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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중요한 건 공감의 깊이가 아니라 반경입니다. 현재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거리가 한 뼘도 닿지 못하고 있어요.” 2022년 현재 소셜미디어 세상은 얼핏 보면 공감이 가득하다. 게시물에는 ‘좋아요’가 넘쳐나고, 많은 이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이게 정말 서로가 공감한다는 증거가 될까. 진화생물학자인 장대익 가천대 창업대 석좌교수(51)가 보기에 “우리는 지금 공감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을 뿐”이다. ‘공감의 반경’(바다출판사)을 지난달 28일 펴낸 장 교수는 3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오늘날 우리는 부족사회에서 혈연으로 맺어진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공감만 하고 있다”며 “현재 가속화하는 혐오와 분열도 집단의 과잉 공감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온라인 커뮤니티가 만들어지면서 생긴 ‘디지털 부족화(部族化)’ 현상이 오히려 우리 사회의 공감 능력을 후퇴시키고 있어요. 여성과 남성, 진보와 보수로 쪼개진 자기들만의 공간에서 자기가 속한 부족을 지키려고만 하는 원시적 본능이 싹튼 거죠. (부족 내에서만) 서로 깊이 공감하고 있다고 여기다 보니, 이런 공감이 혐오와 차별을 양산하고 있는 겁니다.” 한국에선 유독 디지털 부족화로 인한 문제가 왜 더 심각해진 걸까. 장 교수는 세계에서 보기 드문 ‘입시지옥’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고 지목했다. 그는 “같은 교실의 옆 책상에 앉은 친구와 끊임없이 경쟁하며,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에 눈감아야 성공하는 게 한국의 입시제도”라며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의 머릿속엔 타인의 고통을 외면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인식이 뿌리내릴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왜곡된 공감을 바로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장 교수는 해법 역시 교육에 있다고 봤다. 그는 “인간의 공감 능력은 어떤 사회에서 나고 자랐는지, 어떤 문화와 제도에 놓였는지에 따라 충분히 확장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캐나다 교육혁신가 메리 고든(73)이 창안한 프로그램 ‘공감의 뿌리’가 대표적인 사례다. 집단따돌림 역할극 놀이 등을 통해 상대방의 감정을 역지사지로 느껴 보는 방식이다. 2010년 스코틀랜드에선 이 프로그램을 실시해 학교 폭력이 상당히 줄어드는 결과를 얻었다고 한다. “한국에도 이런 교육이 시급합니다. 현행 정규과정은 수리나 외국어 실력을 키우는 건 그토록 강조하면서, 정작 우리 곁에 살아가는 타인의 슬픔과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은 길러내지 못하고 있어요. 우리 사회가 괴물을 만들지 않으려면 당장 공감 능력을 교육해야 합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속 나만의 공간에는 ‘좋아요’가 넘쳐난다. 하트 버튼을 누르면 그 어느 때보다 공감을 표현하기 쉬운 시대다. 하지만 신간 ‘공감의 반경’(바다출판사)을 지난달 28일 출간한 장대익 가천대 창업대학 석좌교수(사진·51)는 정반대의 주장을 내놓는다. “우리는 지금 ‘공감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고.“진정 중요한 건 공감의 깊이가 아니라 반경입니다.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에게는 한 뼘도 가 닿지 못하고 있어요.” 3일 전화로 만난 장 교수는 “오늘날 우리는 부족 사회에서 혈연으로 맺어진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공감만 하고 있을 뿐”이라며 “오늘날 가속화하는 혐오와 분열은 내 집단에 대한 과잉 공감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온라인 커뮤니티가 만들어지면서 ‘디지털 부족화 현상’이 우리 사회의 공감능력을 후퇴시키고 있다”고 진단한다. 여성과 남성, 진보와 보수가 쪼개진 우리들만의 공간에서 우리 부족을 지키는 원시적인 형태의 부족 본능이 싹텄다는 지적이다. 장 교수는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고 있다고 여기지만 이 공감은 혐오와 차별을 양산할 뿐”이라고 우려했다. 교육자인 그는 디지털 부족화 현상이 만들어낸 괴물이 어디서부터 비롯됐는지를 추적했다. 장 교수는 ‘입시제도’가 그 원인 중 하나라고 봤다. 그는 “바로 옆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와 끊임없이 경쟁하며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외면해야만 성공하는 것이 지금의 입시제도”라며 “이런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타인의 고통을 외면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인식이 뿌리내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타인을 향한 공감의 반경을 넓힐 수 있는 해법 역시 ‘교육’에서 찾았다. 그는 “인간의 공감능력은 어떤 사회에서 나고 자랐는지, 어떤 문화와 제도에 놓여 있는지에 따라 충분히 확장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교육제도나 정책 변화로 충분히 공감의 반경을 넓힐 수 있다는 주장이다. 캐나다의 교육 혁신가 매리 고든이 창안한 ‘공감의 뿌리’ 프로그램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다.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가 되어보는 역할극 놀이를 통해 역지사지의 감정을 느껴보는 것이다. 실제로 2010년 스코틀랜드에서 이 프로그램 실시 전후의 아이들에게 찾아온 변화를 분석해 보니 학교 폭력이 상당 수준 감소됐다는 결과가 나왔다. “현행 정규 교육과정은 수리능력과 외국어능력을 키워내는 수학능력시험은 그토록 강조하면서 정작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공감 능력은 길러내지 못하고 있어요. 내 주변의 고통에도 슬퍼하지 못하는 ‘괴물’을 길러내지 않으려면 이제 공감능력도 교육해야 할 때입니다.” 이소연기자 always99@donga.com}
18세기 불교예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보물 ‘축서사괘불탱(鷲棲寺掛佛幀)’이 1일 서울 종로구 불교중앙박물관에 자태를 드러냈다. 1768년 제작돼 경북 봉화군에 있는 축서사 대웅전을 지켰던 축서사괘불탱이 254년 만에 처음 제자리를 떠난 것. 높이 894cm, 너비 509cm에 이른다.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은 “영남 북부 불교문화의 정수가 담긴 걸작을 수도권 시민에게 선보이기 위해 전시를 기획했다”고 2일 밝혔다. 이달 27일까지 박물관 1층 로비에서 만날 수 있는 축서사괘불탱은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솟아오르는 구름을 채워 넣어 법석(法席)에 강림한 부처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봉화 축서사 괘불의 화기(畵記)에는 ‘정일 스님과 낙선 스님, 일성 스님 등 10명의 스님이 1768년 3월 14일 불사를 시작해 25일 동안 괘불을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2003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됐다. 당시 문화재청은 “대형 불화인데도 구성이 치밀하고 구도가 안정됐을 뿐만 아니라 채색과 인물 표현이 뛰어나 18세기 괘불탱화 중 수작”이라고 밝혔다. 이번 전시에는 고려시대 불교문화를 상징하는 보물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과 ‘안동 봉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도 함께 선보인다. 고려 중기에 만든 두 불상이 한곳에서 전시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인기 걸그룹 아이브의 멤버인 장원영이 최근 착용한 봉잠(鳳簪·봉황 장식이 달린 비녀)을 두고 말이 많았다. 중국 일부 누리꾼이 “중국 문화를 훔쳐갔다”고 주장하자 국내에선 “또 우리 것을 자기 것이라 우긴다”며 분노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난달 16일 프랑스 파리 패션위크에서 장원영이 봉잠을 언급하며 “한국의 멋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 건 옳은 말이다. 비녀는 한반도 고대부터 전해 내려온 전통문화이며 봉잠은 조선 왕실에서 중요한 행사가 열릴 때 애용하는 장신구였다. 조효숙 가천대 패션디자인과 석좌교수는 “봉잠은 왕비나 대비 등 내명부 최고 지위의 여성들만 착용할 수 있었던 조선 왕실의 대표적 유물”이라고 했다. 여성들이 긴 머리를 틀어 올려 고정시키는 비녀는 한국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전역에 퍼져 있는 장신구 문화. 삼국사기에는 834년 통일신라에서 당대 신분제인 골품제에 따라 “진골 여성은 진주 장식 비녀를 사용할 수 없고, 6두품 여성은 비녀에 순금을 사용해선 안 된다”는 기록이 있다. 봉잠 역시 세 나라에서 지체 높은 여성들에게 사랑받은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조선에선 왕실의 국가적 행사에만 사용할 정도로 정통성을 부여했던 장신구다. 대표적인 문화재로 영친왕비가 혼례 때 착용한 봉잠 등 8점이 국립고궁박물관에 남아있다. 다만 장원영이 착용한 봉잠은 한국 고유의 전통 양식이라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왕실에서 쓰던 옛 봉잠과 생김새가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이나 일본 형식도 아니다. 조 교수는 “한국 디자이너가 전통 비녀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현대적으로 새롭게 해석한 작품이라 보는 게 맞다”고 했다. 그렇다면 조선 비녀만의 특징은 뭘까. 이선희 수원대 의류학과 객원교수는 “중국과 일본 비녀는 길지 않은 세로형인 데 비해 한국 비녀는 가로로 굵고 긴 형태”라고 말했다. 한국 비녀가 독특한 생김새를 갖게 된 건 1756년 영조가 ‘얹은머리’인 가체를 금지하면서부터라는 분석이 나온다. 원래 동아시아에선 가체 위에 꽂는 세로형 비녀를 주로 썼지만, 조선에선 영조가 가체 금지령을 내린 뒤 쪽진 머리를 고정하기 위해 가로로 기다랗고 굵은 비녀가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비녀는 쪽진 머리에서 가장 큰 변화를 줄 수 있는 패션 아이템”이라며 “이후 조선 비녀는 길이가 갈수록 가로로 더 길어졌고, 잠두(簪頭·비녀의 머리)도 더 두툼하고 입체적으로 바뀌었다”고 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조선시대 여성 패션의 화룡점정을 찍은 장신구는 바로 ‘비녀’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화려하고 기품 있는 비녀는 잠두(비녀의 머리 부분)에 봉황 장식이 달린 ‘봉잠(鳳簪)‘으로 꼽힌다. 조효숙 가천대 패션디자인과 석좌교수는 “봉잠은 왕비나 대비 등 조선 왕실에서도 내명부 최고 지위에 있는 여성들만 착용할 수 있었던 조선 왕실의 대표적인 유물”이라고 강조했다. 인기 걸그룹 아이브(IVE)의 멤버인 장원영이 지난달 16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패션위크에서 봉잠을 머리에 꽂았다가 중국 누리꾼들로부터 “중국 문화를 훔쳤다”는 비난을 받자, 국내 전문가들이 나서서 “사실이 아니다”라고 반박하고 나섰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도 지난달 28일 인스타그램을 통해 “중국의 일부 누리꾼들이 한국의 전통 문화를 중국 것으로 둔갑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반도에서 비녀는 고대부터 내려져왔을 정도로 역사적 뿌리가 깊다. ‘삼국사기’에는 834년 통일신라시대에 당대의 신분제인 골품제에 따라 진골 여성은 비녀에 진주 장식을 사용하지 못하고, 6두품 여성은 순금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등 계급에 따라 장신구를 차별화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비녀라는 유물 자체는 고대 시기부터 동아시아 전역에서 긴 머리를 틀어 올려 고정시키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한국만의 독특한 양식과 문화가 따로 존재했다는 얘기다. 특히 조선 왕실이 들어선 뒤 봉잠은 왕실 여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신구였다. 대표적인 유물은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한 영친왕비가 혼례 때 착용했던 봉잠 등 8점이다. 봉잠은 곧 조선 왕실 여성의 최고 권위를 상징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중국이나 일본과 다른 조선 비녀의 매력은 뭘까. 이선희 수원대 의류학과 객원교수는 당대 일본이나 중국과 다른 조선 비녀만의 가장 독특한 특징으로 “가로로 굵고 긴 형태”를 꼽았다. 학계에 따르면 조선만의 독창적인 비녀 양식은 1756년 영조가 얹은머리 형태를 금지하면서부터 만들어졌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원래는 중국이나 일본처럼 가체를 올린 머리 위에 핀을 꽂는 형태의 세로 비녀가 각광받았지만, 이때부터 쪽진 머리를 고정하기 위해 가로로 기다랗고 굵은 형태의 비녀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교수는 “쪽진 머리에서 가장 큰 변화를 줄 수 있는 장신구가 바로 비녀였다”며 “그러다보니 점차 가로로 더 길어졌고,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조선의 잠두가 더 두툼하고 입체적으로 변해갔다”고 설명했다. 조 석좌교수는 “계절에 따라 매화, 석류 등 잠두의 모양이 달라진다. 이 같은 다양성은 조선 비녀가 갖는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라며 “앞으로 동아시아의 비녀 중에서도 조선의 비녀가 갖는 특징을 살펴보는 연구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문화재청은 백제시대 공예품의 정수로 알려진 보물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를 국보로 승격할 예정이라고 31일 밝혔다. 2009년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서탑 심주석(탑의 중심을 이루는 기둥)의 사리를 넣는 구멍 속에서 발견된 이 유물은 ‘백제 왕후가 재물을 시주해 사찰을 창건하고 639년에 사리를 봉안했다’는 기록이 새겨진 금제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 등 9점으로 이뤄져 있다. 문화재청은 “‘삼국유사’를 통해 전해 내려온 미륵사의 창건 설화와 조성 연대를 역사적으로 밝혀낸 중요한 유물”이라고 설명했다. ‘이봉창 의사 선서문’을 비롯한 문화재 6건도 보물로 지정된다. 이봉창 의사(1900∼1932)가 1931년 12월 13일 항일 독립운동단체 ‘한인애국단’의 1호 단원으로 입단하며 적은 선서문으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한다’는 다짐이 담겼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45년이 지나도 ‘데니 태극기’를 처음 본 날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먼지 덮인 상자를 여는 순간 바로 알았어요. 아, 이건 대한민국의 보물이구나.” 10월 28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 집옥재에서 만난 로버트 R 스워타우트 미국 캐럴대 역사학과 명예교수(73·사진)는 ‘데니 태극기’와의 조우를 “운명 같은 만남”이라 불렀다. 한국말이 유창한 그는 국내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태극기인 ‘데니 태극기’의 존재를 알리고 이를 국내로 반환하는 데 결정적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최근 한국인 부인과 처가인 제주도에 들른 뒤 서울에 왔다. 1975년 근대 조미 외교사를 석사 논문으로 준비하던 스워타우트 교수는 미 오리건대 도서관에서 손바닥만 한 고서 하나를 발견했다. 19세기 중국에 다녀온 미 외교관 문서로 ‘포틀랜드 출신 변호사 오언 데니(1838∼1900)가 1886∼1890년 조선에서 고종의 외교자문을 지냈다’는 기록이 담겨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여러 도서관을 몇 달 동안 뒤져 ‘데니 외교문서’들을 찾아냈어요. 거기서 데니 변호사가 조선 독립을 위해 분투한 흔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료도 있을 것 같아 오리건주에 사는 후손을 만나기 위해 수소문했어요. 마침내 1977년 후손인 윌리엄 랠스턴 변호사 부부 집에서 태극기가 담긴 상자를 찾아냈죠.” 가로세로 262×182.5cm인 데니 태극기는 스워타우트 교수가 찾기 전엔 존재조차 몰랐던 유물이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10월 25일 이를 보물로 지정하며 “1882년 고종이 태극기를 제정한 뒤인 1889∼1890년 무렵 제작된 것으로, 국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로 가치가 높다”고 밝혔다. 스워타우트 교수는 데니 태극기의 존재를 알리는 데 그치지 않았다. 5년 가까이 랠스턴 변호사 부부와 연락하며 한국에 기증하도록 설득했다. 그는 “외세 침략에도 꿋꿋이 독립을 쟁취한 한국의 역사를 사랑한다”며 “생김새는 한국인과 달라도 조선 독립을 지키려 했던 데니처럼 한국 문화재를 지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독립을 열망하며 만든 국기입니다. 미국보다 그 희망을 현실로 이룬 한국에 갔을 때 더 뜻깊죠. 결국 랠스턴 변호사가 ‘한국에 보내고 싶다’고 했을 때, 역사학자로서 뿌듯했습니다.” 1981년 6월 고국의 품에 안긴 데니 태극기는 귀환 40년 만인 지난해 보물로 지정됐다. 소식을 들은 스워타우트 교수는 “한국 젊은이들이 그 가치를 알고 역사를 배울 수 있게 돼 기뻤다”면서 “당장 한국에 오고 싶었지만 팬데믹 때문에 이제야 왔다”며 웃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데니 태극기에는 고난에도 자유롭고 강한 나라가 되고자 했던 조선의 희망이 담겼어요. 이미 그 꿈을 이뤄낸 한국에서 청년들도 이 태극기를 보며 더 큰 희망을 품길 바랍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외규장각 의궤(儀軌)’는 “조선 기록문화의 꽃”이라 불린다. 왕실 중요 행사의 모든 과정을 상세히 적은 공식 보고서로 정통성과 품위를 함께 지녔기 때문이다. 특히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약탈당했다가 2011년 장기임대 형식으로 145년 만에 고국에 돌아와 더욱 소중하고 가치가 크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의궤 귀환 뒤 10년 동안 연구한 성과를 선보이는 특별전 ‘외규장각 의궤, 그 고귀함의 의미’를 1일부터 개최한다. 하나의 거대한 보물창고처럼 꾸민 이번 전시는 2011년 파리국립도서관에서 귀환한 외규장각 의궤 297책 등 460여 점을 선보인다. 3부로 구성된 전시의 1부 ‘왕의 책, 외규장각 의궤’에서는 왕에게 올렸던 ‘어람용(御覽用) 의궤’가 지닌 품격을 소개했다. 의궤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서책으로서도 ‘장인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당대 최고의 기술을 가진 장인들이 최고의 재료로 일반 서책에서 보기 힘든 고급 장황(글, 그림에 비단이나 두꺼운 종이를 발라 꾸미는 것)을 했다. 2부 ‘예로서 구현하는 바른 정치’와 3부 ‘질서 속의 조화’에선 조선 왕조가 의궤에 어떤 가치를 담으려 했는지를 조명한다. 박물관은 “유교사회 통치이념의 근간인 충과 효, 예의 도리가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공신녹훈(功臣錄勳)’이 대표적인 사례다. 국가나 왕실에 공을 세운 신하를 포상한 기록물로, 백성에게 모범을 알리려 했다. 또 왕과 공신들이 모여 개최한 ‘회맹제(會盟祭)’를 기록한 의궤에는 군신이 하나 돼 나라를 지킨다는 뜻을 공고히 다졌다. 임혜경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외규장각 의궤에는 예로써 국가를 다스리고, 질서를 지켜 조화로운 나라를 세우려던 조선의 통치이념이 잘 담겨 있다”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3월 19일까지 한다. 3000∼5000원. 다만 외규장각 의궤 반환을 이끌었던 고 박병선 박사(1923∼2011)를 기리는 뜻에서 기일(11월 23일)이 있는 주인 11월 21일부터 27일까지는 무료 관람을 실시한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45년이 지났는데도 ‘데니 태극기’를 처음 본 날을 생생하게 기억해요. 어두컴컴한 지하실에 내려가 먼지 덮인 상자를 열어본 순간 바로 알았어요. 아, 이건 대한민국의 보물이다…” 운명처럼 만났다. 1975년 미국 오리건대 도서관에서 손바닥만한 크기의 고서를 발견했다. 19세기 말 중국에 다녀온 미국 외교관이 남긴 문서. 포틀랜드 출신 미 변호사 오언 데니(1838~1900)가 1886년 3월부터 1890년 4월 18일까지 조선에 머물며 고종의 외교자문을 지냈다는 기록이었다. 당시 석사 논문으로 18, 19세기 조·미 외교사를 연구하던 로버트 R. 스워타우트 캐럴대 역사학과 명예교수(73)의 눈이 반짝였다. 수개월 동안 밤새도록 도서관을 샅샅이 뒤져 찾아낸 ‘데니 외교문서’에는 데니 변호사가 조선 독립을 위해 분투한 흔적이 담겨 있었다. 혹 미국에 살고 있는 그의 후손들이 더 많은 사료를 갖고 있지 않을까. 데니의 가계도를 찾아내 오리건 주에 살고 있는 후손들을 수소문했다. 그리고 마침내 1977년 후손인 윌리엄 랠스턴 변호사 부부의 집 지하실에 있는 먼지 덮인 상자에서 ‘데니 태극기’를 만났다. 스워타우트 교수가 없었다면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 ‘데니 태극기’는 존재조차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10월 25일 데니 태극기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하며 “1882년 고종이 태극기를 제정한 이후인 1889~1890년 무렵 제작된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밝혔다. 데니 태극기가 보물이 된 지 1주년을 맞아 한국을 찾은 스워타우트 교수를 10월 28일 오후 ‘고종의 서재’로 알려진 서울 경복궁 집옥재에서 만났다. “외세의 침략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독립을 쟁취한 한국의 역사를 사랑한다”는 그는 유창한 한국말로 “생김새는 여러분과 다르지만, 조선의 독립을 지키려 했던 데니처럼 한국의 역사와 유물을 지키고 싶었다”며 웃었다. 그는 데니 태극기를 세상에 알리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5년 동안 후손을 만나 1981년 이들이 데니 태극기를 한국에 기증하도록 설득했다. 사실 ‘1890년 데니에게 이 태극기를 하사한다’는 고종의 친필 문서가 남아 있어 후손들이 간직한다고 해도 설득할 명분은 마땅하지 않았다. 스워타우트 교수는 “미국에 있는 데니의 후손들이 갖고 있다면 지하실에서 점차 그 의미가 잊히고 말 것”이라며 “이 태극기가 있어야 할 곳은 한국이라고 설득했다”고 한다.“나라가 위태로울 때 독립국가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담아 만든 국기입니다. 미국에 남아 있는 것보다 그 희망을 현실로 만들어낸 대한민국에 갔을 때 가장 뜻 깊죠. 결국 랠스턴 변호사가 1981년 ‘더 늦기 전에 이 태극기를 한국에 돌려보내고 싶다’고 했을 때, 역사학자로서 할 일을 한 것 같아 뿌듯했습니다.” 지난해 이 태극기가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 지 41년 만에 보물이 됐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스워타우트 교수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는 “창고나 지하실이 아니라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데니 태극기를 보며 역사를 배울 수 있게 돼 기뻤다”고 말했다. 현재 데니 태극기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데니 태극기에는 자유롭고 강한 나라가 되고자 했던 조선의 희망이 담겨 있어요. 이미 그 꿈을 이뤄낸 한국에서 젊은 청년들이 이 태극기를 보면서 그보다 더 큰 희망을 품길 바랍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사단법인 사충서원이 올해 사충신 순절 300주년을 맞아 이들의 충절을 기리는 제향을 29일 경기 하남시 사충서원에서 올렸다. 사충신은 조선 경종 때인 1722년 연잉군(영조)을 왕세제로 추대하다 소론이 일으킨 사화(士禍)로 죽음을 맞은 ‘노론의 4대신’ 충헌공 김창집, 충문공 이이명, 충익공 조태채, 충민공 이건명을 가리킨다. 1724년 왕위에 오른 영조는 즉위한 지 2년 만인 1726년 사충신을 모두 신원(伸원)시켜 이들의 넋을 위로했다. 이날 이상혁 사충서원 이사장은 “목숨을 내놓으면서도 왕권 강화와 나라를 위해 묵묵히 자신의 신조를 지켜낸 4명의 충신 덕분에 훗날 영조는 왕위에 올라 조선의 문예부흥과 탕평을 이끌었다”고 추모했다. 이날 제향에는 정해창 전 법무부 장관이 초헌관, 이상은 한복문화학회장이 아헌관, 안동 김씨 미당종친회장이 종헌관으로 참례했다. 초헌관은 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제관이며 아헌관 종헌관은 각각 두 번째, 세 번째 술잔을 올린다. 옛 문헌에서 제향 의복을 밝혀낸 이 학회장은 사충신 제향에 참례한 첫 번째 여성이 됐다. 사충서원은 영조가 1726년 왕명을 내려 종묘를 짓고 남은 재목을 하사해 건립했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명령으로 전국에 있는 서원이 철폐될 때에도 존속된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다. 하남=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한국에서 핼러윈은 문화·상업적으로 ‘만들어진 문화’다. 전문가들은 MZ세대(밀레니얼+Z세대)가 유년 시절을 보낸 2000년대 초 영어 유치원과 학원에 원어민 강사 채용이 일반화되고 수업의 일환으로 핼러윈 파티가 정착되면서 핼러윈 문화가 확산됐다고 분석한다. 어릴 때부터 핼러윈 파티를 접한 MZ세대에게 핼러윈은 더 이상 미국 문화가 아니라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처럼 익숙한 문화가 됐다는 것이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30일 “지금 10, 20대는 어린이집을 다니던 미취학 아동 때부터 원어민 강사와 함께 코스튬 플레이를 즐기며 핼러윈에 익숙해진 세대”라며 “성인이 된 지금도 이들에게 핼러윈은 자연스러운 문화가 됐다”고 말했다. 한국의 핼러윈 문화는 MZ세대를 대상으로 한 마케팅과 맞물리며 규모가 커졌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2000년대 초 국내 테마파크에서 핼러윈 축제를 기획하며 학원가에서 소규모 집단이 즐기던 파티에서 대규모 축제로 몸집을 키웠다”고 했다. 회사원 이하영 씨(28)는 “초등학생 때부터 가족과 놀이동산에 가서 핼러윈 퍼레이드를 접했다”며 “10월이 되면 음식점과 상점이 각종 핼러윈 이벤트를 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핼러윈을 즐기게 됐다”고 말했다. 실제 핼러윈 문화에 익숙해진 MZ세대가 성인이 되면서 서울 용산구 이태원과 마포구 홍대입구역 일대 클럽에서 핼러윈을 마케팅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어린이가 있는 가족과 이웃들이 소규모로 즐기는 미국 핼러윈과 달리 한국의 핼러윈이 테마파크와 클럽을 중심으로 대규모 인파가 몰리는 축제로 자리 잡은 배경이다. 소셜미디어도 핼러윈 문화가 폭발적으로 확산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독특한 복장을 한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면 뜨거운 관심을 받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한국의 핼러윈 문화는 코스튬 플레이를 한 사진을 SNS에 올리는 ‘인증샷’ 문화와 만나며 핼러윈 축제가 열리는 클럽 일대에 폭발적인 인파를 끌어들였다”고 말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더 이상 ‘머리를 쓰라’는 말이 통용되지 않는 시대가 오고 있다. 안타깝게도 현실이 그렇다. 뇌는 더 이상 진화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최근 몇 년 동안 독일과 프랑스, 영국 등에서 국민의 평균 지능지수(아이큐)를 검사한 결과 정체됐거나 갈수록 떨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뇌라는 신체 기관에서 더 많은 지능을 뽑아내려는 노력은 신경생물학의 엄격한 한계에 부딪혔다.” 그렇다면 우리의 뇌는 이제 퇴화할 일만 남은 걸까. 다행히 미국에서 과학저널리스트로 명성을 쌓은 저자는 “미래는 ‘뇌 밖에서’ 사고하는 데 있다”고 다독거린다. 좁디좁은 두개골이란 한계를 벗어나 인지 능력을 뇌 바깥으로 확장해야 할 때라는 얘기다. 저자는 그동안 미 전역에서 행한 ‘정신 확장 프로젝트’와 그 연구 결과를 중점적으로 다뤘다. 미국에선 1997년 앤디 클라크 워싱턴대 교수가 뇌 바깥에서 이뤄지는 사고가 우리의 정신을 넓힌다는 ‘확장된 마음’ 이론을 내놓은 이래 이런 연구들이 왕성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생각보다 방법은 간단하다. 첫 번째, “몸을 쓰라”. 인지 기능을 단숨에 향상시킬 최고의 해법으로 꼽힌다. 미 미네소타주의 한 방사선 전문의는 동료들을 대상으로 걷기 실험을 했다. 평소처럼 가만히 앉아 방사선 슬라이드를 검토한 집단은 이상 징후를 평균 85% 찾아냈다. 그런데 러닝머신 위에서 시속 1.6km 속도로 걸으며 방사선 사진을 살핀 집단은 99% 가까이 이상 징후를 발견해 냈다. 수년 전부터 사무실에서 유행하는 ‘스탠딩 데스크’도 허리 건강은 물론이고 직장인의 업무 역량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한다. “공간의 변화”도 좋은 방법이다. 미 학술지 경영아카데미저널에 따르면 효율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직원들의 책상은 공통점이 있다. 사적인 물건의 약 70%를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게 배치한다고 한다. 긴장도가 높은 업무 환경에서 일하는 이들일수록 자신만 볼 수 있는 공간에 사적인 물건을 놓으면 심리적 안정감을 찾기 때문이다. ‘내 주변 환경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인지 능력을 극대화시킨다고 한다. 마지막 비법은 “치열하게 논쟁하라”이다. 2019년 미 국립과학원 회보에는 4년 동안 과학 분야를 연구한 대학원생 수백 명의 지적 발전 정도를 추적한 논문이 실렸다. 논문의 결론은 예상과는 한참 빗나갔다. 대학원생의 지적 능력은 지도 교수의 가르침 때문에 향상된 게 아니었다. 연구실에서 동료들과 나눈 논쟁적인 대화가 가장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왜 그럴까. “창의력은 관계 속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는 생각보다 똑똑하지 않다. 혼자 추론해서 결론을 내리다간 확증 편향에 갇히기 쉽다. 오히려 다른 관점을 지닌 동료와 치열하게 맞서는 과정에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가 탄탄히 쌓인다.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영화 ‘인크레더블’(2004년)과 ‘라따뚜이’(2007년)를 함께 만든 브래드 버드 감독과 존 워커 프로듀서는 제작 당시 공개적으로 거침없이 말싸움하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저자가 볼 때 버드 감독의 의견은 이 책의 핵심 주제와 맞닿아 있다. “저는 제 동료가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하길 바라지 않아요. 골치 아픈 소리를 해대는 게 우리 둘에게 서로 좋은 일이죠. 갈등을 피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영화가 성공하는 겁니다.” ‘익스텐드 마인드’는 무척 신선하다. 지능은 물론이고 창의력과 기억력을 향상시키는 힘이 두뇌 바깥에 있다는 주장은 사례가 풍부하고 설득력도 가득하다. 실은 우리도 알고 있다.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있느니, 친구들과 만나 시원하게 놀고 나면 공부도 더 잘된다. 그걸 신경과학 측면에서 입증해 주니 더욱 반가울 따름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더 이상 ‘머리를 쓰라’는 말이 통용되지 않는 시대가 오고 있다. 안타깝게도 현실이 그렇다. 뇌는 더 이상 진화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최근 몇 년 동안 독일과 프랑스, 영국 등에서 국민의 평균 아이큐를 검사한 결과 정체됐거나 갈수록 떨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뇌라는 신체 기관에서 더 많은 지능을 뽑아내려는 노력은 신경생물학의 엄격한 한계에 부딪혔다.” 그렇다면 우리의 뇌는 이제 퇴화할 일만 남은 걸까. 다행히 미국에서 과학저널리스트로 명성을 쌓은 저자가 내놓은 신간 ‘익스텐드 마인드’(알에이치코리아)는 “미래는 ‘뇌 밖에서’ 사고하는데 있다”고 다독거린다. 좁디좁은 두개골이란 한계를 벗어나 인지 능력을 뇌 바깥으로 확장해야 할 때라는 얘기다. 저자는 그동안 미 전역에서 행한 ‘정신 확장 프로젝트’와 그 연구 결과를 중점적으로 다뤘다. 미국에선 1997년 앤디 클라크 워싱턴대 교수가 뇌 바깥에서 이뤄지는 사고가 우리의 정신을 넓힌다는 ‘확장된 마음’ 이론을 내놓은 이래 이런 연구들이 왕성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생각보다 방법은 간단하다. 첫 번째, “몸을 쓰라.” 인지 기능을 단숨에 향상시킬 최고의 해법으로 꼽힌다. 미 미네소타 주의 한 방사선 전문의는 동료들을 대상으로 걷기 실험을 했다. 평소처럼 가만히 앉아 방사선 슬라이드를 검토한 집단은 이상 징후를 평균 85% 찾아냈다. 그런데 러닝머신 위에서 시속 1.6㎞ 속도로 걸으며 방사선 사진을 살핀 집단은 99% 가까이 이상 징후를 발견해냈다. 수년 전부터 사무실에서 유행하는 ‘스탠딩 데스크’도 허리는 물론 직장인의 업무 역량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한다. “공간의 변화”도 좋은 방법이다. 미 학술지 경영아카데미저널에 따르면 효율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직원들의 책상은 공통점이 있다. 사적인 물건의 약 70%를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게 배치한다고 한다. 긴장도가 높은 업무 환경에서 일하는 이들일수록 자신만 볼 수 있는 공간에 사적인 물건을 놓으면 심리적 안정감을 찾기 때문이다. ‘내 주변 환경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인지 능력을 극대화시킨다고 한다. 마지막 비법은 “치열하게 논쟁하라”이다. 2019년 미 국립과학원 회보에는 4년 동안 과학 분야를 연구한 대학원생 수백 명의 지적 발전 정도를 추적한 논문이 실렸다. 논문의 결론은 예상과는 한참 빗나갔다. 대학원생의 지적 능력은 지도 교수의 가르침 때문에 향상된 게 아니었다. 연구실에서 동료들과 나눈 논쟁적인 대화가 가장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왜 그럴까. “창의력은 관계 속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는 생각보다 똑똑하지 않다. 혼자 추론해서 결론을 내리다간 확증 편향에 갇히기 쉽다. 오히려 다른 관점을 지닌 동료와 치열하게 맞서는 과정에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가 탄탄히 쌓인다.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영화 ‘인크레더블’(2004년)과 ‘라따뚜이’(2007년)를 함께 만든 브래드 버드 감독과 존 워커 프로듀서는 제작 당시 공개적으로 거침없이 말싸움하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저자가 볼 때 버드 감독의 의견은 이 책의 핵심 주제와 맞닿아있다.“저는 제 동료가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하길 바라지 않아요. 골치 아픈 소리를 해대는 게 우리 둘에게 서로 좋은 일이죠. 갈등을 피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영화가 성공하는 겁니다.”‘익스텐드 마인드’는 무척 신선하다. 지능은 물론 창의력과 기억력을 향상시키는 힘이 두뇌 바깥에 있다는 주장은 사례가 풍부하고 설득력도 가득하다. 실은 우리도 알고 있다.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있으니, 친구들과 만나 시원하고 놀고 나면 공부도 더 잘 된다. 그걸 신경과학 측면에서 입증해주니 더욱 반가울 따름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유럽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은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정말 예상 못 했어요.” 올해 4월 21일 시작한 오스트리아 국립빈세계박물관의 특별전 ‘책거리: 우리 책꽂이, 우리 자신’을 한국민화학교와 함께 기획한 조너선 파인 관장(53)이 말했다. 국내 젊은 세대에게도 생소한 조선시대 책거리를 다룬 현대 민화(民畵) 작가 31명의 작품으로 구성한 이 전시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오스트리아는 물론이고 유럽 전역에서 관람객이 몰려든 것. 다음 달 1일까지 예정했던 전시를 내년 4월까지 연장하기로 했다. 1, 2년 뒤 전시 일정을 미리 짜는 박물관으로선 매우 이례적인 결정이다. 한국을 찾은 파인 관장을 26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그림손에서 만났다. 이 갤러리에서는 현대 민화 전시가 열리고 있다. 그는 “지난해 부임한 뒤 ‘시대를 앞서가는 전시’를 선보이고 싶어 선택한 첫 번째 전시”라며 “(성공하리란) 확신은 있었지만 그 예상을 몇 배는 뛰어넘었다”며 웃었다. “팬데믹 여파로 화상으로 소통하는 방식에 익숙해졌습니다. 이 때문에 화면 속에 비친 ‘우리 뒤의 책장’이 중요해진 거죠. 책장은 물론이고 거기에 놓인 책을 포함한 여러 물건이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 됐어요. 그런 점에 조선 책거리는 시대를 내다본 문화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전시 부제인 ‘우리 책꽂이, 우리 자신’도 직접 지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는 사물로 가득 채운 책장엔 누군가의 인생이 담겼다”며 “한국의 전통 회화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서 깊은 컬렉션을 소장한 우리 박물관의 정체성과도 잘 어울렸다”고 했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 가운데는 국내에서도 그리 알려지지 않은 청년 작가가 많다. 파인 관장은 “진정한 예술의 가치는 값이나 명성에 있지 않다”며 “젊은 감각으로 책거리 민화에 ‘커피 잔’ ‘태블릿 PC’도 그려 넣어 문화적 공감대가 높았다”고 했다. “처음엔 ‘이게 뭐지’ 하며 먼발치에서 보던 관람객들이 책거리에서 익숙한 물건을 발견하고 어느새 다가서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책거리에서 오스트리아 심리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1856∼1939)의 책을 발견하고 한참을 웃던 이도 기억나네요. 책거리를 통해 유럽과 한국의 문화가 하나의 세계로 확장되는 진기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파인 관장은 민화의 매력에 대해 “한국 문화가 가진 에너지와 닮았다”며 “평범한 이의 삶과 철학을 담아내기 때문에 세계 어디서도 통할 보편성을 지녔다”고 평했다. “요즘 유럽은 물론이고 세계가 한국에 대해 더 알길 바라고 있잖아요. 한국은 현재 세계에서 큰 사랑을 받는 대중문화뿐 아니라 역동적인 역사를 간직한 나라죠. 한국 역사 자체가 하나의 서사라고 생각합니다. 빈세계박물관이 한국 문화와 역사를 선보이는 ‘유럽의 창문’이 되고 싶습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국내에 현존하는 목조 불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경남 합천 해인사의 ‘신라 쌍둥이 불상’ 2건이 국보로 승격했다. 문화재청은 “‘합천 해인사 법보전 비로자나불좌상 및 복장유물’과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복장유물’을 국가지정문화재 국보로 지정했다”고 26일 밝혔다. 2012년 함께 보물로 지정됐던 두 불상이 10년 만에 국보로 승격됐다. 두 비로자불좌상은 802년 해인사가 창건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9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국내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목조불상으로 평가받는데, 한쪽 어깨를 드러낸 모습이 자연스럽고, 옷 주름과 둥근 얼굴도 완성도가 뛰어나다. 워낙 두 불상이 서로를 빼닮아 ‘쌍둥이 불상’으로 불리며 사랑받아왔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9세기 석굴암 불상을 연상하게 만드는 뛰어난 조각기법을 보여주는 국가적 보물이다. 학술적 예술적 가치도 모두 뛰어난 유물”이라고 설명했다. 문화재청은 같은 날 ‘속초 신흥사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등 7건을 보물로 지정하기도 했다. 강원 속초시 신흥사에 소재한 영산회상도는 조선 영조 때인 1755년에 당대 기량이 가장 뛰어났던 화승 10명이 제작한 불화로 알려졌다. 해당 불화는 6·25전쟁 직후인 1954년 자취를 감췄다가 2007년 미국 로스앤젤레스(LA)카운티박물관 수장고에서 6조각으로 분리된 채 발견됐다. 2010년부터 국내 전문가들이 약 1년 4개월에 걸쳐 복원에 성공한 뒤 2020년 8월 고국으로 돌아왔다. 신흥사 영산회상도는 묘사가 섬세하고 좌우대칭이 완벽해 수준 높은 예술적 성취를 이룬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신라시대 유학자 홍유후 설총(薛聰·655∼?) 선생의 성균관 문묘 봉안 1000주기를 맞아 설총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식이 개최됐다. 성균관(관장 손진우)은 25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 대성전 등에서 다채로운 행사를 개최했다. 성균관 명륜당 앞마당에서 설총의 업적을 주제로 열린 전국시조백일장에는 지난달 사전 신청을 통해 예선을 통과한 학생 및 일반인 33명이 참가했다. 성균관은 백일장 본선에 오른 참가자 전원에게 ‘장원’ 등 상장을 수여했다. 원효대사의 아들인 설총은 당나라에서 접한 ‘주역’ ‘주례’ ‘의례’ ‘예기’ 등 구경(九經)을 읽고 해독해 후학을 양성한 수위(首位) 유학자로 꼽힌다. 고려 현종 때인 1022년 유림의 본산인 성균관에서 ‘유학의 종주’로 배향돼 현재까지 기려 왔다. 성균관은 26일 경북 경산시 삼성현문화박물관에서 관련 학술대회도 개최한다. 설총은 한문을 알지 못해 문자 생활을 하지 못하는 백성들을 위해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우리말을 적는 ‘이두 표기법’을 정리한 언어학자로 추앙받는다.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설총 선생은 유학뿐 아니라 도교와 불교 등 당대 사상을 총망라해 후대에 전한 사상가이자 언어학자”라며 “이두 표기법을 집대성한 덕분에 한문 경전을 국어화해 읽을 수 있게 됐고, 훗날 한학 연구가 발전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제가 살아온 서울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그 변화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누구인지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어요. 나의 이야기가 한 시대의 삶을 이야기하는 증언이 될 수 있으니까요.” 1993년부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창비) 시리즈를 펴낸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73)가 고향인 서울 답사기 후속편으로 시리즈를 이어간다. 2017년 서울 편 1·2권을 내놓은 데 이어 사대문 안동네와 한양도성 밖의 역사를 엮은 3·4권을 25일 출간했다. 유 교수는 이날 오전 11시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서울을 움직인 힘은 바로 서울을 살아낸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앞선 두 권에서 조선 궁궐과 왕실의 역사를 풀어냈다면, 이번 책의 주인공은 서울을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그는 고고학자들이 유물과 유적을 통해 과거를 재구성하듯, 오늘날 서울에 남겨진 흔적을 되짚는 ‘고현학(考現學)’의 방식으로 책을 써내려갔다. 유 교수는 평수로 2억 평이 넘는 대도시 서울에서 특히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뒤 폐허가 된 도시를 채우고 변화시킨 사람들 이야기에 주목했다. 1930년대 성북동에 터를 잡은 문인들이 대표적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이주하며 갑작스럽게 불어난 서울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북촌과 성북동 일대 대규모 주택 개발이 이뤄졌다. 유 교수는 “1933년 만해 한용운 선생이 성북동에 자리 잡은 것을 필두로 이태준을 비롯한 문인들이 살아가며 성북동은 새로운 이야기가 피어나는 ‘문인들의 아지트’가 됐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출간된 문학잡지 ‘문장지’는 성북동에서 태어났다”고 설명했다. ‘서울토박이’인 그의 자전적인 이야기도 담았다. 유 교수는 6·25전쟁 직후 천막으로 지은 임시 교실에서 수업을 들은 일화를 전하며 “추억으로 남은 이야기가 후대 사람들에게는 당대의 단면을 보여주는 문화사”라고 말했다. 책에는 인사동에서 리어카를 끌며 이삿짐을 날랐던 ‘황 씨 아저씨’나 6·25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고 성북동 달동네에 터를 잡은 피란민들도 등장한다. 그는 “이런 필부필부들이 함께 어우러져 일궈나간 곳이 서울”이라고 강조했다. “서울 편을 끝으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끝맺을까 고민했다”는 그는 어느덧 길었던 대장정을 끝낼 채비를 하고 있다. “아직 가봐야 할 곳과 써야 할 이야기들이 남아 있어요. 마지막은 ‘국토 박물관 순례’라는 주제로 그동안 제가 전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전하려고 해요. 첫 장은 전곡리 구석기시대 유적, 가장 마지막 장은 독도예요. 독도에 가서 나의 이야기를 끝내려 해요.”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청와대의 주인이 수십 번 바뀌는 동안에도 흔들림 없이 제자리를 지킨 나무들이 있다. 청와대 수궁 터에 있는 744년 된 주목(朱木)은 청와대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고목나무다. 오랜 세월을 버틴 탓일까. 자그마한 키에 몸체 대부분이 죽어버려 속은 텅 비었지만 지금도 여름이 찾아오면 푸른 이파리를 만발하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녔다. 비단 주목뿐일까. 청와대에는 현재 100년이 넘은 고목나무가 무려 총 43그루나 있다. 올 5월 10일 청와대가 개방된 뒤 역대 대통령이 거주했던 관저와 귀빈을 맞던 상춘재 등 건물들은 큰 관심을 받았지만, 청와대에 있는 5만5000여 그루의 나무들은 이름 없이 스쳐지나가는 등산로의 조연에 불과했다. 경북대 산림학 명예교수인 저자는 2019년 대통령경호처의 의뢰로 청와대 경내에 있는 나무 208종을 조사해 연구서 ‘청와대의 나무와 풀꽃’(2019년)에 담아냈다. 책에는 청와대 통행로를 따라 쉽게 만나볼 수 있는 나무 등 85종을 추려 상세한 해설을 담았다. 저자는 “더 많은 이들에게 청와대 나무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저자가 역대 대통령들이 청와대 경내에 심은 기념식수 속에서 정치적인 의미를 짚어내는 대목도 흥미롭다. 2003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청와대 인근 등산로에 심은 서어나무는 꽃이 아름답지도, 열매가 달리지도 않아 못생긴 축에 속한다. 특징이 있다면 여느 산에서 만날 수 있는 흔하디흔한 나무라는 것. 저자는 “서어나무에는 친서민과 탈권위를 강조한 노 전 대통령의 철학이 담겼다”고 풀이한다. 책 첫 번째 장에는 ‘청와대 나무 지도’를 담았다. 말채나무, 팥배나무, 오갈피나무, 섬괴불나무, 때죽나무…. 청와대를 관람할 때 난생처음 듣는 나무의 이름으로 빼곡한 이 지도를 펼쳐 보며 산책해 보면 어떨까. 어쩌면 청와대의 진정한 주인은 세상이 변해도 오랜 시간 자신의 자리를 지켜온 이 나무들일지 모른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29만8092점.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의 장서각 수장고에 있는 일제강점기 포함 조선시대 사료 수다. 종류도 다양하다. 왕실 문헌만 12만여 점이 소장돼 있으며, 노비문서나 양반들이 주고받은 편지, 유서 등 민간 고문헌도 17만여 점이나 된다. 10일 출간된 ‘고문헌에 담긴 조선의 일상’(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은 정수환 고문서연구실장(48) 등 장서각 소속 연구원 8명이 방대한 자료 가운데 조선의 일상이 잘 드러나는 내용들을 정리한 책이다. 한중연에서 22년째 고문헌을 탐구해온 정 실장은 20일 전화 통화에서 “고문헌이 딱딱한 한문만 가득할 것 같지만, 실은 사람 사는 냄새가 진득하게 담겨 있다”며 웃었다. 정 실장이 추천한 대표적인 사료는 실학자 황윤석(1729∼1791)이 8세부터 62세까지 쓴 일기 ‘이재난고(이齋亂藁)’다. 모두 46권인데, 그중 한 권은 18세기 중엽 한양의 주택시장에 대한 ‘깨알 정보’가 가득하다고 한다. 고향인 전북 고창에서 벼슬살이를 하던 황윤석은 1769년 마흔 살에 승진해 한양에서 왕실 족보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게 됐다. ‘서울 직장생활’을 위해 고향 땅을 판 40냥을 들고 사대문 안에서 열심히 발품을 팔지만 작은 집 한 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황윤석은 내 집 마련이란 꿈을 포기하게 됩니다. 한양에 집을 못 구해 하숙생으로 지내게 되죠. 예나 지금이나 지방 사람에게 ‘서울살이’는 힘들었던 거죠.” 고문헌 탐구는 역사적 인물의 면모를 들여다보는 풍부한 단서도 제공한다. 병자호란 때 청에 끌려가 목숨을 잃은 ‘삼학사(三學士)’ 가운데 하나인 오달제(1609∼1637)가 그랬다. 남한산성에서 끝까지 청과의 화의에 반대했던 기개는 그가 남긴 ‘충렬공유고(忠烈公遺稿)’에 잘 드러난다. “문집에 1633년 오달제가 24세에 응시한 과거시험 답지가 나와요. 당시 문제가 국가재정 확보를 위해 준비하던 ‘동전’을 유통할 좋은 방법을 서술하라는 거예요. 근데 오달제는 ‘동전을 만드는 게 임금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려는 것인지 민초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지’를 되레 따져 묻는 답을 씁니다. 국가시험 응시생이 정부가 시행하려는 정책의 유해성을 지적하고 나선 거죠. 그의 곧은 성정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정 실장은 “이처럼 ‘임자’를 기다리는 고문헌은 무궁무진하다, 별것 아닌 조선의 낙서에서 당대의 유머 코드를 읽어낼 수도 있다”며 “수많은 사료에서 진짜 ‘이야기’를 찾아내는 건 후손들이 해야 할 큰 숙제”라고 강조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처음엔 제 동생에게 더 명확한 세상을 알려주고 싶어 시작했어요.” 그저 한 가지 작은 소망이었다. 동생과 함께 웃고, 함께 울고 싶었다. 임현아 작가(37)의 동생은 지금 서른이 넘었지만 정신 연령은 세 살이다. 뇌병변과 지적 장애로 온종일 TV 앞에 앉아 화면만 바라본다. 임 작가는 그런 동생에게 TV 속 세상을 조금이나마 들려주고 싶었다. 영화를 볼 때면 스무고개를 하듯 동생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를 골랐다. “왕자님이 하늘에서 구름 타고 궁궐로 내려왔어.” “전우치가 그림 속으로 슝 들어간 거야.”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 계속 말을 건네다 자연스레 ‘화면해설 작가’라는 직업을 꿈꾸게 됐다. 임 작가를 포함해 장애인을 위해 영상 설명 극본을 쓰는 ‘화면해설 작가’ 5명이 자신들의 일과 삶을 담은 에세이 ‘눈에 선하게’(사이드웨이)를 12일 펴냈다. 화면해설 작가란 시각장애 등으로 인해 영화나 드라마 등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 영상을 설명하는 대본을 전문적으로 쓰는 이들이다. 2011년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미디어접근센터에서 화면해설 작가 양성교육을 받은 임 작가는 그간 영화 ‘체포왕’(2011년), KBS 다큐멘터리 ‘동행’ 등의 화면해설 대본을 써왔다. 함께 책을 펴낸 권성아(51) 김은주(46) 이진희(46) 홍미정 작가(51)는 함께 교육받은 입문 동기이자 10년 넘게 같은 길을 걸어온 동료들이다. 19일 서울 마포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만난 이들은 “화면해설 작가란 초행길에 나선 친구에게 길을 설명하듯, 장면 속 모든 걸 꼼꼼하게 알려주는 사람들”이라며 “아직 국내에선 생소한 분야라 좀 더 많은 분에게 이 일의 필요성을 알려주려고 책을 썼다”고 말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 작품은 모두 403편입니다. 그런데 화면해설이 포함된 작품은 10여 편뿐이에요. 3%도 안 되죠. 저희는 거창한 걸 바라는 게 아니에요. 그저 ‘기생충’ ‘미나리’ 같은 좋은 작품을 장애인들도 함께 즐길 수 있으면 좋겠어요.”(홍 작가) 물론 국내에서도 2011년 방송법 개정 뒤 화면해설방송이 의무화됐다. 방송사들은 전체 프로그램 가운데 5∼10%를 화면해설방송으로 편성해야 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김 작가는 “아무래도 법이 정한 대로 의무만 다하면 된다는 인식이 강하다”며 “연말쯤 화면해설방송 할당량이 차면 멀쩡히 해설방송을 하던 프로그램도 중단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한숨을 쉬었다. 화면을 설명하는 일도 말처럼 쉽지는 않다. 특히 눈빛이나 몸짓이 중요한 장면이 그렇다. 권 작가는 4월 종영한 tvN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너무 막막했다”고 떠올렸다. 주인공 나희도(김태리)와 백이진(남주혁)이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은 대사가 겨우 다섯 마디였다. “수백 번 돌려본 끝에 이렇게 썼어요. ‘희도가 지나쳐 가는 이진의 팔을 잡는다. 이진의 눈길이 희도의 손에서 천천히 얼굴로 향한다. 희도는 이진의 눈을 피하지 않는다. 이진은 팔을 붙잡힌 채 희도의 말을 듣고 있다.’ 예상보다 더 만만치가 않죠? 하하.” 작가들은 인터뷰 도중 갑자기 휴대전화를 켜서 보여줬다. 각자의 메모장엔 온갖 표현과 단어가 빽빽했다. 이 작가는 “귀에 착 달라붙는 문장 하나를 찾으려 밤새 머리를 쥐어뜯을 때도 있다”며 웃었다. “글을 쓰는 게 본업이지만, 실은 장애인에게 말을 건네는 일을 한다고 생각해요. 뻔한 표현보단 가장 적확한 표현을 찾아야, 아주 작은 감정의 떨림까지 들려줄 수 있으니까요. 작가란 독자에게 그런 걸 전달해주는 직업이 아닐까요.”(이 작가)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