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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스 프리(Tax Free)를 싫어하는 사람은 실적을 올려야 하는 세무서 직원을 빼고는 없다. 세무서 직원조차도 쇼핑객이 되면 택스 프리를 찾는다. 돈은 속성상 돈을 숨길 수 있는 곳이나 세금이 적은 곳을 찾아가기 마련이다. 카리브해의 케이맨 제도에는 법인세가 없다. 인구 5만여 명의 이 작은 섬나라는 법인이 실재하는지 서류상의 페이퍼컴퍼니인지는 관심이 없다. 법인 등록세와 매년 등록을 갱신하는 요금만 받고도 잘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 일간 쥐트도이체차이퉁의 탐사 저널리스트인 바스티안 오베르마이어는 지난해 어느 날 신원 미상의 인물로부터 10만 건에 달하는 페이퍼컴퍼니 내부 자료를 건네받았다. 이것이 이른바 ‘파나마 페이퍼스’다.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축구선수 리오넬 메시 등 조세회피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운 명단이 대량 유출돼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그중에는 한국인 190명도 포함돼 있었다. ▷유럽연합(EU)은 5일 한국을 조세회피처 17개국 중 하나로 지정했다. 한국을 빼고 모두 경제 규모가 작은 나라이거나 자치령인 섬지역이다. 어디 있는지도 알기 어려운 세인트루시아 같은 나라 수준으로 한국이 졸지에 전락한 기분이다. 한국이 포함된 건 외국인투자지역과 경제자유구역 등에 투자하는 외국 기업의 세금 감면 혜택과 관련해 투명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EU는 제재 수위를 결정하지 않았지만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사실만으로도 어제 원-달러 환율이 오르는 등 타격을 받았다. ▷2009년 주요 20개국(G20) 회의에서 조세회피처 블랙리스트가 본격 거론됐다. 그 리스트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홈페이지에 게시돼 있으나 한국은 없다. 그러나 EU는 더 엄격한 조세회피처의 개념을 갖고 있다. 자유무역지대와 같은 곳도 일종의 조세회피처로 분류한다. 조세회피처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지만 핵심은 투명성이다. 유리지갑 회사원들에게 한국이 조세회피처라니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복잡한 기업 세제를 개선하지 않으면 블랙리스트에서 벗어나 그레이리스트에 오르는 것도 쉽지 않을 듯하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얼마 전 법원 게시판에 ‘재판이 곧 정치’라고 쓴 오현석 인천지법 판사는 올해 40세다. 2011년 각각 ‘가카새끼’와 ‘가카의 빅엿’이란 말이 들어간 글을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 당시 이정렬 부장판사와 서기호 판사는 42세와 41세였다. 옛날에 사십을 불혹(不惑)이라고 했다. 오늘날같이 복잡한 세상에서도 사십이 불혹인지 모르겠지만 사십은 판사로서는 그저 약관(弱冠)의 나이일 뿐이다. 미국 대사관이 각국에 배포하는 ‘미국의 사법제도(Outline of the U.S. Legal System)’란 자료를 보면 미국의 주 지방법원 판사는 대략 46세에, 연방 지방법원 판사는 49세에 된다. 항소법원의 경우 주 항소법원과 연방 항소법원에 판사들이 처음 발을 들여놓는 나이는 공히 53세 정도다. 세기의 재판이라고 불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1심 재판의 배석판사가 둘 다 31세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법정드라마를 즐기는 미국인들이 알면 깜짝 놀랄 것이다. 일본만 해도 판사가 되기 전에 판사보로 10년을 보낸다. 그 후에 임용 요청이 받아들여져야 판사가 된다. 이렇게 하고도 10년마다 재임용 절차를 밟는다. 우리나라는 사실상 한번 판사는 영원한 판사다. 10년마다 재임용 심사가 있지만 탈락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다 보니 지방법원 배석판사에서 단독판사나 고등법원 배석판사를 거쳐 지방법원 부장판사까지는 웬만한 판사는 다 한다. 걸러지는 유일한 절차가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과정인데 이것마저 없애겠다고 한다. 고법 부장판사 승진을 없애기로 한다면 재임용 심사라도 강화해야 균형이 맞는다. 얼마 전 김동진 인천지법 부장판사가 자신의 SNS에서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의 잇따른 구속적부심 석방 결정을 비판했다. 김 부장판사는 2012년 자신이 항소심 재판장을 맡았던 횡성 한우 사건의 유죄 판결을 뒤집은 대법원 판결을 비판해 서면경고를 받고, 2014년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선거법 위반 혐의 1심 무죄 판결을 비판했다가 정직 2개월의 중징계를 받았다. 43세에 드러난 가벼운 처신이 45세에 징계를 받아도 변하지 않고 48세에 또 재발했다. 이런 판사를 재임용 심사로 잘라내지도 못하고, 고법 부장판사 승진에서 탈락시켜 제 발로 나가게 하지도 못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미국에서도 40대 중후반이면 판사를 시작할 나이지만 변호사로서 ‘세상사의 검증’을 거친 40대 중후반의 판사와 법원이라는 온실에서 커 40대 중후반에 이른 판사가 같을 수 없다. ‘소년·소녀 급제’해 약 10년간 배석판사를 하고 나오면 예전에는 서울시장 안 부러웠다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단독판사가 된다. 부장판사 밑에서 숨겨졌던 배석판사들의 독단이 잘 드러나는 때가 이 시기다. 이때 걸러내지 못하면 그 독단이 부장판사 때까지 이어진다. 독단에 빠진 판사들은 양심을 판사마다의 성향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재판이 곧 정치’라는 오 판사가 그런 사례다. 그러나 양심은 어원상 함께(con) 아는 것(scientia)이다. 양심은 빈곤한 인문학적 지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종교적·철학적 기원을 갖고 있다. 양심은 비유하자면 1000개의 강에 비친 달(月印千江)과 같다. 각자에게 있지만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다. 판사라면 이 사건을 내가 보듯이 동료들도 볼까, 상급심 판사들이라면 어떻게 볼까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함께 아는 것(conscientia)’이다. ‘내가 아는 것’은 있을지언정 ‘함께 아는 것’ 따위는 없다고 여긴다면 법관을 그만두고 나가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차리든가 해야지 법원에 붙어 있을 이유가 없다. 법원이 이른바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으로 양심을 시험받고 있다. 법원 재조사위원회는 의혹의 당사자로 지목된 법원행정처 판사들의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복사해 가 언제든지 열어볼 준비를 해놓고 있다. 영장을 제시받지 않고 자신이 쓰는 컴퓨터를 열어줄 의무가 없다는 것은 법관만이 아니라 누구나 다 ‘함께 아는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재조사위가 이 양심에 어긋난 일을 하려 한다. 독단을 양심으로 착각한 몇몇 법관들이 재조사위를 좌우하는 사태를 침묵하는 많은 법관들이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제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이었다. 기관총 같은 직사화기의 발전으로 참호가 중요해졌다. 그리고 참호를 돌파하기 위해 기관총에도 끄떡없는 전차가 만들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은 전차를 이용한 전격전이 중심이었다. 그리고 전차를 잡는 항공기인 공격기가 등장했다. 이어 공중 장악의 필요성이 대두하고 전투기가 등장했다. 6·25전쟁은 2차대전 말에 처음 실전 배치된 제트전투기가 전장의 주역이 된 최초의 전쟁이었다. ▷강력한 대공(對空) 미사일의 등장에 따라 전투기의 역할이 축소되는 듯했으나 이를 되살린 것이 적의 탐지를 피하는 스텔스 기능이다. 2006년 미군이 알래스카 상공에서 두 팀으로 나누어 벌인 2차례의 모의 공중전에서 241 대 2라는 격추 성적차가 나왔다. 조종사 기량에 별 차이도 없는데도 일방적 학살에 가까운 기록이 나온 것은 이긴 팀에만 속한 최신예 전투기 F-22 랩터 덕분이었다. 진 팀에 격추당한 2대도 F-22가 아니라 F-15였다. F-22가 최초의 스텔스기는 아니지만 비행 성능의 제약을 극복한 본격적인 스텔스기였기 때문이다. ▷주일미군 소속인 F-22 6대가 어제 한미 연합 공군 훈련차 광주비행장에 와 8일까지 머문다. 역시 주일미군 소속인 F-35A 6대와 F-35B 12대도 한국에 왔다. F-35 기종은 F-22가 너무 비싼 데다 수출로 인한 기술 유출이 우려돼 미군이 생산을 중단하고 대신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스텔스 전투기다. 한국은 미국과 맺은 F-35A 40대 도입 계약에 따라 내년에 1차분 6대를 들여온다. ▷러시아와 중국의 전투기 중에 아직 랩터의 상대가 되는 전투기가 없다. 실은 이것이 미군이 랩터의 생산을 일단 중단하고 F-35 기종 생산에 집중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중국이 랩터를 상대하기 위해 올 3월 실전 배치한 것이 젠-20 전투기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강군몽(强軍夢)의 핵심전력이다. 하지만 스텔스 기능이 취약해 랩터의 상대로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랩터가 하늘의 왕자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번엔 북한 김정은을 ‘병든 강아지(sick puppy)’라고 불렀다. 지난달 29일 북한이 미국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형을 시험 발사한 후다. ‘병든 강아지’는 병들어 자기 토사물을 먹는 강아지를 이른다. ‘미친 개(mad dog)’는 힘이라도 좋지, 병든 강아지는 비실비실하기까지 하니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더 경멸적일 수도 있다. ▷트럼프는 김정은을 향해 ‘미치광이(mad man)’라는 말을 여러 차례 사용했다. 그러다가 성에 안 찼는지 깔보는 식의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온 게 올해 9월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의 ‘미사일 쏘아대는 꼬마(little rocket man)’다. 이번에 나온 ‘병든 강아지’와 같은 계열이다. 트럼프는 그러다가도 김정은이 다소 고분고분해지는 것 같으면 ‘꽤 영리한 녀석(pretty smart cookie)’이라는 식으로 다소 치켜세워 주기도 했다. ▷김정은은 트럼프의 ‘미사일 쏘아대는 꼬마’에 ‘망령든 노인(dotard)’이란 말로 반격했다. 김정은이 정확히 어떤 한국말을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고 북한의 대외선전매체인 조선중앙통신은 그 말을 ‘dotard’로 번역해 전했다. AP통신에 따르면 조선중앙통신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 박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어버이연합 시위대를 지칭하기 위해서도 그 말을 썼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오지(outpost)’ 국가라고 부른 북한 덕분에 많은 미국인이 뜻밖에 ‘dotard’란 고색창연한 단어를 알게 됐다. 김일성대 영문학과 출신 탈북자로부터 북한의 영문학과는 몽골 해군과 비슷하다는 재밌는 비유를 들은 적이 있다. 몽골은 바다가 없어 해군은 실전 훈련을 할 수 없다. 북한 대학의 영문학과 학생들도 주로 책을 통해 영어를 배울 뿐 실제 쓰이는 영어를 배울 기회가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셰익스피어나 초서의 글에나 나오는 단어를 실생활에 쓰는 영어처럼 썼을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의 ‘병든 강아지’에는 어떤 말로 반격할지 궁금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영국 찰스 왕세자가 고(故) 다이애나 전빈(前嬪)과의 사이에 낳은 두 아들 중 미혼인 해리 왕손이 미국 여배우 메건 마클과 27일 약혼했다. 마클은 내년 5월의 신부가 된다. 마클은 이혼 경력이 있는 미국인이다. 1936년 에드워드 8세가 이혼 경력이 있는 미국인 심프슨 부인과의 결혼을 위해 왕위를 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아버지인 조지 6세에게 넘긴 일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물론 해리는 왕위 계승 서열이 형 윌리엄이 케이트 미들턴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조지(4)와 샬럿(2)에도 미치지 못하는 5위여서 왕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래서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윌리엄이 미국인 이혼녀와 결혼하려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이 남는다.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찰스 왕세자는 2005년 이혼녀인 커밀라 파커 볼스와 재혼했다. 볼스는 그 지위가 왕세자빈(princess)이 아니라 공작부인(duchess)이고 찰스가 왕이 된 후에도 왕비급(queen consort)으로 승격하지 못하고 왕세자빈급(princess consort)에 머문다. ▷다이애나만 해도 가난했지만 귀족 집안 출신이었다. 그 자유분방한 기질이 왕실의 엄격함에 맞지 않았을 뿐이다. 윌리엄은 2010년 영국 왕실 사상 최초로 평민 출신인 미들턴과 결혼했다고 해서 화제였다. 마클은 미국인이니까 귀족이니 평민이니 따질 수는 없다. 다만 마클은 외가 쪽으로 흑인 피가 섞여 있다. 이것도 처음이다. ▷마클은 지적이고 다재다능한 여배우다. 미국 노스웨스턴대에서 연극 외에 국제관계를 전공해 정치 진출의 꿈을 꾸기도 했다. 배우를 하면서도 라이프스타일 관련 블로그를 운영하고 인도주의적 활동에도 열심이다. 본인이 디자인한 드레스로 패션쇼를 열기도 했다. 마클이 TV 토크쇼에서 짧은 원피스를 입고 다리를 꼬고 앉아 자유분방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정숙한 세련미의 미들턴에게서는 찾기 힘들다. 스타일만이 아니라 인도주의 스포츠 문화 사업 후원에서 두 왕손 부인들이 펼칠 대결이 궁금해진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해산당한 통합진보당의 대리 복수극이라고나 할까.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후 직접 발표한 1호 인사는 통진당 해산 심판에서 유일한 반대 의견을 냈던 김이수 헌법재판관의 헌법재판소장 지명이었다. 소수 의견도 아닌 극소수 의견을 낸 재판관을 소장으로 지명하는 게 정상이냐는 의문이 들었지만 정당의 자유에 대한 기준은 각자 다를 수 있으니까 의견 차이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 정부가 검찰 ‘숙정(肅正)’을 단행할 때 정점식 전 대검 공안부장 등은 국정 농단과 직접 관련이 없는데도 법무부의 통진당 해산 심판 청구인 측에서 일했다는 이유로 숙청(肅淸)하는 것을 보고 이것이야말로 의견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인사 보복으로 앙갚음하는 것이라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문재인 정부는 국가정보원 개혁발전위원장으로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를 앉혔다. 그가 ‘해방전후사의 인식 4’에 쓴 ‘해방 8년사의 총체적 인식’이란 글의 요점을 글에 나온 내용 그대로 인용해 보겠다. “일제라는 국가권력이 붕괴된 해방의 시점에서 요구되는 혁명의 내용은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 소련군이 진주한 북한에서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은 소련군의 후원에 힘입어 순조롭게 진행됐고, 미군이 점령한 남한에서는 이러한 혁명이 미군정의 반혁명정책에 의해 결국 좌절됐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국정원의 잘못은 엄히 바로잡아야 하지만 대북 공작을 담당하는 국정원의 개혁을 왜 1945년 이후 한반도의 정통성을 북한 공산세력에 부여한 사람에게 맡겨야 하는지는 이해되지 않는다. 이석기의 내란 선동을 드러낸 비밀 회합의 충격적 내용은 국정원의 숙련된 수사가 없으면 포착하기 힘들었다. 앞으로 국정원에 이석기 수사 같은 고도의 대공 수사를 할 의지 자체가 남아있을지 의문이다. 이 정부의 국정원 개혁은 양동이의 물과 함께 아이를 버리는 우(愚)를 범하는 게 아니라 양동이의 물과 함께 아이를 버리는 수(手)를 쓰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통진당은 해산됐으나 통진당적 사고는 번성하고 있다. 경기동부연합에는 민주노동당 시절 정책위의장을 지낸 이용대라는 거물이 있었다. 이 전 의장은 2012년 통진당 비례대표 부정선거 사건이 터지기 전 몸이 아파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는 북한이 2006년 제1차 핵실험을 했을 때 북핵은 북한의 자위를 위한 무기이며 북한이 미국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때 한반도가 긴장 국면에서 평화 국면으로 전환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이런 주장은 민노당 내부에서조차 종북(從北) 논란을 촉발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유사한 주장을 문 대통령의 외교안보특보인 문정인 교수가 하고 있다. 사드 배치를 방해하다가 그 시도가 실패하자 이제는 사드 추가 배치가 없다는 ‘약속’인지 ‘입장 표명’인지를 한 문재인 정부에 중국은 친중(親中)의 진정성을 느끼는 것 같다. 국정원의 대공 수사 의지를 무력화하고 검찰의 공안라인을 숙정하고 통진당을 해산시킨 박근혜 정부의 국정원장 3명을 ‘일망타진’한 이 정부를 북한은 어떻게 봐줄까. 북한이 명확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미국 본토에 이르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인 듯하다. 문재인 정부가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 체제를 완비하기 전에 청와대 임의로 임명한 두 사람은 대윤(大尹)-소윤(小尹)으로 불리며 적폐수사를 주도하는 윤석렬 서울중앙지검장과 윤대진 서울중앙지검 1차장검사다. 윤 차장검사의 누나가 성남시자원센터장을 지낸 윤숙자 씨이고 그 남편이 이용대 전 의장이다. 윤 차장검사의 부인은 최근 사법부의 ‘블랙리스트’ 조사위원이 된 최은주 서울가정법원 부장판사다. 문재인 정부는 통진당 정부도 아니고 주사파 정부도 아니다. 운동권 출신 정부에 가깝다. 그러나 사상이란 묘해서 한쪽 자장에 속하지 않으면 다른 쪽 자장에 속하게 된다. 주사파라는 강력한 자력의 가장 가까운 곳에 백낙청 씨의 ‘분단모순론’이나 민족해방(NL)적 현대사 인식이 위치하고 그 바깥으로 요점 정리도 안 되는 잡다한 운동권적 사고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게 그들은 ‘주적(朱赤)이 동색(同色)인 양’ 한 무더기로 가고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문재인 정부가 굳건한 한미 동맹의 토대에서 중국을 배려하는 정책을 새로운 ‘조선책략’인 듯 말하고 있다. 어제 한미 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미중 간 균형외교에 대한 질문이 있었고, 문 대통령은 균형은 미중 사이의 균형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 무엇의 균형인지에 대해 중국 러시아 동남아 등을 포함해 외교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라고 답했다. 이런 답은 중국에 대한 포커스를 흐리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반미(反美)면 어떠냐’고 대놓고 말했지만 이 정부는 겉으로 말하는 것 다르고 속으로 생각하는 것 다를 정도로는 언사(言辭)를 관리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집권 후 억지스러운 이유를 달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방해하다가 북한 6차 핵실험 직후 돌연 사드 배치를 허용해 일관성을 저버리더니 다시 또 돌연 사드 추가 배치는 없다는 ‘약속’인지 ‘입장 표명’인지를 중국에 했다. 하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을 코앞에 두고 나온 소식치고는 의외여서 혹시 미국의 양해하에 트럼프와 시진핑의 북핵 협상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것인가 애써 긍정적 추측도 해봤지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미국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주권 포기’ 운운하는 비판적 논평으로 곧 드러났다. 트럼프 대통령은 오늘 그의 아시아 순방에서 가장 중요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을 갖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어제도 빌 클린턴 이래 역대 미국 대통령들이 25년간 시간만 허비했다고 비판했지만 그 역시 중국이 실효적인 대북 제재에 나서도록 할 뾰족한 수가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북 제재에 대한 중국의 협력을 얻어내기 위해 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카드는 중국에 직접적인 경제 제재를 가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방들을 압박해 한 푼이라도 더 이익을 취하려는 장사꾼 대통령이 우방으로부터 얻게 될 이익의 총합보다 더 큰 이익을 중국과의 경제 마찰로 단번에 날려버릴 거라고 보기 어렵다. 트럼프 대통령은 어제도 “한국이 수십억 달러어치의 첨단 무기를 구입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힘주어 강조했다. 그 첨단 무기에는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높은 전술핵 대신 핵추진잠수함과 정찰자산 등이 포함된다. 협상으로 중국의 실효적인 대북 제재 동참을 얻어내지 못한다면 두 가지 옵션이 남는다. 하나는 군사적 옵션이다. 군사적 옵션은 트럼프 대통령의 메뉴에 있다 하더라도 경제적 손실도 감수하지 못하는 대통령이 군사적 희생을 감수하리라고 기대하기 힘들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에 많은 힘을 보여줬다. 실제로 사용되는 일은 없길 바란다”고 말했다. 북한을 향한 전례 없는 무력시위는 뒤집어 보면 실제 군사력을 사용하는 상황까지는 가고 싶지 않다는 뜻이 담겨 있다. 다른 하나는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제안했다는, 북핵 포기와 주한미군 철수의 맞교환이라는 카드다. 어제 트럼프에 앞서 중국을 방문한 맥매스터 보좌관은 키신저의 제안과 사실상 같은 중국의 쌍중단(雙中斷)으로는 북핵을 풀 수 없다며 “제재가 최선책”이라고 말했다. 키신저의 제안이 당장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 임기 중 북핵이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상황이 올 수 있고 그로서는 어떻게든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몰릴 수 있다. 게다가 그는 중국을 태평양과 인도양 방면에서 미국 하와이-일본-인도-호주를 잇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동맹으로 봉쇄하자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구상에 공감하고 있다. 그런 미국에, 일본 앞에서 대놓고 동맹은 없다고 말하고 미국과의 알력을 감수하면서까지 중국에 대한 배려를 강화하는 한국은 점점 더 불편한 존재가 되고 있다. 한국과는 아니지만 미국과는 동맹인 나라들로부터 한국을 통한 중국으로의 정보 유출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올 수도 있다. 동맹은 연애와 비슷하다. 가까워지지 않으면 멀어지는 법이다. 연인들이 저렇게까지 하나 싶을 정도로 서로에게 반복해서 사랑을 확인하는 말을 하듯이 동맹국들도 끊임없이 유대의 돈독함을 확인하지 않으면 멀어진다. 다만 환대도 지나친 것은 국가의 자존감에 상처를 줄 수 있고 마지못해 하는 것으로서는 진정성을 전달하기 어렵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그리스 신화의 위대함에는 프로메테우스와 불에 관한 얘기도 일조했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가 신들이 갖고 놀던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가져다준 데 분노해 프로메테우스를 산꼭대기 바위에 묶어 두고 독수리에게 간을 뜯기는 고통을 겪게 했다. 불은 신적인 것이며 신적인 것 덕분에 인간은 동물의 세계에서 벗어났다는 인식을 읽을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올림픽에서는 경기장에 불을 피워 놓았는데 프로메테우스가 자신을 희생하면서 인간에게 선물한 불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성화는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부활된 올림픽에서는 재현되지 않다가 192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올림픽에 처음 등장한 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스에서 채화된 성화가 평창 겨울올림픽을 위해 어제 한국에 도착했다. 그리스 현지에서는 축구스타 박지성 선수가 봉송했고 국내 봉송의 첫 주자는 피겨스케이팅의 기대주 유영 선수였다. ▷성화 봉송은 개막식에 등장하는 마지막 주자가 가장 관심을 끈다.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가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마지막 주자를 맡는 등 그 자리는 국민적 영웅인 스포츠 스타가 맡는 게 관행이다. 평창 올림픽에서는 피겨스케이팅 금메달리스트인 김연아 선수가 유력한 후보다. 다만 김 선수는 평창 올림픽 홍보대사로 온갖 관련 행사에 등장하고 있어 마지막 주자까지 맡는다면 너무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느낌을 줄 수 있다. ▷2014년 브라질 리우 올림픽에서 마지막 주자로 축구선수 펠레가 유력했지만 마라톤 선수 반데를레이 지 리마가 뽑혔다. 그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결승점을 5km 앞두고 선두로 달리다 정신이상자에게 밀려 넘어졌으나 다시 일어나 완주해 동메달을 획득하고도 기뻐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마지막 주자로 손기정 옹이 예상됐으나 그에 이은 진짜 마지막 주자는 라면 끓여 먹고 육상을 해 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 3관왕이 된 임춘애 선수였다. 서프라이즈 효과를 내며 스포츠 정신을 일깨우는 주자를 등장시킬 수 있다면 성화 봉송의 묘미는 더 클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헌법재판소장 임기 규정은 우리나라만 없는 게 아니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장도 임기 규정이 없다. 우리나라 헌법재판소는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를 본떠 만들었다. 두 나라 다 재판관의 임기 규정만 있을 뿐이다. 독일 연방헌법재판관의 임기는 12년이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장은 지금까지 9명이 나왔는데 어떤 소장은 재판관 임기를 꼬박 채운 12년을 했고 어떤 소장은 4년도 채 하지 못했다. 우리나라도 독일도 헌재소장은 재판관과 동시에 소장으로 임명되면 재판관 임기를 다 채우고, 재판관을 하다가 소장으로 임명되면 잔여 임기만 채우는 자리다. 대법원장의 임기는 6년으로 정해져 있는데 왜 헌재소장은 고정된 임기가 없을까. 헌법은 대법원장은 대법관과 급이 다른 자리로 본다. 대법원장은 대법관 제청권이 있다. 대법원장은 그 자신이 제청권을 통해 인사에 영향을 미치니 대법관과 동급일 수 없다. 헌재소장은 그렇지 않다. 헌재소장은 기본적으로 헌법재판관과 동급이며, 소장이 된 뒤에도 동료들 중 1인자일 뿐이다. 그래서 헌법은 헌재소장은 헌법재판관 중에서 임명하도록 하면서 대법원장에게는 이런 제한을 두지 않는다. 청와대가 내심 원하는 대로 소장 임기를 6년으로 하면 위헌이 될 소지가 있다. 헌법재판관은 임기가 6년이고 연임할 수 있다. 연임의 경우 6년 임기가 끝난 뒤 연임시킬 수 있지만 중도에 그만두게 하고 연임시키는 방식을 취할 수 없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대통령은 자신이 임명한 모든 헌법재판관을 중도에 사직하게 하고 연임시킴으로써 최대한 임기를 늘리려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6년 임기제는 유명무실해진다. 헌재소장 임기를 따로 6년으로 정할 때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한다. 대통령은 전임 소장이 퇴임할 때 자신이 지명한 헌법재판관 중 한 명을 소장으로 임명해 그 재판관의 임기를 최대한 늘리려 할 것이다. 2006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시 전효숙 재판관을 중도 사직하게 하고 새로 재판관과 동시에 소장으로 임명하려 했을 때 한 일이다. 당시 정치권은 대통령이 자신이 지명한 재판관의 임기를 늘리려 한 시도로 보고 반발했다. 정종섭의 ‘헌법학 원론’은 이것을 위헌적인 시도라고 적고 있다. 헌재소장 임기가 재판관의 잔여 임기라는 사실은 복잡하게 따질 것도 없이 헌법 조문에 충실하기만 하면 명확하다. 헌재소장은 재판관 중에서 임명하고 소장 임기는 따로 없으니 소장 임기는 재판관 임기가 끝날 때 끝나는 것이다. 박한철 전 소장은 몸소 선례를 남기기도 했다. 선례까지 무시하고 명확히 해달라고 요구하는 측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 굳이 명확히 한다면 잔여 임기라고 하는 수밖에 없다. 청와대에는 변호사 출신 대통령이 있고 법학자 출신 민정수석이 있고 판사 사표를 내고 간 법무비서관이 있다. 그런데도 이런 아마추어적인 문제 제기가 나왔다는 데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김이수 재판관을 소장 후보자로 내세울 때는 소장 임기를 특별히 문제 삼지 않다가 소장 임명이 뜻대로 되지 않자 소장 임기를 들고 나온 이율배반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유남석 광주고법원장을 한 자리 빈 헌법재판관 후보자로 지명하면서, 재판관 9명을 다 채우고 나서야 소장을 임명하겠다고 고집하고 있다. 유 법원장이 재판관이 되고 다시 소장 후보자로 지명된다면 국회는 같은 사람을 상대로 별 시간 차이도 없이 한 번은 재판관으로, 한 번은 소장으로 인사청문을 반복해야 한다. 이것은 국력 낭비다. 그래서 전직 대통령들은 재판관 후보자를 동시에 소장 후보자로 내는 방식을 썼다. 전효숙 건과 비교하면 이런 방식이 얼마나 나이스한지 금방 알 수 있다. 독일에서도 2명의 소장이 재판관 임명과 동시에 임명된 사례가 있다. ‘헌재소장은 재판관 중에서 임명한다’는 조문에 대한 범생이 같은 해석에는 실은 범생이 같지 않은 꼼수가 들어 있다. 헌법재판관은 국회 동의가 필요 없이 임명할 수 있지만 소장은 국회 동의 없이 임명할 수 없다. 문 대통령은 유 법원장을 재판관 겸 소장 후보자로 내세워 국회 임명 동의를 구했다가는 재판관 자리마저도 확보할 수 없을 것 같으니까 일단 국회 동의가 필요 없는 재판관으로 임명해 놓고 보자는 속셈이다. 이런 것이야말로 대통령으로서는 당당하지 못한 태도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미국 작가 돈 윈즐로의 ‘개의 힘’은 멕시코를 중심으로 미국 남부와 콜롬비아에 이르기까지 마약조직의 검은 거래를 파헤친 흥미로운 책이다. 제목은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힘에서 구하소서’라는 성경 시편 구절에서 따왔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감독 드니 빌뇌브의 전작 ‘시카리오’(살인청부업자)도 모티브는 ‘개의 힘’과 비슷하다. 마약 밀반입과 그를 둘러싼 청부살인을 소재로 미국과 멕시코 국경의 황량하고 살벌한 이미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바로 그 국경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공약으로 설치를 약속한 장벽의 시제품이 18일 선보였다.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남쪽 국경에 콘크리트와 철근 재질로 세워진 시제품 8개의 높이는 5.5∼9.1m에 이른다. 이만한 크기의 시제품이 장장 3000km에 이르는 국경지대에 세워진다면 그야말로 현대판 ‘만리장성’이 될 것이다. ▷장벽은 본래 외침을 막으려고 만들었다. 고대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장벽은 ‘야만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었고, 고대 중국의 만리장성은 ‘오랑캐’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었다. 야만족이냐 아니냐, 오랑캐냐 아니냐의 기준이 그 장벽의 어느 쪽에 사느냐에 따라 결정됐다. 트럼프는 멕시코를 통한 미국으로의 밀입국이 경제적으로는 가히 외침이라고 할 만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본 것 같다. 실은 게르만족의 이동이나 흉노족의 남하도 군사적인 외침이면서 동시에 경제적인 이주였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채택했던 미국과 멕시코 두 나라가 NAFTA를 폐기하고 장벽을 세우겠다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이다. 그러나 눈을 돌려 보면 세계에서 가장 강고한 장벽은 한반도를 남북으로 가르는 철책과 지뢰 지대다. 이곳은 독일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이후 남아 있는 유일한 철의 장막이다. 11월 트럼프 방한 시 휴전선을 방문한다느니 마느니 말이 많다. 있는 장벽도 허물지 못하면서 마음의 장벽을 더 높이 쌓고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 얼마나 먼 길을 더 헤매야 사람들은 장벽을 허물 수 있을까.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북한이 남한에 핵을 쏘면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을 핵으로 때릴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가진 핵이 없으니 때릴 수 없다. 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 ‘무기와 인간’에는 초콜릿 군인(chocolate soldier)이 나온다. 그의 총에는 탄창이 없고 초콜릿이 들어 있다. 우리의 초콜릿 군통수권자의 무기고에는 있어야 할 핵이 없다. 문 대통령은 북한을 핵으로 때릴 능력이 없지만 미국이 핵으로 때리려 하면 어떻게 나올까. 쉽게 답할 수 없다. 다만 아직 능력이 안 되는데도 전시작전권을 환수하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한반도에서 한국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어날 수 있는 핵전쟁을 막아보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그리고 막지 못하더라도 반대했다는 흔적은 남기고 싶은 것이다. 문 대통령은 북한으로부터 핵 공격을 받을 경우 재래식 무기로는 보복을 할 것인가. 한반도에서 전쟁은 안 된다고 말했지만 그것만은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 무기로 안 된다면 미국이 가진 첨단 재래식 무기로라도 대응할 것이다. 그것도 하지 않겠다면 군통수권자도 뭐도 아니다. 이 지점에 이르면 문 대통령이 가진 생각의 모순이 드러난다. 그는 핵 공격에 재래식 무기로 대응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갖고 있는 듯하다. 미국에서 첨단 무기 수입 운운하는 것이 그런 뜻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소총으로 기관총과 대결하고, 기관총으로 탱크와 대결하고, 탱크로 전투기와 대결하겠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하겠다. 미국의 북한 전문매체 ‘38노스’의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북한이 서울을 향해 250kt 위력의 핵 도발을 감행할 경우 단 한 발로 약 78만 명의 사망자와 277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한다. 북한 6차 핵실험의 위력을 TNT 폭약 108∼250kt으로 추정하고 북한이 향후 최대치인 250kt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는 가정하에 진행된 시뮬레이션이다. 반면 러시아가 시리아에서 시험 삼아 몰래 사용해봤다는 ‘모든 폭탄의 아버지(FOAB)’는 미국이 4월 아프가니스탄에 투하한 ‘모든 폭탄의 어머니(MOAB)’보다 더 위력적이라는데도 TNT 폭약 44t의 위력을 갖고 있을 뿐이다. 핵무기와는 대결이 되지 않는다. 핵무기는 히로시마 나가사키 투하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절대 무기다. 문 대통령이 한반도를 핵 전장으로 만든 대통령이 되기는 싫고, 핵을 재래식 무기로 대응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걸 자신도 느끼고는 있으니까 매달리는 것이 김정은 참수작전이다. 영리한 토끼는 은신처로 세 개의 굴을 판다. 김정은이 참수작전에 당할 만큼 어리석었다면 지금과 같은 위기를 몰고 오지도 못했다. 현실은 북한이 핵을 쏜다면 우리도 핵을 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세계도 역사도 비웃을 한민족의 비극이 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런 비극을 감수할 각오가 없으면 김정은의 핵 사용을 막을 수 없다. 진보 보수정권을 막론하고 대통령들의 어리석음으로 북한의 핵 보유를 막지는 못했지만 핵 사용만은 기필코 막아야 한다. 김정은의 핵 사용을 막는 길은 ‘핵을 핵으로 억지하는’ 수밖에 없다. 다른 묘수가 있는 것처럼 굴지 말고 제발 정석대로나 했으면 한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지난달 한국핵정책학회에 나와 “핵은 보수와 진보의 논리가 아니다. 생존의 문제다. 핵을 스스로 만들든지, 핵을 가진 것과 같은 조건이나 위치를 만들든지, 상대가 핵을 못 갖게 하고 못 쓰게 해야 한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셋 중 어느 것 하나에도 확신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문정인 대통령특보를 잊고 있었다. 그가 다른 생존 방법을 하나 제시하긴 했다. 웬만하면 가능한 한 김정은이 해달라는 대로 해주는 것이다. 그것도 살아가는 방법이기는 하다. 다만 주인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라 노예로서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핵을 머리에 이고도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살아가려면 각별한 각오가 필요하다. 북한을 핵을 가진 강성대국이 아니라 핵만 가진 빈털터리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그런 각오 말이다. 총에 탄창 대신 초콜릿을 넣고 다니는 초콜릿 군인은 평화주의자다. 국제정치학자인 한스 모겐소는 이렇게 말했다. “평화를 만드는 것은 평화적 태도가 아니라 군사적 힘의 균형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국민이 공무원 때문에 손해를 보면 보통 국가와 공무원 양쪽을 상대로 배상을 청구한다. 2015년 ‘민중총궐기’ 집회에서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사망한 백남기 씨의 유족은 살수차를 조종한 한모, 최모 경장에게 국가와 연대해 각각 5000만 원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냈다. 손해배상 판결이 나면 보통 국가가 일단 피해자에게 배상하고 나중에 잘못한 경찰관에게 그 돈을 달라고 한다. 다만 잘못한 경찰관에게 고의나 중과실이 없으면 국가가 다 책임진다. ▷백 씨 관련 소송에서는 국가배상 소송으로는 특이하게도 국가가 아니라 경찰관 2명이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서둘러 백 씨 유족의 청구를 받아들이는 청구인낙(請求認諾)을 했다. 경찰관들이 자기 책임으로 다투지 않고 돈을 물겠다고 한 이상 국가에 그 돈을 달라고 할 수도 없다. 경찰관들이 무슨 돈이 많아서 돈 많은 국가를 놔두고 자기 돈으로, 그것도 정당한지 부당한지 다툼이 있는 직무상 행위에 대해 5000만 원씩을 배상하는지 의문이다. 경찰관들은 “더 이상 유족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어서”라고 했다. 그런 마음이 분명히 있겠지만 그것만이 이유였을까 싶다. ▷소송이 처음 제기됐을 때의 피고 국가는 박근혜 정부의 국가였다. 지금 이어받아 소송을 진행하는 피고 국가는 문재인 정부의 국가다. 문재인 정부의 국가는 이 소송에서 이기려는 의지가 전혀 없다. 그렇다고 국가가 나서 청구인낙을 하면 국가가 재판 결과도 지켜보지 않고 배상한다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 같으니까 경찰관들을 앞세워 배상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정부의 검찰은 경찰관들이 물대포를 쏘는 과정에서 불법 행위가 있었는지 조사했으나 기소할 혐의를 찾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의 검찰이 다시 조사하고 있다. 경찰관들로서는 기소가 두렵기도 하고, 기소를 면한다고 해도 인사권을 쥔 경찰 수뇌부의 눈치를 봐야 한다. 사건 당시 신윤균 서울4기동단장도 곧 청구인낙서를 제출할 예정이라고 한다. 현직이 아닌 강신명 전 경찰청장, 구은수 전 서울경찰청장만 소송을 계속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몇 해 전이다. 당시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였던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와 2년 가까이 대한변호사협회의 한 위원회에서 같이 활동하면서 그를 근접 거리에서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김 후보자의 말은 부드럽고 태도는 늘 겸손했다. 그는 내가 직접 접해본 법관 중에서 깊은 인상을 심어 준 법관 가운데 한 명이다. 김 후보자가 우리법연구회 회장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대법원장 후보자가 되고 나서야 알았다. 위원회 회의가 끝나면 위원들은 같이 저녁식사를 한다. 김 후보자는 바쁜 중에서도 가능한 한 참석하려고 노력했다. 저녁식사 자리에 정치도 심심치 않게 화제에 올랐지만 김 후보자에게서 이념적으로 특별히 편향적이라고 할 만한 발언을 들은 기억은 없다. 김 후보자에게는 남달리 반듯한 풍모가 있다. 몇 차례 얘기를 나눈 후에 그 풍모의 정체가 종교적 독실성과 무관치 않다고 여기게 됐다. 그는 법원 내 불자 모임인 서초반야회를 창립하고 그 회장을 지냈다. 서울대 법대 재학 시절 법불회에서부터 열심히 활동했다고 한다. 난 다른 종교를 갖고 있으니 불교에 편향된 사람이라는 의심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 후보자는 위원회 활동을 하기 전에 몰랐고 그 후로도 연락한 적은 없다. 그러다 김 후보자가 대법원장 후보자로 지명됐을 때 예상치 못한 괜찮은 카드라고 생각했다. 대법원장 후보자 지명을 고사한 박시환 전수안 두 전 대법관이 그를 가리켜 “우리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했을 때 그들이 어떤 느낌으로 한 말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언론과 정치권에서 나오는 김 후보자에 대한 평가는 그를 지지하든 반대하든 다소 피상적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는 말이 있다. 튀는 판사들이 아니면 외부에서 어느 판사의 개인적 면모를 알기 힘들다. 어찌 보면 소소하다고 할 수 있는 개인적 경험을 늘어놓은 것은 2005년 존 로버츠 미국 연방대법원장이 임명될 때 국제부 기자로서 관심 있게 지켜본 미국 언론의 보도가 떠올라서다. 미국 언론의 연방대법원장 검증은 대통령 검증보다 어떤 면에서 더 엄격하다. 로버츠가 자랄 때 친구와 싸움을 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까지 파고들었다. 마치 로버츠의 생애 전체에 대한 생활기록부를 펼쳐 놓은 느낌이었다. 당시 50세인 로버츠의 판사 경력이 연방항소법원 2년밖에 없어서 검증할 만한 판결이 부족했고 그래서 더 인성을 파고들었는지 모른다. 나는 김 후보자의 성품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어떤 사안에 어떤 판결을 했는지는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 있게 대법원장감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보도를 유심히 지켜봤다. 그에게서 인사청문 대상자에게 흔히 드러나는 재산 병역 표절 등의 도덕적 결함이 발견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상식에 크게 어긋난 편향된 판결이 없었다. 전교조 법외노조 효력정지 가처분 인용이 논란이 되고 있지만 그 정도로 자격 시비를 하는 것은 지나치다. 그가 대법관을 했다면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 의견을 피력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논란에 휩싸였을 수도 있을 테지만 대법관을 거치지 않은 점이 여기서는 운 좋게 작용했다. 다만 그의 개혁 성향이 현실과 동떨어져 공상(空想)적으로 흐르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남아 있다. 그가 춘천지법원장 시절 했다는 수평적 판사 조직 실험이 그렇다. 미국의 판사 조직이 수평적인 것은 주법원이든 연방법원이든 판사를 40대 후반이 돼야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로 치면 대개 고법 부장판사가 되기 직전의 나이다. 우리나라도 모든 판사가 고법 부장판사 정도의 경륜을 갖고 있다면 수평적 판사 조직을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나이가 사십이 돼도 ‘재판은 정치’라는 헛소리를 하는 판사가 있는 게 실상이다. 법원에 그 말고도 대법원장을 할 만한 사람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보정권이 대법원장에 대한 지명권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보수가 합의해줄 수 있는 드문 인물임에 틀림없다. 보수정권이 대법원장 지명권을 갖고 있더라도 진보가 어느 정도 동의해주는 인물을 뽑을 수밖에 없다. 사법부의 수장은 그런 자리다. 국회에서 그의 임명동의가 부결될 경우 그보다 못한 인물이 지명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솔직히 없지 않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한국이 사드 배치를 완료하자 중국 공산당 기관지 런민일보의 자매지 환추시보가 7일자 사설에서 ‘한국 보수주의자들은 김치를 먹어서 멍청해진 것인가’ 등의 격한 표현으로 한국을 비난했다. 멍청하다는 뜻으로 쓴 중국어는 호도(糊塗)다. 우리가 덮어서 감춘다는 뜻으로 쓰는 호도를 중국인은 총명(聰明)의 반대말로 쓴다. 일본식 표현으로 바꾸면, ‘김치를 먹어서 바카야로(바보)가 된 것인가’의 느낌이 난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 중국어판에서 김치는 통상 밥과 함께 먹는데 칼로리가 적고 비타민 등이 많아 미국 건강잡지가 세계 5대 건강식품 중 하나로 선정했다고 첫머리에 소개돼 있다. 그런 김치가 중국인의 입맛에는 맵게 느껴져 중국인은 대체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자기들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건강에 나쁘지도 않은데 먹어서 멍청해진다고 하는 것은 도무지 이치에 닿지 않아서 헛웃음만 나온다. 사람이 멍청해지는 것은 무슨 음식을 먹어서가 아니라 맹목적인 감정에 휩싸여 논리적으로 생각할 능력을 잃어서다. ▷김치는 한국의 보수주의자들만 먹는 게 아니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다 먹는다. 심지어 이른바 진보좌파들, 바로 중국에까지 가서 사드 배치를 비난한 현대판 사대주의자들도 먹는다. 한국 보수주의자들만 찍어서 비난하고 싶었다면 김치를 먹어서 멍청해진다는 말만큼 부적절한 말도 없다. 사설은 본래 의도한 바도 달성하지 못하고 한국인 전체를 욕한 멍청한 글이 되고 말았다. ▷중국에 난득호도(難得糊塗)란 말이 있다. 멍청한 척하기도 힘들다는 뜻이다. 초탈한 넓은 마음이 있어야 멍청한 척할 수 있다. 중국이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오면 한국도 초탈한 마음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8일 갤럽조사에서 핵무기 보유를 원하는 국민이 응답자의 60%로 나타났다. 우리가 중국의 코앞에서 핵무기를 갖겠다는 ‘총명’한 태도로 나와야 중국이 정신 차리겠는가. 중국이 멍청하지 않다면 북한이 핵을 포기하도록 한 번이라도 제재에 앞장서 우리가 핵을 원할 생각을 아예 갖지 않게 도와줘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자연지진은 발생 원인에 따라 구조지진, 화산지진, 함몰지진으로 나뉜다. 대부분의 규모가 큰 지진은 지각을 이루는 판들의 변형에 따라 발생하는 구조지진이다. 화산활동으로도 지진이 발생하고 거대한 지하 동굴 등의 함몰에 의해서도 지진이 발생한다. 화산지진과 함몰지진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다. 지하 핵실험의 충격에 따른 지진은 인공지진이라고 해서 자연지진과 구분한다. 그러나 핵실험 이후 갱도 등이 붕괴되면서 일어나는 2차 지진은 함몰지진이다. ▷중국은 3일 북한 6차 핵실험 이후 약 8분 30초 만에 규모 4.4의 함몰지진이 발생했다고 핵실험 이후 24분 만에 밝혔다. 핵실험 후 지진파로 감지된 함몰은 5차 때까지는 없던 것으로 6차 핵실험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다. 우리 기상청은 함몰지진 관측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듯하다. 핵실험 이틀이 지나서야 지진파를 고주파 대역과 저주파 대역으로 나눠 분석해 저주파 대역에서 함몰 추정 지진파가 잡혔다고 밝혔다. ▷핵실험 이후의 함몰지진은 지반이 무너져 생긴 틈으로 방사성 물질이 새어나올 수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에 국민의 안전과도 직결된다. 이 때문에 기상청의 뒤늦은 함몰지진 확인이 비판을 받고 있다. 북한 핵실험은 북한 최북단에 가까운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서 진행된다. 한국의 휴전선과는 400km 이상 떨어진 곳이다. 원자력안전위원회의 휴전선 이남 방사능 측정치는 평상시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인근 북한 주민들은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 부설 북한 전문 미디어 38노스가 북한 6차 핵실험 뒤 촬영한 첫 풍계리 산악지역 사진에는 핵실험장뿐만 아니라 주변 여러 곳의 토사가 무너져 내려 산사태가 발생한 모습이 보인다. 앞서 5차례의 핵실험 때보다 지형 변화가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갱도 붕괴 등의 함몰 흔적은 찾기 어려웠으나 화상도가 낮아 명확한 상황을 알기는 어렵다. 차후 보다 높은 해상도의 위성사진 분석 결과를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광범위한 지형 변화가 있다면 추가 붕괴 가능성도 있어 안심하기는 이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도널드 트럼프는 그가 대통령이 되리라고 거의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2015년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면서 ‘불구가 된 미국’이란 책을 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널뛰기하는 듯이 보이는 그의 언행이 나름대로 상당한 일관성이 있음을 알게 된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말은 부드럽게 하되 큰 몽둥이를 지니고 있으라(Speak softly and carry a big stick)”는 말을 남겼다. 트럼프는 반대다. 그는 북한에 “군사적 옵션을 포함해 모든 옵션이 테이블 위에 올라 있다”고 엄포를 놓고 중국에 “북한 제재에 동참하지 않으면 환율조작국 지정도 불사하겠다”고 말한다. 그가 부동산 사업에서 익힌 협상의 기술 중 하나가 일단 거칠게 말하고 보자는 것이다. 정말 조심해야 할 상대는 부드럽게 말하는 쪽이다. 부드럽게 말하는 쪽이 큰 몽둥이를 쓸 가능성이 높다. 거칠게 말하는 쪽은 몽둥이를 쓸 생각이 없어 말로 기선을 잡으려는 것이다. 몽둥이를 쓰는 데는 돈이 들어간다. 사업가 출신 트럼프는 그런 돈이 아까운 것이다. 중동은 석유라는 자원이 있으니까 석유를 확보한다는 명분에서라도 큰 몽둥이를 쓸 수 있다. 부시 대통령 부자(父子)는 중동에서 큰 몽둥이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빌 클린턴 이래 북핵을 다룬 모든 미국 대통령의 고민은 북한에 대해서는 무슨 이익이 있어서 그런 큰 몽둥이를 써야 하느냐는 것이다. 트럼프는 심지어 중동에서 큰 몽둥이를 쓴 것도 미국에는 이익이 없었다고 비판한다. 그런 그가 북한에 대해 큰돈이 들어가는 큰 몽둥이를 쉽게 쓸 리가 없다. 북한 도발의 와중에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지란 말을 흘리며 한국을 압박해 경제적 이득을 얻어낼 궁리를 하는 게 트럼프란 사람의 본색이다. 뉴욕군사학교를 나온 트럼프는 군사력을 실제 사용해서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보다는 군사력의 압도적 우세를 과시함으로써 상대방을 지레 겁먹게 하는 게 돈이 덜 든다고 여긴다. “화염과 분노” 같은 거친 말만 늘어놓고 매번 위력 시위나 하고 돌아가는 것은 트럼프의 머릿속에서나 가능한 군사력의 돈 안 드는 활용법에 따른 것이다. 위력 시위 후 북한이 잠시 조용해지자 “김정은이 현명하다”며 그 효력이 하루도 못 갈 말을 하는 것은 무너지는 믿음에 대한 안타까운 집착이다. 큰돈이 들어감에도 큰 몽둥이를 쓰는 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높은 가치를 추구할 때 가능하다. 트럼프는 동맹국들을 미국의 군사비나 축내고 무역을 통해 미국의 이익이나 빼내가는 나라로 묘사하고 있다. 그에게 자유의 가치를 함께 지킨다는 정신은 희미해졌다. 트럼프의 미국은 자유의 제국에서 한 힘센 국가로 후퇴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여전히 ‘전쟁만은 안 된다’는 말을 ‘북핵은 안 된다’는 말보다 앞세운다. 그 메시지는 분명하다. 북핵을 용인하는 한이 있더라도 전쟁만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큰 몽둥이도 없이 부드러운 말을 하는 상대만큼 우스운 상대도 없다. 전쟁만은 안 된다는 부드러운 말은 큰 몽둥이를 갖고 있지 않으면 무력한 투항일 뿐이다. 전술핵이 우리가 가져야 할 큰 몽둥이다. 북한의 6차 핵실험 이후 전술핵을 한국에 재배치하고 한미가 그 사용을 공유하는 것이 시급해졌다. 문 대통령은 북한이 아직 레드라인(red line)을 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레드라인이라는 발상 자체가 틀렸다. 핵 보유는 명확한 선(線)을 긋기 어려운 면(面)의 개념이다. 북한은 핵 보유라는 레드 존(red zone)에 들어온 지 이미 오래고, 나가지 않을 것이 분명해졌다. 실은 전술핵 배치를 간절히 원해도 트럼프가 순순히 내줄지가 더 걱정이다. 문 대통령의 사드 배치 태도에 실망한 트럼프는 전술핵을 공유할 만큼 문 대통령을 신뢰하지 않는다. 기존의 군사동맹에 대해서도 돈을 더 내라는 트럼프가 한미 FTA 양보 등 대가를 안겨 주지 않아도 전술핵을 배치해줄지 의문이다. 그러나 압박이건 대화건 전술핵을 일단 배치해 놓은 다음의 얘기다. 지금 문 대통령의 지상과제는 트럼프를 설득하든 협박하든 그에게 대가를 지불하든 전술핵을 배치하는 것이다. 전술핵으로 최소한의 핵 균형을 이루는 것이 북한의 오판을 막아 전쟁을 막는 방법이기도 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원정군을 이끌고 조선에 와 평양성에서 왜군을 대파한 이여송은 6·25전쟁으로 치면 인천상륙작전으로 단번에 전세를 뒤집은 더글러스 맥아더나 다름없는 인물이다. 그가 뛰어난 장수였다는 공식 기록의 뒷면에는 조선인을 상대로 자행한 횡포가 자자하게 전해 내려온다. 이여송은 명에 귀화한 조선인 출신의 요동총병관 이성량의 아들이다. 고려 말이나 조선 초에 요동으로 건너간 집안의 후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 김 주말레이시아 미국대사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인 2011년, 한미 수교 이후 129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계 주한 미국대사로 임명됐다. 당시 일각에서는 한국어와 영어가 모두 유창한 미국대사인 만큼 누구보다 한국 입장을 깊이 이해하고 때론 한국 편에 설 것이라는 기대가 나왔다. 하지만 비슷하게 생긴 얼굴만 보고는 그가 엄연히 미국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미국인 대사라는 점을 잠시 잊고 너무 큰 기대를 건 것인지 모른다. ▷차기 주한 미국대사에 빅터 차 조지타운대 교수가 내정됐다고 한다. 임명되면 두 번째 한국계 주한 미국대사다. 북한 핵과 미사일이 미국의 직접적 위협이 되면서 한미가 그 어느 때보다 협조해야 하고, 어쩌면 대립할 수도 있는 국면에서 대사로 내정됐다. 차 내정자는 조지 부시 대통령 시절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국장에 임명됐을 때 “한국에서 내게 갖는 기대를 아마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대사로 내정된 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차 내정자의 부친은 1950년대 컬럼비아대 유학생으로 미국에 갔다가 정착했다. 김 전 대사나 차 내정자나 모두 부모님이 한국인이고 부인도 한국인이다. 다만 김 전 대사는 중학교 1학년까지 한국에서 다니다 미국으로 이주한 교포 1.5세대인 반면 차 내정자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교포 2세대다. 김 전 대사보다 훨씬 더 미국으로 깊이 들어가 있다. 한국어를 하지만 한국의 주미 특파원들과도 한국어로 얘기하지 않는다. 한국계지만 철저하게 미국인인 대사가 오는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밥 우드워드가 쓴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이라는 책을 보면 그가 1970년대 닉슨의 워터게이트 도청 사건을 파헤칠 당시 미국 언론의 취재윤리를 엿볼 수 있다. 기자들은 연방수사국(FBI)의 수사기록을 알아내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도 수사기록을 ‘정화(淨化)되지 않은 보고서’로 간주했다. 우드워드는 “FBI에서는 누구라도 악의적인 말을 할 수 있고 (소환된 사람이 전하는) 정확도가 떨어지는 정보, 개인적 의혹, 불평불만이 그대로 기록된다”고 썼다. 그래서 우드워드의 워싱턴포스트는 범죄로 보이는 내용은 두 명 이상의 취재원에 의해 확인되지 않는 한 수사기록만으로 보도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우드워드는 제보자인 ‘딥 스로트’로부터 받은 정보도 힘든 확인 작업을 거친 후에야 기사화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사정이 다르다. 수사기록 내용 자체가 그대로 특종이 된다. 이런 약점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집단이 검찰이고, 그것을 가장 잘 이용한 것이 최순실 국정농단 특검이다. 특검법에는 ‘국민의 알 권리 보장을 위해 피의사실 외의 수사 과정에 대해 브리핑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 이 규정은 피의사실을 제외하고 있지만 실제론 특검이 피의사실을 매일 흘리는 수단으로 악용됐다. 그렇게 해서 특검의 프레임에 맞춘 부정확한 정보가 많이 보도됐고, 그에 따라 편향성이 강한 여론이 형성됐다. 특검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기업 총수들을 뇌물죄로 기필코 기소해야 하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국회가 박 전 대통령 탄핵 사유에 수사도 되지 않은 뇌물죄를 입도선매 식으로 끼워 넣는 바람에 사후적으로 뇌물죄를 입증해야 했던 것이다. 탄핵을 위해서는 굳이 뇌물죄까지 필요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뇌물죄를 뭉개버리고 파면을 선고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에서 드러났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뇌물죄가 필요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국회와 헌재가 맡은 탄핵 절차의 외곽에서 흔히 공직자의 가장 중요한 탄핵 사유로 취급하는 뇌물죄의 피의사실을 지속적으로 흘림으로써 탄핵에 대한 압력을 증가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검이 흘린 정보만 일방적으로 들어야 했던 수사 단계에서와는 달리 피의자와 변호인의 주장까지 들을 수 있는 공판 단계에서는 정보의 균형이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특검이 ‘차고 넘친다’고 자부하던 증거는 결심(結審) 단계에 이르러서는 상당 부분 논박당했다. 막판에 청와대까지 나서 이른바 ‘캐비닛 문건’을 공개하며 지원사격에 나선 것은 만약 뇌물죄가 무죄가 되면 곤란해지는 측이 어딘가 불안해한다는 인상을 줬다. 특검을 빼놓고는 이제 미르·K스포츠재단에 간 돈을 뇌물이라고 보는 쪽은 별로 없다. 양아치에게 돈을 뜯기는 것은 무슨 대가를 바라서가 아니라 해코지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이제 초점은 삼성의 최순실 딸 정유라 승마 지원금도 뜯긴 돈이냐, 아니면 뇌물이냐로 모아진다. 이것은 삼성이 승마협회 지원사 자격으로 지원한 것이어서 이쪽에서 보면 이렇게, 저쪽에서 보면 저렇게 보인다. 뭐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결국 대가 부분을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특검이 대가로 설정한 삼성의 승계 작업이라는 틀은 외양만 그럴듯할 뿐 실체는 부실하다. 삼성 측은 “특검이 주장한 ‘승계 작업’ 과정이 모두 마무리되더라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삼성전자에 대한 의결권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다”고 딱 잘라 주장했다. 변동이 있는지 없는지는 판사가 계산기를 두드려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언론계의 교황으로 불린 월터 리프먼은 일찍이 ‘여론’이란 책에서 여론 자체가 아니라 여론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주목할 것을 촉구하고 여론이 얼마나 비합리적으로도 형성될 수 있는지 강조했다. 여론은 존중해야 하지만 형성 과정이 왜곡된 여론까지 존중할 필요는 없다. 뇌물죄 사건을 처음부터 관심을 갖고 지켜본 한 대형 로펌의 대표변호사는 “특검은 여론에 호소해 왔고 재판부가 여론의 압박을 이겨낼 수 있느냐가 유무죄의 관건”이라고 말했다. 권력에 저항하는 것보다 여론에 맞서는 것이 더 어려운 시대라고 한다. 그럼에도 판사라면 여론에서 독립해 유죄든 무죄든 오로지 명징한 법적 논증으로 판결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프랑스와 독일을 흔히 유럽연합(EU)의 쌍두마차라고 부른다. 과연 두 나라는 여전히 쌍두마차인가. 두 나라의 경제력은 2000년대에 들어와 역사상 선례가 없을 정도로 격차가 커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프랑스가 법으로 주 35시간 노동제를 강제한 것은 2000년부터다. 주 35시간 노동제는 근로자의 노동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늘린다는 좋은 목적으로 도입했지만 더 많이 일하려고 해도 일할 수 없게 만들어 17년이 지난 지금까지 프랑스 경제의 질곡이 되고 있다. 2007년 집권한 공화당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주 35시간 노동제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됐지만 노조의 반발로 실패했다. 2012년 집권한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비록 자기 당이 도입한 제도이지만 폐해를 인정하고 폐지를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현 대통령이 올랑드 정부의 경제장관으로 있다가 뛰쳐나온 것이 주 35시간 노동제 폐지가 좌절돼서다. 마크롱이 신생 정당을 창당해 대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것은 공화당으로도 안 되고 사회당으로도 안 되기 때문이다. 마크롱의 당선이 새로운 프랑스의 시작인지는 잘 모르겠고 무능한 프랑스가 맞은 파탄의 ‘화려한 피날레’인 것은 분명하다. 프랑스가 사회당 리오넬 조스팽 총리 주도로 주 35시간 노동제를 도입하던 무렵 독일에선 사회민주당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늘리기 위해 노력했다. 상급 노조에 의한 집단적인 임금 인상 관행이 줄어들고 기업별로 임금과 노동시간 협상이 이뤄지는 새 관행이 정착되기 시작했다. 그런 노력의 연장이 2003년 발표된 ‘2010 어젠다’다. 기독민주당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2010 어젠다’를 이어받아 독일의 최전성기를 이끌어 냈다.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체제에서 헤매던 2000년 무렵은 두 나라에 아주 중요한 시점이었다. 유럽연합(EU)은 1999년 단일 화폐 유로를 출범시키고 본격적인 시장 통합을 이뤘다. 역내 환율이 없어져 한 국가의 경쟁력은 직접 다른 나라에 타격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세계적으로는 2001년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 거대한 시장이 열렸다. 이 시점에 프랑스는 조스팽이라는 전철수(轉轍手)를 만나고 독일은 슈뢰더라는 전철수를 만난 것이 나라의 운명을 갈랐다. 두 나라의 장기 대차대조표는 실업률과 무역수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독일의 실업률은 2005년 11.7%로 최고치를 쳤으나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해 지난해 4.1%까지 내려갔다. 프랑스의 실업률은 2010년 독일을 추월해 2013년 10%를 넘어선 이후 지난해까지 4년 연속 두 자릿수를 기록하고 있다. 독일 무역흑자와 프랑스 무역적자의 격차는 1990년 100억 유로에서 지난해 32배인 3200억 유로로 벌어졌다. 이 액수는 일자리로 따지면 약 320만 개에 해당한다. 주 35시간 노동제는 단기적으로는 일자리를 늘리는 효과가 있었지만 장기적으로는 프랑스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결국은 일자리를 줄이는 결정적 요인이 됐다. 본래 프랑스 제품은 디자인을 제외하고 질과 서비스 등 모든 면에서 독일 제품에 뒤떨어졌다. 프랑스는 뒤떨어지는 제품 경쟁력을 독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인건비에 의한 가격 경쟁력으로 따라잡았다. 그러나 제 주제도 모르고 세계 최초로 주 35시간 노동제를 실시함으로써 그 경쟁력마저 사라졌다. 이제 프랑스에 남은 거의 유일한 경쟁력은 원전을 토대로 한 값싼 전기료 정도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나온다. 사라지는 경쟁력 때문에 프랑스는 원전을 포기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반면 독일은 전기료 부담을 안고서라도 원전에서 신재생 에너지로의 전환을 추구할 만큼 경쟁력에 자신이 생겼다. 문재인 정부는 탈원전을 선언하고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고 최저임금을 파격적으로 올리고 있다. 초과 근로시간도 줄이겠다고 한다. 우리 산업의 어떤 경쟁력을 믿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성장의 원동력은 경쟁력이다.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나라는 더 그렇다. 경쟁력은 아랑곳없는 소득 주도 성장은 훗날 노동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조스팽의 주장만큼이나 어리석었다고 평가받을 수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당번병을 영어로 배트맨(batman)이라고 한다. 전쟁 중 장교의 짐이 든 안장(bat)을 말에 씌워 끌고 다니던 사람에서 비롯됐다. 영국군에는 제1차 세계대전까지만 해도 모든 장교에게 병사-하인(soldier-servant)이 딸려 있었다. 소설 ‘반지의 제왕’에서 샘이 주인님(Master)이라고 부르는 프로도와의 관계가 작가 존 로널드 톨킨이 참전 중 경험한 장교-주인과 병사-하인의 관계에 기초한 것이다. 이 말이 전간기(戰間期)에 들어와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지면서 배트맨으로 바뀌었다. ▷당번병은 장교의 명령을 부하에게 전달하고, 장교의 군복과 장비를 상시 가용한 상태로 관리하고, 장교가 지휘를 하느라 시간이 없어 못 하는 잡무를 처리한다. 영국에서 당번병은 더 힘든 임무에서 면제되고 지휘관이 베푸는 특전을 받기 쉽고 진급도 빨라 선호되는 보직이다. 우리나라 군대에 당번병은 공식 편제에 없지만 보통 대대급 부대에서부터 무전병과 1호차 운전병이 세트로 부대장의 당번병 임무를 맡는다. ▷공관병은 당번병과 달리 장성급 지휘자의 승인하에 공식적으로 둘 수 있다. 공관병은 연대급 이상 부대 지휘관의 관사에서 생활하면서 가사를 돌보는 임무를 맡는다. 본래 임무와는 달리 자녀들의 학습도우미로 활용돼 종종 구설수에 올랐다. 그럼에도 힘든 훈련이나 사역에서 제외돼 꽃보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선진국 군대에서는 지휘관이 필요하면 신원조회를 거친 민간인을 고용해 쓴다. 우리나라 사병 봉급이 모병제 수준으로 높았다면 공관병은 진즉 민간 가사도우미로 대체됐을 것이다. ▷박찬주 육군 제2작전사령관(대장)이 1일 공관병에 대한 갑질 의혹에 책임을 지고 전역지원서를 제출했다. 박 사령관 부부는 공관병이 호출에 즉각 응하도록 공관 내 두 곳에 있는 호출 벨과 연동된 전자팔찌를 채우는 등 비인간적 대우를 했다고 한다. 송영무 국방부 장관은 공관병을 민간 인력으로 대체하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공관병 제도는 없애야 마땅하지만 민간 인력으로 대체하려면 또 돈이 들어가니 계속 돈 들 일만 쌓여 간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