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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소설가(53)가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로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을 9일(현지 시간) 수상했다. 메디치상은 공쿠르상, 르노도상, 페미나상과 함께 프랑스의 4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사건으로 인한 상처와 치유를 그린 작품이다. 한 작가는 2016년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했다. 2019년 제33회 인촌상(언론·문화 부문)을 받았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한강 소설가(53·사진)가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로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을 9일(현시 시간) 수상했다. 메디치상은 공쿠르상, 르노도상, 페미나상과 함께 프랑스의 4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사건으로 인한 상처와 치유를 그린 작품이다. 한 작가는 2016년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했다. 2019년 제33회 인촌상(언론·문화 부문)을 받았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8편의 단편소설을 총 3곳의 집에서 썼어요. 재개발, 계약 기간 만료로 집을 옮겨 다니며 쓰다 보니 자연스레 집에 대한 이야기가 담겼습니다.” 세 번째 소설집 ‘축복을 비는 마음’(문학과지성사·사진)을 1일 펴낸 김혜진 소설가(40)는 7일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가 2019∼2022년 이사 다니며 작품들을 쓴 만큼 집과 관련된 애환과 고민이 실렸다는 것이다. 그는 “주거와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함께 가지고 있는 집은 우리 사회에서 복잡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근래 집값 상승으로 집에 대한 논의가 많다”며 “집에 대한 한국 사회의 여러 고민을 담고 싶었다”고 했다. 201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젊은작가상, 김유정문학상을 받은 그는 신간에서 집과 관련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비판적으로 다룬다. 단편 ‘산무동 320-1번지’는 세입자에게 월세를 내라고 집주인 대신 독촉하는 관리인을 그린다. ‘20세기 아이’는 어린아이의 눈으로 재개발을 앞둔 쇠락한 동네의 현실을 바라본다. ‘이남터미널’은 빌라 투자를 위해 달동네를 돌아다니는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집을 소유하려는 욕망에 대해 묻는다. 집을 소유한 이도 굴레에 빠져 있기는 마찬가지다. ‘목화맨션’은 집주인 만옥과 세입자 순미의 이야기지만 둘을 갑을관계로 그리지 않는다. 남편이 아프고 빚에 허덕인다며 순미에게 세를 빼지 말라고 통곡하는 만옥의 속사정을 전할 뿐이다. “개발이고 뭐고 이제는 진짜 신물이 나요. 평생 그 말 쫓아다니다가 나도 우리 아저씨도 다 굶어 죽게 생겼어.”(만옥)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엄마들의 독서 모임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미애’, 집 청소하는 노동자의 애환을 전한 ‘축복을 비는 마음’에선 집과 동네에 얽힌 미묘한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지금보다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갈지를 고민하는 마음을 다룬 ‘자전거와 세계’, 지친 업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직장인의 애환을 담은 ‘사랑하는 미래’처럼 집을 간접적으로만 다룬 작품도 있다. 신작 표지는 다세대 빌라가 늘어선 달동네 하늘에 폭죽이 터지는 그림이다. 김 소설가는 “절망보단 집이 더 나은 공간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몸을 갈아 넣지 않으면 못 할 일이에요. 매일 10시간씩 6개월에 걸쳐 총 600만 쪽 이상을 찍어냈죠.” 6일 경기 파주시 출판도시활판공방. 인쇄공 김평진 장인(74)이 제작된 지 100년이 넘은 활판인쇄기에 활판을 밀어 넣으며 말했다. 기계 안으로 빨려 들어간 활판 위 글자에 잉크가 묻었다. ‘칙칙’ 하는 소리와 함께 흰 종이 위에 검은 글자가 인쇄됐다. 김 장인은 결과물을 내밀며 웃었다. “뭐가 다른지 한번 느껴보세요.” 인쇄된 종이는 검은 글자의 농도가 진해 눈에 잘 들어왔다. 표면을 만져보니 글자마다 오톨도톨한 요철(凹凸)의 질감이 느껴졌다. 감회가 새로워 인쇄된 미국 작가 잭 런던(1876∼1916)의 중편소설 ‘야성의 부름’의 한 구절을 음미하며 읽었다. “두꺼운 목으로 늑대 무리의 노래이자 이전 세상의 노래인 야성의 부름을 울부짖는다.”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서 지난달 31일부터 판매하고 있는 중편소설 33편을 모은 선집 ‘노벨라33’(전 33권·다빈치) 중 한 권이다. 노벨라는 중편소설을 뜻한다. 요즘엔 활판을 종이에 대지 않고 간접인쇄하는 ‘오프셋’ 방식을 주로 쓴다. 이에 비해 이 선집은 입체 활판을 종이에 대고 직접 눌러 깊숙이 찍어내는 고전 방식인 ‘활판인쇄’ 방식을 사용했다. 오프셋 방식이 유행하면서 1980년대 후반부터 활판인쇄 방식은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전자책과 웹소설이 인기를 끄는 요즘 종이책의 본류를 찾아간 기획을 내놓은 건 박성식 다빈치 대표(58)다. 박 대표는 쇠락해가는 문학 장르(중편소설)와 인쇄 기술(활판인쇄)을 되살리고 싶어 약 10년 전부터 선집을 기획했고, 2년 전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박 대표는 “팔만대장경판으로 책을 만드는 것과 유사하다”며 “더 빠르게, 더 저렴한 가격으로 책을 만드는 것이 발전인지 묻고 싶었다”고 했다.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먼저 기계로 글자를 활판에 새겨야 했다. 파주활판공방에 남아 있는 100년 이상 된 활판인쇄기 두 대는 고장이 잦았다. 김 장인과 권용국 장인(89)의 나이가 적지 않은 점도 근심거리였다. 알라딘에서 제작비 5억 원을 투자했고, 박 대표가 사비 5000만 원을 더 썼다. 내용도 신경 썼다. 영국 작가 조지 오웰(1903∼1950)의 ‘동물농장’,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1913∼1960)의 ‘이방인’처럼 한국 독자에게 익숙한 작품뿐 아니라 미국 페미니스트 작가 케이트 쇼펜(1850∼1904)의 ‘각성’, 미국 호러 작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1890∼1937)의 ‘인스머스의 그림자’ 등 다양한 작품을 담았다. 프랑스 작가 오노레 드 발자크(1799∼1850)의 ‘공놀이하는 고양이 상점’처럼 국내 초역한 작품도 있다. 이 선집은 7일까지 132세트가 팔렸다. 구매자의 85.2%가 40대 이상이다. “장인의 숨결이 느껴진다”, “종이에 꾹꾹 눌러 담긴 문장”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정가 77만 원에 이르는 선집에 왜 지갑을 연 걸까. 박한수 파주활판공방 대표(57)는 “활판인쇄로 찍어낸 책엔 ‘아날로그의 맛’이 살아 있다.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가 있어도 LP판을 찾듯 마니아 독자들은 소장하고 싶은 책을 찾는다. 오프셋으로 찍은 글자는 쉽게 뭉개지고 날아가지만, 활판인쇄로 종이에 글자를 꾹꾹 눌러 새긴 책은 500년 이상 가서 소장가치가 높다”고 했다. 판매가 끝나면 제작에 쓴 활판은 모두 해체해 구매자에게 사은품으로 증정할 예정이다. 인쇄된 1000세트는 다시는 출간되지 않는 한정판으로 남게 되는 셈이다. 비슷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제작자들은 ‘고난의 행군’을 다시 할까. 박 대표는 “다 쏟아부었다. 이번 프로젝트를 마지막으로 출판계에서 은퇴할 계획”이라고 했다. 김 장인은 “누구라도 불러준다면 다시 인쇄기를 돌릴 것”이라고 했다.파주=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한국어요? 유튜브에서 K팝 음악을 듣고, 넷플릭스에서 한국 드라마를 보며 배웠어요.” 1일(현지 시간) 제42회 ‘샤르자 국제도서전’이 열린 아랍에미리트(UAE) 샤르자 엑스포센터. 1999년생 샤르자 출신 여성 프리랜서 통역가인 웨즈 단 씨는 검은색 히잡을 매만지며 유창한 한국어로 말했다. 그는 “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했고 정규 교육 과정에서 한국어를 배우지 않았다. 한국 대중문화와 UAE에 있는 한국인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한국어를 익혔다”고 했다. 그가 도서전에 온 건 이날 저녁 도서전에서 열린 김상근 그림책 작가의 강연을 통역하기 위해서다. 그는 “사실 UAE에 한국 책이 많이 번역되진 않아서 그림책은 처음 읽어봤다. 그림책은 모두가 공감할 만한 소재와 주제의식을 담고 있어서 UAE 독자들도 재밌어할 것 같다”며 김 작가의 ‘두더지의 고민’을 가리켰다. ‘두더지의 고민’은 친구가 없어 고민인 귀여운 두더지가 주인공인 그림책이다. 어느 날 홀로 놀던 두더지는 눈덩이를 굴린다. 눈덩이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진다. 그런데 갑자기 눈덩이 속에서 “살려 달라”는 소리가 들린다. 눈덩이 속에 다른 동물들이 파묻힌 것이다. 두더지는 눈덩이에 갇힌 동물들을 구해주고 친구가 된다. 두더지는 “친구들과 뭐하며 놀까” 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한국에서 ‘두더지의 고민’의 권장 연령은 4∼7세다. 실제로 한국에선 아이들이 많이 읽는다. 한국 대중문화의 인기가 높아지는 요즘, 한국어를 배우려는 해외 성인 독자에겐 그림책이 학습용 콘텐츠가 될 수 있다. 그림책은 내용이 간단명료하고, 모두가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글의 양이 적어 처음 한국 책을 접하는 ‘입문자’에게도 어렵지 않은 셈이다. 1일부터 열린 샤르자 국제도서전에선 경혜원, 김상근, 박현민, 최혜진 작가가 참가하는 그림책 북토크가 진행됐다. 그림책 작가들과 아이들이 함께 그림을 그리는 행사도 마련돼 성황을 이뤘다. 샤르자 국제도서전에 참가한 출판사 잉글리시에그의 송민우 대표(대한출판문화협회 저작권 담당 이사)는 “해외에서 ‘한국 콘텐츠는 무조건 소개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한국어를 배우려는 수요가 늘어나는 상황을 보니 영어 교육책을 한국어로 번역해 해외에 낼 생각도 한다”고 말했다. 이날 통역가는 기자에게 “가수 유재하를 좋아한다. 요즘엔 밴드 잔나비, 싱어송라이터 심규선 노래도 자주 듣는다”고 했다. 그가 말한 음악가는 모두 한 줄 한 줄 곱씹을 만한 의미가 담긴 가사를 쓰고 부르는 이들이다. 해외의 젊은 세대가 처음 한국에 빠지는 계기는 주로 K팝이지만 점차 그들은 인디밴드의 노래 등 ‘조금 다른’ 음악을 찾아 들으며 한국어를 음미한다. 이들이 한국 그림책을 읽으며 사전에서 한국어를 찾아보고, 한국을 더 깊게 이해하고 싶어 이상(1910∼1937)의 시와 박경리(1926∼2008)의 소설을 밤새워 읽는 날도 언젠가 오지 않을까. 그림책이 한국 문학의 세계화를 부르는 마중물이 되길 바란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국왕이 오신다!” 1일(현지 시간) 제42회 ‘샤르자 국제도서전’이 열린 아랍에미리트(UAE) 샤르자 엑스포센터. 셰이크 술탄 빈 무함마드 알 까시미 샤르자 국왕이 도서전 주빈국인 한국관을 찾자 장내가 술렁였다. 샤르자를 ‘책의 도시’로 만들고 있는 까시미 국왕의 방문에 중동 출판인들의 이목이 쏠린 것이다. 까시미 국왕은 정호승 시집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2017년·창비), 김애란 소설집 ‘바깥은 여름’(2017년·문학동네) 등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둘러본 뒤 “한국 책을 중동에 많이 번역해 출판해 달라”고 당부했다. 국왕이 자리를 뜨자 UAE, 이집트, 레바논 등 중동 국가에서 온 출판인 수십 명이 몰려들어 한국 책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샤르자는 UAE를 이루는 7개의 연합 토후국 중 하나다. 샤르자 인구는 약 140만 명으로, 아부다비(290만 명), 두바이(270만 명)에 이어 세 번째로 많다. 샤르자는 도서청이라는 정부 관청을 별도로 둘 정도로 도서 산업에 관심이 많다. 샤르자에 ‘출판도시 자유구역’을 만들어 외국인이 출판사를 차려 책을 펴낼 경우 세금을 모두 면제해준다. 1982년부터 시작된 샤르자 국제도서전은 중동 최대 도서전으로 불린다. 샤르자 국제도서전 입장은 무료다. 12일까지 열리는 올해 샤르자 국제도서전엔 109개국에서 2000여 개 출판사가 참여했다. 한국은 올해 처음으로 샤르자 국제도서전 주빈국으로 참여했다. 샤르자가 한국을 주빈국으로 초대한 건 드라마, 음악 등 한국 대중문화에서 시작된 관심이 책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흐메드 알 아메리 샤르자 도서청장은 1일 한국 기자들과 만나 “한국 책은 한국을 배울 수 있는 좋은 매개체”라며 “출판도시 자유구역에선 인도 태생의 영국 작가 살만 루슈디의 책도 자유롭게 펴낼 수 있다”고 했다. 루슈디는 소설 ‘악마의 시’에서 이슬람교 창시자 마호메트를 부정적으로 그려 1988∼1998년 이란의 종교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에게 파트와(사형선고)를 받은 바 있다. 189㎡ 규모로 설치된 한국관의 주제는 ‘무한한 상상력’이다. 전쟁, 빈곤 등 현재 인류가 마주한 위기를 책에 담긴 상상력으로 극복하자는 취지다. 한국관에는 한국 책 79종이 전시됐다. 김혜순 시집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2022년·문학과지성사) 등 순문학 작품을 비롯해 배명훈 공상과학(SF) 소설집 ‘타워’(2020년·문학과지성사) 같은 장르문학도 다수 소개됐다. 정호승 시인, 김애란 소설가, 황선미 동화작가 등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뿐 아니라 정무늬 등 웹소설 작가도 중동 독자를 만났다. 한국관엔 김언수 장편소설 ‘설계자들’(2010년·문학동네)처럼 아랍어로 출간된 작품도 전시됐다. 김 작가는 “2021년 이집트에서 ‘설계자들’이 아랍어로 출간됐다. UAE, 레바논 등에서도 아랍어를 함께 쓰는 만큼 모두 내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라고 했다. 곽효환 한국문학번역원장은 “번역이 활발하게 진행된다면 중동 출판 시장은 거대한 블루 오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샤르자=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1984년 12월 19일이었어요. 둘째 아들 나이는 만 6세 80일이었습니다.” 서울 강남구 정다운도서관에서 29일 만난 김수연 목사(77·사단법인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 대표)는 39년 전 사고 날짜를 정확히 기억했다. 당시 그의 집이 있던 아파트에 불이 났다. 집에 홀로 있던 둘째 아들은 베란다로 뛰어가 에어매트가 깔린 밖으로 몸을 던졌지만 크게 다쳤다. 방송기자로 김포공항에서 취재하던 그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렸다. 하지만 아들은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사고 며칠 전 그의 옆에서 동화책을 읽던 아이 모습이 떠올랐다. “책은 얼마든지 사준다”고 했지만 아이와 도서관 한번 가보지 못했다. 직업 특성상 야근하기 일쑤였고 주말에도 출근했다. 후회스러웠다. 그는 기자를 그만두고 목사가 됐다. 아들이 세상을 떠난 뒤 종교에 삶을 의탁한 것. 김 목사는 이날 허공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살아있으면 40대가 됐겠지만, 내 가슴속에서 아들은 여전히 만 6세 80일에 머물러 있어요. 도서관에 오는 아이들을 보면 둘째 아들이 생각납니다.” 그는 1987년부터 36년간 전국에 도서관을 짓고 다녔다. 그가 만든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이 설립하거나 운영하는 도서관은 392개에 달한다. 그가 사재를 털거나 후원을 받아 세운 학교마을도서관이 262개, KB국민은행 후원으로 세운 작은도서관이 113개, 강남구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는 구립도서관이 17개다. KB국민은행 후원을 받아 농어촌과 지역 축제 현장을 찾는 이동형 도서관인 ‘책 읽는 버스’도 운영한다. 이날 그를 만난 정다운도서관은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이 2004년부터 강남구의 위탁을 받아 운영하는 구립도서관이다. 그는 도서관을 채운 수십 명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속삭였다. “실의에 빠져 있던 내가 할 수 있는 건 도서관을 짓는 일이었어요. 세상을 떠난 둘째 아들처럼 책을 좋아하는 아이들을 위해서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도서관을 세워준다며 찾아갔지만 “책 안 산다”고 문을 걸어 잠그는 초등학교도 있었다. “도서관을 설립하지 말고 현금을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한때는 자존심이 상해서 그만두고 싶었다. 하지만 문화적으로도 성숙한 나라가 되기 위해선 독서운동을 포기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동네 곳곳에 있는 작은 도서관이야말로 아이들이 책과 가까워질 수 있는 곳”이라며 “국가 발전의 속도는 국민의 독서량에 비례한다”고 했다. “돈을 기부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아이들이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선 독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아이들에게 생선(돈)을 주기보단 독서를 통해 낚시(인생을 사는 법)를 가르쳐 주고 싶었죠. 젊을 때는 ‘책 전도사’였는데 나이 들어 머리가 하얘지니 애들이 ‘책 할아버지’라고 부르더군요. 하하.” 그는 강남구 한길교회 담임목사다. 전국에 도서관을 만들기 위해 주중에 뛰어다니고, 주말이면 자택이 있는 강원 평창군에서 상경한다. 이날도 그는 예배를 끝내고 부랴부랴 도서관으로 달려왔다. 동영상을 즐겨 보는 시대, 독서의 의미를 물었다. 그는 책에 푹 빠진 아이들을 가리키며 자신 있게 답했다. “살다 보면 두렵고, 무서운 일과 마주칩니다. 그럴 때면 저는 다른 사람의 경험과 지혜가 담긴 책에서 길을 찾아요. 고통이 가득한 인생을 산 뒤에야 이를 깨달았죠. 하지만 책을 읽는 이 아이들은 다를 겁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당나라에서 통일신라로 향하던 배에서 한 상인이 살해됐다. 갑판에 쓰러져 있는 시신의 목엔 졸린 흔적이 짙게 남아 있고, 몸 뒷면은 멍이 들어 있었다. 뒤에서 누군가 올라타 목을 조르며 무릎이나 발로 누른 듯했다. 누가, 왜 이런 범행을 저질렀을까. 유학을 떠났다가 고국으로 돌아가던 신라인 유학생 설자은은 추리를 시작했다. 시신에 진주 장신구가 걸쳐져 있는 걸 보니 범행 목적이 돈이 아닌 것 같았다. 상인은 배에 탈 때 두 여자를 데리고 탔는데 보이지 않았다. 여러 배가 함께 항해하고 있었던 만큼 범인이 살인을 벌인 배에서 다른 배로 옮겨 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조사 끝에 설자은은 유력한 용의자를 찾아낸다. 하지만 설자은은 곧 추리를 그만둔다. 사라진 두 여자가 과거 당나라에 끌려갔던 여성들이고, 상인은 이 여성들을 이용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왜 범인을 밝히지 않냐고 묻자 설자은은 웃으며 답한다. “일단 가기나 갑시다, 금성(서라벌)으로.” 통일신라 서라벌을 배경으로 남장 여자 설자은이 여러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를 담은 미스터리 장편소설이다. 주인공은 오빠가 당나라 유학을 앞두고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오빠로 행세하기로 결심한다. 오빠와 얼굴이 닮았고, 머리가 좋았다. 하지만 여성이어서 공부를 할 수 없어 기회를 만든 것이다. 유학을 마치고 신라에 돌아온 설자은은 왕실에서 일하며 수수께끼 같은 사건을 척척 해결한다. 동명 드라마로 제작돼 화제가 된 장편소설 ‘보건교사 안은영’(2015년·민음사)으로 유명한 작가가 3년 만에 내놓은 새 장편소설이다. 남장 여자를 주인공으로 삼아 여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설정은 여성 삼대를 통해 여성주의 시각을 담은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2020년·문학동네)를 생각나게 한다. 논리적 사고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은 추리 소설의 전형을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공상과학(SF), 판타지 등 다양한 장르문학을 썼던 작가가 추리물에 처음 도전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작가는 2편 ‘설자은, 불꽃을 쫓다’, 3편 ‘설자은, 호랑이 등에 올라타다’를 펴낼 계획이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 “계절마다 경주에 가 다음 이야기를 건져오고 싶다”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이 책은 이태원 핼러윈 참사 이전의 일상, 참사 당일 상황, 참사 이후 앞으로의 발걸음을 떼기 힘들어하는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이정민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대표가 25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열린 인터뷰집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창비)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말했다. 이 대표는 이태원 핼러윈 참사 희생자 이주영 씨의 아버지다. 참사 1년에 맞춰 책을 내는 건 생존자와 유가족의 이야기를 국민에게 전하기 위해서다. 이 대표는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참사에 대해서 기억해 주시길 바란다”며 “기억이 조금씩 모여 커진다면 다시는 대한민국에 이러한 참사가 발생하지 않고 더 이상의 유가족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신간은 유해정 인권기록센터 ‘사이’ 활동가 등 13명으로 구성된 ‘10·29 이태원 참사 작가기록단’이 14명의 증언을 듣고 정리했다. 생존자들은 참사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제 위로 몇 명인지도 모를 사람들이 한꺼번에 쓰러졌어요. 사방이 살려 달라, 구해 달라는 절규였어요.”(생존자 이주현 씨 증언 중) 희생자에 대해 ‘왜 이태원에 놀러 갔냐’고 악플을 달았던 누리꾼과 소송까지 했던 유가족의 사연도 담겼다. “악플을 손수 모았어요. 피해 대상이 저였다면 사과도 받아들이고 합의도 고려했겠죠.”(희생자 김유나 씨의 언니 김유진 씨 증언 중) 참사 1년이 지난 지금도 남겨진 이들은 사회적 편견과 싸우고 있다. 가족과 친구들이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뒤 슬퍼하고 애도한 기억도 정리했다. 이날 간담회에서 희생자 김의현 씨의 누나 김혜인 씨는 “기억되지 않는 참사는 반복될 수 있다”며 “왜 사고 후 처리 과정이 불투명한지, 왜 책임자들은 책임을 지지 않는지를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유 활동가는 “집필은 슬픔의 연대를 통해 위로가 확장되는 과정이었다”며 “참사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이들을 위로하고 또 격려하고 싶었다”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중국 산둥대 한국어학과 학생들은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학생들만큼 한국문학에 대한 이해도가 높습니다. 특히 한자에 능숙한 만큼 고전문학, 근대문학 연구에 뛰어나요.” 서울 종로구 문예지 ‘유심’ 사무실에서 24일 만난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75)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1983∼2012년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산둥대 학생들의 실력이 서울대 학생들과 비교해 전혀 밀리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산둥대 학생들은 한국어로 한국문학에 대해 토론하고 발표한다”며 “영어, 일본어에도 능통해 4개 언어로 소통하며 문학적 깊이를 더해 가고 있다”고 했다. 권 교수는 미국 하버드대 하버드옌칭연구소 초빙교수, 도쿄대 한국조선문화연구소 초청교수,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겸임교수로 전 세계를 돌아다녀 ‘한국문학 전도사’로 불린다. 그가 중국으로 향한 건 1992년 한국어학과를 설립한 산둥대가 ‘국제 동아시아연구원’(가칭) 설립을 추진하면서다. 권 교수는 “2026년 국제 동아시아연구원 개설을 목표로 올 7월부터 산둥대에서 외국인 석좌교수로 일하고 있다”며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문학, 언어, 문화에 대한 학술적 교류가 목표”라고 했다. “한국과 중국 연구자들은 보는 관점이 달라요. 예를 들면 시인 이상(1910∼1937)의 작품을 한국 연구자들은 폐병에 시달린 성장 과정이나 건축학도라는 점에서 해석하죠. 중국 연구자는 이상의 작품을 일제식민지라는 당대 역사와 결부 짓더군요.” 권 교수는 중국 학생들이 근대 한국과 중국의 사상 교류에도 관심이 많다고 했다. 박은식(1859∼1925), 신채호(1880∼1936) 등 독립운동가들이 근대 중국의 개혁을 주창했던 량치차오(梁啓超·1873∼1929)의 변법론을 조선에 소개한 과정을 연구하는 식이다. 권 교수는 평생 모은 근현대 문헌 1654점을 서울대 중앙도서관에 25일 기증한다. 정지용(1902∼1950) 시집 ‘백록담’ 초판본, 이광수(1892∼1950) 소설 ‘무정’ 5판본, 염상섭(1897∼1963) 소설 ‘만세전’ 초판본을 비롯한 희귀 자료가 다수 포함돼 있다. 북한 주간지 ‘문학신문’도 창간호부터 1960년 12월 27일까지 기증됐는데 이는 국내 유일의 자료다. 고문헌 400점도 포함돼 있다. 서울대 중앙도서관에 고문헌이 기증된 건 1994년 이후 처음이다. 이를 모은 전시 ‘어느 국문학자의 보물찾기’는 25일부터 12월 15일까지 서울대 중앙도서관에서 열린다. 고가에 거래되는 희귀한 문헌을 왜 기증했을까. 속물적인 질문을 던지니 그는 눈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자식들은 문학에 관심이 없으니 물려줄 필요가 없잖아요. 평생을 서울대에 있었어요. 후배 연구자를 위해 자료를 받아준다니 제가 고맙고 영예로운 일이죠.” 1970년대 문학 평론을 시작한 그는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지난달 1일에는 문예지 ‘유심’을 재창간했다. 서울대 중앙도서관에서 25일 열리는 기증식에 참여하는 그는 28일 다시 중국으로 떠난다. 한국문학의 미래를 묻자 그는 진중히 답했다. “한류를 방탄소년단(BTS)이나 드라마 등 대중문화에서만 찾지 마세요. 이미 한국어를 공부하고, 한국문학을 연구하는 외국 학생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 학생들이 다음 한류를 이끌 겁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한국편집기자협회(회장 김창환)는 제29회 한국편집상 수상작으로 본보 편집부 양충현 하승희 부장의 ‘표류, 생사의 경계에서 떠돌다’(우수상) 등 8편을 선정했다고 24일 밝혔다. 대상은 조선일보 신상협 차장의 ‘카카오 ‘뚝’’이 차지했다. 시상식은 12월 8일 오후 7시 반 서울 중구 코리아나호텔에서 열린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2021년 3월 박희병 서울대 명예교수(67)는 마지막 학부 강의를 열었다. 1996년부터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한 그는 그해 8월 정년 퇴임을 앞두고 있었다. 과목명은 ‘한국고전문학사’. 고조선 단군신화부터 김소월(1902∼1934)의 시까지 한국 고전문학의 시작부터 끝을 다루는 만만치 않은 수업이었다. 게다가 코로나19로 수업은 화상으로 진행됐다. 이전 학기까지 약 30명이 듣던 이 수업은 박 교수의 ‘마지막 강의’라는 게 알려지면서 수강생이 61명으로 늘었다. 국문학과뿐만이 아니라 간호학과, 경영학과, 디자인학과, 기계공학부 등 전공도 다양했다. 청강생도 16명 참가했다. 매주 2회씩 75분간 예정된 수업은 번번이 시간을 넘겼다. 학생들은 토론과 질문을 쏟아냈다. 따분한 과목으로 여겨지는 고전문학 수업에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16일 출간된 ‘한국고전문학사 강의’(전 3권·돌베개·사진)는 그가 2021년 1학기에 진행한 32강의 수업을 묶었다. 신간에서는 향가, 고려속요, 시조 등 고전문학을 두루 다룬다. 학생들은 왜 고전문학에 매료된 걸까. 박 교수는 22일 전화 인터뷰에서 “대학생들이 현대문학만 좋아한다는 건 편견”이라고 했다. “문학을 통해 인식의 눈을 키우고,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고전문학에 담긴 희로애락에 학생들은 특히 공감했습니다.” 그는 지식보단 인간에 방점을 두고 작품을 읽어 나간다. 학생들은 삶을 통찰한 옛 문장을 읽으며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 조선 실학자 연암 박지원(1737∼1805)이 누나를 잃은 뒤 ‘큰누님 박씨 묘지명’에서 ‘외배 지금 가면 어느 때 돌아올꼬?/보내는자 쓸쓸히 강가에서 돌아가네’라고 통곡하는 모습엔 짙은 슬픔이 묻어난다. 고려 문호 이규보(1168∼1241)의 문장 ‘한 알 한 알을 어찌 가볍게 여기겠나/사람의 생사와 빈부가 달렸으니./나는 농부를 부처처럼 존경하네’(‘햅쌀의 노래’ 중)에선 당대 백성의 삶을 볼 수 있다. 박 교수는 “문학의 본령은 인간의 삶과 정신에 대한 탐구다. 작품에 깃든 마음의 궤적을 좇고 싶었다”고 했다. 박 교수는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과 물은 균등하다’는 조선 실학자 홍대용(1731∼1783)의 ‘담헌서’의 한 구절도 인상적이다”며 “인간이 중심이 아니라 만물을 평등하게 바라보는 시각을 지녔으면 좋겠다”고 했다. 역관 시인 이언진(1740∼1766)의 ‘호동거실’ 중 “서산에 뉘엿뉘엿 해 넘어갈 때/나는 늘 이때면 울고 싶어요./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어서 저녁밥 먹자고 재촉하지만”이라며 외로움을 토로한 시에선 잘 알려지지 않은 중인 출신 문인의 빼어남을 엿볼 수 있다. 여성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 소설 ‘완월회맹연’을 통해 고전문학 속 여성의 영향도 연구한다. 그는 “조선시대, 새로운 진리를 탐구하려는 지적 요구는 중인과 여성에게도 있었다”고 했다. 요즘 그는 어떻게 지낼까. “문하생들과 함께 조선 문인 김시습(1435∼1493)의 작품을 읽고 있어요. 할 수 있는 건 공부뿐이니 계속 해나갈 뿐이죠.”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가장 오래된 글부터 최근 글까지 시차가 약 70년이 되더군요. 천천히 읽으며 제 생애를 돌아봤습니다.” 김병익 문학과지성사 고문(85)은 22일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 산문, 수상 소감, 문학평론 등 평생 써 온 44편의 글을 모은 ‘기억의 양식들’(문학과지성사)을 9일 펴낸 건 자신의 삶을 곱씹어 보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는 “내 삶의 기억을 ‘양식’(良識·사물을 올바르게 판단)화함으로써 체험을 내면화하고 싶었다. 또 기억을 ‘양식’(樣式·일정한 모양이나 형식화)해 타인과 공유하려 했다”고 말했다. 신간에 담긴 가장 오래된 글은 그가 대전중학교에 다니던 1954년 쓴 시다. “눈엔 방울이 아롱져/바라보던 북쪽이 울적해지고/북극성/호올로/외로움이 흘러.”(시 ‘눈 오는 밤’ 중)라는 시구에선 그의 문학적 재능이 엿보인다.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로 일하던 1967년 발표한 평론 ‘문단의 세대연대론’에선 평론 실력을 선보인다. 당시 갈라져 있던 원로 작가와 신진 작가들이 다툴 것이 아니라 힘을 모아 한국 문학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가 1975년 문학과지성사를 창립하고,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며 이청준(1939∼2008), 최인훈(1936∼2018) 등 당대 유명 작가를 거침없이 평론하던 모습도 엿볼 수 있다. 그가 “문화란 삶의 속살이자 사회의 품격”이라고 쓴 2016년 제30회 인촌상(언론·문화 부문) 수상 소감도 담겼다. 신간엔 그의 아내 정지영 씨가 1956년 발표한 소설 ‘여상의 빛’도 실려 있다. 그는 서두에 “일흔네 해 전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얼굴을 내게 보인 정지영”에게 책을 헌정한다고 썼다. 그는 인터뷰에서 “신간에서 가장 아끼는 글은 아내가 쓴 작품”이라고 말했다. 2만6000원.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누구나 중요한 일을 앞두곤 불안에 사로잡힌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일을 하기에 자격이 없을 거라고, 일에서 성공하지 못할 거라는 비관적인 생각에 갇힐 때도 있다.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까지 느끼곤 한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사진)가 1995년 발표한 ‘멜랑콜리아 I’은 누구나 느끼는 불안과 우울이란 감정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소설의 배경은 1853년 독일 뒤셀도르프다. 화가 지망생 라스는 멋진 보라색 양복을 입고 침대에 누워 있다.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 교수가 곧 그를 제자로 받을지 결정할 예정이다. 하지만 그는 아카데미에서 퇴짜를 맞을까 걱정하며 “내 그림을 탐탁지 않아 한다는 말을 듣기 싫다. 나는 오직 침대에 누워 있고 싶을 뿐이다”고 되뇐다. 그는 불안을 떨쳐 보내기 위해 자신이 짝사랑하는 헬레네를 생각한다. 헬레네는 그가 사는 하숙집 주인의 딸이다. 고통스러운 마음을 다독이는 데 환상만 한 게 있을까. 그는 “두 팔로 헬레네를 감싸 안았고, 가슴은 자신도 모를 무언가로 가득 채워져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고 상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상상은 망상으로 커진다. 그는 헬레네의 삼촌에게 자신과 헬레네가 연인 사이라고, 삼촌이 헬레네를 억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하숙집에서 쫓겨나고, 망상에 가득 찼다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멜랑콜리아 I’은 실존 인물인 노르웨이 풍경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1830∼1902)의 생애 중 이틀을 소재로 했다. 죽은 뒤에야 세상의 주목을 받은 라스의 실제 인생에 소설적 상상력을 버무렸다. 라스가 정신착란에 빠진 건 성공하지 못할 거라는 불안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강박에 시달리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셈이다.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 지닌 이 불안을 포세는 문학으로 극대화했다. 포세가 1996년 발표한 ‘멜랑콜리아 II’는 라스의 누이이자 허구의 인물인 올리네의 삶을 그린다. 1902년 노르웨이 스타방에르에 사는 올리네는 치매를 앓고 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허둥거리고 기억을 잊을 때마다 좌절한다. 파편처럼 부서지는 올리네의 머릿속에선 이미 세상을 떠난 라스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소녀 시절 라스와 행복하게 뛰놀던 기억이 연기처럼 사라진다. 두 작품을 묶은 ‘멜랑콜리아 I-II’엔 포세의 문학적 특성이 짙게 묻어난다. 포세는 같은 문장을 반복하면서 환청과 환영에 시달리고, 과거와 현재를 혼동하는 주인공들의 심리를 조금씩 드러낸다. 주인공들이 혼잣말로 내뱉는 문장은 연극 배우의 대사처럼 시적이다. 노르웨이 작가 헨리크 입센(1828∼1906)의 재림이자 아일랜드 작가 사뮈엘 베케트(1906∼1989)의 환생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희곡과 산문의 경계를 부순 포세 답다. 책은 1인칭과 3인칭 시점을 오가는 서술 방식 때문에 쉽게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다만 현학적인 문장은 적고, 서사를 파악하긴 쉽다. 우울증(Melancholia)에 시달리는 현대인이라면 주인공들이 겪는 혼란도 와닿을 것이다. 작가는 노르웨이 표준어 중 인구의 10∼15% 정도가 쓰는 뉘노르스크어로 작품을 쓴다. 이 언어는 자체적인 리듬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손화수 번역가는 “작품을 소리 내어 읽어보면서 특유의 아름다운 리듬감을 느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매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면 수상자의 작품은 판매량이 반짝 늘곤 한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5일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가 선정되자 그의 소설 ‘아침 그리고 저녁’(문학동네)은 5일간 연간 판매량의 48배가 팔렸다. ‘특수’라고 부를 정도까진 아니지만 출판계엔 반가운 소식이다. 미국 시인 루이즈 글릭이 2020년 노벨문학상을 받을 땐 상황이 달랐다. 당시까지 한국에 출간된 그의 시집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첫 책은 그해 10월 수상으로부터 2년 1개월이 지난 2022년 11월에야 국내에 출간됐다. 이 때문에 교보문고가 2013∼2022년 10년 동안 각 수상 직후 1년 판매량을 분석한 통계에서 글릭은 책이 없어 순위에 포함되지 못했다. ‘야생 붓꽃’은 글릭의 작품 중 국내에 처음 소개된 시집이다. 1993년 미국에서 출간된 뒤 글릭의 시 세계를 오롯이 담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눈에 띄는 건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태도가 담긴 작품들이다. 마치 어느 정원사의 일기처럼 읽힌다. “우편함 옆에, 갈라진 자작나무/이파리들이 지느러미처럼 주름 잡혀 포개져 있어요./그 아래, 하얀 수선화들, 얼음 날개,”(시 ‘아침 기도’ 중) 시인은 이른 아침 거닐고 있는 것 같다. 이 시에서 시인은 “나팔 수선화의 속 빈 줄기들”을 상상하면서 “야생 제비꽃 어두운 이파리들”을 생각한다. 그는 “삶의 고독과 고통 속에서도 소생하려는 생명의 의지를 표현해온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런 거창한 수식 없이도 자연에 대한 묘사만으로도 감동이 다가온다. “깨어났을 때 나는 숲에 있었어. 어둠은/자연스러워 보였어. 소나무들 사이로 하늘이/수많은 빛줄기들로 두터웠어”(시 ‘연령초’ 중) 화자인 이 식물은 키가 작은 탓인지 태어날 때부터 어둠이 익숙한 듯하다. 키 큰 소나무 사이로 내려오는 빛에 의지해 살아간다. 시인은 상상한다. 식물에 목소리가 있으면 어떨까. “혹시 내게 목소리가 주어진다면”(〃). 식물이 태어난 그 순간 슬펐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가 슬픔을 느낀다는 것조차 나는 몰랐어”(〃). “내 고통의 끝자락에/문이 하나 있었어//내 말 좀 끝까지 들어봐; 그대가 죽음이라 부르는 걸/나 기억하고 있다고”(시 ‘야생 붓꽃’ 중) 미국에 이민 온 헝가리 유대인의 후손인 글릭은 10대에 거식증을 심하게 앓아 7년 동안 심리 치료를 받았고, 학교도 순탄하게 다니지 못했다. 시인에게 시는 ‘삶을 잃지 않으려는 본능적인 노력’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 고통이 자연에 대한 묘사에 담겨 있다. 그는 광대수염꽃, 눈풀꽃, 실라꽃, 제비꽃, 개기장풀, 들꽃, 클로버 등 다양한 식물에 삶을 빗댄다. 김소연 시인이 글릭에 대해 “여러 생애를 겹쳐 산다”고 평가한 이유다. 글릭은 13일(현지 시간) 미국의 자택에서 향년 80세로 별세했다. 뉴욕타임스(NYT)는 그의 부고 기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이라고 했다. 현재 글릭의 시집은 국내에 7권이 출간돼 있다. 오늘 아침엔 글릭의 시를 읽어 보는 건 어떨까.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작가님이십니까?” 어느 날, 배달 라이더 안이지는 로버트 재단의 최 부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안이지는 화가를 꿈꿨으나 연이은 실패로 생계 유지를 위해 라이더로 일하고 있었다. 로버트 재단은 전시회에 참여하면 안이지를 후원하겠다고 했다. 예상치 못한 제안에 안이지는 배달하던 햄버거가 식고 셰이크가 녹았는지도 몰랐다. 로버트 재단은 안이지에게 4개월 동안 작품 1개 이상만 완성하라고 했다. 쾌적한 숙소, 무제한 식사도 제공하겠다고 했다. 활동비, 재료비는 물론이고 전시를 원하면 전문 인력도 지원한다고 했다. 그런데 로버트 재단엔 이상한 점이 있었다. 재단 이사장인 로버트가 사람이 아니라 ‘개’라는 것이다. 대체 이 재단의 정체와 꿍꿍이는 뭘까. 12일 출간된 윤고은 작가(43)의 장편소설 ‘불타는 작품’(은행나무·사진)은 저택에 사는 백만장자인 개가 인간 예술가를 좌지우지하는 ‘웃픈’(웃기면서도 슬픈) 이야기다.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17일 만난 윤 작가는 “언젠가 ‘동물 중에 개가 가장 친근하다. 이왕이면 개가 집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농담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농담이 시간이 지나 소설이 됐다”고 했다. “마당 딸린 집에 사람과 개가 있으면 보통 사람이 주인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개가 주인이라는 설정으로 통념을 뒤집고 싶었어요. 하하.” 로버트 재단은 전시회 마지막 날에 작품 중 하나를 소각해야 한다는 조건도 내걸었다. 작품을 불태워 사람들의 관심을 끌겠다는 것이다. 이런 설정은 바나나를 테이프로 벽에 붙인 이탈리아 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 ‘코미디언’을 떼어내 먹는 행위가 화제가 되는 현대 예술에 대한 풍자처럼 느껴진다. 윤 작가는 “예술작품이 다른 예술작품보다 더 주목받아야 살아남는 게 현실”이라며 “일단 주목받아야 이후에 가치가 부여되는 구조를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작품을 불태우면 사진이 남더라도 원본은 사라지는 거잖아요. 예술가가 스스로 작품을 불태울 수 있을까 하는 딜레마, 또 예술품의 원본은 결과물이 아니라 예술가가 고통스럽게 창작하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고민을 담았습니다.” 그는 2021년 장편소설 ‘밤의 여행자들’(2013년·민음사)로 영국 추리작가협회가 주관하는 대거상 번역추리소설상을 수상했다. 그는 ‘밤의 여행자들’의 후속작을 준비하고 있다. “재난 여행이라는 소재는 유지하되 주인공은 바뀔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엔 편혜영, 이홍 작가와 문학 에이전시 ‘에이전시 소설’을 세웠다. 이 회사는 ‘불타는 작품’이 국내에 출간되기 전 영미권 출판사에 판권을 수출하기도 했다. “최근 한국문학이 해외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잖아요. 한국 작가들의 문학성이 손상되지 않게 해외에 배달하는 라이더가 되고 싶습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작가는 카카오페이지에게 직접 또는 제3자를 통해 대상 콘텐츠를 기반으로 2차적 저작물을 작성할 수 있는 독점적인 권한을 부여한다.”웹소설 플랫폼 ‘카카오페이지’를 운영하는 카카오엔터테인먼트가 2018∼2020년 자사 웹소설 공모전에서 당선된 작가와 맺은 계약 내용의 일부다. 계약은 웹소설을 기반으로 웹툰, 공연, 영화, 드라마, 게임 등 2차 저작물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을 카카오 측에 넘기도록 했다. 웹소설의 주인공으로 피규어나 이모티콘을 만들고, 오디오북을 제작하는 권한도 포함됐다. ‘사전에 작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단서는 달았지만, 웹소설이 인기를 얻을 때 적지 않은 수익을 낼 수 있는 독점 사업권을 플랫폼이 확보한다고 명시한 것이다.》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당시 5개 공모전에서 당선돼 카카오엔터와 이 같은 계약을 맺은 작가는 28명(2차 저작물 유형 총 210개)이다. 그러나 지난해 11월까지 카카오엔터가 작품을 활용해 웹툰 등 2차 저작물을 만든 것은 11개 당선작을 활용한 16개뿐이었다. 카카오가 독점권을 갖고 있기에 나머지 17개 당선작은 2차 저작물을 만들 기회를 사실상 놓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지적이 나왔다. 공정위는 최근 작가들의 2차 저작권을 부당하게 침해했다며 카카오엔터를 제재했다. 카카오엔터는 “창작자의 2차 저작권을 회사가 부당하게 양도받은 사례가 없다”며 법원에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대형 포털 사업자들이 운영하는 웹소설 플랫폼이 작가들과 맺는 2차 저작권 계약이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플랫폼 측은 ‘정상 계약’이라는 입장이지만 작가들 사이에선 “시장을 과점하고 있는 플랫폼의 요구를 거절하기 힘들어 불리한 내용의 계약을 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 많다. 이에 업계 특성을 반영한 표준계약서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 “플랫폼이 제시하는 계약 조건 거부 어려워”“작가님 웹소설을 플랫폼 화면 상위에 노출하려고 합니다. 웹툰화 논의도 함께 하려고 합니다.” 최근 한 웹소설 작가는 작품을 연재하고 있는 대형 웹소설 플랫폼으로부터 이런 제안을 받았다. 포털 사업자가 운영하는 이 플랫폼 측은 웹소설을 웹툰으로 만들기 위해 2차 저작권을 5년 동안 독점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작가는 5년 동안 이 플랫폼이 웹툰으로 만들지 않으면 자신의 작품이 다른 곳에서라도 웹툰으로 제작될 기회를 영영 놓칠까 봐 걱정이 됐다. 하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제안을 수용했다고 했다. 거절했다가 웹소설마저 홍보할 기회를 잃고 사장될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다. 이 작가는 “대형 플랫폼과의 관계를 망치기 두려워 어쩔 수 없었다”며 “자유로운 계약이란 허울을 쓰고 있지만, 사실상 ‘갑을 관계’에서 이뤄진 불공정한 계약”이라고 말했다. 네이버, 카카오 등 대형 포털이 운영하는 플랫폼은 인기를 모은 웹소설을 기반으로 웹툰 등을 만들어 함께 유통한다. 탄탄한 서사를 지닌 웹소설을 바탕으로 웹툰을 제작하면 성공 가능성도 높기 때문이다. 2019년 네이버시리즈에 공개된 웹소설 ‘화산귀환’은 2021년 동명의 웹툰으로 만들어져 네이버웹툰에 연재돼, 웹소설과 웹툰 누적 매출액이 150억 원에 이른다. 플랫폼이 지식재산권(IP) 가치가 높은 웹소설의 2차 저작권을 활용하고자 하는 이유다. 원칙적으로 작가는 기존에 작품을 연재했던 플랫폼이 아닌 다른 플랫폼과도 계약을 맺을 수 있어야 한다. 성공한 웹소설 작가라면 유리하게 계약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경우는 별로 없다. 플랫폼이 웹소설 연재를 시작할 때나 연재 중에 2차 저작물 제작에 대한 권한을 달라고 하면 거절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실시한 ‘2022 웹소설 산업 현황 실태조사’에 따르면 ‘작가와 플랫폼 계약 체결 방식’에 대해 작가 500명 중 52%가 “플랫폼이 제시한 계약 조건을 사실상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고 답했다. ‘작품 연재와 2차 저작권을 같이 계약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엔 “부당하다”는 응답이 55%를 차지했다. 이는 대형 플랫폼이 웹소설 시장을 과점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2022 웹소설 산업 현황 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웹소설 시장 전체 매출 1조390억 원 가운데 양대 플랫폼인 네이버와 카카오가 차지하는 비율은 81%나 된다. 네이버가 운영하는 네이버시리즈, 네이버웹소설, 문피아 등 3개 플랫폼이 4266억 원(41.1%), 카카오페이지가 4145억 원(39.9%)의 매출을 올렸다. 구성림 공정위 지식산업감시과장은 “대형 플랫폼 사업자가 우월적 지위를 악용해 창작자의 권리를 제한하고 있다”며 “작가들이 더 나은 조건에서 2차 저작물을 제작할 기회가 봉쇄되고 있다”고 했다. 최근엔 웹소설이 드라마나 영화로도 제작되면서 2차 저작권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지만 이 역시 웹소설 플랫폼 사업자가 만드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카카오페이지의 ‘사내맞선’은 웹소설과 웹툰을 합쳐 국내외 누적 조회 수가 3억2000만 회에 달한다. 이 작품을 지난해 드라마로 만든 제작사인 ‘크로스픽쳐스’는 카카오엔터 계열사다.● “플랫폼, 수익의 최대 45% 가져가기도”웹소설을 편집하는 출판사 격인 콘텐츠기업(CP) 중 상당수가 대형 플랫폼 소속인 것도 작가의 입지를 좁힌다. 보통 웹소설 업계는 3자 계약을 맺는다. 작가는 CP와 1차 계약을 맺고, CP가 플랫폼과 2차 계약을 맺는다. 수익도 플랫폼이 CP에 분배하고, CP가 이를 다시 작가에게 지급하는 식이다. CP가 작가들에게 2차 저작물 제작 권한을 양도하자고 제안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한데 공정위에 따르면 카카오엔터는 CP 9개를 보유하고 있다. 플랫폼의 영향력 아래 놓인 CP 소속 작가가 적지 않은 셈이다. 한 웹소설 작가는 “데뷔 때 유력 CP와 맺은 계약이 나중에 발목을 잡는 경우가 많다”며 “작가는 작품 홍보, 계약 관리 등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 CP가 하자는 대로 계약을 맺곤 한다”고 했다. 수익 배분에도 문제가 있다. 통상 대형 플랫폼은 전체 수익의 30%를 기본 수수료로 가져간다. 작품이 수시 이벤트에 참가하는 대가로 추가 수수료를 가져가는 경우 총수수료는 최대 45%가 되기도 한다. 작품을 알리기 위해서는 홍보를 해야 해 이벤트는 사실상 필수 요소로 꼽힌다. 이에 작가의 몫은 전체 수익에서 많아야 50%에서 적게는 38%까지 떨어진다. 한 웹소설 작가는 “플랫폼이 네이버, 카카오에 한정돼 배분 비율을 조정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대형 플랫폼에 미운털이 박히면 작품을 써도 발표할 곳이 없어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고 했다. 김휘빈 한국웹소설작가연합 대표는 “대형 플랫폼이 CP까지 소유해 CP는 플랫폼의 이익을 대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업계에선 웹소설 표준계약서가 없어 문제가 악화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웹소설 작가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작품 연재와 2차 저작권을 한 번에 계약하면 안 된다” 등 유의할 점을 공유한다. 작가들이 온라인에 계약서를 올리고 문제가 없는지 서로 봐주기도 한다. 이융희 웹소설 평론가는 “웹소설은 2차 저작권 계약이 활발한 만큼 영화, 애니메이션, 드라마, 게임 등 각 분야별로 계약을 할 수 있는 세밀한 표준계약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문체부는 올 8월 창작자와 플랫폼 관계자 등을 모아 ‘민관 합동 웹소설 상생협의체’를 만들고 표준계약서 마련을 추진하고 있다. 이 협의체에 참가한 서성종 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사무국장은 “연재 계약과 2차 저작권 계약서를 따로 만드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김성은 문체부 출판인쇄독서진흥과장은 “이르면 내년 상반기 웹소설 표준계약서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호재 문화부 기자 hoho@donga.com}
인간을 미치게 하는 ‘균’이 지상에 가득 퍼진 어느 미래. 사람들은 어둡고 퀴퀴한 지하 도시에서 연명한다. 하지만 태린은 지상을 동경한다. 해 질 무렵이면 노을이 일렁이고, 밤엔 하늘에 별들이 가득한 지상으로 나가고 싶어 지상을 탐험하는 ‘파견자’ 시험에 응시한다. 최종 시험을 앞둔 어느 날 태린에게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는 태린에게 “너는 왜 나를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타박하고, “이제는 모든 걸 함께 잊어버리자”고 제안한다. 태린은 균에 감염돼 미쳐버린 걸까. 아니면 태린에게 진실을 알려주려는 것일까. 13일 출간된 김초엽 작가(30)의 두 번째 장편소설 ‘파견자들’(퍼블리온)은 곰팡이 같은 균이 세상을 지배한 미래를 그린다. 김 작가는 16일 서울 강남구 최인아책방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동안 인간이 아닌 존재에 대해서 많이 써왔지만 균을 다루는 건 엄두를 못 냈다”며 웃었다. 포스텍(포항공대)에서 화학 학사, 생화학 석사 학위를 받은 과학도 출신 공상과학(SF) 작가이지만 균을 공부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이다. “균은 연구가 굉장히 어려운 생물이에요. 국내에 제대로 된 대중서도 잘 나와 있지 않았어요. 그러다 최근 교양과학서 ‘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2021년·아날로그)를 읽고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죠.” 그는 ‘작은 것들이…’에 따르면 곰팡이는 미로를 피해 균사를 뻗는다면서 “곰팡이들은 뇌도 없고 지능도 없는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뇌가 있는 인간처럼 미로 문제를 해결할까 궁금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인간의 시점으로만 평생을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한계가 있다”며 “인간이 아닌 다른 생물이 어떻게 세계를 감각하고, 인식하는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신간의 설정은 식물이 지배한 지구에 살아가는 인간을 그려 15만 부가 팔린 그의 첫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2021년·자이언트북스)을 떠올리게 한다. “문학은 우리가 개인의 관점의 한계를 벗어나서 다른 세상과 타인을 경험하게 해 주잖아요. 동물, 생물뿐 아니라 로봇, 인공지능(AI), 외계인의 삶을 상상하면서 ‘인지’의 범위를 넓히고 싶어요.” 2017년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부문 대상을 받으며 데뷔한 그는 2019년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 등을 통해 한국 SF의 지평을 넓혀 왔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김보영, 정보라 작가처럼 한국에서 활동하던 SF 작가들의 작품이 영어로 출간되면서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한국 SF가 지금까지 제대로 잘해 온 것”이라며 “(한국 SF를 바탕으로) 영화·드라마가 만들어지는 데 대해 SF 작가로서 감사한 기회라 생각한다”고 했다. 다음 계획에 관해선 “일단 올해는 SF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비디오게임에 대한 에세이를 쓸 것 같다”며 “내년이 돼야 다른 작품을 쓸 씨앗이 생겨나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화문 현판을 가리고 있던 흰색 천이 걷히자 검정 바탕에 금색으로 ‘光化門’이라고 쓰인 새 현판이 드러났다. 기존 현판은 흰 바탕에 검정 글씨로 쓰여 있었다. 시민 500여 명이 환호했다. 13년 동안 ‘부실 복원’ 논란을 빚은 광화문의 얼굴이 제 모습을 찾은 순간이었다. 복원된 광화문 월대(月臺·궁궐 주요 건물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터보다 높게 쌓은 단)도 이날 함께 공개됐다. 광화문이 일제가 훼손하기 전의 모습을 약 100년 만에 되찾은 것이다. 최응천 문화재청장은 “광화문은 경복궁의 얼굴”이라며 “월대와 현판 복원을 통해 2010년부터 추진한 광화문 복원 사업이 마무리됐다”고 말했다.● 광화문 현판, 200년 넘은 적송 위에 글자판 붙여광화문 현판 복원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문화재청은 2010년 광복절에 새 현판을 복원해 걸었지만 3개월 만에 목재 표면이 갈라졌다. 학계에선 흰 바탕에 검정 글자로 만든 현판이 제대로 된 고증을 거치지 않았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2016년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본명 김영준) 대표가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 소장된 광화문 사진을 찾아내 공개하면서 현판이 원래 검정 바탕에 밝은 글씨로 쓰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후 ‘경복궁 영건일기’에서 광화문 현판이 ‘黑質金字’(흑질금자·검정 바탕에 금색 글자)라는 기록이 추가로 확인되면서 현판의 옛 모습 복원이 추진됐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2018년부터 5년간 전문가 고증을 거쳐 현판을 제작했다. ‘경복궁 영건일기’ 기록을 토대로 도금한 동판에 글자를 오려 현판 위에 붙였다. 기존 현판은 글자를 새겨 넣었다. 새 현판은 강원 양양 등에서 확보한 수령 200년 넘는 적송을 건조해 만들었다. 배경 칠엔 아교와 전통 안료를 사용했다. 현판 제작에는 장인 6명이 참여했다. 한글 현판을 내걸어야 한다는 일부 의견도 있었지만 흥선대원군이 1865년 경복궁을 중건했을 당시 훈련대장 임태영이 쓴 필체를 사용하기로 결정됐다. 크기는 가로 427.6㎝, 세로 113.8㎝로 기존 현판(가로 390.5㎝, 세로 135.0㎝)보다 가로 길이는 조금 더 커지고 세로는 줄었다. ● 난간석 서수상, 월대 복원 맞춰 발견돼월대는 흥선대원군이 임진왜란 후 270여 년 동안 폐허로 남았던 경복궁을 중건하며 정문인 광화문의 격을 높이기 위해 쌓았다. 1923년 일제가 전차선로를 설치하며 철거됐다. 복원 과정에선 전차 선로가 발굴됐다. 지난해엔 일제가 철거한 월대의 난간석 40여 점이 경기 구리시 동구릉에서 발견됐다. 올해 8월엔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 야외에 1982년 개관 때부터 전시됐던 서수상(瑞獸像·상상 속 상서로운 동물상) 1쌍이 원래 월대의 어도(御道) 앞을 장식했다는 사실이 시민의 제보로 밝혀졌다. 고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 유족이 문화재청에 서수상을 기증했다. 난간석과 서수상은 복원된 월대에 옛 모습대로 배치됐다. 일각에서는 월대의 역사가 깊지 않고, 광화문 앞을 지나는 사직로를 직선에서 ‘U’자로 바꾸면서까지 복원할 만한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이날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광화문이 복원돼 우리의 살아 있는 역사가 한발 한발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서울의 옛 모습을 복원하는) 여러 사업을 마무리하는 화룡점정”이라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연어, 폐어, 소. 셋 중 어느 둘이 가까운 관계이고, 어느 것이 먼 관계일까. 일단 연어와 폐어는 비슷하게 생겼다. 물속에 살며 종일 헤엄친다. 비늘로 덮여 있고 알을 낳는다. 이에 비해 소는 풀밭에 산다. 네 다리가 있고, 새끼를 낳는다. 언뜻 연어와 폐어가 가깝고, 소는 먼 관계처럼 보인다. 하지만 분류학의 일종인 ‘분기학’의 관점에선 답이 다르다. 폐어는 육상동물의 폐와 같은 조직으로 호흡할 수 있고, 물 밖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음식물이 식도로 넘어갈 때 폐로 들어가지 않도록 돕는 후두개도 있다. 심장도 소와 비슷하게 생겼다. 진화 과정에서 연어가 먼저 다른 계통으로 갈라져 나갔고, 폐어가 다음에, 소가 마지막에 분기했기 때문이다. 분기학에 따르면 폐어와 소가 가까운 관계, 연어가 먼 관계인 셈이다. 생물의 이름과 질서를 연구하는 학문인 분류학을 다룬 교양과학서다. 분류학을 처음 정립한 이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기원전 322)다. 그는 모든 존재를 단계로 구분했다. 무생물-식물-연체동물-곤충-갑각류-포유류-인류로 정리한 것.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존재는 태어난 그대로 존재할 뿐이므로 각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이동할 수 없다고 믿었다. 스웨덴 생물학자 칼 폰 린네(1707∼1778)는 속명과 종명을 함께 쓰는 이명법(二名法)을 만들어 분류학을 체계화했다. 이명법은 각 생물에 두 라틴어로 된 이름을 붙여주는 방식이다. 인간 종을 호모사피엔스라고 부르는 것이 대표적이다. 영국 생물학자 찰스 다윈(1809∼1882)의 진화론 이후엔 분류학의 한 갈래로 분기학도 생겨났다. 종의 형질을 분석해 어떤 종들이 다른 종들보다 얼마나 ‘진화적’으로 가까운가를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분류학이 체계화되면서 과학자들 사이에서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생물이 하나의 분류가 되려면 한 조상에서 유래한 모든 후손을 포함해야 하고, 나머지는 하나도 포함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연어를 어류로 분류하려면 연어의 조상에게 또 다른 후손이 없는지 들여다봐야 한다. 그런데 그 후손엔 폐어뿐만 아니라 도마뱀, 거북이, 뱀, 곰, 호랑이, 토끼, 인간 등 다양한 동물이 포함되기 때문에 ‘어류’를 따로 분류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류가 없다니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한국계 미국인 과학 칼럼니스트인 저자는 분류학 체계가 정말 맞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는 생명의 분류와 명명을 전문가들에게 맡겨 버렸다. 그들은 새들이 공룡이라는 소리까지 한다.” 저자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건 동물이 세계를 감각으로 인지하는 ‘움벨트(Umwelt)’다. 흑백만 구별하는 개는 냄새로 세상을 인지한다. 벌은 인간이 보지 못하는 자외선으로 길을 찾는다. 인간도 인간이 세상을 인지하는 방식으로 생물을 분류하면 된다는 것이다. 최근 심리학자들은 어린아이가 생물을 인지하는 방식으로 생물을 분류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저자의 주장처럼 조만간 새로운 분류학 체계가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비교적 생소한 분야를 다뤄 읽기는 만만치 않지만 과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선사해 흥미롭다. 2021년 국내에 출간돼 큰 주목을 받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곰출판)의 저자 룰루 밀러는 “이 책보다 나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친 책은 없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