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훈진

최훈진 기자

동아일보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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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건축디자인 기사를 씁니다. 많이 보고, 듣고, 묻고 쓰겠습니다.

choigiza@donga.com

취재분야

2024-08-28~2024-09-27
사회일반57%
교육17%
보건13%
정치일반7%
사건·범죄3%
기획3%
  • ‘파친코’ 감독 차기작 낙점된 ‘이 소설’…작가가 밝히는 집필 배경은

    “‘서로 사랑한 두 사람이 종교적인 이유로 세계관이 너무나도 다르다면 어떨까’란 질문에서 출발한 소설입니다.”2018년 컬트 종교와 테러를 다룬 첫 장편 ‘인센디어리스’(The incendiaries·문학과지성사·사진)로 미국 문단의 주목을 받은 한국계 미국인 권오경 작가는 11일 줌(화상회의)으로 진행된 온라인 기자 간담회에서 종교를 소재로 소설을 구상하게 된 배경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최근 한국어로도 번역 출간된 이 소설은 광신적 사이비 종교 ‘제자’(弟子)의 교주 ‘존 릴’, 어머니의 죽음 후 자책하며 방황하다 이 종교에 빠지는 ‘피비’, 신학대를 관둔 뒤 우연히 사랑하게 된 피비가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걸 막으려는 ‘윌’ 등 세 인물의 관점에서 쓴 이야기가 교차하며 전개된다.권 작가는 이를 통해 ‘영원한 삶’을 믿는 신앙인과 비신앙인이 지닌 세계관의 간극을 보여주고자 했다. “한때 저는 목사를 꿈꿨지만 17살 때쯤 책을 읽으며 내가 가진 관점만이 유일한 진리라는 신념을 유지하는 게 불가능해졌습니다. ‘우리 영원히 살 것’이라는 믿음에서 ‘우린 결국 흙, 먼지 알갱이, 우주가 될 것’이라는 새로운 세계관으로 넘어간 게 제게는 충격이자, 크나큰 슬픔이었습니다.” 신앙을 잃어 본 그의 경험은 주인공들의 심리적 묘사에 반영됐다. 윌이 “내가 그리스도에게 신물이 났던 까닭은 오히려 그분을 사랑하기를 멈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소설 속에서 권 작가과 같은 경험을 갖고 있는 ‘윌’은 극단주의 종교의 본질엔 안락과 구원을 찾아헤매는 인간의 결핍과 외로움이 있다는 걸 드러낸다. 10대 때부터 작가의 머릿속을 맴돈 이 작품은 세상에 나오기까지 1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그는 “아무 페이지나 펼쳤을 때 문장이 살아있고, 더 이상 가꾸고 싶은 생각이 안들 때 완성됐다고 느꼈다”며 “힘들 땐 세상에 혼자 남은 듯 공허하고 외로웠던 ‘17살의 나’를 떠올렸다”고 했다. 그의 전부였던 신앙은 문학으로 대체됐다. “문학은 제 마음과 정신이 있는 곳입니다. 이상적인 형태의 책이 존재한다고 믿고, 집필을 통해 그걸 찾아나가죠.” 소설 속엔 이산(디아스포라)문학적 요소도 곳곳에 묻어난다. 피비가 “나는 이민자잖아. 이민자들은 심리 상담을 믿지 않아. 내가 그런 걸 한다고 하면 주위 한국인들이 의지박약이라고 볼 거야. 다른 인종 집단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라고”라고 말하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세 살 때 미국으로 이주한 이민 2세인 권 작가는 현실적 이유로 예일대에 진학해 경제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일을 하라”는 부모님의 격려 덕분에 브루클린 칼리지에 예술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으며 글을 계속 써나갈 수 있었다. 그는 가장 큰 영향을 준 작가로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1882∼1941)를 꼽았다. 그는 “버지니아 울프의 저서들 중에 특정 문단은 족히 수 백 번을 읽었다”고 했다. 그는 한국계 미국인에게 황무지나 다름없던 영미권 문학에서 앞선 길을 개척한 이창래, 이민진 등 선배 작가들도 언급했다.인센디어리스는 이민진 작가의 소설 ‘파친코’를 제작한 코고나다 감독이 맡아 드라마로도 제작 중이다. 권 작가는 소설이 발표된 후 큰 호응을 얻고, 드라마화까지 결정된 과정을 말하며 “지난 5년간 한국 콘텐츠들은 아시아계 콘텐츠는 인기가 없다는 할리우드의 인식이 얼마나 틀렸는지 잘 증명해왔다”고 강조했다.7년째 집필 중인 그의 차기작은 발레리나와 사진작가, 두 여성의 야망과 욕구를 다룬 이야기다. 그는 “여성은 늘 누군가의 엄마, 딸, 자매 등이 되길 강요받았다”며 “왜 여성은 남성과 달리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에 대해선 장려 받지 못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져왔었다. 많은 분들이 공감하실 거라 생각한다”고 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 2023-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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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103세 철학자가 걸어온 신앙 여정

    ‘103세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어린 시절 “죽음을 무서워하기보다 운명으로 느꼈다”고 한다. 여전히 집필 활동을 활발하게 이어가는 저자이지만 병약한 몸으로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텨냈던 유소년기의 기억이 선명하다. 미래를 쉽게 장담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건강 상태는 저자가 신앙의 문으로 들어서는 한 배경이 됐다. 그는 열네 살 때 윤인구 목사(부산대 설립자·연세대 3대 총장)의 설교를 듣고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건강을 허락해 주시면, 내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하겠습니다.” 신앙인으로 살아온 여정을 기록한 이번 책에도 100년 넘는 세월을 산 철학자가 체득한 깨달음이 녹아 있다. 저자는 “인간다운 삶의 진리가 곧 복음”이라 여긴다. 그는 자신이 겪은 다양한 일화를 통해 진정한 삶의 가치를 전하고자 한다. 늙었다는 핑계로 ‘인생의 마라톤’을 중단하는 과오를 범해선 안 된다는 메시지가 와닿는다. 그는 일생에서 자신이 젊은 시절 못지않게 많은 일을 한 기간으로 98세 이후 4, 5년을 꼽는다. 노년의 시간을 풍요롭게 채울 수 있었던 그의 비결은 용기와 신념이었다. 인간애의 중요성도 환기시킨다. 저자는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교리와 교권이 아닌 인간애의 진리”라고 강조한다. 정치적 노선에 따라 인권에 대해 다른 태도를 보이는 이들은 따끔하게 비판한다.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 2023-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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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군 기록 수천편 분석… “위안소는 국가 범죄”

    “위안소 제도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저지른 구조적 가해 시스템이었습니다.” 최근 ‘진중일지로 본 일본군 위안소’(휴머니스트·사진)를 출간한 하종문 한신대 일본학과 교수(59)는 6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강조했다. 하 교수는 일본군의 중대 이상 부대가 공식 기록한 ‘진중일지’ 수천 편을 2007년부터 훑었다. 진중일지에는 중일전쟁 당시 상하이파견군 주도로 ‘위안소’가 설치되기 시작한 1937년부터 패전을 앞두고도 위안소를 잔류시킨 1945년까지 일본군이 위안소를 어떻게 운영했는지가 담겨 있다. 일본 육군성이 위안소 설치에 적극 관여한 증거 중 하나인 ‘육지밀수 제495 문서’도 하 교수의 분석을 통해 드러났다. 하 교수는 “일본군이 1937년 난징 점령을 앞두고 위안소 설치에 나섰는데, 신속히 설치하느라 상하이파견군에 대한 위생방독용 ‘삿쿠’(콘돔)를 본토에 100만 개를 보내달라고 요청한 문서는 1938년 사후에 작성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진중일지 속 위안소는 ‘외출’ ‘휴양’ ‘위안’ 등 단어와 연관지어 기록돼 있을 뿐 참혹한 인권 유린은 감춰져 있다. 군은 위안소를 이용하는 방법이나 금액 등도 체계화해 문서로 남겼다. “1. 하사관, 병의 입구는 남측 동문으로 한다. 2. 단가: 중국인 1엔, 조선인 1엔 50센, 일본인 2엔….” 위안소 운영은 부대의 점령지 주둔 및 경비 등 군의 작전과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었다. 하 교수는 “일본군은 새로 점령한 지역에는 주둔 규정을 만든 뒤 위안소 이용 방식이 포함된 내무 규정을 만들었다”면서 “우한을 점령한 1938년 11월에는 주둔지에 정착할 때까지 위안소를 이용하도록 권장하는 안내문도 확인했다”고 말했다.“위안소는 일본군 체계 안에 편입돼 있었고, 위안소 제도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저지른 범죄입니다.”(하 교수)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 2023-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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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왕계 저자-유학의 종장’이 불교 詩를?… “설총은 ‘유-불-도’ 三敎 융합사유한 학자”

    “진성(眞性) 밖까지 두루 통하였고/법신(法身) 속에서 공으로 비어 있네/사물에 접촉해도 본디 집착함이 없으니/소리 들려도 귀를 막으려 하지 않네.”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1748∼1807)의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에 수록된 ‘동시연기(東詩緣起)’에는 설총(655∼?)이 지었다는 5언시가 나온다. 1022년 문묘에 배향된 설총은 아버지 원효대사와 달리 유가적 사유를 펼친 유학의 종장으로 받들어져 왔다. 하지만 이 시는 연꽃처럼 소란한 환경, 온갖 욕망에도 마음의 고요함을 유지하는 경지를 강조하며 불교적 사유를 드러낸다. 설총이 통념과 달리 유학과 불교, 도교까지 융합하는 사유를 했던 학자라는 연구가 나왔다.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최근 학술지 ‘한문학보’ 제47집에 게재한 논문 ‘홍유후(弘儒侯) 설총 사상과 문학의 새로운 이해’에서 그간 학계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설총의 한시와 불교적 시를 검토한 뒤 “설총을 유학자로만 이해하는 것은 폭넓은 학자였던 그의 정체성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논문에 따르면 학계에서 719년 설총이 지은 글로 보고 있는 경주 감산사 아미타상 조상기(造像記·불상을 만든 사연이나 유래에 대한 기록)에는 발원자의 삶을 요약한 부분에서 “무착(無着·승려의 이름)의 참된 선종을 우러러 사모하여 때때로 유가론(瑜伽論)을 읽었고, 장주(莊周)의 현묘한 도를 함께 사랑하여 날마다 소요유(逍遙遊)를 읽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안 교수는 “설총은 불교에 깊은 식견을 지닌 지식인이었으며, 이 문장에서는 유가와 불교와 도교까지, 삼교(三敎)를 모두 융합하고자 한 지향을 엿볼 수 있다”고 밝혔다. 안 교수는 논문에서 설총이 변려문(騈儷文·4언구와 6언구를 기본으로 대구만으로 문장을 구성하는 한문 문체) 문장가였다고 강조했다. 변려문은 당대 주류적 문체로 격식을 갖춰 써야 하는 정식 문장에 사용됐다. 감산사 아미타상 조상기는 ‘불교의 발생은 서역에서 시작되어/포교의 등불이 동방에 전해져 이르렀다’처럼 문장의 구조가 대구를 이룬다. 대구적 표현은 설총의 또 다른 문장이 남아 있는 ‘석조미륵보살입상’에도 드러나 있다. 설총이 신문왕(재위 681∼692)과 독대해 대화한 내용을 기록한 작품인 ‘화왕계(花王戒)’에도 변려문 문체가 사용됐다고 안 교수는 분석했다. 안 교수는 “설총은 당시 주류 문체인 변려문으로 불교의 행사나 승려의 삶을 다룬 글을 썼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설총을 유학자로만 인식하게 된 건 김부식(1075∼1151)이 유교적 통치이념을 굳건히 하려는 목적으로 편찬한 삼국사기에서 군주를 권계한 신하의 대표적 사례로 설총을 제시했기 때문이라는 게 안 교수의 설명이다. 안 교수는 “김부식은 유가의 의식에 부합한 인물로 설총을 부각했고, 그 핵심 작품으로 군주를 권계한 화왕계를 인용한 것”이라고 했다. 이로 인해 설총이 순수한 유학자로 부각되면서 학자로서 펼친 사유의 다양성이 축소 해석됐다는 것이다.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 2023-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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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8독립선언, 中과 연대… 日서 유학생들 서로 영향”

    “‘2·8독립선언’은 104년 전 일본 도쿄에서 함께 공부한 한국과 중국, 대만의 젊은이들이 연대와 교류를 통해 세계를 상대로 발신한 메시지였습니다.” 이성시 일본 와세다대 문학부 교수(71·재일한인역사자료관장)는 2·8독립선언 104주년 기념일을 하루 앞둔 7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선언의 의의를 동아시아 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2·8독립선언은 1919년 2월 8일 도쿄의 재일 조선인 유학생 대표 11명 등 600여 명이 재일본조선기독교청년회 회관 강당에 모여 조선의 독립을 선포한 사건이다. 이 교수는 최근 출간된 ‘동아시아 속 2·8독립선언, 그 역사적 의의’(삼인·사진)의 감수를 맡았다. 재일한인역사자료관이 2019년 2·8독립선언 100주년을 기념해 도쿄에서 개최한 심포지엄에서 발표하고 토론한 내용을 한국어로 번역해 정리한 책이다. 책은 당시 조선인 유학생들이 1915년 ‘일본의 대 중국 21개조 요구’로 촉발된 중국인 유학생들의 대규모 반대 집회에 크게 고무됐고, 2·8독립선언이 1919년 중국 베이징에서 학생들 주도로 일어난 항일운동인 5·4운동으로 이어졌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 교수는 “조선인 유학생들은 신해혁명을 경험한 중국인 유학생 주도로 도쿄에서 결성된 신아동맹당에 2년간 참여했다”며 “선언서에는 당시 일본 사회에서 많이 쓰이던 용어인 개조(改造)도 여러 번 등장한다. 일본의 문화, 사회도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2·8독립선언은 100여 년 전 함께 미래를 공유하며 어두운 시절을 이겨낸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지금은 동아시아 각국의 젊은이들 간 교류가 거의 없어 안타깝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무엇을 위해 연대할 수 있을지 모색해야 합니다.”(이 교수)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 2023-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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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와이 1세대 이민자는 독립유공자… 사탕수수 농장서 번 돈 보태”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 속 인물인 방영근은 을사늑약 직전인 1904년 집안 빚 20원을 갚기 위해 ‘미지의 땅’ 하와이로 간다. 그리고 땡볕 아래 사탕수수 농장에서 고된 노동을 마친 저녁이면 아리랑을 부르며 눈물을 적신다. 이는 실제 1900년대 초 고국을 떠나 미국 하와이로 이주한 1세대 이민자들의 삶의 풍경이었다. 1903년 1월 13일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간 102명의 ‘방영근’들로 시작된 미주 한인 이민 역사가 올해로 120주년을 맞았다. 지난해부터 국가보훈처 후원으로 1세대 이민자들의 묘비를 탁본한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장(82)이 탁본 49점을 기증하기 위해 3일 충남 천안의 독립기념관을 찾았다. 이날 이 소장은 독립기념관 겨레의집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하와이 1세대 이민자 모두가 독립유공자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하와이 초기 이민자 약 7400명 중 미주 본토로 건너가거나 환국하지 않고 남은 이민자는 4000여 명. 이 소장에 따르면 전명운(1884∼1947), 장인환(1876∼1930) 의사가 재판에 넘겨지자 하와이 이민자 2018명이 기금 모금에 참여했다. 안중근 의사(1879∼1910)의 재판기금 모금에도 1595명이 힘을 모았다. 하지만 독립기념관에 따르면 하와이 초기 이민자 중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은 사람은 70여 명에 불과하다. 이 소장은 최근 3년 동안 1세대 이민자들의 묘비 조사에 주력했다. 묘비를 통해 1919년 대한부인구제회 결성에 참여한 백인숙 선생(1873∼1949) 등의 신원을 파악하기도 했다. 백 선생은 한인신문 등에 활동이 기록돼 있지만 인적 사항은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 소장은 “탁본에서 파악된 정보 등을 바탕으로 열두 분이 지난해 독립유공자로 추서됐다”고 했다. 이 소장은 1963년 미국으로 건너가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와 남캘리포니아대(USC)에서 각각 사회학·도시계획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은 뒤 30년간 도시계획 전문가로 활약했다. 2004년 잘되던 사업을 접고 이민사 연구에 발을 들였다. 이 소장은 “호랑이가 없어 토끼가 왕 노릇을 한 것”이라며 몸을 낮췄다. “이민사를 정리하고 기념하는 일을 하려면 이중 언어를 구사하면서 주, 시 정부가 돌아가는 구조를 꿰고 있어야 했어요. 도시계획 분야에서 쌓아온 인맥이 이민사 연구에 도움이 됐죠.” 이 소장은 1926년 이승만 전 대통령이 주도해 하와이 빅아일랜드에 조성했던 ‘동지촌’ 숯가마 사업 터 관리를 시급한 과제로 꼽았다. 동지촌은 사탕수수 농장을 떠난 한인 이민자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여의도 면적보다 넓은 약 960에이커(약 388만 ㎡)의 땅을 사 농사를 짓고 목장과 숯가마 등을 운영했던 곳이다. 국외 독립운동사적지로 지정은 됐지만 숯가마 내부 시설은 녹슬었고, 접근하는 길은 수풀이 우거진 상태다.“방치되다시피 한 사적지를 지금이라도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관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120년 전 이민자들이 역경과 고초 속에서도 고국의 독립을 지원했다는 사실이 잊히지 않을 겁니다.”(이 소장)천안=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 2023-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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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탕수수 농장서 번 돈…독립 운동에 보탠 하와이 이민자들을 기억해야”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 속 인물인 방영근은 일제 강점 전인 1904년 집안 빚 20원을 갚기 위해 ‘미지의 땅’ 하와이로 간다. 그는 땡볕 아래 사탕수수 농장에서 고된 노동을 마친 저녁이면 아리랑을 부르며 눈물을 적신다. 이는 실제 1900년대 초 고국을 떠나 하와이로 이주한 1세대 이민자들의 삶이었다. 1903년 1월 13일,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간 121명의 ‘방영근’들로 시작된 미주 한인 이민 역사가 올해로 120주년을 맞았다.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장(82)은 지난해부터 국가보훈처 후원으로 1세대 이민자들의 묘비 58점을 탁본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번 돈을 십시일반 모아 안중근 의사(1879~1910) 등을 지원한 무명의 독립 운동가를 발굴하는 사업의 일환이다. 탁본을 기증하기 위해 3일 충남 천안의 독립기념관을 찾은 이 소장은 독립기념관 겨레의집에서 진행된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하와이 1세대 이민자 모두가 독립유공자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하와이 초기 이민자 약 7400명 중 미주 본토로 건너가거나 환국하지 않고 하와이에 남은 이민자는 4000여 명. 이들 중 상당수는 1908~1910년 독립운동 기금 모금에 참여했다. 이 소장에 따르면 친일 대한제국 외교고문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1851~1908)를 살해한 전명운(1884~1947), 장인환 의사(1876~1930)와 안 의사의 재판기금 모금에 각각 2018명, 1595명이 힘을 모았다. 이 소장은 “힘들게 일하면서도 나라 잃은 설움을 대물림하지 않겠단 목표 아래 피땀 흘려 번 돈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자녀를 억척같이 가르친 덕분에 지금은 많은 한인들이 미국 사회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다”며 웃었다. 현 하와이주 부주지사인 실비아 장 루크(장은정)를 비롯해 한인 이민자의 후손들이 하와이주 대법원장, 호놀룰루시 경찰청장 등 요직을 지냈다. 이 소장은 1963년 미국으로 건너가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와 남캘리포니아대(USC)에서 각각 사회학·도시계획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딴 뒤 호놀룰루시 도시계획과 공무원 등을 거치며 30년간 도시계획 전문가로 활약했다. 2004년 잘 되던 사업을 접고 이민사 연구에 발을 들였다. 2003년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 사업 준비를 도맡았던 이 소장은 이듬해부터 각종 자료를 발굴하고 수집, 검증해 6대까지 이어져온 ‘코리안 디아스포리아’의 역사를 기록 중이다. 이 소장은 “호랑이가 없어 토끼가 왕 노릇을 한 것“이라며 몸을 낮췄다. “이민사를 정리하고 기념하는 일을 하려면 한국어와 영어 모두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주, 시 정부가 돌아가는 구조를 꿰고 있어야 했습니다. 도시계획 분야에서 제가 쌓아온 명성이 이민사 연구 활동에 도움이 됐죠.”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대면 활동이 중단된 최근 3년 동안은 1세대 이민자들의 묘비 명단 작성에 주력했다. 그는 “묘비에서 그간 찾기 어려웠던 고인의 출생지나 가족 관계 등 예상 밖의 많은 정보가 나와 공적이 확인된 백인숙, 오창익, 함삼여 등 12명이 독립유공자로 추서됐다”고 했다. 독립기념관에 따르면 하와이 초기 이민자 중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은 사람은 70여 명에 불과하다. 이 소장은 시급한 과제로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26년 하와이 빅아일랜드에 조성했던 ‘동지촌’ 숯가마 사업 터 관리를 꼽았다. 동지촌은 사탕수수 농장을 떠난 한인 이민자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여의도 면적보다 큰 약 388만㎡ 규모의 땅을 사들여 농사, 목장 및 숯가마 운영 등을 위해 만든 터전이다. 올해 보훈처 사업으로 독립운동 사적지 표지판이 세워질 예정이지만 보존 관리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는 상황이다.“사적지 보존을 통해 120년 전 미국으로 이민한 한인들이 갖은 고초와 역경을 겪으면서도 나라를 되찾겠다는 절박함으로 고국의 독립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잊혀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 소장)천안=최훈진기자 choigiza@donga.com}

    • 2023-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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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인정받지 못한 ‘황금손’ 그리고 빼앗긴 DNA 연구

    위대한 발견을 했지만 가려진 여성이 있다. ‘생명의 비밀’을 밝히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유대계 여성 과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1920∼1958)이다. 1953년 2월 28일은 인류사에 전환점이 된 순간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캐번디시물리학연구소의 생물학자 제임스 왓슨(95)과 물리학자 프랜시스 크릭(1916∼2004)이 DNA의 구조를 밝히면서 ‘생명은 무엇인가’라는 수수께끼의 핵심 문제 중 하나가 풀렸다. 이중나선 구조인 DNA의 자기 복제를 통해 유전정보가 전달된다는 사실이 명확해진 것이다. 미국 미시간대 의학사센터 소장인 저자는 1950년대 영국 케임브리지대를 배경으로 한 DNA 구조 발견의 역사를 다양한 사료에 근거해 되살렸다. 왓슨과 크릭, 물리학자 겸 생물학자인 모리스 윌킨스(1916∼2004) 등이 과학의 발전을 추구한 여정과 함께 그 과정에서 드러난 여성 차별, 연구윤리 위반을 충실히 파헤쳤다. 저자는 특히 젊은 남성 과학자들 틈 속에서 유일한 여성이자 자신의 공헌을 끝내 인정받지 못하고 난소암으로 37세에 요절한 프랭클린에게 주목했다. 프랭클린이 공부한 케임브리지대는 1869년까지 여학생을, 1871년까지는 유대인을 받지 않았다. 여학생들은 1947년까지도 케임브리지 대신 소속 칼리지의 학생으로 기록됐다. 수업 때는 교실 좌석의 맨 앞줄 등 분리된 구역에 앉아야 했다. 프랭클린은 이 같은 차별적 분위기 속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1950년 킹스칼리지 생물물리학 연구팀에 들어갔다. 그러나 같은 팀의 동료 남성 윌킨스는 프랭클린을 자신의 조수로 여기는 한편으로 외모를 평가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X선 사진에 드러난 수천 개의 회절 무늬를 일일이 분석하는 도구는 사람의 손과 눈, 계산자였다. 각 단계가 정확하지 않으면 오류가 발생해 잘못된 해답으로 이어졌다. 프랭클린은 자신의 ‘황금손’으로 DNA 구조를 규명하기 위해 느리지만 정확하게 X선 자료를 촬영해 나갔다. 왓슨과 크릭이 DNA 이중나선 구조 모형을 발표하자 영국 학계에서는 “DNA 구조를 훔친 것과 다름없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은 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왓슨과 크릭은 1953년 킹스칼리지를 떠나는 프랭클린의 ‘51번 X선 회절 사진’을 동의 없이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왓슨과 크릭의 발견은 당시 세계적 X선 결정학자였던 프랭클린의 이 사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프랭클린의 사진을 왓슨과 크릭에게 보여준 윌킨스는 1962년 DNA의 이중나선 구조와 기능을 밝혀낸 공로로 왓슨, 크릭과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저자는 난소암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프랭클린이 평생 감당했던 부담과 위험을 이렇게 묘사했다. “아주 작은 계산 실수라도 하면 그녀가 짠 실험이라는 직물에 큰 구멍이 생겼고, 남성 경쟁자들은 기꺼이 밟고 올라갔다. 이런 역학 관계는 프랭클린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가로막았다.”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 2023-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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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명의 비밀 파헤친 ‘황금손’…여성 과학자 프랭클린을 다시 보다

    위대한 발견을 했지만 가려진 여성이 있다. ‘생명의 비밀’을 밝히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유대계 여성 과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1920~1958)이다. 1953년 2월 28일은 인류사에 전환점이 된 순간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캐번디시물리학연구소의 생물학자 제임스 왓슨(95)과 물리학자 프랜시스 크릭(1916~2004)이 DNA의 구조를 밝히면서 ‘생명은 무엇인가’라는 수수께끼의 핵심 문제 중 하나가 풀렸다. 이중나선 구조인 DNA의 자기 복제를 통해 유전정보가 전달된다는 사실이 명확해진 것이다. 미국 미시간대 의학사센터 소장인 하워드 마르켈은 저서 ‘생명의 비밀’(늘봄)에서 1950년대 영국 케임브리지대를 배경으로 한 DNA 구조 발견의 역사를 다양한 사료에 근거해 되살렸다. 왓슨과 크릭, 물리학자 겸 생물학자인 모리스 윌킨스(1916~2004) 등이 과학의 발전을 추구한 여정과 함께 그 과정에서 드러난 여성 차별, 연구윤리 위반을 충실히 파헤쳤다. 저자는 특히 젊은 남성 과학자들 틈 속에서 유일한 여성이자 자신의 공헌을 끝내 인정받지 못하고 난소암으로 37세에 요절한 프랭클린에게 주목했다. 프랭클린이 공부한 케임브리지대는 1869년까지 여학생을, 1871년까지는 유대인을 받지 않았다. 여학생들은 1947년까지도 케임브리지 대신 소속 칼리지의 학생으로 기록됐다. 수업 때는 교실 좌석의 맨 앞줄 등 분리된 구역에 앉아야 했다. 프랭클린은 이 같은 차별적 분위기 속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1950년 킹스칼리지 생물물리학 연구팀에 들어갔다. 그러나 같은 팀의 동료 남성 윌킨스는 프랭클린을 자신의 조수로 여기는 한편으로 외모를 평가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X선 사진에 드러난 수천 개의 회절 무늬를 일일이 분석하는 도구는 사람의 손과 눈, 계산자였다. 각 단계가 정확하지 않으면 오류가 발생해 잘못된 해답으로 이어졌다. 프랭클린은 자신의 ‘황금손’으로 DNA 구조를 규명하기 위해 느리지만 정확하게 X선 자료를 촬영해 나갔다. 왓슨과 크릭이 DNA 이중나선 구조 모형을 발표하자 영국 학계에서는 “DNA 구조를 훔친 것과 다름없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은 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왓슨과 크릭은 1953년 킹스칼리지를 떠나는 프랭클린의 ‘51번 X선 회절 사진’을 동의 없이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왓슨과 크릭의 발견은 당시 세계적 X선 결정학자였던 프랭클린의 이 사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프랭클린의 사진을 왓슨과 크릭에게 보여준 윌킨스는 1962년 DNA의 이중나선 구조와 기능을 밝혀낸 공로로 왓슨, 크릭과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저자는 난소암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프랭클린이 평생 감당했던 부담과 위험을 이렇게 묘사했다. “아주 작은 계산 실수라도 하면 그녀가 짠 실험이라는 직물에 큰 구멍이 생겼고, 남성 경쟁자들은 기꺼이 밟고 올라갔다. 이런 역학 관계는 프랭클린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가로막았다.”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 2023-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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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얼굴 모르는 고조부모 제사 지내는건 시대착오”

    ‘얼굴도 모르는 고조부모까지 기제사를 올려야 할까.’ 전통 기록유산을 연구하는 경북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이 “4대 봉사(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의 기제사를 모시는 것)는 시대착오적이라는 의견이 많다”고 밝히면서 2일 논쟁이 이어졌다. 진흥원은 전날 ‘제례문화에 대한 오해와 편견’ 자료를 내고 “조선시대에도 4대 봉사가 제도적으로 명시된 적은 없었다”고 밝혔다. 진흥원에 따르면 1484년 편찬된 법전 경국대전에는 “6품 이상 관료는 3대까지, 7품 이하는 2대까지, 서민은 부모 제사만을 지낸다”고만 돼 있다. 그러나 ‘주자가례’를 신봉하는 유학자들에 의해 4대 봉사가 보급됐다. 진흥원은 “조상과 생전 주고받은 정서적 추억이 풍부할수록 추모의 심정은 간절해진다”며 “조상 제사의 대상은 (부모, 조부모 등) ‘대면 조상’까지로 한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라고 강조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얼굴도 모르는 분들의 제사를 지낼 때마다 ‘왜 해야 하나’ 싶었다”, “살아계신 부모에게 잘하는 것도 힘든 시대다”라며 진흥원의 의견에 찬성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조상에 대한 존경의 차원에서 고조부모까지 제사를 모셔야 한다”는 의견도 일부 나왔다.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 2023-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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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얼굴도 모르는 고조부모 제사상 차리기?…“시대착오적” vs “존경 차원”

    ‘얼굴도 모르는 고조부모까지 기제사를 올려야 할까’. 전통 기록유산을 연구하는 경북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이 “4대봉사(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의 기제사를 모시는 것)는 시대착오적이라는 의견이 많다”고 밝히면서 2일 논쟁이 이어졌다. 진흥원은 전날 ‘제례문화에 대한 오해와 편견’ 자료를 내고 “조선시대에도 4대봉사가 제도적으로 명시된 적은 없었다”고 밝혔다. 진흥원에 따르면 1484년 편찬된 법전 경국대전에는 “6품 이상 관료는 3대까지, 7품 이하는 2대까지, 서민은 부모 제사만을 지낸다”고만 돼 있다. 그러나 ‘주자가례’를 신봉하는 유학자들에 의해 4대 봉사가 보급됐다.진흥원은 “조상과 생전 주고받은 정서적 추억이 풍부할수록 추모의 심정은 간절해진다”며 “조상 제사의 대상은 (부모, 조부모 등) ‘대면 조상’까지로 한정시키는 것이 합리적이다”라고 강조했다. 과거에는 조혼(早婚)으로 4대가 함께 사는 경우가 흔했기에 4대봉사가 당연시됐지만 오늘날은 증조부모를 대면하는 경우도 드문데,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는 제사를 지내는 것은 필요치 않다는 얘기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얼굴도 모르는 분들의 제사를 지낼 때마다 ‘왜 해야 하나’ 싶었다”, “살아계신 부모에게 잘하는 것도 힘든 시대다”라며 진흥원의 의견에 찬성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조상에 대한 존경의 차원에서 고조부모까지 제사를 모셔야 한다”는 의견도 일부 나왔다.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 2023-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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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美라는 우산 사라지면… 타격 가장 큰 곳은 동아시아”

    1944년 7월 전후(戰後) 세계 금융질서를 세우기 위한 회의가 미국 북동부 뉴햄프셔주의 작은 도시 브레턴우즈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서 달러가 기축통화(국제 간 결제나 금융거래의 기본 화폐)로 받아들여지면서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경제 질서와 안보 체제가 구축됐다. 미국은 연합국 사이의 갈등을 막았을 뿐 아니라 세계 화물운송의 안전을 자국 내 상거래처럼 보호했다. 이 덕에 어느 대륙에 있는 어느 나라든 세계 각지의 대양에 접근이 가능해졌다. 장거리 해상운송의 안전성이 담보되자 운송비는 저렴해졌고, 이는 세계의 분업화를 촉진했다. 군사 경쟁을 벌이던 제국들은 경제적인 상호 협력 관계가 됐고, 새로운 체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경제 성장과 안정을 가져왔다. 이른바 ‘75년 황금시대’다. 하지만 냉전 시대 미국이 소련을 압박하기 위해 설계한 이 같은 체제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미국 안보전략 싱크탱크 ‘스트랫포’의 분석 담당 부사장을 지낸 저자도 그중 한 명이다. 지정학과 인구통계학에 기반해 국가의 부상과 몰락을 예측해온 지정학 전략가인 그는 전작인 ‘셰일 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2017년),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2018년), ‘각자도생의 세계와 지정학’(2021년) 등에서 “미국이 구축해온 세계질서를 직접 허물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이번 책에서는 미국이라는 우산이 사라진 세계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질지 구체적으로 예측했다. 또 인구 감소 위기와 맞물려 붕괴의 최전선에 놓일 나라들을 평가했다. 미국의 역할이 사라지면 각국은 자국이 포함된 공급사슬과 자국 시장을 보호하는 데 중점을 두게 될 것이라는 게 저자의 전망이다. 이 같은 세계에서 가장 불리한 지역으로 저자는 동아시아를 지목한다. 손해가 가장 큰 건 중국이다. 에너지에 대한 접근과 원자재 수입 등이 가로막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중국의 인구 고령화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진행 중이다. 무역 해상로의 안전을 미국에 의존하면서 제조업 공급사슬의 수혜를 봐 왔던 한국과 대만도 타격이 작지 않을 것으로 전망한다. 한국의 경우 출산율 하락이 일본보다 20년 늦게 시작됐지만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어 문제가 더욱 크다. 심지어 저자는 ‘기근의 시대’가 돌아올지 모른다고 경고한다. 농업에 필요한 연료, 비료 등 모든 공급 체계를 갖춘 나라는 미국과 프랑스, 캐나다뿐이다. 미국 주도 안보 체제의 와해와 맞물려 인구 감소도 인류가 직면한 심각한 위기다. 2020년대 세계적으로 근로 연령층이 대거 은퇴하지만 이들을 대신할 청년층은 턱없이 적다. 이 같은 인구 구조의 붕괴는 세계 경제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저자는 “브레턴우즈 협정이 가속화한 전 세계의 도시화, 문명화가 출산율을 저하시켰기 때문”이라며 유례없는 경제적 번영이 인구구조 붕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고 지적한다.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 2023-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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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주도 ‘75년 황금 시대’의 종말… “해상 무역 수혜 본 한국 타격 클 것”

    1944년 7월 전후(戰後) 세계 금융질서를 세우기 위한 회의가 미국 북동부 뉴햄프셔주의 작은 도시 브레튼 우즈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서 달러가 기축통화(국제 간 결제나 금융거래의 기본 화폐)로 받아들여지면서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경제 질서와 안보 체제가 구축됐다. 미국은 연합국 사이의 갈등을 막았을 뿐 아니라 세계 화물운송의 안전을 자국 내 상거래처럼 보호했다. 이 덕에 어느 대륙에 있는 어느 나라든 세계 각지의 대양에 접근이 가능해졌다. 장거리 해상운송의 안전성이 담보되자 운송비는 저렴해졌고, 이는 세계의 분업화를 촉진했다. 군사 경쟁을 벌이던 제국들은 경제적인 상호 협력 관계가 됐고, 새로운 체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동안 경제 성장과 안정을 가져왔다. 이른바 ‘75년 황금시대’다. 하지만 냉전 시대 미국이 소련을 압박하기 위해 설계한 이같은 체제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미국 안보전략 싱크탱크 ‘스트랫포’의 분석 담당 부사장을 지낸 저자인 피터 자이한도 그 중 하나다. 지정학과 인구통계학에 기반해 국가의 부상과 몰락을 예측해온 지정학 전략가인 그는 전작인 ‘셰일 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2017년),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2018년), ‘각자 도생의 세계와 지정학’(2021년) 등에서 “미국이 구축해온 세계질서를 직접 허물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최근 펴낸 네 번째 저서 ‘붕괴하는 세계와 인구학’(김앤김북스)에서는 미국이라는 우산이 사라진 세계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질지 구체적으로 예측했다. 또 인구 감소 위기와 맞물려 붕괴의 최전선에 놓일 나라들을 평가했다. 미국의 역할이 사라지면 각국은 자국이 포함된 공급사슬과 자국 시장을 보호하는 데 중점을 두게 될 것이라는 게 저자의 전망이다. 이같은 세계에서 가장 불리한 지역으로 저자는 동아시아를 지목한다. 손해가 가장 큰 건 중국이다. 에너지에 대한 접근과 원자재 수입 등이 가로막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중국의 인구 고령화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진행 중이다. 무역 해상로의 안전을 미국에 의존하면서 제조업 공급사슬의 수혜를 봐 왔던 한국과 대만도 타격이 적지 않을 것으로 전망한다. 한국의 경우 출산율 하락이 일본보다 20년 늦게 시작됐지만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어 문제가 더욱 크다. 심지어 저자는 ‘기근의 시대’가 돌아올지 모른다고 경고한다. 농업에 필요한 연료, 비료 등 모든 공급 체계를 갖춘 나라는 미국과 프랑스, 캐나다뿐이다. 미국 주도 안보 체제의 와해와 맞물려 인구 감소도 인류가 직면한 심각한 위기다. 2020년대 세계적으로 근로 연령층이 대거 은퇴하지만 이들을 대신할 청년층은 턱없이 적다. 이같은 인구 구조의 붕괴는 세계 경제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저자는 “브레튼 우즈 협정이 가속화한 전 세계의 도시화, 문명화가 출산율을 저하시켰기 때문”이라며 유례없는 경제적 번영이 인구구조 붕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고 지적한다.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 2023-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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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월 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 100주년 학술대회

    올해 학술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 100주년 학술대회를 비롯해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하는 학술 행사가 여럿 예정돼 있다. 국립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은 1923년 1월 3일부터 6월 7일까지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임정 국민대표회의를 기념하는 학술대회를 6월 개최할 예정이다. 국민대표회의는 71개 독립운동 단체의 대표 125명이 참석한 가운데 총 74차례에 걸쳐 열렸다. 임정을 해체하고 새로 조직해야 한다는 창조파와 그대로 유지하면서 개편, 보완해야 한다고 주장한 개조파로 나뉘었다. 양측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면서 끝내 합의가 무산되고 말았다. 올해는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關東)대지진 당시 일본의 자경단원, 경관, 군인 등이 조선인 수천 명을 학살한 지 100년 되는 해다. 당시 혼란한 상황 속에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고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급속히 퍼졌다. 동북아역사재단과 독립기념관, 한국학중앙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 등 4개 기관은 8월 ‘관동대지진 100주기 국제학술회의’를 공동으로 연다. 광복 78주년과 카이로 선언 8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기획전 ‘영국과 함께한 독립운동’(가제)과 관련한 학술행사도 8월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열린다. 미국과 영국, 중국이 1943년 11월 27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발표한 공동 선언문에는 ‘한민족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내용이 담겼다. 카이로 회의는 한국의 독립이 결의된 첫 국제회의였지만 독립 시점을 명확히 하지 않은 탓에 신탁통치 관련 갈등으로 이어졌다.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 2023-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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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편의 서재는 ‘치외법권 지대’… 다시 살라면 못살거 같아^^ ”

    《“노상 글을 썼던 이 선생(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에게는 서재가 필요했어요. 난 그의 서재를 치외법권 지대처럼 일상 세계와 격리시켜 주려고 기를 썼지요.” 강인숙 영인문학관장(90·건국대 명예교수)이 최근 자전적 에세이 ‘글로 지은 집’(열림원·사진)을 펴냈다. 다음 달 26일은 남편 고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1934∼2022)의 1주기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도 ‘치외법권 지대’였던 서재에서 16일 만난 강 관장은 “(국립중앙도서관 측이) 1년 가까이 서재를 정리했지만 아직도 정리할 자료가 많이 남았다”며“올가을쯤엔 (이 전 장관의 바람대로) 서재를 일반에 공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서재는 이 전 장관이 생전 쓰던 모습 그대로였다. 책장에는 책 6400여 권이 빼곡히 꽂혀 있었고, 책상에는 자료 여러 개를 동시에 보기 위해 사용하던 컴퓨터 7대가 마지막까지 그의 삶을 기록한 카메라와 함께 놓여 있었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동기로 만나 해로한 동갑내기 부부의 숙원은 방해받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는 서재를 갖는 것이었다. 문학 평론을 쓰면서 여러 대학에 강의를 다녔던 두 사람에게 서재는 ‘창작의 자궁’이자, 세 자녀를 길러낼 수 있게 해준 생업의 현장이었다. 이 전 장관은 2015년 대장암이 발병했고, 수술을 받은 뒤 항암치료 대신 집필을 택했다. “이 양반이 병이 나니까 그때부터 쓸 게 많다고 새벽 2시까지 서재에서 매일 글을 썼어요. 빨리빨리 다 쓰고 가야 한다고. 나는 글을 쓰고 있다가 2시간에 한 번씩 올라가 상태를 살폈죠.” 그렇게 부부가 각자 쓴 책이 이 전 장관 사후 발간된 유작 ‘한국인 이야기’ 남은 시리즈와 강 관장의 이번 책 ‘글로 지은 집’이다. ‘글로 지은 집’은 부제 ‘구순 동갑내기 이어령·강인숙의 주택 연대기’처럼 부부가 안정된 보금자리를 마련해 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부부는 셋집을 전전하다가 결혼 4년 만에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에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했다. 피란민이던 강 관장과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이 컸던 이 전 장관에게 내 집 마련은 “‘간장 종지만 한 자유’(박완서 단편소설 ‘조그만 체험기’에서 인용)가 우리를 정신적으로 해방시켜 준” 의미였다. 1963년 서울 중구 신당동의 적산가옥을 구입해 이사하자 문단에서는 ‘이어령이 베스트셀러를 내 대궐 같은 집을 샀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강 관장은 “건평 24평에 불과했다”며 “모로 봐도 호화 주택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총 일곱 번의 이사를 거쳐 1974년 산골짜기 외딴섬이던 평창동에 지은 집은 부부의 영원한 보금자리가 됐다. “바위산에 백설이 쌓여 천지가 거룩한 신선계” 같았던 평창동의 자연을 품은 집은 자녀들의 출가 후 2008년 이어령의 ‘영’, 강인숙의 ‘인’을 딴 문학관으로 새로 태어났다. 부부의 자택 역할도 이어갔다. 강 관장은 집을 연결고리로 책을 쓴 이유에 대해 “농경사회였던 우리나라에선 집이 제일 중요하다. 인간과 정착공간의 관계를 생각해 본 것”이라며 “아이들의 탄생, 이어령 씨와 나의 사회생활 진척도, 평론적 글쓰기, 서재의 함수관계 등 모든 게 집에 담겨 있지 않나 한다”고 했다. 강 관장이 그간 책에 담기를 꺼려 왔던 이 전 장관과의 일화가 이번 책에는 심심찮게 등장한다. “이 전 장관은 이 책 원고를 읽고는 아무 말씀 없으셨다”고 한다. “원래 서로의 글에 관해 얘기하지 않아요. 집에만 오면 애 셋이 달려들어 ‘내 얘기 좀 들어 달라’고 아우성치고 잠들면 이 선생은 또 작업을 하셔야 하니까. 나는 리얼리즘, 이어령 씨는 수사학·기호학 전공이니까 영역도 다르죠.” 생전 책 130여 권을 쓴 ‘시대의 지성’ 이 전 장관과 64년을 함께한 삶은 어땠을까. “내 작업이 이 사람(남편)을 해쳐선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어요. 평론을 쓰려면 큰 방에 책을 줄 세워 놓고 뽑아 쓰는 방식으로 주석을 달았는데, 저는 유독 남편이나 애들이 오면 하던 일을 숨기느라 급급했죠. 가족들이 부담을 느낄까 봐서요.” 강 관장은 “그럴 만한 분이었으니까 이 선생 (원고 교정 등) 심부름한 것도 후회는 안 한다”면서도 “(같은) 인생을 다시 살라면 못 살 것 같다”고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글로 지은 집’은 평창동 집에서 생을 마감한 이 전 장관과 같은 마지막 바람으로 책을 끝맺는다. “이 집에서 숨을 거두고 싶다. 이왕이면 송홧가루가 시폰 숄처럼 공중에서 하느작거리는 계절이면 좋겠다.”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 2023-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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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어령 선생과의 결혼? 힘들었지만 후회 없어…다시 하라면 못한다”

    “노상 글을 써야 해서 그에게는 서재가 필요했다. 내가 그의 서재를 치외법권 지대처럼 일상 세계와 격리시키려고 기를 쓰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강인숙(90) 영인문학관장(건국대 명예교수)이 다음달 26일 남편 고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1934~2022)의 1주기를 앞두고 최근 자전적 에세이집 ‘글로 지은 집’(열림원)을 펴냈다. 강 관장의 표현대로 한 가정의 ‘치외법권 지대’였던 고인의 서울 종로구 평창동 집 서재에서 16일 강 관장을 만났다. 그는 “1년 가까이 이 선생 서재의 디지털 아카이빙(기록보관) 작업을 했지만 아직도 많이 남았다”며 “올 가을쯤엔 (이 전 장관의 바람대로)서재를 일반에 공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 전 장관의 서재는 그가 생전 사용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6400권이 빼곡히 꽂힌 책장, 7대의 컴퓨터가 놓여져 있는 널따란 책상, 마지막까지 그의 삶을 기록해준 카메라까지. 서울대 국문과 동기로 만나 해로한 동갑내기 이어령·강인숙 부부의 숙원은 방해받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는 온전한 서재를 갖는 것이었다. 평론을 쓰면서 여러 대학의 강의를 나가야 했던 두 사람에게 서재는 창작의 자궁이자, 세 자녀를 길러낼 수 있게 해준 생업의 현장이다. 생전 130여 권의 책을 쓴 ‘시대의 지성’ 이 전 장관과 64년을 함께한 삶은 어땠을까. 강 관장은 웃으면서 “대단히 힘들었지만 후회는 없다”면서도 “다시 살라면 못 살 것 같다”며 손사래를 쳤다. “결혼 생활은 학교거든요. 인간에 대해 알게 되고, 부모가 되면 또 얼마나 사람이 돼요? 아이들이 부모를 많이 가르치잖아요. (원고 교정 등) 이 선생 심부름한 것도 후회 안하고, 그럴만한 분이었으니까. 근데 그러면서 내 일을 하려니까 힘들었죠. (이 선생은) 완벽주의자라 누굴 칭찬하는 법이 없었어요. 자기가 한 일도 만족하지 못하고.” 강 관장은 책에서 남편 이야기하길 꺼려 왔다. 하지만 이번 책은 ‘구순 동갑내기 이어령·강인숙의 주택 연대기’라는 부제처럼 부부가 안정된 보금자리를 마련해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어 이 전 장관과의 일화나 가족사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이 선생 이야기가 나오니까 본인에게 모니터링을 시켰죠. 사후에 내기로 합의를 봤고요. 읽고는 아무 말씀 없으셨어요. 원래는 서로의 글을 읽거나 얘기하지 않아요. 집에만 오면 애 셋이 달려들어 ‘내 얘기 좀 들어 달라’고 아우성 치고 잠들면 이 선생은 또 작업을 하셔야 하니까. 그리고 나는 리얼리즘, 이어령 씨는 수사학·기호학 전공이니까 영역도 다르죠.” 그렇게 ‘크로스체크’까지 마쳤는데도 2020년 마무리된 이 책은 발간까지 3년이 걸렸다. 강 관장은 “이 선생이 (투병으로 인해) 책을 못내는 기간이 오니 다 쓴 책도 차마 내질 못했다”고 했다. 이 전 장관의 투병 사실은 2019년 공개됐지만, 대장암 발병은 2015년부터였다. “이 양반이 병이 나니까 그때부터 쓸게 많다고 새벽 2시까지 서재에서 매일 글을 썼어요. 빨리 빨리 다 쓰고 가야 한다고. 나는 글을 쓰고 있다가 2시간에 한 번씩 올라와 상태를 살폈죠.” 이 전 장관이 수술을 받은 뒤 항암치료 대신 집필을 택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부부가 각자 써낸 책이 이 전 장관 사후 발간된 첫 유작 ‘한국인 이야기’와 강 장관의 이번 책 ‘글로 지은 집’이다. 결혼 후 삶을 정리하는 글을 쓰는 데 집을 ‘연결고리’로 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농경사회였던 우리나라에선 집이 제일 중요하죠. 인간과 정착공간의 관계를 생각해 본거예요. 아이들의 탄생, 이어령 씨와 나의 사회생활 진척도, 평론적 글쓰기, 서재의 함수관계 등 모든 게 담겨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피란민이던 강 관장과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이 컸던 이 전 장관에게 있어 결혼 4년 만의 첫 내 집 마련은 “‘간장 종지만한 자유’(박완서 소설 ‘조그만 체험기’에서 인용)가 우리를 정신적으로 해방시켜준” 적지 않은 의미였다. 이후 일곱 번의 이사를 거쳐 1974년 산골짜기 외딴섬이던 평창동에 지은 집은 부부의 영원한 보금자리가 됐다. “바위산에 백설이 쌓여 천지가 거룩한 신선계” 같았던 평창동의 자연을 품은 집은 자녀들의 출가 후 2008년 이어령의 ‘영’ 강인숙의 ‘인’을 딴 문학관으로 새로 태어났다. “그(이어령)의 시간을 아껴주기 위해…” 강 관장은 허덕허덕 바빴다고 했다. “내 작업이 이 사람(이어령)을 해쳐선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어요. 당시엔 인터넷이 없으니 남편이나 저나 평론을 쓰려면 큰 방에 책을 줄 세워 놓고 뽑아 쓰는 방식으로 ‘푸트노트’(주석) 다는 작업을 했는데, 저만 유독 남편이나 애들이 오면 하던 일을 숨기느라 급급했죠. 제가 일하는 걸 보면 가족들이 부담을 느낄까봐서요.” 늘 그에게 1순위였던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강 관장은 어쩌다 전화 한 통 오지 않는 날엔 ‘자식도 없고, 돈도 없는 외로운 노인의 고독’을 떠올린다고 했다. “혼자 살고 싶은 그들에게 응원가를 불러주고 싶어요. 자유로우려면 외로운 건 참아야죠. 요즘은 익숙해져 괜찮아요. 1년의 학습기간이 있었으니까요.” 강 관장은 평창동 집에서 생을 마감한 이 전 장관과 같은 마지막 바람을 적으며 책을 끝맺는다. “우리는 이 집에서 숨을 거두고 싶다. 이왕이면 송홧가루가 시폰 숄처럼 공중에서 하느작거리는 계절이면 좋겠다.”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 2023-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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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친구가 세상을 떠나면 코끼리도 장례를 치른다고?

    동물도 죽음을 슬퍼한다. 적지 않은 종이 가까운 사이였던 동물이 세상을 떠나면 꽤 오랫동안 곁을 지킨다. 일종의 애도 의례다. 얼룩말은 죽은 얼룩말의 사체 곁에 한동안 꼼짝 않고 머문다. 코끼리는 죽은 코끼리의 몸에 흙을 뿌려 매장하고 사체가 있는 장소로 반복해 되돌아온다. 코끼리의 ‘장례’인 셈이다. 죽음을 목격한 원숭이는 상실감에 빠져 평소보다 더 많은 상대와 털 고르기를 한다.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애도를 통해 스스로를 치유하는 것이다. 30년 이상 세계 각지에서 코끼리를 연구한 미국 행동생태학자인 저자는 코끼리를 비롯해 다양한 야생동물의 인사와 놀이, 애도, 선물 등 10가지 의례 행동을 소개한다. 그리고 인간과 동물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이들 의례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상기시킨다. 인간이 놀이를 통해 배우듯 동물도 놀며 생존과 번식 기술을 깨친다. 남아프리카의 나미비아 사막에서 연구하던 저자는 어느 날 눈을 뜨자마자 새끼 사자들이 암사자와 함께 활기차게 노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들은 사냥 연습을 하듯 서로 거칠게 부딪치고 머리와 목을 물며 장난을 쳤다. 기린도 목을 서로 감싸 상대의 옆구리를 들이박는 ‘네킹’이란 싸움 놀이를 한다. 목을 얼마나 친밀하게 감싸느냐는 기린의 짝짓기를 결정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선물은 동물에게도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갈라파고스제도 에스파뇰라섬의 멸종위기종인 코끼리거북은 구애할 때 상대에게 야생 토마토를 선물한다. 코끼리거북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이기 때문이다. 푸른발부비새 수컷은 둥지를 지을 때 필요한 나뭇가지나 돌을 암컷에게 건네며 구애한다. 환경이 바뀌어 더이상 둥지가 아닌 맨땅에 알을 낳는데도 조상의 습성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공동체 생활을 위해 인사가 왜 중요한지, 집단의 힘을 발휘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가 무얼 의미하는지 등을 다채로운 동물 행동 사례와 함께 제시한다. 저자가 찍은 생생한 사진도 풍성하게 실렸다. 저자는 인간과 동물, 자연은 모두 하나로 연결돼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의례하는 삶’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기술 발달과 사회적 거리 두기로 서로 단절된 현대인이 다시 단단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관계 회복에 필수적인 의례의 가치를 되새겨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판타지 소설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한 영국 작가 겸 영문학자 C S 루이스(1898∼1963)가 ‘실낙원’ 서문에 남긴 말을 인용하며 의례의 의미를 강조한다. “의례에 완전히 빠져들 수 있다면 우리는 의례에 대해 더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의례를 치르는 목적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고는 이 기회가 아니었다면 거기에 집중하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는다.”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 2023-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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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은 시집 낸 실천문학사 “깊이 사과… 시집 공급 중단”

    성추행 의혹으로 활동을 중단했던 고은 시인(90·사진)이 최근 사과 없이 신작 시집 ‘무의 노래’와 캐나다 시인과의 대담집 ‘고은과의 대화’를 출간해 논란을 빚은 가운데, 출판사 실천문학사가 20일 사과문을 내고 시집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고 시인은 여전히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문학계 안팎에선 고 시인의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윤한룡 실천문학사 대표는 20일 입장문을 통해 “이번 사태로 인해 심려를 끼쳐드린 분들께 출판사 대표로서 깊이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시집은 17일부터 공급을 중단했으며 계간지 ‘실천문학’도 이미 원고 청탁이 끝난 2023년 봄호까지만 정상 발간하고, 자숙의 의미로 올해 말까지 휴간하겠다”고 했다. 다만 윤 대표는 “국내 모든 서점의 고은 시인 시집 주문에 불응해 공급하지 않고 있다”면서도 “공급 중단은 여론의 압력에 출판의 자유를 포기해야 하는지에 대한 결정이 날 때까지 계속할 것”이라고 밝혀 공급 재개의 여지를 남겼다. 또한 윤 대표는 시집과 함께 논란이 된 대담집 ‘고은과의 대화’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윤 대표는 성추행 의혹 폭로 후 아무런 해명이나 사과가 없었던 고 시인의 시집을 발간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도 해명했다. 그는 “자연인이면 누구나 가지는 헌법적 기본권으로서의 출판의 자유와, 고은 시인과 실천문학사 사이의 태생적 인연이 있었다”면서 “이러한 본사의 출판 의도와는 다르게 시집은 현재 여론의 비판에 직면해 있다”고 했다. 실천문학은 1980년 고 시인 등을 주축으로 창간됐다. 1995년 주식회사로 전환됐고, 현재 윤 대표가 대주주다. 앞서 고 시인은 2018년 최영미 시인이 동아일보를 통해 성추행 의혹을 공론화하자 활동을 중단했다. 이후 최 시인과 동아일보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지만 1·2심에서 모두 패소했다. 실천문학사가 고 시인의 시집과 대담집을 연이어 출간하자, 문단 안팎에서는 고 시인의 ‘사과 없는 복귀’에 대한 비판이 잇따랐다. ‘실천문학’ 편집자문위원인 이승하 중앙대 문예창작과 교수는 19일 온라인 문학전문지 ‘뉴스페이퍼’에 올린 글을 통해 “고은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반성과 사과”라고 지적한 뒤 편집자문위원 사퇴 뜻을 밝혔다.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 2023-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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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끼리도 장례를 치른다?…흙 뿌리고 곁 지키며 애도

    동물도 죽음을 슬퍼한다. 적지 않은 종이 가까운 사이였던 동물이 세상을 떠나면 꽤 오랫동안 곁을 지킨다. 일종의 애도 의례다. 얼룩말은 죽은 얼룩말의 사체 곁에 한동안 꼼짝 않고 머문다. 코끼리는 죽은 코끼리의 몸에 흙을 뿌려 매장하고 사체가 있는 장소로 반복해 되돌아온다. 코끼리의 ‘장례’인 셈이다. 죽음을 목격한 원숭이는 상실감에 빠져 평소보다 더 많은 상대와 털 고르기를 한다.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애도를 통해 스스로를 치유하는 것이다. 30년 이상 세계 각지에서 코끼리를 연구한 미국 행동생태학자인 케이틀린 오코넬은 신작 ‘코끼리도 장례식장에 간다’(현대지성)에서 다양한 야생동물의 인사와 놀이, 애도, 선물 등 10가지 의례 행동을 소개한다. 그리고 인간과 동물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이들 의례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상기시킨다. 인간이 놀이를 통해 배우듯 동물도 놀며 생존과 번식 기술을 깨친다. 남아프리카의 나미비아 사막에서 연구하던 저자는 어느 날 눈을 뜨자마자 새끼 사자들이 암사자와 함께 활기차게 노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들은 사냥 연습을 하듯 서로 거칠게 부딪치고 머리와 목을 물며 장난을 쳤다. 기린도 목을 서로 감싸 상대의 옆구리를 들이박는 ‘네킹’이란 싸움 놀이를 한다. 목을 얼마나 친밀하게 감싸느냐는 기린의 짝짓기를 결정하는 요소이기도 하다.선물은 동물에게도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갈라파고스제도 에스파뇰라섬의 멸종위기종인 코끼리거북은 구애할 때 상대에게 야생 토마토를 선물한다. 코끼리거북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이기 때문이다. 푸른발부비새 수컷은 둥지를 지을 때 필요한 나뭇가지나 돌을 암컷에게 건네며 구애한다. 환경이 바뀌어 더이상 둥지가 아닌 맨땅에 알을 낳는데도 조상의 습성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공동체 생활을 위해 인사가 왜 중요한지, 집단의 힘을 발휘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가 무얼 의미하는지 등을 다채로운 동물 행동 사례와 함께 제시한다. 저자가 찍은 생생한 사진도 풍성하게 실렸다. 저자는 인간과 동물, 자연은 모두 하나로 연결돼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의례하는 삶’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기술 발달과 사회적 거리 두기로 서로 단절된 현대인이 다시 단단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관계 회복에 필수적인 의례의 가치를 되새겨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판타지 소설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한 영국 작가 겸 영문학자 C S 루이스(1898~1963)가 ‘실낙원’ 서문에 남긴 말을 인용하며 의례의 의미를 강조한다. “의례에 완전히 빠져들 수 있다면 우리는 의례에 대해 더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의례를 치르는 목적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고는 이 기회가 아니었다면 거기에 집중하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는다.”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 2023-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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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수영 학문’ 생길 정도로 인정받는 건 남편이 남의 흉내 안 냈기 때문”

    “닭하고 토끼하고가 의좋게 노는 것을 좋아하는 나의 의식의 심부에는 어떤 미신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닭띠이고 나의 아내가 바로 토끼띠이니까 말이다.” 김수영 시인(1921∼1968·사진)이 1960년대 쓴 에세이 ‘토끼’의 일부다. 글에 등장하는 ‘토끼띠 아내’ 김현경 여사(96)를 19일 경기 용인시 자택에서 만났다. “(김 시인과는) 동네 아저씨의 친구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어요. 행색이 아주 기괴했어요. 눈은 부리부리하고. 제가 힘들던 시절 ‘같이 문학 하자, 너 재주 있다’며 만나기 시작했죠.” 81년 전 일이지만 김 여사의 기억은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1942년 김 시인과 사귀던 당시에 대해 김 여사는 “김 시인이 우리 집 담벼락에 와 휘파람으로 베토벤 교향곡 ‘운명’을 불면 제가 ‘너 왔구나’ 하고 나가 데이트했다”고 했다. 김 시인은 자신의 시에 쉽게 만족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만날 때마다 서로 써온 시를 바꿔 읽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김 시인이 ‘똑같은 시는 쓰면 안 된다’며 가져온 종이를 찢더라고요. 당시 시인이 1945년 문예지 ‘예술부락’에 발표한 시 ‘묘정의 노래’를 읽고 조지훈 시인이 깜짝 놀랄 정도였는데 말이죠.” 김 시인의 1949년 작품 ‘토끼’는 이렇게 시작한다. “토끼는 입으로 새끼를 뱉으다/토끼는 태어날 때부터/뛰는 훈련을 받는 그러한 운명에 있었다”. 김 여사는 “여동생이 우리 신혼집을 찾아와 ‘친정에 토끼가 새끼를 낳았다’는 소식을 전해주자, 내가 토끼띠라는 걸 알던 김 시인이 단숨에 써내려간 시”라며 “(김 시인은) 토끼같이 날 예뻐했다”고 했다. 김 시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가세는 기울고 병치레로 고생하다 김 여사를 만났다. 1950년 결혼 직후 6·25전쟁이 터졌다. 김 시인은 북한 의용군으로 징집됐다가 탈출했다. 광복 후 ‘폭포’ ‘푸른 하늘을’ 등 강렬한 현실의식을 담은 시를 쏟아내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1968년 그가 ‘토끼같이 예뻐했던’ 아내와 두 아들을 남기고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숨졌다.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지난 요즘도 김 시인의 작품이 많이 연구되는 데 대해 김 여사는 “남의 흉내를 안 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공부벌레인데, 정직하고 진실했어요. 늘 본질을 추구하면서 새롭게 쓰고 차원을 높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죠. 머물지 않고 늘 앞서가는 자유정신으로 펜을 잡았어요.” 김 여사는 눈이 그렁그렁한 채 말을 이어갔다. “요즘도 혼자 집에 있으면서 일과가 김 시인의 책을 읽는 거예요. ‘김수영 학문’이 생길 정도로 많이 읽히고 인정받는데,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싶어요.”용인=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 2023-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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