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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송평인 논설위원입니다.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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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6~2024-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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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벽에 대고 말하는 시대

    조국 법무장관 임명에서 숨 막히는 기분이 든 것은 공론(公論)이 시행되지 않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왕이 주권을 갖고 있을 때조차도 공론은 천하의 원기(元氣)라고 여겼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권력은 법에 따라 단순히 행사하는 것을 넘어 최소한 부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공론정치다. 조국 법무장관 임명은 날것 그대로의 권력에 의해 강행한 것이다. 장관 검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문민정부 이후 이 정도로 공론과 충돌한 인사가 또 있었나. 문재인 대통령은 “개혁성이 강한 인사일수록 임명에 반대가 많다”며 화살을 국민에게 돌렸다. 수사권이 검찰에 있든 경찰로 가든 일반 국민으로서는 조삼모사(朝三暮四)에 불과해 별 관심이 없다. 그런데 개혁에 반대하고 있다니, 숨 막히는 이유는 거기에도 있다. 인사에 대한 공론은 그 사람이 책임질 위법행위가 있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위법행위가 있으면 감옥에 가거나 말거나 할 일이지 임명하거나 안 하거나 할 일이 아니다. 인사에 대한 공론은 장관을 할 만한 사람이냐를 전체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막스 베버가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에서 결여해서는 안 되는 감각으로 꼽은 ‘눈대중(Augenmaß)’이란 말을 빌리자면 위법이냐 아니냐 일일이 자로 재듯 재는 것이 아니라 눈대중으로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국민 대다수가 함께 “그 사람은 안 돼”라고 하면 그것이 공론이다. 언론이 항상 공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사로운 의견이나 당론(黨論)을 공론으로 포장하는 경우도 있다. 아마 문 대통령이 지명한 장관급 후보자에 대한 많은 시비들 중에서는 공론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전의 시비들과 조 후보자를 둘러싼 시비는 그 수준이 질적으로 달랐다. “조국 씨는 안 돼”라는 의견은 완고한 진영 논리를 깨뜨릴 만큼 공론적이었다. 공론은 여론과는 다르다. 여론은 단순히 다수이냐 아니냐를 따지지만 공론은 합리적 이유를 들어 그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어야 한다. 쇼비니즘(맹목적 민족주의)은 다수의 지지를 받더라도 합리적으로 그 주장을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에 공론이 되지 못한다. 반면 “조국 씨는 안 돼”라는 주장은 공정성을 향한 강한 도덕적 확신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래서 ‘닥치고 비호’를 외친 패거리주의의 부도덕성이 더욱 선명해 보였다. 조국 법무장관 임명 반대는 여론상으로도 우세했다. 리얼미터 같은 여론조사기관에서조차 50%대를 기록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실제 체감할 수 있는 반대의 목소리는 그보다 훨씬 높았다. 샘플도 확정되지 않은 ‘전화 임의걸기’를 해서 500명을 채우는 리얼미터 식의 싸구려 조사 말고 외국에서처럼 응답자에게 돈을 주고 하는 제대로 된 조사를 해봤다면 최소한 10% 이상은 더 높았을 것이다. 법무장관은 장관 중에서도 특별한 장관이다. 프랑스에서는 법무장관을 ‘가르드 드 소(garde de sceau)’라고 해서 일반 장관(ministre)과는 달리 부른다. 영국에서도 법무장관은 로드 챈슬러(Lord Chancellor)라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미국은 법무장관의 역할이 프랑스 영국 등과는 다소 다르지만 역시 일반 장관(Secretary)과는 달리 어토니 제너럴(Attorney General)이라 부른다. ‘가르드 드 소’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도장을 보관하는 사람이다. ‘가르드 드 소’는 왕의 결정이 담긴 문서에 도장을 찍어 집행력을 부여한다. 그렇다고 기계적으로 도장을 찍는 것은 아니었다. 왕의 결정이 정치적 전통을 침해한다고 여기면, 즉 공론에 반한다고 여기면 도장 찍는 것을 거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군주제에서는 왕이 주권자이기 때문에 도장 찍기를 거부하는 그를 불러 도장을 찍으라고 명령할 수 있었다. 그 경우 그는 왕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지만 대신 왕의 결정에 대한 책임을 면한다. 주권자가 왕 한 사람인 체제에서 공식적으로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가르드 드 소’였던 것이다. 다른 장관도 아닌 이 특별한 법무장관의 임명 과정에서 공론이 철저히 무시됐다. 공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언론인데 벽에 대고 말하는 느낌이다. 언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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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로듀스 101’ 조작 의혹[횡설수설/송평인]

    아이돌 연습생 오디션 프로그램인 ‘프로듀스 101’ 시리즈는 제목을 읽는 데서부터 세대 차가 드러난다. 101은 영어로 읽어야 한다. 그렇다고 ‘원 헌드러드 원’이나 ‘원 제로 원’으로 읽어서는 젊은이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미국 사람처럼 ‘원 오우 원’, 혹은 대강 연음해 ‘워너원’으로 읽어야 한다. 물론 꼰대 취급 받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면 백일이나 일공일로 읽어도 상관없다. ▷101이란 숫자는 101명의 아이돌 연습생이 나와서 경쟁을 벌인다고 해서 붙었다. 최종적으로 남은 11명이 계약된 기간 동안 프로젝트 그룹을 만들어 활동한다. 여기에 들어가는 것으로도 큰 성공이다. 여자 연습생이 출연한 시즌 1에서는 ‘아이오아이(I.O.I)’라는 그룹이 만들어져 김세정 전소미 같은 스타가 나왔고, 남자 연습생이 출연한 시즌 2에서는 ‘워너원(Wanna One)’이라는 그룹이 만들어져 강다니엘 박지훈 같은 스타가 나왔다. ▷가장 최근인 올 7월 끝난 것이 ‘프로듀스X101’인데 투표 조작 의혹에 휘말렸다. 7월 19일 마지막 생방송 때 시청자 유료 문자투표에서 예상을 뒤집는 의외의 결과가 나오고 순위 득표수에서 이해하기 힘든 규칙성이 발견된 것이다. 방송 내내 화제를 모았던 두 후보가 탈락한 데다 1위와 2위, 3위와 4위, 6위와 7위, 10위와 11위의 표 차가 모두 정확히 2만9978표였다. 주최 측은 자체 조사를 벌였지만 원인을 찾지 못하고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필자가 중학생일 때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인기였다. ‘박원웅과 함께’를 열심히 들었는데 친구가 어느 곡을 순위에 올려야 한다고 해서 함께 수백 장의 엽서를 보냈던 적이 있다. 컴퓨터화된 세계에서는 타인의 아이디로도 투표할 수 있다. 시즌 1에서 이미 아이디 중복 투표가 드러나 논란이 됐다. 시즌 2에서는 중국에서 아이디를 사고파는 행위가 적발되기도 했다. 아예 해킹해 아이디를 가로채거나 생성할 수 있다면 순위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경찰은 2일 투표 조작 의혹 수사를 시리즈 전체로 확대한다고 밝혔다. 정말 조작이 있었다면 누가 어떻게 조작할 수 있었는지, 이 프로그램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궁금할 만한 사건이다. 우리가 그 작동 과정을 속속들이 알 수 없는 시스템 앞에서 느끼는 불안은 빅브러더로 표상되는 숨은 조작자에 대한 불안이다. 삶의 조작은 ‘트루먼 쇼’, 기억의 조작은 ‘인셉션’ 같은 영화에서나 있는 일인지 몰라도 투표의 조작 정도는 이미 현실인가.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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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콩 시위 과격화 우려[횡설수설/송평인]

    중국 덩샤오핑 체제에서 개혁파의 기수였던 후야오방 총서기의 사망을 추도하기 위해 학생과 시민이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광장에 모이기 시작한 것은 1989년 4월 17일이다. 계엄령이 내려진 것은 33일이 지나서다. 그 후에도 예상외로 강한 시위대의 저항에 약 5만 명의 군인은 베이징 근교에 대기만 하고 있었다. 실제 진압에 나선 것은 계엄령 선포로부터 13일이 지나서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코앞에서 벌어진 시위를 무력 진압하는 데 나서기까지 47일이 걸렸다. ▷홍콩에서 송환법에 반대하는 시위가 어제로 86일째를 맞았다. 홍콩 인근 선전에 중국 공안이 집결해 있어 무력 개입의 가능성이 언급되지만 아직 홍콩에 계엄령이 내려지지는 않았다. 시위대는 어제부터 총파업과 동맹휴학에 돌입하며 주말 중심의 시위를 일상의 저항으로 바꾸는 새 단계에 들어섰다. 홍콩도 13일이 추석이다. 시위대는 13일까지 송환법의 완전 철폐와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했다. 13일까지가 또 다른 고비가 될 것으로 보인다. ▷홍콩 시위에는 두 흐름이 합류하고 있다. 일국양제(一國兩制)에서 민주주의의 확립을 요구하는 다수의 흐름과 독립 없이는 홍콩의 민주주의도 불가능하다는 소수의 흐름이다. 지난주 홍콩 경찰에 체포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난 시위 주도자 조슈아 웡 같은 이는 온건파다. 그가 이끄는 데모시스트당은 홍콩의 독립을 주장하는 대신 일국양제가 끝나는 2047년 투표로 홍콩의 미래를 결정하자는 입장이다. ▷시위에는 늘 다수의 의도를 벗어나는 과격한 흐름의 분출이 있게 마련이다. 지난 주말 중국 오성홍기를 끌어내려 불태우는 행위가 있었으나 실제 압박도 되지 못하면서 중국 본토인의 분노만 자아냈다. 친중(親中) 홍콩 정부가 프락치를 이용해 시위의 과격화를 유도한다는 의혹도 없지 않다. 허리에 권총을 찬 남성이 화염병을 던지는 모습이 사진에 찍혔다. 그의 정체를 두고 시위대로 위장한 경찰인지 논란이 벌어졌다. ▷6·4 톈안먼 사태 당시 후야오방을 이은 자오쯔양 총서기는 5월 20일 리펑 등 보수파가 주도한 계엄령 발효를 앞두고 “여러분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제발 광장을 떠나주세요”라고 시위대에 눈물로 호소했다. 5월 24일에서 27일 사이 자오쯔양이 해임됐다. 5월 말 학생 지도부의 온건파 왕단과 우얼카이시가 톈안먼 광장에서 학생들을 철수시키자는 의견을 냈으나 차이링 같은 강경파가 반대했다. 6월 3일 밤 잔혹한 진압이 시작됐다. 홍콩에서 같은 불행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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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제 짐을 함부로 내려놓을 수 없다”는 심리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쏟아지는 의혹 속에서 정작 해명은 제대로 하지 않고 더 채찍질해 달라고 말하거나 엉뚱하게 정책 비전을 발표하는 부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건 진실을 마주하지 않으려는 저항으로 볼 수 있다. 정신질환의 원인은 대개 수치심을 일으키거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과거의 경험이다. 분석자가 그런 경험을 들춰내려 하면 피분석자는 말을 돌리거나 거짓이라며 화를 낸다. 이것을 저항이라고 한다. 조 후보자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누구나 다 언행불일치가 있어 보통은 사돈 남 말 하듯 하지 못한다. 조 후보자는 자기가 한 말을 잊은 듯이 행동하거나 자기가 한 일을 잊은 듯이 비판할 때가 종종 있다. 특목고가 목적대로 운영되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자녀를 외고에 보내 의대까지 진학시키고, 장학금은 경제 중심으로 지급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자녀는 장학금을 연거푸 받도록 한다. 자신 속의 모순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다 보면 억압된 충동이 무의식으로 침잠해 있다가 타인에게서 같은 모순을 발견할 때 자신도 모르게 강한 반감으로 나타나는 법이다. 오프라인에서의 예의 바른 조국과 온라인에서 거친 말을 쏟아내는 조국은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같이 괴리가 커 때로 두 명의 조국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를 실제 만나 보면 잘생긴 데다 너무 예의가 발라서 오히려 상대방을 부담스럽게 만들 정도라고 한다. 그런 사람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서는 학자적 비판이 필요한 대목에서 ‘구역질 난다’는 표현을 서슴없이 쓰고, 사과하는 사람을 향해 “파리가 앞발을 비빌 때는 이놈을 때려잡아야 할 때다. 퍽∼”이라며 가학 성향의 청소년 같은 발언을 쏟아놓는다. 조 후보자 역시 모든 자식들처럼 아버지에 대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가졌을 것이다. 건설업자의 생리를 갖고 있으면서 사학재단 이사장의 반듯한 면모를 유지해야 했던 아버지에 대해서는 더욱 그랬을 수 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부친 살해’로 표상되는 아버지 극복으로 해결되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은 자식이 거세 공포를 느끼고 알게 모르게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으로 끝난다. 조 후보자가 남에게 하는 말과 자신의 행동을 완벽히 분리해서 다루는 능력은 그런 환경에서 온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조 후보자에게는 일반적인 정신분석의 틀을 넘어서는 특수한 심리구조가 있다. 그는 사모펀드를 기부하고 사학재단에서 손을 떼겠다고 발표하고 자녀 문제에 대해서까지 사과하고 난 뒤 “저와 제 가족이 고통스럽다 해서 제가 짊어진 짐을 함부로 내려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 말은 성경에서 예수가 한 기도를 상기시킨다.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하나님께 십자가 처형의 쓴잔을 옮겨달라고 간청하면서 그러나 자신의 뜻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일견 조 후보자가 거의 성인(聖人)에 가까운 정신 상태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민이 그에게 무슨 짐을 지운 적이 없다. 국민의 다수는 오히려 그에게 짐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다만 그 스스로 자신은 진리의 편에 있고 진리의 편이 자신에게 지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진리가 아닌 편에 선 사람들이 자신과 가족에게 가하는 고통을 참고 가는 수밖에 없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진리의 편과 아닌 편을 구별하는 이분법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래 이른바 ‘진리의 정치’를 관통하는 사고방식이다. 이것은 과거 절대 종교와 싸우면서 내 편과 네 편 사이의 토론과 합의를 존중하는 전통을 세운 민주주의적 사고로부터 유사종교적 사고로 후퇴하는 일종의 퇴행이다. 조 후보자가 버틸 수 없을 지경에 왔다고 여겨지는데도 버티고 있는 것은 이런 의식의 퇴행이란 측면에서 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다. 공지영 안도현 이외수 등 그나마 문학을 했다는 자들이 보여주는 유아기적 패거리 의식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을 이념의 외톨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실은 자신이 이념의 외톨이일 가능성이 크다는 역설을 정신분석은 보여준다. 집안에서는 오이디푸스도 되지 못한 채 아버지의 구태를 반복하는 자들이 스스로도 혁신하지 못하면서 국가와 사회를 혁신하겠다고 나서 안보와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가고 민주주의마저 위기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 작금의 상황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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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정 상속[횡설수설/송평인]

    상속을 불평등의 기원이라고 보고 상속 재산을 국가나 사회에 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상주의자도 있다. 그렇지 않고 상속을 인정한다고 해도 재산이 플러스일 때만 물려받고 빚이 있을 때는 물려받지 않는다면 공정하지 않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꼭 그렇게 볼 것은 아니다. 부모 잘 만나 부자가 되는 것은 막지 못해도 부모 잘못 만나 빚쟁이가 되는 것만은 막아주자는 데 상속 포기나 한정 상속(상속한정승인) 제도가 생긴 이유가 있다. ▷상속 포기를 하면 빚이 후순위 상속자에게 넘어가 그가 피해를 볼 수 있다. 한정 상속을 하면 자기 순위에서 상속이 멈추고 상속받은 재산의 범위에서 빚을 갚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자기 회사가 부도가 나도 가족들 앞으로 돌려놓은 돈이 많아 잘 먹고 잘사는 사람들이 있듯, 부모의 빚잔치 덕분에 잘 먹고 잘살아 놓고는 부모 빚을 상속하지 않는 데 상속 포기나 한정 상속을 악용하는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조국 법무장관 후보자의 부친이 사망했을 때 가족에게 남긴 재산은 정리해보니 고작 21원이었다. 가족은 부친의 빚이 또 얼마나 있을지 몰라 한정 상속을 신청해 뒀다. 그 결과 나중에 법원이 조 후보자 모친에게 18억 원, 조 후보자 형제에게 각각 12억 원을 캠코에 지급하라고 판결했을 때 세 사람은 한 푼도 물지 않았다. 56억 원대의 재산가인 조 후보자도 한 푼도 물지 않았다. 아무런 절차적 하자는 없다. 다만 캠코가 못 받은 42억 원이란 돈은 결국 국민의 몫이 될 수 있다. ▷조 후보자 가족은 모두 부친의 빚을 상속하지 않았지만 모친과 동생은 부친과 동생이 각각 운영한 건설회사의 연대보증인으로, 두 회사가 모두 부도가 나면서 기술보증기금 등에 별도로 약 50억 원의 빚을 지게 됐다. 모친이야 자식에 기대 채권자에게 빼앗길 돈 없이 무일푼으로 살면 그만이지만 동생은 그럴 수 없었다. 배우자도 있고 어린 자식도 있는 상황에서 채권자에게 쫓기게 되면 서류상 이혼을 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조 후보자의 동생은 빚도 많지만 부친이 이사장으로 있던 사학재단에 공사대금 채권 52억 원도 갖고 있다. 그는 논란이 일자 채권을 기술보증기금에 진 빚을 갚는 데 내놓겠다고 밝혔다. 이 채권은 사학재단에 가용할 자금이 있어야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당장의 현금화는 쉽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한정 상속으로 부친이 생전에 진 빚은 모두 탕감받으면서 부친 사학재단에 대한 채권은 언젠가라도 행사하겠다는 것이 양심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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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 미사일 폭발 공포[횡설수설/송평인]

    유럽 쪽 러시아 북부에 백해(白海·White Sea)라는 내해(內海)가 있다. 백해 연안에는 세베로드빈스크라는 도시가 있고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13일 러시아 군이 실험 중이던 신형 미사일 엔진이 폭발했다. 방사능 수치가 일시적으로 평소의 16배까지 올라갔지만 러시아 정부는 방사능 유출을 부인했다. 폭발 현장 인근 주민들은 마을을 떠나라는 권고를 들었지만 왜 떠나라는 건지 이유는 듣지 못했다. ▷이런 괴이한 상황이 블라디미르 푸틴의 러시아에서는 드물지 않다. 2000년 핵추진 잠수함 쿠르스크의 침몰로 탑승자 118명 전원이 사망했다. 당시 러시아 정부는 도움을 주겠다는 영국 해군의 제안을 거절하고 유족을 대상으로 선원 전원이 생존해 있다는 등의 거짓 브리핑으로 일관했다. 지난달만 해도 스파이 활동을 하던 최첨단 핵추진 잠수함에서 가스 폭발 사고로 14명의 승무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으나 러시아 정부는 여전히 심해 탐사 잠수정이 폭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은폐는 독재의 뒷면이다.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세르게이 스크리팔 등 망명한 러시아 정보기관 요원들은 독극물 살해를 당하고, 푸틴의 정적인 보리스 베레좁스키와 측근의 자살은 의문사로 남아 있다. 안나 폴릿콥스카야 같은 비판적 언론인도 암살을 당했다. 올 5월에는 반(反)푸틴 언론인 아르카디 밥첸코가 암살을 모면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경찰과 협조해 살해당한 것으로 가장했다가 다시 등장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벌어졌다. ▷푸틴은 이 모든 것이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듯 최근에도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방문해 ‘밤의 늑대들’이라는 바이크 동호회의 건장한 회원들과 함께 바이크를 타며 실효적 지배를 과시했다. 웃통을 벗고 말을 타고 총으로 호랑이를 잡는가 하면 투명유리의 심해 잠수정을 직접 운전하며 바다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때마다 ‘21세기 차르’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전 세계에 뿌린다. ▷이번 사고는 낮은 고도로 날아 대륙을 건너가는 ‘9M730 미사일’의 시제품과 관련 있다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푸틴이 ‘지구 어디든 도달할 수 있다’고 자랑한 이 신무기에 대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우리는 더 진전된 비슷한 기술을 갖고 있다”고 맞받았다. 최근 중거리핵전력(INF) 조약의 파기는 미국 러시아 중국이 새로운 군비 경쟁에 돌입했음을 의미한다. 러시아 하늘에서 방사능 수치가 올라가고 ‘제2의 체르노빌’이 언급되는 상황이 불행한 사태의 전조가 아니었으면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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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조국 씨의 박사논문 표절에 대해

    과거 조국 서울대 교수의 박사논문 표절 의혹에 대해 쓴 적이 있다. 법무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그의 국회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철저한 검증 차원에서 이를 정리해줄 책임감을 느낀다. 조 후보자의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로스쿨 박사논문 표절 의혹을 처음 제기한 곳은 인터넷매체 미디어워치다. 영국 옥스퍼드대 D J 갤리건 교수의 논문에서 다수 문장을 베꼈다는 내용이었다. 미디어워치가 제기한 박원순 서울시장 아들의 엑스레이 사진이나 JTBC의 태블릿PC에 대한 의혹 등에 한 번도 동조한 적이 없다. 그러나 논문 표절은 다르다. 수십 단어가 연속해서 일치하는 문장들을 보면 의심하고 말고 할 게 없다. 조 후보자가 베낀 이유까지 대강 짐작이 갔다. 그는 갤리건 교수의 논문에서 영국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의 책을 요약한 부분을 베꼈다. 벤담의 책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단어는 평범해 보여도 한 페이지를 읽는 것이 쉽지 않은 대단히 어려운 영어다. 벤담의 책은 벤담 자체에 대한 논문을 쓰지 않는 한 2차 문헌을 통해 인용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는 벤담의 책을 직접 읽은 것처럼 써야 폼이 난다고 여긴 듯하다. 이 일을 계기로 조 후보자의 박사논문을 직접 읽어보기로 했다. 논문은 버클리대 인터넷 웹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꼼꼼히 읽은 곳은 독일어 문헌을 인용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을 택한 이유는 조 후보자가 서울대 석사논문에서 독일어 문헌 표절을 시인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표절의 제1공리인즉 표절하는 사람이 한 번 표절하고 마는 경우는 없다. 같은 패턴의 표절을 10군데 가까이 발견했다. 이번에는 미국 인디애나대 로스쿨 크레이그 브래들리 교수의 논문이다. 베낀 곳은 브래들리 교수가 독일어 판결문을 요약한 부분이다. 여기서도 독일어 판결문을 직접 읽은 것처럼 써야 폼이 난다고 여긴 듯하다. 미디어워치는 이후 더 작업을 진행해 모두 6개 논문에서 약 50군데에 이르는 표절을 발견했다. 시각적으로도 금방 알 수 있는 표절이 그 정도라는 것이지 꼼꼼히 들여다보면 훨씬 더 많은 인용부정이 발견된다. 가령 독일어 논문을 12개 인용하는데 페이지 표시도 없는 하나마나한 인용이 무려 9개 논문에 이르고, 페이지가 표시된 것도 찾아 들어가 보면 본문의 내용이 나와 있지 않는 황당한 인용들이 있다. 그러나 버클리대 로스쿨은 미디어워치의 제소에 따라 표절 심사를 한 뒤 표절이 아니라고 했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표절 조사를 했다고 단정하고 그 경우 같은 문헌에서 인용한 것이 양쪽에 다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버클리대 로스쿨 측이 제소 내용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둘째는 조 후보자가 다른 저자의 아이디어를 베끼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법학 논문에 건축 설계 같은 대단한 창의성이 있을 리 없지만 그마저도 정직성이 확보되고 나서의 문제다. 버클리대의 표절 기준에는 ‘타인의 저작으로부터 구절을 다수 베끼는 것(wholesale copying of passages from works of others)’이 명확히 들어 있다. 당시 버클리대 로스쿨에서 표절 심사를 담당한 사람은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고문 메모’로 세계적 악명을 떨친 한국계 존 유 학장이다. 버클리대 로스쿨에는 ‘한국법 센터’가 있고 서울대와 교류를 하고 있다. 교류의 파트너가 버클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 교수로 재직 중인 조 후보자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버클리대로서는 이 논문을 표절이라 판단하면 학교가 창피해지는 데다 서울대 측의 주요 파트너를 잃게 된다. 그래서 나는 서울대가 이 논문을 한번 직접 조사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서울대 연구진실성위원회는 위원회가 직접 받은 공문도 아니고 조 후보자 앞으로 온 존 유 학장의 편지를 근거로 심사를 거부했다. 편지는 존 유 학장이 표절 조사를 한 뒤 대학 본부 앞으로 보낸 내부 메모랜덤(memorandum)을 첨부한 것이다. 표절이 아니라면 조 후보자 앞으로 보낼 필요도 없는 것이므로 조 후보자의 요청에 의해 보내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연구진실성위원회 위원장은 진보 편향의 이준구 전 경제학과 교수가 맡고 있었다. 이것이 조 후보자가 ‘무혐의로 결론 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내막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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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NF 폐기와 미사일 배치[횡설수설/송평인]

    냉전 해체라고 하면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를 먼저 떠올리지만 그 근저에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의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 회담, 중거리핵전력(INF) 조약 같은 합의가 자리 잡고 있다. INF 조약은 1986년 10월 레이캬비크 회담에서 논의가 시작돼 수차례 회담 끝에 1987년 12월 체결됐다. ▷미소 간에 직접 위협이 되는 핵 운반체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불리는 장거리미사일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이다. 이를 전략무기라고 한다. 사거리 500∼5500km의 중거리 핵 운반체는 주로 미국 본토에서 떨어진 서유럽과 소련의 동유럽 위성국 사이의 위협이었다. 그래서 전략무기와 구별해 다뤘다. 미소에 위협이 덜 직접적인 중거리핵전력 폐기를 우선 확정하고 전략무기 감축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탈(脫)냉전 시대로 들어가는 문턱이 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북한이 쏴대는 미사일을 ‘작은 것’이라며 별것 아닌 듯이 취급했다. 690km까지 날아간 이스칸데르급 미사일도 있으니 다 ‘작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로서는 500km 미만 날아간 것도 제주도를 뺀 남한 전역에 위협이 되므로 미국 중심의 기준을 적용해 안보를 다룰 수는 없다. 그러나 미국에는 직접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국 우선주의자인 트럼프에겐 별것 아닐 수 있다. ▷미국은 지난해 10월 이미 INF 조약 탈퇴를 예고했다. 그 전해 러시아가 9M729라는 미사일을 배치함으로 사실상 INF 조약을 위배했다는 것이 이유다. 러시아는 그 미사일은 사거리가 490km로 INF 조약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나 미국은 최대 1500km까지 날아가는 이스칸데르K 미사일로 보고 있다. 게다가 INF 조약은 미국과 러시아 사이의 조약으로, 새로 군사강국으로 굴기하는 중국이 그 조약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결정적 맹점이 있다. ▷냉전 해체의 상징이던 INF의 파기는 신(新)냉전의 시작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장관은 INF 조약 탈퇴 하루 만인 3일 “아시아 지역에 중거리미사일을 배치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중국은 관영매체를 통해 “한국과 일본은 미국 아시아 정책의 총알받이가 돼선 안 된다”고 발끈했다. 냉전시대 소련은 SS-20, 미국은 퍼싱-2 배치를 놓고 유럽에서 맞붙었다. 이제 중거리미사일 배치의 전장(戰場)이 아시아로 확대될 모양이다. 동북아에는 냉전시대보다 더한 폭풍주의보가 내려진 셈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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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안보와 경제 양면에 국정파탄의 그림자 짙다

    문재인 정부가 내세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업적인 한반도 평화 정착마저 기만적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북한 핵협상은 한 걸음도 진전하지 못했다. 북한에 시간만 벌어주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는 현실화되고 있다. 북한이 그 사이 핵탄두를 12개나 늘렸다는 보도가 나왔다. 보도의 근거를 따져 물을 필요도 없다. 내가 김정은이라도 그랬을 것이다. 북한이 6차 핵실험을 하고 미국이 죽음의 백조로 불리는 B1B 폭격기를 북한 동해 상공 깊숙한 곳까지 출격시킨 것이 문재인 정부 출범 몇 개월이 지나서다. 그 무렵 한 청와대 참모가 저녁 자리에서 한반도가 불바다가 될지도 모른다고 거품을 물며 북한보다 미국을 성토하길래 그에게 “트럼프는 돈이 아까워서라도 전쟁을 하지 못할 자”라고 일갈한 적이 있다. 모든 방면에서 더 강한 압박을 유지해야 할 순간에 압박을 푼 것이 이 정부다. 우리가 한미 군사훈련을 중단하고 남북군사합의로 스스로를 무장해제하는 동안 북한은 우리 군이 궤도조차 추적하지 못하는 신형 미사일을 개발하고 3000t급 잠수함의 건조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발사 능력의 진전을 드러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군사훈련 중단한 것, 언제든지 재개할 수 있다”며 별거 아닌 듯이 말했다. 그러나 이제 한미 군사훈련은 우리 측이 재개를 요구해도 훈련비를 내지 않으면 트럼프는 응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 전방과 해안에서 경계실패의 소식이 들려온다. 급기야 먼 하늘에서는 1953년 정전협정 이후 처음으로 러시아 군용기에 의해 영공이 침범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터키는 군사력에서 러시아의 상대가 되지 않는데도 2015년 11월 자국 영공으로 4km 정도 들어와 17초 정도 머문 러시아 전폭기를 격추시켰다. 우리는 러시아 조기경보기가 9km까지 들어오고 7분간 휘젓고 다녔는데도 조용조용 처리하고 있다. 트럼프처럼 거친 말을 할 때는 싸울 의사가 없다는 뜻이다. 정말 싸울 의사가 있으면 몽둥이를 뒤에 숨긴 채 부드러운 말을 할 것이다. 실전 같은 훈련을 하고 철통같은 경계를 하는 것은 전쟁을 원해서가 아니라 전쟁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전쟁과 평화의 역설적인 측면을 알지 못하고 겉으로 보이는 대로 위기와 평화를 판별하는 지도자를 둔 것이 우리의 불행이다. 지난달 국제신용평가사 피치가 한국의 올해 국내총생산(GDP) 전망치를 2.5%에서 2.0%로 낮춘 데 이어 이달 들어 S&P도 2.4%에서 2.0%로 낮췄다. 국내에서는 29일 처음으로 하나금융투자가 2.0%의 전망치를 내놓았다. 2.0%는 차마 1%대를 언급하지 못하는 예의일 수 있다. 노무라 ING처럼 1%대 전망치를 내놓은 외국 증권사도 있다. 한국의 성장률은 2011년 이후 지난해까지 3% 안팎에서 오락가락하며 연평균 3%의 성장을 했으나 올해 처음 1%대 성장률로 추락할 가능성이 커졌다. 케인스의 유효수요이론만 해도 투자를 늘려 투자수요와 소득수요를 동시에 끌어올리자는 것이지, 소득만 올려 수요를 끌어올리자는 것이 아니다. 소득주도성장은 꼬리가 몸통을 움직이겠다는 무모한 이론이다. 더 큰 문제는 소주성이 빚은 참혹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유턴할 생각이 없다는 점이다. 올해는 그나마 2% 성장이 희망으로는 남아 있지만 내년부터는 1%대 성장이 고착화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이 한국개발연구원(KDI) 등에서 나오고 있다. 한일 갈등이 안보와 경제 양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갈등의 근저에는 관제 민족주의가 깔려 있다. 그 민족주의는 심지어 편파적이기까지 해서 중국에 대해서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압박에 물러서고 미세먼지까지 내 탓을 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만사 네 탓이다. 문재인 정부가 위안부 재단을 해체하고 징용 배상 문제를 방치했을 때 무슨 복안이 있었던가. 대책 없이 스스로 불러일으킨 관제 민족주의의 관성으로 여기까지 왔다. 후대의 사가(史家)들은 이번 사태를 해방 이후 역사의 가장 어리석은 대목 중 하나로 꼽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12척은 귀양 갔다가 와보니 남은 배였다. 그 많은 배를 스스로 고물로 만들고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국정농단을 우습게 보이게 만들 국정파탄의 그림자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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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리스 존슨[횡설수설/송평인]

    차기 영국 총리로 유력한 보리스 존슨(55)은 1964년 아버지가 미국에 유학 중일 때 뉴욕에서 태어났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외교관 자녀를 위한 유러피안스쿨에 다녀 프랑스어까지 유창하다. 영국으로 돌아와 이튼스쿨과 옥스퍼드대를 다녔다. 게으르고 괴팍하기는 하나 인기 있는 학생이었고 두 학교에서 다 토론클럽 회장과 학생신문 편집장을 지냈다.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53) 등과 같은 세대로 영국 보수당을 이끄는 옥스퍼드 그룹에 속한다. ▷첫 직업은 기자였다. 1987년 ‘더타임스’에서 수습기자를 할 때 인용을 조작했다가 해고됐다. 그 뒤 ‘데일리 텔레그래프’에서 자리를 잡고 브뤼셀 특파원과 정치칼럼니스트로 13년간 일했다. 브뤼셀 특파원 때 영국 내 유럽연합(EU) 회의론을 조장하기 위해 ‘EU가 콘돔 사이즈를 16cm로 통일하려 한다’는 등 과장된 기사를 쓴 것으로 비판받는다. 기사의 진실성은 간혹 논란을 빚었지만 풍부한 지식과 재기는 널리 인정받고 있다. ▷2001년 하원의원이 된 그가 외국에서까지 눈길을 끈 것은 2008년 런던시장에 당선되면서다. 반대하는 유권자조차 그가 웃겨서 그에게 투표했다고 한다. 그는 따분한 걸 참지 못하는 유형이다. 쾌활하고 유머가 넘친다. 그러나 그 유머는 윈스턴 처칠처럼 고전적이지 않고 스스로 망가지면서 조롱거리가 되는 것을 감수하는 4차원적일 때가 많다. 다른 한편 엘리트주의에 젖어 있고 때로 여성차별적이거나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는다. ▷‘악동(惡童)’ 이미지의 존슨은 ‘영국판 트럼프’로 불리기도 한다. 유난히 밝은 금발, 유복한 가정환경, 난잡한 사생활, 무원칙주의 등이 비슷하다. 과거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케인스주의의 잔재와 싸운 대서양 양쪽의 ‘정치적 연인(戀人)’이었다면 트럼프와 존슨은 68혁명의 유산인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과 싸우는 대서양 양쪽의 ‘정치적 형제’쯤 된다. 다만 악동이라도 트럼프는 무식해 보이고 군대식인 데 비해 존슨은 지적이고 록(rock)풍이다. ▷토론과 타협을 중시하는 ‘영미식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 언어의 신중함이 사라지고 있다. 트럼프와 존슨은 트위터를 통해 즉흥적으로 말하길 좋아하고, 거짓말도 수시로 하고, 해야 할 대답은 끝까지 피한다. 트럼프와 존슨이 영미식 민주주의 파산의 전조인지, 위선을 거부하고 직접성을 강화하는 새 민주주의로 가는 혼돈스러운 국면인지 지켜볼 일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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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관제 민족주의 넘어 관제 쇼비니즘

    지난해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100년이 되는 해였다. 그 전쟁에 대해 당시 외신들은 전문 사가(史家)들을 인용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일어난 전쟁’으로 평가했다. 근시안적인 정치가들이 쇼비니즘, 즉 맹목적 애국주의에 이끌려 일으킨 전쟁이라는 것이다. 그런 전쟁이 역사상 최대의 인명 피해를 초래했다.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계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저격했다. 독일이 오스트리아의 동맹이긴 하지만 황태자 부부는 오스트리아에서 그다지 인기가 없는 후계자였다. 게다가 독일이 오스트리아 편에 서서 세르비아 등 슬라브족의 후견자인 러시아와 전쟁을 하게 되면 러시아의 동맹국인 영국 프랑스와 동시에 전쟁을 치러야 한다. 그런 위험을 감수할 만한 국익이 없는데도 독일 지식인과 언론은 게르만족의 자존심을 내세우며 전쟁을 선동했다. 쇼비니즘이란 말은 본래 프랑스에서 왔다.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으나 한때 교과서에도 소개된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도 쇼비니즘적이라는 냉정한 평가가 있다. 당시 프랑스와 영국에서도 쇼비니즘이 기승을 부렸지만 의회를 통해 제도적으로 여과되고 있었다. 그러나 전제주의 체제인 독일에서는 황제가 대중 여론의 직접적 영향을 받았다. 독일 대중에게 외교는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받는(give and take)’ 타협이 아니라 ‘이기느냐 지느냐’의 치킨게임이었다. 최장집 교수가 문재인 대통령의 올 3·1절 기념사를 놓고 관제(官製) 민족주의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한 바 있다. 문 대통령이 지속적으로 조장해 온 관제 민족주의에서 국내적으로든 국외적으로든 어떤 생산적 이익이 기대되는지 알기 어려웠다. 그런 의미에서 맹목적이었다. 결국 그것이 발단이 돼 한일(韓日) 간 경제 갈등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빚어졌다. 한일 양국에서 쇼비니즘의 기운이 강하게 일고 있어 우려된다. “한국이 미국에 울며 매달리고 있다” 식의 글로 한국을 조롱하는 산케이신문의 논조는 더러운 쇼비니즘이다. 하지만 청와대 참모가 전쟁도 아닌데 동학혁명 죽창가 운운한 것 역시 해로운 관제 쇼비니즘일 뿐이다. 쇼비니즘에 쇼비니즘으로 대응하는 것이야말로 악순환의 고리에 사로잡히는 어리석은 짓이다. 일본이 문 대통령을 비난하니 문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논리는 한국이 아베 총리 비난하니 아베 총리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논리처럼 졸렬하다. 과거사 문제가 경제 갈등이 되도록 방치한 쪽도, 과거사 문제를 경제 갈등으로 몰아간 쪽도 잘못이라면 서로 상대편 정부를 비판해 상대편을 자극하기보다는 자국 정부를 비판해 실용적 방향으로 견인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다. 청와대는 어제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해 제3국 중재로 가자는 일본의 요구를 거부했다. 일본의 요구대로 중재로 가기로 합의한다면 일본의 수출 규제는 부당해지는 모양새가 되고 일단 격화하는 갈등을 잠재울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는데 그것마저 사라졌다. 제3국 중재로 가자는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이자는 주장이 나온 것은 중재에 승산이 있다고 봐서 그런 것은 아니다. 설혹 중재에 지더라도 한국 정부는 ‘중재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배상한다’는 퇴로를 얻게 된다. 중재가 성립하지 않아 국제사법재판소(ICJ)까지 가서 패소하는 경우에도 그렇다. 한국 정부가 배상할 액수가 적지 않겠지만 무역 갈등으로 초래될 막대한 손해와 비교하면 별게 아닐 수 있다. 물론 최선책은 제3국 중재나 ICJ로 가지 않고 해결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길 수 있다는 법률가들도 없지 않지만 그 반대가 대부분이다. 지게 되면 돈이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 수치를 당하고 한일 관계에서 수세에 몰릴 수 있다. 강제징용 피해자의 개인적 청구권이 남아 있다는 한국 대법원의 배상 판결은 대법관들 다수가 외교적 청구권에 대해 말을 얼버무려서 그렇지, 일본 기업만이 아니라 한국 정부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그 의미를 문재인 청와대가 알아듣지 못한 척해서 지금과 같은 상황에 왔다. 무역 갈등은 커져 가는데 국제 중재나 재판도 안 되고 우리 정부가 전향적인 배상안을 내놓을 의지도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일본 기업에 배상을 강제할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제 가능한 로드맵조차 보이지 않으니 암담할 뿐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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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르무즈 해협 파병[횡설수설/송평인]

    해협은 중요하다. 러시아 선박이 흑해에서 지중해로 나오려면 터키의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지나야 한다. 18, 19세기 남하하는 러시아와 이를 저지하려는 영국 프랑스 사이에 싸움이 거셌다. 이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나오려면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야 한다. 과거 영국은 본토에 맞먹는 규모의 함대를 지브롤터에 두고 제해권을 장악했다. 지브롤터 해협 이외에 출구가 없던 지중해에 숨통을 틔워 준 것이 수에즈 운하다. 그 관할권을 둘러싸고도 1956년 프랑스 영국과 이집트 사이에 전쟁 위기까지 갔다. ▷페르시아만에서 원유를 실은 배는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오만만을 거쳐 아라비아해로 빠져나간다. 해협의 가장 좁은 곳은 너비가 39km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이란과 오만이 절반씩 나눠 갖고 있다. 대부분의 배가 통과하는 오만 쪽 해역에는 들어오는 배와 나가는 배를 위한 각각 2마일 너비의 항로가 선박 간 충돌을 막기 위한 완충 구역을 사이에 두고 갈라져 있다. 고작 4마일의 좁은 항로를 통해 전 세계 액화석유가스의 3분의 1, 원유의 5분의 1이 움직이는 것이다. ▷미국과 이란의 핵협상을 둘러싼 갈등이 격화하는 가운데 호르무즈 인근 해역에서 유조선들에 대한 공격이 잇따르고 있다. 미국은 이란을 배후로 지목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중동에서 석유를 수입하는 국가들은 스스로 유조선을 보호해야 한다”며 파병을 요구했다. 최근 사태는 제1차 세계대전 때 터키가 독일 편에 서서 항로를 폐쇄하자 연합국이 반발한 다르다넬스 해협 사태와 비슷해지고 있다. ▷일본은 파병 요청을 받았다고 밝혔고 우리나라도 의사 타진 수준의 비공식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호르무즈 해협 파병에는 군인들의 인명 피해 우려와 함께 이란과 쌓아온 경제협력관계를 단번에 날려버릴 리스크가 있다. 하지만 원유의 75%를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수입하는 나라가 남 일처럼 ‘나 몰라라’ 하고 무임승차만 바라는 것은 무책임해 보인다. ▷진보 진영에 파병에 대한 무조건적 거부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상선들의 항해할 자유를 지키기 위한 파병은 대의(大義) 면에서 수긍할 만하다. 만약 일본이 파병하는데도 우리는 파병하지 않는 상황이 되면 미국의 눈에 양국에 대한 평가는 크게 대비될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미동맹을 위해 이라크 파병까지도 결정했다. 우리로서는 일본의 경제보복 규제에 직면해 미국의 중재가 절실한 상황에서 파병은 거부하기 곤란한 요청이라는 점도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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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태수와 장영자[횡설수설/송평인]

    사망자 츠카이 콘스탄틴, 사망장소 에콰도르 ○○병원, 사망일시 2018년 12월 1일, 특이사항 연고자 없음…. 카자흐스탄에서 만든 가짜 신분이었기에 공식적으로는 연고자는 없었다. 하나 실제로는 아들 정한근 씨가 임종을 지켰다. 한근 씨는 입관 당시 아버지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검찰에 제출했다. 시신의 얼굴이 신문에 실리는 일은 드물지만 그 사진은 그의 죽음을 애도가 아니라 증명하기 위해서 신문에 실려야 했다. ▷정 씨는 에콰도르에서 1997년 한보 사태 당시 이미 도피한 아들 한근 씨와 함께 유전사업을 벌이고 생일파티 사진까지 남기는 등 꽤 안락한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도피 생활을 하면서도 95세의 장수를 누렸다니 그가 특별히 건강한 것인지, 검찰이 쫓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인지 모르겠다. 다만 한때 재계 서열 14위 그룹을 이끌었던 사람이 84세의 나이에 해외로 도피해 언제 붙잡혀 송환될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 보낸 11년은 그 자체로 창살 없는 감옥이었을 것이다. ▷정 씨의 입관 당시 모습이 신문에 실린 날 1980년대 2000억 원대 어음 사기 사건에 연루됐던 장영자 씨가 다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는 기사도 실렸다. 장 씨는 1982년부터 1993년까지 11년, 1994년에서 1998년까지 4년, 2001년에서 2015년까지 14년 등 29년을 사기죄로 감옥에서 보냈다. 지난해 다시 사기 혐의로 구속됐고 징역 4년이 확정된다면 2022년까지 총 33년간 옥살이를 하게 된다. ▷숙대 메이퀸을 지낼 정도로 미모를 자랑했고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낸 남편 이철희 씨와 함께 사채시장의 ‘큰손’으로 행세했던 장 씨가 처음 옥살이를 할 때의 나이가 38세였다. 어느덧 75세가 됐다. 한때 ‘대도(大盜)’로 불렸던 조세형이 늙어서도 좀도둑질을 계속하며 도둑질의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듯이 장 씨 역시 나이가 들어서도 사기의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 그녀의 진짜 불행인 듯하다. ▷정 씨의 뇌물은 통이 컸다. 뇌물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동그라미 하나가 더 붙은 것에 놀랐다고 한다. 불법으로 쌓아올린 한보그룹이란 성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로 향하는 과정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장 씨가 ‘큰손’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집안이 전두환 전 대통령 부인 이순자 씨의 사돈 집안이라는 배경도 있었다. 돈으로 나라를 뒤흔들었던 두 사람의 노년이 한마디로 탐욕무상(貪慾無常)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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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미란다 원칙’ 받들며 별건 수사하는 나라

    미국에서 미란다(Miranda) 원칙을 확립한 미란다 판결 이전에 ‘맵(Mapp)’ 판결이 있었다. 별건(別件) 수사를 통해 수집된 증거는 배제한다는 원칙을 확립한 판결이다. 1961년 경찰관 3명이 맵이란 여성의 집을 찾아 폭파사건 혐의자를 찾고 있다며 집을 수색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맵은 변호사와 통화를 한 뒤 수색을 거부했다. 경찰관은 맵의 손에 수갑을 채우고 집을 수색했다. 그러나 혐의자는 찾지 못했다. 그 대신 음란물을 발견하고 맵을 음란물 소지 혐의로 체포했다. 맵은 기소됐고 유죄 선고를 받았다. 이 사건은 연방대법원까지 올라갔고 맵은 무죄 선고를 받았다. 맵의 음란물 소지 혐의는 폭파사건 혐의자를 찾는 본건(本件)과는 상관없는 별건(別件) 수사의 결과라는 이유에서다. 적폐청산 수사 과정에서 적지 않은 별건 수사가 이뤄지는 가운데 최근 서울고등법원이 별건 수사로 수집된 증거를 명확히 부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위법 수집된 증거는 배제하라고 형사소송법에 나와 있지만 어디까지 구체적으로 위법으로 볼지는 법원에 달려 있다. 방위사업청 공무원들이 방위사업체로부터 뇌물을 받는다는 의혹으로 시작된 수사가 있었다. 국방부 조사본부는 방위사업청 직원들의 법인 카드 사용 명세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사무실 컴퓨터 외장 하드와 업무 서류철을 통째로 압수해갔다. 압수된 컴퓨터 외장 하드에 직원들의 군사기밀 유출을 입증하는 자료가 있었던 모양이다. 기무사가 그 자료를 열람하고 직원들을 군사기밀 유출 혐의로 기소했다. 법원은 이를 별건 수사로 보고 무죄를 선고했다. 정의감에 불타는 일반인이라면 이 판결을 이상하게 볼 수도 있다. 경위야 어쨌든 군사기밀 유출이 있었고 그에 대한 처벌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증거가 있는데도 처벌할 수 없다니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분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상식적 판단을 뒤집었기에 맵 판결은 충격적이었다. 수사의 경위야 어떻든 맵은 음란물을 소지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법원은 수사의 경위를 문제 삼았다. 수사기관의 손쉬운 수사에의 유혹을 방치할 경우 광범위한 인권 침해가 일어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우리는 과거 영장도 없이 아무 데나 뒤져 증거를 찾을 수 있던 시대에서 영장이 있어야 압수수색할 수 있는 시대로 넘어왔다. 영장의 범위를 벗어나는 압수수색을 인정하면 영장도 없이 증거를 찾던 시대로 회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논리적 사고가 법원의 판결에 깔려 있다. 미란다 원칙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에 대해 고지받지 않은 상태에서 혐의자의 자백은 강요에 의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원칙이다. 강요에 의한 자백이 위법이라는 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조금 더 노력하면 변호인접견권이 허용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자백도 위법이라는 걸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변호인접견권에 대해 듣지 못했다고 해서 혐의자가 자백을 했는데도 증거로 삼을 수 없다는 건 누가 봐도 당연한 것은 아니다. 10여 년 전 프랑스 신문 르몽드에서 퀴즈 문제를 하나 본 적이 있다. 미란다 원칙이 프랑스에도 적용되느냐 아니냐를 묻는 퀴즈였다. 정답은 ‘아니다’였다. 프랑스도 뒤늦게 미란다 원칙을 받아들이고는 있지만 부분적으로만 수용하고 있을 뿐이다. 독일 등 다른 유럽 국가도 비슷하다. 우리나라는 미란다 원칙을 형사소송의 대원칙처럼 받들고 있다. 형사소송 체계까지 할리우드 대중문화의 영향을 받는 천박한 풍토를 탓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미란다 원칙과 같은 높은 수준의 원칙을 존중하는 나라에서 별건 수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취급하는 심각한 불균형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범죄를 끝까지 추적해 정의를 세운다는 입장에서 보면 영장주의 자체가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법치는 정의를 실현하는 기술(技術)이면서 정의의 추구를 제한하는 기술이다. 프랑스 혁명기의 자코뱅에서 20세기 공산주의자들까지 정의를 세우겠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정의를 유린한 역사가 적지 않기에 정의 추구에는 절제가 필요하다. 적폐청산 수사가 별건수사로 얼룩졌다 할지라도 재판만큼은 적폐청산의 대의(大義)에 가려진 수사의 위법을 가려내 형사소송 체계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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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日안보조약 불만[횡설수설/송평인]

    미일 안보조약은 1951년 체결된 후 일본에서 불평등한 조약이라는 불만이 나와 이른바 안보투쟁의 원인이 됐다. 지금은 미국에서 오히려 불평등한 조약이라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26일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차 일본 오사카로 향하기 전 “일본이 공격을 받으면 미국은 그들을 위해 싸우지만 미국이 지원을 필요로 할 때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소니 TV로 미국에 대한 공격을 지켜보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패전국 일본은 자위대를 보유하고 개별적 자위권까지는 행사할 수 있지만 집단적 자위권 행사는 평화 조항이라고 불리는 일본 헌법 9조에 저촉된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집단적 자위권은 자국의 동맹국이 공격을 받으면 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반격하는 권리를 말한다. 집단적 자위권이 없이 서로 방어해 주는 동맹국이 되기는 어렵다. 그래서 한국 필리핀 등은 미국과 상호방위(mutual defense)조약을 체결하고 있지만 일본은 이름부터 다른 안보(security)조약을 체결하고 있다.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꿈꾸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2015년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가능하도록 한 법을 날치기로 통과시켰지만 여전히 헌법 9조에 저촉된다는 주장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트럼프가 불만을 늘어놓는 게 아베에게 반드시 불리하지 않다. 헌법 9조를 개정해 위헌 논란 자체를 없애려는 아베의 시도에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접국인 한국으로서는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가질 경우 한반도 유사시 우리의 요청 없이도 위협받는 미군을 구실로 일본이 개입할 수 있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트럼프의 불만은 따지고 보면 돈과 연결돼 있다. 주둔군 수로 보면 주일미군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주독미군, 주한미군 순이다. 주일미군지위협정에 따르면 주일미군의 운영경비는 미국이 부담하도록 돼 있지만 1978년부터 일본은 그 비용을 분담하고 있다. 트럼프는 미일 안보조약의 실질적 비대칭성을 거론하며 분담금을 더 내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는 한국에도 주한미군 운영경비의 분담금 증대를 요구하고 있다. 한국은 1991년부터 분담금을 내기 시작해 분담률이 아직 일본만큼 높지는 않다. 하지만 한국은 일본과 달리 베트남전 참전, 이라크 파병 등으로 피를 흘리면서까지 미국의 동맹국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동맹을 소중히 여기고 동맹의 의리를 지키되 부당할 정도의 분담금 증대 요구에는 당당히 대응할 필요가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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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트럼프 재선 도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8일 재선 도전 출정식에서 민주당의 대선 후보 유력주자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과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을 겨냥해 ‘졸린(sleepy) 조 바이든’ ‘미친(crazy) 버니 샌더스’라고 부르며 조롱했다. 미국 사회학자 대니얼 벨은 신대륙 정치가 구대륙의 이데올로기적 대결에 오염되지 않고 상호존중의 정신을 간직한 것을 미국의 축복으로 여겼으나 트럼프 이후 그런 말을 하기가 어려워졌다. ▷미국 정치에서 말의 책임감이란 고전적 원칙이 사라지고 있다. 트럼프에게 말은 협상에 앞서 벼랑 끝까지 상대방을 몰고 가는 수단이다. 말의 내용보다 자극하거나 무마하는 말의 효과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구별하기 어렵고 하룻밤 사이에 말을 뒤집기도 한다. ▷미국인의 62%도 이런 트럼프가 불편하다고 여긴다. 경제 활황에도 불구하고 최근 폭스뉴스 조사에서는 민주당의 주요 도전자가 모두 트럼프를 이기고 특히 바이든은 10%포인트의 가장 큰 격차로 트럼프를 이기는 것으로 나왔다. 경제 활황이라도 좋은 일자리는 많이 늘지 않았을 수 있다. 최근 갤럽 조사에서 응답자의 40%만이 트럼프의 일자리 성과에 긍정적 반응을, 55%가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게다가 경제는 활황을 끝내고 하락 조짐을 보여 트럼프가 점수를 얻을 여지가 줄고 있다. ▷세계는 여태껏 겪어보지 못한 미국을 겪고 있다. 친절한 엉클 샘은 더 이상 없다. 자기 이익이 최우선인 스크루지 아저씨가 있을 뿐이다. 민주당 도전자들은 이런 트럼프를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이고 종교차별적’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중하층 노동자는 멕시코와의 국경에 철의 장벽을 쌓고 중국 상품에 관세를 부과하려는 트럼프의 보호주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트럼프는 대선 출정식 후 하루 만에 291억 원의 후원금을 모았다. 민주당의 주요 세 후보가 출마 선언 이후 모은 후원금을 합친 215억 원보다 많다. ▷미 대선까지는 아직 1년 4개월 넘게 남았다. 2016년 대선 6개월 전까지도 거의 아무도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리라고 예측하지 못했다. 당시로는 미국인은 트럼프가 어떤 대통령이 될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미국인들은 그때보다 트럼프를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좋은 식으로 그를 더 잘 알고 있지는 않다. 라스베이거스의 도박사 중에는 트럼프에게 거는 사람이 적지 않다. 미국에서 재선에 나선 대통령은 대개 이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3년 전 뒤집힌 예상이 이번에는 뒤집히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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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문재인-윤석열’ 운명공동체

    문무일 검찰총장은 윤석열이라는 실력자 위에서 고군분투한 총장이었다. 처음에는 힘만 들고 티도 안 나는 자리를 왜 맡나 했는데 끝까지 주눅 들지 않고 막판에는 흔들리는 옷만 아니라 흔드는 손도 보라며 권력에 일갈하는 기세로 나와 보기 좋았다. 문무일이 먼저 총장에 임명되고 총장의 의견을 들어 윤석열이 서울중앙지검장에 임명된 게 아니라 윤석열이 먼저 임명되고 그 뒤에 문 총장이 임명됐다. 청와대는 뒤바뀐 순서를 통해 검사들에게 검찰의 실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명확히 보여줬다. 직전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이 당시 법무부 검찰국장과 같이 밥을 먹고 관행대로 서로의 부하직원들에게 격려금을 준 일이 느닷없이 친정부 언론에 보도되고 다음 날로 이영렬이 경질됐다. 음습한 공작의 냄새가 풍겼다. 그런 공작의 결과 윤석열이 먼저 서울중앙지검장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청와대는 그를 앉히기 위해 고검장급이던 서울중앙지검장 자리를 검사장급으로 낮추는 위인설급(爲人設級)의 일까지 벌였다. 어느 고등법원 부장판사로부터 들은 얘기다. 한 법조인의 상갓집에 갔는데 먼저 와 있던 윤석열이 뒤늦게 온 문 총장을 보고 일어서지도 않더란다. 윤석열 주변에 그가 거느리고 온 검사들은 다 일어서서 예의를 갖췄으나 그만이 일어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 총장은 문상을 한 뒤 함께 온 대검 참모들과 따로 상을 차렸다고 한다. 직접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게 사실일까 아직도 의문을 갖고 있다. 나이 든 늦깎이들은 대체로 더 깍듯한 법이다. 그 부장판사가 허튼소리 할 사람은 아니지만 상갓집에서 본 일에 대한 기억이라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다만 그 얘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법조계가 검찰 내 권력구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문 총장은 내가 검찰에 출입하며 상대한 평검사들 중 마지막 남은 검사다. 그 아래 기수로는 거의 안면이 없다. 윤석열을 알지 못하나 그에 대해서는 그가 중앙수사부 검사이던 시절 함께 식사 자리에 동석했던 사람으로부터 들은 얘기가 있다. 윤석열이 “죄 없는 사람 데려다 죄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곳이 중수부”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중수부 검사 출신으로 대법관을 지낸 분에게 윤석열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하자 이 사람 발끈했다. 내가 중수부를 모욕한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다른 기회에 검찰총장을 지낸 분에게 윤석열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하자 이분은 “처음부터 죄 있다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라며 담백하게 받아넘겼다. 좋게 말하면 그런 뜻이었을 게다. 죄 없는 사람을 죄 있는 사람으로 만들려면 못된 수사 기법이 동원되기도 한다. 검찰에서 가족같이 지낸 사람의 잘못을 불어놓고 재판에 증인으로 나오길 주저할 때는 법이 금지하는 유죄협상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환부만 도려내는 외과 수술식 수사’에 대한 강조는 사라지고 곳곳에서 저인망식 별건(別件) 수사가 벌어지고 있다. 수사관이 표적 기업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자료를 뒤진다. 기업에는 걸면 걸리는 혐의가 많다. 그런 혐의를 피하기 위해 자료를 감추면 이번에는 증거인멸을 했다고 팬다. 그런 것으로도 안 되면 오랜 관행을 비리로 둔갑시키면 된다. 그렇게 모으고 모아서 당사자조차 놀랄 정도의 많은 혐의와 두꺼운 공소장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윤석열과 그 키즈(Kids)’의 수사방식이다. 덩치 큰 사람들이 오히려 성격이 여리다고, 윤석열이 독한 게 아니라 그 밑에 과거 노무현 청와대에서 일해 청와대와의 교감에 능한 정치참모 역할의 검사 하나와 누구의 말처럼 ‘한 편의 소설’같이 공소장을 제작하는 데 능한 수사기계 역할의 검사 하나가 있다는 얘기도 있다. 윤석열은 국가정보원 댓글 수사와 관련해 윗사람을 치받고 성공한 전력 때문에 그들이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면 거부하지도 못한다고 한다. 그렇게 떠밀리듯 지금의 자리에 와 있다는 평가도 있다. 문무일 검찰은 실은 제1기 윤석열 검찰이었다. 앞으로 시작되는 것은 제2기 윤석열 검찰일 뿐이다. 윤석열이 양날의 칼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 혹은 기대는 접으시라. 문재인-윤석열은 한 배를 탔다. 그들은 적폐청산 수사로 인해 운명 공동체로 엮였다. 흥해도 같이 흥하고 망해도 같이 망한다. 권력으로부터 검찰의 독립은 사치스러운 말이 되고 지금은 씨알도 먹힐 여지가 없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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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홍콩 100만 시위

    1920년대 상하이, 1950년대 홍콩은 중국 현대사의 한 시대를 대표하는 도시들이다. 1920년대 상하이는 당시 ‘동양의 파리’라고 불릴 정도로 국제적이어서 대한민국 최초의 임시정부도 그 속에 자리 잡았다. 오늘날의 홍콩을 만든 것은 1950년대 공산화된 중국을 피해 온 난민들이다. 그들이 홍콩의 개방성 속에 어우러져 서구에 필적할 아시아의 첫 대중문화의 시대를 열었다. ▷홍콩은 예나 지금이나 관광의 홍콩이지 정치의 홍콩은 아니다. 그러나 1997년 홍콩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된 이후로는 정치의 홍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홍콩은 중국에 속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홍콩의 정부 수반인 행정장관만 해도 정부에 의해 임명되지 않고 선거로 선출된다. 그러나 주민들의 직접 선거가 아니라 대의원의 간접 선거로 선출되기 때문에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홍콩 행정장관이었던 둥젠화(董建華), 도널드 창, 렁춘잉(梁振英)과 현 캐리 람 장관은 모두 강경 친중파다. 여론조사에서는 민주파 후보의 지지도가 높아 주민의 의사와 간선제의 결과가 일치하지 않았다. 2014년 홍콩 주민들은 행정장관의 직선을 요구하며 50만 명이 참가한 ‘우산 혁명’ 시위를 벌였다. 중국 정부는 마지못해 2017년 직선제에 동의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 직선제가 중국 인민대표회의가 사전에 뽑은 2, 3명의 후보를 놓고 직접 투표하는 무늬만 직선제여서 홍콩 주민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9일 홍콩에서 반환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가 열렸다. 중국과의 범죄인 인도 협정 개정 반대 시위에 100만 명이 운집했다. 시위대는 중국 정부가 반체제 인사나 인권운동가를 본토로 송환하는 데 이 법을 악용할 것을 우려했다. 시위는 전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켜 미국 캐나다 독일 일본 등에서도 연대 지지 집회가 열렸다. ▷이번 시위는 닷새 지연돼 주말에 맞춰 열린 6·4 톈안먼 사태 30주년 추모 시위라고도 볼 수 있다. 홍콩이 정치 개혁을 요구하다가 희생된 6·4 톈안먼 시위대를 끊임없이 추모하는 것은 중국의 정치 개혁 없이 홍콩의 정치 개혁도 어렵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우산 혁명을 이끌었던 지도부에게 징역형이 선고되는 것을 목격한 지금, 그것은 단순한 추모 이상이다. 지금의 홍콩 주민들에게 30년 전 톈안먼 시위대의 요구는, 그것 없이는 정치적 자유는 물론이고 치솟는 집값 등 민생 문제도 독자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절실한 현재진행형의 요구가 되고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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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조국 수석, “괴물은 되지 마라”

    서울대 법대는 형법 쪽이 유독 약하다. 민법 쪽만 하더라도 곽윤직 교수라는 큰 산이 있었고 그 계보가 양창수 교수(전 대법관), 김재형 교수(현 대법관)로 면면히 이어졌다. 반면 형법 쪽은 유기천 교수가 유신 시절 미국으로 망명해 버린 후 지금까지도 변변한 교수가 없다. 1984년 촉망받던 강구진 교수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사망하지 않았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강 교수는 이수성 교수와 연배가 비슷하다. 이 교수는 나중에 서울대 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냈지만 형법 교수로서는 존재감이 없었다. 그가 강 교수의 빈자리에서 선후대를 잇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서울대에는 단독으로 형법 교과서조차 써본 교수도 하나 없다. 그런 그가 ‘낳은’ 사람 중 하나가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인 조국 교수다. 조 교수가 대학원 시절 쓴 석사논문은 소련 법학자들의 사상을 다루고 있다. 심사위원장은 이 교수였다. 손꼽히는 마당발인 이 교수는 ‘형님, 아우’ 하는 인맥 관리에는 능했지만 소련 법학은 말할 것도 없고 법학 자체에 별 관심이 없었다. 조 수석은 안경환 교수의 권유로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로스쿨로 유학을 떠났다고 했다. 그의 박사논문 심사위원장이 필립 존슨이라는 교수이며 특이하게도 ‘지적 설계(Intellectual Design)’라는 사이비과학 운동의 주도자라는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관심이 딴 데 가 있는 ‘구멍들’을 잘도 찾아내서 학위를 받았다. 민정수석이 된 조 교수가 지난해 내놓은 문재인 정부의 헌법 개정안은 욕심이 커 너무 많은 내용을 담으려다 갈피를 못 잡은 학부생의 리포트처럼 낯 뜨거운 수준이었다. 헌법의 헌(憲)은 큰 틀을 의미한다. 큰 틀이 반드시 가져야 하는 골격의 체계성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헌법 사안과 법률 사안도 구별하지 못해 법률로 규정할 사안을 헌법에 집어넣은 사례도 적지 않았다. 조 수석이 틀을 만든 검경 수사권 조정안에 대해서는 권한이 검찰로 가느냐, 경찰로 가느냐를 떠나 수사 실무를 알기나 하고 만들었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경찰에 대한 보완수사 요구, 검찰의 2차 수사권 등 핵심 항목에 대해 경찰도 검찰도 일치된 개념을 갖고 있지 못하다. 소재(所在) 수사 지휘 등 세세한 부분을 망라해서 고려하지도 못했다. 이런 법안을 국회가 섣불리 패스트트랙에 올리는 바람에 결정의 순간 앞에서는 이도 저도 못하는 ‘브렉시트’ 꼴이 나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그의 박사논문을 꼼꼼히 읽은 적이 있다. 독일어 표기는 실수가 많았고 독일 문헌을 읽지도 않고 인용했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 적지 않았다.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자기 능력의 80% 정도를 발휘해 할 수 있는 일이다. 개헌도, 검경 수사권 조정도 그의 능력에 부치는 일이다. 젊었을 때부터 자신을 향한 과분한 기대에 부응해 능력에 부치는 일을 해오다 보니 습관이 돼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고향 말로 이제 ‘고마하고’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에게 넘겨줬으면 한다. 대통령의 행정부 인사권은 기본적으로 재량에 속한다고 보기 때문에 인사검증 실패에는 크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다만 국정의 중재자로서 하는 사법부 인사는 다르다. 김명수 대법원장, 그리고 유남석 헌법재판소장과 문형배 이미선 헌법재판관 등 대통령 몫으로 임명된 헌재 구성원이 과거 정권의 편파성을 극복하기는커녕 더 노골적으로 편파적인 구성이 된 데는 교수 시절 입만 열면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한 조 수석의 책임이 크다. 조 수석은 파슈카니스 등 소련 법학자들의 사상에 대한 석사논문을 준비하던 중 남한사회주의노동자연맹(사노맹)에 가담했다. 파슈카니스는 공산주의에서는 ‘계획’이 법을 대체한다고 보면서 법학의 괴물이 돼갔다. 지금 애매모호한 ‘촛불정신’이 법을 대체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정적과 대기업에는 터무니없이 가혹하고 내 편과 민노총에는 터무니없이 관대한 법 적용이 검찰과 법원에 스며들고 있다. 청와대가 무고하게 이영렬을 쫓아내고 거의 탈법적으로 임명한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의 수사와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 법무비서관들에 의한 법원의 배후 공작을 통해 이런 일이 이뤄지고 있다는 의심이 든다. 오래전 사노맹 일로 그를 비판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 한마디는 해주고 싶다. ‘일 못해도 좋으니 괴물은 되지 마라.’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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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톈안먼 시위 30주년

    1989년 6월 4일 새벽 4시 중국 베이징 톈안먼(天安門)광장의 불이 꺼졌다. 확성기로 시위대에 대한 소개(疏開)가 시작될 것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학생들은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팔짱을 꼈다. 학생들 10m 앞에 기관총과 소총을 지닌 군인들이, 그 뒤에 탱크와 장갑차가 서 있었다. 그리고 진압 시작. 당시 시위대 대표 중 한 명이었던 차이링(53)은 “오랜 시위에 지쳐 천막 안에서 깊이 잠든 학생들을 탱크가 짓밟았다”고 증언했다. ▷중국 정부가 1991년 밝힌 톈안먼 시위 진압의 공식 사망자 수는 241명이다. 그러나 당시 베이징과 인근 병원의 진료기록을 집계하면 적어도 478명이 사망하고 920명이 부상했다는 주장이 있다. 국제사면기구(AI)는 사망자가 1000명까지도 이를 수 있다고 본다. 지난해 비밀해제된 영국의 한 외교기밀문서는 사망자가 1만 명을 넘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살아남은 톈안먼 사태 관련자는 수감되거나 추방됐다. 당시 시위대 대표 중 한 명이었던 왕단(50)은 징역 11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병보석으로 석방돼 치료 목적의 망명을 인정받아 미국으로 건너갔다. 지식인 대표였던 류샤오보는 망명을 거부하고 중국에 남아 수감과 연금 생활을 이어가다가 2017년 간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2010년 노벨평화상 수상은 중국이 출국을 막아 빈 의자에서 이뤄졌다. ▷중국 우주물리학자 팡리즈가 1986년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귀국했다. 그는 중국의 빈곤이 전제적 정치체제와 경직된 통제경제의 산물이라고 봤다. 그의 호소에 학생들이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당시 후야오방 총서기와 자오쯔양 총리는 시위에 유화적이었으나 실권자인 덩샤오핑은 강경한 대응을 주문했다. 세 사람은 마오쩌둥에 같이 저항했으나 그 문제로 갈라섰다. ▷톈안먼 시위는 신해혁명-5·4운동-중화인민공화국 수립-문화혁명-덩샤오핑의 개혁개방으로 이어진 중국 현대사의 단절점(斷絶點)이자 그 이후의 역사를 이해하는 열쇠다. 덩샤오핑의 의도가 반영된 1989년 4월 26일자 런민(人民)일보 사설은 “20만 명이 죽는다 해도 20년의 안녕을 쟁취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톈안먼 사태는 덩샤오핑 이후 중국 체제가 경제적으로 개방을 추구할지 몰라도 정치적으로는 독재임을 분명히 했다. 한때 중국 경제가 개방되면 정치적 민주화도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기대가 있었으나 시진핑에 이르러서 거꾸로 집단지도체제에서 단일지도체제로 회귀하면서 그런 기대도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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