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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AI) 챗봇 서비스인 ‘챗GPT’가 원고를 쓰고 네이버의 번역 AI 파파고가 한국어로 옮긴 책이 등장했다. 표지 그림은 이미지 플랫폼 ‘셔터스톡’의 생성형 AI인 셔터스톡AI가 그렸다. 책은 글 생성부터 교열·교정·인쇄까지 단 7일 만에 완성됐다. 출판사 스노우폭스북스는 사람의 기획안을 바탕으로 챗GPT가 쓴 자기계발서를 출간했다고 17일 밝혔다. 오픈AI가 지난해 11월 챗GPT를 출시한 후 국내에서 챗GPT의 책이 나온 건 처음이다. 해외에선 지난달 ‘당신은 어떻게 세계를 지배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챗GPT가 생성한 글을 엮어 정리한 3페이지 분량의 책 ‘챗GPT의 부상’이 출간된 바 있다. 김서진 스노우폭스북스 대표는 “AI의 언어로 독자를 설득할 수 있을지, 외국 서적 출간에 필수 작업이던 번역의 과정은 AI로 완전히 넘어온 걸까 등의 궁금증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이번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했다. 작업 과정은 챗GPT가 ‘함부로 인연을 맺지 마라’ 등의 목차에 어울리는 에세이를 각각 3000자 분량으로 생성하면 이를 파파고를 활용해 번역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책에는 영문 원고와 이를 번역한 한글 원고가 모두 실렸다. 비교적 깔끔한 영어 문장에 비해 한글 번역본의 경우 주어와 서술어가 호응하지 않는 등 일부 어색한 표현이나 비문도 눈에 띈다. 스노우폭스북스는 파파고를 이용해 2시간 동안 영어 원문 135쪽 분량을 모두 번역했다. 출판계 관계자들은 챗GPT가 일부 출판사가 내놓는 ‘짜깁기식 기획서적’ 시장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순 있지만 표절 등 저작권 침해 논란을 비롯해 낮은 완성도 등이 한계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장은수 출판평론가는 “챗GPT는 기존 데이터를 기반으로 문장을 만들기 때문에 표절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며 “글쓰기에 도움을 주는 만큼 장기적으로 창작에 도움이 되겠지만 표절 여부를 충분히 검증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미국 미술사학자이자 현대미술 큐레이터인 어맨다는 키가 120㎝인 저신장 장애인이다. 대학 캠퍼스에서 강연하는 그는 강의실 앞에 설 때마다 늘 불편함을 느꼈다고 한다. 모든 강연대가 적어도 키 150㎝ 이상인 ‘정상 성인’을 기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어맨다는 상자 받침대를 놓거나 계단 발판을 만들어 자신의 키를 강연대에 맞출 수도 있었지만 다른 길을 선택했다. 미국 올린공과대 디자인학부 교수인 저자를 찾아가 “나에게 딱 맞는 휴대용 강연대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 결과 세상에 없던 단 한 사람만을 위한 강연대가 탄생했다. 저자와 학생들은 한 학기 동안 항공 우주 공학에서 주로 사용하는 검은색 탄소섬유판으로 ‘3단 접이식 강연대’를 만들었다. 경첩으로 연결된 넓적다리를 펼친 다음 지지대를 세우고 마지막 상판을 올리면 언제 어디서든 어맨다를 위한 강연대가 펼쳐진다. 저자는 이 경험을 통해 묻는다. 어쩌면 비장애인 위주로 설계된 이 세상에는 어맨다처럼 매일 불편함을 느끼며 살아온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을까.사회적 디자인을 연구해온 저자는 7일 출간된 ‘다른 몸들을 위한 디자인’(김영사)에서 어맨다를 위해 제작한 강연대 뿐만 아니라 어린 장애인을 위해 만든 맞춤형 가구, 청각 장애인을 위해 지은 건축물 등을 다채롭게 소개한다. 장애를 가진 이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디자인적 상상력이 필요하고, 무수히 많은 장애인들과 디자이너들은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왔다는 얘기다.저자가 다른 몸을 위한 디자인을 고민하게 된 건 다운증후군을 가진 첫째 아이가 태어나면서다. 그는 “아이가 갓난아이였을 때부터 세상은 이 아이를 위해 설계되지 않았음을 알게 됐다”고 털어놓는다. 아이에게 자신의 몸을 세상에 어울리게 만들라고 독려해야 할지, 아니면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세상이 아이에게 맞춰 구부리고 휘어져달라고 요청해야 할지 고민하던 저자는 스스로 변화하기로 마음먹는다. “부적합은 개인과 집단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믿는 그는 장애인을 위한 디자인을 하고 그런 변화를 이끌어낸 이들을 찾기 시작한다.30년간 뉴욕 전역에 있는 어린 장애인들을 위해 저렴한 맞춤형 가구를 만들어온 ‘적응형디자인협회(ADA)’가 대표적이다. 일례로 ADA는 발달장애와 뇌전증성 뇌병증으로 똑바로 앉을 수 없는 두 살 니코를 위해 단 하나뿐인 가구를 만들었다. 밥 먹을 때, 놀 때, 낮잠 잘 때 아이가 다양한 각도로 편하게 기댈 수 있는 등받침을 더한 ‘의자-테이블’이 바로 그것. 놀랍게도 이 특별한 가구의 주재료는 종이 세 겹을 덧댄 삼중 골판지다. 저자는 다른 몸을 위한 디자인에는 특별한 재료가 필요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이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이 같은 변화는 궁극적으로 ‘나’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저자는 “장애는 일부에게만 영원히 속하는 고정된 딱지가 아니다. 누구나 그 자리에 설 수 있다”고 강조한다. 질병이나 사고뿐 아니라 나이가 들면서 누구나 다른 디자인을 필요로 하게 된다. 노인이 되면 무릎을 구부려 변기에 앉았다 일어나는 일조차 낯설고 힘들어진다. 화장실 변기뿐일까. 저자의 말처럼 신경 써서 주변을 살펴본다면 우리가 함께 바꿔나갈 곳은 어디에나 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6세기 초 경북 경주에 조성된 금령총에서 나온 유물 파편은 총 2만여 점이다. 파편들이 제자리를 찾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지난해 7월 22일 국립경주박물관 역사관에 있는 ‘1수장고’에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최지은 학예연구과 연구원(32)이 2018∼2020년 금령총 재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파편 조각을 맞춰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토기 아래를 받치는 ‘굽다리’ 파편 500여 점을 바닥에 깔아놓고 함께 출토된 토기와 맞춰 보던 중 아무리 찾아도 맞는 구석이 없는 조각 하나가 있었다. 2019년 9월 무덤 중앙에서 남쪽으로 약 15m 떨어진 데서 찾은 4cm 크기의 굽다리 파편이었다. 최 연구원은 15일 전화 인터뷰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1924년 금령총에서 출토됐던 ‘긴 목 항아리’를 가져와봤다. 긴 목 항아리 바닥의 깨진 단면과 굽다리 파편 조각을 맞춰 본 순간 빈틈없이 유물과 파편이 들어맞았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던 파편과 유물이 실은 하나의 완형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최 연구원은 2020년 11월 발굴 현장에서 가져온 1.5cm 크기 굽다리 파편 역시 ‘긴 목 항아리’의 일부였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그는 “첫 발굴부터 파편이 제자리를 찾기까지 4년이 걸렸다”며 웃었다. 그의 발견은 금령총에 얽힌 제의(祭儀)를 이해하는 단서가 됐다. 무덤 중앙에서 출토된 ‘긴 목 항아리’의 파편 일부가 왜 본체와 15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됐을까. 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훼기(제사 그릇을 의도적으로 깨뜨리는 행위) 의식의 실마리가 풀렸다. 김은경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금령총은 어린아이의 무덤”이라며 “항아리 아래 굽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려 시신이 안치된 무덤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뿌린 것이다. 이는 죽은 아이가 이승을 떠돌지 않도록 이승과 저승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를 끊는 의식”이라고 해석했다. 2만 점이 넘는 금령총 출토 파편 가운데 최 연구원의 손을 거쳐 제자리를 찾은 유물은 200여 점에 이른다. 그가 찾은 ‘긴 목 항아리’의 굽다리 파편 조각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금령, 어린 영혼의 길동무’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다음 달 5일까지. 무료.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박물관의 목표가 바뀌었습니다. 이전에는 많은 유물을 선보이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단 한 점의 유물이라도 관람객의 마음에 남기는 겁니다.” 2020년부터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기증실 재개관 프로젝트를 맡은 이원진 학예연구사의 말이다. 그의 말대로 박물관은 기증 유물 5만여 점 가운데 1408점을 한꺼번에 전시했던 이전 기증실을 완전히 바꿨다. 지난해 12월 16일 새로 단장한 기증Ⅰ실 오른쪽에 마련된 144㎡(약 43평) 규모 독립 공간에는 단 한 점, 보물 ‘손기정 기증 청동투구’가 놓여 있다. 사방이 어두운 가운데 유물을 비추는 조명만이 반짝인다. 벽면은 손기정 선생(1912∼2002)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며 부상으로 받은 그리스 청동 투구가 1986년 고국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소개한 글로 채워져 있다. 많은 유물을 전시해 각각의 유물을 집중 조명할 수 없었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과 집중을 한 것. 리모델링 전에는 관람객에게 주목받지 못했던 이곳이 이제는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가 됐다. 상설전시실의 변화는 2, 3년 전부터 시작됐다. 개관한 지 10년이 넘은 노후 상설전시실을 새로 단장하면서 높아진 관람객의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전시법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 이 과정에서 전시 유물을 줄이는 대신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상설전시실의 명품화’가 이뤄졌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021년 3월 ‘분청사기 백자실’을 시작으로 최근까지 ‘사유의 방’ ‘청자실’ ‘기증실’을 전면 리모델링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산하 국립경주박물관도 지난해 12월 ‘불교조각실’을 새로 단장하면서 동선을 없앴다. 기존 유물 137점 가운데 절반을 들어내 새 전시실에 70점만 추렸더니 불상을 전시실 군데군데 배치할 여유가 생겼다. 박아연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관람객에게 동선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관람객이 유물을 선택해 볼 수 있는 구조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는 “과거에는 특별전시가 박물관의 주력이었다면 이제는 상설전시실 재개관이 주력”이라고 덧붙였다. 유물 뒤편도 공개했다. 177cm 크기의 국보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국립경주박물관의 옛 전시실에서는 벽면에 딱 붙은 채 전시돼 뒷면을 볼 수 없었다. 새로 단장한 불교조각실에서는 불상 주위를 거닐며 뒤태를 볼 수 있다. 조효식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관람객이 불상 뒷면을 보며 어디에 놓여 있었는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상상해 보길 바랐다”며 “구석구석을 보면서 관람객 스스로 유물의 진면목을 발견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지난해 12월 27일 ‘과학문화실’을 전면 리모델링하면서 국보 ‘천상분야열차지도 각석’에 디지털 매핑(물체 표면에 그래픽을 입히는 작업)을 시도했다. 김충배 국립고궁박물관 전시기획과장은 “각석 표면에 1467개의 별이 새겨져 있지만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았다”며 “유물 표면 위에 실감 영상을 띄워 유물의 진가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한 것이 상설전시실을 개편한 이유”라고 말했다. 미술관 전시 디자인 작업에 여러 차례 참여한 이세영 논스탠다드 스튜디오 대표는 “상설전시야말로 박물관의 근본”이라며 “유료로 운영되는 기획전시실뿐 아니라 무료로 운영되는 상설전시실의 품격이 향상되고 있다는 건 그만큼 관람객의 영향력과 안목이 높아졌다는 뜻”이라고 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박물관의 목표가 바뀌었습니다. 이전에는 많은 유물을 관람객에게 선보이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단 한 점의 유물이라도 관람객의 마음에 남기는 겁니다.”2020년부터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기증실 재개관 프로젝트를 맡은 이원진 학예연구사의 말이다. 그의 말대로 박물관은 기증 유물 5만여 점 가운데 1408점을 한꺼번에 전시해왔던 이전 기증실을 탈바꿈했다. 많은 유물을 한자리에 전시하며 각각의 유물을 집중 조명할 수 없었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과 집중’을 한 것이다.지난해 12월 16일 새 단장한 기증Ⅰ실 오른쪽에 마련된 144㎡(43평) 규모 독립 공간에는 단 한 점, 보물 ‘손기정 기증 청동투구’가 놓여 있다. 바닥부터 벽면, 천장까지 어두컴컴한 가운데 유물을 비추는 조명만이 반짝인다. 전시장 밖 벽면에는 1936년 손기정 선생(1912~2002)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며 부상으로 받았던 그리스 청동 투구가 1986년 고국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소개한 글이 채워져 있다. 리모델링 전에는 관람객에게 주목받지 못했던 이곳이 이제는 남녀노소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핫플레이스’가 됐다.상설전시실의 변화는 2, 3년 전부터 나타난 흐름이다. 개관한 지 10년이 넘은 노후 상설전시실을 새 단장하면서 문화 소양이 높아진 관람객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한 전시법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 그러면서 전시 유물의 양을 줄여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상설전시실의 명품화’가 이뤄지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021년 3월 ‘분청사기 백자실’을 처음 탈바꿈한 뒤 최근까지 ‘사유의 방’, ‘청자실’, ‘기증실’을 전면 리모델링해왔다. 이 같은 변화의 흐름은 다른 지역 박물관에도 이어진다. 박아연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과거에는 특별전시가 박물관의 주력 사업이었다면 이제 상설전시실 재개관이 주력 사업”이라고 강조했다.틀에 박힌 동선을 탈피하는 실험도 상설전시실에서 이뤄지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이 지난해 12월 새 단장한 ‘불교조각실’에는 동선이랄 게 없다. 경주박물관은 전시실을 전면 리모델링하면서 기존 유물 137점 가운데 절반을 들어냈다. 새 전시실에 70점만 추리자 정원에 놓인 조각상처럼 툭툭 커다란 불상을 전시실 군데군데 배치할 여유가 생겼다. 박 학예연구사는 “박물관이 관람객에게 동선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관람객이 능동적으로 전시실을 거닐며 유물을 선택해 볼 수 있는 구조로 연출했다”고 설명했다. 관람 금지구역이었던 유물 뒤편도 공개하는 파격 시도도 선보였다. 177㎝ 크기 국보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국립경주박물관의 옛 불교전시실에서는 전시장 벽면에 딱 붙어 있어 뒷면을 살펴볼 수 없었다. 반면 새 단장한 불교조각실에서는 관람객이 불상 주위를 돌면서 머리와 몸통 뒷면에 난 커다란 구멍까지 살펴볼 수 있다. 조효식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관람객이 불상 뒷면을 보면서 어디에 놓여 있었는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상상해보길 바랐다”며 “구석구석을 둘러보면서 관람객 스스로 유물의 진면목을 발견하도록 하는 취지”라고 말했다. 옛 유물에 디지털 기술을 접목하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지난해 12월 27일 ‘과학문화실’을 전면 리모델링하면서 국보 ‘천상분야열차지도 각석’에 디지털 맵핑(물체 표면에 그래픽을 입히는 작업)을 시도했다. 김충배 국립고궁박물관 전시기획과장은 “각석 표면에 1467개의 별과 295개의 별자리가 새겨져 있지만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유물 표면 위에 실감 영상을 띄워 각각의 별자리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전시 개편의 이유”라고 설명했다. 공간디자인스튜디오 ‘논스탠다드’의 이세영 대표는 “소장 컬렉션을 선보이는 상설전시야말로 박물관의 근본”이라며 “유료로 운영되는 기획전시실뿐 아니라 무료로 운영되는 상설전시실의 품격이 높아지고 있다는 건 그만큼 관람객의 영향력과 눈높이가 높아졌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언젠가 이집트에 가는 게 엄마 꿈이거든요. 전시를 통해 이집트를 먼저 만나실 수 있게 제가 예매했어요.” 국내 최대 규모의 이집트 유물 전시인 ‘이집트 미라전: 부활을 위한 여정’이 열리고 있는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11일 전시장을 찾은 길민주 씨(26)는 어머니 오경숙 씨(57)와 함께 온 이유를 말했다. 모녀는 몰려든 인파에 2시간 반 동안 전시장 위층에 있는 대기실에서 입장을 기다렸다. 전시장에 들어선 순간 길 씨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오길 잘했다”며 감탄했고, 오 씨는 “딸 덕분에 이집트 구경을 해보네”라며 미소 지었다. 지난해 12월 15일 개막한 ‘이집트 미라전’이 이날 관람객 10만 명을 돌파했다. 이날 전시장은 기원전 722년∼기원전 655년경 만들어진 목관 ‘호르의 외관’이 놓여 있는 전시장 입구부터 인파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주말에는 하루 평균 4000여 명이 전시장을 찾는다.●깊이 있고도 쉽게… 남녀노소 인기 이집트 사후세계관을 다룬 이번 전시는 고대 이집트 역사를 전문적이면서도 쉽게 풀어내 나이에 상관없이 만족스럽게 즐길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번 전시는 2만5000점이 넘는 이집트 컬렉션을 소장한 네덜란드 국립 고고학박물관의 유물 중 인간·동물 미라 13점, 미라 관 15점, 투탕카멘 좌상과 오시리스·이시스 조각상 등 유물 250여 점으로 구성됐다. 컴퓨터단층촬영(CT)으로 미라 내부의 미스터리를 푼 모습도 국내 최초로 볼 수 있다. 미라를 CT로 촬영하는 기술은 네덜란드 국립 고고학박물관의 최신 연구 성과 중 하나다. 고대 이집트 신화와 역사를 풀이해주는 실감영상을 통해 어린이와 청소년의 눈높이에도 맞춰 어린이·청소년 관람객 수가 3만6097명에 이른다. 이날 이집트 피라미드 실감영상을 보던 노건우 군(9)은 “이집트에 놀러 온 것 같다”며 눈을 떼지 못했다. 바닥에 앉아 한참 동안 영상을 보던 노 군은 “한국사에 관심이 많은데 이집트 역사를 이렇게 자세히 공부하는 건 처음이다”라고 말했다. 고대 이집트 신화를 담은 애니메이션이 나오는 화면 앞에는 20명 넘게 모여 있었다. 전지원 양(10)은 어머니 윤진선 씨(36)가 “다른 유물을 보러 가자”고 해도 꼼짝하지 않았다. 5분간 영상을 다 본 후 발걸음을 옮긴 전 양은 “엄마, 옛날 이집트에는 왕을 대신해서 신전을 돌봐주던 사람들이 있었대!”라며 신관(神官)의 의미를 설명했다. 윤 씨는 “복잡한 이집트 신화를 애니메이션으로 설명해주니 아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며 웃었다.●이집트 다녀온 이들도 “명품 전시” 고대 이집트 고위층의 목관 10점이 둥근 원을 이루며 세워진 전시 3부는 이집트에 다녀온 이들도 명품으로 꼽는 전시의 하이라이트다. 전시장 중앙에 놓인 ‘하이트엠헤트의 관’ 앞에 선 최지혜 씨(42)는 목관 위에 새겨진 문양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기원전 722년∼기원전 332년경 후기 왕조 시대에 만들어진 이 목관 표면에는 사자(死者)를 사후세계로 안내하는 주문과 화려한 꽃무늬 장식이 가득했다. 최 씨는 “20년 전 이집트 카이로박물관에서 이런 목관들을 본 적이 있다”며 “유물 수는 현지 박물관이 더 많지만 전시 구성과 상세한 설명은 ‘이집트 미라전’이 훨씬 더 훌륭하다”고 말했다. 딸과 함께 전시장을 찾은 한성길 씨(83)도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던 1985년 이집트에서 미라와 목관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한 씨는 “고대 이집트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며 “미라를 만드는 방법까지 설명해줘 이 전시가 현지보다 더 알찬 것 같다”면서 “딸이 ‘아빠 따라 오길 잘했다’고 말했다”며 웃었다. 전시 관계자는 “평일 오전 10시부터 낮 12시 사이에는 비교적 덜 붐벼, 가능하다면 이 때 관람하길 권한다”고 말했다. 3월 26일까지. 1만3000∼2만 원.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언젠가 이집트에 가보는 게 우리 엄마 꿈이거든요. 그 꿈을 이뤄주려고 제가 예매했어요.”고대 이집트 문명의 ‘종합선물세트’라고 불리는 특별전 ‘이집트 미라전: 부활을 위한 여정’이 열리고 있는 11일 오후 2시경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경기 화성시에 사는 길민주 씨(26)는 어머니 오경숙 씨(57)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일주일 전 인터넷으로 전시 티켓 2장을 예매했다. 그러고도 인파가 몰려 2시간 반 동안 전시장 위층에 있는 대기실에서 입장 순서를 기다렸다. 그토록 기다렸던 전시장에 들어선 순간 길 씨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오길 잘했다”며 감탄을 연발했다. 어머니 오 씨는 “딸 덕분에 엄마가 이집트 구경을 해보네”라며 미소를 지었다. 지난해 12월 15일 개막한 ‘이집트 미라전’이 11일 관람객 10만3106명을 돌파했다. 이날 기자가 찾은 전시장은 기원전 722년~기원전 655년경 만들어진 ‘호르의 외관’이 놓여 있는 전시장 입구에서부터 발 디딜 틈 없는 인파로 붐볐다. 티켓을 예매한 뒤 최소 2시간을 기다려야 전시장에 입장할 수 있었다.●전문성에 더해 어린이 눈높이 맞춰 남녀노소 인기이집트 사후세계관을 다룬 이번 전시는 자칫 복잡할 수 있는 고대 이집트 역사를 남녀노소 모두의 눈높이에 맞춰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2만5000점이 넘는 이집트 컬렉션을 소장한 네덜란드 국립 고고학박물관의 유물 중에서 미라 관 15점 등으로 엄선된 유물 250여 점을 선보였다. 컴퓨터단층촬영(CT)으로 미라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최신 연구 성과도 공개해 전문성을 갖췄다. 그러면서도 고대 이집트 신화와 역사를 풀이해주는 실감영상으로 어린이의 눈높이도 맞췄다. 고대 이집트 역사를 집중 조명한 전시인데도 어린이·청소년 관람객 수가 3만6097명에 이른 이유다.이날 전시장에 마련된 이집트 피라미드 실감영상을 보던 노건우 군(9)은 “진짜 이집트에 놀러 가서 역사를 본 것 같다”며 눈을 떼지 못했다. 바닥에 앉아 한참 동안 영상을 보던 노 군은 “원래 한국사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집트 역사를 이렇게 자세히 공부하는 건 처음”이라며 감탄했다. 고대 이집트 신화를 풀어낸 애니메이션이 나오는 화면 앞에는 20명이 넘는 관람객들이 모여 있었다. 전지원 양(10)은 어머니 윤진선 씨(36)가 “다른 유물 보러 가자”고 해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5분간 영상을 다 본 뒤에야 자리를 옮긴 전 양은 “엄마, 옛날 이집트에는 왕을 대신해서 신전을 돌봐주던 사람들이 있었대!”라며 신관(神官)의 의미를 풀어 설명했다. 어머니 윤 씨는 “복잡한 이집트 신화를 애니메이션으로 설명해주니 아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며 웃었다. ●이집트 다녀온 이들도 “명품 전시” 찬사특히 고대 이집트 고위층의 목관 10점이 둥근 원을 그리며 세워진 3부는 실제 이집트에 다녀온 이들도 “명품”으로 꼽는 전시의 하이라이트였다. 이날 3부 전시장 중앙에 놓인 ‘하이트엠헤트의 관’ 앞에 멈춰 선 최지혜 씨(42)는 목관 위에 새겨진 문양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기원전 722년~332년경 후기왕조시대에 만들어진 이 목관 표면에는 사자를 사후세계로 안내하는 주문은 물론 화려한 꽃무늬 장식이 가득했다. 최 씨는 “20년 전 항공사 직원으로 일할 때 이집트 카이로박물관에서 이런 목관들을 봤다”며 “유물 수는 현지 박물관이 더 많지만 예술적인 전시 구성과 상세한 설명은 ‘이집트 미라전’이 더 훌륭하다”고 평했다. 이날 딸과 함께 전시장을 찾은 한성길 씨(83) 역시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던 1985년 이집트에 방문해 미라와 목관을 본 적 있다. 한 씨는 “고대 이집트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며 “미라를 만드는 방법까지 설명해주는 전시 내용은 현지보다 더 알차다”고 강조했다. 그는 “딸이 ‘아빠 따라 오길 잘했다’고 한다. 이집트 문명을 이해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누구에게라도 권하고 싶다”며 웃었다. 3월 26일까지.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鄧小平). ‘현대 중국을 만든 이’를 꼽으라면 빠질 수 없는 이름이다. 하지만 상하이는 이들이 집권하기 전인 1930년대에도 미국 시카고와 뉴욕에 버금가는 스카이라인을 갖춘,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였다. 1895년 이미 영국 런던 수준의 전차 체계를 갖췄다. 세계의 기업가들이 상하이로 몰려들었다. 1842년 난징조약이 체결되기 전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상하이는 어떻게 50년 만에 대도시로 자리매김했을까. 이 변화의 한가운데에 중동 출신 유대 기업인 가문 ‘서순’과 ‘커두리’가 있었다. 근현대 중국 상하이에서 거대 기업을 일궜던 두 유대인 가문의 역사를 기록한 논픽션이다. 미국 보스턴글로브 등에서 30년 가까이 중국 특파원으로 일하며 퓰리처상을 수상한 저자는 풍부한 자료 조사와 인터뷰로 중국 공산당이 감춰왔던 역사의 모자이크를 복원한다. 중동의 유대인 지배계층으로 영국에 건너가 오늘날 우리 돈으로 약 3조 원에 이르는 부를 축적한 서순 가문은 중국으로서는 숨기고 싶은 기억이다. 중국에 아편을 판 돈으로 상하이의 부동산과 주식, 호텔, 회사에 투자해 서순 제국을 세웠기 때문이다. 서순 가문 회사의 직원으로 시작해 상하이에서 호텔업 등으로 부를 축적한 커두리 가문도 탐탁지 않은 건 마찬가지. 이들 가문이 득세한 1842년부터 1949년까지 107년의 세월은 제국주의 국가가 중국에 세력을 뻗쳤던 ‘치욕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이 때문에 1949년 정권을 잡은 중국 공산당은 ‘제국주의 부역자’라며 재산을 몰수하고 이들의 역사를 지워버렸다. 잊힌 역사를 추적하는 이 책의 미덕은 복잡다단했던 시대를 이분법적 시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들 가문에 대해 “상하이에 기업가 정신을 들여왔지만 빈부격차를 심화시켰고, 아편 무역으로 중국인의 삶을 망가트렸다”며 있는 그대로를 기록할 뿐이다. 저자는 두 가문이 남긴 명암을 훑으며 “성장과 발전뿐 아니라 불평등과 부패, 모순도 이 책의 주인공”이라고 강조한다. 저자는 그러면서도 “중국에 상하이 유전자(DNA)를 창조했다”며 이들의 유산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한다. 20세기 초 이들 가문이 주도한 자유무역과 기업가 정신을 보고 자란 상하이의 중국인들이 세계화를 꿈꾸게 됐다는 것이다. 1978년 문호를 개방한 중국이 경제 중심지로 상하이를 선택하고,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와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처럼 경제 수완이 좋았던 중국 지도자가 모두 상하이 출신인 이유도 이들이 남긴 기업가 DNA가 상하이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훗날 두 가문의 이름은 중국에서 희미해졌지만 기업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하다. 커두리 가문은 1949년 공산주의를 피해 상하이를 떠나온 중국 출신 기업인들과 손잡고 홍콩에 정착했다. 여전히 홍콩 최대 전력회사 CLP홀딩스와 페닌슐라 호텔 체인을 경영하며 세계 경제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홍콩을 세계 경제 무대로 이끌면서 아시아의 잠재력을 깨웠다는 평가를 받는다.“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처럼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가 뒤섞인 당대 상하이의 빛과 어둠이 모두 담겼다.이소연 기자 alw ays99@donga.com}
“외국 기관에서 종종 제가 연구해온 미라를 기증해 달라고 요청해온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때마다 ‘우리의 역사는 우리가 지키고 연구해야 한다’고 답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제 힘만으로는 부족하네요.” 2002년 9월 경기 파주시 파평 윤씨 종중산 묘역에서 발굴된 파평 윤씨 모자(母子) 미라를 연구한 김한겸 고려대 의대 명예교수(68)는 9일 전화 통화에서 “법이 바뀌었어도 여전히 그 누구도 이 미라를 책임지려 하지 않고 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미라는 세계 최초 모자 미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동안 파평 윤씨 모자 미라를 포함해 김 교수가 연구해온 총 8구의 미라는 그가 재직하던 고려대 의대 해부학교실과 고려대구로병원 부검실에 나뉘어 보관되고 있다. 20년 넘게 미라 보관 비용을 병원과 대학이 부담해 왔다. 그나마 김 교수가 2021년 3월 정년퇴직하면서 미라는 갈 곳이 마땅찮은 상황이다. 지난해 7월 미라를 학술·역사적으로 ‘중요출토자료’로 인정하고 보존과 연구를 지원하는 매장문화재보호법 조항이 신설됐다. 하지만 파평 윤씨 모자는 여전히 지원 대상이 아니다. 문화재청이 “법령 시행 전 묘지 이장 과정에서 출토된 인골과 미라에 대해서는 법령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에 김 교수가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에 미라를 기증하는 방법도 알아봤지만 이 역시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문화재청 발굴제도과 관계자는 “국립문화재연구원에는 현재 미라를 안치할 수 있는 냉동·냉장시설이 갖춰지지 않았고 연구와 보관을 위한 전문 인력도 없다”고 했다. 지난해 7월 법령이 시행된 뒤 올해 ‘중요출토자료 관리·지원 사업 예산’ 명목으로 문화재청이 받은 예산은 2억 원. 미라 연구를 할 수 있는 전문 인력과 시설을 갖추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다. 김 교수는 “수백 년 전의 세계를 담고 있는 미라를 지켜내야 한다”며 “앞으로 문화재청이 지원 범위와 연구 체계를 확대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정한 지원은 미라를 연구할 수 있는 전문 인력과 인프라를 확충하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그의 말을 새겨들어야 한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조선 고종(1852∼1919)이 1896년 5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1868∼1918)의 대관식을 맞아 전한 외교 선물 5점이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박물관에서 127년 만에 공개된다. 고종은 1896년 2월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했고,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민영환(1861∼1905)을 전권공사로 하는 사절단을 파견하면서 선물을 총 17점 보냈다. 이 유물 5점은 크렘린박물관에서 10일부터 4월 19일까지 열리는 특별전시 ‘한국과 무기고, 마지막 황제 대관식 선물의 역사’에 나온다. 공개되는 유물 가운데 ‘흑칠나전이층농’은 고종의 특명으로 당대 가장 뛰어난 나전 장인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농 하단부에 십장생(十長生) 문양 나전을 부착해 니콜라이 2세의 무병장수를 기원했다. 1920년 일본에 실톱이 도입되며 자개를 실처럼 잘게 잘라 붙이는 ‘끊음질’ 나전 기법이 유행했는데, 이 작품은 일본보다 30년 앞서 이 기법이 적용돼 공예사적으로 가치가 높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복원을 지원했다. 학계에도 보고된 적이 없는 천재 화가 장승업(1843∼1897)의 걸작 2점도 최초로 공개된다. 공개되는 작품은 ‘고사인물도(故事人物圖)’ 연작 4점 중 ‘노자출관도(老子出關圖)’와 ‘취태백도(醉太白圖)’로, 두 작품 모두 가로 65cm, 세로 174.3cm 크기의 대작이다. ‘吾園 張承業(오원 장승업)’이라는 서명 앞에 ‘朝鮮(조선)’이라는 국호를 붙여 이 작품이 외교 선물을 전제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진수영보(眞壽永寶·참다움과 장수, 영원한 보물)’ 등의 글자를 새긴 백동향로 2점도 선보인다. 향로의 모양은 각각 사각형과 원형으로 대관식의 취지에 맞춰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라는 뜻의 ‘천원지방(天圓地方)’을 나타냈다고 평가된다. 정교하게 투조한 문양의 구조는 일반적인 공예품에서 보기 어려운 복잡하고 세밀한 얼개를 보여준다는 평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월지(月池)에는 ‘통일신라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양은경 부산대 고고학과 교수의 말이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왕이 별궁인 동궁을 지으며 674년 조성한 경북 경주시 월지에서는 1974년부터 2년간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토기와 기와, 금속공예품, 불상, 목간(木簡) 등 3만3292점에 달하는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유물의 양이 워낙 방대하다 보니 국립경주박물관 전시장에 선보인 1200여 점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 수장고에서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왜 이토록 많은 유물이 못에 잠겨 있었나’, ‘파편으로 발견된 유물의 전모는 어땠을까’…. 국립경주박물관이 올해부터 월지의 미스터리를 푸는 작업에 본격 착수한다. 2032년까지 10년 동안 경주 월지 출토 유물 전량을 재조명하고 분석하는 ‘2032 월지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다. 경주박물관을 6일 찾아 ‘월지 미스터리’ 실타래의 한 가닥을 풀어봤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 용역을 통해 지난해 4월부터 7개월간 월지 출토 불교 유물을 분석한 양은경 교수는 “1975년 월지에서 출토된 15.9cm 크기 금동 귀 조각 2점은 7세기 제작된 1m 높이 좌상의 일부일 가능성이 높다”는 추론을 내놨다. 당대 신라 불상에 나타난 귀 형태를 비교 분석한 결과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83호)’의 귀와 가장 닮았다는 것이다. 양 교수는 “8세기 중엽 제작된 석굴암 본존불상과는 귀 형태가 달랐고, 7세기 제작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귀와 크기 및 형태가 가장 유사했다. 이를 통해 불상이 7세기 후반 만들어졌다고 추론했다”고 말했다. 그는 “채 분석되지 않은 월지 출토 유물 가운데 불상의 나머지 부분이 확인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덧붙였다. 월지에서 출토된 각기 다른 크기의 금동 화불(化佛·변화한 부처) 282점과 약 30cm 크기 금동 판불(板佛·금동 판면에 표현한 불상) 10점이 별개가 아닌 하나의 작품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임영애 동국대 문화재학과·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에 따르면 두 유물은 같은 재료로 만들어져 있을 뿐 아니라 유물 가장자리나 뒷면에 둥근 구멍이 나 있다. 어딘가 고정돼 있었던 흔적을 공유한 것이다. 임 교수는 “판불을 고정하는 뒤판이 있고 그 위에 판불과 화불이 함께 장식된 구조”라며 “연구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이 밝혀지면 작품의 입체성이나 완성도 면에서 당대 불교 문화권에서 제작한 다른 판불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걸작이 나올 것이다. 이번 프로젝트로 판불과 화불의 관계가 드러나길 기대한다”고 했다. 1000점이 넘는 문양 벽돌도 연구 대상이다. 이날 기자가 국립경주박물관 수장고에서 살펴본 벽돌 1점은 일부가 부서진 채로 단면이 드러나 있었다. 조효식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단면을 가리키며 “자세히 보면 총 3겹으로 덧대 바닥을 견고하게 다진 흔적이 보인다”며 “백제 벽돌보다 2㎝가량 더 두꺼운 통일신라의 벽돌 제작 기법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박물관은 월지 출토 유물의 깨진 단면과 뒷면까지 디지털 아카이브에 올려 유물 제작기법에 대한 연구도 진행할 계획이다. 함순섭 국립경주박물관장은 “월지 연구는 당대의 생활문화사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라며 “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물론 신라사학 전문가들과 협업해 월지의 비밀을 풀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경주=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고종(1852~1919)이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1868~1918) 대관식에 전달한 외교 선물이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박물관에서 127년 만에 처음 공개된다. 그중에서도 ‘흑칠나전이층농’은 2020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국외 소재 문화재 보존복원 지원으로 수장고에서 나와 빛을 볼 수 있었다. 고종의 특명으로 당대 가장 뛰어난 나전 장인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농 하단부에 십장생(十長生) 문양 나전을 부착해 니콜라이 2세의 무병장수를 기원했다. 1920년 일본에 실톱이 도입되며 자개를 실처럼 잘게 잘라 붙이는 ‘끊음질’ 나전 기법이 유행했는데, 이 작품은 일본보다 30년 앞서 조선 공예사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선의 마지막 천재 화가로 불리는 장승업(1843~1897)의 걸작 2점도 최초 공개된다. 이번에 공개되는 작품은 ‘고사인물도(故事人物畵·역사나 신화 속 인물과 관련된 일화를 그린 그림)’ 연작 4점 중 ‘노자출관도(老子出關圖)’와 ‘취태백도(醉太白圖)’ 2점이다. 두 작품 모두 세로 174.3㎝ 가로 65㎝ 크기의 대작으로 학계에서도 알려진 바가 없는 걸작으로 꼽힌다. 그림 왼쪽 하단에는 ‘吾園 張承業(오원 장승업)’ 서명 앞에 ‘朝鮮(조선)’이라는 국호를 붙여 이 작품이 외교 선물을 전제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밖에도 ‘진수영보(眞壽永寶·참다움과 장수, 영원한 보물)’를 새긴 ‘백동향로’ 2점도 선보인다. 고종은 1896년 아관파천 이후 니콜라이 2세와 두터운 친분 관계를 맺은 것으로 유명하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친서는 30건에 이를 정도다. 첫 친서 역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서 출발했다. 당시 충정공을 특사로 파견해 전한 이 편지에는 “짐은 폐하(니콜라이 2세)가 정의를 토대로 세계 열강제국이 짐의 나라에 대한 일본의 불법적 행위를 꾸짖고 나라의 독립을 침해하지 못하게 모든 조약규정 위반을 즉시 중지하도록 권고해 주길 바라고 바란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번 전시를 통해 선보이는 외교 선물 속에 위태로웠던 구한말 조선의 외교·정치사가 담긴 셈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앞으로도 나라 밖 중요 유물의 복원 등을 지원해 세계 속 우리 문화재 가치를 알릴 것”이라고 설명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2009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은제이화문화병(銀製李花文花甁·사진)’이 일본의 미술품제작소에서 제작된 제품으로 뒤늦게 확인돼 문화재 등록이 말소됐다. 문화재청은 3일 관보를 통해 등록 말소 사실을 공개하면서 “해당 유물이 조선 왕실에서 사용하는 공예품을 제작하던 이왕직미술품제작소가 아닌 일본 도쿄의 고바야시토케이텐(小林時計店) 제품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고바야시토케이텐은 19세기 중반부터 1943년까지 도쿄에서 영업하며 시계와 은 제품 등을 만들던 미술품제작소다. 문화재청은 이 화병이 몸통 가운데에 대한제국 황실 문장인 이화(李花·오얏꽃) 문양이 붙어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1910년대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고 2009년 10월 문화재로 등록했다. 하지만 일각에서 “병 아랫면 ‘고바야시(小林)’라는 압인(押印)이 명확히 확인돼 일본산 제품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해왔다. 지난해 12월 문화재청이 재조사를 벌인 결과 해당 압인이 고바야시토케이텐 제품에 찍힌 것과 같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문화재청은 “문화재위원 등이 2009년 현장 실사 과정에서 유물을 면밀히 살펴보지 못했다”고 밝혔다. 화병은 소장처인 국립고궁박물관이 계속 관리할 예정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6·29선언이 발표되기까지의 청와대 내 상황을 담은 기록물이 공개된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1987년 당시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이던 김용갑 전 총무처 장관(87)이 이달 1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6·29선언 배경을 기록한 자필 메모 2건을 기증했다”고 7일 밝혔다. 김 전 장관이 기증한 메모 표지의 제목은 각각 ‘보고’와 ‘낙서’로, 제5공화국의 핵심 인사가 6·29선언이 나오기까지 일어난 일을 기록한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낙서’는 당시 김 비서관이 전두환 전 대통령을 독대하기 하루 전인 1987년 6월 18일 건의할 내용을 미리 적어둔 메모다. 메모에서 김 전 장관은 △서울올림픽 이후 직선제나 선택적 국민투표 △13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직선제, 내각제 개헌 △4·13조치에 대한 국민투표 부의 방안을 적은 뒤 “이 3가지 나름대로 약점”이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이 같은 방식으로는 “일거에 민심 회복 불가(하고), 승산도 희박(하다)”며 “직선제 대통령 선출 개헌”을 결단해야 한다고 적었다. 메모의 겉장에 ‘낙서’라고 표기한 건 보안을 신경썼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보고’라는 제목의 메모에는 1987년 6월 14일 계엄령 선포 검토부터 6월 25일 직선제 개헌 수용으로 정국 수습 방향을 선회하기까지 청와대 내의 움직임과 대응이 기록됐다. 이번 기증은 김 전 장관이 남희숙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에게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내가 남긴 기록을 기증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 이뤄졌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부부가 이혼한 뒤 딸은 엄마와 산다. 남자는 여느 때처럼 딸을 만나러 전 부인의 집에 간다. 집은 아무것도 달라진 것 없어 보인다. 잔디도 단정하게 정돈돼 있다. 그때 가만히 소파에 앉아 있던 사춘기 딸이 아빠에게 인사를 건넨다. “아빠, 안녕.” 생기 넘쳐 보이는 딸아이의 목소리는 어딘가 이전과 달라졌다. 변화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아이가 거실에 놓인 새장에서 살아 있는 새를 꺼내 잡아먹기 시작한 것. 전 부인은 더 이상 딸을 맡아 키울 수 없다고 한다. 양육은 남자의 몫이 됐다. 남자는 딸의 방에 살아있는 새를 가져다 놓을까. 아르헨티나 출신 소설가로 지난해 전미도서상 번역 부문을 수상한 저자의 초기작 20편을 모았다. 표제작은 새를 잡아먹는 딸의 이야기를 그렸다. 툭툭 끊어지는 단문으로 짧게 써내려간 이야기에는 생생한 현실과 잔혹한 환상이 뒤섞여 있다. 부인을 죽여 여행가방에 넣어둔 것이 하루아침에 위대한 예술작품으로 둔갑하거나 누군가의 머리를 바닥에 내리찧는 장면을 그린 그림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식이다. 기이하고 낯설어 보이지만 이들 이야기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감정이 담겨 있다. 바로 불안이다. 저자는 평범한 일상에 스며들어 점차 실체를 드러내는 불안을 환상으로 표현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그의 환상은 깨지기 쉬운 모든 것과의 관계에 내재된 잔혹성을 고민하는 데서 나온다”고 평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전화공포증’ 호소하는 MZ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으로 비대면 메신저에 익숙해진 청년들이 ‘콜포비아(전화공포증)’를 호소하고 있다. 전화는 물론 ‘말하기’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학원가를 찾은 이들의 사연을 들어봤다.》#. 회사원 김명수 씨(34)는 휴대전화 벨이 울리며 상사의 이름이 뜨면 마음이 조급해진다. 평소에는 회사 업무가 아니라면 누군가와 전화를 주고받을 일이 별로 없다. 가족, 친구들과는 주로 카카오톡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이야기를 나눈다. 김 씨는 “업무 전화 통화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는데, 입사하고 나니 상사부터 고객까지 전화로 응대하는 게 기본이었다”며 “전화를 받는 게 두렵다는 걸 회사에 다니면서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올 초부터 공공기관 인턴으로 일하고 있는 대학생 A 씨(27)는 지난해 12월 말 출근이 확정되자 “기본적인 전화 에티켓이라도 배워 둬야 할 것 같다”며 부랴부랴 서울 강남구의 한 스피치학원에 등록했다. A 씨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심각했을 당시 대학이 비대면 수업을 한 탓에 면접 준비 강의나 대면 스피치 강좌를 수강하지 못했다. 첫 출근을 앞둔 A 씨는 “앞으로 상사에게 전화로 보고할 일이 많을 것 같은데,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대면 전환되자 수면 위로 드러난 ‘콜포비아’최근 코로나19 사태가 엔데믹(감염병의 풍토병화)으로 접어들면서 비대면에서 대면 생활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다. 신입사원 연수나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OT) 등도 속속 재개되는 가운데 ‘말하기’에 대한 두려움에 스피치학원을 찾는 이들도 늘고 있다. 특히 일부 MZ세대(밀레니얼+Z세대)를 중심으로 사회적 교류가 줄어들었던 팬데믹 기간 ‘콜포비아(Call Phobia·전화 공포증)’가 생겼다는 이들도 꽤 된다. 구인구직 포털 알바천국이 지난해 9월 콜포비아와 관련해 MZ세대 2735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조사를 벌인 결과 응답자의 29.9%가 ‘콜포비아를 겪고 있다’고 답했다. ‘가장 선호하는 소통 방식’으로는 응답자의 61.4%가 문자나 SNS와 같은 텍스트를 꼽았다. 반면 전화 소통(18.1%)은 대면 소통(18.5%)보다도 낮은 3위를 차지했다. 이에 따라 전문가와 수강생을 연결하는 온라인 플랫폼 등에는 전화 스피치 강의가 성행하고 있다. 특히 스피치학원에는 MZ세대가 적지 않다고 한다. 서울 마포구 U스피치학원의 신유아 원장은 “전체 수강생의 4분의 1가량은 전화 대화에 어려움을 겪는 20, 30대”라며 “이제는 상담을 받으러 온 이들에게 ‘전화로 말하는 건 어떤지’라는 물음을 기본으로 던질 정도”라고 했다. 상대적으로 젊은층에서 콜포비아를 호소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코로나19 탓으로 풀이된다. 코로나19가 심각했던 기간에 대학에 입학한 이들은 비대면 수업이 전면적으로 실시되면서 동기, 선후배와 얼굴을 직접 보며 제대로 교류하지 못했다. 직장에 취업한 이들 역시 올해 2, 3년 차가 됐다고 해도 재택근무를 하며 메신저를 통한 의사소통에 익숙해진 경우가 적지 않다. 지난해 12월 말 마포구의 스피치학원을 찾은 이모 씨(21)도 그런 경우다. 이 씨는 “고등학생 때는 교내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 상을 탔을 정도로 말하기에 자신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2020년 대학 입학과 동시에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달라졌다. 고향을 떠나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서울에 온 이 씨는 대학 기숙사에서 룸메이트도 없이 홀로 지냈는데 대학 동아리 활동 등 대면 활동도 거의 중단돼 대인 관계가 많이 위축됐다고 한다. 이 씨는 “3년 동안 대학 강의를 대부분 비대면으로 들은 데다 기숙사에서 혼자 지내는 날이 많아지면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일주일을 보내는 때가 늘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택배나 배달 전화를 받는 일조차 꺼려진다”고 털어놨다. 신 원장은 “과거에는 대학이나 직장에서 직접 부딪치며 자연스럽게 전화나 대면으로 말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했다면 지난 3년 동안에는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일상화하면서 이런 기회가 사라졌던 것”이라고 했다.●비대면 메신저가 ‘소통 뉴노멀’ 돼 일부 청년들의 콜포비아는 문제라기보다는 의사소통 수단의 변화에 따른 현상일 뿐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SNS가 점점 더 일상을 파고드는 현실에서 전화가 익숙지 않은 이들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는 얘기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전화 통화를 꺼리는 건 청년들의 잘못이 아닌 메신저 플랫폼 다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최근 회사에 입사하기 시작한 2000년대생들은 가정에서조차 유선전화기를 본 적 없는 첫 세대”라며 “이들에게 전화는 ‘스마트폰’을 뜻한다. 전화는 유일한 원거리 대화 수단이 아니라 문자나 SNS와 같은 여러 소통 수단 중 하나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고령층이 디지털기기를 이용한 소통을 어려워하는 것처럼 젊은 세대가 전화 통화를 낯설어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얘기다. 실제 알바천국이 지난해 9월 발표한 MZ세대 콜포비아 실태 조사에서 응답자의 절반에 가까운 46.6%는 “문자, 메신저 등 텍스트 소통에 익숙해지다 보니 전화 통화에 어려움을 느낀다”고 답했다. 이 교수는 “진짜 문제는 지난 3년 동안 코로나19 확산으로 직장과 학교마저 온라인 비대면으로 전환하면서 젊은 세대가 전화나 대면 등 육성 커뮤니케이션에 적응할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제공받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했다.일부 기업들은 전화 통화에 익숙하지 않은 ‘코로나 세대’의 입사에 맞춰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전화 받는 법 정도는 신입사원이 이미 아는 기본 에티켓’이라고 여겼던 데서 변화하고 있는 것. 지난달 16일 진행된 SK이노베이션의 신입사원 연수에서는 “모르는 사람과 전화로 얘기할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 “사내 또는 사외 분들과 전화로 대화할 때는 어떤 점에 유의해야 할까요” 같은 질문이 이어졌다고 한다. 이에 회사는 비즈니스 매너 교육 과정에 전화 에티켓을 추가했다. 전문 강사가 업무 전화 상황을 재현하면서 “전화를 걸거나 받을 때에는 본인 소속과 이름을 밝히고 용건을 말해야 하고, 전화를 걸 땐 상대가 통화 가능한 상황인지를 묻는 게 예의”라고 가르쳤다. 이 회사는 지난달 말부터 사내 상담센터에서 대면 업무 전환으로 인한 어려움이 없는지 관련 상담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대인 커뮤니케이션 교육 강화해야” 학교에서 전화 통화를 포함한 대인 커뮤니케이션 교육을 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지난해 8월 박희선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가 강의하는 ‘대인 커뮤니케이션’ 강좌에는 대기자만 150명이 몰렸다. 코로나19 확산 후 2년 반 만에 대면으로 진행되는 커뮤니케이션 강좌가 열리자 수강신청 대란이 벌어진 것이다. 박희선 교수는 “10년 동안 강의하면서 수강 인원 35명인 이 수업의 대기자 수가 150명을 넘긴 건 처음이었다”며 “대면 생활로 바뀌면서 대인 커뮤니케이션을 배워야 할 필요성은 커진 반면 관련 강의는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비대면 소통이 뉴 노멀(New normal)이 된 지금 대면 적응을 위해 교육기관이 ‘커뮤니케이션’ 강좌를 확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초중고교에서도 관련 교육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이동귀 교수는 “‘노 마스크’로 얼굴을 맞대며 살아야 하는 대면 생활로 전환되고 있지만 이미 지난 3년 동안의 비대면 메신저 중심 소통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며 “초중고교 정규 교육과정에도 대면 커뮤니케이션 강의를 열어 학생들의 적응을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핵가족화가 일반화된 오늘날 어린이와 청소년이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과 소통할 경험이 적은 만큼 커뮤니케이션 교육의 필요성은 더욱 크다”고 덧붙였다. 기업에서는 젊은 세대에게 익숙한 대화 방식과 소통 플랫폼을 활용하는 방안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박희선 교수는 “전화나 대면 커뮤니케이션은 여전히 중요한 소통 수단이지만 중요한 건 세대 간 양방향 소통”이라며 “젊은 세대만 기성세대에 맞출 것이 아니라 기성세대도 요즘 청년들이 쓰는 메신저나 소통법을 익히며 서로 맞춰 나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다른 사람과 전화하는 목소리 녹음해 모니터링 해보세요” 스피치-커뮤니케이션 전문가 3명이 추천하는 ‘콜포비아 극복법’ 전화 상황 재현하는 연습 필요핵심내용 요약 메모하는 습관을 ‘콜포비아’를 이겨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스피치·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인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와 박희선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 신유아 U스피치 원장이 구체적인 방법을 제안했다. 신 원장은 콜포비아를 호소하는 수강생들에게 가장 먼저 “다른 사람과 전화하는 내 목소리를 녹음해 모니터링을 해 보라”고 조언한다. 통화 내용을 돌아보면서 스스로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게 변화의 시작일 수 있다는 것. 그는 “전화 통화로 말하다 보면 평소 대화할 때와는 다르게 목소리가 작아진다거나 말끝이 짧아지는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며 “나도 몰랐던 전화 습관을 파악하려면 모니터링은 필수”라고 말했다. 전화 상황을 재현하는 연습도 필요하다. 이 교수는 “요즘 청년들은 나이가 많고 직급이 높은 상사와 대화할 때 쓰는 표현에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며 “가족이나 친구처럼 가까운 사람들과 다양한 전화 상황을 재현해 보면서 필요한 단어나 표현을 익히는 게 좋다”고 설명했다. 전화를 걸고 받는 일에 익숙해졌다면 그 다음은 전화 통화에서 핵심 내용을 요약해 메모하는 습관을 만들어야 한다. 미리 대본을 적어 두는 것은 추천하지 않았다. 상황에 맞는 대응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통화 중 떠오르는 핵심 키워드 2, 3가지를 간략하게 메모하면서 다음에 이어 나갈 주제를 미리 생각해두다 보면 업무 전화도 쉽게 이해하며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기성세대 중 일부가 권위적인 방식으로 전화를 한다며 이런 태도는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박 교수는 “콜포비아를 겪고 있는 사람이 스스로 노력하는 일도 필요하지만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거나 전화 통화를 어려워하는 이들을 다그치는 건 지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지난해 9월 강원 삼척시 정라동에 완공된 ‘이사부독도기념관’은 베일에 싸인 듯 주변 경관 속에 숨어 있다. 512년 신라장군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기 위해 출항했다는 설이 있는 정라동 일대는 앞으로는 육향산, 뒤로는 폐조선소로 둘러싸여 있다. 삼척항과 고작 500m 떨어져 있지만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삼척시가 2017년 국제건축설계 공모를 냈을 때 과제는 2가지였다. ‘꽉 막힌 경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리고 ‘독도 기념관으로서의 역사성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22개국 72개 팀이 응모한 공모에서 뽑힌 심플렉스 건축사사무소의 설계도면은 심사위원단으로부터 “경관의 한계를 극복했을 뿐 아니라 육향산과의 관계를 시(詩)적으로 설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기념관에서 지난달 31일 만난 심플렉스 건축사사무소 송상헌 대표(45)와 박정환 대표(44·홍익대 건축학부 교수)는 “대지가 처한 상황을 한계가 아니라 땅의 역사라고 여겼다. 오히려 바다 경관을 직접적으로 끌어들일 수 없었기에 다른 방식의 바다를 상상할 수 있었다”고 했다. 기념관 입구 관광안내센터에서 한 층을 내려간 뒤 물이 흐르는 길목 옆 영토수호기념관으로 들어서면 전면 유리창 너머로 육향산 하부 암반과 잔잔한 1m 깊이의 못이 보인다. 육향산은 마치 바다 위에 떠오른 섬과 같은 모습이다. 4개 동으로 나뉜 건물에는 모두 육향산을 바라보는 전면 유리창이 설치돼 관람객들은 기념관 어디서든 섬의 이미지를 마주할 수 있다. 박 대표는 “신라 시대 육향산 일대는 섬이었다”며 “근대 들어 매립된 부지 일부를 약 4m가량 파서 과거의 경관을 되돌리는 한편 바다 위에 떠오른 독도의 이미지를 표현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땅의 역사를 경관 자체로 드러내고 싶었다”는 것이다. 건축이 설계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공사 중이던 2019년 초 관광안내센터 부지 주변에서 1520년 지어진 삼척포진성(三陟浦鎭城) 성벽 일부가 확인됐다. 추가 매장문화재 조사를 위해 1년 가까이 공사가 중단됐을 뿐 아니라 성벽이 출토된 곳에서 20m 이내에는 건물을 지을 수 없게 됐다. 이에 따라 못의 면적은 줄이고 건물 위치도 바꿔야 했다. 박 대표는 “처음 설계도와는 달라졌지만 이조차도 이 공간이 가지고 있는 역사의 일부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새로운 착상이 떠올랐다. ‘삼척포진성의 성벽처럼 돌을 쌓아 옹벽을 세우면 어떨까.’ 송 대표는 “삼척포진성 성벽 일부가 발견된 관광안내센터 앞에서 육향산 하부 경관까지 이어지는 길목에 ‘막돌 쌓기’ 방식으로 옹벽을 세워 공간의 역사성을 더했다”고 설명했다. 착공 5년 만에 완공된 기념관은 이르면 올 상반기 중 관람객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다. 건축가들은 이곳이 어떻게 쓰이길 바랄까. 송 대표는 “1만4115㎡(약 4270평)에 이르는 거대한 대지를 관광안내센터와 영토수호기념관, 독도체험공간, 복합휴게공간 등 4개 동으로 나눠 설계한 건 각각의 건물이 유연하게 다른 용도로 쓰이길 바랐기 때문”이라고 했다.“한 건물에서는 독도 전시, 다른 건물에서는 미술 전시, 광장에선 음악 공연, 휴게공간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역사 강연이 펼쳐지는 상상을 합니다. 복합문화공간이 부족한 삼척시에서 이곳이 다채로운 쓰임새로 채워지길 바랍니다.”(박 교수)삼척=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강원 삼척시 정라동 일대에 지난해 9월 완공된 ‘이사부독도기념관(이하 기념관)’은 베일에 싸인 듯 주변 경관 속에 숨어 있다. 512년 신라장군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기 위해 출항했다는 설이 있는 정라동 일대는 앞으로는 육향산, 뒤로는 폐조선소와 공장 건물로 둘러싸여 있다. 삼척항과 고작 500m 떨어져 있지만 바다를 볼 수 없는 구조다. 삼척시가 2017년 7월 기념관을 짓는 국제건축설계 공모를 냈을 때 건축가들에게는 두 가지 과제가 주어졌다. 이토록 꽉 막힌 경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리고 독도 기념관으로서의 역사적인 의미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22개국 72개 팀이 응모한 공모전에서 1등으로 뽑힌 심플렉스 건축사사무소의 설계도면은 심사위원장이었던 프랑스 건축가 로랑 살로몽으로부터 “경관의 한계를 극복했을 뿐 아니라 육향산과의 관계를 시(詩)적으로 설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달 31일 기념관에서 만난 심플렉스 건축사사무소 송상헌 대표(45)와 박정환 대표(44˙홍익대 건축학부 교수)는 “대지가 처한 상황을 한계라고 생각하지 않고 이조차도 땅의 역사라고 여겼다. 오히려 바다 경관을 직접적으로 가져올 수 없었기에 다른 방식의 바다를 상상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기념관 입구에 지어진 관광안내센터로 들어서서 계단 한 층을 내려가면 1m 깊이의 못이 나온다. 물이 흐르는 길목 바로 옆에 세워진 영토수호기념관으로 들어서면 전면에 난 유리창 너머로 깎아지른 육향산 하부 암반과 그 아래 잔잔한 못이 보인다. 육향산은 마치 바다 위 떠오른 섬과 같은 모습이다. 박 대표는 “육향산 일대는 신라장군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기 위해 출항했을 당시 섬이었던 곳”이라며 “매립된 부지를 약 4m가량 파 내려 과거의 경관으로 되돌리면서 바다 위에 떠오른 독도의 이미지를 표현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땅의 역사를 글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경관 자체로 드러내고 싶었다”는 것. 4개 동으로 나뉜 건축물 내부에 육향산을 바라보는 전면 유리창을 낸 것도 관람객들이 건물 내외부를 자유롭게 거닐며 어디서든 섬의 이미지를 마주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모든 일이 설계대로 순탄하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2019년 초 관광안내센터 부지 주변에서 1520년 지어진 삼척포진성(三陟浦鎭城) 성벽 일부가 확인됐다. 매장문화재가 발굴되면서 추가 조사를 위해 1년 가까이 공사가 중단됐을 뿐 아니라 매장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성벽이 출토된 곳에서 20m 이내에 건물을 지을 수 없게 됐다. 이에 따라 못의 면적이 줄고 건물 위치를 바꿔야 했다. 박 대표는 “처음 설계 의도와는 달라졌지만 이조차도 이 공간이 가지고 있는 역사의 일부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생각을 바꾸자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삼척포진성의 성벽처럼 돌을 쌓아 올린 옹벽을 세우면 어떨까.’ 송 대표는 “삼척포진성 성벽 일부가 발견된 관광안내센터 앞에서 육향산 하부 경관까지 이어지는 길목에 ‘막돌 쌓기’ 방식으로 옹벽을 세워 공간의 역사성을 더했다”고 설명했다. 설계도면을 수정하는 예상하지 못한 변수를 만났지만 이마저도 건축물에 역사 한 페이지를 더한 셈이다. 착공 5년 만에 지어진 기념관은 이제 건축가의 손을 떠나 이르면 올 상반기 중 관람객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다. 이들은 이곳이 어떻게 쓰이길 바랄까. 송 대표는 “우리가 14,115㎡에 이르는 거대한 대지를 관광안내센터와 영토수호기념관, 독도체험 공간, 복합휴게공간 등 4개 동으로 나뉜 건축물로 설계한 건 각각의 건물이 유연하게 다른 용도로 쓰이길 바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한 건물에서는 독도 전시, 다른 건물에서는 미술 전시, 광장에선 음악 공연, 휴게공간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역사 강연이 펼쳐지는 상상을 합니다. 복합문화공간이 부족한 삼척시에서 이곳이 다채로운 쓰임새로 채워지길 바라요.” (박 교수)삼척=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아버지의 손길을 거치면 죽은 동물이 살아나는 것 같았어요. 마치 아버지가 손끝으로 생명을 불어넣는 듯했죠.”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 자연문화재연구실의 오정우 연구원(39)은 어릴 적 박제사인 아버지 오동세 국립중앙과학관 자연사연구실 연구원(63)이 꼭 마술사 같았다고 했다. 아버지의 손길이 닿으면 죽었던 새가 다시 날개를 활짝 펼쳤다. 20대 중반이 된 정우 씨가 박제를 배우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딱 잘라 “하지 말라”고 했다. 당시까지도 사냥당한 동물을 불법으로 박제한다는 인식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부자(父子)가 함께 박제사로 일한다. 대전 서구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 자연문화재연구실에서 지난달 27일 만난 부자는 “우리는 한국 자연사의 한 페이지를 만들고 있다”며 웃었다. 오동세 씨는 40년 경력의 박제사로 2000년 도입된 국가공인 ‘문화재수리기능자 박제 및 표본 제작공’ 자격증을 1호로 취득했다. 2007년 만들어진 문화재청 천연기념물센터에서 2017년까지 박제사로 일했다. 지금은 정우 씨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문화재청의 유일한 박제사로 일하며 사고사하거나 자연사한 천연기념물 사체를 박제하고 있다. 문화재청 천연기념물센터 전시실과 수장고에 있는 천연기념물 표본 550여 점은 모두 이 부자가 만든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을 잘 만들어야 한다. 그럼 보이는 곳은 자연스럽게 모양이 나오게 돼 있다”고 가르쳤다. 동물 사체는 몸속의 지방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면 박제를 만들어도 얼마 못 가 표면이 변색되거나 봉제선 사이로 지방이 흘러나온다. 아들은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사체의 속을 말끔히 정리하는 데만 제작 시간의 3분의 2를 투입한다. 조류는 깃털 하나라도 틀어지면 날개가 가지런하게 접히지 않기에 하나하나 제 위치에 맞게 배치한다. 아버지는 또 “동물의 습성을 연구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장면을 연출하라”고 강조했다. 이날 연구실에는 정우 씨가 최근 건조 작업 중인 천연기념물 매 암수 한 쌍의 표본이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날개를 활짝 편 수컷이 오른발에 움켜쥔 먹이를 바로 아래 날아오는 암컷의 왼발에 건네는 역동적인 찰나를 재현한 것이다. “매는 수컷이 사냥한 먹이를 공중에서 암컷에게 발 사이로 전해주는 습성을 지녔어요. 박제로 동물의 생생한 습성을 보여주고 싶어서 실제 동물 사진을 붙여놓고 똑같이 만들곤 합니다.”(정우 씨) 박제사 한 명이 1년에 만들 수 있는 박제는 많아야 50개 정도다. 그래서 표본이 없는 종 위주로 먼저 작업을 한다. 최근에는 201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경주개 동경이 표본을 만들고 있다. 정우 씨는 “후세에 물려줘야 하는 역사 자료라는 생각으로 털끝 하나까지 정확하게 보여주려 노력한다”고 했다. 정우 씨는 울릉도와 독도 일대에 서식하는 흑비둘기 표본을 만든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는 2019년 6월 천연기념물 생태 환경을 살피기 위해 찾아간 울릉도에서 1968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흑비둘기 사체를 구했다. 냉동고 없는 배를 타는 동안 혹시라도 사체가 부패할까 봐 2박 3일 동안 사체를 얼음 팩으로 감싸 연구실까지 가져왔다. 문화재청에 흑비둘기 표본은 그가 만든 1점뿐이다. “일주일간 공들여 만든 표본의 깃털에서 오묘한 무지갯빛이 반짝였어요. ‘만약 멸종되더라도 아이들이 이 귀한 자연유산을 만날 수 있겠구나’ 싶더라고요. 그럴 때 보람을 느낍니다.”(정우 씨)대전=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아버지의 손길을 거치면 죽은 동물이 살아났어요. 마치 아버지가 손끝으로 생명을 불어넣는 듯했죠.” 어릴 적 아버지는 꼭 ‘마법사’ 같았다. 그의 손길이 닿으면 죽은 새가 다시 살아나 날개를 활짝 펼쳤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 자연문화재연구실에서 천연기념물의 사체를 박제하는 오정우 실무관(39)의 꿈은 아버지처럼 박제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 오동세 국립중앙과학관 자연사연구실 실무관(63)은 40년 박제 경력을 자랑할 뿐 아니라 2000년 국내 처음 도입된 ‘국가공인 문화재수리기능자 박제표본 자격증’을 1호로 취득한 전문 박제사로 손꼽힌다. 2007년 대전 서구에 문화재청 천연기념물센터가 건립될 때부터 2017년까지 문화재청에서 박제사로 근무했다. 2012년부터 그 자리를 아들이 잇고 있다. 국내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물의 사체를 박제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국가공인 자격증을 취득한 전문 박제사는 54명. 전문 학원이나 교육과정 없이 도제식으로 소수에게만 전해진다. 이마저도 기관에 소속돼 실제 활동하는 박제사는 10명 내외. 이들 부자야말로 천연기념물인 셈이다. 현재 문화재청 천연기념물센터 전시실과 수장고에 있는 천연기념물 표본 550여 점은 모두 이들 부자의 손끝에서 ‘다시 살아났다.’ 이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사고사하거나 자연사한 천연기념물 사체를 수거해 새 생명을 불어넣는다. 27일 대전 서구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 자연문화재연구실에서 만난 이들은 “우리는 한국 자연사의 한 페이지를 만들고 있다”며 웃었다. “아이들에게 한반도에 이런 천연기념물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일이잖아요. 동물의 털끝 하나까지 섬세하고 정확하게 보여줘야죠.” (아들 오 실무관) 아버지는 자신의 뒤를 이은 아들에게 늘 “겉모습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속을 처리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아버지 오 실무관은 “동물의 내장과 지방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면 얼마 못가 표면이 변색되거나 봉제선 사이로 지방이 흘러나오기 마련”이라고 강조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표본 하나를 만들 때마다 약 이틀 동안 사체의 속을 온전히 제거하고 동물의 깃털이나 털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데 쓴다. “동물의 습성을 관찰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장면을 연출하라”는 것 역시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수한 가르침이다. 이날 연구실에는 아들 오 실무관이 최근 작업하는 천연기념물 매 암수 한 쌍 표본이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날개를 활짝 편 수컷이 오른발에 움켜 쥔 먹이를 바로 아래 날아오는 암컷의 왼발에 건네는 역동적인 찰나를 재현한 것이다. “매는 수컷이 새끼에게 줄 먹이를 사냥해 암컷에게 공중에서 발 사이로 직접 전해주는 ‘공중급식’ 습성을 지녔어요. 살아 있는 동물의 습성을 보여주고 싶어서 실제 동물 사진을 붙여놓고 똑같이 만들곤 합니다.” (아들 오 실무관) 아버지에 뒤를 이어 문화재청의 유일한 박제사가 된 오 실무관은 “문화재청에 단 1점뿐인 흑비둘기 표본을 만든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2019년 6월 천연기념물 생태 환경을 둘러보기 위해 찾아간 울릉도에서 흑비둘기 사체를 발견한 것. 울릉도와 독도 일대에 서식하는 흑비둘기는 1968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초여름 가져간 짐도 버거웠지만 그가 차마 사체를 버려두고 올 수 없었던 이유다. “혹시라도 사체가 훼손될까 2박 3일 출장 내내 얼음 팩으로 돌돌 말아 이고 지고 연구실까지 가져왔어요. 일주일간 공들여 만든 표본의 깃털에서는 오묘한 무지갯빛이 반짝였습니다. 언젠가 멸종되더라도 아이들이 이 귀한 자연유산을 만날 수 있겠구나…. 고생한 보람이 있었죠.”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