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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선에서 최고로 많은 1639만4815명(48.56%)이 국민의힘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에게 표를 줬다. 2위 후보의 득표수도 가장 많았다. 1614만7738명(47.83%)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대통령이 되기를 원했다. 0.73%포인트 격차. 전체 유권자 4419만7692명 가운데 24만7077명의 선택이 5년 권력의 향배를 갈랐다. 이번 대선에서 정책과 비전은 큰 의미가 없었다. 영국 가디언은 ‘주술사, 히틀러 그리고 상호 증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한국인들이 악의에 찬 선거에서 투표소로 향했다”고 썼다. 비호감 대선이라는 평가 속에 각 진영 사상 ‘최다 득표’라는 역설적인 투표 결과가 나타났다. 우리 후보가 좋아서가 아니라, 상대 후보에 대한 혐오가 유권자들을 투표장으로 이끈 것이다. 싫은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네거티브 캠페인이 제대로 먹힌 선거였다. 그래서일까. 승복은 했지만 대선이 끝난 지 2주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싸운다. 역대 대선에서 당선인들은 허니문 기간 동안 5년 동안 펼칠 국정에 대한 기조를 잡는데, 허니문마저 사라졌다. 예상됐던 정치권의 조기 개전을 두고 통합과 협치의 정치가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아쉽게도 전망은 불투명하다. 5월 10일 새 정부 출범 후 한 달도 채 안 되는 시점에 또 전국단위 선거가 치러지기 때문이다. 6·1전국지방선거다. 민주당이 의회권력을 장악한 정치구도 속에서 지방권력이라도 확보해야 하는 국민의힘, 대선 패배 이후 반등의 계기가 필요한 민주당. 각각의 절실함이 또 정면으로 부딪칠 것이다. 최근 윤 당선인에게 ‘우리는 안전 마진이 없다’는 당의 전략보고서가 제출됐다. 지방선거에서 패배할 경우 집권과 동시에 식물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승리를 낙관하기 어려운 국민의힘의 위기감이 반영된 것이다. 25일 발표된 한국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윤 당선인의 국정 운영 기대치는 55%다. 과거 대선 승리 2주 차에 실시된 같은 조사에서 이명박 당선인 84%, 박근혜 당선인 78%, 문재인 대통령 87%를 받았다. 민주당은 의외로 빨리 새 정부에 대한 견제 심리가 나타날 수 있다고 보고 총력전을 준비하고 있다. 일부 지지자들 사이에선 이재명 후보 차출설까지 거론된다. 민주당 소속 구청장들과 서울시 의원들은 선거 승리가 어렵더라도 표심 경쟁력이 있는 인물이 함께 뛰어야 구청장과 시의원 자리를 최대한 지킬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손혜원 전 열린민주당 의원은 이 후보의 민주당 대표 추대 및 서울시장 후보 차출을 공개적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가능성은 낮지만 용산 대통령 시대를 열려는 윤 당선인과 이를 저지하려는 이 후보 간 20대 대선 연장전이 펼쳐지지 말라는 법도 없다. 패자에게는 지고도 인정하기 힘든 0.73%의 승리였다. 이대로라면 두 달 후 전 국민이 다시 네 편 내 편을 가르는 ‘대선 연장전’ 성격의 극단적 선거를 치를 가능성이 크다. 윤 당선인이 그 전에 확실하게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는 성과를 보여주면 된다. 다음 달 초면 총리, 장관 등 새 정부 내각 후보자가 발표될 예정이다. 국민통합, 편 가르기 없는 실력 있는 인재 발탁…. 문재인 대통령이 하지 못한 것을 윤 당선인이 해내는 것이 진짜 승리다. 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정치교체’냐 ‘정권교체’냐를 두고 여야 대선 후보들이 격돌했다. 여권 후보가 “정권교체가 아니라 정치교체가 이뤄져야 할 때”라고 외쳤다. 그러자 야당 후보는 “정치교체는 정권교체로만 가능하다”고 맞섰다. 지금 얘기가 아니다. 2017년 대선을 앞두고 지지율 선두를 다퉜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과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의 목소리다. 2017년엔 정권교체론이 승리했다. 반면 2012년 박근혜 전 대통령,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치교체’를 앞세워 대권을 거머쥐었다. 유권자의 상대적 박탈감을 자극하는, 선거에 으레 등장하는 ‘교체’ 프레임의 연장선이다. 이번 선거에서도 ‘바꿔 열풍’이 거세다. “저 후보는 바꿀 자격조차 없다”는 네거티브까지 더해졌다. 비호감 대선이라는 혹평 속에 투표를 포기하는 유권자가 늘어날 듯한데, 실상은 반대다. 이달 1, 2일 조사한 동아일보 대선 4차 여론조사에서 ‘반드시 투표하겠다’는 유권자는 90.2%로 집계됐다. 지난달 중순 3차 여론조사 때 86.8%, 지난달 초순 2차 여론조사 때 84.5%보다 오히려 많아졌다. 5년 전 마지막 여론조사에서는 ‘반드시 투표하겠다’는 답변이 90%에 이르지 못했다. “찍을 후보가 없다”는 대선 레이스가 결승점을 눈앞에 두고 예년보다 더 뜨거워지고 있다. 새 시대에 대한 설렘이나 기대도 없지 않겠지만, 박빙의 승부 속에 “반드시 ○○○ 당선을 막겠다”는 지지층의 결기는 더 강해진 모양새다. 한쪽 진영을 적극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선 “누가 대통령이 돼도 나라가 불행해질 것”이라는 탄식이 나온다. 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당선될 경우 민주당은 2016년 총선부터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 2020년 총선에 이어 다시 2022년 대선까지 전국 단위 선거에서 내리 5연승이라는 민주화 이후 전례가 없던 기록을 세우게 된다. 지금은 선거 때니까 강경파들이 목소리를 낮추고 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리가 옳았다” “민심은 역시 우리 편”이라며 다시 오만과 무소불위의 옛 민주당의 모습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농후하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당선돼 정권교체가 이루어진다면 새로운 여당은 172석이라는 절대 다수 의석을 확보한 제1야당을 상대로 한 혹독한 대결 정국을 돌파해야 한다. 민주당이 반대할 경우 새 정부는 정부조직개편은 말할 것도 없고 내각 구성조차 어렵다. 신구 권력의 극한 대립 속에 적폐청산을 앞세운 검찰발(發) 사정 정국이 열리지 말라는 법도 없다. 국민통합과 협치는 다시 멀어질 것이다. 대한민국은 이미 1년 넘게 치열한 대선 레이스를 거치며 각 당은 물론이고 보수-진보 진영으로 나뉜 국민들 사이 감정의 골이 깊어진 상태다. 누가 당선되든 40% 남짓 득표가 최대다. 당선된 후보를 선택하지 않은 절반의 국민은 환호하는 상대 진영을 바라보며 열패감에 시달릴 것이다. 여기에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골목상권 불황, 일자리 없는 청년, 북한의 새로운 도발 위기까지…. 말 그대로 나라 안팎이 암울한 상태다. 대선은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를 위한 비전과 정책을 제시해 줄 새로운 리더의 탄생을 여는 장이다. ‘교체’는 목적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이대로라면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1950년대의 정치구호가 끊임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누가 되든 당선 후 새 대통령의 첫 국정 과제는 그동안 쌓인 분노의 에너지를 하나로 모을 수 있는, 통합을 위한 구체적인 실행 계획이다.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대선판에 ‘적폐청산’이 다시 등장했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는 9일 공개된 언론 인터뷰에서 ‘전(前) 정권 적폐청산 수사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해야죠. (수사가) 돼야죠”라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현 정부를 근거 없이 적폐 수사의 대상, 불법으로 몬 것”이라며 대통령국민소통수석을 통해 공개적으로 ‘강력한 분노’를 표출했다. 공식 선거운동 시작(15일)을 눈앞에 두고 대선판이 진영 간 대충돌로 치달을 태세다. 적폐청산 시즌3에 불씨가 댕겨진 모양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생경한 단어였던 적폐청산이 정치에서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이후 60년간의 적폐청산 구상을 밝히면서다. 이후 2017년 대선 때 문재인 대통령은 “적폐청산은 시대정신”이라고 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을 전후해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이 주창했던 적폐청산의 이름 아래 구속됐고, 이명박 전 대통령도 감옥에 갇혔다. 문 대통령은 5년 전 취임사에서 “감히 약속드린다. 2017년 5월 10일 이날은 진정한 국민 통합이 시작되는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했다. 결과는 달랐다. 적폐청산을 국정과제 1호로 삼았던 정부는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이분법 통치를 국정의 동력으로 삼았고, 분열은 극에 달했다. 거의 모든 논쟁적 이슈의 옳고 그름이 진영논리에 따라 엇갈렸다. 과학의 영역인 코로나19 방역에 대한 평가에도 진영논리가 개입됐다. 정부 지지자들은 여권의 비상식과 위선이 드러나도 ‘문 대통령은 그래도 옳다’고 했고, 야권 진영은 늘 그 반대쪽에 섰다. 박 전 대통령이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지난해 말 풀려났다. 이 전 대통령은 수감 중이다. 민주주의와 법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국가에서 보기 드문 전직 대통령 수난사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 모든 게 적폐청산 아래 벌어진 일이다. 적폐청산과 국민통합은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다는 것을 지난 5년 동안 모두가 지켜봤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은 최순실 사태와 박 전 대통령 탄핵이 발화점이 됐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이 저류에 깔려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과도한 보복을 받았다고 굳게 믿는 집단은 자신들을 피해자라고 여기고 권력 의지를 다진다. 그리고 힘을 가지게 되면 ‘정의’를 앞세워 가해자로 변하곤 한다. ‘오랫동안 켜켜이 쌓여 온 불법과 반칙을 없앤다’는 적폐청산은 그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권력이 앞장서는 순간 정치보복으로 변질되기 십상이다. 후보·배우자를 둘러싼 비호감 대선에 진영 간 감정 대결이 더욱 격해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누가 승자가 돼도, 패자는 승복보다는 치욕감을 되새기며 집권의 기회만 엿볼 가능성이 크다. 논쟁적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지지층을 선동해 광화문광장으로 뛰쳐나갈 수도 있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른 데는 5년 동안 통합을 외면하고, 적폐청산에 몰두한 문 대통령과 여권의 책임이 크다. 그렇다고 “우리가 당했으니 너희도 똑같이 당해 보라”는 것은 공멸의 지름길이다. 대선은 새로운 대한민국의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이다. 비극적인 노 전 대통령 사태 이후 20년 가까이 우리 정치에서 반복돼 온 극한 대립 구도와 적폐청산의 악순환을 이제는 끊어야 할 때다. 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여야는 8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회의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 배우자 김혜경 씨와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 배우자 김건희 씨를 두고 공방을 벌였다. 윤영석 의원은 “(경기도청) 비서실에 근무했던 직원 A 씨에 따르면 본인 업무와 시간의 90% 이상이 김혜경 씨의 사적인 용무를 처리하는 일이었다고 할 정도로 너무나 상습적으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며 “과잉 의전 문제, 갑질 문제 등을 볼 때 당시 이 지사와 김 씨가 왕과 왕비로 군림한 것 아닌가 싶다”고 주장했다. 민주당도 김건희 씨 관련 의혹으로 반격에 나섰다. 유정주 의원은 김 씨의 허위 학력과 경력 의혹들을 열거하며 “이런 일은 또 하나의 ‘신정아 사건’을 연상케 한다. 리플리 증후군이라 불러도 무색하지 않다”고 따졌다. 이날 예결위에서 국민의힘 김은혜 의원은 “대장동 분양대행업체 대표 이모 씨가 남욱에게 빌려준 22억5000만 원 중 12억 원을 김만배가 전달받았고, 이 대여금 중 일부를 유동규(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에게 주고, 유동규가 3억여 원을 이재명 성남시장 선거자금으로 썼다는 사실을 지난해 초 인지했다는 남욱의 검찰 진술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대통령선거가 한 달 남짓 남았다. 비호감 대선, 뽑을 후보가 없는 대선이라지만 그래도 이번 대선의 수확을 꼽으라면 청년 문제의 공론화를 들고 싶다. 오랫동안 주변부에 맴돌던 청년 담론이 대선 국면을 통해 한국 정치의 핵심 이슈로 떠올랐다. 대선 때는 늘 시대정신이 등장한다. 2012년엔 경제민주화가 부각됐고, 2017년엔 적폐 청산이 대선 어젠다였다. 하나같이 당면한 시대적 과제였고, 그 출구를 반드시 찾아야 하는 의제였다. 지금 시대정신은 ‘부모보다 못사는 첫 세대’로 전락한 청년일 수밖에 없다. 얼마 전 현대경제연구원이 낸 보고서에 따르면 일하지 않고, 학교도 다니지 않는 니트족이 작년보다 24.2%(8만5000명) 증가한 43만6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청년의 삶은 더 팍팍해졌고, 일자리는 물론 삶의 기회마저 잃을 수 있다는 청년들의 위기가 장기화되고 구조화될 수 있다는 경고가 계속 울리고 있다. 청년의 표심을 읽은 여야 대선 후보들은 앞다퉈 청년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는 비니를 쓰고 조거팬츠를 입고 춤을 췄다. 청년기본소득에, 청년을 겨냥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소확행) 공약도 연이어 내놓고 있다. ‘석열이 형’을 자처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는 공정사회를 약속하며 청년원가주택, 청년도약계좌 등 계층이동 사다리 복원을 주요 공약으로 내놨다. 그런데도 청년들의 호응은 신통치 않다. 여론조사에서 20대의 36%가 상황에 따라 다른 사람을 지지할 수 있다거나, 지지 후보가 없다고 답하고 있다(21일 한국갤럽 조사). 전 연령층에서 가장 높다. 40대 이상은 이 수치가 10%대에 불과하다. 아직도 청년들이 체감할 수 있는 무언가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일하고 사랑하고 가정을 꾸리는, 예전엔 특별하지 않았던 일들이 지금의 청년에게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 됐다. 문제는 이같은 청년 이슈가 정부의 역량을 집중해도 해결하기 쉽지 않은 난제라는 점이다. 국회는 2020년 ‘청년기본법’을 제정했고, 정부는 이를 기반으로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청년정책조정위원회를 만들었다. 청년 참여단, 온라인 청년 패널 등도 설치했다. 하지만 청년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 정도 시스템으론 산적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대로 가다간 기득권을 쥔 기성세대와 청년 사이에 세대 전쟁이 벌어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여야 후보들은 스윙보터로 떠오른 청년 표심을 잡기에 오늘도 여념이 없다. 하루가 멀다 하고 청년 공약을 내놓고 밈, 짤 제작 등 선거 전략을 총동원하고 있다. 그렇지만 청년들도 안다. 후드티를 입고 등장하는 여야 대선 후보들의 모습이 표를 노린 일회성 선거운동이고, 여성가족부 폐지나 병사 봉급 200만 원 같은 공약은 젠더 갈등에 편승한 선거전략이라는 점을. 대선 시대정신은 선거 과정에서 펼쳐지는 공론의 장에서 새 대통령이 역량을 집중할 국가적 의제를 정하고, 해결을 위한 공동체의 합의를 형성하는 것이다. 시대의 약자인 청년 문제의 답을 찾는 대선이 돼야 한다. 이를 기반으로 새 정부는 청년정책의 새 틀 짜기부터 시작해야 한다.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20대 대통령을 뽑는 대선의 해로 들어섰다. 3월 9일 대선까지 D-67, 두 달 남짓 남았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의 레이스는 한층 뜨거워지고 있다. 그러나 국민의 반응은 시큰둥하기만 하다.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도 있겠지만, 차기 정부에 대한 희망과 기대는 오간 데 없고 그들만의 자리싸움이 유권자들의 정치 혐오를 키우고 있다. 선거가 막바지를 향하면서 각 후보 캠프에는 ‘인재영입’이라는 이름 아래 위원회니, 포럼이니, 특보단이니, 부대변인단이니 하는 소그룹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들여다보면 교수, 전직 관료, 한물간 정치인들의 줄서기가 요란하다. “○○○는 △△△캠프로 갔다더라” “○○○는 △△△에게 줄을 대고 캠프 직함을 받는 데 성공했다” 등의 말들이 끊이지 않는다. 대선 캠프는 민주화와 대통령 직선제의 산물이다. 그렇지만 캠프 선거 도입과 함께 ‘자리’를 논공행상의 대가로 나눠주는 행태는 1987년 이후 선거를 거듭할수록 악화되고 있다. ‘이회창 대세론’이 회자되던 2002년 이 후보 캠프에서 이 후보를 돕겠다고 나선 교수가 100명이 넘었다고 해서 ‘폴리페서(polifessor)’라는 조어(造語)가 만들어졌다. 대학 강단의 정치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2017년 대선을 앞두고 꾸려진 문재인 대통령의 싱크탱크 ‘국민성장’에 참여한 교수와 전문가는 1000명을 넘어섰다. 4번의 대선을 거치면서 그 규모가 10배 이상으로 커진 셈이다. 대통령 선거가 반복되면서 대선캠프 참여→정권 창출→낙하산 인사로 이어지는 일부 인사들의 줄 대기 ‘성공신화’가 사회 곳곳으로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이제 대선 캠프 참여는 인생 한 방을 노리는 인사들에게는 출세(出世)의 공식이 됐다. 여의도에서는 “대한민국 최대 복권은 로또가 아니라 대선 캠프”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다. 다양화된 사회상에 걸맞게 그 대상과 규모도 커져서 예전에는 정치인과 일부 교수 등에게 주로 해당됐던 캠프 참여가 지금은 전직 행정부 관료, 전직 장성, 전문직, 체육인, 연예인 등 사회 전 직군을 망라하고 있다. 정권이 바뀌면 대통령이 직간접으로 임명할 수 있는 자리가 약 1만 개에 이른다고 한다. 캠프에 참여한 인사들은 빚 독촉하듯 자리를 요구하고, 이들은 정권의 영혼 없는 심부름꾼 노릇을 한다. 민주당 주변에는 문재인 정부 5년의 임기를 마무리하는 단계에 들어선 지금도 5년 전 받은 대기표를 들고 청와대의 전화만 기다리고 있는 인사들이 적지 않다.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공유하는 ‘동지’들을 정부 및 사회 각 영역에 배치하는 것은 책임정치 구현 차원에서 어느 정도 필요하다. 문제는 능력도 안 되는 사람들을 대선 과정에서 도움을 줬다는 이유만으로 낙하산에 태워 내리꽂는 규모가 계속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코드인사와 편 가르기를 끊임없이 부추기는 요인이 된다. 공직을 전리품으로 쓰지 않겠다는 후보들의 공약은 어차피 지켜지지 않는다. 5년마다 반복되는 물갈이와 낙하산을 둘러싸고 시비를 벌일 것이 아니라 대통령의 권한으로 임명할 수 있는 자리를 엄격하게 규정하는, 국민이 동의할 수 있는 합법적 시스템을 구축할 때가 됐다. 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스포츠 세계뿐 아니라 정치에도 여러 징크스가 회자된다. 특히 대통령 선거와 관련된 징크스가 꽤 많다. 대표적인 것이 ‘국무총리 징크스’다. 총리직을 통해 전국적 인지도와 탄탄한 행정 능력까지 갖춘 전직 총리가 유독 대권 도전에서는 번번이 실패한다는 징크스다. 김종필 전 총리와 이회창 전 총리, 고건 전 총리가 대표적이었다. 이낙연, 정세균 전 총리의 대권 도전으로 깨질까 했던 ‘국무총리 징크스’는 내년 대선에서도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 반면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이후 안경 쓴 후보는 늘 낙선했다는 ‘안경 징크스’는 2017년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효력을 상실한 징크스가 됐다. 포스터에 나온 얼굴이 가장 작은 후보가 당선된다는 ‘포스터 징크스’도 지난 대선에서 깨졌다. 19대 대선 후보 포스터에서 얼굴이 가장 작았던 후보는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였다. 선거를 거듭하면서 더욱 견고해진 징크스도 있다.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이후엔 결과가 바뀌지 않는다는 ‘역전 불가론’이다. 공식 선거운동 시작 전 마지막 여론조사 결과가 실제 투표에서 뒤집힌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징크스다. 1987년 대선부터 7번의 대선에서 한 번도 깨지지 않았다. ‘역전 불가론’은 동일한 결과가 우연히 반복돼 만들어지는 징크스라기보다는 사실 선거의 공식에 가깝다. 내년 3·9대선의 공식 선거운동은 투표일 22일 전인 2월 15일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대다수 유권자는 공식 선거운동 시작 전에 이미 표심을 정한다. 공식 선거운동 기간 펼쳐지는 선거 캠페인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번 선거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대선이 80여 일 앞으로 다가오면서 이미 ‘현재 지지하는 후보를 바꾸지 않겠다’는 유권자 비율이 70%를 넘었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나왔다. 이 때문에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후보 캠프는 2월 15일을 보름여 앞둔 1월 말 설 연휴 직전 여론조사를 이번 대선의 최대 승부처로 보고 있다. 박빙 판세 속에서 추격전을 벌이고 있는 이재명 후보 캠프는 1월 중순 여론조사에서 골든크로스를 이뤄내고, 우세 속에 설 연휴로 진입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2주일 남짓 그 기세를 이어가 2월 15일 공식 선거운동 기간에 진입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전략이다. 다시 말해 윤석열 후보가 1월 말까지 역전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내년 대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굳힌다는 얘기다. 이 후보가 최근 전국 곳곳에서 하루에도 5개가 넘는 일정을 소화하며 공약과 정책 메시지를 공격적으로 쏟아내는 것도, 김종인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이 7일 첫 선대위 회의에서 “윤석열 후보를 비롯해 선대위가 별다른 큰 실수만 하지 않으면 정권을 가져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고 말한 것도 앞으로 한 달 남짓한 기간이 이번 대선의 최대 고비이기 때문이다. 대선에서 징크스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설이 하나 더 있다. 진보, 보수 정권이 번갈아가며 10년씩 집권한다는 ‘10년 주기설’이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진보정권 10년, 이명박 박근혜 보수정권 10년이 이어졌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가 시작됐다. ‘10년 주기설’이 견고한 징크스로 자리 잡을지, 한때의 바람이 만들어낸 우연한 결과에 불과했는지는 한 달 후면 그 윤곽이 대략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수차례 대선을 치렀지만 요즘은 정치 이야기가 유독 껄끄럽다. “이재명이, 혹은 윤석열이 되면 나라 망하는 것 아니냐” “저쪽이 되면 모두 교도소 가는 것 아니냐” 식의 듣기 불편한 말만 오간다. “정치 얘기는 그만하자”고 화제를 돌리는 게 상책이다. ‘네 편’ ‘내 편’은 선거에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다. 특히 대선은 갈등 증폭기라고 할 만하다. 정치는 집단의 혐오와 두려움을 적극 활용한다. 영·호남을 대립시키는 지역 갈등이 대표적이었다. 편 가르기만큼 우리 편을 쉽게 결집시키는 수단이 없다. 감정에 이해관계까지 얽히면 더는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오로지 피아만 남는다. 선거가 반복되면서 갈등의 대척점은 지역에서 진영, 세대, 빈부 등으로 확대됐다. 갈등의 다양화가 주요 선거 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이번 대선에선 청년의 남녀 문제, 젠더 갈등까지 소환됐다. 이미 20대 남성과 여성만 두고 보면 ‘이성 혐오의 시대’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각종 온라인 사이트엔 서로를 혐오하는 표현들이 넘쳐난다. 반대 성(性)에 대한 ‘극혐’은 일상 속에서도 번지고 있다. 경제 불황, 취업난 등으로 젊은 세대의 삶이 팍팍해지면서 반대 성에 의해 차별받고 손해 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어졌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주자들은 이 같은 불만을 파고든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민주당은 페미니즘을 입 밖에 꺼내지 못하는 정당, 광기의 페미니즘을 멈추면 이재명 후보를 기쁜 마음으로 찍겠다”는 내용의 반페미니즘 글을 민주당 선대위 참석자들과 공유하고 이를 읽어보라고 권고했다. 문재인 정부의 페미니즘 정책에 등을 돌렸다는 ‘이대남(20대 남성)’의 인식을 알기 위한 목적이라는 해명을 내놨지만, 젠더 갈등에 편승해 반페미니즘으로 20대 남성 표심을 얻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은 당연하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도 양성 평등 공약으로 제시한 ‘성범죄 무고죄 처벌 강화’ 또한 반페미니즘 정책이라는 관측 속에 여성계의 반발을 사고 있다. 두 후보가 동시에 내놓은 여성가족부 개편 공약도 비슷하다. 이 후보는 “남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건 옳지 않다”, 윤 후보는 “여성가족부가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했다”고 일부의 주장을 그대로 옮기며 젠더 갈등을 부추긴다. 대장동 특혜 사건을 두고 서로가 몸통이라며 듣기에 섬뜩한 말까지 서슴지 않는 이 후보와 윤 후보는 젠더 갈등까지 가차 없이 선거 전략에 넣고 적대감을 키운다. 이미 문재인 정부가 말했던 ‘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과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는 실패했다. 갈등의 정치는 일상이 됐다. 두 후보 모두 문재인 정부 때보다 나아질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내년 선거에서 누가 당선되든 더 큰일이 날 것 같은 분위기다. ‘대선은 미래의 선택’이라고 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극심한 흑백 인종 갈등 속에서 대선을 치렀지만 ‘변화(Change)’와 함께 ‘우리는 할 수 있다(Yes, we can)’고 계속해서 외쳤다. 변화를 추구하면서도 믿음과 희망의 메시지를 담았다. 대선까지 100일 남짓 남았다. 불안과 증오가 아닌 미래와 희망을 논의하는 정상적인 대선 궤도로 돌아갈 때다. 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누가 될 것 같아요?” 정치부 기자라고 하면 사석에서 이렇게 묻는 사람이 적지 않다. 알 수 없다. 예상 시나리오에 없던 돌발 변수들이 한 달이 멀다 하고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게 이번 대선이다. 투표일은 앞으로도 4개월 넘게 남아 있다.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겠는가. “아직 모른다” 또는 “하늘이 알겠죠”라고 웃어넘기곤 한다. 그럼 수심 가득한 표정으로 다시 묻는다. “○○○가 정말 될까요?” 반복되는 이런 질문과 답변이 중요한 게 아니기에 답답할 때가 있다. 핵심은 ‘누가 더 대통령 자격이 있는가’다. 자격도 여러 가지다. 그중에서도 이번 대선에서 가장 소홀히 취급 받는 대목이 외교 역량인 듯하다. 여야 모두 네거티브와 편 가르기 선거 캠페인에 집중하다 보니 정책 공방은 사실상 멈춰 선 상태다. 특히 외교·안보 논쟁에선 여야 후보들 모두 서로 실수를 피하고 싶은지 “굳건한 한미 동맹을 바탕으로 김정은과 대화하겠다”식의 초보적 주장에서 진도가 더 나가지 않고 있다. 후보들이 외교 분야에 대해서는 좀처럼 깊이 있는 토론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아일보가 국민의힘 1, 2차 경선 과정에서 치러진 10차례의 TV토론회에서 후보들이 주장한 내용을 음성-텍스트 변환 인공지능(AI) 서비스로 전수 분석했다. ‘국민’ ‘대통령’을 제외하면 ‘이재명’ ‘대장동’ ‘고발사주’ ‘화천대유’ 같은 단어들이 상위 톱10 키워드를 점령했다. ‘핵’이 상위권에 들긴 했지만 이 역시 “한국도 핵을 보유해야 한다” “미국과 핵을 공유하겠다” 등 일부 보수층의 ‘핵 보유’ 주장을 옮긴 정도에 불과하다. 국제사회가 추구하는 핵 확산 방지체제를 한국이 어떻게 극복하겠다는 것인지, 득실은 어떤지를 깊이 있게 논쟁하는 장면은 없다. 어떤 후보는 전술핵과 전략핵을 구분하지 못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다음 정부 출범과 함께 새 대통령이 맞닥뜨릴 핵심 과제는 한미관계와 한중관계의 재설정이다. 쿼드(Quad) 등 동맹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중국 견제 흐름 속에서 국익을 어떻게 지켜낼지, 한국은 큰 숙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최근 토론회나 여야 후보 간 공방에서 한미, 한중관계가 주요 키워드로 거론된 적이 없다. 후보들이 이 부분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다. 한일관계에 대해서는 “죽창가를 부르다 한일관계가 망가졌다”(윤석열 전 검찰총장) 등 ‘반(反)문재인 외교’면 한일관계도 풀릴 것이라는 단순 논리나, 독도 표기 문제를 두고 “역사적 기록도 남길 겸 올림픽 보이콧을 검토해야 한다”(이재명 후보) 등 지지층을 겨냥한 강경 발언만 난무하고 있다. 국무총리를 지낸 한 원로인사는 “이재명 윤석열 홍준표를 보면 셋 중 누가 대통령이 돼도 국제무대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해 정상회담 또는 다자회담을 하는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고 했다. 국격과 국제정세를 꿰뚫는 역량을 갖춘 리더십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라를 책임지겠다고 나선 대통령 후보들이 매일 자신을 둘러싼 추문을 방어하기 급급하다. 국제정세에 대해서는 본인의 철학 또는 구상 없이 교과서에 나올 법한 원론적인 발언만 반복하고 있다. 이런 후보들을 두고 차기 대통령을 뽑아야 하는 선거를 정상이라고 말할 순 없다. 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찍고 싶은 후보가 없다” “이런 대선은 처음이다”. 요즘 이런 푸념을 자주 듣는다. 이재명 경기도지사에게 불안을 느끼는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이 있다. 국민의힘 지지자들 중에서도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하는 인사들이 있다. 확신을 갖기엔 어딘가 불안하다는 얘기다. 여기에 이 지사를 둘러싼 대장동 개발 의혹과 윤 전 총장의 고발 사주 의혹, 주술 논란은 지지자들의 불편한 마음에 기름을 부었다. 그렇지만 여론조사 추이를 살펴보면 두 후보 지지율은 흔들림이 없다. 이들은 각각 여야 대선후보 선호도에서 2위와 격차가 있는 1위를 몇 달째 유지하고 있다.(한국갤럽 기준) 왜 이럴까? ‘기본소득’(이 지사)이나 ‘공정과 상식’(윤 전 총장)이 시대정신과 부합해서? 그것보다는 반대편에서 이유를 찾는 것이 쉬울 듯하다. 한쪽 진영을 지지하는 이들에겐 ‘우리 후보’에게 느끼는 불안보다 ‘저쪽 후보’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수차례 대선을 치른 여의도의 한 선거전문가는 “‘좋은 후보 도와주자’보다 ‘나쁜 후보를 막아야 한다’고 해야 지지자들이 더 잘 뭉친다”고 했다. 각 후보 캠프가 이를 모를 리 없다. 이 지사도 윤 전 총장도 각종 의혹을 돌파하는 핵심 전략은 강경 발언이다. 이 지사는 “국민의힘이 지금은 마귀의 힘으로 잠시 큰소리치지만, 곧 부패지옥을 맛볼 것”이라고 비난하고, 윤 전 총장은 “민주당 정권이 우리 당 경선에까지 마수를 뻗치고 있다”고 외친다. 갈등과 증오의 수위가 올라갈수록, 상대를 대번에 제압할 것 같은 강력한 결기를 보여줄수록 지지층 사이에서 입지가 강화된다. 특히 충성도가 높은 당원과 열성 지지자들에겐 ‘정권 재창출’ 또는 ‘정권 교체’의 염원을 이뤄낼 수 있는 대표선수가 절실할 뿐이다. 추문은 감수해야 할 작은 기회비용에 불과하다. 이런 몰가치적 투쟁에선 도덕이나 정의 같은 정치철학이나 공약 등 미래 비전은 의미를 갖기 어렵다. 어디까지나 당내 경선까지만 통하는 전술이다. 경선은 당원과 열성 지지자를 누가 더 많이 확보하느냐의 싸움이지만 본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각각 30% 안팎을 차지하는 여야의 지지층 지형 속에서 20∼30%가량의 무당층·중도층이 승패의 무게추 역할을 한다. 이 때문에 경선 때는 지지층을 겨냥해 이념적 성향을 강조하고, 중도층 표를 얻어야 하는 본선에선 점차 중앙으로 옮기고, 대선 이후에는 통합을 내거는 것이 대선의 ABC다. 그러나 이번 대선은 여야 후보들을 둘러싼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 등으로 본선도 A∼Z까지 네거티브로 넘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여야 캠프 관계자들은 “경선에선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당의 후보로 선출된 이후 본선에서는 바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정말 본선에서는 ‘마귀’ ‘마수’ 같은 적대적 표현이 사라질까. 중요한 것은 말이든 행동이든 유권자를 부끄럽게 만드는 지도자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최순실 사태가 가르쳐 준 교훈 중 하나도 그것이다.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미셸 오바마 여사는 “그들이 저급하게 행동해도 우리는 품위 있게 행동한다(When they go low, we go high)”라는 말로 미국 국민을 환호하게 했다. 우리 대선에서 이런 연설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과한 기대일까.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후의 총선을 거울삼아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4월 총선 직후 가까운 참모들에게 이같이 말했다. 문 대통령은 당시를 회상하며 “지금은 개혁을 해야 한다는 말은 맞는데, 현실성은 있는지 봐야 한다”고 했다.(강민석 전 청와대 대변인, ‘승부사 문재인’) 180석이라는 예상을 뛰어넘는 승리를 거둔 직후였다. 어떤 일이 있었길래 문 대통령은 ‘거울’을 언급했을까. 노무현 정부 2년 차인 2004년 열린우리당은 17대 총선에서 탄핵 역풍으로 152석을 얻는 대승을 거뒀다. 이후 여당은 국가보안법, 과거사법, 사립학교법, 신문법(언론관계법) 등 이른바 ‘4대 입법’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결과는 참혹했다. “우리는 옳다”며 선명성만 강조한 강경파들로 인해 노무현 정부는 순식간에 민심을 잃고 추락했다.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대표)으로 있으면서 여야 협상을 이끌었던 이부영 전 의원의 페이스북 글이다. “한나라당에서도 국가보안법 개정을 논의할 수 있다는 연락이 왔다. 여당이 국가보안법 완전 폐지를 주장하는 바람에 협상은 깨졌다. 열린우리당은 분열했고 정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일부 과격파 의원들은 필자를 ‘배신자’라고 손가락질했다. 중진의원들은 폐지파 의원들의 살기등등한 기세에 눌려 침묵했다.” 여의도 정치에서 강경파의 주장을 경계하는 건 이들은 목적 달성을 위해서 같은 당 안에서도 자신들의 선악(善惡) 기준에 따라 네 편 내 편을 나누고, 결과적으로 자기편에게도 피해를 끼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또 존재감을 보이고, 세를 넓혀가기 위해 늘 새로운 ‘적’을 만들어낸다. 이는 당을 넘어 사회 전반을 갈등과 분열로 몰아간다. 적폐세력, 토착왜구 등은 그 한 예일 뿐이다. 검찰개혁 시즌2도 마찬가지였다. 청와대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와 안착을 문 대통령의 레거시(유산)로 삼고 검찰개혁을 마무리할 뜻이 있었다. 하지만 공수처법 처리 이후 새로운 ‘적’이 필요했던 강경파들은 ‘검수완박’(검찰 수사권의 완전한 박탈)과 ‘윤석열 징계=검찰 개혁’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었다. 결과는 4·7 재·보선 참패였고, 야권 대선 후보 윤석열의 탄생이었다. 내부에서도 질타가 쏟아졌다. 이후 강경파들은 시선을 언론으로 돌렸다. 여기에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이 맞물리면서 폭주를 누구도 말리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한 중진 의원은 “경선 투표가 코앞이다.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 큰 강경파와 열성 지지층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대선을 앞둔 민주당 지도부는 일단 ‘오만 프레임’에 다시 빠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7개 상임위원장을 야당에 다시 넘겨준 것도, 언론중재법 처리를 앞두고 8인 협의체를 만든 것도 전술의 일환이다. 그러나 법조계의 위헌성 지적, 국제적 언론기구와 인권단체 등의 우려에도 “우리는 옳다”는 강경파들의 태도는 꿈쩍하지 않는다. 문 대통령은 “선을 넘으면 또 다른 혼란과 갈등이 벌어질 것이고, 국민이 실어준 힘을 엉뚱한 데 낭비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강 대변인은 썼다. 하지만 정치적 생존이 더 중요한 강경파들은 임기 말 대통령의 우려쯤은 개의치 않는다. “우리만 옳다”는 권력의 오만을 바로잡은 건 늘 국민의 심판뿐이었다. 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청와대 조직을 많이 축소하고 직원들의 직급도 낮출 것이다. 국정은 내각 중심으로 하고 대통령비서실은 조정 기능으로 역할을 한정하려 한다.” 지금 뛰고 있는 야당 주자들 공약이 아니다. 13년 전인 2008년 1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당선인 신분으로 신년 기자회견을 열었을 때 다짐한 말이다. 기자회견 한 달 뒤, 2008년 2월 25일 이명박 정부가 출범했다. 당시 실세로 통했던 정두언 전 의원은 이 전 대통령을 만나 청와대 축소 방안을 보고했다. “청와대에서 각 부처의 인사를 직접 챙기면 장관이 무력화됩니다. 장관이 바지사장이 되고 관료들이 청와대의 눈치만 보게 되면 전 관료사회의 역할이 부실해질 수 있습니다.” 정 전 의원은 이 같은 문제점을 설명하며 청와대 인사수석실 폐지를 건의했다. 그러나 이 전 대통령의 생각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이 전 대통령은 “인사수석을 없애면 이 사회 곳곳에 침투한 좌파세력들은 어떻게 척결하느냐”는 취지로 답했다고 한다. 전(前) 정부에서 정부 및 산하 기관 곳곳에 자리 잡은 친노(친노무현) 인사들을 내보내고, 새 정부 인사들을 그 자리에 다시 배치하려면 청와대가 인사수석실을 통해 각 부처와 산하 기관 인사를 직접 챙겨야 한다는 뜻이었다. 결국 이 전 대통령은 인사수석을 없애는 대신에 인사비서관을 두었다. 직급은 낮아졌지만 내용적으로 바뀐 것은 없었다. 대선 때면 늘 들리는 공약 중 하나가 청와대 비서실 축소다. 후보들은 앞다퉈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언급하며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대통령비서실의 기능과 역할을 확 줄이고 장관들에게 실질적인 의사결정 권한과 인사권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말뿐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4년 전 취임사에서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삼고초려해서 유능한 인재에게 일을 맡기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집권 기간 내내 진영과 이념, 즉 ‘네 편’ ‘내 편’을 따지는 인사에 의존했다. ‘캠코더(대선 캠프+코드+더불어민주당)’ 인사라는 조어까지 만들어졌다. 대다수 국민은 물론이고 여러 정치권 인사들도 인사수석실이 원래부터 청와대에 있던 곳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인사수석은 2003년 출범한 노무현 정부 때 처음 생겼다. 그전까지 민정수석이 독점한 인사에 대한 추천·검증 기능을 분리하겠다는 명분이었다. 처음에는 장관 등 고위직만을 대상으로 했지만 지금은 정부 각 부처는 물론이고 공기업과 산하 기관 간부 인사에 이르기까지 어지간한 자리엔 거의 대부분 청와대의 뜻이 반영된다. 노무현 정부 이후 몇 번의 정권 교체와 인적 청산을 거치면서 대선 때가 되면 각 주자들 캠프로 수많은 ‘뜻있는’ 인사들이 몰려들고, 집권하면 전리품으로 자리를 나누는 풍경이 이제 대선의 기본 공식처럼 됐다. 그 첨병이 인사수석실이다. 대다수가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우려한다. 인사 기능을 청와대가 직접 맡기 시작하며 생긴 과도한 인사권 행사가 부작용을 더욱 키우고 있다. 인사수석실을 통해 각 부처와 사회 곳곳에 뿌려진 낙하산 인사들은 옳고 그름이 아닌 청와대의 뜻과 지시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근원적으로는 개헌을 통해 권력 구조를 바꿔야겠지만 일단 청와대 비서실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해법이 될 수 있다. 여야 후보들이 “측근 인사는 없다”는 원칙론적인 공약 말고, ‘인사수석실 폐지’ 같은 실질적인 방법론을 함께 약속하면 어떨까. 아니면 지킬 수 없는 탕평인사라는 약속을 아예 하지 말든가. 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위태위태한 경선’이라고 한다. 누가 이겨도 불행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경선을 바라보는 여권 지지자들 사이에서 후보들을 향해 ‘아름다운 경선’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지층의 걱정에도 이재명 후보와 이낙연 후보는 전면전에 돌입했다. 예비경선 때 방어 모드를 취했던 이 지사가 공세로 전환하면서 두 후보는 연일 충돌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만의 이슈가 아니다. 국민의힘에도 조만간 닥칠 문제다. 이달 말 국민의힘 경선이 공식 출발하는 순간 홍준표 유승민 원희룡 후보 등 당내 기존 주자들은 선두를 달리고 있는 윤석열 후보를 향해 검증을 앞세운 공격을 본격화할 태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양당 모두 당 차원의 후보 검증단 설치가 화두다. “당이 중립적으로 검증하자” 또는 “대선후보 검증 절차를 시스템화하자”는 제안이다. 상대를 겨냥한 의혹 제기가 네거티브인지, 정당한 검증인지를 당이 판단하자는 취지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현실성이 떨어진다. 네거티브와 검증의 경계는 언제나 모호하다. 비슷한 의혹 제기도 ‘내가 하면 검증, 남이 하면 네거티브’다. 불리한 검증 결과를 선뜻 인정할 후보도 없다. 과거 대선 경선 과정에서 당내 검증 기구가 논의됐다가 흐지부지된 이유다. 유권자 입장에서도 당이 내놓은 자당 후보에 대한 검증 결과를 신뢰하기 어렵다. 지지자들에겐 아군 사이에 벌어지는 아슬아슬한 공방이 위태로워 보일 것이다. 진영을 향한 로열티가 강할수록 ‘아름다운 경선’에 대한 절박함도 클 수밖에 없다. 그들은 후보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않는 범위에서, 경선 흥행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딱 그 정도 수준의 공방을 원한다. 그래야 정권 재창출 또는 정권 교체에 성공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꿈일 뿐이다. ‘아름다운 경선’은 불가능에 가깝다. 모 후보 캠프에 참여한 한 인사는 “목숨을 걸었다”고 말했다. 권력의지가 어지간히 강하지 않은 사람은 대선판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그런 인사들이 모여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해 각자의 인생을 걸고 벌이는 치열한 싸움이 경선이고 대선이다. “후보자로서 품위와 정직을 최고의 덕목으로”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는” 등의 원팀협약식 선서는 지지층의 우려를 덜어주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 과정에서 이명박 후보는 DNA 검사까지 받았다. 이 후보가 이복 아들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자 이를 해소하기 위한 절차였다. 박근혜 후보도 “나에게 애가 있다는 얘기까지 있다. DNA 검사도 해주겠다”고 했다. 경선은 본선과 나아가 대통령 당선 이후 발생할 수 있는 새로운 리더에 대한 리스크를 줄여가는 과정 중 하나다. 치열하고 혹독할수록 유권자들에게는 더 많은 판단의 근거가 쌓인다. 양당 모두 후보 간 검증 공방의 길을 아예 확 터주는 건 어떨까. 다소 과격한 발언이 오가더라도, 인신모독이나 마타도어 등 수준 이하의 언행은 지금까지 대한민국과 시민들이 쌓아온 민주주의와 선거에 대한 축적된 역량으로 충분히 걸러낼 수 있다고 본다. 허위 또는 조작이 드러나면 후보 본인에게 더 무거운 책임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당과 일부 지지자들이 원하는 인위적인 ‘아름다운 경선’ 만들기는 대한민국의 리스크를 더 키울 수 있다. ‘혹독한 경선’을 치르고 판단은 유권자에게 맡기면 된다. 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2017년 5·9대선은 전형적인 심판 선거였다. ‘적폐청산’이라는 단어가 선거를 지배했다. 당시 문재인 캠프 핵심들에게 ‘과거 말고 미래비전을 담은 어젠다는 없느냐’고 물으면 의아하다는 표정과 마주하곤 했다. 답변은 간단했다. “있지 않느냐. 적폐청산을 통한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 나라를 나라답게!” 어떻게 그렇게 뻔한 질문을 하느냐는 얼굴이었다. 정권 교체가 이뤄졌고, 공약대로 적폐청산은 문재인 정부 5년을 관통하는 핵심 이정표가 됐다. ‘미래’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정권 출범 3년차에 접어든 지난해 7월 청와대는 비로소 ‘그린뉴딜’이라는 미래전략을 꺼내들었다. 5년 단임 대통령의 골든타임인 1, 2년을 흘려보낸 뒤였다. 대선 과정은 대한민국을 이끌 새 리더를 선택하는 숙고의 시간이자, 향후 5년간 우리가 선택해야 할 미래비전을 두고 각계각층의 담론과 국민적 총의를 모으는 공간이기도 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바람 속에서 치러진 4년 전 대선은 이 같은 공론의 장(場)으로서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대선까지 이제 8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 여야 합쳐서 20명이 넘는 후보가 뛰어든 전례 없는 뜨거운 레이스가 시작됐다. 하지만 현 정부 5년에 이어 도합 10년을 국민의 뜻이 담긴 미래비전 없이 새 시대를 맞아야 할 위기다. 지지율 1, 2위를 달리고 있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나 이재명 경기도지사를 둘러싼 주요 의제는 그들이 구상하는 미래가 아니다. ‘X파일’, 여배우 스캔들 등 추문성 의혹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예비경선(컷오프)을 마무리한 더불어민주당 내부에선 “4차례의 TV 토론회 끝에 남은 것은 바지밖에 없다”는 자조 섞인 반응이 나온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얼마 전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변경했다. UNCTAD가 1964년 설립된 이래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바뀐 나라는 한국뿐이다. 최근 통화한 한 전직 관료는 “다음 정부 5년은 대한민국이 선진국의 대열에 안착할지, 그 문턱에서 다시 후퇴할지가 결정되는 중대한 시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나라 밖은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변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 간 갈등은 더욱 가팔라지고 있고, 반도체,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백신을 비롯한 새로운 첨단산업의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지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한국의 생존을 가름할 것이라는 전망이 이어지고 있다. 내부적으론 2030, MZ세대가 사회 시스템의 전폭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5년 전과 달라야 한다. 각 당이 미래비전과 전략을 담은 메시지를 내놓고 여야가 겨루는 공론의 장으로서의 기능이 회복돼야 한다. 현 정부의 불합리하고 모순된 정책들에 대한 평가도 선택의 중요한 요소다. 다만 대부분은 대한민국이 수십 년 동안 축적해 온 민주주의와 법치라는 제도와 시스템을 정상화시킨다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라 믿는다. ‘총선은 과거에 대한 평가, 대선은 미래에 대한 선택’이라고 한다. 혹자는 ‘총선은 연애, 대선은 결혼’이라고도 표현한다. 방점은 ‘미래’다. 다음 세대가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대선이 돼야 한다.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언제부터 문재인 대통령의 집권을 확신했나.”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에게 물었다. 그는 “2016년 국정농단 사건 이전, 그보다 꽤 오래전에 당선을 확신했다”고 답했다. 예상 밖이었다. 2017년 5월 치러진 19대 대선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풍(風) 속에서 다자구도로 치러졌다. 더불어민주당의 무난한 승리가 예상되긴 했지만 2016년 말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이전까진 판세가 크게 달랐다. 2016년 상반기까지 문 대통령의 지지율은 10%대 중후반으로 20∼30%를 유지하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물론이고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에게도 뒤지곤 했다. 문 대통령의 집권 가능성에 대해 정치 전문가들은 “글쎄”라는 회의적 반응을 내놓던 시기였다. 이에 대해 양 전 원장은 “(2014년) 세월호 사건 이후 민심을 돌이키기 어렵겠구나 판단했다. 야권으로서는 대안이 문 대통령밖에 없기 때문에 준비만 잘하면 집권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등 돌린 민심, 준비된 당과 후보 두 가지를 정권교체의 메커니즘으로 본 것이다. ‘준비만 잘하면’에 대한 민주당의 핵심 전략은 변화였다. 2016년 1월 문 대통령은 당 대표직을 김종인 비대위원장에게 넘기고 당의 중도화에 박차를 가했다. 같은 해 가을엔 친문 색깔을 크게 지운 대선 초기 캠프 광흥창팀을 출범시켰다. 당시 광흥창팀에 참여했던 여권 인사는 “캠프의 핵심 키워드는 달라진 문재인, 달라진 민주당이었다”며 “변하지 못하면 모두 (정치적으로) 죽는다는 절박감이 있었다”고 말했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설명은 더 직설적이다. “여당이 잘하면 야당은 영원히 기회가 없어요. 여당의 실패를 먹고사는 게 야당 아니에요? 그렇지만 야당이 여당의 실패를 받아먹을 수 있을 정도의 변화가 있어야죠.” 김 전 위원장이 토론회나 인터뷰 등에서 여러 차례 한 얘기다. 민심 이반이 필요조건이지만 이를 받아먹을 수 있는 준비, 즉 변화를 통한 새 정권에 대한 기대감을 보여줘야 집권의 길이 열린다는 뜻이다. 첫 번째 키워드인 민심 이반에 대한 판단은 사람마다 다르다. 민주당 A 의원은 “임기 말 대통령의 지지율이 40% 안팎에 이른다. 민심 이반이나 레임덕은 야당의 희망사항”이라고 일축했다. 다만 부동산 대책 등 정책 실패에 대한 불만, 여권 인사들의 내로남불과 오만에 대한 분노, 코로나19 사태 장기화에 따른 경제난. 이 같은 여론이 쌓이면서 여권에 등 돌리는 민심이 위험수위라는 것은 민주당도 인정하고 있다. 야당은 여기에 36세 ‘0선’ 당 대표를 탄생시켰다. 불과 1년 전 총선 패배에도 ‘영남 패권’을 고수했던 국민의힘 당원들이 확 변한 것이다. 정권교체에 대한 절박감이 반영됐다고 본다. 야권에 남은 마지막 퍼즐 조각은 준비된 후보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비롯해 최재형 감사원장 등 야권 후보군은 더욱 풍성해지고 있다. 여당도 뒤늦게 변화에 대한 시동을 걸고 있다. 윤 전 총장이 지지율 선두를 달리고 있지만, 여권과 야권 후보들의 지지율을 합산하면 각각 35% 안팎의 지지를 받고 있다. 아직은 팽팽한 판세다. 반전이 또 벌어지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이준석 대표 탄생의 가장 큰 교훈은 “민심은 변화를 원한다” “변하지 않으면 미래도 없다”는 것 아닐까. 절박하다면 여야 모두 더 변할 수 있다. 대선은 아직 258일 남았다.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1996년 10월 1일 밤 러시아 극동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루스카야 거리 55번지 A아파트. 비명이 들렸다. 그 직후 아파트 3층 복도에서 둔기에 뒷머리를 맞고 숨진 남성이 발견됐다.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한국영사관에서 근무하던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소속 최덕근 영사였다. 러시아인 목격자는 경찰에서 “아파트 안쪽에 2, 3명의 괴한이 서성거렸다. 그(최 영사)가 아파트 입구로 들어간 후 얼마 안 있어 비명이 들렸다”고 진술했다. 최 영사는 당시 탈북자들을 상대로 북한의 위조지폐인 일명 ‘슈퍼노트’의 유통 경로를 추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시신을 인도받은 한국 정부의 부검 결과 최 영사의 몸에서 북한 공작원들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독약 성분이 검출됐다. 북한 공작기관이 살해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범인을 밝혀내지 못한 채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다. 최 영사는 ‘이름 없는 별’로 남았다. 국정원 중앙 현관으로 들어서면 검은색 돌판 위에 별들이 나란히 새겨져 있는 조형물과 마주한다. 돌판 아래엔 ‘소리 없이 별로 남은 그대들의 길을 좇아 조국을 지키는 데 헌신하리라’란 글이 적혀 있다. 임무 수행 중 희생된 요원들을 기리는 조형물이다. 이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숨졌는지는 물론이고 이름도 공개되지 않는다. 숨진 시기나 과정이 알려지면 비밀리에 수행한 임무가 상대국이나 적에게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임시로 외교관 신분을 갖는 ‘화이트’ 정보 요원으로 활동했던 최 영사의 순직은 이후 러시아와의 외교 문제로 비화하면서 ‘이름 없는 별’ 중 유일하게 그 내용이 알려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4일 국정원을 방문했다. 취임 후 두 번째다. 10일이면 창설 60주년을 맞는 국정원의 새 원훈석 제막식에 참석했다. 문 대통령은 이번 방문에서도 ‘이름 없는 별’ 앞에서 묵념했다. 달라진 것이 있다. 3년 전 18개가 새겨져 있던 검정 돌판 위 별이 19개로 늘었다. 국정원 관계자는 “지난해 내부 심사를 거쳐 별을 추가했다”며 “구체적인 임무나 사망 시기를 밝힐 수는 없지만 현 정부 출범 이후 순직한 분”이라고 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국정원 내부에선 “우리는 사이버에서 일하고 우주를 지향한다”는 구호가 회자되고 있다. 1961년 6월 10일 김종필(JP)이 중앙정보부를 창설했을 때 만들었던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라는 원훈을 각색한 것이지만 과거와 달라진 국정원의 역할을 보여주는 비공식 원훈인 셈이다. 2000년대 들어 국정원은 산업기밀 유출 방지, 사이버 공격 대응, 국제범죄, 우주정보 등 과거와는 달라진 형태로 정보활동을 벌이고 있다. 상당수 전장이 사이버 세계로 이동했지만 그렇다고 비밀 요원의 활동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국가의 위상이 높아진 만큼 대북 첩보 수집뿐만 아니라 초국가적으로 움직이는 산업스파이, 테러 및 납치 대응 등 국내와 해외 곳곳에서 치러지는 소리 없는 전투는 더욱 격해지고 있다. 국정원 관계자에 따르면 ‘이름 없는 별’은 2000년대 이후에도 계속 새겨지고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미국 방문 때 6·25전쟁 참전용사 랠프 퍼킷 주니어 예비역 대령 곁에서 무릎을 굽혔고, 이는 한미 동맹을 상징하는 한 장면이 됐다. 다만 우리 곁에도 국익을 위한 헌신이라는 명예만 갖고 이름 없이 사라진 영웅이 적지 않다는 것도 되새겼으면 한다.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임기 4년을 넘긴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 청와대는 을씨년스러웠다. 당시 출입하던 기자들은 청와대를 종종 ‘절간’으로 표현했다. 노 전 대통령은 그해 12월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기자단 송년 만찬에서 “칭송받는 대통령은 물 건너간 것이 됐다. 역사적 평가를 받는 대통령으로 넘겨졌다”고 탄식했다. 앞서 노 전 대통령은 취임 4주년 직후인 2007년 2월 29일 열린우리당(현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했다. 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그해 2월 무렵 16%까지 떨어졌다(한국갤럽 기준). 차기 대선을 앞두고 당은 노 전 대통령과 함께 가기가 부담스러웠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탈당계를 제출한 노 전 대통령은 당원들에게 편지를 썼다. “떠난다 생각하니 너무 섭섭하여 ‘탈당’이라는 말 대신 굳이 ‘당적정리’라는 말을 써봅니다. … 임기가 끝난 뒤에도 당적을 유지하는 전직 대통령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일으킨 당에서 나가야 하는 격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열린우리당은 이날 당사에 걸려 있던 10개에 가까운 노 전 대통령 사진들을 철거했다. 당시 탈당계를 들고 여의도 당사를 찾은 대통령정무팀장이 현재 친문 진영의 정태호 의원이다. 탈당계를 접수한 사무총장은 지금 당 대표를 맡고 있는 송영길 의원. 그리고 그해 3월부터 레임덕 속에서 마지막 1년을 보내는 노 전 대통령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참모가 문재인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이었다. 레임덕에 빠진 무기력한 대통령의 참혹한 모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셈이다. 10일 진행된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4주년 특별연설’을 유심히 지켜봤다. 많은 현장 사진들 속에서 연단에 오르기 직전, 커튼 뒤에 대기하고 있던 문 대통령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입을 꽉 다물고 있는 그의 표정이 비장했다. 전 국민 앞에 서기 직전, 마지막 1년에 대한 각오를 스스로 다지는 순간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특별연설을 눈앞에 둔 4월 마지막 주 한국갤럽 조사에서 문 대통령의 지지율은 취임 후 최저치인 29%로 나타났다. 30% 아래로 내려간 것은 처음이었다. 이 여파로 대통령 지지율이 민주당 지지율보다 낮은 ‘당청 지지율 역전’ 현상이 발생했다. 임기 말 당청 지지율 역전이 고착화되는 시점을 레임덕 징후 중 하나로 본다. 지지율 격차가 더 벌어지면 당은 대통령 탓을 하기 시작하고, 여권의 자중지란이 일어난다. 대통령 탈당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노 전 대통령도 그랬다. 4·7 재·보선 패배에서 확인한 분노한 민심에, 당청 지지율 역전까지. 청와대 입장에선 죽비로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이다. 문 대통령은 이번 개각 과정에서 박준영 해양수산부 장관 후보자를 포기했다. 문 대통령이 인사청문보고서 재송부를 국회에 요청한 후보자에 대해 낙마를 결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임기 말 당청은 과거와 같은 상하 관계가 아니라 파트너십 관계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도 당의 목소리를 무겁게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특별연설에서 “모든 평가는 국민과 역사에 맡기고, 마지막까지 헌신하겠다”고 했다. 역사의 심판만 기다려야 하는 무기력한 1년이 될지, 헌신할 수 있는 1년이 될지, 모든 것은 문 대통령에게 달려 있다.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갑자기 몰아친 ‘LH 사태’ 속에 치러졌다. 더불어민주당과 청와대는 부동산 선거 바람을 차단하기 위해 ‘부동산 적폐 청산’을 꺼내 들었다. 1년 앞으로 다가온 대선 퍼즐의 한 조각을 맞춰보는 심정으로 선거를 지켜봤다.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는 민주당의 참패였다. 국민의힘 오세훈 시장은 57.5%의 지지를 얻어 민주당 박영선 후보(39.2%)를 18.3%포인트라는 큰 차이로 제쳤다. 선거는 상대가 있는 제로섬 게임이다. 상대 진영 지지층 10%를 가져오면 격차는 20%포인트 벌어진다. 여당 성향으로 분류됐던 2030세대가 야당 쪽으로 돌아서며 무게추가 확 기울었다. 문재인 정부는 2040세대의 전폭적인 지지와 기대 속에 탄생했다. 2017년 5·9대선을 일주일 앞두고 동아일보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당시 문재인 후보는 20, 30, 40대에서 각각 48.3%, 56.9%, 50.5%의 지지를 받았다.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홍준표 후보의 20대(7.5%) 30대(7.0%) 40대(7.7%),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의 20대(13.2%) 30대(11.2%) 40대(17.5%)의 2040 지지세를 압도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출범 4년 차가 마무리돼 가는 지금 2030의 표심은 반대로 향했다. 지상파 방송3사의 출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오 시장은 40대를 제외한 전 연령대에서 박 후보를 앞섰다. 특히 20대에서 오 시장(55.3%)은 박 후보(34.1%)를 21.2%포인트 차로 앞섰고, 30대에서도 56.5%의 지지를 받아 박 후보(38.7%)를 17.8%포인트 차로 눌렀다. 오 시장(48.3%)과 박 후보(49.3%)가 1.0%포인트의 격차를 보인 40대와 비교하면 2030의 표심은 4년 전과 비교할 때 확연히 달라진 것이다. 민주당이 야당이던 시절 진보 진영은 청년을 향해 “아프냐, 괴로우냐, 그러면 분노하라. 그리고 투표하라”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보냈다. 이는 정권 교체의 원동력이 됐다. 권위에 적대적인 2030의 표심을 꿰뚫어 본 것이다. 하지만 열화와 같았던 문 대통령을 향한 2030의 지지와 기대는 이제 여권에 아득한 추억일 뿐이다. 오히려 재집권을 꿈꾸는 민주당에 2030은 가장 위협적인 세력으로 떠올랐다. 2030의 분노가 과거에 볼 수 없었던 급격한 정치구도의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은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지난해 1월 반중 성향의 대만 차이잉원 총통이 대선에서 압승한 원동력도 2030이었다. 민진당 소속 차이 총통은 2019년 상반기까지만 해도 여론조사 지지율이 30%대에 그쳐 국민당 소속 한궈위 후보에게 크게 뒤졌다. 하지만 힘을 앞세운 중국의 대만 압박에 반발한 2030이 투표장으로 대거 향하면서 6개월 만에 판세가 확 바뀌었다. 2019년 11월 처음으로 반중 성향의 범민주파가 과반을 차지한 홍콩 구의원 선거도 마찬가지다. 화들짝 놀란 정치권은 앞다퉈 젊은 세대와의 소통을 강화하고 해소책을 마련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구조적 원인이 깊게 배어 있는 2030의 문제를 1년 안에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내년 대선까지 분노의 바람이 속절없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어쩌면 지금 필요한 것은 선심성 정책이 아닌 그들의 아픔에 대한 공감일 것이다. 여권에는 4년 동안 축적된 오만의 이미지와 기득권을 다 내려놓겠다는 각오와 역발상이 필요하다.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뜬금없이 “피해자님이여!”를 적는 민주당의 공감 능력으로는 2030에게 다가갈 길은 보이지 않는다.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더불어민주당 곳곳에서 걱정과 한탄의 목소리가 들린다. 4·7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나흘 앞으로 다가왔지만 여론조사 격차가 좀처럼 줄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국민의힘은 “무능과 부패를 끝내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우리더러 부패 세력이라니, LH 직원들의 부동산 투기가 과거 정부에서는 없었겠나. 더 많았을 것이다.” 민주당의 중진 의원 A는 통화에서 “하필 선거 앞두고 이런 일이 터져서”라며 이같이 말했다. 민주당이 이번 선거에서 고전하는 이유가 그의 말처럼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태와 일부 인사들의 부패 때문일까. 절반만 맞는 말이다. LH 사태는 불씨에 불과했다. 분노 게이지는 이미 위험 수위로 올라 있었다. 집값을 역대 최고 수준의 상승률로 올려놓고도 “과도한 현금 유동성과 투기 세력이 부동산 가격 상승의 원인”이라며 자신들의 잘못은 절대 인정하지 않는 정부 여당. 기회의 사다리를 빼앗긴 청년들의 분노를 향해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문” “과거부터 쌓인 부동산 적폐가 원인”이라며 책임을 회피하는 정권 핵심들. 여기에 “집 없는 임차인들의 어려운 삶을 생각해 임대료를 올리지 말라”던 김상조 전 대통령정책실장과 박주민 의원 등 일부 핵심들의 행태. 이런 모습들에 유권자들은 화가 날 대로 난 것이다. 종종 정치에선 실체보다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더 중요한 경우가 있다. 이명박(MB) 대통령 때 촛불시위도 꼭 광우병 쇠고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 아니다. 국민의 안전과 보건이 걸린 중대 이슈를 부처 간 충분한 협의, 야당과의 대화도 없이 당선인 신분이었던 이 전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그것도 미국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농장에서 웃는 모습으로 골프카트를 타면서. 여기에 “우리가 미국에서 살아봐서 아는데 미국산 쇠고기는 싼 데다 안전하다”는 식의 가르치려는 태도까지 겹치자 민심은 폭발했다. 집권 기간 4년 동안 민주당의 반복된 태도가 있다. 악재가 터지면 “터무니없는 정치 공세”로 치부했다가, 민심이 더 나빠지면 “적폐 때문이다” “국민의힘은 민주당보다 더했다”고 공격의 화살을 돌리는 것이다. 지금 민주당이 오세훈 후보를 겨냥해 내곡동 땅을 집중 거론하고 “MB 아바타”라고 부르는 것도 “국민의힘은 민주당보다 더 부패한 세력이다. 미워도 민주당을 찍어야 부패가 덜하다”는 전략이다. 근데 좀처럼 지지율 격차가 줄지 않는다. 유권자들은 부패에 화난 게 아니라 갖은 정책 실책에도 제때 사과하고 반성하지 않는 집권세력에 화가 난 것이기 때문이다. 유세 현장에서 성난 민심을 몸으로 맞닥뜨린 민주당은 뒤늦게 사과 행보에 나섰다. “무한 책임을 느끼며 사죄드린다. 간절한 초심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겠다”(이낙연 상임선대위원장) “그 원인이 무엇이든 민주당이 부족했다”(김태년 원내대표) 등 지도부는 연일 고개를 숙이고 있다. 민주당은 릴레이 사과와 반성이 막판 반전의 모멘텀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선거 이후에도 지금의 간절함을 잊지 않는 것이다. 오만 프레임에 휩싸인 민주당이 신뢰까지 잃는다면 정권 말 국정 운영과 차기 대선은 더욱 험난해질 수밖에 없다. 지금의 절박한 읍소가 선거를 앞둔 정치적 ‘읍쇼’가 되서는 안 된다.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올림픽 때 새로운 계기가 만들어지지 않겠어요?” 최근 만난 외교안보 분야 고위 당국자의 말이다. 꽉 막힌 남북, 북-미 대화의 해법을 묻자 그는 대뜸 올림픽을 화두로 꺼냈다. 교착 상태에 빠진 대화의 돌파구를 열기 위해 전 세계가 참여하는 올림픽을 외교 이벤트로 활용하려는 정부의 구상은 알고 있었지만 ‘개최 여부도 불투명한 도쿄 올림픽이라니’. 그의 답변에 맥이 살짝 빠졌다. “북한이 참여할까요?” 그에게 물었다. 예상치 못했던 답변이 돌아왔다. “베이징 올림픽도 있잖아요.” 문재인 대통령 임기 내에 어떻게든 북-미 비핵화 대화의 물꼬를 트겠다는 정부의 강박에 가까운 의지는 알고 있지만 ‘내년 2월 베이징 올림픽이라니.’ 설마 했다. 얼마 후 또 다른 고위 당국자를 만났다. 설마가 아니었다. 평소 입이 무거운 그도 베이징 겨울올림픽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다는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2022년 베이징 겨울올림픽 때 열차로 베이징을 가는 계획이 있었다. 북한 내 철로 복구가 우선 필요한데, 유엔의 대북 제재가 풀리지 않아 그건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올림픽 릴레이 대화의 의미를 강조했다. 도쿄가 어렵다면 베이징 올림픽에서 북-미가 비핵화 협상 테이블에 다시 마주 앉을 수 있도록 중재하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불씨를 되살리고…. 청와대와 정부 고위 당국자들의 시선은 이미 도쿄를 넘어 베이징을 향하고 있다. 2018년 2월 평창 겨울올림픽. 한반도기를 앞세운 남북 선수단 공동 입장,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게다가 김여정과 문재인 대통령의 만남, 그리고 이어진 4월 남북 정상의 도보다리 산책, 5월 2차 판문점 정상회담, 9월 3차 평양 정상회담까지. 숨 가쁘게 진행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긴박한 순간과 이벤트들. 문 대통령은 ‘어게인(again) 2018’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자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을 코로나19 극복의 장으로 연출하고, 미국 못지않은 영향력을 세계에 과시하려는 중국 역시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고 나설 것이다. 북한을 압박할 가능성도 있다. 놓칠 수 없는 기회다. 그렇지만 베이징 올림픽은 2022년 2월 4∼20일 열린다. 3월 9일 차기 대선을 한 달 앞둔 시점이다. 합리성, 평화에 대한 당위성보다는 감정에 편승한 진영 간 증오와 대립이 극에 달할 시기다. 정부의 의도와 관계없이 남북 대화 이벤트가 정치적 논란을 피해갈 여지는 없다.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는 이벤트를 앞세운 대화를 기피한다는 점도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해 9월 후보 시절 미국외교협회(CFR)에서 싱가포르,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을 두고 “사진이나 찍을 기회였다”고 했다. 이벤트성 협상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칫 한미 공조에 엇박자를 노출할 위험성도 있다. 2018년 평창에서 시작해 2019년 하노이 ‘노딜’까지 이어진 정부의 평화 이벤트는 막을 내릴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새로운 대북정책을 공개하면 한반도는 다시 북-미 결전의 장으로 돌아갈 가능성도 있다. 베이징 올림픽의 기회를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다. 다만 과거처럼 이벤트에 집중하기보다는 실질적인 성과에 집중할 수 있는 차분한 대화를 기획해야 한다. 과거의 대북정책을 냉정히 검증하고 다음 정부에 넘겨줄 교훈을 찾는 것에 무게를 둔 임기 말 대북정책이 필요하다. 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