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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역시 책을 쓰기 전까지 ‘늑대의 아이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역사에서 잊힌 이야기였죠.” 리투아니아 작가 알비다스 슐레피카스(57·사진)는 6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난달 6일 국내에 출간된 장편소설 ‘늑대의 그림자 속에서’(양철북)는 리투아니아에서도 생소한 이야기였다는 것이다.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1939∼1945년)이 끝나고 식량을 구하기 위해 국경을 넘나들었던 동프로이센 고아를 뜻하는 ‘늑대의 아이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동프로이센은 과거 독일의 영토였으며 지금은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의 일부 지역이다. 1944년 이 지역을 점령한 소련군이 독일인을 살해하고 핍박한 뒤 1만 명의 고아가 발생했다. 하지만 독일인이 피해자인 탓에 기억에선 지워졌다. 슐레피카스는 1996년 처음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늑대의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은 뒤 15년에 걸쳐 취재하고 집필해 2011년 리투아니아에서 이 소설을 펴냈다. 그는 “살아남은 ‘늑대의 아이들’을 만나 설득했다. 오래된 증언의 신뢰성을 확인하기 위해 다양한 각도에서 자료를 수집했다”고 말했다. 소설엔 ‘늑대의 아이들’의 피폐한 삶을 날것 그대로 담았다. “독일인이라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 죽여라!”라고 외치는 소련 군인들,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와 뼛속을 파고드는 추위에 떨며 부모를 그리워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생생히 그렸다. 그는 “전쟁은 전장에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군인뿐 아니라 아무 잘못 없는 아이들의 삶까지도 파괴한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영국 더 타임스는 “역사 속에서 잊힌 비극을 흔들림 없이 묘사했다”며 그해 ‘최고의 새로운 역사소설’로 평가했다. 슐레피카스는 “‘늑대의 아이들’은 길거리에서 쓰레기를 주워 먹었다. 대부분 노예처럼 일하고, 나치 독일인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부끄러워하며 살았다”고 했다. “‘늑대의 아이들’은 자식들에게도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하지 못했죠. 소설이 출간된 뒤에야 인정받았고, 이들은 비로소 주변에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놨습니다. 소설 덕에 리투아니아 학교에서 역사 시간에 ‘늑대의 아이들’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는 이 소설로 리투아니아에서 ‘국민 작가’로 불리게 됐다. 주한독일문화원 초청으로 이날 처음 한국을 방문한 그는 “리투아니아의 국가명은 리투아니아어 ‘lietus’(비)와 관련 있다. 겨울비가 내리는 날 주한독일문화원에서 한국 독자를 만나니 운명적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고, 아이들은 죽고 있다.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우크라이나 아이들이 희생되는 걸 보면 정말 끔찍합니다. 여전히 ‘늑대의 아이들’이 발생하는 거죠. 물론 어떤 문학이든 사람을 죽이는 것을 막지 못해요. 하지만 참상을 기록하지 않으면 사람이 죽었다는, 고통받았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게 되죠. 정치와 경제가 하지 못하지만, 문학만이 할 수 있는 건 기억하는 것 아닐까요.”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황석희 영화번역가(44·사진)는 2017년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의 자막을 번역한 뒤 한 청각장애인으로부터 페이스북 메시지를 받았다. 영화의 주인공 엘라이자를 ‘농아(聾啞)’라고 번역했는데 잘못됐다는 것이었다. 그는 처음엔 억울했다. 표준국어대사전엔 ‘청각 장애인과 언어 장애인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돼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면서 장애인을 가리키는 단어는 ‘농아인’으로 번역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납득하게 됐다. 그는 제작사에 연락해 주문형비디오(VOD)라도 자막을 바꿔 달라고 요청했다. 영화사 입장에선 귀찮은 일이었지만 ‘번역 AS(애프터서비스)’로 유명한 그의 설득에 결국 그 단어는 모두 바뀌었다. 그는 지난달 17일 출간된 에세이 ‘번역: 황석희’(달)에 이 에피소드를 쓰며 딸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라고 했다. “아빠는 반성에 자존심 같은 거 없어.” 황 번역가는 4일 전화 인터뷰에서 “18년 전 번역을 시작할 때부터 최고의 번역가가 되진 못해도, 관객과 가장 가까운 번역가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영화 번역에서 ‘오역’의 기준이란 굉장히 복잡합니다. 사전적 정의를 따라도 틀릴 수 있고, 연출자의 의도를 유추해야 하니까요. 다만 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으로 번역 논란에 대해 관객을 설득하고 소통하려 해요.” 그는 원작 속 선을 넘나드는 말장난을 한국어의 말맛과 동시대 문화적 특성을 반영한 이른바 ‘초월 번역’으로 주목받았다. 영화 ‘데드풀’(2016년)에서 농담으로 가득한 오프닝 크레디트를 한국식 욕설로 번역한 것이 대표적이다. 출연진을 가리킨 자막 ‘God’s perfect idiot’를 ‘신이 내린 또라이’로, 제작자를 가리킨 자막 ‘Asshats’를 ‘호구들’이라고 번역해 화제가 된 것이다. 또 ‘스파이더맨: 홈커밍’(2017년)에선 스마트폰 문자 속 이모지인 ‘스마일’과 ‘주먹’을 자막에 넣었다. 가로 자막 한 줄에 넣을 수 있는 글자 수인 12자를 최대한 활용한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그는 “자막은 넓은 캔버스(화면 전체)가 아닌 작은 울타리(화면 맨 아래)에 넣어야 하니 물리적 한계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며 “여태 번역한 영화 자막 100만 개 중 실험적 시도는 10개 안팎에 불과하다. 전통적 틀에서 벗어날 땐 오히려 더 주의를 기울인다”고 했다. 신간엔 그가 영화계에서 일하며 겪은 여러 에피소드가 담겼다. 그는 2022년 드라마 ‘파친코’에선 자막이 아니라 대사 번역을 맡았다. 제작사가 애플TV플러스고, 배경은 한국인 만큼 영어로 쓰인 대사를 한국어로 바꿔야 했다. 그는 “과거 해외 작품에선 한국인이 듣기엔 말도 안 되는 한국어 대사가 많았다”며 “해외 제작사들이 한국을 배경으로, 한국인이 등장하는 작품을 내놓으면서 대사 번역으로 영역이 넓어지고 있다”고 했다. 생성형 인공지능(AI) ‘챗GPT’가 번역하는 시대, 영화번역가의 미래는 있을까.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답했다. “번역이 올바른지, 틀린지 채점하는 수준을 넘어선다면요. (사람의) 번역이 영화의 맥락과 시대의 흐름을 어떻게 반영했는지 비평을 하는 수준까지 이른다면 AI를 이길 수 있어요.”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시집에 실은 작품은 대부분 웃기기보단 슬픈 이야기예요. 모든 것이 꼬일 때, 기대감이 실망으로 바뀌었을 때 주로 썼죠.” 개그맨 양세형(38)은 5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4일 시집 ‘별의 길’(이야기장수)을 출간한 계기를 이렇게 밝혔다. 그는 “내게 시는 재미난 놀이이자 감정을 표출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수단”이라며 “방송과 달리 내면엔 여리고 감성적인 면도 있다. 멋진 마흔 살이 되고 싶어 시집을 낼 결심을 했다”고 말했다. 2003년 개그맨으로 데뷔한 그는 SBS ‘웃찾사(웃음을 찾는 사람들)’, tvN ‘코미디빅리그’ 등 개그, 예능 프로그램에서 특유의 까부는 캐릭터로 20년간 활동했다. 신간에는 88편의 시를 실었다. “대머리 가발을 쓰고/수염을 그리고/다크서클을 내리니//오늘은 빵빵 터지겠구나”(‘코미디언’ 중)라며 공연이 끝난 뒤의 허탈한 심정을 그렸고, “걷다가 그냥 걷다가/보고 싶어 눈을 감았어요./오늘은 어제보다 더 반갑네요”(‘아빠가 해주는 삼겹살김치볶음 먹고 싶어요’ 중)라며 2014년 암으로 세상을 뜬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다. 그는 “주변에 짧은 글을 써서 선물했는데 이런 습관이 이어져 시집을 펴내게 됐다”며 “나태주 시인처럼 한눈에 보고, 바로 이해할 수 있는 ‘편한 시’를 쓰고 싶다”고 했다. 시집 인세 전액은 위기에 빠진 청소년들을 돕는 등대장학회에 기부할 계획이라고 한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문고본 세계문학선으로 잘 알려진 출판사 범우사의 창업자 윤형두 회장(사진)이 3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8세. 1935년 일본 고베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6년부터 월간 ‘신세계’에서, 1961년 민주당 당보 ‘민주정치’에서 기자로 일했다. 1963년 동국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1966년 범우사를 세웠다. 범우사는 1970년대 범우고전선, 1980년대 비평판 세계문학선, 범우문고 등을 내며 국내외 고전을 소개했다. 고인은 50여 년 동안 법정 스님의 ‘무소유’(1976년), 아일랜드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2002년) 등 약 5000종의 단행본을 출판했다.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 한국출판학회 회장, 한국출판협동조합 이사장, 한국출판문화진흥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한국출판문화상을 4차례, 대통령 표창을 1차례 받았다. 2009년 국제인명센터(IBC)의 ‘21세기를 대표하는 2000명의 지식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사노라면 잊을 날이’(1979년), ‘책의 길 나의 길’(1990년) 등 책 20여 권을 썼다. 유족으로는 부인 강영매 전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아들 재민 범우사 대표, 재준 서울디지털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딸 성혜 윤아트 대표가 있다. 빈소는 서울 세브란스병원, 발인은 6일 오전 10시. 02-2227-7500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창작무용 공연 ‘격(隔·사진)’이 서울 종로구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8일 오후 8시와 9일 오후 4시 이틀 동안 열린다. ‘격’은 러시아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1882∼1971)의 발레음악 ‘봄의 제전’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삶을 탄생, 희생, 소멸이란 키워드로 표현했다. 춤, 음악, 영상 미디어의 장르 간 경계를 허문 시각적 연출이 돋보인다. 위보라 ‘알.에이컴퍼니’ 대표는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걸음’을 무대 움직임으로 확장했다. 무용수 각자의 걸음걸이도 있겠지만, 걸음에 대한 인간의 공통된 이야기를 보편적으로 풀어냈다”고 했다. 4만∼5만 원.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오픈 스페이스가 과하면 평안의 내밀성을 잃어버리고, 너무 가리면 수도원처럼 폐쇄적 공간이 된다.” 이은석 경희대 건축학과 교수(61)는 1일 출간한 책 ‘건축가 이은석의 환대’(픽셀하우스·사진)에서 종교시설 건축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이렇게 밝혔다. 그가 설계한 서울 종로구 새문안교회처럼 개방과 내밀함 사이의 균형을 적절히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그는 신간에서 ‘들림과 열림’ ‘자연과 묵상’ 등 7개 키워드로 종교시설 건축이 나아갈 길에 관해 설명했다. “(종교시설이) 현대적 환대 개념인 공공성으로의 전환을 꾀해야 할 때”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4만5000원.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1960년대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끈 김수용 감독(사진)이 3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4세. 1929년 경기 안성시에서 태어난 고인은 6·25전쟁 때 통역장교로 복무했으며, 정전 이후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 배치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1958년 ‘공처가’로 감독에 데뷔해 코미디 영화를 주로 찍다가 1963년 ‘굴비’를 기점으로 한국 사회의 현실을 다루기 시작했다. 문예영화 붐을 이끈 ‘갯마을’(1965년), 영화계의 현실을 담은 ‘어느 여배우의 고백’(1967년),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재해석한 ‘안개’(1967년) 등으로 주목받았다. 가난에 시달리는 소년 가장의 수기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년)는 개봉 당시 서울에서 28만5000명의 관객을 동원하고 대만으로 수출됐다. 1999∼2005년 초대·2대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 제33대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을 지냈다. 유족으로는 부인 공숙영 씨, 아들 석화 전 서울대 어린이병원장과 세화 전 용인대 이과대 학장, 딸 정화 심리상담사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발인은 5일 오후 1시. 02-2072-2020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당신, 길거리 흡연은 규칙 위반이야’라고 주의를 줘본들 적반하장 격으로 오히려 화를 내서 싸움만 날 테니까.” 정신과 의사 이라부에게 회사원 가쓰미가 찾아와 하소연했다. 가쓰미는 규칙을 어기는 이들에 대한 분노를 억누르고 있다. 과호흡 발작까지 간혹 일으킬 정도다. 그러나 타인에 대해 지적하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스트레스만 받고 있다. 이라부는 분노 조절이 안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금방 화를 내는 것도 문제지만, 제대로 화를 안 내는 것도 문제”라고 꼬집었다. 이라부는 태평하게 웃으며 “화를 내면 된다”고 진단했다. 가쓰미는 며칠 뒤 전철 건널목에 갔다. 그곳에서 일본의 국민체조로 불리는 라디오 체조를 시작했다. 두 발 뛰기로 전신을 가볍게 흔들고, 팔과 다리를 접었다 폈다 했다. 주위에선 사람들이 휴대전화로 영상을 찍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가쓰미는 신경 쓰지 않으며 소리쳤다. “이렇게 화창한 날씨는 거의 없단 말이야! 바다가 반짝이는 시간대는 지금뿐이야!” 가쓰미는 행복해졌을까. 단편 ‘라디오 체조 2’의 내용이다. 국내에서도 적지 않은 인기를 모았던 ‘공중그네 시리즈’의 4편이다. 일본 대중문학상인 나오키상을 받은 ‘공중그네’와 ‘인 더 풀’, ‘면장 선거’ 등 3권은 국내에서 총 100만 부 팔렸다. 일본에서 2006년 ‘면장 선거’, 올해 ‘라디오 체조’가 출간됐으니 이라부가 17년 만에 복귀한 셈이다. 신간엔 5편의 단편을 담았다. 컴퓨터만 벗어나면 불안증을 앓는 주식 투자자(단편 ‘어쩌다 억만장자’), 원격 수업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대학생(단편 ‘퍼레이드’)으로 마음이 피폐한 현대인을 그렸다. 이라부는 웃음을 선사하며 우울증을 치료하고(단편 ‘해설자’), 광장공포증에 걸린 피아니스트에게 밴드 공연에 참여해보라고 따뜻하게 조언하며(단편 ‘피아노 레슨’) 이를 해결한다. 과거 작품의 연장선이라는 한계는 있다. 하지만 이라부의 유쾌한 진단을 받으면 옛 친구를 만난 듯한 기분이 든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최근 일본 시즈오카현 ‘후지산세계유산센터’를 들렀을 때 눈길이 가는 소개 문구가 있었다. 후지산이 201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건 일본의 예술 작품 덕이라는 것이다. 후지산을 묘사하고 예찬한 작품들이 유네스코의 마음을 끌었고, 등재에 큰 역할을 했다는 설명이었다. 특히 회화, 하이쿠뿐 아니라 다자이 오사무(1909∼1948) 같은 근대 문학 작가들의 작품들이 영향을 끼쳤다고 쓰여 있었다. ‘다자이, 다자이’는 일본의 대표적인 사소설 작가인 다자이의 자전적 작품을 엮은 선집이다. 특히 눈길이 가는 건 1938년이 배경인 ‘부악백경’이란 단편이다. 부악은 후지산의 별명이다. 백경은 100가지 풍경이란 의미다. 다자이가 후지산 기슭에서 2개월간 지내면서 썼다. “방의 커튼을 살짝 걷어 유리창 너머로 후지를 본다. 달이 있는 밤은 후지가 창백하게 물의 정령 같은 모습으로 서 있다. 나는 한숨을 쉰다. 아아, 후지가 보인다. 별이 크다. 내일은 맑겠구나.” 주인공 ‘나’는 어느 밤 후지산을 바라보고 내일 날이 맑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시 살며시 커튼을 치고 그대로 잠이 들려다가 만다. “맑다고 해서 딱히 이 몸에 별다른 것도 없는데, 하고 생각하니 웃겨서, 혼자 이불 속에서 씁쓸히 웃는다”고 냉소할 수밖에 없는 게 자신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다자이는 1935년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1936년 일본 문학계 최고 권위의 문학상 중 하나인 아쿠타가와상을 타지 못해 좌절했다. 복막염으로 입원하고 마약 중독에 시달리기도 했다. 소설에선 삶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후지산의 절경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사실 ‘나’가 후지산을 처음부터 좋아한 건 아니다. 처음에는 후지산의 풍경을 마치 목욕탕 벽에 그려진 그림 같다고 경멸한다. “연극의 무대 배경 같은 풍경”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후지산의 풍경에 젖는다. 후지산 인근 사람들과 교류하고 한 아가씨와 결혼식까지 치르며 닫혀 있던 ‘나’의 마음은 점차 열린다. 후지산이 근사하다고 감탄할 정도로 마음이 누그러진다. 다자이가 주목하는 건 자연의 영속성이다. 후지산을 깎아내리다가 아름답다고 말하며 갈대처럼 휘날리는 ‘나’의 마음과 달리 후지산은 말없이 서 있을 뿐이다. ‘나’는 “순간마다 변하는 내 마음속의 애증이 부끄러워지면서 역시 후지산은 멋지다”고 돌아본다. 다자이가 후지산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다. 지난달 24일 사단법인 제주학회는 ‘한라산의 문화유산적 가치와 활용 방안 탐색’을 주제로 국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한라산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생물권보전지역, 세계지질공원 등으로 인정받았지만, 예술과 인문학적 가치는 제대로 발견되지 못했다는 평가 때문이다. 이날 학술대회에선 문화유산적 가치를 부각해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사실 아직 한라산 하면 외국인들이 바로 떠올리는 문학작품은 많지 않다. 그러나 언젠가 정지용(1902∼1950)의 시 ‘백록담’을 읽고 한라산을 찾았다는 이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산다는 것은 괴로운 것”, “천국에는 무료함밖에 남아 있지 않다”…. 독일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1788∼1860)가 남긴 명언들이다. 삶의 희망 따윈 인정하지 않는 독설가의 충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삶은 진자처럼 고통과 무료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데, 사실 이 두 가지가 삶의 궁극적인 요소”라는 그의 격언을 읽다 보면 비관주의에 빠질 듯하다. 최근 출판계에 쇼펜하우어 신드롬이 불고 있다. 철학 교양서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유노북스)는 온라인 서점 예스24와 알라딘에서 11월 3∼4주, 온라인 교보문고 11월 3주 종합 1위를 차지했다. 쇼펜하우어의 격언을 모은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페이지2),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포레스트북스)도 각각 11월 4주 예스24 종합 4, 7위에 올랐다. ‘마흔에…’는 15만 부가 판매됐고, ‘남에게…’는 5만 부가, ‘당신의…’는 7만5000부가 각각 팔렸다. 독자 반응도 뜨겁다. “자기계발서의 거짓 위로에 지쳤는데 철학책에 위로받았다”, “거침없는 ‘팩폭’(팩트폭격)에 감동했다”는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선 독서를 인증하고, 격언을 퍼나르는 이도 많다. 200여 년 전 ‘꼰대’ 철학자가 남긴 말에 2023년 한국 독자들이 반응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고통’이라는 철학으로 유명하다. 부, 명예 등 가짜 행복을 좇는 고통을 넘어 자기 자신을 새롭게 거듭나게 하는 과정에서 겪는 진짜 고통을 경험해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염세주의자라는 시각도 있지만,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가 “모든 희망을 잃고도 진리를 추구”한 사람으로 평가할 정도로 행복에 대한 현대 철학의 기틀을 세웠다. 쇼펜하우어 관련 책이 주목받기 시작한 건 ‘마흔에…’가 최근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 소개된 영향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인기가 지속되는 건 “하고자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등 명확한 조언이 독자를 끌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서선행 포레스트북스 본부장은 “‘괜찮다’, ‘잘하고 있어’라는 하나 마나 한 위로보단 명확한 현실 인식에 바탕을 둔 조언이 통한 것”이라고 했다. 박찬국 서울대 철학과 교수는 “쇼펜하우어는 유머와 예리함, 삶을 꿰뚫는 시각을 갖춘 문장을 썼다”고 했다. “천국과 지옥의 경험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 같은 문장이 독자를 매료시켰다는 것이다. 팬데믹을 거치며 인간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독자들이 늘어난 점이 영향을 미쳤다는 의견도 있다. ‘마흔에…’를 쓴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은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추운 날씨에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상대의 가시를 견딜 수 있는 적당한 거리를 찾는 고슴도치에 비유했다”며 “직장, 가정, 학교뿐 아니라 나이 들어 홀로 살아가며 관계와 고독에 대해 고민한 독자가 반응한 것 같다”고 했다. 알라딘에 따르면 ‘마흔에…’ 독자의 45%, ‘남에게…’, ‘당신의…’ 독자의 35%가 40대다. 2008년 ‘30대 위로’ 열풍을 불러왔던 ‘서른살이 심리학에게 묻다’(김혜남 지음·갤리온)를 읽었던 독자들이 이제 40대가 돼 쇼펜하우어에서 조언을 찾는다는 분석도 있다. 이현정 유노북스 편집팀장은 “무게 있는 독서에 관심이 깊은 40대가 철학에서 인생의 답을 찾고 있다”고 했다. 김현정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담당은 “한 해를 마무리할 때를 맞아 삶에 대한 고찰과 지혜를 얻고자 하는 분위기도 반영됐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부동산 경매에 뛰어드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경매 초보자들은 기초적인 지식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무리하게 경매에 뛰어들어 큰 손해만 보고 물러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제대로 부동산 경매를 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10년 동안 수천 건의 경매사건을 다뤄온 주희진 변호사(사법연수원 44기)는 신간 ‘물어보기 부끄러워 묻지 못한 부동산 경매’(새로운제안)에서 “경매로 부동산을 산다는 건 공인중개사한테 부동산을 소개받는 게 아니라 법원에서 소개받아 사는 것”이라고 강조한다.낙찰받고 싶은 부동산에 아무런 법률적 하자가 없는지 알기 위해서는 경매와 관련한 부동산 법률용어를 이해해야 한다. 직접 부동산 주변을 둘러보고, 부동산 가치에 영향을 미칠만한 요인이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이런 문제는 법률적인 내용을 알지 못하면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주 변호사는 신간에서 부동산 경매에서 가장 기초적인 부동산 법률용어부터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 또 경매사건 의뢰인들에게 생각하지 못하게 손해가 났던 상황이 무엇인지, 독자들이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무엇을 꼭 알고 있어야 하는지도 알려준다.주 변호사는 나아가 ‘고수들의 세계’도 소개한다. 싼값에 낙찰받아 하자를 고치고 비싸게 되팔아 수익을 극대화하는 ‘특수물건’은 물론 유치권·선순위 가등기·공유지분·법정지상권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초보자라면 피하면 좋을 물건들도 자세하게 알려준다.주 변호사는 한양대 법학과를 조기, 우수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2015년부터 2023년까지 경매사건 전문 로펌에서 경매 사건을 다뤘다. 2019년부터는 ‘열린 아카데미’에서 일반 투자자를 대상으로 경매 강의를 했다. 현재 법무법인 윈스의 파트너 변호사다. 2만 원.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나온 지 오래다. 대학에서 문학, 역사, 철학과는 문을 닫고, ‘문송’(문과여서 죄송합니다)이란 말도 익숙해졌다. 그러나 정말 인문학은 인생에서 전혀 쓸모없을까. 동아일보는 인문학이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사회 문제를 극복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보며 인문학의 저력을 들여다봤다. 4회에 걸쳐 매주 연재한다. “자연과학은 하나의 질문에서 하나의 답을 찾고, 사회과학은 하나의 질문에서 파생된 여러 답 중 타당성 높은 하나의 답을 고르지요. 하지만 인문학은 하나의 질문에 모두가 같은 답을 내놓으면 안 됩니다. 인문학은 모든 사람의 생각이 다 다르다는 다양성을 바탕으로 해요.” 가치는 숫자로 측정되고, 효율이 최고로 여겨지는 시대다. 인문학이 설 자리를 잃고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103)는 27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이렇게 강조했다. “‘삶의 목적’을 묻는 인문학의 가치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인문학이 모든 학문의 뿌리라며 최근 인문학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윤리적, 이성적 판단력을 기르는 인문학의 토대 위에 사회과학, 자연과학이 꽃피었다는 것. 그는 “개인의 모든 활동은 오로지 전체를 위해 존재한다는 전체주의가 범람할수록 인문학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 간 전쟁 등 갈등이 첨예하다”며 “시대를 화해시키기 위해 꼭 필요한 게 인문학”이라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인문학 전도사’다. 전국을 다니며 인문학 강연을 열고, 전공인 철학을 기반으로 문학, 역사학을 버무린 인문학적 사고를 풀어낸다. 에세이 ‘영원과 사랑의 대화’(1961년·김영사), ‘백년을 살아보니’(2016년·덴스토리) 등 60여 년 동안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냈고 여전히 현역 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비결이다. 그는 “기업에서도 부장이나 임원 등 관리자가 인문학적 기반이 없으면 다양한 구성원들의 생각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삼성 등 여러 대기업에서 강의했는데, 특히 임원들이 인문학의 가치를 인정하더군요. 각기 다른 생각을 지닌 구성원을 이끄는 리더십을 기를 방법은 오로지 인문학, 독서입니다.” 김 교수가 인문학에 매료된 건 중학생 때다. 그는 평양 숭실중 3학년 때 시련을 맞았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해 이를 거부하면 학교에 다니지 못하게 됐다. 나중에 시인이 된 동급생 윤동주(1917∼1945)에게 어떡할 거냐고 물으니 “신사참배는 할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도 윤동주를 따라 자퇴했다. 김 교수는 “도서관에 가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책을 읽으며 학업을 대신했다”며 “이때 문학, 역사, 철학책을 셀 수도 없이 많이 읽었다. 독서가 인문학으로 가는 길이었다”고 회고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1878∼1938)의 연설도 그를 인문학의 길로 이끌었다. 당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도산이 요양차 가석방됐는데, 그가 사는 평안남도 대동군 송산리로 와서 연설을 했던 것. 김 교수는 “어릴 적엔 기독교적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신학자를 꿈꿨지만 도산의 연설을 듣고 난 뒤 더 넓은 시각을 지닌 인문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달걀을 깨고 나온 병아리처럼 세상이 다시 보였어요. 도산의 연설과 그때 읽었던 책들이 인생의 거름이 됐죠.” 김 교수는 “평생 철학을 공부했지만 러시아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통해 인간에 대해 알게 됐다. 에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로 판단력을 배웠다”고 했다. 생성형 인공지능(AI) ‘챗GPT’가 등장한 지도 1년이 됐다. 점차 AI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게 된다면 인문학의 빛이 바래지 않을까. 그는 웃으며 어림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AI가 못하는 게 하나 있어요. 휴머니즘이죠. 휴머니즘이 없으면 어른은 약한 아이를 상대로 싸우고, 악(惡)을 악으로 갚습니다. AI가 인간을 위해, 인간이 인간답게 존재하기 위해선 휴머니즘을 세우는 인문학이 사라질 수 없죠.”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소설집 ‘저주토끼’엔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기 힘든 환상소설이 주로 담겨 있다. 그러나 단편 ‘재회’는 예외다. 비현실적인 요소 없이 현실에 단단히 발붙인 소설이기 때문이다. ‘재회’는 대학원 논문을 쓰기 위해 폴란드로 자료 조사를 떠난 한 여자의 이야기다. 여자는 도서관에서 폴란드 남자와 대화한다. 남자는 여자가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책을 읽는 것을 보고 말을 걸었다. 몇 번의 만남 끝에 여자와 가까워진 남자는 자연스레 자신의 할아버지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남자의 할아버지는 나치가 만든 강제수용소 생존자였다. 유대인은 아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군에 의해 수용돼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전쟁이 끝났지만 할아버지는 고통에 시달렸다. 할아버지는 물과 식료품을 오랫동안 아껴가며 먹었다. 집엔 통조림을 가득 채워놓았다. 해가 져도 불을 켜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씻기 위해 물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비상 시 탈출하기 위해 여행 가방을 싸서 현관 옆에 뒀다. 남자는 여자에게 말했다. “할아버지는 이미 지나간 전쟁을, 이미 사라져버린 수용소를 평생 두려워하면서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낸 수용소 안에서 살고 있었던 거야. 할아버지는 죽고 난 뒤에야 정말로 자유롭게 자기 도시의 거리를 걸을 수 있게 됐어.” ‘재회’를 읽으며 여자 주인공에게서 작가 정보라의 모습이 보였다. 정 작가는 미국 예일대에서 러시아 동유럽 지역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폴란드에서 어학연수를 했다. 이후 인디애나대에서 슬라브 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할 땐 폴란드 출신 작가 브루노 야시엔스키(1901∼1938)로 논문을 썼다. 한국에선 폴란드 작가 브루노 슐츠(1892∼1942)의 ‘브루노 슐츠 작품집’(2013년·을유문화사)을 번역했다. 정 작가가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폴란드 작가들의 작품을 읽고, 잠시나마 폴란드에 살며 전쟁의 비극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한 것이 아닐까 싶다. 전쟁에 반대하는 이는 많다. 하지만 이익과 엮일 때 전쟁 반대를 표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올해 전미도서상 시상식을 이틀 앞둔 13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타임스(NYT)에 난 기사를 읽었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 기사는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자들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중동전쟁에 대해 의견을 발표하려 하자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기업들이 전미도서상 후원을 철회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우려가 무색하게 전미도서상 재단은 14일 성명을 통해 “정치적 발언은 전미도서상 역사상 혹은 그 어떤 시상식에서도 결코 전례가 없는 일이 아니다”라며 작가들 편에 섰다. 15일 시상식에서 소설 부문 최종 후보인 미국 작가 알리야 빌랄은 단상에 올라 “우리는 반유대주의와 반팔레스타인 정서, 이슬람공포증을 동등하게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정 작가는 다른 작가들과 함께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동의를 표했다. ‘저주토끼’가 전미도서상 번역문학 부문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재회’에 담긴 작가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아, 망했다. 간장게장이 먹고 싶어.” 어느 날 이사이는 이런 충동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주위 동료들은 고개를 젓는다. ‘게살 맛이 나는 합성 단백질 식품’을 권할 뿐이다. 인간이 살기 위해선 식량이 아니라 음식이 필요하다는 이사이의 말에 동료들은 동의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위로한다. 사실 이사이가 사는 곳이 한국이라면 간장게장을 먹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해외라도 발품을 팔면 될 일이다. 그러나 이사이가 사는 곳은 다름 아닌 화성이다. 화성에 해산물을 들여오려면 바다와 비슷한 인공 생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수조 전체를 방사선 차단 시설 안에 둬야 한다. 특히 생물을 산 채로 화성으로 배송하는 일은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이사이는 “포기하라고 하지 마세요! 우리(화성인)는 계속 원하고 싶은 걸 원할 거예요!”라고 소리친다. 단편소설 ‘위대한 밥도둑’의 내용이다. 인류가 화성으로 이주했을 때 벌어질 법한 일을 상상한 공상과학(SF) 단편소설 6편을 담은 연작소설집이다. 서울대 외교학과에서 학사·석사 학위를 받은 작가는 2020년 한국 외교부의 의뢰를 받아 2년을 연구한 뒤 ‘화성의 행성정치’라는 보고서를 썼다. 화성이 인류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를 인문학으로 탐구한 것이다. 작가가 본업으로 돌아와 문학적으로 풀어놓은 소설들은 처음엔 엉뚱한 상상으로 시작하지만 끝내 독자를 납득시킨다. 화성 이주 초창기 벌어진 첫 살인 사건을 그린 ‘붉은 행성의 방식’부터 인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뒤 개발 제한 구역을 해제할지 여부를 다룬 ‘나의 사랑 레드벨트’까지 인류의 화성 이주 과정을 시기대로 풀어냈다. 지구 기상학자와 화성에 사는 유전학자의 연애를 담은 ‘김조안과 함께하려면’, 화성에서 태어났으나 지구로 이주하는 이의 이야기인 ‘행성 탈출 속도’에선 인간 군상의 모습을 애잔하게 그렸다. ‘행성봉쇄령’처럼 첨예한 행성 정치 문제도 정면으로 다뤘다. ‘작가의 말’에서 “새로 시작한 행성의 문명은 지구에서 우리가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를 가뿐히 초월한 문명이기를” 바란다고 썼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운명에 만약은 없다’(쌤앤파커스)는 노상진 명리학자가 쓴 책이다. 저자는 사주 명리학은 사주팔자를 풀어서 명(命)의 이치, 하늘이 내린 목숨과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말한다. 운명에 깃든 길흉화복을 알아보는 학문이라는 것. 저자는 “사주를 운(運)에 따라 생각이 바뀐다는 표현도 엄밀히 말하면 ‘운로(運路)가 바뀌었다’라고 표현해야 한다. 생각이 바뀐다고 느끼는 것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기운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라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왜 2023년에야 중증장애인이 (아쿠타가와상을) 최초로 수상하게 됐는지 모두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올 7월 19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169회 아쿠타가와상 시상식. 수상자 이치카와 사오 씨(43)는 단상에 올라 이렇게 일갈했다. 그는 목에 기관절개 호스를 꽂고, 전동 휠체어를 탔다. 선천적으로 ‘근세관성 근병증’이 있어 얼굴은 한쪽으로 기울고, 허리는 굽었다. 하지만 그는 당당하게 덧붙였다. “이 소설은 처음으로 나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써낸 소설입니다.” 그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중편소설 ‘헌치백’(허블)은 일본에서 출간 후 30만 부가 팔리며 화제를 모았고, 지난달 31일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그는 15일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장애 예술가가 주목받는 건 좀처럼 오지 않는 기회다. 카메라 앞에서 도발적인 말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신간은 이치카와 씨와 같은 질환이 있는 중증장애인 여성 샤카의 이야기다. 샤카는 좁은 방 안 침대에 누워서 태블릿PC로 인터넷에 야한 소설을 쓰며 산다. 샤카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익명으로 “다시 태어나면 고급 창부가 되고 싶다”, “비장애 여성처럼 임신과 중절을 하고 싶다”고 쓰며 욕망을 표출한다. 그리고 부모에게 받은 재산으로 돈을 주고 남성 간병인과 섹스를 하려다가 끝내 실패하고 좌절한다. 소설은 장애 여성의 삶과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살기 위해 파괴되고 살아낸 시간의 증거로서 파괴되어 간다” 같은 소설 속 문장은 연민의 시선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당사자만 닿을 수 있을 법한 깊이를 보여준다. 작품이 주목받은 이유에 대해 이치카와 씨는 “제가 중증장애인이기 때문”이라며 “문학은 항상 새로움을 원하니까”라고 쿨하게 답했다. 소설은 또 ‘R18’(성인 소설), ‘슈퍼달링’(여자들이 이상형으로 손꼽는 남자) 같은 일본 인터넷 문화와 은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해 문학적으로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난 오랫동안(약 20년) 시대와 사회를 빠르게 반영하는 라이트노벨을 써 왔다. 순수 문학의 좁고 닫힌 세계에 시대의 분위기를 불어넣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이창동 감독(69)의 영화 ‘오아시스’(2002년)에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장애 여성의 성(性)과 삶을 그린 이야기가 자신에게 창작의 원천이 됐다는 것이다. 그는 “사실 한센병, 뇌성마비 등 장애를 다룬 예술은 항상 존재했다. 하지만 장애 예술이 주류 예술계에서 인정받는 일은 많지 않다”고 했다. 그는 또 “중증장애인은 교육을 받고 독서하기 힘들다. 교육이나 독서를 돕는 환경이 없으면 중증장애인 예술가가 생겨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은 장애인이 읽기 어려운 종이책 중심이다. 전자책(e북)과 오디오북 보급이 많아진다면 장애인이 적극적으로 예술에 참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유머를 담아 말했다. “친애하는 한국 독자 여러분. 저는 (장애 때문에) 집에서 나갈 수 없지만, 소설로나마 만나게 돼 영광입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었는데요. 이 상(메디시스 외국문학상)도 받을 거라 예측 못 했습니다. 하하.” 소설가 한강 씨(53)는 14일 서울 양천구 한국방송회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노벨문학상에 가까워진 것 아니냐’는 질문을 받자 수줍게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그는 2016년 연작소설집 ‘채식주의자’(2007년·창비)로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데 이어 9일(현지 시간)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2021년·문학동네)로 프랑스 메디시스 외국문학상을 받았다. 한 씨는 “작가가 글 쓰는 건 결과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상을 받는 순간보단 소설을 완성한 순간이 제일 행복하다”고 했다. 메디시스상은 공쿠르상, 르노도상, 페미나상과 함께 프랑스 4대 문학상으로 불린다. 외국문학상은 1970년 제정된 이래 체코 출신 소설가 밀란 쿤데라(1929∼2023), 이탈리아 기호학자이자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1932∼2016) 등이 받았다. 한 씨는 “식당에서 샴페인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눈 게 전부일 정도로 자유로운 시상식이었다”며 “상패도, 선정 이유도 없는 시상식은 참가한 적도, 본 적도 없어 재밌었다”고 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사건으로 인한 상처와 치유를 그린다. 한 씨는 “이 소설은 (폭력 등) 인간성의 밤 아래로 내려가서 촛불을 밝힌다”며 “끝까지 작별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했다. 프랑스 문단이 한국의 역사적 상흔을 다룬 작품을 인정한 까닭을 묻자 그는 “언어, 문화가 다르지만 인간의 폭력, 제노사이드의 경험은 인간 모두가 공유할 수 있다”며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고통에 대한 이야기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고 했다. 프랑스어판 제목 ‘불가능한 작별’에 대해 묻자 그는 “절묘하게 (작별하는) 주어를 특정하지 않고 의미를 살려서 참 좋았다. 불가능한 작별을 하는 대신에 끝끝내 작별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결의로 읽어 달라”고 했다. 한 씨는 다음 계획에 관해 “원하지 않았으나 받았고, 결국엔 반납해야 하는 ‘생명’에 대해 쓰고 싶다”며 “밝은 소설을 쓰고 싶다. 겨울에서 봄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틸러와 퐁은 열정적으로, 때로는 무모하게 세계에 뛰어들어 삶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를 찾습니다. 이들은 매 순간 새로운 영역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마치 탐험가처럼요.” 지난달 31일 번역 출간된 장편소설 ‘타국에서의 일 년’(알에이치코리아·사진)의 이창래 작가(58)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 소설은 한국계 미국인인 이 작가의 6번째 장편으로 한국계 미국인 청년 틸러와 중국인 사업가 퐁이 중국 선전, 마카오, 홍콩 등 여러 나라를 표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가는 이번 신작을 쓴 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는 이들을 그리고 싶어서라고 했다. “우리가 살면서 결코 알지 못했던 어렵고 극단적인 시련을 마주하면 어떨까요.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이 작가는 1995년 미국 사회에서 뿌리내리지 못하는 한국인 2세 이민자 이야기를 그린 데뷔작 ‘영원한 이방인(Native Speaker)’으로 펜·헤밍웨이상을 수상하는 등 영미문학계의 주목을 받아 왔다.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꾸준히 거론된다. 가해자인 일본인 군의관의 시점에서 ‘위안부’의 실태를 다룬 ‘척하는 삶’ 등 한국 근현대사에 휩쓸린 이들의 삶을 주로 그렸다. 반면 이번 신작은 한국인의 피가 8분의 1 섞여 있지만, 외모로는 혈통을 알아보기 힘든 청년 틸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그는 “(피가 섞였지만) 평생을 백인으로 살아온 청년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며 “청년이 어떻게 아시아인 멘토(퐁)와 친구가 되는지, 세상을 접하면서 어떤 것을 알아차리게 될지, 어떻게 자아가 변할지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틸러가 미숙한 청년이라는 점도 눈에 띈다. 미국 프린스턴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일하며 젊은 학생들과 만난 경험이 반영됐느냐고 묻자 그는 “소설에서나마 학생들이 세상에서 마주할 투쟁을 그리고 싶었다”고 답했다. “전 늘 나이를 먹지만 학생들은 (계속 바뀌기 때문에) 나이를 먹지 않습니다! 학생들은 항상 희망, 걱정,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어요. 학생들과 대화하는 일은 항상 저를 젊게 하고 활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누구나 힘들고 어려운 상황과 사건들을 다시 마주할지라도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나요?” 감각적인 문장으로 정평이 난 그는 신작에서도 인간의 감각에 천착한 문장으로 독자를 끌어당긴다. 소설에서 틸러는 자신이 지나쳐 온 여러 도시를 떠올리며 “대학교의 오래된 참나무 책상 서랍을 열면 피어오르는, 먼지 낀 곰팡이 냄새”, “은하수처럼 펼쳐진 탁 트인 푸른 바다라는 필터를 수 킬로미터나 거친 산들바람”을 떠올린다. 이 작가는 “나는 항상 신체와 감각에 대해 글을 쓰는 데 관심이 많았다”며 “이번 소설 역시 우리가 직면한 삶의 질감과 경험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담으려 했다”고 했다. 그는 미국에서 이산문학(디아스포라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미국에서 이민진 작가의 장편소설 ‘파친코’ 등 한국 이산문학이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를 묻자 “세상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지만, 세상은 모든 면에서 점점 더 다양해지고 있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이 작가는 자신의 젊음에 관한 소설을 쓰고 있다. 그는 “거의 완성했는데, 자전적이면서도 허구적인 작품”이라며 “아마 내년에 출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일론 머스크와 그의 가족, 친구뿐 아니라 ‘적’과도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올 9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를 다룬 평전 ‘일론 머스크’(21세기북스)를 펴낸 미국 전기 작가 월터 아이작슨(71·사진)은 12일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머스크를 기술 발전에 앞장서는 선구자로 묘사하면서도 그에 대해 “괴팍하다”며 광인적 면모를 가감 없이 서술할 수 있었던 건 균형 있는 취재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그는 “난 그들(취재원)의 말을 듣기만 했다. 물론 (사실관계를 확인해야 해) 책을 펴내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아이작슨은 미 시사주간지 타임 편집장, CNN방송 CEO로 일했다. 신간은 그가 2년 넘게 머스크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주변 사람들 130여 명을 밀착 인터뷰해 썼다. 집필 계기를 묻자 그는 “평소 우주탐사, 지속가능 에너지, 인공지능(AI)에 관심이 많았다”며 “머스크를 알고 친구의 소개로 머스크에 대한 취재를 시작했다”고 했다. 처음 전기가 출간됐을 땐 내용의 객관성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됐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신간에서 오류가 발견되면서 의구심이 사라졌다. 아이작슨은 우크라이나군이 크림반도에 주둔한 러시아군에 드론(무인항공기) 공격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머스크가 위성 인터넷 서비스인 스타링크를 일시 차단했다고 썼다. 머스크가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해 스타링크를 무상 제공했지만 드론 공격이 러시아의 핵 반격을 불러 핵전쟁으로 번질까 두려워했다는 것. 하지만 머스크가 크림반도엔 원래 스타링크가 연결되지 않았다고 해명하면서 오히려 신간에 대한 신뢰가 높아졌다. 아이작슨은 “책이 정말 공정하고 직설적이며 정직하다고 생각한다. 머스크의 내막을 썼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라고 했다. 아이작슨은 독일 출신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1955∼2011)의 전기를 쓴 세계적인 전기 작가로 유명하다. 잡스는 그에 대해 “털어놓게 하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했다. 또 신간을 통해 머스크가 세운 뇌 이식 칩 개발 기업인 뉴럴링크 임원 시본 질리스의 아이들이 머스크의 ‘사랑 없는’ 정자 기증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새로 드러나면서 화제가 됐다. 내밀한 속내를 털어놓게 만드는 비결에 대해 그는 “나는 말을 거의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가능한 한 침묵을 지키고, 가능한 한 주의 깊게 들으려고 할 뿐”이라고 했다. 이 책을 바탕으로 한 머스크 전기 영화도 제작된다. 로이터통신은 미 영화사 A24가 신간의 영화 판권을 샀다고 10일(현지 시간) 보도했다. 연출은 영화 ‘블랙스완’(2011년), ‘마더!’(2017년)로 유명한 미 영화감독 대런 애러노프스키가 맡는다. 아이작슨은 다음 계획에 대해 “(미국 툴레인대 역사학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역사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줄 것”이라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최근 벌어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원인에 대한 분석은 다양하다. 아랍인의 결집을 노린 하마스의 노림수라는 의견부터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대응이 불러온 참사라는 지적까지. 혹시 이스라엘의 인구 구조 변화가 이번 사태 원인 중 하나가 된 건 아닐까. 2000년 이스라엘의 유대인 합계출산율은 2.66명이었다. 같은 시기 아랍인 합계출산율은 4.74명이었다. 아랍인이 유대인보다 아이를 1.8배 더 낳은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엔 인구 구조 변화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분쟁의 해법이 될 것이란 예측이 많았다. 시간이 지나면 투표권을 지닌 아랍인의 목소리가 커지고, 아랍인으로 구성된 팔레스타인과 평화를 모색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하지만 20년 후 상황은 바뀌었다. 2020년 이스라엘 내 유대인 합계출산율은 3명으로 늘었다. 반면 아랍인 합계출산율은 2.99명으로 줄었다. 최근엔 유대인이 아랍인보다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이다. 특히 초정통파 유대인이 아이를 많이 낳았다. 이들이 아랍인의 인구가 늘어날 것을 우려해 출산 장려 운동을 펼쳤기 때문이다. 초정통파 유대인의 이스라엘 이주도 장려됐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인구가 늘어나면서 이스라엘이 보수화됐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강경 대응이 잦아졌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2019년 이스라엘 전체 인구의 12%를 차지했던 초정통파 유대인은 2065년엔 32%로 늘어난다. 이스라엘에서 초정통파는 병역 의무가 면제되고, 국가로부터 특별보조금을 받는다. 저자는 “초정통파 유대인의 수가 증가하면서 이스라엘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미국 로즈 칼리지 정치학 교수이자 인구통계학자인 저자는 각 국가가 겪는 여러 문제를 인구통계학적으로 분석한다. 그는 “정치, 경제, 사회의 기반이 사람이기 때문에 인구 구조를 모르고선 사회를 분석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최근 세계 인구는 급격하게 늘어났다. 1700년 세계 인구는 10억 명에 불과했지만 1900년엔 20억 명, 2022년엔 80억 명을 넘어섰다. 80억 명은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한 이래 지금까지 태어난 1080억 명의 약 7%에 해당한다. 한마디로 인구 폭발 상태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은 상황이 다르다. 선진국에선 1분에 25명, 개발도상국에선 240명의 아이가 태어난다. 인도의 급속한 경제 성장은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덕이다. 반면 독일은 고령화로 군에 입대할 젊은이가 줄어들자 최근 일부 미성년자와 유럽연합(EU) 출신 이민자를 군인으로 채용하기로 했다. 고령화로 경제 저성장뿐 아니라 안보 위협에도 시달리고 있는 셈이다. 한국에 대한 분석도 눈길이 간다. 저자는 지난해 한국의 합계출산율이 0.78명인 상황을 “놀라울 정도로 낮다”고 지적한다. 저출생의 원인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남녀 간 임금 격차가 가장 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국은 2062년이면 중위 연령이 62세를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저자는 한국이 안보 문제를 겪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2022년 북한의 합계출산율은 1.9명으로 한국보다 2배 이상으로 높아 병력 차이를 낳는다는 것이다. 물론 국방력엔 장비 첨단화 등 여러 요소가 있지만 절대적 병력 감소와 경제 저성장은 안보에서 무시할 수 없다는 것. “(한국의) 고령화는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에 맞서는 국가의 대응태세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저자의 경고가 가볍지 않게 다가온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