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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가 이렇게 짠해도 되는 걸까. 부제가 ‘한국의 자영업자 보고서’인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자영업자(自營業者)를 다뤘다. 한자어로 ‘자기 사업을 하는 사람’이니 꽤 근사하게 들리지만, 저자들은 영어 표현이자 책 제목인 ‘self employed’가 한국 자영업자를 훨씬 적확하게 표현한다고 봤다. 집필에 참여한 학자들에 따르면 무급 가족 종사자까지 약 669만 명에 이르는 한국의 자영업자는 대부분 영세하고 위태롭기 때문이다. 당장 임금 근로자는 안 힘드냐는 볼멘소리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자영업자를 둘러싼 지표는 심각한 경고음을 울린 지 오래다. 지난해 기준 자영업자 평균소득은 임금 근로자의 약 60%밖에 되질 않는다. 1인당 빚도 더 많고, 노동시간도 더 길며, 갈수록 50대 이상 고령이 늘고 있다. 게다가 이미 알다시피 창업을 했다가도 2년 안에 40%가, 5년 안엔 70%가 폐업한다. 그런데도 전 세계 맥도날드 매장(3만6000여 개)보다 남한 땅의 ‘치킨 집’이 더 많은 게 우리의 현실이다. 물론 어떤 이들은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북쪽의 도발에 익숙해져버렸듯 ‘그게 어디 어제오늘 일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은 되묻는다. “자영업 문제는 한국 사회의 많은 모순이 집약된 축소판이다. 우리는 계속 이렇게 악순환을 거듭해야 하는 것인가”라고. 너무나 얽히고설킨 난제라도 풀려는 노력은 계속돼야 한다. 뻔한 얘기지만 시장의 공정한 경쟁을 다시 세우고, 약자를 보호하는 사회적 시스템을 정비한다면 불가능은 없다. 그게 이 책이 지금 등장한 이유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한국교회 안엔 교회공동체를 사유화해서 개인이 소유하려는 욕망에 휩싸인 이들이 존재합니다. 복음의 정신을 온전히 되살리는 에큐메니컬(교회일치) 운동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신임 총무로 선임된 이홍정 목사(61)는 최근 일부 대형 교회의 세습에 대해 “자기우상화의 길을 가는 퇴행적 교권정치 문화”라고 비판했다. 이 목사는 “지난달 20일 취임 첫날부터 바로 회의가 열리는 등 무척 바쁘다”며 “교회 안팎으로 심각한 상황에 처한 만큼 할 일이 많다”고 말했다. 최근 서울 중구의 한 식당에서 만난 이 목사는 시종일관 차분하면서도 왠지 모를 결기가 느껴졌다. 그는 “지금도 하나님께서 내면에 일으킨 두려움의 소용돌이를 온 마음으로 느끼고 있다”며 “‘두 개의 십자가’를 짊어진 기분”이라고 신임 총무로 선임된 소감을 밝혔다. 그는 “친누님이 왜 굳이 스스로 자꾸 고난의 길을 가느냐고 물었다”고 말했다. 이 목사가 말한 심각한 상황이란 두 개의 십자가와도 직결된다. 첫째, 분단과 냉전의 문화를 극복하는 민족공동체의 치유와 화해를 일컫는다. 둘째, 최근 지속적으로 논란이 되는 한국교회의 갱신과 변혁이다. 이 목사는 “명약관화한 경고음이 지속적으로 들리는데도 돈과 권력과 명예에 대한 탐욕을 제어하지 못한 채 위기로 치닫고 있다”고 말했다. “총무를 맡았다고 지금까지 NCCK가 걸어온 길에서 크게 벗어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앞으로 지역교회와의 연계를 강화하고, 미래 지도자를 양성하는 교육 훈련을 강화하는 데 더 노력을 기울이려 합니다. 또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동북아시아에서 평화를 사랑하는 시민들의 연대가 더 적극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봅니다.” 이 목사는 젊은 시절 5·18민주화운동이 인생을 바꾸는 큰 전환점이었다. 당시 그는 광주에서 ROTC(학군사관) 교육을 받다가 시민들이 잡혀와 고초를 겪는 광경을 직접 봤다. 이 목사는 “군인 신분이라 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당시의 내적 고통이 이후 사회운동에 헌신하는 밑거름이 됐다”고 회고했다. 이후 비무장지대 수색대 소대장으로 복무한 경험도 한반도 평화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100여 년 만의 귀향.’ 타향에 머물던 보물급 문화재 1점이 최소 한 세기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조선 후기 대표적 고승인 묵암 대사(1717∼1790)의 초상화 ‘묵암당 진영(默菴堂 眞影)’이 본가인 전남 순천시 송광사로 전격 환수됐다. 송광사 성보박물관(관장 고경 스님)은 3일 “일본 개인 소장자가 갖고 있던 묵암당 진영을 오랜 협의 끝에 송광사로 모셔오기로 결정했다”며 “묵암 스님이 입적하기 직전에 남긴 것으로 알려진 이 그림은 송광사는 물론이고 한국 불교 전체의 소중한 보물”이라고 밝혔다. 묵암 최눌(默菴 最訥)은 한국의 삼보(三寶) 사찰인 송광사에서도 손꼽히는 학승으로 화엄학의 대가로 이름을 떨쳤다. 임진왜란 때 서산 대사(1520∼1604)와 함께 송광사를 지켰던 부휴 대사(1543∼1615)의 적통으로 불교 해설서 ‘제경회요(諸經會要·동국대도서관 소장)’, 시문집 ‘묵암집(默庵集·규장각 소장)’ 등 다수의 문헌을 남겼다. 묵암을 기리는 비와 부도는 지금도 송광사에 남아 있다. 이번에 환수된 묵암당 진영은 지긋한 노승의 풍모가 역력한 것으로 미뤄볼 때 스님의 말년인 1780년대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고경 스님은 “많은 후학의 존경을 받았던 묵암 대사가 입적하셨을 당시 법구를 모신 송광사 부속 암자인 보조암(普照庵)에 스님의 초상화를 내걸었다는 사료가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언제 송광사에서 자취를 감춘 것일까. 명확한 기록이 남아 있질 않아 확실하진 않으나, 가장 짧게 잡아도 1910년대로 추정된다. 송광사 측은 “일제강점기 직전에 송광사는 조국을 되찾으려는 의병 활동을 지원하는 근거지로 유명했다”며 “당시 일본 헌병의 습격으로 사찰 건물이 파손되고 많은 문화재를 약탈당했는데 이때 함께 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묵암당 진영은 1920년대 일본 교토박물관의 한 전시회에서 ‘조선 승려의 초상화’로 세간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어, 이전에 일본으로 넘어간 건 분명하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묵암당 진영은 역사적으로 가치가 높은 데다 불교 회화적 측면에서도 값어치를 따질 수 없는 문화재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조선 시대 승려 초상화는 대부분 19세기 것으로, 18세기에 그려진 작품 자체가 희귀하다. 게다가 이 그림은 묵암 대사를 눈앞에서 마주한 듯 정밀하고 섬세하다. 정우택 동국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표정은 물론이고 신체 비례가 자연스럽고 배경 곳곳에 금니(金泥·금가루 채색)를 적절히 사용했다”며 “실재감이 뚜렷하고 그림 테두리마저 세련되게 묘사한 보기 드문 걸작”이라고 평가했다. 상단에 세로로 드리운 띠 ‘풍대(風帶)’도 눈여겨봐야 한다. 조선의 불교 회화에서 이런 장식은 주로 부처나 보살을 그릴 때만 나타난다. 김민영 불교학자는 “현존하는 스님 진영에서는 전례를 찾을 수 없다”며 “묵암 대사가 당대에 얼마나 존경받았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설명했다. 송광사는 조만간 100여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묵암당 진영을 모시는 대규모 봉헌법회를 열 계획이다. 고경 스님은 “어렵사리 스님을 다시 모시게 된 만큼 정성을 다해 다양한 행사로 뜻을 기리겠다”고 말했다. 한편 묵암당 진영은 8일까지 열리는 동국대박물관 특별전 ‘나한’에서 일반 관객도 직접 볼 수 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프란치스코 교황의 낙태 관련 발언을 인용하는 과정에서 논란을 빚었던 조국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이 29일 천주교 인사들을 만나 고개를 숙였다. 조 수석과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오후 4시 천주교 수원교구청을 찾아 천주교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 위원장인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생명윤리위 총무를 맡고 있는 이동익 서울대교구 공항동성당 주임신부, 천주교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사무국장인 지영현 신부와 만났다. 낙태죄 폐지 청원 답변 과정에서 불거진 교황 발언 왜곡 논란을 해명하기 위해서였다. 앞서 조 수석은 청와대 청원 답변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임신중절에 대해 우리는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천주교주교회의 측은 “교황이 그런 발언을 한 사실이 없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에 문재인 대통령은 “(천주교가) 오해하지 않도록 잘 설명하라”고 조 수석에게 지시했다. 문 대통령은 천주교 신자다. 면담 이후 박 대변인은 서면 브리핑에서 “생명 존중이라는 천주교회의 입장을 겸허하게 청취했다. 청와대의 청원 답변 내용 중 외국 언론 기사를 압축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음을 말씀드렸다”고 밝혔다. 박 대변인은 청와대 가톨릭 신자들의 모임인 ‘청가회’ 회장이다. 이동익 신부도 “이 주교께서 ‘교황 발언은 전체 맥락을 잘 살펴야 이해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전달하자 조 수석이 ‘의견을 압축 전달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다. 천주교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며 공식적으로 사과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 신부는 또 “청와대는 천주교가 우려하는 어떤 의도를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며 “약간의 오해가 있었지만 이번 기회에 충분한 교감을 이뤘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논란은 일단락됐지만 청와대 안팎에서는 조 수석의 연이은 ‘설화’를 우려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조 수석은 20일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관련 당정청 회의에서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공수처 설치가 시급하지 않다는 해석을 낳을 수 있는 발언을 해 여당 지도부가 대신 진화하기도 했다. 낙태 관련 발언 파문도 박 대변인이 당사자인 조 수석을 대신해 수습에 앞장섰다. 청와대 관계자는 “조 수석의 정무 감각에 대해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많다”고 전했다. 한편 천주교 측은 ‘낙태죄 폐지 반대 100만 명 서명 운동’은 이번 면담과 상관없이 계획대로 진행할 입장이라고 밝혔다. 이 신부는 “먼저 천주교 차원에서 시작한 다음에 다음 달부터는 일반 시민들도 동참하는 범국민적 운동으로 확산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한상준 alwaysj@donga.com / 수원=정양환 기자}
다음 달이면 거리엔 또다시 정겨운 풍경이 찾아온다. 한국구세군은 최근 “다음 달 1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자선냄비 시종식을 열고 모금활동을 펼친다”고 밝혔다. 따스한 빨간 냄비와 그 곁을 지키는 종소리. 부모라면 한 번쯤 아이의 고사리손에 돈을 쥐여준 기억도 날 터. ‘함께 나누기에’ 더 깊게 가슴에 남는다. 지난해 모금액을 보면 올해도 기대가 크다. 총 77억4000만 원이 모였는데, 2015년보다 5억1000만 원이나 증가했다. 당시 탄핵 정국으로 사회가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떠올려 보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어려울수록 돕고 사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선냄비의 정신이니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살짝 아쉬운 면도 있다. 거리 모금은 다소 줄었고, 기업 모금액이 늘어난 결과란다. 부진한 실적 탓에 신용카드로 기부하던 ‘디지털 자선냄비’도 지난해 운영이 중지됐다는데…. 1890년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 시작된 자선냄비는 진짜 수프를 끓이던 솥을 내걸었다. 이웃의 영혼을 데울 불쏘시개는 서로의 관심과 행동뿐이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엄마도 꿈이 많았죠. 한땐 예쁘고 젊었죠./우리가 뺏어 버렸죠. 엄만 후회가 없대요./엄마는 아직 몰라요. 시간이 이제 없단 걸/말해줄 수가 없어서, 우린 거짓 희망만 주네요.’ 망했다. 추천받을 때 “조심하라”는 경고를 들었건만. 야근 마친 까만 밤, 한적한 버스 안이라 방심했던 걸까. 귓가를 꼬집던 노래가 세차게 목구멍을 때린다. 제발 앞자리 학생이 눈치 채지 말았으면. 엄지로 꾹꾹, 눈두덩을 마구 눌러댔다. 추태 고백은 그만. 이건 이젠 옛날 가수가 되어 버린, 한 밴드가 내놓은 ‘뻔한’ 발라드에 대한 이야기다. 분명히 얘기한다. 공일오비(015B)는 한물갔다. 1990년대 얼마나 쩌렁쩌렁 했는지 아무 상관없다. 14일 신곡을 발표했는데, 차트엔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 제목도 이게 뭔가. ‘엄마가 많이 아파요’라니. 게다가 윤종신이 불렀다. 그들의 데뷔 곡 ‘텅 빈 거리에서’(1990년)처럼. 시대착오란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멜로디나 코드 진행이 상투적입니다. 딱 ‘그 시절’풍이에요. 생활 밀착형 가사도 당대야 신선했지만…. 그런데 왜 이 곡이 사람을 미치게 하냐고요? 그건, 뮤지션의 ‘진정성’이 담겼기 때문이겠죠. 형식이나 스타일만 갖고는 설명하기 힘든.”(대중음악평론가 A 씨) 실은 ‘엄마가…’는 015B가 돌아가신 엄마에게 바친 곡이다. 멤버인 장호일은 한 인터뷰에서 “2013년 겨울 갑작스레 불치 판정을 받고 세상을 떠나셨다”며 “처음부터 오랜 벗인 윤종신이 불러주길 바랐지만 그의 어머니도 몸이 편찮으셔 한참 망설였다”고 털어놨다. 그래서인가. 인터넷엔 윤종신이 콘서트에서 노래하다 목이 메는 동영상을 볼 수 있다. 그 울컥함을 뉘라서 탓할까. 혹 찾아볼 요량이면, 꼭 사람 없는 데서 보길. 18일 끝난 KBS2 ‘고백부부’도 그랬다. 이 드라마, 무지하게 전형적이다. 과거로 돌아간단 설정도, 소중한 가족이란 주제도 식상했다. 그런데 돌아가신 엄마와 만나는 대목에서 무장해제가 돼버린다. 마지막 회. “부모 없인 살아져도 자식 없인 못 살아.” 딸과 헤어지는 엄마(김미경)의 한마디. 묵직하다 못해 버거운. 그날 낮, 목포에선 세월호 마지막 영결식이 열렸다. 솔직히 이런 코드, ‘뇌’로는 싫어한다. 모성애는 생물진화에서 종족보존의 본능일 뿐이라 되뇌어 본다. 엄마의 희생이라 떠받들며 여성성을 짓누르는 잣대도 못마땅하다. 갈수록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사회에서 개인이 기댈 유일한 언덕은 사적 안전망인 가족”(김희경의 책 ‘이상한 정상 가족’)일지도. 그렇건 말건, 21세기에도 엄마란 키워드가 주야장천 먹히는 게 개운치는 않다. 하지만 심장은 뇌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래, 전형적이고 상투적인 줄 안다. 그래도 엄마는 엄마다. 부모는 부모다. 로런스 그로스버그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 교수는 “대중음악의 주요 기능은 수용자를 ‘정서(affect)의 공간’으로 불러오는 것”이라며 “정서는 삶의 느낌이라 설명하는 것과 긴밀히 연결된다”고 했다. 015B는 한탄한다. “언젠간 잘해 줘야지 그렇게 미뤄만 두다가, 이렇게 헤어질 시간이 빨리 올 줄 몰랐다”고. 어쩜 뻔한 것이야말로 우리네 인생을 가장 적확히 꿰뚫는 건 아닐는지. 스산해서 남루할지라도. 또 그리 똑 닮은, 한 해의 마지막 달이 온다. 정양환 문화부 기자 ray@donga.com}
국내에 인도 아헹가 요가를 전파해 온 현천 스님이 현대인의 건강과 치유를 위한 책 ‘요가와 스포츠’(선요가)를 펴냈다. 아헹가 요가란 ‘현대 요가의 창시자’라 불리는 인도의 B K S 아헹가(1918∼2014)가 만든 요가 수련법이다. 아헹가는 수천 년 이어져온 요가를 체계적으로 정립해 세계적 요가 열풍을 일으켰다. 현천 스님은 현지에서 아헹가를 모시고 3년 이상 수련하며 최고급 단계까지 마친 직계 제자다. ‘요가와 스포츠’는 아헹가가 생전 스포츠 선수 등에게 요긴한 요가법을 정리한 것을 현천 스님이 번역했다. 현천 스님은 “요가는 호흡과 명상 등 8단계로 이뤄지는데 대중에겐 3단계인 ‘자세’만 알려지며 다이어트 운동으로 오해받고 있다”며 “자세만 잘못 따라 하다간 오히려 건강을 해칠 수 있으니 제대로 된 교육을 받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서울과 대구 등지에서 요가센터를 운영하는 현천 스님은 5년 전부터 대구 지역 중고교생에게도 무료 요가 강습을 진행하고 있다. 스님은 “입시교육에 고통받는 한국 청소년에게 요가는 심신 안정과 자세 교정을 위한 최고의 운동”이라고 권했다. 현천 스님은 향후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요가 자세를 소개하는 ‘현대인을 위한 요가’ 개정판도 출간할 예정이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바탕으로 물질에 치우쳐 정신문명이 쇠퇴해가는 것을 막는 범국민의식 개혁운동을 벌여나가겠습니다.” 이정희 천도교 교령(72·사진)이 15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다음 달 1일 현도기념일을 앞두고 한국 사회에 보국안민(輔國安民) 정신을 고취시키는 ‘대도 중흥 비전 21’을 발표했다. 현도기념일이란 제3대 교조인 손병희(1861∼1922)가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한 날을 일컫는다. 이 교령은 또 “이러한 대도 중흥을 실천적으로 한국 사회에 전파하기 위해 ‘인내천운동연합’도 출범한다”고 밝혔다. 대도 중흥이란 ‘천도교 한울님의 뜻을 이어 근본을 다시 세우는 것’이라고 천도교는 설명했다. 이를 위해 △동학문화센터 개관 △천도교중앙도서관 설립 △청년·여성 포교활동 활성화 등 다양한 사업을 벌인다. 올해 일본 고베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지부를 설립한 천도교는 향후 중국과 유럽 등으로 지부를 확충할 방침이다. 이 교령은 “천도교는 동학 때부터 이 땅의 정신문화를 이끌어가는 중심적 역할을 해왔다”며 “인간과 세상이 더불어 잘살고자 하는 천도교 사상을 세계화하는 데 박차를 가하겠다”고 강조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NCCK(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연을 맺지 않았다면 그저 ‘뻔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NCCK를 통해 세상을 배웠고, 또 그를 바탕으로 한국 교회를 다시 살필 수 있게 됐습니다. 제가 이룬 것보다 얻은 게 더 많네요.” 개신교 교단협의체인 NCCK의 총무를 맡아 7년 동안 이끈 김영주 목사(65)가 20일 퇴임한다. 김 목사는 1989년 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을 시작으로 30년 가까이 NCCK에 몸담아왔다. 소회가 남다를 법도 하건만 “훌륭한 후임 총무(이홍정 목사)가 더욱더 한국 교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줄 것”이라며 껄껄 웃었다. “굳이 성과를 따지자면 내외부적으로 ‘열린’ 활동을 한 점을 꼽겠습니다. 기존 교단과 색깔이 다른 정교회와 루터교가 NCCK로 들어왔고, 소수의 목소리를 받아들여 청년·여성 대표 부회장 자리도 마련했죠. 외부적으로도 이웃 종교와의 유대를 강화하고 ‘남북나눔운동’도 이끌었죠. 특히 나눔운동은 ‘열린 진보와 열린 보수의 결합’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최근 일부 개신교 대형교회의 행보에도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김 목사는 “명성교회 부자세습은 교회가 지녀야 할 최고의 가치인 공공성과 도덕성을 스스로 저버리는 모습”이라며 비난했다. 종교인 과세에 반대하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종교는 사회봉사의 책무가 있는데, 교회를 사적 조직처럼 여기고 불투명한 운영을 고수한다면 결국 국민이 등을 돌릴 것”이라고 했다. 그는 경색된 남북관계에 대한 우려도 표시했다. “얼마 전까지도 민간·종교 차원에서 ‘3·1절 100주년 공동행사’나 ‘남북 세계 콘퍼런스’ 같은 다양한 아이디어를 북한과 공유하며 추진해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막혀 버렸어요. 정부 간 대화가 막히더라도 민간 쪽 통로는 끊이지 않아야 하는데…. 보다 적극적으로 물꼬를 트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김 목사는 지난달 물러난 자승 전 조계종 총무원장과 종교지도자가 나서는 ‘남북평화포럼’(가칭) 같은 기구 창설도 고민하고 있다. 김 목사는 “더 많이 공부하고 협의해서 남북문제는 물론 한국 사회에 보탬이 되는 활동을 벌일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퇴임 다음 날인 21일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으로 취임할 예정이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독립운동가 이상설(1870∼1917) 순국 100주년을 맞아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은 ‘성명회(聲明會) 선언서’ 원본과 함께 당시 성명회와 연관된 귀중한 해외사료 2점도 새롭게 발굴됐다. 근대사다큐멘터리 제작사 ‘더채널’의 김광만 PD는 13일 “조선총독부가 명치44년(1911년) 작성한 비밀보고서인 ‘재외선인에 관한 상황조사표’를 일본 도쿄 외무성 자료실에서, 1910년 러시아의 ‘조선인 추방에 대한 헌병경찰대장의 결정문’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극동역사문서보관소에서 발견했다”고 밝혔다. ‘재외선인…’은 1911년 4월 일제 내무성이 당시 외무성 정무국장인 구라치 데쓰기치(倉知鐵吉)에게 보낸 기밀문서다. 구라치는 안중근 의사(1879∼1910)의 하얼빈 의거 조사를 맡아 안 의사를 사형에 이르도록 총지휘한 장본인이다. 이 문서는 한마디로 일제의 ‘블랙리스트 끝판왕’이라 할 수 있다. 성명회 선언서 직후 연해주를 중심으로 해외 각지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 800여 명을 주도면밀하게 분석했다. 개인 호구조사는 물론이고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활동을 하는지 세세하게 적시했다. 특히 이상설과 유인석 김학만 등 성명회 관련 인사의 설명은 매우 자세하다. 이상설을 예로 들면, 생김새나 최근 활동까지 꼼꼼히 적시했다. ‘키 5척4촌(약 162cm), 얼굴 길고 단발. 1909년 7월 초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왔음. 조선인 밀집 거주지인 개척리에서 배일(排日) 연설을 자주 함. 1910년 8월 23일 한민학교에서 병합에 대한 과격한 연설. 집에 배일 인사가 식객으로 상당수 머물고 있음.’ 보고서가 성명회 조직만큼 공들인 또 하나는 안중근 의사 관련 인물이었다. 언급된 인물만 60명이 넘는다. 무엇보다 안 의사 주도로 1909년 손가락을 끊어 피로 맹세한 ‘단지동맹(斷指同盟)’에 대한 내용이 놀랍다. 그동안 12명이 참여했다고 알려졌는데, 이 문서에선 35명이나 거론되고 있다. 안 의사 재판에 통역을 맡았다는 한기동이나 동행친구 이춘길, 안 의사가 실패할 경우 거사에 나설 예정이라는 한종호, 안 의사에게 총알을 제공한 윤치종 등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들도 등장한다.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는 “성명회 선언서 이후 일제는 즉각 해외 독립운동에 대한 조직적 탄압에 들어갔다”며 “결국 이로 인해 연해주 한인들은 불모지로 강제 이주당하는 고통을 당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번 러시아 기밀문서는 이 같은 정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1910년 11월 당시 헌병경찰대장인 R. P. 셰르바코프 명의로 작성된 문서는 연해주 한인을 바이칼호 서쪽 도시인 이르쿠츠크로 강제 추방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특히 선언서에 서명한 한인 가운데 2324명 명단을 확보해 여기에 포함시켰다. 당시 러시아 정부는 이상설을 비롯한 성명회 간부도 대거 체포해 이르쿠츠크에 유폐시켰다. 이상설은 이듬해 석방돼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다시 독립운동에 투신하지만 1917년 병을 얻어 48세의 나이에 순국했다. 반병률 한국외국어대 사학과 교수는 “이상설 선생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서 성명회를 조직해 이념과 노선을 초월해 헌신했던 인물”이라며 “선언서와 일본, 러시아의 기밀문서를 보면 당시 선조들이 얼마나 절박하게 조국 독립에 헌신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고 평했다.정양환 ray@donga.com·유원모 기자}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진정한 대한인은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죽을 각오가 돼 있습니다.” 훌륭한 필체도 적잖으나, 붓놀림이 낯선 듯 조악한 글씨가 상당하다. 한자 이름을 몰라 한글로 쓴 이름에, 부녀자라 차마 밝히기 쑥스러웠는지 ‘누구의 처(妻)’란 서명까지. 하지만 한 목소리로 소리 없이 외치고 있었다. “내 조국을 찾고 싶다”고. 고종의 ‘헤이그 특사’ 이상설 선생 순국 100주년을 맞는 올해, 1세기가 넘어서야 후손들에게 친견을 허락한 ‘성명회 선언서’는 뜨겁다 못해 구슬픔이 배었다. 1910년 8월 강제병합이 전해지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학교에 모인 한인들은 ‘성명회’를 결성하고 사흘 뒤 성명서 초안을 완성했다. 그리고 두 달 뒤, 8624명이란 전대미문의 인원이 참여한 성명서가 미국 땅으로 보내졌다.○ 무기를 들고 끝까지 싸우리라 이상설이 집필하고 유인석이 다듬은 것으로 알려진 선언서는 성명회 조직 후 첫 사업이었다. 성명회는 독립운동을 위해선 서구 열강의 인식과 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봤다. 이 때문에 일제가 명성황후 시해사건 등 갖은 만행을 저질렀음을 규탄했다. 선언서는 당시 국제외교계의 공식 언어였던 프랑스어로 쓰였다. 이상설 선생은 프랑스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7개 언어를 구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인들이 범한 행위는 문명의 관념은 조금도 없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행위 가운데 가장 잔인하고 가장 야만적이며 가장 사나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명서는 세계 열강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비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의를 두둔하려 귀하들의 명예와 영광을 이룬 원칙을 포기하지 말라”고 당당히 훈수했다. 그리고 목숨을 건 투쟁에 나서겠노라 맹세했다.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광복과 국권 회복에 기필코 도달할 때까지 손에 무기를 들고 일본과 투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장차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진정한 한국인은 자신의 자유와 나라의 광복을 획득하기 위해 목숨을 던지겠습니다.” 이석형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장은 “이상설 유인석 선생 등은 구한말부터 곧은 절개를 지켰던 선비의식이 투철했던 독립운동가”라며 “대의를 위해 모든 것을 투신하겠다는 숭고한 의지가 성명서에 담겼다”고 전했다. ○ 광복의 염원이 기적을 이루다 성명회 선언서가 더욱 가치를 지니는 건 무려 8000명이 넘는 동포가 동참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이렇게 많은 이가 서명한 선언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1910년경 연해주 거주 한인은 대략 5만여 명. 당시 1가구가 5∼6명이었던 걸 감안하면 한인 가구 수는 1만 가구 안팎이었다. 박환 교수는 “주로 집안의 가장이 서명했을 걸 고려하면 연해주와 그 인근 모든 동포가 참여한 셈”이라며 “통신수단도 변변치 않던 시절 한두 달 만에 이런 인원을 모은 건 기적”이라고 말했다. 또 하나 놀라운 건 선언서가 당대 정파나 사상을 초월했다는 점이다. 서명록엔 훗날 대한독립군사령관 홍범도 장군과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정근을 비롯해 김치보 유진율 이갑 등 다양한 면면이 눈에 띈다. 당시 연해주는 계파 분열이 극심하던 시기였다. 심지어 일반 백성도 고려인파 경성파 함경도파 평안도파 등으로 갈라져 물리적 충돌도 벌어졌다. 박찬승 한양대 교수는 “성명회 선언서는 일시적이긴 했으나 신분과 이념을 뛰어넘는 놀라운 결과물”이라며 “조국의 독립이란 깃발 아래 모든 이해관계를 뒤로 하고 하나로 뭉친 쾌거”라고 설명했다. 유원모 onemore@donga.com·정양환 기자}
“대한국민은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한다.” ‘헤이그 특사’로 유명한 독립운동가 이상설(1870∼1917·사진) 주도로 1910년 세계에 독립 의지를 천명했던 ‘성명회(聲明會) 선언서’ 원본이 107년 만에 처음으로 발견됐다.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회장 이석형)는 12일 “지난달 근대사다큐멘터리 제작사 ‘더채널’의 김광만 PD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에서 당시 미국에 보내진 성명회 선언서 전체를 찾았다”며 “기록과 입소문으로만 전해졌던 선언서의 실제 모습이 최초로 모습을 드러냈다”고 밝혔다. 이 선언서는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인 8624명이 서명해 ‘3·1독립선언서’급 가치를 지닌다는 게 학계의 평가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직후 러시아 연해주에서 결성된 성명회는 이상설과 구한말 의병장으로 활약한 유인석을 비롯해 이범윤 김학만 등이 함께 뜻을 모은 독립운동단체다. 총 118장의 선언서는 유인석이 성명회장 명의로 친필 사인을 남긴 선언서 6장과 8624명이 자신의 이름을 써넣은 서명록 112장으로 이뤄져 있다.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따로 첨부한 표지 서류엔 ‘1910년 10월 미 국무장관 앞으로 도착한 자료’라는 내용의 짤막한 설명이 붙어 있다.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는 “성명회 선언서는 독립운동 역사의 초창기 사료로 3·1독립선언서나 6·10만세운동 선언서의 모델이라 할 수 있다”며 “당시 8000명이 넘게 가담했다는 건 현지에서 활동하던 한인 지도자를 포함한 민초(民草) 대다수가 한마음으로 참여한 위대한 독립운동이라는 증거”라고 평가했다.정양환 ray@donga.com·유원모 기자}
‘두둥.’ 솔직해지자. ‘소련’과 관련해 읽은 책 몇 권 안 된다. 그나마 옛 중역본들, 안 그래도 ‘…스키’ 이름 지명이 헷갈리는데 문장까지 어려워 더 헤맸다. 그런데 2013년 어둠을 뚫고 한 줄기 빛이 도달했으니. 이름 하여 ‘속삭이는 사회’(교양인). 스탈린 시대 내밀한 가족사를 촘촘히 엮은 걸작이었다. 2권짜리 두툼한 책이건만 어찌 그리 감동적인지. 꼭 읽어보시라. 참고로 그해 동아일보가 뽑은 ‘올해의 책 10’에도 들었다. 두둥 하고 북을 울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 런던대 교수인 저자는 러시아 현대사의 권위자인건 둘째 치고 글을 참 잘 쓴다. 그런 그가 속삭이는 사회에 이어 다시 한 번 러시아 100년사(史)를 정리해준다니 어찌 아니 기쁠쏘냐. 찐득한 침 묻혀 가며 페이지를 넘겼다. 저자가 밝힌 대로, 그간 러시아혁명은 1917년 전후에만 초점이 맞춰진 감이 없지 않다. 스탈린 시대 등 다른 시대도 그냥 당대로만 취급되고 설명됐다. 하지만 러시아혁명은 따로국밥이 아니다. 한 세기를 관통하는 전체 흐름에서 봐야 한다. 이를 위해 볼셰비키 세대와 스탈린 엘리트 세대, 1960년대 세대의 부침과 상호작용을 따져보는 건 흥미로운 작업이다. 다만 기대가 컸던 탓일까. 아무래도 ‘속삭이는…’이 줬던 전율엔 미치지 못한다. 100년을 한 권에 욱여넣다 보니, 살짝 교과서 요점정리를 마주한 기분도 든다. 하지만 아무리 소품이라도 장인의 솜씨야 어디 가겠나. 읽어 두면 어디 가서 이쪽 화제가 나왔을 때, 꽤나 통찰력 있는 척 폼 잡을 수 있겠다. 뭐, 그것도 분명 ‘좋은’ 책의 효용가치니까.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지난해 국내에 출간된 미국 그래픽노블 ‘겟 지로(Get Jiro·시공사)’는 얘기 자체가 골 때렸다. 가까운 미래에 요리사가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된다는 설정이었다. 모든 게 넘쳐흐르다 보니 결국 원초적인 식욕(食慾)이 세상을 지배하게 됐다는 식이다. 요리사가 정치 경제를 쥐고 흔드는지라, 식사 예절을 문제 삼아 칼부림을 해도 뭐라 하는 이가 없다. 글쓴이가 유명 셰프라는데 평소 테이블 매너 없는 손님한테 꽤나 스트레스 받았나 보다. 요리가 정치까지 주무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둘의 관계가 심상찮은 건 틀림없다. 노자(老子)가 그랬단다. “나라를 다스리는 건 생선을 요리하는 것과 같다”고. 갸우뚱. ‘깜냥’ 떨어지면 비린내가 난다는 뜻일까. 하여튼 국제정치에선 음식을 둘러싼 이런저런 후일담이 적잖이 쏟아진다. 차이쯔창(蔡子强) 홍콩중문대 교수가 쓴 ‘정치인의 식탁’(애플북스)이란 책을 보면 요리는 상당히 요긴한 정치 수단이 되기도 한다. 특히 격변의 20세기엔 이런 능력이 출중했던 이들이 많았다.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와 소련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1879∼1953)이 대표적인 경우다. 루스벨트의 요리 정치는 ‘핫도그 외교’가 최고로 꼽힌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앞두고 영국 왕실을 자국에 초대했다. 그런데 의전이라면 어디서도 최고로 받았을 양반들을 모셔다 놓고, 잔디밭에 끌고 가 핫도그를 나눠먹었다. 당연히 양국 언론은 “무례의 극치”라며 비난했다. 하지만 이는 영국에 반감이 컸던 국민을 달래려 각본대로 움직인 ‘쇼’였다. 서민 가족처럼 친근한 이미지를 연출해 “우리가 남이가”란 인식을 자연스레 심어줬다. 그런 고수였던 루스벨트도 스탈린에겐 당한 적이 있다. 한반도도 무관치 않은 1945년 얄타회담 때였다.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의 수행비서 존 마틴에 따르면 캐비아와 버터, 감귤 등 귀하디귀한 음식이 “기관총이 불을 뿜듯” 쏟아져 나왔다. 당시 캐비아 최대 생산국이던 소련은 이를 전면 수출 금지시키고 자국에만 공급하던 시절이었다. 의도는 명확했다. “이 귀한 걸 우린 맘껏 즐긴다”는 과시와 “이리 풍족하니 아쉬울 게 없다”는 허세였다. 스탈린은 결과에 매우 만족하며 모스크바로 돌아갔단다. 그만한 역사적 방점을 찍은 건 아니겠지만, 요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방한 만찬에 오른 ‘독도새우’도 반향이 크다. 굳이 도화새우란 공식 명칭을 놔두고 독도새우라 부른 청와대 메시지는 자명하다. 문외한의 외국인도 “한국엔 독도란 맛난 새우가 나는 섬이 있나 보다”라며 고개를 끄덕였을지 모른다. 루스벨트와 스탈린처럼 정치인의 식탁은 한두 가지 포석만 염두에 두진 않는다. 이번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일본엔 ‘대사 각하의 요리사’란 만화가 있다. 주베트남 일본대사의 관저 셰프가 요리로 복잡한 외교관계의 실타래를 푸는 데 기여한다는 내용이다. 그중에 일본 매실장아찌와 베트남 메에(타마린드)를 절묘하게 배합해 양국 관계자의 입맛을 사로잡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청와대 만찬 주제도 ‘함께 갑시다(We go together)’였다. 만화에선 밥상머리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이를 하수(下手)로 본다. 일본은 남의 잔칫상 갖고 붉으락푸르락하기 전에, 뭘 해결하고 뭘 받아들여야 함께 갈 수 있는지 다시금 되돌아볼 때다. 정양환 문화부 기자 ray@donga.com}
최근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를 봤다. 요즘 마블과 디즈니는 정말 뭘 해도 되는 ‘집안’인가 보다. 초인 종합선물세트인 ‘어벤져스’야 큰 성공을 거뒀지만, 사실 토르와 헐크는 좀 어정쩡했다. 각각의 솔로 무비들은 그리 두드러지질 않았고. 근데 둘의 조합이 이리 근사할 줄이야. 국내에서도 개봉 11일 만에 300만 명을 돌파하며 승승장구다. 영화 속 대사 가운데 “아스가르드는 장소(땅)가 아니라 백성이 있는 곳이다”란 말이 나온다. 북유럽 신화에서 유래한 아스가르드는 ‘천둥의 신’ 토르와 같은 신이 사는 나라를 일컫는다. 벌써부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꽤 회자되는데, ‘속지주의냐 속인주의냐’는 깜찍한 논박도 불거졌다. 영화가 끝난 뒤 극장 풍경을 바라보며 다시금 이 말을 곱씹었다. 이제 마블 영화 팬들은 웬만하면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도 자리를 뜨지 않는다. 재밌는 쿠키 영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마블이 창조한 영화 속 세계를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라 부른다. 그 세상이 어디쯤인지 이제 아무도 묻지 않는다. 백성이 어디 있는지 다들 아니까.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한반도는 예로부터 거룩한 순교자들이 많았던 땅입니다. 그 희생과 화해의 정신을 이어받아 남북한이 평화를 이루길 기도합니다.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같은 혈육이 함께할 수 있는 사랑의 잔치가 열리길 바랍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가 주최한 ‘2017 한반도평화나눔포럼’에 참석한 중남미 가톨릭 지도자들이 한반도의 평화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엘살바도르 산살바도르 대교구의 그레고리오 로사 차베스 추기경과 멕시코 모렐리아 대교구의 카를로스 가르피아스 메를로스 대주교, 아르헨티나 주교회의의 비센테 에스페체 질 정의평화위원은 7일 오전 서울 중구 천주교서울대교구청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평화 정착을 위해선 ‘대화’와 ‘인내’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올해 엘살바도르 역사상 처음으로 추기경에 임명된 차베스 추기경은 1970∼90년대 내전 종식에 결정적 기여를 했던 인물이다. 2015년 복자로 시복된 오스카르 로메로 대주교(1917∼1980)의 최측근으로 당시 군사정권과 반군의 협상을 이끌어 1992년 평화협정을 성사시켰다. 차베스 추기경은 “돌이켜보면 처음엔 사막에 홀로 떨어진 듯 막막했지만 참고 견디며 꾸준히 대화하면서 상황은 조금씩 바뀌어갔다”며 “정치인과 외세가 힘겨루기에 빠지면 결국 희생을 치르는 건 백성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또 추기경은 “과거를 기억하지 않으면 미래도 없다”며 “한국인 역시 역사를 제대로 배우고 진심으로 평화를 향해 전력을 기울여야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당부했다. 메를로스 대주교 역시 마약 카르텔 등으로 고초를 겪는 멕시코 사례를 들려줬다. 그는 “2010년부터 가톨릭 전체가 힘을 모아 평화 정착 운동을 펼치고 있다”며 “크게 △평화기도 운동 △평화 교육제도 마련 △사회적 네트워크 및 플랫폼 구축 △폭력 피해자 치유 프로그램 개설 △청년 평화 프로그램 운영 등을 골자로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질 위원은 “남미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무기가 없는 비핵화 대륙”이라며 “남북한 정부 역시 핵무기는 평화나 공존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기 바란다”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가톨릭 신부이자 불교철학 박사인 이영석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교수가 쓴 ‘예수처럼 부처처럼―성경과 무문관의 우연한 만남’(성바오로·사진)이 최근 출간됐다. 이 신부는 미국 버클리 예수회신학대를 졸업한 신부이면서도 동국대에서 불교철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예수처럼…’은 성경과 중국 송나라 무문혜개 선사가 쓴 ‘무문관’을 함께 연구한 결과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이 신부는 “두 종교의 문법은 서로 다르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삶의 기술’에 대해서는 공통점이 많다”며 “핵심은 헛된 망심(妄心)이 아니라 진실한 진심(眞心)에 있다”고 강조했다. 1만8000원.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불교를 불교답게 만들고, 종단의 사회적 역량을 강화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노력하겠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35대 총무원장으로 선출된 설정 스님의 취임 법회가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조계사와 우정국로 특설무대에서 개최됐다. 설정 총무원장은 취임사에서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려면 화쟁(和諍·대립을 벗어나 소통을 통해 통합을 지향하는 불교 사상)과 중도 사상이 필요하다”며 “여러 문제로 갈등했던 분들과 대화합을 이루기 위한 방안을 강구해 실행에 옮기겠다”고 약속했다. 설정 스님은 또 “선거 과정에서 비판이 제기되며 종도와 국민에게 불안과 걱정을 끼쳐드린 것은 모두 저의 부덕과 불찰에서 비롯됐다”며 “다름은 틀림의 기준이 될 수 없으므로 대탕평(大蕩平) 정책을 펼쳐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수행 가풍과 승풍(僧風) 진작, 대중공사에 기초한 종단 쇄신 등을 핵심으로 한 10가지 정책 기조도 밝혔다. 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인 김희중 대주교는 축사를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언제나 서로 다른 종교인들의 우정 어린 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며 “설정 총무원장이 ‘잘하고 있는 건 더 잘하고, 고칠 것은 고치고, 바꿀 것은 과감히 바꾼다’는 약속대로 나아가면 한국 불교가 우리 사회와 민족을 위해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덕담했다. 조계종의 입법기구인 중앙종회 의장 원행 스님은 “고희(古稀)를 넘긴 설정 스님이 종단의 중책을 맡은 것은 불교다운 불교, 존경받는 불교, 신심 나는 불교를 위함”이라고 말했다. 이날 법회에는 한은숙 원불교 교정원장과 한국이슬람중앙회 이주화 이맘 등 이웃 종교인을 비롯해 정세균 국회의장, 정갑윤 홍문표 의원 등 국회 정각회 회원, 하승창 대통령사회혁신수석비서관, 나종민 문화체육관광부 1차관, 김종진 문화재청장 등 약 1만5000명이 참석했다. 법회에 참석한 마크 내퍼 주한 미국대사 대리는 설정 스님에게 직접 꽃다발을 건네며 합장을 올리기도 했다. 덕숭총림(수덕사) 방장이던 설정 스님은 지난달 12일 서울 종로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73.4%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임기는 4년이다. 충남 예산에서 출생한 설정 스님은 덕숭총림 3대 방장을 지낸 원담 스님을 은사로 14세에 출가했으며 1994∼1998년 중앙종회 의장을 지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대한불교조계종 제34대 총무원장인 자승 스님(사진)이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퇴임 법회를 가졌다. 자승 스님은 퇴임사에서 “종단의 안정과 화합, 발전은 총무원장 개인의 능력이 아닌 종단 집행부와 중앙종회, 교구본사와 사찰 등 모두의 합심과 원력으로 이뤄진다”며 “부덕함도 부족함도 모두가 잘 메워주었기에 아쉬움도 미련도 없다”고 밝혔다. 스님은 또 “차기 총무원장으로 훌륭한 분을 모셨으니 더 나은 종단의 역사를 선명하게 새겨나가게 될 것”이라며 “늘 그래왔듯 종단을 위한 희생정신으로 봉사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2009년 제33대 총무원장으로 취임했던 자승 스님은 2013년 재선에 성공하며 8년 동안 총무원장으로 조계종을 이끌었다. 1994년 종단 개혁 이후 연임한 총무원장은 처음이었다. 31일 공식 임기가 끝나는 스님은 다음 달 강원 인제군 백담사로 가서 12월 2일부터 3개월 동안 외부 출입을 일절 금하는 무문관(無門關) 수행에 들어갈 예정이다. 12일 선거에서 제35대 총무원장으로 선출된 설정 스님은 다음 달 1일 취임 법회를 가진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마르틴 루터(1483∼1546)가 이 땅에 온다면, 통탄할 일이 많을 겁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뼈를 깎는 심정으로 개혁에 나서야 합니다. 당대 로마교황청에서 봤듯이 종교가 타락하면 부패한 정권보다 추잡해집니다.” 최근 국내에선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다양한 포럼이나 기념예배 등이 쏟아진다. 루터 관련 신간도 10여 권이 나왔다. 개신교 쪽에선 소강석 새에덴교회 담임목사의 행보가 눈에 띈다. 개신교 연합체인 ‘종교개혁500주년성령대회’ 대회장을 맡아 8일 신도 5000여 명이 참석한 성령대회, 15일 기념예배를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25일 경기 용인시 새에덴교회에서 만난 그는 평소 달변과 달리 말을 무척 신중하게 골랐다. 소 목사는 “평생 다시 오지 않을 기념비적인 날인 건 틀림없지만, 현재 한국 교회에 닥친 위기에 대한 고민이 더 크다”고 말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주는 가장 큰 메시지는 무엇인가. “용기다. 권위와 제도에 맞설 수 있는 종교적 믿음. 알다시피 그가 살던 중세는 교황청이 무소불위의 힘을 지녔다. 그런데 일개 수도사가 반기를 들었다. 루터도 인간이다. 수많은 회유와 협박을 받았다. 흔들리고 좌절하기도 했다. 소신을 밝힌 것도 대단하지만, 역경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킨 점이 더 위대하다. 루터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서 서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큰 기념일인데 이벤트가 많지 않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루터는 ‘오직 성경, 오직 믿음’을 강조했다. 화려한 겉치레를 싫어하고 지양했다. 후대가 흥청망청할 수 있겠는가. 신실한 학술대회와 예배에 무게중심을 뒀다. 둘째, 한국 교회가 처한 환경을 고려했다. 몇 년 전부터 500주년을 준비했는데, 지난해부터 나라에 큰 격변이 있지 않았나. 내실을 기해야지 경거망동할 때가 아니다. 개신교 내부에서도 심각하게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루터가 통탄했을 것’이란 말과 같은 맥락인가. “맞다. 특히 한국 교회 분열은 적폐 중의 적폐다. 다양한 입장과 의견이 존재할 순 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선 모두 하나일 뿐이다. 요즘처럼 종교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가 떨어지고 있을 때 ‘연합과 일체’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종교인 과세 이슈도 좀 더 정치한 접근이 필요하다. 자꾸 오해를 만드는 상황이 안타깝다. 우리 교회는 오래전부터 성실하게 납세해왔다. 정부도 교회도 머리를 맞대고 좀 더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종교개혁 500주년 뒤 한국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은…. “지난해 한국 개신교는 사회복지에 약 8000억 원을 썼다. 그런데도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는다. 억울한 면도 있지만, 왜 이런 처지가 됐는지 반성해야 한다. 어쩌면 한국 사회와 마찬가지로 성장일변도에 매달렸던 건 아닐까. 한국 교회도 하루빨리 패러다임을 바꿔야 살아남는다. 더 이상 개혁을 주저하다간 공룡의 몰락을 겪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다. 개혁의 키워드는 ‘투명성’과 ‘도덕성’이다. 지금 한국 교회가 루터의 시대정신에 목말라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용인=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