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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는 시원했을지 모르지만 국민은 답답했다. 청와대가 정말 국회 통과를 목표로 했다면 논란거리가 수두룩한 개헌안은 내놓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통과도 되지 않을 개헌안이니까 대통령의 생각이나 맘껏 펼쳐 보이자는 것 같았다. 대통령의 생각이란 것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 개헌안 중 ‘국회 의석은 투표자 의사에 비례하여 배분한다’는 조항은 사실상 독일식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겠다는 뜻이다. 대통령을 견제하려면 국회에 소선거구제에 바탕을 둔 거대 양당이 있어야 한다. 국회에 군소정당이 난립할 수 있는 선거제를 도입하자고 하면서 대통령제는 거의 현행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은 국회의 권력을 약화시켜 대통령의 권력을 상대적으로 강화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은 과거 독일식 비례대표제 도입을 전제로 분권형 대통령제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두 제도의 상관관계에 대해 자신의 말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청와대의 개헌안은 의미가 있다. 자유한국당 등 야당은 국회의 국무총리 선출권이나 추천권을 요구했으나 청와대는 “대통령제와 맞지 않는 변형된 의원내각제”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거부든 수용이든 의사를 분명히 한 것은 논의를 위한 진전이다. 국회가 총리 선출권이나 추천권을 갖게 되면 사실은 이원정부제가 된다. 현행 헌법처럼 대통령과 총리의 권한영역이 겹치고 총리가 ‘만인지상(萬人之上) 일인지하(一人之下)’인 상황에서 국회의 선출이나 추천으로 권한이 강화된 총리가 대통령과 대립한다면 효율적 국가 운영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대통령의 권한은 무엇이고 총리의 권한은 무엇인지 구별해야 하는 문제가 따른다. 대통령은 외치(外治), 총리는 내치(內治)로 구별한다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간단하지 않다. 그것을 미리 정하지 않고 총리를 선출하거나 추천하자고 말하는 건 무의미하다.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은 누구 말대로 ‘20년 더 집권할’ 자신이 있어 대통령 권한을 약화시키는 시늉만 하고 넘어가고, 한국당은 그렇지 못해 분권형 총리에 목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치 상황이란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 없다. 민주당이 참패해서 또 다른 정치보복의 쓴맛을 볼 날이 올 수도 있고, 한국당은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닌 정치 불능 시스템에서 헤맬 수도 있다. 헌법은 승자가 돼도 패자가 돼도 당당히 뛰어놀 수 있는 중립적인 그라운드로 여겨야 한다. 여당은 대통령의 권한을 대통령 개헌안보다 더 내놓아야 하지만 야당도 총리 문제에서 반드시 승부를 보려 해서는 안 된다. 국회에 총리 선출권이나 추천권을 주지 않아도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을 분산할 다른 대안들이 없지 않다. 국회 인사청문 대상일 뿐인 장관들과 검찰총장 국가정보원장 국세청장 경찰청장 등 4대 권력기관장을 국회 임명동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도 그런 대안 중 하나다. 미국과 같은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장관을 비롯해 중앙정보국(CIA) 국장, 연방수사국(FBI) 국장 등 고위 공직자를 모두 상원의 인준을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인준이 임명동의에 가까우냐, 인사청문에 가까우냐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국과 한국의 정치문화의 차이를 고려할 때 임명동의는 한국식 인준제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대통령제는 총리를 제외하고는 장관 등 행정부 요직에 대한 의회의 통제가 부족했기에 결국 제왕적 대통령제로 귀결되고 말았다. 이것이 개헌 요구에 이른 요체다. 이런 반박이 가능하다. 총리와 감사원장은 현재도 국회 동의를 얻어 임명하지만 독립적인가. 임명은 국회 동의를 얻어 해도 해임은 대통령 맘대로 할 수 있는 상황에서 독립성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문화는 더뎌도 발전하고 있어 당파성이 강한 인물이 총리나 감사원장이 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중남미 국가는 미국과 유사한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정치적 후진성을 면치 못한다. 제도만으로 되지 않는 정치문화적 요소가 있다. 정치문화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으면 아무리 좋은 제도도 소용없다. 30여 년 만에 개헌이란 거대한 판을 벌여놓고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있느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1987년에는 권력을 쥔 쪽이 망해버렸고 지금은 권력을 쥔 쪽이 꽃놀이패를 쥐고 있다. 야권이 욕심을 버리고, 거부하지 못할 대의(大義)에 호소하지 않으면 개헌은 성공하기 어렵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시진핑은 17일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주석에, 시진핑의 오른팔인 왕치산은 국가부주석으로 선출됐다. 왕치산은 지난해까지 중국 집단지도체제를 구성하는 정치국 상무위원 7인 중 1인이었다. ‘정치국 상무위원은 68세가 정년’이란 관례에 따라 은퇴했으나 5개월 만에 돌아온 것이다. 전국인대에서 7인의 정치국 상무위원 옆에 나란히 앉아 관례에 없는 사실상 ‘제8의 정치국 상무위원’임을 분명히 했다. ▷스탈린에게는 베리야가 있었다. ‘스탈린의 개’라고 불렸다. 스탈린 시대의 잔혹한 숙청은 베리야가 주도했다. 시진핑에게는 왕치산이 있다. 시진핑과 같은 태자당 출신이면서 5년 선배인 그는 ‘시진핑의 저승사자’ 정도로 부를 수 있겠다. 왕치산은 시 주석 1기 당 중앙기율검사위 서기를 맡아 부패 척결을 빌미로 저우융캉 등 시진핑의 정적들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집단지도체제를 깨고 마오쩌둥 시대의 단일지도체제로 돌아가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왕치산은 선출된 뒤 시진핑과만 악수하고 리커창 총리와는 악수를 하지 않았다. 2인자는 리 총리가 아니라 자신이라고 과시한 것이다. 시진핑은 2970표 중 만장일치로 선출됐다. 왕치산은 반대표가 한 표 나왔다. 반대표 숫자까지 짜고 친다는 전국인대다. 시진핑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한 헌법 조항이 반대표 2표가 나온 것과 비교하면 헌법보다 위다. 왕치산은 헌법 선서를 한 뒤 주먹으로 연단을 내리쳤다. 그는 미국 정치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의 팬이다. 드라마 주인공이 강함과 결의를 보여줄 때 테이블을 두 번 치는 습관을 따라했다는 관측이 나왔다. ▷마오 시대는 저우언라이라는 2인자가 있었다. 장쩌민 시대에는 후진타오라는 후계자, 후진타오 시대에는 시진핑이라는 후계자가 있었다. 시진핑은 후계자를 없애버린 것이 마오와 비슷하다. 2인자만이 가능한 시대다. 저우는 외교를 맡았다. 왕치산도 외교를 맡아 시진핑 장기 집권의 토대를 닦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터프한 굴기(굴起) 외교가 눈에 그려진다. 한반도 정세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당장이라도 무력을 행사할 것처럼 북한을 위협해왔다. 위협은 때로는 거친 발언이었고 때로는 군사력 시위였고 때로는 ‘코피’ 전략에 반대한 빅터 차 주한 미국대사 후보자의 내정을 철회하는 것과 같은 인사 조치였다. 그런 전략이 북한 김정은에게 통해 대화에 나선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한미 군사훈련은 해도 좋다고 통 크게 말한 김정은이다. 그를 대화에 나서게 한 건 경제제재라는 분석이 꽤 설득력 있다. 트럼프의 위협이 잘 통한 건 오히려 문재인 정부다. 정부는 일본이나 미국 하와이가 하는 전쟁 대비 훈련은 한 번도 하지 않으면서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까 노심초사하는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트럼프는 싸움꾼처럼 보이지만 경제적 이익에 관해서는 지독해서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실제 전쟁은 누구보다 꺼린다. 그의 책 ‘협상의 기술’을 읽어보면 거칠게 말하는 것은 실은 진짜 싸움을 피하려는 의도가 있어서다. 트럼프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무력행사는 북한의 ‘코피’를 터뜨리는 정도다. 그거라도 할 수 있을지 논란이 있었다. 문 대통령이 트럼프식 무력시위의 이중성을 보지 못하고 전쟁의 전(前) 단계로만 보려 했다면 성급했다고 할 수 있다. 부동산 개발사업에서는 잘 통했으나 안보에서도 통하는지 불안했던 트럼프식 협상 기술의 효용성을 입증하고 싶어 하던 그에게 북한과의 회담은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었다. 한국 특사단이 ‘트럼프님께서 주도한 압박이 주효해 어쩌고저쩌고’ 하니 트럼프는 그 자리에서 5월까지 김정은을 만나겠다고 답했다. 그 자리에서 말했다고 즉흥적으로 결정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미국 정상이 북한 지도자를 만나주는 것 자체가 미국이 오랫동안 아껴온 카드인데 함부로 썼다는 느낌이 든다. 트럼프는 북-미 정상회담을 백악관이 발표하지 않고 한국 특사단이 미국 기자들 앞에서 직접 영어로 발표하도록 했다. 북-미 정상회담은 한국이 주선했으므로 그 성공도 한국이 책임지라는 뜻이다. 북-미 정상회담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1월 북한의 평창 겨울올림픽 참가 유도에서부터 무려 5개월의 시간을 핵 프로그램 완성을 목전에 둔 북한에 벌어준 책임이 오롯이 문 대통령에게 돌아간다. 나쁜 결과는 남 탓으로 돌릴 준비도 미리 해두는 것이 그의 몸에 밴 협상 기술인 듯하다. 프레임은 늘 흠잡을 데 없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문 대통령이 4월 남북 정상회담에서 북한으로부터 받아내려 할 긴박한 양보는 미국 본토에 도달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개발 보류다. 그 대신 북한은 ‘핵 동결=입구, 핵 폐기=출구’로 내걸고 미국과 평화협상을 벌이려 할 것이다. ICBM은 보류한다고 하더라도 핵 폐기를 조건으로 미국과 평화를 맺으면 김일성 일가가 3대에 걸쳐 추구해온 핵 보유의 목적은 달성된다. 핵과 평화의 맞교환은 논리적으로는 간단해 보인다. 그러나 미국이 원하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핵 폐기(CVID)’에는 난제가 수두룩하다. 북한이 원하는 체제 안전 보장의 범위도 명확하지 않아 미군 철수 등 심각한 갈등을 초래할 수 있는 요구가 잠재해 있다. 문 대통령은 민족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진 듯한 비장한 자세로 운전대를 잡았으나 악마들을 다룰 남다른 치트키(cheat key·게임에서 비장의 무기)를 갖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대화 말고는 무슨 대안이 있는가.’ 문 대통령은 영수회담에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에게 그렇게 물었다. 핵을 갖고도 무너진 옛 소련의 사례는 오히려 다른 대안을 제시한다. 제재와 압박으로 북한을 핵만 가진 빈털터리로 만드는 것이다. 핵은 절대무기이지만 함부로 쓸 수 없다는 한계도 있다. 설혹 대안이 없다고 하더라도 있는 척해야 할 판에 ‘대화 말고는 무슨 대안이 있느냐’는 발언은 스스로의 협상력을 깎아 먹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대화로 문제가 해결된다면 그보다 좋은 게 없다. 다만 대화는 시기가 중요하다. 정말 절묘한 시기를 택한 것인지 지켜보자. 대화를 하고도 가시적 성과가 나오지 않아 대화에 대한 기대가 더 이상 남지 않는 순간 진짜 위기는 시작된다. 그때 대화의 결과는 제쳐두고 대화의 성사만을 위해 무작정 달려온 사람은 칭송을 고스란히 비난으로 돌려받는다. 위기는 기회가 되고 기회는 위기가 되기도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냉전 시대 적대국이었던 미국과 소련의 정상은 뉴욕 유엔본부에서 마주칠 때를 제외하고는 제3국에서만 만났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1960년 니키타 흐루쇼프와 프랑스 파리에서 만나 회담했다. 로널드 레이건은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1985년 스위스 제네바와 1986년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만났다. 레이캬비크 회담이 계기가 돼 냉전 종식의 분위기가 무르익은 1987년 이후에야 두 정상은 워싱턴과 모스크바를 오가며 회담을 열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이 정상회담을 갖는다면 전례 없는 북-미 정상회담이기 때문에 어디서 만날지 벌써 예상이 분분하다. 워싱턴과 평양은 도청 등의 문제가 있어 양국 모두에 부담스러운 장소다. 그래서 스위스 스웨덴 등 중립적인 제3국이 거론된다. 스위스 제네바는 유엔 유럽지역 본부 등 국제기구가 즐비하고 북-미 간 고위급 접촉이 종종 이뤄진 곳이다. 김정은이 유학한 특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스웨덴은 판문점 중립국 감시위원회 일원이고 평양 주재 스웨덴대사관은 미국인을 위한 영사 업무를 대행하고 있다. ▷남북한 사이의 판문점도 거론된다. 북한 지도자가 된 후 한 번도 해외에 나가본 적이 없는 김정은이 북한을 사실상 벗어나지 않고 트럼프 대통령을 만날 수 있고, 트럼프 대통령은 판문점을 관할하는 미군 기지가 인근에 있어 미국 본토에서처럼 회담을 준비할 수 있다. 판문점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장소라는 상징성도 있다. 판문점은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가보려다가 기상 악화로 방문이 취소된 곳이기도 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이 성과가 있을 것으로 보면 과감히 평양을 방문할 가능성도 있다. 예측 불허의 김정은이 워싱턴을 전격 방문하지 말란 법도 없다. 북-미 정상회담의 중매를 맡은 한국의 서울이나 제주에서 보자는 얘기가 나올 가능성도 없지 않다. 조지 부시가 1989년 고르바초프를 만나 냉전 종식에 합의한 지중해 몰타 근처의 크루즈선 같은 멋진 장소를 거론한다면 첫 만남으로는 너무 나간 것일까.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연극 연출가 이윤택을 향한 미투(#MeToo) 폭로에서 간과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의 성추행이나 성폭력은 단지 나쁜 손의 문제가 아니라 나쁜 의식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그의 작품에는 사실상의 성추행 장면이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한다. 그의 출세작 ‘오구’라도 좋고 셰익스피어를 각색했다는 ‘햄릿’이라도 좋고 다른 작품이라도 좋으니 한번 봐 보라. 이윤택 자신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인간의 성적 욕망의 탐구’니 어쩌니 할지 모르겠으나 실은 모두 범죄행위에 가깝다. 범죄적인 성적 욕망을 예술의 소재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범죄적인 성적 욕망도 예술의 중요한 소재다. 다만 범죄라는 인식이 작품 속에서 갈등으로 작용하는 한에서 그렇다. 이윤택의 작품에서는 성추행 장면이 반복적으로 벌어지는데도 범죄라는 인식이 느껴지지 않는다. 성추행은 처음에는 여성에 의해 거부되지만 결국 여성에 의해 기꺼이 즐거이 받아들여진다. 그의 작품은 성에 있어서 여성은 솔직하지 못하다는 착각에 기초해 ‘남녀관계는 남자가 밀어붙여야 한다’는 마초적 인식을 관객들에게 부추긴다. 남녀상열(男女相悅)은 인간의 거부할 수 없는 욕망이다. 아프리카 오지의 밤하늘 아래서 성욕에 불타올랐던 정의구현사제단 신부에게까지도 ‘유혹할 자유’를 부인할 생각은 없다. 현대 사회는 성인에게 있어서 자유연애의 사회다. 다만 자유연애라 하더라도 그 속에 어떤 규율이 있다. 상대가 거부의 반응을 보일 때 무시하고 더 나가서는 안 된다는 규율이다. 이 엄격한 규율이 지켜지지 않으면 자유연애는 부자유연애가 된다. 그것이 성추행이고 성폭력이다. 법적으로 성추행이나 성폭력이 되려면 피해자의 분명한 거부 의사표시가 전제돼야 한다. 문화예술은 일찍부터 거부와 동의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한 영역을 다뤘고, 외면상 동의가 있었다고 보일지라도 돈이나 권력관계에 의해 성립한 동의는 진정한 동의와 거리가 멀다는 비판의식을 갖고 위대한 로맨스를 창조해왔다. 현대 문화예술은 자유분방해 보여도 실은 현실의 법보다 더 높은 도덕성을 추구했던 것이다. 이윤택의 작품은 그런 것과 거리가 멀다. 저승에서 온 남성들이 거대한 음경을 흔들며 등장하는 ‘오구’ 같은 작품은 니체 식으로 말하면 디오니소스적 성의 굿판을 벌여놓고 이를 수습할 어떤 아폴론적인 계기도 제시하지 않는다. 디오니소스적 착란 속에 무대 위의 연극과 무대 아래의 현실은 둘로 나눌 수 없는 불이(不二)의 세계가 된다. 무대가 곧 사타구니 안마를 받는 여관방이고 발성연습 시간은 그것을 핑계로 상대의 몸을 더듬는 순간이 된다. 이윤택을 진보예술가라고 볼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진보연(然)한 예술가임에는 틀림없다. 노무현 정부 들어 과거 정부가 직접 나눠주던 문예진흥기금을 문화예술인들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나눠주도록 했다. 자율성이 강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문화예술계의 상당 부분을 진보 측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개편이었다. 이런 개편에서 가장 이익을 본 것이 이윤택 같은 이들이다. 이런 예술가가 각광을 받았기에 그의 작품이 성공의 모범이 되고 연극판 전체가 성의 난장판 비슷하게 변질된 감이 없지 않다. 이윤택은 박근혜 정부에 들어와 이른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오른 대표적 인물이다. 박근혜 정부는 어떻게 나눠줘도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는 시대착오적인 문예진흥기금을 폐지하는 쪽으로 갔어야 했으나 노무현 정부가 만든 체제를 그대로 둔 채 그 배분을 강압적으로 수정하려다가 직권남용의 함정에 빠졌다. 이윤택은 문재인 정부에 들어와 다시 정부 문화지원의 최대 수혜자가 됐다. 지난해만도 문예진흥기금 등에서 4억4600만 원을 지원받았다고 한다. 진보연한 문화예술인이 주로 미투의 폭로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이 분야의 헤게모니를 그들이 쥐고 있다는 방증일 뿐이다. 미투는 당연히 보수니 진보니 하는 이데올로기적 분류와 상관없다. 검찰같이 보수적인 세력이 헤게모니를 쥐었던 분야에서는 그들이 미투 폭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알량한 헤게모니를 이용해 찰나의 오르가슴을 얻으려다 수치스러운 폭로에 직면한 것이 어디서나 미투 사태의 본질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울 여의도에 초대형 아스팔트 광장을 만든 건 1972년이다. 이듬해 그곳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100만 명이 모인 대규모 전도 집회를 열었다. 정치는 암울했지만 개발의 망치 소리가 전국에 울려 퍼지던 때다. 농촌을 떠나 도시의 삭막한 환경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마음의 안식을 종교에서 구했다. 교회마다 부흥사들의 전도 집회가 열렸고 그런 흐름의 시작에 그레이엄 목사가 있었다. ▷그의 1973년 여의도 집회에 가보지 못했지만 그 못지않게 컸던 1980년 여의도 집회에는 가봤다. 그의 설교는 논리적인 설득보다 마음에 불을 지피는 것이었다. 말 한 단락이 끝나기도 전에 김장환 목사의 통역이 따발총처럼 이어졌다. 나중에 세계침례교총회장까지 된 김 목사가 유명해진 것은 1973년 집회의 통역을 맡으면서부터. 하지만 거꾸로 미군 부대 하우스보이 출신인 그의 유창한 통역이 없었다면 설교의 감동은 훨씬 덜했을 것이다. ▷그레이엄 목사는 1950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만나 북한 공산당 격퇴를 촉구하고 1952년 전쟁 중인 한국을 방문해 집회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1990년대 두 차례 방북해 김일성과도 만났다. 김일성은 트루먼 이후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영적 조언자였던 그레이엄 목사와의 만남을 마다하기는커녕 미국과의 대화 채널로 활용하려 했다. 그레이엄 목사로서는 평양에 외국인을 위한 교회를 짓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레이엄 목사는 미국 대통령들과 친하고 김 목사는 그레이엄 목사와 친했기 때문에 이 커넥션은 한미 관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난해 한미 정상회담 때는 아들 프랭클린 목사가 김 목사의 주선으로 사전에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 1시간가량 대화를 나눴다. 여기서 오간 문 대통령 부모의 흥남철수 얘기가 미국 대통령과 부통령에게 전달돼 회담을 부드럽게 이끄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미국의 영적 지도자였기 때문에 세계 정치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던, 개신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자 중 한 사람이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평창 겨울올핌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에서 아깝게 금메달을 놓친 이상화 선수는 2014년 소치 겨울올림픽 이후 은퇴를 고민한 적이 있다. 이미 올림픽 2연패를 이뤘기에 최고의 자리에서 영광스럽게 떠나라는 유혹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올림픽 3연패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또 4년간을 치열한 훈련으로 보내야 하는 막막한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는다. 이상화는 어제 “경기가 끝난 후 왜 울었느냐”는 질문에 “4년이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갑자기 압박감이 사라져 운 것 같다”고 답했다. ▷금메달을 딴 일본 고다이라 나오 선수가 이상화에게 다가와 건넨 첫마디는 일본말 ‘요쿠얏타요’가 아니라 서툰 한국말로 ‘잘했어’였다. 금메달은 따는 것도 어렵지만 지키는 게 더 어렵다는 건 이상화로부터 금메달을 빼앗아오기 위해 20대 청춘을 다 보낸 고다이라가 잘 알 것이다. 고다이라는 어쩌면 이상화가 은퇴하지 않았기에 이상화를 기필코 꺾겠다는 마음으로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에 자비로 네덜란드 유학을 떠나고 올해 32세의 나이까지 필사적으로 달렸는지 모른다. ▷여자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처럼 이상화와 고다이라는 경기로는 예민해져서 신경전까지 벌이면서도 빙상 밖에서는 묘한 우정을 쌓았다. 이상화는 “내가 일본에 갈 때는 고다이라가 언제나 돌봐줬다”고 말했고, 고다이라는 “서울에서 경기가 끝난 후 급히 다른 나라로 갈 일이 있을 때 이상화가 직접 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잡아주고 택시비까지 대신 내줬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한국과 일본이 2002년 월드컵을 공동 개최했던 사이였다는 사실이 아득히 먼 일로 느껴질 정도다. 양국은 반일(反日)과 혐한(嫌韓)의 분위기까지 거론될 정도로 관계가 악화돼 있다. 그러나 베토벤 합창교향곡에 나오는 실러의 시 ‘세상의 풍조(die Mode)가 나눈 것을 신비로운 그대의 힘이 다시 결합시킨다’처럼 정치가 나눈 것을 스포츠가 하나로 묶기도 한다. 얼음판 위에서 두 빙속 여제의 어깨동무는 스포츠의 신비로운 힘을 보여주는 소중한 장면이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북한 김여정의 어릴 적 해외 생활의 흔적을 취재한 적이 있다. 2009년 김정은이 북한 김정일의 후계자로 부상했을 때다. 스위스 베른 인근의 쾨니츠라는 지역에 김정은과 김여정이 살던 집과 다니던 학교를 찾아 취재했다. 물론 두 사람은 오래전 그곳을 떠난 뒤였다. 김여정은 1997년 무렵 김정은과 함께 헤스구트 공립초등학교에 등록했다. 김정은은 이듬해 중학생이 돼 같은 부지에 있는 슈타인횔츨리 공립중학교에서 7학년부터 9학년 초까지 다녔다. 김여정은 계속 초등학교에 다녔다. 둘은 학교에서 불과 200m 떨어진 연립주택단지 내 3층 벽돌집에 살았다. 북한 대사관에서 나온 여성이 둘을 돌본 것으로 알려졌다. 둘은 2000년 말 학교를 떠났다. 김정은이 베른 국제학교를 다녔다는 잘못된 기사들이 지금도 나온다. 베른 국제학교를 다닌 건 세 살 위의 김정철이다. 김정철은 베른 북한 대사관 숙소에 거주하면서 보디가드 학생까지 대동하고 메르세데스벤츠를 타고 학비가 비싼 그 사립학교에 다녔다. 김정철은 1998년 9학년 무렵 학교를 떠났다. 언제부터 다녔는지는 불명확하지만 늦어도 1994년부터는 다녔다. 당시만 해도 누가 김정일의 후계자로 키워지고 있었는지는 분명하다. 김정은이 베른 국제학교에 다녔다는 오보가 나온 것은 베른 국제학교 교사와 졸업생이 김정은이 북한의 후계자로 부상했다는 뉴스가 나오자 언론 인터뷰를 하면서 김정은과 김정철을 혼동했기 때문이다. 당시 스위스 신문이 인용한 ‘케렌 클라인’이란 이름의 베른 국제학교 출신 여성을 페이스북에서 접촉해 직접 혼동을 확인했다. 그의 재학시절 학교 앨범에 있는 사진은 김정은이 아니라 김정철이었다. 당시 스위스 거주 한국인들은 김정은과 김여정이 쾨니츠에서 학교를 다녔다는 뉴스에 놀랐다. 북한 대사관에서도 상당히 떨어져 있는 데다 부자들만 모여 사는 은밀한 동네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흥미로운 반응 중 하나는 “김정일이 돈이 없지 않았을 텐데 왜 두 자녀를 학비 무료인 공립학교에 보냈을까”였다. 김정철이 후계자가 된다면 김정은과 김여정이 그보다 잘나서는 안 되는 게 세습 왕조의 룰이지만 그 때문에 스위스의 보통 사람들이 받는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김정일은 자녀들이 세상 물정을 알 만한 고등학생 때는 외국에 두지 않았다. 김정일은 두 아들 모두 중학교 3학년 무렵인 9학년 때 불러들였다. 겨우 중학생 시절을 보낸 두 아들에게도 유학 생활의 영향은 팝송 농구 스키에 대한 열정으로 남아 있다. 김정철은 지금도 에릭 클랩턴 공연을 보러 다니고, 김정은은 집권 후 미국 농구 스타 데니스 로드먼을 불러들이고 마식령스키장을 지었다. 초등학생이었던 김여정에게는 그 영향이 어릴 적 배운 외국어에 대한 감각처럼 잠재해 있다 더 폭넓게 드러날 수 있다. 김정철이 여성호르몬 과다 분비로 후계 구도에서 탈락하면서 김정은이 졸지에 김정일의 후계자가 됐다. 김정은이 집권한 후 북한 매체에 등장한 김여정의 초기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우스꽝스러웠다. 김정은이 열병식을 하는 무대의 뒤쪽에서 느닷없이 얼굴을 내민다거나 김정은의 시찰행사에 혼자 떨어져 따라가거나 히죽거리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철이 없어 그랬을 수도 있고 자유분방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김여정은 대외적으로는 이번 방남이 데뷔나 다름없다. 그는 흑백의 단정한 옷차림에 옅은 화장을 하고 턱을 약간 치켜든 도도한 자세로 가능한 한 말을 아꼈다. 그나마 오래 훈련을 해서 ‘도도녀’의 모습을 연출한 듯한데 과거 북한에서 잘나가던 여성들이 보여주던 내적인 도도함을 찾기 어려웠다. 김여정만 아니라 현송월도 그랬다. 자신을 지켜볼 수많은 한국 여성들이 북한 상류층 여성도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앞서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한 것이 아닐까. 상대방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능력을 통해 작용하는 소프트파워의 힘이다. 김여정은 김정은의 헤르메스(使者)로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방북 초청장을 전했다. 헤르메스는 저쪽의 것을 이쪽에 전달할 뿐 아니라 이쪽의 것을 저쪽에 전달도 해야 한다. 북한에서는 2인자조차도 김정은 앞에서 입을 가리고 말을 한다. 김정은과 흉금 없이 말할 상대는 김여정밖에 없다. 김여정이 이쪽에서 느낀 바를 가감 없이 전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얼마간의 의미는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최근 주한 미국대사 임명이 철회된 빅터 차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는 한국 특파원들을 만나도 영어로만 얘기하는 사람이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미국에 유학 왔다가 정착한 부모로부터 한국말을 배워 한국말을 할 줄 알지만 그의 모국어는 엄연히 영어다. 버락 오바마 정부에서 최초의 한국계 주한 미국대사가 된 성 김만 해도 중학생 때 미국으로 이주해 모국어는 한국어인 것과 비교된다. ▷빅터 차가 주한 미국대사로 내정됐다는 첫 보도는 이미 지난해 8월에 나왔다. 그러나 뒤이어 내정이 취소됐다느니, 내정 자체가 없었다느니 하는 혼란스러운 소문이 흘러나왔다. 임명 절차도 이례적으로 질질 끌었다. 그러다 결국 지난해 12월 한국 정부의 아그레망(임명 동의)까지 받았는데 미국에서 돌연 임명이 철회된 것이다. 구체적인 철회 이유는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도널드 트럼프 정부 내에 그의 대사 임명을 저지하려는 지속적인 움직임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빅터 차는 1994년 컬럼비아대에서 한미일 관계를 다룬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대학에 적을 두고 방송 등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조언하다가 2004년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국장으로 들어가 2007년까지 일했다. NSC 아시아국장으로 임명됐을 때 “한국에서 내게 갖는 기대를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까지 말할 정도로 미국의 이익도 강조했다. 그럼에도 트럼프 정부의 한층 높아진 충성심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듯하다. ▷그는 북핵 문제에서 흔히 매파로 분류되지만 스스로는 강경 네오콘임을 부인한다. 그는 대사 검증 과정에서 미국의 북한 핵·미사일 시설 정밀 타격에 반대 견해를 피력했다. 반대의 명시적인 이유는 군사작전 시 한국인이 입을 피해를 걱정해서라기보다는 한국과 일본에 거주하는 미국인을 대피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미국대사 내정자가 미국인을 먼저 걱정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그가 말하지 않는 내심에는 부모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깔려 있었을 것이라 본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최근 임명된 민유숙 대법관에 대해 현재 법원장으로 있는 분이 고등법원 부장판사였을 때 한 얘기가 기억난다.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에서 민 대법관보다 기수가 아래인 김소영 대법관이 임명된 직후였다. 그는 “법관은 판결문 쓰는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며 “판결문 쓰는 능력은 민유숙이 위다. 민유숙이 먼저 대법관을 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양승태 이전의 어느 전직 대법원장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줬더니 좀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대법관의 능력은 판결문을 쓰는 것으로만 판단할 수 없고 기획·조정력도 봐야 한다”는 것이다. 김 대법관은 그 대법원장 체제에서 법원행정처 정책총괄심의관으로 근무했다. 민 대법관은 법원행정처에 근무한 적이 없다. 대법원장을 지낸 분과 고등법원 부장판사의 눈높이가 달랐다고밖에 할 수 없다. ‘재판관은 재판을 잘할 수 없으면 안 된다. 그러나 재판밖에 할 줄 몰라도 안 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모든 법관에 적용될 수 있는 말인지는 자신이 없다. 그러나 최소한 대법원장에게라면 타당할 것이다. 김명수 대법원장도 법원행정처에 근무한 적이 없다. 재판만 주로 한 법관은 순수해서 사법행정도 공정하게 잘할 것인가. 칸트의 말처럼 때로는 순수한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얼마 전 ‘판사 블랙리스트’ 추가조사위는 판사 블랙리스트와는 전혀 관련 없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 판결 관련 각계 동향 보고’라는 문건을 공개해 어느 신문의 표현을 빌리자면 ‘판결 빌미로 청와대와 뒷거래한 양승태 대법원’이란 의혹을 던졌다. 이것은 의혹으로 남겨놓고 적당히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 법원행정처 차장은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의 전화를 받을 수 있다. 그 자리는 그런 자리다. 대통령민정수석은 청와대의 변호사 격이다. 그의 조속한 상고심 진행 요구는 선거법 위반 사건의 경우 2심 판결로부터 3개월 내에 끝내야 한다는 법률에 비춰 충분히 할 수 있는 요구다. 다만 전화 때문에 대법원이 합의체로 넘길 이유가 없었는데 합의체로 넘겼거나 대법관들이 자기 의사에 반해 선거법 무죄취지 파기환송에 동의했다면 그런 대법원을 믿고 최종심을 맡길 수 없다. 해체하고 재구성해야 마땅하다. 추가조사위 발표에 대해 대법관 13명 전원은 즉각 “이 사건은 소부(제3부)의 합의를 거친 결과 증거법칙을 비롯한 법령 위반의 문제가 지적됐고, 사회적·정치적 중요성까지 아울러 고려해 합의체에 회부됐다”며 “관여 대법관들은 재판에 관해 사법부 내외부의 누구로부터 어떠한 연락을 받은 사실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고 밝혔다. 합의체 판결은 과반만 찬성해도 되는데 전원 일치 판결이었다. 의혹 제기 자체가 무리한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대법관 성명으로 부족하다면 김 대법원장이 직접 당시 재판에 관여한 대법관을 일일이 면담해 진상을 파악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시 제3부에 속한 사건 주심은 퇴임했다. 그를 조사하면 사건이 합의체로 넘어간 과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상고법원 설치에 반대한 대법관들도 최소한 두 명 있었다고 한다. 진실이 따로 있다면 그들이 말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잘못이 있다고 한들 대법관들이 순순히 얘기하겠느냐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식의 반박을 할 거면 확인도 못할 의혹을 왜 던졌는지 먼저 답해야 한다. 만류에도 불구하고 추가조사의 길을 연 것은 김 대법원장 자신이다. 의혹이 의혹으로 남는 것만으로도 대법원에 대한 신뢰는 훼손돼 그가 져야 할 책임이 크다. “재판이 재판 외의 일로 영향을 받는다고 오해받을 만한 일은 없어야 한다”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의혹을 증명하든가 증명하지 못하면 대법원장이 물러날 정도로 중대한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특정 판사들에 대한 동향 조사는 사찰과는 거리가 멀지만 과한 측면이 있다. 대부분 공개된 정보를 수집했지만 사적으로 알음알음 수집한 정보도 섞여 있다. 불필요할 정도로 ‘열심히’ 정보를 수집한 것이 양승태 대법원이 관료화한 증거일 것이다. 법원행정처 축소 등 김 대법원장이 하고 싶어 하는 개혁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다만 대법원장이 애송이 ‘판사님’들에 휩쓸려 사소한 것에 불꽃을 튀기다 대법원을 다 태워먹는 일은 없어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권력기관 개혁에 찬성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듯하다. 그러나 청와대가 조국 민정수석비서관을 통해 최근 밝힌 권력기관 개혁안에는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다. 개혁의 골자는 국가정보원과 검찰이 가진 수사권의 상당 부분을 경찰에 넘기는 것이다. 경찰은 국정원으로부터 대공수사권을, 검찰로부터 경제·금융 등 일부 특수사건을 제외한 모든 사건의 수사권을 넘겨받는다. 대공수사권이 국정원에 있든 경찰에 있든 국민으로서는 대공수사를 잘해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견제고 균형이고 말하기 전에 잘해보자고 하는 것이 개혁일 텐데 잘해보라고 넘기는 대공수사권이 아니란 걸 모두가 안다. 지난해 국정원에서 검찰로 이첩한 대공수사는 한 건도 없다. 이 정부가 대공수사에 대한 의지가 있는가. 솔직히 없다고 말하지 못할 뿐이다. 수사권에 대해서는 검찰에 있든 경찰에 있든 수사를 잘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할 수 없다. 권한 남용을 막으려면 검찰이 기소권을 갖더라도 수사는 가능한 한 다른 데서 해야 한다. 그 다른 데가 국정원이든 경찰이든 혹은 우리나라에는 없는 경제범죄수사국이든 상관없다. 그래야 상호견제가 가능하다. 대공수사도 전문성이 요구되는 수사이고 경제·금융 관련 수사도 전문성이 요구되는 수사다. 대공수사마저 경찰에 넘기는 판에 경제·금융 관련 수사를 검찰에 남긴 건 일관성이 없다. 검찰이 경찰 수사에 끼어드는 빌미가 될 수 있다. 검찰에 여전히 영장청구권과 보충수사권이 남아 있어 지금과 큰 차이가 없다는 얘기도 나온다. 청와대가 검찰총장 동의 없이 낙점해 놓은 ‘믿는 구석들’이 없었다면 수사와 기소의 분리 원칙이 보다 철저히 관철됐을 것이다. 검찰의 제도적 개혁을 철저히 하지 못하면서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같은 제2의 검찰을 만들 생각부터 하는 건 현명하지 않다. 공수처에 대해서는 수사와 기소의 분리라는 개혁 원칙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어 우려스럽다. 공수처를 신설한다면 공수처가 수사권을 가질 때 검찰이 기소권을 갖든가, 공수처가 기소권을 가질 때 경찰 등 다른 조직이 수사권을 갖는 식의 견제와 균형이 모색돼야 한다. 경찰은 대부분 사건의 1차적 수사권을 가짐으로써 훨씬 큰 권한을 얻는 건 틀림없다. 다만 현재의 경찰에서부터 자유당 시절까지의 경찰을 조망해 보면 경찰은 검찰보다 더 권력에 아유굴종(阿諛屈從)했다. 경찰 조직은 매우 커서 같은 직급의 경쟁자가 많고 승진 기준의 공정성이 떨어져 상관의 낙점에 목을 매는 조직이다. 게다가 경찰관은 사퇴하면 검사처럼 변호사를 할 수도 없어 권력 앞에서 강단을 갖고 처신하기 어렵다. 이런 경찰에 권한을 넘기기 위해서는 내부적인 권한 분산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선진국 경찰은 거의 모두 자치경찰제를 기반으로 운영된다. 청와대도 비대해진 경찰 권한을 자치경찰제를 도입해 분산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그런데 그게 고작 치안 분야를 시도지사 관할로 넘기겠다는 것이다. 수사를 할 수 없는 경찰은 경찰이 아니라 그냥 방범대다. 헌법 제1조 3항을 신설해 지방분권을 명시한 개헌을 하겠다며 읍면동 조직까지 동원해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는 정부에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자치경찰제다. 자치경찰제라 함은 자치경찰이 한 지역 내에서 일차적으로 사전적 방범 활동과 사후적 범죄수사 등 모든 종류의 경찰 업무를 수행하고 국가경찰은 테러나 조직범죄 등 전국적 단위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에 국한해 개입하는 방식을 말한다. 미국 뉴욕경찰은 모든 종류의 범죄 사건을 수사하고 연방수사국(FBI)은 연방법 위반 사건이나 기타 중대 사건에 대해 보충적으로 개입해 뉴욕경찰과 협력해 수사를 진행할 뿐이다. 독일 연방경찰과 란트(Land)경찰, 일본 국가경찰과 도도부현(都道府縣)경찰의 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청와대 권력기관 개혁안이 큰 변화를 가져올 것처럼 보이는 건 권한을 주고받는 권력기관들의 눈에만 그렇다. 권력기관들 위에 있는 청와대나 권력기관들 밑에 있는 국민의 눈으로 보면 조삼모사(朝三暮四)다. 청와대의 권력기관 장악은 대통령제를 제왕적으로 만든 주요 원인이다. 개혁안에서도 권력기관을 내려놓지 못하고 손아귀에 쥐고 있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진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이승만 대통령 시절 대통령 생일 축하 행사는 서울운동장 같은 거대한 장소에서 열렸다. 남녀 고교생 수만 명이 참가한 매스게임이 열리고 여고생들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이 대통령 본인이 원했든 측근들이 부추겼든 대통령이 한 정파의 지도자가 아니라 전 국민의 지도자로 표상돼 국민 전체가 생일을 축하하는 모양새가 이뤄졌다. 민주 정치에서는 오히려 전체주의적으로 비치는 그런 행태가 이승만 몰락의 원인(遠因)이 됐다고도 할 수 있다. ▷어제 서울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서 문재인 대통령 생일 축하 광고를 봤다. 활짝 웃고 있는 문 대통령의 모습에 ‘1953년 1월 24일 대한민국에 달이 뜬 날, 66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 등의 문구가 쓰인 패널이 에스컬레이터의 한쪽 면을 가득 채우고 있고 아이들의 목소리로 ‘Happy birthday to you’라는 곡이 흘러나왔다. 지하철 이용객 중에는 문 대통령 지지자도 있고 반대자도 있다. 반대자들은 불쾌감을 느낄 것이고 지지자라도 열렬 지지지가 아닌 이상 지나치다고 느낀 사람이 적지 않을 듯하다. ▷문 대통령 지지자들은 자발적인 광고인데 뭐가 문제냐고 항변한다. 서울교통공사는 지난해 성형광고를 전면 금지키로 했다. 지나친 성형광고가 판단력이 제대로 서지 않은 청소년에게 유해한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다. 성형광고는 자발적이지만 바람직하지 않다. 집권 시절의 이명박 대통령이나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대통령 생일 축하 광고를 냈다면 어땠을까. 역지사지(易地思之)해서 생각해볼 능력이 떨어지거나 ‘내로남불’이다. ▷왕조 국가도 아닌데 국가 지도자의 생일을 지지자들의 사적 공간이 아니라 지지자와 반대자가 섞여 있는 공공장소에서 축하한다는 발상은 퇴행적이다. 대통령은 헌법상 국민의 대표자이긴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한 정파의 지도자다. 이 긴장관계가 허물어진다면 건강한 민주 국가가 못 된다. 대통령 생일 광고 정도는 가벼운 퇴행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퇴행이 문 대통령에게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진 않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아이들의 능력은 놀랍다. ‘영재발굴단’이란 TV 프로그램을 보면 언어의 영재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강원도 고성의 한 분교에 다니는 9세 아이는 누나가 영어 공부하는 모습을 그대로 따라 해 전국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 1등을 휩쓸 정도의 영어실력을 자랑한다. 동화책 등으로 영어를 배운 지 9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CNN 뉴스를 듣고 고3 영어듣기 평가까지 통과한 7세 아이도 있다. ▷미국에서도 2006년 이미 뉴욕타임스에 미국 중산층 사이에 5세 이하 어린이를 상대로 한 외국어 교육이 미술이나 음악 교육만큼 보편화됐다는 기사가 나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중국 방문 때 6세 외손녀 아라벨라 쿠슈너의 영상을 보여줬다. 아라벨라는 이 영상에서 중국 노래를 부르고 한시를 중국어로 읊어 중국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아라벨라의 엄마 이방카는 아라벨라에게 3세 때부터 중국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교육부가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방과 후 영어 수업을 금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교육부는 올해부터 초등학교 1, 2학년 영어수업이 전면 금지된 만큼 일관성 측면에서 이런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고 한다. 몇 살부터 외국어를 가르치는 게 좋은지 잘라 말하기 어렵다. 모국어를 배우기 전에 외국어를 배우면 모국어 습득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견해에 충분히 일리가 있다. 그러나 모국어 습득이 좀 늦더라도 외국어를 함께 배우는 이중 언어능력을 선호하는 학부모들의 심정도 이해할 만하다. ▷문제는 일률적 규제다. 국공립 초등학교의 영어 수업 금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사립 초등학교에까지 영어 수업 금지를 강제하더니 자율적이던 초등 이전 교육과정을 막대한 정부 돈이 들어가는 누리과정으로 만들어놓고는 방과 후 영어 수업까지 금지하려 한다. 살판 난 것은 영어학원들이고 힘들어지는 것은 추가로 비싼 학원비를 지출해야 하는 서민이다. 방과 후 수업은 본래 사교육을 흡수하려고 만든 것이다. 진보정권의 평등주의 교육이 오히려 사교육을 부추기는 기막힌 역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더글러스 케네디의 베스트셀러 소설 중에 ‘빅 픽처’가 있다. 훌륭한 작품인지는 모르겠으나 한번 잡으면 놓기 어려운 책이다. 다 읽고 나도 제목이 왜 ‘빅 픽처’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다만 내용 중에 이런 대목이 있긴 하다. “글을 쓰는 사람은 어떤 장면의 세세한 부분들을 모은다. 그 세세한 것들이 한데 모이면 ‘큰 그림’이 완성된다.”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노무현 정부는 말과 행동이 별로 다르지 않았다. 말은 종종 심각한 논쟁을 일으켰지만 논쟁을 회피하지 않고 뚫고 가려고 했다는 점에서 노 정부는 솔직했다. 그런 점에서 ‘반미면 어떠냐’고 말한 노무현은 최소한 음모가는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말 따로 행동 따로다. 이 정부의 말은 관리된다. 말과 행동의 불일치 속에 언뜻언뜻 비치는 진실의 조각들을 모아야만 그들이 추구하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청와대는 문정인 대통령통일외교안보특보의 말이 나올 때마다 개인적 의견일 뿐이라고 거리를 뒀지만 결국 문 특보의 말대로 되고 있다. 문 특보는 한미 군사훈련과 북한 핵실험을 동시에 중단하는 중국의 쌍중단(雙中斷)과 유사한 북핵 해법을 제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평창 겨울올림픽 기간에 한미 군사훈련 연기를 주장함으로써 쌍중단을 향한 정부의 본심을 드러냈다. 쌍중단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올림픽 대표단 파견 용의를 밝혔음에도 그렇다. 북한은 핵 프로그램 완성을 위해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미국도 군사훈련을 연기할 수는 있을지언정 중지하기 어렵다. 쌍중단은 쌍궤병행(雙軌竝行)으로 가겠다는 신호로서만 의미가 있다. 미국의 선제공격이 어렵고 대북 제재에 구멍이 뚫려 있는 한 북한은 조만간 핵무기를 완성할 것이고 그때야 비로소 핵과 주한미군 철수의 맞교환이라는 쌍궤병행에 응할 것이다. 정부의 대북 제재 강화가 말뿐임은 절차를 다 따랐다 하더라도 바뀌었으리라고 보기 어려운 개성공단 폐쇄를 그 일부 절차를 트집 잡아 불법으로 몰아간 데서도 확인됐다. 문 대통령은 중국 방문에서 시진핑 주석에게 대북 원유공급 중단에 대해 당부조차도 하지 않았다. 정부의 ‘평화를 위한 복안’이란 대북 제재는 건성으로 하면서 북한이 협상에 응하는 때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문 대통령과 이낙연 총리 신년사에는 올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70주년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 총리의 신년사는 뜬금없이 올해를 건너뛰어 내년 상하이 임시정부 100주년을 언급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어제 국립서울현충원을 참배하고 방명록에 ‘건국 백년을 준비하겠다’고 썼다. 대한민국에는 정통성이 없고 북조선인민공화국에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한 학자를 국가정보원 개혁발전위원장에 앉혀 국정원을 유명무실하게 만들더니 그것으로도 모자라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에 앉힌 정부다. 이것이 문재인 정부의 코드다. 정부가 추구하는 것이 대한민국을 대한민국이 태어난 해방정국의 혼돈으로 되돌려 그 속에서 완전히 다른 국가정체성을 형성하려는 것은 아닌가. 그것의 외교적 귀결이 한미 동맹으로부터의 거리 두기와 친중(親中) 노선의 강화다. 하버드대 그레이엄 앨리슨 교수가 만든 신조어 ‘투키디데스 함정’이 기존 강국인 미국과 신흥 강국인 중국의 충돌을 설명하는 데 널리 인용된다. 그러나 미중 충돌에만 주목하는 건 강대국주의자의 시선이다. 우리로서는 그 충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생하는지 봐야 한다. 투키디데스 전문가인 예일대 도널드 케이건 교수는 고대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존 강국 스파르타의 동맹국이었던 메가라가 신흥 강국 아테네의 경제 압력에 굴복해 동맹을 갈아타려 했기 때문에 벌어진 전쟁이라고 지적했다. 섣부른 동맹의 교체 시도는 큰 위험이 따른다. 미국 잡지 ‘디플로맷’이 언급했다는 이 상황에서의 ‘저울질(balancing act)’은 조롱의 말이지 칭찬이 아니다. 한미 동맹의 균열은 미국의 북한 선제공격 가능성을 더 높일 수 있다. 새해에는 큰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된다. 정부는 목적지를 솔직히 밝히지 않는 운전자다. 상상력을 발휘해 진실의 조각을 맞추지 않은 승객은 ‘어, 어’ 하다 낯선 곳에 내리고 나서 후회할 수 있다. 차창으로 낯선 풍경이 보이기 시작하는 지금이 차를 세울 때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통일부의 정책혁신위원회라는 조직이 어제 “지난해 2월 7일 북한의 장거리로켓 발사 직후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는 개성공단 전면 중단이 결정되지 않았다”며 “다음 날 오전 홍용표 당시 통일부 장관에게 박근혜 대통령의 철수 지시가 통보됐고, 이날 오후 김관진 당시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세부계획을 마련한 뒤 10일 발표가 이뤄졌다”고 밝혔다. 또 “개성공단 철수를 결정한다면 헌법상 긴급처분이나 남북교류협력법에 따른 협력사업 취소 등의 적법한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박 전 대통령의 개성공단 가동 중단은 북한이 4차 핵실험과 장거리미사일 발사 시험을 한 달 간격으로 실시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내려진 정치적 결정이다. 대통령은 그런 고도의 정치적 결정에 대해서는 결과에 따라 정치적 책임을 지면 된다. 다 따랐다 하더라도 결정이 뒤바뀌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려운 형식적 절차를 놓고 다 지켰느니 마느니 따지는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는가. 더구나 개성공단 가동 중단은 남북 상황이 개선되면 재가동할 것을 전제로 한 임시적인 중단으로 영구적인 중단을 전제로 하는 협력사업 취소에 해당하지 않는다. 또 헌법 제78조가 규정한, 내우외환 등의 상황에서 최소한으로 필요한 재정·경제상의 처분도 아니고 교전 상태에서 국가를 보위하기 위한 긴급조치도 아니다. 따라서 지체 없이 국회에 보고해 승인을 얻어야 할 사안도 아니다. 그런 사안이었다면 당시 국회에서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개성공단 가동 중단 결정은 NSC를 거치지는 않았지만 NSC 상임위를 거친 뒤 발표됐다. NSC 상임위는 NSC의 위임으로 모든 사안을 결정할 수 있다. 게다가 NSC 의장은 대통령이고 그 구성원은 모두 대통령이 임명한 각료와 참모다. 이런 구조에서 대통령의 지시가 먼저인지, 그 지시가 구두인지 서면인지 따지는 것은 트집 잡기에 불과하다. 국무회의 심의만 하더라도 개성공단 철수로 입주업체 직원들이 볼모로 잡힐 수도 있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준비를 끝내고 전격적인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개성공단 재개를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다. 상황이 바뀌어 개성공단 재개를 추진하더라도 굳이 전 정권의 조치를 불법적인 양 깎아내리면서 할 필요는 없다. 당시는 유엔 대북 제재와 충돌하는 개성공단의 유지가 어려워진 시기였고 지금도 다르지 않다. 민간위원들로 구성된 혁신위의 발표는 문 대통령 공약에 억지로 맞춘 느낌이 적지 않다. 각 부처가 들러리로 내세워 ‘손 안 대고 코 푸는’ 식의 이런 위원회야말로 법적 근거가 없는, 없애야 할 조직이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요즘 오스트리아의 음악도시 잘츠부르크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만들어진 지 200년이 되는 내년 행사 홍보로 벌써 바쁘다고 한다. 이 노래는 1818년 잘츠부르크에서 약 20km 떨어진 오베른도르프라는 작은 마을의 성(聖) 니콜라우스 성당에서 처음 불렸다. 성당 신부 요제프 모어가 크리스마스가 되면 느꼈던 감정을 담아 노랫말을 쓰고 성당 오르간 반주를 맡은 초등학교 음악선생 프란츠 그루버가 곡을 지었다. ▷예수는 예루살렘 근처의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임을 선언한 이후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거센 반발이 일었다. 유엔총회는 21일 예루살렘 지위에 어떤 결정도 거부하는 결의안을 압도적 다수로 통과시켰다.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의 성지인 특이한 도시다. 종교의 성지가 종교 간 불화의 가장 큰 원인이라는 사실은 종교의 이상에 반하는 특이한 역설이다.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이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聖)의 개념을 없애버린 혁명이었다. 더 이상 성인(聖人)도 없고 성지(聖地)도 없다. 거꾸로 모두가 성인이고 모든 곳이 성지다. 만인이 제사장이고 신자들이 모이면 어디나 교회인 것이다. 이런 사상이 근대 계몽주의를 낳고 현대 민주주의를 낳았다. 특정한 장소를 성지로 구별하고 집착하는 것은 프로테스탄트적이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기독교적이지도 않다. 천국에서 루터에게 물어봐도 예루살렘을 무결정의 상태로 둔 유엔총회의 결의가 옳다고 할 것이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작은 마을의 작은 성당에 어울릴 법한 소박한 곡이다. 그루버가 손으로 직접 그린 악보를 보니 기타 반주에 ‘소프라노와 알토 이중창’으로 부르도록 돼 있다. 초연 때는 모어 신부가 기타를 치면서 소프라노 파트를, 그루버 선생이 알토 파트를 불렀다고 한다. 눈 덮인 마을에서 한밤에 울려 퍼진 그 노래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그런 소박한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 크리스마스의 정신이 됐으면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문재인 대통령이 그제 재외공관장 청와대 만찬에서 “전 세계는 촛불혁명을 일으킨 우리 국민을 존중하고 덕분에 저는 어느 자리에서나 대접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중국 방문 중 홀대론을 의식한 발언으로 보인다. 대접받은 본인이 홀대가 아니라 환대를 받았다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냐마는 바로 본인 얘기이기 때문에 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문 대통령은 방중 기간에 ‘중국이 번영할 때 한국도 번영했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그러나 중국인도 한국인도 공감하기 어려운 말이다. 중국인은 수많은 주변국 중 하나일 뿐인 한국과의 역사를 잘 몰라서 그렇고, 한국인은 중국과의 역사를 너무 잘 알아서 그렇다. 한나라 전성기 때 중국은 고조선에 낙랑군 등 4군을 설치했다. 수나라 때 중국은 고구려에 세 차례나 침입했다가 패해 물러났다. 당나라 때 중국은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 뒤 신라까지 지배하려다 나라가 기울기 시작해 물러났다. 중국이 번성할 때 한국은 힘들었다. 동서고금에 번성하는 큰 나라 옆에서 괴롭지 않은 작은 나라는 없지만 중국 외에 주변국이 의지할 다른 대국이 없던 중화권에서는 더 그랬다. 송나라는 도(道)의 주자, 문(文)의 구양수와 소동파를 배출했던 문화국이었으나 군사적으로는 거란과 여진의 침입에 시달렸다. 그때 중국과 한국은 평화로웠다. 문강무약(文强武弱)의 송나라가 문 대통령의 베이징대 연설 표현을 빌리자면 ‘중국이 주변국들과 어울려 그 존재가 빛났던’ 소프트파워의 중국이었다. 문 대통령의 연설은 이런 중화인민공화국이 돼달라는 바람을 담은 듯하나 시진핑 국가주석의 하드보일드 중국몽(中國夢)과는 거리가 멀다. 꿩처럼 타조도 천적이 다가오면 머리를 파묻는다는 사실은 미국 CNN 기자가 강경화 외교부 장관에게 한 인터뷰 질문에서 처음 알았다. 타조는 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는 약자가 강자에게 하는 게 아니다. 니체가 잘 정리했다. 강자가 약자에게 하는 역지사지는 배려이고, 약자가 강자에게 하는 역지사지는 굴욕이다. 알아서 긴 굴욕을 배려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문 대통령은 베이징대에서 마오쩌둥의 장정(長征)에 참여한 김산과 중국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정율성을 치켜세우는 연설을 한 뒤 충칭임시정부 청사로 향했다. 이 지점에서 역사의 중국과 현실의 중국 사이에 해결하기 어려운 충돌이 발생한다. 정작 충칭의 임시정부를 도운 것은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인데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을 거론하며 중국과 한국은 근대사의 고난을 함께 극복한 동지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우리에게는 고난을 함께 극복한 동지가 아니라 고난을 초래한 장본인이다. 문 대통령은 충칭임시정부 청사에서 임시정부 수립이 대한민국 건국이며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충칭임시정부의 김구만 하더라도 임시정부 수립을 건국으로 보지 않았다. 그가 1941년 삼균주의(三均主義)를 토대로 광복 후 건국의 청사진을 제시한 ‘대한민국건국강령’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이것이 상식적으로 쓰는 건국이란 말에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건국관이다. 임시정부 수립을 건국처럼 오도되도록 한 대표적 인물은 이승만이다. 이승만은 1948년 정부 수립 때부터 상당 기간 정부 공문서에 ‘대한민국 30년’(1948년 의미)이라는 식으로 썼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자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생일을 임신 날짜에 맞추는 게 정상적일 수는 없다. 다만 문 대통령이 임시정부의 법통으로 건국을 보려 한 점은 높이 산다. 김구는 신산(辛酸)의 시절에도 임시정부를 공산주의자들의 통일전선 전략에서 지켜냈다. 그 때문에 해방정국에서 임시정부를 배격한 것은 여운형의 건준, 박헌영의 공산당 등이었다. 대다수 국민은 임정이 건국에 큰 역할을 해주길 바랐다. 김구가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에 동의해 놓고도 막판에 거부한 것은 유감스러운 대목이지만 그의 통일의 소원은 우리의 소원이기도 하다. 완전한 건국의 그날까지 건국에 대한 불필요한 논란은 유보하는 것이 좋겠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영어와 한국어의 구조적 차이 중 하나는 be 동사의 유무다. be 동사는 ‘있다’는 뜻으로도 쓰이지만 주어와 형용사를 연결하는 기능이 중요하다. 영어는 문장구조 자체에서 형용사를 인식할 수 있다. ‘I am happy’와 ‘I walk’라는 문장에서 시제와 인칭에 따라 변하는 것은 be 동사든 일반 동사든 동사이다. 형용사 happy는 변하지 않는다. ▷한국어 ‘나는 행복하다’와 ‘나는 걷다’에서는 주어와 형용사, 주어와 동사가 모두 직접 연결된다. ‘행복하다’라는 형용사도, ‘걷다’라는 동사도 시제에 따라 어미가 변하기 때문에 문장구조 자체에서 형용사인지 동사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형용사는 사물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 동사는 사물의 동작이나 작동을 나타내는 것으로 내용적으로 구별하지만 언제나 타당한 것은 아니다. ▷국립국어원은 최근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늙다’를 동사로 분류했다. ‘늙다’는 사물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늙다’는 ‘예쁘게 늙자’ ‘예쁘게 늙어라’와 같은 청유형과 명령형이 가능하다. 반면 형용사 ‘예쁘다’는 ‘예쁘자’ ‘예뻐라’로 변화시켜 사용할 수 없다. 그러고 보면 ‘늙다’를 동사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그럼에도 ‘늙다’는 동사이고 ‘젊다’는 형용사라는 건 해명이 쉽지 않은 비대칭성이다. ▷국립국어원은 ‘잘생기다/못생기다’ ‘잘나다/못나다’도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지만 동사로 분류했다. 이 단어들은 ‘잘’ ‘못’이라는 부사와 ‘생기다’ ‘나다’라는 동사가 합쳐진 말로 일부 동사에서처럼 과거형으로 쓰고 현재로 읽는 특징이 있다. 가령 ‘그 녀석 잘생겼다’라고 하지 ‘그 녀석 잘생기다’라고 하지 않는다. 현재형으로 쓰고 현재로 읽는 형용사 ‘예쁘다’와 다르다. 그럼에도 ‘잘생기자’ ‘잘생겨라’ 같은 활용은 없어 완전한 동사라고 하기도 어색하다. 이들 단어를 형용사로 분류할지 동사로 분류할지는 오랜 논란거리다. be 동사가 없어 형용사와 동사를 선험적으로 구별하지 않는 언어이다 보니 그 틈새에서 이런 경계선상의 단어들이 생겨난다.송 평 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박원오 전 대한승마협회 전무는 최순실 씨 측근으로 정유라 씨 승마 지원을 끌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음에도 처벌 대상에서 제외됐다. 그가 특검 수사에 유리한 진술을 한 대신 처벌을 피한 플리바기닝(plea bargaining)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우리 법은 피고인에게 혐의가 있으면 검찰이 무조건 기소하도록 하고 있다. 혐의가 있는데도 검찰 멋대로 기소하지 않으면 직무 유기에 해당한다. ▷전직 국가정보원장들이 특수활동비 유용으로 구속됐음에도 예산을 책임진 이헌수 전 국정원 기조실장은 구속을 면했다. 장시호 씨는 뜯어낸 기업 돈으로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설립을 주도했다. 이런 장 씨에 대해 검찰은 구속을 면해주고 겨우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했다. 그러자 법원은 구형보다 무려 1년이 많은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하고 법정구속까지 했다. 법원의 중형 선고는 플리바기닝에 대한 경고로 볼 수 있다. ▷미국에서 형사사건의 90%가량이 재판 없이 피고인이 유죄 인정을 하는 대신 형량을 감면받는 플리바기닝으로 종결된다. 플리바기닝은 배심제의 사생아라는 말이 있다. 배심 재판이 시간이 많이 걸리는 데다 배심원이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형사사건이 많아지면서 플리바기닝이 대세를 이뤘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플리바기닝은 판사 앞에서 피고인의 의사가 자발적인지, 사실관계가 뒷받침되는지 확인한 후에 인정된다. 이 과정에서 법원에서 유죄로 인정할 범죄사실, 검찰이 불기소할 범죄사실이 밝혀진다. ▷정 씨의 이화여대 입시비리 사건으로 정작 구속되고 처벌된 것은 교수들뿐이다. 김종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은 핵심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혐의로는 기소되지 않았다. 삼성 측은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항소심 공판에서 김 전 차관이 삼성에 관해 한 진술의 신빙성을 문제 삼았다. 이런 의문이 제기되는 것은 플리바기닝이 검찰 밀실에서 이뤄져 사실관계가 뒷받침되는지 확인하는 절차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가 있는 장 씨나 딸 결혼을 앞둔 이 전 실장에게 구속을 두고 거래가 있었다면 그것 역시 자발적인 협조라고 보기 어렵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고문현 한국헌법학회장(57)이 1일 취임하면서 “한국헌법학회의 독자적인 헌법 개정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헌법 개정안은 국회가 국회의원 36명으로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구성해 현재 새 헌법 조문화(條文化) 작업을 하고 있다. 학자와 시민단체 대표 등 50명으로 구성된 자문위원회의 도움을 받고 있는데 고 회장은 이 자문위 위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헌법개정특위와는 별도로 전문가 집단의 독자적인 헌법 개정안을 내놓겠다고 밝힌 것이다. 고 회장은 경북대 출신으로 서울대 법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숭실대 법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학자를 보좌관으로 아는 국회”―왜 헌법학회의 개헌안을 따로 내놓기로 했나. “학자가 하는 일은 병이 나면 진단을 해서 고치는 의사 역할과 비슷하다. 제왕적 대통령의 폐단이 드러났다. 헌법학자들이 올바른 처방을 내놓는 것은 1987년 이후 30년 만에 찾아온 역사적 책무이기도 하다.” ―학자들은 헌법개정특위 자문위를 통해 의견을 반영할 수도 있는데…. “헌법개정특위 의원들이 자문위로부터 한 수 배워 헌법을 만들겠다는 마음보다는 특위와 자문위의 관계를 의원과 보좌관의 관계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정치권이 일방적으로 강해 정당의 정략에 따른 개헌안이 만들어질 수 있겠다는 우려도 든다.” ―19대 국회에서 김철수 서울대 명예교수 중심으로 국회의장 직속의 헌법자문위가 활동해 조문화 작업까지 마쳤다. 이번 국회에서는 과거 개헌 작업을 한 사람들이 대부분 배제되고, 학자들과 시민단체 대표들이 누가 중심이라고 할 것 없이 섞여서 활동하고 있다. 얼마나 효율적인가. “개헌에 헌법학자들의 의견만 반영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문가적 논의의 어려움이 있는 건 사실이다. 가령 헌법 10조는 행복추구권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을 제외하고 세계 어느 나라 헌법에도 행복추구권은 없다. 이 세상에 기본권 치고 행복 추구 아닌 게 없다. 행복추구권은 너무 불명확한 개념이어서 어느 정도 구체화되지 않으면 큰 의미가 없다. 행복추구권은 정통성이 부족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 5공화국 헌법을 만들면서 국민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집어넣은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가 아니어서 맥락을 모르는 사람들은 왜 그 좋은 말을 빼느냐고 한다.” ―연말까지 각 지방을 돌면서 국민대토론회가 열린다. 조문도 다 만들지 않고 국민대토론회를 여는 데 대한 비판도 있다. “전문적 의견을 바탕으로 국민에게 이해를 구해야지 처음부터 국민을 참여시킨다고 해서 국민이 만드는 개헌이 되는 건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 언제쯤 의견을 낼 것인가. “2006년 헌법학회 이름으로 헌법 개정안을 만든 적이 있다. 이를 토대로 검토하면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현재 헌법학회 고문단에는 헌법학회 전임 회장들과 김철수 교수 등 몇몇 공법학회장 출신이 포함돼 있다. 이분들이 최종 결정을 내릴 것이다. 합의가 안 되면 다수의견이라도 제시하고 정 안 되면 개헌 기준만이라도 제시할 것이다. 정세균 국회의장이 2월 말까지 개헌안을 마련해 3월에는 발의한다고 해서 바빠졌다. 그 전에 공개하겠다.” ―청와대는 국회가 개헌안에 합의하지 않으면 대통령이 개헌발의를 준비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감지되는 청와대쪽 움직임이 있나. “법제처를 중심으로 일부 위원을 위촉해 비공개로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몇몇 교수 이름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국회가 개헌안을 준비하고 있는 시점에서 청와대가 공개적으로 뭘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다.”5·18과 촛불은 전문 넣기 어렵다 ―국회가 특권을 없애기는커녕 보좌관을 1명 더 늘리고 짬짜미 예산으로 뒷거래하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보면서 이런 국회에 개헌을 맡기는 것은 국회 권한만 늘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국회가 개헌안을 마련하면 국회에 유리하게, 국회가 정해진 시한까지 합의를 못 해서 대통령이 개헌안을 마련하면 대통령에게 유리하게 개헌안이 마련될 우려가 있다. 그래서 우리 헌법학자들이 중립적인 개헌안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국회가 얼마나 수용할지는 모르겠다. 최소한 국민이 국회의 개헌안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해 보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개헌과 관련해 ‘새 헌법 전문에 부마항쟁과 5·18광주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촛불 항쟁의 정신을 새겨야 한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한국은 미국과 달리 헌법 전문의 효력도 인정하고 있다. 국회 특위에서 헌법 전문과 관련해 어떤 논의가 이뤄지고 있나. “6월 민주항쟁을 추가하자는 데는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5·18민주화운동을 넣는 데는 지역별 의견 편차가 너무 크다. 부마항쟁은 지역 간 균형을 맞추려고 5·18과 함께 내세운 듯한데 반응이 좀 그렇다. 촛불 시위에 대해서는 겨우 1년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이어서 더 많은 숙고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무엇보다 우리 헌법에는 법치주의라는 말이 빠져 있다. ‘법치주의에 터 잡아’라는 말을 넣자는 데 거의 합의가 이뤄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 결국 법치를 하지 않은 데서 비롯되지 않았나.” ―통치구조에서 특히 논의가 분분하다던데…. “혼합정부제(이원정부제)와 대통령 4년 중임제가 대립하고 있다. 혼합정부제는 외치(外治)는 대통령에게, 내치(內治)는 국무총리에게 맡기자는 투톱 시스템(two top system)이다. 그러나 외치와 내치를 구별해 통치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고 대통령제나 의원내각제와 달리 이원정부제는 헌법적 개념도 아니라는 반박이 있다. 대통령 4년 중임제는 국무총리와 위원에 대한 의회 통제를 강화하고 국가정보원 검경 국세청 등 권력기관 수장에 대한 대통령의 인사권을 제한하는 대신 현행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바꿔 국정 안정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혼합정부제가 다수의견이고 대통령 4년 중임제가 소수의견이다. 어떤 정부 형태를 택하든 대통령 결선투표제 도입과 대통령의 특별사면권 제한에는 합의가 이뤄졌다.”더욱 강화된 경제민주화 조항 ―대통령의 권한을 줄이면 국회의 권한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 국민은 제왕적 대통령의 권한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줄어든 권한이 국회로 가는 것도 선뜻 내키지 않아 한다. “국회의 면책특권 불체포특권도 동시에 줄여야 한다. 개헌 결과 국회의원 수가 늘어난다면 그런 개헌에 국민이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이번 예산안 처리에서도 국회의원 보좌관 수를 늘려 국회를 보는 여론이 좋지 않다. 인구 비례로 보면 우리나라 국회의원 수가 외국보다 많은 편이다. 300명 이내로 돼 있는 국회의원 수를 250명 이내로 줄이는 등 국회도 고통을 분담한다는 모습을 보여야 개헌의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상원을 만들자는 논의도 있던데…. “헌법재판소가 2014년 선거구 간 인구 편차를 2 대 1까지만 허용했다. 1995년까지만 해도 편차가 4 대 1까지 허용됐는데 2001년 3 대 1로 줄더니 2 대 1까지 줄어들었다. 그 결과 시골 지역 이익을 대변할 의원 수가 줄고 있어 상원의 형태로 시골의 대표성을 강화해 도시와 시골 간 균형을 맞출 필요가 제기됐다. 더 나아가 통일이 된다면 인구 비례인 하원에서 열세인 북한 지역의 이익을 균형 있게 대변할 수 있는 상원의 필요성이 있다. 상원 신설에 자문위는 대체로 찬성하지만 현 국회의원의 권한을 축소시키는 것이어서 특위가 반대한다.” ―경제 분야는 어떠한가. “시장경제보다 정부규제를 강화하는 안이 만들어지고 있다. 헌법 119조 2항의 중간 부분에 들어 있는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를 앞으로 끌어내고,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여’를 ‘경제력의 집중과 남용을 방지하여’로 확대하는 한편, ‘할 수 있다’라는 권고적인 동사를 ‘하여야 한다’는 강제적인 동사로 바꾸는 안이 다수의견으로 제시돼 있다. 여기에 더해 다수의견은 ‘국가는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집중과 남용의 피해자들에게 징벌적, 집단적 사법구제수단을 보장한다’는 119조 3항을 신설하는 안까지 제시했다. 이에 대해 경제에 대한 규제는 선택적으로 할 수 있어야지 이를 의무로 규정할 경우 시장경제의 근간을 해치고 계획경제라는 의혹을 야기할 수 있다는 소수의견의 반발이 있다.” ―각계의 헌법 개정 주문이 밀려들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연방제 수준의 지방분권 개헌을 강조했다. 국민의당은 국회 표결에서 여당에 협조해주는 대가로 국회의원 선거구제를 1, 2당에 유리한 소선거구제에서 3당에 유리한 중대선거구로제로 개편하는 뒷거래를 하고 있다. 농협 등 농민단체는 헌법에 국가의 농업지원을 의무화하는 농업 조항의 신설을 요구하고 있다. 세종시는 수도 조항을 신설해 행정수도까지 못 박아 달라고 한다. “지방분권에 대해서는 헌법 제1조에 집어넣자는 의견이 있다.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항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에 이어 3항을 신설해 지방분권을 넣자는 것이다. 이에 대해 헌법 제8장 지방자치편을 강화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반발이 있다. 선거구제 개편은 비례대표제 확대, 국회의원 증원 등이 선행돼야 한다. 너무 정략적으로 흐를 수 있어 이번 개헌에 포함시키면 개헌 자체를 물 건너가게 할 수 있다. 농민단체 측 요구대로 농업 조항을 따로 신설한다면 어업은 어업 조항, 중소기업은 중소기업 조항을 신설해 달라고 요구가 터져 나올 것이다. 수도 조항은 통일 후를 대비해야 하니까 미리 규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거대 문제를 방만하게 제시하기보다 그동안 노출된 구체적인 헌법적 문제를 먼저 풀어야 할 것 아닌가. 가령 박 전 대통령의 탄핵 과정에서 60일 만의 재선거라든가, 부통령이 없는 권한대행제의 한계가 드러났다. 최근에는 헌법재판소장의 임기 문제도 다시 제기됐다. “큰 틀이 정해지지 않아 그런 데까지는 손을 못 쓰고 있다.”제왕적 대통령제 해결이 중요 ―헌법을 전면적으로 뜯어고치는 게 가능할까. “일단은 개헌의 기회가 왔으니 헌법 전반을 검토하는 것이고 실제 가능한지는 다른 얘기다. 사안마다 의견이 분분하니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합의할 수 있는 선에서의 개헌으로 가지 않을까 싶고 결국은 원포인트(one point) 개헌이 될 수도 있다. 원포인트 개헌이 된다면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을 줄이는 개헌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원포인트 개헌이라고 말하지만 그 의미도 명확하지 않다. 조항 하나만 바꿔 대통령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고치는 식은 가능하지 않은 듯하다. “대통령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고친다면 달랑 그 조항 하나만 뜯어고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대통령의 권한이 변하는 데에 맞춰 국회와 사법부의 권한도 대거 조정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어디까지 조정을 해야 하는지 또 복잡한 논의가 필요하다.” ―이번에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을 없애는 데 집중하고 나머지 과제는 뒤로 돌리되 그 대신 헌법 개정의 경직성을 완화해서 앞으로 보다 자주 개정을 한다면 어떨까. “현재 국회의 헌법 개정 정족수인 재적인원 3분의 2를 충족시키는 것은 한 당이 반대하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를 5분의 3으로 내리자는 의견도 나와 검토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헌법 개정하면 5공화국, 6공화국 식으로 공화국의 명칭을 바꾸는 전면적인 헌법 개정만 연상한다. 그렇다 보니 개헌을 너무 어렵게 여긴다. 프랑스나 독일처럼 비교적 잦은 헌법 개정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