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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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신광영 논설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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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3~2024-11-22
칼럼100%
  • [두만강변의 배신]복수를 위한 생존

    《 (지난 줄거리) 북한과 중국을 오가며 탈북 브로커로 활동하다 한국으로 탈북한 채민철. 그가 행방불명된 죄로 북한의 아내와 어린 남매는 시골 유배지로 보내졌다. “탈북자 일가족과 탈영병들을 북송시키면 네 가족을 잘 보살펴 주겠다”는 보위부 간부 ‘윤 영감’의 제안을 받은 민철은 탈북해 중국에 숨어 살던 이명호 장은희 부부를 속여 북측에 넘긴다. 북송된 은희에겐 지옥 같은 나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   화장실 문 높이는 70cm였다. 멀리서 보면 안에서 쪼그려 앉아 용변 보는 사람의 머리가 보였다. 장은희(가명)는 문에 등을 기댄 채 화장실 안에 웅크리고 앉았다. 머리는 푹 숙이고 발꿈치는 들었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위장해 감시를 피할 수 있는 자세였다. 쇠붙이를 쥔 손 안에 땀이 흥건했다. 2006년 2월 새벽 4시. 함경북도 온성군 보안서(경찰서) 내 구류장 건물은 고요했다. 손 안에는 7cm 길이의 녹슨 대못 하나와 실핀 3개, 옷핀 하나가 있었다. 옷핀은 걸림 장치가 풀려 바늘 끝을 드러내고 있었다. 입을 벌렸다. 대못을 집어 목구멍 끝까지 가져갔다. 식도에 들어가도록 못을 조금씩 세웠다. 못은 식도 벽을 찢으며 일자로 세워졌다. 못을 밀어 넣었다. "어억, 어억." 구역질이 새어나왔다. 실핀과 옷핀도 우겨 넣었다. 가슴이 막혔다. 물을 들이켰다. 못 끝이 장기 내벽을 긁으며 흘러내렸다. 화장실 안 양동이에는 물이 있었다. 죽은 날벌레 떼와 유충, 물곰팡이가 뒤섞여 부유하는 썩은 녹물이었다. 습관처럼 남편 이명호(가명)를 생각하며 속말을 했다. '현준이(가명) 아부지, 내래 교화소 6년형이랍니다. 살아서는 나오지 못한다는 얘기 아입니까. 차라리 이래 죽는 게 나슬 것 같습니다. 죽는 것도 간단치가 않습니다.'●죽은 언니의 다리 9.9㎡(3평) 남짓한 구류장. 16명이 빈틈없이 서로 엇갈려 누워 자고 있었다. 은희는 돌아와 그 틈에 끼어 누웠다. 곧 죽는다는 생각에 눈물이 고였다. 눈물이 흐르기 전에 소매로 훔쳤다. 보위부와 보안서에서 1년 2개월을 보내면서 울다 들킨 이들이 어떤 고초를 겪는지 잘 알고 있었다. 눈치 빠른 간수는 우는 죄수를 끌어내 시래기를 강제로 먹여 대변을 보게 했다. 변에서 쇠붙이가 발견되면 고문을 했다. 자살 시도는 조국에 대한 배신이었다. 은희가 보안서에 온 건 4개월 전이었다. 북송된 뒤 10개월간의 보위부 조사를 마친 은희와 명호는 각각 생계를 위해 탈북한 경제범과 남한에 협력한 정치범으로 분류됐다. 2005년 9월말 보안서로 호송되기 전 은희는 명호가 있던 구류장을 지나다 속삭였다. "살아서 보기요." 한 달 뒤 명호는 상급기관인 함경북도 보위부로 끌려갔다. 경제범 형기는 길어도 3년이라고 했다. 영양실조로 죽기 전에 살아서 나올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 볼만했다. 결과는 6년형이었다. 북한 당국은 남한행 탈북자가 5년 새 20배로 늘자 긴장했다. "본때를 보여 주겠다"며 징벌적 선고를 내렸다. 선고를 받은 날 밤, 7년형을 받은 동료 언니와 함께 자살하기로 했다. 각자 같은 양의 쇠붙이를 먹었다. '어차피 죽을 거 실컷 먹어보기나 하자.' 죄수에게 펑펑이 가루(옥수수 뻥튀기를 갈아 가루로 만든 것)를 배식하는 일을 하며 가루를 몰래 입안 가득 밀어 넣었다. 가루를 훔쳐 구류장에 들어와 죄수들과 나눠먹었다. 입 안에서 침으로 '펑펑이 떡'을 만들며 우물거렸다. 죽을 때를 기다렸다. 며칠 뒤 설사를 하던 동료 언니가 죽었다. 들것 밖으로 삐져나온 언니의 다리를 은희는 멍하니 쳐다봤다.● 쥐와 경쟁하다 '강짜로(억지로) 거둬 넣은 못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더란 말입니다. 나만은 살아 나가 복수하라고, 당신이랑 군대 아들이 나를 살군(살린) 것이지요? 반드시 살아나가 채 가(채민철·가명)를 만나겠습니다. 칼탕쳐(칼로 토막내) 죽이겠습니다. 그렇게 해도 원수를 다 못 갚는다고 생각합니다. 꽃나이 세 명이 죽은 거 아닙니까. 그라고 우리 현준이는요….' 여자 주먹 크기의 밥덩이 하나. 2006년 4월 은희가 교화 생활을 시작한 평안남도 개천 교화소에서 나오는 한 끼 식사였다. 100g 남짓이었다. 밥덩이는 강냉이를 껍질째 빻아 찐 것이었다. 껍질에 사료까지 섞여 돌 씹는 느낌이 났다. 때로는 유리조각과 작은 못도 섞여 나왔다. 은희가 속한 뜨개반은 하루에 모자 5개를 떠야 했다. 하루 15시간 이상 뜨는 모자는 중국으로 팔려 나갔다. 5개를 다 못 뜨면 일렬로 꿇어앉아 '각재(각목) 구타'를 당했다. 입으로는 삽이 날아와 이를 깨놓았다. 식사는 '처벌밥'으로 바뀌었다. 한 끼당 30g. 한 숟가락 분량이었다. 살려면 5개를 뜨고 봐야 했다. 평소엔 '까마귀 날개' 국이 밥과 함께 나왔다. 썩어 문드러져 구멍이 숭숭 뚫린 양배추 잎을 물에 넣어 끓인 것이었다. 잎도, 국물도 까맸다. 흐물흐물한 큰 잎이 떠 있는 모습은 군데군데 털이 빠져 죽은 까마귀 날개가 물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밥 먹는 시간은 2분. 한 반 죄수가 80명인데 국그릇은 20개였다. 국을 받자마자 '까마귀 날개'를 바닥에 건져놓은 뒤 한 번에 들이켰다. 국그릇을 넘겨준 다음 유일한 건더기인 '까마귀 날개'를 씹어 삼켰다. 늘 설사를 했다. '봄에 락종(落種·논밭에 씨 뿌리기)을 할 때는 그래도 낫습니다. 뜨락또르(트랙터) 소리에 개구리가 놀라 튀어 오릅니다. 그걸 잡아다 찢어가지고 몰래 매달아놓고 마르기만 기다리거든요. 꾸득꾸득해지면 얼마나 맛있는지 모릅니다. 현준이 아부지, 내래 '세상에 어디 여자라는 기 개구리를 잡는가' 하지 않았습니까. 개구리 튀겨 당신 술안주로 내줘도 내 어디 입에나 댔습니까. 개구리가 눈을 바로 뜨고 올려다보는 게 어찌나 무섭던지요. 이제는 없어서 못 먹습니다. 날이 좋지 않아 마르지 않거나 말리는 중에 쥐가 채가면 얼마나 아쉽고 속상한지요. 참 한심하지요.' 2008년 평안남도 증산교화소로 이동한 은희는 개구리로 버텼다. 개구리를 잡다 걸리면 발길질을 당했다. 처벌밥을 받거나 굶었다. 보호동물을 잡았다는 게 이유였다. 은희는 살아서나가야 했다. 쥐와 경쟁을 벌이는 한편 밥덩이 세 개를 모아 동료가 잡아놓은 쥐와 바꿨다. 쥐고기를 씹으며 4년 전 본 민철의 이목구비를 머릿속에 그렸다. 겨울이면 교화소 내에 달구지가 자주 오갔다. 은희는 달구지 밖으로 팔 다리가 축 늘어진 시체의 모습을 하루에도 여러 번 봤다. 뼈에는 가죽이 쪼글쪼글한 헝겊처럼 붙어있었다. '허약 3도'들이 줄지어 죽었다. 교화소에서는 허약자의 바지를 벗겨 허약도를 측정했다. 엉덩이 살이 얼마나 빠졌는지, 엉덩뼈(엉치뼈 아랫부분)가 얼마나 드러났는지를 살폈다. 양쪽 엉덩뼈가 드러나 약간 벌어져 있으면 1도, 세운 주먹이 엉덩뼈 사이에 들어가면 2도, 눕힌 주먹이 들어가면 3도였다. 2도는 똑바로 서지 못했다. 3도는 항문 근육이 토끼꼬리처럼 늘어져 있었다. 툭 건드리면 쓰러져 죽을 사람들이었다. 2009년 겨울, 은희는 허약 2도였다. '그렇게 맛있던 밥덩이가 목이 까슬까슬하매 넘어가질 않는 겁니다. 내장에 병이 나매 계속 설(설사)을 합니다. 저 지게에 얹힌 날강냉이 하나 채 먹으면 얼마나 달큰할까요. 몸이 금방 나슬 텐데요. 정신이 풀려 서 있을 수 없는데도 지도원은 '놀면 죽는다' 캅니다. 나가도 일을 못할 텐데요. 일을 못해 밥이 줄면 허약 3도가 될 것이고…. 그라면 살아나가 복수하지 못하게 될 텐데 말입니다.'● 다섯 생명과 바꾼 약속이 깨지다 민철의 가족을 보살펴주겠다던 윤창주 함경북도 보위부 반탐처장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행불자'의 가족을 따라다니는 감시의 눈길은 더 매서워졌다. 이웃들은 민철의 아내 허정애(가명)의 집에서 새어나오는 대화를 엿들어 인민반장 회의 때 보고했다. 정애가 민철이 보내준 돈을 가지고 시장에 가면 보안원(경찰)이 따라붙었다. 무언가를 사면 돈의 출처를 추궁한 뒤 잡아갈 터였다. 민철은 정애와 통화할 때마다 "남한으로 오라"고 했다. 그는 2005년 중순부터 다시 한국에 들어가 살고 있었다. 은희 가족 셋과 북한 탈영병 둘을 북한에 넘긴 사실이 중국 공안에 적발돼 그해 여름 한국으로 추방됐다. 민철은 2003년 탈북해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가고는 싶은데 애들도 너무 어리고…." 2005년 당시 딸은 14세, 아들은 10세였다. 탈출의 순간은 4년 뒤 찾아왔다. 2009년 6월 보안원이 정애에게 다그쳐 물었다. "이 쌍간나, 니 요즘 누구랑 통화하네?" 벽장에 숨어 남편과 통화를 하다 보위부 탐지기에 휴대전화 전파가 잡힌 것이었다. 남한에 건 전화라는 게 밝혀지는 건 시간 문제였다. 그날 밤 짐을 싸 두만강 국경으로 도망쳤다. 민철은 탈북 브로커를 보냈다. 정애와 두 남매는 중국,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을 거쳐 탈북 1년 만인 2010년 6월 한국 땅을 밟았다.● "아는 살아있다" 2011년 7월 은희는 교화소 문을 나섰다. 두만강변에서 보위부원들에게 체포된지 6년 7개월만이었다. 교화소에서의 마지막 4개월은 생존 투쟁의 나날이었다. 보이는 대로 낟알을 주워 먹었다. 쓰레기장에서 썩은 고구마를 찾아내 씹어 먹었다. 벌레는 잡히는 대로 입에 넣었다. 가족을 생지옥으로 팔아넘긴 민철에게 복수하려면 허약 2도에서 벗어나 살아야 했다. 은희는 출소하자마자 보위부원에게 남편의 생사부터 물었다. "무기수 중에 이명호가 없다. 그라면 어찌 됐겠니?" 남편 친구 말도 다르지 않았다. "너는 어떻게 명호가 살아있다고 보는가. 군대아들(민철이 북송시킨 탈영병 2명)도 다 죽었단다." 남편 친구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아는 살아있단다. (온성군) 창평으로 가보라." 현준이는 창평의 한 농가에 살고 있었다. 반쯤 열린 대문 사이로 마루에 앉은 아이가 보였다. 입양된 현준이는 양어머니 무릎에 앉아 재잘댔다. 보위부원들이 얼어붙은 두만강에 내동댕이쳤던 젖먹이가 어느새 7세가 돼 있었다. 이름도 바뀌어 있었다. 은희는 아들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양엄마를 친엄마로 알고 크는 게 행복할 것 같았다. 이제와서 아들을 반역자의 자식으로 살게 할 수는 없었다. ● 발 밑 자갈 소리 "한국 갈 돈 준비됐으이 넘어오라. 내 창바이(長白) 국경에 서있을 거이다." 한국에 간 새아빠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출소한 지 보름이 지나서였다. 은희의 엄마는 은희보다 5개월 앞선 2004년 1월 중국으로 탈북했다. 중국에서 조선족 남자와 결혼해 딸을 기다렸다. 엄마와 새 아빠는 북송된 딸이 돌아오길 기다리다 2008년 한국으로 갔다. 탈북을 결심한 은희는 갓 제대한 남동생과 혜산(북)-창바이(중)의 국경에서 만나기로 했다. 함북 온성군에서 양강도 혜산시까지는 걸어서 보름이 걸렸다. 보름이 지나자 압록강이 보였다. 150m 폭의 강만 건너면 중국이었다. 저녁 9시. 강둑 후미진 곳에 북한 군인이 나타났다. "강에 길 열어놨소. 지금 가면 되기요." 남매가 미리 돈을 쥐어준 군인이었다. 남매는 마지막으로 각자의 옷 주머니를 매만졌다. 국경에 도착하기 전 시장에 들러 산 칼이 하나씩 들어있었다. 단추를 누르면 칼집에서 칼날이 튀어 올라오는 자동 칼이었다. 칼날 길이는 7cm. 붙들릴 상황이 되면 다시 고초를 겪는 대신 자결할 계획이었다. 강둑을 걸어 강 초입에 도착했다. 발걸음을 뗐다. '자그락자그락.' 발밑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북한군이 야반 탈북자를 잡겠다며 압록강 초입에 깔아둔 자갈 소리였다. 자갈들은 서로 몸을 뒤섞으며 거친 소리를 냈다. 돈을 받은 군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소리는 밤공기를 타고 공명했다. "누기야." 북한군 초소 불이 켜졌다. 군인 7명이 뛰어나왔다. 은희는 온몸에 힘이 풀렸다. 함께 헤엄치던 동생의 손을 놓았다. 강 하류로 떠내려갔다. 동생은 누나를 뒤돌아보며 중국을 향해 헤엄쳤다. 강 건너 어둠 속에서 새아빠 실루엣이 우왕좌왕 흔들리고 있었다. 떠내려가던 은희는 주머니 속 칼을 꺼냈다. 칼이 튀어 올랐다. 배 깊숙이 찔러 넣었다. 군인들은 은희를 강둑으로 끌어냈다. 양쪽에서 팔을 잡고 강둑에 몇 차례 처박았다. 등을 발로 짓이겼다. 칼이 더 깊이 박혔다. 군인들은 은희를 바로 눕히고서야 배에 박힌 칼을 발견했다. "독종 간나. 제 배에 칼 꽂는 게 세상에 어디 있는가." 은희는 또 교화소에 가면 민철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분했다. 칼에 찔린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손효주·신광영 기자 hjson@donga.com※논픽션 드라마는 사건의 실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드라마 형식으로 재구성한 새로운 형식의 기사입니다. 공식 기록과 당사자 증언을 검증해 재연한 100% 실화(實話)입니다.}

    • 2013-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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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만강변의 배신]아버지의 선택

    《 (지난 줄거리) 중국으로 탈북해 숨어살던 이명호 장은희 부부는 한국으로 데려다주겠다는 탈북자 출신 채민철의 안내를 받아 차에 탔다. 하지만 민철이 부부를 내려준 곳은 북한 보위부원들이 숨어있는 ‘사지(死地)’였다. 은희는 보위부 수사관이 내민 북한 군사 기밀 문서를 보고 숨통이 막혔다. “남한에 가려면 필요하다”는 민철의 말을 믿고 남편이 그에게 건넨 문서였다. “사람이 이럴 수 있는가.” 은희는 치를 떨었다. 》망원경의 초점은 한참을 방황하다 자전거를 탄 소녀에게 멈췄다. 더 들이밀 수 없을 때까지 눈을 망원경에 파묻었다. 흰 셔츠에 남색 치마. 이목구비가 흐릿했지만 딸이었다. 이제 열세 살. 마지막으로 본 게 2년 전이다. 여덟 살이 된 아들은 키가 제법 자랐다. 머리가 자전거 손잡이 높이까지 왔다. 아들의 반질반질한 바지가 햇볕에 반짝였다. 아이들 옆 풀밭에 앉아있는 여자는 아내였다. 예전보다 더 말랐는지 얼굴뼈와 턱선이 도드라져보였다. 2004년 7월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채민철(가명·당시 39세)은 두만강 건너 북한 땅에 있는 가족들을 살펴봤다. 중국 옌볜(延邊) 두만강 접경도시인 투먼(圖們)에서 북한으로 연결되는 투먼대교. 이쪽 끝은 중국, 저쪽 끝은 북한이었다. 다리 아래 두만강이 흘렀다. 민철은 중국 쪽 다리 끝 옆에 있는 전망대에 서 있었다. 다리 길이 200m가 민철과 가족 간의 거리였다. 북한 쪽 다리 끄트머리에 세관이 있었다. 중국에서 건너온 무역상을 마중 온 사람들이 많아 감시의 눈길이 분산되는 곳이었다. 전날 민철은 북한에서 두 아이를 키우는 아내 허정애(가명·당시 37세)에게 전화를 했다. "내일 애들 데리고 세관 앞에 나오라. 거기서 놀아라." 정애는 세관 옆 풀밭에서 토끼풀 뜯는 척을 하며 아이들이 놀 시간을 확보했다. 남매는 강둑을 오가며 건너편을 힐끔힐끔 봤다. 전망대에는 관광객이 북적여 검은 점만 여럿 있었다. 아버지를 분간해낼 수는 없었다. 남매는 30분쯤 강둑을 기웃기웃하다 돌아갔다. 의심을 살까봐 더는 머물지 못했다. 세관을 통과해 나온 조선족 남자가 정애 앞에 포대자루를 내려놨다. "저쪽 아저씨가 전하랍니다. 아저씨가 애들 사진 몇 장 갖다달라니까 내일 다시 보기요." 자루에는 약초와 약통 몇 개, 쌀이 있었다. 정애는 간염과 폐병을 앓고 있었다. 아들은 각혈이 심해 코와 입으로 자주 피를 토했다. 그 날 먼발치에서 가족들을 본 뒤 민철은 투먼대교에 사람이 몰리는 매주 토요일 오후 3시 다리 앞에 나갔다. 아내와 아이들도 그 시간에 맞춰 건너편 강둑으로 나왔다. 민철은 2~3주에 한 번 남매와 통화했다. 버릇처럼 "키가 얼마나 컸는가"라고 물었다. ○ '윤 영감'을 만나다 민철은 다리를 건너 북한에 갈 수 없었다. '윤 영감'을 알게 돼 시작된 숙명이었다. 영감은 지령을 내리는 보위부 간부를 뜻하는 은어다. 윤 영감의 본명은 윤창주. 함경북도 국가안전보위부 반탐처장으로 반역분자나 간첩을 색출하는 책임자였다. 2001년 7월 윤창주를 처음 만난 곳은 정치범 고문으로 악명 높은 종성집결소 취조실이었다. 민철은 몽둥이에 맞아 코뼈가 부러져있었다. 눈 주변까지 파랗게 부어오른 민철에게 그가 물었다. "토마토 많이 따 먹었나?" 민철은 방금 전까지 토마토 수확에 동원됐다가 불려온 터였다. 한 달 간 조사만 받다가 불쑥 투입된 것이었다. 조사 받는 동안 거의 먹지 못했던 민철은 지도원 눈길을 피해 토마토를 입에 쑤셔 넣었다. 윤창주는 민철이 뭘 하다 불려 들어왔을지 꿰뚫고 있었다. "더 따먹어도 된다. 괜찮아." 집결소에서 처음 들어본 부드러운 말투였다. 윤창주는 머리가 희고 눈빛이 인자한 50대 후반의 남자였다. 배가 볼록 나오고 덩치가 우람한 전형적인 당 간부의 풍채였다. "죄는 없던 걸로 해줄 테니 나랑 한 번 일해 볼래." 시키는 대로 하면 살려준다는 말이었다. 민철의 죄목은 2001년 봄 북한사람 2명을 중국으로 탈북시킨 것이었다. 탈북브로커가 민철의 돈벌이였는데 빼돌린 이 중 하나가 요주의 인물이었다. 민철은 그의 중국 은신처를 알고 있었다. 민철은 망설이지 않았다. "반탐처장 동지 지시대로 중국 가서 잡아 오겠습니다." 중국 파견 전날 민철은 특별면회를 했다. 한 번 들어오면 생사가 불투명해지는 정치범 집결소에선 이례적이었다. 윤창주가 아내 정애를 직접 차에 태워 온 것이다. 정애는 핼쑥한 얼굴로 울먹였다. 민철은 이 면회가 격려용인지 협박용인지 분간되지 않았다.중국에서 잡아오겠다고 한 목표물의 행방은 묘연했다. 1년 넘게 진척이 없었다. 효용가치가 떨어진 끄나풀은 보호받기 어려웠다. 국가안전보위부(한국으로 치면 국가정보원)의 경쟁 정보기관인 조선인민군 보위사령부(보위사·한국으로 치면 기무사령부)가 민철의 과거 탈북 브로커 행적을 다시 들춰 수사에 들어갔지만 보위부는 그를 감싸지 않았다. 이번에 다시 잡히면 살아나올 가능성이 없었다. 민철은 중국에 숨어 지내다 2003년 7월 한국으로 탈북했다. 민철이 행방불명되자 그의 가족은 집에서 차로 1시간 거리인 시골마을로 추방됐다. 갱생차 트럭이 멈춰선 곳은 소 외양간 앞이었다. 민철의 아내 정애는 어린 남매와 이삿짐 보따리를 차에서 끌어내렸다. 축사에 소는 없고 빗물이 가득 차있었다. 구석에 보따리를 내려놓자 모기떼가 먼지처럼 피어올랐다. 물어뜯던 소들이 사라져 애타게 손님을 기다린 모기들이었다. 굶주린 모기들은 사람 손바닥에 짓눌려 으스러져도 살갗에 꽂은 주둥이를 빼지 않았다. 모기를 상대하는 사이 보따리는 땅의 축축한 오물이 스며들어 황토 빛이 됐다. 이 축사가 민철 가족의 유배지였다. ○ 두 아버지 민철은 한국에 온 지 1년 만에 다시 중국에 갔다. 가족이 추방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 그 후 상황을 알아봐야 했다. 중국에서 북한 골동품 밀무역을 하면 한국보다 돈을 더 쉽게 벌 수 있기도 했다. 정애와 연락이 닿은 건 2004년 7월. 수사를 피해 잠적한 지 2년 만이었다. 가족들은 유배지에서 1년 가까이 지내다 이제 막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투먼대교를 사이에 두고 매주 토요일 서로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어느 날이었다. 정애는 민철과의 통화에서 보위부원과 보안원(경찰관)의 '쫄쿠기(뜯어내기)' 얘기를 했다. 매일같이 찾아와 돈과 식량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남편이 행방불명이면 중국에 있을 테고, 그럼 돈을 보내줄 것이니 나눠 갖자"는 궤변을 늘어놨다. 보통 북한에서 행방불명자들은 가족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중국으로 간 뒤 번 돈을 가족에게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정애는 밉보일까봐 빚을 내 뇌물을 댔다. 수시로 있는 중앙당 검열에서 '행불자' 가족은 1순위 조사대상이었다. 검거 실적을 쌓으려 또 다시 추방 보내거나 감옥에 가두는 게 다반사였다. 어린 남매는 '도망자의 자식'으로 살게 될 터였다. 민철 역시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일곱 살 때 어머니가 사망했고 아버지는 군에서 제대하는 날 세상을 떴다. 열여섯 살에 군 입대 하던 날 민철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봤다. 민철이 은희의 남편 이명호(가명·당시 23세)를 알게 된 건 그 즈음이었다. 민철은 북한의 가족에게 돈을 전해줄 송금책을 찾고 있었다. 밀무역으로 잔뼈가 굵은 명호는 북한 국경경비대 군인들과 호형호제했다. 명호는 "가족들과 남한에 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민철은 흔쾌히 응했다. 둘 다 가족을 지켜야 하는 아버지였다.○ 비열한 거래 며칠 뒤인 2004년 9월 20일 민철은 중국 투먼역 대합실에서 낮 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2001년 윤창주 지령을 받고 중국에 나왔을 때 동료 겸 감시자였던 김용식이었다. "채 사장, 그동안 어디 있었어?" "홍콩에서 조폭 했다." 한국 갔다고 실토했다간 반역자로 몰릴 판이었다. 민철이 말을 이었다. "윤 영감하고는 연락하나?" 민철은 윤창주와 다시 연락하고 싶었다. 한 때 자기를 보호해준 사람이었다. 가족을 부탁하기엔 그만한 '빽'이 없었다. 석 달 뒤인 12월 12일, 민철은 윤창주의 전화를 받았다. 영감의 목소리는 여전히 자상했다. "채 동무, 가족은 안 데리고 갔더라. 나를 믿는다면 한 번 왔다가라." '가족은 안 데리고 갔더라'는 말의 속뜻을 민철은 여러 번 되새겼다. 윤창주는 공작원 교육 때 "체포할 땐 억지로 끌어오기 보단 스스로 찾아오게 하라"는 얘기를 자주 했다. 한 번 가면 못 올 수도 있었다. 이튿날 오후 8시 민철은 꽁꽁 언 두만강을 혼자 건넜다. 약속장소는 근처 기차굴이었다. 민철은 전날 윤창주와 통화하며 "남한에 귀순하려는 북한 탈영병 둘을 알고 있다"고 넌지시 말했다. 탈영병 두 사람은 명호가 민철에게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잡으려면 윤창주가 자신을 돌려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민철은 생각했다. 새카만 굴 안에서 라이터 불빛이 번쩍했다. 윤창주였다. "부탁이 있습니다." "가족들? 걱정마라. 잘 돌봐줄게." "온성에 아내가 애가 둘 있습니다. 잘 좀 막아주시기요." "채 동무는 내 일만 잘 도와주면 돼. 군인들 며칠 있다 체포하고."○ 잠든 아기 얼굴 문 밖에서 잠겨있는 자물쇠를 열자 안에서 '털컥'하며 총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 채민철이야." 안에 있던 두 남자는 문틈으로 민철의 얼굴을 확인하고 총을 거둬들였다. 명호가 숨겨주는 북한 국경경비대 탈영병들이었다. 민철은 조금 전 명호에게서 자물쇠 열쇠를 건네받았다. "오늘 (남한) 간다. 짐 챙겨." 민철은 김용식이 끌고 온 회색 지프차에 탈영병들을 태워 두만강변의 보위부 요원들에게 넘겼다. 그런데 용식이 당초 계획에 없던 요구를 했다. "이명호 식구들도 넘기자." "가는 안 돼. 여자랑 갓난애가 있다고." "윤 영감 지시다." 탈영병 체포 계획을 짜며 명호 가족 얘기를 슬쩍 했는데 용식이 윤창주한테까지 보고 한 것이었다. "여자랑 애기를 어떻게 넘기나." 결국 명호만 넘기기로 마음먹은 민철은 명호에게 전화를 걸어 "너만 먼저 가자. 내려오라"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옆에 있던 용식이 민철을 비웃듯 바라봤다. "간나 새끼, 너 남한 간 거 우리가 모를 줄 아나!" 민철은 심장이 죄어왔다. 윤창주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북한의 가족들은 더욱 위태로웠다. 용식은 윤창주에게 전화를 걸어 민철을 바꿔줬다. 영감의 중저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채 동무 새끼집(자식 사랑) 큰 거 내 잘 안다. 애들만 생각해." 이 때 명호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형님, 마누라가 왜 자기 안 데려가느냐고 난리요." 민철은 명호의 천진한 목소리에 숨이 막혔다. 한국에 간다고 들떠할 명호 부부의 얼굴 표정이 눈에 선했다. 가까스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오라. 다같이." 민철은 차 뒷좌석에 탄 명호 가족을 백미러로 쳐다봤다. 방금 전 북한에 넘긴 군인 두 명이 앉았던 자리였다. 명호 아들 현준이가 눈을 감고 아빠 가슴팍에 안겨있었다. 민철은 여권 사진을 찍으러 명호 부부를 사진관에 데려간 날이 떠올랐다. 그날 현준이는 지금 같은 표정으로 민철의 품에서 잠들어있었다.신광영·손효주 기자 neo@donga.com   ※논픽션 드라마는 사건의 실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드라마 형식으로 재구성한 새로운 형식의 기사입니다. 공식 기록과 당사자 증언을 검증해 재연한 100% 실화(實話)입니다.}

    • 2013-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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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만강변의 배신]베일 벗은 배신자

    《 (지난 줄거리) 중국에서 ‘한국행’을 기다리던 명호 은희 부부는 그를 구원자로 믿었다. 한국에서 온 탈북자 민철. 그의 안내로 지프에 탔다. 남쪽으로 간다면 왼쪽에 있어야 할 두만강이 오른쪽 차창으로 내다보이는 것 말고는 모든 게 순조로웠는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차가 멈추고 헤드라이트가 꺼졌다. 어둠에서 나타난 낯선 사내들의 그림자. ‘중국 공안인가?’ 은희의 착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   생후 8개월 된 아기가 꽁꽁 언 두만강 위에 내동댕이쳐졌다. 아기는 팔다리를 빳빳이 뻗고 부들부들 떨었다. '으앙으앙' 목청 찢어지는 소리가 차가운 밤공기를 갈랐다. 북한 보위부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현준이(가명)의 기저귀를 벗겨 칼로 북북 찢었다. "기저귀 두둑한 거 좀 보라. 이 독종 간나, 아 새끼 기저귀에까지 돈을 숨겨 놨구만 기래." 칼을 내두르자 노란 액체가 묻어나왔다. 현준이가 겁에 질려 싼 오줌이었다. 돈은 없었다. 현준이는 알몸으로 떨며 제 엄마만 봤다. 장은희(가명·당시 24세)는 눈범벅이 된 아기 얼굴을 닦아주려다 보위부원의 귀쌈(귀싸대기)에 나가떨어졌다. 2004년 12월 16일 오전 3시 중국 투먼(圖們) 도봉호텔. 불 꺼진 방에 혼자 앉은 채민철(가명·당시 39세)의 귀에 아기 울음소리가 맴돌았다. 소리를 떨치려 술을 들이켤수록 새파랗게 질린 현준이 모습은 더 생생해졌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6시간 전 그가 목격한 광경은 고량주 2병을 비워도 사라지지 않았다. ○ 두만강-12월 15일 전날 밤 9시경 투먼과 함경북도 온성군을 가르는 두만강변. 민철은 장은희 가족 체포조가 4명에서 순식간에 20여 명으로 불어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온성군 남양 북한군 중대부 초소에서 대기하던 보위부원들은 가족을 태운 차가 멈춰서자마자 두만강을 넘어 투먼으로 모여들었다. 초소는 두만강 중국 국경에서 100여 m 떨어진 지척이었다. 체포조는 은희를 걷어차고 귀쌈 때리기를 반복했다. 아기는 얼굴이 눈밭에 반쯤 박혀 바둥거렸다. "지도원 동지, 내 도망 안 갈 테니 현준이 좀 업고 가게 해주십시오." "이 개간나. 개소리 치지 말고 걸어라." 체포조는 밧줄에 묶인 가족을 군홧발로 차며 초소 방향으로 몰았다. 현준이는 누군가의 팔에서 몸을 비틀며 빠져나오려 했다. 경기를 일으킬 듯 자지러지던 아기는 이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덜덜 떨뿐 울지도 못했다. ○ 낯익은 뒷모습 부부는 고개를 숙이고 초소에 들어섰다. 은희가 아기의 상태를 살피려고 고개를 들면 군홧발이 날아왔다. 한 간부가 발길질을 만류했다. "아는 보게 해주라. 어차피 다 죽을 거 아이가." 은희가 고개를 들자 결박돼 벽을 보고 꿇어앉은 두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가죽점퍼를 입은 뒷모습은 움츠리고 있었다. 먼저 끌려온 탈북자인 듯 했다. 트럭 소리가 초소 밖에서 요란하게 퍼지더니 부대장급 간부 서너 명이 초소로 뛰어들었다. "개새끼들." 간부들은 두 남자에게 달려들어 뒤통수를 찍어 찼다. 얼굴이 벽에 부딪친 뒤 바닥으로 튕겼다. 피범벅이 됐다. 은희는 피로 물든 가죽점퍼를 유심히 봤다. 낯설지가 않았다. 은희 가족과 함께 숨어 살던 탈영군인 김정혁(가명·당시 22세)과 이광일(가명·당시 22세)이었다. 점퍼는 한 달 전 은희가 이들을 투먼시장에 데리고 가 사 입힌 옷이었다. "남한가면 옷 잘 입어야 돼. 이래 입고 모자도 쓰면 너거 군인인 줄 아무도 모를 거다." 정혁과 광일은 형수가 사준 옷을 들고 몇 달 만에 웃었다. '저 아들이 와 여기 있는가….' 두 시간 전 군인들의 은신처였던 투먼 석유제현공장 사택 3층. '끼이익.'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군인들은 얼어붙었다. 바깥에서 채워놓은 자물쇠 열쇠를 가진 사람은 은희의 남편 이명호(가명·당시 23세)와 이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조선족뿐이었다. 이들이 연락 없이 문을 여는 일은 없었다. 누군가 자신들을 잡으러 온 게 틀림없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가슴은 더 심하게 요동쳤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채민철이었다. "오늘 (남한으로) 가자. 짐 챙겨라." 군인들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형님, 정말입니까? 진짜지요?" 정혁과 광일은 아껴둔 가죽점퍼를 챙겨 입었다. ○ 결정적 증거 부부는 갱생차에 실려 온성군 보위부로 호송됐다. 보위부원이 원하는 답변을 할 때까지 끝나지 않을 조사를 받아야 할 처지였다. 구류장 배정 직전 두 사람이 같은 사무실에 남겨진 시간은 3초. 명호는 은희에게 한마디를 던진 뒤 구류장으로 끌려갔다. "일체 모른다." 모든 죄를 자신이 안을 테니 "아무것도 모른다"고 진술해 살아나가라는 얘기였다. 구류장에 들어가기 전 몸 검신(檢身)이 시작됐다. 보위부원은 은희 옷을 모두 벗겼다. "뽐뿌질 하라." 은희는 팔을 머리 위로 올린 뒤 나체로 앉았다 일어서는 동작을 반복했다. 그렇게 하면 질 안에 숨긴 돈이 빠져나온다는 것이었다. 수치심에 떨면서도 속으로 되뇌었다. '일체 모른다.' 조사가 이어졌다. 은희는 각목과 철제 의자로 맞아 온몸이 퉁퉁 부어 있었다. 조사를 받지 않는 시간은 9.9㎡(3평) 크기 구류장에서 죄수 15명과 앉아서 생활했다. 잘 때는 나란히 열을 맞춰 앉은 다음 뒷사람 배 위에 몸을 겹쳐 누웠다. 사람과 오물, 벌레 등 구류장 안 모든 것이 한꺼번에 썩어가며 악취를 내뿜었다. 얼음장 같은 바닥에는 벌레가 우글대는 걸레가 있었다. 이불이었다. 현준이를 누일 곳은 그 거적때기뿐이었다. 조사받은 지 10일째 되던 날 보위부원이 물었다. "니 채민철이 왔을 때 어떤 말했어?" 가슴이 철렁했다. "모르는 사람입니다." 보위부원은 기다렸다는 듯 종이 한 장을 꺼내 읽었다. "2004년 10월 중국 투먼 교원주택 8층 1호. 장은희는 남한 방송에 나오는 여배우를 보더니 '나 남한 가도 알리지 않을까요?(북한에서 온 거 티나지 않을까요?)' 하고 물었음." 은희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번졌다. 보위부원은 은희 표정을 힐끗 보고는 계속 읽어 내려갔다. "채민철이 '한국 가도 알려지지 않을 세련된 스타일'이라고 하자 웃으며 좋아함." 3개월 전 은희와 민철이 나눈 대화와 똑같았다. 심장이 내려앉으려는 순간 남편의 당부가 떠올랐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기래? 이래도 모른다 하는가 보자." 보위부원은 다른 종이를 은희 가슴팍에 내밀었다. '동계 훈련 명령서'라고 적힌 종이였다. 누군가 꾹꾹 눌러쓴 글씨가 가득했다. 말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조선인민군 최고 사령관 김정일.' 은희는 얼어붙었다. 남편의 당부도 더는 생각나지 않았다. ○ 그날만 불이 켜졌다 은희 가족이 숨어 지낸 투먼의 아파트는 늘 어두웠다. 빈집으로 위장하려고 불을 켜지 않았다. 불을 켜는 순간 보위부원 군홧발 소리 수십 개가 아파트 곳곳으로 파고들 것 같았다. 소리가 멈추는 동시에 보위부원들이 문을 부수고 집으로 들이 닥치는 상상이 은희를 괴롭혔다. 2004년 12월 초. 불을 끄고 거실에 앉아 있던 은희의 눈길이 작은방 문틈으로 향했다. 하얀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두런두런하는 소리도 들렸다.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문을 열어젖히자 갇혀있던 빛이 쏟아졌다. 담배 연기까지 가득해 방은 더 환해보였다. 방 안에는 남편과 정혁, 광일이 있었다. 명호는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들고 수화기 너머 한 남자가 불러주는 말을 따라 읊었다. 정혁은 명호가 읊는 말을 종이에 써내려가고 있었다. 광일은 창가에서 망원경을 들고 북한군 초소 쪽을 살폈다. 세 남자는 줄담배를 피웠다. 수화기 너머는 남편과 친분이 있는 북한 군인인 듯했다. 남편은 은희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계속 했다. "2004년도 동계 훈련을 다음과 같이 진행할 것을 명령한다. 군종, 병종, 전문병 부대, 구분대(대대 아래의 부대 조직단위)들의 훈련 달수는 다음과 같이 할 것. 땅크병구분대 7달, 비행구분대 12달…." "전자전병훈련은 적의 무선전자수단들의 배치 위치를 신속 정확히 판정하여 적극적인 전파 장애를 조성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매월 일선 부대에 직접 내려 보내는 훈련 명령서였다. 군사기밀이었다. 유출은 곧 총살이었다. 다음 날 명호는 안절부절못했다. 은희는 명호가 은희 가족의 은신처를 지공한 조선족과 통화하며 하는 말을 들었다. "채 형이 국정원 사람에게 명령서를 줘야 남한에 수월하게 갈 수 있대요. 명령서를 복사해서 채 형한테 얼른 줘야 합니다." 명호는 필사적이었다. 얼마 전 중국 다롄(大連)의 일본 국제학교에 들어가 망명 요청을 하려다 실패하는 바람에 보위부가 명호 가족을 잡겠다며 혈안이 된 터였다. 명호는 마지막 동아줄이라 믿은 민철에게 명령서를 건넸다. 그 명령서가 은희 앞에 놓여있었다. ○ 화장실 밀담(密談) 은희는 계속 먹지 못했다. 구류장 식사로 나오는 썩은 강냉이죽은 먹으면 바로 탈이 났다. 껍데기가 둥둥 떠있는 데다 코를 찌르는 시큼한 냄새 때문에 입에 대기 힘들었다. 민철의 정체를 알게 되자 배고픔도 잊었다. 젖도 말라버렸다. 현준이는 남은 기력을 다해 울었다. 강냉이죽이 나오면 고개를 돌리던 현준이가 어느 날 입을 뻐끔뻐끔했다. 은희가 할 수 없이 죽을 떠주자 입을 쫙쫙 벌려 받아먹었다. 은희는 민철에게 묻고 싶었다. 이렇게 할 거면서 왜 현준이를 친아들처럼 예뻐했냐고. 아기를 보고도 어떻게 승냥이로 변할 수 있었느냐고. 체포 12일 만인 12월 27일, 구류장 문이 열렸다. 간수가 들어섰다. "애기를 안고 나오라." 은희는 직감했다. 구류장에 수감된 여성의 아기는 입양 보낸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저한테 애기 떼면 안 됩니다. 나 죽거든요. 차라리 날 죽게 해주세요." 울며 발버둥을 치다 혼절했다. 그날 밤 은희는 간수를 불렀다. "선생님, 저 대변보겠습니다." 1호 구류장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소변은 방에서 해결하지만 대변을 보려면 복도 끝 화장실에 가야 했다. 2, 3호를 지나 4호 앞에서 멈춰 섰다. 철창을 톡톡 건드렸다. 명호에게 화장실로 오라는 신호였다. 대변 전용 화장실은 가까이만 가도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간수들은 '사람 갈 곳이 못 된다'며 감시하지 않았다. 부부가 1, 2분이나마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현준이 아부지, 현준이를 떼갔습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은희는 오물 범벅인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일그러진 얼굴에서 소리 없는 눈물이 흘렀다. 명호는 은희 옆에 쪼그려 앉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효주·신광영 기자 hjson@donga.com논픽션 드라마는 사건의 실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드라마 형식으로 재구성한 새로운 형식의 기사입니다. 공식 기록과 당사자 증언을 검증해 재연한 100% 실화(實話)입니다.}

    • 201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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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만강변의 배신]국경의 덫

    《 두만강에는 야만의 법칙이 흐른다. 상대를 죽여 내가 사는 것이 중국 두만강 국경의 생리다. 9년 전 어린 남매의 아버지였던 탈북자 스파이 채○○ 씨(48)는 비열한 순응을 택했다. 그는 자신과 가까웠던 또 다른 아버지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구원의 손길을 가장한 배신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한국에 가려 했던 탈북자 일가족은 사지(死地)로 내몰렸다. 부부는 20대였고 아들은 8개월 된 젖먹이였다. 북한 국가안전보위부는 부인과 13세 딸, 8세 아들을 북한에 남겨두고 탈북한 채 씨에게 ‘작업’을 제안하며 “가족을 잊지 말라”고 했다. 부정(父情)과 인정(人情). 그 사이에서 채 씨는 한쪽을 택했다. “내 자식들은 나처럼 꿈 없이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채 씨의 선택으로 다른 탈북자 가족의 삶은 풍비박산이 났다. 채 씨의 죗값은 과연 얼마일까. 동아일보 탐사보도팀은 채 씨가 탈북자 일가족 납치 북송에 가담하기까지 지난 10여 년간 행적을 되짚어봤다. 총성이 사라진 북-중 국경에서 남북한 정보당국이 벌이는 음모, 북한체제의 농간에 스러져간 두 가족의 좌절과 투쟁을 목격했다. ‘드라마’ 형식을 빌리지 않고는 제대로 전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취재팀은 8월부터 두 달간 채 씨와 피해자, 양쪽 가족들, 검경 수사팀, 사건 목격자와 신고자 등 주변 인물을 2∼7차례 만나 심층 인터뷰했다. 기사는 검찰 공소장과 수사기록, 1심 판결문, 당사자 증언 등을 통해 확인된 사실만을 토대로 재구성했다. 본보는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100% 실화를 재현하는 ‘논픽션 드라마’를 앞으로도 계속 선보일 계획이다. 》 회색 지프차에는 5명이 타고 있었다. 조수석의 남자는 낯이 익었다. 두 달 전 집에서 본 남자였다. 운전사는 말이 없었다. 한국말을 모르는 중국남성인 듯 했다. 왼쪽에 앉은 남편 가슴팍에 생후 8개월 된 아들이 잠들어 있었다. 장은희(가명·당시 24세)는 차창 밖을 내다봤다. 꽁꽁 언 두만강이 어둠 속에 멈춰 있었다. 반 년 전 아들을 업고 건널 땐 가슴까지 차오르던 강이었다.2004년 12월 15일 오후 9시. 중국 옌볜(延邊) 두만강 접경도시인 투먼(圖們)의 외곽도로를 10여 분째 가고 있었다. 차 안은 고요했다. 남편이 초조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형, 저 두만강 건너에 있는 게 강양군대(북한군 국경경비대) 아닌가?" 조수석의 남자는 반응이 없었다. '남한행' 차에 탔지만 은희는 안심하지 못했다. 가는 길에 중국 공안이 차를 세우는 상상이 떠올랐다. 6개월 간 숨어 살 때 제복 입은 사람을 보면 심장이 내려앉던 관성이 남아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순조로웠다. 남쪽으로 간다면 왼편에 있어야 할 두만강이 오른쪽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것 말고는….○ 은신처에 찾아온 남자 조수석의 남자가 집에 나타난 건 두 달 전인 10월 어느 날이었다. 짧은 스포츠형 머리에 검은 양복 차림이었다. 키는 북한에선 평균인 165㎝ 정도. 그는 쌍꺼풀 진 큰 눈을 번뜩이며 목례를 했다."우리를 한국에 보내줄 채 형이야." 남편 이명호(가명·당시 23세)가 그를 소개했다. 은희는 생후 6개월 된 아들 현준(가명)이를 안고 채민철(가명·당시 39세)을 빤히 쳐다봤다. 낯선 사람이 집에 온 건 중국 투먼에 숨어 산 지 넉 달 만에 처음이었다. 투먼은 북한 최북단인 함북 온성군에서 두만강만 건너면 나오는 중국 땅. 남한에 가려고 '선'을 찾는 탈북자가 많다. 명호와 은희는 그해 6월 갓난아기를 데리고 이곳으로 탈북했다. 명호가 밀무역을 할 때 친해놓은 조선족의 집에 숨어 지냈다. 은신처는 중국과 북한을 잇는 투먼대교 옆 8층짜리 아파트 꼭대기 층이었다. 망원경으로 보면 북한 초소의 군인들 얼굴표정이 보였다. 민철은 거실로 들어서며 말했다. "어? 한국 거 보네." 드라마 '올인'이 TV에 나오고 있었다. 집 안 구석구석을 살피는 민철의 바쁜 눈빛이 은희와 마주쳤다. 민철은 은희 품에 있던 현준이를 끌어안았다. "야, 이 새끼 잘생겼다." 민철은 아기와 이마를 맞대고 익살스런 표정을 지었다. 은희가 외출 준비를 하는 내내 민철은 아기를 무릎 위에 앉혔다. 민철이 볼을 비비자 현준이는 수염에 따가워하며 몸을 비비 꼬았다. 다 같이 사진관으로 옮겨서도 민철은 현준이를 안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 녀석, 화보 모델해도 되겠다." 이날 명호와 은희는 여권 사진을 찍었다. 위조 여권으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간다는 게 며칠 전 민철이 명호에게 제시한 계획이었다. ○ "형님 배를 따오면 살려준답니다" 명호는 '쫄쿠기(뜯어내기)'를 못 견뎌 탈북을 결심했다. 명호는 중국과 북한을 오가며 송이버섯 밀무역으로 생계를 꾸렸다. 장사를 하려면 북한 최고 정보기관인 국가안전보위부와 보안원(경찰)의 묵인이 필수였다. 두 기관에서 하루씩 교대로 명호 집을 찾았다. 달라는 뇌물을 주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었다. 이들을 피해 다니자 명호는 곧바로 체포 대상이 됐다. 밀무역을 하며 다져놓은 북한군과 보위부 인맥은 명호를 조여 오는 수사망으로 돌변했다. 남한행은 살기 위한 선택이었다. 탈북한 지 석 달 만인 2004년 9월 명호는 투먼 시내 음식점에서 민철을 만났다. 민철은 "청진에서 군함 타고 나갔다가 수영해서 한국에 귀순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의 무용담은 명호를 사로잡았다. 1년 전 탈북자 25명이 베이징 한국대사관에 들어가려다 중국 공안에게 잡힌 사건 때문이었다. 이후 남한으로 가는 '선'이 끊겨 민철 같은 유경험자가 귀했다.당시 명호는 며칠 전 일 때문에 신경이 더욱 곤두서 있었다. 북한 국경경비대 상등병 김정혁(가명·당시 22세)과 이광일(가명·당시 22세)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명호가 밀무역을 할 때 뒤를 봐줬고 탈북할 때도 두만강 길을 열어준 군인들이었다. "(보위부에서) 형님 배를 따오면 살려준답니다." 명호는 표정이 굳어졌다. 친형제로 여기는 동생들이라도 조심했어야 했다. 명호 가족의 탈북을 도운 게 발각돼 총살 위기에 놓였다가 체포 임무를 받고 파견된 것이었다. 탈북을 도와준 사람을 체포용 미끼로 쓰는 게 보위부의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하지만 정혁은 곧 중국으로 찾아온 속내를 털어놨다. "형님 못 죽이겠소.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읍시다. 남한 같이 가요." 명호는 정혁과 광일을 숨겨줬다. 가족과 사는 아파트에서 10km쯤 떨어진 석유공장 뒤편 다세대주택 3층이었다. 이곳 역시 명호를 숨겨준 조선족의 집이었다. 명호는 밖에서 자물쇠를 채우고 전기를 끊어 빈집으로 위장했다. 탈영병 은닉죄는 잡히면 살 길이 없었다. ○ 비정한 국경 도시 투먼은 돈과 안전을 위한 배신이 일상화된 도시였다. 누군가의 최소한의 선의에 내 생명을 맡겨야 했다. 북한 공작원들이 중국 공안 복장을 하거나 탈북 브로커 행세를 하며 탈북자를 색출했다. 돈벌이로 탈북자 은신처를 보위부에 일러바치는 조선족도 많았다. 북한에서 송이버섯이나 골동품을 가져올 판로를 보장받는 대가로 정보를 넘기는 식이다. 이들은 북한 정보를 한국 국가정보원 요원에게 팔아넘기는 이중 스파이 짓도 했다. 명호 역시 국정원 첩보망의 한 고리였다. 북한 쪽 인맥을 통해 빼낸 정보를 넘기며 도피자금을 벌었다. 명호는 투먼을 벗어나려 했다. 중국 다롄(大連)에 있는 일본 국제학교에 뛰어들어 망명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명호 가족과 탈영병 둘을 포함해 탈북자 16명이 탄 승합차가 학교 앞에 도착했을 때 아무도 내리지 못했다. 교문 앞에 공안 차량이 이미 와 있었다. 차에 탄 누군가에게서 계획이 새나간 것이었다. 투먼에 돌아온 명호는 더욱 초조해했다. 다롄의 승합차 안에 숨어있던 스파이에게 얼굴이 노출됐기 때문이었다. 바삐 한국으로 떠나야 했다. 민철과 가까워진 건 그즈음이었다. 대부분의 브로커가 한국에 가본 적 없는 조선족이었는데 민철은 달랐다. 한국 주민등록증을 갖고 있었고 남한행에 성공한 경험이 있었다. 명호는 민철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나중에 잡히면 정치범으로 몰릴 수 있어 탈북자들끼리도 함부로 하지 않는 말이었다. "남한에 가려고 하는데…. 형이 도와줄 수 있소?" 민철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내가 직접 데려가줄게." 명호는 민철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탈영병 둘도 데리고 있어서 걔들부터 빨리 보내야 될 것 같소." "그러면 네가 다친다. 손 떼는 게 좋지 않겠냐." 명호는 민철이 자신을 걱정해주는 것에 고마워했다. 민철은 돈이 궁하던 명호에게 100달러까지 지폐를 종종 쥐어줬다.○ 합승의 함정 민철과 남한행을 상의한 지 두 달쯤 뒤인 2004년 12월 15일 오후 8시. 명호는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다 민철의 전화를 받았다. 명호는 전화를 끊고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은희랑 애기는 왜 안 데려가겠다는 거야?" 이를 들은 은희가 식탁에 앉은 채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에 (남한) 못 가면 언제 간단 말입니까. 우리도 남자들 있을 때 끼어서 갈 기라요." 명호는 다시 민철에게 전화를 걸어 3, 4분 만에 통화를 끝냈다. "짐 싸라. 다 같이 간다." 명호 가족은 8층을 걸어서 내려왔다. "명호야." 민철의 목소리였다. 200m쯤 떨어진 곳에 지프차가 있었다. 명호 가족이 탄 차는 정적 속에 10분쯤 달렸다. 민철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는 차를 세우고 밖에서 통화를 하고 들어왔다. "명호야. (함경북도 온성군) 상탄에서 사람 하나 넘어오기로 했다. 받아서 같이 가자." "아, 그럼 그렇게 하기요." 탈북브로커를 한 적이 있는 명호는 '남한행 합승'이 간혹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차는 교차로에서 U턴해 두만강변 외곽도로로 들어섰다. 민철의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이번엔 차 안에서 전화를 받았다. "어, 어, 어." 민철은 나직이 대꾸만 했다. 운전사는 곧 한적한 갓길에 차를 세웠다. 시동과 헤드라이트도 껐다. 한겨울 국경의 밤은 적막했다. 어둠 속에서 남자 2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현준이 아버지, 둘 다 남자입니다. 남한 가는 길에 좋겠습니다." 은희는 험한 길에 건장한 사내들이 동행하는 것을 다행스러워했다. 나란히 오던 남자는 좌우로 갈려 각각 뒷좌석 쪽으로 다가왔다. 은희가 있는 오른쪽 문을 연 남자는 차에 엉덩이를 들이밀며 말했다. "야, 이 개간나, 안으로 들어가라." '이런 막 돼먹은 인간.' 은희는 생각했다. 명호 쪽에도 남자가 끼어 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차 앞쪽에 또 다른 남자 두 명이 나타났다. 은희는 '차는 좁은데 무슨 사람이 이리 많나' 하며 의아해했다. 그 순간 남자들은 은희와 명호의 팔을 꺾어 수갑을 채웠다. 은희는 차 문을 열려고 몸부림 쳤다. 밖에는 중국 공안 복장을 한 남자가 한 명 더 와 있었다. 차 밖으로 끌려나와 강변 쪽 절벽으로 발길질을 당했다. 그때만 해도 은희는 돈을 얼마나 줘야 공안이 풀어줄지 생각했다. 눈밭에 나뒹구는 엄마 아빠를 보고 현준이가 울기 시작했다. 울음 사이로 북한말이 들려왔다. "야, 빨리 빨리 빠져라. 복잡하게 놀지 말고." 괴한들에게 반말을 하는 민철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은희는 정신이 들었다.신광영·손효주 기자 neo@donga.com}

    • 2013-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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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종 복원 ‘두번째 도전’ 성공할까

    사라진 토종 여우를 복원하기 위한 ‘두 번째 도전’이 경북 영주시 소백산국립공원에서 이뤄진다. 21일 국립공원관리공단에 따르면 경북 영주시 순흥면 종복원기술원 중부복원센터에서 적응 훈련을 받고 있는 여우 22마리 가운데 자연적응력이 가장 뛰어난 6마리가 27일경 방사될 예정이다. 공단은 앞서 2006년 멸종위기 야생동식물 증식 복원 종합계획을 수립했고 2011년 소백산 자락에 9600m²(약 2900평) 규모의 자연 적응 훈련장을 만들었다. 마침내 지난해 10월 31일 처음으로 암수 여우 한 쌍을 방사했다. 하지만 암컷 여우는 방사 6일 만에 경북 영주시 부석면 임곡리 한 민가 아궁이 안에서 폐사한 채 발견됐다. 수컷 여우도 11월 21일 충북 단양군 가곡면 야산에서 창애(톱니가 달린 덫)에 걸린 채 발견돼 결국 왼쪽 다리를 절단했다. 토종 여우 첫 복원 시도가 실패한 원인은 여우들의 적응 훈련 기간이 3, 4개월로 너무 짧았던 것과 방사 시기가 너무 늦어 날씨가 추워진 점 등이 지적됐다. 이번에는 방사 시기가 지난해보다 한 달가량 빨라졌다. 여우들의 적응 훈련 기간도 최장 1년에 이를 정도로 길다. 특히 올해는 실제 서식환경에서 생활해 보게하는 ‘자연방사장’ 과정이 새로 도입됐다. 이성호 기자 starsky@donga.com}

    • 201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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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쓰레기가 돈이다]음식쓰레기 종량제 Q&A

    올 6월부터 전국에 확대 시행되고 있는 음식물쓰레기 종량제. 주부들은 추석(19일)을 맞아 음식 준비는 물론이고 잔반 등 쓰레기 배출을 어떻게 할지 고민이 깊다. 궁금증을 문답형식으로 정리했다. Q. 음식물쓰레기 종량제를 해야 하는 이유는….(경기 성남시 이수진·42) A. 음식물쓰레기가 무분별하게 배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다. 우리나라는 하루에 약 1만5000t의 음식물쓰레기가 배출되고 있다. 그 처리비용과 환경오염으로 인한 경제적 낭비를 환산하면 연간 20조 원에 이른다. 종량제는 버린 만큼 수수료를 내는 방식(월 1000∼1500원)이다. 쓰레기를 적게 버린 가정에 혜택을 주자는 취지다. Q. 우리 집은 예전부터 음식물쓰레기를 분리해서 버렸는데 이번에 바뀐 부분은….(부산 중구 최재연·30) A. 음식물쓰레기 종량제는 10여 년 전부터 일부 지역에서 실시됐고 전국에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2010년 이후다. 현재 144개 대상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94%인 136개 지자체가 시행하고 있다. 올해 안에 전 지역으로 확대될 예정이다. 음식물 분리배출 의무지역이 아닌 군 지역은 실정에 맞게 자율 시행이 가능하다. Q. 음식물쓰레기 분리 배출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쓰레기를 처리하는 비용은 더 늘어나는 것 같다. 또 이 쓰레기들이 제대로 재활용되고 있나.(경기 수원시 강현진·39) A. 가구별로 체감 금액이 다를 수 있지만 쓰레기 배출 수수료는 대부분 지역에서 종량제 시행 전과 비슷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 구리시의 경우 기존 1500원에서 700∼800원 수준으로 감소하기도 했다. 또 현재 배출되는 음식물쓰레기의 95% 이상이 사료와 퇴비 등으로 재활용되고 있지만 일부 지자체는 자원화 시설 미비로 소각 처리하는 경우도 있다. Q. 음식물쓰레기를 버리는 방식이나 수수료가 왜 지역마다 다른가.(인천 연수구 김윤수·39) A. 지자체마다 쓰레기 처리 여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자동계량(RFID), 전용봉투, 납부칩 방식 등 다양한 방법으로 쓰레기를 수거한다. 수수료도 재정자립도 등을 고려해 결정한다. 자동계량 방식은 ‘버린 만큼 부담한다’는 종량제 취지와 가장 부합하고 주민 만족도도 높지만 관련 장비를 구입하는 데 부담이 있어 국고 지원을 하고 있다. 환경부는 “자동계량을 도입한 지자체의 경우 쓰레기 양이 평균 18%, 최대 40%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고 밝혔다. Q. 추석에 음식물쓰레기가 많이 나올 텐데 줄이는 방법은….(서울 강서구 이희경·60세) A. 환경부는 각 가정에서 음식물쓰레기를 줄일 수 있도록 스마트폰 앱 ‘우리 집 냉장고’를 최근 개발했다. 주요 식재료 100여 가지에 대한 각종 정보가 정리돼 있어 식재료명을 입력하면 싱싱하게 관리하는 요령, 친환경 조리법 등에 관한 조언을 얻을 수 있다. 환경부는 또 14일 서울역 귀성객을 대상으로 ‘환경을 위한 우리 가족의 세 가지 약속’ 행사를 열고 음식물쓰레기와 온실가스를 줄이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할 예정이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2013-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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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생자만 있고 발포명령자 없는 ‘5·18 모순’ 33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미납 추징금을 모두 내겠다고 발표했지만 5공화국에 대한 진정한 역사청산은 아직 요원하다. 특히 계엄군의 총격으로 민간인 165명(정부 집계)이 사망한 5·18민주화운동 당시 발포 명령자 규명은 반드시 이뤄져야 할 역사적 과제다. ‘5·18특별법’이 제정된 1995년 합동수사본부가 꾸려졌고 2007년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까지 이뤄졌지만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군 자위권 발동을 주장했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 발포 명령자는 끝내 찾지 못했다. 총에 맞아 숨진 사람은 있는데 총을 쏘라고 한 사람은 없는 모순이 33년째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최근 ‘12·12, 5·18합동수사본부’의 판결문과 검찰 공소장을 살펴보고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이희성 전 육군참모총장 인터뷰, 5·18단체 면담 등을 통해 발포 당시 상황을 되짚어봤다. 1995년 검찰 수사 결과를 보면 계엄군이 첫 총격을 가한 건 1980년 5월 20일 오후 10시 반 광주역 앞에서였다. 18일 대학생을 주축으로 한 시위대와 공수부대 간의 갈등이 격화되기 시작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이날 3공수여단 군인들에게 실탄이 지급됐고 M-16 소총으로 시민들을 위협하는 과정에서 시민 4명이 사망했다. 이튿날인 21일 오후 1시 반 전남도청 앞에선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를 조준한 총격이 있었다. 오후 3시 50분 광주우체국 앞에서도 총격전이 벌어져 이날에만 38명의 민간인이 사살됐다.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의 상부 지휘라인은 이희성 계엄사령관(당시 육군참모총장)-진종채 2군사령관-윤흥정 전투병과교육사령관-정웅 31사단장-각 공수부대 여단장이었다. 이들 중 누구도 발포 명령을 했다고 인정한 사람은 없다. 검찰 공소장을 보면 당시 신군부의 수괴였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첫 총격이 있었던 20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윤흥정 전교사령관이 시위 진압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작전 책임자를 소준열 육군종합행정학교장으로 교체해달라고 요구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 조사 때는 전 씨가 군의 자위권 발동을 주장한 사실도 드러났다. 과거사위가 입수한 2군사령부 문서에 따르면 ‘1980년 5월 21일. 전 각하(전두환) 초병에 대해 난동 시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라고 돼 있다. 1996년 열린 5·18 관련자 재판에서 법원은 1980년 5월 21일 오후 4시 35분 주영복 당시 국방부 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정도영 보안사 보안처장 등이 회의에서 자위권 발동을 결정했고 계엄군은 이를 발포 명령으로 받아들였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군 수뇌부로 하여금 자위권 발동을 결정하게 한 사람이 전두환이라고 아니 볼 수 없고, 이희성 주영복이 그 요구를 적극 수용했다”며 전 씨의 책임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군 수뇌부의 공동 책임을 묻는 데 그쳤을 뿐 발포 명령자를 색출하지는 못한 것이다. 특히 법원은 자위권 발동 결정 전 벌어진 총격에 대해선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국방부 과거사위 관계자는 “당시 발포 명령과 관련된 자료가 남아있지 않고 전 씨 등 관련자들이 진술을 기피해 한계가 있다”며 “발포 명령자가 누구인지 물증이 없어 실명을 밝히지 못했다”고 말했다. 당시 최고 지휘권자였던 이희성 전 육군참모총장(89)은 10일 “당시 지휘권은 윤흥정 전교사령관이나 후임인 소준열 전교사령관(1980년 5월 22일 부임)에게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윤 씨와 소 씨는 각각 2002년과 2004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이처럼 발포 명령의 진실을 알만한 이들 중 일부는 사망하고, 생존자는 책임을 회피하고 있어 국가 공권력 차원에서 의지를 갖고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신광영·손효주 기자neo@donga.com}

    • 2013-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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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 발포’ 규명 등 5共청산은 이제부터…

    1988년 11월 23일 오전 9시 32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 응접실. 퇴임한 지 1년이 채 안 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생중계되는 TV 카메라 앞에서 침통한 표정으로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을 읽어 내려갔다. 믿었던 동지 노태우 대통령은 여소야대 정국에서 야당의 ‘5공 청산’ 요구를 거부하지 못했고 전 전 대통령은 이날 강원도 백담사로 은둔의 길을 떠났다. 이순자 여사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12·12쿠데타 당시 전 전 대통령 측으로부터 하극상을 당했던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은 1993년 7월 전 전 대통령 등을 내란혐의로 고소·고발했다. 그러나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이듬해 10월 ‘공소권 없음’이라고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심판대에 제대로 오르지도 못한 첫 번째 심판이었다. 1995년 10월 노태우 전 대통령이 수천억 원대 비자금을 갖고 있다고 당시 박계동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폭로하면서 두 번째 심판이 다가왔다. 이를 계기로 김영삼 대통령이 ‘역사 바로 세우기’를 내세우며 5·18특별법 제정을 공식화했고 검찰은 다시 전 전 대통령을 향해 수사의 칼날을 겨눴다. 1995년 12월 2일 오전 9시, 이번에는 전 전 대통령이 연희동 자택 응접실이 아닌, 집 앞 골목에서 ‘대국민 담화’를 읽었다. 이른바 ‘골목성명’이었다. 7년 전의 초췌한 표정은 간데없이 성난 얼굴이었다. 그는 “검찰의 태도는 진상 규명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분히 현 정국의 정치적 필요에 따른 것이라고 보아 저는 검찰의 소환 요구 및 여타의 어떠한 조치에도 협조하지 않을 생각입니다”라고 밝히고는 고향 경남 합천으로 떠나 버렸다. 하지만 이튿날 합천까지 내려온 검찰 수사관들에 의해 전 전 대통령은 서울로 송환됐다. 그리고 1997년 4월 그는 군사반란 및 내란죄 혐의로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두 번째 심판의 결과였다. 그해 12월 22일 그는 사면됐다. 하지만 그가 재임 기간 거둔 정치자금 중 사적(私的) 용도로 챙겨 뒀다고 법원이 판단한 2205억 원의 추징이 문제였다. 1997년 법원이 추징금을 확정하면서 확보한 전 전 대통령의 재산은 약 239억 원. 이후 16년 동안 추가로 추징한 돈도 290억 원 남짓에 불과했다. 그러나 현 정부 들어 민주당은 추징시효를 연장하고 불법 재산과 거기서 유래한 재산을 별도 절차 없이 가족 등에게서 추징할 수 있도록 하는 ‘공무원 범죄에 관한 몰수 특례법 개정안’, 일명 ‘전두환 추징법’을 5월 발의했다. 6월 초 전 전 대통령의 장남 재국 씨가 조세회피처인 버진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를 소유하고 있다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의 폭로가 나오면서 ‘전두환 추징법’ 처리에 불이 붙었다. 전 전 대통령은 대통령 단임 약속을 지켰고 헌정 사상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뤘다는 점 등을 공적으로 내세워 왔다. 하지만 국민은 그가 권력을 쥐는 과정에서의 군사쿠데타 및 5·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5공 기간 자유와 언론을 탄압한 기억을 잊지 않았다. 특히 5·18 민주화운동 중 계엄군의 총격 등으로 민간인 165명(정부 공식 통계)이 사망했지만 누가 최초 발포 명령을 했는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1995년 검찰의 수사 결과엔 1980년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발포명령 하달 과정에 연루된 정황이 두루뭉술하게 나타나 있을 뿐이다. 5공의 업보를 심판하고 역사적 과오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와 시대적 요구가 퇴임 후 25년이 지나 불법취득 재산에 대한 추징금 납부 선언을 이끌어냈다. 나머지 부분의 5공 청산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셈이다.민동용·신광영 기자 mindy@donga.com}

    • 2013-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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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두대간 가장 많은 수종은 신갈나무

    한반도의 중심 생태축인 ‘백두대간(白頭大幹)’은 산양 삵 하늘다람쥐 등 멸종위기종과 천연기념물의 주요 서식지다. 전체 길이는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1400km에 달한다. 남한 쪽 구간은 강원 고성군 향로봉에서 지리산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684km. 생태계의 ‘보물창고’인 이 백두대간에 사는 동식물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생태지도’가 국내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산림청과 녹색연합은 백두대간 남한 지역을 10개 구간으로 나눠 각 구간의 대표 수종과 동식물을 선정했다고 9일 밝혔다. 생태지도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 식물 가운데 33%, 특산종 가운데 27%가 백두대간에 분포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많이 자생하는 나무는 해발 200∼1900m까지 다양한 고도에서 고르게 발견된 신갈나무였다. 한국 특산종 중 가장 많은 것은 20여 개의 작은 흰 꽃이 무리지어 피는 꼬리진달래와 구상나무였다. 구상나무는 전 세계에서 지리산 덕유산 한라산 등 세 곳에서만 자생하는 희귀 나무. 백두대간에는 멸종위기 동물 30종도 함께 살고 있었다. 1급인 반달곰은 지리산, 사향노루는 설악산, 산양은 점봉산, 수달은 두타산에서 발견됐다. 그러나 백두대간 식생이 상당 부분 파괴돼 황토색 민낯을 그대로 드러낸 지역이 적지 않았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2013-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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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쓰레기가 돈이다]음식물쓰레기 처리법

    음식물쓰레기 종량제가 도입됐지만 가정에서 쓰레기를 잘못 분류해 처리비용을 더 부담하거나 친환경 재활용이란 본래 취지를 못 살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음식물쓰레기를 한데 모아 버리면서 악취나 벌레가 생기지 않게 살충제를 뿌리거나, 일반 쓰레기를 음식물쓰레기로 잘못 알고 버리는 사례 등이 대표적이다. 5일 환경부에 따르면 2011년 수거된 음식물쓰레기 1만3537t의 95%는 사료나 퇴비, 바이오가스로 전환됐다. 하지만 살충제 등 화학물질에 오염된 음식물쓰레기는 이런 재활용이 불가능하다. 자연 부패해 쉽게 분해되는 물질만 음식물쓰레기로 배출하는 것도 중요하다. 동물 뼈나 어패류 껍데기, 계란 또는 견과류 껍데기, 복숭아씨, 카페인 성분을 포함한 차와 한약재 등은 자연분해가 어려워 일반 쓰레기로 버려야 한다. 이런 물질이 음식물쓰레기와 섞이면 퇴비나 사료의 품질이 떨어질 뿐 아니라 재활용 공정과정에서 파쇄기 등 기기 고장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환경부는 “식자재나 남은 음식물 가운데 어떤 게 음식물쓰레기에 해당하는지는 지방자치단체별로 처리시설 여건에 따라 분류기준에 다소 차이가 있어 시군구 홈페이지를 참고하는 게 좋다”고 설명했다. 음식물쓰레기를 버릴 때 물기를 제거해 부피를 줄이는 것도 중요하다. 종량제 시행으로 버리는 만큼 처리 수수료 부담도 커지기 때문이다. 과일껍질 등 식물성 쓰레기는 햇볕에 말리고 찌개류는 국물을 버리고 남은 찌꺼기의 물기를 짜낸 후 버리는 게 좋다. 최근에는 쓰레기 처리에 미생물을 이용하는 방법이 주목받고 있다. 유익한 미생물로 이루어진 EM(Effective Micro-Organism·유용 미생물군)과 쌀뜨물을 섞어 발효시켜 만든 EM 활성액이 그런 사례다. 악취를 없앨 수 있을 뿐 아니라 쓰레기를 바로 발효시켜 퇴비로 쓸 수 있다. 서울 송파구청은 최근 EM 생산공장을 설립했으며 이달부터 EM 원액을 각 가정에 무료로 보급할 예정이다. 가정에서는 음식물쓰레기를 버릴 때 이 액체를 쓰레기에 조금씩 뿌리면 된다. 베란다나 마당에 화초 또는 텃밭을 가꾸는 가정은 지렁이를 활용하면 쓰레기를 좀 더 친환경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 스티로폼이나 플라스틱통으로 만든 배양상자에 지렁이를 키우며 수분과 소금기를 제거한 과일 껍질, 채소류, 계란 껍데기 등을 잘게 썰어 먹이로 주는 것이다. 이 음식물을 먹은 지렁이가 배설하는 분변토에는 수천 마리의 이로운 세균과 효소가 포함돼 있어 유기농 비료로 활용할 수 있다. 과일이나 야채 껍질을 살림에 활용할 수도 있다. 오래돼 굳어버린 조미료통에 사과 껍질을 넣고 밀봉한 채 하루쯤 두면 조미료가 부드럽게 풀어진다. 그을음이 생기거나 까맣게 음식이 눌어붙은 냄비를 세척할 때도 사과껍질을 쓰면 잘 닦인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2013-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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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쓰레기가 돈이다] 세 가지 음식물쓰레기 종량제

    서울 금천구 시흥동의 한 아파트에 사는 주부 김미영(43)씨는 6월 음식물쓰레기 요금으로 1170원을 냈다. 지난해 6월에 낸 음식물쓰레기 요금(1300원 정액납부)보다 다소 줄어 든 것. 김씨의 아파트가 올해 6월 음식물쓰레기 종량제를 도입하면서 생긴 변화다. 단지별로 수거함에 버려진 음식물쓰레기의 총량을 측정해 합산한 뒤 수수료를 가구별로 균등하게 분배하는 방식에서 가구별로 배출한 쓰레기 양에 따라 수수료를 부과하는 ‘무선주파수인식(RFID) 방식’으로 바뀌었다. 김 씨는 “우리 집은 여름에 수박도 거의 안 먹고 음식쓰레기가 다른 집보다 적은 편인데 종전에는 똑같이 부담을 해야 해 억울했다”며 “많이 버리면 그만큼 돈을 많이 내야 해 요리할 때부터 신경을 쓰게 되는 것도 종량제의 효과인 거 같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음식물쓰레기는 하루 평균 1만5000여 t에 이른다. 국민 한 명당 약 300g의 음식물쓰레기를 배출하는 셈이다. 정부는 음식물쓰레기 처리 비용으로 연간 8000억 원이 소요되고, 음식물의 생산 유통 조리과정에 소모되는 비용까지 포함하면 음식물쓰레기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연간 20조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6월부터 전국에 확대 실시된 음식물쓰레기 종량제는 쓰레기를 줄여 경제적 낭비를 최소화하고 환경을 보호하자는 취지다. 음식물쓰레기를 아무리 많이 버려도 정해진 수수료만 내도록 했던 기존 방식과 달리 버린 만큼 부담금을 차등화해 쓰레기를 적게 버리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게 이 제도의 골자다. 환경부는 음식물쓰레기 종량제가 전면 시행되면 한 해 쓰레기 발생량이 연간 20% 줄어 1600억 원의 처리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이 정도만 줄어도 온실가스 배출량이 감소해 소나무 3억6000만 그루를 심는 친환경적 효과가 생긴다는 게 관련 기관들의 분석이다. 현재 음식물쓰레기 종량제의 운영 방식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RFID 방식은 지정된 곳에 쓰레기를 버리면 전자카드나 전자태그를 통해 쓰레기를 배출한 가정을 확인하고 무게에 따라 수수료를 부과한다. ‘전용봉투제’는 음식물 전용봉투를 구입해 음식물쓰레기 처리비용을 선납하는 방식이다. 기존에는 음식물쓰레기 용기함에 음식물만 버렸지만 전용봉투에 담아 버리면 상대적으로 간편하고 위생적이다. 편의점 등에서 구입한 ‘납부칩’이나 ‘스티커’를 수거용기에 부착한 뒤 배출하면 환경미화원이 칩 또는 스티커가 부착된 용기에 한해 수거하는 방법도 있다. 환경부 관계자는 “음식물쓰레기를 줄이는 일은 돈과 직결되는 문제이므로 식생활 문화 자체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며 “식재료 구입이나 보관 방법을 개선해 쓰레기 자체를 줄이는 환경부의 대국민 캠페인 ‘줄일수록 좋아요’에 적극 협조해 달라”고 당부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2013-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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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력위기는 넘겼지만… 물부족 대책은?

    남부지방의 폭염이 한창이던 지난달 24일, 대구의 하루 수돗물 사용량은 107만5000여 m³로 2009년 이후 일일 기준 최대치를 기록했다. 인구 253만 명이 1인당 1.5L 페트병 280개 분량의 수돗물(420L)을 사용한 것. 이는 우리 국민의 1일 평균 수돗물 사용량 335L(2011년 기준)보다 25%나 많은 양이다. 여름철에는 전력난 못지않게 물 부족 우려도 커진다. 우리나라는 수자원량이 세계 153개국 중 129위에 불과한 ‘물 부족 국가’다. 여기에 계절별 강수량 편차가 커 연중 확보하는 수자원 중 실제 이용 가능한 비율은 26%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국민의 1인당 하루 물 사용량은 335L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2008년 337L, 2009년 332L, 2010년 333L, 2011년 335L로 거의 줄지 않고 있다. 영국의 물 전문 리서치기관 ‘GWI’가 최근 전 세계 19개국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우리는 체코, 폴란드, 호주에 이어 네 번째로 물을 많이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기관은 한국의 수돗물 사용량이 많은 이유 중 하나로 ‘저렴한 수도요금’을 꼽았다. 우리나라의 상수도요금은 m³당 653원으로 인도, 중국, 러시아에 이어 네 번째로 싸다. 환경부 통계에 따르면 2011년 전국의 평균 수도요금은 619.3원(m³ 기준)으로 생산원가(813.4원)의 76% 수준. 상수도 운영이 적자를 면하기 어려운 구조다. 2011년 기준으로 지방자치단체들의 상수도 부문 부채액은 1조822억 원. 전년도 1조19억 원에서 803억 원이 증가했다. 수도사업 적자가 누적돼 수도시설에 대한 신규 투자가 지체되면서 수자원 활용의 효율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환경부 조사 결과 2011년 수도관 누수율은 시설 노후 등으로 인해 10.4%로 나타났다. 20년 이상 돼 교체가 시급한 노후관이 전국적으로 약 4만 km에 달하는 실정이다. 단국대 경영대학원 전형준 교수는 “수도요금이 다른 공공요금에 비해 지나치게 싸다 보니 수돗물의 소중함에 대한 인식이 낮고 지자체는 누적되는 상수도 관련 적자를 다른 예산으로 메우는 실정”이라며 “깨끗한 수돗물이 안정적으로 확보되지 않으면 생수를 사 마시거나 정수기를 들여놓아야 해 국민 개개인이 부담을 떠안게 된다”고 강조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2013-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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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마 끝나자 폭염-열대야… 순간전력 역대최고치 육박

    서울에 살고 있는 주부 정모 씨(32)는 8일 올여름 들어 처음 에어컨을 틀었다. 전기료를 아끼느라 평소 거의 에어컨을 이용하지 않는 정 씨지만 이날만은 견디지 못했다. 정 씨는 “장마 직후라 습도가 높고 기온까지 올라가다 보니 온 집안이 찜통 수준”이라며 “전기료를 절약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에어컨을 켜지 않고는 견디기가 어려울 정도였다”고 말했다. 장마가 끝나자마자 전국에 기록적인 폭염이 덮치면서 8일 전력수요가 올여름 최대치를 경신하는 등 전력대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8일 전국 대부분 지역에 폭염특보가 발효된 가운데 전력거래소는 오후 1시 34분 예비전력량이 450만 kW 밑으로 떨어지자 전력수급 경보 ‘준비’를 발령했다. ‘준비’는 전력경보 5단계(준비, 관심, 주의, 경계, 심각) 중 첫 번째 단계로 전력수급 경보가 발령된 것은 지난달 19일 이후 20일 만이다. 전력거래소에 따르면 이날 오후 2∼3시 전력수요량은 평균 7378만 kW로 지난달 19일 7211만 kW를 넘어서며 올여름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날 전력거래소가 예상했던 이날 최대 전력수요량 7370만 kW를 초과한 것. 특히 이날 오후 1시 54분에는 순간 최대 전력수요가 여름철 역대 최고치였던 지난해 8월 6일 7490만 kW에 육박하는 7431만 kW까지 치솟기도 했다. 잠잠했던 전력난이 다시 불거진 것은 긴 장마가 끝나면서 전국 대부분 지역에 폭염특보가 발효될 정도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데 따른 것이다. 이날 울산의 낮 최고기온은 38.8도로 1932년부터 시작된 기상관측 이래 역대 최고기온이었다. 기상청이 울산 남구 고사동에 참고용으로 설치한 자동기상관측장비의 온도는 무려 40도까지 올랐으며 경북 울진 지역도 이날 37.8도까지 올라 기상 관측 이래 최고를 기록했다. 전력수요가 당초 예상을 넘어섰는데도 전력수급에 큰 차질이 빚어지지 않은 것은 정부가 이달 5일부터 백화점 등 대형 건물의 전력소비를 의무적으로 3∼15% 줄이도록 하는 강도 높은 절전대책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이날 대형 건물에 대한 강제 절전조치와 공장 조업시간 조정 등 절전대책을 통해 줄인 전력수요량은 456만 kW에 이르렀다. 전력거래소 관계자는 “이날 최대 전력공급량이 7800만 kW 수준이었던 만큼 절전대책이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았다면 전력수요가 공급량을 초과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칫 대규모 정전사태인 ‘블랙아웃’이 발생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문제는 이 같은 절전대책에도 불구하고 당분간 찜통더위와 열대야가 이어지면서 전력난이 더욱 악화될 소지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정부는 이달 9∼14일이 전력난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전력거래소는 9일에는 시간당 최대 전력수요가 7420만 kW에 이르러 전력 경보 2단계인 ‘관심’이 발령될 것으로 내다봤다.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이날 전력거래소에서 열린 여름철 전력수급 대응 종합점검회의에서 “다음 주 14일까지 전력수급 1차 고비가 찾아올 것으로 예상된다”며 협조를 당부했다. 한편 찜통더위에 따른 사망자도 나왔다. 8일 오후 5시경 경남 양산시 평산동의 한 아파트 텃밭에서 일하던 박모 씨(65)가, 전날 오후 3시경 충북 영동군 심천면의 한 공사장에서 일하던 김모 씨(54)가 열사병으로 숨졌다. 기상청은 이번 폭염이 14일까지 계속될 것으로 예상했다.문병기·신광영 기자 weappon@donga.com}

    • 2013-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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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체휴일제, 우리 회사도 쉴 수 있을까

    정부가 내년부터 관공서에 설과 추석 연휴에 한해 ‘대체공휴일제’를 도입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일반 기업 등 민간 부문은 대체공휴일제 도입 여부가 노사 자율 결정사항이어서 중소 및 영세사업장 종사자들은 대체공휴일제를 누리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정부는 7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국무총리공관에서 당정청 실무급 회의를 열고 설과 추석에 대한 대체공휴일제를 내년부터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당초 검토됐던 어린이날은 시행 대상에서 빠졌다. 이에 따라 내년부터 설과 추석 연휴가 일요일과 겹치면 연휴 다음날 평일에 쉴 수 있다. 예를 들어 내년 추석은 9월 8일 월요일로 연휴 앞날인 7일이 일요일인데 대체공휴일제를 적용하면 본래 9일까지만 쉴 수 있던 게 10일까지로 휴일이 하루 늘어난다. 안전행정부는 대체공휴일제가 시행되면 향후 10년간 공휴일이 총 9일 늘어난다고 밝혔다. 공무원이 대체공휴일에 근무를 하면 ‘휴일 수당’을 받는다. 정부는 이 제도 도입을 위해 대통령령인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 개정안을 이달 중 입법 예고할 계획이다. 민간 부문은 대체공휴일제가 ‘자율 선택 사항’이다. 현재도 근로자의 날과 주휴일(주로 일요일)을 제외한 모든 법정공휴일은 노사 자율로 유급 휴무 여부를 정하는 ‘약정휴일’이다. 광복절 같은 국경일의 경우엔 거의 모든 사업장이 유급휴일로 정하고 있지만 대체휴일제의 경우 중소사업체 사용자들이 반대하는 분위기가 강해 모든 근로자에게 확대 적용하는 게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주요 대기업과 금융기관 등은 노사협약에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준용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에 대체공휴일제를 도입할 것으로 전망된다. 재계는 대체공휴일제 도입을 원칙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의견이다. 하지만 ‘관공서의 공휴일을 준용한다’는 명시적 규정을 두고 있지 않은 상당수 중소 영세업체는 대체공휴일제를 기피할 것으로 보인다.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이 제도가 경영사정이 열악한 소규모 기업으로까지 확대되면 인건비 부담 가중 등의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중소기업 근로자와 비정규직 등 취약계층이 대체공휴일제의 혜택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정부가 지속적으로 독려하지 않으면 공휴일 휴무 혜택이 불균등하게 돌아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신광영·박창규 기자 neo@donga.com}

    • 2013-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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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추 찜통더위… 전주 37.6-서울 35도

    입추(立秋)인 7일 전주의 낮 기온이 37.6도까지 오르는 등 찜통더위가 전국에서 기승을 부렸다. 기상청에 따르면 이날 낮 최고기온은 울산이 36.8도, 포항 36.5도, 대구 36.2도, 광주 36도, 속초 35.4도, 강릉 35.2도, 서울 35도 등으로 나타나 전국 각지에서 올 들어 최고 기온을 기록했다. 기상청은 이날 오전 11시 전국 대부분의 지방에 폭염주의보를 내렸다. 이날은 북태평양 고기압이 크게 확장하며 한반도를 뒤덮어 대기 불안정이 상당 부분 해소되면서 소나기도 거의 내리지 않아 기온이 크게 오른 것으로 분석된다. 기상청은 “덥고 습한 공기가 계속 유입되는 데다 강한 햇빛이 더해지면서 당분간 전국 대부분 지역에 폭염과 열대야가 이어질 것”이라고 예보했다. 8일도 대부분 낮 최고기온이 33도 이상으로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전문가들은 체감온도가 40도가 넘는 정오부터 오후 5시까지는 야외 활동을 자제하고 수분을 충분히 섭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폭염으로 냉방기기 사용이 늘면서 한동안 안정세를 유지했던 예비전력이 또다시 경보 수준으로 진입할 것으로 보인다. 올여름 전력난은 원전 정지 영향으로 6월 5일 처음 ‘관심’ 경보가 발령된 이후 지난달 19일까지 19차례 ‘준비’ 경보가 내려졌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2013-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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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밤 같은 대낮… 6일 중부 시간당 50mm 게릴라 폭우

    6일 오후 1시경 서울 경기 등 중부지방엔 천둥을 동반한 시간당 50mm 안팎의 강한 소나기가 쏟아졌다. 여름철 소나기는 항상 있는 일이지만 이날 폭우처럼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강풍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는 것은 낯선 일이다. 기상청은 “북태평양고기압 가장자리를 따라 한반도 하층의 따뜻한 수증기가 유입되는 가운데 밤사이 기온이 높게 유지된 지면 위로 상층의 찬 공기가 만나면서 거대한 비구름대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낮 동안 달궈진 아래쪽 뜨거운 공기와 위쪽 찬 공기가 만나면 대기가 불안정해지고 그로 인해 국지성 강우가 내리는 건 여름에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올해는 긴 장마에 이어 대기 불안정이 심한 편이어서 기습 폭우가 잦은 것이라고 기상청은 분석했다. 기상청은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공기의 힘이 워낙 강해 구름을 지상 13km 높이로 밀어 올려 구름층이 그만큼 두꺼워졌다. 그 결과 검은 커튼을 치듯 햇빛이 차단됐고 대기 불안정이 심화됐다”고 설명했다. 기상청은 당분간 강한 소나기가 자주 내릴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이번 주말에는 찬 공기를 동반한 상층기압골이 지날 것으로 예상돼 중부지방에 천둥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내릴 것이라고 예보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2013-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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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대 최장 장마는 끝났는데 전국 곳곳에 때아닌 장대비

    역대 최장인 49일간 지속된 장마가 4일 끝났다. 하지만 당분간 외출할 땐 우산을 챙기는 게 좋겠다. 피서객들도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대비해야 한다. 장마 직후엔 불볕더위와 함께 ‘깜짝 소나기’가 잦기 때문이다. 기상청이 “장마전선이 북상해 한반도를 벗어난 만큼 이번 장마가 끝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밝힌 5일 전국 곳곳에 강한 소나기가 쏟아졌다. 서울 경기 등 중부지방과 전남 내륙지방에 시간당 30mm 안팎의 소나기가 여러 차례 내렸다. 한여름에 내리는 비는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으로 태평양에서 수증기를 머금은 따뜻한 공기가 한반도에 유입되면서 형성된다. 이 공기는 지표면의 열을 받아 한층 가열되고 부력의 영향으로 상승하면서 위쪽의 차가운 공기와 만나 빗물이 된다. 여기에 장마까지 장기간 지속되면 장마전선이 떠나간 뒤에도 일정 기간 대기 중에 다량의 수증기가 남게 돼 비가 내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장마 직후 소나기가 집중되는 이유다. 허진호 기상청 통보관은 “산간이나 계곡 피서객들은 기습적인 소나기가 자주 내릴 수 있어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며 “소나기 구름이 국지적으로 발달해 지역 간 강수량 차이가 커서 스마트폰 등을 이용해 기상정보를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한편 6일 전국의 낮 최고기온은 30∼36도까지 올라 무더울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 경기 등 중부지방은 오전에, 나머지 지역은 오후 한때 소나기가 내릴 것으로 보인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2013-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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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졸 정규직 취업자 24%, 2년새 비정규직 이직

    대학 졸업 후 어려운 취업 관문을 뚫은 취업자 가운데 2년 이상 그 직장에 계속 다니는 비율은 절반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취업자 5명 중 1명은 2년 새 직업이 없는 상태가 됐다. 한국고용정보원은 4일 2009년 전문대 이상 졸업자 중 1만8066명을 대상으로 이들의 1차 취업 결과와 2년 뒤인 2011년 상황을 비교한 ‘직업 이동 경로’를 추적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에 따르면 2011년 현재 취업 상태인 1만5410명 가운데 2009년 1차 조사 때와 같은 직장에 다니는 비율은 50.1%에 불과했다. 취업자의 33.2%인 5116명은 1차 조사 때와 다른 직장으로 옮긴 상태였다. 나머지 2574명은 1차 조사 당시 취업을 못 했다가 이후 취업한 사례였다. 1차 조사 당시 취업자가 2년 뒤 무직자가 된 비율은 21.3%에 달했다. 특히 이직한 사람 중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옮긴 비율은 23.5%에 달했다. 상대적으로 근무 조건과 처우가 열악하더라도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직장을 찾아간 결과로 해석된다. 첫 직장을 그만둔 이유에 대해 ‘적성에 맞고 보다 나은 직장으로 옮기기 위해(33.9%)’ ‘보수 이외의 근무 여건이 불만이어서(15.6%)’라는 의견이 많았다. 성별로는 여성이 직장을 옮기는 비율이 35.3%로 남성(31.3%)보다 높았다. 첫 직장을 계속 다닌 사람의 평균 월급은 251만2000원으로 2년간 18.3%(38만9000원) 올랐다. 이직자의 평균 월급은 202만6000원이었다. 고용정보원 박상현 연구위원은 “최근 대졸 취업자는 입시 위주 교육과 격심한 취업 경쟁 탓에 진로를 깊이 고민하지 않은 채 외형적인 조건만 따져 일단 취업하고 보자는 경향이 강했다. 이 때문에 뒤늦게 새 일자리를 찾아 나서게 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2013-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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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녹색연합 “DMZ면적 60년간 43% 줄어”

    강원 양구군의 최전방부대인 21사단의 가칠봉 관측소. 이곳 장병들은 막사 밖을 나갈 때 방탄조끼를 입어야 한다. 북한군 오성산 초소와 떨어진 거리는 불과 700m. 행여나 오발이든 조준사격이든 총탄이 날아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1997년 북한군 2명이 침입하려다 철책 5m 앞에서 1명이 사살되고 나머지 1명은 도주한 적도 있다. 가칠봉 부대와 북한군 사이에는 비무장지대(DMZ)가 펼쳐져 있다. 1953년 정전협정 당시 남북한은 휴전선에서 2km씩 후퇴해 그 사이를 DMZ로 정했다. 약속대로라면 남과 북은 4km 이상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남북한 최전방부대가 어쩌다 700m까지 근접하게 된 것일까. 환경단체 ‘녹색연합’은 1953년 992km²였던 DMZ 총면적이 올해 570km²로 줄어들어 60년 새 43% 감소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24일 밝혔다. 북한이 1968년과 1986년 유리한 능선 고지를 차지하려 북방한계선을 야금야금 밀고 내려오자 우리도 일부 남방한계선을 북진시킨 결과다. 녹색연합 관계자는 “북한이 200보 내려오면 우리가 50보 올라가는 형국이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남북 간 긴장 완충지대가 축소됐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세계적인 생태보전구역인 DMZ의 생태계가 훼손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북한은 1986년 북방한계선을 밀고 내려오면서 최대 1만 V의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책선을 대거 설치했다. 남쪽의 침입을 차단하고 탈북자를 막으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고라니, 산양, 반달가슴곰 등 희귀동물들이 이 고압선에 감전돼 죽는 피해가 속출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녹색연합 관계자는 “남북이 DMZ 공간을 잠식해 야생동물의 서식지가 줄면서 생존에 위협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2013-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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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14일 연천 1시간 94mm 물폭탄

    주말인 13, 14일 경기북부와 강원지역을 중심으로 최고 280mm가 넘는 국지성 집중호우가 쏟아져 3명이 숨지고 1명이 실종되는 등 비 피해가 속출했다. 경기 연천에는 이날 오전 6∼7시 최고 94mm의 물 폭탄이 쏟아졌다. 기상청이 집계한 경기북부와 강원 일부 지역의 이틀간 누적 강수량(14일 오후 10시 현재)은 경기 가평군 285.5mm, 강원 춘천시 266mm, 경기 남양주시 223mm, 서울 강동구 218.5mm 등이다. 곳곳에서 피해가 잇따랐다. 14일 오전 11시 25분경 경기 포천시 내촌면 진목리 배수로에서 주민 이모 씨(57)가 급류에 휩쓸려 숨졌다. 같은 날 낮 12시 55분경에는 남양주시 와부읍 팔당대교 인근에서 한모 씨(58)가 숨진 채 물에 떠 있는 것을 행인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이에 앞서 오전 10시 10분경에는 가평군 상면 덕현리 조종천 앞 도로에서 자신의 승용차가 물에 잠기자 차 안의 가족을 구하려고 뛰어든 문모 씨(34)가 급류에 휩쓸려 실종됐다. 전날 오후 5시경에는 가평읍 승안리의 한 펜션 앞 계곡에서 행락객 이모 씨(38·여)가 급류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 강원지역에서는 낙석과 침수 등으로 도로 20여 곳의 교통이 끊겼다. 14일 오전 9시경 강원 홍천군 두촌면 원동리 야산에서 발생한 산사태로 산자락 컨테이너에서 생활하던 박모 씨(85)가 매몰돼 수색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화천군 간동면 방천1리 파로호낚시터에서는 폭우로 인한 도로 침수로 낚시꾼 140여 명과 차량 50대가 한때 고립됐지만 다행히 전원 구조됐다. 서울 역시 주택 담장이 붕괴되고 하천 인근 지대가 침수되는 사고가 속출했다. 13일 오전 2시경 은평구 녹번동 다가구주택의 10m 높이 축대 벽이 붕괴되면서 주민 55명이 은평구청 5층 강당으로 긴급 대피했다. 이날 오전 11시경에는 노원구 월계동 중랑천 자전거 도로 인근을 산책하던 김모 씨(69)가 불어난 강물에 휩쓸렸다 구조됐다. 기상청은 장마전선이 남하하면서 함께 움직이는 강한 비구름대가 서해상에서 중부지방으로 지속적으로 유입돼 서울과 경기 강원에 돌풍과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내린 것으로 분석했다. 기상청 관계자는 “15일 저녁부터 16일 오전 사이에 장맛비가 잠시 소강상태에 들겠지만 16일 밤부터 17일까지 비구름이 다시 강하게 발달해 중북부지방에 많은 비가 내릴 것”이라고 예보했다. 서울 경기 강원 지역에 이미 많은 비가 내려 지반이 약해진 만큼 산사태와 주택 도로 침수 등 피해에 대비해야 한다고 기상청은 당부했다.신광영 기자·춘천=이인모 기자·곽도영 기자 neo@donga.com}

    • 2013-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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