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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바 하면 한국의 60, 70대는 1970년대 안방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던 미닫이문 흑백TV를 떠올릴 것이다. 영문 알파벳 로고가 선명한 노트북이 기억난다면 그 이후 세대라 할 수 있다. 도시바가 가진 최초 기록들만 열거해도 왜 ‘일본의 자존심’으로 불렸는지 알 만하다. 일본 최초의 냉장고, 세탁기, 컬러TV부터 세계 최초의 노트북PC, 낸드플래시 반도체까지 수많은 1호 제품을 양산했다. ▷150년 역사의 일본 대표 기업 도시바가 다음 달 20일이면 도쿄 증시를 떠난다. 도시바는 22일 임시주주총회를 열고 대주주 변경과 함께 자진 상장폐지를 확정했다. 1949년 상장해 시가총액 상위 자리를 지켜온 일본 테크산업의 상징이 74년 만에 증시에서 퇴장하는 것이다. 2조 엔(약 18조 원)을 들여 지분 전량을 확보한 현지 사모펀드 컨소시엄은 도시바의 새 주인이 됐다. 컨소시엄은 도시바의 기업 가치를 끌어올린 뒤 재상장하겠다지만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다. ▷도시바는 ‘일본의 에디슨’으로 불리는 다나카 히사시게가 1875년 설립한 다나카제작소에서 출발했다. 재벌기업 미쓰이에 인수돼 시바우라제작소로 바뀌고 일본 최초로 백열전구를 만든 도쿄전기와 합병하면서 도쿄의 도(東), 시바우라의 시바(芝)를 따 도시바가 됐다. 전자회사로 출발했지만 방산·철도·의료기기·중공업까지 손을 뻗치며 80개가 넘는 계열사를 거느리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재계의 거인이자 150년 기술기업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한국과 중국 업체의 거센 추격에도 변화에 느렸다. 특히 반도체 사업에선 세계 1위 자리를 지키던 낸드플래시에 추가 투자를 할지 말지 망설이는 사이 기술을 전수해준 삼성전자에 완전히 밀렸다. 2001년 도시바의 합작사업 제안을 거절한 삼성전자는 과감한 투자로 1년 반 만에 도시바를 앞질렀다. 경쟁사들이 미래가 불투명하다며 인수를 포기한 미국 원전회사 웨스팅하우스를 무리하게 사들인 건 결정적 패착이었다. 동일본 대지진 여파로 천문학적 손실을 떠안으면서 인수 11년 만에 웨스팅하우스의 파산을 선언했다. ▷소니, 파나소닉 등이 적자에 허덕일 때도 도시바는 흑자를 이어갔지만 가짜였다. 5년간 2200억 엔의 이익을 부풀린 분식회계가 2015년 들통나 가파르게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 여파로 돈 되는 사업을 모조리 팔아야 했다. 상폐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행동주의 펀드들에서 자금 수혈을 받았지만 경영 정상화는 더 꼬였다. 2017년 발간된 일본 경영서 ‘도시바의 비극’은 경영진의 파벌주의, 연공서열의 경직된 조직 문화, 시장 변화를 읽지 못한 폐쇄적 경영 등을 실패 원인으로 짚었다. 혁신 않고 한눈 팔다가는 어느 기업이라도 도시바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대구와 광주를 대중교통으로 오가는 사람들은 기차보다 버스를 주로 이용한다. 기차를 타면 ‘ㅅ’자 형태로 오송역까지 가서 환승해야 하고, 버스와 비교해 시간은 별 차이 없는데 요금은 두세 배 비싸다. 이 때문에 대구와 광주를 바로 잇는 철도를 건설하자는 얘기가 일찌감치 나왔지만 20년 넘게 공회전했다. 광주대구고속도로도 하루 교통량이 전국 고속도로 평균의 절반이 안 될 만큼 한산한데 굳이 철도를 깔아야 하느냐는 거였다. ▷대구∼광주 간 철도 건설은 재작년이 돼서야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에 포함됐지만 이마저도 후순위 사업으로 밀렸다. 비용 대비 편익이 1보다 커야 경제성이 있다고 보는데, 이 수치가 절반에 못 미친 탓이다. 당시 198km 길이의 일반철도를 단선으로 놓는 데 4조5000억 원 이상의 사업비가 드는 것으로 분석됐다. 그런데 대구시와 광주시가 2038년 아시안게임을 공동 유치하겠다며 철도 조기 착공을 밀어붙이더니 올 8월 ‘달빛고속철도 건설을 위한 특별법’이 국회에 발의됐다. ▷대구 옛 지명 ‘달구벌’과 광주의 순우리말 ‘빛고을’의 앞 글자를 딴 고속철 건설을 사업이 타당한지 따져보는 예비타당성 조사 없이 추진하려는 법안이다. 대구가 지역구인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대표 발의하고 여야 의원 216명이 서명해 헌정 사상 최다 의원이 이름을 올렸다. 영호남 화합과 국토균형개발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거대 양당의 텃밭인 대구와 광주 지역의 표심을 사려는 선심성 법안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여야는 앞서도 ‘대구경북 통합신공항 건설’과 ‘광주 군공항 이전’을 특별법으로 주고받기 한 전력이 있다. ▷당초 계획과 달리 특별법은 205km 구간에 복선 고속철도를 건설하도록 했다. 최고 시속 300km를 보장하는 선로를 2개 이상 깔아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 맞추면 사업비가 11조 원을 웃도는 것으로 국토교통부는 추산했다. 더군다나 설계 변경으로 사업비는 눈덩이처럼 불지만 시간 단축은 고작 2분에 그친다. 일반철도를 깔고 고속 운행하면 86분, 고속철도로 하면 84분이 걸린다고 한다. 이미 일반철도 사업비도 물가 상승으로 6조 원을 넘겼는데, 2분 당기려고 5조 원을 더 쓰겠다는 것이다.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최근 홍준표 대구시장, 강기정 광주시장을 만나 연내 특별법을 처리하겠다고 약속했다. 국민의힘 소속 홍 시장은 “국회가 결정하면 기획재정부는 따라오게 돼 있다”고 했다. 여야가 정부 동의도 거치지 않고 초대형 사업을 강행하겠다는 것이다. 2035년 달빛고속철의 수송 인원은 주중 하루 7800명 정도라고 한다. 정치 논리로 탄생해 텅 빈 지방공항들처럼 달빛고속철도 역시 텅 빈 열차가 달릴 수 있다는 얘기가 벌써부터 들린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일본에서 엔저 앞에 ‘와루이’(나쁜)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은 건 지난해 봄이다. 엔화 가치가 이른바 ‘구로다 방어선’이라는 달러당 125엔을 뚫고 내려가면서다. 통상 엔화가 약세일 때 수출 기업의 실적 호조를 앞세워 경기를 회복시켰는데, 이런 경로가 먹히지 않는다는 거였다. 엔저의 긍정적 효과보다 수입가격 상승이 쏘아올린 물가 급등, 무역수지 악화 등 악영향이 크다는 평가가 쏟아졌다. 일본 재무상도 “그만큼 임금이 오르지 않으니 나쁜 엔저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최근 국제 외환시장에서 엔화는 달러당 150엔을 넘어 152엔 수준까지 근접했다. 152엔마저 뚫는다면 엔화 가치는 버블 경제 붕괴 초반이던 1990년 이후 33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 된다. 엔화는 1985년 플라자 합의 때 ‘엔고’를 조건으로 세계 3대 통화가 됐지만, 버블 붕괴와 함께 엔고가 디플레이션을 몰고 오면서 일본 경제는 ‘잃어버린 30년’에 진입했다. ▷30년여 만에 맞은 초(超)엔저는 팬데믹 이후 전 세계가 금리를 끌어올리는 동안에도 일본은 마이너스 금리를 유지한 영향이 크다. 특히 10년간 아베노믹스 집행관으로 있던 ‘엔저론자’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가 올 4월 떠나고 신임 총재가 들어선 뒤에도 무제한 돈 풀기가 계속되면서 엔저의 질주는 멈추지 않고 있다. 그사이 미국은 금리를 더 올려 금리가 낮은 엔화를 팔고 금리가 높은 달러를 사는 ‘엔캐리’ 자금이 엔저를 부추기고 있다. ▷엔저 특수에 힘입어 일본 수출 기업과 관광 산업은 역대급 호황을 맞았다. 엔화를 헐값에 사서 일본 주식을 사려는 외국인 자금이 몰리면서 증시도 훨훨 날고 있다. 하지만 많은 일본 기업이 해외로 생산기지를 옮긴 탓에 수출 기업의 실적 개선이 임금 인상과 가계소득 증가로 이어지는 선순환 고리는 끊겼다. 오히려 엔저로 엔화 구매력이 바닥으로 추락해 일본 국민은 더 가난해졌다.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물가 상승에 100엔숍이 사라졌고, 관광객이 넘치는 대로변 쇼핑가와 달리 뒷골목 상점은 눈물의 폐업을 하고 있다. ▷이를 두고 나쁜 엔저를 넘어선 ‘가나시이’(슬픈) 엔저라는 얘기가 나온다. 이런데도 일본 정부는 디플레이션에서 확실히 탈출하기 전까지 엔저에 브레이크를 밟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세계 시장에서 일본과 경합하는 한국 주력 제품의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과거 원-엔 환율이 ‘1 대 10’ 비율보다 하락하면 한국 경제가 감기에 걸렸는데, 지금 100엔당 860원대까지 낮아졌다. 슈퍼 엔저 장기화의 영향이 최소화될 수 있도록 우리 경제 구조를 고도화하고 수출 경쟁력을 더 높여야 할 때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나라마다 기준이 대동소이하지만, 국내 보건당국은 한 번 술을 마실 때 남성은 소주 7잔(맥주 5캔), 여성은 5잔(맥주 3캔) 이상 마시는 걸 폭음이라고 규정한다. 남녀 간에 2잔이 차이 나는 건 여성의 알코올 분해 능력이 남성보다 떨어져서다. 남성보다 왜소한 여성은 간의 크기도 작아서 간에서 분비되는 알코올 분해 효소가 남성의 30∼50%에 불과하다. 여성호르몬 에스트라디올은 알코올 분해 효소의 활동도 방해한다. 술이 남자보다 여자에게 더 치명적인 이유다. ▷그런데 잔뜩 취할 정도로 술을 몰아서 마시는 한국 여성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일주일에 2번 이상 폭음하는 사람이 최근 10년 동안 남성은 25.1%에서 23.6%로 줄어든 반면 여성은 7.9%에서 8.9%로 늘었다. ‘고위험 음주’에 해당하는 술꾼들이다. 한 달에 한 번 이상 폭음하는 사람으로 좁혀 봐도 남성은 62%에서 56%로 감소했지만 여성은 31%로 변화가 없었다. 질병관리청은 2012년부터 2021년까지 성인의 음주 행태를 분석해 최근 이런 내용의 심층 보고서를 내놨다. ▷보고서에 따르면 자주 폭음하는 술꾼들이 남성의 경우 40, 50대 중장년층에서 많았지만 여성은 20, 30대 젊은층에서 두드러졌다. 특히 30대 여성의 고위험 음주율은 10년간 11.6%에서 13.2%로 뛰었다. 이는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고 여성 음주에 대한 사회·문화적 수용성이 높아진 영향이 크다. 서른 살 여자 동창 3명이 주구장창 술 마시는 드라마 ‘술꾼도시여자들’이 큰 인기를 끈 것도 이 같은 현실이 투영된 결과다. ▷도수는 낮추고 맛은 살린 ‘순한 술’ 경쟁이 불붙은 것도 한몫했다. ‘국민의 술’ 소주는 2004년 21도, 2006년 20도, 2014년 18도, 2018년 17도 등으로 도수를 계속 낮추며 남성 중심이던 소비층을 여성으로 넓혔다. 2015년 14도짜리 유자 맛 과일소주가 처음 나왔을 땐 “일반소주는 입에도 못 댔는데 두세 병은 거뜬히 마셨다”는 여성들의 무용담이 쏟아졌다. 최근엔 위스키에 토닉워터나 탄산수를 섞어 마시는 하이볼, 당을 뺀 제로슈거 소주가 여성 애주가를 사로잡고 있다. ▷임신과 출산으로 술을 끊었다가 육아로 인한 스트레스를 ‘육퇴’(육아+퇴근) 후 술 한잔으로 푸는 여성들도 여럿이다. 미국에선 이를 뜻하는 ‘마미주스’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하지만 습관적인 음주가 알코올 의존증으로 이어지기까지 남성은 평균 7∼8년, 여성은 5년 걸린다고 한다. 남성은 습관적으로 술을 마시지만 여성은 스트레스와 외로움, 우울감 등을 달래기 위해 술을 찾았다가 문제가 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건강한 음주는 없다’는 말은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애플의 위탁생산업체인 대만 폭스콘이 2018년 10조 원 이상을 투자해 중국 주하이에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는 청사진을 발표했다. 국내외 반도체 관련 기업 60여 곳을 현지로 초청해 사업 설명회까지 열었다. 이 과정에서 공장 설립을 돕는 컨설팅업체가 ‘진세미’라는 게 알려졌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서만 28년간 일하며 ‘반도체 공정(工程)의 달인’으로 불리던 최모 씨가 2015년 싱가포르에 설립한 회사였다. ▷최 씨는 18년 몸담은 삼성전자에서 한 번 타기도 힘들다는 삼성그룹 기술대상을 세 번이나 탔다. 2001년 옮겨간 하이닉스에선 빚더미 애물단지 회사를 세계 D램 2위 업체로 끌어올리며 사장 후보까지 올랐다. 국내 반도체 산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은탑산업훈장도 받았다. 그런 그가 중국, 대만 등 해외에서 컨설팅을 해주며 현지 반도체 공장 가동에 기여한다는 소식에 퇴직한 고급 인력을 우리가 활용해야 한다는 말들이 나왔다. ▷돌연 최 씨의 구속 소식이 들려온 건 올 6월이다. 2018년 중국 시안의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불과 1.5km 떨어진 곳에 이 공장을 본뜬 ‘복제 공장’을 지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삼성전자에서 반도체 공장 BED(반도체 클린룸 최적화 기술), 공정 배치도, 설계 도면 등을 대거 빼돌렸다고 한다. 최소 3000억 원, 최대 수조 원대 가치가 있는 핵심 기술들이다. K반도체의 산증인이 산업 스파이가 됐다는 소식에 산업계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복제 공장을 짓기 위해 최 씨는 삼성, 하이닉스 출신 등 반도체 엔지니어 200여 명을 영입했다. 기존보다 2배 많은 연봉은 물론이고 체류비, 자녀 교육비 등 파격 조건을 제시하며 ‘친정 식구’들을 데려온 것이다. 검찰은 최 씨가 이들에게 삼성전자 자료를 입수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봤다. BED는 삼성전자를 퇴사한 직원이 근무 당시 훔쳤고, 설계 도면은 삼성 시안 공장의 감리회사 직원이 빼돌렸다. ▷시안 공장에 8조 원을 투자하기로 했던 폭스콘이 발을 빼면서 공장 설립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최 씨는 청두로 눈을 돌렸다. 2020년 청두시에서 4600억 원을 투자받아 반도체 합작회사를 만들고 공장까지 세운 것이다. 그런데 이 공장에서 개발한 20나노급 D램 반도체에 삼성의 핵심 기술이 활용된 정황을 최근 경찰이 포착했다고 한다. 다행히 최 씨가 구속되면서 양산은 못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삼성의 ‘준(準)복제 공장’쯤은 생긴 셈이다. 넋 놓고 있다가는 중국에 첨단 기술과 인력들을 다 빼앗길 판이다. 산업 스파이를 간첩죄에 준해 엄벌해야 하는 이유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부산 지역의 중견 조선업체 대선조선이 이달 12일 주채권은행에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을 신청했다. 수주 물량이 쌓였는데도 선박 인도가 지연되면서 일시적인 자금난에 처했기 때문이다. 조선업계가 긴 불황의 터널을 지나 수주 호황을 맞았지만, 중소업체 중엔 극심한 인력난과 원자재 가격 급등을 견디지 못하고 유동성 위기에 빠진 곳이 적지 않다.하지만 이들 업체는 대선조선처럼 워크아웃을 활용해 신속하게 경영 정상화를 시도할 기회가 사라졌다. 워크아웃 제도의 법적 근거가 되는 ‘기업구조조정촉진법’(기촉법)이 국회의 태만으로 16일부터 효력을 상실해서다. 이제 위기에 몰린 기업이 기댈 수 있는 구조조정 수단은 훨씬 더 까다롭고 강도 높은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만 사실상 남았다.고금리·고물가·고환율 등 3고(高) 위기가 한국 경제를 다시 덮친 가운데 구조조정 제도의 공백을 불러온 정치권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기촉법의 재입법을 서두르는 동시에 20여 년간 반복돼 온 법률 일몰과 재연장의 논란을 끝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국회 파행에 또 없어진 ‘워크아웃법’잭 웰치 전 제너럴일렉트릭(GE) 회장이 기업 구조조정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면서 대중화된 워크아웃이 한국으로 건너온 건 외환위기 때다. 외환위기 여파로 기업들이 줄도산하자 2001년 한시법(유효기한이 정해진 법)으로 기촉법이 만들어졌다. 이 법을 근거로 워크아웃은 채권단 75% 이상이 동의하면 채무 조정과 신규 자금 지원 등을 통해 부실기업의 경영 정상화를 유도하는 구조조정 프로그램으로 운영돼 왔다. 한시법이 5차례 연장을 거듭하면서 채권단 주도의 워크아웃은 법원이 주도하는 법정관리와 더불어 기업 재도약을 위한 핵심 수단으로 활용됐다. 중소기업뿐만 아니라 하이닉스, 현대건설, 금호아시아나 등이 워크아웃을 거쳐 되살아났다. 금융위원회가 2012∼2021년 기업은행에서 선정한 부실징후기업 1348곳을 분석한 결과, 워크아웃으로 기업을 정상화시킨 성공률은 34.1%인 반면 법정관리 성공률은 12.1%에 그쳤다. 정상화에 걸리는 기간도 워크아웃이 3.5년으로 통상 10년 정도 걸리는 법정관리보다 짧았다. 워크아웃이 보다 신속하고 유연하게 구조조정을 지원하는 게 입증된 셈이다.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수주 계약 해지 사유에 해당되고, 수출입 기업의 경우 신용장 거래가 중단돼 정상적인 영업 활동을 할 수 없다. 금융채권뿐만 아니라 일반 상거래채권도 동결돼 협력업체 등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만만치 않다. 반면 워크아웃은 이런 부작용 없이 상거래를 지속할 수 있다. 기업들이 법정관리를 ‘최후의 수단’으로 여기는 이유다. 워크아웃의 이런 장점 때문에 올해도 기촉법 시한 만료를 앞두고 여야 의원들이 각각 일몰을 연장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소위가 6, 7월 두 차례 법안을 논의하고는 개점휴업에 들어가면서 이 법은 일몰을 피하지 못하고 또 없어지고 말았다. 여야의 극한 대립 속에 기촉법 관련 논의가 내년 4월 총선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기촉법 공백기에 중견기업·건설사 줄줄이 무너져금융당국은 기촉법 재입법을 추진하는 동시에 전 금융권이 참여하는 ‘구조조정 자율협약’을 가동해 법의 공백을 메우기로 했다. 과거 기촉법이 일몰 폐지됐을 때도 자율협약으로 워크아웃을 진행한 전례가 있다. 하지만 자율협약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데다 채권자 범위도 모든 금융채권자가 아니라 채권금융회사로 한정돼 한계가 분명하다. 올해를 제외하고 기촉법이 일몰 기한을 넘겨 효력을 잃은 경우는 4차례 있었다. 가장 긴 공백은 2006년 1월부터 2007년 11월까지 약 2년이다. 이때 6개 기업이 자율협약 방식으로 구조조정을 추진했지만 4곳이 채권단 간 이견으로 실패했다. 특히 중견 디스플레이 회사였던 현대LCD는 법정관리를 거쳐 중소업체에 일부 자산이 매각됐다가 결국 청산됐다. 휴대전화 제조업체 VK모바일도 채권단 합의에 난항을 겪다가 최종 부도를 맞고 청산됐다. 2011년 5개월 동안 기촉법이 실효됐을 때는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과 맞물려 삼부토건·동양건설·월드건설·LIG건설 등 중견 건설사들이 줄줄이 법정관리로 직행했다. 이 중 일부 건설사는 법정관리 신청 직전에 대규모 기업어음을 발행해 투자자들에게 부실을 떠넘겼다는 비판을 받았다. 올해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 경기 침체와 금리·물가 상승 여파로 경영난에 처한 기업이 늘고 있어 워크아웃 중단의 파장이 작지 않을 것으로 우려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3년 연속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 내는 한계기업이 지난해 말 기준 3900개를 웃돈다. 전체 기업(외부감사 대상 비금융 기업)의 15%를 차지하는 것으로 5년 만에 가장 높은 비중이다. 금융감독원의 신용위험평가 결과, 워크아웃이나 법정관리가 필요한 부실징후기업은 185개로 1년 새 25개 늘었다. 자금난이 영세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확산되면서 1∼8월 어음부도액은 3조6200억 원을 넘어섰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1년(1조9000억 원)이나 레고랜드 사태가 있었던 지난해(2조2500억 원)보다 심각한 수준이다. 금융권과 산업계에서 “구조조정 골든타임을 놓쳐 도산하는 기업이 없도록 재입법을 서둘러야 한다”는 요구가 쏟아지는 이유다.● “기업에 다양한 구조조정 선택지 줘야”기촉법 일몰 기한이 돌아올 때마다 법 존속 여부를 두고 사회적 논란은 반복되고 있다. 금융위는 한시법인 기촉법을 연장하는 것에서 나아가 상시화 검토도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법정관리를 주도하는 법원은 기촉법을 폐지하고 사법부 영역에서 구조조정이 일원화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조조정 주도권을 둘러싸고 밥그릇 싸움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법원행정처는 이번에도 국회 정무위에 기촉법 연장 반대 의견을 냈다. 워크아웃에 동의하지 않는 채권자에 대해 재산권 침해 등 위헌 소지가 있고, 금융채권자 권한이 우선시되면서 채무기업이 사실상 배제된다는 것이다. 기촉법이 관치금융 수단으로 활용된다는 비판도 오래된 논쟁거리다. 이에 대해 금융위는 그동안 수차례 법 개정을 통해 관련 문제를 대부분 해소했다는 입장이다. 원치 않는 채권자는 반대매수청구를 통해 이탈할 수 있고, 기업이 신청해야만 워크아웃을 개시할 수 있으며, 금융감독원장의 채권행사 유예 요청 권한 등도 없앴다는 것이다. 임채운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법정관리와 워크아웃의 장단점이 뚜렷한 만큼 기업들에 다양한 선택지를 주고 상황에 맞게 구조조정 수단을 정하도록 하는 게 맞다”며 “선택지를 오히려 없애는 방향으로 가면 안 된다”고 말했다. 세계적으로도 법원 밖 구조조정을 다양화하는 추세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해 ‘기업 구조조정을 위한 정책 옵션’ 보고서에서 법정 외 구조조정 활용을 높일 것을 권고했다. 그러면서 워크아웃 제도를 근거로 한국의 위기대응 능력을 60개 대상국 중 가장 높게 평가했다. 일본, 미국, 영국 등 선진국처럼 제3의 구조조정 기관이 채권단과 채무자 입장을 공정하게 조율하면서 기업 회생을 신속하게 돕는 새로운 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많다. 한은은 ‘기업 채무조정제도 개선에 관한 글로벌 논의와 시사점’ 보고서에서 “법원 외에 공정하고 중립적인 제3자 역할을 하는 도산 실무가를 육성해야 한다. 중소기업 맞춤형 채무조정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새로운 제도가 마련되기도 전에 기존 워크아웃 제도를 없애는 건 위기에 처한 기업들의 재기 발판을 없애는 것이나 다름없다. 국회와 정부는 서둘러 재입법을 통해 워크아웃 제도를 부활시켜야 한다. 민생을 챙기는 일이 바로 이런 것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무섭게 치솟던 가계빚 증가세에 브레이크가 걸린 건 작년 4분기 들어서다. 가계대출은 지난해 통틀어 7조8000억 원이 줄었는데 통계 편제 이래 첫 감소다. 한국은행 기준금리가 10년 만에 연 3%대로 올라선 데다 부동산과 주식 시장이 얼어붙은 영향이 컸다. 대출금리 인상을 알리는 은행 문자메시지에 벌벌 떨고, 상투에 집을 사서 물렸다며 땅을 치는 ‘영끌족’이 한둘 아니었다. 전세를 끼고 갭투자에 나섰던 사람들이 ‘갭거지’가 됐다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이 같은 분위기도 반짝이었다. 올 들어 한은이 줄곧 금리를 동결하고 금융당국의 은행권 ‘이자 장사’ 질타에 대출금리가 하락세로 돌아서자 빚을 갚으려던 사람들이 생각을 바꿨다. 특히 봄 이사철 이후 집값이 바닥을 쳤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영끌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주식시장에선 배터리 투자 광풍이 빚을 내서 돈을 벌려는 ‘빚투족’의 귀환을 부추겼다. ▷영끌·빚투에 앞장선 이들은 이번에도 2030 청년층이다. 팬데믹 시기에 아파트 ‘공포 매수’를 주도하고, 주식 투자에 뛰어든 ‘동학개미운동’ 세대다. 국감 자료를 보면 올 7월까지 1년 동안 5대 시중은행과 6대 증권사에서 이들이 새로 받은 대출은 134조 원에 육박한다. 1년간 해당 은행들에서 162조 원의 주택담보대출이 나갔는데 절반가량이 20, 30대 몫이었다. 상반기 전국 아파트 매매의 3분의 1을 30대 이하가 사들였다고 하니 곧장 주택담보대출로 이어진 셈이다. ▷한국부동산원 집계로 전국 아파트 매매가는 12주 연속 상승세다. 서울에선 ‘미친 집값’으로 불리던 급등기의 80∼90% 수준을 회복한 아파트가 속출하고 있다. 집값이 다시 꿈틀대자 이번에도 때를 놓치면 나만 소외될지 모른다는 포모(FOMO) 심리가 2030세대를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다 어렵게 취업한 일자리마저 저소득 비정규직이 많다 보니 착실히 돈을 모으기보다 주식이나 코인 투자로 한방을 노리는 청년들이 늘고 있다. ▷문제는 고금리와 저성장이 굳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은행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다시 최고 7%를 돌파했고, 미국발 고금리 시대는 더 길어질 것으로 보인다. 소득과 자산이 적은 청년들이 감당하기 힘든 나락으로 내몰릴 수 있다는 얘기다. 벌써부터 이자를 제때 갚지 못하는 20, 30대가 늘고 있다고 한다. 부동산·주식 거품이 빠지면 대박을 노린 섣부른 투자가 쪽박으로 돌아올지 모른다. 한은 총재가 “다시 낮은 금리로 갈 거라고 생각하고 집을 산다면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젠 ‘아파트 때문에 나라 망하겠다’는 아파트 망국론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됐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요즘 고깃집이나 횟집 메뉴판에서 바뀐 건 가격만이 아니다. 메뉴판 구석에 ‘쌈채소 리필은 한 번만 가능’ ‘상추·깻잎 리필에 3000원’ 등을 써 붙인 식당이 갈수록 늘고 있다. 여름 성수기와 추석 연휴를 지나고도 고공 행진하는 채소값 때문이다. 청상추 100g이 1821원으로 작년 이맘때보다 50% 넘게 뛰었고, 같은 양의 깻잎은 3165원으로 15% 올랐다(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6일 소매가 기준). 국산 삼겹살 100g이 2700원대에 판매되고 있으니 깻잎이 삼겹살보다 비싸진 것이다. “삼겹살로 깻잎 싸먹겠다”는 얘기가 나올 판이다. ▷과일값도 다르지 않다. 추석을 앞두고 사과와 배 1개씩 사면 만 원을 넘겼는데 지금은 더 올랐다. 곧 마트에 풀릴 가을 대표 과일 단감은 가락시장 도매가격이 지난해보다 최고 40% 넘게 급등했다. 올해 유독 심했던 폭염·폭우 등 극한 기후의 여파가 여전히 농산물 수급에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6, 7월 두 달간 내린 집중호우로 서울 여의도 면적의 236배에 달하는 농지가 침수, 낙과 등의 피해를 입었으니 쉽게 진정될 가격 상승세가 아닌 듯하다. ▷이상 기후가 불러온 농산물 가격 급등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에선 오렌지 가격이 연일 뛰고 있다. 최근 뉴욕상품거래소에서 농축·냉동 오렌지주스 선물(先物) 가격은 역대 최고가를 기록했다. 허리케인이 강타한 플로리다의 오렌지 생산량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탓이다. 사탕수수 최대 산지인 인도와 브라질의 가뭄으로 설탕 선물 가격도 12년 만에 최고가를 찍었다. 남유럽의 전례 없는 폭염과 가뭄으로 올리브 수확이 급감하면서 국제 올리브유 가격은 1년 새 2배 넘게 치솟았다. ▷국제 농산물 가격 급등은 시차를 두고 국내 식품가격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올리브유를 고집하던 국내 치킨 프랜차이즈는 18년 된 레시피를 바꿔 해바라기씨유를 절반 섞어 쓰기로 했다. 원유(原乳) 가격 인상 여파로 우유에 이어 아이스크림 가격도 뛰면서 ‘밀크플레이션’에 시동을 걸었다. 거의 모든 음식에 들어가는 설탕의 가격 상승이 이끌 ‘슈거플레이션’이 현실화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올 7월 영국 BBC의 시사 프로그램에서 ‘기후플레이션’이라는 신조어를 처음 소개했는데, 불과 몇 달 새 우리 밥상을 위협하는 최대 요인이 됐다. 이상 기후가 농산물 작황 부진으로 이어져 식품물가를 끌어올리고 전체 물가에도 악영향을 준다는 뜻이다. 2035년이면 기후 변화가 세계 식품물가 상승률을 최대 3.23%포인트 높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무분별한 탄소 배출이 지구 온도뿐만 아니라 물가까지 끌어올리는 기후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2009년 5월 한국전력 본사 지하에 비상상황실 ‘워룸(war room)’이 만들어진 적이 있다. 미국발 금융위기와 고유가 여파로 창사 이래 처음 적자가 나면서 위기감이 높아진 때였다. 이 워룸에서 한전 컨소시엄 직원 80여 명이 야전침대를 두고 7개월 내내 휴일도 없이 살다시피 했다.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을 따내기 위한 사령부 역할을 한 것이다. 전시처럼 일한 결실은 국내 1호 원전 수출이자 사상 최대 인프라 수출로 이어졌다. 며칠 전 한전 본사에 다시 워룸이 등장했다. 이번엔 사장 집무실이 간판을 바꿔 달았다. 20일 취임한 김동철 신임 사장이 간이침대를 들여놓고 이곳에서 숙박하고 있다고 한다. 김 사장은 “위기 극복의 실마리가 보일 때까지 휴일을 반납하고 24시간 본사를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 직원들에게는 ‘제2의 창사’라는 각오로 경영 체질을 개선할 것을 주문했다. 한전 설립 62년 만에 최초로 정치인 출신 최고경영자가 된 김 사장의 첫 행보다. 한전이 처한 위기 상황은 14년 전 워룸이 들어섰을 때와 비할 바가 못 된다. 2008년 3조 원에 육박하는 첫 적자에 충격을 받았지만, 올 상반기 영업적자는 8조4500억 원에 이른다. 2021년 2분기 이후 아홉 분기 연속 영업손실을 내면서 누적 적자는 47조 원을 넘어섰다. 민간 기업이라면 벌써 파산하거나 매각됐을 수준이지만 한전은 천문학적 빚을 내며 버티고 있다. 2020년 말 132조 원이던 한전 부채는 2년 반 새 200조 원대로 급증했다. 앞으로 5년간 한전이 부담해야 할 이자만 24조 원, 하루 131억 원꼴이다. 우량 공기업이던 한전이 빚더미 ‘적자 공룡’으로 전락한 건 제때 전기요금을 올리지 않은 게 결정적이다. 국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는데도 문재인 정부는 정권 말이자 대선 직후인 작년 4월을 제외하고 전기요금을 한 번도 올리지 않았다. 오히려 탈원전 정책에 매달려 발전 비용이 저렴한 원전 가동을 줄이고, 고가의 신재생에너지와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을 늘려 비싼 전기를 생산했다. 전기료가 원가에도 못 미쳐 전기를 팔수록 손해인 구조가 굳어진 것이다. 출범 1년 4개월을 맞은 현 정부도 이젠 자유로울 수 없다. 당초 정부는 한전의 경영 정상화를 위해 올해 kWh당 51.6원의 전기료 인상이 필요하다고 봤지만 1, 2분기에 21.1원 올리는 데 그쳤다. 전기요금 정상화 숙제를 미루는 게 국정 지지율이나 내년 총선 때문이라면 지난 정부가 보여줬던 포퓰리즘 행태와 다를 바 없다. 전기료 방치는 한전의 부실로 끝나지 않는다. 전력망 투자가 위축되면 전력산업 생태계가 훼손되고 대규모 정전 같은 국가 재난 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 적자 보전을 위해 한전이 찍어내는 한전채가 시중 자금을 빨아들여 금융시장 혼란을 부추기는 문제도 반복되고 있다. 최근 국제유가가 다시 배럴당 100달러 돌파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한전이 더 깊은 수렁에 빠질 위험이 다분하다. 공기업 부실이 커지면 국민 세금으로 메울 수밖에 없다. 더 늦기 전에 원가와 수요를 기반으로 전기요금을 정상화하는 게 정공법이다. 한전의 2023년형 워룸은 정부와 정치권을 설득해 정치 논리에 좌우되는 기형적 전기요금을 바꾸는 사령부 역할을 해야 한다. 노조에 휘둘리지 않고 방만한 조직과 경영을 대수술하는 리더십도 보여야 한다. 앞서 5월 한전이 부동산 매각, 임금 인상분 반납 등 26조 원 규모의 재무구조 개선책을 내놨지만 진전이 없다. 국민이 공감할 만한 추가 자구안을 내놔야 한다는 지적이 쏟아지는 이유다. 워룸이 정치인 출신 사장의 보여주기식 쇼에 그친다면 한전의 정상화는 물론이고 에너지 정책의 정상화도 요원할 것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고강도 부동산 대책이 쉴 새 없이 쏟아지던 2018년 무렵부터 틈새형 주거상품의 인기가 치솟았다. 주택시장에 집중된 규제 장애물을 피해 오피스텔, 도시형생활주택 등으로 돈이 몰린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뜨거웠던 건 생활숙박시설(생숙)이다. 강릉, 속초, 제주 등에서 세컨드하우스로 각광받던 생숙이 수도권에 상륙하며 청약 열풍을 몰고 왔다. 2021년 서울 마곡지구에서 분양한 생숙은 고분양가 논란에도 최고 6049 대 1, 평균 657 대 1의 경쟁률로 시장을 놀라게 했다. ▷흔히 레지던스라고 불리는 생숙은 원래 취사와 세탁 등이 가능한 숙박시설이다. 주택법이 아니라 건축법과 공중위생관리법의 적용을 받는다. 하지만 전입신고가 가능하고 거주에 불편함이 없는 데다 건축법상 특별한 규제도 없어 주거용으로 쓰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특히 청약통장이 필요 없고 전매 제한, 대출, 거주 의무 등 각종 규제에서 자유로워 실수요자는 물론이고 시세 차익을 노린 투자자까지 몰려들었다. 이에 힘입어 2018년부터 매년 아파트를 빼닮은 1만 채 이상의 생숙이 들어섰다.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을 벌이던 지난 정부는 생숙마저 과열 조짐을 보이자 칼을 빼들었다. 2021년 5월 건축법 시행령을 고쳐 생숙의 숙박업 신고를 의무화하고 용도 변경 없이는 주거용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오피스텔로 변경하도록 2년의 유예기간을 줬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매년 건물 시가표준액의 10%를 이행강제금으로 물리기로 했다. 유예기간이 끝나는 다음 달 15일부터 오피스텔로 용도 변경을 하지 않고 지금처럼 거주하면 수천만 원의 벌금을 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건축법 개정 이전에 이미 분양했거나 준공된 생숙까지 이를 소급 적용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전국 592개 단지, 10만여 채의 생숙 집주인들은 그야말로 날벼락이다. 오피스텔로 용도 변경을 하려면 복도 폭을 넓히고 주차 대수를 늘리고 통신·소방시설 등을 강화해야 하는데, 다 지어놓은 건물은 이 요건을 충족하기가 쉽지 않다. 이렇다 보니 지금까지 오피스텔로 바뀐 생숙은 1%뿐이다. ▷생숙 집주인들은 정부가 지키기 어려운 잣대를 들이대며 입주자를 거리로 내몰고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특히 분양부터 입주까지 정부와 지자체 누구도 문제 삼지 않다가 투기를 막겠다며 급하게 법 개정을 밀어붙여 혼란을 키웠다고 분통을 터뜨린다. 10만여 채의 불법 건축물을 양산하는 규제 시한이 코앞인데 정부가 손놓고 있어선 안 된다. 주거 패러다임 변화에 맞춰 주거와 숙박 기능을 담은 ‘하이브리드형 시설’로 생숙을 양성화하자는 전문가 의견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후진국에서나 일어날 법한 은행 횡령 사건이 또 터졌다. 이번엔 BNK경남은행에서 50대 부장급 간부가 7년간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자금 562억 원을 빼돌렸다고 한다. 지난해 우리은행의 700억 원대 역대급 횡령 사건이 드러난 지 1년여 만이다. 10년 넘게 한 부서에서 장기 근무한 직원이 서류를 위조해 대출을 받고 가족 계좌로 이체한 수법부터, 은행과 금융당국이 수년간 이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점까지 판박이다. ▷경남은행에서 2007년부터 부동산 PF 업무를 맡아온 이모 부장은 7년 전 PF 대출 상환금을 가족 명의 계좌로 몰래 보내도 적발되지 않자 본격적으로 범죄 행각을 벌였다. 수시로 들어온 대출금 78억 원을 가족 계좌 등으로 옮긴 것이다. 수법은 갈수록 대담해졌다. 아예 PF 시행사인 것처럼 서류를 꾸며 대출금 326억 원을 가족 법인 계좌로 이체했다. 또 다른 PF 사업에서 상환된 돈을 본인이 담당하던 PF 대출을 갚는 데 쓰기도 했다. 은행 내부통제에 구멍이 뚫린 게 아니라 아예 시스템이 마비된 것 아니냐는 의심이 들 정도다. ▷횡령 사실이 드러난 과정은 더 어이없다. 다른 저축은행 PF 사건을 수사하던 검찰이 올 4월 이 부장의 금융거래에서 수상한 점을 포착하고 정보 조회를 요청할 때까지 은행은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했다. 더군다나 은행은 자체 감사를 거쳐 횡령액이 78억 원이라고 지난달 금융감독원에 보고했다. 하지만 불과 10여 일 만에 금감원은 484억 원의 횡령을 추가로 적발했다. 제 식구를 감싸기 위해 은폐한 게 아니라면 은행 감사 시스템도 고장 난 셈이다. ▷금융당국의 책임도 가볍지 않다. 당국은 은행 횡령 사고를 막겠다며 지난해 11월 ‘내부통제 혁신 방안’을 내놨다. 오랫동안 같은 업무를 맡을 경우 사고 위험이 높아지기 때문에 순환 근무와 명령 휴가 등을 통해 장기 근무자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는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이 부장은 15년 넘게 PF 업무를 담당했고, 은행은 지난해 문제가 없다고 보고했다. 당국의 지시를 무시한 은행도 황당하지만 이를 제대로 점검하지 못한 금감원도 할 말이 없다. ▷최근 6년여 동안 금융사 임직원들의 횡령액은 2200억 원을 넘어섰다고 한다. 허술한 내부통제와 뒷북 감독이 문제지만 바늘도둑을 소도둑으로 키우는 솜방망이 처벌도 한몫한다. 회삿돈 2215억 원을 횡령한 오스템임플란트 전 직원이 얼마 전 1심 재판에서 이례적으로 징역 35년형을 선고받았는데, 은행원의 횡령에는 좀 더 무거운 잣대를 들이대야 할 듯하다. 수백억 원대 횡령 사고가 연례행사처럼 터져나오니 어디 은행 믿고 돈을 맡길 수 있겠나.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미국 월가의 투자 보고서에 농업과 인플레이션을 합친 ‘애그플레이션’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건 2007년이다. 옥수수 값 폭등으로 멕시코에서 ‘토르티야 폭동’이 일어난 것을 시작으로 세계 30여 개 국가에서 식량 가격 급등으로 인한 폭동이 발생하던 때였다. 식량 위기가 안보 위기로 확산되자 반기문 당시 유엔 사무총장은 2008년 4월 비상사태를 선포했다.식량 위기 공포에 다시 방아쇠를 당긴 것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다. 세계 최대 곡물 생산·수출국으로 꼽히는 두 나라의 전쟁이 길어지면서 세계인의 식탁이 위협받고 있다. 여기에다 올해 극단적인 폭염·폭우 등 이상기후로 물가가 치솟는 ‘기후플레이션’까지 맞물려 식량 위기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고착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한국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극한 기후는 이미 우리 밥상을 덮쳤고 쌀을 제외한 곡물 자급률은 바닥 수준이다. ‘소리 없는 쓰나미’라 불리는 식량 안보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노골화되는 러시아의 ‘식량 무기화’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발표하는 세계 식량가격지수는 전쟁 발발 직후인 지난해 3월 역대 최고치(159.7)로 치솟았다. 러시아의 흑해 봉쇄로 세계 3대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이 막히면서 2007∼2008년의 식량 폭동이나 2011년 ‘아랍의 봄’ 때보다 상황이 더 나빠진 것이다. 이를 가까스로 잠재운 것은 유엔과 튀르키예의 중재로 체결된 ‘흑해곡물협정’이다. 이 협정에 따라 전쟁 와중에도 지난해 7월 이후 우크라이나산 밀·옥수수·보리 등 3280만 t이 흑해를 통해 45개국으로 수출됐다. 하지만 앞서 3차례 협정을 연장했던 러시아가 지난달 17일 협정 파기를 선언하더니 흑해에 접한 우크라이나 최대 항구도시 오데사의 곡물창고와 항만 시설을 연일 공습했다. 이어 24일에는 전쟁 이후 처음으로 다뉴브강 항구도시 레니를 공격했다. 흑해 항로를 대체할 수출길은 다뉴브강을 이용한 수로와 인접 국가를 거치는 육로뿐인데 노골적으로 내륙 수로 곡물 항구를 타격한 것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을 인질로 삼아 전 세계를 대상으로 ‘식량 테러’를 가하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세계 곡물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지난달 25일 미국 시카고상품거래소에서 밀 선물 가격은 부셸(약 27kg)당 7.7달러에 거래되며 5개월 만에 최고치로 뛰었다. 곡물협정 중단 이후 나흘 새 18% 급등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현재 북반구가 곡물 수확기인 데다 세계 최대 밀 생산국인 러시아에 수출 가능한 물량이 쌓여 있어 국제 곡물 가격이 지난해처럼 계속 급등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국제 곡물 가격이 요동칠 것이라는 관측이 높다. 러시아의 ‘곡물 만행’이 서방의 제재 완화를 노린 것이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전쟁 이후 퇴출당한 국제금융결제망(SWIFT·스위프트) 재가입 등을 요구하고 있는데 서방으로선 수용하기 쉽지 않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이번 사태로 곡물 가격이 최대 15% 상승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기후플레이션’ 몰고 온 엘니뇨지난해 말 현재 식량 수출의 빗장을 걸어 잠근 국가는 27개국에 이른다. 밀, 옥수수 같은 곡물뿐만 아니라 육류, 유제품, 팜유, 비료 등 57개 품목에 대해 수출 금지나 수출 물량 제한 등의 조치가 시행됐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식량 위기 우려가 높아지자 각국이 식량보호주의를 강화하고 나선 것이다. 이 같은 움직임이 자국의 식량 수급 안정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중장기적으로 국제 식량 가격을 더 높이는 역효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행이 밀 가격 변화를 실증 분석했더니, 수출 제한 비중이 1%포인트 늘 때마다 밀 가격은 2.2%포인트 올랐다. 더군다나 올해는 4년 만에 발생한 엘니뇨로 극한 폭염과 폭우, 가뭄 등 이상기후가 지구촌을 덮치면서 식량 가격 급등세와 식량 보호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다. 설탕(원당) 선물 가격은 사탕수수 최대 산지인 인도와 브라질의 가뭄으로 5월 파운드당 26센트를 넘어서며 12년 만에 최고치를 찍더니 현재 24센트를 오르내리고 있다. 초콜릿 원료인 카카오 원두 가격은 1·2위 생산국인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와 가나의 폭우로 지난달 46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중남미 파나마가 100년 만에 최악의 가뭄을 겪으면서 칠레산 와인, 브라질산 소고기, 에콰도르산 바나나 등의 수출도 차질을 빚고 있다. 글로벌 물류 요충지인 파나마운하의 수위가 낮아져 선박 통행을 제한한 탓이다. 인도는 올 들어 설탕 수출을 제한한 데 이어 지난달 20일부터 바스마티 품종을 제외한 모든 품종의 쌀 수출을 금지했다. 인도 쌀 수출 물량의 45%를 차지하는 규모다. 최근 인도 북부 지역이 45년 만에 최악의 홍수 피해를 입으면서 쌀값이 들썩이자 특단의 조치에 나선 것이다. 세계 최대 쌀 수출국인 인도의 금수 조치로 국제 쌀 가격도 뛰고 있다. 점점 뜨거워지고 있는 지구가 식품 물가를 끌어올리는 ‘히트플레이션’(열+인플레이션)이 본격화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유럽중앙은행(ECB)이 5월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 요인을 제외하고 폭염 영향만으로 지난해 유럽 식품물가 상승률은 0.67%포인트 더 높아졌다. 독일 포츠담기후변화연구소는 이 보고서에서 “2035년에는 기후 변화가 세계 식품물가 상승률을 최대 3.23%포인트 끌어올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자급 능력+해외 조달+비축’ 3박자 갖춰야더 섬뜩한 건 우크라이나 전쟁은 여전히 교착 상태이고 극한 기후는 올해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미국항공우주국(NASA·나사) 등은 엘니뇨 영향이 본격화하는 내년이 올해보다 더 더울 것이라는 관측을 잇달아 내놨다. 식량 위기가 상시적이고 구조적인 위험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국내에서도 최근 극한 호우에 불볕더위가 이어지며 채소 값이 한 달 새 2∼4배 급등했는데 일시적 현상으로 볼 게 아니다. 게다가 한국은 국제 곡물 가격 급등과 식량보호주의 움직임에 매우 취약하다. 연간 수요량의 80%(1800만 t)를 해외에 의존하는 세계 7위 곡물 수입국인 탓이다. 1980년대 50%를 넘던 한국의 곡물 자급률(사료용 포함)은 2021년 20.9%까지 떨어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다. 자급률이 85%에 육박하는 쌀을 제외하고 밀(1.1%), 옥수수(4.2%), 콩(23.7%) 등 나머지 주요 곡물은 대부분 수입한다. 세계 곡물 값이 뛰면 국내 가공식품과 외식 물가는 물론이고 생활 물가 전반이 줄줄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글로벌 경제 패권 경쟁과 공급망 재편이 심화되는 가운데 식량과 자원을 무기화하는 국제적 흐름은 더욱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도 이에 대비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식량 안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곡물은 하루아침에 생산 기반을 늘리고 자급화를 실현하는 게 힘든 만큼 쌀 중심으로 돼 있는 식량비축 제도를 확대하고 안정적인 해외 공급망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일본은 밀과 사료곡물 등의 상시 비축을 법제화하고, 종합상사들이 일찌감치 해외 농업 개발과 계약재배 등에 뛰어들어 곡물 수입의 70%를 안정적으로 책임지고 있는데 이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국내 자급 능력을 높이는 데 힘써야 한다. 임정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자급률을 높이려면 우량 농지를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아울러 밀, 콩, 옥수수 등 자급률이 낮은 곡물에 대해선 쌀 농가 수준의 보조금을 지원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신냉전 구도가 갈수록 뚜렷해지는 상황에서 지금의 ‘반도체 전쟁’이 언제 ‘식량 전쟁’으로 확대될지 모른다. 총성 없는 식량 전쟁에 대비해 정부와 민간이 머리를 맞대고 서둘러 대응책을 마련해야 할 때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경남 거제시 조선해양문화관 광장에 있던 120t짜리 거북선이 결국 지난주에 철거됐다. 2011년 경남도의 ‘이순신 장군 기념사업’ 일환으로 제작됐지만 아무런 활용도 못 하다가 땔감과 고철만 남기고 폐기된 것이다. 국비와 지방자치단체 예산 16억 원이 투입된 프로젝트의 한심한 결말이다. 철거된 거북선은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남해안 일대 지자체들이 앞다퉈 ‘이순신 마케팅’에 뛰어들고,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거북선보다 더 많은 거북선을 만들어 낼 때 편승한 사업이었다. 게다가 제작업체가 국내산 목재를 쓰겠다는 계약을 어기고 외국산을 사용한 게 드러나 ‘짝퉁’ 꼬리표가 붙었다. 승선 체험 등 관광용으로 쓰려고 바다에 띄웠지만 물이 새고 기울어져 뭍으로 끌어올려야 했다. 지상에서도 배가 뒤틀리고 부서지는 사고가 잇따랐다. 엉성한 계획으로 출발해 부실한 시공과 관리감독으로 이어진 지자체 전시행정의 전형적인 사례다. 문제는 이처럼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수십억, 수백억 원의 세금을 낭비한 사업이 널려 있다는 사실이다. 서울시가 1100억 원을 들여 만든 세운상가 공중보행로는 개통 1년 만에 철거 논란에 휩싸였다. 전임 시장이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했지만 통행량이 당초 예측의 5∼17%에 불과한 탓이다. 충북도가 ‘내륙판 자갈치시장’을 표방하며 바다도 없는 괴산군에 조성한 수산단지는 파리만 날릴 지경이다. 사업성을 도외시한 이 역발상 행정에 230억 원이 투입됐다. 110억 원 넘게 들어간 부산 수영구의 복합생활문화시설 ‘비콘그라운드’, 1220억 원이 투입된 대구 군위군의 ‘삼국유사테마파크’, 강원 원주시가 폐철로를 매입하기도 전에 54억 원을 들여 사들인 관광열차 등 애물단지로 전락한 시설이 곳곳에 수두룩하다. 사업성이나 활용 방안을 치밀하게 검토하지 않고 일단 짓고 보자는 식의 안이한 행정에 국민 세금이 줄줄 새고 있는 것이다. 전국 243개 광역·기초지자체의 재정 자립도는 평균 45%에 그친다. 전체 예산 중 지방세 같은 자체 수입이 절반도 안 된다는 뜻이다. 재정 자립도가 30%를 밑도는 지자체는 190곳이 넘는다. 이런데도 지자체마다 보여주기식 행정에 돈을 펑펑 쓸 수 있는 건 국세에서 자동 이전되는 지방교부금이 있기 때문이다. 선출직 지자체장들이 중앙정부가 내려보내는 지방교부금을 쌈짓돈 삼아 치적 쌓기나 선거용 사업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인사권과 예산 편성권, 인허가권을 쥔 지자체장이 결정하면 공무원들은 따라갈 수밖에 없다. 상당수 지자체가 재정 혁신 노력은 게을리한 채 인기 영합식 정책을 남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올해도 지자체 186곳이 19조 원이 넘는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했는데, 이 중엔 공짜로 해외여행을 보내주거나 탈모 치료비를 지원하는 식의 선심성 사업이 적지 않다. 지자체의 흥청망청 예산 낭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올해 역대급 세수 펑크가 예상될 정도로 나라 살림이 비상이라는 점에서 우려를 더한다. 국가채무가 1000조 원을 넘어선 상황에서 중앙정부에서 매년 수십조 원을 받아 쓰는 지자체의 세금 낭비는 나랏빚 부담을 가중시킬 뿐만 아니라 지방자치 시스템 자체를 뒤흔들 수 있다. 각 지자체의 예산 낭비를 막을 제도적 장치가 필요한 이유다. 중앙정부의 지자체 사업 타당성 검증을 강화하고, 전문가와 지역주민들이 불필요한 사업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사업 선정 과정과 예산 집행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시스템도 필요하다. 지방재정의 건전한 자립을 위해 60년 넘은 지방교부금 제도를 대수술하는 작업도 서둘러야 한다. 지자체의 방만 재정으로 혈세가 줄줄 새는 일이 더는 없어야 할 것이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올여름 할리우드 기대작으로 꼽히는 영화 ‘오펜하이머’의 영국 런던 시사회는 지난주 배우들 없이 진행됐다. 맷 데이먼, 에밀리 블런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등 스타 배우들이 레드카펫에서 사진만 찍고 사라진 것이다. 홀로 무대에 오른 감독은 “그들은 피켓을 들기 위해 떠났다”고 했다. 14일 자정을 기해 시작된 미국 배우·방송인노동조합의 총파업에 배우들이 동참한다는 설명이었다. 배우조합은 지난달부터 디즈니, 유니버설, 넷플릭스 등을 대표하는 영화·TV제작자연맹과 고용계약 협상을 벌였지만 결국 결렬됐다. ▷앞서 5월부터 미국 작가조합이 파업에 들어간 데 이어 배우, 스태프 등 16만여 명이 몸담은 배우조합까지 파업을 결의하면서 세계 최대 영화산업 메카인 할리우드가 멈춰섰다. 두 노조의 동반 파업은 매릴린 먼로가 참여하고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배우조합장으로 있던 1960년 이후 처음이다. TV 산업 초창기였던 당시 작가와 배우들이 방송국에 판매된 영화 재상영 분배금 문제를 놓고 함께 싸웠다면, 이번엔 할리우드 판도를 뒤흔들고 있는 스트리밍과 인공지능(AI)을 두고 뭉쳤다. ▷동영상 스트리밍 시대가 열리면서 넷플릭스, 애플, 디즈니 같은 콘텐츠 플랫폼 기업은 배를 불리고 있지만 정작 콘텐츠 생산자인 작가와 배우들은 합당한 로열티를 받지 못한다는 게 양대 조합의 주장이다. 하지만 이들이 더 우려하는 건 AI가 잠식할 할리우드의 미래다. 앞으로 생성형 AI가 대본을 쓰고, AI 딥페이크 기술이 배우의 신체와 연기를 대체하면서 이들의 직업이 폐기 처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려는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지난해 실어증으로 은퇴한 ‘다이하드’ 배우 브루스 윌리스는 자기도 모르는 새 전성기 모습을 이용한 딥페이크 광고가 만들어져 논란이 됐다. 마블의 신작 ‘시크릿 인베이젼’ 오프닝 영상은 아예 AI가 만들었다. 작가조합이 제작자들에게 AI를 활용한 대본 작성과 수정을 금지해 달라고 요구하고, 배우조합이 배우의 얼굴과 목소리가 AI에 무단 도용되는 걸 막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AI의 진화로 일자리를 위협받게 된 콘텐츠 생산자들이 반격에 나서는 건 할리우드뿐만이 아니다. 작가, 예술가 등 14만여 명이 속한 독일 협회와 노동조합은 AI가 저작권을 침해하고 있다며 유럽연합에 AI 규정 강화를 촉구했다. 영국 배우조합도 AI 때문에 배우들 일자리가 없어진다며 파업을 예고했다. 국내 최대 웹툰 플랫폼에선 AI 보이콧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생성형 AI가 상용화된 지 1년도 되지 않아 벌어진 일들이다. AI가 ‘예술가의 종말’을 부를지에 대한 논쟁은 63년 만의 ‘할리우드 셧다운’으로 더 뜨거워지게 됐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우간다보다 못하다.’ 한때 한국 금융의 후진성을 질타할 때 쓰였던 말이다. 다보스포럼으로 알려진 세계경제포럼(WEF)이 2015년 발표한 국가경쟁력 금융 부문에서 한국이 87위, 우간다가 81위에 오르면서다. 당시 WEF의 평가가 기업인 설문조사 위주로 진행돼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결과를 뼈아프게 받아들이는 금융인들이 적지 않았다. 이후 WEF가 통계지표 반영 비중을 높이면서 한국의 금융 경쟁력은 껑충 뛰었다. ▷국가경쟁력 외에도 WEF가 매년 국가별로 순위를 매기는 것 중 ‘성 격차(Gender Gap) 지수’라는 게 있다. 경제 참여·기회, 교육 수준, 건강, 정치 권한 등 4가지 항목에서 남녀평등 정도를 평가해 지수화한 것이다. 그런데 WEF가 그제 발표한 성 격차 지수에서 한국은 146개국 중 105위에 그쳤다. 지난해보다 여섯 계단 하락한 것이자 아프리카 세네갈(104위)보다 낮은 수준이다. 심지어 르완다가 12위였다. ▷여성의 지위와 권한 자체가 아니라 ‘성별 격차’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남녀 모두 수치가 낮은 아프리카 국가들보다 남녀 차이가 큰 한국이 뒤로 밀린 것이다. 한국뿐 아니라 중국(107위), 일본(125위) 등 가부장적 문화가 남아 있는 아시아 국가들이 대체로 하위권에 몰렸다. 반면 ‘육아 천국’, ‘복지 천국’으로 꼽히는 북유럽의 아이슬란드·노르웨이·핀란드·스웨덴과 뉴질랜드는 1∼5위를 휩쓸었다. 이들 국가가 90% 안팎 수준으로 남녀평등을 실현했다면 한국은 68% 수준으로 평가됐다. ▷여성 인권의 절대 수준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WEF 평가를 깎아내릴 게 아니라 자성할 대목들도 적지 않다. 항목별로 보면 경제 참여·기회가 114위로 종합 순위보다 낮았고, 더 세부적으로는 근로소득(119위), 고위직 비율(128위)이 최하위권을 맴돌았다. 남녀 임금 격차가 크고, 여성의 승진이 힘들다는 뜻이다. 한국 남성이 100만 원의 임금을 받을 때 여성은 69만 원을 받고, 여성 10명 중 4명은 출산과 육아, 자녀 교육으로 경력 단절을 경험하고 있다. 민간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은 11.5%에 불과하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매년 발표하는 ‘유리천장지수’에서 한국이 ‘만년 꼴찌’인 것도 이 때문이다. 경제 규모 세계 10위권을 자랑하고, K컬처로 문화 강국 반열에 오른 한국의 부끄러운 현주소다. 최악의 저출산은 물론이고 고용, 복지, 교육 문제까지 어느 것 하나 성평등 정책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해결 방안을 찾기보다 극단적 혐오의 충돌로 젠더 갈등의 골만 깊어져 우려스럽다. 성평등을 통해 여성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것은 여성뿐 아니라 남성, 정부를 포함한 한국 사회 전체의 과제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한국에서 자본시장 범죄는 ‘남는 장사’다. 수백억 원의 부당이득을 챙겨도 기껏해야 몇 년 징역형을 살면 되고, 벌금도 푼돈에 그친다. 모범수가 되면 가석방까지 돼 빼돌린 돈으로 호의호식하면 된다. 회계사 출신의 한 기업사냥꾼 사례는 증권가에서 유명하다. 6년간 7건의 증권 범죄에 가담해 수백억 원을 챙겼지만 여태 확정된 처벌은 800만 원 벌금형에 불과하다. 그는 심지어 코스닥 상장사의 부정거래, 배임 등에 연루돼 재판을 받는 도중 쌍용차 매각 과정에 뛰어들어 주가를 띄우고 ‘먹튀’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본시장 범죄의 다수를 차지하는 3대 불공정거래(시세조종, 부정거래, 미공개정보 이용)에 대해 현재 형사 처벌만 가능하고 별도의 금전적·행정적 제재 수단이 없는 탓이 크다. 형사 처벌마저도 불공정거래 혐의가 적발돼 법원의 최종 판결을 받기까지 평균 2∼3년씩 걸리는 데다 실형 대신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비중이 40%가 넘는다. 이렇다 보니 주가 조작범이 자본시장으로 돌아와 다시 범죄를 저지르는 사례가 허다하다. ▷SG증권발 주가 폭락과 비슷한 5개 종목 무더기 하한가 사태가 며칠 전 발생했는데, 배후로 지목된 온라인 주식투자 카페 운영자 강모 씨도 ‘전력’이 있다. 그는 2014년 2월부터 카페 회원 등과 함께 거래량이 적은 4개 종목을 찍은 뒤 1년 반 동안 무려 1만111차례 사고팔며 주가를 조작했다. 4개 종목엔 이번에 폭락한 대한방직도 있었는데, 당시 주가는 3만 원대에서 15만 원대로 치솟았다. 이 같은 시세조종으로 강 씨는 지난해 말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벌금 4억 원을 확정받았다. ▷‘솜방망이’ 형사 처벌과 별개로 증권 범죄자의 주식 거래를 차단하는 장치가 있었다면 강 씨의 재등장을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이미 선진국들은 법적 판단이 나오기 전에 금융당국의 제재만으로 불공정거래 혐의자의 금융 거래를 막고 막대한 과징금을 부과하고 있다. 미국에선 실리콘밸리 최대 사기극으로 꼽히는 바이오기업 ‘테라노스’ 창업자에 대한 형사 재판이 작년 1월 끝났지만, 앞서 2018년 금융당국이 50만 달러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10년간 상장사 취업 제한 조치까지 내렸다. ▷한국 금융당국도 지난해 불공정거래를 한 사람의 금융투자 거래를 최대 10년간 제한하는 방안을 내놨지만, 관련 법안은 국회 정무위원회 소위에서 잠자고 있다. 불공정거래로 얻은 부당이득에 대해 최대 2배의 과징금을 물리는 법안도 2년 넘게 계류돼 있다가 4월에야 국회 정무위 전체회의 문턱을 넘었다. 증권 범죄는 개미들을 약탈하고 자본시장의 근간을 흔드는 중대 범죄다. 한 번이라도 적발되면 패가망신할 정도로 일벌백계하는 법안들이 서둘러 도입돼야 한다. 불공정거래가 더 이상 남는 장사가 돼선 안 된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인천 청라국제도시에서 2016년 5월 공급된 공동주택 용지는 600 대 1 이 넘는 입찰 경쟁률로 화제를 모았다. 그런데 추첨을 통해 이 땅을 가져간 곳은 한 증권사가 만든 페이퍼컴퍼니였다. 당시 중견 건설사들이 당첨 확률을 높이기 위해 수십 곳의 위장 계열사를 동원해 공공택지 입찰에 중복 참여했는데, 이 증권사가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해당 증권사는 30개의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 전국 곳곳의 택지 입찰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이 같은 입찰 방식이 ‘벌떼 입찰’이라고 불리며 문제가 되자 얼마 후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일정 수준의 주택건설 실적과 시공능력을 갖춘 업체만 참여할 수 있도록 청약 자격을 제한했다. 이를 통해 금융사가 세운 위장 건설사는 퇴출될 수 있었지만 건설사들이 만든 위장 계열사들은 걸러내지 못했다. 도심 재개발·재건축에 비해 저렴하게 공급되는 공공택지는 당첨만 되면 수백억 원의 차익을 낼 수 있는 ‘슈퍼 로또’로 인식되다 보니, 벌떼 입찰이 건설업계의 관행으로 굳어졌다. ▷결국 정부는 지난해 9월 ‘벌떼 입찰 근절 방안’을 내놨다. 추첨에 참여할 수 있는 모기업과 계열사 수를 1필지에 1개로 제한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맞춰 국세청도 벌떼 입찰로 공공택지를 분양받은 건설사들에 대해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지난 정부 5년 동안 호반·대방·중흥·우미·제일 등 5개 건설사가 LH가 분양한 공공택지의 37%를 가져갔다는 문제 제기가 나오면서다. 이 중 호반건설은 LH 택지의 10분의 1을 싹쓸이했다. ▷작년만 해도 벌떼 입찰에 “검토가 필요하다”며 소극적 태도를 보였던 공정거래위원회가 그제 호반건설을 대상으로 과징금 608억 원을 부과한다고 발표했다. 호반건설이 유령회사에 가까운 계열사를 만들고 협력사까지 동원해 공공택지 23개를 낙찰 받은 뒤, 회장의 두 아들이 소유한 회사들에 넘겼다는 것이다. 이 덕에 2세 회사들은 6조 원에 가까운 분양 매출을 올린 것으로 공정위는 판단했다. 부당 지원과 일감 몰아주기로 2세 회사들은 단기간 급성장했고, 이 과정에서 경영권 승계도 쉽게 이뤄졌다. ▷문제는 편법으로 공공택지를 독과점한 건설사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벌떼 입찰이 암암리에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부는 두 달 전에도 벌떼 입찰에 나선 건설사 19곳을 추가 적발했는데, 서류상으로만 사무실을 운영하는 곳이 수두룩했다. 시장이 공정하게 운영되지 않으면 권력과의 유착이나 탈세 같은 비리가 생겨나고, 소비자들이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시장 질서를 어지럽히고 개발 이익을 독식하는 벌떼 입찰을 서둘러 뿌리 뽑아야 하는 이유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인생에는 세 번의 고독기가 찾아온다는 미국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 교수팀의 연구 결과가 있다. 죽음이 그림자처럼 다가오는 80대, 체력과 수입이 함께 꺾이는 50대, 그리고 뜻밖의 시기가 20대다. 인생의 봄날 같은 20대에 취업과 진로, 결혼 같은 인생의 중대사를 결정하면서 극심한 스트레스와 외로움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불안한 청춘인데, 한국의 청년들은 팬데믹 시기를 거치면서 비관과 좌절, 분노를 일상으로 품고 지낸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숫자가 니트(NEET)족 청년 39만 명이다. 지난해 일하지 않고, 일할 의지도 없는 15∼29세 청년 백수들이 국내에 이만큼 된다는 얘기다. 이들은 구직 활동도 포기하고 그냥 쉬고 있어 실업자에도 잡히지 않는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니트족이 증가했다지만, 한국의 니트족 비율은 북유럽 국가의 7배가 넘는 것으로 분석될 만큼 심각한 수준이다. ▷더 큰 문제는 이 니트족 39만 명 가운데 직장 경험이 있는 사람이 29만2000명이나 된다는 사실이다. 바늘구멍 같은 취업 관문을 뚫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퇴사한 뒤 다시 취직할 생각도 않는 청년들이 이렇게나 많은 것이다. 일을 그만둔 뒤 1년 넘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있는 청년도 6만 명에 육박한다. 짧은 직장생활과 오랜 취업 준비 과정에서 신체적으로, 감정적으로 지쳐 무기력해진 ‘번아웃 청년’이라고 지칭할 만하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만난 ‘번아웃 청년’들은 “취업 준비만 3년 했지만 입사한 중소기업은 힘들고 나와 맞지 않았다” “온갖 허드렛일을 해야 하는 신입 생활에 지쳤다”고 호소했다. 무기력한 청년들이 쌓이는 것은 그들 눈높이에 맞는 일자리가 빈약한 탓이 크다. 대학 진학률은 세계 최고지만, 이에 걸맞은 질 좋고 지속 가능한 일자리는 갈수록 줄고 있다. 얼마 전 현대차가 10년 만에 실시한 생산직 공채에 수만 명이 몰려 채용 사이트가 마비된 건 양질의 일자리를 원하는 청년들의 기대가 얼마나 절실한지 보여준다. ▷이런 청년들에게 ‘의지만 있다면 못 할 일이 없다’라거나 ‘계속해서 걸어가라’ 같은 자기계발서식 조언을 하는 건 번아웃의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것과 다름없다. 일본에서는 장기 불황이 시작된 1990년대 초 취업 적기를 놓친 청년들이 집에 틀어박히면서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됐다. 이들이 현재 60만 명이 넘는 중장년 히키코모리가 돼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한국의 번아웃 청년들이 ‘잃어버린 세대’가 되지 않도록 전방위 노력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다. 청년들이 자포자기 심정으로 구직 대열에서 이탈하는 나라는 미래가 없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2018년 10월 출시된 ‘타다 베이직’은 스마트폰 앱에 출발지와 도착지, 시간을 입력하면 11인승 카니발을 이용할 수 있는 차량 호출 서비스였다. 얼핏 보면 택시 호출 앱과 비슷하지만 회사가 배차를 정해 기사가 딸린 렌터카를 보내주는 방식이 달랐다. 당시 관련법에서 11인승 이상은 기사와 차량을 함께 빌리는 걸 허용했는데, 이 틈새를 파고든 신개념 사업 모델이었다. 일반 택시보다 비쌌지만 승차 거부가 없는 데다 친절한 서비스, 넓고 쾌적한 공간이 입소문 나 1년여 만에 이용자 170만 명을 끌어모았다. ▷타다의 흥행은 즉각 택시업계의 반발을 불렀다. ‘타다 퇴출’을 외치며 택시 기사가 분신했다. 택시조합 등이 2019년 “타다가 불법 콜택시 영업을 한다”며 회사와 경영진을 검찰에 고발했고, 검찰은 택시업계 손을 들어 그해 10월 경영진을 재판에 넘겼다. 불법과 합법의 경계에 설 수밖에 없는 신산업을 기존 법률로 무리하게 기소한다는 비판이 거셌지만, 앞서 80여 개국에서 성업 중인 차량공유 서비스 ‘우버’를 불법 영업으로 기소했던 검찰이었다. ▷1·2심에 이어 대법원은 그제 타다의 불법 혐의에 대해 무죄를 확정했다. 타다는 콜택시가 아니라 당시 법령에서 예외를 인정한 렌터카 서비스였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하지만 4년 만에 ‘불법 꼬리표’를 뗐어도 예전의 혁신 서비스를 부활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1심 무죄 판결이 나온 다음 달인 2020년 3월, 여야 정치권이 일명 ‘타다 금지법’을 통과시키며 대못을 박아버렸기 때문이다. 총선을 앞두고 택시 기사 25만 표, 가족까지 포함해 100만 표를 의식한 결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갈등을 조정하고 중재해야 할 정부는 보이지 않았다. 정부와 국회는 오히려 개정법이 ‘타다 진흥법’이라는 주장을 폈지만, 현재 택시를 제외한 모빌리티 서비스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그 사이 국민에게 돌아온 건 지독한 택시 대란과 요금 인상이었고, 남은 건 택시 호출 시장을 장악한 대기업 카카오의 독점이다. 혁신의 싹을 자르면서 보호하려고 했던 택시 산업은 요즘 택시 기사조차 이탈하는 황무지가 됐다. ▷더 큰 문제는 제2, 제3의 타다가 속출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법률 서비스, 세금 환급, 원격 의료, 부동산 중개 등 각종 분야에서 새로운 플랫폼을 선보인 스타트업들이 기존 사업자의 반발에 가로막혀 고전하고 있어서다. 대법원 판결 직후 타다 모델을 만든 이재웅 전 대표가 “혁신을 만들어내는 기업가를 저주하고, 기소하고, 법을 바꿔 혁신을 막고, 기득권의 이익을 지켜내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고 했는데 새겨들어야 할 지적이다. 제2의 타다가 현실화된다면 우리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선도할 자격이 없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세계적 예술 작품이 국내에서는 ‘검은돈’의 창구로 애용된 일이 적지 않다. 각종 비리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화제에 오르내리는 유명 작품이 한둘 아니다. 10년 전 검찰이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를 압수수색했을 때는 박물관 하나 차릴 정도의 ‘대어’들이 쏟아졌다. 미술품은 누가 얼마에 샀는지 알기 어렵고, 과세 대상에서도 비켜나 있어 범죄 수익 은닉이나 비자금 조성, 편법 증여 등에 안성맞춤으로 여겨져 온 탓이다. 최근엔 고가의 명품이나 시계가 이런 목록에 첨가되는 추세다. ▷SG증권발(發) 주가 폭락 사태의 몸통인 라덕연 H투자컨설팅업체 대표도 이 같은 행태를 흉내 냈다. 보도에 따르면 라덕연 일당은 서울 강남의 한 갤러리에서 투자자들에게 그림을 구매하도록 하고, 실제 그림은 보내지 않는 방식으로 투자 수수료를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삼천리·다우데이타 등 8개 상장기업의 주가를 불법 시세 조종으로 띄워 7305억 원의 부당 이득을 벌어들였고, 이 중 수수료 명목으로 1944억 원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자금 세탁소’로 활용된 이 갤러리를 압수수색해 라 대표 일당이 소유한 유명 그림 수십 점을 확보했다고 한다. ‘물방울 화가’로 유명한 김창열 화백의 작품부터 미국 현대미술의 거장 앨릭스 카츠의 그림, 영국 출신의 팝아트 작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이 포함됐다. 호크니는 2018년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예술가의 초상’이 생존 작가 작품으로는 최고가(9031만 달러)에 낙찰되며 ‘가장 비싼 화가’ 타이틀을 얻었는데, 검찰이 이번에 압수한 호크니 작품들은 포장도 뜯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유명 미술품 외에 검찰이 압수한 라 대표의 명품 시계도 여럿이다. 바쉐론 콘스탄틴, 파텍 필립 등 시가 2억∼7억 원을 호가하는 스위스 하이엔드 브랜드 시계들이다. 라 대표 회사 직원이 보관하던 에르메스 체스판, 루이비통 테이블, 롤스로이스 차량 등도 함께 압수된 것으로 전해졌다. 라 대표 일당이 수수료 등 범죄 수익으로 고가의 미술품과 사치품을 대거 사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라덕연 일당은 단기간에 주가를 띄워 한탕 하고 튀는 식의 작전이 얼마나 더 교묘해지고 과감해졌는지 보여준다. 일반적 주가 조작 수법에서 진화해 다단계 방식으로 투자 규모를 키웠고 공매도가 안 되는 종목, 차액결제거래(CFD)를 통한 거래 등 법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공개된 용의자나 다름없었던 라 대표는 방송에 나와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뻔뻔함을 보이다가 최근에야 구속됐다. 세계 자본시장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일들이다. 민낯을 드러낸 한국 자본시장을 재정화하는 작업이 시급한 이유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