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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라고 커밍아웃하니 저를 ‘나이지리아의 악마’라고 부르더군요.” 나이지리아 출신 미국 소설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42·사진)가 장편소설 ‘보라색 히비스커스’(민음사·1만5000원)의 국내 출간을 기념해 한국을 찾았다. 강연, 에세이, 소설로 여성주의를 전하는 그는 요즘 세계에서 가장 ‘핫’한 페미니스트 작가로 통한다. 서울 중구 더플라자 호텔에서 19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정도는 다르지만 성평등이 제대로 구현된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며 “페미니즘은 오랜 불평등을 바꾸려는 정의구현 운동”이라고 했다. 이어 “페미니즘을 남성 혐오 운동으로 여기는 분위기는 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라며 “남성 역시 사회적 기준에 의해 억압당하는 측면이 있는데, 페미니스트가 되면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보라색…’은 나이지리아 소녀가 엄격한 가부장제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데뷔작이다. 이 작품으로 그는 영연방 작가상(2003년)을 받으며 스타 작가로 우뚝 섰다. 그는 “데뷔작이지만 자전적인 소설은 아니다. 이 소설을 통해 종교의 복잡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장편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2006년), 소설집 ‘숨통’(2009년) 등에서 나이지리아 사회의 혼란과 인종 차별, 성 차별을 짚었다. 에세이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2014년), ‘엄마는 페미니스트’(2017년)는 페미니즘 입문서가 됐다. 패셔니스타로도 잘 알려진 그는 한국의 탈코르셋 운동에 대해 “여성성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외모에 대한) 여성의 선택권을 회복시킨다는 점에서 훌륭하다고 생각한다”며 K뷰티에 관심이 많아 얼른 쇼핑을 하러 가고 싶다”고 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여성의 언어로 세상을 읽고, 외모 콤플렉스에서 벗어났어요. 뇌 구조가 바뀐 셈입니다.” 2016년 서울 강남역 살인사건은 많은 여성에게 그랬듯 윤이형 작가(43)에게도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생각, 언어, 작품이 깨지고 부서지며 기본값을 ‘새로 고침’했다. 최근 펴낸 단편집 ‘작은마음동호회’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내놓은 첫 결실이다. 14일 서울 종로구 청계천변에서 만난 그는 “나의 언어로 쓰면서도 끊임없이 ‘이게 맞나’ 싶어 괴롭고 힘들었다. 남성의 언어를 떨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절감했다. 부족하지만 변화하는 상태의 나를 솔직히 내보이고, 비판받고, 고쳐 나가려 한다”고 했다. 책에 실린 단편 11편은 제각각 다른 결로 반짝인다. 여성 이슈라는 큰 줄기에 여성 간 갈등, 퀴어, 여성 혐오, 성폭력 등을 얹었다. 표제작 ‘작은마음동호회’는 기혼 여성이 여성주의를 만났을 때 겪는 필연적 분열을 다룬다. 스스로 결혼 제도를 선택했지만, 예상치 못한 부조리와 육아의 무게에 짓눌려 방황하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아이를 키우면서 집회·시위에 적극 참석하기란 쉽지 않죠. 정치하는 엄마에 대한 외부 시선도 곱지만은 않고요. 외부의 시선과 스스로에 대한 열등감이 만나 기혼 여성의 분열이 극으로 치닫곤 합니다. 하지만 기혼 여성을 가장 혐오하는 건 기혼 여성 자신일지도 모릅니다. 비관에서 벗어나 작은 것부터 바꾸고 투쟁했으면 합니다.” 다른 위치에 처한 여성 간 갈등에도 주목했다. 기혼과 비혼 여성(‘작은마음…’), 인간과 로봇 여성(‘수아’), 당사자와 비당사자(‘피클’), 엄마와 딸(‘마흔셋’)이 반목하고 후회하다가 화해한다. 그는 “여성주의 안의 균열과 갈등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차이를 모른 체하기보다 다름을 연결해 나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했다. ‘피클’은 각종 미투 사건에 대한 개인의 태도를 돌아보게 만든다. 유부남 선배와 사귀는 후배 기자 유정이 성폭력 피해 사실을 알리며 도움을 구하지만 동료들은 매몰차게 외면한다. 그의 됨됨이와 평판이 마뜩잖다는 이유에서다. 피해자와 아는 사이일수록 연대가 어려운 아이러니의 핵심을 그는 ‘여성의 여성 혐오’로 파악했다. “익명의 피해자는 선뜻 지지하지만 아는 사이일 경우 신뢰할 수 있나 없나를 점검하죠. 왜 그런 걸 따질까…. 남성 문법에 따른 여성 혐오 때문이더군요. 피해자의 불안정성이 피해 사실을 부정하는 근거가 돼선 안 될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랑이란다’는 미러링 소설이다. 외계 존재에게 납치돼 사랑이란 이름의 폭력과 착취로 만신창이가 되는 남성들. 살아남기 위해 그들의 지시를 따르던 남자는 전처의 말을 떠올린다. “죽을 때까지 알 수 없을 거야. 아무 때나 끌려나와 아무렇게나 대해지는 느낌을.” 윤 작가는 “과격한 미러링에 대해 처음엔 회의적이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여성이 당하는 폭력과 여성이 가하는 폭력은 무게가 같을 수 없다”고 했다. 마지막 작품 ‘역사’에는 몸이 잘릴수록 개체가 불어나는 존재가 등장한다. 침묵의 강에 빠뜨려 종족을 절멸시키려는 적들. 그 순간 이들은 강력해진 내성을 확인하며 도약한다. 나약하고 불안정해도 끝내 진화하는 존재에 여성을 빗댔다. “중요한 건 서로를 향한 작은 마음입니다. 자매가 건넨 믿음으로 다시 나를 믿게 되는 그런 마음들요. 서로의 처지가 달라도 대화하고 이해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여성에겐 있다고 확신합니다.”이설 기자 snow@donga.com}
문재인 대통령이 항일 시인 이육사(1904∼1944)를 소재로 한 소설 ‘그 남자 264’(문학세계사·사진)를 읽고 저자인 고은주 소설가에게 감상평을 담은 친서를 보냈다. 고 작가는 12일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문 대통령에게 받은 친서를 공개했다. 대통령은 “육사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 한 명이고, 특히 그의 시 ‘광야’를 매우 좋아한다”며 “현충일 추념사에서 광복군에 합류한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를 말한 이후 논란을 보면서 이육사 시인도 의열단이었다고 주변에 말하곤 했다. 소설에 그런 내용들이 담겨 있어 기뻤다”라고 썼다. 고 작가는 13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육사가 살았던 서울 성북구에 다음 달 이육사기념관이 완공된다. 성북구청장 시절 기념관 건립에 도움을 줬던 김영배 청와대 민정비서관에게 책을 발송하면서 대통령에게 함께 보냈다”고 설명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가요계 : 케이팝 일본서 잘나가도 국내선 홍보 자제 한일 관계 경색으로 가요 업계에 ‘일본 주의보’가 퍼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가수들의 일본 내 활약상은 물론 일본 입출국 소식, ‘공항 인증샷’도 자제하는 분위기다. 특히 살얼음판을 걷는 이들이 있다. 전체 매출 가운데 일본의 비중이 높은 기획사, 이제 막 해외 시장 공략에 나서며 가까운 일본에서 활동을 시작한 그룹들이다. 한 중견 연예기획사의 관계자는 “예전에는 패션 브랜드 협찬을 받아 김포공항 출국 인증샷을 언론에 하나라도 더 노출하려 했는데 최근에는 일본 입출국을 조용히 진행하고 있다”며 “‘또 일본 가는 것 아니야?’ 하는 시선을 피하기 위해 앞으로 김포공항이 아닌 인천국제공항발 비행기표를 끊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고 귀띔했다. 일부 기획사는 최근 일본 오리콘 차트 소식을 보도자료로 배포하지 않았다. 팬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축하 메시지가 오갔을 뿐이다. 세계 시장에서 두루 강하거나 팬덤의 충성도가 공고한 이들은 상대적으로 여유롭다. 이들 팬덤에서는 ‘이런 시국에 우리 가수가 일본에서 활약해 엔화를 벌어 온다’는 긍정적인 반응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조심하는 것은 일본 내 인증샷이다. 한 가요기획사 관계자는 “일본에서 열심히 활동하되 식당에 가더라도 ‘여기 사시미가 정말 맛있다’ 같은 사진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지 말자는 암묵적 계율이 생겼다. ‘일본’이 사실상 SNS 게시물 금기어가 됐다”고 말했다. 국제 정세와 무관하게 일본 내 케이팝 시장은 아직 든든하다. 트와이스는 지난달 말 발표한 일본 싱글 ‘HAPPY HAPPY’와 ‘Breakthrough’ 모두 9일 일본 레코드 협회로부터 플래티넘(25만 장 이상 출하) 인증을 받았다. 트와이스는 이로써 2017년 6월 발표한 일본 데뷔 앨범부터 8연속 플래티넘을 달성했다. 방탄소년단은 지난달 발표한 열 번째 일본 싱글 ‘Lights/Boy With Luv’로 이날 밀리언(100만 장 이상 출하) 인증을 받았다. 갓세븐, 동방신기도 최근 오리콘 차트에서 정상을 밟거나 최상위권에 랭크되며 여전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한 연예계 관계자는 “케이팝의 주 소비층인 일본 젊은이들은 한일 관계에 관심이 높지 않은 데다 최근 일본 기획사 ‘요시모토 흥업’과 ‘자니즈’가 각각 내분 사태를 겪는 등 잇따른 일본 연예계 대형 이슈에 눈길이 쏠려 있다”면서도 “한일 갈등이 심화돼 한국 가수의 TV 출연 금지, 대형 공연장 대관 금지 조치가 내려질까 봐 염려된다”고 말했다. ▶공연계 : 일제 강점기 연극 무산… “국내 반일 감정 부담”한일 관계 경색이 지속되면서 공연계도 몸 사리기에 나섰다. 추가 공연 논의가 무산되거나 일부 공연을 자체 취소하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 일본 내 반한(反韓) 기류로 인한 피해보다는 국내 반일 감정이 큰 변수로 작용하는 모양새다.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6일 개막해 25일까지 공연하는 ‘루루섬의 비밀’은 지방 및 연말 공연이 논의 중이었으나 최근 연말 공연 계획은 무산됐다. 작품은 한국 인형극단 ‘예술무대산’과 일본 그림자극단 ‘가카시좌’가 5년간 워크숍을 거쳐 만든 어린이 대상의 그림자 인형극. 대관을 담당한 공연장 측은 최근 한일 관계가 악화한 상황에 굳이 논란이 될 상황을 만들지 않겠다는 취지로 공연 논의를 중단했다. 해당 공연에는 그림자나 인형 등이 주로 등장하며 실제 배우의 대사는 적은 수준이지만, 작품 제작에 참여한 일본인 배우 2명이 무대 앞으로 나서 한국어로 공연을 펼치는 장면도 연출된다. 조현산 ‘예술무대산’ 대표는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일이지만, 공연장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며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공연을 본 관객들이 ‘이런 문화 교류는 계속돼야 한다’고 남기는 후기를 보면 문화와 정치를 구분해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시민의식이 자리 잡은 것 같다”고 답했다. 또한 국립극단은 9월부터 무대에 올릴 예정이던 연극 ‘빙화’를 전격 취소했다. ‘빙화’는 1940년대 발표된 임선규의 작품으로, 연해주로 강제 이주한 조선인의 이야기다. 일제강점기 연극 통제 정책에 따라 시행된 ‘국민연극제’ 참가작으로 친일적 요소가 강한 것으로 평가된다. 국립극단 측은 “연구자들 사이에서만 알려진 친일 연극의 실체를 드러내 부끄러운 역사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취지로 기획됐다”면서도 “하지만 최근 일본의 경제 보복에 대한 국민들의 심려에 공감해 기획 의도를 참작하더라도 작품을 무대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앞서 공연장에서는 작은 소동도 있었다. 7월 1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아디오스 피아졸라, 라이브 탱고’ 공연에서는 일본의 탱고밴드 ‘콰트로시엔토스’ 연주 순서에서 한 관객이 “쪽바리!”라고 외친 뒤 공연장 밖으로 사라지는 사고가 벌어졌다. 24일에는 일본 플루티스트의 독주회가 예정되어 있어 주최 측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고 있다. 공연계 관계자는 “일본 관련해 예정된 공연을 무조건 취소하기도 어려우며, 관객을 완벽히 통제하기도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그저 무사히 공연이 마무리되길 바랄 뿐”이라고 답했다.▶출판계 : “일본 소설 안 읽어요”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 이후 국내에서 시작된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 출판계로 번지고 있다. 12일 인터파크 도서에 따르면 이달 첫째 주 일본 문학 분야 도서 판매량은 6월 마지막 주 대비 38% 감소했다. 7월 중반까지 건재하던 일본 소설도 7일 일본 정부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삭제한 이후 판매량이 주춤하고 있다. 일본 소설 스테디셀러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현대문학)의 7월 판매량은 6월 대비 22% 감소했다. 6월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케이도 준의 ‘한자와 나오키’(인플루엔셜)의 판매량은 39% 줄었다. 일본과 관련된 역사·사회서는 판매가 급증하고 있다.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가 쓴 ‘반일 종족주의’(미래사)는 8월 둘째 주 인터넷 교보문고 종합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이 책은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거세게 비판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아오키 오사무 전 교도통신 서울특파원이 아베 신조와 내각 각료 19명 중 15명이 속한 조직 ‘일본회의’의 실체를 해부한 ‘일본회의의 정체’(율리시즈)는 정치·사회 부문 2위였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뿌리와이파리)는 지난달 셋째 주 3위에 오른 뒤 10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한 출판사 관계자는 “한일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며 “일본인 저자와 관련된 마케팅을 취소하거나 연기하는 출판사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이설 기자 snow@donga.com}
“수업과 학생문화 모두 기대 이하였습니다.” 올해 서울의 한 대학에 입학한 A 씨는 한 달 반 만에 학교를 그만뒀다. 대학에서 지적·인격적으로 성장할 거란 기대가 산산조각 났기 때문이다. 일부 교수는 수업의 목표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 토론으로 수업을 때운다는 인상도 받았다. 새내기 오리엔테이션의 권위와 규율도 불편했다. 최근 그는 대안 대학 ‘미지행’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A 씨는 “스승은 정성껏 질문하고 학생은 진지하게 생각한다. 졸업장의 무게는 제도권 대학보다 가벼울지 몰라도 배움의 만족도는 훨씬 커졌다”고 했다.○ 평등하고 능동적인 ‘공부 공동체’ 기존 대학의 문법을 부수는 교육 플랫폼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2015년 문을 연 신촌대가 있다. ‘스피치로 말잘해볼과’ ‘트라우마 극복해볼과’ 등 의문형 ‘까’를 ‘과’로 바꾸고 간판에 대학을 붙였지만 지향점은 대학과 모든 게 정반대다. 학력과 관계없이 누구나 가르칠 수 있다. 교육부 인가는커녕 뚜렷한 조직체계도 없다. 학비는 2과목에 8만 원(한 달 기준). 수업은 신촌 일대의 공간을 빌려서 연다. 이해랑 신촌대 운영위원은 “‘대학’이라는 명칭은 상징적으로 사용할 뿐 모두가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프로젝트 또는 모임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입학·졸업증, 학점이수, 스펙이 없는 평등한 공부 공동체”라고 설명했다. 이곳의 핵심 가치는 도전과 변화다. 진로 고민으로 끙끙 앓던 이혜민 씨(28)는 신촌대에서 인생 항로를 바꿨다. 인문과 실용을 아우르는 수업을 듣고 학과장으로 강의(‘SNS해볼과’)를 하다 보니 자신을 정확히 파악하게 됐다. 영양사에서 금융과 마케팅 쪽으로 진로를 바꿨다. 신촌대는 학과장들이 동네에서 수업을 열면서 이태원대, 구로대, 분당 캠퍼스, 테헤란로대 등으로 분화됐다. 뿌리 격인 신촌대의 시스템을 따르되 지역의 특성을 덧입었다. 구로대는 은퇴 이후 삶을 고민하는 중장년층 중심으로 운영된다. 분당 캠퍼스는 마을 공동체 성격이 강하다. 이태원 캠퍼스는 예술 수업이 활발하고 테헤란로대는 금융 수업을 주로 연다. 금융인 출신인 한연숙 테헤란로대 학과장은 “테헤란로가 경제·금융의 메카라고 하는데 관련 강의를 들을 기회가 없었다. 전·현직 금융인을 위한 배움터”라고 했다. 건축가 신혜원, 문학평론가 함돈균, 무용가 안은미가 의기투합해 만든 ‘미지행’은 학교의 배움을 사회로 연결시키는 게 목표다. 학교의 운영 단위는 유닛이다. 생각 몸 미디어 도구 등 유닛별로 학과장 격인 디렉터가 있다. 학위와 논문이 아닌 현장 경험과 네트워크 역량으로 디렉터를 뽑았다. 내년 정식 개교를 앞두고 지난달 20명을 모집해 시험호를 띄웠다. 이번 학기 등록금은 180만 원. 출판사를 다니다 입학한 하연 씨는 “일을 해보니 분절된 전공 지식보다 통합적 사고방식이 중요하다는 걸 절감했다. 뜬구름처럼 들릴 수 있지만 훨씬 실용적인 공부법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2016년 문을 연 파이청년학교는 청년의 길잡이를 자처한다. 초중고교 12년간 앞만 보고 달려온 이들이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잘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도록 돕는 게 목표다. 이 때문에 인문·심리학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2년 과정으로, 수강료는 한 학기에 220만 원 선이다. 파이학교는 현장 교육에 특히 공을 들인다. 지난해에는 학생들의 제안으로 게임을 프로젝트 주제로 정하고 게임회사 최고경영자(CEO)를 초청해 수업을 진행했다. 올해 주제는 웹툰. 30년 경력의 웹툰 작가의 작업실을 둘러보고 웹툰을 제작했다.○ 대안 대학 붐…“수업 내용 잘 따져봐야” 지적도 독학의 보고인 유튜브에도 대학이 존재한다. 김미경 강사가 진행하는 김미경tv유튜브대는 올해 1월 5일 서울의 한 대학 강당을 빌려 출범식 성격의 입학식을 열었고, 1500여 명이 참석했다. 학생들은 동영상을 시청한 뒤 언급된 책을 읽고 온라인 카페에 A4 용지 5장 내외로 독후감을 올려야 한다. 팬덤 중심의 유튜브 기반 독서 대학인 셈이다. 학칙은 나름대로 까다롭다. 일정 건수 이상 과제를 제출해야 활동할 수 있다. 참여도에 따라 열정대학생, 열정우등생, 열정장학생으로 등급이 올라간다. 열정장학생인 김용현 씨(40)는 “책을 읽고 온·오프라인에서 동기생들과 생산적 관계를 맺다 보면 열정이 고취된다. 운동을 습관화하고 새벽에 일어나게 됐다”고 했다.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대안 대학이 빠르게 번지는 배경에는 기존 대학의 침몰이 있다. 이해랑 위원은 “현재 대학은 비싼 등록금에 비해 효용이 떨어진다. 학문의 범위도 제한돼 있다. 이에 대한 불만으로 맞춤형 교육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했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미래 사회에는 빠르게 분야를 바꿔 적응하는 ‘리부팅’ 능력이 중요하다. 초-중-고-대학으로 이어지던 정규 교육과정의 쓸모에 의문을 품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입시 중심의 교육체제에 변화가 일고 있다”고 했다.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한 교육 관계자는 “말이 대학이지 실용학원과 다를 바 없는 플랫폼이 적지 않다. 싼 게 비지떡일 수 있으니 수업 내용을 잘 따져봐야 한다”고 지적했다.이설 snow@donga.com·신규진 기자}
“말하기 조심스러운데…. 수업과 학교 문화가 모두 기대 이하였습니다.” 19학번으로 서울의 한 대학에 입학한 A씨는 한 달 반 만에 학교를 그만뒀다. 대학의 울타리에서 지적·인격적으로 성장할 거란 기대가 산산조각 났기 때문이다. 일부 교수는 수업의 목표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 토론으로 수업을 때운다는 인상도 받았다. 새내기 오리엔테이션의 권위와 규율도 불편했다. A씨는 최근 ‘미지행’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통합적 사고를 지닌 세계시민 양성을 추구하는 대안 대학. 올해 시범 학기를 열고 학생 20명을 모집했다. A씨는 “스승은 정성껏 질문하고 학생은 진지하게 생각한다. 졸업장의 무게는 제도권 대학보다 가벼울지 몰라 배움의 만족도는 훨씬 커졌다”고 했다. 연 1000만 원에 육박하는 등록금. 4년을 다녀도 멀게 느껴지는 교수님. 유튜브 강의보다 실속 없는 교양 수업. 취업을 목표로 종마처럼 달리는 캠퍼스 친구들. 오늘날 대학의 자화상이다 최근 기존 대학의 문법을 깨부수는 교육 플랫폼이 대거 등장하고 있다. 결은 조금씩 다르지만 자유로운 배움터를 추구한다. 누구나 학과를 개설할 수 있는 신촌대·서초대·테헤란로대, 배움의 공공성을 지향하는 미지행, 유튜브 기반의 김미경tv유튜브대, 전문성에 방점을 둔 파이(PIE)청년학교 등이다. 함돈균 미지행 총괄 디렉터는 “커뮤니티 중심의 취미 모임부터 대학의 틀을 갖춘 교육 기관까지 배움의 통로가 다양해지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대안학교의 성인 버전인 대안 대학이 주목받고 있다”고 말했다. ●‘나도 학과장 해볼과’ ‘스토리텔링 강의기법 배워볼과’, ‘제대로 된 시민참여로 행복해질과’, ‘스피치로 말잘해볼과’, ‘트라우마 극복해볼과’…. 이런 흐름의 중심에는 2015년 문을 연 신촌대가 있다. 신촌대의 전략은 발랄하고 가벼운 비틀기다. 의문형 ‘까’를 ‘과’로 바꾸고 간판에 대학을 붙였지만 지향점은 대학과 모든 게 정반대다. 가방 끈과 별개로 누구나 가르칠 수 있고, 교육부 인가는커녕 뚜렷한 조직체계도 없다. 학비는 2과목에 8만 원(한 달). 수업은 신촌 일대의 공간을 빌려서 연다. 이해랑 신촌대 운영위원은 “‘대학’이라는 명칭은 상징적으로 사용할 뿐, 모두가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프로젝트 또는 모임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입학·졸업증, 학점이수, 스펙이 없는 평등한 공부 공동체”라고 설명했다. 이곳의 핵심 가치는 도전과 변화다. 진로를 고민하던 이혜민 씨(28)는 신촌대에서 인생 항로를 바꿨다. 인문과 실용을 아우르는 수업을 듣고 학과장으로 강의(‘SNS해볼과’)를 하다보니 스스로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게 됐다. 영양사에서 금융과 마케팅 쪽으로 직업을 바꿨다. 이 씨는 “인문, 사회, 과학을 넘나드는 지식을 배우고 때로 가르치다보면 도전 정신이 고양되고, 이런 변화가 일상에서 긍정의 씨앗을 틔운다. 제한된 삶의 테두리를 깨고 싶은 이들은 만족할 것”이라고 했다. 개교 5년차. 신촌대는 빠르게 외연을 넓히고 있다. 학과장들이 동네에서 수업을 열면서 이태원대, 구로대, 분당 캠퍼스, 동탄 캠퍼스, 서초대, 테헤란로대 등으로 분화됐다. 원조인 신촌대의 시스템을 따르지만 지역의 특성을 덧붙였다. 구로대는 은퇴 후 진로 고민을 안은 중장년층 중심으로 운영된다. 분당 캠퍼스는 마을 공동체 성격이 강하다. 이태원 캠퍼스는 예술 관련 수업이 활발한데, 지자체로부터 공간을 제공받으며 새로운 협력모델을 구축했다. 테헤란로대는 금융 관련 수업을 주로 연다. ‘펀드·리츠·P2P로 부동산 간접투자해볼과’, ‘리더라면 이코노미스트읽어볼과’ 등이다. 금융인 출신인 한연숙 테헤란로대 학과장은 “테헤란로가 경제·금융의 메카라고 하는데 관련 강의를 들을 기회가 없었다. 전·현직 금융인들을 위한 배움터”라고 했다. 가성비 좋은 ‘실용학원+교양강좌+취미모임’으로 단단히 자리매김한 신촌대는 어떤 앞날을 그릴까. 이해랑 위원은 “조직을 정비한 뒤 시니어, 청년, 예술, 미디어 등으로 지역 캠퍼스를 특화했으면 하는 게 개인적 바람”이라고 했다. ●“배움을 사회로 연결시키는 미래형 학교” “교수님이 아닌 이름을 불러요. 혜원(신혜원), 돈(함돈균) 이렇게요. 호칭이 평등하니 소통도 편안하게 이뤄집니다.”(미지행 학생 하연) “이수 학점이나 과제는 없어요. 스스로 무엇을 공부할지 정하고, 수업에서는 구성원들과 긴밀히 소통하죠. 초·중·고를 거쳐 갑자기 대학에 진학해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은 그렇지 않아요. ”(미지행 학생 B씨) 미지행은 공존·세계시민·생명을 학교 정신으로 삼고, 미래 의제를 중심으로 공부하는 학교다. 학교의 배움을 사회로 연결시키는 게 목표다. 건축가 신혜원, 문학평론가 함돈균, 무용가 안은미 등이 의기투합했다. 내년 정식 개교를 앞두고 지난달 20명을 모집해 시험호를 띄웠다. 이번 학기 등록금은 180만 원. 내년부터는 학비가 오를 것으로 보인다. 파운데이션과정 1년을 포함한 5년제로 진행된다. 몸, 도구, 공간, 생각, 소통 등의 강좌를 자유롭게 골라 듣는다. 시험 학기 학생은 대안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 유학생, 직장인으로 다양하다. 학교 구성원들은 서로를 형, 언니가 아닌 이름으로 부른다. 출판사를 다니다 입학한 하연 씨는 “사회에서 일을 하다보니 분절된 전공 지식보다 통합적 사고방식이 중요하다는 걸 절감했다. 얼핏 뜬구름처럼 들릴 수 있지만 훨씬 실용적인 공부법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학교 운영 단위는 유닛이다. 생각 몸 미디어 도구 등 유닛 별로 학과장 격인 디렉터가 있다. 학위와 논문이 아닌 현장 경험과 네트워크 역량으로 디렉터를 뽑았다. 교육이 사회적 영향력으로 이어지길 바라기 때문이다. 강연과 연구 내용을 토대로 학교 자체가 일터화(미디어) 되는 밑그림도 그리고 있다. 미지행은 연구소로 등록돼 있다. 함돈균 디렉터는 “국가 교육시스템에 예속될 계획은 없다. 대학으로 인가를 받으면 재정 보조를 받을 수 있지만 자율성은 포기해야 한다. 현실적 요구를 반영해 해외 대학과 연합을 구축해 학점을 교류하고, 연합 학교에서 졸업인가를 받는 방식을 구상 중”이라고 했다. ●김미경 팬덤, 유튜브대학 “요즘 미경샘 강의를 들으며 영어와 재테크를 공부해요. 오랜 꿈이었던 그림도 배우고요. 여느 때보다 활기차게 삽니다.‘ 서울에 사는 40대 김상희 씨는 최근 다시 대학생이 된 기분이다. 친언니의 권유로 김미경tv유튜브대학에 입학한 것. ’북드라마‘, ’드림머니‘, ’인간관계 대화법‘ 등을 시청한 뒤 영상에서 소개한 책을 읽고 카페에 독후감을 제출한다. 김 씨는 ”자기계발, 꿈, 영어, 시사, 재테크를 두루 다룬다. 문화센터나 취미모임보다 수업 구성이 풍성한 데다 회원들끼리 결속력이 높다“고 했다. 독학의 보고인 유튜브에도 대학이 생겨났다. 김미경 강사가 진행하는 김미경tv유튜브대다. 올해 1월 5일 1500여 명이 서울의 한 대학 강당에 모여 출범식 성격의 입학식을 열었다. 수업은 온라인에서 이뤄진다. 동영상을 시청한 뒤 언급된 책을 읽고 온라인 카페에 A4지 5장 내외로 독후감을 올려야 한다. 팬덤 중심의 유튜브 기반 독서 대학인 셈이다. 현재 카페 회원은 2만2400여 명. 남녀노소가 두루 참여하지만 40대 이상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연간 9만9000원을 내고 유료회원이 되면 학번과 오프라인 모임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진다. 현재 유료회원은 2300여 명이다. 학칙은 나름 까다롭다. 일정 건수 이상 과제를 제출해야 활동할 수 있다. 참여도에 따라 열정대학생, 열정우등생, 열정장학생으로 등급이 올라간다. 만만찮은 진입장벽을 극복하고 많은 이들이 유튜브대에 열광하는 이유가 뭘까. 열정장학생인 김용현 씨(40)는 ”책을 읽고 온·오프라인에서 동기생들과 생산적 관계를 맺다보면 열정이 고취된다. 운동을 습관화하고 새벽기상을 하게 됐다“고 했다. 유료회원 C씨는 ”인맥과 사고의 폭이 넓어지다보니 스스로 브랜드화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붙었다“고 했다. ●대안 대학 등장은 필연…”수업 내용 잘 따져봐야“ 지적도 2016년 문을 연 파이청년학교는 청년들의 길잡이를 자처한다. 초·중·고 12년 간 앞만 보고 달려온 이들이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잘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도록 돕는 게 목표다. 이 때문에 인문·심리학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2년 과정으로, 수강료는 한 학기에 220만 원 선이다. 파이학교는 현장 교육에 특히 공을 들인다. 지난해에는 학생들의 제안으로 게임을 프로젝트 주제로 정하고 게임회사 CEO를 초청해 수업을 진행했다. 올해 주제는 웹툰. 30년 경력의 웹툰 작가의 작업실을 둘러보고 웹툰을 제작했다고 한다. 이밖에 커뮤니티 성격이 강한 오픈 칼리지, 직장인2교시, 취향관 등도 있다. 대안 대학이 빠르게 번지는 배경에는 기존 대학의 침몰이 있다. 이해랑 위원은 ”현재 대학은 비싼 등록금에 비해 효용이 떨어진다. 학문의 범위도 제한돼있다. 이에 대한 불만으로 맞춤형 교육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했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미래 사회에서는 빠르게 분야를 바꿔 적응하는 ’리부팅‘ 능력이 중요하다. 초·중·고·대로 이어지던 정규 교육과정의 쓸모에 의문을 품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입시 중심의 교육체제에 변화가 일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한 교육 관계자는 ”말이 대학이지 실용학원과 다를 바 없는 플랫폼이 적지 않다. 싼 게 비지떡일 수 있으니 수업 내용을 잘 따져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과학과 인문 지식이 충만한 데다 글과 말까지 된다. 경계의 지식을 책과 강연으로 적극 알려온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48)를 지난달 31일 만났다. 서울 관악구 관악로 그의 사무실은 온통 책이었다. 그 가운데 비범한 외양의 책을 뽑아들며 그가 눈을 반짝였다. “다윈은 저의 지적 영웅입니다. 이 흥분을 모두와 나누고 싶습니다.” 최근 그는 다윈(1809∼1882)의 ‘종의 기원’(사이언스북스·2만2000원)을 번역 출간했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 등이 함께하는 다윈포럼이 준비해온 다윈 선집 ‘드디어 다윈’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다. 그는 “1859년 출간 이후 1872년까지 모두 6번 개정됐는데, 국내 번역서는 대부분 마지막 판을 다뤘다. 초판을 진화학자가 번역한 것은 의미 있는 시도”라고 했다. ―초판을 선택한 이유는…. “포럼에서 6판과 1판 간 경합이 뜨거웠다. 초판은 당대 반응을 반영하지 않은 이론이고 6판은 생각의 완성에 가깝다는 논리였다. 개인적으로 2판을 주장했다. 거듭 고쳐 쓰기 전 원형의 생각을 간직한 데다 오탈자만 잡아 완성도가 높을 거라 생각했다. 한데 2판도 초판과 판이해서 초판을 택했다.” ―‘종의 기원’ 출간 당시엔 여러 차례 고쳐 쓰는 게 일반적이었나. “다윈은 소심한 편이라 비판에 일일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학계 반응에 대한 변을 담아 다시 고쳐 썼던 거다. 지금 같았으면 그는 파워 블로거가 됐을 거다. 댓글에 일일이 답하며 소통하지 않았을까?” ―번역에서 특히 신경 쓴 부분은…. “한국어로 잘 읽히도록 다듬는 데 공을 들였다. 다윈의 시대에는 문장이 한 페이지를 넘길 정도로 만연체가 유행했는데, 이 때문에 한국어 번역본도 어렵게 느껴졌다. ‘생존경쟁’을 ‘생존투쟁’으로 고치는 등 용어도 대폭 수정했다.” ―많은 이들과 ‘종의 기원’이 주는 기쁨을 나누고 싶다고 했다. “복잡하고 정교한 자연세계를 설명할 길을 제시한 역작이다. 또 개인은 거대한 생명의 나무에서 뻗은 하나의 가지에 불과하며, 우연히 빚어진 운 좋은 생명체임을 일깨운다. 성경에 버금가는 치유의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윈 이후 진화학의 흐름은…. “현대의 생물학은 다윈 진화론의 패러다임 위에서 작동한다. 유전자 중심으로 진화학을 설명한 ‘이기적 유전자’ 등 후속 이론이 나오고 있다. 진화윤리, 진화심리, 진화경제 등도 등장했다. 전례 없이 생산적인, 겨자씨 같은 학문이다.” ―다윈 찬양론자처럼 느껴진다. “지적인 영웅이자 애정하는 영웅이다. 천재성을 타고난 영웅은 멀게 느껴지는데 다윈은 그렇지 않다. 따개비만 8년을 연구할 정도로 성실히 임하다 보니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인간미를 진하게 풍기지 않나?” ―인문학 성향이 강한 과학자인가, 과학 성향을 지닌 인문학자인가. “늘 경계에 있었기에, 주변에서도 ‘과학자냐, 철학자냐’고들 묻는다. 정체성을 깊이 고민한 끝에 어느 순간 진화학자라고 스스로를 명명하니 마음이 편해지더라. 통섭의 시대에 학문의 경계를 가르는 것도 뭔가 이상하다.” ―과학자들의 시각이 남다른 점은…. “과학자들은 가장 최신의 이야기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옛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정의했는데, 과학은 영장류학, 뇌과학 등으로 사회성을 구체적으로 파고든다.” ―왕성하게 저서를 쏟아내고 있다. “대학원 시절 독서의 즐거움에 눈을 떴다. 어린 시절부터 책벌레였던 인사들을 보면 콤플렉스도 느낀다. 하지만 독서에 늦은 때란 없다. 독서를 하면 실제 뇌가 변하고, 성격과 인생의 변화로 이어진다.”이설 기자 snow@donga.com}
“다윈은 저의 지적 영웅입니다. 이 흥분을 모두와 나누고 싶습니다.”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48)는 읽고 쓰고 나누는 진화학자다. 과학과 인문학을 넘나들며 책과 강연으로 경계의 지식을 적극 알리고 있다. 지난달 31일 찾은 그의 사무실은 온통 책이었다. 과학서부터 독서법까지, 신들린 듯 펴낸 저서 더미에서 그가 비범한 외양의 책을 뽑아들며 눈을 반짝였다. 최근 그가 번역한 다윈(1809~1882년)의 ‘종의 기원’(사이언스북스·2만2000원)이었다. -왜 지금 ‘종의 기원’인가.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 등이 함께하는 다윈 포럼이 2005년부터 준비해온 다윈 선집 시리즈 ‘드디어 다윈’의 첫 번째 책이다. 2009년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을 맞아 펴낼 계획이 늦어졌다. 1859년 출간 이후 1872년까지 모두 6번 개정됐는데, 국내 번역서는 대부분 마지막판을 다뤘다. 초판을 진화학자가 번역한 것은 의미 있는 시도라고 본다.” -초판을 선택한 이유는? “포럼에서 가장 논란이 됐던 부분이다. 6판과 1판 간 경합이 뜨거웠다. 초판은 당대 반응을 반영하지 않은 이론이고 6판은 생각의 완성에 가깝다는 논리였다. 개인적으로 2판을 주장했다. 소심한 다윈이 거듭 고쳐쓰기 전 원형의 이론에 오탈자만 잡아 완성도가 높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한데 2판도 초판과 판이하게 달라서 초판을 택했다.” -‘종의 기원’ 출간 당시엔 여러 차례 고쳐 쓰는 게 일반적이었나. “다윈은 소심한 편이라 비판에 일일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학계 반응에 대한 변을 담아 다시 고쳐 썼던 거다. 지금같았으면 그는 파워 블로거가 됐을 거다. 댓글에 일일이 답하며 소통하지 않았을까?” -번역에서 특히 신경쓴 부분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한국어로 잘 읽힐 수 있도록 다듬는데 공을 들였다. 다윈의 시대에는 한 페이지가 넘어갈 정도로 긴 만연체가 유행했는데, 이 때문에 한국어 번역본도 어렵게 느껴졌다. 포럼 회원들과 토론을 거쳐 ‘생존경쟁’을 ‘생존투쟁’으로 고치는 등 용어도 대폭 수정했다.” -‘종의 기원’이 주는 흥분을 모두와 나누고 싶다니, 도전 의지가 솟구친다. “자연과 존재에 대한 눈을 틔워준 책이다. 복잡하고 정교한 자연세계를 설명할 길이 없었는데, 다윈이 자연선택이라는 매커니즘을 제시한 거다. 개인은 거대한 생명이 나무에서 뻗은 하나의 가지에 불과하며, 우연과 우연이 만나 빚은 운좋은 생명체임을 일깨운다. 인간에 대한 이해로 이끄는 책으로, 성경에 버금가는 힐링이 있다고 생각한다.” -‘종의 기원’ 이후 진화학의 흐름은? “한 이론의 역사는 300년을 주기로 돌아가는데, 다윈의 이론은 성숙기에 접어들었다. 현대의 생물학은 다윈 진화론의 패러다임 위에서 작동한다. 유전자 중심으로 진화학을 설명한 ‘이기적 유전자’ 등 후속 이론이 나오고 있다. 진화윤리, 전화심리, 진화경제 등도 등장했다. 전례 없이 생산적인, 겨자씨 같은 학문이다.” -다윈 찬양론자처럼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다윈은 지적인 영웅이자 애정하는 영웅이다. 다윈은 한 분야에 성실히 임하다 보니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따개비만 8년을 연구했다. 천재성을 타고난 영웅은 멀게 느껴지는데 다윈은 그렇지 않아서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이론치고 덜 알려진 것 같다. “종교적인 이유가 크다고 본다. 우생학,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한다는 오해도 받았다. 경쟁을 대놓고 이론으로 소개하는 것에 대한 견제도 없지 않았다. 사실 다윈은 경쟁만큼 협력에 대해서도 관심을 쏟았다.” -인문학 성향이 강한 과학자인가, 과학 성향을 지닌 인문학자인가. “양쪽을 오가며 활동한다. 늘 경계에 있었기에, 주변에서도 ‘과학자냐, 철학자냐’고들 묻는다. 정체성을 깊이 고민한 끝에 어느 순간 진화학자라고 스스로를 명명하니 마음이 편해지더라. 통섭의 시대에 학문의 경계를 가르는 게 바람직하다고 보지 않는다.” -지난 10여 년 간 과학담론이 빠르게 부상했다. “과학은 물질 조건에 기여하고 생활의 편리를 돕는 학문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과학이 우리의 생각을 바꾼다는 점이다. 과학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건, 확립된 절차에 동의한다는 뜻이다. 9.11 테러 이후 과학자들이 도덕 윤리 사회에 대해 목소리를 내면서, 합리적 객관적으로 사고하려 하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과학자들의 시각이 남다른 점은? “과학자들은 가장 최신의 이야기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옛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정의했는데, 과학은 최신의 렌즈로 사회성을 탐구한다. 영장류학, 뇌과학 등으로 사회성을 구체적으로 파고드는 거다. 인문사회과학에서 다루던 주제가 과학 쪽으로 넘어온 셈이다.” -글과 말이 동시에 되는 과학분야 학자로 손꼽힌다. 독서에 대한 책도 펴냈다. “어린 시절 독서와 거리가 멀었다. 과학고 시절 저자와 글쓰기의 중요성에 눈을 떴고, 연애편지와 교회 주보를 쓰면서 ‘쪽글’로 글쓰기 기초를 닦았다.(웃음) 대학원 시절 독서의 재미에 눈을 떴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책벌레였던 인사들을 보면 은근히 콤플렉스도 느낀다. 하지만 독서에 늦은 때란 없다. 독서를 하면 실제 뇌가 변하고, 성격과 인생의 변화로 이어진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소설가 장은진 씨(사진)가 제20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고 이효석문화재단이 4일 밝혔다. 수상작은 소설집 ‘외진 곳’. 심사위원단은 “사회 소수자들을 향한 따스한 공감의 에너지와 시대의 응전력을 지닌 작품”이라고 대상 선정 사유를 밝혔다. 이효석문학상은 가산 이효석(1907~1942)을 기리기 위해 2000년 강원 평창군 효석문화제에서 제정됐다. 시상식은 9월 7일 오후 12시 강원 평창군 진부문화센터에서 열린다. 상금은 3000만 원. 이설 기자 snow@donga.com}
한국가정연구소장인 저자의 강연을 묶었다. 아내와 남편의 역할 경계가 흐려지는 시대에 ‘남편수업’이란 모토는 낡은 문법처럼 보인다. 하지만 뚜껑을 열면 한 개인이 관계에서 지침을 삼을 만한 조언이 주를 이룬다. 1장 ‘남자의 삶’과 2장 ‘부부농사’는 가정 문제에 서툰 이들을 위한 기초 가이드 격이다. 가족 탄력성, 일과 가족의 균형, 고부 갈등, 졸혼 등을 다룬다. 3장 ‘자식농사’에서는 자녀 교육에 있어 부부 간 노선을 통일하고 가족 간 추억을 유산으로 남겨야 한다는 조언이 이어진다. 4장 ‘가정에서의 대화’, 5장 ‘나의 삶’은 각각 관계와 노년의 삶을 훑었다. 뾰족한 통찰은 없지만 생생한 사례가 담겼다. 가정 문제를 진지하게 대한 적 없는 이들의 기초 독본으로 적합해 보인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토지문화재단(이사장 김영주)은 한국과 러시아 대학생들의 교류 프로그램인 ‘제10차 한-러 대학생 대화(KRD)’ 참가자 40여 명이 1일 경남 통영시 박경리 작가의 묘소와 기념관을 방문했다고 2일 밝혔다. 앞서 올해 6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대에서는 박경리문학제가 열렸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마흔 즈음, 변화 없이 평온하게 흐르던 세계에 금이 갔다. 친구와 가족을 잃은 뒤의 일상은 ‘비포 앤드 애프터’처럼 낯설었다. 그들이 없는 채로 남은 날을 살아내야 하고, 앞으론 비슷한 일이 반복될 거란 사실이 가슴을 짓눌렀다. 이런 마음으로 세월호 사건까지 겪었다. 낙관이 넘치던 글에 비관의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김연수 소설가(49)가 40대에 써내려간 글을 묶어 산문집을 냈다. 제목은 ‘시절일기’(레제·1만5000원), 부제는 ‘우리가 함께 지나온 밤’. 2003∼2017년 절규하듯 토해낸 글 가운데 일부를 거듭 고쳐서 엮었다. 26일 서울 종로구 청계천변에서 만난 그는 “지나고 보니 그 시절을 버틴 건 글쓰기 덕분이었다. 사람을 두 번 살게끔 하는 글쓰기를 통해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했다. 시간 순서와 상관없이 5개 테마로 글을 묶었다. 특히 2부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글로만 구성했다. 그만큼 세월호가 안긴 타격이 컸다. “소설가는 기승전결로 세상을 바라보는데, 세월호 사건은 논리를 한참 건너뛰는 어처구니없는 비극이었다.” “가슴이 안 뛴다고나 할까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희망이 무너지자 오래 무기력했습니다. 당시에 쓴 글도 못 봐줄 만큼 어둡겠거니 했는데 의외로 그렇지 않더군요. 한 줄기 빛이나마 찾으려고 노력한 덕분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저의 렌즈를 덧씌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세상을 바라보려 합니다. 쓰는 행위를 통해 태도가 바뀐 거죠.” 젊은 세대의 필독서로 통했던 첫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2004년) 당시에 작가의 관심사는 온통 자신이었다. 소설을 쓸 때도 딱히 바깥을 신경 쓰진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한 건 독자가 책으로부터 받는 영향이 크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부터. 그는 “주인공에게 공감하다가 독자 본인의 세계와 작품 세계를 연결짓더라. 시공간을 구체적으로 설정하는 편이라 더 깊이 연루되는 것 같다. 작품이 여러 기억이 공동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정거장 같은 곳이라는 걸 알고 나니 책임감이 생겼다”고 했다. 요즘에는 우리 사회의 속성에 관심이 간다. 과거 출구 없는 ‘헬조선’처럼 느껴진 우리 사회가 요즘엔 달리 보이기 시작했단다. “광화문 집회를 가보니 흥미롭더군요. 개인의 가치관은 유년기의 영향을 크게 받는데, 1940년대생은 1950∼60년대, 20대는 2000년대를 겪은 거잖아요. 사회적 피가 다른 이들이 같은 사회에 공존하니 모든 이슈가 합의를 보지 못한 채 어중간하게 결론이 나는 거죠. 한 세력이 오래 통치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고요. 그만큼 사회적 비용이 높지만, 젊은 민주주의 국가의 특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는 소설도 다작하지만 산문집도 다수 펴냈다. 초기엔 잡문을 쓴다는 생각에 창피했는데, 지금은 산문이 더 어렵고 조심스럽다. 독자와 곧장 연결되고 시공간에 대한 목소리가 바로 드러나서다. 최근에는 소설이 잘 써지지 않아 산문에 더 몰두하고 있다. “백석과 임진왜란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는데, 언제 완성할지 모르겠어요. 산문은 그냥 질문만 해도 되는데 소설은 해답을 찾아야 하잖아요. 답이 없으니 글이 막히는 거죠. 소설이 쉽게 써지던 시절은 끝났다는 상실감이 들지만, 지금 쓰는 소설이 예전만 못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중년의 강을 건너면서 알게 된 것들이 많으니까요.” 이설 기자 snow@donga.com}
마흔 즈음, 변화 없이 평온하게 흐르던 세계에 금이 갔다. 친구와 가족을 잃은 뒤의 일상은 ‘비포 앤 애프터’처럼 낯설었다. 그들이 없는 채로 남은 날을 살아내야 하고, 앞으론 비슷한 일이 반복될 거란 사실이 가슴을 짓눌렀다. 이런 마음으로 세월호 사건까지 겪었다. 낙관이 넘치던 글에 비관의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김연수 소설가(49)가 40대에 써내려간 글을 묶어 산문집을 냈다. 제목은 ‘시절일기’(레제·1만5000원), 부제는 ‘우리가 함께 지나온 밤’. 2003~17년 절규하듯 토해낸 글 가운데 일부를 거듭 고쳐서 엮었다. 26일 서울 종로구 청계천변에서 만난 그는 “지나고 보니 그 시절을 버틴 건 글쓰기 덕분이었다. 사람을 두 번 살게끔 하는 글쓰기를 통해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했다. 시간 순서와 상관없이 5개 테마로 글을 묶었다. 특히 2부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글로만 구성했다. 그만큼 세월호가 안긴 타격이 컸다. “소설가는 기승전결로 세상을 바라보는데, 세월호 사건은 논리를 한참 건너뛰는 어처구니없는 비극이었다.” “가슴이 안 뛴다고나 할까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희망이 무너지자 오래 무기력했습니다. 당시에 쓴 글도 못 봐줄 만큼 어둡겠거니 했는데 의외로 그렇지 않았더군요. 한 줄기 빛이나마 찾으려고 노력한 덕분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저의 렌즈를 덧씌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세상을 바라보려 합니다. 쓰는 행위를 통해 태도가 바뀐 거죠.” 젊은 세대의 필독서로 통했던 첫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2004) 당시에 작가의 관심사는 온통 자신이었다. 소설을 쓸 때도 딱히 바깥을 신경 쓰진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한 건 독자가 책으로부터 받는 영향이 크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부터. 그는 “주인공에 공감하다가 독자 본인의 세계와 작품 세계를 연결짓더라. 시공간을 구체적으로 설정하는 편이라 더 깊이 연루되는 것 같다. 작품이 여러 기억이 공동으로 모이고 흩어지는 정거장 같은 곳이라는 걸 알고 나니 책임감이 생겼다”고 했다. 요즘에는 우리 사회의 속성에 관심이 간다. 과거 출구 없는 ‘헬조선’처럼 느껴진 우리 사회가 요즘엔 달리 보이기 시작했단다. “광화문 집회를 가보니 흥미롭더군요. 개인의 가치관은 유년기의 영향을 크게 받는데, 40년대 생은 1950~60년대, 20대는 2000년대를 겪은 거잖아요. 사회적 피가 다른 이들이 같은 사회에 공존하니 모든 이슈가 합의를 보지 못한 채 어중간하게 결론이 나는 거죠. 한 세력이 오래 통치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고요. 그만큼 사회적 비용이 높지만, 젊은 민주주의 국가의 특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는 소설도 다작하지만 산문집도 다수 펴냈다. 초기엔 잡문을 쓴다는 생각에 창피했는데, 지금은 산문이 더 어렵고 조심스럽다. 독자와 곧장 연결되고 시공간에 대한 목소리가 바로 드러나서다. 최근에는 소설이 잘 써지지 않아 산문에 더 몰두하고 있다. “백석과 임진왜란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는데, 언제 완성할지 모르겠어요. 산문은 그냥 질문만 해도 되는데 소설은 해답을 찾아야 하잖아요. 답이 없으니 글이 막히는 거죠. 소설이 쉽게 씌어지던 시절은 끝났다는 상실감이 들지만, 지금 쓰는 소설이 예전만 못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중년의 강을 건너면서 알게 된 것들이 많으니까요.” 이설 기자 snow@donga.com}
영역을 넘나드는 크로스오버 인재가 각광받는 시대. 독학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때마침 곳곳에 콘텐츠가 넘쳐난다.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의 저자 야마구치 슈가 전하는 ‘독학 가이드’다. ‘목표를 정하라’ ‘시간을 분배하라’ 같은 뻔한 조언도 있지만, 방법을 몰라 허둥대는 이들은 한 번쯤 참고할 만하다. 독학의 밀도는 감도에 좌우된다. 그리고 이 감도는 전략이 결정한다. “원하는 테마(권력, 사랑…)와 장르(영화, 정치철학…)를 결합해 우선순위에 따라 시간을 배분하라”는 게 전략의 골자다. 일의 성과로 연결되지 못한 지식은 ‘경험 뭉치’일 뿐이다. 독학한 내용을 개인의 문맥에 맞게 재구성해야 쓸모가 생긴다. 그래야 중요한 의사결정 과정에서 의미 있는 시사와 통찰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슈의 깨알 비법이 이어진다. “흥미로운 사실, 통찰과 시사, 행동 지침에 밑줄을 그어라”, “한 책에서 가장 중요한 5∼9개 대목을 옮겨 적어라”, “시사점과 그로 인해 내가 실천해야 할 일을 정리하라”…. 지적 전투력을 높이는 데 유용한 11개 분야와 추천도서도 9권씩 소개한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10대를 위한 소설인데 내용은 제법 묵직하다. 어른용 에세이인데 어린이도 충분히 읽겠다 싶다. 최근 나이별 분류법에서 벗어난 책이 다수 나오고 있다. 내용, 길이, 시각적 측면에서 어른과 아이가 함께 즐길 만한 새 책 3권을 소개한다. 1. 오빠는 오늘도 오케이 10대 시절엔 오빠가 늘 못마땅했다. 화장실 문을 열어둔 채 볼일을 보고, 늘 팬티 바람에 먹을 땐 온갖 소리를 내고…. 이혼해서 아빠는 집에 없고 엄마는 일하느라 바쁜데, 오빠마저 신경을 박박 긁어대니 그럴 만했다. 오빠를 이해하기 시작한 건 대학 졸업 작품을 준비하면서부터. 오빠를 위한 특별 변기를 고민하다 보니 새삼 그가 다시 보였다. “오빠는 언제나 자기 본연의 모습 그대로 생활한 것이다.” 찬찬히 되감아본 오빠는 아기처럼 사랑스러웠다. 아침마다 ‘안녕, 잘 잤어?’ 대답을 들을 때까지 묻고, 물을 마시기 전엔 ‘돼?’ 하고 허락을 구한다. 덮밥은 층층이 차례대로 먹는다. 이따금 생각에 잠겨 빙긋이 웃기도 한다. 과거를 반추하던 저자는 자신의 아픔과 맞닥뜨린다. “가족과 나 자신에 대한 원망이 응어리진 탓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않았다.” “오빠만의 ‘질서’가 있듯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질서’가 있는 법이다.” 다운증후군 환자의 특성과 가족의 애환을 담백하게 그렸다. 명랑함과 아픔을 강약조절한 솜씨가 돋보인다. 초등학생∼성인.2. 열세 살의 여름 주인공 해원은 열세 살이다. 초등학교 6학년 여름, 가족 휴가로 떠난 바다에서 해원은 산호를 만난다. 내심 좋아하던 반 친구다. 그날 이후 눈덩이처럼 불어난 산호를 향한 마음. 단짝 친구 진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까 했더니, 벼락이 떨어진다. “예전에 산호가 나 좋아했어.” 1998년 여름날이 배경이다. 단순한 눈짓에 모든 감정을 덧입혀 씨름하는 유리 같은 열세 살의 어설픈 사랑이 풋풋하다. 아무리 다듬어도 못마땅하던 머리 모양, 단짝과 주고받던 교환 일기, 은근 신경 쓰였던 인기투표…. ‘추억템’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저마다의 열세 살 풍경이 비슷해서일까. 단조로운 일상이지만 여느 막장 드라마보다 몰입도가 높다. 성인용이라면 반전 축에도 못 낄 마지막 장면에서 멈칫했다면, 추억 여행에 성공한 셈이다. 초등학생∼성인.3. 우리 아빠는 도둑입니다 어느 날 아빠가 경찰에 붙잡혀 갔다. 하늘 같던 우리 아빠가 도둑이란다. 회사 로커는 물론이고 마을의 거의 모든 집에서 물건을 훔쳤단다. 내게 생일 선물로 준 자전거마저도…. 그날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친구들은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이것도 훔쳤느냐”고 묻고, 선생님은 따돌림을 모른 척했다. 단짝 친구 로게르마저 무슨 짓을 할지 두려워졌다. 엄마는 아빠가 물건을 훔쳤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당했다. 마트에서는 “훔친 돈은 받지 않는다”며 출입을 거부한다. 엄마는 흐느끼다가 입술을 깨물며 아빠를 욕했다. “무언가를 사야 할 때마다 항상 선물이라며 갑자기 들고 오곤 했어. 그만큼 도둑질도 좋아했던 건 아닐까.” 가냘픈 유년 시절을 지나온 건 온전히 부모 덕분이다. 우주 같은 엄마 아빠가 내 뒤에 버티고 있다는 생각이 우리를 자라게 한다. 주인공이 끝내 쓰러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이 길도 착한 사람들만 이용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아니다. 길은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초등학교 고학년∼성인.이설 기자 snow@donga.com}
올해 9회를 맞는 박경리문학상이 24일 결선에 오른 최종 후보 5명을 공개했다. 안토니오 무뇨스 몰리나(63·스페인)와 에두아르도 멘도사(75·스페인), 이스마일 카다레(83·알바니아), 마거릿 애트우드(80·캐나다), 옌롄커(61·중국)이다. 이 상은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1926∼2008)의 문학정신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11년 제정했다. 국내외 작가들을 모두 대상으로 하는 한국 최초의 세계 문학상이다. 올해 심사는 위원장인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를 필두로 권기대 번역가, 김성곤 서울대 명예교수, 김승옥 고려대 명예교수, 이세기 소설가, 유석호 연세대 명예교수(가나다순)가 맡았다. 24일 만난 김우창 교수는 후보자들의 작품세계에 대해 “20세기의 정치 체제를 깊이 사유했다. 정치의 비극적 속성과 그 속에서 분투하는 개인의 삶을 실감 나게 되살렸다”고 했다. 스페인의 간판 작가 몰리나는 ‘리스본의 겨울’(1987년)과 ‘폴란드 기마병’(1991년)으로 후보에 올랐다. 각각 음울한 현대인의 방황과, 내전·독재로 얼룩진 스페인 현대사를 지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김 교수는 “개인이 정치사에 휘말리는 아이러니를 자연스럽게 보여준 수작”이라고 말했다. 멘도사는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유머와 아이러니를 절묘하게 섞어낸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표작으로는 데뷔작인 ‘사볼타 사건의 진실’(1975년) ‘경이로운 도시’(1986년) 등이 있다. 군수업체 간부의 살해 사건을 다룬 ‘사볼타…’는 미스터리를 형성하는 역사적 배경을 파고들어 주목받았다. 김 교수는 “각자의 상황과 이익을 위해 쟁투하는 인간사를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작가”라고 했다. 카다레는 첫 장편 ‘죽은 군대의 장군’(1963년)과 함께 ‘꿈의 궁전’(1981년) ‘광기의 풍토’(2005년)로 후보에 올랐다. 알바니아의 현실을 신화와 전설을 변주해 우화적으로 그린 작품을 주로 써왔다. ‘죽은…’에 대해 김 교수는 “국가적 명분으로 폭력이 정당화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남성 중심 사회를 비판하는 작품을 다수 펴낸 애트우드는 캐나다 최초의 페미니즘 작가로 통한다. ‘시녀이야기’(1985년) ‘눈먼 암살자’(2000년) 등을 펴냈으며, 2017년 노벨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발표되자마자 미국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베스트셀러에 오른 ‘시녀이야기’는 2017년 TV드라마로 제작되며 시대를 뛰어넘는 고전임을 입증했다. 옌롄커는 중국 부조리 서사의 대가로 통한다. ‘여름 해가 지다’(1992년) ‘레닌의 키스’(2003년)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2005년) 등이 대표작. 대중과 평단의 지지를 고루 받으며 루쉰문학상, 라오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사회주의 체제에 억눌린 개인의 욕망을 뛰어난 상징으로 드러내는 작가”라고 김 교수는 평했다. 수상자는 9월 19일 발표할 예정이다. 시상식은 ‘2019 원주 박경리문학제’에 맞춰 10월 26일 강원 원주시 토지문화관에서 열린다. 동아일보는 최종 후보자 5명의 작품세계를 차례로 지면에 소개한다. 김 교수는 “앞으로는 국내 작가의 작품도 후보작으로 검토할 계획이다. 또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소수 언어권 작품도 적극 발굴하겠다”고 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엇, 회의실 어떻게 찾았어?” “피자 냄새 맡고 따라왔지.” “귤 사왔다. 서울에서 파주로 유학 온 귤이야.” 작정한 듯 유치한 농담을 주고받는다. 사회적 가면을 떨치고 소꿉놀이 시절로 돌아간 동창모임 같았다. 17일 경기 파주시 문발로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책으로 둘러싸인 회의실에 하나둘 방문객이 찾아들자, 미간에 힘을 주고 토론하던 홍예빈(37·열린책들 상무) 홍유진(34·열린책들 기획위원) 남매의 뺨에 홍조가 올랐다. 출판계에도 이런저런 모임이 많지만 이날 모임은 ‘출판인 2세’들이 함께하는 자리다. 9년 전 10명에서 출발해 현재 22명으로 덩치를 키웠다. 김지영 자유아카데미 대표이사(46)와 진성원 백산출판사 상무(45), 이윤규 일진사 기획실장(40), 류원식 교문사 대표(38), 조한나 푸른숲 기획편집부 과장(38), 김민지 미래M&B 대표(37), 이수철 현문미디어 대표(34), 이소영 아람 대리(28) 등 20대부터 40대까지 모두 부모의 뒤를 이어 출판계에 뛰어들었다. 매달 만나 밥과 술, 고민을 나누던 친목단체였지만 최근 새롭게 돛을 띄웠다. 공부 모임으로 성격을 바꾸고 강사를 초청해 다양한 현안을 배우기로 한 것. 첫 번째 공부 모임 현장을 찾아 지식을 다루는 출판계 2세들의 고민을 살짝 엿봤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한 잡지사에서 기획자로 일하다가 2011년 부름에 응해 일을 시작했습니다.”(문승현 세진사 기획팀장) “회화를 전공했어요. 3년 전부터 어머니 회사에서 디자인, 마케팅, 기획을 차근차근 익히고 있습니다.”(최정현 꿈터 기획·편집 팀장) 강의 시작 전, 피자 콜라 귤이 탁자에 깔리고 새 얼굴 소개 시간이 이어졌다. 문 팀장은 김두영 삼호뮤직 대표(41), 최 팀장은 김지영 대표의 초대로 왔다. 모임 참여는 부모 세대 모임을 통해 이뤄진다. “아들딸이 회사에 들어와 일을 시작한다”며 모임 멤버를 소개팅처럼 연결해준다. 어색함은 잠시. 업과 처지가 비슷하다 보니 금세 속내를 터놓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출판계에서 일하고 싶었나요? 다른 사람들은 어때?” 모임 회장인 김지영 대표의 질문에 회원들이 머릿속으로 답을 골랐다. 다들 ‘가업’에 발을 딛기까지 길고 뜨거운 고민을 거쳤다. 출판은 특히 업황이 힘든 데다 창업주의 개성이 분명해 결정이 어려웠단다. “시무식에 갔다가 얼떨결에 데뷔했어요. 원래 요식업에 관심이 많았죠. 아직도 이 길이 맞나, 자신과 싸우는 중입니다.”(이수철) “울타리를 벗어나려 오래 노력했어요. 내가 방향을 설정해 나아가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거든요.”(문승현) “지적 콘텐츠를 생산하는 일이라, 웬만해선 부모님이 성에 안 차 하세요. 내 일(광고)을 계속했어도 이보다 잘했을 텐데….”(김지영) 대표도 직원도 아닌 애매한 위치. 그들이 잔뼈가 굵은 편집자들을 내몬다는 아픈 지적도 있다. “편집자들은 사회적으로 촉이 발달한 분들이 많아요. 설득과 소통 능력도 중요한 자질이죠.”(조한나) “처음 와서 의욕적으로 답답한 부분을 바꿔보자 했는데, 어느 순간 겸손해지더군요. 기존 틀에서 자리를 잡은 뒤 새로운 판을 짜야 한다는 걸 깨달았죠. 회사를 성장시킨 동력은 직원들이니까요.”(이윤규)○ 앞으로 30년을 걸머진 어깨 국내 출판계는 요즘 지각변동 중이다. 책 읽는 이들은 갈수록 줄어들고, 가볍게 즐길거리가 쏟아진다. 홍예빈 상무는 “격하게 말해 사양화되는 게 사실이다. 앞으로 30년은 기존 방식으로는 지탱이 힘들 것”이라고 했다. 유튜브를 첫 번째 공부 주제로 삼은 것도 이 때문이다. 디지털로 활로를 모색하는 출판계 분위기를 반영했다. 모임 내 유튜브 전도사로 통하는 이소영 대리가 아이디어를 냈다. 유튜브 채널 ‘아람’(구독자 4만9000여 명)을 운영하는 그는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고 얼굴도 공개했다. 젊은 감각의 2세들이 잘할 수 있는 분야가 유튜브”라고 했다. 이날 강사인 유튜브 컨설턴트 정재곤 씨가 B급 정서의 코믹 동영상을 틀자 회원들이 포복절도했다. 정 씨는 “이 영상은 놀랍게도 광고다. 이 영상처럼 신나게 시청자를 웃게 한 뒤 마지막에 대놓고 ‘광고한다’며 살짝 흘려야 성공한다”고 했다. 주제와 타깃이 날카로워야 알고리즘에 포착돼 계단식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팁도 덧붙였다. “유튜브는 가볍고 재미있는 영상이 각광받잖아요. 책은 깊고 무거운 매체인데,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할까요?”(홍유진) 아직 유튜브에 도전장을 던져 성공한 출판사는 드물다. 출판사 브랜드를 드러내는 순간 시청자들이 외면하는 경우가 많단다. 이야기적 요소가 풍부한 소설은 사정이 좋은 편이지만, 인문·사회과학서는 영상화하기 힘들다. “책 내용을 요약하면 구매로 이어지지 않고, 조금만 드러내면 조회수가 바닥”이라는 2세들의 하소연에 정 씨는 “타깃을 정해 그들이 좋아할 만한 영상을 서브 채널에 꾸준히 올려야 한다”고 했다. “중학생 때 아버지께 MP3플레이어를 팔지 왜 책을 파느냐고 여쭤본 적이 있어요. 당신께서 ‘책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셨어요.”(이수철) “지식을 전달하는 매개체를 다루는데, 자부심 없이는 지속하기 힘들지.”(진성원) “부모님은 어려운 상황에서 잘 이끌어오셨는데, 나 자신을 증명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압박이 있지.”(김두영) 하지만 “그래도 갖은 고민을 나눌 이 모임이 있어 다행이야”라는 누군가의 말에 모두 격하게 동의했다. 파주=이설 기자 snow@donga.com}
“엇, 회의실 어떻게 찾았어?” “피자 냄새 맡고 따라왔지.” “귤 사왔다. 서울에서 파주로 유학 온 귤이야.” 작정한 듯 유치한 농담을 주고받는다. 사회적 가면을 떨치고 소꿉놀이 시절로 돌아간 동창모임 같았다. 17일 경기 파주시 문발로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책으로 둘러싸인 회의실에 하나 둘 방문객이 찾아들자, 미간에 힘을 주고 토론하던 홍예빈(열린책들 상무·37) 홍유진(열린책들 기획위원·34) 남매의 뺨에 홍조가 올랐다. 출판계에도 이런 저런 모임이 많지만, 이날 모임은 ‘출판인 2세’들이 함께 하는 자리다. 9년 전 10명에서 출발해 현재 22명으로 덩치를 키웠다. 김지영 자유아카데미 대표이사(46)와 진성원 백산출판사 상무(45), 이윤규 일진사 기획실장(40), 조한나 푸른숲 기획편집부 과장(38), 김민지 미래M&B 대표(37), 이수철 현문미디어 대표(34), 이소영 아람 대리(28) 등 20대부터 40대까지 모두 부모의 뒤를 이어 출판계에 뛰어들었다. 매달 만나 밥과 술, 고민을 나누던 친목단체였지만 최근 새롭게 닻을 띄웠다. 공부 모임으로 성격을 바꾸고 강사를 초청해 다양한 현안을 배우기로 한 것. 첫 번째 공부 모임 현장을 찾아 지식을 다루는 출판계 2세의 고민을 살짝 엿봤다.●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한 잡지사에서 기획자로 일하다가 2011년 부름에 응해 일을 시작했습니다.”(문승현 세진사 기획팀장) “회화를 전공했어요. 3년 전부터 어머니 회사에서 디자인, 마케팅, 기획을 차근차근 익히고 있습니다.”(최정현 꿈터 기획·편집 팀장) 강의 시작 전, 피자·콜라·귤이 탁자에 깔리고 새 얼굴 소개 시간이 이어졌다. 문 팀장은 김두영 삼호뮤직 대표(41), 최 팀장은 김지영 대표의 초대로 왔다. 모임 참여는 부모 세대 모임을 통해 이뤄진다. “아들·딸이 회사에 들어와 일을 시작한다”며 모임 멤버를 소개팅처럼 연결해준다. 어색함은 잠시. 업과 처지가 비슷하다보니 금세 속내를 터놓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출판계에서 일하고 싶었나요? 다른 사람들은 어때?” 모임 회장인 김지영 대표의 질문에 회원들이 머릿속으로 답을 골랐다. 다들 ‘가업’에 발을 딛기까지 길고 뜨거운 고민을 거쳤다. 출판은 특히 업황이 힘든 데다 창업주의 개성이 분명해 결정이 어려웠단다. “시무식에 갔다가 얼떨결에 데뷔했어요. 원래 요식업에 관심이 많았죠. 아직도 이 길이 맞나, 자신과 싸우는 중입니다.”(현문미디어 이수철 대표) “울타리를 벗어나려 오래 노력했어요. 내가 방향을 설정해 나아가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거든요.”(문승현) “지적 컨텐츠를 생산하는 일이라, 웬만해선 부모님이 성에 안 차 하세요. 내 일(광고)을 계속 했어도 이보다 잘했을 텐데….”(김지영) “어머니가 엄청 좋은 일이라며 딱 1년만 해보라고 하셨어요. 다행히 재밌게 일하고 있습니다.”(조한나) 대표도 직원도 아닌 애매한 위치. 그들이 잔뼈가 굵은 편집자들을 내몬다는 아픈 지적도 있다. “편집자들은 사회적으로 촉이 발달한 분들이라 설득과 소통이 필수예요.”(조한나) “처음 와서 의욕적으로 답답한 부분을 바꿔보자 했는데, 어느 순간 겸손해지더군요. 기존 틀에서 자리를 잡은 뒤 새로운 판을 짜야 한다는 걸 깨달았죠. 회사를 성장시킨 동력은 직원들이니까요.”(이윤규)●앞으로 30년을 걸머진 어깨 국내 출판계는 요즘 지각변동 중이다. 책 읽는 이들은 갈수록 줄어들고, 가볍게 즐길 거리가 쏟아진다. 홍예빈 상무는 “격하게 말해 사양화되는 게 사실이다. 앞으로 30년은 기존 방식으로는 지탱이 힘들 것”이라고 했다. 유튜트를 첫 번째 공부 주제로 삼은 것도 이 때문이다. 디지털로 활로를 모색하는 출판계 분위기를 반영했다. 모임 내 유튜브 전도사로 통하는 이소영 대리가 아이디어를 냈다. 유튜브 채널 ‘아람’(구독자 4만9000여 명)을 운영하는 그는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고 얼굴도 공개했다. 젊은 감각의 2세들이 잘 할 수 있는 분야가 유튜브”라고 했다. “유튜브는 가볍고 재미있는 영상이 각광받잖아요. 책은 깊고 무거운 매체인데,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할까요?”(홍유진) 아직 유튜브에 도전장을 던져 성공한 출판사는 드물다. 출판사 브랜드를 드러내는 순간 시청자들은 외면하는 경우가 많단다. 이야기적 요소가 풍부한 소설은 사정이 좋은 편이지만, 인문·사회과학서는 영상화하기 힘들다. “책 내용을 요약하면 구매로 이어지지 않고, 조금만 드러내면 조회수가 바닥”이라는 2세들의 하소연에 이날 강사인 유튜브 컨설턴트 정재곤 씨는 “타깃을 정해 그들이 좋아할 만한 영상을 서브 채널에 꾸준히 올려야 한다”고 했다. “중학생 때 아버지께 MP3를 팔지 왜 책을 파느냐고 여쭤본 적이 있어요. 당신께서 ‘책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셨어요.”(이수철) “지식을 전달하는 매개체를 다루는데, 자부심 없이는 지속하기 힘들지.”(진성원) “부모님은 어려운 상황에서 잘 이끌어오셨는데, 나 자신을 증명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압박이 있지.”(김두영) 하지만 “그래도 갖은 고민을 나눌 이 모임이 있어 다행이야”라는 누군가의 말에 모두 격하게 동의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1 천문에 관심이 많은 직장인 안모 씨는 별이 총총 박힌 하늘에 늘 목이 말랐다. 책으로 접한 지식은 밋밋하고 천문대는 교외에 있어 방문이 힘들었다. 그러다 만난 유튜브는 갈증을 단비처럼 적셔줬다. 별자리부터 궤도 비행하는 우주정거장까지 ‘다큐멘터리급’ 영상이 가득했다.#2 이화외고 3학년 박재희 양은 유튜브로 공부한다. 모의고사를 치르는 즉시 학교, 학원 교사들이 문항풀이 동영상을 올린다. 박 양은 “최근 ‘제주4·3사건’에 대한 발표도 유튜브로 준비했다. 일목요연하게 핵심만 알려줘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30여 년 전, 궁금한 게 생기면 선생님에게 묻거나 책을 뒤졌다. 10여 년 전부터는 온라인 검색 포털에 질문을 띄웠다. 지금은 유튜브가 이 역할을 한다. 10, 20대는 물론 중장년층까지 유튜브에서 교양을 쌓고 호기심을 채울 수 있어 ‘지식튜브’(지식+유튜브) 시대가 열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 잡학·상식 분야 특히 인기 “족발에서 보이는 형광색의 정체는?” “우유팩은 왜 개봉 방향이 정해져 있을까?” 유튜브 채널 ‘사물궁이’에 올라온 내용이다. ‘사소해서 물어보지 못했지만 궁금했던 이야기’를 5분 내외로 설명한다. 지난해 9월 개설해 최근 구독자 51만 명을 넘겼다. 유튜브 측에 따르면 매일 100만여 건의 지식 동영상이 올라온다. 인문, 사회, 과학, 예술을 아우른다. 이 가운데 ‘잡학·상식’을 다루는 채널의 약진이 돋보인다. ‘사물궁이’, ‘세상의 모든 지식’(구독자 11만2900여 명), ‘은근한 잡다한 지식’(8만6000여 명)이 대표적이다. 귀여운 웹툰을 내세운 사물궁이는 가벼운 퀴즈를 푸는 느낌을 준다. ‘세상의…’는 브랜드 백과사전, 도서 백과사전처럼 지적 영감을 자극할 만한 콘텐츠를 다룬다. ‘은근…’은 상처 치료용 연고 후시딘과 마데카솔의 차이를 알려주는 과학상식 채널에 가깝다. 역사 채널도 인기가 높다. 연대기로 역사를 다루는 교과서와 달리, 특정 일화를 짤막한 콩트처럼 재구성한다. ‘써에이스쇼’(15만9000여 명)는 화면에 옮긴 역사 만화 ‘먼나라 이웃나라’ 같다. 임진왜란, 삼국지, 전국시대 등을 다루는데 드라마처럼 흥미가 최고조일 때 영상이 끝난다. ‘별별역사’는 직접 그린 만화와 실제 사진을 활용해 지루할 틈이 없다. 개설 5개월 만에 구독자 4만 명을 바라본다. 국제정치사를 재치 있게 다루는 ‘효기심’(57만4000여 명)과 친일파 10인, 여성운동가 5인 등을 다루는 ‘디바제시카’(176만여 명)도 인기다. 영어회화로 시작한 디바제시카는 팬들의 요청으로 지식정보튜브를 개설한 것으로 알려졌다. ‘도를 아십니까’, ‘노점상 할머니 진짜 부자일까’, ‘해병대 전우회 컨테이너의 실체’ 등 한 번쯤 궁금할 법한 부분을 코믹하게 풀어낸 ‘실험카메라’ 채널도 ‘핫’하다. ‘수상한 녀석들’(99만5000여 명), ‘진용진 유튜브’(60만여 명)를 비롯해 비슷한 채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철저한 웃음 유발용 동영상도 적지 않다. 마트에서 ‘시각장애인이 쓰는 물안경’과 ‘장까지 안 가는 유산균’을 찾는 식이다. 영화 리뷰 채널과 스포츠 채널은 경쟁이 치열하다. ‘마블세계 3대 악녀’, ‘역대 최고의 우주영화’, ‘역사상 가장 강한 수비’, ‘올해 아시아 유망주 몸값 10’이 인기 동영상에 올랐다. 틈새를 공략한 채널도 많다. 무기를 다루는 ‘건들건들’(12만9000명)과 ‘밀덕(밀리터리 덕후)영상 캐러브’(3만9000여 명), 해산물 백과사전 격인 ‘수산물을 부탁해TV’(8만4000여 명), 공룡 덕후가 만든 ‘DinoBattle TteokooTV’(6만8000여 명)가 있다.○ 왕좌의 게임보다 재밌는 지식튜브 “17분이 1분인 줄.” “왕좌의 게임보다 더 재밌음.” 정복전쟁사를 다루는 ‘별별역사’ 채널의 ‘스페인 아즈텍 전쟁’ 편. 시청각 자료 위로 사투리 섞인 목소리의 남성이 만담하듯 설명을 이어간다. 강력한 웃음 포인트는 허를 찌르는 영상. 스페인 병사가 창을 이용해 강을 건넜다는 대목에 올림픽 높이뛰기 경기 사진을 띄운다. 지식튜브의 가장 큰 매력은 재미다. 영화 10여 편의 관련 장면, 자료 사진, 직접 제작한 그래픽을 5∼10분으로 압축한다. 한 유튜버는 “완벽에 가깝게 각본을 짜야 치열한 유튜브 정글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했다. 재미는 높은 몰입도로 이어진다. 중학생 자녀를 둔 최모 씨는 “아이들과 과학, 역사 채널을 함께 본다. 깊이 있는 사유를 방해한다는 편견이 있었는데 집중도가 높아 한 분야를 ‘워밍업’하는 데 적합하다”고 했다. 지식 탐험은 유튜브의 매력이다. 하나의 동영상을 틀면 추천 영상 20여 개가 뜬다. 포털사이트의 연관 검색어와 비슷하지만, 곧장 다른 채널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훨씬 강력하다. 연출가를 꿈꾸는 대학생 김세나 씨는 “영화를 리뷰하는 채널들을 통해 정보를 얻고 감각도 키우고 있다”며 “유튜브만 부지런히 봐도 거의 모든 대화에 참여할 수 있다”고 했다.○ “지식 검증 기능 강화해야” 지식튜브 운영자는 의사 약사 변호사 같은 전문가 그룹과 전문가 못지않은 ‘덕력’을 자랑하는 이들로 나뉜다. 후자는 ‘구글링’(구글 검색)으로 필요한 정보를 모아 편집한다. ‘써에이스쇼’처럼 참고 서적과 다큐멘터리 목록을 적기도 한다. 하지만 일부 구독자는 정보의 신뢰도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직장인 송모 씨는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채로 지식을 전달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과학을 제외한 지식은 책으로 얻는다”고 했다. 직장인 임모 씨는 “육아 상식을 주로 보는데 EBS 채널에서 관련 내용을 확인한다”고 했다. 유튜브는 지식을 비전문적으로 다루는 게 필연적이라는 의견도 있다. ‘별별역사’의 운영자 김도형 씨는 “유튜브는 이야기하듯 가볍게 지식을 들려주는 플랫폼이라고 생각한다. 비전문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라서 더 친숙하게 느끼는 것”이라고 했다. 지식튜브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거대 지식플랫폼으로 자리 잡은 만큼 지식을 검증하는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특히 실험카메라 같은 채널은 인권 침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이설 기자 snow@donga.com}
여름은 독서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감각이 말랑해진 휴가 때 만난 책은 더 진한 감흥을 안긴다. 동아일보 ‘책의향기’ 팀이 교보문고, YES24, 알라딘과 함께 휴가철에 읽을 만한 책을 ‘맞춤형 테마’로 골랐다.○ ‘시간 순삭’ 소설 별다른 계획이 없다면 시간을 순간 삭제해줄 소설이 ‘딱’이다. 때마침 북유럽과 미국의 스릴러 대가가 동시에 신작을 출간했다. 요 네스뵈의 ‘폴리스’와 스티븐 킹의 ‘아웃사이더 1·2’다. 각각 경찰을 노리는 연쇄살인범과 살인범으로 몰린 교사에 대한 이야기다. 히가시노 게이고, 테드 창, 켄 리우의 작품도 몰입도가 높다. 국내 소설로는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 윤성희의 ‘상냥한 사람’, 김세희의 ‘항구의 사랑’, 조해진의 ‘단순한 진심’이 눈에 띈다. ‘진이, 지니’의 정유정 작가와 ‘설계자들’의 김언수 작가의 전작들도 열대야와 함께하기 좋다. ○ 속세 때 벗기 바쁜 업무에 부동산, 교육, 노후까지 챙기느라 터질 것 같은 우리의 뇌. 휴가 때라도 쉬게 하자. ‘정위 스님의 자수 정원’은 무명 위에 최소한의 기법으로 수를 놓는 수행자의 마음과 생활을 담백하게 풀어냈다. 에세이스트 고 김서령의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는 정갈한 문체와 따뜻한 일화가 돋보인다. 미국의 뇌신경학자이자 소설가인 올리버 색스의 에세이 ‘의식의 강’과 생전 그의 연인인 빌 헤이스의 ‘인섬니악 시티’는 생의 아름다움을 반추하게 한다. 겉치레에서 벗어나 고독을 되새기자는 ‘자발적 고독’(올리비에 르모 지음), 공황장애 극복법을 소개한 ‘어느 날 갑자기 공황이 찾아왔다’(클라우스 베른하르트), 아름다운 문체로 문학을 분석한 신형철의 ‘몰락의 에티카’, 다도를 다룬 ‘매일매일 좋은 날’(모리시타 노리코)도 추천 목록에 올랐다.○ 휴가 공부 휴가를 이용해 지적 호기심을 채우고 싶다면 대중 교양서가 적당하다. 뇌 과학자의 놀라운 뇌중풍(뇌졸중) 분투기인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질 볼트 테일러)는 유익한 데다 아름답다. 먹고사는 문제를 소설로 풀어낸 ‘산 자들’(장강명), 철학사를 쉽게 정리한 ‘미치게 친절한 철학’(안상헌)도 있다. 진화심리학을 집대성한 ‘진화한 마음’(전중환), 식물에 대한 에세이 ‘랩걸’(호프 자런), 그리고 ‘곰브리치 세계사’(에른스트 H 곰브리치)도 가볍게 읽기 좋다. ○ 걷고 싶은 도시 여행지의 흔적을 그린 책은 어떨까. 작가의 손끝에서 실감 나게 되살아난 도시가 적지 않다. 정수복의 ‘파리를 생각한다’,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 찰스 디킨스의 ‘찰스 디킨스의 밤 산책’(런던), 페르난도 페소아의 ‘페소아의 리스본’, 무라카미 하루키의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요시모토 바나나의 ‘꿈꾸는 하와이’, 카트린 지타의 ‘내가 함께 여행하는 이유’(그리스, 오만 등)가 명저로 꼽힌다. 여행과 걷기를 다룬 책으로는 삶의 중요한 볼거리를 안내하는 ‘나 자신과 친구 되기’(클레멘스 제드마크),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 인문 여행 시리즈인 ‘클래식 클라우드’가 있다. ○ 추억 소환 나 홀로 휴가족이라면 과거의 나와 만나는 것도 한 방법. 박완서 작가가 유년의 기억을 소설로 그린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만인의 추억을 건드린다. 예민해서 아프고 아름다운 성장기를 그린 신작 소설 ‘이 소년의 삶’(토바이어스 울프), ‘널 만나러 왔어’(클로이 데이킨)도 눈에 띈다. 20대와 80대 여성의 우정을 그린 ‘수영하는 여자들’(리비 페이지)과 빨강 머리 앤, 작은 공주 세라, 하이디, 작은 아씨들을 엮은 ‘걸 클래식 컬렉션 세트’는 옛 친구의 얼굴을 떠오르게 한다.이설 기자 sno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