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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보배인 저출산 시대에도 ‘품을 잃은 아이들’이 있다. 친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유기된 아이들. 그리고 부모가 방임한 아이들까지.올해 출생신고를 의무화하되 ‘익명 출산’을 허용하는 두 법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우리 주위엔 여전히 미아처럼 품을 찾아 떠도는 아이들이 있다.그동안 이 아이들은 뭘 감내하며 살아왔을까.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베이비박스’(부모가 아이를 두고 가도록 마련된 상자)를 500시간 동안 관찰하고, 품을 찾아 떠도는 0~29세 아동·청년 47명을 만나 그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말한다. “미안해 아가야.”자립준비청년. 성인이 된 청년들에게 ‘자립준비’라는 모순적인 수식어를 붙이는 이유는 남들보다 빠르고 외로운 홀로서기를 맞닥뜨리기 때문일 것이다.과거 ‘보호종료아동’이라 불렸던 자립준비청년은 아동양육시설(보육원), 공동생활가정(그룹홈), 가정위탁 등의 보호를 받다가 만 18세 이후 보호가 종료된 이들을 뜻한다. 친부모의 손에 자랄 수 없었던 각자의 사정은 모두 다르지만, 보호가 종료되는 순간부터 의지할 곳이 사라진다는 점은 같다. 2020년 유권자 연령이 하향되면서 만 18세는 선거에서 투표권도 행사할 수 있는, 거의 완전한 ‘법적 성인’인 나이가 됐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은 진학과 취업 같은 거대한 결정들 앞에 선 막막한 청년들이기도 하다. 세상의 편견도 날 것 그대로 마주해야 한다. 지난해 광주에서는 보육원에서 자란 자립준비청년 2명이 연달아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다. 이들의 유서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다”, “아직 다 읽지 못한 책이 많은데”, “삶이 고달프다”라는 글이 남겨져 있었다.정부는 올해부터 자립 수당을 인상하고 맞춤형 사례관리를 강화하는 등 정책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하지만 돈과 제도만으로는 해소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10대부터 20대까지의 자립준비청년 35명을 만났다. 청년들은 말했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삶의 고비에서 도움을 줄 ‘믿을 만한 어른’, 눈치 보지 않고 꿈을 향해가라는 응원, 그리고 자신들을 있는 그대로 봐줄 편견 없는 시선이라고.이 가운데 4명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실어봤다. 링크를 통해 인터랙티브 기사 ‘사운드트랙: 품을 잃은 아이들()’에 접속하면 자립준비청년과 현재 보호를 받고 있는 아동들의 실제 음성으로 담은 더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다.조병익(19·보육원 퇴소)친부모를 알 수 없는 무연고 아동으로 보육원에서 살다가 만 18세가 된 올해 퇴소했다. 올해 3월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했지만 5월까지 수술을 받지 못한 채 ‘방 안에만 누워 뼈아픈’ 19번째 생일을 보냈다. 아직 만 19세 미만이라 수술을 받기 위해선 보호자 동의가 필요한데, 시설에서 퇴소해 후견인은 없는 ‘공백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홀로서기의 첫걸음을 내딛는 대학교 1학년에 겪은 그 일로 그는 인간관계 범위도 좁아지고 아르바이트도 더는 할 수 없었다. 치료를 마친 뒤 그는 노래 작사, 책 집필 등 세상을 향한 ‘날개’를 조금씩 펼치고 있다.후견 공백으로 수술 못 받고 방에서 은둔한 ‘19번째 뼈 아픈 생일’올해 3월에 전동킥보드를 타고 가다가 신호위반 차량에 부딪히는 사고를 당했어요. 근데 생일인 5월 말까지 수술받지 못해서 집에 누워만 있었어요. 병원에서는 제가 만 19세 미만이라 보호자 동의가 없으면 수술을 안 해준다는데, 시설에선 퇴소 후에는 (후견인 역할을) 해줄 수 없다고 해서요. 두 달 동안 진통제와 항생제 처방만 받고 거의 은둔하면서 살다가 5월에 수술받았죠. 그동안 손목 인대도 파열되고 잃은 게 많아요. 스트레스 때문에 불면증까지 왔어요. 정부도 병원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하고, 세상이 다 부정적으로 보이더라고요. 의지할 사람이 없으니까 보육원 과장님이랑 선생님만 주구장창 찾아갔어요. 혼자 사는 게 나쁜 일은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저처럼 부모가 없는 아이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생겨요. . 보호종료 후에 이런 공백이 생기지 않게 후견인 제도가 개선되어도 좋을 것 같아요. 예외적인 상황에선 본인이 혼자 해결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의사 표현을 할 수 있게 해주면 좋겠어요. 부모 없이 혼자서 컸다는 게 제 잘못은 아니잖아요어렸을 땐 부모님 없는 보육원 애는 불쌍하고 딱하다는 인식이 박혀있었던 것 같아요. 학교 친구들도 제가 보육원에 산다는 소문을 듣고 나서부터 저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더라고요. 그럴 때마다 보육원 선생님은 ‘보육원 출신은 절대 창피한 일이 아니야. 오히려 또래 애들보다 풍족할걸? 누가 불쌍하다는 식으로 얘기하면 ‘너희도 우리처럼 돈 많니’라고 당당하게 나서라’고 말해주셨어요. 고등학교에 가서야 비로소 학기 첫날에 반 친구들에게 “나 보육원 출신이야”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실제로 저희는 돈 관리도 일찍 배웠고, 삶에 대한 경험이랑 지식도 다양하게 얻었어요. 사람들이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아유, 불쌍한 것” 하기보다 “우리와는 다르지만 잘 사는 것 같다”, “대견하다”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최근에 가사를 쓴 자작곡 ‘웃고 있네’에도 이런 마음을 담았어요.김민정 (23·가명·그룹홈 퇴소)부모님이 이혼한 뒤 아버지와 살며 심한 폭력과 방임을 당했다. 한겨울에도 찬물로 씻고 반찬은 김치뿐인, ‘쓰레기장’에 가까운 집에 살았다. 중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의 아동학대 신고로 그룹홈으로 분리됐다. 하지만 아버지의 집에서도, 그룹홈에서도, 자립한 뒤에도 그는 든든히 의지할 곳 없이 눈치를 보는 생활을 해야만 했다. 아동복지 전문기관 초록우산이 지원하는 경기 남부 청년 자조모임 ‘청자기’를 만나며 조금씩 자신감을 찾은 그는 정책 제안 등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나중에 결혼할 때 혼주석에 앉을 사람이 없어요제가 가족에 얽힌 사연을 꺼내서 이야기하면 듣고 ‘잘 컸다’고 다독여줄 사람은 없을 것 같아서 두려워요. 나중에 제가 결혼을 할 때를 상상해도, 혼주석 자리에 누가 앉을까 생각하면 좀 슬퍼져요. 진짜 앉을 사람이 없거든요.전에 사귀었던 남자친구랑 정말 풋풋하고 귀엽게, 꽤 오래 사귀었어요. 1년 정도 만났을 때 남자친구 군입대를 앞두고 (남자친구) 어머니께 처음 제 이야기를 해드렸어요. 그분께서 그동안 계속 제게 부모님에 대해 질문하셨는데 매번 둘러대고 거짓말했거든요. 근데 그분이 제가 자라온 이야길 듣고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이 “야. 너는 결혼식 작게 해야겠다”였어요. 그리고 “너는 상대방 부모님이 좀 세야겠다. (남들이) 너 못 건드리게”였어요. 절 그렇게 깎아내리실 줄은 몰랐어요. 저는 노력 되게 많이 했거든요. “이렇게 자랐지만 할 수 있는 게 많다”라는 걸 보여주려고요. 남자친구 집에서 놀고 나서도 굳이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했어요. 내가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은 사이가 좋아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거든요. 하지만 아무리 해도 결국 돌아오는 건 “너 이젠 우리 집 오지 말아라”는 한마디 였어요.지원책이 있으면 뭐 해요. 필요할 때 옆에 있어 주지 않는데.“정부가 하는 자립지원통합서비스에 대해 정말로 할 말이 많아요. 최대 5년까지 주기적으로 맞춤형 지원을 해준다는 정책이거든요. 근데 실제로는 일대일로 배정되는 상담사 개인 성향에 따라 너무 달라져요.최근에 제가 치과 진료비를 최대 100만 원까지 지원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큰맘 먹고 치과에 갔어요. 선천적으로 이가 안 좋아서 임플란트를 해야 했거든요. 담당자분께도 시간 맞춰 와달라고 말씀을 드렸죠. 근데 그분이 약속 시간이 한 시간 넘게 지났는데 전화도 안 받는 거예요. 겨우 통화가 됐는데 “카드 번호만 알려줘도 결제 가능하다니까 안 갈게요” 하더라고요. 전 병원 직원이랑 다른 환자들에게 민폐 덩어리가 돼서 눈치를 보는 동안, 본인은 그냥 여기까지 오는 게 귀찮다고 당일에서야 일방적으로 약속을 취소한 거죠. 한두 번이 아니에요. 처음에도 다짜고짜 “과거 얘기 좀 해보세요” 하기에 기분이 나빠서 “조금 불친절하신 것 같네요”라고 했더니 “일이니까”라고 대꾸하더라고요. 한 번은 제가 너무 열이 나고 아파서 아침 일찍 전화를 건 적이 있어요. 근데 바로 거절하고 문자로 “오전 9시~오후 6시 사이에 연락해주세요”라고 답장이 온 거에요. 너무 서러웠어요. 당장 와달라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약값이나 병원비 지원받을 수 있는지 물어보려던 건데 너무 매몰찼어요.물론 제가 필요했던 게 지원금이긴 해요. 하지만 지원제도의 가장 큰 취지는 옆에서 지켜줄 어른을 만들어주겠다는 것 아닌가요? 정말 필요할 때 옆에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정혜세(22·보육원 퇴소)정혜세의 엄마는 건강이 좋지 않은 미혼모였다. 태어나자마자 보육시설에서 여러 ‘엄마’(생활지도원)의 손에 자랐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야 보통 아이들의 엄마는 1명뿐이라는 걸, 엄마는 ‘출근’하거나 ‘퇴근’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태어나 첫 충격에 빠졌다. 사춘기에 꽤나 방황하다 “야, 엄마아빠 없는 게 네 잘못은 아니잖아”라는 같은 반 친구의 말에 큰 위안을 받았다. 현재 LH 매입임대주택에서 살며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그는 자신에게 여전히 집요하게 따라붙는 ‘부모님 관련 질문’에서 벗어나고 싶다. 대한민국에선 모든 질문이 ‘부모님은?’으로 끝나요고등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했거든요. 그럼 사람들이 “부모님이 용돈 안 주냐”고 물어보죠. 부모님이 맞벌이라고 둘러대기는 좀 그래서 “그냥 제가 용돈 벌려고요”라고 얘기하면 또 “부모님이 뭐라고 안 하시냐”고 해요. 제가 “부모님이 괜찮다고 하셨어요” 해도 “그래도 학생 때 공부를 해야지” 하고 이어져요. 그나마 학생이었을 땐 제가 좀 무례하게 대답해도 “애가 사춘기라 예민하네” 하면서 넘어가 줬거든요? 성인이 되고 나니까 함부로 쳐내기가 더 힘들어졌어요. 요즘은 사람들이 물어봐도 대꾸를 안 하게 돼요. “(가족들과) 집에서 살아요?” 하고 물어보면 “아, 예, 그냥 혼자 살아요.”하고, “부모님은?” 이러면 “뭐, 알아서 잘 사시겠죠.” 이런 식으로 넘겨요. 대한민국에서는 뭐만 하면 ‘부모님’으로 끝나는 거예요. 확실히 부모님이 있다는 게 디폴트(기본값)에요. 없다는 게 창피하거나 부끄럽진 않은데, 뒤에서 사람들끼리 제 얘기를 하는 게 너무 싫었어요. 그런 게 왜 궁금한지 모르겠어요. 저는 살면서 남의 부모님이 궁금한 적이 없었거든요.부모님이 없는 게 꼭 ‘마이너스’는 아닌 것 같아요가족관계증명서를 떼면 전 아무도 없어요. 스무살 때 군대 면제 처리할 때 구청 직원분께 증명서를 보내드렸더니 ‘오, 혜세 씨 깔끔한데요’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둘이서 “어유 좋은 거죠” “깔끔해요, 빨리빨리 처리할 수 있네요” 하고 농담했죠, 하하.부모님이 없는 게 제게 꼭 ‘마이너스’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집도 좋은 곳을 지원받아서 살고 있고요. 물론 부모님이 있으면 ‘플러스’일 수도 있지만 늘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니 부모가 자기 애들을 학대하거나 빚을 물려주는 경우도 많더라고요.제 친구는 미술 쪽에 재능이 있어요. 그런데 자기 부모님께 “저 부모님 가게 물려받기보다 미술을 하고 싶다”라고 얘기했다가 곧바로 거절당했어요. “무슨 미술이야. 와서 일이나 도와. 우리한테는 네가 짐이야” 이런 식으로 얘기하셨다더라고요. 어떻게 반응을 해야 될지 딜레마였어요. 친구 부모님을 욕할 수도 없잖아요.이동권(28·가정위탁 종료)초등학생 때 부모가 이혼한 뒤 아버지, 큰아버지와 같이 살았다. 아버지는 2, 3일씩 집을 비웠고, 큰아버지는 동권을 자주 때렸다. 두 사람이 피운 담배 냄새는 어린 동권의 온몸에 깊이 스며들었다. 같은 반 아이들은 ‘담배 피우는 아이’라며 동권을 따돌렸다. 13살 때 이모 집에 위탁돼 사촌들과 함께 자랐다. 독립한 뒤 중앙가정위탁지원센터(현 아동권리보장원에 통합됨)에서 운영한 가정위탁정책참여단 ‘라온제나’에서 활동했다. 남들이 꿈과 진로를 얘기할 때 저는 꺼낼 말이 없어요저는 중학교 때부터 역사에 정말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데 막상 대학 진학할 땐 이모와 집안 어른들한테 갑작스럽게 진로를 부정당하면서 어른들에 대한 신뢰도 잃었고, 의지할 곳도 없었어요. 그러면서 방황이 시작됐어요. 선생님들도 저를 굉장히 불쌍하고 도움을 줘야 되는 존재, 군대로 치면 관심 병사로 취급하는 게 느껴졌어요. 지금도 남들이 꿈이라던가 진로 얘기를 할 때 저는 사실 얘기할 게 없어요.‘라온제나’를 접하고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나만 이상한 게 아니었구나”였어요. 먼저 들었어요. 그동안 주변 애들은 다 정상적으로 엄마 아빠 밑에서 자라는데 나는 왜 이모 밑에서 이렇게 커야 하는지 의문이었거든요. 그런데 저처럼 ‘가정위탁’이란 울타리 안에서 지원받는 친구들이 상당히 많고, 활발하게 잘 지내는 사람들도 많다는 걸 처음 본 거죠.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느낀 감정은 ‘나도 나중에 저렇게 잘 자립할 수 있겠구나’라는 안도감이 가장 컸어요. 그전까지는 제 미래가 아예 어두컴컴한 느낌이었다면, 그때부터 길이 여러 갈래 보이는 느낌이었죠.너무나 다른 ‘자립준비청년’들, 한 명 한 명 기댈 곳 생겼으면최근 자립준비청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긴 했는데, 여전히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은 것들도 반반인 것 같아요. 단순히 ‘지원금 주면 되겠지’ 멘토 붙여주면 되겠지’ 하는 식으로요. 근데 장학사업을 예로 들자면, 솔직히 자신의 꿈을 이미 명확하게 정한 친구들만 받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일반 가정에서 자라는 친구들도 진로를 못 찾는 경우가 많은데, 하물며 시설이나 위탁으로 자란 친구들은 더욱 그렇거든요.자립준비청년들에게 가장 필요한 정책을 하나 고르기엔. 각자의 차이도 너무 커요. 보호시설과 가정위탁이 다르고, 특히 가정위탁의 경우에는 집집마다 환경이 더 달라요. 어떤 집은 보호가 종료된 뒤에도 정말 친자식처럼 여길 수 있지만, 보호기간에만 보살피는 집도 있죠. 지금도 지역별 자립지원전담기관에서 가장 연락이 안 되는 아이들이 가정위탁이래요. 보호자가 연락을 안 받으면 방법이 없으니까요.당사자에게 여러 선택지를 주고 고르라고 하기보단, 차라리 아이들이 언제든 연락할 수 있는 센터를 활성화하고 그곳에서 각 아이에게 맞는 자원을 배분해 준다면 좋겠어요. 사실 갓 스무살 된 친구들은 자기에게 뭐가 부족한지 자체를 알기 어려워요. 특히 돈 관리는 정말 닥쳐봐야 알거든요. 저도 대학생 때 신용카드 발급이 된다기에 해봤다가 연체된 적도 있었어요. 보호가 종료되기 전, 아직 보호 중일 때부터 지원이 시작되면 아이들이 덜 헤맬 수도 있을 것 같고요. 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미아: 품을 잃은 아이들’은 저널리즘의 가치와 디지털 기술을 융합해 차별화한 보도를 지향합니다. ‘히어로콘텐츠’(original.donga.com)에서 디지털 플랫폼에 특화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히어로콘텐츠팀▽팀장: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취재: 조유라 이승우 조민기 기자▽프로젝트 기획: 위은지 기자 ▽사진: 홍진환 기자▽편집: 하승희, 양충현 기자 ▽그래픽: 김수진 기자▽인터랙티브 개발: 임상아 임희래 뉴스룸 디벨로퍼▽인터랙티브 디자인: 여하은 차설 인턴스마트폰 카메라로 QR코드를 찍으면 품 밖으로 내몰렸던 아이들의 이야기를 디지털 콘텐츠로 구현한 ‘그 아이들이 버려진 곳’()과 ‘사운드트랙: 품을 잃은 아이들’()로 각각 연결됩니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조유라 기자 jyr0101@donga.com조민기 기자 minki@donga.com이승우 기자 suwoong2@donga.com}
아이가 보배인 저출산 시대에도 ‘품을 잃은 아이들’이 있다. 친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유기된 아이들. 그리고 부모가 방임한 아이들까지.올해 출생신고를 의무화하되 ‘익명 출산’을 허용하는 두 법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우리 주위엔 여전히 미아처럼 품을 찾아 떠도는 아이들이 있다.그동안 이 아이들은 뭘 감내하며 살아왔을까.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베이비박스’(부모가 아이를 두고 가도록 마련된 상자)를 500시간 동안 관찰하고, 품을 찾아 떠도는 0~29세 아동·청년 47명을 만나 그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말한다. “미안해 아가야.”미아 - 품을 잃은 아이들[3] 소년의 품에 남은 상처“부모도 없는 새끼가 뭔데 이런 데서 공부하는 척하고 앉아있냐.”그 순간, 이가람의 머릿속 수류탄 안전핀이 뽑혔다. 기말고사가 다가오던 2013년 여름. 열람실엔 시험공부를 하러 온 중학생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문제집을 넘기고 있었다. 양평군립도서관의 큼직한 책상을 사이에 두고 가람과 민혁(가명)에게만 살기가 흘렀다.전날 둘 사이엔 이미 전조가 있었다. “너 엄마도 없잖아”라는 말을 눈앞에서도, 카카오톡 단체대화방에서도 민혁은 쉽게 꺼냈다. 부모가 있는 아이들끼리는 별 타격감이 없는 욕이었다. 하지만 가람에겐 그 수류탄을 터뜨릴 수 있는 뇌관이었다. 둘 사이에 주먹이 오갔다. 중학생 특유의 야생성이 교실 안을 가득 메웠다.다음날 열람실에서 둘은 다시 마주쳤다. 잡담을 하는 가람에게 민혁의 신경이 곤두섰다.“야! 시끄럽다고. 조용히 해라.”“지금 대화 중이잖아. 끼어들지 마라.”낮은 소리로 으르렁댈 때, 거기서 멈춰야 했다. 민혁은 가람의 약점을 잘 알았고, 너무나 결정적일 때에 건드렸다.가람은 퍼뜩 가방에 무슨 물건이 들어있는지 기억해냈다. 전날 저녁 친구와 가지고 놀다가 가방에 넣어놓은, 중학생이 들고 다녀선 안 될 물건이었다. 첫 이름, 이순신가람의 첫 이름은 ‘이순신’이었다. 충무공 탄신일인 4월 28일에 가로등 아래서 발견됐다는 이유였다. 영아원이었던 서울성로원 아기집에서 3년간 이순신으로 살다가 경기 양평의 보육원 ‘신망원’으로 옮겨졌다. 신망원 이사장은 출생신고를 할 때 “애 이름을 이순신이라고 지으면 커서 놀림 받는다”라며 ‘이가람’이라는 새 이름을 지어줬다.그곳에선 10명 가까운 사내아이가 한방을 썼다. 모르는 아이들과 두 줄로 머리를 맞대고 각자의 이불을 덮고 잤던 그날, 하지만 아침이 되니 서로의 이불이 뒤섞인 채 엉켜있던 그날. 가람의 생애 첫 기억이다.일반 가정에서 외동으로 태어난 아이가 혼자서 부모 두 명의 사랑을 옴팡 받고 자라는 동안, 가람은 매일 바뀌며 출퇴근하는 생활지도원 ‘이모’의 관심을 수많은 아이들과 나눠가져야했다. 가끔 ‘삼촌’도 있었다. 가람의 기억에 남은 삼촌은 두 명이다. 그나마도 한 명은 일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나갔다.그 시절의 생활을 결정지은 건 착한 형 세 명이 아니라, 못된 형 한두 명이었다. 기분이 좋으면 좋아서, 나쁘면 나빠서 동생들을 때렸다. 한여름엔 쓰레기장에 한 시간 동안 세워놓고 모기의 제물이 되게 만들었고, 각종 힘든 자세를 만들어 아이들을 ‘고문’시켰다. “지금 그랬다면 당장 소년원 갈 수준이었죠”라고 가람은 회고했다.가람은 형들이 때리고 괴롭힌다고 이모들에게 일렀다. 그래봐야 해결책 없는 고자질에 불과했다. 이모들이 서류 결재를 받고 전화를 받으러 사무실로 나가면 괴롭힘은 다시 시작됐다. 가족이면서도 가족이 아닌 아이들과 살기 위해선 서열 속에서 각자도생해야 했다. 어느 순간부터 형들에게 당한 괴롭힘이 가람의 손에도 익어갔다.들켜선 안 되는 치부신망원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는 한 학년에 반이 하나인 ‘미니학교’였다. 출중했던 가람의 장난기는 많은 아이를 울렸다. 사마귀 뱃속에서 뽑은 연가시, 뜨거운 물에 담가 노랗게 변한 ‘황금 여치’를 아이들 책상에 던졌다.가람이 4학년이었던 2010년 말 교무실에서 작은 신경전이 벌어졌다. 모든 교사들이 5학년 담임을 기피했다. 가람을 맡기 무서워해서다. 결국 4학년 담임교사가 “어떻게든 1년만 더 해보겠다”며 총대를 멨다.다음 해 어느 날, 가람의 담임은 복도에서 눈물을 흘렸다. “내가 너 나쁜 행동들 뜯어고치려고 했는데 더 이상은 못하겠다….” 담임은 한 마디를 남기고 등을 보였다. 잠시 뒤 흐느끼는 소리가 화장실에서 들려왔다. 복도 한가운데에 선 가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해 가람은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다. 전교생이 1000명이 넘는 큰 학교였다. 신망원에서 여기에 온 아이는 가람이 처음이었다. 전학 첫날, 교실 창밖에 아이들이 벌떼같이 몰려왔다. 책가방을 툭 쳐서 떨어뜨리고 도망가는 아이들도 있었다.하지만 가람의 ‘집’에 대해선 아무도 몰랐다. 생존본능과 흥미가 동시에 발동했다. 가람이 태어나 처음으로 ‘보육원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뗀 순간이었다.‘애들이 알면 난 먹잇감이야…’가람은 기를 쓰고 출신을 숨겼다. 소위 ‘사고 치는’ 무리들과 한 패로 어울렸다. 신망원 아이들처럼 셔틀버스를 타고 등하교하는 대신 방과 후의 자유를 갖게 된 가람이 친구들과 온 동네를 쏘다니다 보면 해가 금세 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신망원 이모들은 가람에게 전화를 했다. 그날도 가람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정선 이모’라는 글자가 떴다.“이가람, 넌 왜 맨날 이모한테 전화가 와? 부모님이 아니고?”순간 가람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 좀, 그냥 번호 저장을 이모라고 한 거야.” 얼토당토않은 거짓말이 흘러나왔다. 지난번에도 “그냥 엄마, 아빠가 바쁘다”고 횡설수설하며 둘러댔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다른 물음표를 이어 붙이지 않았다. 이듬해 신망원 동기 1명이 전학을 왔다. 가람과 친했던 동갑내기 아이가 축구부에 스카우트된 것이다. 영아원에서부터 같이 손잡고 온 가장 오래된 친구였다. 하지만 가람은 편치 않았다. 신망원에서 경의중앙선 신원역까지 가는 30분 동안 가람은 친구에게 당부했다. “우리 일단은 모른척하자. 나중에 자연스럽게 친해진 척하면 돼.”14분 뒤 전철에서 내리고 나서부터 둘은 남남처럼 걸었다. 가람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하나였다.‘얘랑 같은 출신인 거, 애들한테는 들키면 진짜 안 돼.’남들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으려 다른 사람의 약점을 먼저 잡고 다니는 가람 때문에, 신망원 직원들은 한 달에 한 번꼴로 교무실에 불려 왔다. 그런 날 이모는 집에 가는 길에 ‘돈까스클럽’을 들르곤 했다. “먹고 싶은 거 골라봐”라는 이모의 말에 왕돈가스와 토마토 스파게티를 실컷 주문했다. 재미없는 학교 수업도 일찍 끝나고, 이모랑 단둘이 귀가하는 날. 가람은 그날이 좋았다.그런 날이 아니라면 가람은 언제나 혼자서 귀가했다. 전철역을 나오면 남한강 너머 기울어가는 오후의 해가 강물에 번쩍이며 비쳤다. 동네 할아버지들을 지나쳐 고불고불한 시골길을 오르다 보면 큼직한 차를 한 대씩 마주치곤 했다. “도련님!”갑자기 가람 앞에서 차가 멈추고 문이 탁 닫힌다. 멀끔한 양복 차림의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다.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타시죠.”기다려왔던 순간이다. 내 출생의 비밀이 드디어 나타나는구나, 마침내 엄마가 나를 찾고 있구나. 저택에 도착하자 누군가가 다시 안내한다. “곧 회장님이 도착하십니다. 앞으론 이곳에서 회장님의 사업을 물려받기 위한 경영수업을 듣게 될 겁니다….”가람의 상상은 이어졌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어떤 차도 멈춰서지 않았다. 멀어져가는 엔진소리를 들으며 그는 계속 걸었다. 집에 들어가기 싫을 때마다 가람의 상상은 길어지곤 했다. 어른에 대한 신뢰가 깨지다중학교 1학년 때. 담임 교사가 어느 날 가람과 함께 다니는 아이들을 타이르기 위해 따로 불렀다.“너희에게 가람이 상황을 자세히 설명할 순 없지만, 가람이는 너희처럼 부모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그러니까 사고 치지 않게 너희가 도와줘야 해.”하지만 아이들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저희 다 알아요.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말씀해줬어요.”5학년 때면 벌써 2년 전이었다. 그 교사는 “나도 걔는 어떻게 못 해. 걔 고아원 사니까 원장님한테 직접 연락해봐”라면서 신망원 전화번호까지 친구들에게 알려줬다고 했다. 담임은 가람을 불러 이 얘기를 전했다.가람은 그날 남은 수업을 듣지 않고 복도에서 종일 울었다. 창피함도, 슬픔도 아니었다. 쭈뼛대며 다가온 아이들은 모른 척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가람의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얼마나 힘들게 애들을 속였는데, 그래서 다들 모르는 줄 알았는데…. 나만 바보였네.’엄마 없는 아이라는 걸 약점으로 잡는 건 애들이나 할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 짓을 다른 사람도 아닌, 선생님이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가람은 안에서 무언가가 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어른에 대한 신뢰였다.모든 게 드러나면서 “애미 없는 새끼”라는 폭언을 함부로 꺼내는 아이들도 늘기 시작했다. 가람에게는 모든 치부를 까발리는 폭탄 같은 말이었다. 바로 그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 그동안 발버둥 쳐 왔는데…. 두려움이 현실화된 것이다.그때부터 가람은 집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친구네 집을 돌아가며 잤다. 1학년이 끝나가던 초겨울, 친구 한 명이 자신만만하게 자고 가라며 자기 집으로 불렀다. 반지하였다. 집에 들어서자 치킨 냄새가 진동했다. 친구 부모님은 식탁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들어왔니? 너네 어차피 술 먹고 다니는 거 다 알아. 여기 앉아. 너네도 한잔해.”가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친구를 쳐다봤다. 친구는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람도 언제나 누구에게나 솔직하고 싶단 생각을 했다. 하지만 가람의 ‘집’에선 규칙을 조금만 어기면 “다른 애들이 따라 하니까 안 돼”라는 말이 귀에 못이 박혔다. ‘다른 애들’이라는 게 없는 집, 아이와 부모만 있는 ‘보통 집’을 보며 부러움이 자랐다.치킨을 다 먹은 뒤 친구의 앨범을 펼쳤다. 그 속에는 아기에서 소년으로 자란 친구, 얼굴에 조금씩 주름이 늘어나는 부모님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가람은 현관문을 바라봤다. 친구가 들어올 때마다 엄마와 아빠가 “들어왔니”라고 반기는 장면이 필름처럼 돌아갔다.가람에게도 사진은 많았다. 그 속의 가람은 늘 혼자였다. 가끔 신망원을 찾아오던 후원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이름도 가물가물했다. 이걸 가지고 누구랑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어렸을 때 얘기를 나눠줄 사람 없었다.이모와 삼촌은 이틀에 한 번씩 교대했다. 그들은 자주 그만뒀고, 자주 새 사람으로 교체됐다. 편애하는 아이도 있었다. 아이들은 다 느꼈다. 알아서 각자의 사랑을 찾아야 했다.가람이 정말 좋아했던 이모가 있었다. 잠이 오지 않을 때 다가가서 칭얼대면 잠이 들 때까지 안아줬다. 주말이면 데리고 나가서 애정을 담아 놀아줬다. 언젠가 그 이모의 손을 잡고 터널길을 걸었던 기억이 났다. 맛있는 것을 너무 많이 먹고 마셔서, 긴 터널길을 걸어가는 내내 자꾸 화장실이 가고 싶어 보챘던 것 같은 기억이 났다. 과거를 회상하고 서로 놀리며 그런 추억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그 이모는 몇 년 만에 신망원을 그만뒀다. 그때의 기억도 이모가 갖고 사라졌다. 새로 온 이모는 과거의 가람을 몰랐다. 가람을 1부터 100까지 지켜본 사람은 가람뿐이었다.“엄마인 척하지 마요”외박이 이어지자 박명희 원장이 결국 학교로 찾아갔다. 불려 나온 가람은 눈을 사납게 치켜떴다. 걱정돼서 찾아왔다는 말에 가람은 딱 한 마디를 내뱉었다.“엄마인 척하지 마요.”이상했다. 가람의 말이 박 원장에겐 “엄마가 돼 주세요…”라는 환청으로 들렸다. 2009년 원장이 되고 지금까지 지켜본 가람은 반성이란 걸 모르는 아이였다. 그랬던 아이의 말이 그날따라 다르게 들렸다. 모든 문제를 남 탓으로 돌리는 건, 스스로를 탓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어질까 봐 그런 것 아닐까. 이 녀석이 혹시 진짜 가족을 갈구하는 거였다면…. 그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봤다.“내가 네 엄마는 아니지만, 원장으로서 널 데리고 키우잖아. 너 신망원이 그렇게 싫으면 차라리 우리 집에 와서 좀 지낼래?”사나웠던 가람의 눈가가 그 순간 살짝 불그스름해졌다. 그는 자신의 판단이 맞다고 확신했다. 그날 저녁 세 딸을 모아놓고 말했다.“가람이가 요즘 많이 힘들어해서 우리 집에 와서 지내도 좋겠다고 했어. 그러면 너희들이 방을 같이 써야 하는데 괜찮겠니?”“걔가 온대? 그럼 그러자.”가람과 동갑인 큰딸이 쿨하게 답했다. 하지만 그날도 다음날도 가람은 들어오지 않았다. 아직 가람에겐 갈 수 있는 친구 집이 너무 많았다.가람은 어른을 외면하고 친구들에게 매달렸다. 자러 갈 친구 집이 마땅치 않은 밤엔 노숙을 했다. 벼를 베어내고 빈 겨울 논두렁에 볏짚을 쌓아서 불을 지피고 모여 잔 적도 있다. 저녁거리는 마트에서 훔쳤다. 공사장에 남은 대리석 같은 걸 주워다가 강다리 밑에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그 와중에도 학교를 빠지진 않았다. 점심은 먹어야 하니까.경찰서를 처음 간 건 학교폭력 가해자로 신고가 접수되면서다. 경찰관은 뒤로 깊이 기대앉아 손가락을 까딱이며 말했다. “네가 부모가 없고 하니까, 쟤가 부모가 있어서 부러워서 때렸다고 해. 상대방한테 좀 불쌍하게 여겨져야 선처를 받을 수 있어.”가람에게 부모가 없다는 사실은 그에겐 그저 귀찮은 사건을 빨리 해결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아이의 상처를 약점으로 삼지 않을 것이라는, 어른에 대해 남아있던 일말의 믿음이 다시 한번 무너졌다. ‘나는 그냥 불쌍한 존재구나.’ 그리고 경찰이 하라는 대로 했다. 가람은 오늘만 보고 사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부모 있는 게 부러워서 그랬다고 써”2013년 7월 양평도서관에서 민혁과 마주한 가람은 “부모가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라”라는 말에 벌떡 일어섰다.문득 머릿속에 지난밤 일이 스쳐 지나갔다. 그날 같이 놀던 친구는 일본 애니메이션 ‘나루토’를 좋아했다. “심심한데 나루토 표창 던지기나 따라해 보자”며 그들은 집에서 휴대용 과도를 들고 동네 공원으로 나섰다. 나무 기둥에 아무리 던져봐야 과도가 꽂힐 리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친구는 방바닥에 팽개쳐져 있던 가람의 가방에 과도를 던져 넣었다.가람은 가방에서 그 칼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리고 민혁에게 휘둘렀다. 배에 스쳤지만 옷조차 찢지 못했다. 그다음엔 팔꿈치에 스쳤다. 역시 피는 나지 않았다. 머리채를 잡고 목에 과도를 갖다 댔다. “아까 그 소리 다시 한번 해봐라.” 눈으로만 힐끔대던 사람들이 낮게 웅성댔다. 민혁이 왼손으로 오른쪽 팔꿈치를 받쳐 잡았다. 벌어진 살에서 붉은 피가 흘렀다. 가람은 칼을 떨어뜨렸다. 민혁은 가람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로 말했다. “경찰에 신고한다.”그날 가람은 처음으로 수갑을 찼다. 경찰서에서 똑같은 말을 들었다. “쟤가 부모가 있어서 부러워서 그랬다고 적어.”부모가 있는 게 부럽기만 했던 게 아니다. 부모가 없는 것이 드러날 때마다 지독하게 무시 받는 것이 지긋지긋할 뿐이었다. ‘고아원 사는 애’라는 낙인은 그 무엇으로도 덮을 수 없는 약점이었다.그때 민혁의 아버지가 경찰서에 왔다. 먼저 와있던 박 원장은 마음을 졸였다. 가람은 덤덤했다. 뺨 정도 맞지 않을까 싶었다. 민혁의 아버지는 호통을 시작했다. 그런데 방향이 예상과 반대였다.“야, 너는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어? 사람이 해야 될 말이 아닌데 왜 그딴 소리를 해!”그는 “아들이 원인제공을 한 것 같다”며 가람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어른에게 사과를 받는 것은 가람의 삶에서 극히 드문 일이었다. 심지어 칼에 베인 건 가람이 아닌 민혁이었다. 가람은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죄송하다”고 얼버무렸다. ‘혹시 내가 어른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나….’잠시 떠올랐던 생각은 이내 가라앉았다. 초등학교 5학년 담임, 진술서 작성을 강요했던 경찰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어쨌든, 이번에도 ‘부러워서’라는 진술은 해야 했다.다시 버려질 수 있다는 두려움중학교 2학년. 가람은 신망원을 나왔다. 흡연, 절도, 욕설, 교권침해, 폭력, 감정조절의 어려움…. 박 원장이 법원에 보낸 통고(소년 사건을 법원에 바로 신청하는 제도) 서류에는 가람이 저지른 행각이 빼곡히 적혔다. 보육원은 가람을 더는 감당하기 어려웠다.가람은 경기 안양시 서울소년분류심사원(미성년자들이 소년보호재판을 받기 전 머무는 시설)에서 강간범, 차량 절도범들과 열흘을 같이 지냈다. 그곳에서 10단계 보호처분 중 6호 처분(민간 시설의 감호 위탁)을 받고 전주의 법무부 관할 보호시설로 옮겨졌다.신망원에선 가람이 큰형에 속했지만, 전주에선 다시 막내였다. 형들에게 발로 걷어차여 코에는 금이 가고 이빨도 부러졌다. 가람은 밤마다 ‘태생’을 생각하다 잠들었다.‘내가 만약 보통 가정에서 멀쩡하게 태어나서 자랐으면 어땠을까….’원장인 임영숙 수녀는 그나마 기댈 수 있는 존재였다. 주말엔 아이들 밥을 손수 지었고, 아픈 아이가 생기면 직접 병원을 데리고 갔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조금씩 벗어나던 가람이 과거의 관성대로 대들고 나서도 후회라는 것을 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임 원장도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가람은 아무 종교도 믿지 않았지만 자기 전 매일 기도했다.“제가 한 행동들에 대해서 정말 반성하고 있으니까 빨리 신망원에 보내주세요. 이 순간들이 빨리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제발요.”한편 가람을 퇴소시킨 박 원장은 초조했다. 원장으로선 해야 할 조치였지만 인간적으로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가람과 같이 뿌리를 전혀 모르는 ‘무연고’ 아이들은 부모가 누구인지는 아는 아이들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생고아”라고 일컬었다. 외로움과 분노에 가득 찬 가람이 세상마저 등 돌린 생고아가 됐다고 생각할까 봐 마음이 쓰였다.반면 가람은 박 원장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가출을 일삼던 시절에도 가람은 박 원장에게 긴 카톡 메시지를 보내곤 했다. “죄송해요. 지금 제가 하는 행동들이 잘못이라는 건 알아요. 금방 고칠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가람 마음 깊은 곳에는 다시 버려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늘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랬던 자신을 박 원장이 공식적으로 내친 것이었다.그래도 박 원장은 ‘정선 이모’와 함께 간간히 전주로 찾아왔다. 그리곤 가람에게 해마다 약속했다. “1년 뒤에 데리러 올게.” 2016년 가람이 중학교를 졸업하던 날엔 다짐도 했다. “너 3년 후에 고등학교 졸업하면 같이 제주도로 여행 가자.” 허황하게 들리는 기약들 속에서 두 사람은 서서히 익숙해졌다. 가람의 ‘사고 빈도’도 점차 낮아졌다. 물론 보호관찰기간 동안 더 문제를 일으키면 다음 순서는 소년원이라는 두려움이 가장 컸다. 하지만 거칠었던 친구들이 사라진 자리를 ‘전주엄마’ 임 원장과 ‘양평엄마’ 박 원장이 채우면서 가람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고등학교 1학년 담임은 가람의 생활기록부에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라고 적었다.최초의 가로등을 찾아가다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었다. 가람은 키가 컸다. 아무리 먹어도 살도 찌지 않았다. 누구를 닮아서 이렇게 생겼는지 궁금했다. 비슷한 처지의 주변 친구들 중에서는 경찰서에서 부모의 연락처를 찾은 사람도 있다고 했다.고등학교 1학년이 되자 가람은 세 살까지 살았던 영아원에 연락했다. 주택가 가로등 아래에서 발견됐다는 내용, 신고자의 이름과 전화번호, 그리고 ‘서울 중랑구 신내동 XXX’라는 주소를 받아적어 찾아갔다. 식당과 주차장, 낡은 연립빌라 사이에서 가람은 두리번거렸다. 가로등이 많았지만 여기다 싶은 지점은 없었다.지구대와 경찰서도 찾아갔다. DNA를 채취해 실종아동찾기 데이터베이스에 올려두겠다는 얘기, 만약 그걸로 친모를 찾더라도 친모가 동의해야만 연락할 수 있다는 얘기뿐이었다. DNA 채취는 이미 오래전 신망원에서도 했던 것이었다. 다른 자료는 없느냐고 묻자 경찰은 말했다. “그때만 해도 옛날이라 다 수기로 적어가지고 폐기됐을 건데….“친부모를 찾게 된다면 무엇부터 하려고 했느냐고 묻자, 가람은 “싸대기 한 대씩 때려주고 끝내고 싶어요. 여자 한 대, 남자 한 대요”라고 말했다. 아마 빚이 많을 테니 알고 지내고 싶진 않았다. 다만 단 한 가지, 친부모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긴 했다. “대체 어떤 상황이었기에 저를 낳아서 버렸어야 했나요.” 더 이상 직접 물어볼 수 없어진 질문이었다.남은 건 신고자 연락처였다. 망설이다 전화를 걸었다. 나이 든 남자가 받았다. 신고한 것은 자기의 딸인데, 당시 일로 너무 충격을 받았으니 더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그 딸은 가람의 가장 어릴 적 모습을 본, 유일한 인물이었다. 가람은 1년에 두세 번씩 모두 다른 시간대에 전화를 걸었다. 매번 그 남자가 받았다.대학교까지 마친 지난해, 전주를 떠나려 이삿짐을 정리하던 가람은 그는 한동안 잊고 지냈던 메모지를 발견했다. 오랜만에 다시 전화번호를 눌렀다. 이번에도 통화가 안 되면 그만할 참이었다. 수화기 저편에서 처음으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옛날 기억을 하나씩 더듬어 설명해줬다.“퇴근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밖에서 울음소리가 들렸어요. 나가 보니까 아기가 있더라고요. 깜짝 놀라서 경찰서에 데려다줬는데, 주변에 어떤 할머니가 서성대고 있었어요. 그 할머니께서 경찰서까지 따라오셨는데 아무 말씀도 없으셨어요. 지금은 어떻게 지내요? 무엇을 하면서 살고 있어요?”“아, 저, 이제 대학 막 졸업했고요, 취업해서 이사 갈 예정이고….” 갑작스런 질문에 가람이 얼떨결에 답하자 그는 말했다. “잘 커 줘서 고맙네요.”잠시 말을 잇기 어려웠지만 가람은 용기를 냈다. “다음에 한 번 올라가면 뵙고 싶어요”라는 말에 그는 “언제든 괜찮으니, 연락 한번 하고 와요”라고 답했다.가람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도어락에 지문을 얹고 ‘가족’이 되었다올해 다시 찾아온 충무공 탄신일 4월 28일. 가람과 여자친구, ‘엄마’와 ‘아빠’가 생일맞이 식사를 하러 모였다. 그 자리에서 박 원장이 입을 뗐다.“딸들한테 네 입양 동의 받았어.”옆자리 여자친구를 의식한 가람은 그 순간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간신히 눌렀다. 가람은 그때 박 원장 부부를 엄마아빠로 부르고 수시로 집에도 드나들었다. 하지만 서류상 가족이 아닌 상황에서 가람은 늘 눈치를 봤다. 친척 경조사 때는 자신이 박 원장을 ‘엄마’라고 부르는 이유를 일일이 설명해야 했다. 박 원장 부부는 드문드문 ‘성인 입양’ 얘기를 꺼냈지만, 가람은 별 희망을 품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커다란 생일선물을 받은 것이다.입양 절차를 마치고 얼마 후 박 원장은 집 도어락을 최신형으로 교체했다. 이가람에서 ‘박가람’으로 성도 바꾼 그는 가족의 지문을 등록하는 기계에 자신의 엄지손가락도 얹었다. 이젠 진짜 가족이 됐다. 믿을 수 있고 흔들리지도 변하지도 않는 어딘가에 속해있고 싶다는 안정감. 가람이 평생에 걸쳐 원해온 걸 얻은 순간이었다.성인이 된 가람에게 ‘부모 없는 놈’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대신 동정과 의심이라는 상반된 시선이 따라붙었다. 일터의 동료는 “너 자취하잖아”라는 핑계로 반찬이며 선물을 자꾸 챙겨줬다. 그는 자취하는 다른 직원들에겐 그런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 대학 때 일했던 카페 사장도 가람이 보육원 출신이라는 걸 안 뒤 30만 원이 든 봉투를 챙겨주며 속삭였다. “다른 애들한텐 휴가비로 5만원씩만 줬으니까 비밀로 해.”아무 일도 없을 땐 연민을 샀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1순위 용의자가 됐다. 술집에서 일할 때 사장은 “계산이 안 맞는다”며 전 직원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첫 번째로 가람을 호명했다. 이런 누명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가람은 아득바득 완벽을 추구하며 살았다.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를 동정하고 의심하게 되기도 했다.현재 가람은 내년을 목표로 미국 이민을 준비하고 있다. 대학에서 전공한 호텔조리학과 식당에서 직접 일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요식업 분야의 사업을 배워볼 생각이다. 그의 휴대전화 잠금화면은 흰 바탕에 고딕체로 적힌 영어단어들로 빽빽했다.“제가 원래 낯선 곳에 새로 적응하는 것을 좋아해요. 재미있잖아요.”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걸 안다. 아마도 한국에 다시 돌아올 생각은 들지 않을 것 같다고 가람은 말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휘둘렸던 과거를 모두 갈아엎는 새출발을 그는 갈망하고 있었다. 사람은 무서워하지 않지만 귀신은 무서워했던 아이, 가출을 일삼다가도 밤늦게 귀가할 땐 깜깜한 시골길이 무서워 한 가로등에서 ‘흐읍’ 심호흡한 뒤 다음 가로등까지 숨을 참고 달려야 했던 아이, 언제나 온전한 사랑을 원했던 아이가 세상에 대한 믿음을 잃은 것은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가람은 신망원에서 배우 강동원을 만난 기억을 떠올렸다. 베이비박스(부모가 아이를 두고 갈 수 있도록 만든 상자)를 다룬 영화 ‘브로커’에서 그는 심성이 따뜻한 보육원 출신 청년을 연기했다. 연기를 앞두고 가람에게 조언을 구하러 온 강동원은 “내가 이번 영화에서 연기할 때 어떤 마음으로 임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가람은 잠시 고민하다가 짧게 답했다.“그냥, 이 아이들이 마냥 사회의 악(惡)으로 비치지만 않았으면 좋겠어요.”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미아: 품을 잃은 아이들’은 저널리즘의 가치와 디지털 기술을 융합해 차별화한 보도를 지향합니다. ‘히어로콘텐츠’(original.donga.com)에서 디지털 플랫폼에 특화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히어로콘텐츠팀▽팀장: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취재: 조유라 이승우 조민기 기자▽프로젝트 기획: 위은지 기자 ▽사진: 홍진환 기자▽편집: 하승희, 양충현 기자 ▽그래픽: 김수진 기자▽인터랙티브 개발: 임상아 임희래 뉴스룸 디벨로퍼▽인터랙티브 디자인: 여하은 차설 인턴스마트폰 카메라로 QR코드를 찍으면 품 밖으로 내몰렸던 아이들의 이야기를 디지털 콘텐츠로 구현한 ‘그 아이들이 버려진 곳’()과 ‘사운드트랙: 품을 잃은 아이들’()로 각각 연결됩니다.양평=홍정수 기자 hong@donga.com조유라 기자 jyr0101@donga.com조민기 기자 minki@donga.com이승우 기자 suwoong2@donga.com}
아이가 보배인 저출산 시대에도 ‘품을 잃은 아이들’이 있다. 친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유기된 아이들. 그리고 부모가 방임한 아이들까지.올해 출생신고를 의무화하되 ‘익명 출산’을 허용하는 두 법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우리 주위엔 여전히 미아처럼 품을 찾아 떠도는 아이들이 있다.그동안 이 아이들은 뭘 감내하며 살아왔을까.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베이비박스’(부모가 아이를 두고 가도록 마련된 상자)를 500시간 동안 관찰하고, 품을 찾아 떠도는 0~29세 아동·청년 47명을 만나 그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말한다. “미안해 아가야.”미아 - 품을 잃은 아이들[2] 차가웠던 부모의 품프롤로그봄기운 완연한 햇살 속에서 김정선은 초조하게 아이를 기다렸다. ‘울산광역시 가정위탁지원센터’라고 적힌 간판이 걸린 건물 1층의 카페였다. 남편 박상섭이 계속 말을 건넸지만, 정선은 손끝만 매만졌다.‘내가 잘 결정한 걸까….’2주 전 정선은 센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부모의 방임으로 갈 곳이 없어진 아이를 어른이 될 때까지 키워 달라는 부탁이었다. 이미 2017년부터 아이 한 명을 위탁받아 키우고 있던 ‘경험자’ 정선에게 다시 요청이 들어온 것이다.정선이 ‘가정위탁’이란 낯선 제도를 알게 된 것은 외동아들의 군 입대 후 텅 빈 거실에서 본 ‘인간극장’에서였다. 친부모 대신 세 아이를 키우고 있는 중년 부부의 눈빛엔 희열이 가득했다. 방송 말미 ‘위탁부모를 모집한다’는 자막이 정선의 마음을 홀렸고, 그렇게 만난 아이가 둘째 아들 다정(가명)이다.센터 직원에게 “생각 좀 해볼게요” 하며 일단 전화기를 내려놓고, 정선은 한동안 깊은 생각에 빠졌다.“엄마, 우리가 하면 안 돼? 내가 많이 도와줄 테니까 우리가 데려오자.”아파본 사람이 남의 아픔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다정이 덕분에 다시 용기를 냈다. 하지만 이번 아이는 상황이 녹록지 않아 보였다. 휴대전화 벨소리에 정선은 현실로 돌아왔다.“아이 왔습니다! 센터로 올라오시면 됩니다.”2022년 4월 8일 오후 2시 30분. 정선은 외할아버지 품에 안겨 있는 혁재(가명)를 만났다. 아이는 눈썹을 갈매기 날개 모양으로 찌푸렸다. 새로 사 입힌 체육복은 한참 커서 팔다리 소매가 두어 번 접혀 있었다. 18개월이라고 했는데 갓 100일 된 아이 같았다.외할아버지는 눈물을 훔치며 혁재를 건넸다. 빼빼 마른 아이는 신생아처럼 가벼웠다. 정선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팔은 무게추를 단 듯 쑥 내려갔다. 묵직한 책임감이 두 팔을 짓눌렀다. 정선과 혁재는 그렇게 가족이 됐다. 혁재가 죽음의 문턱에서 구조된 지 한 달 만이었다.#1. 불완전한 만남, 준비없던 생명그해 3월 3일. 혁재는 아사(餓死) 직전 발견됐다.혁재 엄마 김유민(가명)은 당시 스물 한 살이었다. 김유민의 부모는 불화가 심했고, 어린 김유민은 할머니에게 떠넘겨졌다. 학교에서는 왕따를 당했다. 중학교 3학년, 졸업도 포기하고 자퇴하겠다는데도 김유민을 붙잡는 교사는 없었다.김유민은 못 받은 사랑을 남자들에게 갈구했다. 18세 때 만난 남자와 첫 딸 재은(가명)을 낳고 성인이 되자마자 혼인신고를 했다. 훗날 김유민을 변호한 김태엽 변호사는 “자기한테 관심을 가져주고 본인을 지켜줄 수 있다고 얘기해 주는 남성들에게 너무너무 심하게 의존했다”고 했다.첫 결혼은 오래가지 못했다. 경제능력이 없는 남편에게 실망한 김유민은 이혼도 하지 않은 채 집을 나왔다. PC방을 전전하던 김유민 앞에 나타난 건 일곱 살 연상 임훈석(가명)이었다. 그는 부모가 이혼한 뒤 보육원에서 자랐다. 성인이 되면서 보육원을 나왔고, 자립정착금을 받아 독립했다. 김유민은 딸을 데리고 그와 동거를 시작했다.동거 7개월 만인 2020년 9월 29일 혁재가 태어났다. 하지만 아이가 생겼다고 달라진 건 없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PC방을 전전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했다.#2. 받지 못 한 사랑, 줄 수 없던 사랑재은이는 13개월이었던 2020년 9월부터 울산 남구의 한 어린이집을 다녔다. 교사들의 말과 놀이에 반응이 없고 무기력했다. 한겨울에도 맨발에 내복만 입었다. 식사 시간마다 재은이는 누가 뺏어갈세라 허겁지겁 음식을 먹었다. 교사들은 이후 검찰에 “아이가 항상 계절에 맞지 않는 옷차림을 했다”고 진술했고, 법원은 부부가 이때부터 재은이와 혁재를 제대로 양육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다.방임이 알려질까 겁난 김유민은 2021년 6월 30일부터 딸을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0~6세 아동을 가정에서 돌보는 부모에게 지급되는 양육수당을 받았다. 울산 남구청은 재은이 앞으로 총 270만 원, 혁재 앞으로 330만 원을 지급했다. 아동수당 10만 원도 매달 입금됐다. 만 8세 미만 대한민국 국적 아동 모두가 받는 돈이다. 32개월 동안 재은이 앞으로 320만 원, 18개월 동안 혁재 앞으로 180만 원을 받았다. 양육·아동수당은 부부의 식비와 PC방비, 담뱃값, 강아지 두 마리 사료비와 미용비로 지출됐다.2021년 10월부터 아이들은 더 방치됐다. 부부는 ‘관계 악화’와 ‘육아 스트레스’를 핑계로 각각 자주 외출했다. 재은이는 하루에 한 끼를 가까스로 먹었다. 라면 국물에 만 밥이나 아빠가 남긴 반찬이 대부분이었다. 혁재는 아주 가끔 분유만 먹었다.부부가 아이들을 전혀 돌보지 않아도 수당은 문제없이 지급됐다. 현행 아동수당법은 아동수당을 받는 아동이 제대로 부모의 양육을 받고 있는지 관리·감독하는 내용이 빠져 있다. 지자체는 재은이와 혁재의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다.2022년 1월 29일 네 사람은 인근 다가구 원룸으로 이사했다. 이때부터 아이들의 공간은 매트리스 한 칸이 전부가 됐다. 부부는 아이들이 집을 어지럽힌다며 매트리스 주변을 박스 4개로 막았다. 재은이는 매트리스를 탈출해 애완견의 사료와 배변을 집어먹었다. 허기진 탓에 울지도 못했다. 이웃들은 이 집에 두 아이가 산다는 것을 까맣게 몰랐다.이사 34일째. 외출했다 돌아온 임훈석은 오후 7시 2분경 냉장고 앞에 쓰러져 있는 재은이를 발견했다. 허기에 시달리다 박스들을 밀어내고 가까스로 매트리스를 탈출했지만 끝내 냉장고 문을 열지 못한 채 쓰러졌고, 오후 8시 5분 31개월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영양실조와 뇌출혈. 부검 결과 위 안에는 당근 1조각만 있었고, 사망 당시 키는 78.3cm, 몸무게는 6.5㎏였다. 또래 여아의 표준 체중의 절반에 불과했다.#3. 삶을 거둔 누나, 살아남은 동생누나와 함께 이 모든 것을 겪은 혁재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경찰이 출동했을 때 매트리스에서 발견된 혁재는 너무 마른 탓에 피부가 쪼그라들어 마디마디 뼈의 형태가 보일 정도였다. 사타구니는 빨갛게 헐었고 기저귀는 언제 갈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이의 몸무게는 5kg였는데, 또래 평균 몸무게는 10.7kg이었다.경찰은 급히 아이를 병원으로 옮겼다. 혁재는 말을 하지도, 음식을 씹지도, 앉아 있지도 못했다. 주사를 7차례나 맞는 동안에도 울지 못했다. 누군가가 눈을 맞추거나 따뜻하게 안아준 적도 없는 혁재는 모든 감각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한 달간 몸무게가 회복돼 7.8㎏까지 늘어났다. 그러나 17개월간 멈췄던 성장이 쉽게 재개되진 않았다. 보통 아이들은 생후 4~6개월부터 이유식을 먹지만, 부모가 혁재에게 준 음식은 분유뿐이다. 혁재가 김유민, 임훈석과 함께 살던 2021년 2월 의사가 “아이 몸무게가 잘 늘지 않으니 큰 병원에 가 보라”며 진료의뢰서를 써줬지만, 부부는 이를 무시했다. 그해 7월 이후로는 병원도 가지 않았다.혁재는 말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래서 혁재는 말 대신 비명으로 의사소통을 했다. 엄마, 아빠 등 여러 단어를 구사할 나이였지만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오직 “으아아아” 뿐이었다. 이름을 부르고 말을 걸어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두 사람은 혁재에게 걸음마도 연습시키지 않았다. 다리와 허리에 힘이 없는 혁재는 어딘가에 늘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기는 대신 엉덩이로 다리를 밀면서 다녔다. 또래 아이들이 뒤집기에 성공하고, 첫걸음을 떼고, 처음으로 “엄마”를 불러 기념했을 순간들이 혁재에겐 없었다. 김유민과 임훈석은 혁재에게 밥만 주지 않은 게 아니라 미래도 앗아갔다.#4. 쏟아부은 애정, 두발로 선 아이18개월의 삶에서 혁재가 가졌던 것은 보행기 한 대와 분유병, 내복 한 벌, 포대기 하나가 전부였다. 하지만 정선은 혁재와 가족이 된 첫날, 아이의 짐을 정리하며 알 수 없는 막막함을 느꼈다. 몇 개의 짐조차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혁재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울기 시작했다. 밤이 되면 울음은 더 커졌다. 어두운 방에 평생 갇혀 살았던 아이는 유난히 어둠을 싫어했다. 정선은 소파에 기대 혁재를 안고 동이 틀 때까지 달래고 달랬다. 팔과 팔목이 남아나지 않았다. 아랫집 사람들도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것 같았다. 정선도 밤마다 혁재를 따라 울고 싶었다. 하지만 속으로 삼켰다.‘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이 정도는 견디자….’그때 혁재의 울음소리 사이로 조용히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정이었다.“엄마 미안해, 우리 엄마 불쌍해 죽겠어. 내가 괜히 혁재 데려오자고 해서 엄마가 고생하는 것 같아. 나 때문에….”정선은 벌떡 일어나 다정이 방으로 달려갔다. 다정은 엉엉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정선은 “엄마, 미안해”를 반복하는 다정이를 꼭 껴안았다. “괜찮다, 엄마는 괜찮아. 고마워 다정아.” 정선도 함께 울었다.혁재의 상태는 예상보다 심각했다. 구조 직후부터 혁재를 치료했던 울산대병원 의료진은 퇴원 전, 아직 혁재를 만나보지도 못한 정선에게 전화를 걸어 갖은 신신당부를 전했다. “애가 소리를 잘 못 듣는 것 같으니까 이비인후과 가봐야 하고요. 아까 안과랑 재활의학과도 말씀드렸죠? 다 하면 한 달에 6번 정도 되실 거예요.” “네네.” “아직 소화도 안 되니까 땅콩, 견과류 이런 거 절대 주시면 안됩니다.” “네네네.”실제 만나보니 안 아픈 곳이 없는 아이였다. 울산대병원엔 주 2회 꼬박꼬박 발도장을 찍었다. 진작 마쳤어야 했던 예방접종도 1주일에 3번씩 맞았다. 지난해 추석에도 혁재를 안고 병원을 찾아다녔다. 천식 발작으로 제대로 호흡하지 못하며 밤새도록 설사를 해서다.집에서 해내야 할 일들은 더 큰 숙제였다. 의료진은 “당장 삼키질 못해도 주르륵 흐르는 미음이 아니라 현미밥처럼 ‘꼬들꼬들’한 음식을 자꾸 씹어야 한다”며 ‘씹는 연습’을 시켜야 한다고 당부했다.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정선은 처음으로 이유식이란 것을 만들었다. 친아들에겐 집밥조차 제대로 해준 적이 없었다. 장사를 하느라 늘 바빠 아들 손에 용돈을 쥐어주며 “밖에서 사 먹어라”고 했던 그였다.정선이 애쓰는 동안 혁재는 억눌린 감정을 표출했다. 소파 밑, TV장 밑엔 혁재가 던진 포크들이 굴러다녔다. 말로 표현을 하지 못할 뿐 화가 많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던지고 사람을 깨물었다. 정선은 혁재가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한 탓에 감정 표현을 하는 법을 모르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바로잡아야 할 건 바로 잡는 게 ‘위탁 엄마’가 할 일이었다.집에 온 지 두 달 만인 6월 혁재는 처음으로 어린이집에 갔다. 덩치는 여전히 친구들의 반도 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은 의자에 앉으면 바닥에 발이 닿는데, 혁재 혼자만 허공에 둥둥 발이 떠 있었다.“제대로 걷지도 몬하고 아직도 궁디이만 끌고 댕기는데, 아한테 장애가 있는 거 아이가?”주위 사람들은 속도 없이 보챘다. ‘장애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열심히 살면 되지. 내 아인데 기꺼이 받아들일 거야.’ 정선은 속으로만 답했다.두 달 뒤 혁재는 자기 힘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똑바로 걷지는 못했다. 뒤뚱거리는 아이를 붙잡고 정선은 주문을 외듯 말했다. “괜찮다. 우리 아들은 잘 걸을 거야. 아직 서툴고 힘이 없어서 그래.” 매일 밤 혁재의 다리를 몇 시간이고 주무르고, 굽혔다 폈다 하면서 빌었다. 혁재가 신나게 뛰어다닐 수 있도록, 다리에 힘이 생기게 해 달라고.#5. 순간의 선택, 평생의 행복“어머니, 이것 좀 보세요!”혁재가 어린이집에 간 지 두 달 만인 8월. 교사가 정선에게 동영상을 보여줬다. 혁재가 물병에 달린 빨대로 물을 마시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아이의 모습에 정선은 왈칵 눈물이 터졌다.분유 하나만으로 생명을 지탱해온 혁재. 살기 위해 젖병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 텅 빈 젖병을 뜯어대느라 젖꼭지 부분이 며칠 만에 해지곤 했다. 그랬던 혁재가 처음으로 다른 도구를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는데 필요한 행위를 스스로 해냈다는 대견함, 앞으로 찾아올 어려움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거란 안도감에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정선은 혁재와 함께한 모든 순간 중에서 그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어머니, 진짜 제가 잘 키워볼게요. 혁재가 저한테 온 것도 인연일 텐데 정말 최선을 다해서 정성껏 키울게요.” 교사와 정선은 서로를 붙잡고 엉엉 울었다.혁재는 이제 건강하게 뛰어다니는 네 살 어린이가 됐다. 정선은 매일 오후 3시 혁재를 데리러 어린이집에 간다. “혁재야, 엄마 왔다!” 정선이 문 앞에서 큰소리로 외치면 혁재가 튼튼한 두 다리로 전속력으로 달려와 안긴다. 뜀박질하는 걸음마다 바가지 모양 머리칼이 휘날리는 게 그렇게 이뻐 보일 수가 없다. 고작 6시간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며칠은 떨어졌다 만난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꼭 껴안는다.혁재는 물김치와 나박김치를 좋아하는 ‘한식파’다. 죽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던 아이가 소고기 국물이 들어간 이유식을 시작으로 진밥을 거쳐 된밥까지 섭렵했다. 과거를 보상받으려는 듯 식사량도 어마어마하게 늘었다. 세 끼는 기본, 매일 간식으로 소시지 2개와 요플레 2개, 빵 2개를 먹어야 배가 부르다.저녁은 꼭 상섭(아빠) 옆에 달라붙어 먹는다. 아빠가 먹는 음식도 다 좋아한다. 정선은 혁재의 배를 신기하게 바라보며 살살 문지른다. 어른 손바닥 2개로 가려지는 작은 배에 그 많은 음식이 들어가는 게 신기해서다. 볼록 나와 있던 배는 자고 일어나면 쑥 들어갔다. 혁재의 몸무게는 2년 반 만에 세 배 넘게 ‘폭풍성장’ 중이다.#에필로그김유민과 임훈석은 올해 4월 27일 대법원에서 각각 30년형을 받고 복역 중이다. 김유민은 재은이와의 기억을 곱씹으며 일주일에 두 번씩 반성문을 썼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김유민은 반성문에 “사랑을 못 받았기 때문에 주는 법을 잘 몰랐던 것 같다”고 적었다. 김유민의 수감생활을 지켜본 교도소 직원들은 “옥중에서 낳은 셋째를 홀로 키우며 최선을 다하고 있다. (범행을 저지른 데에는) 유년 시절 보호를 못 받았던 영향이 큰 것 같다”는 탄원서를 법원에 제출하기도 했다.김유민의 어머니는 자신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며 자책했다. 김유민이 아이였을 때 직접 키웠더라면, 사랑을 더 많이 줬더라면 딸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란 후회가 그를 뒤덮었다. 그는 “아이(재은이)에게 미안하고 죄스럽다”고 한탄했다.정선은 김유민이 안타까울 뿐 다른 감정은 없다고 했다. “부족한 어미지만…. 그 어린 아이(김유민)가 뭘 알았겠어요. 가정이 안 좋으니까 집을 나와서 살았고, 열심히 사는 법을 못 배웠을 거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을 거고…. 세월이 흐르면 자기 잘못을 뉘우치겠지요.” 정선은 “혁재는 지금 아주 건강하다고, 엉덩이에 살도 흐르고 너무 좋다고 얘기해 주고 싶다”고 덧붙였다.매일 저녁 정선이 음식물쓰레기를 버리려 하면 혁재가 베란다로 뛰어간다. 엄마가 “아이고, 아들 괜찮아”라고 손사래를 쳐도 혁재는 고사리손으로 쓰레기통을 들고나온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가 화장실에 갈 때 까치발을 들어 전등을 켜는 것도 혁재의 몫이다. “아이가 커서 우리와 주고받은 행복이나 사랑을 사회에 돌려줄 거라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죠.”사랑을 받기만 원할 줄 알았는데, 언제부턴가 우리가 혁재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자식처럼 키웠는데… 친권 없어 고개숙이는 위탁가정김정선 씨와 혁재(가명)는 ‘가족’이지만 법적으로는 ‘남남’이다. 두 사람이 ‘가정위탁’이라는 제도로 만났기 때문이다.가정위탁은 아동 학대나 경제적 사정, 이혼 등으로 친부모가 아이를 직접 키울 수 없는 경우 다른 가정이 돌보도록 하는 제도다. 원칙적으로는 친부모의 상황이 나아지면 원래 가족으로 돌아가는 게 목적이다. 친부모의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만 18세가 될 때까지 위탁 가정에서 지낼 수 있다. 가정의 돌봄이 절실한 아동과, 아이를 돌볼 수는 있지만 입양까진 어려운 가정을 맞춤형으로 연결하는 제도인 셈이다.위탁 부모가 되려면 소득 등 조건을 갖춰야 하고, ‘예비 위탁부모 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위탁 아동은 기초생활수급자로 선정돼 월 30만~50만 원의 양육보조금을 받는다. 위탁 부모 경력 3년 이상 등 일정 조건을 충족하면 학대를 당한 아이나 장애가 있는 아이, 36개월 미만 아이도 받을 수 있다. 이 경우 월 100만 원을 추가로 더 지원한다.가정위탁으로 맺어진 부모와 아동은 주민등록상 ‘동거인’에 불과하다. 입양이 이뤄지면 친권을 양부모가 갖지만, 가정위탁은 친부모에게 친권이 남아 있다. 이 때문에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수급비 영수증을 일일이 증명하도록 하는 등 위탁 부모를 더 까다롭게 감시한다.친권이 없는 위탁 부모는 어려움이 많다. 36개월 아랑(가명)이를 7개월 때부터 위탁받아 키우고 있는 이숙진 씨(43)는 아버지 칠순을 기념해 해외여행을 계획했다. 그러나 친부모의 동의 없이는 영문가족관계증명서가 발급이 안 돼 아랑이와 남편은 국내에 남았다. 친부모는 연락이 두절된 상태다. 이 씨는 “휴대전화 개통, 보험 가입도 불가능하다. 학교 갈 날이 다가올수록 답답한 마음이 커져간다”고 했다.김민정 세이브더칠드런 부산가정위탁지원센터장은 “위탁 부모들이 아이를 기르는 동안이라도 병원 입원이나 수술 등 친권이 필요한 상황에서 친권을 대리 행사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미아: 품을 잃은 아이들’은 저널리즘의 가치와 디지털 기술을 융합해 차별화한 보도를 지향합니다. ‘히어로콘텐츠’(original.donga.com)에서 디지털 플랫폼에 특화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히어로콘텐츠팀▽팀장: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취재: 조유라 이승우 조민기 기자▽프로젝트 기획: 위은지 기자 ▽사진: 홍진환 기자▽편집: 하승희, 양충현 기자 ▽그래픽: 김수진 기자▽인터랙티브 개발: 임상아 임희래 뉴스룸 디벨로퍼▽인터랙티브 디자인: 여하은 차설 인턴스마트폰 카메라로 QR코드를 찍으면 따뜻한 요람 대신 차디찬 바닥에 놓였던 아이들의 이야기를 디지털 스토리텔링 기사로 구현한 ‘그 아이들이 버려진 곳’()으로 연결됩니다.울산·부산=조유라 기자 jyr0101@donga.com울산·부산=조민기 기자 minki@donga.com홍정수 기자 hong@donga.com이승우 기자 suwoong2@donga.com}
아이가 보배인 저출산 시대에도 ‘품을 잃은 아이들’이 있다. 친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유기된 아이들. 그리고 부모가 방임한 아이들까지.올해 출생신고를 의무화하되 ‘익명 출산’을 허용하는 두 법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우리 주위엔 여전히 미아처럼 품을 찾아 떠도는 아이들이 있다.그동안 이 아이들은 뭘 감내하며 살아왔을까.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베이비박스’(부모가 아이를 두고 가도록 마련된 상자)를 500시간 동안 관찰하고, 품을 찾아 떠도는 0~29세 아동·청년 47명을 만나 그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말한다. “미안해 아가야.”미아 - 품을 잃은 아이들[1] 베이비박스에 놓인 유준이눈을 뜬 지 사흘. 이유준(가명)은 세 번째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산부인과 분만실의 바퀴 달린 이동식 침대, 산동네 언덕배기 ‘베이비박스’의 나무 침대를 거쳐 아동일시보호소의 침대에 지금 막 도착했다. 중간에 잠시 들렀던 병원 검진실과 수유실, 상담실의 침대까지 포함하면 사흘간 옮겨 다닌 침대는 6개나 된다.유준이가 거쳐 간 품은 이보다 훨씬 많았다.유준이를 가장 먼저 품었다가 가장 먼저 떠난 사람은 엄마다. 9월 2일 오전 11시 22분 엄마 배 속을 나온 유준이는 병원에서 두 밤을 보냈다. 소나기가 남긴 축축한 습기를 맡으며 퇴원한 아이가 향한 곳은 엄마의 집이 아니었다.차로 40분을 달려 서울 관악구 신림동 베이비박스에 도착했다. 작은 십자가가 솟은 붉은 건물 외벽에 ‘재단법인 주사랑공동체 위기영아긴급보호센터’라고 적힌 간판이 보였다. 아이를 안은 엄마가 반층 계단을 올라 현관에 들어서자 플라스틱 차양 밑으로 푸른빛이 비쳤다. 하늘색 앞치마를 입은 보육사가 나왔다.보육사는 유준이를 건네받아 ‘베이비룸’으로 들어갔고, 엄마는 현관 아래 ‘상담실’로 향했다. 이 순간부터 아이와 엄마는 아무 관계가 없는 남남이다. 엄마는 아이에게 남기는 편지 맨 윗줄에 ‘이유준. 2023년 9월 2일’이라고 적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아이는 밤새 울었다. 목이 터져라 울음을 토해내는 3.5㎏ 아이를 야간 보육사와 자원봉사자들이 번갈아 달랬다. 공갈젖꼭지를 물려도 아이는 계속 뱉어냈다.“그래도 좀 있으면, 내일 아침이면 나가니까….”보육사는 아이에게 공갈젖꼭지를 다시 물렸다. 부모가 있지만 없는, 출생신고도 하지 못한 유기아동 유준이 인생의 여정은 이렇게 출발했다.유준이가 겪은, ‘인수인계’“주사랑공동체예요. 아이가 한 명 들어왔어요.”날이 밝았다. 전화를 받은 관악경찰서 난우파출소 경찰관이 베이비박스를 방문했다. 2009년 말 만들어진 베이비박스는 법적 근거가 있는 아동보호시설이 아니라 비인가 시설이다. 엄마가 아이를 두고 간 ‘영아 유기’ 범죄가 벌어졌다는 ‘신고 전화’는 그렇게 차분했다.폐쇄회로(CC)TV 8대로 둘러싸인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무턱대고 버리는 부모는 이제 거의 없다. 24시간 상주하는 직원과 상담한 뒤 아이를 두고 떠나는 부모들이 영아 유기 범죄자인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비교적 안전한 곳에 아이를 맡긴 것인지를 놓고 지금까지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경찰과 서울시, 정부 등 관계기관은 아이를 버린 엄마와 아이를 거둔 주 사랑공동체를 묵인했고, 2000명이 넘는 아이가 이곳을 거쳐 갔다.유준이를 만나러 출동한 경찰관 역시 차분했다. 그는 “아이를 버린 엄마가 누구냐”고 캐묻지도, CCTV를 보여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익숙한 일인 듯 아이의 이름, 생년월일, 예방접종 여부만 물으며 몇 줄의 진술을 받았을 뿐이다. 그는 아이 사진을 찍고, 아이 입에 면봉을 넣어 DNA(유전자)를 채취하고는 파출소로 복귀해 영아유기발견통보서를 작성했다.2시간 후. 베이비박스 건물을 촬영하는 CCTV 화면에 승합차가 나타났다. 관악구청에서 아이를 데리러 나온 아동보호전담요원들이었다.“분유는 9시에 35밀리리터 정도 먹었어요. 애가 혀가 조금 말려서 분유를 잘 못 빨아요.”유준이를 겉싸개로 감싸 품에 안은 보육사가 밤새 파악한 주의사항을 전달했다. 아이의 이삿짐은 엄마가 입혔던 옷과 분유가 담긴 종이가방, 아직 포장을 뜯지 않은 수유패드가 전부였다. 승합차에 이삿짐을 옮기는데 5분이면 충분했다. 듬직한 체격의 아동보호전담요원 박경태 씨가 아이를 넘겨 들곤 익숙하게 받쳐 안았다. 이들은 서초구 시립어린이병원을 먼저 들렀다. 박 씨가 이 일을 시작한 지 3년이 넘었는데도 건강검진을 받으러 올 땐 마음이 늘 불편하다. 보통의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진 혈액검사라는 걸 받을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친부모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아이는 신생아라도 혈액검사를 받아야 했다.생후 사흘 된 유준이는 혈관이 잘 잡히지 않았다. 의료진은 성인 손가락만 한 팔뚝을 붙잡고 한참을 씨름하다가 결국 머리에서 피를 뽑기로 했다. 아이는 분유를 게워가며 울고 또 울었다. 채혈은 30분이나 걸렸다.간신히 검진을 마친 뒤 한적한 길을 20분 달려 강남구 수서동의 한 벽돌 건물에 도착했다. 1998년 세워진 이곳은 서울에 유기된 아동들이 모두 거치는 일시보호시설, ‘서울특별시 아동복지센터(센터)’였다.1층 상담실에 도착한 박 씨는 각종 서류와 물품을 넘기고, 아동신병인수인계서에 서명한 뒤 텅 빈 유아차를 승합차에 싣고 떠났다. 센터 직원들은 유준이를 2층 신생아방 침대로 옮겼다. 보육사가 기저귀를 열어보는 동안 유준이가 모빌 아래서 팔다리를 버둥거렸다.“편하게 해줄게요. 다 됐어요~”새 배냇저고리와 속싸개가 몸을 덮자 비로소 안정을 되찾은 아이는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유준이는 몰랐다. 한 주 후 이사를 또 해야 한다는 것을.생후 열하루째 되던 날. 센터 앞에 베이지색 차량이 멈춰 섰다. 빨간 셔츠의 여성이 운전석에서 내려 센터 출입문을 열었다. 노원구의 아동양육시설‘성모자애드림힐’(성모자애)의 김윤현 양육팀장이었다. 때맞춰 센터 직원도 유준이를 안고 상담실에 등장했다.“오구 오구 이뻐라. 세상에, 세상에나.”5명이 동시에 탄성을 터뜨렸다. 놀란 유준이가 울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돌본지 20년 차인‘베테랑’ 김 팀장은 스마트폰을 유준이의 얼굴 앞으로 가져가 사진을 찍었다. “목소리가 크십니다? 존재감이 있는데?” “애가 표현이 확실하더라고요.”인수인계가 다시 시작됐다. 소아청소년과 검진 결과와 건강 상태 설명이 끝난 후 유준이는 간호사 품에 안겨 뒷좌석에 올랐다. 서울 동부간선도로를 40분간 달리는 동안 한 번 울지도 않았다. 구름 모양 간판을 단 성모자애 건물에 두 사람이 아이를 안고 들어섰다.“어머나 예뻐라!” 여기서도 똑같은 탄성과 절차가 이어졌다. “이 아이는 황달이 있어요?”회색 수녀복을 입은 노은희 원장이 유준이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일주일 새 조금 빠지긴 했지만, 아이 얼굴은 여전히 노란빛을 띠었다. 신생아들이 머무는 4층 방으로 옮겨진 유준이를 먼저 와있던 형들 옆에 보육사가 눕혔다. 간호사는 센터에서 들려준 주의사항을 전하며 세 번째 인수인계를 마무리했다. 보육사는 아이의 귀에 체온을 재고, 한 번 더 사진을 찍고, 온수에 씻기고, 배냇저고리를 갈아입혔다. 벌써 유준이가 누운 네 번째 잠자리다. 또다시 낯선 곳에서 칭얼거리던 아이는 젖병을 물리자 이내 잠잠해졌다.“빠는 힘은 좋네.”보육사는 혼잣말을 했다.아이 앞에 펼쳐진 두 갈래 인생신생아방엔 이미 두 아이가 있었다. 보육사 한 명이 돌볼 수 있는 신생아는 최대 두 명이다. 유준이가 오면서 정원을 초과한 것이다. 그래도 아이를 받아야 했다. 서울에서 베이비박스 남자아이를 우선적으로 받는 양육시설은 성모자애를 포함해 3곳뿐이었기 때문이다.이곳에 있는 동안 아이 앞으로 많은 서류가 만들어졌다. ‘미상’으로 기재됐던 본적은 성본창설이 마무리되면서 ‘한양 이 씨’로 정해졌다. 출생신고는 노원구청에서 생후 44일에야 이뤄졌다.가장 어려운 단계는 지금부터다. 지난해 아동보호정책이 개편되면서 ‘가정형 보호 우선’ 원칙이 도입됐다. 최우선은 원래의 부모 가정에서 자라는 것이지만, 그럴 수 없다면 일반적인 가족에 가장 가까운 ‘입양’, 다음으로 일시적으로 아동을 맡아 기르는 ‘가정위탁’, 그리고 소규모의 공동생활가정(그룹홈)을 차례대로 고려해야 한다. 흔히 보육원이라 부르는 아동양육시설은 이 모든 게 불가능할 경우 선택하는 마지막 ‘집’이다.유준이가 온 성모자애는 마지막 순위인 보육원이다. 아직 종착지는 아니다. 이곳에서 살면서 입양이 되길 기다려야 한다.서울시 아동복지센터는 올해 5월 입양에 적극적인 보육원 네 곳에 베이비박스 아동을 집중적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길고 복잡한 입양 절차를 단축하기 위해서다. 김민주 센터 소장은 “아이가 어릴수록 입양가정에 가서도 쉽게 적응하니까 기간을 줄이는 게 좋다”며 “근데 입양이란 게 시설장의 경험과 의지가 무척 중요한 일이라 유기아동 전담보호시설을 선정했다”고 말했다.그 네 곳 중 하나가 성모자애다. 지난달 21일 유준이는 ‘입대확인서(입양대상아동확인서)’를 받았다. 그새 황달기가 완전히 빠지고 토실토실하게 살도 올랐다. “생후 80일 만에 나온 거니까 예전보단 훨씬 빨라진 편이에요” 김윤현 팀장이 말했다. 유준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옆자리에 있었던 형은 벌써 예비 양부모를 만났다.하지만 유준이가 언제 어떻게 어떤 양부모와 맺어질지까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이제부턴 시간 싸움이다. 국내 입양에선 이왕이면 어린아이, 기왕이면 아들보다 딸을 원하는 부모들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돌이 지나고 나이가 점점 들면,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이곳을 ‘우리집’으로, 여기의 직원들을 ‘이모’나 ‘삼촌’으로 부르며 성인으로 자랄 것이다.유준이의 ‘선배’ 아이들71명의 아이가 사는 성모자애엔 유준이의 ‘선배’가 많았다. 베이비박스를 통해 온 아이만 65명에 이른다. 베이비박스가 만들어진 건 2009년 12월이지만, 아이들이 급증한 건 2012년 말부터다. 입양특례법 개정으로 ‘출생신고가 이뤄진 아이’만 국내 입양이 가능해지면서 여러 사정으로 출생신고를 할 수 없는 부모들이 몰려온 것이다. 부모가 “당장 키울 수 없으니 잠시 맡아달라”며 맡긴 아이까지 포함해, 베이비박스에 들어온 아이는 2012년 79명에서 이듬해 252명으로 치솟았다. 출생아 10만명당 아이 수로 따지면 58명에 이른다. 이 수치는 2018년 66명까지 올랐다가 다소 줄었지만 지난해에도 여전히 42명이었다.그렇게 성모자애로 넘어온 아이들의 눈엔 불안감이 자주 비쳤다. 때때로 조증(躁症)이 온 것처럼 조급하고 예민해졌다. 명랑한 아이는 숨이 넘어갈 듯 깔깔댔고, 화가 많은 아이는 수류탄처럼 위험해졌다. 아이들은 일상에서 늘 사랑과 관심을 갈구했다. 하지만 너무나 거칠게 갈구한다는 게 문제였다. 날이 우중충하거나 비가 오면 아이들의 예민함은 더 극에 달했다. “다녀왔습니다!”하교한 초등학교 1학년 남자아이가 신발주머니로 풍차를 돌리며 악을 썼다. 유준이처럼 베이비박스에서 이곳으로 온 아이다. 웃옷은 바지에서 삐져나왔고 가방도 절반쯤 열렸다. 저 상태로 방에 들어가면 다른 아이들과 부딪히며 싸울 것이 분명했다. 노 원장이 아이를 붙잡고 찬물과 과자를 주며 진정시켰다.“자자, 신난 건 알겠어. 그러다 울지도 몰라. 일단 물 좀 마셔라.”조금 뒤 발을 구르며 들어온 2학년 남자아이는 눈썹이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얼굴로 혼자 씩씩댔다. 생활관은 4층이었지만 분기탱천하는 화를 이길 수 없었는지 엘리베이터를 그냥 스쳐 지나갔다. 곧이어 ‘꽝꽝’하고 부서져라 계단을 밟는 소리가 회랑에 울렸다. 김 팀장은 휴대전화 통화 버튼을 눌렀다.“네, 선생님. 방금 올라간 아이 좀 얼굴이 안 좋아요. 잘 보셔야겠어요.”학교에서도 아이들은 감정조절에 애를 먹었다. 선생님들도 종종 성모자애에 ‘SOS 전화’를 걸었다. 한 아이가 수업 시간에 가벼운 지적을 받자 책상을 밀치고 유인물을 갈기갈기 찢은 다음 날이었다. 담임 교사는 통화에서 한숨을 푹 쉬었다.“집(보육원)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솔루션 같은 게 있으면 페이퍼(문서)로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었다.매일 바뀌는 엄마, 자꾸 떠나는 이모‘아이들은 무슨 일을 겪고 있는 걸까.’총신대 사회복지학과 오혜정 교수는 올해 초 성모자애 등 서울 시내 양육시설 34곳에 사는 베이비박스 아동에 관해 연구에 착수했다. 지난해 보건복지부 아동양육시설 평가위원으로 현장 조사를 다니면서 동료에게 들었던 말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아서다.“개인적인 느낌이긴 하지만, 베이비박스 아이들이 좀 어려움이 많은 편인 것 같아요.”오 교수는 베이비박스 출신 초등학생(3~6학년) 241명을 설문 조사해봤다. 조사 대상의 절반이 넘는 아이들은 “현재 상담 치료를 받고 있다”라고 답했다. 2016년 경기도가 양육시설 아동을 대상으로 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나온 수치(25%)의 두 배를 넘었다. 생각보다 높은 수치였지만, 보육원에서 아이들을 적극적으로 상담한 결과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더 주목해야 할 결과가 있었다. 아이들을 돌보는 사람인 ‘생활지도원’이 얼마나 자주 바뀌는지에 대한 조사였다. ‘가장 짧게 생활한 사람과 보낸 시간’을 묻자 “1년이 되지 않는다”라는 아이가 73%나 됐다. 제일 길었던 사람과 보낸 시간은 ‘3년 미만’이 절반이었다. 오 교수는 “이렇게 자주 바뀔 줄은 몰랐는데, 숫자를 보고 정말 충격을 받았다”라고 말했다.베이비박스에 온 아이들은 대부분 ‘원치 않은 임신’으로 태어났다. 부모들이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두고 오면서 남긴 쪽지엔 그때의 감정이 온전히 담겨있다.“너의 존재를 알았을 때 정말 죽을 것 같았어.”“10개월 동안 스트레스 많이 받았을 텐데 미안해.”“좋은 것만 먹고 행복한 생각만 하는 다른 엄마들이랑 달랐으니까….”엄마 뱃속에서부터 이어진 불안은 성장 과정에서도 일상이었다. 보육원에선 3교대로 근무하는 생활지도원의 손에 자랐다. 아이들이 이모와 삼촌으로 부르는 그들은 밤낮으로 맞교대하는 것은 물론, 입사와 퇴사도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아이들은 이별에 익숙해졌다. 오 교수가 만난 한 생활지도원은 다리를 다쳐 입원한 일을 털어놓았다. 며칠 만에 퇴원한 그가 보육원으로 돌아오자 한 아이가 달려와 안기며 “엄마가 그만둔 줄 알았어요. 가버린 줄 알았어요”라고 엉엉 울었다.그 이야기를 듣는 오 교수의 마음은 복잡했다. 그에게도 아들이 있다. 엄마가 얼굴을 찌푸린다거나 잠시 먼 곳에 다녀온다고 해도 아들은 “엄마가 날 버린 걸까”라는 의심을 떠올릴 리가 없었다. 그런데 오 교수가 조사한 아이들은 달랐다. 가족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떠나지 않는 존재여야 하는데, 아이들에겐 그런 사람이 없었다. 한 번 엄마는 영원한 엄마가 아니었던 것이다.“나를 왜 버리고 갔어요?”성모자애 직원들은 첫 베이비박스 아동인 준서(가명)와 민서(가명)가 들어왔던 2013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신생아를 볼 일은 드물었는데, 입양특례법 개정으로 갓난아기가 6명이나 들어온 것이다.“첫해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었어요. 사랑을 진짜 많이 받고 자랐거든요.”아이들은 다달이 차례대로 들어왔고, 보육사들도 비록 교대로 근무하긴 마찬가지였지만 사랑을 쏟아줄 여력이 충분했다. 김윤현 팀장도 사무실 직원들과 쉬는 시간마다 “막둥이 보러 가자”라며 우르르 올라가 앞다퉈 안아주고 얼러줬다. 생애 첫 100일 동안 온 식구들의 관심을 담뿍 받은 아이들은 당차고 호기심이 넘쳤다.“제가 생각하는 멋진 어른은요, 얼굴이 잘생긴 건 상관은 없어요. 양심이 있고, 그다음에 배려심 많은 사람! 잘생긴 건 그다음이에요…. 근데 선생님(기자)은 몇 살이에요?”(준서)“10년 뒤에는 소설가나 만화가가 되고 싶어요. 일본에서 만화가로 데뷔한 다음에 한국으로 돌아와서 친구들한테 자랑할 거예요. 지금 일본어 공부도 하고 있어요.”(민서)2014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매년 두 자릿수씩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생활지도원 혼자서 젖먹이 7명을 돌봐야 했고, 준서·민서와 같은 유대관계를 형성하긴 어려웠다. 분유를 먹이고 잠을 재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유아 시절 아이와 양육자 간 형성되는 애착은 아이의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 애착 형성의 ‘골든타임’을 놓친 ‘1세대 베이비박스 아동’들은 이제 사춘기의 길목에 서 있다. 자신도 어쩔 줄 모르는 감정 기복과 불안 속에서 부모가 자신을 떠났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저는 엄마 아빠가 없는 줄 알고 선생님들한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엄마 아빠가 바빠가지고, 그래서 저를 여기에 잠시 내버려 둔 거라고 했어요.”(건우·9·가명) ‘이모’들은 아이들이 ‘낳아준 엄마와 아빠’에 관해 물어올 때마다 대답을 숨기지는 않았지만, ‘베이비박스’라는 단어를 먼저 언급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눈치 빠른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4학년생 여자아이들의 스마트폰을 살펴보던 김 팀장은 검색기록에 ‘베이비박스’, ‘미혼모’ 같은 단어들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어른들이 답해줘야 할 아이들의 질문은 결국 한 곳으로 귀결됐다. “엄마. 아빠. 나를 왜 버리고 갔어요?”(민서)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미아: 품을 잃은 아이들’은 저널리즘의 가치와 디지털 기술을 융합해 차별화한 보도를 지향합니다. ‘히어로콘텐츠’(original.donga.com)에서 디지털 플랫폼에 특화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히어로콘텐츠팀▽팀장: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취재: 조유라 이승우 조민기 기자▽프로젝트 기획: 위은지 기자 ▽사진: 홍진환 기자▽편집: 하승희, 양충현 기자 ▽그래픽: 김수진 기자▽인터랙티브 개발: 임상아 임희래 뉴스룸 디벨로퍼▽인터랙티브 디자인: 여하은 차설 인턴스마트폰 카메라로 QR코드를 찍으면 따뜻한 요람 대신 차디찬 바닥에 놓였던 아이들의 이야기를 디지털 스토리텔링 기사로 구현한 ‘그 아이들이 버려진 곳’()으로 연결됩니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조유라 기자 jyr0101@donga.com이승우 기자 suwoong2@donga.com조민기 기자 minki@donga.com}
동아일보 특별기획 [장애, 테크로 채우다] 시리즈가 7월 29일 막을 내렸습니다. 이번 기획의 에필로그는 각 회별 주인공들이 직접 말하는 ‘나의 삶, 나의 일상’입니다. 삶은 이렇게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펼쳐집니다. 지면 제약으로 미처 전하지 못했던 ‘손끝으로 세상을 보는 마케터’ 고미숙 씨의 이야기도 만나보세요.다양한 몸들의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김예솔 (스웨덴에서 활동하는 가구 디자이너·릴라 엘리펀트 창업)‘나는 이렇게 생각한다’의 힘은 커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기도 하고, 그 주변을 바꾸기도 합니다.어렸을 때부터 장애를 갖고 살아오면서 밥을 먹고 자고 놀고 싶은 욕구는 친구나 저나 비슷했는데, 세상은 저를 다르게 대하는 것 같았습니다.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좋을 텐데, 자꾸만 다른 게 마치 결점인 것처럼 인생의 성적표에 감점을 주는 것 같았어요. 그 성적의 기준은 대체 누가 정한 걸까요?스웨덴에는 ‘얀테의 법칙(Jantelagen)’이라는 오래된 사회적 규범이 있습니다. 당신이 남보다 특별하다거나, 똑똑하거나, 잘났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이 법칙이 현대에 와서는 개인주의와 상반되고 구시대적인 사상이라는 의견도 있긴 합니다.하지만 이런 규범 덕분인지 스웨덴에서는 저의 장애가 그렇게 신기한 일로 비쳐지지 않는 것 같아요. 저처럼 휠체어를 타며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어요. 그것이 가능한 것은 스웨덴 사회가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라는 신념아래 만들어져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식 때문인지 장애학생이 학교에 입학한 뒤에야 편의시설이 마련되는 게 아니라, 장애학생의 재학유무에 상관없이 모든 학교는 장애인이 접근가능하게 지어져야 합니다. 교육 시스템 역시 장애 학생 개별의 요구에 따라 모든 지원을 국가와 지자체가 무상으로 제공합니다.반면, 제가 성장기를 보냈던 한국에선 아빠가 저를 일반고에 보내기 위해 발품을 팔아야했어요. 저를 ‘받아준‘ 유일한 학교는 건물에 엘레베이터가 없었는데요. 학교 측은 기존 계단 위에 임시로 나무 경사로를 만드는 비용을 저희 부모님이 학교 발전기금 차원에서 부담한다는 조건을 걸었습니다. 부모님은 그 조건을 받아들인 뒤에야 저를 입학시킬 수 있었어요.저의 중고교 시기 6년 간의 통학 역시 부모님의 몫이었습니다. 당시에(현재도 모든 버스가 저상버스는 아닙니다) 제가 사는 지역에는 휠체어로 탈 수 있는 대중교통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죠. 게다가 미술을 하겠다는 저를 위해 여름방학이면 엄마는 생업을 뒤로해야 했습니다. 엄마는 미대 입시를 위해 서울 홍대 앞 미술학원에 다니겠다는 저를 따라서 홍대 앞 월셋집에서 같이 살면서 활동 보조 겸 공부 뒷바라지를 하셨습니다.어쩌면 한국 사회는 개인의 노력과 열정으로 무언가 성취를 이루는 데에는 환호하지만, 그런 가시적인 성공의 대가로 치러야했던 보이지 않는 희생에 대해선 당연시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 운영되는 장애인 활동 보조 서비스가 저의 성장기에도 있었다면, 엄마는 친구들도 만나고 취미 생활을 즐길 여유가 있었을 거예요. 또 지금처럼 장애인 이동 지원 차량이나 저상버스 같은 모두를 위한 대중교통 인프라가 있었더라면 아빠는 저의 ‘365일 운전기사’가 되지 않을 수 있었을 겁니다. 바꾸어 생각하면, 그런 희생을 기꺼이 감수해준 부모님이 없었다면 저에겐 배움의 기회가 애초부터 없었을지 모릅니다.2007년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을 때 디자인과 건물에 편의시설 개선을 요청했던 적이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학과 교수님들과 조교님들을 포함해 학교 구성원들이 한 마음으로 제 요구에 힘을 실어 주셨습니다. 그 요구가 대학 총장님께 전달되어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설치되고 난 후, 학과 조교님이 제게 이렇게 말했어요. “당연히 있었어야 했던 편의시설이지만, 그럼에도 총장님께는 감사를 표현하는 게 좋을 것 같다.“그 조교님의 말은 제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어요. 엘리베이터가 장애 학생 단 한명을 위해 1억원을 투자한 시설로 해석되는 게 아니라, 장애가 있든 없든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보편적인 접근성을 보장하는 기본권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담긴 말이었기 때문입니다.스웨덴에서는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등한 배움의 기회를 갖습니다. 그 결과 장애인 역시 직업 능력을 갖추게 되고, 고용시장에서도 비장애인과 동등한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세금을 내며 다시 사회에 환원합니다. 이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데 저의 장애가 걸림돌이 되지 않는 자유를 저는 비로소 타국에서 누리고 있습니다.저는 이제 많은 에너지를 창작에 쏟고 있어요. 평소 휠체어를 타면서 필요했던 일상 도구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기능적일 뿐만 아니라 집안 한 켠에 두고 보기에도 아름다운 물건들입니다. 집안의 다른 물건들과도 조화를 잘 이루는, 튀지 않는 미감을 추구합니다. 오랫동안 질리지 않고, 곁에 두고 싶은 가구이면 좋겠거든요. ‘릴라 엘리펀트’에서 만드는 저의 가구들이 세상에 나와 훈훈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길 바라봅니다. 얀테의 법칙처럼 말이죠. 겸손하게 자기 할일을 묵묵히 하는 ‘믿음직한 사람’같은 가구이면 좋겠어요. 그래서 다양한 몸을 가진 저와 우리가 여전히 아름다운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이 가구들이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나에게 걷는다는 것의 의미김승환 (‘입는 로봇’ 연구원·KAIST 기계공학과 웨어러블로봇 연구실)아침에 눈 뜬 뒤 침대에서 내려와 디디는 첫발, 은은하게 흙냄새가 나는 여유로운 산책길, 시끌벅적한 음식점의 문턱을 넘어 들어갈 때의 설렘… 일상 속에서 내딛는 수많은 걸음은 많은 이들에게 당연한 일상의 일부입니다. 제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하지만 하반신이 완전히 마비된 뒤 ‘걷기’가 지니는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다시 걸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한때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기술이 발전하면서 서서히 ‘가능’으로 돌아서고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 산책하고, 사람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대화를 나누고, 가고 싶은 곳을 아무런 걱정 없이 언제든 갈 수 있는, 한때는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일상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꿈과 희망도 더 자유롭게 실현할 수 있을 것이고요. 웨어러블 로봇은 아직 완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장애인들이 일상 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장애인들의 자립과 사회 참여를 증진시킬 통로가 될 것이며, 휠체어를 타던 장애인들의 일상생활에도 혁신을 가져올 것입니다. 장애인이 걸을 수 있게 된다면 장애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발전한 기술은 장애인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공경철 교수님을 필두로 한 카이스트 기계공학과 엑소랩(Exoskeleton Laboratory)에서 저를 포함한 20명의 연구진들은 더 나은 로봇 기술을 연구·개발하고 있습니다. 저는 새로운 로봇이 만들어지고 발전하는 연구실 속 일상을 SNS 등을 통해 여러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습니다. 웨어러블 로봇이 우리의 삶에 어떤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에도 기여하고 싶습니다.저희는 2024년에 열리는 로봇·장애인 융합 국제 올림픽인 사이배슬론(Cybathlon) 대회에서 다시 한 번 우승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계속 나아가다보면, 언젠가 로봇이 휠체어를 대신할 수 있는 날도 오지 않을까요? 내가 이래서 음악을 못 끊나보다임채섭(시력을 잃어가는 작곡가·뮤직프로듀싱팀 ‘티스푼’ 소속)30년 전 햇살이 내리쬐는 어느 여름날, 매미의 강렬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마침 오늘도 30년 전 그런 강렬한 매미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소리를 매개로 과거를 회상해봅니다. 혼자서 뭔가를 가지고 놀고 관찰하기 좋았던 저는 그 때 리코더를 불고 있었습니다. 30년이 흐르며 그 리코더는 이제 건반과 컴퓨터로 바뀌어있습니다.음악을 시작하게 된 시점부터 음악을 연주하고, 만들고,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있습니다. 그 중 어느 것이 우선인지 알기 어렵지만 각각의 매력이 다르기 때문에 음악 안에서 직업이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요즘은 아침이 되면 산책 때 메모 했던 음원 수정사항을 반영해 음악적인 스케치를 조금 더 구체화시킵니다. 이런 수정 작업은 시력이 남아있던 예전에도 했던 일이지만 이걸 보이스 오버(화면을 읽어주는 서비스) 기능으로 하려고 하니 새로운 훈련처럼 느껴집니다. 컴퓨터가 발전해도 아직은 가상 악기의 여러 가지 값을 정확하게 딱 일치시켜서 읽어주지는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에게 어떤 기술이 좀더 편하고 적응할 수 있는 대안인지를 계속 찾아가는 훈련을 하게 됩니다.컴퓨터로 음악 작업을 하다보면 화면 확대를 했을 때 건반 일부가 안 보이기도 합니다. 음의 높낮이가 구분이 안 될 때도 있죠. 강약 조절이 잘 되는지 보기 위해 화면 아래쪽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음표를 보기 위해 화면 위로 올라가다보면 커서가 엉뚱한 곳에 가 있기도 합니다. 다행히 요즘 저는 PC를 활용해 음악을 만들 때 ‘logic remote’라는 앱을 활용해 아이패드를 컨트롤러로 사용하는 대안을 발견해가고 있어요.예전에는 건반으로 음표를 입력했던 방법을 썼지만 지금은 시각장애인 음악인에 맞는 환경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죠. 작업 속도는 과거보다 조금 느릴 수 있지만 마우스로 음표를 일일이 찍고 강약을 수정하거나 가상 악기 등을 걸어줄 수 있어 할 수 있는 작업의 범위가 계속 넓어지고 있어요. 이런 방법을 쓰면 좀더 객관적인 모니터링이 되기도 하고, 특이한 화성이나 리듬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좋기도 합니다.제가 음악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기술들은 이 순간에도 계속 새롭게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기술들을 가까운 분들의 도움을 통해서 익혀나가고 있어요. 그런 과정을 통해 저에게 맞는 멋진 기계나 프로그램들을 꼭 찾게 될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나중에 전맹이 오더라도 이런 기술들에 접근할 수 있도록 요즘은 틈틈이 점자 공부를 하고, ‘한소네’라는 점자 단말기를 익히고 있어요.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는 진행성 장애로 인한 분노들이 저에게는 젊은 날의 혈기였던 거 같기도 합니다. 이런 분노들은 어찌 보면 열정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살고 싶은 열정, 음악을 하고 싶은 열정, 칭찬받거나 뽐내고 싶은 열정 같은 거 말이죠. 이런 것들이 가라앉고 있는 부표가 기적적으로 수면 위로 올라오듯, 저를 다시 떠오르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게임을 즐기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게임의 세계에선 ‘켠 김에 왕까지’라는 말이 있어요. 저는 어렸을 때 이 말을 듣고 ‘무조건 끝까지 가서 엔딩을 본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잘 살든 못 살든, 제게 주어진 지금 이대로의 인생을 끝까지 즐겨본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이런 의미에서 음악은 미우나 고우나 저의 친구입니다. 사람 속은 알 수 없고 언제든지 떠나갈 수 있지만, 음악은 노력의 영역이므로 저에게서 영원히 떠나가지 않을 것 같거든요. 아마도 그래서 제가 음악을 못 끊나봅니다.첫 발은 천근만근이지만… 내딛고 나면 어떻게든 나아가는 것이 삶이규환 (중증장애에 맞선 치과의사·분당서울대병원 건강증진센터 치과클리닉 교수)다치고 나서 중환자실에 누워있을 때, 담당 의사는 제게 “더 좋아지지 않는다. 평생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전신마비가 된 몸으로 뭘 하다가 죽을까’ 만 번을 생각해도 치과 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모두가 반대했고 미쳤냐고 욕했지만, 정말 0.1초라도 치과의사로 살아보고 싶었어요.그래서 재활원을 나와 1년 만에 치대에 복학했습니다. 재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겁쟁이가 되고, 사회로 나오는 게 더 두려워질 것 같아서요. 복학 후 처음엔 휠체어로 문턱을 못 넘어서, 문 앞에서 눈치 보며 하루 종일 계속 버텼습니다. 교수님들은 한숨만 쉬셨죠. 그러다 예방치과 교수님, 방사선과 교수님께서 처음으로 “들어와, 해보자”라고 하시더라고요. “내가 자료를 줄 테니까, 여기서 판독을 해”라면서요. 그렇게 시작했습니다.가장 힘든 건 첫 발이에요. 저는 강연을 할 기회가 있을 때면 “장애인은 비장애인만큼 노력해선 안 된다”고 늘 이야기합니다. 그냥 버티는 것도 힘들겠지만 거기서 한 발짝씩만 더 나아가라는 거죠. 그 과정에서 보조기기와 기술, 최신 장비를 활용하는 건 정말 중요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더 중요한 건 포기하지 않는 마음인 거 같아요.사실 한 발 내미는 게 너무 힘듭니다. 그 한 발이 수만근의 무게입니다. 근데 그것만 내딛으면 어떻게든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아요. 삶이란 게 그런 것 같아요. 한 번뿐인 인생, 진짜 하고 싶은 거 하다가 죽어야죠. 최중증 장애인인 저도 이렇게 해냈잖아요.제가 살아가는 모습을 그래서 보여드리는 거예요. 0.1%의 희망만 있어도 절대 포기하지 마시라구요. 저도 중환자실에서 누워있을 때 어려움을 극복해낸 분들의 기사들을 읽고 희망을 많이 얻었습니다. 그때의 저처럼, 절망으로 삶을 포기하고 있는 분들께서 제 이야기를 보고 “그래, 까짓 거 나도 한번 해보자”라는 희망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한 가지 색으로 그려진 하루하루지만 예쁜 꽃처럼 피어나게 가꿀 거예요고미숙 (손끝으로 세상을 보는 마케터·소셜벤처 ‘닷’ 커뮤니케이션 매니저)저의 하루는 한 가지 색으로 그려진 그림이에요. 하지만 사랑을 받는 날엔 몽글몽글해지고, 시선을 집중받는 날엔 스크래치가 생겨서 하루하루가 모이면 드라마처럼 다채로운 스케치북이 만들어진답니다. 그날을 떠올려볼까요. 살랑 부는 봄바람에 기분도 설렜던 날이었어요.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를 보러 흰 지팡이를 들고 집을 나섰는데요. 점자 블록이 없는 길을 ‘초집중’하며 걷다가 앞에 오던 사람과 부딪치면서 지팡이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만 거예요. 친절한 그분은 흰 지팡이를 손에 쥐여 주며 사과도 해 주셨죠.‘역시 세상엔 좋은 분들이 많아’ 흐뭇해하며 지하철역에 도착했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하며 걸었지만 주말이라 붐비는 통로에서 사람들과 부딪히다 보니 방향을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소심한 저는 망설임 끝에 용기를 내 지나가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죠. “저… 제가 눈이 안 보여서요. 지하철 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해요?”돌아오는 건 대답 대신,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터벅터벅’ 하는 발소리뿐이었습니다. 혼자서라도 길을 찾으려 기억을 더듬고 이곳저곳을 헤맸지만 같은 곳만 빙빙 돌 뿐이어요. 시간이 흐르며 다급해진 마음에 다시 용기를 내 다른 사람에게 길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이쪽으로”라며 제 옷을 냅다 잡아당기는 거예요. 약속장소에서 만나 제 이야기를 들은 다른 시각장애인 친구는 말했습니다. “난 내 흰 지팡이에 걸린 사람이 오히려 나한테 눈 똑바로 뜨고 다니라고 하던걸?” 시각장애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선 마음부터 더 단단해져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하루였죠. 제가 시력을 잃기 전에 좋아했던, 비 오는 날도 떠올려봅니다. 눈이 보일 땐 빗방울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스며드는 모습이나 창문에 맺혀있는 빗방울을 보는 게 좋았죠. 우산을 쓰고 걸을 때면 들려오던 ‘토독토독’하고 떨어지던 빗방울의 소리도요. 그런데 지금은 비 내리는 날이면 걱정을 먼저 하게 돼요. 비 내리는 소리로 인해 주변 소리가 가려지고, 길 곳곳에 생긴 물웅덩이를 피하기도 힘들거든요. 사설제 인생의 책갈피는 이렇듯 행복하고 아름답지만은 않아요. 언제나 상처받는 것에 익숙해져야 하고, 좋아하던 것들도 즐기기를 망설이게 되죠. 저뿐 아니라 누구나 크기가 다른 고민과 걱정의 씨앗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 씨앗이 어떤 모습으로 자랄지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건강하게 자라서 예쁜 꽃을 피우는 씨앗이 될 수 있도록 저는 긍정의 물과 사랑의 햇살로 잘 키워 보려고요.<특별취재팀>▽기획·취재: 신광영 neo@donga.com 홍정수 이채완 기자▽사진: 송은석 기자▽디자인: 김수진 기자※아래 주소에서 [장애, 테크로 채우다] 전체 시리즈와 디지털로 구현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홍정수 기자 hong@donga.com이채완 기자 chaewani@donga.com}
노인이 되면 당연했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해지지 않는 때가 온다. 집 안에서 혼자서 앉고 일어서거나 밖에 나가 지인을 만나는 것조차 버거워지는, 신체적·정신적 제약이 본격화되는 때 말이다. 노쇠로 인한 ‘장애’를 안고 살아갈 인생의 황혼기는 모두에게 예정된 미래다. 이 때 기술은 노인들이 기존 삶의 질을 유지하고 존엄한 삶을 사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할 수 있다. 4월 19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2023 베리어 프리’ 박람회장. 미야자키현에서 여동생을 태우고 10시간을 운전해 이곳까지 온 모리시타 야스나리 씨(65)가 자동차기업 토요타 부스 앞을 서성였다. 야스나리 씨는 차량 왼편에 있는 조수석이 ‘윙’ 소리를 내며 왼쪽으로 90도 회전해 차량 밖으로 나오는 광경을 신기한 듯 바라봤다. 그는 부스 직원에게 물었다.“이 회전 좌석을 쓰면 동생을 차에 태우는 게 좀 수월해질까요?”“고령자나 장애인이 허리나 다리에 힘을 덜 쓰고도 차에 탈 수 있게 한 거예요. 다른 사람 도움 없이 혼자 조수석에 타는 게 가능해질 겁니다.”(직원)흰머리가 거뭇거뭇한 야스나리 씨는 “휠체어를 타는 여동생을 차에 태우는 게 늘 나의 몫이었는데 좌석이 회전하면 제가 몸을 조금만 굽혀도 돼 허리가 덜 아플 것 같다”고 했다.이 박람회는 고령자와 장애인, 그리고 야스나리 씨처럼 가족을 돌보는 사람들을 위한 첨단기술이 소개되는 장이었다. 주최 측은 “박람회가 시작된 28년 전만 해도 이런 기술이 있다는 것 자체를 사람들이 몰라서 아주 작게 시작했는데 그 사이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요즘은 수만 명이 찾아오는 대형 이벤트가 됐다”고 했다.삶의 질의 핵심은 ‘마음껏 움직이기’토요타 부스의 또 다른 인기 제품은 휠체어 이동장치였다. 고령이 되면 노쇠나 질환 등의 이유로 전동휠체어를 타는 경우가 많은데 휠체어가 무거워 차 트렁크에 싣는 게 큰 부담이다. 부인이 휠체어를 타는 60대 일본인 부부는 토요타 직원이 휠체어 이동장치를 시연하는 내내 눈을 떼지 못했다.직원이 차 트렁크를 연 상태로 이동장치의 전원 버튼을 누르자 휠체어를 고정시킬 수 있는 장치가 차량 밖 바닥까지 내려왔다. 휠체어를 올려놓고 다시 버튼을 누르니 트렁크 안으로 쏙 들어갔다. 사람이 힘을 쓸 일이 없었다. 담당 직원은 “평균 30kg 정도인 전동휠체어를 들어 올릴 수 있고 모든 차량에 설치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자 남편은 말했다. “지금 아내가 타고 있는 휠체어가 전동이라 엄청 무겁거든요. 올해 저희 부부 나이가 69살이라 힘이 부치는데 이런 게 있으면 휠체어를 차에 싣고 자유롭게 다닐 수 있을 것 같네요.”김영선 경희대 디지털뉴에이징연구소장(노인학과 교수)은 “국내에선 휠체어를 실을 수 있게 차를 개조하려면 약 1500만 원이 들 정도로 부담이 큰데 (토요타 제품은) 차량을 개조하지 않고 간단히 설치만 하면 되는 방식이어서 활용도가 높을 것 같다”고 했다.‘고령자를 위한 스쿠터’ 부스도 인파로 북적였다. 이 스쿠터는 혼자 힘으로 걷을 수는 있지만 먼 거리를 다니긴 힘든 고령자들을 위해 개발됐다. 기자가 운전면허가 없는데 시승이 가능한지를 묻자 직원은 “이 스쿠터 자체가 면허를 반납한 고령자들이 밖에 다니기 편하도록 개발된 것”이라며 기자에게 스쿠터를 내밀었다.스쿠터에 타보니 1~6단계까지 속도 조절이 가능했다. 코너 구간을 통과하며 핸들을 살짝 돌리자 속도가 자동으로 느려졌다. 다른 관람객이 스쿠터를 탄 기자 앞으로 지나가려 할 땐 경보음이 울렸다. 외관은 상아색의 깔끔한 바탕에 검은색으로 약간의 포인트만 줬다. 토요타 관계자는 “고령자가 스쿠터를 타고 밖에 나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도록 세련되고 젊은 느낌을 주는 디자인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고 했다. 당연하던 것들이 당연해지지 않을 때“와, 자전거를 정말 오랜만에 타보네요.”오사카에 사는 카와치 케이스케 씨(75)는 부스에 전시된 ‘고령 친화 자전거’를 타면서 이렇게 말했다. 부인 리츠코(71)는 “남편이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집에 자전거를 두고도 타기를 주저하는 걸 보고 안타까웠는데 오늘은 다르다”고 했다. 이 자전거는 일반 자전거와 다른 특징이 몇 가지 있다. 우선 세발 자전거여서 안정감이 있다. 안장에는 허리 받침대가 있어 몸을 기댈 수 있다. 페달 쪽에는 잠시 다리를 올려놓고 쉴 수 있도록 발판도 부착돼있다. 고령자들이 근력 저하로 균형을 잡기 어렵고, 발목과 무릎 등 관절이 약해지며 체중 부하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문제점을 해결한 것이었다. 케이스케 씨는 “몇 년 전 오른쪽 다리에 마비가 온 뒤부터는 집에 있는 자전거를 한 번도 타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며 “이 자전거는 발판이 있어 발을 올리기가 쉽고, 허리 받침대가 몸을 고정해 주니 페달에 힘을 싣기도 쉬웠다”고 했다. 김 교수는 “노인들은 신체 기능이 저하되면서 밖으로 잘 안 나오게 되는데 이렇게 고령 친화형으로 디자인된 자전거가 보급되면 무엇보다 외부 활동을 지속하게 해주는 효과가 클 것”이라고 말했다.초고령자 돌보는 고령자를 위한 기술 박람회에서는 고령자와 장애인을 돌보는 기족 등 주변인을 위한 기술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거동이 어려운 사람을 집안 내부에서 옮기는 장치인 전동 리프트가 그 중 하나다. 자동차 엔지니어 히로시 씨(59)는 차를 만드는 기술을 접목해 이 리프트를 개발했다. 침대에 누워 지내는 와상 노인들을 휠체어로 옮긴 뒤 화장실, 주방 등 다른 곳으로 옮기는 데 쓰이는 기구다. 와상 노인들은 근력과 인지 기능이 저하되는데 최소한의 움직임을 통해 상태가 악화되지 않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또한 이들을 돌보는 사람들의 신체적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 김 교수는 “영국 호주 등에서는 ‘들지 않기 정책(no lift policy)’을 도입해 돌봄 인력이나 의료진이 환자를 직접 드는 대신 기기의 도움을 받게 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고 말했다. 히로시 씨는 “10년간 이 제품을 제작해오면서 91세 남성이 88세 부인을 돌보려고 제품을 보러 왔을 때가 기억에 남는다. 본인도 노쇠해 집안에서 부인을 옮기는 게 어려웠는데 이 리프트 덕에 수월해졌다며 기뻐했다”고 전했다.또 다른 전동 리프트 업체인 ‘카네타 코포레이션’은 의자형 리프트를 개발했다. 기존의 전신형 리프트는 부피가 커서 가정집에서 사용하기 어려웠다. 이를 보완해 부피가 작고 조작이 쉬운 의자형으로 개발한 것이다. 이 업체 직원은 기자에게 한 부녀 고객의 사진들을 보여줬다. 아버지를 홀로 돌보는 딸이 의자형 리프트를 이용해 침대에 누워만 지내는 아버지를 부엌으로 옮기는 장면이 담긴 사진이었다. 딸은 “예전엔 온전히 팔 힘으로 아버지를 침대에서 꺼내드려야 했는데 이젠 한층 편해졌다”고 했다.기자가 박람회장을 둘러보는 동안 혼자 구경 온 고령자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이들은 ‘개인 자격’이라고 적힌 명찰을 달고 여러 기술들을 꼼꼼하게 살폈다. 고이즈미 유타카 씨(73)는 “인터넷에서 간병 용품을 찾다가 이 행사를 알게 됐다. 6, 7년 전부터 빼놓지 않고 매년 방문하고 있다”고 했다. 93세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유타카 씨는 휠체어를 타는 어머니를 위한 제품을 찾고 있었다. 어머니가 집의 방과 방 사이를 다닐 때 문턱에 걸려 휠체어에서 튕겨나갈 뻔한 경우가 잦았는데 자신도 고령이라 일일이 돌볼 수가 없어 낙상 방지용 휠체어를 찾고 있다고 했다. “어머니가 휠체어를 처음 탄 8년 전만 해도 제가 60대라 괜찮았는데 저도 이젠 70대가 되니 어머니를 돌보기가 점점 버거워지네요. 저의 빈자리를 채워줄 기술을 잘 찾아보려 합니다.”동아일보는 장애의 빈틈을 기술과 디자인으로 채우며 다시 일어선 ‘다른 몸의 직업인’ 5명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로봇팔을 한 사이클 선수, 시력을 잃어가는 작곡가, 손을 못 쓰는 치과의사, 휠체어를 타는 ‘걷는 로봇’ 연구원과 스웨덴에서 활동하는 가구 디자이너…. 부서진 몸으로 다시 일어선 이들은 말합니다. 삶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고.▽기획·취재: 오사카=신광영 neo@donga.com 홍정수 이채완 기자▽사진: 송은석 기자▽디자인: 김수진 기자※아래 주소에서 [장애, 테크로 채우다] 전체 시리즈와 디지털로 구현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오사카=이채완 기자 chaewani@donga.com신광영 기자 neo@donga.com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제가 조금 느립니다. 하지만 세계에서 제일 꼼꼼하고 안전하게 봐 드리겠습니다.” 분당서울대병원 건강증진센터 치과클리닉 이규환 교수(44)가 환자들에게 건네는 첫인사다. 그냥 인사치레는 아니다. 그는 손을 쓰지 못하는 의사다.손을 쓰지 못하는 ‘중증장애 치과의사’규환은 어깨와 손목을 약간 움직일 뿐, 목 아래로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중증장애 치과의사다. 그의 진료실은 두 가지가 다르다. 의사가 전동휠체어에 앉아 있고, 치과 도구를 잡을 때 손가락에 투명한 플라스틱 기구를 끼운다는 점이다. “3단으로 부탁드립니다. 한 단만 더 올릴까요? 네, 감사합니다.”규환의 요청에 따라 간호사가 페달을 밟자 환자가 앉은 진료 의자가 기계음을 내며 올라갔다. 간호사는 규환의 검지손가락에 끼워진 플라스틱 기구에 동전만 한 치과용 거울을 고정시켰다. 규환은 어깨와 손목을 천천히 움직이며 거울에 비친 환자 입안 구석구석을 살폈다. “치석 관리를 아주 잘하셨네요. 훌륭합니다.”이 병원에서 일한 지 올해로 19년 차인 규환은 검사와 판독, 상담, 예방클리닉을 주로 맡는다. 규환은 농담처럼 “저도 이제 연차가 좀 쌓여서요. 잘하는 것에 더 집중하고 있는 거죠”라며 웃었다. 2005년부터 여기서 일했으니, 벌써 20년차가 다 되어간다. 초반에는 일반 진료도 직접 했지만, 이제는 전문분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를 찾는 진료 예약은 대부분 꽉 차 있다.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가슴에 강철을 깔다규환은 늘 웃는 인상이다. 무표정일 때에도 그렇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 단단한 철벽으로 무장돼있다. 치대 본과 3학년이던 2002년, 중환자실에서 읽은 무협지에 나온 말이다.“‘네 가슴에 강철을 깔아라’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야 사람이 살아간다고.”키 188cm의 건장한 청년이었던 그는 병원 실습을 마치고 수영장에서 다이빙을 하다 목뼈가 부러져 전신이 마비됐다. 늘 하던 대로 물에 뛰어들었지만, 그날은 머리가 바닥에 부딪히며 목이 꺾였다. 한동안 스스로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중상이었다. 한 달쯤 지나자 간신히 어깨까지 감각이 돌아왔지만 그뿐이었다. 담당의는 규환에게 “평생 이렇게 살 준비를 하라”고 했다.밤낮으로 비명과 울음소리가 가득했던 중환자실에서 버티기 위해 간호사들에게 부탁했다. 정말 바쁘겠지만, 혹시라도 짬이 나면 제게 책을 보여주실 수 있느냐고, 무슨 책이든 상관없고, 한 장씩 넘겨만 주시면 된다고. 중환자실에서 지낸 한두 달 동안 그렇게 100권 가까이 책을 읽었다. 성경부터 시작해 일본만화 ‘슬램덩크’ 시리즈, 소설 ‘갈매기의 꿈’까지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그의 ‘인생 한 줄’이 된 문장들은 무협지에서 나왔다. 앞으로의 삶은 분명 상처로 가득할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일도 많을 것이었다. “그들이 네게 상처를 내지 못하게 가슴에 강철을 깔아라.” 그는 이 문장을 가슴에 품고 장애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으로 ‘강해지기’를 택했다.모두가 말린 ‘1년 만의 복학’규환은 사고 1년 만에 치대에 복학했다. “전신마비 치과의사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며 모두가 말렸다. 법학으로 진로를 바꾸라는 설득도 많았다. 하지만 규환은 사고를 당했다고 가던 길을 틀고 싶지는 않았다.“중환자실에서 ‘내가 이 몸으로 뭘 할 수 있을까’ 만 번은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근데 정말 0.1초라도 치과의사로 살아보고 싶더라고요.”당시 교내에는 장애인 시설이 거의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에선 동기들이 규환이 탄 휠체어를 들고 계단을 올랐다. 교수 연구실이나 실습실에도 문턱이 하나씩 있었다. 혼자 들어갈 수가 없어서 누군가 도와줄 때까지 무한정 ‘뻗치기’를 했다.손을 쓸 수 없으니 필기도 할 수 없었다. 동기들과 선후배들이 챙겨준 필기와 교과서를 눈으로만 보고 외웠다. 그는 “원래도 머리가 나쁘지는 않았는데 다치고 나서 더 좋아진 것 같아요”라며 웃었다. 하지만 웃을 일이 아니었다. 남들처럼 밤늦게까지 실습을 하고, 하루종일 필기를 노려보며 공부하다가 욕창이 생겼다. 그래도 버티다 정신까지 잃었다.진료 실습 땐 치과용 기구를 손가락에 고정시키기 위해 고무줄로 피가 안 통할 정도로 꽉 동여맸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기구가 많아 손에서 빠지면 환자가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움직이지 않는 손으로 진료를 하며 환자의 입안에 상처를 내지 않으려다 보면 손가락이 기구에 찔리고 베이는 일이 많았다. 그의 손은 늘 상처투성이였지만 그렇게 부딪히며 기회의 문을 하나씩 열어갔다.맨땅에 헤딩 대신 ‘헬멧 쓰고 헤딩’어렵게 중증장애 치과의사의 길을 개척해 온 규환이 모두에게 ‘무식하고 지독한’ 방법을 권유하지는 않는다. 그가 늘 후배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맨땅에 헤딩하는 것과 ‘헬멧 쓰고 헤딩’하는 건 천지차이”라는 것.가만히 앉아 더 좋은 신기술과 첨단장비가 개발되기를 기다리는 대신, 가진 것을 총동원하고 없는 것을 직접 만들어내며 한 발짝씩 나아갔다. 아무 정보도 없이 ‘맨땅에 헤딩’을 너무 많이 하다가 문자 그대로 죽을 고비도 수차례 넘겼다.의사를 꿈꾸는 후배들뿐 아니라,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그는 앞선 ‘선배 장애인’들의 경험과 노하우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입이 닳도록 말한다. ‘헤딩’을 망설이지 말되, 가능한 좋은 ‘헬멧’을 쓰라는 것이다.특히 든든했던 헬멧으로 그는 한국장애인고용공단과 국립재활원을 꼽았다. 전동휠체어와 욕창방지용 방석 등을 지원받았고, 무엇보다 치과 진료에 필요한 기구를 맞춤 제작할 기회도 얻었다.국립재활원에서 보조기기를 맞추는 경로는 보통 두 가지다. 하나는 규환처럼 국립재활원 부속 재활병원에 입원하는 경우, 또 하나는 외래로 방문해서 직접 의뢰하는 경우다. 수요자의 상태와 생활패턴 등을 고려해 만들고 사후관리까지 해준다. 기존에 없던 기기를 신규 제작하는 경우엔 길면 수개월까지 소요된다.규환은 이곳에서 치과 도구들을 간편하고 빠르게 손가락에 고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세상에 없던 기구’를 국립재활원 전문가들과 함께 개발했다. 투명한 플라스틱을 원통처럼 말고, 끝엔 도구를 꽂을 수 있도록 고정용 고무를 장착했다. 고무 부분이 도구를 단단하게 고정시켜주는 강도를 세 단계로 구분해 각각 색깔을 달리 했다. 또 폴리염화비닐(PVC) 소재로 만들어 끓는 물에 살짝 담그면 모양을 손쉽게 다시 잡을 수 있도록 했다. 첨단 하이테크는 아니지만 장애인마다 각기 다른 수요에 딱 맞게 제작한 로테크(low-tech), 미들테크(middle-tech) 기기들은 가볍고 저렴하면서도 큰 효과를 낸다. 서울 강북구 국립재활원에서 만난 재활병원부 김온유 척수손상재활과장과 보조기기제작실 김지민 주무관은 그동안 개발한 보조기기들을 제작실 작업대에 한가득 펼쳐 보였다. 두 사람은 규환의 보조기구 제작에도 참여했다. “팔과 손이 마비된 분이 계셨는데 자신의 손으로 물을 마시고 싶어해 전용 컵 홀더를 만들어 드렸어요.”“비슷한 장애가 있는 다른 분에겐 스마트폰으로 카톡을 할 수 있도록 손가락을 끼워서 쓸 수 있는 터치펜을 만들어 드렸고요.”장애를 갖는다는 건 아주 일상적인 일조차 스스로 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진다는 뜻이다. 사람마다 필요로 하는 ‘일상’은 각자 다르다. 컵을 잡거나 물을 마시거나 화면을 터치하는 것은 비장애인에게는 엄청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맞춤형 기구를 사용하는 장애인들은 “잃어버렸던 일상을 하나씩 되찾을 때마다 삶이 한 뼘씩 확장되는 것 같다”고 전한다. ● “장애인에게 진료받기 싫다” 화내던 환자들을 넘어규환은 힘겹게 치대를 졸업했다. 하지만 곧바로 의사가 될 수는 없었다. 자신을 받아주는 병원을 찾기가 힘들었다. 서류를 통과해도 휠체어를 타고 가 면접을 보고 나면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병원장, 부원장, 기조실장 등 각종 ‘실장님’들이 전화를 받을 때까지 끈질기게 전화했어요. 단 10분이어도 좋으니 진료를 보여 드릴 기회를 달라고요.”오랜 두드림 끝에 수화기 너머에서 긴 한숨과 함께 “한번 와 보세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규환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가 휠체어를 탄 상태로 시험 진료를 하던 날, 병원 의료진들이 우르르 구경을 와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봤다. 치과의사가 된 뒤에도 고비는 남아있었다. “진료실에 들어와서 저를 보고는 재수 없다고 ‘퉤’ 하며 침을 뱉는 환자분도 있었어요. ‘내가 왜 병신한테 진료를 받아야 하느냐’고 병원에 컴플레인(항의)하는 분도 많았고요.”환자 열 명 중 일곱 명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나머지 두세 명은 쭈뼛대며 진료 의자에 앉았다. 규환은 그들에게 “보시다시피 제가 몸이 불편하고 좀 느립니다. 근데 실력은 최고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꼼꼼하고 안전하게 봐 드리겠습니다”라며 다가갔다.점차 그를 다시 찾는 환자들이 생겨났다. “그때 깔끔하게 진료해줘서 시원했다” “꼼꼼하게 설명해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거친 손에 새겨진 20년의 흔적다치기 전, 규환은 위만 보고 살았다. 부족함 없는 가정형편, 어디 가서 밀리지 않았던 두뇌와 건강한 신체를 가진 그였다. 치대에 진학한 것도 사명감 때문은 아니었다. 공부를 잘 하면 의사가 되어야 하나보다,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고 나면 좋은 집, 좋은 차를 사고, 돈 많이 벌며 편하게 살지 않을까 짐작했다. 다친 뒤, 그는 스스로 ‘바닥’이라고 생각한 곳에 닿았다. 처음으로 위 대신 아래와 옆을 보게 됐다. 중환자실에 누워 순간마다 기도했다. 제 몸을 다시 예전처럼 돌려놓아주신다면, 이 몸을 정말정말로 다른 사람들을 돕는 데 쓰겠노라고. “울면서 수없이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다 주진 않고 팔만 이렇게 조금 돌려주셨네요.” 어깨를 살짝 으쓱해 보이며, 규환은 말했다. ‘조금’ 돌려받은 팔로 의사가 된 뒤, 중환자실 침대에서의 약속을 잊지 않으려 애썼다. 사고 때문에, 절망 때문에, 후유증 때문에, 규환은 수차례 거의 죽어봤기 때문에 오히려 하루하루의 최선과 진심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아이를 낳은 뒤, 규환은 육아 선배들의 조언에 따라 자신의 육아 철학도 “넘치게 사랑하고 부족하게 키우자”로 정했다. 잔소리 대신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6살배기 딸은 아빠의 무릎과 어깨 위로 기어올라가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장난을 친다. 조그마한 손가락으로는 아빠의 굳은 손을 쥐고 흔들며 “아빠 손은 괴물 손!”이라고 놀린다. 그의 두 엄지와 손마디는 큼직한 굳은살이 뒤덮어 얼룩졌다. 근육이 빠져 가늘고 긴 팔과 어울리지 않게 울퉁불퉁한 손을 보며 “영광의 상처”라고 말했다. 20년도 더 전부터 도구에 베이고 찔리고 진물이 나도록 끈과 고무줄로 동여맨 흔적이다. 이제 규환이 진료 때마다 손가락에 끼는 투명한 플라스틱 기구는 간단해 보이지만 그에겐 간단치 않다. 그의 손에 더 이상 피와 진물이 흐르지 않게 해주고, 치과의사로 살아갈 수 있게 해준 기구이기 때문이다. 그냥 주저앉지 않고, 0.1%의 가능성에도 포기하지 않고 20년 넘게 싸워왔다는 증거가 그 손에 담겨있다.동아일보는 장애의 빈틈을 기술과 디자인으로 채우며 다시 일어선 ‘다른 몸의 직업인’ 5명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로봇팔을 한 사이클 선수, 시력을 잃어가는 작곡가, 손을 못 쓰는 치과의사, 휠체어를 타는 ‘걷는 로봇’ 연구원과 스웨덴에서 활동하는 가구 디자이너…. 부서진 몸으로 다시 일어선 이들은 말합니다. 삶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고.▽기획·취재 : 신광영 neo@donga.com 홍정수 이채완 기자▽사진 : 송은석 기자▽디자인 : 김수진 기자※아래 주소에서 [장애, 테크로 채우다]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디지털로 구현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홍정수기자 hong@donga.com이채완 기자 chaewani@donga.com}
“중2 때였어요. 당시 선생님이 쪽지시험을 보고 틀린 개수만큼 머리채를 잡고 칠판에 얼굴을 들이박았거든요. 저도 불려나가서 칠판에 여러 번 세게 부딪혔는데 갑자기….” 작곡가 임채섭 씨(41)는 과거 교사의 체벌로 왼쪽 눈을 실명했다. 권투선수들이 시합 중 눈을 정통으로 맞았을 때 종종 발생하는 망막 박리가 심하게 왔다. 채섭은 남은 한 쪽 눈에만 의지하다보니 오른쪽 시력도 서서히 악화됐다. 사고 후 27년이 지난 지금, 그는 진행성 시각장애인으로 살고 있다. 어제까지 보이던 게 오늘은 보이지 않고, 어제는 할 수 있었던 일이 오늘은 어려워지기도 한다.그는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작곡 경력을 차곡차곡 쌓았다. 올해로 17년차다. 드라마 OST, K팝 등 다양한 작업에 참여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는 여러 번 음악을 단념하려 했다. 피로가 누적된 날은 잔존 시력이 거의 나오지 않아 악보조차 보이지 않았다. 건반에 닿는 손의 기억에 의존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만하면 해볼 만큼 해봤다’며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음악을 놓지 않았다.“어떻게든 음악을 계속 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보니 눈을 대신해 줄 기술과 장비들을 발견하고 익히게 되더라고요. 시력을 잃는 속도보다 기술에 적응하는 속도를 더 높이면 나중에 완전히 못 보게 되더라도 음악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안내견과 전철역 가는 길지난달 1일 아침 채섭이 함께 사는 시각장애인 안내견 ‘호연’이와 서울 도봉구 집을 나섰다. 지방 공연에 가는 날이다. 채섭이 인근 전철역인 창동역까지 가려면 횡단보도가 3군데를 건너야 한다. 세 곳 모두 신호등이 없어 건널 때 차가 오는지 잘 살펴야 한다. “진행성 시각장애가 있다보니 횡단보도 건너는 게 갈수록 조심스러워져요. 호연이에게 50%는 의지하지만 저 역시 안내견의 안전을 지켜줘야 하니까 횡단보도 앞에 서서 귀를 최대한 기울입니다. 차 소리가 완전히 안 들리고 사람들 건너는 소리가 들리면 그 때 움직이죠.”채섭이 호연이와 함께 지하철 플랫폼에 들어서자 마침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선로에 멈춰선 열차 문이 닫히기까진 4, 5초의 여유가 있었지만 채섭은 열차에 바로 타지 않고 탑승구 앞에 멈춰 섰다. “이렇게 기다리고 있다가 다음 열차가 도착하면 문이 열리자마자 타야 안전하거든요.”호연이는 다음 열차가 올 때까지 수시로 고개를 들어 반짝이는 눈동자로 ‘형아(채섭)’를 살폈다. ‘앉아’ ‘일어서’ 같은 구령을 듣기 위해 귀도 쫑긋 세웠다. 채섭과 호연이가 열차에 오르자 승객들의 시선이 이 래브라도 리트리버 안내견에게 온통 쏠렸다. “호연이를 예쁘게 봐주시는 분들이 많아 감사하긴 한데 눈으로만 봐주시면 좋겠어요. 가끔 말없이 사진을 찍거나, 제가 시각장애인인 걸 알고 제 얼굴 바로 앞에서 찍는 분도 있거든요. 만지시는 분들도 있고요. 근데 안내견이 낯선 자극을 계속 받게 되면 평소 훈련받은 역할을 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어요.”장애인마다 ‘장애 MBTI’가 있다 채섭이 이런 일상을 갖게 되기까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교사의 폭력으로 시력을 잃고 집에서만 채섭은 방 유리창 너머로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려와도 인사를 건네지 못했다. “낙오자가 된 것처럼 너무 위축이 되고 중2병까지 겹쳐서 그랬던 거 같아요. 마음의 블랙홀이 쉽게 메워지진 않더라고요.”그는 가해 교사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사춘기를 보냈다. 하지만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는 쪽을 택했다. “드라마 ‘더글로리’ 보셨나요. 복수를 하고나면 결국엔 허무해지지 않던가요. 저는 이미 너무 큰 것을 잃어버렸는데 남은 삶마저 미움과 분노로 채우면서 더 슬프게 만들고 싶진 않았어요.”눈 수술 후 중학교를 휴학한 채섭이 하루 일과를 보낸 곳은 동네 피아노학원이었다. 당시 좋아하던 게임을 할 수도 없었고 책을 읽기도 어려워, 대신 피아노 앞에 앉았다. 건반 위치는 손끝으로 선명히 느껴졌고, 귀에 들려오는 소리로 악보를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었다. 피아노 학원이 그에겐 학교이자 놀이터였다. “당시 라디오로 음악을 들으며 하루하루 보내곤 했는데 음악이 마음속 빈 공간으로 들어오더라고요. 이 곡을 만들었던 사람과 소통하는 것 같아서 혼자 남겨진 기분도 덜 느껴지고, 나 역시 누군가를 위해 이런 걸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채섭의 할머니는 음악을 통해 세상으로 나오려는 손자에게 전자피아노를 마련해줬다. 할머니는 “너한테 가장 필요한 것을 사라”며 매달 몇 만원씩 십수 년간 모아온 쌈짓돈을 내준 것이었다. 채섭은 그 전자피아노로 독학을 해 부산대 음대에 입학했다. 집에 손을 벌릴 형편이 아니었던 채섭은 음대 시절 닥치는 대로 알바를 했다. 주중에는 화장품과 정수기 방문 판매를 하고, 주말엔 결혼식 축가 연주를 다니며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었다. 가장 쏠쏠했던 알바는 노래방에 들어갈 곡을 만드는 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음원을 디지털로 자동 변환하는 기술이 없어서 사람이 한 곡 한 곡 귀로 듣고 음표와 박자를 그려가며 노래방 버전으로 수동 전환했다. 그렇게 수백 곡의 노래를 완전히 해부해서 재조립했다. 고된 일이었지만 채섭에겐 ‘실전형’ 작곡 공부이기도 했다.그는 “장애인도 성향이 사람마다 다 다르다. 일종의 ‘장애 MBTI’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의 상황에 대한 분노가 커 공격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변과 협조적으로 살아가려는 부류도 있다는 뜻이었다. “앞이 안 보이는 건 매일 매순간 의식하게 돼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장애와 친해지긴 어렵죠. 그렇다고 장애라는 거대한 돌덩이를 어디로 보내버릴 순 없어요. 보낼 때마다 기어이 반송돼서 오더라고요. 어차피 같이 가야할 존재라면 예쁘게 포장하고 부피를 최소화해서 마음 속 ‘냉장고’ 깊숙이 넣어두는 수밖에요.”시력의 빈틈을 메워준 기술들지난달 21일 채섭의 집을 찾았을 때 신곡 작업이 한창이었다. 그의 집은 곡을 함께 만드는 멤버들과의 작업실이기도 하다. 편곡과 믹싱 전문인 채섭은 작곡가 겸 보컬리스트인 서재윤 씨, 피아노 베이스 등 재즈 연주가인 황영훈 씨와 2년 전 ‘티스푼’이란 밴드를 결성했다. K팝이나 드라마, 뮤지컬 등에 쓰일 곡을 만들기 위해 각자 장기를 티스푼으로 모아보자며 힘을 합쳤다. 재윤이 기본 멜로디에 작사, 보컬을 담당하고 영훈은 여러 악기로 선율에 살을 붙인다. 채섭은 신디사이저 등을 이용해 믹싱과 편곡을 하며 완성도 높은 곡으로 버무려낸다. 한 때 음악을 포기하려던 채섭을 잡아준 게 바로 그 두 사람이었다.“20년 넘게 해온 음악이지만 도저히 못 하겠다 싶더라고요. 근데 두 분이 ‘조금 천천히 가도 된다’며 힘을 줬죠. ‘이렇게 곡 잘 만드는 사람이 포기하면 국가적 손실을 넘어 우주적 손실’이라고 농담도 해주고….”채섭을 일으켜 세운 건 사람이지만 그가 힘겹게 되살린 용기를 실현하도록 해준 건 기술이었다. 그의 작업실에는 시력의 한계를 메워주는 여러 기술이 모여 있다. 그는 아이맥(iMac) PC 앞에 앉아 능숙하게 작곡 프로그램을 다뤘다. 커서의 위치 등 모니터 화면을 설명해주는 ‘보이스 오버’와 화면을 크게 확대해주는 기능을 자주 썼다. 악보를 집중적으로 봐야 할 땐 ‘조디’라는 특수 확대기기를 머리에 쓴다. 이걸 쓰면 눈앞의 사물이 30배 정도 확대돼 보인다.채섭이 PC에 아이패드를 연결하자 태블릿 화면이 전자 피아노 건반으로 바뀌었다. 그가 믹싱을 할 때 즐겨 쓰는 로직 리모트(Logic Remote)라는 애플리케이션(앱) 덕분이었다. “이 앱은 음악을 만드는 일종의 스케치북이에요. 10년 넘게 써와서 익숙하고, 화면도 크지 않아 웬만한 버튼이 어디 있는지 제 손이 다 알죠. 그래서 섬세한 정밀 작업도 가능해요.” 그는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피곤할 날에는 점자 단말기를 PC에 연결해 작업한다. 이런 첨단기기들은 사회복지법인 ‘따뜻한동행’ 등에서 지원을 받았다.시력을 잃고 마음의 시야를 넓히다채섭과의 인터뷰가 무르익어 가는데 어디선가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좁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기자와 마주 앉은 채섭이 손으로 식탁 아래를 가리켰다. 호연이가 긴 몸을 바닥에 늘어뜨린 채 코를 골며 숙면 중이었다. 호연이는 채섭의 다리 맡에 머리를 두고, 통통한 엉덩이로는 기자의 두 발등을 깔고 앉은 상태였다. 조금 전부터 느껴지던 발등의 낯선 온기는 그 엉덩이에서 전해져온 것이었다.“호연이는 제가 평소 식탁에 혼자 있으면 적적할까봐 제 옆에 착 붙어 앉아요. 제가 밥을 다 먹거나 일을 마치면 호연이도 그제야 같이 일어나죠. 오늘은 비도 오는 와중에 ‘형아’랑 멀리 다녀오느라 피곤했을 거예요.”비 내리는 날이면 채섭과 호연은 외출할 때 평소보다 신경이 곤두선다. 주변에 차량이나 사람이 있는지를 귀로 살펴야 하는데 빗소리 때문에 소리의 간섭이 많아진다. 채섭의 구령 소리가 호연이에게 잘 안 들리기도 한다. 호연이가 비옷을 입고 있어 ‘도그 토일렛’의 영문 약자인 DT1(소변), DT2(대변) 상황이 생기면 이 역시 만만치 않다.평소에는 호연이가 길가에서 대변을 볼 땐 엉덩이 쪽에 비닐봉지를 고정시켜 처리한다. 하지만 비 오는 날에는 호연이에게 입혔던 비옷을 벗기고 하네스(반려동물의 몸을 고정하는 벨트)를 해체한 뒤 엉덩이 쪽에 비닐을 걸어야 한다. “안내견의 변이 아예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교육을 받았어요. 변이 땅에 떨어지면 시각장애인들은 어디에 어떻게 떨어졌는지 안 보여서 줍기가 어렵거든요. 그래서 엉덩이에 비닐을 잘 채워야 하는데 비 오는 날에는 좀더 난이도가 높죠.”채섭이 하루 중 가장 기다리는 시간은 호연이와 동네 공원을 산책할 때다. 함께 걸으며 작업해놨던 음원을 다시 차분히 들어본다. 그러다 수정할 게 떠오르면 스마트폰에서 카카오톡 보이스 기능을 켜서 또렷한 발음으로 혼잣말을 한다. 그 음성은 바로 문자로 전환돼 ‘나와의 채팅방’에 전송된다. 집에 가선 이 문자를 다시 음성으로 전환해 들으며 곡을 고친다. 이런 기능이 있어 채섭은 지인들과도 활발히 카톡을 주고받는다.그는 요즘 점자 공부에 어느 때보다 열심이다. 언젠가는 찾아올 ‘전맹(완전히 보이지 않는 상태)’의 삶을 지금부터 대비하려는 것이다. 14살에 실명해 ‘장애 나이’로 치면 올해 27세인 그는 “시력을 잃어가며 오히려 마음의 시야가 넓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차라리 처음부터 전맹이었다면 더 나았겠다 싶을 때도 있어요. 눈이 더 안 보이는 상황에 매번 적응해야 하는 게 평생의 숙제거든요. 하지만 뒤집어보면 감사한 일이에요. 제가 계속 음악을 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할 시간이 주어진 거니까요.”동아일보는 장애의 빈틈을 기술과 디자인으로 채우며 다시 일어선 ‘다른 몸의 직업인’ 5명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로봇팔을 한 사이클 선수, 시력을 잃어가는 작곡가, 손을 못 쓰는 치과의사, 휠체어를 타는 ‘걷는 로봇’ 연구원과 스웨덴에서 활동하는 가구 디자이너…. 부서진 몸으로 다시 일어선 이들은 말합니다. 삶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고.▽기획·취재: 신광영 neo@donga.com 홍정수 이채완 기자▽사진: 송은석 기자▽디자인: 김수진 기자※아래 주소에서 [장애, 테크로 채우다]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디지털로 구현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임채섭 작곡가가 속한 뮤직프로듀싱 팀 ‘티스푼’ 유튜브 채널신광영 기자 neo@donga.com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이채완 기자 chaewani@donga.com}
“경수야, 내 다리 한 짝 어디 있어?” 모터 소리로 웅웅대는 연구실. 김승환 씨(35)가 건너편에 앉아있던 박사과정 시경수 연구원을 불러 묻는다.“이거요?”경수가 선반에서 꽤 커다란 금속 물체를 꺼내온다. 언뜻 보면 씨름선수의 굵직한 종아리도 넉넉히 들어갈 보호대 같다. 승환이 자기 ‘다리 한 짝’을 들고 설명한다.“꽤 크죠? 이게 제가 지난번에 입었던 로봇의 다리에요. 다 분해해서 어디로 가고 이거 하나 남은 걸 겨우 찾았어요.”이곳은 대전 과학기술원(카이스트) 본원 기계공학동 3층에 있는 웨어러블 로봇 연구실, 일명 ‘엑소(exo)랩’이다.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해주는 로봇을 만드는 곳에 올해 1월 연구원으로 정식 합류했다. 여기에서 승환이 환한 얼굴로 ‘과거의 다리 한 짝’을 붙들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내년에 직접 입고 뚜벅뚜벅 걸을 ‘미래의 두 다리’를 만들기 위해서다.‘사이보그 올림픽’을 향해연구실에 들어서자 어른 키만 한 로봇 4대가 기자를 맞았다. 천장 레일에 주렁주렁 매달린 웨어러블(착용형) 로봇 네 대 중 가장 압도적이었던 것은 영화 ‘아이언맨’을 연상시키는 ‘워크온수트4’. 허리와 다리 전체를 튼튼한 몸체로 감쌌고, 관절 부위엔 큼직한 구동기(모터)가 존재감을 과시했다. 가슴팍에는 태극마크까지 붙어있었다.“2020년 사이배슬론에 나가서 금메달을 딴 로봇이거든요.” 승환이 팔을 들어 로봇을 만지며 말했다.‘사이보그 올림픽’으로 불리는 사이배슬론은 신체장애인들이 첨단 보조 장비를 이용해 누가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지 겨루는 국제대회다. 4년마다 수십 개 국가 참가팀들이 스위스에 모여 진검승부를 벌인다. 2020년 대회 당시 카이스트 연구팀이 참여한 ‘엔젤로보틱스’팀은 하반신 완전마비 장애인이 보행 로봇을 입고 겨루는 경주에 출전했다. 장애물을 피하고, 앉았다가 일어나고, 경사로와 계단을 걷는 등의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경기였다. 첫 출전인 2016년엔 동메달, 2020년엔 금메달을 따며 전 세계의 이목을 단번에 끌어모았다.▶2020년 대회 결승전 영상 보기승환은 내년 10월 스위스에서 열리는 사이배슬론 2024에 출전해 자신이 직접 입을 새 로봇을 연구 중이다. 그는 배꼽 아래로는 움직이는 것은 물론, 아무 외부감각을 느낄 수 없는 ‘하지 완전마비’ 장애를 가졌다. 비장애인에게 ‘걷기’는 본능에 가까운 자연스러운 행위지만 하반신 마비 장애인들에겐 한 걸음을 떼는 것조차 어렵다. 이들이 걸을 수 있도록 로봇은 여러 기능을 수행한다. 지난 두 번의 사이배슬론에 모두 출전했던 김병욱 선수가 2020년 대회 때 사용했던 로봇을 착용하고 걷기 시범을 보였다.일어나는 것은 하나의 동작이 아닌, 수많은 과정의 연속체다. 먼저 다리를 정렬하고, 몸을 45도 앞으로 기울인 뒤, 목발로 단단히 땅을 짚으면서 일어서 균형을 잡아야 비로소 완성된다.몸을 앞뒤로 조금만 움직여도 중심을 잃기 일쑤다. 목발을 바닥에서 떼고 두 다리로만 버티는 것에도 첨단 기술이 동원된다. 걷는 것은 더욱 복잡하다. 다리를 얼마나 들어올려야 하는지, 무릎을 언제 굽혀야 하는지, 발이 바닥에서 언제 떨어지고 닿는지, 그 무엇도 본능적으로 알 수 없기 때문에 로봇의 움직임을 정밀하게 구현해야 한다.연구실 한쪽에선 벽면 거치대에 매단 로봇 다리가 기계음을 내며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때마다 컴퓨터 모니터에는 푸른색과 붉은색 그래프가 물결 모양을 그렸다. 파란 선은 ‘이렇게 움직여라’라고 미리 입력해둔 가동 계획이고, 빨간 선은 실제로 다리가 움직인 궤적을 기록한다. ‘랩장’을 맡고 있는 박사과정 김형준 연구원은 “빨간 선이 파란 선에서 많이 멀어지지 않아야 목표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비어있는 로봇이 혼자 움직이게 하는 건 비교적 쉽다. 하지만 몸무게가 수십kg인 사람이 착용한 상태에서 수시로 바뀌는 무게중심을 실시간으로 보정하는 것은 복잡하다. 이때 휠체어 발판에 놓인 승환의 다리가 갑자기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가 익숙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마비 환자들에게 자주 오는 일반적인 증상이에요. 로봇에 탔을 때 이렇게 예고 없이 다리가 떨려도 저 ‘빨간 선’이 함께 흔들리지 않도록 안정적으로 잡아줘야 제대로 걸을 수 있어요.”관절에 달린 모터는 200kg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 만에 하나 오작동한다면 관절과 근육을 다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모든 동작은 극도로 정교하게 계산해야 한다. 그냥 로봇이 아닌, 사람이 입는 로봇이기 때문이다.수많은 ‘관절’과 ‘근육’의 기능을 특수 설계하기 위해 자재를 직접 공수한다. 견본도 종이를 오리고 점토를 붙여 만든다. 승환의 표현에 따르면 “전선과 볼트, 너트 빼고는 ‘톱니 하나까지’ 전부 직접 설계하는” 수준이다. 연구실 구석엔 착용부를 만들 때 쓰는 재봉틀까지 있다.걷겠다는 갈망, 두 번의 고비원래 승환은 공학이나 연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회사원으로 전국으로 출장을 다니며 1년에 자가용 주행거리가 6만km를 훌쩍 넘겼다. 그 시절 집은 ‘잠자는 곳’이자 ‘씻고 옷 갈아입는 곳’에 불과했다. 그러다 교통사고가 났다. 그해 스물아홉 살이었다. 중환자실에서 깨어난 승환은 하반신을 내려다봤다. 멀쩡해 보였지만 감각이 없고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그는 마취가 안 풀렸다고 생각했다. 몇 년 전 상처 봉합수술을 받던 때와 똑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 마취는 영영 풀리지 않았다. 척수 완전 손상이었다. 2년 넘는 재활 기간 내내 좌절과 희망이 번갈아 승환을 찾아왔다. 그때마다 그의 중심을 굳건하게 잡아준 것은 여자친구였다. 자꾸만 입원실로 찾아오는 여자친구에게 몇 번씩이나 헤어지자는 말을 건넸지만, 여자친구는 못 들은 척을 했다. 주말에는 승환의 어머니와 간병을 교대했다. 다치기 전엔 한 번도 뵙지 못한 여자친구의 어머니도 병실로 찾아와 첫인사를 나눴다.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결국은 여자친구의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 ‘불호령’을 내렸다. 수화기 너머로 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래. 어떤 방식이든 좋으니, 식장에는 걸어서 들어와라.”결혼을 허락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때만 해도 여자친구의 아버지는 승환의 몸 상태를 정확히는 모르고 있었기에 했던 말이다. 하지만 ‘예비 장인’의 말에 승환은 가슴이 뛰었다. “어떻게든 걷기만 하면 된다는 말씀이시죠?” 수화기에 대고 되물었다.승환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로봇’이었다. 보행 로봇을 타볼 방법, 도와줄 사람을 필사적으로 찾아 헤맸다. 얼마 뒤 ‘2020년 사이배슬론 참가자 모집 공고’를 발견하고선 단숨에 지원했다. 여러 관문을 통과해 최종 후보 7인에 선정됐다. 예비용 로봇도 맞췄다. 난생처음으로 ‘김승환’ 석 자를 써 붙인 로봇을 타고 걸음을 내디뎠다. 고지가 코앞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이튿날이었다. 갑자기 손발이 차가워지고 고열이 몰려왔다. 처음 간 병원은 ‘독감’을 의심하며 약을 처방해줬지만, 열은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응급실에 실려 갔다. 의료진은 ‘욕창’에 패혈증까지 진행됐다는 진단을 내렸다. 그러고 보니 몸에 뾰루지 같은 것이 난 걸 하나 보긴 했다. 그런데 패혈증이라니… 중환자실로 실려 가면서도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근육까지 전부 녹인 거대한 피고름집을 긁어내는 수술을 받았다. 그 자리에 남은 건 텅 빈, 주먹보다도 큰 구멍이었다. 대회 출전을 포기해야만 했다. ‘김승환’ 이름표가 붙었던 로봇은 낱낱이 분해돼 최종 출전자용 로봇 두 대의 예비부품으로 사용됐다. 현재 남은 것은 연구실 구석에서 겨우 찾아낸, 연구원인 경수가 승환에게 갖다준 다리 한 짝뿐이다. 퇴원에는 거의 반년이 걸렸다. 회사에 복직했고, 결혼을 했다. 아이도 생겼다. 삶은 꽤 순탄하게 흘러가는 듯했다. 하지만 커다란 공허함과 허망함은 사라지지 않았다.그러다 지난해 말, 마침내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카이스트 웨어러블 로봇 연구실이 낸 ‘장애인 채용’ 공고를 발견했다. 당시에도 재활을 위해 병원을 다니며 보행로봇 훈련을 놓지 않고 있던 그는 곧바로 지원했다.두 번째 도전에서도 역시나 고비가 찾아왔다. 재활 치료 과정에서 꼬리뼈 쪽에 손바닥만 한 물집이 생겨버린 것. 물집이 터져서 옷이 젖은 걸 알아차린 순간, 아찔함이 몰려왔다. 치료에 전념한 결과, 다행히 상처는 점차 회복됐다.다니던 회사에 망설이며 새 도전도 알렸다. “합격하면 여기를 그만둬야 하는데 괜찮을까요?”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표는 “가야지! 지금 안 하면 언제 할래?”라며 단박에 ‘오케이’ 사인을 날렸다. 마침내 카이스트 채용이 확정됐다. 회사 일을 마무리하고 사흘 만에 대전으로 향했다. 오전 9시, 첫 출근의 설렘과 두려움이 섞인 마음으로 들어선 연구실은… 텅 비어있었다. 한 남자만이 긴 앞머리를 머리띠로 밀어 넘긴 채 피곤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밤을 지새우다 여태 못 들어간 경수였다. 엑소랩에서의 생활이 그렇게 시작됐다.‘무에서 유’를 넘어, ‘유에서 완성’으로하반신 마비 장애인을 걷게 하는 로봇을 연구하는 이곳에서 승환은 자신의 몸을 온전히 내놨다. 스무 명 가까운 연구원들 앞에서 그는 자신의 장애 정도부터 생리현상을 어떻게 해결하는지까지 낱낱이 브리핑했다.키가 180cm인 승환은 어깨끈을 매고 천장 레일에 매달리기도 했다. 근육이 빠져 가늘어진 장딴지와 허벅지를 연구원들이 직접 만져보게 하기 위해서다. 비장애인이라면 옷이 잘 맞지 않으면 불편함을 바로 알아채지만 하지마비 장애인은 다르다. 몸에 딱 맞게 착용하지 않으면 로봇 안에서 몸이 흔들려 균형을 잃거나 본체와 마찰하면서 화상을 입을 수 있다. 3D스캐너로 신체 치수를 재는 것만으론 마비된 몸에 맞는 로봇을 설계할 수 없다.사실 기존 연구원들은 승환과 거의 접점이 없었다. 대부분이 20대 비장애인이었고, 평생을 학교 안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지내왔다. 연구실을 이끄는 공경철 교수가 연구원들에게 “장애인을 채용하겠다”며 의견을 물었을 때, 적잖은 이들이 이메일로 부담을 표했다. 자신의 연구 성과를 제대로 내는 것도 쉽지 않은데, 장애인 동료까지 잘 챙길 수 있을지 걱정된다는 것이었다. 걱정과 달리, 이제는 많은 것들이 물 흐르듯 이뤄진다. 함께 일한 지 2, 3달 만에 연구원들과 승환은 스스럼없이 장난을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점심을 먹으러 우르르 구내식당으로 가는 길, 휠체어에 탄 승환이 앞서가자 한 연구원이 성큼성큼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밀면서 말했다. “자율주행~!” 휠체어가 알아서 식당으로 갈 테니 몸을 맡기라는 농담이었다. 건물 밖으로 나갈 때에도 굳이 누군가 뒤에서 뛰어나와 ‘승환을 위해’ 문을 대신 밀어주지 않는다. 그저 앞에 있던 승환이 문을 열자 다른 연구원들이 뒤따라 나왔다. 승환이 합류하면서 연구의 속도와 효율성도 껑충 뛰었다. 상상 속 몸이 아닌, 실제 장애가 있는 몸에 테스트하고 의견을 나누며 바로바로 수정할 수 있게 되면서다. 승환이 엑소랩의 ‘경쟁력’이 된 셈이다. 밤샘을 밥 먹듯 하는 다른 연구원들과 달리, 승환은 아직까진 가능한 6, 7시 퇴근 원칙을 지키고 있다. “여기에서는 제 몸이 자산이자 자원이니까, 건강관리를 잘하는 것도 제 중요한 역할이에요” 그는 덧붙였다.다시 걸어보니 ‘걷는 로봇’ 포기 못 해내년 사이배슬론 경기 난이도는 4년 만에 훌쩍 높아진다. 아직 보행로봇의 ‘필수품’인 목발 없이 박스를 든 채 걸어야 하고, 징검다리를 건너고, 높은 부엌 찬장에 있는 물건도 꺼내야 한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지 겨루는 수준이다.2016년 첫 도전을 앞두고 연구팀과 출전자들은 사실상 미완의 로봇으로 훈련을 시작했다. 무수한 시행착오와 합숙까지 불사한 결과, 경력과 자본으로 무장한 해외 팀들을 상대로 두 번 연속 기적을 일궜다.그때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면, 지금은 ‘유’를 ‘완성’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박사과정 박정수 연구원은 “이제 다음 목표는 장애인이 도움 없이 스스로 착용할 수 있는 로봇”이라고 했다.“패러다임 자체가 바뀌는 거예요. 지금은 완전히 ‘일대일 맞춤’이라 대당 1억 원이 넘거든요. 입는 것도 두세 명이 도와야 간신히 3분 걸리고요. 이젠 본체는 공유하고, 몸에 밀착되는 ‘착용부’만 3D프린터로 정교하게 맞추는 방법을 연구하는 거예요.”가격이 내려가고 입기도 간편해지니까 누구나 로봇을 입을 수 있는 단계로 한 걸음 더 앞서간다는 것. 정수는 “대회에서는 금메달이라는 최대 성과를 거둬봤잖아요”라며 “이번엔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걸 만들어서 더 큰 ‘임팩트’를 주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 물론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로봇만 입으면 비장애인과 같은 일상을 즐길 정도의 상용화가 단숨에 이뤄지기는 어렵다. 상용화는 기술 발전뿐 아니라 사회 인프라와 법률, 문화까지 복잡하게 얽힌 문제이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이동성이 좋은 휠체어를 넘어서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승환이 보행 로봇 개발에 매달리는 이유는 다시 걸어봤기 때문이다. 로봇을 처음 탄 순간 ‘걸었던 삶’의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가족과 산책하고, 사람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대화하고, 맛집에도 문턱 걱정 없이 드나들던 예전의 일상이 눈에 선했다. 승환은 “어떻게든 서서 걸을 수 있다는 걸 느껴보니, 더 포기할 수가 없어졌다”고 그는 말했다.하반신 장애인에게 걸음은 그 자체로 도전이자 스포츠다. 휠체어가 몸의 일부라면, 로봇은 극한에 도전하려 서킷을 달리는 스포츠카다. 승환이 덧붙였다. “자동차도 100년 전에는 첨단 기술의 집약체였잖아요. ‘걷는 로봇’이 지금은 스포츠카처럼 소수를 위한 고도의 기술이지만 10년 뒤에는 달라지지 않을까요.”대회까지 남은 일정을 설명하는 승환의 휠체어 등받이에 노란색 호랑이 모양 뜨개 인형이 달랑거렸다. “아들이 호랑이띠거든요. 태명이 ‘빅토리(승리)’ 할 때 토리였어요.”얼마 전 돌을 앞두고 가족사진을 찍을 때, 토리는 카이스트의 마스코트인 ‘넙죽이’ 인형을 작은 손으로 꼭 붙잡았다. 마치 이곳이 아빠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했다.승환은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한 아들이 언젠가 “아빠는 왜 못 걸어?”라고 물어 올 때 “아빠는 다쳤지만 로봇을 만들어서 이렇게 걷잖아”라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아들이 친구들에게 “너희, 로봇 타봤어? 우리 아빠는 탄다!”라고 자랑하는 얼굴도 상상하곤 한다.6년 전 교통사고로 두 다리가 굳어졌을 때 승환을 일으켜 세운 건 가족이었다. 이제는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일어서고 싶다는 무수한 꿈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 재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 로봇을 처음으로 타 봤을 때, 연구실에 들어온 지금, 승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승환은 호랑이 인형을 바라보며 말했다.“저한테는 로봇을 타다가 다쳐도 그 자체가 과정이에요. 설령 제 다리가 부러져도 로봇만 탈 수 있다면 괜찮아요. 아팠던 적, 절망했던 적은 많지만 걷겠단 생각을 포기한 적은 없으니까요.”동아일보는 장애의 빈틈을 기술과 디자인으로 채우며 다시 일어선 ‘다른 몸의 직업인’ 5명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로봇팔을 한 사이클 선수, 시력을 잃어가는 작곡가, 손을 못 쓰는 치과의사, 휠체어를 타는 ‘걷는 로봇’ 연구원과 스웨덴에서 활동하는 가구 디자이너…. 부서진 몸으로 다시 일어선 이들은 말합니다. 삶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고.▽기획·취재: 대전=홍정수 hong@donga.com 신광영 이채완 기자▽사진: 대전=송은석 기자▽디자인: 김수진 기자※아래 주소에서 [장애, 테크로 채우다]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디지털로 구현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이채완 기자 chaewani@donga.com}
스웨덴에서 활동하는 가구 디자이너 김예솔 씨(35)가 바라보는 세상은 걷는 사람들보다 50cm가 낮다. 그의 눈높이에선 걷는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올해로 스웨덴 생활 6년 차. 예솔이 다니는 공공도서관에는 도서 검색대의 높이가 제각각이다. 스웨덴인 평균 신장에 맞춘 것부터 키가 작은 사람, 어린이 등에 맞춰 다양한 높이의 검색대가 나란히 있다. 옷가게에서 쇼핑을 하다 휠체어 리프트를 발견하기도 한다. 매장 내 단 높이가 달라 두 걸음만 올라가면 되는 계단인데 말이다. 시내버스를 타면 내리는 문 앞에 휠체어 공간이 널찍하게 있다. 그곳은 유모차를 가지고 버스에 탄 부모들의 ‘아지트’이기도 하다. “스웨덴에선 마치 누군가의 상황을 미리 헤아려보고 빈틈을 채워준 것처럼 배려가 곳곳에 녹아 있어요.”철저히 ‘걷는 사람’에 맞춰진 가구들하지만 스웨덴에서도 집에 들어오면 한국과 다를 게 없다. 인테리어, 특히 가구는 철저히 걸을 수 있는 사람의 관점에서 설계돼 있다. 휠체어 이용 경력 28년 차인 예솔에게도 하루하루가 도전이다. 휠체어에 앉아 가스레인지 불을 켜면 바로 눈앞에서 불이 타오른다. 싱크대가 높아 재료 손질이나 칼질도 만만치 않다. 수도꼭지에도 손이 잘 닿지 않는다. 찌개가 잘 끓고 있는지 냄비 안을 들여다보기도 어렵다. 휠체어를 탄 채 뜨거운 요리를 거실 식탁으로 옮기려면 외줄타기를 하듯 묘기를 부려야 한다. 식탁이나 책상은 휠체어 탄 사람에겐 너무 높거나 낮을 때가 많다. 다리 사이 간격도 좁아서 사람들과 같이 테이블에 앉으려면 바퀴에서 딱 걸린다.예솔은 “장애인이어서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니라, 장애가 있으면 혼자 일상을 꾸려가기 어렵게 디자인된 환경 탓에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해지는 것 같다”고 했다. 그의 가구 디자인에는 이런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다른 몸’을 가진 사람에게도 안전하고 편안한 가구를 만들자는 것이다. 예솔은 한국의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다. 졸업 후엔 KT에 입사해 온라인서비스 화면을 디자인했다. 일은 적성에 맞았지만 모니터 화면이 아닌, 현실의 공간을 디자인하고 싶었다. 그가 4년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택한 것이 바로 가구였다. 2018년 스웨덴 가구기업인 이케아(IKEA) 장학생으로 선발돼 유학길에 올랐다. 스웨덴 남서부에 있는 룬드대에서 산업디자인 석사과정을 마쳤다.예솔이 휠체어 이용자를 위한 가구를 만들겠다고 다짐하게 된 일화가 있다. 그날은 스웨덴인 친구 안나(52)의 초대로 저녁식사 자리에 간 날이었다. 50년 가까이 ‘걷는 사람’으로 살아온 그는 2년 전 하반신이 마비된 후에도 집으로 친구들을 불러 요리해주는 걸 여전히 즐겼다. 그날도 안나는 평소처럼 주방과 거실을 오가며 직접 음식을 날랐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파스타를 쟁반에 담아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휠체어 바퀴를 굴렸다. 바퀴를 밀 때마다 쟁반 위 접시가 달그락거렸다. 예솔과 친구들은 거실 식탁에서 불안한 눈빛으로 안나를 바라봤다. 장애인이 도와 달라고 하기 전까진 나서지 않는 게 스웨덴식 매너였다.“안나가 왜 직접 음식을 나르려 했는지 이해가 돼요. 휠체어를 탄다고 의존적일 필요는 없잖아요.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음식을 나르는 모습이 우아해 보이지 않았어요. 안나는 친구들에게 근사하게 대접하는 게 중요한 사람인데 그러려면 안나에게 뭐가 필요할까 생각하게 됐어요.”그녀를 자유롭게 해준 가구들기자가 3월 말 스웨덴 룬드에 있는 예솔의 집에 들어섰을 때 크림색 벽면에 원목 가구들이 배치된 세련된 북유럽 인테리어가 눈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게 다가 아니었다.현관에 들어서자 허리 높이에 손바닥만 한 정사각형 버튼이 있었다. 휠체어에 탄 상태로 버튼을 눌러 현관문을 자동으로 여닫을 수 있게 한 것이었다. 각 방 문에는 휠체어에 앉아서도 열고 닫을 수 있도록 긴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방은 물론이고 욕실까지 문턱이 모두 제거돼 있었는데 턱을 제거한 곳을 벽 색깔과 같은 톤으로 마감해 눈에 잘 띄지 않았다.가구들도 자세히 살펴봐야만 미세한 차이를 드러냈다. 휠체어 타는 1인 가구로 스웨덴에서 매년 이사를 다니면서, 휠체어 타는 친구들의 불편을 보면서 떠오른 아이디어를 예솔이 직접 구현해낸 가구들이었다. 우선 주방에 바퀴가 달린 원목의 푸드 트레이가 있었다. 안나와의 저녁식사에서 모티브를 얻은 바로 그 가구였다. 휠체어에 탄 채 가볍게 밀기만 하면 음식이나 무거운 물건을 옮길 수 있게 했다. 구멍 뚫린 직물로 사이드바를 만들어 휠체어에 앉아서도 안에 뭐가 놓여 있는지 잘 보였다.거실의 원형 테이블은 다리가 3개였다. 보통 4개인 테이블 다리를 3개로 줄이고, 대신 다리 사이 간격을 넓혔다. 테이블 다리 사이가 좁아 휠체어 바퀴가 걸리는 문제를 개선한 것이었다. 옷장을 열자 위쪽에 있는 옷걸이 봉에 긴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이걸 잡아당기면 옷걸이 봉이 아래로 내려와 휠체어에 앉아서도 옷을 쉽게 걸고 꺼낼 수 있었다.“이 가구들이 제겐 자유의 첫걸음이에요. 자유가 대단한 게 아니에요. 원할 때 문을 여닫을 수 있고, 옷 걸고 싶을 때 옷 걸고, 요리한 음식을 식탁에서 먹을 수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집에서 이런 걸로 고민하지 않잖아요. 휠체어 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여야 해요.”예솔은 휠체어 이용자들도 쓰기 편한 가구를 만들기 위해 스웨덴인 목수인 페더 칼슨과 힘을 합쳤다. 페더는 예솔의 룬드대 재학 시절 목공예 실습 강사였다. 예솔이 디자인을 그려서 넘기면 페더가 시제품으로 만들었다. 예솔은 시제품을 써보며 설계를 보완했고, 어느 정도 완성품이 나오면 휠체어를 타는 지인들에게 보내 피드백을 받았다.두 사람은 2021년 ‘릴라 엘리펀트(작은 코끼리)’라는 가구회사를 차려 제작을 시작했다. 1년 사이에 5점의 가구가 세상에 나왔고, 푸드 트레이 ‘클룸픽(Klumpig)’은 한국에도 진출해 판매되고 있다. 페더는 “저 역시 장애인의 삶을 잘 몰랐는데 예솔과 작업하면서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됐다”고 했다.‘장애 초래하는 환경’ 바꾸는 디자인의 힘예솔은 스웨덴에서 틈틈이 가구 디자인을 하면서 직장 생활도 병행하고 있다. 전 세계 주요 여행지의 숙소나 박물관, 각국의 대형마트, 백화점 등의 장애인 접근성 정보를 제공해주는 정보기술(IT) 플랫폼 회사에 다닌다. 휠체어용 경사로나 엘리베이터가 있는지, 있다면 어디에 있는지, 시각장애인용 점자나 청각장애인용 보조 장치가 구비돼 있는지 등을 알려주는 애플리케이션을 디자인하는 게 예솔의 업무다.회사 이름은 ‘장애인들 세상을 발견하다(Handicap people discovers the world)’란 말을 줄인 ‘핸디스커버’다. 이 회사 창업자 세바스티앵에겐 근육병으로 다섯 살 때부터 휠체어를 타온 아들이 있다. 그는 고향인 프랑스를 비롯해 여러 나라로 가족여행을 갈 때마다 휠체어 바퀴로 넘어설 수 없는 장벽에 수없이 부딪혔다. 장애인 시설이 없으면, 없다고 알려만 줘도 헛걸음을 줄여 큰 도움이 될 텐데 그런 서비스가 없었다.세바스티앵(사진)은 고령화 등으로 신체 기능에 제약이 생긴 인구가 늘고 있고, 장애를 갖게 된 후에도 여행과 쇼핑을 즐기며 삶의 질을 유지하려는 수요가 많아진다는 점에 착안했다. “경제력을 갖춘 은퇴자들이 많고, 장애인들은 만족스러운 서비스에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려는 성향이 강해 시장성이 있습니다. 기업들도 유럽연합(EU) 정책에 따라 장애인 시설 투자를 많이 했기 때문에 이를 알리고 싶어 해 양쪽의 필요가 맞아떨어지는 거죠.”장애 후에도 삶이 우아하도록3월 말 스웨덴 룬드는 연일 비가 내렸다. 기자는 룬드대 안 카페에서 인터뷰를 위해 예솔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 창문 너머로 예솔이 비를 맞으며 캠퍼스를 가로질러 오는 게 보였다. 휠체어 앞에 동력장치를 결합해 마치 오토바이를 타고 오는 것처럼 보였다. 카페로 들어온 예솔은 오토바이 앞부분처럼 생긴 동력장치를 분리해 구석에 ‘주차’했다. 그러곤 빗방울이 맺힌 바람막이 잠바를 탈탈 털어 휠체어 의자에 건 뒤 기자와 마주 앉았다.―스웨덴에 살아보니 어떤가.“한국과 비교하자면 장애인이 살기에 스웨덴은 제도가 좋고, 한국은 사람이 좋다. 스웨덴은 돌봄 시스템이 탄탄하지만 스웨덴 사람들은 장애인이 곤란한 상황에 처해도 도움을 청하지 않는 한 먼저 손 내밀지 않는다. 장애인이 도움의 대상으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섣불리 나서면 실례가 될 수도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제도에 빈틈이 많지만 그 틈을 사람들이 메운다. 한국에선 휠체어를 타고 가다 문제가 생기면 꼭 누군가가 도움을 준다.”―왜 가구 디자인에 관심을 갖게 됐나.“휠체어를 타다 보면 세상이 내 얼굴에 대고 ‘너는 여기 들어오지 마’라면서 밀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런 배타적인 환경을 만드는 첫 장벽이 가구인 것 같다. 가구는 신체가 환경과 맞닿는 첫 지점이니까. 집에 있는 가구마저 장애인에게 차별적인 경우가 많다. 일부 장애인용 의료기구가 있긴 하지만 입원할 때만 일시적으로 쓴다. 퇴원 이후 집에서 보내게 될 여생을 위한 디자인이 필요하다.”―가구도 상품인데 많이 팔려야 하지 않나.“물론이다. 휠체어 장애인에게 최적의 디자인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매력적인 디자인을 하고 싶다. 스웨덴에서 유모차를 가지고 시내버스에 탄 부모들이 휠체어용 공간을 애용하듯 장애인을 우선 고려한 디자인은 보편적으로도 유용할 수 있다. 요즘 스마트폰 화면 배경을 검은색으로 설정하는 다크모드도 마찬가지다. 원래 시각장애인들이 휴대전화를 볼 수 있도록 도입한 기능인데 간호사들이 많이 쓴다. 야간에 입원 환자들 점검할 때 태블릿이나 스마트폰을 다크모드로 하면 환자들이 덜 방해받기 때문이다.” (예솔이 만든 푸드 트레이 ‘클룸픽(Klumpig)’을 제작·판매하는 ‘아이엠히어’ 정혜원 대표는 “구매 고객들 중 상당수가 40, 50대 비장애 여성들이다. 본인들이 써보시고 부모님께 드리려고 재구매하는 경우도 많다”고 전했다.)―어떤 가구를 지향하나.“아름답고 우아한 가구를 만들고 싶다. 삶의 어느 순간 장애를 갖게 되더라도 만족스러운 환경에서 살 수 있어야 한다. 저 역시 그랬고, 장애를 갖게 되면 그동안 추구했던 삶을 포기해야 한다는 좌절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디자인을 통해 보여주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늙고, 사고를 당할 수 있고, 여성들은 출산을 한다. 삶의 일정 기간은 몸이 불편한 상태로 살아간다. 장애가 장애로 느껴지지 않게 해주는 가구는 많은 사람에게 필요할 수 있다.”―디자이너란 어떤 사람인가.“디자이너가 세상을 보는 눈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물이 디자인이다. 그래서 평소 타인의 삶을 섬세하게 관찰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그들의 눈이 되어줄 수 있다.”내 몸의 소중한 일부, 휠체어기자는 예솔의 집으로 옮겨 사진 촬영을 하며 조심스럽게 제안을 하나 했다. 평소에 휠체어에서 내려와 쉴 때는 어떻게 하는지 찍고 싶다고 하자 예솔은 거실의 그네 의자에 옮겨 앉았다. 촬영을 시작하려는데 예솔이 말했다.“저기 휠체어 좀요.”기자가 무심코 카메라 앵글 밖으로 옮겨놨던 휠체어를 갖다 달라는 말이었다. 예솔은 휠체어를 자기 옆으로 끌어당기며 카메라를 바라봤다. 사진기자는 휠체어의 검은색이 주변 크림색 배경에 비해 너무 색감이 강해 잠시 빼놓고 찍어보자고 했다. 하지만 예솔은 휠체어가 사진에 함께 담겼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기자는 다음 날 예솔과 인터뷰를 하며 휠체어가 사진에 담기길 원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물었다.“저는 척수염이 찾아온 일곱 살 때부터 28년간 휠체어를 타온 사람이에요. 제 몸의 자연스러운 일부죠. 특별히 어떤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 촬영을 하는데 휠체어가 옆에 없어서 순간 가까이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그날 인터뷰에서 예솔은 “장애라는 것을 안타깝게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저는 저의 장애를 진솔하게 대하고 싶다”고 했다. “누구나 자신의 민낯을 마주보는 게 힘들지만 용기 내서 직시하고 나면 그때부턴 괜찮아지는 것 같아요. 저 역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끌어안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젠 몸에 있는 하나의 점처럼 느껴져요.”가구로 스웨덴 뒤흔들다예솔은 4월 말 기다리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가 만든 가구들이 룬드시가 속한 스웨덴 스코네주(州) 주관 ‘2023 디자인 어워드’ 대상작으로 선정됐다는 소식이었다. 예솔은 스웨덴의 디자인 공모전에 여러 번 도전했지만 낙방을 거듭했다. 마침내 디자인 선진국 북유럽에서 진가를 인정받은 것이다. 주최 측은 “어떤 신체 조건을 갖고 있든 충만한 일상을 보낼 가치가 있다는 접근법은 스웨덴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통념을 뒤흔들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가구 디자인을 계속하려면 아직은 지속적인 펀딩이 필요해요. 그래서 공모전 때마다 계속 냈는데 이번엔 진짜 될 거라고 생각했던 곳에서도 번번이 떨어졌어요. ‘이 작업을 세상이 과연 알아봐 줄까’ 하는 자기 의심이 들 때도 많았죠. 제가 너무 실망하니까 페더가 그러더군요. ‘우리가 의자 하면 딱 떠오르는 디자이너, 조명 하면 생각나는 그 디자이너… 그 스타 디자이너들이 알려지기까지는 평생이 걸렸다’고요. 제가 너무 빨리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을 부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예솔은 4월 16일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서 열린 ‘걸즈온휠즈’라는 토크콘서트에 참석했다. 휠체어를 타는 2030세대 여성들이 모여 각자의 일과 일상을 공유하는 자리였다. 초등학생부터 30대까지 다양한 연령의 여성들이 탄 휠체어 50여 대가 무대 앞을 가득 메웠다. 행사 초대를 받고 스웨덴에서 날아온 예솔이 무대에 올랐다. 휠체어들 사이로 한 20대 여성이 자신의 시각장애인 안내견을 쓰다듬으며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예솔은 유심히 바라봤다. 예솔은 그 여성의 귓가에 펼쳐놓듯이 자기소개를 시작했다.“여러분, 제 소개를 해볼게요. 지금 저는 휠체어를 타고 있어요. 짙은 회색의 수동 휠체어예요. 제 머리는 검은색에 단발머리이고, 위아래로 베이지색 블라우스와 치마를 입었습니다. 오늘 좀 밝은 느낌을 내보고 싶어서요. 자 그럼, 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동아일보는 장애의 빈틈을 기술과 디자인으로 채우며 다시 일어선 ‘다른 몸의 직업인’ 5명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로봇팔을 한 사이클 선수, 시력을 잃어가는 작곡가, 손을 못 쓰는 치과의사, 휠체어를 타는 ‘걷는 로봇’ 연구원과 스웨덴에서 활동하는 가구 디자이너…. 부서진 몸으로 다시 일어선 이들은 말합니다. 삶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고.<특별취재팀>▽기획·취재:룬드(스웨덴)=신광영 neo@donga.com 홍정수 이채완 기자▽사진:룬드(스웨덴)=송은석 기자▽디자인:김수진 기자※아래 주소에서 [장애, 테크로 채우다]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디지털로 구현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김예솔 디자이너 유튜브 계정룬드(스웨덴)=신광영 기자 neo@donga.com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이채완 기자 chaewani@donga.com}
“그날 사이클 트랙에 들어서는데 컨디션이 최고였어요. ‘이래도 나를 국대(국가대표)로 안 뽑아?’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죠. 신기록을 낼 거 같아서 경기 전에 주최 측에도 얘기해놨어요. 원래 뒤에서 출발한 선수가 앞 선수를 따라잡으면 시합이 도중에 끝나는데 제가 앞 선수 따라잡더라도 흐름을 끊지 말아달라고요.”지난해 10월 전국체전 사이클 경기가 열린 강원 양양 벨로드롬에 장내방송이 울려 퍼졌다. ‘이번 경기는 추월 승부가 아니고 기록경기입니다. 심판진은 경기 중단 없이 끝까지 진행해주세요.’장애인 사이클 국가대표 상비군인 나형윤 선수(39)는 이날 자신감에 부풀어있었다. 출발선에 선 형윤은 한바퀴가 333m인 달걀형 트랙을 찬찬히 살폈다. 승부를 겨룰 다른 선수는 반 바퀴 앞인 맞은편에서 출발대기 중이었다. 이 트랙을 12바퀴(총 4km) 도는 경기였다. 형윤은 몇 주 전 비공식 4km 경기에서 기존 신기록을 훌쩍 넘겼다. 국가대표 선발전인 이번 체전에서 그때처럼만 달려준다면 태극마크를 달 수 있었다.형윤은 출발선 옆 관중석으로 고개를 돌려 두 사람과 눈을 맞췄다. 딸 하나린(8)과 부인 박미선(39) 씨였다. 하나린은 ‘하늘에서 내려온 아이’라는 뜻의 순우리말이다. 딸아이는 이날 아침에도 평소처럼 형윤에게 ‘로봇팔’을 건네며 “아빠, 오늘도 일등 해”라고 말했다. 두 팔이 없는 형윤은 딸이 로봇팔이라고 부르는 전자의수를 착용하고 사이클을 탄다. 팔뚝 절단 부위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으로 의수의 손을 오므렸다 폈다 할 수 있다.“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린, 아빠 팔 좀 갖다 줘’ 이렇게 말하곤 해요. 경기 있는 날 아침엔 드라이기나 손 선풍기로 의수를 꼼꼼히 말려요. 의수와 피부 접촉면에 땀이 차면 오작동이 날 수 있어서요.”국가대표 선발전 그날출발 신호가 울리자 형윤은 ‘댄싱’을 시작했다. 안장에서 엉덩이를 뗀 채 사이클을 좌우로 흔들며 매섭게 치고 나갔다. 사이클 선수들은 속도를 빠르게 끌어올리기 위해 핸들 손잡이를 몸 쪽으로 잡아당기며 춤을 추듯 좌우로 무게중심을 옮긴다. 이 때 페달을 힘껏 구르면서 동시에 핸들을 강하게 잡아당길수록 속도가 빨리 붙는다. 형윤에겐 전자의수가 빠지지 않도록 힘 조절을 잘 해야 하는 순간이다. 이 때만 해도 경기는 순조로운 듯 했다.댄싱으로 반 바퀴쯤 달려 속도가 붙자 형윤은 안장에 앉아 몸을 웅크렸다. 사이클 바퀴에서 나는 ‘쐐’ ‘쐐’ 소리가 고요해진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이제 형윤은 핸들 손잡이에서 손을 떼서 핸들 가운데 세로로 뻗어있는 티티바(TT바·Time Trial Bar)로 옮겨 잡을 타이밍이었다. 티티바를 잡아야 몸이 공처럼 모아져 공기 저항을 최소화시킬 수 있다.“왼손부터 티티바로 옮겨 잡으려고 하는데 핸들을 쥔 손이 펴지지가 않는 거예요. 손이 그 상태로 잠겨버린 거죠. 댄싱할 때 팔을 살살 당긴다고 당겼는데 힘이 들어갔는지 의수가 살짝 들려서 배터리 접촉 불량이 된 거 같더라고요. 급한 마음에 배터리가 단자와 잘 맞붙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오른팔을 핸들에서 떼서 왼팔을 막 때렸어요. 근데 왼손이 움직이기는커녕, 오른손마저 충격 때문에 오류가 나서 손이 벌려진 채로 말을 듣지 않더라고요.”응원석에 있던 미선은 비틀비틀 트랙을 달리는 남편을 조마조마하게 바라봤다. 승부욕이 강한 형윤에게 미선은 “욕심 내지 말고 다치지 말자”는 말을 자주 해왔다. 미선에게 남편의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를 들려왔다.“손이 망가졌어! 손이 안돼!”형윤은 오른손이 공중에 들린 채로 왼손으로 핸들을 잡고 사력을 다해 페달을 구르고 있었다. 사이클 전용 경기장인 밸로드롬은 트랙 양끝에 있는 반원 모양 곡선주로의 경사가 40도 정도로 가파르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선수들이 트랙 밖으로 튕겨나가지 않도록 막기 위해서다.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형윤은 파도 꼭대기에 선 서퍼처럼 아슬아슬하게 곡선주로를 달렸다. 몸이 부서지고 난 뒤 형윤이 두 팔을 잃던 날 저녁은 강풍이 불었다. 그가 강원도 최전방인 22사단 GOP 부대 중사로 근무하던 2006년 11월이었다. 강풍에 고압선이 끊어져 북쪽을 비추는 철책 경계등이 모두 꺼져버렸다. 야간에 북한군의 동태를 살피기 어렵게 된 비상사태였다. 상급부대에서 전기 기술자를 급파했다. 그 기술자는 바람이 계속 불어 위험하다며 복구 작업을 포기했다.그러자 부대장은 형윤에게 작업을 청했다. 형윤은 부대 간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전봇대에 올랐다. 하지만 몇 시간 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땐 고압전기가 양팔과 겨드랑이, 허벅지 등을 관통해 몸 곳곳이 터져나간 상태였다. 8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두 팔은 절단해야 했다. 이듬해 전역할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세 살이었다.형윤은 중고교 동창이자 동갑인 미선이 처음 문병을 왔던 날 짓궂게 인사를 건넸다. “야 이 기집애야, 오빠가 다쳤는데 이제야 오냐.” 미선은 응수했다. “여자 동창들 중에 나 혼자 왔거든. 고마운 줄이나 알아.”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은 5년간의 연애 후 2014년 결혼했다. 결혼식 날 형윤은 실리콘으로 된 의수 손가락에 결혼반지를 끼었다. 결혼에 이르기까지 우여곡절을 지켜봐온 하객들은 저마다 눈물을 쏟았지만 신랑 신부는 예식 내내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이듬해 딸이 태어날 때만해도 형윤은 당구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팔을 잃은 청년 장애인이 생계를 위해 마련한 나름의 대안이었지만 결국 처분했다. “아이에게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아빠이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서 복지시설에 취업했어요.” 형윤은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태권도와 철인3종을 하는 장애인들을 알게 됐고 그들의 권유로 운동을 시작했다. 금세 소질을 보인 형윤은 철인3종 가운데 하나인 사이클 선수가 됐다. 그는 “제가 (사이클을) 잘은 못 타도, 할 수 있는 거라서 도전하게 됐다”고 했다.전자 의수를 착용하면 자전거를 타는 게 가능했다. 브레이크는 안장 바로 밑 프레임에 옮겨 달아 허벅지를 오므리면 잡을 수 있게 개조했다. 또 고개만 숙이면 물을 마실 있도록 긴 투명 빨대를 물통에서 핸들 앞까지 연결했다. 포스코1%나눔재단 등에서 지원받은 보조기구들도 ‘빈틈’을 메워줬다. 형윤은 마음이 답답한 날이면 친구들과 집이 있는 가평에서 서울까지 자전거로 다녀오기도 했다. 자전거는 장애를 갖게 된 뒤 움츠려드는 형윤이 다시 세상으로 나갈 수 있게 해준 친구였다.장애인 사이클은 장애 정도에 따라 5등급으로 나뉘고 1등급에 가까울수록 중증인데 형윤은 4등급으로 분류됐다. 등급에 따라 가중치를 적용하기 때문에 경증인 선수가 중증 선수보다 순위가 높으려면 기록이 월등히 좋아야 한다. 형윤은 지난 4년 간 한 단계씩 올라서며 국가대표 상비군이 됐다.장애인이 운동선수를 직업으로 유지하려면 국가대표가 돼야 한다는 게 형윤의 생각이었다. 그래야 국제대회에 출전할 수 있고 거기서 포인트를 쌓아야 패럴림픽에도 나가며 후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몸이 부서지고 난 뒤 비로소 시작한 사이클은 그에게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딸에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될 수 있게 해줬다.멘탈이 터지고 딸의 목소리만짧은 시간 동안 폭발적인 스피드로 승부하는 사이클 트랙 경기에선 몸을 최대한 낮춰 공기저항을 줄여야 한다. 한손으로 핸들을 잡고 달리던 형윤은 균형을 잡으려 몸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페달을 굴러도 속도가 나지 않았다. 이번 경기를 통해 국가대표가 되고자 했던 형윤은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웠다.“정말 중요한 순간에 오작동이 와버리니까 멘탈이 터져버렸어요. 코치는 ‘그냥 달려!’ 이러는데 저는 그냥 멘탈이 나가버리더라고요.”관중석에 있던 8살 딸이 미선에게 물었다. “엄마, 아빠 오늘 왜 그래?”“아빠가 손이 고장 나서 넘어질지도 몰라. 하나린이 아빠 잘 타라고 응원해줄래.”네 살 때부터 아빠 경기를 따라다녔던 딸은 형윤이 질주할 때면 자그마한 몸으로 경기장이 떠나가도록 응원했다. 꼬마의 우렁찬 목소리에 다른 관중들도 박수를 치며 추임새를 넣는 일이 많았다. 아이는 초등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수줍음을 느끼게 됐는지 응원소리가 작아졌지만 이날만큼은 예전처럼 온 힘을 다했다. ‘쐐~’ ‘쐐~’ 소리만 나던 경기장에 여리지만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빠 아빠!”, “아빠 파이팅!”, “아빠 이겨라!” 시합을 계속해야 할지, 포기할지 정신이 혼미했던 형윤은 이 소리를 바로 알아챘다. “딱 그 소리밖에 안 들렸어요. 아이가 꼬맹이 때처럼 목이 터져라 외치는….” 형윤은 다시 세차게 페달을 밟았다. 하지만 오래 달리지는 못했다. 딸아이의 눈앞에서 상대 선수에게 따라 잡히고 말았다. 이기는 건 당연하고 신기록을 목표로 시합에 나섰던 형윤은 추월 패를 당해 트랙에서 내려왔다. 의기소침해진 그는 경기 후 양양 앞바다에서 돌 틈에 숨은 꽃게를 같이 잡자는 아이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국가대표 선발전에서 고배를 마신 형윤은 “그래도 로봇팔이 있어서 지금의 제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의수는 제 몸의 일부인데 어떻게 원망하겠어요. 더 철저히 대비하지 못한 제 잘못이죠.”결혼 전에 형윤은 의수를 밖으로 내놓고 반팔 차림으로 외출하곤 했지만 딸이 태어난 뒤부턴 여름에도 밖에 나갈 땐 긴팔을 입는다. 의수를 낀 아빠 때문에 아이가 불편한 시선을 받을까봐 걱정되기 때문이다.형윤은 딸의 학교 친구들이 집에 놀러와 나누던 대화를 우연히 들은 적이 있다. 한 친구가 “애들이 교실에서 ‘하나린 아빠는 장애인’이라면서 웃고 떠든 적이 있다”고 하자 딸이 “나 그 때 교실에 없었는데…”라며 말을 흘렸다. 그러자 친구는 “너 그때 교실에 있었잖아”라며 천진하게 말했다. 형윤은 딸의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말없이 바라봤다.딸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친구들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우리 아빠 장애인인데 그게 뭐가 어때서. 우리 아빠, 나라 지키다가 다친 거야. 장애인이 창피한 거 아냐.”몇 주 뒤 미선은 딸 담임교사와 면담하며 이 일화를 꺼냈다. 교사는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다”고 미선을 안심시켰다. “하나린이 반 아이들에게 ‘우리 아빠 팔은 로봇팔이야. 군대에서 다쳐가지고 국가유공자이고 사이클 선수야’라고 자랑하듯 얘기하더라고요.”엄마는 똥손, 아빠는 금손미선이 출산 이후 혼자 외출을 해본 건 딸이 태어난 지 952일만이었다. ‘독박육아’를 각오하긴 했지만 팔이 자유롭지 않은 남편의 빈자리는 컸다.“처음으로 혼자 외출한 날짜를 정확히 기억할 정도로 독박육아를 했어요. 제가 육체적으로 힘들었다면 신랑은 정신적으로 힘들었을 거예요. 눈앞의 아기를 얼마나 안아보고 싶었겠어요. 다른 아빠들처럼 기저귀 갈고, 목욕시키면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고 싶었을 거예요. 다행히 아이가 몸을 가눌 수 있게 되면서부터는 신랑이 기저귀를 갈았어요. 사회복지사로 일할 때 어르신들 기저귀 갈아드리는 일을 한 적이 있어서 맨손으로 곧잘 하더라고요.”딸을 맘껏 안아주기 어려운 형윤은 배낭처럼 메는 캐리어에 아이를 태우고 틈만 나면 나들이를 다녔다. “신랑은 몇 시간이고 아이를 어깨에 메고 산에 가고 바다도 가고 전국을 다녔어요. 물고기도 같이 잡고, 스키도 같이 타고, 부루마블 게임도 하고…. 요즘은 신랑이 아침에 누룽지 끓여서 아이 밥 먹이고 등교까지 시켜서 저는 많이 편해졌어요. 다른 어떤 아빠들보다 아이와 많은 걸 함께 해요. 하나린은 아빠의 장애를 느낄 겨를이 없을 거예요.”형윤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딸의 그림 친구이기도 하다. 의수에 연필을 끼워 쓱쓱 그려낸다. “신랑이 옛날에 학교 다닐 때부터 판화 같은 걸 엄청 잘 했었거든요. 나비 한 마리를 그려도 저는 유치원생처럼 그리는데 신랑은 호랑나비도 거의 똑같이 그려줘요. 그래서 하나린이 저한테 만날 그러죠. 엄마는 똥손이고 아빠는 금손이야.”금메달도 메우지 못한 빈자리형윤은 지난해 4월 네델란드에서 열린 세계 상이군인 체육대회인 ‘인빅터스 게임’에 출전해 남자 사이클 부문(개인독주 로드바이크1)에서 우승했다. 세계 각국 상이군인 출신 선수들이 모이는 이 대회에선 메달 수여식이 독특했다. 금·은·동 메달리스트가 높이 차가 없는 연단에 나란히 서고, 자녀나 배우자 등 가족이 선수에게 메달을 걸어줬다. 한 여자선수에겐 남자친구가 메달을 걸어준 뒤 무릎을 꿇고 청혼하기도 했다. 형윤은 딸아이 또래의 여자아이가 휠체어에 탄 아버지에게 메달을 걸어주며 목을 끌어안는 장면을 가만히 바라봤다.“가족들 동행은 지원이 안 된다고 해서 저 혼자 오긴 했는데 딸과 아내가 함께 왔더라면 좋았겠다 싶었어요. 한국에선 상이군인이라고 자부심을 느껴본 적이 없는데 여기 선수들과 가족들은 정말 자랑스러워하더라고요. 제가 딸에게 아빠가 나라를 위해 일하다가 다쳤다고 얘길 해주긴 했지만 아이는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를 수 있잖아요. 금메달 딴 거 많이들 축하해주셔서 감사하긴 한데 사실 남들 평가가 중요한 건 아니에요. 내 가족이, 내 딸이….”형윤은 말을 잠시 멈추고 촉촉하게 붉어진 눈동자를 깜박였다. 기자와 인터뷰할 때마다 개구쟁이 같은 눈빛으로 거침없이 말하던 평소와는 다른 눈동자였다.그는 인빅터스 대회에 함께 출전한 동료 선수들로부터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군 간부가 공무 중 부상으로 장애를 얻으면 상이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된 것이다. 제대 후 15년이 지났지만 형윤은 늦게나마 상이연금을 받을 수 있는지 국방부에 문의했다. 하지만 담당자는 장애 발생 5년 내에 연금을 신청해야 한다는 규정 탓에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 ‘5년 시효’가 지났더라도 장애가 악화된 경우 신청이 가능했지만 형윤은 이미 가장 중증인 장애1급으로 전역해 해당될 수 없었다.“제 권리에 무지했다는 것에 자책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전역 당시 상이연금에 대한 안내가 전혀 없었고, 5년 내 신청해야 한다고 하는데 23살에 양팔을 절단하고 어떻게 살지 막막하던 시기여서 다른 건 신경 쓸 여력이 없었어요.”“아빠 가슴에 왜 내가 있어?”올해 첫 전국 대회가 열린 5월 6일 전남 영암국제자동차경주장 선수 대기실은 ‘쐐’ 소리로 가득했다. 경기 시작 30분을 앞두고 몸 풀기가 한창이었다. 사이클 뒷바퀴를 거치대에 올려놓고 페달을 구르는 형윤의 허벅지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형윤은 핸들 위에 깔아놓은 흰 수건 위에 맨 팔뚝을 기댄 채 페달을 굴렀다.조금 뒤 사이클에서 내려온 그는 뚝뚝 떨어지는 땀을 닦아냈다. 이제 출발선으로 이동할 차례였다. 형윤은 젖은 훈련복을 벗고 맨 팔뚝으로 유니폼 상의를 꺼내들었다. 옷 아래쪽을 입으로 물고 능숙하게 한 팔 씩 소매에 집어넣는데 그의 가슴팍에 주먹만한 문신이 살짝 비쳤다. 딸의 앳된 얼굴이 왼쪽 가슴에 새겨져있었다.“아빠 가슴에 왜 내가 있어?”라고 아이가 물을 때면 형윤은 “하나린이랑 함께 있는 것처럼 느끼고 싶어서”라고 말해준다.유니폼 지퍼를 올린 그는 사이클 옆에 놓아둔 때 묻은 로봇 팔을 한 짝씩 꼈다. 이어 오른손으로 왼손을 한 번 툭, 왼손으로 오른손을 한 번 툭 쳤다. 그래야 두 팔에 전원이 켜진다. 형윤은 안장에 몸을 실으며 이제 한 몸이 된 두 손으로 사이클 핸들을 굳게 쥐었다. 그러곤 탁 트인 트랙을 향해 페달을 밟았다.동아일보는 장애의 빈틈을 기술과 디자인으로 채우며 다시 일어선 ‘다른 몸의 직업인’ 5명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로봇팔을 한 사이클 선수, 시력을 잃어가는 작곡가, 손을 못 쓰는 치과의사, 휠체어를 타는 ‘걷는 로봇’ 연구원과 스웨덴에서 활동하는 가구 디자이너…. 부서진 몸으로 다시 일어선 이들은 말합니다. 삶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고.<특별취재팀>▽기획·취재: 신광영 neo@donga.com 홍정수 이채완 기자▽사진: 송은석 기자▽디자인: 김수진 기자※아래 주소에서 [장애, 테크로 채우다]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디지털로 구현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이채완 기자 chaewani@donga.com}
미국 연방대법원이 지난달 29일(현지 시간) 1961년 이후 대학 입시, 공공기관 채용 등에서 비(非)백인을 우대해 온 ‘소수인종 우대 정책(어퍼머티브 액션)’을 두고 62년 만의 위헌 판결을 내리자 미 이념 갈등 및 분열이 격화하고 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이날 “(현 대법원은) 정상적인 법원이 아니다”라며 판결을 약화시킬 수 있는 각종 교육 정책을 도입하겠다고 반발했다. 집권 중 3명의 보수 성향 대법관을 임명해 대법관 9명 중 6명을 보수파로 채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미국이 능력 기반 제도로 돌아가야 한다”고 반겼다. 대법원은 이날 아시아계 학생 단체 ‘SFA’가 하버드대와 노스캐롤라이나대를 상대로 “소수계를 우대하며 백인 및 아시아계 지원자에게 불이익을 주고 있다”고 2014년 제기한 헌법소원을 각각 6 대 2, 6 대 3으로 위헌 판결했다. 이에 관한 다수 의견서를 쓴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인종이 아닌 개인의 경험으로 학생을 평가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소수계 우대는 낙태, 이민, 총기 등과 함께 이념 갈등의 주요 의제로 꼽힌다. 보수 우위의 대법원은 지난해 6월에도 낙태권 폐기 판결을 내렸다. 이에 반발한 진보 유권자가 결집해 다섯 달 후 중간선거에서는 집권 민주당이 상원 다수당 위치를 지켰다. 마찬가지로 이번 판결 또한 내년 대선의 향배를 가를 핵심 의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하버드大 아시아계 역차별, 위헌 불러… “韓학생 유불리 두고봐야” ‘美 소수인종 대입 우대’ 위헌 판결SAT점수 아시아계 월등히 높은데하버드 입학 확률은 흑인이 더 높아“공정한 입시 한국 학생에 기회”미국 연방대법원의 소수계 우대 정책 위헌 판결로 미 주요 대학의 입학 사정은 물론이고 사회 전반에 적지 않은 변화가 예상된다. 특히 이번 판결이 최고 명문 하버드대를 둘러싼 소송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교육열 높은 한국 등 아시아 각국의 관심 또한 상당하다. 다만 아시아계 학생의 유불리 여부는 당장 단정하긴 어렵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표면적으로는 미 대학입학자격시험(SAT)에서 높은 점수를 얻고도 소수계 우대 정책을 통해 흑인, 히스패닉 학생에게 부여된 가산점 때문에 피해를 받았던 아시아계 학생이 명문대 입학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계기가 마련됐다. 그러나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 진보 세력 등이 판결에 거세게 반발하며 이를 무력화할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힌 데다 아시아계가 아닌 백인 학생이 주 수혜자가 될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 NYT “하버드의 아시아계 차별→위헌 판결” 흑인 인권운동이 활발했던 1960년대 도입된 이 정책은 태생적으로 ‘역차별’ 논란을 불렀다. 미 주요 대학의 인종 다양성이 확보되긴 했지만 성적이 좋은 일부 백인 학생은 자신보다 성적이 낮은 흑인, 히스패닉 학생에게 밀려 명문대에 들어가지 못한 것에 불만을 표했다. 미 주요 인종 중 학업 성적이 가장 우수한 아시아계는 자신들 또한 소수계임에도 이 정책으로 흑인과 백인 모두에게 역차별을 받는다고 호소했다. 특히 일부 명문대가 아시아계 학생의 리더 자질 및 융화 노력 부족 등을 거론하며 백인에 비해 아시아계 선발에 소극적이었던 것도 이런 불만을 키웠다. 데이비드 프렌치 뉴욕타임스(NYT) 칼럼니스트 또한 30일 칼럼에서 하버드대의 아시아계 차별이 이번 위헌 판결로 이어졌다고 진단했다. 위헌 판결에 동조한 존 로버츠 대법원장 또한 학업 성적 하위 40%인 흑인 학생의 하버드대 입학 확률이 상위 10%인 아시아계보다 높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아시아계 학생의 성적 우수는 통계로 입증된다. 지난해 아시아계의 SAT 평균 점수는 1229점. 백인(1098점), 히스패닉(964점), 흑인(926점)보다 높다. 2021년 기준 미 인종별 구성은 백인 59.4%, 히스패닉 18.4%, 흑인 12.2%, 아시아계 5.6% 순이다. 인구 비중이 가장 작으니 소수계 우대 정책 실시 때 나머지 세 인종보다 소외될 여지가 큰 셈이다.● 韓 학생 유불리 두고 봐야 한국계 학생의 유불리에 대한 전망은 엇갈린다. 송재원 유웨이 교육평가연구소 해외사업팀장은 “미 학교들이 성적이 우수한 아시아계 학생을 기득권층으로 여겨 다른 인종에 비해 더 깐깐한 자격을 요구해 왔다. 인종 차별 없이 공정한 입시를 치를 수 있다는 측면에서 한국 학생에게 기회가 생겼다”고 긍정 평가했다. 1996년부터 주(州) 차원에서 소수계 우대 정책을 폐지한 캘리포니아주에서도 이후 명문 주립대의 아시아계 학생 진학률이 올라갔다. 다만 판결의 혜택이 아시아계가 아닌 백인에게 집중될 것이란 분석도 있다. 미 명문대를 이끄는 학내 지도부, 주 후원자 모두 백인인 탓이다. 판결 직후 하버드대 아시아계 학생 단체 ‘하버드AAA’는 성명을 통해 “이 판결로 흑인, 히스패닉 학생의 비율이 줄겠지만 그 자리는 대부분 백인이 대체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아시아계 중에서는 유학생 수가 많은 중국계와 인도계가 한국계보다 더 많은 혜택을 볼 가능성이 있다. 지난해 11월 미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미국의 한국 유학생은 4만755명이다. 중국(약 29만 명), 인도(약 20만 명)에 비해 훨씬 적다. 백인 경관에 의한 비무장 흑인 사망 등으로 흑백 갈등이 이미 심각한 상황에서 이번 판결에 따른 미 전반의 다양성 약화가 아시아계에 또 다른 부메랑이 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판결에 반발한 흑인과 히스패닉이 아시아계에 대한 증오 범죄를 자행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미국 대학 입시, 공공기관 채용 때 비(非)백인을 우대하도록 한 정책. ‘흑인 및 히스패닉계 학생에 비해 성적이 우수한 백인 및 아시아계 학생이 피해를 입는 역차별’이란 비판과 ‘인종 차별을 완화시킨다’는 긍정론이 맞선다. 워싱턴=문병기 특파원 weappon@donga.com홍정수 기자 hong@donga.com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중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인구 대국으로 떠오른 인도가 세계 무대 중심에 서려는 꿈을 키우고 있지만 ‘질 나쁜 교육’이 장애물이 되고 있다. 인도 교육이 상위권 학생에게 자원을 집중하는 시스템이다 보니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통신기술(ICT) 인재를 배출하는 이면에는 대다수 학생들이 기초학력조차 갖추지 못하는 그늘이 있다. 영국 시사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인도 인구와 경제 규모는 커지고 있지만 저학력 젊은이들이 국가 성장 잠재력을 갉아먹어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 수 있다고 진단했다.● 학생 2억6000만 명 상당수 기초학력 미달인도는 인구 평균 연령이 29세에 불과할 만큼 젊고 붐비는 나라다. 인도 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총 학생 수는 2억6523만 명, 각급 학교는 149만 개교에 이른다. 하지만 인도 전체 어린이의 4분의 3에 이르는 농촌지역 아동을 대상으로 조사한 연간 교육 현황 보고서(ASER·2022)에 따르면 기초학습 능력이 심각한 수준이었다. 수학의 경우 5학년(10세) 아동 26%만이 기본적인 나눗셈을 할 수 있었다. 8학년 읽기 시험에서는 2학년 수준의 글을 읽을 수 있는 아동이 70%도 되지 않았다. 인도는 여전히 고등교육 진학률이 상당히 낮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인도 중부 차티스가르주(州)의 초등학교 등록률은 95%인 반면 고등학교 등록률은 57.6%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인도가 교육의 양적 확장을 꾀하면서 최근 10년간 학교 시설 수준과 상급 학교 진학률은 꾸준히 증가했다. 문제는 성적 추이는 제자리걸음이라는 점이다. 공립학교와 사립학교 간 격차도 벌어졌거나 비슷하게 유지됐다. 2학년 수준의 글을 읽을 수 있는 8학년생이 사립학교에서는 80%였지만 공립학교에서는 66%에 불과했다. 2017년 공립학교에 대한 교육당국 불시 조사에서는 교사 4분의 1가량이 결근한 것으로 나타났다.● 엘리트 교육 중심, 교육-빈부 격차 극심이코노미스트는 학력 저하의 주요 원인을 인도 특유의 엘리트 교육에서 찾았다. 1947년 영국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인도 정부는 빠르게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소수 명문대, 소수 엘리트를 키우는 데 교육의 초점을 맞췄고 지금까지 이를 유지하고 있다. 인도 싱크탱크 정책연구센터(CPR) 야미니 아이야르 센터장은 인도 교육이 “줄 세우기 식”이라며 “맨 앞 두 줄만 가르치는 시스템”이라고 꼬집었다. 엘리트 교육의 최전선에 델리인도공대(IIT Delhi)가 있다. 1951년 설립된 IIT는 순다르 피차이 구글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해 미국 실리콘밸리를 주름잡는 수많은 인도계 엔지니어를 배출했다. IIT 입시 경쟁도 치열해 학부모들이 비싼 사교육비를 대기 위해 집을 팔거나 대출을 받는 일도 벌어진다. IIT에 재학 중인 스리카르 안켐 씨는 동아일보에 “상위 1% 학생들은 학교를 가지 않고 입시 전문 학원에서만 생활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반면 대다수의 학생들이 다니는 공립학교나 등록금이 저렴한 사립학교에서의 기초교육은 교육당국의 우선순위에서 벗어나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라지 쿠마르 씨는 “카스트 제도의 잔재로 극심한 빈부 격차가 교육 격차로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변화 조짐은 있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2020년 상위권 중심이던 교육 커리큘럼을 조정하고 전반적 기초학력을 높이기 위한 교육 개혁 방향을 발표했다. 취학 전 교육 강화와 성과에 따른 교사 보상 방침도 제시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성공에 대한 인도(인)의 인식을 감안하면 인도의 교육 개혁이 쉽지 않은 길”이라면서도 “인도 정부가 목표한 대로 제조업과 경제를 키우려면 결국 필요한 것은 (엘리트가 아닌) 대다수 젊은이들”이라고 짚었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김수현 기자 newsoo@donga.com}
황금 색채의 거장으로 불리는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마지막 초상화가 27일(현지 시간) 경매에서 유럽 내 예술작품으로는 최고가에 낙찰됐다. 경매회사 소더비는 이날 영국 런던에서 열린 경매에서 클림트가 숨지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두 점의 그림 중 하나인 ‘부채를 든 여인’이 8530만 파운드(약 1419억 원)에 낙찰됐다고 밝혔다. 이는 앞서 2010년 2월 소더비 런던 경매에서 1억432만 달러(약 1363억 원)에 낙찰된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청동조각 작품 ‘걷는 사람Ⅰ’의 기록을 깬 것이다. 소더비 측이 사전에 예상한 낙찰가인 8000만 달러(약 1034억 원)도 훌쩍 뛰어넘었다. ‘부채를 든 여인’은 앞서 1994년 소더비 뉴욕 경매에서 1160만 달러(약 151억 원)에 팔렸다. 약 30년 만에 낙찰가가 10배 가까이로 오른 것이다. 소더비는 최종 구매자가 소더비 아시아 전 회장이었던 패티 웡이라고 전했다. 그는 홍콩의 한 수집가를 대리해 이번 경매에 참여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작품은 1918년 56세였던 클림트가 뇌경색으로 쓰러진 뒤 폐렴으로 숨졌을 당시 작업실 이젤 위에 놓여 있다가 발견됐다. 클림트의 후원자이자 친구였던 에르빈 뵐러가 소유하다 수집상을 거쳐 1994년 경매에 등장했다. ‘부채를 든 여인’에는 패션과 직물, 동양 문화에 관심이 컸던 클림트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모델은 봉황이 그려진 동양적 문양의 드레스를 입은 채 어깨를 노출하고 있다. 소더비 측은 이 작품에 대해 “능력이 절정에 달한 예술가의 걸작”이라며 “경계를 벗어나려는 실험적 시도로 가득하다”고 평가했다. 클림트는 ‘키스’와 ‘유디트’ 등 금박을 활용한 화려하고 대담한 작품들로 유명하다. 그가 그린 풍경화 ‘자작나무 숲’은 지난해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460만 달러(약 1368억 원)에 낙찰됐다. 전 세계 미술품의 최고가 기록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예수를 그린 ‘살바토르 문디’다. 이 작품은 2017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4억5030만 달러(약 5890억 원)에 낙찰됐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혁신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에서 마약성 환각물질을 사용하는 일이 성행하고 있다고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7일 전했다. 집중력과 창의력을 높이고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기업가들이 환각물질을 ‘혁신의 돌파구’로 여긴다는 것이다. WSJ에 따르면 테슬라와 스페이스X의 최고경영자(CEO)인 일론 머스크는 향정신성의약품인 케타민을 투약하고, 구글 공동 창업자 세르게이 브린은 ‘환각버섯’으로 알려진 실로시빈을 사용한다고 주변인들은 전했다. 수면마취제인 케타민은 환각 증상을 유발해 국내에서는 ‘클럽 마약’으로도 알려져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벤처캐피털 회사 중 하나인 파운더스 펀드는 고위직들이 참여한 비공개 파티에서 환각성 약물을 내놓은 것으로 전해졌다. 실리콘밸리에서 마약 사용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샌프란시스코 기반의 컨설턴트 출신인 칼 골드필드는 “수백만 명이 환각제를 소량씩 복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타트업 빌드베터AI의 스펜서 슐럼 CEO는 “벤처캐피털과 투자자들은 평범한 사람, 평범한 기업이 아니라 특별함을 원한다”며 자신도 세 달에 한 번씩 LSD를 복용한다고 밝혔다. 머스크 CEO는 이날 “(우울증에 처방되는)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차단제(SSRI)는 사람들을 자주 ‘좀비’로 만든다. 케타민을 가끔 복용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이라는 트윗을 올렸다. 다만 과거 ‘퇴근 후 활동’이었던 환각제 사용은 최근 기업 문화로 굳어졌다고 WSJ는 전했다. 창고형 할인점에 빗대 ‘코스트코’로 불리는 큰손 마약상들을 통해 공동 구매를 하기도 한다. 암호화 메시징 앱인 ‘시그널’ 등을 통해 초대가 이뤄지는 폐쇄형 파티에서는 환각물질이 일반 파티에서의 칵테일처럼 가볍게 제공된다고 한다. 환각물질 사용을 합법화하기 위한 연구와 투자가 늘면서 관련 시장 규모가 2029년이면 현재의 2배로 커질 것이라는 예측도 나왔다. 전문가들은 약물로 기분을 전환하려는 움직임들이 약물 의존이나 자기 파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부분의 마약류 사용이 불법인 만큼 경영진들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고 WSJ는 전했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혁신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에서 마약성 환각물질을 사용하는 일이 성행하고 있다고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7일 전했다. 집중력과 창의력을 높이고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기업가들이 환각물질을 ‘혁신의 돌파구’로 여긴다는 것이다. WSJ에 따르면 테슬라와 스페이스X의 최고경영자(CEO)인 일론 머스크는 향정신의약품인 케타민을 투약하고, 구글 공동 창업자 세르게이 브린은 ‘환각버섯’으로 알려진 실로시빈을 사용한다고 주변인들은 전했다. 수면마취제인 케타민은 환각 증상을 유발해 국내에서는 ‘클럽 마약’으로도 알려져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벤처캐피털 회사 중 하나인 파운더스 펀드는 고위직들이 참여힌 비공개파티에서 환각성 약물을 내놓은 것으로 전해졌다. 실리콘밸리에서 마약 사용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샌프란시스코 기반의 컨설턴트 출신인 칼 골드필드는 “수백만 명이 환각제를 소량씩 복용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스타트업 빌드베터AI의 스펜서 슐램 CEO는 “벤처캐피탈과 투자자들은 평범한 사람, 평범한 기업이 아니라 특별함을 원한다”라며 자신도 세 달에 한 번씩 LSD를 복용한다고 밝혔다. 머스크 CEO는 이날 “(우울증에 처방되는)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차단제(SSRI)는 사람들을 자주 ‘좀비’로 만든다. 케타민을 가끔 복용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이라는 트윗을 올렸다. 다만 과거 ‘퇴근 후 활동’이었던 환각제 사용은 최근 기업문화로 굳어졌다고 WSJ는 전했다. 창고형 할인점에 빗대 ‘코스트코’로 불리는 큰 손 마약상들을 통해 공동구매를 하기도 한다. 암호화 메시징 앱인 ‘시그널’ 등을 통해 초대가 이뤄지는 폐쇄형 파티에서는 환각물질이 일반 파티에서의 칵테일처럼 가볍게 제공된다고 한다. 환각물질 사용을 합법화하기 위한 연구와 투자가 늘면서 관련 시장규모가 2029년이면 현재의 2배로 커질 것이라는 예측도 나왔다. 전문가들은 약물로 기분을 전환하려는 움직임들이 약물 의존이나 자기파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부분의 마약류 사용이 불법인 만큼 경영진들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고 WSJ는 전했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사상 초유의 러시아 내분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은 1994년부터 집권 중인 ‘동유럽의 마지막 독재자’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69)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는 24일(현지 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그에게 반기를 든 민간 용병회사 바그너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협상을 성공시켜 존재감을 확인시켰다. 약 30년의 철권 통치와 잔혹한 반대파 탄압으로 그간 국제 사회에서 기피 인물 취급을 받았지만 이제 ‘내가 러시아의 붕괴를 막았다’고 선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5일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국제사회 ‘천민’이었던 루카셴코가 중재 성공 후 자신을 신뢰할 만한 정치가 겸 중재자로 홍보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날 벨라루스 국영 벨타통신은 당초 푸틴 대통령이 프리고진과의 협상 성공 가능성을 반신반의했지만 프리고진은 루카셴코 대통령이 전화를 걸자마자 받았고 협상이 성공했다고 전했다. 이 과정에서 루카셴코 대통령은 24일 내내 양측과 통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소련 시절 집단농장 관리인을 지냈고 1991년 독립 후 반부패 운동가로 활동했다. 1994년 독립 후 첫 자유선거에서 초대 대통령에 뽑혔고 이후 헌법 개정, 반대파 탄압 등을 통해 장기 집권을 이어왔다. 특히 부정선거 시비로 얼룩진 2020년 대선 이후 반대파 탄압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푸틴 정권의 도움을 얻어 정권을 유지했다. 이에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푸틴 대통령은 여전히 루카셴코 대통령을 ‘부하’로 보고 있다”고 진단했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사상 초유의 러시아 내분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은 1994년부터 집권 중인 ‘동유럽의 마지막 독재자’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69·사진)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는 24일(현지 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그에게 반기를 든 민간 용병회사 바그너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협상을 성공시켜 존재감을 확인시켰다. 30여 년의 철권 통치와 잔혹한 반대파 탄압으로 그간 국제 사회에서 기피 인물 취급을 받았지만 이제 ‘내가 러시아의 붕괴를 막았다’고 선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25일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국제사회 ‘천민’이었던 루카셴코가 중재 성공 후 자신을 신뢰할 만한 정치가 겸 중재자로 홍보하고 있다고 전했다. 전 벨라루스 외교관 파벨 슬런킨은 NYT에 “이번 사태로 푸틴 정권의 취약성이 드러났고 프리고진 또한 결국 물러섰지만 루카셴코만이 승점을 얻었다”고 진단했다.이날 벨라루스 국영 벨타통신은 당초 푸틴 대통령이 프리고진과의 협상 성공 가능성을 반신반의했지만 프리고진은 루카셴코 대통령이 전화를 걸자마자 받았고 협상이 성공했다고 전했다. 이 과정에서 루카셴코 대통령은 24일 내내 양측과 통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옛 소련 시절 집단농장 관리인을 지냈고 1991년 독립 후 반부패 운동가로 활동했다. 1994년 독립 후 첫 자유선거에서 초대 대통령에 뽑혔고 이후 헌법 개정, 반대파 탄압 등을 통해 장기 집권을 이어왔다. 특히 부정선거 시비로 얼룩진 2020년 대선 이후 반대파 탄압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푸틴 정권의 도움을 얻어 정권을 유지했다. 이에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푸틴 대통령은 여전히 루카셴코 대통령을 ‘부하’로 보고 있다”고 진단했다.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러시아 민간 용병회사 ‘바그너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24일(현지 시간) 초유의 무장 반란을 일으키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판도에도 상당한 변화가 예상된다. 프리고진은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양측이 내내 혈투를 벌여온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의 요충지 바흐무트를 장악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바흐무트와, 프리고진이 반란 과정에서 점령한 러시아 남부 로스토프나도누는 불과 195km 떨어져 있다. 러시아가 내분에 대응하느라 바흐무트 등을 사수하는 데 공백이 생겼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는 예상보다 더디게 진행되던 대반격 속도를 대폭 앞당길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에 휩싸였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서방의 추가 무기 지원과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 허용을 촉구했다. 다만 박정호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큰 내상을 입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국면 전환을 위해 오히려 우크라이나 공격을 강화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전쟁 판세에 대한 양측의 유불리는 아직 정확한 평가가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 젤렌스키 “F-16 지원-나토 가입 허용”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소셜미디어에 “악(惡)의 길을 택하는 이는 자멸한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 더 오래 머물수록 러시아가 황폐해질 것”이라며 빠른 철군을 촉구했다. 그는 미국 등 서방 주요국을 향해 “F-16 전투기와 에이태큼스(ATACMS) 미사일을 지원하고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또한 허용해 달라”고 촉구했다. 나토 회원국을 위협하는 러시아에 대한 공동의 방어력을 향상시키기 위함이라고 강조했다. 미하일로 포돌랴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고문은 “러시아 엘리트 사이의 분열이 명백하다”며 푸틴 정권이 사태가 해결된 듯 행동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한나 말랴르 국방차관 또한 “우리에게 기회의 창이 열렸다”고 반겼다. 벨라루스 매체 넥스타는 러시아군이 바그너그룹과의 내분으로 헬리콥터 6기, 항공관제기 1기 등 최소 7대의 비행기를 잃었다고 전했다. 서방 주요국도 우크라이나 지지를 재확인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날 휴양지 캠프데이비드 방문 계획을 잠시 미루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리시 수낵 영국 총리 등과 통화했다. 네 정상은 모두 우크라이나 지원을 다짐했다. 특히 바이든 행정부는 당초 27일 바그너그룹이 아프리카 곳곳의 독재 정권을 지원하는 대가로 이들 나라의 광물 사업 등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는 것에 대한 제재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이것이 푸틴 정권과 바그너그룹 사이에서 푸틴 측을 편드는 것처럼 보일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제재를 보류하기로 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5일 전했다.● 우크라 영토 수복 속도 빨라질 듯 미 싱크탱크 전쟁연구소(ISW)는 바그너그룹이 로스토프나도누를 점령한 것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총괄하는 러시아 남부군관구의 지도력에 상당한 타격을 안길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영국 가디언 또한 러시아군의 사기가 떨어지면 우크라이나가 올여름 빼앗긴 영토를 빠르게 수복할 것으로 내다봤다. 바그너그룹은 러시아의 침공 직후부터 돈바스에 병력을 대거 배치했다. 지금까지 최소 5만 명의 용병을 투입했다. 특히 우크라이나군의 거센 반격으로 러시아 정규군이 쉽사리 장악하지 못했던 바흐무트를 점령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로이터통신은 바흐무트 전투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가장 유혈이 낭자한 전투”라고 평했다. 프리고진은 러시아 국방부가 바그너그룹에 탄약 등 물자 보급을 거부하는 바람에 바흐무트에서 심각한 병력 손실을 봤다며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 발레리 게라시모프 총참모장 등 정규군 수뇌부를 줄곧 비판했다. 러시아의 내분 소식을 접한 우크라이나에서는 바그너그룹의 탱크와 장갑차가 로스토프나도누에 입성하는 영상을 보고 환호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속속 목격됐다. 반(反)푸틴 성향이 강하며 전쟁 종식을 원하는 일부 러시아인도 마찬가지였다. 적지 않은 로스토프나도누 시민은 프리고진이 24일 도시를 떠나기 전에 박수를 보내고 그에게 악수를 청하며 환호했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워싱턴=문병기 특파원 weappon@donga.com}
해저 4000m에 가라앉아 있는 타이태닉호 잔해 관광에 나섰던 ‘타이탄’ 잠수정이 교신 두절 4일 만에 산산조각이 난 채 일부 잔해가 발견됐다. 미국 구조 당국은 잠수정 탑승자 5명 전원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타이탄은 해수면의 약 400배에 달하는 해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치명적인 내파(catastrophic implosion)’로 파괴된 것으로 파악됐다. 내파는 외부 압력으로 구조물이 파괴되는 일종의 내부 폭발이다. ● 타이태닉호 488m 지점서 잔해 발견 존 모거 미 해안경비대 소장(1구역)은 22일(현지 시간) 오후 기자회견을 열고 “잠수정 잔해가 타이태닉 뱃머리에서 약 488m 떨어진 해저 바닥에서 발견됐다”며 “탑승객 가족들에게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미 해저 탐사 업체 오션게이트 엑스페디션이 운영해 온 잠수정 타이탄은 18일 오전 8시 미 매사추세츠주 케이프코드 해안에서 약 1450km 떨어진 지점에서 잠수를 시작해 1시간 45분 만에 통신이 끊겼다. 그 후 4일이 지난 22일 오전 캐나다 심해에서 원격조종 로봇이 수심 4000m 해저에서 타이탄의 일부 잔해를 발견했다. 발견된 잔해는 탑승객들이 머물던 공간의 일부인 잠수정 선체 꼬리 부분과 선체 앞부분 등 총 5조각이다. 구조 당국은 발견된 선체 부위와 파손 상태 등을 통해 탑승객 전원이 사망한 것으로 판단했다. 모거 소장은 시신 수습 가능성에 대해 “해저 상황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하다”며 말을 아꼈다. 수색에 참여했던 대원들은 기자회견장 뒤편에서 연신 눈물을 닦기도 했다.● “심해 압력에 선체 찌그러진 듯” 타이탄은 심해의 강한 압력에 선체가 찌그러지듯 파괴됐을 것이란 분석이 많다. 데이비드 마켓 전 미 해군 대령은 NBC 방송 인터뷰에서 “그 정도(해저 4000m) 수준의 압력은 사람 위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올라와 있는 것과 같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압력”이라고 말했다. 잠수정 폭발 시점은 교신이 두절된 직후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미 해군 고위 관계자를 인용한 보도에 따르면 해군은 18일 교신이 끊긴 직후 일급 군사 음향 탐지기를 통해 폭발음 비슷한 소리를 감지했다. 소리의 발원지도 잠수정 잔해가 발견된 장소 인근이었다. 해안경비대는 이 정보를 토대로 수색 범위를 좁힌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해안경비대 측은 “사고 관련 시간별 상황은 아직 명확하지 않다”며 “잠수정이 폭발할 정도의 소리라면 부표형 음파탐지기에도 포착될 수 있는데 현재로선 확인된 게 없다”고 했다.● 캐머런 감독 “111년 전 참사 반복에 충격” 타이탄이 해저 압력을 견디지 못한 이유에 대해선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 정전 등 다양한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일각에선 2021년부터 운항을 시작해 온 타이탄이 수차례의 심해 잠수를 진행하며 선체의 강도를 유지해 주는 티타늄 탄소 섬유에 ‘피로 균열’이 발생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 때문에 타이탄 운항사인 오션게이트 측의 안전 의무 이행 여부가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오션게이트의 전 임원은 타이탄이 심해 잠수 안전 규정을 지키지 않는다고 여러 차례 경고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1997년 영화 ‘타이태닉’ 제작 과정에서 타이태닉호 잔해를 탐사했던 제임스 캐머런 감독은 이날 ABC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111년 전인 1912년 타이태닉 참사와 비슷한 일이 거의 같은 곳에서 또 일어난 것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과거 타이태닉호 선장은 반복된 경고를 무시하고 흐린 날 밤에 유빙을 향해 돌진해 수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이번에도 안전 경고를 무시한 유사한 비극이 일어났다는 점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억만장자 英탐험가-파키스탄 재벌 父子… 귀환 못한 3억짜리 여행 “재벌 아들, 무섭지만 아버지 위해 타”타이태닉 희생자 고손녀 남편도 사망 타이태닉호를 보기 위해 잠수정 ‘타이탄’에 올랐다가 숨진 5명의 탑승객은 타이태닉호에 대한 관심과 함께 탐험에 대한 열망이 높았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타이탄 운영사인 오션게이트 익스페디션의 스톡턴 러시 최고경영자(CEO)는 부인이 1912년 타이태닉호 침몰로 사망한 스트라우스 부부의 고손녀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등석에 탔던 이 노부부는 사고 당시 다른 이들에게 구명보트를 양보한 뒤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러시 부부는 타이태닉 잔해를 수차례 찾아 나서기도 했다고 미 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아들 술레만(19)과 함께 타이탄에 오른 파키스탄의 재벌 샤자다 다우드(48)는 파키스탄의 최대 식품·비료 기업인 엔그로홀딩스의 부회장이다. 그의 누나는 미 NBC 인터뷰에서 “동생은 어릴 때부터 1958년 영화 ‘타이태닉호의 비극’을 여러 번 봤을 정도로 타이태닉에 집착했다”라며 “조카인 술레만은 이번 여행이 무섭다고 말하면서도, 아버지를 기쁘게 해주려 동반 탑승을 결정했다”라고 전했다. 항공업체 ‘액션에이비에이션’ 회장이자 영국 국적의 억만장자로 알려진 해미시 하딩(58)도 여러 기네스 세계기록을 보유한 탐험가다. 2021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태평양 마리아나 해구에서 가장 오래, 가장 멀리 해저를 탐사한 기록도 세웠다. 지난해에는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가 세운 민간 우주기업 ‘블루 오리진’을 통해 우주여행을 다녀왔다. 프랑스 국적의 폴앙리 나르졸레(77)는 ‘미스터 타이태닉’이란 별명을 가진 해양 탐사 전문가다. 해군 출신인 그는 1987년 최초의 타이태닉호 복구 작업을 했고 타이태닉호 선체 인양권을 가진 기업에서 5000여 개에 이르는 유물 발굴 작업을 이끌기도 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일각에선 14일(현지 시간) 그리스 해안에서 파키스탄인 약 400명을 포함해 750명의 실향민이 탄 선박이 침몰한 지 며칠 만에 억만장자들이 위험한 초호화 관광에 나섰다가 변을 당한 사건에 세계의 이목이 쏠리는 것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 8일 일정인 이 잠수정 관광의 1인당 비용은 25만 달러(약 3억4000만 원)에 달한다.뉴욕=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홍정수 기자 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