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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독서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감각이 말랑해진 휴가 때 만난 책은 더 진한 감흥을 안긴다. 동아일보 ‘책의향기’ 팀이 교보문고, YES24, 알라딘과 함께 휴가철에 읽을 만한 책을 ‘맞춤형 테마’로 골랐다. ●‘시간 순삭’ 소설 별다른 계획이 없다면 시간을 순간 삭제해줄 소설이 ‘딱’이다. 때마침 북유럽과 미국의 스릴러 대가가 동시에 신작을 출간했다. 요 네스뵈의 ‘폴리스’와 스티븐 킹의 ‘아웃사이더 1·2’다. 각각 경찰을 노리는 연쇄살인범과 살인범으로 몰린 교사에 대한 이야기다. 히가시노 게이고, 테드 창, 켄 리우의 작품도 몰입도가 높다. 국내 소설로는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 윤성희의 ‘상냥한 사람’, 김세희의 ‘항구의 사랑’, 조해진의 ‘단순한 진심’이 눈에 띈다. ‘진이, 지니’의 정유정 작가와 ‘설계자들’의 김언수 작가의 전작들도 열대야와 함께 하기 좋다. ●속세 때 벗기 바쁜 업무에 부동산, 교육, 노후까지 챙기느라 터질 것 같은 우리의 뇌. 휴가 때라도 쉬게 하자. ‘정위 스님의 자수 정원’은 무명 위에 최소한의 기법으로 수를 놓는 수행자의 마음과 생활을 담백하게 풀어냈다. 에세이스트 고(故) 김서령의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는 정갈한 문체와 따뜻한 일화가 돋보인다. 미국의 뇌신경학자이자 소설가인 올리버 색스의 에세이 ‘의식의 강’과 생전 그의 연인인 빌 헤이스의 ‘인섬니악 시티’는 생의 아름다움을 반추하게 한다. 겉치레에서 벗어나 고독을 되새기자는 ‘자발적 고독’(올리비에 르모 지음), 공황장애 극복법을 소개한 ‘어느 날 갑자기 공황이 찾아왔다’(클라우스 베른하르트), 아름다운 문체로 문학을 분석한 신형철의 ‘몰락의 에티카’, 다도를 다룬 ‘매일매일 좋은 날’(모리시타 노리코)도 추천 목록에 올랐다. ●휴가 공부 휴가를 이용해 지적 호기심을 채우고 싶다면 대중 교양서가 적당하다. 뇌 과학자의 놀라운 뇌졸중 분투기인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질 볼트 테일러)는 유익한 데다 아름답다. 먹고 사는 문제를 소설로 풀어낸 ‘산 자들’(장강명), 철학사를 쉽게 정리한 ‘미치게 친절한 철학’(안상헌)도 있다. 진화심리학을 집대성한 ‘진화한 마음’(전중환), 식물에 대한 에세이 ‘랩걸’(호프 자런), 그리고 ‘곰브리치 세계사’(에른스트 H. 곰브리치)도 가볍게 읽기 좋다. ●걷고 싶은 도시 여행지의 흔적을 그린 책은 어떨까. 작가의 손끝에서 실감나게 되살아난 도시가 적지 않다. 정수복의 ‘파리를 생각한다’,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 찰스 디킨스의 ‘찰스 디킨스의 밤 산책’(런던), 페르난도 페소아의 ‘페소아의 리스본’, 무라카미 하루키의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요시모토 바나나의 ‘꿈꾸는 하와이’, 카트린 지타의 ‘내가 함께 여행하는 이유’(그리스, 오만 등)가 명저로 꼽힌다. 여행과 걷기를 다룬 책으로는 삶의 중요한 볼거리를 안내하는 ‘나 자신과 친구 되기’(클레멘스 제드마크),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 인문 여행 시리즈인 ‘클래식 크라우드’가 있다. ●추억 소환 나홀로 휴가족이라면 과거의 나와 만나는 것도 한 방법. 박완서 작가가 유년의 기억을 소설로 그린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만인의 추억을 건드린다. 예민해서 아프고 아름다운 성장기를 그린 신작 소설 ‘이 소년의 삶’(토바이어스 울프), ‘널 만나러 왔어’(클로이 데이킨)도 눈에 띈다. 20대와 80대 여성의 우정을 그린 ‘수영하는 여자들’(리비 페이지)과 빨강 머리 앤, 작은 공주 세라, 하이디, 작은 아씨들을 엮은 ‘걸 클래식 컬렉션 세트’는 옛 친구의 얼굴을 떠오르게 한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행정학 전공의 교수가 3년 전 폐쇄된 개성공단을 배경으로 쓴 영문 소설이 출간됐다. 제목은 ‘Beyond the Division(분단, 그 너머)’(오스틴 매콜리 출판사). 작가는 허만형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62·사진)다. 작품은 개성공단에서 경계를 허물고 우정과 사랑을 주고받던 사람들이 공단 폐쇄 조치로 강제 이별을 맞는 인물들의 감정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저자는 서문에서 “분단으로 고통받은 이들의 오랜 기다림에 희망을 비추고, 금지된 사랑이 이뤄지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썼다. 저자는 2017년 연구년을 맞아 미국에 머무는 동안 첫 영문 소설인 이 작품을 완성했다. 미국 영국 등 세계 각국의 아마존 사이트와 국내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구입할 수 있다.이설 기자 snow@donga.com}
“이범진 고손, 이위종 증손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16일 오전 서울 중구 서소문로 환경재단 사무실. 푸른 눈의 두 여성이 한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헤이그 특사 3인방 가운데 1명인 이위종 열사(1884∼?)의 외손녀인 류드밀라 예피모바 여사(82)와 외증손녀인 율리야 피스쿨로바 전 모스크바국립대 역사학과 교수(50)다. 이들은 ‘시베리아의 별, 이위종’(김영사·1만5000원·사진) 출간기념 기자간담회에 초청돼 한국을 찾았다. 이 열사의 일대기를 추적한 책으로 역사적 뼈대에 상상력을 20% 정도 입혔다. 저자인 역사학자 이승우 씨(69)는 집필 과정에서 모스크바를 찾아 열사의 후손들을 인터뷰했다. 이 열사는 대한제국 외교관이자 한일병합에 항거해 자결한 이범진 러시아 주재 특명전권공사(1852∼1911)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프랑스 등에서 근대 교육을 받았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해 해외에 한국 상황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예피모바 여사는 “선조들은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분들이다. 한국이 역사를 기억해줘서 고맙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국사를 전공한 피스쿨로바 전 교수는 “이 열사의 연설로 한국을 침략하려는 일본의 민낯이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이후 열사는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며 영웅적 행보를 걸었다”고 했다. 이 열사는 이준 이상설 열사에 비해 알려진 바가 적다. 이후 활동상은 물론이고 돌연 실종돼 사망 연도조차 불분명하다. 피스쿨로바 전 교수는 “후손으로서 그에 대한 작은 정보도 절실하다. 힘든 시기에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열사를 제대로 기억하면 한국은 더 발전할 수 있지 않겠나”라고 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단편집 ‘빛의 호위’(2017년), 장편 ‘로기완을 만났다’(2011년)…. 소설가 조해진(43)의 작품은 어둠과 빛이 교차한다. 아픔을 파고들지만 페이지마다 따사로움이 묻어난다. 투명하고 세심한 연출 덕분이다. 다섯 번째 장편 ‘단순한 진심’(민음사·1만3000원)은 전작보다 한층 그윽해졌다. 입양아, 미혼모, 혼혈아, 기지촌 여성…. 겹겹의 아픔이 한없이 깊어서 그에 맞서려는 분투가 더 눈부시게 다가온다.》 서울 종로구 청계천변에서 12일 만난 그는 “역사 속에 버려진 생명을 포함해 모든 생명은 귀하다고 생각한다. 탄생과 죽음을 아우르는 생명에 바치는 헌사”라고 했다. 주인공은 나나. 프랑스로 입양돼 연극배우이자 극작가로 일하는 여성이다. 한국에서는 문주라고 불렸다. 부모에게 버려진 채 철로를 서성이던 그를 1년간 맡아 기른 기관사가 붙여준 이름이다. 양부모는 다정했지만 나나는 ‘문주’를 떨쳐내지 못한다. ‘문주로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가보지 못한 바깥의 삶을 반복해서 상상하고 원망하고 그리워한다. 단편집 ‘빛의 호위’에 실린 ‘문주’의 서사를 장편으로 다시 썼다. “국가와 부모로부터 정체성을 강제로 소거당한 삶은 어떨까. 아픔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어 입양이라는 주제를 미뤄두고 있었어요.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인인) 제인 정 트렌카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 ‘피의 언어’를 읽고서 비로소 첫 문장이 나왔습니다.” 집필은 쉽지 않았다. 문주의 외로움에 짓눌려 문장이 감정에 휘둘렸다. 거리를 둬야겠다 싶어 인물들에게 무대와 관련 있는 직업을 줬다. 포기하고 싶을 땐 삶에서 한 발짝 떨어져 견디길 바랐다. 장편으로 옷을 갈아입으면서 복희의 비중이 커졌다. 젊은 시절 기지촌 여성들을 보살피고 대안가족까지 꾸린 인물이다.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을 찾은 나나를 보면서 복희는 수년간 맡아 키우다 입양 보낸 누군가를 떠올린다. 작가는 “미혼모에 대해 유난히 차별적인 시선이 한국의 입양률을 높인 측면이 있다. 그래서 기지촌이라는 세계를 새롭게 보탰다”고 했다. 등장인물들은 완벽한 타인임에도 기꺼이 서로의 삶에 손을 내민다. 복희는 나나가 먹고 싶다던 수수부꾸미를 내놓고, 나나는 의식을 잃은 복희의 곁을 지킨다. 문경은 먼 옛날 아버지가 돌봤던 나나를 힘껏 껴안는다. “하나의 생명을 외면하지 않고,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는” 태도다. “한순간이나마 나를 감싼 빛은 언젠가 다른 이에게 전해진다고 생각해요. 등단 초기에는 삶을 긍정하는 태도가 쉬운 건줄 알았는데 이젠 반대예요. 절망은 차라리 쉽고, 희망과 낙관은 가시밭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의 소설은 늘 이방을 배경으로 하거나 이방인이 등장한다. 인물들 간 물리적 거리는 멀다. ‘로기완…’은 아예 접촉이 없었고 장편 ‘여름을 지나가다’(2015년)에서는 이따금씩 스쳤다. 이번 작품에서는 서로가 깊이 연결된다. 비슷한 공간보다 먼 풍경 속 인물들이 서로에게 스며드는 과정이 경외감을 안겨서 선호한다고 했다. 등단한 지 올해로 14년. 줄곧 단순히 건네는 진심, 빛처럼 따듯한 호위 같은 글을 써왔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해선 안 된다는 수전 손태그와 자신이 겪은 고통을 세상에 알린 프리모 레비의 책을 자주 읽는다. “누구나 언제든 이방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미혼모, 장애인, 동성애자는 남이 아닌 우리인 거죠. 제 소설이 조금이나마 생명을 환대하는 태도를 상기시킨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 같습니다.”이설 기자 snow@donga.com}
항공권 비교 사이트 ‘스카이 스캐너’가 순식간에 가장 저렴한 항공권을 솎아내는 비결은? 알고리즘이다. 나도 모르는 내 취향을 구글이 잡아내는 이유도? 알고리즘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곁으로 바싹 다가온 알고리즘. 사전적 의미는 ‘어떤 문제를 풀거나 목적을 달성하고자 거치는 여러 단계의 절차’다. 현실에선 수학적 의미를 더해, 특정 설정값에 따라 빠르게 목표를 달성하는 계산 과정을 뜻한다. 저자는 알고리즘의 다양한 활용사례를 통해 알고리즘의 개념, 과정, 신뢰도, 그리고 인간과 이롭게 ‘윈윈’할 방법을 탐색한다. 알고리즘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주민번호처럼 목표, 특징, 설정, 기발함, 결점을 각양각색으로 조합해 공식화하기 때문이다. 보통 우선순위(영화나 빠른 길 추천), 분류(상품 추천), 연관짓기(데이트 주선), 필터링(음성 인식) 등 4가지를 조합해 실행하도록 설계된다. 사법제도, 의료, 치안, 쇼핑…. 필요한 거의 모든 행위가 버튼 하나로 해결되는 편리함은 자동화, 즉 알고리즘에 빚지고 있다. 특히 인권과 직결된 사법제도에도 관여한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유죄 판결을 받은 범법자의 형량을 결정할 때 판사가 알고리즘이 계산한 위험평가지수를 참조해도 좋다고 승인했다.” 알고리즘은 영리하지만 실수도 잦다. 한 미국인 남성은 무턱대고 내비게이션만 떠받들다가 벼랑 끝에 매달렸다. 얼굴 인식 알고리즘에 찍혀 은행 강도로 오해받은 사람도 있다. 근본적인 문제는 알고리즘이 미묘하게 사생활과 인권을 침범할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알고리즘이) 부적절한 신뢰와 힘, 영향력과 결합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 결과 때문에 사회의 밑바탕은 흔들릴 수 있다.” 대체로 이롭지만 때론 치명타를 날리는 알고리즘. 어떻게 갈피를 잡고 대응해야 할까. 저자는 모든 단계마다 인간을 고려하는 알고리즘을 이상적 모델로 꼽는다. “기계가 내놓는 결과물을 과신하는 인간의 습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알고리즘 자체의 결점을 포용하고 불확실성을 과감히 정면으로 드러내야 한다.”이설 기자 snow@donga.com}
#“다이어리야, 에세이야, 그림책이야?” 최근 서점을 방문한 김아영 씨는 ‘당신은 나를 열어 바닥까지 휘젓고’(알마)를 들고선 고개를 갸웃했다. 동그랗게 깎인 모서리 모양과 멋스러운 표지는 영락없는 다이어리인데, ‘안희연 짓고 윤예지 그리다’를 보면 책이 분명했다. 활자, 시, 그림을 결합한 ‘활자에 잠긴 시’(활잠시)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이다. #직장인 이선형 씨는 틈만 나면 인스타그램에서 책 영상을 ‘느낀다’. 얼굴 없는 목소리가 책을 낭독하는 동안 화면에는 그림, 음악, 자막이 흐른다. 김 씨는 “마치 ‘낭독채널+영화 트레일러’ 같다. 내용은 유익한데 시각적으로 덜 피로해서 좋다”고 했다. 책의 시조 격인 파피루스 두루마리가 탄생한 지 5000여 년. 이후 책은 무언가에 새겨진 글자의 형태로 존재해 왔다. 최근 이런 책의 개념이 바뀌고 있다. 크기 모양 재질 같은 물성은 물론이고 시 소설 에세이 등 장르의 경계도 허물어지는 추세다. 전자책 오디오북 유튜브까지 가세하면서 전통적인 독서의 개념마저 흔들고 있다. 예술·문학서를 주로 내는 출판사 알마는 시각적 요소를 결합해 새로운 독서 경험을 제공한다. ‘활잠시’ 시리즈는 시인과 그림 작가가 각각 산문과 그림으로 예술가를 오마주한다. 안지미 알마 대표는 “표지와 내지, 텍스트와 그림, 장과 장의 경계가 흐릿해 예술품처럼 느껴진다고들 한다. 시인과 그림 작가의 상상력이 만나 제3의 상상력을 창조한다”고 했다. 눈으로 읽는 데서 벗어난 책도 있다. ‘듣는 책’을 표방하는 오디오북은 기본. 오디오북 업체 ‘윌라’는 최근 신용카드 크기의 카드형 오디오북을 선보였다. ‘보이지 않는 책’에 대한 편견을 돌파하기 위한 책이라는 게 윌라 측의 설명이다. 휴머니스트와 미메시스는 북토크 음원을 덧입힌 전자책으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USB 오디오북도 최근 독자와 만났다. 책의 ‘사용법’도 진화하고 있다. 시집 ‘내 벽장 속의 바다’(을궁)는 다이어리처럼 장마다 메모 공간을 뒀다. 민음사는 조만간 컵 받침 크기에 방수 재질인 ‘코스터북’을 출간한다. 장강명 김세희 작가의 단편 소설 6편이 책마다 1편씩 담겨 “휴가철 수영장에서 음료와 함께 즐기는 책”을 지향한다. 실제 컵 받침으로 사용할 수 있다. 창비의 ‘소설의 첫 만남’ 시리즈는 형태의 반전으로 타깃 계층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성석제 김애란 등 작가가 썼는데, 큰 활자에 거의 모든 페이지마다 삽화가 실렸다. 담당 부서도 청소년출판부다. 황혜숙 창비 편집3국장은 “청소년과 20대 초반을 타깃으로 하는 미국의 ‘영 어덜트(Young Adult)’ 소설의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독특한 물성의 책도 눈에 띈다. 올해 선보인 알마의 ‘FoP’(포비든 플래닛)와 ‘GD(Graphic Dionysus)’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공상과학(SF) 시리즈인 FoP는 영화 오프닝처럼 시작한다. 그림 작가가 10장 내외로 작품을 소화해 그림으로 풀어낸다. GD는 책을 무대처럼 꾸민 희곡집이다. 클라이맥스로 치달으며 암전되거나 막이 바뀌는 순간 그래픽으로 호흡을 끊어주는 식이다. 스릴러의 불안한 심리를 반영하려 책 한 귀퉁이를 사선으로 자른 범죄 논픽션 시리즈인 ‘시그눔(signum)’도 있다. 인터넷 출현 후 짧아진 텍스트가 독서 환경을 바꾼 걸까. 아니면 낮은 독서율이 살길을 찾아 책이 속성을 바꾸게 한 걸까.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는 “책의 변화는 부정할 수 없는 흐름이다. 출판계가 이 흐름에 자연스럽게 동참하다 보면 기존의 가치에 새로운 미덕을 더해갈 것”이라고 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지난해 8월. 크라우드 펀딩 업체 텀블벅의 후원으로 시집 9권이 동시 출간됐다. 세련된 디자인에 기성 시인과 신인을 아우르는 라인업. 눈 밝은 독자들은 ‘신상’ 시집선에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독립 출판사 ‘아침달’이 화제다. 시집을 내는 출판사 가운데 곳간이 비교적 넉넉한 대형 출판사는 4, 5곳에 불과하다. 그나마 등단을 해야 출간 기회가 돌아온다. 아침달은 등단 여부와 관계없이 큐레이터들이 출간을 결정해 편집까지 돕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디자인·편집회사를 운영하던 손문경 대표가 출판사를 연 건 2013년. 유희경 오은 김소연 등 기성 시인과 계약을 맺고 신인을 발굴했지만 2016년 ‘미투 운동’으로 출판계가 급격히 침체됐다. 묵혀둔 원고를 출간하려니 출판사와 일부 저자의 낮은 인지도가 마음에 걸렸다. 서울 마포구 성미산로 ‘아침달 서점’에서 2일 만난 손 대표는 “6명은 기성 시인, 3명은 무명 시인이었다. 한 번에 ‘짠’ 하고 동시에 출간하면 출판사와 신인 시인의 낮은 인지도를 극복할 수 있겠다 싶었다”고 했다. 시집선의 평균 판매량은 2000∼4000권. 독립 출판사로선 ‘대박’에 가까운 성적이다. 아침달은 그 뒤로 2권을 더 펴내 모두 11권의 라인업을 갖췄다. 아침달의 저력은 틀에 얽매이지 않은 실용 전략이다. 우선 큐레이터들이 원고를 받아 옥석을 가린다. 출판사 기획자로 일하는 송승언 시인이 1차로 심사한 뒤 큐레이터인 김소연 김언 유계영 시인이 ‘○(합격), △(보류), ×(불합격)’로 투표를 한다. 유계영 시인은 “1인당 시 30∼50편을 검토한 뒤 3명이 모두 찬성해야 시집이 출간된다. 3∼5편에 대한 완결성만 보는 등단 제도보다 오히려 까다로운 측면이 있다”고 했다. 김소연 시인은 “큐레이터와 시인이 소통하면서 시집을 만들어가는 점도 새롭다”고 설명했다. 디자인도 재판 때마다 색을 바꾸는 등 수시로 변화를 준다. 시의 지평을 넓히려는 시도도 눈에 띈다. 한 편의 장시로 구성된 이호준 시인의 ‘책’, 시인 20명의 ‘삽화+반려견에 대한 시 2편+사진+산문’을 담은 ‘나 개 있음에 감사하오’가 대표적이다. 데뷔 무대로도 성공적이라는 평가다. ‘우리 다른 이야기 하자’의 조해주 시인은 민음사와 계약을 맺었다. 이호준 시인은 각종 계간지에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손 대표는 “시를 둘러싼 생태계에 애정을 지닌 기성 시인들의 힘”이라고 공을 돌렸다. 소정의 활동비만 받는 큐레이터 3인방은 “순수하게 즐거워서 하는 일이다”(김소연), “원고를 검토하며 많이 배운다”(유계영), “신인은 좋은 출발을, 기성 시인은 좋은 경험을 하길 바란다”(김언)고 했다.이설 기자 snow@donga.com}
#지난해 8월. 텀블벅 후원으로 9권이 시집이 동시에 독자와 만났다. 모양은 같되 색상과 디자인은 제각각. 시집 주인은 유희경 유진목 오은 서윤후 김소연 등 유명 시인부터 미등단 신인으로 다양했다. #최근 출간된 ‘나 개 있음에 감사하오’는 반려견을 키우는 시인 20명이 함께 썼다. ‘삽화+반려견에 관한 시 2편+반려견 사진+조각 산문글’로 구성됐다. 각 글의 제목은 ‘시인 이름X반려견’이다. 시를 즐기는 이들 사이에서 ‘아침달’이 화제다. 규격화된 크기, 기성 시인, 대형 출판사….시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문법을 깨부수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어서다. 지난 2일 ‘아침달 서점’을 찾아 시 전문 독립 출판사의 성공 비법을 들여다봤다. ○9권 동시 출간 ‘시집 쇼’ 지난 2일 찾은 서울 마포구 성미산로의 ‘올 화이트’ 주택 2층. ‘아침달 서점’과 ‘아침달 출판’이 함께 둥지를 튼 곳이다. 서점에 들어서니 한쪽 벽면을 메운 ‘아침달 시집선’이 눈에 띈다. 크라우드 펀딩으로 출간한 9권의 시집을 동시 출간하며 ‘아침달’ 브랜드를 알렸다. 그 뒤로 2권을 더 펴내 모두 11권의 라인업을 갖췄다 . 디자인·편집 회사를 운영하던 손문경 대표가 출판사를 연 건 2013년. 의욕적으로 기성 시인과 계약을 맺고 신인을 발굴했지만 2016년 ‘미투 사태’를 맞았다. 신생 독립 출판사, 미등단 시인…. 지난해 전열을 가다듬고 출간에 시동을 걸었지만 성공 가능성이 희박했다. 손 대표는 ‘텀블벅 후원’과 ‘기성 시인과 신인의 콜라보’로 상황을 돌파했다. “7명은 기성 시인, 2명은 첫 시집을 내는 시인이었어요. ‘아침달’도 독립 출판이라 존재감이 없었죠. 한번에 ‘짠’ 하고 동시에 출간하면 출판사와 신인 시인의 낮은 인지도를 극복할 수 있겠다 싶었죠.” ○“무기명 원고 놓고 난상토론” “매달 한 번 큐레이터 회의가 열려요. 곧 시인들이 방문할 겁니다.” 손 대표와 대화를 마무리할 즈음. 출판사 기획자로 일하는 송승언 시인이 부지런히 서점 책상을 치우며 이렇게 말했다. 아침달 시집의 맨 뒷장엔 모두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큐레이터 김소연 김언 유계영’이다. 아침달의 모토는 ‘등단이라는 장벽과 별개로 좋은 원고를 세상에 소개하기’. 좋은 원고를 캐낼 방법을 고민하다가 김소연 시인의 제안으로 큐레이터 제도를 도입했다. 송 시인이 1차 심사한 원고를 놓고 큐레이터 3인방이 ‘○(합격) △(보류) X(불합격)’으로 투표를 한다. ‘미니 신춘문예’를 닮은 방식. 어떤 부분이 새로운 걸까. 유계영 시인은 “30~50편 이상의 시를 읽은 뒤 3명이 만장일치로 찬성해야 시집이 출간된다. 3~5편의 완결성만 보는 등단제도보다 오히려 까다로운 측면이 있다”고 했다. 김소연 시인은 큐레이터라는 용어에 주목해 달라고 당부다. 그는 “권력구조가 묻어나는 편집위원 대신 사용하는 호칭이다. 출간 여부를 결정하고, 원고에 특히 애정을 보인 큐레이터가 조력자로서 저와 소통한다”고 했다. 소통 중심의 편집 과정은 기성 시인을 이끄는 요소로도 작용한다. 김언 시인은 “아침달에 참여한 기성 시인들이 적지 않다. 기존 출판사에서 출간을 하면 안정적일 테지만, 직접 시집을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 아침달의 저력은 ‘즐거움’ 미등단 시인이 시집을 내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시집을 펴내는 출판사는 곳간이 넉넉한 대형 출판사 4,5군데 정도. 이마저도 등단을 해야 차례가 돌아온다. 아침달의 가장 큰 성과는 새로운 시집 출판 방식을 개척한 것. ‘우리 다른 이야기 하자’로 데뷔한 조해주 시인은 민음사와 계약을 맺었다. ‘책’을 펴낸 이호준 시인은 각종 계간지에 작품을 발표하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시의 지평을 넓히려는 시도도 눈여겨봐야 한다. 우선 디자인. 오은 시인의 ‘나는 이름이 있었다’는 1쇄 초록에서 2쇄 오렌지로 표지 색을 갈아입었다. 유희경 시인은 1쇄 때 눈으로 표지를 가득 채웠다가 2쇄 부터는 여백을 많이 뒀다. 시 선별 기준도 자유롭다. 이호준 시인의 ‘책’은 한 권 전체가 하나의 장시로 구성됐다. 시 동인 ‘뿔’의 공동 시집과 절판된 최정례 시인의 ‘햇빛속에 호랑이’(1998) 도 다시 출간할 계획이다. 시 전문 출판사는 아닌데 어쩌다 보니 시집만 12권 냈다. 평균 판매량은 2000~4000부. 독립 출판사로서는 ‘대박’을 친 셈이다. 손 대표는 “큐레이터를 비롯해 시의 생태계에 애정을 지닌 기성 시인들의 힘이다”고 했다. 소정의 활동비를 받고 활동하는 ‘시인 3인방’은 이 말에 손사래를 쳤다. “순수하게 즐거워서 하는 일이에요. 원고를 놓고 토론하는 일 자체가 문학의 즐거움과 비슷합니다.”(김소연) “출판사 규모가 작다는 이유로 좋은 시집이 묻혀서는 안 되겠지요. 신인은 아침달에서 좋은 출발을, 기성 시인은 좋은 경험을 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김언) 이설 기자 snow@donga.com}
방탄소년단(BTS) 해외 콘서트에서 한국어 ‘떼창’은 이젠 익숙한 풍경이다. 유튜브 등을 통해 팬들이 가사 ‘선행학습’을 해오기 때문. BTS의 ‘IDOL’ 뮤직비디오에는 “지화자 좋다” “덩기덕 쿵더러러러”처럼 지극히 한국적인 추임새가 ‘Hooray it‘s so awesome’, ‘Bum badum bum brrrrumble’ 등 외국인도 알기 쉽게 번역돼 있다. “가장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노래”라고 해외 팬들이 치켜세우는 데 번역도 한몫한 셈이다. 이처럼 한국 문화콘텐츠의 세계적 성공은 적절한 번역에 상당 부분 빚지고 있다. 해외 팬들에게 탄탄한 아이돌 음악은 물론이고 영화나 문학에서도 K콘텐츠를 알리는 첨병 역할을 톡톡히 한다. 가장 눈에 띄는 케이팝은 그 중심에 국내 팬들이 있다. 이들은 소속사에서 운영하는 아이돌 공식 계정과 별개로 신곡이 나오면 부지런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여러 외국어로 가사를 번역해 나른다. 트위터 ‘감자밭할매’ ‘아미살롱’ 등 일명 ‘번역계’라 불리는 팬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가사뿐 아니라 아이돌 소식이 담긴 한국어 기사, 멤버들의 일상을 다룬 브이로그 영상까지 번역한다. ‘Oppa(오빠)’ ‘Unnie(언니)’ ‘Aegyo(애교)’ 등 ‘돌민정음’(아이돌과 훈민정음을 합한 신조어)을 소개한 글도 수두룩하다. BTS 팬 박현정 씨(23·여)는 “해외 투어를 다니기 시작하면 정보를 얻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언제 어디서 활동하든 ‘팬질’이 가능해졌다”고 했다. 영화 번역의 중요성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더욱 조명 받고 있다. 해외에서 호평을 받은 ‘똥파리’(2008년) 이후 독립영화도 외국어 자막을 제작하는 문화가 정착됐다. ‘칠곡 가시나들’(2018년)은 할머니들의 경북 사투리를 미국 남부 사투리로 표현해 말맛을 살렸다. 표현이 한국적일수록 번역이 어려운 건 당연지사. ‘기생충’ 번역을 맡았던 영화평론가 달시 파켓은 ‘짜파구리’를 라면(Ramen)과 우동(Udong)을 합친 ‘Ramdong’으로 번역하는 데만 2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카카오톡’과 ‘곱등이’는 외국인들에게 익숙한 ‘왓츠앱’ ‘노린재(Stink bug)’로 바꿨다. “Wow, Does Oxford have a major in document forgery(서울대 문서위조학과 뭐 이런 것 없나)?” 특히 의역과 직역 가운데 한 가지를 택하는 일은 번역자와 감독에겐 큰 고민거리다. ‘기생충’에서 재학증명서를 위조한 딸 기정(박소담)에게 기택(송강호)이 한 이 말은 “서울대가 상징하는 의미가 전달돼야 한다”는 봉 감독의 요청에 따라 옥스퍼드대로 교체했다. ‘살인의 추억’(2003년)에서 “밥은 먹고 다니냐”는 두만(송강호)의 대사는 외국인에게 더 친숙한 “Do you get up early in the morning too?”가 됐다. 최근 각광 받는 K문학의 번역자는 한국인, 외국인, 교포 2세 등으로 다양하다. 한쪽 언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공동 번역자를 두거나 제3자에게 초벌 번역을 의뢰하기도 한다. 문학 번역은 다른 분야에 비해 난도가 높다. 작가의 숨은 의도와 문체의 맛까지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해외로 한국 문학을 수출하는 KL매니지먼트의 이구용 대표는 “예전보다 상황이 개선됐지만 여전히 검증된 번역자를 찾기 힘들다”고 했다. 시 번역은 뭣보다 까다롭다. 문법에 얽매이지 않는 데다 사전에 없는 관용구 빈도가 높아서다. 이 때문에 시인과 번역자 간의 소통이 매우 중요하다. 주어를 넣느냐 빼느냐, 관용 어구를 어떻게 옮기느냐 등 구조가 달라 논의할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 고통의 산물은 큰 찬사를 받는 결과물로 탄생하기도 한다. 최정례 시인(54)의 시 ‘얼룩덜룩’은 영국인 번역가 매토 맨더스롯과 협업해 2017년 ‘Zebra Lines’로 번역했다. 나무 그늘에 몸이 얼룩덜룩한 모습을 ‘얼룩말 무늬’로 표현한 것. 당시 옥스퍼드대에서 한국 시 최고 번역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문화콘텐츠 번역은 여전히 부차적 요소로 취급받는다. 그렇다 보니 번역자들은 여전히 빠듯한 마감 시간에 시달린다. 번역비도 중국, 일본 시장과 비교해 절반 수준에 머물러 있다. 파켓 씨도 “5일 만에 급하게 완성해 넘긴 영화도 많다”고 털어놓았다. 번역 시스템이 전체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웹소설이나 웹드라마 등 새로운 콘텐츠가 출현하고, 유튜브 등 유통 방식도 다양해졌다”며 “번역 방식과 플랫폼도 이런 흐름을 적극 반영할 수 있는 고민이 필요하다”고 했다.신규진 newjin@donga.com·이설 기자}
방탄소년단(BTS) 해외콘서트에서 한국어 ‘떼창’은 이젠 익숙한 풍경이다. 유튜브 등을 통해 팬들이 가사 ‘선행학습’을 해오기 때문. BTS의 ‘IDOL’ 뮤직비디오에는 “지화자 좋다” “덩기덕 쿵더러러러”처럼 지극히 한국적인 추임새가 ‘Hooray it’s so awesome‘, ’Bum badum bum brrrrumble‘ 등 외국인도 알기 쉽게 번역돼 있다. “가장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노래”라고 해외 팬들이 추켜세우는데 번역도 한몫한 셈이다. 이처럼 한국 문화콘텐츠의 세계적 성공은 적절한 번역에 상당 부분 빚지고 있다. 해외 팬들이 탄탄한 아이돌 음악은 물론이고 영화나 문학에서도 K-콘텐츠를 알리는 첨병 역할을 톡톡히 한다. 가장 눈에 띄는 케이팝은 그 중심에 국내 팬들이 있다. 이들은 소속사에서 운영하는 아이돌 공식 계정과 별개로 신곡이 나오면 부지런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여러 외국어로 가사를 번역해 나른다. 트위터 ’감자밭할매‘, ’아미살롱‘ 등 일명 ’번역계‘라 불리는 팬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가사뿐 아니라 아이돌 소식이 담긴 한국어 기사, 멤버들의 일상을 다룬 브이로그 영상까지 번역한다. ’Oppa(오빠)‘ ’Unnie(언니)‘ ’Aegyo(애교)‘ 등 ’돌민정음‘(아이돌과 훈민정음의 합한 신조어)을 소개한 글도 수두룩하다. BTS 팬 박현정 씨(23·여)는 “해외 투어를 다니기 시작하면 정보를 얻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언제 어디서 활동하든 ’팬질‘이 가능해졌다”고 했다. 영화 번역의 중요성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더욱 조명 받고 있다. 해외에서 호평을 받은 ’똥파리‘(2008년) 이후 독립영화도 외국어 자막을 제작하는 문화가 정착됐다. ’칠곡 가시나들‘(2018년)은 할머니들의 경북 사투리를 미국 남부 사투리로 표현해 말맛을 살렸다. 표현이 한국적일수록 번역이 어려운 건 당연지사. ’기생충‘ 번역을 맡았던 영화평론가 달시 파켓은 ’짜빠구리‘를 라면(Ramen)과 우동(Udong)을 합친 ’Ramdong‘으로 번역하는 데만 2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카카오톡‘과 ’곱등이‘는 외국인들에게 익숙한 ’왓츠앱‘, ’노린재(Stink bug)‘로 바꿨다. “Wow, Does Oxford have a major in document forgery?”(서울대 문서위조학과 뭐 이런 것 없나?) 특히 의역과 직역 가운데 한 가지를 택하는 일은 번역자와 감독에겐 큰 고민거리다. ’기생충‘에서 재학증명서를 위조한 딸 기정(박소담)에게 기택(송강호)이 한 이 말은 “서울대가 상징하는 의미가 전달돼야한다”는 봉 감독의 요청에 따라 옥스퍼드대로 교체했다. ’살인의 추억‘(2003년)에서 “밥은 먹고 다니냐”는 두만(송강호)의 대사는 외국인에게 더 친숙한 “Do you get up early in the morning too?”가 됐다. 최근 각광 받는 K문학의 번역자는 한국인, 외국인, 교포2세 등으로 다양하다. 한쪽 언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공동 번역자를 두거나 제3자에게 초벌 번역을 의뢰하기도 한다. 문학 번역은 다른 분야에 비해 난이도가 높다. 작가의 숨은 의도와 문체의 맛까지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해외로 한국 문학을 수출하는 KL매니지먼트의 이구용 대표는 “예전보다 상황이 개선됐지만 여전히 검증된 번역자를 찾기 힘들다”고 했다. 시 번역은 뭣보다 까다롭다. 문법에 얽매이지 않는 데다 사전에 없는 관용구 빈도가 높아서다. 때문에 시인과 번역자 간의 소통이 매우 중요하다. 주어를 넣느냐 빼느냐, 관용 어구를 어떻게 옮기느냐 등 구조가 달라 논의할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 고통의 산물은 큰 찬사를 받는 결과물로 탄생하기도 한다. 최정례 시인(54)의 시 ’얼룩덜룩‘은 영국 번역가 매토 맨더스롯과 협업해 2017년 ’Zebra Lines‘로 번역했다. 나무 그늘에 몸이 얼룩덜룩한 모습을 ’얼룩말 무늬‘로 표현한 것. 당시 옥스퍼드대학에서 한국시 최고 번역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문화콘텐츠 번역은 여전히 부차적 요소로 취급받는다. 그러다보니, 번역자들은 여전히 빠듯한 마감시간에 시달린다. 번역비도 중국, 일본 시장과 비교해 절반 수준에 머물러있다. 파켓 씨도 “5일 만에 급하게 완성해 넘긴 영화도 많다”고 털어놓았다. 번역 시스템이 전체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웹 소설이나 웹드라마 등 새로운 콘텐츠가 출현하고, 유튜브 등 유통 방식도 다양해졌다”며 “번역 방식과 플랫폼도 이런 흐름을 적극 반영할 수 있는 고민이 필요하다”고 했다. 신규진기자 newjin@donga.com이설 기자 snow@donga.com}
“혼이 나간 아이 엄마는 눈물범벅이고 아빠도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고, 그 집 애들은 죄다 무릎을 꿇고 경찰에게 제발 봐달라며 빌고 있었어요. 어찌나 짠하던지 형용할 말도 못 찾겠더라고요. 심지어 사령관이, 루치디라는 자였는데, 아이를 강제로 데려가느니 차라리 범죄자 백 명의 체포명령을 이행하는 게 낫겠다고 말하는 것도 들었어요.” 1858년 6월 25일 이탈리아 볼로냐. 유대인 상인 모몰로 모르타라의 집에 교황청 헌병대가 들이닥친다. 이들은 여덟 자녀의 이름을 일일이 확인하더니 여섯 살 아들 에드가르도를 납치하다시피 데려간다. 가톨릭 신자인 하녀가 아이의 첫돌 무렵 남몰래 세례를 줬고, 교회법에 따라 유대인 가정에서 자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후 아이를 되찾기 위한 모르타라 부부의 사투가 이어진다. 교회법에 따라 게토에 격리돼 살던 유대인 공동체는, 제 아이를 잃은 듯 격분해 모르타라를 돕는다. 명문 유대인 가문을 통해 읍소하고, 세례를 줬다는 하녀를 찾아 사실을 추궁하고, 종교재판관실 문을 두드리고…. 하지만 처절한 노력에도 교황청은 완고했다. 에드가르도는 부모와 떨어져 교황 피우스 9세의 특별 감독하에 가톨릭 교육을 받는다. 종교재판이 서슬 퍼렇던 시절. 이탈리아 유대인에게 모르타라 가족의 비극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이들은 속으로 분노하면서도 통치자의 역린을 건드릴까 봐 큰 목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도자 긴급회의를 열고, 비슷한 사건을 겪은 이들의 증언을 모으며 물밑에서 대항할 힘을 다졌다. 이 사건으로 볼로냐 사회는 빠르게 양분됐다. “서로 다른 두 현실의 충돌은 서로 다른 두 서사, 서로 다른 두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유대인 동족뿐 아니라 교회의 세속통치에 반대하는 기타 세력들이 받아들인 유대인의 서사는 교황 지배하의 광신이 무너뜨린 화목한 가정의 일화를 묘사하고 있었다. …(교회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구원의 일화, 그대까지 타락한 삶과 영원한 지옥의 내세가 예정된 소년을 하느님이 친히 구원하셨다는 감동의 일화로 둔갑했다.” 납치 사건 이후 몇 주가 지나 소규모 유대인들이 조직한 운동은 이탈리아 반도 밖까지 알려졌다. 당시 국제 정세는 격변 중이었다. 각지의 다양한 세력이 교황권에 도전했고, 여기에 계몽주의 사상이 가세해 교황의 세속지배에 균열을 냈다. 축적된 변화의 에너지는 국제적 저항운동으로 이어졌다. 서서히 교황권이 무너지고 종교재판관에 대한 고발이 진행된다. 지난한 재판을 거치지만 관련자들은 혐의를 벗고 풀려났고, 에드가르도는 피우스 9세를 ‘다른 아버지’라 부르며 학업을 이어간다. 교황은 그를 ‘꼬마 개종자’라 부르며 뿌듯하게 여겼다. 훗날 신부가 된 에드가르도의 모습을 당시 한 지역신문은 “적지 않은 유대인도 이 걸출한 설교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조용히 앉아 있었다”고 묘사했다. 유대인 가족의 분투로 이탈리아가 근대를 맞았을까. 비극의 요소를 골고루 갖춘 사건, 역사적 인물, 변화의 시기를 대서사시로 엮은 논픽션이다. 2015년 전기·자서전 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한 역사학자가 썼다. 사건 자체가 극적인 데다 인물들의 감정선을 솜씨 좋게 묘사해 빠르게 읽힌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마크 라일런스 주연으로 영화화될 예정이다.이설 기자 snow@donga.com}
소설도 쉽지 않지만 산문은 더 어려웠다. 소설에선 내가 아닌 척 시치미를 뗄 수 있었다. 에세이는 숨을 곳이 없었다. 간간이 원고 청탁이 들어오면 보고 들은 일화에 기대 글을 “쥐어짰다”. 이따금 자신을 무대에 올리더라도 직접화법은 피했다. 힘겹게 낳은 글을 그러모아 등단 17년 차에야 첫 산문집을 냈다. 제목은 ‘잊기 좋은 이름’(열림원·1만3500원·사진). 3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김애란 소설가(39)는 “원고를 통해 시절을 마주하니 반가우면서도 쑥스럽다. 너무 재치를 부린 부분이나 과잉된 부분들은 빼고 오리고…. 모든 글을 다시 썼다”고 했다. “미숙한 표현이나 문장을 보면 부끄럽고, 과거의 감수성이 낯설게 다가오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했지만 향수나 아쉬움 없이 담담하게 원고를 마주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시절에만 쓸 수 있는 글을, 한 시절들을 묶은 책이니까요.” 그의 관심은 나에서 우리로, 그리고 더 큰 우리로 외연을 넓혔다. 첫 단편집 ‘달려라 아비’(2005년)에서는 나의 기원을 파고들었다. 마지막 단편 ‘바깥은 여름’(2017년)에서는 울타리 안의 우리를 응시했다. 산문집에 실린 조각글 32편도 ‘1부 나, 2부 너, 3부 우리’로 나눠 담았다. 그는 “시간 순으로 글을 배열했더니 관심의 변천사가 한눈에 보였다. 생물학적, 사회적 요인으로 인한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했다. “20대의 저는 지금보다 능청스럽고 명랑하고 사람을 좋아했죠. 다치고 실망하는 시행착오를 거친 지금은 타인에 대해 더 겸손해졌고요. 중요한 건 변화를 받아들이는 태도라고 생각해요. 때로 잃어버린 것들이 아쉽지만, 과거와 지금의 내가 똑같은 일도 이상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세 권의 책을 내고서야 직업 소설가로서의 자의식을 갖게 됐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보고 듣고, 스치는 단상 전부를 수첩에 기록하고. ‘글쓰기의 상태’로 몸을 유지하기 위해 바지런히 움직이지만,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에는 기꺼이 스위치를 꺼둔다. 각별히 사랑하는 작가는 웹툰 작가인 윤태호와 도스토옙스키. 각각 “솜씨 좋게 삶의 세부를 그려내고”, “타고난 이야기꾼이어서”다. 그는 시대의 청춘을 다독이는 소설가로 불린다. 옹색한 삶에 서투르지만 당당하게 맞서는 청춘들을 매력적으로 그려내 왔다. ‘중견’ 타이틀이 어색하지 않은 요즘. 그의 눈은 위와 아래를 바삐 오간다. 그는 “7년 전부터 1인칭에서 3인칭으로 감각이 변한 것 같다. 과거에는 사회에 막 발 디딘 이들의 깨끗함, 맑음, 낙관을 주시했다면 요즘엔 사회 구조 안에서 딜레마에 봉착한 이들에게 관심이 간다”고 했다. “편의상 후배라고 부르지만 사실상 동료인 작가들의 책을 자주 봅니다. 작가들의 첫 번째, 두 번째 책에는 그 시기에만 가능한 에너지가 담뿍 담겨 있지요. 김세희 작가가 그린 삶의 구체성, 박상영 작가의 에너지와 활달함, 김봉곤 작가의 섬세함과 에너지에서 기분 좋은 자극을 받습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정파를 가리지 않고 전·현직 정치인을 꼬집는 ‘인물시’가 나왔다. 최근 출간된 월간 ‘시’ 7월호에는 이오장 시인(67)의 짤막한 인물시 33편이 실렸다. 우선 전·현직 대통령에 대한 시가 눈에 띈다. “안개강 하나 건너와 옷깃 터는가/자연은 돌고 돌아 제자리에 오는 것/그대가 받들어야 할 자연은 국민이다.”(‘문재인’ 전문) “이 세상 모든 것은 공주가 갖는 것/공주의 모든 것은 부마가 갖는 것/부마 없는 공주는 국민이 부마.”(‘박근혜’ 전문) 대권 주자로 꼽히는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와 이낙연 국무총리도 등장한다. “가마꾼 없는 가마는 전시품이다/가마 탔다고 으스대지 말고/차라리 혼자 걸어라.”(시 ‘황교안’) “부릅뜬 눈에 큰 귀 열고/펜으로 그려낸 스피커 시절로 돌아가라.”(시 ‘이낙연’) 이 시인은 “정치인 158명에 대한 인물시를 썼고, 계속 쓰고 있다. 그 가운데 33편을 월간 ‘시’에 소개했다”며 “초심을 잃고 국민을 우롱하는 정치인을 시로 은유하고 싶었다”고 했다.이설 기자 snow@donga.com}
방탄소년단(BTS)이 다녀간 곳 가운데 해외 팬들은 어디를 가장 가고 싶어 할까. 한국관광공사가 지난달 137개국 2만227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강원 강릉시 주문진해수욕장 향호해변의 버스정거장(21.8%)이 1위로 나타났다. 2017년 BTS가 발매한 정규 2집 리패키지 앨범 ‘YOU NEVER WALK ALONE’의 표지에 실린 곳이다. 부산 다대포해수욕장(12.2%), 전남 담양군 메타세쿼이아 길(12.1%), 서울 라인프렌즈 이태원점(11.8%), 경기 양주시 일영역(7%)이 뒤를 이었다. 연령별로 선호 목적지에 차이가 났다. 10∼30대는 향호해변 버스정거장, 40대는 라인프렌즈 이태원점, 50대 이상은 담양군 메타세쿼이아 길로 나타났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6월 24일 오후 서울 성북구의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신경림 시인(83)이 잔잔한 웃음으로 일행을 맞았다. ‘해방 40년의 문학’, ‘연려실기술’…. 거실 벽면을 메운 책장엔 누런 더께가 쌓인 책들이 빼곡했다. “오늘 주제는 ‘한국시의 가능성에 대한 생각과 개인적으로 잊히지 않는 사건과 장면’입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예술위)가 진행하는 ‘한국 근·현대 예술사 구술채록 사업’ 현장. 시인과 마주 앉은 김춘식 동국대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교수가 5차 채록 주제를 알리자 일행의 눈이 일제히 시인의 입에 꽂혔다. 영상과 사진 촬영자, 기록자, 현장 총괄이 원로 예술인의 업적과 생애 전반을 듣고 찍고 기록한다. 이 사업은 문학·연극·음악·미술·대중예술 분야의 예술인을 두루 만나고 있다. 예술위 측은 “2003년 처음 시작해 지금까지 315명의 채록을 마쳤다. 집중적인 구술면담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외부인은 참석하지 않는 게 원칙이다. 사업 시작 16년 만에 언론이 함께하는 건 처음”이라고 했다. “좋은 세상에 태어났으면 학교 선생 하고 연금 받아서 해외여행도 다녔을 텐데….” “문학으로 만난 사회와의 불화가 계속 이어져서 평생 지고 가게 된 것 같아.” 시인이 유년 시절, 문학에 빠져든 과정, 모진 시대를 견딘 기억을 찬찬히 꺼냈다. 대체로 평온했지만, 때로 격정적이고 이따금 촉촉한 표정으로 이야기하길 1시간. 채록자인 김 교수가 휴식 시간을 알렸다. 카메라가 꺼지고 모두가 참았던 숨을 시원하게 내뱉는다. 채록 작업은 보통 2시간씩 5번 10시간 내외로 진행한다. 촬영영상은 편집 없이 그대로 보관한다. 발화(發話)한 내용뿐 아니라 침묵과 표정, 땀까지 기록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오래전 일이라 흐릿한 기억이나 잘못된 정보는 ‘각주’ 처리한다. 아픈 기억일수록 노년에 이르러 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부분도 그대로 기록한다”고 했다. “요즘은 갈등이나 번민이 거의 없어. 삶의 종언에 이르렀다는 뜻이겠지.”(신 시인) 쉬는 시간에도 가벼운 이야기가 오간다. 올해 채록 대상은 8명. 문학 분야는 신경림 시인이 유일하다. 가장 중요한 인물 선정 기준은 시급성이다. 대다수가 노년인지라 삼고초려를 해 섭외를 한 직후에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구술을 끝내자마자 이승을 등진 경우도 있다. “바보 같은 데가 있는 게 시인이지. 지나치게 세속적이고 ‘뺀질’하고…. 그런 게 시인은 아니라는 생각을 들게 만든 게 조지훈 시인이지.” 다시 카메라가 켜지고 시인이 말을 잇는다. 구술에서 뭣보다 중요한 건 채록자와의 호흡이다. 하나의 인생을 두고 마주한 두 사람의 인연과 관점에 따라 이야기의 방향과 깊이가 달라진다. 정보원 아르코예술기록원 과장은 “구술 채록은 사실 발굴보다 마음속 이야기를 오롯이 이끌어내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본질”이라고 설명했다. 2시간 반 넘게 이어진 채록이 끝나면 저녁 자리에서 회포를 푼다. 신 시인의 단골집인 동네 냉면 가게로 자리를 옮겼다. 진짜 구술은 공식 구술을 마친 이후부터라는 이야기가 있다. 내밀한 시간을 공유한 이들끼리 “라포르(rapport·친밀감과 신뢰)”가 형성되고, 술이라도 한 잔 돌면 꾸밈없는 속내가 나온다. ‘구술 이후의 구술’까지 마친 시인이 가만히 말했다. “제대로 이야기한 것 같지 않고, 많은 이야기를 빠뜨린 것 같고…. 충분히 이야기한 것 같은데 이상하네. 그런데 더 하라면 못 하겠어.”이설 기자 snow@donga.com}
6월 24일 오후 서울 성북구의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신경림 시인(83)이 잔잔한 웃음으로 일행을 맞았다. ‘해방 40년의 문학’, ‘연려실기술’…. 거실 벽면을 메운 책장엔 누런 더께가 쌓인 책들이 빼곡했다. “오늘 주제는 ‘한국시의 가능성에 대한 생각과 개인적으로 잊히지 않는 사건과 장면’입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예술위)가 진행하는 ‘한국 근·현대 예술사 구술채록 사업’ 현장. 시인과 마주 앉은 김춘식 동국대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교수가 5차 채록 주제를 알리자 일행의 눈이 일제히 시인의 입에 꽂혔다. 영상과 사진 촬영자, 기록자, 현장 총괄이 원로 예술인의 업적과 생애 전반을 듣고 찍고 기록한다. 이 사업은 문학·연극·음악·미술·대중예술 분야의 예술인을 두루 만나고 있다. 예술위 측은 “2003년 처음 시작해 지금까지 315명의 채록을 마쳤다. 집중적인 구술면담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외부인은 참석하지 않는 게 원칙이다. 사업 시작 16년 만에 언론이 함께 하는 건 처음”이라고 했다. “좋은 세상에 태어났으면 학교 선생 하고 연금 받아서 해외여행도 다녔을 텐데….” “문학으로 만난 사회와의 불화가 계속 이어져서 평생 지고 가게 된 것 같아.” 시인이 유년 시절, 문학에 빠져든 과정, 모진 시대를 견딘 기억을 찬찬히 꺼냈다. 대체로 평온했지만, 때로 격정적이고 이따금 촉촉한 표정으로 이야기하길 1시간. 채록자인 김 교수가 휴식 시간을 알렸다. 카메라가 꺼지고 모두가 참았던 숨을 시원하게 내뱉는다. 채록 작업은 보통 2시간씩 5번 10시간 내외로 진행한다. 촬영영상은 편집 없이 그대로 보관한다. 발화(發話)한 내용뿐 아니라 침묵과 표정, 땀까지 기록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오래전 일이라 흐릿한 기억이나 잘못된 정보는 ‘각주’ 처리한다. 아픈 기억일수록 노년에 이르러 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부분도 그대로 기록 한다”고 했다. “요즘은 갈등이나 번민이 거의 없어. 삶의 종언에 이르렀다는 뜻이겠지.” (신 시인) 쉬는 시간에도 가벼운 이야기가 오간다. 올해 채록 대상은 8명. 문학 분야는 신경림 시인이 유일하다. 가장 중요한 인물 선정 기준은 시급성이다. 대다수가 노년인지라 삼고초려를 해 섭외를 한 직후에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구술을 끝내자마자 이승을 등진 경우도 있다. “바보 같은 데가 있는 게 시인이지. 지나치게 세속적이고 ‘뺀질’하고…. 그런 게 시인은 아니라는 생각을 들게 만든 게 조지훈 시인이지.” 다시 카메라가 켜지고 시인이 말을 잇는다. 구술에서 뭣보다 중요한 건 채록자와의 호흡이다. 하나의 인생을 두고 마주한 두 사람의 인연과 관점에 따라 이야기의 방향과 깊이가 달라진다. 정보원 아르코예술기록원 과장은 “구술 채록은 사실 발굴보다 마음속 이야기를 오롯이 이끌어내 기록으로 남기는 본질”이라고 설명했다. 2시간 반 넘게 이어진 채록이 끝나면 저녁 자리에서 회포를 푼다. 신 시인의 단골집인 동네 냉면 가게로 자리를 옮겼다. 진짜 구술은 공식 구술을 마친 이후부터라는 이야기가 있다. 내밀한 시간을 공유한 이들끼리 “라포르(rapport·친밀감과 신뢰)”가 형성되고, 술이라도 한 잔 돌면 꾸밈없는 속내가 나온다. ‘구술 이후의 구술’까지 마친 시인이 가만히 말했다. “제대로 이야기한 것 같지 않고, 많은 이야기 빠뜨린 것 같고…. 충분히 이야기한 것 같은데 이상하네. 그런데 더 하라면 못 하겠어.” 이설 기자 snow@donga.com}
2017년, NHK 오사카 법조팀장이었던 저자는 특종을 낚는다. 아베 신조 총리의 부인 아키에 여사가 명예교장으로 있던 사학법인이 턱없이 낮은 가격으로 국유지를 매입한, 이른바 ‘아베 사학 비리 스캔들’이다. 초대형 특종을 보도했지만 회사에는 이상한 기류가 흐른다. 기사를 손보면서 총리 부부 이름이 삭제됐다. 검찰이 사건에 연루된 공무원들을 불기소하기로 결정한 직후에는 기자 업무에서 빠지라는 인사 통보까지 받는다. 현장 기자가 일본 공영방송의 적나라한 뒷모습을 고발한 책이다. 권력이 교묘하게 언론에 개입하는 과정이 구체적이고 실감나게 담겼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스트레스를 받으면 인간의 몸과 마음에 맹렬한 변화가 일어난다. 심박수 증가에 운동 기능 저하는 기본. 심하면 배변·배뇨 조절도 힘들어진다. 개인이 아니라 국가가 극한의 스트레스 상황에 놓이면 어떻게 될까. 이 책은 일촉즉발의 군사 위기 상황인 1962년 쿠바 미사일 사태 당시, 국가 시스템이 스트레스에 맞서 제대로 작동했는지를 추적한다. 당시 세기의 핵 담판을 이끈 인물은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소련의 정치인 니키타 흐루쇼프였다. 두 사람은 단호하게 상황을 통제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 것으로 회자된다. 하지만 저자는 100명 이상의 관련자 인터뷰, 현장 답사, 군사 해제 기밀 자료를 토대로, 당시 두 수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감정을 완벽히 통제하지 못했다고 결론 내린다. “‘검은 토요일’로 알려진 날, 쿠바 주둔 소련군은 흐루쇼프의 허락 없이 미군 U-2정찰기를 추락시켰다. 소련군 핵무장 잠수함의 함장은 핵어뢰를 쏠 뻔까지 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이런 소련 개자식들.’ 같은 소식에 잭이 냉정하게 반응한 반면 바비는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칠 듯 욕하고 주먹을 치켜들며 방에서 서성거리면서 분을 삭였다.” 냉전의 종식, 절정, 기원을 차례로 담은 저자의 ‘냉전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이다. 첫 번째 작품인 ‘1945’는 지난해 국내 출간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소방의 길을 걷는 내내 문학이 그리웠습니다. 20년 넘게 소방관으로 일한 지금은 두 길이 다르지 않게 느껴집니다. 일하면서 부대낀 사람과 그들이 건넨 사연이 제 속에서 영글어 이야기로 꽃피웠다는 걸 알거든요.” 21일 서울 종로구 청계천변에서 만난 박이선 전북군산소방서 현장안전점검관(50). 그의 손에는 다섯 번째 장편 ‘궁정동 사람들’(나남·1만4800원)이 들려 있었다. 1979년 10·26사태가 일어난 하루를 담담한 시선으로 훑은 작품이다. 》 그는 전북 남원시 지리산 산골에서 자랐다. 몰락한 선비였던 조부의 어깨 너머로 글을 깨치고 한학을 익혔다. 물놀이보다 책이 좋았지만, 인근에는 도서관도 서점도 없었다. 누군가 한두 권씩 보태둔 허름한 교실 문고를 읽어치우며 지적 허기를 달랬다. ‘문청’을 꿈꿨지만 방송통신대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형편상 취업에 쓰임새가 있는 공부를 해야만 했다. 군대에 다녀온 직후 그의 눈에 소방공무원 시험 공고가 들어왔다. 하지만 화염 속을 드나들면서도 오래 문학열병을 앓았고, 2015년 끝내 꿈을 이뤘다. 단편 ‘하구’로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등단하거나 작품을 내지 않아도 작가처럼 읽고 쓰는 이들이 적지 않아요. 초년병 시절 저와 소방서 동료들도 그랬습니다. 문예집을 만들어 시, 소설, 수필을 싣고 돌려봤지요. 군산 월명산 이름을 딴 ‘월명소방’에 소설을 내면서 혼자 이야기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박 작가는 등단 전후로 ‘이네기’ ‘이어도 전쟁’ ‘여립아 여립아’ 등 역사 장편소설을 내리 써냈다. 최근 7년간 쓴 장편은 3권이다. 주요 관심사는 역사나 군사, 안보. 그는 “역사를 특히 좋아한다. 책과 전문가의 도움도 받지만 역시 최고의 스승은 기록이다. 광개토대왕릉비도 한자를 하나하나 연구해 전체 맥락을 살폈다”고 했다. ‘궁정동 사람들’을 구상한 건 2016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아닌 박흥주 육군 대령을 주인공으로 세웠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왼팔이자 엘리트 군인으로, 사건에 연루된 6명 가운데 가장 먼저 처형된 인물이다. 그는 “박 대령으로부터 보통 사람의 고민을 읽어냈다”고 했다. “집에는 어린 자녀와 병약한 아내가 있고, 사살 대상은 형제처럼 지내던 경호원들이고. 사건 30분 전에 그를 괴롭혔을 생각들을 떠올려봤습니다. 한참 상상하다 보니 이런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직장에서는 소중한 것들을 제쳐두고 일 생각만 하게 되는데, 교육받은 대로 훈련받은 대로 행동한 건 아닐까 하고요. 소방관들도 긴급한 상황에서는 반사적으로 매뉴얼을 따르거든요.” 소설을 통해 그가 말하고 싶었던 건 ‘선택의 문제’다. 개인이 상관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선택을 하고, 시대의 사건에 휘말리는 과정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었다고 한다. 박 작가는 늦깎이 소설가인 만큼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잔뜩 쌓여 있다. 그는 “탄광 노동 소설은 거의 마무리됐고, 천재 음악가이자 소설가인 홍난파 선생의 이야기에도 마음이 간다. 발굴되지 않은 역사 속에서 따듯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캐내고 싶다”고 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아님께서 아님을 아니하시고 아님에 아니하고 아니하시니, 아님이 아니하온지라…’ (‘Lord No does not Lord No and none and not at Lord No thus Lord No does not…’) 김혜순 시인(64)의 여섯 번째 시집 ‘죽음의 자서전(사진)’에 실린 시 ‘아님’에는 아님이라는 단어가 길게 이어진다. 시인은 내심 번역자가 이 시를 어떻게 옮길까, 영어로 바꾸는 게 가능하긴 할까 싶었다. 김 시인은 “‘아님’을 ‘Lord No’라고 바꾸다니, 세상에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번역자인 최돈미 시인과 함께 해외에서 시 낭송회를 열곤 하는데, 이 시를 교차해서 낭송하면 감탄이 쏟아진다”고 했다. ‘아님’을 포함해 49편의 시가 실린 ‘죽음의 자서전’(문학실험실·1만 원) 영역본이 이달 6일 캐나다의 그리핀 시문학상(Griffin Poetry Prize)을 수상했다. 시 부문을 둔 문학상으로는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상으로, 아시아 여성이나 한국인으로는 첫 수상이다. 캐나다에서 돌아온 김 시인은 25일 기자회견을 통해 벅찬 소감을 전했다. “우리는 아시아인인 데다 여자니까 상을 줄 리 없다고 생각했어요. 최돈미 시인과 그저 즐기다 오자는 마음으로 참석했죠. 아니나 다를까, 시상식장에 모인 1000여 명 가운데 동양인은 저희 둘뿐이었어요. 한데 덜컥 이름이 호명돼 정말 놀랐죠. 현실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2015년 시인은 삼차신경통으로 병원을 찾았지만 메르스 사태로 진료를 받지 못한 채 여러 병원을 전전했다. 당시 이중의 고통 속에 쓴 시 49편이 ‘죽음의 자서전’에 담겼다. 개인뿐 아니라 세월호, 전사자, 시위 대원 등 사회적 죽음을 두루 훑는다. ‘너는 전신을 기울여 매달려요//감당 못 하겠어요 몸을 비틀어/물의 손가락을 붙잡고//물의 머리칼로 짠 외투를 입어요/꿇어앉아 얼굴을 덮어요…’(‘물에 기대요’) 그는 “죽은 자의 죽음에 대한 시가 아니다. 죽음에 처한 산 자가 쓴 자서전이다. 죽음에 처한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경험을 시로 풀어냈는데, 이런 시적 감수성이 그들(해외)에게 닿지 않았나 싶다”고 했다. 이번 수상으로 노벨 문학상 수상에 근접한 게 아니냐는 평가까지 나온다. 앞으로 노벨상을 염두에 두고 영문 시집을 펴낼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다소 높아진 목소리로 “그런 말은 하지도 말라. 그건 소설가에게 소설을 쓰지 말라, 시인에게 시를 쓰지 말라는 것”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상금 6만5000캐나다달러(약 5750만 원)는 번역자와 시인이 6 대 4의 비율로 나눠 갖는다.이설 기자 sno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