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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하고 토끼하고가 의좋게 노는 것을 좋아하는 나의 의식의 심부에는 어떤 미신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닭띠이고 나의 아내가 바로 토끼띠이니까 말이다.” 김수영 시인(1921∼1968·사진)이 1960년대 쓴 에세이 ‘토끼’의 일부다. 글에 등장하는 ‘토끼띠 아내’ 김현경 여사(96)를 19일 경기 용인시 자택에서 만났다. “(김 시인과는) 동네 아저씨의 친구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어요. 행색이 아주 기괴했어요. 눈은 부리부리하고. 제가 힘들던 시절 ‘같이 문학 하자, 너 재주 있다’며 만나기 시작했죠.” 81년 전 일이지만 김 여사의 기억은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1942년 김 시인과 사귀던 당시에 대해 김 여사는 “김 시인이 우리 집 담벼락에 와 휘파람으로 베토벤 교향곡 ‘운명’을 불면 제가 ‘너 왔구나’ 하고 나가 데이트했다”고 했다. 김 시인은 자신의 시에 쉽게 만족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만날 때마다 서로 써온 시를 바꿔 읽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김 시인이 ‘똑같은 시는 쓰면 안 된다’며 가져온 종이를 찢더라고요. 당시 시인이 1945년 문예지 ‘예술부락’에 발표한 시 ‘묘정의 노래’를 읽고 조지훈 시인이 깜짝 놀랄 정도였는데 말이죠.” 김 시인의 1949년 작품 ‘토끼’는 이렇게 시작한다. “토끼는 입으로 새끼를 뱉으다/토끼는 태어날 때부터/뛰는 훈련을 받는 그러한 운명에 있었다”. 김 여사는 “여동생이 우리 신혼집을 찾아와 ‘친정에 토끼가 새끼를 낳았다’는 소식을 전해주자, 내가 토끼띠라는 걸 알던 김 시인이 단숨에 써내려간 시”라며 “(김 시인은) 토끼같이 날 예뻐했다”고 했다. 김 시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가세는 기울고 병치레로 고생하다 김 여사를 만났다. 1950년 결혼 직후 6·25전쟁이 터졌다. 김 시인은 북한 의용군으로 징집됐다가 탈출했다. 광복 후 ‘폭포’ ‘푸른 하늘을’ 등 강렬한 현실의식을 담은 시를 쏟아내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1968년 그가 ‘토끼같이 예뻐했던’ 아내와 두 아들을 남기고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숨졌다.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지난 요즘도 김 시인의 작품이 많이 연구되는 데 대해 김 여사는 “남의 흉내를 안 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공부벌레인데, 정직하고 진실했어요. 늘 본질을 추구하면서 새롭게 쓰고 차원을 높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죠. 머물지 않고 늘 앞서가는 자유정신으로 펜을 잡았어요.” 김 여사는 눈이 그렁그렁한 채 말을 이어갔다. “요즘도 혼자 집에 있으면서 일과가 김 시인의 책을 읽는 거예요. ‘김수영 학문’이 생길 정도로 많이 읽히고 인정받는데,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싶어요.”용인=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닭하고 토끼하고가 의좋게 노는 것을 좋아하는 나의 의식의 심부에는 어떤 미신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닭띠이고 나의 아내가 바로 토끼띠이니까 말이다.…이들의 궁합이 더 신기해 보인다면 신기해 보인다.” 시인 김수영(1921~1968)이 1960년대 남긴 에세이 ‘토끼’에는 이 같은 내용이 나온다. 생업으로 닭을 길렀던 시인이 “닭을 기르는 집에는 반드시 토끼가 있어야 한다고 해서” 키운 토끼를 보고 떠오른 단상을 적은 것이다. 글에 등장하는 ‘토끼띠 아내’ 김현경 여사(96)를 19일 경기 용인시 자택에서 만났다. 김 여사는 상수(上壽)를 바라보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운 모습이었다. 김 여사와 김 시인의 인연은 81년 전인 194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네 아저씨의 친구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어요. 행색이 아주 기괴했어요. 눈은 부리부리 하고. 제가 힘들던 시절 ‘같이 문학하자, 너 재주 있다’며 만나기 시작했죠. 우리 집 담벼락에 와 김 시인이 휘파람으로 베토벤 교향곡 ‘운명’을 부르면 제가 ‘너 왔구나’하고 나가 데이트했죠.” 김 시인은 그때부터 자신의 시에 쉽게 만족하는 법이 없었다. “만날 때마다 서로 써온 시를 바꿔 읽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김 시인이 ‘똑같은 시는 쓰면 안 된다’며 가져 온 종이를 찢더라고요. 당시 시인이 1945년 문예지 ‘예술부락’에 발표한 시 ‘묘정의 노래’을 읽고 조지훈 시인이 깜짝 놀랄 정도였는데 말이죠.” 김 시인은 1949년 ‘토끼’라는 시를 썼다. 시는 ‘토끼는 입으로 새끼를 뱉으다/ 토끼는 태어날 때부터/ 뛰는 훈련을 받는 그러한 운명에 있었다’로 시작한다. 김 여사는 “여동생이 우리 신혼집을 찾아와 ‘친정에 토끼가 새끼를 낳았다’는 소식을 전해주자, 내가 토끼띠라는 걸 알고 있던 김 시인이 단숨에 써내려간 시”라며 “토끼같이 날 예뻐했다”고 했다. 김 시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가세는 기울고 병치레로 고생하다 김 여사를 만났지만 1950년 결혼 직후 6˙25가 터졌다. 김 시인은 북한 의용군으로 징집됐다가 탈출했다. 해방 이후 ‘폭포’ ‘푸른 하늘을’ 등 강렬한 현실의식을 추구한 시를 쏟아냈지만 1968년 불의의 사고로 그가 ‘토끼같이 예뻐했던’ 아내와 두 아들을 남기고 숨졌다.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지난 요즘에도 김 시인이 남긴 시와 산문이 갈수록 더 많이 연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 여사는 “남의 흉내를 안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공부벌렌데, 정직하고 진실했어요. 늘 본질을 추구하면서 새롭게 쓰고 차원을 높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죠. 머물지 않고 늘 앞서가는 자유정신으로 펜을 잡았죠.” 김 여사는 ‘김수영의 시는 난해하다’는 일각의 평가에 대해 “표현의 방식이 높고, 생각하는 차원도 보통이 아닐 뿐 난해한 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상주사심(常住死心·늘 죽을 각오로 살아야한다)’. 김 시인은 이같은 자신의 좌우명대로 살다 갔다. 김 여사는 “지금 읽어도 진부하지 않고 새롭게 느껴지는 시를 쓰신 비결은 공부였다”며 “철학책을 탐독했는데,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 얘기를 많이 해서 충무로에 갔다가 전집을 사다드리니 좋아하셨다”고 회상했다. 김 여사는 눈이 그렁그렁한 채로 말을 이어갔다. “요즘도 혼자 집에 있으면서 노상 일과가 김 시인의 책을 읽는 거예요. ‘김수영 학문’이 생길 정도로 많이 읽히고 인정받는데,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생각이 들어…안타깝죠.”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사로탈(샤를로트 코르데)은 글 읽기를 좋아하여 더위와 추위를 가리지 않았다.…마침내 법국(프랑스)에 대혁명이 일어나니…세력가 마랍(장 폴 마라)이 있어 전국의 대권을 잡고 백성에게 포학한 정치를 펴 백성의 상함이 한정 없었다. 사로탈이 홀연히 전국의 백성을 구원할 것을 생각하였다.…사로탈은 곧 마랍의 곁에 이르러 능릉한 칼날로 그의 가슴을 꿰었다.” “백 년 전에 미주에서 흑인 노예를 매매하여 부렸다.…비다 여사(해리엇 비처 스토)가…천고에 없어지지 아니할 의론을 세워 수만 명 흑인 노예의 구세주가 되었다.” 근대 초기 여성용 교과서 ‘여자독본’(1908년 발간)에 실린 프랑스 대혁명 당시 지롱드파 여성 샤를로트 코르데(1768∼1793)와 미국 소설가 해리엇 비처 스토(1811∼1896)에 대한 내용이다. 우국지사 위암 장지연 선생(1864∼1921)이 낸 이 책은 한국과 중국, 서양의 여성 83명을 열전 형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당시 여성 교육은 ‘현모양처’에 초점을 뒀다는 인식이 많지만 ‘여자독본’에는 전쟁, 혁명 등 역사적 격변기에 주체적 역할을 한 여성들 모습이 비중 있게 등장한다. 박시언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원은 11일 학술대회 ‘동아시아 권력과 시각표상’에서 발표한 ‘근대 전환기 비일상(非日常) 표상과 여성 교육’에서 이같이 밝혔다. 박 연구원에 따르면 여자독본에는 군사를 진두지휘하거나 총과 칼을 들고 전투에 참여하는 여성 인물이 잔 다르크(1412∼1431)를 비롯해 7명 등장한다. 프랑스 혁명기 여성 영웅 롤랑 부인(1754∼1793) 등이 도전적인 혁명가의 모습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박 연구원은 이러한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나중에 1919년 3·1운동의 주축이 됐다고 봤다. 대표적인 사례가 전주 지역 3·1운동의 중심에 섰던 기전여학교다. 학교에서 여자독본을 통해 동서양 여성들의 저항의식과 투쟁을 접한 이 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의 준비와 진행까지 전 과정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이 학교 졸업 후 소학교 교사로 일하던 임영신 씨(1899∼1977)는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기도 했다. 박 연구원은 “여자독본에는 체제에 주체적으로 저항하는 여성,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활약하는 여성 등이 다양하게 제시된다”며 “유교주의를 넘어 주체적 여성의 삶을 꿈꾸게 하는 재료가 됐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도 여성용 교과서인 ‘부녀감’(1887년)이 발간됐지만 ‘여자독본’과는 차이점이 적지 않다. 일본 메이지 천황의 부인인 쇼켄(昭憲) 황후(1849∼1914)의 지시로 발간된 이 책은 여성을 복수나 저항의 주체로 그리지 않았다. 전쟁에서는 부상병을 간호하고 군복을 만드는 등 후방을 방어하는 모습이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을 벌였던 일본의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또 국경과 민족, 인종의 경계를 넘나드는 여성의 연대나 자유로운 지리적 이동을 보여준다고 박 연구원은 설명했다.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사로탈(샤를로트 코르데)은 글 읽기를 좋아하여 더위와 추위를 가리지 않았다.…마침내 법국(프랑스)에 대혁명이 일어나니…세력가 마랍(장 폴 마라)이 있어 전국의 대권을 잡고 백성에게 포학한 정치를 펴 백성의 상함이 한정 없었다. 사로탈이 홀연히 전국의 백성을 구원할 것을 생각하였다. …사로탈은 곧 마랍의 곁에 이르러 능릉한 칼날로 그의 가슴을 꿰었다.”“백 년 전에 미주에서 흑인 노예를 매매하여 부렸다.…비다 여사(해리엇 비처 스토)가…천고에 없어지지 아니할 의론을 세워 수만 명 흑인 노예의 구세주가 되었다.”근대 초기 여성용 교과서 ‘여자독본’(1908년 발간)에 실린 프랑스 대혁명 당시 지롱드파 여성 샤를로트 코르데(1768~1793)와 미국 소설가 해리엇 비처 스토(1811~1896)에 대한 내용이다. 우국지사 위암 장지연 선생(1864~1921)이 낸 이 책은 한국과 중국, 서양의 여성 83명을 열전 형식으로 소개하고 있다.당시 여성 교육은 ‘현모양처’에 초점을 뒀다는 인식이 많지만 ‘여자독본’에는 전쟁, 혁명 등 역사적 격변기에 주체적 역할을 한 여성들 모습이 비중 있게 등장한다. 박시언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원은 11일 학술대회 ‘동아시아 권력과 시각표상’에서 발표한 ‘근대 전환기 비일상(非日常) 표상과 여성교육’에서 이같이 밝혔다. 박 연구원에 따르면 여자독본에는 군사를 진두지휘하거나 총과 칼을 들고 전투에 참여하는 여성 인물이 잔 다르크(1412~1431)를 비롯해 7명 등장한다. 프랑스 혁명기 여성 영웅 롤랑 부인(1754~1793) 등이 도전적인 혁명가의 모습으로 소개되기도 한다.박 연구원은 이러한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나중에 1919년 3·1운동의 주축이 됐다고 봤다. 대표적인 사례가 전주 지역 3·1운동의 중심에 섰던 기전여학교다. 학교에서 여자독본을 통해 동서양 여성들의 저항의식과 투쟁을 접한 이 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의 준비와 진행까지 전 과정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이 학교 졸업 후 소학교 교사로 일하던 임영신 씨(1899~1977)는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기도 했다.박 연구원은 “여자독본에는 체제에 주체적으로 저항하는 여성,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활약하는 여성 등이 다양하게 제시된다”며 “유교주의를 넘어 주체적 여성의 삶을 꿈꾸게 하는 재료가 됐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도 여성용 교과서인 ‘부녀감’(1887년)이 발간됐지만 ‘여자독본’과는 차이점이 적지 않다. 일본 메이지 천황의 부인인 쇼켄(昭憲) 황후(1849~1914)의 지시로 발간된 이 책은 여성을 복수나 저항의 주체로 그리지 않았다. 전쟁에서는 부상병을 간호하고 군복을 만드는 등 후방을 방어하는 모습이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을 벌였던 일본의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국경과 민족, 인종의 경계를 넘나드는 여성의 연대나 자유로운 지리적 이동을 보여준다고 박 연구원은 설명했다.최훈진기자 choigiza@donga.com}
“흰 모란꽃 위에 바위를 얹었지요/그 바위가 삭아 주저앉기를 기다리면서요/모란꽃 흰 접시는 천년이 지나도록 깨지지 않았어요…” 안도현 시인의 신작 시 ‘모란꽃’이다. 모란꽃의 ‘흰 접시’가 깨지지 않고 천년을 버티듯, 시도 깨지지 않고 버티며 스스로를 지킨다. 모란꽃처럼 오랜 시간을 버텨낸 ‘시힘’의 동인들이 열한 번째 동인지를 펴냈다. 창단 40주년인 2024년을 앞두고 신작 시와 산문을 내놓은 것이다. 1984년 고운기 시인(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의 제안으로 모인 ‘시힘’의 20대 시인들은 어느덧 시단의 중진으로 자리잡았다. 안 시인을 비롯해 나희덕, 문태준, 이병률 시인 등 16명의 글을 묶었다. 시인들은 시집에 실린 ‘시힘의 말’에서 “멀리 지내며 서로의 빛을 읽는다”고 고백한다. 느슨하고 넓은 울타리 안에서 서로 미약하게 연결돼 있지만, 그래서 더 반짝일 수 있다는 것. 이 같은 철학은 1985년 나온 첫 동인지 ‘그렇게 아프고 아름답다’의 서문 “건강한 삶과 시의 서정성에 바탕을 두고 각각의 목소리를 지니며 조화를 이루고 존중할 것”에서도 드러난다. 안 시인은 산문 ‘자유롭고 독자적인’에서 “민중문학의 시대, 시힘의 전투력은 허약했지만 그 덕분에 각자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다”고 말한다. 느슨한 울타리가 동인이 문단계의 ‘모란꽃’이 된 비결이라는 것이다. 삶을 “잠깐 거닐다 가는 잰걸음 길 정도”로 비유한 박철 시인의 ‘조약돌’을 읽고 나면 잔잔한 슬픔과 함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던 짐이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이 든다. 정일근 시인의 시 ‘수국塚수국塚’에도 인생의 무상함이 짙게 배어 있다. “한 편의 시를 읽고 공감한다는 건 자신의 감정을 깨끗이 씻는 것과 같다.” 시인을 썩은 감정을 씻어내 주는 ‘감정 수선사’라 명명한 이대흠 시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고은 시인의 성추행 의혹을 처음으로 고발했던 최영미 시인이 1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위선을 실천하는 문학”이라고 썼다. 최 시인은 이 같은 문구를 올리면서 별다른 설명은 달지 않았다. 그러나 성추행 의혹이 불거진 지 5년 만에 아무런 사과나 해명 없이 최근 신작 시집과 대담집을 출간한 고 시인과 출판사 실천문학사를 비판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고 시인의 시집 ‘무의 노래’와 대담집 ‘고은과의 대화’ 출간 소식이 전해지자 최 시인은 11일 본보에 “허망하다. 조만간 글을 통해 입장을 밝히겠다”고 했다. 최 시인은 2017년 계간 ‘황해문화’에 원로 문인 ‘En’의 성추행 행적을 고발한 시 ‘괴물’을 발표했고, 이듬해 동아일보를 통해 고 시인의 성추행 의혹을 폭로했다. 고 시인은 최 시인과 동아일보를 상대로 각각 1000만 원과 10억 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지만 2019년 항소심에서 패소한 뒤 상고하지 않았다.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2018년 성추행 폭로가 잇따랐던 고은 시인(90·사진)이 아무런 사과 없이 5년 만에 등단 65주년 기념 시집과 대담집을 최근 발간하자 문단 안팎에서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온라인에서는 책을 출간한 실천문학사에 대한 불매 운동도 확산하는 모양새다.● “뻔뻔하고 부끄러움 모른다”고 시인은 신작 시집 ‘무의 노래’와 캐나다 시인과의 대담을 엮은 ‘고은과의 대화’를 냈다. 그는 시집 ‘작가의 말’에서 “다섯 번의 가을을 보내는 동안 시의 시간을 살았다”고 했지만 자신의 성추행 의혹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독자들은 고 시인의 ‘사과 없는 복귀’를 거세게 비판하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온라인 서점에는 고 시인에 대해 “고작 몇 년 휴식기를 가진 후 뻔뻔하게 고개를 들었다”, “부끄러운 줄 모른다”는 비판 글이 잇따라 올라왔다. 온라인 문학전문지 뉴스페이퍼가 7, 8일 트위터에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는 문인과 독자 등 응답자(2424명)의 99.3%가 고 시인의 문단 복귀에 반대한 것으로 나타났다. 두 책의 판매량도 저조하다. YES24는 “각각 10부 미만으로 판매됐다”고 밝혔다. 교보문고 관계자도 “아주 소량으로 들어와 매장에 다 풀리지도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고 시인에 대한 비판이 실천문학사가 출간한 책 전체에 대한 불매 운동으로 확산할 조짐도 보이고 있다. SNS에는 “실천문학사 불매에 동참해 주세요”, “실천문학사는 문학을 더럽히지 말라”, “영원히 불매할 것” 등의 글이 올라오고 있다.● “해명도 사과도 없어 공분”문단의 반응도 싸늘하다. 2017년 시 ‘괴물’로 고 시인의 성추행 의혹을 처음 제기한 최영미 시인은 신작 발간 논란이 불거지자 11일 “허망하다. 조만간 글을 통해 입장을 밝히겠다”고 했다. 정여울 작가 겸 문학평론가는 “(성추행) 의혹이 제기된 이상 명쾌한 해명이 필요한데, 해명도 사과도 없는 건 독자들의 기대에 부합하지 못한다”며 “독자들은 ‘글만 잘 쓰는 작가’가 아니라 ‘사람으로서도 훌륭한 작가’를 원한다”고 지적했다. 이민우 뉴스페이퍼 편집장 역시 “해명, 사과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게 공분을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강석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문학평론가)는 “시를 쓰는 건 자유지만 문학적·사회적으로 합당한지 공론장을 통해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고은론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한원균 한국교통대 글로벌어문학부 교수는 “도덕적, 윤리적으로 짚어야 할 부분이 있다”고 했다.● 계간지 주간 “발간 몰랐다”이번 시집과 대담집 출간은 실천문학사 윤한룡 대표가 독단으로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계간 ‘실천문학’은 지난해 겨울호(146호)에서 고 김성동 작가 추모 특집으로 고 시인의 신작 시집에도 실린 추모시 ‘김성동을 곡함’을 싣기도 했다. 겨울호 편집주간을 맡았던 구효서 소설가는 “계절마다 여러 사람이 편집주간을 돌아가며 맡는데, 계간지를 받아본 뒤에야 고 시인의 시가 실린 걸 알았다. 이번 시집과 대담집 출간도 미리 알지 못했다”고 했다. 실천문학은 1980년 고 시인 등이 주축이 돼 창간했다. 1990년대 주식회사로 전환됐고, 현재 윤 대표가 대주주다. 고 시인은 성추행 의혹을 부인하며 최 시인에 대해 1000만 원, 관련 기사를 보도한 동아일보와 기자를 상대로 10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지만 1심과 2심에서 모두 패소했다.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최근 안중근 의사(1879∼1910)의 삶을 다룬 영화와 뮤지컬, 소설 등 콘텐츠가 잇따라 나와 인기를 모으는 가운데 안 의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여전히 국내에도 적지 않게 자리 잡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본에서는 안 의사를 존경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테러리스트’라는 인식이 폭넓게 퍼져 있다. 스가 요시히데 전 일본 총리가 2014년 중국 하얼빈 안중근 기념관 개관을 두고 “(안중근은) 우리나라의 초대 총리를 살해, 사형 판결을 받은 테러리스트”라고 하는 등 우익 정치인들의 발언 등이 영향을 미쳤다. 문제는 ‘일본 입장에서는 그렇게 볼 수 있다’, ‘1909년 하얼빈 의거가 없었다면 한일강제병합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등 잘못된 역사 인식이 국내에도 없지 않다는 것. 전문가들은 최근 안 의사 관련 콘텐츠의 인기를 계기로 왜곡된 인식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일 양국의 역사 교과서를 비교 연구한 논문 ‘한일 역사교과서는 안중근을 어떻게 기술해왔는가(1945∼2007)’를 쓴 신주백 전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장(60)은 “예전에 지인이 ‘안중근 의거로 한일병합이 일어난 것 아니냐’고 물은 게 뇌리에 남아 논문을 쓰게 됐다”고 했다. 신 전 소장에 따르면 과거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그같이 가르쳤다. 일본 산천출판사가 펴냈던 교과서는 ‘한일병합은 안중근이 촉발한 것’이라고 기술해 오다 1990년대 들어 수정했다. 신 전 소장은 “사실이 아니라는 걸 일본 학계도 뒤늦게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안 의사가 사살한 이토 히로부미(1841∼1909)는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으로 강제병탄의 기초를 구축했고, 조선의 식민지화에 반대했던 것이 아니라 ‘조선인과 국제사회의 반발 등을 의식해 천천히 하려고 했던 것뿐’이라는 게 우리 학계의 통설이다. ‘법의 눈으로 안중근 재판 다시보기’(2010년)를 펴낸 명순구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61)는 “과거 수업 도중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 여기는 일본의 시각에 많은 학생이 동의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면서 “민법학자인 내가 국제법을 공부해 관련 책과 논문을 썼던 이유”라고 했다. 의거 뒤 체포된 안 의사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국제법상 ‘전쟁 포로’라고 주장했다. 그는 1910년 중국 뤼순의 일본 법정에서 “나는 개인 자격으로 남을 죽인 범죄인이 아니다. 대한국의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따라서 국제공법에 따라 재판하라”고 했다. 명 교수에 따르면 국제법상 전쟁 중 교전을 벌이는 ‘교전자격자’의 공격은 정당방위에 해당한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항일의병전쟁이 벌어지고 있었고, 안 의사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이었으며, 국제법상 비정규군도 교전 자격이 인정됐다. 또한 이토의 하얼빈 방문은 침략 행위의 일부로 볼 수 있다. 명 교수는 “안 의사의 이토 사살은 교전의 일부로 정당행위”라면서 “안 의사는 이순신 장군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이제야 시조란 옷에 팔 하나를 끼워 넣은 것 같습니다. 아직 빼야 할 군더더기가 더 많습니다. 더 다듬고 풀 먹이고 또 다림질해 나가겠습니다.”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10일 열린 20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상식. 올해 최고령 당선자인 김미경 씨(57)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김 씨는 “축하 인사를 받을 때마다 어깨가 무거워진다”며 “잠시 날개를 접었다가도 길을 찾아가는 새들처럼 시조의 행간 속에서 길을 찾겠다”고 했다. 이날 시상식에는 김 씨를 비롯해 김혜빈(중편소설), 공현진(단편소설), 권승섭(시), 임선영(희곡), 김서나경(동화), 장희재(시나리오), 민가경(문학평론), 윤성민(영화평론) 씨까지 총 9개 부문 당선자가 모두 참석했다. 작가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출발선에 선 이들은 감사를 표했다. 장희재 씨는 “글을 쓰겠다며 서울에 올라와 만난 모든 인연에 감사하다”며 “이번에도 안 되면 어디에도 내지 않으려 했던 글을 심사위원분들이 알아봐 주셨다”고 말했다. 김혜빈 씨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에 문학을 붙들었다”며 “가족 덕분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공현진 씨는 “(심사위원인) 오정희 성석제 선생님 두 분의 이름이 앞으로 소설을 써나가는 데 힘이 될 것”이라고 했다. 멈추지 않고 글을 쓰겠다는 다짐도 밝혔다. 올해 최연소 당선자인 권승섭 씨(21)는 “완전한 사람이 되진 못하더라도, 온전한 상태로 시를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했다. 임선영 씨는 “작가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도록 써나가겠다”고 했다. 김서나경 씨는 “앞으로 쓰는 글이 세상에 닿을 테니 써 보라는 격려라고 생각하고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윤성민 씨는 “활자를 겸손히 대하며 꾸준히 쓰겠다“고 밝혔다. 민가경 씨는 “오늘 제가 받은 거룩한 부담을, 희망을 쓰겠다는 다짐을, 매일 새기겠다”고 말했다. 정호승 시인은 격려사에서 “오늘 느끼는 기쁨은 한국 문학의 미래를 이끌어 가야 할 책임이 부여된 기쁨이어야 한다”면서 “생명이 다할 때까지 결사적으로 써 달라”고 당부했다. 이날 시상식에는 심사위원인 오정희 구효서 소설가, 이근배 이우걸 시조시인, 노경실 동화작가, 신수정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문학평론가), 김시무 영화평론가, 주필호 주피터필름 대표 등 30여 명이 참석했다.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개신교 연합기관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정전 70주년을 맞아 국내외에서 서명운동을 펼치겠다고 밝혔다. 이홍정 NCCK 총무(사진)는 9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정전 70주년을 맞는 올해, 한반도 평화를 위해 국내외에서 100만 명 서명운동을 전개해 유엔에 제출하겠다”고 말했다. 전 세계에서 100만 명의 서명을 받아 종전과 평화협정을 이루기 위해 종전평화캠페인을 전개한다는 것이다. 이 총무는 “광복 80주년이 되는 2025년까지 서명운동을 이어가겠다”고 했다. 올해 7월 한반도 평화를 주제로 국제심포지엄도 열 계획이다. 이 총무는 “올해는 간토대지진으로 조선인 학살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라며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9월 1일 일본 교회와 함께 도쿄에서 추모 행사를 열 예정”이라고 덧붙였다.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김병두, 김철환, 금산덕근(金山德根), 금성선홍(金城宣弘), 방산효달(方山孝達)….” 일제강점기 일본 니가타현 사도(佐渡)광산에 강제 동원돼 노역하다가 탈출한 조선인들의 이름이다. 일본 정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인 이 광산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 494명의 이름이 ‘담배 배급 명부’를 통해 처음 확인됐다.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연구위원(63)은 최근 학술지 ‘한일민족문제연구’에 발표한 논문 ‘조선인 연초배급명부로 본 미쓰비시광업 사도광산 조선인 강제동원’에서 미쓰비시광업(현 미쓰비시머티리얼)이 당시 노무자들에게 담배를 배급할 때 작성한 ‘조선인 연초(담배) 배급 명부’ 3종을 분석해 명단을 밝혀냈다. 앞서 정 연구위원은 미발간 사도광산사(史) 원고를 분석해 조선인 1519명이 강제 노역했다는 사실을 밝혀냈지만 명단까지 파악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최근까지 우리 정부에 신고된 사도광산 강제 동원 피해자 약 150명의 이름도 절반 정도가 명부에서 확인됐다. 명부에서는 조선인이 탈출한 기록이 확인됐다. 1945년 6월 20일자 명부에는 같은 숙소에 머물던 조선인 11명 가운데 7명이 탈출했고, 3명이 붙잡혔다고 기록돼 있다. 가족 사망 등의 이유로 조선에 다녀올 수 있는 허가를 받고 귀국한 이들 가운데 15명이 광산에 돌아오지 않고 이탈했다는 기록도 있다. 정 연구위원은 9일 전화 통화에서 “명부는 사도광산에 조선인이 강제 동원됐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말했다. 정 연구위원은 2019년 일본의 재야 사학자로부터 처음 연초 배급 명부를 확보했다. 이후 우리 정부가 일본 시민단체로부터 수집한 또 다른 명부와 사도시 박물관에 보관된 명부까지 3종의 명부를 비교했다. 또 국가기록원의 강제 동원 명부, 옛 신문 기사 등 총 24종의 문서도 함께 분석해 총 745명의 명단을 밝혔다. 580명의 성과 이름은 온전히 파악했고, 165명은 성명의 일부나 창씨 개명한 이름을 확인했다. 정 연구위원은 “다른 자료를 종합 분석한 결과 이들은 함남, 경북, 강원 등 여러 지역에서 동원된 것으로 드러났다”고 설명했다. 조선인들은 1939년 2월부터 니가타현 앞바다 사도섬에 있는 이 광산에 강제 동원돼 전쟁 물자에 사용되는 구리, 철, 아연 등 광석을 캤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2월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후보로 내면서 대상 기간을 금광으로 유명했던 에도(江戶)시대(1603∼1867년)로 한정하고, 조선인 강제 동원의 역사는 쏙 빼놓았다.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김병두, 김철환, 금산덕근(金山德根), 금성선홍(金城宣弘), 방산효달(方山孝達)….” 일제강점기 일본 니가타현 사도(佐渡)광산에 강제 동원돼 노역하다가 탈출한 조선인들의 이름이다. 일본 정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인 이 광산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 494명의 이름이 ‘담배 배급 명부’를 통해 처음 확인됐다.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연구위원(63)은 최근 학술지 ‘한일민족문제연구’에 발표한 논문 ‘조선인 연초배급명부로 본 미쓰비시광업 사도광산 조선인 강제동원’에서 미쓰비시광업(현 미쓰비시머티리얼)이 당시 노무자들에게 담배를 배급할 때 작성한 ‘조선인 연초(담배) 배급 명부’ 3종을 분석해 명단을 밝혀냈다. 앞서 정 연구위원은 미발간 사도광산사(史) 원고를 분석해 조선인 1519명이 강제 노역했다는 사실을 밝혀냈지만 명단까지 파악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최근까지 우리 정부에 신고된 사도광산 강제 동원 피해자 약 150명의 이름도 절반 정도가 명부에서 확인됐다. 명부에서는 조선인이 탈출한 기록이 확인됐다. 1945년 6월 20일자 명부에는 같은 숙소에 머물던 조선인 11명 가운데 7명이 탈출했고, 3명이 붙잡혔다고 기록돼 있다. 가족 사망 등의 이유로 조선에 다녀올 수 있는 허가를 받고 귀국한 이들 가운데 15명이 광산에 돌아오지 않고 이탈했다는 기록도 있다. 정 연구위원은 9일 전화 통화에서 “명부는 사도광산에 조선인이 강제 동원됐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말했다. 정 연구위원은 2019년 일본의 재야 사학자로부터 처음 연초 배급 명부를 확보했다. 이후 우리 정부가 일본 시민단체로부터 수집한 또 다른 명부와 사도시 박물관에 보관된 명부까지 3종의 명부를 비교했다. 또 국가기록원의 강제 동원 명부, 옛 신문 기사 등 총 24종의 문서도 함께 분석해 총 745명의 명단을 밝혔다. 580명의 성과 이름은 온전히 파악했고, 165명은 성명의 일부나 창씨 개명한 이름을 확인했다. 정 연구위원은 “다른 자료를 종합 분석한 결과 이들은 함남, 경북, 강원 등 여러 지역에서 동원된 것으로 드러났다”고 설명했다. 조선인들은 1939년 2월부터 니가타현 앞바다 사도섬에 있는 이 광산에 강제 동원돼 전쟁 물자에 사용되는 구리, 철, 아연 등 광석을 캤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2월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후보로 내면서 대상 기간을 금광으로 유명했던 에도(江戶)시대(1603~1867년)로 한정하고, 조선인 강제 동원의 역사는 쏙 빼놓았다. 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고독사 문제의 대책으로 일본의 ‘도키와다이라(常盤平)’식 해법이 잘 알려져 있지만 거긴 자치회장을 중심으로 한 주민 간의 끈끈한 연대가 있어 가능했던 거예요. 무턱대고 일본을 따라 ‘커뮤니티를 되살리자’는 식의 정책으론 문제 해결이 어렵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고독사 담론을 비교 연구하는 일본 규슈대 한국연구센터의 오독립 학술연구원(43)은 8일 동아일보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도키와다이라’는 일본 지바(千葉)현 마쓰도(松戸)시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다. 1960년대 약 5000가구가 입주해 젊고 수입이 비교적 높은 이른바 ‘단지족’의 터전이 됐다. 시간이 흘러 2000년대로 접어들자 주민 10명 중 3명이 65세 이상일 정도로 고령화됐다. 단지에서 외롭게 죽음을 맞는 이가 많아지자 주민들은 머리를 맞대고 자치회장을 중심으로 ‘고독사 제로 작전’을 펼쳤다. 열쇠점, 신문판매점 등과 협력해 긴급 연락망을 구축했고, 쉼터인 ‘이코이(휴식) 살롱’을 열어 사람들이 모이도록 했다. 이런 자구책은 2007년 커뮤니티 재활성화를 골자로 한 일본 후생노동성의 ‘고립사 방지 추진 사업’의 모델이 됐다. 우리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고독사 대책도 이 같은 일본의 사례를 바탕으로 지역 사회의 연결망을 촘촘히 하는 데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그러나 오 연구원은 “2000년 이후 최근까지 일본 내 고독사는 꾸준히 증가했다”며 “주민 간 관계 맺기를 강조하는 고독사 대책은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일본 도쿄도 감찰의무원 자료에 따르면 도쿄 내 고독사는 2020년 6096명으로 2003년(2861명)에 비해 2배 이상으로 늘었다. 오 연구원은 “일본에선 혼자 맞는 죽음을 대비하는 ‘슈카쓰(終活)’나 고독사 후 수습을 부탁하는 내용을 담은 ‘엔딩노트’가 유행하는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은 ‘죽음을 막는 것’에 초점을 뒀다가 실패한 일본의 고독사 대책을 되풀이할 게 아니라 1인 가구에 대한 안정적인 생애주기별 지원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같은 1인 가구라도 65세 이상은 고령자 대상 복지제도의 혜택을 받지만 중장년층은 사업 실패 등을 겪으면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고립되기 쉽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그는 최근 서울대 일본연구소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관련 내용을 발표했다.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으로 불리는 불황으로 복지 지출을 줄여야 했기에 커뮤니티 중심의 고독사 대책을 강조해왔던 것입니다. 정부가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중장년층을 적극 찾아내야 고독사로 이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방탄소년단(BTS)의 맏형 진(본명 김석진·31)이 경기 연천군 육군 5사단 신병교육대에서 훈련을 받는 모습이 공개됐다. 군 관련 내용을 다루는 페이스북 페이지 ‘육군훈련소 대신 전해드립니다’에는 6일 진의 사진이 올라왔다. 진이 화생방 훈련을 받은 뒤 고통스러워하며 얼굴을 찌푸리자 동기들이 그의 얼굴에 물을 부어 씻겨주는 모습이다. 지난해 12월 13일 입대한 진은 신병교육대에서 동료 훈련병들의 지지를 받아 ‘중대장 훈련병’으로 뽑혔다. 중대장 훈련병은 간부의 지시를 중대에 전하고 점호할 때 중대 대표로 경례하는 일을 한다. 진은 이달 중순까지 신병교육대에서 기초 군사훈련을 받은 뒤 일선 부대에 배치될 예정이다. 전역 예정일은 2024년 6월 12일이다.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고독사 문제의 대책으로 일본의 ‘도키와다이라(常盤平)’식 해법이 잘 알려져 있지만 거긴 자치회장을 중심으로 한 주민 간의 끈끈한 연대가 있어 가능했던 거예요. 무턱대고 일본을 따라 ‘커뮤니티를 되살리자’는 식의 정책으론 문제 해결이 어렵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고독사 담론을 비교 연구하는 일본 규슈대 한국연구센터의 오독립 학술연구원(43·사진)은 8일 동아일보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도키와다이라’는 일본 지바(千葉)현 마쓰도(松戸)시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다. 1960년대 약 5000가구가 입주해 젊고 수입이 비교적 높은 이른바 ‘단지족’의 터전이 됐다. 시간이 흘러 2000년대로 접어들자 주민 10명 중 3명이 65세 이상일 정도로 고령화됐다. 단지에서 외롭게 죽음을 맞는 이가 많아지자 주민들은 머리를 맞대고 자치회장을 중심으로 ‘고독사 제로 작전’을 펼쳤다. 열쇠점, 신문판매점 등과 협력해 긴급 연락망을 구축했고, 쉼터인 ‘이코이(휴식) 살롱’을 열어 사람들이 모이도록 했다. 이런 자구책은 2007년 커뮤니티 재활성화를 골자로 한 일본 후생노동성의 ‘고립사 방지 추진 사업’의 모델이 됐다. 우리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고독사 대책도 이 같은 일본의 사례를 바탕으로 지역 사회의 연결망을 촘촘히 하는 데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그러나 오 연구원은 “2000년 이후 최근까지 일본 내 고독사는 꾸준히 증가했다”며 “주민 간 관계 맺기를 강조하는 고독사 대책은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일본 도쿄도 감찰의무원 자료에 따르면 도쿄 내 고독사는 2020년 6096명으로 2003년(2861명)에 비해 2배 이상으로 늘었다. 오 연구원은 “일본에선 혼자 맞는 죽음을 대비하는 ‘슈카쓰(終活)'나 고독사 뒤처리를 부탁하는 내용을 담은 ‘엔딩노트’가 유행하는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은 ‘죽음을 막는 것’에 초점을 뒀다가 실패한 일본의 고독사 대책을 되풀이할 게 아니라 1인 가구에 대한 안정적인 생애주기별 지원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같은 1인 가구라도 65세 이상은 고령자 대상 복지제도의 혜택을 받지만 중장년층은 사업 실패 등을 겪으면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고립되기 쉽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그는 최근 서울대 일본연구소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관련 내용을 발표했다.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으로 불리는 불황으로 복지 지출을 줄여야 했기에 커뮤니티 중심의 고독사 대책을 강조해왔던 것입니다. 정부가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중장년층을 적극 찾아내야 고독사로 이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인간은 왜 얼굴에 색을 칠하고 그림을 그렸을까. 화장의 시작은 단순히 얼굴을 아름답게 꾸미는 데 있지 않았다. 남아프리카 동굴에서 발견된 붉은 ‘오커’(황토)는 수만 년 전 사람들이 몸과 얼굴에 발라 집단의 소속임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오커를 바르는 행위를 통해 고대인은 적에게 맞설 용기도 얻었다고 한다. 이집트인은 검은 먹 성분의 재료인 ‘콜’을 눈에 발라 보호하고자 했다. 1912년 세상에 알려진 이집트 여왕 네페르티티(기원전 1340년)의 흉상은 눈가가 검게 칠해져 있다. 오늘날 눈매를 강조한 화장과 흡사하다. 동아시아 일부 지역에서는 치아를 검게 물들이기도 했다. ‘흑치’는 악령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이며, 아름다움과 고급스러움의 표현이었다. 세계적 화장품 기업 랑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저자가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일한 내공을 살려 화장의 기원부터 ‘뮤즈’가 된 인물, 뷰티 산업의 발전사 등을 정리했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전 세계 문명을 넘나들며 화장의 역사를 파헤친다. 진화심리학을 빌려 화장을 설명하기도 한다. 밝고 투명한 피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얼굴을 치장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목표였다. 그리스와 중국이 서로의 존재를 몰랐던 고대에도 두 문명은 모두 피부 미백을 위해 납 성분을 사용했다. 저자는 ‘하얀 얼굴’을 선호하는 건 피부 빛깔로 생식능력을 파악하려는 습성과 관계가 있다고 설명한다. 배란기 여성의 피부는 월경 중에 비해 밝아지고, 임신 후엔 피부색이 짙어진다. 이 때문에 밝은 피부가 젊음과 건강한 생식능력의 상징으로 여겨졌다고 말한다. 밝고 하얀 피부를 가지려면 볕에 그을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점에서 상류 계급의 표시이기도 했다. 각 시대의 화장법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뮤즈도 소개한다. 시대의 아이콘이 된 이들을 따라 화장하는 행위는 어쩌면 집단적 소속감을 느끼기 위한 본능적 욕구일 수도 있다. 저자는 심리학자 엘레인 슬레이터의 말을 인용하며 화장의 본질을 되새긴다. “화장 행위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한쪽 끝에 만화에 가까울 정도로 결점 없는 모습이 있다면 반대쪽 끝에는 민얼굴이 있다. 그리고 중간에는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 아닌, 자신의 가장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일상의 화장이 존재한다.” 여성의 참정권 확보, 피임약 도입 등 여성의 자율성 확대와 미용 산업의 부흥은 역사적으로 맞물려 있다고 강조한다. 화장이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비난받던 시기는 대체로 여성이 가장 억압받던 시기와 일치했다. 저자는 화장의 역사적 맥락과 의미를 확장하며 뷰티산업이 미적 기준을 획일화한다는 비판에 맞서고자 한다. “이상적인 방식을 따라야 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아름다움이 사회에서 용인된다면 화장은 권력 분산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완벽한 얼굴’이란 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인간은 왜 얼굴에 색을 칠하고 그림을 그렸을까. 화장의 시작은 단순히 얼굴을 아름답게 꾸미는 데 있지 않았다.남아프리카 동굴에서 발견된 붉은 ’오커’(황토)는 수만 년 전 사람들이 몸과 얼굴에 발라 집단의 소속임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오커를 바르는 행위를 통해 고대인은 적에게 맞설 용기도 얻었다고 한다. 이집트인은 검은 먹 성분의 재료인 ‘콜’을 눈에 발라 보호하고자 했다. 1912년 세상에 알려진 이집트 여왕 네페르티티(기원전 1340년)의 흉상은 눈가가 검게 칠해져 있다. 오늘날 눈매를 강조한 화장과 흡사하다. 동아시아 일부 지역에서는 치아를 검게 물들이기도 했다. ‘흑치’는 악령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이며, 아름다움과 고급스러움의 표현이었다.세계적 화장품 기업 랑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저자가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일한 내공을 살려 화장의 기원부터 ‘뮤즈’가 된 인물, 뷰티 산업의 발전사 등을 정리한 책 ‘메이크업 스토리’(화장의 기나긴 역사)를 6일 펴냈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전 세계 문명을 넘나들며 화장의 역사를 파헤친다. 진화심리학을 빌려 화장을 설명하기도 한다. 밝고 투명한 피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얼굴을 치장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목표였다. 그리스와 중국이 서로의 존재를 몰랐던 고대에도 두 문명은 모두 피부 미백을 위해 납 성분을 사용했다. 저자는 ‘하얀 얼굴’을 선호하는 건 피부 빛깔로 생식능력을 파악하려는 습성과 관계가 있다고 설명한다. 배란기 여성의 피부는 월경 중에 비해 밝아지고, 임신 후엔 피부색이 짙어진다. 이 때문에 밝은 피부가 젊음과 건강한 생식능력의 상징으로 여겨졌다고 말한다. 밝고 하얀 피부를 가지려면 볕에 그을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점에서 상류 계급의 표시이기도 했다.각 시대의 화장법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뮤즈도 소개한다. 시대의 아이콘이 된 이들을 따라 화장하는 행위는 어쩌면 집단적 소속감을 느끼기 위한 본능적 욕구일 수도 있다. 저자는 심리학자 엘레인 슬레이터의 말을 인용하며 화장의 본질을 되새긴다. “화장 행위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한쪽 끝에 만화에 가까울 정도로 결점 없는 모습이 있다면 반대쪽 끝에는 민얼굴이 있다. 그리고 중간에는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 아닌, 자신의 가장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일상의 화장이 존재한다.”여성의 참정권 확보, 피임약 도입 등 여성의 자율성 확대와 미용 산업의 부흥은 역사적으로 맞물려 있다고 강조한다. 화장이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비난받던 시기는 대체로 여성이 가장 억압받던 시기와 일치했다.메이크업 아티스트로 활동중인 저자 리사 엘드리지는 화장의 역사적 맥락과 의미를 확장하며 뷰티산업이 미적 기준을 획일화한다는 비판에 맞서고자 한다. “이상적인 방식을 따라야 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아름다움이 사회에서 용인된다면 화장은 권력 분산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완벽한 얼굴’이란 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1970년대 여성의 대표적 저임금 직업 중에 ‘다방 레지(레지스터)’가 있었다. 당시 영화에서 다방 레지는 지방에서 무작정 상경한 여성의 표상으로 다뤄졌다. 다방과 커피, 여성이 하나로 이어지는 프레임이 만들어진 건 당시 ‘레지’를 통해서였다. 반면 다방이라는 같은 공간에서 남성은 커피를 소비하는 지식인으로 표현됐다. 커피만큼 젠더와 밀접하게 관련된 사물도 드물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1861년 조선에 처음 전해져 일상 문화로 자리 잡은 커피를 통해 우리 사회 젠더와 인권 문제 등을 분석한 ‘한국의 커피 수용과 변천’(사진)을 지난해 12월 펴냈다. 공동 저자인 박건 동국대 인구와사회협동연구소 연구초빙 교수(사회학자)는 우리 사회에서 ‘커피의 젠더화’ 과정을 살폈다. ‘커피 심부름’은 여성 노동자가 처했던 차별적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용어다. 국내에서도 1970년 인스턴트 커피 제품이 생산되기 시작됐고, 1979년 커피자판기가 등장했지만 여성은 커피 제조 노동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대학이 비서학과를 신설하고, 여군이 여성을 대상으로 ‘차 끓이기’ 교육을 시행한 것도 그러한 사회적 인식이 투영된 사례다. 여성 노동자를 결혼하면 곧 퇴사할 보조노동자로 바라보면서 직장 내 여성에게 붙은 ‘미스김’ 꼬리표는 쉽게 떼어지지 않았다. 커피전문점이 골목마다 있고, 1인당 매일 평균 한 잔 이상의 커피를 마시는 오늘날에는 여성이 더 이상 ‘커피 타는’ 존재로 여겨지지 않는다. 하지만 소비자로서도 커피를 마시는 여성에게는 ‘된장녀’라는 비하적 이미지가 덧씌워졌다고 박 교수는 분석한다. 남성은 커피 제조 전문가인 바리스타로 인식된다. 세계 바리스타 대회에서 우승한 남성 바리스타의 이름을 딴 유명 커피 프랜차이즈점도 이러한 인식의 확산에 기여했다. 커피를 둘러싸고 여전히 불평등한 젠더적 이미지가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박 교수는 “커피는 중립적 액체로 보이지만 생산과 유통, 제조, 소비 과정에서 젠더 불평등의 양상이 겹쳐진다”면서 “현재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통시적으로 보여주는 대표 상징물”이라고 말했다.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계미년(癸未年) 8월 10일 대왕년(大王年) 남제왕(男弟王)이 오시사카궁에 있을 때 사마(斯麻·무령왕의 이름)가 장수를 염원하면서(念長寿)….” 일본의 국보인 청동거울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사진)’에는 이 같은 내용의 48개 글자가 원형으로 새겨져 있다. 고대 일본 천황을 신주로 모시는 스다하치만 신사에서 1800년대에 발견된 것이다. 국내 학계에서는 백제 무령왕(재위 501∼523년)이 계미년인 503년 일본 게이타이(繼體) 천황(재위 507∼531년)에게 보낸 것으로 보는 의견이 많았다. 이를 바탕으로 현 일본 왕실의 직계 조상으로 평가되는 게이타이 천황이 무령왕의 친동생이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홍성화 건국대 교수는 지난해 12월 27일 동아시아비교문화연구회와 동아시아고대학회가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연 학술대회 ‘백제와 동아시아의 대외관계’에서 “인물화상경에 나온 남제왕은 무령왕의 동생인 동성왕”이라고 주장했다. 홍 교수는 청동거울의 ‘미년’ 앞 글자가 십간의 ‘계’가 아닌 어조사 ‘矣(의)’라고 봤다. 글이 십이지인 ‘미년’으로 시작해 어조사(의)로 끝난다는 것. 또 기존에는 ‘목숨 수(壽)’의 약자(寿)라고 봤던 글자도 ‘받들 봉(奉)’자로 해석했다. 이 같은 분석을 바탕으로 그는 해당 글이 “기미년(己未年)인 479년, 백제의 삼근왕이 사망하고 동성왕이 즉위(11월)하기 전인 8월 10일에 무령이 일본에 체류하던 동성에 대한 왕위계승권을 인정하면서 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작곡 이론을 잘 모르는 저희가 노래를 만든다는 게 신기해 자꾸만 해보게 돼요.” 지난해 12월 26일 서울 강남구 대청중학교 1학년 교실. 이승하 군(14)은 친구들이 인공지능(AI) 작곡 앱 ‘뮤지아’(뮤직+AI)를 활용해 만든 노래를 들으며 음악 수업에 빠져 있었다. 이 군은 “학원 숙제하다가 힘들면 노래를 만들고 들으면서 스트레스를 푼다”며 웃었다. 학생들은 태블릿PC로 뮤지아를 이용해 자유자재로 작곡했다. 피아노 건반이 그려진 뮤지아 사이트에서 화음(코드)을 눌러보며 마음에 드는 멜로디가 만들어지면 이를 음성 편집·처리 사이트인 ‘밴드랩’으로 옮긴 뒤 악기음 추가, 음역대 조절 등을 거쳐 곡을 완성했다. AI를 수업에 도입한 음악교사 강봉정 씨(32)는 ‘사교육 1번지’로 불리는 대치동에서 학생들이 음악에 흥미를 갖게 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안창욱 광주과학기술원(GIST) 전기전자컴퓨터공학부 교수가 2017년 제자들과 창업한 AI 음악 기술 기업 ‘크리에이티브마인드’에 도움을 요청했다. 강 씨는 “학생들에게 일단 ‘성에 차는 곡’을 만드는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었다”며 “곡을 만들며 흥미를 느끼면 이론적 지식도 더 쉽게 흡수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2학기의 마지막 음악 수업이 진행된 이날, 이 반 학생 31명이 지난해 10∼12월 만든 곡에 대한 품평회가 열렸다. 투표를 통해 가장 좋은 곡으로 꼽힌 통통 튀는 멜로디의 곡 ‘수행평가’(김서준 군)가 흘러나오자, 학생들은 “노래가 밝은 성격의 서준이를 닮았다. 즐겁고 신날 때 듣고 싶은 노래”라며 리듬에 맞춰 고개를 흔들었다. 이날 수업을 참관한 안 교수는 ‘AI 작곡 기술의 유용한 점’을 묻는 학생들의 질문에 “사람을 돕는 것”이라고 말했다. 안 교수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취향이나 선호가 모여 AI 작곡의 모티브가 된다”며 “AI의 역할은 창의력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재료를 순식간에 만들어 공급함으로써 사람이 더 고차원적 작업을 하거나 개인의 취향을 살리는 데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강조했다.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