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정말 사정없이 쪼그라들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위세 말입니다. 트위터라는 스피커가 꺼지는 순간 그의 영향력은 사라졌습니다. 지난 4년 동안 880만 명의 팔로어들에게 왜곡된 주장과 정적들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는 것이 주요 업무 중 하나였던 트럼프 전 대통령은 트위터의 계정 차단과 함께 한순간에 대중의 관심 영역에서 완전히 잊혀진 사람이 된 것이죠. 계정이 막혀버리자 일주일 넘게 백악관에서 혼자 끙끙 고민하던 그는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 날 도망가는 사람처럼 아침 일찍 플로리다로 떠나버렸습니다.트럼프 전 대통령의 초라한 퇴장 드라마는 소셜미디어의 막강한 영향력을 새삼 절감하게 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대다수 미국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트럼프 소음’을 더 이상 안 듣게 돼서 좋다”는 것이죠. 하지만 미국인들의 속마음도 편치만은 않습니다. 트위터의 이번 결정은 헌법에 보장된 개인의 의사표현 권리를 막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미국처럼 수정헌법 1조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금쪽같이 여기고, 검열을 악으로 보는 나라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인권단체인 시민자유연대(ACLU)는 평소 트럼프 전 대통령을 비판해온 진보 성향 단체입니다만 트럼프 계정 차단에 대해 “헌법 수호 측면에서 나쁜 선례를 남길 수 있는 옳지 않은 결정”이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트위터가 이런 후폭풍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요. 이 또한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미 언론과 관련 블로그 등을 종합해보면 드라마의 배경은 의회 난입 사태가 발생한 워싱턴도, 트위터 본사가 있는 샌프란시스코도 아닙니다. 주 무대는 남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당시 막후 상황을 아는 전문가들에 따르면 트위터를 이끄는 잭 도시 최고경영자(CEO)는 이곳에서 휴가를 즐기던 중 대통령 계정 차단이라는 ‘세기의 결정’을 내렸습니다. 폴리네시아는 남태평양의 섬들로 구성된 프랑스 해외령으로 이 섬들 중 하나인 타히티에서 폴 고갱이 그린 원주민 여성 그림은 매우 유명하죠. 요즘은 미국과 유럽의 부호(富豪)들이 자국의 엄격한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방역규칙을 피해 몰려가는 곳이기도 합니다.트위터가 단칼에 영구 차단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닙니다. 의회 난입 사태 직후 트위터는 1차로 계정을 정지합니다. 이 결정은 도시 CEO의 자발적인 결정이라기보다는 ‘트위터 3인방’으로 불리는 30대 후반~40대 초반의 고위급 경영진 3인의 건의를 받아들인 것이었죠. 폴리네시아에서 휴가를 즐기던 도시 CEO에게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오른팔’ 격인 비자야 가디 법률정책 고문(여성)으로부터 긴급 전화가 걸려옵니다. 의회 폭력 사태로 난리가 난 것을 본 그녀는 신속하게 트럼프 계정 차단의 필요성을 건의합니다. 도시 CEO는 마지못해 “당신에게 일임하겠다”는 식으로 답변을 줍니다. ‘미적지근한 동의’였죠. 1차 계정 차단 작업 완료.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영구 차단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트위터는 후속 작업에 돌입합니다. ‘소셜미디어 커뮤니티 스크리닝(검토)’ 작업이죠. 대개 소셜미디어 플랫폼들은 계정 통제 결정을 내린 뒤 자사 트래픽뿐 아니라 타사 소셜미디어의 토론 흐름도 검토합니다. 특히 이번 경우 트위터는 팔러 등 극우 성향의 소셜미디어 트래픽을 집중 검토했습니다. 의회 난입 사태로 한바탕 난리를 치른 후 트럼프 지지자들의 주장이 점점 더 과격화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띄었죠. 의견들 중에는 “폭력적 방법을 동원해 조 바이든 취임을 막아야 한다”는 등 위해(危害) 시도를 암시하는 내용들도 많았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트위터 내부적으로 직원들의 집단 성명 움직임도 불붙었습니다. “트위터의 소극적 대응”을 비판하는 여론을 직접 피부로 겪는 직원들이 서명 운동에 돌입한 것이죠. 트위터 직원 4900명 중 400여명이 ‘트럼프 계정을 영구 차단시켜야 한다’고 서명하면서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내부 의견 청취 시스템이 잘 갖춰진 미국 회사 입장에서는 직원들의 집단 의견을 무시해버릴 수는 없는 상황이었죠. 여기에 경쟁자 페이스북이 ‘트럼프 임기 말까지 계정 차단’이라는 결정을 내리며 발 빠른 대응을 하는 모습을 보이자 트위터는 속이 타들어 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2시간 후 1차 계정 차단이 해제되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다시 트위터 무대로 돌아왔습니다. 트위터로서는 “이제 좀 조용해지면 좋으련만”하고 희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계정이 풀리자마자 “미국 애국자들의 위대한 목소리(GIANT VOICE)를 들리게 해야 한다”는 특유의 대문자 트윗을 날리며 더욱 선동적인 면모를 보입니다. 이어 “바이든 취임식을 보이코트하겠다”며 지지자들에게 ‘나를 따르라’식의 진두지휘 명령을 내리죠.소셜미디어 토론장, 내부 분위기,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3각 위험 신호를 감지한 ‘트위터 3인방’에게 폴리네시아의 도시 CEO로부터 긴급 전화가 걸려옵니다. 3인방은 그가 어떤 최종 결정을 내릴지 이미 예감한 상태. 도시 CEO의 첫 마디는 “나는 선을 그었다. 지금 상황은 그 선을 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선(line)은 ‘대중의 이익이 개인의 표현의 자유보다 앞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죠. 도시 CEO도 법적, 영업적, 윤리적 심사숙고 끝에 이런 결정을 내렸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습니다. 이후 트위터는 트럼프 대통령과 ‘두더지 잡기(Whack-a-Mole)’ 싸움에 돌입합니다. 우리나라 오락실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뽕망치 게임을 영어로 이렇게 부르는데요. 트럼프 대통령은 평소 이용하던 @realDonaldTrump 계정이 막히자 @POTUS 등 자신의 영향력이 닿는 다른 계정으로 빠르게 옮겨가며 지지자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전달하려 했고, 트위터는 이를 간발의 차이로 추적하며 차단시켜 버렸죠. 트럼프 대통령과 트위터 간에 펼쳐졌던 ‘계정 때려 막기’ 게임을 이렇게 부릅니다. ‘Whack-a-Mole’은 요즘 미국의 화제어이기도 하죠. 트럼프 전 대통령이 트위터에서 1차 계정 정지 후 영구 퇴출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36시간. 그동안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에서 많은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습니다. 트럼프의 운명을 결정지은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참치 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동원참치’. 1982년 첫선을 보인 동원참치캔은 40여 년 동안 한국인의 식탁에서 사랑을 받아왔다. 설 명절 선물로도 손색이 없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대에 세계적으로 고단백 건강식품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저렴하면서도 영양이 풍부한 참치 수요가 꾸준히 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유통업체 코스트코는 미국 매장에서 고객 1명이 살 수 있는 참치캔 수량에 제한을 두기도 했다. ‘집콕’ 시대에 필수적인 영양분 섭취에 참치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상반기 미국 내 참치캔 및 참치파우치 매출은 전년 동기에 비해 29.6% 늘었다. 참치캔 1위 브랜드 스타키스트는 같은 기간 매출액이 17.47% 증가했다. 참치캔은 고단백 저칼로리 식품이다. 전체 영양 성분의 27.4%가 단백질로 이뤄져 있다. 생선 가운데 단백질 함량이 가장 높다. 돼지고기(19.7%), 쇠고기(18.1%), 닭고기(17.3%) 등 육류와 비교해도 단백질 함량이 더 많다. 참치캔의 단백질은 2010년 칠레 광산 붕괴 사고 때 입증된 바 있다. 당시 지하 622m에 매몰됐던 33명의 광부는 69일 동안 참치 두 숟가락과 과자 반 조각, 우유 반 컵을 48시간마다 나눠 먹으며 기다리다가 무사히 구조됐다. 참치의 단백질, 과자의 탄수화물, 우유의 지방을 골고루 섭취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기적이었다.참치에 많이 함유된 DHA는 뇌 기능 저하를 막고 학습 부진 개선에도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임산부와 수유기 여성은 하루 300mg의 DHA를 섭취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이뿐만 아니라 참치의 오메가3 지방산은 혈압을 낮추고 염증을 억제할 뿐 아니라 성인병 예방에도 도움을 준다. 2014년 미국 타임(TIME)지는 정신건강에 도움을 주는 ‘16대 힐링푸드’로 참치를 꼽기도 했다. 동원참치캔은 1982년 12월 선보인 뒤 줄곧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1980년대에는 값비싼 고급식품으로, 1990년대에는 가미 참치를 통한 편의식품으로, 2000년대 들어서는 건강성을 강조한 건강식품으로 사랑을 받아왔다. 최근 동원참치는 “바다에서 온 건강”이라는 콘셉트를 내세우며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동원F&B 관계자는 “밀레니얼 세대가 참치캔을 간편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레시피를 개발해 보급하고, 맞춤형 소스와 각종 재료로 양념한 요리용 참치캔 등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말했다.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우리는 주한 외국인 250만 명 시대에 살고 있다. 그들은 한국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우정의 징표를 간직하고 살아간다. 외국 기업인과 외교가 인사들의 ‘보물 1호’를 알아본다. 시몽 뷔로 벡티스코퍼레이션 대표(58)는 오전 8시쯤 회사에 도착해 책상 위에 놓인 액자에 먼저 눈을 돌린다. 이 액자는 한국 생활을 즐겁게 해나갈 수 있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15일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 있는 뷔로 대표의 사무실을 찾았을 때 그는 “보물 1호다”라며 자랑을 시작했다. 인터뷰는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 진행됐다. 액자엔 사람 사진이 들어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의 액자에는 영어 문구 사진이 끼워져 있다. 자신의 소셜미디어와 휴대전화를 통해 받은 텍스트 메시지들을 사진으로 인화해 액자로 만든 기발한 착상이다. 뷔로 대표는 캐나다 몬트리올 출신이다. 그가 운영하는 벡티스는 한국에 진출하려는 캐나다 기업을 위해 시장 조사를 하고, 캐나다 등으로 눈을 돌리는 한국 기업을 위해 정보 컨설팅을 해준다. 이와 함께 국내 소재 외국계 기업이나 해외 기업에 취업하고자 하는 한국 젊은이들을 위한 글로벌 인재 시장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그의 업무다. 주한캐나다상공회의소 회장(2008∼2011년) 등을 지내며 관심 영역을 넓혀 나간 덕분이다. 주로 강연, 일대일 멘토링을 통해 한국 젊은이들을 만난다. 강연 및 수업료를 조금 받기도 하지만 한국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하기 힘든 일이다. 액자의 영어 문구는 그가 만난 한국 젊은이들이 보내온 감사 메시지들로 채워져 있다. “당신의 메시지가 큰 힘이 됐다” “당신 덕분에 꿈을 찾게 됐다”는 내용이다. “‘글로벌 시대’라는 말은 많지만 정작 글로벌을 꿈꾸는 한국 취업생을 위한 정보는 거의 없더군요. 그래서 저는 ‘딥다이브(Deep-Dive)’ 전략을 택했습니다.” 뷔로 대표는 ‘딥다이브’에 대해 “‘깊게 다이빙하다’, 즉 ‘속속들이 파헤치다’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강연 때 제가 한국 젊은이들로부터 받는 질문은 정말 피부에 와닿는 것입니다. ‘외국 기업에 이력서를 낼 때는 2장이 좋냐, 3장이 좋냐’ ‘면접 인터뷰 때 손동작은 어떻게 해야 외국인 눈에는 자연스러운가’ 같은 것들이죠. 외국인 경영자 입장에서 서구식 인재관에 대한 큰 틀의 지식을 제공하면서 이런 세부 정보들도 사례 연구를 통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는 1986년 캐나다에서 대학 졸업 후 옛 대한석유공사(유공) 국제금융부에 근무하게 되면서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1998년 벡티스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대 취업난과 함께 대학들의 강연 요청이 급증하면서 ‘인기 강사’가 됐다. 지금까지 250여 차례 해외 취업 관련 강연을 했다. 에어클래스 등 동영상 강의 플랫폼도 활용한다. 그러다 보니 사업 영역이 확장돼 미국 유럽 등에서 파견된 외국계 기업 간부들을 대상으로 여는 ‘한국 이해’ 트레이닝 세션도 주된 일이 됐다. “한국인 직원들은 질문하기를 꺼리고 서열을 중시하기 때문에 ‘외국인 보스’가 보기에는 좀 멀게 느껴지기도 하죠. 그럴 때 한국인 직원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소통 방법을 알려줍니다.” 뷔로 대표에게 자신과 한국의 관계를 한마디로 정의해 달라고 하자 ‘번역가(interpreter)’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영어 번역가는 아니고요. 한국과 다른 나라가 서로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문화·지식 번역가’가 제 역할입니다.”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시위대와 함께 하느니 차라리 혼자 있고 싶어요.” 의회 난입 사태 후 미국 바디스프레이 회사 액스(AXE)가 자사 소셜미디어에 올린 트윗 성명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지지 시위대가 스프레이를 들고 의회 곳곳에 낙서를 하고 몸에 뿌리며 난장판을 만드는 장면이 사진과 방송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간 후였죠. 시위대가 휩쓸고 간 뒤 의회 건물 한 구석에 내동댕이쳐진 바디스프레이 캔은 요즘 미국 소셜미디어에서 가장 많이 트렌딩 되고 있는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물론 바디스프레이 회사가 시위를 조장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관련’ ‘연상’ 기업인 것만은 분명하죠. 유명 브랜드가 우연하게 큰 사건 사고에 연루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입니다. 이럴 때 기업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요. 액스는 폭력시위대를 비판했습니다. 사회적 논란이 되는 이슈에 자기 목소리를 분명히 낸 것이죠. 이 회사의 트위터 메시지는 이어집니다. ‘의회에서 발생한 폭력과 증오의 행동을 규탄한다. 민주적 절차와 평화로운 정권 이양을 존중한다’는 내용이었죠. 그러자 “옳은 결정”이라는 이해와 공감의 댓글이 이어졌습니다. 액스의 시위대 규탄이 도덕적으로 옳은 결정이라는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비즈니스적으로도 옳은 결정이었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기업의 목표는 이윤 극대화입니다. 일각에서는 폭력시위 비판이 긍정적인 이미지 형성으로 이어지면서 매출 상승이 기대된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디스프레이는 원래 작은 시장입니다. 꼭 사야 되는 생필품도 아니지요. 매출 상승보다는 하락을 점치는 전문가들이 더 많습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벌써 액스 보이콧에 돌입했습니다. “우리를 비난하는 회사 제품은 사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액스 입장에서는 시위를 규탄할 경우 매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예상했겠지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로 한 것이죠. 이럴 때 대부분의 기업은 침묵을 선택합니다. 미국 패밀리레스토랑 체인 ‘올리브가든’ 사례입니다. 얼마 전 CNN 유명 앵커인 앤더슨 쿠퍼의 방송 발언이 논란의 시초였습니다. 폭력 시위대가 체포되지도 않고 해산하는 것을 보고 분개한 쿠퍼는 “저 무리들은 (음식점) 올리브가든과 (숙소) 홀리데이인으로 돌아가 무용담을 떠들어댈 것”이라고 말했죠. 폭스뉴스 등 트럼프 지지층에서는 “부자 좌파의 엘리트주의”라며 쿠퍼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습니다. 쿠퍼는 미국의 손꼽히는 부호인 밴더빌트 가문 출신이기 때문이죠. 올리브가든이나 홀리데이인은 ‘대중 브랜드’ 이미지가 강합니다. 그러자 쿠퍼는 살짝 꼬리를 내리며 “개인적으로 올리브가든에 잘 간다. 거기 브레드스틱이 맛있다”면서 “당시 긴박한 상황을 전하려다 보니 말이 잘못 나왔다”고 해명했습니다. 쿠퍼가 소속된 CNN과 폭스뉴스가 올리브가든을 놓고 입씨름을 벌이는 동안 정작 올리브가든은 아무런 반응도 내놓지 않았습니다. 홀리데이인도 마찬가지로 ‘노코멘트’ 전략을 택했습니다. 일각에서는 “‘폭력시위 규탄’ ‘평화 존중’ 정도의 메시지는 내놓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두 회사 모두 조용했습니다. 이 같은 침묵 전략을 두고 “비즈니스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트럼프 지지자들이 한바탕 시위를 벌인 뒤 체인점이 많고 가격대가 저렴한 올리브가든이나 홀리데이인을 애용한다는 것은 꽤 알려진 사실이었으니까요. 2013년 흑인 소년 트레이본 마틴 총격 사건 때 등장했던 스키틀즈도 비슷한 사례입니다. 당시 비무장 상태의 마틴은 편의점에서 스키틀즈 한 봉지와 아이스티를 사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경찰관 조지 짐머만의 총격에 사망했고, 짐머만은 이후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죠. 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거세게 일어나면서 스키틀즈는 평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됐습니다. 시위대는 스키틀즈를 한 봉지씩 들고 스키틀즈 마스크를 쓰고 시위를 벌였습니다. ‘무지개를 경험하라(Taste the Rainbow)’라는 스키틀즈 광고 문구 자체가 인종차별 반대 시위와 딱 들어맞은 컨셉이었죠. 홍보 효과를 누리면서 스키틀즈의 매출도 올랐습니다. 그러나 스키틀즈는 판결 때나 이후 벌어진 시위 때나 어떤 반응도 내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논란을 둘러싼 기업들의 마케팅 기법도 점차 변하고 있습니다. 의회 난입 후 많은 기업들은 ‘침묵’보다 ‘의견’을 택하고 있습니다. “폭력 규탄” “민주주의 수호”에서부터 “대통령 탄핵” “권한 박탈”에 이르기까지 자기 목소리를 낸 기업은 코카콜라, 벤&제리스 등 줄잡아 30개 이상으로 추산됩니다. 미국 마케팅전문지 애드에이지는 “그 중에는 벤&제리스, 파타고니아처럼 평소 사회참여 정신이 투철한 기업이 있는가 하면 코카콜라, 셰브론 등 ‘미묘한 평판’을 가진 브랜드도 있다”고 말합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엑손모빌, 화이자 등 1만4000개 기업을 회원으로 거느린 보수 성향의 전미제조업협회(NAM)가 ‘트럼프 대통령의 즉각적인 사임’을 요구할 정도로 기업들의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 전역에 트라우마를 안겨준 이번 사태를 통해 기업들의 사회의식도 확실히 변하고 있는 듯합니다.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시위대의 국회의사당 난입으로 풍비박산이 난 미국 도널드트럼프호(號)에서 각료와 참모들의 탈출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뛰어내린 사람은 멜라니아 트럼프 여사를 보좌해온 스테파니 그리셤 영부인 비서실장. 그녀는 난입 사건이 벌어지고 난지 2시간 뒤 “물러나겠다”고 밝혔습니다. “영부인 비서실장이 가장 먼저 사표?” 많은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했죠. 평소 멜라니아 여사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국 운영과 거리를 둬왔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줄사표를 내려면 장관들이 먼저 움직이지 그리셤처럼 백악관 내부에서 일하는 참모들은 대통령 눈치를 보느라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게 공통적인 시각이었습니다. 단 두 문장. 그리셤 실장이 CNN 등에 보낸 사임 성명은 매우 짧았습니다. “그동안 국가를 위해 봉사한 것은 영광이었다. 멜라니아 여사의 어린이돕기 운동을 비롯해 이 행정부의 업적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내용이었죠. 그러나 백악관 정치를 아는 이들은 “그리셤이 가장 먼저 떠날 줄 알았다”며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녀는 트럼프 대통령의 미움을 감수하고 직언해온 참모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죠. 그리셤 같은 소신파가 백악관에는 드물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대통령의 비정상적 국가 운영을 묵인하고 동조했던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파 참모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몇 달 전 멜라니아 여사를 둘러싼 ‘태틀러 커버 실종사건’은 그리셤의 성향을 잘 보여줍니다. 태틀러는 영국의 유명한 패션가십 잡지입니다. 멜라니아 여사는 지난해 태틀러 11월호와 단독 인터뷰를 했습니다.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에 선거홍보성 인터뷰였죠. 그런데 멜라니아 인터뷰가 실린 11월호 표지모델은 메건 마클 영국 왕손빈. 미국 퍼스트레이디 정도를 인터뷰했으면 당연히 커버도 장식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하지만 태틀러 표지에는 대문짝만한 메건 마클 사진과 함께 멜라니아 인터뷰는 안내문구 정도만 실렸습니다. 당시 태틀러 인터뷰를 성사시킨 것이 바로 그리셤 실장이었습니다. 태틀러 측은 그리셤이 인터뷰 계약만 했지 표지모델 계약은 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미국의 많은 친(親)트럼프 전문가들은 그리셤에게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커버 모델도 못 된 인터뷰라니 퍼스트레이디 위신이 뭐가 되느냐” “수많은 미국 언론을 놔두고 왜 표도 안 되는 영국 매체와 인터뷰했느냐”는 것이었죠. 그리셤 실장은 이런 공격에 대꾸하지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털어놓은 얘기에 따르면 “이런 때일수록 멜라니아 여사와 트럼프 대통령을 덜 부각시켜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녀는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캠페인이 극우화되면서 일반 대중과의 괴리감이 커지는 상황에서 멜라니아 여사가 멋진 옷을 차려입고 환하게 웃는 표지모델로 등장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흔히 ‘신비주의’라고 불리는 멜라니아 여사의 영부인 활동 자제 스타일이 이해가 됩니다. 모델 출신이니 딸 이방카 백악관 선임보좌관처럼 앞에 나서 활동할 줄 알았는데 대통령 사저가 있는 이스트윙에서 비교적 조용하게 지냈습니다. 멜라니아 여사를 백악관 입성 초기부터 보좌해온 그리셤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교양이 넘치고 미스터리한 분위기의 재클린 오나시스 케네디 여사를 동경해온 멜라니아 여사의 개인적 취향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기도 했죠. 그리셤 실장은 멜라니아 여사의 추천으로 트럼프 대통령을 직접 보좌하기도 했습니다. 2019년 7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대통령의 이미지 작업을 총괄하는 백악관 공보국장 겸 대변인을 맡았습니다. 공보국장 시절 그리셤은 또 다른 인터뷰 사건으로 백악관을 발칵 뒤집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밥 우드워드 워싱턴포스트(WP) 부편집인이 트럼프 대통령을 인터뷰한 사건이었죠. 1회 인터뷰가 아니라 백악관 집무실에서 18회에 걸쳐 심층 인터뷰를 했는데요, 그 결과물이 지난해 9월 발간된 우드워드의 ‘격노(Rage)’라는 책입니다. 솔직히 이 책은 내용 자체보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동안 맹비난해왔던 “거짓 언론”의 정점인 WP와 장시간에 걸쳐 인터뷰를 했다는 사실이 더 큰 화제였죠.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우드워드와 인터뷰하도록 설득한 사람이 그리셤이었습니다. “대통령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면 WP 같은 매체와 소통의 채널을 여는 것이 중요하다”고 끈질기게 설득했다고 합니다. MAGA파가 대세인 백악관에서 그리셤 같은 인물이 쉽게 살아남기 힘들겠죠. 그녀는 9개월간의 짧은 백악관 공보국장·대변인직에서 물러나 영부인 비서실장에만 전념하게 됩니다. 원래 자리로 돌아가서도 그녀의 기질은 여전했습니다.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 멜라니아 여사의 문병 문제가 관심사로 떠오르자 그리셤은 “전염 위험 때문에 안 간다”고 딱 자른 보도자료를 냈습니다. ‘아픈 남편을 극진하게 돌보는 아내’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던 트럼프 충성파들은 또 한 번 그리셤에게 불만을 터뜨렸다고 합니다. 지금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 은둔하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그의 정신 상태가 점점 불안정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진작 그리셤 같은 부하들의 말에 좀 더 귀 기울일 걸…”하는 회한에 잠겨있을까요. 그럴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미국에서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내각을 구성할 장관들이 속속 지명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든 미국에서든 장관이 된다는 것은 개인적인 영광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장관이 되려면 꼭 거쳐야 하는 단계가 있죠. 바로 인사청문회입니다. 후보자 입장에서는 진땀나는 자리입니다. 미국은 우리나라와 달리 청문회가 정책과 현안 위주로 진행됩니다, 그러나 사전 준비에 많은 공을 들인다는 점에는 별로 차이가 없죠. 미국 장관 후보자들도 예상질문을 뽑아보고, 사전 리허설을 합니다. 지금쯤 워싱턴 정가에서는 바이든 초대 내각의 장관 후보자들이 받게 될 예상질문 목록이 돌아다닙니다. 각자 분야에 따라 다양한 질문을 받겠지만 공통된 질문을 꼽으라면 중국입니다. ‘차이나 리트머스 테스트’. 후보 밑에서 청문회를 준비하는 실무자들은 중국을 이렇게 부른다고 합니다. 순서의 문제일 뿐 중국에 대한 질문은 꼭 받게 될 것이고, 이에 대해 얼마나 빈틈없는 답변을 할 수 있는지가 장관 자질 결정에 중요한 잣대가 된다는 것이죠. 물론 중국이 워싱턴의 주요 관심사가 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수년 전 워싱턴특파원 시절 유명 싱크탱크들이 주최하는 포럼이나 컨퍼런스에 가보면 절반 정도는 중국을 주제로 다루더군요. 처음에는 재미있어서 몇 번 참석했지만 나중에는 “중국 말고는 할 게 없나”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중국 관련 행사는 언제나 청중이 꽉꽉 들어찹니다. 싱크탱크 입장에서는 가장 실패 없는 주제인 셈이죠. 중국을 보는 시각도 달라졌습니다. 조지 W 부시와 버락 오바마 행정부 초기까지만 해도 미국은 글로벌 무대에서 부상하는 중국을 보면서 ‘한계론’을 주장했습니다. 중국이 가지고 있는 내적 모순, 즉 민주주의 부재, 법과 질서 의식 결여, 독재적 정치구조 등으로 인해 성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죠. 싱크탱크들은 유행처럼 ‘중국의 급성장’ ‘미국의 몰락’ 등을 얘기했지만 결론은 항상 “걱정할 것 없다”였습니다. 중국이 미국의 코앞까지 치고 들어오는 지금이야 그런 푸근한 만족감에 빠져 있을 경황이 없습니다. 청문회를 준비하는 장관 후보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외교안보를 다루는 국무·국방 장관, 미중 교역갈등에 관여하는 경제 관련 장관들 뿐만이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장관들도 중국 예상질문을 뽑아보느라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고 합니다. ‘청문회 코치’를 자처하는 미국 정치매체 몇 곳이 뽑은 예상질문에 따르면 교육장관은 ‘캠퍼스까지 침투한 중국 스파이망 대응책’에 대한 질문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응용 질문(?)으로 미 초중고교에 설치된 중국어 교실인 ‘공자학원’ 존폐 문제에 대해서도 확실한 답변을 준비해야 합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지난해 “중국 공산당 침투”를 이유로 공자학원 폐지 방침을 밝힌 바 있죠. 농무장관은 “중국의 농산물 수입 중단이 촉발한 미국 농가 파산 대책을 말해보라”는 의원들의 질문에 시달릴 것으로 보입니다. 보건장관이야 당연히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 처음 발발한 것으로 알려진 중국 문제를 그냥 넘어갈 수 없겠죠. 상무장관 청문회에서는 중국 화웨이와 틱톡에 대한 후속 제재가 중요하게 다뤄질 것이 확실합니다. 예상질문을 제시하는 매체들은 친절하게 답변도 알려주네요. 구체적인 답변은 아닐지라도 의원들의 송곳 질문을 대응하는 요령을 보자면 “‘중국’과 ‘협력’을 결코 한 문장에 넣지 마라”가 눈에 띕니다. 아무리 할 말이 궁해도 “중국과 발전적인 협력관계를 도모해 나가겠다” 같은 교과서적인 답변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죠. ‘협력(cooperation)’뿐 아니라 ‘조율(coordination)’ ‘상호의존(interdependence)’ 류의 단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단어들을 입에 올리면 “우리가 중국과 사이좋게 지낼 때인가”는 의원들의 질타를 감수해야 합니다. ‘중국과의 협력’이 아닌 ‘중국에 대응하기 위한 동맹국들과의 협력’에 중점을 두라고 청문회 코치들은 충고합니다. 특히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중국에 비교적 유화적 태도를 보였던 오바마 행정부 시절 정책결정직에 있었던 후보자들입니다. 오바마 시절에 국무부 부장관을 지낸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후보자가 대표적인 사례죠. 그는 대중(對中) 강경파로 알려졌지만 그건 오바마 기준에서나 통하는 얘기일뿐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를 거치면서 정치권의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도 현격한 조정을 거쳤기 때문입니다. 마르코 루비오 공화당 상원의원은 블링컨 후보자를 가리켜 “손님(중국)이 불편해 할까봐 온갖 신경을 써주는 주인장 같다”고 비웃고 있습니다. 하버드대 출신의 소장파인 벤 사스 공화당 상원의원은 청문회 후보자들에게 아예 ‘이런 답변을 준비하라’는 보도자료를 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 시절 국가안보 정책에 관여했던 지명자들은 중국이 변한 만큼 중국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소상히 밝힐 준비를 하라. 이전 직책에 있을 때 어떻게 중국을 잘못 평가했으며 그 이유가 무엇인지 대해 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중국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는지 밝혀라. 또한 만약 지금 중국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다른 정책을 펼 수 있었을지에 대해서도 리뷰하라.”정미경 기자mickey@donga.com}
《김영훈 대성그룹 회장(69) 집무실에 들어서면 색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집무실 한가운데 접대용 테이블에 가득 쌓여있는 책들이다. 족히 50, 60권은 될 듯한 책들 중에는 영어 원서들도 많이 눈에 띈다. 모두 김 회장이 관심을 두는 에너지·과학 분야 책들이다. 업무를 보다가 짬을 내서 읽는다고 한다. 김 회장은 산업계에서 독서파로 유명하다. 한 달에 10권 이상 읽는 ‘공부하는 최고경영자(CEO)’다. 김 회장은 지난달 에너지 분야에서 은탑 산업훈장을 받았다. 에너지산업 최고 공로자에게 수여하는 이 상은 최근 3년간 동탑이었다가 김 회장 수상을 계기로 은탑으로 격상됐다. 5일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집무실에서 가진 수상 후 언론과의 첫 인터뷰에서 김 회장은 에너지산업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펼쳤다.》 “지금이 ‘팍스코리아나(한국 주도 세계질서)’를 여는 적기입니다. ‘팍스아메리카나’ ‘팍스브리타니카’만 있으란 법은 없지요.” 김 회장의 예언은 별로 허황되게 들리지 않는다.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역사적 근거와 세계 신조류를 훤히 꿰뚫으면서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산업 각 분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디지털 인공지능(AI) 혁명을 눈여겨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보통신기술(ICT)에서 글로벌 영향력이 입증된 한국 기업들이 에너지 부문에서도 빠르게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 그의 평가다. “태양광이나 풍력이 차세대 에너지로 각광받고 있다는 말은 자주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태양은 맑은 날이 있으면 흐린 날도 있고, 바람은 불 때가 있는가 하면 잠잠할 때도 있어 에너지 공급 예측이 불가능하죠. 학술적으로 간헐성(인터미턴스)의 한계를 안고 있지요. 그래서 대두된 것이 에너지를 많이 저장해뒀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저장시스템(ESS)입니다. ESS로 일찍 눈을 돌린 것이 바로 한국입니다. 현재 LG화학, 삼성SDI 등이 세계 시장에서 강자로 통하죠.” 김 회장은 “또 다른 차세대 에너지인 원자력발전도 글로벌 관점에서 볼 때가 됐다”고 이어갔다. 국내에서 원전 문제가 이념의 틀에 묶여 있는 사이 벌써 세계에서는 ‘원전 르네상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치열한 개발 수주 경쟁이 이뤄지고 있다. “원전은 한국 러시아 중국의 점유율이 높습니다. 한국은 다른 두 나라에 비해 품질이 좋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지요. 미국, 유럽, 그리고 이들의 영향권 내 국가들에서 한국 원전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세계 시장이 눈앞에 펼쳐진 만큼 글로벌 경쟁을 할 때는 기업과 정부가 한 몸처럼 움직여야 합니다.” 김 회장의 주장이 무게를 가지는 것은 세계 90개국을 회원국으로 둔 세계에너지협의회(WEC) 회장직을 오래 맡아왔다는 것과 무관치 않다. 그는 2005년 아태지역 담당 부의장을 시작으로 공동회장, 회장, 그리고 현재 명예회장 직에 이르기까지 15년 넘게 WEC에서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인터뷰 도중 기자에게 보여준 사진들 속에는 그가 WEC 회장 자격으로 대통령도 만나기 힘들다는 사우디아라비아 에너지장관, 중국 정부 에너지총괄책임자 등과 나란히 대화하는 모습이 찍혀 있다. 김 회장은 “석유 한 방울도 나지 않는 나라, 그런 나라의 대기업도 아닌 중견기업 대표가 WEC 리더십 자리를 장기간 유지해왔다는 것이 바로 한국의 저력을 방증하는 것 아니겠냐”고 겸손하게 말했다. 그는 글로벌 리더인 동시에 대성그룹이라는 한 기업의 책임자이기도 하다. 1947년 연탄 찍어내는 회사로 출발해 올해로 창립 74주년을 맞은 대성그룹은 주력사업인 도시가스 외에 태양광 및 풍력 복합발전 시스템인 솔라윈 프로젝트를 비롯해 매립가스 자원화, 폐기물 에너지, 수소충전 등 청정에너지 분야로 확대하고 있다. CEO로서 좌우명을 묻자 그는 자신의 명함을 봐달라고 했다. 김 회장 이름 위쪽으로 성경에서 유래한 영어 문구 ‘신뢰받는 명성이 부보다 더 값지다(A good name is more desirable than great riches)’라고 써 있었다. 그는 “공익을 추구하는 것이 최상의 수익모델이라고 믿는다”는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영어의 어원을 찾아가다보면 법에서 유래한 용어들이 많습니다. 수많은 ‘미드’에서 보듯이 미국인들은 워낙 법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도널드 트럼프 시대에 미 사법 체계는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요즘 트럼프 대통령은 유죄 판결을 받은 자신의 측근들 사면시키느라고 정신이 없죠. 얼마 전까지는 판사 교체에 전력을 쏟았습니다. 미국변호사협회(ABA)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임기 4년 동안 연방법원 판사 227명을 교체했습니다. 대법관 9명 중 3명, 항소법원 판사 179명 중 53명, 지방법원 판사 677명중 174명을 교체했죠. 대법원과 항소법원은 전체의 3분의 1, 지방법원은 4분의 1 수준입니다. 최고 기록은 아닙니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임기 4년 동안 이보다 더 많은 260명을 갈아치웠죠.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성향으로 판사들을 채워 넣다보니 수가 부족하고, 그래서 ‘수준 미달자’가 포함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트럼프 임명 판사 중 10명이 ABA의 ‘자격미달(unqualified)’ 도장을 받았습니다. 물론 ABA가 자격미달 판단을 내린다고 해서 임명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수치스러운 일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트럼프 정권의 판사 교체 열풍을 보면서 법조계와 언론을 중심으로 일찌감치 ‘대선 법적 다툼’ 우려가 터져 나왔습니다. 트럼프 진영이 오래 전부터 불복 소송을 계획하면서 이에 대비해 법원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었죠. 결과는 어떨까요. 트럼프 진영은 지금까지 53건의 대선 관련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모두 패하거나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상당수는 자신이 임명한 판사로부터 얻은 결과였죠. 일부는 트럼프 진영이 알아서 소송을 취하했고, 다른 일부는 증거자료 미비로 재판 시작도하기 전에 퇴짜를 맞았습니다. 어떤 사건은 트럼프 변호인들이 판사에게 질책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가장 먼저 나온 판결부터 보자면 펜실베이니아 주 제3순회항소법원(항소법원은 13개의 순회구역으로 나뉨)의 스테파노스 비바스 판사는 “선거가 불공정했다는 트럼프 변호인 측 주장은 매우 심각한 것이다. 그러나 불공정하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선거가 불공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 같은 주장을 하려면 구체적인 혐의와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혐의도 없고 증거도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비바스 판사는 트럼프 대통령이 2017년 임명했죠. 조지아 주 사건도 유명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임명한 스티브 그림버그 연방지법판사는 트럼프 지지자로 유명한 린 우드 변호사가 제기한 투표결과 인증 중단 청원을 거부하면서 “마지막 순간에 제기하는 중단 요구는 혼란과 선거권 박탈 의심을 초래할 수 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법적으로나 사실적으로나 근거가 없다”고 밝혔습니다. 가장 굴욕적인 사건으로는 위스콘신 판결이 꼽힙니다. 브렛 루드비히 연방지법 판사는 트럼프 진영의 우편투표 절차 무효 소송에 대해 “어떻게 이런 소송을 연방법원까지 가지고 올 수 있는지 이해하는 데 매우 매우 힘든 시간을 가졌다. 거의 기이하다”고 판결했습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올해 임명한 판사였죠. 이런 판결들이 연이어 나오는 데 대해 “애초에 소송 가치조차 없는 유치한 사건들”이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소송을 벌이는 이유가 법적인 정당성 확보가 아니라 지지자 결집을 위한 모양새를 갖추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볼 때 수보다는 양이 중요하니까요.“‘트럼프 판사’는 트럼프 판사가 아니다(‘Trump judges’ are not Trump judges).” 요즘 미국에서 유행하는 말입니다. “‘트럼프가 임명한 법관’이라고 해서 트럼프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는 법관이 아니다”라는 뜻이겠죠. 2018년 트럼프 대통령이 사법부 판결을 트집 잡으며 “오바마 판사”라는 용어를 쓰자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 “우리에겐 ‘오바마 판사’나 ‘트럼프 판사’ ‘부시 판사’ ‘클린턴 판사’가 없다”고 반박한데서 유래한 말입니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법을 공부하고 법에 대해 치열하게 연구하며 살아온 법관의 세계를 모독하고 모든 것을 거래로 재단하는 트럼프식 사고방식에 일침을 놓은 것이죠. 당시만 해도 “순진한 발언”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기도 했지만 지금은 “이해가 된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네요. 대선 소송전은 역설적으로 미국인들에게 법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이죠.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아무도 내 몸에 이물질을 주사할 수 없어. 상상만 해도 끔직하다.” “정부가 강제적으로 백신을 접종시킨대. 이건 폭정이다!”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한국이 보기에는 화이자에 이어 모더나까지 전국 배포를 시작한 미국이 그저 부러울 뿐입니다만 정작 미국에서는 백신 접종 반대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지금은 백신 열풍에 휩싸여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조만간 안티-백신 주장이 크게 터져 나올 가능성도 높습니다. 이를 선도하는 세력은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월드’라고 불리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열성 지지자들. 마스크 착용을 거부해 미국에서 코로나19가 걷잡을 수 없이 퍼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이죠. 완패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나름 선전한 트럼프 대선 성적표에서 보듯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트럼프 열성 지지파들입니다. 지금 ‘MAGA 월드’에서는 코로나19 백신 거부 운동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냥 ‘트럼프 열성 지지자’라고 한데 묶어 얘기하지만 사실 이들도 들여다보면 매우 복잡합니다. 흔히 ‘큐어넌(QAnon)’이라고 불리는 극우 성향 음모론자, 반과학이성주의자, 반정부주의자, 복음주의자 등이 섞여 있습니다. 큐어넌 성향의 소셜미디어 인플루엔서 디애나 로레인은 최근 인기 웹 프로그램인 ‘인포워즈’에서 “예수님이 맞는대도 나는 안 맞을 거야(I don‘t care if Jesus takes it, I’m not taking the vaccine)”라며 백신 거부를 선언했습니다. 이 말은 트럼프 지지자들 사이에서 인기 구호가 됐죠. 트럼프 대선 패배 후 뜨는 보수 인터넷매체 뉴스맥스의 백악관 담당기자는 “코로나19는 자연 치유되는 병이다. 정치인들이 통제의 수단으로 백신을 이용하려는 것일 뿐”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죠. 폭스뉴스의 유명 앵커 터커 칼슨도 “조 바이든 차기 행정부가 강제 접종에 나설 것이다. 국가적 위기다”라고 겁을 주고 있습니다.이들이 백신을 거부하는 이유는 ‘과학적 근거 부족’, ‘개인 자유권 침해’, ‘바이든 정권 무조건 반대’ 등 다양합니다. 특히 상당수 트럼프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요즘 ‘백신 ID’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정부가 강제 접종을 시킬 것이고, 개인증명서로서 백신 ID를 발급할 것이라는 소문이지요. ‘포스트 코로나’ 세상에서는 백신 ID가 없으면 안 되고, 심지어 취직도 할 수 없다는 가짜뉴스입니다. 바이든 차기 정부는 강제 접종 방침을 밝힌 바 없습니다. 또한 미국 영국 등 백신 배포에 속도를 내고 있는 국가들에서는 접종 증거로서 백신 ID를 발급하겠지만 이를 여권 같은 개인 신분 증명으로 활용할 계획은 없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최근 상원 백신 관련 청문회에 전미내과외과의사협회(AAPS) 소속 증인들이 출석해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AAPS는 권위 있는 ‘전미의사협회(AMA)’와 명칭은 비슷하지만 사실은 정부의 의료정책 관여를 반대하는 단체로, 모든 종류의 백신 접종을 거부합니다. 제인 오리엔트 AAPS 상임이사는 상원 국가안보·정무 위원회 청문회에서 “아직 코로나19 백신 효과가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다”며 “특히 생식 기능에 위험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연히 반발 여론이 터져 나왔죠. “백신 배포가 시작되는 시점에 의회가 왜 이런 주장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느냐”는 것이죠. 그도 그럴 것이 미국에서는 백신을 주저하거나 회피하는 민심이 아직 크기 때문입니다. 의학계에서는 백신이 집단면역 효과를 낼 수 있는 국민 접종 수준을 70~80%로 보고 있죠. 최근 의료 전문조사기관 카이저 패밀리재단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71%가 백신 접종 의사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공화당 지지자들의 주저하는 비율이 42%로 높았고, 반면 민주당 지지자들은 12%만이 주저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런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의 애매한 태도가 지지자 그룹은 물론 보수적 미국인들의 백신 불신을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스스로 마스크를 벗었듯이, 자신이 발신하고자 메시지는 다양한 제스처로 지지자들에게 전하는 리더죠. 그는 백신 접종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이 없습니다. 전임 대통령들은 물론 바이든 당선자까지 “TV 카메라 앞에서 접종 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고 있는 데도 말이죠. 물론 개발 및 승인 배포 과정을 신속하게 이뤄내는 트럼프 행정부의 대(對) 코로나19 ‘초고속(워프 스피드) 작전’ 자체가 백신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 백신을 맞을 건지 빨리 밝혀라”는 요구가 터져 나오는데도 트럼프 대통령 측은 “아직 접종 계획이 없다”고만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케일리 맥커내니 백악관 대변인은 “대통령은 백신 접종에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최근 코로나19에 걸렸다가 회복됐기 때문에 급히 접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건강상의 이유보다는 지지자들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분석이 더 맞아 보입니다. 지금처럼 대선 불복 소송전으로 지지자 결집이 중요한 시기에 이들이 거부하는 백신 접종에 급히 나설 필요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정권 이양 시점에 ‘백신을 맞네 안 맞네’ 문제로 미국은 또 한번 시끄러울 듯 합니다.정미경 기자mickey@donga.com}
파리바게뜨는 유난히 힘들었던 올해를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우리가 서로의 산타가 되자”라는 캠페인을 전개한다. 우선 미국의 ‘톰 브라우닝’ 작가와 협업을 통해 ‘거리 두기로 휴가가 생긴 산타클로스’ 케이크 시리즈를 내놓았다. 촉촉한 초콜릿 스펀지 케이크 시트에 초콜릿 가나슈 크림을 얹어 조화시키고 산타클로스 장식물을 올린 ‘산타는 휴가 중’ 케이크 등이 있다. ‘펭수’가 산타로 변신한 초콜릿 케이크 ‘펭수 산타와 함께 메리크리스마스’도 선보인다. 레트로 감성을 반영한 케이크로는 커피향의 모카 케이크 위에 눈 덮인 집 모양의 장식물을 얹은 ‘반짝반짝 빛나는 모카하우스’가 있다. 기존 스테디셀러인 우유 생크림 케이크 위에 신선한 생딸기와 크리스마스 문구의 토퍼를 얹은 ‘크리스마스 시그니처 생크림 케이크’도 찾아볼 수 있다. 과자류로는 산타의 모습을 담은 다회용 파우치를 귀여운 곰 모양의 구움과자로 채운 ‘산타가 주는 선물 주머니’를 내놓았다. 홈파티족을 위한 ‘집콕 파티 패키지’도 한정 판매한다. 한편 파리바게뜨는 전국 3400여 매장 내에 ‘QR코드(제로페이)’가 삽입된 미니 자선냄비를 설치하는 등 디지털 기부 방식을 도입해 고객 참여형 기부 활동도 전개한다.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조 바이든 행정부 집권을 앞둔 미국에서 ‘프롭22’가 화제입니다. 정치인들은 서로 암호를 주고받듯이 “프롭22”라고 수군댑니다. 워싱턴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AOC’라는 이니셜로 더 잘 알려진 젊은 여성 정치인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도 “프롭22” 얘기만 나오면 열을 올립니다. ‘프롭22’가 뭐기에 그럴까요.미국은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직접선거로 민의를 반영하는 시스템도 있습니다. ‘주민발의’ 제도죠. 이건 주 단위로 운영됩니다. 주에서 논란이 되는 사안에 대해 주민들이 의견을 모아 발의하면 직접선거로 찬반 투표를 하는 겁니다. 통과되면 주 헌법으로 제정 또는 개정됩니다.이 제도가 활성화된 주가 있고 안 된 주가 있습니다. 가장 활발하게 운영되는 주는 캘리포니아입니다. 지난달 대선 때 캘리포니아 주민들이 TV에서 지겹도록 본 정치광고는 조 바이든-도널드 트럼프 유세 광고가 아닙니다. ‘프롭22’ 광고입니다. 주민발의는 영어로 ‘프로포지션’ ‘이니셔티브’ 등으로 불립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프로포지션,’ 줄여서 ‘프롭’이라고 하고, 그 뒤에 해당 안건의 행정번호를 붙입니다.대선이 있던 날 캘리포니아 주민들은 ‘프롭22’를 포함한 12건의 주민발의 안건에 표를 던지기 위해 투표소로 향했습니다. 관심의 초점은 ‘프롭22’ 통과 여부. 결과는 58%의 지지를 얻어 통과였습니다. 그런데 이 안건은 내용이 좀 독특합니다. 주민발의에서는 동성결혼, 낙태 등 주로 윤리적인 이슈들이 많이 다뤄지는데 반해 이 건은 매우 테크니컬하고 지엽적인 이슈였죠. 하지만 협소하게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미국 경제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 그리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근로자의 법적 지위 논란을 정조준한 안건이라는 평가가 많았습니다.‘프롭22’의 핵심 내용은 올해 초부터 캘리포니아 주에서 시행되고 있는 ‘AB5 법’의 예외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AB5 법’은 플랫폼 근로자들을 정직원으로 고용하는 것을 의무화하고 있습니다. 트럼프 시대에 실리콘밸리는 몸조심하기 바빴지만 ‘AB5 법’은 그대로 둘 수 없다는 분위기가 강했죠. 우버, 리프트 등 공유경제 기업들이 ‘프롭22’ 발의를 주도했고, 인스타카트 등 신선식품 배달업체들도 합세했습니다. 기업으로서는 정직원으로 대우하면 최저임금, 고용보험, 유급휴가 등을 보장해야 하므로 비용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죠. 실리콘밸리는 부랴부랴 주민발의를 통해 ‘AB5 법’에 각종 예외조항을 만들어 플랫폼 근로자들을 직접 고용직원이 아닌 독립적 개인사업자로 규정하도록 한 것입니다. 요즘 ‘공유경제’ ‘플랫폼 근로자’ 같은 단어를 모르면 안 되는 시대입니다. 디지털 플랫폼을 매개로 단기간 근로가 이뤄지는 경제형태입니다. 미국에서는 ‘긱 이코노미’ ‘긱 워커,’ 또는 그냥 ‘긱’이라고 부릅니다. 미국은 이미 ‘긱’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올해 노동인력의 35%가 “프리랜서” “계약근로자” “플랫폼노동자” “우버드라이버” 등 뭐라고 불리던 간에 ‘긱 이코노미’에 종사한다는 경제잡지 포브스 조사결과가 있습니다. 2023년에는 노동인력의 절반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건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발발 전 예측이니 지금 조사한다면 그 비중은 훨씬 더 높겠죠. 한국에서는 아직 협소한 범위에서 사회적 논의가 진행되고 있기는 합니다만 ‘배달의 민족’ 같은 플랫폼 근로자나 일반 택배 노동자의 근로조건이 문제가 되고 있죠.실리콘밸리는 ‘프롭22’를 통과시키기 위해, 노동관련 단체들은 이를 막기 위해 치열하게 맞붙었습니다. 우버 등은 홍보와 로비 비용으로 2억 달러(2180억 원 정도)를 썼다고 합니다. 캘리포니아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이 들어간 투표였습니다. 뉴욕타임스가 “주지사나 상하원 선거도 아닌 일개 주민투표에 이렇게 돈을 쏟아 부은 사례가 없다”고 평할 정도였으니까요. 우버는 주민투표를 앞두고 15시간 이상 일하는 근로자에 대해서는 건강보험과 고용보험 혜택을 주겠다는 선제적 양보안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이제 주무대는 캘리포니아에서 워싱턴으로 옮겨갔습니다. ‘프롭22’ 통과 다음날 우버 경영진은 “이 모델을 미 전역에 적용시킬 수 있은 방안을 찾겠다”고 밝혔습니다. 다른 주에서 주민발의를 통해 비슷한 안건이 올라오거나 연방 의회 및 주 의회 차원에서 안건이 상정되면 통과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말이죠. 벌써 ‘프롭22’는 미 정치권의 핫이슈가 됐습니다. 민주당 내 진보세력의 얼굴마담 격인 오카시오코르테스는 “캘리포니아 정치에 참견한다”는 비난을 들으며 ‘프롭22’ 통과 저지에 힘을 썼습니다만 별로 효과를 내지 못했죠. 배달 근로자들이 많은 뉴욕 브롱크스와 퀸즈 구역을 지역구로 둔 그녀는 “바이든 행정부에서 실리콘밸리 ‘빅 테크’ 기업들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질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바이든 당선자가 가장 먼저 부딪힐 문제 중의 하나는 급변하는 경제 속에서 적절한 근로권의 범위를 찾는 일이 될 것입니다. 연방의회 차원에서는 올해 9월 일부 민주당 상하원 의원들 주도로 플랫폼 근로자들에게 최저임금 건강보험 등을 보장하는 법안을 발의해 놓은 상태입니다. 대선 때 실리콘밸리와 노동단체들의 지지를 동시에 얻은 바이든으로서는 이들 간에 이해관계 균형을 맞추기가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다른 나라들이 이를 지켜보고 있죠.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싱가포르와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렸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정상회담에서 어떤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으십니까. 두 정상이 악수하는 장면이요? 합의사항에 서명하는 장면이요? 미국인들에게 물어보면 가장 흔히 들을 수 있는 대답은 ‘국기 장면’입니다. 미국인들이야 한국이랑 보는 시각이 다를 테니까요. 당시 두 정상 뒤로 정말로 많은 수의 미국과 북한 국기가 배치돼 있었습니다. 워싱턴 특파원을 하면서 자주 행사를 취재해 봤지만 그렇게 많은 국기가 자리 잡을 걸 본 적이 없습니다. 각기 다른 나라 국기들도 아니고, 같은 두 나라 국기들을 저렇게 반복적으로 많이 늘어놓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시 두 나라 국기가 뒤쪽 배경을 완전히 뒤덮은 것을 보면서 북한과의 기 싸움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의지를 읽는 것 같았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나는 지금 애국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자기 과시 본능을 보는 듯 했습니다. 두 정상이 악수하는 장면이 빨갛고 파란 원색의 국기들과 어울리다보니 확실히 시선 집중 효과는 크더군요. 트럼프 대통령의 공과는 후세가 판단할 것이고, 그 평가가 후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의 확실한 공(?)을 하나 꼽자면 국기를 자기 브랜드화 했다는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조 바이든 시대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국기 회복’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지자 결집을 위해 마음대로 가져갔던 국기의 본래 의미를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당장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 때 애국심을 표하고 싶은 대다수 미국인들은 마음 놓고 손에 들고 흔들 게 없습니다. 성조기를 흔들자니 ‘트럼프 지지자가 훼방을 놓으려고 저러는 것’이라는 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국기는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로고가 박힌 야구모자 만큼이나 친(親) 트럼프 진영의 심벌이 됐기 때문입니다. 국기는 미국인들에게는 ‘스타즈 앤 스트라이프스’ ‘스타 스팽글드 배너’ ‘올드 글로리’ 등의 애칭으로 불리면서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그렇다고 평탄한 세월을 보낸 것만은 아닙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 성조기를 불태우는 행위에 대해 당시 공화당 주도 의회와 중립적인 연방대법원이 ‘국기보호법’ 제정을 둘러쌓고 대치한 것은 유명한 사례입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베트남전 때 미국의 참전을 반대하는 단체들은 국기를 거꾸로 꼽는 ‘업사이드다운 아메리칸 플래그’ 운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정권이나 정부 정책에 항의하는 미국인들은 국기를 거꾸로 꼽는 식으로 자기 의사를 표현합니다. 2018년 퓨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트럼프 시대에 미국인들의 국기 노출 빈도가 최고 수준에 달했다고 합니다. 아파트가 아닌 단독주택 스타일이 많은 미국에서는 국기를 내다 거는 집들이 많은데 트럼프 대통령 시절에는 그러한 경향이 특히 높았다는 것이죠. 집 앞에 국기를 펄럭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한 비율은 공화당 지지자들이 민주당 지지자들에 비해 두 배 이상 높았다고 합니다. 국기를 통해 지지층을 결집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전략을 흔히 ‘깃발의 정치’라고 부릅니다.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보수행동정치회의(CPAC) 연단에서 국기를 껴안는 제스처를 취한 것이지요. 지지자들의 반응이 좋자 올해는 키스도 하고 “베이비, 너를 사랑해”라고 고백도 합니다. 한 참석자는 “우리의 아름다운 국기를 트럼프만큼 사랑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라는 트윗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깃발은 비슷한 의미를 가진 또다른 깃발을 부르기 마련입니다. 트럼프 지지 집회에서 남부연합기나 ‘트럼프를 짓밟지 마라’고 쓰인 개즈던기는 국기만큼이나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BLM)’ 인종차별 반대 시위 때 트럼프 지지자들은 국기 중간 한 줄만 푸른색으로 칠한 ‘경찰의 목숨도 중요하다’ 깃발을 흔들기도 했습니다. 이에 맞서 민주당 지지자들은 국기를 나치 깃발과 함께 드는 식으로 저항의 표시를 했습니다. 국기가 완전히 트럼프의 전용물이 된 것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일부 반(反) 트럼프주의자들은 하도 들게 없다보니 미국 원주민 깃발까지 들고 나오기도 했습니다. 시각효과가 큰 ‘깃발 싸움’에서 민주당 진영은 철저히 패한 셈입니다. 바이든 당선자는 화합을 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분간 화합의 상징으로 성조기를 드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짧은 역사를 커버하기 위해 유달리 국기에 애착을 보여 온 미국이 국기를 멀리 하게 된다면 정말 큰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쯤 다시 국기 흔들고 싶은 마음이 생길지 궁금합니다.정미경 기자mickey@donga.com}
“I got started out HBCU, Delaware State.” 오늘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학벌’ 얘기를 하기 위해 영어로 시작해봤습니다. 지난해 바이든이 유세할 때 한 말인데요. “나는 HBCU인 델라웨어 스테이트에서 시작했다”라는 뜻이지요. ‘HBCU’는 미국에 100여개 넘게 있는 흑인 전용 대학을 줄여 부르는 말입니다. 인종차별 시대의 산물로, 델라웨어 스테이트 대학도 그 중 하나이지요. “바이든이 흑인대학을 나왔다구?” 당장 이런 의문이 드실 겁니다. 그래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9월 TV 대선토론 때 이를 문제 삼기도 했지요. 그는 바이든이 ‘치매 때문에 말실수를 한다’고 트집 잡으면서 “당신은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 델라웨어 스테이트 대학 출신인가”라고 공격했습니다. TV토론 때는 흐지부지 넘어갔지만 미 언론들도 이상하게 여겨 팩트 체크를 해봤나 봐요. 그래서 바이든이 하려던 말의 의미는 “내가 처음 정치를 시작했을 때 델라웨어 스테이트 대학의 지지를 받은 것이 큰 도움이 됐다”였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확실히 하자면 바이든 당선인이 나온 대학은 델라웨어 스테이트 대학이 아닌 ‘유니버시티 오브 델라웨어,’ 즉 델라웨어대입니다. 그 후 시라큐스대 로스쿨을 졸업했습니다. 둘 다 좋은 대학입니다.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의 시선으로 봤을 때 더 높게 쳐주는 대학들이죠. 하지만 솔직히 말해 ‘톱 클래스’는 아닙니다. 지금은 바이든 당선 축하 무드니까 아무도 크게 얘기하지 않지만 워싱턴에서는 이렇게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립니다. “배우 출신으로 일리노이 주 유레카 칼리지를 나온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이후 40여년 만에 아이비리그 학부나 대학원 졸업장을 가지지 못한 첫 번째 대통령”이라고요. 그렇다고 바이든 당선인에게 ‘학벌 콤플렉스’가 있다거나, 자신이 나온 대학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모교 졸업 기념연사로 네 차례나 등장했고, 대학 스포츠경기 때마다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열성 동문’으로 통합니다. 부통령 시절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블루 헨즈(푸른 암탉들)’라는 팀명으로 유명한 델라웨어대 미식축구 경기를 자주 관람하기도 했죠. 델라웨어대도 바이든 당선 때 홈페이지에 한국식으로 치자면 ‘우리 학교 경사 났네’라는 축하 배너를 내걸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바이든 본인은 아이비리그 졸업장을 가지지 못한 것을 끊임없이 의식했다고 주변 사람들은 말합니다. 누가 이를 업신여기기라도 하면 상처도 받고요. 워싱턴은 그런 동네이기 때문입니다. 똑똑한 수재들이 대개 의사나 판사, 대기업 직장인으로 방향을 잡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미국은 워싱턴으로 진출합니다. 직접 정계에 투신하던지, 아니면 싱크탱크에서 정책 연구를 하면서 거대한 엘리트 공동체 사회를 형성합니다. 바이든의 한 측근은 “그는 워싱턴에 모여드는 수재들을 한편으로는 존경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질투하는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합니다.바이든이 풍기는 분위기는 외골수 학구파나 연구자로 보이지 않지만, 의회를 통해 정력적으로 많은 정책들을 입안하고 협상하는 상원의원 생활을 40년 가까이 지냈습니다. 뛰어난 학문적 성취나 졸업장 없이 ‘정책통’으로 통할 수 있었던 것은 주변에 인재들이 많이 포진해 있다는 의미겠죠. 자신의 지적 능력은 뛰어나지 않지만 하버드급 브레인들을 잘 활용하는 것, 이를 워싱턴에서는 ‘바이든 패러독스’라고 부르죠. 한 언론 조사에 따르면 현재까지 내정된 바이든 내각의 92%는 아이비리그 졸업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학력이나 경력보다는 자신의 대한 충성심을 최우선으로 치며 요직에 앉혔던 트럼프 대통령과 비교해보면 화려함 그 자체입니다. 국무장관에 지명된 토니 블링컨은 하버드대 출신으로 국무부 요직을 거쳤고. 공화당이 집권해 정치에서 물러났을 때는 싱크탱크 연구원으로 로비스트로 수십 년의 경력을 가졌습니다. 론 클레인 백악관 비서실장 내정자 역시 하버드 법대 출신으로 되기 힘들다는 연방대법원 서기직을 거쳤죠.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낙점된 제이크 설리번은 예일대 졸업장에 영국 옥스퍼드대 로즈 장학생 출신입니다. 바이든 인재 경영론의 두 번째 포인트는 ‘오래 두고 본다’는 겁니다. 그는 인재들을 젊은 나이에 영입해 키우는데 매우 열성적인 스타일입니다. 젊은 정치인들과 많은 토론을 하고, 그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일을 벌려볼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죠. 일명 ‘그루밍 전략’입니다. 일각에서는 ‘바이든 초대 내각이 버락 오바마 시대 요직 인사들로 채워졌다’는 얘기가 있지만,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바이든이 키운 인재들이 당시 정치 경험이 부족했던 오바마 대통령 밑에서 많이 중용됐었다’일 겁니다. 바이든 사단의 대표주자인 클레인 비서실장 내정자는 20대 중반 나이에 의회에서 임명하는 법사위원회 자문변호사로 일하다가 우연히 이 위원회 위원장을 맡게 된 바이든 상원의원의 눈에 띄게 되면서 아예 바이든 진영에 합류해 1988년 대선 출마 때 연설담당자로 활동하게 됩니다. 워싱턴도 작은 동네라 일 잘하면 소문은 나게 마련이어서 앨 고어 부통령 비서실장을 거쳐 바이든 부통령 비서실장, 오바마 행정부의 전염병 에볼라 대응팀 수장까지 맡게 되죠.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시절 그녀의 오른팔 역할을 했던 제임스 루빈 전 국무부 대변인 역시 바이든이 키운 정치인 중 한 명이죠. 그는 ‘바이든 인재론’을 이렇게 정리합니다.“When you work for him, he trusts you to run with the ball and he protects you when you fumble.”(만약 당신이 바이든을 위해 일한다면, 그는 당신이 주도적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믿어주고, 만약 당신이 실수를 했다면 그가 당신을 보호해준다)정미경 기자mickey@donga.com}
미국 워싱턴 시내에는 국무부, 법무부, 재무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등 많은 정부 부처 본부들이 있습니다. 한 곳 예외가 있다면 워싱턴 근교 알링턴에 있는 국방부 본부, 펜타곤입니다. 너무 커서 워싱턴 시내에는 도저히 지을 수 없었다고 하죠. 펜타곤은 근무자가 2만7000~2만8000명에 달하는, 단일 건물로는 세계 최대 규모입니다. 물론 이건 본부 규모일 뿐이고, 현역 군인, 주방위군 등 실제 군인들 숫자까지 합치면 미 국방부는 280만 명의 직원을 거느린 세계 최대 고용주입니다. 그래서 국방부 수장을 뽑을 때는 작전 수행 능력과 더불어 조직 운영 능력을 중요하게 봅니다. 이 말은 두 가지 능력을 동시에 갖춘 사람을 찾기가 그만큼 쉽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죠. 대부분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장성 출신들이 출세 코스로 장관이 되지만 그 방대한 조직을 잘 이끌지 못해 고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간혹 짐 매티스 전 국방부 장관처럼 두 가지 능력을 두루 갖춘 인물이 나타나기도 해요. 하지만 매티스 전 장관은 가장 중요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코드’가 맞지 않아 거의 쫓겨나듯 물러났습니다. 그래서 조 바이든 초기 내각의 국방부 장관으로 여성이 물망에 오르고 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아무리 바이든 차기 행정부가 여성 중용 정책을 내걸었다고 해도 최대 조직에 전장에 나가 총 한번 쏘아본 경험이 없는 여자를 리더 자리에 앉힐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은 파격이죠. 강력한 후보로 떠오르는 인물은 미셸 플러노이 전 국방부 차관(59)입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 정책담당 차관을 지냈습니다. 정책 차관을 ‘넘버3 포스트’라고 하는데요. 장관, 부장관에 이은 5명의 차관 중 가장 노른자위 직책으로, 미국이 수많은 세계 분쟁 중 어느 분쟁에 나서야 하고, 어떤 군 위주로 개입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의 병력을 투입해야 하는지 등을 결정하는 자리입니다. 하버드대 졸업-옥스퍼드대 유학이라는 고위관리 교육 정코스를 밟은 후 하버드대에서 연구하다가 빌 클린턴 행정부 때 처음 정치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죠. 그녀가 차관 시절 수립했던, 그리고 이후 싱크탱크 연구에서도 계속 담당해온 전시작전 계획들은 실제로 “뛰어나다”는 평을 듣습니다. “사려 깊은” “실용적인” 등의 수식어가 붙죠.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 같은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변하는 국가적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위기가 예상되는 지역에 기민한 선제 대응을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사이버 군사전, 인공지능(AI) 도입 등 군 수뇌부 인사들이 뒤쳐지는 ‘IT 리터러시(정보기술 해독력)’도 앞선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경험이 없다보니 플러노이의 전쟁 리더십에 “이론적이다” “탁상공론”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것도 사실인데요. 이런 경험 부족을 메워주는 것이 바로 그녀의 조직 이해력입니다. 그녀가 장관이 될 수도 있다는 말에 국방부 직원들이 가장 기뻐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플러노이 조직 리더십의 강점은 ‘생활로서의 군’을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군은 전쟁을 위해 존재한다고 할 만큼 전쟁수행 능력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국가간 대규모 물리적 충돌이 벌어지기 힘든 21세기 정치외교 구도로 볼 때 생활인, 조직 구성원, 커리어 관리 차원에서 군인들을 통솔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입니다. 이게 바로 그녀가 스스럼없이 강조하는 ‘워라밸(가정-일 양립)’ 개념이기도 합니다. 물론 너무 흔해져버린 이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조금 근사하게 들리는 ‘인재 유지(best talents retainment)’라는 말을 쓰더군요. 군이 그 특유의 권위주의적, 상명하복 조직 문화를 개선하지 않으면 최고의 인재들을 다른 분야로 빼앗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거창한 정책 변화도 아닙니다. ‘워라밸’이라고 해서 여성에게만 이득이 되는 제도도 아니구요. 플러노이 차관 시절 국방부는 ‘예상시간 휴무제(PTO)’를 도입했습니다. 직장인이라면 일주일에, 또는 한달에 몇 차례 꼭 가정을 위해 시간을 내야 할 때가 있죠. 아이들 학교에 가기 위해, 부모님을 병원에 모시고 가기 위해 한나절이 필요합니다. 미리 예상 가능하지만 필요할 때마다 상사에게 주저리주저리 말하기 꺼려지는 시간이죠. 미국 직장들은 팀별로 일을 많이 진행하니 팀제도로 PTO를 도입할 경우 미리 신고만 하면 다른 팀원이 나를 위해 몇 시간 일을 커버해줍니다. 플러노이 전 차관은 “이런 제안마저도 정시 출퇴근을 중시하는 국방부 문화에서 쉽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처음 국방부 내부 타운홀 미팅에서 이런 제안을 했더니 상사와 동료들이 쓴웃음을 지으며 ‘먹히지도 않을 소리’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하죠.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도입된 후 국방부 직원들이 가장 잘 활용하는 제도도 정착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생활 속에서 필요한 워라밸 제도는 그녀의 경험에서 나왔습니다. ‘자녀 3명을 둔 엄마’라는 워싱턴 성공 교과서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여성 직장인이다 보니 시간 관리의 중요성을 잘 아는 것이죠. 그래서 더 이상 시간 관리가 용이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때는 미련 없이 국방부 3인자의 자리를 포기했습니다. 임명 3년 뒤 아이들이 손이 많이 가는 10대 청소년기에 접어들자 남편과 상의 후 사표를 냈습니다. 그녀의 남편 역시 당시 보훈부 차관으로 이들 부부는 워싱턴의 잘 나가는 파워 커플이었죠. 그녀의 사표는 워싱턴 정가에서 큰 화제가 됐었죠. 12월부터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자의 장관 발표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외교관계 차원에서 한국이 관심을 두는 미국 장관은 서너 명에 불과합니다. 국방장관은 국무장관과 더불어 톱급인데요. 플러노이가 예상대로 장관이 된다면 트럼프 대통령 시절 추락한 국방부의 자존심과 내부 결속력을 다시 올리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그녀만큼 모든 면에서 갖춘 후보를 찾기도 힘들지요.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국내 이너뷰티 시장은 콜라겐에 집중돼 있지만 해외에서는 피부 표면에서 수분장벽 역할을 하는 세라마이드와 피부 형태를 유지하고 조직을 단단하게 해주는 콜라겐을 함께 섭취하는 추세가 확산되고 있다. 매일유업의 생애주기별 영양설계 전문 브랜드 매일 헬스 뉴트리션은 100% 우유에서 추출한 세라마이드 성분을 함유한 ‘먹는 화장품’(이너뷰티) 신제품 ‘셀렉스 밀크세라마이드’를 선보였다. ‘셀렉스 밀크세라마이드’는 밀크세라마이드(600mg)와 저분자 피시 콜라겐(1000mg)을 한꺼번에 섭취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여기에 콜라겐과 함께 먹으면 좋은 비타민C 하루 권장 섭취량(100mg)과 히알루론산, 엘라스틴까지 추가했다. 신제품에 포함된 ‘밀크세라마이드’는 매일유업의 50년 유가공 전문 노하우를 바탕으로 100% 우유에서 추출한 특허받은 피부 보호용 조성물이다. 매일 하루 1포 물 없이 간편하게 털어 먹는 분말스틱 형태이며 부드럽고 맛있는 요거트 맛이다. 가격은 4주 분량 1팩에 4만5000원. 매일유업 관계자는 “30대부터는 콜라겐과 세라마이드를 함께 섭취하면 좋다”고 말했다. 매일 헬스 뉴트리션의 대표 브랜드인 셀렉스는 2019년 단백질 건강기능식품 최다 생산 실적을 기록하며 단백질 성인 영양식 시장 1위를 달리고 있다.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패배 불복 와중에 미국인들을 웃게 만든 사건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웃고 지나갈 게 아니라 뒤죽박죽 상태인 미국 정치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대선 후 소송전을 개시하던 무렵 트럼프 대통령이 트윗을 올렸습니다. “내일 주말 아침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 포시즌즈에서 기자회견 열림. 참석 바람.” 기자회견 앞에 ‘대규모(big)’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써가며 기대감을 높였죠. 대선 패배 후 저기압 모드였던 트럼프 대통령이 모처럼 신이 나 트윗을 올렸으니 기자들은 포시즌즈 호텔에 “회견이 예정돼 있느냐”고 전화를 겁니다. 그러나 트럼프 진영으로부터 회견장 예약이 없었던 포시즌즈 호텔은 오히려 “이게 뭔 소리?”라는 반응을 보이죠. 회견 장소에 대한 의문은 당일 아침 풀립니다. 트럼프 측은 “오늘 회견은 ‘포시즌즈 토털 랜드스케이핑’이라는 조경회사에서 열린다”고 기자들에게 수정 문자를 보냅니다. “웬 조경회사?”라는 의문을 가진 기자들이 삼삼오오 지정된 장소에 집결합니다. 도착해보니 특급 호텔 포시즌즈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필라델피아 슬럼가에 있는 조그만 조경회사. 이 때부터 기자들의 관심사는 ‘기자회견에 누가 나오느냐’ ‘무슨 얘기를 하느냐’가 아니라 ‘왜 이런 곳에서 기자회견이 열리나’로 옮겨갑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을 둘러보니 기자회견 장소로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한쪽으로는 성인용품 상점, 다른 한쪽으로는 화장장 사이에 끼여 있는 조경회사, 그것도 회사 내부 사무실이 아닌 야외 주차장에서 기자회견이라뇨. 그런데 정말 기자들 사이를 뚫고 루돌프 줄리아니 트럼프 대통령 개인 변호사 겸 전 뉴욕 시장이 등장합니다. 줄리아니 하면 트럼프 대통령의 ‘심복’ 아니겠습니까. 뒤로는 급조한 무대를 배경으로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화려한 경력의 트럼프 법률팀이 쭉 도열해 있습니다. 줄리아니는 새로울 것이 없는 “이번 선거는 사기다” “부정선거다”라는 주장을 펴기 시작합니다. 열변을 토하는 사이 펜실베이니아 개표가 끝나고 언론사들은 일제히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 승리’라고 공식 발표를 합니다. 기자들은 수군거리며 더 큰 뉴스가 나올 바이든 선거본부로 발걸음을 옮기죠. 기자들이 왜 떠나는지 모르는 줄리아니는 주변에 물어보고 “모두들 바이든이 승자래요”는 대답을 듣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라 당황하던 줄리아니는 역시 드라마적 연출에 강한 면모를 보이며 수습에 나섭니다. 회견 도중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오 신이시여, 언제부터 네트워크(방송사)들이 승자를 결정했습니까. 법정에서 결판이 나야지요”라며 울부짖습니다. 배경, 등장인물, 타이밍, 스토리라인 등이 모두 4차원스러운 이 한 편의 드라마는 CNN 등 언론사들에 의해 주말 아침 생중계됐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기자회견 장소 예약을 담당하는 트럼프 진영 말단 직원의 ‘실수’로 발생한 일이라고 합니다. 웬만한 거짓 트윗은 지우지 않은 트럼프 대통령도 포시즌즈 트윗은 창피했던지 삭제해 버렸습니다. 그러는 사이 이 조경회사는 소셜미디어에서 최고 검색어로 등극하며 수많은 유머의 소재거리가 됐습니다. CNN의 잭 태퍼라는 앵커는 “트럼프타워의 금빛 엘리베이터에서 시작된 트럼프의 대통령 야망이 결국 포르노샵 부근 동네에서 막을 내렸다”고 비꼬기도 했죠. 성인용품 상점 주인까지 조연으로 등장해 기자들의 인터뷰 공세에 “트럼프도 자기가 진 줄 알아, 알고 말고”라며 혀를 찹니다. 이 사건은 작게 보면 한 말단 직원의 실수지만 크게는 트럼프 법률전략의 대전환을 의미한다고 미 언론은 지적합니다. 패배를 예감한 트럼프 진영은 이미 6월부터 백악관 법률팀을 가동해 소송 전략을 수립했다고 하죠. 이곳저곳에서 소송을 벌이는 것이 간단해 보일지 몰라도 사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각 주마다 제각각인 선거관련 법률을 알아야 하고, 주의 대표적인 로펌들을 소송 대리인으로 선정하고, 부정선거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들을 선거 핫라인으로 모아 해당 법정에 자료로 제출해야 하는 복잡한 과정입니다. 올 6월에 시작했어도 늦은 감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트럼프 진영 핫라인에 40여명이 근무한다고 하는데 턱도 없이 작은 인원입니다. 장난전화를 골라내야 하고, 설사 부정이 개입했다 하더라도 선거를 무효화할 수 있을 만큼 조직적인 규모로 이뤄졌는지 판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줄리아니의 등장은 의미가 있습니다. 주마다 각개전파로 진행돼온 소송전에서 이제 발을 빼겠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대부분이 ‘함량미달’인 소송을 대량으로 전개한 뒤 ‘걸리는 것이 있으면 다행’이라는 주먹구구식 전략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것을 누구보다 트럼프 대통령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줄리아니가 법률 총책임자로 전면에 나섰으니 앞으로는 대규모 대중집회와 언론을 통한 부정선거 호소에 더 집중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물론 이런 대중선동 전략도 ‘약발’은 오래 가지 않겠죠. 이름도 낯선 ‘포시즌즈 토털 랜드스케이핑’ 사건을 보면서 많은 미국인들은 “트럼프 시대가 정말 막을 내리는구나”라고 직감했을 겁니다. 대선 불복 몽니를 부리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죠. 혼란의 미국에 부조리 코미디극을 선사한 사건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듯 합니다.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의 승리로 올해 미국 대선 드라마가 마무리됐습니다. 이런 결과를 두고 두 그룹의 사람들이 울고 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은 도널드 트럼프 선거진영과 지지자들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졌으니 이 사람들의 우울한 반응은 당연합니다, 또 다른 그룹은 여론조사 업계입니다. 내놓는 사전 여론조사마다 바이든 당선자의 압승을 예측했던 업계는 실제 개표 집계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예상 밖 선전을 하면서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야 할 처지가 됐죠. “대충 바이든 당선자가 이겼으니 됐지 않았느냐”구요? 아닙니다. 정확성이 생명인 여론조사에서 “대충”이라는 말로 그냥 넘어가는 사례는 없습니다. 특히 언론이 이 문제를 걸고넘어지고 있습니다. 여론조사를 믿고 바이든 압승 시나리오를 만들어놨다가 함께 망할 뻔했던 미 언론사들은 여론조사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몇 개 헤드라인을 볼까요.“여론조사, 남은 믿음마저 다 버렸다”“대재앙 여론조사”“여론조사업계 자폭해야”“여론조사(의 필요성)를 여론조사 하라” 아직 개표가 완료된 상황은 아닙니다만 현재까지 나온 결과로 본다면 바이든 당선자의 ‘접전 끝 승리’라는 결론이 가능합니다. 특히 후반부로 가면서 몇몇 경합 주에서 우편투표에서 큰 격차를 보인 것이 승리의 견인차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사전 여론조사 결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선거 직전까지 대표적인 여론조사기관 ‘리얼클리어폴리틱스’는 7.2%포인트, 뉴욕타임스 산하 ‘파이브써티에이트’는 8.4%포인트로 바이든 당선자의 여유 있는 승리를 예측했습니다. 일부 조사기관은 “두 자리 수로 이긴다”고 장담하기도 했습니다. 여론조사의 오차범위가 3% 내외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바이든 당선자의 승률을 너무 높게 잡았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죠. 개별 주로 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플로리다 주에서 이기자 다들 놀랐는데요. 원래 여론조사에서는 2.5%포인트 격차로 패할 것이라는 예측이었는데 정작 개표를 해보니 3.5%포인트 차이로 이겼습니다. 오하이오는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1% 내외로 이기는 힘든 싸움이 될 거라고 하더니만 개표 결과는 8%포인트 차이로 압승 그 자체였습니다. 언론처럼 여론조사도 트럼프 대통령을 개인적으로 싫어하기 때문에 과소평가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상하원 선거도 함께 치러진 이번 대선에서 전반적으로 공화당 후보들을 너무 ‘박하게 대접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수전 콜린스라는 메인 주의 여성 상원의원(공화)은 트럼프 행정부 정책에 사사건건 반기를 들다가 찍혀서 이번 선거에서 물갈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죠. 그랬는데 초반부터 선두를 유지하더니 결국 6.2%포인트 차이로 이겼습니다. 퀴니피액대 여론조사에서는 12%포인트라는 어마어마한 차이로 패할 것으로 예측됐었는데 말이죠. 선거 여론조사는 힘들기로 정평이 나있습니다. 개표 집계라는 결과로 바로 확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시험지 채점’이 즉시 된다는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전문가 그룹에서 정말 ‘톱 중의 톱’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평소 미국 정치에서 이름도 못 들어본 리얼클리어폴리틱스니, 파이브써티에이트니 하는 여론조사기관들은 선거 때만 되면 여기저기 인용되면서 물 만난 고기처럼 대활약을 하죠. 미국인들의 농담 중에 “‘리얼클리어폴리틱스’라는 이름이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하면 선거철이 왔다는 증거”라는 말이 있을 정도죠. 고고한 명성을 쌓아오던 여론조사가 2016년 대선 때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승리를 예측했다가 크게 한번 당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당시 여론조사업계는 1년여의 자체 조사를 거쳐 실패의 원인을 심층 분석하는 보고서를 내놓았습니다. 표본 추출에서 인종, 경제력 등과 비교해 덜 발달된 교육 수준이라는 변수를 더 세분화해야 한다는 결론이었습니다. 또 유선전화와 함께 휴대전화까지 응답자에 포함시킨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냥 끊어버리는 응답에 대해 문자메시지, 이메일 등의 대안을 줘야 한다는 제안도 나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개선된 올해 대선 여론조사로 또다시 망신을 당했으니 할 말이 없게 됐습니다. 들리는 얘기로는 우편투표 유권자들의 응답이 과대 반영된 것이 문제의 시발점이라고 합니다. 친(親) 바이든 성향의 우편투표 유권자들은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때문에 외출을 꺼리니 여론조사 전화를 받고 적극적으로 응답할 가능성이 높죠. ‘샤이 트럼프(숨은 트럼프 지지자)’의 여론조사에 대한 불신을 감안해야 했다는 반성도 나온다고 합니다. 샤이 트럼프는 여론조사를 믿지 않기 때문에 응답 자체를 거부하는 비율이 높으니까요. 외부인들이 보기에 여론조사는 미스터리 그 자체입니다. 이 분야는 웬만한 정보는 ‘업계 비밀’이라며 공개를 꺼리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여론조사가 크게 빗나간 두 건 모두 트럼프 시대에 집중돼 있다 보니 “트럼프 지지자들 사이에는 여론조사로는 끄집어내기 힘든 그 어떤 무엇이 있다”는 워싱턴 호사가들의 뒷얘기가 그럴싸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이제 트럼프 시대는 끝나가고 있지만 여론조사는 한번 잃는 신뢰를 되찾는데 시간이 걸릴 듯하네요.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전임 대통령의 삶보다 더 처량한 삶은 없다.” 존 퀸시 애덤스라는 미국 6대 대통령이 한 말입니다. 200여 년 전 나온 말이지만 지금 들어도, 아니 지금 듣기 때문에 더욱 수긍이 갑니다. 글로벌 미디어와 인터넷 헤드라인을 매일 장식하는 자리에서 내려온 뒤의 삶은 얼마나 허전할까요. 이 말을 한 애덤스 전 대통령도 얼마나 전임 대통령의 삶이 싫었던지 한참 급을 낮춰 하원의원으로 다시 정치 세계에 뛰어들어 17년 동안 활동하다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제 새 미국 대통령을 뽑는 때입니다.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패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이번에 안 물러난다고 해도 어차피 4년 뒤에는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오늘의 주제는 ‘트럼프 대통령은 물러난 뒤 어떻게 전임 대통령의 삶을 살아나갈 것인가’입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아웃사이더’인 트럼프 대통령이 퇴임 후 살아가는 과정도 예사롭지 않을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인데요. 지구상 그 어느 누구보다 관심의 초점이 되기를 원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슬기롭게 전임 대통령의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을까요. 미국에는 ‘전임 대통령 클럽’이라는 전통이 있습니다. 전임 대통령 장례식이 있을 때 이 클럽 회원들은 서로 모여 정담을 나누고 어깨를 도닥여 주는 훈훈한 장면을 연출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클럽에 자동 가입은 되겠지만 환영은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본인도 인정했습니다. 지난해 블룸버그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아무래도 전임 대통령 클럽에서 ‘왕따(집단 따돌림)’ 당할 것 같다”구요. 전임 대통령도 명성과 대중적 인기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떠난 뒤 외교와 자선활동을 통해 더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 클럽의 지원사격도 없이 혼자 ‘포스트-프레지던트 라이프(퇴임 후의 삶)’을 개척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가 퇴임 후 처량한 삶을 살 것으로 예측하는 전문가는 거의 없습니다.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진출할 것이다” “‘트럼프-TV’를 개국할 것이다” “러시아 모스크바에 트럼프타워를 지을 것이다”는 등 들리는 얘기가 많죠. 가능성 중 하나는 ‘펜실베이니아 대통령’설(說)입니다. 워싱턴에서 백악관은 펜실베이니아 가(街)에 있습니다. 우연하게도 워싱턴의 트럼프 인터내셔널 호텔도 펜실베이니아 가에 위치해 있죠. 트럼프 대통령이 물러난 뒤에도 트럼프 호텔에 운동본부를 차려놓고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펜실베이니아 가의 또 다른 대통령’이라는 의미죠. 트위터로 기자 브리핑을 매일 열고, 폭스뉴스 진행자나 논객을 초청해 열렬 지지자들이 좋아할만한 이슈를 만드는 것이죠. 이 방안은 상당한 논의가 진전됐다고 합니다. 재임 업적을 홍보하는 테마파크 건설 소문도 들립니다. 허황된 얘기 같다구요? 아닙니다. 나중에 건설될 트럼프 기념 도서관을 변형시켜 기념관도 보고 놀이시설도 즐기는 방식으로 짓는다면 그리 힘든 일도 아니죠. 기념 도서관이야 전임 대통령의 특권이니 당연히 세금으로 지어지게 됩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마러라고 별장이 있는 플로리다에 ‘디즈니월드’가 있으니 그와 견줄만한 테마파크 건설은 필생의 사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외교적으로는 평소 친하게 지내온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 등 ‘독재자 친구들’과 조인트벤처 사업을 벌이거나 정치 컨설팅에 뛰어들 수도 있습니다.이런 구상들이 실현되려면 시기가 관건입니다. 미국 대통령들은 퇴임 직후 일정 기간동안 대중의 시선에서 사라집니다. 워싱턴 전문용어로 ‘그레이스(자비의) 기간’이라고 하죠. 후임 대통령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도록 빠져주는 기간입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퇴임과 함께 텍사스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후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내 침묵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한 말은 유명합니다. 오바마 전 대통령 역시 후임으로 당선된 트럼프 대통령이 못마땅했지만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이 만들어 놓은 훌륭한 전통”이라며 2년여 동안 공식 석상에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완전히 정치를 은퇴할 생각이 아니라면 이 기간 동안 노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재창조 작업을 하게 되죠. 트럼프 대통령은 열성 지지자들이 많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빨리 활동을 재개하고 싶은 마음일 텐데요. 하지만 정치의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앞으로 재개 시점의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모르죠. 북한에서 사업을 벌일 구상을 하고 평양 경기장에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손잡고 나타나 농구 경기를 관람하는 날이 올 지두요.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미국 대통령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가장 생생한 유권자 민심을 알 수 있는 방법이 뭘까요. 맞습니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댓글들을 살펴봤습니다. △“Like him or not, Trump lets you know where he stands. Biden stands for whatever the teleprompter tells him to stand for.” 폭스뉴스 페이스북에 이런 댓글이 달렸습니다. 평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을 보면 자기주장이 확고하죠. “그를 좋아하건 말건 이건 인정해야 한다. 트럼프는 자신의 주장이 뭔지(where he stands) 당신에게 알게 해준다.” “반면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는 텔레프롬프터(자막 모니터)가 시키는 대로 주장을 편다.” ‘Stand for’는 ‘(어떤 쪽 주장을) 옹호하다’는 뜻입니다. △“I didn’t realize doing rallies, watching TV and tweeting was considered the president working his ass off, lol.” CNN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댓글입니다. 이 댓글이 달린 동영상을 보면 트럼프 대통령이 “나는 한가한 바이든 후보와는 달리 여기저기 유세 다니며 뼈 빠지게 일한다(work my ass off)”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댓글은 그 발언을 비꼽니다. “유세하러 다니고, TV 보고, 트위터 하는 걸 대통령이 열심히 일한다고 하는 건 줄 몰랐네.” 그리고 ‘lol(정말 웃겨)’로 끝을 맺죠. 대통령의 직무가 아닌 자기 선거운동 하러 다니고, 취미생활 하는 걸 어떻게 열심히 일한다고 할 수 있느냐는 거죠. △“The US is just like these tik tok people. They don’t care how dumb they look, as long as all eyes are on them.” 최근 마지막 대선 TV 토론을 생중계한 NBC방송 웹사이트에 올라온 댓글입니다. 해외 시청자 댓글이네요. “미국은 꼭 ‘틱톡’ 출연자들 같다. 자기들이 얼마나 멍청해 보이는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관심만 받으면 된다(all eyes on them).” 틱톡에는 몸을 이용한 묘기를 선보이는 출연자들이 많습니다. 우스꽝스럽지만 관심 받는 것 자체를 즐기는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가 높죠. 외국인이 보기에는 저것도 토론이랍시고 하면서 그저 주목 받는 데만 관심이 팔린 두 후보가 틱톡 묘기자랑 같다는 것이죠. 정미경 콘텐츠기획본부 기자·前 워싱턴 특파원 mickey@donga.com}
오늘은 옷 얘기 좀 해볼까요. 정장을 잘 차려 입은 남자를 보면 “와! ‘수트빨’ 산다”고 하죠. 미국에서는 ‘정장빨’ ‘수트빨’ 좋은 남자를 가리켜 ‘브룩스 브라더스족(族)’이라고 합니다. 미국 여행객이나 연수, 유학생들이 워낙 많은 시대이니 아시는 분은 잘 아시겠지만 브룩스 브라더스는 정장 판매 회사입니다. ‘저렴이’가 아니라 고가 기성복을 판매합니다. 오프라인 샵들은 최근 경기 한파로 파산 신청을 냈지만 브랜드는 건재하고 온라인 판매는 성업 중이죠. 그런데 미국 대선 역사에서도 브룩스 브라더스가 등장합니다. “미국 대통령이 브룩스 브라더스 옷을 즐겨 입는다”라는 차원의 얘기가 아닙니다. 선거는 민주국가에서 가장 합법적인 의사 표현 방법입니다. 반면 폭력은 가장 불법적인 정치행태라고 할 수 있죠. 합법의 정점 선거에 끼어든 가장 불법적인 폭력 사태, 그 교차점에 브룩스 브라더스가 있습니다. 무슨 얘기냐구요. 미국처럼 자기 나라 선진 정치를 금쪽같이 떠받드는 나라에서 대선 현장의 폭력사태는 정말로 흔치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가끔 일어납니다. 때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00년 대선.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후보와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가 대결했을 때입니다. 사건은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에서 벌어졌습니다. 미국 대선에 관심 없는 분들이라도 ‘플로리다 재검표’ 논란은 아실 겁니다. 정확히 말해 마이애미 데이드 카운티 선거구에서 벌어졌죠. 우리나라 TV에서 미국 대선일 풍경 비춰줄 때 투표용지를 개표하는 선거요원들 모습을 보셨을 겁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책상에 둘러앉아 수작업으로 열심히 세고 있죠. 그 작업은 투명선거를 위한 언론 공개가 원칙입니다. 워싱턴 특파원 때 보니 선거관리위원회가 기자들에게 개표작업 참관을 원하는지 사전 신청을 받더군요. 물론 개표 요원과 참관인들 사이에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 합니다.당시 데이드 카운티 선거구 개표 수작업 결과 1만 750여 표가 실제 투표인 수와 차이가 났습니다. 그러자 카운티 선거당국은 기계를 이용한 개표 작업을 다시 한번 진행하기 위해 기계가 설치된 옆방으로 투표용지를 가져가려고 했죠. 정확히 말해 그 기계를 ‘밸럿 스캐닝 머신(ballot scanning machine)’이라고 합니다. 당시 민주 공화 양당의 전국위원회에서 파견된 선거 참관인들도 많이 보고 있었는데요. 마감 시간을 맞추느라 정신이 없던 선거당국이 양당 위원회나 선거본부 측 참관인들과 충분한 사전 협의 없이 투표용지를 옮겼던 게 문제의 발단입니다. 당시 공화당의 부시 후보가 근소한 차이로 앞서던 상황이었죠. 투표용지를 옮기자 안 그래도 재검표 작업 자체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공화당 측 참관인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일대 난투극이 벌어졌습니다. 선거 관계자들이 재검표 기계가 있는 방에 들어가 문을 닫자 이를 열려는 공화당 참관인들이 문을 부수고 난리도 아니었죠. 당시 월스트리트저널 보도를 보면 “브룩스 브라더스 정장에 에르메스 넥타이, 손에는 휴대전화를 든(휴대전화가 흔치 않던 시절이므로) 공화당 참관인들이 ‘빨리 문 열어!’ ‘하던 일 못 멈춰!’라고 고함을 치며 문을 때려 부쉈다”고 합니다. 이 날은 선거일. 마이애미 일반 유권자들의 의상은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이었겠죠. 공화당 시위자들의 의상이 얼마나 도드라졌는데 이들을 가리켜 ‘브룩스 브라더스 군단’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시위를 ‘브룩스 브라더스 폭동’이라고 하죠. 미국 선거 흑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큰 사건입니다.결국 기계 재검표는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민주당의 고어 후보는 재검표를 포기하고 선거결과에 승복했죠. 당시 브룩스 브라더스 군단은 일반인이 보기에는 선거 난동꾼이었지만 공화당의 부시 진영에게는 승리의 수훈갑이었죠. 그들은 부시 행정부에서 주요 직책을 차지하며 영전했습니다. 당시 브룩스 브라더스 군단 주동자 중에서 아직까지도 친숙한 이름이 있습니다. 올해 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관련된 러시아 스캔들 공판에서 위증 혐의로 실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 갈 위기에 처했던 정치 컨설턴트 로저 스톤입니다. 자기 자신을 가리켜 “나는 GOP 히트맨(공화당 청부살인업자)이야”라고 공공연히 홍보하고 다니는 약간 독특한 정신세계를 가진 인물인데요. 얼마 전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 전 마지막 권한으로 스톤에 대한 사면 결정을 내려 감옥행을 면하게 해주면서 미 정치권이 소란스러웠죠. 요즘 미국 사회를 보면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에, 인종차별 반대 무드에, 대선 불안까지 겹치면서 ‘브룩스 브라더스 폭동’ 비슷한 것이 또 한번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브룩스 브라더스’가 아니겠죠. 2000년 당시야 정보기술(IT) 활황으로 경제적 거품이 잔뜩 끼어있을 때니 정장을 빼입고 시위를 벌였죠. 지금은 ‘AR-15 폭동’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습니다. ‘AR-15’는 미국인들이 많이 소지하고 있는, 총기사고 때마다 빈번하게 등장하는 콜트사의 반자동 소총입니다. 시대가 이렇게 변한 것이죠.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