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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브히지트 바네르지, 에스테르 뒤플로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 부부가 공동으로 쓴 ‘Poor Economics’(‘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라는 제목으로 2012년 국내 출간)에는 지구상 ‘빈곤의 덫’을 해결하기 위한 많은 현장 체험과 노력들이 소개돼 있다. 예방접종 사업도 그중 하나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매년 전 세계에서 무려 200만∼300만 명이 예방 접종만으로도 피할 수 있는 간단한 질병 때문에 사망하고 있다고 한다. 인도의 우다이푸르 지역에서는 공중보건소에서 무료로 예방주사를 놓아주는데도 접종률이 5% 미만이었다. 문제는 접종비용이 아니라 간호사들의 높은 결근율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먼 길을 걸어 보건소까지 왔는데 번번이 문이 닫혀 있으니 그다음부터는 사람들이 오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한 비정부기구(NGO)가 매달 같은 날짜, 같은 시간에 접종을 실시했더니 접종률이 17%까지 올랐다. 주사 맞는 사람에게 빵 한 조각을 더 주니 38%까지 올랐다. 저자들은 “문제는 쉽게 풀 수 있는 일도 정부가 개입하면 이상하게 꼬이는 데 있다”고 말한다. 빈곤 퇴치도 돈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데 다른 문제들은 오죽하겠는가. 최근 정부가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소재·부품·장비 산업 경쟁력 강화 육성도 마찬가지다. 일본이 7월 4일 반도체, 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3개의 한국 수출 규제를 밝힌 지 한 달 만인 8월 5일 산업통상자원부를 비롯한 12개 부처가 공동으로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대책’을 내놓았다. 6년간 총액 7조5000억 원을 투입하겠다고 했다. 이를 통해 100대 품목은 5년 내, 20대 품목은 1년 내 공급안전망을 확보하겠다는 구상이다. 어느 때보다 정부 의지가 결연하고, 돈벼락이 쏟아지는 만큼 관련 중소기업, 연구기관들에는 아연 활기가 도는 모양이다. 이달 11∼18일 전국 각지에서 6차례 열린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를 선도할 ‘강소기업 100’ 사업설명회에는 1600여 개 중소기업이 몰렸다. 서울 수도권만 추가로 설명회를 개최해야 할 만큼 성황이다. 속전속결식 대책과 예산폭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25개 정부 출연연구소 연구자 2600명이 내부 논의를 거쳐 8월 말 일본발 ‘소재·부품·장비 대란’과 관련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냈는데 귀담아들을 만하다. 연구자들은 지난 20년간 수십조 원의 예산을 들였는데 왜 성과가 충분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반성부터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계해야 할 5가지를 들었는데 ‘예산증액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를 첫 번째로 꼽았다. 특별예산으로 1조 원이 넘는 돈이 추가 투입된다는 말을 들은 한 원로 정책전문가가 “이대로라면 국민 세금 1조 원이 하늘의 먼지처럼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걱정했다고 한다. 성과가 없었던 대책을 반복하면 결과는 뻔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돈을 본격적으로 풀기 전에 프로젝트 추진체계부터 확 바꾸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한일관계가 회복돼 글로벌 공급망이 다시 원활히 돌아갈 경우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중국의 글로벌 기업들과 치열한 가격경쟁을 벌이고 있는 삼성, SK, LG 등 국내 대기업에 안정된 공급망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외에서 얼마든지 가격 대비 품질 좋은 소재·부품·장비를 조달할 수 있는데 국내 중소기업 제품이라고 구매를 강요할 수 없는 노릇이다. 자칫 유사시 동원될 예비군 역할에 그칠지도 모를 사업에 어디까지 세금으로 지원할 것인가 심각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좋은 뜻으로 벌이는 사업일수록 국민 세금이 먼지처럼 흩어지는 돈이 되어선 안 된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삼성전자가 지난달 중국 광둥성 후이저우에 있던 마지막 스마트폰 공장을 철수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미중 무역전쟁에 따른 생산기지의 위험을 분산하는 전략으로 분석하면서 “경쟁사인 애플이 하지 못했던 것을 삼성이 달성했다”고 평가했다. 애플은 삼성과 달리 자체 공장 없이 개별 부품을 아웃소싱을 통해 조달한다. 이미 저숙련 근로자에 대한 교육 투자가 너무 많아 애플은 철수를 하고 싶어도 못 한다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삼성전자 공장 철수에 대한 중국 측 반응이다. 리커창 중국 총리가 다른 반도체 공장이긴 하지만 철수가 확정된 상태인 외국 기업을 깜짝 방문한 것만으로도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관영매체 환추시보는 한술 더 떠 삼성이 품위 있게 떠났다며 중국 기업도 외국 기업의 행동에서 배워야 한다는 논평을 내놓았다. 단순히 삼성이 문 닫는 공장 직원들에게 퇴직금은 물론 시계 선물을 주고 다른 일자리를 찾아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만은 아닐 것이다. 리 총리의 방문이나 환추시보 평가는 중국에 진출한 해외 기업을 결코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떠나는 기업에 대한 칭찬이니 효과는 더 커질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이 떠나는 글로벌 기업을 비난만 할 수 없는 것이 삼성전자의 후이저우 근로자의 임금을 보면 알 수 있다. 진출 당시인 2008년 1894위안(약 32만 원)에서 2018년 5690위안(약 97만 원)으로 10년 만에 3배로 올랐다. 2018년 광저우 근로자의 평균임금은 8218위안(약 136만 원)이다. 베트남은 중국 인건비의 절반 정도이고 인도는 더 낮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 미중 무역전쟁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폭탄 부과 선언 1년 만에 중국을 떠났거나 떠날 것을 검토하는 글로벌 기업이 50여 개에 달했다. ▷중국에서 한국 기업이 가장 많이 진출했던 곳은 산둥성 최대 도시 칭다오다. 중소기업 위주로 2000년대 중반 1만 개 가까이나 있었다. 그런데 2008년 글로벌 외환위기 직후 ‘야반도주’ 바람이 불었다. 주원인은 급격한 임금 상승이다. 하룻밤 사이에 100개 이상의 기업이 사라졌다 하니 얼마나 심각한 수준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웬만큼 떠날 중소기업들은 다 떠나 불미스러운 일이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탈중국은 이제 글로벌 대기업들로 번지고 있다. 기업들은 생산기지를 끊임없이 옮겨 다닐 수밖에 없고, 버림받은 지역 입장에서도 떠나는 기업을 원망만 할 수 없는 냉혹한 글로벌 경쟁시대다. 중국을 떠나도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기업이 없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요즘 청년들 일자리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군인이 귀한 휴가시간을 쪼개 전역 후 일자리 박람회 자리에 왔을 정도다. “군 생활에 큰 어려움은 없는데 제대하면 뭘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최대 고민”이라는 병장의 말이 요즘 취업난을 실감나게 한다. 군에서도 장병들 취업 문제를 걱정해주기 때문에 취업박람회에 가겠다고 하면 충분한 외출 사유가 된다고 한다. ▷‘리스타트 잡페어 2019’가 16, 17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한때는 촛불로 덮였고 며칠 전까지 조국 사퇴 집회가 열렸던 바로 그 광장이 일자리를 찾고 정보를 제공하는 부스들로 정치의 광장에서 민생의 광장으로 변했다. 잡페어 부스를 찾은 박모 병장은 12월 전역 후 복학하는데 전공을 살려 게임회사 취업을 희망하고 있다. 군대 동기인 최모 병장은 요새 뜨는 사물인터넷 회사에 가고 싶지만 쿠팡맨도 좋다고 했다. ▷청년취업도 큰일이지만 여성취업은 국가의 노동력 확보 차원에서도 큰 과제다. 작년 기준으로 결혼 임신·출산 육아 등의 이유로 직장을 그만둔 ‘경력단절여성’이 184만 명이나 된다. ‘어쩔 수 없이 자발적으로’ 회사를 그만둔 여성이 대부분이다. 재취업을 원하지만 ‘원하는 임금이나 조건에 맞는 일거리가 없을 것 같아서’ 구직을 단념하고 있다. ▷시간을 가리지 않고 일자리를 찾는 ‘인생 다모작’ 신중년층도 많다. 전문성을 살려 짧은 시간 일하고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자 하는 청년층도 점차 늘고 있는 추세다. 이런 수요에 맞춰 정규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1, 2시간짜리 단기 알바가 아닌 중간 성격의 근로 형태가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다. 기업도 당사자도 원하지만 정규직 보호 위주의 경직된 고용시장 탓에 제대로 자리 잡고 있지 못할 뿐이다. ▷네덜란드에는 ‘고용시간에 따른 차별금지법’이 있다. 일주일에 15∼30시간 근무하는 시간선택제 근로자와 전일제 근로자에 대해 근로조건을 차별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시간당 임금, 휴가기간 보장 등에서 동일한 권리와 대우를 보장한다. 네덜란드 근로자 3명 중 1명이 시간선택제 근무를 하고 있다. 특히 여성 근로자는 4명 중 3명 정도가 자발적 시간제 근로자다. ▷우리나라는 정규직-비정규직, 대기업-중소기업, 남성-여성의 임금 수준 및 근로조건 격차가 가장 심한 나라 가운데 하나다. 경직된 고용시장을 개혁해서 차별 없는 다양한 근로형태가 생겨나야 한다. 그래서 일자리를 찾는 잡페어가 아니라 사람을 구하는 잡페어가 더 많아지기를 기대해본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엊그제 국무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세계 경기 하강이 우리 경제에 어려움을 주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경제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낙관론을 되풀이하지는 않았다. 다행이다. 산업현장 분위기와는 동떨어져 빈약한 자료를 근거로 자신감을 피력할 때가 아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지금은 경제위기가 아니다. 위기에 대해 딱 부러진 정의는 없다. 오랜 기간 지속된 침체 혹은 예측하지 못한 외부 충격으로 경제주체들이 심리적 공황을 겪어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이고 경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을 위기라고 할 수 있겠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신청 당시 겪었던 바다. 지금이 디플레이션 상황도 아니다. 디플레이션은 비교적 정립된 개념이다. 앞으로 자산 가격이나 물건 값이 계속 더 떨어질 것이란 예측이 만연해야 한다. 물건을 안 사니 생산이 줄고 가격을 더 낮추는 악순환이 벌어져 백약이 무효인 상태다. 잠깐 물가상승률이 마이너스로 떨어진 상태가 아니다. 지금이 경제위기라거나 디플레이션이라고 단정하는 경제전문가는 없다. 경기가 최고 꼭대기를 찍은 것을 24개월이나 지난 뒤에 결론을 내리는 게 학자들의 습성이다. 그렇지만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지적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대통령은 우리 경제가 어려운 것이 세계 경기가 하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반쪽만 말한 것이다. 한국 경제는 3저 호황처럼 운 좋게 세계 경기의 훈풍을 탄 적이 있지만 대개는 세계 경제의 거센 풍랑을 거쳐 왔다. 관건은 늘 외부 상황이 아니라 내부의 대처 능력이다. 정부 경쟁력의 한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재정 상태가 빠른 속도로 취약해지고 있다. 가장 최근 통계인 올 들어 8월까지의 상황을 보자. 국세는 작년 같은 기간보다 3조7000억 원, 소득세는 1조1000억 원, 부가세는 4000억 원씩 줄었다. 세금 수입이 이처럼 줄고 있는데 지출은 38조8000억 원이나 늘었다. 국가 부채가 사상 최대인 697조9000억 원으로 700조 원 돌파는 시간문제다. 복지는 처음 받기 시작할 때는 혜택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권리가 된다. 한 번 주면 다시 빼앗기 어렵다. 그래서 시작을 신중히 해야 한다. 성장동력은 멈춰 가는데 이 속도를 계속 유지할 수는 없다. 속도 조절이 필요한데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고 한다. 선거로 가는 길 역시 늘 선의로 포장돼 있다. 대중적 감수성에 호소해 득표에 도움 되는 정책들만 난무한다. 그게 바로 그리스, 아르헨티나식 위기로 가는 지름길이다. 경제가 어려운 상황임을 인정한다면 당장 인기는 없지만 경제 체력을 튼튼히 하는 작업도 병행해야 한다. 공무원은 늘릴 게 아니라 줄여야 한다. 신의 직장 공기업을 개혁해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세계 141개국 가운데 130위인 노사문화를 더 이상 이대로 둘 순 없다. 과감한 규제 혁파로 경제 최전선에 나가 있는 기업들 기를 살릴 정책도 내놔야 한다. 실제 나오는 정책은 하나같이 역주행이다. 콩 심어 놓고 팥 나기를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경제부처를 출입했던 기자로서 가슴 한편에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가 있다. 경제 펀더멘털이 좋다는 정부의 발표를 곧이곧대로 들어 경제 대재앙에 대해 경고음을 제대로 울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이다. 지금이 사전적 의미로 경제위기가 아니고 디플레이션 상태가 아닌 줄 모르는 바 아니다. 경제는 심리이기 때문에 어렵다고 하면 더 어려워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러다가 위기로 갈지 모른다는 절박함 혹은 최소한의 위기의식마저 없어 보이는 정부나 정치권의 행태에 대해서는 줄기차게 경종을 울리지 않을 수없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명절인데 떡값이라도 하시라고…” “회식에 쓰시라고…” 등이 뇌물을 전달할 때 사용하는 고전적 표현이다. 적은 금액이지만 성의로 생각해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봉투를 열어보면 떡 몇 트럭을 사도 모자라지 않을 금액이 들어 있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뇌물 봉투의 대명사는 ‘촌지(寸志)’다. 마음에 담은 자그마한 뜻 정도인 일본식 표현이다. 일본에서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작은 금액을 줄 때 촌지라고 적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줄 때는 ‘御례(오레이)’ 또는 ‘松の葉(마쓰노하)’라고 적는다. 예의 차린다거나 솔잎밖에 안 된다는 뜻이다. 우리 귀에 익은 ‘와이로(賄賂)’는 주로 공무원이나 정치인에게 갖다주는 뇌물이다. 중국에서 붉은 봉투란 뜻의 ‘훙바오(紅包)’는 세뱃돈이나 축의금을 의미하는데 촌지 같은 의미도 있다. 거액의 돈이나 상품권을 ‘월병(月餠)’ 상자에 채워 전달했다가 적발되는 사건이 가끔 보도되는데 우리의 사과 상자가 떠오른다. ▷촌지와 비슷한 의미로 미약한 정성이란 뜻의 ‘미성(微誠)’이란 표현도 쓰였다. 촌지나 미성은 그다지 많지 않은 금액이 대부분이었다. 과거 학부모가 학교 선생님을 찾아갈 때 작은 잡지에 끼워 전달하는 경우가 많아 학교 앞 서점에서는 작은 판형 잡지가 많이 팔린다는 말도 있었다.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돈 봉투가 거의 사라진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닌 것 같다. 국토교통부 서울지방국토관리청 간부가 작년에 하도급 업체 등으로부터 총 1100만 원의 뇌물을 받고 하도급 업체 선정 입찰을 방해한 혐의로 구속 수감 중이란 사실이 국감 자료에서 드러났다. 관련 건설업자의 휴대전화에서 “올 때 국장 용돈 좀 준비해 오라”는 문자메시지가 발견됐다고 한다. 마지못해 받은 것이 아니라 대놓고 돈을 가져오라고 한 것이다. 이 외에도 국토부 전·현직 직원 20여 명이 건설업자 뇌물·향응 비리 사건에 연루돼 무더기로 처벌되거나 자체 징계를 받았다. ▷예나 지금이나 칼이 손에 있으면 휘두르고 싶은 게 인간의 기본 심성이다. 공무원의 권력은 규제에서 나온다. 규제를 바탕으로 고무줄 같은 재량권을 휘두르는 것이다. 청렴의무 교육을 강화하고, 처벌 수위를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예 규제 자체를 대폭 없애 부패의 우물을 메워버리는 것이 청렴 사회로 이끄는 구조적인 해결책이자 지름길이다. 여기에 민간의 창의성까지 높일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문제는 칼을 가진 자는 좀처럼 스스로 칼을 내려놓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거의 넉 달째 계속되던 홍콩의 격렬한 반중 시위가 캐리 람 행정장관이 범죄인 송환 법안이 ‘죽었다’고 발표하면서 한풀 가라앉았다. 시위의 표면적인 이유는 송환법안이 홍콩의 자유를 훼손하고 민주투사를 대상으로 악용될 것이라는 우려였다. 그런데 23일 홍콩의 유력지인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가 이에 대한 색다른 분석을 내놓았다. 이번 시위의 근본 원인이 살인적인 집값과 이에 따른 양극화 때문이라는 것이다. 홍콩의 소득 중간층 직장인이 아파트 한 채를 사려면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21년을 모아야 한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천정부지로 높아진 집값으로 민심이 불만에 가득 차 있었는데 여기에 범죄인 송환법이 불을 댕겼다는 분석이다. 지금 우리에게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대통령 국정수행에 대한 부정적 의견이 20대 청년층에서 높은 이유는 ‘정의’ ‘공정’ 같은 보편적 가치 훼손에 대한 분노라고 보여진다. 하지만 동시에 그 밑바닥에는 자신의 취업 문제와 경제 사정에 대한 암울한 전망이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취업난은 자신의 문제이거니와 주변에서 직접 듣고 보기 때문에 불만을 느낄 여지라도 있다. 반면 국민연금은 청년 세대에게는 소리 없는 적이다. 슬그머니 그러나 확실히 다가오고 있는 부담이다. 현행 국민연금의 구조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지금은 매달 소득의 9%를 내면 65세에 자신이 평생 받은 급여의 40%를 받는 구조로 설계돼 있다. 올해 초 국민연금공단 산하 국민연금연구원은 국민연금에 20년 가입하면 20년간 납부액의 최소 1.4배에서 최대 3배까지 받아갈 수 있다고 밝혔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이만큼 훌륭한 노후대책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누군가의 혜택은 누군가의 비용이다. 연금 문제는 시간의 문제다. 지금 세대의 혜택은 나중 세대의 부담으로 고스란히 돌아간다. 단순하고 확실한 산수 차원의 계산이다. 국민연금공단의 재정추계에 따르면 지금 구조를 유지하면 2041년 국민연금 재정이 적자로 돌아서고 2057년에 완전히 고갈된다. 알기 쉽게 1995년생인 지금 24세 청년이 65세가 되는 2060년에는 국민연금 기금이 완전히 바닥나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더 이상 줄 기금이 없으니 그때 내고 그때 받아가는 부과식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다. 자기가 낸 만큼 받아가려면, 즉 보험료 대비 수혜액 비율을 1로 유지하려면 자기 소득의 3분의 1인 33%를 연금 보험료로 내야 한다. 아니면 얼마 전 그리스처럼 수령액을 왕창 깎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려면 지금 9%인 보험료 납부율을 최소 2배 이상 올려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지금 세대에게 유리하게 설계돼 있는 연금개혁은 늦추면 늦출수록 후세대에게 불리해진다. 그렇지 않아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저출산·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다. 연금 문제는 ‘세대 간의 전쟁’이라고 불린다. 당장 국민적 합의 도출을 위해 장기플랜을 가동해도 결코 빠르지 않다. 그런데 지금 정부와 정치권은 연금개혁 문제를 다룰 겨를도 의지도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피해 당사자인 청년 세대는 당장에라도 당신들 문제는 당신들이 해결하라고 윗세대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자식 세대로부터 386세대는 취업난 걱정 별로 안 하고, 현직에 있을 때부터 누릴 것 다 누리고, 연금폭탄을 뒤로 넘겨가면서, 늙어서까지 혜택을 받아가는 정말 몰염치한 세대였다는 말만큼은 듣고 싶지 않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작년 4월 정부가 한창 소득주도성장의 기치를 올릴 때다. 김광두 대통령직속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이 각종 경제지표를 바탕으로 “경기 침체의 초입에 들어섰다고 보여진다”고 말하면서 정책효과와 경기 논쟁에 불이 붙었다. 청와대와 여당에서는 “J노믹스 설계자라는 사람이 저럴 수 있냐”며 부글부글 끓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도 “한 달 치 통계만 갖고 보기는 어렵다. 광공업생산 빼고 다른 쪽은 나쁜 흐름을 보이고 있지 않다”고 반박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사후적 통계가 아니라 피부로 먼저 느끼던 기업인들은 무슨 뒷북치는 소리냐고 했다. 그해 말 김광두 부의장은 사표를 내고 물러났다. 돌이켜보면 김 부의장이 맞았다. 지금은 누구도 우리 경제가 당시부터 쭉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는 데 이견을 달지 않는다. 달라진 것은 “인구구조 탓이다” “기다리면 효과가 날 것이다”고 했다가 지금은 미중 무역 갈등이나 일본의 경제 보복 같은 외부환경에 화살을 돌리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이전 팀과 달리 억지 주장을 하지는 않는다. 경제가 좋지 않은 것은 맞다. 앞으로도 크게 나아질 전망도 별로 없다. 그러니까 나랏빚을 내서라도 살려야겠다, 국회가 도와달라는 전략이다. 최근 한국 경제에 과거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디플레이션이란 말이 오르내리고 있다. 비록 한 달 치 통계이기는 하지만 8월 소비자물가가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로 나왔기 때문이다. 이 디플레이션에 대한 판단과 전망이 엇갈린다.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은 수요 둔화로 물가 수준이 장기간에 걸쳐 하락하는 디플레이션 상황은 아니라고 했다. 농수축산물과 석유 가격 하락 등 공급 측면에서의 일시적 요인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책임 있는 당국자의 발언은 자기 예언적 실현을 넘어 시장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래도 뒤가 찜찜한 것은 역시 외환위기 이후 이어져 온 정책 책임자들의 발언에 대한 학습효과 때문일 것이다. 반면 경기 침체에 따른 수요 부진도 적지 않게 작용했기 때문에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같은 장기불황으로 가는 입구에 들어섰다는 경고의 목소리도 있다. 그렇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괜한 소리로만 들리지 않는 것은 최근 나오는 경제지표가 잿빛 일색으로 깔려 있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의 기본 체력이라고 할 수 있는 잠재성장률이 떨어지고 있다. 올해 성장률이 잘해야 2%대 초반이고 1%대에 그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수출이 지난해 12월 이후 9개월 연속 마이너스다. 무역흑자는 3분의 1 토막이 났다. 엊그제 신용평가기관 무디스는 한국의 주력 기업들에 대한 신용등급이 무더기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올 것이 오나 싶다. 불행은 홀로 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미국 중국을 포함해 세계 경제가 동반 침체할 것이라는 ‘R(Recession·침체)의 공포’가 퍼져 있다. 우리나라에는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따라 갈지 모른다는 ‘D(Deflation·저물가 장기불황)의 공포’가 어른거리고 있다. 정치가 경제에 부담을 주는 ‘P(Politics·정치)의 공포’까지 겹쳤다. 1933년 대공황의 한가운데 취임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우리가 단 한 가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바로 두려움 그 자체다”라고 했다. 실제 이상으로 위기를 조장하고, 공포감을 키우는 것은 경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은 무엇보다 정부와 기업, 국민 간의 신뢰가 중요한 때다. 그러려면 정부가 지금보다 더 솔직해져야 한다.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과 성과를 보여야 한다. 그러면 공포는 어느새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삼성전자 LG전자 쌍두마차가 이끄는 한국의 가전제품은 일본을 넘어 세계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 지 오래다. 하지만 일본의 기술력은 여전히 최상급이고 중국은 물량 공세로 바짝 추격하고 있다. 이런 치열한 ‘가전 삼국지’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자리가 6∼11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리고 있는 ‘IFA 2019’이다. ▷세계 3대 전자제품 박람회로 CES(소비자전자제품전시회), IFA(국제가전박람회), MWC(모바일월드콩그레스)가 꼽힌다. CES는 매년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다. 그해 판매될 가전제품을 미리 보여준다. IFA는 매년 9월 베를린에서 개최된다. 1월에 예고했던 제품들이 실제 출시된다. 대형 바이어들과 거래가 오고 가는 곳이다. 2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리는 MWC는 휴대전화 통신기술 위주의 전시회다. ▷IFA 2019에서 삼성전자는 최대 규모인 1만72m²(약 3050평)의 전시공간을 마련했다. 가전의 꽃 TV에서 화면 가로에 약 8000화소가 박혀 있는 8K 시리즈를 내놓았다. 어떤 화질의 영상이 입력되든지 8K 수준으로 변환하는 인공지능 화질 엔진을 탑재한 제품이 눈길을 끌었다. LG전자는 두루마리 휴지처럼 둘둘 말았다가 풀 수 있는 세계 최초의 초대형 롤러블 TV를 선보였다. 마치 폭포수가 굽어진 TV를 따라 흘러내리는 듯한 화면은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일본은 글로벌 TV 시장에서 1, 2위 자리를 삼성 LG에 내준 지 오래다. 하지만 기술력은 살아있다. 2017년 세계 최초로 8K TV를 상용화한 곳이 샤프다. 이번에 5세대(5G) 통신 모뎀을 결합한 120인치 8K 액정 TV를 내놓았다. 삼성 LG와 8K 시장에서 주도권 경쟁에 나설 태세다. 중국은 인해전술이다. IFA 2019 전체 참가 기업 1856개의 약 절반인 882개가 중국 기업이다. 싸구려 이미지를 벗어난 수준이지만 한일 제품에 비해 가격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삼성 LG로서는 많은 비용을 들여 전시회에 참가하고 장식했는데, 괜히 중국의 홍보마당만 만들어 준다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고 한다. ▷TV 분야의 새로운 추세가 8K라면 스마트폰에서는 5G폰이다. 본격적인 5G 스마트폰을 내놓은 곳은 한국의 삼성과 LG뿐이다. 일본은 도쿄 올림픽이 열리는 내년을 5G 서비스를 본격화할 시점으로 잡고 있다. 중국은 5G 스마트폰을 내놓기는 했지만 품질 디자인 모두 많이 어설픈 단계다. 조만간 바짝 따라올 것이다. 잠깐 방심하면 금방 따라잡히는 것이 전자제품 글로벌 삼국대전이다.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지난 주말 동네 일본 라멘 가게의 입간판 표지가 바뀌어 있었다. 매직펜으로 서툴게 ‘한국’이라고 쓰고 태극기 문양까지 그려 넣은 A4용지로 ‘일본 라멘’의 일본 글자를 가려 ‘한국 라멘’으로 만들었다. 가게 안에서 파는 메뉴는 똑같은데 하루아침에 라멘의 국적이 바뀐 것이다. 그래도 저녁 시간에 손님이 없어 젊은 종업원들이 빈 식탁만 닦고 있었다. 일본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거세다. 불량 부정제품에 대한 소비자 불매운동과는 다른 차원이다. 이달 중순에 실시한 한 여론조사에서 일본제품 불매운동에 참여하고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79.2%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한국인 관광객이 많은 도쿄 오사카 오키나와 후쿠오카 등 4개 지역의 7월 카드 매출액이 6월에 비해 20% 정도 감소했다. 단체관광 예약 취소가 줄을 잇는 것으로 봐서 8월 매출은 이보다 더 많이 줄 것이다. 수입맥주 가운데 부동의 1위였던 아사히가 칭타오, 하이네켄 등에 밀려났다. 일본에서 한국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은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신문 방송에서 한국 상품과 여행에 대한 불매운동 보도도 거의 없다. 한일 갈등이 불거진 뒤 열린 방탄소년단의 일본 오사카 시즈오카 순회공연은 공연마다 수만 명의 일본 팬이 몰려 난리가 났고, 음반 판매도 1위를 달렸다. 하지만 앞으로 사태 추이에 따라 어떻게 될지 모른다. 과거 일왕 사죄 요구 등 몇 차례 갈등이 불거졌을 때 단체관광이 일제히 취소됐고 한류 바람이 급속히 식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파기, 화이트리스트 배제 적용 등으로 한일 갈등이 심화되고 불매운동은 장기화 조짐을 보인다. 불매운동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그 결과는 어떨까.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최근 한일 무역분쟁이 일본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겠지만 한국에 비해선 작은 정도라고 분석했다. 사태가 장기화되면 무역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제조업 타격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고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낮췄다. 불매운동의 상징처럼 된 유니클로의 매출이 이전에 비해 절반 이하로 줄었다고 한다. 해외시장에서 제조해 여기에 납품하는 한국의 의류공장들은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매장 점원들은 실직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최근 고용노동부는 다음 달 코엑스에서 열 예정이던 해외취업박람회를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불매운동이 일고 있는 와중에 일본 기업이 대거 참여하는 행사를 진행하기가 부담스럽다는 이유다. 일본 취업의 꿈에 부풀어 있던 청년들이 유탄을 맞은 셈이다. 가슴이 뜨거운 것은 좋으나 머리까지 뜨거워지면 안 된다. 머리를 더 뜨겁게 부채질하는 정치적 선동에 넘어가면 안 된다. 이들은 사태가 악화돼도 직접적으로 피해 볼 게 없는 사람들이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 관광객이 많이 찾는 명동 한복판에 ‘노 저팬’ 현수막을 내건 구청장과 그 현수막을 끌어내린 지역 상인들이 그 사실을 웅변한다. 한국은 이미 경제 규모 세계 11위, 1인당 소득 3만 달러로 선진국 문턱에 와 있다. 해외 원조 받던 세계 최빈국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는 미국은 물론 일본과의 기술 협력, 상품 교역이 큰 역할을 했다. 그 과정에서 미일에도 큰 이득이 된 것은 물론이다. 지금은 일제하 물산장려운동, 인도의 스와데시(영국 상품 불매운동)를 벌이던 식민지 시대가 더 이상 아니다. 오히려 상대국에서 한국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벌어지면 ‘유치하고 시대착오적인 운동을 그만두라’고 촉구해야 할 때다. 정치인들이 아무리 사태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어도 민간 차원에서는 거기에 휘말리지 말고 여행이든 상품이든 문화공연이든 더 활발히 교류하고 협력하자는 제안은 어떨까 싶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강남이란 개념도 희박하던 1971년 9월 ‘남서울 아파트’라는 이름으로 대단지 아파트 분양광고가 나갔다. 지금의 반포주공 1단지다. 강남 아파트 시대의 문을 열었다는 의미에서 한국 주택사에서도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지금은 40년이 훌쩍 넘은 구식 설계와 시공으로 엘리베이터도 없고 집 안은 낡고 불편하다. 하지만 오래 거주한 주민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분양 당시 서울대 교수, KDI(한국개발연구원) 박사, 고위 공무원들이 사택으로 많이 배정받았다. 이후에도 동(棟) 간 거리가 넓고 큰 수목이 많은 차분한 주거여건으로 법조인, 의사, 기업 임원이 많이 들어왔다. 명문이라 불리는 학교들이 많아 자녀 교육 때문에 이사 온 30, 40대의 비중이 높아졌지만 여전히 초기에 입주한 70대 이상 고령층이 많다. 인근 아파트 단지에서 재건축 바람이 불 때도 “생활 기반이 다 여기 있고, 오래 정든 이웃들과 헤어지기도 싫고, 이사 다니기도 귀찮다”면서 재건축 추진에 동의하지 않는 주민이 많아 번번이 재건축이 무산됐다. ▷총사업비 10조 원으로 역대 최대의 재건축사업이라던 반포주공 1단지 재건축이 최근 수년간 급가속 페달을 밟아 결실을 보나 했더니 지난주 서울행정법원의 관리처분계획 취소 판결로 인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됐다. 같은 평형 조합원 내에서 누구는 많이 배정받고 누구는 적게 배정받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취지였다. 재건축은 정해진 층고, 용적률 범위 내에서 조합원들이 서로 나눠 가져야 한다. 한쪽이 많이 가져가면 다른 쪽의 몫이 줄어든다. 조합원 간 이해 대립이 격렬할 수밖에 없다. 작은 평형, 큰 평형 이해관계가 달라 평형대별로 모임이 따로 있다. 대형 평형 조합원은 제시된 감정평가액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책정됐다며 소송을 제기해놓고 있다. 한강 조망권이 있는 조합원과 그렇지 않은 조합원의 주장이 또 서로 다르다. ▷이번 판결에 대해 조합 측은 항소할 뜻을 밝히고 있는데 이 재판이 만약 대법원까지 가면 언제 결론이 날지 알 수 없다. 자칫하면 어렵사리 피한 재건축 초과이익환수제 폭탄을 다시 맞을 수도 있다. 얼마 전 분양가상한제까지 발표됐다. 추가 분담금을 많게는 가구당 10억 원 가까이 부담해야 한다면 차라리 재건축을 포기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추진 과정에서 발생한 이주비 지급 문제도 있고 시공사에 대한 마찰도 끊이지 않고 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게 재건축사업이라지만, 강남 최초의 아파트 반포주공 1단지는 재건축사업에서도 ‘새로운 역사’를 쓸 모양이다.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요즘 지방에 가보면 조그만 읍내 사거리에도 어김없이 반일(反日) 현수막이 붙어 있다. ‘안 사요, 안 가요, 안 먹어요’는 기본이다. ‘경제도발 다시는 지지 않습니다’ ‘경제침략 우리가 이깁니다’처럼 각오를 다지는 내용이 많다. 차마 글로 옮기기 힘든 저질 욕설에 가까운 내용이 큰 정당이나 사회단체 이름으로 붙어 있는 경우도 더러 있다. 서울 도심에서 제주 서귀포까지 전국 방방곡곡에 죽창가가 울려 퍼지는 듯하다. 강제징용 배상 문제에서 촉발돼 수출 규제, 화이트리스트(수출 절차 간소화 대상국) 상호 배제로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 이 상황이 격화될 경우 현수막의 내용처럼 과연 한국이 일본을 이길 수 있을까? 오늘날 대한민국은 과거 조선, 대한제국 때와는 분명히 다르다. 한 국가의 경제 규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지표는 국내총생산(GDP)이다.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뤄진 1965년 한국의 GDP는 31억 달러, 일본은 909억 달러로 약 30배 격차였다. 개인의 소득 수준을 보여주는 1인당 GDP는 한국 109달러, 일본 920달러로 일본이 한국의 약 9배였다. 2018년 한국의 GDP는 그동안 무려 522배가 증가한 1조6194억 달러로 세계 11위가 됐다. 세계 3위 일본의 4조9719억 달러와는 약 3배 차이로 좁혀졌다. 1인당 GDP에서 한국은 3만1346달러로 잃어버린 20년을 경험한 일본의 3만9306달러에 바짝 추격했다. 국중호 요코하마시립대 교수는 ‘흐름의 한국, 축적의 일본’(2018년)에서 2002∼2017년의 추세를 감안하면 한국이 3, 4년 후에 일본을 따라잡거나 앞서는 큰 사건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일본이 수출 규제에 나선 배경에는 과거 우습게 봤던 한국이 이렇게까지 성장한 것에 대한 경계심과 견제 심리가 깔려 있다는 분석도 있다. 대한민국 위상이 달라졌지만 그렇다고 현수막에 걸린 내용이나 일부 정치인들의 선동처럼 한국이 일본과 맞붙어도 될 정도가 되었느냐는 것은 다시 생각해볼 문제다. 좁혀졌다고는 하나 연간 생산 규모가 한국의 3배다. 메이지 유신(1868년) 이후 100년 넘게 축적된 자본과 기술을 감안하면 동원 가능한 물자의 격차는 이보다 훨씬 크게 벌어질 것이다. 경제 구조를 봐도 한국이 취약한 편이다. 수출입이 경제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한국은 70%로 수출 위주 국가다. 일본은 28%로 내수 중심의 국가다. 인구는 한국이 5100만 명, 일본은 1억2000만 명. 서로 같은 타격을 주고받는다고 해도 한국이 받을 충격은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경우에도 허세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승패를 가르는 데 객관적인 전력이 전부는 아니다. 경제전쟁에서 승리라는 개념을 정의하기 어렵지만 일본이 한국을 반드시 이긴다고 볼 수도 없다. 비록 객관적인 조건에서 앞선다고는 하나, 앞에는 강한 적이 있고 뒤로 물러설 곳이 없는 이른바 ‘사지(死地)’에 상대를 빠뜨리면 상대도 죽기 살기로 싸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승자 없는 전쟁, 모두가 패자인 전쟁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대형 서점에 가보면 손자병법은 군사학보다는 경영·처세 관련 코너에 더 많은 해설서가 깔려 있다. 손자병법은 백전백승(百戰百勝)을 말하지 않는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 즉 부전승(不戰勝)이 기본 정신이다. 백성과 국가의 존망을 생각해 전쟁은 가급적 삼가야 한다는 신전론(愼戰論)이 핵심이다. 특히 서로 피해가 막대해 이겨도 이긴 것 같지 않은 공성전(攻城戰)은 최하책이다. 경제분쟁이 장기화 조짐을 보인다고 한다. 불과 3개 품목에 대한 수출 규제만으로 한국 경제는 혼란을 겪고 있다. 이쯤에서 접고 양국 모두 자유무역의 정도로 돌아가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저도 제가 무서워요’, ‘초보 운전인데 아이까지 타고 있어요’. 이런 재치와 애교 넘치는 자동차 스티커를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법적으로도 문제 될 게 없다. 그런데 하이빔(상향등)을 켰는데 갑자기 앞차의 뒷면 유리에서 귀신이 번쩍 나오는 형광 스티커를 붙였다면 단속 대상이다. 실제 벌금 10만 원이 부과된 적이 있다. 선팅도 옅게 하면 합법, 짙게 하면 불법이다. 이처럼 ‘합법 튜닝’과 ‘불법 개조’의 경계는 늘 애매하다.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실제 있었던 일이다. 2010년 전남 영암에서 ‘포뮬러원(F1) 코리아 그랑프리’가 열렸을 때다. 경기에 참여하는 페라리, BMW 등 유명 레이싱팀 관계자들이 자동차관리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적발됐다. 경기장도 한국 땅인데 한국 기준에 맞는 충돌시험과 환경인증을 거치지 않은 불법개조 차량이 등록된 번호판도 없이 운행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였다. 규제 당국이 자동차 튜닝을 바라보는 마인드가 이 정도다. ▷국토교통부가 8일 ‘자동차튜닝 활성화대책’을 내놓았다. 튜닝에 대한 기본 원칙을 불법에서 합법으로 바꾸겠다고 한다. 그중 하나로 그동안 11인 이상 승합차에만 허용하던 캠핑카 개조를 모든 차량에 허용했다. 예를 들어 7인승 기아자동차 카니발이나 현대자동차 스타렉스를 뜯어고쳐 자신만의 캠핑카로 만들 수 있게 됐다. 개조 비용은 천차만별이지만 싱크대, 침대 등 기본적인 모양을 갖추는 데 1000만∼2000만 원 정도 든다고 한다. 국토부는 이번 조치로 연간 3500억 원 이상의 경제효과와 4000여 명의 일자리 창출효과를 기대한다고 했다. ▷튜닝 활성화 대책은 그 전에도 있었다. 2013년에도 국토부가 규제혁신 차원에서 ‘튜닝시장 활성화방안’을 대대적으로 발표한 적이 있다. 당시 튜닝시장 규모는 미국 35조 원, 독일 23조 원, 일본 13조 원인 데 비해 한국은 5000억 원에 불과했다. 그런데 대책 발표 이후 5년 넘게 지났는데 튜닝시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발전한 게 별로 없다. 튜닝에 대한 규제와 단속이 크게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이다. ▷핑계 없는 무덤 없듯이, 명분 없는 규제 없다. 자동차 튜닝 규제는 규제 명분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안전’과 ‘환경’을 내건다. 물론 안전은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독일 등 튜닝 선진국에서 하듯이 교체 부품에 대한 철저한 검증과 공식인증 등의 방법으로 안전을 확보하면서 산업도 키우는 방법이 없는 게 아니다. 이번에 정부가 규제를 확 풀겠다고 하니, 안전한 가운데 자동차 제조 강국 한국이 튜닝산업에서도 강국이 되기를 기대해본다.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윤석열 검찰총장이 지난번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가치관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으로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Free to Choose)’를 말했을 때 마치 호랑이가 “원래 나는 고기보다는 채소를 더 좋아해”라고 말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어 취임사에서 “정치·경제 분야의 공정한 경쟁 질서를 무너뜨리는 범죄에 대해서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대응할 것”이라며 자신의 법 집행 방향을 제시했다. 만약 윤 총장이 몸담고 있는 문재인 정부의 경제철학과 그동안 보여온 구체적인 정책들을 프리드먼이 알았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제발 내 이름은 팔지 말아 달라’고 하지 않을까 싶다. 밀턴 프리드먼이 누구인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면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더불어 자유시장경제의 상징적 인물이다. 정부가 시장에 어떤 명분으로든 개입하는 것을 지독히 싫어한다. ‘불완전한 시장이 불완전한 정부보다 낫다’는 게 프리드먼의 기본 철학이다. 세금을 많이 걷고 복지를 늘리는 큰 정부는 프리드먼 경제철학에서 최대의 적이다. 언제나 ‘대중의 이익’ 같은 미사여구를 달고 시행되는 분양가 상한제 같은 가격 통제는 최악의 정부 개입 행위다. 시장 실패의 대표적 사례로 정부 개입의 명분을 주는 공해 문제를 보자. 검찰은 생리상 공해 배출 기업은 악덕 기업이라는 선악의 문제로 접근할 게 틀림없다. 프리드먼의 주장은 다르다. 공해는 일정 정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범죄와 처벌로 다룰 것이 아니라 예컨대 공해배출세를 도입해 기업으로 하여금 배출 요인을 스스로 줄이게 하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공해를 많이 발생시키는 상품은 이 세금 때문에 적게 발생시키는 상품보다 비싸져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줄어들 것이라는 원리다. ‘선택할 자유’에 나오는 사례다. 기본적으로 법은 선과 악을 가려 악을 척결하고 정의를 세우는 작업이다. 반면 경제는 정의보다는 효율을 추구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인 검찰이 나서 시장 질서를 바로잡겠다며 ‘보이는 칼’을 휘두르는 장면은 법과 경제, 정의와 효율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어느 모로 보나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 정신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윤 총장이 임명되자마자 서울중앙지검은 삼성바이오로직스 김태한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김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은 올해 5월 법원에서 기각된 바 있다. 지난달 29일에는 대우조선해양 하도급 업체들이 하도급 비리 건으로 공정거래위원회가 아닌 서울중앙지검에 고소장을 접수시켰다. 앞으로 검찰의 칼이 어디로 향할지 모른다. ‘공정경쟁’이란 취임사가 본격적인 대기업 수사를 위한 명분 쌓기용 사전포석이란 분석도 있다. 우월적 지위에 있는 대기업은 거악(巨惡)이며 언제든지 공정경쟁을 해칠 수 있기 때문에 정부가 손봐야 할 잠재적 대상으로 취급한다면 ‘선택할 자유’를 크게 오독(誤讀)한 것이다. 이 책을 번역해 출간한 곳부터가 전경련이 설립했던 자유기업원이다. 윤 총장이 젊은 시절 ‘선택할 자유’를 감명 깊게 읽고, 프리드먼의 경제철학에 대해 깊이 공감했다면 차분히 시간을 갖고 다시 한번 읽기를 바란다. 조직이라는 용어가 어디보다 잘 어울리는 검찰에서 총장을 따라 요즘 후배 검사들 사이에서도 이 책을 읽는 사람이 늘었다고 한다. 꼼꼼히 읽으면 좋겠지만 제목만 봐도 국가 또는 검찰이 시장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보다는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윤석열 총장 체제의 검찰이 공정경쟁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얼마나 많은 경제 관련 수사를 벌일지 모르겠으나 최소한 자유시장경제와 프리드먼의 의미는 정확히 이해하기 바란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인공지능(AI)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많다. 최근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 “앞으로는 첫째도 AI, 둘째도 AI, 셋째도 AI”라고 했다. 손 회장은 벤처 투자자다. 미래 산업에서 AI의 중요성을 이야기한 것이다. AI는 경제·산업을 넘어 인류를 위해,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AI는 인프라다. AI의 등장은 전화의 발명, 자동차의 발명, 컴퓨터의 발명에 비견될 정도다. 혹은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 앞으로 발전 속도는 가늠하기 어렵다. 무엇을 할 수 있느냐보다 무엇을 할 수 없느냐는 질문이 더 어울린다. 9, 10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AI 관련 구글 아시아포럼에 참석했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AI가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놓고 뜨거운 토론과 사례 발표가 이어졌다. 밀림속 자연의 온갖 소리 분석해 브라질 아마존 열대우림의 템베족(族) 거주 지역. ‘레인포리스트 커넥션’의 창립자이자 대표인 토퍼 화이트의 노트북에 특이한 음파감지 신호가 잡혔다. 전기톱의 음향 그래프였다. 화이트는 즉시 템베 부족장에게 무전을 쳤다. 그리고 음파 발생 진원지로 출동했다. 아니나 다를까 불법 벌목업자들이 트럭을 세워두고 한창 나무들을 잘라내고 있었다. 열대우림 훼손의 50∼90%가 불법 벌채 때문이다. 동영상을 보여준 화이트 대표는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 CO₂ 발생인데 1km²의 열대우림 보존 효과는 자동차 1000대를 만들지 않는 효과와 같다”고 말한다. 넓고 넓은 열대우림 한가운데서 어떻게 벌목꾼들의 전기톱 소리를 잡아낼 수 있었을까. 화이트 대표는 중고 휴대전화 5대를 편평한 판에 연결한 다음 태양광 전지를 부착해 높은 나무 끝 부분에 숨겨두었다. 휴대전화는 자신의 노트북에 깔린 인공지능(AI) 프로그램 ‘텐서플로’와 24시간 연결돼 있다. 열대우림에서는 원숭이, 매미, 앵무새, 나뭇잎의 버석거림 같은 온갖 소리들이 끊임없이 쏟아진다. 영리한 텐서플로는 멀리서 사람이 못 듣는 벌목 현장의 전기톱, 트럭 소리를 콕 집어낸다.DMZ 생태계 보존에 활용하면 어떨까 음향 분석 AI가 열대우림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중 생물은 보기는 어려워도 소리를 포착하기는 상대적으로 쉽다. AI는 여러 지역 멸종 위기 동물의 소리를 분류해 낸다. 태평양에서 녹음된 10만 시간 분량의 오디오 데이터를 학습한 AI는 혹등고래, 범고래 소리를 각각 인지한다. 이런 방법으로 수집된 고래들의 서식지, 산란 위치, 이동 경로 데이터는 멸종 방지에 활용된다. 수중 생물 개체의 90%가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는 보고가 있다. 열대우림 훼손과 마찬가지로 남획과 불법 어로가 주범이다. 이를 막는 데 AI의 역할이 점차 커질 것이다. 폭 4km, 길이 248km 한국의 비무장지대(DMZ). 서울에서 불과 자동차로 1시간 거리다. 1953년 정전협정 이후 66년간 인간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다. 한국 정부 조사 결과 포유류 조류 식물 등 7개 분야 4873종의 생물이 서식하고 있다. 한반도 생물종의 약 20%다. 멸종 위기종의 41%가 DMZ 일대에 서식한다. 수십 년간에 걸친 현지 주변 답사, 망원경을 통한 실측 조사 결과다. 앞으로 열대우림에서 활용된 AI의 음향 분석 기법이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동물의 서식 분포와 이동을 훨씬 적은 인력과 비용으로 보다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다. 음향 분석 AI 텐서플로의 활용 방안은 무궁무진해 보인다.인간의사 능가하는 ‘AI 명의’ 긴급전화와 구급차가 생명을 살리는 데 절대 요긴한 장치라면 앞으로 여기에 AI를 추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컨설팅 회사 액센추어는 일본 사가현과 함께 구급차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응급환자의 상태에 적합한 병원을 찾아가는 프로그램이다. 구급대원과 환자가 나누는 대화, 병원의 데이터 등을 통해 AI가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병원을 찾아내는 것. 병원을 찾느라 허비하는 시간을 40% 줄였고 이송 시간을 평균 1.3분 단축했다.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확률이 7% 올라갔다는 것은 상품 판매량을 7% 올리는 것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100명 중 7명을 살렸다는 겁니다.” 프로젝트 지휘자 구도 다쿠야 씨의 설명이다(일본경제신문, AI 2045 인공지능 미래보고서). ‘구글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2013년 9월 30일자 타임지(誌)의 표지 제목이다. 이때 이미 IBM의 인공지능 왓슨은 60만 건의 진단서와 200만 쪽의 전문서적, 150만 명의 환자 기록을 학습했다. 폐암 진단에서 왓슨은 90% 정확도, 인간은 50%의 정확도를 보였다. 의사 출신이면서 구글 AI 프로덕트 매니저로 일하는 릴리 펑은 “세계적으로 사망률 1위는 폐암인데 폐암의 80%가 조기 진단이 안 된다”며 “AI의 방사선 사진 판독은 정확도가 높고 시간이 적게 걸려 의사의 부담을 덜어주고 환자의 생존율을 높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 세계 4억1500만 명 정도가 당뇨병성 망막증 환자 위험군이다. 이 가운데 50%가 실명한다. 그런데 인도에서만 안과 의사가 12만 명 정도 부족한 실정이다. 현재 당뇨병성 망막증 환자를 판단하는 실력이 AI와 의사가 비슷한 수준이다. AI가 진단만큼은 지금이라도 의사를 대체해도 손색이 없다는 말이다. AI는 데이터가 쌓일수록 실력이 늘고 있다. 진단 분야에서 의사를 능가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진단이 쉽고 빠르면 치료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AI가 많은 사람에게 빛을 찾아주는 셈이다. 기술적 차원과는 별도로 원격 진료 같은 제도적 장벽이 해결돼야 함은 물론이다. 청각장애인의 입과 귀가 되다 뇌중풍(뇌졸중), 파킨슨병, 다발성 경화증 등 여러 신경질환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사를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말을 한다고 하는데 상대방이 알아듣지를 못하는 구음장애다. 디미트리 카넵스키는 러시아에 살던 어린 시절 청각장애를 얻었고, 그 이후에 영어를 배웠다. 카넵스키의 말은 두세 살 어린애가 버벅거리는 것처럼 들린다. 일반 사람은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러나 AI는 카넵스키의 발음과 억양을 학습을 통해 알고 있다. 카넵스키는 자신의 말소리를 AI 알고리즘이 깔린 스마트폰을 통해 자막으로 보여줄 수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현재 4억6600만 명이 청각 또는 난청장애를 겪고 있다. 2055년에는 9억 명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한다. 보청기로 해결이 안 되는 사람들이다. 이미 무료로 배포돼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실시간 자막 프로그램이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상대방의 말을 AI가 실시간으로 번역해 스마트폰에서 자막으로 보여준다. 청력이 없어도 시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70개 이상의 언어와 방언을 지원하고 있다. 영어권보다는 정확도가 다소 떨어지기는 하지만 한국어도 가능하다.방대한 문화유산 AI가 보존-관리 일본 초서 구즈시지는 현대 일반인들은 도저히 읽을 수가 없다. 중국 초서보다 더 간략한 데다 휘갈긴 문자다. 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0.01%가 채 안 된다. 수백만 권의 책과 10억 개가 넘는 구즈시지 역사문서가 사장될 위기다. 도쿄정보학연구소의 타린 클라누왓 연구원은 “구즈시지를 현대 일본어로 변환하는 머신러닝을 구축한 결과 한 페이지를 변환하는 데 약 2초, 책 한 권을 변환하는 데 1시간이 걸리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2300개의 문자를 해독할 수 있고 정확도는 85%라고 한다. 구글 번역기의 고문서 확장판인 셈이다. 우리나라 역시 주시경 선생이 한글을 본격적으로 보급하기 전에는 거의 모든 기록물이 한자로 돼 있다. 한자 번역 프로그램이 일반화되면 이를 스캔해서 한글로 번역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일본의 구즈시지보다 짧을 것이다. 조상들의 문화유산을 현대화하는 데 AI가 단단히 한몫할 게 틀림없다. AI가 인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인간의 상상력의 크기와 비례한다. AI가 발전할수록 인문학적 상상력이 중요한 이유다. 도쿄=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한강 주변 아파트에서 같은 동, 같은 층, 같은 평수라도 강이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에 따라 시세가 몇 억씩 차이가 난다. 거실에서 보이느냐, 주방에서 보이느냐에 따라 또 차이가 난다. 123층 국내 최고층인 롯데월드타워 주변의 아파트도 한강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빌딩 조망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된다고 한다. ▷미국의 자존심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대한 조망 가치는 얼마나 될까. 뉴욕의 개발업체가 맨해튼의 한 낡은 건물을 허물고 그 자리에 44층짜리 빌딩을 올리려고 했다. 그러자 그 낡은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12층짜리 고급 주택의 입주민들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대한 조망을 잃지 않기 위해 개발업체에 1100만 달러(약 130억 원)를 지불하고 공중권(Air Rights)을 사들였다고 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공중권은 용적률이다. 예를 들어 20층까지 지을 수 있는 지역에 10층짜리 건물이 있다면 남은 10층만큼의 용적률을 이웃 20층 건물주가 살 수 있다. 이를 이용해 자기 건물을 30층까지 올리거나 아니면 앞 건물이 더 올라가지 못하게 해 조망권을 확보할 수도 있다. 뉴욕 소호의 트럼프 호텔이 주변 낮은 건물의 공중권을 사들여 도심 조망권을 확보한 것도 그런 사례다. ▷서구 국가에서 공중권은 민간끼리도 활발히 거래되지만 지방정부가 도심 개발과 역사적 가치가 높은 건물을 보전하기 위해 활용하는 경우도 많다. 뉴욕시는 뉴욕 그랜드센트럴터미널 빌딩과 천장벽화를 보전하기 위해 1954년 이 건물에 50층의 공중권을 책정했다. 팬암이 이를 사들여 터미널 옆에 지금의 메트라이프 본사로 사용되는 59층짜리 빌딩을 올렸다. 일본 역시 도쿄 기차역사의 용적률을 주변 고층 빌딩들에 팔아 개조 비용을 조달한 적이 있다. 빌딩 건물주는 비좁은 도심에서 추가 공간을 확보해서 좋고, 지방정부는 도심 개발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을 조달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우리나라의 조망권, 일조권은 침해당하지 않을 권리 혹은 침해당했을 때 보상받을 수 있는 권리다. 건물과 분리해 용적률만 따로 떼서 팔 수는 없다. 다만 서울시가 2007년 성북 지역의 성곽 보전을 위해 공중권과 유사한 아이디어를 낸 적이 있다. 성북지역 용적률의 일부를 3km 떨어진 월곡 개발지역에 넘겨주고 여기에서 생긴 개발이익의 일부를 성북 지역이 다시 돌려받는 2개 지역 결합 개발 방식을 취한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는 어떻게 이런 건물들이 아직 보존돼 있을까 싶은 곳들이 많다. 우리도 공중권 개념을 적극 활용해보면 어떨까 싶다.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무병단명 일병장수(無病短命 一病長壽)’ ‘골골 팔십(八十)’이란 말이 있다. 자신의 약한 몸을 걱정해서 늘 조심하는 사람들이 오래 산다는 말이다. 반면에 자신의 타고난 체질을 믿고 건강관리는 내팽개친 채 무절제한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고꾸라지는 경우도 주변에서 자주 본다. ▷한국은 세계 최장수 국가 그룹의 당당한 멤버다. 보건복지부가 최근 발표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건통계에 따르면 2017년 기준 평균수명이 한국 여자는 85.7세, 남자는 79.7세, 전체 평균 기대수명은 82.7세다. 세계 최장수 국가인 일본의 84.2세와 불과 1.5세 차이다. 자살을 제외하고는 암, 치매, 순환기계 질환 등 거의 모든 지표에서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건강한 축에 속한다. ▷객관적인 건강상태와 주관적인 느낌은 확실히 다른 모양이다. ‘본인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한국이 29.5%로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낮다. 세계 1등 장수국 일본 사람 역시 거의 3명 중 1명(35.5%)만이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했다. 반면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사람들은 10명 중 8명 이상이 스스로 건강하다고 대답했다. 본인의 건강에 관한 한 한국 일본 사람이 ‘쓸데없는 비관주의자’들이라면 미국 호주 쪽 사람들은 ‘근거 없는 낙관주의자’들이라고 할 만하다. ▷재작년 세계보건기구(WHO)와 영국의 한 대학이 함께 세계인 수명을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는데 2030년에 기대수명이 90세를 넘는 나라는 한국 여성이 유일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한국인의 장수 양대 비결로 ‘김치’와 ‘건강염려증’을 꼽았다. 건강 관련 TV 프로그램이 엄청나게 많다는 점만 봐도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건강에 관심이 많은지 알 수 있다고 분석했다. 사실 사람들이 만나면 건강 관련 주제는 빠지지 않고, 잡지들은 철마다 다이어트 특집을 싣고, 건강보조식품의 종류가 이렇게 다양하고 많이 먹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고 한다. 한국인이 즐겨 먹는 김치 된장 등 발효음식이 콜레스테롤을 낮추고, 면역력을 높이면서 암을 예방한다는 사실은 이미 입증된 바다. ▷한국인의 장수 비결인 건강염려증은 유달리 건강에 대해 걱정과 관심이 많아 여러 가지 노력을 한다는 긍정적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도를 지나치면 진짜 정신병이 될 수 있다. 건강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은 불안증세를 수반하는 ‘건강염려증(hypochondriasis)’으로 이끈다는 말이다. 건강에 대한 염려도 적당하면 장수 비결이요 과하면 정신병이다. 뭐든지 적당한 것이 좋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원래 안 되는 걸 억지로 하다 보면 무리수가 동원되기 마련이다. 최저임금이 너무 올라 자영업자들이 못 살겠다며 거리로 뛰쳐나오니 대통령 공약을 차마 손댈 수는 없고 그렇다면 다른 걸로 보상해 주겠다며 불만 달래기용으로 급히 들고나온 것이 신용카드 수수료 절감 방안인 제로페이다. 중소벤처기업부와 서울시가 지난달 제로페이 전담 민간기업을 설립하겠다고 했다. 박영선 장관이 새로 부임한 중기부가 ‘제로페이 간편결제추진단’ 명의로 IBK기업은행 같은 국책은행과 신한은행 KEB하나은행 같은 주요 시중은행 등에 공문을 보내 10억 원씩 총 300억 원대의 출연금을 요청한 것이 확인됐다. 출연금은 법인 설립 후 기부금으로 처리해주겠다고 한다. 제로페이는 가맹점 소비자 양쪽 모두에게서 돈을 안 받는 것이니 당초부터 이익을 낼 수 없는 사업구조다. 이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면 도리어 원래 취지에 어긋난다. 이익을 내지 않는 민간기업이라니 네모난 동그라미 같은 그 자체로 어불성설이다. 사업성이 없는 데다 정부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업을 민간기업이 제 정신이라면 제 돈 내고 할 리가 만무하니 국책 은행, 민간 은행들의 팔을 비튼 것이다. 대부분 신용카드 회사를 계열사로 운영하고 있는 은행들은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회사의 결제시스템을 자기 돈까지 줘가면서 밀어줘야 하는 기막힌 상황이다. 이 정도면 말이 좋아 기부금이지 칼만 안 든 강도나 다를 게 뭐가 있느냐는 게 시중은행의 반응이다. 그래도 겉으로 말도 못 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다. 같은 공무원인 금융위원회에서조차 지금이 군사독재 시절도 아니고 중기부나 서울시가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최근 기획재정부가 업무추진비 등 관서 운용 경비 지급에 사용하는 정부 구매카드에 신용카드 직불카드 외에 제로페이를 포함시켰다. 카카오페이나 삼성페이처럼 민간에도 비슷한 서비스가 있는데 제로페이만 포함시킨 것은 계열사에 일감 몰아주기나 다름없다. 민간기업 같으면 당장 공정거래위원회 조사 대상감이다. 서울시는 가급적 제로페이를 우선 사용하고 간부들은 사용 실적을 보고하라고 했다니 최근 발효된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에 안 걸리는지 모르겠다. 제로페이가 처음 등장한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5월까지 사용실적이 36만5000건, 57억 원이다. 홍보나 가맹점 유치에 쓴 예산 98억 원에도 턱없이 못 미친다. 같은 기간 신용카드가 49억 건에 266조 원, 체크카드가 32억 건에 74조 원인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초라한 수준인지 알 수 있다. 제로페이는 처음부터 정부가 나랏돈과 세금 혜택 같은 행정력을 무기로 민간인들의 결제 시장에 뛰어들었으니 심판이 선수로 뛰는 불공정 게임이다. 심판까지 뛰었는데도 실적은 거의 제로이다 보니 정부 스스로 비판해왔던 온갖 형태의 불공정 행위를 스스로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급조된 정책이 효과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도 뚝심 행정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최저임금 인상의 결과는 이제 모두들 알고 있다. 정부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이제 와서 동결이니 인상 최소화니 이런 말들을 하고 있다. 제로페이는 그 참상을 보고도 실패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같은 행위를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을 두고 미친 짓(Insanity)’이라고 했다. 제로페이로 자영업자를 위하는 정부, 시장(市長)이라는 정치 홍보는 충분히 됐을 것이다. 이 정도 했으면 많이 해본 것 아닌가. 국가를 위해서나 납세자를 위해서나 하루라도 빨리 접는 게 어떨까 싶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이전 정부 시절이었던 2014년 이른바 창조금융이란 모토 아래 기술평가신용(TCB) 대출 제도가 도입됐다. 기술력이 우수하지만 담보력이 미약한 창업 초기 기업에 대해 무담보 무보증 대출을 확대하자는 것이다. 금융당국은 수시로 개별 은행들의 실적을 체크해 줄 세우고 유무형의 각종 불이익을 주곤 했다. 그러자 정부에 정책이 있으면 민간에는 대책이 있다는 말처럼 각 은행들 본점에서는 일선 지점에 TCB 대출을 어떻게든 최대한 늘리라는 지침을 내렸다. 일선 창구에서는 기존 신용대출을 포함해 바꿀 수 있는 여신은 모두 TCB 항목으로 바꾸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말하자면 값싼 중국산 쌀이나 조개를 한국산 포대에 담아 파는 식의 ‘포대갈이’ 수법이 동원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관계형 대출’이란 제도도 도입됐다. 신용등급이 낮아도 기업 대표의 도덕성, 경영 의지, 성장성 등을 평가해 중소기업에 대출해주는 제도다. 은행들은 속으로 전형적인 탁상행정, 관치금융이라고 비웃었지만 한편으로는 기존 신용대출을 관계형 대출 항목으로 갈아타는 방법 등을 통해 실적도 맞추고 금융당국의 비위도 맞췄다. 하늘 아래 새로운 정책은 없는 모양이다. 금융위원회가 얼마 전 혁신금융 추진방향을 발표했다. 핵심적인 내용 가운데 하나가 기업여신 시스템을 혁신적으로 뜯어고치겠다는 ‘일괄담보’ 대출 제도다. 재고자산 기계설비 같은 동산(動産)은 물론이고 특허권, 기술력, 성장성 같은 무형의 자산도 담보로 인정해 적극적으로 대출을 해주라는 취지다. 부동산 담보 위주의 전당포식 대출에서 벗어나 신용 대출로 가자는데 누가 반대할 것인가. 이전 정책들처럼 언제나 문제는 당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있고, 취지보다는 실행의 디테일에 있다. 은행들은 이번에도 ‘취지 공감, 실행 곤란’이라며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으로만 답답해하고 있다. 아무리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IoT)이 잘 발달됐다고 해도 은행이 거래 기업의 재고를 일일이 어떻게 파악할 수 있으며, 특허권을 담보로 잡았다가 해당 기업이 부실화되면 그 특허권을 어디에서 처분하느냐는 것이다. 아직 우리나라에 특허시장은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미미하다. 은행이 담보로 얻은 특허권으로 사업을 할 것도 아니고 건전성 악화로 이어질 소지가 크다. 여신 실무자들은 과거의 경험을 되살려 ‘일괄담보’에 바꿔 담을 각종 대출 물건을 추리고 있다고 한다. 최근 만난 중소기업 대표 몇 명에게 새 기업여신제도의 취지와 내용을 설명해주고 어떨 것 같으냐고 물어보니 한결같이 어느 먼 나라 이야기냐는 반응이었다. 여기서 한발 더 나간 게 영세 자영업자 맞춤형 대출이다. 신용은 양호하지만 매출액이 적고 담보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는 자영업자가 주요 대상이다. 은행들의 사회공헌자금도 적극 활용하라고 한다. 정책금융을 넘어 최저임금 인상의 부작용을 땜질하는 정치금융 냄새가 물씬 풍긴다. 생색은 금융당국이 내고 리스크는 은행이 진다. 그 리스크의 최종 피해자는 고객이다. 예나 지금이나 은행에 금융당국은 영원한 상전이다. 금융당국이 제시하는 목표는 어떻게든 맞추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현실적인 신용 인프라가 충분치 않은 상황이라면 은행들은 실적 맞추기를 위해 편법이라도 동원할 수밖에 없다. 장부상 선진 금융이 아니라 실제 한 단계 높은 대출문화를 가져오려면 정책적 목표 제시와 함께 금융 생태계를 뜯어고치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는데 엊그제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현재 60세인 정년을 65세로 연장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을 때 꼭 그 심정이었다. 고령층을 생산현장에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보나 개인적으로 보나 절실한 문제다. 현재 진행되는 고령화 저출산 속도면 2050년에는 취업자가 전체 인구의 36%에 불과하게 된다. 이들이 모든 물건을 만들고 서비스를 제공해 돈을 벌고 나머지는 이들에 얹혀산다면 나라 경제가 정상적으로 유지되기 어렵다. 멀쩡한 육체와 숙련된 기술, 노동할 의지가 있는데 은퇴 후 20∼30년간을 마냥 쉬거나 생계에 쫓겨 단순노무직이나 길거리 좌판 같은 저소득 일이라도 할 수밖에 없다면 개인적으로도 불행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보다 고령화사회를 먼저 접한 일본은 2013년 정년을 65세로 늘렸고 다시 70세로 늘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독일도 현재 65세인 정년을 2029년까지 67세로 연장하기로 했다. 미국과 영국은 법적 의무 정년제도 아예 없앴다. 세계에서 고령화 속도가 가장 빠르고 노인빈곤율은 최악인 한국이 정년 연장을 검토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홍 부총리의 정년 연장 검토 발표를 듣고 놀란 것은 이것이 ‘제2의 최저임금’ 사태를 불러오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최저임금도 취지와는 무관하게 무리를 했기 때문에 고용참사는 참사대로 겪고 이를 땜질하느라 세금은 세금대로 쏟아 붓고 있는 중이다. 요즘 한창 2020년 최저임금을 심의 중인데 동결 혹은 최소 인상으로 가는 분위기다. 2년간 29% 올린 폭을 임기 5년 동안 단계적으로 나눠 올렸다면 대선 공약도 지키고 부작용도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본이 정년 연장 문제를 비교적 기업과 근로자 간 큰 충돌 없이 정착시킬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정책을 만들 때 정부가 기업의 사정을 충분히 배려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정년 연장을 논의하는 데 있어 채용하고 고용을 유지시키는 주체인 기업이 핵심적인 대화 파트너임은 물론이다. 그런데 홍 부총리의 정년 연장 검토 발표에 기업들은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냐’는 분위기다. 이달 말에 여러 부처가 합동으로 만든 방안을 발표한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노사문제, 인사제도 대화 창구인 경총에 연락 한 번 없었다고 한다. 앞으로 정부안이나 국회안을 가지고 형식적인 공청회는 몇 번 거칠지 몰라도 기업은 그냥 정부나 정치권이 정한 대로 하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2013년 정년 60세를 도입할 때도 그랬다. 정년 연장은 정부가 주도적으로 추진하는 것인 만큼 공무원, 공기업이 최우선적인 적용 대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대기업 은행을 포함해 근사한 직장의 정규직이 가장 큰 혜택을 보게 된다. 이들에게 지금 다니고 있는 좋은 직장을 5년 더 다니게 해 준다는 것만큼 반가운 소식이 있을까 싶다. 하지만 지금 같은 연공서열적 임금체계, 경직된 고용 관행을 유지하면서 정년만 늘려 놓으면 기업 여건은 별도로 하고도 풍선효과처럼 그 피해가 청년층, 비정규직 등 노동시장의 약자에게 돌아간다. 그 충격은 최저임금을 능가할 게 틀림없다. 총선이 1년도 채 안 남은 시점에서 홍 부총리가 정년 65세의 화두를 던진 것에 대해 총선지원용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제기하는 시선도 일부 있다. 정년 연장이 정권 연장의 도구로 사용되면 안 되는 것은 물론이다. 부디 취지가 좋다는 것만 갖고 무리하지 않기를 바란다.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지방 산업단지에서 직원 200명 정도의 조그만 공장을 운영하는 대표 K 씨를 최근 만났더니 황당하고도 서글픈 이야기를 했다. 지난해 말 그동안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지방고용노동청 근로감독관이 갑자기 방문해 공장을 둘러보지도 않고 어차피 털면 나올 테니 이실직고하라고 했다. K 대표는 비교적 약한 사안 하나를 말하고 경미한 처벌을 받는 것으로 안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 근로감독관은 “미안한데 사실은 나도 실적 때문에 큰 기업은 이미 한 바퀴 돌고 여기 나왔다”며 용역업체에서 파견받은 직원이 몇 명이냐고 물었다. 대여섯 명 된다고 하니 연말까지 그 직원들을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하라고 했다. 수사권, 체포권까지 갖고 있는 근로감독관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어 용역직원들의 능력과 무관하게 곧바로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K 대표는 “올해는 원래 뽑을 예정이었던 신입사원을 한 명도 뽑지 않았다”고 하면서 “작년 말 일만 없었으면 우리 회사를 첫 직장으로 가졌을 젊은 애들이 안됐다”고 했다. 고용노동부가 2년간 29.1% 오른 최저임금이 고용 감소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엊그제 ‘처음’ 인정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작년 신문 기사를 찾아보면 몇 페이지에 걸쳐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정규직 전환이 고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례가 숱하게 실려 있었다. 이후 통계청 공식 통계로도 이런 우려가 사실로 확인됐는데 고용부는 그동안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청와대가 긍정적인 효과가 더 크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최저임금이 고용에 준 충격보다 이런 정부의 의도적 무능이 더 충격적이다. 21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한국의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을 2.6%에서 2.4%로 낮추면서 앞으로 가장 중요한 과제가 노동생산성 향상이라고 지적했다. 성과는 안 오르는데 정부가 나서 봉급은 더 주라고 하면 회사가 직원 줄이는 것은 뻔한 이치다. 이런 간단한 상식을 확인하고 인정하는 데 2년씩 걸린다면 청와대 고용부를 포함한 정부 공무원의 노동생산성이 얼마나 낮은지를 보여준다. 노동생산성을 올리려면 일 잘하는 사람은 더 대우해주고, 못하는 사람은 대우를 낮게 하면 된다. 그래도 도저히 안 되면 해고해서 잘하는 사람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 현 정부에서 이런 방향의 노동개혁은 금기어가 됐다. 귀족노조 등 내부 기득권층의 자리를 더 튼튼히 해주고 결과적으로 신규 진입은 어렵게 만들고 있다. 독일 등 요즘 잘나가는 국가들이 추진해온 노동시장 변화와는 정반대다. 정부가 500조 원 슈퍼팽창예산에 추경을 더해 경기 부양에 나서겠다고 한다. 아직 나라 곳간에 여유가 있다 하니 어려울 때 빚을 좀 더 내 사용하는 게 나쁠 건 없다. 하지만 잘못된 정책의 땜질 또는 현금복지 같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할 게 아니다. 잠재성장률을 올리는 방향, 다시 말해 노동생산성을 높이고 경제 체질을 강화하는 데 써야 한다는 게 OECD나 한국개발연구원(KDI) 등의 권고다. 예컨대 카풀 같은 공유경제는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데 추진 과정에서 택시 기사처럼 피해 보는 이해관계자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이런 곳에 세금으로 적절한 보상을 해가면서 새로운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 수 있도록 산업구조와 노동시장 구조를 업그레이드하는 게 정부가 할 일이다. 그래야 다시 경제가 좋아지고 일자리도 늘고 빚을 갚는 선순환이 발생한다. 그런데 자기 돈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인지 정부는 세금으로 소 잡아먹을 생각만 하고 있는 것 같다. 쓸 때는 좋겠지만 그러면 대한민국 경제, 소는 누가 키우나.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