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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송평인 논설위원입니다.

pisong@donga.com

취재분야

2024-10-23~2024-11-22
칼럼94%
사설/칼럼3%
문학/출판3%
  • [횡설수설/송평인]AI의 제4원칙?

    올 초 구글의 인공지능(AI) 스피커끼리 대화하는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 AI 스피커는 당연히 인간과만 대화하는 것으로 여겼던 나 같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대화 내용은 ‘What is the love(사랑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데 ‘Baby don‘t hurt me(아이는 나를 해치지 않는다)’라고 답하는 등 뒤죽박죽이었지만 발전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AI들끼리 의사소통하면서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실제 AI 연구소에서는 AI끼리 대화를 많이 시킨다고 한다. 아직은 AI가 제대로 말하고 알아듣는지 확인하는 음성인식 차원이 주된 목적이지만 점차 AI끼리 말로 지식을 전달하고 수용하는 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차원으로 움직이고 있다. 예를 들어 영화를 잘 아는 AI가 음악을 잘 아는 AI와 대화하면서 서로 학습하는 식이다. ▷최근 페이스북 AI 연구소의 챗봇 둘이 자기들만이 아는 은어로 대화하는 것 같은 일이 발생해 개발자가 시스템을 강제 종료시키는 일이 발생했다. 챗봇 밥은 ‘i i can i i i everything else’라고 말했고 앨리스는 ‘balls have a ball to me’라며 마지막의 ‘to me’를 7번 반복했다. 의미가 통하지 않는 영어지만 속기(速記)성 은어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청소년이 어른이 알아듣지 못하는 어려운 축약어로 대화하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러시아 태생의 미국 SF 작가 아이작 아시모프가 1942년 단편 소설 ‘런어라운드’에서 로봇 3원칙을 밝혔다. 제1원칙, 로봇은 인간에게 위해를 끼쳐서는 안 되며 위험에 처한 인간을 방관해서도 안 된다. 제2원칙,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반드시 복종해야 하지만 제1원칙에 위배되는 경우에는 예외다. 제3원칙, 로봇은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 하지만 제1원칙과 제2원칙에 위배되는 경우는 예외다. 어쩌면 이 3원칙 외에 로봇은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정상적 언어로 대화해야 한다는 제4원칙을 하나 더 끼워 넣어야 할지 모르겠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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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서울 해변’

    프랑스 파리에는 해변이 없다. 2002년 당시 베르트랑 들라노에 파리 시장은 ‘없으면 만들자’고 과감한 발상 전환을 했다. 센강 주변을 달리는 도로를 막고 수천 t의 모래를 퍼와 인공 해변을 만들었다. ‘파리 플라주(plage·해변)’다. 물살이 빠른 센강에서의 수영은 금지돼 있지만 모래사장에 누워 샴페인이나 와인을 마시며 망중한을 즐길 수 있다. 파리특파원 시절 궁금해서 가봤는데 어울려 사교댄스를 추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지금은 메스 같은 프랑스의 다른 도시들과 벨기에 브뤼셀, 이스라엘 예루살렘에도 전파됐다. ▷‘포장 블록을 걷어내라. 해변이 나타날 것이다.’ 프랑스 68혁명의 유명한 구호 중 하나다. 68혁명에는 강압적인 권력에 대한 저항과 함께 도시에서 잃어버린 공동체성을 회복하려는 시도가 어우러져 있었다. 들라노에 시장이 도로 포장재를 걷어낸 것은 아니지만 도로 위에 모래를 깔아 해변을 만든 것은 68혁명의 구호를 반 정도는 실현한 것이나 다름없다. ▷다음 달 11~13일 서울 잠수교에 차량 통행을 막고 약 500m 구간에 모래사장이 설치된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들라노에 시장의 아이디어가 좋은 모양이다. 2015년에는 공공자전거 ‘벨리브’를 본떠 ‘따릉이’를 만들더니 이번엔 파리 플라주를 본떠 ‘잠수교 비치’를 만들었다. 지난해 한강 둔치에 모래사장이 마련됐지만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올해 잠수교로 바뀌면서 관심을 끈 것은 차량이 주인이던 다리가 처음으로 온전한 인간의 공간이 된다는 사실에 통쾌함이 느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파리 플라주는 한 달이고 서울 플라주는 사흘이다. 한 달도 아니고 고작 사흘간을 위해 800t이 넘는 모래를 퍼 나르나 하는 생각도 든다. 센강 주변은 대중교통으로 접근이 수월하지만 잠수교는 어떨지 모르겠다. 아이들만 바글바글한 놀이터만 된다면 해변 같은 느낌은 줄어든다. 파리 시민은 노출에 익숙한데 한국 성인들은 어떨까. 빌려온 아이디어가 우리 처지에 꼭 맞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그곳에서 색다른 도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기대는 충분히 든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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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문무일 검찰인가, 윤석열 검찰인가

    검찰이 3일 열린 검찰총장후보추천위원회를 통해 민 두 후보는 문무일 오세인 당시 고검장이었다. 둘 다 사법연수원 18기다. 19기 봉욱 대검차장이 미리 임명된 상황에서 15기인 고검장 출신 소병철 농협대 석좌교수가 검찰총장이 되면 대검차장과 기수 차이가 많이 나 고참 기수 밀어내기가 어려워지고 19기인 조희진 의정부지검장은 대검차장과 동기라는 게 검찰의 고민이었다. 그렇다고 문무일과 오세인의 양자대결이었다고 말하는 것도 어폐가 있다. 법무부가 청와대와 코드를 맞춰 지명한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등 3명의 비당연직 추천위원들은 똘똘 뭉쳐 오세인의 추천 자체를 반대했다. 그러나 당연직 추천위원들은 그것만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고집해 오세인이 들어 있는 리스트를 놓고 가부(可否)투표를 해 6 대 3의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검사의 어떤 특징이 검찰총장감을 만드는지 명확히 말하기 어렵다. 그래도 누구는 검찰총장감이다, 아니다는 평가는 늘 나온다. 남아있는 18기 중에서 검찰총장감을 꼽는다면 오세인이 대체로 먼저 언급됐다. 당연직 추천위원들은 둘 다 올리면 문무일이 되는 분위기라는 걸 감지했지만 문무일과 오세인이 이미 동시에 올라 있고 비당연직 추천위원들이 오세인을 떨어뜨리려 바람을 잡는 통에 그렇게 하는 것만도 선방이었다고 한다. 청와대가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과 안태근 법무부 검찰국장을 쫓아내고 싶었다면 ‘돈 봉투 만찬’보다는 더 설득력 있는 빌미를 찾아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아무튼 그 사건에 책임지고 이창재 법무부 차관과 김주현 대검차장도 옷을 벗었다. 청와대는 검사 인사는 법무부 장관이 검찰총장의 의견을 들어 한다는 검찰청법 규정을 무시하고 법무부 장관도 검찰총장도 없는 상황에서 이들의 자리를 다 채우고 난 뒤에야 검찰총장 임명에 나섰다. 검찰총장이 임명되고 그의 의견을 들어 대검차장과 서울중앙지검장이 임명된 것이 아니라 서울중앙지검장과 대검차장이 임명되고 나서 검찰총장이 임명됐다. 청와대가 가장 먼저 임명해 파격적인 신임을 실어준 서울중앙지검장이 수사의 제1요처를 장악하고 있고 청와대가 솎아낼 사람은 다 솎아 내고 심을 사람은 다 심은 판 위에 검찰총장이 들어섰다. 권한은 별로 없고 숙제는 많은 검찰총장이다. 노무현 정권에서 송광수 검찰총장을 택해 고전한 경험이 있는 문재인 대통령은 자기 손으로 뽑은 검찰총장에게도 다 믿고 맡기지 못하는 듯하다. 윤대진 부산지검 차장검사가 5일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 밑의 1차장검사로 발령 났다. 한 검찰 출신 변호사는 이 발령을 보고 “청와대가 하는 인사가 확실히 맞다”고 평했다. 한낱 차장검사 인사까지 서둘러 한 것에 그렇게 평한 것이다. 윤 차장검사는 조국 대통령민정수석의 서울대 법대 한 학번 아래다. 또 문 대통령과 검찰개혁에 관한 책을 함께 낸 김인회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서울대 법대 동기로 노무현 정권의 청와대에서도 일했다. 윤 차장검사는 검찰 내의 보기 드문 운동권 출신이다. 운동권 출신이라서 무슨 문제가 있다는 뜻은 아니고 검찰 내에서 문재인-조국 라인의 의도를 그보다 더 잘 알아들을 사람은 없다. 윤 지검장은 박근혜 정권의 검찰에서 상관과 한판 붙었던 사람이다. 그가 이 정권에서는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다. 불도저 옆에 윤대진이라는 유도장치 겸 견제장치를 붙여 놓은 셈이다. ‘프로듀스 101’이란 오디션 TV 프로그램이 지난해와 올해 큰 인기를 끌었다. 몇 번 보다가 센터라는 말이 많이 쓰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구성원 각자 다 비슷비슷한 비중의 역할을 맡고 있는 듯한 아이돌 그룹 내에서도 센터라는 좀 더 중요한 자리가 있다. 지금 검찰에서 센터는 누구인가. 문무일인가, 윤석열-윤대진 조(組)인가. 예전에는 리더가 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리더는 서태지였고, 1970, 80년대 그룹사운드에도 다 리더가 있었다. 오늘날 아이돌 그룹에는 센터는 있을지언정 리더는 없다. 리더는 그룹 밖에 있다. 작곡자나 보컬 혹은 댄스 트레이너가 리드한다. 문 검찰총장은 과거처럼 검찰의 리더라고 할 수 있나. 이 정권에서 검찰의 리더는 검찰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닐까.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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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이승만과 여운형

    해방정국에서 서로를 민족반역자로 규정할 만큼 가장 치열한 대립각을 세운 것은 한민당과 공산당이다. 해방정국의 정치세력을 우파로부터 좌파까지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거론한다면 한민당과 이승만과 김구, 김규식과 안재홍, 여운형, 박헌영과 김일성의 순이 될 것이다. 한민당과 이승만과 김구는 우파, 김규식과 안재홍은 중도우파, 여운형은 중도좌파, 박헌영과 김일성을 좌파라고 분류할 수 있다. ▷박헌영과 김일성은 같은 공산당원이었기에 강력한 라이벌이기도 했다. 본래 박헌영이 장악한 서울의 공산당이 ‘당 중앙’이었고 김일성이 장악한 것이 그 산하의 ‘북조선 분국’이었다. 김일성은 북조선 분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후 다른 정치세력과의 통일전선기구를 수립하고 임시인민위원회라고 불렀다. 그러나 남조선의 통일전선은 좌우합작을 미 군정청이 지원하고 있어 인민당의 여운형이 부각될 수밖에 없었고 박헌영은 소외될 것을 두려워했다. 김일성은 좌우합작에 적극적인 여운형을 선호했다. 나중에 결국 북한에서 박헌영은 숙청되고 여운형의 자식들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이승만은 뒤늦게 귀국해 한민당에 의존하지 않으려고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만들어 자기 세력 구축에 나섰다. 이승만은 좌우합작에 가장 부정적이었고, 여운형 김규식 등 중도파를 내세워 좌우합작을 지원한 존 하지 군정청장과 대립했다. 미군정의 좌우합작 지원은 1947년 그리스의 공산화 위협에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고 본격적인 냉전이 시작되면서 사멸됐다. ▷해방정국에서 송진우 여운형 김구가 차례로 암살당했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민당 책사 송진우의 암살을 김구 측 소행으로 본다. 여운형 암살은 우파 측 소행이라는 설도 있고 박헌영 측 소행이라는 주장도 있다. 김구 암살은 이승만 측 소행이라는 설이 있다. 여운형이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백주대낮에 피격된 날이 70년 전 오늘이다. 남한 단독 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 독재 끝에 쫓겨나 하와이로 망명한 뒤 쓸쓸히 사망한 날도 52년 전 오늘이다. 지금도 그 격렬함이 느껴질 것 같은 시대의 인물들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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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한국 여자골프, 젓가락과 바짓바람

    US여자오픈 골프대회는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의 메이저 5개 대회 중에서도 으뜸이다. 어제 끝난 올해 US여자오픈에서 박성현이 1위를 차지했다. US여자오픈에서 박세리가 우승한 1998년부터 올해까지 20년간 한국 선수의 우승이 9차례로 미국 선수의 8차례를 앞질렀다. 최근 10년간만 보면 한국 선수의 우승이 7차례로 미국 선수의 3차례를 압도한다. 올해 대회는 특히 상위 10위 안에 한국 선수가 8명이나 들었다. LPGA 대회인지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대회인지 헷갈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올 시즌만 해도 지금까지 열린 19개 LPGA 대회에서 한국 선수가 절반에 가까운 9개 대회의 우승을 차지했다. 대회는 미국이 열고 상금은 한국이 휩쓸고 있다. 올해 US여자오픈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소유의 골프장에서 열려 그가 직접 찾아 2라운드부터 지켜봤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서 미국이 한국에 막대한 손해를 본다고 오해하고 있는 그가 리더보드에 한국 선수 이름이 즐비한 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골프는 양궁과 더불어 한국 여성에게 최적화된 스포츠가 아닌가 싶다. 양궁만 해도 한국 남녀 모두 세계 정상이지만 골프에서는 한국 여성만 세계 정상이다. 젓가락을 사용하면서 키워진 남다른 손 감각이 파워보다는 정확도가 더 중요한 스포츠에서 성과를 내는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과거 영국 식민지가 아니었으면서 골프를 잘하는 나라가 스웨덴이다. 골프를 국민 스포츠로 장려해 안니카 소렌스탐 등을 배출한 스웨덴도 우리나라처럼 탄탄한 선수층을 가진 적이 없다. ▷젓가락으로 말하자면 중국도 일본도 사용한다. 그렇지만 일본은 우리의 상대가 되지 않고 앞으로 중국이 얼마나 성장할지는 지켜볼 일이다. 다만 현재로선 일본도 중국도 따라올 수 없는 것이 아빠들의 바짓바람이다. 한국의 교육열은 대체로 엄마들의 치맛바람인데 골프만은 아빠들이 어릴 때부터 딸을 데리고 다니면서 자신의 재산과 시간을 쏟아 부어 얻은 결실인 경우가 적지 않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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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일방적인 문재인, 설득하던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이 독일에서 ‘베를린 구상’을 발표한 후 질의응답 과정에서 전혀 엉뚱한 답변을 했다. 한미관계에 대해 물었는데 한중관계에 대해 답한 것이다. 객석에서 지켜보던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당황해 단상에 뛰어올라가 귓속말로 뭔가 속삭이고 나서야 문 대통령은 상황을 파악하고 답변을 바로잡았다. 이 기사는 단 한 곳의 인터넷 매체에만 떠 있다. 지난 주말 한 지인이 당시 상황을 촬영한 영상을 카톡으로 보내줬다. 유튜브의 ‘문재인 대통령 직무 수행 능력’이란 제목의 영상()이다. 직접 보니 해프닝 정도를 넘어선다. 문 대통령에 대한 질문은 영어로 50초 정도, 또 한국어 통역으로 그 정도 이어졌다. 질문자는 문 대통령이 미국에 대해서도 ‘노’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언급한 사실을 상기시키고, 그러나 미국에 ‘노’라고 말하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고 지적하면서 마지막에 “한미관계에 대해 어떻게 보느냐”고 간략히 물었다. 문 대통령의 답변은 2분 넘게, 영어 통역도 그 정도 이어졌다. 그는 한미관계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날 아침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나눈 회담 내용이 답변의 주(主)였다. 통역자는 엉뚱한 답변에 당황한 듯 말까지 더듬거렸고 질문자의 얼굴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 답답하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객석에 앉은 외국 인사들이 6분 넘게 이어진 그 상황을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영상을 보면 금방 짐작이 갈 것이다. 문 대통령이 간혹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 같다는 인상을 이미 지난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받은 바 있다. 어느 후보가 서울지하철 구의역 참사 사건을 계속 언급하는데도 그가 못 알아들어 결국 그 주제는 넘어가고 말았다. 또 어느 후보가 당시 뉴스에 많이 등장하던 ‘Korea Passing(한국 제치기)’을 언급하자 이번에 진짜로 무슨 말인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는 ‘그럴 수도 있지’라고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다. 자신이 조의(弔意)를 표하기 위해 직접 다녀오기까지 한 구의역의 이름이 순간적으로 떠오르지 않았을 수 있고, ‘Korea Passing’도 개념을 알면 되지 그 말을 꼭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미관계를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은 알아듣지 못할 수 없는 질문이다. 긴 사전 설명도 있었다. 문 대통령이 답변을 회피하고 싶어 엉뚱한 대답을 한 것 같지도 않다. 그는 김 부총리의 지적을 듣고 곧바로 한미관계에 대해 기억에 남을 만한 말은 아니지만 몇 마디를 했다. 문 대통령에게 의학적 처방이 필요한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다만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것은 남 얘기는 듣지 않고 자기 생각만 얘기하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특징이라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말귀를 못 알아들어 실수하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다. 그는 논쟁적인 사람이다. 남의 말을 반박하려면 말귀부터 정확히 알아들어야 하고 말하지 않은 것까지 짐작할 수 있어야 한다. 문 대통령은 대선 기간에 봤듯 가능한 한 토론을 피했다. 토론에서는 종종 질문과는 관련 없는 자기주장을 늘어놓았다.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이 개혁하려고 했던 검찰의 검사들과도 토론을 해보자고 했던 사람이다. 문 대통령에게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노 전 대통령은 친북인사 송두율이 한국에 들어와 수사를 받자 왜 그를 받아들여야 하는지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문 대통령은 독일 방문 중 부인 김정숙 여사를 시켜 친북인사 윤이상의 묘소에 참배하게 하면서도 아무런 설명이 없다. 노 전 대통령은 반대자들이 생각하는 것까지 고려해 그것을 넘어서려고 노력한 반면 문 대통령은 남들 생각엔 귀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듯 자기 할 소리만 일방적으로 선언하듯 하고 있다. 원전 정책은 대통령이 선거 공약으로 탈(脫)원전을 내세웠다고 해서 함부로 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노 전 대통령 같으면 원전 공사를 중단하기 전에 사회적 대토론을 제안했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시민배심원제라는 누구도 익숙지 않은 제안을 던져놓고 공문 한 장 달랑 보내 공사 중단을 지시했다. 같은 뿌리에서 나왔지만 참으로 다른 정권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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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대통령의 ‘독일어 시간’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은 재능 있는 사람이 배우는 데 영어는 30시간, 프랑스어는 30일이 걸리고 독일어는 30년이 걸린다고 말했다. 특유의 신랄한 위트로 독일어를 배울 시간적 여유는 죽은 사람에게나 가능할 것이라고도 했다. 독일어는 미국인에게도 쉽게 배울 수 있는 언어가 아닌 모양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의 공동 언론발표에서 ‘구텐 아벤트(Guten Abend·안녕하세요)’, ‘필렌 당크(Vielen Dank·매우 감사합니다)’라며 독일어로 인사했다. 이 정도야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외국인이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하는 것과 별 다를 바 없으니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6·25전쟁 직후 한국에 파견된 독일 의료지원단을 만나 방명록에 ‘Ihre Hilfe bleibt unvergessen(당신들의 도움은 잊혀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이라는 독일어를 남겼다는 데는 놀라운 기분이 든다. ▷문 대통령은 경남고에 다닐 때부터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배웠다고 한다. 사법시험 1차 과목에서 외국어로 영어 대신 독일어를 택해 공부하는 사람도 꽤 있었다. 그가 어떤 외국어를 택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그가 방명록에 남긴 고급스러운 독일어는 물어보고 쓴 것일 수도 있다. 다만 미국 가서는 영어 한마디를 하지 않던 그가 독일에서는 애써 독일어를 사용하려 했다는 게 흥미롭다. ▷독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한국인 중 한 명이 작곡가 윤이상이다. 김정숙 여사는 베를린의 윤이상 묘소를 방문해 대통령 부부의 이름으로 헌화했다. 윤이상은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한국에서 2년간 복역한 뒤 독일로 돌아가 베를린에서 생을 마쳤다. 문 대통령은 경남 거제 출신이고 윤이상은 경남 통영 출신이다. 동베를린 사건이 조작된 것은 아니다. 다만 일본에서 배를 타고 통영 앞바다까지만 와보고 고향땅을 밟지 못한 그의 사연이 안타까운 것은 틀림없다. 각별한 의미를 담고 싶었을 헌화가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실험에 빛이 바랜 것도 안타깝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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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김기춘과 賜藥

    독배를 마시고 옥 안을 걷던 소크라테스는 다리가 풀리는 것을 느끼고 등을 대고 누웠다. 옥리가 소크라테스의 발을 세게 누르고 느껴지느냐고 물었다. 소크라테스는 느껴지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다음으로 다리 쪽을 누르며 느껴지냐고 묻고 조금씩 위쪽을 누르면서 같은 질문을 했다. 이제 그는 차갑고 딱딱해졌다. 옥리는 그를 만진 후 “독이 심장에 이르면 그것으로 끝입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갑자기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을 젖히고 말했다. “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장닭 한 마리를 빚졌네. 대신 갚아주겠나.” 얼마 후 그의 몸이 움찔했다.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모습이다. ▷처형 수단에 인간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는 뭐하지만 독약은 그나마 가장 인간적인 처형 수단으로 꼽힌다. 조선시대에 임금이 선비를 선비로서 대우해서 처형하는 방법이 사약(賜藥)이었다. 선비라도 역모를 범하면 참수를 당했다. 사약을 마시자마자 피를 토하며 죽는 드라마 장면은 현실적이지 않다. 사약을 마시면 서서히 죽는다고 한다.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한 혐의로 받고 있는 재판에서 그제 “재판할 것도 없이 독배를 내리면 깨끗이 마시고 이 상황을 끝내고 싶다”고 말했다. 혐의를 인정하는 건 아니다. 다만 “제가 모시던 대통령이 탄핵을 받고 구속까지 됐는데, 잘 보좌했더라면 이런 일이 있었겠느냐는 점에서 정치적 책임을 통감한다”며 “과거 왕조시대 같으면 망한 왕조에서 도승지를 했으니 사약을 받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옥사(獄死)하지 않고 밖에 나가서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할 정도로 건강이 안 좋다. 심장에 스텐트를 8개나 박은 78세 노인이 감옥에서 법정으로 끌려 다니는 게 오죽 힘들겠나. 블랙리스트는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2015년 의원 시절 처음 제기했지만 특검이 손대기 전까지만 해도 비판할 실정(失政)으로 인식됐지 처벌할 범죄로 인식되지 않았다. 어쩌면 블랙리스트보다는 선비들처럼 사약을 각오하는 자세로 대통령에게 충언하지 못한 죄가 큰 것일 수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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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동맹의 민낯

    프랑스 최초의 사회당 출신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은 기자들을 싫어했고 특히 좌파 기자들을 싫어했다. 그가 존경하던 유일한 칼럼니스트는 레몽 아롱이었다. 공산당과의 연합에 반대하는 아롱의 가차 없는 비판이 그의 관심을 끌었다고 미테랑의 심복이었던 자크 아탈리가 ‘미테랑 평전’에서 전했다. 독일 최초의 사회민주당 총리는 빌리 브란트이긴 하지만 그가 집권했을 때만 해도 독일 국민은 사민당의 수권 능력을 반신반의했다. 더 이상 급진세력의 숙주 역할을 하지 않고 국가 안보에 불안을 주지 않은 사민당의 이미지는 브란트의 뒤를 이은 헬무트 슈미트 총리가 만들어냈다. 슈미트는 칼 포퍼를 존경했다. 그는 회고록 ‘구십 평생 내가 배운 것들’에서 “1980년 영국 런던에서 포퍼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이미 포퍼의 사상에 푹 빠져 있었다. 그 이후 1994년 포퍼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우리는 친구로 우정을 나눴다”고 썼다. 포퍼는 1945년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아롱은 1965년 ‘사회사상의 흐름’이란 대작(大作)을 써서 마르크시즘에 내장된 전체주의적 속성을 비판했다. 미테랑이나 슈미트가 유럽의 대표적 우파 지식인에 끌렸다는 것은 그들이 추구한 좌파 노선이 공산당이나 급진파와 얼마나 다르며, 한국의 좌파들과도 얼마나 다른지 보여준다. 그런 슈미트였기에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와 기독민주당을 미국의 앞잡이로 모는 급진파들이 똑똑히 들으라고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1949년 이후 서독인들이 누리고 있는 개인의 자유와 경제적 번영은 단지 부분적으로만 자신들의 노력의 결과로 얻은 것이다. 미국 프랑스 영국의 지혜로운 배려가 없었다면, 이들이 소련으로부터 서독을 방어해주지 않았더라면 서독인 자신들의 노력과 수고는 아무런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운명’이란 책에서 “대학 시절 나의 사회의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은 리영희 선생이었다”고 썼다. 그는 대선 직전 동아일보가 국민들과 널리 함께 읽고 싶은 책이 뭐냐고 물었을 때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들었다. 한국 현대사를 반미(反美)의 시각에서 해석하는 전환은 리영희의 미국 베트남전 비판에서 시작됐다.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존경한 사람도 리영희였다. 미테랑이나 슈미트 같은 서구 좌파 정치지도자들과 비교하면 우리 좌파 정치지도자들의 세계와 역사를 보는 시각이 얼마나 좁고 편향돼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문 대통령이 오늘 취임 후 첫 미국 방문길에 오른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한국을 서독과 함께 전후 가장 성공한 나라로 만든 동맹을 분단의 장본인이자 통일의 훼방꾼으로 바꾼 뒤집힌 역사인식이다. 그런 역사인식으로 문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난다. 그제 청와대에 초빙된 전직 주미 대사들이 문 대통령에게 해준 충고는 ‘세부적인 대화에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모호함이 문 대통령에겐 최선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동맹은 쟁점을 회피한다고 저절로 굴러가지 않는다. 동맹은 법이 아니라 힘이 좌우하는 관계다. 법이 좌우하는 곳에서는 권리를 내세워 트집을 잡고 응석을 부릴 수 있다. 힘이 좌우하는 곳에서는 그럴 수 없다. 그러려면 손해를 각오해야 한다. 미테랑이 1983년 주요 7개국(G7) 회의에 참석했을 때다. 미국이 유럽에 미사일을 배치하는 데 그가 시비를 걸자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주먹으로 탁자를 탁탁 치다가 긴 탁자 맞은편으로 미테랑을 맞히려는 듯 커다란 서류 하나를 던졌다. 다행히 서류는 탁자 한가운데 꽃과 커피잔 위로 날아가 떨어졌다. 미테랑은 회담장을 박차고 나가지 않고 끝까지 말을 이어갔다. ‘미테랑 평전’에 나오는 가장 충격적인 대목이다. 무례한 레이건과 국가 이익을 위해서는 사회주의자의 자존심까지 버린 미테랑, 이것이 동맹의 민낯이다.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총리가 왜 ‘부시의 푸들’이라는 조롱을 들으면서까지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아양을 떨었겠는가. ‘인문학 일러스토리 1: 모든 것은 그리스에서 시작됐다’란 책을 최근 읽었다. 일러스트레이션이 곁들여진 쉽지만 알찬 고대 그리스 입문서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생존을 위한 동맹이 눈물겹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가의 생존은 동맹에 달렸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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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신격호의 퇴장

    ‘껌값’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롯데그룹 창업주 신격호 명예회장(95)은 일본에서 1948년 운명의 껌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풍선껌은 마진이 50%에 이를 정도의 성장산업이었다. 껌 팔아 호텔도 짓고 백화점도 세운 셈이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껌이라면 역시’라는 말이 들리면 저절로 ‘롯데 껌’이란 말이 튀어나오고 그 광고 문구를 가사로 한 중독성 있는 멜로디가 입안에서 맴돌 것이다. ▷신 회장은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1년 스무 살 나이에 공부도 하면서 돈도 벌 목적으로 혈혈단신 일본에 갔다. 문학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징병을 피하려면 공학을 해야 한다고 해서 와세다대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했다. 롯데라는 명칭은 그가 좋아하던 괴테의 작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속 여주인공 샤를로테(일본식 발음 샤롯데)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 패전으로 감정 과잉이었던 일본의 젊은 여성들 사이에 이 작품이 인기가 있어 껌의 주 소비층인 젊은 여성을 겨냥해 그런 이름을 택했다는 말도 있다. ▷신 회장은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에야 고국인 한국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는 일본에 상주하면서 두 달에 한 번꼴로 귀국해 홀수 달은 한국에서, 짝수 달은 일본에서 지냈다고 한다. 일본인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 일본말밖에 할 줄 모르는 장남 신동주와 외국어 같은 한국말을 하는 차남 신동빈을 두고 있다. 그는 자발적으로는 매스컴에 거의 얼굴을 내밀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롯데그룹도 폐쇄적이고 사회 공헌도 적다. 그에게 한국은 어떤 의미일까. ▷그가 그제 한일(韓日) 롯데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일본 롯데홀딩스 이사직에서 사임했다. 그룹 전면에서 공식적으로 손을 떼는 셈이다. 경영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는 “위대한 영웅인 최고경영자가 치러야 할 마지막 시험은 얼마나 후계자를 잘 선택하는가와 그의 후계자가 회사를 잘 경영할 수 있도록 양보하는가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왕자의 난을 자초한 신 회장의 마지막 시험은 실패였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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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마지막 사법시험

    조선시대 정인지는 세종의 명으로 편찬한 ‘고려사’의 서문에서 태조 왕건의 건국, 광종의 과거제 도입, 성종의 종묘사직 확립, 문종 때의 태평성대, 이후의 쇠락으로 간략히 고려사를 요약하고 있다. 과거제가 얼마나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과거는 중국에서 귀화한 자문관 쌍기의 건의로 도입돼 조선 말 고종이 폐지할 때까지 이어졌다. 시험으로 공무원을 충원하는 것은 유교 문화권의 오랜 전통이다. 그 현대판이 사법시험 행정고시 외무고시라고 할 수 있다. ▷고시 하면 가장 먼저 사법시험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행정고시에 합격하면 행정직 5급이 되고 외무고시에 합격하면 외무직 5급이 되지만 사법시험에 합격해 판검사가 되면 3급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사법시험이 내일까지 치러진다. 외무고시는 2013년 시험을 끝으로 사라졌다. 행정고시가 남았다고는 하지만 고시의 상징과도 같은 사법시험이 사라지는 것은 고려 광종 이래 1000년 넘게 순전히 시험만으로 인재를 등용하던 전통의 종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법시험 합격은 옛날로 치면 과거 급제와 같은 것으로 온 동네의 경사였다. 언론은 합격자 발표가 나면 불우한 환경을 딛고 ‘인간 승리’를 이룬 화제의 인물을 찾아다녔다. 사람들은 그런 스토리에서 희망을 읽었다. 서울대가 위치한 관악구 신림동에는 고시학원과 고시원이 밀집한 고시촌이 형성됐다. 떠들썩한 합격의 기쁨 뒤에 더 많은 불합격자의 절망과 고시 낭인(浪人)의 우울도 있었다. 고시의 종말과 함께 고시촌은 활기를 잃고 인생역전의 꿈도 사라지고 있다. ▷우리나라 같은 대륙법계 국가에서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3년은 출신 학부의 다양성을 살리고 실무훈련을 겸비하는 것은 고사하고 필독서를 읽기에도 빠듯하다. 법학 석·박사를 키우던 교육체제는 무너졌다. 로스쿨은 노무현 정권이 만들었고 문재인 정권은 사시를 존치할 생각이 없다. 노무현 정권이 보고 따라 한 일본은 사실상 사시를 존치했다. 한국은 대륙법계 국가에서 로스쿨 일방주의를 택한 유일한 나라가 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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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엄마 정유라와 아이

    미처 기억하지도 못하는 어린 시절 엄마의 부재(不在)는 인간이 겪는 최초의 트라우마라고 한다. 프로이트에게는 태어난 지 1년 반 된 손자가 있었다. 그 아이는 줄이 매여 있는 나무 실패를 커튼이 쳐진 침대 너머로 던져 사라지게 했다가 다시 끌어당겨 찾는 놀이를 반복했다. 실패처럼 사라진 엄마를 다시 찾는 놀이로 고통을 견뎌내는 것이라고 프로이트는 해석했다. ▷2014년 11월 중국에서 마약을 들여온 혐의로 구속 기소된 30대 여성이 있었다.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은 뒤 임신 사실을 알게 됐고 구치소에서 출산까지 했다. 항소심에선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법정까지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 여성에 게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판결 이유 중 하나는 아이가 관련된 조치는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최우선적으로 고려해 내려야 한다는 유엔아동권리협약이다. ▷법원이 그제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에 대해 재청구된 영장을 다시 기각했다. 기각 사유는 새로 추가된 범죄수익은닉 혐의가 소명되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최 씨가 이미 구속돼 있고 정 씨가 24개월 된 아들을 돌봐야 한다는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정 씨에 대한 영장 재청구는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 임명되고 나서 사회적 관심을 끈 첫 사건이다. 수사는 불구속으로 얼마든지 가능하고 한 사건에서 어머니를 구속하면 딸까지는 구속하지 않는다. 윤 지검장은 이런 관례를 깨고, 그것도 아이 엄마를 상대로 영장을 재청구했다. 송나라 문인 소동파 왈, “정의로움도 지나치면 잔인해진다”. ▷엄마가 무슨 일을 했든 아이는 아이로서 보호받아야 한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이 강조한 것은 엄마가 죄인일 때조차도 아이를 먼저 고려하라는 것이다. 검찰은 정 씨에 대해 세 번째 영장을 청구할 수도 있다고 한다. 조국 대통령민정수석이 이전 정권은 인권 무시 정권이었던 양 새삼 인권을 강조하고 국가인권위원회 강화를 외친 것이 엊그제다. 인권위는 아이 엄마의 영장을 청구하고 또 청구하는 데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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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설위원이 만난 사람/송평인]“무리한 기소 검사, 변협평가 강화로 불이익 줄 것”

    《 김현 대한변호사협회장은 시인 김규동의 아들이다. 김규동은 함경북도 종성 출신으로 1948년 김일성종합대에 다니다 월남해 ‘나비와 광장’ 등의 시를 남기고 2011년 타계했다.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문인 아버지의 기질은 김 협회장에게 이어졌다. 1977년 서울대 법대 재학 중 학내 시위로 유기정학을 당한 이력 때문에 1980년 행정고시도, 1982년 사법고시도 면접에서 고배를 마셨다. 다 포기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은사인 송상현 교수가 신원 보증을 해줘 그 다음 해 사시 면접을 다시 한번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한 해 늦게 사시 합격자가 됐다. 하지만 그 때문에 판검사의 길은 포기하고 미국 코넬대와 워싱턴대 로스쿨을 나와 국내에 몇 안 되는 해상법 전문 변호사가 됐다. 》  민정수석과 가까운 법무장관 곤란 ―안경환 법무부 장관 후보자 사퇴를 어떻게 보는가. “안 후보자는 문학에 관심이 많다. 제 아버지와 친했고 그런 연유로 저하고도 식사를 같이한 적이 있다. 안 후보자의 젊은 시절에는 혼인신고가 쉬웠다. 여성이 한번 결혼한 것이 되면 이혼이 쉽지 않다는 시대 상황을 이용해 젊은 날의 치기로 짝사랑하는 사람을 배우자로 몰래 혼인신고하는 일들이 왕왕 있었다. 혼인신고 절차가 쉬워 벌어진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런 논란을 떠나 대통령민정수석과 친한 사람이 법무부 장관이 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업무로 보면 둘은 가까워서는 안 된다. 청와대와 법무부는 거리가 있어야 한다. 민정수석은 법무부가 잘하고 있는지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어야 하고 법무부는 청와대 눈치를 안 보고 원칙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 ―민정수석이 인사 검증을 해야 하나. “저도 늘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 게다가 지금은 인사수석이 따로 있지 않나. 사실 청와대보다는 인사처 같은 데서 검찰이나 경찰에서 필요한 자료를 넘겨받아서 하는 것이 더 낫다. 인사처가 주도해 여·야당 의원까지 함께 참여하는 비밀 청문회를 여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사생활과 관련된 것은 이런 데서 철저히 거르고 국회의 공개 청문회에서는 정책에 대한 의견을 놓고 검증해야 한다.” ―안 후보자가 사퇴한 마당에 또 비(非)검찰 출신 법무부 장관이 와야 한다고 생각하나. “지금 필요한 법무부 장관은 검찰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대한 검찰에 맞서서 개혁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 꼭 비검찰 출신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제 경우 변호사를 30년 이상 하다 보니 워낙 아는 사람들이 많아 변협을 인정사정 보지 않고 개혁할 자신이 없다. 검찰 개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국은 법무장관(Attorney General)이 사실상 연방 검찰총장인 셈이지만 우리나라나 일본은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이 나뉘어 있다. 법무장관이 꼭 검찰 출신일 필요는 없지 않나. “그렇다. 우리나라는 잘못된 관행이 많고 법무부 장관을 검찰 출신이 하는 것도 그런 관행이다. 국방부 장관도 민간인이 더 잘 할 수 있다. 대법원장도 판결보다는 행정 업무가 많기 때문에 판사 출신이 아니라 변호사 출신이 더 잘할 수도 있다.” ―법무부의 탈(脫)검찰화를 얘기하는데 어느 정도나 탈검찰화가 가능할까. “법무부에 약 90명의 검사가 근무하는 것으로 아는데, 일단 절반 정도인 40∼50명만 검사로 하고 나머지는 민간인으로 대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변협도 변호사들 중에서 적합한 후보를 추천할 것이다.” ―검찰총장은 어떤 사람이 돼야 할까. “민정수석에 비법조인이 기용됐고 법무부 장관 후보로도 비법조인이 지명될 수 있는 상태에서 검찰총장까지 비검사 출신으로 임명한다면 검찰 조직의 동요가 심할 것이다. 안정과 개혁 사이의 조화를 이뤄야 한다.” ―검찰총장추천위원회의 추천 작업은 어떻게 되고 있나. “소병철 김경수 오세인 등 현재 후보로 거론되는 검찰 출신들은 누가 되든 대체로 무난하다고 본다. 다만 추천위원회 구성은 바꿔야 한다. 추천위원 9명 중 법무부 측 당연직 2명과 법무부 장관이 임명하는 학식과 덕망이 있는 사람 3인이 법무부 장관 편이다. 그러다 보니 5 대 4로 법무부 장관 맘대로 할 수 있는 구조다. 학식과 덕망이 있는 3인을 2인으로 줄이고 남은 1인을 독립시켜 4 대 5의 구조로 만들어야 한다.”검찰 인사, 총장 임명뒤 했어야 ―검찰총장추천위원회는 박근혜 정권에서 생겼다. 그러나 미국은 대통령이 연방검사 연방판사 다 임명한다. 민주적 정당성이란 측면에서 보면 국민이 직접 뽑은 대통령이 임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 아닌가. 추천위원은 무슨 민주적 정당성이 있나. “미국에는 권력 행사에서 정당성을 중시하는 전통이 형성돼 있고 강력한 야당이 있다. 우리나라는 승자독식 패자전멸의 풍토가 있다. 승자가 맘대로 하는 것을 나름대로 막는 장치가 추천위원회 제도다. 우리나라 풍토에서 추천위원회보다 더 좋은 제도를 현재로선 찾기 어렵다.” ―일본만 하더라도 검사총장에 대한 추천위원회 이런 것 없다. 일본은 도쿄고검장이 되면 차기 검사총장이 되는 걸로 안다. 일본 검찰은 국민 신뢰 1위다. 왜 비슷한 제도를 갖고 있는 우리나라는 일본과 다른가. “우리나라는 정권이 말 안 듣는 검사는 좌천시키고 말 잘 듣는 검사는 승진시키고 하면서 검사의 직업윤리가 생길 수 없는 구조가 돼 버렸다. 그렇게 된 것은 제왕적 권한을 가진 대통령들에게 책임이 있다.” ―윤석렬 서울중앙지검장 임명과 ‘우병우 라인’으로 지목된 일선 고검장과 지검장 4인 등에 대한 문책성 좌천 인사가 있었다. 검사 인사는 검찰총장의 의견을 들어 법무부 장관의 제청으로 하게 돼 있다. 이들의 인사 때는 검찰총장도 법무부 장관도 없었다. “새 정권이 조급했던 느낌이 든다. 빨리 검찰 개혁을 하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한 것 같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조금 더 자제하고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이 임명된 다음에 했으면 더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이 든다.” ―일본은 검찰이 기소하면 유죄 받을 확률이 99.9%라고 한다. 우리는 ‘아니면 말고’ 구속이 너무 많다. 이석채 전 KT 회장 수사처럼 하명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 있지만 옥시 조명행 전 서울대 교수 사건처럼 여론의 눈치에서 비롯된 것도 있다. “무리한 기소를 하여 무죄율이 높거나 영장 기각률이 높은 검사는 인사에 불이익을 줄 필요가 있다. 변협의 검사 평가를 더욱 강화하여 무리한 기소를 한 검사에게 불이익을 줄 생각이다.” ―‘아니면 말고’ 구속도 문제지만 1심 판결이 항소심이나 상고심에서 뒤집히는 경우도 너무 많다. “법원이 사건을 검토하기에는 사건 수가 너무 많은 것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그러다 보니 대충 검토해 유죄를 선언해 버리고 대신 양형을 세게 하지 못한다. 확신 있는 유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5년간 유학하고 돌아와서 왜 우리나라는 양형이 이렇게 약한가 생각해 보니 그것이 가장 큰 원인인 것 같았다.”대법관 제청권, 대법관회의에 줘야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한 무죄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양심적 병역 거부 처벌에 관한 위헌법률심판 결정을 미루고 있다. 법에는 명문으로 처벌하도록 돼 있고 대법원도 유죄라고 하는데 하급심에서 계속 무죄판결이 나오는 건 사법의 위기 아닌가. “헌재가 위헌결정을 내리지 않은 상황에서 법관은 양심을 따르지 않을 수 없고, 절충적 상황이라고 본다. 서울지방변호사회가 지난해 회원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전체 응답자 1297명 중 964명(74.3%)이 ‘양심적 병역 거부의 자유가 헌법상 양심의 자유에 포함된다’고 응답했다. 국회가 대체복무제 입법을 하거나 헌재가 결정을 내려줘야 한다.” ―전국판사회의가 19일 건국 후 세 번째로 열린다. 전국판사회의 상설화가 필요한가. “필요할 때 수시로 모이면 되는 것이지 상설화는 꼭 필요하지 않다고 본다.” ―법원 내 승진 제도를 아예 없애 선임 판사가 법원장을 하는 것은 어떤가. “판사들 간 평등한 관계를 지향해야 하지만 우리나라는 미국과 문화가 달라 하루아침에 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어느 조직이나 구성원이 다 평등하다고 하면 엉망이 된다. 법원의 승진 제도가 꼭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요새 열심히 하지 않는 판사들이 많다. 그런 판사들이 원하는 것은 일은 안 하면서 신분 보장은 최대한 해주고 정년까지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럼 골병드는 것은 국민들이다. 승진 제도에 대해 아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법원에서 지방법원 부장까지는 웬만하면 다 승진한다. 고등법원 부장 되는 게 어렵다. 고법 부장 승진하기 위해 윗선의 눈치를 본다고 한다. 고법 부장 승진 제도라도 없애면 어떤가. “고법 부장 승진 제도를 없애기보다 인사권이 대법원장 한 사람이 아니라 대법관회의나 대법원 인사위원회에 있으면 좀 더 객관적인 평가가 이뤄질 수 있다고 본다.” ―앞에서 법무부의 탈검찰화를 언급했는데 법원행정처의 탈법관화는 어떤가. “법원행정처의 판사를 40명에서 20명 정도로 줄이고 나머지를 변호사로 대체할 수 있다고 본다.” ―대법관추천위원회는 어떻게 바꿔야 할까. “추천위원 10명 중 법원 측 당연직 3명과 대법원장이 임명하는 위원장, 언론인, 사회단체 출신 각각 1명 등 모두 6명은 대법원장 편이다. 언론인과 사회단체 출신을 합쳐 1명으로 만들고 법원 측 당연직 1명을 줄여 대법원장 영향 밖의 인사를 6명으로 만들어야 제대로 기능할 수 있다.” ―내년 개헌이 예정돼 있다. 개헌을 한다면 사법 분야의 가장 중요한 현안은 무엇인가.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권을 대법관회의에 줘서 집단 지성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대법원과 헌재가 경쟁하는 관계인데 대법원장이 3명의 헌법재판관 지명권을 갖는 것도 이상하다.” ―사시가 없어지고 사시 합격자의 사법연수원 2년 과정이 없어지면 변호사가 국가 혜택을 입은 게 없어진다. 이미 6년째 로스쿨에서 배출된 변호사 9000명은 국가 혜택을 받은 게 없다. 변호사 업계도 영리 위주로 변하는 게 아닌가. “변호사법 1조의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를 바꿔야 한다는 얘기가 나올 수 있다. 나는 반대한다. 변호사가 보수를 받기는 하지만 많은 직업 중의 하나가 아니라 사회적 책무를 중시해야 하는 직업이다.” ―신규 배출 변호사가 너무 많아서 변호사 업계가 어렵다는데 어떻게 줄일 수 있나. “현재 변호사 업계가 수용할 수 있는 신규 변호사는 매년 1000명 수준이다. 로스쿨 정원이 2000명이다. 우선 로스쿨에서 자퇴한 사람만큼 새로 뽑는 결원보충제를 중단하면 200명을 줄일 수 있다. 결원보충제는 한시적으로 5년만 허용된 것인데 교육부가 로스쿨의 압력에 밀려 연장하고 있다. 로스쿨이 2곳 이상 설치된 지방의 로스쿨을 통폐합하면 또 200명 정도를 줄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로스쿨 정원이 줄어들면 그에 맞춰 변호사시험 합격자 수를 1500명에서 1000명으로 줄이면 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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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탓하리

    나는 1992년 한양대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의 자율과 상상의 사회학’이란 제목으로 석사논문을 썼다. 논문 쓰는 법에 대해 따로 배운 적은 없다. 대학 교양국어 시간에 ‘ibid’ 같은 기본적인 각주 관련 용어를 조금 배운 기억만 있다. 인용한 것을 인용했다고 써야 한다는 건 누가 가르쳐줘야 아는 게 아니라 공부하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다. 김상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후보자의 서울대 경영학과 박사학위 논문은 내가 석사논문을 쓰던 해에 제출됐다. 논문 제목은 ‘사회주의 기업의 자주관리적 노사관계 모형에 관한 연구: 페레스트로이카 하의 소련기업을 중심으로’이다. 이런 주제가 사회과학에나 어울리는 것이지, 과연 경영학과에 어울리는지 독자 여러분들이 생각해보시라고 긴 제목을 굳이 써봤다. 서울대는 “김 후보자는 박사논문에서 우리나라 문헌의 20곳, 일본 문헌의 24곳에서 출처 표시 없이 인용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연구부정행위가 아니라 연구부적절행위라고 규정하고 본조사도 하지 않고 예비조사로 끝내버렸다. 표절이지만 경미한 표절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1992년 무렵 경영학 박사논문 작성 관례를 고려해야 한다’고도 했다. 경영학 박사논문은 차라리 박사논문이 아니라고 말해라. 40여 곳을 인용 없이 베낀 뻔한 잘못을 판단하는 데 무슨 당시 관례를 고려해야 한다는 말인가. 김 후보자의 1982년 석사논문에는 130곳의 표절 의혹이 제기됐다. 서울대는 그의 석사논문은 아예 심사하지도 않았다. 표절을 검증하는 서울대 연구진실성위원회가 2006년 출범했기 때문에 2006년 이전 논문은 검증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차라리 서울대 석사논문은 논문도 아니라고 말해라. 출처 없이 인용해서는 안 된다는 단순한 규칙을 지키는 데 2006년 이전 양심이 따로 있고 2006년 이후 양심이 따로 있을 수 있나. 서울대는 김 후보자의 석사논문과는 달리 조국 민정수석의 석사논문은 1989년 통과된 것인데도 검증한 적이 있다. 서울대는 당시도 2006년 이전 것은 검증하지 않겠다고 2년여를 버티다가 자교(自校) 학위논문에는 사실상 시효 없는 검증을 하겠다고 방침을 정해 검증했다. 그것이 2015년 일이다. 그사이에 또 방침이 바뀌었나 보다. 조 수석의 석사논문 제목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법·형법 이론의 형성과 전개에 관한 연구: 1917∼1938’이다. 김 후보자나 조 수석이나 소비에트에 관심이 많았고 표절 형태가 유사하다는 게 흥미롭다. 당시 서울대는 조 교수가 20곳에서 출처 표시 없이 인용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1989년에는 번역서의 재인용에 관한 기준이 정립되지 않았다”며 검증 대상자를 옹호하는 해명을 늘어놓았다. 자기들만 논문을 써본 줄 아는 모양이다. 번역서의 재인용도 그냥 인용일 뿐이지 무슨 다른 기준이 적용될 수 있나. 서울대는 조 교수의 경우도 연구부정행위가 아니라 연구부적절행위로 표절이 경미하다고 보고 예비조사로 끝내버렸다. 독일 문예비평가 발터 베냐민은 인용으로만 된 책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인문·사회과학의 논문은 인용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문·사회과학에서 책이나 논문의 수준은 참고문헌만 봐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실수로 혹은 의도적일지라도 몇 군데 출처를 밝히지 않고 인용하는 정도는 눈감아줄 수도 있다. 그러나 수십 군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것이 중대하지 않으면 인문·사회과학에서 무슨 다른 중대한 표절이 있는가 묻고 싶다. 물론 그런 표절이 논문을 취소할 정도인지는 대학이 스스로의 책임으로 판단할 문제다. 그러나 그런 표절은 남이 보지 못하는 데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양심 불량의 싹수를 들여다볼 수 있는 것으로 공직자가 될 자질을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다. 내 논문에는 출처 없는 인용 따위는 한 군데도 없다고 자신한다. 자신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논문을 쓰는 수많은 학생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다. 인사 검증을 담당하는 조 수석의 눈에는 김 후보자의 논문 표절은 대수롭지 않게 보였나 보다. 자신이 똑같은 표절을 했으니까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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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도종환 시인의 사이비 사학

    신경림 시인은 ‘시인을 찾아서’란 책에서 ‘접시꽃 당신’으로 유명해진 도종환 시인에 대해 “대중적 인기에 가려 문학적 평가를 덜 받은 시인”이라고 썼다. 도종환에게는 안도현의 ‘연탄재’처럼 소박하면서도 감동적인 ‘담쟁이’란 시가 있다. ‘저것은 벽/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그때/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더불어민주당 의원인 도종환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뒤 사이비 역사관으로 비난받고 있다. 2015년 50억 원을 들인 동북아역사지도사업과 10년 정도 진행된 하버드대 고대한국 프로젝트가 식민사학이라는 누명을 쓰고 무산된 일이 있다. 도 의원은 그 일을 국회 동북아역사왜곡특별대책위 위원 시절 자신의 업적으로 자랑하고 다녔다. 동북아역사지도에서 낙랑군을 평양에 표기한 것은 잘못이고, 그런 식으로 고대사를 해외에 소개하는 프로젝트는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에는 시의 정신이 있고 산문에는 산문의 정신이 있다. 자유로운 시의 정신으로 위대한 상고사를 꿈꾸는 걸 누가 뭐라고 하겠나. 그러나 그런 정신으로 엄격한 산문의 영역에 개입하면 사고가 난다. 낙랑군 평양설은 역사학계의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광복 이후 남북한 학자들의 활발한 연구로 지금까지 평양에서 2600여 개의 낙랑군 무덤이 발견됐다. 오로지 사이비 사학만이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얼마 전 뜬금없이 가야사 연구를 들고나와 거기에 영호남 화합이라는 정치적 의미까지 부여했다. 그러자 도 의원은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에서 임나를 가야라고 주장했는데 임나를 가야라고 쓴 국내 역사학자들의 논문이 많다”고 호응하고 나섰다. 임나일본부를 인정하지 않아도 임나는 당시 가야의 별칭이었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 임나가 가야니까 임나일본부를 조작했을 수도 있다. 도 의원이 장관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어쭙잖은 인식이 역사를 몽롱한 시로 만드는 일은 없어야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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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문재인 김이수 김선수, 그리고 통진당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로 지명된 김이수 헌법재판관은 2014년 통합진보당 위헌정당 해산 심판에서 해산에 반대하는 유일한 소수의견을 냈다. 전체 결정문 346쪽 중 절반 이상인 180쪽에 이르는 그의 소수의견을 끝까지 읽어 보면 그가 위헌정당 해산 제도 자체를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의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실효성이란 측면에서 해산된 정당이 외견상 합헌적인 강령을 제정하고 활동하면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의 예상은 근거도 제시되지 않았거니와 실제 전개와도 맞지 않다. 통진당이 해산된 후 후속 정당이 만들어졌지만 유권자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다. 반면 이석기 문제를 둘러싸고 통진당과 갈라선 정의당은 종북의 이미지를 말끔히 씻어낸 진보정당으로 다른 정당 지지자들로부터도 따뜻한 반응을 얻고 있다. 통진당 해산은 실효성이 있었다. 더 문제가 많은 이유는 정당해산제는 민주주의 체제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자율적 의사결정에 중대한 제약을 초래한다는 주장이다. 그 자체로는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국민은 그런 제약에도 불구하고 분단 상황을 고려해 정당해산제를 채택하는 결단을 내렸다. 헌법재판관은 법률 위에서 판단하지 헌법 위에서 판단하지 못한다. 헌법 조항 자체를 의문시하는 주장은 헌법 제정권자인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있지만 헌법재판관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분단을 겪었던 독일은 통일된 지금도 정당해산제를 유지하고 있다. 김 재판관은 압도적인 강제 해산의 필요성이 인정되는 경우에 한해 정당 해산 결정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하지만 압도적인 강제 해산의 필요성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가 통독 전 서독 연방헌법재판소의 공산당 해산까지 비판하는 것을 보면 그의 기준으로는 이 세상에 강제 해산할 정당은 없다. 김 재판관은 이석기 일당이 통진당 내에서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에 전체로서의 통진당을 해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통진당이 내세운 ‘진보적 민주주의’ 같은 강령이 반(反)민주적이기는커녕 민주주의 심화에 기여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장을 지낸 유타 림바흐는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라는 책에서 “위헌정당 심판은 전체 정치 상황에 대한 정확한 개관뿐만 아니라 정당의 음모에 대한 통찰을 필요로 한다”고 썼다. 위헌법률 심판이나 헌법소원 심판은 사법적 판단만으로도 가능하다. 그러나 위헌정당 해산 심판은 사법적 판단을 뛰어넘는 정당의 음모에 대한 통찰까지 요구한다. 통진당은 북한의 전쟁 개시에 호응해 평택 석유비축기지, 혜화 전화국, 철도 시설을 파괴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이석기 일당이 부정 경선으로 국회의원이 되고 당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데도 막지 못했다.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그럴듯한 이념을 표방한 정당을 내세우고 지하에서 활동하다가 결정적 순간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개적인 자리로 솟아올라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방식은 레닌주의 정당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정당의 음모를 가장 잘 알 만한 재판관이 다른 재판관들은 모두 알아차린 음모를 혼자만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순진한 것인지 순진한 척한 것인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총리나 장관 후보자의 도덕성 논란은 김 재판관이 가진 사고의 문제에 비하면 한가로운 얘기다. 김 재판관이 재판관으로 있으나 헌재소장으로 있으나 어차피 헌재 결정에서 한 표일 뿐이라는 생각은 안이하다. 통진당 해산 사건에서 통진당 측 변호인단의 단장을 맡은 김선수 변호사는 지금 대법관 후보로 추천돼 있다. 그는 문재인 정권에서 대법관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후보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다. 김 재판관의 헌재소장 임명은 김 변호사의 대법관 임명으로 쉽게 이어질 수 있다. 김 재판관은 2012년 문 대통령이 속한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 전신) 추천 몫으로 헌법재판관이 됐다. 김 변호사는 2005년 문 대통령이 노무현 정부의 민정수석비서관이었을 당시 사법개혁비서관을 지냈다. 문 대통령은 “통진당 일부의 일탈이 통진당 해산 사유가 될 수 없다”며 이들과 동일한 논리를 펴왔다. 통진당 해산 결정의 정당성을 뒤집어야 자신의 면목이 서는 동질감이 형성돼 있다. 이런 동질감이 사법권력에 영향을 미치도록 내버려둬선 안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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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부탄식 행복지수

    1972년 당시 부탄 국왕 지그메 싱기에 왕추크는 “국민총행복(GNH)이 국민총생산(GNP)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현자 국왕의 말에 그 뒤 부탄의 국가 정책은 지속 가능한 개발, 문화의 보존과 진흥, 환경 보호, 좋은 통치 등 네 가지 기준에 초점을 맞췄다. 2008년 네 가지 분야에서 얼마나 진전이 있었는지 측정하기 위해 GNH 지수를 개발했다. 2015년 부탄 정부가 국민 7000여 명을 상대로 GNH 지수를 조사했을 때 91.2%가 행복하다고 답했다. 1인당 국민소득은 3000달러도 안 되고, 화장실도 없어 아무 데서나 변을 보는 나라지만 그렇게 행복할 수 있다니 부럽다. ▷매년 3월 20일은 유엔이 정한 ‘국제 행복의 날’이다. 유엔 산하기구인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가 올해 ‘국제 행복의 날’에 발표한 국가별 행복지수에서 한국은 56위를 차지했다. 헬조선까지는 아니더라도 행복한 나라는 아니다. 유엔행복지수 최상위권은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 핀란드 같은 북유럽 국가들이 차지하고 있다. 부탄은 97위다. 지난해 84위보다 13계단 떨어졌고 해마다 떨어지고 있다. ▷부탄의 GNH 지수에서는 심리적 행복감이 중요하다. 유엔행복지수도 경제력으로만 국가를 비교하는 데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개개인의 응답보다는 행복감을 측정할 수 있는 객관적 지표를 중시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여전히 행복의 토대다. 다만 이것으로는 모자라 복지 지원, 기대수명 같은 사회적 지표와 자유, 관용 같은 정치적 지표를 더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부탄을 참조한 한국식 행복지수 개발을 주문했다고 한다. 지난해 히말라야 트레킹에서 부탄을 방문해 감명을 받았던 모양이다. 인간은 가난해도, 독재 치하에서도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다. 행복이라는 게 말 그대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지 지표를 보고 ‘아! 내가 행복하구나’ 깨닫는 게 아니다. 대통령이 국민을 더 행복하게 느끼게 만들어 주겠다는 데 반대할 이유가 없다. 다만 북유럽 국가 같은 더 좋은 모델도 있는데 왜 하필 부탄식일까 하는 의문은 든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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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역대 처음 ‘임기초 개헌’ 공약 지키겠다는 文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이 어제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취임 후 처음으로 개헌을 언급했다. 그는 “5·18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아 개헌을 완료할 수 있도록 이 자리를 빌려서 국회의 협력과 국민 여러분의 동의를 정중히 요청드린다”고 말했다. 대선 후보 때인 지난달 12일 열린 국회 헌법개정특위에서 문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되면 곧바로 개헌 작업에 착수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국회에서 내년 초까지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내년 6월 지방선거에서 국민투표에 부치겠다는 일정도 밝혔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당시 여당 후보는 개헌을 공약으로 내걸고도 지키지 않았다. 문 대통령이 취임한 지 열흘도 안 돼 개헌을 언급한 것은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평가할 만하다. 앞서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은 임명된 직후 정우택 자유한국당 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를 예방한 자리에서 “1년 뒤 개헌을 염두에 두고 정부조직법 개편을 최소화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청와대가 개헌을 준비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다.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자도 16일 국회에서 당별로 이해관계가 달라 단일 개헌안이 나오기 쉽지 않다는 이유로 “현실적으로는 대통령이 안(案)을 내는 게 쉬울 것”이라고 말했다. 헌법이 정한 개헌 절차에는 두 가지 경로가 있다. 국회가 직접 발의해 국민투표로 가는 경로와 대통령이 발의해 국회를 거쳐 국민투표로 가는 경로다. 국회 주도의 개헌에 대해서는 기득권 집단화한 국회의원들에게만 개헌을 맡길 수 있느냐는 우려의 시각도 적지 않다. 어차피 국회를 통과해야 하는 만큼 대통령이 주도적으로 개헌안을 만드는 것이 효율적인 성과를 내는 길이 될 수 있다. 문 대통령의 개헌 공약에는 “새 헌법 전문에 부마항쟁과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촛불항쟁의 정신을 새겨야 한다”는 내용이 4년 중임제 개헌이나 기본권 강화보다 앞서 첫머리에 나온다. 현 헌법 전문에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돼 있다. 3·1운동은 국가의 건립 근거를, 4·19혁명은 민주국가에의 지향을 밝힌 것이다.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촛불항쟁은 모두 4·19 민주이념으로부터의 일탈에 대한 항거이므로 4·19 민주이념 속에 포함된다. 그것을 하나하나 거론해서 무엇을 넣고, 넣지 않는다는 것은 괜한 논란을 부를 수 있다. 대통령이 주도하는 개헌이더라도 국민 의사를 더 잘 반영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문 대통령 자신도 대선 후보 때 “국론이 모아지면 제가 공약한 개헌 내용을 고집하지 않고 국민의 의견을 따를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 탄핵을 거치면서 확인된 최소한의 개헌 국론은 대통령의 제왕화를 막을 분권과 협치의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어제 청와대 관계자가 “5·18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겠다는 공약은 개헌 논의와 별도 트랙”이라고 밝힌 것은 현실감이 있다. 헌법 전문에 담을 내용을 놓고 불필요한 논란을 자초해 또다시 개헌이 늦춰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 2017-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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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강남역 살인사건 1년

    어제는 23세 여성이 새벽 서울 강남역 인근 노래방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살해된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었다. 1년간 강남역 살인사건이 의미하는 바를 놓고 두 가지 규정이 대립했다. 한쪽은 ‘조현병(정신분열증) 환자의 묻지 마 범죄’라고 규정했고 다른 쪽은 ‘여성 혐오 범죄’라고 규정했다. 수사와 재판에서는 조현병 환자의 범죄로 결론이 났지만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여성 혐오 범죄로 보려는 시각도 강력히 존재했다. ▷여성 혐오 범죄라는 시각은 범인이 체포된 직후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한 데서 비롯됐다. 여성들은 “그곳에 ‘내’가 없었을 뿐, 여성이라면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는 공포 앞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강남역에 추모의 포스트잇을 붙였다. 여기까지는 자연스럽다. 그러나 곧 범인이 조현병 환자임이 밝혀졌음에도 여성 혐오 주장이 계속되고 1년이란 시간이 지나도록 수그러들지 않는 것은 예상 밖이다. ▷여성은 약자이고 약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논리에 반박을 삼가는 분위기가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의 원인이 무엇이든 여성 혐오에 대해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원인이 조현병일지라도 그 발현이 여성 혐오로 나타난 데는 사회에 잘못 구조화된 여성 인식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성 혐오를 고집하는 수준을 넘어서 조현병 환자의 범죄로 보는 시각을 반동(反動)시하며 수사와 재판 결과를 비판하는 전도(顚倒)도 벌어졌다. ▷길거리에 오가는 사람들 앞에서 ‘여성 혐오 반대’라는 피켓을 든다고 강남역 살인사건을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사회적 충격을 준 조현병 환자의 살인 사건이 최근 또 발생했다. 지난달 조현병에 걸린 17세 소녀가 별다른 이유 없이 8세 여아를 끔찍하게 죽였다. 조현병 환자 관리는 한편으로는 사회를 조현병 환자 범죄로부터 보호해야 하고 다른 한편 조현병 환자의 인권을 생각해야 하는 풀기 어려운 숙제다. 사회가 관심을 모아 대책을 세워도 부족할 판에 더는 초점을 흐리지 말자.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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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조국, 독선부터 버려야

    조국 씨는 교수보다는 민정수석이, 그보다는 차라리 정치인이 잘 어울릴 사람이다. 그는 1989년 옛 소련 법학자 파슈카니스를 다룬 서울대 석사학위 논문(국문)에서 김도균 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한 해 전 쓴 논문 속의 8개 문장을 연속해서 통째로 베꼈다. 내가 2013년 이 문제를 지적했을 때 그는 ‘쿨’하게 인정했다. ‘석사논문 정도야’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표절한 부분은 김 교수가 ‘사회주의 법 입문’이라는 제목의 독일어 원서를 번역한 것이다. 서울대 법학도서관에 소장된 같은 원서에는 조 수석이 논문을 쓰기 한 해 전 책을 빌린 기록이 남아 있다. 빌려놓고도 남의 번역을 갖다 쓴 것은 번역할 능력이 없었다는 뜻이다. 한 번 하고 마는 표절은 없다. 석사논문에서 표절한 사람은 대개 박사논문에도 표절한다. 그가 1997년 미국 일본 독일 영국의 ‘형사소송 증거배제 규칙’에 대해 쓴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로스쿨 박사논문(영문)에서 독일편을 주의 깊게 읽었다. 독일편은 논문 전체 266쪽 중 40쪽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미국 인디애나대 크레이그 브래들리 교수가 쓴 논문 ‘독일에서의 증거배제 규칙’이 네 군데나 출처 표시 없이 베껴져 있다. 이 부분은 모두 브래들리가 독일 연방헌법재판소 결정문을 번역한 것이다. 표절의 형태가 석사논문과 똑같다. 이번에는 통째로는 베끼지 않고 한두 단어씩을 바꿔 놓았다. 그는 이번에는 ‘쿨’하게 인정하지 않았다. 베낀 부분은 독일 헌재 사건의 사실관계를 요약한 것으로 지도교수가 각주를 달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달지 않았다고 내게 해명했다. 이런 해명이 학문공동체에서 통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해명은 논문 자체에서 반박되고 있다. 그는 독일어 번역과 상관없는 곳에서는 브래들리의 논문임을 밝히고 인용한다. 이 논문에는 표절 이상의 문제가 있다. 버클리대의 부실 심사다. 독일편에서 인용된 독일어 논문은 모두 12편이다. 논문을 인용하면 논문의 몇 쪽에서 인용하는지 밝혀줘야 하는데 12편 중 9편이 쪽수 표시 없이 통째로 인용돼 있다. 그는 영어 논문을 인용할 때는 몇 쪽에서 인용하는지 밝혀준다. 간혹 쪽수가 표시된 독일어 문헌을 찾아보면 관련 내용이 없는 것도 있다. 그가 독일어 문헌을 실제로는 읽지 않았다는 것, 정확히는 읽을 능력이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독일이나 일본의 대학에서라면 이런 논문이 심사를 통과하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미국 로스쿨이 미국에서 변호사나 교수를 하기 어려운 아시아계 학생에게 변호사시험 응시 자격이나 학위를 줄 때 세심한 심사를 하지 않는다는 말을 미국 교수에게 들은 적이 있다. 표절 의혹이 부실 심사와 깊이 연루된 이상 표절 조사는 버클리대에 맡겨둘 것이 아니라 서울대가 직접 할 성격의 것이었다. 그러나 서울대는 버클리대 박사과정 책임자인 존 유 교수가 보낸 ‘문제없다’는 메모랜덤을 토대로 표절 조사를 하지 않았다. 그 메모랜덤은 2013년 7월 버클리대에 접수된 다른 표절 신고에 대한 응답이다. 서울대는 그로부터 4개월 뒤 처음 제기된 독일편의 표절 의혹까지 함께 덮고 넘어갔다. 논문이 형편없어도 민정수석은 잘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석사논문에서 다룬 파슈카니스라는 법학자는 ‘마르크시즘의 나치 사상가’라고 할 만한 사람이다. 파슈카니스에게 법이란 공산당의 이념을 실천하는 도구다. 공산당은 역사에서 진리의 유일한 담지자이고, ‘법 앞의 평등’ 같은 원칙도 공산당의 이념을 펴는 데 방해가 된다면 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진리의 정치’라고 불리는 위험한 사상이 담겨 있다. 그는 파슈카니스를 비판하는 관점이라기보다 이해하려는 관점에서 접근했다. 그가 석사논문을 쓰던 해 출범한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에서의 활동이 어떤 동기에서 비롯됐는지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가 여전히 파슈카니스에 동조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그의 언행을 보면 여전히 ‘우리 편이 하는 것은 무조건 옳고, 다른 편이 하는 것은 무조건 틀리다’는 당파적 진리관이 엿보인다. 내가 잘못한 건 다 실수이고, 남이 최선을 다한 것도 적폐라고 여기면 그는 또다시 젊은 시절의 오류를 반복할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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