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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미스터리 영화다. 각본을 쓰고 연출한 한국계 캐나다인 셀린 송 감독 설명에 따르면 그렇다. 열두 살 때 서로 좋아하던 남녀가 24년 만에 뉴욕에서 만나서 데이트하는 이야기인데도? 송 감독은 “첫 장면에서 주인공 세 사람이 등장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데, 대답 자체가 미스터리”라고 설명한다. 영화는 나영(그레타 리)과 해성(유태오), 나영의 남편 아서(존 매가로)가 새벽 4시 한 술집에서 대화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누구이며, 서로 어떤 관계인지 추측하며 수군거리는 내레이션이 깔린다. 그들이 회사 동료인지, 여행자들인지, 서로 애인인지, 만약 애인이라면 어느 쪽인지 궁금해하는 테이블 맞은편 시선 목소리다. 화면은 천천히 나영의 표정을 확대하며 빨려 들어간다. 바깥의 질문과 추측, 수군거림이 나영의 내면과 겹쳐진다. 저들은 누구야? 그건 나영이 평생에 걸쳐 의식해온 질문일 것이다. 영화는 나영과 해성의 로맨스 감정을 근간에 깔지만, 사랑을 절대화하는 여느 로맨스 공식과는 달리 ‘반드시 이뤄졌어야 할 사랑, 무조건 지켜’ 식은 아니다. 즉, 사랑과 삶을 경합시키지 않는다. 삶이 굳건히 이기는 구도다. 영화는 로맨스의 실현이 아니라, 관계와 인연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 것을 더 중요시한다. 그리고 한 인간의 정체성을 이루는 요소들을 차례대로 훑으며 대답을 찾아간다. 한국과 미국, 유년과 청년, 중년에 진입하는 시점을 교차하면서.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찾는 접근. 맞다. 이건 틀림없이 미스터리다. 여기선 저마다의 정체성과 여기서 파생되는 관계가 가장 중요한 테마다. 영화든 실제든 한 인간의 정체성이란 다양한 성분 배합이다.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은 것, 주어지거나 주어지지 않은 것. 각각의 요소가 얼마나 비율별로 뒤섞이고 혼합되느냐에 따라서 각자의 정체성이 규정된다. 그 배합의 비율이란, 돌이켜보면 늘 공교롭고도 묘한 것이다. 여기서 나영은 중산층 배경에 열두 살 때 캐나다로 이민을 간다. 나영은 해외에서 쓸 이름을 선택해야 할 때 마땅한 이름을 찾지 못하는 가운데 노라라는 이름을 부모에게서 받다시피 한다. 이는 모두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나영 혹은 노라는 자신이 오랫동안 꿈꿔온 작가로서의 삶을 위해 캐나다에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다. 예술인 레지던시에 입주한다. 선택이다. 선택과 조건이 중첩되며 삶이 구성된다. 그러나 나영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해서도, 인연이라는 의미를 남겨둔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삶이 흘러갈 때에도, 몇 겹의 인연이 쌓여서 만들어진 필연이라는 믿음. 이건 돌고 돌아 선택과 우연이 쌓여 만들어진 자기 정체성을 긍정하는 논리가 된다. 우연에도 의미가 있다고 믿으며 실패와 착오, 삶의 교차와 엇갈림에 대해서도 납득한다. 여기 나 자신은 불가피하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 명제는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모두 마찬가지다. 남편 아서가 현재 미국 사회에 안착한 노라의 삶과 선택을, 해성은 나영이 선택하지 않고 내려놓고 온 한국에서의 삶과 과거를 각각 상징한다. 그 모두 인연의 형태로 나영과 맺어져 있다. 나영은 얼마간은 한국인이고, 얼마간은 미국인이며 혼재된 정체성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지금의 삶이 무수한 ‘패스트 라이브스(Past Lives)’, 전생이 중첩된 결과라면 모든 인간은 다 얼마간씩은 혼재된 채로 살아간다. 영화는 서구권에선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윤회 사상을 가지고 와서 다층적 정체성의 감각을 일깨웠고, 이로 인해 해외 평단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아마도 나영은 오프닝 장면에서 한국에 남아 있었더라면 가능했던 삶의 형태들을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아주 잠시일 뿐이다. 로맨스조차도 나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서 받아들일 테니. 오히려 로맨스 대신 나라는 영원한 미스터리로 빠져들어 가며 속에서 계속 되묻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누구인가. 그러한 질문은 이민자의 테마만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인연 속에 흘러간다. 정체성이란 늘 유동적이다. 이러니 타인을 한 가지 정체성으로 함부로 규정해도 될 것인가.임현석 DX본부 전략팀 기자 lhs@donga.com}
영국 소설가 로알드 달(1916∼1990)이 쓴 소설 ‘찰리와 초콜릿 공장’(1964년)은 1971년 처음 영화화됐다. 로알드 달은 그 영화를 몹시도 싫어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제목. 영화는 ‘윌리 웡카와 초콜릿 공장’(국내 개봉명 ‘초콜릿 천국’)이다. 영화 제목에선 주인공 판잣집의 가난한 꼬마 찰리 대신 제과업자 웡카의 이름이 들어간다. 식품회사 퀘이커가 원작 소설에서 착안해 초콜릿 ‘웡카 바’를 만들어서 팔 참이었고, 이를 홍보하기 위해 영화 제작비 전액인 300만 달러를 댔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제품을 광고하려는 목적인 만큼, 영화 제목에도 제품명처럼 웡카가 들어가야 한다고 못 박았다. 당시 침체기였던 영화업계는 온갖 자산을 팔던 시점이라 후원인의 입김은 절대적이었다. 졸지에 웡카 영화가 된다. 달은 배역 캐스팅도 못마땅해했는데, 특히 웡카 역을 맡은 배우를 두고두고 씹었다. 비밀스러운 초콜릿 공장을 운영하는 웡카는 소설에선 장난기와 웃음기가 가득하다고 묘사된다. 반면 이 역을 맡은 미국 배우 진 와일더는 장난꾸러기보다는, 친절하되 냉소적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그는 애수에 젖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달은 와일더의 유약한 인상이 괴짜 웡카 역엔 어울리지 않는다고 봤지만, 감독의 견해는 달랐다. 초콜릿 공장에 온 아이들을 환대하다가도 그들이 무례할 때마다 악마처럼 돌변해서 골려주는 웡카라는 인물은 다층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는 원작자 의사와 무관하게 각색이 이뤄졌다. 소설에서 웡카는 아이들과의 첫 만남에서 느닷없이 토끼춤을 추는 반면, 와일더가 연기한 웡카는 첫 등장 신에서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절뚝이면서 걸어 나온다. 그러던 그가 앞으로 넘어질 것처럼 휘청이다가 앞구르기를 하자 아이들이 환호한다. 시작부터 아이들을 속이는 깜짝 공연이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속내를 알 수 없고 의뭉스러운 인물을 묘사하고자 와일더가 제안한 각색이다. 달은 이런 잡다한 각색을 인정하지 않았는데도, 영화는 개봉했다. 그는 영화가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서 TV에 나오면 그냥 꺼버렸다. 007 시리즈 ‘두 번 산다’ 각본을 쓴 그였지만, 정작 자기 작품 영화화엔 인색해졌고 영화 산업에 대해서도 냉소했다. 원작자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영화는 겨우 손익 분기점을 맞췄다. 그러나 작품의 운명이란, 인생처럼 모를 일이다. 이 인기 없던 가족 영화는 1980년대 들어 재조명된다. 당시 가정용 비디오 기기 보급과 함께 어린이 가족 영화 붐이 일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크리마스 시즌 재방송 등으로 큰 인기를 누린다. 최근 개봉작 ‘웡카’는 이 1971년작 영화의 프리퀄이다. 달 소설에서 캐릭터만 빌려오고, 스토리는 모두 새롭게 창작된 것이다. 주인공 웡카(티모테 샬라메)와 메인 캐릭터 움파룸파(휴 그랜트) 모두 1971년 영화 작품과 복장이 유사하다. 약간은 슬퍼 보이는 웡카의 표정도 해당 작을 따른다. 또 그때와 같은 노래를 부른다. 달은 웡카가 노래를 부른다는 설정도 싫어했지만, 이제 더 이상 소설만이 원작도 아닌 것이다. 작품의 운명이란 이처럼 묘하다. 이번 작에서 관중 앞에서 태연하게 공연하는 웡카 캐릭터는 소설이 아니라, 1971년 작에서 따왔다. 이는 코미디언이기도 했던 와일더의 해석이었다. 영화 웡카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중시하는 무드 역시 1971년 작과 관련이 깊다. 그 영화에선 주인공 찰리가 편모슬하이고, 엄마의 사랑이 각별하다. 소설 원작에선 아버지가 있는데도 바꾼 설정이었다. 이처럼 최근작은 소설보다 영화 원작을 취하지만, 그럼에도 원작자 달이 추구해온 작품 세계를 섬세하게 반영한다. 자기가 능숙한 줄 알지만 실은 엉망진창인 어른과 책벌레로 야유받지만 실제로는 세상사에 통달한 어린이의 대립 구도는 달의 말년 수작인 ‘마틸다’를 떠올리게끔 한다. 달은 오 헨리처럼 ‘트위스트 엔딩’(소설 막바지에 이뤄지는 반전)의 달인이었는데, 선한 얼굴을 하고서 남을 속이거나 제 꾀에 넘어가서 골탕먹는 악인들을 자주 등장시키곤 했다. 웡카 영화 속 악인인 여관 주인은 그의 단편 소설 ‘하숙집 여주인’(번역 소설집 ‘헨리 슈거’에 수록)이 연상된다. 이번 작 웡카는 원작의 결함을 보완하기까지 한다. 소설에선 초콜릿을 먹으려고 공장에 와서 일하던 움파룸파 나라 사람들이 제국주의의 희생자처럼 보였다면 최근 개봉작에선 웡카와 동등한 위상을 지닌 활극의 주역이 된다. 이쯤 하면 캐릭터도 캐릭터지만, 작품을 둘러싼 서사까지도 함께 성장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성장은 응원할 수밖에 없다.임현석 DX본부 전략팀 기자 lhs@donga.com}
영화 ‘시민덕희’는 보이스피싱 사기를 당한 시민 덕희(라미란)가 중국으로 날아가 범죄조직 총책을 잡는 이야기를 그린다. 2016년 세탁소를 운영하던 40대 주부 김성자 씨가 보이스피싱으로 3200만 원을 잃은 뒤 조직원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총책 검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야기를 영화로 재구성했다. 김 씨는 조직원과 연락하며 조직 총책의 인적 사항과 사기 피해자 명단 등과 같은 핵심 정보를 받아 경찰에 전달했고, 이를 통해 실제로 검거까지 이뤄졌다. 김 씨는 신고 후 경찰이 미온적으로 대응하기에 직접 정보를 모았다고 한다. 영화는 실화에 상상력을 보태 덕희가 보이스피싱 조직이 있는 중국 칭다오까지 날아가서 잠복하고, 범죄 조직 주소를 찾고, 감시하는 것으로 나온다. 모티브가 된 실화 자체가 흥미로워서 영화화하기 쉬운 소재처럼 보이지만 범죄물에서 완력을 쓰지 않는 40대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고, 초점을 맞춘다는 게 만만한 조건이 아니다. 여기 덕희는 범죄도시 마석도 같은 주먹이 없고, 복수의 화신 존 윅 같은 총잡이도 아니다. 그렇다고 두뇌 싸움을 할 만한 캐릭터도 아니다. 영화 제목에 시민이 들어간 것도, 내세울 게 시민이라는 것뿐이라 별 능력이 없다는 의미다. 덕희가 보이스피싱을 당한 사실을 알고 난 뒤 사기 친 조직원 재민(공명)과의 통화에서 시원하게 욕을 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가만 안 둔다고 하면 진짜 곧 상대를 으스러트릴 것 같은 마동석과 달리 덕희는 그 장면이 너무도 무력하기만 하다. 그러나 영화는 무너진 삶과 자존감을 회복하려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발버둥으로도 기어이 극을 끌고 간다. 영화 속 덕희는 욕 잘하고 막무가내일 뿐이어서 범죄조직 주소를 하나하나씩 찾아나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씩 찾아가는 동안 실마리를 찾는 느낌을 받게 된다. 덕희가 아등바등하며 피해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직접 조직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는 동안 느낄 수 있다. 자존감은 평범한 사람들의 초능력이라는 것을. 영화는 자기 삶을 회복하겠다는 마음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밝히는 데 집중한다. 그렇게 삶의 존엄과 자존감의 문제를 전방 배치하면서, 범죄 피해자가 갖고 있을 것만 같은 속성에서 벗어난다. 그러면서 사기와는 무관한 개인적인 신파에 갇히지 않는다. 덕희는 아이 둘을 혼자 키우는 엄마로 그려지지만, 영화는 거기에 어떤 이유나 배경이 있는지를 다루지 않는다. 그런 사연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 삶의 회복 그 자체가 중요할 뿐이므로, 사기로 말미암아 벌어진 사달과 피해만을 다룰 뿐이다. 이는 ‘나쁜 놈 잡는 데 이유 없다’는 범죄도시의 교훈과도 절묘하게 포개진다. 중국에 가면서 연차를 쓸 고민, 한국에 돌아와서는 쉬느니 일해야 한다고 말할 때 덕희는 꿋꿋하게 평범하다. 그리고 평범하다는 건 존엄성을 지키면서 산다는 의미다. 바보 같아서 사기당했다는 피해자 비난에도 절박한 삶이 무엇이 잘못이냐고 되묻는다.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은 칭다오의 보이스피싱 조직에 갇혀서 부득이하게 범죄에 조력하는 재민이다. 재민 역시 맞지 않고, 욕먹지 않는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 역시 자존을 지키는 삶을 우선시한다. 평범한 삶을 지켜주기 위해서 발벗고 나선 게 공권력이 아니라, 사기 피해를 입은 덕희라는 점 또한 인상적이다. 개인사를 덜어내고 범죄 피해와 가해에 대해서만 다루는 영화는 한결 가볍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범죄 피해로 무너지는 덕희를 비추다가, 재민의 연락을 받고 직접 범죄조직을 잡겠다고 마음먹는 장면까지 숨 가쁘게 펼쳐진다. 16부작 드라마를 3부부터 보는 것 같은 빠른 호흡이다. 이 점이 관객 호응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가 공감과 몰입을 이끌어내기 위해 잔인한 묘사를 가져오는 점은 호불호가 갈린다. 특히 완력으로 범죄조직을 만류할 힘이 없는 덕희는 몸을 내던지는데, 여기서의 폭력이 과하다는 평이 있다. 다만 영화 모티브가 된 실화 속에선 범죄 피해자 중 한 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도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현실이 영화 속 폭력만큼이나 잔혹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김 씨가 돈을 앞세운 총책의 합의 권유를 물리친 것도 목숨을 끊은 피해자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잔혹한 세상에도 누군가를 안쓰러워하는 마음이 있다. 그건 이 세상이 초능력이 있는 영웅들의 세상보다 나은 점이다. 임현석 DX본부 전략팀 기자 lhs@donga.com}
‘신세기 에반게리온’ TV 시리즈의 극장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국내 개봉은 이번이 처음이다. 에반게리온 TV 시리즈(1995년) 24화 이후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일본에선 1997년 개봉했으나 국내에서는 27년 만에 정식으로 소개되었다. 구작 마감 후 10년 만인 2007년부터 리부트한 신(新)극장판 시리즈의 경우 구작과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일종의 대체 현실이라, 마니아들 중에선 TV판과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만을 시리즈 원작이자 진정한 종결로 보는 이들도 적잖다. 국내 개봉은 이번이 최초지만, 일찍이 이 작품을 어떻게든 다 구해서 본 이들이 있다. 한국식 오타쿠(한 분야에 빠진 마니아)의 첫 주축이라고 할 만한 세대다. 지금 오타쿠라고 하면 방구석에서 음험하게 자기 세계에 갇힌 사람들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20년 전 한국의 오타쿠들은 달랐다. 작품을 구하려고 발품을 팔고 정보를 수집하는 활력적인 사람들. 내 기억 속 세기말 혹은 2000년을 전후로 한 새천년 오타쿠들이다. 이 무렵 한국의 오타쿠들은 음지로 돌아다니는 작품들을 구하기 위해 비록 낯을 가리는 성격일지언정 바깥에서 사교할 수밖에 없었다. 정보에 빠삭한 친구에게 접근해야 했고, 어떤 테이프가 돌고 있는지 안테나를 바짝 세워놓아야만 했다. 잡지 부록으로 나눠주던 애니메이션 설정집을 구하기 위해 서점을 수시로 들락거렸다. 태동하던 온라인 문화에도 누구보다 개방적이면서 적극적이었다. 평소 만화 취향이 비슷하지만 친하지는 않았던 옆 반 아이가 희귀작을 구했다는 소문을 들으면, 먼저 인사를 건네며 자신을 소개할 정도의 비즈니스 매너가 있어야만 그 시절 오타쿠였다. 그럼 옆 반 아이도 복된 소리 전한다는 마음으로 같이 영상을 보는 인류애를 품어야만 참된 오타쿠였고. 그러다가 그들은 해적판을 판다는 어느 역 근처 굴다리로 가는 모험에 함께하기도 했을 것이다. 굴다리의 음험한 분위기에 흠칫 놀라면서도,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발을 내디뎠다.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랬던 시절이었다. 중2병을 앓으며 에반게리온을 봤으며, 지금도 에반게리온 얘기라면 밤새도록 이야기할 수 있는 동시대 오타쿠 손지상 서울웹툰아카데미 멘토는 “그 무렵은 사회성이 없으면 오타쿠를 할 수 없던 시대”라며 “온갖 과정을 거쳐 어렵게 구한 작품을 보기에 앞서 ‘이 작품을 구하고 접한 나, 칭찬해’ 정서가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그렇기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은 한국 오타쿠들이 특히 좋아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당시 어둠의 경로 내지는 일본에 사는 친척 등을 통해 어렵게 작품을 구하고 접했던 한국 오타쿠들은 손 작가 지적처럼 ‘나 칭찬해, 나 대단해’ 정서 속에 작품을 올려치기 하는 경향도 없잖아 있었다. 기자도 TV판 시리즈 마지막을 보면서 훌륭한 작품이라며 훌쩍이던 생각이 난다. 지금까지도 용두사미의 대명사처럼 불리며 조롱받는 TV판 갑분싸 ‘오메데토 엔딩’(축하해 엔딩·등장인물들이 주인공 주변에서 박수를 치며 축하하며 끝내는 엔딩)도 더할 수 없이 훌륭해 보였다. 감동을 받으려고 이미 준비가 다 돼 있는 상태로 에반게리온을 접했고, 턱없이 감동했다.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이 TV판 엔딩의 미흡한 마무리를 수습하기 위한 작품이라는 설명을 듣고선, 그게 미흡했던가 돌이켜야 할 만큼. 에반게리온 TV판에서 종결짓지 못한 기획 의도와 진짜 서사를 알려고 극장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을 보려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다. 일본 전국 고교생 종합체육대회 토너먼트 2차전을 다룬 극장판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어느 팀이 이겼는지 알려고 보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매트릭스로 철학 하기, 에반게리온으로 철학 하기가 유행이던 2000년대 초반 지적 탐구의 시대를 떠올리며 이제야 에반게리온 전체를 뒤늦게 배우러 가거나, 21세기 들어 신극장판을 통해 새롭게 접한 뒤 구작의 감동을 뒤늦게 접해 보려는 관객은 있을지도. 아니면 해적판 같은 걸로 처음 접했던 세대들이 다시 정당하게 값 치르고 뒤늦게 작품에 공식적으로 경의하려는 목적이거나. 그렇다면 탑건, 슬램덩크를 거쳐 에반게리온까지. 이젠 극장은 서사를 보는 곳이 아니라, 자기 성장 서사를 완성시키는 곳이 돼 가는 것은 아닐까. 상영에 들어가기 전, 극장이 어두워질 때 같은 희귀작을 같이 보던 그때 친구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른인 척하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어둠 속이 꼭 굴다리 같아서. 임현석 DX본부 전략팀 기자 lhs@donga.com}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1952∼2023)의 마지막 연주는 재작년 9월에 촬영됐다. 그가 온몸으로 전이된 암과 투병 중이던 때다. 굽은 등, 옴팍한 볼, 야윈 손가락에서 이미 병세가 완연해 보인다. 죽음을 예감한 이의 마지막 연주. 자리를 청한 건 사카모토 본인이다. 사카모토는 2020년 12월 11일 암으로 인해 이대로 두면 살 날이 6개월뿐이라는 통보를 받는다. 그럼에도 사카모토는 바로 다음 날 온라인으로 전 세계에 송출될 솔로 콘서트에 예정대로 나선다. 그는 스태프들에겐 시한부 통보를 받은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그날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얼굴로 담담히 연주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죽음을 머릿속에서 떨쳐낼 순 없었고, 자신의 연주를 썩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 완벽주의자는 생각했다. 한 번 더 납득할 수 있는 연주를 하고 싶다고. 사카모토는 자신의 스완송(Swan Song·최후의 작품 내지는 활동)을 완성시켜줄 사람으로 영화감독 소라 네오를 찾아간다. 소라는 자신의 아들(어머니의 성을 따른다)이다. 아들은 마지막 연주를 찍기로 승낙하면서 연주할 곡 목록부터 정해줄 것을 요청했고, 사카모토는 음악가로서의 삶을 관통하는 스무 곡을 미리 선별한다. 연주 장소는 사카모토가 일본에서 가장 좋은 소리를 내는 곳으로 여긴 ‘NHK 509 스튜디오’. 촬영은 7일간 이뤄졌으니, 하루에 대략 세 곡씩이다. 곡마다 2∼3번씩 테이크. 소라 감독은 사카모토의 마지막을 담은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이하 오퍼스)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으로 열한 번째 곡 ‘통푸(Tong Poo)’ 연주 장면을 꼽는다. 그 장면에서 사카모토는 연주 안에 젊은 날의 작의를 담아내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하지만 도무지 손이 받쳐주질 않는다. 몸이 쇠한 그는 악보대로 타건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럴수록 스튜디오에 설치된 세 대의 4K 카메라는 사카모토의 표정과 손을 파고든다. 사카모토는 거의 울먹이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사카모토의 팬이라면 하필 그가 어려워하는 그 곡이 통푸라는 게 저릿할 수밖에. 사카모토가 마지막 연주를 위해 선별한 스무 곡이 각 시절을 상징한다면, 통푸는 사카모토의 청년기에 해당한다. 한때 그는 백남준의 전위 예술과 영화 문법을 파괴하는 장뤼크 고다르의 영화에 심취했다. 고다르의 영화 제목 ‘동풍’(東風·일본식 발음은 통푸)과 ‘중국 여인’을 자신의 음악 여정 중 초창기에 몸담은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YMO) 곡 제목으로 가져왔을 정도. 고다르를 의식하며 작곡한 통푸는 젊은 사카모토의 미래 선언문 같기도 하다. 1978년에 무기적이고도 단속적인 기계음을 중심에 놓고 만든 이 곡을 듣고 있노라면, 그가 자신의 전도유망함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점이 매우 강하게 와닿는다. 그는 고교 1학년 때 쓴 곡으로도 도쿄예술대 작곡과에 합격할 만하다고 평가받은 천재 아니던가. 그는 1983년 YMO 해체 이후 영화 음악가이면서 배우, 모델로서도 명성을 쌓는다. 그러면서도 피아노 연주자 커리어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피아노 독주에서도 통푸는 포함됐는데, 원곡처럼 빠른 템포로 어레인지했다. 여전히 음은 조밀하고, 틈을 허용하지 않는다. 젊은 시절의 연주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마지막 연주에서 통푸는 다르다. 그는 간신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한 발씩 나아갈 때마다 음을 아주 깊숙한 심연으로 떨어트리면서다. 소라 감독은 힘에 부친 사카모토를 그대로 담았다. 소라 감독이 가장 인상적이라고 말할 때, 그건 사카모토의 젊은 날과 말년의 교차를 뜻하는 것이다. 오랜 시간을 거친 뒤 한계에 직면한 인간이 거기에 있다. 사카모토가 한계 속에서 분투하는 장면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내면과 회한까지도 넘겨 보게끔 한다. 사카모토가 숨을 고르며 연주를 이어가는 동안 음 사이는 넓어진다. 그리고 이는 곡과 곡 사이에 있는 여백과도 포개진다. 그 진공 속에선 낮은 기침 소리나 흐느낌, 벅찬 숨소리까지도 음악이 돼서 뒤섞인다. 그것은 벅차기도 애처롭기도 해서 도대체 음악이란 무엇이기에 이렇게까지 전념하고 있느냐고 묻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 질문에 사카모토는 말없이 연주를 이어간다. 영상 속 그는 평생에 걸쳐 대답하고 있다. 임현석 DX본부 전략팀 기자 lhs@donga.com}
올해 흥행과 화제 모두 잡은 영화엔 공통점이 있다. 주인공이 불의한 시스템 속에서 혼자 애국한다는 것. 올바른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불의를 한 번에 뒤집는 초인에 대한 갈망이 담겼다는 점이다. 마블 영화 속 애국자 히어로 ‘캡틴 아메리카’에 비견할 만한 ‘캡틴 코리안’의 시대랄까. 올해 1000만 관객을 넘은 두 영화 ‘범죄도시3’와 ‘서울의 봄’이 그렇고, 개봉 나흘 만에 100만 관객을 모으며 흥행 가도를 밟고 있는 ‘노량: 죽음의 바다’ 역시 불의한 세상에서 외롭게 애국하는 한국형 히어로 공식에 충실하다. 코로나19 엔데믹(풍토병화)과 물가 및 영화 티켓 값 인상으로 인해 극장을 찾는 인구가 크게 줄었는데도 화제 몰이에 성공한 몇 안 되는 영화들이다. 이들 영화 속 한국형 히어로들은 누구보다도 철저한 국가관에 입각한 원칙론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범죄도시3에서 주인공 형사 마석도(마동석)는 범죄 조직이 서울 한복판에서 마약을 판매하고 있다는 걸 알고 말한다. “나쁜 놈들은 잡아야 돼.” 수사 방식이 무리하다는 상부 지적에도 초인적인 완력을 믿고 홀로 범죄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악인들을 기어이 쥐어팬다. 범죄도시 시리즈 속 “나쁜 놈들은 잡아야 돼”는 시대를 넘나들며 변주된다. 서울의 봄에선 12·12 군사반란 당시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을 모티브로 한 이태신(정우성)의 입을 통해서도 나온다. “내 조국이 반란군한테 무너지고 있는데 끝까지 항전하는 군인 하나 없다는 게 그게 군대냐.” 여기 국가관이 철저한 원칙론자는 시시각각 전세가 기울어지는 가운데서도 고군분투하며 기세를 팽팽히 맞춰 놓는다. 연말 대작인 노량에서도 이 대사는 반복된다. “이 전쟁을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 이순신(김윤석)은 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왜군을 끝까지 쫓아 섬멸하겠다는 의지를 다진다. 그러고 보면 한국형 히어로들은 국가 시스템 내지는 세상과 불화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이들은 모두 내부의 적으로 인해 발목이 잡혀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범죄도시 시리즈에선 상부가 무리한 수사라며 마석도를 말리기도 하거니와, 3편에선 아예 경찰이 범인이다. 서울의 봄에서도 결코 멈추지 않을 것만 같던 이태신에게 제동을 거는 것은 결국 상부다. 노량에선 진린이 명나라 황제에게 하사받은 칼로 항전을 결사하는 이순신을 겨누면서까지 전투를 만류하는 장면이 들어간다. 임금 선조가 왜 아직도 이순신은 고니시 유키나가를 잡지 못했느냐고 책망하자 신하 윤두수가 이순신이 공적을 세우지 않으면 오히려 잘됐다고 고하는 장면도 있다. 이들 영화 모두 상황과 원칙이 충돌할 때, 자신을 멈춰 세우려는 세상과 이를 돌파하려는 원칙론자의 대립을 통해 극을 끌고 간다. 애국 영웅 캡틴 코리안에 열광하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원칙 없이 상황에 따라 부화뇌동하는 세상, 자기 진영에 따라 진실도 다르게 취급하는 세상에서 그저 원칙과 본질만을 추구하는 마음을 영화에서라도 찾고 싶은 것 아니냐는 해석이 가능해 보인다. 진영과 조직 논리에 상관없이 본질만을 향해 가는 올곧은 이들이 그만큼 현실에선 귀하다는 것이다. 대중은 영화를 통해 불의한 세상을 극복할 상상력을 얻고, 올바른 세상에 대한 비전을 얻는다. 혹은 잘못된 현실에 대한 대리만족으로서 영화를 소비한다. 영화란 언제나 한국 사회의 거울이었지만, 최근엔 그러한 경향이 더욱더 뚜렷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올바른 세상에 대한 비전을 의리로 똘똘 뭉친 군대와 경찰 조직의 초인적 영웅상에서 찾고 열광하는 심리가 무엇인지도 궁금해진다. 한국 사회가 불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여전히 초인적 메시아를 갈망해서? 매력적인 서사를 가져 한때 초인처럼 보이던 정치인들이 권력을 쥐자마자 그저 비루한 욕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걸 보고도? 아 참, 이들 영화의 또 다른 공통점. 모두 영웅담을 다루지만, 관념적 영웅주의에 대해서 동시에 냉소를 심어 놓았다는 점이다. 결국 동료의 조력으로 퍼즐을 풀어가는 마석도, 전두환을 모티브로 한 전두광의 대사(“인간은 강력한 누군가가 자기를 리드해 주길 바란다니까”),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인간적인 마음을 부각하고 전장을 왜군과 조선군 일개 병졸의 시선으로 따라가는 노량 속 연출까지. 불의를 일소하는 영웅을 기대하는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을 다독이면서도 동시에 냉소하는 표정이 영화에서 동시에 스친다. 올해 영화는 한국 사회 그 자체가 됐다.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1979년 12월 12일 밤 10시 조금 넘은 시각. 한 무리의 군인들이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사(현 일민미술관 건물)에 들어섰다. 수도경비사령부(수경사·현 수도방위사령부) 마크를 단 군인들이 총기를 들고 각 층마다 진입해 창문을 열고 밖을 향해 사격 자세를 취했다. 군인들은 1층과 옥상을 수시로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무전 교신을 했다. 새벽 3시경 ‘병력을 이동시키라’는 무전 연락을 받은 뒤 수경사 병력들은 철수했다. 새벽 4시경 이번엔 공수부대 병력이 동아일보사에 진입했다. 먼동이 틀 무렵인 6시 반, 또 다른 병력이 진입한다. 그날을 떠올리던 동아일보 기사(1987년 11월 21일 9면)는 이렇게 덧붙인다. “공수부대는 수경사 병력으로 교체됐으나 이들은 처음 왔던 수경사 병력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군인들이었다.” 서울 한남동에서 총소리를 들었다는 시민 전화를 받고 현장 취재에 나간 기자들과 회사에 소집된 기자들은 급변하던 그날 상황을 각각의 역사적 현장에서 지켜봤다. 그리고 13대 대선을 한 달여 앞둔 1987년 11월 특집 연재 기획 ‘12·12 수수께끼’(1987년 11월 14∼24일)를 통해 상당 부분 베일에 가려져 있던 그날의 세부를 까발렸다. 그때 기록을 보면 지금도 서늘하게 느껴지는 구석이 있다. ‘유신통치 기간 중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비서실 지침에 의해 움직인 관습에 젖은 행정부처는 물론 사법부까지도 계엄 업무와 관련이 없는 일반 소관 업무조차 계엄사령부에 세부 지침을 요구하거나 지침이 없다는 이유로 직무를 정상적으로 집행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이처럼 힘의 행사를 요구받기 시작한 군 조직 내부에서 주도권을 잡고자 하는 파워 게임이 전개되는 현상은 권력의 속성상 필연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중략) 국가 위기 상황에서 군이 근본 임무에 충실치 않고 실력자끼리 힘의 대결을 벌이다 민주화를 8년이나 늦어지게 한 사건이라는 역사적 심판도 면할 수 없다.’(1987년 11월 23일 5면) 여기서 기사는 12·12 군사반란이 권력의 속성을 드러내고 민주화를 늦춘 사건이라는 의의를 중시한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이들 각자의 대의나 욕망은 기사에선 모두 의견이자 주장으로만 처리된다. 그리고 어떤 주장이나 의견도 역사적 심판(민주화를 늦어지게 한 사건)이나 의의를 넘어설 순 없다. 기사는 증언을 최대한 수집하되 진실은 대립하는 의견 속 어딘가쯤에 위치한다고 여긴다. 예컨대 최규하 당시 대통령을 두고선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연행 재가 요청을 물리친 것은)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의견과 “정승화 총장이 12월 9일 급박하게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전보 인사를 대통령에게 건의했지만, 별 조치 없이 48시간을 끌었다”란 김치열 전 법무부 장관 비판이 상존한다는 점을 당시 기사는 밝히고 있다. 우유부단해 실기했다거나 군 실세의 재가 요청을 물리친 강골이라는 상반된 평가 중간 어디쯤 진실이 있을 것이다.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되, 역사적 의의를 무겁게 여기는 것. 또 반대로 결론을 엄연하게 여기되 동시에 역사 주체들의 의도와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는 것. 냉정한 역사 인식은 이 사이를 오가는 것이어야 한다. 12·12 군사반란 당일 긴박한 시간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은 팩트에 기반한다지만 캐릭터를 명확하고 단순하게 설정해, 많은 부분 상상력에 기댄 의견임을 숨기지 않는다. 그동안 12·12 군사반란에 대한 방송 재연극이 다수 있었는데, 이전과는 다르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그동안의 재연이 대부분 신군부 세력이 어떻게 권력 획득에 성공했는지를 조명하는 데 집중했던 반면 이번엔 진압군의 실패 과정에 초점이 맞춰지며 중심축이 옮겨갔기 때문이다. 기존 서사 중심축을 흔들기 위해 영화 편집은 훗날 신군부 세력과 반란을 진압하는 육군본부 지휘체계를 빠르게 오가며, 진영을 교차하는 것만으로도 팽팽한 기싸움이 느껴지게끔 한다. 영화는 주요 인물의 동기를 대의와 욕구로 단순하게 처리하는데, 이 점은 역사를 납작하게 만든다는 비판과 서사성을 끌어올려 극 자체의 몰입감을 높인다는 평가가 공존할 만하다. 충실한 재연이라는 측면만 놓고 보면 드라마 ‘제5공화국’ 등 기존 재연극에는 못 미치지만 역사적 사실에 대한 환기라는 면에선 호소력이 있다. 12·12 군사반란을 다룬 다른 재연극들이 대개 5공의 종말까지 다루면서 권력 앞에 의리란 덧없다는 교훈까지 나아가는 것과 달리, 영화는 그저 권력욕이 비루하다고 보여주는 쪽에 가깝다. 정말이지 권력이란 무엇일까. 서울의 봄을 비롯한 숱한 해석들과 여러 관점 속에서 전체적인 그림을 맞춰보고 싶어진다.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그리스 신화에서 명계를 다스리는 죽음의 신 하데스는 로마 신화로 건너오면 플루토(Pluto)가 된다.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시리즈 ‘플루토’는 죽음의 신을 자처하는 악당 로봇 플루토와 어린이 로봇 아톰의 대결을 그린다. 아톰? 맞다. 그 ‘우주소년 아톰’이다. 애니메이션 만화 원작은 ‘20세기 소년’ ‘몬스터’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우라사와 나오키 작이다. 데즈카 오사무(1928∼1989)의 유명 만화 아톰 시리즈 중 ‘지상 최대의 로봇’(잡지 기준 1964년 작) 편을 리메이크했다. 만화 플루토는 데즈카 원작에서 설정된 주인공 아톰의 출생연도인 2003년 연재를 시작(2009년 종료)했다. 연재 시기를 부러 아톰 출생연도에 맞춘 것. 만화를 통해 로봇과 인간의 관계를 일찍이 사유한 데즈카 감독에 대한 헌사 의미가 담겼다. 애니메이션 플루토도 기본 스토리 골격은 리메이크 대상작(지상 최대의 로봇)을 따른다. 데즈카 작에서 중동의 한 왕국 술탄이 사치로 인해 왕좌에서 쫓겨나고 이에 대한 분풀이로 악당 로봇 플루토를 개발해 아톰을 비롯한 지상 최강의 로봇 7대와 싸우게 한다. 플루토는 최강 로봇들을 하나씩 쓰러뜨린다. 원작인 지상 최대의 로봇 편에서는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은 로봇이 등장한다. 희생당한 친구(브란도)와의 우정을 떠올리며 복수를 다짐하는 로봇(헤라클레스), 그와의 전투 후 죽기 직전인 플루토를 살려준 채로 떠나는 아톰, 플루토를 이길 힘이 있지만 어린이를 구하려다가 뒤를 잡혀 죽는 로봇(엡실론) 등이다. 플루토 역시 아톰을 유인하기 위해 아톰의 여동생 우란을 납치하고서 죄책감을 느끼는 것으로 그려진다. 반면 술탄과 그를 추종하는 박사는 플루토를 다그치며 전투에서 지면 자폭하게끔 설계한다. 작품은 묻는다. 누가 더 인간적인가? 인간적이라는 건 무엇인가? 만화는 인간만을 주체에 두는 무성의한 이분법과 도식을 비튼다. 우라사와도 이 점에 끌렸으리라. 플루토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이 사유를 증폭시킬 정교한 세계관을 만든다. 인공지능(AI)과 기계공학이 고도로 발달해 인간형 로봇이 보편화된 미래. 로봇인권법에 따라 로봇들 역시 인격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며 인간과 같이 살아간다. 로봇을 증오하는 인간과 그런 증오심마저 학습해 인간에 한층 더 가까워진 로봇이 출현한다. 로봇 아톰과 로봇 형사 게지히트, 플루토는 모두 고도로 진화해 인간을 닮았다. 그들은 악인과 선인 모두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1960년대 아톰 원작과 달리 플루토는 인간성 해석에 더 집중하는 서스펜스 스릴러다. 애니메이션에서 인간은 증오로 인해 스스로 종말을 향해 간다. 증오하는 것도 인간이고, 증오를 끊어낼 힘이 있는 것도 인간뿐이다. 아톰의 재해석 역사를 보는 것도 흥미롭다. 1964년 데즈카 작 지상 최대의 로봇은 민족주의적 성향이 다분하다. 이란으로 추정되는 한 중동 국가에서 만든 로봇이 지구 전역을 돌며 각국 대표 로봇들을 각개 격파하다가 일본 대표 로봇 아톰에 가로막힌다는 스토리는 미국인 레슬러를 때려눕히는 역도산의 프로레슬링 쇼처럼 보인다. 강한 일본이 패전 후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스토리로도 해석되는 것. 플루토와 싸우는 최강 로봇 7대 중엔 미국산이 없다. 1960년대 이란은 친미 국가였다. 플루토 머리에 달린 두 개의 뿔은 커다란 두 개 귀를 단 디즈니 만화 캐릭터와도 닮아 보인다. 플루토는 플루토늄, 우란은 우라늄, 아톰은 아토믹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전후 트라우마도 드러난다. 단, 플루토를 절대 악으로만 그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훗날 리메이크를 통해 풍요롭게 해석할 여지를 남긴다. 만화 플루토가 나온 2003년, 지상 최강의 로봇들이 로봇 무기화를 단행한 페르시아 왕국을 단죄하기 위한 다국적군에 참여했다는 설정 등은 이라크전쟁을 떠올리게끔 했다. 선악으로 도식화하는 서구 패권주의에 대한 반발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민족주의 해석,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풀이되더니, 올해 공개된 애니메이션은 AI 시대와 중동 갈등 와중에 공개돼 공존과 증오 극복을 화두로 한 작품으로도 해석되고 있다. 트라우마에 갇힌 일국 민족주의에서 증오를 극복하는 보편성 추구로 나아가는 재해석 과정이 의미심장하다. 희망을 생각해 보게끔 한다.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밝힌 제작 기간은 10년,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작화감독 중 한 명이자 지브리 출신 가와구치 도시오가 감독을 맡았다. 시리즈는 총 8개 작품 각 1시간 분량이다.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공포영화의 핵심 공식. 세상에는 꼭 하지 말라는 일을 하는 이들이 있고, 영화에서 이들은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 왜 금기를 넘는가? 인간은 어리석기 때문이다. 왜 어리석은가? 인간은 욕망하기 때문이다. 무슨 욕망? 좋은 공포물이라면 몇 단계를 거쳐 마지막엔 이 질문 앞에 도착한다. 여기 지금의 욕망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공포물 ‘톡 투 미’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린 너무 외롭다고. 그래서 우린 가끔 너무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된다고. 영화 톡 투 미는 90초짜리 쇼트폼 동영상 챌린지에 몰두하는 젊은이들을 비춘다. 이들은 소통을 즉각적인 동영상 소비로 대신한다. 이 시대에 소통이란 ‘관종’으로서 소비되거나, 감정을 유발하는 도구로서 대상을 호출하는 것을 의미할 뿐, 여기 누군가를 이해하거나 누군가에게서 이해받고자 하는 마음은 해소되지 못한 채 깊은 갈증만을 남긴다. 목마른 자, 기꺼이 플랫폼 시대의 관종이 된다. 영화 속 엄마를 잃은 17세 소녀 미아는 심한 우울증으로 인해 수시로 손톱을 만지작거리는 아이다. 미아는 외로움 속에 아버지를 떠나 친구 제이드 집에서 살다시피 한다. 어느 날 미아는 제이드와 참석한 한 파티에서 또래 사이에서 유행하는 90초 빙의 챌린지 톡 투 미 의식을 치른다. 미아가 또래들과 어울리려는 마음으로 자진해서 의식에 참여한 것. 기꺼이 스스로 온라인 동영상 속 소비 대상이 된다. 미아는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박제 손을 잡고 귀신을 부르는 주문(“톡 투 미”)과 귀신을 몸으로 불러들이는 주문을 외고 빙의 체험에 돌입한다. 친구들은 스마트폰 동영상으로 미아의 신비 체험을 촬영하다가 그 이상을 지나면 귀신이 붙는다는 90초를 지나서 가까스로 미아와 박제의 손을 떼어낸다. 미아는 그날 의식 이후 이상한 환영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번엔 제이드의 집에서 치러진 심령 파티. 제이드의 동생 라일리가 빙의 체험을 하던 중 미아의 엄마가 몸에 붙은 것처럼 행동한 뒤 발작을 일으키고 자해하는 모습을 본다. 미아는 엄마가 죽은 이유를 찾고, 귀신에 붙들린 라일리의 영혼을 구해내겠다는 마음을 품지만 곳곳에서 함정과 마주친다. 영화는 플랫폼 소비의 취약성과 현대적 욕망을 정확히 들여다보았다는 반응을 이끌어냈다. 우울감 속에서 호러를 발견했다는 호평 속에 세계 최대 영화 비평·리뷰 사이트인 ‘로튼 토마토’에서 토마토 미터(신선도 지수·긍정적 평가를 내린 사람의 비율)는 94%(12일 기준)에 이른다. 영화 내용만 들여다보면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지 말고, 위험한 장난은 하지 말라는 어른들의 경고를 오컬트적으로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엔 그러한 금기도 새롭게 해석된다. 여기서 친구들은 돌아가면서 영상을 촬영하고, 온라인에 업로드하면서 놀이 문화에 심취하는 이들로 그려진다. 타인에게 주체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 대상으로서 소비하는 놀이는 결코 서로를 이어주지 못한다. 라일리가 자해 소동을 벌이고 경찰이 집에 찾아오자 책임 피하기에 급급하다. 빙의 의식에 참여한 이들이 이상 행동을 벌이고, 촬영본에 대해 지워 달라고 친구들에게 사정하는 모습을 통해 영화는 스스로 주체가 되지 못하는 이들이 결국 돌고 돌아 공포에 사로잡힌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타인을 대상으로서 소비하지 말고, 주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소비되지도 말라는 것. 이 영화의 메시지다. 타인과 연결되고 싶더라도 그 주체의 자리는 항상 나여야 하며, 타인의 욕망 역시도 주체의 자리 위에 놓아주어야 한다. 누군가와 어울리더라도(그게 귀신이라고 해도), 자신을 내어주는 방식이어선 곤란하다. 그러니 오해하지 말 것. 외로움과 이에 대한 해소라는 욕망 자체는 죄가 없다. 인간이 존엄하다면 욕망도 마찬가지일 터. 영화를 보면서 올해 일본 아쿠타가와상을 받고 최근 한국에 번역된 소설 ‘헌치백’이 절묘하게 떠올랐다. 중증 장애인인 소설 속 주인공은 자기 욕망이 얼마나 엄연한지 받아들이면서 자신을 대상이 아닌, 주체의 자리에 놓는다. 욕망을 바라보는 영화와 소설 두 시선을 교차하며 살피는 것도 흥미롭다.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윤곤강 시·비평 전집(소명출판) 윤곤강 시인(1911~1950)의 문학 활동을 정리한 ‘윤곤강 시·비평 전집’이 출간됐다. 1911년 충남 서산 태생인 윤 시인은 1928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0년 일본 센슈대학에서 법철학을 전공하던 중 1931년 비판 7호에 시 ‘녯성터에서’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그는 신석초, 김광균, 이육사 등 주요 문인들과 시 전문 동인지 ‘자오선’(1937)을 발간하는 등 당대 문단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해방 이후 해방기념시집 ‘횃불’(1946)에 참여했고 1948년에는 시집 ‘피리’, ‘살어리’와 비평집 ‘시(詩)와 진실(眞實)’을 펴냈다 윤 시인은 특정 문예사조에 매몰되기보다는 당대 담론을 폭넓게 용인한 시인으로 평가된다. 한국문학이 근대 담론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고 그 방식에 대해 고민하던 1930년대 문단에 등장해 리얼리즘·모더니즘·전통주의 등 다양한 층위의 문학 활동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시론을 펼쳤다는 평도 따라 붙는다. 해당 문집은 ‘윤곤강 문학기념사업회’가 기획해 출간됐다. 해당 전집 출간에 맞춰 이달 3일 오후 5시 서울 종로구 사간동 출판문화회관에 출판기념회가 열린다. 임현석 기자 lhs@donga.com}
일본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82)는 은퇴 선언이 잦은 감독이다. 최신 극장판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무려 네 차례의 은퇴 번복 끝에 나왔다. 최신작을 두고 언론에서 나오는 혼란스러운 수식어(사실상 마지막 작품, 새로운 시작, 복귀작, 이번엔 진짜 은퇴작일지도…)는 앞선 이력 때문이다. 첫 은퇴 선언은 1997년이다. 그는 당시 극장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를 만든 뒤 개봉에 앞서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의 초기 극장판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년)의 주제의식을 잇는 작품으로 구상에만 16년, ‘붉은 돼지’(1992년) 이후 5년 만에 내놓은 극장판으로 감독 사상의 집대성 느낌이 강했던 터라 은퇴 선언이 거장의 결기처럼 여겨졌다. 해당 작이 1400만 명 이상 관객을 동원하며 일본 극장가 관객 기록을 갈아치운 가운데 50대 감독의 이른 퇴장을 받아들일 수 없던 팬들 성화로 그는 이듬해 은퇴를 철회했다. 그러나 다음 작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년)을 내놓으며 재차 은퇴 선언. 그러다가 당초 기획만 맡기로 했던 2004년 작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선 직접 감독직을 맡으며 복귀. 다음 작 ‘벼랑 위의 포뇨’(2008년)를 제작 중 또 은퇴 선언, 다시 복귀. 가장 최근 은퇴 선언은 10년 전이다. 장편 극장판 ‘바람이 분다’(2013년) 발표 당시 미야자키는 기자들에게 “또 말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번엔 진짜 은퇴다”라고 발언했다. 본인도 머쓱했는지 말한 뒤엔 멋쩍게 웃었다. 그동안 그의 은퇴 번복은 특유의 완벽주의 성향과 경영상 이유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은퇴 선언과 무관하게 매일 회사에 출근해 오던 그로선 뒷방 신세를 견디지 못하고 답답한 마음에 결국 복귀하는 패턴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또 그는 흥행 실적이 상대적으로 다소 부진했던 경우(벼랑 위의 포뇨) ‘잘 팔리는’ 감독으로서 실적을 만회하겠다는 마음가짐을 밝히며 복귀하기도 했다. 흥행과 작품성을 보장할 수 있는 진짜 후계자가 나오느냐가 관전 포인트가 됐다. 그땐(아쉽긴 해도) 미야자키도 진짜 내려놓겠지 하고 말이다. 그러나 전작 ‘바람이 분다’부터 이런 시각이 달라졌다. 미야자키가 이전 작품들을 미진하게 여기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쓰겠다는 열의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 자신의 이야기를 끝내지 못한 것이다. 그는 최근 들어 신화적 세계관을 덜어내면서 보다 직접적인 형태로 자신의 어린 시절 무의식을 지배했던 이미지와 그 근원에 대해서 풀어놓는다. 그 과정에서 미야자키 이전 작품들에 녹아들어 있는 생태주의와 반전·평화주의는 모순적인 배경 위에 세워져 있다는 사실이 선연해진다. 예컨대 전작 ‘바람이 분다’는 평화를 바라면서도 전쟁에 사용되는 전투기에 매혹된 어린 시절의 향수가 강하게 녹아들어 있다. 그거 모순 아니냐는 질문에 노감독은 당시 인터뷰에서도 선선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평화주의와 향수를 오가다가 결국 우울로 이어지는 해당 작품의 서사는 느슨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다. 그는 그 작품만으론 자신의 어린 시절을 지배한 기억과 감정을 충분히 풀어내지 못했다고 느꼈으리라. 그는 자전적 성격이 강한 최신작에서 모순을 스스로 끄집어 낸다. 군수공장 공장장으로 일하던 아버지라는 실제 자신의 생활 배경을 소환한다. 세계가 무너진 이후에도 살아남아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과 과거 정체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번 작은 과거에 대한 향수와 환멸을 동시에 품는 실존에 대해 미야자키가 그 모습대로 인정하고 다음 스텝으로 가겠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제 관건은 어떤 세계를 만들어갈지 그 구체성에 달렸다고 말하려는 것일까. 그 점에서 의미심장한 것은 이 세계에서 있었던 일을 잊느냐, 기억하느냐가 주인공 마히토에게 달려 있다는 점이다. 미야자키에게 천착해 온 서브컬처 평론가 손지상 서울웹툰아카데미 멘토는 “결국 미야자키는 자신의 정체성과 모순을 직시한 뒤 ‘나는 이렇게 살 것’이라고 대답한 것이며 이는 제목에 숨겨진 진짜 의미일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번 작은 미야자키 작품 속 소녀 이미지가 모성과 연결돼 있다는 그동안의 비평 분석에 대해 ‘히미’라는 캐릭터를 통해 직설적으로 화답하는 점도 인상적이다. 미야자키가 유년의 의미를 명확하게 인식하게 된 것일까. 그럼 이제 그도 어른이 되는 것일까. 그는 또 작품을 내놓겠지만, 적어도 그의 유년 이야기는 종지부를 찍었다. 어른이 되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질문을 던져놓고선.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전 카이로 특파원 lhs@donga.com}
팔레스타인 지역 분쟁을 부추기는 요인들이 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서 벌어진 이스라엘과 아랍 세계의 구원은 차치하고서라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 강경파들은 갈등을 조정하기보다 도모하는 방식으로 이익을 취하는 구조가 공고화됐다는 점. 폭력과 갈등은 되풀이된다. 이 폭력의 악순환을 해부한 작품이 2005년 스티븐 스필버그 연출작 영화 ‘뮌헨’이다. 영화는 1972년 독일 뮌헨 올림픽에서 벌어진 이른바 뮌헨 올림픽 참사를 배경으로 한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올림픽 현장에서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단 11명을 인질로 잡고 팔레스타인 포로 석방을 요구했는데, 서독 경찰의 대응 실패로 인해 결국 인질 모두 숨진 사건이다. 이스라엘 해외 정보기관 ‘모사드’는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팔레스타인인 11명을 살해하려는 목적으로 5인조 암살단을 구성한다. 모사드 출신 비밀 요원 애브너(에릭 바나)가 리더로 암살단을 이끈다. 하지만 애브너는 목표물을 제거할수록 혼란을 겪는다. 복수를 해도 상대 조직 인사가 새로운 인물로 대체되고, 새로운 제거 목표가 생겨나며 도무지 복수의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폭력으로는 악의 종식을 이룰 수 없고, 괴물과 싸우면서 괴물이 돼 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기에 암살 팀원들 역시 정체불명의 조직에 의해 하나둘 목숨을 잃으면서 복수의 대상은 더 늘어나고, 자신도 언제 제거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영화에선 무고한 테러리즘에 희생된 이들에 대한 복수심과 팔레스타인 민족 국가 건설이라는 과제에 투신하는 마음을 모두 온정적으로 다룬다. 이로 인해 영화는 다루기 어려운 복잡한 과제에 용감하게 도전했다는 긍정적인 평과 함께 덧없는 양비론과 평이한 휴머니즘에 입각한 밋밋한 작품이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특히 뮌헨 올림픽 참사가 큰 트라우마로 새겨진 이스라엘에서도 비판받고, 이슬람권에선 대부분 상영되지 못했다. 이처럼 첨예하고 당장 피해가 발생하는 사태에서 본질적이고 이상적인 해답은 설득력이 떨어지고 무력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개인의 내면에 무관심하고 충성만을 요구하는 비정한 국가와 조직의 작동 방식을 다룬 점은, 예술이 늘 그러하듯 생각해 볼 여지를 만든다. 숭고한 대의로 움직이는 시스템은 개인의 마음을 황폐화시키며, 그 자체로 폭력적일 수도 있다는 것일까. 영화가 다루는 1970년대의 잔혹 복수극 이후로도 피가 피를 부르는 잔혹 사태는 이어지고 있다. 개인의 자리가 줄어들고, 복수를 수행하는 거대 정치의 비중 영역이 커지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제대로 복수를 수행하지 않으면 더 큰 화를 부를 것이라는 두려움도 있다. 영화에서 암시한 대로 복수의 시스템이 정확하게 작동할수록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커진다. 최근 이스라엘 정치권은 강화된 안보 역량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팔레스타인을 협력 대상으로 보지 않는 기조가 팽배해졌다. 이스라엘 의회(크네세트)에서도 친아랍 목소리가 줄어드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대립을 통해 정치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극우 강경파 비중이 점차 몸집을 키워 왔으며 갈등이 누적됐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실효 지배하는 무장정파 하마스 역시 통치 무능과 비민주적인 의사 결정에 대한 팔레스타인인들의 비난 어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정국을 전환하려는 목적으로 극단주의에 입각한 테러리즘을 획책하는 경향이 더 심화됐다. 팔레스타인 민중 상당수는 하마스의 무능과 폭력성에 회의감을 느끼면서도 대안을 찾지 못한다. 여기에 중재를 외치지만 자국 이익에 따라 적당히 폭력을 용인하고 때맞춰 수습하는 이집트 등 주변 아랍 국가와 이란, 미국, 중국, 프랑스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보복과 복수를 반복하는 저주에 빠졌다. 대립이 격화될수록 사람들의 피가 맞교환된다. 정치에 의해 희생되고 있는 건 무고한 이들이다. 50년 전 참사를 다룬 20년 전 영화가 지닌 메시지는 지금도 변한 게 없어 보인다. 영화는 핏빛 복수 속에서 죽음을 목격할 가족의 존재를 암시한다. 그들은 지금 이스라엘에도 있고, 팔레스타인에도 있다. 남겨진 이들의 표정을 생각하면, 휴머니즘만이 세계를 구원할 것이라는 희망을 놓을 수 없다.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전 카이로 특파원 lhs@donga.com}
영화 ‘잠’은 극 초반 설정상 악의를 지닌 인물이 없다. 오가는 길 먼저 말 붙이는 선한 아랫집 이웃, 강아지를 키우며 출산을 준비하는 윗집 밝은 부부가 있을 뿐이다. 이웃끼리 작은 선물을 건넬 땐 호의가 교차한다. (*이 칼럼엔 영화 ‘잠’에 대한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웃과의 관계는 주로 한시적이며, 미세한 균열만으로도 지옥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우리네 삶 도처에 그러한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방아쇠가 있고 이는 우리 자신조차도 언제 어떻게 당겨질지 모른다. 부부나 연인 관계도 마찬가지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지만 타인을 온전히 다 알 순 없으며, 화합하려 애쓰는 마음이 진심이라고 해도 잘못해서 상대의 방아쇠를 건드리고 대화가 삐끗하고 수틀릴 수 있다. 악의가 없이도 문제는 벌어진다. 도처에 밟지 말아야 할 지뢰가 많은데, 무엇이 지뢰인지 모르겠을 때 삶은 호러가 된다. 영화 잠은 나를 언제든 광기로 몰아넣을 수 있는 방아쇠와 지뢰의 존재를 보여준다. 영화 속 방아쇠는 가족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선한 동기다.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 광기에 휩싸일 수 있는 나 자신도 공포의 대상이 된다. 만삭 임신부 수진(정유미)과 현수(이선균) 부부에게 공포의 대상은 일차적으론 현수의 밤중 무의식이다. 어느 날 수진은 옆에 잠든 남편 현수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누가 들어왔어.” 수진은 이날부터 현수가 심상찮다고 느낀다. 급기야 현수가 수면 중 갑자기 일어나서 이상 행동을 벌이는 것을 본다. 현수는 잠에 취한 채로 걸어다니며 냉장고에서 생고기와 날계란을 거칠게 씹어 먹는다.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려고 하자 수진은 기겁한다. 그제야 지속적인 야간 층간소음에 점잖게 하소연하던 아랫집 이웃 민정(김국희)의 말도 이해가 간다. 현수는 밤중 부부가 기르던 강아지를 냉동고에 집어넣어 죽이기까지 한다. 아이가 태어나자 수진의 불안은 노이로제 수준이 된다. 혹시 남편이 아이를 무심결에 죽일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다. 여기서 현수의 무의식에 수진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운명을 보여준다면, 일반적인 공포 영화의 문법을 따르는 셈이다. 그러나 현수는 진심으로 수진을 걱정하고, 치료법을 찾기 위해 병원을 찾는다. 수진은 아이를 지키려는 마음과 불안감 속에서도 현수와 생활을 분리하는 대신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서 해법을 찾고자 한다. 부부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을 합친다. 집 벽에 걸린 가훈대로다.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 할 일이 없다.’ 수진은 남편 현수가 공포의 대상이지만 피하는 대신 어떻게든 고치려고 한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지키겠다는 마음은 뒤틀리거나 광기로 치달아가기 쉬운 감정이다. 벽에 걸린 가훈을 비출 때마다 수진의 표정 또한 점점 의미심장해진다. 평범한 가훈에 담긴 함의가 문득 섬뜩하게 느껴질 때, 극이 기대 온 공포 감정과 문법이 크게 비틀린다. 영화는 제한된 공간의 디테일을 통해서 인물의 감정선을 보여줄 만큼 촘촘하다. 반면 대조적으로, 서사에선 과감한 생략이 돋보인다. 그리고 생략을 통해 해석의 여지를 크게 열어젖힌다. 철저하게 계산된 열린 결말엔 고개를 끄덕인다. 관객 저마다의 관점과 처지를 다시 환기하게끔 하는 구석도 있다. 다양한 해석으로 열려 있는 결말은 저마다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세상과 삶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이 느껴진다. 각자 믿음만을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과의 관계에서 합리적으로 처신하려면 ‘혼이 실린 구라(거짓말)’라도 필요한 것일까. 아니면 우린 아무리 애써도 결국 아무런 진실도 모르는 채로 떠내려가고 마는 것일까. 남편 현수가 미친 사람이 너무 많다고 할 때 타인을 대상화하는 일반적인 용례와 달리, 자기 성찰적인 자조처럼 느껴져서 여운이 길었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섬세한 태도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세속을 살아가는 한 누구나 모순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개별자로서의 욕망과 이를 초월한 도덕감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간다. 세상을 긍정하지 않으면서도 순응하거나, 삶에 순응하면서도 부정할 수 있다. 좋은 예술은 이를 ‘아이러니’라고 부르며 삶과 동의어로 친다. 인간이 착오를 저지르고 혼란한 마음을 떠안는 건 얼마간 불가피하다. 다만 여기서 갈림길이 발생한다. 모순의 굽어진 줄기를 애써 곧게 펴며,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른 분별없는 행동을 대의와 선의로 포장하며 기만할 수도 있고, 과거를 그대로 응시하고 후회하고 반성할 지점에서 정확히 그 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 애잔하고 마음이 쓰이는 건 후자다. ‘원자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는 어느 쪽인가. 현실에서 그는 원폭 개발과 일본 히로시마 및 나가사키 투하에 일조한 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한 적은 없다. 추상적으로 반성을 암시했을 뿐 첨예하고도 직접적인 윤리적 질문에 대해선 외면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반면 오펜하이머를 알던 이들은 그가 원폭 개발 과정에서의 자신의 책임을 강하게 의식했다고 회고한다. 그의 생애를 다룬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신작 영화 ‘오펜하이머’는 원작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따라 죄책감에 시달리는 내면에 보다 방점을 찍는다. 이러한 영화 연출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1954년 비공식 청문회이다. 1950년대 매카시즘 광풍이 미국을 뒤흔들 당시 정부는 한때 공산주의자와 어울린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의 행적을 문제 삼는다. 미국의 예상과는 달리, 소련이 1949년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 것도 문제가 된다. 오펜하이머는 소련 스파이 혐의를 받고 안보 인가 등 공직 권한이 박탈될 위기에 처한다. 아내를 비롯해 동료들이 오펜하이머가 궁지에 몰렸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청문회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해명할 것을 종용하지만 청문회 내내 그는 무기력할 뿐이다. 함정을 놓으며 옥죄어 오는 질문에도 그는 보호벽을 치지 않는다. 덫으로 걸어가는 일이 되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사실과 논리에 의지한다. 이 과정에서 청문위원들은 그의 행보를 들여다본다. 이때 그는 공산당원은 아니었지만 아내와 친동생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 중 많은 이가 공산주의 사상에 빠져 있었고 심지어 당원이기도 했으며 한때 자신도 그 사상에 가까웠다는 점을 회고한다. 교수로서 학내에선 타협적이지 않은 모습도 보이지만, 정부로부터 핵 개발 프로젝트 주도 권한을 부여받자 과학 행정가로서 자유분방한 물리학자들을 능숙하게 리딩했던 점에서 의심의 눈총을 사게 된다. 그가 불륜을 저지르고 윤리에 무감한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원자폭탄 개발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윤리를 강하게 자각했다는 점이나, 비범한 천재성과 공존한 열등감이라는 감정도 언뜻 모순돼 보인다. 그는 미세한 마음의 작용을 청문위원들에게 납득시키지 못하고, 숱하게 허점을 노출하고 만다. 이론물리학자로서 수식과 증명의 세계에서 분투하던 그가 논리의 바깥에서, 설득할 수 없는 진실이라는 모순의 극점으로 치닫는다. 그는 벼랑 끝에서 더할 나위 없이 진실되고 자아는 통합돼 있으며, 바로 그 점이 필연적으로 그에게 반성과 죄의식의 자리를 만들어 낸다. 영화는 오펜하이머 비공식 청문회와 함께 그와 악연으로 얽힌 스트로스 제독(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미 상무장관 공식 청문회를 교대로 보여준다. 스트로스는 자신의 삶이 무결하다고 믿는 쪽이다. 청문회에서 그동안 자신이 믿은 진실이 순식간에 깨지는 과정을 마주한다. 스트로스 제독 역시 청문회를 거쳐 몰락한다.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지뢰가 삶에 잠재돼 있고, 그걸 밟고 만다. 모순 없는 삶은 없다. 삶에서의 결함을 종종 후회하고 성찰하는 이와 그러지 않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이념화된 정치 언어는 왜 무도한가. 그것은 아이러니로서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올해 여름 한국 영화 블록버스터 이른바 빅4(밀수, 더 문, 비공식작전,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같은 질문을 마주하고 있다. 자기 힘으론 어쩔 수 없는 재난과 난리통 속에 휩쓸려갈 때 개인은 어디에 의지해야 하나? 국가와 공권력, 더 나아가 공동체를 믿을 수 있나? 이 질문이 중요한 건 한국 사회가 공존에 대한 해법을 마련하지 못하는 가운데 문제를 해결해야 할 사회적 리더십은 정치 공학에만 매몰돼 있고, 각자도생 외에 뚜렷한 답이 없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뇌리에 남은 할리우드식 블록버스터 구출 내지는 탈출 서사가 공권력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 것과 달리, 한국식 서사엔 같은 대상에 대해 우리 현실을 반영한 일정한 냉소가 깔려 있다. 이 빅4 영화는 신뢰가 사라진 세상을 다룬다. ‘밀수’가 다루는 공간은 국가 주도 산업 정책과 환경 오염으로 말미암아 삶의 터전이 사라지고 공권력이 비루한 악으로 전락한 곳이다. ‘비공식작전’도 국가가 위험에 처한 개인을 정치적 계산에 따라 외면하는 시대상을 배경으로 삼는다. 여기에선 나와 가깝게 부둥킨 이들과의 신뢰가 중요하다. ‘더 문’은 달 탐사 중 우주에서 조난당한 대원을 구하기 위해 시스템이 아니라 전 우주센터장의 소명감에 의지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지진 이후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파트 한 동을 지키려는 중산층 주민들의 악다구니와 회의감으로 어수선하다. 상대적으로 미래 SF적 상상력이 더해진 영화 두 편(더 문, 콘크리트 유토피아)이 공동체의 역할과 의무를 보다 첨예하게 묻는 쪽이다. 영화 속 미래 재난과 절망 속에서 싸우는 인간을 그리며 공동체를 회복하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반면 과거를 다룬 영화 두 편(밀수, 비공식작전)은 신뢰가 무너지고 공존을 모색하지 않는 세상에서 개인 단위에서의 구원이 더 부각된다. 동료애를 통해 보람과 위안을 구한다. 밀수와 비공식작전 두 편이 SF에 비해선 소박하고도 유머러스하지만, 들여다보면 냉소는 더 짙다. 빅4 영화 속 SF적 세계관 속에선 적어도 진실이 드러나면 세상이 회복될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진실이 중요하다는 믿음이 극을 끌고 간다. 반면 과거를 다룬 두 영화는 공권력이 진실도 손쉽게 은폐할 수 있는 시대를 그린다. 여기에선 개인이 짊어져야 할 부담의 크기가 더 크다. 대체로 세상이 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없을 때 개인 단위에서 해법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법이다. 공동체에 대한 신뢰 수준이 낮을 때, 우리가 짓는 표정이 냉소다. 이런 관점에서 가장 냉소적인 작품은 비공식작전이다. 김성훈 감독의 전작인 ‘터널’이 그랬듯 이 역시 위험에 처한 국민이 등장하고,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모습이 그려진다. 레바논에서 우리 외교관이 납치되는 일이 벌어지지만 정부는 부처 간 기 싸움으로 말미암아 제대로 된 구출 작전을 벌이지 못한다. 구출 작전에 투신하는 개인들도 처음엔 거창한 대의와는 일견 멀어 보인다. 외무부 중동과에서 5년간 근무한 외교관 민준(하정우)이 납치 외교관을 구하는 일에 자원한 것도 미국 발령이라는 개인적 동기에서 비롯한 것이다. 우연한 계기로 민준을 돕는 현지 택시기사 판수(주지훈)도 철저하게 돈벌이라는 자기 동기에 충실하다. 그들이 배신과 불신을 거쳐 마음을 바꿔 맞손을 잡는 과정이 흥미롭게 그려지지만, 개개인 단위에서 서로에 대한 믿음이 쌓일수록 역설적으로 국가 시스템에 대한 냉소는 더욱 깊어진다. 영화는 망가진 시스템 속에서도 자기 윤리에 충실한 개인이 많은 것을 바꿀 수 있고, 자기 일에 몰두하면서 그때그때 만나는 인연에 대해 호의를 품는 것은 값진 일이라고 말한다. 그건 현실적인 조언처럼 들린다. 이상적이진 않은 현실적인 조언. 현실적이지 않지만 이상적인 조언. 지금 시점에서 우리 사회에 무엇이 더 유효한 것일까. 요즘 한국 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먹고살려면 어디까지 해야 하는 거냐?” 영화 ‘밀수’에서 극 초반 엄 선장(최종원)의 푸념은 윤리와 생활 사이에서의 딜레마를 간결히 함축한다. 그 장면이 의미심장한 건 영화가 이 딜레마를 깊게 파고들겠다는 선언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여기 생활을 옹호하는 인물이 춘자(김혜수)라면, 공동체성을 더 중시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건 진숙(염정아)이다. 영화는 이 둘이 교차하는 과정에서 딜레마의 간극을 좁히거나 벌리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 칼럼엔 영화 ‘밀수’에 대한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영화가 다루는 배경은 1970년대 가상의 바닷가 촌읍 군천이다. 진숙과 춘자는 해녀로 밥벌이를 하지만, 근처에 화학공장이 들어서고 바다가 오염되자 달리 살길을 모색하다 ‘바닷속 물건을 건져 올리기만 하면 된다’는 브로커 말을 듣고 밀수에 가담한다. 진숙과 춘자는 더할 나위 없는 친구 사이지만 배경은 다르다. 진숙이 촌읍에서 선주 아버지를 둔 먹고살 만한 인물인 반면, 춘자는 열네 살 때부터 식모살이를 했던 억척스러운 인물로 그려진다. 신중한 엄씨 일가와 달리 춘자는 밀수판을 키우자는 쪽이다. 급기야 엄 선장 몰래 금괴까지 밀수하기로 하는데, 밀수품을 바다에서 들어올리다 세관에 적발된다. 결국 밀수판에서 손을 떼려던 엄 선장이 불미스러운 일로 죽고, 그의 딸 진숙도 징역을 살게 된다. 춘자만 검거를 피해 혼자 빠져나오고, 진숙은 세관에 밀고했다는 소문이 도는 춘자에게 적개심을 키운다. 서울로 올라와 밀수품 판매업을 하던 춘자는 또 다른 거물 밀수꾼 권 상사(조인성)를 도와야 하는 처지가 되고, 결국 큰 밀수판을 벌이기 위해 군천에 내려오게 되면서 다시 진숙을 만난다. 진숙과 춘자가 재회하는 장면, 서로 뺨을 두 대씩 내갈길 때 서사는 팽팽해진다. 진숙은 아버지의 배도 잃고 곤궁한 처지로 내몰린 가운데서도 남겨진 해녀들의 리더로서 꿋꿋하게 자존심을 지키려 한다. 반면 춘자는 그런 그에게 큰돈을 만지게끔 해주겠다며 접근한다. 제안에 응하지 않으려던 진숙은 자신을 따르는 동료 해녀가 병원비를 마련해야 하는 처지가 되자, 다시 춘자의 손을 불가피하게 잡는다. 모두가 밀수에 가담하고 범법자인 상황에서도 영화는 선악을 명확하고도 뚜렷하게 분별한다. 이때 선과 악, 옳고 그름을 가르는 핵심축은 의리다. 영화에선 한 식구처럼 보이던 인물이 돌연 배신하며 악인이 된다. 또는 악인인 줄 알았던 인물이 여전히 서로에 대한 정서적 유대감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선의의 옹호자가 되기를 반복한다. 이러한 전환을 잘 보여주는 건 권 상사라는 캐릭터다. 그는 월남에서 사람 죽인 걸 훈장처럼 여기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악귀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부하인 애꾸(정도원)를 살린 인연을 떠올릴 때 돌연 의리감을 가진 캐릭터성이 부각되면서 몰입을 이끌어낸다. 로맨스가 없는 영화에서 권 상사는 인상적인 액션 신을 통해 춘자와 미묘한 뉘앙스를 남기며, 악인임에도 동정할 여지를 만든다. 춘자를 비롯해 우직한 세관 계장(김종수)이나 해녀들을 돕는 장도리(박정민)도 의리를 축으로 선과 악을 오가는 복잡한 캐릭터들이다. 영화는 세상이 모두를 얼마씩은 악인으로 만들어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애초에 해녀들이 밀수에 가담한 것도 정치사회적 배경이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러한 명백한 악행에 대해 사법적, 도덕적 판단과 딜레마에 빠진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영화는 누구나 나빠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자기 나름대로의 윤리적 실천 범위를 설정하고, 이를 지켜나간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실천은 다른 사람의 처지에 대한 감정적, 정서적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에만 납득 가능해진다. 영화는 다방에서 일하는 옥분(고민시)을 비롯한 어촌 사람들의 우정과 의리를 이해에 기반한 연대처럼 다룬다. 그리고 이때의 결속은 일시적인 반목을 뛰어넘는다. 이들의 우정과 의리는 영화 속 조폭들의 충성과는 대조적이다. 상하 관계에서 비롯하는 충성은 윤리적 감각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뿐더러 책임감도 결여돼 있다. 그들은 공감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큰 빈 틈을 남긴다. 언제나 큰 힘은 우정에서 나온다.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 ‘엘리멘탈’은 물, 불, 흙, 공기 등 4원소가 서로 모여 살아가는 도시(엘리멘트 시티)가 배경이다. 사회에서 배척받는 불 원소 소속 여성 ‘엠버’와 도시 주류인 물 원소 소속 남성 ‘웨이드’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이 칼럼에는 영화 ‘엘리멘탈’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는 서로 섞일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물과 불 원소가 서로 화합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다룬다. 엠버의 부모는 불 원소만 모여 살던 파이어랜드를 떠나온 이민자로, 모든 것을 불태우는 속성으로 말미암아 엘리멘트 시티에서 배척받아 온 것으로 묘사된다. 엠버 가족은 불 원소가 모여 사는 도시 내 커뮤니티에서 작은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며 오랜 세월 신산한 삶을 버텨낸다. 엠버 가족에겐 가게는 삶의 근간이자 자부심이다. 그러나 다른 주류 원소들 눈엔 무턱대고 세운 비인가 건물에 불과하다. 영화는 물 중심 사회에서 불 원소가 받는 은근한 차별을 비춘다. 엠버 가족은 미국 내 아시아계 이민자의 삶과 사랑을 상징한다. 그래서인지 한국계 이민자의 삶을 다룬 영화 ‘미나리’와 배경과 성향이 다른 두 집안과 자녀들의 엇갈린 사랑 이야기를 다룬 ‘로미오와 줄리엣’ 내지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섞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엘리멘탈은 익숙한 구조를 차용하지만, 소재를 다루는 방식은 독창적이다. 연출과 작화 면에선 원소별로 특징을 잡아채는 방식도 그렇거니와 이야기 면에선 차별받는 소수자의 내면을 세심하게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그렇다. 배경과 성향이 다른 집안을 그리는 영화들은 선한 자녀와 대별되는 가문 간의 극한 대립을 통해 극을 끌고 나가는 게 일반적인데, 영화는 이러한 전형성에선 벗어난다. 엘리멘탈에서 웨이드의 가족은 엠버를 극진히 환대한다. 엠버의 가족은 웨이드에 대한 적개감을 보이지만 이는 극 안에서 납득할 수 있게끔 설명돼 있다. 웨이드에 대한 반대 감정은 증오나 혐오 감정에 기반한다기보다는, 오랜 차별 속에서 익힌 엠버 부모의 생존 감각 내지는 주류 사회에서 상처받을 자녀를 우려하는 마음처럼 보인다. 적개감은 견고하지 않다. 자신의 의지로 가족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로미오와 줄리엣인 셈이다. 영화의 핵심적인 갈등은 가문 간이 아니라, 엠버의 내면에서 일어난다. 엠버는 타국에서 억척스럽게 자신의 자리를 일궈낸 부모에 대한 존경심을 강하게 내비치며, 가게를 물려받는 것으로 가족이 바라는 삶을 받아들이려 한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만의 창의성을 인식하며, 불 원소 커뮤니티를 벗어나 자신이 부여받은 능력에 따라 자아를 실현하려는 마음도 있다. 두 감정은 엠버의 마음속에서 충돌한다. 그리고 내면에서의 혼란은 극의 막바지까지 이어진다. 영화 속 세계관 설정은 한국계 이민자 2세대인 영화감독 피터 손 개인의 경험이 반영돼 있다. 손 감독도 1960년대 말 미국으로 이민을 간 뒤 현지에서 식료품 가게를 운영한 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림에 대한 재능을 실현하고 싶던 손 감독 또한 가게를 물려받길 원하는 아버지와 갈등을 빚었다고. 그는 이 과정에서 이민 2세대로서 한 사회 안에서 각자의 배경과 성향이 다른 이들이 어떻게 서로 이해하고 융화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이민자 자녀들이 마주하는 딜레마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동시에 이야기가 보편성을 지닌 것처럼 느껴지는 건 감독의 경험에서 비롯한 신중함과 섬세함이 영화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엘리멘탈에선 등장 캐릭터 누구 하나도 악인으로 묘사하지 않는데, 대립하는 양쪽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응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사회에 적대할 만한 존재를 정하고, 이를 극복하고 이겨내는 것만으로 좋은 삶이 저절로 주어질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회적인 차별도 직시하면서 동시에 개인 차원에서의 작은 실천 또한 중요하다고 소박하게 다룬다. 이는 구조의 문제를 너무 손쉽게 개인화하고, 미시적으로 처리했다는 비판을 들을 지점도 있긴 하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면 선량한 태도가 세상을 바꾼다는 메시지에 무방비로 턱없이 공감하고 싶어진다. 우리 안의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키가 우리에게 있다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와닿아서가 아닐지.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영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는 여러모로 1980년대적이다. 당시는 미국 영화계가 블록버스터 ‘죠스’와 스타워즈 오리지널 시리즈의 대성공으로 야심만만했고, 모험과 액션의 스케일을 전례없이 키우던 시기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네 편 연출을 연달아 맡은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자신이 어릴 때부터 열광했던 첩보영화 ‘007’ 시리즈를 참고하면서도, 주인공 인디아나 존스를 007보다 더 가혹한 환경으로 밀어넣는다. 여기엔 큰 스케일의 독특한 퍼즐을 펼쳐 놓고 수습할 수 있다는 연출·제작 자신감이 녹아들어 있다. 1∼3편에서 인디아나 존스는 제임스 본드와 같은 첨단 무기도 없고, 적을 만나면 대체로 도망가야 하는 처지로 그려진다. 게다가 유적 속엔 바위가 굴러오는 부비트랩까지 깔려 있고, 맨주먹 액션도 꼭 달리는 차 위나 기차 위에서 한다. 장애물을 통한 제약이 복잡하고 정교할수록 주인공 존스의 창의적인 액션과 기지, 유머가 빛난다. 1980년대적이라는 건, 한편으론 한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1980년대에 개봉한 인디아나 존스 초기 시리즈(1∼3편)는 비(非)서구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여과 없이 노출한다. 유물의 가치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인디아나 존스 자신이라는 식의 표현이나, 유물을 해당국의 허락 없이 가져오겠다는 발상부터가 거칠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마지막 작품이 될 것으로 보이는 다섯 번째 작품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은 전작의 영광과 흠을 모두 의식하는 작품일 수밖에 없다. 연출을 맡은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인디아나 존스의 강렬한 인상을 이 시점에 복원하면서도, 기존 존스의 한계를 뛰어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인디아나 존스의 매력과 흠결은 분리가 가능한가? 더욱이나 이 과제의 난도를 높이는 배경도 있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는 할리우드에서 최근에 그러하듯 기존 시리즈에서 주연 배우를 바꾸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이른바 ‘리부트’를 통해 재해석하는 길도 막혀 있다는 점이다. 시리즈 첫 편 레이더스(1981년)부터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 해리슨 포드를 떠나서 존스를 말할 수 없어서다. 영화 제작사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후속작을 마치 007처럼 리버 피닉스, 샤이아 러버프 같은 배우에게 맡길 것처럼 보였으나, 몇 가지 이유로 인해 결과적으로 모두 실패했다. 시리즈 마지막 작품도 노인이 된 포드가 존스 역을 맡는다. 이번 영화가 어떻게든 기존 인디아나 존스의 유산을 쥔 채로, 새로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하는 캐릭터가 친구의 딸이자 대녀인 헬레나 쇼(피비 월러브리지)다. 쇼는 아버지가 평생을 연구한 유물 ‘안티키테라’를 찾는 인물로 그려진다. 시간 여행을 갈 수 있는 이 유물을 찾아 나치 출신 인사들도 뒤쫓고 있다는 설정이다. 쇼는 영화 초반 유물의 가치보다는 돈을 더 중요시하고, 이성 관계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는 또 다른 버전의 인디아나 존스처럼 느껴진다. 둘 다 아버지가 고고학자라는 점이 같고, 인디아나 존스 역시 시리즈 내내 독특한 이성관을 암시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존스는 비록 유물을 팔 생각은 안 했지만, 존스 역시 유물을 찾는 모험의 시작은 모험심이라는 개인적 동기에서 비롯했다. 쇼의 말에도 이러한 관점이 들어가 있다. 쇼는 인디아나 존스에게 모험심에 사로잡힌 도굴꾼이라고 일갈한다. 시리즈에 내려진 비판을 쇼를 통해 영화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이다. 존스에 대한 한계를 억지로 지워내지 않고 그대로 영화 안에 남긴다. 그것이 흠임을 알려주면서. 노인이 된 존스는 쇼의 물음에 간결하게 대답한다. 그건 의미 있는 일들이었다고. 42년에 이르는 여정 속에서 존스가 말하는 의미란 쇼의 비판을 상쇄한다기보다는 각각 일리 있는 말처럼 느껴진다. 이번 영화 속 존스는 한평생 과학적인 태도로 일관해 왔지만, 시간의 틈이라는 오컬트 현상에 대해선 “그동안 봐온 건 있다”라며 이해한다는 태도를 보인다. 이 역시 자신의 신념과는 상충되지만, 그대로 인정한다. 모순에 대해서 둘 다 맞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 노년이란 그런 것일까. 영화는 인디아나 존스와 함께 늙어간 이들에 대한 예우가 담긴 것처럼 느껴진다. 이는 곧 삶에 대한 경의이기도 하다. 긴 여정을 마친 이들이여, 부디 아늑하고 평온하길.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예술이 쉬울 리 없다. 영감이 오길 기다려야지, 작업물에 몰두해야지, 필요한 경우 정부나 지자체 예술가 지원 사업에 서류를 넣을지 고민도 해야 한다. 사업기획·지원서 및 증빙 서류 처리로 머리를 싸매는 것도 적잖은 예술가들의 중요 일과다. 사실 예술 그 자체만큼이나 지원 사업을 비롯한 예술가의 삶을 둘러싼 조건과 환경 속에서 예술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이 자주 돌출된다. 영화 ‘익스트림 페스티벌’은 지자체 문화재단 사업과 축제 수의계약을 둘러싼 딜레마를 다룬다. 예술과 제도의 민낯을 경쾌한 코미디 톤으로 풀어낸다. 행사·축제 기획사 ‘질투는 나의 힘’ 대표 혜수는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를 기리기 위해 망진군청이 주최하는 지역 축제 ‘정조문화제’를 준비하던 중, 축제 하루 전 행사 타이틀과 콘셉트가 ‘연산군문화제’로 갑작스레 바뀌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망진군수가 다른 역대 조선 왕들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정조 대신 폭군 연산이 지자체 홍보엔 더 낫다고 봤기 때문이다. 군수는 수도권과 가깝다는 걸 부각하려고 연산군이 한양에서 이 가상의 지자체를 자주 들렀다는 가짜 스토리텔링까지 덧입힌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행사는 점점 당초 계획과는 다른 방향으로 꼬인다. 축제 클라이막스였던 정조 연극은 돌연 ‘갑자사화의 형식을 빌린 팬데믹 종식 선언’으로 바뀐다. 연극을 맡기로 한 지역 극단은 갑작스럽고도 무리한 콘셉트 변경에 학을 떼더니, 마침 망진문화재단 예술지원사업에서 탈락했다는 문자를 받자 아예 축제 보이콧을 선언한다. 게다가 혜수의 남자친구이자 대행사 이사 상민이 섭외한 초청 가수는 오지 않는다. 예전에 불미스러운 일로 퇴사한 극작가 직원 래오가 스태프 업무로 불려오는데, 툴툴대다가 일을 망친다. 여기에 망진군에서 벗어날 생각밖에 없는 지역 알바생 은채는 인턴을 거쳐 정직원이 되려고 의욕과다 상태다. 군청에서 다음 축제 기획 사업까지 따내야 하는 혜수는 군수 눈치를 보면서 중간에서 난장판을 조율해야 한다. 어떻게든 축제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해야만 한다. 영화에선 대행사 대표는 대표대로, 스태프와 연극 배우들은 또 그들대로 개인 해법을 찾는 사람들로 설정돼 있다. 축제 자체의 본질은 차라리 부차적이고, 자기 살길을 모색하는 과정만이 담긴다. 지역 축제와 지역 극단 예술 모두 공동체 감각을 기초로 둬야 한다는 명제에서 아득히 멀어진다는 점이 역설적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당장은 자기 삶을 도모하는 것 외엔 다른 수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이 추구하는 지향점과 비루한 삶의 격차를 좁힐 방법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가 느끼는 건 애환이다. 자기 목표를 향해 의심 없이 꿋꿋하게 진군하는 군수와 상민에겐 애환이 없다. 예술과 삶의 격차를 가장 예민하게 느끼는 건 대행사 전 직원이자 극작가로서 예술을 지향하는 래오다. 지역 극단을 향해 결국 돈 때문에 이러는 거냐고 냉소하지만, 그 역시 혜수의 표현대로라면 직장인으로선 무능하고, 예술가로선 불성실하다는 혐의를 벗어나지 못한다. 얽히고설킨 예술가의 딜레마다. 이쯤에선 영화는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면서, 직장 생활에 대한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자신만의 문제의식과 지향점을 가지고 시작한 일이 점차 초라해지고, 또 해법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린 무엇을 해야 할까. 영화는 무대를 만들고 어떤 배역이든 조금이라도 의미를 찾아내는 지역 극단 대표의 모습을 비춘다. 저마다의 개인 해법과 의미를 찾아가야 하는 상황은 막막하고 안쓰럽지만, 그래도 삶이 계속돼야 한다는 것일까. 축제가 계속돼야 하듯 말이다. 영화 초반은 블랙코미디에 가깝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여기 나오는 저마다의 사정을 이해하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뾰족하던 톤은 점차 둥글어진다. 이는 예술이 삶을 이해해 가는 과정처럼 느껴지지만, 유머가 무뎌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해는 된다. 영화가 예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암시하는 만큼, 자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어느 누구도 미워하거나 조롱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담겼을 것이다. 영화는 마지막까지 농담을 던진다. 삶은 계속되고, 그게 아무리 엉망진창이어도 유머를 잊지 말아야 한다. 영화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이 점일 것이다.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1980년대 초 군사독재 시절만 하더라도 만화에서 아이가 어른에게 반말하거나 말대꾸하는 장면을 넣을 수 없었다. 만화 출판 전에 검열을 거쳐야 하는 시기, ‘아기공룡 둘리’ 원작자 김수정 화백은 검열을 피하고자 아이 대신 동물을 의인화하기로 마음먹고, 내친김에 당시엔 잘 쓰이지 않던 공룡 캐릭터를 내세웠다. 그렇게 세상 물정 모르는 척하지만, 항상 머리에 혹을 달고 혓바닥을 내밀면서 저항의 기운을 뿜어내는 공룡 캐릭터가 1983년 4월 만화 월간지 ‘보물섬’에 등장한다. 검열을 피한다고 피했는데도, 아이들 버릇을 망친다는 이유로 아기공룡 둘리는 연재 당시 학부모·시민단체로부터 불량 만화로 꼽히곤 했다. 요즘 들어선 둘리를 그저 대가리와 몸뚱이가 둥글둥글 친근하기만 한 봉제인형 공룡 캐릭터로 아는 경우도 많지만, TV 및 극장판 애니메이션 속 둘리의 진짜 매력은 바로 이 불온성에 있다. 둘리 탄생 40주년을 맞아 개선된 화질로 재개봉한 둘리 시리즈 극장판 애니메이션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 리마스터링’에서 둘리의 까칠한 매력이 되살아난다. 남극 빙하를 타고 서울 도봉구 우이천으로 떠내려 온 공룡 둘리는 쌍문동 중산층 고길동 집에서 더부살이한다. 이 과정에서 둘리는 온갖 엉뚱한 행동으로 말썽을 일으키고, 고길동과는 앙숙처럼 지낸다. 오늘날 소셜미디어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고길동을 말썽꾸러기 객식구를 받아준 성인군자로, 둘리와 친구들을 민폐를 끼치는 인성 파탄자처럼 해석하는 밈(meme·인터넷 유행 콘텐츠)이 퍼져 있다. ‘어디 초능력 맛 좀 볼 테야’라는 둘리의 태도는 지금 보면 선 넘는 것처럼 보이긴 한다. 누리꾼들은 영화 ‘부당거래’ 속 명대사(“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알아요”)를 패러디해 ‘호이가 계속되면 둘리인 줄 알아요’는 말로 둘리 쪽을 야유한다. 그러나 이건 둘리 입장도 들어봐야 한다. 재개봉한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보면 당시의 시대상과 분위기가 느껴지는데 여기서 고길동은 어린이를 자주 손찌검하고,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어린이에 대한 물리적 폭력이 폭넓게 또 긍정적으로 용인되던 시절, 때리는 어른을 향해 만화는 둘리의 입을 빌려 ‘어린이를 때리지 말라’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만화는 어린이를 지지하는 내용으로, 그 시기로선 매우 드물게 폭력과 훈육의 경계를 따지고 든 것이다. 이는 둘리가 그 시절 어린이들에게 사랑받고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 극장판 애니메이션 속 둘리는 낚싯대를 회초리처럼 휘두르는 고길동을 향해 “어린이를 때렸으니 큰 병에 걸려 죽을 거예요”라고 저주한다. 그리고 “아저씨 죽으면 이 집은 내 것”이라고 밉살맞게 굴었다가 더 맞고 집 밖으로 쫓겨난다. 둘리는 담벼락에 서서 아저씨는 농담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애니메이션은 이 상황을 일종의 유머극처럼 그리지만, 여기에도 뼈가 있어서 뾰로통하고 다정하지 않은 그 시절 어른들을 야유하는 뉘앙스가 있다. 어린이를 지지하는 콘텐츠가 많지 않던 시기엔 앞선 대사들이 다소 과격해 보일지라도, 분명 어른들과의 관계 속에서 마음을 다친 이들을 위로하고 이해해주는 기능이 있었을 것이다. 둘리 만화가 연재되던 시기 어린이 독자들은 어떻게 하면 둘리가 고길동을 괴롭힐 수 있을지 아이디어를 담은 우편을 김 화백에게 보내왔다고 한다. 어디 자기 마음 토로할 곳 없는 어린이들이 그 시절 특히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어른들을 골려주는 상상을 하면서 둘리를 봤다는 의미다. 그런 시대상을 곱씹으면, 둘리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부러 더 과격하게 나간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둘리는 현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공감대가 더 컸다. 둘리와 친구들은 결핍을 품고 있는 어린이들을 상징한다. 고아이거나, 자신이 몸담은 조직에서 쫓겨났거나, 어딘지 모르는 곳에 불시착해 버린 아이들이다. 이들은 주관이 뚜렷하고 고길동으로 대표되는 세상의 기준을 의심하고 폭력에 민감하다. 동시에 자기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일엔 또 진심이다. 집안일을 돕고, 서커스에서 스타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모두 빨리 어른이 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들은 반항과 순종하려는 마음 사이를 오가다가, 나쁘고 착하길 반복하다가 문득 어른이 될 것이다. 지금 보니 고길동도 그렇거니와, 그 시절 모두가 애잔하다.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