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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면 가장 피곤하고, 남이 하면 가장 좋은 것이 바로 경쟁이다. 독점은 그 반대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두 항공사의 기내식 서비스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정평이 나 있다. 서방 항공사들의 닭고기나 생선튀김 같은 푸석한 메뉴만 접하다 비빔밥, 불고기, 영양쌈밥, 라면 같은 메뉴를 보면 한국인 승객은 물론이고 외국인들도 감탄한다. 두 항공사는 겹치는 노선을 운영하면서 치열한 고객 유치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는데 특히 후발 주자였던 아시아나항공이 기내식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부가 16일 산업경쟁력강화 관계장관회의에서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인수합병을 승인했다. 이로써 국내 항공산업은 1988년 이후 32년 만에 대한항공의 독점체제로 다시 돌아가게 됐다. 이번 합병은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다. 예컨대 국가산업 차원에서는 항공산업의 경쟁력이 중요했을 것이고, 주채권은행인 KDB산업은행은 채권 회수에 무게를 두었을 것이다. 아무도 대변해주지 않지만 소비자의 입장도 있다. 주무 당국인 국토교통부나 대한항공은 그럴 리 없다고 부인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독점 대한항공이 여객이나 화물 항공료를 올리고, 기내식 메뉴가 줄고, 각종 서비스 질이 떨어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게 이윤의 논리고 독점의 심리다. 독점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정부밖에 없는데 주요 주주로 대한항공과 한 비행기를 탄 정부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고용 문제도 주요 쟁점사항이다. 정부와 산업은행은 합병의 전제로 인력 구조조정은 없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하지만 중첩되는 사업 정리, 중복 인력 조정이 없다면 왜 항공사끼리 합병을 하며 어디서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냐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과 경영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KCGI-반도건설-조현아 3자 주주연합의 반발도 변수로 남아 있다. 아시아나항공의 설립일은 5공 임기의 마지막 날 일주일 전인 1988년 2월 17일이다. 당시 정부로서는 88올림픽 이후 급증할 여객 수요를 감당하고 경쟁체제를 통해 항공산업을 키울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다 호남 민심을 고려해 광주고속을 운영하던 금호그룹을 제2 민항 사업자로 선정했다는 게 통설이다. 이런 이유로 이번에도 아시아나항공 인수기업으로 대기업 외에 중견그룹 가운데는 호남에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 자금력이 있는 기업들의 이름이 많이 오르내렸다. 날개가 있다는 점 빼고는 닭고기와 비행기가 공통점이 없는데도 당사자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하림그룹이 인수기업으로 오르내린 것도 전북 지역의 대표적 기업이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번 인수합병 과정에서 사업·경제적 측면 외에 정치적인, 지역적인 요인들로 인한 잡음이 별로 없었던 점은 다행스러운 대목이라 하겠다. 무엇보다 일반 국민인 납세자 입장이 가장 중요하다. 재무적으로 부실한 두 회사가 합쳤다가 사정이 악화되면 산은의 추가 지원 말이 나올 수 있다. 작년 말 아시아나항공의 새 주인이 될 뻔했던 현대산업개발이 소송을 각오하고 인수 계약을 취소한 것도 갑작스러운 코로나19로 인해 ‘승자의 저주’에 빠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두 항공사가 1년 내 갚아야할 단기 부채만 약 10조 원이다. 부실한 두 기업의 합병에 따른 동반 추락으로 밑 빠진 독에 나랏돈을 붓는 ‘세금의 저주’가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점 대한항공의 뼈를 깎는 자구 노력이 먼저 있어야 한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친구 A는 공무원 생활 30년에 은퇴를 몇 년 앞두고 있다. 새벽같이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느라 친구들 모임에도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덕분에 실적과 성실함을 인정받아 승진은 항상 최선두였다. 하지만 이번 정부 들어 몇 번의 승진 심사에서 탈락한 이후 더 이상의 기대를 접었다. 더욱 딱해 보이는 것은 그의 살림살이다. 무주택인 채로 지방 근무를 나갔다가 서울로 다시 돌아오니 도심은 물론이고 서울 주변에 집 사는 것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강원도 혹은 제주도에 내려갈 것이라고 한다. 이 친구의 무주택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 가장 큰 것이 청와대나 경제부처가 하는 말을 너무 믿었다는 점이다. 노무현 정부 당시 집값이 한창 들썩일 때였다. 불안해진 친구 아내가 재건축 아파트 입주권이라도 사야겠다고 부동산중개업소에 다녀왔다. 그랬더니 친구가 “공무원이 아파트 딱지나 사서야 되겠느냐. 어차피 집값은 반드시 잡는다고 하니 그때 사도 늦지 않다”면서 면박을 줬다고 한 걸 들은 적이 있다. 지금은 집 이야기만 나오면 아내 얼굴도 쳐다보지 못하는 처지가 됐다. 여기에 당시 꽤 이름을 날리던 한 민간경제연구소의 논리도 한몫했다. 국민소득, 성장률, 인구구조 등을 종합해서 보면 서울의 집값이 턱없이 높은 수준이라는 것이다. 일본에서 부동산 버블이 터지듯 오래지 않아 서울 집값도 폭락한다는 거품붕괴론을 열심히 전파했다. 친구 A도 그 거품붕괴론을 들먹이면서 반드시 집값이 내려갈 것이라고 강조하곤 했다. 당위를 현실로 믿고 싶었던 것이다.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정확히 맞는다고 하는데 20년 넘은 최근에도 미친 집값론은 반복되고 있으니 그 말 듣고 집 안 산 사람들은 미칠 노릇일 게다. 요즘 전세시장이 불안하다. 그런데 최근 열린 고위 당정청 비공개 회의에서 홍남기 경제 부총리는 전세 거래 물량이 늘었고 전세시장이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얼마 전에 전세를 구하러 직접 돌아다니지 않았다면 아마 홍 부총리의 말을 믿었는지도 모른다. 3600가구 단지에 전세로 나온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해서 5500가구 옆 단지로 갔더니 사정이 낫다는 게 겨우 2, 3채였다. 10명이 줄을 선 끝에 제비뽑기해서 전세계약자를 결정했다는 말이 결코 소설이 아니었다. 전국 1000가구 이상 아파트 단지 총 1798개 단지 중 72%가 전세 매물이 5건 이하라는 전수조사 결과가 일반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현실과 가깝다. 아무리 경제는 심리이고, 정책담당자의 사기가 중요하고, 윗분의 의중을 살펴야 한다고 하지만 홍 부총리의 이날 발언은 현실과 너무 멀다. 앞으로는 나아질까. 전세 품귀와 전셋값 인상과 가장 관련이 많은 변수 중 하나가 신규 아파트 입주 물량이다. 전국 아파트 입주 물량을 보면 7월 4만1154가구에서 점점 줄어 이달에 2만1987가구로 감소한다. 내년에는 총 26만5594가구로 올해보다 26.5% 더 줄어든다. 서울만 보면 2만6940가구로 올해 4만8758가구에 비해 거의 반 토막 수준으로 급감한다. 주택임대차 3법 개정에 따른 일시적 혼란은 몇 개월 지나면 안정될 것이라는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의 말을 선뜻 믿기 어려운 이유다. 어제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 주재로 홍 부총리, 김 장관 등이 참석한 경제상황 점검회의가 열렸다. 언제부턴가 청와대, 국회에서 경제 관련 회의가 열린다면 또 무슨 해괴망측한 주장과 대책들이 나올까 싶어 겁부터 난다. 정부가 하는 말만 믿고 따라하기만 하면 노후에 손해 보는 일이 없다는 믿음을 주려면 무엇보다 정치적 목적이 아닌 현실적인 기반에서 출발한 대책을 내놔야 한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경기 이천의 특산물을 묻는 초등학교 시험문제에 ‘반도체’라고 써낸 답안이 있었다. 선생님이 기대한 답은 아마도 쌀 도자기 복숭아 정도였을 것이다. 틀렸을까 맞았을까. 채점 결과는 모른다. SK하이닉스가 제작한 가상의 광고 스토리다. SK하이닉스 본사는 이천에 있는데 이천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내는 기업이고 고용 인원도 2만 명 정도로 가장 많다. 이천시로선 특산물을 넘어선 보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제 SK하이닉스의 반도체가 세계적 특산물이 될 것 같다. ▷어제 SK하이닉스가 인텔과 90억 달러(약 10조2591억 원) 규모의 인수 계약을 체결했다. 메모리 반도체 부문, 그중에서도 낸드플래시 분야다. 초창기 반도체 구분법은 데이터를 저장하지 못하지만 처리가 빠른 비메모리 ‘램(RAM)’과 늦지만 반영구적으로 저장할 수 있는 메모리 ‘롬(ROM)’이었다. 저장과 속도를 통합한 것이 D램과 낸드플래시다. 둘 중에서도 속도는 D램, 저장은 낸드플래시가 장점을 갖고 있다. ▷스마트폰의 메모리 용량이 512GB(기가바이트)까지 갈 수 있는 것은 낸드플래시, 카메라가 빛을 순간적으로 전자신호로 바꿀 수 있는 것은 D램 덕분이다. D램과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세계시장 점유율 1위는 삼성전자다. SK하이닉스는 D램은 2위, 낸드플래시는 5위였다. 이번 인수로 낸드플래시도 2위에 올라서게 됐다. 이제 D램과 낸드플래시 모두에서 1, 2위가 한국 기업이 된다. ▷세계 반도체 시장은 요동치고 있다. 미국의 그래픽 반도체 기업인 엔비디아는 올해 8월 영국의 반도체 설계회사인 ARM을 소프트뱅크로부터 400억 달러에 인수한다고 밝혔다. 구글도 자체적으로 반도체 개발에 나섰고, 테슬라는 AI 반도체 칩을 개발해 자율주행 차량 신모델에 적용할 것으로 알려졌다. ▷하이닉스는 굴곡의 역사를 갖고 있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빅딜에서 정부가 전경련을 통해 LG반도체를 떼어내 현대전자로 합병시켜 버렸다. 이후 현대하이닉스는 부진을 면치 못하다가 현대그룹에서 떨어져 나왔고, 공개 매물로 나와 있던 것을 10년 뒤 SK그룹이 도박에 가깝다는 말을 들으면서 인수했다. ▷SK하이닉스의 제2공장은 충북 청주에 있는데 청주국제공항의 활주로가 시작되는 마을 이름이 비상리(飛上里)다. 조상들이 마치 공항이 들어설 걸 예견하고 지은 것처럼 우연치고는 참으로 절묘하다. 인텔 메모리 사업 인수를 계기로 SK하이닉스가, 나아가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K반도체’로 한 단계 더 비상(飛上)하기를 기대해 본다. 우연을 만든 것은 하늘의 일이요,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일이다.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한정된 물건의 가격을 정하는 데 경매만큼 신속 공정한 방식도 드물다. 뉴욕 크리스티 미술품 경매나 공동 어시장 경매를 보면 그 자리에서 가격과 낙찰자가 결정돼 버리고 다른 참가자들의 불평불만도 없다. 공공 공사나 정부 물품 조달은 좀 더 까다롭고 복잡하다. 1994년 32명의 목숨을 앗아간 성수대교 붕괴의 원인이 최저가 낙찰제에 따른 부실공사라는 비난이 일자 재무상태 기술능력 등을 함께 고려한 적격심사제가 도입됐다. 업계에서는 운에 따라 결정된다고 해서 ‘운찰제’라고 부른다. 이래 바꿔도 골치, 저래 손봐도 문제인 것이 공공재산의 입찰 경매제도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은 ‘동시 다중 라운드 경매’를 고안한 미국 스탠퍼드대의 폴 밀그럼과 로버트 윌슨 교수에게 돌아갔다. 이들의 연구는 공공재산 경매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주파수 경매가 대표적인 사례인데 정부가 여러 주파수 대역을 한꺼번에 경매 대상으로 내놓고 마지막 낙찰자가 나올 때까지 수많은 라운드를 반복하면서 남은 입찰자들이 계속 새로운 가격을 제시하는 방식이다. 노벨위원회는 “이 방식은 매도자와 매수자는 물론 납세자가 고루 혜택을 볼 수 있게 했다”고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1994년 미국이 무선주파수 경매에 이 이론을 처음 적용한 이후 대부분의 국가들이 활용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3G, LTE 주파수 경매에 이어 2018년 5G 주파수 경매에도 이 방식이 적용됐다. 주파수 대역을 얼마에 누구에게 매각하느냐는 통신회사뿐만 아니라 국민 일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매각 대금이 너무 높게 결정되면 사업성이 떨어져 해당 산업이 엎어지는 ‘승자의 저주’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 낙찰가의 일부가 요금 형태로 소비자에게 떠넘겨질 수도 있다. 반대로 너무 낮게 결정되면 국민 세금 부담이 높아진다. 이런 문제점에 대한 해법으로 현재까지는 동시 다중 라운드 방식이 최선으로 꼽힌다. ▷최근 노벨 경제학상은 순수 경제이론보다는 현실적인 문제 해결에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이론들에 주어지는 경향이 있다. 남자 소변기에 파리를 그려 넣는 것만으로 화장실 청결 효과를 높이는 넛지 이론의 2017년 수상도 그중 한 예라고 하겠다. 작년 노벨 경제학상은 현장 실험을 통해 빈곤 퇴치를 위한 실증적 해법을 제시한 연구자들에게 돌아갔다. 현재 한국에서는 초유의 경제 정책 실험들이 진행 중이다. ‘비정규직 제로’나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같은 정책 실험들이 어떤 효과와 부작용을 낳는지를 실증적으로 연구해 이론적으로 정립한다면 훗날 한국에서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을까.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청나라 말기 이종오(李宗吾)가 정립한 후흑학(厚黑學)이란 이론이 있다. 후흑은 면후(面厚)·심흑(心黑)의 준말로 낯이 두껍고 속마음이 시커멓다, 즉 뻔뻔스럽고 음흉하다는 뜻이다. 후흑학에 따르면 난세에는 정의나 양심보다는 후흑이 승리할 때가 많았다. 후흑은 대체로 그런 부류의 사람을 일컫지만 전략이나 정책에도 해당된다. 이런 후흑에 가까운 정책의 대표적인 사례가 현 정부의 재정운용이고, 엊그제 정부가 발표한 재정준칙도 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재정준칙은 국가채무 같은 재정지표가 일정 수준을 넘지 않도록 운용하겠다는 지침이다. 핵심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을 60% 이하로, 통합재정수지는 ―3% 이내로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수치도 수치지만 적용 시점이 이 정부가 끝난 한참 뒤인 2025년부터이고 갖가지 예외조항이 있는 데다 강제 규정도 없어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이다. 우리도 국가재정에 대해 아예 신경을 끄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면피용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재정이 악화되는 속도는 실로 심각한 수준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야당 대표 시절 국가채무비율이 마지노선인 40%를 넘어선 것을 두고 “나라 곳간이 바닥났다”며 박근혜 정부를 맹비난한 적이 있다. 집권 후에는 자신의 과거 발언에 대한 어떤 해명도 없이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40%의 근거가 뭐냐”며 팽창 적자예산의 길을 활짝 열었다. 여기에 코로나19가 터지자 추경에 추경을 거듭하고 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포함해 이전의 정부들이라고 돈 쓰면 인기 얻는 줄 몰랐겠는가. 모두가 국민의 세금 혹은 미래세대가 갚아야 할 빚이고, 재정건전성이 나라경제의 방파제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랏빚을 내는 데 신중에 신중을 기한 것이다. 이렇게 아껴둔 돈을 두고 “다른 나라에 비해 재정지출의 여력이 아직은 충분하다”며 펑펑 써대고는 마치 자신의 능력이고 치적인 양 생색을 내는 것을 보면 참으로 낯이 두껍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이런 후흑성 퍼주기 정책들이 유권자들에게는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지난 총선 때 긴급재난지원금에서 그 효력이 충분히 검증됐고 차기 대선 주자들 가운데 현재 여론조사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정치인이 스스로 포퓰리스트를 자임하는 이재명 경기지사인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외상이라면 소도 잡아먹는다’는 속담처럼 해선 안 되는 줄 알지만 그걸 선택하는 비합리적인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비둘기에게 A레버를 쪼면 조금이지만 당장 먹이가 나오고 B레버를 쪼면 몇 초 늦게 더 많은 먹이가 나오는 실험이 있었다. 지연되는 시간과 늘어나는 먹이의 양에 따라 달라지지만 결국에는 비둘기들이 ‘나중 많이’ B레버보다 ‘당장 조금’ A레버를 선호했다. 최근 각광받고 있는 행동경제학과 진화생물학에서는 2억8000만 년 전에 조류와 분화한 포유류의 뇌도 크게 다르지 않고 인간의 행동도 그 범주에 속한다고 한다. 포퓰리즘에 치우친 정치인일수록 새 머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인간의 비합리적인 속성을 자신을 위해 최대한 이용해 먹는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여당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게 재정건전성을 강조하던 국민의힘도 기본소득 도입을 정강정책 1호로 내세운다. 갈수록 정치무대는 누가 더 남의 돈으로 자기 생색내기를 잘하는지를 겨루는 후흑 대결의 장으로 치닫고 있는 느낌이다. 그 추세를 막기는 어려워 보인다. 다만 비합리적인 선택의 쓰라린 대가는 결국 국민이 치를 것이라는 점도 알고는 있어야 한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같은 금액이라도 손 베일 것 같은 빳빳한 지폐가 든 용돈 봉투를 주면 왠지 어깨가 으쓱해지고 받는 사람도 기분이 더 좋아진다. 그래서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을 앞두고서는 신권 지폐 인기가 더 높아진다. 은행 창구에서는 1인당 한정된 금액만 새 지폐로 바꿔주곤 했다. 그런데 이번 추석에는 특이하게도 새 지폐가 아닌 5만 원권이 품귀 현상을 빚고 있다. ▷요즘 시내 곳곳의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는 ‘한국은행의 지급 중단으로 5만 원권 인출이 어렵다’는 내용의 안내문이 붙어 있다. 은행 창구에 직접 가도 원하는 만큼 5만 원권을 받기 어렵다. 사실 추석 이전부터도 시중에는 5만 원권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한국은행이 예년보다 적게 찍어서가 아니다. 찍어 내보낸 지폐가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올 3∼8월 중 5만 원권 환수율(발행액 대비 환수액)은 20.9%. 10장을 찍어 내보내면 2장밖에 다시 은행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2015년 이후 매년 3∼8월 5만 원권 환수율은 50∼90%대였고 작년만 해도 72.6%였다. ▷5만 원권 실종 사태의 원인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코로나19에 의한 사회적 거리 두기다. 회식이 줄고, 사람을 만나지 않으니 현금 자체를 꺼낼 일이 줄었다. 둘째는 안전자산 선호 현상이다. 전쟁 위험이나 불황이 닥치면 금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는 것과 같은 이유다. 이왕 현금으로 보관하려면 5000원짜리나 1만 원짜리보다 5만 원짜리가 낫다. 셋째 원인은 초저금리 현상이다. 은행에 맡겨둬도 이자가 붙지 않으니 차라리 집 안에 현금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달러, 유로, 엔화 등 세계 공통적 현상이다. 여기에 한국만의 사정을 더하면 증여세 등 세금 부담이 갑자기 크게 늘어난 일이다. 자금 추적이 가능한 은행에 맡기지 않고 현금으로 갖고 있다가 자식에게 물려주려는 세금폭탄 회피 동기가 있다고 한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현금이나 금을 집 안에 보관할 수 있는 개인금고 제작업체들이 때 아닌 호황을 맞고 있다. ▷화폐 발행액만큼이나 중요한 게 화폐 유통 속도다. 화폐 유통 속도가 2배라면 같은 금액이라도 화폐 공급 효과가 두 배로 올라간다. 반대로 아무리 많은 나랏빚을 내고, 돈을 찍어 풀어봐야 부동산 같은 자산시장에 잠기거나 아예 개인금고에 묻혀버리면 돈을 푼 효과가 없어진다. 오히려 역효과만 나타나기 십상이다. 건강한 사람은 피가 잘 돌듯이 경제 체질이 튼튼하면 돈도 잘 돌아간다. 돈이 돌지 않는 경제는 ‘돈맥경화’에 걸린 것이다. 5만 원권 실종 사태는 우리 경제의 현 상황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바로미터라고 하겠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민주화를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면 ‘1인 1표’다. 경제민주화는 이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불평등 해소나 약자와 강자의 균형을 맞춘다는 정도로 해석하면 너무 막연하다. 노동운동, 소비자운동도 아니고 ‘1인 1표’는 더더구나 아니다. 재벌개혁이나 이익공유제라고 하면 범위가 너무 좁다. 솔직히 말해 대학·대학원 때 경제경영 전공을 했고 경제 관련 취재를 20년 이상 한 필자도 정확히 뭔지 잘 모르겠다. 이런 경제민주화가 요즘 다시 논란의 한복판에 섰다. 상법, 공정거래법, 금융그룹감독법개정 및 제정안이 지난달 국무회의를 통과해 국회에 상정됐다. 이들 법안에 정부 여당은 경제민주화를 위한 ‘공정경제 3법’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최근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미스터 경제민주화’로 부르면서 이들 법안 처리에 도움을 요청했다. 재계에서는 기업 활동을 옥죄는 ‘기업규제 3법’이라고 부른다. 제1야당인 국민의힘은 이도 저도 아니다. 김 위원장은 정강정책에 있는 경제민주화와 모순되지 않는다며 이들 법안에 긍정적 입장이다. 김병준 전 비대위원장 등은 자유시장경제를 지지하는 당의 정체성에 위배된다며 비판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분명한 것은 경제민주화가 경제경영학계의 논의 대상이 아니라 정당의 정책이나 대선후보자들의 선거공약에 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세 후보의 거의 유일한 공통 공약이 경제민주화였다. 일반 국민들이 다중대표소송이 뭔지, 감사위원을 분리선임하면 뭐가 달라지는지, 공정위의 전속고발권 폐지가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지 잘 알기 힘들다. 이들 법이 통과되는 것이 우리 경제에 도움이 될지, 해악이 될지 판단하기는 더 어렵다. 경제와 정치를 두부 자르듯 나눌 수는 없지만 경제민주화는 경제적 의미보다 정치용어에 가깝다. 선거철에 후보들이 너나없이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를 가지 않고 반드시 전통시장에 가서 좌판에서 감자도 몇 개 사고 어묵도 사 먹는 장면이 경제민주화와 어울리는 이미지다. 한마디로 경제민주화 주장은 경제를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유권자의 마음을 사기 위한 선거운동이다. 정치인들에게 선거운동을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나라의 미래와 청년들을 생각해서라도 경제도 조금 생각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슬로건으로서의 경제민주화를 주장하려면 대기업, 재벌 총수에 대한 견제 장치만 둘 게 아니라 거대 노조의 기득권에 대한 견제도 있어야 균형이 맞다. 한국 노조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노조다. 노조 가입률을 보면 그렇지 않아도 철밥통인 공공부문이 68%로 민간의 10%보다 훨씬 높다. 작년에 파업한 141개 회사 중 77%가 1000명 이상 사업장이다. 이들 거대 노조의 기득권에 의해 피해를 보는 측은 노동 취약계층이다. 대표적인 것이 아직 노동시장에 진입해 보지도 못한 청년층 미취업자들이다. 그런데도 현 정부는 이들의 특권을 타파하는 것이 아니라 불법 활동으로 해고된 자도 노조에 가입할 수 있도록 한 노동법 개정을 통해 날개를 달아주려 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를 포함해 한국 경제와 관련 보고서에서 빠지지 않는 권고 내용이 노동개혁이다. 비정규직, 중소기업, 비노조원, 취업준비생 같은 노동 취약계층의 권리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노동시장에 대한 수술이 필요하다. 약자를 위한다는 차원에서 경제민주화와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경제민주화란 아름다운 이름 아래 ‘공정경제’를 추진하겠다면 마땅히 ‘노동개혁’도 빠져서는 안 된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한국판 뉴딜’은 미국 32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1933∼1945년 재임)의 ‘뉴딜(New Deal·새로운 합의) 정책’에서 따온 말이다. 원조 뉴딜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정부가 테네시강 유역 개발 사업처럼 적극적인 재정정책으로 일자리를 만들고 수요를 창출해 대공황에서 벗어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문재인 정부도 한국판 뉴딜에 대해 “루스벨트 대통령이 1930년대 대공황 극복을 위해 ‘뉴딜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한 것처럼…”이라고 밝히고 있다. 사실 뉴딜의 내용은 그보다 훨씬 넓고 깊다. 정부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규정으로 전통적인 자유방임의 기조에서 벗어나 경제 사회 곳곳에 정부의 개입을 대폭 강화하겠다는 것이었다. 뉴딜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하지만 정치적 연대 효과나 사회보장법 도입을 비롯한 사회개혁에 대한 평가는 별도로 하더라도 적어도 경기회복, 즉 불황 탈출 대책으로는 실패한 정책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루스벨트의 최측근이자 재무부 장관인 헨리 모겐소는 1939년 하원 청문회에서 “이전에 없던 수준으로 돈을 썼지만 효과가 없습니다. … 이번 정부가 집권한 지 8년이 지났지만 처음 시작할 때만큼 실업률이 높습니다. … 게다가 부채도 어마어마합니다”(미국 자본주의의 역사·Capitalism in America, 앨런 그린스펀·에이드리언 올드리지, 2020년)라고 뉴딜 정책의 실패를 자인했다.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뉴딜 정책 실패의 가장 강력한 증거로 실업률을 들고 있다. 1939년 미국의 실업률은 17.2%, 실업자는 948만 명으로 전임 정부 마지막 해(실업률 16.3%, 실업자 802만 명)보다 오히려 악화됐다. “루스벨트가 떠들썩하게 내세운 공공 부문의 일자리는 민간 부문의 일자리 파괴로 상쇄됐다”는 설명이다. 대공황의 늪에서 미국 경제를 꺼내준 것은 뉴딜 정책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이었다. 이런 원조 뉴딜이 우리의 코로나 위기 탈출의 길잡이가 될 수 있을까. 뉴딜이 경제정책으로 실패한 원인 중 하나는 일련의 반(反)기업적 정책들이다.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부가 민간의 생산과 가격을 통제하고 세금을 중과했다. 밀월 관계였던 노조와는 정반대로 루스벨트 정부와 기업의 관계는 갈등을 넘어 적대 관계로 치달았다. 밉보인 주요 기업인들은 세무조사의 칼날을 피할 수가 없었다. 기업인이 불안에 떨고,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 상황에서 투자가 이뤄지고, 고용이 창출되고, 경기가 살아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곳곳에 구멍이 뚫려 새고 있는 펌프에 아무리 마중물을 퍼부어 봤자 물이 잘 길어질 리가 없는 것 역시 예나 지금이나 미국이나 한국이나 매한가지다. 한국판 뉴딜을 위해 정부가 앞장서 20조 원 규모의 ‘뉴딜펀드’를 조성하겠다고 한다. 요즘 시중에는 유동자금이 넘쳐난다. SK바이오팜 공모주에 31조 원, 카카오게임즈에 57조 원의 청약증거금이 일시에 몰린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뉴딜펀드의 자금 모집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였는지 파격적인 세제 혜택에 정부가 원금을 보장하겠다고 했다. 자본시장법 위반 논란이 불거지자 원금의 10%에 대해서는 정부가 우선적으로 손실을 떠맡아 ‘사실상’ 원금을 보장해주는 효과를 주겠다고 한다. 정부가 나서지 않아도 잘될 사업에 정부가 굳이 나설 필요가 없고,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수익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사업에 대한 투자자의 손실을 일반 납세자의 주머니에서 보전해주겠다는 것은 어느 쪽으로 봐도 옳지 않다. 편법에 편법을 더하는 것은 민간 투자가 정부가 원하는 곳에, 원하는 만큼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는 명칭을 따온 원조 뉴딜의 사례가 보여주고 있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박근혜 정부 초기 조원동 대통령경제수석이 조세 개편안을 설명하면서 “마치 거위에게서 고통 없이 털을 뽑는 방식으로 해보려고 했다”고 말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국가 운영을 위해 세금은 필요한 것이고, 이것을 납세자가 덜 고통스럽게 걷어야 한다는 고전적인 비유다. 말인즉슨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국민을 털 뽑히는 거위에 비유한 것이 국민감정에 불을 질렀다. 현 정부의 과세 방식은 스스로 표방하듯 ‘핀셋 증세’ ‘부자 증세’다. 지난달 말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소득세 최고세율을 크게 올리는 방안을 발표하면서 “세율을 올렸지만 최고위층에 대해서만 적용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고 말한 데서 여실히 드러난다. 부자들만 콕 찍어서 이들에게 왕창 뜯어내는 것이니 대다수 국민들은 안심하시라는 말이다. 이 말이 정치적 효과는 있을지 모르겠으나 공정하다고 보기 어렵다. ‘7·10 부동산대책’에 따라 종합부동산세 부담이 홍 부총리의 설명으로도 2배 정도 올랐다. 최고세율은 3.2%에서 6.0%로 올랐다. 여기에 종부세의 20%를 내야 하는 농어촌특별세가 더해지면 7.2%가 된다. 보유세는 집을 갖고 있는 한 매년 내야 하는 세금이다. 정부의 협박성 의도와 달리 소유자가 집을 매물로 내놓지 않는다면 대략 14년 정도 만에 집 전체를 세금으로 가져가겠다는 것이다. 판다고 할 때까지 고율의 세금으로 주리를 틀다가 그래도 끝까지 버티면 정부가 강제 수용해 간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아무리 3주택 이상(조정대상지역 2주택) 합산 공시가격 94억 원 이상의 극소수에 해당하는 사례라고 하지만 정상적인 세정(稅政)이라고 보기 어렵다. 광기(狂氣)에 가까운 수준이다. 이미 세율 세계 1위인 양도세를 보자. 김조원 전 대통령민정수석 사례가 대표적이다. 지난달 말 소유한 2채 가운데 잠실 아파트를 22억 원에 내놓았다. 그대로 팔렸다면 양도차익은 17억7000만 원. 이 중 양도세로 9억7000만 원을 내야 했다. 두 채 모두 팔지 않는다면 올해 내야 할 종부세는 대략 1000만 원. 내년에는 2000만 원 정도로 2배 오른다. 장관급인 수석직을 포기한 것이 양도세 폭탄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주택 수를 가지고 인사를 하는 행태가 못마땅해서인지 알 수 없다. 뭐가 됐든 둘 다 모두 세계 토픽감이다. 부동산 세금뿐 아니라 소득세, 법인세도 핀셋 방식 증세가 이뤄졌다. 소득세는 연소득 10억 원 이상 소득자에 대한 최고세율이 40%에서 45%로 올랐다. 지방세를 포함하면 49.5%다. 이미 고소득층이 지는 세 부담이 결코 작지 않은 수준이다. 2018년 기준 소득 상위 1%의 개인이 벌어들이는 수입은 전체 수입의 11%. 전체 소득세 중 이들의 납부액이 차지하는 비중은 42%다. 상위 10% 소득자가 전체 소득세의 78%를 내고 있다. 급여생활자들이 포함된 근로소득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미 상위 10%가 전체 근로소득세의 74%를 내고, 하위 39%는 한 푼도 내지 않는 구조다. 이 면세자 비율이 일본만 해도 15.5% 정도다. 늘 ‘넓은 세원, 낮은 세율’이라는 세정 원칙이 제시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균등 비율로 내는 것보다 많이 버는 사람이 더 많이 누진적으로 내는 것이 원칙적으로 조세 형평상 맞고 그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여기에도 정도가 있다. 나라마다 다르고, 정부마다 다르겠지만 부자는 얼마든지 때려도 좋다는 쪽으로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거나 혹은 납세 당사자가 세금을 내고도 오히려 죄인 취급 받는 기분을 느낀다면 그것은 분명 과한 것이다. 그런 제도나 사회는 오래가지 못한다. 차라리 거위 털 뽑기 방식이 낫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11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민간임대주택특별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민간 등록임대주택 제도가 정식 폐지됐다. 주택임대사업자는 전국 51만 명이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종합부동산세 납부 대상자 역시 같은 51만 명으로 인구로는 전체의 1%, 가구 수로는 2.5% 수준이다. 현 정부 출범 후인 2017년 12월 임대등록 활성화 대책을 발표한 이후 급증한 주택임대사업자 가운데는 세제 혜택을 활용한 투기 목적의 사업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형주택 몇 채를 사들여 은퇴 후 임대수입으로 생활을 이어가자는 생계형 임대주택사업자도 적지 않다. 이들은 시행된 지 3년도 안 돼 정책이 180도 바뀌는 바람에 졸지에 사회적 범죄자 취급받는 다주택자가 됐다. 동시에 종부세 과세 기준이 거주 주택뿐 아니라 임대주택을 합산하도록 바뀌어 종부세 폭탄까지 맞을 처지에 놓였다. 10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1명의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일반 형사원칙과 마찬가지로 세금 정책 역시 아무리 좋은 취지라고 해도 그 과정에서 억울한 납세자가 발생해서는 안 된다. 새 제도를 도입하면 충분한 경과 규정을 두거나 피해 구제를 위한 예외 규정을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정상적인 행정의 원칙은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는 식의 거여(巨與)의 입법 폭주 앞에서는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과거 누렸던 특혜를 이제야 바로잡는다는 정치적 명분 앞에서는 재산권 침해, 징벌적 세금, 과잉금지 원칙 위배, 소급입법 같은 주장은 그저 적폐세력들의 불평불만일 뿐이다. 1%를 때려서 나머지 99%에게 박수를 받을 수 있다면 정치적 표 계산으로 남는 셈법이다. 임대료 통제와 쌍둥이처럼 닮은 명분 정책이 최고이자율 제한이다. 이재명 경기지사가 최근 더불어민주당 의원 176명에게 법정 최고금리를 연 24%에서 10%로 인하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국민이 원하는 것을 하자는 포퓰리즘이 뭐가 나쁘냐고 당당하게 말하는 이재명 지사는 원래 그러려니 하지만 덩달아 뛰는 여당 의원도 여럿 있다. 김남국 민주당 의원은 같은 날 연 10%로 낮추는 대부업법과 이자제한법 개정안을 발의했고 이전에 발의된 비슷한 내용의 개정안도 있다. 최고이자율 제한은 고리대금업자들로부터 서민을 보호하자는, 더없이 좋은 명분을 내세운다. 실상을 보자. 저축은행 캐피털사 대부업체 등 제도권 내 대부업 이용자는 현재 178만 명 정도. 서민금융진흥원 집계로는 현행 최고이자율 24%에서도 대출 승인율이 11.8%밖에 안 된다. 거의 10명 중 9명은 대출 퇴짜를 맞는다는 말이다. 연 10%로 상한을 확 낮추면 대부업체들로서는 그 금리로는 대출해 줄 수 없다는 경우가 급증할 것은 정한 이치다. 제도권 금융에서 퇴짜를 맞은 저신용자 가운데 작년 한 해 10만 명 정도가 불법 사금융으로 내몰렸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에게 적용된 금리는 법정 최고금리보다 훨씬 높아 평균 연 100%를 넘는 그야말로 살인적인 금리다. 은행이나 기껏해야 새마을금고 정도를 이용하는 일반 국민들로서는 이런 현실을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옛날부터 고리대금업은 나쁜 것이고, 최고금리를 연 24%에서 10%로 낮춰주는 건 착한 법이며, 이런 주장을 하는 정치인들이야말로 대부업자 편이 아닌 진정 서민을 생각하는 정치인이라고 믿기 쉽다. 실제 알고 보면 일종의 대국민 사기에 가깝다. 정부 정책이라고 무조건 믿고 따라가다가는 낭패 당하기 십상이고, 국민 위하는 척하는 말에 박수 보냈다가는 곤경에 빠질 수 있다. 정신 똑바로 차리는 수밖에 없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요즘 부동산과 관련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정책과 정치인들의 발언들이 차마 눈 뜨고는 못 볼 지경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설마 이런 것까지 할 수 있겠는가 싶은 막장 정책들이 현실화되고 있다. 엊그제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4급 이상 간부들에게 연말까지 살고 있는 집을 빼고는 모두 처분하고, 그러지 않으면 승진 전보 성과 등 인사에서 불이익을 주겠다고 했다. 청와대와 정부가 2급 이상 다주택 공무원들에게 집을 처분하지 않으면 인사 불이익을 주겠다고 하니 이 지사는 ‘묻고 더블로’ 식으로 4급까지 확대한 것이다. 주택정책과 관련된 부서에서 근무하는 것도 아닌데 승진이 전부인 공무원에게 주택 소유 여부를 업무 성과와 연결시키는 것은 자기 정치를 위한 직장 갑질 횡포나 다름없다. 최근 쏟아지는 전반적인 정책 방향은 다주택 소유자를 사회적 범죄자 취급하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의 정책 기조를 수립하는 전략기획위원장이면서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인 진성준 의원은 최근 ‘1가구 1주택’ 원칙을 아예 법으로 정하자는 ‘부동산 민주화’ 법안을 추진할 뜻을 밝혔다. 2018년 10월 이정미 당시 정의당 대표는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농지개혁의 원칙이었던 경자유전(耕者有田)에 빗대 ‘거자유택(居者有宅)’으로 ‘1가구 1주택’을 정책의 기본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전월세상한제와 계약갱신요구권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당한 주장인 줄만 알았는데 여당 독주의 국회에서 상임위와 법사위를 통과하고 이제 본회의만 남았다. 너도 나도 주장하는 ‘1가구 1주택’이 실제로 이뤄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나라의 2015∼2018년 평균 주택보급률(주택 수÷가구 수)은 103%, 주택보유율(주택보유 가구÷가구 수) 56%다. 10가구 중 4가구 이상이 전월세를 살고 있다는 말이다. 미국 영국 일본 등도 대체로 60% 수준이다. 주택보유율이 96%인 나라가 루마니아다. 1989년 차우셰스쿠 공산 독재정권이 무너지면서 대부분 국가 소유였던 주택을 국민들에게 거의 컬러TV 한 대 가격으로 싸게 팔았다. 모두가 주택을 가졌으니 살고 있는 집을 팔려고 내놓아도 팔리지 않는다. 주택 건설 및 관련 산업은 물론이고 임대시장도 발달할 수가 없다. 직장 문제로 이사를 하려고 해도, 결혼해 분가를 하려고 해도 가격이 낮은 임대주택이 없으니 지금 집에서 주저앉게 된다. 1인 가구가 늘어나는 세계적 추세와는 달리 루마니아는 점점 대가족화돼 가고 있다. 루마니아 젊은이들은 모두가 집을 갖고 있는 것은 저주라고 표현한다.(‘규제의 역설’, 최성락, 2020년) 주거 안정의 모범 사례로 꼽히는 싱가포르도 주택보유율이 90%를 넘는다. 국민의 80%가 정부에서 공급하는 주택에 살고 있다. 이게 가능한 것은 독립 당시 싱가포르 정부가 토지를 국유화했기 때문이다. 부동산의 대부분이 민간 소유인 우리나라에서 1가구 1주택이 정착되려면 토지 혹은 주택 국유화가 전제돼야 한다. 토지 공개념을 훨씬 뛰어넘어 부동산 민주화, 부동산 국민공유제 같은 단어들과 폭주하는 정부 태도를 보고 있으면 토지 국유화도 마다하지 않겠다 싶다. 이처럼 아예 시장경제 시스템을 포기한다면 모를까 정부에 의한 가격의 직접 통제는 원하지 않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폭격 이외 수단으로 도시를 파괴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주택 임대료 통제’라는 말이 괜히 경제학 교과서에까지 실려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대한민국에서 현재진행형인 사안들이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직장인들끼리 “내일 내가 회사 안 나오면 로또 당첨된 줄 알라”며 농담처럼 하는 말이 가끔 현실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우리사주 형태의 공모주 배당을 받아 대박을 터뜨린 SK바이오팜 직원 중 일부가 퇴사 신청을 했다고 한다. SK바이오팜의 임직원은 207명, 우리사주 배정 물량은 244만6931주다. 1인당 평균 1만1820주(5억7918만 원)씩 샀다는 계산이 나온다. 지난달 청약에서 공모가 4만9000원이었던 주가가 18만8000원(22일 종가)으로 4배 가까이로 올랐으니 1인당 평균 16억 원 정도의 차익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사주는 의무보호예수라는 제도에 묶여 1년간 팔지 못한다. 그 대신 퇴사를 하면 예탁결제원에 강제로 맡겨뒀던 주식을 한 달 뒤 돌려받을 수 있다. 앞으로 1년 뒤 더 오를지, 아니면 떨어질지 아무도 장담 못 하는 게 주가다. 벤처 거품의 전설 새롬기술은 1999년 8월 2300원이었던 주가가 6개월 만에 30만8000원으로 1만3000배 이상 올랐다가 그해 연말 5500원으로 폭락한 적도 있다. 주식 투자 격언에 ‘사는 것은 기술이고, 파는 것은 예술이다’라는 말이 있다. 주식을 처분하기로 한 SK바이오팜 직원들은 매도 타이밍과 현재의 직장을 맞바꾼 셈이다. ▷우리사주의 원래 취지는 사원 복지와 함께 근로의욕 향상이다. 회사 주식을 갖고 있으니 시세 차익과 배당을 더 많이 받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일할 동기가 주어지니 회사도 좋고, 직원도 좋다는 말이다. 그런데 올라도 어느 정도가 아니라 로또 당첨 수준으로 오르니 ‘애사심(愛社心)’보다 주가가 떨어지기 전에 수익을 현실화해야 한다는 ‘퇴사심(退社心)’이 발동한 것이다. 우리사주 대박의 역설이다. ▷SK바이오팜 공모주 청약에 무려 31조 원의 현금이 몰렸다. 그만큼 저금리 등으로 시중에 떠도는 유동성이 풍부한데 마땅히 투자할 곳이 없다는 의미다. 그 돈이 돌아다니며 공모주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9일 공모주를 모집한 에이프로의 청약률은 1582 대 1, 티에스아이는 1621 대 1이었다. 가히 광풍 수준이라 할 만하다. ▷공모주라고 다 오르는 건 아니다. SK바이오팜처럼 ‘따상’(공모가 2배의 시초가가 형성되고 이후 상한가)과 ‘3연상’(3일째 연속 상한가)하고 한 달 가까이 오름세가 이어지는 주식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상장 직후부터 급락하기 시작해 공모가를 밑도는데도 보호예수에 묶여 하락 곡선을 쳐다보고만 있어야 하는 공모주들이 적지 않다면, SK바이오팜의 대박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직장인들의 심기를 약간이라도 달랠 수 있을까.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경제학(Economics)의 원래 이름은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ics)이다. 시간이 지나 주로 마르크스 경제학을 정치경제학이라고 부른다. 1990년대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함께 정치경제학에 대한 관심도 떨어져 영향력과 전공자가 현저히 줄었다. 그런데 때 아니게 요즘 대한민국에서 엉뚱한 ‘정치경제학’이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좌파 경제이론으로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좌충우돌의 정치적 성향 혹은 정치인들이 경제 현실과 정책을 지배하는 현상이다. ‘경제’는 실종되고 ‘정치’만 난무하는 것이다. 최근 한 달이 멀다 하고 등장하는 부동산 대책이 대표적이다. 부유세 성격인 종부세 강화에 이어 가격 통제인 분양가상한제도 모자라 거래허가제까지 등장했다. 이런 초강력 수단마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자 또다시 부랴부랴 7·10대책이 나왔다. 집을 사지도, 갖고 있지도, 팔지도 못하게 옴짝달싹 못하게 해놓고 그 자리에 세금 폭탄을 때리는 정책이다. 청와대가 방향 잡고, 민주당이 압력 넣고, 정치인 출신 장관이 행동에 나서는 모양새다. 정상적인 경제 정책이라 보기 어렵다. 무엇보다 신중해야 할 세금 정책에서 정교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로지 오기와 결기만 넘쳐난다. 그러다 보니 벌써 집 한 채 갖고 있는 것도 죄냐, 집값 오른 건 서울 등 수도권인데 왜 지방에서도 세금 폭탄을 맞아야 하느냐는 불만과 부작용들이 터져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부동산은 경제 문제를 뛰어넘은 사회·정치 문제다. 계급 문제라는 인식 즉 ‘부동산이 계급’이라는 말도 아주 틀린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가구당 전체 자산 가운데 부동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76% 정도다. 주요 국가 가운데 가장 높다. 월급 올라봐야 집값 오르는 것을 쫓아가지 못한다. 올해 초 남녀 232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우리나라 양극화 심화의 주원인’을 묻는 질문에 1위가 ‘부동산 소유’였다. 2위가 ‘부모의 직업’이었다. 영화 ‘친구’의 유명한 대사 ‘너그 아부지 뭐하시노?’를 ‘너그 아부지 어데 사시노?’라고 바꿔야 할 판이다. 부동산에 의한 불평등 심화는 해결해야 할 과제다. 그렇다고 접근 방식까지 정치적, 계급투쟁식이어서는 될 것도 안 된다. 의욕이 현실을 압도해서는 원하는 결과는커녕 정반대의 결과를 내놓기 십상이다. 이것이 역대 정부의 경험이고 이번 정부 들어서만 스무 번 이상의 학습 결과이기도 하다. 운동권 출신 정치 군관들은 이제 경제 정책 현장에서 물러나고, 경제 전문가들이 등장해야 한다. 그래도 쉽지는 않겠지만 해결 가능성이 높아진다. 전두환 대통령은 경제 지식이 거의 전무했다. 김재익 경제수석에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전적으로 믿고 맡겼다. 5공 당시 정치는 몰라도 서민 경제를 포함한 나라 경제는 대단히 좋았다. 김대중 정부 때도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헌재 강봉균 경제부총리 같은 경험 많은 정통 관료들에게 사태 해결을 일임했다. 그 때문에 위기를 극복하고 도약을 준비할 수 있었다. 지금의 대한민국 경제는 과거보다 규모가 훨씬 커졌고 복잡해졌다. 정교한 칼잡이로서 전문가들의 식견과 경험이 더욱 필요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운동권 출신의 현 정부 핵심 인사들 사이에서는 노련한 정통 관료들이 자신들을 속여 먹는다는 인식이 강하다. 작년 5월 당시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와 김수현 대통령정책실장이 마이크가 켜져 있는 줄도 모르고 “정부 관료가 말을 안 듣는다”고 말하고 맞장구치는 장면은 정통 관료에 대한 불신을 여과 없이 드러낸 대목이다. 경제와 전문가는 찾아보기 힘들고 정치와 얼치기만 난무해서는 집값과의 전쟁은 필패로 갈 수밖에 없다. 서민만 더 힘들어진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문재인 정부 출범 후 1년이 채 안 된 2018년 2월. 김상곤 전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 출석해 곤욕을 치렀다. 교육 문제가 아닌 주택 문제였다. 한 야당 의원이 “문재인 정부 인사들이 집값 상승 덕을 본다”면서 “거주하지도 않는 대치동 아파트를 왜 가지고 있느냐”고 따졌다. 김 부총리는 “팔려고 했는데 안 팔린다”고 답변했다가 “거짓말하지 마라. 어제 부동산에 갔다 왔는데 매물이 없어 난리더라”라는 면박만 들었다. 결국 김 부총리는 다음 달인 3월 래미안대치팰리스 아파트(94.49m²)를 시세보다 1억5000만 원 낮은 급매로 23억7000만 원에 팔았다. 최근 해당 아파트의 시세는 국토교통부에 신고된 실거래가 기준으로 35억 원이다. 김 부총리는 그해 9월 물러났다. 가정이지만 6개월만 집을 안 팔고 버텼더라면 최소 11억 원의 금전적 손실을 보지 않을 수 있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지난달 30일 정세균 국무총리가 주택 처분 권고에도 다주택을 보유하고 있는 청와대 참모들을 향해 “공직자들이 솔선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상곤 부총리의 전례도 있고 보면 팔자니 더 오를 것 같고, 안 팔자니 미운털이 박힐 것 같고 당사자와 부인들에게는 잠 못 이루는 밤이 이어질지도 모르겠다. 집값 하락이 확실하고 반등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면 판단력 빠른 청와대 참모들이 비서실장이나 국무총리가 팔지 말라고 해도 팔 것이다. 집 파는 행위가 마치 희생인 듯 솔선수범을 보이라고 재촉하는 것이 당분간 집값 떨어지기 힘들 것이라는 신호로 읽힐지도 모르겠다. 6·17부동산대책이 나온 직후 잠실 일대 부동산 중개업소들은 해가 지도록 계약서 쓰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앞으로 계속 가격이 올라갈 것이니 규정이 발효되기 전에 사두자는 수요가 밀렸기 때문이다. 거래허가제라는 극약 처방이 시장에서는 정부가 집값 인상을 보증해준 것이나 다름없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최근 항간에 청와대와 여당에 미운털이 박힌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물러나고 그 자리에 김현미 국토부 장관이 갈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경제 문외한이 경제 사령탑이 된 적이 한 번도 없기에 말도 안 되는 괴담(怪談)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후 김 장관이 잇따라 방송에 출연해 “정부가 보유세 등 부동산 세제의 부족한 점을 손봐야 할 점이 있다”는 말을 하는 걸 보면 괴담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다. 아무리 실세 장관이라고 해도 주택의 수급을 담당하는 국토부 장관이 경제부총리를 제치고 세제를 직접 거론하는 건 드문 일이다. 보유세 인상에 이어 분양가상한제, 은행 대출 금지, 거래허가제까지 나온 마당에 사실상 집값과의 전쟁을 선포한 정부가 경제 초보지만 집값만은 잡겠다는 김현미 장관을 경제부총리에 앉힌다고 해도 크게 놀랄 일은 아닌 것 같다. 골프 유머에 ‘프로는 본 데로 공이 가고, 아마추어는 친 데로 가고, 초보는 걱정한 데로 간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마치 부동산대책에 대한 현 정부의 의욕 과잉과 이에 비해 결과는 반대로만 나오는 초보 실력을 빗댄 말 같다. 정치는 몰라도 경제는 우격다짐으로 될 일이 아니다. 나라 경제에 부동산밖에 없다면 모르겠으나 한쪽에서 무리하면 다른 한쪽에서 반드시 부작용이 터지기 마련이고 정부가 원하는 대로 시장이 따라주지도 않는다. 막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잘 흘러가도록 만드는 것이 치수(治水)의 기본이고 나아가 세상 이치라면 부동산대책도 이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월드컵 축구 4강의 주역이면서 지금은 방송 해설위원으로 활약 중인 이영표 선수는 현란한 헛다리 짚기 페인트 모션으로 유명했다. 마치 이쪽으로 찰 것처럼 하다가 반대 방향으로 패스하거나 드리블해 나가는 속임수 동작이다. 그런데 현 정부는 축구도 아닌 국민연금 개혁에서 여러 차례 국민을 상대로 페인트 모션을 취하고 있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15일 “정부가 새로 만들 안은 없다”면서 “대선에서 주요 어젠다로 오르길 바란다”고 밝힌 것이 세 번째였다. 현 정부 내 연금개혁 포기 선언이나 다름없다. 첫 번째 속임수 동작은 2018년 8월 복지부 산하 국민연금 제도발전위원회에서 약 1년간의 논의 끝에 보험료율을 현행 9%에서 12∼15%로 올리는 방안을 마련했을 때였다. 임기 초기 그나마 추진 가능성이 높을 때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 눈높이와 맞지 않다”면서 퇴짜를 놓았다. 그리고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에 연금개혁을 맡겼다. 경사노위는 경총, 노총 등 대립적 이해관계자 등이 참여한 기구다. 국민연금 같은 전 국민적 사안에 대해 합의안을 도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곳이다. 더구나 최대 최강 노조단체인 민노총은 경사노위에 들어와 있지도 않았다. 두 번째는 경사노위가 어정쩡하게 만든 3가지 시나리오를 작년 9월 국회에 떠넘긴 때다. 연금개혁은 현재 납부자들이 보험료를 더 내거나, 은퇴 후에 적게 받거나, 더 내고 적게 받는 수밖에 없다. 이런 유권자에게 인기 없는 정책을 총선이 1년도 안 남은 국회에 던진 것은 하지 말자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국민연금 개혁은 문 대통령의 지난 대선공약이다. 보험료는 올리지 않고 나중에 받는 소득대체율은 올리겠다는 것이었다. 애당초 ‘증세 없는 복지’보다 더 심한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공약(空約)이었다. 이대로 뭉개고 가면 누가 이득이고, 누가 손해를 볼까? 현행 제도로는 30년쯤 뒤에 기금이 바닥난다. 국민연금은 저축했다가 나중에 타가는 금융상품이 아니라 돈 버는 세대가 은퇴한 세대를 먹여 살리는 사회보험 성격의 제도다. 기금이 바닥났다고 해도 국가가 있는 한 지급을 중단할 수 없다는 말이다. 다만 그해 거둬서 그해 지급하는 방식으로 운용될 수밖에 없는데 은퇴자 대비 노동인구가 변수다. 그런데 이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빨리 변하고 있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현재 소득이 가장 많은 연령층인 40, 50대가 태어난 시기, 즉 1960∼70년대는 출생아가 매년 80만∼100만 명이었다. 2010년 출생아는 47만 명, 작년에는 30만 명이었다. 올해는 27만 명 정도로 예상된다. 부모 세대의 3분의 1밖에 안 되는 지금의 어린이 청년세대가 커서 한창 돈 벌 나이에 국민연금 기금이 바닥나 있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하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청년세대는 역사상 처음으로 부모보다 가난한 세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취업도 잘 안되고, 저성장이 고착화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다 국민연금 폭탄까지 떠넘긴다는 것은 해도 너무한 일이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사기범죄율 1위다. 사기란 상대를 기망(欺罔), 즉 속여서 재산상 이득을 얻는 행위를 말한다. 개혁을 하는 척 시늉만 하면서 말 못하는 자식 세대에 경제적 부담을 떠넘기는 것은 어떤 결과가 나와도 상관없다는 식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사기나 다름없다. 소득이 많건 적건 당장 보험료를 더 내고 나중에 적게 받는 걸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자기들만 잘 먹고 잘살면서 자식 세대들 등쳐먹은 사기꾼 세대였다는 소리는 듣지 않아야 할 것 아닌가.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5공 말, 6공 초, 즉 1980년대 중후반을 3저(三低) 호황시대라 부른다. 정치·사회적으로는 혼란스러웠지만 경기는 이른바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고 했다. 저금리, 저유가, 저환율이라는 ‘3저 현상’으로 경제가 순풍에 돛단 듯했다. 일자리는 경제성장률의 종속변수다. 경제성장률이 1986년 11.2%, 87년 12.5%, 88년 11.9%였으니 일자리가 넘쳐 날 수밖에 없었다. 마이너스 성장만 안 해도 감지덕지해야 할 지금 처지에서 보면 꿈같은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1980년대 대학생들은 강의실 밖으로 뛰쳐나가 돌 던지고, 학점이 바닥을 기더라도 취직 걱정은 별로 안 했다. 취업 측면만 보면 대단히 운이 좋은 세대라고 할 수 있다. 눈물의 구조조정이란 표현이 횡행했던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때는 기존 취업자들인 중장년층의 타격이 컸다. 그리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지나면서 취업 시장은 신입 공채 대신 경력직 위주로 판이 새로 짜여 갔다. 여기에 코로나19 충격이 덮쳤고 이번에는 청년층이 직격탄을 맞았다. ▷통계청 자료로 올 4월 20대(20∼29세) 고용률은 54.6%였다. 4월 기준으로는 통계 작성을 시작한 1983년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최근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1년 늦게 취직하면 같은 연령의 근로자에 비해 10년간 임금이 연평균 4∼8% 낮아진다. 늦게 취직하는 것만 해도 억울한데 그 영향이 10년 이상 간다는 말이다. 취직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눈높이를 낮춰 일자리를 잡으려 할 것이고 첫 임금이 이후 임금 인상이나 이직의 경우 기준점으로 계속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LG경제연구원의 2007∼2015년 장기 분석에 따르면 4년 늦게 직장을 구한 20대는 곧바로 취업한 비슷한 연령대에 비해 임금이 4년 뒤 60%까지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요즘 청년층은 IMF 세대보다 더 불운한 코로나 세대라 할 만하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평생소득가설(Life Cycle Hypothesis)이라는 소비이론이 있다. 40, 50대처럼 돈을 많이 버는 시기에 저축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돈을 적게 버는 청년 시기에는 빚을 내서라도 소득보다 많은 소비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첫 취업 자체가 많이 늦어진 데다 인공지능(AI)의 출현으로 일자리 자체가 대거 사라질 것이라는 걱정까지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장차 내 소득의 라이프 사이클이 어떻게 변할지 예측하기 힘든 코로나 세대를 대상으로 새로운 경제학 이론이 나와야 할지도 모르겠다.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뜻하지 않은 이유로 경영 사정이 어려워지면 기업의 경우 비용을 줄이거나, 가지고 있는 자산을 팔아 자금을 마련하거나, 그것도 어려우면 외부에서 빚을 낸다. 뒷골목에서 빌리는 사채(私債)가 아닌 다음에는 대출기관에 상세한 채무상환계획서를 제출하고 엄격한 심사를 받아야 한다. 빌린 돈을 어디에 어떻게 활용해서 돈을 번 다음 언제부터 다시 갚겠다는 내용이다. 정부도 크게 다를 게 없다. 코로나19처럼 비상사태가 벌어져 민간에서 생산 소비가 줄고, 수출이 막혀 해외 부문에서 절벽이 생기면 정부가 빚을 내서라도 이를 메우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정부의 상환 계획이 막연하기 짝이 없다는 점이다. 당대에 갚을 생각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다. 은행 대출 같으면 당장 퇴짜 맞을 수준이다. 정부가 어제 3차 추경 35조3000억 원을 편성했다.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라는 영화 ‘기생충’의 대사처럼 정부도 나름의 계획이 있다. 이른바 ‘선순환론’ ‘좋은 채무론’이다. 정부가 마중물을 풀어 소비와 소득을 올리면 생산과 일자리가 늘고, 경제 규모가 커지면 재무건전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논리다. 이제는 여권에서조차 언급을 꺼리는 소득주도성장 구조와 흡사하다. 두 논리 모두 현실성과 속도가 문제다. 상환계획서대로 빚을 갚지 못한 기업은 부도가 나고 개인은 신용불량자가 된다. 순환 고리가 어디서 어긋나면 국가도 어려운 지경에 처할 수 있다. 주인이 있는 기업은 망하면 끝장이라는 절박함이 있지만 정치인들은 자신의 임기 때만, 혹은 다음 선거 때까지만 국민들이, 유권자들이 좋다고 하면 그만이다. 이런 도덕적 해이가 알게 모르게 소위 정치 지도자라는 인사들에게 만연해 있다. 추경이 더 없다면 올해 국내총생산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43.5%가 된다. 현 정부 출범 전인 2017년 36.0%였던 것과 비교하면 대단히 빠른 증가 속도다. 엊그제 열린 한국경제학회에서는 이 추세대로 가면 2028년에는 80%까지 오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방만한 재정 운용으로 어려움에 처한 나라로 그리스 아르헨티나 등을 꼽는데 이 국가들도 한때는 튼튼한 재정을 자랑했다. 그리스는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국가채무 비율이 20%대였다. 1981년 사회당 파판드레우 정권이 들어서면서 “국민이 원하는 것은 들어줘야 한다”는 기치 아래 복지 분야에 마구 돈을 풀었다. 채무비율은 3년 만인 1984년 40.1%로 급상승했다. 다시 1993년 100.3%까지 가는 데 불과 9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후 늘 재정위기에 시달렸다. 결국 2010년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럽연합(EU)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처지가 됐다. 빚이 늘어나는 것은 순식간이고 한번 준 복지는 되돌릴 수 없다는 점은 전 세계 공통이다. 요즘 우리 주변에는 파판드레우 이상으로 ‘국민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정치인들이 부쩍 많아졌다. 재정을 곳간에 쌓아두면 썩는다고 말할 정도로 무식해서 용감한 정치인들과 달리 선배들로부터 보고 배운 것이 있고 전문가적 양심을 갖춘 기획재정부 관료들도 이제 지쳤는지 당청에서 쏟아내는 무리한 요청에 무기력한 반응이다. 최근 만난 한 전직 고위 관료는 “후배들이 이제 지쳤는지 당이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거의 포기한 것 같은 분위기”라고 전했다. 영화 기생충에서 무모한 계획은 두 가족 몰살이라는 비극적 결말로 이어진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정치논리를 앞세운 무모한 국가 재정 운용의 비극은 한두 가족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이번 총선 결과는 여러 가지를 보여주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돈 풀기의 위력이고, 또 하나는 경제 논리가 정치 앞에서 얼마나 초라해질 수 있는지였다. 코로나19는 정치 경제 사회 이슈를 모두 빨아들인 블랙홀이었다. 마지막에 튀어나와 선거판을 흔든 이슈는 긴급재난지원금 하나였다. 그리고 그 위력은 대단했다. 그 나름 정치에 일가견이 있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보니 여당이 이렇게까지 압승할 선거는 아니었는데 막판 전 국민 가구당 100만 원 현찰 지급의 힘이 컸다고 한다. 여야가 다 같은 공약을 내걸었지만 나라 곳간의 열쇠를 쥐고 있는 여당의 약속과 입밖에 없는 야당의 약속은 실현 가능성에서 현저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다음번 큰 선거인 대선의 이슈는 뭐가 될까. 경제를 보면 지금의 위기상황이 당장은 끝없이 이어질 것처럼 보이지만 바람에 누웠던 풀이 바람이 그치면 다시 일어나듯 머지않아 반등하리라고 본다. 다만 큰 추세는 저성장이 뉴노멀로 굳어지는 흐름일 것이다. 코로나19나 세월호 참사 같은 초대형 사건 사고가 없다면 다음 대선 주요 이슈 가운데 하나는 분명히 복지가 될 것으로 본다. 그중에서도 ‘기본소득’이 핵심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벌써 일부 대선주자급 인사들이 솔솔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다. 기본소득은 일회성 긴급재난지원금과는 차원이 다르다. 자산이나 소득, 일할 의지 여부와 관계없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동적으로 지급되는 정기적 소득이다. 기존 수당들을 가능한 한 많이 폐지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긴 하지만 가히 복지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소득은 설계하기에 따라 다양한 실체를 가질 수 있다. 사회주의자에서 시장경제주의자까지 모두 내걸 수 있는 구호다.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 역시 오래전부터 기본소득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총선 막바지에 긴급재난지원금을 전 국민 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결코 즉흥적인 발상이 아니었다. 이번 선거에서 보여준 또 다른 교훈은 선거 앞에서 경제가 얼마나 무기력할 수 있는가였다. 여권에서 재정건전성 주장은 철없는 소리로 치부된 지 오래다. ‘생산적’ ‘증세 없는’ 이런 관용구를 복지 앞에 붙이는 것조차 이제는 구차하게 여기는 것 같다. 복지 확대는 그 자체로 필수이고, 재원이 필요하면 부유층에게서 세금을 더 걷겠다고 거리낌 없이 말할 만큼 대담해졌다. 더구나 이번 코로나 대방출로 국가 부채의 한도에 대한 한계선도 완전히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나마 나라 곳간을 지키려던 홍남기 경제부총리의 저항은 표 계산 앞에서는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에 불과했다. 다음번 선거 기간 누가 경제부총리에 앉아 있더라도 달라질 게 없다. 지금은 여야 없이 포퓰리즘으로 치달을 게 뻔한데 변변한 수비수 하나 없는 형국이다.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격언은 경제학 교과서에 늘 나오는 말이다. 물리학에서 질량보존의 법칙쯤 되는 기본 원칙이다. 기본소득이든 뭐든 정부가 뿌려대는 돈 자루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닌 한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일 것이다. 빚을 끌어다 쓴다면 그 대가를 언젠가는, 누군가는 반드시 치르게 돼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돈다발의 위력이 대단하지만 위험하기도 하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지폐 다발 같은 달콤한 선의로 포장돼 있다는 것을 지구 반대편의 여러 나라가 보여주고 있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그 길이 아닌지 누군가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도 외쳐야 할 것 같다.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선거가 끝났다. 코로나19도 진정 국면이다. 경제 위기는 이제부터다. 앞으로 코로나 불황이 얼마나 오래가고 언제쯤 회복될 것인지 안갯속이다. 금리와 국제유가가 마이너스 수준까지 떨어지고 아르헨티나의 국가 부도가 임박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떨어질 때는 한도 끝도 없어 보이지만 다시 오르는 게 시장경제 원리이고 세상의 이치다. 경제 전문가들은 코로나 위기에 따른 세계 경제 추이를 영어 알파벳 모양을 본떠 몇 가지 유형으로 전망한다.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급반등형인 V자로 예상한다. 기업신용평가기관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경기 하강 뒤 서서히 상승하는 U자형 혹은 나이키형 곡선 모양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급전직하 I자형으로 전망하는 전문가도 있다. 1930년대 대공황(Great Depression)보다 더 심각한 공황(Greater Depression)이 온다는 것이다. 해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는 세계 경제 흐름과 비슷한 추이를 보이겠지만 정책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한국 경제가 두 번 모두 이듬해 곧바로 급반등해 정상을 되찾는 V자형이었다.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까. 그동안 한국 경제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유감없이 발휘된 저력이나 빨리빨리 국민성, 혹은 금방 식었다가 다시 달아오르는 화끈한 냄비 성향이 이런 위기 때는 오히려 긍정적 효과를 발휘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다. 주식시장에서 이른바 동학개미들이 외국인투자가들이 쏟아내는 물량을 받아내는 용감무쌍함도 그중에 하나다. 우려되는 부분은 정치권이다. 벌써부터 정치논리에 휘둘려 정책이 갈팡질팡하고 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3월 19일 당정청 회의에서 긴급재난지원금을 소득 하위 50%에게만 주자고 주장했다가 여당의 70% 지급안에 밀려났다. 여당은 이제 100% 지급안을 주장하고 있다. 총선 전 약속을 지킨다는 명분이다. 선거 전 종부세를 완화할 것처럼 내비쳤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내팽개치는 것을 보면 그 명분도 큰 의미는 없어 보인다. 긴급재난지원금 논란은 한 사례에 불과하다. 국가 재정에 대해 “곳간에 쌓아두기만 하면 썩어버리기 마련”이라고 말하는 수준의 경제 인식을 갖고 있는 정치인들이 대거 국회에 입성했다. 이들에게 휘둘려서는 위기를 수습하는 것이 아니라 침체의 골만 더 깊게 파이게 하고 부작용을 양산할 뿐이다. 코로나 경제 위기 대처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여당과 정부가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돈을 쏟아부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나라 경제를 말아먹기로 작정한 것이 아니라면 나랏빚을 내는 데 신중해야 한다. 쓰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써야 할 곳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당장은 기업 파산과 이에 따른 대량 해고를 막기 위해 앞으로 얼마나 많은 금액을 투입해야 할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지경이다. 길게 보면 이미 저성장 기조에 접어든 데다 저출산·고령화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어 들어올 세금은 줄고 돈 쓸 데는 급속도로 늘고 있다. 지금은 체력이 허약해진 한국 경제가 대형 사고를 당해 응급실 수술대 위에 올려져 있는 형국이다. 수술 집도의는 경제 전문가가 맡아야 한다. 이럴 때 정치 선무당들이 옆에서 여기부터 째라 마라, 주사를 더 놔라 마라는 식으로 설치면 안 된다. 코로나 방역 과정에서 전문가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경험했다. 경제 위기 대처도 다를 게 하나 없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대선 중간에 치러지는 총선은 대체로 정부 정책과 집권 정당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이 강하다. 임기 절반 정도가 지나면 임기 초반에는 효과를 반신반의했던 정책들에 대한 성적표가 나오기 때문이다. 특히 경제정책은 결과가 수치로 집계되고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기 때문에 평가하기 좋은 대상이다. 이번 총선 역시 현 정부의 3대 경제정책 기조 즉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에 대해 여당은 그동안의 실적을 홍보하고, 야당은 비판하는 정책 대결의 장이 돼야 한다. 그중에서도 현 정부 경제정책의 간판 격인 소득주도성장과 이를 위한 3대 정책 수단인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근로시간 단축,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대한 평가가 있어야 마땅하다. 선거 결과를 통해 정부와 여당은 기존 정책을 더욱 강하게 밀고 나갈 추진력을 얻거나 아니면 수정할 명분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이 민주사회에서 선거가 갖는 긍정적 자정(自淨) 기능 중 하나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는 코로나19가 모든 이슈를 덮어 정책 평가의 기회가 실종됐다. 인물도 정책도 모르는 ‘깜깜이 선거’ 가운데 거의 유일한 정책 대결이라는 게 긴급재난지원금이다. 워낙 정책 이슈가 없다 보니 국민혁명배당금당 대표라는 허경영 씨가 이번 총선 공약으로 국민 1인당 1억 원씩 주자는 게 화제다. 과거 허 씨가 내건 공약이나 기행들을 보건대 코미디 프로그램이라면 모를까, 나라 정책을 다루는 공론의 장에서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고 본다. 노이즈 마케팅 우려를 알면서도 굳이 들먹이는 것은 긴급재난지원금을 둘러싸고 멀쩡한 정당들이 보이는 행태들이 허 씨와 다른 게 뭔가 싶어서다. 우선 국민의 세금이거나 후세대의 빚인 수십조 원을 동원하면서 깊이 고민한 흔적을 찾기 어렵다. 새로운 논리나 추가 재정조달 방안 없이 며칠 사이 수조 원이 왔다 갔다 한다. 일단 표를 위해서는 지르고 보자는 식이다. 이대로 가도 연말에 국가부채가 815조5000억 원에 이른다. 재정건전성의 심리적 마지노선이라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40% 선을 넘어선다. 공무원·군인 연금의 구멍을 때울 돈까지 합치면 국가부채가 작년 말 기준으로 이미 1743조 원이다. 저성장 기조에 코로나 불황까지 겹쳐 세금 수입은 줄어들 게 뻔하다. 이번 불황은 단기간에 끝날 일이 아니다. 피해 구제와 경기 회복을 위해 빚을 더 낸다고 해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상황이다. 책임이 덜한 야당일수록 선거에서 찬란한 약속을 제시하기 쉽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그들과 입장이 다르고, 달라야 한다. 이번 총선 결과에 관계없이 계속 정책을 집행할 권한과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야당에 대해 무책임한 발언을 자제하라고 비난할지언정 똑같은 경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 그런데 한술 더 뜨고 있는 게 현실이다. 우리는 1997년 외환위기라는 국가적 재난을 ‘위장된 축복’으로 만든 경험이 있다. 일시적 진통제나 시원한 사이다가 아니라 뼈를 깎는 고통을 통해서다. 우리 정치가 87년 체제에 머물러 있다면 경제는 기본적으로 97년 시스템에서 머물러 있다. 그렇지 않아도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게 시스템을 바꿀 때가 됐다. 코로나 쇼크를 또 한 번의 위장된 축복으로 만들 수 있다. 좀비 기업들을 자연스럽게 정리하고, 노동시장 개혁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고, 규제혁신을 통해 기업들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 이것이 시장경제에서 불황이 가지는 순기능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선 경제 전문가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표에 휘둘려 거꾸로 가고 있다. 국민이 정신 차려 바로잡는 수밖에 없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