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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 글로벌 경제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폴 크루그먼 미국 뉴욕시립대 교수, 2019년 10월 9일) “다음 번 글로벌 금융위기는 2020년에 찾아올 것이다. 미국의 주가는 20% 떨어지고 석유를 비롯한 에너지 가격은 35% 떨어질 것이다.”(JP모건, 2018년 9월) “미국에서도 마이너스 금리가 나타나는 것은 시간문제다.”(앨런 그린스펀 전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 2019년 8월 13일) “2020년 세계 경제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한 해가 될 것으로 보인다.”(‘중국발 세계 경제위기가 시작됐다’ 감수자 안유화 성균관대 중국대학원 교수, 2020년 2월 7일) 2020년에 글로벌 경제위기가 닥칠 것이라고 전망했던 글들 가운데 몇 개다. 대체로 오랜 기간 세계 경제를 리드해온 미국과 중국 경제가 이미 한계에 봉착했고, 미중 무역 갈등이 이 축적된 화약에 불을 붙이는 트리거(방아쇠)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미처 세계 경제전략 분석가들이나 투자의 귀재들인 월가 투자은행 누구도 중국발 전염병이 글로벌 경제위기의 트리거가 될 줄은 예측하지 못했다. 시각을 달리하면 야생박쥐 바이러스가 아닌 어떤 다른 이유가 있었더라도, 혹은 없었더라도 글로벌 경제위기가 터져 나올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는 말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글로벌 경제위기의 공통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 발생하기 하루 전에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돌발 현상이다. 둘째, 발생지가 중국이다. 셋째, 아직 피크가 오지 않았다. 넷째, 글로벌 현상이다. 발생 원인이 비슷하니 대처 방안도 비슷할 수밖에 없다. 감염병이나 경제위기 모두 첫째, 국제적인 공동 대처가 필요하다. 둘째, 피크 전에 과감하고 신속한 선제 조치가 있어야 한다. 셋째, 중국으로 역유입되는 일은 막아야 한다. 넷째, 또 다른 변종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대비해야 한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은 있다. 한 방 얻어터지기 전에는….” 핵주먹 마이크 타이슨의 말이다. 코로나19 이전에는 우리에게도 저임금 근로자의 소득을 높여 내수를 진작하고 전체 성장을 견인한다는 그럴싸한 계획이 있었다. 그러다 이번에 전 세계가 예기치 못한 한 방을 맞았다. 같은 한 방이라도 나라마다 충격이 다르다. 예전부터 미국이나 중국이 기침하면 한국은 독감에 걸린다고 했다. 그렇기에 전문가들은 보유 외환을 충분히 쌓아두고 재정건전성이라는 방파제를 든든히 구축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해왔다. 기축통화 발행국인 미국이나 무역의존도가 우리의 절반도 안 되는 중국 일본과 재정건전성의 중요성을 같이 비교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혁민 연세대 의대 진단검사의학교실 교수는 “코로나19는 이제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4, 5월에 피크를 이룰 것이라는 게 세계 진단의학계의 판단”이라고 말한다. 전염병이 잡혀야 소비도 생산도 교역도 돌아간다. 경제위기에 대해서도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엊그제 대통령 주재 비상경제회의에서 100조 원을 퍼붓겠다고 했다. 과감한 결정이다. 한편에서는 그럴수록 그동안 재정 에너지를 비축해 두었더라면 이런 위기 국면에서 훨씬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앞으로도 글로벌 경제위기가 재발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실제 미국이나 중국 경제 시스템의 마비가 세계 경제위기로 전파될 가능성이 근본적으로 제거된 것은 아니다. 일단 급한 불을 끈다고 보면 중장기적 대처 방안은 이미 나와 있다. 체질을 강화하고 면역력을 기르는 일이다. 재정, 노사관계, 일자리, 규제 정책 등을 지금껏 해왔던 체질 약화 정책의 반대로만 하면 된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조만간 혹은 언젠가 전염병은 수그러들 것이다. 고립, 불안, 우울에 따른 정신적 후유증은 오래갈 것이다. 그것보다 더 오래가고 심각할 수 있는 것이 경제 충격이다. 지난 주말에 집 안에만 있기 힘들어 집 근처 영화관에 갔다. ‘기생충’에 밀리긴 했지만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까지 오른 영화인데도 우리 일행 3명을 포함해 5명이 관람객 전부였다. 전문식당가는 텅텅 비어 있었다. 닭갈비 가게 여주인은 어제는 점심 저녁 통틀어 네 팀을 받았고 오늘은 처음이자 마지막 손님이라 빨리 문 닫고 갈 것이라고 했다. 얼굴에 근심이 가득 찼다. 전염병뿐 아니라 경제가 팬데믹이다. 전 세계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보다 더 심각한 복합 불황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돈 냄새를 가장 빨리 정확하게 맡는다는 월가의 투자자들은 일제히 주식을 팔고 금, 달러, 채권 같은 안전자산으로 몰렸다. 뉴욕 증시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대로 폭락했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무디스 같은 국제 신용평가 기관들은 올해 한국의 성장률을 1%대로 낮추고 경우에 따라 0%대까지 떨어질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어차피 위기는 닥친 것이고 앞으로의 대처가 중요하다. 단, 이전의 경제 정책, 코로나19 방역 대처와는 달라야 한다. 전문가의 경고를 무시하고 밀어붙인 최저임금 인상 같은 정책적 실수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 방역에선 지금도 초동 대응의 잘못은 시인하지 않고 희생양 찾기에 여념이 없다. 서울시장, 경기도지사의 관심 끌기용 신천지 때리기는 보기 안쓰러울 정도다. 확진자 증가세가 주춤하자 그새를 못 참고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감염 예방의 모범 사례로 남을 만하다고 자랑이다. 이런 무능, 남 탓하기, 자화자찬 3종 세트로는 국민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이래서는 이번 경제 충격 극복 못 한다. 가장 중요한 일은 전문가 의견을 듣고 따르는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직언을 서슴지 않고 대통령 설득에 나섰던 이헌재 강봉균 강만수 같은 경제 관료들이 있었다. 그 나름대로 경제에 식견이 있다는 당시 대통령들도 그들의 말을 수긍하고 따랐다.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그 정도의 기개와 추진력을 갖췄다고 보는 사람은 여권 내에서도 많지 않을 것이다. 경제 사령탑을 교체하고 새로운 인물에게 전권을 줘 대처하는 것이 최선이겠으나 인사 검증, 청문회를 거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다면 현 경제팀에라도 최대한 권한을 줘야 한다. 경제는 문외한 수준이면서 힘이 좀 있다고 감 놔라 배 놔라 간섭하면 전문가들이 그나마 있는 능력도 발휘할 수가 없다. 벌써부터 거물급 정치인들의 ‘아무 말 대잔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대통령 최측근인 김경수 경남지사는 “모든 국민에게 재난기본소득으로 100만 원씩 지원하자”고 제안했다. 원래 기본소득은 기존의 복지 정책을 통째로 바꾸는 거대한 실험이다. 각종 수당, 세제 감면 등 모든 복지 혜택을 없애고, 재벌 회장이건 노숙자건 소득에 관계없이 똑같은 금액을 나눠 주자는 것이다. 아무리 일시적이라곤 하지만 준비 없이 실행했다간 대혼란을 초래할 게 뻔하다. 인기를 끌겠다 싶으면 자기 돈 아니라고 조 단위는 우습게 생각하는 이런 정치인들의 소음부터 먼저 차단해야 한다. 얼마 전 별세한 잭 웰치 GE 회장은 기업의 위기관리 방안으로 5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지금 눈에 보이는 위기는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 둘째, 솔직하게 알리고 잘못에 대해선 사과하라. 셋째, 아픔이 있더라도 사람과 시스템을 바꾸라. 넷째, 외부 평가에 담담해져라. 다섯째, 절망하지 말고 위기 후 더 강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라. 기업이나 국가나 위기에 대한 대처 방식은 매한가지다. 이전과 똑같이 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할 순 없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세기의 경영자(Manager of the Century)’로 불리는 잭 웰치 전 GE 회장이 어제 8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웰치는 기업 현장에서 몸으로 경영학 교과서를 쓴 사람이다. 웰치가 20세기 아날로그 시대 ‘경영의 신’이라면 그와 어깨를 견줄 인물은 21세기 디지털 시대를 대표하는 스티브 잡스밖에 없다. ▷무엇이 그를 살아 있는 경영의 전설로 만들었을까. 오래전에 미국의 한 경영대학원에서 ‘잭 웰치 리더십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웰치를 개인적으로도 안다던 교수는 그의 카리스마가 얼마나 대단한지 GE 임원들에게 깨진 유리 조각이 깔린 시멘트 바닥을 맨무릎으로 기어가라는 지시를 내려도 임원들은 그 지시를 기꺼이 따를 것이라고 했다. 그런 강력한 리더십의 원천은 웰치의 성격이나 스타일이 아니라 그가 보여준 성과 때문이라는 게 강의의 핵심이었다. 실제 그의 경영철학은 모두 ‘경쟁에서 이기기’로 통한다. 그의 두 번째 자서전 제목도 ‘위닝(Winning)’이다. 수많은 경영이론이 있지만 역시 ‘꿩 잡는 게 매’다. ▷웰치는 대단히 실용적이고 가차 없는 스타일이었다. 상대평가를 통해 상위 20%에게는 영혼과 지갑을 채워주고, 가운데 70%에게는 기회를 더 주고, 하위 10%는 해고하는 철저한 성과주의 인사 시스템을 지켰다. 여기에서 온정주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해고당할 사람은 일찍 해고하는 게 실업자 대열의 끝에 서지 않도록 도와주는 길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건물은 놔두고 사람만 모두 죽이는 중성자탄에 비유해 ‘중성자 잭’이란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늘 따라다녔다. ▷웰치는 불같이 급한 성격에, 맹렬한 학습 욕구 그리고 강한 자신감과 낙관주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의 성격에는 어머니 영향이 컸다. 어렸을 때 말을 더듬어 ‘참치(Tuna)’ 샌드위치를 시키면 ‘Two… Tuna’라고 들려 2개가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때마다 어머니가 “그건 네가 너무나 똑똑해서 혀도 네 똑똑한 머리를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야”라며 자신감을 줬다. 본인 역시 말 더듬는 것을 의식한 적이 없다고 하는데 이 정도 강한 멘털이 있었으니 ‘세기의 경영자’ ‘중성자 잭’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웰치의 위기관리 팁 5개가 있다. 그중 첫째가 ‘보이는 것보다 더 크게 생각하라.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때가 많다’, 둘째가 ‘세상에 비밀은 없다. 숨기려 하지 말고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리고 먼저 사과하라’다. 어려운 시기다. 한 번쯤 새겨볼 만한 말이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강남 집값 상승은 다소간 배 아픈 문제이지만 전월세 가격 즉 임대료 상승은 민생과 직결되는 문제다. 그리고 상대적 약자이고 다수인 서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는 사안이다. 그래서 주택 임대료 문제는 한국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정치적 이슈로 부각되곤 한다. 지난달 30일 독일의 수도 베를린 시의회는 향후 5년간 주택 임대료를 올리지 못하게 하는 ‘임대료 동결법’을 통과시켰다. 이미 올리기로 합의했더라도 2014년 이후 지어진 집이라면 작년 6월 정해진 임대료를 5년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 베를린시는 사회민주당, 좌파당, 녹색당이 과반의석을 차지해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과거 동독 공산당 후신인 좌파당이 법안을 주도했다. 이에 앞서 미국 캘리포니아주 의회는 앞으로 10년간 임대료 인상률을 연 5% 이내로 제한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주거비용 급등으로 노숙인이 늘어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처다. 문재인 정부가 이에 뒤질 리가 없다. 법무부와 더불어민주당이 작년 9월 당정협의를 통해 현재 2년인 전월세 계약 기간을 2배인 4년으로 늘리겠다고 밝힌 바 있다. 상가에만 적용되는 계약갱신청구권을 주택에도 적용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문 대통령의 대선 공약 사항이기도 하다. 한꺼번에 왕창 전월세를 올리지 못하도록 하는 전월세 상한제는 한 묶음이다. 주택시장에 몰고 올 파장을 감안하면 이 정도 큰 정책을 발표하기 전에는 최소한 주택정책 주무부서인 국토교통부와 사전 실무협의가 있어야 한다. 발표장에 김현미 국토부 장관도 배석하는 것이 당연하다. 조국 법무부 장관의 임명 직후 한창 도덕성 논란을 빚을 무렵이라 그런지 부처 간 협의도 없었고 관련 부처 장관도 배석하지 않았다. 발표 후 국토부는 “사전 협의는 없었지만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힌 게 고작이었다. 부동산 정책에 관련한 실질적 수단 즉 세제 예산 금융을 주무르고 있는 기획재정부도 꿀 먹은 벙어리이긴 마찬가지다. 다른 모든 정책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코로나19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지만 전월세 상한제와 계약갱신청구권 도입은 조만간 터져 나올 사안이다. 법무부가 지난해 해외 사례를 연구하기 위해 유일하게 보낸 곳이 베를린이고 최근 강남 전셋값이 급등하고 있어 속도를 내는 형국이다. 임대료 상한제나 계약갱신기간 확대는 다른 가격 통제 정책과 마찬가지로 당장 혜택을 보는 유권자가 많고, 약자들 편에 선다는 이미지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선호하는 이른바 ‘착한 정책’이다. 그렇다고 결과까지 착하지는 않다는 ‘선의의 역설’은 이미 수많은 역사적 사례를 통해 입증됐고 근래에는 최저임금 인상 후유증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입증된 바 있다. 특히 임대료 통제는 의견 충돌이 잦은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 일치를 보는 몇 안 되는 정책이다. 주택의 공급과 질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결국에는 세입자들이 피해를 입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경제학 교과서 ‘맨큐 경제학’은 스웨덴 경제학자 아사르 린드베크의 “폭격 이외 수단으로 도시를 파괴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주택 임대료 통제”라는 말을 인용해 가격 통제 폐해의 대표적 사례로 임대료 통제를 들고 있다. 대체로 정치인들이 앞장선 경제 정책은 끝이 좋지 않다. ‘장기적’으로 도시가 파괴되고 ‘결국’ 세입자가 피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당장’ 표를 얻을 수만 있다면 양잿물도 마실 수 있다는 게 정치인의 속성이다. 이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역시 정신 차린 유권자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더구나 ‘기생충’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아니다. 그렇다고 ‘배트맨’이나 ‘겨울왕국’ 같은 판타지 영화도 아니다. 작년 말 뉴욕타임스는 ‘기생충’을 올해의 영화로 꼽았다. “반지하와 대저택은 현대사회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장소로 어디서든 벌어지고 있는 계급투쟁에 대한 교훈을 전하고 있다”는 평을 달았다. 사실 그대로는 아니지만 현실적인 내용이라는 말이다. ‘기생충’이 아카데미 작품상 각본상을 수상한 데는 영화가 던지는 사회적 메시지가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게 평론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바로 경제적·사회적 불평등 문제다. 먼저 불평등에 대한 ‘인식’이 어떤가를 보자. 아카데미상을 선정하는 미국의 분위기부터 보자. 올해 초 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43%가 ‘이런저런 형태의 사회주의가 좋은 것’이라고 응답했다. 작년 카토연구소 조사도 비슷하다. 사회주의에 대한 호감이 39%, 비호감이 59%였다. 18∼29세 청년층은 사회주의에 대한 호감이 50%로 자본주의에 대한 호감 49%보다 높았다. 현대 자본주의 대표주자 격인 미국의 여론이라는 점에서 놀라운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자칭 사회주의자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어제 발표된 한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대선후보 지지율 선두를 차지한 배경이다. ‘기생충’이 최근 흑인 등 소외계층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아카데미상 심사단과 젊은 관객들에게서 큰 반향을 일으키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 역시 사회주의에 대한 통념이 과거와는 달라지고 있는 것은 확연해 보인다. 법무부 장관을 하겠다며 인사청문회에 나선 조국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이 “나는 자유주의자이면서 사회주의자”라고 할 정도는 됐다. 주관적 ‘인식’과는 별도로 불평등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은 어떨까. ‘기생충’이 골든글로브에서 수상한 직후인 올해 1월 블룸버그통신은 ‘기생충이 놓친 한국의 현실’이란 기사를 실었다. “‘기생충’은 한국의 불평등이 브라질이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시아판으로 묘사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라며 몇 가지 근거를 들었다. 대표적인 경제적 불평등 관련 지표인 지니계수는 한국이 0.32로 아시아에서 동티모르를 제외하면 가장 낮은 수치, 즉 가장 평등한 수준이다.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보다 낮다. 최하위 20%의 소득 대비 최상위 20%의 소득은 5.3배다. 남아프리카공화국 28배, 미국 9.4배보다 낮다. 일본, 호주, 이탈리아보다 양호하고 프랑스나 독일과 비슷하다. 상위 1%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한국이 12.2%로 미국 20%, 브라질 28%보다 많이 낮다. 정부 자료에서도 인식과 사실의 괴리가 잘 드러난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19년 한국인 의식조사’에서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생각한다는 비율이 34.6%였다. 통계청 조사로는 중위소득 50∼150%에 속하는 가구 비율이 전체의 58%로 많은 차이를 보였다. 영화가 현실과 같을 필요가 없음은 물론이다. 한발 더 나아가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따질 것 없이 인식과 현실의 괴리가 점점 더 벌어지고,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에 불만이 갈수록 높아진다는 현상 자체가 또 하나의 ‘팩트’다. 이번 ‘기생충’의 영화적 성취는 우리 사회를 지속가능한 사회로 만드는 데 더 많은 노력과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부의 생산에 누가 더 많이 기여를 했든지 간에 분배로서의 정의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그와 동시에 실제보다 더 부풀려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심리적으로 더 불행하게 만들고 사회적 분열을 부추겨 반사이득을 취하려는 ‘인간 기생충’의 준동도 함께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지하 주차장도 없는 15층 아파트 1층 주민에게 엘리베이터 사용료를 내라는 아파트 관리비 고지서가 나왔다면 주민들 반응이 어떨까? 1층 주민이라면 “말도 안 되는 소리”, 다른 층 주민들이라면 “공동 시설인데 당연히 내야지”라고 할 것이다. 실제 이런 분란이 종종 벌어진다. 재판으로 간 경우도 있고, 국회 격인 입주자대표회의에서 투표로 결정된 사례도 있다. 투표의 경우 짐작대로 1층 주민도 내야 하는 쪽으로 결론이 난 경우가 많았다. 다수의 결정이라고 반드시 공정하고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바야흐로 누구나 한 표를 행사하는 선거 시즌이다. 정당과 후보자들이 다양한 공약을 내걸고 표심을 유혹하고 있다. 그런데 가장 많은 표를 얻을 만한 약속이 가장 합리적인 정책일까.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운 공약도 더러 있다. 예컨대 만 20세 청년 전원에게 3000만 원씩, 부모가 없는 청년에게는 최대 5000만 원씩 정부가 지급하겠다는 ‘청년기초자산제’는 여당인지 야당인지 분간이 안 가는 정당의 총선 1호 공약이다. 화끈한 만큼 뒷감당이 불감당인 약속이다. 이뿐만 아니다. 농어민수당, 노인수당, 아동수당 등 이미 있는 여러 이름의 수당을 이중 삼중으로 더 올려주겠다는 공약이 여야 가릴 것 없이 난무하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수당(手當)’을 ‘정해진 봉급 이외에 따로 주는 보수’라고 풀이하고 있다. 앞으로는 ‘정부로부터 그저 받는 돈’이란 뜻이 추가되게 생겼다. 정치인이 표를 좇는 것은 일견 이해할 만하지만 그래도 정도가 있다. 작년 우리나라 경제 성장률이 2.0%였다. 올해 정부 목표가 2.4%다. 작년 정부 예산 증가율은 9.5%였다. 올해는 거기서 9.3% 더 늘렸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묻고 더블로 가!’ 식이다. 이 중 현금복지 사업은 작년에 비해 10.6% 증가했다. 성장률의 4∼5배나 되는 예산 지출, 그것도 현금 살포식 지출 증가가 계속 가능하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대국민 사기극, 미래 세대에 대한 약탈 행위나 다름없다. 조세 저항 없이 생색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 빚 끌어다 현금 봉투 뿌리는 일이다. 그래서 국가 채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추세다. 그 폐해는 반드시 누군가에게 돌아갈 것이다. 특히 빚 보따리가 다음 세대의 어깨를 짓누를 게 뻔하다. 그래서인지 최후의 선택이 늘고 있다. ‘발로 하는 투표’, 즉 이민 열풍과 기업 탈출이다. 최근 여기저기서 거의 매주 열리는 이민설명회는 예약 없이는 입장도 안 될 정도로 성황이다. 외교부 통계로도 작년 해외 이주 신청자가 1년 새 5배 가까이 늘었다. 미국 캐나다 호주에 갈 형편이 안 되면 말레이시아라도 가겠다면서 동남아 이민 문의가 폭주한다고 한다. 기업도 떠난다. 기업들이 나라 밖으로 싸들고 나간 돈, 즉 해외직접투자(FDI) 금액이 작년 3분기까지 444억5000만 달러로 전년에 비해 21.6% 증가했다. 1년 총액으로 500억 달러가 넘을 것이 확실시된다. 관련 통계가 작성되기 시작한 1981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반대로 한국에서 사업하겠다고 들어온 돈은 작년 3분기까지 134억8500만 달러로 전년 대비 29.8% 줄었다. 기업이 해외로 빠져나가면 일자리는 누가 만들고 세금은 누가 낼 것인가. 오랜 경험을 가진 경제 관료들은 ‘이건 아닌데’ 싶지만 겉으로는 입도 벙긋 안 하는 게 정부세종청사 분위기라고 한다. 장차관에게 개인 집도 팔라 말라 하는 판에 청와대에 좌표 한번 잘못 찍혔다간 그나마 모기만 한 목소리도 못 내고 사라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고, 공짜의 종착지가 어디인지를 보여주는 해외 사례는 지금도 널려 있다. ‘소경 제 닭 잡아먹기’라는 속담이 있다. 자식까지 생각한다면 결국은 국민이 눈을 똑바로 뜨는 수밖에 없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천동설처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은 당연하지 않은 것이 많다. 대학 친구가 은행에서 부장을 끝으로 명예퇴직에 몰렸다. 명예퇴직이란 불명예퇴직의 포장이다. 나이는 50대 중반으로 한창 일할 만하고, 경험과 지식도 충분하다. 그런데 왜 주민등록상 나이로 차례차례 퇴직을 해야 하는가. 부모가 출생신고를 늦게 해서 회사를 더 다니게 되는 경우도 많다. 별수 없다고 하지만 공정해 보이지는 않는다. 금융회사는 호봉제 채택 비율이 가장 높은 업종이다. 입사한 지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 신입사원 2, 3명의 봉급을 받는 것이 불공정하다는 청년세대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능력이 충분히 있고, 심지어는 봉급을 적게 받을 용의도 있는데, 나이가 찼다는 이유만으로 회사에서 나가야 하는 것이 불공정하다는 명예·정년퇴직자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신입사원과 정년퇴직자의 불만을 동시에 줄이는 방안이 입사 순서가 아니라 일의 성격에 따라 임금을 정하는 직무급제가 될 수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호봉제로 인해 높은 임금을 받는 장기 근속자의 임금을 낮추고 대신 청년 채용을 늘릴 수도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2015년 기준 30년 이상 근무한 직원과 1년 미만 근무자의 임금 격차는 평균 3.3배다. 일본의 2.5배보다 높을 뿐만 아니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봉제는 여전히 강고하다. 줄고 있는 추세라고 하지만 작년 기준으로 종업원 100인 이상 사업체 중 58.7%가 호봉제를 채택하고 있다. 연공서열제가 장점도 많지만 고령화, 저성장 추세에는 맞지 않는다. 며칠 전 고용노동부가 ‘직무 능력 중심 임금체계 확산 지원방안’을 발표했다. 근속연수가 높아지면 자동으로 임금이 올라가는 호봉제는 줄이고 대신 직무와 능력 중심으로 임금체계를 개편하겠다는 것이다. 좋은 취지이고 방향이다. 임금의 대원칙 가운데 하나가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다. 이 원칙에 가장 충실한 제도가 직무급이다. 같은 일을 하는데 비정규직이란 이유만으로, 하청업체에서 파견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본사 직원보다 월급을 반밖에 못 받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남녀, 정규직·비정규직, 대기업·중소기업의 임금 차별도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이 제대로 안 지켜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직무급은 국제노동기구(ILO)가 권장하고 있는 제도이기도 하다. 하지만 쉽지는 않아 보인다. 직무급이 호봉제의 벽을 넘지 못하는 것은 역시 기득권의 반발 때문이다. 고용부의 방안이 나오자 민노총은 즉각 “정규직의 임금 삭감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며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역시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이해관계 앞에선 헌신짝이다. 임금체계 개편은 정부의 올해 노동혁신 과제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정부가 시늉만 하고 의지가 없기는 다른 혁신이나 마찬가지다. 정부가 직접 통제할 수 있는 330여 개 공공기관 가운데 직무급을 도입한 곳은 겨우 5개, 그것도 직원 1000명 이상인 제법 큰 공기업은 이달 도입을 발표한 KOTRA가 유일하다. 공무원 임금체계는 말할 것도 없다. 자기도 못 하면서 민간기업에 대해 도입을 권고하니 제대로 말이 먹힐 리가 없다. 관련 컨설팅을 받는다면 지원해 주겠다는 예산이 고작 4억 원이다. 100세 시대에 봉급을 적게 받고도 일을 오래하는 방안이 있다면 기업과 근로자, 사회 모두에 득이 될 수 있다. 공정한 임금체계는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근무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등 3가지를 모두 합친 것보다 우리 사회에 훨씬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물론 공정하고 생산적인 방향이다. 하지만 ‘노동을 존중하는 사회’가 아니라 ‘노조를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고 있는 정부가 과연 노조의 반발을 무릅쓰고 제대로 시도나 해볼지는 의문이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이제는 2020년대. 정치적으로도 그렇지만 경제적으로도 그 시대가 주는 이미지가 있다. 1950년대 한국 경제는 농업, 빈곤의 이미지가 강하다. 1960년대는 경제발전의 초석을 놓은 시기였다.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됐다. 1963∼1969년 평균 경제성장률은 10.7%. 1970년대는 본격적 고도 성장기다. 중화학공업의 기초를 놓았다. 평균 성장률은 10.5%. 1980년대는 저금리 저유가 저환율의 3저 흐름을 타고 ‘단군 이래 최대’라는 호황을 누렸다. 평균 성장률은 8.8%. 1990년대는 경제 개방화의 흐름 속에 잊지 못할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이 있었다. 위기를 넘겨 질적으로 한 단계 도약했다. 평균 성장률은 7.1%. 2000년대는 벤처 붐이 불기 시작했고 정보기술(IT) 강국의 대열에 올라섰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있었지만 평균 성장률 4.7%의 비교적 견실한 성장을 이뤘다. 2010년대는 평가하기에 아직 이른 면이 있다. 한국 경제가 본격적으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거나 혹은 안정기로 접어든 시기였다고 평가될 가능성이 높다. 2010∼2018년 평균 성장률은 3.0%. 2010년대의 마지막 해인 작년은 어땠을까. 경제성장률은 2%에 간신히 턱걸이하거나 1%대로 떨어졌을 것으로 관측된다. 석유파동,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등 3차례 경제위기 때를 제외하면 역대 최악이다. 세계 경제 평균 성장률이 3.2%, 미국이 2.6%였으니 외부 여건 탓만 할 수도 없다. 서울대 경제추격연구소는 최근 펴낸 ‘2020 한국경제 대전망’(21세기북스)에서 작년이 ‘내우외환’의 해였다면 올해는 ‘오리무중(五里霧中) 속의 고군분투(孤軍奮鬪)’가 한국 경제의 키워드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중 무역전쟁의 결말이 어떻게 날지 예측할 수 없고, 정부 초반기 섣부른 정책 실수를 뒷수습하기 바쁜 상황에서 주위의 원군 없이 한국 경제가 홀로 분투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것이다. 사방이 온통 불확실하지만 확실한 점도 몇 가지 있다. 우선 개인정보보호법, 정보통신망법, 신용정보법 등 ‘데이터 3법’은 하루빨리 처리해야 한다. 타이밍이 중요한 산업이다. 알고 보니 국회는 핑계였다. 작년 말 선거법, 공수처법 처리하는 과정을 보니 여기의 백분의 일만 의지를 가졌더라도 ‘데이터 3법’은 벌써 처리되고 남았을 것이다. ‘부동산은 계급’이라는 정치적, 이념적 시각으로 접근하는 부동산정책은 이제라도 버려야 한다. 세계 어디에도 특정 지역 집값 잡기에 주택정책을 올인하는 정부는 없다. 뉴욕 런던 시드니 등 서울 못지않게 집값이 뛰는 곳에서도 2개월에 한 번꼴로 세제 금융 거래 대책을 총망라한 부동산대책을 내놓지는 않는다. 주택정책은 거시경제 위협을 고려하되 ‘서민의 주거 안정’이라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정치·사회적 접근으로는 해답이 없다. 2020년대 중반쯤에는 1인당 국민소득에서 한국이 일본을 따라잡는 역사적 대사건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잘사는 나라, 못사는 나라의 기준이 대체로 1인당 국민소득이라고 할 때 한국이 일본보다 잘사는 나라가 되는 것이다. 다만 한국의 하강곡선, 일본의 상승곡선에서 교차점이 찍힌다면 ‘잃어버린 20년’마저 한국이 일본을 뒤따라갈 것이라는 점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대로 가면 더 추락할 수도 있다. 휴대전화만 가지면 누구나 기자이고, 유튜브용 카메라만 있으면 누구나 평론가인 세상이다. 올해는 총선이 기다리고 있다. 포퓰리즘이 극성을 부리기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여기에 부동산 공유제 같은 ‘아무 말 대잔치’가 대선 후보급들에서 난무한다. 한국 경제가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은 아니지만 최소한 잠재력만큼은 실력을 발휘해 착실한 안정 궤도로 재도약하느냐, 아니면 남미행 급행열차를 타느냐는 2020년대의 문을 여는 올해에 달렸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공기업은 정부가 주인이다. 정부가 회장이나 사장을 사실상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KT나 포스코처럼 공기업이 국민주를 통해 민영화되면 주식을 가진 주주가 주인이 된다. 최고경영자(CEO) 선임은 당연히 이사회와 주주총회에서 내려야 한다. 아주 당연한 이야기인데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게 현실이었으니 항상 말썽이 벌어졌다. ▷27일 KT 이사회는 전원 합의로 새로운 CEO 후보에 커스터머&미디어 부문장인 구현모 사장을 단독 확정했다. 황창규 회장의 임기가 끝나는 내년 3월 주총에서 최종 승인될 예정이다. 구 사장은 1987년 입사한 정통 KT맨으로 전략 기획이 전문이다. 11년 만의 내부 출신 CEO인 것이다. 앞으로 계열사 43개, 임직원 6만1000명, 연 매출 23조 원, 자산 34조 원으로 재계 순위 12위인 KT그룹을 이끌게 된다. 연봉도 내리고 공식 직함을 대표이사 회장이 아닌 대표이사 사장으로 낮춰 겸손 모드로 갈 모양이다. ▷KT는 포스코, KT&G 등과 마찬가지로 주인이 워낙 많고 흩어져 있다 보니 사실상 주인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회장 인선에 청와대를 포함한 정권 실세의 입김이 절대적이었다. 그 후과(後果)로 전임자들이 줄줄이 불행한 일을 겪어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남중수 사장과 이석채 회장이 재판을 받아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황창규 회장 역시 정권이 바뀌자 수사를 받았다. ▷그러다 보니 이번 인사에서 구 사장 개인보다 사장 선발 과정에 눈길이 쏠렸다. KT 이사회는 먼저 사외이사가 특정 인사를 추천하면 자동으로 회장 후보군에 포함되는 사외이사 추천제를 없앴다. 정권 실세의 영향력 행사 통로로 지목받아오던 제도다. 그 대신 완전공모제를 통해 후보군을 투명하게 짜고 지배구조위원회-회장후보심사위원회-이사회를 거쳐 후보를 좁혀왔다. 황 회장은 일찌감치 차기 회장 선임 과정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고 최종 이사회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정부로서도 이목이 집중된 KT 인선에 드러내놓고 간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작년 포스코 최정우 회장 선임 과정에서도 과거보다 정치적 입김이 적었다는 평가가 있다. 반면 올해 KT&G 백복인 사장의 연임을 막으려고 국책은행인 IBK기업은행 지분을 동원했다가 의도를 관철하지 못하고 정부 체면만 구긴 일도 있었다. 민영화된 공기업의 CEO 선임이 투명하게 이뤄지는 관행이 쌓여가야 한다. 이번 구 사장 선임이 담고 있는 가장 큰 의미는 2002년 KT 민영화 이후 사실상 첫 평화적 CEO 교체라고 할 수 있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대한민국이 처음부터 이렇게 잘살았던 것은 아니다. 최초의 근대식 주식회사로 꼽히는 경방이 출범한 1919년 이후 100년간 한국은 농업국가에서 경공업을 거쳐 중화학, 첨단 전자산업 국가로 도약했다. 작년 기준으로 경제 규모 세계 12위, 1인당 국민소득은 전쟁으로 폐허만 남은 1953년 67달러에서 3만2000달러로 477배나 늘었다. 세계에 유례가 없는 일이다. 여기에는 기업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그중에서도 선두에 섰던 대기업들의 역할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공과를 떠나 대한민국 경제의 역사는 대기업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아일보가 창간 100주년을 맞아 민간위원 30명과 함께 선정한 ‘한국 기업 100년, 퀀텀점프의 순간들’ 명장면 100개 가운데 1위가 삼성전자의 반도체 산업 진출을 천명한 도쿄선언, 2위가 포스코(옛 포항제철)의 첫 쇳물 배출, 3위가 독자개발 승용차 포니의 탄생이었다. 삼성의 반도체 진출을 두고 인텔은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비웃었지만 삼성은 세계 시장에서 어깨를 나란히 한 라이벌 기업이 됐다. 자동차 철강 조선 화학 모두 출범 당시에는 무모하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 이제는 한국 산업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으로 자리 잡았다. 정부의 역할도 지대했다. 수출 주도·중화학공업 육성의 경제발전 모델을 세우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기업들을 지원하고 독려하며 산업을 발전시켰다. 그런 한국이 이제는 저물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다. 경제성장은 정체되고 청년들은 취업난에 시달려 희망을 잃고 있다. 무엇보다 산업 현장의 기업들이 의욕을 잃고 있다. 국내 투자보다 해외로 나갈 기회만 엿보고 있다. 곧 2010년대가 저물고 2020년대가 시작된다. 한국 경제 그리고 한국 기업들에 한 차원 높은 단계로의 퀀텀점프가 필요한 시기다. 무엇을 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이제 정부가 주도하고 기업이 따라가던 시대는 지났다는 점이다. 창의력은 말할 것도 없고 지식과 정보의 축적에서도 이미 민간은 정부를 훨씬 뛰어넘었다. 기업들은 “정부에 크게 바라는 것도 기대하는 것도 없다. 가만 내버려두기만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공공연히 한다. 과거의 잣대, 정치적 표 계산 때문에 기업들을 각종 규제와 간섭으로 칭칭 묶어 버리면 한국 경제의 또 한 차례 도약은 결코 이뤄질 수 없다.}
《12·16부동산 대책이 기습적으로 발표됐다. 직후 재산권 침해 헌법소원이 제기됐다. 전 법제처장 이석연 변호사에게 의견을 물었다. 위헌적 요소가 많다고 한다. 대북정책을 포함해 현 정부 정책 기조 가운데도 헌법정신과 법절차를 위반한 것이 많다고 주장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사유를 인정하지만 이 변호사는 문재인 대통령의 정책 가운데 일부의 위헌성은 그것을 뛰어넘는 수준이라고 한다. 이 변호사는 행시 사시를 모두 합격하고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을 5년간 지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사무총장을 지냈고 이명박 정부 때는 법제처장이었다. 보수 진보에 앞서 엄격한 헌법주의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 ―12·16부동산 대책이 기습적으로 실시됐다. 강남 집값 안정이 타깃이다. 시세 15억 원 초과 주택에 대해서는 대출을 전면 금지한 대책 등에 대해 헌법소원이 제기됐다. “우리나라 헌법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이 두 가지를 축으로 하고 있다. 최고의 목적은 국민행복권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헌법 제37조 제2항은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해 필요한 경우에 한해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다. 단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번 12·16대책은 시장경제의 기본정신도 무시한 것이다. 정당한 목적이 있다고 해도 방법이 적정해야 하고, 피해를 최소화해야 하고, 법익의 균형성을 지켜야 하는데 이번 대책은 이러한 ‘과잉금지의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충분한 상환 능력이 있는데 고가 주택이라는 이유만으로 재산 가치를 완전히 무시한 것은 기본권 침해 소지가 크다고 본다.” ―행정부의 재량권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가계 대출이 너무 많아 줄이라는 것은 행정부의 재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특정 금액 이상의 주택에 대한 전면적 대출 금지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다. 서울에 들어와서 살고 싶은 사람에게 현금 없으면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1가구 주택자에게 보유세가 너무 많아서 못 살겠으면 집 팔고 다른 데로 가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대다수 국민의 배 아픔을 이용해 편을 가르고 표를 얻으려는 고약한 정책이다. 헌법적 가치인 시장경제는 신뢰와 예측의 바탕 위에서 돌아간다. 이번 대책은 기습적으로 실시돼 이런 최소한의 예측가능성을 무너뜨렸다. 기본권을 제한하더라도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다고 했는데 경제부총리 말 한마디로 갑자기 대출을 금지했다는 점도 법 위반 소지가 있다.” ―과거 토지초과이득세, 주택상한제 등 다른 부동산 대책에 대해서도 위헌 판결 난 것이 있었는데 어떤 근거였나. “노태우 정부 때 토지초과이득세, 택지소유상한제를 실시했다. 하도 말도 안 되는 정책이어서 국세청 고문변호사도 그만두고 공익 차원에서 헌법재판소에 헌재 소원을 냈다. 당시 토초세, 택지소유상한제는 토지공개념에 근거한 정책이라고 했는데 우리 헌법에 토지공개념이란 단어는 없다. 두 제도가 위헌이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 실현되지 않은 이득에 대해 세금을 매겼다는 것인데 이번 12·16대책 가운데 종합부동산세를 급작스럽게 올린 것과 비슷하다. 종부세는 재산세를 내고 다른 부동산들과 합산해서 또 내는 것이어서 중복과세 소지도 다분하다. 토지는 그나마 공급이 매우 한정돼 있지만 주택은 그렇지 않다. 아파트만 보더라도 전체 가격에서 토지 지분이 차지하는 부분은 아주 작지 않은가. 토지에 대해서도 위헌 판결이 났는데 이번 12·16대책처럼 주택에 대한 기본권 침해는 토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위헌적 요소가 크다고 본다.” ―당시 토초세, 택지상한제 위헌 판결로 피해 보상을 모두 받았나. “판결 결과로 나중에 피해를 보상받은 사람도 있고, 이미 토지를 처분한 사람이나 기업들도 있다고 들었다. 정부가 깊숙이 개입해서 결과적으로 실패를 불러온 정책들은 두고두고 피해를 끼친다. 함석헌 선생은 ‘역사란 한 사람이 잘못한 것을 모든 사람이 물어야 하고 한 시대의 실패를 다음 시대가 회복할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했다. 또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인간은 아버지의 죽음은 쉽게 잊지만 자신의 재산상 손해는 결코 잊지 못한다’고 했다. 이번 정부의 정책 실패에 대해 이자에 이자가 붙은 계산서가 나와 국민 전부 혹은 다음 세대까지 물게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국민들도 그런 정책과 만든 사람들을 쉽게 잊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비서실장, 여당 원내대표, 경제부총리가 청와대 비서진, 정부 부처 고위공무원, 국회의원에 대해 1주택 외는 다 팔라고 사실상 지시했다. 벌써 집을 내놓은 공무원도 나왔다. 해당자들이 전전긍긍할 텐데 어떻게 보나. “물론 집 팔라고 한 지시가 법률 행위는 아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1급 이상 고위공무원뿐만 아니라 2, 3급 이하 공무원들의 승진 심사, 인사검증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겠는가. 공직자에게 국민의 모범이 되라는 말은 할 수 있지만 아파트 두 채, 세 채를 갖고 있다고 공무원이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주겠다는 것은 국민으로서 행복추구권, 나아가서는 공무담임권 위반 소지도 있다. 법 위반의 문제도 있지만 총선에서 표를 얻기 위해 공무원들을 자신들의 수족 정도로 취급하는 것이 한심스럽다.” ―부동산 대책뿐이 아니라 이번 정부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이나 절차쯤은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대북정책이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선언, 그해 9월 19일 평양공동선언과 함께 발표됐던 남북군사합의서를 보자. 과거 7·4공동성명처럼 말 그대로 선언적 의미가 강했던 기존 남북선언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번 것은 대한민국의 국방 외교 경제 군사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하는 것이고 국민들에게 막대한 경제적 부담을 주는 것이다. 이 선언이 나오자마자 통일부가 북한에 철도·도로 건설해준다고 다음 해 당장 2986억 원이 들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군사합의서는 국회 동의도 안 거친 상태에서 벌써 착착 실행되고 있다. 군사분계선에서 훈련을 중지했고, 비무장지대에서 GP를 철거했고, 한미연합훈련을 사실상 무력화시켰다. ‘대한민국의 군사상 이익을 해하거나 적국에 군사상 이익을 공여하는 행위’인 일반이적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선거를 통해 집권한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닌가. “우리 헌법 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것을 버리면 헌법을 버리는 것이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양대 축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다. 그리고 이를 위한 법절차 준수다. 지금 정부의 대북정책 혹은 통일정책 방향이 과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 지금 정부는 ‘자유’라는 용어를 빼고 싶어 하지 않나. 자유민주적이 아닌 사회주의적 또는 다른 식의 통일을 하고 싶으면 국민의 동의를 얻어 헌법부터 바꿔야 한다. 그러면 합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초헌법 행위다. 공약을 통해 집권했다 해서 판문점선언, 평양선언, 남북군사합의서가 국민적 동의를 얻었다고 볼 수 없다. 판문점선언은 국회에 제출됐지만 동의가 안 된 상태다. 이 상태에서 평양선언이 나오고 군사합의서가 집행되고 있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헌법상 국군통수권자이지 문 대통령이 자주 말하는 것처럼 민족 조정자가 아니다.” ―너무 보수적 시각에서 본 것 아닌가. “처음에 말했지만 나는 진보 보수 이런 개념을 떠나 헌법을 오래 연구해왔고 헌법을 지킬 것을 강조하는 헌법주의자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준수만큼 사회적 약자 보호도 중시해 왔다. 그래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사유에 대해 동의했다. 탄핵결정문을 자세히 보라. 문화체육부 간부 인사 개입, 언론자유 침해, 세월호 관련 생명권 보호의무와 직책성실의무 위반은 탄핵 사유가 안 된다고 했다. 다만 최서원(최순실 본명)을 위해 대통령의 지위와 권한을 남용한 것은 헌법을 위배한 것이고 기업의 재산권과 기업경영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고 했다. 이 정도의 탄핵사유는 평양선언, 남북군사합의서 등이 대한민국에 끼칠 영향과 비교하면 ‘새 발의 피’다. 그러나 탄핵사유가 된다는 것과 실제 탄핵이 이뤄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국민 여론, 재판관 구성 등이 최종 판단에는 크게 작용할 것이다.” ―사회·정치 정책 가운데 위헌적 요소가 있는 것이 있다면…. “헌재가 박 전 대통령 탄핵 사유에 대해 자기 소속 정당, 정파 또는 지지 세력을 대상으로 대통령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국민의 신임을 위배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정부의 정책들 가운데 자기 정파, 지지 세력만을 위한 정책들이 많다. 문 대통령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수사가 이뤄지는 와중에 절제된 검찰권 행사가 중요하다면서 검찰은 성찰하라고 공개적으로 말한 대목은 특정한 사건에 대해 직접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으로 명백한 법 위반이다. 이 밖에도 국민청원제도는 조선시대의 신문고 제도와 비슷한 것인데 지금이 봉건왕조도 아니고 법률적 근거가 없는 제도다. 행정부 사안만 청원을 받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사법 입법부 관련 제도에 대한 청원까지 다 받아 국민의 의견으로 전달하면서 실질적으로 사법부에 영향을 미친다. 3권 분립을 무시한 제왕적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2003년 10월 13일 시정연설에서 ‘강남불패’를 깨겠다고 공언했다. “종합적 대책을 준비하고 있으며 그것으로도 부족할 때는 강력한 ‘토지공개념 제도’ 도입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후 김진표 당시 경제부총리는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주택담보대출 억제를 골자로 하는 10·29종합대책을 내놓았다. 그는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고 본다”면서 “더 강력한 것은 사회주의적인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후 수십 번의 종합대책이 나왔지만 강남불패는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사회주의적이라던 분양원가 공개가 약과로 보일 만큼 규제의 강도는 점점 더 세졌다. 급기야 직접 가격통제 방식인 분양가상한제를 사실상 서울 전역으로 확대 실시하는 상황까지 왔다. 부동산에 대한 온갖 규제와 중과세의 논리적 근거를 토지공개념에서 찾는다. 그 비조(鼻祖)가 1879년 ‘진보와 빈곤’을 발간한 미국의 헨리 조지다. 토지사유제가 모든 불평등과 불의의 근원이니, 개인의 토지 사유를 금지하고 기왕의 사유지에 대해서는 그곳에서 발생하는 모든 이익은 한 푼도 남김없이 정부가 세금으로 거둬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헨리 조지는 주택과 토지를 구별했다. “세금은 과세 대상의 품목을 제거할 목적 또는 줄이기 위한 목적으로 부과하는 것이다. 미국 대부분의 주에서 개가 많아지면 개를 줄이기 위해 개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다면 주택을 없애기를 바라지 않으면서 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인가”라고 말한다. 흔히들 주택은 자동차와 달리 공급이 제한된 특수한 상품이라고 한다. 알고 보면 공급 제한은 자연적 요인보다 인위적 요인이 훨씬 크다. 서울만 봐도 강남의 아파트 공급은 집주인은 하고 싶어 안달인데 정부가 틀어막고 있다. 강남 이외 지역도 마찬가지다. 최근 서울시의회 자료로 2012년 이후 서울시가 뉴타운 등 정비사업구역을 해제하는 바람에 착공하지 못한 아파트가 경기 분당신도시의 2.6배에 해당하는 25만 가구에 달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주택 공급도 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다는 말이다. 헨리 조지 같은 사람도 주택과 토지는 같은 부동산으로 분류되지만 둘은 본질적으로 달라 자연의 산물인 토지와 달리 주택은 노동의 산물로 펜과 다를 게 없다고 했다. 해답은 이미 나와 있다. 필요한 곳에 원하는 주택을 늘리는 것이다. 당장 집값이 오를 것 같아서 못 하겠다고 하는데 이것이 정책과 정치의 차이점이다. 지하철 공사를 하면 차선이 줄어서 상당 기간 불편하지만 완공되고 지하철이 다니게 되면 교통은 더 편리해진다. 강남 아파트 재건축도 마찬가지다. 일시적으로 오를 수는 있지만 다른 조건이 같다고 할 때 공급을 늘렸는데 가격이 지속적으로 오를 수는 없는 일이다. 문제는 시간차다. 그래서 부동산 정책에서 시간이 필요한 정책은 실종되고 코앞의 표만 계산하는 정치만 난무한다. 고가 주택을 가진 게 죄인 1%를 두드려서 99%로부터 박수를 받는다면 정치인에게 이보다 좋을 수 없다. 폭탄 수준으로 종부세도 올렸고, 재산권 침해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큼 대출도 조였고, 가격상한제까지 도입 확대했다. 그래도 집값이 더 오른다면 이제 남은 카드가 무엇일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 특정 지역의 주택은 정부 허락을 받아야 사고팔 수 있는 주택거래허가제도 거론되는 대책 중 하나다. 설마 중국 북한 같은 사회주의 국가도 아닌데 가능할까 싶지만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시장이 주택공유제를 공공연히 주장하는 상황이니 그 어떤 황당무계한 발상도 현실로 닥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을 듯싶다. 도대체 그 자체로 이념이고 계급이고 정치라는 부동산 대책의 끝은 어디일까.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유학이나 장기 출장 등으로 한국에 온 외국인이면 깜짝 놀라는 게 몇 가지 있다. 밤 12시가 넘었는데도 총 칼 맞을 걱정하지 않고 돌아다닐 수 있는 도심의 안전, 그리고 전화나 인터넷 설치를 신청하면 당일 아니면 늦어도 다음 날이면 깔끔하게 끝내주는 초고속 서비스에 혀를 내두른다. 그중의 백미가 음식 배달 문화다. 24시간 족발 치킨 짜장면 햄버거 피자는 기본이고 한식 일식 중식 양식 등 1시간 내 배달이 안 되는 게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 배달 서비스 앱 1위인 ‘배달의민족’ 운영사인 ‘우아한형제들’이 독일계 음식배달 서비스 기업인 딜리버리히어로(DH)에 매각된다. DH는 이미 2위 ‘요기요’와 3위 ‘배달통’을 인수한 터라 한국 음식배달업 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하게 됐다. 음식 가방을 매단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다녀서 후줄근해 보일지 모르지만 4차 산업혁명의 기술이 배달 앱에 총집약돼 있다. 음식점 검색 및 추천에서 음성 주문, 결제까지 인공지능(AI)을 통해 해결하고 있고, 자율주행 배달 로봇을 개발해 시험 중이다. 로봇이 사람도 아니고 차도 아니어서 인도로 달려야 할지, 차도로 달려야 할지 제도가 미처 못 따라오고 있는 실정이다. ▷‘배달의민족’ 지분 87%의 인수 금액은 4조8000억 원으로 국내 인터넷기업의 인수합병(M&A) 금액으로 사상 최대다. 최근 현대산업개발·미래에셋대우 컨소시엄이 아시아나항공 인수 가격으로 제시한 금액 약 2조 원의 2배를 훌쩍 넘는 금액이다. ▷‘배달의민족’은 익살스러운 이름이다. 배달은 고조선의 다른 이름인 배달(倍達)과 물건을 나르는 배달(配達)의 중의적 표현이다. 오토바이 택배에서부터 새벽 음식 배송까지 배달 문화가 워낙 발달해 있으니 ‘配達의 민족’이란 뜻으로 들려도 이상할 것이 없다. 지난해 기준으로 전국에서 배달주문 앱 이용자가 2500만 명, 2010년 시작한 ‘배달의민족’의 누적 주문량은 작년 말 4000만 건을 넘었다. ▷외솔 최현배 선생이 작사한 한글날 노래 1절 첫머리는 ‘강산도 빼어났다 배달의 나라’로 시작한다. 신용하 전 서울대 명예교수 등에 따르면 고조선의 첫 도읍지 ‘아사달’은 ‘밝달 아사달’이라고도 했다. ‘밝달’이 고조선 민족의 상징적 호칭으로 확대되면서 고조선 사람들을 ‘밝달’ 사람이라고 불렀다. ‘밝달’을 한자로 음차 표기한 것이 ‘倍達(배달)’이다. 무일푼으로 음식점 전단 정보를 모아 사업을 시작한 지 10년도 안 돼 수조 원짜리 회사를 만들었으니 이 회사 대표 김봉진 씨와 직원들 역시 진취적인 배달의 자손이라 할 만하다.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길거리에 징글벨 노랫소리가 울리면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듯이 정부 당국자나 정치인들의 입에서 통신비 인하 얘기가 나오면 선거가 머지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최근 최기영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 등 통신 3사 사장과 가진 조찬간담회에서 통신비 인하를 꺼냈다. 월 4만 원대 이하라는 구체적인 가이드라인까지 제시했다. 5세대(5G) 망 구축을 위해 정부도 국회도 적극 지원하겠다는 덕담도 함께 건넸지만 3사 사장은 장관의 통신비 발언에 식사가 제대로 소화나 됐을지 모르겠다. 휴대전화 요금 인하가 선거의 단골 메뉴로 자리 잡은 것은 휴대전화가 나오고부터다. 휴대전화 요금을 낮추겠다는 약속만큼 ‘가성비’ 높은 선거용 정책이 없기 때문이다. 세금을 올리면 납세자들의 반발이 심할 것이고 정부 여당으로서는 선거에서 악재다. 하지만 휴대전화 요금을 정부가 앞장서 낮춰준다면 반대할 국민이 없을 것이다. 반면 불만 대상자는 통신사 3개사밖에 되지 않으니 이보다 더 효율적인 선거용 정책이 있을까 싶다. 한국 못지않게 정부 관료의 입김이 센 일본도 통신비 인하를 선거용으로 활용하기는 마찬가지다. 작년 8월 아베 신조 총리의 오른팔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한 강연에서 “휴대전화 요금을 40% 정도 낮출 여지가 있다”는 발언을 했다. 이에 요미우리신문은 “내년 참의원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요금 인하가 실현될 경우 자민당에 상당한 호재로 작용할 수 있는 기대가 있다”고 분석했다. 아베 총리의 자민당 총재 경선 3선 도전도 한 달이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통신비에 대한 입김은 일본보다 한국이 더 강하다. 일본은 형식적이나마 휴대전화 요금을 자율적으로 정하는 반면에 한국은 선진국들이 가입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유일하게 정부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앞으로 어떤 요금제가 나올지 두고 볼 일이다. 오래전 외국 시사잡지에서 읽은 유머다. 한 후보자가 “다른 마을들에는 아름다운 다리가 많은데 우리 마을에만 없습니다. 제가 당선이 되면 근사한 다리를 놓아 드리겠습니다”라고 목청 높여 연설했다. 그러자 앞줄에 있던 청중 한 명이 “감사한 말씀인데, 우리 마을에는 강이 없는데요”라고 하자 당황하지도 않고 그 후보자는 “그렇다면 좋은 강부터 하나 유치하겠습니다”라고 했다는 우스갯소리다. 우스개가 아닌 현실 상황일 수도 있는데 바로 또 하나의 선거철 단골 메뉴인 지방 공항 건설이다. 없는 이용객을 두고 공항부터 짓겠다는 약속이다. 강원 양양 국제공항은 명색이 관광 중심인 강원지역에 국제공항 하나 없다는 명분으로 건립됐다. 지난해 이용객은 3만7000명. 1999년의 수요예측 연 272만 명의 1.4%다. 하루 이용객이 공항 근무자와 비슷한 날이 많다. 무안공항 역시 1999년 사업계획 수립 당시 이용객이 연간 857만 명에 달할 것이라는 수요예측을 앞세워 건립됐으나 작년 이용객은 6.3% 정도인 54만 명에 그쳤다. 이런 선례에도 아랑곳 않고 내년 예산에서 새만금국제공항의 사업착수비 성격으로 기본계획수립비가 40억 원 책정됐다. 국토 균형발전이라는 명분으로 이미 예비타당성 조사는 면제받았다. 2028년까지 7912억 원의 예산이 투입될 예정이다. 지역의 오랜 민원사업이 해결된 것이다. 양양 무안 등 두 공항은 비록 뻥튀기 수요예측이었지만 그나마 예비타당성 조사를 거친 사업들이었다. 어느 나라나 정치집단과 그 영향을 받는 정부의 정책이 선거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시기적으로 선거에 앞서 발표되는 정책이 모두 선거용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언제나 정도의 문제다. 통신비 인하나 공항 건설은 파급효과가 워낙 막대한 사안이다. 이제는 낡은 레코드판을 그만 틀었으면 한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육군 대령으로 예편한 A 씨와 부인은 부산에서 에어비앤비 호스트사업을 하고 있다. 3년 전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의 빈방을 외국인 숙소로 제공한 것이 시작이었다. 사업이 잘돼 지금은 해운대와 광안리해수욕장 사이에 있는 허름한 아파트 5채를 얻어 리모델링해 숙소를 늘렸다. A 씨 부부는 원래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해 이런 종류의 일을 재미있어 하는 데다 노후에 적지 않은 돈까지 벌고 있어 친구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고 있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A 씨 부부의 숙소는 외국인에게만 빌려 줘야 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그제 정보통신기술(ICT) 규제 샌드박스 심의위원회를 열고 외국인뿐만 아니라 내국인을 상대로 한 숙박 공유 영업을 내년 상반기에 허용해 주기로 했다. ‘한국형 에어비앤비’ 사업의 길이 열린 것이다. 에어비앤비의 한국지사에는 올해 1월 기준 현재 호스트 2만 명, 등록숙소 4만6000개가 회원으로 가입해 있다. 그런데 현행법상 도시지역에서는 외국인 투숙객만 허용되고 내국인 대상은 불법이다. 하지만 이 경계가 사실상 무너진 지 오래다. 작년 국내 에어비앤비 시설 이용자 290만 명 가운데 70% 가까운 200만 명이 내국인이었다. 이용자도 불법인 줄 모르고 이용하고, 사업자도 은근슬쩍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단속도 하는 둥 마는 둥이다. ▷내국인 상대 도심 숙박공유사업의 물꼬를 텄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하지만 반쪽짜리 허가라는 비판이 벌써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장소는 서울 지하철역 반경 1km 내에 있어야 하는 데다 집 전체를 빌려 줘서는 안 되고 본인이 거주하는 집의 빈방에 국한된다. 한 플랫폼 사업자가 관리하는 호스트는 4000명을 넘지 못하도록 했고 호스트당 영업 일수도 연간 최대 180일로 한정했다. ▷외국의 숙박 공유 사업을 보면 에펠탑 근처 아파트에서 태국 시골의 허름한 집까지 다양하다. 빈방이 아니라 집 전체를 빌려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급호텔 수준도 있고 인근 모텔보다 싼 곳도 있다. 관광 진흥이나 새로운 일자리 창출에는 큰 도움이 되겠지만 역시 문제는 기존 사업자와의 충돌이다. 정부는 기존 숙박업계에 대해 세금 혜택을 준다거나, 불법 숙박업소에 대한 단속을 강화한다고 한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도 않고 효과도 크지 않을 것이다. ▷2014년 한국에 진출한 공유차량 서비스 우버는 국내 택시업계의 강력한 반발로 1년을 못 버티고 철수했다. 숙박공유 역시 기존 사업자와의 충돌을 피해 나가기 어려울 것이다. 숙박공유가 제대로 자리 잡을지, 아니면 요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제2의 타다가 될지 지켜볼 일이다.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연장·휴일근무를 포함해 법정근로시간을 주당 최대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줄인 근로시간단축제가 작년 7월 1일 도입돼 1년이 훌쩍 넘었다. 1차로 종업원 30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이 제도가 실시된 직후 만난 국내 최대 로펌의 한 노동법 전문 변호사가 “앞으로 투잡족이 급증하고 통계에 잡히지 않는 산업재해가 상당히 늘 것”이라고 해 놀란 적이 있다. 법정근로시간이 줄면 장시간 근로에 따른 산업재해가 줄어들 것이라던 정부 예측과는 정반대 분석이었다. ▷불길한 예측은 들어맞기 쉬운 모양인지 실제 두 개 이상 일자리를 가진 투잡족이 크게 늘었다. 건강보험 가입자 가운데 중복 직장가입자가 2015년 8월 15만3501명에서 올 8월엔 25만5355명으로 증가한 것이다. 특히 2018년에서 2019년 사이에는 20%나 증가했다. 이 숫자는 그나마 월 60시간 이상 일하는 근로자들이 가입하는 건강보험 대상자 통계다. 대리기사, 편의점 아르바이트처럼 건강보험에 가입되지 않아 공식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투잡족은 이보다 더 빠른 속도로 증가했을 것이다. 통계청의 경제활동 인구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투잡 희망자는 62만9000명이었다. ▷투잡족은 원래 본업 외에 재능을 살리고 약간의 돈도 버는 ‘취미형’으로 여겨졌지만 요즘 급증하는 투잡족은 주로 ‘생계형’이다. 주 52시간제로 줄어든 수입을 벌충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투잡족에 합류하는 것이다. 올 5월 경기도 버스기사들은 시간외수당이 없어지면서 월 100만 원 이상 수입이 줄어들 위기에 처하자 파업을 선언했다. 결국 버스요금을 올려 시민들에게 부담을 지우는 것으로 파업 위기는 넘겼다. 하지만 낮에는 버스를 몰고 밤에는 대리운전 기사로 뛰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다. 출산 양육 등의 이유로 직장을 그만둔 이른바 경력단절여성이 가장의 수입이 줄자 분유비, 학원비라도 벌기 위해 다시 직업전선에 뛰어드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과로도 위험하고, 손에 익지 않은 일을 새로 하게 되면 산재 사고가 늘지 않을까 걱정이다. ▷일본도 최근 3년간 투잡족이 200만 명이나 늘어 작년 말 700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과는 달리 일손 부족이 원인이다. 일본 정부는 표준취업규칙을 바꿔 투잡족을 보호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고 공무원의 복수 직장을 허용하는 지방자치단체도 등장했다. 우리나라도 2개의 직장을 동시에 갖는 게 원칙적으로는 불법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업들은 근로계약서나 사규를 통해 겸업을 원칙적으로 불허하거나 사전에 엄격한 허가를 받도록 하고 있다. 직업 한 개로 생활할 수 있다면 큰 행운으로 여겨야 하는 세상이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의 3대 모토는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다. 그중 소득주도성장이 간판 격이다. 이를 추진할 3가지 수단은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다. 최저임금은 2년 연속 경제성장률의 3배가 넘는 9% 이상씩 올렸다가 내년에는 2.9%로 낮췄다. 정규직화는 공기업에서 출발해 민간기업으로 확산한다는 전략이었는데 당초부터 직접 전환이 아닌 자회사 형식 전환이라는 완충장치를 가지고 갔다. 민간기업으로의 확대는 정부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 이번에 정부가 내년 1월 1일부터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주 52시간 근로시간 단축을 적용하려던 것을 사실상 1년 유예했다. 특별연장근로요건도 재난, 사고 재해에 국한돼 있던 것에서 경영상 사유를 포함시켰다. 소주성 3가지 수단 가운데 남은 근로시간 단축에 대해 속도조절을 한 것이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현장을 파악한 결과 중소기업들이 준비가 안 돼 있었다”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이에 대해 경총과 중소기업중앙회는 불완전한 땜질 처방이라고 아쉬움을 표시했다. 민노총은 최저임금 1만 원에 이어 근로시간 단축도 포기한 문 정권 노동정책에 대해 총파업도 불사하겠다고 한다. 아쉽고 불만스럽겠지만 속도조절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현실적 여건이 안 돼 있는데 공약이라고 밀어붙였다가는 제2의 자영업 대란이 일어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명분과 체면은 정치에서 찾고 민생이 걸린 경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실리와 현실 위주로 갈 수밖에 없다. 마음 같아서야 시속 100km, 200km 달리고 싶어도 도로 사정이 안 좋거나 바깥에 눈비 쏟아지면 속도를 늦추는 게 올바른 이치다. 국내 경기는 이미 하강 사이클이고 세계 경기는 꽁꽁 얼어붙어 언제 풀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저소득층의 소득을 올려 경제적 사회적 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다. 불평등의 대가는 경제적 약자만이 아니라 사회 공동체 전체가 치러야 한다는 걸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시위들이 보여준다. 격차 해소를 위한 정책적 노력은 당연하다. 평등의식이 강한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요컨대 최저임금이나 주 52시간이나 모두 정책의 방향이 문제가 아니라 속도와 방법이 문제였다. 처음부터 신중하게 설계했으면 좋을 뻔했다. 어쨌거나 지금이라도 속도를 늦춘 건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적절한 선택이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도 비슷한 지적을 하고 있다. 최근 월간 신동아 인터뷰에서 최저임금 근로시간 단축 등을 예로 들면서 “저소득층 소득을 올리는 것은 마땅히 할 일인데 그것이 경제성장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잘 모르겠다. 설명이 필요했다”고 한다. 비록 경제전문가는 아니지만 대표적인 석학이 이런 질문을 던지는데 일반인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 않을까. 김 교수는 그러면서 “개념이나 이념을 하나의 가설로 생각하고 현실에 맞춰 시험하며 끝없이 수정해 달라”고 당부한다. 청와대는 임기 절반을 돌았으니 이제 성과를 보여줘야 할 때라고 한다. 성과는 심은 만큼 나온다.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무리하게 추진하면 반드시 탈이 나기 마련이다. 학교 다닐 때 음악 시간에 한 번쯤 들어봤을 용어 가운데 ‘마 논 트로포(Ma Non Troppo)’가 있다.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란 뜻이다. 예를 들어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라면 ‘빠르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란 의미다. 사자성어로 하자면 ‘지나친 것은 모자람과 같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경제 정책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세상 이치가 다 그런지도 모르겠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서울 을지로 공구상가 일대는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힙지로’라고 불린다. 개성 있고 유행에 앞서 간다는 의미의 ‘힙(hip)’과 ‘을지로’를 합친 말이다. 날씨가 추워졌는데도 해가 져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직장인들과 남녀 커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어 골목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호프와 노가리를 주문한다. 연령도 2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하다. 신기한 듯 셀카를 찍어대는 외국인 관광객도 적지 않다. 밤 12시가 가까운 시간까지 가득 메운 골목은 마치 독일의 맥주축제 옥토버 페스트 혹은 대만 야시장을 연상시킬 만큼 서울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가게 앞에까지 테이블을 내놓고 장사를 하는 것은 불법이다. 식품위생법 등 현행법으로는 관광특구, 호텔 혹은 지방자치단체장 등으로부터 허가를 받은 곳에서만 옥외 영업을 할 수 있다. 자기 땅이 아닌 인도에 영업용 테이블을 설치하면 통행을 방해해 민원이 제기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공유재산 무단 점유에 해당될 수 있다. 차도까지 나오면 도로교통법 위반 소지까지 있다. 을지로 일대의 길거리 테이블 영업은 흠을 잡겠다고 따지고 나서면 오늘 당장에라도 그만둬야 할지 모른다. 간혹 유명 레스토랑이나 호프집이 자신 소유의 건물 테라스나 출입구 밖에서 영업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역시 영업장소로 허가를 받아야 한다. ▷서울 남산의 남쪽 경사면인 이태원과 경리단길에 있는 루프톱 카페들은 명소가 된 지 오래다. 비탈에 위치한 건물의 옥상은 탁 트인 경관을 제공한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여름밤에 특히 인기가 좋다. 겨울에는 소형 텐트를 치고 안에 전기난로를 피우는데 오붓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하지만 현행법상 건물 옥상은 식품접객업 영업면적 신고 범위에서 제외돼 허가가 나지 않기 때문에 루프톱 카페 역시 불법 소지가 다분하다. ▷기획재정부가 내년 하반기부터 소음 등 민원 또는 위생상의 문제가 없다면 일단 노천카페나 루프톱 같은 옥외 영업을 원칙적으로 허용하기로 했다. 경제 활력 대책의 일환이라고 한다. 잘 운영되면 헤밍웨이가 사랑했다는 프랑스의 노천카페처럼 그 지역의 명물이 될 수 있다. 푸드트럭도 반대 목소리가 있었지만 각종 축제장의 감초로 자리 잡았다. 청년 일자리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물론 넘어야 할 난관도 하나둘이 아닐 것이다. 이미 루프톱 카페 주변 주민들로부터 밤늦게 켜놓은 야외 조명, 소음 등의 민원이 끊이질 않고 있다고 한다. 소방차 진입 방해 등 안전 문제도 발생하지 않도록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 운용의 묘를 잘 발휘해 지역 명소들을 키워 갔으면 좋겠다.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타다’가 논란이다. 검찰이 차량 호출 서비스 ‘타다’를 불법영업으로 최근 기소했다. 1년 넘게 차가 굴러다니는 동안 주무 부처인 국토교통부는 합법인지 불법인지 말이 없었다. 공개적 유권해석을 내리지 않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천만다행으로 여기는 듯하다. 청와대도 법무부를 통해 보고를 받았다고 하는데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규제혁신 총괄 홍남기 경제부총리도 남의 말 하듯 “당황스럽다”라고 할 게 아니다. 규제개혁을 법원에 맡길 것이 아니라면 이제라도 공식 의견을 내야 한다. ‘타다’ 기소는 규제혁신을 둘러싼 현 정부의 속내와 한계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동시에 규제혁신이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를 보여준다. 앞으로 표 떨어질 규제개혁은 없을 것 같다. 의료업계가 반대하는 원격진료, 숙박업계가 반대하는 공유숙박은 물론이고 본격적인 공유차량 서비스는 꿈도 꾸지 않는 게 정신 건강을 위해 좋을 듯싶다. 외쳐 봐야 쇠귀에 경 읽기이고 기대해 봐야 희망 고문일 뿐이다. 정부는 나열하지 않은 규제는 모두 허용한다는 네거티브 방식을 도입하겠다고 큰소리쳤다. 립서비스였다. 이 말 믿고 새로운 사업 시작했다가는 검찰 법원에 불려 다닐 ‘타다’ 꼴이 나기 십상이다.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려면 경제부총리가 총대를 메야 한다. 경제기획원에서 시작해 재정경제원, 재정경제부와 기획예산처, 기획재정부까지 이름이 4번 바뀌는 동안 모두 출입기자로 취재한 경험이 있다. 가까이서 지켜본 경제 관료들은 재정건전성을 마치 신앙처럼 갖고 있었다.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데 선배들이 의원들과 싸워가며 달래가며 튼튼하게 지킨 나라 곳간이 큰 역할을 했다는 자부심이 강하다. 예산 따내기에 혈안인 의원들도 재정건전성은 인정해 주는 분위기였다. 2015년 9월 9일 당시 문재인 야당 대표는 2016년 예산안을 두고 “재정건전성을 지키는 마지노선으로 여겨 왔던 국민총생산(GDP) 대비 40%가 깨졌다”며 “국가채무를 국민과 다음 정부에 떠넘기는 예산안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올해 5월 16일 재정전략회의에서 문 대통령은 홍 부총리에게 “40% 근거가 뭐냐”고 되물었다. 정치인인 대통령의 뒤집기 발언은 그렇다고 쳐도 경제부총리는 뭔가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확장도 어느 정도다. 경제성장률이 잘해야 2%대인데 재정지출 증가율은 2년 연속 9%가 넘는다. 내용은 더 문제다. 보건·복지·노동 지출은 12%대 증가다. 이에 대해 홍 부총리는 “확대되는 재정을 어디에 써야 하는가?”라고 스스로 묻고 “생산성 향상을 위해 집중 투자해야 한다”고 답한다. 다만 늦은 밤 홀로 개인 페이스북을 통해서다. 왜 이런 말을 대통령 앞에서, 공개 회의석상에서 하지 못하는가. 정책의 실패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선거의 실패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은 정치와 권력의 속성이다. 굵직한 선거를 앞두고 대통령은 물론이고 대통령정책실장, 정치인 출신 장관들에게서 2∼3년 뒤, 혹은 다음 세대에나 효과가 날 정책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번 정부 임기가 반환점을 돌았다. 홍 부총리도 다음 달이면 벌써 취임 1년이다. 경제부총리의 평균 임기가 1년 1개월 정도다. 당장 나가도 크게 아쉬울 게 없는 기간이다. 이제라도 눈치 보지 말고 선배 동료들에게, 무엇보다 국가 경제와 미래 세대에 부끄럽지 않은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야 한다. 시작점은 오랜 경제 관료 경험에서 봤을 때 분명히 아닌 것에 대해서는 ‘No’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칠레 수도 산티아고는 불타고 있다. 대규모 시위와 무력 진압, 폭동과 약탈로 최소 20명이 사망하고 7000명 이상이 연행됐다. 원래 산티아고는 남미 주요 도시 가운데 밤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도시다. 이는 역설적으로 1973년 이후 17년간의 피노체트 군사정권 덕분이었다. 무고한 시민들도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학살되는 판에 총질을 해대는 범죄 집단들이 설 곳이 없었던 것이다. 인구 1800만 명, 1인당 국민소득이 우리나라의 절반 수준인 1만5000달러인 칠레. 한국이 최초로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국가로 와인과 홍어로 친숙하다. ▷피노체트 이후 최대의 혼란을 야기한 것은 고작 혼잡시간대 지하철 요금 30페소(약 50원) 인상이었다. 처음엔 고교생들이 주도한 지하철 무임승차 형식의 저항 운동이었으나 산티아고 인구 500만 명 가운데 20%인 100만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시위로 번졌다. 시위가 벌어지자 후안 안드레스 폰타이네 경제장관은 “혼잡시간대 할증 요금을 내기 싫으면 더 일찍 일어나 출근하면 된다”고 해 시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빵을 달라는 군중을 향해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고 했다는 망언을 연상케 한다. 실제로는 왕비를 미워한 군중이 퍼뜨린 소문이라는 게 정설이지만 어쨌든 칠레 경제장관의 발언도 두고두고 회자될 게 틀림없다.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은 해당 경제장관, 그리고 시위대를 ‘범죄자’라고 지칭한 자신의 사촌인 내무장관을 포함해 핵심 장관 8명을 경질하고 지하철 요금 인상도 철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됐다. 이번 혼란으로 이달 16, 17일 산티아고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세계 21개국 정상들이 모일 예정이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무산됐다. 이번 APEC은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이 별도로 만나 1차 무역합의 서명을 하려고 한다는 뉴스로 특히 주목을 받았었다. 이제 서명 장소로 산티아고 아닌 제3의 장소가 거론되고 있다. ▷지하철 요금 인상과 망언만으로는 100만 군중의 분노를 설명하지 못한다. 밑바닥에 흐르는 근본 원인이 따로 있다. 칠레는 주변국들에 비해서는 정치·경제적으로 안정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인구 1%가 부의 33%를 차지하는 등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소득 불평등이 가장 심한 국가로 꼽히고 있다. 이번 시위에서 특히 청년층의 불만이 극도로 표출됐는데 청년(만 15∼24세) 실업률 19.2%가 그 이유를 말해준다.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