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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때로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부지불식간에 찾아온다.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저자(76)가 열네 살 때 한 소년이 그의 앞에서 벼락에 맞아 죽었다. 저자와 소년 사이의 거리는 불과 몇 발자국에 불과했다. 만약 벼락이 그를 비켜 가지 않았다면 그날이 저자 생의 마지막 날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연히 벼락을 피했고 삶은 계속됐다. 저자는 2017년 이 책을 출간하며 영국 가디언지와 나눈 인터뷰에서 “그날 이후 나는 항상 내게 일어난 일, 그 완전한 무작위성에 대해 괴로워했다. 그날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저자의 적지 않은 소설 가운데서도 분량이 가장 방대한 이 책은 삶의 무작위성 앞에서 저자가 오랜 시간 품어온 가정(假定)을 펼쳐 보인다. 만약 그해 여름 캠프에 가지 않았다면, 만약 그해 가을 삼촌이 도박에 전 재산을 걸지 않았다면, 만약 그날 그녀와 키스하지 않았다면…. 저자는 소설에서 자신과 같은 해(1947년)에 태어난 주인공 아치 퍼거슨을 4개의 평행우주 속에 그려냈다. 퍼거슨은 어찌할 수 없는 일들과 어찌할 수 있었던 일들을 거치며, 다른 존재로 4개의 다른 버전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그려 나간다. 소설은 퍼거슨의 유년기부터 20대까지를 연대기순으로 1∼7장으로 나누고 다시 퍼거슨이 같은 시기에 보낸 각기 다른 4가지 버전의 이야기를 각 장의 1∼4절로 나눠 펼친다. 이는 작은 선택의 차이와 삶의 우연이 겹겹이 쌓여 끝내 다른 존재로 갈라지게 되는 과정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일례로 유년 시절 ‘퍼거슨 3’의 이야기를 다룬 1장 3절의 첫 문장은 “그(퍼거슨)의 사촌 앤드루가 죽었다”로 시작한다. 이어지는 ‘퍼거슨 4’의 이야기 1장 4절은 그 나이대 퍼거슨의 가족이 더 큰 집으로 이사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 차이와 우연들이 퍼거슨 가족의 앞날을 송두리째 바꾸고, 그가 보게 될 책과 영화를 바꾸고, 그가 만날 인연을 바꾸고, 결국 그의 이야기를 바꾼다. 미국 현대사가 인물의 삶을 관통하며 예기치 못한 사건에 연루시킨다. 이토록 예측 불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삶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 저자도 같은 고민을 한 것 같다. 자신처럼 소설을 쓰는, 자신과 가장 닮은 ‘퍼거슨 4’를 통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오직 신만이 네가 바른 선택을 했는지 잘못된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있다는 뜻이야. 불행하게도 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절대 말해주지 않아. 신에게 편지를 쓸 수는 있지. 하지만 그건 아무 소용이 없잖아. 주소를 모르니까.” 아마도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선 어찌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며 웃어넘길 수밖에 없다는 뜻이 아닐까. 책을 읽다 보면 다른 세계 속 퍼거슨들의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뒤섞인다. 각각의 이야기는 별개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이야기 전체가 한 사람 앞에 놓였을지 모를 다른 삶의 갈래를 모두 펼쳐 보인 듯하다. ‘퍼거슨 4’의 말을 빌리자면 “현실은 일어날 수 있었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느낌”이다. 저자가 ‘선셋 파크’ 이후 10년 만에 낸 장편이다. 저자는 66세 때부터 3년간 쓴 이 소설을 펴내며 “이 책을 쓰기 위해 평생을 기다려온 것 같다”고 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원래 인간은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잘 잊어요. 그래서 사회가, 공동체가 응답하지 못하는 일이 너무나 많은데, 그렇다고 환멸을 느끼거나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고통은 본래 그런 면이 있으니까. 인연이 닿아 저에게도 고통의 이야기가 전해졌기에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차별과 고용불안 등 사회적 요인이 장애인, 비정규직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건강을 어떻게 해치는지 탐구해 온 김승섭 서울대 보건대학원 환경보건학과 교수(44)가 자신의 공부를 되돌아본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동아시아)를 22일 출간했다. 책은 그간 이어온 여러 매체와의 대담과 기고 등을 묶었다. 서울 관악구 서울대 연구실에서 이날 만난 김 교수는 “좋은 해답이라기보다 좋은 질문을 찾으려 애썼던 시간을 공유하고 싶었다”고 했다. 건강은 사회적이다. 휠체어를 타는 고혈압 장애인에게 이뇨제를 처방하면 외출을 더욱 꺼리게 된다. 거리의 장애인 화장실이 상당수 창고로 변해버린 탓이다. 장애인의 건강과 이동권은 직결돼 있다. 김 교수가 “어떤 고통은 치료가 아닌 응답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유다. 책 속 소제목처럼 ‘차별은 공기처럼 존재하고, 지워진 존재는 고통에 응답받지 못하는’ 한국 사회다.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보건학자의 길을 택한 김 교수는 그동안 해고 노동자와 그 가족, 동성애자와 양성애자, 소방공무원, ‘코로나19 취약계층’의 고통을 다뤄왔다. 그는 자신의 연구를 “비명과 신음소리를 사회적 언어로 해석하는 작업”, “인간의 고통을 사회적 맥락에서 바라보게 하는 일”이라고 했다. 연구는 ‘더 나은 질문’을 찾는 과정이었다. 트랜스젠더인 사람에게 “구직 과정에서 차별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라고 물어봤자 실태에 접근하긴 어려웠다. 성별을 표시해야 하는 서류 심사 자체가 장벽이어서 취업 자체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다른 질문지를 만들었다. “신분증이나 주민등록번호를 제시하는 상황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을까 봐 일상적 용무를 포기한 적 있습니까?” 그제야 혐오를 맞닥뜨릴까 두려워 ‘평범한’ 경험마저 포기하며 사는 이들의 목소리가 드러났다. 세월호 생존자와 가족, 천안함 생존자의 건강에 관한 논문을 쓰기도 했다. “정치 사회적 맥락이 너무 다른 별개의 사건이지만 모두 서해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와 동료를 잃은 것이지요. 거기에 집중했을 땐, 다르지 않았어요. 생존자의 트라우마를 다루는 한국 사회의 (부족한) 실력이 일관되게 드러난 일들이었습니다.” 2017년 ‘아픔이 길이 되려면’(동아시아) 이후 대중서 여섯 권을 펴낸 김 교수는 앞으로 10년간은 ‘차별과 건강’을 주제로 한 교과서를 쓸 계획이라고 했다. “우리의 경험, 우리의 데이터가 담긴 교과서가 필요해요. 제 모든 시간을 교과서 집필에 쓰려고요.” 인터뷰 말미에 그는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며 독자를 언급했다. “독자들이 저를 지켜주셨어요. 책을 많이 읽어주신 덕분에, 그를 통해 이웃들을 지켜낸 이야기도 많았어요. 그래서 더 노력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깊이 감사합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돈이 인간을 어떻게 구속하고 지배하는가. 이것이 인간의 실체를 밝히는 열쇠라고 생각했습니다. 끝없이 야기되는 비극적인 현실, 이것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제 평생에 걸쳐 생각했던 돈에 얽힌 인간의 본성과 욕구를 탐구하고자 했습니다.” 장편소설 ‘황금종이 1·2’(해냄)를 출간한 조정래 작가(80·사진)는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20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200자 원고지 약 1800장 분량의 이번 소설은 돈을 둘러싼 인간 군상의 비극을 그렸다. ‘천년의 질문’(2019년) 이후 4년 만에 낸 장편이다. 조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우리의 행복과 불행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어느 만큼이나 지니지 못하면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박탈해 버리는 것은 무엇일까”를 비롯한 13가지 물음으로 책을 연다. 그는 “돈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돈 앞에서 당신은 어떤 인간인지 독자에게 묻고자 했다”고 말했다. 소설은 돈 앞에 선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담아냈다. 평생 모은 돈이 담긴 통장을 이불 밑에 숨긴 채 죽어간 사람 등 열네 개의 이야기가 옴니버스 식으로 펼쳐진다. 소설은 다른 한 편으로 돈에 휘말린 삶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탐색한다. 조 작가는 “다음 책이 내 생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고 했다. “등단 60주년(2030년)에 인간 영혼의 근원을 탐구한 작품을 발표하고 은퇴하는 것이 작가로서 소망”이라는 것. 그는 “이번 작품을 끝내자마자 곧바로 새 작품 준비를 시작했다”고 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임유영 시인(37·사진)의 첫 시집 ‘오믈렛’(문학동네)이 출간 당일인 지난달 24일 중쇄를 찍었다. 온라인 예약 판매에 주문이 밀려들며 오프라인 서점에선 초쇄본을 구경하기가 어려웠다. 출판사도 “우리도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긴 어렵다”고 할 정도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임 시인은 2020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등단작부터 일부 심사위원들로부터 “이게 시야?”(문학평론가 박상수)라는 반응이 나오는 등 논쟁적인 작품으로 화제를 불러모았다. 당시 출품 시 9편 중 8편의 제목이 ‘아침’으로 같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어떤 시는 “모자 하나가 멀리 호수 위에 둥둥 떠 있는 걸 보았다”는 문장으로, 또 어떤 시는 “새 아이보리 비누를 뜯어 세수했다”는 문장으로 시작됐다. 매일 새로운 아침이 오고 매일 다른 일기를 쓰듯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침’이라는 제목의 시로 반복됐다. 그게 바로 일상이고, 그게 바로 시라는 듯이.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10일 만난 임 시인은 “매일 쓰는 일기와 시의 세계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는 걸 깨달으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는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의 진실을 적확하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술이론을 전공한 그는 2019년 한 문화원에서 처음 시작(詩作) 수업을 들었다. 그는 “그 전까진 매일 글을 끄적이면서도 시를 쓰고 싶다는 마음을 외면했다”고 했다. “시를 쓰는 자의식을 갖는다는 게 너무 비대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신인이지만 국립현대미술관과 경기도미술관에서 현대미술 작가 이안리와 ‘콜렉티브 안녕’이란 이름으로 시와 그림을 함께 제작하는 프로젝트를 선보인 이력도 있다. 임 시인의 작품 가운데는 타인의 입장이 되어 쓴 이야기가 적지 않다. 시 ‘만사형통’에선 누군가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베풀려 했던 ‘나’의 마음을 거절하는 ‘그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따뜻한 거 먹이고 싶다. 삼겹살에 묵은지 지글지글 구워서 쌈 싸주고 싶다. 그러나 두 사람은 외투에 냄새 배는 게 싫다며 사양하였고, 나는 마침내 거절을 쥐고 다른 잠 속으로 사라질 수 있었다.” 임 시인은 “‘그들’이 수혜자로만 그려지는 게 아니라 자기 목소리를 내는 존재이길 바랐다”고 했다. 시 ‘꿈 이야기’에선 4월의 어느 날 사고로 죽은 소녀의 이야기가 꿈과 현실을 오가며 펼쳐진다. 그는 “시에 현실과 환상, 삶과 죽음을 뒤섞는 까닭은 그것이 저에게 일말의 진실이기 때문”이라며 “삶 가운데 죽음이 있고, 꿈은 현실을 반영한다”고 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여섯 살짜리 아들에게 지금 전쟁이 벌어지는 거라고 얘기했다. 아들은 울음을 터뜨렸다.”(우크라이나 키이우에 사는 기자 K) “여기서는 자유롭게 숨을 쉴 수가 없다. 사람들이 들이닥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고 살아간다.”(러시아 예술가 D) 지난해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날, 독일의 작가이자 삽화가인 저자는 두 나라에 사는 두 친구가 떠올랐다. 우크라이나 키이우에 사는 러시아 출신 기자 K가 안전하게 살아 있는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사는 예술가 D가 ‘푸틴의 러시아’에서 제 목소리를 내고 있는지…. 얼굴 한번 본 적 없이 온라인으로 딱 한 번 접촉했던 이들이 무탈하길 바라는 마음에 보낸 안부 문자 한 통으로 이 책은 시작됐다. 돌아온 답장 속엔 전쟁이 뒤바꿔버린 두 가족의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전쟁의 한복판에 놓인 K는 폭격에서 살아남은 이들을 취재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동료들이 살해당했고, 기차역과 거리엔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이 정처 없이 떠돌았다. 이 전쟁을 반대하는 D는 푸틴 정부가 자신과 가족을 감시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 숨죽이며 살아갔다. 혹시라도 가장 가까운 친구가 D의 생각을 경찰에 알릴까,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터놓을 수 없는 불신의 나날이 이어졌다. 가장 사적인 문자메시지에 전쟁이 불러온 여파가 생생히 전해진 것이다. 그날 이후 저자는 1년간 두 친구와 주고받은 문자메시지를 엮어 그림책을 펴냈다. 두 사람이 보내온 문자와 함께 자신의 그림을 담았다. 책을 펼치면 왼쪽엔 K의 나날이, 오른쪽엔 D의 나날이 동시에 펼쳐진다. 저자는 이 책을 펴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개인들의 사적인 발화가, 이 전쟁에 직접 영향을 받지 않는 우리 같은 사람들도 이 전쟁이 일상에 끼치는 끔찍한 여파를 이해하게 해주는 정서적 시작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왼쪽 페이지엔 K가 사는 집 창문 너머 치솟는 불길이, 오른쪽 페이지엔 D가 사는 러시아 곳곳에 나붙은 전쟁 지지 포스터가 그려져 있다. 이 간극은 이들의 몸과 마음에도 영향을 미쳤다. 종군 기자로 우크라이나 현장을 취재하는 K는 온몸으로 전쟁을 겪어야 했다. 새벽엔 경보 소리에 잠에서 깼고, 거센 포격 소리 속에서 쪽잠을 자는 나날이 이어졌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복통을 느꼈다. “분노와 증오가 뒤섞인 고통이었다”고 K는 말한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멀리 떨어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무는 D에게 전쟁은 무기력감으로 다가왔다. 전쟁에 반대 목소리를 낸 D 주변 예술가들이 해고됐다. 전쟁 반대 시위에 나가 목소리를 내고 싶었지만, 정부의 감시 대상이 될까 두려웠다. 혼자서라도 러시아를 떠나고 싶지만, 가족들이 머무는 고향을 떠날 수 없음을 깨닫고 만다. 직업도, 사는 지역도, 처한 상황도 모두 다르지만 이들은 전쟁 이후 미래를 빼앗겼다는 공통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전쟁이 벌어진 지 35주가 흘렀을 때 K는 “요즘 누군가 미래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면 ‘만약 우리가 살아남는다면’이란 표현을 사용한다”는 문자를 보냈다. D는 52주가 지났을 때 “이 전쟁 때문에 미래를 떠올린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를 잊고 말았다”고 했다. 저자는 “서로 다른 점은 있으나 D와 K 모두가 전쟁의 목격자”라며 “이 전쟁에서 인간이 치르고 있는 희생을 이해하려면 바로 이런 개인적인 목소리를 기록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썼다. 원제는 ‘Diaries of War’.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의 예장(禮葬·국가에서 예를 갖춘 장사) 행렬을 409년 만에 재현하는 ‘이순신 순국제전’이 17∼19일 충남 아산시 현충사 일대에서 열린다. 온양온천역∼현충사 4.4km 구간에서 19일 펼쳐지는 충무공 예장 행렬은 17세기 예법에 따라 진행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충무공의 예장은 충무공이 노량해전에서 순국하고 16년이 지난 1614년 산소를 이장하며 치러졌다. 당시 광해군이 “(충무공의) 예장을 치르고 묘소의 석물을 모두 갖춰 주라”고 명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번 재현 행사는 1627년 인조의 아버지 원종의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진행된 예장 절차를 상세히 기록한 ‘원종예장도감의궤’ 등을 참고했다. 김시덕 을지대 장례지도학과 교수는 “충무공은 임진왜란 일등공신으로 덕풍부원군에 추봉됐고 영의정으로도 추증됐다”며 “국가의 예우를 다해 장례를 치를 자격이 있다고 조선 왕실이 인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예장 행렬엔 제관 복장을 갖춘 시민 700여 명이 참여한다. 제관 복장은 조선 왕실 복식사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의 고증을 거쳐 17세기 양식으로 복원했다. 상여는 온양민속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32인 상여’를 사용한다. 상여꾼 32명이 드는 규모로 현존 민속 상여 중 최대 규모다. 1930년대 제작됐다. 온양민속박물관은 17일 이 상여를 선보이는 전시를 연다. 이날 오후 2시 반 박물관에선 ‘이별이 아닌 만남, 죽음’이라는 주제로 인문학 콘서트를 열고 충무공의 죽음이 지닌 의미를 살펴본다. 온양온천역에선 18일 오후 2∼5시 이봉근 명창의 ‘성웅 충무공 이순신가’와 국가무형문화재 종묘제례악보존회의 ‘충무공 현충제례악’ 공연이 펼쳐진다. 이번 제전은 아산시가 주최하고 아산문화재단과 을지대가 공동 주관한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경기 양주시 대모산성(사적)에서 궁예(869∼918)가 세운 나라 태봉(泰封)의 연호 정개(政開)가 적힌 목간 1점이 출토됐다고 양주시와 기호문화재연구원이 15일 밝혔다. 태봉과 관련된 목간 유물이 나온 건 처음이다. 목간은 30cm 길이에 팔각 모양으로, 한 면에 ‘政開三年丙子四月九日(정개 3년 병자 4월 9일)’이라고 쓰여 있다. 정개는 태봉에서 914년부터 사용했던 연호로 정개 3년은 916년을 뜻한다. 이와 함께 ‘大井(대정)’, ‘大龍(대룡)’이 쓰여 있어 제의(祭儀) 등에 쓰였던 유물로 추정된다. 팔각 면에 총 120자가 쓰여 있고, 한 개 면엔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한국목간학회는 20일부터 이틀간 이 목간의 문자를 판독하는 회의를 연다. 궁예는 901년 고구려를 계승하는 후고구려를 세웠고, 911년 나라 이름을 태봉으로 고쳤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1. 올해 9월 1일 인천국제공항 내 문화재감정관실. 학고재 갤러리가 올 10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아트페어 프리즈 런던에 출품해 판매하려던 작품 1점에 대해 ‘반출 불가’ 결정이 내려졌다. 작품은 ‘물성 탐구의 선구자’로 불리는 곽인식(1919∼1988)이 1962년 유리로 만든 작품 ‘62―602’였다. 문화재청은 이 작품이 “1960년대 곽 작가의 초기작 중에서도 대표성을 띤다”며 “예술적·학술적 가치는 물론 희귀성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으로 국내에서 지켜야 하는 문화유산이라는 것이다.#2. 2020년에는 근대 한국미술의 거장 이중섭(1916∼1956)의 1950년대 초 회화 ‘꽃나무 가지에 앉은 새’의 홍콩 반출이 불허됐다. 당시 문화재청 문화재감정관실은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매우 큰 근대기 회화작품”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2019년엔 이인성(1912∼1950)의 1939년 작품 ‘Peach’가 미국으로 출품되려다가 문화재청으로부터 반출 불가를 통보받았다. “근대 한국 회화사에서도 기준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라는 이유였다.》문화재청이 국외 반출 불가를 결정한 이 작품들엔 공통점이 있다. 첫째, 제작된 지 50년이 지났다. 둘째, 작품의 예술적·학술적·역사적 가치가 인정된다. 셋째, 희소성 시대성 특이성 등이 있다고 판단된다. 우리 문화재보호법(제60조)은 이 조건들을 충족하는 예술작품을 ‘일반동산문화재’로 규정하고, 국외로의 영구적 반출을 원칙적으로 금지한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은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며 우리 문화재를 약탈당한 역사적 맥락을 담아 제정됐다. 문화재를 지키지 못했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비(非)지정 문화재에도 엄격한 규제 원칙을 적용한 것이다. 하지만 최근 세계 미술 시장이 K미술에 주목하면서 변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미술계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해외 갤러리 등의 한국 근대 미술품 구입을 문화재보호법이 가로막는 탓에 K미술의 세계화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문화재보호법, K미술 세계화 걸림돌 돼” 특히 미술계에선 현행법이 생존 작가의 작품까지도 국외 반출을 금지한 점에 대한 반발이 거세다. 생존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팔려 해도 50년이 넘은 것은 일단 규제 대상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최근 문화재청은 생존 작가의 작품은 일반동산문화재에서 제외하도록 문화재보호법 시행령을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미술계에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작고한 작가의 경우 시행령이 개정돼도 여전히 규제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지난달 14일 세상을 떠난 한국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의 작품 중 1973년 이전에 만들어진 작품들은 원칙적으로 국외로 나갈 수 없다. 시간이 흐르면 반출될 수 없는 작품은 점점 늘어난다. 외국 정부가 인증한 미술관과 박물관이 ‘전시’ 목적으로 구입할 경우엔 예외적으로 문화재청 허가를 받아 반출될 수 있지만, 민간 갤러리나 개인 소장자에겐 판매될 수 없다. 김인혜 전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은 “세계 미술시장이 이제 막 한국의 단색화를 주목하기 시작했는데, 문화재보호법으로 인해 한국 미술의 확장이 가로막히고 있다”고 했다. 한 국내 옥션 관계자는 “K팝, K무비, K문학이 세계의 주목을 받는 데 비해 K미술의 조명이 더딘 이유”라고 했다.●“경매 출품 위한 반출도 어려워”현행법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 곳 중 하나가 해외 박물관, 미술관의 한국실이다. 미술품을 쉽게 구매할 수 있는 국외 경매에는 한국에 있는 일반동산문화재 출품이 안 되는 탓이다. 경매 출품을 위한 반출은 ‘전시’라는 목적이 확정되지 않은 데다 소장처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해외 박물관 등은 국내 옥션이나 개인 소장자와 따로 접촉해 구매해야 전시 목적으로 미술품을 반출해갈 수 있다. 2018년 이후 올해 8월까지 일반동산문화재의 국외 수출이 허가된 것은 5점이 전부다. 반출 불가 결정이 난 것은 196건이다. 이에 따라 해외 미술관의 한국실은 작품 확보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이 소장한 한국 컬렉션 수는 약 400점. 화려한 금동불상부터 불화, 청자를 비롯한 최고급 컬렉션을 3000점 넘게 소장하고 있는 일본 유물 컬렉션과는 규모와 예술성 면에서 차이가 크다. 임수아 클리블랜드미술관 큐레이터는 “한국 기관이 소장한 국보나 보물을 임시로 빌리는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격차”라며 “개인 소장자나 옥션과 개별적으로 연락해 구매하는 방식으로는 작품 확보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미술계 일각에선 문화재보호법을 일본 수준으로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일본 문화청은 비지정문화재의 경우 국외 반출과 국외 거래를 자유롭게 허용한다. 국내외 예술법을 조망한 전문서 ‘예술법’(학고재)을 펴낸 캐슬린 김 미국 뉴욕주 변호사는 “일본처럼 비지정문화재에 대한 규제가 없어야 외국 시장에서 한국의 예술작품의 가치를 인정받고, 한국 미술의 세계화가 이뤄질 수 있다”고 했다.●“비지정문화재 전체 규제 철폐는 시기상조”반면 문화재청은 일본처럼 비지정문화재 전체를 자유롭게 국외에서 반출·거래되도록 법을 바꾸는 건 시기상조라고 보고 있다. 고미술 시장에선 여전히 도굴되거나 도난된 문화재가 암암리에 거래되고 있다는 게 중론이다. 굴곡진 역사를 거치면서 이미 해외로 밀반출된 문화재도 적지 않다. 비지정문화재 전체에 대해 ‘국외 반출 금지’ 규제를 없앨 경우 도난된 중요 문화재가 해외로 반출되는 걸 막을 방법이 없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김은영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학예연구관은 “문화재를 약탈당한 역사가 깊은 우리는 일본처럼 규제를 풀 수 없다”고 강조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문화재 약탈의 역사를 겪은 이탈리아의 경우는 규제 폐지 대신 완화를 택했다.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 중 다량의 문화재를 약탈당한 이탈리아는 원래 한국처럼 만들어진 지 50년이 넘은 유고 작가의 예술작품을 문화재로 보고 정부로부터 수출 허가를 받은 작품만 반출을 허용하는 ‘문화유산법’을 뒀다. 하지만 미술계에서 이 법이 갤러리와 소장자의 매매 권리를 지나치게 침해한다는 비판이 나오자 2017년 법을 손봤다. 수출 허가를 받아야 하는 문화재의 범위를 만들어진 지 70년이 넘은 것으로 좁혔다. 또 금전적 가치가 1만3500유로(약 1915만 원) 이하이면 제작 시기에 무관하게 허가를 받지 않고 수출할 수 있도록 했다. 김 변호사는 “한국 법도 현행 50년 기준을 100년 정도로 완화한다면 한국의 근대 미술품이 자유롭게 세계 시장으로 나아가 주목받을 기회를 얻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렇게 될 경우 박서보(1931∼2023), 유영국(1916∼2002), 김환기(1913∼1974) 등 한국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규제 없이 국경을 넘을 수 있게 된다.●“문화재보호법령 개정 방향성 논의”문화재청은 근현대 미술이 수출되는 길을 넓히기 위한 추가 법 개정을 검토하고 있다. 올해 초엔 고려대 세종캠퍼스 산학협력단에 관련 연구 용역을 맡긴 상태다. 다만 민간 문화재 감정기관의 신뢰도가 높지 않은 한국 현실상 일정 시가 이하 문화재의 반출을 조건 없이 허용하는 방안은 도입되기 어렵다는 전망이 나온다. 문화재위원인 박은순 덕성여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개인 간 해외 거래를 허가하는 건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면서도 “문화재보호법에서 일반동산문화재로 보는 기간의 범위를 좁히거나, 일반동산문화재로 분류되는 조건 규정을 구체화하는 등 여러 방법을 열어두고 전문가들과 문화재보호법 개정 방향성을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소연 문화부 기자 always99@donga.com}
단위면적당 제철로 유구가 가장 많은 충북 충주 칠금동 유적에서 백제 제철로의 토목공학 기술을 엿볼 수 있는 지하 목조 구조물이 다수 나왔다. 문화재청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가 2016년부터 이달 초까지 백제의 철 생산지였던 칠금동 유적을 발굴 조사한 결과, 전체 제련로(製鍊爐·철광석에서 철과 불순물을 분리하는 공정이 이뤄지는 제철로) 34기 가운데 85%(29기)의 하부에서 지하 목조 구조물이 나왔다. 이는 현재까지 백제의 제철로에서만 확인된 독특한 구조로, “노체(爐體)의 하중을 견디기 위한 지반 강화 시설”이라는 분석이다. 정락현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연구원은 10일 서울 송파구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열린 학술대회 ‘강철 백제, 철 생산의 중심지 충주’에서 이 내용을 발표했다. 제련로 하부에서 확인된 ‘이중 구조’는 제련로 하부를 만들 때 땅을 한 번만 판 것이 아니라 파낸 바닥에 목조시설로 바닥을 다지고 그 위에 점토를 채운 뒤 점토 가장자리에 말뚝을 박았다. 칠금동 유적은 전체 2200㎡ 면적에서 제련로 34기와 제철 생산 부속시설 등이 확인돼 단위면적당 유구 밀집도가 가장 높은 백제의 철 생산 중심지로 꼽힌다. 어창선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은 “백제인들이 고도화된 토목공학기술과 제철기술을 바탕으로 제철로를 건설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2015년, 30세 때 아이를 낳은 저자에게 맘카페는 별세계였다. “아이 이마에 피가 나는데 어느 병원으로 가야 할까요?” 질문을 던지면 1분 안에 동네 병원 목록이 주르륵 댓글로 달렸다. 어린이집, 유치원, 보습학원 . 매 순간 선택의 연속인 초보 엄마에게 맘카페는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가 말해주지 않는 정보를 속속들이 알려줬다. 출산 후 전업주부가 된 저자는 하루 3번 맘카페를 찾는 충성 회원이었다가 5년 전부터 카페 운영자로 활동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 책은 내부자의 시선으로 분석한 맘카페 보고서다. 저자의 경험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요즘 엄마들’의 현실을 비춘다. 저자가 처음 맘카페를 찾은 이유는 “정보에서 도태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대가족이 한집에 살며 아이를 함께 기르던 과거와 달리 핵가족 시대엔 부모가 오롯이 양육을 책임진다. 육아를 엄마의 몫으로 여기는 한국 사회에선 보통 이 책임을 엄마가 짊어진다. ‘파파카페’는 없고 맘카페만 존재하는 현실은 자녀 양육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고정된 성 역할을 뚜렷이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책의 미덕은 저자가 내부자로서 맘카페를 마냥 변호하기보다 내부의 폭력성을 있는 그대로 성찰했다는 점이다. 욕설이 난무하는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와 달리 맘카페 회원들은 둥글둥글한 말투를 지향한다. 존대가 원칙이다. 저자는 겉보기에 선해 보이는 맘카페의 언어는 이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엄마다움’의 반영이며, 맘카페는 근본적으로 선하기만 한 곳이 아니라고 분석한다. 저자는 언어의 이면(裏面)에 숨겨진 집단린치를 들여다본다. 맘카페의 조직력을 활용해 동네 상권에 ‘별점 테러’를 하는 행위가 그중 하나다. 맘카페를 “힘 있는 공간”이라고 규정한 저자는 맘카페 회원들에게 보다 주체적인 인식을 요구한다. “‘약자는 선량하다’는 함정이 나의 이기심을 강화하고 집단의 힘을 좇는 일로 이어졌던 건 아닌지 냉정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 이 같은 자성과 함께 “파파카페도 생겨났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담았다. 아이 문제를 놓고 같이 머리를 맞댈 동반자가 있다면, 엄마 홀로 맘카페에서 전전긍긍할 일은 줄어들 것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국보인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과 보물인 조선 왕실 의궤(儀軌·왕실이나 국가 중요 행사 내용을 정리한 기록)가 100여 년 만에 원래 자리인 오대산으로 돌아왔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반출된 이후 실록은 110년 만이고, 의궤는 101년 만이다. 문화재청은 9일 강원 평창군 오대산에 새로 마련된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이관된 실록과 의궤를 공개했다.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실록이 전주 사고본만 남고 모두 소실되자 4부를 재간행해 오대산 등 4곳의 사고(史庫)에 나눠 보관했다. 오대산 사고본은 1913년 도쿄제국대로 반출됐다가 1923년 간토대지진으로 일부 소실됐고, 남은 27책이 다시 경성제국대(현 서울대)로 옮겨졌다. 뒤늦게 일본 도쿄대가 ‘성종실록’ 9책, ‘중종실록’ 30책, ‘선조실록’ 8책 등 47책을 더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2006년 3월 오대산 월정사 등은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를 꾸려 환수 운동을 시작했고, 도쿄대는 석 달 만에 전부를 국내에 기증했다. 2017년 ‘효종실록’ 1책까지 돌아와 모두 75책이 돌아왔다. 의궤는 일제가 1922년 반출한 것으로 82책이 일본 왕실도서관에 있다는 것이 파악되자 2006년 환수위원회가 꾸려져 반환 운동을 펼쳤다. 그 결과 2011년 돌려받았다. 돌려받은 실록과 의궤는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서울 종로구)에 보관돼 왔다. 박물관은 1606년 오대산에 사고를 지어 전쟁이나 화마로부터 실록과 의궤를 지켜왔던 조선 왕실의 뜻을 이어받아 마련됐다. 오대산 사고를 수호하던 월정사가 2017년 건립해 ‘왕조·실록의궤박물관’으로 운영하던 건물을 문화재청에 기부 채납했다. 박물관엔 일단 실록 9책과 의궤 26책 등 35책이 먼저 이관됐고, 수장고 내부 공사가 마무리되는 내년까지 나머지를 옮길 계획이다. 박물관은 상설전시를 통해 실록과 의궤를 선보인다. 전시에선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만든 국새(보물) 등 관련 유물 50여 점도 만나볼 수 있다. 전시장 초입엔 실록과 의궤가 박물관으로 돌아오는 여정이 디지털 실감 영상으로 펼쳐진다. 박물관은 12일 개관한다.평창=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기후 환경이 우리 역사에 미친 영향을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열린다. 한국생태환경사학회와 한국생태환경사연구소는 11일 서울 중구 동국대에서 ‘13세기 동아시아 기후변동과 자연재해’를 주제로 추계학술대회를 연다. 김문기 부경대 사학과 교수는 학술대회에서 ‘온난기의 발견: 13세기 동아시아의 기후변동’을 발표하고 동아시아가 13세기 무렵이 온난기였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유럽 학계는 10∼13세기를 ‘중세 온난기’로 규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지만 동아시아에 대해서는 관련 연구가 비교적 적다. 김 교수에 따르면 원나라 농업기술서적 ‘농상집요(農桑輯要)’엔 13세기 초 감귤이 현재의 북방한계(난징 지역)보다 북쪽인 허난(河南)성 탕허(唐河)현과 친양(沁陽)현 등지에서도 재배됐다고 기록됐다. 김 교수는 “최근 중국 학계에선 13세기를 확연한 ‘온난기’로 규정하고 있다”며 “고려시대 건축물이나 유적 등의 수목에서 기후변화 정보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중세 동아시아 기후변화사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김대기 강원대 교수는 ‘13세기 중국의 이상 기후와 재해’를 발표할 예정이다. 이 밖에도 이현숙 연세대 의학사연구소 교수는 ‘신보살경(新菩薩經)과 권선경(勸善經)으로 본 당 고종대 질병과 인구’를 발표한다. 당대 경전을 통해 7세기 무렵 동아시아에 퍼졌던 질병을 분석하는 한편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한 나당연합군을 통해 이 같은 질병이 한반도로 유입됐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端硯竹爐詩屋(단연죽로시옥)” 제주 유배 생활을 마친 만년의 추사 김정희(1786∼1856)가 한강 노량진이 보이는 용산 강마을에 머물던 시절 현판에 새기기 위해 쓴 글씨다. ‘중국 단계(端溪) 지역에서 만들어진 최고급 벼루와 차를 끓이는 대나무 화로, 시를 지을 수 있는 작은 집’이라는 뜻으로, 이 세 가지만 있으면 여생을 즐기는 데 부족함이 없다는 의미다. 주어진 상황에 자족하며 살아가는 노선비의 마음이 전해진다. 국립대구박물관은 궁중과 민간 현판을 아울러 조선의 현판 114점을 선보이는 특별전 ‘나무에 새긴 마음, 조선 현판’을 7일 개막한다. 전시에 나오는 궁중 현판엔 백성을 향한 군주의 마음이 담겼다. 영조(1694∼1776)는 국가 재정을 관리하는 관청인 호조에 내린 현판에 ‘均貢愛民 節用畜力(균공애민 절용축력)’이라고 썼다. ‘조세를 고르게 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씀씀이를 절약해 힘을 축적하라’는 뜻이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힘 있는 나라로 나아가려는 군주의 결단을 표현했다. 정조(1752∼1800)는 ‘萬川明月主人翁(만천명월주인옹, ‘온 시냇물에 비친 밝은 달의 주인’이란 뜻)’이라는 호를 정하게 된 이유를 현판에 적어 창덕궁 존덕정에 내걸었다. 강한 왕권을 바탕으로 이상적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정조의 뜻이 담겼다. 고종(1852∼1919)은 자신이 머물던 경운궁(현재의 덕수궁) 즉조당에 1905년 ‘慶運宮(경운궁)’이라고 쓴 현판을 내걸었다. ‘경사스러운 운수가 가득한 궁’이라는 뜻으로, 국운이 위태롭던 때 나라의 안녕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민간의 현판에선 스승과 제자, 부모와 자식 등의 인연을 엿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서예가 이광사(1705∼1777)가 아들 이긍익(1736∼1806)의 서실(書室)에 걸기 위해 손수 쓴 현판 ‘燃藜室(연려실)’이 대표적이다. ‘명아주를 태우는 방’이라는 뜻으로 중국의 역사가 유향이 밤늦도록 나무를 태워 가며 역사 연구를 한 끝에 대가가 됐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됐다. 아들이 훌륭한 역사가가 되길 바라는 아버지의 바람을 새긴 것. 이긍익은 훗날 조선의 역사를 42책에 걸쳐 기록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을 펴냈다. 자연 풍경과 어우러진 정자의 현판도 볼 수 있다. 경북 안동 풍천면에 있는 ‘翠潭亭(취담정)’ 현판은 잔잔한 연못 풍경을 형상화한 미디어아트와 어우러져 관람객을 맞는다. 취담정은 ‘맑고 푸른 연못’이란 뜻이다. 현판 아래에 한자의 뜻과 그 유래를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 풀어 해설했다. 내년 2월 12일까지. 무료.대구=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우리가 만든 걸 좀 보시겠습니까?” 2004년 1월, 북한 영변의 방사화학실험실 안. 리홍섭 북한핵과학연구소장이 당시 미국 에너지부 소속 국립 연구기관인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의 선임연구원 자격으로 방북한 저자에게 이렇게 물으며 구두 상자만 한 적갈색 금속상자를 꺼내 보였다. 상자 속 또 다른 상자를 열자 투명 테이프로 뚜껑을 밀봉한 유리병 두 개가 보였다. 리 소장은 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병에 우리의 생성물, 플루토늄 금속 200g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북한이 핵무기 제조를 시도하고 있다는 암시였다. 재처리된 플루토늄은 원래 액체 상태다. 이를 핵무기 제조에 쓸 때 플루토늄을 합금해 금속화하는 과정을 거친다. 2002년 10월, 북한이 미국과 체결했던 ‘북-미 제네바 합의’(1994년)를 파기한 지 1년여 만에 가동이 중단됐던 영변의 원자로를 재가동해 이 같은 결과물을 만들어냈음을 과시한 것이었다. 2004∼2010년 북한의 핵시설을 둘러본 미국의 핵물리학자가 펴낸 이 책은 변변한 패 하나 없던 나라 북한이 미국 본토를 겨냥할 핵무기 보유국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한다. 책 제목이 보여주듯 저자는 미 정부엔 “관리 가능한 정도의 위험만 감수하면 평양이 핵무기 폐기로 가는 외교의 길을 나서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는 순간들”이 있었다고 본다. 이는 북핵 문제를 둘러싼 외교 실패의 책임을 북한 탓으로 여겼던 미국 측 전문가들의 일반적 견해와는 다른 입장이다. 한마디로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사전에 막지 못한 미국의 결정적 실수들을 분석한 책이다.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장과 스탠퍼드대 국제안보협력센터(CISAC) 센터장을 지낸 저자가 꼽은 가장 치명적인 변곡점은 조지 W 부시 정부가 ‘북-미 제네바 합의’를 파기한 2002년이다. 1994년 미국과 북한이 체결한 이 합의는 ‘북한의 핵 개발 동결’을 골자로 한다. 북한이 핵무기 개발 활동을 즉각 중지하고 관련 시설을 해체하는 대가로 미국이 북한에 에너지를 원조해주는 외교적 거래였다. 무엇보다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 동결 감시 활동에 협력해야 한다는 조항도 이 합의에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이 합의는 2001년 9·11테러가 벌어진 뒤 삐걱댄다. 부시 정부가 “국제적인 테러 세력의 후원자”라며 북한을 이라크, 이란과 함께 3대 ‘악의 축’으로 규정한 것. 미 정보당국이 입수한 첩보는 합의 파기에 결정타를 날렸다. 북한이 우라늄 농축용 원심분리기 프로그램을 위한 고강도 알루미늄관을 입수하려 했다는 내용이었다. 북한의 기만행위가 전제했지만, 그럼에도 저자는 이 합의를 파기한 미국의 선택은 근시안적이었다고 비판했다. 이듬해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고 IAEA 검증단을 북한에서 쫓아냈다. 이전까진 북-미 제네바 합의를 통해 북한의 핵 개발을 ‘관리’할 수 있었지만, 합의 파기 후 “(미국은) 북한이 훤히 보이게 폭탄을 제조하는 동안 팔짱을 끼고 서 있기만 했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2001년 이후 역대 미국 정부의 대북 정책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저자는 이러한 시도를 한 이유에 대해 “미래에 미국이 더 나은 정책을 펼칠 수 있도록 워싱턴을 비판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근본적으로 저자는 북한이 경제 개선을 위해 전략적으로라도 미국과 관계 개선에 나설 거라고 보는 입장이다. 책엔 북한의 핵시설을 두 눈으로 직접 본 목격자의 묘사가 생생하게 펼쳐져 있다. 원제는 ‘Hinge Points: An Inside Look at North Korea’s Nuclear Program’.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6·25전쟁을 알고만 있던 제가 박경리의 소설 ‘토지’를 읽고 전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처럼, 문학은 타인의 삶을 상상할 수 있게 합니다.” ‘제12회 박경리문학상’을 수상한 오스트리아 작가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69)가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1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말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나치에 의해 파괴된 마을 인근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전쟁은 지나갔지만 일상 곳곳에서 과거가 아닌 현실로 남아 있었다”고 했다. 그는 “희망은 미래를, 기억은 과거를 향해 있다”며 “시간은 단절돼 있지 않고 연결돼 있다”고 했다. 그의 작품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공간이 뒤섞인 것이 특징이다. 국내에도 출간된 ‘최후의 세계’(1988년)가 대표적이다. 로마제국에서 유배당한 작가 오비디우스가 20세기 유럽에서 사라진 자신의 책 ‘변신’을 찾는 여정을 통해 제국주의와 문명, 인간의 탐욕을 탐구했다. 박경리문학상 심사위원단은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 “시간의 부침에 저항하는 문학의 가치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평했다. 박경리 선생(1926∼2008)을 기리기 위해 2011년 제정된 박경리문학상은 토지문화재단과 강원 원주시가 공동주최한다. 상금은 1억 원.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엄마는 딸만 낳은 죄로 해산하고 닷새 뒤부터 밭일을 나가셨다. … 우리 자매들은 번갈아 가면서 아기를 돌봤고, 아기는 방긋방긋 잘 웃어 우리 모두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지난달 17일 경기 여주시에 있는 토닥토닥그림책도서관. 김동헌 관장(57)이 여주시 금사면에 사는 홍모 할머니(83)에게 전화로 ‘새벽별은 베롱베롱’(책여우)의 한 구절을 들려주던 때였다. 제주도에 사는 또래 할머니 8명이 지은 책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홍 할머니가 전화 너머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도 동생들 돌보느라 밖에 나가서 놀지도 못했는데…. 학교 다니는 친구들 앞에 동생 업은 모습을 보이기 부끄러워 늘 동구 밖 비탈로 다녔어. 글 배워 책 읽는 것이 그렇게 부러웠어.” 정식 교육을 받은 적 없어 글을 읽지 못하는 홍 할머니는 이날 책의 청자(聽者)로 생의 첫 번째 책을 만났다. 어린 시절 꿈꿨던 독서의 꿈을 여든 넘어 이룬 것이다. 2016년 문을 연 이 도서관은 2019년부터 마을 어르신에게 전화로 책을 읽어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김 관장은 “글을 배우지 못해 책을 읽을 수 없거나 거동이 불편해 도서관이나 서점에 갈 수 없는 어르신들이 책과 만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도입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이달부터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전화로 찾아가는 책 친구’ 프로그램으로 태어났다. 지원 대상도 어르신뿐 아니라 장애인으로 확대됐다. 한 달여 동안 전국 5곳(경기 부천·여주, 세종, 광주, 경북 칠곡)의 어르신과 장애인 37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다. 낭독활동가는 지역당 15명씩 총 75명이며 지원 예산은 1억 원이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은 “독서 사각지대에 놓인 고령자와 장애인이 책을 즐길 수 있도록 장기적으로 지원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단절됐던 책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싶은 이들에게 희소식이다. 김 관장은 2021년에 만난 이대식 할머니와의 일화를 전했다. 그는 “당시 할머니가 박경리의 ‘토지’를 읽어 달라며 전화를 걸어왔다”고 했다. 독서를 좋아했던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해진 뒤로 한동안 책과 연을 끊고 살았다. 전화로 책을 읽어준다는 소식에 신청한 것. 할머니는 “‘토지’는 굉장히 긴데, 괜찮겠냐”고 묻는 김 관장에게 “갈 수 있는 데까지 가 보자”고 답했다고 한다. 매주 하루씩 15분간 1년 동안 이어진 책 읽기 끝에 ‘토지’ 1권 마지막 장에 다다랐을 무렵 할머니는 “다음 주에 또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연락이 끊겼다. 건강이 나빠져 요양원에 입원한 것이다. 김 관장은 “‘한 줄도 건너뛰지 말라’고 했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할머니는 생의 마지막 책으로 ‘토지’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했다. 김 관장은 “책을 읽어주는 게 끝이 아니다”라고 했다. “‘전화로 찾아가는 책 친구’는 궁극적으로 책을 통해 한 사람의 일생을 듣는 일이에요. 책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 중 하나죠.”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고려 후기 동종(銅鍾·구리로 만든 종) 가운데서도 예술성이 뛰어난 보물 전북 ‘부안 내소사 동종’(사진)이 국보로 승격된다고 31일 문화재청이 밝혔다. 높이 103cm인 내소사 동종은 현존하는 고려 후기 동종 가운데 가장 크다. 종을 만든 내력이 적힌 주종기(鑄鍾記)에 한중서(韓冲敍)라는 장인이 1222년 700근(약 420kg)의 무게로 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부안 청림사에 봉안됐다가 철종 때인 1850년 내소사로 옮겨졌다. 공중을 나는 듯한 역동적인 장면을 표현한 용뉴(龍鈕·범종 가장 위쪽에 있는 용의 모습을 한 고리)와 연꽃 문양이 입체적으로 장식된 종의 어깨 부분 등 장식성과 조형성이 뛰어나다. 특히 몸체는 균형 잡힌 비례와 아름다운 곡선을 보여준다는 평가다. 문화재청은 “통일신라 문화를 계승하면서도 고려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대표작”이라고 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초대 주미공사로 1887년 미국에 파견됐던 박정양 공사(1841∼1905)의 부인 양주 조씨(1841∼1892)의 묘지(墓誌·고인의 행적을 적어 무덤에 함께 묻은 돌이나 도자기 판·사진)가 미국에서 돌아와 후손 품에 안겼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백자청화정부인양주조씨묘지(白磁靑畵貞夫人楊州趙氏墓誌)’를 소장하고 있던 마크 피터슨 미국 브리검영대 명예교수(77)가 박 공사의 증손으로 반남 박씨 죽천공파 종중 회장인 박찬수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61)에게 유물을 기증했다고 31일 밝혔다. 기증된 묘지는 가로 14.7cm, 세로 17.5cm, 두께 1.3cm로, 조씨의 생애가 122자로 기록돼 있다. 1892년 세상을 떠난 조씨는 1921년 박 공사 묘소에 합장됐다. 묘지는 합장 이전에 유실된 것으로 보고 있다. 피터슨 교수는 한국에 머물던 1980년대 한 골동품점에서 해당 묘지를 사들인 뒤 소장해 오다 지난해 7월 자신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우물 밖의 개구리’를 통해 기증 의사를 밝혔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이 건물은 한국의 자주독립 외교 활동의 역사적 장소이자 한영 친교의 요람이다.” 영국 런던 켄싱턴구 얼스코트 트레보버 4번지에 있는 한 건물 중앙 출입문 위에 이곳이 1901∼1905년 주영국 대한제국공사관이었음을 알리는 동판이 10월 30일(현지 시간) 걸렸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영국 주재 외교관이던 이한응 열사(1874∼1905·사진)가 1905년 이 건물에서 순국하고 공사관이 폐쇄된 지 118년 만이다. 문화재청은 한영 수교 140주년을 맞아 이날 주영 한국대사관과 함께 이 건물 앞에서 ‘옛 주영 대한제국공사관 동판 제막식’을 열었다. 이 건물이 대한제국공사관으로 쓰이기 시작한 1901년 이후 122년 만에 그 흔적을 남기게 된 것이다. 이곳은 비극적인 대한제국사와 항일운동사가 깃든 역사적인 장소다. 당시 주영 대한제국공사관 서리공사였던 이한응 열사는 1905년 을사늑약을 앞두고 그해 5월 12일 이 건물에서 자결했다. 일본 정부가 한 해 전 런던에서 체결한 ‘제1차 한일의정서’ 제5조(대한제국 정부와 대일본제국 정부는 상호 간에 승인을 거치지 않고 뒷날 본 협정 취지에 어긋나는 협약을 제3국과 맺을 수 없다)를 근거로 공사관을 폐쇄하자 목숨을 바쳐 항거한 것. 자결 직전 이 열사가 남긴 유서 전문은 이후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돼 항일독립운동의 씨앗이 됐다. 당시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국가는 주권이 없고 인간은 평등을 상실하여 모든 교섭은 치욕이 망극하니 이 어찌 피 끓는 자가 참을 수 있는 일인가.” 이 열사가 순국한 주영 대한제국공사관 건물의 외부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만, 1960년대 영구임대주택으로 바뀌면서 내부는 개조됐다. 현재는 36가구가 거주하는 공공 임대아파트로 쓰인다. 문화재청은 2018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을 통해 옛 대한제국공사관 건물 6곳(일본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중국)의 현황과 매입 가능성을 조사하는 연구용역을 진행했다. 연구 결과 이미 실거주자가 있는 이 건물을 매입하긴 어렵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에 문화재청은 지난해부터 이 건물을 관리하는 영국 피보디사와 협의한 끝에 대한제국의 역사를 기념하는 영문 동판을 설치했다. 이제 이 거리를 지나는 누구나 이 건물에서 대한제국의 ‘자주 외교 활동’이 펼쳐졌음을 알 수 있게 됐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내년부터 제작된 지 50년 넘은 미술작품 중 생존작가의 작품을 자유롭게 해외로 보내 전시 및 매매할 수 있게 된다. 문화재청은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문화재보호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고 30일 밝혔다. 이는 제작한 지 50년 이상 지난 생존 작가의 예술 작품을 ‘일반동산문화재’로 규정해 국외 반출을 원칙적으로 금지해왔던 현행법에 대한 미술계 비판을 반영한 조치다. 그간 미술계는 현행법이 생존 작가들의 국제 아트페어 참가와 작품 매매 권리를 제약한다고 지적해왔다. 전시를 위해 작품을 외국에 보낼 때도 일일이 문화재청장 허가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내년에 개정안이 시행되면 미술품 시장이 더욱 활성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