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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일제의 식민지배가 불법 무효’라는 대한민국의 일관된 기조를 분명하게 밝혀 모든 논란을 없애길 바란다.” 최근 김형석 신임 독립기념관장 임명으로 촉발된 정부와 광복회의 갈등이 확산하는 가운데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사진)는 16일 동아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이 교수는 대선 당시 윤석열 대통령의 출마를 도운 최측근이자 죽마고우이면서, 이종찬 광복회장의 아들이기도 하다. 이 교수는 광복회가 올해 8·15 광복절 경축식을 정부와 별도로 개최한 데 대해 “정부가 독립기념관 이사로 일제의 수탈을 부정하는 낙성대경제연구소 소장을 임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장에 ‘반일 종족주의’ 공저자를 임명한 데 이어 독립기념관장에까지 논란이 많은 인물을 임명한 걸 (광복회가) ‘도발’로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느냐”며 “대통령 주위에 역사에 대한 이상한 견해를 부추기는 이들이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대통령이) 중도 지향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며 “아직 임기가 절반 이상 남아 있으니, 국민의 여망을 담았던 윤석열의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다”고 덧붙였다. 이철우 교수 “대통령 주위에 이상한 역사의식 부추기는 이들 있지 않나”‘역사전쟁’ 복판에 선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독립기념관장 임명은 방아쇠일 뿐… 독립운동 의미 지우려는 이들 많아일제 주권 침해에도 나라 소멸 안 해… 대한제국-1919년-1948년 민국 계속미래 위해 경색 한일관계 개선 당연… 국민 동의 얻으려면 역사관 확고히친일 논란-정당성 시비 피해야《또 ‘역사전쟁’이다. 이번엔 정부가 김형석 대한민국역사와미래 이사장(고신대 석좌교수)을 독립기념관장으로 임명한 것에 광복회가 반발하면서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부친과 친구 사이’에 갈등이 일며 의도치 않게 역사전쟁의 복판에 서게 된 게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63)다. 이 교수는 윤석열 대통령과 서울 대광초, 서울대 법대 동기인 ‘절친’이다. 동시에 이종찬 광복회장의 아들, 우당 이회영 선생(1867∼1932)의 증손자이기도 하다. 그를 16일 서울 중구 콘퍼런스하우스 달개비에서 만났다. 이 교수는 인터뷰 내내 부친을 ‘광복회장’이라고 호칭했고, “대통령은 하나의 기관인데 무슨 사사로운 친구가 있겠냐”며 사적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발언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법사회학 연구자로 일제강점기 국적 문제를 포함한 국적법 전문가이기도 한 이 교수는 윤석열 정부의 대일 정책에 대해 “역사전쟁을 일으키면서 한일 관계를 끌고 나가니 자꾸 불필요한 친일 논란을 일으키고 정당성 시비에 걸리게 된다”고 지적했다.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에서 출마 선언을 한 사람으로서 대통령이 ‘역사전쟁’을 직시하길 바란다”고도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광복절 경축식이 갈라져 열렸다. “착잡하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싶었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한 원인은…. “작년 광복절에도 건국절 논란이 있었는데, 가까스로 경축식이 거행됐다. 이후 독립기념관 이사에 낙성대경제연구소장(박이택)이 임명됐을 땐 이사진과 독립운동 유관 단체들이 강력히 항의했다. 하지만 (정부는) 오불관언이었다. 김 교수(이 교수는 그를 ‘관장’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교수’로 불렀다)의 독립기념관장 임명 건은 김낙년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임명 등을 포함해 묵은 문제가 터지는 걸 촉발한 방아쇠일 뿐이다.” ―광복회는 김형석 관장이 후보자 면접에서 ‘일제시대 국적은 일본이다. 국권을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한 것 아니냐’고 답한 것을 문제 삼았다. “해외에서 돌아가신 독립운동가들에게 대한민국 국적을 찾아주자는 운동이 벌어져 2005년 국적법 개정안이 제출됐다. 국회 법사위에서 ‘그분들은 국적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국적을 찾아드릴 필요가 없다’는 검토 보고가 나왔다. 그분들은 조선 국적 또는 1919년 선포된 대한민국 국적이라는 게 대한민국과 국회의 공식 입장이다. 다른 직책이라면 몰라도 독립기념관장 후보자가 이를 몰랐다는 건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일제가 강제로 뺏긴 했지만, 나라를 뺏긴 건 엄연한 사실 아닌가. “강도가 물건을 빼앗으면 주인이 소유권을 잃는가? 물건의 점유만을 잃는 것이지 소유권을 잃는 건 아니다. 국가 역시 강점으로 ‘소멸됐다’는 것과 ‘주권이 침해됐다’는 건 다른 문제다.” ―‘영토, 국민, 주권’이 있어야 국가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대한민국이 북한에 주권을 행사하지 못한 채 수십 년이 지났다고 해서 헌법의 영토 조항을 망상이라고 할 수 있는가? 국제적으로 불법 강점 전후 국가의 동일성과 계속성을 주장하는 예가 많이 있다. 소련의 해체로 독립한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소련 편입 전의 자국이 소멸하지 않았다며 1940년 강점 전의 법제를 되살리기도 했다.” ―1941년 11월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제정한 것, 김구 선생이 1945년 9월 성명에서 “건국의 시기로 들어가려 하는 과도적 단계”라고 말한 것 등도 당시엔 아직 건국이 되지 않았다는 인식이 아닌가. “한국이 소멸했으니 나라를 새로 만든다는 뜻이 아니라, 주권이 침해된 나라의 주권을 되찾아 나라의 실질을 갖춘다는 뜻으로 사용한 것이다. ‘건국’이라는 말을 레토릭(수사)으로 쓰는 예는 많이 있다. 김대중 정부 당시 ‘제2의 건국’도 그렇다.” ―김 관장은 건국절 제정에 반대한다고 했다. “그런 말로 논란을 피해 가면서, 실제로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의미를 지우려고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정부도 건국절을 추진하거나 검토한 적이 없다는데….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역사적으로 헌법으로 확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공식 호칭 대신 ‘상해 임시정부’라고 불렀다. ‘대한민국’이라는 말을 왜 안 썼는지 의아하다. 이런 논란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대통령이 직접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역사적 자기 인식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혀 달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대한제국-1919년 대한민국-1948년 대한민국의 동일성과 계속성에 대한 확신이다. 이를 대한민국의 주권적 자기 정의(sovereign self-definition)라고 말하고 싶다. 이걸 부정하고 대한민국을 1948년에 처음으로 태어난 나라로 보면 한반도 전체에 대한 대한민국의 관할권이나 독도 영유권 주장의 근거도 약화된다. 일제 통치의 불법 무효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수십 년 동안 과거사를 둘러싸고 오랜 한일회담을 통해 우리가 요구해 온 것 가운데 많은 부분을 잃게 된다. 누구나 관점을 달리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정부와 공직자는 이런 관점을 따라야 한다.” ―‘1919년 대(對) 1948년’의 건국 시점 논쟁을 어떻게 보나. “의미가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대한민국은 이미 존재하는 나라였기에 건국을 논할 이유가 없다. 광복회는 없던 국가가 1919년에 건국됐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대한제국은 이미 근대 국제질서에 편입되어 다자조약도 체결한 국가다. 그 조약의 효력이 계속됨을 1986년 대한민국 외교부가 확인했다. 그 국가가 1919년에 이름을 바꾸고 민주공화국을 선포한 것이지, 새로 건국된 것이 아니다.” ―과거 정부의 입장은 어땠나. “이승만 대통령이야말로 이런 대한민국의 동일성과 계속성을 누구보다 강하게 주장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에 서명국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했고, 그렇게 될 뻔했는데, 일본과 영국이 반대해 안 됐다. 반대 논리가 바로 ‘한국은 일본의 일부에 불과했다’는 것이었다. 이후에도 역대 정부가 대한민국의 계속성을 분명히 했다.” ―독립기념관장은 꼭 독립운동가 후손이 맡아야 하나. “그렇지 않다. 폭넓게 맡아야 한다. 관장 심사 기준에 독립운동가 후손을 우대한다고 돼 있다고 한다. 비록 관행이었다고 해도 세대가 많이 내려온 이상 이젠 바꿀 필요가 있다. 관장에 최고의 실력을 갖춘 사람이 뽑힐 수 있도록 국민이 보는 앞에서 재공모를 했으면 좋겠다.” ―광복회장이 ‘용산에 일제 밀정 같은 존재의 그림자’를 언급했는데…. “격앙된 가운데 나온 말인데, ‘밀정’은 좀 과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심경이었는지는 이해한다. 광복회장이야말로 반민특위 때와 달리 ‘친일’로 낙인찍히는 사람의 범위가 부당하게 늘어났다는 의견을 계속 피력해 온 분이다.” ―광복회장과 대통령의 관계는…. “광복회장께서 작년 한일 정상회담 때 대통령을 정말 많이 도왔다. 전직 주일 대사들을 만나 ‘각자 뛸 수 있는 공간에서 같이 노력하자’고 했다. 강제징용 해결 방식에 대한 비판 여론엔 ‘피해자들을… 경청하고 반영되도록 노력하되 내내 업고 외교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인터뷰하며 정부에 힘을 실었다. 역사관을 확고히 함으로써, 국민적 동의를 얻어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로 나아가자는 생각이었는데…. 참 아쉽다. 그렇게 도울 수 있는데, 그런 생각이 배척당하고, 공격당하고, 음해당하는 것이 그분에겐 굉장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인 것 같다.” ―야당은 ‘친일 정권’이라고 비판한다. “난 ‘친일’이라는 용어에 매우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노무현 정부 당시) 친일진상규명특별법, 재산환수법에 반대했고, 류석춘 교수 위안부 관련 발언 기소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칼럼을 쓴 사람이다. 정부가 ‘친일 몰이’를 자초하고 있다.”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 과거사 언급이 없었다. “전전(戰前) 일본이 가한 고통을 일깨우는 걸 회피하는 게 일본의 적극적 조치를 이끌어 내는 데 도움이 되겠나.” ―윤석열 정부의 대일 정책을 평가한다면…. “경색된 한일 관계를 풀어내는 건 불가피하고, 미래 세대를 위해서도 개선이 당연한 일이다. 정부가 그 방향으로 발걸음을 디딘 건 높게 평가한다. 그러나 일본과의 우호 협력을 증진하기 위해서도 국가의 역사적 자기 인식을 확고히 해야 한다. 그래야 용서를 하고 아량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의 비위를 맞추며 무슨 조치를 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구걸, 굴종에 불과하다.” ―취임 전 대통령의 역사 인식은 어땠나. “대통령이 서울중앙지검장이었던 2018년 강제징용 대법원 재상고심 판결이 나오기 직전이었다. 함께 친구 모친상 조문을 갔다가 내가 ‘청구권 협정 해석상 청구하기는 어려운 것 아니냐’고 하자 대통령이 정색하며 배상 판결의 정당성을 강하게 주장했다. 작년 강제징용 해법을 제시할 때 판결에 문제가 있는 듯 말하기보단 ‘판결은 존중하지만, 대통령으로서 정치적으로 풀겠다’고 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있다.” ―대통령의 역사 인식이 변한 것인가. “대통령이 휘둘린다고 하긴 어렵지만… 대통령 주위에서 이상한 역사의식을 부추기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또 한국 정치가 양극화가 너무 심하고, 극단적인 네거티브로 가다 보니, 공격당하다 (자신도) 점점 극단으로 가서 방어기제가 작용하는 것 아닌가 싶다. 대통령에게 ‘중도 민심을 잃지 말라’는 취지의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을 받지 못했다. 주위 사람들에게도 ‘중도 민심을 잃으면 곤란하지 않으냐’고 했는데, ‘콘크리트 지지층을 확보해야 중도로 확장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답을 들었다.” ―대선 전 윤 대통령이 ‘정치에 투신하면 여러 강점을 발휘할 것’이라고 인터뷰하는 등 많이 옹호했는데, 지금은…. “어리둥절한 상황이다. (대통령에 대한) 지지자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었는데, 좁아져 매우 아쉽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최근 평안북도 의주에 대규모 홍수가 났는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이례적으로 주민 앞에서 위로 연설을 하면서 한국식 표현을 여러 차례 썼다고 한다. 자유아시아방송(RFA)은 평북도의 소식통을 인용해 “김정은이 연설 서두에서 흔히 사용하던 ‘동지’ 혹은 ‘인민’이라는 말 대신 ‘주민’이라고 했고, 노인이나 늙은이를 한국식으로 ‘어르신’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김정은이 쓴 ‘병약자’, ‘험지’, ‘음료수’, ‘폄훼한다’ 등의 표현도 북한에선 거의 쓰이지 않는다고 했다. 연설을 들은 주민들이 많이 놀랐다고 한다. ▷지방 출신이 서울서 오래 살아도 여전히 사투리를 쓰는 것처럼 말할 때 즐겨 쓰는 낱말은 잘 바뀌지 않는다. 집무실 TV로 한국 예능과 드라마를 챙겨 보는 것으로 알려진 김정은이다. 얼마나 즐겨 봤으면 용어까지 바뀌었을까 싶다. 한국 드라마를 시청한 10, 20대 청년을 강력하게 처벌하는 북한이지만 탈북민들은 “북한에선 고위층일수록 노골적으로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본다”고 말한다. ▷북한은 지난해 초 남한 말투 사용을 금지하는 ‘평양문화어보호법’을 제정했는데, 법 조문이라기엔 표현이 저급하다. “괴뢰(남한)말은…조선어의 근본을 완전히 상실한 잡탕말로서 세상에 없는 너절하고 역스러운 쓰레기말”이라고 했다. 금지 항목도 깨알 같은데, “자녀들의 이름을 괴뢰식으로 너절하게” 지어선 안 된다. ‘오빠’라는 호칭은 소년단 시절까지는 쓸 수 있지만 청년동맹원이 된 뒤엔 써선 안 된다. 장마당 세대를 중심으로 한국 문화가 유입되는 걸 김정은이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올 6월엔 비슷한 취지로 북한 국가국어사정위원회가 ‘다듬은말참고자료’를 발행하기도 했지만 혼란이 적지 않은 것 같다. 평북도의 소식통은 RFA에 “(김정은이) 텔레비죤도 ‘TV’라는 한국식 표현을 썼다”고 했다. 그러나 이 말은 당국이 ‘다듬은말’로 사용을 권장하는 말이다. ‘조선중앙텔레비죤’이라는 명칭에서 보이듯 북한은 원래 ‘텔레비죤’을 많이 썼는데, 요즘엔 공식 매체도 ‘TV’라고 한다. ‘텔레비죤’이 ‘외국말 찌꺼기’라고 판단한 것 같은데, 실은 한국식으로 ‘TV’ 사용이 늘다가 아예 자리를 잡은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문화는 물처럼 스며드는 것이어서 막는다고 막아지는 게 아니다. 평북도의 소식통은 “주민들에게는 평양말을 사용하라고 하면서 자기는 한국말을 대놓고 쓰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말투까지 주민을 통제하는 김정은이 정작 자기 입은 통제를 못 하는 모양새다. RFA에 따르면 “텔레비죤을 ‘TV’라고 하는 사람은 수상하니 신고하라”는 내용이 과거 북한의 반(反)간첩 포스터에도 있었다고 한다. 김정은을 신고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겠지만 뭔가 수상하다고 느낀 사람은 많았을 것이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인 일본 사도광산이 지난달 27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위원국의 만장일치로 등재됐는데, 2주일이 지나도록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우리 정부가 사도광산이 세계유산에 등재되는 데 동의한 경위를 놓고 명확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있는 탓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앞서 기자들에게 “일본이 전체 역사를 반영하기로 약속했고, 실질적 조치를 이미 취했다”고 등재 동의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막상 등재 뒤 우리 언론이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의 관련 전시물을 확인해 보니 ‘강제동원’ ‘강제노역’ 표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우리 외교부는 동원의 강제성 표현은 이번엔 협상 대상이 아니었다고 했다. 일본 측이 되풀이하진 않았지만 2015년 하시마 탄광(일명 군함도) 등재 당시 ‘한국인 등이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에서 강제로 노동을 했다’고 밝힌 것을 그대로 이어가겠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언론이 관련 전시에 ‘강제’ 표현을 안 쓰는 데 한국이 사전 합의했다고 보도하자 외교부는 즉시 “전혀 사실무근”이라며 부정했다. ▷그러나 사실무근이라는 해명이 사실무근이었다. ‘굴욕 외교’라는 지적에 외교부는 “전시 내용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강제’라는 단어가 들어간 일본의 과거 사료 및 전시 문안을 요구했으나 최종적으로 일본은 수용하지 않았다”고 뒤늦게 밝혔다. 일본이 강제동원 명시를 거부했는데도 세계유산 등재에 동의해준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외교부는 처음 설명이 거짓말은 아니었다고 할지 모르겠다. ‘강제 표현이 협상 대상이 아니었다’는 건 일본 대표가 세계유산위에서 다시금 강제성을 인정할 것인지에 대한 얘기였고, 관련 전시 문안 협상에 대한 답변은 아니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언론도 국민도 정부에 강제성 명시 요구 여부를 물었지, 그런 식으로 쪼개서 묻지 않았다. 이렇게 교묘하게 사실을 왜곡하는 게 바로 거짓말이다. 정부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국민을 우롱해가며 굴욕 외교를 감추려 한 것이다. ▷등재 과정을 왜곡한 정황은 또 있다. 외교부는 세계유산위 개최를 앞두고 배포한 보도자료에선 “모든 노동자”를 위한 전시물을 설치했다는 일본 대표의 발언에서 단어를 “한국인 노동자”로 바꿔 전달했다. 일본이 위원국들 앞에서 모호한 표현을 쓴 걸 우리 정부가 국민들에게 감춘 셈이 됐다. ▷일본이 하시마 탄광 등재 당시의 ‘전체 역사를 소개하겠다’는 약속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데, 처음부터 등재 동의를 작심하지 않고서야 이 같은 저자세 외교를 할 리가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협상 과정에서 ‘등재를 표결로 가져갈 수도 있다’는 각오는 찾아볼 수 없다. 한일 관계 개선과 한미일 안보협력 확대를 외교 성과로 꼽고 있는 대통령실의 직간접적 지침이 없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일본 정부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인 니가타현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전시관을 마련했는데, 제목에서부터 왜곡된 역사 인식이 드러난다. 전시 제목은 ‘조선반도(한반도) 출신자를 포함한 광산 노동자의 생활’. 일본 정부는 원래 강제동원 피해자를 ‘징용공’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피해자의 소송이 잇따르자 동원의 강제성을 희석하기 위해 2018년부터 용어를 ‘구(舊)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로 바꿨다. 그런 용어를 버젓이 쓴 것이다. ▷전시 세부 설명엔 ‘징용’이 나오고, ‘관 알선’ ‘모집’에 총독부가 관여했다는 걸 담긴 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강제동원’ ‘강제노동’ 표현은 빠졌다. 징용과 강제동원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맥락이 확연히 다른 말이다. 일본이 ‘당시 한반도가 일본 영토였고, 전쟁 중 자국민 징용은 강제노동이 아니다’라며 징용도 합법적이라고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선 일본 정부 대표단이 “한국인 등이 자기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강제 노역했다”고 인정한 2015년 하시마(일명 군함도) 탄광 등의 등재 때보다도 오히려 후퇴한 셈이 됐다. ▷일본 언론 보도에 따르면 ‘강제노동’ 표현을 안 넣는 걸 우리 정부가 합의해줬다고 한다. ‘해당 문구 대신 상설전시를 하고, 한반도 출신자가 1500명 있었고, 노동환경이 가혹했다는 걸 소개하겠다’는 일본 측 제안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한일이 내년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앞두고 새로운 불씨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작용했다”고 한다. 반면 우리 외교부는 사전합의가 “사실무근”이라며 부인하고 있다. “강제성 표현 문제는 2015년에 정리됐고, 이번엔 협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 언론이 오보를 낸 것이 아니라면 한일 양국 정부 어느 한쪽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외교를 과학처럼 하려고 하면 경직될 수밖에 없다”(헨리 키신저)지만 이번처럼 한쪽이 명백히 국민을 속이는 사안은 따지고 들지 않을 수 없다. 외교부 당국자는 6월 “우리 입장이 충분히 반영됐다고 판단하면 정부는 컨센서스(전원 동의) 형성을 막지는 않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우리 입장’엔 강제동원 명기가 있었나 없었나. ▷강제동원 명기를 요구하지 않았다면 그것대로 문제다. 하시마 탄광과 사도광산 등재는 별개 사안이다. 더구나 일본은 하시마 탄광 역시 ‘전체 역사를 알리겠다’는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 나아가 일본 정부 관계자가 ‘정부는 강제노동이 아니라는 입장’이라고 계속 언론에 흘리고 있다. 일제 징용은 국제노동기구가 1999년 이미 강제노동이라고 인정한 사안이다. 관계 개선도, 미래 지향도 무엇보다 올바른 역사인식이 바탕이 돼야 한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반려견 유치원비보다 대학 등록금이 싸다”는 말이 있었는데, 거짓이 아니었다.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 조사 결과 지난해 4년제 사립대의 연간 등록금은 평균 약 732만 원이고, 월평균으로 환산하면 61만 원이었다. 한데 반려견을 위탁업체에 맡기는 비용이 월 60만∼90만 원이어서 대학 등록금과 비슷하거나 더 비쌌다. 등록금은 영어유치원(월 174만 원) 사립초(76만 원) 사립국제중(106만 원) 자사고(75만 원) 고교생 사교육(74만 원) 등에 드는 비용보다 쌌다. ▷다른 물가는 다 오르는 동안 등록금만 제자리에 머무르거나 내렸기 때문이다. 사립대 평균 등록금은 2008년에도 738만 원이었다. 지난해까지 15년 동안 오히려 6만 원이 싸진 것이다. 국립대도 약 420만 원 선에서 거의 변화가 없었다. 해당 기간 소비자물가가 36.7% 올랐음을 고려하면 실질적으론 등록금이 2008년 대비 4분의 3 아래로 떨어진 셈이다. 정부가 등록금을 인상한 대학엔 국가장학금Ⅱ 지원을 하지 않거나 재정지원 사업에서 배제하는 방법으로 등록금 동결을 사실상 강요해 온 탓이다. ▷그만큼 학부모 부담은 줄었지만 문제는 등록금이 싸지면서 대학 교육의 질도 ‘비지떡’이 돼 간다는 데 있다. 국회 입법조사처에 따르면 연구비 실험실습비 도서구입비 등 대학의 교육과 연구 예산이 모두 2011년 대비 18∼26%씩 감소했다. 대학이 구독하던 전자저널을 끊은 탓에 교수가 다른 대학의 아이디를 빌려 쓰는 건 심한 축에 들지도 않는다. 실험에 필요한 장비를 못 사서 대학원생이 장비가 있는 다른 대학까지 몇 시간을 오간다. 건물에서 비가 새도 고칠 돈이 없다. 교수 월급을 물가만큼도 올려주지 못하니 인재가 기업으로 빠져나가거나 중요한 연구를 제쳐두고 기업 과제에 목을 맨다. ▷저소득층 학생이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던 시절이라면 모르지만 이제 그런 사례는 많이 없어졌다. 국가장학금 제도가 확충되면서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 계층은 등록금 전액을 지원받을 수 있고, 그 밖에도 소득 구간별로 연 350만∼570만 원의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 정부도 등록금 인상 필요성을 안다. 2022년 6월엔 교육부 당국자가 “정부 내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했으나 여전히 눈치만 보는 중이다. ▷정부가 장학금을 미끼로 등록금 인상을 규제해 대학의 등록금 책정 권한을 침해하는 건 법적 근거도 없다. 등록금뿐이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고등교육에 대한 공교육비 투자가 초·중등교육보다 더 적은 건 한국과 그리스, 콜롬비아뿐이다. 고등교육 투자가 멎은 가운데 우리 대학의 경쟁력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인적 자원밖에 기댈 것이 없는 나라가 무엇이 중요한지 잊고 있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J D가 나에게 알랑방귀를 뀌고(kiss my ass) 있다. 그는 내 지지를 간절하게 원한다.” 2022년 9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J D 밴스 공화당 상원의원 후보(오하이오) 지지 유세에서 한 말이다. 사실 밴스는 이민 정책을 두고 트럼프를 “미국의 히틀러”에 빗대는 등 강하게 비판했던 인물이다. 그런 밴스가 자신에게 복종한다는 걸 군중 앞에서 과시한 것이다. 올 11월 치러질 대선에서 승기를 잡은 트럼프가 15일(현지 시간) 밴스 상원의원을 러닝메이트로 지명했다. ▷밴스는 쇠락한 러스트 벨트 출신으로 성공한 이야기를 담은 회고록 ‘힐빌리의 노래’를 2016년 출간하며 전국적 명성을 얻었다. 책엔 삶이 무너진 저학력 백인 노동자 계층의 분노와 좌절이 담겼다. 그가 예일대 로스쿨에 가겠다고 하니 아버지는 지원서를 쓸 때 ‘흑인이나 진보주의자인 척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가 속한 집단의 자포자기 수준이 그렇게나 심했다는 얘기다. 책은 트럼프 핵심 지지층의 정서를 대변했지만 밴스는 보수주의자이면서도 트럼프에 비판적이었다. 2016년 대선 당시엔 트럼프를 “유해하다(noxious)”고까지 했고, 보수 성향의 무소속 에번 맥멀린 후보를 지지했다. ▷그런 그의 입장은 정치 입문을 고려하기 시작한 2018년경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서 트럼프를 “오하이오주 등 지역민의 좌절감을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지도자”라고 평가했다. 이후 자신의 트럼프 비판 트윗을 삭제했고, 트럼프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운동에 뛰어들었다. 트럼프가 패배한 2020년 대선은 부정선거라는 주장에도 동조하는 등 골수 트럼프 지지자로 거듭났다. ▷밴스의 변신이 순전히 정치적 야망 때문인지는 그 자신만 알 것이다. 다만 요즘 미국 정치 현실에서 공화당 소속으로 트럼프에 맞서고서 정치적 성장을 기대하긴 어려운 게 사실이다. 2022년 오하이오주 공화당 상원의원 후보 경선 역시 트럼프가 누구를 간택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밴스가 원래 가진 고립주의와 경제적 포퓰리즘 지향이 트럼피즘에서 길을 찾았다는 평가도 나온다. ▷1984년 8월 2일생으로 만으로는 아직 39세인 밴스는 1952년 리처드 닉슨(당시 39세) 이후 최연소 미국 부통령 후보다. 트럼프의 적지 않은 나이와 도덕성의 결함을 커버할 수 있는 후보로 꼽힌다. 당선될 경우 2028년 선거엔 출마하지 못하는 ‘트럼프 이후’를 노려볼 수도 있다. 밴스가 처음 유명해졌을 때 미국의 진보 성향 주간지 ‘뉴 리퍼블릭’은 그를 두고 ‘블루 아메리카(백인 노동자 계층)를 위한 거짓 예언자’라고 했다. 그 말이 맞을지 진짜 선지자가 될지, 트럼프뿐 아니라 밴스에게도 세계의 시선이 쏠렸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이 8일 오후 방미 일정을 위해 하와이로 출국하기 전 정부기관에 내린 장마 대비 ‘16자 지시사항’이 논란이다. 지시 내용이 “이번 장마에도 피해 대비를 철저히 할 것”이라는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하천 범람과 제방 붕괴 위험을 점검하라든가, 산사태 취약지역은 미리 대피하도록 유도하라든가 하는 구체적 내용은 전혀 없었다. 이 지시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각 정부 부처에 전파했고 산하 기관과 지방자치단체, 시도교육청, 일선 학교들에까지 통보됐다. ▷전달받은 공무원과 교사 등은 “이렇게 짧은 대통령 지시사항은 처음 본다” “(세부) 내용이 전무하다 보니 너무 건성건성으로 보인다”는 반응이다. 메시지는 내용만큼이나 형식이 중요하고, 분량도 일종의 형식이다. 공무원들이 호우 대비의 각론을 숙지하고 있다고 해도 그를 대통령의 메시지에 담느냐 아니냐는 무게감이 천지 차이다. ▷최근 한반도는 짧은 시간 특정 지역에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지는 ‘극한 호우’가 일상화됐다. 수십 년에서 100년에 한 번 내릴 만한 큰비가 몇 년 만에 찾아오고 있다. 2022년 중부지방 집중호우로 반지하 주택 침수 참사가 났고, 지난해엔 오송 참사가 발생했다. 과거 강수량 기준으로 만든 대책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 제방의 계획홍수위 이상으로 물이 차오르는 일이 잦아지고, 산사태도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번 장마에도”로 시작해 마치 연례행사 같은 느낌을 주는 대통령의 ‘16자 지시’에선 그런 긴장감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지시가 나오고 하루가 지난 9일 밤부터 10일 오전까지 충청과 호남엔 ‘물 폭탄’이 쏟아졌다. 남북 폭은 좁고 동서로 긴 강수 구역이 형성되면서 일부 지역엔 200년 만에 한 번 올 만한 폭우가 내렸다. 전북 군산 어청도엔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많은 시간당 146mm의 비가 내렸고, 충남에도 시간당 100mm가 넘게 왔다. 인명 피해도 적지 않다. 충남 서천에서 산사태로 집이 무너져 70대 남성이 사망했다. 충북 영동에선 저수지 둑이 무너져 주민 1명이 실종됐다. 곳곳에서 주민이 고립되고 집이 떠내려가고 농경지가 침수됐다. ▷대통령은 8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최근 기후변화의 영향 등으로 예측을 넘어서는 기상이변이 자주 발생한다”며 피해 대비를 당부했다는데, 왜 실제 지시는 달랑 한 줄로만 내려갔을까. 그 많은 보좌진 가운데 ‘16자 지시’에 살을 붙일 사람이 없나. 이태원 참사 뒤 대통령비서실장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은 참모 조직이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컨트롤타워”라고 했는데, 참모 기능은 제대로 하는 건지 싶다. 대통령실을 지붕을 대강 얼기설기 엮어 비 새는 집처럼 꾸려가는 것은 아닌가.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최근 서울의 한 도심 농원에서 대표적 열대과일인 바나나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화제가 되고 있다. 국내도 근래 들어 바나나 온실 재배가 충남북과 경북 선까지 확대되긴 했다. 그러나 서울의 노지에서 열매가 열렸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이례적인 결실엔 지난해에 이은 기록적 더위도 한몫했을 것이다. 기후변화 영향으로 지난해 전국 연평균 기온은 기상관측망이 확충된 1973년 이래 가장 높은 13.7도에 이르렀다. 지난달 서울은 평균 최고기온이 30.1도로 근대적 기상관측 이래 가장 더웠다. ▷여름은 계속 길어지는 추세다. 기상학적 정의로 요즘은 일 년 중 넉 달이 여름(일 평균 기온이 20도 이상으로 오른 기간)이다. 1912∼1940년엔 여름이 평균 98일(6월 11일∼9월 16일)이었는데, 2011∼2020년엔 29일이 늘어 127일(5월 24일∼9월 28일)이 됐다. 가을은 짧아져 온 듯하면 간다. 그래서 여름은 길게 발음해 ‘여∼름’, 가을은 짧게 ‘갈’이라는 농담도 나온다. 기상청이 이런 실정을 반영해 통념상 3개월씩으로 나뉜 계절의 길이를 재설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제 중반으로 접어드는 장마는 예측이 어렵다. 게릴라성으로 열대성 스콜 비슷하게 집중호우가 내린다. 낮엔 갰다가 밤에 ‘야행성 폭우’가 내리기도 한다. 장마 기간은 길어지는 추세다. 원래 6월 하순부터 7월 하순까지가 전통적 장마철이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선 8월에 강우량 곡선이 재차 산 모양을 그리며 9월 하순까지 2차 강수가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더워진 대기가 수증기를 더 많이 머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젠 장마가 아니라 ‘우기(雨期)’로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힘을 얻고 있다. ▷남해안까지로 한정됐던 아열대 기후가 점차 북쪽으로 확산하는 모양새다. 지난달엔 아열대 곤충인 러브버그(붉은등우단털파리)가 극성을 부렸고, 뇌염모기의 출현도 빨라지고 있다. 한라봉이 아닌 ‘경주봉’이 나온 건 벌써 옛말이 됐다. 망고와 파파야 등도 경북 등지에서 재배된다. 바다도 뜨거워져 제주도 앞바다엔 열대의 맹독성 바다뱀이 출현했다. 24절기 중 ‘작은 더위’라는 뜻의 소서(小暑)는 7월 6, 7일이지만 이젠 씨 뿌릴 때라는 망종(芒種·6월 5, 6일)이나 하지(6월 21, 22일) 즈음이 어울리는 것 같다. ▷세계기상기구에 따르면 지난해는 기록상 지구가 가장 더웠던 해였다. 하지만 5년 안에 새 기록이 쓰일 가능성이 86%라고 한다. 폭염 발생은 산업화 전보다 세 배 가까이로 증가했고, 발생 시 강도도 강해졌다. 온실가스 배출이 줄지 않으면 이런 현상이 앞으론 더 심각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 바나나야 흥밋거리라지만 그런 기후에 사람이 적응할 수 있을까가 문제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국민 생명과 재산 보호를 위해 1억2000만 원을 쓸 수 없다는 인식이 안타깝다.” 청주지법 재판부가 지난달 31일 ‘오송 참사’를 일으킨 공사 현장소장에 대해 법정최고형인 징역 7년 6개월을 선고하면서 한 말이다. 이 돈이면 지난해 7월 충북 청주 미호천교 도로 확장 공사장에 홍수 방호벽을 설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건설사는 콘크리트 방호벽 대신 흙으로 임시 둑을 쌓았다. 제대로 다지지도 않았고, 높이도 모자랐다. 부실 공사였다. 이 둑이 무너지면서 인근 오송 궁평2지하차도에서 14명이 귀중한 목숨을 잃었다. 판사는 “최소 징역 15년은 선고해야 했는데 한없는 무기력함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다음 주면 전국이 대부분 장마권에 든다. 요즘엔 집중 극한 호우 탓에 하천 범람 위험이 더욱 커졌다. 그제 감사원이 지하 공간 침수 대비 실태를 점검한 보고서를 냈는데, 전국 지하차도 1086곳 중 제방 붕괴 시 침수 우려가 있는 곳이 최소 182곳이나 됐다. 그 가운데 159곳(87%)은 차량 진입 통제 기준에 인근 하천 홍수주의보 같은 외부 위험요인이 빠져 있는 등 기준조차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채였다. 132곳(73%)은 차량 진입 차단시설이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오송 참사’를 겪고도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이다. 지방자치단체가 행정안전부에 예산 지원을 요청한 지하차도 40곳 중 17곳은 지원을 받지 못해 차량 진입 차단시설을 설치하지 못했다고 한다. 환경부의 홍수 관리 대책은 시작부터 구멍이 나 있었다. 용역 계약을 맺었던 업체가 전체 하천의 6.3%인 235개 하천을 분석 대상에서 누락한 것이다. ▷사실 오송 참사 역시 그로부터 3년 전 부산 침수 사고와 양상이 판박이였다. 집중호우가 쏟아진 2020년 7월 부산 동구 초량제1지하차도에서 침수 사고가 났다. 차량 6대가 잠겨 3명이 숨지고 4명이 다쳤다. 당시 지하차도 출입 통제 시스템은 3년째 고장 나 있었고, 배수펌프는 작동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행안부는 부랴부랴 자동차단 시설 구축과 원격 차단, 상황 전파 시스템 구축 등 대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3년 뒤 오송의 궁평2지하차도에도 침수 시 차량 진입을 자동 차단하는 시설은 없었다. 두 달 뒤에야 설치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배수펌프가 먹통이었던 것도 그대로다. 막상 물이 지하로 밀려들자 작동을 멈췄다. ▷지하 침수 사고가 반복됐던 7월이 코앞이다. 감사원 지적에 대해 행안부와 국토교통부는 대책을 마련했다고 했지만 현장에서 실제 얼마나 이행됐는지는 알 수 없다. 비가 좀 많이 내리는 날이면 운전자들이 지하차도에 진입해도 될지 말지 불안해하는 게 우리 재난 안전 수준이다. 같은 비극을 얼마나 되풀이한 뒤에야 비로소 참사 예방에 전력을 다하려 하는가.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1987년 12월 8일 최창락 동력자원부 장관이 기자회견을 열고 “대륙붕 6-1광구에서 국내 최초로 양질의 대규모 가스층이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부산 동쪽 120km 해상 ‘돌고래3’ 시추공에서 생산 가능성을 시험한 결과 10시간 동안 가스가 분출돼 불길이 타올랐다는 것. 국내 대륙붕 시추 사상 처음이라고 했다. ‘신군부의 일원인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이 될 것이냐, 아니면 민주 정부냐’, 운명을 가를 대통령 선거일을 1주일여 앞둔 시점이었다. ▷‘산유국의 꿈이 가시권에 들어왔다’며 흥분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매장 추정량을 묻는 물음에 기술진은 답을 꺼렸다. 정부는 “내년부터 3개의 평가정을 뚫어 경제성 여부를 판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사실 1972년 첫 시추 이래 국내 대륙붕에서 미량의 천연가스나 유층(油層)이 발견된 건 여러 차례 있었다. 경제성이 없었을 뿐이다. 일부 언론 매체들은 발표 시점이 미묘하다는 점을 짚으며 섣부른 기대나 낙관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듬해 매장량 평가 시추에서 결국 경제성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선거를 앞두고 장관이 호들갑을 떤 셈이 됐다. ▷한국석유공사가 경북 포항 영일만 앞 심해에서 석유·가스를 탐사하는 ‘대왕고래’ 프로젝트 자료 일부를 비공개로 전환해 논란이 일고 있다. 원래는 정보공개포털에 자료 상당수를 ‘부분공개’ 상태로 올려놨는데, 최근 탐사 시추 관련 자료 등을 비공개로 바꾼 것이다. 공사는 “개인정보가 포함된 문서 등을 전환했다”고 했다. ‘등’자가 붙었으니, 개인정보 외 다른 이유로 비공개한 자료도 있다는 얘기다. 공사는 야당의 자료 요구도 ‘국가 자원안보 중요 정보’라며 거부하고 있다. ‘대왕고래’가 몸을 숨긴 것이다. ▷자원 부국의 꿈이 실현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1987년 돌고래3 발표 당시엔 생산 가능성 시험 결과라도 있었다. 이번엔 탐사 시추도 안 한 채 갖고 있던 자료만 새로 분석했다고 한다. 분석한 기업 액트지오의 대표가 브리핑까지 했지만 여러 의문이 깔끔하게 풀리진 않았다. 국민은 ‘대왕고래’가 얼마나 유망하길래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깜짝 발표’한 건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자원 개발은 특성상 언론이나 국민이 검증할 수 있는 수단이 별로 없다. 최근 한 설문조사에선 이번 유전 탐사 결과 발표에 대해 10명 중 6명이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아직 첫 삽도 안 떴는데 정부가 믿음을 잃은 것이다. 이런 식이면 비단 이번 프로젝트가 아니더라도 뚝심 있는 탐사가 필요한 유전 개발이 초장부터 좌초할 우려가 있다. ‘대왕고래’ 프로젝트가 돌고래3의 재판이 되지 않으려면 국익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투명한 정보 공개가 무엇보다 우선이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자동차 부품 업체, 보건소, 전투기 제작 업체, 시·군청, 금융회사, 해경, 대기업…. 모두 최근 직장 내 괴롭힘으로 자살한 직원이 나왔거나 그랬다는 의혹이 제기된 곳이다. 괴롭힘 피해는 직종을 가리지 않는다. 자살로 끝난 산업재해의 절반 이상은 과로와 함께 직장 내 괴롭힘이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2019년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개정 근로기준법)이 시행됐지만 비극이 여전히 끊이지 않는 실정이다. ▷하지만 부당한 피해를 막는 법이 생기면 악용하는 이들도 나타나기 마련이다. 사적 이익을 노리거나 잘못을 지적하는 상사에게 복수하려고 없는 사실을 지어내 허위 신고를 하는 이들이다. 비자발적 퇴사로 인정받아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상사가 괴롭혔다’고 거짓 신고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정당한 업무 지시를 상습적으로 이행하지 않다가 징계를 받게 되자 ‘괴롭힘을 당했다’고 신고하기도 한다. 인사 발령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부서장을 갈아 치우려고 거짓 신고하는 사례도 있다. 좋은 취지의 법이 ‘오피스 빌런’(직장 내 악당)의 무기가 된 셈이다. ▷서유정 한국직업능력연구원 연구위원 등의 관련 실태 연구에 따르면 허위 신고자는 보상금이나 고용 계약 연장 등 보상을 먼저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통상의 괴롭힘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의 분리나 가해 중단을 주로 원하는 것과 달랐다. 같은 행위에 대한 반복 신고도 많았다. 회사는 책임을 회피하며 피신고인에게 모든 책임을 지라고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거짓 신고를 당한 사람 5명 중 1명은 부당한 징계까지 받았다고 한다. 허위 신고가 또 다른 유형의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학계에선 모호한 법 규정이 허위 신고의 여지를 주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우리 법은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고통을 주거나 근무 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금지한다. 이에 비해 비슷한 법을 가진 나라들은 대부분 조항에 지속성이나 반복성 규정을 두고 있다. 대체로 6개월∼1년 이상 또는 주 1회 이상 계속돼야 괴롭힘이 인정된다는 것이다. 구체적 기준은 우리 사정에 맞게 바꾼다고 해도 객관성이 보완될 필요성은 있어 보인다. ▷허위 신고의 폐해는 신고당한 개인에 그치지 않는다. 거짓 신고가 횡행하면 진짜 피해자의 신고도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이들이 많아지게 마련이다. 지금도 직장 내 폭행·폭언 피해자 10명 중 6명이 불이익이 두려워 신고하지 못한다는데, 신고가 더 위축될 수도 있다. 가짜 사건으로 근로감독관 업무에 과부하가 걸리면 피해 구제에 시간이 오래 걸리게 된다. 부작용을 막기 위해선 회사가 취업규칙에 허위 신고인을 징계하도록 하는 등의 지침을 마련하도록 한 해외 사례를 검토할 만하다. 제도의 실효성이 떨어지면 진짜 약자가 피해를 본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분위기 따라 대학에 가고 떠밀리듯 취업엔 성공했지만, 진정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진 못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일하며 장시간 근로에 시달리다가 ‘번아웃’을 겪는다. 유명 애니메이션 밈(meme)처럼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을 시전하고 보란 듯이 그만두고 싶지만 그 다음이 막막해서 꾸역꾸역 다닌다. 우리 시대 많은 직장인의 초상일 것이다.》 황보름 작가(44)의 20대도 그랬다. 하지만 그는 흔한 비극을 흔치 않은 희망으로 바꿨다. 나이 서른에 7년 다닌 대기업을 그만두고 10년을 갈고닦은 끝에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낸 것. 그가 2022년 출간한 소설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클레이하우스)는 국내에서만 30만 부가 팔렸고, 지난달엔 서점 직원들이 투표로 뽑는 일본 서점대상 1위(번역 부문)를 했다. 지구 반대편 브라질의 독자가 ‘깊은 우울감에 빠졌는데 큰 위로를 받았다’, ‘책에 나온 문장을 삶의 지침으로 삼겠다’며 열렬한 독후감을 보내온다. 옛 동료들은 경력을 쌓아 가는데, 독자를 만나리라는 기약도 없이 방에 틀어박혀 글만 썼던 황 작가의 30대는 어떤 시간이었을까. ‘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로’ 같았을까 싶어 29일 만났는데, 그는 “대체로 많은 날이 편안하고 좋았다”고 했다. ‘취업이 잘된다’는 전망에 사촌 오빠들을 따라 진학한 공대, ‘3점대 후반’ 학점으로 졸업(2004년), 취업 재수도 없이 입사한 대기업 LG전자. 황 작가의 사회생활 출발은 순탄한 편이었다.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한 그가 일하게 된 곳은 개발 부서였다. 하지만 얼마 안 돼 깨달았다. 자신은 코딩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개발자는 자는 거 아냐’라는 슬픈 농담이 있을 정도의 장시간 노동도 괴로웠다. 휴대전화 새 모델을 만드는 3∼6개월짜리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주 7일 근무에 오후 10, 11시 퇴근이 당연시됐다. “그렇게 몇 개월을 지내면 사람이 피폐해지잖아요. 더구나 일이 없어도 야근을 해야 했어요. ‘프로젝트가 시작됐는데,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는 느낌? 직원들이 늦게까지 남아 있는 모습을 위에 보여주려던 것도 있던 것 같고….” 동료들에게 민폐는 끼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일에서 보람을 찾긴 어려웠다. 3년 차에 번아웃이 왔다. “너무 힘들었는데, 그 시절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끔찍한 시절이라 그런가 봐요.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풀다가 체중이 갑자기 15kg 늘기도 했어요. 어느 정도 지나니 완전히 무감해지더라고요. 집과 회사만 왕복하고, 사람들도 만나지 않고, 그냥 기계처럼 살았어요.” 회사를 그만둔 건 용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너무 코너에 몰려서, 무기력해서였다고 한다. 다행히 그동안 돈 쓸 시간도 없었고, 소비에 관심이 없었던 덕에 통장에는 7년간 받은 월급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인생에 한 번 정도는 좋아하는 일을 해봐도 되지 않을까? 마흔 살 전에는 그런 일을 찾자.’ 부모님 집에 함께 살면서 야금야금 조금씩 쓰면 10년은 어떻게 될 것도 같았다. 처음부터 글을 쓰려고 했던 건 아니다. 서울 강남의 어학원에 다니다가 2012년쯤부턴 1년쯤 강사 일에 도전하기도 했다. 그러다 하고 싶은 일이 글쓰기라는 걸 깨달았다. 어릴 적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던 그였다. 책 2권에 해당하는 원고를 여러 출판사에 보냈지만 출간 거절 메일만 돌아왔다. 가까스로 2017년 첫 에세이 ‘매일 읽겠습니다’(어떤책)를 냈지만 1쇄도 다 안 나갔다. 이후 ‘난생처음 킥복싱’(티라미수 더북), ‘이 정도 거리가 딱 좋다’(뜻밖) 등 에세이 2권을 더 냈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 그래도 꾸준히 노력했다. 방에서 글을 쓰는 단순한 삶이었다. 믿을 구석도 없는데 느긋했다고 한다. “먼 미래를 바라보지 않았어요. 5월엔 ‘12월까지는 버틸 수 있잖아’ 생각했죠. 뚜렷한 계획도 희망도 없었지만 그냥 그 생활이 좋았어요.” 부모님은 황 작가를 마냥 지지해줬다. “서른 넘어서 작가 되겠다고 몇 년이나 방에 틀어박혀 있으니 ‘엄마 아빠 몸에서 사리가 나올 수도 있겠다’ 싶었죠. 그런데 제가 회사 다니며 불행해하는 걸 느끼셨대요.” 그런 그도 마흔한 살이 되자 ‘겉은 작가였지만 속은 백수였던’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로 먹고사는 일의 요원함’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 2021년 초 선배의 소개로 다시 회사에 취업했다. 하지만 삶은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선물을 준다. 2018년 ‘시간은 남는데 에세이는 어렵고, 몇 달만이라도 소설로 도망가자’는 마음에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에 연재했던 것이 ‘휴남동 서점’이었다. 이미 전업 작가 생활엔 ‘마침표를 찍었다’고 생각한 뒤 이 소설을 별 기대 없이 전자책 출판 공모전에 출품했다. 당선된 소설은 ‘밀리의 서재’에서 e북으로 출판됐고, 비로소 세상으로 나아가게 됐다. 소설엔 번아웃에 회사를 그만두고 남편과도 갈라선 뒤 서점을 차린 영주, 취업에 실패하고 서점에서 바리스타로 일하는 민준, 무기력증에 빠진 고교생 민철, 비정규직으로 일하다가 부당한 대우를 겪고 그만둔 뒤 뜨개질을 하는 정서 등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인물 사이엔 갈등이나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게 별로 없다. 기자가 “신춘문예라면 예심서 낙방했을 것 같다”고 하자 황 작가는 “등장인물끼리 지지고 볶는 얘기가 아니라, 애초에 관계를 통해서 치유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래도 ‘다음이 너무 궁금하다’는 분들이 너무 많다”라며 웃었다. 소설을 빛내는 건 삶의 벽에 부딪힌 이들이 내면의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이다. 이들은 대화를 통해 깊어지는 고민과 함께 성장하고, ‘세상이 정해 놓은 경로를 따르지 않아도, 길에서 튕겨 나왔다고 해도 삶은 다른 방식으로 이어진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비슷한 상황을 ‘앞서 겪어 본’ 작가의 내공이 고스란히 배어난다. “‘내가 노력을 덜 해서 이렇게 된 게 아닐까’ 같은 좌절과 자책감에 시달리는 분들이 많잖아요. 그런 분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한 명 한 명이 추스르고 일어서는 걸 돕고 싶었어요.” 소설은 꽤 직설적으로 우리 사회의 노동 문제를 거론한다. 황 작가는 말했다. “일을 너무 많이 해 노동에 삶이 잠식되잖아요. 대기업 중소기업 격차도 크고, 삶을 영위하고 미래를 준비할 만큼 돈을 버는 이들도 적고요. 문제가 너무 오래 지속되면 마치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게 돼요. ‘요즘 취업 안 된대, 비정규직 많지’라고 하면 식상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구체적 개인을 들여다보면 그런 게 하나하나 얼마나 큰 상처이겠어요. 나는 열심히 살아왔는데 사회가 받아들여 주지 않을 때, 앞에서 문이 닫혔을 때의 심정을 헤아리고 싶었습니다.” 직장에서 번아웃을 겪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저는 힘든 시간을 지혜롭게 지나오지 못해서, 그냥 정통으로 맞아서 이런 소설을 쓴 것 같다”며 “가능하다면 그 시간을 덜 힘들게 지나길 바란다. 직장인으로서의 정체성 말고 주말엔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고, 운동을 하며 다른 정체성을 만들면 무게가 덜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최근 서점가엔 ‘휴남동 서점’과 언뜻 닮아 보이는 소설이 꽤 이어지고 있다. 친숙하고 추억이 있을 만한 공간을 배경으로 각자의 사연을 가진 여러 인물이 아픔을 치유하는 이야기들이다. ‘힐링 소설’, ‘장소 소설’로 불리기도 한다. “기존엔 문학적 성취를 이룬 분들이 등단을 거쳐 주로 출간을 했잖아요. 그러다 이런 책의 성공을 보고 평소에 내면에 이야기를 간직하던 분들이 ‘나에게도 기회가 왔다’고 여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주제가 비슷한 건) 모두가 뭔가 힘들어서 그런 건가 싶기도 하고요.” 25개국에 판권이 수출된 ‘휴남동 서점’은 한국 문학 수출에서도 ‘현상’이라고 할 만한 것을 이끌고 있다. 출판사에 따르면 이 소설은 최근까지 일본과 브라질, 영국 등에서만 각각 3만5000부가량이 팔렸다. ‘아몬드’(손원평), ‘불편한 편의점’(김호연) 등과 함께 K문학이 현지에서 단단한 팬층을 만드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 소설들이 상업적으로 좋은 성적을 내자 최근 수출되는 일부 한국 작품은 출간 경쟁이 붙어 선인세가 2억∼4억 원 수준까지 올랐다고 한다. 황 작가는 “브라질 신문과도 서면 인터뷰를 서너 번 했다”며 “‘휴남동 서점’ 속 등장인물처럼 느슨하게 거리를 두고 만났으면 좋겠다는 열망, 잔잔하고 평화로운 이야기를 읽고 싶다는 바람이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소설을 또 쓸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저 이야기를 한다’는 자세로 올해엔 새로운 소설 초고를 완성할 계획이라고 했다. “저는 유독 사람이 만나서 변화하는 이야기가 좋아요. ‘시절인연(時節因緣·인과에 따라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환경이 조성돼야 일이 일어난다는 불교용어)’이랄까…. 이번에도 그런 얘기를 쓰게 될 것 같습니다.” “삶엔 하나의 정답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모두가 같은 삶과 꿈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각자 자기에게 맞고 편한 삶이 있는 거겠지요. 대체로 고되고 힘에 부치지만 대개 다 지나가잖아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 마치 경로를 이탈한 것처럼 보이는 모든 분들을 응원하고 싶습니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이미 포기해버린 느낌,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홍콩에 사는 찰리(19)는 열다섯 살 때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스스로를 집에 가뒀다. 부모님과 할머니까지 네 식구가 함께 사는 30㎡ 넓이 아파트, 그중에서도 작은 이층침대가 그의 세계 전부였다. 밥도 침대 위에서 먹었다. 미국 CNN방송은 최근 찰리를 비롯한 아시아 청년들의 은둔 문제를 다루면서 “홍콩과 일본, 한국에 은둔형 외톨이가 150만 명 이상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CNN이 거론한 3개국은 모두 입시 등 경쟁이 치열하고 ‘주변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이 심한 나라로 꼽힌다. 찰리는 교사들이 ‘나쁜 학생’을 꾸짖을 때 했던 “그런 식이면 나중엔 거지가 될 거다”라는 말을 마음속 깊이 받아들였다고 했다. 우리나라 학교에서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세 나라는 모두 자살률이 아시아에서 6위권에 드는데, 특히 우리 20대의 자살·자해 시도는 최근 수년간 급증 추세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은 청년들이 나약해서 갖게 되는 생각이 아니다. 성적이나 취업, 외모 등 획일적 기준으로 모두를 줄 세우니 이제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이들이나 자라는 아이들까지도 일찌감치 ‘낙오했다’, ‘실패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일본과 함께 유난히 타인의 시선에 민감한 문화를 가진 탓인지 ‘비교질’이 잦고, ‘○○계급표’ 같은 게 난무한다. 그러나 성공의 ‘좁은 문’을 통과하는 이들은 엎어놓은 압정 끝처럼 소수에 불과하다. 다수를 자책으로 몰고 가 불행하게 만드는 구조다. ▷하지만 압축 근대의 폭력을 앞서 헤쳐온 기성세대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나누기보단 부아만 돋우는 훈계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다들 그러고 사는데 왜 너만 유난을 떠느냐.” 은둔형 외톨이 청년들이 자주 듣는 말이라고 한다. 미국 심리학자 매슬로의 이론을 빌리면 생리적·안전 욕구 충족에 급급했던 부모 세대가 과거의 경험에 갇혀 애정·소속, 존중, 자아실현 등 욕구의 좌절에 잘 공감하지 못하는 건 아닌가 싶다. 자식이 은둔 중이라는 걸 숨기려고만 하다가 문제를 악화시키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스스로가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순간이 기억에 남아요.’ 은둔에서 벗어나 다른 은둔 청년을 돕고 있는 한 청년의 말이다. 우울증 경험을 진솔하게 다룬 에세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의 백세희 작가는 “힘내라는 말, 자신감을 가지고 위축되지 말라는 말은 때론 독”이라며 “난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 의심 없이 편안하게, 그뿐이다”라고 했다. ‘실패해도 괜찮다, 남들과 다르게 살아도 괜찮다.’ 은둔하는 청년들에게 이런 말을 자신 있게 해줄 수 있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이란 테헤란 남쪽 하바란엔 묘비가 없는 공동묘지가 있다. 원래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이 묻히는 곳이었는데, 1988년 이란 당국이 정치범을 대규모로 처형한 뒤 시신을 가져다 버렸다. 가족들이 발견했을 때 시신들은 매장도 되지 않은 채 쌓여 있었다고 한다. 이란 정부는 추모를 막았고, 무덤을 식별할 수 있는 표지를 없앴고, 묘지를 불도저로 밀어버렸으며, 꽃도 심지 못하게 석회와 소금물을 뿌렸다. 최근엔 2m 높이의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 밖에서 바라볼 수도 없게 만들었다. 희생자 가족이 구성한 단체 ‘하바란의 어머니들’은 정부의 탄압 속에서도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을 36년째 멈추지 않고 있다. ▷처형은 이란-이라크 전쟁 말기부터 준비됐다. 희생자들은 이란인민전사(PMOI)나 공산당원 등 좌파들로 1979년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팔레비 왕정을 전복할 땐 같은 편에서 싸운 이들이었다. 혁명 성공 뒤 반체제 세력으로 몰린 것이다. 주로 평화시위를 하다 체포된 이들이었다. 당시 이란 전역에서 5000∼3만 명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증언에 따르면 6인 1조로 지게차에 실려 30분마다 크레인에 목이 매달렸다고 한다. 아이들도 희생됐다. 22일 동안 채찍질을 550번 당한 끝에 숨진 여성도 있었다. ▷최고지도자 호메이니가 처형 명령을 내렸고, ‘죽음의 위원회’로 불리는 4인 위원회가 ‘재심’을 해 교수형 판결을 내렸다. 각 판결에 5분도 안 걸렸다고 전해진다. 4인 위원 중 한 명이 19일(현지 시간) 헬기 사고로 외교장관과 함께 숨진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이다. 1988년 28세로 수도의 검찰청 차장으로 일했던 그에겐 ‘테헤란의 도살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 말고도 대(大)처형에 관여한 이들은 이후 승승장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강경파인 라이시 대통령은 집권 이후에도 반정부 시위를 가혹하게 탄압했다. 2022년 22세 여성이 히잡을 느슨하게 썼다는 이유로 ‘도덕경찰’에 끌려갔다가 의문사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를 겨냥해 ‘독재자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가 등장하기도 했다. 정부의 강경 진압으로 500여 명이 숨졌고, 2만2000여 명이 체포됐다. 정부에 반대하는 이들의 원한은 더욱 깊어졌을 것이다. ▷추락한 헬기에서 죽음은 순식간에 닥쳤을 터이다. “이 쉬운 죽음은 그들에게 충분하지 않아요. 그들은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개처럼 울부짖으며 길고 고통스러운 처벌을 받아야 했어요.” 이란 북서부 라히잔에 사는 한 시민(55)이 미국 뉴욕타임스(NYT)에 밝힌 소감이다. 이런 이들과는 반대로 테헤란의 광장엔 라이시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인파가 운집하기도 했다. 이란의 오래 묵은 한(恨)은 언제나 풀리게 될까.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여러 영화를 상영해야 정상인 멀티플렉스 극장이 또다시 ‘모노(mono)플렉스’가 됐다. 요즘 영화관에 가면 주야장천 ‘범죄도시4’만 튼다. 다른 영화들은 오전에만 반짝 상영하는 탓에 사실상 조조영화가 됐고, 저녁 시간대 등은 거의 100%가 ‘범죄도시4’다. 이 영화의 상영점유율은 지난달 24일 개봉 뒤 80%를 넘었고, 이달 들어서도 70% 안팎이다. 전국에 스크린이 3000개쯤 되는데, 5일에만 2778개 상영관이 이 영화를 1만5002회 틀었다. 스크린을 도배한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영화계에서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이하영 하하필름스 대표)라는 성토가 나온다. 과거 사례와 비교하면 ‘범죄도시4’의 상영관 독점이 어느 정도인지가 뚜렷이 드러난다. 스크린 독과점 논란이 거세게 일었던 2017년 영화 ‘군함도’의 상영점유율이 50%대 중반이었다. 12일 만에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명량’(2014년)의 점유율은 40%대였고, 최근 1000만 영화인 ‘파묘’도 50%대였다. ‘범죄도시4’의 스크린 독점은 2019년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극장으로선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 한다’는 항변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영화관들은 막대한 적자를 봤다. 부채 비율이 치솟았고, 국내 3대 멀티플렉스 중 2곳이 한때 사실상 자본잠식 직전에 이르기도 했다. 계열사의 출자 등으로 연명한 극장들은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줄줄이 지방 상영관의 문을 닫는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범죄도시4’는 ‘서울의 봄’(2023년), ‘파묘’에 이은 구세주 격이다. 특히 비성수기로 여겨지는 4, 5월의 흥행 성공은 가뭄의 단비와 같을 것이다. ▷‘범죄도시4’를 제외하고 당장 크게 눈에 띄는 영화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는 역으로 다양성 부족이라는 한국 영화계의 구조적 문제가 극심해졌음을 드러낸다. 박스오피스 10위권 내 우리 영화는 이 영화와 파묘뿐이다. ‘1000만 아니면 쪽박’이라는 말이 현실화한 것이다. 100억 원 이상의 제작비가 들어가는 이런 영화에서 제작진이 새로운 시도나 모험을 하기 쉽지 않다. 2021년 30%까지 떨어졌다가 올해 68%까지 반등한 한국 영화 점유율이 불안한 이유다. ▷상대적으로 적은 제작비로 관객 300만∼400만 명을 목표로 하는 ‘중박 영화’나 독립영화도 관객을 만날 기회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제2의 봉준호, 박찬욱 감독이 나온다. ‘범죄도시4’를 보고 ‘마동석표 액션은 볼만하지만 되풀이되다 보니 슬슬 지루해진다’는 관객이 적지 않다. 이는 곧 한국 영화가 처한 현실이기도 할 것이다. 프랑스처럼 특정 영화에 일정 비율 이상 스크린을 배정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스크린 상한제 도입을 논의해볼 시기가 가까워 오고 있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분열하고, 타협하지 못하는 건 정말 한국인의 특성일까. 악의적 편견에 불과하지만 새삼 마음이 무겁다. 최근 일련의 뉴스에서 우리 사회가 가진 대화와 타협의 역량에 일찌감치 한계가 드러나는 일이 잦아서다. 침수 문제가 불거지고도 24년 동안 비만 오면 물에 잠기는 처지로 방치된 국보 반구대 암각화 문제만 해도 그렇다. 1970년 발견된 반구대 암각화는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선사 유적이지만 앞서 건설된 울산 사연댐 탓에 침수를 반복하며 훼손돼 왔다. 학계가 대책 마련을 촉구한 2000년 이후에도 원형 보존을 둘러싼 이견, 예산 문제 등에 더해 대구·경북 지자체 간의 물 갈등까지 엮이면서 해결책을 내지 못했다. 사연댐의 수위를 낮추면 지자체 간에 도미노식으로 식수를 끌어와야 하는데 2009년 발암물질 낙동강 유출 사태로 대구와 구미가 물 분쟁을 벌이는 가운데 대책이 함께 표류했다. 정치권이 개입한 가변형 임시 물막이 설치는 수리 전문가들의 반대에도 추진했다가 실패하면서 아까운 시간만 버렸다. 최근 환경부가 사연댐에 수문을 설치하기로 했지만 식수 갈등은 여전히 잠재해 있는 실정이다.‘힘 대 힘’ 갈등의 패자는 국민 재정안정론과 소득보장론이 팽팽한 국민연금 개혁 논의는 사실과 의견이 뒤섞여 혼란스럽다. 기금의 고갈 시기나 이후 가입자에게 약속한 급여를 지급하는 데 필요한 돈은 계산하면 나온다. 비교적 정해진 미래에 가깝다. 반면 고갈 뒤 부족액을 모두 가입자의 보험료로 충당할지, 재정을 투입할지, 자산소득에도 보험료를 부과할지 등은 가치 판단과 의사 결정의 영역이다. 두 영역이 뒤섞인 채 전문가들이 다투다가 지난해 8월엔 재정계산위원 2명이 사퇴하기까지 했다. 최근 일단락된 국회 공론화위 시민대표단 숙의토론회는 새로운 시도였음엔 틀림없다. 그러나 미래세대에 대한 대표성이 약한 시민 500명을 ‘대표단’이라고 부르기도, 이들 대상 설문조사 결과가 온전한 민의라고 보기도 어렵다. 토론회에 관련 참고 자료가 제대로 제공되지 않았다는 등의 뒷말까지 나오고 있다. 영국은 연금개혁 당시 전문가 보고서를 가지고 여러 차례 간담회와 많은 국민이 참여하는 토론회를 거친 뒤, 정리된 안을 가지고 다시 전국 각지를 돌며 간담회와 토론회를 열어 개혁안을 마련했다고 한다. 갈피를 못 잡는 의대 증원 문제는 갈등 관리 실패의 전범처럼 보인다. 지난해 정부와 대한의사협회의 대화는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고 평행선을 그렸다. 의정 대화를 사회적 협의체로 끌고 가는 등 새로운 방식의 공론화가 필요했지만 정부는 총선을 두 달 앞두고 ‘2000명 증원’을 전격 발표하면서 갈등을 폭발시켰다. 협상 상대에 대한 상호 존중도 찾기 어렵다. 의사 측은 시종일관 집단행동을 통해 힘으로 정부를 꺾을 심산이다. ‘정부는 의사를 이길 수 없다’더니 ‘원점 재검토’만 되풀이하며 의료개혁특위 참여마저 거부한다. 이런 전개에선 누가 이기건 국민은 패자가 될 공산이 크다.타자 입장 생각 않으면 함께 길 잃을 것 “한국인은 너무 극단적이다. ‘끝장을 보자’ ‘너 죽고 나 죽자’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그래서 너무 무섭다.” 양서를 꾸준히 내 존경받았던 한 출판계 어른이 작고 전 사석에서 가끔 했던 말이다. 그게 한국인의 민족성이라기보단 격동의 근현대사에서 극단적인 상황을 너무 많이 경험한 탓일 게다. 이젠 사생결단식 소통을 넘어설 법도 한데, 최근 정치의 양극화와 맞물리며 대화와 타협은 더 어려워지는 것처럼 보인다. 독일 사회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최근 책 ‘공론장의 새로운 구조변동’에 실린 인터뷰에서 공론장의 포용성을 강조했다. 토의엔 “타자의 관점을 취하고 그의 상황에 서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같은 공동체의 일원임을 잊고 산적한 과제 앞에서 함께 길을 잃을까 두렵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그저 책상 앞에 앉아서 이런 대화를 할 수밖에 없어요. ‘(콜레라 백신을) 아이티로 보낼까요, 시리아로 보낼까요? 아니면 짐바브웨?’”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전한 국경없는의사회 국제의료 코디네이터의 한탄이다. 최근 수년간 아프리카 등에서 콜레라가 대규모로 확산한 가운데 국제 의료구호 단체들이 모진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예방 백신이 극도로 부족한 상황에서 수천 명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지원처 선별을 해야 하는 탓이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2021년 22만여 명까지 감소했던 세계 콜레라 감염자가 이듬해 47만여 명으로 늘었다. 콜레라는 카리브해 연안과 중동, 남아시아 등에서 급속히 확산했다. 케냐의 소말리아 난민촌 어린이들 사이에서, 내전으로 기반 시설이 파괴돼 강물을 마셔야 하는 시리아에서, 무정부 상태가 된 아이티에서 창궐했다. 특히 최근 2년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맹위를 떨쳐 7개국에서 집계된 것만 4000여 명이 숨졌다. 백신도 동이 났다. 전쟁으로 콜레라 발생 소지가 큰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공급할 백신마저 없는 실정이다. ▷현재 콜레라 백신을 생산하는 세계에서 하나뿐인 기업이 한국의 유바이오로직스다. 인도의 회사가 한 곳 더 있었는데, 지난해 생산을 중단했다. NYT에 따르면 유바이오로직스는 최근 생산 단계와 성분을 간소화하는 한편 제2공장 가동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올해부터 백신 수천만 회분을 증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유엔의 지원을 받는 국제백신연구소(IVI)의 줄리아 린치 박사는 이 회사를 두고 “(콜레라 대응의) 숨은 영웅”이라고 평가했다. 뒤늦게 인도와 남아공의 회사 세 곳이 백신 제조에 뛰어들었지만 빨라야 내년 말부터 제품이 나온다. ▷지난해 매출이 약 700억 원인 중소기업 유바이오로직스는 서울대 수의대 출신 백영옥 대표가 2010년 설립했다. 국제백신연구소와 기술이전 계약을 맺은 뒤 2015년 WHO 인증을 받고 이듬해부터 콜레라 백신을 수출하며 자리를 잡았다. 질병 퇴치를 목표로 하는 게이츠재단의 지원금을 받기도 했다. 수출용 코로나19 백신도 개발했고, 해마다 연구개발에 적지 않은 돈을 쓰면서 다른 백신으로 사업을 다각화하는 중이라고 한다. ▷수인성 질병인 콜레라는 부유한 나라에선 거의 유행하지 않는다. 빈국의 전염병이다. 최근 극단 기후 탓에 가난한 나라의 국민은 홍수로 상하수도 시설이 파괴되거나 가뭄이 들어 깨끗한 마실 물도 모자란 상황이다. 콜레라 백신은 당분간 공급이 달릴 것으로 전망되지만 글로벌 대형 제약사들은 별 관심이 없다. 개당 수 달러에 이문도 적은 탓이다. 그 결과 콜레라와의 전투에서 승부가 사실상 한국의 한 중소기업에 달린 형국이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한 당인 듯 한 당 아닌’ 총선 선거운동이 4년 전에 이어 다시금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이 4·10총선을 앞두고 각각 국민의미래와 더불어민주연합이라는 위성정당을 또 꾸린 탓이다. 공직선거법은 후보자 등이 다른 정당을 위해 선거운동을 하는 걸 금한다. 매수된 후보가 상대 후보를 위해 뛰는 등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다. 한데도 모(母) 정당과 위성정당이 연합해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한 몸처럼 선거운동을 벌이는 장면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4년 전 민주당과 그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은 똑같은 디자인의 선거유세용 ‘쌍둥이 버스’를 운영하다 선관위로부터 시정명령을 받았다. 비례대표 후보자는 기호가 적힌 유세 차량을 사용할 수 없는데, 두 정당의 기호이면서 선거일(4월 15일)을 의미하는 1과 5를 버스에 커다랗게 적는 꼼수를 썼던 것이다. 이번 선거에선 기호를 빼고 쌍둥이 버스를 만들었다. 모 정당과 위성정당의 기호(이번 총선에선 1, 3번)를 나란히 보여주는 수법은 대신 ‘더 몰빵 13 유세단’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했다. ▷요즘 유세 현장에서 국민의힘을 지원하러 나온 국민의미래 비례대표 후보들은 입은 있는데 말은 없다. 어법에도 맞지 않는 “국민 여러분 미래합시다” 등의 문구가 쓰인 손팻말을 든 채 멀뚱히 섰을 뿐이다. 침묵 시위를 벌이는 것도 아니고 묵언 유세다. 물론 선거법 위반을 피하려는 꼼수다. 지난 총선에서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의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 원유철 대표가 당 기호를 가리려고 점퍼를 뒤집어 입거나 가슴에 스티커를 붙였던 것과 비슷한 촌극이 재현되는 모양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위성정당을 직접 홍보할 수 있고,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못 한다. 한 위원장은 불출마했지만 이 대표는 지역구에 출마한 후보자 신분이기 때문이다. 4년 전 이해찬 민주당 대표,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의 경우와는 반대다. 그러나 이재명 대표는 최근 공개 석상에서 “더불어민주연합 비례 24번 서승만이었습니다. 24번까진 당선시켜야지요”라고 말했다가 선거법 위반 논란이 일었다. 국민의미래 후보도 ‘불러서는 안 될’ 국민의힘 후보 이름을 연호하다 지적을 받았다. 이 당이나 그 당이나 마음속으론 어차피 한 당이니 헷갈리기도 할 것이다. ▷지난해 7월 헌법재판소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합헌으로 판단하면서 거대 정당의 위성정당 창당을 막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데도 두 거대 정당은 방지책은커녕 또다시 위성정당을 만들고 선거법을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피해가며 양당 체제만 강화하는 중이다. 입법자들이 앞장서 국민과 법을 농락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가 갈수록 우스워지고 있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온라인 불법 도박 범죄자들은 회원 모집책을 ‘총판’이라고 부른다. 최근 중학교 2학년 학생들마저 총판으로 고용한 일당이 경찰에 붙잡혔다. 이들은 5000억 원대 도박사이트를 운영하며 중고교생 12명을 모집책으로 썼다. 도박에 중독된 아이들에게 돈을 주고 친구를 도박에 끌어들이거나 텔레그램 채팅방 등에서 도박사이트를 홍보하도록 했다. 말이 좋아 총판이지 경찰에 붙잡힐 위험을 해외에 있는 총책 대신 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이들을 총알받이로 쓴 것이다. ▷‘산에 가야 범을 잡고, 물에 가야 고기 잡고, 자, 돈 놓고 돈 먹기.’ 교묘한 눈속임으로 행인들의 쌈짓돈을 뜯어내던 과거 야바위꾼도 아이들은 상대하지 않았다. 어른들의 틈을 비집고 아이가 머리를 들이밀면 야바위꾼은 사설(辭說)에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를 끼워 넣었다. 요즘엔 ‘무슨 짓을 저지르든 돈만 벌면 된다’는 사고가 팽배하다 보니 범죄자들이 아이들을 동원해 아이들에게 도박을 권한다. ‘도박으로 한 번에 큰돈을 벌었다’고 친구들에게 자랑하라고 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범죄자들 탓에 도박이 교실을 좀먹어 들어가고 있다. 청소년 사범, 중독 환자, 상담 수가 모두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아이들은 친구 얘기를 듣고 마음이 동하거나, 공짜 웹툰과 드라마를 보려고 접속한 불법 공유 사이트에서 호기심에 배너 광고를 눌렀다가 도박을 시작하게 된다. 도박에 중독된 아이가 부모님의 지갑에 손을 대거나 절도, 온라인 사기 등 범죄의 길로 빠져드는 사례도 적지 않다. 청소년이 청소년에게 도박비를 고리로 빌려주는 ‘작업 대출’ 생태계까지 있다고 한다. ▷10대 자녀를 뒀다면 아이가 평범한 게임을 하는 건지 도박에 빠진 건지 눈여겨 살펴야 한다. 아이들이 하는 온라인 도박은 카지노처럼 딱 봐도 도박처럼 생긴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사다리 타기나 게임형 도박은 얼핏 봐선 일반 게임 앱과 구별하기 쉽지 않다. 불법 스포츠토토 도박사이트 역시 ‘요즘 아이가 스포츠 경기에 관심이 많구나’ 하고 오해할 수 있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불법 도박은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다. ▷청소년의 뇌는 어른보다 중독에 더 취약하다. 신경세포가 쉽게 흥분할 뿐 아니라 보상 및 여러 중독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파민이 어른보다 많이 분비된다. 즉석에서 보상이 생기는 도박에 쉽게 빠져드는 이유다. 초중고교의 도박중독 예방 교육은 2022년부터 음주 흡연 마약 등 다른 예방 교육과 함께 의무화됐지만 잘 이뤄지지 않는 실정이라고 한다. 흡연 등의 예방 교육을 우선시하는 경우가 많은 탓이다. 교육이 형식적으로 진행되는 일도 적지 않다고 한다. 성장기에 도박에 중독되면 나중에 헤어나오기도 힘들다. 학교와 학부모가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최근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연금특위) 공론화위원회가 압축한 두 가지 국민연금 개혁안에선 연금 기금 고갈에 대한 위기의식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론화위는 내는 돈(보험료율)을 현행 소득의 9%에서 13%로 올리고 받는 돈(소득대체율)은 40%에서 50%로 늘리는 ‘1안’과, 내는 돈을 12%로 늘리고 받는 돈은 지금대로 유지하는 ‘2안’을 내놨다. 더 많이 받는 1안은 연금 재정수지가 장기적으로 오히려 나빠진다. 2안 역시 재정 건전성을 담보하기엔 역부족이다. 1, 2안은 각각 기금 고갈 시점을 2055년에서 2062년, 2063년으로 7, 8년 미룰 뿐이다.》국민연금이 미래로 가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일각에선 기금 고갈 이후엔 수급자들에게 줄 보험료를 해마다 가입자들에게 걷는 ‘부과방식’으로 전환하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난해 제5차 연금 재정추계에 따르면 부과방식 전환 뒤 현행 소득대체율(40%)을 유지할 때 매년 급여를 충당하는 데 필요한 보험료는 2060년 29.8%, 2080년 34.9%에 이른다. 보험료율이 35%면 월 소득이 300만 원일 때 세금과 다른 보험료를 제외하고 국민연금보험료로만 약 105만 원을 내야 한다는 얘기다. 보험료율을 공론화위 안처럼 3, 4%가 아니라 아예 현행의 두 배인 18%로 대폭 올린다고 가정해도 비슷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기금 고갈 시점은 2080년대로 연기되지만 이후 세대는 여전히 30∼40%의 보험료율을 감당해야 한다. 부과방식으로 연금을 안정적으로 지급하려면 합계출산율이 2명은 돼야 한다. 그래야 뒷세대가 적절한 보험료로 비슷한 인구의 앞세대를 부양할 수 있다. 출산율이 1.8명인 프랑스도 지난해 연금 수급 연령을 62세에서 64세로 2년 늦추는 개혁을 단행했다가 전국적인 반대 시위가 벌어지는 등 진통을 겪었다. 하지만 한국은 출산율이 올해 0.7명도 안 될 것으로 전망된다. 앞으로도 극적 상승을 기대하긴 어렵다. 이 같은 문제는 국민연금이 처음부터 앞선 세대가 낸 보험료와 운영수익보다 훨씬 많은 급여를 받도록 설계된 데서 비롯됐다. 개혁이 지연되고 급격한 저출산 고령화의 덫에 빠지면서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보험료율 조정을 뛰어넘는 제도 자체의 근본 개혁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내후년 이후 출생아들, 낸 연금 절반도 못 받아” 지난달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이강구(47) 신승룡(36) 연구위원이 ‘KDI 포커스’ 보고서를 통해 파격적인 국민연금 개혁안을 내놨다. 기금 고갈 우려가 없는 ‘신(新)연금’을 출범시키자는 제안이다. 핵심은 미래세대도 가입자가 납부한 보험료와 운용수익만큼은 급여로 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데 있다. 이른바 ‘기대수익비 1’의 연금이다. 현 연금의 세대별 기대수익비를 살펴보자. 이번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만 60세가 되는 1964년생 이전 세대는 기대수익비가 ‘2’가 넘는다. 누군가 보험료로 1억 원을 냈고, 그 운용수익이 1억 원이라고 치면, 연금 급여는 4억 원 이상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연금에 소득재분배 기능이 있지만 고소득자의 기대수익비도 1이 넘는다. 이런 초과 수익은 미래세대가 감당해야 한다. 기대수익비는 점점 하락해 올해 만 20세가 되는 2004년생은 ‘1’까지 떨어진다. 기금 고갈 이후 앞선 세대의 급여를 충당하기 위해 보험료가 급격히 오르는 탓이다. 그래도 이들 세대까진 적어도 낸 돈과 운용수익만큼은 급여로 받을 수 있다. 지금의 어린이와 청소년 세대부턴 기대수익비가 ‘1’ 아래로 떨어진다. 내년에 태어나는 아이들은 기대수익비가 약 ‘0.5’이고, 이후 아이들은 쭉 ‘0.4’대다. 누군가 낸 보험료와 운용수익이 6억 원이라고 칠 때 급여는 3억 원도 못 받는다는 뜻이다. 미래세대가 이런 구조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기적적인 출산율 회복이 없다면 국민연금은 언젠가 파국을 맞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한편에선 베이비붐 세대의 기대수익비가 ‘2’에 가까운 건 잘못이 아니라는 분석도 있다. 이들은 부모를 봉양했으면서도 자식으로부턴 부양을 기대하기 어려운 세대이고, 빈곤율도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기초연금을 개혁해 대응할 문제라는 의견이 나온다.● “적립된 만큼 가져가는 DC형 연금 필요” ‘기대수익비 1’의 신연금을 만들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줄 돈을 미리 정해 놓지 말고 받을 시점에 납부한 보험료와 운용수익만큼만 급여로 지급하는 것이다. 이를 확정기여형(DC)이라고 한다. 현 연금은 연금 가입 이력 등으로 나중에 받을 급여가 미리 정해지는 확정급여형(DB)이다. 그러나 전체 연금 차원에선 DB형은 불확실성에 대응하기 어려운 구조다. 수십 년 뒤 인구와 경제 환경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연금 재정을 5년마다 새로 추계함에도 매번 재정수지 전망이 악화하는 것도 그 탓이다. KDI 연구진은 신연금은 수급 시작 시점에 해당 세대의 기대여명에 따라 급여 수준을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적립된 만큼만 가져가도록 하면 기금은 이론적으로 영원히 고갈되지 않는다.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은 설계하기 나름이다. 연구진은 “보험료율을 15.5% 안팎으로 하면 2006년생부터 현행과 같은 소득대체율 40%의 급여 수준을 보장할 수 있다”고 봤다. 둘째, 빚이 쌓여 가는 현 연금과 단절하는 일이다. 국민연금 기금적립금은 지난해 말 기준 국내총생산(GDP)의 절반에 이르는 1036조 원으로 커졌지만 현 가입자에게 약속한 급여를 지급하기에도 부족하다. 현 연금이 당장 문을 닫고, 추가 가입도 납부도 하지 않는다고 가정할 때 2045년까지만 약속한 급여를 줄 수 있다. 이듬해부터 모든 가입자가 사망할 때까지 줘야 할 연금액(미적립 충당금)이 올해 가치로 환산해 609조 원(GDP의 26.9%)에 이르지만 이 돈은 없다. 기존 가입자가 보험료를 계속 내도록 할 경우엔 미적립 충당금의 규모가 더욱 커진다. 줘야 할 돈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전영준 한양대 경제금융대 교수는 이 ‘암묵적 부채’의 규모가 지난해 가치 기준 1825조 원에 이른다고 최근 연금개혁 세미나에서 밝혔다. KDI 보고서는 현 연금은 계정을 분리하고 추가 납부를 중단한 뒤 국가 일반재정을 투입해 미적립 부채를 충당하자고 제안했다. 연구진은 “기금운용수익을 5%로 잡으면 해마다 30조 원씩 투입해도 600조 원의 뭉칫돈을 넣은 것과 같은 효과가 난다”며 “당장 재정을 투입해야 기대수익비가 상대적으로 큰 현세대도 미래세대의 부담을 나눌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고갈 이후 위험 과장’ vs ‘낙관 기대 안 돼’ 신연금 구상에 대한 비판도 나오고 있다. 주은선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신연금은 공적연금의 가치인 ‘세대 간 연대’를 단절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며 “최저보장 연금에 대한 고민도 엿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강구 연구위원은 “신연금도 개인 계좌가 아니라 연령이 같거나 비슷한 집단(코호트)을 묶어 지금과 비슷한 방식으로 세대 내에서 소득을 재분배할 수 있다”며 “현 세대 저소득층의 부양 부담을 인구도 적은 미래세대에 떠넘기는 건 옳지 않다”고 했다. 정부 재정을 신연금이 아니라 현 연금에 투입하자는 의견도 나온다. 남찬섭 동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베이비붐 세대가 지나간 뒤 2070년대가 되면 인구구조가 안정화되고 그동안 출산율이 오를 수도 있다”며 “현 연금에 재정을 투입해 저소득 가입자와 영세사업장을 지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기금 고갈 이후의 위험이 과장됐다는 분석도 있다. 김연명 중앙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2050년대 이후 아이들이 줄어들면 교육비 지출을 연금 기금으로 돌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KDI 연구진은 “최근 25년 동안 경제성장률과 출산율이 계속 떨어지고 기대여명은 길어졌는데, 낙관적 기대를 바탕으로 연금을 개혁해선 안 된다. 신연금 개혁을 하지 않을 땐 현 연금에 투입해야 할 재정 규모가 609조 원보다 더욱 커질 것”이라는 입장이다. 현 국민연금의 미적립 부채 규모가 커 해결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연금이 미래로 가는 길은 지금도 계속 좁아지는 중이다. 지난 정부가 개혁의 골든타임을 흘려보낸 사이 연금 재정의 장기 건전성은 더욱 나빠졌다. 신연금 제안은 우리 연금이 그나마 ‘젊은 연금’이어서 가능한 것으로 평가된다. 지금부터 5년만 지나도 현 연금의 미적립 충당금은 869조 원 이상으로 늘어난다. 이강구, 신승룡 연구위원은 “최소한 미래세대가 기성세대의 노후 보장을 위해 수용하기 어려울 정도의 부담을 져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해소해야 보험료도 인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