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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을 떠난다고) 크게 달라질 건 없습니다. ‘그리고 읽고 쓰고 가르치며’ 평생을 보냈는데, 이젠 ‘그리고 읽고 쓰는’ 삶에 좀 더 매진하는 것뿐이지요. 주위에 온통 고마운 분들에게 감사한 일밖에 없었으니, 전 행운아입니다.” 누군가를 찾아가는 발걸음이 이토록 스산했던 적이 있었을까. 3일 김병종 서울대 동양화과 교수(65)를 만나기로 한 서울 종로구 한 카페. 문 앞에서 침을 두어 번 꿀꺽 삼켰더랬다. 지난해 사별한 아내, 소설가 정미경. 고인을 그리며 올해 초까지 세상에 선보인 유작들. 그리고 5월, 세월은 그에게 정년퇴임 회고전을 준비시켰다. 허허로울 심상(心狀)을 괜한 인터뷰로 어지럽히는 건 아닌지. 한데 ‘행운아’라니. 말을 고르느라 한참을 더듬거렸다. ―많이 힘드셨을 텐데…,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그게 사실이니까요. 제 학교생활 40여 년은 ‘훌륭한 스승, 뛰어난 선후배, 놀라운 제자’가 다입니다. 끊임없이 그들에게 영감과 자극을 받았습니다. 가르치기보단 오히려 배우는 게 컸던 시간이죠. 이렇게 모교에서 회고전까지 여는 선물을 받았는데 어찌 운이 따르지 않았다 하겠습니까.” ―11일부터 열리는 회고전 제목이 ‘바보 예수에서 생명의 노래까지’입니다. “한 우물도 벅찬 게 미술의 길인데, 전 좀 산만했죠. ‘바보 예수’ ‘어린 성자’ ‘숲에서’ ‘생명의 노래’…. 다양한 주제와 시리즈를 파고들었습니다. 밟아온 길을 담담하게 보여주려니 전시 제목도 덧붙일 게 없군요. 2015년 중국 베이징 진르(今日)미술관에서 가진 개인전이 한 번 화가 인생을 정리하는 기회였는데, 당시엔 중국 정부가 종교적 이유로 ‘바보 예수’를 불허했어요. 작품 수(60여 작)는 많지 않지만, 고르고 골랐으니 진정한 ‘회고’는 이번 전시가 되겠습니다.” ―2014년 시진핑(習近平) 주석에게 그림을 선물한 게 계기가 된 전시지요. “그렇죠. 참…, 고마운 인연은 도처에 있습니다. 반응도 썩 엉망은 아니었어요. 진르미술관장이 ‘퇴임 뒤 1년에 6개월은 중국에서 활동하자’는 제안도 했습니다. 긍정적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일단 전시 끝나고 찬찬히 결정해야죠.” 김 교수는 겸양을 내비쳤지만, 현장 분위기는 무척 뜨거웠다. 현지에서 손꼽히는 미술평론가인 자오리(趙力) 중앙미술학원 교수의 평은 이를 단박에 갈음한다. ‘김병종의 독창적 상상력과 낭만적 색채는 회화예술의 동양적 가치를 견지하면서 서구를 수용한 결과물이다. 중국 미술은 그의 작품으로 많은 시사를 받게 될 것이다.’ 그의 작품세계는 지난달 27일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평화의 집 비공개회담장에 2009년 작 ‘화려강산’이 걸리며 또 한 번 주목받았다. ―마음도 정리하실 겸, 훌쩍 떠나는 것도 방법이겠습니다. “정리란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제 본격 ‘전업 작가’로 출발하니, 새로이 도전하는 시작일 뿐이지요. 아내 일은 출간할 유작이 1편 더 남았는데, 정리의 대상은 아니니까요. 아, 최근 아내를 무척 아끼셨던 이어령 선생한테 꾸중을 좀 들었습니다. ‘문학의 일은 문학에 맡겨두시게. 내 책임지고 정 작가 평가는 재정립할 테니, 자네는 붓을 놓지 말게’라고 하셨습니다. 정신이 번뜩 들더군요. 더 맹렬하게, 치열하게 살아야죠. …누가 되지 않도록.” 인터뷰 끝자락, 비가 무척이나 굵게 내렸다. “아들이 회고전에 입을 양복 한 벌 사러 가자네요. 뭔 기념이냐며 거절했는데 한사코…. 부쩍 아비가 신경 쓰이나 봐요”라며 자리를 뜬 김 교수. 젖은 구름 새 햇살이 내비친 게 겨우 얼마 뒤임을 그땐 알지 못했다. 야멸치던 거리 공기가, 곰지락 개운해졌다. 20일까지.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미술관. 02-880-9504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국립현대미술관(관장 바르토메우 마리)이 덕수궁관 개관 20주년을 맞아 ‘내가 사랑한 미술관: 근대의 걸작’전을 서울 중구 덕수궁에서 개최했다. 올해는 1938년 석조전 서관을 ‘이왕가미술관’이란 이름으로 건립한 지 80년이 되기도 한다. 비록 일제강점기였긴 해도 덕수궁관은 한국에서 최초로 미술관 용도로 설계한 건물. 전체 5부로 구성한 이번 전시에서 1부를 ‘1938년 건축과 이왕가미술관’이란 주제로 석조전 자체에 초점을 맞춘 이유다. 국립고궁박물관과 일본 하마마쓰시립중앙도서관에 있는 주요 도면과 관련 자료를 선보였는데, 당시 설계도 원본은 처음으로 공개한다. 2∼5부는 덕수궁과 관련 깊은 작품들 위주로 소개한다. 1969년 국현이 설립된 뒤 실질적인 개관전이던 1972년 ‘한국근대미술 60년’이 2부 주제다. 박수근(1914∼1965)의 ‘할아버지와 손자’, 고희동(1886∼1965)의 ‘부채를 든 자화상’ 등 교과서에서 자주 접했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1973∼1998년 기증을 통해 수집한 근대미술 컬렉션을 모은 3부와 1998년 덕수궁관 개관 때 열린 ‘다시 찾은 근대미술’전을 되짚은 4부, 1998∼2018년 최근 20년 궤적을 살핀 5부도 흥미롭다. 이번 전시에 맞춰 국현이 뽑은 ‘덕수궁관 팔경(八景)’을 찾아볼 수 있다. 원형계단실과 중앙홀 등 건축 자체의 정수로 8곳을 선정했다. 다소 억지스럽긴 해도, 미술을 즐기는 다양한 방식으로 받아들일 만하다. 마리 관장은 “한국 근대미술의 진면목을 발견하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라고 안내했다. 10월 14일까지. 3000원. 02-2022-0600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27일 남북 정상회담이 열릴 평화의집에 배치하는 미술 작품은 북한산과 금강산, 제주도 등 한반도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담은 작품들로 주로 선정했다. 작가들은 민중미술부터 순수회화, 사진에 이르기까지 고루 포진했다. 1층 로비에 걸려 남북 정상의 기념사진 배경이 될 ‘북한산’을 그린 민정기 화백(69)은 25일 발표 때까지 선정 사실을 몰랐다. 이날 오후 작업실에서 전화를 받은 민 화백은 “막 소식을 들어 다소 당황스럽다”며 “좋은 화가가 많은데 내 그림이 그런 역사적 공간에 걸릴 만한지 스스로 되돌아봤다”고 말했다. 북한산은 민 화백이 2007년 완성한 452.5×264.5cm의 대형 작품. 2010년경 국립현대미술관이 구입해 소장해 왔다. 민 화백은 “조국 산하를 화폭에 담는 일은 조선 진경산수 이래로 이어진 소중한 전통”이라며 “작가로서 열심히 살아온 보람을 느낀다”고 밝혔다. “‘북한산’은 오랫동안 마음에 품었다가 실행에 옮긴 작품입니다. 두 달 동안 매일 산에 올라 답사한 뒤 작업에 들어갔죠. 겸재 정선(1676∼1759)의 ‘금강전도’처럼 전체를 아우르는 전도(全圖) 형식을 취했어요. 북한산 응봉에서 바라보는 시선으로 산을 감싼 북한산성을 담아낸 형국입니다.” 2층 회담장의 ‘상팔담에서 본 금강산’(681×181cm)을 그린 신장식 국민대 교수(59)는 30년 가까이 금강산을 그려온 작가다. 그는 “사계의 아름다움이 분명한 금강산은 겸재를 포함해 많은 예인들이 사랑한, 한국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 가운데 하나”라고 설명했다. 신 교수 본인이 소장하던 작품으로 이번에 대여 요청을 받고 흔쾌히 승낙했다. “금강산 옥류동 계곡을 올라가면 구룡폭포가 있는데, 그 위에 8개의 소(沼)가 상팔담입니다. 그곳 전경이 하늘에서 내려온 꽃 같다고 ‘천화대’라 부르죠. ‘상팔담에서…’는 그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광경을 담았습니다. 남북 회담이 좋은 결과를 내길 기원합니다.” 1층 접견실 병풍은 김중만 작가(64)의 사진 작품 ‘천년의 동행, 그 시작’. 김 작가는 “지난주 청와대에서 요청이 들어와 작업했다”며 “뜻깊은 작업이라 작품은 무상 제공했다”고 말했다. 세종대왕기념관이 소장한 여초 김응현(1927∼2007)의 ‘훈민정음’을 재해석했다. “한글은 우리가 한민족임을 보여주는 가장 이상적인 매개체입니다. 거기에 남북 정상을 뜻하는 ‘ㅁ’은 파랑, ‘ㄱ’은 빨강으로 색을 집어넣었죠. 미학적 접근인데, 학예연구사들이 각각 ‘통하다’ ‘만들다’는 뜻이 있다고 알려줬어요. 좋은 일에 좋은 뜻이 담겨 기쁩니다.” 3층 연회장 주빈석 뒤에 걸린 ‘두무진에서 장산곶’의 신태수 작가는 “청와대에서 2주 전쯤 연락받았다”며 “소중한 국가 행사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된다면 바랄 게 없다”고 말했다. “2014년 백령도에 머물며 그린 작품입니다. 서해5도는 분쟁의 상처가 남은 장소잖아요. 하지만 백령도의 두무진과 북한 땅 장산곶은 남북이 대치한 장소인데도 땅 자체는 평화로운 기운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림 속에서 함께 하나가 되길 소망하며 그렸습니다.” 이 밖에 2층 회담장 입구엔 천경자 화백의 수제자로 알려진 이숙자 작가의 ‘청맥, 노란 유채꽃’과 ‘보랏빛 엉겅퀴’가, 로비 방명록 서명 장소에는 판화가 김준권 작가의 ‘산운(山韻)’이 걸린다. 평화의집에 걸리는 작품들은 청와대에서 직접 선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는 “초기 협조 문의가 오기도 했으나 전체적인 진행은 청와대에서 관할했다”며 “‘북한산’을 포함한 일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을 청와대에서 요청해 대여해 줬다”고 설명했다.정양환 ray@donga.com·김민 기자}
광활한 밤하늘에 숨구멍처럼 촘촘히 박힌 별들은 인간에게 어떤 얘기를 들려주려는 걸까. 제주도에서 태어나 평생 제주를 화폭에 담아온 백광익 작가(66)의 개인전 ‘오름, 바람, 별’이 다음 달 9일부터 열린다. 현재 제주국제예술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는 백 작가는 작품 자체가 제주의 정체성과 상징으로 채워져 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오름’ 시리즈는 제주 특유의 풍광을 소재로 자연과 인간의 어울림을 담았다. 김영호 중앙대 교수는 “오름은 모태성징의 표상으로 제주인의 마음을 대자연으로 연계시키는 매체”라며 “오름과 그 위로 부는 바람과 별의 움직임을 그려내는 일은 제주 토박이인 백 작가가 가장 자연스럽고 잘할 수 있는 작업”이라고 평했다. 실제로 캔버스 대부분을 차지하는 하늘과 아래쪽에 조그맣게 위치한 오름의 풍경 그림은 묘한 착시를 일으킨다. 딱히 어려울 게 없는 단순한 도상의 조합인 듯한데도 왠지 끊이지 않는 서사의 한가운데로 관객을 초대한다. 김원민 미술평론가는 이를 두고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떠올렸다. “구상적 운동과 통일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 밤하늘은 오름과 우주공간이 만들어내는 아름답고 장대한 시가 아닐 수 없다. ‘별 하나에 추억(追憶)과/별 하나에 사랑과/별 하나에 쓸쓸함과….’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이 겹쳐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감정의 이입이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는 이를 신과 인간의 접점으로 보기도 했다. 박 교수는 “까마득한 우주의 신비를 머금은 온갖 전설과 신화, 설화의 단어들이 떠돈다”며 “그 아래 오름은 거대한 하늘 아래 작고 낮게 자리한 제주라는 땅, 삶의 터전을 드러낸다”고 설명했다. 작가의 생각은 어떨까. 백 작가는 자신의 작업노트를 통해 오름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전했다. “20여 년 세월 동안 신비로운 여인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연인의 심정으로 오름 작업을 하고, 이제야 만날 수 있었다.” 다음 달 18일까지 서울 서대문구 동아일보 충정로사옥 동아옥션 갤러리.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양재문 사진작가(65)의 초대전 ‘아리랑 판타지’가 18일부터 서울 종로구 금보성아트센터에서 열린다. 1994년부터 한국 전통 춤 사진을 선보인 양 작가는 한국의 전통 춤이 지닌 ‘정중동’한 특징을 포착하며 자기만의 독특한 영역을 구축해왔다. 특히 이번 전시는 다양한 춤이 시작되는 찰나의 흘림에 초점을 맞춘 역동적인 이미지를 소개했다. 양 작가는 “한국 전통춤의 고요함과 역동성은 들숨과 날숨으로 풀어내는 춤사위의 절묘한 호흡 속에 살아 숨 쉰다”며 “아리랑에는 시대적 아픔을 겪어오면서도 슬픔과 한스러움을 넘어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기운이 살아 있다”고 설명했다. 이경률 중앙대 교수는 “양 작가의 춤 사진은 사진의 형태로 드러난 추상”이라며 “삶의 뒤안길에서 발견한 무의식의 시선과 반항”이라고 평했다. 29일까지. 02-396-8744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동양적 유산에서 나온 오묘한 성격을 간직한 채 서양미술의 흐름 속에 용기 있게 합류한 본보기다.”(자크 라세뉴 전 프랑스 파리시립미술관장)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이성자 화백(1918∼2009)을 조명한 전시 ‘이성자: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이 국립현대미술관(관장 바르토메우 마리)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다. 올드 팬에게 이 화백은 ‘종이배’를 불렀던 가수 위키 리(본명 이한필·1936∼2015)의 누나로 친숙하다. 위키 리는 KBS 장수 프로그램 ‘전국노래자랑’의 초대 MC이기도 했다. 2009년 프랑스 투레트에서 세상을 떠난 이 화백은 흔히 재불 서양화가로 불린다. “이국 땅에서 불모지를 일구듯 치열함과 처절함을 갖춘, 토속적이지 않으면서도 동양적인”(이지은 명지대 교수) 그의 그림은 오히려 더 한국적이었다. 그런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주제로 미술관은 ‘조형탐색기(1950년대)’ ‘여성과 대지(1960년대)’ ‘음과 양(1970년대)’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1980년대 이후)’로 나눠 소개했다. 이 화백은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켰단 점에서도 주목받는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이혼으로 세 아이와 이별한 뒤의 타향살이는 상상 이상으로 고됐을 터. 심지어 고국에선 미술을 전공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는 여자이고, 여자는 어머니고, 어머니는 대지다”라며 여성의 삶을 받아들였다. 미술관은 “어머니와 조국, 아들에 대한 사랑은 삶의 목적이자 그림을 그리는 이유였다”고 설명한다. 1980년대부터 별세할 때까지 천착했던 ‘하늘’과 ‘우주’ 역시 이 화백 인생의 여정이 오롯하다.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선보인 작업을 그는 “동서의 극을 오가는 내 생활의 그림일기”라고 불렀다고 한다. 전시 제목인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에 담긴 뜻이다. 비행기에서 바라본 극지 풍경에서 경계의 접점과 조우한 것이리라. 그 하늘나라로 떠난 작가는 이젠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작품은 말을 해줄 듯 말 듯하다. 7월 29일까지. 02-2188-6000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최근 한국 현대미술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작가 10인을 소개하는 전시 ‘내일의 작가·행복한 꿈’이 11일부터 서울 종로구 노화랑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에는 국내외 다양한 기획전에 참여하며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는 김덕기 김동유 노세환 박성민 박형진 송명진 윤병락 이강욱 이동재 이호련 등이 참여했다. 자기만의 색깔을 가진 40, 50대 작가들로 현대사회가 품고 있는 복잡한 이야기를 개성 있게 풀어낸다는 평가를 받는다. 가족이 꿈꾸는 행복을 화려하고 과감한 색채로 담아내는 김덕기 작가부터 일상과 예술처럼 이원적인 대립세계를 우아하고 부드러운 터치로 표현하는 이강욱 작가, 현대인의 관음증을 자극하며 회화와 사진의 한계에 도전하는 이호련 작가 등 다양한 작품을 만나는 재미가 있다. 20일까지. 02-732-3558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영화 ‘월레스와 그로밋’ ‘치킨 런’ ‘숀더쉽’…. 제목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영국 클레이애니메이션의 명가 아드먼스튜디오의 예술작품들이 한국 관객들을 만난다. 현지 스태프가 직접 설치작업에 참여한 ‘아드만 애니메이션전―월레스&그로밋과 친구들’ 특별전이 13일부터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디자인전시관에서 개최된다. 아드먼스튜디오 공식 전시가 아시아 국가에서 열리는 건 처음이다. 프랑스와 독일, 호주에 이어 세계에서도 4번째 전시다. 1972년 설립한 아드먼스튜디오는 영국 남서부 월턴온템스란 작은 마을에서 함께 자란 친구 피터 로드와 데이비드 프록스턴이 창업자다. 어릴 때부터 애니메이션 제작만 꿈꿔 왔던 둘은 남아프리카에 사는 땅돼지 ‘아드바크(aardvark)’에 슈퍼히어로를 뜻하는 ‘…맨’을 합쳐 ‘아드먼’이란 애니메이션 주인공을 창조했다. 영국은 물론 전 세계를 열광시킨 ‘아드먼스튜디오’의 기원이다. 이후 TV 시리즈와 영화를 히트시키며 세계인들에게 ‘클레이애니메이션=아드먼’이란 등식을 각인시켰다. 미국 아카데미상 4회, 영국 아카데미상을 2회나 받았다. 이번 특별전은 아드먼 초창기부터 최근작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전시물을 372점이나 소개한다. 애니메이션의 출발인 드로잉 작업과 스케치는 물론 실제 영화에 등장했던 인형과 촬영세트, 디지털영상 등 볼거리가 화려하다. 아드먼 관계자는 “단순한 전시가 아니라 영화와 이어지는 추억의 감성을 떠올려 볼 수 있는 자리”라며 “예술가의 상상력이 어떻게 실제 영상으로 구현되는지를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전시장에서 만나는 작품들은 그 유머러스함도 인상 깊지만, 스케일이나 섬세함이 한 번 더 탄복하게 만든다. 특히 2015년 국내에도 개봉했던 영화 ‘숀더쉽’ 등의 영화 세트를 그대로 옮겨온 전시물은 놓치면 아쉽다. 아드먼의 조명 디자이너들이 직접 제작하고 설치했는데, 영화에서 보여준 낮밤의 변화나 구름이 지나가며 생기는 그림자 등을 당시 촬영 현장 그대로 재현했다. 심지어 조그만 찰흙인형 하나도 대충 만든 게 아니었다. 로봇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정밀한 철제 골격을 만들어 움직임의 생동감을 살렸다. 아드먼스튜디오 전문가 외에 프랑스 파리 ‘아트루디크뮤지엄’ 스태프도 방한해 설치작업에 참여한 점도 눈길을 끈다. 아트루디크는 월트 디즈니전, 스튜디오 지브리전, 마블 히어로전 등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던 대중문화 전시로 명성을 떨쳤다. 이번 전시를 공동 주최한 바이스의 최아영 본부장은 “아드먼의 세계 첫 전시를 이끌었던 곳으로 관객들을 매료시킬 노하우가 풍부하다”고 귀띔했다. 이번 전시는 수동적인 관람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체험 존과 포토 존을 마련해 더욱 큰 즐거움을 선사한다. 앙증맞은 인형과 쿠션, 에코백 등 관련 상품도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배우 송윤아가 오디오 가이드에 재능 기부로 참여해 작품 이해를 좀 더 친근하고 편안하게 돕는다. 7월 12일까지. 7000∼1만5000원. 02-577-8415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성곡미술관이 2009년 세상을 떠난 박장년 화백의 첫 회고전 ‘박장년 1963∼2009 실재와 환영의 경계에서’를 개최했다. 단색화와 극사실주의 사조를 아우르며 현대회화의 지평을 넓힌 것으로 평가받는 박 화백의 작품 90여 점을 전시했다. 특히 이번 전시엔 1970년대부터 작가가 매진했다는 ‘마포(麻布)’ 시리즈(사진)가 눈길을 끈다. 캔버스를 싼 마포 위에서 그림과 실제 천이 어우러지며 ‘경계’를 무너뜨린다. 작가는 이를 ‘캔버스 표면을 표면 그 자체로 되돌려준다’고 표현했다고 한다. 오광수 미술평론가는 고인의 회화를 두고 “격렬한 제스처 대신 무겁게 침잠하는 심연과 같은 기운이 지배하고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서울 종로구 성곡미술관. 다음 달 13일까지. 3000∼7000원. 02-737-765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검붉은 저녁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노래 ‘잠들지 않는 남도’에서) 4월이면 대지를 뒤덮는 유채꽃. 섬은 그 잔향만큼 진한 아픔을 머금었다. 강산이 일곱 번 바뀌었건만. 붓 칠한 역사의 캔버스는 갈수록 또렷하다. 제주도립미술관(관장 김준기)이 올해 제주 4·3사건 70주년을 맞아 ‘4·3 70주년 특별전 포스트 트라우마’를 개최했다. 1948년의 상처를 다시금 조명하고, 동시대에 필요한 상생의 길로 나아가자는 마음을 담아 마련했다. 이번 전시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던 ‘개인’의 실존적 자취에 주목했다. 4·3사건이 벌어졌던 제주는 물론이고 광주와 중국 난징, 일본 오키나와 등 집단 학살의 범죄가 벌어졌던 현장은 모두 해당된다. 중일전쟁 당시 731부대의 생체실험을 고발한 재중작가 권오송의 수묵화나 제2차 세계대전 때 오키나와 전투에 희생된 평범한 현지 주민의 참상을 담은 일본 작가 야마시로 지카코의 작품 등을 선보인다. 특히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제주 출신 강요배 작가의 ‘불인’은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관객들을 만난다. 제주시 조천읍 북촌을 담은 이 작품은 아무런 말이 없는 풍경화로도 쓰라린 역사를 얼마나 잘 표현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또 제주에서 태어나 덴마크로 해외 입양됐다는 제인 진 카이젠 작가의 영상작품 ‘Remains’도 챙겨 볼만하다. 특별전은 모두 226점을 전시한다. 제주까지 찾기 힘든 이들도 아쉬움을 달랠 기회가 있다. 서울 마포구 이한열기념관 등 6곳에서 도립미술관과 연계해 프로젝트 전시 ‘잠들지 않는 남도’를 지난달 31일부터 선보였다. 4·3사건을 모티브로 한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공간 41 △대안공간 루프 △성북예술창작터 △성북예술가압장 △d/p(이산낙원)이 참여했다. 김준기 관장은 “4·3의 상처를 평화라는 인류사적인 보편 가치로 재해석한 전시”라며 “학살의 아픔을 평화의 메시지로 승화시킬 계기를 마련하길 바란다”고 설명했다. 제주 전시는 6월 24일까지. 서울 전시는 29일까지. 064-710-430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성공도 명성도 바란 적이 없습니다. 평생 그림을 그리며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으니 그보다 행복한 일이 없지요. 이번 전시 역시 꾸준히 ‘나의 길’을 가던 당시의 숨결이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단색화가 이정지 화백(77). 웬만큼 그림을 아는 이들에게도 낯선 이름일 수 있다. 단색화로 인기를 끌었던 박서보 하종현 서승원 등 남성 단색화가에 비해 주목도가 낮았다. 하지만 국내 여성작가로는 유일하게 40년 이상 단색화 외길을 걸어온 그는 최소한 지금보다는 더 큰 상찬을 받아 마땅한 예술가다. 최근 열린 개인전 ‘이정지: 80년대 단색조회화(單色調繪畵)를 중심으로’는 그런 그의 품격을 엿볼 수 있는 자리다. 1980년대 “엄격하게 신체를 활용해 바르고 긁기를 반복한” 작품 30여 점은 형언하기 힘든 묵직함이 가득하다. 이 화백은 “40대 왕성하던 시절 캔버스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데 집중했다”며 “얼핏 닮아 보이지만 어느 하나도 동어반복인 작품이 없다. 우주적이면서도 인간적인, 깊이와 인생관을 담으려 했다”고 설명했다. 굳이 ‘단색조회화’라 부르는 이유도 설명했다. “서양 단색화와는 전제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지요. 1970년대 화단을 지배한 모노크롬의 극성기에 작품 활동에 합류하긴 했지만, 그 집단성에서 벗어나길 바랐습니다. 예를 들어 제 작품을 단색, 하나의 색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누리끼리하거나 거무스름하죠. 이건 서양의 잣대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에요. 한국적인 정서를 표현한 거예요.” 해외에서 더 큰 평가를 받아온 그는 당시 작품을 선보였던 일본 개인전에서는 “기량이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한국 모더니즘 계승의 중심 주자에 속해 있음을 증명했다”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이 화백은 “60년 가까이 주위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작품에 매진했다”며 “화가는 한 사람이라도 알아봐주는 이가 있다면 만족하며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런 뜻에서 난 인복 많고 축복 받은 화가”라고 말했다. 다음 달 14일까지. 서울 종로구 선화랑. 02-734-0458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9월 7일 개막하는 ‘2018 광주비엔날레’(대표이사 김선정)가 올해의 라인업을 발표했다. ‘상상된 경계들(Imaged Borders)’을 주제로 열리는 이번 비엔날레는 40개국 153명의 작가가 참여한다. 2010년 제63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영화 ‘엉클 분미’로 황금종려상을 받았던 태국의 아피찻뽕 위라세타쿤 감독과 일본 ‘네오 팝아트’의 대표화가인 나라 요시토모 등 면면도 화려하다. 올해는 국내외 작가들이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작품을 많이 선보인다. 영국 설치미술가인 마이크 넬슨은 당시 주요 현장이던 옛 국군병원을 모티브로 한 작품을 소개한다. 프랑스 현대미술가 카데르 아티아도 당대의 광주시민과 지금의 현대인을 연결한 작품을 전시할 예정이다. 박화연 여상희 등 한국의 젊은 작가들도 광주의 역사성을 반영한 작품으로 비엔날레에 참여한다. 남미와 중동 등 제3세계 작가나 디아스포라 이력을 지닌 작가의 참여도 늘었다. 아시아 작가 비중도 67%로 역대 최대다. 비엔날레 측은 “광주비엔날레가 유럽 중심 담론에서 탈피해 변방과 경계 지대의 이슈를 생산하며 현대미술의 중심축을 이동시키려는 열망의 반영”이라고 설명했다. ‘2018 광주비엔날레’는 9월 7일부터 11월 11일까지 광주비엔날레 전시관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등에서 열린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제54회 한국보도사진전’이 21일부터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2관에서 열린다. 한국사진기자협회가 주최하는 보도사진전은 1962년 제1회를 시작으로 지속적으로 개최돼 왔다. 올해 주제는 ‘하나 된 열정, 모두의 불꽃’. 시대와 역사의 현장을 지킨 보도사진 수백만 컷 가운데 11개 부문에 걸쳐 선정한 90여 점을 소개한다. 올해 대상은 이재문 세계일보 기자의 ‘올림머리 푼 박 전 대통령’이 수상했고, 전영한 동아일보 차장의 ‘흑인발레단이 선택한 유일한 동양인 이충훈’(사진)은 포트레이트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한국보도사진전 역대 수상작과 ‘미국 포토저널리즘 워크숍―American Life’ 사진 등 총 250여 점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다음 달 3일까지 이어진다. 6000원. 02-733-9576∼7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참 묘한 ‘사진’이다. 처음엔 그림으로 보였다. 사진이란 걸 안 뒤론 컴퓨터그래픽(CG)이겠거니 여겼다. 하지만 이게 아날로그 필름 카메라로 찍은 작품이라니. 사진작가 이정록(47)의 개인전 ‘생명의 나무(Tree of life)―Decade’에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2013년)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 펼쳐진다. 이번 전시는 ‘제8회 갤러리나우작가상’ 선정 기념으로 열렸다.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갤러리나우’에서 만난 이 작가는 “신과 인간이 교통(交通)하는 장소를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런 그의 작품은 지난해 영국 필립스옥션에서 2만2500파운드(약 3360만 원)란 고가에 팔릴 만큼 해외에서도 인기가 높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무엇’이 담긴 걸까. 그게 뭔지는 각자 몫이겠지만.―이런 사진은 어떻게 찍는 건가. “말로 설명하긴 다소 복잡하다. 일단 원하는 구도를 찾고 대상을 설치하는 데만 며칠이 걸린다. 촬영도 장시간 노출하며 수없이 촬영을 반복한다. 라이트 페인팅(light painting) 기법의 일종인데, 장시간 빛을 발산하는 기존 방식과 달리 ‘순간 광(光)’을 쓴다. 한 작품 완성에 최소 2주가 걸린다. 한라산에서 작업할 땐 6주가 걸렸다.”―무척 고된 작업이겠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작가로선 너무 즐거운 시간이다. 예술사진은 실상의 재현이 아니라 내면의 표현이라고 본다. 심장 어딘가를 관통하는 찰나를 끄집어낼 수 있다면 그만큼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나. 난 억지로 만들기보단 기다리는 편이다. 에너지가 뿜어내는 순간을 잡으면 작업은 자연스럽게 이뤄진다.”―나무라는 개체에 주목한 이유가 있나. “자연은 언제나 내가 작품을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특히 나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성한 존재 아닌가. 계기는 2007년 전남 고흥이었다. 뿌연 안개 아래 넓은 들판에 홀로 선 고목을 마주한 순간 찌릿하고 전기가 통했다. 나무 주위로 퍼지는 아우라가 보였다고나 할까. 나무를 숭배한 옛 선조들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그걸 표현해 나가는 작업이 10년이 흘렀다.” ―나무 주변으로 ‘나비’가 날아다니는 작품도 많다. “역시 신화적 풍경의 일부라고 보면 된다. 평범한 장소(place)가 중립적인 무균질의 공간(space)으로 바뀌는 지점에 어울리는 매개체다. 나비는 역사, 종교적으로도 메타포가 강하다. 탄생과 죽음, 이승과 저승의 메신저로 읽히기도 하고. ‘navi’는 히브리어로 선지자라는 뜻이기도 하다.” ―최근엔 어떤 작품을 찍고 있나. “5·18민주화운동 당시 만행을 저지른 505부대를 아는가. 최근 광주에 그들이 고문을 자행했던 지하실에 다녀왔다. 온몸이 떨렸지만 번뜩 뭔가 들어오더라. 신과의 교통은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다. 몇 년 전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현장을 다녀온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인류의 아픔도 신화적 교감이란 측면에서 지속적으로 들여다보고 싶다.” 27일까지. 서울 종로구 갤러리나우. 02-725-293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참 묘한 ‘사진’이다. 처음엔 그림으로 보였다. 사진이란 걸 안 뒤론 컴퓨터그래픽(CG)이겠거니 여겼다. 하지만 이게 아날로그 필름 카메라로 찍은 작품이라니. 사진작가 이정록(47)의 개인전 ‘생명의 나무(Tree of life)-Decade’에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2013년)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 펼쳐진다. 이번 전시는 ‘제8회 갤러리나우작가상’ 선정 기념으로 열렸다.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갤러리나우’에서 만난 이 작가는 “신과 인간이 교통(交通)하는 장소를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런 그의 작품은 지난해 영국 필립스옥션에서 2만2500 파운드(약 3360만 원)란 고가에 팔릴 만큼 해외에서도 인기가 높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무엇’이 담겼기 걸까. 그게 뭔지는 각자 몫이겠지만. -이런 사진은 어떻게 찍는 건가. “말로 설명하긴 다소 복잡하다. 일단 원하는 구도를 찾고 대상을 설치하는 데만 며칠이 걸린다. 촬영도 장시간 노출하며 수없이 촬영을 반복한다. 라이트 페인팅(light painting) 기법의 일종인데, 장시간 빛을 발산하는 기존 방식과 달리 ‘순간 광(光)’을 쓴다. 한 작품 당 완성에 최소 2주가 걸린다. 한라산에서 작업할 땐 6주가 걸렸다.” -무척 고된 작업이겠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작가로선 너무 즐거운 시간이다. 예술사진은 실상의 재현이 아니라 내면의 표현이라고 본다. 심장 어딘가를 관통하는 찰나를 끄집어낼 수 있다면 그만큼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나. 난 억지로 만들기보단 기다리는 편이다. 에너지가 뿜어내는 순간이 잡으면 작업은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나무라는 개체에 주목한 이유가 있나. “자연은 언제나 내가 작품을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특히 나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성한 존재 아닌가. 계기는 2007년 전남 고흥이었다. 뿌연 안개 아래 넓은 들판에 홀로 선 고목을 마주한 순간 찌릿하고 전기가 통했다. 나무 주위로 퍼지는 아우라가 보였다고나 할까. 나무를 숭배한 옛 선조들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그걸 표현해나가는 작업이 10년이 흘렀다.” -나무 주변으로 ‘나비’가 날아다니는 작품도 많다. “역시 신화적 풍경의 일부라고 보면 된다. 평범한 장소(place)가 중립적인 무균질의 공간(space)이 바뀌는 지점에 어울리는 매개체다. 나비는 역사, 종교적으로도 메타포가 강하다. 탄생과 죽음, 이상과 저승의 메신저로 읽히기도 하고. ‘navi’는 히브리어로 선지라라는 뜻이기도 하다.” -최근엔 어떤 작품을 찍고 있나. “5·18민주화운동 당시 만행을 저지른 505부대를 아는가. 최근 광주에 그들이 고문을 자행했던 지하실에 다녀왔다. 온 몸이 떨렸지만 번뜩 뭔가 들어오더라. 신과의 교통은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다. 몇 년 전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현장을 다녀온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인류의 아픔도 신화적 교감이란 측면에서 지속적으로 들여다보고 싶다.” 27일까지. 서울 종로구 갤러리나우. 02-725-293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한국을 떠올리면 ‘투명한 노랑(transparent yellow)’이 생각납니다. 왜냐고요? 글쎄, 누군가를 바라보면 특유의 아우라가 보이듯 자연스러운 거라 설명하기 어렵네요. 중국 하면 ‘옅은 파랑(pale blue)’이 연상되는 거랑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그때 알아봤어야 했다. 이 양반, 심오하지만 머리를 쥐어뜯게 만들 거라는 걸. 전시장 작품 아래 죽 이어진 노란 띠. 이유를 물었더니 ‘한국의 색’을 반영한 거란다. 대가들의 예술관은 참 가늠이 어렵다. 7일 서울 용산구 ‘페이스갤러리’에서 만난 리처드 터틀 작가(77)는 ‘현대의 화가 열전’ 같은 목록에서 꼭 등장하는 이다. ‘포스트미니멀리즘’의 선구자라 불리는데 “섬세한 물질성과 형태, 빛, 질감의 미묘한 표현이 특징”이라고 평가받는다. 하여튼 대단한 미술가인데, 그는 이를 ‘시(poetry)’라고 표현했다. “21세 때부터 매일 시를 씁니다. 지금도 아침저녁으로 시를 짓죠. 시란 세상을 구성하는 조각들을 언어로 이어붙이는 작업입니다. 미술 역시 마찬가지예요. 우리 눈에 보이건 안 보이건, 때론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무언가를 끄집어내고 조합하는 겁니다. 인간의 오감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의식과 감정을 발현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과 같죠.” 그런 그가 생애 처음으로 한국에서 선뵈는 시(개인전)는 ‘나무에 대한 생각들’이다. 총 23점에 이르는 작품은 자그마한 액자 속에 접착제로 붙인 알록달록한 종이 조각들을 쭉 전시했다. 얼핏 유치원생의 마구잡이 놀이 같아 보이기도…. 침을 꿀꺽 삼키고 설명을 요청했다. “세상의 모든 재료는 쓰레기처럼 취급하면 쓰레기로 반응합니다. 미학적으로 접근하면 아름다운 재료로 표현되죠. 자세히 보면, 각기 다른 조명 아래 서로 다른 공간과 운율이 느껴질 거예요. 영감(inspiration)에서 영혼(soul)을 끄집어내는 순간을 캐치하는 게 중요합니다.” 문득 떠올랐다. 어쩌면 이런 얘기 몰라도 되는 거 아닐까. 잠깐 눈을 거슴츠레 뜨고 혼자만의 조명을 만들어봤다. 창가로 스며드는 빛, 그걸 타고 어른거리는 액자. 어쩌면 이게 작가가 그렇게 강조한 모순(contradiction)일지도. 맘속엔 이미 아름다움이 저장됐으니. 5월 12일까지. 070-7707-8787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부산시립미술관(관장 김선희)이 개관 20주년을 맞아 부산 근대미술의 발자취를 짚어보는 전시를 개최한다. 미술관은 16일부터 부산 해운대구 본관에서 개관 20주년 특별전을 공개한다. 1부 ‘모던, 혼성 1928∼1938’은 일제강점기 부산 미술의 태동기를 짚어본다. 2부 ‘피란수도 부산―절망 속에 핀 꽃’은 6·25전쟁 전후에 임시수도로 문화적 르네상스를 꽃피웠던 시기를 조명한다. 1부는 시기가 시기인지라 일본인 화가와 부산을 무대로 활동한 한국 화가의 작품이 고루 섞였다. ‘부산미술전람회’를 이끌며 당시 부산 미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안도 요시시게(安藤義茂)의 작품도 40여 점을 전시한다. 임응구(1907∼1994) 우신출(1911∼1992) 등 당대 부산 화가의 예술세계도 소개한다. 2부는 이중섭 김환기 장욱진 박수근 등 피란 시절 부산에서 활동한 한국 근대미술 선구자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아울러 5월 25일부터는 부산 1세대 서양화가인 김종식(1918∼1988)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부산의 작고 화가, 김종식’전을 연다. 미술관 관계자는 “김종식은 대담한 필치와 강렬한 색채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했으나 적절히 조명할 기회가 드물었다”고 설명했다. 051-744-2602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굳이 정의하자면, 전 ‘달빛을 그리는 화가’입니다. 태양 아래 사물을 조명하는 게 서구 미술이라면, 달빛은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감성을 드러냅니다. 동아시아에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관조의 문화를 지녔죠. 눈이 아니라 육감으로 느끼는 빛이라고나 할까요.” 지난달 27일 경기 양평군 작업실에서 만난 이재삼 작가(58)는 예상과는 다른 미술가였다. 1990년대부터 목탄화에 천착해 왔기에 묵직한 분위기일 줄 알았건만. 편안한 후드티를 입은 모습은 활기찬 청년에 가까웠다. 마침 작업실 앞뜰을 뛰노는 산토끼 한 마리를 함께 지켜보고 있자니, 그 차갑던 겨울이 떠나가는 느낌이랄까. 이 작가 역시 “스티브 잡스의 ‘항상 열망하라, 항상 무모하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며 “여전히 공부하는 자세로 초심을 잃지 않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제3회 박수근미술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고마운 일이지만, 더 옷깃을 여미고 겸손해지고 싶다. 그래도 한눈팔지 않고 창작에 매진했다고 격려받은 것 같다. 박수근 선생께서 ‘앞으로도 잘 버텨라’ 하시며 어깨를 툭 쳐주신 기분이랄까. 스스로를 돌아보며 ‘마음 바빠지지 말자’라고 여러 번 되뇌었다.” ―끝없이 정진하는 수도자 말투로 들린다. “하하, 닮은 점이 있다. 예술가 역시 흐름에 휩쓸리지 말고, ‘열매’를 맺는 세월을 견뎌야 한다. 화가라고 왜 돈이 궁하지 않겠나. 대중 취향을 따라가고픈 유혹도 생긴다. 하지만 결국 답은 내 안에 있다. 지금껏 무엇을 향해 걸어왔는지 돌아보면 갈 길도 보인다. 자기만의 방식을 찾고 지키는 게 중요하다.” ―‘목탄화가’란 스타일을 30년 넘게 지켜왔다. “기왕이면 ‘숯의 화가’라고 불러주면 좋겠다. 서양 드로잉에 쓰는 목탄화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숯(목탄)은 흑연과 먹 등 다양한 재료를 연구해 다다른 결과물이었다. 자연 안료인 송진과 아교 등도 함께 쓰는데 자세한 건 기밀이다. 숯은 ‘나무를 태워서 숲을 환생시킨 영혼’ 아닌가. 일종의 환원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나무나 폭포, 물안개 등을 주로 그리는 이유와 이어지나. “그렇다. 난 ‘달빛’에 비친 풍광화(風光畵)를 그리는 사람이다. 햇빛의 시각적 명료함이나 원근감을 쫓지 않는다. 달빛이 품은 빛의 덩어리를 담는다. 동양화 서양화란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지만, 한국인 정체성이 새겨진 DNA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서양화 전공인데 전혀 다른 세계관을 펼친다. “쉽지 않았다. 30대 중반에 큰 변화를 겪었다. 이전까진 ‘그냥저냥’ 서구적 설치미술을 주로 했다. 하지만 내 옷이 아니었다. 불편하고 고통스러웠다. 이전 활동을 모두 접고 3년 이상 칩거하며 연구했다. 국수주의는 싫지만, 난 ‘한국 사람’이다.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하나 더, 책 읽고 설명해야 하는 미술이 싫었다. 보면 딱 아는 그림을 그리려 했다. 삶의 근원이란 그런 거 아니겠나.” ―요즘 문화계는 물론 세상이 ‘미투 운동’으로 시끄럽다. “누구에게 훈수 두는 성향이 아니라 조심스럽다. 다만 나무는 수백 년을 사는데, 인간은 겨우 100년 남짓 머물다 간다. 헛된 일로 그 짧은 시간을 망치지 않길 바란다. 작가는 이성과 감정의 밸런스가 중요하다. 현실에 발 담고 있되, 자신의 영역에 몰입해야 한다. 돈과 욕망을 좇는다면 예술보다 쉬운 길이 훨씬 많다.”양평=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미술 작품에 시대정신(zeitgeist)을 담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거창할 필요도 없다. 한 시대의 보편적인 정신이나 태도가 잘 배어 있는지가 관건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추구하지만 쉽지 않은 길. 특히 현대미술은 수용자 입장에서도 가늠이 어렵다. 하지만 현재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일민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IMA Picks’에 참여한 작가 3인은 최소한 그 시대정신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건 자명해 보인다. 이문주(46) 김아영(39) 정윤석 씨(37)는 국내외 예술현장에서 10년 이상 활동하며 주목받아온 작가들. 회화와 설치미술, 영상미술 등 다소 이질적인 장르에서 작업을 해왔다. 굳이 이들을 묶은 전시를 개최한 이유가 뭘까. 조주현 일민미술관 학예실장은 ‘경계’를 공통점으로 꼽았다. 실제로 세 작가의 전시는 현대미술치곤 꽤 ‘친절하다’. 말하고자 하는 주제나 소통방식이 명확하다고나 할까. 특히 2전시실에서 소개하는 이 작가의 전시 ‘모래산 건설’은 회화가 중심이라 더 편안하게 느껴진다. 동명 작품인 ‘모래산 건설’만 해도 그렇다. 크루즈 관광선 뒤로 펼쳐진 개발 현장. ‘4대강 사업’이 떠오르는 풍경이 어떤 경계를 얘기하려는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걷는 사람’ 시리즈 등 다른 그림도 마찬가지다. 그곳이 한반도 어디쯤이건 미국 보스턴과 독일 베를린이건, 재개발 혹은 철거 공간은 황량함이 가득하다. 미술관 측은 “작가는 화폭에 담은 장소마다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년 넘게 현장연구를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회화가 다큐멘터리로서 지닐 수 있는 에너지란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다큐멘터리라면 3전시실에서 마주한 정 작가의 ‘눈썹(Lash)’은 그 최대치를 보여주는 전시다. 특히 영상으로 담은 마네킹과 섹스돌(sexdoll·성 행위에 사용하는 인형) 공장 모습은 매우 충격적이다. ‘19금 사회고발 TV 프로그램’이 주는 자극과 닮았다. 작가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드러내는 장소”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묘하게도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왠지 서글퍼지는 순간을 경험할 수도 있다. 낯설고 괴기한 분위기에서 인형을 제작하는 노동자의 무미건조한 손길은 쉽게 잊히질 않는다. ‘눈썹’이란 전시 제목은 인형 작업의 마지막 단계인 속눈썹 부착에서 따왔다고 한다. 김 작가가 주제로 다룬 ‘이주(migration)’ 역시 시대를 관통하는 경계의 이슈다. 1전시실에 펼쳐진 개인전 ‘다공성 계곡’은 비교적 난해한 편이나, 극적 구성을 따라가는 재미가 있다. 페트라 제네트릭스라는 상상의 지하광물이 뜻하지 않게 이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며 벌어지는 얘기를 담았다. 자연과학에서 다공성(多孔性)은 내부에 많은 구멍을 가진 성질을 뜻하는데, 이야기 구조에서 논리적 허점을 일컫는 ‘플롯 홀’과 의미적으로 겹친다고 한다. 그런데 그 구멍이 오히려 작가와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맛이 있다. 작가는 “사회정치적 이슈지만 예술은 어떤 책임감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는 시선으로 작업했다”고 설명했다. 4월 29일까지. 학생 4000원, 성인 5000원. 02-2020-2083조윤경 yunique@donga.com·정양환 기자}
“금 나와라, 뚝딱!” 김성복 작가의 개인전 ‘도깨비의 꿈’은 금까진 몰라도 은은 튀어나올 분위기다. 그도 그럴 것이, 도깨비방망이를 형상화한 작품 ‘금 나와라 뚝딱’(230×60×60cm)은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어 반짝반짝 은빛이 나니까. 순진한 감상이라 욕해도 할 수 없다. 이전부터 해태나 호랑이 등 한국 전통 소재를 해학적인 조각 작품으로 선보여 왔던 김 작가의 전시는 아이 손을 잡고 오면 더 좋을지도. 해태의 미소가 흐뭇한 ‘신화’나 도깨비방망이와 숟가락이 합쳐진 ‘꿈 수저’ 등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도와준다. “희망이 없는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희망을 갖길 바란다”는 작가의 의도까진 몰라보면 또 어떤가. 원래 꿈이란 건 각자 꾸는 거 아니겠나. 전시 제목이기도 한 ‘도깨비의 꿈’은 메인이벤트로 짚어보자. 10cm 안팎의 나무 조각 1200여 개가 모여 있는데 찬찬히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다음 달 24일까지. 서울 종로구 사비나미술관. 02-736-4371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