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룡

구자룡 기자

동아일보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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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구자룡 기자입니다.

bonhong@donga.com

취재분야

2024-10-23~2024-11-22
남북한 관계14%
국방13%
국제일반7%
대통령3%
정치일반3%
기타60%
  • “한중관계 ‘비대칭성’ 갈수록 심화… 사드 제재 ‘역습’ 불러”

    《“마음이 한 번 멀어지면 좁혀지기 어렵다.”(이욱연 서강대 교수)“북핵이 한중 관계의 핵심이 되면 한국은 항상 을(乙)이 될 수밖에 없다.”(김재철 가톨릭대 교수)“한중 간 상호의존 심화된 비대칭성의 역습이 곧 사드 사태였다.”(정재호 서울대 교수) “보완성은 약화되고 경쟁이 부각되는 시기가 온 것 같다.”(신정승 동서대 동아시아연구원장·전 주중대사) 올해 한중 수교 30년을 맞아 가진 동아일보 산하 화정평화재단(이사장 남시욱) 주최 신년 좌담회에서 전문가들은 양국 관계에 켜진 경고등에 주목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좌담회는 5일 신 전 대사 사회로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2시간 반 동안 진행됐다. 신 전 대사는 한중 수교 비밀 협상 당시 외교부 과장급 간부로 협상에 직접 참가했다.》○ 목표, 가치와 규범 차이 안고 출발한 韓中 신: 한국은 중국과의 수교를 통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통일 기반 마련, 경제적 기회 확보, 국제무대에서 전방위적 활동 확대 등 목표가 있었다. 지난 30년간 경제 인적 교류 확대뿐 아니라 중국의 북한 일변도 정책을 바꾸는 성과도 있었다. 그런데 한중 관계가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긴 것인가. 정: 양국이 어려운 과정을 거쳐 수교했지만 당초의 기대에 비하면 성과는 무척 아쉽다. 무역 투자 관광이 그나마 양국 관계를 지탱해 온 주춧돌인데 그마저 흔들리고 있다. 양국 관계의 키워드는 상호 의존인데 한국이 중국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비대칭화가 갈수록 심화됐다. 이로 인한 역습이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이후의 경제 제재다. 양국 간 가치와 규범 차이가 점차 커지면서 상호 부정적 인식도 커졌다. 마늘 파동, 고구려사 문제,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 사드 사태 등 위기가 있었다. 갈수록 안보 이슈로 비화하고 미국 북한 등 제3자가 개입되면서 양국만의 협상으로 풀기 어려운 관계가 되고 있다. 김: 수교 이후 10주년, 20주년에 비해 양국 관계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훨씬 높아진 배경에는 양국 간 동상이몽이 있었다. 경제적 이익 추구는 공통점이지만 양국의 수교 목표에 메울 수 없는 차이가 있었다. 한국은 북한 문제에서 중국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반면 중국은 한반도의 세력 균형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유지하고 나아가 한미 동맹에 영향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양국이 서로 상대방의 목표를 존중해 주지 않으면서 문제가 생겼다. 이: 양국은 출발부터 가치와 규범을 공유하지 않았지만 한 해 1000만 명 이상이 오갔다. 오랜 문화적인 유대가 있는 데다 정서와 마음이 통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치와 규범의 차이에 따른 갈등은 커지고 정서적 유대는 낮아지고 있다.○ 미중 전략적 갈등, 한중 관계에도 먹구름 신: 한중 간 비대칭화 확대에 미중 간 전략적 갈등 심화까지 겹쳐 양국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미중의 물리적 충돌 우려까지 나온다. 중국은 시간은 자기편이라고 하는 상황이다. 정: 1990년대와 2000년대만 해도 중국에서의 현지 연구는 상당히 개방적이고 자유롭게 진행됐다. 당시 보여준 추세라면 중국이 시장친화적이고 자유 지향 체제로 수렴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 지금은 그렇게 보기 어렵다. 중국은 미국이 깔아놓은 질서를 바꾼다는 뜻에서 ‘수정주의’ 국가로 불리지만 그 전에 스스로 세운 원칙을 바꾸고 있다. 불당두(不當頭·우두머리가 되지 않는다), 도광양회(韜光養晦·실력을 기르며 때를 기다린다), ‘해외기지 안 만든다’ 등의 입장을 모두 뒤집었다. 미중 간 충돌이 발생한다면 몇 년 전에는 남중국해를 꼽았는데 지금은 대만이다. 다만 대만은 가연성은 높으나 폭발력은 낮다. 한반도는 가연성은 매우 낮지만 일단 불이 붙으면 폭발력은 남중국해 동중국해 대만해협을 합친 것보다도 클 것이다. 신: 미국 영국 호주 3국이 오커스(AUKUS)라는 사실상 대중국 군사동맹을 출범시켰다. 미국은 쿼드(Quad·미국 인도 일본 호주 4국 협의체) 그리고 한미일 협력을 통해 대중 압력을 강화하고 중국은 러시아와의 전략적 협력 수위를 높이고 있다. 새로운 냉전 구도로 가는가. 김: 신냉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지만 크지는 않다고 본다. 미국의 압박과 중국의 반격 속에 바이든 행정부는 ‘가드레일’을 마련하려 시도한다. 양국 갈등이 선을 넘어 충돌하지 않도록 관리하려는 시도이다. 중국도 미국과의 경쟁을 현실로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경쟁의 폭과 속도, 범위는 조절하려고 하는 듯하다.○ 한미 동맹의 외연 중국까지?신: 미국은 유럽연합(EU)과 함께 인권과 민주주의로 대중 압박을 강화하고 있다. 이: 민주주의와 인권은 소중한 가치다. 하지만 이런 압박이 중국 내부적 변화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을 수 있다. 중국은 지금 1990년대보다 훨씬 더 억압적이고 폐쇄적으로 가고 있다. 이런 때 밖에서 억압과 압박 공세가 들어오면 내부 변화는 오히려 어려워진다. 외부 억압으로 중국이 서방식 민주주의로 바뀔 것이라는 기대는 회의적이다. 신: 올가을 공산당 제20차 당 대회에서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3연임될 것이란 전망이 많다. 현재 내부적인 통제나 강경한 대외 정책이 집권 기반을 다지기 위한 것이라면 당 대회 이후에는 유연해질 수 있나. 정: 유연해진다 해도 단기적이고 전술적인 차원일 것이다. 긴 호흡으로는 여전히 공세적인 외교를 펼 가능성이 크다. 중국은 최근 수년간 미국과의 무역 분쟁에서 필요하면 ‘끝까지 간다’는 자세를 보였다. 미중 관계에서의 ‘가드레일’이 잘 지켜진다고 보기 어려울 수 있다. 신: 전 주한미군 사령관이 얼마 전 한미 연합작전 훈련 대상에 중국도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한미 동맹 대상이 중국까지 외연을 확장한다는 의미다. 김: 미국의 기대는 분명하다. 미국은 일본에 안보를 보장하듯 일본도 미국 안보 위협 대처에 기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미국이 지금까지 비대칭적으로 한국의 안보를 보장했다면 이제 한국도 어떤 역할을 하기를 원할 것이다. 대응 대상에 중국을 포함하는 것은 우리가 이해했던 한미 동맹과는 다른 차원이어서 신중하게 중지를 모을 필요가 있다. 신: 남중국해에서 미국이 얘기하는 항해 자유, 상공 비행의 자유를 한국은 중시할 수밖에 없지만 어디까지 미국에 보조를 맞춰야 하나. 김: 남중국해의 항행과 비행의 자유는 당연히 지지해야 할 규범이지만 미국이 공동 순항을 하자고 하면 할 수 있을까. 중국이 우리의 배타적경제수역(EEZ)이나 방공식별구역(KADIZ)을 일상적으로 항행하는 상황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 북핵과 한중 관계 ‘불편한 동행’ 신: 북핵은 동아시아 정세와 한중 간 관계에도 핵심적인 변수다. 김: 한국은 보수 진보 정부 모두 북핵 문제 해결에서 중국을 바라봐 왔다. 차기 정부는 중국에 대한 기대를 좀 조정하거나 접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20년간 중국이 우리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려는 의지와 능력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 국경절에 톈안먼(天安門) 성루에 올랐고, 문재인 대통령은 베이징(北京) 겨울올림픽을 활용해 종전선언을 추진하려고 했지만 결과는 없었다. 앞으로 상황은 더 안 좋아질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북한 핵 문제를 한중 관계가 아닌 미중 관계의 맥락에서 보기 때문이다. 중국은 미국이 우호적이고 협력적 정책을 취하면 돕겠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미중 갈등은 점차 커지고 있다. 이런데도 북핵 해결에서 중국의 역할을 한중 관계의 핵심에 놓으면 우리는 중국에 언제나 을(乙)의 위치에 머물 수밖에 없다. ○ 中 애국주의와 韓 반중 정서라는 걸림돌 신: 중국의 국력이 대폭 신장되면서 세계 각국과 갈등도 나타나고 있는데 한중 양자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국의 대국 의식에 대한 반감이 커지는 데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서로 보완성이 약화되고 경쟁적인 성격이 부각되는 시기가 온 것 같다. 이: 한중이 가치와 규범으로 맺어진 관계는 아니지만 정서적 유대감으로는 상당히 밀착돼 있었다. 그런데 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이 양국 모두에서 나오고 있다. 중국 요인은 시진핑 체제가 억압적으로 변하면서 경직화하고 있는 점이다. 시진핑 체제 이후 전랑(戰狼)외교, 홍콩 민주화 운동 억압, 코로나 사태 기원 논란, 문화 기원 논쟁 등이 한국인들의 마음을 멀어지게 했다. 한국 내 반중(反中) 정서 확산도 악영향을 미쳤다. 한국 사회의 혐오 문화가 반중 혐중으로 확산됐다. 심지어 혐중이 상업주의화되고 있는데 유튜브나 포털에서 중국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의 클릭 수가 높아가는 것이 한 사례다. 신: 중국은 기회가 될 때마다 패권을 추구하지 않겠다며 주변국과 친성혜용(親誠惠容)의 동반자 관계를 강조한다. 그런데 주변국 반응은 싸늘해 중국을 경계한다. 중국이 자국 중심의 새로운 국제질서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가. 정: 중국은 대외 관계에서 여러 입장을 수정하고 있다. 중국은 1000년이 넘는 중화주의의 유전자(DNA)를 갖고 있는데 사회주의란 꺼풀이 벗겨지면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양제츠(楊潔지) 국무위원은 외교부장 시절 아세안 국가들과의 공식 회의에서 “우리는 대국이고 너희들은 소국이다”고 했다. 신: 중국 내에서 높아지는 애국주의도 파장이 커질 전망이다. 이: 중국의 변화를 가로막는 중요한 내부적 걸림돌 중 하나가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다. 시진핑 시대 민족주의는 ‘치욕 민족주의’와 ‘문화 민족주의’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전자는 아편전쟁 이후 당한 치욕을 계속 환기시키고 외국에 대한 배타적인 정서를 강조해 내부 통합, 중화권 통합을 이루려는 것이다. ‘문화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것은 주요 2개국(G2), 세계 2위 경제대국 등 위상이 높아졌음에도 소프트파워,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평가가 낮다는 위기감이 반영된 것이다.○ 한중, ‘화이부동’으로 신: 수교 이후 30년간 한중 관계를 돌아보면 저자세 논란 등 아쉬움이 있다. 정: 우리는 지난 30년간 ‘가랑비에 옷 젖듯이’ 중국의 존중을 받지 못하는 것에 스스로 익숙해졌다. 한국 관리들은 소위 공중증(恐中症)에 젖어 안타깝다. 상황의 역전을 위해서는 정치인이 용기가 필요하다. 이: 한중 관계에서 구동존이(求同存異)를 강조하는데 ‘구동’이 핵심이다. 이는 법가적인 생각으로 통일을 강조하는 내부 통치가 아닌 외교 원칙으로는 맞지 않다. 한중 관계를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는 화이부동(和而不同)으로 가야 한다. 서로 다른 것을 전제하고 만나야 한다. 경제적인 이익 차이나 정치적인 이견과 달리 마음이 일단 멀어지면 쉽게 좁혀지기 어렵다. 김: 한중 관계의 지난 30년이 확장과 발전의 시기였다면 앞으로는 조정과 모색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정부나 민간 차원이나 조금 더 솔직하게 이견을 다루기 시작해야 한중 관계가 관리되고 발전될 수 있다. 대중 관계에서 전략적인 모색이 필요한데 우리는 대중 정책을 둘러싸고 진영이 서로 갈라져서 상대를 비난하기 급급하다. 치열하면서도 냉철하고 합리적인 대중 전략 논쟁이 있었는지 회의적이다.정리=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윤융근 기자 yunyk@donga.com}

    • 2022-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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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로나 ‘면역 여권’[횡설수설/구자룡]

    프랑스 정부가 21일 백신을 접종받지 않으면 대중교통 이용이나 특정 장소 접근을 금지하는 내용의 법안을 내놓자 야당에서 ‘보건 독재’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코로나19 항체 보유’ 여부에 따라 국가 간 이동은 물론 국내 활동도 제한하는 ‘면역 여권’ ‘면역 면허’가 다시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면역 여권’은 코로나19에 감염됐다가 회복했거나 백신을 접종한 뒤 항체가 형성돼 면역력이 생겼음을 국가가 자격증처럼 인증하는 것이다. 여행과 항공 분야 등의 경기를 살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어 이미 몇몇 국가에서 부분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에스토니아가 7월 세계 처음으로 ‘디지털 면역 여권’을 발행했고 헝가리는 9월 관련법을 통과시켰다. 발트 3국 국가 간, 그리고 호주 뉴질랜드 간에는 ‘면역 여권’이 있으면 입국 후 2주간 자가 격리를 면제해주는 ‘트래블 버블’도 시행 중이다. ▷‘면역 여권’이 코로나 봉쇄를 돌파하게 할 것이라는 긍정적인 기대도 크지만 부작용 우려도 만만치 않다. ‘면역 여권’은 소지자가 바이러스를 막아낼 수 있는 항체를 보유해 자유롭게 활동해도 감염 우려가 없다는 것이 근본 전제다. 하지만 미국의 150여 개 혈청 검사 중 12개만이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았다. 승인받았지만 정확도가 81%에 그친 것도 있을 만큼 혈청 검사의 정확성과 신뢰성은 논란이 있다. 더욱이 코로나19는 항체가 있어도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는 데다 항체가 생긴 뒤에도 2차, 3차 감염 사례도 속출하는 괴질(怪疾)이다. 세계보건기구(WHO)가 ‘면역 여권’은 믿을 수 없다고 반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윤리적인 논란도 있다. 면역 보유에 따라 사람과 국가를 차별하는 증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19세기 미국에서 치사율 50%의 황열병이 돌자 이 병을 앓고 나은 사람이 아니면 일자리는 물론 집도 못 구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면역 여권’이 사회 활동에 필수 증명서가 되면 위조가 판치고 암시장이 형성될 수도 있다. 가짜 증명서 소지자가 ‘면허받은 감염원’으로 활개 치는 모습을 그려 보면 오싹하기까지 하다. ▷스페인 마드리드는 7월 ‘면역 카드’를 발표하면서 “다른 나라에 수출해야 할 모델”이라고 자신감을 나타냈지만 “면역 여부로 차별하는 거냐”며 시민들이 강력히 반발하자 하루 만에 취소했다. 각국에서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돼, 코로나19 제압에 조만간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코로나와 싸우면서 생겨난 사회적 갈등과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20-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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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턴 87% 공백… 방치된 ‘의료대란 시한폭탄’ 누가 멈추나[논설위원 현장 칼럼]

    2일 오후 2시 반 대전 중구 목중로 대전선병원 서관 5층 27m² 크기의 남성 인턴 숙소. 방 양쪽 벽에 커튼으로 가려진 2층 침대가 있고 방 가운데에는 컴퓨터, 서류와 환자들에 대한 메모 등이 업무용 책상에 놓여 있었다. 숙소와 휴식, 업무가 분리되지 않은 인턴의 고달픈 처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바닥의 빈 박스에는 야식용 컵라면과 과자 등이 담겨 있고, 의자에는 개키지 않은 의사 가운과 수술복이 둘둘 뭉쳐져 있다. 숙소 입구에는 토, 일요일 없이 짜인 인턴 7명의 야간 당직 스케줄과 비상 연락망이 빼곡히 적혀 있다. 때로는 생명이 위급한 환자 치료를 위해 급히 콜을 받고 뛰어나가는 인턴들의 정신없이 바쁘고 고단한 생활의 단면이 펼쳐져 있었다. 과거 인턴은 ‘1년 365일 하루 24시간’ 대기 상태였다고 대전선병원 김광민 감염관리실장(감염내과 전문의)은 말했다. 2015년 ‘전공의법’이 만들어져 그나마 나아졌다지만, 1주당 ‘80시간+8시간(긴급한 필요시)’이 법정 근무시간이다. 이마저도 제대로 안 지켜진다. 2018년 실태조사에서 수련병원의 3분의 1이 규정을 어겼다. 전국 240여 개 수련병원에서 근무하는 한 해 3000여 명의 인턴은 ‘수련’만 받는 학생이 아니고 응급실 중환자실 수술실 등에서 궂은일을 하는 필수 의료 인력이다. 이 병원 인턴 C 씨는 “밤에 소변을 보지 못하는 환자의 요도에 삽관을 하거나, 발열 환자에게 항생제를 처방하는 등 레지던트 선생님들과 함께 병원의 밤은 우리가 지킨다”고 자부심을 나타냈다.내년 병원 인턴 2700여명 부족 이런 인턴이 내년 한 해 병원에서 거의 사라질 위기다. 올 8월 전공의 파업에 동조해 의사 국시 실기시험을 거부한 올해 의대 졸업생들이 재응시 기회가 없으면 의사 면허를 취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턴이 충원되지 않으면 수도권과 지방 가릴 것 없이 의료 현장은 큰 혼란을 겪을 전망이다. 수련병원은 규모도 크고 중증 환자를 치료하는 곳이어서 의료 체계의 상부 고리가 흔들려 동네 의원에서 중환자가 발생해도 이송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달 26일 전국 수련병원 전공의 모집정원 공고를 내면서 레지던트 1년차 3399명은 발표했지만 인턴 정원은 공고도 못 했다. 내년 3월 1일 병원에 배치해야 하지만 전공의 파업 당시 의대 졸업생 대부분이 실기시험에 응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올해 응시 대상자 3172명 중 미응시자는 2749명으로 87%였다. 의대 졸업생은 필기와 실기 시험을 모두 합격해야 의사 면허를 받을 수 있다. 내년 1월 7, 8일 치러지는 필기시험에는 실기시험 응시 대상자 3172명을 포함해 3196명이 원서를 냈다. 이제 실기 재응시가 진행되어야 한다. 10년간 4000명 의대 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설립 등에 반대하며 시험을 거부한 의대생들이 끝내 재응시하지 못하면 내년 각 병원에서 필요한 인턴은 최대 2700여 명이 부족할 수 있다. 의사 국시 실기는 준비와 시행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시험은 마네킹 환자를 대상으로 채혈, 소변줄 삽입 등 50여 가지 시술 중 6가지를 각 5분씩 수행하는 ‘오스키(OSCE) 시험’과 환자 대역 배우 6명을 상대로 각각 10분간 진찰을 하고 진단과 처방을 내리는 ‘임상 시험(CPX)’, 그리고 실기시험 간 쪽지 시험 격인 ‘사이 시험’ 등으로 이뤄진다. 수험생 1인당 3시간가량이 소요된다. 더욱이 서울의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국시원)에서만 치르기 때문에 시험에만 2개월가량이 걸린다. 당장 재응시 결정을 내려도 내년 3월은커녕 5월까지도 인턴을 배치하기 쉽지 않다. 문제는 사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도 전혀 없다는 점이다. ‘코로나 전시’에 팔짱만 “총파업으로 인한 국민 불편은 송구하지만 대국민 사과 계획은 없다.”(대한의사협회) “정부와 의료계만이 아닌 국민 여론의 문제다.”(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 “의대생들의 국시 재접수를 반대한다.”(청와대 국민청원) 의대생 실기시험 재응시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입장이 좁혀지지 않은 채 시간만 흘러가고 있다. ‘의료 대란의 초강력 태풍을 눈앞에 두고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10월 성균관대 의대 교수들 성명)는 절박한 호소가 무색하다. 코로나19 재확산으로 방역 최전선의 의료진 확보가 시급한 가운데 누구도 책임 있게 나서지 않고 있다. 이탈리아는 졸업 예정인 의대생에게 의사 시험을 면제하고 8, 9개월 일찍 진료 업무를 시작하도록 한다. 방역 전쟁에 마치 ‘의료 학도병’을 투입시키는 듯한 이런 긴박한 분위기와는 대조적이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수도권은 8일부터 2.5단계로 격상했고, 경찰에 처음 방역으로 을호 비상경계를 발령했다. 체육관 임시시설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바야흐로 비상이다. 타국에 비해 백신 확보도 늦어 ‘국민적 방역과 의료진의 분투’로 상당 기간 버텨야 한다. 중환자 시설이 있어도 의료 인력 부족으로 치료를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런데도 2700여 명의 의대생들이 의사 면허증이 없어 지켜보고 있어야만 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한 해 인턴 결손 부작용 일파만파 재응시 문제가 풀리지 않아 인턴 배출이 한 해 늦어지면 우선 내년 3월부터는 의료 현장에서 의사가 부족해진다. 그런 데다 내후년에는 레지던트를 뽑을 인력이 없어 전공의 공백이 시작된다. 한 해 채우지 못한 그 공백은 레지던트 과정 4년간 연차가 올라가며 계속된다. 전공의 한 해 결손의 여파는 군의관 보충 차질로까지 연결된다. 전공의 파업으로 3차 의료기관의 응급실에 가지 못해 병원을 옮겨 다니다가 증세가 악화되거나 목숨을 잃었다는 보도도 나왔다. 그런데 한 해 의사가 배출되지 않으면 2000명 이상의 전공의가 4년간 파업하고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 빚어진다. 올해 인턴에 올라가지 못한 의대생들은 내년 하반기 후배들과 인턴 경쟁을 벌이게 되면서 2000명 이상이 수련병원에 가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수련병원에서는 전공의가 부족하고, 상당수 인원은 외부에서 떠도는 의료 인력의 비효율과 낭비가 지속되는 것이다. 의료 인력은 한 해 시험을 보지 못하면 다음 해에 모두 합격시켜서 털 수 없는 특성 때문이다. 이런 의료 인력의 왜곡 현상이 빚어내는 가장 큰 피해자는 물론 환자들이다. 신규 의사 면허자가 한 해 없어지면 의료 취약 지역 공중보건의 배치에도 비상이 걸린다. “사실상 답이 없다”연세대 의대의 경우 신촌세브란스병원만 한 해 필요한 인턴 인력이 100여 명이다. 이 병원 관계자는 “이번에 실기시험에 응시한 학생 400여 명을 기존 배치 비율대로 복지부에서 배분받는다고 해도 10명도 채 안 돼 진료 현장의 혼란이 올 수밖에 없다”며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고 밝혔다. 대전선병원 김광민 실장은 “6, 7명의 인턴을 뽑지 못하면 어떻게 메울지 답이 없다”고 토로했다. 보건 당국이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진 방안 중에는 ‘공개된 불법’이라는 말까지 있는 ‘PA(Physical Assistant) 간호사’의 활용이 있다. ‘PA 간호사’는 간단한 봉합 등 의사가 해야 할 일을 간호사가 돕는 것으로 비공식적으로 행해지고 있으나 이를 공식화하거나 합법화하는 데는 의사들의 반발이 크다. 여당 의원은 이를 엄벌하는 법안을 발의했고 복지부에서도 단속을 강화하는 지침을 내놓기도 했다. 아쉬운 대로 땜질을 할 수 있는 궁여지책이라지만 갈 수 없는 길이다. 전공의들의 야간 당직을 대신할 ‘입원전담전문의’ 제도는 전문의 자격증을 가진 의사가 야간 당직만을 맡게 하는 것이다. 적정한 수가 책정도 안 되어 있고 인력을 구하기도 쉽지 않아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인턴이 없으면 레지던트가 대신하고, 전공의가 할 일에 교수들이 투입된 것은 전공의 파업 때 벌어졌던 현상이다. 하지만 교수가 전공의 업무에 투입되는 만큼 진료나 수술이 줄어들거나 피로가 쌓여 장기간 지속할 수는 없다.환자 생명-국민 건강이 최우선 지금 상황은 환자들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하는 시한폭탄의 시계가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어느 쪽이 백기를 들고 나오라고 할 수도 없다. 학생들은 2번이나 연기된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지만 대한의사협회 김대하 대변인은 통화에서 “명분이 있었던 만큼 시험 거부 외에 달리 의사 표현 수단이 없었던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럼에도 비판적인 여론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박능후 장관이 재응시 허용을 위해서는 “국민의 양해가 필요하다”고 강조한 것도 그런 이유다. 정부는 여론을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여론 뒤에 숨거나 끌려가기만 해서도 안 된다. 코로나19 사태가 상당 기간 계속되는 가운데 의사 부족으로 인한 의료 공백으로 예기치 못한 환자의 피해가 발생하면 그 파장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어디에서부터라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나서야 한다. 지금 준비해도 의료 공백에 대비할 시간은 빠듯하다. 대전=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20-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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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세 꺾인 불복[횡설수설/구자룡]

    “우리는 이길 것이지만 국익을 위해 연방총무청(GSA)에 초기 절차와 관련된 일을 하라고 권고했다.” “기억해. GSA는 누가 차기 대통령인지 결정 안 했거든.” 트럼프가 23일 하루 몇 시간 새 올린 모순되는 트윗이다. 그의 불복 의지는 꺾이지 않았으나 GSA의 정권 인수 지원이 시작되면서 안보 브리핑 등 인수인계 작업이 궤도에 올랐다. ▷미국 대선 당선인은 상대 후보의 승복과 선거인단 과반수 확보로 사실상 확정된다. 각 주가 선거인단을 확정하는 ‘세이프 하버 데드라인(safe habor deadline·올해는 12월 8일)’ 전에 상대 후보가 승복하면 GSA가 업무 인수 지원을 시작해 당선인 신분이 시작되지만 이번엔 ‘승복 없는 GSA 지원’으로 일단락된 모양새다. 트럼프는 제기한 소송에서 32패 2승, 경합주인 조지아 위스콘신에 이어 펜실베이니아와 네바다까지 24일 바이든의 승리를 확정했다. 승부는 진작에 끝났으나 트럼프 머릿속은 온통 ‘대선은 사기, 위헌’이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차마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듯하다. 그는 13일 트윗에서도 컴퓨터 집계 프로그램인 ‘도미니언 보팅 시스템’이 사전에 자신과 바이든의 득표율을 입력해 자신을 지지하는 270만 표가 삭제됐다고 주장했다. ▷초유의 ‘권력 이양 몽니’에도 19세기 프랑스 정치가 토크빌이 찬탄했던 ‘미국 민주주의’는 ‘트럼프 시대의 일탈’을 회복해가고 있다. 법원은 소송 남발에 제동을 걸고 있다. 펜실베이니아주 연방법원은 개표 결과 인증을 막는 소송을 기각하며 “논거가 마치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처럼 무턱대고 짜깁기됐다”고 지적했다. 트럼프의 선거 불복에 최측근들까지 잇따라 돌아서고 있다. ▷분열과 장벽으로 상징되던 트럼프 때와 달리 바이든 행정부는 다양성을 향해 가고 있다. 어머니는 인도 이민자, 아버지는 아프리카계 자메이카 출신인 카멀라 해리스를 첫 여성 부통령으로 선택한 바이든 당선인은 이민정책 총괄 국토안보부 수장에 이민자를 지명했다. 미 역사상 첫 여성 재무장관이 탄생했고, 유엔 주재 미국대사에도 흑인 여성이, 정보기관 총괄 국가정보국장에도 여성이 내정됐다. 통합과 포용, 미국이 가진 ‘다양성의 힘’을 정부 구성에서 보여준다. ▷트럼프가 대선 결과를 끝내 확정하지 못할 경우 하원에서 대통령을 선출한다는 조항에 실낱같은 기대를 건 건지, 아니면 ‘싸움꾼 이미지’를 지켜 차기 대선 출마를 노리는 건지, 읽기 힘든 복잡한 속내로 버티기 무리수를 연발하고 있지만 그가 무너뜨릴 뻔했던 ‘미국 민주주의’는 성큼성큼 복원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20-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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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인종 국가’ 한국[횡설수설/구자룡]

    우리 군이 ‘다문화 군대’로 불릴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2010년부터 다문화 가정 출신 청년들의 군 입대가 시작됐는데 2028년이면 한 해 입대자가 8000명가량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주민 중 외국인 비율이 10%가 넘는 안산시에는 필리핀, 캄보디아 출신 경찰이 근무하고 있다. 축구 야구 배구 농구 등 국내 프로스포츠에서 뛰는 외국인 선수는 100명을 넘었다. 필리핀 출신 국회의원, 키르기스스탄 출신 구의원이 나왔고, 농촌으로 시집온 여성이 이장과 부녀회장을 맡는 곳도 여러 곳이다. ▷국내 거주 외국인이 지난해 말 기준 약 222만 명으로 인구 대비 4.3%를 차지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다문화·다인종 국가’ 기준 5%를 4년 후면 넘고 2040년에는 7%로 높아질 것이란 전망이다. 국내 거주 외국인은 2009년 100만 명을 넘은 데 이어 2018년 200만 명을 돌파했다. 조선족 동포 등 중국 출신이 42.6%로 가장 많고 베트남 태국 미국 순이다. 한국 국적 취득자도 18만5728명으로 8.4%에 달한다. ▷외국인을 대거 받아들여 인구 구조가 바뀌는 것은 사회와 국가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럼에도 근로자 취업 기회를 넓히고 결혼·직업으로 국적을 부여하는 등 문을 활짝 연 것은 내국인 ‘인구 절벽’의 영향이 크다. 올 3월부터 국내 출생 신생아 수가 사망자 수보다 적어졌고, 내년에는 처음으로 절대인구가 2만 명가량 줄어든다. 합계출산율(여성 1명 평생 출산 수)은 이미 2018년부터 ‘0명’대로 떨어졌다. 외국인 유입이 늘어도 내국인 감소를 채우기는 부족해 2029년부터는 한국 내 거주자 총수가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출산 장려와 양육 지원 등 대책에도 ‘백약이 무효’인 듯 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외국인 증가는 노동력 공급과 사회 유지는 물론이고 다양성과 창의성을 높이는 동력이 될 수 있다. 물론 비(非)백인 비율이 37%인 미국에서 종종 인종 갈등이 불거지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프랑스에서도 인종·문화 간 갈등으로 인한 비극이 잇따르는 걸 보면 다인종 국가화의 심화는 예기치 못한 문제들도 야기할 수 있다. ▷전 세계 176개국에 720만 명의 한국인이 진출해 살고 있는 것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차별이나 불편함이 없도록 함께 지내야 할 이웃들이다. 단순히 외국인 비율이 높아지는 것을 넘어서 다문화 선진국이 되기 위해선 의식과 제도, 문화가 성숙해야 한다. 다가올 다문화 다인종 시대가 어떤 모습이 될지는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달렸다. 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20-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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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위 자백이라도 안 했으면 지금 살아 있겠습니까”[논설위원 현장 칼럼]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 이춘재가 다음 달 2일 ‘8차 사건’ 증인으로 수원지방법원에 나온다. 이춘재가 저질렀다고 자백한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20년을 복역하고 나온 윤성여 씨(54)의 재심 9차 공판이다. 이춘재는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8차 사건’의 범인으로 체포돼 처벌을 받았다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이춘재의 자백이 법정에서 사실로 확정된다면 윤 씨의 20년 복역은 인권을 보호해야 할 국가기관이 한 개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사법 피해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재심 판결은 12월 나올 예정이다. 2009년 출소 후 충북 청주의 한 자동차용품 업체에서 근무하고 있는 윤 씨를 24일 오전 그가 복역했던 청주교도소 정문 앞에서 만났다. 윤 씨가 실명과 얼굴을 언론에 공개하는 것은 자신과 같은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며 앞으로 당당하게 살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1988년 9월 16일 경기 화성 태안읍 진안리에 살던 박모 양(13)이 자신의 집에서 잠을 자던 중 오전 1시경 성폭행을 당하고 피살됐다. ‘연쇄 살인 7차 사건’ 발생 9일 뒤였다. 윤 씨는 1989년 7월 체포돼 이듬해 5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 확정판결을 받았다. 20년형으로 감형된 뒤 만기 몇 개월을 앞두고 출소한 지도 10년여가 지난 지난해 9월 ‘이춘재의 자백’이 나왔다. “재판은 선고 내려져 봐야 압니다” “여기서 19년 6개월을 있었습니다.” 그는 교도소 정문이 보이자 탄식처럼 말했다. “장애인 복지기관 자원봉사를 위해 몇 번 밖으로 나온 것 말고는 안에서만 생활했다”는 윤 씨에게 재심 선고를 앞둔 심경을 물었다. “재판은 선고가 내려져 봐야 압니다.” ‘범인만이 알 수 있는 의미 있는 진술을 했다’며 경찰이 지난해 11월 ‘이춘재가 진범’이라고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했고, 올 1월 재심이 받아들여져 재판이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지만 윤 씨는 여전히 재판 결과에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윤 씨는 1심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된 뒤 ‘경찰 조사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잠을 자지 못한 상태에서 허위 진술을 했다’며 항소했다. 왜 검찰 조사나 1심 재판에서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았는지부터 물었다. “다른 말이 필요 없다. 내가 허위 자백이라도 하지 않았으면 지금 살아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고 생각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겁먹게 했을까. 그는 “당시는 상황이 그랬다”고만 했다. 당시 경찰 관계자는 재판에서 3세 때부터 소아마비로 왼쪽 다리가 불편한 상황에서 윤 씨에게 쪼그려 뛰기를 시켰다고 증언했지만 윤 씨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법정에서 한 경찰관은 구타도 있었다고 증언했지만 현장을 지휘했던 당시 형사계장은 가혹행위는 없었다고 부인했다. 공개 재판 법정에서라도 억울하다고 말해 볼 생각은 못 했을까. “재판을 기다리는데 다른 미결수들이 ‘공소장의 죄로만 보면 사형이다. 화성 살인 사건은 널리 알려져 있어서 선고하자마자 형이 조기 집행될 수도 있다’고 했다. ‘법원 괘씸죄’라는 말도 들었다. 경찰과 검찰에서 인정한 것을 부인하면 그렇다고 했다.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윤 씨는 “변호사를 구할 수도 없는데 죄를 부인하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고 했다. 주위에서 조언이나 변변한 도움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불확실한 정보와 불안, 공포 등이 뒤섞여 자기 방어를 제대로 하지 못한 듯했다. 윤 씨는 1심 판결이 나온 뒤 항소했지만 1년도 안 돼 2, 3심에서도 그대로 원심이 확정됐다. 국과수 감정서 미스터리 서울에서 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니다 모친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친척이 있는 화성으로 보내진 윤 씨는 11세에 경운기공업사에 들어가 줄곧 일했다. 1989년 7월 25일 저녁 하루 일을 마치고 공업사 사장 등 6, 7명과 함께 저녁을 먹으려는데 경찰이 와서 “잠깐 가자”고 했다. 따라나섰는데 사람들이 보이지 않자 손에 수갑을 채웠다. 윤 씨는 초등학생 피살 사건을 조사한다길래 7번가량 체모를 뽑아주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경찰서나 파출소 한번 가보지 않았던 그는 당시에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경찰은 피해자의 몸에서 채취된 범죄 용의자의 체모에서 티타늄 등 금속 성분이 다량 검출되자 윤 씨를 포함해 금속을 취급하는 업종 종사자를 대상으로 탐문 및 체모 채취 조사를 벌였다. 당시 이춘재도 전기 업체에서 근무했지만 ‘화성 6차 사건’에 이어 이번에도 혈액형이 달라 조사 대상에서 빠졌다.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부터 현장 체모와 윤 씨 체모가 일치한다는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서’를 전달받은 다음 날 윤 씨를 체포했다. 지난달 14일 수원지법 7차 재심 공판. 재판부는 1989년 윤 씨 사건 재판 당시 자백 외 유일한 과학적 근거로 제시됐던 국과수 ‘감정서’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었다. 1989년 감정서는 현장 체모와 윤 씨 체모의 유사성이 ‘3600만 분의 1’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3600만 명 중 한 명밖에 없을 정도로 서로 유사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당시 감정서에는 그 같은 결론을 스스로 부정하는 내용들도 담겨 있었다. 두 체모 간 10여 종 금속물질의 방사성 동위원소의 편차율은 40%였다. 통상 5%, 최고 20%는 넘지 말아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그런데다 염소는 170(현장 체모) 대 1572(윤 씨 체모), 마그네슘은 198 대 844(단위 ppm) 등으로 몇 배 차이가 났다. 하지만 1989년 재판에선 누구도 그런 내용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이번에 윤 씨의 재심 재판에 나선 국과수 등 전문가들은 “도저히 같은 시료(체모)라고 볼 수 없다”고 증언했다. 법무법인 다산과 함께 윤 씨 재판을 맡고 있는 ‘재심 전문’ 박준영 변호사는 재판정에서 “‘편차율 40%’가 ‘유사성 3600만 분의 1’로 둔갑돼 윤 씨를 범인으로 모는 ‘확증 편향’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재심 증언대에 선 윤 씨 기소를 담당했던 검사는 “감정서의 숫자는 자세히 보지 않고 ‘일치한다’는 국과수의 결과만 믿었다”고 말했다. 당시 국과수에서 감정서를 작성한 책임자는 건강 악화로 증언을 못하고 있다. 윤 씨는 잠시 휴정 시간에 “감정서를 보고 담당 검사의 말을 듣고 있으니 ‘쑥쑥 오른다’(부글부글 끓는다)”고 했다. 한 사건, 두 명의 자백 윤 씨 재심 사건에서 핵심은 감정서의 신뢰성과 함께 이춘재와 윤 씨의 자백이다. 윤 씨는 경찰에 체포된 후 범행을 ‘자백’하는 자술서를 3차례에 걸쳐 10쪽가량 썼다. 윤 씨는 “연행된 뒤 3일간 잠을 한숨도 재우지 않아 경찰이 불러주는 대로 정신없이 썼던 것 같다”고 했다. 자술서는 피해자의 목을 조를 때 맨손을 사용하고 범행 후 피해자의 아래 속옷을 벗긴 후 그대로 다시 입혔다고 했는데 현장 상황과 달랐다. 초등 3년을 마친 피의자가 썼다고 볼 수 없는 표현도 여러 곳이라고 변호인 측은 설명했다. 반면 경찰이 지난해 이춘재를 진범으로 잠정 결론 내리면서 범인만이 아는 ‘의미 있는 진술’을 몇 가지 예시했다. 피해자의 신체 특정 부위에 대한 설명, 박 양의 방 구조를 펜으로 그려가며 설명한 점, 벗은 양말로 목을 조른 범행 수법과 범행 후 피해자의 새 속옷을 뒤집어 입히고 나왔다는 내용 등이 범행 당시 상황과 같았다는 것이다. 다리가 불편한 윤 씨가 열린 대문을 두고 자신의 키 높이보다 높은 담장을 넘어 들어갔다 나왔다는 진술이나 현장 검증 내용도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변호인 측은 주장했다. 여기서 한 가지. 현장 체모의 혈액형은 B형으로 이춘재의 O형과도 다르다. 이춘재가 진범이라면 현장에서 채취된 체모가 어디서 나왔는지, 혈액형 조사가 정확했는지가 문제다. 국가기록원에 보관되어 있던 현장 체모 두 점은 오랜 시간이 지나 최근 유전자 검사 등 첨단 감식을 의뢰했으나 ‘감정 불가’ 판정이 나왔다. 1986년부터 1991년까지 이춘재가 자백한 10건의 화성 연쇄 사건 중 5건은 유전자 검사로도 확인됐다. 엄숙히 지켜봐야 할 재심 결과 지난해 9월 윤 씨는 퇴근하고 집에서 오후 8시쯤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청주교도소에 있을 때 근무했던 박모 계장이 이춘재의 자백 사실을 알려줬다. 평소 뉴스나 인터넷을 잘 보지 않는 윤 씨는 그에게서 처음 들었다고 했다. 그 며칠 전 이춘재를 다시 조사하던 경찰이 찾아와서 “8차 사건도 다시 보려고 한다”고 했지만 자백 얘기는 해주지 않았다고 했다. 윤 씨는 이춘재의 자백 소식을 듣고 반갑거나 놀라기보다 ‘화성’이라는 말이 다시 나오지 않기만을 바랐다고 했다. “주위에 화성 8차 사건으로 복역하고 나온 것을 감추고 오랫동안 살아왔다. 내가 화성과 관련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져서 뭐가 좋겠냐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처럼 재심을 청구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다. 이미 20년을 복역하고 나와서도 10년이 지났다. 잊혀졌던 화성 사건이 자꾸 들먹여지는 것이 싫었다.” 12월에는 1991년 부산 엄궁동 낙동강변 살인사건으로 21년간 옥살이를 했던 두 명에 대한 재심 판결도 나올 예정이다. 재심 결과는 당사자뿐 아니라 이 사회와 국가에도 큰 의미가 있다. 이들이 모두 무죄로 나온다면 사법 시스템 전반을 되돌아보는 거울로 삼아 통렬한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엄숙하고 진지하게 결과를 지켜볼 일이다. 청주·수원=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20-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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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계동 슈바이처’[횡설수설/구자룡]

    경제성장이 본격화하기 전엔 작은 읍면은 물론 도회지에서도 의사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1960년대에 서울시는 의사가 왕진을 거부하면 단속하겠다는 엄포를 내렸는데 그만큼 병의원과 의사가 귀했기 때문이다. 1960년 전국 의사 수는 7765명으로 지금의 12분의 1 수준이었다. 그런 시절 동네 의원은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누구나 어떤 증세든 의지하고 찾아가는 ‘건강 인프라’였다. ▷22일 100세로 별세한 ‘은명의원’ 김경희 원장이 서울 노원구 상계동 수락산 자락의 판자촌에 내과를 연 것은 1984년이었다. 개원 후 무료 진료를 했으나 진료의 질이 낮을 거라 여겨 찾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1000원 진료’를 했는데 당시 택시 기본요금이 800원 정도였다. 고교 3학년 때 폐결핵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그는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는 기도를 했고 평생 그 약속을 지켰다. 가난한 주변 친구들이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모습을 본 그는 일제강점기였던 세브란스의전 2학년 때부터 보육원 아이들을 위해 무료 봉사에 나섰다. 광복 후엔 서울역에서 중국과 일본에서 돌아온 교포를 치료했다. 1970년대에는 판자촌을 돌며 무료 진료를 이어갔고 2004년 노환으로 병원 문을 닫기 전까지 홀몸노인을 위한 무료 왕진도 다녔다. ▷‘상계동 슈바이처’의 타계가 더욱 애잔하게 느껴지는 것은 ‘동네 의원’ ‘왕진 가방’ 등으로 상징되는 신뢰, 봉사의 의사 이미지가 옅어지는 세태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여러 차례의 의료 분쟁과 일부 진료 과목의 과당경쟁은 ‘의술과 상술’의 이미지를 뒤섞어 버렸다. ▷김 원장은 부모님의 이름에서 한 자씩 따온 ‘은명(殷明)’이라는 이름의 장학회, 심장수술후원회 등을 통해 이웃을 돕고, 1996년에는 평생 모은 전 재산인 토지(감정가 53억 원)를 모교에 기부했지만 동네 빵집을 했던 아들 등 4자녀에게는 한 푼 물려주지 않고 자립하도록 했다고 한다. 의사로서도 부모로서도 귀감이 되는 모습이다. ▷김 원장이 병원 문을 닫은 지 16년이 지났지만 그가 작고했다는 소식에 애도하고 아쉬워하는 것은 그의 헌신과 사랑의 여운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병원 문을 닫기 3년 전부터 건강이 악화됐으나 “내 손이 안 가면 도움을 받던 (가난한) 사람들이 영향을 받는다”며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슈바이처의 어록 중 “나는 오직 한 가지 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 진실로 행복한 사람은 섬기는 법을 갈구하며 발견한 사람이다”고 했는데, 김 원장은 그런 의미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을 것이다.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20-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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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객기 납북 51년, 국민 여태 잡혀 있는데 정부는 손놓아”[논설위원 현장 칼럼]

    “오래전 여객기 납치 사건이라 현장이 없는데 어디서 만나 얘기를 들으면 좋을지?” “원래 비행기가 오려고 했던 곳이 김포공항이었으니 거기서 만나지요!” 1969년 대한항공(KAL) 여객기 피랍 때 부친이 납북된 황인철 씨(53)를 최근 김포공항에서 만났다. 그는 KAL 납북과 관련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286호 채택 50주년이었던 지난달 9일 유엔에 부친 송환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내고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메아리 없는 1인 시위를 벌였다. 어느덧 51년의 세월이 흘러 돌잡이였던 아들은 얼굴에 잔주름이 생긴 중년이 됐지만 사건이 잊혀져서는 안 된다는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다. 대관령에서 기수 돌려 北으로1969년 12월 11일 오전 9시 반 강릉발 김포행 첫 비행기 YS11A가 강추위로 김포공항 활주로가 얼어 이륙이 갑자기 취소됐다가 낮 12시 25분 운항을 재개했다. 시간이 바뀌어 탑승을 취소한 사람도 있지만 64인승 쌍발기에 승객 47명과 승무원 4명이 탑승했다. 승객 중에는 권총을 소지한 간첩 조창희(당시 42세)가 있었으나 보안 검색에 걸리지 않았다. 이륙 후 약 10분. 비행기가 대관령 고개를 지날 때 객실 앞부분 좌석에 있던 한 남성이 급히 조종석으로 들어갔다. 조종석과 객실 통행이 차단되지 않던 때였다. 잠시 후 여객기 창밖으로 바다가 보였다. 여승무원의 다급한 안내방송이 나왔다. “비행기가 납치됐다. 가지고 있는 신분증이나 사진을 모두 찢어서 없애 달라.” 어느새 북한 전투기 2대가 나타나 양쪽에서 호위하며 여객기는 북상했다. 한국 공군기 2대가 뒤늦게 출동했으나 때는 늦었다. 여객기는 함흥 연포 비행장에 착륙했다.‘특수이산가족’이 된 미귀환자 1970년 2월 14일 판문점. KAL기 납치 피해자들이 돌아왔으나 승무원 4명과 승객 7명 그리고 조창희를 뺀 39명이었다. 억류 65일간 납치 피해자들은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세뇌 교육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북한은 비행기 변기에 찢어서 버린 사진과 신분증도 찾아내 신원을 확인해 신문을 했다. 손모 씨(당시 27세)는 돌아왔으나 20일간의 전기고문과 약물주사 등으로 언어기능 장애를 일으켰다. 2001년 2월 26일 평양고려호텔 이산가족 상봉장.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 23세에 KAL 승무원으로 입사했던 성경희 씨가 김일성대 교수인 남편, 20대의 아들딸과 함께 ‘특수이산가족’으로 나와 남측의 모친을 만났다. 다른 미귀환자 10명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북측은 ‘소재 불명’ ‘생사 불명’이라고 둘러댔다. 북한은 앞서 1958년 2월에도 부산발 서울행 KNA 소속 여객기 ‘창랑호’를 경기 평택 상공에서 납치했으나 승객과 승무원 26명을 모두 돌려보냈다. 그러더니 YS11A는 미귀환자 송환 요구에 응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북에 남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의 항공기 납치 및 테러는 1987년 11월 115명이 탑승한 KAL 858기를 미얀마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폭파하는 만행으로 이어졌다.공무원 피살 손놓은 정부, 납북도 방치 “모이지 못한 지 오래입니다. 미귀환자 부모는 돌아가시고 형제들도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연로한 분이 많아….” 황 씨는 자신이 대표를 맡고 있는 ‘KAL기 납치 피해자 가족회’에 대해 묻자 이렇게 답했다. 북한의 모르쇠, 정부의 무성의와 무신경 그리고 일부는 북에 남은 가족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걱정까지 더해져 ‘피해자 가족회’ 활동은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25세에 납북된 승무원 정경숙 씨의 오빠 정현수 옹(90)은 전화통화에서 “피해자 11명의 가족이 모여 여기저기 뛰어다니기도 했으나 이제는 지쳤다”고 말했다. 정 옹은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이 동생에게 KAL 채용 공고를 알려준 것을 안타까워했다. 모친은 2000년 눈을 감으면서도 “딸을 보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남편(당시 41세)이 납북된 이모 씨도 아들과 20년 넘게 정부 부처를 찾아다녔지만 “오히려 북한 말만 앵무새처럼 전하는 정부에 지쳤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토로했다. “북한이 1983년 ‘항공기 불법 납치 억제에 관한 국제 협약’도 비준해 납치 피해자를 돌려보내는 것이 의무이기도 하다고 했더니 정부 관계자는 북한이 협약 가입 전에 벌인 일이라 어쩔 방법이 없다는 듯이 답변했습니다.”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던 황 씨가 다소 격앙됐다. “하기야 눈앞에서 국민을 사살한 것을 보면서도 제대도 막지도 항의하지도 않는데 50년도 더 지난 일을 꺼내려고나 하겠습니까!” “사건 자체 모르는 국민도 많을 것” 황 씨는 지난달 9일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과 미첼 바첼레트 유엔 인권최고대표, 외교부 등에 부친의 송환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올해 5월에는 유엔 인권이사회 산하 ‘강제적 구금에 관한 실무그룹(WGAD)’에서 자신의 부친이 강제구금 때문에 송환되지 못했다는 판단도 처음으로 받아냈다. 그는 피해자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지만 지난해 12월 KAL기 피랍 50년과 올해 유엔 결의 채택 50주년에 1인 시위를 벌였다. 2007년 다니던 출판사도 그만두고 건설현장 일용직 등으로 생활하며 부친 송환에 매달리고 있다. “대한민국 상공에서 비행기를 납치해 아직까지 피랍자를 돌려보내지 않고 있는 사건이 잊혀져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그는 “KAL기 피격 사건과 헷갈리고 납치 사건은 있었는지도 모르는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그는 부친이 살아있다고 확신해 활동을 그만두지 않고 있다. 황 씨의 부친 황원 당시 영동MBC PD(당시 32세)는 그날 직속 상사 대신 서울 출장길에 올랐다가 납치됐다. 이듬해 1월 1일 황원 씨는 피랍자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가고파’라는 노래를 불러 모두가 눈물 속에 합창을 했는데 이 사건 뒤 어디론가 끌려갔다고 귀환자들은 증언했다. 납치됐다 돌아온 승객 현모 씨는 “돌아오지 못한 사람 중에는 북한에 당당하게 맞선 사람들도 있었다”며 “영동MBC의 황 PD와 카메라맨 김봉주 씨(당시 28세)도 그런 사람”이라고 했다. 황 씨는 브로커 등을 통해 생존을 확인한 부친을 2013년 초 신의주까지 나오게 했으나 그해 2월 북한의 3차 핵실험 후 국경 경비가 강화되면서 탈북이 무산됐다. 그 후 2017년 황해북도 사리원에서 봤다는 소식도 들었다. 황 씨는 송환 요구 투쟁이 힘겨워 보인다는 말에 의외의 답변을 했다. “터무니없는 현실에 분노만 하면 못 합니다. 그러면 스스로 오래 견디지 못합니다.” 납북자 송환 노력, 韓日의 차이 스가 요시히데 신임 일본 총리는 지난달 24일 문재인 대통령과 가진 첫 전화통화에서 납북자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관심을 요청했다. 문 대통령은 일본의 노력을 지원 지지하겠다고 했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회고록에서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 앞서 아베 신조 총리가 주문한 것은 납북자 문제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북한 김정은에게 직접 얘기해 일본에 대해 할 도리는 다한 셈이었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규정한 납북 피해자는 17명으로, 5명은 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평양 회담 직후 돌아왔다. 일본인 피해자는 니가타 해변 등에서 납북됐지만 한국은 KAL 여객기, ‘동진 27호’ 어선, 북-중 국경에서 납치된 7명 등 납치 수법도 다양하고 인원도 많다. 휴전 협정이 되기 전까지 6·25전쟁 기간 납치된 민간인(2017년 4월 총리실 보고서) 9만4000여 명과 미귀환 국군포로 8만여 명도 있다. 이 중 생존해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여서 시간도 얼마 남아 있지 않다. 북한에 억류돼 있던 국군포로들은 2000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들을 데려갈 수도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고 한다. 김 대통령에 이어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에 다녀왔지만 납북자는 한 명도 데려오지 않았다. 납북자를 돌려보내라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우리 땅의 하늘에서 대낮에 납치된 여객기에 탑승했던 피해자들이 돌아오지 못해도 국가가 아무런 대응을 할 수 없는 것인가. KAL기 납치 피해자에 이어 지난달 서해에서 피격된 공무원의 형 이래진 씨도 서울유엔인권사무소를 찾아다니며 조사를 요청하고 있다. 국가와 정부가 국민 보호에 손을 놓거나 소홀할 때 한 개인이 감당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생각하게 하는 요즘이다.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20-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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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증발’[횡설수설/구자룡]

    거품경제가 꺼진 1990년대의 ‘잃어버린 10년’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매년 10만 명가량이 ‘실종’됐다. 이 중 8만5000명가량은 ‘스스로 증발’한 것이었다. 프랑스 저널리스트 레나 모제는 이들을 추적한 책 ‘인간 증발’에서 “‘약한 불 위에 올려놓은 압력솥’으로 비유되던 일본 사회에서 한계에 내몰린 사람들이 수증기처럼 증발했다”고 분석했다. ▷동아일보가 3개월간 추적해 최근 5회에 걸쳐 기획 보도한 ‘증발’ 시리즈는 우리 사회에서도 많은 이들이 증발하고 있는 실태를 생생히 전했다. 증발됐다가 6년 만에 돌아온 남동생이 “푸석한 노인이 되어 돌아왔다”고 말하는 문모 씨 누나의 사연 등을 접한 독자들은 “같은 하늘 아래에 있는 일인지 가슴 먹먹하다”고 했다. 코로나19까지 겹쳐 더 많은 이들이 사회적 낭떠러지로 밀려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진하게 배어 있는 독자 의견도 쏟아졌다. ▷실직 파산 사별 이혼 질병, 혹은 사고 배신 무지, 바보 같은 순진함…. 두 손 손가락 사이를 미끄러지듯 빠져나가는 한 가닥 희망의 끈마저 끝내 붙잡지 못하고 먼 길 낭떠러지 같은 ‘증발의 심연’으로 빠져 들어갔던 사람들의 사연은 다양하고 절절하다. 지금도 사회 어디에선가 하얀 밤을 새우는 ‘예비 증발자’들이 있다. 독자들은 이들이 어떻게 다시 돌아오는지, 돌아올 수 있는지를 추적해 달라고 했다. 개인 사회 국가가 각각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해 보자는 주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다. 수년 전 대구에서는 38세 남성이 배가 고파 포장마차에서 생닭 2마리를 훔치다가 붙잡혔는데 주민등록도, 호적도 없는 ‘무적자(無籍者)’였다. 갓난아기 때 보육원에 맡겨졌다가 뛰쳐나온 뒤 노숙하며 전전한 것이다. 거주지 신고를 하지 않고 떠도는 ‘거주 불명자’도 40여만 명에 달한다. 사회의 경계선에 있는 사람들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극단적인 증발인 ‘자살’이 개인적 선택이 아니라 사회제도의 영향에 의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정보기술과 생명기술의 융합으로 극소수의 사람들은 신적인 능력을 갖는 ‘호모 데우스’가 될 수도 있지만 수십억 명의 사람들을 고용시장에서 밀어내 사회와의 관련성을 잃고 하찮은 존재로 전락한 ‘무관한’ 사람이 되게 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경쟁이 치열하고 서로를 비교하기 좋아하는 폐쇄적인 집단문화일수록 ‘패배자’들은 증발을 택한다. ‘사회적 자살자’인 증발자들이 개인적으로만 해법을 찾기에는 너무 버거운 시대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2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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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회의원 감축[횡설수설/구자룡]

    이탈리아는 2018년 3월 총선이 끝난 후 86일간 정부 구성을 하지 못했다. 가까스로 지명된 주세페 콘테 총리도 대통령과의 내각 구성 불화로 6일 만에 사임했다. 유럽에서 ‘고비용 저효율’ 정치의 상징처럼 불린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랬던 이탈리아가 정치의 세계에서 난제 중 난제로 꼽히는 의원 수 줄이기에 성공했다. ▷21일 이탈리아 국민투표에서 70% 찬성으로 상하원 의원 수를 3분의 1 이상 줄이는 개헌안이 통과됐다. 945석 중 345석을 없앤다. 이탈리아는 무솔리니 같은 독재자가 다시 나오지 못하도록 ‘큰 의회’를 선택했으나 정당 난립, 포퓰리즘 등 부정적인 요소만 누적됐다. 의회 비대화가 이탈리아병(病)의 근원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돼 1983년 이래 7번의 감축 시도가 있었지만 번번이 좌절됐다. 이번에도 의원들의 저항이 거셌지만 코로나19 방역 실패로 많은 인명 피해가 나고 주력 산업인 관광업이 붕괴된 상황이 결정적 요인이 됐다. ▷적정 의원 수 기준은 나라마다 사정이 다를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34개국의 의원 정수를 조사한 결과 10만 명당 의원 수는 영국이 2.15명으로 가장 많다. 한국은 0.58명, 이탈리아는 1.56명이다. 미국이 0.16명으로 가장 적지만 연방제여서 단순 비교가 어렵다. OECD 평균은 0.97명이다. ▷한국의 의원 수는 ‘양적’ 기준으로만 보면 적은 편이지만 ‘질적’ 측면은 다르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 대비 의원 보수는 한국이 5.27배로 일본 이탈리아에 이어 세 번째다. 일부 유럽 의회에서는 의원 2명당 한 명의 비서를 두지만 우리는 의원 1명당 보좌진 8명을 둘 수 있다. 보수 대비 일의 효과성은 노르웨이를 1.0으로 잡을 때 미국 0.16, 일본 0.07, 한국은 0.01로 OECD 국가 중 26위다. 이탈리아는 0.00이었다(서울대 행정대학원 정부경쟁력 연구센터 보고서). ▷우리 제헌국회가 200석 의석으로 출발한 이래 의원 수가 줄어든 것은 3대 국회에서 4대 국회로 넘어갈 때, 5·16군사정변 이후 6대 국회가 출범할 때, 그리고 15대에서 16대로 넘어갈 때 등 모두 세 차례였다. 이후 의원 수는 꾸준히 증가했다. 단지 헌법에 명시된 ‘200인 이상’ 규정 때문에 300명 선을 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범여권이 의원 수 증가를 밀어붙이다가 끝내 포기한 것도 여론의 거센 반발 때문이었다. 국민 여론과 달리 우리 정치인들 사이에선 의원 수 감축은 ‘금기어’다. 하지만 국회가 국민의 시선과 계속 동떨어져 간다면 의원 수 감축이 먼 나라 일이 아닌 날이 올 것이다.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20-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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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가 강둑을 무너뜨렸다고?… 수압붕괴설 현장에선 실소[논설위원 현장칼럼]

    “4대강 보가 물길을 막아 강의 수위와 수압을 높여 상류 제방을 붕괴시키고 홍수 피해를 키웠다.” 지난달 9일 경남 합천창녕보 상류 250m 지점 낙동강 제방이 무너져 뭉텅 잘린 곳으로 누런 흙탕물이 쏟아져 들어오자 여당과 환경단체, 그리고 일부 학자가 이런 주장을 폈다. 보가 수질을 악화시킨다고 줄기차게 주장해왔던 그들이 이번에는 보가 홍수를 유발하고 피해를 키웠다는 비난까지 추가한 것이다. 보는 둔치보다 낮은 높이로 설치돼 평소에는 물이 넘쳐흘러 ‘수중보’로도 불리는 작은 구조물이다. 표적이 된 합천창녕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가뭄 대비 보에 ‘홍수 책임’ 덤터기 지난달 26일 필자가 합천창녕보를 찾았을 때 보 상류 좌안(물 흐르는 방향 기준) 창녕군 이방면의 제방 30m가량이 무너진 현장은 흙과 자갈을 메워 파란색 포장을 덮고 모래주머니로 눌려 있었다. 무너진 제방은 강 안쪽 둔치에 ‘우산 2 배수문’이 있고 배수문에서 제방 반대편 농지까지는 바닥으로 콘크리트 암거 배수구가 연결돼 있는 곳이었다. 현장 취재에 동행한 신현석 부산대 토목공학과 교수는 “암거 배수구와 제방 사이는 흙과 콘크리트로 재료가 달라 물이 스며들면서 제방 붕괴로 이어진 것”이라며 “토목학에서 ‘재료 분리’로 부르는 현상이 붕괴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제방 바닥에는 가로 2m, 세로 1m 크기의 배수구 3개가 나란히 설치돼 있었다. 2002년 8월 태풍 ‘루사’ 때 붕괴된 낙동강의 함안군 백산제와 합천군의 광암제, 가현제 등 3개 제방도 모두 배수장이 있던 부위가 뚫렸다. 이번에 붕괴된 제방은 2004년 완공됐으며 폭 약 2.5m로, 위에는 자전거 전용 아스팔트 도로가 깔려 있다. 배수문이 없는 곳은 멀쩡했다. 방송 화면만 보고 ‘수압붕괴설’을 주장했던 일부 토목 전문가는 현장에 와 보고 바로 ‘재료 분리’를 인정했다고 한다. 수위 수량 수압 영향 미미한 보 합천창녕보는 낙동강 양쪽의 창녕군 이방면과 합천군 청덕면을 잇는 675m 길이의 공도교(橋) 아래에 설치됐다. 보 전체 길이 328m 중 110m(33.5%)는 고정 구조물(고정보)이고 나머지는 열고 닫는 수문이 있는 가동보다. 평소에는 가동보도 막아 농업용수 등으로 쓰고 5000kW의 수력발전기도 돌린다. 남는 물은 10.5m(이하 해발) 높이의 보 위를 넘어 흘러간다. 보 관리사무소에 따르면 제방이 붕괴된 지난달 9일 오전 4시경 강물 수위는 17.6m였다. 보 월류 수위 10.5m보다 7.1m 높았고 계획 홍수위(홍수 관리를 위해 상한으로 정한 수위)보다 1m, 제방 높이 21.8m보다는 4.2m 낮았다. 강물이 차고 넘쳐 둑이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평시에 보가 물을 막아 상류 100∼200m 구간의 수위가 높아지는 현상을 ‘배수(背水·back water) 효과’라고 하는데 그 높이는 10∼20cm다. 보를 몇 m 이상 훌쩍 넘겨 강물이 흘러넘치는 홍수 때는 의미가 없고 그때는 가동보도 열린다. 보 때문에 수압이 높아졌다면 보의 위와 아래의 수위 차이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제방 붕괴 2시간 후쯤 측정된 합천창녕보의 상하류 수위 차는 0.18m였다. 비슷한 시간에 측정된 낙동강 전체의 8개 보 중 가장 작았다. 그뿐만 아니라 수위 차가 가장 컸던 구미보(3.99m)나 상주보(3.54m) 등에서도 제방 붕괴가 없었다. 통상 1m 이내의 수위 차는 강 상하류의 자연 수위로 간주된다. 당시 수량은 어떨까. 평상시 보를 막아놓을 때 위로 넘쳐흐르는 물의 양은 합천창녕보가 초당 약 150m³로 계획 홍수위까지 물이 찼을 때의 양 1만7000m³에 비하면 113분의 1이다. 창녕함안보는 그 비율이 110분의 1로 대부분의 보가 비슷하다. 그런 데다 집중호우 등으로 물이 불어나면 가동보는 모두 개방된다. 고정보가 있는 구간은 가동보 구간의 유속이 빨라져 흘러 내려가는 수량에는 큰 차이가 없다. 홍수로 강에 물이 가득 찰 때는 보 구조물 부분이 전체 수량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미미한지 보여준다.교각-보 모두 홍수위 고려한 시설 “홍수 때 물 흐름을 빠르게 하려고 강변의 나무 한 그루도 베어내는데 강 일부를 가로지르는 고정보가 물길을 막는 것은 분명하다.” 일부 환경단체 등의 ‘보 홍수 책임론’의 주장에서 등장하는 비유다. 고정보가 물의 흐름을 막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보는 가뭄에 대비하고 농업용수, 수변시설 등을 위한 이수(利水) 목적으로 건설하면서도 홍수 때 물길을 막는 것을 보정하는 작업도 병행된다. 박석순 이화여대 환경공학과 교수는 “보를 설치하기 전에 강물이 흐르는 수직 단면을 뜻하는 ‘통수(通水) 단면’을 넓혀 보로 인해 줄어드는 단면을 보완한다”며 “이를 통해 ‘계획 홍수위’가 높아지지 않도록 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바닥을 준설해 보 높이를 낮추거나 둔치를 깎거나 강변을 넓히기도 한다”며 “이 같은 처방은 교각을 세울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말했다. 강이나 하천에 구조물을 세울 때 얼마나 ‘통수 단면’을 보정해야 하는지는 토목공학에서는 기초 상식이라는 것이다. 4대강 16개 보 중 죽산보(1cm)와 낙단보(9cm)는 보 설치 후 홍수위가 약간 올랐고 나머지는 같거나 오히려 낮아졌다. 합천창녕보는 보 건설 이후 홍수위가 76cm 낮아졌다. 신 교수는 “보의 이수 효과나 ‘통수 단면’ 보정 등은 무시한 채 단지 물길을 막는다며 철거를 주장하는 것은 교각이 물 흐름을 막으니 다리를 철거해야 한다는 논리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보 때문에 수압이 높아져 합천창녕보 상류의 제방이 무너졌다는 주장이 얼마나 근거가 빈약하고 보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주장인지를 현장은 말해준다. 여기에 보가 홍수 막는 역할을 못 했다는 지적을 하는 것은 4대강 사업에 대한 반대 심리가 보에 대한 엉뚱한 공격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합천창녕보 상류 제방이 무너진 다음 날 “4대강 보가 홍수 조절에 어느 정도 기여했는지를 평가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한 전문가는 “대통령의 지시는 가뭄 막는 시설에 홍수 조절 효과를 조사하겠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댐-지형 관리 중요성 일깨운 호우 역대 최장 장마에 ‘500년 빈도’의 집중호우로 많은 피해가 발생한 이번 홍수에서 정작 긴요한 댐 관리의 중요성은 소홀히 했다. 섬진강댐과 합천댐 하류에서 피해가 컸던 것은 많은 비가 예보되었는데도 댐 물을 빼지 않고 있다가 정작 집중호우가 내릴 때 많은 물을 방류한 것이 한 요인으로 지목됐다. 낙동강 지천 황강 범람의 원인이 된 합천댐의 경우 2015년 7월 저수율이 45.9%였으나 올해 7월에는 84.4%였다. 댐 관리가 환경부로 넘어온 뒤 갈수기에 녹조를 막으려고 물을 너무 많이 가둬 놓은 것은 아니었는지 등 댐 저수율 관리 부실은 앞으로 규명돼야 할 사안이다. 이번 홍수는 강의 본류와 지천이 직각으로 만나는 곳에서 큰 피해가 발생한 것이 특징이었다. 지난주 찾아간 경남 하동의 화개장터. 섬진강과 화개천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장터는 지붕까지 물에 잠겼다가 빠진 뒤 보름이 지났지만 문을 연 가게는 거의 없었다. 한두 곳 문을 연 식당 벽에는 천장 근처까지 물이 찼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곳에 큰 홍수 피해가 난 것은 집중호우, 섬진강댐 수위 조절 문제도 있었지만 지형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철 호남대 교수는 “섬진강 본류와 지천인 화개천이 직각으로 만나는데 수량이 많고 유속이 빠른 본류에 막혀 지천의 물이 빠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강물이 역류해 합류 지점 화개장터 침수의 한 요인이 됐다”고 말했다. 이번 홍수는 지류 지천의 제방이 붕괴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하는 것은 물론 지류 지천의 물이 원활히 빠져나가도록 섬진강이나 낙동강 본류의 ‘물 그릇’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현장은 보여줬다. 4대강 사업과 보의 환경 영향 등에 대해서는 여권과 환경단체 등에서 비판과 시비가 계속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집중호우와 홍수는 4대강 사업에서 노후 제방을 보강하거나 강 주변에 저류지 등을 건설했던 ‘홍수 방지 계획’이 다시 주목받는 계기가 됐다. 대형 재난의 위력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정확한 문제와 미비점을 찾아내 보강하는 것이 과제다. ‘합천창녕보 때문에 상류 둑이 터졌다’는 ‘현장감 제로’의 인식으로는 해결책은 없고 공허한 정치 구호만 남을 뿐이다. 창녕·하동=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20-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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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로나 후유증’ 공포[횡설수설/구자룡]

    “퇴원 165일째지만 계속되는 후유증은 크게 5가지다. 잠깐 전 일도 기억 안 나고 머리가 멍한 ‘브레인 포그(Brain Fog)’, 가슴과 위장의 통증, 피부 변색과 건조증, 만성 피로….” ‘부산 47번 환자’ 박현 교수(48)가 17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은 코로나19가 완치 판정을 받았다고 해도 끝이 아닐 수 있음을 경고한다. 무증상 감염, 전파력과 치사율이 동시에 높은 특징 등에 이어 치료 후에도 심각한 후유증을 남길 수 있다는 공포까지 더해져 코로나와의 전쟁을 더욱 힘겹게 하고 있다. ▷할리우드의 여배우 얼리사 밀라노는 최근 인스타그램에 퇴원 후에도 4개월 동안 현기증, 위통, 숨가쁨, 단기 기억력 상실, 불쾌감 등을 겪고 있고 머리카락도 뭉텅뭉텅 빠진다며 사진을 올렸다. 영국 찰스 왕세자와 미국프로농구 선수 뤼디 고베르는 완치 후에도 후각과 미각이 돌아오지 않았다.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19 첫 발병 이후 9개월이 되어가면서 나오는 연구나 증상 보고들은 코로나는 더 이상 호흡기 질환만이 아님을 보여준다. 바이러스가 전신을 감염시켜 폐와 뇌, 피부까지 파고들어 브레인 포그와 만성 피로, 심장부정맥과 심혈관 합병증 등을 일으킨 사례들이 보고된다. 특히 우려스러운 것 중 하나는 혈소판 과잉반응이다. 출혈 시 피를 멎게 하는 기능이 혈관 내에서 일어나면 심장마비나 뇌졸중을 유발할 수도 있다. ▷급성 호흡기 질환인 사스도 완치 환자의 27%가량이 수년간 만성피로증후군을 겪었다는 연구가 있지만 코로나의 후유증 범위는 아직 다 드러나지도 않았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코로나가 섬망증(환각 초조 과잉행동을 동반한 정신질환), 우울증 등도 유발할 수 있다며 ‘전례 없는 정신보건 위기’라고 경고했다. 미국 파우치 소장은 “바이러스 한 종이 이처럼 광범위한 증상을 일으키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항체의 단명’ 가능성도 제기된다. 중국 연구진은 무증상 감염자의 40%가 두 달 뒤 항체를 잃었다고 발표했다. 미국의 29세 남성 변호사는 두 번째 확진을 받고 치료 중인데 치료돼도 또 감염될 수 있다고 의료진은 우려한다. ▷미국의 보고를 보면 걸렸는지도 모른 채 넘어간 이들이 많지만, 발병해 완치된 뒤에도 “짧은 대화도 하기 어려워 몇 분마다 호흡기를 사용”하거나 “극도의 피로감으로 단 1분만 걸어도 지친다”고 호소하는 젊은이들도 있다. 완치 후에도 일부는 각종 후유증으로 ‘건강과 질병의 중간 지점’의 삶을 살 수도 있다. 코로나는 ‘치료보다 예방이 우선’ 정도로는 부족한, 절체절명의 심정으로 막아야 하는 난적이다.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20-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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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틱톡과 위챗 차단[횡설수설/구자룡]

    중국 벤처 1세대를 대표하는 BAT(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와 샤오미는 “태풍이 부는 길목에 서면 돼지도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샤오미 설립자의 말처럼 변화의 바람에 재빨리 올라타 성공을 이뤘다. 2세대 벤처는 “산에 호랑이가 있는 줄 알아도 기어이 산에 오른다”며 기존 강자들에 도전하며 성장했다. 최근 미중 갈등의 초점으로 떠오른 위챗은 1세대 벤처 텐센트가 운영하는 중국판 카카오톡이고 틱톡은 2세대의 대표 주자다. ▷중국의 유니콘(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의 비상장 기업) 바이트댄스가 2016년 내놓은 ‘15초 동영상’ 제작 공유 앱 틱톡은 1020세대가 선호하는 짧은 동영상에 스토리를 입히는 전략으로 급성장했다. 세계 150여 개국에서 75개 언어로 콘텐츠가 만들어지고 공유되며 가입자 10억 명 중 1억6500만 명이 미국인이다. 중국의 ‘국민 메신저’ 위챗 가입자는 13억 명이나 되지만 미국 내 가입자는 수백만 명 정도로 화교가 대다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연방공무원의 틱톡 및 위챗 사용을 금지하고, 두 앱 소유 기업과 거래도 막는 행정명령에 6일 서명했다. 사용자 개인정보가 중국 공산당에 흘러간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내놓지 않았다. 트럼프는 틱톡의 북미 유럽 인도 사업의 인수를 추진하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MS)에 제동을 걸었다가 다시 수익 일부를 정부에 내는 조건으로 인수에 동의한다고 말을 바꾸기도 했다. MS 창업자인 빌 게이츠는 “거래 원칙이 완전 이상하다”며 불만스러워했다. ▷미국 기업 애플도 이번 조치의 유탄을 맞을까 봐 걱정이다. 중국 내 여론조사에서 “위챗 앱을 애플 앱스토어에서 내려받지 못하면 아이폰 대신 다른 스마트폰을 사겠다”는 응답이 90%가 넘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애플의 시장점유율은 4위로 10% 안팎이지만 올해 2분기에만 1300만 대의 아이폰을 팔았다. 나이키 스타벅스 등 중국 시장에서 위챗을 통해 고객을 유치해온 미국 기업들도 불안해한다. 몇몇 중국계 변호사들은 미국 내 위챗 사용자들을 모아 트럼프의 행정명령을 무효화하는 소송에 나서기로 했다. ▷중국 정부는 방화벽을 쳐 중국인들의 페이스북, 유튜브 접속을 막고 있다. 그래도 다수의 중국인들은 사설 유료 서비스를 이용해 유튜브 등에 접속한다. 틱톡이나 위챗 사용을 금지해도 이 앱을 선호하는 미국 사용자들은 우회로를 찾을 것이다. 틱톡과 위챗의 차단 같은 인위적 방법으로 정보화 시대 지구촌에 별 실효성 없는 문턱을 인터넷 공간에 만드는 것이 과연 명분과 실리에 맞을지, 트럼프의 선택이 걱정스럽다.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2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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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 위의 아마존강’[횡설수설/구자룡]

    서울은 과거 여름 장마철 상습 침수 지역이 많았으나 현재는 30년 빈도, 시간당 95mm의 강수량 배수 능력을 갖춰 물에 잠기는 피해는 크게 줄었다. 2011년 7월 하루 301.5mm의 비가 3일간 내려 우면산 산사태가 났을 때는 시간당 최대 80mm가 내렸다. 최근 수도권과 강원 영서지방에 ‘양동이 폭우’가 쏟아져 속수무책에 가까운 큰 피해가 발생하고 있는데 시간당 최대 120mm가 쏟아진 곳도 있다. 비는 내리는 양보다 짧은 시간 몰아치는 ‘집중호우’가 문제다. 한반도는 집중호우 조건이 수두룩하다. ▷한반도는 계절풍인 열대 몬순의 영향을 받아 우기가 집중되는데 여름철에 태평양에서 습한 남동풍이 불어와 장마전선을 만들어 한반도 상공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한 해 내릴 비의 60% 이상을 뿌린다. 적도 인근 태평양 온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지는 엘니뇨현상은 기후변화로 더욱 강해진다. 이로 인해 태풍은 더욱 사나워지는데 길목에 있는 한반도를 매년 몇 개씩은 빼놓지 않고 지나간다. 올해는 시베리아 폭염으로 북극의 냉기가 밀려 내려오는 ‘블로킹 현상’까지 겹쳐 장마가 50일을 넘겨 역대 최장 기록이다. 그런데 긴 장마에 엄청난 폭우까지 동반한 것은 ‘하늘 위의 아마존강’ 격인 대기천(大氣川·atmospheric river)의 영향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대기천은 ‘중위도 저기압의 따뜻한 지역에서 고위도 지역으로 수증기가 이동하면서 생긴 가늘고 긴 수증기 통로’로 정의된다. 일정 시간을 기준으로 수직 단면적의 대기를 지나는 수증기의 양에 따라 ‘약함’에서 ‘예외’까지 5등급으로 구분된다. 지구 상공에는 3∼5개의 대기천이 수증기 순환을 위해 떠돌고 있는데 양이 많은 것은 지구촌 최장인 아마존강의 2배, 미국 미시시피강의 15배인 것도 있다고 한다. 지난해 2월 캘리포니아 북부 해안 상공에 형성된 대기천은 폭이 563km, 길이는 2575km였다. 지난해 10월 일본 하코네에 태풍 하기비스가 시간당 900mm 이상을 쏟아낸 것도 태풍에 대기천이 꼬리처럼 붙어 동반 북상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태풍에 대기천 대비까지 골칫거리가 하나 더 늘었다. ▷한국도 여름철 남부 지역 강수량의 35% 이상은 대기천에 의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지구 온난화로 더욱 자주 나타날 수 있어 ‘대기천 예보’도 준비 중이라고 한다. 그런 데다 지난해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이 남해 고흥 연안 지역 퇴적물로 과거 9000년 동안 집중호우 기록을 보니 3가지 주기 중 요즘이 1550년 주기와 780년 주기의 정점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당분간 ‘폭우 장마’가 계속된다는데 ‘천시(天時) 지리(地理)’ 조건이 불리하니 ‘인화(人和)’로 수해를 극복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할 때다. 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2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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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신 3상 시험[횡설수설/구자룡]

    18세기 영국 글로스터셔의 개인병원 의사 에드워드 제너는 한 우유 짜는 처녀가 천연두에 걸리고도 아무 증상이 없는 것을 발견했다. 알고 보니 전에 우두(牛痘)에 걸렸을 때 생긴 항체가 천연두도 막아낸 것이었다. 제너는 천연두를 막는 우두 항체를 가진 사람이 많은 것에 착안해 소의 피부 반점에서 우두를 직접 추출해 인류의 첫 백신을 개발했다. 그 지방 사람들은 요즘으로 치면 ‘백신 3상 시험’ 참가자나 마찬가지다. 백신(VACCINE)이 암소를 뜻하는 라틴어 ‘VACCA’에서 나온 연유이기도 하다. ▷코로나19 전 세계 확진자가 1600만 명을 넘어 2차 대확산 우려가 높아지는 가운데 백신에 대한 기대와 개발 열기도 높아지고 있다. 미국 모더나와 화이자는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27일 나란히 백신 3상 시험에 들어갔다. 전 세계적으로 165개 백신 후보 물질에 대한 연구가 진행 중인데 3상 단계에 진입한 것이 6개다. 모더나는 11월경 시험을 마치고 내년부터 한 해 5억∼10억 회 투약분을 생산한다는 계획이다. 백신 개발에 5∼10년이 필요하다는 말이 무색한 속도전이다. ▷3상 시험은 코로나 백신 시대의 문턱에 다다랐음을 알리는 청신호다. 먼저 수십 수백 명을 대상으로 안전과 효능을 시험하는 1, 2상을 거쳐 수만 명을 대상으로 하는 마지막 관문 3상을 통과하면 백신 판매가 시작된다. 모더나는 미국 89개 지역에서 3만 명 지원자를 모아 백신과 소금물 플라세보 제품을 주입하는 두 그룹으로 나눠 28일 간격으로 두 차례 접종한다. 피시험자는 물론 시험을 진행하는 의료진도 누가 진짜 백신을 맞았는지 모르게 한다. ▷백신 3상 시험은 시험 대상자들이 자연 감염되어야 하므로 시간이 오래 걸리고 실패율도 높다. 모더나 등이 미국은 물론 브라질 남아공 등 확진자가 급증하는 곳에서 시험을 진행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모더나는 최소 150명 이상이 감염돼 그중 60% 정도에서 항체가 생기면 백신 개발에 성공한 것으로 결론 내릴 계획이다. 하지만 코로나19는 S, V, GH형 등 변종이 날로 늘어나고 일부는 항체를 무력화해 백신 개발의 앞날을 너무 낙관할 수만은 없다. ▷빌 게이츠가 최근 문재인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한국의 한 제약업체를 거론하며 한국이 백신 개발에서 앞서가고 있다고 했지만 ‘격려성’ 발언이다. 한국 업체는 아직 1상 시험도 마치지 못했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백신 패권’을 향한 경쟁은 제약, 바이오, 정보기술(IT) 경쟁의 종합 결정판이다. 기업과 연구자의 분발, 사회와 국가적 지원이 필요하다.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20-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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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싼샤댐의 안전[횡설수설/구자룡]

    나일강 아마존강에 이어 세계 세 번째로 긴 창장강(長江·양쯔강)은 중국 중심부를 동서로 흐르는데 그 유역은 매년 홍수 피해로 몸살을 앓았다. 2000여 년간 216차례의 대홍수가 기록됐다. 1931년 여름엔 홍수로 14만5000명이 사망하고 1998년에는 1800여 명이 숨졌다. ▷홍수 피해는 2006년 싼샤(三峽)댐 완공 후 줄어들었다. 쑨원 장제스 때부터 구상된 ‘만리장성 이래 최대 토목공사’의 완공이었다. 비교적 폭이 좁은 곳을 골라 지었는데도 댐 길이가 2335m로 후버댐(221m)의 10배가 넘고 저수 용량은 소양호의 13배를 넘는 세계 최대 수력발전소 댐이다. 싼샤라는 이름은 상류의 물이 약 200km 길이의 기암절벽 협곡 3곳을 지나기 때문에 붙여졌다. 짓기 전에 서울 면적의 약 2배 면적이 수몰돼 물에 잠기는 유적만 1200곳이 넘고 120만 명 이상 이주민 발생, 환경 재앙, 심지어 높은 수압으로 지진 발생 우려가 있다는 등 문제점이 제기됐지만 치수입국(治水立國) 대의에 밀렸다. ▷최근 중국 남부에서 한 달 이상 폭우가 계속되면서 싼샤댐의 구조물 변형설, 붕괴설이 나오는 등 안전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한때 홍수 통제수위(145m)를 넘어선 것은 물론이고 최고 수위(175m)에서 불과 11m 아래까지 높아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대만의 한 토목전문가는 친민진당 계열 쯔유(自由)시보 기고에서 “통제수위에서 불과 2, 3m밖에 안 넘었는데 하류 도시 이창이 수몰될 위험에도 불구하고 방류한 것은 댐 안전에 애초부터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중국건축과학연구원 황모 연구원은 최근 SNS에서 “마지막으로 말한다. 이창 아래 지역의 주민은 달아나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중국 관영언론은 대만의 친민진당 언론과 전문가들이 불순한 의도로 퍼뜨리고 있다고 반박한다. ▷싼샤댐이 부실 공사로 붕괴될 수도 있다는 설득력 있는 근거는 제시된 적이 없다. 다만 붕괴될 경우 거대한 재앙이 초래될 것이라는 각종 시뮬레이션이 나온다. 중남부 지역에서 4억∼6억 명의 이재민이 발생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댐이 무너져 100억 t 이상의 물이 시속 수십 km로 쏟아지면 이창 우한 난징 상하이 등 하류 대도시 침수는 물론이고 공업시설, 군사시설도 초토화될 수 있다. 강과 중국 동부 해안을 따라 지어진 원자력발전소가 붕괴되면 동북아 주변 국가까지 방사능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다. 담수가 한반도 남부 바다와 서해로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와 바다 염분 농도가 달라지면 생태계 파괴로 한국도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싼샤댐 안전은 주변국에도 큰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20-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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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로로 평생 강제노역… 죽어서도 이름 숨기는 ‘43호’ 낙인[논설위원 현장칼럼]

    14일 오후 9시 서울 도봉구 쌍문동의 한 중소병원 장례식장 2호실. 조문객이 많지 않고 조화 화환도 2개만 놓여 있어 쓸쓸했다. 영정 앞에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 명의로 보내온 검은색 조기(弔旗)가 놓여 있어 눈길을 끌었다. 고인은 북한에서 국군포로로 52년간 억류되어 있다가 15년 전 탈북한 이모 씨(90). 그의 별세로 1994년 조창호 소위 이후 탈북 귀환한 국군포로 80명 중 생존자는 22명만이 남게 됐다. 이 씨는 살아서 이름과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고 유족은 부고도 내지 않았다. 북에 두고 온 부인과 두 딸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6·25전쟁에 목숨을 걸고 참전했다 붙잡혀 수십 년간 북한 땅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사선(死線)을 넘어온 탈북 국군포로 대부분은 아직도 죽어서도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는 상황이다.‘金씨 일가’에 법적 책임을 묻다 서울중앙지법은 7일 탈북 국군포로 노모 씨(91)와 한모 씨(86)가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북한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두 사람에게 각각 21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번 소송을 도운 탈북민 인권단체 ‘물망초’의 박선영 이사장(동국대 교수)은 “북한에 대한 한국 법원의 재판권을 인정하고 손해배상 명령을 내린 최초의 판결”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지난해 3명, 올해 들어서도 2명째 고령의 국군포로가 세상을 떠났다. 유엔사 자료 등에 따르면 정전협정 후 공산군에 붙잡힌 국군포로 중 8343명만이 인도되고 8만여 명은 북한에 억류됐다. 이들은 대부분 북한에서 수용소를 거쳐 탄광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생존자는 2014년 560여 명이 가장 최근에 파악된 숫자다. 국군포로에 대한 첫 배상 판결에 통일부 대변인은 “판결을 존중한다”면서도 “다른 사례에 일반화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번 판결을 다른 국군포로는 물론이고 납북 피해자, 천안함 폭침, 박왕자 씨 피격 사건 등 북한의 불법 행위로 피해를 입은 국민이 법원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는 시작으로 삼아야 한다는 기대와는 많은 시각차가 있다. 물망초 국군포로송환위원회 정수한 위원장(울산대 교수)은 “국군포로의 한과 눈물을 달래기에는 배상금이 턱없이 작은 액수지만 북한의 강제노동 책임을 확인한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죽어서라도 고향에 묻히고 싶다” 배상 판결이 나온 사흘 뒤 서울 서초구 방배동 물망초 사무실에서 소송을 낸 한 씨를 만났다. 한 씨는 “북한에 얼마나 더 생존해 있는지 모르는 국군포로의 귀환을 위해 정부가 더 노력해 달라”고 호소했다. 한 씨는 “북에 있는 국군포로 중에는 죽어서라도 남한의 고향 땅에 묻히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북한은 국군포로들을 억류한 뒤 ‘내무성 건설대’를 조직해 탄광에서 강제노역을 시켰다. 국군포로로 강제노역 건설대가 조직됐다는 사실은 2000년 7월 탈북한 유영복 씨의 증언과 수기집 ‘운명의 두 날’을 통해 처음 알려졌다. 건설대는 1701∼1709부대로 나뉘어 각기 다른 지역과 탄광에 분산돼 강제노역을 했다. 한 씨도 ‘1709부대’ 소속으로 여러 탄광을 전전했다고 한다. 한 씨는 실명과 얼굴 노출은 안 된다며 인터뷰를 진행한 3시간여 동안 줄곧 ‘국가유공자’가 앞에 새겨진 모자를 눌러썼다. 북한에서 결혼해 3남 2녀를 두었는데 탈북할 때 다른 도시에 살고 있던 큰아들과 막내딸 등 2명은 같이 오지 못해 자신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저항운동 ‘무궁화 청년단’ 사건 17세 중학생 때 마을 친구들과 함께 자원입대한 한 씨는 강원 양구의 7사단 수색소대에 배치됐다. 그가 입대한 1951년 말은 전선이 교착돼 수색소대는 최전선에서 일진일퇴를 벌이는 가장 위험한 임무를 맡았다. 한 씨는 참호에 수류탄을 던지며 습격해 오는 중공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됐고 당시 이마에 입은 상처는 지금도 선명히 남아 있다. 한 씨는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당시 평안북도 우시수용소에 있었다. 수용소의 한 관리자는 자신이 한국군 장교 출신으로 여수·순천 10·19사건(여순반란사건·1948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자랑해 국군포로들이 속으로 분노했다고 한다. 한 씨는 수용소에 이어 함경북도 신창탄광 회령탄광 고건원탄광을 거쳐 하면탄광에서 61세가 되어서야 풀려났다. 40년 넘게 강제노역을 한 것이다. 한 씨는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국군포로 출신들의 저항운동인 1958년 ‘무궁화 (장교) 청년단’ 사건도 증언했다. 청년단은 아오지탄광 출신을 주축으로 약 80명 규모였다. 그해 8월 발각돼 전원 사형될 때까지 1년여간 비밀리에 연락을 하며 활동했다고 한다.살인적인 탄광 강제노동 한 씨는 고건원탄광은 갱도 내에 메탄가스가 많아 광원들이 쓰는 모자의 안전등 때문에 점화돼 폭발하는 사고가 많아 자신이 아는 사망자만도 15명에 이른다고 전했다. 가까이 지냈던 위생 군의관 출신 중위 강점출과 경북 안동 출신의 안종길 등 두 사람은 이름과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다고 말했다.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들이 탄광에서 임금은커녕 안전장치도 없이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차별 속에 지낸 것은 몇몇 탈북 국군포로의 수기에도 나와 있다. 허재석 씨는 체험수기 ‘내 이름은 똥간나 새끼였다’(2008년 출간)에서 “지하 4000m 탄광 막장에 들어가면 심장이 줄어들고 숨도 가빴다. 끝나면 집에서 땔 석탄을 메고 지하 경사도를 따라 2∼3시간을 걸어야 굴 밖으로 나왔다”고 했다. 그는 “국군포로가 말실수로 잡혀가면 돌팔매로 사는 집 유리창을 모두 깨뜨리고 집을 허물어 버리는 일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첫 탈북 귀환 국군포로인 조창호 소위는 수용소에서 탈주하려다 발각돼 13년형을 선고받았고 교화소와 탄광 노동 생활을 이어갔다. 이미 전사 처리돼 남측 가족들이 제사도 지냈던 그는 43년 만에 돌아왔다. 그는 1980년 탄광에서 은퇴할 때 규폐증과 왼쪽 눈 실명, 작업 중 사고로 왼쪽 다리 절단 등 온몸이 성한 데가 없었다. 가족들도 외면한 ‘43호’ 낙인 북한에서 미송환 국군포로는 ‘43호’로 불린다. 북은 ‘내무성 건설대’로 편입된 이들에게 1956년 내각 명령 143호로 공민증을 발급했는데 ‘43호’는 명령번호를 줄인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결혼해 자녀를 낳으면 배우자와 자녀도 모두 ‘43호’가 된다는 것이다. 47년간 억류됐던 유영복 씨는 수기 ‘운명의 두 날’에서 ‘국군포로’라는 낙인 때문에 입양 자녀와 불편했던 사연도 소개했다. 아들도 ‘43호’ 신분이어서 중학교 졸업 후 상급학교에 가지 못하고, 군에서도 받아주지 않자 자신을 입양한 유 씨를 원망했다고 했다. 2010년 1명이 돌아온 뒤 국군포로 탈북은 끊어졌지만 탈북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2017년 1월 중국까지 넘어온 K 씨는 둥베이(東北) 지방에 체류하다 2월 초 북한 보위부 특수반에 납치돼 북송됐다. 당시 87세였다. 중국 현지의 한국 공관에서 “한 달 후 영사관에 들어오라”는 말을 듣고 기다리다 붙들린 것이다. K 씨에 앞서 2005년 1월 중국까지 나왔다 다시 북송된 한만택 씨(당시 73세)도 어이없는 정부의 실수로 북송된 경우다. 한 씨의 가족들은 탈북 한 달여 전 한국 외교부에 도움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보냈다. 그런데 엉뚱한 부서에 전달돼 탈북 이후 도움을 받지 못했다. 한 씨는 탈북 이튿날 옌지의 한 호텔에서 중국 공안에게 붙잡혀 북송됐다. 그는 탈북 전 사망한 것으로 가장하기 위해 가묘(假墓)까지 만들었던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했다.국군포로 방치, 국가 의무 팽개친 것 북한은 공식적으로 국군포로의 존재를 부인하고 ‘전쟁 시기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자’라고 부른다. 2000년 첫 남북 정상회담 이후 한국 정부는 국군포로를 이산가족의 일부로 분류해 협의하기로 했다. 실제로 이산가족 상봉 때 납북자와 국군포로를 ‘특수 이산가족’으로 분류해 만나도록 했다. 정부는 국군포로가 북한에서 국경을 넘을 때는 직접 개입하지 않지만 북한을 벗어난 뒤에는 ‘재외 국민’ 구조 차원에서 나선다고 한다. 휴전협정상 명백히 ‘국군포로’이고 북한에 생존자가 숱하게 남아 있음이 많은 귀환 포로를 통해 확인됐는데도 송환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국가의 기본적인 의무를 팽개친 것이다. 하물며 ‘국군포로’라는 말마저 북한의 눈치를 보아 쓰지 못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국군포로는 탈북 귀환하면 현역병으로 제대 전역식을 치른다. 북에 있는 국군포로는 미귀환 ‘현역 국군 장병’이다. 지금까지 국군포로 수만 명이 북에서 차별과 강제노역 속에 스러져 갔다. 이번 배상 판결은 국가가 국군포로 송환을 위해 무언가를 할 시간이 많지 않음을 다시 일깨워줬다. 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20-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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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로나 백신[횡설수설/구자룡]

    인류가 지금까지 개발한 백신은 총 28종이다. 모두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죽이거나 약화시킨 뒤 인체에 주입해 항체를 만드는 방식이다. 그런데 코로나19 백신을 만들기 위한 인류의 노력은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유전정보를 이용해 바이러스의 특정 부위만으로 백신(mRNA)을 만든다. 코로나19의 치사율과 전파력이 높고 변칙적 특성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미국 바이오업체 모더나가 백신 후보 물질 ‘mRNA-1273’에 대한 1단계 임상시험에서 참가자 45명 전원이 항체가 생겼다고 의학저널에 발표했다. 앞서 5월 45명 중 8명을 우선 검사한 결과 모두 ‘중화항체’가 생겼다고 밝힌 뒤 후속 발표다. 중화항체는 바이러스가 세포에 들어가는 것을 직접 막아준다. 모더나는 연구가 순조로우면 내년 한 해 최대 10억 회 투약분의 백신을 공급할 수도 있다고 추산했다. 미 고위 관리는 “4∼6주 내에 백신 후보 물질 제조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백신 개발 기대를 높이는 소식들이다. ▷하지만 신약이나 백신은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고 투약되면 예기치 않은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통상 백신 개발에는 동물실험과 3단계 임상시험, 그리고 판매 후 임상시험까지 5∼10년이 걸린다. 특히 수만 명에게 백신을 주입해 결과를 기다리는 3상 시험은 최대 난관이다. 모더나 1상 시험 발표만으로 너무 섣부른 기대를 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런데 아직 검증되지 않은 백신을 맞고 인공으로 바이러스에 노출되는 실험에 자원자가 늘고 있다. 미국 시민단체 ‘하루라도 빨리’가 모집하는 ‘인체 유발 반응 시험(HCT)’ 지원자가 15일 현재 140개국 3만1200여 명에 달한다. 위험을 무릅쓰고 나선 ‘백신 개발 전사’들이다. 기존의 3상 시험은 백신 주입 후 자연감염을 통해 항체 생성을 검증해야 해 오랜 기간이 걸렸는데 이들 자원자의 헌신으로 3상 시험 기간을 대폭 줄일 수 있다. 또한 미국 정부가 ‘초고속 작전(Operation Warp Speed)’을 벌이는 등 각국이 인허가 과정 패스트트랙을 가동해 백신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미 1300만 명 이상이 확진된 코로나19가 기온이 내려가면 다시 대확산될 것이라는 공포가 커지는 상황에서 인류는 백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백신은 개발돼도 생산량이 제한돼 물량 확보 경쟁이 나타날 수 있다. 국내에서도 국제백신연구소(IVI)와 민간업체들이 백신을 개발하고 있는데 ‘백신 자급’에 대비해야 할 수도 있다. 백신 개발이 코로나 방역 전쟁의 최후 결전장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20-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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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종 코로나[횡설수설/구자룡]

    한 가닥 염기서열로 된 ‘RNA 유전자’ 바이러스는 증식 과정에서 수많은 변종이 빠른 주기로 나타난다. 설계도가 엉클어져 불량이 나오는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바이러스가 생존을 위해 발 빠르게 변신하는 경우도 있다. 사스, 메르스, 에이즈를 일으키는 HIV, 에볼라, 스페인독감, 인플루엔자 등이 모두 RNA 바이러스인데 이들보다 빠르고 더 변칙적으로 변종을 만들어내는 게 바로 코로나19다. ▷요즘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지난해 말 중국 우한에서 처음 등장했던 코로나19와는 크게 다르다. 코로나19는 유전자 염기서열 차이에 따라 크게 S, V, L, G, GR, GH형으로 분류된다. L은 우한에서 처음 등장한 원형이고 S, V는 약간 변이된 수준이다. G계열 세 유형은 중국에서 미국 유럽 아프리카 등으로 건너간 뒤 크게 변이된 것인데 70%가량이 GH형이다. 한국도 5월 초 이태원 클럽 이후 최근 광주와 대전의 집단감염까지 GH형이 주종을 이룬다. ▷중국 연구팀이 최근 완치자 41명의 혈액에서 항체를 추출해 변종 코로나19에 투여한 결과 3명의 항체는 바이러스 무력화에 실패하고 한 항체의 대응력은 거의 ‘0’으로 나타났다. 완치자 혈청이 약발이 듣지 않을 정도로 변이가 이뤄진 이 바이러스가 바로 GH형이다. GH형은 세포 침투력이 2배 이상 높고, 전파력은 10배 이상 늘었다. 한국도 GH형이 많은 지역은 확진자 한 사람이 전파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재생산지수(R0)’가 전국 평균 1.06보다 월등히 높았다. ▷사람을 감염시키는 코로나바이러스는 7종이지만 박쥐에는 5000여 종이 있다. 지금 나타나는 변이는 자가 복제 과정상의 오류에 의한 것이어서 변이 정도가 제한적이지만 코로나19가 다른 코로나와의 ‘재조합’까지 이뤄지면 완전히 다른 변종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이혁민 연세대 의대 교수). 현재도 변종 코로나19는 세포를 뚫고 들어가는 ‘스파이크 단백질’이 변이 전보다 4, 5배 많다. 공성전(攻城戰)에서 성에 걸치는 갈고리가 많고 끝이 뾰족해 침투가 쉬워진 격이다. 무증상 감염이라는 ‘스텔스 기능’에 이어 조준 사격할 ‘타깃’마저 수시로 변신해 치료제와 백신 개발에서 고전이 불가피하다. ▷다만 희망적인 대목은 2, 3월 우한에서 국내에 들어온 S형이나 신천지 대구교회 등의 V형은 철저한 검사와 치료로 거의 사라졌다는 점이다. GH형에 이어 또 어떤 변종이 등장할지 모르지만 방역전쟁에서 끝내는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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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콩의 슬픈 운명[횡설수설/구자룡]

    영국이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뒤 난징에 정박 중인 군함 콘월리스호에서 난징조약을 맺을 때 탐을 낸 곳은 닝보나 상하이 등 창장(長江)강 하류 지역이었다. 청은 상하이 등 5개 도시는 개항만 하고 대신 중원(中原)에서 멀리 떨어진 섬 홍콩을 할양했다. 홍콩이 식민지로 전락했지만 작은 어촌에서 ‘아시아의 진주’로 성장한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하지만 이제 홍콩은 ‘아시아 금융허브’에서 ‘쇠락하는 중국의 한 지방도시’로 퇴행할 수도 있는 기로에 섰다. ▷중국 전국인대가 어제 15분 만에 만장일치로 통과시켜 오늘부터 바로 시행되는 ‘홍콩 보안법’은 중국 정부 직속 국가안보국을 홍콩에 세우고 비밀경찰도 운용하도록 했다. 반중 인사 재판에는 행정장관이 특정 판사를 지명할 수 있다. 테러나 정부 전복, 외세와의 유착 행위자 등에게는 ‘종신형’도 가능하다. 조슈아 웡 등 민주화 운동가들은 ‘반중난항(反中亂港·중국에 반대하고 홍콩을 어지럽힌)’ 인사로 검거될 수 있다. 당장 1일 홍콩 반환 기념식 집회가 금지됐다. 홍콩을 비추던 ‘자유와 민주’의 촛불이 풍전등화다. ▷중국은 지난해 ‘송환법’을 만들려고 군대까지 동원하려다 일국양제(一國兩制) 약속을 존중하듯 물러섰지만 결국 더 강한 발톱으로 움켜쥐기에 나섰다. 홍콩 반환 후 공산화를 우려하던 영국 마거릿 대처에게 ‘50년간 일국양제’를 제안한 것은 덩샤오핑이었으나 시진핑 주석에 의해 내팽개쳐진 것이다. ▷중국이 더 이상 홍콩을 ‘특별행정구’로 취급하지 않자 미국도 홍콩에 대한 특별 지위를 박탈했다. 1992년 홍콩정책법에 따라 부여한 관세, 투자, 비자 발급 등의 우대 조치도 없애기 시작했다. 만약 미국이 ‘보안법’ 제정 관련 인사가 거래하는 홍콩 은행에 세컨더리 보이콧을 행사하고 중국이 희토류 카드까지 꺼내 반격한다면 홍콩발 미중 갈등이 또다시 세계를 흔들 것이다. ▷홍콩에서는 자본과 인재의 엑소더스가 우려된다. 반환 협상 타결 1년 전인 1983년, 톈안먼 사태가 벌어진 1989년, 그리고 1997년 반환 때의 3차례 ‘미니 탈출’에 이어 ‘대탈출’이 일어날지 주목된다. 홍콩 주재 미국 기업의 30%가 탈홍콩을 고려하고 있다는 조사도 나왔다. 홍콩은 한국 경제에도 중요한 중간 거점이다. 대중 수출에서 홍콩 경유 부분을 별도 집계할 정도다. 7000여 명 영주권자를 비롯해 1만7000여 명 한국 교민의 삶의 안정성도 위협받을 수 있다. 세계 2위 경제대국 중국이 국제사회와의 약속을 저버린 대가는 결국 스스로 치르겠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홍콩 주민의 삶이 뿌리째 흔들리게 될 것 같아 안타깝다. 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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