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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오전 7시. 오늘도 잠든 지 4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눈이 떠졌다. “계속 누워 있고 싶다”는 혼잣말도 잠시. 옷을 갈아입은 이동수(가명·33) 씨는 곧장 집을 나섰다. 이 씨가 향한 곳은 서울 성동구의 A프랜차이즈 고깃집. 가게 앞에는 냉장고기를 실은 트럭이 와있다. 고기를 받아 가게 냉장고에 넣으니 오전 9시. 부족한 잠을 보충하려고 집으로 돌아와 누웠지만 1시간 만에 눈을 떴다. “장사 시작한 후론 하루 서너 시간밖에는 깊이 못 자겠더라고요. 신경 쓸 게 많아 예민해진 탓인지….” 이 씨는 지난해 4월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어 고깃집을 시작했다.● 1주 74시간 일하는 ‘청년 사장’ 오후 3시 다시 가게로 향했다. 문 열기까지 두 시간 남았지만 고기를 손질해야 하는 지금부터가 분주하다. 고기는 약 40인분. 장사가 잘될 땐 70인분까지 준비해야 해서 가게 출근시간은 그만큼 더 앞당겨진다. 같은 프랜차이즈 다른 매장에서는 직원이 함께 손질하지만 이 씨 가게에는 전담 직원이 없다. 지금이야 능숙해졌지만 처음에는 새벽까지 고기를 붙잡고 씨름했다. 동이 튼 뒤 귀가하면 칼을 쥐었던 손가락이 펴지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을 고용하지 않았다. 인건비 부담이 커서다. 그 대신 오후 5시부터 밤 12시까지 서빙하는 아르바이트생만 서너 명 썼다. 오후 3시부터 이튿날 오전 1시까지 영업시간 내내 가게를 지키는 건 이 씨뿐이다. 정기휴무는 없다. 이날처럼 고기가 오는 날에는 오전에도 나와야 한다. 이렇게 1주일간 74시간을 일한다. 통계청이 지난달 집계한 국내 자영업자는 567만5000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이 씨처럼 직원을 쓴 자영업자는 일주일 평균 51.6시간, 그렇지 않은 자영업자는 52.8시간을 일한다. 직장인 평균 근로시간인 42.6시간보다 9~10시간 더 많다. 현실은 통계보다 훨씬 고되다. 그래도 “저녁에만 바쁜 장사라 다른 가게에 비하면 편하다”고 이 씨는 말했다. ‘주 74시간’은 힘든 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얘기다. 아르바이트생에게 가게를 맡기고 쉴 법도 하지만 그게 잘 안된다. 이들이 출근한 뒤에도 이 씨는 눈에 띄는 곳에 행주가 있진 않은지, 자리는 잘 정리됐는지 구석구석 살핀다. 이날도 10시간 동안 앉아 쉰 시간은 고작 30분을 넘었다. “전에는 PC방을 했어요. 창고에서 쪽잠을 자며 생활했는데 샤워하러 집에 간 사이 아르바이트생이 손님과 시비가 붙어 소동이 벌어진 후로는 잠깐 외출도 불안해졌습니다.” 개업하고 1년 5개월간 이 씨는 단 이틀 쉬었다. 여름휴가로 평균 4.1일을 쉬는 직장인은 다른 나라 얘기다. 가끔씩 지칠 때면 문을 닫고 쉬고 싶지만 혹여나 그때 찾았다가 헛걸음한 손님이 가게에 나쁜 이미지를 가질까 걱정이다. “나라에서 자영업자 모두 한 달에 이틀 쉬라고 강제했으면 좋겠지만…. 월세도 비싸니까 하루라도 더 벌어야죠.” 59㎡(약 18평) 남짓한 가게 임차료는 월 300만 원이다.● ‘워라밸’을 갈아 넣는 자영업자의 삶 PC방을 하기 전에는 회사원이었다. 첫 직장에선 군대식 문화에 적응을 못 했고 계약직으로 들어간 다음 회사에선 정규직 전환이 안 됐다. 세 번째 회사마저 사정이 나빠지자 이 씨는 장사를 결심했다. 여가시간 없이 주 74시간 노동하는 그의 현재 순소득은 대기업 연봉 수준이다. “대기업이 아닌 회사 생활도 불안정하더라고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생각하면 회사 다닐 때가 낫긴 하죠. 직장인은 그래도 주말은 쉬잖아요.” 미혼인 그의 유일한 낙은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축구다. 사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하다. 피곤할 법도 하지만 자는 시간을 쪼개가며 매주 참석한다. 대학생 때 그는 일주일에 네댓 번씩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질 만큼 사람을 좋아했다. 딱 이틀 가게 문을 닫은 날에도 이 씨는 친구들과 여행을 다녀왔다. 가족과도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당분간은 유예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워라밸을 (일에) 다 갈아 넣고 있지만, 나중에 결혼하면 가족과 놀면서 지낼 거예요. 젊을 때 부지런히 벌어 가족을 편하게 해주는 게 꿈입니다.” 오후 11시 반. 아르바이트생들을 30분 일찍 퇴근시킨 이 씨는 주문 마감시간인 밤 12시까지 텅 빈 가게를 지켰다. 마감 후에도 뒷정리하느라 다음 날 0시 35분이 돼서야 가게를 나섰다. 이 씨 가게에 불이 꺼지자 거리는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서울시내 다른 번화가와 달리 간판에 불이 들어온 곳이 이 거리에는 거의 없었다. 최근 길 건너 상권이 번화하면서 이 씨 쪽 동네는 ‘죽어가는 상권’이라는 말이 돈다. 그의 가게는 비교적 잘되는 편이지만 매출은 하락세다. 이 씨는 “가맹 계약이 끝나는 7개월 뒤에도 여기서 장사를 할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 씨가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게를 시작하며 가까운 곳에 얻은 집까지 걸리는 시간은 단 2분. 이 씨의 ‘일’과 ‘삶’은 같은 공간에 있었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1998년 여성으로는 첫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이 된 그로 할렘 브룬틀란 전 노르웨이 총리는 자기 곁에서 누군가 휴대전화를 쓰면 힘들어했다. 두통 때문이었다. 의사이자 공중보건학자인 브룬틀란은 휴대전화 전자파가 두통을 일으킨다고 믿었다. 일상생활의 전자기기가 내뿜는 전자파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다만 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는 휴대전화 전자파를 ‘발암가능물질’로 분류했다. 휴대전화 전자파와 암 발생 사이에는 제한적이고 약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IARC는 담배에 대해서는 단호하다. 석면, 벤젠 등 117종의 물질과 함께 ‘발암물질’로 분류했다. 오랜 인체 역학조사를 통해 암을 비롯한 각종 질병을 유발하는 증거를 충분히 확보했다는 얘기다. 출시 1년 만에 국내 담배시장 점유율 10%에 육박한 궐련형 전자담배가 파고든 틈새는 여기다. 일반 담배보다 덜 해롭다는 것. 식품의약품안전처가 “궐련형 전자담배도 타르, 벤젠 등 유해물질이 검출됐다”고 하자 미국 필립모리스가 행정소송까지 내며 발끈한 것도 상품의 특장으로 내세운 부분을 건드려서일 터다. ▷유해성 논란에 전자파까지 가세한다면 어떨까. 동아일보가 국가금연지원센터 등과 함께 국내 시판되는 궐련형 전자담배 3종을 분석한 결과 0.68∼3.18μT(마이크로테슬라)의 전자파가 검출됐다. 이 3종은 전자파가 가할 수 있는 인체 손상 등을 방지하기 위한 인증을 받지 않아도 된다. 검출된 전자파 수치가 인체에 유해한지는 전문가들 의견이 엇갈린다. 그래도 찜찜하다고 느낄 전자담배 흡연자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담배업계는 전자담배 시장을 유망하다고 본다. 최근 ‘말버러’로 유명한 미국 담배회사 알트리아는 전자담배업체 ‘줄’의 지분 35%를 1조4000억 원에 사들였다. 문제점도 적지 않다. 불을 붙이지 않아도 되고 냄새도 거의 없어 청소년이 일반 담배보다 거리낌 없이 접할 수 있다는 건 외국만의 일이 아니다. 전자파 때문에라도 전자담배, 나아가 담배를 끊겠다는 새해 결심을 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겠다.민동용 논설위원 mindy@donga.com}
사람의 오감에서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 청각과 촉각이다. 임종기(臨終期)에 접어들어 의식이 흐릿해도 인공호흡기를 붙일 때 아픔을 느낀다고 한다. 기도에 플라스틱 관을 넣는 삽관은 고통이 극심해 정신적 충격까지 받을 수 있다. 몇 년 전 뉴질랜드의 79세 할머니는 가슴에 ‘Do Not Resuscitate’(소생시키지 말라)라는 문신을 새겼다. 의식을 잃었을 때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삽입 같은 연명의료로 고통을 연장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품위 있게 죽을 권리’를 세상에 알린 건 1975년 미국 뉴저지의 21세 여성 캐런 퀸란 사건이었다. 급성 약물중독으로 뇌 기능이 멈추자 그의 부모는 딸의 생명 유지 장치를 떼어달라고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1심은 기각했지만 대법원은 인정했다. 퀸란은 인공호흡기를 떼고 9년을 더 살았다. 회생 가능성은 없다지만 온갖 기기를 주렁주렁 매단 채 가족들과 함께 있지도 못하는 중환자실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싶다. ▷임종을 앞둔 환자의 통증과 가족의 심적 고통을 덜어주는 의료 시스템을 비교 평가하는 지표로 ‘죽음의 질(質)’이 있다. 한국은 2010년 40개국 중 32위에서 2015년 80개국 중 18위로 나아졌다. 그러나 건강보험과 국민연금제도가 더 나은 의료 정책을 만들 것이라는 기대가 순위를 높였을 뿐 호스피스 등 완화의료 시스템이나 환자 통증을 낮춰주는 마약성 진통제 사용 등은 한참 밑이었다. 생명 연장에만 급급해 환자가 뒷전이 된 셈이다. ▷환자의 결정이나 가족 동의로 연명의료를 안 받아도 되도록 2월 시행된 연명의료결정법이 개정됐다. 환자의 의사를 확인할 수 없을 때 19세 이상 배우자 및 직계 존·비속 전원의 서명이 필요했는데 내년 3월부터 손자, 손녀 동의는 없어도 된다. 그렇다고 환자의 생명 의지를 외면해서는 안 될 일이다. 말기 암이지만 연명의료를 중단하고 따뜻한 ‘생전 장례식’을 치른 85세 김병국 씨는 “나는 삶을 포기한 적이 없다. 내 삶을 온전한 모습으로 완성하고 싶을 뿐”이라고 했다. 삶의 마지막을 어떻게 맞을지 생각해 보게 된다. 민동용 논설위원 mindy@donga.com}
110101-100001. 1968년 11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에게 대한민국 1호로 발급된 주민등록번호다. 앞 6자리는 지역을, 뒤 6자리는 성별과 거주 세대 및 개인 번호를 나타냈다. ‘시민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고 반국가적 불순분자를 색출, 제거한다’는 명분과 함께 주민등록증은 탄생했다. 양손 엄지손가락 지장을 찍어야 하고, 휴대 및 제시 의무까지 있어 기본권 침해라는 논란이 적지 않았다. ▷1965년부터 추진됐지만 반대 여론에 번번이 막히던 주민번호제도는 1968년 중대한 안보 상황 덕을 봤다. 북한 특수부대 요원들이 청와대 인근까지 침투해 대통령을 노린 1·21사태에 이어 이틀 뒤 동해 공해상에서 미국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피랍됐다. 주민번호 발급 3주 전 터진 울진·삼척무장공비침투사건은 종지부였다. 열 손가락 지문을 찍게 된 건 유신체제가 굳어진 1975년. 앞 6자리에 생년월일을 넣고 뒤 7자리에 성별, 지역, 출생신고지 고유번호 등을 넣는 13자리 주민번호도 이때 생겼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5개국 이상은 개인 식별을 위해 개인고유번호, 신분증번호, 국가신분증 등을 쓴다. 북한에는 공민증이 있지만 거주지를 제한하고 이동을 통제하는 수단일 뿐이다. 6자리 공민번호를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고 한다. 개인의 특정 고유 정보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죽을 때까지 바꾸지 않고, 각양각색의 개인정보가 주민번호를 토대로 형성되는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정부의 통제를 벗어날 개인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분출되던 주민번호 개선론은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면서 ‘개인정보 유출 방지’ 차원이 대세다. 성별번호가 남성은 각각 1, 3번인데 여성은 그 뒤인 2, 4번인 것은 남녀평등에 위배된다는 교체론도 있다. 생년월일과 성별 등이 아닌 임의 번호를 부여하자는 주민등록법 개정안이 국회 계류 중이다. 주민번호가 일상생활 전반에 너무 촘촘히 사용돼 경제적 사회적 교체비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내일이 주민번호가 탄생한 지 50년 되는 날이다.민동용 논설위원 mindy@donga.com}
영국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은 중앙 탑에 있는 감시자를 수감자는 볼 수 없도록 설계된 원형 감옥인 패놉티콘 개념과 설계도를 제시했다. 보이지 않는 감시자의 시선을 느끼는 수감자가 더 잘 교화된다는 것이다. 미셸 푸코는 이 개념을 확장해 ‘감시자 없이 모두가 모두를 감시하는 형태’를 근대사회로 봤다. 개인이 첨단 정보기술(IT)에 통제되다시피 하는 21세기는 ‘디지털 패놉티콘’이라고도 불린다. ▷현대인은 자신의 정보가 인터넷에 연결된 IT 기기를 통해 사이버 공간에 저장되는 것을 알지만 묵인한다. ‘자발적으로 디지털 패놉티콘에 참여한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그렇다고 일거수일투족을 누군가 몰래 들여다보는 것까지 방조할 수는 없다. 최근 가정용 폐쇄회로(CC)TV를 해킹해 여성 수천 명의 사생활을 엿본 일당이 붙잡혔다. CCTV뿐만이 아니다. 인터넷 카메라(IP 카메라)를 비롯해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비디오게임기부터 로봇청소기나 스마트TV 등 사물인터넷(IoT) 가전제품을 해킹해 훔쳐본 타인의 일상이 담긴 동영상이 인터넷상에 퍼져 간다. ▷아이 돌보미에게 맡긴 아이가 집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보려고 설치한 IP 카메라는 손수건으로 덮는다. 노트북 웹카메라 렌즈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스마트폰은 뒤집어 놓는다. ‘렌즈 포비아’다. 정부는 지난해 홈·가전 IoT 보안가이드를 발표하고 IoT 기기 업체가 개발 단계부터 보안성을 높이도록 했다. 그러나 저가의 중국산은 해당 사항이 아니다. 중국에서는 3만 원만 내면 IP 카메라 해킹 소프트웨어를 살 수 있다. ▷인터넷 보안 전문가들은 ‘0000’같이 설정된 비밀번호 해킹에는 10초도 안 걸린다고 말한다. IoT 가전제품 초기 비밀번호를 복잡하게 바꾸고 주기적으로 변경하며 소프트웨어를 최신 상태로 업데이트해야 하는 이유다. IP 카메라는 정말 필요한지 고민해야 한다. 구입했다면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데는 설치하지 말고 쓰지 않을 때는 전원을 꺼놓는 게 기본이다. 집 밖에서는 불법 촬영용 뚫린 구멍이 없는지 살펴봐야 하고 집 안에서는 ‘관음의 렌즈’를 경계해야 하는 위험한 시대다. 민동용 논설위원 mindy@donga.com}
미국은 자국 군사기술을 탈취해 간 중국 스파이의 시조(始祖)로 첸쉐썬 박사를 지목한다. 중국에서 ‘미사일의 아버지’로 불리는 첸 박사는 양탄일성(兩彈一星·원자폭탄 수소폭탄 인공위성) 개발을 주도했다. 그러나 1999년 미 하원 특별위원회의 일명 ‘콕스 보고서’는 그가 1930년대 중반∼1950년대 중반 캘리포니아 제트추진연구소 등에서 일하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기밀을 빼갔다고 밝혔다. 중국 정부는 공식 부인했다. ▷옛 소련 몰락 이후 중국은 스파이 세계에서 미국의 주요 상대다. 연방수사국(FBI)의 전직 중국 분석가는 중국의 첩보전 스타일을 이렇게 묘사했다. “해변의 모래가 목표라면 러시아는 밤에 잠수정에 잠수부들을 태우고 가서 몰래 모래를 퍼온다. 미국은 인공위성을 최대한 가동한다. 중국은 모래 한 톨씩 가져오라는 특명을 받은 관광객 수천 명을 몇 년에 걸쳐 보낸다. 이들이 돌아와 수건을 털면 누구보다 더 많은 정보가 쌓인다.” 인해전술과 고도의 인내심이다. ▷2035년까지 자국 기술 표준을 세계에 적용시키겠다는 ‘중국 표준 2035’를 앞세운 중국의 첨단기술 탈취 시도에 미국은 민감하다. 미국 정부는 최근 항공우주산업 및 항공기 기술을 훔치려 한 혐의로 중국 국가안전부 소속 장교 및 요원들과 중국인 엔지니어 등을 잇달아 기소했다. 앞서 6월에는 “중국 국가안전부가 배치한 산업스파이 4만 명이 세계를 염탐한다”고 주장한 데 이어 중국을 가장 위협적인 스파이 국가로 꼽았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지난해 2035년까지 사회주의 현대화를 실현하고 2050년까지 중국을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으로 만들겠다고 천명했다. 사실상 패권경쟁을 선언한 셈이지만 첨단기술 훔치기는 미국 따라잡기에 갈 길이 멀다는 조바심의 표현이기도 하다. “우리 기술에 대한 싹쓸이 절도를 묵과할 수 없다”며 미국이 고삐를 더욱 죄는 것은 중국몽(中國夢)의 싹을 아예 잘라버리겠다는 의지로도 비친다. 1972년 미중 관계 정상화 이후 공존하던 두 강대국이 무역전쟁을 넘어 더 큰 충돌을 예고하는 것일까. 민동용 논설위원 mindy@donga.com}
2008년 취재진이 가득 모인 기자회견장에서 가수 나훈아 씨가 갑자기 탁자에 올라섰다. 허리띠를 풀고 바지 지퍼를 반쯤 내린 나 씨는 “5분을 보여 드리겠다. (보여줘서) 아니면 믿으시겠느냐”라고 외쳤다. 일본 야쿠자가 그의 신체 일부를 훼손했다는 등 자신을 둘러싼 각종 루머를 반박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믿습니다”라는 여성 팬들의 고함에 그는 잠시 좌중을 노려보곤 내려왔다. ▷경찰이 어제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자택과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했다. 그런데 압수수색 대상에 신체도 포함되면서 세인의 관심이 여기에 집중됐다. 사람들은 ‘신체’란 말에서 작가 공지영 씨와 통화하며 “이 지사 신체 특정 부위에는 크고 까만 점이 있다”고 밝힌 배우 김부선 씨를 떠올린 듯하다. 경찰은 어제 압수수색은 이 지사가 친형을 강제 입원시켰다는 의혹 등에 관한 것이지, 김 씨와의 ‘스캔들’ 의혹과 관련된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압수수색 대상에는 보통 차량, 주거와 함께 신체가 들어간다. 휴대전화가 중요한 압수물인 세상에서는 더 그렇다. 그러니 이 지사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은 특별할 것도 없는데 관심이 엉뚱하게 흘렀다. 몸에 점이 있는지 확인하는 절차는 신체검사로 검증에 해당한다. 압수수색 영장이 문서형식상 압수수색검증 영장이라는 표제를 달고 있지만 검증까지 포함하는지는 내용을 봐야 한다. 신체검사가 영장에 포함된다면 검사할 신체 부위와 검증 방식 등이 기록된다. 이날 경찰의 압수수색 영장에 그런 내용은 없었다고 한다. ▷선거 과정에서 불거진 고소·고발은 선거 후 당사자들끼리 취하하는 게 일반적이다. 취임 100일이 지났는데도 몇 년 전의 일로 수사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 지사로서는 답답할 터다. 하지만 더 답답한 쪽은 그가 경기도정을 잘 이끌어주기를 바라는 1300만 도민이 아닐까. 이 지사 측은 공인된 의료기관을 통해 검증받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지사가 해명할 것은 해명하고, 수사당국도 불필요한 논란을 최소화하면서 진실을 밝히는 데 힘써야 한다.민동용 논설위원 mindy@donga.com}
지난해 말 이사를 하려고 이삿짐센터 몇 곳에 견적을 내달라고 했다. 한 업체가 다른 데보다 20만 원가량 더 책정했기에 이유를 물었다. 50대 업체 대표는 “저희는 일하는 사람이 다 한국인이어서 말이 잘 통한다. 짐을 옮기다 실수하는 일이 거의 없다”고 답했다. 그는 “요즘 젊은이들, 육체노동 잘 안 하잖아요”라고 했다. ▷1990년대 초반 한국과 일본에서는 각각 ‘3D’와 ‘3K’라는 말이 유행했다. 3D는 더럽고(dirty) 힘들고(difficult) 위험한(dangerous) 일을, 3K는 일본어로 위험(기켄)하고 고되고(기쓰이) 불결한(기타나이) 일을 말했다. 한국과 일본 청년들이 3D·3K 직종을 기피하자 대안은 외국인 노동자였다. 1990년 12월 28일자 동아일보 기사 제목은 이랬다. ‘외국 막일꾼 떼 지어 온다.’ 중소기업 인력난이 심해지고 불법 외국인 노동자가 늘자 정부는 1994년 6월 인력시장을 공식 개방해 네팔인 산업기술연수생 30명이 처음 입국했다. ▷24년이 지난 현재 취업비자를 받은 외국인 노동자는 100만 명을 넘었다. 불법 체류자로 추산되는 30여만 명을 더하면 약 130만 명이 대부분 몸을 쓰는 전국 일터에서 일한다. 아파트 신축 공사장에 중국어로 된 작업자 안전수칙 안내판이 세워진 지 오래고, 한국인들은 건설현장 주변에서 ‘불법 외국인 추방’을 외치며 시위를 벌인다. 서울의 모텔 청소원은 우즈베키스탄 출신, 식당 주방일이나 요양원 간병인은 중국동포, 지방 영세 공장에는 베트남 출신이 많다. 선원 6만 명 가운데 외국인이 2만5000명이나 된다. 충북 파프리카농장에서 제주 광어양식장까지 이들이 없으면 일이 돌아가지 않는다. ▷외국인 노동자 급증은 한국과 일본이 마찬가지인데 양상은 과거와 아주 다르다. 아베노믹스 호황으로 구인난에 허덕이는 일본은 그동안 장기 체류를 허용하지 않던 단순노무직 문호마저 외국인 노동자에게 열었다. 반면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여파로 임시직·일용직 일자리가 급감한 한국인 50, 60대는 인력시장에서도 중국인 20, 30대에게 밀려난다. 외국인 노동자를 바라보는 시선도 양국이 많이 다를 것이다. 민동용 논설위원 mindy@donga.com}
2015년 2월 26일 간통죄 위헌 결정이 나오자 콘돔 제조업체 주가가 상한가를 쳤다. ‘간통죄 폐지 테마주’라며 피임약 제조업체도 언급됐다. 정작 이들 업체 뒤에서 표정 관리를 한 업종은 심부름센터였다. 배우자, 특히 남편의 외도를 의심해 ‘뒷조사’를 의뢰하는 여성이 늘어날 것이라고 본 것이다. 심부름센터 의뢰인 10명 중 8명이 여성이고 대부분 주부라는 보도까지 나왔다. ▷정보통신기술(ICT)의 발달로 뒷조사 기법도 첨단을 달린다. 스마트폰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척 악성 코드를 심어 통화 내용이나 동영상,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대화를 들여다보는 건 보통이다. 몰래카메라, 차량 위치추적기 등을 동원한 사생활 추적도 공권력 뺨친다고 한다. 물론 이런 심부름센터의 뒷조사는 불법이다.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신용정보보호법) 40조는 신용정보회사 말고는 특정인의 사생활을 조사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없고, 탐정이라는 명칭도 사용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셜록 홈스라도 한국에선 탐정사무실을 낼 수 없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주로 전직 수사관들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모두 허용하듯, 차라리 탐정을 제도화해 엄격히 관리해야 불법적 사생활 캐기가 사라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1999년 이래 국회에 탐정 입법안 7건이 발의됐지만 번번이 통과하지 못했다. 경찰청과 법무부의 밥그릇 다툼 때문이라는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헌법재판소가 어제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신용정보보호법 40조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요즘 몰래카메라나 차량 위치추적기 등을 이용해 남의 사생활을 캐는 행위가 사회 문제로 대두된 현실을 고려할 때, 특정인의 사생활 조사 비즈니스를 금지하는 것 말고는 사생활의 비밀과 평온을 보호할 방법이 없다는 판단에서다. 탐정이라는 명칭도 탐정소설이나 영화에서 너무 멋지게 등장하는 탓에 사생활 조사를 적법하게 할 권한이 있는 것처럼 오인될 수 있다며 못 쓰도록 했다. 국민의 사생활과 기본권이 지금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임을 새삼 일깨워준 셈이다. 민동용 논설위원 mindy@donga.com}
경기 용인시가 내년부터 중학교와 고등학교 신입생 전원에게 교복을 무상으로 지원한다. 전국에서 처음이다. 용인시는 중고교 신입생에게 교복구매비를 지급하는 용인시 교복지원 조례안이 17일 용인시의회 본회의에서 전체 의원 27명(자유한국당 더불어민주당 각 13명, 국민의당 1명) 만장일치로 통과됐다고 밝혔다. 자유한국당 소속 정찬민 시장의 무상 교복사업에 반대하던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고교 무상급식 확대 등을 조건으로 찬성했다. 용인시는 경기도에 보고한 뒤 다음 달 초 조례를 확정 공포할 예정이다. 용인시의 내년 중고교 진학자는 중학생 1만1000여 명, 고등학생 1만2000여 명 등 모두 2만3000명으로 추정된다. 지원금액은 시장이 매년 정하도록 했다. 내년도 지원금은 교육부가 산정한 학교 주관 구매 상한가(1인당 29만6130원)를 기준으로 약 68억 원이 들 것으로 전망된다. 교복구매비를 받으려면 신청서를 작성해 시청이나 읍면동 주민센터에 제출하면 된다. 중고교 무상교복 지원은 정 시장이 앞서 7월 제안했다. 정 시장은 각계 의견을 수렴했고, 8월에는 전국 처음으로 중학교 신입생에게 무상교복을 지원한 이재명 경기 성남시장을 만나기도 했다.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서울시는 18일 자치권을 재확인하는 ‘서울특별시 자치헌장 조례’를 공포했다. 일부 자치구가 주민자치 기본조례를 제정한 적은 있지만 광역자치단체가 입법 조직 재정의 자치를 규정한 조례를 만든 것은 처음이다. 다만 선언적인 성격이 짙어 실질적 효과는 미지수다. 이날 공포된 자치헌장은 ‘법령에 위반하지 않는 범위에서 조례를 제정할 수 있다’고 규정해 자치입법권의 의미를 강화했다. 지방자치단체의 법률이라 할 수 있는 조례는 헌법과 지방자치법에 따르면 ‘법령의 범위 안에서, 법률의 위임이 있어야’ 제정하도록 돼 있다. 이 때문에 최소한 지방자치법의 해당 조항을 개정하지 않는다면 이번 자치헌장 조례의 해당 규정은 선언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에 대해 서울시는 ‘장기전’을 통해 지방자치법 개정을 이끌어낸다는 복안이다. 시는 이날 “자치헌장을 바탕으로 법령에 저촉되지 않도록 조례를 만들어 정책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조례 내용이 상위법인 법률과 충돌해 중앙정부와 갈등이 생기면 대법원에 판단을 맡기는데 지금까지 지자체 손을 들어준 판례가 많다는 것. 결국 이 같은 판례를 계속 쌓아 가면 지방자치법 개정 여론이 커질 것이라는 계산이다. 박대우 서울시 정책기획관은 “지방자치 권한을 명확하게 규정함으로써 지방분권에 대한 사회적 어젠다를 제시하겠다”고 말했다. 자치조직권과 관련해선 중앙정부가 지자체 행정기구와 정원을 결정할 때 인건비 같은 최소한의 분야에 그쳐야 한다고 규정했다. 현재는 지자체 조직 및 그 구성원 수까지 정한다. 한편 자치헌장에 ‘차별금지’ 조항이 없는 것이 눈에 띈다. 당초 박원순 시장은 시민의 권리의 하나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넣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단체와 보수단체가 ‘동성애자의 권리까지 서울시가 보호해야 하느냐’며 비판하자 한발 물러선 것으로 보인다. 박 시장은 2015년에도 서울시 인권헌장의 ‘성소수자 차별 금지’ 조항이 보수단체와 종교단체의 반발에 부닥치자 인권헌장 채택을 무산시켰다. 노지현 기자isityou@donga.com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한 뒤 대선 주자들이 쏟아 놓은 말들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더불어민주당 소속 안희정 충남도지사의 13일 발언이다. 이날 충남 천안시 충남북부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충남경제포럼 조찬 특강 강연자로 나선 안 지사는 다른 대선 주자들처럼 ‘새로운 대한민국’을 화두로 삼았지만 내용은 사뭇 달랐다. 안 지사는 “촛불 광장과 대한민국의 이 커다란 전환은,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문구의 의미는 ‘나는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빼앗기지 않겠지만, 시민과 주권자로서의 의무도 절대로 방기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가야 된다”고 말했다. 이어 “그런데 여전히 이 국면에서 정치는 ‘나 대통령 시켜 주면 내가 해줄게’의 관점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우리는 국민의 권리를 강조하고, 국가의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의 동전의 뒷면에는 국민의 의무와 국가의 미래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 함께 있다고 생각한다”며 “만약 권리와 의무를 우리가 동등하게 보지 않는다면 ‘똑똑한 대통령 하나 뽑아 팔자 고쳐 보자’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면 곧, 또 실망감이 몰려올 것이다”라고 했다. 그즈음 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는 “(헌법재판소가 탄핵 기각을 결정하면) 다음은 ‘혁명’밖에 없다”고 했다. 이른바 촛불 민심을 광장민주주의로 찬양하던 때였다. 유력 정치인들이 ‘강물의 힘으로 배를 뜨게 하지만 강물이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군주민수(君舟民水)라는 사자성어를 들먹이며 국민 된 권리를 떠받들던 때였다. ‘이 위대한 국민의 뜻에 따라 국가 대개조를 하겠다. 지켜봐 달라’고 구애하던 때였다. 그런데 안 지사는 ‘눈치도 없이’ 국민의 의무를 같이 강조하고 나섰다. 그의 설명은 이랬다. “제 정치적 리더십의 핵심은 ‘가만히 계세요. 내가 알아서 해 줄게요’가 아니다. ‘함께 합시다’이다. (국민이) 함께 해주지 않는 이상 어떠한 창의도, 혁신도 일어나지 않는다.” 지지율 5%를 넘기 힘든 안 지사는 ‘발이 땅에서 30cm 정도 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의 대학 은사인 도올 김용옥은 “철학을 하는 나보다 더 추상적”이라고 했다. ‘가식적으로 보인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다른’ 목소리를 내는 정치인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후 안 지사의 발언은 달라졌다. “국민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속지 말라”고 했고 문 전 대표를 겨냥해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는 “대선 경선이 다가올수록 내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는 어법을 사용하겠다. 점점 선명해질 것”이라고 자신의 ‘변화’를 해명했다. 안 지사 측은 “언론은 ‘함께 합시다’라는 뜻에는 관심이 없다. 유력 주자를 공격해야 기사가 난다. 인지도를 높이려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안 지사에게 이상과 현실의 거리는 아직도 멀었다. 민동용 정치부 차장 mindy@donga.com}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로 가는 길에 택시를 탔다. 택시운전사가 “손님, 오늘 오전 청문회 보셨어요?”라고 묻더니 말을 이어갔다. “아주 코미디예요. 코미디. 우병우(전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 기껏 불러다 놓고 지들(의원들)끼리 한 시간을 넘게 싸우더라고요. 허허.” 이날 국회에서 열린 최순실 국정농단 국정조사특별위원회 5차 청문회 얘기였다. 이른바 태블릿PC 진위를 놓고 위증(僞證) 교사 의혹을 받고 있는 새누리당 이완영 의원이 야당 의원들과 설전을 벌인 것을 TV로 봤다는 운전사는 한심하다는 투였다. 이날로 다섯 차례 청문회까지 마쳤지만 기억나는 것은 증인들의 “모릅니다” “기억나지 않습니다”와 의원들의 “국민이 다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라는 말뿐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의원이 제보를 받아 14일 3차 청문회에서 공개한 ‘최순실 녹취록’이 그나마 눈에 띄었을 뿐이다. 의원들은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자업자득이다. 이날 5차 청문회만 해도 18명의 증인에게 출석요구서를 보냈지만 나온 증인은 단 2명이다. 최순실 정호성 같은 주요 증인은 수감을 이유로 출석 요구를 거부했다. 국회모독죄 고발 운운하지만 전례를 볼 때 벌써부터 흐지부지될 공산이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위증도 마찬가지다. 법에 따르면 위증을 한 증인이나 참고인에 대해 국회가 고발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수사와 재판을 통해 위증임이 밝혀질 때까지 꽤 시일이 걸린다. 거짓말이 확정됐을 때는 그 사안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수그러들었거나 국회의 고발 의지도 거의 사라진 다음이다. 국회 스스로 청문회의 ‘위엄’을 세우지 못해 온 것이다. 이날 청문회에서 야당의 한 의원은 “(우병우 전 민정수석비서관은) 거짓말을 할 때 눈을 세 번 깜박거린다”며 ‘놀라운’ 관찰력을 뽐내기도 했다. 의원들은 증인들이 “모른다” “아니다”라고 했을 때 이를 뒤집을 능력이나 준비가 부족했다. 그저 “또 거짓말이야”라고 다그치는 게 대부분이었다. 정치권에서는 국정조사는 그저 ‘씻김굿’ 같은 통과의례 정도로 보기도 한다. 그게 전부라면 국민이 너무 허전하지 않겠는가.민동용·정치부 mindy@donga.com}
21일 새누리당의 분당으로 ‘보수신당’(가칭) 창당이 가시화되면서 조기 대선을 눈앞에 둔 정계 개편의 출발 신호가 울렸다. 4·13총선을 거치며 이뤄진 야권 1차 분열에 여권 2차 분열이 더해져 유동성과 불확실성이 더욱 커졌다는 게 중론이다. 형식상 4당 체제지만 내용적으론 훨씬 더 복잡하다. 친문(친문재인), 친박(친박근혜), 비문(비문재인)·비박(비박근혜)의 제3지대 등으로 구분될 수도 있고, 보수의 분열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독자세력화, 패권 대 비(非)패권의 구도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 내년 대선까지 숱한 이합집산, 합종연횡이 예고되는 이유다.○ 각개약진(各個躍進) 조만간 신당이 생기면 정치권은 1당이 되는 더불어민주당, 여당인 새누리당, 그리고 그 사이에 국민의당과 보수신당이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이 궤도 밖에 반기문 총장,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등이 위성처럼 위치할 것으로 전망된다. 새누리당 비주류는 보수신당을 플랫폼으로 하는 ‘중도·보수 빅 텐트’를 치며 기존의 보수성향 지지층 재규합과 중도성향 지지층 흡수에 매진할 것으로 보인다. 여당과 박근혜 대통령이라는 틀을 벗어나 새 정당으로 뿌리내리기가 우선이라는 판단에서다. 친박이 잔류하는 새누리당은 당분간 위축된 상황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듯하다. 당내 리더십이 흔들리고 뾰족한 대선 후보마저 없기 때문이다. 탈당할 유승민 의원, 탈당한 남경필 경기도지사는 물론이고 오세훈 전 서울시장, 원희룡 제주도지사, 김기현 울산시장 등 대선 주자로 꼽히는 인사도 신당 합류를 선언했거나 당을 떠날 확률이 높다. 원내 2당이지만 자칫 불임(不姙) 정당이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다. 반면 민주당은 문재인 전 대표를 비롯해 박원순 서울시장, 이재명 성남시장, 안희정 충남도지사 같은 대선 주자들이 건재하다. 국민의당은 안철수 전 상임공동대표가 사실상 독주하고 있다. 보수신당도 유 의원 같은 잠재적 대선 주자들이 각축을 벌이며 지지율 끌어올리기에 힘을 쏟을 것으로 보인다.○ 이합집산(離合集散) 이런 다자 대결 구도는 대선 승리 가능성이라는 점에서 지지율 높은 후보들이 있는 민주당에 유리한 상황이다. 다만 국민의당이나 보수신당이 현재까지는 가장 유력한 문 전 대표에게 집권을 그냥 안겨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게 중론이다. 이른바 ‘비문 전선’이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명분이다. 그중 하나는 개헌이다. 촛불 민심은 더 이상 제왕적 대통령제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최소한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을 이뤄내야 한다는 명분이다. 문 전 대표는 이날 이 같은 개헌 논의를 “정치적 계산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라고 평가절하했다. 달리 얘기하면 개헌이 친문을 고립시키는 제3지대 형성의 열쇠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기존 질서와 새 질서, 또는 패권 대 비(非)패권의 구도다. 헌법재판소가 박 대통령의 탄핵을 인용 결정한다면 보수신당은 ‘박근혜 대통령 부역자’라는 오명을 확실히 떨쳐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문 전 대표(친문 진영)를 패권, 또는 기득권으로 몰아세우며 나머지 범야권이 ‘비패권지대’를 구성하는 시나리오다. 손 전 대표는 이날 “이러한 개혁의 뜻에 동참하는 정치세력을 모아 국민주권개혁회의를 구성하겠다. 내년 2, 3월이면 정치 빅뱅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문 전 대표는 “친문, 친박, 반문 전선이 아니라 결국 민주당 후보와 누군지 모르지만 상대편의 대결이 될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제3지대가 어떻게 꾸려질지는 미지수다. 국민의당 한 의원은 “신(新)질서라는 새로운 깃발 아래 보수신당, 국민의당, 민주당 비문 진영이 다 모이는 정당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친문 진영을 제외한 범야권 후보 단일화도 거론된다. 특히 반 총장이 보수신당이나 국민의당에 합류하거나 독자세력화를 이룬다면 개연성 있는 구상이라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반 총장이나 안 전 대표, 혹은 보수신당 후보가 높은 지지율로 승산이 있다고 판단된다면 제3지대는 구상에만 그칠 수도 있다. 한편 심상정 정의당 상임공동대표는 “대선에서 결선투표를 도입해 범야권 연합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민동용 mindy@donga.com·강경석 기자}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국회 대정부질문에 출석한 20일 하루 종일 정부에는 비상이 걸렸다. 박근혜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된 상황에서 행정부 수반인 황 권한대행과 서열 2위인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국회에 머무른 5시간 동안 북한의 기습 도발 등 분초를 다투는 사태가 벌어지면 대처가 늦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다음 서열인 이준식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대통령 권한대행의 대행’ 역할을 해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황 권한대행은 국회 본회의장으로 들어가면서 “상황을 각별히 잘 챙겨라”라고 국무총리실 간부들에게 당부했다고 한다. 한민구 국방부 장관은 국방부 청사에서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 징후, 휴전선과 서해 북방한계선(NLL)의 북한군 동향을 수시로 보고받으며 전군의 감시 및 경계 태세를 확인하는 등 대응 수위를 높였다고 군 당국은 전했다. 21일 국회 대정부질문에는 한 장관을 비롯해 윤병세 외교부 장관, 홍용표 통일부 장관까지 모두 출석한다. 총리실 관계자는 “급한 상황이 벌어지면 즉각 본회의장으로 들어가 보고하고 황 권한대행이 유선으로 일단 조치한 뒤 최대한 빨리 복귀할 계획이었다”라며 “하지만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평소보다는 시간이 더 걸렸을 것”이라고 전했다. 대통령도, 국무총리도 아닌 ‘대통령 권한대행’이라는 모호한 지위에 놓인 황 권한대행으로서는 ‘협치’라는 명분을 위해 국회에 출석하기는 했지만 자칫 공백이 발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우려를 감수하고 국회에 출석했지만 의원들은 깊이 있게 국정을 논의하기보다는 황 권한대행 개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며 ‘군기 잡기’에 주력했다. 황 권한대행은 “혹시 대통령 출마를 계획하고 있느냐”란 국민의당 채이배 의원의 질문에 “전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다른 의원들이 ‘(황 권한대행이) 황제급 의전을 요구한다’, ‘이미 대통령으로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니냐’ 등 자극적인 질문을 하자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며 “유감으로 생각한다”라고 일축했다. 황 권한대행은 이날 “부득이한 부분에선 인사를 단행해 경제 살리기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하지 않나 판단한다”라고 밝혀 야당이 반대해도 인사권을 일부 행사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다만 “법률로 대통령의 과도한 권한을 견제해야 한다”라는 새누리당 강효상 의원의 지적에는 “논의는 충분히 할 수 있다”라고 말해 개헌 논의 가능성을 열어 뒀다.장택동 will71@donga.com·민동용 기자·윤상호 군사전문기자}
《 19일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한 지 열흘째를 맞는다. ‘심각’ 단계에까지 이른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나 미국의 금리 인상 등 국내외 사회·경제적 위기의 파고는 높지만 정치권은 오히려 태평해 보인다. 국정 운영의 공동 책임을 지겠다는 야당들은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군기 잡기’에 몰두해 있고, 여당은 친박(친박근혜)과 비주류 진영의 자중지란으로 날을 새우고 있다. 황 권한대행은 야권과의 파트너십 구축보다는 ‘홀로 서기’에 더 집중하는 모양새다. 여야정 협의체 구성이 요원해지면서 국정이 장기 표류할 우려는 커져 간다. 》 ○ 野, 국정 주도권 잡기에 올인 더불어민주당은 18일에도 ‘황 권한대행 때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기동민 원내대변인은 이날 서면브리핑에서 “황 권한대행은 어설픈 대통령 흉내 내기를 당장 그만둬야 한다”며 “대정부질문 불참, 과도한 대통령급 의전, 공공기관장 인사 강행까지 민생은 뒷전이고 막무가내 행보로 국민 분노만 자초한다”고 비판했다. 황 권한대행이 20, 21일로 예정된 대정부질문 참석 여부를 명확히 하지 않고, 마사회 이사장 인사를 단행하겠다고 밝힌 것을 지적한 것이다. 기 원내대변인은 이어 “(황 권한대행이)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한일 군위안부 협정 등 대통령과 최순실이 주도한 현 정부 정책을 강행하겠다고 밝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드 배치와 한일 군위안부 협정 과정에 ‘비선 실세’ 최순실 씨가 관여했다는 사실은 이날까지 드러난 게 없다. 민주당은 황 권한대행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아니라 대통령 권한을 잠시 대행하는 ‘국무총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탄핵 정국 초기 거국중립내각과 국회 추천 총리를 얘기할 때는 외치·내치에 관한 대통령의 권한을 모두 갖는 총리라고 했다. 그런 총리를 거부한 민주당이 이제 와서 황 권한대행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탄핵안이 헌법재판소로 넘어간 지 9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촛불 민심에만 기댄다는 비판도 있다. 박경미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촛불의 ‘명령’은 버티기로 일관하는 박 대통령의 퇴진과 구속수사, 황 권한대행 동반사퇴, 헌재의 빠른 인용결정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당에 대해서도 친박 진영 지도부와는 대화하지 않는다는 ‘원칙’만 고수하고 있다. 결국 국정 운영의 공동 책임을 진 다른 두 축에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파상 공세만 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신 못 차린 與, 밀리지 않겠다는 黃 상황이 이런데도 여당은 당내 수습조차 못하고 있다. 친박계는 원내대표 경선 승리로 마치 폐족(廢族)의 위기를 벗고 당 주도권을 다 잡은 듯한 분위기다. 반면 비박(비박근혜)계는 탈당인지, 분당인지, 방향도 정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고 있다. 새누리당 관계자는 이날 “광인(狂人)들의 정당 같다”고 한숨을 쉬었다. 이처럼 주류와 비주류 진영의 갈등 심화로 집안 단속할 여력도 없는 여당이 국정 운영의 한 축이 될 수 있을지 회의적인 시선이 여권 내에서도 적지 않다. 새누리당의 한 비주류 의원은 이날 통화에서 “야당 없이 정부와 ‘친박계 여당’만 합의한다고 국민이 인정해 주겠느냐”며 “뭘 해도 짬짜미란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을 게 뻔하다”고 주장했다. 황 권한대행도 야당에 일방적으로 끌려가지는 않겠다는 태도다. 황 권한대행은 여야정 협의체 참여에 대해 명확한 태도를 밝히지 않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황 권한대행은 사드 배치 등 외교 사안은 상대국이 있는 만큼 예정대로 진행하겠다는 방침”이라고 전했다. 다만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는 교육부에서 23일까지 의견수렴 절차를 진행하고 있는 만큼 결과를 보고 최종 입장을 정리할 계획이다. 국정과 관련된 일정들은 정상적으로 진행하겠다는 뜻도 분명히 하고 있다. 정부는 29일경 황 권한대행 주재로 관계 장관들과 회의를 한 뒤 ‘2017년 경제정책방향’을 발표할 계획이다. 각 부처의 신년 업무보고도 황 권한대행이 받을 예정이다. 민간인 참석 등을 배제하고 형식을 간소화해 짧게 진행할 방침이다. 황 권한대행은 20, 21일 대정부질문에 참석해도 인사말만 하고 질의응답은 응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22일 5차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올 우병우 전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이 부인으로 일관한다면 여야정 관계는 더욱 냉각될 가능성이 높다.민동용 mindy@donga.com·장택동·신진우 기자}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를 인정하면서 과도기적 국정 운영을 위한 여야정 협의체 구성에 합의한 야당들이 황 권한대행에 대한 견제의 고삐를 바짝 죄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 국민의당 김동철 비상대책위원장, 정의당 심상정 상임대표는 13일 오후 국회에서 회동하고 “황 권한대행은 국회 협의 없이는 일상적 국정 운영 이상을 하면 안 된다”고 밝혔다. 국정 역사 교과서 같은 기존 ‘박근혜표’ 정책의 실행은 물론이고 장차관급 인사 등도 사실상 야권과 논의하라는 주문이다. 이와 함께 여당 대표를 제외한 야 3당 대표와 황 권한대행의 회동을 제안했다. 민주당 박경미 대변인은 회동 후 브리핑에서 “행여나 황 권한대행이 국정 전반의 운영에 선제적으로 나설 작정이라면 어림도 없다. 새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얌전히 국회의 뜻을 받들라”고 못을 박았다. 새누리당 내홍으로 여야정 협의체 구성이 어렵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공동 책임을 지겠다는 야권이 황 권한대행을 국정 운영의 파트너로 보지 않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황 권한대행은 전날 국회가 제안한 여야정 협의체에 참가할지와 20, 21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 참석할지에 대해서는 이날도 명확한 태도를 밝히지 않았다. 국무총리실은 “정치권에서 여야정 협의체와 관련해 구체적인 제의를 하면 적극 검토하겠다”고만 밝혔다. 민동용 mindy@donga.com·장택동 기자}
‘탄핵안 가결 이후’ 국정 컨트롤타워의 한 축은 국회여야 한다는 생각이 정치권에 퍼져 있다. 기존의 당정청 정책협의 체제에서 국회와 정부의 협의 체제로 바꿔야 한다는 인식이다. 협의체 구성에 대한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공식 언급은 아직 없지만 홀로 국정을 운영할 동력이 부족해 반대하기는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다만 계파 간 주도권 경쟁에 들어간 새누리당이 새 지도부 옹립에 애를 먹고 있어 협의체 구성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禹 “친박 지도부와는 대화 거부”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은 11일 일단 황 권한대행 체제를 인정했다. 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 기자간담회에서 “국가 안정을 위해 ‘황교안 체제’를 묵인하지만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국민의당 박지원 원내대표도 “헌법 질서를 지키면서 법치를 강조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촛불 민심을 국회가 바통 터치해야 한다”는 박 원내대표의 말처럼 조기 대선까지 국정 운영의 주체는 국회라는 생각이 명확하다. 탄핵안 통과에 촛불 민심의 힘이 컸지만 국정 수습은 국회에 맡겨 달라는 주문이다. 민주당 추미애 대표, 국민의당 안철수 전 상임공동대표에 이어 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도 이날 여야정 협의체 구성을 촉구했다.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는 콕 찍어서 “안 전 대표의 여야정 협의체 제안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문 전 대표는 이날 협의체에 시민사회도 참여하는 방안을 제안했지만 우 원내대표는 “당은 당대로 알아서 하겠다”고 사실상 거부했다. 다만 2야(野)의 파트너가 될 새 지도부를 새누리당이 쉽게 정하지 못한다는 게 문제다. 여당을 빼놓은 협의체를 정부가 응할 리 없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는 페이스북에 “국민의당 안 전 대표의 여야정 협의체 제안은 바람직한 구상으로 평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우 원내대표는 “(새 지도부가) 친박(친박근혜) 지도부라면 일체의 대화를 거부하겠다. 그렇다면 국정 혼란이 오지 않겠는가”라며 친박 진영을 압박했다. 사실상 공백인 경제 컨트롤타워를 협의체 구성보다 먼저 세워야 한다는 주장도 계속됐다. 안 전 대표는 “경제부총리를 다음 주에 정하자”며 “민주당의 뜻을 따르겠다”고 말했다. 유일호 경제부총리와 임종룡 경제부총리 후보자가 공존하는 혼란상 해소를 위한 논의의 물꼬를 튼 셈이다. 우 원내대표도 “의원총회에서 의견을 수렴하겠다”고 밝혔다. 새누리당, 민주당, 국민의당 원내대표는 12일 오후 국회에서 회담을 하기로 했다. 12월 임시국회 일정 조율과 협의체 구성, 민생·경제·국방·외교안보 등의 현안 선정 등과 함께 경제부총리 문제도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 野, 박근혜표 정책 뒤집자? 국회·정부의 국정 협의체가 이뤄져도 야권이 촛불 민심을 수용한다며 ‘박근혜표 정책 폐기’ 주장을 쏟아낸다면 황 권한대행 체제와 갈등이 우려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야당들은 △국정 역사 교과서 채택 △한일 위안부 합의 △한일 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성과연봉제 등에 반대하고 있다. 우 원내대표는 이날 “롯데와 땅(부지) 문제도 해결 안 됐는데 5월 전 (사드) 배치는 무리”라고 사견임을 전제로 말했다. 그러나 정치권 일각에서는 조기 대선을 몇 개월 앞둔 ‘시한부 과도정부’ 체제에서 기존 정책 뒤집기를 무리하게 밀고 나간다면 자충수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국정 교과서 문제는 이념과 진영의 대립이 거세기 때문에 갈등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자칫 황 권한대행이 국정 교과서 집행을 고수하고, 이에 반발한 야권이 ‘황교안 탄핵’ 카드를 꺼낸다면 또 다른 국정 혼란이 초래될 위험성도 있다. 이 때문에 박 원내대표는 이날 “‘4·19’ 이후 이승만 대통령 장기 집권에서 쌓였던 모든 불만이 분출했고 혼란이 온 결과는 5·16쿠데타였다”고 과도한 정책 뒤집기에 경고 신호를 보냈다. 민동용 mindy@donga.com·유근형 기자}
“이제 탄핵안은 우리 손을 떠났다. 지금 이 순간부터 국회도 국정의 한 축으로 나라가 안정될 수 있도록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9일 오후 4시 10분경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직후 정세균 국회의장은 이렇게 국회의 역할을 강조했다. 탄핵안 처리 전까지 “탄핵 이후가 더 막막하다”는 우려가 많았다. 집권 여당은 자중지란에 빠졌고, 야권은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촛불 민심에 기대 오락가락했다. 국정 공백이 뻔히 예견됐지만 야권은 조기 대선을 염두에 둔 듯한 태도를 드러내기도 했다. 탄핵이라는 헌법 절차를 밟으면서도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 등은 “탄핵안이 가결되더라도 박 대통령은 즉각 퇴진해야 한다”고 말해 ‘반(反)헌법적’ 발언이라는 논란을 불렀다. 민주당 추미애 대표는 탄핵 이후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을 황교안 국무총리까지도 물러나야 한다는 취지로 내각 총사퇴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제 황교안 권한대행이 ‘대한민국호’의 임시 선장이 됐다. 그러나 ‘최순실 게이트의 방조자’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는 그가 기존 내각을 이끌고 정치·경제·외교안보 위기라는 삼각파도를 헤쳐 낼지 의문이라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이 때문에 또 다른 선출 권력인 국회가 이제까지의 모습을 탈피해 국정 운영의 한 축 역할을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야권도 일단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추 대표는 탄핵안 국회 통과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무엇보다 국정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하고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결정이 조기에 마무리될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또, 황 권한대행 퇴진 요구와 관련한 질문에도 “경제·민생·안전에 우선해 정치적 논쟁을 먼저 하는 것은 자제하겠다”며 말을 아꼈다. 민주당 일각에서는 탄핵 이후 민생과 경제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 수권정당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자는 기조로 전환하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민주당 관계자도 “내각 총사퇴 주장은 황 권한대행에게 민심과 달리 독주하거나 오버하지 말라는 경고였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야권은 이날도 헌법재판소의 최종 결정을 기다리며 정국 수습에 전념하겠다는 명확한 선언은 하지 않았다. 여전히 꺼지지 않고 있는 촛불 민심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탄핵안 가결 직후 문 전 대표는 ‘퇴진’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지만 “박 대통령이 스스로 결단해야 한다”고 여지를 남겼다. 대선 후보 지지율이 급상승하고 있는 이재명 경기 성남시장도 “대통령 퇴진 투쟁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했다. 국민의당 김동철 비상대책위원장은 “국민의 명령에 따라서 조속히 자진해서 대통령이 결단해 주실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가 당 대변인이 수위를 낮추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당장 10일 서울 광화문 촛불집회에도 문 전 대표, 이 시장, 박원순 서울시장, 추 대표 등은 참석할 예정이다. 민주당이 여, 야, 정부가 함께 국정을 논의하는 국회·정부정책협의체 구성을 제안하기는 했지만 당 주도권 전쟁 국면에 접어든 여당 내 파트너가 없어 ‘정치 진공’ 상태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길게는 240일 동안 국회가 책임 있는 자세로 국정 운영을 담당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명호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야권 주도의 국회와 황 권한대행 간의 협치가 중요하다”며 “국가적 긴급 상황 대비책 마련, 정치 일정의 예측 가능성 제고, 그리고 개헌 논의에 이르기까지 국회가 떠맡을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민동용 mindy@donga.com·황형준 기자}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처리를 하루 앞둔 8일 더불어민주당은 탄핵을 기정사실화하며 황교안 국무총리도 사퇴해야 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문재인 전 대표가 탄핵안이 가결돼도 박 대통령 즉각 퇴진 운동을 하겠다고 한 데 더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을 인사마저 물러나라는 것이다. 민주당은 지난달 박 대통령의 국회 총리 추천 요구를 거절했고, 국민의당의 ‘선(先) 총리 추천, 후(後) 탄핵’ 제안도 묵살했다. 탄핵이라는 헌법 절차를 진행하면서도 그 헌법이 정한 규정을 무시하려는 속내에는 조기 대선을 앞둔 정략적 판단이 깔려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민주당 추미애 대표는 이날 오후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탄핵안의 뜻에는 내각 불신임이 포함됐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전날 라디오 인터뷰에서 밝힌 “황교안 권한대행 체제는 국민이 받아들일 수 없다. 내각 총사퇴가 필요하다”고 한 데 대한 부연설명 격이었다. 다만 추 대표는 “탄핵안이 가결되면 새 총리 논의를 해야 한다는 뜻인가”라는 질문에는 “지금 이 순간까지는 탄핵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탄핵안이 가결 처리돼 황 총리 권한대행 체제가 시작된 후 내각 총사퇴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를 의미한다. 추 대표도 이를 의식한 듯 전날 “(내각 총사퇴) 자체가 겪어보지 못한 초유의 입법 공백”이라며 “정치적 해법 모색이 필요하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추 대표 측도 내각 총사퇴를 바로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김민석 당 대표 특보단장은 “내각 총사퇴가 (탄핵 이후) 구체적 후속 프로그램이라기보다는 탄핵안을 박근혜 내각 전체에 대한 탄핵이라고 규정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민주당 관계자는 “황 총리 권한대행 체제는 국민 정서상 받아들일 수 없다”며 “황 총리가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민주당 일각에서는 황 총리가 물러나기 전 야당 중심의 국회가 추천한 경제부총리를 임명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법률이 정한 국무위원의 순서로 (대통령) 권한을 대행한다’고 한 헌법 71조에 따라 민주당이 추천한 경제부총리가 임명되고 황 총리가 사퇴하면 경제부총리가 권한대행이 된다. 이 경제부총리가 법무부 장관 및 검찰총장, 국가정보원장 등을 새로 임명한다는 것이다. 결국 헌법재판소가 탄핵 인용 여부를 결정할 때까지 민주당의 경제, 사회복지 등 민생 정책을 친야(親野) 성향의 경제부총리 밑에서 입법화하고, 신임 권력 기관장이 대선을 관리하게 하겠다는 속내라는 분석도 있다. 다만 민주당의 다른 관계자는 “새 경제부총리가 권한대행을 맡는다는 것은 아직 아이디어 차원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 같은 생각은 국정 안정보다는 조기 대선만 바라보는 근시안적 방안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새누리당 비주류 좌장 격인 김무성 전 대표는 이날 “탄핵 절차가 시작되는 과정에서 야권이 황 총리를 인정한다고 해놓고 지금 와서 부정하는 발언을 한다면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주는 일”이라고 질타했다.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도 “야당에서 왜 이런 현실적이지 못한 목소리를 외치느냐”며 “짧은 시간 안에 그나마 준비된 사람이 (대통령) 하겠다는 얘기고 애초부터 개헌론을 봉쇄하자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정치학)는 “헌재 결정으로 탄핵이 끝날 때까지는 헌법 절차를 존중해야 한다”며 “자기 입맛에만 맞게 선동적, 독단적, 불통의 모습을 보인다면 국민이 수권 정당으로 보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