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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6세기 한반도에서 꽃피었던 ‘분청사기(粉靑沙器)’의 전통을 계승하며 현대적으로 재조명한 전시 ‘이제 모두 얼음이네’가 관객을 기다린다. 가나문화재단은 “한국 분청사기의 대가로 꼽히는 ‘급월당(汲月堂)’ 윤광조 작가(72)와 후배 작가들이 참여하는 전시가 서울 종로구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다”고 전했다. 분청사기는 시기적으로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사이에 크게 성행했던 도자. 청자나 백자가 지닌 정갈하고 단아한 아름다움과 달리, 독특한 조형미로 투박하면서도 대담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멋을 지녔다. 이 때문에 청자 백자보다 현대적인 감각에 더 잘 맞는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윤 작가는 최순우 전 국립박물관장(1916∼1984)이 생전에 “물속에 잠긴 달을 길어 올릴 만한 기량을 가진 작가”라며 급월당이란 호를 지어준 것으로 유명하다. 얽매이지도 과장스럽지도 않은 그의 작품 세계는 서구권에서도 각광을 받아왔다. 이번 전시엔 급월당은 물론 변승훈과 김상기 김문호 이형석 등 그의 문하라 할 수 있는 작가들이 함께 참여해 작품 90여 점을 선보인다. 재단은 “다섯 작가의 동인전은 분청사기의 전통 양식과 현대 미적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31일까지. 02-736-102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예술 공항(Art Port).’ 18일 개장하는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은 최고의 문화공간을 꿈꾸며 ‘아트포트 프로젝트’에 약 46억 원을 투입했다. 지니 서, 율리우스 포프 등 국내외 유명작가 18명의 작품이 승객들을 맞이한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역시 ‘프랑스 미술계의 스타’ 그자비에 베양(55·사진)의 ‘그레이트 모빌’이다. 3층 출국장에 설치된 높이 18.5m의 작품은 모른 척 지나치기도 힘들다. 11일 개장 기념 기자회견에 맞춰 내한한 베양은 “인천공항과 같은 국제적 공간에서 수많은 사람이 내 작품과 조우하는 건 작가에게도 큰 의미를 지닌다”고 말했다. ―‘그레이트 모빌’에 가장 주력한 점은…. “겸손과 균형이다. 대형 프로젝트지만 여긴 미술관이 아니다. 시각적으로 눈에 띄어도 소박해야 한다고 봤다. 큰 모빌이지만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전달하려 했다. 승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되 압도하길 바라진 않는다.” ―작품이 지닌 뜻은 뭔가. “모빌은 물리적 법칙을 따라 움직인다. 본질은 같아도 계속 움직이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마치 자연 풍경이나 낮과 밤처럼. 공항에 오는 승객과도 닮았다. 동일한 인물이지만 다른 상황과 환경으로 이동하지 않나.” ―설치 장소가 공항이란 점을 많이 의식한 것 같다. “맞다. 공항은 사람들이 24시간 움직이는 곳이다. 21세기를 상징하는 형이상학적 공간이랄까. 내 작품에서도 시간과 이동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가볍게는, 내 작품이 승객들이 거대한 공항에서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도와주면 좋겠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1917년 그가 한 거라곤 별게 없었다. 뉴욕 한 상점에서 산 소변기에 ‘R. Mutt’란 서명을 남겼을 뿐. 하지만 후대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미술 작품”(2004년 영국예술협회)으로 꼽았다. 그 마르셀 뒤샹(1887∼1968)의 ‘샘’을 올해 국내에서 만난다. 국립현대미술관(관장 바르토메우 마리)이 10일 서울 종로구 서울관에서 ‘2018 전시 라인업’을 공개했다. ‘완성도, 전문성, 그리고 역사적 깊이’를 올해의 목표로 삼은 미술관은 뒤샹을 비롯해 김중업, 이성자, 윤형근, 아크람 자타리 등 다양한 국내외 거장의 향취에 흠뻑 젖을 기회를 제공한다.○ 서울관-미래를 내다보는 상상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과 공동 주최하는 ‘마르셀 뒤샹’전은 올해 12월 마지막 전시로 예정돼 있다. ‘샘’과 함께 ‘레디메이드’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 등 관련 작품 약 110점을 선보인다. 뒤샹 전으로는 국내 역대 최대 규모. 이보다 앞서 5월엔 레바논 출신 세계적 사진작가 ‘아크람 자타리(52)’ 개인전이 관객을 찾아간다. 스페인 바르셀로나현대미술관 공동 주최. 마리 관장은 “특히 1997년 ‘아랍이미지재단’의 공동 설립자인 자타리는 재단이 축적한 예술가들의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한 작업도 공개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11월에는 2014년 세상을 떠난 독일 영화감독이자 미디어 아티스트 ‘하룬 파로키’ 전도 예정돼 있다. 한여름 8월엔 한국 단색화를 대표하는 화가 ‘윤형근’(1928∼2007) 전이 열린다. 사후 미공개 작품을 포함한 작품 60여 점이 소개된다. 유족들이 처음 공개하는 다양한 사료를 통해 장인인 김환기(1913∼1974)와의 관계도 조명한다. 연극 무용 등과 연계해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2018 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과 1960년대 미국 뉴욕 예술가들과 벨 전화연구소가 설립한 비영리 예술단체 ‘이에이티(E.A.T.)’를 조명하는 ‘E.A.T.: 예술과 과학기술의 실험’ 등도 눈여겨볼 만하다.○ 과천관-한국 미술을 관통하는 내러티브 과천관은 올해 국내 거장을 소개하는 자리가 많다. 먼저 3월엔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이성자(1918∼2009) 회고전이 마련된다. ‘이성자: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은 추상예술의 대가로 꼽히는 그의 작품 세계를 총망라한다. 마리 관장은 “한국의 대표적 개념·설치미술가 박이소(1957∼2004)를 조명하는 ‘박이소: 기록과 기억’(7월)과 국내 1세대 현대건축가 김중업(1922∼1988)을 회고하는 전시 ‘김중업’(8월)도 놓치면 아쉽다”고 추천했다. 미술관 소장품으로 구성하는 특별전도 2차례 열린다. 국내 작가의 뉴미디어 소장품을 전시하는 ‘소장품 특별전: 동시적 순간’(2월)과 지난해 ‘균열Ⅰ’에 이어 김환기 유영국 백남준의 작품을 보여줄 ‘소장품 특별전: 균열Ⅱ’(9월)가 관객을 기다린다. 한편 덕수궁관에서는 ‘내가 사랑한 미술관, 근대의 걸작’(5월)과 ‘제국의 황혼, 근대의 여명: 근대전환기 궁중회화’(11월)가 예정돼 있다. 마리 관장은 이날 간담회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은 2016년 관람객 221만 명에서 지난해 284만 명으로 크게 늘어나는 성과를 이뤘다”며 “미술관 운영에서 3년은 짧은 시간이다. 진화하고 발전하는 과정에 있는 만큼 재임하고 싶다”고 말했다. 2015년에 취임한 마리 관장은 올해가 임기 마지막 해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고향 제주에서 히말라야까지.’ 한국사진학회장인 양종훈 상명대 교수가 제주 제주시 김만덕기념관에서 ‘포토옴니버스’전을 개최한다. 늘 발로 뛰며 세상을 누비는 ‘행동하는 사진가’인 양 교수는 이번 전시 역시 에이즈로 고통받는 아프리카부터 폭압에 신음하는 동티모르 등 쉽게 접하기 힘든 세계의 현장 곳곳을 카메라에 담아 왔다. 특히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제주 해녀’는 동향의 애정이 듬뿍 묻어난다. 척박한 작업 환경에도 묵묵히 삶을 꾸려온 강인한 여성의 질감이 잘 살아 있다. 소설가인 박범신 명지대 교수는 “그의 사진 세계는 밝고 천진하고 역동적이면서도 고통 너머의 희망을 보여 준다”고 평했다. 양 교수는 2007년 동아일보가 주최한 동아미술제에서 시각장애인과 함께한 ‘마음으로 보는 세상’이 전시기획부문에 당선됐을 정도로 세상의 그늘진 곳을 조명하는 데 줄곧 힘써 왔다. 양 교수는 “개선할 수 있는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건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의무이자 특권”이라며 “병들고 약하고 소외된 이들이 자신에게 손짓한다는 믿음을 언제나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음 달 25일까지. 064-759-609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전진과 창작을 위해서 기성관념이나 생활 주변의 여러 가지 현실을 부정하는 일이 있더라도 우리들의 의식 속에 깃들어 있는 자국과 그림자는 결코 지울 수 없을 것이다. … 전통이란 말 속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는 뜻도 포함돼 있다.” 우성 김종영(又誠 金鍾瑛·1915∼1982)이 1980년 국립현대미술관 도록에 썼던 ‘자서(自書)’의 일부분이다. 이런 글은 다소 의외다. ‘현대 추상조각의 선구자’로 불리는 그가 전통을 중시 여겼다니.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리는 전시 ‘김종영, 붓으로 조각하다’는 이런 궁금증에 대한 실마리를 낙낙하게 제공하는 자리다. 경남 창원에서 태어난 우성은 ‘영남 사림의 영수’ 김일손(1464∼1498)의 7대손이다. 동요 ‘고향의 봄’에 나오는 “울긋불긋 꽃 대궐”이 그의 생가를 일컫는다고 한다. 명문가답게 여섯 살 때부터 시(詩)·서(書)·화(畵)를 자연스레 접하고 배웠다. 1932년 동아일보 주최 ‘제3회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람회’에서 서예작품으로 장원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를 공동 주최한 김종영미술관의 박춘호 학예실장은 “당시 겨우 17세인 학생이 중국 당나라 서예가 안진경(709∼785)의 서체를 구현하자 심사위원들이 현장에서 다시 써보라고 했을 정도”라고 전했다. 그런 우성인지라 ‘전통과 현대의 일치’는 자연스레 그의 예술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가 됐다. 20세기 초 국내 미술계는 서양 문물에 경도돼 한국과 동양미술을 격하하는 분위기가 컸다. 하지만 양쪽 모두 체득한 우성은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을 지닐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조각에서도 서구 풍조를 객관적으로 수용하려 했다. 이번 전시는 우성의 예술세계가 글씨에서 그림, 그리고 조각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우성이 고교 때 수학여행을 갔다는 금강산을 담은 우리의 대표적 전통미술작품으로 겸재 정선(謙齋 鄭敾)의 ‘만폭동도(萬瀑洞圖)’가 있다. 실제로 이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우성의 글씨와 수채화를 먼저 감상하자. 그런 뒤 이를 추상적으로 표현한 드로잉을 거쳐 조각작품 ‘74-5’나 ‘75-4’ 등을 마주하면 한 예술가의 시간여행에 동행한 쾌감이 몰려온다. 특히 추사 김정희(1786∼1856)를 유독 존경했다는 우성의 작품들을 살펴보는 즐거움도 녹록지 않다. 이번 전시에선 우성이 1967년 썼다는 글씨 ‘판천지지미 석만물지리(判天地之美 析萬物之理)’도 만날 수 있다. 장자(莊子)의 ‘천하’편에 나오는 “하늘과 땅의 아름다움을 판단하고, 세상 만물의 이치를 분석한다”는 글귀다. 우성의 예술관을 적확하게 짚어준다. 박 학예실장은 “김종영 선생은 초기엔 작품에 ‘각인(刻人)’ ‘각도인(刻道人)’으로 서명을 남기다가 후기엔 ‘불각도인(不刻道人)’으로 바꿨다”며 “인공적인 아름다움을 배제하고 끝없이 예술의 정수(精髓)를 추구했던 그의 작품세계는 이런 동양적 가치관과 깊은 연을 맺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음 달 4일까지. 02-580-130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세계 미술계에 한류 붐을 일으켰던 ‘단색화’는 앞으로 어디로 나아갈까. 서울 종로구 ‘리안갤러리 서울’에서 5일 시작된 전시 ‘한국의 후기 단색화’는 어쩌면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수도 있겠다. 단색화 열풍의 바통을 이어받을 차세대 주자들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날 기회이기 때문이다. 실은 이번 참여 작가들에게 차세대란 수식어는 꽤나 어색할지도 모르겠다. 김근태 김이수 김춘수 김택상 남춘모 법관 이배 이진우 장승택 전영희 천광엽 등 11명은 짧아도 10년 이상, 길게는 1970년대부터 꾸준히 단색화 작업을 해온 미술가들. 기획을 맡은 윤진섭 전 국제미술평론가협회 부회장은 “김환기(1913∼1974) 이우환(82) 등 전기 단색화 작가들의 제자 세대로 1970, 80년대 한국 미술 현장에서 모더니즘 미술을 직접 체험했던 작가들을 일컫는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후기 단색화’전을 윤 전 부회장이 기획했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그는 한국 단색화를 2000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영문판 도록에서 ‘코리안 모노크롬(Korean Monochrome)’이 아니라 ‘Dansaekhwa’로 처음 명명한 평론가다.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려 화제를 모았던 ‘한국의 단색화’ 전도 선보였다. 윤 전 부회장은 “후기 단색화 작가들은 최근의 퇴조를 만회할 만한 경쟁력을 충분히 갖췄다는 게 미술계의 지배적 견해”라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서 만나는 작품 21점은 모두 인상 깊다. 하나로 묶어 단정 짓긴 어렵지만, 독자적인 재료와 실험을 통해 작품을 ‘의식의 표현 수단’으로 삼는 성향을 보인다. 천연 재료인 숯과 먹 등을 즐겨 쓰는 이배 작가는 특출한 동양적 감각으로 국내외의 주목을 받고 있다. 김택상 작가는 물에 최소한의 안료만 섞어 표현하는 ‘침전기법’을 통해 오묘한 자연주의를 추구한다. 서울 전시는 다음 달 24일까지. 3월 8일부터는 대구 중구 리안갤러리에서 순회 전시를 가질 예정이다. 02-730-2243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늦은 밤 TV를 틀면 가끔 기시감이 찾아온다. 별건 아니다. 채널이 많아 같은 영화나 예능 프로그램을 수십 번씩 마주해서다. 보통은 리모컨을 누른다. 그런데 꾸역꾸역 보게 되는 작품이 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할리우드 첩보스릴러 ‘본 시리즈’는 꼭 넋을 놓는다. 희한한 건, 볼 때마다 새로운 장면을 목도한다. 몹쓸 기억력. 며칠 전 1편 ‘본 아이덴티티’가 그랬다. 과거를 잊어버린 제이슨 본(맷 데이먼). 어렵사리 자기 집을 찾아내 벨을 눌렀다. 빈집인 건 당연지사. 옆에 있던 마리(프랑카 포텐테)가 이런 농을 던진다. “You are not here(당신은 여기 없네요).” 깜짝 놀랐다. 실은 똑같은 말을 해줬던 스님이 있었다. 일명 ‘저잣거리 스님’으로 불리는 법현 스님이다. 지난해 선원을 찾았을 때, 환하게 웃으며 이처럼 알쏭달쏭한 말을 던졌다. 솔직히 형이상학에 약하지만, 당시 말씀은 귀에 쏙 들어왔다. “기껏 찾아왔더니, 없다 그러니까 이상하죠? 사람이 그런 존재입니다. 육신이 왔다고 함께 있는 게 아니죠. 이렇게 인연을 맺었지만, 아직 서로 잘 모르잖아요. 본질은 자신을 둘러싼 다양한 조각들이 모여서 이뤄집니다. 그걸 조금씩 알아가며 존재의 가치도 올라가죠. 전 지금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은 겁니다.” 어디에 머무르는지로 깨닫는 존재의 가치라…. 그런 뜻이라면, 법현 스님만큼 독특한 존재감을 지닌 인물도 흔하지 않다. 스님이 2005년 연 대한불교태고종 열린선원은 서울 은평구 역촌중앙시장에 있다. 50년도 넘은 재래시장은 딱 봐도 세월의 ‘짠내’가 시큼하다. 요즘 서울에선 희귀한 지물포나 방앗간에 묻혀 찾기도 힘들다. 심지어 바로 옆에 교회도 있다. “처음엔 만류도 컸죠. 세상에서 제일 시끌벅적한 곳에서 불도를 닦을 수 있겠느냐고요. 하지만 종교가 뭡니까. 사부대중에게 법을 전해야지요. 그렇다면 시장은 최고의 포교 터죠. 교회와도 사이가 무척 좋습니다. 해마다 12월엔 ‘성탄절 축하’ 현수막도 내거는 걸요. 껄껄.” 물론 자기 자리를 아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청년들은 대다수가 앞길을 고민한다. 법현 스님도 엇비슷했다. 대학 때부터 출가를 고민했지만 가족이 걸렸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살림. 장남은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도저히 부모님을 저버릴 순 없었습니다. 그런데 태고종은 결혼도 봉양도 가능하거든요. 요즘 교수들을 만나면 ‘학생들 자존감이 떨어져 있어 걱정’이란 얘길 합디다. 그럴 땐 짐짓 꾸짖습니다. ‘당신부터 정신 차리시오. 선생이 긍지를 지녀야 제자도 힘을 받지’라고. 방법은 찾으면 나옵니다. 그럴 맘의 자세가 되어 있는가가 문제예요.” 삶은 참 까다롭다. 지금 서 있는 인생도 가끔 뒤통수를 친다. 열심히 하루를 살아가도 우리는 여기에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땐 방법이 없다. 주위를 둘러보는 수밖에.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들이 있을 것이다./이런 때도 저런 때도 그저 따땃이 해라./더구나 추운 때는 따슨 것이 제일이여./찬바람 맞고 다니다가도/바람벽에 볕 들먼 좋지 않드냐?’(법현 스님의 책 ‘그래도, 가끔’에서) 그래, 결국 옷깃을 여미는 건 마음먹기에 달렸다. 우리가 어디에 서 있건 간에. 둘러보면 분명 손잡아 줄 이가 있다. 그렇게 한발씩 내디뎌야 한다. 또 한 해가 시작됐다.정양환 문화부 차장 ray@donga.com}
“왜 이렇게 공부를 많이 하냐고요? 산중에서 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시간이 남아돌아요, 하하.” 지난해 12월 29일 전화 통화한 자현 스님(47)은 참 유쾌했다. 이미 고려대 철학과와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동국대 미술사학과·역사교육과 박사인 그는 주위에서 ‘사(四)박사’로 불린다. 그뿐인가. 현재 동국대 미술학과는 수료, 국어교육과는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조만간 ‘육(六)박사’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 그가 2015년 공부 노하우를 담은 책 ‘스님의 공부법’에 이어 지난해 말 ‘스님의 논문법’(불광출판사)까지 내놓은 건 자연스러워 보인다. “에이, 그렇지도 않아요. 실은 전 머리 되게 나쁩니다. 초등학교 때 ‘가’도 많았고, 돌아서면 까먹을 정도로 기억력도 떨어져요. 그래서 더 이런 책을 쓸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타고난 능력을 지닌 사람에게야 노하우가 왜 필요하겠어요. 둔재지만 공부에서 성과를 내고 싶은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공부도 잘하고 논문도 잘 쓰는 필살기란 뭘까. 스님은 ‘초식’보다 ‘정수’를 깨치는 게 중요하다고 짚었다. 예를 들어, 대학원생이 졸업논문을 써야 한다고 하자. 그럼 일단 자신이 몸담은 조직의 시스템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전공과 학과가 요구하는 것이 뭔지, 관련 학회에선 어떤 논문들이 주목받는지를 알아야 한다. 전체적 흐름을 짚지 않고서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선 좋은 결과물을 내놓기 힘들다. “공부도 마찬가지죠. 예를 들면, 대학수학능력시험도 당대의 유행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걸 잘 모르면 낭패 보기 십상이죠.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목적의식’입니다. 이 공부를 통해서 뭘 얻고 싶은 건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해요. 그냥 공무원시험 합격이 목표여선 안 됩니다. 그럼 어찌어찌 공무원이 되더라도 행복하질 않아요. 자기 인생에서 이 공부가 왜 필요한지를 깨달아야 학습에 재미가 생깁니다. 그래야 공부도 ‘취미’가 되는 거예요.” 스님이 보기엔 요즘 채널A 예능 ‘나만 믿고 따라와, 도시어부’를 통해 다시 열풍이 불고 있는 낚시는 공부와 무척 닮았다. 스님은 “즐기는 사람은 고기를 낚는 것과 상관없이 밤새 앉아 있어도 행복할 수 있지만, 취미가 없는 이는 30분도 고통스럽다”며 “기왕 공부를 할 거면 자신이 가장 즐길 수 있는 방식을 찾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조언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새해면 올해의 목표나 소망을 품는다. 물론 ‘누구나’는 아니다. 하루하루 버티기 힘겹거나 절망만 가득한 이도 있을 테니까. 그래도 1월 1일. 저무는 해보다 솟아오르는 태양을 떠올리는 게 인지상정이다. 때론 새로운 시작이 또 다른 상실을 맞닥뜨리는 순간이 될지도 모른다. 2008년 영화 ‘걸어도 걸어도’를 연출한 일본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동명 소설에서 그런 쓰라림이 찾아온 시간을 묘사했다. 해마다 현관에 새해맞이 꽃꽂이를 해놓던 어머니. 화사해서 보기 좋아도, 다들 무덤덤하게 그러려니 하며 지나쳐 왔다. 어느 연말, 갑작스레 어머니가 쓰러졌다. 가족은 그 꽃을 보는 마음이 휑해질 수밖에 없다. “정초가 시작돼 현관 앞을 꾸몄던 꽃들이 시들어도, 이때만큼은 좀처럼 버릴 수가 없었다. 그것이 결국 어머니의 마지막 꽃꽂이가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어렴풋이 느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수고를 고맙게 생각하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12월이나 1월이나 바람은 차다. 때늦은 후회도 언제든 밀려온다. 2018년 신년 계획도 좋지만, 일상의 작은 온기야말로 올해는 잘 챙기시길.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종교계 지도자들이 2018년을 맞아 신년사를 발표했다. 대한불교조계종의 설정 총무원장은 ‘실천하는 삶’을 강조했다. 설정 스님은 “천사불여일행(千思不如一行)이라고 깊이 생각하고 다짐하더라도 한 번 실천하는 것보다 못하다”며 “사회를 병들게 하는 물질 만능과 이기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간절한 한마음으로 실천하면 지금의 어려움을 능히 이겨낼 수 있다”고 덕담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염수정 추기경은 “끊임없이 발전과 성숙을 위해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나가야 한다”며 “우리에게 필요한 덕은 어제와 다른 오늘을 위해 희망을 갖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인 엄기호 목사는 올해의 메시지로 ‘자유와 회복’을 선택했다. 엄 목사는 “지난해가 정치적 혼란과 혼동의 정국이었다면 이제는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고 새로운 소망의 미래를 열어나가야 할 시점”이라고 밝혔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이럴 때가 제일 난감하다. 아마도 이 책은 출판사 입장에선 ‘가장 적절한 시기’에 출간했으리라. 14일 스타워즈 8편에 해당하는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가 국내 개봉했으니 세간의 주목은 떼어 놓은 당상. 어라, 그런데 28일 기준 관객 수가 100만 명도 되질 않는다고? 아, 이것 참. 띠지에 둘러놓은 ‘워싱턴포스트 No.1 베스트셀러’란 문구가 왠지 휑하다. 저자도 얘기했다. “인류는 크게 세 부류로 나뉠 수 있다. 스타워즈를 사랑하는 사람, 스타워즈를 좋아하는 사람, 스타워즈를 사랑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라고. 최신작 관객 수가 스타워즈에 대한 애정을 측정하는 절대적 기준이야 되지 않겠지만. 이 책을 집어 들 독자들이 누구일지는 뻔해 보인다. 그래도 하나는 분명하게 얘기할 수 있다. ‘스타워즈’엔 별 신경 안 썼거나 갈수록 실망했던 이라 할지라도 다시 한 번 ‘관심’을 갖게 될 거라고. 어쩌면 “그래, 그래도 스타워즈잖아”라며 영화관을 찾을지도 모르겠다. 또 낙담할지언정. 그만큼 이 책은 스타워즈가 어떤 매력을 지닌 영화인지, 왜 한국을 포함한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 세계가 열광하는지를 훑었다. 뜨겁고 깊은 애정을 갖고. 흥미로운 건 스타워즈 ‘덕후’인 저자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법학자란 점이다.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로버트 웜슬리 대학 교수인 그는 2009∼2012년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규제정보국 책임자를 맡았던 인물이다. 국내에선 2009년 베스트셀러가 됐던 ‘넛지’의 공저자로도 이름을 떨쳤다. ‘팔꿈치로 슬쩍 찌르다’라는 뜻을 가진 ‘넛지(nudge)’는 ‘타인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을 지칭하는 경제학 용어다. 거창하게 말하면 ‘자유주의적 개입주의’의 바탕이 되는 개념이란다. 이런 저자 소개만 들으면 책이 무겁지 않을까 걱정할 수 있겠다. 뭐, 솔직히 말하면 뒷부분엔 그런 대목도 없지 않다. 스타워즈 얘기라고 꼬셔놓고 결국엔 자신의 법철학을 설파하는 ‘선생님’ 본색을 드러내곤 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그렇게 책장 넘기는 속도가 느려지지 않는다. 너무 찬사 일색이라 살짝 배알이 꼴릴 때도 있지만, 가벼운 맘으로 영화 속 장면들을 떠올리며 흐뭇하게 읽을 만하다. 안타깝지만 이런 흐름은 양날의 검인 측면도 분명 존재한다. 어중간하게 문지방에 올라서 있는 모양새라고나 할까. 확 문을 젖히고 들어가지 않아 깊이 있는 깨달음을 건질 기회가 적다. 게다가 너무 여러 주제를 이것저것 다룬다. ‘겉핥기’로 여겨질 정도로. 물론 이건 전략적 선택일 가능성이 높다. 영화 ‘스타워즈’를 돌이켜보라. 근사하긴 하나 걸작 예술작품은 아니지 않나. 다소 다양한 해석이 나오긴 해도, 스타워즈는 대사도 줄거리도 알기 쉽고 어렵지 않아 더 애정이 간다. 그럼 그걸 두고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는 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어리석은 짓이다. 그런 뜻에서 책 ‘스타워즈로…’는 과하지 않고 딱 적당하다. 이미 포스가 함께하는데 뭘 더 바라겠나. 원제 ‘The World according to Star Wars’(2016년).정양환 기자 ray@donga.com}
1970, 80년대 연극의 메카이자 창작극의 산실이던 세실극장이 경영난으로 내년 1월 8일 개관 42년 만에 문을 닫는다. 건축가 김중업의 작품 중 하나인 세실극장은 1976년 320석 규모로 개관해 이듬해부터 연극협회가 연극인회관으로 사용하며 1∼5회 대한민국 연극제를 개최한 유서 깊은 곳이다. 2013년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김민섭 세실극장 극장장은 28일 “극장을 운영하며 월세 1300만 원을 포함해 매달 2400만 원의 운영비가 들었다”며 “1년에 10여 편씩 365일 공연을 올려도 매달 1000만 원의 적자를 메우기 어려웠고, 결국 내년 1월 7일 신체 연극 ‘안네 프랑크’ 공연을 끝으로 문을 닫기로 했다”고 밝혔다. 세실극장 측이 경영난으로 폐관 위기에 처하자 서울연극협회와 아시테지 한국본부가 나섰다. 지난달 서울연극협회 방지영 부회장과 아시테지 한국본부 김숙희 이사장이 세실극장 건물주인 대한성공회 측을 찾아 극장 운영을 이어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월세 금액을 놓고 성공회 측과 팽팽한 줄다리기를 벌이다 27일 성공회 측으로부터 ‘세실극장 공간을 성공회 사무실로 활용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방 부회장은 “세실극장이 한국 연극사에서 지닌 의미와 상징성을 고려해 서울연극협회와 아시테지 한국본부가 세실극장 공동 운영에 나서기로 뜻을 모았다”며 “서울연극협회와 아시테지 한국본부는 성공회 측에 월 1300만 원인 월세를 1000만 원으로 조정해 달라고 요구했고, 성공회는 운영위원회를 연 뒤 이를 수용하기 어렵다는 뜻을 전해왔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대한성공회 측은 “성공회 역시 세실극장의 역사나 의미를 가치 있게 여기고 있다”며 “성공회가 세실극장을 폐관하려는 게 아니다. 현재 임대차 계약을 맺고 공연장을 운영하는 분이 경영이 어려워 더 이상 계약을 연장하지 못하겠다고 통보해왔다”고 밝혔다. 세실극장의 경영난은 과거에도 있었다. 1981년부터 1997년까지 제작그룹 마당이 인수해 한국 창착극의 산실로 자리 잡았던 세실극장은 외환위기가 닥친 1998년 1년간 휴관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건물주인 성공회 측이 사무실로 개축하려던 것을 우여곡절 끝에 1999년 4월 연출가 하상길과 극단 로뎀이 인수해 운영했다. 당시 국내 최초로 네이밍 스폰서십을 도입해 제일화재해상보험의 후원을 받아 극장 이름이 제일화재 세실극장으로 바뀌었고 2010년 한화손해보험이 제일화재를 인수해 한화손보 세실극장이 됐다. 2012년 4월 기업 후원마저도 끊기며 다시 세실극장으로 명칭을 바꿔 홀로서기에 나섰지만, 결국 경영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폐관하게 됐다. 유서 깊은 연극 공연장의 폐관은 최근 몇 년 새 두드러진다. 특히 2015년은 연극인들에게 ‘상실의 시대’로 통한다. 2015년 국내 최초의 민간 소극장인 ‘삼일로창고극장’이 경영난을 이유로 폐관했다. 이후 서울시가 삼일로창고극장이 세 들어 있던 건물을 임차해 재개관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내년 재개관을 목표로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이다. 2015년 4월 28년간 대학로를 지켜온 ‘대학로극장’이 폐관한 데 이어 ‘품바’로 유명한 상상아트홀(1990년 개관)과 김동수 플레이하우스(2000년)도 폐관됐다. 김정은 kimje@donga.com·정양환 기자}
해가 중천에 떴건만 매서운 한기는 멈출 줄 몰랐다. 하지만 불전을 감도는 향내는 ‘나무아미타불’을 타고 갈수록 진해졌다. 붉고 푸른 지화(紙花)도 극락왕생을 축원하며 향기를 머금은 걸까. 23일 원적(세수 90세, 법랍 77세)한 직지사 조실 녹원(綠園) 스님이 떠나는 날은 시리도록 맑았다. 27일 오전 경북 김천시 직지사에서 열린 스님의 영결식은 새벽부터 사부대중 5000여 명이 몰려들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날 장례는 제24대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1984∼86년)을 지낸 스님을 위해 조계종 최고 의례인 종단장으로 봉행됐다. 조계종이 종단장을 치르는 것은 2014년 해인사에서 열렸던 조계종 전 종정 법전 스님의 종단장 이래 3년 만이다. 장의위원장을 맡은 총무원장 설정 스님은 영결사에서 “녹원 대종사는 부처의 종자인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이 불사이니 중생을 위한 일에는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하셨다”며 “조계종 역사의 산증인으로서 가는 곳마다 연꽃이 만개하는 맑고 향기로운 일생이셨다”라고 추모했다. 원로회의 의장인 세민 스님도 “종단이 혼란에 빠졌을 때 총무원장을 맡아 난제를 해결하고 통합의 소중한 가치를 깨닫게 했으며, 종회의장으로 법령을 정비해 불교 중흥의 기틀을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행자 시절 녹원 스님을 모셨던 교구본사주지협의회 회장인 호성 스님은 옛 추억을 떠올렸다. 경북 의성군 고운사 주지인 스님은 “38년 전 공양을 지어 올릴 때마다 ‘참으로 맛있다’며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며 “세간, 출세간을 구분치 않고 한없는 자비로 세상을 대하고 거리낌이 없었던 큰스님이 가시는 길에 이렇게 마지막 공양을 올리게 돼 슬프고도 슬프다”고 했다. 2시간 남짓 진행된 영결식이 끝난 직후엔 식장에서 산길로 700m 정도 떨어진 연화대에서 다비식이 거행됐다. 오색으로 펼쳐진 수백 기의 만장(輓章)으로 가득 찬 길을 따라 옮겨진 녹원 스님의 법구는 1000여 명이 읊는 경소리와 함께 불이 붙여졌다. 이날 다비식은 2006년 최규하, 2009년 노무현, 2015년 김영삼 전 대통령 장례에서 염을 했던 ‘연화회’에서 맡았다. 이날 영결식에는 청와대 불자회장을 맡고 있는 하승창 대통령사회혁신수석비서관, 이철우 의원, 김관용 경북도지사, 박보생 김천시장, 김갑수 문화체육관광부 종무실장 등 정관계 인사도 다수 참여했다. 녹원 스님의 유발상자(속가 제자)이자 국회 정각회장인 주호영 의원은 줄곧 빈소를 지켰다. 천태종 총무원장인 춘광 스님과 관음종 총무원장 홍파 스님, 태고종 총무원장 편백운 스님도 참석해 분향했다. 다비식을 마친 녹원 대종사의 초재는 29일, 7재는 내년 2월 9일 직지사에서 열린다.김천=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이참에 앞으로도 쭉 안 했으면 좋겠네.” 결국 무산됐다. 지상파방송 연말행사인 ‘KBS 연예대상’ 얘기다. 1987년 시작했으니, 나름 30년 역사를 지녔건만. 끝내 장기 파업 여파를 피해가지 못했다. 의외로 반응은 잘됐단 분위기다. 위 인터넷 댓글은 양반이다. ‘연기대상 가요대상도 폐지해라’, ‘추억의 영화나 틀어 달라’. 공들인 제작진 노력도 무심하게. 방송가 시상식은 언젠가부터 천덕꾸러기가 됐다. 좋은 연기, 훌륭한 무대를 상찬하자는 자리가 어쩌다 이런 대접을. 한 드라마 PD는 “누워서 침 뱉기지만 방송국이 자초한 측면이 크다”며 “여러 차례 지적받았던 문제점들이 개선되지 않아 시청자가 실망한 것 같다”고 한탄했다. 뭐가 문제였을까. 첫째, 상의 지나친 ‘남발’이다. 지난해 MBC 연기대상 리스트를 살펴보자. 연기상이 부문별로 특별기획 연속극 미니시리즈 3가지나 된다. 또 이걸 각각 최우수연기상과 우수연기상, 황금연기상으로 나눠 놓았다. 다른 방송사도 거기서 거기다. KBS는 장편 중편 단편에 미니시리즈와 일일극까지 있다. SBS는 판타지와 로맨틱코미디, 장르드라마가 공존한다. 판타지가 장르에 속하지 않는다는 걸 이때 처음 알았다. 공동수상은 왜 이리 많은지. 혼자 받는 게 낯설어 보일 지경이다. 지난해 SBS 연기대상은 심지어 10명이 떼거리로 받는 ‘뉴스타상’ 덕에 모두 40명에게 골고루 상이 돌아갔다. 이 정도면 연기자로선 안 받는 게 서운하겠다. 한 방송작가는 “방송국과 연예인 소속사가 ‘수상’을 전제로 스케줄을 조정하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귀띔했다. 두 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가 받을지 뻔하니 김이 샌다. 웬만큼 ‘급’이 되는 연예인은 뭔 상일지는 몰라도 분명 스테이지에 올라간다. 실제로 과거 한 여배우가 불참하자 ‘대상이 아닌 걸 알고’라는 뒷말이 무성했다. 한 대중문화평론가는 “연기 평가란 주관적 요소가 강해 원래 시상식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며 “하지만 한국은 연기 외적인 흥행이나 인기도를 강하게 반영해 ‘사내 포상’이라 부르는 게 맞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본질적인 의문. 시청자는 비난하고, 내부에선 자성하는 시상식이 왜 지속되는 걸까. 해답은 방영 다음 날 시청률을 보면 나온다. 지난해 KBS 연기대상은 1부는 전국 기준 15.2%(닐슨코리아)였다. 종편과 케이블방송의 약진에 요즘 지상파 드라마나 예능도 한 자릿수 시청률이 허다한데. 다른 시상식 역시 10% 안팎의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혹자는 ‘전파 낭비’라지만 방송국으로선 이런 ‘땅 짚고 헤엄치기’가 없죠. 회당 몇천만 원 받는 스타 수십 명을 거의 푼돈으로 3∼4시간씩 출연시킬 기회가 흔합니까. 시청률이 보장되니 광고나 협찬도 수월한데. 몇 해 전 논란이 커지니 미국 에미상처럼 통합 시상식을 치르잔 의견이 나온 적 있습니다. 당연히 안 되죠. 3사만 돌아가며 방송해도, 해마다 거둬들이던 수익이 확 깎이는데 누가 반기겠습니까.”(한 연예프로그램 CP) 누리꾼 바람과 달리, KBS 연예대상은 내년에 돌아올 게다. 실은 올해도 방송사마다 연기와 연예, 가요 대상을 치르니 평상시 9분의 8로 줄었을 뿐이다. 일개 방송사가 ‘아시아 최고의 커플 상’을 뽑는 희한한 광경은 또 벌어진다. 우리가 그날 TV 시상식을 보고 있는 한. 정양환 문화부 기자 ray@donga.com}
“아무 일 없이/편안하길 바라지만/풀 수 없는 숙제가 많아/삶은 나를 더욱/설레게 하고/고마움과 놀라움에/눈 뜨게 하고/힘들어도/아름답다/살 만하다/고백하게 하네.” 수녀님은 대뜸 책을 펴들곤 시를 읊었다. 그것도 카랑할 만치 낭랑한 목소리로. 19일 오후 서울 용산구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녀회 내에 있는 성 분도 은혜의 뜰.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이해인 수녀(72)는 “왠지 시린 날씨 탓인지 ‘오늘의 행복’을 읽으며 여러분과 만나고 싶다”며 “언제나 오늘이란 선물에 숨어 있는 행복을 찾으며 살고 있단 말로 근황을 대신하겠다”고 말했다. 이해인 수녀가 산문집 ‘기다리는 행복’(샘터·사진)을 펴냈다. 2008년부터 시작된 암 투병에도 뜨거운 창작 활동을 이어가는 그에게도 산문집은 2011년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 이후 6년 만이다. 이 수녀는 “내년 5월 23일이면 수도서원(修道誓願·수도회에 들어가 수도자로 살 것을 다짐하는 일) 50주년을 맞는다”며 “그간 열심히 수도자로서 삶을 살며 꾸준히 글도 써온 자신에게 축하를 보낸다”고 설명했다. ―수도서원 50주년을 맞는 소회는…. “뭔가 하나의 마침표를 찍고 저녁노을을 바라보는 듯한 뿌듯함이 감돈다. 시작할 때만 해도 막연히 두려웠는데, 여기까지 왔음을 자축하며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저를 키워준 공동체와 독자에게도 고맙다. 젊은 날만 한 열정은 옅어졌지만, 시간이 준 선물인 여유로움이 찾아왔다.” ―이번 책도 그런 마음이 담긴 건가. “맞다. ‘기다리는 행복’은 1979년 썼던 시의 제목이기도 하다. 아무리 힘들어도 초심을 놓지 않으려고 인내했던 세월을 칭찬하고 싶었다. 시와 산문은 물론 법정 스님과 주고받은 편지, 세월호 추모시 등도 실었다. 1968년 첫 서원을 하고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일하던 시절의 일기는 처음 공개한다. 그런데 정리를 하다 보니 너무 많이 담았다. 뭔가를 비우고 가볍게 살아야 하는 세상에 괜히 무거운 책 하나를 내놓아 죄송할 따름이다.” ―건강을 걱정하는 독자들이 많다. “암 투병한 지 9년 됐다. ‘명랑 투병’ 한다고 말했지만 쉽지 않더라. 그래도 눈물 흘리거나 한탄하지 않았다. 아, 한 번 있었다. 2008년 항암치료가 끝난 뒤였다. 피아니스트 신수정 교수가 치료받을 때 덮으라고 준 분홍 타월을 보는데 울음이 터졌다. 이 사물이 고통의 시간을 함께 견뎌줬다고 생각하니 감동스러웠다. 당시 주치의가 보낸 문자메시지는 아직도 기억한다. ‘수녀님, 이 한 몸 크게 수리해서 더 좋은 몸을 받는다고 여기세요’라고. 말이 주는 에너지가 이런 것일까. 아프고 난 뒤 행복과 기쁨이란 말을 더 많이 쓰게 됐다.” ―연말을 맞아 독자에게 전하고픈 얘기가 있다면…. “아픔이 많았던 해였다. 하지만 남 탓만 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자문해 보자. 요즘 북한을 보면 너무 밉지만, 그래도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세상으로 눈을 돌리고 함께해야 한다.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스스로도 글 쓴다는 핑계로 주위에 도움만 받은 건 아닌지 반성한다. 내년엔 좀 더 동료와 이웃을 챙기며 살고 싶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서울에서 멀지 않은 암자에 다녀왔다. 푸른 공기가 시리도록 쨍한 산기슭. 스님과 불자들이 정성을 쏟은 절은 아담한데 정갈했다. 뭣보다 손수 기른 뒷마당 채소가 기막혔다. 강된장을 툭 얹어 싸 먹어봤다. 아삭하다 못해 달달했다. 다 좋았건만. 뒷간은 정이 가질 않았다. 요즘 세상에 ‘푸세식(재래식)’이 웬 말이람. 얼마 되지도 않은 절인데. 왜 굳이 냄새 고약한 아날로그를 고집했을까. 스님께 슬쩍 구시렁거려봤다. 되레 나무람만 돌아왔다. “어허. 이 해우소(解憂所)가 얼마나 귀한 건데. 더럽긴 뭐 더러워. 인분 퇴비로 텃밭을 가꾸니 이토록 싱싱하지. 해우소가 달리 근심을 덜어주는 곳인 게 아냐. 농사지을 걱정도 해결해주는 걸세. 옛 어른들도 그러셨지. 똥이 밥이라고.” 맞다. 세상이 그렇다. 지저분해도 쓸데가 있다. 별것 아니어도 사연이 있다. 그만큼 헛된 일은 왜 없겠나. 억지로 부린 욕심. 줏대 없던 참견과 시비. 뒤죽박죽 뒤섞인 채 또 한 해가 간다. 새벽녘 창밖에 켜켜이 쌓인 상념. 쏴아.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 붙잡지 못한 세월만큼 속절없이 지나간다. 꾸역꾸역.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올해 종교계는 굵직한 현안이 많았다. 2018년 시행을 앞두고 종교인과세가 국민적 관심을 받았고,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교체와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 등 사회 역사적 의미가 깊은 이슈도 많았다. 하지만 어느 하나 순탄한 게 없었다. 종교인과세는 보수 개신교계를 중심으로 정부안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 1년 내내 시끄러웠다. 지난달 기획재정부와 종교계가 ‘종교활동비 비과세’ 등에 합의하며 한숨 돌리는 듯했으나, 다른 직종과의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종교계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개신교계에서는 하반기 명성교회를 둘러싼 논란이 컸다. 이 교회는 개척자인 김삼환 목사가 세습을 거듭 부인해왔음에도 결국 아들 김하나 목사가 담임목사를 맡았다. 게다가 지난해부터 논의가 이어졌던 개신교 연합단체들의 통합 역시 사실상 무산됐다. 올해 개신교로선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95개 논제’를 밝힌 지 500년 되는 뜻깊은 해였으나 분위기가 살지 않았다. 불교계는 8년간 조계종을 이끌었던 자승 총무원장이 임기를 마치고 설정 스님이 새로운 4년을 이끌게 됐다. 과정은 쉽지 않았다. 뜨거운 쟁점이던 직선제 선거는 결국 이뤄지지 않았고, 승려대회 추진과 명진 스님 단식 등으로 시끄러웠다. 지난달 총무원장에 정식으로 취임한 설정 스님은 “대탕평을 통해 불교의 본질을 되살리겠다”는 입장을 거듭 밝히며 희망의 불씨를 되살렸다. 가톨릭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편이었다. 하지만 낙태죄 존폐를 둘러싸고 정부와 미묘한 입장차를 보이며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달 초 시작한 ‘낙태죄 폐지 반대 일반인 100만 명 서명운동’이 내년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책을 덮자마자, 그의 다른 작품을 찾아봤다. 솔직히 소설 ‘3차 면접에서…’를 만나기 전까지 이 작가가 누군지도 몰랐다. 그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단 얘기만 들었을 뿐. 하지만 책을 읽은 뒤, 절로 탄식이 쏟아졌다. 이렇게 굉장한 소설가가 어쩌다가. ‘3차 면접에서…’는 길지 않은 분량인지라 줄거리도 단출하다. 갈수록 취업문이 좁아지는 세상. M은 그간 마흔여덟 번쯤 면접을 봤지만 여전히 백수 신세다. 하지만 드디어 그에게도 서광이 비추나. 떨어질 거란 짐작과 달리 한 제과회사에 합격한다. 곧장 4주간 연수원에 입소한 M. 하지만 그 앞엔 예상치 못한 고비가 기다리고 있다. 이 소설, 희한하다. 자다가 눈을 떴는데 처음 보는 장소에서 깬 기분이 이럴까. 실은 표지에 나오는 ‘문학을 배워본 적 없는 젊은 작가’란 설명에 수긍이 간다. 여타 소설에서 익숙했던 작법이나 묘사가 없다. 때론 거칠다 못해 흐리터분할 정도로. 그런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칭칭 온몸에 감겨오는 뭔가가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게 뭔 줄 아세요? 남들보다 못한 인간으로 도태되는 것? 사람들한테 머저리라고 손가락질당하는 것? 가장 수치스러운 건 말이죠…. 죄를 눈감아주는 거예요. 아무 벌도 내리지 않는 거예요. … 나를 이해하는 거. 그것만큼 견디기 어려운 게 없어요.” 뭣보다 주인공 M의 감정선은 쫓아가는 내내 긴장감이 탁월하다. 롤러코스터가 따로 없다. 막상 거리를 두고 보면 별거 아닌데. 읽는 내내 불안과 우려와 짜증과 낙담이 뒤죽박죽 밀려온다. 그래, 어쩌면 그의 혼란을 ‘비정상’이라 치부하면 그만일지도. 하지만 다들 안다. 누구나 그런 선택을 하진 않지만, 마음 어딘가를 스쳐갔던 악의(惡意)를. 어쩜 우리는 21세기 한국판 ‘이방인’(알베르 카뮈)을 만난 건지도 모르겠다. 박지리 작가는 지난해 가을 31세로 삶과 이별했다. 지금까지 이 작품을 포함해 장편 다섯과 단편 하나를 세상에 내놓았다. 내년 하반기쯤 마지막 유작이 공개될 예정이다. 벌써부터 더 이상 그의 자식들을 만날 수 없다는 게 서글퍼진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불교에서 종단의 역할은 수행자가 수행에 집중하도록 만들어 주는 게 근간입니다. 솔직히 그간 종단이 너무 정치화, 정치집단화됐다는 점을 반성해야 합니다. 사상이나 이념을 초월해 불교의 본질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세간의 신뢰도 회복할 수 있습니다.” 13일 서울 종로구의 한 식당에서 만난 설정 스님(75)은 차분하지만 굳은 결기를 내비쳤다. 지난달 대한불교조계종 제35대 총무원장으로 취임한 뒤 처음 갖는 언론 간담회에서 유독 수행과 화합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불교는 모름지기 깨달음을 향해 정진할 뿐 다른 것에 눈 돌려선 안 되며 자비심을 갖고 서로 반목하고 질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설정 총무원장은 이를 위해 “총무원을 비롯한 모든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자리이타(自利利他)’를 끝없이 되새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리란 모든 열정을 쏟아 철두철미하게 자기 단련을 하는 것이며 이타는 부처님 가르침을 지키며 양보하는 자세라고 설명했다. “솔직히 이 나이에 선방에서 생활하는 게 훨씬 편하고 좋습니다. 도심 속 총무원에 기거하니 공기도 나쁘고 시끄러워 잠도 잘 못 자요. 하지만 여러 차례 거절하다 결국 선거에 나섰던 건 이런 불편함도 모두 감수하겠다는 결심이 섰기 때문이지요. 지금 불교는 망망대해에서 침몰하는 배와 같은 형국입니다. 하지만 해법은 의외로 쉽습니다. 자신을 내려놓고 수행에 집중하면 타인과 시비가 생길 일이 뭐가 있습니까. 승가(僧伽·부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들)가 승가다우면 모든 일이 해결됩니다.” 설정 총무원장은 특히 현 조계종의 선거제도가 분란의 씨앗이 되고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직선제건 간선제건 선거를 통해 총무원장을 뽑으면서 파벌과 다툼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스님은 “선거가 민주주의적 방식인지는 몰라도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화합과 위계질서를 무너뜨리고, 삼보정재(三寶淨財·사찰의 재산)를 헛되이 쓰며,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시스템은 꼭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물론 악법도 법이니까 무작정 폐지할 순 없습니다. 다양한 경로로 대화하고 설득해야 합니다. 하지만 패거리문화를 양산하는 현 체제보다는 부처님의 뜻을 되살린 ‘만장일치제’를 도입하려는 고민과 연구가 필요합니다. 지금처럼 진흙탕에서 싸우는 모습만 보여서야 누가 불교를 신뢰하겠습니까. 이는 ‘사부대중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는 불교 십중대계(十重大戒)를 지키는 길이기도 합니다.” 최근 설정 총무원장은 무척 분주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난달 16일 지진 피해 지역인 경북 포항시를 방문해 이재민을 찾았고, 다음 날엔 전남 목포시를 찾아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을 만나 위로를 전했다. 스님은 “대중과 함께하며 마음을 나누는 건 불교가 첫 번째로 해야 할 당연한 일”이라며 “편견에 치우치지 않는 진정성을 갖고 종단 안팎의 대화합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마음에 온갖 욕심 버리고/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공양게·供養偈) 한풍(寒風)이 드세던 11일 오후. 시린 손을 호호 불며 찾은 경기 용인시 ‘선재사찰음식문화연구원’에서는 명절 고향집을 찾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바깥마당 처마에 걸렸던 눈은 마저 녹지 못하고 달라붙었건만. 뽀얀 김이 서린 부엌 창가로, 한참 뭔가를 다듬느라 분주한 선재 스님(61)이 보였다. 대한불교조계종 선정 사찰음식 명장 1호. 거창한 이름만큼 선재 스님은 요즘 절밥 하면 떠오르는 ‘아이콘’이지만, 막상 마주하면 수줍은 웃음이 온기를 뿌렸다. “길도 얼었는데 뭐 여까지 오냐”며 타박을 놓다가도 뭐 하나 더 내놓느라 자리에 앉을 새가 없다. 인터뷰하게 제발 오시라고 만류하길 몇 차례. 어라, 스님의 손엔 ‘김치 국물’ 한 사발이 들려 있었다. “이리 추운데 웬 나박김치인가 싶죠? 그런데 겨울철 절에서 제일 중요한 게 이 김치요. 고기와 오신채(五辛菜·마늘 파 달래 부추 무릇)를 금하니 어디서 에너지 얻기가 마땅찮지. 그런데 김치는 발효식품이라 영양이 가득하거든. 엄동설한이 와도 아침에 장독대 가서 꼭 이거 한 사발을 들이켜요. 그럼 하루 종일 속이 편해.” 이게 무슨 조화일까. 의심 가득 받아들었는데 절로 탄성이 터졌다. 무슨 국물이 살아있는 듯 목젖을 타고 꿈틀거린다. 젓갈도 없이 어찌 이런 맛이. 스님은 “오히려 그런 게 안 들어 훨씬 깔끔하고 상쾌하다”고 귀띔했다. 실제 절간 김치는 잣이나 호두, 좁쌀 등으로 담백하게 맛을 낸다. ‘슈퍼 푸드’ 견과류는 김치와 궁합이 의외로 잘 맞는다. 치자가루도 근사하다. 혈액순환에 탁월한 효능을 지닌 치자를 선조들은 고춧가루 대신 썼다. 홍갓도 추천 재료. 나박김치나 동치미에 넣으면 보랏빛 국물이 보기에도 아리땁다. 김치만큼 겨울 사찰음식에 또 중요한 게 있다. 뿌리채소와 해초류다. 예전엔 봄여름에 거둬 말려뒀던 걸 썼지만, 요즘은 식재료 구하기가 어렵지 않다. 이날 스님이 선보인 요리는 ‘파래 연근전’과 ‘버섯 된장 쌈밥’ ‘능이 부침’. 오래 묵힌 된장 간장을 써서 감칠맛을 돋우니 젓가락을 놓을 새가 없다. 긴긴 겨울밤, 후식도 빼놓을 수 없다. 지난달 29일 청와대 국빈만찬에 선보였던 ‘송차(松茶)’와 ‘다식’이 대표적인 요리다. 3년 이상 솔잎을 숙성시킨 송차는 막힌 혈을 풀어주고, 측백나무 열매인 백자인(柏子仁)으로 만든 다식은 면역력 회복에 그만이다. 스님은 “채식주의자인 스리랑카 대통령 일행을 위해 기름진 메인요리의 콜레스테롤을 중화시켜 줄 음식으로 골랐다”며 “양국 정상이 크게 만족했다며 인사를 많이 받았다”고 전했다. “열반경(涅槃經)을 보면 중생들이 고민거리를 털어놓는 장면이 나와요. 그런데 부처님은 엉뚱하게 ‘뭘 먹고 사느냐’고만 물어보시죠. 왜인 줄 아세요? 좋은 음식을 먹어야 심신도 맑아지니까요. 딴 거 없습니다. 건강한 땅에서 키운 제철음식을 먹으면 됩니다. 하나 더,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옛 어른은 콩 심을 때 한 구멍에 세 알을 넣었어요. ‘하나는 벌레, 하나는 새, 하나는 사람’을 위해. 음식엔 인간이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임을 깨닫게 해주는 깊은 성찰이 담겨 있죠. 겨울 사찰음식은 그런 조화를 첫째 덕목으로 칩니다.” 용인=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