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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실의 바보(Fool in the shower room)라는 비유가 있다. 물을 틀었는데 너무 차가우니 뜨거운 쪽으로 확 틀었다가 이번에는 다시 차가운 쪽으로 확 틀고 이런 걸 반복하는 걸 두고 이르는 말이다. 처음에는 차갑더라도 좀 있으면 따뜻한 물도 함께 나올 텐데 기다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 2년을 맞았다. 이 정도 지났으면 처음에 튼 물이 차가운 물인지, 뜨거운 물인지, 적당한 온도인지 알 때쯤 됐다. ‘샤워실의 바보처럼 굴지 말고 정책의 효과가 나오기를 더 기다려 달라’고 하기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경제학에서 장기와 단기를 가르는 구분이 대체로 1년인데 장기간 기다린 셈이다. 올해 초 기자회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한 부작용을 인식하고 대책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정책의 큰 방향을 수정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부작용에 대해 확실히 더 땜질하겠다는 말로 들려 우려스럽다. 한국갤럽이 실시한 문 정부 2년 차 정책평가 여론조사에서 정치 외교 사회 등 각종 정책 가운데 경제 점수가 가장 낮다. 62%가 ‘잘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잘하고 있다’는 23%에 불과하다. 청와대 집무실에 일자리 상황판을 만들면서까지 일자리를 최우선적으로 챙기겠다고 했는데 고용노동 분야에 대한 평가는 ‘잘못하고 있다’가 54%, ‘잘하고 있다’는 29%다. 경제전문가들의 평가는 일반 여론조사보다 더 혹독하다. 얼마 전 서강대 박정수 경제학과 교수가 한국경제학회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에서 ‘임금상승률이 성장률보다 낮고’, ‘기업은 이익을 근로자에게 제대로 나눠주지 않고’, ‘임금이 오르면 경제가 성장할 것’이라는 소득주도성장의 이론적 토대가 애당초 왜곡된 통계에 기반한 것이라며 조목조목 비판했다. 현 정책의 전제인 만큼 세밀한 검증과 치열한 토론이 필요한 것 같다. 자동차에서 가장 중요한 장치 2가지를 들라면 단연 엔진과 브레이크다. 브레이크는 생명과 직결된 장치라 무엇보다 소중하다. 하지만 서 있는 자동차는 가장 안전하지만 자동차의 본질을 상실한 것이다. 경제에서 엔진은 역시 기업이다. 최근 들어 대통령이 격려차 기업들을 방문하고 있지만 갈수록 우리 경제에서 엔진의 파워는 떨어지고 정부가 핸드브레이크 거는 소리만 자꾸 들린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 분야 가운데 하나가 핀테크다. 혁신성장 차원에서 정부와 국회가 나서 KT가 대주주인 인터넷전문은행 케이뱅크에 6000억 원 규모의 증자 여지를 터줬다. 그러면서 한쪽에서는 공정거래위원회가 과거 KT의 입찰 담합혐의를 문제 삼아 검찰 고발조치까지 했다. 황창규 회장이 정치권 불법 후원금 지원으로 수사를 받는 가운데 세 번이나 구속됐다가 무죄 또는 무혐의 판결을 받은 이석채 전 회장을 불법채용 건으로 또 구속시켰다. 정부와 KT의 심상치 않은 관계를 모를 리 없는 금융위원회는 KT의 대주주 적격심사를 중단해 사실상 증자의 길이 막혔다. 사정이 어려워진 케이뱅크의 매각설까지 나오고 있다. 가속페달(액셀러레이터)과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함께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문제인 사회적 사안에서는 새는 두 날개로 난다는 격언처럼 형평성이 중요한 포인트다. 경제 문제에 있어서는 균형보다 우선순위를 선택하는 게 중요하다. 선후도 뒤바뀐 데다 가속페달과 브레이크마저 동시에 밟으면 잡음만 요란할 뿐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우리 경제가 그 상황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신바람을 일으킬 방안이 무엇인지 집권 3년 차에 접어드는 지금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올해 글로벌 가전 시장의 중요 흐름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IFA GPC 2019가 25~28일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역도시 우엘바에서 열렸다. 여느 해나 마찬가지로 가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리는 IFA 본 행사를 위한 홍보행사임과 동시에 글로벌 가전 시장의 흐름을 엿보게 해주는 자리다. 올해도 주최국인 독일을 비롯해 아시아 유럽 미국 중동 아프리카 등 전 세계 55개국에서 300여 명의 취재진이 몰렸다. IFA가 유럽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의 가전 박람회이고 이처럼 많은 미디어가 몰리는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세계 가전 시장에서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는 한국의 삼성, LG는 참가하지 않았다. 미국 일본의 주요 기업들도 메인 행사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것인지 간단한 제품 전시도 없었다. 이 행사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나라는 역시 중국이었다. IFA 혹은 CES, MWC 같은 대규모 전시회를 자체적으로는 기획하기 힘든 후발주자 중국에게는 더 없이 좋은 홍보기회가 아닐 수 없다. 전 세계 인구 5명 중 1명인 중국 자체 시장의 거대함은 물론이고, 글로벌 시장 진출에도 의욕을 보이는 중국은 여타 가전기업들에게는 위협적인 존재다. 더 이상 조잡한 제품을 오로지 가격으로만 승부하는 단계는 아닌 듯 하다. 얀닉 피어링 하이얼 유럽 최고경영자(CEO)는 “올해 초 이탈리아 가전기업 ‘캔디’와 합병해 유럽시장에서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시장조사업체 유로모니터 통계를 인용, “지난해 하이얼과 캔디 두 회사의 합계 시장점유율이 전세계 시장에서는 15.4%를 차지한다”고 밝혔다. 하이얼은 이번 행사 현장에서 세탁기와 건조기가 아래위로 배치돼 일체형으로 결합된 형태의 ‘하이얼 듀오’ 신제품을 선보였다. 프리미엄급 제품들에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또 다른 중국 가전기업 TCL의 마렉 마제스키 유럽 제품 개발 디렉터는 유럽시장 목표와 관련, “TV는 2020년까지, 오디오 제품 및 냉난방기는 2022년까지 각각 TOP3에 올려놓겠다”고 밝혔다. 사운드바와 휴대용 스피커 등 오디오 제품과 구글, 알렉사의 인공지능(AI) 플랫폼과 연계된 스마트홈 시스템 등도 소개했다. 중국 통신기업 화웨이는 9월 6~11일 ‘IFA 2019’ 본 행사에서 3년 연속 기조연설을 한다. 삼성 LG는 이번 행사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은 한발 빠른 가전 및 전자 통신 분야의 선두주자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옌스 하이테커 IFA사장은 5G와 함께 인공지능(AI)과 연결성을 올해 IFA의 핵심 키워드로 꼽았다. 다만 가전제품에 이 기술이 적용돼 수익성을 내는 데는 수년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때 SONY 등 세계 가전 시장의 최강자였던 일본기업들도 이번 행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다만 내년에 열릴 IFA-NEXT(스타트업 기업 위주 행사)의 파트너 국가로 기업 홍보보다는 일본이 세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얼마나 개방적인 국가인지를 보여주는 국가 이미지 홍보 기회로 활용했다. 파트너 기업으로 행사 주최측에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일본 정부 관리까지 나서 장시간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것은 내년 도쿄 하계 올림픽을 계기로 일본의 국가 이미지를 바꾸려는 큰 전략 가운데 하나인 듯 했다. 우엘바=김광현논설위원 kkh@donga.com}
선진국 가운데서는 이탈리아가 포퓰리즘 정치의 표본으로 꼽힌다. 역대 정부가 연금개혁과 공공부문 축소는 도외시한 채 빚을 늘려가며 유권자들에게 선심을 쓴 결과 표는 얻었지만 유럽연합(EU)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처지가 됐다. 부채를 갚으라는 독촉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다가 지난주 국가신용등급이 투기등급 바로 위인 Baa3까지 떨어졌다. 포퓰리즘 연합정부를 이끌고 있는 오성운동은 중앙은행이 보유한 1000억 달러어치의 금괴를 단기 경기부양에 사용하자고 목소리를 높여 또 한번 세계의 웃음거리가 됐다. 잘되기는 어려워도 망하는 건 순식간이다. 이탈리아가 2011년 우량등급인 Aa2등급에서 투기등급 직전까지 추락하는 데 10년이 채 안 걸렸다. 슈퍼 팽창예산 편성에다 어제 국가부채를 동원한 추경 편성을 한 우리 정부나 현금복지를 남발하는 지방자치단체들을 보면 반드시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엊그제 ‘소득주도성장과 확장적 재정운용’ 토론회에서 “지금이야말로 정부가 곳간을 활짝 열어야 할 때”라고 말한 사람은 홍장표 대통령직속 소득주도성장특별위원장이다. 현재 한국 경제가 좋지 않은 것은 세계 경제가 좋지 않기 때문인데 이에 대처하기 위해 추경을 비롯해 빚을 내서라도 나랏돈 푸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두 가지 의미에서 뻔뻔스러운 발언이다. 작년 말까지만 해도 조만간 소득주도성장의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큰소리치더니 이제 와서 우리 경제가 나쁜 것을 세계 경제 탓으로 돌렸다. 매달 30만∼40만 명씩 늘던 취업자 수가 10만 명 이하로 떨어지고, 못 살겠다는 자영업자의 비명이 터져 나온 게 이미 작년 초여름이다. 대다수 주류 경제학자들이 경제학 족보 저 끄트머리에 있는 정책을 무리하게 적용하면 비극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수도 없이 경고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이다. 그보다 더 뻔뻔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미래세대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다.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얼마든지 빚을 낼 수 있다. 이른바 확장적 재정운용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국가든 기업이든 빚은 그 자체보다 빌린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 이제까지 해온 것으로 봐서는 지금 경제팀이 경기를 되살릴 실력을 갖춘 팀이라고 보기 어렵다. 어떻게든 나랏돈이 풀려 소비가 되면 생산으로 이어져 일자리를 만들고 경기를 살릴 것으로 본다면 재정 낭비란 말은 왜 있겠는가. 일자리 안정자금처럼 잘못된 정책으로 당초 지출할 필요가 없었던 곳에 땜질용으로 쓰이는 것은 더욱 곤란하다. 후세에게 부담을 줘가면서까지 나랏빚을 늘리려면 이전 정책에 대한 재검토와 함께 설득력 있는 경제 회생 비전과 실행 방안을 먼저 제시하는 게 순서다. 그런데 외교 문외한인 장하성 전 대통령정책실장을 주중 대사라는 막중한 자리에 보내는 걸 보면 대통령 차원에서 기존의 정책에 대한 수정 의사가 별로 없는 것 같다. 나라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그 틀에 다시 세금을 쏟아붓는 것은 현재와 미래의 납세자에게 정말 염치없는 노릇이다. 바둑에서 아마추어와 프로 혹은 하수와 고수를 가르는 기준 중에 하나가 실착을 했을 때의 대처 태도다. 고수는 실착을 금방 깨닫고 손을 빼 다른 곳에서 반전의 기회를 찾는다. 반면 하수는 실착인지 아닌지 아예 모르거나, 알았더라도 이미 놓인 돌에 연연하다 패착으로 만들고, 판 전체를 그르치는 경우가 많다. 경제 운영과 국가 부채도 마찬가지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애플이 어떤 기업인가. 스티브 잡스의 지휘 아래 스마트폰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판매량에서는 삼성전자에 밀려 2위다. 순이익은 다른 세계의 모든 스마트폰 제조업체를 합친 것보다 더 많다. 한마디로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기업이다. 이런 천하의 애플이 퀄컴에 백기를 들었다. ‘세기의 특허전’이라 불렸던 애플-퀄컴의 30조 원대 소송이 합의 형식이었지만 사실상 애플의 항복으로 어제 막을 내렸다. ▷먼저 공격한 쪽은 애플. 2년 전인 2017년 1월 “퀄컴이 독점적인 지위를 이용해 과도한 로열티를 물린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여기에 대만의 아이폰 부품업체인 폭스콘 등이 가세해 소송금액이 270억 달러에 달했다. 퀄컴도 가만있지 않았다. “애플이 로열티 지급계약을 위반했다”며 70억 달러의 맞불 소송을 제기했다. 가장 먼저 승부 판정을 내린 곳은 주식시장이었다. 합의 소식에 퀄컴 주가는 전날 대비 23.21% 급등했고, 애플 주가는 거의 그대로였다. ▷개인 간이나 기업 간이나 죽일 듯이 싸우다가 먼저 합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대개 끝까지 가봐야 득 될 게 없는 쪽이다. 이번 소송도 마찬가지. 시간이 갈수록 절박한 쪽은 퀄컴보다 애플이었다. 올해는 무선통신기술이 4세대를 넘어 5세대(5G)로 넘어가는 원년이다. 애플의 최대 경쟁자 삼성전자가 5G 칩이 탑재된 갤럭시 S10을 내놓고 시장 선점에 들어갔다. 애플은 퀄컴으로부터 칩을 공급받아야 그나마 내년에라도 5G 아이폰을 낼 수 있는 상황에 몰린 것이다. 세기의 특허전 종결 배경에는 삼성전자라는 제3의 변수가 있었던 셈이다. ▷이번 분쟁에서 재차 확인된 것은 애플도 꼼짝 못 하게 한 특허의 파워다. 퀄컴은 제조 공장이 한 채도 없는 전형적인 팹리스(fabless) 기업이다. 오로지 기술 개발에만 몰두한다. 주요 수익원은 특허에 대한 로열티다. 우리 귀에도 낯설지 않은 CDMA(부호분할다중접속)를 포함해 무선통신과 관련해 퀄컴이 보유하고 있는 특허 및 특허 출원이 무려 13만 개에 이른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매년 200억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퀄컴은 독점 횡포 기업으로도 유명하다. 자국인 미국의 연방거래위원회(FTC)가 2017년 퀄컴을 상대로 반독점 소송을 제기해 진행 중이다. 애플 삼성전자 등에 매긴 과도한 로열티 등이 주요 쟁점이다. 한국 공정거래위원회도 퀄컴에 작년 2245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한 바 있다. 배가 아프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러운 게 기술 특허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가까운 후배가 대표를 맡기도 해 지켜본 일이다. 작년에 사단법인을 차리겠다는 후배가 서류를 갖춰 관청을 찾았다. 7∼9급으로 추정되는 주무관(담당 공무원)이 “법인 이름에 청년이 들어가는데 왜 이사진에 청년이 포함돼 있지 않느냐”며 다시 서류를 만들어 오라고 했다. “신생아 이름이 들어간 법인도 있는데 그럼 이사진에 신생아도 포함시켜야 하느냐”며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이 밖에도 도장이 잘못됐다는 것에서 시작해 사무실 실사 일정도 일방적으로 세 번씩 바꿔가며 온갖 트집을 잡아 시간 끌기를 8개월. 이사진에 청년을 포함시킨다는 추후 보완 조건을 달아 겨우 설립 인가증을 받았다. 그리고 몇 달 뒤 서류를 보완해 갔더니 그새 담당자가 바뀌어 있었다. 새 담당자는 “여기에 청년이 이사로 포함될 필요가 뭐가 있느냐”면서 “이런 추가 서류는 필요 없으니 도로 가져가라”고 했다.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조그만 회사라도 차려보고 운영해 본 사람들이라면 그 정도는 약과라고 할 것이다. 아무리 하위직 공무원이라도 요즘 몇백 대 1의 어려운 시험 관문을 뚫고 들어왔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일 텐데 이렇게 터무니없는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이른바 ‘내재적 접근’을 시도해봤다. 결론은 당근과 채찍이라는 행위에 대한 동기였다. 착착 서류를 잘 내줘 봐야 이득 되는 것 없고, 늦게 내줘도 손해 보는 게 없는데 서둘러 처리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만에 하나 잘못되면 평생 안정직장이 흔들릴 수도 있다. 게다가 인허가권을 틀어쥐고 농간을 부리면 현직 혹은 퇴직 후 이권으로 직결될 수도 있다. 더 큰 인센티브가 제공되지 않는다면 규제를 풀지 않는 게 공무원으로서는 합리적인 행동이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을 지낸 강경식 씨는 “펀더멘털은 튼튼하다”라고 했던 말로 외환위기 주범처럼 낙인이 찍혀 있으나 관료 사회에서는 대단히 개혁적인 성향으로 평가받던 인물이다. 금융실명제 도입을 추진했고, 기업 노동개혁을 밀어붙이려다 관료 내 반대 세력에 번번이 부딪혔다. 강 부총리는 그럴 때마다 관료들이 가장 큰 고질병인 ‘노파심’ 때문에 규제를 손에서 놓지 못한다고 한탄했다. 민간이 더 잘할 수 있지만 만에 하나 잘못되면 돌아올 책임과 걱정 때문에 규제를 풀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규제는 공무원 개인보다 시스템에 문제가 더 많다. 아무리 공무원 개개인을 욕해 봐야 꿈적도 하지 않는다. 대통령이 나서서 “규제혁신 속도가 답답하다”고 혼을 내도 정권 바뀔 때까지 기다리면 그만이다. 무엇보다 공무원의 권한과 책임을 동시에 줄이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대형 사고가 터지면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라는 질타로 담당 조직 인력과 예산이 늘고, 승진 기회와 권한도 함께 늘어나는 경우가 많다. 겉으로는 걱정하면서 속으로는 웃는다는 게 공무원 사회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자기반성을 하자면 이제 언론도 정부 탓을 줄여야 한다. 장마가 져도, 고속버스가 밭으로 굴러도 모두가 천재(天災) 아닌 인재(人災)이고, “그동안 공무원은 뭘 하고 있었느냐”며 책임을 지우면 의도와는 반대로 공무원의 권한만 더 넓혀주는 결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공무원에게 책임을 덜 묻고 제발 정부가 그만 좀 간섭하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반으로 줄여도 모자랄 판에 이번 정부 임기 내 공무원 수를 17만 명이나 늘린다고 한다. 재직 시 들어갈 급여 327조 원, 퇴직 후 연금 92조 원(국회예산처 추산)의 세금도 아깝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공무원 고질병이 우리 사회에 확산 심화되는 것이 훨씬 큰 국가적 비용이 아닐까 싶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컴퓨터에서 시작된 인공지능(AI)은 인류문명사에 있어 최대의 발명품으로 손꼽힌다. AI는 산업혁명에 이어 인류가 여태까지 경험하지 못한 고도의 생산성을 가져다줄 것이다. AI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를 받으면서 나머지 시간은 개인 각자가 자기실현을 위해 사용하는 노동의 해방을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반대로 이대로 가다가는 직업의 소멸, 고용 없는 성장, 실업자를 양산하는 노동의 종말을 불러올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도 함께 존재한다. AI가 바꿀 미래, 특히 노동의 미래를 취재하기 위해 경기 성남시 판교 글로벌R&D센터에 있는 인공지능연구원(AIRI)을 찾았다. 입구에 사람 키만 한 길쭉한 모니터에 나타난 AI 안내원 ‘맹문희’ 양이 방문객을 인식하고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한다. 낯선 사람이라 문을 열어주지는 않았다. 자주 드나드는 직원은 얼굴이 학습돼 있어 카드를 대거나 비밀번호를 누르지 않아도 “오늘도 파이팅” 혹은 “피곤하시죠”라면서 문을 열어준다. 연구원에 들어서니 집채만 한 컴퓨터들이 가득 들어찬 방이 아니라 자기 책상에서 노트북이나 데스크톱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모습이 쾌적한 일반 기업 사무실과 다름없다. ‘한국 최고의 AI 컴퓨터는 어디 있는 걸까’ 하고 두리번거릴 필요 없다. AI는 AI 컴퓨터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컴퓨터들이 네트워크로 연결돼 함께 큰 데이터 용량을 처리한다. 김진형 원장은 인공지능의 대명사가 된 알파고와 이세돌이 2016년 3월 바둑 대결을 벌였을 때를 예로 들었다. “이세돌은 혼자인데 알파고는 수많은 컴퓨터가 연결된 것이니 불공정한 게임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AI의 기본 속성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리죠.” 이후 알파고는 중국의 일인자 커제도 가볍게 꺾고 더 이상 인간과는 상대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인공지능 자기들끼리 둔다. 그러면서 점점 더 고수가 돼가고 프로기사들은 이제 인공지능의 수를 학습하기 바쁘다. 인공지능과 컴퓨터는 두부 자르듯 명확한 구분선은 없다. 인공지능은 더욱 스마트해진 컴퓨터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빠른 계산을 넘어 추론하고 판단할 수 있고, 분석과 해석을 넘어 스스로 생성을 하는 단계에 왔다면 인공지능이라고 본다는 게 대체적인 정의다. 많은 데이터와 학습이 필수다. 예를 들어 화난 표정의 사진을 보여주었을 때 “화난 표정입니다”라고만 대답할 수 있다면 컴퓨터다. 화난 표정을 딥 러닝(Deep Learning)한 인공지능에 다른 사진을 넣고 “화난 사진을 만들어 줘”라고 하면 그런 표정의 사진을 ‘생성’할 수 있다. 나훈아 노래와 음성을 학습해 존 레넌의 ‘이매진’을 나훈아 창법으로 부르게 할 수 있다면 인공지능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바둑기사들은 인공지능에 완패한 뒤에도 여전히 직업을 보전할 수 있는 다행스러운 경우다. 하지만 다른 많은 직업은 인공지능에 밀려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지구상에서 돈 냄새를 가장 잘 맡는 집단인 글로벌 투자은행 1위 골드만삭스가 주식 트레이더 600명을 단 2명으로 줄였다는 뉴스가 매사추세츠공대(MIT) 테크놀로지 리뷰에 실린 게 2017년 4월이다. 의사, 판사, 변호사 등 고연봉 두뇌형 직업은 인공지능 우선 대체 그룹에 속한다. 에스토니아에서는 간단한 벌금형 정도는 이제 AI가 판결해 준다는 최근 외신 보도가 있었다. 미국 보스턴컨설팅그룹의 발표에 따르면 가까운 미래에 변호사 업무의 50%는 알고리즘으로 대체할 수 있다. 폐질환을 비롯해 진단 분야에서는 이미 인공지능이 의사를 앞섰다. 의사의 80%는 알고리즘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 게 이미 6년 전이다. 최근 사회적 갈등을 빚고 있는 차량 공유 서비스는 제도가 기술의 발전을 막고 있는 경우다. 마부가 아무리 ‘붉은 깃발’을 흔들어도 결국은 마차와 마부가 자동차와 운전자에게 길을 열어주었듯 자율주행차가 택시 운전사의 소멸을 가져오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우리 생활 곁에도 AI가 성큼 다가와 있다. “하기스 기저귀 깎아주세요.” “선택하신 상품이 최저가인지 제가 대신 찾아드릴게요!” 손님과 고객센터 직원의 대화가 아니다. 9일 기자와 인터파크 AI 기반 챗봇인 ‘톡집사’의 대화 내용이다. 기저귀를 찾아달라고 하자 자동으로 ‘기저귀/분유/물티슈/생리대’ 카테고리가 대화창에 떴다. 하기스 모델을 선택하고 ‘깎아 달라’고 주문하자 할인 쿠폰을 띄워 주며 최저가인지를 알아봐 준다. 채팅과 로봇의 합성어인 챗봇은 콜센터 일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인터파크의 ‘톡집사’ 누적 이용자 수는 1000만 명을 돌파했다. 콜센터에 접수되는 콜 수가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의미다. AI 챗봇의 운영이 아직 초기 단계인 만큼 인력을 당장 대체하기는 어렵다. AI의 특성상 데이터가 쌓이고 정확도가 향상돼 향후 대화가 점점 자연스러워질 경우 콜센터를 대체할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예술적인 범주에 들어가는 화가, 음악가 등 예술인들은 괜찮지 않을까. 김 원장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면서 작년에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열었던 인공지능 그림 전시회 팸플릿을 보여주었다. 빈센트 반 고흐, 장프랑수아 밀레의 그림을 인공지능이 학습해 그린 그림들이다. 박자, 음의 높낮이 등을 볼 때 미술보다는 훨씬 더 인공지능 친화적 예술 분야인 듯한 음악은 말할 것도 없다. AI의 확대에 따른 생산성 증대란 쉽게 말해 지금은 100명이 할 일을 ‘1명+AI’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99명이 소득이 없는데 ‘소득-소비-생산-소득’의 경제 순환은 어떻게 이뤄지겠는가. 순환의 고리가 끊어지는, 지속 가능하지 않은 성장이 바로 고용의 종말이다. 고용의 종말은 사회공동체의 종말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데 암울한 미래상이다. ‘메가트렌드’의 저자 존 나이스비트는 비교적 낙관적이다. 최근작 ‘미래의 단서’에서 “농업시대에서 산업시대로 전환되고, 조립라인이 등장했을 때도, PC가 사무직을 대체했을 때도 일자리 문제는 전반적으로 잘 해결돼 왔다”면서 “모든 구조적 변화 뒤에는 사라지는 일자리보다 새로 만들어지는 일자리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김 원장 역시 AI는 산업적 생산성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적으로도 삶의 질을 한층 높여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인간의 노동시간이 주 52시간이 아니라 주 20시간, 주 10시간으로 되고 남는 시간을 생존이 아닌 자기실현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면 이는 분명히 인류의 발전”이라고 말한다. 이런 변화를 주도하거나 쫓아가느냐 혹은 무감각하거나 알면서도 외면하느냐에 따라 국가 혹은 개인 간 격차가 벌어질 것이다. 미래는 이미 와 있지만 선택은 하기 나름이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곽도영 기자 now@donga.com}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최근 혁신금융 추진방향을 발표했다. 재고 자산 같은 동산(動産)은 물론이고 기술력, 성장성, 영업권 같은 무형의 자산도 담보로 인정해 적극적으로 대출을 해주라는 내용이다. 은행이 전당포식 담보대출에서 벗어나 신용대출로 가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 누가 반대하겠는가. 하지만 언제나 문제는 당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있고, 취지보다는 실행의 디테일에 있다. 최근 만나본 은행 임원 몇 명도 ‘당연히 그 방향으로 가야 하는 건 맞는데…’라면서도 말끝을 흐렸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4년 창조금융이란 이름으로 기술평가신용(TCB) 대출제도가 도입됐다. 기술력이 우수하지만 담보력이 미약한 창업 초기 기업에 대해 무담보 무보증 대출을 확대하자는 것이다. 초기에 금융당국은 은행들 줄 세우기를 하고 실적이 좋지 않으면 각종 불이익을 주곤 했다. 그러자 ‘정부에 정책이 있으면 민간에는 대책이 있다’는 말처럼 본점에서는 일선 지점으로 TCB 대출을 늘리라는 지침을 내렸고 일선 창구에서는 기존 신용대출을 포함해 바꿀 수 있는 것은 모두 TCB 항목으로 바꾸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적어도 장부상으로는 갑자기 선진 대출 시스템으로 진화한 것이다. TCB와 비슷한 시기에 ‘관계형 대출’도 도입됐다. 신용등급이 낮아도 사장의 도덕성, 경영 의지, 성장성 등을 평가해 중소기업 등에 대출해 주라는 제도다. 은행들은 속으로는 전형적인 탁상행정, 관치금융이라고 비웃었지만 여러 편법을 통해 실적도 맞추고 금융당국의 비위도 맞췄다. 이번 혁신금융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일괄담보 대출’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법률적으로 한 건씩 개별적으로만 담보권을 설정하도록 돼 있는데, 특허권 상호권 등을 부동산 등 다른 자산과 한꺼번에 묶어 담보로 제공할 수 있게 바꾸겠다는 것이다. 일본의 기업담보제도와 유사한 것으로 대출 관행의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할 만큼 혁신적인 변화라 할 수 있다. 은행들은 여기에도 ‘취지 공감, 실행 곤란’이라며 속으로 답답해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무리 사물인터넷(IoT)이 잘 발달됐다고 해도 해당 기업의 재고를 어떻게 일일이 파악할 수 있으며, 해당 기업이 부도가 나면 담보로 잡은 특허권 상표권은 어디에서 처분하느냐는 것이다. 아직 우리나라에 특허를 사고파는 시장은 없다고 해도 될 정도로 미미하다. 은행이 담보로 얻은 특허권으로 사업을 할 것도 아니고 건전성 악화로 이어질 소지가 크다. 한발 더 나아간 게 영세 자영업자 맞춤형 대출이다. 신용은 양호하지만 매출이 적고 담보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는 자영업자가 주요 대상이라고 한다. 역시 취지는 훌륭하다. 은행들의 사회공헌자금도 적극 활용하라고 한다. 정책금융을 넘어 최저임금 인상의 부작용을 땜질하는 정치금융 성격이 다분하다. 예나 지금이나 은행은 금융당국의 영원한 ‘을’이다. 자칫 은행 경영진은 주주들로부터 배임행위로 항의 혹은 소송을 당할 것이냐, 감독당국으로부터 실적 부진으로 문책을 당할 것이냐를 놓고 선택의 기로에 놓이는 상황이 올 것이다. 다른 제도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금융은 사전 관련 제도의 정비가 중요하다. 너무 앞서면 부작용이 드러나거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편법이 횡행하기 마련이다. 일괄담보 대출, 자영업자 맞춤형 대출이 좋은 취지대로 현장에서 정착하려면 금융당국은 은행들을 억누르지 말고, 서두르지 않아야 한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1997년 말 외환위기가 터져 국민들 호주머니 사정이 대단히 나빠졌을 때다. 불법이니 당연히 세금이 붙지 않는 가짜 석유가 기승을 부렸다. 당시 휘발유 차를 액화석유가스(LPG) 차로 불법 개조하다가 적발됐다는 뉴스도 심심찮게 나오곤 했다. 요즘 LPG 가격은 휘발유의 60% 수준인데 1990년대만 해도 LPG는 휘발유의 4분의 1 수준이었다. 이제 이런 LPG 차량 불법 개조 뉴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26일 0시부터 ‘액화석유가스의 안전관리 및 사업법’ 개정안이 공포·시행돼 일반인도 LPG 차량을 살 수 있게 됐다. 버스는 액화천연가스(LNG)를 많이 사용하고 택시는 LPG가 주 연료다. 영업용 외에는 장애인, 국가유공자만 LPG 차량을 살 수 있었다. 이제 휘발유 차량을 LPG 차량으로 개조해도 불법이 아니다. 두 차량은 엔진 착화 방식이 비슷해 일반 자동차 정비소에서도 개조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한다. 앞으로 LPG 가스충전소와 함께 기술 있는 정비소가 바쁘게 생겼다. ▷LPG나 휘발유나 사실 생산 혹은 수입 원가는 거의 비슷하다. 차이가 나는 것은 세금 때문이다. LPG가 1L에 900원, 휘발유가 1500원 정도다. 그 대신 LPG 차량은 연료소비효율이 좋지 않다. 현대자동차의 신형 쏘나타 공식 연비를 예로 들면 LPG 차량이 휘발유 차량보다 연비가 25% 정도 낮다. 가격과 연비를 모두 고려할 때 1년에 약 2만 km를 달리는 운전자라면 연 52만 원 정도 연료비를 절약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하지만 기름값만 생각해서 차를 고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힘이 약한 LPG 차량 수요가 폭증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자동차업계의 전망이다. 아직은 가스 충전이 불편한 것도 흠이다. ▷LPG는 석유 정제 과정에서 발생하는 양이 많지 않고 환경오염 물질 배출도 적어 고급 연료 대우를 받아왔지만 반대로 수급 불안정이 늘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그런데 셰일가스 개발이 확대되고 여기서 LPG가 대량 공급되면서 이제 세계적으로 수급 문제는 많이 사라졌다. 대기오염 저감 대책의 일환으로 일반인 구매를 허용했지만 LPG 차량이 미세먼지를 적게 배출하는 대신 온실가스의 주범인 이산화탄소는 더 많이 배출해 환경 이슈는 계속될 듯하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A, B 두 명이 와서 1000만 원을 빌려 달라고 했다. ‘같은 이자’로 A는 1년 뒤, B는 10년 뒤에 돌려주겠다면 누구에게 빌려주겠는가? 당연히 A에게 빌려줄 것이다. 돈 빌려주는 기간이 길면 내 돈이 그만큼 오래 묶이고, 돈을 떼일 가능성도 높아지며, 물가가 올라 돈 가치가 떨어질 우려가 높기 때문이다. 장기 B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단기 A보다 ‘높은 이자’를 주겠다고 하면 된다. ▷이런 이유로 대개는 장기 금리가 단기 금리보다 높다. 그런데 가끔은 장기 금리가 더 낮은 기현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22일 미국 채권시장에서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기 직전인 2007년 이후 12년 만에 장·단기 금리역전 현상이 발생했다. 미국 10년 만기 국채 금리와 3개월 만기 국채 금리가 연 2.459%에 거래를 마쳤는데, 장중 한때 10년 만기 국채의 금리가 2.42% 선까지 내려가면서 역전이 벌어진 것이다. 이는 곧바로 주식 시장에 영향을 미쳐 대표적인 주가지수 중 하나인 다우존스30 평균지수가 460.19포인트(1.77%) 급락했다. ▷장·단기 금리역전을 경기 하강의 서막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경기침체가 오랫동안 이어진다는 말이다. 미국에서도 2차 세계대전 이후 장기 불황 국면에 들어설 때마다 장·단기 금리역전 현상이 벌어진 적이 있다. 미국뿐만 아니라 글로벌 경기가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는 경고음이다. 지난주 미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는 기준금리를 동결하면서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당초 2.3%에서 2.1%로 낮추었다. 유럽, 중국 경제도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고, 강세를 보였던 일본마저 2016년 이후 처음으로 이달에 정부가 부정적 경기 판단을 내렸다. ▷한국에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몇 차례 장·단기 금리역전이 일어났고 2012년에는 보름 이상 지속됐으나 그 이후는 보기 드물었다. 요즘 국채 10년 만기물이 1.9∼2.0%, 3년 만기물이 1.8% 안팎으로 장·단기 역전은 발생하지 않고 있다. 다만 기준금리를 포함해 장·단기 금리 모두 미국 금리보다 낮은 ‘한미 금리역전’ 상태가 장기적으로 지속되고 있다. 더욱 분발해야 할 쪽은 우리인 것 같다.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조지아주는 앨라배마 플로리다 미시시피 등과 함께 미국에서 동남쪽에 치우쳐 있어 ‘딥 사우스(Deep South)’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궁벽진 곳이다. 과거에는 흑인 노예노동에 의존해 면화농장과 방적산업이 번창했다. 값싼 노동력을 찾아 관련 공장들이 중국 등 아시아로 떠나면서 변변한 제조업이 없었다. ▷이런 조지아에 한국 기업은 구세주 같은 존재다. 19일 SK이노베이션이 조지아주 웨스트포인트에서 전기배터리 공장의 첫 삽을 뜨는 행사를 가졌다. 2025년까지 총 16억7000만 달러(약 1조9000억 원)가 투입되는 등 단일 규모로 조지아주 역대 최대 투자다. 이미 10년 전 기아자동차가 이 지역에 진출한 후 부품공장 등 90여 개 한국 기업이 진출해 지역경제를 살리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 ▷이번에 SK이노베이션이 진출한 미 동남부 지역은 일명 ‘선벨트’로 불리는 신흥 자동차 산업 지역이다. 현대·기아차, 폭스바겐, BMW, 볼보 등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주변에 몰려 있다. 디트로이트 등 ‘러스트 벨트’가 글로벌 금융위기로 침체를 걷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러스트벨트가 녹슬어가는 과정을 지켜본 선벨트는 GM 같은 강성 노조문화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토지 등 인프라, 세금 혜택 등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는 당국의 헌신적 외자 유치 노력과 함께 이 같은 온건한 노사문화가 글로벌 기업들이 터를 잡는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SK이노베이션 경영진이 투자 유치 협상 막판에 미국 시간으로 새벽에 최종 제안을 했는데 주지사까지 승인이 나는 데 1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윌버 로스 미 상무장관은 직접 기공식까지 달려와 “오늘이 상무장관 된 지 2년 동안 가장 기쁜 날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브라이언 켐프 조지아주지사도 “열심히 사는 주민들에게 정말 신나는 날”이라고 자축했다. 연봉 4000만 원 정도 하는 일자리가 2000여 개 생겨나고 하다못해 인근에 식당이라도 더 생길 테니 신날 수밖에. ‘해외 글로벌 기업이 한국의 지방도시에 대규모 공장을 짓기로 결정해 일자리가 수천 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는 뉴스는 언제쯤 들을 수 있을까.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뜨거운 사회·경제적 이슈였던 자가용 카풀에 대한 이른바 사회적 대타협이 이달 7일 이뤄졌다. 핵심 합의 내용은 토·일요일과 공휴일을 제외한 평일 출퇴근 시간인 오전 7∼9시, 오후 6∼8시에 자가용 카풀 영업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서비스를 할 수 있는 플랫폼 택시 도입, 월급제 추진도 합의 내용이지만 구체성이나 강제성이 없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문제다. 이 같은 합의를 두고 협상을 중재해온 전현희 더불어민주당 택시·카풀 태스크포스(TF) 위원장은 택시와 카풀업계가 상생하는 모델이라고 자평했다. 이낙연 국무총리도 대화와 양보를 통해 첨예한 갈등을 해결한 아름다운 선례라는 찬사를 보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들의 의견은 많이 다른 것 같다. 이해당사자는 구사업자인 택시업계, 신사업자인 카풀업체 그리고 국민 대다수인 이용자 등 크게 세 그룹이다. 엊그제 서울 경기 전체 택시 10만여 대 가운데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서울시개인택시조합이 합의안을 전면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오전 오후로 제한된 2시간도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카풀업체는 카풀업체대로 불만이다. 합의에 참가한 카카오모빌리티의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고, 합의 내용에도 동의할 수 없다고 한다. 이미 몇 개 업체가 출퇴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무제한 카풀 서비스를 시작했다. 현행 여객자동차법 제81조는 자가용 자동차 영업을 할 수 없도록 규정하면서 출퇴근 때 승용자동차를 함께 타는 경우는 예외로 두고 있다. 이에 대한 해석도 분분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이미 출퇴근 자가용 영업을 허용하고 있다고 볼 여지가 있다. 여기에 시간을 한정했으니 규제 완화가 아니라 오히려 규제 강화라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수 이용자의 소리 없는 불만이다. 이들의 소망은 단순하다. 출퇴근 시간이든 심야든 택시 잡느라 이리저리 안 뛰어다니고, 어렵게 잡았는데 승차 거부당하는 일 없고, 친절한 차를 타고 싶다는 것이다. 타협안에는 이런 요청이 반영돼 있지 않다. 이용자를 대변해야 할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의 책임이 크다. 며칠 전 자율주행차가 일반 차량들 틈에 섞여 서울 강변북로∼올림픽대로를 거쳐 서울숲 주차장까지 8km를 25분 동안 달렸다. 인공지능(AI) 발전과 5세대(5G) 통신으로 자율주행차는 기술적으로는 이미 거의 완성됐고 제도적인 문제만 남아있다. 카풀, 택시 가릴 것 없이 운전자 자체가 사라질 판이다. 그때 가서도 카풀의 전면적 영업 행위를 저지한 것처럼 자율주행차 영업 행위를 실력행사로 막고 나설 것인가. 이미 재작년 봄에 세계적인 AI 권위자인 미 스탠퍼드대 제리 캐플런 교수로부터 “나의 다른 예측은 모두 틀릴 수 있지만 10년 내 자율주행차가 보편화되리라는 전망은 내기를 해도 좋다”며 “직업의 사회적 변화에 대해 심각히 고민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번 택시·카풀 대타협은 3가지를 보여주었다. 규제 완화의 어려움, 사회적 대타협의 허울 좋은 명분, 그리고 또 하나는 정부의 무능이다. 대체로 규제 완화의 예외 조항으로 생명 안전 환경을 들고 있다. 이번 카풀·택시업계 갈등에서 보듯이 이해관계는 이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막강하다. 생계가 걸려 있어 비난만 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사회적 대타협이 사회 흐름에 역행하는 봉합, 때로는 정작 중요한 당사자인 다수 국민을 뺀 야합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많은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4차 산업혁명에서 뒤처지지 않게 나라를 앞으로 끌고 나가는 게 정부의 능력이자 책임이다. 그런데 규제의 ‘붉은 깃발’을 없애겠다는 정부가 이해당사자들에게 막혀 더 만들고 있으니 갑갑한 노릇이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인공지능과 로봇산업이 발전하면서 우선적으로 대체될 직업은 대체로 두 가지로 분류된다. 이용자나 고용주 입장에서 봤을 때 비용이 많이 드는 변호사, 의사, 증권 애널리스트 같은 고소득 직종, 그리고 돈을 떠나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3D업종이다. 오히려 양극단 가운데 어정쩡한 직업이 상대적으로 오래 남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기존 직종을 급속히 대체하고 있는 새로운 직업 계층을 ‘뉴칼라(New Collar)’라고 한다. ▷‘뉴칼라’라는 용어는 IBM 최고경영자 버지니아 로메티가 2017년 1월 다보스포럼에서 처음 사용했다. 인공지능이 더욱 발전하게 되면 일부 일자리는 사라지게 되지만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고 이 새로운 일자리를 차지할 계층을 ‘뉴칼라’라고 불렀다. 자동화가 진행되면 그 자동화 시스템을 만들고 운영할 사람이 필요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뉴칼라 계층이라는 말이다. 여기에는 기존의 교육 과정을 이수했다는 졸업장이 큰 의미가 없다. 디지털 혁명의 흐름을 선도하고 적응할 능력이 필요할 뿐이다. 실제 최첨단 정보기술(IT) 기업인 IBM 직원 3명 중 1명이 2년제 대학 출신이다. ▷4일 서울 세명컴퓨터고등학교가 ‘뉴칼라 스쿨’ 2개 반 52명의 신입생을 받아들였다. 고교 3년과 2년제 대학의 5년 통합교육과정이다. 프로그래밍, 데이터베이스 및 빅데이터 분석 등 인공지능 관련 수업이 중심이다. 수업 방식도 실무 중심의 토론식이라고 한다. 머리를 싸매고 외우면서도 졸업 후에 과연 이 지식을 몇 번이나 써먹을까 끝없이 의문이 들게 하는 교과 과정이나 광복 이후 요지부동인 6·3·3·4학제도 시대 변화에 맞게 다양성, 융통성, 실용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손질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요즘 월가에서 가장 선호하는 전공 가운데 하나가 수학이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를 이용해 투자를 하는 알고리즘을 짜는 데 수학, 컴퓨터프로그래밍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뛰어난 감각으로 채권투자의 전설로 불리던 미국의 빌 그로스가 빅데이터와 투자 알고리즘을 장착한 애송이 뉴칼라 세대에 밀려 48년간 몸담았던 채권시장에서 쓸쓸히 퇴장하는 모습도 새로운 시대의 반영이다.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연탄이 도시가스로 바뀌면서 석탄이 죽은 산업이 됐다. 광부들이 오갈 데 없게 된 것이 지금 택시 기사와 유사한 상황이다. 1970, 80년대 막장 직업이 지금의 극한직업 회사 택시 기사들이다. 승용차 카풀은 반드시 해야 할 문제다. 택시 기사가 담배 냄새 없애고, 라디오 볼륨 줄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는 건 택시 업주도, 기사도, 정부도 다 안다. 특히 기사들이 벼랑 끝까지 몰려 있다. 카풀 도입에 항의하며 벌써 기사 3명이 스스로의 몸에 불을 질렀다. 정부와 여당은 사회적 대타협을 하자고 한다. 이름만 고상한 변명용 절차다. 카풀 도입은 택시 기사 본인과 가족의 생계가 걸린 문제다. 결사 항전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소비자 대표가 협의체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무슨 권한으로 우리가 좀 편해야겠으니 당신들이 양보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애당초 신·구 사업자, 택시 기사, 이용자들로는 타협이 이뤄질 수 없는 사안이고 논의 구조다. 당사자끼리 도저히 풀기 어려운 이런 걸 해결하라고 정부가 있고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있는 것이다. 공유경제는 4차 산업혁명의 중심에 있고 승용차 카풀은 핵심 산업 가운데 하나다. 규제개혁을 총괄하는 기획재정부나 담당 부처인 국토부는 카풀 도입의 명분에는 긍정적이다. 작년 말에 국토부도 아이디어 차원에서 택시산업 발전 방안을 제안했으나 매우 제한적이다. 사납금제 대신 월급제 도입, 개인택시 면허 매입 후 감차, 앱 미터기 설치 등이다. 택시 감차를 위해서는 매년 35억 원 정도를 지출하고 있다. 승용차 카풀을 도입하면 이용자들이 혜택을 본다. 서울 경기에만 2200만 명의 인구가 밀집해 있다. 세계에서 카풀 사업 하기 이보다 좋은 여건도 별로 없다. 규제를 풀면 피해자가 생기고 수익자도 생긴다. 카풀로 돈 벌 기회를 얻은 사업자는 세금 말고도 기여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이용자도 수익자 가운데 하나다. 그 전에 정부가 직접 나서야 한다. 택시는 버스,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이 아니라서 정부가 직접 재원을 투입할 수 없도록 돼 있어 한계가 있다고 한다. 그 발상부터 고쳐야 한다. 직원이 1만 명 남짓한 대우조선해양의 구조조정에 10조 원이 넘는 정부 국책은행의 자금이 들어갔다. 직원 1만3000명인 한국GM을 10년간 한국에 붙잡아 두는 조건으로 국책은행이 8100억 원의 자금을 지원했다. 직접 고용 인력이 1000여 명 남짓한 광주형 일자리 공장에 국책은행의 지원금 4000억 원 이상이 투입될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가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하고 지역개발사업에 투입하는 돈이 24조 원이다. 1980년대 정부가 석탄 광산을 정리한 사례도 있다. 석탄산업합리화라는 이름하에 광산을 매입하고 광부들에게 생활지원금, 학자금까지 지급했다. 대우조선해양 한국GM도 어차피 민간기업이고 광산들도 대부분 민간 소유였다. 택시산업이 이들보다 공공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 없다. 공유경제의 대가 아룬 순다라라잔 뉴욕대 교수는 최근 인터뷰에서 한국의 카풀제 도입 시도와 택시업계의 반발과 관련해 “새로운 시스템이 도입되면 정부가 기존 시스템에 속한 사람이 계속 일을 해서 돈을 벌게 할 뿐 아니라 일정 부분 재정적 보상도 해줘야 한다. 그게 유일한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세상 이치는 다 마찬가지다. 카풀제에서 지금처럼 사회적 대타협만 기다리는 것은 연탄산업을 그대로 가져가자는 것과 마찬가지다. 당위만 외치고 행동은 없는 정부가 아니라 욕먹을 각오로 일을 하고 성과를 내는 정부가 보고 싶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3월 주주총회 시즌이 다가오고 있다. 기업의 해당 부서는 주주들에게 설명할 자료를 만드느라 한창 바쁠 때다. 실적이 좋지 못한 기업은 쏟아질 비난의 화살을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피해 나갈까 골머리를 앓는다. 대표적인 ‘실적 마사지’ 방법 중 하나가 누적매출 보고다. 10년간 매년 1만 개씩 팔던 물건을 작년에는 1000개밖에 못 팔았다면 매출이 90% 줄었다고 말하는 대신 “누적 판매량이 재작년까지 10만 개였는데 작년에는 10만1000개가 됐다”고 발표하는 것이다. 실제로 2013년 아이폰 판매가 급감하자 애플의 최고경영자 팀 쿡이 투자자들에게 여러 번 써먹은 수법이다. 이처럼 거짓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실이라고도 보기 어려운 게 경제 통계의 양면성이다. 특히 정치인이나 정책 담당자들이 이런 숫자놀음에 능하다. 최근 김수현 대통령정책실장은 지난해 성장률(2.7%)과 관련해 “고무적이다. 경기 회복 자신감이 있다”고 자평했다.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도 지난해 민간소비 증가율(2.8%)이 경제성장률을 웃돈 것을 두고 “민간소비를 중심으로 성장하는, 체질이 강한 경제로 변화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심지어는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경제가 좋다는 말까지 나왔다. 청와대나 여당의 핵심 인사가 자신감과 의욕을 갖는 것은 좋다. 하지만 누적매출 보고식의 사기진작용에서 그쳐야 한다. 정말 우리 경제가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국민들을 바보로 아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아심이 들 게 할 수준이라면 곤란하다. 경기 분석에 대한 전문성을 갖고 있으면서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해 온 국책연구원 한국개발연구원(KDI)의 경기 진단은 좀 다른 것 같다. KDI는 12일 발표한 ‘2월 경제동향’에서 4개월 연속 경기가 둔화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동안 ‘다소 둔화→점진적 둔화→둔화 추세 지속’ 등으로 매달 경기 부진에 대한 표현 강도를 높여왔다. 생산·내수·수출·투자 등 경기를 떠받치는 핵심 지표에 대해 모두 부정적 진단을 내놨다. 민간소비와 관련해선 “소매판매액이 낮은 증가율을 기록하는 등 민간소비 증가세가 다소 미약하다”고 분석했다. 작년 고용 상황에 대해서도 ‘같은 숫자, 다른 해석’이 존재한다. ‘최저임금 인상 등으로 근로소득이 늘어난 데다 상용 근로자가 증가해 일자리 질도 좋아졌다’는 게 정부 스스로가 내린 작년도 일자리 부문에 대한 대체적 평가다. 숫자만 놓고 볼 때 틀린 게 없다. 하지만 근로소득이 늘어난 대신 자영업자가 줄고 실업자가 많아져 상·하위 20% 계층 간 소득격차가 더 벌어졌다는 것도 사실이다. 고용의 질을 가늠하는 주요한 척도인 상용 근로자가 34만 명 늘었다. 그 대신 19만5000명의 임시 일용 근로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월급을 더 받게 된 것과 일자리를 잃은 것을 두고 고용의 양은 나빠졌지만 질적으로 좋아졌으니 다행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경제는 심리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지나친 비관론을 경계하는 차원에서 정치인이나 정책담당자의 발언들이 나왔다고 믿고 싶다. 어차피 사회 인문적 현상에서 ‘지구는 둥글다’처럼 100% 객관적 사실을 말하기를 기대할 수도 없다. 하지만 숫자를 자기 입맛에 맞게 오도하는 데도 정도가 있다. 현실과 동떨어진 진단이 정책적 오류로 이어지지 않을까 그게 걱정일 뿐이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김현철 대통령경제보좌관이 말실수로 경질됐다. 발언 내용은 20, 30대든 50, 60대든 한국에서 일자리 없다고 불평불만 늘어놓지 말고 아세안이나 인도로 가라는 것이었다. 발언 장소는 대한상의 조찬 자리, 청중은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었다. 자체로는 문제가 없더라도 ‘시간 장소 상황(TPO·Time Place Occasion)’ 이 3가지가 맞지 않으면 황당한 결과를 낳게 되는 게 패션과 말이다. 김 보좌관 본인도 “신남방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표현”이라고 사과하고 사표를 제출했다. 궁금한 것은 어떻게 서울대 교수 출신인 차관급 인사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발언으로 화를 자초했을까였다. 초조함과 조바심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이제 문재인 정부도 집권 3년 차에 접어들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처음에는 욕을 먹었다 치더라도 지금쯤은 뿌린 대로 조금씩은 거둬야 할 때다. 문 정부의 경제정책을 통틀어 ‘J노믹스’라고 부른다. ‘문’노믹스는 어감도 좋지 않고 하니 ‘재인’의 J에서 따와 J노믹스라고 붙였는데 여기에는 J자에 대한 좋은 의미도 있다고 캠프 출신 김 전 보좌관이 설명한 적이 있다. 원래 J커브는 경제학 용어다. 환율이 올라가면 수출단가는 떨어지고 수입가격이 올라 처음에는 무역적자를 본다. 시간이 지나면 수출단가가 떨어진 효과가 나타나 무역수지가 더 좋아지는 이론이다. 소득주도성장 역시 처음에는 부작용이 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긍정적인 효과가 본격적으로 나오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런데 반전은커녕 고용참사, 자영업대란 등으로 아직까지도 대통령 지지율을 가장 많이 까먹고 있는 게 바로 소득주도성장이다. 소득 하위 20%의 소득은 줄어 양극화가 더 악화됐다. 이 때문인지 최근 청와대에서 가장 많이 달라진 모습이 경제인과의 만남이다. 대통령 국무총리는 물론 각 부처 장관과 여당 대표 할 것 없이 하루가 멀다 하고 기업인들을 만나고 전시회를 찾는다. 삼성전자 공장은 정치인들의 단골 방문 코스로 자리 잡았다. 현 정부가 결코 반기업적 성향이 아니며 기업 활력 살리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다. 그늘에서 일해야 할 대통령 비서가 대한상의 조찬강연에 나선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실적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반전을 정책 홍보로 꾀하려다 덜컥 발언이 나온 것이다. 바둑 격언에는 묘수 3번 두면 진다는 말이 있다. 열세다 싶어 반전을 꾀하느라 무리수를 뒀다가 그 무리수가 결정적 패착으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J노믹스의 설계자라는 김광두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이 자의로 물러났고, 소득주도성장의 설계자인 홍장표 경제수석, 행동사령탑 장하성 정책실장도 지난해 말 퇴진했다. 남아 있던 김 보좌관까지 이번에 빠졌다. 현 정부 경제정책 슬로건의 창안자가 모두 사라진 만큼 더 이상 구호에 얽매이지 말고 적극적인 방향 전환을 모색할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기업인들 자주 만나 덕담 주고받는 것으로 얼어붙은 경제심리가 상승 커브로 돌아서기 어렵다. 지금부터라도 정석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동안 강조해왔던 규제혁신에 박차를 가해 가시적인 조치들을 내놓아야 한다. 정치적 이유로 왜곡 선정돼 두고두고 세금 잡아먹을 애물단지가 될 것이 아니라면, 생활 사회간접자본(SOC)이든 토목사업이든 정부가 적극적으로 내수경기 살리기에 나서는 걸 나쁘게만 볼 것도 아니다. 뭐가 됐든 이제 계획이나 기대가 아니라 실적으로 진짜 J커브를 보여줘야 할 때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원래는 좋은 뜻인데 잘못 알려진 말이 제법 있는데 표변(豹變)도 그중에 하나다. 사람이 태도를 갑자기 바꿔 좋지 않다는 나쁜 뜻으로 주로 쓰인다. 원래는 계절이 바뀌면 표범이 털을 갈 듯이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되면 이를 확 바꾸는 게 군자의 태도라는 말이다. 주역의 군자표변(君子豹變)에서 나온 말이다. 새해가 되자 문재인 대통령의 경제에 대한 태도가 표변한 것일까. 일단 겉으로 보면 많이 달라진 것처럼 보인다.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경제 35번, 성장 29번, 혁신 21번을 언급하면서 경제에서 실적을 올리도록 매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15일에는 5대 그룹 총수를 포함해 130명을 청와대로 불러 간담회를 가졌다. 앞서 7일에는 중소·벤처기업인들과도 만났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도 16일 경제단체장을 만난 데 이어 17일에는 소상공인연합회를 별도로 찾아가 현장소통 간담회를 가졌다. 소상공인연합회장은 올 들어 부총리 말고도 대통령을 2번이나 만났다. 과거 대통령과 장차관이 이처럼 짧은 시간에 자주 경제인들과 대화의 자리를 가진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그런데 정말 대통령이 달라졌을까. 대통령의 기업인 간담회 전날 법무부는 대통령의 신년기자회견 후속조치로 집중투표제, 감사위원 분리선출, 다중대표소송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상법개정안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대한상의를 비롯해 재계가 수없이 재고해 달라고 요청했던 핵심 현안들이었다. 간담회 때마다 나온 최저임금의 업종별 지역별 차등 적용 현장 건의에 대해서도 “현실적으로 방안을 만들기 어렵다”는 거부 답변만 번번이 돌아왔다. 신년사에서도 언제까지 효과가 날지 모르는 소득주도성장 기조를 촛불처럼 인내하면서 계속 추진할 뜻을 밝혔다. 효과 미지수 사업 밀어붙이기의 대표적인 정책 사례 가운데 하나가 한창 정부와 서울시가 열을 올리고 있는 제로페이다. 이 사업 홍보를 위해 중소벤처기업부는 작년 29억 원, 서울시는 30억 원을 들였다. 그럼에도 시범사업 시작일인 작년 12월 20일부터 이달 4일까지 제로페이 결제 건수는 총 1607건. 하루 평균 107건인데 사실상 제로에 가깝다. 올해도 중기부 60억 원, 서울시 38억 원의 예산을 잡아놓고 있다. 자영업자들을 위해 우리가 이렇게 애쓰고 있다는 정책 홍보 차원이라면 모를까, 이용자 불편 등을 감안하면 앞으로도 나아질 게 없다는 게 관련업계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아무리 경제는 심리라고는 하지만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게 투자요, 일자리다. 경제 살리기의 효과를 거두려면 잘못된 정책은 하루빨리 접고 표범이 털을 갈듯 새로운 정책으로 갈아타야 한다. 보여주기 간담회를 자주 가질 게 아니라 제도를 통해, 법령을 통해 바꿔야 한다. 인권변호사로 정치에 오래 몸담은 문재인 대통령이 경제 사정에 대해 속속들이 깊이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최저임금의 긍정효과가 90%라느니,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가 한국이라느니 이런 가짜뉴스를 가짜인 줄도 모르고 발언하지 않았겠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대통령을 직접 탓하기보다는 이런 원고를 써준 참모들에게 주로 비난의 화살이 돌아갔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첩경은 경제를 이념으로 머리로만 생각하는 참모들이 아니라 사업다운 사업을 해봤거나 제대로 경제정책을 해본 프로페셔널의 목소리를 충분히 듣고 실천에 옮겨 표변하는 길이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애플이 세상에 없던 물건인 스마트폰이란 것을 들고나왔던 2008년 당시, 삼성전자는 핀란드의 노키아와 함께 세계 휴대전화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막 등장한 스마트폰이 피처폰을 대체할 새로운 흐름이 될지 아니면 한번 히트하고 사라질 반짝 발명품이 될지 누구도 모르던 때였다. 스마트폰에 주력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잘나가던 애니콜 시장의 위축으로 연결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삼성 내부에서도 격한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 무선사업부를 총괄하던 신종균 당시 사장은 “스마트폰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최고경영진은 신속한 의사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2010년 갤럭시 시리즈다. 늦었지만 가장 빨리 쫓아갔다. 반면 노키아는 미적거렸다. 점유율 40%라는 확실한 1위 자리가 변화를 거부한 독(毒)이 됐다. 노키아는 결국 스마트폰 시장에 제대로 진입해 보지도 못한 채 몰락했다. 한때 명품으로 불렸던 노키아폰은 이제 박물관행 처지가 됐다. ▷애플 마니아들은 처음에 갤럭시를 애플의 ‘카피캣’(복제품)이라고 놀리곤 했다. 그럼에도 갤럭시는 S펜을 장착한 노트 시리즈 등을 내놓으면서 제품과 가격 모두에서 애플을 맹추격했다. 드디어 2011년 아이폰을 제치고 갤럭시가 스마트폰 시장에서 판매 1위에 올랐다. 그해는 스마트폰의 창시자 스티브 잡스가 사망한 해이기도 하다. 애플에서 잡스의 창의성이 사라졌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던 무렵이다. 작년 3분기(7∼9월) 현재 스마트폰 시장 세계 점유율은 삼성전자가 20.1%로 1위, 애플(13.0%)은 화웨이(14.4%)에도 밀려 3위로 떨어졌다. ▷올해로 갤럭시가 탄생한 지 10년이 됐다. 이를 맞아 삼성은 2월 애플의 ‘안방’인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갤럭시 탄생 10주년 기념작인 갤럭시 S10을 선보일 예정이다. 삼성 고위 임원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들이 위기에 처해 있다고 말한다. ‘졸면 죽는다’라는 군대 용어처럼 잠깐 방심했다가는 언제 노키아 신세가 될지 모르는 게 요즘 글로벌 경쟁이다.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1851년 영국 런던 하이드파크에서 열린 제1회 만국박람회는 산업혁명의 나라 대영제국의 자부심과 위용을 드러내는 자리였다. 행사장 메인 건물 수정궁(The Crystal Palace)은 철강과 유리로 지어졌다. 돌과 벽돌의 시대가 지나가고 산업화 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밤을 밝히는 가스등, 배수용 펌프 등은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로 세계 곳곳에서 몰려온 관람객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산업화시대의 대축제가 만국박람회라면 정보화시대의 대축제는 지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고 있는 CES(Consumer Electronics Show·소비자전자제품전시회)라고 할 수 있다. 1967년 뉴욕에서 시작된 CES는 연초에 열리는 세계 최대 전시회로 그해 기술 트렌드를 보여주는 자리다. 행사를 주최하는 미국소비자기술협회(CTA)는 올해 키워드로 인공지능, 스마트홈, 디지털 헬스케어, e스포츠, 스마트시티 5가지를 꼽았다. 특히 올해 전시회는 이 모두를 가능하게 하는 기술의 원동력으로 이동통신기술 5세대(5G)가 도래했음을 알렸다. 작년 평창 겨울올림픽 때 한국이 처음 상용화에 성공했음을 세계에 알린 그 기술이다. 5개 키워드, 5G 모두 제도적 뒷받침만 된다면 기술적으로는 한국이 얼마든지 해볼 만한 분야들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전시회에서 눈에 띄는 특징 가운데 하나가 자동차다. 가전제품 전시장을 자동차 회사들이 점령한 것이다. 현대·기아차를 비롯해 벤츠, 도요타, 아우디, 혼다 등 세계 주요 자동차 회사가 모두 CES에 참가해 전자·정보통신기술의 총집약체가 자동차란 걸 유감없이 보여줬다. 심지어 벤츠는 신차 모델을 모터쇼가 아니라 이번 CES에서 발표했다. ▷중국 기업들의 약진도 두드러진다. 불과 4, 5년 전만 해도 벤처기업 수준이던 회사들이 이제는 중견을 넘어 글로벌 대기업으로 성장해 전시회에서 무시 못 할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1970년대 미국 기업들은 CES를 두고 소니, 파나소닉 등 일본 기업에 미국 시장을 공략할 홍보 마당을 깔아준다고 불평했다. 이제 그 불만이 중국 기업들을 향하고 있다. 모두 한국의 미래가 걸린 변화들이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세계 TV 생산 1위는 2006년 이후 13년째 삼성전자다.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삼성이 1위, 애플이 2위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다 지난해 중국 화웨이가 애플을 제치고 판매대수 2위로 올라섰다. 애플은 아이튠스 같은 콘텐츠 서비스에서 삼성 화웨이보다 앞선다. 세계 최대 가전박람회인 미국 라스베이거스 CES 개막을 이틀 앞둔 6일 ‘앙숙’ 삼성전자와 애플의 동맹소식이 들려왔다. ▷스마트TV는 드라마나 영화만 보는 수동적 매체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인터넷과 연결돼 음악재생, 학습, 쇼핑 등 그 자체로 PC와 모바일앱의 기능을 아우르는 커뮤니케이션 센터다. 이번 동맹으로 삼성 스마트TV 속에 음악 동영상 재생 서비스인 ‘아이튠스’와 ‘에어플레이2’가 탑재됐다. 삼성은 LG, 소니 같은 TV 경쟁업체에 대한 경쟁력을 높이고 애플은 아마존 넷플릭스 등과의 콘텐츠 서비스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목적이다. 삼성전자는 애플만이 경쟁자가 아니고, 애플은 삼성 말고도 싸울 상대가 많은 것이다. ▷삼성과 애플이 그동안 보여 온 모습은 경쟁자를 넘어 적에 가깝다.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당연해 보이는 휴대전화의 ‘직사각형에 둥근 모서리’를 문제 삼아 애플은 2012년 삼성에 세기의 특허소송을 제기했다. 돈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삼성에 좋지 않은 이미지를 주기 위한 견제용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소송 중에 있는 개인들 같으면 서로 쳐다도 안 볼 텐데 그 와중에서도 삼성전자와 애플은 아이폰 핵심 부품인 마이크로칩 개발을 위해 긴밀히 협력해왔다. 기업은 동지이면서 동시에 적인 ‘프레너미(Frenemy)’가 가능하고 또 가능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시대다. ▷애플과 삼성전자는 중국시장에서 점유율 추락이라는 동병상련을 겪고 있다. 그런데 삼성전자는 화웨이 같은 중국 기업에 주요 스마트부품들을 공급하고 있기도 하다. 이쯤 되면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구별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을 정도다. “영원한 친구도 없고 적도 없다. 오로지 우리의 영원한 이해관계만 있을 뿐이다”라는 19세기 영국 정치가 파머스턴 경의 말은 요즘 글로벌 기업들에 딱 어울린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20세기 인터넷 기술로 청년 부호가 대거 탄생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애플의 스티브 잡스,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가 신기술이 낳은 세계 최대 신흥 부호들이다. 한국에서도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불어 닥친 정보기술(IT) 혁명이 벤처 1세대 부호를 만들어냈다. 지금까지 건재하며 거의 재벌 반열에 오른 대표적인 사람이 네이버 이해진 글로벌투자책임자,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와 넥슨의 김정주 사장이다. 이들은 연배가 엇비슷하고 모두 서울대 공대 출신이다. ▷그 트리오 중 한 명인 김정주 사장이 넥슨의 지분을 전량 매각하고 게임산업에서 손을 뗀다고 한다. 김 사장의 지분 매각 사유가 분분하다. 한편에서는 셧다운제(청소년 심야시간 게임 이용 규제) 등 게임산업에 가해지는 갖가지 규제 때문에 더 이상 한국에서 게임산업을 하기에 지쳤다는 분석도 한다. 또 대학 동창인 진경준 전 검사장에게 비상장 주식 4억2500만 원어치를 공짜로 준 혐의로 2년간 검찰 조사와 재판을 받느라 시달렸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두 요인 다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업가’ 김정주를 나름대로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런 이유로 게임사업을 그만둘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오로지 사업적 판단일 것이라는 관측들이다. 그렇지 않아도 게임산업은 시장도 넓어지지만 경쟁 기업은 더 많이 늘어 글로벌 레드오션이 되는 추세다. 김 사장은 줄곧 게임산업 밖에서 대박을 터뜨릴 다른 기회를 찾아왔다. 유럽의 가상화폐거래소, 이탈리아 유기농 동물사료업체 등을 사들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국내 게임업체 1위인 넥슨의 인수 후보로는 국내외 몇몇 기업과 함께 중국의 1, 2위 게임기업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게임시장 규모로는 이미 한국을 넘어섰고 기술 수준도 한국의 턱밑까지 쫓아온 중국에 국내 대표 게임업체가 통째로 넘어갈 가능성도 없지 않다. 게임산업을 오락실 수준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디지털 기술과 콘텐츠가 결합된 최첨단 산업이다. 이런 산업의 대표 기업이 다른 나라로 통째로 넘어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씁쓸한 일이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