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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겪는 열대기후였다. 비행기 문을 나서는 순간, 훅 하고 끼얹는 습한 열기.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5월 한낮은 한마디로 습식 사우나였다. 1995년 외무부(현 외교통상부) 출입기자였던 나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미국과 북한의 준(準)고위급회담을 취재하러 갔다. 회담의 관심사는 7개월 전 타결된 미북(美北) 제네바 합의에 따라 북한에 제공하기로 한 경수로의 노형(爐型)을 한국형으로 하느냐였다.14년 전 상황과 여전히 비슷 그런데 정작 한국은 회담에 참여하지 못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핵문제는 북-미의 문제’라는 북한의 ‘한국 배제’ 전략 때문이었다. 따라서 한국 기자들의 취재도 다소 기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뒷날 한국 대사를 지낸 토머스 허버드 미국 측 수석대표와 북한 측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이 진행한 그날 회담 결과를 미국 측이 한국 외무부에 브리핑하면 그 내용을 외무부 당국자에게 물어보는 게 기본적인 취재라인이었다. 일주일을 예상하고 떠났던 출장은 무려 한 달이나 끌었다. 습식 사우나에서, 사실상 ‘제3자’의 입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답답한 취재였다. 하지만 북한에 제공할 경수로를 사실상 한국형으로 합의한 것이 길고 지루한 취재의 보상이라면 보상이었다. 핵문제에서 물꼬를 튼 ‘미북 직거래’는 이듬해인 1996년 4월 독일 베를린에서의 미사일회담 개최로 이어졌다. ‘미북 미사일회담’은 본보의 특종 보도로 알려졌다. 그때 한국 언론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이가 바로 이번에 방한한 로버트 아인혼. 당시 미 국무부 정치·군사담당 부차관보였던 그는 북한의 이형철 외무성 미주국장과 함께 미사일회담 수석대표를 맡았다. 역시 한국은 끼지 못했다. 한국을 직접 위협하는 스커드 미사일 문제 등을 다루는 회담이었음에도. 벌써 14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비슷하다. 우리 영해에서, 북한의 어뢰 공격을 받아, 한국 전함이 침몰됐어도 우리는 지난달 방한한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의 입에 오히려 신경을 곤두세웠다. 14년 전 미사일회담 때처럼 아인혼 미 국무부 북한제재 조정관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하고 있다. 아니, 상황은 그때보다 훨씬 나빠졌다. 당시만 해도 북한 핵문제는 핵무기 1, 2개를 생산할 수 있는 양의 플루토늄을 보유했다는 ‘의혹’ 수준이었다. 이제는 ‘의혹’이 아니라 ‘현실’이다. 북한은 그사이 두 번의 핵실험을 감행했다. 최근 미국의 핵 전문지는 “북한이 핵폭탄 8∼12개를 제조할 수 있는 양의 플루토늄을 갖고 있다”며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했다. 미사일은 어떤가. 북한은 1998년 대포동1호(사거리 2000∼2500km), 지난해 대포동2호(사거리 5000km)를 발사했다.미국의 어깨 뒤에 숨는 비겁함 14년 동안 한미의 대북 핵·미사일 정책이 총체적으로 실패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사이 10년 집권했던 좌파정권의 ‘대북 퍼주기’로 북한의 핵과 미사일은 무럭무럭 자랐다. 그러면서 우리 내부의 비겁함도 무럭무럭 자랐다고 나는 생각한다. 적어도 14, 15년 전에는 북한 핵·미사일 문제 논의에 한국이 ‘제3자’가 되는 데 대한 공분(公憤)이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우리의 젊은 병사 46명이 차가운 바다에 수장됐음에도 미국의 어깨 뒤에 숨어 클린턴 장관이나 아인혼 조정관이 한마디 하면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심리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역사는 미국도 ‘결정적 시기’에 한국을 포기했거나 떠나려 했던 적이 있음을 말해준다. 미국이 떠난다면 군사분계선(MDL)과 북방한계선(NLL)에 우리 홀로 설 수 있을 것인가. 이제는 자문(自問)할 때가 됐다.박제균 영상뉴스팀장 phark@donga.com}
그는 지방대 일어일문학과 교수였다. 전국학생처장협의회장을 맡을 정도로 교수로선 대외활동이 활발한 편이었지만, 중앙무대에서 지명도가 높지는 않았다. 그가 출세가도를 달리는 급행열차를 잡아탄 것은 이명박 후보의 대선캠프에 합류하면서부터. 외곽지원조직인 선진국민연대 공동네트워크팀장을 맡았던 그는 이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대통령직 인수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러자 “김대식 교수가 자기 학교의 지명도까지 높였다”는 말도 돌았다.‘보상’ ‘돌려막기’ ‘코드’ 인사 논란 그는 2008년 6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에 임명되면서 다시 한 번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국내외 자문위원만 2만 명에 육박하는 거대조직에 통일 관련 경력이 사실상 전무한 40대 중반의 책임자가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자 보수성향의 민주평통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뜨악한 반응이 나왔던 게 사실이다. 김대식 전 민주평통 사무처장은 6·2지방선거에 한나라당 전남지사 후보로 출마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는다. 당내 호남 출신 사이에선 “고향은 전남(영광)이지만, 성장기 이후 부산에서 생활한 사람”이라는 볼멘소리가 나왔다. 그는 지방선거 한 달여 뒤 치러진 한나라당 전당대회에도 출마했다. 11명 중 9위에 그쳤지만 적어도 당내에서 ‘호남의 대표선수’로 각인되는 성과를 얻었다. 만일 그가 선진국민연대 출신이 아니었어도 불과 2년 반 만에 ‘대통령직 인수위원→민주평통 사무처장→한나라당 전남지사 후보→당 대표최고위원 출마’라는 고속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을까. 여러모로 전임 노무현 대통령과는 대조되는 이명박 대통령이지만, 적어도 인사 문제에선 전임의 폐해를 답습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임기 반환점을 코앞에 두고 노 대통령 시절 자주 지적됐던 ‘보상’ ‘돌려막기’ ‘코드’ 인사 얘기가 자주 들린다. 최근 선진국민연대 출신들이 문제된 것은 대선 논공행상이 형평을 잃었기 때문이다. 과도한 보상 인사는 정권 내부의 균열까지 불러온다. 노무현 정권 때는 낙선자를 장관 자리로 보상해 물의를 빚었다. 백용호 대통령정책실장은 MB 취임 이후 공정거래위원장(1년 3개월)과 국세청장(1년)을 거쳤다. 대통령 임기가 절반도 안 됐는데, 벌써 세 번째 중책이다. 공정거래위나 국세청 같은 주요 조직의 장(長)으로 1년 남짓 임기는 너무 짧다. 더구나 백 실장은 아무도 손대지 못하던 국세청의 개혁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오던 터였다.MB 정권의 ‘코드’는 TK 백 실장에 대한 숨 가쁜 인사는 노무현 정부 시절 김병준 대통령정책실장에 대한 ‘돌려막기’ 인사를 생각나게 한다. 김 전 실장은 ‘대통령직속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장→대통령정책실장→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임명 직후 논문 표절 시비로 낙마)→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으로 요직을 옮겨 다녔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코드’ 인사다. 노무현 정권의 코드가 이념이었다면, 이명박 정권의 코드는 TK(대구경북)이다. 통계적으로는 형평의 모양새를 갖췄더라도 이 정부 들어 얼마나 많은 TK 출신들이 요직에 중용됐는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더구나 공무원들 사이에서 ‘진정한 정권의 2인자’로 불리는 원세훈 국정원장(경북 영주)을 비롯해 박영준 국무차장(경북 칠곡), 이영호 전 대통령고용노사비서관(경북 포항) 등 정권 실세들이 TK 출신이라는 점이 정관가에 던지는 메시지는 크다. 그럼에도 시민·사회운동을 했다고 굳이 고려대에 TK 출신(경북 칠곡)인 박인주 씨를, 그것도 ‘사회통합’을 담당하는 수석비서관에 임명한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곧 개각이다. 인사가 흐트러지면 대통령이 백날 ‘경제 살리기’에 혼신을 바쳐도 그 충정이 국민에게 전달되지 못한다. 진부하게 들리지만 이 말은 여전히 진리니까. ‘인사는 만사(萬事)다.’박제균 영상뉴스팀장 phark@donga.com}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란 그림을 본 일이 있다. 로마 군인 차림을 한 젊은이 3명이 칼 세 자루를 들고 있는 아버지에게 각각 손을 내밀고 있다. 아버지 뒤쪽으로는 젊은이들의 아내와 여동생인 듯한 3명이 비통에 잠겨 있다. 프랑스 고전주의 작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1784년 그린 이 그림은 고대 로마의 고사를 묘사한 것이다. 기원전 7세기 로마는 인근 도시국가 알바롱가와 전쟁을 하게 된다. 두 나라는 불필요한 출혈을 하기보다는 대표자의 결투로 승패를 결정하기로 한다. 그림에 등장하는 세 젊은이가 로마 쪽 대표선수인 호라티우스 가문의 3형제다. 이 3형제는 알바롱가의 대표 가문 3형제와 맞붙어 2명이 희생되지만 남은 1명이 적 3형제를 차례로 쓰러뜨려 최후의 승리를 차지한다. 문제는 이 젊은이가 죽인 3명 중 한 명이 여동생의 약혼자였던 것. 그림에서 비통해하는 세 여인은 남편들과 약혼자의 죽음을 예고하는 복선이다. 오래전에 봤던 이 그림이 불현듯 떠오른 것은 최근 이명박 대통령의 말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한일중 정상회의에서 “우리는 전쟁을 두려워하지도 않지만, 전쟁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데는 거의 모든 국민이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데는? 솔직히 말하면 나는 전쟁이 두렵다. 전쟁을 겪어보지 않았을뿐더러 필연코 전쟁은 크건 작건 국민의 땀과 눈물, 희생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내 가족은 호라티우스 가문의 형제들처럼 목숨까지는 아닐지언정 국가를 위하여 얼마만큼의 땀과 눈물, 희생을 바칠 수 있을까. 머나먼 로마 시절의 얘기라고? 아니다. 지금도 세계 많은 나라의 국민이 국가를 위하여 땀과 눈물은 물론이고 목숨까지 바치고 있다. 미국만 해도 2003년 3월 이라크전쟁이 시작된 이후 올해 5월 말까지 미군 약 4400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 달 평균 51명꼴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도 2001년 10월 개전 이후 올해 5월 말까지 사망자가 1000명을 넘었다. 아프간 미군 사망자 수는 해가 갈수록 늘어 지난해에만 316명이 숨졌다. 매월 26명꼴이다. 미국은 슈퍼 파워니까, 그 힘을 유지하기 위해 그만한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국이 전쟁 당사국이 될 가능성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는 태평양전쟁과 6·25전쟁, 베트남전쟁을 겪어냈다. 그러나 1973년 한국군의 베트남 철수 이후 우리는 전쟁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천안함 폭침사건이 나기 전까지는. 동족상잔의 전쟁은 피해야 한다는 데 토를 달 사람은 없다. 다행히 천안함 사태도 군사적 충돌보다는 경제적 외교적 대응으로 흐름을 잡아가고 있다. 하지만 ‘전쟁을 각오해야 평화를 지킨다’는 명제가 진리임은 동서고금의 역사가 증명한다. 그리하여 천안함 사태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천안함 유족은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은 최고의 남편이자 아버지였어요.…사랑한다는 말 자주 못해서 미안해요. 사랑해요.”(고 김종헌 상사에게 아내가) “귀염둥이 막내야.…너는 야단 한번 안 맞을 정도로 기쁨만 주던 아들이었다. 내게 아들로 와줘서 고마웠다.”(고 나현민 상병에게 어머니가)박제균 영상뉴스팀장 phark@donga.com}
A는 B를 사랑한다. 하지만 B는 A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절망에 빠진 A가 B 앞에 나타나 말한다. “죽어버리겠다!” 그런데 B의 심드렁한 대답. “죽든지, 말든지…” 사실 B는 C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C의 속마음은? 짝사랑만큼 애처롭고 비극적인, 그 때문에 동서고금을 통틀어 그렇게 많은 이야기와 예술작품의 소재가 된 게 또 있을까. 비단 개인 사이의 짝사랑만이 아니다. 2004년 여름, 파리 특파원 임기를 마치고 귀국한 뒤 정치부 기자로 일하면서 놀란 것은 당시 노무현 정권의 ‘프랑스 사랑’이었다. 노 대통령은 이해찬 국무총리를 책임총리로 하는 프랑스식 분권형 대통령제를 하려 했다. 프랑스식 국방개혁을 추진했고, 프랑스 사례를 들먹이며 ‘과거사 청산’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이 말한 프랑스 사례 대부분은 내가 직접 살면서 겪은 프랑스 현실과는 다른 견강부회(牽强附會)였다. 더구나 노무현 정권의 프랑스 사랑은 일방통행이었다. 특파원 시절 우체국에 편지를 부치러 가서 한국과 북한, 서울과 평양을 헷갈려하는 우체국 직원들 때문에 황당했던 일이 적지 않았다. 프랑스 지식인들도 ‘김정일’은 알지만 ‘노무현’은 몰랐다. 노무현 정권의 프랑스 짝사랑은 2007년 5월 집권한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우파개혁으로 쏙 들어갔다. 문제는 사회주의 소련과 동구권 몰락에 이어 대안으로 여겨졌던 사회민주주의 프랑스마저 ‘변절’하자 국내 좌파가 더욱 노골적으로 친북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 지난해 나온 이른바 ‘친일인명사전’에는 좌익·월북 친일인사의 이름이 대부분 빠졌다. 누가 봐도 ‘북한 짝사랑’이 확연한 이 사전에는 외려 일제강점기부터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노래 ‘짝사랑’의 작곡가 고(故) 손목인 씨가 포함됐다. 고인은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로 시작되는 ‘짝사랑’(고복수 노래) 외에도 ‘타향살이’ ‘목포의 눈물’ ‘아내의 노래’ ‘슈샤인 보이’ ‘아빠의 청춘’ 등 일제와 광복 이후 민족의 애환을 담은 불후의 애창곡을 남겼다. 이런 작곡가를 친일가요를 몇 편 지었다고 꼭 친일파로 매도해야 했을까. 아무튼 국내 좌파의 지독한 짝사랑에도 북한은 반응이 없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무수한 애정공세를 폈지만, 북한이 반응을 보인 것은 돈이나 식량 등 선물을 받을 때뿐이었다. 그 이유는 마음이 다른 데 가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반 내가 판문점 출입기자를 할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북한의 관심은 오로지 미국이었다. 짝사랑 앞에서 ‘죽어버리겠다’고 하는 사람처럼 북한이 핵 시위를 벌이는 이유도 오직 미국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다. ‘철천지 원쑤 미제’에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하다 미국이 콧방귀도 안 뀌자 ‘6자회담 내에서 평화협정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며 꼬리를 내리는 북한을 보면 애처롭기까지 하다. 이런 북한의 저자세에도 미국은 ‘먼저 비핵화부터 하라’고 문을 걸어 잠갔다. 이 역시 미국의 관심이 딴 데 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외교적 관심사에서 북한 문제는 중동·중앙아시아 이슈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거들떠보지 않는 미국의 문을 두드리는 북한, 그런 북한에 짝사랑을 퍼붓는 국내 좌파가 노래 ‘짝사랑’의 한 구절을 떠오르게 한다. “잃어∼진(버린) 그 사∼랑∼이 나를 울립니∼다…”박제균 영상뉴스팀장 phark@donga.com}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가 깃든다는, 이 성탄절 아침에, 이런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먼저 나를 슬프게 한다. 4월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 곽승준 위원장이 ‘밤 10시 이후 학원교습 제한’을 밝힌 지 반년 뒤, 교육과학기술부 이주호 제1차관이 21일 다시 똑같은 내용을 발표할 때, 정책의 옮고 그름을 떠나, 그 반년 동안 이 정부가 뭘 했나 하는 의문이 들지만, 그 갈팡질팡 허송세월을 반성하기는커녕, 외국어고에 지원하는 학생들에게 사교육 경험을 ‘자백’하라는 황당한 정책을 추진한다는 뉴스가, 크리스마스이브에 곤히 잠든 아들딸의 얼굴에 겹쳐 나를 슬프게 한다. 3월 여야 합의로 요란하게 출발한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지방과 정치학계가 “중앙정치에서 벗어난 풀뿌리 지방자치를 해야 한다”며 요구한 ‘지방선거 정당공천제 폐지’는 묵살하고, ‘매년 두 차례 치러지는 국회의원 재·보궐선거는 고비용·저효율이라 연 1회로 줄이자’는 요청에도 눈감고, ‘정치자금법 재판을 1년 안에 신속하게 끝내도록 하자’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정치자금법 개정 의견도 잘라버린 채,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정치인이 자진 반납하면 형사처벌을 면제해주는 ‘정치개악’을 하려다, ‘야합’이라는 비판에 화들짝 꼬리 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혹시나’ 하다가 ‘역시나’ 9개월을 날렸다는 생각이 나를 슬프게 한다. 멀쩡한 시민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오게 할 정도로, 진실을 왜곡한 지상파 방송의 독과점 구조를 깰 미디어법이, 7월 격렬한 몸싸움 끝에 국회에서 통과됐으나, 이에 불복해 민주당 등 야당의원들이 헌법재판소에 낸 미디어법 권한쟁의 심판사건에, 헌재가 ‘국회 가결은 유효하다’고 결정했건만, 다시 18일 헌재에 미디어법 권한쟁의 심판을 낸 야당의 오기는 말할 것도 없고, 미디어법 국회 통과 직후 “연내에 종합편성과 보도전문 채널을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가, 22일에는 ‘내년 상반기에도 종합편성채널 선정이 불가능하다’고 밝혀, 적어도 반년을 날린 이 정부의 무기력, 혹은 눈치 보기가 나를 더없이 슬프게 한다. 6월 정부가 ‘4대강 살리기 마스터플랜’을 발표하고, 11월부터 공사에 착수했지만, 4대강 사업 예산을 비롯한 내년도 예산안 타결은 감감무소식, 헌정 사상 최초로 ‘준예산’ 집행이 초읽기에 들어갔는데, 최악의 기록이란 기록은 모조리 갈아 치우고 있는 18대 국회가, 준예산 사태까지 몰고 간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지만, 남편은 자신의 금시계를 팔아 아내의 탐스러운 머리칼에 사용할 빗을 선물했으나, 아내는 그 머리칼을 팔아 남편의 금시계에 걸맞은 시곗줄을 선물했다는 이 성탄절에, 선물은커녕 드잡이를 주고받으려는 여야가 나를, 아니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런 쌈박질의 와중에, 도무지 합의라고는 모르는 여야가, 아프가니스탄 지방재건팀(PRT) 보호 병력 파견을 위한 파병 동의안의 국회 심의·처리는 내년 2월로 미루기로 ‘합의’했다는데, 정치싸움에 몰두해 국익이 걸린 외교는 뒷전으로 미뤄버린 이 나라가, 올 한 해 동안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고도 달라질 줄 모르는 한국정치가, 우리를 더없이 슬프게 한다. 스크루지 영감도 개과천선했다는 이 성탄절 아침에….박제균 영상뉴스팀장 phark@donga.com}
그의 이름은 박무덕이었다. 네 살 때까지는. 1882년 박무덕이 태어난 곳은 일본 가고시마 현 나에시로가와.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 도공 70명이 마을을 이루고 400년을 살아온 곳이었다. 그의 아버지 박수승은 도자기 사업으로 번성하자 무덕이 네 살 때 일본 평민보다 상위계급인 사족(士族)의 성(姓) 도고(東鄕)씨를 산다. 그 후 박무덕은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가 됐다. 시게노리는 1897년 가고시마 제1중학교에 입학했다. 사족 자제들이 다니던 이 학교의 학생들은 그가 가짜 사족, 조선 핏줄임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럴수록 그는 무섭게 공부에 매달렸다(김충식의 ‘슬픈 열도’). 그는 1904년 도쿄제국대 독문과에 입학한다. 시게노리가 중학교에 입학하기 2년 전인 1895년. 한반도에서는 을미사변이 터졌다. 당시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인들을 경복궁에 데리고 들어간 한국인이 있었다. 조선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 그는 사변 직후 일본으로 망명했다. 처자가 있었지만 단신으로 건너간 그는 일본 여성과 결혼해 1898년 4월 아들을 낳았다. 아들의 이름은 우장춘(禹長春). 그러나 우범선은 장춘이 여섯 살 때인 1903년 11월 민씨 집안 청지기 출신의 자객 고영근에게 목숨을 잃는다. 아버지가 살해된 뒤 조선총독부는 장춘 형제에게 학비를 지원했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 기자 출신인 이종각 일본 주오대 강사는 저서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에서 일본이 얼마나 명성황후 살해의 성공을 높이 평가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설명했다. 장춘은 1916년 도쿄제대 농과대 실과에 입학한다. 한편 시게노리는 우장춘이 대학에 입학하기 4년 전인 1912년 일본 외무고시에 합격했다. 이후 승승장구한 그는 1941년 외무대신(장관)에 임명된다. 그는 이듬해 사직했으나 1945년 4월 다시 외무장관이 되어 일본의 패전협상을 맡게 된다. 도고 장관은 군부의 암살기도와 협박에도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는 일본 내 평가를 받았다. 그의 고향 마을 뒤쪽에는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이 있다. 1964년 일본 각료가 쓴 기념관 송덕비문은 이렇게 끝난다. “…종전 공작의 주역을 맡아 대업을 완성하고 일본국과 일본 국민을 구했다.” 다시 우장춘으로 돌아가보자. 장춘은 1936년 도쿄제대 농학부 대학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육종학자로 명성을 날렸다.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자 우장춘 박사 환국위원회가 결성된다. 1950년 3월 입국한 우 박사는 광복 전까지 일본에서 전량 들여오던 채소 종자를 우리 손으로 개발해 우량한 종자를 생산했다. 또 한국의 육종기술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납치된 조선 도공의 후예가 ‘일본국과 일본 국민’을 구하고, ‘조선 국모 시해범’의 자식이 불모의 한국농업 재건의 기초를 닦은 이 부조리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도고 시게노리가 한국 핏줄을 속이고 일본과 일왕에 부역했다고 침을 뱉을 것인가. 우장춘이 매국노의 아들인 데다 조선총독부 돈으로 공부한 친일파라고 돌을 던질 것인가. 8일 발간되는 친일인명사전에 한국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룬 고(故) 박정희 대통령과 우국의 절창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남긴 위암 장지연 선생이 포함됐다고 한다. 친일문제에 그렇게 단세포적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는 것을 한일관계의 격랑 속에 얽힌 우장춘과 도고 시게노리의 삶이 웅변한다.박제균 영상뉴스팀장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