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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 고즈넉한 산사로 가는 길이 이렇게 화려해도 되는 것일까. 나무 그늘 아래 활짝 피어난 꽃무릇의 유혹이 온몸을 휘감는다. 가을은 모든 것이 스러져 가고, 퇴색하는 계절이 아닌가. 그런데 이런 계절에 선명한 붉은 융단이 깔릴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노을빛처럼 불타오르는 숲속의 꽃밭은 칸 영화제의 레드카펫보다 아찔한 황홀경을 연출한다. 애틋한 사랑과 그리움이 담긴 꽃무릇이 한창인 고창 선운사와 영광 불갑사에 다녀왔다. ●선운사 도솔천에 핀 그리움의 꽃전북 고창의 선운사는 해마다 3, 4월이면 온 산에 빨간 동백꽃이 피어난다. 붉은 동백꽃이 통째로 툭툭 떨어지는 모습은 처연한 사랑의 슬픔을 느끼게 한다. 천연기념물 제184호로 지정된 선운사(禪雲寺) 동백나무 숲은 절 뒤쪽 산자락에 30m 너비로 3000여 그루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불에 잘 타지 않는 동백나무는 산에 불이 났을 때 사찰을 보호하기 위한 방화림(防火林)으로 많이 심어 왔다. 그런데 가을의 초입에 선운사는 어떤 단풍보다 먼저 붉은 유혹으로 물든다. 동백꽃보다 더 슬픈 사랑과 그리움을 담은 석산(꽃무릇)이다. 선운사 입구에서부터 시작된 꽃무릇 행렬은 길가에서 몇 송이씩 무리지어 하늘거린다. 마치 클로드 모네의 그림에서 붉은색 개양귀비꽃이 초록색 들판과 흰 구름 속에 있는 듯한 모습이다. 꽃무릇은 햇살 아래에서는 오히려 색이 바래 흐려진다. 반면 나무 그늘에서 무더기로 피어난 꽃무릇은 더욱 진한 크림슨색으로 빛난다. 꽃무릇은 ‘상사화(相思花)’의 일종이다. 땅에서 맵시 있게 솟아오른 초록색 꽃대 위에 덩그러니 한 송이가 달려 있다. 매끈한 줄기에는 어떤 잎의 흔적도 없다. 광합성은 어떻게 하고, 영양분은 어떻게 얻을까. 답은 뿌리에 있었다. 수선화과인 꽃무릇은 알뿌리로 번식을 한다. 꽃이 지고 나면, 10월에 파릇파릇한 잎이 돋아난다. 겨울에 선운사에 오면 살찐 부추나 난초처럼 생긴 풀들이 온통 새파랗게 나 있는 걸 볼 수 있다. 그래서 돌 틈에서 나오는 마늘이라고 해서 ‘돌마늘(석산)’ 또는 ‘개난초’라고 부르기도 한다. 결국 상사화의 잎과 꽃은 어긋난 시간 때문에 같은 하늘 아래서 만날 수 없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이 있듯이 인연이란 스치지 않으면 맺어질 수 없고, 만남 없이 생겨나지 않는 게 그리움이다. 그러나 꽃과 잎이 홀로 버텨낸 시간은 헛된 것은 아니다. 잎은 부지런히 광합성을 해서 뿌리에 영양분을 비축하고, 그 힘으로 허공으로 불쑥 기다란 꽃대를 올려 꽃을 피워낸 것이다. 꽃은 열매도 없이 땅으로 떨어져, 뿌리로 돌아간다. “아직 한번도/당신을/직접 뵙진 못했군요//기다림이 얼마나/가슴 아픈 일인가를/기다려보지 못한 이들은/잘 모릅니다.//좋아하면서도/만나지 못하고/서로 어긋나는 안타까움을/어긋나 보지 않은 이들은/잘 모릅니다.//날마다 그리움으로 길어진 꽃술/내 분홍빛 애틋한 사랑은 언제까지 홀로여야 할까요?//오랜 세월/침묵 속에서/나는 당신께 말하는 법을 배웠고/어둠 속에서/위로 없이도 신뢰하는 법을/익혀왔습니다.//죽어서라도 꼭/당신을 만나야지요/사랑은 죽음보다 강함을/오늘은 어제보다/더욱 믿으니까요.”(이해인 수녀 ‘상사화’) 꽃무릇이 유난히 절 주변에 많이 심어져 있는 이유는 뿌리에 방부제 성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탱화를 그릴 때나 단청을 할 때 뿌리 성분을 짓찧어 넣으면 좀이 슬지 않고 색이 오래 유지된다고 한다. 그래서 절마다 상사화에 얽힌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상사화의 꽃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선운사 꽃무릇을 더 호젓하게 즐기려면 대웅전을 지나 물소리를 들으며 도솔암까지(약 2km) 산책하면 좋다. 선운사 옆으로 흐르는 도솔천 계곡의 어두운 물빛을 환하게 밝히며 피어 있는 꽃무릇은 더욱 애틋하다. 도솔천 물빛에 반사된 나무 그림자는 그야말로 피안의 세계다. 꽃과 빛, 그늘과의 명암 대비가 시선을 확실히 잡아당기는 매력이 있다. ●영광 불갑사 꽃무릇 우리나라 3대 꽃무릇 군락지는 고창 선운사, 영광 불갑사, 함평 용천사다. 그중에서 영광 불갑사는 국내 최대 군락지다. 단일 군락으로는 불갑사 일대가 가장 많다. 선운사의 꽃무릇은 길 따라 자연스럽게 피어 있고, 불갑사 꽃무릇은 노을빛 꽃 융단을 펼친 듯 압도적이다. 불갑사는 선운사보다 2, 3일 개화기가 빠르다. 영광 법성포는 백제 불교가 최초로 도래한 지역이다. 백제 침류왕 원년(384년),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영광 법성포를 통해 들어와 불교를 전파했다. 그가 건립한 최초의 사찰이 불갑사다. 불갑사(佛甲寺)는 이름 그대로 풀이하면 사찰 중 으뜸이라는 뜻이다. 영광 굴비로 유명한 법성포(法聲浦)는 성인(聖人)이 법(法)을 가지고 들어온 포구란 뜻이다. 불갑사에서 언제부터 상사화를 심어 온 것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사찰 뒤편 동백골 주변에 자생하던 것이 골짜기로 번져 연실봉 가는 길이 가장 먼저 상사화로 뒤덮였다. 일주문에서 사찰에 이르기까지 약 1km 구간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좌우 산자락과 공원이 온통 붉은 꽃물결이다. 불갑사 경내에 들어가면 흙담 아래에 삼삼오오 피어 있는 꽃무릇이 정겹다. 불갑사에는 상사화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 불갑사에서 수행하던 ‘경운’이라는 스님이 불갑사를 창건한 마라난타 존자의 고향인 간다라 지역으로 유학을 떠난다. 스님은 법회에서 만난 간다라 지역 쿠샨 왕의 공주와 서로 첫눈에 반하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스님을 추방하게 되고, 공주는 작은 화분에 참식나무 한 그루와 작은 씨앗을 선물로 주었다. 불갑사로 돌아온 스님이 열반에 든 후 참식나무 밑에서 꽃이 피어나는데,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상사화라 하였다고 한다. 상사화는 석산(꽃무릇) 외에도 붉노랑상사화, 제주상사화, 위도상사화, 백양꽃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여름철 8월이 상사화의 절정기이고, 가을이 시작되는 9월은 꽃무릇 세상이다. 꽃무릇이 꽃이 핀 뒤에 10월쯤에 잎이 나는 반면, 다른 상사화는 봄에 잎이 난 뒤에 여름에 꽃이 피는 점이 다르다. 꽃과 잎이 서로 볼 수 없는 특성은 같다. 꽃무릇은 김천 직지사, 정읍 내장사, 서울 길상사 등에서도 10월 초까지 감상할 수 있다. ●한국의 아이비 송악과 수동리 팽나무 고창 선운사로 가는 입구 매표소 옆엔 개울 건너 절벽 전체를 뒤덮으며 자라는 덩굴나무가 있다.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수백 년 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덩굴나무 줄기는 절벽을 타고 부챗살처럼 뻗어 15m 넘게 올라간 모습이 장관이다. 잎은 반질반질 윤이 나고 짙은 녹색이다. 국내 송악 중 가장 큰 나무여서 천연기념물(367호)로 보호하고 있다. 송악은 한국의 아이비(Ivy)다. 송악은 상록성 덩굴나무인데, 주로 남해안과 제주도 등 남쪽 지방에 분포한다. ‘담장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창 수동리에 가면 수령 400년 넘은 팽나무(천연기념물 제494호)를 만날 수 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나온 경남 창원 북부리 팽나무처럼 주변이 탁 트인 마을 산정에 우뚝 솟아 있는 우람한 팽나무다. 현재 천연기념물 노거수로 지정된 팽나무는 경북 예천 금남리 황목근과 고창 수동리 팽나무 단 2건뿐이다. 수동리 팽나무 그늘 아래 앉으니 언덕 아래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가을바람이 머리카락에 닿는다. 누렇게 익어가는 벼들도 춤을 춘다. 고창, 영광=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초가을 고즈넉한 산사로 가는 길이 이렇게 화려해도 되는 것일까. 나무 그늘 아래 활짝 피어난 꽃무릇의 유혹이 온몸을 휘감는다. 가을은 모든 것이 스러져 가고, 퇴색하는 계절이 아닌가. 그런데 이런 계절에 선명한 붉은 융단이 깔릴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노을빛처럼 불타오르는 숲속의 꽃밭은 칸 영화제의 레드카펫보다 아찔한 황홀경을 연출한다. 애틋한 사랑과 그리움이 담긴 꽃무릇이 한창인 고창 선운사와 영광 불갑사에 다녀왔다.》○ 선운사 도솔천에 핀 그리움의 꽃 전북 고창의 선운사(禪雲寺)는 해마다 3, 4월이면 온 산에 빨간 동백꽃이 피어난다. 붉은 동백꽃이 통째로 툭툭 떨어지는 모습은 처연한 사랑의 슬픔을 느끼게 한다. 천연기념물 제184호로 지정된 선운사 동백나무 숲은 절 뒤쪽 산자락에 30m 너비로 3000여 그루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불에 잘 타지 않는 동백나무는 산에 불이 났을 때 사찰을 보호하기 위한 방화림(防火林)으로 많이 심어 왔다. 그런데 가을의 초입에도 선운사는 어떤 단풍보다 먼저 붉은 유혹으로 물든다. 동백꽃보다 더 슬픈 사랑과 그리움을 담은 석산(꽃무릇)이다. 선운사 입구에서부터 시작된 꽃무릇 행렬은 길가에서 몇 송이씩 무리지어 하늘거린다. 마치 클로드 모네의 그림에서 붉은색 개양귀비꽃이 초록색 들판과 흰 구름 속에 있는 듯한 모습이다. 꽃무릇은 햇살 아래에서는 오히려 색이 바래 흐려진다. 반면 나무 그늘에서 무더기로 피어난 꽃무릇은 더욱 진한 크림슨색으로 빛난다. 꽃무릇은 ‘상사화(相思花)’의 일종이다. 땅에서 맵시 있게 솟아오른 초록색 꽃대 위에 덩그러니 한 송이가 달려 있다. 매끈한 줄기에는 어떤 잎의 흔적도 없다. 광합성은 어떻게 하고, 영양분은 어떻게 얻을까. 답은 뿌리에 있었다. 수선화과인 꽃무릇은 알뿌리로 번식을 한다. 꽃이 지고 나면, 10월에 파릇파릇한 잎이 돋아난다. 겨울에 선운사에 오면 살찐 부추나 난초처럼 생긴 풀들이 온통 새파랗게 나 있는 걸 볼 수 있다. 그래서 돌 틈에서 나오는 마늘이라고 해서 ‘돌마늘(석산)’ 또는 ‘개난초’라고 부르기도 한다. 결국 상사화의 잎과 꽃은 어긋난 시간 때문에 같은 하늘 아래서 만날 수 없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이 있듯이 인연이란 스치지 않으면 맺어질 수 없고, 만남 없이 생겨나지 않는 게 그리움이다. 그러나 꽃과 잎이 홀로 버텨낸 시간은 헛된 것은 아니다. 잎은 부지런히 광합성을 해서 뿌리에 영양분을 비축하고, 그 힘으로 허공으로 불쑥 기다란 꽃대를 올려 꽃을 피워낸 것이다. 꽃은 열매도 없이 땅으로 떨어져, 뿌리로 돌아간다. “아직 한번도/당신을/직접 뵙진 못했군요//기다림이 얼마나/가슴 아픈 일인가를/기다려보지 못한 이들은/잘 모릅니다.//좋아하면서도/만나지 못하고/서로 어긋나는 안타까움을/어긋나 보지 않은 이들은/잘 모릅니다.//날마다 그리움으로 길어진 꽃술/내 분홍빛 애틋한 사랑은 언제까지 홀로여야 할까요?//오랜 세월/침묵 속에서/나는 당신께 말하는 법을 배웠고/어둠 속에서/위로 없이도 신뢰하는 법을/익혀왔습니다.//죽어서라도 꼭/당신을 만나야지요/사랑은 죽음보다 강함을/오늘은 어제보다/더욱 믿으니까요.”(이해인 수녀 ‘상사화’) 꽃무릇이 유난히 절 주변에 많이 심어져 있는 이유는 뿌리에 방부제 성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탱화를 그릴 때나 단청을 할 때 뿌리 성분을 짓찧어 넣으면 좀이 슬지 않고 색이 오래 유지된다고 한다. 그래서 절마다 상사화에 얽힌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상사화의 꽃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선운사 꽃무릇을 더 호젓하게 즐기려면 대웅전을 지나 물소리를 들으며 도솔암까지(약 2km) 산책하면 좋다. 선운사 옆으로 흐르는 도솔천 계곡의 어두운 물빛을 환하게 밝히며 피어 있는 꽃무릇은 더욱 애틋하다. 도솔천 물빛에 반사된 나무 그림자는 그야말로 피안의 세계다. 꽃과 빛, 그늘과의 명암 대비가 시선을 확실히 잡아당기는 매력이 있다. ○영광 불갑사 꽃무릇우리나라 3대 꽃무릇 군락지는 고창 선운사, 영광 불갑사, 함평 용천사다. 그중에서 영광 불갑사는 국내 최대 군락지다. 단일 군락으로는 불갑사 일대가 가장 많다. 선운사의 꽃무릇은 길 따라 자연스럽게 피어 있고, 불갑사 꽃무릇은 노을빛 꽃 융단을 펼친 듯 압도적이다. 불갑사는 선운사보다 2, 3일 개화기가 빠르다. 영광 법성포는 백제 불교가 최초로 도래한 지역이다. 백제 침류왕 원년(384년),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영광 법성포를 통해 들어와 불교를 전파했다. 그가 건립한 최초의 사찰이 불갑사다. 불갑사(佛甲寺)는 이름 그대로 풀이하면 사찰 중 으뜸이라는 뜻이다. 영광 굴비로 유명한 법성포(法聲浦)는 성인(聖人)이 법(法)을 가지고 들어온 포구란 뜻이다. 불갑사에서 언제부터 상사화를 심어 온 것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사찰 뒤편 동백골 주변에 자생하던 것이 골짜기로 번져 연실봉 가는 길이 가장 먼저 상사화로 뒤덮였다. 일주문에서 사찰에 이르기까지 약 1km 구간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좌우 산자락과 공원이 온통 붉은 꽃물결이다. 불갑사 경내에 들어가면 흙담 아래에 삼삼오오 피어 있는 꽃무릇이 정겹다. 불갑사에는 상사화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 불갑사에서 수행하던 ‘경운’이라는 스님이 불갑사를 창건한 마라난타 존자의 고향인 간다라 지역으로 유학을 떠난다. 스님은 법회에서 만난 간다라 지역 쿠샨 왕의 공주와 서로 첫눈에 반하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스님을 추방하게 되고, 공주는 작은 화분에 참식나무 한 그루와 작은 씨앗을 선물로 주었다. 불갑사로 돌아온 스님이 열반에 든 후 참식나무 밑에서 꽃이 피어나는데,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상사화라 하였다고 한다. 상사화는 석산(꽃무릇) 외에도 붉노랑상사화, 제주상사화, 위도상사화, 백양꽃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여름철 8월이 상사화의 절정기이고, 가을이 시작되는 9월은 꽃무릇 세상이다. 꽃무릇이 꽃이 핀 뒤에 10월쯤에 잎이 나는 반면, 다른 상사화는 봄에 잎이 난 뒤에 여름에 꽃이 피는 점이 다르다. 꽃과 잎이 서로 볼 수 없는 특성은 같다. 꽃무릇은 김천 직지사, 정읍 내장사, 서울 길상사 등에서도 10월 초까지 감상할 수 있다. ○한국의 아이비 송악과 수동리 팽나무고창 선운사로 가는 입구 매표소 옆엔 개울 건너 절벽 전체를 뒤덮으며 자라는 덩굴나무가 있다.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수백 년 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덩굴나무 줄기는 절벽을 타고 부챗살처럼 뻗어 15m 넘게 올라간 모습이 장관이다. 잎은 반질반질 윤이 나고 짙은 녹색이다. 국내 송악 중 가장 큰 나무여서 천연기념물(367호)로 보호하고 있다. 송악은 한국의 아이비(Ivy)다. 송악은 상록성 덩굴나무인데, 주로 남해안과 제주도 등 남쪽 지방에 분포한다. ‘담장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창 수동리에 가면 수령 400년 넘은 팽나무(천연기념물 제494호)를 만날 수 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나온 경남 창원 북부리 팽나무처럼 주변이 탁 트인 마을 산정에 우뚝 솟아 있는 우람한 팽나무다. 현재 천연기념물 노거수로 지정된 팽나무는 경북 예천 금남리 황목근과 고창 수동리 팽나무 단 2건뿐이다. 수동리 팽나무 그늘 아래 앉으니 언덕 아래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가을바람이 머리카락에 닿는다. 누렇게 익어가는 벼들도 춤을 춘다. 글·사진 고창/영광=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코로나19를 겪은 지난 3년간은 매우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괌의 호텔 대부분이 문을 닫거나 비용 절감, 인원 감축에 나서야 했지요. 그러나 팬데믹 기간은 괌의 관광산업을 돌아보고,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미국령인 괌은 매력적인 에메랄드 빛 바다 휴양지로 한국인과 일본인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여행지다. 태평양의 휴양지인 하와이보다 비행거리가 가깝고, 비용도 저렴하기 때문이다. 2019년까지는 1년 내내 모든 호텔의 객실이 가격과 상관없이 예약이 꽉 찰 정도였는데, 코로나19 사태로 모든 것이 멈췄다. “올해 4월부터 한국에서 오는 관광객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현재 괌의 호텔 객실을 찾아오는 관광객의 90%는 한국인입니다. 팬데믹 이후 일본보다 한국 관광객이 괌을 먼저 찾아오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을 하지 못했죠.”(켄 야나기사와 ‘더 츠바키 타워’ 총지배인) 7월 괌 정부관광청이 발표한 집계에 따르면 괌의 한국인 여행객 수는 올해 4월 3239명이었던 것이 6월에는 1만6298명에 이르렀다. 이는 지난해 6월(173명)보다 94배 늘어난 수치다. 일본은 아직 해외여행을 꺼리는 분위기가 남아 있고, 중국은 미국령 괌을 위해선 비자발급이 필요하기 때문에 일본, 중국인 관광객이 사라진 괌의 해변과 호텔에서는 한국어를 쉽게 들을 수 있다. 괌 관광청은 올해 약 22만 명의 한국인 관광객이 괌을 찾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PIC괌, 더 츠바키 타워, 힐튼 괌 리조트 앤드 스파, 호텔 닛코 괌, 리가로얄 라구나 괌 리조트 등 괌 내에 6개의 호텔과 리조트를 운영하고 있는 PHR그룹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가장 큰 고객으로 떠오른 한국인 관광객들을 위한 본격적인 서비스 개선에 나섰다. 먼저 고급화 전략이다. 2015년에 5성급 럭셔리 호텔인 두짓타니 괌이 문을 연 데 이어, 괌 최초로 6성급 호텔을 표방한 더 츠바키 타워가 2020년 7월 오픈했다. 340개 전 객실에 오션뷰 발코니를 갖춘 이 호텔은 에메랄드 빛 투몬 비치를 내려다보는 인피니티풀 수영장에서 매일 밤마다 분수 쇼가 펼쳐진다. 또한 26층 클럽라운지에서는 애프터눈 티를 즐기며 환상적인 일몰 장면을 감상할 수 있다. 1층 뷔페 레스토랑에서는 서울의 한식을 비롯해 도쿄, 홍콩, 싱가포르, 타이베이 등 5개 국제도시의 스탠더드에 맞춘 식음료(F&B) 서비스도 즐길 수 있다. 야나기사와 더 츠바키 타워 총지배인은 “럭셔리 호텔은 시설보다 중요한 것이 고객 서비스”라며 “팬데믹 기간에 오픈해서 호텔이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직원들이 최상의 고객서비스를 위한 준비시간을 벌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투몬베이 옆의 건비치에 자리 잡은 호텔 닛코는 30년 전통의 리조트로, 야자수가 우거진 해변과 괌에서 가장 긴 미끄럼틀을 가진 수영장이 명물이다. 이 호텔은 코로나19 기간 동안 브랜드 재정비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모바일에 익숙한 한국인 MZ세대 고객을 사로잡기 위한 모바일 앱 서비스다. 디지털 체크인과 체크아웃, 모바일 키, 레스토랑 예약 등을 모두 호텔 도착 전 모바일로 진행할 수 있다. 또한 위생에 민감한 한국인들을 위해 친환경 소재를 사용한 허스키(Huskee) 텀블러를 전 객실에 비치해 기념품으로 증정한다. 이 텀블러를 들고 로비 파운틴 카페를 방문할 경우 50% 할인을 받을 수 있다. “괌 여행은 하와이와 비슷한 풍경을 즐길 수 있으면서도 가깝고 비용이 저렴합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어도 한국과 일본인 관광객이 몰려들었죠. 그러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살아남기 위해 현지인들을 위한 핼러윈, 크리스마스, 밸런타인데이 파티를 만들었습니다. 전통적인 허니문이나 패키지 관광을 넘어서 젊은 세대들이 즐길 수 있는 리조트로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습니다.”(호텔 닛코 윌리엄 시노자키 총지배인) 괌=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아비뇽 다리 위에서∼ 다 같이 춤추자∼ 동그라미 그리며∼.” 프랑스 남부 론강 위에 놓인 이 다리는 ‘아비뇽 다리 위에서’라는 민요로 널리 알려졌다. 12세기 무렵 양치기 소년 베네제가 신의 계시를 듣고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어 ‘성 베네제 다리’라고도 불린다. 22개의 아치로 돼 있던 다리는 현재 4개의 교각만 남아 있다. 더 이상 강을 건널 수는 없는 다리지만, 민요 덕분에 아비뇽을 전 세계에 알린 다리가 됐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신석정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제9회 석정시문학상에 문효치 시인이, 제9회 석정촛불시문학상에 손은조 시인이 각각 선정됐다. 석정시문학상은 한국문학사의 중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신석정(1907~1974) 시인의 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제정됐다. 신석정기념사업회가 주관하고 부안군, 석정문학회, 부안군 문화재단, 전북예총, 한국신석정시낭송협회가 후원하는 이 상의 올해 심사위원에는 신달자 시인과 안도현, 김영, 정군수 시인 등이 참여했다. 석정시문학상 수상자인 문효치 시인은 전북 군산 출생으로 1966년 한국일보 및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당선됐다. 1966년 ‘신년대’ 동인회 참여를 비롯해 1980년 ‘진단시’ 동인회 창립, 문학과 창작 편집주간, 현대시인협회 상임이사 및 부회장, 동국문학인회장, 한국문인협회 사분과 회장, 계간 라토피아 편집고문, 국제 펜 한국본부 이사장, 한국예총 부회장을 역임했다. 김삿갓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등을 수상했다. 문효치 시인은 “이번 수상은 평소 흠모하는 분의 시 정신을 기리는 상이요, 고향 전북에서 주어지는 상이어서 자부심을 느낀다”며 “제 삶의 나머지 주어진 시간에 후회없는 문학 인생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석정촛불시문학상 수상자인 손은조 시인은 경북 경주 출생으로 2018년 월명문학상, 2020년 동리목월 신인상을 수상했다. 손 시인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제가 처음으로 빠져 들었던 시가 신석정 시인님의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다. 제가 재미있게 읽은 만화 첫 지면에 삽화와 함께 전개된 이 시가 어린 제 가슴을 얼마만큼 흔들어 놓았는지 동시만 배우던 작은 세계의 탈바꿈이자 나만의 노트를 만드는 출발점이 됐다”고 말했다. 시상식은 오는 24일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석정문학관에서 열린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신석정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제9회 석정시문학상에 문효치 시인이, 제9회 석정촛불시문학상에 손은조 시인이 각각 선정됐다. 석정시문학상은 한국문학사의 중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신석정(1907~1974) 시인의 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제정됐다. 신석정기념사업회가 주관하고 부안군, 석정문학회, 부안군 문화재단, 전북예총, 한국신석정시낭송협회가 후원하는 이 상의 올해 심사위원에는 신달자 시인과 안도현, 김영, 정군수 시인 등이 참여했다. 석정시문학상 수상자인 문효치 시인은 전북 군산 출생으로 1966년 한국일보 및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당선됐다. 1966년 ‘신년대’ 동인회 참여를 비롯해 1980년 ‘진단시’ 동인회 창립, 문학과 창작 편집주간, 현대시인협회 상임이사 및 부회장, 동국문학인회장, 한국문인협회 사분과 회장, 계간 라토피아 편집고문, 국제 펜 한국본부 이사장, 한국예총 부회장을 역임했다. 김삿갓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등을 수상했다. 문효치 시인은 “이번 수상은 평소 흠모하는 분의 시 정신을 기리는 상이요, 고향 전북에서 주어지는 상이어서 자부심을 느낀다”며 “제 삶의 나머지 주어진 시간에 후회없는 문학 인생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석정촛불시문학상 수상자인 손은조 시인은 경북 경주 출생으로 2018년 월명문학상, 2020년 동리목월 신인상을 수상했다. 손 시인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제가 처음으로 빠져 들었던 시가 신석정 시인님의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다. 제가 재미있게 읽은 만화 첫 지면에 삽화와 함께 전개된 이 시가 어린 제 가슴을 얼마만큼 흔들어 놓았는지 동시만 배우던 작은 세계의 탈바꿈이자 나만의 노트를 만드는 출발점이 됐다”고 말했다. 시상식은 오는 24일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석정문학관에서 열린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갖고 있다. 그는 법조문을 비롯해 한번 읽은 모든 문서는 스캐너처럼 머릿 속에 저장하는 비상한 암기능력을 갖고 있다. 또한 가끔씩 상상 속에서 고래가 튀어나올 때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창조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우영우는 언어나 인지능력에는 문제가 없지만 사회적 관계와 상호작용에 어려움을 겪는다. 발달 장애인들 중에는 지적능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일부 극소수는 천재성을 보인다. ‘고래’에 집착하는 우영우처럼 한가지 주제에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엄청난 정보를 수집하고, 천재적인 암기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너무 한정된 분야에만 관심을 갖다보니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거나 소통에는 어려움을 겪는다. 요즘 발달장애인들이 천재성을 발휘하는 분야 중 하나가 미술이다. 원래 미술치료는 발달장애인들이 자기표현과 의사소통력을 기르고, 신체의 근육을 치료하기 위한 방법으로 쓰였다. 그런데 미술작업에 빠져든 발달장애 작가 중에는 정규 입시미술 교육을 받은 화가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화려한 색채감과 창조적인 작품을 쏟아내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발달장애’는 언어, 인지, 운동, 사회성 등의 능력이 제 나이에 맞게 발달하지 못한 상태를 모두 지칭하는 말로, 자폐성 장애와 다운증후군, 지적장애 등을 모두 포괄하는 말이다.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한지민의 다운증후군 언니로 출연했던 정은혜 작가는 지난달 서울 인사동 토포하우스에서 드로잉 전시회를 가졌다. 실제 발달장애인인 그는 ‘은혜 씨의 포옹’이라는 그림에세이를 통해 자신이 꼭 안아주고 싶은 사람들의 얼굴을 그렸다. 지난달 31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개막한 전시회에는 발달·지체·청각 등의 장애를 안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작가 50인의 작품이 선보이고 있다. 그런가하면 현재 전국 20개 러쉬 매장에서는 윈도를 갤러리로 활용해 발달장애 작가들의 그림을 만날 수 있는 ‘제1회 러쉬 아트페어’가 열리고 있다. ●마음을 그리는 화가 지난 8일 발달장애 미술박람회인 러쉬아트페어가 열리고 있는 서울 종로구 대학로 러쉬매장에서 만난 양예준 작가(13). 그는 흰 모자를 눌러쓴 채 인사를 하면서도 쉽게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비늘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는 멸종위기 샴 악어, 눈동자들이 가득찬 어린 왕자의 옷, 총천연색 색깔로 칠해진 ‘마음을 그리는 화가’ 자화상…. 오일 파스텔, 색연필, 아크릴 물감을 이용해 그린 그의 그림은 화려한 색채감이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곳곳에 등장하는 눈동자가 섬뜩하면서도 아름답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난 후였어요. 예준이가 혼잣말을 하면서 끊임없이 연필을 잡고 흔드는 반복행동을 했습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자극에 스스로 처리가 안되니까 불안해하면서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너무 안타까워서 벽에 커다란 전지를 붙여주었지요. 연필을 들고 그냥 흔들지 말고, 선이라도 그으리고 말이죠. 어느날 아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더군요. 지구 색연필을 잡고 반복해서 선을 그리고, 덧칠해서 번들번들해질 때까지 말이죠.” 어머니 장은경 씨는 예준이가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에 빠졌다. 여러차례 자살충동도 겪었다고 했다. 연필을 쥐고 손을 흔드는 행동을 고치기 위해 시작한 그림 그리기로 우연하게 ‘미술 치료’가 시작됐다. “어느날 얼굴 그림에 민트색을 칠해놨더라구요. 왜 이런 색을 칠하지? 다른 애들처럼 제대로 색을 그리지 못하는 걸 보고 걱정하면서도 그냥 놔뒀어요. 부모 모두 미술전공자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더라구요. 그런데 어느날 서대문 자연사박물관에서 주최하는 그림대회에 엄마 아빠하고 김밥싸고 가서 놀러가자는 마음에 신청해서 갔습니다. 아이가 입상하지 못했는데도, 전시를 하게 해주었어요. 그게 계기가 됐습니다. 이후 2년 동안 그림대회에 나가서 50여 개의 상을 받았습니다. 심사위원분들이 정형화된 그림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 응원을 많이 해주셨어요.” 예준이는 밀알복지재단과 한양대에서 발달장애 미술 수업을 받기도 했다. 집에 와서도 4시간 이상씩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엄마가 “12시니까 자야 해”라고 말하면, “더 그리면 안돼요?”라고 묻는다고 한다. 그림을 그리면서 너무 행복해하고, 자존감이 크게 높아지면서 치유가 되고 있다고 한다. 더 이상 약물이 필요없을 정도로 혼잣말을 하거나 손을 떠는 행동도 많이 나아졌다. 교실에서도 더 이상 선생님과 친구들 사이에서도 장애인이 아니라 ‘그림 잘 그리는 아이’로 불려지게 됐다고 한다. 양예준 작가는 시내버스 광고도 나오고, 오티즘 엑스포, 러쉬아트페어에도 초대받는 어엿한 작가가 됐다. 지난 9월1일~6일 영국 사치(Saatchi) 갤러리가 주최하는 ‘스타트 아트페어 서울 2022’에도 학생 미술공모전에서 당선됐다. 발달장애 미술이 아니라 전국의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한 공모전에서 심사를 거쳐 6명 중 한 명으로 당선된 것이다. 스타트 아트페어에는 기안84, 송민호, 낸시랭 등 유명 연예인들의 작품도 초청돼 화제를 모았다. 양 작가의 ‘우리 안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오랑우탄’ 그림은 10월 영국 런던 프리즈 위크 기간 사치 갤러리에서 열리는 ‘스타트 아트페어’에도 초청돼 글로벌 무대에서도 선보일 예정이다. 예준이는 평소 눈동자를 그리기 좋아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주제로 한 작품에서도 눈동자에 슬픔을 담았다. 그리고 우크라이나를 상징하는 해바라기와 사람의 이미지, 전쟁을 멈춰달라는 메세지와 함께 총알을 맞은 흔적도 그려넣었다. 어머니 장은경 씨에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았던 소감을 물었다. “우영우 그 친구는 매우 특별하잖아요. 그런 친구들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아이 중에 극소수입니다. 저도 장애아의 엄마니까. 제 아이가 우영우처럼 극소수의 재능을 가진 아이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제가 발달장애인들의 삶과 죽음에 관한 책 출판 작업을 함께 한 적이 있어요. 내 아이도 언젠가 엄마가 없는 세상에서, 어느 시설에 들어가서 살 수 밖에 없을 때가 오겠죠. 그 때 누군가에게 행복을 줄 수 있고, 자기만의 취미가 있다면 그거면 됐다고 생각합니다. 뭔가 특별하고 대단한 것을 바라지는 않아요. 그저 아이가 일반인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가고, 장애를 가졌지만 행복한 상태가 됐으면 합니다. 예준이에게 넌 어떤 화가야?하고 물어보면, ‘저는 마음을 그려요. 마음을 그리는 화가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래 너는 네 마음을 그리니까, 사람들이 언젠가 그 마음을 알아줄꺼야라고 말해줍니다.”●“이규재는 꼴찌다, 그러나 나는 화가지!” 발달장애 미술의 특징은 ‘교육’에 의해 미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집요하게 그림을 파고 들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표현법과 색채감을 완성해나간다는 점이다. 입시미술에 길들여진 천편일률적인 작품과 달리, 나이 어린 작가인데도 놀라울 정도로 독창적이고 대담한 작품이 많다. 10년 이상 발달장애 미술 작가를 발굴하고 전시와 협업을 기획해 온 크리에이터 한젬마 씨에게 발달장애 미술에 대해 물었다. “작가들의 색감이 매우 자신있고, 밝은 경우가 많다. 색의 대비 매칭력이 뛰어나서 색감표현력이 강렬하고 구성력이 뛰어나다. 미술전시 브로슈어를 만들 때는 보통 색보정을 좀 한다. 좀더 밝고 선명하고, 강렬해 보이기 위해서다. 그런데 발달장애 작가들의 그림은 유독 원화만큼 색보정이 안됐다. 절대 그래픽이나 인쇄를 통해서는 그 원화만큼의 색상을 만들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는 이들의 그림을 ‘빛’에 가깝다고 표현한다.” 발달장애 작가들은 시계, 자동차, 새 등 자신이 관심이 있는 대상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끊임없이 반복해서 그린다. 9월19일까지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리고 있는 ‘장애인 문화 예술축제 A+ 페스티벌 특별전시’에는 부산시 연제구에 사는 발달장애 작가 윤진석 씨(24)의 작품도 전시되고 있다. 네살 때 발달장애 진단을 받은 그는 시계에 집착해왔다. 다른 사람 얼굴을 쳐다보거나 눈을 맞추는 것도 힘들어하는 윤 씨는, 병원과 식당, 복지관, 학교의 벽에는 걸려 있는 벽시계를 하염없이 쳐다보곤 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벽에 걸린 시계를 앞면과 뒷면을 샅샅이 살피고, 시계를 분해해 내부를 관찰하는 것도 좋아했다. 그의 어머니는 “진석이는 다른 사람의 눈을 쳐다보는 대신 시계를 바라보며 위안을 얻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윤씨는 이렇게 관찰한 시계를 스케치북에 옮겼다. 종이 앞장에 시계 앞면을 그리고 뒷면에는 직접 관찰한 뒷모습을 새겨넣었다. 그는 해당 시계를 관찰한 장소와 시간까지도 정확히 기억했다. 그림 제목에는 늘 ‘그랜드호텔 수영장 시계’ ‘청도 오리백숙 시계’ ‘이랴이랴 숯불갈비 시계’처럼 그 시계 관찰 장소를 써넣었다. 그림이 알려지면서 윤씨 시계 그림은 tvN 드라마 ‘마인’에도 등장했다. 드라마 속에서 그 그림은 12억원에 거래된다. 러쉬아트페어 가로수길점에서 전시회를 열고 있는 이규재 작가는 5살 무렵부터 종이에 동그라미와 네모, 세모 등의 도형 그리기를 반복하며 매일 사과상자 가득 그림종이가 쌓였다고 한다. 부모는 자폐성 장애의 특징인 반복 집착행동으로만 여겨져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제한을 두기도 했습니다. 결국 사춘기가 되면서 비장애친구들과의 차이에 힘들어할 때마다 “이규재는 뭘 해도 꼴찌다”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음성틱이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미술대회에서 상 을 받게 된 후로 “이규재는 꼴찌다. 근데 난 화가지, 상받았지, 이규재는 이규재다”라는 자존감의 표현을 혼잣말로 하는 버릇이 생겼다. 미술로 자존감을 얻고 치유를 하게 된 것. 그는 여행 가고 싶은 곳을 스스로 검색해서 스케줄을 정하고 하나하나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 나무와 산, 박물관을 찍은 사진을 컴퓨터에 저장해놓고 생각날 때마다 보며 그 느낌을 그림으로 그린다. 물감 뿐 아니라 혼합 재료로 그린 그의 그림은 마치 물결이 치는 듯 판타지처럼 보인다. 최서은 작가는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지만 대학졸업 후 늦게 발달장애 진단을 받고 아무 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증에 빠졌다. 그러다 목판화를 하기 시작하면서 조각칼로 나무를 깎아낼 때의 따뜻한 촉감에 매료돼 나무판으로 주위에 있는 나무와 꽃, 강아지를 그리며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목판화의 매력에 흠뻑 빠져 15년 가까운 시간을 한 길을 걸어왔다. 스스로 발달장애를 안고 있으면서도 판화작업에 ‘생산적 집착’ 을 통해 스스로 ‘힐링(Healing)’하는 방법을 터득한 작가이다. 3살에 자폐 진단을 받은 이다래 작가는 지난 20여 년간 그림으로 세상과 교류해 왔다. 현재 20대 초반인 그는 4번의 개인전을 비롯해 수많은 전시회에 초대됐다. 2014년에는 그림 속 얼룩말이 돌연 작업실에 등장한 장면을 정밀히 묘사해 장애인 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는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원예 수업과 하루 한 시간 한강 변을 걷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작업실에 머물며 그림을 그린다. 지난 5월 서울 용산 대통령 집무실에서 조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이 회담을 마치고 발달장애 화가 김현우(픽셀킴) 작가의 ‘퍼시 잭슨, 수학드로잉’이라는 그림을 감상해 주목을 끌었다. 다운증후군이 있는 김 작가는 자신이 경험하고 상상하는 것을 픽셀로 조형화하는 작업을 해왔다. ‘퍼시잭슨 수학드로잉’은 세로로 칠해진 파랑과 노랑, 주황 바탕에 풀 수 없는 수학 공식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통합 교육 방침에 따라 일반 고등학교에서 비장애인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들었던 김 작가에게 수학 수업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알 수 없는 것들이 가득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수업 시간 내내 김 작가는 선생님이 칠판에 그린 도형과 그래프, 수학공식을 자신의 노트에 빼곡하게 따라 썼다. 김 작가가 빼곡히 채운 수십 권의 노트는 이후 2019년 캔버스로 옮겨지면서 작품 ‘퍼시잭슨 수학드로잉’으로 완성됐다. 어릴 적부터 ‘그리스 로마 신화’를 수십번 넘게 완독했던 김 작가는 ‘퍼시잭슨’ 역시 신화에서 영감을 받았다.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반인반신’인 퍼시잭슨은 김 작가에게 이도 저도 아닌, 어떤 것으로 표현하거나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풀 수 없는 수학공식 같았다. 그렇게 ‘퍼시잭슨’이 다루는 ‘번개’의 모양을 본뜬 세로무늬가 수학 공식과 연결돼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한 것이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한젬마 씨는 “발달장애인들이 동물을 좋아하고 동물을 그리는 작가들이 유독 많다”며 “특히 깜짝 놀랄 정도로 색감이 뛰어난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발달장애인들은 본능적으로 구성력과 표현력, 완성도를 타고나는 이가 많다. 교육에 의해 미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릴적부터 집요하게 그림만 파고드는 이가 종종 있는데. 그러한 성향을 보이는 이들이 예술가로 성장하곤 한다. 후기인상주의 화가 툴루즈 로트렉도, 낭만주의 대가 고야도, 한국의 운보 김기창 화백도 누구도 장애 화가라 언급하지 않는다. 후천적 장애화가가 된 마티스나 마네는 장애시기의 작품이 더 빛을 발하기도 했다. 장애가 예술을 방해하지 못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도심의 길거리에서 화려하게 빛나고 있는 매장의 윈도는 기업의 브랜드를 알리고, 상품을 프로모션하는 치열한 경쟁터다. 시선을 가장 잘 끌어들이는 윈도는 섬세하게 연출되는 공간이다. 그런데 이 매장 윈도를 활용한 국내 최초의 아트페어가 열린다. 영국의 핸드메이드 코스메틱 브랜드 ‘러쉬(LUSH)코리아’가 올해 20주년을 맞아 서울 이태원, 가로수길을 비롯해 전국 20개 매장에서 ‘러쉬 아트페어’를 개최한다. 한 기업의 매장이 미술 작품을 소개하는 팝업 아트페어 갤러리로 변신하는 셈이다. 러쉬코리아는 올 7월 서울 서초구 양재동 aT센터에서 열린 ‘오티즘 엑스포’에서도 국내 발달장애 예술가 26명이 심각한 멸종 위기에 몰린 야생동물을 그린 ‘멸종 위기 동물전’ 전시회를 열었다. 이번에는 전국 20개 지역의 발달장애 예술가들의 창조성과 독창성, 상상력이 담긴 예술작품을 매장 윈도에 전시하는 아트페어를 개최했다. “현대성은 경계를 파괴하고 융·복합을 통해 다양한 콘텐츠가 어우러지도록 한다. 매장은 제품을 판매하는 곳이지만, 윈도를 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로 전환했다. 말 그대로 ‘원 플레이스 멀티 유스(One Place Multi Use)’다. 이곳에서 소비자는 관람객이며, 생산자이고 크리에이터가 된다.”(우미령 러쉬코리아 대표) 천연 재료와 수작업을 통해 코스메틱 제품을 만드는 러쉬는 ‘환경보호, 동물보호, 인권’의 가치를 기업 이념으로 추구해 왔다. 이번 아트페어에서 ‘예술에 편견은 없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우 대표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공존하는 세상을 위해 발달장애 작가들과 협업을 하게 됐다”고 소개했다. 러쉬는 그동안에도 국내에서 보디로션 채러티 팟의 판매금을 모아 발달장애인들의 평등한 조화를 위한 자조 모임 ‘꿈과 나눔’을 후원하고, 영국에서는 다운증후군 작가와 콜라보한 천 포장재 ‘낫랩(Knot Wrap)’을 출시하기도 했다. 이번 러쉬 아트페어는 서울 대학로점(양예준 작가), 강남역점(최서은), 이태원역점(권태웅) 등을 비롯해 경기, 충청, 전라, 경상, 제주의 러쉬 매장에 해당 지역에서 살고 있는 발달장애 작가를 초대해 릴레이 전시를 펼친다. 9월 29일부터 11월 7일까지는 강원국제트리엔날레와 콜라보한 러쉬 아트페어가 열린다. 아티스트의 작품과 러쉬 제품이 따로 전시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영감을 주고받는 전시라는 점도 특징이다. 각 매장의 전시장에는 작가의 대표작과 어울리는 제품을 큐레이션함으로써, 스토리가 있는 컬래버레이션이 펼쳐진다. 발달장애 예술가들의 작품 특징이 화려한 색채감과 창조적 형태여서 코스메틱 제품과 잘 어울린다는 평을 받고 있다. 최근 세계 3대 아트페어인 영국 ‘프리즈’가 한국의 국제아트페어(KIAF)와 함께 열려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MZ세대가 열광하고 있는 아트페어는 호텔방이나 카페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러쉬 아트페어를 기획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한젬마 씨는 “아트페어의 진화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그림마켓의 ‘장소성’”이라고 말한다. “그동안 아트페어라고 하면 실내공간의 흰벽(White Wall)에 작품을 걸고 판매하는 것으로 인식돼 왔다. 그런데 러쉬 아트페어는 전국의 매장을 전시장으로 해석함으로써 거리의 갤러리화, 거리 아트페어, 숍 아트페어인 최초의 팝업 아트페어다. 상점에서 시민들에게 예술을 제공하고, 융·복합이 펼쳐지는 퍼블릭 아트의 성격도 가지게 된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도자공예 작가 김혜정 씨와 재단법인 예올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주최하는 ‘2022 올해의 공예상’ 수상자로 6일 선정됐다. 올해로 5회째를 맞이하는 ‘올해의 공예상’은 한국 공예 발전에 기여하며 국내외에서 활발한 창작활동을 이어가는 창작자와 공예문화를 널리 알리는 데 기여한 개인이나 단체에 수여하는 상이다. 창작 부문 수상자 김혜정은 도자공예 작가로 재료의 특성에 대한 예술적 실험과 심미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특히 ‘지구의 순환, 미래지향적인태도, 자연 친화적인 생활 방식의 회복’의 주제를 담은 작품으로 스페인 로에베(LOEWE)재단 공예상 파이널리스트로 선정돼 한국공예의 위상을 널리 알리는데 이바지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받았다. 매개 부문 수상단체인 예올(이사장 김영명)은 지난 20년간 우리나라의 문화와 아름다움을 지켜온 비영리 단체이다. 20년간 꾸준히 전통과 현대공예를 아우르는 전시를 개최하고 공예 작가를 후원하는 등 다양한 매개활동을 전개해왔다. ‘2022 올해의 공예상’ 수상자에게는 공예상징을 담은 특별 제작한 트로피와 함께 상금 (창작부문 1500만원, 매개부문 500만원)과 문체부 장관 표창장이 수여될 예정다. 트로피는 공예가 지닌 역사성을 상기하고 공예의 미적 가치를 상징적으로 표현해 수공예로 직접 제작하고 있다. 지난해에 이어 고보형 작가가 제작을 맡았다. 창작부문 수상자 김혜정 작가의 전시는 오는 12월 9~12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리는 ‘2022 공예 트렌드 페어’에서 진행된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그리스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에는 관능과 해학이 넘치는 조각 작품이 있다. 목욕을 하려던 아프로디테(비너스) 여신에게 음탕한 목신(牧神)인 사티로스(판)가 집적대자, 여신은 슬리퍼를 들고 때리려 하고 있다. 아프로디테의 아들 에로스(큐피드)는 사티로스의 뿔을 잡아 밀치고 있다. 사티로스는 산들을 쏘다니며 아리따운 요정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욕정 덩어리 목신이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전북 남원은 사랑의 고을이자 문학의 고향이다. 지리산의 힘찬 산세와 섬진강의 부드러운 물결이 시작되는 남원 곳곳에는 이야기가 숨어 있다. 판소리 ‘춘향전’의 탄생지이고, ‘흥보가’의 흥부와 놀부가 살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만복사지에는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판타지 사랑 이야기인 김시습의 ‘금오신화’가 펼쳐지고, 서도역의 철길 위에는 작가 최명희가 남긴 불멸의 현대 문학 ‘혼불’이 이글거린다. ● 만복사와 광한루의 사랑남원시 왕정동 벌판에 불그스레한 노을이 번질 즈음. 텅 빈 만복사지를 지키고 있는 석인상의 두 눈은 튀어나올 것만 같다. 풀밭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고려시대 보물급 오층석탑과 당간지주, 석불입상, 연꽃무늬 불상 좌대가 마치 연극배우가 대사를 하고 있는 듯하다. 바로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 쓴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에 나오는 ‘만복사저포기’ 이야기가 펼쳐지는 무대다. 만복사에 머무르던 흙수저 노총각 양생(梁生).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결혼하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빌고 있다. 금오신화에 나오는 양생, 한생, 박생이란 주인공 이름의 ‘생’은 생원의 준말이다. 조선시대 소과(小科)인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만, 향리의 가난한 선비를 올려주는 호칭이기도 했다. 어느 날 양생은 부처님과 저포놀이(윷놀이 비슷한 막대 주사위 놀이) 한판 승부를 벌인다. 게임에서 이긴 양생은 절에서 아리따운 여인을 만나고 사랑에 빠진다. 여인과 사흘을 함께 보내고, 친구들과 함께 시를 지으며 놀았던 양생은 마지막 날 여인으로부터 은그릇을 선물로 받는다. 그런데 다음 날 만난 그녀의 부모님은 “3년 전에 왜구의 침입 때 죽은 딸의 무덤에 함께 묻어준 은그릇을 어떻게 갖고 있느냐”며 놀란다. 결국 양생은 억울하게 죽었던 여인의 환생을 위해 천도재를 올려주고, 자신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가슴에 품고 평생토록 지리산의 약초꾼으로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만복사저포기를 현대적으로 각색한다면 게임과 판타지, 멜로와 호러가 섞인 복합 장르물 영화가 탄생할 법하다. 춘향전이 한 남자를 사랑한 여자의 지조와 정절을 노래했다면, 만복사저포기는 만날 수 없는 여인에 대한 남자의 변치 않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남원시내는 거대한 춘향전 테마파크로 봐도 과언이 아니다. 구룡계곡 입구 육모정 앞에는 소설 속 허구 인물인 춘향이의 무덤까지 조성돼 있다. 해마다 춘향제 때마다 제사도 지낸다고 한다. 백년가약을 약속했던 이몽룡이 한양으로 떠날 때 춘향이가 따라 나와 눈물로 작별했던 정자인 ‘오리정(五里亭)’에는 ‘춘향이 눈물방죽’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오리정에서 북쪽으로는 춘향고개가 있고, 춘향이 이별하는 아픔에 허둥지둥 따라가다 버선이 벗겨졌다는 ‘춘향이 버선밭’도 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백미는 광한루 야경이다. 광한루(廣寒樓)는 미인 항아가 살고 있는 달나라 궁전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를 닮았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완월정(玩月亭)의 호수에는 달빛이 비치고, 광한루 앞에는 세 개의 섬이 떠 있다. 몽룡과 춘향이 함께 걷던 오작교는 난간이 없는 돌다리여서 자칫 물에 빠질 것 같은 마음이 든다. 그래서 연인끼리 걸으면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남원의 대표적인 명소인 만복사와 광한루는 정유재란(1597년) 때 불타 없어졌다.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을 지키던 병사들과 남녀 백성 1만여 명은 몰살을 당해 ‘만인의총’에 묻혔다. 만복사저포기에서 왜구에 의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여인의 비극이 100년 후 실제로 벌어졌던 것이다. 만복사는 이후 빈터로 남았고, 광한루는 인조 때 다시 지어졌다. ● 뱀사골 계곡에서 만난 천년송 남원은 영호남의 경계인데다, 섬진강을 통해 남해로 이어지는 요충지다. 삼한시대에 마한의 왕이 남원 달궁계곡에 은거지를 마련하고 사방 험준한 산세 중 적이 넘어오기 쉬운 길목마다 수비군을 배치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북쪽에는 8명의 장군을 배치해서 ‘팔량치’라고 했고, 서쪽은 정 씨 장군을 배치해 ‘정령치’, 동쪽은 황 씨 장군을 배치해 ‘황령치’라고 불렸다. 남쪽은 특히 중요한 요충지여서 성씨가 각기 다른 3명의 장군이 방어토록 하고 ‘성삼(姓三)재’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정령치는 차로 오를 수 있는 지리산 최고 높이의 고개마루로 정령치 휴게소 앞 전망대에 서면 구름 속에서 천왕봉, 노고단, 반야봉 등의 연봉들이 변화무쌍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남원에서 지리산을 오르는 뱀사골 계곡은 여름 피서와 가을 단풍으로 유명하다. 지리산국립공원 전북사무소에서 와운(臥雲)마을 천년송(千年松)까지 걷는 ‘뱀사골 신선길’(2.3km)은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는 편안한 트레킹 코스다. 용이 노는 요룡소, 멧돼지가 노는 돗소(돗은 남원 사투리 ‘돼지’), 호리병 같은 병소 등 수많은 전설이 깃든 물길을 감상하며 덱길을 걷는다. 30여 분을 걷다 보니 구름도 쉬어간다는 와운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뒤편에 우람한 천년송이 시원하게 뻗어 있다. 하늘을 향해 꿈틀대며 오르는 자태하며 천년 세월의 두꺼운 용비늘 모양까지, 과연 우리나라 최고의 소나무(천연기념물 424호)로 불릴 만하다. 이 천년송은 할머니 소나무로 불리는데, 20여 m 더 올라간 지점에 할아버지 소나무도 있다. 화려하고 우람한 할머니 소나무와 달리 할아버지 소나무는 S자 모양의 맵시 있는 몸매를 자랑한다. 남녀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두 소나무에도 남원의 색다른 사랑 전설이 담겨 있지 않을까 궁금해진다. 남원 노봉마을 서도역에는 최명희 작가(1947~1988)의 ‘혼불 문학관’이 있다. 1981년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된 ‘혼불’은 1995년까지 월간 ‘신동아’에 연재됐던 작품. 일제강점기인 1930, 40년대 남원 지방의 ‘매안 이씨’ 문중을 배경으로 한 대하소설이다. 세시풍속, 관혼상제, 음식, 노래를 판소리처럼 운율 있는 언어로 담아낸 ‘혼불’은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에 비견되는 소중한 언어의 보고로 평가받고 있다. 1934년 개장한 서도역은 소설 속 인물인 효원이 시집가던 날 “점잖은 밥 한상 천천히 다 먹을 만한 시간이면 닿는 정거장”이라는 구절로 묘사된다. 서도역 앞에는 아름드리 고목과 호젓한 철길이 남아 있다.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나오는 기차역 장면도 서도역에서 찍었다. ● 숲속 미술관과 카페남원시 운봉읍 행정리의 ‘서어나무숲’에 들어서면 한여름에도 서늘한 나무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이곳은 200여 년 전에 조성한 마을 숲으로 90여 그루의 아름드리 근육질을 뽐내는 개서어나무가 빽빽하게 자라고 있다. 마을 숲은 홍수와 바람을 막고, 땅의 기운이 센 곳은 눌러 주고 허(虛)한 곳은 보(補)해 주는 비보림(裨補林)이다. 서어나무 숲속에서는 새소리, 바람소리를 ASMR 장비로 듣고, 지역 특산물인 김부각 위에 치즈를 올린 디저트를 먹으며 피크닉을 하는 ‘숲멍 체험’ 프로그램도 즐길 수 있다. 이백면에 있는 ‘아담원(我談苑)’도 숲과 미술관, 카페가 잘 어우러진 휴식처다. 원래 나무를 키우던 조경 농원이었는데 2018년 11월 ‘나와 나누는 대화’라는 뜻의 아담원으로 재탄생했다. 수목원 내 산책길을 걷다 보면 글라스 하우스 형태의 미술관을 만난다. 미국의 조각가 로버트 모어랜드가 만든 빨간색 산 모양의 작품,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 앞 분수대에서 만날 수 있는 니키 드 생팔의 조각품이 전시돼 있다.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은 ‘화첩기행’으로 유명한 남원 출신 작가 김병종의 대표작을 만날 수 있다. 춘향테마파크 뒤편에 노출콘크리트로 지어진 미술관 앞은 바닥에 물이 담겨 있어 하늘과 구름, 나무가 반사되는 한가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미술관 내 북카페 ‘화첩기행’은 너무 맛있어 미안하다는 ‘미안커피’와 직접 만든 케이크가 인기다. 남원에 들렀다면 여름 보양식의 상징인 추어탕을 맛봐야 한다. 광한루 근처에는 추어탕집이 즐비한 ‘추어 거리’가 있다. 남원 추어탕 맛을 내는 미꾸리는 미꾸라지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다. 미꾸리는 미꾸라지에 비해 수염이 짧고, 성어 기간이 2년으로 미꾸라지보다 갑절이나 길다. 그만큼 귀한 음식 재료로 만든 ‘남원 추어탕’은 뼈째 갈아서 먹는 방식이지만, 통째로 익혀서 부추와 함께 먹는 ‘추어 숙회’도 별미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전북 남원은 사랑의 고을이자 문학의 고향이다. 지리산의 힘찬 산세와 섬진강의 부드러운 물결이 시작되는 남원 곳곳에는 이야기가 숨어 있다. 판소리 ‘춘향전’의 탄생지이고, ‘흥보가’의 흥부와 놀부가 살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만복사지에는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판타지 사랑 이야기인 김시습의 ‘금오신화’가 펼쳐지고, 서도역의 철길 위에는 작가 최명희가 남긴 불멸의 현대 문학 ‘혼불’이 이글거린다.》○ 만복사와 광한루의 사랑남원시 왕정동 벌판에 불그스레한 노을이 번질 즈음. 텅 빈 만복사지를 지키고 있는 석인상의 두 눈은 튀어나올 것만 같다. 풀밭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고려시대 보물급 오층석탑과 당간지주, 석불입상, 연꽃무늬 불상 좌대가 마치 연극배우가 대사를 하고 있는 듯하다. 바로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 쓴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에 나오는 ‘만복사저포기’ 이야기가 펼쳐지는 무대다. 만복사에 머무르던 흙수저 노총각 양생(梁生).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결혼하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빌고 있다. 금오신화에 나오는 양생, 한생, 박생이란 주인공 이름의 ‘생’은 생원의 준말이다. 조선시대 소과(小科)인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만, 향리의 가난한 선비를 올려주는 호칭이기도 했다. 어느 날 양생은 부처님과 저포놀이(윷놀이 비슷한 막대 주사위 놀이) 한판 승부를 벌인다. 게임에서 이긴 양생은 절에서 아리따운 여인을 만나고 사랑에 빠진다. 여인과 사흘을 함께 보내고, 친구들과 함께 시를 지으며 놀았던 양생은 마지막 날 여인으로부터 은그릇을 선물로 받는다. 그런데 다음 날 만난 그녀의 부모님은 “3년 전에 왜구의 침입 때 죽은 딸의 무덤에 함께 묻어준 은그릇을 어떻게 갖고 있느냐”며 놀란다. 결국 양생은 억울하게 죽었던 여인의 환생을 위해 천도재를 올려주고, 자신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가슴에 품고 평생토록 지리산의 약초꾼으로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만복사저포기를 현대적으로 각색한다면 게임과 판타지, 멜로와 호러가 섞인 복합 장르물 영화가 탄생할 법하다. 춘향전이 한 남자를 사랑한 여자의 지조와 정절을 노래했다면, 만복사저포기는 만날 수 없는 여인에 대한 남자의 변치 않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남원 시내는 거대한 춘향전 테마파크로 봐도 과언이 아니다. 구룡계곡 입구 육모정 앞에는 소설 속 허구 인물인 춘향이의 무덤까지 조성돼 있다. 매해 춘향제 때마다 제사도 지낸다고 한다. 백년가약을 약속했던 이몽룡이 한양으로 떠날 때 춘향이가 따라 나와 눈물로 작별했던 정자인 ‘오리정(五里亭)’에는 ‘춘향이 눈물방죽’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오리정에서 북쪽으로는 춘향고개가 있고, 춘향이 이별하는 아픔에 허둥지둥 따라가다 버선이 벗겨졌다는 ‘춘향이 버선밭’도 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백미는 광한루(廣寒樓) 야경이다. 광한루는 미인 항아가 살고 있는 달나라 궁전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를 닮았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완월정(玩月亭)의 호수에는 달빛이 비치고, 광한루 앞에는 세 개의 섬이 떠 있다. 몽룡과 춘향이 함께 걷던 오작교는 난간이 없는 돌다리여서 자칫 물에 빠질 것 같은 마음이 든다. 그래서 연인끼리 걸으면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남원의 대표적인 명소인 만복사와 광한루는 정유재란(1597년) 때 불타 없어졌다.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을 지키던 병사들과 남녀 백성 1만여 명은 몰살을 당해 ‘만인의총’에 묻혔다. 만복사저포기에서 왜구에 의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여인의 비극이 100년 후 실제로 벌어졌던 것이다. 만복사는 이후 빈터로 남았고, 광한루는 인조 때 다시 지어졌다. ○뱀사골 계곡에서 만난 천년송남원에서 지리산을 오르는 뱀사골 계곡은 여름 피서와 가을 단풍으로 유명하다. 지리산국립공원 전북사무소에서 와운(臥雲)마을 천년송(千年松)까지 걷는 ‘뱀사골 신선길’(2.3km)은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는 편안한 트레킹 코스다. 용이 노는 요룡소, 멧돼지가 노는 돗소(돗은 남원 사투리 ‘돼지’), 호리병 같은 병소 등 수많은 전설이 깃든 물길을 감상하며 덱길을 걷는다. 30여 분을 걷다 보니 구름도 쉬어간다는 와운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뒤편에 우람한 천년송이 시원하게 뻗어 있다. 하늘을 향해 꿈틀대며 오르는 자태 하며 천년 세월의 두꺼운 용비늘 모양까지, 과연 우리나라 최고의 소나무(천연기념물 424호)로 불릴 만하다. 이 천년송은 할머니 소나무로 불리는데, 20여 m 더 올라간 지점에 할아버지 소나무도 있다. 화려하고 우람한 할머니 소나무와 달리 할아버지 소나무는 S자 모양의 맵시 있는 몸매를 자랑한다. 남녀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두 소나무에도 남원의 색다른 사랑 전설이 담겨 있지 않을까 궁금해진다. 남원 노봉마을 서도역에는 최명희 작가(1947∼1988)의 ‘혼불 문학관’이 있다. 1981년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된 ‘혼불’은 1995년까지 월간 ‘신동아’에 연재됐던 작품. 일제강점기인 1930, 40년대 남원 지방의 ‘매안 이씨’ 문중을 배경으로 한 대하소설이다. 세시풍속, 관혼상제, 음식, 노래를 판소리처럼 운율 있는 언어로 담아낸 ‘혼불’은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에 비견되는 소중한 언어의 보고로 평가받고 있다. 1934년 개장한 서도역은 소설 속 인물인 효원이 시집가던 날 “점잖은 밥 한상 천천히 다 먹을 만한 시간이면 닿는 정거장”이라는 구절로 묘사된다. 서도역 앞에는 아름드리 고목과 호젓한 철길이 남아 있다.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나오는 기차역 장면도 서도역에서 찍었다. ○숲속 미술관과 카페남원시 운봉읍 행정리의 ‘서어나무숲’에 들어서면 한여름에도 서늘한 나무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이곳은 200여 년 전에 조성한 마을 숲으로 90여 그루의 아름드리 근육질을 뽐내는 개서어나무가 빽빽하게 자라고 있다. 마을 숲은 홍수와 바람을 막고, 땅의 기운이 센 곳은 눌러 주고 허(虛)한 곳은 보(補)해 주는 비보림(裨補林)이다. 서어나무 숲속에서는 새소리, 바람소리를 ASMR 장비로 듣고, 지역 특산물인 김부각 위에 치즈를 올린 디저트를 먹으며 피크닉을 하는 ‘숲멍 체험’ 프로그램도 즐길 수 있다. 이백면에 있는 ‘아담원(我談苑)’도 숲과 미술관, 카페가 잘 어우러진 휴식처다. 원래 나무를 키우던 조경 농원이었는데 2018년 11월 ‘나와 나누는 대화’라는 뜻의 아담원으로 재탄생했다. 수목원 내 산책길을 걷다 보면 글라스 하우스 형태의 미술관을 만난다. 미국의 조각가 로버트 모어랜드가 만든 빨간색 산 모양의 작품,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 앞 분수대에서 만날 수 있는 니키 드 생팔의 조각품이 전시돼 있다.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에서는 ‘화첩기행’으로 유명한 남원 출신 작가 김병종의 대표작을 만날 수 있다. 춘향테마파크 뒤편에 노출 콘크리트로 지어진 미술관 앞은 바닥에 물이 담겨 있어 하늘과 구름, 나무가 반사되는 한가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미술관 내 북카페 ‘화첩기행’은 너무 맛있어 미안하다는 ‘미안커피’와 직접 만든 케이크가 인기다. 남원에 들렀다면 여름 보양식의 상징인 추어탕을 맛봐야 한다. 광한루 근처에는 추어탕집이 즐비한 ‘추어 거리’가 있다. 남원 추어탕 맛을 내는 미꾸리는 미꾸라지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다. 미꾸리는 미꾸라지에 비해 수염이 짧고, 성어 기간이 2년으로 미꾸라지보다 갑절이나 길다. 그만큼 귀한 음식 재료로 만든 ‘남원 추어탕’은 뼈째 갈아서 먹는 방식이지만, 통째로 익혀서 부추와 함께 먹는 ‘추어 숙회’도 별미다.글·사진 남원=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샤를 가르니에(1825∼1898)가 설계한 프랑스 파리의 오페라하우스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Y자 모양’의 대계단을 만난다. 다채로운 색깔의 최고급 대리석으로 제작된 계단은 부드럽고 우아한 곡선으로 물결친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2막 첫 장면에서 가면무도회가 펼쳐지는 무대 위 계단은 바로 샹들리에와 조각품으로 장식된 파리 오페라 가르니에 계단을 차용한 것이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미래의 여행사는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을 활용한 검색 알고리즘으로 항공권과 호텔, 체험상품 등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개인의 취향까지 만족시켜야 살아남는다.” 온라인 종합여행사(OTA)이자 트래블 테크 기업인 타이드스퀘어의 윤민 대표(53·사진)가 그리고 있는 여행상품의 미래다. 타이드스퀘어는 세계 항공사들의 항공편과 호텔, 여러 체험 상품과 직접 연결된 전산 시스템을 구축해 여행사와 개인들에게 다양한 여행 상품을 설계할 수 있도록 돕는 기술 기업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도 올해 3월 850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고, 2019년에는 카카오, 두나무 등으로부터 약 500억 원의 투자를 받는 등 총 1400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고려대 식품공학과 출신인 윤 대표는 유니텔, 새롬기술 등 정보기술(IT) 기업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대한항공과 현대카드에서는 마케팅을 담당했다. 여느 여행사들이 여행상품 개발에 몰두하는 것과 달리 여행 관련 기술 기반을 구축하는 회사를 꾸린 배경이다. 윤 대표는 “온라인에서 여행 계획을 짜고 상품을 선택하는 게 일반화되면서 여행업은 장치산업이 돼 가고 있다. 여행 테크 기업에는 얼마나 많은 데이터(연결 기관과 상품 정보)를 확보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더 많은 데이터를 확보해야 기내식을 미리 주문할 수도 있고, 창가와 복도, 와이파이 제공 여부 등 다양한 서비스를 고객이 선택하게 할 수 있다. 복잡한 데이터 조합에서 최적을 찾는 작업은 더 이상 여행사 직원이 할 수 없고, 기술의 영역이 되고 있다”고 했다. 코로나19가 창궐한 2∼3년간 구글과 삼성전자 출신 개발자 60여 명이 타이드스퀘어의 여행 시스템 업그레이드를 진행한 배경이다. 윤 대표는 “전 세계적인 차세대 항공 예약 플랫폼인 ARM인덱스 인증을 완료함으로써 기술 우위를 선점한 것이 경쟁력 강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ARM인덱스는 국제항공운송협회(IATA)가 주도해 개발한 항공권 예약, 발권, 취소를 위한 차세대 항공 플랫폼이다. 타이드스퀘어는 최적의 데이터를 확보하기 위해 지난해 10월에는 북미 최대 여행사협의체인 ‘트래블 리더스 네트워크’에 가입하고 글로벌 파트너십을 강화했다. 트래블 리더스 네트워크는 6000개의 지점과 4만 명 이상의 여행 자문단을 보유하고 있다. 타이드스퀘어는 자사 기술을 바탕으로 현대카드 고객을 위한 프리미엄 여행 브랜드 ‘현대카드 프리비아(PRIVIA) 여행’도 운영하고 있다. 2017년 SK투어비스를 인수해 기업 출장, 마이스(MICE) 영역에서도 시장점유율을 높여 왔다. 설립 7년 만에 국내 종합여행사 5위권(BSP 기준)에 진입했다. 지난해 6월에는 카카오모빌리티와 손잡고 카카오T 앱에서 국내선 항공권 검색, 예매, 발권을 진행할 수 있는 ‘카카오 T 항공 서비스’를 시작했다. 또 특가 항공권 알림 앱 ‘플레이윙즈’, 숙박 예약 앱 ‘올스테이’ 등에도 투자해왔다. 카카오톡에 ‘카이트(KYTE)’ 서비스도 시작했다. 친구들과 온라인 메신저에서 얘기를 나누다가 여행지가 선택되면 바로 항공권과 숙박을 예약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서비스다. 윤 대표는 “코로나19 이전 국내 여행 산업은 디지털 트렌드와 해외 OTA 진입에 따라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며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여행업의 경쟁이 다시 치열해질 것에 대비해 기술 개발에 더욱 매진할 것”이라고 밝혔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미래의 여행사는 글로벌 테크기업으로 가야 한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을 활용한 검색 알고리즘으로 항공권과 호텔, 체험상품 등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개인의 취향까지 만족시켜야 살아남는다.” 온라인 종합여행사(OTA)이자 트래블 테크 기업인 타이드스퀘어의 윤민 대표(53)가 그리고 있는 여행 상품의 미래이자 현재다. 타이드스퀘어는 세계 항공사들의 항공편과 호텔, 여러 체험 상품들과 직접 연결된 전산 시스템을 구축해 중소여행사와 개인들에게 다양한 여행 상품을 설계할 수 있도록 돕는 기술 기업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도 올해 3월 850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고, 2019년에는 카카오, 두나무 등으로부터 약 500억 원의 투자를 받는 등 총 1400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고려대 식품공학과 출신인 윤 대표는 유니텔, 새롬기술 등 정보기술(IT) 기업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고, 대한항공과 현대카드에서는 마케팅을 담당했다. 여타 여행사들이 패키지 여행 상품 개발에 몰두하는 것과 달리 여행 관련 기술 기반을 구축하는 회사를 꾸린 배경이다. “온라인에서 여행 계획을 짜고 상품을 선택하는 게 일반화되면서 여행업은 장치산업이 돼 가고 있다. 항공사에게 받은 데이터가 많을수록 고객에게 제공할 수 있는 정보의 조합도 많아진다. 더 많은 데이터가 있으면 기내식을 미리 주문할 수도 있고, 창가와 복도, 와이파이(WiFi) 제공 여부 등 다양한 서비스를 고객이 선택할 수 있게 할 수 있다. 복잡한 데이터 조합에서 최적을 찾는 작업은 더 이상 여행사 직원이 할 수 없고, 기술의 영역이 되고 있다.” 타이드스퀘어는 자사 기술을 바탕으로 현대카드 고객을 위한 프리미엄 여행 브랜드 ‘현대카드 프리비아(PRIVIA) 여행’도 운영하고 있다. 2017년 SK투어비스를 인수해 기업 출장, 마이스(MICE) 영역에서도 시장점유율을 높여 왔다. 설립 7년 만에 국내 종합여행사 5위권(BSP 기준)에 진입했다. 그러나 윤 대표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해외 온라인 항공권, 호텔 검색에 강점을 가진 ‘트래블 테크놀로지(Travel Tech)’ 기업으로 국내외 여행사 등을 대상으로 한 ‘B to B’(기업간 거래) 시장에 집중해왔다. 특히 코로나19가 창궐한 2년여간 구글과 삼성전자 출신 개발자 60여 명이 타이드스퀘어의 여행 시스템 업그레이드에 매진해왔다. 윤 대표는 “전 세계적인 차세대 항공 예약 플랫폼인 ARM인덱스 인증을 완료함으로써 기술 우위를 선점한 것이 경쟁력 강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ARM인덱스는 국제항공운송협회(IATA)가 주도해 개발한 항공권 예약, 발권, 취소를 위한 차세대 항공 플랫폼 NDC의 새로운 이름이다. 타이드스퀘어는 이미 2018년에 전세계 7개사만 인증받은 최고 등급인 NDC Capable 레벨 3을 받았고, 2019년에는 전세계 13번째로 ‘NDC Aggregator 레벨 4’ 인증을 모두 획득했다. 타이드스퀘어는 자사 여행 플랫폼인 투어비스에 2019년 국내 최초로 ARM 인덱스를 연동했다. 루프트한자독일항공(LH), 싱가포르항공(SQ), 진에어(LJ) 연동을 시작으로 에미레이트항공(EK)과 아메리칸항공(AA) 등 총 16개의 항공사와 ARM인덱스 연동을 맺었다. 이로써 국내 여행사 중 중 ARM인덱스에 가장 많은 해외 항공사와 직접적인 항공권 예약, 발권 제휴를 맺은 기업이 됐다. “ARM Index를 적용한 OTA에서는 항공사와 직접 연동한 효율적인 요금을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소비자가 직접 발권과 취소, 좌석 지정, 수화물 추가, 기내식 선택, 기내 엔터테인먼트 구매 등의 부가서비스를 선택할 수 있다. 그동안 거의 할 수 없었던 일인데 NDC를 최초 상용화해서 항공권을 경쟁력 있는 가격에 제공하고 다양한 기내 서비스를 선택할 수 있게 됐다.” 타이드스퀘어는 최적의 데이터를 확보하기 위해 지난해 10월에는 북미 최대 여행사 협의체인 ‘트래블 리더스 네트워크’에 가입하고 글로벌 파트너십을 강화했다. 트래블 리더스 네트워크는 6000개의 지점과 4만 명 이상의 여행 자문단을 보유하고 있다. 윤 대표는 또한 2016년부터는 매년 여행기술마케팅 컨퍼런스인 WIT(Web in Travel)도 주최해 전 세계 OTA(On-line Travel Agency)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트래블 테크 기업의 고민은 얼마나 많은 고객에게 좋은 데이터를 추천해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수많은 항공사, 수많은 여행사와 협업해야 하고 글로벌하게 소통해야 한다. 보통 여행사들은 중간 대행사를 통해 해외 항공사, 호텔, 리조트에 연결해왔는데 우리는 직접 연결함으로써 더 많은 데이터와 가격 경쟁력을 갖추게 됐다.” 타이드스퀘어는 국내에서도 다양한 ‘협업’을 통해 성장해왔다. 지난해 4월 대한항공 스카이패스 회원이 타이드스퀘어가 운영하는 ‘현대카드 프리비아 여행’이나 ‘투어비스’에서 호텔을 예약하면 대한항공 마일리지를 최대 1500마일까지 적립해주는 서비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호텔을 예약하면 항공마일리지를 적립해주는 서비스는 국내에서 처음이었다. 지난해 6월에는 카카오모빌리티와 손잡고 카카오T 앱에서 국내선 항공권 검색, 예매, 발권을 진행할 수 있는 ‘카카오 T 항공 서비스’를 시작했다. 또한 특가 항공권 알림 앱 플레이윙즈, 숙박 예약 앱 올스테이, 여행스타트업인 비앤비히어로, 비마이게스트, 폴라리움 등에도 투자해왔다. “여행은 원래 검색이 중요하다. 검색하고 예약하고 그리고 여행을 간다. 그런데 새로운 패턴이 나타났다. 지인들끼리 같이 채팅하고, 뭐가 좋을지 선택하고, 쇼핑한다. 중국 위챗에서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 국내에서도 이런 트렌드에 맞춰 카카오톡에 ‘카이트(KYTE)’ 서비스를 론칭했다. 친구들과 톡을 나누다 항공과 숙박을 바로 예약할 수 있다. 이 서비스가 여행 플랫폼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윤민 대표는 “코로나19 이전 국내 여행 산업은 디지털 트렌드와 해외 OTA 진입에 따라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며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여행업의 경쟁은 다시 치열해질 것이고, 트래블 테크 기업으로서 기술 개발에 더 매진할 것”이라고 밝혔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프랑스 남부 도시 아를에는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작품 ‘밤의 카페(Caf´e la Nuit)’ 속 카페가 그대로 남아 있다. 별이 그려진 밤하늘과 카페 차양의 밝은 노란색이 대비를 이루며 어우러져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한다. 고흐가 만든 이 작품에 나오는 카페의 이름은 ‘테라스(Terrasse)’였지만, 지금은 ‘카페 반 고흐’로 이름이 바뀌었다. 1990년대 초에 벽면을 노란색으로 칠해 반 고흐의 그림과 비슷해졌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경남 통영시 육지에서 2km 정도 남동쪽으로 가면 한산도에 도착한다. 배 위에 서면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수려한 풍경이 펼쳐지고 영화 ‘한산’에 나온 임진왜란 한산대첩 격전의 현장도 감상할 수 있다. 거제대교 밑 견내량의 좁은 해협을 빠져나온 바닷물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출렁거린다. 한산도를 비롯해 미륵도, 화도, 거제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360도로 빙 둘러싸고 있다. 1592년 7월 충무공 이순신이 좌우로 날개를 활짝 펼친 학익진(鶴翼陣) 전법으로 ‘바다 위에 성(城)’을 쌓고 73척의 왜군 함대를 격파한 바로 그 현장이다. ● 승리를 만드는 집, 제승당 통영에서 배로 30분 만에 한산도에 도착하니 제승당으로 가는 팻말이 보였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 이후 삼도수군통제 본부로 삼은 곳이다. 둥그렇게 만으로 둘러싸여 있어 바닷물이 잔잔한 호수처럼 보이는 이곳은 바로 천혜의 요새임을 알게 해준다. 아름드리 적송이 우거진 나무 그늘 아래로 약 1km의 해변길을 걸으면 제승당에 도착한다. 대첩문과 충무문을 지나니 ‘제승당(制勝堂)’이 나타난다. 이곳은 이순신의 집무실(숙소)이자 작전지휘소였던 ‘운주당(運籌堂)’이 있던 곳이다. 이순신은 선조 26년(1593년)부터 한양으로 압송돼 갔던 해인 선조 30년(1597년)까지 3년 8개월 동안 이곳에서 주둔했다. 1491일 동안의 일을 기록한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 중 1029일의 일기가 쓰여진 곳이기도 하다. 운주당, 제승당은 모두 이름이 의미심장하다. 운주당의 ‘주(籌)’는 주판(籌板)에 쓰이는 글자로, 셈을 할 때 쓰는 산가지를 뜻한다. 요즘으로 치면 최첨단 컴퓨터를 운용하며 전략 시뮬레이션을 하는 방인 셈이다. 직관적인 감이 아니라 무기체계와 날씨, 조류 변화까지 철저한 계산을 통해 짜내는 작전 지휘소인 셈이다. 이순신은 운주당에서 계급장과 상관없이 어떤 하급 병사도 찾아와 의견을 내고 토론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영화 ‘한산’에서도 이순신 장군이 55척의 함선 지휘관의 무력과 심성까지 세밀하게 살펴서 좌우 날개에 세우는 학익진을 완성하기 위해 며칠 밤을 새우는 장면이 나온다. 제승당(制勝堂)은 말 그대로 ‘승리를 만드는 집’이다. 영어 해설문에는 ‘the place where victory is made’라고 쓰여 있다. 이순신의 사전에는 ‘싸워서 이긴다는’ 법은 없었다. ‘싸우기 전에 먼저 확실히 이겨놓고’ 싸웠다. 승리는 이미 제승당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손자병법의 첫 번째인 ‘시계(始計)’ 병법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요, 싸워야 한다면 승리가 확정된 상황에서 최대한 빠르고 피해 없이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 국가와 민초들의 삶에 막대한 피해를 주고 난 다음에 이기는 승리는 애민(愛民)주의자 이순신의 머릿속에 없었다. 그러나 운주당의 ‘소통의 문화’는 이순신의 백의종군 이후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에 의해 변질됐다. “원균은 애첩을 데리고 운주당에 살면서 울타리를 두 겹으로 막아 놓아 장수들도 그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는 또 술을 좋아해 날마다 술주정을 하고 화를 냈으며, 형벌을 내리는 데도 일정한 법도가 없었다. 그래서 병사들은 왜적을 만나면 달아나는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서로 하면서 수군거렸다.”(서애 유성룡의 ‘징비록’) 결국 원균은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해 160척의 조선 수군 함선의 대부분과 숙련된 군사들을 모두 잃어버렸다. 그리고 한산도의 운주당도 폐허가 됐다. 이순신은 남은 12척의 배를 가지고 다시 싸움을 이어 나간다. 영조 15년(1739년)에 통제사 조경은 한산도에 다시 제승당을 세웠다. ●바다를 건너는 활터, 한산정 제승당 근처에는 이순신이 ‘한산섬 달 밝은 밤에 큰 칼 옆에 차고’ 오르던 수루(戍樓)도 복원돼 있다. 수루는 물가에 세운 누각(水樓)이 아니다. 군대가 주둔하는 수자리(병영)에서 적군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세운 망대다. 수루에 올라 보니 관암과 문어포 사이로 한산도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지금은 평온하지만 이순신에게는 애끓는 바다였을 것이다. “맑음. 늦게 가리포, 금갑, 남도, 사도, 여도가 보러 왔기에 술을 먹여 보냈다. 이날 밤 바람은 몹시 싸늘하고, 차가운 달빛이 낮과 같아 잠에 들지 못하고 밤새도록 뒤척거렸다.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치밀었다.”(난중일기, 1595년 10월 20일)제승당 아래쪽에는 ‘한산정’이라는 활쏘기 훈련장이 있다. 이순신이 부하들과 함께 활쏘기를 연마하던 곳이다. 정자에서 쏜 화살은 바다를 건너 약 150m 거리에 있는 과녁에 맞히도록 돼 있다. 요즘 한국의 양궁 국가대표팀이 야구장에서 소음 적응 훈련을 하듯이 이순신은 해전에 필요한 실전 적응 훈련을 하기 위해 바닷물을 건너는 활터를 만들었던 것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의 이순신의 멋진 활 솜씨를 보고 난 후라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다. 통영 시내에 있는 삼도수군통제영에도 이순신의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통제영에 있는 가장 큰 건물인 ‘세병관(洗兵館)’은 전쟁이 끝나고 피 묻은 칼과 창, 활, 갑옷과 같은 병장기를 씻는다는 의미다. 시인 두보의 ‘세병마행(洗兵馬行)’에서 따온 말로 평화를 염원하는 말이다. ‘어떻게 하면 힘센 장사를 얻어 하늘의 은하수 물을 끌어다가, 갑옷과 무기를 깨끗이 씻어 영원히 사용하지 못하게 할 것인가(安得壯士挽天河 淨洗甲兵長不用).’ 세병관 주변에 있는 ‘지과문(止戈門·전쟁을 그치게 하는 문)’, ‘괘궁정(掛弓亭·활을 걸어두는 정자)’도 평화를 염원하는 글귀다. 위대한 무인은 전쟁을 그치게 하는 사람이다. 또한 녹슬고 무디어진 병장기를 잘 씻고, 닦고, 훈련하며 평소에 안보에 대비해야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의미가 담긴 현판이기도 하다.● 미역이 춤을 추는 매물도, 홍도 통영여객선터미널에서 매물도로 가는 뱃길에서도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수려한 섬들을 구경할 수 있다. 두 개의 섬이 사구로 연결된 비진도를 지난 배는 소지도, 소매물도, 등대섬을 보여준 뒤 1시간 반 만에 매물도에 도착한다. 대항항 앞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세 선녀가 물 위에서 노니는 모습처럼 보인다는 삼녀도가 그림처럼 떠 있다. 매물도와 소매물도는 트레킹과 낚시, 다이빙으로 유명한 섬이다. 가장 유명한 다이빙 포인트는 매물도에서 배를 타고 2시간 정도 걸리는 홍도다. 전남 신안군 흑산면의 홍도와 이름이 같은 통영 홍도는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제335호)로 지정돼 있다. 무인도인 홍도는 깎아지른 절벽에 살고 있는 수많은 괭이갈매기가 섬의 주인이다. 매물도와 홍도에서 스킨스쿠버 장비를 갖추고 다이빙을 했다. 바닷물 속에 들어가니 청줄돔이 서로 꼬리를 물고 뱅글뱅글 돌며 사랑놀이를 하고, 숲처럼 우거진 미역과 감태, 다시마 사이로 수백 마리의 자리돔 떼가 헤엄친다. 한산대첩에서 패한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는 조선 수군의 추격을 피해 인근 무인도에 숨어서 미역을 뜯어 먹으며 열흘을 버티다가 뗏목을 만들어 간신히 탈출했다.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와키자카 집안은 한산대첩이 벌어졌던 날에 미역만 먹는 풍습이 이어진다고 한다. 와키자카가 숨어 있던 섬은 아니지만 한산면에 속해 있는 매물도, 홍도 바닷속에서 미역과 감태, 모자반이 우거진 모습을 보니 감회가 깊었다. 매물도에서 550m 정도 떨어져 있는 소매물도는 코발트색 청명한 바다를 배경으로 우뚝 솟은 해식 절벽 지형이 진경을 이룬다. 이곳의 등대섬은 1980년대에 쿠크다스 과자 CF의 배경이 돼 일명 ‘쿠크다스섬’으로 이름을 날렸다. 썰물 때면 소매물도와 등대섬 사이에 열목개라 불리는 80m의 몽돌 바닷길이 열린다. 통행이 허용되는 2~5시간 동안 탐방객들은 등대섬으로 건너가 하얀 등대와 푸른 초원 위에서 한적한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경남 통영시 육지에서 2km 정도 남동쪽으로 가면 한산도에 도착한다. 배 위에 서면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수려한 풍경이 펼쳐지고 영화 ‘한산’에 나온 임진왜란 한산대첩 격전의 현장도 감상할 수 있다. 거제대교 밑 견내량의 좁은 해협을 빠져나온 바닷물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출렁거린다. 한산도를 비롯해 미륵도, 화도, 거제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360도로 빙 둘러싸고 있다. 1592년 7월 충무공 이순신이 좌우로 날개를 활짝 펼친 학익진(鶴翼陣) 전법으로 ‘바다 위에 성(城)’을 쌓고 73척의 왜군 함대를 격파한 바로 그 현장이다.》○ ‘승리를 만들어내는 집’ 제승당통영에서 배로 30분 만에 한산도에 도착하니 제승당(制勝堂)으로 가는 팻말이 보였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 이후 삼도수군통제 본부로 삼은 곳이다. 둥그렇게 만으로 둘러싸여 있어 바닷물이 잔잔한 호수처럼 보이는 이곳은 바로 천혜의 요새임을 알게 해준다. 아름드리 적송이 우거진 나무 그늘 아래로 약 1km의 해변길을 걸으면 제승당에 도착한다. 대첩문과 충무문을 지나니 ‘제승당’이 나타난다. 이곳은 이순신의 집무실(숙소)이자 작전지휘소였던 ‘운주당(運籌堂)’이 있던 곳이다. 이순신은 선조 26년(1593년)부터 한양으로 압송돼 갔던 해인 선조 30년(1597년)까지 3년 8개월 동안 이곳에서 주둔했다. 1491일 동안의 일을 기록한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 중 1029일의 일기가 쓰인 곳이기도 하다. 운주당, 제승당은 모두 이름이 의미심장하다. 운주당의 ‘주(籌)’는 주판(籌板)에 쓰이는 글자로, 셈을 할 때 쓰는 산가지를 뜻한다. 요즘으로 치면 최첨단 컴퓨터를 운용하며 전략 시뮬레이션을 하는 방인 셈이다. 직관적인 감이 아니라 바람과 조류, 무기체계까지 철저한 계산을 통해 짜내는 작전 지휘소인 셈이다. 이순신은 운주당에서 계급장과 상관없이 어떤 하급 병사도 찾아와 의견을 내고 토론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영화 ‘한산’에서도 이순신 장군이 55척의 함선 지휘관의 무력과 심성까지 세밀하게 살펴서 좌우 날개에 세우는 학익진을 완성하기 위해 며칠 밤을 새우는 장면이 나온다. 제승당은 말 그대로 ‘승리를 만들어내는 집’이다. 영어 해설문에는 ‘the place where victory is made’라고 쓰여 있다. 이순신의 사전에는 ‘싸워서 이긴다’는 법은 없었다. ‘싸우기 전에 먼저 확실히 이겨놓고’ 싸웠다. 이는 손자병법의 첫 번째인 ‘시계(始計)’ 병법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요, 싸워야 한다면 승리가 확정된 상황에서 최대한 빠르고 피해 없이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 국가와 민초들의 삶에 막대한 피해를 주고 난 다음에 이기는 승리는 애민(愛民)주의자 이순신의 머릿속에 없었다. 그러나 운주당의 ‘소통의 문화’는 이순신이 파직된 후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에 의해 변질됐다. “원균은 애첩을 데리고 운주당에 살면서 울타리를 두 겹으로 막아 놓아 장수들도 그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는 또 술을 좋아해 날마다 술주정을 하고 화를 냈으며, 형벌을 내리는 데도 일정한 법도가 없었다. 그래서 병사들은 왜적을 만나면 달아나는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서로 하면서 수군거렸다.”(서애 유성룡의 ‘징비록’) 결국 원균은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해 160척의 조선 수군 함선의 대부분과 숙련된 군사들을 모두 잃어버렸다. 그리고 한산도의 운주당도 폐허가 됐다. 이순신은 남은 12척의 배를 가지고 다시 싸움을 이어 나간다. 영조 15년(1739년)에 통제사 조경은 한산도에 다시 제승당을 세웠다. ○바다를 건너는 활터제승당 근처에는 이순신이 ‘한산섬 달 밝은 밤에 큰 칼 옆에 차고’ 오르던 수루(戍樓)도 복원돼 있다. 수루는 물가에 세운 누각(水樓)이 아니다. 군대가 주둔하는 수자리(병영)에서 적군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세운 망대다. 수루에 올라 보니 관암과 문어포 사이로 한산도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지금은 평온하지만 이순신에게는 애끓는 바다였을 것이다. “맑음. 늦게 가리포, 금갑, 남도, 사도, 여도가 보러 왔기에 술을 먹여 보냈다. 이날 밤 바람은 몹시 싸늘하고, 차가운 달빛이 낮과 같아 잠에 들지 못하고 밤새도록 뒤척거렸다.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치밀었다.”(난중일기, 1595년 10월 20일) 제승당 아래쪽에는 ‘한산정’이라는 활쏘기 훈련장이 있다. 이순신이 부하들과 함께 활쏘기를 연마하던 곳이다. 정자에서 쏜 화살은 바다를 건너 약 150m 거리에 있는 과녁에 맞히도록 돼 있다. 요즘 한국의 양궁 국가대표팀이 야구장에서 소음 적응 훈련을 하듯이 이순신은 해전에 필요한 실전 적응 훈련을 하기 위해 바닷물을 건너는 활터를 만들었던 것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의 이순신의 멋진 활 솜씨를 보고 난 후라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다. 통영 시내에 있는 삼도수군통제영에도 이순신의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통제영에 있는 가장 큰 건물인 ‘세병관(洗兵館)’은 전쟁이 끝나고 피 묻은 칼과 창, 활, 갑옷과 같은 병장기를 씻는다는 의미다. ‘어떻게 하면 힘센 장사를 얻어 하늘의 은하수 물을 끌어다가, 갑옷과 무기를 깨끗이 씻어 영원히 사용하지 못하게 할 것인가.’ 시인 두보의 ‘세병마행(洗兵馬行)’에서 따온 말로 평화를 염원하는 뜻이다. 세병관 주변에 있는 ‘지과문(止戈門·전쟁을 그치게 하는 문)’, ‘괘궁정(掛弓亭·활을 걸어두는 정자)’도 평화를 염원하는 글귀다. 위대한 무인은 전쟁을 그치게 하는 사람이다. 또한 녹슬고 무디어진 병장기를 잘 씻고, 닦고, 훈련하며 평소에 안보에 대비해야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의미가 담긴 현판이기도 하다.○미역이 춤을 추는 매물도, 홍도통영여객선터미널에서 매물도로 가는 뱃길에서도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수려한 섬들을 구경할 수 있다. 두 개의 섬이 사구로 연결된 비진도를 지난 배는 소지도, 소매물도, 등대섬을 보여준 뒤 1시간 반 만에 매물도에 도착한다. 대항항 앞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세 선녀가 물 위에서 노니는 모습처럼 보인다는 삼녀도가 그림처럼 떠 있다. 매물도와 소매물도는 트레킹과 낚시, 다이빙으로 유명한 섬이다. 가장 유명한 다이빙 포인트는 매물도에서 배를 타고 2시간 정도 걸리는 홍도다. 전남 신안군 흑산면의 홍도와 이름이 같은 통영 홍도는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제335호)로 지정돼 있다. 무인도인 홍도는 깎아지른 절벽에 살고 있는 수많은 괭이갈매기가 섬의 주인이다. 매물도와 홍도에서 스킨스쿠버 장비를 갖추고 다이빙을 했다. 바닷물 속에 들어가니 청줄돔이 서로 꼬리를 물고 뱅글뱅글 돌며 사랑놀이를 하고, 숲처럼 우거진 미역과 감태, 다시마 사이로 수백 마리의 자리돔 떼가 헤엄친다. 한산대첩에서 패한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는 조선 수군의 추격을 피해 인근 무인도에 숨어서 미역을 뜯어 먹으며 열흘을 버티다가 뗏목을 만들어 간신히 탈출했다.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와키자카 집안은 한산대첩이 벌어졌던 날에 미역만 먹는 풍습이 이어진다고 한다. 와키자카가 숨어 있던 섬은 아니지만 한산면에 속해 있는 매물도, 홍도 바닷속에서 미역과 감태, 모자반이 우거진 모습을 보니 감회가 깊었다. 매물도에서 550m 정도 떨어져 있는 소매물도는 코발트색 청명한 바다를 배경으로 우뚝 솟은 해식 절벽 지형이 진경을 이룬다. 이곳의 등대섬은 1980년대에 쿠크다스 과자 CF의 배경이 돼 일명 ‘쿠크다스섬’으로 이름을 날렸다. 썰물 때면 소매물도와 등대섬 사이에 열목개라 불리는 80m의 몽돌 바닷길이 열린다. 통행이 허용되는 2∼5시간 동안 탐방객들은 등대섬으로 건너가 하얀 등대와 푸른 초원 위에서 한적한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글·사진 통영=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절벽 남쪽 아래에는 기원전 6세기에 건축된 디오니소스 극장이 있다. 여기서 연극과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위한 축제를 연 게 서양 연극의 출발점이라고 한다. 1만7000명 수용 규모의 극장에선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 등 전설적 희곡 작가들의 작품이 공연됐다. 원형극장 객석 첫 줄은 VIP석인데, 등받이가 있는 돌의자에 이름까지 새겨져 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쿠바의 수도 아바나 시내에서는 형형색색의 올드카를 볼 수 있다. 1940, 50년대에 생산된 캐딜락, 뷰익, 포드 등이다. 올드카는 1959년 쿠바 혁명 이후 1961년 미국과의 수교 단절로 생긴 유산이다. 무역제재로 차량 수입이 금지된 쿠바인들은 올드카의 부품을 직접 수리해 수십 년을 써왔다. 그래서 에어컨은 물론이고 안전띠도 없고, 매연이 심한 차들도 많다. 그래도 ‘올드카 투어’는 쿠바 최고의 인기 관광 상품이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