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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내 국가수사본부(국수본)는 전국 경찰서의 형사과와 수사과 사건을 총괄하는 또 하나의 괴물이 될 수 있다. 수사의 주도권이 검찰에 있든, 국수본에 있든 국민에게는 조삼모사(朝三暮四)다. 수사권 조정은 대통령의 검경 인사권을 견제할 수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 고쳐야 할 단순한 핵심을 빼놓으니까 얘기가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복잡해지기만 하는 것이다. 미국은 수사권이 경찰에 있다. 경찰관은 수사를 하고 나면 검사를 찾아가 이대로 기소하면 판사에게 유죄 판결을 받아낼 수 있는지 의견을 구한다. 검사는 경찰관의 자문에 응하는 일종의 국가 변호사(attorney)일 뿐이다. 기소장에 서명도 검사가 아닌 경찰관이 한다. 이런 방식은 경찰이 주민 자치의 기관으로 생겨나고, 그래서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얻고 있는 나라에서 가능하다. 이런 전통이 없는데도 무늬만 자치인 자치경찰을 하겠다고 하면서 경찰에 미국처럼 수사의 전권을 주려는 것이 검경 수사권 조정의 핵심 내용이다. 우리나라 경찰은 미국 경찰과 달리 국민의 경찰이 아니라 국가의 경찰로 출발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경찰의 전횡을 통제할 필요가 생겼고 검사의 수사지휘권이 태어났다. 검사는 법률의 전문가이지, 수사의 전문가는 아니다. 그럼에도 검사에게 수사지휘권을 부여한 것은 인권 보호 때문이다. 수사지휘권 혹은 최소한 수사종결권에 대한 검찰의 요구는 일리가 있다. 다만 검사에게 수사지휘권을 주기 위해서는 중요한 조건이 하나 있다. 정권으로부터 검사의 독립이다. 독일처럼 검찰권이 연방과 주로 나뉜 국가는 별도로 하고 우리나라처럼 중앙집권적인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에는 ‘사법평의회’라는 기구가 있어 판검사 인사권을 행사한다. 사법평의회에는 대통령이나 총리가 참여하긴 하지만 합의체이기 때문에 전횡을 휘두를 수 없다. 이들 나라에서는 판검사를 ‘사법관(magistrat)’으로 통칭하고 검사에 대해서도 판사에 준하는 방식으로 인사의 독립성을 보장한다.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검찰 인사에 사실상 전횡을 휘두를 수 있게 돼 있다. 우리나라 대통령을 제왕적으로 만든 단 하나의 요인을 꼽아보라면 검찰 인사권이라고 말하겠다. 수사권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와 국수본으로 옮겨가면 두 기관의 구성원에 대한 인사권이 대통령을 제왕적으로 만들 것이다. 대통령에게 공수처장 후보를 2명 추천하는 방식에서는 그중 1명은 대통령 입맛에 맞춘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공수처 검사 인사위원회’는 과반이 친여 몫이어서 대통령은 자기 뜻에 맞는 사람들로 공수처 검사를 뽑을 수 있다. 국수본부장은 검찰총장보다 더 쉽게 대통령이 원하는 대로 뽑을 수 있다. 우리나라 형사사법제도의 틀을 만든 것은 일본이다. 그럼에도 두 나라의 제도는 오늘날 크게 달라졌다. 일본은 패전 이후 점령군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주도로 자치경찰제를 통한 대대적 분권화를 시행한 후 경찰에 사실상 독립된 수사권을 부여하는 개혁을 이뤄냈다. 구속영장만 해도 법적으로는 검찰이 독점하지만 실제로는 경찰이 신청한 영장을 검찰이 단 한 번도 반려하지 않음으로써 경찰 수사를 존중하는 관행을 만들었다. 우리나라 검찰은 정권에는 피학적(被虐的)이고 경찰에는 가학적(加虐的)이다. 그래야 대통령이 검찰을 지배하고 검찰이 경찰을 지배하는 구조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있는 권력에는 설설 기면서 경찰에는 상전 노릇 하려는 검찰을 떠올리면 검찰의 힘을 빼버려야 한다는 격한 기분이 들면서도 우리와 유사한 다른 나라의 경험을 봤을 때 경찰을 획기적으로 뜯어고치지 않는 한 검찰의 수사지휘권을 함부로 없애기도 어렵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청와대가 지난해 내놓았던 누더기 같은 헌법개정안을 떠올려보라. 검경 개혁의 틀도 딱 그 수준이다. 대통령 권한을 내려놓은 대신 4년 중임제를 실시하겠다는 개헌안에 검찰 등 권력기관에 대한 인사권을 어떻게 하겠다는 언급은 한마디도 없었다. 현재 대통령의 검찰총장과 경찰청장 임명은 국회의 동의조차 요하지 않는다. 개헌이 아니라 법 개정으로 가능한 그것마저도 고칠 생각이 없다. 핵심을 건드리지 못하니까 권한을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옮기는 변죽만 울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근대 과학은 실험을 중시한다. 실험을 위해서는 측정과 비교가 필요하다.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는 세종대왕 때 만들어진 측우기(測雨器)가 ‘모셔져’ 있다. 측정의 중요성을 강조한 과학철학자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한 TV 강연에서 이 측우기를 ‘깡통에다 자 하나 대 놓은 것’이라고 표현한 걸 들은 적이 있다. 측우기의 소박함을 폄훼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비의 양을 측정한다는 생각, 나아가 똑같은 자로 전국에 내린 비의 양을 비교한다는 생각이고 그것이 과학 정신임을 강조한 것이다. ▷실험 과학의 면모가 갖춰진 17, 18세기에 이르러 과학자들은 도량형의 세계적 통일을 모색했다. 그 결과로 미터법을 토대로 한 길이와 무게의 기준이 만들어졌다. 길이의 기준인 1m는 파리를 지나는 지구 자오선 길이의 4000만분의 1로 정해졌다. 길이의 기준이 만들어지자 무게의 기준도 만들 수 있게 됐다. 1kg은 1000cm³의 물이 밀도가 가장 높은 섭씨 4도에서 지닌 무게로 정해졌다. 1799년 표준이 되는 미터 원기(原器)와 킬로그램 원기가 백금으로 만들어져 파리 ‘공화국 문서보관소’에 보관됐다. ▷백금이 단단하다고 하지만 온도와 습기에 따라 미세한 변화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후에 국제미터협약을 거쳐 1889년 보다 정확히 만들어진 새 원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레이저 기술 등이 발달하면서 더 정확한 길이와 무게의 측정이 가능해졌다. m는 1983년 국제도량형총회에서 빛이 2억9979만2458분의 1초 동안 진공 속에서 진행한 거리로 새로이 정의됐다. kg에 대해서는 에너지와 질량이 서로 교환된다는 원리를 이용한 복잡한 계산 방법이 적용되기 때문에 늦어져 지난해 국제도량형총회에서 비로소 새로운 정의가 채택됐다. ▷오늘은 세계측정의 날이다. 우리나라는 오늘부터 새로운 kg 기준을 적용한다. kg의 기준이 바뀌었다고 갑자기 체중이 변할 것을 우려하거나 기대할 필요는 없다. 1889년 국제 킬로그램 원기는 그사이 최대 100만분의 1g이 줄어들었다. 새로 채택된 kg의 정의에 따라 무게를 환원한다 해도 고작 최대 100만분의 1g이 늘 뿐이다. 마블 시리즈의 앤트맨에게라면 몰라도 우리에게 이 정도 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지만 양자 역학을 다루는 과학이나 나노 기술을 다루는 산업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정의다. 다만 일반인으로서는 더 이상 이해하기도 쉽지 않게 된 kg의 정의가 아쉬울 뿐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국내 최초의 등대는 인천 팔미도 등대다. 지도를 펼쳐보면 팔미도는 인천으로 들어가는 광활한 해역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왕조는 1903년 팔미도에 높이 약 8m의 등탑을 세웠다. 개화 이후 일본 등과의 해상교역이 점차 늘던 시기의 산물이다. 팔미도 등대는 1950년 인천상륙작전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국인 유격대 KLO부대가 상륙작전에 앞서 팔미도를 탈환해 등대를 켜 상륙하는 전함들을 인도했다. ▷캄캄한 밤의 외로운 불빛은 단지 시인이 낭만을 노래하는 소재나 귀선(歸船)의 피로를 풀어주는 표지만이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임을 실감한 때가 있다. 1996년 동해 강릉 북한 잠수함 침투 사건을 취재할 때 등명낙가사라는 절의 주지로부터 들은 얘기다. “한밤중에 절로 돌아가다가 잠수함이 좌초한 곳에 인접한 해안 절벽에서 바다 쪽으로 전조등을 비춰주는 자동차를 봤다.” 그의 말이 맞다면 좌초한 잠수함의 무장간첩들은 고정간첩이 켜준 전조등을 등대 삼아 해안 절벽을 기어올라 산으로 도망친 것이 된다. ▷서해 대(大)연평도에는 조기잡이 어선의 바닷길을 비추는 등대가 1960년에 세워졌다. 북한 간첩 침투에 이용될 수 있다는 이유로 1974년 소등됐다. 이후에도 바다에 안개가 많이 낄 때 이곳에서 소리 신호는 보냈는데 그마저도 1987년 중단됐다. 정부는 17일 45년 만에 연평도 등대의 불을 다시 켜기로 했다. 이 일대를 평화수역으로 조성하고 향후 남쪽의 인천항과 북쪽의 해주·남포항을 잇는 해로가 개설될 때에 대비한 것이라고 한다. ▷대연평도에는 두 개의 등대가 있다. 마을이 있는 남쪽 선창에는 불을 밝힌 다른 등대가 있어 주민들의 야간 귀선에 어려움이 없다. 이번에 불을 켜는 등대는 마을 북쪽 해발 105m 언덕 등대공원에 있다. 등대의 빛은 40km 넘게 뻗어나가 먼바다를 비추는 용도로 쓰인다.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같은 항법장치의 발전으로 등대는 점차 없어지는 추세다. 그래도 육안으로 볼 수 있으면 항해에 나쁠 건 없다. 다만 군사적 부담을 감수하고 등대를 가동할 필요가 있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북한 해안 방사포는 등대 불빛을 보고 쏘는 것이 아니라 좌표를 찍어 쏘는 것이어서 달라질 게 없지만 공기부양정 등이 야간 침투할 경우 등대 불빛은 유용한 지표가 된다. 주민에게 당장 등대가 시급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평화가 정착됐다 싶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군사적 보완책을 강구한 뒤에 점등을 논의해도 늦지 않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박근혜 전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했을 때다. 어느 기자가 장관이나 수석비서관도 대면보고한 적이 드물다는 점에 대해 물으니 대통령은 충분히 많은 서면보고를 받고 의문이 있으면 수시로 전화로 묻는다고 답한 뒤 배석한 장관들을 돌아보면서 “대면보고가 꼭 필요하세요”라고 물었다. 그 말에 장관들도 웃고 참모들도 웃고 기자들도 웃고 말았지만 그것은 고쳐지지 않을 불통을 깨닫는 허탈함의 웃음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얼마 전 사회원로 초청 자리에서 “적폐 수사에 대해 정부가 통제할 수도 없고 통제해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통제하지 않았다’도 아니고 ‘통제할 수 없다’는 유체이탈적 화법은 뭔가. 민정수석이 검찰에 전화도 하지 않는데 무슨 통제냐는 생각은 밤늦도록 줄을 쳐가며 보고서를 읽고 있는데 대면보고가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과 마찬가지로 짧고 허망하다. 결국 법원에서 무죄가 난 돈 봉투 사건으로 서울중앙지검장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5년 차나 아래 기수를 법무부 장관도 검찰총장도 없는 틈을 타 내리꽂아 적폐 수사의 틀을 만든 것이 대통령 자신이다. 그것만으로는 불안했던지 죄가 되는지 의심스러운 사건에는 꼭 개입했다. 박찬주 전 육군 대장의 공관병 갑질 의혹이 불거지자 ‘뿌리를 뽑으라’고 지시했다. 군 검찰은 죄가 되지 않자 별건인 뇌물로 기소했으나 결국 무죄가 됐다. 계엄령 문건에는 대놓고 수사를 지시했고, 실행계획과는 거리가 멀자 계엄령 검토 자체가 불법이라는 억지를 부렸다. 청와대가 혐의의 입증이 곤란에 처한 순간마다 캐비닛 문건이란 걸 들고나온 사실을 일일이 말해야 할까. 문 대통령은 지난달 군 장성들을 만난 자리에서 “칼은 뽑았을 때 무서운 것이 아니라 칼집 속에 있을 때 가장 무섭다”고 말했다. 그 말은 칼집 속의 칼을 늘 더 예리한 것으로 준비하고 칼 쓰는 법을 끊임없이 연습하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얘기이지, 중요한 군사훈련을 모두 중단시켜 칼 쓰는 법마저 잊게 만들고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다. 문 대통령에게는 ‘내가 생각하는 나(I)’와 ‘남들이 생각하는 나(me)’ 사이의 간격이 커 보인다. 사람에 따라서는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처럼 ‘나쁜 평화가 전쟁보다 낫다’는 졸렬한 생각으로 칼을 녹여 쟁기를 만들 수도 있겠다. 그렇게 할지라도 최소한 자신이 칼을 버리고 있다는 자기 인식은 있어야 한다. 그런 자기 인식도 없이 태연하게 ‘칼은 칼집에 있을 때 가장 무섭다’고 말하는 사람과는 어떻게 얘기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건축가 승효상 씨가 판문점 도보다리에서 민족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지고 대화하던 두 사나이라고 불렀던 문 대통령과 김정은은 실은 딴생각을 하고 1년여를 보냈다. 문 대통령은 스스로를 북-미 관계의 중재자 혹은 촉진자로 여겼으나 김정은의 눈에는 오지랖 넓은 당사자였을 뿐이다. 지금 북한은 남쪽을 향해 “당신들의 처신이 핵무기 앞에서 살아남으려는 당사자의 자세인가”라고 위압적으로 묻고 있는 듯하다. 김정은과의 불통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심각한 것은 ‘중단된 군사훈련은 북한의 행동에 따라 언제든지 재개할 수 있다’는 미국 폭스뉴스 인터뷰 때의 ‘아니면 말고’ 발언에 담긴 착각이다. 한번 중단된 한미 연합훈련은 트럼프라는 고약한 미국 우선주의자에 의해 한국이 군사훈련비를 분담하지 않으면 재개될 수 없는 것으로 변하고 있다. 미국의 눈에도 한국은 당사자인 것이다. 김정은도 트럼프도 아는 냉엄한 현실을 혼자만 몰랐다. 문 대통령은 올 신년사에서 경제기조와 관련해 “가보지 못한 길이어서 불안하지만 가겠다”고 말했다. 잘 아는 분야도 가보지 못한 길은 함부로 가서는 안 되는 법인데 문외한인 분야에서 대다수 경제학자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길을 굳이 가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지 그 심리가 궁금하다. 문 대통령은 계급장 떼고 토론하기 좋아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다른 스타일이다. 문 대통령에게 대화란 ‘진리’가 적폐의 소음을 참고 견디는 지루한 자리라는 인상을 종종 받는다. 분에 넘치는 중요한 자리를 맡는 것은 자신의 미숙한 판단을 과신할 수 있어 꼭 좋은 일은 아니다. 최소한 안보와 경제에서만큼은 남 얘기도 좀 들으면서 갔으면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일부 방송사들은 “시청자에게 적합하지 않을 수 있는 이미지가 포함돼 있다”는 자막을 내걸었다. 장갑차에 일부 시위대가 깔리는 장면은 흐릿하게 처리했다. 베네수엘라에서 지난달 30일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대를 향해 장갑차가 돌진하는 장면을 말한다. ▷사람들은 30년 전 중국 톈안먼 사태를 상기했을 듯하다. 1989년 6월 4일 오전 4시 인민해방군은 탱크를 동원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 진압에 나섰다. 당시 시위대의 학생대표 중 한 명이었던 차이링(柴玲)은 “학생들은 지쳐 천막 안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는데 인민해방군이 탱크로 짓밟아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버렸다”고 증언했다. 당시 미국 방송사들은 10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보도했으나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아직도 모른다. 지난해 비밀 해제된 영국의 한 외교기밀문서는 총에 맞거나 탱크에 깔려 죽은 사망자가 1만 명을 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시위의 운명은 종종 탱크 앞에서 갈린다. 1991년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자신을 체포하러 온 탱크 위에 올라가 공산당 쿠데타가 무효임을 선언하자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다. 톈안먼 사태가 남긴 사진 중 하나가 탱크를 가로막고 선 탱크맨(Tank man)의 모습이다. 사진은 어둠 속의 ‘성공적인’ 진압 다음 날인 6월 5일 낮에 찍혔고 그는 다행히 탱크에 깔리지 않았다. 2017년 대만 중양(中央)통신 보도에 따르면 그는 중국에서 이름을 숨기고 생존해 있다. 그러나 그의 생사와는 관련 없이 사진은 탱크에 짓밟힌 민주화 시위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톈안먼 사태 당시 중국 지도자 덩샤오핑은 인민해방군의 시위 진압을 칭송하면서 “적에게는 1%의 용서도 베풀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껏해야 돌이나 화염병을 든 시위대를 탱크로 깔아뭉개는 것은 아무리 시위대를 국민이 아니라 적으로 본다 해도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잔혹한 행동이다. 반(反)인륜적 진압 그 자체다. 중국을 개혁개방으로 이끈 덩샤오핑의 이중성이 엿보인다. ▷베네수엘라 사태를 탱크가 무차별 학살을 자행한 톈안먼 사태에 비교하는 것은 다소 섣부른 감이 없지 않다. 아직은 그런 지경까지 가지 않았다고 본다. 다만 올 초 야당 지도자인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이 과도정부를 선언함으로써 고조되기 시작한 마두로 정권과 반정부 시위대의 갈등이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시민을 향해 돌진하는 장갑차가 더 큰 비극의 전조가 아니었으면 한다. 군대는 모름지기 국민의 군대여야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지난해 6·13 지방선거는 여론조사의 정확도, 정확히는 부정확도를 가늠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당시 광역의원 비례대표 정당별 득표는 자유한국당이 27.76%였다. 그러나 선거 전날과 전전날인 11, 12일의 리얼미터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광역의원 비례대표 정당지지율은 한국당의 경우 18.7%로 실제 개표 결과와 9%포인트의 차이가 났다. 여론조사회사로서는 수치스럽게 느껴야 할 차이다. 광역자치단체장의 득표도 한국당 김문수 후보가 바른미래당 안철수 후보와 야당 표를 크게 나눠 가진 서울에서만 20%대의 지지율이 나왔을 뿐 광주 전남 전북을 뺀 거의 모든 지역에서 30∼40%에 이르는 득표를 했다. 선거 직전까지 리얼미터의 정당지지도 여론조사에서 한국당이 얻은 지지율에서 이런 득표율은 예측은커녕 상상도 할 수 없었다. 6·13 지방선거는 리얼미터의 여론조사에 비해서는 한국당이 압도적으로 잘 치른 선거였다. 리얼미터가 매주 발표하는 국정지지도 및 정당지지도 조사는 대부분 ARS를 통해 이뤄지며 응답률은 5% 안팎이다. 5%의 낮은 응답률은 표본이 대표성이 있고 표본의 크기가 크다면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리얼미터 조사는 표본 중의 한 전화번호로 몇 차례 전화를 걸어 받지 않을 경우 다른 번호로 대체해 전화하는 ‘대체 걸기’를 통해 목표한 표본 수를 맞춘다. 이것은 표본이 계속 바뀌어 표본의 대표성을 말하기 점점 어려워지는 것을 뜻한다. 표본의 대표성이 무너지는 상황에서의 낮은 응답률은 조사에 거부감이 적은 집단에 특유한 편향이 반영될 여지를 넓힌다. 나는 리얼미터의 국정지지도 및 정당지지도 조사의 수치가 국민들 사이의 실제 여론을 반영한다고 보지 않는다. 다만 절대 수치와 달리 수치의 등락은 상대적인 것이다. 편향이 있는 수치라도 그 편향에 일관성이 있다면 여론의 변화를 어느 정도 반영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절대 수치가 잘못된 체중계라도 체중의 상대적 변화는 잴 수 있다. 그래서 리얼미터 여론조사를 보기는 한다. 다만 잴 때마다 체중계는 같은 것을 사용한다는 조건하에서다. 리얼미터는 최근 이미선 헌법재판관 후보자와 관련해 2차례 여론조사를 해 발표하면서 다른 체중계를 사용했다. 부정적 여론이 압도했던 1차 조사 때와 부정적 여론이 간발의 차이로 앞선 2차 조사 때의 질문이 달랐다. 이것은 여론조사가 아니라 여론조작에 가깝다. 12일 조사에서는 “최근 이미선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가 열렸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후보자의 헌법재판관으로서의 자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로 물었다. 이때는 부적격 응답이 54.6%로 적격 응답 28.8%에 비해 압도적으로 앞섰다. 그러나 17일 조사에서는 “여야 정치권이 이 후보자의 임명을 두고 대립하는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은 이 후보자에 대한 청문보고서를 국회에 다시 요청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문 대통령이 이 후보자를 헌법재판관으로 임명하는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로 물었다. 이때는 임명 반대 응답이 44.2%로 임명 찬성 응답 43.3%에 비해 소폭 높게 나왔을 뿐이다. 2차 조사의 질문은 불필요하게 장황하다는 것만으로 질문으로서는 결격인 데다 바로 그 불필요하게 장황한 부분에서 문 대통령을 두 차례 등장시켜 문 대통령 지지자의 호응을 유도하고 있다. 특정한 한 시점에서의 이 후보자에 대한 여론이 아니라 두 시점에서의 여론 추세를 비교해볼 작정이었다면 질문을 통일시켰어야 한다. 여론조사 회사가 질문을 바꾸고도 논란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어리석은 것이고, 논란을 예상하고도 질문을 바꾼 것이라면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리얼미터가 언제부터인가 국정지지도 및 정당지지도 조사를 할 때 그때그때 이슈가 되는 문제에 대해서도 질문을 하나 더 보태 조사하기도 한다. 정당지지도 및 국정지지도 조사는 약 2500개의 표본을 조사하지만 이슈 조사는 약 500개의 표본을 조사한다. 같은 응답률일 때 표본의 크기가 작으면 정확도는 떨어진다. 탈(脫)원전 같은 이슈는 전문가조차 일도양단(一刀兩斷)해서 대답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론조사 대상으로 적합하지 않다. 정확도는 더 떨어지는데 여론조사에 적합하지 않은 것까지 조사하고 있으니 과감하다고 해야 할지 무식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프랑스 문호 빅토르 위고의 소설 ‘파리 노트르담’은 영어권에서는 ‘노르트담의 꼽추’로 번역됐지만 책의 주인공은 꼽추 종지기 카지모도도 어느 다른 인물도 아니고 바로 성당 자체다. 19세기 프랑스 문학사가 귀스타브 랑송은 “이 책에서 개개의 인물보다 더 생생한 것은 군중이요, 그것보다 더 생생한 것은 파리라는 도시 자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생생한 것은 그 그림자가 파리를 덮고 있는 성당이다. 파리 노트르담은 이 소설에서 진정한 넋을 가진 유일한 개인”이라고 썼다. ▷위고는 ‘파리 노트르담’의 독립된 한 장을 아예 성당 설명에 할애하고 있다. 위고에 따르면 ‘최초의 돌을 놓은 샤를마뉴(742∼814)와 최후의 돌을 놓은 필리프 오귀스트(1165∼1223)’ 사이에 오랜 세월에 걸쳐 지어진 노트르담은 로마네스크 양식도 고딕 양식도 르네상스 양식도 아니고 세 양식이 모두 섞인 잡종이지만 그렇다고 순수한 양식보다 덜 귀중한 것은 아니다. 노트르담은 세월이 건축가가 돼 만들었으며 면 하나하나 돌 하나하나가 프랑스 역사의 한 페이지라고 위고는 썼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어제 노트르담 화재에 “우리 일부가 불탔다”고 말한 것과 상통한다. ▷가톨릭 성당은 입구를 중심으로 보면 서향(西向)이다. 성당은 동서 방향의 긴 축을 따라 서쪽에 입구가 있고 동쪽에 제단(祭壇)이 놓인다. 다행히 관광객들이 주로 보는 서쪽 입구의 쌍둥이 종탑과 외관은 온전했다. 성당은 동서 축과 남북의 짧은 축이 십자가 모양으로 만나는 곳에 제단이 놓이고 그 위에 첨탑이 선다. 그 첨탑에서 보수 공사를 하다 불이 나 지붕까지 태웠다. 3개 장미창 중 성모마리아(노트르담)가 그려진 남북 축의 북쪽 장미창이 첨탑에 가까웠음에도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위고가 보던 파리 노트르담은 화재 전까지 우리가 보던 파리 노트르담과 달랐다. 위고의 소설이 혁명을 겪으며 훼손된 성당에 관심을 불러일으켜 1844∼1864년의 대대적 복원 작업으로 이어졌다. 이번에 불탄 첨탑만 해도 위고가 소설을 쓰던 시절에는 잘려 나가고 없었으나 당시 작업을 거쳐 복원됐다. 세계가 불타는 노트르담을 보며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했다. 위대한 문화 유적이 가진 보편적 호소력을 보여준다. 낙심할 것은 없다. 20세기만 해도 영국의 윈저성, 일본의 금각사(긴카쿠지·金閣寺) 등이 불에 탔다가 복원됐다. 명품 브랜드 구치의 모기업은 복원을 위해 1억 유로를 기부했다. 더 멋진 복원만이 화재의 상처를 극복하는 길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아름다운 벚꽃철이다. 벚꽃 하면 일본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벚나무 중 가장 화려한 왕벚나무의 자생지는 제주도다. 그 사실을 처음 밝혀낸 것은 1902년 제주도에 파견된 프랑스 출신의 에밀 타케 신부다. 그가 일본에 있던 식물학자 친구 신부에게 왕벚나무의 존재를 알리고 그 대가로 온주 밀감 14그루를 선물받았는데 이것이 오늘날 제주 감귤농업의 기반이 됐다. 프랑스 출신의 공안국(본명 안토니오 공베르) 신부는 미사주를 만드는 데 쓸 포도를 얻기 위해 1901년 경기도 안성 구포동 성당에 머스캣이라는 외국 품종의 포도나무를 심었다. 이후 주민들이 안성의 토질 기후 등이 포도 재배에 적합한 사실을 발견하고 포도를 대대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한 것이 안성 포도의 출발점이다. ▷기독교는 책의 종교다.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으로 보통 선교를 시작한다. 병에 걸린 사람을 고쳐주는 것과 빈곤에서 벗어나게 도와주는 것은 선교의 효과적인 수단이면서 선교 이전에 인륜인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발동이다. 선교사들이 학교와 병원을 짓는 것 외에 농축산업 기술을 전파하고 새 작물이나 산물을 소개하는 역할을 맡기도 하는 이유다. ▷전북 임실은 2010년 순천완주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자동차로 찾아가기 쉽지 않은 곳이었다. 1967년 임실 성당에 벨기에 출신의 지정환(본명 디디에 세스테번스) 신부가 부임해 서양에서 산양 2마리를 들여왔다. 처음에는 산양유를 팔았는데 남아 버려지는 산양유의 처리를 고민하다 치즈를 만들었다. 그러나 산양유로 만드는 치즈가 향이 강해 시장에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자 나중에 산양유 대신 우유로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치즈를 만들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피자 붐이 일어 치즈 수요가 늘어나면서 유명 브랜드로 성장했다. ▷김치가 어울리는 산골마을의 이국적인 치즈에는 특별한 사랑이 담겨 있다. 지 신부가 산양을 들여올 기발한 결심을 한 것은 가난한 주민들을 어떻게든 도와야겠다는 소박한 일념에서다. 벨기에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태생적으로 치즈를 좋아하지 않는 그였으나 치즈 만드는 법을 유럽까지 가서 배워오기를 수차례 거듭한 끝에 치즈 생산에 성공했다. 주민들이 치즈 생산의 혜택을 볼 즈음에 그에게 불치병인 다발성 신경경화증이 찾아왔으나 굴하지 않고 “장애인이 됐으니 이제 그들의 고통과 재활에 동참하겠다”며 장애인 공동체를 설립했다. 그가 13일 88세로 선종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신부님, 고마웠습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서울 광화문 정부청사와 교보생명 건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기리는 10명의 그림 사진 작품이 주초부터 내걸렸다. 인물 선정은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정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했다고 한다. 있는 사람보다는 없는 사람 때문에 눈길이 갔다. 이승만이 없다. 어른들이 애들만도 못한 치졸한 왕따 놀이를 하고 있다. 김구는 있다. 임정의 마지막 주석인 김구는 당연히 있어야 할 사람이지만 김구와의 오랜 협력관계로 보나, 임정에서의 중요성으로 보나 김구 외에 한 사람 더 있어야 한다면 그 사람은 이승만이다. 안창호도 있고, 심지어는 인지도가 떨어지는 김규식까지 있는데 이승만은 없다. 왜 이승만이 있어야 하는지는 인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그날이 오면’ 전시에 가 보면 알 수 있다. 중앙 로비에 1921년 1월 1일 임정·임시의정원의 신년축하식 기념사진 확대판이 놓여 있다. 사진 정중앙에 임정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자리 잡고 있다. 이승만은 임정에서 탄핵됐다고 하지만 김구에 의해 다시 주미 외교위원장으로 임명됐고 해방정국에서도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받아들이기로 한 데까지는 서로 협력했다. 김구가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받아들이기로 해놓고 갑자기 돌아선 이유는 김구가 해명해야 했다. 이후 김구의 해명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선정된 인물 중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는 것도 눈길을 끌었다. 여운형이다. 그는 해방정국에서 임정이 들어오기 전에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해 임정을 말아먹으려 했던 사람이다. 1980년대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전면에 내세운 사람이 여운형이다. 여운형의 건준, 건준을 이은 공산주의자 박헌영의 조선인민공화국 건립 시도가 성공했다면 자유로운 대한민국은 존재하기나 했을지 의문이다. 한국프레스센터 앞에서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언론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무정부주의자 신채호가 임정이 수립된 해인 1919년 창간한 ‘신대한(新大韓)’ 1, 2, 3호가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주간지는 임정에 대한 비판을 넘어 임정을 폐지하려 했다. 신채호의 집요한 공격에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고 창조파, 개조파, 임정수호파로 나뉘어 싸우게 된다. 결국 김구가 국민대표회의를 해산시켜 임정을 간신히 유지했으나 이후 임정은 명맥만 유지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여운형과 박헌영이 해방정국에서 임정의 적대자였다면 해방 이전 임정의 적대자는 신채호와 김원봉이었다. 김원봉은 1930년대 김구가 윤봉길 의거 이후 일본 경찰에 쫓겨 상하이를 떠나 유랑하는 사이 조선민족혁명당이란 이름으로 연합세력을 구축해 김구로부터 임정을 탈취하려 했다. 김구가 민첩히 대응해 한국국민당을 창당하고 이청천 세력과 조소앙 세력을 김원봉의 연합세력에서 끌어냄으로써 임정을 지켰다. 당시 임정이 김원봉에 의해 장악되고 해방정국의 건준과 연결됐다면 어찌 됐을지 아찔하다. 영화 ‘암살’에서 김구와 김원봉이 반갑게 만나는 장면은 거짓이다. 충칭에서 두 세력은 임정의 지원자인 장제스(蔣介石)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합작했지만 거주지까지 수십 리 떨어져 살 정도로 앙숙이었다. 임정 100주년이 임정을 지킨 사람들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임정을 없애거나 말아먹으려 한 사람들을 기리고 있으니 이런 자가당착(自家撞着)이 없다. 굳이 신채호 김원봉 여운형을 기리고 싶다면 임정은 진즉 폐기됐어야 했는데 잘못 살아남아 해방 이후의 역사를 망쳤다고 먼저 말하는 것이 솔직한 태도다. 그러지 못하겠다면 최소한 임정 100주년은 피해서 기리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정부는 말로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이 대한민국의 위대한 역사라고 한다. 그것이 정말 위대한 역사로 느껴진다면 간디에게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라는 이름을 지어준 타고르나 핀란드 민족의 시련과 극복을 그린 ‘핀란디아’를 작곡한 시벨리우스 같은 성취가 나올 법도 한데 그렇지 못하다. 임정을 폄훼하고 폭력투쟁만 치켜세우는 교육을 받은 젊은 예술가들은 비폭력적인 3·1운동이 왜 위대한지 느끼지 못하고 임정 100주년이 왜 위대한 100년의 시작인지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니까 자가당착인지도 모르는 그림이나 생산하는 허수아비가 돼 관제(官製) 왕따 놀이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다시 제대로 임정 100주년을 기념해야겠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프랑스에서 한국계 정치인인 세드리크 오(37)가 최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디지털 담당 장관으로 임명됐다. 디지털 담당은 우리 식으로는 정보통신기술(ICT) 담당이다. 담당 장관은 ‘Secr´etaire d‘Etat’라고 해서 장관인 ‘Ministre d’Etat’와는 구별하지만 장관급으로 분류된다. 직전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 때의 플뢰르 펠르랭 전 문화장관, 장뱅상 플라세 전 국가개혁 담당 장관에 이어 장관급 이상 한국계 정치인이 한 명 더 나왔다. ▷펠르랭과 플라세는 한국인 입양아 출신이다. 6·25전쟁이 끝난 1953년 한국이 최빈국 중 하나였을 때 한국에서 해외로의 입양이 시작됐다. 프랑스는 미국을 빼고 유럽 국가 중 한국인 입양아가 가장 많은 나라다. 그래서 한국인 입양아 출신 장관이 둘이나 배출된 것일 수 있다. 미국에서라면 한국계 정치인을 말할 때 주로 교포 2, 3세가 언급될 것이지만 프랑스는 그렇지 않다. 프랑스는 이주민에 대한 체계적인 동화(同化) 정책으로 한편으로는 이주민을 프랑스 사회로 포섭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독자적인 이주민 사회가 형성되는 것을 방해한다. 프랑스에서 한인 교포 사회가 미국처럼 크지 않은 이유다. ▷세드리크 오는 한국인 입양아 출신도 아니고 한인 교포 2, 3세도 아니다. 그는 국방연구원인 한국인 아버지와 교사인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사실 그는 프랑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수많은 혼혈 중 한 명이다. 그가 한국계 장관이라면 아버지가 프랑스로 이주한 헝가리인인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은 헝가리계 대통령이 된다. 오늘날 프랑스는 조부모 때부터의 순혈 프랑스인도 찾기 어렵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혼혈 사회다. 물론 부모 중 한쪽이 아시아나 아프리카 출신인 경우는 피부색이나 생김새가 달라 백인끼리의 혼혈과는 달리 취급받을 수 있지만 프랑스 사회는 혼혈화가 많이 진행돼 인종적인 면에서 상당히 개방적이다. ▷세드리크 오가 담당 장관이 되는 데는 그가 마크롱 대통령과 삼성전자 권오현 전 회장의 만남을 주선해 삼성전자 인공지능(AI)연구소를 파리 근교 불로뉴에 유치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점도 한몫했다고 한다. 한국은 과거 프랑스 등 해외로 입양을 보내던 나라에서 정보기술(IT) 강국의 이미지에다 한식과 케이팝으로도 프랑스인을 사로잡고 있다. 한국 전체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이 한국인 입양아 출신이든, 한인 교포든, 부모 중 한쪽이 한국인인 사람이든 모두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 있는 듯하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어제는 본래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가 예정된 날이었으나 지나버렸다. 29일을 이틀 앞두고 테리사 메이 총리의 브렉시트안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의향 투표(indicative vote)가 하원에서 벌어졌다. 노딜 브렉시트, 제2차 국민투표 등 8가지 선택지 각각에 찬반 표시를 하는 투표였다. 그러나 어느 선택지도 과반의 찬성을 얻지 못했다. 총리의 안에 찬성하지도 않으면서 노딜 브렉시트도 제2차 국민투표도 아니라면 어떻게 하자는 거냐, 영국이 결정 장애에 빠졌다. ▷브렉시트 의향 투표는 어느 선택지에 과반의 찬성이 나오면 새로운 발의안을 만들어 정식 투표에 부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원은 총리가 EU와 합의한 안을 연거푸 거부한 데 이어 스스로의 대안을 마련하는 데도 실패했다. 의향 투표는 과반의 찬성을 얻는 선택지가 2개 이상 나와도 골칫거리인 비정상적 투표였으나 오죽 처지가 궁색하면 그런 투표까지 했겠나 싶다. ▷다행히 영국 하원이 브렉시트 의향 투표 전에 브렉시트 시한을 4월 12일로 연기하기로 결정해 노딜 브렉시트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원은 다음 달 1일 다시 브렉시트 대안에 대한 토론을 벌일 예정이다. 메이 총리는 하원의 의향 투표 직전 자신의 합의안이 통과되면 사임하겠다고 배수진을 치며 반격에 나섰다. 통상은 총리의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사임하는 것이지만 관철돼도 사임하겠다는 것이다. 열흘 남짓한 날이 새로 주어졌다. 하원이 대안 마련에 실패하면 메이 총리의 합의안을 놓고 3차 투표를 할 수밖에 없다. ▷영국을 모범 민주주의 국가로 만든 것은 19세기 영국의 유명한 헌법해설가 월터 배젓이 말한 대로 프랑스인에 비해 우둔할 정도로 신중한 국민성이다. 브렉시트를 결정해 놓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신중함이 다 어디로 사라졌나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해진다. 민주주의는 인류가 고안한 가장 좋은 정치제도가 아니라 인류가 고안한 가장 덜 나쁜 정치제도라는 말이 있다. 신중함을 잃어버린 민주주의는 포퓰리즘에 휩쓸리기 쉽다. 영국은 후회하지 않을 결정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최근 KBS 방송에 출연해 “이승만을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고 말하는 김용옥 씨를 보면서 일본 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를 떠올린 것은 마루야마가 1940년대에 쓴 ‘일본정치사상사 연구’의 한글번역판(1995년)에 장문의 서문을 쓴 사람이 마침 김 씨이기 때문이다. 서문은 한편으로는 마루야마에 대한 열등감과 다른 한편으로는 허황된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다. 마루야마는 도쿄대 법대를 나와 20대 후반의 나이에 김 씨 자신이 중국 학자 펑유란의 ‘중국철학사’와 더불어 동아시아인이 쓴 20세기 동아시아의 가장 중요한 책으로 꼽은 ‘일본정치사상사 연구’를 썼다. 김 씨는 고려대를 나와 대만대 도쿄대 하버드대에서 두루 공부하고 나이 70세가 넘도록 동양 사상을 연구했지만 지금까지 세계에 내놓을 만한 무슨 책을 썼는지 모르겠다. 받은 화려한 교육에 비하면 이룬 학문적 업적은 초라하다. 19세기 이후 학문을 하는 사람은 근대(modern)라는 문제와 씨름하지 않을 수 없다. 근대를 이해해야 탈근대(post-modern) 이해도 가능하다. 마루야마는 에도 시대 유학자 오규 소라이가 성리학적 관점에서 탈피해 정치를 도덕에서 구별해냄으로써 일본의 근대를 사상적으로 준비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이 맞건 틀리건 그는 학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김 씨도 마루야마 같은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제마의 사상의학, 최한기의 기학, 최제우의 동학 등을 통해 조선 성리학 세계에서 근대로의 출구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조선은 근대의 사상적 준비에 왜 실패했는지 해명하지도 못했고 그럼에도 오늘날 이만큼 큰 성취를 이룬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보여주지도 못했다. 김 씨는 TV에 나와 논어 금강경 요한복음 등 이미 신성(神聖)의 지위는 고사하고 우상의 지위마저 상실한 경전들에 대해 우상파괴적 비판을 가하며 불필요한 가학(加虐)에 빠져들었다. 젊어서 도발은 패기이지만 나이 70세가 넘도록 도발만 하고 있는 것은 한계다. 도발을 넘어 포지티브(positive)한 정립에 이를 수 없는 무능력과 스스로 부풀린 자아상(自我像) 사이의 간격이 그를 요새 젊은이들이 하는 말로 관심종자(關心種子·관심을 받지 못하면 못 배기는 유형)의 길로 빠져들게 한 것이 아닐까 싶다. 학자가 소피스트처럼 궤변으로 대중을 놀라게 하는 데 재미를 붙여선 안 된다. 한국 현대사를 언급하는 학자라면 일자무식(一字無識)의 사람도 알고 있는 사실, 즉 왜 이승만의 한국은 성공 국가가 되고 김일성의 북한은 실패 국가가 됐는지 우선 해명해야 한다. 물론 더 나은 나라로 가기 위해 과거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고, 사실 북한과 달리 그런 반성이 작동하는 시스템이 한국을 성공 국가로 만들었다. 다만 반성이 궤변이 돼 반성이 가능한 시스템을 만드는 데 기여한 사람을 무덤에서 파내자는 식의 망발을 해선 안 된다. 최장집 씨는 마르크스주의 노동정치학을 전공했지만 패거리 의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대부분의 진보 학자들과는 달리 진영을 초월하는 비판정신을 보여주는 학자다. 그는 15년 전 노무현 정권을 향해 ‘과거사 진상규명’ 같은 이념 문제를 앞세워 현실의 사회경제적 문제 해결을 도외시한다고 질타했고, 최근에는 보수 학자들도 잠자코 있을 때 문재인 대통령의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의 ‘친일 청산’ 발언은 관제(官制) 민족주의라고 과감히 비판했다. 최 씨는 김 씨처럼 재기발랄한 학자는 아니지만 또 김 씨처럼 재기만 발랄한 학자도 아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는 정치학자로서 그의 문제의식의 정확함을 보여준다. 그를 우리 시대 정치의 발견자라고 부르고 싶다. 그는 민주화 이후에는 선악의 이분법적 투쟁보다는 정치가 필요한데 정치를 투쟁으로 되돌리는 것은 정치적 타협에 의한 시급한 사회경제적 문제의 해결을 연기시킬 것이라고 우려한다. 최 씨가 정년퇴임 후 그 연륜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정치학의 기초 고전, 즉 막스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와 같은 고전을 제자들과 함께 읽고 제자들이 새로 번역한 책에 직접 해설을 다는 것을 보고 놀랐다. 노교수가 초심의 대학원생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관심종자와 학인(學人), 70대 지식인의 어느 두 초상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앞두고 임정을 중심으로 한국 현대사를 보려는 시도가 일고 있는 것은 반가운 현상이다. 단, 임정의 역사에서 누가 임정에 어깃장을 놓았는지는 똑똑히 알고 임정을 강조해도 강조해야 할 것이다. 1919년 수립된 상하이 임시정부에 최초의 반기를 든 것은 베이징을 기반으로 한 신채호 세력이다. 이승만의 ‘외교적 노력에 의한 독립’론을 문제 삼아 그를 대통령으로 선임한 임정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반기의 이유였으나 그 밑바닥에는 ‘적에 대한 파괴의 반면(反面)이 곧 독립’이라는 사상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것이 의열단식 투쟁을 지지한 ‘조선혁명선언’으로 나타났다. 다음으로 반기를 든 것은 연해주를 기반으로 한 이동휘의 한인사회당 세력이다. 상하이 임정이 수립 직후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이동휘가 중심이 돼 만든 대한국민의회와의 통합이다. 그 결과 이동휘가 임정에 국무총리로 부임하면서 통합정부가 구성됐다. 그러나 이동휘가 이승만, 안창호와 갈등을 빚다 1921년 사임하고 연해주로 돌아가면서 통합은 없었던 것이 됐고 이동휘 세력은 반(反)임정의 길을 걷게 된다. 불만이 있다고 해서 신채호나 이동휘처럼 3·1운동의 피로 세워진 임정에 다 어깃장을 놓은 것은 아니다. 안창호 역시 임정에 불만을 갖고 있었으나 임정 주변을 떠나지 않고 임정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했으니 그것이 국민대표회의 소집과 유일당 운동이다. 안창호는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의장을 맡아 임정을 새롭게 개조할 것인지, 아니면 아예 없애고 새로 만들 것인지 논의를 이끌었다. 비록 합의에 이르지 못해 실패로 끝났지만 실패한 시도마저도 임정을 옹호하고 임정을 중심으로 통합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국민대표회의에서 실패한 안창호는 다시 유일당 운동으로 통합에 나섰다. 유일당 운동은 대통령제에서 내각책임제로 바뀐 임정에 맞춰 이당치국(以黨治國) 체제를 갖추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임정의 맏형이었던 이동녕도 동참했다. 그러나 유일당 운동은 1928년 코민테른이 12월 테제로 사회주의 세력에 좌우합작 거부를 지시함으로써 끝이 났다. 좌파 세력은 독자적으로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을 결성했고 이에 안창호와 이동녕은 우파만으로 한국독립당을 조직해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로 등장한 반임정 세력은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이다. 1932년 윤봉길 의거 직후 임정은 상하이를 떠나 8년간의 유랑 길에 오른다. 김구가 일본의 집요한 추적을 따돌리는 동안 임정과 한국독립당의 관계도 멀어졌다. 그 틈을 타 의열단을 중심으로 임정 주변의 정당들이 통합한 뒤 조선민족혁명당을 구성해 반(反)임정, 반(反)김구를 외쳤다. 이에 김구는 한국국민당을 새로 창당해 가까스로 임정을 지켰다. 다행히 조선민족혁명당에 가담한 조소앙 세력과 이청천 세력이 얼마 지나지 않아 탈퇴해 김구 측에 합세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김구는 충칭에서 중국 국민당 장제스의 압력으로 김원봉과 좌우합작을 하지만 두 세력은 끝까지 물과 기름처럼 따로 놀았다. 조선민족혁명당의 당군(黨軍)인 조선의용대의 태반이 옌안으로 가 중국 공산당 팔로군에 합세하는데도 김원봉이 충칭에 남은 것은 조선의용대에서 주도권을 잃었기 때문이다. 충칭 임정에서 겉돌며 자기 세력 확장에만 몰두하던 김원봉은 해방정국에서 최종적 열세(劣勢)를 확인하고 옛 동지인 옌안파에 기탁하려 북한으로 넘어간다. 마지막 반임정 세력은 해방정국에 등장하는 박헌영의 공산주의 세력과 이에 놀아난 건국준비위원회의 여운형이다. 그들을 반임정 세력으로 규정한 것은 환국한 김구 측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겠다. 김구가 환국 후 연 첫 임정 국무회의에 내각 외 인사로 유일하게 참석한 사람은 1942년 김구가 주미외교위원장에 임명한 이승만이다. 이승만은 임정의 초대 대통령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나오는 표현인 ‘임정의 법통(法統)’을 따지자면 이승만 안창호 이동녕 김구 등이 그 법통을 잇거나 지킨 지도자들이다. 안창호와 김구, 이승만과 김구의 경쟁구도에서 발생한 내부의 시비는 일단 제쳐두자. 지금은 누가 임정의 기치를 높이 들었고 누가 임정에 어깃장을 놓았는지 제대로 알고 제대로 기념하는 것이 중요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문재인 정부는 3·1운동과 그 결실로 건립된 임시정부 100주년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고 그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북한 정권은 물론이고 남한에서도 1980년대 ‘해방전후사의 인식’ 출간 이후 3·1운동과 임시정부를 폄훼하는 강력한 흐름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물론 문 대통령이 북한에 100주년 공동 기념을 제안한 것이나 중국 공산당 정부에 임시정부 지원에 대한 감사를 표한 것은 방향이 틀린 것이다. 법률가가 아니면 역사가가 됐을 것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드는 착각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런 무리한 제안이나 엉뚱한 감사에서 3·1운동과 임시정부를 강조하려는 의지는 더 뚜렷했다고 볼 수도 있다. 3·1운동의 위대함은 비폭력 저항에 있다. 일제의 총칼 앞에 맨손으로 자유와 독립을 외치다 쓰러진 선조들은 너무 숭고해서 그들이 종교적 순교자처럼 느껴진다. 숭고는 두렵고 떨리는 감정을 느낄 때 쓰는 표현이다. 헌법에 따라 평화롭게 시위할 권리를 보장받은 위에서 맘껏 시위할 권리를 행사한 촛불집회를 그런 권리 자체를 얻기 위해 순교적으로 싸운 3·1운동에 견주는 것은 적절한 역사적 비유가 아니다. 신채호는 3·1운동 후 그 운동이 폭력적 중심을 형성하지 못해 실패했다고 비판하고 김원봉의 의열단 투쟁을 지지했다. 그러나 의열단 투쟁은 영화적 감수성에 더 맞을지 몰라도 새롭지도 전략적이지도 않은 데다 나중에 대부분 공산주의 투쟁으로 흡수되고 만다. 3·1운동의 비폭력 저항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후 10년간의 무장투쟁에 대한 반성에서 나왔다. 나라가 망하자 만주와 연해주로 활동무대를 옮긴 독립운동가들은 이국땅에서 풍찬노숙하며 의열단 이전에 의열단보다 더 체계적으로 싸웠다. 무장투쟁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겨룰 만한 상대라면 무장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1919년 당시에는 독립운동가들의 필사적인 투쟁도 세계적 강국의 반열에 오른 일본을 무너뜨리기에는 너무 무력했다. 문제는 나라가 있고 힘도 커져 싸울 만하고 싸워야 할 때는 평화를 강조하고, 싸우는 것 자체가 무모할 때는 싸움을 강조하는 뒤틀린 역사가들이다. 비폭력 저항은 일견 가장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관계가 제국주의적 약육강식(弱肉强食)에서 벗어나 인도주의에 입각한 민족자결주의와 국제공동안보의 새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현실성을 얻기 시작했다. 3·1운동 직후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는 간디가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전개했다. 근대사 초유의 두 운동이 갖는 시대적 동시성과 그 국제적 조건에 주목하지 않으면 3·1운동의 노선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거니와 이후의 외교전과 애국계몽운동의 의의도 제대로 평가하기 어렵다. “3·1운동의 피로 임정이 세워졌다.” 김구의 선전부장이었던 엄항섭의 말이다. 3·1운동과 임정의 관계는 이렇게 단순히 말할 수밖에 없다. 임정에 대한 국민의 위임은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 루소식의 일반의지가 형성되듯 임정이 세워졌을 때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마음으로 승인했다. 그렇게 우리는 헌법에 ‘3·1운동으로 건립된 임정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이라고 새기게 됐다. 신채호는 한국사를 묘청이 김부식에 패하고, 최영이 이성계에 패하고, 정인홍이 인조 세력에 패한 실패의 역사로만 본다. 그것은 임정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의 역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로 보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게 대한민국사를 매도하다가 돌연 임정 운운하다 보니 말이 꼬이고 해방정국에서 임정을 봉대한 세력의 대부분을 무시하고 김구만을 선양하는 옹졸한 결과가 빚어지고 있다. 해방정국에서 임정을 쌈 싸듯 말아 먹으려 한 두 세력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박헌영의 남로당이라고 지적한 것은 바로 김구의 비서로 일했던 장준하다. 남로당이 주도한 대구폭동을 대구인민항쟁으로 미화한 학자가 청와대에 들어가고 친정부적 공영방송들은 도올 김용옥을 통해 여순반란을 여순민중항쟁으로 미화하는 말을 공공연히 퍼뜨리고 있다. 말로는 임정을 높이면서 실제로는 임정을 폄훼하며 결국 북한에 합세한 남로당과 여운형과 김원봉을 미화하는 기괴한 불협화음에 우리는 둘러싸여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야마모토 유지라는 마이니치신문의 베테랑 법조기자가 쓴 ‘일본 최고재판소 이야기’란 책이 있다. 오래전에 나온 책이다. 최근 다시 보면서 오사카공항 소송이 눈에 띄었다. 1975년 그 소송이 일본 최고재판소 대법정에 회부되는 과정이 양승태 대법원에서 일제 강제징용 소송의 전원합의체 회부가 추진된 과정과 비슷하다. 오사카 이타미(伊丹)공항을 오가는 항공기의 굉음에 대해 ‘조용한 밤을 돌려달라’고 인근 주민들이 소송을 제기했다. 오사카 고등재판소는 주민들의 야간비행 정지 요구를 받아들였다. 소음으로 고통받는 주민들을 위해 위자료 등 손해배상을 명하는 걸 넘어 소음을 제거하기 위해 항공기 비행 자체를 금지한 판결은 처음이었다. 환경권을 우선시한 오사카 고등재판소의 획기적 발상은 세계로부터 주목받았다고 야마모토 기자는 썼다. 우리나라 대법원장에 해당하는 일본 최고재판소 장관은 당시 오카하라 마사오였다. 오카하라는 오사카공항 소송을 최고재판소 소법정에 놔뒀다가 오사카공항이 항공기도 오가지 못하는 비(非)문명지대로 추락할까 걱정했다. 그래서 사건이 배정된 제1소법정의 재판장을 불러 “사건을 대법정으로 돌리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기자의 취재 내용이고 오카하라 본인은 “혹시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일본 최고재판소에도 우리나라 대법원의 소부(小部)처럼 3개의 소법정이 있다. 사건은 일단 재판관 5명으로 구성된 소법정에서 다루고 소법정이 ‘사안이 중대하다’고 판단한 경우에 재판관 15명으로 구성된 대법정에 회부한다. 오사카공항 소송은 이미 제1소법정이 구두변론 등 심리를 모두 끝내고 판결을 앞두고 있었다. 중대한 사건이라고 해도 소법정에서 대법정에 회부하는 건 심리를 끝내기 전이다. 결심까지 끝낸 사건을 대법정에 회부하는 것은 이례적이었다고 한다. 오카하라 장관이 말했어도 재판장이 딱 잘라 안 된다고 했으면 대법정 회부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재판장은 오사카공항 소송이 지닌 중요성을 고려해 제1소법정에 속한 재판관들을 불러 대법정 회부를 논의했다. 결국 병으로 요양 중인 재판관 1명을 빼고 4명 중 3명이 회부에 찬성해 사건은 대법정에 회부됐다. 제1소법정의 평의는 오사카 고재 판결을 지지하는 것이었다고 한다(기자가 비밀인 평의 내용을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대법정에서 6년의 시간이 흐른 뒤 그 판결은 뒤집히고 말았다. 야마모토 기자는 이 에피소드에 ‘대법정 회부의 모략(謀略)’이라는 제목을 달고 비판적으로 다룬다. 그는 일본 정부와 오카하라 사이의 내통(內通) 의혹까지 제기한다. 오카하라가 대법정 회부를 부탁한 시점과 일본 정부 법무성이 대법정 회부를 요구한 시점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야마모토 기자에게 오카하라의 행위가 불법이라는 인식은 희미하다. 모략이니 내통이니 하는 것도 법조 윤리에 비춰 문제가 있다는 의미에서의 모략이고 내통이다. 오사카공항 소송은 일본 사법사에서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할 정도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 받는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에서도 이 사건의 내막을 기억하는 일반인은 거의 없는 듯하다. 위키피디아 일본어판에는 오사카공항 소송이란 항목이 있지만 야마모토 기자가 기록한 그런 내막은 언급되지 않는다. 그 내막은 일본 법조기자의 기억에나 남은 에피소드에 불과하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나라 검찰은 그런 혐의를 모으고 모아 양 전 대법원장을 구속하고 기소했다. 흠결 없는 사법행정과 불법적인 남용 사이에는 넓은 회색지대가 존재한다. 이항(二項) 대립을 좋아하는 원리주의적 판사들에게 그런 회색지대는 생각하기 성가신 영역이다. 그들에게 블랙리스트는 형법적으로 불법인 블랙리스트거나 블랙리스트가 아니거나밖에 없다. 3000명이나 되는 법관 중에서 대외적 의견 표명이나 동료 판결 비판을 통해 논란을 자초한 법관의 면모를 대법원장이 알 필요가 있다는 인식은 들어설 여지가 없다. 대법원장이 구속될 정도의 대단한 재판 거래라면 그래서 그가 얻은 건 뭔가라고 사정을 잘 모르는 외국인은 물을 것이다. 상고법원은 얻지도 못했다. 겨우 판사들 해외 파견 자리 몇 개 얻자고 그 짓을 했다는 말이 된다. 이건 뭐지? 외국인은 어깨를 으쓱할 것이다. 베네수엘라처럼 기괴한 나라가 되고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미인과 석유의 나라 베네수엘라. 2000년 이후 미스 유니버스를 두 번 이상 차지한 다른 나라는 없는데 베네수엘라만 세 명 배출했다. 엘 시스테마 같은 빈곤층 청소년 음악교육 프로그램으로 LA필하모닉의 최연소 음악감독이 된 천재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을 낳기도 한 창의적인 나라이기도 하다. 풍부한 석유자원도 갖고 있다. 다만 그 수입이 외국계 석유회사와 국내 과두 계층에 편중됐던 게 문제다. ▷석유는 이 나라의 축복이자 저주다. 우고 차베스는 2000년 집권 이후 석유회사를 국유화하고 나머지 제품은 석유를 수출한 돈으로 수입해 국민에게 싸게 공급하는 포퓰리즘 정책을 썼다. 유가가 높을 때는 그런 정책이 가까스로 유지가 가능했으나 2014년 유가가 급락하자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차베스가 2013년 암으로 사망하면서 정치적 위기까지 더해졌다. 차베스는 니콜라스 마두로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마두로는 관권선거로 집권 초부터 정당성 시비에 휘말렸다. ▷베네수엘라 경제는 2013년 말 이후 초(超)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다. 물가는 한 주 만에 몇만 %씩 올라 더 이상 세는 의미가 없어졌다. 석유의 나라에서 무려 인구의 10%인 300만 명이 먹고살기 위해 나라를 떠나는 진기한 엑소더스가 벌어지고 있다. 국민 평균 체중이 2016년과 2017년 사이에 10kg 이상 줄었다는 충격적인 조사 결과도 있다. 차베스 치하에서 무기 보유가 확산돼 2014년 미스 베네수엘라 출신의 여배우 모니카 스페아르가 노상강도의 총격에 사망하는 등 치안도 더 불안해졌다. ▷최근 수만 명의 시민이 반(反)마두로 시위에 나서고 이에 호응해 야당 지도자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이 과도정부를 선언했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남미 주요국들은 과이도 의장을 임시 대통령으로 인정한 반면 중국 러시아 등은 마두로 지지를 밝혀 대통령 2명이 공존하는 불안한 정국이 이어지고 있다. 일부 군인들의 쿠데타 시도는 진압되고 군부 전체가 동요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차베스 없는 차베스주의가 종말을 향해 가고 있음은 틀림없는 듯하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미국 연방대법원은 9명으로 구성된다. 이에 더해 법무부 서열 3위인 송무실장은 대법원에 빈번히 드나든다 해서 10번째 대법관이라고 불린다. 송무실장은 연방정부를 대표해 정부가 당사자인 소송을 지휘하는 건 물론이고, 정부가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사건과 관련한 정부의 의견을 수시로 대법원에 전달한다. 지난해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은 한일 관계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그 파장 자체가 전원합의체에 회부될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었음을 입증한다. 그렇다면 한일청구권협정의 당사자인 정부로서는 당연히 전원합의체 회부를 요청할 수 있었던 사안이다. 우리나라 대법원 규칙에 정부가 법원에 의견을 표할 절차가 있었느니 없었느니 따지는 것은 지극히 형식적인 논리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소수의 사건만 상고를 허가해 전원합의체로 판결을 내린다. 우리나라는 모든 사건의 상고가 가능한 대신 상고사건은 일단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된 소부(小部)에서 다루고, 소부에서 전원일치가 되지 않거나 특별히 중요한 사안일 경우에 전원합의체에 회부한다. 법리적으로 볼 때 대법원 소부 사건은 본래는 전원합의체가 다뤄야 하지만 현실적 여건상 어려워 일단 소부에 맡긴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엄격하게 본다고 해도 전원합의체에 회부해 달라는 의사 표시 정도는 대법원장이 할 수 있지 않을까. 오히려 대법원의 수장으로서 사안이 중요한데도 소부에 방치한다면 그거야말로 무책임한 것이다. 미국 연방대법관들은 매주 금요일 열리는 대법관회의에서 사건에 대한 견해를 밝힌다. 대법관회의가 끝난 후에도 의견이 다른 대법관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서로 메모를 주고받는다. 밥 우드워드 기자는 ‘지혜의 아홉 기둥’이란 책에서 “얼 워런 대법원장은 회의에 들어오기 전 윌리엄 브레넌 대법관과 만나 작전계획을 짜고 회의 중에도 담합하기 일쑤였다”고 썼다. 대법원 재판은 상호 의견 제시와 교환이 필수적인데 우리는 너무 경직되게 본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강제징용 사건의 일본 기업 측 변호사를 만난 것은 적절하지 못했다. 우드워드 책에는 워런 버거 대법원장 시절 한 변호사가 재심청구를 위해 자신의 딸이 재판연구관으로 있는 대법관과 자신과 같은 아일랜드계의 대법관을 만난 일화가 나온다. 두 대법관은 변호사가 사건을 언급하자 사무실에서 쫓아낸 것으로 나오지만 그 접촉으로 인해 문제의 재심청구를 진지하게 다뤄야 한다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그 접촉은 재판관이 사건에서 스스로를 회피해야 할 문제나 윤리 위반의 문제로만 다뤄졌을 뿐이다. 통합진보당 의원 지위확인 소송에 대한 개입이란 “인용이든 기각이든 국정감사 기간인 만큼 선고를 연기해 달라”는 것이다. 판결은 2개월여 연기됐다. 제프리 토빈 기자가 쓴 ‘더 나인’에는 윌리엄 렌퀴스트 대법원장 시절 그가 대법관회의에서 검토할 상고허가신청서 목록에서 사건을 빼버림으로써 시간을 끄는 얘기가 나온다. 원칙적으로 그런 개입도 하지 말아야 하지만 본안(本案)도 아닌데 불법으로 걸고넘어질 정도인지는 의문이다. 헌법재판소 파견 법관을 통한 정보 수집에 대해 헌재 관계자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파견은 헌재와 법원이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이며 그 자신도 모르는 헌재의 찬반 결정까지 파견 법관이 미리 알 방도는 없다는 말을 들었다. 공보비를 예산에 쪼들리는 법원장에게 나눠준 것은 항목을 어떻게 책정하느냐의 기술적인 사안이다. 특정 판사 불이익 처분에 대해서는 이른바 사법농단의 발단인데도 지금까지도 뚜렷한 게 없다. 문제가 있다면 대법원장의 ‘제왕적’ 인사권 자체에 있다. ‘재판 거래’ 의혹은 언제부터인가 ‘재판 개입’ 의혹으로 슬그머니 쪼그라들었다. 그마저도 재판 본안보다는 절차 등 부수 사안에 관련된 게 대부분이다. 오히려 서영교 의원의 ‘재판 청탁’과 비교하면 공적인 측면이 부각되는 개입이다. 박병대 전 대법관은 지인의 사건을 자신의 소부로 끌고 왔다고 한다. 대법원의 사건 배당은 기계적인데 어떻게 끌고 왔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검찰은 이제야 핵심에 도달했다. 사익추구적 재판 청탁이 사법의 신뢰를 흔드는 본체다. 양 전 대법원장에게도 있을지 모른다. 검찰은 스스로도 불법인지 아닌지 잘 모르는 분야에서 불법몰이에 헛심 쓰지 말고 명백한 불법이나 속 시원히 밝혀 보라.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예로부터 새해가 되면 나라에서 반드시 내놓아야 하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이 책력(冊曆)이다. 책으로 된 달력을 말한다. 조선에는 관상감(觀象監)이라는 정부기관에서 관력(官曆)을 발행했다. 조선은 농업 중심 사회였으므로 절기,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시간, 삭망(朔望·음력 초하루와 보름)과 상하현(上下弦·반달)의 일시를 알려주는 것이 중요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천문학이 쇠퇴해 한때 독자적 역법의 계산이 어려워진 적도 있었으나 사실상 조선이 망할 때까지 발행됐다. ▷일제도 1911년부터 1936년까지 조선민력(朝鮮民曆)을 간행했다. 민력이라고는 했지만 편제의 주체는 조선총독부였다. 조선민력에 대항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낸 달력이 대한민력(大韓民曆)이다. 기미독립선언으로 조선의 독립국임을 선언한 이상 주체적인 달력을 내는 것은 임시정부의 당연한 임무로 여겨졌다. 대한민국 2년(1920년) 달력이 발견됐다. 임시정부가 출범한 것이 1919년 10월이므로 최초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발행 달력이다. ▷현대인에게는 한 주가 7일이지만 고대 로마와 그리스에서는 낯선 개념이었다. 프랑스 혁명력은 한 주를 10일로 만들었다. 한 달은 3주가 된다. 각 30일로 이뤄진 12개월 후에 5일로 이뤄진 축제주간이 덧붙여진다. 소련의 스탈린은 한 달을 5일 단위의 주 6개로 구성했다. 토·일요일은 사라지고 노동자는 회사마다 5분의 1씩 돌아가며 쉬었다. 당시로선 자본주의보다 노동시간이 짧아졌지만 공통의 휴일은 없어졌다. 지배하는 자는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도 지배하려 한다. ▷대한민력은 조선민력과 달리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하는 일본의 표준시가 아니라 동경 127.5도를 기준으로 하는 경성(서울)의 표준시를 채택했다. 조선민력의 일왕 생일 대신 단군 개천절과 독립선언일을 기념일로 내세웠다. 공간은 비록 일제에 빼앗긴 상태지만 우선은 시간만이라도 우리의 시간을 되찾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엿보인다. 그런 의지가 있었기에 1945년 다시 우리의 공간까지 되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청와대는 풍수지리상 불길해 언젠가는 옮겨야 한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대통령집무실의 광화문 이전이 당장은 어렵지만 언젠가는 필요하다면서 한 이 말을 들었을 때 이것이 정부 위원회(광화문대통령시대위원회)를 책임진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말인지 의아했다. 풍수지리를 유기체적 자연관의 입장에서 재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터를 놓고 길하니 불길하니 하는 것은 버려야 할 미신적 요소로 돌아가는 것이다. 터가 길하고 불길한 게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이 길함과 불길함을 만든다. 한 전직 장군이 자살했다. 문재인 정부가 기무사령부의 계엄령 문건을 쿠데타 모의로 몰고 가지만 않았다면, 그래서 검찰이 샅샅이 뒤졌지만 나오는 게 없자 세월호 사찰을 물고 늘어져 적폐로 몰아가지 않았다면 그는 죽지 않을 수도 있었다. 셰익스피어 연극 ‘오셀로’에 나오는 이아고 같은 측근이 문재인 대통령의 귀에 대고 의심을 불어넣었는지, 아니 문 대통령이 혼밥을 먹다가 섬광 같은 의심을 갖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체계적으로 편향된 의심이 결국 불길한 일을 초래했다. 김태우 전 청와대 특감반원과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의 폭로로 촉발된 청와대의 사찰과 외압 의혹도 현 집권세력이 전 집권세력을 단죄하면서 사찰이나 외압의 개념을 지나치게 확장해 놓은 데 기인한 면이 없지 않다. 언론에 나온 동향이나 자기 조직 내에서 다 아는 정보를 모아놓은 것조차 사찰로 매도하고 대통령의 정책을 부처에 관철하는 과정까지 형식적 절차를 문제 삼아 직권남용으로 몰았다. 단지 매도하고 억지를 부렸으면 정치는 본래 그러려니 하겠지만 집권하자마자 검찰을 동원해 단죄했다. 두 실무자의 폭로는 증자(曾子)의 ‘출호이자반호이자(出乎爾者反乎爾者)’라는 말처럼 ‘너에게서 나온 것이 너에게 돌아가는’ 불길한 예고편이다. 청와대를 옮기고 싶을 정도의 불길함은 궁극적으로 자살 수감 등으로 이어진 역대 대통령들의 비극사를 가리킨다. 정권이 전직 대통령들을 수사할 때는 모두 이유가 없지 않았다. 재치 있는 미국 정치인 벤저민 프랭클린이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 맞다. 온갖 것에 다 이유를 갖다 붙일 수 있으니 말이다.” 대통령들끼리 치고받는 거야 높은 데서 제왕적 권력을 휘두르며 서로에 대한 피해에 책임이 없지 않은 그들의 싸움이라고 하자. 이번 정권에서는 적장을 치면 부하들은 대부분 놔둔다는 말도 통하지 않았다. 적폐라는 프레임을 내걸고 전 정권에 속한 고위급 중 한 사람도 법망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어떤 구실로라도 단죄하려 했고 눈에 띄지도 않은 중간 간부의 진급과 포상까지도 일일이 간섭했다. 아예 싹을 말리려는 시도다. 이러니 야당은 권력을 되찾으면 반드시 보복하겠다고 벼르고 있고 여당으로서는 20년 집권을 도모하지 않는 한 보복을 피할 방법이 없다. 내년 총선과 내후년 대선의 피 터지는 싸움이 예상된다. 조선시대 기축옥사(己丑獄事)는 가장 잔혹했던 사화(士禍)다. 당시 서인(西人) 정철에 의해 희생된 동인(東人) 이발의 후손들은 지금도 제사 준비를 할 때 북어를 방망이로 두들기면서 ‘이놈의 정철, 이놈의 정철’이라며 울분을 토한다고 한다. 쌍방에 무자비한 피해를 입힌 사화의 역사를 읽으며 조상들은 왜 저런 어리석은 짓을 했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지금 우리가 그런 어리석음의 회로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꼴이다. 길함과 불길함의 세계는 옳고 그름의 세계와는 좀 다르지 않나 싶다. 아무리 옳아도 지나치면 반발을 부르고 글러도 지나치지만 않으면 참고 넘어가는 게 세상사다.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다퉈 봐야 평행선을 달릴 뿐이더라. 그러나 한 가지는 동의할 만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나침은 불길함을 부른다. 옳다고 여기는 것도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 비극에 나오는 휴브리스(hubris·오만)에 대한 경고다. 까마귀 우는 소리가 불길한 징조가 아니다. 청와대 뒤로 가파르게 솟은 북악산이 불길한 형상이 아니다. 진짜 불길한 징조는 34세의 변호사 1년 차인 청와대 행정관이 57세의 육군참모총장을 카페로 불러내는 저 위력, 아니 57세의 육군참모총장이 34세의 변호사 1년 차인 청와대 행정관이 부른다고 카페로 나가는 저 굴신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대법원이 최근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에 제출한 법원개혁안이 그다지 개혁적이지 않다는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법행정에서 가장 선진적인 제도는 미국식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선호했던 개혁은 미국 연방사법회의식 사법행정인 듯하다. 그러나 대법원은 ‘국민과 함께하는 사법발전위원회(사발위)’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럽 대륙국가의 사법평의회 방식과 유사한 사법행정회의를 채택했다. 연방사법회의 방식은 법관만으로 구성되지만 사법행정회의에는 외부 인사도 참여한다. 얼마 전 국회 토론회에서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의 사개특위 대표 주자 격인 의원들이 나와 대법원의 법원개혁안이 전향적이지 않다고 일제히 평가절하하는 것을 봤다. 무책임하게 보였다. 사발위 위원을 했던 내가 보기에는 그 안은 너무 전향적이어서 오히려 사법의 안정을 해칠까 봐 걱정될 정도다. 가장 큰 비판은 외부 인사를 법관과 동수인 5명으로 하지 않고 4명으로 한 데 대해 쏟아졌다. 그러나 사발위는 외부 인사를 포함한다고만 건의했지, 외부 인사를 몇 명으로 할지에 대해서는 건의하지 않았다. 헌법 101조는 사법권이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한다고 규정한다. 이 사법권에 사법행정권도 포함되느냐는 논란이 있지만 외부 인사가 많아지면 위헌의 위험이 높아진다. 사법평의회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제도가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프랑스 사법평의회는 우리나라의 대법원장 격인 파기원장이 맡는 의장을 빼고 14명의 위원 중 사법관과 외부 인사가 동수로 구성된다. 이탈리아의 사법평의회는 대통령, 파기원장, 검찰총장 외에 27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는데 3분의 2는 사법관이고 3분의 1은 외부 인사다. 외부 위원의 비중은 그 나라의 사정에 달렸다고 봐야지 외부 인사가 더 많거나 최소한 동수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번역된 ‘이탈리아 현대사’(저자 폴 긴스버그)란 책에서 1958년 이탈리아에 도입된 사법평의회에서 사법관이 다수를 점한 데 대해 사법의 독립이란 측면에서 다행스럽게 평가하는 대목을 봤다. 외부 위원 수가 과반이냐 아니냐보다 더 중요한 점은 유럽 대륙국가의 사법평의회는 검찰과 법원 모두를 관할한다는 사실이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우리나라처럼 검사가 수사지휘권까지 갖고 있다. 이런 구조에서는 수사지휘도 하고 기소도 하는 검찰이 불공정할 때 오는 폐해가 법원 재판의 불공정성에서 오는 폐해보다 훨씬 클 수 있다. 따라서 사법평의회를 만든다면 검찰을 통제하는 기구를 먼저 만드는 게 순서다. 대통령을 제왕적으로 만드는 검찰 인사는 대통령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면서 법원만 외부의 간섭에 문을 여는 것은 불균형을 심화시킨다. 그럼에도 법원은 외부에 문을 여는 어려운 결정을 했는데 그런 법원만 몰아세우는 것은 비판하는 측의 균형감 부족을 드러낼 뿐이다. 검찰은 지금 검경수사권 조정에서 검찰의 수사지휘권을 빼앗아 기소와 수사를 완전히 분리하는 데 저항하고 있다. 검찰의 저항에도 이유가 없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에서처럼 경찰 자치를 강화해 경찰권을 충분히 분산시킨 상태에서 경찰에 수사권을 넘겨주지 않으면 정보 기능까지 갖고 있는 경찰은 검찰보다 더한 권력집단이 될 수 있다. 또 검찰의 수사지휘권에는 경찰의 과잉 수사로부터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기능도 분명히 있다. 사법행정회의 제안이 나오지 않았으면 모르되 이왕 나온 이상 검찰에도 유사한 기구를 만드는 것이 균형에도 맞을뿐더러 섣부른 검경수사권 조정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사법행정회의를 집행 기능까지 포함하는 총괄기구가 아니라 주요 사안에 대한 심의·의결 기구로 한 데 대한 비판도 무책임하다. 총괄기구로 할 경우 기껏해야 한 달에 한 번 정도 회의에 참석하는 외부 인사들이 충실한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법관 인사 운영을 법관들로만 구성된 ‘법관인사운영위원회’에 맡기는 것도 문제라고 하지만 그 위원회가 사법행정회의 산하에 있는 이상 큰 문제가 되는지는 의문이다. 이번 개혁은 과거 70년간 이어진 법원의 운영 틀을 바꾸는 중대한 작업이다. 국회가 국가 삼권(三權) 중 하나인 법원의 일에 대해서만큼은 법원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정략을 버리고 더 연구하고 고민해서 모두가 훌륭하다고 여길 만한 개혁안을 만들어 냈으면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