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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업사원의 세계에는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다. ‘토론에 이기면 상담(商談)이 깨진다.’ 그도 그럴 것이 상담(商談)은 공통의 이익을 확인하고 다듬어 가는 과정이다. 반면 토론은 생각의 차이를 드러내는 과정이다. 서로의 주장이 맞부딪치고 결과로써 승자와 패자가 갈린다. 비록 옳은 말이라도 자신을 이기려 들거나 아픈 곳을 찌르는 영업사원에게 물건을 사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국가 간의 비즈니스도 다르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를 계기로 한국과 중국 간의 관계가 급속히 얼어붙고 있다. 마치 ‘상담(商談)의 시대’에서 ‘토론의 시대’로 옮겨가는 듯한 양상이다. 공동의 이익보다는 대만 문제나 ‘장진호 전투’처럼 상호 입장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이슈가 전면에 부상했다. 주고받는 말의 수위도 예사롭지 않다. 옳고 그름의 문제를 따지자면, 윤 대통령이 틀린 말을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국익의 관점에서 필요한 말인지 필요하지 않은 말인지, 이득이 되는 말인지 손해가 되는 말인지에 대해서는 숙고해볼 여지가 많다. 우리에게 중국은 대체 가능한 시장인가.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2001년만 해도 중국(홍콩 포함)과의 무역이 한국의 전체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4.5% 정도였다. 미국 일본 두 나라와의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33.2%)에는 절반도 못 미쳤다. 하지만 2007년 그 비중이 22.8%로 미국과 일본을 합한 비중(22.7%)을 추월했다. 지금도 중국이 미국과 일본 두 나라를 합한 것보다 규모가 큰 무역상대국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런 중국을 대체하는 시장을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다음으로 한중 간의 교역은 일대일 수평적인 관계인가. 2020년을 기준으로 중국과의 무역액을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으로 나눈 대(對)중국 무역의존도는 16.3%에 이른다. 이에 비해 중국의 대한(對韓) 무역의존도는 1.9% 정도 수준에 불과하다. 통상 갈등이 빚어졌을 때 한국은 중국보다 8배 이상의 고통을 각오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안보 문제와 달리 무역마찰에는 동맹인 미국도 이렇다 할 우군이 되지 못한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갈등 이후 롯데 등 한국 기업들이 받았던 보복 조치와 한국 문화콘텐츠에 대한 한한령의 전개 양상만 떠올려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아직 ‘노(NO)’를 할 만한 실력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대놓고 상대를 자극하는 것은 위태로운 행동이다. 모리타 아키오 소니 창업주 사례가 반면교사가 될 만하다. 모리타 창업주는 뛰어난 국제감각으로 ‘워크맨’ 등 숱한 마케팅 신화를 쓴 경영인이다. ‘일본 주식회사’의 ‘대표 영업사원’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지만 말년에 돌이키기 어려운 큰 실수를 했다. 1989년 극우 인사인 이시하라 신타로와 더불어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책을 쓴 일이다. 이 책은 당시 소니의 컬럼비아영화사 매입으로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키워가던 미국을 크게 자극했다. 모리타 창업주 자신도 이 책을 쓴 일을 후회한 나머지 영문 번역본에는 자신의 이름과 원고를 모두 빼도록 했다. 하지만 때늦은 후회였다. 일본의 반도체 산업을 쑥대밭으로 만든 미국의 ‘보복’도 이 책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힘이 부족할 때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실력을 키우는 것이 지혜다. 과감한 개혁개방으로 ‘경제대국’의 토대를 닦은 덩샤오핑이 좋은 본보기다. 1990년대 초 소련 붕괴를 앞두고 어수선한 상황에서 중국이 국제사회의 리더로 나서야 한다는 안팎의 요구에 덩샤오핑이 내놓은 답은 도광양회(韜光養晦)였다.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실력을 키운다는 뜻으로, 덩샤오핑이 부연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도광양회는 우리나라의 기본 상황과 국제적 역량을 대비하는 현실에서 출발해 큰 뜻을 품고 또 약점을 잘 감추면서, 일에 매진하는 것이다. 아울러 자신을 과시하는 것, 스스로 표적이 되는 것, 스스로 지른 불에 타 죽는 것을 피하는 것이다.’ 미국이 국운을 걸고 중국과의 ‘디커플링’을 추진하는 현실에서, ‘탈(脫)중국’은 동맹인 한국으로서 상당 부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선택이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나서서 중국의 ‘타깃’이 될 이유는 없다. 중국도 미국을 상대로 할 말을 하기까지는 30년의 도광양회가 있었다. 아직은 토론보다 상담(商談)이 필요한 때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2000년 이후 작년까지 미국이 ‘국빈방문(state visit)’ 형식으로 외국 정상을 맞은 것은 모두 18차례다. 1년에 한 번꼴이 채 안 된다. 2013년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이 자신에 대한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감청 의혹에 분노해 국빈방문 직전에 전격 취소한 일이 있긴 했지만, 아주 예외적인 경우다. 초강대국 미국의 대통령으로부터 최상의 예우와 대접을 받는 일이다 보니, 성사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외교적 성과가 되기도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빈방문을 위해 오늘 미국으로 향한다. 이번 방문은 한미동맹 70주년을 기린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넘어 대(對)중국, 대러시아 외교 관계의 중요 전환점이라는 실질적 의미를 갖게 될 가능성이 크다. 윤 대통령의 외신 인터뷰를 놓고 한-미 대 중-러 간에 격렬하게 벌어진 전초전이 예고하는 바다. 대통령실은 대만-우크라이나 관련 윤 대통령의 발언은 상식적이고 원론적인 수준의 답변이라는 입장이다. 중-러의 괜한 과민반응이라는 것이다. 발언의 득실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평가도 크게 다르다. “미국 중심 동맹열차의 앞자리에 올라타야 한다”는 ‘전략적 명확성’ 옹호론과, “중-러와 각을 세우는 것은 위험한 선택”이라는 ‘전략적 모호성’ 옹호론이 교차한다. 미국과 중-러의 대결이 어떻게 전개될지 아직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상황이고, 양자택일이 가져올 결과의 중대성을 고려할 때 쉽게 결론을 낼 일은 아니다. 이런 때 미국과 중-러 간, 전략적 명확성과 전략적 모호성 간의 갈림길에서 미국의 주요 동맹국 지도자들이 보여주는 행보는 우리에게 중요한 ‘나침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2000년 이후 미국을 유일하게 두 번 국빈방문한 국가원수다. 미국으로선 최선의 호의를 베푼 셈이다. 미국과 프랑스의 동맹은 미국 독립전쟁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랜 관계다. 그런데도 마크롱 대통령은 이달 초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대만 문제와 관련해서 “유럽은 미국의 추종자가 돼서는 안 되며, 유럽의 것이 아닌 위기에 연루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요컨대 ‘유럽과 미국은 다르다’는 ‘전략적 자율성’론이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마크롱 대통령과 윤 대통령에 이은, 바이든 정부의 세 번째 ‘국빈’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인도는 미국이 중국의 인도·태평양 진출을 봉쇄하기 위해 가장 공을 들이는 나라 중 하나다. 미국에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다음으로 중요하다는 다자안보협의체 ‘쿼드’의 멤버다. 하지만 인도는 미국 등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에 결정적인 ‘구멍’이 되고 있다. 우크라이나전 발발 후 러시아산 석유를 중국 다음으로 많이 수입하고 있고, 인도 루피-러시아 루블의 결제 시스템을 도입해 금융제재를 종이호랑이로 만들었다. 최근에는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까지 논의하는 중이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지난해 10월 유럽연합(EU) 정상들과 함께 중국을 “적대적 경쟁자”라고 선언해 놓고,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대규모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다. 미국의 ‘80년 혈맹’인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의 간청을 뿌리치고 산유국들의 유가 기습 인상을 주도해 인플레 전쟁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외로워지고 있다”는 로런스 서머스 전 미 재무장관의 최근 진단이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이다. 미국의 주요 동맹 리더들이 ‘바이든 동맹열차’의 앞자리를 굳이 비워 두는 이유는 미국과 정서적으로 덜 친밀해서도, ‘바보’여서도 아닐 것이다. 미-중 간 ‘디커플링(Decoupling)’의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데다 도를 넘어선 ‘메이드 인 USA 우선주의’가 동맹국들의 국익과 충돌하는 부분이 점점 가시화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도 이미 미국의 반도체법이나 인플레감축법(IRA) 발효 과정에서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 안보 현실에서 한미동맹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하지만, 디테일 하나하나까지 ‘동맹’과 ‘국익’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싫든 좋든 아직은 중국이 한국의 최대 교역국이라는 현실에도 눈을 감을 수 없다. 70년간 피로 나눈 한미의 진한 유대와 우정을 확인하는 샴페인 잔이 오가는 순간에도, 윤 대통령이 국익을 위한 주판과 계산기만큼은 치우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방미 성과를 내는 만큼이나 국빈방문의 ‘사후 청구서’를 줄이는 일도 중요하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미국 인디애나대 연구에 따르면 현생 인류인 호모사피엔스가 지구상에 존재해온 25만여 년 동안, 첫아이를 본 아버지의 평균 나이는 30.7세였다고 한다. 만혼(晩婚)이 일상화된 2023년 한국에서는 어떨까. 한국 남성은 대개 20대 초반에 군대에 간다. 제대 후 ‘취업운’이 순탄하면 대졸자의 경우 26세 안팎, 비대졸자의 경우 23세 안팎에 첫 직장에 들어간다. 그런 다음 열심히 저축을 해서 전셋집 한 칸이라도 마련할 여유가 생기는 33, 34세 정도에 결혼을 한다. 첫아이는 30대 중반은 돼야 보게 된다. 설령 입대를 미루고 결혼부터 서두르려 해도 심각한 취업난·주택난이 앞을 막는다. 첫아이를 보는 나이가 ‘호모사피엔스 평균’에 도달하는 것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다. 국민의힘 정책위원회에서 나왔다는 ‘30세 전 아이 셋 낳은 아빠 병역 면제’ 아이디어는 이런 점에서 현실성이 전혀 없는 탁상공론이다. 사전에 길 가는 청년 서너 명만 붙잡고 물어봤어도, “왜 애는 여자가 낳는데 혜택은 남자가 보느냐”와 같은 불필요한 분란을 일으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여당 민생특위에서 나왔다는 ‘밥 한 공기 다 비우기 운동’ 아이디어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다. 고령에 힘겹게 벼농사를 짓는 농민들을 생각하면 매년 쌀 소비가 줄어드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쌀 소비 감소가 다이어트를 위해 밥을 남기는 여성들 때문은 아니다. 밥상에서 쌀을 밀어내는 ‘주범’을 굳이 찾자면 다이어트가 아니라 고기다. 2012년까지만 하더라도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돼지고기 닭고기 소고기 등 육류보다 29.2kg이나 많았다. 하지만 ‘밥보다 고기’ 현상이 가속화하면서 작년을 기점으로 육류가 쌀 소비를 추월했다. 그렇다고 ‘고기 덜 먹기 운동’을 해서 쌀 소비를 늘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쌀 소비를 늘리자는 논의는 좋은 의도에서 시작했을 수 있다. 하지만 심각한 쌀 과잉생산을 유발할 수 있는 더불어민주당의 양곡관리법에 대한 비판과 대안이라는 맥락에서 나온 이상 희화화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윤석열 정부가 ‘주 69시간’ 논란에서 보여준 갈팡질팡과 정책 난맥상은 더 심각하다. 노동개혁은 노동, 교육, 연금 등 3대 개혁 중에서도 현 정부가 첫손가락에 꼽는 핵심 과제다. 주 52시간제 개편안은 그중에서도 ‘1호 법안’이다. 준비할 시간도 충분했다. 윤 대통령의 핵심 공약 중 하나였고 정부 안에서 제대로 된 논의가 시작된 것도 지난해 6월부터다. 3대 개혁은 비단 중요하다고 해서만 3대 개혁인 것이 아니다. 계층 간, 세대 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서다 보니 해결되지 않은 문제와 모순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켜켜이 쌓여있는 영역이다. 그만큼 어려운 숙제라는 의미다. 개혁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이해당사자들과의 충분한 사전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한 대의(大義)만 앞서고 ‘디테일’이 없어서는 추진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반발이나 난관을 돌파해 나갈 수 없다. 그러나 정부는 바뀌는 산업 환경에 맞춰 근로시간을 다양화하고 선택권을 확대한다는 제도 개혁의 취지를 전달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 예외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극단적인 사례인 ‘주 69시간’이 마치 법안의 본질인 것처럼 여론이 흘러가는데도 전혀 효율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 주무 부처인 고용노동부가 해명이라고 내놓은 어설픈 카드뉴스는 거꾸로 비판 여론에 불을 질렀다. 결정적으로 윤 대통령과 대통령 참모들은 주당 근로시간 ‘60시간 상한’을 놓고 계속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연출하면서 정책의 일관성과 신뢰성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국민의힘은 소수 여당이다. 윤석열 정부가 불리한 국회 의석 구조를 극복하고 국정 주도력을 발휘하려면 국민의 지지 외에는 달리 우군이 없다. 그러나 최근 한국갤럽 조사나 엠브레인퍼블릭 등 4개 기관의 공동 조사를 보면, 윤 대통령의 양곡관리법 거부권 행사나 주 52시간제 개편 모두에 대해 비판 여론이 긍정 여론을 압도한다. 최근 정부 여당이 연이어 쏟아낸 자책골과 정책 참사가 자초한 결과다. 윤 대통령은 최근 이 같은 난맥상을 수습하기 위해 당정 협의를 강화하라고 지시했지만, 당과 정부가 모두 환골탈태하지 않으면 협의 시간을 늘린다고 해서 나아지는 게 있을지 의문이다. 불신의 늪에 빠진 정책 신뢰성을 회복하려면, 우선 정부 여당이 바뀌려 한다는 믿음부터 심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첫 단추가 철저한 자기반성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테라-루나’ 폭락 사태의 핵심 인물인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가 지난주 몬테네그로에서 체포됐다. 그는 작년 9월 인터폴 적색수배가 떨어진 이후에도 트위터를 통해 “죄도 없고 도망가는 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위조여권까지 갖고 있었던 걸 보면, 영락없는 ‘도주 범죄자’의 행색이다. 그는 한국 검찰뿐 아니라 미국과 싱가포르 사법당국에도 쫓기는 신세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와 검찰은 이미 그를 기소까지 한 상태다. 그가 설계한 ‘테라’는 일명 ‘스테이블 코인’이다. ‘스테이블(안정적이라는 뜻)’은 코인 1개의 가치가 항상 1달러가 유지되도록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스테이블 코인이 이름값을 하려면 통상 발행된 코인의 총액만큼 달러화를 담보로 예치해 둬야 한다. 하지만 테라는 이런 담보가 없어도 ‘루나’라는 자매 코인과의 ‘알고리즘’을 통해 ‘1테라=1달러’를 유지한다고 주장했다. 권도형은 이런 허황된 이야기만으로는 투자자를 모으기가 어렵다고 봤는지, 연 20%짜리 코인 예금상품까지 내걸었다. 현란한 전문용어로 포장된 디지털 눈속임과 폰지 사기에서 흔히 보이는 고수익 미끼가 ‘테라-루나 생태계’를 떠받치고 있었던 셈이다. 테라-루나는 한때 성공 가도를 걷는 것처럼 보였다. 코인의 가치가 100배 넘게 올랐고, 시가총액은 50조 원 이상으로 부풀었다. 그러나 모래 위에 쌓아올린 성이 오래 버틸 리 없었다. 작년 5월 테라-루나의 안정성에 대한 회의론이 확산되자, 불과 일주일 만에 가격이 1만분의 1로 폭락했다. 시가총액 50조 원이 한순간에 증발했고, 국내에서만 20여만 명의 피해자가 발생했다. 미국 SEC는 테라-루나 사태를 권도형이 주장하는 “실패”가 아니라 ‘증권 사기’라고 단언한다. SEC가 공개한 소장(訴狀)에 따르면 권도형은 2021년 5월 ‘1테라=1달러’가 무너지자 제3자에게 테라를 대량으로 매집하게 해서 가격을 끌어올렸다. 그러고선 마치 테라-루나의 알고리즘이 ‘자기회복력’을 발휘한 것처럼 선전했다. 폭락 사태로 “전 재산을 잃었다”는 그의 말 또한 거짓이었다. 지난해 6월 이후 스위스 은행을 통해 1억 달러 이상의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인출한 사실이 SEC에 꼬리를 밟혔다. 그가 검거된 현시점에서 최대 관심사는 어느 나라에서 재판을 받게 되느냐는 것이다. 법률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그가 한국으로의 송환을 희망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한국에서라면 훨씬 가벼운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미국 법원이 금융·증권 범죄를 얼마나 중한 범죄로 여기는지는, 2009년 70조 원대 다단계 금융사기로 기소됐던 버나드 메이도프가 징역 150년을 선고받은 데서 여실히 드러난다. 여기에 비하면 금융·증권 범죄에 대한 한국의 단죄와 처벌은 한마디로 ‘솜방망이’ 수준이다. 대법원 통계에 따르면 2020년 한 해 동안 주가조작 등 증권 불공정 거래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64명 중 40%에 해당하는 26명이 집행유예를 받았다. 사회적으로 크게 이목이 집중됐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만 하더라도, 1심 법원은 권오수 전 도이치모터스 회장의 유죄를 인정하면서도 “실패한 시세조종”이라는 이유를 들어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검찰은 검찰대로 김건희 여사 관련 부분에 대해 수사 의지 자체를 의심받고 있다. 라임·옵티머스·디스커버리 등 이른바 ‘문재인 정권의 3대 펀드 사건’에 대해서도 부실수사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권도형의 국적은 한국이다. 인터폴을 통해 먼저 적색수배를 건 것도 한국이다. 실낱같지만 피해 구제를 위해서도 권도형은 한국으로 데려올 필요가 있다. 그런데도 권도형 체포 뉴스를 접한 많은 사람들이 “차라리 그를 미국으로 보내버리는 게 나은 것 아닌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솜방망이’ 처벌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2020년 미국 사법당국이 한국에 세계 최대 아동 성 착취물 사이트 운영자인 손정우에 대해 범죄인 인도를 요청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라면 징역 50년 이상의 중형이 예상되는 상황이었지만, 손정우는 결국 한국에서 재판을 받았고 징역 2년(일부 혐의에 대해서는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복역을 마쳤던 상황)의 가벼운 처벌을 받는 데 그쳤다. 권도형에 대해서도 이런 일이 재연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그러자면 철저한 수사를 통해 빈틈없는 증거와 법리를 갖춰야겠지만, 법원의 양형이나 금융·증권 범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도 획기적으로 달라져야 한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사업가를 뜻하는 영어 단어 ‘비즈니스맨(Businessman)’은 원래 영국에서 ‘공직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단어가 지금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된 것은 미국으로 건너간 다음부터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미국은 어떤 나라보다 공직과 비즈니스 간의 경계가 희미하다. “미국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비즈니스다(The chief business of the American people is business).” 캘빈 쿨리지 전 대통령이 남긴 말이다. 이런 점에서는 외교통이라는 조 바이든 대통령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이후 지금까지 한국과의 관계에서 보여 온 행보를 돌이켜 보면 ‘퍼스트 비즈니스맨’이라는 칭호가 가장 어울려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은 2021년 5월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국 대기업들로부터 44조 원의 ‘투자 선물 보따리’를 챙겼다. 이어 지난해 5월 하순에는 한국을 직접 방문해 한국 대기업들의 ‘투자 보따리’를 100조 원으로 키워서 가져갔다. 이런 투자 계획들이 구체화하면서 한국 기업들은 지난해 어떤 외국 기업보다 많은 일자리를 미국 안에서 만들어 냈다. 바이든 대통령은 한국 기업에 ‘러브콜’을 보낼 때마다 지원 약속을 빼놓지 않았었다. 지난해 방한 당시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을 만나서는 “투자에 보답하기 위해 실망시키지 않도록 지원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고, 삼성전자 평택공장을 방문해서는 “(한국 반도체 산업이) 양국 간 기술동맹을 통해 더욱더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의 약속과 공언(公言)은 현재로선 ‘공수표’가 된 상태다. 현대차는 바이든 대통령이 서명한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의 최대 피해자가 됐다. 미국의 유력 일간지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현대차에 대한 미국 행정부의 기습공격”이라고 평가했고, 현대차 공장을 유치한 조지아주 팻 윌슨 경제개발부 장관은 “불이익과 모욕”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그나마 배터리 업체들은 IRA의 수혜를 볼 것으로 예상했으나 미국 기업과 중국 기업이 손을 잡고 ‘IRA 우회로’를 찾으면서 자칫하면 헛물만 켠 꼴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반도체는 더 심각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의 대중 반도체 수출 규제로 각각 33조 원과 22조 원을 투자해 놓은 중국 내 반도체 공장의 ‘업그레이드’에 심각한 제약을 받게 될 처지다. 여기에 더해 미국 정부는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공장을 지으면서 보조금을 받을 경우 영업기밀까지 들여다보겠다는 부대조건을 내걸었다. 이쯤 되면 미국의 ‘칼날’이 중국만 겨냥한 것인지,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들까지 동시에 겨냥한 것인지 그 의도가 의심스러운데,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의 최근 언행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러몬도 장관은 지난달 23일 한 강연에서 “난 미국이 모든 최첨단 반도체 생산 기업이 상당한 연구개발 및 대량 제조 시설을 둔 ‘유일한 국가’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작년 6월에는 러몬도 장관이 한국에 7조 원을 들여 공장을 짓는 방안을 검토 중이던 대만의 반도체웨이퍼 업체를 미국으로 ‘가로채 간’ 일도 있었다. 현재 한국 경제는 중증(重症)의 복합위기에 빠져 있다. 수출, 성장, 물가, 경상수지 어느 하나 성한 것이 없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의 부진한 성적표를 한 달이 멀다 하고 갈아 치우는 중이다. 더 큰 문제는 이것이 일시적인 지표상의 부진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국이 미국에 최종 소비재를 내다 팔고, 한국은 중국에 중간재를 수출하는 ‘비즈니스 모델’ 자체가 통째로 흔들리는 데서 오는 구조적인 위기라는 점이다. 중국시장이 급속히 위축되는 와중에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줄 것 다 주고 뒤통수까지 맞는 현실에서는 한국 경제의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4월 말로 예정된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는 결코 허비해선 안 되는 기회다. 미중 간의 신냉전 구도 속에서도 ‘한국이 땅에 발을 딛고 설 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이번 방미에서 입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자면 사실상 ‘밑장 빼기’로 변질돼 가는 IRA와 반도체법을 ‘공정한 법’ ‘동맹과 같이 가는 법’으로 돌려 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미국의 ‘퍼스트 비즈니스맨’을 상대할 수 있는 카운터파트는 한국에서 ‘1호 영업사원’뿐이다. 결국은 윤 대통령의 숙제라는 이야기다.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지만, 바이든 대통령이 입 밖으로 꺼내 놓은 ‘말 빚’이 있기에 꼭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한국은 2005년부터 매년 햅쌀 수천억∼1조 원어치를 사들여 창고에 쌓아 두는 ‘공공비축제’를 시행하고 있다. 또 이와 별개로 쌀값이 떨어지면 정부가 나서서 과잉 생산된 물량을 사들이는 ‘시장격리제’도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9월 중순까지만 해도 10여 차례나 시장격리를 단행했고, 거기에 들어간 돈만 5조 원이 넘는다. 비축·격리로 창고에 재어둔 쌀은 3년쯤 뒤 매입·보관비용의 10분의 1이 조금 넘는 헐값에 가공용으로 처분된다. 이런 식으로 매년 1조 원이 훨씬 넘는 혈세가 허공으로 증발한다고 보면 된다. 이런 현실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쌀 과잉생산을 더 부추기게 될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밀어붙이고 있다. 현행 양곡관리법에는 ‘쌀 시장격리’가 정부의 재량사항인데, 아예 의무조항으로 ‘대못질’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24일 “양곡관리법 처리를 반드시 매듭짓겠다”고 강조하면서 주된 명분 중 하나로 ‘식량안보’를 내세웠다.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식량안보’의 정의는 1996년 세계식량정상회담에서 논의된 내용에 바탕을 두고 있다. ‘모든 사람이 활동적이고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식습관과 음식선호를 충족시키는 안전하고 영양가 있는 식탁에 물리적·경제적으로 언제든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식량안보의 정의다.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는 대목은 ‘음식선호’다. 어떤 비상상황에서도 밥, 잡곡, 라면, 빵, 고기, 야채 등을 식탁에 골고루 공급할 수 있어야 진정한 식량안보가 이뤄지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식량안보는 극히 취약하다는 평가를 면할 수 없다. 지나친 쌀 편중 때문이다. 쌀은 매년 초과공급 물량을 처리하느라 홍역을 치르고 있지만 나머지 작물의 자급률은 형편없이 낮은 수준이다. 2020년 기준으로 밀 자급률은 0.8%에 불과하고 옥수수와 콩도 각각 4.2%와 23.7%에 그친다. 한정된 재원으로, 쌀에 지금처럼 많은 돈을 쏟아붓다 보면 밀·콩·옥수수 등 다른 작물의 자급률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이 대표가 쌀 과잉생산을 더 심화시킬 개정안을 강행하는 명분으로 “식량안보” 운운한 것은 번지수가 틀려도 한참 틀린 것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지난해 9월 민주당 개정안이 그대로 시행되는 경우를 가정해 추산한 바에 따르면 2022년부터 2030년까지 초과생산된 쌀을 ‘시장격리’시키는 데 매년 평균 1조443억 원의 재정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일부 민주당 의원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함께 포함돼 있는 ‘쌀 생산조정제’(타 작물 재배 지원사업)의 효과 때문에 쌀 생산이 줄어들어 시장격리 상황 자체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가당착이다. 쌀 시장격리를 할 필요가 없어지는데, 굳이 재량사항을 의무사항으로 바꿀 이유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한국의 공공비축과 시장격리 제도가 얼마나 심각한 자원 낭비인지는 쌀 소비량이 우리의 2배가량인 일본과 비교해 봐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2022년 생산분의 경우 한국은 공공비축용과 시장격리용으로 각각 45만 t씩 총 90만 t을 사들였다. 이에 비해 일본은 20만 t을 공공비축용으로 사들였다. 정부 예산으로 남아도는 쌀을 사들여 시장에서 격리시키는 제도는 아예 없다. 개정안을 ‘악법’으로 볼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법안이 담고 있는 ‘메시지’ 때문이다. 개정안의 내용은 쌀을 아무리 많이 생산해도 과잉생산 물량을 정부가 사들여서 가격을 떠받칠 테니 마음 놓고 쌀농사를 지으라고 권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쌀 과잉생산의 악순환이 끝없이 되풀이될 것이다. 민주당이 국회의장의 중재를 받아들였다며 내놓은 수정안도 본질은 매한가지다. 숫자 몇 개 바꾸고 조건 한두 개 더 붙였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이 대표는 2021년 2월 25일 대선후보 토론에서 당시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를 상대로 마치 가르치기라도 하듯 “식량안보란 밀, 콩 같은 전략식량에 대해 지원금을 준다는 뜻”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한정된 재정 여건상 밀, 콩 같은 전략식량을 지원하려면 ‘밑 빠진 독’이나 다름없는 쌀 시장격리 의무화 조항은 폐기하는 것이 마땅하다. 정작 자신은 아는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남을 가르치려 드는 것은 정치지도자가 아닌 요설가의 행동이다. 이 대표가 자신이 했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고, 한국의 식량안보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잘못을 범하지 않기 바란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공기업이던 포스코와 KT가 민영화된 것은 각각 2000년과 2002년의 일이다. 20년도 넘었다. 포스코 최정우 현 회장과 KT 구현모 현 대표는 모두 민영화 이후 5번째 최고경영자(CEO)다. 전임자들은 대부분 끝이 좋지 않았다. 검찰의 집중적인 수사를 받고 ‘타의로’ 자리를 내놨거나, 수사가 저인망처럼 조여 오자 자진사퇴 형식으로 화(禍)를 피했다. 두 번째 임기까지 채운 황창규 전 KT 회장도 불기소 처분을 받기는 했지만 수사의 칼날을 피하지는 못했다. 이전 정권에서 임명한 CEO는 일단 ‘몰아내고 본다’는 것이 공식처럼 되풀이되다 보니 벌어졌던 일이다. 여기에는 보수정권이든 진보정권이든 예외가 없었다. 권력형 비리가 만연했던 5, 6공 시절을 배경으로 한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난 니가 깡팬지 아닌지는 관심이 없어. 넌 내가 깡패라고 하면 그냥 깡패야.” 영화 속 검사가 극 중 피의자에게 하는 말이다. 역대 정권이 이른바 ‘국민 기업’인 포스코와 KT를 대해온 방식이 딱 이런 식이었다. 이는 ‘민간 주도 경제’를 기치로 내건 윤석열 정부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국민연금이 전면에 나섰다는 점이다. 최근 국민연금의 공개적인 압박에 KT 이사회는 CEO 선임과 관련해 지금까지 밟아온 절차를 백지화하고 새롭게 공개경쟁 방식의 공모 절차를 진행하기로 했다. 국민연금이 KT 1대 주주의 자격으로 CEO 선임에 대한 의사를 밝힐 수는 있다. 다만 CEO 후보자의 경영 성과와 자격, 절차적 공정성에 대해 객관적이고 투명한 판단 근거는 제시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드는 의문이다. 먼저 경영 성과. 지난해 KT는 1998년 상장 후 처음으로 매출 25조 원을 돌파했다. 영업이익으로는 1조6901억 원을 벌었다. 이에 따라 국민연금은 526억9000만 원을 현금으로 배당받았다. 둘째 구 대표의 자격과 관련해 ‘국회의원 쪼개기 후원금’ 사건 간여 정도다. 구 대표는 이로 인해 벌금형 약식명령을 받았으나 이에 불복해 정식 재판을 청구했다. KT 규정상 금고 미만은 CEO 결격 사유가 아니다. 그래서인지 국민연금은 이런 것들보다는 주로 CEO 선임 절차의 공정성을 문제로 삼고 있는데, 그마저도 구체적인 설명이 부족하다. 가장 우려스러운 대목은 정치권력이나 정부가 배후에 있는 ‘연금 관치’ 가능성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과거 정부투자기업 내지는 공기업이었다가 민영화되면서 소유가 분산된 기업들은 ‘스튜어드십’이 작동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흘 뒤 열린 국민의힘 비상대책회의에서는 포스코, KT 등을 콕 집는 발언이 나왔다. ‘관치’가 아니라고 굳이 부인할 생각도 없어 보인다. 30일 열린 세미나에서 한 여당 의원은 “단기적으로 ‘관치’라는 비판을 받더라도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해 완전 민영화된 우리금융의 경우는 국민연금 대신 금융위원장과 금융감독원장이 나서서 총대를 멘 경우지만, ‘관치 부활’이라는 맥락에서 무관치 않아 보인다. 전임 CEO의 3연임을 저지하고, 만들어진 빈자리를 꿰찬 것은 ‘모피아 적통’에 해당하는 임종룡 전 금융위원장이었다. 우리금융 민영화는 뭘 위한 민영화였나. 2010년 영국에서 시작된 ‘스튜어드십 코드’는 남의 돈을 맡아 관리하는 금융기관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규칙을 정리한 것이다. 핵심은 충직한 집사처럼 주인의 이익을 배신하지 않는 것이다. 무작정 남의 것을 베낄 일이 아니다. 우리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은 전 국민의 소중한 노후자금을 지키는 데 모든 코드가 맞춰져야 한다. 관치나 정치권력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립성을 갖추는 것이 제1번 코드가 돼야 한다. 과거 한국 경제를 국가부도의 수렁으로까지 몰아넣었던 ‘관치의 망령’을 무엇보다 경계해야 한다. ‘국민연금이 관치에 동원된 미래’를 상상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탈원전이나 전기요금 포퓰리즘 등 정부 정책에 발목이 잡혀 작년 한 해 동안에만 30조 원이 넘는 적자를 낸 한전의 ‘꼴’을 보면 된다. 우선은 소유 분산 기업이 대상이라고 하지만, 연금 관치의 물꼬가 일단 트이면 대상이 확대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번 정권이 선을 넘지 않는다고 해도, 다음 정권까지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윤석열 정부가 ‘연금 관치’의 막을 열어 국민연금의 고갈을 더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난방비 문제 해결 방안으로 ‘횡재세’를 거론했다. 이 대표는 25일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현 제도를 활용해 정유사에 부과금을 매기는 방안을 먼저 언급한 뒤 “차제에 다른 나라들이 다 만들어 시행하고 있는 횡재세 제도도 확실하게 도입하는 것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일부 민주당 의원은 해당 법안까지 국회에 발의해 놓은 상태다. 우선 “다른 나라들이 다 만들어 시행하고 있는 횡재세”라는 이 대표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미국 중국 일본에는 횡재세가 없다. 횡재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유럽에서 주로 도입되거나 논의되고 있다. 영국이 특히 선도적인데, 한국과는 환경 자체가 크게 다르다. 영국은 세계 3대 유종(油種) 중 하나인 ‘브렌트유’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산유국이다.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BP, 셸, 하버에너지 등 글로벌 석유메이저들까지 여럿 거느리고 있다. 횡재세는 이 업체들이 북해유전에서 원유와 가스를 뽑아 올리면서 얻는 초과이윤에 대해 매기는 세금이다. 영국과 달리 한국에는 자체 유전을 갖고 원유를 생산하는 ‘석유회사’가 없다. 100% 수입으로 들여온 원유를 정제해서, 휘발유 경유 항공유 등 석유제품의 형태로 파는 ‘정유회사’들이 있을 뿐이다. 이런 정유사업은 노다지나 횡재와는 거리가 있다. 원유가 등락에 따른 리스크를 고스란히 져야 하고 설비와 기술에 막대한 투자를 해야 한다. 그래서 영국도 정유사업이나 석유제품 소매를 통해 벌어들인 이윤에는 횡재세를 부과하지 않는다. 이 대표와 민주당이 또 하나 간과해선 안 되는 것은 정유산업이 한국의 주력 수출산업이라는 사실이다. 지난해 국내 정유사들의 석유제품의 수출액은 570억 달러로 전체 품목 중 반도체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한국 정유사들의 매출 60%는 수출에서 나온다. 이런 국제 경쟁력을 갖추기까지는 사활을 건 설비투자와 기술개발, 마케팅 노력이 있었다. 정상적인 기업 활동을 통해 창출한 영업이익에 ‘횡재’라는 딱지를 붙여 국가가 거둬간다면 투자와 고용은 위축되고 경쟁력도 추락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올 초부터 횡재세가 한층 강화되자 관련 기업들이 투자와 고용을 줄이는 계획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한국 수출산업은 가뜩이나 간판 주자인 반도체의 부진으로 앞이 안 보이는 상황이다. 이런 마당에 정유산업마저 ‘세금 폭탄’으로 팔다리를 묶을 수는 없다. 횡재세는 세제 원리로 봐도 ‘나쁜’ 세금에 속한다. 명확성과 예측가능성이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 재무장관을 지낸 비토르 가스파르 국제통화기금(IMF) 재정국장은 유럽연합(EU)의 횡재세 도입 논의와 관련해 “세제의 안정성을 해치는 문제적 발상”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형평성도 문제다. 정유는 대상이 되고 반도체 자동차 방위산업 금융은 안 되는 근거는 뭔가. 난방비가 문제라고? 그럼 정유사가 아니라, 한국지역난방공사가 정확한 ‘번지수’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의 여파로 석유 수요가 급감하자, 한때 선물(先物)시장 원유가격이 배럴당 마이너스 37.63달러까지 떨어진 일이 있다. 원유를 돈을 받고 파는 것이 아니라 돈을 주고 팔아야 했다. 그해 상반기 한국 정유사들도 약 5조 원의 손실을 냈다. 앞으로 유사한 상황이 생기면 정부가 나서서 보전해주도록 할 셈인가. 반도체는? 자동차는? 철강은? 이 대표는 지난 대선에서 기본소득 재원 마련 방안으로 처음에 국토보유세를 들고나왔다. 그러나 여론의 역풍이 만만치 않자 다시 탄소세를 대안으로 내놨다. 기업들을 대상으로 연간 법인세의 절반, 또는 총액과 맞먹는 금액을 거둬들인다는 구상이었다. 이런 일이 만약 현실이 된다면 한국 기업들은 법인세를 두 번 내는 셈이 된다. 그나마 이 꼴 저 꼴 참아가며 국내에 남아 있는 기업들마저 전부 짐을 싸서 나가라고 등을 떠미는 꼴이다. 국토보유세, 탄소세, 횡재세에는 동일한 ‘스토리 라인’이 있다. 먼저 악당이 그려진다. 국토보유세에는 투기에 눈먼 땅 주인, 탄소세에는 환경을 파괴하는 기업, 횡재세에는 과도한 이윤을 탐하는 기업이 악당으로 등장한다. 그러면서 정치는 스스로를, 약자를 대변하는 로빈 후드로 포장한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 국민들도 진부한 ‘로빈 후드 스토리’에 이골이 난 지 오래다. 횡재세 논의는 이쯤에서 접는 것이 좋다. 기업 때리기로 정치적 ‘횡재’를 하는 시대는 지나갔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일본 히로시마현 구레(吳)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초대형 전함 ‘야마토’를 건조한 공창(工廠)이 있던 항구다. 이곳에서는 현재 길이가 248m에 이르는 대형 호위함 ‘가가’를 개조하는 작업이 8개월 넘게 진행되고 있다. 개조 작업이 끝나면 가가는 최신예 수직이착륙 스텔스 전투기 F35B를 탑재하는 항공모함으로 변신하게 된다. 가가의 자매 격인 ‘이즈모’는 2021년 6월 F35B 이착륙이 가능하도록 갑판 개조 작업을 마쳤다. 이즈모와 가가의 당초 용도는 헬리콥터 탑재용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전투기 탑재용 항공모함으로의 개조를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라는 의혹이 줄기차게 제기됐었다. 일본 정부는 자위대 여성 간부용 방이라고 주장했지만, 함재기 조종사와 정비사를 위한 공간으로밖에 안 보이는 선실이 100개 가까이 만들어져 있는 등 의심스러운 대목이 많았다. 일본 정부의 본심이 드러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2018년 말 이즈모와 가가를 항공모함으로 개조한다고 공식화했다. ‘공격용인 항공모함을 보유하는 것은 평화헌법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 등에 대해 당시 일본 정부의 한 관계자가 내놓은 답은 “재해 대응 등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너무나도 옹색한 변명에, 일본의 재무장에 민감한 중국에서는 “F35B를 재난 구조에 쓰는 나라는 일본뿐”이라는 등의 비아냥이 쏟아졌다. 이즈모와 가가의 사례에서 보듯 일본 정부는 ‘공격 받을 때만 최소한으로 자위력을 행사한다’는 ‘전수방위(專守防衛) 원칙’을 교묘한 구실과 논리를 동원해 형해화시켜 왔다. 다만 지금까지는 슬금슬금, 야금야금 행동에 옮겨 왔다. 그러나 작년을 전환점으로 노골적인 ‘전수방위 이탈’과 군사대국화에 나서고 있다. 국내총생산(GDP)의 1% 범위 안에서 억제하도록 돼있던 방위비 지출을 GDP의 2%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계획을 내놨고, ‘적 기지 공격능력 보유’를 3대 안보 문서에 명기했다. 물론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이 굳건한 이상 ‘적 기지 공격능력 보유’가 한국을 겨냥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방위비 증액도 현재로선 중국의 팽창에 대응하기 위한 성격이 짙다. 일본 정부 싱크탱크에서는 ‘공격하는 측은 방어하는 측보다 병력이 3배 많아야 한다’는 ‘공자(攻者) 3배’의 법칙을 방위비 증액의 명분으로 세우기도 한다. 현재 일본 국방비가 중국의 6분의 1 수준이기 때문에 GDP 대비 비율을 2배로 올려야 중국의 공격에 버틸 수 있다는 것이다. 이즈모와 가가의 항공모함화만 하더라도 중국과 영토 갈등을 빚고 있는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게 일본 정부 안팎의 설명이다. 그럼에도 한국이 일본의 군사대국화에 대한 경계심을 늦출 수 없는 이유는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몰고 가려는 일본의 도발 수위가 해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적 기지 공격능력’을 명기한 3대 안보 문서에는 “일본 고유의 영토인 다케시마(일본이 주장하는 독도 명칭)에 대해 일본의 일관된 입장에 기초해 의연히 대응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직전 문서인 2013년 판 ‘국가안보전략’에는 ‘다케시마’라고만 표기했으나 이번엔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수식어가 추가됐다. 독도를 둘러싼 갈등으로 아찔했던 순간도 있었다. 2006년 4월 한국 측의 독도 주변 해류조사를 둘러싸고 양국은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갈 뻔했다. 이때는 한국 해경과 일본 해상보안청이 대치 전면에 나섰지만, 2018년 12월에는 우리 군과 자위대가 갈등의 당사자가 됐다. 일명 ‘초계기 갈등’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독도를 끊임없이 분쟁지역화하려는 일본이다. ‘전수방위’ 원칙이 완전히 무너지고 일본 정치의 우경화가 심화한다면, 이즈모와 가가를 센카쿠열도에는 보내고 독도 해역에는 안 보내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서도 웬만한 돌발 악재에는 흔들리지 않도록, 탄탄한 우호관계를 만들어 가는 일이 중요하다. 원활한 소통채널도 구축해야 한다. 하지만 마냥 상대방의 선의에만 기댈 수는 없는 것이 안보다. ‘설마’에 기대서도 안 된다. 윤석열 대통령은 11일 “일본도 이제 머리 위로 중거리탄도미사일(IRBM)이 날아다니니까 방위비 증액하고, 소위 반격 개념을 국방계획에 집어넣기로 했지 않았나”라고 말했다. 하지 않는 게 나았을 말이다. ‘공격할 수 있는 나라 일본’에 꽃길을 깔아줬다간 언제 우리에게 부메랑이 될지 모른다. 역사가 말한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프로 스포츠 선수들의 세계에는 ‘2년 차 징크스(sophomore jinx)’가 있다고 한다. 데뷔 첫해 펄펄 날던 선수들도 2년 차가 되면 성적이 곤두박질치는 사례가 흔하게 나타난다. 자초한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지만 한국의 대통령들도 집권 2년 차에 정권의 명운이 달린 위기와 봉착하는 징크스를 겪어 왔다. 2000년 이후 선출된 대통령들은 거의 예외가 없었다. 2003년 취임한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3월 국회로부터 탄핵을 당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집권 2년 차인 2009년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본격화된 시기다. 세월호 침몰은 박근혜 대통령의 집권 2년 차에 벌어진 참사다. 문재인 대통령이 팬데믹 위기와 처음 맞닥뜨린 것은 집권 3년 차 12월이지만, 경제 정책의 간판인 소득주도성장이 좌초한 것은 2년 차일 때다. 2년 차 징크스는 윤석열 대통령에게도 예외가 아닐 것으로 보인다. 경제 위기 징후가 심상치 않다. 지난해 밀려든 고물가·고환율·고금리의 파도는 전주곡 정도로 느껴진다. 윤석열 정부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 정부가 작년 말 ‘2023년 경제전망’을 발표하면서 내놓은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1.6%다. 한국 경제가 2%에도 못 미치는 성장률을 보인 것은 1980년 오일쇼크, 1998년 외환위기,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위기 등 4번뿐이라고 흔히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것은 결과로 나타난 수치이고, 그 직전 해 정부가 내건 전망 또는 목표치는 그렇게 낮지 않았다. 2020년은 2.4%, 2009년은 3% 안팎, 1980년은 1∼4%였다. 심지어 한국경제가 역대 최악의 위기를 겪었던 1998년(―5.1%)을 목전에 두고 직전 해 정부가 잡았던 성장목표도 3%였다. 당초 5%를 제시하려 했지만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위해 성장률을 2%로 낮춰야 한다는 국제통화기금(IMF)과 타협점으로 찾은 것이 3%였다. 비단 수치만의 문제도 아니다. 앞서 4번의 위기는 각각 고(高)유가, 외환 고갈, 미국의 파생금융상품 부실, 코로나 팬데믹 등 분명한 원인이 존재했고 해법 또한 단순했다. 위기 극복은 방법이 아닌 의지의 문제에 가까웠다. 하지만 올해 한국 경제가 맞닥뜨린 위기는 미중 디커플링, 우크라이나전쟁으로 인한 에너지·식량난, 글로벌 인플레이션,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인한 경기 침체 등 원인마저 복합적이다. 윤 대통령이 어제 신년사 대부분을 경제 문제에 할애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윤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내놓은 경제 위기 해법은 크게 두 줄기다. 단기적 처방으로는 ‘해외 수주 500억 달러 프로젝트’를 포함한 수출산업 집중 지원을, 중장기적 해법으로는 노동·교육·연금 등 3대 개혁의 추진을 제시했다. 이 중 각 계층 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히는 데다 법 개정까지 필요한 3대 개혁의 경우는 협치, 양보, 타협, 통합 없이는 추진이 불가능한 것들이다. 여든 야든 어느 한쪽만의 이념이나 철학을 고집해서는 돌파구를 찾을 수 없는 것들이다. 유연성과 실용주의가 결합하지 않고는 해결 불가능한 과제들이다. 노동개혁만 해도, 파시즘과 공산주의 모두로부터 영국을 지켜낸 윈스턴 처칠 총리의 실용주의적 태도는 좋은 참고가 된다. 처칠은 국가 경제를 볼모로 한 파업에 대해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도 강경하고 단호한 태도를 취했지만, 한편으로는 최저임금제도의 강력한 옹호자였고 실업수당의 전신인 실업보험을 처음으로 도입하기도 했다. 최초의 직업소개소를 세우는 데도 기여했다. 윤 대통령 스스로도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3대 개혁은 정부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부와 국회 시민사회가 초당적, 초정파적으로 해결할 문제”라고 말했다. 대선 후보 시절 언론 인터뷰에서는 협치를 언급하면서 “거대 야당 인사가 청와대에 올 수 없다고 한다면 내가 밖으로 찾아가 만나겠다. 국회의사당 식당도 좋다”고 했다. 윤 대통령의 집권 3년 차인 내년에는 22대 총선이 있다. 내년 말경이면 임기가 반환점을 돌아 집권 초반에 비해 급속히 힘이 빠질 가능성이 크다. 윤 대통령이 협치를 하려고 해도 올해를 넘기면 기회 자체가 소멸할 수 있다. ‘야당 인사’들에 대한 식사 초대가 너무 늦어지면 의미가 없다. 장소도 기왕이면 국회의사당 식당보다는 한남동 관저가 좋겠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에게는 늘 두 가지 문제가 있다. 급한 것과 중요한 것. 그런데 급한 것은 중요하지 않고, 중요한 것은 급하지 않다.” 이 말은 행동과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긴급성과 중요성의 딜레마’라는 화두를 던졌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사람들은 무엇을 우선할까. 대부분 급한 쪽을 택한다는 것이 학자들의 연구 결과다. 급한 일보다 중요한 일의 가치가 훨씬 클 때도 그렇다.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경영학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사고(思考) 도구가 ‘아이젠하워 매트릭스’다. 이 매트릭스는 할 일의 모든 목록을 4개 그룹으로 나눈다. ‘급하고 중요한 일’, ‘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 ‘급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 ‘급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일’이 그것이다. 이 중 뒤의 2개는 부하에게 위임하거나(Delegate) 업무 목록에서 지워버리라(Delete)는 게 전문가들의 처방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 핵심은 ‘급하고 중요한 일’과 ‘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의 우선순위 또는 황금비율 결정에 있다. 국가든 기업이든 리더가 전자보다 후자에 더 큰 관심을 쏟아야 그 조직은 성공할 수 있다. ‘급하고 중요한 일’은 크게 강조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아서 스스로 챙기지만, ‘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은 한 조직 안에서 소명감과 책임감이 남다른 사람, 즉 리더가 아니면 아무도 챙기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이 소홀히 다뤄지는 예를 찾는다면 저출산·고령화 대책이나 연금개혁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나라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사안들이지만 지금 일을 하거나 안 하는 효과가 10년 뒤, 20년 뒤 나타나기 때문에 어느 정권도 명운을 걸고 덤비지 않는다. 대형 재난을 예방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세계 최저의 출산율이고, 국민연금 폭탄 돌리기이며, 이태원 압사 참사다. 지난 7개월간 윤석열 정부의 국정 운영을 놓고는 이것저것 많이 벌이는 것 같긴 한데 뭘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굵직한 국정 어젠다도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가 많다. 급한 일과 중요한 일의 경계와 균형이 무너진 탓일 것이다. ‘선택과 집중’이 없다. 15일 TV로 점검회의 모습이 생중계된 120대 국정과제도 비근한 예 중 하나일 것이다. 유연하고 효율적인 정부 체계 구축, 공정한 경쟁을 통한 시장경제 활성화, 범죄로부터 안전한 사회 구현, 풍요로운 어촌 활기찬 해양… 등등. 이렇게 계속 이어지는 것이 120대 국정과제 리스트다. 손에 잡히는 구체성도, 이 정부만의 정체성도 보이지 않는다. 굳이 대통령실에 현황판을 걸어놓지 않더라도 각 부처가 알아서 챙겨야 할 기본 책무들이다. 대통령에게 가장 소중한 자원은 ‘시간’이다. 대통령은 거의 무한정에 가까운 인적, 물적 자원을 쓸 수 있으나 시간만은 예외다. 위임할 것은 위임하고, 지울 것은 지워버려야 중요한 어젠다에 쓸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연금·노동·교육 등 3대 개혁과 저출산·고령화 대책 같은 것이 국가의 미래가 걸린 그런 어젠다다. 이런 일들은 대통령이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윤 대통령이 15일 3대 개혁에 대해 강한 실천의지를 밝힌 것은 기대되는 대목이다. 아쉬운 점은 여전히 어떤 부분은 ‘수사(修辭)를 위한 수사’로만 읽힌다는 점이다. 연금개혁이 대표적이다. 윤 대통령은 연금개혁에 대해 “이번 정부 말기나 다음 정부 초기에는 연금개혁 완성판이 나오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정부는 안(案)만 만들고 실행은 다음 정부에 넘기겠다는 취지로 읽힌다. 그러나 연금개혁은 안이나 아이디어가 없어서 못 하는 것이 아니다. 3대 개혁과 저출산·고령화 해결의 확실한 단초만 마련해도 윤 대통령은 성공한 대통령으로 이름을 남길 수 있다. 이런 일들이 ‘대통령의 시간’을 집중 투자해야 할 일들이다. ‘긴급하고 중요한 일’들은 끊임없이 밀려오기 때문에 적당히 덜어내지 않으면 ‘번 아웃(탈진)’의 위험이 있다는 것이, 시간관리 전문가인 스티븐 코비의 이야기다. 탈진 상태가 가까워지면 ‘중요하지 않은 일’에서 도피처를 찾고, 결국은 실패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시행착오를 피하려면 윤 대통령의 ‘아이젠하워 매트릭스’를 국가의 운명이 걸린 중장기 과제를 우선순위에 두고 다시 한번 정리할 필요가 있다. 더 많이 위임하고 더 많이 지워야 한다. 무엇보다 대통령 집무실에 설치된, 보기에도 숨 막히는 ‘120대 국정과제 현황판’은 ‘책임총리’의 집무실로 보내는 것이 좋겠다. 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미국 서부 항만 물류를 장악하고 있는 국제항만창고노조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견줄 만큼 막강한 독점적 지위와 위세를 자랑한다. 미국 총수입물량의 40%가량이 이곳을 통과하다 보니 가벼운 분규 시늉만 해도 미국 경제가 경기(驚氣)를 일으킨다. ‘부두의 귀족들(Lords of Docks)’이 노조원들의 별칭이다. 이런 항만노조도 두려워하는 게 하나 있다. 파업이 국가 경제·안보를 위협할 경우 대통령이 법원 허가를 받아 노동자의 직장 복귀를 명령할 수 있도록 한, 이른바 직장복귀명령제다. 2002년 항만노조의 파업이 길어지자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이 명령을 발동해 사태를 종결지었다. 윤석열 정부가 이번 화물연대 파업에서 사상 처음으로 발동한 업무개시명령의 원조가 이것이다. 이 제도가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은 2002년 미 서부 항만파업이 있었던 그 다음 해, 노무현 정부에서다. 이런 연관 고리 외에도 화물연대의 파업에는 윤 대통령과 노 대통령 간에 묘한 공통점이 보인다. 취임 후 처음으로 맞닥뜨린 초대형 이슈가 화물연대 파업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평행이론을 연상시킬 정도다. 2003년 5월 화물연대 포항지부의 파업이 시작되자 노 정부는 허둥지둥했다. 미국을 방문 중이던 노 대통령이 파업 진행 상황을 챙기기 위해 청와대로 전화를 했으나 당직자들이 잠을 자느라 전화를 안 받는 해프닝까지 있었다. 준비 안 된 노 정부는 화물연대에 백기투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계는 기세가 올랐다. 곧이어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도입에 반발하는 전교조의 연가투쟁 선언이 터져 나왔다. 이런 배경에서 나왔던 게 “대통령을 제대로 못해 먹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발언이었다. 화물연대의 1차 파업에 대한 윤 정부의 대응도 오십보백보였다. 윤 대통령은 파업 초기 “노사관계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수수방관했다. 그러다가 파업으로 인한 손실이 2조 원에 육박하는 등 파장이 커지자 사태를 부랴부랴 미봉했다. 합의를 놓고 국토부는 “안전운임제 일몰제를 한시 연장하기로 했다”고 하고, 화물연대는 “일몰제를 폐기하기로 했다”고 딴소리를 했을 정도다. 큰 불씨를 남겨 2차 파업을 자초한 셈이다. 윤석열-노무현 평행이론은 여기까지다. 윤 대통령의 경우는 아직 취임 후 200여 일이 지났을 뿐이다. 나머지는 가능성의 영역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노사관계에 관한 한 노 대통령보다 훨씬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경제의 성장 잠재력이 과거에 비해 크게 떨어진 데다, 문재인 정부 5년간 노사관계가 노동계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이 됐기 때문이다. 문 정부는 2020년 12월 해고자와 실직자의 노조 가입을 허용하고 노조전임자의 급여 지급을 허용하는 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이어 지난해 4월 노동자의 권리를 크게 강화하는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협약 3개를 추가로 비준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ILO 핵심 협약 8개 중 7개를 비준한 나라가 됐다. 제조업 경쟁관계에 있는 미국 중국 일본보다 수가 많은 것까지는 그렇다고 칠 수 있다. 심각한 문제는 ‘파업 시 대체 근로 허용’ 등 노사관계의 균형을 잡기 위한 경영계의 요청은 깡그리 무시됐다는 점이다. 이런 가운데 강경투쟁의 선봉에 선 민노총은 문 정부의 친노조 정책을 업고 급속하게 세를 불렸다. 잦은 파업과 생산 손실은 고질병이 됐다. 임금근로자 1000명당 연평균 근로손실일수는 일본의 100배가 넘는다. 신발 속에 이렇게 큰 ‘돌덩이’를 넣어 둔 채로는 윤 대통령이 규제혁신전략회의를 백날 열어 봐야 성장 엔진이 되살아나지 않는다. 대화가 필요할 때는 대화로, 원칙을 세워야 할 때는 원칙으로 우선 눈앞의 민노총 총파업 공세를 헤쳐 나가야 하겠지만 그것은 끝이 아닌 시작일 뿐이다. 정작 중요한 윤 대통령의 과제는 입법을 통해 기울어진 운동장을 근본적으로 바로잡는 것이다. 여소야대라는 여건상 당장의 입법이 어렵다면 최소한 내후년 총선에서 핵심 공약으로 내놓고 유권자의 판단을 물어볼 수 있는 준비를 지금부터 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진보를 자처했던 노 대통령조차도 노동계의 격렬한 반대를 뚫고 업무개시명령과 같은 입법 유산을 남겼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가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윤 대통령이다.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15대 국회는 1999년 초반 ‘환란 조사 특위’를 구성해 청문 활동을 한 뒤 339쪽 분량의 국정조사 결과보고서를 채택했다. 보고서는 ‘환란 극복 교과서’로 불릴 정도로 외환위기의 원인과 발생 과정, 책임 소재, 교훈, 대책 등을 포괄적으로 담았다. 보고서는 환란의 주된 원인 중 하나로 위기 당시 강경식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의 무능함과 안이함,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늑장 보고를 꼽았다. 보고서는 또 무모한 환율방어로 인한 외환보유액 소진, 종금사 인허가 남발, 성급한 대외개방, 소극적인 산업 구조조정 등 보다 구조적인 정책 실패도 광범위하게 지적했다. 보고서만 일별해도 외환위기의 본질을 얼추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수사를 통한 책임 추궁은 실패 그 자체였다. 환란 원인 중 지엽적인 한 부분에 해당하는 ‘정책 담당자(강 부총리와 김 수석)들의 늑장보고’에 대해서만 기소·재판이 진행됐다. 범죄 구성요건을 갖춘 행위에 대해서만 객관적인 증거를 토대로 엄밀한 인과관계를 따지는 형사소추의 성격상 그 이상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법원의 판단은 1심, 2심, 3심 모두 무죄였다. 수사·재판만으로는 온전한 책임 규명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은 비단 환란 같은 ‘정책 참사’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1989년 영국 사우스요크셔 셰필드 힐즈버러 축구경기장에서 발생한 압사 참사, 2001년 일본 효고현 아카시시에서 벌어진 불꽃놀이 압사 참사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건은 모두 중립적인 전문가들의 조사 결과 현지 지방경찰 지휘부의 책임이 컸다는 결론이 나왔지만 형사재판의 결과는 딴판이었다. 힐즈버러 참사의 현지 경찰 책임자에 대해 영국 사법부의 최종 판단이 내려진 것은 사고 후 30년이 지난 2019년 11월의 일이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혐의에 대해 영국 프레스턴왕실법원의 배심원단이 내놓은 평결은 무죄였다. 아카시 참사의 현지 경찰 책임자에 대한 일본 사법부의 최종 결정은 사고로부터 약 12년 뒤 나왔다. 경찰 수사 결과 과실치사 혐의로 송치된 아카시경찰서의 서장과 부서장에 대해 검찰은 “혐의 없음”으로 불기소 처분을 했다. 유족들의 반발로 길고 지루한 불복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서장은 사망했고, 부서장은 공소시효가 끝났다는 이유로 면소(免訴) 판결을 받았다. 이태원 압사 참사에 대한 경찰의 수사가 시작된 지 20일 가까이 지났다. 경찰 수사의 칼날은 주로 현장 지휘관들을 향하고 있다. 지난 17일 행정안전부와 서울시, 서울시 자치경찰위원회 등을 압수수색했지만 여론에 등 떠밀리듯 이뤄진 ‘뒷북 수색’이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나 윤희근 경찰청장,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에 대해 경찰이 제대로 된 수사 의지를 갖고 있다는 흔적이나 징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설령 경찰이 강력한 수사 의지가 있더라도 ‘윗선’의 사법적 책임을 규명하기까지는 보통 험난한 길이 아니다. 수사와 재판만 쳐다보고 있다가는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일’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책임 규명이 제대로 안 되면 재발 방지 대책인들 제대로 된 것이 나올 리 없다. 증거가 ‘오염’되거나 증인들의 기억이 시간에 ‘침식’되지 않은 초기 단계에 경찰 수사가 철저하고 신속하게 진행돼야 한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하지만 이태원 참사와 같은 비극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면 사법적 책임과는 별개로 정책적, 행정적 책임 등을 규명할 수 있는 별도의 조사는 반드시 필요하다. 여야가 대립 중인 국정조사와 관련해서는 환란조사 특위 등의 전례를 참고해서 합의점을 찾아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야당만의 반쪽 국조는 소모적인 정치공방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국조를 피해서는 안 된다. 중립적인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진상조사도 서둘러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증거와 증언이 착종(錯綜)하고 흐릿해지는 것은 수사의 어려움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영국 힐즈버러 참사에 대한 배심원단의 무죄 평결에 한 유족은 이렇게 절규했다. “그럼 누가 96명을 무덤 속에 밀어 넣었단 말이냐. 대체 누구 책임이라는 것이냐.”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 유족들에게도 이런 한을 남기지 않으려면 수사는 수사, 국조는 국조, 전문가 조사는 전문가 조사대로 사고 원인과 책임 소재를 철저하게 밝혀내야 한다.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초등학생도 알 수 있게 쉬운 말을 쓸 것, 문장을 45자 전후로 짧게 쓸 것, 복문을 쓰지 말 것. 접속사를 사용해서 단문을 이어 붙일 것, 영어처럼 결론부터 말할 것, 구와 구 사이에는 1초 이상,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2초 이상의 간격을 둘 것….” 일본 효고(兵庫)현 경찰본부가 2002년 제작한 ‘혼잡 인파 경비 매뉴얼’ 한 페이지에 실린 내용 중 군중 안내·통제 멘트의 작성지침에 해당하는 대목이다. 매뉴얼은 이 밖에도 사고예방을 위한 상세한 요령을 107쪽에 걸쳐 담고 있다. 이 매뉴얼이 만들어진 계기는 2001년 7월 효고현 아카시(明石)시에서 발생한 불꽃놀이 관람객 압사 참사다. 양방향에서 밀려든 인파 때문에 육교 위에서 불꽃놀이를 보던 관람객 11명이 목숨을 잃고 200여 명이 다쳤다. 아카시 참사는 축제의 규모나 성격에서 이태원 참사와 비슷한 점이 적지 않다. 당시 아카시 시경(市警)은 관람객 15만 명이 몰릴 것으로 예상하고 경찰관 349명을 현장에 배치했다. 이 중 인파 관리를 맡았던 경찰관은 36명에 불과했다. 190명은 폭주족 단속, 102명은 축제 현장 범죄 단속이 임무였다. 서장과 부서장은 경찰서에 앉아서 현장을 지휘했다. 아카시 참사와 이태원 참사 모두 경찰은 범죄 단속에만 신경을 쓰고 안전관리는 방치했다. 총괄책임자가 현장에 없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일본에서는 아카시 참사 후 11일 만에 법률·위기관리·건축·방재·구급의학 전문가들로 구성된 조사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다. 위원회는 6개월간 독립적인 조사 활동을 한 끝에 142쪽 분량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아카시 불꽃 축제는 시(市)가 주최를 했고 137명의 인력을 투입해 경비를 담당했던 민간 전문업체가 별도로 있었지만, 보고서는 참사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곳으로 경찰을 지목했다. “현장에서 관람객에게 강제력을 갖고 대응할 수 있는 것은 제복 입은 경찰관과 기동대인 것이다. 혼잡 인파 경비의 경우 자체 경비가 원칙이라지만 그것을 조직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을 경찰에게만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경찰의 책임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보고서는 경찰의 잘못과 관련해서는 컨트롤타워 공백을 큰 문제로 꼽았다. “총괄지휘를 해야 할 서장과 부서장이 현장 텐트가 아닌 경찰서에 있었다. 이래서는 사고가 일어나기 직전, 사고 발생 순간, 사후 대응에 이르기까지 경찰력을 집중하기 곤란했다.” 통일된 지휘계통과 치밀한 사전 시뮬레이션만이 사고를 막을 수 있다고 보고서는 강조한다. “사고가 발생한다는 전제를 세워 놓고, 어떤 시나리오에 따라 일어날지를 예측하는 것, 이른바 시나리오 기법을 활용해 ‘위험 포인트’를 추출하고, 그것을 어떻게 해소할지 사전협의를 진행해야 한다.” 20년 전 작성된 이 보고서가 지적하고 있는 점들이 이번 이태원 핼러윈 축제에서는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서울시경과 용산경찰서, 서울시와 용산구청은 “주최자가 없는 축제”, “축제가 아닌 현상”이라는 이유 등을 들어 안전관리에 손을 놨다. 압사 위험을 호소하는 112전화가 줄을 잇는 다급한 상황에 용산경찰서장은 걸어서 10분 거리인 곳을 차로 이동하느라 1시간 가까이 허비했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1일 고강도로 수사와 감찰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랬던 장본인이 압사 사고 희생자들이 앰뷸런스와 길 위에서 생사를 넘나들던 시간에 술을 마시고 잠들어 있었던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참사 다음 날 “경찰과 소방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일찌감치 지휘부의 책임론에 선을 그은 것이다. 윤 청장이나 이 장관의 발언에 내비치는 의도대로 수사·감찰이 진행된다면 총경 몇 명과, 현장에서 몰려드는 인파를 통제하고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려고 목이 터지게 부르짖던 현장 경찰관들에게만 책임이 돌아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임기응변을 제대로 하지 못한 죄일 것이다. 앞서 아카시 참사 조사위원회 보고서는 아카시 참사를 포함해 일본에서 있었던 6건의 대형 혼잡 인파 참사를 분석한 결과를 이렇게 요약했다. “이상의 사고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사고 발생 직전 현장에서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일본 와세다대 도도 야스유키 교수는 중국 등 해외발 공급망 위기가 발생했을 때 일본 경제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게 될지를 연구해 왔다. 세계 최고 성능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100만 개 일본 기업의 공급망 데이터를 분석했다고 한다. 대중(對中) 수입 80%가 두 달간 끊겼을 때 자동차, 전자, 식품 등 전 산업 분야에 걸쳐 53조 엔에 이르는 생산 소실(消失)이 발생한다는 게 도도 교수의 결론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최근 이런 내용을 ‘제로 차이나가 되면…’이라는 제목 아래 소개했다. 53조 엔은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10%에 이르는 금액이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정해서 고민하는 일본이 별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연구의 동인(動因)은 과거 일본이 실제로 겪은 쓰라린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일본은 2010년 9월 중국-일본 간 분쟁 수역에서 자국 해상보안청 순시선과 실랑이를 벌이던 중국 어선을 나포해 선장을 기소하려는 직전 단계까지 갔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희토류 수출 물량을 삭감하는 보복 조치를 단행하자 후폭풍을 감당하지 못하고 20여 일 만에 ‘백기’를 들었다. ‘제로 차이나’는 일본만의 리스크일까. 그렇지 않다. 한국도 무풍지대가 아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중국 봉쇄를 위한 가장 핵심적인 무기로 반도체를 활용하고 있다. 제조장비와 기술 측면에서는 미국에 ‘을(乙)’이고, 제품 판매 면에서는 중국에 ‘을’인 한국으로선 언제 어느 칼날에 ‘제로 차이나’와 같은 위기를 맞을지 모른다. 반도체가 아니라 전기자동차와 디스플레이 등의 핵심 소재인 희토류 쪽에서 칼이 날아들 가능성도 있다. 중국 공산당 산하의 한 관영지는 최근 미국에 대한 희토류 수출 제한을 공공연하게 거론했다. 중국의 희토류 무기화가 현실화하고 그 불똥이 조금만 튀어도, 희토류 70% 이상을 중국에서 사다 쓰는 한국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대만 문제도 심각한 변수다. 마이클 길데이 미국 해군참모총장은 19일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을 거론하면서 “2027년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만 올해나 내년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중국이 대만 침공을 결행한다면 미국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했던 것 이상의 제재를 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한국도 당연히 제재 대열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중국도 가만히 앉아서 당할 리는 없다. 올 3월 상하이에서 코로나19 감염자가 늘어나 ‘제로 코로나’ 정책이 위협을 받자 시 전체를 두 달 넘게 봉쇄했던 중국이다. 훨씬 더 민감한 영토 문제에 관해서는 훨씬 더 극단적인 조치가 나올 것이다. 아직 한국에는 도도 교수가 한 것과 같은 심층 연구가 없지만, ‘제로 차이나’의 충격이 일본보다 작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한국과 일본 모두 전체 수출입에서 대중 수출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5% 선이다. 하지만 일본은 내수 중심 경제이고 한국은 수출 중심 경제다. 해외발 충격에 대한 저항 체력이 전혀 다르다. 전체 GDP에서 대중 수출입이 차지하는 비중이 일본은 6.5% 수준인 데 비해 한국은 16.5% 수준이다. 단순계산으로는 일본보다 두 배 이상 큰 충격이 올 수 있다. 상시화한 공급망 위기의 근원에 해당하는 미중 디커플링은 이미 몇 년째 진행 중이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위기의식이 없다. 신구 정권이 다르지 않다. 지난해 10월 ‘중국산 요소수 사태’ 당시 보여줬던 안일한 뒷북 대처 행태가 최근 미국의 ‘인플레감축법’에 대한 대응 과정에서도 그대로 반복됐다. 정부는 2019년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금지 조치 이후 일본 소재·부품·장비(소부장)에 대한 의존도를 낮춘다며 부산을 떨었지만, 일본 의존이 중국 의존으로 바뀌었을 뿐 제대로 된 성과는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지금까지 10차례에 걸쳐 ‘비상경제민생회의’를 주재했지만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피상적인 논의와 백화점식 해법의 나열이 공감을 부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27일로 예정된 11번째 비상경제회의는 TV 카메라를 앞에 두고 90분간 생방송으로 진행할 계획이라고 한다. 행여라도 빈약한 경제성과를 포장하거나, 공허한 말잔치로 현실을 호도하는 자리가 돼선 안 된다. 이번만큼은 ‘제로 차이나’ 등 한국 경제가 맞닥뜨린 본질적인 위기에 대한 진단과 제대로 된 해법을 국민 앞에 내놓기 바란다.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한국은 유엔무역개발회의가 공인한 선진국이다. 1인당 국민소득은 인도네시아보다 7.5배, 태국보다 4.7배가 많다. 경제적 풍요뿐 아니라 공공부문의 투명성, 사회적 안정성도 크게 앞선다. 어디를 봐도 세 나라를 하나로 묶기가 쉽지 않을 것 같지만,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공통점이 하나 있다. 이름하여 ‘환란 3국’이다. 1997년 발생한 동아시아 외환위기는 많은 나라에 타격을 줬지만 국제통화기금(IMF)에서 구제금융까지 받은 나라는 3곳뿐이다. 달러가 초강세를 보이면서 아팠던 환란의 기억이 다시 소환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지난달 26일 ‘위기 수준의 위험’을 거론하면서 가장 취약한 통화로 한국 원화, 필리핀 페소화, 태국 밧화를 지목했다. 과거 환란 3국 중 인도네시아는 거론되지 않았다. 한국 원화가 인도네시아 루피아화보다 ‘위험한 돈’이라는 평가를 받은 셈이다. 이를 일부 애널리스트와 언론의 편견으로 치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원화 가치의 추락 속도를 보면 그러기가 쉽지 않다. 올해 원화는 달러화 대비 16%가량 떨어졌다. 이에 비해 루피아화는 6% 하락에 그쳤다. 비단 루피아화뿐이 아니다. 원화 가치는 인도 루피화, 말레이시아 링깃화, 태국 밧화, 필리핀 페소화에 비해서도 더 가파르게 떨어졌다. 주가를 보더라도 올 들어 한국 코스피가 25% 떨어지는 동안 인도네시아 증시지수가 5% 오른 것을 보면 한국 경제에 대한 상대적인 평가가 급속히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길이 없다. 정부는 과거보다 크게 늘어난 외환보유액 등을 들어 위기 가능성을 부인한다. 하지만 첨단산업 강국임을 자부하는 한국의 통화가 동남아시아 개발도상국들보다 약세를 보이고 있는 현상은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어쩌다 한국의 원화가 동남아 여러 나라들의 통화보다 불안정하다는 불명예를 안게 된 것일까. 도널드 트럼프 이전의 세계 경제는 주요 2개국(G2)의 국제 분업에 기초해 안정적인 성장을 구가해 왔다. 미국의 자본과 기술이 중국으로 건너가 14억 인구를 먹여살릴 일자리를 만들고, 중국은 저가의 공산품을 통해 인플레이션 없는 미국 경제를 뒷받침했다. 한국은 이 같은 세계화 흐름을 가장 잘 활용한 나라 중의 하나였다. 반도체·화학제품 같은 중간재의 대중(對中) 수출이 IMF 이후 한국 경제를 견인한 주력 엔진이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에서 시작된 ‘미중 신냉전’이 조 바이든 대통령 들어 더 가속화하면서 한국은 ‘두 고래 사이에 낀 새우’ 중에서도 가장 고달픈 신세가 됐다. 한국 경제의 ‘비즈니스 모델’ 자체가 통째로 무너져 내릴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다. 이런 위기에서 국제 금융시장의 신뢰를 잃지 않으려면 바뀐 글로벌 환경에 맞게 경제구조를 뿌리부터 개혁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기본이다. 하지만 변화를 이끌어야 할 정치권과 정부는 위기의식 자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집권여당은 경제를 아예 내팽개친 채 새 대통령의 임기 초기 석 달을 집안싸움으로 허비했다. 과반의석을 차지한 제1 야당은 기초연금 인상, 쌀 시장 격리 의무화 등 재정 축내기 정책으로도 모자라 과격한 파업을 조장하는 ‘노란 봉투법’까지 강행하려 한다. 제조업 기반을 아예 초토화시킬 셈인가. 더 큰 문제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있다. 한국 경제가 생존이 걸린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초당적 대처가 필수인데도 윤 대통령은 최소한의 협치를 이끌어낼 리더십조차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고도의 경제안보 전략을 논의해야 할 국회를 ‘날리믄-바이든’과 같은 저급한 공방의 무대로 만들어 놓은 데도 윤 대통령의 책임이 크다. 국민적 에너지를 하나로 결집시킬 비전이나 어젠다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진영·세대를 넘어 인재를 구하고 머리를 빌리려는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 최근 인도네시아 경제의 선전(善戰)에는 자원부국이라는 배경이 깔려 있다. 하지만 정치나 정부의 리더십이 없이 경제가 저절로 잘되기는 어렵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2045년까지 세계 4대 강국에 진입한다는 그랜드 청사진을 내걸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이를 위한 정치적 추진 동력을 얻기 위해 두 번의 대선에서 맞붙은 최대 정적을 자신의 내각에 참여시켰다. 30대 벤처기업가를 교육문화부 장관으로 발탁하는 파격도 보였다. 이런 모습들을 보다 보면 원화가 루피아화보다 저평가를 당하는 현실이 자존심은 상할지언정 꼭 억울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도쿄 특파원으로 일하던 시절 미국의 한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하던 후배로부터 갑작스러운 e메일을 받은 일이 있다. 꼭 읽어야 하는 영어 논문에 “일본을 알려면 ‘kashi’ 문화를 잘 이해해야 한다”는 구절이 있는데 앞뒤 문맥을 아무리 뜯어봐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kashi’는 일본어의 ‘貸し(가시·빌려줌)’를 소리 나는 대로 옮긴 것이다. 뒤에 ‘만든다’가 따라붙어서 남에게 호의를 베풀거나 도움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가시(貸し)’를 만든 사람은 나중에 돌려받겠다는 의지나 기대를 갖고 있고, 상대는 언젠가 갚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는다는 점에서 ‘통 크게 도와주고 통 크게 잊어버리는’ 우리와는 차이가 있다. 이렇게 답을 했었다. ‘가시(貸し)’는 일본인들의 사적인 대인관계뿐 아니라 정치·외교 문법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키워드다. 일본에서는 내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에 대한 국장이 열린다. 분신을 하며 항의를 하는 사람이 나올 만큼 반대 여론이 거세다. 그 바람에 두어 달 전만 해도 60%대이던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 지지율이 20%대까지 곤두박질쳤을 정도다. 그런데도 기시다 총리가 아베 국장을 무리하게 밀어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가시(貸し)’를 만들기 위해서다. 나카키타 고지 히토쓰바시대 교수(정치학)가 내놓은 분석이다. 여당인 자민당 안에서 입지가 좁은 기시다 총리가 최대 파벌인 아베파에 ‘정치적 가시(貸し)’를 만들려는 노림수라는 것이다. 이번 한일 정상 외교의 득실을 계산할 때도 ‘가시(貸し)’는 중요한 잣대다. 일단 겉으로 드러난 결과만 보면, 한일 정상 외교에서 적잖은 성과가 있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2년 9개월간이나 끊어져 있던 두 나라 정상 간의 소통 채널을 다시 복원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의미가 있다. 일본 측 발표문을 보면 양국 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간다는 데 일치했다”는 표현이 있다. ‘미래지향’은 일본이 2019년판 외교청서에 일부러 삭제했던 표현이다. 과거사에 발목이 잡혀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던 한일 관계를 이대로 둘 수 없다는 공감대는 일단 다시 살려낸 것이다. 이런 성과가 있었으니 앞으로 강제징용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우리는 일본의 전향적 양보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22일자 아사히신문에 실린 기사다. 신문이 전한 일본 측 참석자의 발언은 이렇다. “아무 성과도 없는 중에 만나고 싶다고 하니까, 이쪽은 안 만나도 좋은데도 불구하고 만났다. 일본은 한국에 ‘가시(貸し)’를 만들었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일본인들이 ‘가시(貸し)’를 만들었다고 할 때는 그 대가를 돌려받겠다는 의지나 기대를 담고 있다. 강제징용 문제에 대해 일본은 지금까지보다 더 많은 양보를 한국에 요구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아사히신문이 전한 이 참석자의 발언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당연히 다음에는 (한국 측이) 성과나 진전을 가지고 오겠죠.” 강제징용 문제의 근원에는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지 모를 일본의 ‘적반하장’식 태도가 있다. 하지만 윤 대통령 외교 참모들의 조급증과 한건주의가 사태를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정상 회동까지의 과정을 돌이켜 보면 대통령실 관계자가 이달 15일 “한일 정상회담이 흔쾌히 합의가 됐다”고 설익은 발표를 한 것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일본 측이 합의 사실을 부인하고 자국 언론을 통해 불쾌감을 공공연히 나타내면서 한일 정상 회동은 우리가 ‘통사정’을 해서 만나는 형식이 됐다. 그런 데다 윤석열 대통령이 기시다 총리가 주최하던 행사장까지 찾아가 만나는 대목에서는 자존심도 체면도 없게 됐다. 양국 국기도 내걸리지 않은 채 이뤄진 만남에 대해 ‘한일 정상 약식 회담’이라며 ‘회담’이라는 표현에 집착한 것도 ‘간담’이라고 한 일본과 대비되면서 스타일을 구기는 결과가 됐다. 윤 대통령은 기시다 총리와의 만남에 앞서 가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과거사·경제·안보 등 양국의 모든 의제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포괄적으로 해결하는 ‘그랜드 바겐(일괄 타결)’ 구상을 밝혔다. 이런 식의 ‘통 큰’ 외교는 지나칠 정도로 디테일과 대차(貸借)대조표를 따지고, 실무 차원에서 차곡차곡 논의를 쌓아 윗선으로 올라가는 상향식 일본 외교에 뒤통수를 맞기 십상이다. 비싼 수업료는 이번 한 번으로 족해야 한다.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좋지 않은 성적표와 국제 경제위기 상황에서 우리 정권이 출범했지만 국제 상황에 대한 핑계, 전 정권에서 물려받았다는 핑계가 이제 더 이상은 국민에게 통하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이 25일 국민의힘 국회의원 연찬회에서 한 말이다. 인사 실패 등 뼈아픈 지적이 나올 때마다 “전 정부와 비교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방어막을 치곤 했던 윤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유한(有限)책임이 아닌 ‘무한(無限)책임의 리더’라는 뒤늦은 자각에서 나온 말이라면, 의미 있는 변화다. 만시지탄일 따름이다. 윤 대통령의 경제정책은 많은 부분에서 1981∼89년 미국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로널드 레이건을 벤치마킹했다. 윤석열 정부가 내건 규제 완화, 세금 감면, 작은 정부가 모두 레이거노믹스의 뼈대에 해당하는 것이다. 윤 대통령의 연찬회 발언에는 한편으로 ‘전 정권에서 좋지 않은 성적표를 물려받았다’는 데 대한 억울함도 상당 부분 배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 레이건과 비교하면 그럴 일도 아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백악관에 입성할 당시 물가상승률은 두 자릿수까지 치솟은 상태였고, 연준 금리는 20%를 넘었다. 인플레이션 퇴치를 위해 연준이 급속히 금리를 올린 결과 사상 초유의 스태그플레이션의 먹구름도 몰려오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레이건은 재임 기간 중 성장·물가·고용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물가는 12%대에서 5%대로, 실업률은 7%대에서 5%대로 떨어졌고, 일자리 1700만 개가 새로 창출됐다. 윤 대통령이 주목해야 할 점은 레이거노믹스가 여소야대라는 불리한 정치 지형에도 불구하고 의회 입법을 통해 실현됐다는 점이다. 레이건이 집권했을 당시 상원은 여당인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하원은 민주당이 243석으로 192석인 공화당을 압도했다. ‘큰 정부’와 ‘넓은 복지’를 정책 골간으로 삼는 민주당이 레이거노믹스에 격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리란 것은 뻔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레이건이 한 선택은 야당 지도부를 포함한 개별 의원들에 대한 지속적인 접촉과 설득, 협상이었다. 취임 이튿날 영국 프랑스 독일 캐나다 정상과 통화를 한 레이건이, 3일째에 한 것이 민주당 의원 4명과 만나 규제 완화에 대해 논의한 일이다. 취임 70일째에 존 힝클리의 흉탄이 레이건의 폐를 뚫었지만 그의 야당 설득 행보는 멈춤이 없었다. 70세의 고령이던 그가 수술을 받고 백악관에 다시 출근한 4월 24일부터 레이거노믹스가 구현된 정책을 담은 법안이 통과되는 7월 29일까지 백악관 기록에 나타난 그의 행적을 보자. 5월 4일 4그룹의 민주당 의원 28명과 토론. 5월 6일 다른 그룹의 민주당 의원들과 토론. 5월 11일 공화·민주 양당 하원의원들을 백악관으로 초청. 5월 14일 양당 상원의원 초청 리셉션. 6월 4일 보수적 성향의 민주당 의원들과 미팅. 7월 17일 민주당 의원들과 만나 법안에 대해 상의. 7월 26일 민주당 의원 15명을 캠프 데이비드로 초청해 바비큐 파티. 7월 27일 법안 통과를 호소하는 대국민 연설을 한 후 양당 의원들과 개별 접촉. 7월 28일 양당 의원 43명과 만나 법안 통과를 설득. 하루에 몇 시간씩 전화통을 붙잡고 야당 의원을 설득하는 일도 있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법안은 238 대 195로 하원을 통과했다. 찬성표 중 48표가 민주당에서 나온 것이었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달 법인세와 부동산세 부담을 낮추는 내용의 세제개편안을 내놨다. 또 이달 26일에는 규제혁신전략회의를 열고 경제형벌 완화 청사진을 밝혔다. 하지만 감세든 규제 완화든 거대 야당이 지배하는 국회의 벽을 넘지 못하면 공허한 ‘입 잔치’에 불과할 뿐이다. 야당이 현 정부의 발목을 잡아 경제 살리기가 지연될 경우, 야당은 야당대로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야당의 발목 잡기’가 윤 대통령의 실패에 대한 면책 사유가 될 수는 없다. 야당을 설득해서 정책을 성공시키는 것까지가 윤 대통령이 짊어진 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쌍방이 모두 지는 게임이다. 문제는 야당을 어떻게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고 설득할 것이냐다. 여론을 등에 업고 야당을 압박하는 전략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지지율 20%대 정부에는 공상일 뿐이다. 윤 대통령이 ‘경제대통령’으로 성공하기 위해 당장 시급히 배워야 할 것은 경제이론보다 ‘위대한 설득자(The Great Persuader)’, ‘위대한 소통자(The Great Communicator)’로서 레이건의 면모일 것이다.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1868년 5월 조선 해안을 기웃거리던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 아버지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은 쇄국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더 재촉한다. 그해 일본은 조선과는 정반대로 전면적인 개방과 근대화에 나선다. 메이지유신이 그것이다. 급속한 개혁으로 서구열강을 따라잡은 일본은 조선을 강제병합하고 1945년 패망 때까지 폭압적 지배 아래 두게 된다. 1868년부터 1945년까지의 77년만큼, 한 시기의 선택으로 두 나라의 부침이 이처럼 극명하게 엇갈렸던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광복 77주년. 1945년 해방으로부터 1868년까지 시곗바늘을 되돌린 만큼의 물리적 시간이 흘러 2022년 광복절 아침이 왔다. 이제 한국은 경제 활력이나 생활수준 면에서 일본을 전혀 부러워하지 않아도 될 만한 위치가 됐다. 앞의 77년을 생각하면 뒤의 77년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변신이다. 일본 자민당의 한 정치인은 지난 4일 “한국은 어떤 의미에서는 형제국. 확실히 말해서 일본이 형님뻘”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한 대다수 일본인들의 반응은 세상 물정 모르는 헛소리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한일관계와 관련해서 일본의 시사 잡지에 실리는 기사를 봐도 ‘한일 역전(逆轉)’이라는 화두가 단연 눈에 띈다. ‘한국에 경제지표로 참패 연속이어도 “일본이 풍요롭다”고 외치는 사람들의 현실도피병’(다이아몬드 온라인 8월 4일자), “엔저로 ‘일본이 한국보다 가난해졌다’ 충격의 사실”(동양경제 온라인 7월 24일자), ‘일본경제가 한국에 추월당한 납득 가능한 이유’(동양경제 온라인 3월 7일자) 등이다. 대부분 양국 경제를 깊이 연구한 전문가들이 객관적인 통계자료와 탄탄한 논리에 근거해 써내려간 글들이다. 1990년까지만 해도 한일 사이에 놓인 경제력 격차는 ‘영원히 건널 수 없는 강’으로 여겨졌다. 당시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은 한국의 11배, 1인당 GDP는 3.8배였다. 하지만 지금은 GDP가 2.7배, 1인당 GDP가 1.1배 수준까지 좁혀졌다. 실질적인 구매력을 감안하면 1인당 GDP는 이미 한국이 앞섰다는 평가가 나온다. 무엇이 지난 30년간의 성과를 이렇게 갈랐을까. 많은 일본 경제전문가들이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대형 경제위기에 대한 대응력과 내성(耐性)을 꼽는다. 일본은 고통을 수반하는 구조조정을 하는 대신 재정 확대와 금융 완화 등 ‘진통제’ 대책으로 일관했다. 반면 한국은 기업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사업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위험을 무릅쓰면서 과감한 신규 투자와 신시장 개척에 나섰다는 것이다. 일례로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일본의 GDP는 7% 감소했으나 한국은 4% 증가했다. 2007∼2010년 기간 중 일본의 간판기업인 도요타의 판매 대수는 95만 대가 줄어든 반면 현대·기아차의 판매 대수는 178만 대가 늘었다.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신흥국 시장의 문을 과감히 두드린 결과였다. 삼성전자가 소니를 완전히 따돌리고 ‘가전(家電) 왕좌’에 오른 것도 외환위기 직후다. 외환위기 국면에서 씨를 뿌리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현재 진행되는 글로벌 경제의 복합 위기는 1998년과 2008년의 위기에 비해 결코 만만하지 않다. 인플레이션과 침체가 동시에 진행되는 스태그플레이션만으로도 유례가 드물거니와, 미중 간의 ‘디커플링(공급망 분리)’은 간발만 헛디뎌도 ‘거대한 크레바스’에 추락할 수 있는 대지진에 비견할 만한 격변이다. 미중 디커플링이 진행되는 한, 한국은 CHIP4(미국·일본·대만+한국) 동맹 참여처럼,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딜레마 상황에 수시로 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선택이어도 위축될 이유는 없다.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입증된, 우리의 강한 위기 극복 유전자를 믿어야 한다. 미중 디커플링은 위기인 동시에 한국이 일본을 결정적으로 뛰어넘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기도 하다. 진짜 위기는 현상유지가 주는 안심감에 취해 CHIP4 참여와 같은 어렵고 도전적인 결단을 회피하거나, 애매하게 중간에만 서 있으면 될 것이라는 낙관에 빠질 때 시작된다. 내가 눈을 감으면 눈앞의 위협도 사라질 것이라는 착각, ‘쇄국의 뇌피셜’이 다른 껍데기를 쓰고 되살아나는 순간 과거를 향한 뒷걸음질이 시작될 것이다. 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지난해 12월 하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극빈의 생활을 하고 배운 게 없는 사람은 자유가 뭔지도 모른다”고 말해 구설에 올랐다. 윤 후보는 “어려운 분들을 더 도와드려야 한다”는 뜻이라고 해명했지만 더불어민주당 등으로부터 ‘역대급 망언’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당시 이재명 민주당 후보도 신경림 시인의 시 ‘가난한 사랑 노래’를 인용해 “가난한 이가 어찌 자유를 모르겠는가”라고 일갈을 가했다. 민주당 대표 경선에 나선 이재명 의원이 지난달 29일 자신의 유튜브 방송에서 한 말 때문에 논란에 휩싸였다. 여당은 물론 당내 대표 경선 후보들로부터도 “위험한 발상”, “이분법 정치”라는 지적을 받은 문제의 발언은 이런 내용이다. “고학력·고소득자들, 소위 부자라고 불리는 분들이 우리 지지자가 더 많습니다. 저학력에 저소득층이 국힘 지지자가 더 많아요. 안타까운 현실인데… 언론 때문에 그러지.” 이어지는 안팎의 비판에 대해 이 의원은 “발언의 취지와 맥락을 무시한, 왜곡된 정치공세”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발언을 뒷받침하는 3월 24일자 한 일간지 기사를 SNS에 링크했다. ‘월소득 200만 원 미만 10명 중 6명, 尹 뽑았다’는 제목이 붙은 이 기사는 동아시아연구원(EAI)이 대선이 끝난 직후 설문조사를 통해 분석한 내용을 소개한 것이다. 객관적인 사실이므로 자신의 발언에는 문제가 없다는 뜻으로 읽힌다. 하지만 EAI의 조사가 설령 정확하다 하더라도 이것만을 근거로 ‘민주당은 고학력·고소득층 지지자가 많고, 국민의힘은 저학력·저소득층 지지자가 많다’고 일반화한 것은 너무 나간 것이다. 노동자계층이나 빈곤층이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해준다고 주장하는 진보정당이 아니라 보수정당에 투표하는 것을 정치학 용어로 ‘계급배반투표’라고 한다. 과거에도 이런 현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착시현상일 가능성이 크다는 게 지금까지의 대체적인 연구결과다. 6·25를 직접 경험했거나 전후 이어진 첨예한 남북대치 상황에서 살아온 고령층은 보수성향이 강하다. 이들은 50대 이하 세대에 비해 성장과정에서 교육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복지제도의 틀이 갖춰지기 전에 현역에서 은퇴했기 때문에 빈곤율 또한 높다. 이런 요인을 기술적으로 제거하고 분석하면 학력이나 소득은 지지정당과 별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이 의원의 발언 내용 중 더 문제가 있는 대목은 뒷부분의 ‘남 탓’, ‘언론 탓’이다. KBS MBC TBS 등 공영방송이 민주당에 여전히 유리한 지형을 이루고 있고 보수·진보 할 것 없이 수천 개의 인터넷 매체가 난립하는 상황에서 저학력·저소득층만 유독 민주당에 불리한 정보를 주입당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두 집단을 가르는 차별적인 인식이나 편견이 없고서는 나오기 힘든 발상이다. EAI의 조사만 보더라도 ‘남 탓’ 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의원이 링크한 기사는 민주당의 전통적인 지지기반인 블루칼라층에서도 이 후보가 42.2% 대 53.9%로 윤 후보에게 패배한 점을 지적하며 그 배경으로 두어 가지를 든다. 첫째는 이번 대선이 부동산 선거로 치러졌다는 점이다. 지지후보 결정 이유를 묻는 질문에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를 꼽는 답변이 가장 많았다는 것이다. 이들이 두 번째 이유로 꼽은 것은 대장동 특혜 의혹과 배우자의 법인카드 논란 등이었다고 한다. 결국, 원인은 집권여당이었던 민주당과 대선 후보였던 이 후보 자신이었던 것이다. 이 후보는 지난해 12월 초 대선 과정에서 자신의 가족사가 논란이 됐을 때 “비천한 집안이라 더러운 게 많이 나온다. 저를 탓하지 말아 달라”고 말해 조카살인사건 변론이나 형수욕설까지 ‘출신 탓’이냐는 지적을 받았다. ‘남 탓’이 잦아지면 병이 될 수 있다. 어떤 경우든 정치인들의 언어 속에 학력·소득 수준과 같은 비논리적이고 차별적인 잣대로 국민을 가르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망국적인 지역감정에 더해 한국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들까지 ‘이대남’ ‘이대녀’로 갈라서게 만들고, 이제는 저학력·저소득층과 고학력·고소득층까지 갈라 친다면 국민통합은 더욱더 요원한 숙제가 될 것이다. 그새 잊었는지 모르지만 앞서 이 의원이 인용한 신경림 시인의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너와 헤어져 돌아오는/눈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