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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 사찰 터인 강원 ‘삼척 흥천리 사지’가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됐다고 문화재청이 28일 밝혔다. 9세기 무렵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사찰의 절터에서는 통일신라시대 때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인주함과 금동사자상 등이 출토됐다. 신라에서 왕의 고문 역할을 한 승려를 일컫는 ‘국통(國統)’이 새겨진 비문 조각과 ‘범웅관아(梵雄官衙·교단을 관리하는 승려의 도장·사진)’가 적힌 청동 도장도 나왔다. 다만 이 사찰의 이름이나 기원은 밝혀지지 않았다. 학계에선 흥천리 사지가 그간 문헌에만 나오던 ‘승관(승려 관리) 제도’를 실증하며, 중앙정부가 지방세력 견제용으로 세운 사찰일 것으로 보고 있다. 문화재청은 “통일신라시대 통치 방식을 엿볼 수 있는 유적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설명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금관이 출토된 능묘 가운데 가장 작은 무덤. 6세기 초 신라시대에 축조된 경북 경주시 동성로 ‘금령총’은 출토된 발찌와 팔찌 등 유물이 나온 간격을 볼 때 키가 1m도 되지 않는 어린아이가 묻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왕실은 아이를 묻으며 부디 저승에서 행복하길 바라는 염원을 함께 묻었을 것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이 금령총에 초점을 맞춘 특별전 ‘금령―어린 영혼의 길동무’를 22일부터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선 국보 ‘금령총 기마인물형 토기’와 보물 ‘금령총 금관’ 등 출토 유물 300여 점을 선보인다. 3부로 구성한 전시는 1924년 첫 발굴 때부터 2018년 국립경주박물관이 다시 발굴에 나서기까지의 여정을 담았다. 1부에선 금령총이 일제강점기인 1924년 처음 세상에 알려진 과정을 소개한다. 조선총독부 조사단은 동성로 일대에서 당시 ‘노동리 2호분’이라 부르던 고분을 발굴하다가 무덤 허리춤에서 금방울 한 쌍을 발견했다. 조사관들은 “그 우아함에 사랑하고 좋아할 수밖에 없는 기교”라고 칭송하며 2호분의 이름을 ‘금령(金鈴)’이라고 칭했다. 어쩌면 아이를 먼저 떠나보낸 부모는 아이가 저승에서 길을 잃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머리맡에 부장품을 가득 채웠을지도 모른다. 2부에선 금령총에서 출토된 ‘기마인물형 토기’와 ‘배 모양 그릇’ ‘등잔 모양 그릇’ 등 당대 최고 수준인 부장품을 선보인다. ‘배 모양 그릇’은 저승에서 만난 물길을 무사히 건너길, ‘등잔 모양 그릇’은 어두운 저승길에 발을 헛디뎌 넘어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담겼을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3부는 국립경주박물관이 2018년부터 3년간 금령총을 다시 발굴하며 새롭게 출토된 유물을 소개한다. 2019년 7월 금령총 호석(봉분 주변을 감싼 석물) 외곽에서 단단하게 구워 만든 작은 말 도용(陶俑·사람 대신 무덤에 묻던 허수아비)이 나왔다. 생김새가 1924년 출토된 ‘말 탄 사람 모양 그릇’ 한 쌍과 닮았다. 다만 새로 발굴된 유물은 말의 등과 뒷다리가 깨진 상태였다. 이때 1924년 출토된 ‘긴 목 항아리’의 굽다리 파편 2점이 추가로 나오기도 했다. 항아리의 굽다리는 묻을 때 일부러 깨뜨렸는데, 세상을 떠난 아이가 이승을 떠돌지 않도록 이승과 이어지는 ‘다리’를 끊는 의식이라고 한다. 내년 3월 5일까지. 무료.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2011년 9급 국가공무원 경쟁률은 93 대 1이었다. 11년이 지난 올해 그 비율은 29.2 대 1이 됐다. 30년 만에 가장 낮은 수치다. 올해 7급 국가공무원 경쟁률 역시 42.7 대 1로 43년 만에 최저치를 찍었다. 청년들은 더 이상 공무원을 선망하지 않는다. 2009년부터 10년간 청년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 1위는 공무원이었지만 지난해 통계청 조사 결과 대기업으로 바뀌었다. 국가기관은 공기업에도 밀려 3위로 떨어졌다. 불과 4년 전만 해도 ‘공무원 세대’로 불렸던 청년들에게 어떤 변화가 찾아온 걸까. 2018년 베스트셀러 ‘90년생이 온다’(웨일북)를 펴낸 저자는 4년 만에 벌어진 변화의 원인을 부당함에서 찾는다. 한국행정원에서 발표한 2021년 공직생활실태조사에 따르면 업무 중 느끼는 성취감을 측정하는 직무만족도 조사에서 재직한 지 5년 미만인 공무원은 최하위를 기록했다. 청년들은 돈이 적거나 업무량이 많아서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의전과 복종을 강요하는 공직사회에 반발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비단 공무원 사회뿐일까. 조직생활과 각종 정책에서 청년 세대가 느끼는 부당한 ‘반칙’ 사례들은 다양하다. 청년 세대가 업무 역량이 아닌 근속 연차로 연봉을 책정하는 호봉제에 반발하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최근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는 “왜 담배만 피우고 일도 안 하는 우리 팀 상사의 월급이 그렇게 높은지 이해가 안 간다”는 글이 올라왔다. 실제 2019년 통계청이 발표한 대기업 근로자 월평균 소득 자료에 따르면 20대는 291만 원인 데 비해 50대가 676만 원으로 가장 많았다. 저자는 현재의 임금체계가 청년세대의 일할 의욕을 떨어뜨리고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한다고 지적한다. 청년들의 목소리를 그저 골치 아프다고 여긴다면 바뀌는 것은 없다. “청년세대가 이상한 게 아니라 시대가 바뀌었다”고 강조하는 저자는 시대 변화에 발맞춘 사회의 모습도 담아냈다. 한국처럼 호봉제를 택했던 일본 사회는 최근 개인의 업무 역량과 목표 달성도에 따라 차등적 보상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 국내 기업도 직장 내 위계질서를 강화해왔던 복잡한 호칭 체계를 없애고 ‘매니저’ ‘프로’ ‘리더’ 등 서로에게 수평적인 이름을 붙이는 추세다. 무엇보다 이 책의 미덕은 세대 차이와 갈등을 부각하지 않고, 전 세대를 아우르는 부당한 반칙들을 밝혔다는 데 있다. 일례로 저자는 “최소한 30분 전 출근해 업무를 준비하라”고 지시하는 기성세대를 마냥 ‘꼰대’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 대신 기성세대야말로 오랜 시간 무상 근로를 강요받으며 부당한 반칙에 당해왔던 피해자라고 강조한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기성세대와 청년세대를 편 가르는 대신에 ‘우리’라는 말로 이들을 묶으며 이렇게 끝맺는다. “우리는 함께 세상의 부당함에 저항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진정한 변화는 ‘부당한 반칙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아주 간단한 원칙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2011년 9급 국가공무원 경쟁률은 93대 1이었다. 11년이 지난 올해 그 비율은 29.2대 1이 됐다. 30년 만에 가장 낮은 수치다. 올해 7급 국가공무원 경쟁률 역시 42.7대 1로 43년 만에 최저치를 찍었다. 청년들은 더 이상 공무원을 선망하지 않는다. 2009년부터 10년간 청년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 1위는 공무원이었지만 지난해 통계청 조사 결과 대기업으로 바뀌었다. 국가기관은 공기업에도 밀려 3위로 떨어졌다. 불과 4년 전만 해도 ‘공무원 세대’로 불렸던 청년들에게 어떤 변화가 찾아온 걸까. 2018년 베스트셀러 ‘90년생이 온다’(웨일북)를 펴낸 저자는 4년 만에 벌어진 변화의 원인을 부당함에서 찾는다. 한국행정원에서 발표한 2021년 공직생활실태조사에 따르면 업무 중 느끼는 성취감을 측정하는 직무만족도 조사에서 재직한 지 5년 미만인 공무원은 최하위를 기록했다. 청년들은 돈이 적거나 업무량이 많아서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의전과 복종을 강요하는 공직사회에 반발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비단 공무원 사회뿐일까. 조직생활과 각종 정책에서 청년 세대가 느끼는 부당한 ‘반칙’ 사례들은 다양하다. 청년 세대가 업무 역량이 아닌 근속 연차로 연봉을 책정하는 호봉제에 반발하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최근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는 “왜 담배만 피고 일도 안 하는 우리 팀 상사의 월급이 그렇게 높은지 이해가 안 간다”는 글이 올라왔다. 실제 2019년 통계청이 발표한 대기업 근로자 월 평균 소득 자료에 따르면 20대는 291만 원인 데 비해 50대가 676만 원으로 가장 많았다. 저자는 현재의 임금체계가 청년세대의 일할 의욕을 떨어뜨리고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한다고 지적한다. 청년들의 목소리를 그저 골치 아프다고 여긴다면 바뀌는 것은 없다. “청년 세대가 이상한 게 아니라 시대가 바뀌었다”고 강조하는 저자는 시대 변화에 발맞춘 사회의 모습도 담아냈다. 한국처럼 호봉제를 택했던 일본 사회는 최근 개인의 업무 역량과 목표 달성도에 따라 차등적 보상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 국내 기업도 직장 내 위계질서를 강화해왔던 복잡한 호칭 체계를 없애고 ‘매니저’ ‘프로’ ‘리더’ 등 서로에게 수평적인 이름을 붙이는 추세다. 무엇보다 이 책의 미덕은 세대 차이와 갈등을 부각하지 않고, 전 세대를 아우르는 부당한 반칙들을 밝혔다는 데 있다. 일례로 저자는 “최소한 30분 전 출근해 업무를 준비하라”고 지시하는 기성세대를 마냥 ‘꼰대’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 대신 기성세대야말로 오랜 시간 무상 근로를 강요받으며 부당한 반칙에 당해왔던 피해자라고 강조한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기성세대와 청년세대를 편 가르는 대신 ‘우리’라는 말로 이들을 묶으며 이렇게 끝맺는다. “우리는 함께 세상의 부당함에 저항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진정한 변화는 ‘부당한 반칙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아주 간단한 원칙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이소연기자 always99@donga.com}
“사슴 두 마리가 굴곡진 토기 위에 위태롭게 서 있어요.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이 꼭 제 모습 같았죠.”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1층 가야실.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 권명규 씨(24)는 올해 2월 박물관을 찾았다가 이곳에서 5세기 가야 토기 ‘사슴 장식 구멍단지’를 만났다. 그는 “먼지 쌓이고 구멍 나고 산산조각 난 유물들은 마음을 다친 이들을 치유하는 힘을 지녔다”며 “유물에게서 얻은 힘을 내 또래 친구들에게도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권 씨가 대학생 카피라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광고회사 TBWA 소속 대학생들이 올해 2월부터 국립중앙박물관과 협업해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마음을 치유하는 유물을 추천하는 ‘마음복원소’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유다. 8개월간의 협업 끝에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달 27일 박물관 홈페이지에 ‘마음복원소’를 열었다. 홈페이지에서 현재 심리 상태를 확인하는 설문에 답하면 마음을 보듬어줄 유물들로 관람 코스를 추천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진로 문제로 고민하는 이에게는 ‘대동여지도’를 추천하며 “헛된 여정은 없다. 결국 모든 길은 이어진다”고 전한다. 인간관계로 힘들어하는 이에게는 ‘빗살무늬토기’를 보길 권하며 “먼지 묻고 때 묻은 흔적 덕분에 토기만의 무늬가 오히려 선명해 보이지 않느냐”고 묻는다. 총 300여 점의 추천 유물을 선정했고, 유물별 문구 300여 개는 권 씨가 직접 작성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따르면 16일 기준 ‘마음복원소’를 방문한 이는 1만3000여 명에 이른다. 권 씨와 함께 이 프로젝트를 이끈 성신여대 산업디자인과 3학년 서예희 씨(22)와 부산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 송화연 씨(24)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4일 만났다. 이들은 “내가 가는 이 길이 맞는 길인지 고민하는 또래에게 오랜 세월을 버텨 온 유물의 힘을 전해주고 싶다”며 웃었다. 프로젝트 팀장을 맡은 송 씨는 “사랑, 돈, 인간관계 같은 문제에서 우리는 난관을 처음 겪는 경우가 많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려움을 겪는다”며 “홈페이지에 학업, 진로, 취업뿐 아니라 인간관계, 건강, 돈, 사랑 등 9가지 분야로 구성했고, 심리 상태에 따라 8점 정도의 유물이 추천되도록 했다”고 말했다. 사랑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고 응답한 이에게는 ‘고려시대 숟가락’을 추천하며 친한 친구에게 건네는 따뜻한 한마디처럼, 이렇게 위로한다. “친구야 밥 먹었니? 며칠째 한숨만 삼켰잖아. 이제 우리 밥 한술 먹자.” 돈 때문에 고민인 이들에겐 중국실에 소장된 ‘진나라 기와’를 소개하며 “대출받아 집 샀더니 기와 끄트머리만 내 거다. 나머지는 다 은행 거!”라고 유쾌하게 전한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어 주저하는 이에게는 조선시대 자 ‘진유척’을 알려주며 토닥인다. “그깟 자로 잴 수 있겠어? 우주만큼 커다란 네 가능성을.” 사이트를 디자인한 서 씨는 “마음을 닫고 방 안에 움츠러들어 있을 친구들을 박물관으로 이끌어내는 게 최종 목표”라고 했다. 그는 유물 추천 코스가 나오는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 ‘방문 예약’ 버튼을 넣었다. 설문 응답자가 박물관과 약속을 잡듯 달력에 방문 날짜를 예약하게 한 것이다. 이들은 또래에게 어떤 유물을 추천하고 싶을까. 권 씨는 조선시대 ‘측우기’를 꼽았다. “입사시험 면접에서 계속 떨어지다 보면 내가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해가 쨍쨍한 날의 측우기처럼…. 그럴 때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아직 비가 오지 않았다면 나의 때가 오지 않은 거니까요.”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는 1909년부터 1922년 11월 18일 죽는 날까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고 또 썼다. 자신의 이름에서 본뜬 주인공 마르셀이 과거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깨닫는 여정을 담은 이 책은, 원어로 무려 7권에 달한다. 국내 ‘프루스트 전문가’로 꼽히는 김희영 한국외국어대 프랑스어과 명예교수(73)는 2012년 첫 책을 번역한 후 10년 만인 이달 17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3권(민음사)을 완역했다. 프루스트가 그랬던 것처럼 매일 자정 잠에서 깨 7∼8시간 동안 온전히 번역에 몰두했다. 13권을 모두 합하면 무려 5704쪽. “끝나지 않는 소설을 평생 읽는 것이 어릴 적 꿈이었다”는 그는 지난 10년간 원 없이 그 꿈을 이룬 셈이다. 서울 강남구 민음사에서 14일 만난 그는 책장 한 칸을 가득 채운 책들을 바라보며 “지난 10년은 프루스트의 책을 읽고 번역할 수 있어서 행복한 시간이었다. 특히 프루스트가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된 올해 완역할 수 있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김 명예교수의 책은 그동안 판본을 비교해 가장 정교하게 번역한 정본으로 평가받는다. 길고 난해한 프루스트의 문체를 존중하며 미세한 떨림까지 담아냈다. 그는 “분명 생경하고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낯설게 하기야말로 외국 문학을 읽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새롭고 낯선 문장을 통해 획일적이고 좁은 ‘나’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로 향할 수 있어요.” 그가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은 1권 19쪽에 나온다. ‘나는 동굴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보다도 더 헐벗은 존재였다. … 그러자 추억이 저 높은 곳에서부터 구원처럼 다가와 도저히 내가 혼자서는 빠져나갈 수 없는 허무로부터 나를 구해주었다.’ 그는 “기억이 없다면 인간은 헐벗은 존재일 뿐”이라며 “프루스트의 작품 속에는 당대 프랑스 사회의 각종 사건 사고가 세밀화처럼 묘사돼 있다. 프루스트는 그동안 보잘것없다고 여겨져 왔던 일상의 순간을 소설에 담아내 집단기억을 영원히 남겼다”고 설명했다. “프루스트에게 문학이란 망각과 싸우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 아니었을까요. 아주 하찮은 일상적인 삶의 조각들을 하나의 건축물로 빚어낸 것이 프루스트 작품이 지닌 힘입니다.” 책 한 권 읽기도 어려운 시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권에서 현대인은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 그는 “다 읽고 나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인생의 답을 얻을 수 있다”고 답했다. “소설 속에는 작가를 꿈꾸는 주인공이 자신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과정이 담겨 있어요. 보잘것없고 부스러지기 쉬운 일상, 잊기 쉬운 고통과 쾌락 등 아주 작은 삶의 조각들이 모여 작품이 완성되죠. 문학도, 삶도 결국 작은 조각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닫길 바라요.”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사슴 두 마리가 굴곡진 토기 위에 위태롭게 서 있어요.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이 꼭 제 모습 같았죠.”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1층 가야실. 경희대 국어국문학과에 재학 중인 권명규 씨(24)는 올 2월 박물관을 찾았다가 이곳에서 5세기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가야 토기 ‘사슴 장식 구멍단지’를 만났다. 그는 “고리타분하고 낡은 줄만 알았던 박물관 속 유물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곳에서 내 모습이 보였다”며 “먼지 쌓이고 구멍 나고 산산조각 난 유물들은 마음을 다친 이들을 치유하는 힘을 지녔다”고 말했다. “유물들에게서 얻은 힘을 내 또래 친구들에게도 전하고 싶었어요.”권 씨가 대학생 카피라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광고회사 ‘TBWA’ 소속 대학생들이 올 2월부터 국립중앙박물관과 협업해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마음을 치유하는 유물을 추천하는 ‘마음복원소’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이유다.국립중앙박물관은 8개월 동안의 협업 끝에 지난달 27일 박물관 홈페이지에 ‘마음복원소’를 열었다. 온라인 홈페이지에서 현재 심리 상태를 확인하는 간단한 설문을 진행하면 마음을 보듬어줄 유물들로 코스를 추천해주는 프로그램을 마련한 것. 진로 문제로 고민하는 이에게는 ‘대동여지도’를 추천하며 “헛된 여정은 없다. 결국 모든 길은 이어진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인간관계로 힘들어하는 이에게 ‘빗살무늬토기’를 추천하며 “먼지 묻고 때 묻은 흔적 덕분에 토기만의 무늬가 오히려 선명해 보이지 않느냐”고 묻는 식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따르면 16일 기준 ‘마음복원소’ 페이지 총 방문자 수는 1만3000여 명에 이른다.14일 오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권 씨와 함께 이 프로젝트를 이끈 성신여대 산업디자인과 서예희 씨(22)와 부산대 국어국문학과 송화연 씨(24)를 만났다. 이들은 “취업과 진로 문제로 내가 가는 이 길이 맞는 길인지 고민하는 또래 친구들에게 오랜 세월을 버텨온 유물의 힘을 전해주고 싶다”며 웃었다.프로젝트 기획 초기부터 팀장을 맡은 송 씨는 “어른들이 보기엔 사랑, 돈, 인간관계와 같은 문제는 별 일 아닐 수 있지만 우린 아직 이런 난관이 처음이라 어려울 수밖에 없다”며 “혹시 누군가가 심리 상태를 체크하러 홈페이지에 들어왔다가 내 고민이 없어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다양한 고민 선택지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심리 확인 페이지에는 학업, 진로, 직장생활, 취업뿐 아니라 인간관계, 건강, 돈, 사랑 등 9가지 선택지가 마련됐다.사이트를 디자인한 서 씨는 “마음을 다친 친구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주는 데서 멈추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유물 추천 코스가 나오는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 ‘방문 예약’ 버튼을 추가했다. 마치 박물관과 설문 응답자가 서로 약속을 잡듯 달력에 날짜를 선택하는 식이다. 그는 “마음을 닫고 방 안에 움츠러들었을 친구들을 박물관으로 이끌어내는 게 ‘마음복원소’ 프로젝트의 최종 목표”라고 말했다. 이들은 또래에게 어떤 유물을 추천하고 싶을까. ‘마음복원소’ 유물 추천 시스템에 적용된 따뜻한 위로 문구 300여 개를 손수 작성한 권 씨는 요즘 또래에게 가장 추천하고 싶은 유물로 조선시대 ‘측우기’를 꼽았다. “입사시험 면접에서 떨어지다 보면 내가 쓸모 없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해가 쨍쨍한 날의 측우기처럼…. 그럴 때 너무 조급해 하지 말라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아직 비가 오지 않았다면 나의 때가 오지 않은 거니까요.”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오랜 세월이 흘러 색이 바랜 배냇저고리. 이 작은 옷에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던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는 변함없이 이어진다. 국립민속박물관이 16일부터 서울 종로구 국립민속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길상(吉祥·좋은 일이 일어날 징조) 특별전 ‘그 겨울의 행복’을 연다. 장수를 상징하는 ‘십장생도(十長生圖)’를 포함한 조선시대 민화뿐 아니라 복을 부르는 한자가 새겨진 베개, 부를 뜻하는 모란이 그려진 주전자 등 민속 유물 212점을 선보인다. 전시장은 장수와 명예, 부귀, 강녕, 다산 등 오복(五福)의 의미를 담은 유물로 가득하다. 평균 수명이 45세가량 됐던 조선시대에는 오래 사는 것이 가장 복된 일이라 여겨 일상 곳곳에 장수를 뜻하는 상징물을 새겼다. 조선 중기 문인화가 조지운(1637∼1691)이 그린 고양이 그림 ‘유하묘도’가 대표적이다. 고양이의 한자인 ‘묘(猫)’와 노인을 뜻하는 ‘모(모)’는 중국어 발음이 ‘마오’로 같아 장수를 뜻했다. 길한 소식을 전해주는 까치 한 쌍과 고양이 다섯 마리를 그린 이 작품은 부부가 해로하길 기원하는 바람을 담았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둔 수험생에게 합격을 빌며 엿을 선물하듯 선조들은 시험을 앞둔 이에게 장원급제를 기원하는 상징물을 선물했다. 조선 후기 화가 이한철(1812∼1893)이 게 네 마리를 그린 ‘해도(蟹圖)’는 장원급제해 출세하라는 뜻이 새겨진 부적과 같다. 딱딱한 게의 ‘등갑’을 뒤집으면 1등을 의미하는 ‘갑등(甲等)’으로, 장원급제하길 바라는 마음을 언어유희로 표현한 셈이다. 이 밖에도 ‘화조도 6폭 병풍’ 등 규방 공예품에는 가화만사성을 소망하며 한 땀 한 땀 수놓은 부녀자들의 염원이 담겼다. 오늘날 복의 의미를 지닌 물품도 전시돼 있다. 로또, 주택복권, 돼지저금통 등이 놓여 있는 전시장 벽면에는 지난해 세계 156개국 중 한국의 행복 순위가 59위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유엔 산하 자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가 올해 3월 발표한 ‘세계 행복 보고서 2022’의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이주홍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는 “행복을 기원하는 전시물을 보며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내년 3월 2일까지. 무료.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5cm의 기적’ 부처님은 이제 중생에게 친견(親見)을 허락할까. 15년 전 경북 경주에서 엎어진 채 발견됐지만 얼굴에 풍화로 닳은 흔적 하나 없어 화제가 됐던 ‘남산 열암곡 마애불입상’을 세우는 데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열암곡 마애불입상은 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마애불(磨崖佛·자연 암벽에 조각한 불상) 가운데 가장 완벽한 얼굴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학계에서는 마애불이 1430년 발생한 지진으로 인해 쓰러졌다고 분석했다. 600년 동안 쓰러져 있던 불상을 세우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문화재청도 그간 여러 각도로 검토했지만 “자칫 무리해서 세우려다 불상이 훼손될 수 있다”며 쉽사리 사업을 추진하지 못했다. 올해 9월 진우 스님(61)이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에 오른 뒤 분위기가 급변하고 있다. 스님이 ‘열암곡 마애불입상 입불(入佛)’을 최우선 과제로 밝혔기 때문이다. 학계에서도 “이 상태로 불상을 유지하는 것도 안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마애불 세우기에 찬성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잘못 손댔다간 훼손 위험 2007년 5월 22일 열암곡 마애불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로또 1등 당첨에 가까운 우연이었다. 당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경북도 유형문화재인 열암곡 석불좌상 주변을 발굴하다가 남동쪽으로 약 30m 떨어진 지점에서 거대한 돌덩이를 발견했다. 현장을 조사하던 박소희 연구원은 너비 400cm에 높이 680cm, 두께 280cm인 돌덩이가 심상찮음을 느끼고 나뭇가지 등으로 뒤덮인 바위틈 아래로 손을 넣어 더듬었다. 뭔가 매끈하게 다듬어진 흔적을 찾고 아래를 들여다보니 오뚝하게 솟은 부처의 콧날이 보였다고 한다. 엎어진 불상의 얼굴과 바닥 사이는 불과 5cm. 암벽에서 떨어져 추락했는데도 기적처럼 상호(相好·부처의 용모와 형상)가 하나도 훼손되지 않았다. 게다가 자연스레 파묻혀 있은 덕분에 닳거나 생채기도 나지 않았다. 연구를 통해 9세기 작품으로 확인된 걸 감안하면 1200년 가까이 제 모습을 지킨 셈이다. 그 때문에 발굴 직후에도 “제대로 세우기만 하면 최소 국보나 보물이 될 문화재”라는 평이 나왔다. 하지만 80t이 넘는 마애불 세우기는 절대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문화재계는 물론이고 건축계도 난색을 표했다. 마애불이 있는 장소는 35∼45도에 이르는 급경사로 둘러싸여 있다. 불상을 들어올릴 중장비가 들어오기 어려울뿐더러 불상 자체가 화강암 재질이라 충격을 살짝 받기만 해도 부서질 수 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도 있다. 비지정 문화재인 열암곡 마애불입상이 있는 ‘경주 남산’은 국가사적지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국가사적지에서 비지정 문화재의 위치를 바꿀 때는 반드시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경주시 문화재과 관계자는 “탐방로에 덱 하나를 설치할 때도 문화재청의 허가가 필요하다”며 “마애불 다시 세우기도 중요하지만 남산 보존도 그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라 조심스럽다”고 했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은 2013년 열암곡 마애불과 관련해 50차례 전문가 자문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남산의 지형 변화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대전제에만 동의했을 뿐 결국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했다.○ “조립식 크레인 활용 가능” 2015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발표한 ‘마애불상 정비 보고서’는 새로운 논란에 불을 지폈다. 연구소는 “불상을 받치고 있는 아래 암석이 충격에 의한 파손과 풍화로 내구성이 저하된 상태”라며 “지진 등 외부 요인으로 외력이 작용하면 불상의 이마 부분이 훼손될 우려가 크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듬해 9월 경주에선 규모 5.8의 지진이 발생했다. 우려가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이후 학계와 불교계에선 “현 상태로 마애불을 방치하는 건 위험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2016년 경주시가 한국건설기술연구원에 의뢰해 ‘입불 방안 연구’를 실시한 결과 “중장비로 마애불을 다시 세우는 것이 이제는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오며 전환점을 맞았다. 연구원이 제안한 방법은 ‘호이스트 크레인’을 활용하는 것이다. 가로세로 각각 20m 크기인 호이스트 크레인은 협소한 공간에도 설치할 수 있고, 크레인을 분해해서 이동한 뒤 재조립할 수 있다고 한다. 헬기로 장비를 마애불 근처로 옮긴 뒤 불상 주변 평지에서 조립하면 남산 훼손 위험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고 밝혔다. 일단 경주시는 2020년부터 2년간 열암곡 마애불이 있는 지반을 단단하게 다지기 위해 2단 옹벽을 쌓아올리는 보강 공사를 했다. 홍원표 경주시 문화재과 주무관은 “산사태나 장마 등으로 바위가 붕괴되지 않게 철망을 마애불 주변에 설치했다”며 “지진 등으로 생기는 낙석으로 인한 훼손 위험성은 줄인 상태”라고 했다.○ “최소 보물급 문화재, 본모습 찾아야” 기술적으로 긍정적인 의견이 나오면서 마애불 세우기 사업은 탄력을 받고 있다. 진우 총무원장은 “600년 동안 누워 있던 부처님을 바로 세우는 일은 종교적인 차원을 떠나 민족의 얼을 되살리는 일”이라며 국민적 관심을 촉구했다. 문화재청도 올해 8월 열암곡 마애불입상의 관리 주체인 경주시에 연구 용역비 5억 원을 지원했다. 현재 경주시는 앞선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한국건설기술연구원, 한국건축역사학회와 함께 마애불 입불에 대한 안전성을 파악하는 시뮬레이션 연구를 하고 있다. 내년 8월경 결과가 나오기 전에 학술대회를 개최해 전반적인 조언도 구할 예정이다. 마애불은 세우는 것뿐 아니라 ‘원위치’를 찾는 것도 중요하다. 2018년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이 불상 바닥의 시료 5개를 채취해 인근 암반에서 확보한 시료와 비교해 보니, 현재 불상의 다리 쪽 인근에 있는 암벽에서 추락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됐다. 문화재청은 “마애불을 세운다면 본래 자리를 찾는 학술적 연구가 뒷받침돼야 한다”며 “올해 여름부터 관련 연구도 함께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열암곡 마애불은 세우기만 하면 최소 국가지정문화재 보물급으로 인정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국가지정문화재를 지정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로 고려되는 ‘역사성’과 ‘완전성’을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경주시 연구사업 자문위원인 임영애 동국대 문화재학과·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는 “얼굴 원형이 어떤 깨짐도 없이 완전하게 보존된 유일한 신라 마애불이라 완전성을 갖췄을 뿐 아니라 석굴암 본존불 조성 이후인 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돼 역사성까지 갖췄다”며 “국가사적지인 남산을 훼손하지 않고 마애불을 세울 해법을 모두 합심해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소연 문화부 기자 always99@donga.com}
떨어지는 장미꽃들 사이로 미(美)의 여신 비너스가 윤기 나는 머릿결을 흩날리며 바다 위에 떠오른다. 멍 자국이나 군살은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완벽한 몸매. 15세기 이탈리아 거장 산드로 보티첼리(1445∼1510)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은 오늘날까지도 TV 광고와 영화 속 미녀의 표상으로 꼽힌다. 영국 미술사학자인 저자는 서양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 걸작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지적한다. 주근깨 하나 없는 무결점 피부와 군살 하나 없는 몸매는 실제 여성의 몸을 표현한 게 아니다. 남성 중심적 예술계가 만들어낸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는 오랫동안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굳혀 온 미술 작품들을 소개하며 우리의 뇌에 각인된 여성상이 실제와 얼마나 동떨어졌는지를 드러낸다. 비단 비너스뿐일까. 저자는 성모 마리아 역시 순종적인 여성의 성 역할을 굳혀온 대표적인 여성상이라고 강조한다. 미국 유명 여성지 ‘브라이즈 매거진’의 1950∼1980년대 표지에선 무릎을 꿇은 채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신부가 자주 등장했다. 저자는 “현대사회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순종하는 성녀 이미지가 여성에게 요구된다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수세기 동안 굳어버린 여성을 둘러싼 왜곡된 이미지는 어떻게 해야 바로잡을 수 있을까. 저자는 더 많은 여성 예술가들이 공개적으로 자기 삶을 얘기하고, 실제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면 진짜 날것인 여성의 모습이 수면 위로 드러날 거라고 기대한다. 다행히 세계 곳곳에서 조금씩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스페인 프라도미술관과 이탈리아 우피치미술관은 최근 여성 미술가를 조명하는 전시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여성의 출산 과정을 생생한 사진으로 남겨 화제가 된 영국 조각가이자 사진작가인 허마이어니 월트셔처럼 여성의 진솔한 목소리를 담아내는 예술가도 늘어나고 있다. 저자 역시 그런 여성 가운데 한 명이다. 팬데믹으로 집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이 책을 썼다는 저자는 마무리 부분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서재에서 글을 쓸 때 마음이 불편했다”면서도 “그럼에도 여성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떨어지는 장미꽃들 사이로 미(美)의 여신 비너스가 윤기 나는 머릿결을 흩날리며 바다 위에 떠오른다. 멍 자국이나 군살은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완벽한 몸매. 15세기 이탈리아 거장 산드로 보티첼리(1445~1510)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은 오늘날까지도 TV 광고와 영화 속 미녀의 표상으로 꼽힌다. 영국 미술사학자로 최근 ‘시선의 불평등’(아트북스)을 펴낸 저자는 서양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 걸작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지적한다. 주근깨 하나 없는 무결점 피부와 군살 하나 없는 몸매는 실제 여성의 몸을 표현한 게 아니다. 남성 중심적 예술계가 만들어낸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는 오랫동안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굳혀온 미술작품들을 소개하며 우리의 뇌에 각인된 여성상이 실제와 얼마나 동떨어졌는지를 드러낸다.비단 비너스뿐일까. 저자는 성모 마리아 역시 순종적인 여성의 성 역할을 굳혀온 대표적인 여성상이라고 강조한다. 미국 유명 여성지 ‘브라이즈 매거진’의 1950~1980년대 표지에선 무릎을 꿇은 채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신부가 자주 등장했다. 저자는 “현대사회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순종하는 성녀 이미지가 여성에게 요구된다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수세기 동안 굳어버린 여성을 둘러싼 왜곡된 이미지는 어떻게 해야 바로잡을 수 있을까. 저자는 더 많은 여성 예술가들이 공개적으로 자기 삶을 얘기하고, 실제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면 진짜 날 것인 여성의 모습이 수면 위로 드러날 거라고 기대한다. 다행히 세계 곳곳에서 조금씩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스페인 프라도미술관과 이탈리아 우피치미술관은 최근 여성 미술가를 조명하는 전시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여성의 출산 과정을 생생한 사진으로 남겨 화제가 된 영국 조각가이자 사진작가인 허마이어니 월트셔처럼 여성의 진솔한 목소리를 담아내는 예술가도 늘어나고 있다. 저자 역시 그런 여성 가운데 한 명이다. 팬데믹으로 집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이 책을 썼다는 저자는 마무리 부분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서재에서 글을 쓸 때 마음이 불편했다”면서도 “그럼에도 여성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시선의 불평등캐서린 매코맥 지음·하지은 옮김256쪽·1만7000원·아트북스이소연기자 always99@donga.com}
시대를 고뇌하는 애국지사 윤봉길 의사(1908∼1932)와 윤동주 시인(1917∼1945)이 ‘증강현실(AR)’과 ‘가상현실(VR)’을 통해 우리 곁에 다가온다. 낡은 사진과 글로만 접하던 윤 의사와 윤 시인을 디지털 기술로 복원해 다시 만나는 전시가 열린다. 문화재청은 11일부터 한국문화재재단, 대전시립미술관과 함께 대전 중구 대전창작센터에서 디지털 문화유산 체험전시회 ‘나는-윤동주·윤봉길을 말하다’를 개최한다. 올해 순국 90주년을 맞은 윤 의사는 전시에서 실제로 살아있는 분위기로 관객들을 맞이한다. 전해진 사진 속 옛 모습 그대로 정장을 차려입고 미소를 지으며 관객에게 반응한다. 문화재청 측은 “AR와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한 딥페이크(Deepfake), 반응형 스크린 등 다양한 기술을 적용해 윤 의사를 구현했다”고 설명했다. 윤 의사가 현실 같은 느낌이라면, 윤 시인은 VR를 이용해 교복을 입은 앳된 얼굴을 선보인다. 윤 시인의 삶을 다룬 애니메이션 분위기의 VR 영화 ‘시인의 방’이 이번 전시에서 국내 처음으로 공개된다. 관람객들은 독립된 방에서 머리에 착용하는 HMD(헤드 마운트 디스플레이)를 쓰고 영상을 체험할 수 있다. ‘시인의 방’에서는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시 ‘쉽게 쓰여진 시’에서)는 윤 시인의 속내가 절절히 묻어난다. 책으로 둘러싸인 조그마한 골방에서 윤 시인이 책상에 고개를 묻은 채 괴로워하면, 그의 등 뒤로 꾹꾹 눌러 쓴 시가 흘러나오기도 한다. 해당 VR 영화는 올 9월에 개최됐던 제79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이머시브 경쟁 부문에 공식 초청되기도 했다.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이 공동 제작하고, 배우 이상윤이 윤 시인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쉽게 쓰여진 시’를 포함해 시인의 대표작 9편과 ‘윤동주 친필 원고’ 등 관련 국가등록문화재가 함께 소개된다. 문화재청은 “전시 공간인 대전시립미술관 대전창작센터도 1958년 농산물검사소가 있던 관공서 건물로 2004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근대 건축물”이라며 “전시와 함께 시간 여행을 떠난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고 전했다. 27일까지. 무료.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모든 사물이 인공지능으로 연결된 미래. 갑자기 완벽한 정전(停電)이 찾아온다면? 하늘에서는 비행기가 추락한다. 컴퓨터 화면은 순식간에 검게 변한다. 휴대전화도 작동을 멈춘다. 엘리베이터와 난방기, 냉장고도 사용할 수 없다. 미국 소설가 돈 드릴로가 장편소설 ‘침묵’(국내 2020년 출간)에서 묘사한 초연결사회의 종말이다. ‘피로사회’(2010년·문학과지성사)로 화제를 모았던 한병철 전 독일 베를린예술대 교수(63·사진)는 “지난달 벌어진 ‘카카오 데이터센터 화재’로 인한 데이터 재난 상황을 지켜보며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고 한다. 초연결사회의 이면을 철학적으로 사유한 ‘사물의 소멸’(김영사)을 올해 9월 펴낸 한 전 교수는 7일 e메일 인터뷰에서 “기술에 대한 의존이 더 심해진다면 실제 종말론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소설 ‘침묵’ 마지막 장면에서는 고요와 공포가 느껴집니다. 진정 종말론적인 대목은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할 수 없음을 깨닫는 장면이에요. 사람들은 그제야 (컴퓨터와 휴대전화 없이) 대화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자각하죠.” 그는 우리 사회가 손에 잡히는 물건으로 둘러싸였던 “사물권의 시대”에서, 손에 잡히지 않는 새로운 정보가 끊임없이 흐르는 “정보권의 시대”로 바뀌었다고 분석했다. 실제 두터운 사진첩이 휴대전화 속에서 언제든 지워질 수 있는 ‘디지털 사진첩’으로 대체된 지 오래다. 그는 “이런 시대는 인간관계도 네트워크에서만 존재한다”고 했다. 팔로를 취소하면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어진 관계를 손쉽게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셜미디어는 온라인에서 인간관계를 무제한으로 연결시켰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외롭죠. 서로가 버튼만 누르면 언제든 서로를 처분할 수 있는 처지가 됐기 때문입니다.” 그는 음식, 영화를 넘어 좋아할 만한 친구까지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추천해주는 시대를 경계했다. 결국 이런 순응이 “인간의 주체성마저 소멸하게 만들 것”이라고 진단했다. “우리는 ‘스마트홈’을 비롯한 사물인터넷의 통제 아래 놓여 있어요. 알고리즘이 추천한 선택지를 골라잡을 수 있죠. 하지만 우리가 고른 게 진정 우리가 원하는 것이었을까요?” 디지털 감옥에서 벗어날 방법은 뭘까. 그는 진정한 “관계와 접촉”이라고 답했다. “필요에 의해 맺은 관계에서는 상대방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특정한 목적 없이 타인 그 자체에 집중해야 다름을 인정하고 진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인간 본연의 세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국립문화재연구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충남 부여군 부소산성 군창지(군 식량을 비축한 창고 터) 시굴조사 중 백제 사비기에 만들어진 ‘와적기단(瓦積基壇·기와를 쌓아 만든 기단)’ 건물지 2개 동을 확인했다고 7일 밝혔다. 동서 길이가 약 16m 이상인 북쪽 건물과 14m 넘는 남쪽 건물지가 평행하게 배치됐고, 기단이 최대 20단 가까이 남아 있어 현재까지 발굴된 사비기 건물 중 가장 잘 보존돼 있다. 연구소는 건물 외형이 백제 사비기 왕도 유적지 형태와 유사해 왕궁급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모든 사물이 인공지능으로 연결된 미래, 완벽한 정전(停電)이 찾아온다면…. 하늘에서는 비행기가 추락한다. 컴퓨터 화면이 갑자기 검게 변한다. 휴대전화도 작동을 멈춘다. 엘리베이터, 난방기, 냉장고도 사용할 수 없다. 미국 소설가 돈 드릴로의 장편소설 ‘침묵(The Silence)’의 한 장면이 묘사한 초연결사회의 종말이다. 2017년 출간한 ‘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의 저자로 유명한 재독 철학자 한병철 전 베를린예술대 교수(63)는 지난달 15일 ‘카카오 데이터센터 화재’로 인한 데이터 재난 상황을 지켜보며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초연결사회가 남긴 그림자를 철학적으로 사유한 신간 ‘사물의 소멸’(김영사)을 최근 펴낸 그는 2일 동아일보와 나눈 e메일 서면 인터뷰에서 “단지 소설 속에서만 벌어지는 종말이 아니다. 기술에 대한 우리의 의존이 점점 더 심해진다면 실제로 종말론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고요와 공포가 느껴집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종말론적인 것은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할 수 없음을 깨닫는 장면이에요. 사람들은 그제서야 (컴퓨터와 휴대전화 없이) 이야기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자각하죠.” 한 교수는 이 책에서 우리 사회가 손에 잡히는 물건으로 둘러싸였던 ‘사물권의 시대’에서 손에 잡히지 않고 새로운 정보가 끊임없이 흐르는 ‘정보권의 시대’로 바뀌었다고 분석한다. 추억으로 가득 찬 두터운 사진첩은, 휴대전화 용량이 부족하면 언제든 삭제할 수 있는 ‘디지털 사진첩’으로 대체된 지 오래다. 한 교수는 “이런 시대에는 인간관계도 실재하지 않고 네트워크에서만 존재한다”고 진단했다. 팔로우 취소 버튼 한 번이면 소셜미디어에 가득 찬 인간관계를 손쉽게 정리할 수 있는 세상이다. “소셜미디어는 인간관계를 무제한으로 연결시켰는데도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외롭습니다. 버튼 하나면 언제든 서로가 서로를 처분할 수 있는 처지가 됐기 때문입니다.” 한 교수는 음식, 영화, 책, 쇼핑 목록은 물론 내가 좋아할 만한 친구까지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알아서 추천해주는 시대에는 “인간의 주체성마저 소멸하고 말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이제 인간은 스스로 일상을 통제하지 못하고 ‘스마트홈’을 비롯한 사물인터넷의 통제 아래 놓여 있다”며 “오늘날 우리는 진정한 선택권을 더는 갖고 있지 않다”고 경고했다. 그는 책과 인터뷰 내내 ‘디지털 감옥’이라는 표현을 수차례 강조했다. 마치 독자들에게 경고 메시지를 전하는 것처럼. “디지털 감옥에 갇힌 우리는 그저 ‘좋아요’를 누르는 노예일 뿐입니다. 우리는 알고리즘이 추천한 선택지를 골라잡을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고른 것이 진정 우리가 원하는 것이었을까요?” 이소연기자 always99@donga.com}
멀리서도 범상치 않은 붉은색 전경. 가까이 다가서면 파이프 같은 굵고 기다란 철재가 정열을 머금고 건물을 끌어안듯 둘러싸고 있다. 얼핏 어디까지를 건축이라 부를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그게 ‘우영미’라는 브랜드의 특징이라 봐주면 좋겠어요. 남성과 여성, 동양과 서양에 대한 구분 없이 모든 가치관을 감싸 안으려고 합니다. 경계 없이 다양한 정체성을 포용하려 해요.”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사랑받는 패션 브랜드 ‘솔리드옴므’가 최근 서울 광진구 천호대로에 ‘패션하우스’를 표방한 6층 규모 신사옥을 완공했다. 국내 최고 패션디자이너 가운데 한 명인 우영미 대표(63)는 2일 신사옥에서 동아일보와 만나 “1988년 창업할 때부터 품었던 패션하우스의 꿈을 34년 만에 이뤘다”고 말했다. “설계할 때부터 건축가와 100번 이상 회의했다”는 그는 신사옥의 조그마한 자재 하나까지 심혈을 기울였다. 멋들어진 외관은 맛보기일 뿐, 내부는 건축적 아름다움이 더욱 도드라진다. 1층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긴 복도에 사람 키의 2∼3배쯤 되는 대형 책장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해외 유명 도서관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솔리드옴므 직원들도 ‘도서관’이라 부르는 이 공간은, 책이 아닌 옷으로 가득 차 있다. 우 대표가 운영하는 브랜드 ‘솔리드옴므’와 ‘우영미(WOOYOUNGMI)’에서 여태껏 만든 옷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직원들은 여기서 책을 빌리듯 전작(前作)을 빌려가 연구한다. 새 디자인을 창조하기 위한 ‘참고문헌’인 셈이다. “디자이너에게 가장 좋은 레퍼런스는 결국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옷입니다. 자기복제와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죠. 우리 브랜드가 일궈온 유산이야말로 브랜드를 계속 새롭게 만드는 원천이 됩니다. 끊임없는 연구가 없다면 창조도 없으니까요.” 책장들 옆 공간에는 우 대표가 그간 해온 스케치 흔적과 영감을 줬던 소품들이 박물관 전시처럼 진열돼 있다. 우 대표는 “서른 무렵 브랜드를 창업했는데, 지금껏 간직해온 모든 스케치와 옷들을 축적하는 아카이브를 구축하려 했다”며 “언젠가 우영미가 없더라도 우리 브랜드의 철학은 계승 발전시키길 원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샤넬, 구찌 같은 브랜드는 단지 오래돼 지금까지 사랑받는 게 아니에요. 브랜드를 정립한 최초의 디자이너가 떠난 뒤에도 그 유산이 계속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신사옥 건축의 핵심은 브랜드의 정체성이 이 공간에서 축적되며 더 나은 미래를 열어주길 바라는 거였어요.” 신사옥 제일 위층인 6층에서는 멀리 아차산 자락이 한눈에 펼쳐진다. 우 대표는 자신의 집무실로 ‘꼭대기 명당’을 마다했다. “디자이너들과 매일 회의하고 토론할” 2층을 선택했다. 그는 “디자이너는 아래로 마흔 살쯤 차이 나는 직원과도 거리낌 없이 소통해야 한다”며 “위에서 지시하는 게 아니라 같은 눈높이에 머물러야 물리적 거리감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테라스가 있는 6층과 3층은 직원들에게 내줬어요. 솔직히 경치가 너무 맘에 들어 살짝 혹하기도 했는데…(웃음), 수많은 의상 샘플과 스토리보드가 줄지어 있는 이 창고 같은 2층 공간이 디자이너의 일터거든요. 비좁은 이전 사옥에서 고생한 직원들에게 숨 돌릴 공간을 내주고 싶기도 했고요.” 이날 테라스에는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었다. 맑은 햇살을 즐기던 한 직원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 이렇게 머리를 식히면 상쾌해진다”고 했다. 우 대표는 “직원들에게 ‘일부러라도 테라스에 나가 멍때리라’고 한다”고 말했다. “며칠 전 한 직원이 테라스에 요가 매트를 펴 놓고 누워서 하늘을 보고 있더라고요. 온 종일 책상에 앉아 있으면 아이디어가 떠오르겠어요? 일과 휴식의 경계를 허물 때 더 좋은 생각이 떠올라요. 패션에는 정답이 없거든요. 건축도 마찬가지 아닐까요.”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기다란 복도에 일렬로 나란히 세워진 책장들… 건물 1층 로비에 들어선 도서관 때문일까. 얼핏 출판사 같아 보이는 이곳은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 ‘우영미(WOOYOUNGM)I’와 ‘솔리드옴므’의 신(新)사옥이다. 한데 복도를 가득 채운 책장에는 책이 아닌 두 브랜드가 여태껏 만들어온 옷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 직원들은 마치 책을 빌리듯 브랜드의 전작(前作)을 빌린다. 마네킹 위에 옷을 입히고 대보며 새로운 디자인을 창조해낸다.“디자이너에게 가장 좋은 레퍼런스는 결국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옷들입니다. 우리 브랜드가 그동안 일궈온 옷이라는 유산이야말로 브랜드를 무한히 새롭게 만드는 원천이 되어줄 거예요.” 우영미 솔리드옴므 대표(63)는 1988년 ‘솔리드옴므’를 론칭한 지 34년 만에 “패션하우스를 짓고 싶다”는 오랜 꿈을 이뤘다. 건축가와 함께 100번이 넘는 설계 회의를 거쳐 마침내 지난달 서울 광진구 구의동에 꿈에 그리던 신 사옥을 완공했다. 2일 오전 사옥에서 만난 우 대표는 “브랜드를 창업했을 때부터 지금껏 간직하고 있었던 모든 스케치와 옷들을 축적하는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싶었다. 이제는 내가 없어도 ‘우영미’와 ‘솔리드옴므’라는 브랜드가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명품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의 꿈대로 건물 1층에는 그가 29세에 브랜드를 창업할 때부터 간직해온 스케치 흔적들과 그에게 영감을 준 소품들이 마치 박물관처럼 진열돼 있다. “샤넬, 구찌와 같은 명품 브랜드들이 지금까지 살아남아 사랑받는 이유는 최초의 디자이너가 떠나도 그가 남긴 유산이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오기 때문이에요. 브랜드의 유산이 나날이 축적될 이 공간에서 직원들이 역사를 이어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었습니다.” 그의 손길로 빚은 신 사옥은 외관에서부터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상징한다. 붉은 색의 굵은 기다란 철제 선들이 건물을 끌어안듯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우 대표는 “우영미라는 브랜드는 남성과 여성, 동양과 서양의 구분 없이 이 모든 정체성을 감싸 안는 것이 특징”이라며 “경계를 짓기보다 경계 없이 이 모든 가치관을 포용하는 브랜드의 정체성을 담아냈다”고 설명했다. 우 대표는 신사옥을 지으며 아차산 자락이 한눈에 펼쳐진 꼭대기 6층 명당을 자신의 집무실로 쓰는 걸 마다했다. 대신 그는 두 브랜드의 디자이너들이 매일 회의를 열며 토론하는 2층에 자리 잡았다. 브랜드의 새로운 컬렉션 의상 샘플과 스토리보드가 줄지어 서 있는 창고 같은 공간 사이, 그의 방이 있다. 그는 “6층에서 근사한 풍경을 보며 잠시 혹하기는 했지만, 내가 6층에 올라가면 직원들과 거리가 더 멀어질 것”이라며 “아래로 마흔 살 차이 나는 직원들과도 거리낌 없이 소통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물리적 거리를 좁히기 위해 2층을 선택했다”고 웃었다. 테라스와 맞닿은 3층과 6층은 직원들에게 내줬다. 이전까지 강남구에 있었던 구 사옥에는 없었던 공간이 바로 ‘테라스’다. 우 대표와 인터뷰를 마치고 둘러본 테라스에서는 직원들이 모여 앉아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직원은 “가끔 아이디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 테라스에 노트북을 들고 나와 머리를 식힐 때가 있다”고 귀띔해줬다. 우 대표는 “그동안 숨 고를 시간도 없이 일해 온 직원들에게 숨구멍을 내주고 싶었다”며 “테라스에 나와 멍 때리는 직원들을 볼 때 가장 뿌듯하다”고 말했다. “며칠 전 한 직원이 테라스에 요가 매트를 펼쳐 놓고 하늘을 보며 누워 있더라고요. 그때 이 건물을 짓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있다고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거든요. 오히려 일의 경계를 허물 때 더 좋은 생각이 떠올라요. 패션에는 정답이 없거든요.”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20세기 프랑스 페미니스트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의 이 말은 당시 ‘젠더’를 둘러싼 진화생물학적 관점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정말 성(性)은 원래부터 주어진 게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만들어지는 걸까. 날 때부터 타고난 본성이란 존재하지 않는 걸까. 미국 애틀랜타 에머리대 심리학과 석좌교수이자 여키스 국립영장류연구센터 책임자로 세계적인 진화심리학자인 저자는 젠더를 둘러싼 진화생물학자와 페미니스트의 대립 사이에서 균형 잡힌 시각을 제시하려 노력한다. 한마디로 “타고난 본성은 존재한다. 다만 인간은 유전자와 환경 사이에서 상호작용하며 변화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폭력성과 양육, 성관계 등 다양한 관점에서 진화생물학과 페미니즘이 맞부딪쳐 온 젠더 이슈를 다루며 절충점을 찾아간다. 일단 성의 차이는 분명히 실재한다. 대표적인 사례는 1970년대 뉴질랜드 출신 미국 심리학자 존 머니의 실험이다. 머니는 잘못된 수술로 음경을 잃은 캐나다 남아의 성전환 과정에 개입한 적이 있다. 부모에게 고환을 완전히 제거하는 수술을 권유하고 아이를 여아로 키우라고 권유했다. 보부아르의 말대로 성이 타고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아이는 여성화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아이는 제 본성을 알지 못했는데도 부모가 사다준 인형을 내다버렸다. 레이스가 달린 원피스를 찢어버리기도 했다. 14세 때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진실을 깨닫고 결국 ‘남성성’도 되찾는다. 하지만 상실감을 견디지 못하다 38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이 사례는 타고난 성이란 존재하며, 이를 타인이 강요하거나 바꿀 수는 없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강간은 수컷의 자연적 선택”이라 우기는 남성 중심적 진화생물학계의 주장도 뒤집는다. 2002년 출간된 ‘강간의 자연사’에서 미 생물학자 랜디 손힐과 인류학자 크레이그 파머가 “남성이 성적으로 호응하지 않는 여성을 다루기 위해 선택하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주장한 것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저자는 “수렵 채집인 사회에서도 강간범은 무리에서 살해당하거나 배척당했으며, 심지어는 그의 자식까지 공동체 내에서 버림받는 지위에 놓였다”고 설명한다. 행여 성폭력적 유전자가 본성에 내재돼 있다 하더라도, 촘촘한 감시망을 갖추고 처벌하는 사회라면 도태되고 말 것이라는 분석이다. 인류와 닮은 동물인 보노보 무리에서 강간과 폭력이 쉽게 벌어지지 않는 이유 역시 이러한 촘촘한 유대관계 때문이다. 보노보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함께 여행하고, 밤에는 서로의 소리가 들리는 가까운 거리에서 잠이 든다. 서로가 서로를 보호하는 네트워크가 마련된 덕분에 폭력이 끼어들 틈이 없는 구조다. 비단 동물뿐일까. 저자는 인류도 젠더라는 차이를 넘어서 늘 서로를 지켜왔음을 강조한다. 1994년 르완다 내전 당시 적군이 남성과 소년들에게 해를 가하려 하자, 여성들이 자신의 옷을 빌려줘 그들을 숨겨줬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물론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폭력과 배제, 차별은 분명 인간이 가진 본성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서로를 돕는 연대와 협력 역시 인류가 지닌 본성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저자의 꼼꼼한 분석과 통찰은 갈수록 격해지는 젠더 갈등에 지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준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20세기 프랑스 페미니스트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의 이 말은 당시 ‘젠더’를 둘러싼 진화생물학적 관점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정말 성(性)은 원래부터 주어진 게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만들어지는 걸까. 날 때부터 타고난 본성이란 존재하지 않는 걸까.미국 애틀랜타 에모리대 심리학과 석좌교수이자 여키스 국립영장류연구센터 책임자로 세계적인 진화심리학자인 저자가 7일 출간하는 ‘차이에 관한 생각’(세종)은 젠더를 둘러싼 진화생물학자와 페미니스트의 대립 사이에서 균형 잡힌 시각을 제시하려 노력한다. 한마디로 “타고난 본성은 존재한다. 다만 인간은 유전자와 환경 사이에서 상호작용하며 변화할 수 있다”는 것. 폭력성과 양육, 성관계 등 다양한 관점에서 진화생물학과 페미니즘이 맞부딪혀 온 젠더 이슈를 다루며 절충점을 찾아간다. 일단 성의 차이는 분명히 실재한다. 대표적인 사례는 1970년대 뉴질랜드 출신 미국 심리학자 존 머니의 실험이다. 머니는 잘못된 수술로 음경을 잃은 캐나다 남아의 성전환 과정에 개입한 적이 있다. 부모에게 고환을 완전히 제거하는 수술을 권유하고 아이를 여아로 키우라고 권유했다. 보부아르의 말대로 성이 타고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아이는 여성화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아이는 제 본성을 알지 못했는데도 부모가 사다준 인형을 내다버렸다. 레이스가 달린 원피스는 찢어버리기도 했다. 14세 때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진실을 깨닫고 결국 ‘남성성’도 되찾는다. 하지만 상실감을 견디지 못하다 38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이 사례는 타고난 성이란 존재하며, 이를 타인이 강요하거나 바꿀 수는 없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강간은 수컷의 자연적 선택”이라 우기는 남성 중심적 진화생물학계의 주장도 뒤집는다. 2002년 출간된 ‘강간의 자연사’에서 미 과학자 랜디 손힐과 크레이그 파머가 “남성이 성적으로 호응하지 않는 여성을 다루기 위해 선택하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주장한 것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저자는 “수렵 채집인 사회에서도 강간범은 무리에서 살해당하거나 배척당했으며, 심지어는 그의 자식까지 공동체 내에서 버림받는 지위에 놓였다”고 설명한다. 행여 성 폭력적 유전자가 본성에 내재돼 있다하더라도, 촘촘한 감시망을 갖추고 처벌하는 사회라면 도태되고 말 것이라는 분석이다. 인류와 닮은 동물인 보노보 무리에서 강간과 폭력이 쉽게 벌어지지 않는 이유 역시 이러한 촘촘한 유대관계 때문이다. 보노보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함께 여행하고, 밤에는 서로의 소리가 들리는 가까운 거리에서 잠에 든다. 서로가 서로를 보호하는 네트워크가 마련된 덕분에 폭력이 끼어들 틈이 없는 구조다.비단 동물뿐일까. 저자는 인류도 젠더라는 차이를 넘어서 늘 서로를 지켜왔음을 강조한다. 1994년 르완다 내전 당시 적군이 남성과 소년들에게 해를 가하려 하자, 여성들은 자신의 옷을 빌려줘 그들을 숨겨줬다는 점을 상기시킨다.물론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폭력과 배제, 차별은 분명 인간이 가진 본성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서로를 돕는 연대와 협력 역시 인류가 지닌 본성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저자의 꼼꼼한 분석과 통찰은 갈수록 격해지는 젠더 갈등에 지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준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설치미술가 양혜규(51)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독일 경제지 ‘카피탈’이 선정하는 ‘세계 100대 미술작가’에 이름을 올렸다. 3일(현지 시간) 카피탈에 따르면 독일 프랑크푸르트 슈테델슐레 미대 교수인 양 작가는 지난해 99위에서 올해 여섯 계단 올라 93위로 선정됐다. 양 작가는 올해 덴마크국립미술관과 미국 샌프란시스코현대미술관 등에서 전시를 하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1위는 독일 게르하르트 리히터(90)가 차지했으며 미국 브루스 나우먼(81)과 독일 게오르크 바젤리츠(84)가 2, 3위로 뒤를 이었다. 리히터는 2003년 1위에 오른 뒤 19년째 정상을 지키고 있다. ‘세계 100대 미술작가’는 작가 3만 명 이상을 대상으로 주요 미술관 전시 횟수 등을 분석해 결정한다. 한편 작고한 작가를 대상으로 한 순위에서는 백남준이 15위에 올랐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