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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물 과적 점검만 제대로 했더라면….’ ‘비상버튼만 눌렀더라면….’ ‘제때 탈출 지시를 했더라면….’ ‘해경, 배에 직접 들어가 구조했더라면….’ 302명의 사망·실종 참사를 낸 세월호 침몰 사고를 보면서 끊임없이 머리를 맴도는 아쉬움이다. 대부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태도나 자세만 바꿔도 되고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되는 일이다. 사고 때 이런 게 이뤄지지 않은 것은 평상시 구조구난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설령 갖췄다 할지라도 제대로 실행할 수 있도록 교육 및 훈련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언론 역시 이런 비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대형사고 때마다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사후에 제대로 고쳐졌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이에 동아일보는 ‘대한민국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국가의 총체적인 재난관리 시스템을 집중 점검하고자 한다. 사고 순간은 물론이고 평상시 누가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꼼꼼하게 파헤쳐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안전 대한민국 이렇게 만들자’는 제언을 위한 첫 번째 시리즈다. 앞으로도 동아일보는 적절한 시간 간격을 두고 ‘5000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이 확보되는 그날까지 지속적으로 점검할 예정이다. 》 승무원 12명 중 거동이 가능한 사람은 5명뿐이었다. 지난해 7월 7일 미국 샌프란시스코공항. 아시아나항공기가 착륙 도중 활주로와 충돌해 꼬리가 떨어져나가는 순간 승무원 5명이 부상당했다. 황급히 작동시킨 탈출용 슬라이드는 일부가 안에서 펴져버렸다. 승무원 2명이 끼어 옴짝달싹 못했다. 다치거나 몸이 끼인 7명을 제외하고 남은 승무원 5명의 손에 승객 291명의 목숨이 달린 상황. 설상가상으로 비상구는 8개 중 3개만 열렸다. 뒤편에서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기체 화재가 폭발로 이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90초. 이 시간이 탈출과 생존에 필요한 최소시간, 즉 골든타임이다. 승무원들이 훈련해봤던 최악의 상황은 300명을 비상구 4개로 탈출시키는 것이었다. “순간 머리가 명료해지면서 뭘 해야 할지 보이더라고요. 훈련을 매년 해서 그런지 그냥 몸이 막….”(이윤혜 선임 승무원) 승무원들은 승객들을 전부 대피시킨 뒤 살아서 나왔다. 그 후 1, 2분 만에 기체는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사망자는 3명. 2명은 착륙 당시 충격으로, 1명은 출동한 소방차에 치여 숨졌다. 이 사건은 골든타임 ‘90초’가 완수된 항공기 사고로 기록됐다. 사고는 대개 예상을 뛰어넘는 최악의 형태로 일어난다. 사고 때마다 우리 안전 담당자들이 늘어놓는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 변명이다. 세월호 참사는 구조당국의 무능한 초동대응 실태를 여실히 드러낸 사례다. 첫 침몰 신고가 들어온 16일 오전 8시 52분부터 배가 완전히 뒤집힌 10시 31분까지 총 99분. 아시아나항공기 사고 때와 비교해 ‘골든타임’이 65배나 많이 주어졌지만 302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신고를 접수한 해경은 신고자인 단원고 학생에게 위도 경도 등을 묻다 4분을 허비했다. 신고 내용이 사고 해역을 담당하는 진도 해상관제센터(VTS)까지 전달되는 데에도 15분이 걸렸다. 진도 VTS는 레이더 관측 업무를 소홀히 해 세월호가 100도 이상 급선회했음에도 이상 징후를 알아채지 못했다. 신고 후 약 40분 만에 헬기와 경비정이 도착했을 땐 배가 기울 대로 기울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선내 수색 구조를 하도록 특수훈련을 받은 대원은 현장에 없었다. 최신예 해군 구조함 ‘통영함’(1600억 원) 등 정부가 천문학적 예산을 들인 해상 구조 인프라도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단원고 학생 등 300여 명이 갇힌 채 배가 뒤집히는 광경을 구조대는 속수무책으로 바라봤다. 안이한 초동대응으로 인명피해를 ‘극대화’하는 패턴은 정부가 수십 년째 고치지 못하고 있는 고질병이다. 유치원생 19명을 포함해 27명이 숨진 1999년 경기 화성시 씨랜드 화재 때 소방차가 도착한 건 신고 1시간 13분 만이었다. 화재 사고 골든타임은 단 5분. 당시 씨랜드 측 화재 신고를 받은 경찰은 40분간 사태 파악을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소방차 도착에도 20분 넘게 걸렸다. 씨랜드 진입로는 비포장 일방통행로였고 주민들이 사유지를 주장하며 쇠말뚝을 박아놓았는데 당국은 이를 방치해왔다. 사건 후 15년, 소방차 5분 내 도착 비율은 여전히 66%에 불과하다.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참사 때 상황실 근무자들은 모니터를 보지 않아 화재 경보가 뜬 지 3분이 지나도록 멍하니 있었다. 불이 난 열차가 역에 방치돼 있던 사이 맞은편에서 다른 열차가 들어와 그쪽까지 불이 옮겨 붙었다. 두 열차에서 192명이 숨졌다. 2012년 경북 구미 산업단지 불산 누출사고 때도 소방당국은 불산의 맹독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단순 가스누출로 판단해 피해를 키웠다. 구조요원들이 초기 2시간 반가량 무방비로 방재작업을 했고 위험지역(반경 3km) 주민 대피도 사고 발생 5시간 만에 이뤄져 불산 오염 등 2차 피해가 생겼다. 김근영 한국방재학회 이사는 “초동대응은 정확한 정보 수집 후 신속히 상황 판단을 해야 하는 고도의 작업인데 대부분 하위직 근무자가 담당한다”며 “매뉴얼은 부실하고 훈련도 형식적이어서 최일선 담당자들의 상황 판단력과 자신감이 낮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안전행정부 의뢰로 국내 재난관리시스템을 연구한 한국재난안전기술원은 보고서에서 “우리 재난관리 체계는 피해 예방보다 재해 발생 이후 복구 및 지원의 개념이 강했다”고 밝히며 초동대응 능력 향상을 핵심 과제로 꼽았다. 세월호 참사는 정부가 이 같은 연구 결과를 받아보고도 별 대책을 세우지 않는 사이 벌어진 일이다.신광영 neo@donga.com·주애진 기자}
16년 전 가을, 미술학원 상담실에 겉멋 든 고등학생 하나가 들어섰다. 인사를 한답시고 고개만 까닥했고, 교복은 좀 놀아봤다는 듯 단추를 풀어헤친 상태였다. 녀석은 한쪽 어깨에 가방을 들쳐 메고 있었다. “이제석”이라고 껄렁껄렁하게 자신을 소개한 그 녀석은 역시나 학교 성적이 하위권이었다. 며칠 나오다 말겠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한 장짜리 스케치 숙제를 내주면 녀석은 스무 장, 서른 장을 그려왔다. 한번 쓴 붓으로 다른 색을 칠하려면 그것을 물에 씻고 걸레에 몇 번 닦아야 한다. 그런데 제석이는 뭐가 그리 급한지 시커먼 물에 담갔다 꺼낸 붓을 입으로 쭉쭉 빨아가며 그림을 그렸다. 오래도록 굶주리다 먹이를 발견한 야생동물처럼 무섭게 몰두했다. 제석이는 조금만 관심을 보여주면 10배의 노력으로 화답했다. 공부 좀 하라고 말하곤 했는데, 하루는 녀석이 “쌤(선생님), 저 공부 한번 해볼까요?”라고 했다. 이튿날부터 제석이는 푸른색 교복 상의 왼쪽 주머니에 손바닥 크기의 영어 단어장을 넣고 다녔다. 이후 쉬는 시간에 연필로 쓴 단어장을 빼서 혼자 중얼거리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석 달쯤 지났을까. 단어장을 얼마나 많이 넣었다 뺐다 했는지 교복 왼쪽 가슴 부위가 새까매져 있었다. 교복을 빨아 입어 다른 데는 깨끗해도 그곳만은 언제나 까맸다. 제석이는 미대 합격 통보를 받던 날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녀석이 허리디스크로 고생해 왔다는 걸 나는 문병을 가서야 알았다. 허리도 안 좋은 녀석이 매일 저녁부터 새벽까지 7시간 넘게 연습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그림을 그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짠했다. 제석이는 대학에서 매 학기 전 과목 A+를 받았다. 실력도 좋았지만 가정형편상 장학금이 생명줄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제석이에게 학원 보조강사 일을 맡겼다. 가끔 다른 학원에서 특강 요청이 오면 제석이를 대신 보냈다. 학부 1, 2학년생이 미술 강사를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이례적이다. 그런데도 제석이는 고작 두세 살 어린 학생들에게서 존경을 받았다. 제석이가 보조강사를 그만둔 얼마 뒤 나는 시내에서 놀라운 광경을 봤다. 반바지 차림의 청년이 굴러가는 게 신통할 정도로 낡은 연탄배달 오토바이를 타고 있었다. 주워온 듯한 작은 헬멧은 머리 위에 엉거주춤 걸쳐져 있었다. 제석이었다. 미국 유학을 준비하려 영어학원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 학원은 대구에서 수강료 싸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녀석은 교통비를 아끼겠다고 버려진 오토바이를 주워 탄 것이었다. 제석이는 그렇게 눈물나게 유학비용을 모았다. 몇 년 뒤 나는 TV 9시뉴스에서 제석이를 봤다. 세계적 광고제인 ‘뉴욕 원쇼 페스티벌’에서 공장 굴뚝을 권총으로 묘사한 광고로 최우수상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PC방 컴퓨터로 그 뉴스를 봤는데, 앉은 자리에서 오전 3시까지 인터넷을 뒤지며 관련 뉴스를 보고 또 봤다. 다른 제자나 강사들한테 얘기하면 괜히 질시를 받을까봐 누구한테 말도 못하고 혼자 기뻐했다. 사람들은 제석이를 ‘광고 천재’라며 놀라워했지만 나는 그 결과가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 녀석은 광고 천재라기 보단 ‘노력 천재’였다. 제석이가 광고전문가로 커가는 동안 나는 학원 원장이 됐다. 다른 미술학원 원장들은 수업에서 손을 떼고 경영에만 신경 쓰지만 나는 그러질 못하고 있다. 강의실에서 아이들과 계속 부대끼다 보니 마흔이 넘도록 장가도 못 갔다. 이게 다 제석이 때문이다. 녀석은 요즘도 불쑥 전화로 “쌤, 뭐해요?”라고 묻는데 나는 “쉰다”고 하고 싶지가 않다. “쌤은 수업하다 바닥에 엎어져 그림 그릴 때가 제일 멋져요”라는 제석이의 오래전 한마디는 내 삶의 지표가 돼버렸다. 제석이는 자기 약력을 소개할 때 계명대, 뉴욕 스쿨 오브 비주얼아트, 예일대 미대와 함께 미술학원 이름을 밝힌다. 나에게 배운 걸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제자가 있는데 어찌 가르치는 일을 그만둘 수 있단 말인가. 언젠가 제석이와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다. “쌤, 야구 하면 누가 떠오르세요?” “박찬호.” “축구는 누가 떠올라요?” “박지성.” “광고 하면은요?” “….” “저는 그때 떠오르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석이는 ‘광고의 아이콘’이 되고 싶다고 했다. 지금의 명성이면 적당히 해도 먹고살 텐데 아직도 남들이 안 가는 힘든 길을 가려는 건 그 목표를 위한 몸부림인 것 같다. 제석이는 까까머리 학생 때부터 판을 새로 짜는 방식으로 승부를 걸었다. 그가 앞으로 어떻게 자신만의 룰을 만들어갈지 나는 응원하며 지켜볼 것이다.정영규 대구 제3미술학원 원장}
대형 재난사고가 터질 때마다 “상황 대처 매뉴얼이 부실하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정작 정부가 보유한 각종 안전 및 위기관리 매뉴얼을 다 합치면 모두 3200여 개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자연재해나 화재, 산업재해, 교통안전 등을 담당하는 기관마다 사태 수습용으로 임기응변식 매뉴얼을 내놓는 게 관행으로 굳어진 탓이다. 매뉴얼이 중구난방인 데다 워낙 방대해 담당 공무원들이 이를 제대로 숙지하지 못해 현장에서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다는 게 안전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매뉴얼 너무 많아 안 보게 돼” 세월호 침몰 사고와 관련해 범부처 사고대책본부 고위 관계자는 21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정부 부처와 산하 기관에서 만든 안전 관련 매뉴얼은 개수로만 따지면 3200여 개나 되고 워낙 여기저기서 만들다 보니 내용의 80%가 겹치는 실정”이라며 “내용도 딱딱하고 어려워 비전문가들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국토교통부 내 안전 관련 부서에 근무하는 A 사무관은 “매뉴얼이 한두 개로 정리돼 있으면 반복해서 숙지할 텐데 챙겨야 할 매뉴얼이 수십 개에 달해 제대로 들여다볼 엄두가 안 난다”고 털어놓았다. 미국과 독일 등 선진국은 매뉴얼을 최대한 쉽고 단순하게 만드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인적재난과 자연재해를 구분하지 않고 통합 관리하는 ‘전재해 접근법(All Hazard Approach)’을 채택하고 있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 여러 분야의 안전 담당자들이 원활하게 협업하려면 공통된 기준을 충분히 공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 컨트롤타워 없이 대책본부만 10개 제대로 된 컨트롤타워 없이 우후죽순으로 사고대책본부를 만들어 공무원을 적재적소에 투입하지 못하는 비효율도 문제로 지적받고 있다. 이번 진도 여객선 참사와 관련해 범부처 사고대책본부, 안전행정부 중앙안전재난대책본부, 해양수산부 중앙사고수습본부는 물론이고 해양경찰청 교육부 국방부 등을 포함해 10개 가까운 대책본부가 만들어졌다. 각 부처 장차관을 비롯해 대책본부에 투입된 중앙부처 5급 이상 공무원만 245명에 달한다. 정부는 이런 대규모 대책본부를 만들고도 사망자 현황 및 구조 상황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계속 혼선을 빚어 유족과 실종자 가족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 침몰한 선박 승객들의 생존 여부가 판가름 나는 사고 초기 ‘골든타임’ 때도 이렇다 할 리더십을 보이지 못해 피해를 키웠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서해훼리호 침몰 후 사흘이 지난 12일 오후까지 정확한 사고 원인 규명은 물론이고 승객 수조차 파악되지 않는 등 당국의 위기관리 능력에 대한 심각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21년 전 동아일보 기사다. 1993년 10월 10일 전북 부안군 위도 앞바다에서 발생한 서해훼리호(110t) 침몰 사고를 다룬 것이다. ‘서해훼리호’를 ‘세월호(6825t)’로만 바꾸면 지금 상황과 다를 게 없을 정도로 두 사고는 쌍둥이처럼 보인다. 서해훼리호 침몰 당시 선박 안전 및 감독 부실에 대한 총체적인 문제가 제기됐다. 그러나 292명이 목숨을 잃으며 지적한 문제는 지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서해훼리호 침몰 직후 경찰이 밝힌 승선자 수는 140여 명에서 200여 명으로 수차례 번복했다. 정부는 시신 인양이 끝나고 나서야 362명으로 확정했다. 당시 선사들의 모임인 해운조합이 채용한 운항관리자가 주요 항구에 배치돼 승선자 수를 파악했다. 운항관리자가 선장의 보고를 믿는 허술한 구조였다. 서해훼리호 침몰 이후 정부는 운항관리자를 늘렸다. 현재 전국에 74명의 운항관리자가 있지만 여전히 출항 전 선장이 승선자 수를 문서로 보고하면 이를 승인하는 데 그쳐 정확한 파악이 어렵다. 세월호 선장은 출항 전 점검 보고서에 승선자 수가 450명이라고 보고했지만 실제로는 476명인 것으로 집계됐다. 정부는 이번에도 477명→459명→462명 등 수차례 생존자 수를 번복했다. 서해훼리호 침몰 당시 원인 중 하나로 과적이 지목됐다. 정원이 221명이었지만 362명이 타는 등 화물을 포함해 6.5t을 과적한 상태. 물살이 거센 해역에서 급선회를 시도했고 화물과 사람이 한쪽으로 몰리면서 복원력을 잃은 뒤 침몰했다. 훼리호는 무자격 업체에서 복원력 검사를 받았다. 세월호도 비슷하다. 세월호 선장은 안전점검표에 차량 150대, 화물 657t을 실었다며 운항관리자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사고 이후 밝혀진 화물량은 차량 180대, 화물 1157t. 50t 트레일러 3대도 실려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월호 정원은 921명. 승선자 수는 이에 훨씬 못 미쳤지만 화물이 이를 상쇄하고 남았을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이 때문에 복원력이 떨어진 세월호가 과적 상태에서 급선회를 하면서 복원력을 쉽게 잃고 침몰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과적이 가능한 이유는 운항관리자가 배가 물에 잠긴 정도를 보고 과적 여부를 판단할 뿐 화물을 확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운항관리자가 해운조합 소속이어서 감시자 역할을 하기 어려운 구조이기도 하다. 운항관리자의 구명장비 점검도 형식에 그치는 실정이다.손효주 hjson@donga.com·신광영 기자}
16일 전남 진도해역에서 침몰한 세월호 인양작업이 18일 오전 시작될 예정이지만 배를 끌어올리는 데 두 달 이상 걸릴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2010년 3월 백령도 해역에서 침몰한 천안함은 함미 인양에 3주, 함수 인양에 30일이 걸렸다. 세월호 인양이 천안함보다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는 우선 배의 크기가 10배 가까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세월호는 국내 여객선 최대 규모인 6825t, 천안함은 1220t이다. 천안함은 선체가 두 동강 난 상태에서 하나씩 끌어올렸기 때문에 인양 크레인이 감당해야 할 무게가 세월호의 10분의 1 수준이었다. 박종환 목포대 조선공학과 교수는 “배 안에 차량 등 화물이 많이 실려 있는 데다 물까지 가득 차면 무게가 1만 t 이상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사고 현장으로 이동 중인 크레인 3대의 인양 가능 무게는 총 9200여 t. 크레인을 추가로 투입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해양경찰 등 구조당국은 배 안에 공기주머니 등을 집어넣는 등의 방법으로 무게를 최대한 줄일 계획이다. 세월호의 선체가 거의 180도 뒤집혀 있는 것도 문제다. 이 상태로 끌어올렸다간 인양 과정에서 취약한 부분이 파손되거나 추락할 수 있어 일단 배를 바로 세워야 한다. 천안함 인양에 참여했던 정승계 유일수중공사 사장은 “배를 일으켜 세우려면 배 표면에 용접을 해 고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 작업에만 20일가량 걸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작업은 바닷물이 빠지는 정조시간에만 가능한데 6시간 주기로 1시간 남짓 오기 때문에 길어야 하루 4시간 정도 작업할 수 있다. 세월호 침몰 지점의 수심이 최고 37m로 천안함 침몰 수심(25m)보다 10m 이상 깊다는 것도 인양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조규남 홍익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는 “잠수부들이 일할 수 있는 최대 수심이 30m 정도다. 물 속은 10m 내려갈 때마다 1기압씩 올라 작업자들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세월호 침몰 해역은 국내에서 물살이 세기로 손꼽히는 지역이기도 하다.신광영 neo@donga.com·손효주 기자}
지난해 8월 부산 남구의 한 수련원 인근 내리막길에서 청소년 30여 명을 태운 관광버스가 도로를 이탈해 10m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대형 참사가 예상되는 상황이었지만 중상자나 사망자 없이 대부분 가벼운 찰과상만 입었다. 인솔교사의 지시로 학생들 모두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안전장치를 착용하지 않았을 때는 작은 사고도 치명타가 된다. 2012년 11월 경기 안성시의 한 상가 신축공사 현장에서 인부 김모 씨가 발을 헛디뎌 추락했다. 떨어진 높이는 1.7m에 불과했지만 안전모를 쓰지 않았던 김 씨는 바닥에 머리를 부딪쳐 사망했다. 안전장치 착용 여부는 위험 순간에 생사를 가르는 결정적 요소지만 우리 국민의 착용률은 미흡한 상황이다. 국내 안전띠 착용률은 70% 안팎으로 선진국인 독일 98%, 일본 97%, 스웨덴 96%, 미국 85%에 비해 낮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안전띠를 착용하지 않았을 때 사고로 사망할 가능성이 안전띠를 맸을 때보다 3.3배나 높다. 안전모의 경우도 공사 현장에서 안전모를 쓰지 않아 사망하는 비율이 2010년 31%에서 2012년 41%로 증가했다. 이 같은 인식에 따라 안전행정부는 안전띠와 안전모, 안전조끼의 착용을 생활화하는 ‘3필착(必着)’ 운동을 추진한다고 16일 밝혔다. 안행부는 매월 첫째 주를 안전강조주간으로 정하고 정기적으로 안전캠페인을 펼치기로 했다. 또 시기별로 사고 유형에 대비한 달력과 ‘3필착’ 운동 교육 교재를 각급 기관에 배포할 예정이다. 선진국은 정부 차원에서 안전기구 착용을 제도화하고 있다. 미국의 병원들은 출산 후 퇴원할 때 보호자 차량에 신생아용 카시트가 없으면 아예 퇴원을 금지하고 있다. 캐나다의 경우 ‘동승자 공동 책임주의’를 명문화해 함께 차에 탄 사람이 안전띠를 매지 않다가 적발되면 운전자에게 약 9만 원의 범칙금을 부과한다. 안행부 관계자는 “지난해 충남 태안에서 해병대 캠프에 참가했다가 파도에 휩쓸려 사망한 고교생 5명은 모두 구명조끼를 입지 않은 상태였다”며 “안타까운 사건이 벌어진 뒤 후회하지 말고 사전에 철저한 교육을 통해 안전의식을 높여야 참사를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일곱 살 진규(가명)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는 다섯 살 여동생의 목에 줄을 감고 이 방 저 방으로 끌고 다녔다. 아버지는 동생을 이미 몇 차례 벽에 집어 던지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했다. 동생은 눈을 껌벅이며 숨을 헐떡였다. 진규는 아버지에게 맞을 때 ‘이러다 죽겠다’고 느끼곤 했는데 눈앞에서 동생이 죽어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날도 주먹질에 앞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애새끼들은 맞아야 정신 차려.” 여동생이 숨진 지 7년. 올해 열네 살이 된 진규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법원은 학대로 자녀를 숨지게 한 부모를 살인자로 보지 않지만 진규가 겪는 후유증은 ‘아동 학대가 살인보다 잔인하다’는 걸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혐오했던 ‘폭력’의 노예가 돼 있었다. 》2007년 진규(가명·당시 7세)의 아버지는 다섯 살배기 딸을 때려 숨지게 한 혐의(상해치사)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아버지가 수감된 뒤에도 진규네 집은 계속 전쟁터였다. 진규가 다른 여동생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빠한테 못된 것만 배웠다”며 진규를 미워했다. 남편에게 맞고 살던 엄마는 딸들을 지키려 아들을 때렸다. 3년 뒤 아동보호전문기관 직원은 학대신고를 받고 진규네 집을 찾았다가 혼란에 빠졌다. 진규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와 우울증세를 가진 피해자인 동시에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가해자였다. 페트병에 자기 소변을 받아 동네 아이들에게 강제로 먹이기도 있다. 아버지가 진규 남매에게 했던 단골 수법이었다. ‘폭력의 DNA’가 진규에게 옮겨간 듯했다. 진규는 1년간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받고 2년간 위탁가정에서 지냈다. 그 사이 중학생이 된 진규는 올해 2월에야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두 달쯤 지난 이달 초 진규는 그 집에 홀로 남겨졌다. 엄마가 여동생들을 데리고 집을 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날 진규 엄마는 아동보호기관에 전화를 걸었다. “진규한테 예전 남편의 모습이 보여요. 무서워서 도저히 안 되겠어요.” 전날 진규가 엄마와 말다툼을 하다 부엌칼을 휘두르며 위협했다는 것이다.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한 데 이어 엄마한테마저 버림받은 진규는 어떤 어른으로 성장할까. 아버지가 뿌린 불행의 씨앗은 진규와 가족들을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 생존본능이 공격성으로 표출 동아일보 탐사보도팀은 아동학대 피해 후 구조된 청소년 10명과 유년시절 부모에게 학대당했던 30, 40대 성인 10명이 겪은 후유증을 취재했다. 이들은 폭력에서 벗어난 지 짧게는 1년, 길게는 20년이 됐지만 여전히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학대에서 갓 탈출한 아이들은 물건을 훔치거나 거짓말을 하는 증상을 보였다. 장기간 심리적 물질적 결핍 상태에 있다가 쉼터 등 안정적인 환경에 놓이자 “이럴 때 최대한 챙겨놓아야 한다”는 생존 본능이 도벽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학대를 피하려 가출해 노숙생활을 하다 보니 도둑질이 몸에 밴 사례도 있다. 거짓말 역시 살려는 몸부림이다. 보통 학대 부모들은 폭력의 원인을 아동에게 뒤집어씌우거나 ‘약속을 안 지켰다’고 몰아세우며 폭력의 명분을 쌓는다. 학대받는 아동들은 솔직히 말했다가 무참히 구타당했던 적이 많아 상대가 원하는 대로 사실을 가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는다는 것이다. 공격성도 자주 나타난다. 부모와 신뢰관계 형성이 안돼 상대를 잘 믿지 못하는 데다 더는 억압받지 않겠다는 절박함의 표출이다. 학교폭력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부모에게서 타인을 괴롭히거나 제압하는 요령을 무의식적으로 체득한 결과다. 피해 청소년들의 이런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섣불리 ‘문제아’로 낙인찍게 되고, 주변의 따가운 시선은 이들의 후유증을 더 악화시킨다.○ “엄마 계모 맞지?” 아동학대 피해 후 충분한 관심과 치료를 받지 못한 성인들은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후유증에 시달린다. 지금은 부모가 된 이 피해자들은 몸에 새겨진 학대의 관성이 자녀를 향할 때 극심한 자책감을 느낀다. 친부와 계모에게 골프채로 구타당하고 변기에 처박히는 ‘물고문’을 자주 당했던 A 씨(35·여)는 8세와 3세인 아이들에게 종종 손찌검을 한다. 큰아들은 “엄마는 신데렐라에 나오는 계모 같아. 엄마 계모 맞지”라고 농담하듯 말한다. 이 아이 역시 세 살짜리 동생을 자주 때린다. A 씨는 “나한테서 아빠의 모습을, 내 아이에게서 내 모습을 볼 때면 내 몸의 피를 모두 빼버리고 싶다”고 했다. 친부가 옆집에서 개 잡을 때 쓰는 몽둥이를 빌려와 마구 때리곤 했다는 B 씨(39). 그는 요즘도 개 짖는 소리만 들어도 온몸이 저려오고, 뒤에서 누군가가 몽둥이로 때리는 악몽을 자주 꾼다. 계모는 그가 초등학생 때 냉장고를 자물쇠로 채워 놓고 밥을 굶겼다. 그 때 생긴 식탐이 지금껏 이어져 비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B 씨는 평소엔 조용한 성격이지만 무시당했다고 느끼거나 직장 상사가 일방적 의견을 강요할 때 자기도 모르게 상대의 멱살부터 잡았다. 이 같은 분노조절 장애 탓에 다니던 공기업에서 해고됐고 여러 직장을 전전하다 지금은 막노동을 하고 있다. 학대 피해 과정에서 형제간 신뢰가 깨져 성장한 후에도 사이가 회복되지 않는 사례도 있다. 유년시절 두 살 터울 누나와 함께 8년가량 부모에게 학대당했던 한모 씨(40)는 “매 맞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 내가 안 맞고 누나가 맞을 때엔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했다. 고교 졸업 후 집을 나온 한 씨는 그 후 누나와 거의 연락을 하지 않는다. 한 씨는 “서로가 곤경에 처했을 때 방관했다는 원망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세월이 지나도 관계가 회복될 기미가 안 보인다”고 말했다.신광영 neo@donga.com·배준우 기자}
“저 좀 잡아가 주세요.” 2012년 2월 수도권의 한 아동보호전문기관에 30대 여성이 다급히 전화를 걸어왔다. 이 여성은 상담원에게 “저를 데려가세요” “저 좀 도와주세요”라고 몇 번 외치더니 끝내 흐느꼈다. 아동복지기관에 스스로 전화를 걸기 직전까지 그녀는 일곱 살 된 친아들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자신에게서 아들을 지키고 스스로를 절망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신고전화였다. 중학교 교사 이모 씨(37·여)도 2010년 11월 아동보호기관에 스스로 학대 가해신고를 했다. 학교에선 자상한 선생님으로 알려져 있던 이 씨는 집에 오면 ‘괴물’로 변했다. 그는 10세와 6세인 두 딸이 자신의 지시를 어길 때면 화장실에 가두고 뺨을 후려쳤다. 한 번 회초리를 들면 쇠로 된 막대가 휠 때까지 때려야 직성이 풀렸다. 한겨울에 아이들을 맨발로 집 밖에 서 있게 한 뒤 분에 못 이겨 계단 아래로 밀어버린 적도 있다. 두 엄마가 처음부터 폭력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아이가 행동이 느리거나 주의가 산만해 손바닥 때리기 등 가벼운 체벌을 하기 시작한 게 발단이었다. 이 씨는 “아이가 커서 혹시 무시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나도 많이 맞고 컸기 때문에 일단 매를 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훈육’이 ‘학대’로 변질되기까지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최근 울산과 경북 칠곡 아동학대사망 사건이 집중 조명되면서 비정한 계모가 주된 가해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자녀를 학대하는 부모는 대부분 친부모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보고된 아동학대 6796건의 가해자 가운데 76.2%가 친부모다. 계부모는 학대 가해자의 3.7%였다. 양부모는 0.4%였다. 근본적인 아동학대 대책을 찾으려면 부모가 금쪽같은 친자식을 어떻게 학대하게 되는지 구조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취재팀이 전국 아동보호전문기관의 중점 개입사례 10건을 분석한 결과 부모들의 체벌 정도가 서서히 심해져 결국 극단에 이르는 공통점을 보였다. 이른바 ‘폭력의 에스컬레이팅(escalating·상승)’ 현상이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유미 복지사업본부장은 “훈육과 학대의 경계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없다 보니 훈육 목적으로 체벌을 시작했더라도 기대했던 교정효과를 보고 스스로 화가 풀릴 때까지 때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폭력의 강도를 계속 높이게 된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적절한 외부 개입이 없을 경우 부모는 자신이 휘두르는 극단적 폭력에 둔감해진다. 이 부모들은 체벌을 피하려 자녀가 잘못을 시인하는 반응을 보이면 그간의 폭력이 ‘필요악’이었다고 합리화하는 특징도 보인다. 가해 부모들은 체벌 후 자녀의 마음을 풀어준다며 잠시 잘해주는 패턴을 보이는데 이는 아동의 체벌에 대한 내성을 키울 수 있다. 아이들이 체벌을 당하는 동안 “이것만 맞고 나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갖는 것이다. 자녀의 내성이 커질수록 부모의 폭력은 세질 수밖에 없다. 학대의 강도가 셀수록 아이들은 부모가 보이는 잠깐의 호의에도 감동한다. 이 때문에 피해 아동이 부모를 감싸게 돼 학대 사실이 외부로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학계에서는 자녀 학대 부모들 가운데 30∼60%가 성장과정에서 학대를 경험한 것으로 보고 있다. 폭력이 대물림되는 것이다.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어려서 부모의 학대 속에 성장한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나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막상 자기 자녀와 마찰이 생겨 흥분상태가 되면 유년 시절 학습돼 있던 폭력 성향이 무의식적으로 나오기 쉽다”고 말했다. 또 피학대 경험이 누적되면 감정조절 기능을 하는 뇌 기관인 전전두엽의 기능이 약화돼 감정 조절 능력이 떨어진다. 신광영 neo@donga.com·손효주 기자}
한국승강기안전관리원(승강기안전원·원장 공창석)은 주력사업인 승강기 안전검사 업무를 개선해 기존의 아날로그 방식의 승강기 안전검사를 ‘스마트하게’ 바꾼다. 검사원들이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를 활용해 검사 결과를 현장에서 바로 입력하고 검사 과정에서 이상이 발견되면 부서장에게 화상통화로 상의하는 ‘스마트워크’ 방식을 도입한다. 우리나라 승강기 보유대수는 지난해 2월 50만 대를 돌파해 세계 9위. 신규 설치는 매년 약 2만5000대로 세계 3위다. 승강기안전원은 3일 “시장 규모에 걸맞게 승강기 안전검사 업무를 혁신하려는 것”이라며 “스마트워크 기법으로 주당 3회씩 승강기 검사를 하면 매년 약 33억 원의 예산을 절감할 수 있다”고 밝혔다. 승강기 검사 신청 절차도 편리하게 개편했다. 우선 고객이 언제 어디서나 승강기 검사를 신청하고 확인할 수 있는 모바일 검사 서비스를 도입했다. 스마트폰으로 승강기안전원 홈페이지(m.kesi.or.kr)로 접속해 3번만 터치하면 검사 신청이 완료된다. 승강기를 검사할 검사원의 얼굴과 연락처를 사전에 알 수 있어 쉽게 문의할 수 있다. 국가승강기종합정보센터와 안전 해피콜센터도 새로 개편해 고객의 정보 접근성을 높였다. 승강기 검사 장비의 국산화도 본격화된다. 승강기안전원은 “기존에 전량 수입하던 검사 장비를 자체 기술로 개발할 방침”이라며 “여러 개 검사를 하나의 장비로 할 수 있도록 기술을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이 다기능 측정 장비는 아직 현장시험 단계에 있지만 곧 양산체제로 전환되면 매년 수십억 원에 달하는 장비수입 대체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승강기안전원은 세계 최대 승강기 시장으로 성장한 중국을 비롯해 인도 베트남 몽골 등으로 검사기술 수출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중국 선양에서 진행된 ‘롯데월드 승강기 종합컨설팅’을 수주해 용역을 완료한 게 대표적 사례다. 이런 성과에 힘입어 지난해 승강기안전원은 해외 승강기 컨설팅으로 역대 최고인 5억 원의 수입을 올렸다. 올해는 베트남과 미얀마 등 동남아로 시장을 확대해 기술용역사업의 수익 비중을 전체의 10%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박근혜 대통령이 2일 강병규 신임 안전행정부 장관(60·사진)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강 장관은 이날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취임식을 열고 정식으로 취임했다. 그는 취임사에서 “지방에 숨어 있는 규제를 개선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강 장관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장남의 위장전입과 부인의 농지법 위반 사실이 드러나 야당이 인사청문 경과보고서 채택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1일 국회에 보고서 채택을 재요청하는 절차를 거쳐 이날 강 장관을 임명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광고천재'라는 찬사는 독이었다. 일감이 몰아닥쳤다. 넓은 사무실에 앉아 결재만 하며 보내는 날들이 늘어났다. 한 번씩 움직일 땐 꼭 직원들을 대동했다. 작업 현장에는 직접 나가지 않고 직원들을 대신 보냈다. '원격조종'으로 탄생한 광고에는 '눈깔'이 없었다. 광고주에게도, 스스로에게도 부끄러웠다. 이럴 때 이제석광고연구소 대표 이제석 씨(32)에게 한동안 잊고 지낸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준 물건이 있었다. "서랍에 처박아뒀던 목장갑을 어느 날 우연히 보게 됐어요. 순간 번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 아입니까. 그래, 난 시장통 국밥집 간판쟁이 출신 아이가…." 이 씨는 대학 졸업 후 시장에서 상점 간판을 만들면서 광고의 기초를 닦았다. 목장갑은 거친 목재를 나르고 철판에 못질하던 그의 필수품이었다. 고비 때마다 오기가 발동하는 뚝심이 그때 길러졌다. 미국 뉴욕 '원쇼 페스티벌' 최우수상과 광고계의 오스카상인 '클리오 어워드' 동상 등 세계 유수의 광고제를 휩쓴 그에게 목장갑은 초심(初心)의 상징이었다. 이 씨는 지난해 방 두 칸짜리 작은 사무실로 옮겼다. 광고물 설치작업을 할 땐 가장 먼저 현장에 간다. 벙거지 모자에 목엔 수건을 두르고 손바닥 부분이 시뻘건 목장갑을 낀, 여느 공사판 인부의 모습으로. 그는 "마이클 잭슨이 다이아몬드 장갑이라면 저는 목장갑이죠"라고 했다. 소유한 사람의 인생 역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물건이 있다. 쓸모는 사소해도 삶의 지혜를 일깨워 주거나, 흔들릴 때마다 중심을 지키게 해준 물건들 말이다. 동아일보는 창간 94주년 기획으로 올해도 '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인'을 선정했다. 나름의 성취를 이룬 100인에게도 서툴고 막막했던 과거가 있었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삶의 궤적이 엿보이는 '100인의 물건'을 골라 봤다.● 초심을 일깨우는 것들 1981년 사법시험을 치르던 날, 김형태 변호사(58·법무법인 덕수)는 시험장 책상에 낡은 고동색 필통을 꺼내 놨다. 초등학교 입학 선물로 받은 뒤 20년 가까이 써 오던 것이었다. 필통 안엔 어머니가 손수 깎아준 연필 3자루가 있었다. 크든 작든 시험 전날이면 아들의 연필을 깎아주는 게 어머니의 오랜 응원 방식이었다. 아들은 그해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김 변호사는 지난달 31일 서울 강남구의 사무실에서 기자에게 반세기 동안 간직해 온 플라스틱 필통을 건네 보였다. 필통을 쥔 그의 검지와 중지 첫 마디는 굳은살이 박여 툭 튀어나와 있었다. "손으로 글씨 쓰는 걸 어려서부터 좋아했어요. 손이 움직여야 머리에 영감이 와요. 사적인 글이나 기고문은 물론이고 재판 관련 서면도 다 손으로 씁니다." 김 변호사는 "어려서부터 글에 대한 열정을 불어넣어 준 게 이 필통이라서 지금껏 쓰고 있다"고 했다. 변호사 일을 할 때도 글쓰기 습관 덕을 많이 봤다. "재판이라는 게 사실을 정확히 규정한 뒤 상대를 설득하는 일이기 때문에 언어적 표현력은 좋은 무기입니다. 필통이 총보다 강한 거죠." '행복한 죽음' 전문가로 호스피스 치료의 대가인 윤영호 서울대 의대 교수(암예방관리 전공)는 어릴 때 큰누나를 위암으로 떠나보냈다. 동생들 공부 뒷바라지하느라 정작 자기 몸은 챙기지 못했던 누나였다. 어머니가 "누나 수술 받으러 서울 갔다"고 얼버무리던 날, 스물세 살의 큰누나는 비석 하나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떴다. 윤 교수는 얼마 뒤 집 정리를 하다 초등학생 때 작은누나 소풍에 따라갔다가 누군가의 묘지 비석 옆에서 찍은 흑백 사진을 발견했다. "작은누나와 함께 찍은 그 사진 한 장이 저에겐 운명처럼 느껴졌어요. 사람의 죽음을 평생 탐구하게 될 것 같은…." 윤 교수는 모서리가 너덜너덜한 이 사진을 40년째 간직하고 있다. 과거의 아픈 상처와 얽혀 있지만 이후 삶의 자양분이 된 물건도 많았다. 최홍 맥쿼리투자신탁운용 대표(53)의 사무실에 365일 걸려 있는 자주색 카디건이 그런 물건이다. 30년 전 부산에서 만난 예비 장모는 그에게 옷이 담긴 상자 하나를 건넸다. 스물세 살 청년은 장모 앞에서 상자를 열어 보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형제도 없이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지독히 가난했던 사윗감을 처가에선 강하게 반대했다. 몇 차례 결별 위기가 있었지만 인연은 끝내 이어졌다. 장모는 어렵게 결혼을 승낙하며 그에게 분홍 카디건을 선물했다. 이 옷은 그가 처가에, 그리고 세상에 뜨겁게 받아들여진 첫 순간의 징표로 남았다. 최 대표는 "고아처럼 자란 제가 사실상 '부모님'께 받은 첫 선물이고, 힘들 때마다 희망을 보게 해준 준 옷이라 실밥이 다 터져도 못 버릴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의식'처럼 이 카디건을 입는다. 백원필 한국원자력연구원 원전안전연구본부장(53)은 지난달 30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참고서 '수학의 정석' 얘기를 하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언제 돌려 달라고 할지 몰라 허겁지겁 넘겨봤는데…." 백 본부장은 고교 1학년 때 수학의 정석을 선배들에게 잠깐씩 빌려 봤다. 줄도 못 긋고 중요한 공식을 노트에 빽빽이 옮겨 적던 기억이 4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중학교 때 반장을 하면서도 돈이 없어 수학여행에 못 갈 정도로 가난했다. 홀어머니가 농사일을 하며 백 본부장 형제를 키웠다. "농사를 돕고 산에서 나무를 하며 틈틈이 공부를 했어요. 책 사는데 돈을 쓰면 큰일 나는 줄 알았죠(웃음)." 그는 "아련하게 마음이 아파 오는 시절이지만 좌절하지 않고 극복했다는 것이 지금 자신감의 원천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저랑 길게 통화할 수 있으세요?" 양현석 YG엔터테인먼트 대표(44)는 중학교 2학년이던 1980년대 중반, 114 안내원에게 대뜸 이렇게 물었다. 그는 집에 있던 다이얼 전화기를 붙들고 "전문적으로 춤을 추는 곳이 어딘지 알려 달라"고 사정했다. "안내원이 처음엔 황당해하더니 제 진심이 느껴졌는지 대한무도협회 번호를 알려줬어요." 이 통화를 계기로 양 대표는 또래 댄서들을 알게 돼 본격적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6년 뒤에는 '서태지와 아이들'로 데뷔했다. 114 통화를 했던 다이얼 전화기가 그에겐 잊지 못할 물건이다. 강영진 성균관대 갈등해결연구센터장(53·국정관리대학원 겸임교수)은 10년 다닌 직장을 그만두고 늦깎이 유학을 떠난 지 6개월에 IMF 외환위기를 만났다. 처자식까지 데리고 미국에 왔는데 환율이 두 배로 뛰면서 공부를 관둬야 할 처지에 놓였다. 당시 점심으로 먹던 1달러짜리 쿠키를 강 교수는 내 마음 속의 물건으로 꼽았다.● 성공 자축하는 나만의 기념품 2010년 밴쿠버에 이어 올해 소치 겨울올림픽까지 제패한 이상화 선수(25·스피드스케이팅)는 밴쿠버 대회에서 딴 첫 금메달이 보물 1호다. 단지 노력의 결실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밴쿠버(대회) 때까지는 금메달이 유일한 목표였는데 메달을 따고 나니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어요. 나를 위해 희생해준 주위 사람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거죠." 메달이 준 높은 명예보다 이를 통해 얻게 된 넓은 시야에 이 선수는 더 감사했다. '7년의 밤'과 '28' 등 베스트셀러 소설을 쓴 정유정(48) 작가는 소설을 한 권 쓸 때 스케치북 6, 7권 분량의 그림을 그린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장소를 한 곳 한 곳 손으로 세세하게 묘사한다. 그는 상상하는 세계를 이미지로 완벽하게 구현한 뒤 글로 옮긴다. '7년의 밤'에 나오는 세령마을도 그렇게 탄생했다. 정 작가는 "출간된 소설 못지않게 모태가 된 스케치북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간호사로 일하다 마흔 넘어 데뷔한 그에게 스케치북은 긴 무명시절 스스로를 단련시킨 도구였던 동시에 지금은 성공을 자축하는 자신만의 기념품이다.▽팀장 문권모 소비자경제부 차장▽팀원 유덕영(국제부) 황인찬 신광영 손효주(사회부) 우경임(인력개발팀) 권기범(소비자경제부) 김호경(산업부) 박성진 홍정수(수습기자)▽대학생 인턴기자고혜린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졸업(24)맹서현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24)이혜림 성균관대 컴퓨터교육과 졸업(26)장영근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졸업(28)최현정 연세대 문헌정보학과 졸업(25)}
힘 있는 기관의 공직자일수록 가족의 재산을 공개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 등 청와대 고위참모 13명 가운데 6명(46.1%)이 올해 재산변동 신고 때 가족의 재산 고지를 거부했다. 국무총리와 장관 등 내각 역시 재산 고지 거부 비율이 43.7%나 됐다. 전체 정부 고위 공직자 가운데 부모 자녀 등 직계 존비속의 재산 고지를 거부한 비율이 27%인 것에 비하면 높은 수치다. 고위 공직자는 재산변동을 신고할 때 본인뿐 아니라 배우자 부모 자식 등 직계가족의 재산을 공개하도록 돼 있다. 다만 가족 가운데 결혼해 분가하는 등 독립적인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 개인정보 침해를 막기 위해 사전 허가를 받아 재산등록 고지를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직계 존비속의 고지 거부제는 공직자의 재산은닉 방편으로 이용될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대통령비서실과 국가안보실 대통령경호실 등의 고위 공직자(13명) 가운데 가족의 재산을 공개하지 않은 참모는 김기춘 비서실장과 주철기 외교안보수석, 이정현 홍보수석, 윤창번 미래전략수석, 김장수 국가안보실장, 박흥렬 경호실장 등 6명이었다. 국무총리와 각부 장관 15명(보건복지부·해양수산부 장관은 올해 공개 대상 아님)의 경우 전체 16명 중 정홍원 국무총리와 최문기 미래창조과학부, 서남수 교육부, 황교안 법무부, 이동필 농림축산식품부, 방하남 고용노동부, 조윤선 여성가족부 장관이 가족의 재산 고지를 거부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지난해에 고위공직자 10명 가운데 6명은 전년보다 재산이 증가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재산 신고액은 28억3358만 원으로 1년 사이 2억7497만 원이 증가했다. 급여와 인세 수입이 늘어나서다. 정부와 국회 대법원 등이 28일 공개한 행정·입법·사법부 고위공직자 2380명의 재산변동 신고 내용에 따르면 평균 재산(재산 500억 원 이상 국회의원 4명 제외)은 약 13억2000만 원(지난해 말 기준)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경기침체 속에서도 전체 고위공직자의 60.8%(1423명)가 재산이 늘어난 것은 급여 저축 등으로 재산이 증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중앙 및 지방정부, 산하 기관 등 행정부 공개대상 1868명 가운데 62%(1152명)가 재산이 증가했다. 국회의원은 전체 295명 가운데 64.5%인 190명의 재산이 늘었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자살자 10명 중 6명은 부모나 배우자에게 가정폭력을 당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집안 분위기가 억압적이어서 가족 간 교류가 적었을 때도 자살 확률이 높았다. 동아일보 탐사보도팀은 2011년~2013년에 발생한 자살사건 60건을 대상으로 심리학 전문가들과 심리적 부검을 진행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심리적 부검은 자살자의 생애를 되짚어가며 절망에 이르게 된 경로와 고통의 실체를 찾는 작업이다. 한국은 하루 평균 43명(2011년 기준)이 자살하는 나라다. 인구 10만 명당 31.7명.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자살률이 가장 높다. OECD 평균은 인구 10만 명당 12.6명(2011년). 우리는 2003년부터 9년 연속 자살률 1위다. 자살률 세계 1,2위였던 핀란드는 1986년 국가 차원의 심리적 부검 프로젝트를 세계 처음으로 시도해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30.3명을 2012년 17.3명으로 줄였다. 취재팀은 자살의 씨앗이 폭력적인 가정에서 싹튼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부모의 가정폭력을 목격하거나 장기간 학대 및 방치된 사례, 결혼 후 남편한테 상습적인 신체·언어폭력을 당한 경우를 합치면 65%(39건)에 달했다. 가족 간 관계가 권위적이고 경직돼있어 교류가 적었던 사례도 63.3%(38건)였다. 가정폭력을 경험한 고인들은 어느 누구도 자신을 구출해주지 않았다는 무력감이 가슴 깊이 새겨져 있었다. 성장한 뒤 실직이나 채무누적, 이혼 등 고난이 닥쳤을 때 해결할 수 없다는 좌절감에 쉽게 빠졌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증오해야 하는 딜레마에서 허우적대다 우울증 같은 정신적 후유증도 남았다. 이 때문에 가정 밖에서도 인간관계에 서툴렀다. 부모와 건전한 신뢰관계를 맺은 경험이 없어 주변의 호의도 잘 믿지 못했다. 고민이 생기면 나누지 못하고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자존감이 낮아 자기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마저 강했다. 대구의 한 30대 여성은 아버지의 학대 후유증으로 말을 더듬고 손을 떠는 강박장애를 안게 됐다. 처음엔 참아주던 남편도 이 증세를 볼 때마다 폭력을 휘둘렀다. 이 여성은 결국 자살했다. 어릴 적 가정폭력을 당한 남성 상당수는 폭력성향을 대물림 받았다. 이들은 아내와 자녀를 괴롭히다 외톨이가 됐고, 자살로 내몰릴 때까지 외면 받았다. 아버지가 폭력으로 가족을 휘어잡는 걸 봐온 사람은 자기 문제도 폭력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고비가 왔을 때 자기 파괴적인 방식으로 벗어나려 했다. 자살은 대표적인 자기파괴 행위다. 가족간 의사소통이 취약한 가정에서 자살이 많은 이유는 가족끼리 어려운 상황을 공유해본 적이 드물어 문제를 혼자 해결하려 하기 때문이다. 김경일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는 "자살 직전에는 소외감이 극도에 달하는데 성장과정에서 가족의 지지와 보살핌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자살을 더 쉽게 결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삭막한 가정일수록 서로의 감정에 무관심해 자살 충동을 느끼는 가족이 신호를 보내도 거의 알아채지 못했다. 어쩌다 힘들다고 토로했을 땐 "다들 그렇게 살아" "나도 힘들어" "이겨내야지" 같은 반응을 보였다. 심리적 부검을 통해 접한 고인들은 한 번 닫힌 대화창구를 좀처럼 다시 열지 않았다. 보건복지부는 국내 처음으로 8개월에 걸쳐 체계적인 심리적 부검 연구를 진행했으며 이달 말경 최종 보고서와 함께 종합적인 자살 방지 대책을 발표할 예정이다.신광영 기자neo@donga.com손효주기자 hjson@donga.com}
‘시장에 모인 300명이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칠 때 일본 헌병의 발포로 한 명이 즉사하자, 피고인 공재익은 헌병에게 사람을 살해하고 그대로 끝난다고 생각하느냐고 따졌다. 피고인 조기시 최덕용 이금봉은 헌병 주재소로 돌을 던졌다. 이 죄를 물어 각각 징역 2년과 3년에 처한다.’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만세 투쟁을 하다 검거된 조선인들에 대한 판결문이다. 당시 일제 조선총독부는 무고한 백성들을 치안방해 세력으로 몰아 처벌했다. 안전행정부 산하 국가기록원은 3·1운동으로 재판을 받은 55건(220명)을 선별해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을 발간했다고 26일 밝혔다. 판결문을 보면 재판부가 ‘공소사실을 인정할 만한 증빙이 충분하지 않다’고 스스로 밝히면서도 ‘여러 죄명이 겹쳐 있어 무죄를 선고하지 않는다’며 징역형을 남발했다. 이번에 공개된 판결문에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투사들의 활약상이 담겨 있다. 유관순 열사보다 열흘 먼저 만세운동을 주도한 여학생들도 있었다. 충남 천안 광명학교 여학생 민옥금(당시 17세) 한이순(18) 황금순(18)은 1919년 3월 20일 양대리 시장에서 학생 80명을 인솔해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모두 징역 1년에 처해졌다. 이은선은 그해 3월 24일 인천 계양 장기리 시장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하던 중 체포된 동료를 구하려다 일제 순사의 칼에 찔려 현장에서 순국했다. 판결문에 등장하는 3·1운동 참가자들은 16세 학생부터 70세 노인까지 노소 구분 없이 연령이 고루 분포돼 있었고 직업도 다양했다. 교사, 농부, 인력거꾼, 잡화상, 이발사, 승려, 날품팔이, 수공업자, 의사, 시계수리공, 야채행상 등 거의 전 계층으로 3·1운동의 불길이 번졌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대목이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정진석 국회 사무총장이 충남도지사 선거 출마를 위해 28일 퇴임하기로 했다. 정 사무총장은 2월 임시국회 일정이 마무리되는 28일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이병길 국회 사무차장도 경기 여주시장 출마 준비를 위해 다음 달 초순 퇴임한다. 공직선거법상 현직 공무원이 선거에 출마하려면 선거일 90일 전인 다음 달 6일까지 사퇴해야 한다. 두 사람이 사퇴하면 국회 사무처 설립 이래 처음으로 사무총장과 사무차장이 함께 자리를 비우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강창희 국회의장의 임기가 5월 29일에 끝나기 때문에 차기 국회의장이 선출될 때까지 권한대행 체제로 운영하기로 했다. 당분간 임병규 입법차장이 사무총장 권한대행을 맡는다. 한편 박찬우 안전행정부 제1차관(55)이 충남 천안시장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25일 사퇴했다. 현직 차관이 이번 지방선거 출마를 위해 사퇴한 것은 처음이다. 박 차관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후회 없는 공직 생활을 했다. 33년간의 공직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 천안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려 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강경석 기자 coolup@donga.com}
매년 2월 전국의 대학과 초중고교에서 열리는 졸업식 1만여 건 가운데 대통령이 어느 곳에 참석했는지를 보면 당시 정부의 국정 철학이 보인다. 안전행정부 산하 국가기록원은 졸업시즌을 맞아 ‘대통령과 함께한 특별한 졸업식’을 주제로 사진 등 관련 기록물 23건을 대통령기록포털(pa.go.kr)에 24일 공개했다. 경제성장을 최우선 과제로 여겼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4년 서울대 졸업식에 참석해 “조국 근대화와 민족 중흥을 위해 앞장서 달라”고 당부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당시 취약한 정권 기반을 의식해서인지 1985년 경찰대 1기 졸업식을 방문해 ‘치안 강국’을 역설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5년 이화여대 졸업식에 참석했다. 현직 대통령이 사립대 졸업식에 참석한 첫 사례였다. 그는 “세계화 시대에는 여성만의 직업이 따로 없고 모든 분야에서 당당히 경쟁해야 한다”며 여성의 경쟁력이 국가 발전의 필수요건이라고 강조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9년 불우한 환경에서도 꿋꿋이 학업을 완수했거나 우수 벤처기업을 창업한 졸업생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했다. 각 대학의 수석 졸업자들이 초청되던 기존 관례를 깬 것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4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학위 수여식에 참석해 이공계 우대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는 이 행사에서 “저는 편협한 엘리트주의에 반대하지만 우리 사회가 부득이 용인해야 할 엘리트 우대의 영역이 있다면 그 하나는 과학기술계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성화고 육성에 관심이 많았던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13년 인천 전자마이스터고 1회 졸업식에 참석했다. 그는 마이스터고 활성화를 주요 대선공약으로 내걸었고, 재임 중 입학식과 졸업식에 모두 참석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박근혜 대통령은 14일 “지방자치단체별 채무보증 한도액을 설정해 관리하고 (일부 지방 공기업의) 자산 유동화 방식에 대해서도 철저한 통제 장치를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법무부와 안전행정부 식품의약품안전처 원자력안전위원회 등 법질서 및 안전 분야 업무보고에서 “지자체들의 방만한 재정 운영이 국가적으로 큰 부담이 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박 대통령은 “현재 각 지자체의 지방채 발행에 대해 안행부에서 채무 발행 한도액을 설정해 관리하고 있다”면서 “일부 지자체에서 이것을 회피하기 위해 민간업체의 대출금을 채무 보증하는 방식으로 과도한 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일부 지방 공기업들은 안행부의 공사채 발행 승인을 회피하려고 자산 유동화 방식으로 기업 어음을 발행한다”고 덧붙였다. 지자체 보증 채무 총액은 2012년 말 5조 원에 이르며, 지방 공기업이 자산 유동화 방식으로 발행한 기업 어음도 1조 원에 육박한다. 박 대통령의 지적은 안행부가 올해 도입할 예정인 ‘지자체 파산제’와 맥을 같이한다. 지자체 파산제는 채무불이행 등으로 재정위기를 극복하기 어려운 지자체에 정부나 상급단체가 개입해 재정을 회생시키는 제도다. 정부는 지방정부 부채가 100조 원에 달해 재정이 극도로 악화된 만큼 파산제 도입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이날 공공부문 개혁과 관련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불법적인 집단행동에 엄정하게 대처하고 비정상을 바로잡는 제도적 기반을 구축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며 “공공기관 부채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대표적 기관부터 가시적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장애인을 외딴 섬으로 끌고 가 노예처럼 부려먹은 일명 ‘염전 노예 사건’과 관련해 박 대통령은 “소설보다 현실이 더 기가 막힌다 하더니 정말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느냐”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철저히 뿌리를 뽑아야 하겠다”고 말했다.이재명 egija@donga.com·신광영 기자}
사람 발길이 닿지 않은 설악산 설원은 케이크의 하얀 생크림처럼 매끈했다. 12일 정오, 눈 위로 햇살이 반사돼 눈부시게 빛났다. 길과 길 아닌 곳의 경계는 사라지고 없었다. 발을 내디뎠다. 눈은 포근하게 등산화를 감싸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가슴까지 소리 없이 빨아들였다. 7일부터 계속된 폭설로 이날 설악산의 적설량은 저지대가 1.5m, 고지대는 2m까지 쌓였다. 전례 없는 ‘눈 폭탄’이었다. 설악산 비선대로 가는 길. 기자와 등반길에 동행한 사내들의 입에서 ‘아이쿠’ ‘아이 씨’ 하는 소리가 났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설악산 사무소 재난안전관리반 대원들이었다. 폭설로 사라진 산길을 복원하는 작업을 대원들은 ‘러셀(Russel)’이라고 불렀다. 제설차를 발명한 미국인의 이름을 딴 것. 눈 덮인 산길을 미리 뚫어놓지 않으면 등반객들이 길을 잘못 들어 조난되거나 낭떠러지로 추락할 수 있다. 설악산 탐방로는 기상청 대설주의보가 내려지면 폐쇄되고 대원들이 길을 뚫어야 다시 열린다. 이날 재난안전관리반 대원 7명이 폭설 후 처음으로 나선 러셀 작업에 기자가 따라나섰다.하얀 암흑 선두에 선 대원이 삽을 들어올려 가슴팍까지 차오른 눈을 헤쳤다. 그러자 사방에서 눈이 모래처럼 흘러내려 빈 공간을 채웠다. 새로 내린 눈은 습기가 없어 사르르 부서졌다. 삽으로 눈을 걷어치우면서 상체를 앞으로 굽혀 눈을 짓눌러야 했다. 그러곤 다시 무릎으로 눈을 다지며 다른 쪽 발을 허리 높이까지 들어올려 한발자국 나아갔다. 앞사람이 그렇게 내놓은 흔적을 일렬로 선 뒷사람들이 따라 걸으며 길을 만들었다. 7명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온전히 몸으로 길을 트는 이 과정을 거치자 50cm 정도의 길이 생겼다. “야, 얼마나 갔다고 옆으로 자빠지냐!” 30m쯤 나아갔을 즈음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맨 앞에 가던 대원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옆으로 드러누운 것이다. 눈으로 막힌 길을 처음으로 열어야 하는 선두는 체력 소모가 가장 크다. 먼저 첫발을 내딛다 보니 눈 웅덩이도 자주 만난다. 바위틈을 잘못 디디면 자기 키를 훌쩍 넘겨 눈에 잠길 때도 있다. 한순간 ‘하얀 암흑’에 압도당하고 허우적댈수록 더 깊이 빠진다. 일반 등산객이 그런 상황에 놓이면 살아나오기가 쉽지 않다. 위험하고 힘든 선두는 대원들이 돌아가며 맡는다. 두 번째 대원이 선두가 되고, 맨 앞에 가던 대원은 맨 뒤로 가는 식이다. 7명이 몇 사이클을 돌고 나니 2시간이 훌쩍 지났다. 온 길을 되돌아보니 200m가 채 되지 않았다. 이날 목표량 500m를 채우려면 3∼4시간을 더 해야 했다. 설악산 탐방로의 총 길이는 90km. 겨울마다 설악산 관리사무소에 소속된 대원 20여 명이 하루 4∼8시간씩 몇 주간 러셀 작업을 한다. 오르막길에 접어들자 대원들의 신경이 더욱 예민해졌다. 경사진 곳에서 눈을 뚫다 보면 아래쪽이 갑자기 푹 꺼지면서 눈사태가 덮쳐올 수 있기 때문이다. 눈이 온 뒤 햇볕이 들어 녹았다가 다시 얼어붙고, 그 위에 새 눈이 쌓이면 미끄러운 얼음 위에 거대한 눈덩이가 얹어진 모양새가 된다. 가벼운 충격에도 순식간에 밀려 내려올 수 있다. 가슴까지 눈에 파묻힌 채 러셀 작업을 하는 도중엔 눈사태가 오는 걸 뻔히 보고도 피할 수 없다. 강한 눈사태에 휩쓸리면 순식간에 200∼300m를 떠내려간다. 러셀 도중 기자가 뭔가 말을 하려는 순간 대원들이 ‘쉿’ 하며 눈치를 줬다. 임준호 대원(구조경력 12년 차)은 “오르막에서는 최대한 정숙해야 한다. 목소리도 파동이 있어 눈사태를 일으킬 수 있다”고 했다. 입산이 전면 통제된 설산의 한복판에선 작은 말소리도 명료하고 크게 들렸다. 홀로 살아남은 자의 눈빛 폭설이 내린 직후엔 눈사태나 크고 날선 고드름이 떨어지는 낙빙 위험 때문에 러셀 작업을 가급적 자제한다. 하지만 설산에 고립된 등반객의 조난 신고가 들어오면 위험을 무릅쓰고 눈길을 헤쳐야 한다. 손경완 대원(구조경력 15년 차)이 2012년 2월 공룡능선에서 조난 신고를 받고 출동했을 때의 일이다. 목적지가 아직 한참 남았는데 눈 속에 파묻힌 사람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인근 탐방로가 진작 폐쇄돼 사람이 들어와 있으면 안 되는 곳이었다. “거기 누구예요!” 50대로 보이는 남성은 눈이 풀린 채 손 대원을 쳐다볼 뿐 답이 없었다. “여기서 뭐하고 있어요? 정신 차려요!” 이 조난객은 함께 눈길을 헤매던 친구 2명을 조금 전 눈사태로 쓸려 보내고 혼자 남겨진 상태였다. 정신적 충격을 받은 데다 저체온증으로 의식이 혼미해져 구조요청도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던 것이다. 함께 출동한 구조대원 절반은 원래 목적지로 가고 나머지는 그곳에 남아 사라진 2명을 수색했다. 하지만 곧 해가 저물고 바람까지 세게 불어 구조대원들마저 오도 가도 못하고 밤을 지새우는 비박을 해야 했다. “처음 들어온 신고만 생각해 비박 준비를 안 하고 올라간 터라 텐트도 없이 맨몸으로 버텼죠. 잠들면 얼어 죽기 때문에 서로 따귀를 때려가며 정신을 차리게 했습니다.” 비박은 요즘 낭만적 산행 방식 중 하나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피치 못할 상황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해야 하는 최후의 방법이다. 지난해 겨울 비박 산행을 온 등산객이 바위 밑에서 추위를 달래려 불을 피웠다가 눈이 녹으면서 바위가 움직여 압사당하는 사고가 있었다. 대원들은 다음 날 아침 수색을 재개해 300m쯤 휩쓸려 내려간 시신을 발견해 업고 내려왔다. 나머지 시신 한 구는 석 달 뒤인 5월, 눈이 다 녹은 뒤에야 발견됐다. 처음 눈사태를 맞은 곳에서 무려 1km 가까이 떨어진 곳이었다.고급 등산장비의 덫 조난객들 가운데는 고가의 등산장비만 믿고 섣불리 산행에 나선 경우가 많다. 고어텍스 등산화나 두꺼운 다운점퍼만 있으면 혹한에 끄떡없다고 주장하는 등산용품 업체들의 광고에 현혹된 탓이다. 하지만 사용법을 모르면 고급 장비라도 오히려 독이 된다. 겨울 산에 오를 때 처음부터 두껍게 입는 건 금물이다. 경사를 오르다 보면 금세 땀이 맺히고 바깥의 추운 공기와 만나 얼어붙는다. 이 상태로 등산하는 건 대형 냉장고를 몸에 이고 가는 꼴이다. 초반부터 땀을 내며 체력을 소진시킨 데다 체온까지 떨어져 저체온증이 쉽게 올 수 있다. 저체온증이 오면 판단력이 흐려져 위급 상황에 대비한 장비를 챙겨오고도 필요할 때 활용하지 못한다. 손형일 대원(구조경력 10년 차)은 “탈진해 떨고 있는 조난객의 가방을 열어 보면 따뜻한 옷이나 비상식량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한 번 떨어진 체온은 다시 올리기 어렵기 때문에 애초에 체온 관리를 잘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처음엔 가벼운 바람막이만 걸치고 올라가다 휴식을 취할 때 체온 유지용으로 두꺼운 점퍼를 입는 게 정석이다. 과시 목적으로 산에 오르다 위험을 자초하는 등산객도 많다. 일부 산악회 회원들은 출입이 금지된 구역에 들어가 사진을 찍은 뒤 동호회 카페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 자랑삼아 올린다. 얼마 전 얼어붙은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다 추락해 중상을 입은 사례가 있었다. 손경완 대원은 “남들이 못 가는 데를 가고, 누가 빨리 정상에 오르느냐로 경쟁하는 잘못된 등산 문화 때문에 목숨을 위협하는 무모한 산행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단체로 불법 산행을 하다 조난된 일행 중에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좋은 경치 보겠다”며 무작정 따라온 사람들이 상당수다. 불법 산행 중인 사람이라도 조난당하면 구조해 하산시키는 게 급선무지만 상황이 끝난 뒤에는 규정에 따라 과태료 10만 원을 부과한다. 목숨 걸고 구조해놓고 딱지를 끊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다. 이때 “못 낸다”고 버티거나, 대원들에게 “에라, 봉이 김선달보다 더 한 놈아” “평생 그러고 살아”라며 경멸하듯 쏘아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한다.못 걷겠다는 거구 남성 업고 하산했더니… 무엇보다 대원들이 씁쓸해 하는 건 위급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간사한 단면이다. 손경완 대원은 출입통제구역에서 허리 부상을 입고 쓰러진 조난객을 구하러 갔다가 자초지종을 듣고 기가 찼다고 했다. 아무리 “도와 달라”고 소리쳐도 등산객들이 “힘내라”는 말만 하고 다들 내빼더라는 것이다. 매서운 눈바람을 견디다 못해 “살려 달라”고 애원하자 한 등반객은 “나도 불법 산행 중이라 신고하면 과태료를 내야 해서…”라며 지나쳐갔다. 다행히 누군가 구조신고를 하긴 했지만 접수요원이 자세한 위치를 물으려 하자 대답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걸려온 번호로 다시 걸어 보니 발신자 추적이 안 되는 공중전화였다. 산에서 편하게 내려오려고 환자 행세를 하는 ‘나이롱 조난객’들도 많다. 중상자는 헬기로 이송하지만 그 정도가 아니면 대원들이 등에 업고 하산하는데 이를 악용하는 것이다. 손형일 대원은 “양 발목이 다 삐었다”며 주저앉은 체중 90kg의 남성을 2시간 동안 혼자 업고 내려왔다. 거구의 남성은 “조금도 못 걷겠다”고 하소연했다. 손 대원이 주차장까지 업고 가 “여기 맞죠” 하며 내려주는 순간 그 남성은 “아이고, 고생하셨네”란 인사만 남기고 관광버스로 뛰어 올라갔다. 러셀 작업은 허리와 무릎에 하중이 많이 가 대원 대부분은 무릎 관절이 좋지 않다. 손 대원 역시 무릎 연골이 거의 닳아버린 상태다. 손 대원은 “내 무릎이 나가는 것도 억울하지만 그런 분들 때문에 정말 위급한 신고가 들어와도 빨리 출동을 못하는 게 더 안타깝다”고 한탄했다. 부상 신고가 들어와 “병원 응급실까지 모셔드리겠다”고 안내하면 “그럼 올 필요 없다”며 물러나는 신고자도 상당수라고 한다. 조난 신고를 해 대원들을 올라오게 한 뒤 물이나 비상식량만 받고 “알아서 가겠다”고 하는 등산객도 있다. 유규하 대원(구조경력 9년 차)은 “무거운 응급장비까지 다 메고 올라갔는데 ‘물셔틀’ ‘밥셔틀’을 당하고 나면 다시 내려오기 힘들 만큼 기운이 빠진다”고 말했다.사망자 발견 순간 날아든 비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산속에서 길을 잃었다’는 말을 대원들은 무엇보다 두려워했다. 한겨울 드넓은 설산에서 ‘김서방’을 찾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난자를 찾아 헤매다 미세한 발자국을 봤을 때, 치명상을 입은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상태가 좋을 때, 구급차에 태워 보낸 중상자가 의식을 회복해 감사 연락을 해 왔을 때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생각을 해봐요. 내가 사람을 살렸는데…. 평생 한 번이라도 그런 경험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대원들은 조난 현장에서 감동적인 순간과 종종 맞닥뜨린다. 각기 다른 방향에서 흘러든 두 등반객이 서로 처음 보는 사이에도 손을 잡고 제자리 뛰기를 하며 구조대를 기다렸던 사례도 있었다. 손형일 대원은 몇 년 전 이틀간의 수색 끝에 사망자를 발견한 순간 무전을 통해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운명 소식을 전해 들었다. 손 대원은 “그날 이후 사망한 조난객을 볼 때마다 아버지를 모신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민간구조대 경력까지 포함하면 20년 가까이 설악산을 터전으로 살아온 대원들에게 “산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뭔가 그럴 듯한 대답을 기대했는데 대원들의 입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 모르겠어요. 느끼는 게 매번 다르니까.”“산…. 좋고 또 무섭죠. 감히 뭐라고 얘길 못하겠어요.” “뒷산 가듯 설악산에 오는 분들도 있지만 저에겐 한없이 거대한 존재죠.”러셀 작업을 마치고 대원들과 숙소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무전이 울렸다. ‘조난자 발생. 희운각 대피소 1km 하단에 3명.’방금 전까지 무릎과 허리를 주무르며 “내 연골 다 어디 갔어?” 하고 타령하던 대원들이 말없이 젖은 등산복을 다시 입기 시작했다.설악산=신광영 기자 neo@donga.com}
가난한 어린이, 부랑인, 일반 시민 등을 강제 수용한 뒤 중노동을 시키고 가혹 행위와 살인까지 했던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 정부가 27년 만에 진상 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추진한다. 안전행정부는 1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보건복지부, 부산시,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 규명 대책위원회’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첫 정부 합동 회의를 열고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안행부 측은 우선 자료와 생존 피해자의 진술 등을 확보한 뒤 특별법 제정과 보상 문제 등을 논의할 방침이다. 형제복지원은 1975년 당시 정부가 부랑인 수용 인원에 따라 보조금을 주기로 하자 이를 타내기 위해 마구잡이로 수용자를 늘려 최대 3100명에 달하기도 했다. 복지원 측은 원생을 천막에서 생활하게 하고 벽돌 나르기 등 하루 10시간 이상 중노동을 시켰다. 썩은 밥을 먹이고 달아나다 발각되면 곡괭이로 때리거나 살해한 뒤 뒷산에 암매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어린이를 성적으로 학대하기도 했다. 이 사건 공식 사망자 수만 513명에 달한다. 1987년 3월 탈출하려던 원생 1명이 직원의 구타로 사망하자 35명이 집단 탈출하면서 복지원 실체가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 검찰이 수사에 착수해 원장 박모 씨가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받는 등 가벼운 처벌만 받았을 뿐이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