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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태풍 ‘힌남노’ 상륙 당시 침수된 지하주차장에서 이웃 주민들을 대피시키다 사망한 서보민 씨(21) 등 3명이 의사자로 인정됐다. 보건복지부는 3일 제5차 의사상자심사위원회를 열고 이같이 결정했다고 6일 밝혔다. 서 씨는 지난해 9월 6일 오전 경북 포항시의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물이 차오르자 차량을 옮기기 위해 내려갔다. 서 씨는 침수된 지하주차장에 고립된 이웃들의 대피를 도왔고, 본인은 빠져나오지 못해 변을 당했다. 복지부는 이날 한지은 씨(24)와 이헌호 씨(29)도 의사자로 지정했다. 한 씨는 2020년 2월 17일 오후 동료 직원과 함께 차를 타고 전북 남원시 터널을 지나다 32중 충돌사고에 휘말렸다. 당시 한 씨는 함께 차에 탔던 동료를 구해냈지만 정작 본인은 터널에서 탈출하지 못했고 화재 때문에 연기에 질식해 사망했다. 이 씨는 2021년 5월 25일 오후 경기 화성시 소재 저수지에서 농업 시설물 안전정밀점검을 하던 중 정수지에 빠진 동료를 구하다 자신도 정수지에 빠져 숨졌다. 정부는 유족에게 의사자 증서를 전달하고, 보상금과 의료급여 등을 제공해 예우할 예정이다.이지운 기자 easy@donga.com}
“돈을 버는 건 ‘기술’이고, 쓰는 건 ‘예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번 돈 다 쓰고 죽는 ‘인생 예술가’가 돼 볼까 합니다!” 사랑의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3일 서울 영등포구 63컨벤션센터에서 ‘2023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 회원의 날’ 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서 연단에 오른 박한길 애터미 회장의 유쾌한 입담에 객석 곳곳에서 웃음이 터졌다. 사랑의열매에 본인 명의로 기부한 금액이 누적 10억 원을 넘어선 박 회장은 이날 ‘아너 소사이어티 오플러스(Opulus)’ 1호 회원으로 선정됐다. 사랑의열매는 2017년부터 1억 원 이상을 기부한 고액 기부자들의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를 운영하고 있다. 9월 말 기준으로 3249명이 가입돼 있고, 누적 기부 금액이 3712억 원에 이른다. 기업인을 필두로 전문직 종사자와 자영업자, 공무원, 연예인, 운동선수 등이 회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사랑의열매는 3일 행사에서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 중에서도 10억 원 이상의 기부를 한 회원들을 기리기 위해 ‘아너 소사이어티 오플러스’라는 새로운 클럽을 선보였다. 오플러스는 사랑의열매의 상징인 백당나무의 학명 비부르눔 오풀루스(Viburnum Opulus)에서 따온 명칭이다. 한편 사랑의열매는 누적 기부금 5억 원 이상인 회원은 ‘아너 소사이어티 골드,’ 3억 원 이상인 회원은 ‘아너 소사이어티 실버’라는 명칭으로 예우하기로 했다. 이날 오플러스 1호 회원이 된 박 회장은 “50대에 접어들어 애터미를 어렵게 창업하고 첫 월급으로 200만 원을 받았다. 그중 20만 원을 기부한 게 시작이었다”고 밝혔다. 박 회장은 이렇게 시작한 나눔을 멈추지 않았고, 현재도 매달 월급의 절반 이상을 어린이 지원 사업 등에 기부하고 있다. 박 회장은 이날도 미혼 한부모가정 통합 지원, 저소득 청소년 공부방 조성 등을 위한 기부금 10억 원을 추가로 내놓았다. 박 회장은 2014년 아너 소사이어티에 가입했고, 아내 도경희 부회장도 이듬해 회원이 됐다. 올 8월 손자 루하 군이 1억 원을 기부함으로써 가족 3대, 9명이 아너 소사이어티에 가입하게 됐다. 그가 일군 애터미도 2019년 중견기업으로서는 역대 최고 금액인 100억 원을 미혼 한부모가정 지원금으로 사랑의열매에 내놓은 바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영향으로 4년 만에 열리게 된 회원의 날 행사에서는 지역별 아너 소사이어티 본부의 추천을 받은 회원 18명이 ‘올해의 아너’로 선정됐다. 또 사진작가 서성강 씨와 판화가 이민 씨가 9월 문을 연 아너 소사이어티 라운지에 작품을 기증한 공로로 감사패를 받았다. ‘아너 소사이어티 성장과 도약’을 슬로건으로 개최된 이날 행사에는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과 가족 등 420여 명이 참석했다. 김병준 사랑의열매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살면서 부자를 부러워한 적은 없는데, 공동체 정신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분들을 보면 정말 부럽고, 한편으론 부끄러움을 느낀다”며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들께 존경한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이지운 기자 easy@donga.com}
세 자녀의 어머니이자 자상한 아내였던 40대 여성이 7명에게 장기를 기증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전 가족들에게 “마지막 순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고민하지 않고’ 장기기증을 하자”고 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3일 한국장기조직기증원은 기증자 조미영 씨(47)가 지난달 1일 서울 은평구 은평성모병원에서 심장과 좌우 폐, 간장, 좌우 콩팥, 좌우 안구를 기증한 뒤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조 씨는 9월 24일 어지럼증을 느끼고 쓰러진 뒤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뇌출혈 진단을 받고 뇌사에 빠졌다. 조 씨의 남편 이철호 씨는 아내의 생전 뜻에 따라 장기기증을 결정했고 자녀들도 “엄마도 한 줌의 재로 남겨지는 것보다는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고 살아 숨쉬는 것을 바랄 것”이라며 동의했다. 문인성 한국장기조직기증원장은 “삶의 마지막 순간 장기기증을 하겠다고 약속한 기증자와, 그 약속을 이뤄주기 위해 기증에 동의해주신 유가족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고 밝혔다.이지운 기자 easy@donga.com}
인플루엔자(독감) 유행주의보가 1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동안 소강상태를 보이던 유행 규모가 급증세로 돌아섰다. 특히 아동·청소년은 독감 의심 환자 비율이 유행 기준의 10배 이상으로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와중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양성자 수도 10주 만에 감소세에서 증가세로 돌아섰다. 두 가지 질병이 동시에 유행하는 이른바 ‘트윈데믹’ 우려가 커지고 있다.3일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지난주(10월 22~28일) 병·의원을 찾은 외래 환자 1000명 당 독감 의심 환자의 수, 즉 의사환자분율은 32.6명으로 집계됐다. 직전 주까지만 해도 이 비율이 18.8명이었는데 한 주 새 73% 급증했다. 통상 12월 초를 전후로 독감 의사환자 분율이 30을 넘어서 온 것을 감안하면 예년보다 유행 증가 속도가 1개월가량 빠르다.독감은 특히 아동과 청소년 사이에서 크게 번지고 있다. 지난주 초등학생 연령대(7~12세)의 독감 의사환자 분율은 인구 1000명 당 86.9명으로 집계됐다. 중고등학생 연령대(13~18세)에서도 67.5명이었다. 올 겨울 독감 유행주의보 발령기준인 6.5명 대비 10배 이상으로 많은 의심 환자가 쏟아지고 있다는 뜻이다.전문가들은 코로나19 사태 종식 이후 사회적 거리 두기 등 방역 조치가 해제되고, 손 씻기와 마스크 착용 등 국민들의 생활 방역 의식도 느슨해진 것이 때 이른 독감 유행의 주 원인인 것으로 보고 있다. 지영미 질병청장은 “단체생활을 하는 아동·청소년의 유행이 예년에 비해 높으므로, 아동·청소년은 고위험군이 아니더라도 예방접종에 반드시 참여해달라”고 당부했다. 또 “일상에서 기침예절을 실천할 수 있도록 부모님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도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한편 한동안 잠잠하던 코로나19 유행도 반등세로 돌아섰다. 질병청에 따르면 지난주 주간 신규 코로나19 양성자 수는 8635명으로, 직전 주 7387명 대비 17% 증가했다. 8월 둘째 주 이후 10주간 감소세를 이어 오다 지난주에 반등한 것이다.질병청은 겨울철 코로나19 유행이 계속될 전망인 만큼 코로나19 백신 접종에 적극 참여해줄 것을 당부했다. 1일 오후 6시 기준 65세 이상 고령자의 코로나19 백신 접종률은 20.1%로, 지난달 19일 접종사업이 시작된 이후 2주 만에 20%를 넘어섰다. 전년도 같은 시점 5.7% 대비 3.5배로 빠른 속도다.이지운 기자 easy@donga.com}
“마지막 순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고민하지 않고’ 장기기증을 하자.”생전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해 온 세 자녀의 어머니가 지난달 7명에게 새 생명을 선물하고 세상을 떠났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은 기증자 조미영 씨(47·사진)가 지난달 1일 서울 은평구 은평성모병원에서 뇌사장기기증으로 심장과 좌우 폐, 간장, 좌우 콩팥, 좌우 안구를 기증한 뒤 숨을 거뒀다고 3일 밝혔다.조 씨는 9월 24일 교회에 다녀온 뒤 지인들과 차를 마시던 중 어지럼증을 느꼈다. 조 씨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뇌출혈 진단을 받은 뒤 치료를 받았지만 뇌사 상태에 빠졌다.조 씨의 남편 이철호 씨는 같은 날 의료진에게 ‘오늘이라도 바로 사망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장기기증이 가능할지 문의했다. 조 씨가 생전 장기기증 관련 뉴스를 볼 때면 “혹시 우리에게 저런 일이 생기면 고민하지 말고 다른 누군가를 위해 기증하자”고 얘기해왔기 때문이다. 조 씨의 세 자녀도 “한 줌의 재로 남겨지는 것보다는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고 살아 숨쉬는 것이 엄마가 바라는 일일 것”이라고 생각해 이 씨의 의견에 동의했다.조 씨는 경남 하동에서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지인들은 그를 늘 먼저 인사를 건네는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조 씨는 세 자녀에게는 든든한 엄마였고, 남편 이 씨에겐 자상하고 배려심 많은 아내였다.남편 이 씨는 조 씨를 “둘도 없는 천사 같았던 아내”로 기억했다. 그는 조 씨에게 “가슴 속에서 항상 옆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게. 아이들 걱정 말고, 하늘나라에서 우리 잘 지내고 있는지 지켜봐줬으면 좋겠어. 나중에 다시 만나면 신랑 고생했다는 말 듣고 싶어”라고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큰딸 이현주 씨는 “엄마는 착하고 예쁘고 항상 우리를 먼저 생각해주시는 분이었다”며 “엄마의 딸이어서 행복했고, 앞으로도 늘 기억하며 살겠다”고 말했다.문인성 한국장기조직기증원장은 “삶의 마지막 순간 장기 기증을 하겠다고 약속한 기증자와, 그 약속을 이뤄주기 위해 기증에 동의해주신 유가족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소중한 생명나눔의 실천이 잘 이뤄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이지운 기자 easy@donga.com}
의사가 환자 수술이나 시술 중 과실 없이 불가항력적으로 의료사고가 발생했을 때 지급하는 국가보상금 제도가 소아청소년과(소청과) 전반으로 확대된다. 지금까지는 분만 중 사망사고 등 극히 일부에만 적용돼 왔다. 이 정책을 확대하는 것에 대해 ‘불가’ 입장이었던 보건복지부는 최근 입장을 바꿔 이를 수용하기로 했다. 의사들 사이에서 소송 부담 때문에 소청과가 ‘기피과’가 되고, 소아청소년 응급환자가 ‘표류’하는 상황이 이어지자 정부가 태도를 바꾼 것으로 보인다. 2일 동아일보 취재에 따르면 현재 국회에는 불가항력 의료사고 보상 사업에 소청과 진료를 추가하는 내용의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이 발의돼 계류 중이다. 의사 출신인 신현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했다. 이 법안에 대해 복지부가 최근 “취지에 공감한다. 구체적인 유형과 방식에 대해 관련 단체와 논의하고 재정 당국과 협의하겠다”는 답변서를 국회에 제출한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 국회 다수석을 차지하고 있는 민주당이 발의했고 국민의힘에서도 별 이견이 없는 법안인 만큼 복지부까지 동의하면 국회 통과가 유력하다. 불가항력 의료사고 국가 보상은 2013년 4월 처음 도입됐다. 현재는 분만사고 등에만 적용 중인데, 해당 사건이 발생하면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 의료보상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환자 측에 최대 3000만 원을 보상한다. 현재는 이 중 70%를 국가가, 30%를 병의원이 내지만 다음 달 14일부턴 정부가 전액 부담한다. 내년엔 보상액 한도도 늘릴 계획이다. 이 제도를 분만사고가 아닌 다른 분야로 넓히는 건 도입 10여 년 만에 처음이다. 올 9월만 해도 복지부는 해당 법안에 대해 “다른 진료과목과의 형평성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수용 곤란’ 의견을 표했다. 그런데 최근 소청과 의사들이 잦은 소송 위협 탓에 현장을 떠나고 새로운 의사도 들어오지 않는 현상이 심해지자 이를 수용했다. 의사단체를 상대로 ‘의대 정원 확대’를 설득할 카드이기도 하다. 복지부에 따르면 전국 수련병원의 소청과 전공의(레지던트) 충원율은 2019년 92.4%에서 올해 25.5%로 급감했다. 비수도권 수련병원에서는 올해 72명 모집에 고작 4명(5.6%)이 지원했다. 소아심장 환자의 가슴을 열고 수술을 집도할 수 있는 소아심장외과 전문의가 2035년엔 전국에 17명만 남게 될 거란 예측(동아일보 10월 10일자 A1·12면 참조)까지 나오면서 소아 필수의료 공백에 대한 위기감이 커졌다.떠나는 의사 잡으려… 기형-미숙아 수술사고 책임, 국가가 분담 소아과 과실없는 의료사고 국가 보상 의료진 환영속 “지원 한도 높여야… 최선 다했다면 형사처벌 면제를”의료배상보험 의무 가입도 제기정부-의료계, 국가보상 범위 논의 복지부는 국가가 보상할 ‘불가항력 의료사고’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볼지 소아 의료계와 논의하고 있다. 회생 가능성이 희박한 소아청소년 환자에게 ‘최후의 수단’으로 실시한 의료 행위였다면 의료진의 무과실 여부를 따져 국가가 보상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식도나 항문이 없는 상태로 태어난 선천성 기형아나 괴사성 장염을 앓는 이른둥이(미숙아)를 대상으로 실시한 수술 등이 우선 고려될 것으로 전망된다.● “수술실 떠나려는 후배 붙잡는 데 도움” 일선 소아 의료진들은 이번 조치를 반겼다. 소아 중증 환자에 대한 진료는 성인 환자에 비해 의사 입장에서 훨씬 부담감이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개복 수술의 경우는 성인이라면 큰 문제가 없을 정도의 출혈에도 체구가 작은 소아 환자에겐 치명적일 수 있다. 서정민 삼성서울병원 소아외과 교수는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수술이 어려울 뿐 아니라 혹시 결과가 잘못되면 (환자의) 기대여명에 따른 보상액도 큰 편”이라며 “국가가 보상을 지원한다면 수술실을 떠나려는 후배들을 붙잡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전망했다. 일각에선 실효성 있는 의료진 보호를 위해선 배상 금액 한도를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재 시행 중인 분만 사고에 대한 국가보상제는 한도가 3000만 원인데, 최근 의료사고 민사 소송에선 이보다 훨씬 큰 배상금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임현택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장은 “손해배상 금액이 수억 원을 넘나드는데 3000만 원을 지급한다는 건 ‘생색내기’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형사처벌 면제 필요” 목소리도 민사 소송에 의한 손해배상만 정부가 부담하는 것으론 한계가 있고, 의료진이 현장에서 최선의 판단에 따라 진료했다면 형사 처벌도 면제해야 한다는 요청도 나온다. 수도권의 한 어린이병원장은 “분초를 다투는 아이를 어떻게든 살리려다 보면 사소한 실수가 나올 수 있다. 의료진이 형사 처벌의 공포를 떨쳐내지 못한다면 위급한 상황에서 적극적인 치료를 망설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 의사 본인은 과실이 없다고 판단하면서도 형사 소송으로 인한 긴 법정 다툼에 지쳐 일을 빨리 마무리 짓기 위해 합의금을 지급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올해 초 한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A 씨가 중이염이 의심되는 환아의 귀를 검사하기 위해 귀지를 떼다 피가 나자, 부모가 민형사 소송을 제기한 사건이 논란이 된 적 있다. A 씨는 결국 소송을 취하하는 대가로 합의금을 지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소청과 전문의는 “형사 고소가 의료 분쟁에서 ‘합의금을 키우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는 경우까지 있다고 한다”고 귀띔했다. 대한의사협회는 필수과목 의료진이 최선을 다해 진료하던 중 발생한 사고에 대해선 형사 소송을 제기할 수 없게 하는 ‘필수의료 사고처리특례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신현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궁극적으로는 필수의료 전반으로 국가의 안전망을 확대해야 하며, 보상 규모도 현재 분만사고에 적용되는 것보다 더 높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해외선 책임보험 가입 의무화 불가피한 의료사고에 대비해 의료인이 의료배상 책임보험에 의무 가입하도록 하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불의의 교통사고에 대비해 운전자의 보험 가입이 의무인 것과 같은 이치다. 캐나다는 의료배상 책임보험 가입이 의무인데, 연 500만 원 수준의 보험료 중 80%를 정부가 부담한다. 일본의 책임보험은 의사가 의사협회에 가입할 때 자동으로 가입되도록 설계돼 있고, 미국도 뉴욕 등 일부 주에서 책임보험 가입을 의무화하고 있다. 복지부는 의료계와 법조계, 환자단체 등이 참여하는 의료분쟁 제도개선 협의체를 꾸리고 2일 첫 회의를 열었다. 박민수 복지부 2차관은 이날 “의료사고 부담은 필수의료 기피로 이어져 국민과 생명의 건강을 위협한다”며 “환자와 의료인 모두 만족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김소영 기자 ksy@donga.com이지운 기자 easy@donga.com}
의대 정원 확대 규모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대한한의사협회(한의협)가 한의대 정원 일부를 의대 정원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정부에 제안했다. 2일 의료계에 따르면 홍주의 한의협 회장은 1일 보건복지부 주재로 열린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보정심)에서 지방 소재 한의대 중 희망하는 곳을 의대로 전환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현재 한의대 입학 인원은 정원 외 입학까지 합해 연 800명 선인데, 이 중 일부를 삭감하고 그만큼 ‘3058명’인 의대 정원에 더하자는 것이다. 현재 국내에 한의대가 있는 대학은 총 12개다. 이 중 경희대와 가천대를 제외한 10곳이 비수도권에 있다. 홍 회장은 이날 의대와 한의대가 둘 다 있는 의대에서 한의대 정원 일부를 의대 정원으로 넘기는 방안도 제시했다. 의대와 한의대를 모두 운영하는 대학은 경희대 부산대 원광대 동국대 등 4곳이다. 이들 한의대의 정원을 ‘최소 인원’인 40명만 남기고 의대로 넘길 경우 의대 정원은 160명 늘어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의료계에선 이에 대해 의사와 한의사 양측이 ‘윈윈’할 수 있는 방안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우선 한의계에선 신규 한의사 배출을 줄이는 것이 희소식이다. 최근 한방의료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며 이미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건강보험 재정으로 지급된 진료비 중 한방 의료의 비중은 3.1%였다. 2014년 4.2%에서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의사들 입장에서도 의대 정원 확대 자체를 막을 수 없다면 경쟁 관계에 있는 한의사 수 감축과 동시에 진행하는 게 그나마 낫다는 평가가 나온다. 익명을 요청한 한 대한의사협회 고위 관계자는 “의-한 일원화를 원하고 있는 정부 차원에서도 이 방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정부는 전국 40개 의대를 대상으로 정원 확대에 대한 수요 조사를 벌이고 있다. 다음 주 후반에 이 조사가 끝나면 의료계와 환자단체,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보정심 산하 의사인력 전문위원회 논의 등을 거쳐 의대 증원 폭을 결정하겠다는 방침이다.이지운 기자 easy@donga.com}
2025학년도부터 간호대 정원이 매년 1000명 안팎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보건복지부는 1일 전문가와 환자단체 등이 참여하는 간호인력전문위원회 첫 회의를 열고 간호대 증원 논의를 시작했다. 2023학년도 기준 국내 간호대 정원은 2만3183명이다. 2008년 1만1686명에서 15년 사이 2배로 늘었다. 최근에도 매년 700명씩 꾸준히 늘고 있다. 하지만 현장에선 여전히 간호 인력이 부족하다고 호소한다. 지난해 기준 의료기관에서 근무하는 임상 간호사 수는 인구 1000명당 4.94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8.0명(2020년 기준)의 62% 수준이다. 특히 비수도권에서 간호사 부족이 더 심각하다. 충북은 인구 1000명당 간호사 수가 3.35명에 불과하다. 인력 부족은 만성적인 과로로 이어졌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간호사의 업무 강도를 현재 대비 20% 줄이려면 2035년까지 간호사 5만6000명이 더 필요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는 4월 발표한 제2차 간호인력 지원 종합대책을 통해 간호대 추가 증원 방침을 밝힌 바 있다. 정부 내부적으로는 현재 연 700명인 증원 규모를 2025학년도부터 연 1000명으로 늘리는 것을 목표로 삼은 것으로 알려졌다. 간호계 역시 증원 자체에는 찬성하지만, 처우 개선이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편 복지부는 이날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를 열고 의대 정원 확대 계획을 보고했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지역 배분 및 지역 인프라와의 연계 가능 여부 등을 종합 검토해 최대한 신속히 2025학년도 의대 입학 정원을 확정하겠다”고 밝혔다.이지운 기자 easy@donga.com}
명지병원이 26일(현지 시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제46차 국제병원연맹(IHF) 세계총회에서 사회공헌부문 최우수상(Gold Award Winner)을 수상했다. 명지병원은 지역사회 치매관리 프로그램인 ‘백세총명학교’를 10년 간 운영하며 치매 예방과 관리에 사회적 책임을 다한 노력을 인정받아 이 상을 받았다.명지병원이 2013년 문을 연 백세총명학교는 정신건강의학과, 신경과, 재활의학과, 노인의학센터, 예술치유센터, 공공보건의료사업단이 참여하는 다학제팀으로 운영된다. 치매 환자의 일상생활 능력 저하를 막기 위해 음악·미술 등을 접목한 인지예술치료 프로그램을 개발·적용해 왔다. 또 환자 가족들의 스트레스 해소와 효과적인 돌봄법을 교육하는 ‘백세총명 가족교실’을 마련해 환자와 가족까지 포함한 치매관리 서비스를 제공해 왔다. 명지병원은 2016년부터 경기도광역치매센터를 위탁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국제병원연맹은 2015년부터 매년 전 세계 의료기관의 역량과 성과 등을 평가해 시상하는데, 명지병원의 수상은 이번이 네 번째다.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은 “민간병원의 공공적 역할 강화가 곧 필수의료 부족 문제의 해결책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공공보건의료 강화에 앞장설 것”이라고 밝혔다.이지운 기자 easy@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이 30일 “연금 개혁은 뒷받침할 과학적 근거나 사회적 합의 없이 결론적 숫자만 제시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정치적 유불리를 계산하지 않고 연금 개혁의 국민적 합의 도출을 위해 우리 정부는 최선을 다하겠다. 이 약속은 반드시 지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이날 국무회의에서 ‘숫자가 없는 맹탕’ 비판이 나온 제5차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안을 심의·의결하고 국회에 제출했다. 윤 대통령은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지난 정부는 연금 개혁에 대한 확고한 의지 없이 4개 대안을 제출해 갈등만 초래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엔) 최고 전문가들과 80여 차례 회의를 통해 재정추계와 수리 검증 등 과학적 근거를 축적했고, 24번의 계층별 심층 인터뷰로 의견을 꼼꼼히 경청했다. 여론조사로 일반 국민 의견도 철저히 조사했다”고 강조했다. 보건복지부는 이날 내부 설문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국민연금 가입자 2025명을 8월 설문한 결과 응답자의 81.3%는 제도 개혁의 필요성에 동의했다. 선호하는 개혁 방향성에 대해선 “더 내고 더 받자”가 38.0%로 가장 많았고 “덜 내고 덜 받자”가 23.4%, “더 내고 지금만큼 받자” 21.0% 순이었다. 응답자의 53.6%는 “기금이 소진돼 나중에 못 받을까 불안하다”는 점을 현행 국민연금 제도의 단점으로 꼽았다.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는 “(윤 대통령은) 전 정부 탓을 하며 본인은 다를 것이라고 공언했지만 정부의 이번 발표는 문재인 정부가 4개의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 것만도 못한 것으로 사실상 연금 개혁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라고 비판했다. 장관석 기자 jks@donga.com이지운 기자 easy@donga.com}
‘재무 상담사, 사회복지사, 영양사, 간호사, 의사….’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 위치한 ‘닷하우스’ 직원 300명의 면면이다. 3일(현지 시간) 취재팀이 닷하우스에 들어서니 잘 관리된 수영장, 농구 코트까지 갖춘 실내체육관이 눈에 띄었다. 재무 상담과 법률 상담을 받을 수 있는 사무실이 마련돼 있고, 식료품을 지원받을 수 있는 ‘푸드뱅크’ 안내문도 붙어 있었다. 지역 주민들을 위한 커뮤니티 센터일까. 아니다. 닷하우스는 이민자들이 주로 사는 도체스터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운영되는 1차 의료기관, 즉 동네 의원이다. 기본적으로는 경증, 만성 질환자 치료가 목적이지만 단순히 환자 진료와 처방에서 그치지 않는다. 주거가 마땅치 않은 사람에겐 머물 곳을 알아봐 주고, 법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겐 무료 법률 상담도 지원한다. 환자가 겪는 사회적 어려움이 건강 상태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1차 의료기관이 ‘주치의’가 되어 환자의 건강을 지키는 곳으로 정의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도체스터 지역 주민 2만4000명이 의료-재활-복지 등 통합서비스를 제공하는 이 의원에 다닌다. 의사 한 명에 간호 인력 서너 명이 근무하기 마련인 한국의 동네 의원과는 사뭇 다른 운영 방식이다. 동네 의원이 담당하는 1차 의료는 필수의료 체계를 뒷받침하는 기반이다. 닷하우스처럼 경증, 만성질환자 진료를 의원에서 책임져 줘야 큰 병원이 중증, 응급 환자 치료에 전념할 수 있다. 이런 작은 병원과 큰 병원 간의 ‘분업’을 의료전달체계라고 하는데 한국에선 의료전달체계가 완전히 붕괴된 상태다. 6만8000여 개나 되는 동네 의원이 있지만 소아청소년과(소청과) 등에선 ‘오픈런’이 벌어진다. 줄을 서서 의사를 만나도 ‘3분 진료’ 끝에 처방전만 받아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소청과, 산부인과 등 꼭 필요한 의원은 줄고 미용 시술에 전념하는 의원이 는다. 심지어 마약성 진통제나 다이어트 약을 무분별하게 처방해 돈을 버는 곳까지 나오고 있다. 동네 의원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큰 병원에 경증 환자가 몰리고, 정작 생명이 위태로운 환자가 표류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정부는 19일 필수의료 혁신 전략 발표에서 1차 의료기관의 예방·관리, 교육·상담, 퇴원 후 관리 등 기능을 강화하겠다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실행 계획은 내놓지 못했다.美 동네의원, 경증-만성질환 책임져… 응급실 방문 35% 줄였다美 동네의원, 대형병원과 분업 확실맞춤형 서비스로 입원율 11% 감소환자 상급병원 수술 일정도 잡아줘韓 의원은 “큰 병원 가보라” 말만 미국 보스턴 닷하우스에서 일하는 한국인 의사 김유나 씨(41)에게 흑인 여성 A 씨(45)는 각별한 환자다. 김 씨가 이 환자를 처음 만난 건 5년 전. 병원을 찾은 표면적인 이유는 만성 허리 통증이었지만 A 씨는 우울증과 불안장애, 뇌전증(간질)까지 앓고 있는 어려운 ‘복합’ 질환자였다. 여러 약을 처방했지만 A 씨의 증세는 점점 더 나빠지기만 했다. 초보 주치의로서 고민이 깊어지던 차에 김 씨는 A 씨의 불안한 주거 환경을 떠올렸다. 당시 A 씨의 집 유리창이 깨진 채로 방치돼 있었는데, 이것이 그의 불안장애와 뇌전증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김 씨는 사회복지사와 협력해 A 씨가 살던 임대주택 창문을 수리해 줬고, 그 이후 환자의 상태가 조금씩 호전되기 시작했다. 김 씨는 “한국에서였다면 이렇게 환자 한 명을 오래 보고 고민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만약 A 씨가 한국에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환자의 속사정을 알기 어려운 동네 의원에선 그에게 “큰 병원에 가 보라”는 말밖엔 해주지 못했을 것이고, 환자는 병명을 찾아 여러 종합병원을 전전하게 됐을 공산이 크다.● 응급실 방문 35%, 입원율 11% 감소 효과 환자가 중증으로 악화하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이를 조기에 포착해 대형병원으로 보내는 것도 1차 의료기관, 즉 의원의 중요한 역할이다. 취재팀이 2일 방문한 필리스 젠 센터는 대형병원인 브리검 여성병원이 운영하는 의원이다. 이곳의 의료진은 환자가 유방암이 의심돼 큰 병원에서 진료받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면 그 자리에서 브리검 여성병원에 진료 및 수술 일정까지 잡아 준다. 환자가 유방암 수술을 받은 이후에는 다시 필리스 젠 센터로 돌아와 경과를 추적한다. 닷하우스 또한 보스턴대병원과의 환자 의뢰 및 회송 체계를 갖추고 있다. 지역 주민들의 특성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가치 기반 1차 의료’의 특징이다. 비만율이 높고 고혈압, 당뇨 환자가 많은 미국 특성상 보스턴의 의원들은 영양사를 고용해 환자의 식단 조절을 각별히 챙기는 경우가 많다. 커스틴 마이징어 하버드대 의대 1차 의료센터 교수는 “환자에게 ‘맥도널드를 그만 드시라’고 할 것이 아니라, 환자가 패스트푸드로 끼니를 때울 수밖에 없는 환경을 개선해 주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보스턴에 있는 1000여 개의 의원은 대부분 닷하우스나 필리스 젠 센터와 유사한 형태로 운영된다. 학계에선 이러한 통합적인 의료 서비스 모델을 ‘가치 기반 1차 의료’라고 부른다. 하버드대 의대 연구에 따르면 가치 기반 1차 의료는 환자의 응급실 방문 확률을 35%, 입원율을 11% 감소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늬만 남은 의료전달체계 회복해야 베테랑 내과 의사인 정기석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은 지난달 기자간담회에서 “우리나라 의료전달체계는 무늬만 남았지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큰 병원에서 진료를 받던 환자는 병이 호전된 후에도 동네 의원을 가지 않고 다니던 병원에서 계속 진료받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국민보건의료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0년 종합병원을 찾은 외래 환자 중 22.3%가 감기, 장염 등 경증 질환자였다. 경증 환자가 대형병원을 채우고 있으면 정작 중증 환자는 의사 만나기가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김윤 서울대 의대 의료관리학과 교수는 “경증·만성질환자들이 동네에서 치료받는 게 낫다고 느끼도록 큰 병원에서 할 수 없는 통합적 건강관리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체질 개선을 위해선 장기적으로 의료수가(건강보험으로 지급되는 진료비) 지불 체계를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현재 한국은 의사가 수행한 검사나 시술 ‘한 건당’ 돈을 받는 행위별 수가제를 채택하고 있다. 이 제도 아래에선 1차 의료기관이 영양사나 사회복지사를 뽑아 환자에게 건강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더라도 대가를 지급받기 어렵다. 이와 대조적으로 보스턴에선 1차 의료기관들이 진료비를 ‘환자 1명당’으로 받는다. 우선 관리하는 환자 1명당 일정 금액의 진료비를 받아 환자에게 건강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쓰고, 추후 환자의 건강 상태가 개선되면 인센티브를 추가로 받는다. ※ 이 기사는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보스턴=특별취재팀특별취재팀▽팀장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이지운 김소영 이문수 기자(이상 정책사회부)}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25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한국 상황에 맞는 국내 119구급차 모형 개발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이유가 있다. 국내 구급차의 96%는 ‘스타렉스’나 ‘스타리아’ 등 12인승 승합차를 활용한 소형차다. 앞뒤 길이가 5.12∼5.25m로 짧아 기도 확보와 심폐 소생 등 기본적인 응급처치조차 어려운 구조다. 지난달 19일 독일 함부르크시 아스클레피오스 병원을 오가는 구급차는 ‘달리는 응급실’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이 구급차는 내부가 높아 키가 185cm인 현지 의사가 들어가 똑바로 서 있어도 머리 위 공간이 남았다. 환자를 태웠을 경우 운전자 구급대원 의사 등 4, 5명이 동시에 구급차 안에서 응급처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공간이 넓다. 구급차가 좁아 기도 삽관도 어려운 우리나라 구급차와는 달리 환자 침대 위쪽으로 두 사람은 앉을 수 있었다. 무전기와 약품 등을 수납할 공간도 충분했다. 독일 구급차도 20여 년 전에는 작고 낮아 불편함이 많았다. 하지만 소방당국은 응급환자의 원활한 치료를 위해 구급차의 크기를 키우기로 결정했다. 15인승 승합차나 대형 픽업트럭을 활용해 앞뒤 길이 6m 이상이다. 구급차 차체를 키우기로 결정하면서 응급구조사들이 새로 운전면허를 따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당국이 재교육 비용을 부담하면서까지 밀어붙였다. 위급한 환자를 안전하게 이동시키고, 구급대원의 부상을 막기 위해서다. 10년 차 응급구조사 플로리언 페일 씨(35)는 “응급환자를 심리적으로 안정시켜야 하는 경우도 많은데, 그럴 때도 넓은 구급차가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캐나다 앨버타주는 매년 대형 구급차를 확충하고 있을 뿐 아니라 환자와 구급대원의 안전을 위한 내부 개조에도 힘쓰고 있다. 2019년엔 구급차 내에서 환자를 응급처치하다가 발생할 수 있는 사고를 줄이기 위한 개조 작업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1년 6개월간 구급대원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특수 시선 추적 고글 등 첨단장비를 활용한 결과였다. 그 덕에 환자 이송 중 사고로 인한 부상을 16% 줄일 수 있었다. 반면 우리나라 구급대원들은 비좁은 구급차로 인해 출동 중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리고 있다. 구급대원 출신인 라이언 리 앨버타주 보건부 응급의료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한국 내 구급차 1811대 중 1737대(96%)가 소형이라는 점에 대해 “이런 구조로는 기도 삽관뿐 아니라 다른 응급처치를 하기에도 매우 어렵다. 환자가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일도 생기지 않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라며 “잘못됐다”고 말했다. 구급대가 제 역할을 하려면 이송 중 응급처치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에선 구급대원의 업무 범위가 14가지로 한정돼 있어 심근경색 환자의 심전도를 재지 못하고, 응급 분만 산모의 탯줄도 자를 수 없다. 반면 앨버타주에선 구급대원이 전문의약품 투약을 포함한 거의 모든 응급처치를 할 수 있다. 앨버타주 보건부 수석의료책임자 마크 매켄지 씨는 “환자가 반드시 응급실에 가야 할 상황이 아니라면 구급대원이 환자에게 진통제만 주고 돌려보냄으로써 응급실 과밀화까지도 방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이 기사는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특별취재팀▽팀장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이지운 김소영 이문수 기자(이상 정책사회부)}
정부는 27일 확정한 제5차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안을 통해 65세 이상 노인에게 지급되는 기초연금을 단계적으로 32만3000원(올해 기준)에서 40만 원으로 인상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윤석열 대통령의 공약 사항이다. 하지만 현행 ‘소득 하위 70%’인 지급 대상을 축소하라는 전문가 자문기구의 제안은 빼놓아 정부가 재정 부담 증가를 방치한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정부 자문기구인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재계위)는 19일 정부에 제출한 최종보고서에서 기초연금 수급 대상을 축소할 것을 주문했다. 급격한 고령화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현행 기초연금 지급 기준을 유지하면 재정 부담이 너무 커진다는 취지였다. 재계위는 또 “기초연금 인상은 소득 하위계층에 우선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보건복지부 장관 자문기구인 기초연금 적정성 평가위원회도 유사한 의견을 낸 바 있다. 기초연금 적정성 평가위원회는 최근 복지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장기적으로 기초연금 수급 대상을 전체 노인 중 ‘하위 40∼50% 수준’으로 줄이되 지급액을 최저생계비를 보장하는 수준으로 높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많은 사람에게 조금씩 나눠줄 게 아니라 꼭 필요한 사람에게 많은 돈을 줘야 한다는 뜻이다. 기초연금 지급 대상이 현행대로 유지되면 고령화율이 40%를 넘어서는 2050년에는 전 국민 3명 중 1명꼴로 기초연금 수급자가 된다. 이승희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2020년 17조 원이었던 기초연금 지출액이 2050년이 되면 100조 원이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정부가 이날 지급 대상 축소 없이 ‘금액 인상’만 발표한 것은 총선을 앞두고 노인 표심을 의식한 결과라는 비판이 나온다.이지운 기자 easy@donga.com}
병원이라기보다 증권거래소에 가까운 풍경이었다. 취재팀이 지난달 1일 방문한 호주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WA) 로열 퍼스 병원의 ‘원격중환자실(HIVE)’ 중앙상황실에는 최신 의료기기도, 병상도, 환자도 없었다. 그 대신 3인 1조로 구성된 의료진들의 책상마다 8대의 모니터가 들어차 있었다. 화면은 환자의 심박, 혈압 등 각종 활력 징후와 검사 결과를 담은 차트와 그래프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모니터 위로는 환자와 언제든 화상 진료를 할 수 있도록 카메라가 설치돼 있었다. HIVE는 의료진이 여러 병실에 흩어져 있는 환자들을 한 장소에서 실시간 모니터링하고 상황에 맞는 처방을 내리는 일종의 비대면 진료 시스템이다. 최대 70명의 중증 입원 환자를 동시에 관리할 수 있다. HIVE가 특별한 건 단순히 이 병원에 입원한 중환자만 보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주도(州都) 퍼스 동남쪽 위성도시에 위치한 아마데일 병원, 동쪽으로 600km 떨어진 캘굴리 병원에 입원한 준중증 환자들도 WA주 최대 규모인 로열 퍼스 병원 의료진에게 원격으로 진료받는다. 두 병원은 100∼200병상 규모의 소형병원이다.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한 병원 간 협력을 통해 의료진이 부족한 지역 소형병원도 중증 환자를 돌볼 수 있게 한 것이다. 8월에도 캘굴리 병원 중증 응급환자 1명이 HIVE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호주는 응급실에서도 원격 진료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캐나다에선 지역 내 병원들이 ‘원팀’을 이뤄 응급 환자를 수용할 최적의 의료기관을 최단 시간에 찾아낸다. 전원(轉院·병원을 옮김)이 필요한 환자가 발생하면 지역 내 병원들의 병상과 의료진 현황을 실시간 파악하고 있는 ‘전원·의료지도센터(RAAPID)’에서 치료가 가능한 병원을 찾는다. 모든 병원이 환자 정보를 실시간 공유하는 기술을 갖추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정부가 19일 내놓은 필수의료 혁신 전략 발표 자료에는 ‘협진’과 ‘협력’이란 단어가 총 59번 등장했다. 국립대병원을 거점 의료기관으로 육성하고 지역 내 크고 작은 병원들과 연계를 강화해 서울 주요 대형병원인 ‘빅5’ 등 특정 병원으로 환자가 지나치게 쏠리는 현상을 해소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국립대병원과 지역의료원 간 ‘필수의료 네트워크’를 마련하겠다고도 했다. 병원 간 협력은 환자 ‘표류’의 원인인 지역의료 인력 및 인프라 부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필수 요건이다. 하지만 병원 간 무한경쟁을 통해 성장해 온 한국 의료체계에서 협력은 낯선 개념이다. 지금부터라도 ICT 등 가진 역량을 총동원해 치밀한 실행계획을 짜지 않으면 ‘협력 강화’는 공허한 구호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호주, 지역병원마다 ‘원격응급실’… 韓, 서울로 옮기다 ‘표류 사망’호주도 지방엔 의료진 부족 허덕원격진료시스템 구축해 공백 메워실시간 모니터링으로 대응 더 빨라韓, 병원 간 연결 안돼 ‘환자 표류’… 원격중환자실, 내년 시범사업 첫발 “전 국민에게 ‘평등하게 진료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앤드루 제이미슨 호주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WA)주 지역의료국장은 호주가 원격 중환자실(HIVE·Health in a Virtual Environment) 같은 원격 협진 시스템을 도입한 목적이 지역 간 의료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서라고 강조했다. 호주는 한국보다 의사가 많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호주는 인구 1000명당 의사 수가 4.0명이다. 한국(2.6명)보다 50%가량 많은 수치지만, 호주에서도 지방에는 의료진이 모자란다. 광활한 땅덩이 곳곳에 인구가 수만 명 남짓한 소도시들이 뚝뚝 떨어져 있어 의사들이 지방 근무를 꺼리기 때문이다. 이런 지역에 있는 병원들은 24시간 전문의가 상주하지 못하고, 전공의와 진료 보조 인력(PA·Physician Assistant) 간호사 위주로 운영된다. 이 때문에 큰 병원에서 원격 진료를 제공하지 않으면 중증 병상을 운영하기 어렵다.● 지역 중환자실·응급실, 큰 병원서 ‘원격 협진’중증 입원 환자는 기본적으로 의료진이 24시간 곁을 지켜야 한다. 길게는 2시간, 짧게는 15분 단위로 환자의 상태를 확인해 적절한 처방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역 소형 병원들은 이러한 ‘밀착 케어’를 하기에는 인력이 부족하다. 그 역할을 HIVE 중앙상황실에서 대신하고 있다. 그랜트 워터러 WA주 보건부 선임의학고문은 “HIVE를 통해 많은 중증 환자가 집 근처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대형 병원 중환자실은 최중증 환자 위주로 받을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HIVE 중앙상황실의 모니터에는 모든 환자의 심박과 혈압, 산소포화도 등 기본적인 활력 징후가 실시간으로 표시된다. 혈액검사 결과와 전자의무기록(EMR) 등 상세 정보도 클릭 한 번으로 확인할 수 있다. HIVE 시스템에 탑재된 인공지능(AI)이 각 환자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증세 악화를 감지하는 즉시 의료진이 이를 놓치지 않도록 알람을 울려 준다. 원격 중환자실은 일반적인 중환자실보다 더 뛰어난 치료 성과를 내고 있기도 하다. 의료진이 병상을 오갈 필요 없이 앉은 자리에서 모든 환자를 모니터링할 수 있어 상태 악화에 더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HIVE 시스템을 개발한 필립스에 따르면 HIVE와 같은 원격 중환자실에 입원한 환자는 일반 중환자실 환자에 비해 입원 기간이 30% 짧은 것으로 나타났다. WA주는 HIVE 외에 원격 응급실(ETS·Emergency Telehealth Service)도 운영하고 있다. 응급의학 전문의들이 24시간 교대 근무하며 지역 병원 응급실에 원격 진료를 제공하는 시스템이다. WA주에는 지역 병원이 90곳 있는데, 모두 응급실에 원격 진료가 가능한 전용 병상을 갖추고 있다. 8월 캘굴리 병원에 교통사고를 당한 35세 남성이 실려 왔다. 갈비뼈가 부러지며 폐를 찔러 외상성 기흉이 생긴 환자였다. 의료진은 흉곽에 찬 공기를 빼기 위해 튜브를 삽입한 뒤 환자를 준중환자실로 옮겼다. 그런데 튜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 환자의 늑막 압력이 높아지며 조금만 지체돼도 호흡 곤란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 닥쳤다. 당시 캘굴리 병원엔 이를 처치할 수 있는 외과 전문의가 없었지만, HIVE를 통해 중증 외상 전문의의 지도를 받아 환자를 살려낼 수 있었다. 얼리샤 미철래니 캘굴리 병원장은 “HIVE가 없었다면 환자를 비행기에 태워 퍼스로 보내야 했을 텐데, 그사이 상태가 더 악화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원격 응급실을 통해 응급 환자의 골든타임을 지킬 수 있다는 뜻이다. WA주에서 가장 외진 곳에 있는 쿠누누라 병원은 퍼스에서 약 3000km 떨어져 있는데, 환자 이송용 비행기를 띄워도 3시간 30분이 걸리는 거리다. 구급차로는 쉬지 않고 달려도 34시간이 걸린다.● 상급 병원 포화 해소해 ‘표류’ 막을 대안이러한 호주의 원격 협진 사례는 한국의 지역의료원 문제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전국 35개 지역의료원은 중환자실 시설을 갖추고 있지만, 전담 인력이 부족해 대부분 가동률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에 환자 상태가 조금만 나빠져도 큰 병원으로 옮겨져 상급 종합병원 중환자실이 포화되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 의료 인프라가 있는데도 병원 간 협력하는 시스템이 없다 보니 벌어지는 일이다. 상급 병원 중환자실 포화는 중증·응급 환자 ‘표류’의 원인이 된다. 중환자실에 자리가 없으면 응급실에 자리가 있더라도 이 환자들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올해 5월 말 경기 용인시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74세 구모 씨가 138분간 표류하다가 숨졌다. 당시 구급대가 연락한 인근 권역외상센터 3곳은 모두 중환자실이 부족해 이 환자를 받지 못했다. 구 씨처럼 지역 병원에 중환자실이 없어 서울 등 먼 병원으로 옮겨지다 골든타임을 놓치는 응급 환자가 적지 않다. 경기소방재난본부에 따르면 지난해 응급실이 환자를 받지 못한 사유 중 7.1%가 ‘중환자실 부족’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한국에서도 원격 중환자실 시범사업이 첫걸음을 떼고 있다. 경기도에선 내년부터 이천, 안성, 포천의료원이 원격 중환자실 운영에 돌입할 것으로 전망된다. 분당서울대병원이 중앙 상황실 역할을 맡아 24시간 모니터링을 제공하게 된다. 인천의료원도 인하대병원과 연계해 내년부터 원격 중환자실을 운영하기로 했다. 조승연 인천의료원장은 “큰 수술은 대학병원에서 받더라도 경과는 지역의료원의 원격 중환자실에서 지켜보면 된다. 언제든 수술을 담당한 대학병원 교수와 협진할 수 있으니 환자도, 의료진도 마음이 놓일 것”이라고 말했다. ※ 이 기사는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퍼스, 캘거리=특별취재팀특별취재팀▽팀장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이지운 김소영 이문수 기자(이상 정책사회부)}
‘심장마비·외상→ 귀터슬로 병원→ 녹색(치료 가능한 의료진 및 병상 있음).’ 지난달 22일 독일 서부 귀터슬로시 중앙구조관리국 상황실에 들어서자 중앙에 설치된 대형 화면이 먼저 보였다. 심장마비나 외상,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비롯한 각 질환별로 어느 병원에 현재 이를 치료할 의료진이 있는지를 한눈에 보여주는 ‘병원 및 환자 이송 관리 시스템’이다. 이 화면에는 응급환자들이 탄 구급차가 어느 병원으로 가고 있는지 동선이 떴고, 심지어 상황실 아래 18대의 구급차 중 어떤 구급차가 현재 수리 중인지도 알 수 있었다. 상황실 직원 4명이 이 화면을 보며 분주히 통화를 했다. 독일 중앙구조관리국은 우리나라 소방재난본부에 해당한다. 이날 방문한 귀터슬로시 중앙구조관리국은 지역 주민 37만5000명을 대상으로 연평균 360여 건의 중증 응급환자 이송을 처리한다. 안스가어 칸터 귀터슬로 중앙구조관리국 센터장은 “응급환자 발생 시 환자 정보를 관할 지역 내 10곳이 넘는 병원과 구급차 18대에 빠르게 전파하고, 8∼12분 내로 적절한 치료를 받도록 한다”고 말했다. 기자가 이런 설명을 듣는 동안에도 ‘병원 및 환자 이송 관리 시스템’에 응급환자가 발생했다는 표시가 떴다. 응급환자의 가족이 112(우리나라의 119)로 전화를 걸었고, 곧바로 중앙구조관리국 상황실로 연결됐다. 심장마비 환자였다. 직원은 환자의 상태와 위치 등을 묻고 응급처치법을 조언하며 안심시켰다. 그사이 응급현장에 구급차가 도착했다. 응급구조사가 현장에서 보낸 환자 정보를 토대로 중증인지, 경증인지를 파악했다. 마침 환자의 집에서 가까운 귀터슬로 병원에 심장마비 환자를 치료할 병상과 의사가 모두 있었다. 환자를 실은 구급차는 바로 출발했다. 중앙구조관리국은 환자의 응급도를 엄격히 구분해 꼭 필요한 환자만 대형병원으로 보낸다. 나머지는 소형병원에서 진료를 받게 한다. 이 때문에 중증 응급환자의 진료가 지연되는 일이 드물다. 독일 전역에는 이러한 중앙구조관리국이 주민 10만∼60만 명당 한 곳씩 설치돼 응급환자 이송을 돕는다. 내과 전문의 볼프강 슈미트 씨는 “중앙구조관리국이 지역 내 병상이나 의료진을 관리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한다. 한국과 같은 ‘응급실 뺑뺑이’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국내 응급의료의 큰 문제 중 하나는 ‘응급실 과밀화’다. 중증환자와 경증환자, 보호자가 뒤섞여 시장통을 방불케 한다. 이는 컨트롤타워 없이 현장에서 임기응변으로 대응해야 하는 응급의료 시스템에 기인한다. 거리를 달리는 구급차 안에서 구급대원이 직접 전화를 돌려가며 환자를 수용해줄 병원을 찾다 보니 효과적으로 환자를 배분하기는 불가능하다. 또 구급대원이 이송하는 환자의 중증도를 판단했더라도 환자가 대형병원을 가겠다고 하면 거부하기가 어려운 구조다.獨, 컨트롤타워 허락 없인 응급실 못가… 韓, 환자 절반이 경증 獨 컨트롤타워, 최적 병원 찾아 안내병원, 환자도착 10분전 치료준비 마쳐韓, 구급대원이 환자분류-병원 문의‘경증, 응급실 이용 제한’ 진척 없어 ‘너무 늦게 발견한 건 아닐까.’ 지난달 21일 독일 귀터슬로시에서 만난 안드레 슈뢰더 씨(59)는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던 사연을 들려주며 연신 가슴을 쓸어내렸다. 5월 어머니 집을 찾았다가 바닥에 누워 있는 어머니를 발견했고, 독일 긴급구조 번호인 112(우리나라의 119)에 전화를 걸었다. 구급차는 도착하자마자 어머니가 사는 귀터슬로시 할레 지역에서 약 24km 떨어진 빌레펠트 시내 병원으로 내달렸다. 도시 외곽 지역인 할레는 주변에 병원이 부족한 의료 낙후 지역에 속한다. 하지만 독일의 중앙구조관리국의 신속한 안내로 어머니를 살릴 수 있었다. ● 응급실 ‘컨트롤타워’ 둔 셈 독일의 중앙구조관리국이 슈뢰더 씨의 어머니를 ‘골든타임’ 내에 이송할 수 있었던 건 지역 내 응급실을 관리하는 ‘컨트롤타워’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중앙구조관리국 상황실에선 관할 지역 내 응급실 병상 수뿐 아니라 증상별로 처치할 수 있는 의료진의 근무 여부, 배치된 구급차의 이동 상황까지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다. 중앙구조관리국 상황실 직원은 응급구조사가 업데이트하는 환자의 상태를 보면서 인근 병원 병상 현황과 의료진 근무 여부를 확인해 ‘최적의 병원’으로 이송시킨다. 일단 구급차를 탄 환자는 어느 병원으로 갈지, 응급실에 갈지 등을 선택할 수 없고 중앙구조관리국의 안내에 따라야 한다. 병원과의 유기적인 협력도 이뤄진다. 안스가어 칸터 귀터슬로시 중앙구조관리국 센터장은 “환자를 어느 병원, 어느 의사에게 보낼지 결정하고 병원에 이를 공유하면 환자가 병원에 도착하기 최소 10분 전에는 응급처치 및 치료 준비를 끝낸다”고 말했다. ● 중-경증 환자 분류로 응급실은 평온 병원에서도 환자 이송 전 중앙구조관리국이 △중증 △1차 처치가 필요한 중증 △경증 △도움이 필요한 환자(제 발로 걸어 들어온 환자)로 나눈 것에 맞춰 철저히 진료 동선을 분류하고 중증·응급환자부터 진료한다. 지난달 19일 찾은 함부르크시 아스클레피오스 병원 응급실에는 당뇨병 환자인 중년 여성이 발이 퉁퉁 부은 채로 구급차에 실려 왔다. 경증환자 전용 통로로 들어온 이 환자는 미리 대기 중이던 의료진의 진찰을 받고 10여 분간 통로에 대기했다가 경증환자 치료실로 이동했다. 이런 엄격한 환자 분류로 응급실은 붐비지 않았고, 중증환자가 먼저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아스클레피오스 병원 응급실 토비아스 슈트라파타스 총책임자는 “중앙구조관리국은 어느 병원에서 환자가 빠르게 치료를 받을 수 있을지를 최우선으로 고려한다”고 말했다. 또 중앙구조관리국이 환자를 보냈다면 독일 병원은 반드시 환자에게 1차 응급처치를 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이 병원 응급실 토비아스 셰퍼 부과장은 “중앙구조관리국에서 넘어온 환자의 1차 응급처치는 병상이 있든, 없든 간에 의무”라고 말했다.● 구급대원이 ‘컨트롤타워’부터 운전-응급처치 다 하는 한국 독일과 달리 우리나라 응급실은 항상 포화 상태다. 중앙응급의료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중증환자를 치료하는 권역 및 지역응급의료센터를 방문한 환자는 525만171명이다. 그중 249만9728명(47.6%)이 한국형 응급환자 분류도구(KTAS)에서 가장 낮은 4, 5단계로 평가됐다. 증상이 경미하거나 아예 응급한 상태조차 아니었다는 뜻이다. 이런 환자들로 대형병원 응급실은 늘 ‘북새통’이다. 독일의 중앙구조관리국이 중증-경증 환자를 분류해 환자를 이송할 병원을 안내하는 것처럼 우리나라도 중증-경증 환자를 분류한다. 문제는 구급대원이 현장에서 운전, 응급처치를 하면서 동시에 환자 분류를 하고 전체 병상과 의료진 상황을 파악하는 ‘컨트롤타워’가 돼야 한다는 점이다. 구급대원들이 수십 통의 전화를 걸어 병상과 의사를 찾는 상황에서 체계적인 이송이 이뤄질 리 없다. 3월 19일 ‘대구 여학생 표류’ 사건 당시 응급환자 정보 공유 시스템의 부재로 경북대병원 권역외상센터에 중증 응급환자 3명이 동시에 몰렸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건복지부는 2018년 12월 ‘제3차 응급의료 기본계획’에 “권역응급의료센터에 경증환자의 방문을 억제하는 시범사업을 벌이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올 5월에는 정부·여당이 다시 “경증환자의 대형병원 응급실 이용을 제한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그 이후 진척은 더디고, 느리다. ※ 이 기사는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귀터슬로=특별취재팀▽팀장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이지운 김소영 이문수 기자(이상 정책사회부)}
12일 캐나다 앨버타주 에드먼턴시 중심가에 자리한 앨버타대 병원 응급실 앞. 5분에 1명꼴로 환자가 구급차에 실려왔다. 하나같이 심각한 상처를 입거나 의식이 분명치 않았다. 지난해 앨버타주에서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을 찾은 환자 가운데 입원이 필요 없는 경증 사례는 약 10%에 불과했다. 이는 앨버타주 구급대원이 경증 환자의 응급실 이송을 사실상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급대원 출신인 이언 블랜차드 앨버타주 보건부 응급의료연구소장은 “응급환자이송지침(ATR)이 상세하고, 이를 토대로 이송했다면 법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형병원 응급실 환자 절반이 경증인 한국과 가장 대비되는 지점이다. 국내에선 일부 경증 환자가 119 구급차를 택시처럼 이용하거나 대형병원 응급실로 이송해 달라고 요구해도 구급대원이 이를 거부하기 어렵다. 앨버타주는 매년 응급환자의 최종 치료 결과를 분석해 ATR을 개정하고 있다. 최신 ATR에 따르면 저혈당 환자가 다른 증상 없이 어지럼증만 호소하면 동네의원 외래 진료를 안내해도 된다. 이런 환자 대다수가 별다른 처치 없이 회복했다는 분석을 반영한 것이다. 2016년 개정된 ‘보건인력법’에 따라 구급대원이 현장에서 최선의 판단을 내렸다면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다. 블랜차드 소장은 한국의 상황에 대해 “한국에도 (환자 치료 결과) 자료가 있지 않나. 왜 그걸 활용해 구급대원에게 권한을 주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앨버타주에선 현장 구급대원이 환자의 상태를 판단하기 어려울 때 최적의 이송 기관을 선정해주는 조직이 있다는 점도 한국과 다른 점이다. 앨버타주는 2009년부터 모든 구급차를 보건부 산하로 통합해 구급센터가 빈 병상을 찾아주고 있다. 에디 랭 캘거리대 의대 응급의학과 교수(앨버타주 보건부 응급의료과장)는 “우리(앨버타주)도 20년 전에는 응급환자가 거리를 떠돌다가 사망하는 일이 있었지만 실시간 연계 시스템을 만든 뒤 달라졌다”고 말했다. ※ 이 기사는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특별취재팀▽팀장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이지운 김소영 이문수 기자(이상 정책사회부)}
지난달 12일 찾은 일본 오사카부 히라카타시의 간사이대 의대 고도구급구명센터(응급실). 대학병원 응급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차분하고 조용했다. 응급실에 온 환자들이 초기 치료를 받는 공간에는 ‘초료(初療)’라는 글자가 붙은 침대가 3개뿐이었다. 이 중 1개 침대에만 대퇴골 골절로 실려온 환자가 누워 있었다. 나머지는 비어 있었다. 일본 대학병원은 환자의 중증도에 따라 갈 수 있는 응급실을 철저히 분리해 ‘응급실 과밀화’를 막는다. 간사이대 의대 고도구급구명센터는 입구부터 둘로 나뉘어 있다. 왼쪽 입구는 심정지, 외상, 뇌졸중 등 중증 응급환자를 실은 구급차만 들어갈 수 있는 ‘구급차 전용’이다. 오른쪽 입구는 구급차 대신 걸어서 응급실을 찾은 환자들이 가는 ‘구급 외래 전용’이다. 구급 외래 전용 입구로 들어온 환자들이 필요한 진료를 받는 공간이 따로 있어 구급차를 타고 온 환자들과 섞이지 않는다. 일본은 구급차에 탄 환자의 이송 병원을 선정할 때 구급대원의 판단을 존중한다. 한국처럼 경증환자가 무작정 대형병원 응급실로 이송해 달라고 요구해도 들어주지 않는다. 구급대원은 지역별로 지방정부, 소방, 병원이 함께 참여한 협의체에서 만든 ‘이송·수용 규칙’을 따른다. 고쿠시칸대 의대 다나카 히데하루 응급의학과 교수는 “뇌출혈, 화상, 절단, 심정지 환자 등은 대학병원 응급실 같은 3차 병원으로, 맹장염 폐렴 복통 구토 환자 등은 2차 병원 응급실로 보낸다”고 설명했다. 다나카 교수는 “동네 의원급 의료기관은 당번을 짜서 야간에 발생한 심한 감기 환자 등을 수용한다”고 말했다. 경증환자가 무작정 119를 부르지 않을 수 있는 이유다. ※ 이 기사는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특별취재팀▽팀장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이지운 김소영 이문수 기자(이상 정책사회부)}
‘깡! 깡! 깡!’ 이달 6일 오후 7시 20분. 일본 오사카부 스이타시에 자리한 오사카대 의대 부속병원 고도구급구명센터(응급실) 내에서 크고 날카로운 경보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응급실에 있던 의료진과 환자 모두가 돌아볼 정도로 큰 소리였다. 이 알람은 오사카부에서 한 응급환자가 구급차에 탄 채로 30분 넘게 갈 병원을 찾지 못하고 ‘표류’하는 상황임을 알리는 소리였다. 알람이 울리자마자 의료진 책상에 놓인 단말기에는 현장에 출동했던 구급대원이 입력한 환자의 주요 증상과 혈압, 맥박, 산소포화도 등의 바이털 사인(활력 징후)이 바로 떴다. 응급실 의료진은 이 정보를 토대로 환자를 수용할지 여부를 이 단말기에 입력했다. 그제야 알람은 잦아들었다. 알람이 울리고 의료진이 결정을 내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1분이었다. 오사카대 의대 부속병원에서는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 이 환자는 다른 병원 응급실로 옮겨져 치료받았다. 응급환자가 병원을 찾지 못해 구급차로 ‘뺑뺑이’를 돌고 있을 때 인근 병원의 모든 응급실에 알람을 울리는 이 시스템의 명칭은 ‘마못테(まもって) 네트워크’다. ‘마못테’란 일본어로 ‘지켜줘’라는 뜻이다. ‘지금 환자가 갈 병원을 찾지 못하고 있다. 1분 1초가 급한 상황이니 어느 병원이든 이 환자를 받아서 생명을 지켜달라’고 외치는 셈이다. 이는 구급대원이 병원 수십 곳에 일일이 전화해 환자의 상태를 설명하면서 수용 여부를 문의해야 하는 한국의 응급환자 이송 과정과는 확연히 달랐다. 올해 3월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이 보도한 ‘표류, 생사의 경계에서 떠돌다’에서 뇌출혈 환자인 이준규 군(13)은 8개 병원에서 ‘수용 곤란’ 답변을 받으면서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채 228분을 표류했다. 다리가 골절된 박종열 씨(39)는 23개 병원에서 수용 곤란 통보를 받고 378분을 떠돌다 다리를 잃었다. 생사(生死)를 헤매는 환자의 골든타임은 구급대원이 전화를 돌리는 사이 흘러가 버렸다. 일본도 한국처럼 필수의료 분야의 의사가 부족한 것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난달 11∼15일 기자가 오사카부 현지에서 만나거나, 이달 3∼18일 화상, 이메일 등을 통해 인터뷰한 의료진들은 “응급환자가 병원을 찾아 ‘표류’하는 일은 없다”고 입을 모았다. 이 병원 고도구급구명센터장을 맡고 있는 오다 준 응급의학과 교수는 “응급환자를 빠르게 병원으로 이송할 수 있도록, 마못테 네트워크와 같은 기술을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환자가 구급차 뺑뺑이를 도는 일이 거의 사라졌다”고 말했다. 日, 앱에 이송 가능 병원 자동표시… 韓, 구급대원이 일일이 전화日, 구급대원이 환자증상 입력하면이송 병원 거리순으로 즉시 파악韓, 이달 발표 필수의료 개선책에도‘구급차-병원 연결 시스템’은 빠져 지난달 13일 오사카대 의대 부속병원 고도구급구명센터(응급실). 이곳에 실려 온 중환자들이 치료를 받고 있는 응급중환자실 안에 들어서자, 의료진 책상 위에 놓인 태블릿PC 크기의 검은색 단말기가 보였다. 이 단말기에는 ‘마못테(まもって) 네트워크’라고 적혀 있었다. 오다 준 응급의학과 교수는 “응급중환자실과 간호사 스테이션에 마못테 단말기가 1대씩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 오사카부의 구급대원은 응급환자 수용 요청을 병원 4곳이 거절하거나 갈 병원을 30분 이상 찾지 못하면 이 마못테 네트워크를 이용할 수 있다. 구급대원이 마못테 네트워크에 환자의 주요 증상 등을 입력하면 단말기에서 알람이 크게 울리는 동시에 해당 환자에 대한 정보가 뜬다. ● 경보 울리는 일본 vs 전화 돌리는 한국환자의 정보를 보고 병원은 ‘수용 가능’ 또는 ‘불가능’ 버튼 중 하나를 누른다. 병원이 버튼을 누를 때까지 알람은 계속 울린다. 이 병원 나카오 슌이치로 응급의학과 의사는 “알람이 요란하게 울려 응급환자 수용 요청을 놓치는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 2008년 처음 도입된 마못테 네트워크는 ‘구급차 뺑뺑이’라는 위기 상황에 처한 응급환자의 존재를 오사카부 전체 병원에 동시에 알리는 시스템이다. 구급대원이 응급환자의 수용 가능 여부를 병원에 한 번에 ‘일 대 다(多)’로 문의하는 셈이다. 그중 한 곳이라도 수용 가능 버튼을 누르면 환자는 더 이상 표류하지 않을 수 있다. 반면, 한국은 구급대원이 환자의 수용 가능 여부를 병원에 ‘일 대 일’로 문의한다. 병원에 전화를 걸어 환자의 상태를 설명하고, 수용 여부를 묻는 과정을 환자를 받는 병원이 나올 때까지 반복한다. 그 사이 응급환자의 골든타임은 계속해서 흘러간다. 게다가 한국의 구급대원은 시시각각 변하는 응급실 상황을 바로 인지하기가 어렵다. ‘수용이 어렵다’고 통보했던 A병원에 구급대원이 다른 병원에 차례로 전화를 돌리는 동안 환자를 받을 여력이 생기더라도, 다시 A병원에 전화하기 전까지는 그 사실을 알 수가 없다. ● 환자 증상 입력→이송할 병원 자동 표시오사카부는 마못테 네트워크를 울리기 전에 구급대원이 환자를 이송할 병원을 빠르게 정할 수 있는 시스템도 갖추고 있다. “환자의 증상을 입력하면 현재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순으로 병원 목록이 자동으로 뜹니다.” 지난달 12일 일본 오사카부 히라카타시의 간사이대 의대 부속병원 고도구급구명센터에서 만난 가지노 겐타로 응급의학과 교수는 구급대원이 사용하는 애플리케이션(앱)을 소개했다. 2013년 도입된 오리온(ORION·Osaka emergency information Research Intelligent Operation Network system)이다. 이 앱을 켜자 환자의 성별, 나이, 주요 증상 등을 입력하는 화면이 떴다. 흉통을 호소하는 환자라면 심장병 병력 및 호흡 곤란 여부 등을 입력하는 식이다. 입력이 끝나자 환자의 증상과 정보, 현재 위치를 기반으로 이송할 수 있는 병원 목록이 거리순으로 떴다. 이 같은 정보를 바탕으로 구급대원은 병원에 전화를 걸어 환자 수용 가능 여부를 확인하고 있었다. 구급대원이 환자를 이송할 병원을 정하는 과정이 자동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반면 한국은 이 과정이 구급대원의 ‘머릿속’에서 이뤄진다. 구급대원이 사전에 숙지한 각 병원의 위치와 병원별로 치료가 가능한 진료과목을 바탕으로 전화를 걸 병원을 직접 추리고 있다. ●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한국일본보다 정보기술(IT)이 발달한 한국에서 왜 이런 시스템을 쓰지 않을까. 정부가 이달 19일 발표한 필수의료 혁신전략에도 구급차와 병원을 빠르게 연결할 수 있는 시스템에 관한 내용은 빠져 있다. 국내서도 마못테 네트워크와 유사한 시스템을 도입하려고 시도했지만, 끝내 시행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2019년 운영됐던 응급의료체계 개선 협의체서는 구급대원의 환자 이송을 병원 2곳이 거절하면, 시도 119 종합상황실이 단체 메신저로 인근 응급실에 수용 요청을 보내는 방안이 논의됐다. 만약 환자를 받겠다는 응급실이 없으면 지역에서 가장 큰 응급실로 일단 이송하는 방안도 함께 논의됐다. 하지만 의료계는 소방의 무분별한 이송을, 소방당국은 개인정보 보호 차원에서 환자의 정보를 병원과 실시간으로 연동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면서 결국 최종 보고서에서 빠졌다. 오리온 같은 시스템을 개발할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송경준 보라매병원 공공부원장(응급의학과 교수)은 “이송할 병원의 목록을 추려내는 건 사람보다 컴퓨터가 훨씬 더 잘한다”며 “그 알고리즘을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로 올해 6월부터 충북도가 국토교통부 지원사업으로 오리온 시스템과 유사한 자동화 시스템인 ‘스마트 응급의료 시스템’을 개발해 운용하고 있다. 충북스마트시티챌린지 사업단장을 맡고 있는 김상철 충북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환자 이송 단계에서 병원과 소방 사이의 적극적인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시스템 구축을 위한 정부나 지자체의 재정적인 지원도 충분히 뒷받침돼야 민간 병원의 참여도 늘 것”이라고 강조했다. ※ 이 기사는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오사카=특별취재팀특별취재팀▽팀장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이지운 김소영 이문수 기자(이상 정책사회부)}
“일본 도쿄에는 구급대원의 응급환자 수용 요청을 병원 5곳이 거절하거나 갈 병원을 30분 이상 찾지 못하는 경우에 대비해서 당번 병원을 정해 반드시 응급환자를 수용하도록 하는 ‘도쿄 룰’이 있습니다.” 도쿄 고구시칸대 의대 다나카 히데하루 응급의학과 교수는 “15년 전 ‘구급차 뺑뺑이’로 응급환자들이 연이어 사망하면서 도쿄 룰을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당번 병원은 ‘표류’ 환자를 받기 위해 미리 병상을 비워둬야 한다. 당번 병원이 환자를 받으면 정부에서 수가(건강보험에서 병원에 주는 진료비)를 지급한다. 일본도 처음부터 중증·응급환자 병원 이송 시스템이 지금처럼 잘 갖춰진 것은 아니었다. 일본에도 ‘구급차 뺑뺑이’와 같은 의미의 ‘구급차 다라이마와시(たらい回し·대야 돌리기)’라는 표현이 있다. 하지만 2008년 도쿄에서 구급차에 탄 임산부가 8개 병원에서 수용 곤란 통보를 받은 뒤 뇌출혈로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의료계와 협력해 응급의료체계 개혁에 나섰다. 같은 해 도쿄의 자택에서 흉통을 호소하던 90대 여성이 11개 병원에서 수용을 거부당해 사망한 일도 있었다. 당시 일본 응급의학회는 성명서를 통해 “일반적인 질병을 앓고 있는 응급환자들도 ‘구급차 뺑뺑이’를 당하고 있다. 그야말로 ‘응급의료 난민’이라고 불러야 할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후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대책 마련을 촉구했고, 정부가 화답하면서 지금의 응급의료체계가 구축됐다. 일본은 중앙정부, 지방자치단체, 의료기관, 소방이 함께 참여하는 협의체가 발달돼 있다. 이 협의체에서 지역별 특성에 맞게 응급의료체계를 만들어 시행한다. 오사카부의 마못테 네트워크와 오리온 시스템, 도쿄도의 도쿄 룰 등이 그 예다. 지난달 12일 만난 간사이대 의대 부속병원 가지노 겐타로 응급의학과 교수는 “협의체에서 함께 응급환자 이송 규칙을 정하고 이송이 적절했는지에 대한 평가도 내린다”고 말했다. 이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2008년과 2013년, 마못테 네트워크와 오리온 시스템이 각각 도입될 때도 반발이 있었다. 지금의 한국에서처럼 의료계는 소방의 무분별한 이송을, 소방은 환자의 정보를 병원과 연동하는 것을 우려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구급차 뺑뺑이로 사망하는 환자가 더 이상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대의를 위해 일본 소방당국과 의료계는 뜻을 모았다. 오사카대 의대 부속병원 가타야마 유스케 응급의학과 의사는 “소방과 병원의 합의가 이뤄진 지역부터 먼저 시스템을 도입하고 점차 오사카부 전역으로 확대됐다”고 말했다. ※ 이 기사는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특별취재팀▽팀장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이지운 김소영 이문수 기자(이상 정책사회부)}
지난달 19일 오전 독일 함부르크시 아스클레피오스 병원 응급실. 발작 증세를 보이며 쓰러진 50대 남성 환자가 구급차에 실려 오자 응급의학과 전문의를 포함한 의료진 4명이 입구로 달려 나왔다. 의료진은 일사불란하게 응급 처치를 한 뒤 단 5분 만에 환자를 입원 병동으로 올려보냈다. 해외에서도 고되고 위험한 필수의료 분야는 의사들이 기피하는 분야다. 하지만 기자가 찾은 독일에선 응급 환자가 치료받을 병원을 찾아 헤매는 ‘표류’를 볼 수 없었다. 토비아스 셰퍼 응급실 부과장은 “우리 병원은 인근 권역에서 가장 위독한 환자를 주로 수용하지만, 일손이 모자라 중증 환자를 받지 못한 적은 거의 없다”고 했다. “그런 일은 독일 어디서도 일어나지 않는다”고도 말했다. 우리나라보다 앞서 고령화를 겪은 독일은 일찌감치 의대 입학 정원을 늘린 덕을 보고 있다. 2021년 기준 독일 인구 1000명당 임상 의사가 4.5명으로, 한국(2.6명)의 1.7배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3번째로 많다. 그럼에도 독일 의사협의회는 지금도 ‘의대 정원을 더 늘리라’고 정부에 요구한다. 의사들의 근로 시간이 짧아지면서 실제 진료 여력은 오히려 줄었고, 이를 중증 응급환자 치료에 우선 배치하면서 경증 수술 등은 대기가 길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니엘 뢰르만 귀터슬로시 보건자문위원은 “독일인들은 여전히 더 많은 의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본도 상황이 비슷하다. 일본 정부는 2030년 전후로 의사 부족이 심해질 것을 2006년 예측했다. 이후 2007년 7625명이었던 의대 정원을 2019년 9420명으로 늘렸다. 그러나 필수의료 의사들은 “병상당 의사 수는 여전히 부족하다”며 추가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지난달 13일 일본 오사카대 의대 부속병원 고도구급구명센터에서 만난 오다 준 응급의학과 교수는 “의사가 늘었지만, 필수의료 분야 인력 부족 문제는 여전하다. 의사 증원만으로는 안 되고, 필수의료를 살릴 대책을 병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중증·응급 환자의 ‘표류’라는 국내 필수의료 문제의 해법을 찾기 위해 올 8월부터 10월까지 일본과 독일, 캐나다, 호주, 미국 등 5개국의 병원과 구급대 등 현장 15곳을 방문했다. 그 과정에서 현지 전문가 44명을 인터뷰했다. 해외에선 미리 의사를 확충해 오면서 중증·응급 환자와 의사를 실시간으로 연결해주는 시스템을 개발하는 등 환자를 살리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19일 의대 입학 정원을 확대하고 지역 국립대병원의 진료 역량을 키우는 ‘필수의료 혁신전략’을 발표했다. 졸속 추진으로 더 큰 부작용을 초래했던 역대 정부의 의료 개혁 실패를 답습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각국 의료 현장에서 만난 의사와 정책 당국자들은 “중요한 건 실행 의지와 세밀한 설계”라고 말했다.日, 의대생 18% 지역의무근무… 獨, 개원 제한해 수술실 이탈 막아 日 지역의사 장학생, 10년 의무근무獨 필수의료진, 개원의보다 큰 보상日-獨도 고된 수술의사 기피 늘어“의대 정원확대만으론 해결 어려워” 정부가 2025학년도부터 의대 입학 정원을 늘린다는 의지를 19일 분명히 했다. 하지만 늘어난 의사가 지역·필수의료 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진짜 과제다. 이들이 서울로 몰리거나 피부미용 분야로 빠져나가면 중증 응급환자의 ‘표류’가 해결되기는커녕 국가 의료비 지출만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취재팀이 방문한 독일과 일본, 캐나다 등에서는 필수의료로 의사들을 유인하기 위한 각종 정책적인 지원이 있었다.● 수술 의사 이민 받고 ‘개원의 총량제’ 실시한 독일 독일은 ‘개원의 총량제’를 통해 진료 과목마다 해당 지역에서 문을 열 수 있는 개인병원의 수를 정해두고 있다. 무분별한 ‘개원 러시’로 대형병원 필수의료 의사가 부족해지는 일을 막기 위한 조치다. 실제로 독일은 인구 1000명당 수술 전문의는 1.47명으로, 한국(0.71명)의 2배가 넘었다. 지난달 19일 함부르크시 에펜도르프 병원의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모나 린트샤우는 “대형병원 필수의료 분야 전문의는 개원의보다 통상 더 많은 보상을 받기 때문에 오히려 개원의 허가증이 잘 팔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동네의원을 열고 피부미용 시술이나 물리치료 등을 하는 게 수입이 훨씬 낫다. 수술 의사가 부족한 이유 중 하나다. 이런 정책에도 독일 내에서 의사들의 필수의료 분야 기피 현상은 조금씩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중요한 화두이기 때문이다. 아스클레피오스 병원 토비아스 셰퍼 부과장은 “특히 뇌를 수술하는 신경외과 전문의는 일이 고되고 당직도 잦아 젊은 의사들이 꺼린다”고 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부족한 수술 의사를 해외에서 유치하고 있다. 한국계 독일인인 신장내과 전문의 한성국 씨는 “이민 의사를 위한 전문 어학시험과 자격시험을 따로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지역의사제로 급한 불 꺼 일본은 의대 정원을 대폭 확대하면서 ‘지역의료 확보 장학금’을 도입했다. 의대 정원 일부를 별도 전형으로 선발하고 장학금을 주되 통상 10년 안팎 병·의원이 부족한 지역에서 의무 근무하게 하는 제도다. 이는 2020년 7월 문재인 정부가 발표했다가 의료계의 거센 반발에 직면해 보류한 ‘지역의사제’와 유사하다. 제도 도입 첫해인 2007년엔 지역의료 확보 장학금을 받는 의대생이 183명으로, 전체 의대생의 2.4%에 불과했다. 하지만 2020년엔 1679명(전체의 18.2%)으로 크게 늘었다. 급격히 줄어들던 농촌 지역 의사도 2010년부터 반등해 2018년엔 8년 전보다 12.1% 증가했다. 하지만 현지 전문가들은 이 제도가 ‘지역 의료 붕괴’의 급한 불을 끄는 데엔 도움이 됐을지언정, 필수의료 과목 기피 문제까지 해결하지는 못했다고 지적했다. 도쿄 고쿠시칸대 의대의 다나카 히데하루 응급의학과 교수는 “일본에서도 피부과, 성형외과가 큰 인기를 끄는 반면 응급의학과, 산부인과 등은 ‘4K’(일본어로 ‘힘들다·더럽다·위험하다·멋없다’의 준말) 직업으로 여겨져 의사들이 기피한다”라며 “필수의료 분야에 대한 대우를 높이지 않으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말했다.● “낙수 효과만으로는 필수의료 문제 해결 안 돼” 이는 의대 정원 확대의 ‘낙수(落水) 효과’만으로는 필수의료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필수의료 분야의 근무 여건을 개선하는 한편 응급 환자부터 진료를 받도록 해야 한다. 호주는 정보통신기술(ICT)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호주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의 앤드루 제이미슨 지역의료국장은 “우리도 의사들이 소도시 근무를 꺼린다. 대신 대형병원의 숙련된 의사들이 ‘원격 협진’을 통해 부족한 지역 의료 인력을 보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의대 입학 때 성적뿐 아니라 의사가 되려는 이유와 봉사활동 경력 등 인성 평가를 실시하는 캐나다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캐나다 앨버타주 캘거리 권역 급성기 분야 책임자 스콧 뱅크스는 “캐나다에서도 피부미용 분야 의사가 돈을 더 잘 벌기는 하지만 이 때문에 필수의료 분야가 인력난을 겪지는 않는다”라며 “만약 의대 졸업생 대다수가 소득을 위해 비필수의료 분야를 택한다면 그건 의대 입학생 선별의 실패다”라고 말했다. ※ 이 기사는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특별취재팀▽팀장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이지운 김소영 이문수 기자(이상 정책사회부) 오사카·함부르크·캘거리·퍼스·보스턴=특별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