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책을 읽을 때 줄을 칠 연필이 없으면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어쩔 수 없이 볼펜으로 줄을 치면 틀림없이 후회가 밀려오지요. 읽은 책을 다시 보면 다른 곳에 밑줄을 치고 싶을 때가 있는데 볼펜은 수정할 수가 없으니까요” 대법관이나 권익위원장의 타이틀이 아닌 김영란 전 대법관(65)의 모습은 영락없는 ‘독서광’이었다. 몸에 벤 특유의 독서 습관이 있다는 것부터 스마트폰이나 넷플릭스에 책 읽는 시간을 빼앗기는 데 슬픔을 느끼는 것까지 독서 애호가들의 마음과 꼭 닮아 있었다. 김 전 대법관은 21일 자신의 삶을 구성한 독서의 경험을 담은 에세이 ‘시절의 독서’(창비)를 펴냈다. 그를 28일 경기도 수원시 아주대학교에 있는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알베르 카뮈(1913~1960)의 ‘이방인’을 초등학교 때 읽었어요. 제가 어린 시절에는 책이 귀해서 집집마다 책이 꽂혀 있지 않았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닥치는 대로 읽는 수밖에 없었답니다.” 김 전 대법관은 30년 가까이 한국사회의 최전선에서 법률가로 살아왔으면서도 평생 유일하게 계속해온 것이 책읽기뿐이라고 말할 정도로 열정적인 애독가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 집에 놀러 가도 책장에 꽂힌 세계문학전집을 읽느라 노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고 한다. 책에 대한 사랑은 판사 생활을 할 때도 사그라들지 않아 선후배들의 의아함을 자아낼 정도였다. 그는 “너는 판사인데 왜 소설을 읽느냐”는 동료 판사들이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마사 누스바움이 말하길 판사가 재판하는 건 독자가 소설을 읽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습니다. 재판 당사자들의 심정을 헤아리는 작업이 소설에서 펼쳐지는 상황을 이해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이죠.” 이번 책에서 그는 영국 소설가 도리스 레싱(1919~2013)의 ‘금색공책’, ‘생존자의 회고록’ 등의 소설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여성주의적 시선을 엿볼 수 있었다고 밝힌다.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성’은 관료주의 세계에 대한 암울한 예측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이전 세대의 문인이 남긴 글들 중 여전히 의미 있는 고전들에 대해 김 전 대법관은 “여러 작품 중에서도 보편적인 인간 삶의 단계를 호소하는 작품들이 생명이 긴 것 같다”고 말했다. 영상 매체와 인터넷이 스토리텔링과 정보 제공의 영역까지 모두 장악한 시대. 어린 시절엔 책을 읽다 잠에 드는 게 일상이었던 그 역시도 요새는 저녁에 스마트폰으로 메신저와 이메일을 확인하거나 드라마를 보는 날이 많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책이라는 매체만이 줄 수 있는 고유의 경험을 영원히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다른 세상에 가는 것과 같습니다. 영상 매체를 통해 남이 상상한 세계를 구경하는 것도 분명 즐거운 경험이지만 책을 통해 나만의 상상력을 펼쳐보는 것도 충분히 짜릿한 경험을 선사해 줄 겁니다.”수원=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반들반들한 금속 몸체에 뻥 뚫린 눈, 상·하체를 잇는 전기배선.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를 본 사람이라면 이 인상적인 로봇 C-3PO를 기억할 테다. 스타워즈의 모든 시리즈에 등장하는 C-3PO는 스카이워커의 충직한 집사로, 어설픈 외양과 달리 비범한 능력을 갖췄다. 예민하면서도 편집증적인 성격으로 관객들에게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1977년 첫 시리즈 개봉 당시 일부 관객들은 로봇의 움직임이 너무도 기계적이어서 제작진이 최첨단 기술로 정교한 로봇을 개발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30대의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앤서니 대니얼스(75). 연극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C-3PO를 사람이 연기했으리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사실적인 연기를 펼쳤다. 관객이 C-3PO를 진짜 로봇으로 생각하는 게 영화 홍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제작사는 4번째 시리즈 크레디트에서 그의 이름을 빼버렸다. 이 책은 이런 사연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알려지지 않은 슈퍼스타’라는 수식어가 붙은 대니얼스의 자서전이다. 촬영 현장에서 배우 대니얼스가 아닌 C-3PO로 통한 그는 당시 느낀 설움을 조심스레 풀어놓는다. 이를테면 대본이 ‘루크 스카이워커(마크 해밀)와 C-3PO’로 표기되는 등 자신의 이름이 지워진 걸 볼 때마다 그는 약간의 좌절감을 느꼈단다. 당시 그는 ‘내 존재가 이렇게까지 지워지다니, 혹시 촬영 때 프로답지 못한 일을 저지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종종 빠지곤 했다. 하지만 천재 감독으로 칭송 받던 조지 루커스와의 작업 기회를 날릴 수는 없었다. C-3PO는 스타워즈 전 시리즈에 등장하는 유일한 캐릭터다. 현장에서의 설움과는 별개로 저자는 C-3PO와 스타워즈 시리즈를 깊이 사랑했다. 원작 소설의 애독자였던 그는 자신이 열 살 때 C-3PO를 책에서 처음 만난 날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제작 뒷얘기가 궁금한 ‘찐팬’들이라면 한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웹 드라마인 줄 알고 재생한 영상에서 걸그룹 소녀시대의 수영이 배우 최태준과 함께 예능 프로그램 홍보 포스터를 촬영하고 있다. 여느 촬영 현장과 달리 두 사람 사이에는 노골적인 냉기류가 흐른다. 예능 프로그램 제목은 ‘그래서 나는 안티 팬과 결혼했다’. 동명의 웹 드라마에 등장하는 가상 TV 프로그램이다. 올 4∼6월 32부작에 걸쳐 방영된 이 드라마는 웹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됐다. 국내에선 네이버TV에서 회당 조회수가 50만 회를 넘겼다. 아이치이(iQIYI), 비키(VIKI), 아마존 프라임 재팬 등 해외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통해 세계 190개국에 소개됐다. 인기 아이돌 출신 배우와 참신한 이야기에 힘입어 올 6월까지 드라마 부문 아이치이 1위, 비키 2위에 각각 올랐다. 드라마는 K팝 톱스타인 주인공 ‘후준’과 한순간의 사고로 그의 안티 팬으로 알려지게 된 ‘근영’의 이야기다. 두 주인공이 가상 결혼 예능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하며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뤘다. 드라마 제작사 가딘미디어의 전주예 기획이사는 “원작 웹 소설이 TV 프로그램을 소재로 삼다 보니 영상화하기에 좋았다”고 말했다. 제작사는 동명의 웹 소설이 처음 연재된 2008년부터 눈여겨보다 2018년부터 촬영에 들어갔다. 전 이사는 “톱스타나 그의 팬이 아닌 ‘안티 팬’을 주인공으로 앞세웠다는 점에서 스토리가 눈에 띄었다”고 말했다. TV 예능 프로그램을 주된 소재로 다루는 만큼 ‘황금어장 무릎팍도사’(2012∼2013년)와 ‘비정상회담’(2014∼2017년)의 방송작가를 지낸 남지연 작가가 드라마 제작에 참여했다. 원작자인 김은정 작가도 영상매체의 문법에 맞게 각색에 참여했다. 밝고 활기찬 분위기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캐릭터의 성격을 조정했다고 한다. 김 작가는 “소설은 주인공을 도도한 톱스타와 냉철한 기자 출신의 안티 팬으로 설정했다. 각색 과정에서 보다 매력적인 캐릭터로 다듬기 위해 귀여운 매력을 갖춘 인물들로 다듬었다”고 설명했다. 전 이사는 “근영이 사귀던 남자친구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고 좌절하는 장면이 원작에는 없는데 삽입했다. 인간적 면모를 부여해 근영의 캐릭터를 보다 입체화하기 위한 장치”라고 말했다. 웹 소설은 전개가 빠르면서도 한 회에서 하나의 작은 이야기가 일단락된다는 점에서 드라마와 호흡이 비슷하다. 이 때문에 ‘내 이름은 김삼순’(2005년) ‘커피프린스 1호점’(2007년) ‘해를 품은 달’(2012년) 등 웹 소설들이 드라마 제작자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전 이사는 “웹 드라마 공개 후 반응이 좋아 연재가 끝난 웹 소설 일부 내용이 드라마 내용을 반영해 수정됐다. 이제는 영상 콘텐츠가 원작에 역으로 영향을 주는 시대”라고 말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3남매 중 막내인 설지영 씨(33·여)에게는 아홉 살 터울의 오빠가 있었다. 오빠는 중 3 때 조현병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부모는 이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설 씨는 오빠의 양육자로 10년 넘게 살았다. 오빠가 유일하게 그의 말만 들었기 때문. 폭력성을 보이거나 생떼를 쓰는 오빠를 다른 가족들은 안쓰러워만 할 때 설 씨는 “안돼! 하지 마!”를 외치며 막아섰다. 몇 년 전 오빠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 부모와 언니가 마지막 인사를 건넬 때 오빠를 받쳐 안고 마지막 호흡을 도운 것도 그의 몫이었다. 그는 오빠의 호흡이 끊긴 뒤에야 “사랑한다”는 말을 귓가에 속삭일 수 있었다. 이로써 그의 삶에서 장애와 관련된 것들은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설 씨는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똑똑하고 말 잘 듣는 착한 동생’이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 계속 시달렸다. 자폐성 장애를 앓는 형제를 둔 친구 이은아 씨(32·여)가 “비장애 형제를 돕는 모임을 만들자”고 제안했을 때 설 씨가 선뜻 응한 이유다. 두 사람은 비장애 형제인 박혜연(29·여) 송서원 씨(27·여)와 2016년 정신장애인의 비장애 형제를 돕는 모임 ‘나는’을 만들었다. 이들에게 스스로를, 그리고 서로를 돕는 모임이 필요했던 이유는 이렇게 설명된다. “우리 사회에서 비장애 형제는 가족을 돕는 ‘천사 같은 아이’나 장애 형제를 부정하는 반항아 정도로만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나 비장애 형제들은 정체성에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죠.”(박혜연). 이는 신체장애인 형제를 둔 이들에게도 해당되는 얘기다. ‘나는’은 매주 비장애 형제 5, 6명으로 구성된 소모임 3, 4개 팀을 운영한다. 궁극적인 목적은 비장애 형제들이 장애 형제를 비롯한 가족들로부터 심리적으로 건강하게 독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미국의 알코올 의존증 환자 모임 ‘AA(Alcoholics Anonymous)’의 진행 형식을 빌려 각자의 어려움을 솔직히 털어놓고 아픔을 쓰다듬는다. 대부분의 비장애 형제들은 심리적 어려움을 겪고도 ‘내가 이런 한가한 고민을 품어도 되나’ 하는 자책감에 시달린다. ‘나는’은 이런 고민은 당연하며 해결할 수 있다는 용기를 불어넣는다. 최근 신간 ‘나는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한울림스페셜)를 통해 이런 메시지를 더 널리 알리고 있다. 비장애 형제들이 공통적으로 호소하는 문제점 중 하나는 ‘나’와 ‘비장애 형제’라는 두 자아 사이의 괴리다. 전자만 발달하면 장애 형제로부터 도망치고 싶게 되고, 후자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자신의 진로를 사회복지사나 특수교사로 한정짓는 등 삶 전체를 장애 형제를 위해 바치게 된다. 송 씨는 “나는 비장애 형제라는 자아로 오랜 세월을 살았다. 두 자아의 균형을 맞추고 궁극적으로는 일치시켜야 심리적으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은 장애 가정의 부모를 대상으로도 1년에 6, 7회씩 비정기 교육을 진행한다. 지친 부모들이 자신도 모르게 비장애 자녀에게 부담과 아픔을 주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아직 초등학생인 비장애 자녀에게 “너는 내 가장 친한 친구”라며 기대기도 하고, 장애 자녀의 돌봄 역할을 맡기기 위해 동생을 낳는 경우도 있다. 이 씨는 “‘뭐든지 잘하는 고마운 자식’ 같은 말들도 비장애 형제에게는 짐”이라며 “비장애 자녀가 어려움을 호소할 때 귀를 기울여주기 바란다”고 말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개와 고양이를 모두 길러 본 사람이라면 두 동물이 남긴 물그릇 주변이 서로 완전히 딴판이라는 사실을 알 테다. 얼핏 보면 비슷한 방식으로 물을 마시는 것 같지만 개의 물그릇 주변에는 물난리가 나는 한편 고양이 물그릇 주변은 물 한 방울 없이 깔끔하다. 왜 그런 걸까.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에서 과학적 호기심을 발동시킨 생활밀착형 과학책 2권이 출간됐다. ‘개와 고양이의 물 마시는 법’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 온 동식물의 모습을 유체역학의 시각으로 살펴보고 알아두면 쓸 데 ‘있는’ 흥미로운 과학지식을 전달한다. 개와 고양이 물그릇의 비밀은 바로 이들의 ‘혀’에 있다. 개와 고양이 모두 혀를 물에 댔다 떼 표면장력으로 혀끝에 달라붙은 물을 마신다. 개는 혀를 말아서 국자 모양으로 만들어 물에 푹 담그는 반면 고양이는 혀를 세워 끝만 살짝 물에 대는 것이 차이점. 이 과정에서 개의 혀에 고였던 물은 대부분 다시 흘러나와 자연스레 물그릇 주변이 지저분해진다. 저자는 개와 고양이의 신체 특징 및 기본성격에서 이 같은 차이가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다소 활발한 성향의 개는 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물장구도 치지만 고양이는 물을 매우 싫어한다. 고양이 헤엄이나 개 세수가 없는 이유다. 이런 식의 관찰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사실 인간은 동물의 생김새와 신체 활용 방식에서 수많은 발명품의 영감을 얻어 왔다. 복어의 한 종류인 거북복은 ‘상자 물고기’라는 별명을 가진 네모난 형태의 물고기다. 거북복이 뒤집히거나 흔들리는 일 없이 다른 물고기보다 더 안정적으로 수영하는 이유를 과학자들은 거북복의 독특한 체형이 주위에 발생시키는 물 소용돌이에서 찾았다. 이 발견은 초음속 여객기의 하나인 콩코드 여객기나 우주왕복선 같은 삼각 날개 항공기에 적용됐다. 식물로부터 얻은 아이디어를 로봇에 적용하는 연구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오이 호박 포도 같은 덩굴식물은 줄기가 물체에 닿으면 그 반대편 세포의 생장 속도가 빨라져 곧게 자라지 않고 물체 쪽으로 휜다. 이탈리아 공학 연구소의 연구진은 최근 덩굴식물에서 영감을 얻어 유연한 소재로 만들어 잘 휘는 소프트 로봇을 개발했다. 덩굴손이 액체를 이용한 삼투 현상으로 세포 내 팽압을 조절한다는 점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연구진은 탄소 전극에 이온을 흡착시키는 방식으로 이온 액체를 이동시켜 로봇의 작동을 구현했다. 이번엔 동식물 대신 사물로 눈을 돌려 보자.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휴대전화 케이스, 유리잔, 신발 밑창의 고무 등…. ‘소재, 인류와 만나다’의 저자는 우리 눈에 밟히는 다양한 물건의 소재에 집중해 해당 소재를 우리 인간이 언제부터 활용했고, 이것이 인간사를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 친절하게 알려 준다. 20세기까지의 소재 역사는 돌부터 플라스틱까지로 요약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날카로운 것이 필요했던 최초의 인류는 돌을 깎음으로써 자연물을 ‘소재화’하는 법을 터득했고 금속, 콘크리트, 유리, 고무 등을 거쳐 20세기 기적의 신소재인 플라스틱까지 왔다. 저자는 인류가 풀어야 할 숙제도 함께 짚는다. 과학 학술지 ‘네이처’는 지난해 인간이 만든 인공물의 총 질량이 2020년을 기점으로 자연에서 만들어진 생명체의 총 질량을 넘어섰다고 발표했다는 것. 지금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생활 속 과학지식에 목마른 이들에게 두 책을 권한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에세이 ‘숨 쉬러 숲으로’(문학수첩)를 15일 출간한 장세이 씨(44)는 요새 제주 곶자왈과 오름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숲 덕후’인 장 씨는 20여 년간의 잡지 기자, 편집자 생활을 잠시 쉬기로 하고 지난해 12월 서울에서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한 해 살이 중이다. 어릴 때부터 숲을 좋아하던 그는 2014년 산림청의 숲 해설가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듬해에는 서울 종로구 창덕궁 옆에 생태 책방 겸 문화공간인 ‘산책아이’를 열어 생태 고전을 판매하고 각종 생태 관련 강좌를 기획하기도 했다. 숲의 무엇이 그를 이토록 매료시켰을까. 18일 그의 이야기를 전화인터뷰로 들어봤다. ―숲과 나무를 언제부터 좋아했나. “고향이 부산의 평야지대다. 어린 시절 살던 집 주변에는 논밭이 드넓게 깔려 있어서 땅의 얼굴을 보고 계절의 변화를 알았다. 모내기 풍경이 보이면 봄이었고 황금밭이 펼쳐지면 여지없이 가을이었다. 시장에서 채소나 과일을 산 기억이 거의 없다. 필요한 음식들은 대부분 우리 밭에 있었다. 서울에서 사회생활을 하며 20년 이상이 흐르자 다시 자연이 간절해졌다.” ―숲 해설가라는 직업은 아직 생소한데…. “나도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직업이다. 어느 날 정처 없이 종로를 걷다 빌딩숲이 너무 지겨워서 인터넷 창을 열고 자연을 배울 수 있는 강좌를 찾아봤다. 한 달짜리 입문 교육을 먼저 받았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이 가르쳐서 마음에 쏙 들었다. 수종을 달달 외우게 하는 게 아니라 숲을 걸으며 배운 지식을 바로 접목할 수 있게 해 준다. 예를 들면 소나무를 올려다보게 하고 하늘이 얼마나 보이느냐에 따라 아픈 나무인지 건강한 나무인지 구분할 수 있다는 점을 알려주는 식이다. 그래서 전문 교육 과정을 이수하고 숲 해설가 자격증을 취득했다.” ―숲 해설가는 추천하고픈 직업인가. “아직 안정적인 자리는 많지 않은 것 같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여파로 공원이나 숲에서 운영하던 숲 해설 프로그램도 많이 닫은 것으로 알고 있다. 자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자격증 교육 기관이 많아지고 있는 추세이기는 하다.” ―산책아이에서는 어떤 활동들을 했나. “2015년 시작해 지난해 코로나 여파로 문을 닫기 전까지 한국의 좋은 생태 수필, 그림책을 수집해 판매하고 생태 강좌를 50∼60회 열었다. 나무나 풀 같은 일반적인 주제부터 박찬일 셰프에게 듣는 음식 재료로서의 풀, 성석제와 장석주 등 문학 작가들이 말하는 문학 속의 자연 등 한 분야에 특화된 주제까지 다양한 내용을 다뤘다.” ―제주도에서는 어떻게 지내나. “휴식이 간절해서 제주도에서 한 해 살이 중이다. 남부지방이라 서울과는 식생이 달라 재미나다. 수종도 다양하고 서울과는 다른 지질과 기후를 배우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곳에서도 숲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답사 모임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요즘 날씨에 자연의 정취를 느끼기 좋은 곳을 추천한다면…. “서울 종로구의 창경궁을 추천한다. 제주에 사는 남부 수종부터 북한의 국화(國花)인 함박꽃나무까지 별별 나무들이 다 있다. 창경궁이 아주 크지는 않아 위압적이지 않다는 점도 매력이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작가 겸 코미디언 양다솔 씨(27)는 집중하거나 긴장할 때 팔짱을 끼는 습관이 있다. 그의 팔은 인터뷰가 시작된 지 20여 분 만에 스르륵 풀렸는데, 자신의 스탠드업 코미디 ‘노상방뇨 아저씨들에 대처하는 방법’을 소개할 때였다. 문제의 현장을 목격했을 때 그는 범인(?)의 엉덩이를 차는 시늉을 하거나, 소리를 지르는 시도를 계속했단다. 그는 자신의 신간 에세이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다산북스)에서 스탠드업 코미디 모임에 들어간 첫날을 이렇게 묘사했다. “최초의 공연이 시작되었고, 최초의 관객이 되고 있었다. 나는 팔짱을 풀었다. 바로 앉아서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코미디가 시작된 것이다.” 그는 안정적인 직장을 박차고 나와 이야기꾼으로 살아가고 있다. 17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2년간 다닌 회사를 올 2월에 그만뒀다. 적성에 맞지 않는 일에 빗금을 친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는 2019년부터 동북아국제구술문화연구회(동북구연)라는 다소 거창한 이름의 스탠드업 코미디 모임에서 활동 중이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팬데믹으로 유료 공연을 단 세 차례밖에 하지 못했지만 꾸준히 공연 준비를 하고 있다. 요즘도 2주에 한 번씩 팀원 8명과 모여 어떤 이야기가 건강한 웃음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한다. 회사를 다니며 미뤄둔 글도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는 “에세이를 말로 재밌게 잘 풀어내면 스탠드업 코미디가 되는 것 같다. 아무런 부수적인 장치 없이 내 이야기로 진검승부를 하는 게 에세이와 스탠드업 코미디의 매력”이라고 했다. 그는 왜 이토록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싶은 걸까. 그는 코미디 무대를 통해서는 불행을, 글을 통해서는 행복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말한다. 동북구연 코미디의 단골 소재는 출연자 자신의 불행한 인생이다. ‘웃기지 않은 게 웃길 때 제일 웃기다’라는 게 이들의 코미디 철학. 그는 21세 때 아버지가 갑자기 카카오톡 메시지로 어머니에게 출가를 통보한 후 절에 들어가는 바람에 대학 등록금을 직접 벌어야 했다. 이런 이야기가 무대 위에서는 코미디가 된다. “그래서 제가 아빠한테 한마디 했어요. ‘요새는 초딩들도 카톡으로 헤어지자고 안 한다’고.” 양 씨는 퇴사 후 빌라 앞 화단에서 키운 쌈 야채에 강된장을 곁들여 끼니를 해결하고, 비건 도시락을 각국 향신료를 이용해 정성스레 만든다. 여름에는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인다. 그의 마음은 직장을 다닐 때에 비해 조금도 가난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글을 쓰고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에 서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안정적인 수입을 위해 다시 직장에 들어가는 날이 올 수도 있겠지만 최대한 저의 재주를 굴려 오래오래 잘 살고 싶어요.”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6년 전 조선소 재하청 노동자들의 면접 현장을 기록한 기사를 읽게 됐어요. 작업 현장에 딸린 편의점에서 ‘반장’이라는 면접자가 지원자의 손가락, 발가락이 제대로 있는지 훑어보는 광경이었죠. 마치 일회용품을 구매하는 장면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소설가 김숨이 이렇게 말하며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소설 ‘듣기 시간’(문학실험실), ‘한 명’(현대문학) 등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의 증언을, ‘떠도는 땅’(은행나무)에서 강제이주 고려인의 목소리를 담아낸 김숨이 이번에는 조선소 노동자들의 이야기 ‘제비심장’(문학과지성사)으로 돌아왔다. ‘철’(문학과지성사) 이후 13년 만에 다시 써낸 조선소 이야기다. 지난달 23일 출간한 이번 작품에서 김숨은 노동자의 급을 나누는 다단계 하도급 구조와 외국인 이주 노동자의 노동 현실을 담았다. 그는 왜 다시 조선소로 돌아왔을까. 13일 그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13년 전에 비해 조선소의 노동 현실은 나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졌다고 생각해요. 원청-하청-재하청으로 이어지는 노동자의 분류는 여전히 공고하고 이제는 삶이 더 팍팍해져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에 훨씬 무감각해졌거든요.” 김숨의 고향은 울산 동구다. 아버지는 그가 다섯 살이 되던 해까지 방어진의 조선소에서 일했다.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이지만 조선소 노동 현장은 김숨을 평생토록 끌어당겼다고 한다. 그는 “이 소설은 6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했지만 정서적 집필 기간은 태어났을 때부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집필에 앞서 그는 현직 조선소 재하청업체 노동자와, 노조를 조직하다 해고된 노동자를 만나 심층 인터뷰했다. 현직자와는 세 번째로 잡은 약속에서야 가까스로 마주 앉을 수 있었다. 김숨은 “매번 갑작스레 잔업이 생겼다며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못했던 노동자가 나이 예순을 넘긴 여성이라는 것을 알고 마음이 무거워졌다”고 말했다. 이런 과정들이 노동 현장을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됐다고 한다. 이들과 더불어 작업 현장을 직접 찾아가 만났던 외국인 이주 노동자의 모습, 작업복을 입은 채 술잔을 기울이는 인근 술집의 풍경 등이 모두 소설에 녹아들었다. 그가 이토록 당사자의 목소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숨은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을 인터뷰하면서 어떤 일의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를 쓸 때는 당사자의 의사와 입장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점을 배웠다”고 했다. 소설의 극적 전개를 위해 소설가는 피해를 과장하거나 피해자가 가까스로 회복한 존엄성을 또다시 훼손할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데, 당사자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면 이런 유혹을 떨칠 수 있다는 것. ‘제비심장’이 그리 처참하게 쓰이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땀에 찌든 얼굴빛, 깨진 손톱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쓰고 싶지 않았어요. 이번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훼손되지 않은 그들 영혼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답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거대한 눈동자일까. 판타지 영화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 나오는 악의 군주 ‘사우론’과 비슷한 존재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홍채처럼 보였던 부분이 아라키스 행성에 서식하는 모래벌레의 이빨이라는 것을, 동공처럼 까만 중앙부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수천 개의 이빨에 갈려버린다는 것을 공상과학소설(SF) ‘듄’ 시리즈를 읽은 독자들은 단번에 알아챌 테다. 20일 개봉하는 영화 ‘듄’의 각본을 맡은 존 스파이츠는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관객들이 모래벌레의 스케일과 파워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모래벌레가 실제로 등장하기 전부터 그와 관련된 서사를 조금씩 소개하며 긴장감을 높였다”고 설명했다. SF 거장 프랭크 허버트가 1965년부터 20년에 걸쳐서 완성한 소설 듄 시리즈가 영화화 돼 국내 개봉한다. 듄은 생명 유지 자원인 ‘스파이스’를 두고 아라키스 모래 행성인 ‘듄’에서 악의 세력과 싸우는 메시아 ‘폴’의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국내에는 영화 ‘컨택트’(2017년), ‘시카리오’(2015년)로 유명한 드니 빌뇌브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주인공 폴은 티모테 샬라메가 연기한다.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는 총 6권짜리 시리즈의 첫 번째 권 전반부 절반을 다룬다. 먼저 개봉한 해외에선 이미 900억 원 이상을 벌어들였고, 1시간 이상의 아이맥스 장면으로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 이 영화를 보기 위해 국내에서도 아이맥스관 예약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56년 전 소설인 듄이 영상화된 건 SF 장르임에도 과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중에게 인기를 끌 수 있고, 시대가 지나도 과학적 상상력이 낡지 않는다. 스파이츠는 “듄은 로봇, 인공지능(AI), 광선검, 우주전쟁처럼 공상과학적인 요소들을 없앤 SF소설”이라며 “대신 연습과 훈련에 의해 완벽하게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있는 주인공들을 등장시켜 기술을 지배하는 인류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설명했다. 항성의 유력 가문들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통해 인간 사회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을 시도하는 ‘대하 사극’의 특성을 지닌 것도 영상화에 도움이 됐다. 스파이츠는 “이 작품은 매우 심오한 인간 본성과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했다. 소설에서는 생략된 행성 간 이동 장면, 전투 장면도 영화에선 아이맥스를 활용한 컴퓨터그래픽(CG)으로 그려져 관객의 눈을 즐겁게 한다. 스파이츠는 “소설에 묘사되지 않은 대서사적인 순간들을 영화에선 상상력을 동원해 무대 중앙으로 가져왔다. 글로는 충분히 표현되기 어려운 신비한 우주세계를 충분히 구현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소설 듄의 한국어 판본을 번역한 김승욱 번역가는 “영화에는 악당이 침공을 앞두고 인신공양 같은 방식을 동원해 의식을 치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소설에 없는 내용이다. 인물들의 잔인함과 야만성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양성을 위해 캐릭터의 성별을 바꾸기도 했다. 김 번역가는 “아라키스의 환경을 연구하고 사막행성인 이곳을 푸르게 가꾸는 연구를 하는 리예트 카인즈 박사는 원작에서는 남성으로 묘사됐지만 여성인 샤론 덩컨브루스터가 연기했다”고 말했다. 소설 듄은 2001년 국내 처음 출간된 이후 올해 20년 만에 재출간됐다. 한국어 번역판을 펴낸 황금가지의 김준혁 주간은 “SF의 대중화가 이뤄질수록 독자들은 이 장르의 원류가 무엇인지 궁금해한다. 클래식 SF가 여전히 독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라고 말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많은 이들이 철학에 목말라 하는 시대다. 철학할 여유를 만들어보려고 해도 바쁜 현대인들에게 사색할 틈을 만들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다. 어렵게 시간을 내 철학 책을 사 보기도 하지만 대개 책장을 덮으며 철학도 끝난다. 짬 안 내고, 품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철학은 정말 없는 걸까. 이런 갈증을 느끼는 독자들이 반길 만한 ‘생활 속 철학’을 다룬 책 2권이 출간됐다. ‘식탁은, 에피쿠로스처럼’의 저자는 책의 제목처럼 고대 그리스의 쾌락주의 철학자 에피쿠로스(기원전 341년∼기원전 270년경)의 마음으로 식사하는 게 ‘식탁 앞 철학’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혀끝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단짠단짠’(달면서 동시에 짠맛), ‘고탄고지’(고탄수화물 고지방) 식품으로 식탁을 가득 메우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오산이다. 에피쿠로스가 강조했던 것은 가짜 욕구, 과욕이 아닌 자연적이면서도 필연적인 욕구의 충족이기 때문이다. 최근 일주일간 접한 음식들을 떠올려 보자. 직접 섭취한 식단도 좋고 미디어에서 조명한 음식도 괜찮다. 칼로리가 무척 높거나 맛이 너무 복잡한 식사는 아니었는지. 기름진 패스트푸드와 달콤한 디저트 등 식도락과 먹방의 전성시대에서 각광받는 음식들은 하나같이 화려하고 복잡하다. 그러나 자연에는 ‘단짠’이 없다. 저자는 “자연 속 음식들은 과일같이 달거나, 생선처럼 간간하거나, 돼지고기처럼 기름지거나 할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인간은 자연이 제공하는 음식들만으로도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설계됐다는 점을 떠올려 볼 때 복잡한 맛의 음식들은 인간에게 모두 과하거나 불필요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너무 많은 동물들이 죽고 식재료가 남용된다. 맛있다는 이유로 우리 몸이나 자연에 고통을 주는 음식을 먹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는 것. 탐식하는 ‘배부른 돼지’와 미식하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가르는 차이가 여기에서 온다. 이보다 더 쉬운 생활 속 철학도 있다. 바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다. ‘니체와 함께 산책을’의 저자는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 등 철학자들의 사상이 명상에서 배태됐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니체는 하루에 8시간까지 걸을 정도로 ‘산책광’이었는데, 이는 명상에 빠지기 위해서였다. 병약했던 그가 이토록 긴 산책을 즐겼던 이유는 산책 중 자연과 자신의 경계가 사라지며 찾아오는 명상 시간을 기다리기 위해서다. 이 시간 속에서 니체의 수많은 사상들이 탄생했다. 괴테 역시 모두가 잠든 새벽길을 홀로 걸으며 달빛에 젖는 순간을 즐겼다. 그의 시 ‘들장미’(1771년),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년)에는 자연에 완벽히 융화된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구사하기 어려운 유려한 풍경 묘사가 곳곳에 등장한다. 마침 곡식이 익어가는 계절, 휘영청 밝은 달이 선선한 밤공기를 비추는 계절이다. 좋은 음식과 산책을 통해 그동안 쌓였던 철학에 대한 갈증을 풀어보는 건 어떨까.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버려야 할 물건 1순위는 단연 ‘추억의 물건’입니다.” 지난달 27일 에세이 ‘도망가자, 깨끗한 집으로’(멀리깊이)를 펴낸 신우리 씨(32·사진)가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산후우울증으로 한때 정리가 안 될 정도로 물건을 잔뜩 사들였던 그는 이를 스스로 극복한 경험을 책에 담았다. 어린아이들을 위해 장난감을 여럿 들여 놓는 집도 말끔히 정돈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 6일 그를 만나 집 정리 팁을 들어봤다. “육아 관련 ‘국민템’(국민적 사랑을 받는 인기 아이템)은 전부 샀어요. 어느 날 쌓인 물건들이 창문을 가려 한낮에도 집 안이 어두운 걸 보고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죠.” 2016년, 신 씨는 당시 3세, 1세의 두 아들이 잠든 늦은 밤마다 인터넷 쇼핑을 했다. 육아에 좋다는 장난감과 동화책들을 주로 사들였다. 아이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며 논다는 대문 모형의 장난감인 일명 ‘국민 문짝’, 숟가락 사용법을 안전하게 익히기 위한 ‘국민 숟가락’ 등 끝이 없었다. 아이들을 위해 산 물건들이지만 집이 답답해질수록 그는 아이들에게 예민하게 구는 날이 많아졌다. 출산 전까지 촉망받는 재무설계사였던 그는 육아나 살림이 뜻대로 되지 않는 모습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결국 가득 찬 동화책들로 인해 이음새가 벌어진 책장을 내다버리는 걸 시작으로 ‘집 비우기’에 돌입했다. 신 씨는 “버릴까 말까 망설여지는 물건들은 모두 버리고 ‘이건 절대 없으면 안 돼’ 하는 물건들만 남겼다”고 말했다. 집 정리에 관한 책 40여 권을 탐독하며 방법을 연구했다. 그렇게 집을 비웠더니 기존 물건들의 30%만 남았다. 그는 “한 책에서 ‘물건들은 주인에게 도대체 언제 써줄 거냐고 말을 건다’는 글을 읽고 물건이 가득 찬 집이 왜 그리 답답하고 소란스러운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필요 없는 물건을 버렸다면 남은 물건을 제대로 정리하는 것도 중요하다. 신 씨 가족은 ‘개인 물건을 거실에 두지 않기’라는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남편이 셔츠를 소파에 걸어두면 아이들도 이를 따라 장난감을 거실에 널브러뜨리기 일쑤라는 것. ‘물건을 바닥에 내려두지 않기’는 거실 바닥에 물건들이 나뒹굴지 않도록 하기 위한 원칙이다. 그는 “아이들 방에는 각 물건의 위치를 지정해 해당하는 이름표를 붙이는 걸 추천한다. 아이들이 스스로 물건을 정리하는 습관을 키울 수 있다”고 조언했다. 아이가 있는 집은 대개 장난감이 거실 바닥에 굴러다니고 책장은 각종 전집들로 미어터지기 마련이다. 신 씨는 오늘도 물건이 가득 찬 집에서 고통 받고 있을 부모들이 이 책에서 희망을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책장을 버릴 때 시원하게 모습을 드러낸 벽면을 보고 가슴이 뻥 뚫리는 걸 느꼈어요. 어마어마하게 쌓인 물건들을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겠지만 변화는 아주 작은 데서 시작됩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아프리카 탄자니아 난민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 중인 소설가 압둘라자크 구르나(73·사진)가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스웨덴 한림원은 7일 “식민주의에 대한 단호하고 연민어린 통찰이 수상 배경이 됐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노벨 문학상을 탄자니아 출신 작가가 받은 건 처음으로 아프리카 출신 작가로는 역대 다섯 번째다. 흑인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는 35년 만이다. 1948년 동아프리카 연안 잔지바르섬에서 태어난 구르나는 1968년 난민 자격으로 영국에 갔다. 이후 영어로 소설을 쓰면서 영국 켄트대 교수로 탈식민주의 담론을 연구했다. 동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 ‘파라다이스(Paradise)’는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영국 부커상 최종 후보에 1994년 올랐다. 장편소설 ‘바닷가에서(By the sea)’는 2001년 부커상 1차 후보에 올랐다. 한림원은 “난민의 혼란이라는 주제는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이어진다”며 “그는 모국어로 스와힐리어를 썼지만 20세에 영어를 써야 하는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영어는 그의 문학적 도구가 됐다”고 밝혔다. 그는 10편의 장편소설과 다수의 단편소설을 발표했으며 이 중 국내에 번역 출간된 것은 없다. 한림원이 아프리카 출신 작가를 수상자로 선택한 건 최근 유럽과 미국 출신 작가들이 잇달아 수상한 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슬람 극단주의 부상에 따른 세계적 혼란상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분석된다. 왕은철 전북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는 “구르나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아랍계 아프리카인들의 디아스포라 경험을 다루고 있다”며 “세계 곳곳에서 이슬람문화와 다른 문화권 사이의 갈등이 불거지는 상황에서 한림원이 아프리카 출신 무슬림 작가에게 눈을 돌린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수상자 발표 당시 자신의 집 주방에 있던 구르나는 “(노벨상 수상 소식이) 장난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1000만 크로나(약 13억5600만 원)의 상금을 받는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추억의 물건이죠. 버려야 할 물건 1순위는 단연 추억의 물건입니다.” 지난달 27일 에세이 ‘도망가자, 깨끗한 집으로’(멀리깊이)를 펴낸 신우리 씨(32)가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산후 우울증으로 인해 한때 정리가 안 될 정도로 불필요한 물건들을 잔뜩 사 들이며 살았던 신 씨는 이를 스스로 극복한 경험을 이 책에 담았다. 장난감이 많이 필요한 어린 아이를 키우는 집도 말끔하게 정돈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 6일 신 씨를 만나 그가 직접 터득한 집 정리 팁을 들어봤다. “육아와 관련한 ‘국민템(국민+아이템)’들은 전부 다 샀었어요. 어느 날 쌓인 물건들이 창문을 가려 한낮에도 집 안이 어두운 모습을 보고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죠.” 현재 8살, 6살 난 두 아들이 한창 자라던 2016년 신 씨는 아이들이 잠든 늦은 밤이면 날마다 인터넷 창을 열어 쇼핑을 했다. 주로 사들인 물건들은 육아에 좋다는 장난감과 동화책들. 아이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며 논다는 대문 모형의 장난감 ‘국민문짝’, 안전하게 숟가락 사용법을 익힐 수 있다는 ‘국민 숟가락’ 등 남들이 좋다는 용품은 모두 구매했다. 그러나 아이들을 위해 구매한 물건들이었지만 집이 답답해질수록 신 씨는 아이들에게 더 예민하게 구는 날이 많아졌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 신 씨는 성실하고 모범적인 학생이고 직장인이었다고 한다. 출산 전 금융권에서 재무설계사로 일할 당시에는 동료들에 비해 좋은 성과를 내 촉망 받는 직원이었다. 그랬기에 육아도, 살림도 엉망인 모습을 더욱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신 씨는 동화책으로 가득 채워 타카핀이 벌어져버린 책장을 내다 버리는 것에서부터 ‘집 비우기’를 시작했다. 신 씨는 “버릴까 말까 망설여지는 물건들은 모두 버리고 ‘이건 절대 없으면 안 돼’하는 물건들만 남겼다”고 말했다. 그렇게 집을 비웠더니 물건의 30%밖에 남지 않았다. 정리에 관해 쓰인 책 40여 권을 탐독하며 집 정리의 이론과 실재를 배웠다. 그는 “한 서적에서 ‘물건들은 주인에게 도대체 언제 써 줄 거냐고 말을 건다’는 글을 읽고 물건이 가득 찬 집이 왜 그렇게 답답하고 소란스러웠는지 알게 됐다”고 했다. 필요 없는 물건을 버렸다면 남긴 물건들을 잘 정리하는 것도 중요하다. 신 씨네 가족은 ‘개인 물건을 거실에 두지 않기’라는 원칙을 만들었다고 한다. 아빠가 셔츠를 소파에 걸어 두면 아이들도 쫓아서 장난감을 거실에 널브러뜨리기 마련이기 때문. ‘물건을 바닥에 내려두지 않기’도 거실 바닥에 물건들이 나뒹굴지 않게 하는 중요한 원칙이다. 신 씨는 “아이들 방에는 각 물건의 위치를 지정해 이름표를 붙이는 걸 추천한다. 아이들이 스스로 물건을 정리하며 정리하는 습관을 기르게 된다”고 말했다. 어린 아이를 키우는 집들은 대개 장난감이 거실 바닥에 굴러다니고 책장은 각종 전집들로 미어 터진다. 신 씨는 오늘도 물건이 가득 찬 ‘집구석’에서 고통 받고 있을 양육자들이 이 책에서 희망을 봤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책장을 버렸을 때 시원하게 모습을 드러낸 벽면을 보고 가슴이 뻥 뚫리는 걸 느꼈어요. 어마어마하게 쌓인 물건들을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겠지만 변화는 아주 작은 틈에서 시작된답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이 책은 저의 가장 오래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지난달 30일 신간 에세이 ‘믿는 인간에 대하여’(흐름출판)를 펴낸 한동일 바티칸 대법원 변호사(51)는 “15세에 영세를 받은 직후부터 시작된 삶에 대한 질문들을 책에 담았다”며 이렇게 밝혔다. 라틴어뿐 아니라 그리스, 로마시대 문화 등을 아우르는 그의 전작 ‘라틴어 수업’(흐름출판)은 2017년 35만 부 이상 팔려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는 가톨릭 사제 신분이던 2010년 한국인 중 처음으로 로마 바티칸 대법원의 ‘로타 로마나(Rota Romana)’ 변호사가 됐다. 지난달 21년 만에 사제직을 내려놓고 평신도 신분으로 돌아와 집필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사제가 아니어도 바티칸 변호사 신분은 유지된다. 1일 동아일보 인터뷰룸에서 그를 만났다. “종교는 정원이라고 생각해요. 아름답지만 관리자가 심고자 하는 꽃과 나무만 존재하죠. 천주교라는 정원에서 수십 년을 누렸으니 이제는 자연에서 좀 더 자유로운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대학 강의도 더 이상 나가지 않고, 연구와 집필에만 집중할 계획이다. 그가 사제 신분을 포기하면서까지 공부에 매달리는 이유는 뭘까. 그는 유대인의 설화를 들어 “공부는 신이 인간에게 준 악보(사명)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악보를 찾는 일도 쉽지 않을뿐더러 이 악보를 어떤 악기로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지 배우는 과정도 녹록지 않기에 공부는 끝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공부를 통해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아가는 노력을 해야 비로소 악보와 악기를 모두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신간에서 그는 종교가 어떻게 인간에게 행복과 기쁨을 줄 수 있는지, 인간이 신을 어떻게 오해하고 있는지 등 오랜 고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았다. 그는 신에 대한 찬미보다 이웃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훨씬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찬미에만 열심인 사람은 자칫 신을 충분한 찬미를 받지 못했다고 삐지는 존재로 만들 수 있다. “신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도, 옹졸하게 만드는 것도 모두 인간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사막을 걸을 때 원래 있던 길, 앞 사람이 낸 길은 모래바람이 불면 사라졌습니다. 사막의 길잡이는 땅에 난 길이 아니라 하늘의 별입니다. 여러분이 인생이라는 사막에서 누군가의 뒤를 쫓기보다 자신만의 별을 찾기를 바랍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정지돈이 소설가가 아닌 도시 산책자로 독자들을 만난다. 서울과 프랑스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을 풀어낸 글 23편을 담았다. 문학가의 눈으로 바라본 도시의 거리는 대체로 아름다울 것 같지만 오산이다. 2018년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참여할 만큼 건축·미술에도 조예가 있는 저자답게 도시의 건축물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읽어내는 방식이 날카롭다. 책은 박태원(1909∼1986)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년)의 21세기 버전 에세이를 표방한다. ‘소설가…’는 돈벌이가 시원치 않은 소설가 구보씨가 서울의 거리 곳곳을 쏘다니며 떠올린 단상들로 이어진다. 저자는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1821∼1867)가 도시 산책자를 군중 속의 개인으로 읽어내며 제시했던 개념 플라뇌르(Fl^aneur·한가롭게 거니는 사람)를 연상하기도 한다. 신간의 무대는 서울과 파리의 아름다운 산책길이 아니다. 키 큰 빌딩들로 가득 메워진 광화문 한복판과 파리 콩코르드 광장이 등장한다. 고요한 산책이 가져다주는 목가적인 사유와는 다른, 도시를 걸을 때 동반되는 일종의 산만함이 독특한 심상을 불러일으킨다. 이를테면 디타워, 르메이에르, 그랑서울 등 종로와 광화문의 고층 건물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서울의 중심지이자 상징과도 같은 곳이 어느새 전국의 프랜차이즈 종합 센터로 변모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피맛골 같은 서울의 옛 골목은 여전히 북적이지만 이 동네만의 독특한 문화로 사람들을 끌어모았던 과거의 방식으로 그 명성을 유지하지는 않는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 포섭된 국내의 현실을 사색하기에는 도시 산책이 제격이다. 저자는 도시를 언어에 비유한다. 언어도 일정 수준 이상 배워야 반어, 아이러니, 유머, 농담, 현학적인 표현부터 줄임말이 가능해진다. 도시 역시 가로지르고 표류하고 발견하고 점거하고 걸어야 비로소 제대로 감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태어났거나 살고 있는 동네를 정말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빌딩 없는 산책길이 없어 집에만 머물러왔던 도시생활자라면 이 책은 바로 집 앞에서 시작할 수 있는 좋은 산책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오랜 시간 책상 앞에 앉아 구부정한 자세로 글을 쓰는 게 일상인 소설가들 사이에선 ‘신경통’ ‘안마기’ ‘운동’ ‘요가’ 등이 주된 대화 소재다. 여느 때처럼 동료 작가들과 ‘틀어진 골반’ 따위를 주제로 얘기를 나누던 소설가 김혜나(39)의 머릿속에 ‘요가를 주제로 소설을 쓰면 작가들이 할 말이 많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등단 전 습작생 시절부터 꾸준히 요가를 해 ‘요가 지도사’ 자격증까지 보유한 요가 ‘덕후’. 그를 비롯해 김이설, 박생강, 박주영, 정지향, 최정화 등 6명의 작가가 요가를 소재로 쓴 단편을 모아 소설집 ‘세상이 멈추면 나는 요가를 한다’(은행나무)를 펴냈다. 20대 초반 위장장애 치료와 다이어트를 위해 요가를 시작한 그는 지친 마음이 달래지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등단 전 식당 아르바이트와 글쓰기를 병행하는 기간이 길어지며 우울증까지 앓았던 그는 요가 수련을 하며 ‘소설가가 되는 것보다 나로서 존재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009년 요가 지도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이듬해 마침내 등단의 꿈을 이뤘다. 그는 요가의 어떤 점에 매료됐을까. 김혜나를 지난달 29일 전화로 인터뷰했다. ―요가 동작이 어떻게 마음 수련으로 이어지나. “요가 동작을 하면 처음에는 통증을 느끼는데 이를 오래 하다 보면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걸 알게 된다. 이 경험이 반복되다 보니 인생의 고통이나 행복도 모두 영원하지 않고 사라지는 것임을 깨달았다. 이런 내적 진리를 깨치면 여러 삶의 어려움을 견디기가 편해진다.” ―요가 루틴이 있나. “매일 오전 7∼9시 집에서 아슈탕가 요가를 한다. 요가를 처음 시작하는 분들은 수련시간을 30분부터 시작해 체력과 근력에 따라 서서히 늘리는 걸 추천한다.” ―요가가 소설가 김혜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나. “인물의 내면을 더 섬세하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요가에서 배웠다. 스스로의 고통과 감정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관조하는 힘이 인물의 내면 묘사에 큰 도움이 된다. 요가를 배운 뒤 인물의 생김새, 성별 등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 너머의 내적인 부분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걸 체감한다.” ―요가 베테랑이 됐는데 앞으로 이루고 싶은 게 있나. “그런 게 딱히 의미가 없어진 것 같다. 동작을 잘하는데 의미를 두는 대신 매일 밥 먹고 잠자듯 자연스레 반복적으로 수련하며 조금씩 변화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는 게 즐겁다.” ―요가를 모르거나 이제 시작하는 이가 일상에서 하기 좋은 동작을 추천한다면…. “파스치모타나사나 동작을 추천한다. 두 다리를 앞으로 쭉 뻗고 상체를 숙여 이마를 정강이에, 손을 발이나 발목에 얹는 동작이다. 간단해 보이지만 우리 몸에서 가장 혈액순환이 되지 않는 무릎 뒤쪽을 이완해주며 전신에 에너지가 돌게 한다. 다리 부기가 빠지고 척추가 스트레칭 되며 배는 따뜻해진다. 손발이 찬 사람에게 특히 좋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의 도서판매 정보 공유 시스템에 들어가 봤다가 출판사를 통해 계정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그만뒀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출판유통통합전산망(통전망)도 출판사를 통해야 한다면 신뢰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출판사로부터 인세 누락 피해를 입은 적이 있는 저자 A 씨는 29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날 출판사와 유통사, 서점에 분산된 도서의 생산·유통·판매 정보를 한곳에 모아 제공한다는 통전망이 개통됐지만 작가들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투명한 판매 정보 제공은 아직 요원한 상황이라는 것. 통전망을 운영하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진흥원)은 이날 기자간담회를 열고 통전망 시연회를 진행했다. 진흥원에 따르면 저자가 통전망에 올라간 판매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선 출판사를 통해 관련 자료를 이메일 등으로 전달받아야 한다. 출판사로부터 별도 계정을 받아야 교보문고 등 5개 대형서점에서 제공하는 판매부수를 확인할 수 있는 출협 시스템과 비슷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작가들 사이에서 “정부와 출협이 각각 전산망을 만들어 혼선만 줄 뿐 핵심적인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일각에선 새로운 시스템이 부족하나마 저자와 출판사 간 신뢰 형성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서점들의 공급망관리시스템(SCM) 화면을 찍어 매달 저자들에게 보내온 한 대형 출판사는 “출협 시스템으로 판매 보고를 갈음하겠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이달 초 저자들에게 보냈다. 저자 B 씨는 “비록 출판사를 경유해 판매 정보에 접근하더라도 출판사가 저자를 속이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진흥원이 강조하는 통전망의 핵심은 도서 ‘메타데이터’다. 메타데이터란 대량의 정보들 가운데 필요한 정보를 효율적으로 찾아내기 위해 일정한 규칙에 따라 구조화한 데이터를 말한다. 메타데이터가 제대로 구축되면 출판사는 개별 서점들에 접속할 필요 없이 통전망을 통해 여러 서점들의 판매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서점은 통전망을 통해 출판사들이 제공한 도서 정보를 받아볼 수 있다. 문제는 정부가 구상하는 메타데이터를 구축하려면 출판사들이 적극적으로 자사(自社) 도서를 통전망에 등록해야 하는데 출판사들이 참여할 유인이 아직은 크지 않다는 것이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출판사들이 꾸준히 요구해온 온라인 수·발주 정보 제공이 통전망에서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출판사 입장에선 별도 인력을 투입해 도서 정보를 입력할 유인이 없다”고 말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처음 웹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땐 너무 재밌었는데 글 쓰는 게 일이 되니 재미가 없습니다. 매주 1만5000자씩 과제를 내는 게 고역이네요.” 최근 웹소설 전문학원 스토리튠즈 수강생 80여 명이 모인 익명 채팅방에 한 수강생이 올린 글이다. 자칭 웹소설 마니아로 대박을 꿈꾸며 웹소설 강의를 듣기 시작했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는 것. 다른 수강생들도 “작가로 데뷔하면 매일 5000자씩 써야 하는데 걱정이 앞선다” “취미가 일이 되니 흥미가 사라졌다”며 하소연했다. 총 12회의 웹소설 강의가 진행될수록 지쳐가는 수강생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은 수강생들은 매주 과제를 내는 것 자체에 부담을 느꼈다. 이 때문에 강의 내내 강사들은 “노력하지 못하면 작가로 살아남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웹소설 작가들은 보통 하루 5000자 안팎의 웹소설 한 편을 올린다. 한 달간 쓸 경우 15만 자에 달한다. 웬만한 순문학 단편소설 분량과 맞먹는다. 웹소설은 1년간 약 200회 연재된다. 초심자가 해내기는 만만치 않은 작업량이다. 작가들은 재미가 없다는 이유로 몇 개월 동안 쓴 작품을 스스로 접기도 한다. 중간에 체력이 떨어져 연재를 포기하는 일도 있다. 빠르게 변하는 웹소설 트렌드를 따라잡는 일도 만만치 않다. 요즘 유행하는 작품을 계속 읽지 않으면 흐름에 뒤처지기 때문이다. 강사들은 “수강생들이 최근 유명 작품을 읽지도 않고 글부터 쓰려고 한다”며 쓴소리를 했다. 데뷔 후 유명 작가로 살아남는 건 훨씬 어렵다. 웹소설 플랫폼 카카오페이지에는 이미 4000개 이상의 작품들이 나와 있다. 이 중 500개 작품이 연재되고 있다. 인기가 높아진 만큼 경쟁도 치열한 셈이다. 웹소설 작가의 일상도 꿈만 같지는 않다. 구상, 집필, 퇴고에 하루 10시간 이상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작가들이 적지 않다. 이로 인해 목, 허리 디스크에 시달리는 이도 많다. 한 웹소설 작가는 “웹소설 시장은 요식업과 비슷하다”며 “누구나 도전할 수 있을 정도로 진입장벽은 낮지만 데뷔하고 살아남으려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웹소설 작가로 성공하려면 성실함과 노력이 필수라고 말한다. 김휘열 한국영상대 웹소설과 교수는 “웹소설은 다른 문학 분야와 달리 짧은 시간 내에 많은 분량을 써야 하기에 ‘투잡’을 뛰다 전업 작가로 자리 잡기가 쉽지 않다”며 “취미나 도전에 의의를 두지 않고 수익을 얻겠다면 단단히 각오를 하고 뛰어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웹소설의 경쟁자는 웹툰, 유튜브 등 스낵 컬처입니다.” 최근 웹소설 전문학원 스토리튠즈의 심화반 수업에서 현직 웹소설 작가인 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웹소설이 출퇴근길이나 점심시간 등 짧은 시간에 간편하게 즐기는 콘텐츠인 만큼 스낵 컬처의 특성을 살려야 한다는 것. 웹소설은 보통 회당 5000자로 구성돼 읽는 데 10분 정도가 소요된다. 이 때문에 강사는 웹소설을 쓸 때는 호흡이 짧은 단문을 쓰고, 대화 장면을 자주 넣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마블 영화 ‘아이언맨’이나 일본 만화 ‘원피스’를 사례로 들며 “캐릭터의 외모를 통해 시각적 특징을 부각하라”고 조언했다. 스마트폰으로 끊임없이 콘텐츠를 찾아다니는 독자들을 놓치지 않으려면 문장을 읽는 즉시 머릿속으로 생생하게 장면이 그려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간편하고 빠르게 소비하는 스낵 컬처는 통쾌한 서사를 통해 독자에게 만족감을 줘야 한다. 이른바 ‘사이다’ 서사다. 현실에서 비정규직 말단 직원인 주인공이 가상세계에선 세상을 구하는 영웅으로 각종 괴물과 싸우는 웹소설 ‘전지적 독자시점’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이 누적 조회수 3억6000만 회를 넘긴 데 이어 영상화가 추진 중인 것도 서사 덕분이다. 반면 순문학처럼 주인공이 끊임없이 고민하는 답답한 ‘고구마’ 전개가 펼쳐지면 십중팔구 실패한다. 강사는 “대리 만족을 주기 위해 주인공은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야 한다. 또 주인공은 고난을 겪되 결국엔 성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사는 각 회 막바지에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며 다음 회를 예고하는 에피소드를 남기는 ‘떡밥’을 잘 활용해야 한다고도 했다. 매일 새로운 회가 올라오는 웹소설에서 다음 회가 궁금해진 독자는 지갑을 열기 쉽다. 특히 등장인물이 죽음의 순간에 가까워지거나 로맨스가 시작될 때 회차를 끝내는 것도 기존 웹소설이 많이 쓰는 방식이다. 이는 업계에서 ‘절단 신공’이라고 불린다. 각각 조회수 5억 회, 7000만 회를 기록한 웹소설 ‘나 혼자만 레벨업’과 ‘재혼황후’ 등 웹소설의 드라마 제작이 추진 중인 것도 이런 방식에 힘입은 것이다. 전문가들은 웹소설의 지식재산권(IP) 성장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융희 청강문화산업대 웹소설 창작 전공 교수는 “스마트폰에 특화된 웹소설은 길이가 짧으면서도 독자를 어떻게 빠르게 사로잡을지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뤄진 분야”라며 “최근 웹소설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IP 시장에서 인정받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국내 최초로 고교생 웹소설 공모전을 연 이기호 광주대 문예창작학과 교수(학과장)는 “웹소설은 문학적 표현보다 다음 회를 읽게 만드는 서사 구조에 힘을 실었다”며 “연재에 중점을 두면서 발달한 장점이 영상화에서도 강점으로 작용한다”고 설명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나는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에 빠졌던 대학 시절 보부아르를 만났어요. 인간으로서의 자신뿐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제 존재를 더 정확히 들여다볼 수 있었죠.” 프랑스 파리4대학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의 철학 사상과 문학 작품 연구로 석·박사 학위를 받은 이정순 전 여성문화이론연구소 대표(65)가 현대 페미니즘 사상의 모태가 된 보부아르의 ‘제2의 성’(1949년·사진)을 10일 을유문화사에서 번역 출간했다. ‘제2의 성’은 국내에 여러 판본이 유통되고 있었지만 프랑스 원전을 정식 계약해 번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책 번역과 주석, 해설에 3년간 공을 들였다는 이 전 대표를 최근 전화로 인터뷰했다. “1980년 4월 파리에서 열린 장 폴 사르트르(1905∼1980)의 장례식에서 보부아르를 처음 봤어요. 박사 학위를 준비하던 1986년 3월에 정식으로 약속을 잡고 그를 두 번째로 만났죠. 당시 그의 미소와 그가 쓰고 있던 터번까지도 기억이 생생하답니다.” 보부아르의 철학 사상과 관련한 박사 논문을 준비하던 이 전 대표는 보부아르와 직접 대화하고 싶은 마음에 만남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진솔한 편지에 보부아르는 흔쾌히 시간을 내어 줬고, 한 시간 반 정도 대화한 뒤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건넸지만 그로부터 3주 뒤 세상을 떠났다. ‘제2의 성’은 실존주의 철학의 관점에서 원시사회부터 현대까지 여성의 상황을 예리하게 분석한 보부아르의 대표작. ‘우리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되는 것이다’라는 명제로 유명하다. 보부아르는 이 책에서 사회, 정치, 신화, 문학 등 여러 분야에서 나타나는 남성의 여성 지배 및 남성이 여성에게 부여한 역할과 이미지를 총체적으로 분석했다. 책은 보부아르에게 세계적 명성을 가져다주었지만 당시 가부장 사회에서 “남녀는 평등하다”는 주장은 강력한 반발을 불렀다. 이 전 대표는 “대중은 물론이고 지식인, 심지어 일부 여성들에게도 ‘말도 안 되는 책’이라는 비난을 받았다”고 전했다. 그는 그 시절의 양상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며 “민주주의의 세례를 받고 자란 오늘날의 젊은 여성들은 성평등 인식이 깊은 데 반해 남성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힘은 여전히 공고해 성갈등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1000쪽에 이르는 이 책을 단숨에 읽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 전 대표는 “2부에서 다루는 생애주기에 따른 여성의 체험들은 현대 여성의 상황과도 겹쳐져 쉽게 읽힐 거다. 해제를 먼저 읽은 뒤 책을 읽는 것도 좋은 시작”이라는 팁을 건넸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