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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바둑 랭킹 1위인 신진서 9단(24)이 한중일 국가 단체대항전인 농심신라면배에서 신기록을 세우며 한국팀의 4년 연속 우승을 이끌었다. 이번까지 16연승을 기록해 이창호 9단이 2005년 수립한 종전 최다연승(14연승)을 넘어섰다. 신 9단은 23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제25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3라운드 최종 14국에서 중국의 마지막 주자 구쯔하오 9단(26)에게 249수 만에 불계승했다. 신 9단은 “큰 판을 이겨서 뿌듯하다. 첫판을 둘 때만 해도 먼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6연승까지 하게 돼 영광”이라며 “대국할 때 우승을 생각하면 안 되는데 아른거리다 보니 나중엔 좋지 못한 바둑을 둔 것 같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정신을 바싹 차리고 둬서 이길 수 있었다”고 우승 소감을 밝혔다. 이번 대회는 신 9단의 ‘원맨쇼’였다. 한국팀 설현준 8단과 변상일·원성진·박정환 9단은 1승도 거두지 못하고 모두 탈락했다. 하지만 신 9단이 2라운드에 투입돼 중국팀 셰얼하오(26) 9단을 물리쳤다. 이어 3라운드에서 일본 선수 1명, 중국 선수 3명을 연달아 물리쳐 승부를 최종국으로 몰고 갔다. 이날 열린 경기에서 신 9단은 구쯔하오 9단을 중반부터 조금씩 앞서기 시작했다. 한때 신 9단이 실수를 저질러 위기에 처했지만 뒷심을 발휘했다. 복잡한 패싸움을 걸어 우상귀 백돌을 잡아 반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어 구쯔하오가 서둘러 패를 잇는 실착을 범하면서 재역전에 성공했다. 구쯔하오는 패색이 짙어지자 결국 항복했다. 신 9단은 이번 경기에서 ‘끝내기 6연승’으로 우승했다. 이는 농심신라면배 25년 역사에서 처음이다. 2005년 제6회 농심신라면배에서 이창호 9단이 5연승을 거두며 우승한 ‘상하이 대첩’을 뛰어넘었다는 평가다. 한국팀의 우승 상금 5억 원과는 별도로 신 9단은 4000만 원을 받는다. 농심배에선 3연승한 선수에게 1000만 원을 주고 1승마다 1000만 원을 추가 지급하기 때문이다. 신 9단은 이번 대회로 명실상부한 ‘바둑 황제’에 올랐다. 20세였던 2020년 LG배 우승을 시작으로 2021년 춘란배, 2022년 LG배 및 삼성화재배에서 우승하며 메이저 세계대회를 제패했다. 바둑계에선 신 9단이 인공지능(AI)에 근접한 수를 구사한다고 해 ‘신공지능’이라는 별명이 붙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눈송이(Snowflake).’ 사전에서 이 단어는 하얗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자연 그대로의 눈송이를 뜻한다. 하지만 최근 영미권에서 이 단어는 요즘 청년들을 나약하고 예민한 한심한 존재로 업신여길 때 쓰이는 속어다. 회사나 학교에서 불평만 터뜨리는 젊은 세대가 눈송이처럼 연약하고 쉽게 바스러진다는 뜻이다. 특히 눈송이는 2010년 이후로 성인이 된 이들을 지칭한다. 한국으로 치면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걸쳐 태어난 Z세대에 가깝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 비디오저널리스트인 저자는 눈송이 세대가 이전 세대와 다른 건 사실이라고 인정한다. 눈송이 세대는 부당한 업무에 항의하고, 자신의 임금에 대해 불평한다.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하고, 더 나은 처우를 요구하기도 한다.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사표를 던진다. 이전 세대는 눈송이 세대와 일터에서 함께 일하는 게 쉽지 않다. 하지만 저자는 눈송이 세대가 국가를 망친다는 주장은 잘못된 공포라고 진단한다. 눈송이 세대는 많은 시간을 쏟아 부으며 공부하고 취업을 준비했다. 빈부 격차가 심해지면서 나쁜 일자리로 밀려났을 때 잃을 게 더 많아졌다. 저자는 이전 세대가 제2차 세계대전(1939∼1945년) 등을 거치며 강인하게 살아온 건 인정하지만 강인함은 본받을 것이 아니라 도리어 슬퍼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눈송이란 단어가 유행한 시점을 2016년 이후로 추정한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인터넷을 중심으로 이 단어가 퍼졌다는 것이다. 눈송이는 처음엔 성소수자, 여성을 비판하는 단어로 쓰이다가 정치권에서 세대를 갈라 치며 젊은 세대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다. 영미권에서 정치인들이 노년층의 표심을 얻기 위해 젊은 세대를 나약함의 대명사로 몰아붙였다는 것이다. 물론 눈송이 세대를 만든 건 극우 정치인뿐이 아니다. 이미 기득권이 된 진보 엘리트주의자도 요즘 세대를 나약한 이로 치부하는 ‘꼰대’가 됐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어느 나라든 “나 때는 말이야”라고 말하는 이전 세대와 이에 반발하는 젊은 세대의 갈등이 있는 걸까. 신간을 읽으며 한국에서 벌어지는 MZ세대론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보다 비난하기 급급한 것이 아닌지 돌아본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유명 작곡가이자 프로듀서(PD)로 아이돌 그룹 히트곡을 다수 만든 신사동호랭이(본명 이호양·41)가 숨진 채 발견돼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23일 서울 강남경찰서에 따르면 이날 오후 서울 강남구 작업실에서 이 씨가 쓰러져 있는 것을 지인이 발견해 119에 신고했지만 사망 판정을 받았다. 경찰은 정확한 사망 원인을 조사 중인데, 타살 혐의점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지인은 이 씨와 연락이 닿지 않자 직접 작업실을 방문했다가 이 씨를 발견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씨는 아이돌 그룹 EXID의 ‘위아래’, 티아라의 ‘롤리 폴리’, 트러블 메이커의 ‘트러블 메이커’, 포미닛의 ‘볼륨 업’, 에이핑크의 ‘노노노’ 등의 히트곡들을 만든 유명 작곡가다. 이 씨가 소속된 티알엔터테인먼트에 따르면 이 씨는 최근 걸그룹 ‘트라이비’를 프로듀싱하며 왕성하게 활동했다고 한다. 박충민 티알엔터테인먼트 대표는 “22일 오후 7시경 트라이비가 출연한 방송을 본 뒤 서로 문자를 주고받았고, 23일 출연하는 방송에 대한 콘셉트나 방향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며 “‘내일’을 이야기하던 사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 당황스러울 따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술도 마시지 않고, 금전적 문제도 없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장하얀 기자 jwhite@donga.com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넷플릭스 드라마 ‘살인자ㅇ난감’ 4화. 악인을 감별하는 능력을 우연히 발견하게 된 주인공 이탕(최우식)은 지경배 검사(남진복)를 살해하기 전 잠시 망설인다. 지 검사를 납치해 포박한 상태라 죽이기만 하면 되지만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 것이다. 이탕은 말없이 앉아 책 한 권을 읽는다. 책을 덮은 뒤 지경배에게 다가가 한숨을 쉬며 이렇게 묻는다. “제가 왜 아저씨를 죽이려는 걸까요?” 이탕이 읽는 책은 장편소설 ‘죄와 벌’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1821∼1881)가 1867년 출간했다. 최근 넷플릭스 비영어권 시리즈 부문 1위에 오르며 인기를 끌고 있는 ‘살인자ㅇ난감’이 다루는 주제가 157년 전 이미 다뤄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두 작품 모두 묻는다. ‘악인을 죽이는 일은 용서받을 수 있는가.’ ‘죄와 벌’에서 대학생 라스콜니코프는 악덕 고리대금업자인 노파를 도끼로 잔혹하게 살해한다. 자신이 선악을 초월한 비범한 인물이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라스콜니코프는 노파의 재산 대부분은 그대로 둔 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다. 운 좋게도 라스콜니코프의 범행은 걸리지 않는다. ‘살인자ㅇ난감’에서 ‘죄와 벌’이 등장하는 장면은 많지 않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죄와 벌’은 원작에 가까울 정도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죄와 벌’의 배경인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당시 경제적으로 급격하게 발달하면서 빈부격차가 극심했다. 가난한 라스콜니코프가 부자인 노파에게 혐오의 눈빛을 보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살인자ㅇ난감’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살던 이탕, 고급 승용차를 타고 회식 비용을 거리낌 없이 결제하는 지 검사에게도 삶의 격차가 엿보인다. 합리화 과정도 비슷하다. ‘죄와 벌’에서 라스콜니코프는 “사악한 노파의 삶이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라며 피해자를 깎아내린다. “‘비범한’ 사람은 양심상 장애를 제거할 수 있다”며 가해자인 자신을 옹호한다. ‘살인자ㅇ난감’에서 이탕의 조력자인 ‘노빈’(김요한)이 “쓰레기통(이탕)이 있어야 쓰레기(악인)를 버릴(죽일)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 ‘죄와 벌’에서 라스콜니코프는 죄책감을 극복하지 못한다. 우연히 범죄 현장을 발견한 노파의 이복 여동생까지 죽인 건 자신이 완전범죄를 위해 저지른 잘못이기 때문이다. 또 자신은 사람을 죽이고 평온할 수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수한다. ‘살인자ㅇ난감’에서 이탕이 매일 밤 자신이 죽인 이들의 환영을 보는 점과 데칼코마니처럼 겹친다. ‘살인자ㅇ난감’ 4화 마지막 부분에서 이탕과 노빈은 함께 지 검사를 살해한다. 행동만 봐선 둘 다 용서받을 수 없다. 다만 악인은 죽여야 한다고 확신하는 노빈과 ‘죄와 벌’을 읽으며 망설이던 이탕의 반응은 조금 다르다. 노빈은 “(함께 우리) 집으로 가자”고 제안하지만 이탕은 “따로 살고 싶다”며 거절한다. 용서받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지, 강물에 떠내려가는 지 검사의 시체를 바라보는 이탕의 표정은 어쩐지 슬퍼 보인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작가 김겨울(33)은 2017년 유튜브 채널 ‘겨울서점’을 개설해 26만 명의 구독자를 확보한 뒤 7권의 책을 잇달아 펴냈다. 이 중 지난해 11월 펴낸 에세이 ‘겨울의 언어’(웅진지식하우스)는 출간 직후 온라인 서점 알라딘과 예스24 에세이 부문에서 각각 2, 5위에 올라 석 달 만에 1만2000부가 팔렸다. 이 책은 작가가 서문에 “내가 오로지 김겨울로 쓰는 첫 책”이라고 밝힌 데에서 알 수 있듯, 그동안 주로 써온 리뷰에서 벗어나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주로 담았다. 이혜인 웅진지식하우스 과장은 “유튜브 구독자들 덕분에 초반 판매량이 폭발적이었다”고 말했다. 최근 출판계에서 유튜브를 등에 업은 파워라이터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유튜브 ‘공백의 책단장’(구독자 6만 명)을 운영하는 공백의 에세이 ‘당신을 읽느라 하루를 다 썼습니다’(2022년·상상출판)와 유튜브 ‘유투북 변진서’(구독자 2만 명)를 운영 중인 변진서의 ‘진짜 행복을 찾고 싶은 너에게’(2023년·부크럼)처럼 유튜브 콘텐츠를 바탕으로 에세이를 펴내는 이들도 있다. 기존 파워라이터가 역으로 유튜브에 진출해 고정 독자를 늘리는 사례도 있다. 생물학 분야 석학인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70)는 유튜브 채널 ‘최재천의 아마존’을 2020년 개설해 68만 명의 구독자를 확보했다. 이에 힘입어 그가 최근 1년간 단독 혹은 공동저자, 감수 등으로 관여한 책은 9권에 이른다. 13일 출간된 ‘최재천의 곤충사회’는 알라딘에서 에세이 부문 4위에 올랐다. 출판가에선 최 교수의 유튜브 채널 구독자 상당수가 그의 책을 사는 것으로 보고 있다. 김현정 열림원 주간은 “유튜브 채널 덕에 젊은 독자들에게도 인기가 많다”고 말했다. 유튜버 출신 파워라이터들은 다른 책의 판매량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컨대 김겨울이 유튜브에서 추천한 교양과학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2021년·곰출판)는 20만 부 이상 팔렸다. 독자들이 읽기 부담스러워하는 이른바 ‘벽돌책’도 마찬가지. 792쪽짜리 교양과학서 ‘개미와 공작’(2016년·사이언스북스)은 최재천 교수가 유튜브에서 소개한 뒤 판매량이 10배나 늘었다. 최 교수는 20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유튜브에서 책을 소개한 이후 출판사들이 1년 동안 팔지 못했던 책을 다 팔았다는 소식을 자주 듣는다. 이전에 신문 칼럼이나 강연에서 책을 소개했을 때 잘 팔렸다면 이제는 유튜브로 마케팅 파워가 옮겨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유튜버 개인에 대한 구독자들의 충성도가 책 구매로 이어진 데 따른 것이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자기 이름을 걸고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유튜버에 대한 구독자의 신뢰와 지지가 대단하다. 특히 객관적 평가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책’이라며 주관적 평가를 앞세우는 방식이 기존 평론가들의 추천과 다른 점”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일부 유튜버 출신 파워라이터처럼 책 광고에만 몰두하지 말고, 좋은 책을 꾸준히 쓰고 추천해야 생명력이 길 수 있다고 조언한다. 장은수 출판평론가는 “대중과의 접점이 강한 유튜브와 책이 만나는 접점에 있는 이들의 영향력은 앞으로도 커질 것”이라며 “단편적인 지식 소개를 넘어 무게감 있고 의미 있는 책을 소개해야 신뢰가 무너지지 않는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14만 자. 지난해 12월 19일부터 지난달 16일까지 온라인 독서 플랫폼 그믐의 에세이 ‘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마름모) 독서 모임이 올린 글자 수다. 500여 개 감상문에는 책의 글귀를 단순히 옮겨놓거나, “잘 읽었다” 정도의 단편적인 소개만 있는 게 아니다. 참여자들은 4주 동안 책을 꼼꼼히 읽으며 느낀 점을 상세히 써 내려갔다. “나도 작가처럼 쓰기를 망설였던 것 같다”며 자신의 감상을 쓰거나, 특정 단락을 놓고 서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지난달 10일에는 해당 에세이를 쓴 정아은 작가(49)와 독서 모임 참여자 40명이 서울 마포구의 카페에 모여 2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김새섬 그믐 대표는 “책을 꼼꼼히 완독한 독자만 모이니 질문의 깊이가 깊고 다양하다. 진짜 책의 내용에 대해 심층적인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독자들이 많다”고 말했다. 최근 온라인 독서 플랫폼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2022년 출범한 그믐은 회원 수가 9000명을 넘어섰다. 출판사 문학동네가 2021년 시작한 독파는 3만 명을 넘겼다. 1만여 명이 참여하는 플라이북은 유료로 책을 빌려주는 서비스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텍스처는 책에 쓰인 문장을 온라인으로 공유해 소통하는 방식이다. 온라인 독서 플랫폼이 인기를 끄는 건 아무 때나 참가할 수 있는 ‘느슨한 연결’을 원하는 독자들이 늘고 있어서다. 코로나19로 재택근무가 늘면서 독자들이 온라인 만남에 익숙해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김새섬 대표는 “오프라인으로 만나서 얘기하는 것보다 온라인에서 활자로 소통하면 오히려 책 내용에만 집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작가와의 만남 때 파생되는 대관비 등이 드는 대면 모임에 비해 온라인 플랫폼은 비용이 적게 든다. 그믐은 무료, 독파는 1년에 1만5000원만 내면 된다. 장편소설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문학동네)를 펴낸 정세랑 작가는 지난해 12월 줌 화상회의로 독파 회원들과 만났다. 작가, 편집자의 전문적 해설이 곁들여지는 것도 매력 포인트. 혼자 읽기 버거운 이른바 ‘벽돌책’을 읽을 때 이들의 해설이 유용하다. 예컨대 1040쪽에 이르는 교양과학서 ‘행동’(문학동네)을 함께 읽는 독파의 온라인 모임에는 211명이 몰렸다. 박민재 문학동네 독파팀장은 “마니아 독자층을 보유한 유명 작가들의 소설, 에세이를 해설과 함께 읽으려는 독자가 많다. 특히 분량이 방대한 벽돌책을 함께 읽으려는 수요가 많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온라인 독서 플랫폼이 성공하기 위해선 오프라인 모임이 병행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온·오프라인 독서 플랫폼 모두 책을 매개로 다른 사람과 교류한다는 점은 같다”며 “독특한 개성을 갖춘 소규모 독립서점에서 북토크를 여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독자와의 접점을 늘려야 한다”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드라마 ‘무빙’을 본 뒤 스마트폰을 켜고 원작 웹툰을 정주행한 적이 있나요?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을 듣고 ‘가상 캐스팅’을 해본 적이 있나요? 격주로 화요일마다 연재되는 ‘선 넘는 콘텐츠’는 소설, 웹소설, 만화, 웹툰 등의 원작과 이를 영상화한 작품을 깊이 있게 리뷰합니다. 원작 텍스트가 이미지로 거듭나면서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재밌는 감상 포인트는 무엇인지 등을 다각도로 분석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악당에게도 서사가 필요하다. 삼촌 ‘진만’(이동욱)이 남긴 불법 무기 쇼핑몰 때문에 킬러들의 표적이 된 조카 ‘지안’(김혜준). 그의 생존기를 다룬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킬러들의 쇼핑몰’은 원작소설 ‘살인자의 쇼핑몰’(2020년·자음과모음)의 세계를 확장해 악당들의 이야기에 풍성함을 더했다. 악당들을 위한 찰진 각색 덕인지 지난달 17일 공개된 드라마는 4주간 한국 디즈니플러스 TV쇼 1위를 차지했다. 일본, 홍콩, 대만 등 아시아 5개국에서 톱 10에 진입했다. 원작도 이에 힘입어 알라딘 문학 부문 7위에 오르며 역주행했다. 특히 원작에선 이미 죽은 걸로 나오는 악당 ‘베일’(조한선)을 킬러들을 이끌며 쇼핑몰을 공격하는 사이코패스 두목으로 되살려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원작에서 냉혹한 킬러인 ‘성조’(서현우)는 살인할 때마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성불해라”라는 농담을 던지는 유머러스한 캐릭터로 재창조해 극의 호흡도 조절했다. 14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드라마 연출자 이권 감독(50)은 “베일처럼 극악무도한 악당이 살아 있어야 긴장감이 커지지 않느냐. 악당이 강해야 주인공들이 끈끈하게 뭉친다”고 말했다. 좋은 이야기에서 악당은 주인공과 닮았다. 악당과 주인공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영화 ‘다크나이트’(2008년)에서 조커는 배트맨을 향해 “사람들 눈엔 너도 (나처럼) 미친 놈이야”라고 말한다. ‘킬러들의 쇼핑몰’에선 살인 청부업체에서 한때 함께 일했던 주인공 진만과 베일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게 각색됐다. 진만은 일반인을 죽이지 않는다며 스스로 위로하지만, “너(진만)랑 베일이랑 닮은 꼴”이라는 동료의 말을 듣고 괴로워한다. 악당이라도 나쁜 짓을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영화 ‘아마데우스’(1984년)에서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질투하는 건 아무리 노력해도 재능을 이길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해서인 것처럼 말이다. ‘킬러들의 쇼핑몰’에서 성조는 시시때때로 자신이 고아 출신이고, 킬러들은 사선의 문턱에 서 있다고 말한다. 살아남기 위해 진만을 배신하고 베일 편에 선 이유를 이렇게 변명한 것이다. 성조를 냉혹한 킬러로만 묘사하는 원작과 다른 점이다. 원작자인 강지영 작가(46)는 14일 인터뷰에서 “원작은 분량이 짧아 다양한 이야기를 넣지 못했다. 드라마는 8부작으로 만들어져 악당들의 서사가 더 풍성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액션 장면을 실감 나게 살리기 위해 범죄 규모를 키웠다. 킬러들의 조직 ‘바빌론’이 원작에선 소모임에 불과했지만, 극에선 수백 명이 소속된 글로벌 범죄조직으로 불어나 대규모 전투 장면을 만들어낸 것. 원작에선 총싸움만 벌어지지만, 드라마에선 사방에서 폭탄이 쏟아지고 살인용 드론이 날아다니며 선혈이 낭자한다. 이 감독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서 드라마를 2, 3배씩 빨리 감기 하는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고 싶었다. 영화 ‘킬 빌’(2003년)과 달리 현실감 높은 액션을 만들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드라마와 달리 원작은 심리 묘사에 공을 들인다. 지안이 자신이 몰랐던 진만의 과거를 이해해 나가는 과정에서 겪는 복잡한 감정 변화는 부모와 화해하는 자식의 이야기처럼 읽힌다. “어렸을 적 부모님은 자신의 어려움을 제게 말하지 않았어요. 나이가 든 뒤에야 부모님의 젊은 시절 고충을 이해할 수 있었죠. 작품에는 우리가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여겨온 부모 세대를 받아들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강 작가)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아빠, 이런 얘기 전해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어느 날 60대인 저자는 딸에게 전화로 이 같은 말을 들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 딸은 인터넷에 할아버지의 이름을 검색했다.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1939∼1945년) 중 전사한 줄 알았던 할아버지가 전쟁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후 할아버지가 유럽 등에서 일하며 프랑스 발레리나와 결혼해 세 딸을 뒀다는 충격적인 소식도 알아냈다. 저자는 딸과 전화를 끊은 뒤 이렇게 생각한다. “아버지는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교수인 저자가 딸의 전화를 받은 뒤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다닌 과정을 기록한 회고록이다. 저자는 1944년생으로 올해로 80세다. 청년기를 지나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때에 오히려 아버지의 인생을 찾아간 점이 흥미롭다. 숨겨진 아버지의 비밀을 찾아가는 과정은 추리소설처럼 펼쳐진다. 생전 어머니는 저자에게 “아버지는 전쟁 중 사망했다”고 말했다. 집에는 아버지의 사진 한 장 없었다. 저자도 사실 아버지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저자는 “청소년은 롤모델을 찾고, 배우고, 반항하는 복잡한 노력을 거치면서 자기만의 자의식을 구축한다. 하지만 내게는 그럴 아버지가 없었다”고 고백한다. 조사 결과 아버지는 전쟁 중 죽지 않았다. 아버지는 1942년 미군 정보부대에 입대해 2년간 유럽 전선에 배치된 뒤 1944년 영국에 있는 미군 구치소 임시 교도관으로 발령받았다. 하룻밤 병영을 무단 이탈하는 등 가벼운 잘못을 저지른 미군 병사들을 관리하는 역할이었다. 그런데 전후 이 구치소에서 가혹 행위가 벌어졌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장교와 병사 교도관들이 조직적으로 수감자들에게 억지로 음식을 먹이고, 강제로 뛰게 하는 등의 가혹 행위를 벌인 것. 저자의 아버지는 이와 무관해 처벌받지 않았지만, 법정에서 동료들의 행위를 증언하며 고통스러운 기억과 마주해야 했다. 1946년 제대한 아버지는 미 육군성에 민간인 직원으로 취업했다. 이후 독일, 태국에서 일하며 전후 미군의 복구 활동에 참여했지만 집으로 끝내 돌아가지 않았다. 결국 어머니와 이혼한 아버지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1991년 세상을 떠났다. 왜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저자는 군 기록을 토대로 아버지가 재판을 거치며 전쟁에 대한 혐오를 느꼈다고 추정한다. 또 이 때문에 미군이 전후 세계 질서를 복구할 때 자신의 힘을 보태고 싶어 했을 거라고 봤다. 물론 학창 시절 응석받이였던 아버지가 책임감이 부족했을 거라는 비판적 시각도 있다. 저자는 아버지의 삶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마주한 건 아버지가 아닌 자신이라고 말한다. 아버지가 없는 삶을 원망하고, 늘 불행했다고 생각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됐다는 것.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고 동시에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 어떤 사람인지, 앞으로 어디로 가고 싶은지 돌아보는 기회를 얻었다”는 저자의 말처럼 우리도 부모를 바라보면서 늘 자신의 인생을 살펴보는 게 아닐까.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한국 웹툰 ‘입학용병’은 네이버의 일본 웹툰 플랫폼 ‘라인망가’에서 지난해 총 10억 엔(약 89억 원)의 거래액을 올렸다. 한국에서 2020년부터 네이버웹툰에 연재된 이 작품은 주인공이 비행기 추락 사고를 겪은 뒤 우연히 전투 능력을 갖추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2021년부터 라인망가에 연재된 뒤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일본 만화계의 인기 장르인 학원 액션물이라는 점과 더불어 일본 내 한국 웹툰 플랫폼의 성장세가 영향을 미쳤다. 입학용병의 YC 작가는 “연재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빨리 성공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며 “일본에서 많은 사용자를 확보한 라인망가 덕분에 만화 강국 일본에서 많은 독자들과 연결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 웹툰이 일본 시장에서 잇따라 성공을 거두고 있다. 카카오의 일본법인 카카오픽코마(구 카카오재팬)가 운영하는 현지 웹툰 플랫폼 ‘픽코마’는 지난해 거래액이 1000억 엔(약 8874억 원)을 넘겨 2016년 출시 이후 최고 기록을 세웠다. 네이버웹툰 산하 라인망가와 이북재팬의 지난해 거래액도 1000억 엔을 달성했다. ‘재혼황후’, ‘약탈신부’처럼 일본 내 월 거래액이 1억 엔(약 8억9000만 원)을 넘기는 한국 웹툰도 등장하고 있다. 일본 시장에서 한국 웹툰이 인기를 끄는 건 라인망가, 픽코마 등의 플랫폼이 일본 시장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기존의 종이책 만화만 펴내던 일본 업체 대신 한국 웹툰 업체들이 스마트폰으로 만화를 보는 일본 젊은층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라인망가를 운영하는 ‘라인디지털프론티어’의 김신배 최고성장책임자(CGO)는 “일본 만화는 오랜 역사와 두꺼운 팬덤을 기반으로 거대 만화 시장을 갖고 있다”며 “모바일로 작품을 감상하는 젊은 독자가 꾸준히 늘고 있지만 아직 디지털 만화 시장은 작은 편이라 성장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한국 웹툰 업체가 일본 현지 웹툰을 발굴하기도 한다. 일본 제작사가 만들어 라인망가에 연재한 웹툰 ‘신혈의 구세주’는 지난달 거래액이 1억2000만 엔(약 10억7000만 원)에 달해 라인망가에 연재된 일본 웹툰 중 최고액을 기록했다. 세계 만화 시장에서 일본의 위상이 막강한 만큼 일본에서 성공한 웹툰은 미국, 유럽에서도 환영을 받는 경향이 있다.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쉬운 점도 일본 시장에 진출하는 이유다. 지난해 국내에서 개봉돼 480만 명이 관람한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처럼 일본은 만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에서 세계적 강국이다. 박태준만화회사가 지난해 7월 일본법인 ‘더그림엔터테인먼트 재팬’을 세우고, 한국 웹툰 ‘싸움독학’을 TV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올 4월부터 일본에서 방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샛별 더그림엔터테인먼트 재팬 법인장은 “일본에선 출판 만화를 원작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미디어믹스 시장의 규모가 크다. 한국 웹툰을 기반으로 한 미디어믹스도 연달아 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융희 문화연구자(전 세종사이버대 만화웹툰창작과 겸임교수)는 “일본은 만화를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음악, 게임, 여행 등 다양한 콘텐츠로 만들기에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며 “일본 시장을 한국 웹툰의 세계 진출 교두보로 삼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2008년 가을 미국 시사주간지 ‘뉴요커’를 그만두고,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경비원으로 취직했다. 오랫동안 따르던 형이 암으로 세상을 떠난 직후였다. 그동안 치열하게 쌓은 기자 경력은 상관없었다. 직장에서 버티기 위해 꾸역꾸역 애쓰며 살고 싶지 않았다. 단순한 일을 하면서 조용히 살고 싶었다. 그래서 경비원이 돼 매일 아침 미술관으로 출근했다. 8시간씩 경이로운 예술 작품을 지켜봤다. 거장들의 혼이 담긴 회화와 조각을 보고, 동료 경비원들과 대화하면서 삶과 죽음의 의미를 깨달아 갔다. 멈췄던 인생이 다시 시작됐다. 2008∼2018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경비원으로 일한 경험을 담은 에세이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웅진지식하우스·사진)를 펴낸 미국 작가 패트릭 브링리(41)는 13일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미술관은 현대인들을 위한 사원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미술관에서 우리는 아름답고, 가치 있는 예술품들과 시간을 보내며 마음을 위로하고, 삶을 바꿀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겪었던 기쁨, 슬픔 등 온갖 경험이 어떤 식으로 작품에 반영됐는지 들여다볼 수 있죠.” 신간은 지난해 11월 국내에 번역 출간된 뒤 독자들의 입소문을 타면서 현재까지 10만 부가 팔렸다. 알라딘 종합순위에서 5주 연속(1월 1주∼2월 1주) 1위에 오르는 등 베스트셀러가 됐다. 가족을 잃은 슬픔을 가감 없이 털어놓은 솔직함이 태평양을 건너 한국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형은 내가 흥미로운 일을 겪을 때마다 달려가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었다”며 “형이 아프고 난 뒤에야 형이 내게 얼마나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인지 절실히 깨달았다”고 말했다. “사실 어떤 것이 한국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뜨거운 반응을 전해 듣고 기뻤어요.” 신간에서 경비원이 된 그는 매일 아침 개관 30분 전 배정받은 구역에서 그림을 홀로 바라보는 일상을 적어 내려갔다. 처음에는 별 감흥이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림이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탈리아 화가 베르나르도 다디(1290∼1355)의 회화를 지켜보며 처연함을 느꼈다. 미국 화가 메리 커샛(1845∼1926)의 그림을 보며 햇살에 닿는 듯한 따스함에 젖었다. 그는 “미술관은 아름답고, 신성하고, 세상이 얼마나 충만한지를 알려주는 예술품들로 가득 차 있다”며 “미술관을 거닐면 ‘우리가 겪는 고통이란 얼마나 작고 별것 아닌가’라는 깨달음을 얻는다”고 했다. “미술관에는 삶과 죽음, 아름다움, 고통이 다 담겨 있어요. 예술품을 만든 수천 년 전의 예술가와 만나며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죠.” 그는 사람을 통해서도 치유 받았다. 이민자, 농부, 택시운전사 등 다양한 출신의 미술관 경비원들은 모두 파란색 제복을 입고 동등하게 서로를 대했다. 그는 “동료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방문객들과 대화하면서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열었다”며 “형의 죽음 이후 조용했던 나는 점점 사람들과 다시 소통하기 시작했다”고 돌아봤다. 2018년 그는 미술관 경비원을 그만두고 현재는 뉴욕에서 도보 여행 가이드로 일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미술관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미술관을 올바르게 관람하는 방식은 없습니다. 미술관 큐레이터, 고대 이집트인, 르네상스 화가도 답을 몰라요. 그냥 사람들이 없는 아침에 미술관에 와서 조용히 작품을 바라보세요. 필요한 건 오로지 작품을 마주하고, 마음껏 해석할 용기입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KBS ‘고려거란전쟁’뿐 아니라 최근 드라마, 영화 등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역사왜곡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21년 방영된 SBS 드라마 ‘조선구마사’다. 이 드라마에선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 사제와 통역사에게 중국 전통음식인 월병과 중국식 만두를 대접하는 장면이 나와 논란이 됐다. ‘판타지 사극’을 표방했지만 조선을 방문한 이들에게 중국 음식을 대접한다는 설정은 무리수라는 지적이 나온 것. 제작진은 “명나라 국경에 가까운 지역이다 보니 ‘중국인의 왕래가 잦지 않았을까’라는 상상력을 가미해 소품을 준비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시청자 항의가 쏟아지자 SBS는 방영 2회 만에 조기 종방을 결정했다. 당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행정지도 권고를 내며 “드라마의 허구성에 대해 철저히 고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2021년 방영된 JTBC 드라마 ‘설강화’도 민주화운동을 왜곡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드라마는 1987년 서울을 배경으로 국가안전기획부 요원들에게 쫓기던 남파 간첩(정해인 분)을 운동권 대학생으로 오인한 여대생(지수 분)이 구해준다는 이야기다. 간첩이 광주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안기부 직원이 정의의 사도처럼 묘사된 점이 역사왜곡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디즈니플러스를 통해 해외에서도 볼 수 있는 드라마라는 점에서 외국인들이 자칫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북한이 개입한 사건으로 오해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최고 시청률이 3.9%까지 올랐지만 역사왜곡 논란 직후 1.7%까지 떨어졌다. 드라마가 조기 종방되지는 않았지만, 기업들이 광고와 제작 지원을 철회했다. 해외 콘텐츠들도 역사왜곡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해 12월 개봉한 영화 ‘나폴레옹’은 극중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 장면을 나폴레옹이 지켜보고, 나폴레옹이 기마 돌격에 앞장서는 장면이 “영화적 상상을 넘어선 역사왜곡”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2020년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 시즌4도 다이애나빈이 섭식 장애를 앓아 음식물을 토하는 장면 등이 역사왜곡이라는 비판을 받은 뒤 ‘이 작품은 허구’라는 자막을 추가했다. 국내 방송계에선 정통사극에 새로운 소재를 접목한 이른바 ‘퓨전 사극’이 최근 유행하면서 논란이 더 빈번하게 제기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코로나19가 유행할 당시 격리된 장소에서 촬영할 수 있는 사극 제작이 늘면서 제대로 고증이 안 된 작품들도 방송 전파를 탈 수 있었다는 것. 한 드라마 작가는 “역사왜곡 논란이 과도해지면서 창작자의 자유를 옥죄고 있는 점은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대중문화 콘텐츠의 특성상 대중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을 범위 안에서 작가들이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김성수 대중문화평론가는 “정통·퓨전 사극을 불문하고 대중문화콘텐츠는 대중의 역사 인식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만큼 상상력이란 단어가 변명이 될 순 없다”며 “사료 검증이 철저하고, 사회적으로 합의된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콘텐츠만이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얼마 전 내 작품이 서점 종합 베스트셀러에 올랐는데 출판사 판매량 시스템에는 그게 반영이 안 돼 있었다.” 10권 이상 책을 펴낸 중견 작가 A 씨는 “한참 지나서야 시스템의 숫자가 바뀌는 걸 보고 출판사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2021년 출판계의 불투명한 인세 정산을 놓고 논란이 불거졌지만, 3년이 지난 지금도 현실은 그대로라는 지적이 나온다. 인쇄량이 아닌 판매량만 알 수 있는 데다 이마저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인된 공공기관이 아닌 출판사나 서점이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통계라는 점도 한계다. A 씨는 “인세 논란이 불거진 뒤 대형 출판사들과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가 관련 시스템을 내놓았지만 여전히 믿기 힘들다”고 털어놨다. 2021년 공상과학(SF) 출판사 아작은 장강명 등 작가들의 인세를 누락한 사실이 밝혀져 사과했다. 임홍택 작가는 출판사 웨일북으로부터 전달받은 ‘90년생이 온다’의 종이책 판매부수를 검토하다 발행부수보다 10만 부가 적다는 사실을 발견해 뒤늦게 인세 1억5000만 원을 받아냈다. 논란이 커지자 출협과 문화체육관광부가 각각 도서판매정보공유시스템과 출판유통통합전산망을 만들어 저자가 판매량을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대형 출판사인 문학동네와 창비도 인세 정보를 저자들과 공유하는 시스템을 내놓았다. 하지만 작가들은 여전히 “바뀐 게 없다”는 반응이다. 책마다 고유 번호가 없어 출판사가 판매부수를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는 것. 한 작가는 “담당 편집자조차 책이 얼마나 팔렸는지 모를 정도로 출판사 내부에서도 판매량을 쉬쉬한다”며 “하물며 작가가 정확한 판매량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판매량 집계가 실시간으로 이뤄지지 않는 것도 문제다. 인쇄부수가 아닌 판매부수를 기준으로 인세를 정산하는데, 반품된 물량을 반영하다 보니 인쇄 후 길게는 수개월이 지나서야 판매량을 알 수 있다는 것. 다른 작가는 “출판사가 인세를 뒤늦게 지급한 걸 나중에 알았지만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 인세를 언급하는 작가를 속물로 보는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작가들 스스로 시스템 개선에 나서고 있다. 임홍택 작가는 지난해 11월 출판사 ‘도서출판11%’를 세웠다. 이곳은 출판계 관행과 달리 판매부수가 아닌 발행부수를 기준으로 인세를 지급한다. 임 작가는 “책이 반품되면 출판사가 책임지고 비용으로 처리하고 저자에게 부담을 전가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작가들이 책을 온라인 출판 플랫폼에 독점 공급하기도 한다. 한국추리작가협회 소속 작가들은 2022년부터 오디오북 플랫폼 ‘윌라’에만 작품을 올려 수익을 얻고 있다. 김재희 한국추리작가협회 부회장은 “‘윌라’ 종합 순위에 오르면 수익이 수천만 원에 달해 굳이 출판사를 통해 책을 내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출판계도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처럼 공신력 있는 공공기관이 판매 데이터를 일괄적으로 집계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현재 출협 도서판매정보공유시스템에는 1290개, 문체부 출판전산망에는 2791개 출판사가 각각 참여하고 있다. 이는 문체부에 등록된 전체 출판사(8만2588개)의 각각 1.6%, 3.4%에 불과하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출협이나 개별 출판사들이 운영하는 인세 시스템은 작가들이 신뢰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며 “정부 주도의 통합전산망 가입 출판사를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사지원 기자 4g1@donga.com}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한국의 한 대학 건물. 복도를 꽉 채우는 크기의 거대 문어가 빨판투성이 다리를 굼실거리며 이렇게 말한다. 대학 강사인 ‘나’는 강사들의 권리를 보장하라며 시위 중이다. 진지한 상황이지만 문어의 이상한 행동에 ‘나’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시위를 주도하는 ‘위원장님’의 행동은 더 가관이다. 뒤에서 입맛을 다시던 ‘위원장님’은 전화기로 문어를 때려 기절시킨다. 그러곤 머리 안쪽을 뒤집어 가위로 자르고 내장을 잡아당겨 꺼낸다. ‘위원장님’은 어이없어하는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눈하고 이빨 떼기 전에 물에 씻어야 되는데 좀 도와주실래요?” 최근 출간된 정보라 작가(48)의 소설집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래빗홀·사진)에 수록된 단편소설 ‘문어’의 일부다. 그는 4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소설 대부분은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경북대 사회학과 강사였던 임순광 전 한국비정규교수노조위원장과 농성을 하다 사귀고, 2022년 11년간 강사로 일한 연세대를 상대로 퇴직금과 주휴·연차수당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한 그의 인생이 작품에 진하게 녹아 있다는 것이다. “남편과 연애를 하다 문어회를 먹으러 갔어요. 그런데 남편이 ‘한 놈은 맛이 갔고 다른 한 놈은 싱싱하다’고 말하더라고요. 허락을 받고 그 대사도 소설에 녹였죠.” 그는 단편소설집 ‘저주토끼’(2017년·래빗홀)로 2022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며 주목받았다. 미국 예일대에서 러시아 동유럽 지역학 석사, 인디애나대에서 슬라브 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연세대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러다 2020년 남편을 따라 경북 포항시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포항 죽도시장에서 건어물 가게를 운영하는 시어머니를 따라다니며 소설의 주인공이 된 여러 해양 생물을 떠올렸다. 그는 “포항 송도해변에서 포스코와 해수욕장을 번갈아 보면 소설에 등장하는 미래도시 같다”며 “‘서울 촌놈’인 나는 바닷가를 걸을 때마다 마치 마술 세계에 사는 것처럼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소설집에 담긴 이야기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이 소설보다 더 터무니없고 더 마술적이고 더 잔혹할 수 있다”고 했다. 신작에 실린 6개 단편은 상상과 현실이 온통 뒤섞인 정 작가 특유의 ‘마술적 사실주의’가 돋보인다. 대게는 인간에게 러시아어로 “도와주시오”라고 말을 걸고(단편 ‘대게’), 우주 해파리는 인간 곁을 떠돈다(단편 ‘해파리’).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편견과 비판(단편 ‘상어’), 생태계 파괴로 고통받는 해양 생물들에 대한 고민(단편 ‘고래’)처럼 사회적 문제도 담았다. 그는 “서울을 떠나 바닷가에 산 뒤로 해양 생태계 문제에 민감해졌다”며 “생물들이 없어지면 인간도 죽는다. 지구 생물체가 살아남기 위해선 기후위기에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학생들을 사랑했고 강단을 사랑했고 교육의 가치를 진심으로 믿었다”(단편 ‘문어’)처럼 자신의 고백이 담긴 듯한 문장도 눈에 띈다. “이 남자와 결혼한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단편 ‘대게’)처럼 남편에 대한 진한 애정이 드러나는 대목에서는 소설보다 에세이처럼 읽힌다. 최근 수술을 받았다는 남편의 안부를 묻자 그는 쾌활한 목소리로 답했다. “남편이 엊그저께 퇴원했거든요. 지금 통화도 옆에서 들으면서 계속 추임새를 넣고 있어요. 요즘 오징어, 문어 포획량이 줄어 어민들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꼭 써 달라네요….”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패스트 라이브즈’, ‘성난 사람들’, ‘파친코’, ‘미나리’…. 최근 한국인 이민자들의 정체성이 담긴 ‘코리안 디아스포라’ 콘텐츠들이 문화계를 들썩이게 하고 있다. 그동안 글로벌 콘텐츠 시장에서 변방에 있던 한국 콘텐츠가 주목받으며 한국 이민자들에 대한 시선도 깊이를 더하고 있다. 이방인으로서의 서러움을 인종차별로 풀어내는 것을 넘어 그리움, 분노 같은 정서로 풀어내는 것도 특징이다. 한국적 특수성을 내세우며 색다름을 강조하던 과거를 넘어 누구라도 이해할 만한 보편적 감수성을 건드리며 공감대를 넓히고 있는 것이다.》 ● 한국인 이민자의 삶 입체적으로 그려최근 해외에서 인정받는 한국 관련 콘텐츠는 이민 1.5세대 혹은 2세대가 현지에서 만든 작품들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처럼 토종 한국 콘텐츠가 부상하면서 한국계 외국인들이 제작한 콘텐츠도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BEEF)’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의 각본을 쓰고 연출, 제작을 맡은 이성진 감독은 한국에서 태어나 생후 9개월 때 미국으로 이주한 이민 1.5세대다. 이 감독은 10대 시절 한국식 이름에 부끄러움을 느껴 ‘소니(Sonny)’라는 미국식 이름으로 바꿀 정도로 정체성 갈등을 겪었다. 이런 그의 고민을 반영하듯 ‘성난 사람들’은 미국 사회에 만연한 이민자들의 분노를 포착했다. 특히 극 중 한국계 ‘대니’(스티븐 연)가 설렁탕과 라면을 즐기고, “교회에서 좋은 한국 여자를 만나라”는 엄마의 성화를 듣는 등 한국계 이민자들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한국에서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 남녀가 20년 만에 미국 뉴욕에서 재회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도 12세 때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 셀린 송 감독이 연출했다. 송 감독은 데뷔작인 이 영화로 미국 아카데미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에 오르는 이례적인 성과를 거뒀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고향을 떠나 미국에 정착한 이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송 감독은 아카데미 후보 지명 후 인터뷰에서 “나는 캐나다인이라고 느낀다”고 말했다. ‘성난 사람들’과 ‘패스트 라이브즈’ 모두 한국계 미국인 혹은 캐나다인의 시각에서 한국 이민자의 정체성을 담아낸 공통점을 지닌다. 특히 최근의 코리안 디아스포라 콘텐츠는 백인 주류 사회의 한국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기존에 한국계 배우들은 무술을 잘하는 과묵한 인물이나 소심한 너드(nerd·괴짜), 돈만 밝히는 수전노와 같은 캐릭터로 주로 소비돼 왔다. 배우 이병헌이 영화 ‘지.아이.조’(2009년)에서 선악을 따지지 않고 주어진 임무만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용병을 연기한 게 대표적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역사적 맥락에서 한국 이민자들의 삶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가난에 쫓겨 미국으로 온 한국 이민자 1세대를 다룬 영화 ‘미나리’나 재일 한인 교포들의 애환을 다룬 드라마 ‘파친코’가 대표적이다.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서양인들이 동양인을 그린 작품과 달리 한국계 감독이 찍고, 한국계 배우가 연기한 작품은 한국적 감정을 주체적으로 그린다”고 평가했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성난 사람들’과 ‘패스트 라이브즈’는 서양 창작자들이 한국인에게 지닌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섰다”고 말했다.● 할리우드 ‘다양성’ 추구도 영향코리안 디아스포라 콘텐츠의 성공에는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다양성’을 추구하는 미국 내 분위기도 한몫했다. 미국 사회에서 인종, 성별 등 ‘정치적 올바름’(PC)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2021년 미국 골든글로브에서 영화 ‘미나리’가 한국어로 극이 전개된다는 이유로 작품상이 아닌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르자 아시아계 작품 홀대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 같은 분위기에 힘입어 미국 아카데미는 2022년 남우조연상에 영화 ‘코다’의 미국 농아인 배우 트로이 코처를, 여우조연상에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성소수자이자 라틴계 흑인 배우인 아리아나 더보즈를 선정했다. 아카데미는 올 3월부터는 최고상인 작품상 수상 자격에 ‘다양성’ 기준을 추가했다. 영화 내용이나 제작, 마케팅 방식 등 영화 제작 전반에 걸쳐 인종·성별 다양성을 고려해야 작품상 후보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송 감독이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로 아카데미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에 오른 것도 다양성 추구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아카데미가 2023년 뮤지컬·코미디 영화부문 여우주연상을 중국인 이민자를 다룬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말레이시아 화교 배우 양쯔충(양자경)에게 수여했다. 미국 영화계에서 다양성은 필수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세계적으로 한국 콘텐츠가 흥행하면서 인지도와 친밀도가 높아졌다는 점도 거론된다. 2020년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작품상 등 4관왕을 차지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이 세계적 인기를 누렸다. 방탄소년단(BTS), 블랙핑크 등 K팝 그룹이 미국 빌보드를 휩쓴 것에 더해 대중문화적 파급력이 높아졌다. 이혁상 디아스포라영화제 프로그래머는 “한국이 수년간 쌓아온 콘텐츠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주목받고 있다”며 “특히 세계적으로 인종, 나이, 성별, 장애 등 문화 다양성의 기조가 강조된 점도 성공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분석했다. 보편적인 주제 의식으로 공감을 끌어내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한(恨)’과 같은 한국적 정서를 강조하는 것을 넘어 분노, 향수 등 세계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주제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파친코’를 연출한 저스틴 전 감독은 지난해 10월 부산 해운대구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열린 ‘코리안 아메리칸 특별전: 코리안 디아스포라’ 기자간담회에서 “이민자 이야기는 각자의 섬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이 나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며 “‘성난 사람들’이 대단한 건 이민자의 삶을 통해 현대인이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코리안 디아스포라 문학도 주목코리안 디아스포라 열풍은 출판, 문학계에도 불고 있다. 특히 그동안 주로 작품성으로만 인정받은 코리안 디아스포라 문학이 영화, 드라마로 제작되면서 전방위적 관심을 받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이 7세 때 서울을 떠나 뉴욕에 정착한 한국계 미국 작가 이민진이 쓴 장편소설 ‘파친코’다. 2022년 애플TV플러스에서 공개를 시작한 동명의 드라마가 세계적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소설이 미국 온라인 서점 아마존북스에서 종합 베스트셀러 70위에 올랐다. ‘파친코’의 성공 이후 연달아 영미 문학계에선 다양한 코리안 디아스포라 작품이 주목받고 있다. 한국계 미국 작가 조지프 한(한국명 한요셉)의 장편소설 ‘핵가족’(위즈덤하우스)은 2022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올해의 책’에 선정됐다. 이 작품은 미국 이민 2세대인 주인공이 6·25전쟁을 겪은 할아버지의 흔적을 따라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국계 미국 작가 미셸 조너가 자신의 성장 과정과 엄마가 해주던 한국 음식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에세이 ‘H마트에서 울다’(문학동네)는 2021년 미국에서 출간된 뒤 아마존북스 아시안&아메리칸 분야 1위에 올랐다. 전문가들은 코리안 디아스포라 콘텐츠가 이민자처럼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빈곤층이나 성소수자 등의 관점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파급력이 크다고 분석한다. 이형권 충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국제한인문학회장)는 “다수자와는 다른 소수자만의 생각과 느낌을 살려낼 때 코리안 디아스포라 콘텐츠는 더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어느 날 서울 성북동으로 이사온 ‘나’는 황수건이라는 남자를 만난다. 황수건은 신문 배달원과 참외 장사를 했지만 실패하기 일쑤다. ‘나’는 황수건이 못나고 우둔하다고 생각한다. 실패자인 그를 보며 혀를 끌끌 차곤 한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나’는 매일 황수건을 기다린다. 그는 엉뚱하지만 착하고 인정이 많다. 도시인들의 영악함에 지친 ‘나’에게 황수건의 천진한 심성은 위로가 된다. ‘나’는 장사가 망하고 아내에게도 버림받은 황수건이 술에 취한 모습을 보며 이렇게 읊조린다. “달밤은 그에게도 유감한 듯하였다.” 일제강점기 변화하는 세태 속에서 방황하는 당대인들의 모습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담아낸 소설가 이태준(1904∼?)이 1933년 발표한 단편소설 ‘달밤’의 내용이다. ‘달밤’ 등 이태준의 작품을 수록한 ‘상허 이태준 전집’(열화당·사진) 1∼4권이 최근 출간됐다. 1권에 단편소설, 2권에 중편소설·희곡·시·아동문학, 3·4권에 장편소설을 각각 담았다. 2028년까지 총 14권으로 완간될 계획이다. 근대문학을 이끈 이태준은 1925년 단편소설 ‘오몽녀’로 등단했다. 1934년 첫 단편소설집 ‘달밤’을 비롯해 소설, 희곡, 시, 아동문학 등에서 다양한 글을 남겼다. 소설가 이효석(1907∼1942)과 김유정(1908∼1937)이 활동한 문학동인 ‘구인회’의 창립 멤버다. 이태준은 특히 1940년 펴낸 글쓰기 교본 ‘문장강화’로 유명하다. 당시 문단에서 “시는 정지용(1902∼1950), 산문은 이태준”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이태준은 뛰어난 문장가였다. 광복 직후 월북해 1950년대 중반 북한에서 숙청당했다. 앞서 2015년 ‘이태준 전집’(전 7권·소명출판) 등 전집이 여러 번 출간된 적이 있다. 하지만 월북 이전 그의 모든 작품을 망라하는 전집은 처음이다. 이번 전집에는 각 권마다 500∼1400개의 주석을 달았다. 주석 작업은 이태준의 조카인 김명열 서울대 영문과 명예교수(84)가 주도했다. 김 교수는 “문학은 이태준에게 생명처럼 소중한 것이었다. 그가 북한에서 겪었을 가장 가슴 아픈 일 중 하나는 자신의 작품이 철저히 제거된 점일 것”이라며 “전집 출간이 외삼촌의 한을 풀어드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연명 치료/필요 없다 써놓고/매일 병원 다닌다’. 일본 미야기현에 사는 70세 남성 우루이치 다카미쓰 씨는 신간에 실린 시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주위엔 삶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고 연명 치료 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병원 문턱이 닳도록 자주 드나드는 자신의 이중성을 돌아본 것이다. 노인의 삶에 대한 풍자가 간결하게 녹아 있어 시를 읽은 뒤에도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일본 노인의 일상을 담은 이른바 ‘실버 센류’ 88수를 모은 시집이다. 센류(川柳)는 하이쿠(俳句)처럼 운을 가진 일본 고유의 시로 일본어 기준 5·7·5의 17개 글자로 이뤄져 있다. 신간은 사단법인 전국유료실버타운협회가 일본 노인들을 대상으로 2001년부터 열고 있는 센류 공모전에 당선된 작품들을 모았다. ‘연상이/내 취향인데/이제 없어’처럼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는 작품들이 매년 공모전에 약 1만 편씩 투고된다고 하니 문학에 대한 일본 노인들의 열정이 대단하다. 노인들은 늙음이란 일상을 주목한다. ‘환갑 맞이한/아이돌을 보고/늙음을 깨닫는다’, ‘‘연세가 많으셔서요’/그게 병명이냐/시골 의사여’라는 센류에선 일본 초고령화 사회의 단면을 볼 수 있다. ‘종이랑 펜/찾는 사이에/쓸 말 까먹네’, ‘세 시간이나/기다렸다 들은 병명/노환입니다’라는 고백에선 늙음에 대한 애환이 느껴진다. ‘혼자 사는 노인/가전제품 음성 안내에/대답을 한다’, ‘손주 목소리/부부 둘이서/수화기에 뺨을 맞댄다’는 고백에선 외로움도 묻어 나온다. 하지만 노인들은 마냥 한탄하지 않는다. ‘물 온도 괜찮냐고/자꾸 묻지 마라/나는 무사하다’고 당당히 외친다. ‘손을 잡는다/옛날에는 데이트/지금은 부축’, ‘분위기 보고/노망난 척해서/위기 넘긴다’며 노년의 삶을 웃음으로 승화한다. ‘두 사람의 연애담/처음 들은/장례식 날 밤’, ‘자동 응답기에 대고/천천히 말하라며/고함치는 아버지’처럼 자녀 시점에서 쓴 센류도 있어 젊은 독자도 읽을 만하다. 신간은 글자가 큼직하게 인쇄돼 있어 장년층 독자도 읽기 편하다. 매일 자식의 안부 전화를 기다리는 부모님께 “당당히 노년을 마주하라”며 선물 드리고 싶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미국 뉴욕의 한 공원. 파란색 셔츠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은 해성(유태오)이 홀로 서 있다. 해성은 어색한 듯 두 손을 만지작거린다. 괜스레 주위를 둘러보고 자꾸 머리를 매만진다. 해성의 얼굴엔 걱정이 묻어 있다. “해성!” 흰 셔츠와 회색 바지를 입은 나영(그레타 리)의 부름에 해성이 돌아본다. 나영이 천천히 걸어와 해성 앞에 선다. “와. 너다” 나영이 감탄한다.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본다. 24년 전 두 사람이 한국에서 함께 놀던 장면이 플래시백으로 5초 나온다. 동일 장소, 동일 시간에 존재했던 기억을 떠올린 덕일까. 어색함은 서서히 사라진다. 현재로 돌아온 둘은 소중한 인연을 떠올리며 껴안는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의 한 장면을 보며 수필집 ‘인연’의 책장을 열었다. “수십 년 전 내가 열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동경에 간 일이 있다.” 표제작인 수필 ‘인연’에서 피천득 시인(1910∼2007)은 17세 봄 일본 도쿄에서 유학 중 하숙집에서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던 일본 여성 아사코를 만난 기억을 털어놓는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지닌 아사코는 피천득을 오빠처럼 따랐다. 피천득이 도쿄를 떠나던 날 아침 아사코는 피천득의 목을 안고 뺨에 입을 맞췄을 정도였다. 10여 년이 지나 두 사람은 재회한다. 아사코는 영문학을 공부하는 대학생으로 커 있었다. 저녁을 먹기 전 두 사람은 산책하며 끌림을 느꼈지만 끝내 이어지진 않았다. 다시 10여 년이 지났다.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을 겪은 뒤였다. 어떤 일들을 겪은 것인지 결혼한 아사코의 얼굴은 시들어 있었다. 피천득은 “십 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코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악수 없이 절한 뒤 헤어진다. 피천득은 복잡한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쓰며 글을 끝맺는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한국계 캐나다인 셀린 송 감독의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한국에서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 해성과 나영이 미국 뉴욕에서 재회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 두 남녀의 모습을 연달아 보여준다는 점에서 ‘패스트 라이브즈’와 ‘인연’은 유사하다. 셀린 송과 피천득이 자신이 겪은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마치 한 편의 연애소설처럼 솔직하게 펼쳐냈다는 점도 비슷하다. 피천득은 수필집에서 “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아름답다”(수필 ‘신춘’ 중), “오래 살고 부유하게 사는 방법은 아름다운 인연을 많이 맺는 것”(수필 ‘장수’ 중)이라고 말한다. 셀린 송은 영화계 최고 권위의 미국 아카데미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에 오른 뒤 “(인연은) 기적적인 연결”이라고 했다. 셀린 송이 피천득의 수필을 읽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두 사람이 인연에 대해 갖는 생각은 다르지 않은 듯하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어려운 글이 아니라 어린이들도 읽을 수 있는 쉬운 글을 쓰고 싶었어요. 그 마음이 전해진 게 아닐까요.”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이금이 작가(62)는 세계적인 아동문학상인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글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소감을 묻자 수줍게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그는 “40년 동안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글을 쓰다 보니 괜히 거창한 표현은 하지 않는다”며 “2020년 안데르센상 글 부문 1차 후보에 들었으나 최종 후보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이번 소식을 듣고 얼떨떨하다”고 했다. 그는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IBBY)가 최근 발표한 올해의 안데르센상 글 부문 최종 후보 6명에 포함됐다. 안데르센상은 덴마크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1805∼1875)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세계적 권위의 아동문학상이다. 이수지 작가가 2022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안데르센상 그림 부문을 수상했다. 하지만 1956년 상 제정 이래 한국인 글 작가가 최종 후보에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1984년 새벗문학상에 동화 ‘영구랑 흑구랑’이 당선되며 등단했다. 고교 졸업 후 대학에 가지 않고 등단해 작품이 잘 써지지 않을 때마다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지 않아서가 아닌지 스스로 되묻곤 했단다. 그는 “글 쓰는 데 대학 공부가 무슨 도움이 될지 의문이 들어 대학에 가진 않았지만, 작가가 된 후엔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가자 나도 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다”고 털어놓았다. “사실 제가 하고 싶은 건 ‘학벌 세탁’이었던 것 같아요. 한때 다른 대학에서 국문학과 석·박사 과정을 공부하려는 마음도 있었지만, 글 쓸 시간이 사라진다는 걸 깨닫고 공부를 포기했죠. 따로 문학 공부를 안 한 덕에 어린이들을 위한 쉬운 문장이 탄생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50여 편에 이르는 그의 작품 이면에는 한국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담겨 있다. 동화 ‘너도 하늘말나리야’(1999년·밤티)는 가족 결손 문제를 다루고, 동화 ‘망나니 공주처럼’(2020년)은 고정된 성 역할에 의문을 제기한다. 성폭력 문제를 파고든 청소년소설 ‘유진과 유진’(2004년)처럼 묵직한 작품도 있다. 그는 “처음에는 내가 청소년기에 겪은 고민을 담아 썼지만,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뒤에는 학교에 다녀온 아이들의 수다를 들으며 당시 청소년들의 고민을 들으려 했다”며 “청소년은 어른이 쥐고 있는 주류 사회에서 밀려난 이방인이자 어른과 아이 사이에 있는 경계인”이라고 했다. 특히 IBBY에 제출된 그의 대표작엔 일제강점기를 다룬 장편소설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2016년·사계절), 하와이 이민 1세대가 등장하는 장편소설 ‘알로하, 나의 엄마들’(2020년·창비)이 포함됐다. 한국 역사의 질곡을 다루며 그의 작품세계가 확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학교, 학원만 오가는 한국 청소년들의 현재를 벗어나 과거의 한국 청소년들이 어떻게 살아갔는지를 들여다보고 싶었다”며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 한국지부(KBBY), 한국문학번역원, ‘한국 문학 전도사’로 불리는 영미권 출판 에이전트 바버라 지트워의 도움이 없었다면 작품이 해외에 소개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다음 계획을 묻자 그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동화 ‘밤티 마을’ 3부작은 인권 의식, 성인지 감수성을 반영해 개정판을 3월에 냅니다. 또 일제강점기 러시아 사할린으로 강제징용된 여성이 주인공인 장편소설을 준비 중입니다. 4월 수상자가 발표되는 안데르센상에 휩쓸리기보단 창작에 집중할 겁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1980년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던 여름날 오후. 재무부 공무원인 ‘나’는 총을 멘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로 걸어 들어갔다. 살벌함이 가득한 국보위엔 육군 소장인 국보위 재무분과위원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현재 국가의 재정상태를 잘 모르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일하면 일어나는 각종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었다. 처음에 근엄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던 재무분과위원장은 사표까지 들고 온 나의 지적에 조금씩 귀를 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재무분과위원장의 태도가 조금 바뀌었다고 세상이 달라지진 않는다. 1979년 12·12쿠데타와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거치며 수많은 공무원이 사표를 냈다. 상부에 잘못 보였다는 이유만으로 구속된 동료도 있다. ‘나’는 바람이 불고 밤비가 내리는 세종로를 걸으며 되뇐다. “열정과 꿈은 부서졌다. 내일 출근하지 말자. 그들의 조국과 돌아서자.” 지난해 11월 출간된 소설집 ‘2024 신예작가’(한국소설가협회)에 실린 단편소설 ‘세종로 블루스’의 내용이다. 이 작품의 작가는 바로 이명박 정부에서 초대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낸 강만수 씨(79·사진)다. 강 전 장관은 25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세종로 블루스’는 내 공무원 시절 고뇌를 담은 자전적 소설”이라고 했다.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1970년 행정고시에 수석 합격해 경제부처 공무원으로 30여 년 일한 자신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는 원래 소설가를 꿈꾼 문학청년이었다. 미국 작가 존 스타인벡(1902∼1968)의 장편소설 ‘분노의 포도’를 읽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소설가가 되겠다며 자퇴했다가 1년 만에 복학했다. 1997∼1998년 재정경제원 차관, 2008∼2009년 기재부 장관을 지냈지만 문학청년의 꿈은 버리지 못했다. 그는 “2022년 한국소설가협회가 주관하는 제73회 한국소설신인상 단편소설 부문에 ‘동백꽃처럼’을 투고해 당선됐다”고 했다. ‘세종로 블루스’는 타임머신을 타고 44년 전으로 돌아간 듯 각 정부 부처들이 몰려 있는 서울 종로구 세종로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부가가치세 존치를 두고 설왕설래하던 당시 분위기를 치밀한 르포르타주처럼 전한다. 신군부 세력에 대해 “주권자인 국민 누구도 그들에게 그런 칼을 주지 않았다”처럼 비판한 대목은 그의 생각을 대변하는 듯하다. 그는 “신군부 치하에서 당시 공무원들은 각자 고민을 지니고 있었다”며 “분노, 모욕, 체념이 뒤범벅된 세월을 성찰하며 마지막으로 외치고 싶은 얘기를 썼다”고 했다. 다음 계획을 묻자 그는 소설가로서 포부를 당당히 밝혔다. “곧 단편소설집과 장편소설을 각각 낼 계획입니다. 늦은 만큼 꾸준히 써야죠.”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독일인들은 왜 세상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을까?” 1947년 1월 독일 잡지 ‘관점’에 실린 기사의 일부다. 이 기사는 “(독일인들은) 유럽의 문제아이자 세계의 속죄양”이라며 “국제사회에도 일반 가정과 마찬가지로 사랑받는 아이가 있으면 미움받는 아이도 있다”고 지적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세계인들이 전쟁의 책임을 돌리기 위해 독일을 과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당시 독일인들은 스스로를 전쟁의 가해자가 아닌 ‘속죄양’으로 생각한 셈이다. 독일 일간지 베를리너 차이퉁 기자 출신으로 현재 독일 베를린예술대 문화 저널리즘 명예교수인 저자는 신간에서 전후 독일인의 심리를 파헤친다. 지금의 독일인들은 나치의 만행을 지속적으로 사죄하고 있지만, 2차 대전 패망 직후 10년 동안은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반성하는 독일인의 이미지와는 사뭇 거리가 있는 모습이다. 독일이 패망한 1945년 5월 8일로 시계를 돌려보자. 당시 독일은 엉망진창이었다. 전쟁으로 6000만 명이 사망했다. 소련군은 독일을 약탈하고 짓밟았다. ‘기아의 겨울’이라고 불릴 정도로 혹독한 굶주림을 겪었다. 나라 자체가 대혼돈의 상태였다. 연합군 점령 직전 권력 공백기에 독일인들은 약탈에 몰두했다. 극도의 불안감 속에서 이들은 정부 청사와 창고, 화물열차, 이웃집 등을 미친 듯이 털었다. 암시장에는 횡령하거나 밀수한 물건들이 넘쳐났다. 저자는 이 시기를 ‘늑대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질서에 집착하는 합리적 지성인으로 묘사되는 독일인들이 늑대처럼 서로를 약탈하며 도덕적으로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이 벌어지자 독일인들은 자신을 전쟁의 ‘희생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는 아돌프 히틀러(1889∼1945)가 주도한 것이고, 나치즘에 선량한 독일인들이 희생당했다는 논리다. 저자는 “얼어 죽지 않은 사람은 모두 도둑질을 했다. 모두가 도둑이라면 과연 서로를 도둑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라고 말한다. 죄책감이 사라진 자리에는 쾌락이 찾아왔다. 경제가 살아나기 시작하자 영화관이 앞다퉈 문을 열었다. 수많은 댄스홀이 영업을 재개했다. 전후 인구의 5%만 살아남은 쾰른에선 종전 이듬해인 1946년 축제가 열렸다. 학살에 대한 폭넓은 사회적 논쟁은 존재하지 않았다. 독일인들은 전쟁의 기억을 점차 잊어갔다. 독일인들이 과거사 청산에 나선 건 1963∼1968년 ‘아우슈비츠 재판’ 이후다. 아우슈비츠 재판은 나치 치하에서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렀지만 뉘른베르크 재판(1945∼1949년)에서 단죄받지 않은 독일인 22명을 독일 정부가 기소한 사건이다. 하지만 저자는 아우슈비츠 재판을 자기반성의 산물이라고 보지 않는다. 1968년 5월 프랑스 학생운동으로 촉발된 이른바 ‘68세대’가 부모 세대에 대해 분노한 결과일 뿐이라는 것. 저자는 “‘과거 청산’은 훗날 후손들이 떠맡았다. 전쟁 세대는 집단 책임의 비난을 자기 자식들에게 받았다”며 전쟁 세대가 스스로 반성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저널리스트 출신답게 1945∼1955년 10년 동안의 공식 문서, 신문, 잡지, 책 등 다양한 자료를 촘촘하게 분석했다. 독일인 저자가 자국인들의 심리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며 ‘비겁한 독일’에 대한 자기반성을 꾀한 건 인상적이다. 직접 전쟁을 겪은 가해자들이 자신의 잘못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건 독일인이든 일본인이든 마찬가지 아닐까.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