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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변하는 존재라는 전제를 세우면 지금 이 시간을 아주 소중하게 여길 수 있을 거예요.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와 다를 겁니다. 달라도 괜찮고요.”(히사이시 조) 세계적인 영화음악의 거장 히사이시 조와 저명한 뇌과학자 요로 다케시가 만나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눈 대담집이다. ‘인간은 왜 음악을 만들고, 예술은 개인과 사회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큰 주제 안에서 두 사람의 대화는 과학과 철학, 인문학과 사회학을 넘나든다. 저자들이 가장 먼저 집중한 주제는 감각, 그중에서도 특히 청각이다. 인간은 진화 과정에서 감각과 관련된 많은 기관이 퇴화했다. 하지만 귀만큼은 오래된 감각 기관인 반고리관을 유지하고 있다. 몸의 운동과 직접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반고리관은 뇌의 원초적인 부분에 직접 영향을 주며, 반고리관을 통해 들어온 소리는 다른 어떤 감각보다 정서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 인간이 음악을 만들어 내는 이유다. 음악 외에도 인간의 감수성을 자극하고, 삶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다양한 사회적 요소들을 과학적으로 해석한다. 저자들은 “사람의 일생은 하나의 예술작품과도 같다”고 말한다. 인간은 모두가 자신의 삶을 창작해 나가는 예술가라는 것이다. 자신의 일생을 풍요로운 작품으로 만들려면 감각을 더욱 예민하게 벼리고, 오감을 통해 삶을 생생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당부다. 인생이라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타인의 인생에 대한 존중도 생겨난다고 강조한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미국인 지휘자이자 스테디셀러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명곡들을 만든 천재 작곡가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의 생애를 담은 영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이 6일 개봉한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2012년), ‘아메리칸 스나이퍼’(2015년) 등으로 잘 알려진 할리우드 배우 브래들리 쿠퍼가 주연과 각본, 감독을 맡았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제작을 주도했다. 영화는 번스타인이 어떻게 천재 음악가로서 명성을 쌓았는지에 집중하지 않는다. 영화가 그려낸 건 번스타인과 그의 아내 펠리시아(케리 멀리건)의 결혼생활이다. 번스타인은 칠레 출신 배우인 펠리시아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하지만 양성애자였던 그는 결혼생활 동안 남성들에게도 눈길을 돌리며 둘 사이는 삐걱댄다. 영화는 서로 사랑하며 빛났던 번스타인과 펠리시아의 젊은 시절로 시작해 관계의 위기를 맞았던 중년, 노년에는 평생을 사랑한 펠리시아 곁을 지키는 번스타인의 모습으로 끝맺는다. 공동 각본을 맡은 조지 싱어는 “관객들이 결혼의 복잡한 면과 사랑의 다양한 형태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는 ‘스타 이즈 본’(2018년)에 이은 쿠퍼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쿠퍼는 번스타인을 놀랍도록 비슷하게 재현했다. 영화 첫 장면인 노년의 모습은 쿠퍼가 아닌 번스타인의 자료 영상으로 착각할 만큼 싱크로율이 높다. 촬영 당시 매일 2∼5시간씩 특수 분장을 했다고 한다. 쿠퍼는 번스타인의 생애를 충실하게 복원하기 위해 그의 세 자녀를 인터뷰하고, 그가 살던 집도 방문했다. 번스타인의 아들 알렉산더는 “저희의 의견을 들어주는 태도, 언제나 호기심을 따라 움직이는 것까지 아주 많은 면에서 아버지가 연상됐다”고 했다. 영화 제작에는 총 6년이 걸렸다. 영화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요소는 번스타인의 음악이다. 영화 배경음악으로 실제 번스타인의 곡들을 썼다. 흑백 화면과 번스타인의 음악이 어우러져 리듬이 빠른 뮤지컬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장면들도 있다. 펠리시아 역을 맡은 케리 멀리건의 연기가 가장 눈에 띈다. 일생의 연인과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감정을 우아하게 표현했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제 안에 뭐가, 얼마나 더 남아 있는지 저도 아직 다 모르겠어요. 그 무언가가 꺼내어질 수 있는 작품을 만나길 기대하며 연기하고 있습니다.” 다음 달 6일 개봉하는 영화 ‘3일의 휴가’에서 하늘나라에서 휴가를 얻어 딸을 만나러 내려온 엄마 복자 역을 맡은 배우 김해숙(68)의 말이다. 푸근하게 말을 이어가던 그가 새 작품 이야기를 하자 그를 둘러싸고 있던 공기가 달라졌다.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29일 만난 김해숙은 기대와 기분 좋은 긴장이 뒤섞인 목소리로 “아직도 새 작품 캐릭터를 연구할 땐 첫사랑을 했던 옛날처럼 설렌다”고 했다. 연기 경력 48년, 일흔에 바짝 다가선 배우에게선 여전히 연기를 향한 열망이 엿보였다. “‘국민 엄마’라는 타이틀이 처음엔 굉장히 부담스럽고, 죄송한 마음마저 들었어요. 저는 집에서도 그런 엄마가 아니거든요. 100점짜리 엄마는 못 돼요.(웃음)” 또 엄마 역할을 맡은 이유에 대해 그는 “엄마를 연기할 때 사명감과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부모님이 먼저 떠난 사람은 누구나 그런(부모님의 영혼이 옆에 있다는) 생각을 할 것 같다. 이 영화에 동화돼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연기했다”고 말했다. ‘3일의 휴가’에서 복자는 한평생 딸 진주(신민아) 뒷바라지를 하며 살다가 갑자기 죽는다. 죽은 지 3년이 되는 날 복자는 이승으로 3일간의 휴가를 받는다. 귀신이기 때문에 딸을 만질 수도, 이야기할 수도 없이 바라봐야만 하지만 복자는 고민할 것 없이 딸 진주에게로 향한다. 오랜만에 만난 딸은 복자의 기대와 달리 미국 명문대 교수 자리를 포기하고, 돌연 엄마가 살던 시골집에 눌러앉아 엄마의 레시피로 백반집을 운영하고 있다. 딸이 자신처럼 살지 않길 바랐던 복자는 억장이 무너진다. 하지만 진주가 엄마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으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진주에게 “다 괜찮으니 즐겁게 살아라”는 당부를 하기 위해 하늘나라의 규칙을 어기기로 결심한다. 김해숙은 영화를 찍으며 돌아가신 엄마 생각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홀어머니 아래서 무남독녀로 자란 그는 “제일 가까웠기 때문에 엄마에게 ‘고마워’ ‘미안해’라는 말을 못한 게 가장 큰 아픔이 됐다”며 “‘3일의 휴가’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이야기와 겹쳐지는 지점을 찾으며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했다. “인간미가 없어지고 사회가 각박해져 가잖아요. 영화를 보는 동안이라도 가족의 따뜻함을 느끼면 좋겠습니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2023년이 한 달여 남은 연말, 따뜻한 영화 한 편으로 마음을 데워보는 건 어떨까. 겨울을 맞아 눈시울이 촉촉해지는 힐링 가족 영화들이 잇달아 개봉하고 있다. 영화를 다 보고 극장을 나올 때면 엄마에게 전화를 한 통 하고 싶어질지 모른다. 22일 개봉한 영화 ‘아워 프렌드’는 할리우드의 신성 다코타 존슨이 시한부 엄마 역할을 맡아 화제가 된 작품이다. 급작스럽게 난소암 선고를 받은 니콜(다코타 존슨)이 남편 맷(케이시 에플렉)과 두 딸, 그리고 가족이나 다름없는 친구 데인(제이슨 시걸)과 마지막 날들을 보내는 이야기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암 환자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천천히 이별하는 모습을 현실적으로 그려냈다. 일하느라 바빠 아내와 소원해졌다가 암 진단 소식을 들은 남편 맷은 심경이 복잡하다. 아내가 없는 집은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고, 사춘기에 접어든 딸은 “아빠랑 남겨지는 게 억울하다”며 고함을 지른다. 아내가 곁을 떠나는 게 두렵지만 병간호는 모든 걸 포기하고 싶게 할 만큼 고되다. 그를 일으켜 세워 주는 건 친구 데인이다. 데인은 삼촌처럼 니콜과 맷의 딸들을 돌보고, 니콜과의 이별을 누구보다 슬퍼한다. 무엇보다 다코타 존슨의 시한부 암 환자 연기가 눈에 띈다. 남편과 삐걱대는 현실적인 아내의 모습, 딸들에게 병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강인한 엄마의 모습을 설득력 있게 연기했다. 영원한 이별이라는 결말을 향해 가지만 영화는 마냥 슬프지만은 않다. 곁에 있는 가족들과 어떻게 하루를 더 꽉 채워 살아갈까 고민해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29일 개봉하는 영화 ‘레슬리에게’는 알코올의존증에 빠진 레슬리(앤드리아 라이즈버러)가 아들에게 떳떳한 엄마가 되기 위해 다시 일어서는 이야기다. 영화는 2억 원이 넘는 복권에 당첨돼 흥분한 레슬리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작은 마을에서 곧장 관심의 대상이 된 레슬리는 당첨 사실에 취해 돈을 흥청망청 쓰기 시작한다. 술에 빠져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던 레슬리는 급기야 어린 아들 제임스(오언 티그)를 친구 집에 두고 떠나기에 이른다. 이후 레슬리는 술을 얻어먹기 위해 남자들을 유혹하고, 햄버거를 사주겠다는 옛 친구를 따라갔다가 성폭행당할 위협에 놓이는 등 밑바닥까지 추락한다. 아들은 자신을 다시 찾아온 엄마를 진절머리 치며 밀어낸다. 레슬리를 구원한 건 아주 작은 호의와 관심이었다. 모텔 매니저 스위니(마크 매런)는 레슬리에게서 자신의 과거 모습을 겹쳐 보고, 그녀에게 일자리를 준다. 알코올 금단 현상으로 괴로워하는 레슬리의 곁을 지키며 조용히 밥을 챙겨준다. 레슬리는 그에게서 힘을 얻어 작은 식당을 열게 되고, 아들 제임스와 재회한다. 두 사람이 울며 웃으며 함께 밥을 먹는 장면은 코끝이 찡하게 만든다. 배우 라이즈버러는 이 영화로 제95회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배우 케이트 윈즐릿은 “스크린에서 본 여성 배우의 연기 중 가장 위대하다”고 극찬했다. 따뜻한 모녀 이야기를 담은 한국 가족 영화들도 개봉을 앞뒀다. 다음 달 6일 개봉하는 영화 ‘3일의 휴가’는 ‘국민 엄마’ 김해숙이 하늘나라에서 휴가를 받아 딸 진주(신민아)의 곁을 맴돌며 추억을 쌓는 이야기다. 같은 날 개봉하는 ‘교토에서 온 편지’는 엄마가 50년간 간직한 편지를 따라 딸들과 함께 교토를 여행하는 가족 드라마다. 배우 한선화 한채아 송지현이 세 자매로, 배우 차미경이 엄마로 출연했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 ‘한국이 낳은 위대한 아티스트’ ‘괴짜 예술가’…. 백남준(1932∼2006)을 수식하는 표현은 많지만 그 어떤 것도 ‘인간 백남준’을 적확하게 묘사하지는 못한다. 그의 눈빛과 표정, 말투와 몸짓을 생생하게 보여주며 ‘인간 백남준’에게 다가가는 다큐멘터리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가 다음 달 6일 개봉한다. 그의 생애를 다룬 첫 영화로, 제작에만 5년이 걸렸다. “남준은 약 20개 언어를 하는데 실력이 형편없었어요. 전혀 못 알아 듣겠어요.(웃음)” 영화는 백남준의 조카 하쿠타 겐의 목소리가 나온 후 영어와 독일어, 프랑스어, 심지어 한국어까지 어눌하게 말하는 백남준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미국 휘트니미술관장을 지낸 데이비드 로스는 “그의 말을 듣는 법을 배우기까지 대화가 어려웠다”고 회고하며 웃는다. 백남준은 인터뷰 중 상대방을 향해 “제 영어를 알아듣는다니 정말 뜻밖”이라며 천진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서 풀밭을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화분에 심겨진 꽃의 향기에 심취하기도 한다. ‘기인(畸人)’ 같은 모습 뒤에는 번뜩이는 천재성과 혁명성이 있었다. 그는 ‘예술가’라는 이름에 갇히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틀에 박힌 예술에는 관심이 없다. 내 관심은 온 세상에 있다”고 말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백남준의 일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실험 음악가 존 케이지(1912∼1992)였다. 그는 1958년 독일 뮌헨에서 케이지의 전위적인 퍼포먼스를 보고 “공연이 끝날 무렵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그날 밤 내 인생이 시작됐다. 그는 내게 ‘파괴 면허’를 줬다”고 말했다. 케이지 공연을 본 후 백남준은 익숙한 방식을 탈피해 과감한 시도를 시작했다. 그 무렵 그의 관심이 텔레비전으로 옮겨갔다. 그는 영상을 일방향으로 전송하는 텔레비전의 원리를 전복하기 위해 브라운관에 자석을 갖다 대고, 텔레비전을 부수고, 개조했다. 영화는 백남준의 예술관에 집중하기보다는 그가 처음 대중으로부터 받은 저항, 그럼에도 꿋꿋이 자신의 신념을 밀고 나갈 때의 표정 등을 생생히 보여준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예술가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백남준이 마음에 남는다. 한국계 미국인인 어맨다 김이 감독을, 할리우드 배우 스티븐 연이 내레이션을 맡았다. 주제곡은 백남준과 생전 친분이 있었던 사카모토 류이치(1952∼2023)가 작업했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인간은 욕망에 가득 차서는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다른 종들을 멸종시켜. 인간은 바이러스고, 괴물이 백신이다.”(‘스위트홈’의 임 박사) 괴물이 된 사람들과 그들의 습격에서 살아남기 위한 인간의 처절한 사투를 그린 넷플릭스 드라마 ‘스위트홈’이 12월 1일 ‘시즌2’로 3년 만에 돌아온다. 스케일은 더욱 커지고, 컴퓨터그래픽(CG)은 한층 화려해졌다. 무엇보다 생존이 달린 상황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누가 괴물이고, 누가 인간인가?” 2020년 공개된 ‘스위트홈’ 시즌1은 한국이 제작한 시리즈 중 처음으로 넷플릭스 미국 ‘톱10’에 진입하며 K콘텐츠의 위력을 보여줬다. 총 8부작이 한꺼번에 공개되는 시즌2에 대한 팬들의 관심이 뜨겁다. 동명 웹툰이 원작이지만, 이번엔 원작 만화의 세계관을 확장시켜 원작과는 다른 이야기가 전개된다. 언론에 1∼3회를 미리 공개했다. 시즌2는 시즌1의 배경이었던 낡은 아파트 ‘그린홈’ 입주자들이 그곳을 벗어나 군(軍) 통제하에 ‘안전 캠프’로 이동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괴물화가 진행됐지만 다른 괴물들과는 달리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는 차현수(송강)는 자신이 이 사태를 끝낼 열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백신 개발 실험체가 되기를 자청한다. 시즌1이 제한된 공간에서 괴물과 맞닥뜨리는 방식으로 공포를 극대화했다면, 이번엔 황폐해진 서울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언제 어디서 괴물이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긴장감을 더했다. 무엇보다 집중한 것은 ‘인간성’이다. 카메라는 괴물 출몰에 대처하는 정부의 무능과 정치인들의 위선, 질서를 세워야 한다는 명목하에 괴물보다 더 잔혹해진 군인들, 옆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이에 비해 아비규환 속 엄마의 손을 놓친 아이를 엄마에게 데려다주고, 자신의 새끼를 구하기 위해 군인들에게 미끼가 되기를 자청하는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괴물’도 등장한다. 성공한 ‘K크리처물’답게 CG는 더욱 화려해졌다. 오른팔이 가시로 된 큰 날개로 변하는 현수의 모습은 시즌1에서보다 훨씬 압도적이다. 자신의 욕망이 투영된 모습의 괴물이 된다는 설정으로, 외모에 집착하던 사람은 얼굴이 흘러내린 괴물로 변하고 투병하던 환자는 피만 보면 달려드는 괴물이 되는 등 여러 괴물의 모습이 눈앞에서 움직이는 듯 생생하게 구현됐다. 배우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송강과 이진욱(편상욱 역), 고민시(이은유 역)는 시즌1에 이어 시즌2에도 출연했다. 시즌1에서 선한 마음이 살아있는 살인청부업자를 연기했던 이진욱은 이번 시즌에선 괴물에게 몸이 갈취당한 것으로 설정돼 전혀 다른 연기를 선보인다. 광기 어린 눈빛이 정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질 만큼 열연을 펼친다. 유오성(탁인환 상사 역), 김무열(김영후 역)이 서로 대립하는 군인 역으로, 오정세가 백신을 개발하는 임 박사 역으로 새로 합류해 팽팽한 긴장감을 더한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2016년), ‘도깨비’(2016년), ‘미스터 션샤인’(2018년)을 연출한 이응복 감독이 전작에 이어 연출을 맡았다. 이 감독은 “괴물은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내면에도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며 “하루아침에 인간이 아닌 모습으로 변해버린 연인, 친구, 가족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들이 언제까지 그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고 말했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나한테 딱 맞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혼자 삼겹살 구워 먹기, 경복궁 산책하며 사진 찍기, 남산타워에서 야경 즐기기…. ‘일타 논술 강사’이자 파워 인플루언서인 영호(이동욱)는 커플 부럽지 않은 싱글의 휴일을 보낸다. 연인에게 시간과 돈을 쏟는 대신 한강이 한눈에 보이는 고급 아파트에 혼자 살고, 카메라 LP판 와인 등 좋아하는 것들로 공간을 채웠다. 완벽한 생활을 즐기던 어느 날 영호는 출판사 편집장 현진(임수정)으로부터 서울의 싱글 라이프에 대한 책을 써 보자는 제안을 받게 되고, 평온하던 일상에 간지러운 변화가 시작된다. 혼자가 좋지만 온기를 나눌 누군가를 기다리는 ‘요즘 것들’의 연애를 담은 영화 ‘싱글 인 서울’이 29일 개봉한다. ‘로맨스 장인’으로 불리는 배우 이동욱이 까칠한 싱글남 영호로 2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했다.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21일 만난 이동욱(42)은 “영호가 인간 이동욱과 많이 닮았다”며 “제 일상은 완벽한 싱글 라이프 그 자체다. 혼자 지내는 게 너무 좋고 편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제 시간과 감정을 공유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고 털어놨다. 영화는 첫사랑에 상처 입은 영호가 부족했던 20대 시절을 되돌아보고, 성숙해지는 과정을 담백하게 담았다. 그토록 미워했던 첫사랑이지만 자신이 기억을 왜곡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장면은 관객들에게 서툴렀던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이동욱은 “저도 20대 때 지질한 모습이 분명 있었겠구나 싶어서 공감이 많이 됐다”고 했다. 그는 “영화를 찍으며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늘 열린 마음으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며 웃었다. 이동욱은 고운 피부에 훤칠한 키, 곱상한 이목구비로 로맨스 장르에 최적화된 배우라는 평가를 받지만 저승사자(‘도깨비’·2016년), 사이코패스(‘타인은 지옥이다’·2019년), 구미호(‘구미호뎐’·2020년) 등 필모그래피가 다채롭다. 그는 “도전하는 걸 좋아한다. 같은 캐릭터를 연속해서 하는 건 틀 안에 갇힌 느낌이 든다”며 “다음 로맨스물은 3, 4년 후가 될 것 같다”고 했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4번은 안 돼. 한국에서 4는 불길한 숫자야.” “우리 ‘깐부’ 할까요? ‘단짝’이라는 뜻의 한국말이에요.” 초록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외국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다. “깐부!”를 외치며 하이파이브를 하기도 한다. 머리가 하얗게 센 ‘302번’ 백인 여성은 함께 출연한 아들에게 “4번은 불길하다”고 조용히 속삭인다. 이들이 지내는 생활관엔 한글로 ‘출구’ ‘엘리베이터’라고 안내 문구가 쓰여 있다. 참가자들은 진행 요원들에게 제거당하지 않기 위해 흙바닥에 엎드려 열심히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우승자 ‘456번’(이정재)처럼 달고나를 핥는다. 세트장 한쪽엔 4.2m 높이의 여자아이 모양의 로봇 인형 ‘영희’가 서 있다. 456명의 참가자가 리얼리티 쇼 역사상 최대 상금인 456만 달러(약 60억 원)를 놓고 생존 게임을 벌이는 넷플릭스 예능 ‘오징어 게임: 더 챌린지’가 22일 베일을 벗는다. 지난해 미국 에미상에서 비영어권 드라마 최초로 남우주연상과 감독상 등을 수상한 ‘오징어 게임’ 콘셉트를 그대로 가져왔다. 전 세계에서 8만1000여 명이 지원했다. 참가자들의 암투 앞에 40∼50분 분량의 한 회차가 쏜살같이 지나간다. 총 10화 분량으로 22일 1∼5화, 29일 6∼9화, 12월 6일 최종화를 공개한다. 넷플릭스가 10일 공개한 영상에서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은 ‘오징어 게임: 더 챌린지’ 세트장을 방문해 “드라마 세트장과 정말 똑같다. 문 색깔과 벽 그림까지 같다. 디테일이 살아있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황 감독은 “(더 챌린지)제작팀이 세트장을 실제 드라마와 완전히 똑같이 만들고 싶어했다. 우리 제작팀에 세부사항을 굉장히 자세하게 질문했다”며 “둘러 보니 ‘오징어 게임 시즌2’ 세트장을 더 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웃었다. ‘오징어 게임: 더 챌린지’는 영국 리얼리티쇼 제작사 ‘스튜디오 램버트’와 ‘더 가든’의 작품이다. 런던 워프 스튜디오에 세트장을 만들어 총 16일 동안 촬영했다. 총 6개의 세트장이 서로 연결돼 있고, 드라마 ‘오징어 게임’처럼 미로 같은 계단을 지나면 게임장에 입장하게 된다. 드라마 세트장을 거의 그대로 구현했다. 참가자가 제거될 때마다 천장에 매달린 돼지 저금통에 1명당 1만 달러씩 쏟아지는 것도 원작 그대로다. 다만 원작에서는 무게 때문에 이 장면을 컴퓨터그래픽(CG)으로 처리했는데, ‘오징어 게임: 더 챌린지’에서는 실물 돼지 저금통을 만들었다. 최종화에서 상금으로 가득 찬 돼지 저금통 무게가 800kg에 육박했다고 한다. 다양한 인종과 직업, 성별을 지닌 456명의 참가자는 ‘오징어 게임’처럼 철제 침대에서 먹고 자며 합숙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달고나 뽑기’ ‘구슬치기’ 등 원작에서 나온 게임과 함께 서양인들에게 익숙한 게임이 몇 가지 추가됐다. 참가자들이 탈락하면 셔츠 안에 입은 특수 조끼에서 오징어 먹물을 연상시키는 검은 잉크가 자동으로 터진다. 탈락한 참가자들은 그 자리에서 털썩 쓰러진다. 전례 없는 상금을 건 리얼리티쇼인 만큼 참가자 선발과 공정성에 만전을 기했다. 런던과 미국 서부, 동부에 허브를 두고 8만1000여 명에게서 지원서를 받았다. 이후 비디오 테스트와 면접을 거쳐 456명을 선발했다. 60대 뉴욕타임스(NYT) 전 편집자와 그의 아들, 내과 의사, 전직 군인, 수학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원초적인 생존 경쟁을 벌인다. 다만 참가자 중 한국인은 없다. 존 헤이 더 가든 최고경영자는 “인성을 테스트하는 게임, 믿음과 배신이 이끌어 가는 이야기 등을 기대해 달라”고 했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24명의 소년 소녀를 경기장에 몰아넣고 단 한 명의 승자만 살아서 나간다는 신선한 소재로 북미에서 크게 흥행한 판타지 액션 블록버스터 ‘헝거게임’ 시리즈. ‘헝거게임: 더 파이널’(2015년) 이후 8년 만에 프리퀄(기존의 작품보다 앞선 시기의 이야기를 다루는 속편)로 돌아왔다. 15일 개봉하는 영화 ‘헝거게임: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이다. 영화는 본편에서 6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뮤지컬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2022년) 주인공으로 주목받았던 배우 레이철 제글러가 헝거게임 참가자 루시 그레이 역을 맡았다. 영화는 헝거게임을 주관하는 독재국가 ‘판엠’의 코리올라누스 스노우 대통령이 18세 때 게임 멘토로 참여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스노우는 판엠의 부가 모두 몰린 곳이자 특권층들만이 모여 있는 ‘캐피톨’에 살지만 가난하다. 헝거게임 승자의 멘토가 되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스노우는 절박하게 게임에 임한다. 그의 멘티로 배정된 사람은 12구역의 루시 그레이. 스노우는 사람들을 홀리는 노래 실력과 대담함이 무기인 그녀를 최후의 1인으로 만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영화는 인간적인 면모를 갖고 있던 청년 스노우가 점점 악인으로 변해가는 과정에 집중했다. 화려한 블록버스터 영화나, 전편에서와 같은 극한의 긴장감을 기대한 관객들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울 수 있다. 루시 그레이 역의 제글러는 영화 중후반부 수동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아쉬움을 남긴다. 하지만 여전히 목숨을 건 서바이벌 게임이라는 소재와 헝거게임 세계관은 러닝타임 내내 지루할 틈이 없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영화 ‘파라노말 액티비티’와 ‘인시디어스’ 시리즈, ‘겟 아웃’(2016년), ‘메간’(2023년) 등 참신한 소재와 연출력으로 공포영화의 새 지평을 연 할리우드 제작사 블룸하우스가 영화 ‘프레디의 피자가게’로 돌아왔다. ‘프레디의 피자가게’는 동명의 인기 게임을 소재로 한 실사 공포 영화로, 북미 및 일부 국가 개봉 2주 만에 2억5000만 달러(약 3325억 원)를 벌어들이며 손익분기점을 돌파했다. 올해 미국에서 개봉한 공포영화 중 가장 성공한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15일 개봉한다. 할리우드 ‘호러 명가’가 된 블룸하우스 중심에는 제이슨 블룸 대표(54·사진)가 있다. 화상으로 13일 만난 그는 공포영화 제작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밝고 유쾌한 모습이었다. 블룸 대표는 “한국에도 블룸하우스 팬이 굉장히 많은 걸로 안다. 한국 관객들은 수준이 높다. 블룸하우스와 한국 공포영화 팬들은 아주 잘 맞는 파트너 같다”고 말했다. 2000년 블룸하우스를 설립한 그는 제작사가 내놓은 대부분의 영화에 제작자로 참여했다. 블룸하우스는 2010년 공포영화 ‘파라노말 액티비티’가 크게 흥행하면서 독창적인 저예산 영화를 발굴해 크게 성공시키는 제작사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저예산 영화의 강점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과 배우, 감독을 선정하는 데에 있어서 위험을 감수하고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블룸 대표에게도 ‘프레디의 피자가게’는 만만찮은 도전이었다. ‘프레디의 피자가게’는 2014년 출시된 공포 게임으로, 주인공이 1980년대 어린이 집단 실종 사건에 연루돼 폐업한 피자가게에 야간 경비원으로 취업해 다섯 밤을 보내는 설정이다. 영화 역시 변변한 일거리를 찾지 못하던 마이크(조시 허처슨)가 유령의 집처럼 남아 있는 피자가게에 야간 경비원으로 취직하게 되고, 영문 모를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자 경찰관 바네사(엘리자베스 라일)와 함께 가게의 비밀을 풀어나간다. 블룸 대표가 게임 원작자인 스콧 코슨을 1년간 쫓아다니며 영화화를 제안했고, 8년 만에 빛을 보게 됐다. 영화는 개봉(10월 27일) 후 2주간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며 선전 중이다. 블룸 대표는 “할리우드에서 게임이나 책을 영화화할 때 관객 확장을 위해 대부분 원작을 희석하지만 우리는 원작 팬들에게 집중했다. 이 전략이 주효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블룸 대표는 앞으로 어떤 공포 영화를 만들고 싶느냐는 질문에 “비전을 갖지 않으려고 한다”고 답했다. “어떤 기준을 두게 되면 우리 회사에서 나오는 영화가 다 똑같아질까 봐 항상 경계합니다. 무섭고 독창적인 공포영화를 만드는 것, 그 이상의 기준은 없죠.”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최근 영화계에서 의외의 흥행으로 주목받는 작품이 있다. 배우 강하늘 정소민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물 ‘30일’이다. 지난달 3일 개봉한 이 영화는 제작비 약 60억 원이 든 중·저예산 작품으로, 6일 관객 200만 명을 돌파하며 손익분기점(160만 명)을 넘었다. 개봉 5주 차 주말인 11일에도 전체 박스오피스 4위를 차지하며 뒷심을 발휘하고 있다. 앞서 올해 손익분기점을 넘은 한국 영화가 ‘범죄도시3’ ‘밀수’ ‘콘크리트 유토피아’뿐이고, 세 편 모두 제작비 100억∼200억 원이 넘는 범죄·드라마 장르의 대작인 것을 감안하면 로맨틱 코미디물 ‘30일’의 선전은 눈에 띈다. ‘30일’은 불같이 사랑해 결혼했지만 서로의 찌질함과 괴상한 성격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이혼을 결심한 정열(강하늘)과 나라(정소민)의 이야기를 그렸다. 매일 잡아먹을 듯 싸우던 이들은 마침내 법원에 이혼을 신청한다. 30일의 숙려기간을 받아든 날 함께 교통사고를 당한 이들은 동반 기억상실증에 걸리고 만다. 서로에 대한 나쁜 기억을 잊은 두 사람이 풋풋한 마음으로 되돌아가게 되면서 30일을 보낸다. 설정은 뻔하지만 장면마다 객석에선 폭소가 터져 나온다. 얼굴을 있는 힘껏 구기고 몸을 사리지 않는 두 배우의 열연이 돋보인다. 팬데믹 이후 좀처럼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극장가에서 ‘30일’이 관객들의 선택을 받은 이유는 ‘가볍고 재미있어서’다. 서울 성동구 CGV왕십리에서 11일 영화를 관람한 김한성 씨(27)는 “유튜브 리뷰 영상을 보니 아무 생각 없이 웃으면서 볼 수 있는 영화 같아서 데이트 겸 영화관에 나왔다”며 “긴장하면서 보지 않아도 돼 즐거웠다”고 했다. 앞서 8월 개봉한 유해진 김희선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물 ‘달짝지근해: 7510’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어리숙하지만 마음이 따뜻한 남자 치호(유해진)가 당찬 싱글맘 일영(김희선)을 만나 처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과정을 코믹하게 담았다. ‘극한직업’(2019년)의 이병헌 감독이 각본을 맡아 특유의 유머 감각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는 호평을 받았다. 최종 관객 138만 명으로 손익분기점(165만 명)은 넘지 못했지만 최근 관객 수 100만 명 넘기가 어려운 극장가에서 선전했다는 평가다. 영화는 인터넷TV(IPTV) 유료 결제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두 영화의 성공에 힘입어 29일 개봉하는 임수정 이동욱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물 ‘싱글 인 서울’도 기대를 모으고 있다. 영화계 관계자들은 팬데믹 이후 영화 제작 투자 규모가 줄어들고, 그나마 있는 투자금이 대작에 집중되는 가운데 중·저예산 로맨틱 코미디물이 관객몰이에 성공하면서 훈풍을 불어넣고 있다고 말한다. ‘30일’ ‘달짝지근해: 7510’을 배급한 마인드마크의 김종원 마케팅팀장은 “가장 중요한 것은 관객을 극장으로 데려오는 일이다. 그러려면 다 같이 가볍게 웃으면서 보고 입소문을 타는 영화가 승산이 있겠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는 “팬데믹 이후 예전처럼 무난하게 손익분기점은 넘길 거라는 기대가 없어졌다.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관객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많이 했다”고 밝혔다. 김시무 영화평론가는 “팬데믹 기간 전후로 대작에 투자금이 몰리면서 스케일이 크고 무거운 영화들이 많았다”며 “연이어 쏟아진 대작들로 슬슬 지쳐가던 관객들에게 가볍게 관람 가능한 코미디물과 로맨스물 작품들이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간 것 같다”고 분석했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김원미 피콜로이스트가 16일 오후 7시 반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리사이트홀에서 ‘춤바람난 피콜로, 반도네온과 사랑에 빠지다’를 주제로 독주회를 연다. 피콜로는 이탈리아어로 ‘작다, 젊다’는 의미로 플루트보다 작지만 한 옥타브 높은 소리를 내는 목관 악기다.김 씨는 해마다 새로운 주제로 관객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공연을 기획해왔다. 올해는 춤이 메인 테마다. 1부 5곡은 다양한 춤사위를 연상시키는 국내 초연 곡들로 이뤄져 있다. 2부 4곡은 하나의 춤곡 형식이 완전한 음악 장르가 된 ‘탱고’를 반도네온, 첼로, 더블 베이스까지 뭉친 앙상블 연주로 재조명한다. 김 씨는 “국내 최초로 피콜로 독주회를 개최했던 만큼 매년 새로운 장르와 콜라보를 통해 피콜로가 독창적 매력을 가진 악기라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다”고 했다.김 씨는 예원학교와 서울예술고, 이화여대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영국 로열아카데미오브뮤직에서 석사과정을 밟았고, 동양인 최초로 이탈리아 베르디 콘서바토리에서 피콜로 솔리스트 최고 연주자 과정을 졸업했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박서준이 어떻게, 얼마나 등장할까”로 국내 팬들의 기대를 모았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영화 ‘더 마블스’가 8일 베일을 벗었다. 박서준은 주인공 캡틴 마블(브리 라슨)의 남편인 알라드나 행성의 얀 왕자 역을 맡았다. 소문대로 단 세 장면에 짧게 등장하지만 마블 영화로 할리우드에 눈도장을 찍게 돼 향후 해외 진출이 주목된다. 마블 최초의 흑인 여성 감독이자 최연소 감독인 니아 다코스타(34·사진)는 7일 화상 간담회에서 “팬데믹 기간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2020년)를 보게 됐고 박서준이 눈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이어 “얀 왕자 캐릭터에는 박서준이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어 캐스팅하게 됐다”며 “(얀 왕자는) 출연 분량은 적지만, 임팩트가 있는 중요한 역할”이라고 했다. 그는 “박서준은 굉장히 재밌는 사람이고 현장에 좋은 에너지를 가져오는 사람이다. 엄청난 재능이 있는 배우”라고 덧붙였다. 한국 배우가 마블 영화에 출연하는 것은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년)의 수현, ‘이터널스’(2021년)의 마동석에 이어 박서준이 세 번째다. 다코스타 감독은 할리우드에서 주목받는 신예 감독이다. 그는 10대 때 한국 문화에 푹 빠져 ‘내 이름은 김삼순’(2005년) ‘소울메이트’(2006년) ‘커피 프린스 1호점’(2007년) 등 한국 드라마뿐 아니라 한국 예능도 즐겨 봤다. 그는 “유재석을 제일 좋아한다”며 “한국 드라마, 영화, 음악 등 장르를 불문하고 푹 빠져들었다”고 했다. 그가 그린 ‘더 마블스’는 시원하게 질주하는 롤러코스터 같다. 짧지만 강렬하고, 속도감이 넘친다. 러닝타임이 105분으로 역대 MCU 영화 중 가장 짧다. 영화는 고독한 캡틴 마블이 오랜 친구의 딸인 모니카 램보(티오나 패리스), 자신의 열혈팬이자 ‘미즈 마블’인 여고생 카멀라 칸(이만 벨라니)과 엮이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세 사람은 캡틴 마블에게 복수하려는 크리족 리더 다르-벤(자위 애슈턴) 때문에 초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서로의 위치가 뒤바뀐다. 다르-벤은 자신의 행성 할라를 재건하기 위해 얀 왕자(박서준)가 사는 행성 알라드나의 바닷물을 약탈하려 하고, 캡틴 마블은 법적 남편인 얀 왕자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알라드나 행성으로 향한다. 세 사람이 눈 깜짝할 사이 위치가 바뀌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해프닝이 재미를 준다. 세 사람이 서로에게 애정을 가지며 한 팀으로 변해가는 모습도 잔잔한 감동이 있다. 하지만 모니카 램보와 카멀라 칸의 서사가 영화에서는 처음 소개되는데, 전개 속도가 빨라 이해하기 버거운 지점들이 있다. MCU가 세계관을 확장하면서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된 부분이다. 영화는 각각의 서사에 시간을 할애하기보다는 세 히어로의 팀워크와 오락성에 중점을 두는 방식을 택했다. 빌런인 애슈턴 역시 ‘타노스’만큼의 깊은 인상은 남기지 못했다. 박서준이 연기한 얀 왕자는 알라드나족이 노래로 대화한다는 설정 때문에 제대로 된 대사가 없다. 노래와 춤을 보여주는데 그 설정이 웃기지도, 멋지지도 않고 다소 어정쩡하다. 출연 시간은 5분이 채 되지 않는다. 주연 캐릭터들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도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 눈을 사로잡는 건 우습게도 고양이 구스와 그 새끼들이다. 위기에 빠진 우주 정거장 대원들을 고양이들이 구해낸다는 설정은 귀엽고 기발하다. MCU 다섯 번째 페이즈(큰 스토리라인을 단계별로 구분한 것)의 정체성을 드러내기에는 다소 부족하지만 마블이 새로운 창작자들과 색다른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법에는 구멍이 나 있다. 이제 내가 그 구멍을 메우겠다. 지금부터 널 풀어준 법을 원망해. 내가 지옥을 보여줄게.”(‘비질란테’ 김지용)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가는 ‘나쁜 놈’들을 지구 끝까지 쫓아가 단죄하는 것,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법한 상상이다. 낮에는 모범적인 경찰대 학생이지만 밤이면 범죄자들을 찾아가 직접 심판하는 다크히어로물 8부작 드라마 ‘비질란테’가 8일 디즈니플러스에서 공개된다. 경영 악화로 한국 철수설까지 돌았던 디즈니플러스가 드라마 ‘무빙’의 성공 이후 야심 차게 내놓은 기대작이다. 8일부터 매주 수요일 2회차씩 공개될 예정이다. 서울 강남구 한 호텔에서 6일 열린 ‘비질란테’ 제작발표회에서 배우 유지태(조헌 역)는 “제가 ‘배트맨’ 시리즈 광팬이다. 이제는 한국형 액션 (다크)히어로가 나올 때가 됐다. 그게 바로 ‘비질란테’”라며 “‘비질란테’가 세계적으로 뻗어 나가 ‘박쥐’(배트맨)를 잡는 날이 오길 기대한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원작은 3억7000만 뷰를 기록한 김규삼 작가의 동명 웹툰이다. 원작 만화 팬이 많아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부터 큰 기대를 모았다. 연출을 맡은 최정열 감독은 “웹툰에서 임팩트 있었던 사건들 위주로 구성해 긴장감을 살리고자 했다”고 말했다. 방대한 원작 분량을 8부작으로 줄이는 과정에서 다수의 사건이 담기지 못한 데 대해 최 감독은 “전개가 더 빨라지면서 순식간에 시청자들을 빨아들일 것”이라고 자신했다. ‘비질란테’가 풍자하는 건 ‘빽 없는 자들에겐 단호하고, 빽 있는 자들에겐 물러터진’ 이 시대다. 주인공 김지용(남주혁)은 모범 경찰대생이지만 마음속에는 분노가 가득하다. 어릴 적 지용의 엄마는 그의 눈앞에서 폭행을 당해 목숨을 잃었다. 범인은 심신미약이라는 이유로 낮은 형량을 받고 사회로 돌아온다. 여전히 반성 없이 폭력을 행사하고 다니는 범인을 만난 지용은 그를 직접 단죄하고, 범죄자들을 직접 심판하는 ‘비질란테’로 활동을 시작한다. 현재 군 복무 중인 배우 남주혁은 이번 작품으로 첫 액션 연기에 도전했다. 매일 복싱장에 가서 훈련했다고 한다. 긴 팔다리로 펼치는 액션 연기도 눈길을 끌지만 범죄자를 단죄하는 데 망설임 없는 그의 서늘한 눈빛이 더욱 인상적이다. 유지태는 ‘비질란테’를 쫓는 광역수사대 수사팀장 조헌 역을 맡았다. ‘무시무시한 괴력의 소유자’라는 원작 설정을 따르기 위해 몸무게를 20kg 늘렸다. ‘범죄도시3’에서 빌런 주성철로 깜짝 놀랄 연기 변신을 보여준 배우 이준혁은 ‘비질란테’를 추종하는 재벌 2세 조광옥 역을 맡았다. 배우 김소진은 ‘비질란테’를 보도하며 성공에 대한 욕심을 채우는 기자 최미려를 연기했다. 판사 출신 작가 문유석이 크리에이터로 참여해 각본에 의견을 보태고 감수를 도왔다. ‘비질란테’는 디즈니플러스가 ‘무빙’ 이후 내놓은 웹툰 원작 드라마다. ‘무빙’을 통해 유입된 무료 구독자들이 재구독 여부를 결정할 시점에 공개하는 작품이어서 디즈니플러스도 홍보에 총력을 다하고 있다. 지난달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린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 중앙에는 영화 대신 ‘비질란테’ 초대형 포스터가 걸려 눈길을 끌었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반주 없이 낮은 음성으로 담담히 부른다. 성악적 기교도, 힘도 뺀 빈 공간에 꽃망울이 터져 나온다. 세계적 성악가 베이스 연광철(58·사진)이 생애 첫 한국 가곡집 ‘고향의 봄’을 냈다. 마지막 트랙에 실린 ‘고향의 봄’은 특별히 피아노 반주 없이 그의 목소리로만 녹음했다. 듣는 이들이 어릴 적 시골길을 걸으며 흥얼거렸던 추억을 떠올리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서울 강남구 풍월당에서 3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연광철은 “유럽에서 지낸 30년 동안 그들의 작품, 음악 속에서 살면서 그것을 해석하려고 노력했지만 정체성에 혼란이 오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이번 한국 가곡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자신이 한국 문화 속에서 자랐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전기도 안 들어오는 시골길을 걸으며 느낀 정취, 자연의 아름다움이 저절로 떠올랐다. 외국에서 저는 이방인으로 그들의 음악을 했지만, 우리 가곡을 부를 땐 온전히 제 것을 부르는 것 같았다. 굉장히 편안하고 즐거웠다”고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연광철은 충북 충주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농사짓는 집안에서 태어나 ‘목소리가 좋다’는 칭찬에 성악의 길을 택했다. 부친이 소를 판 돈으로 불가리아 소피아 국립예술학교로 유학을 떠났고, 1993년 플라시도 도밍고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이름을 알렸다. 이후 베를린 국립 오페라극장 전속 단원으로 10년간 활동했고 독일 바이로이트축제극장, 영국 코번트가든 로열오페라하우스 등 세계 주요 오페라 무대에 올랐다. 2018년 독일에서 최고의 성악가에게 수여하는 궁정가수 ‘카머젱거’ 칭호를 받았다. 그런 그에게도 한국 가곡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클래식 음반 매장이자 복합문화공간 풍월당이 올해 창립 20주년을 맞아 그에게 한국 가곡집을 제안했다. 그는 “소리와 발성 같은 음악적 부분보다는 시를 낭송하는 자세로 불렀다”며 “우리말이 굉장히 노래하기 좋은 언어다. 작곡가들이 음성학적으로 더 많이 공부하면 충분히 예술적인 가곡들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이번 가곡집에는 ‘비목’ ‘청산에 살리라’ ‘진달래꽃’ 등 18곡이 담겼다. 책 형태의 가사집 안에 CD가 붙어있는 형태로 제작됐다. 가사를 영어와 일본어, 독일어로 번역 수록해 해외로도 수출할 예정이다. 표지는 지난달 작고한 박서보 화백의 단색화 ‘묘법 No.980308’을 후원받아 만들었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제가 처음 한국에 온 게 영화 ‘4월 이야기’(1998년) 때였어요. 그 뒤에 ‘러브레터’(1999년)를 정식 개봉하게 되면서 한국에 또 한 번 왔습니다. 제가 신인 감독이었는데도 굉장히 열광적인 팬들이 많이 계셨어요. (한국 팬들의 사랑은) 이후 제 인생에 굉장히 강력한 힘과 지지가 돼주었습니다.” 이와이 슌지 감독(60·사진)은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3일 가진 인터뷰에서 한국 팬들에 대한 감사의 말부터 꺼냈다. 그는 1일 개봉한 신작 ‘키리에의 노래’로 한국을 찾았다. 주인공이 일본 홋카이도 설원에서 하염없이 외치는 대사 “오겐키데스카(잘 지내시나요)”가 유행어가 될 정도로 큰 인기를 모은 ‘러브레터’를 비롯해 ‘릴리 슈슈의 모든 것’(2005년), ‘하나와 앨리스’(2015년) 등으로 그는 국내 팬들에게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키리에의 노래’는 동일본 대지진을 겪은 후유증으로 평소엔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지만 노래는 잘 부를 수 있는 ‘키리에’(아이나 디 엔드)가 거리의 가수로 거듭나는 음악 영화다. 지난달 열린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됐다. 이와이 감독은 “노래하는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며 “주인공이 말을 잘 못한다는 설정은 동일본 대지진을 겪으며 떠올린 아이디어”라고 했다. 이와이 감독의 고향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큰 피해를 입은 미야기현 센다이시다. 그는 대지진 이듬해 자신이 쓴 소설을 바탕으로 이번 영화를 연출했다. 영화엔 센다이 곳곳의 아름다운 풍경이 등장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살았던 도시가 큰 피해를 입어 충격을 받았다. 지진이 일어난 후 언젠가 그곳을 배경으로 영화를 찍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가 이번 영화에서 가장 집중한 건 음악이다. 거리에서 버스킹하는 장면을 실감 나게 화면에 담기 위해 현장 녹음본을 영화에 그대로 사용했다. 그는 “영화의 일부가 공연으로 이루어졌다는 느낌을 주려 했다”고 말했다. 이와이 감독 특유의 몽환적인 색감과 영상미에 키리에의 노래가 더해지면서 서로를 치유해 나가는 청춘의 모습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다만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긴 탓에 간간이 흐름이 끊어진다는 느낌을 지우긴 어렵다. 키리에를 연기한 아이나 디 엔드는 일본 아이돌그룹 ‘비슈(BiSH)’ 출신의 싱어송라이터이자 배우다. 목을 긁는 비명 같은 특이한 창법이 키리에의 상처받은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그가 작업에 참여한 6곡이 영화 OST에 수록됐다. 수록곡 ‘혼자가 좋아’는 아이나 디 엔드가 곡을 쓰고 이와이 감독이 가사를 썼다. 1991년 드라마 ‘본 적 없는 내 아이’를 선보이며 올해로 데뷔 32년이 된 이와이 감독은 한국 콘텐츠계가 부럽다고 했다. 그는 “한국 콘텐츠는 웹툰을 실사 영화로 만드는 작업이 활성화돼 있는등 영화와 만화가 잘 융합돼 있다. 일본은 애니메이션에 비해 실사 영화 팬들의 수가 매우 적고 예산 역시 적다. 실사 영화를 좀 더 잘 만들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했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동아일보와 인제군문화재단, 여초서예관이 공동 주최한 제9회 여초서예대전 시상식이 4일 강원 인제군 여초서예관에서 열렸다. 여초서예대전은 서예가 여초 김응현 선생(1927∼2007)의 서법정신을 기리는 대회다. 이날 시상식엔 부문별 대상 수상자인 △문용기 씨(성인부·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상금 500만 원) △허은희 씨(기로부·동아일보 회장상·상금 200만 원) △김효경 양(중고등부·인천서창중 1학년·인제군수상·상금 100만 원) △최진우 군(초등부·서울하늘숲초 6학년·인제군의회 의장상·상금 50만 원)과 우수상 이상 수상자 등 50여 명이 참석했다. 최상기 인제군수와 이춘만 인제군의회 의장, 김대현 여초서예관 명예관장, 이일구 여초서예대전 운영위원장 등이 참석했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대한예수장로회 통합 교단이 여성 목회자 안수를 시작하는 데 앞장선 이연옥 여전도회전국연합회 명예회장이 3일 별세했다. 향년 99세. 고인은 여전도회전국연합회 회장(28·29·31·32대)을 지냈다. 유족으로 동생 이연신 경민교회 장로, 조카 홍문종 전 국회의원 홍인종 장신대 교수 홍지연 경민대 총장이 있다. 빈소는 서울 세브란스병원, 발인 7일 오전 8시. 02-2227-7500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역사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울프슨상을 수상한 미국 예일대 역사학과 교수가 제2차 세계대전을 바다에서 벌어진 전투를 중심으로 풀어냈다. 당시 6대 해군 강국이었던 영국과 미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독일이 바다에서 벌인 전투와 군사 활동, 수송과 상륙작전을 월 단위로 상세하게 정리했다. 베스트셀러 ‘강대국의 흥망’으로 유명한 저자가 2차대전에서 특히 바다에 천착한 이유는 미국 때문이다. 2차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 미국이 세계 최강국으로 급부상할 수 있었던 건 해양을 장악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2차대전에서 연합국이 승리한 건 미국과 영국이 바다를 통해 끊임없이 전투원과 군수품을 실어 날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는 해군력과 생산성 혁명이라는 두 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군수품이 전선에 마를 틈 없이 흘러들었고, 연합군이 승기를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레이테만과 노르망디에서의 승리로 이어졌다. 저자는 미국이 빠른 속도로 생산력을 끌어올린 것은 경제 활황과 그에 따른 세금 인상, 이를 통한 강력한 재정 지원이 바탕이 됐다고 분석한다. 2차대전 이후 이탈리아, 독일, 일본의 해군이 소멸되면서 해양에서의 균형이 무너졌고, 미국의 해군력을 쫓아올 나라는 없어졌다. 그러나 이후 원자폭탄이 개발되면서 해양 장악이 곧 세계 제패를 의미했던 기존의 질서가 재편되기 시작했다. 분량이 방대하지만 역사적 사실과 함께 2차대전의 기승전결과 해양 패권의 흥망을 다각도로 통찰한다. 2차대전의 분수령마다 전쟁 당사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도 꼼꼼하게 짚었다. 해양화가 이언 마셜의 삽화 53점이 수록돼 있어 눈이 즐겁다. 마셜은 평생 군함과 바다, 전쟁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책에 담긴 군함 그림들은 모두 정확한 고증을 거쳤다. 한 점 한 점이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 같다. 생생한 그의 수채화는 당시 해군력의 압도적인 규모를 실감케 한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복제인간과 인간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인간이 오히려 살생에 거리낌이 없고, 복제인간이 절절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면 누가 더 인간답다고 할 수 있을까. 2일 개봉한 영화 ‘시뮬런트’가 던지는 질문이다. 영화는 거대한 기술 기업 넥스세라가 복제인간 ‘시뮬런트’를 대량 생산한 미래가 배경이다. 복제인간들은 겉보기에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이들은 절대 인간을 해칠 수 없고, 자신을 소유한 주인의 명령에 복종한다는 원칙에 따른다. 인간이 ‘셧다운’을 외치면 즉시 전원이 차단된다. 하지만 때로 불량품이 발생해 주인에게서 탈출하는 시뮬런트들이 생겨나게 되고, 특수 요원 케슬러(샘 워딩턴)가 이들을 체포하러 다닌다. 어느 날 케슬러는 탈출한 시뮬런트의 흔적을 쫓다가 전례 없는 수준으로 자율성을 가진 시뮬런트를 만난다. 몇 년 동안 도망 다닌 이 시뮬런트 ‘에즈메’(알리시아 산스)는 직접 손으로 생각이 담긴 일기를 쓰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등 인간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셧다운’을 외쳐도 전원이 꺼지지 않는다. 자신을 체포하려는 케슬러를 공격하기까지 한다. 케슬러는 에즈메가 해킹당했다고 확신하게 되고, 용의자인 해커 케이시(시무 리우)를 추격한다. 이 추격전에는 에반(로비 아멜)과 페이(조대나 브루스터) 부부도 연루돼 있다. 이들 부부는 사고를 당하거나 병들어 더 이상 육체가 기능하지 못할 때를 대비해 자신들을 본뜬 시뮬런트를 제작해뒀다. 그러다 에반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고, 페이는 남편의 기억을 그대로 저장시킨 시뮬런트를 가동시키지만 진짜 남편을 대신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에반을 셧다운시키고 싶어 한다. 에반은 케슬러를 만나 이 같은 사실을 전해 듣게 되고, 그와 함께 도망 간다. 영화 내용 자체가 기시감이 들긴 하지만 인공지능(AI)이 화두인 시대에 시의적절한 주제다. 인간과 비인간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