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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 펴낸 ‘중대재해 사고백서―2023 아직 위험은 끝나지 않았다’ 35쪽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한중콘크리트(cold weather concrete) 시공 조건, 즉 양생(養生)이 어려운 5도 미만의 기온에서 골조 공사를 할 때는 콘크리트 품질관리가 필수다.’ 2022년 1월 11일 오후 3시 46분 무너진 광주 서구 화정동 아이파크 아파트의 사고를 분석한 기록이다. 당시 사람들은 생중계로 지켜봤다. 무너진 아파트 단면에 드러난 철근 가닥들과 콘크리트 더미, 그 위로 날리던 눈발. 백서는 기록했다. ‘겨울철에는 콘크리트가 굳으면서 강도를 확보하는 양생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려지므로 충분한 양생 기간을 확보하며 공사를 진행해야 한다. 더불어 영하의 낮은 온도에 노출되면 콘크리트가 양생 중 얼어버리는 치명적인 결함이 발생할 수도 있다.’ 추운 날씨 탓에 아직 굳지도 않은 콘크리트가 얼어버린 뒤, 기온이 올라가 녹는 현상을 ‘동결융해(凍結融解)’라고 한다. 콘크리트 속에 함유된 수분이 얼면 그 부피가 9%가량 팽창한다. 이 얼음이 녹으면 콘크리트는 구멍 숭숭한 골다공증 환자의 뼈처럼 약해진다. 간단하지만 틀림없는 물리 법칙이다. 이 물리 법칙을 무시해서 현장 노동자 6명이 숨졌다. 그런데 물리 법칙을 어긴 사람과 그 결과로 숨진 사람은 동일인이 아니다. 이윤을 더 남기고 손해를 줄이기 위해 공기(工期)를 앞당기고 영하 날씨에도 콘크리트를 부어야 한다고 결정, 결재, 재촉한 사람은 사망자가 아니다. 백서는 적었다. ‘사람은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상황이라면 최대한 그 위험을 피하고자 한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위험을 감수할 것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 자신도 모르게 가해지는 위험을 모르고 불나방처럼 위험 속으로 들어간다. 특히 건설 현장에서 공기 단축 압박이 그러하다.’ 사건 현장 근로자들은 참사 이후 익명으로 언론에 말했다. “눈이 오는 날에는 타설하면 안 됐는데 했다.” “빨리 좀 해야 할 것 같다는 지시가 있었다.” 그런데 백서에 빠진 것이 있다. 기록 어디에도 정부의 이야기가 없다.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저 모든 시스템의 붕괴는 건설 현장과 근로자의 안전을 관리하는 중앙정부와 관련 부처(고용노동부, 국토교통부 등)가 엄연히 존재하는, 그리고 관련 법 제도와 공무원, 사법행정 인력이 운용되고 있는 국가 테두리 안에서 벌어졌다. 정부의 관리감독 책임이 왜 작동하지 않았는지, 현장 실태를 왜 몰랐고(혹은 알았다면 왜 방치했고), 왜 막지 못했는지. 정부는 자신의 잘못을 함께 기록해야 했다. 콘크리트가 물리의 법칙을 따른다면, 기업은 이윤 추구의 법칙을 따른다. 건설 근로자들은 오늘도 두 법칙 사이에 끼여 위태롭다. 정부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싶다면 마땅히 물리 법칙이 이윤 추구 법칙보다 먼저 적용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라고 국민은 정부에 법과 강제력을 부여했다. 올해 연말 날씨가 변화무쌍하다. 11월 역대 최고기온을 돌파하더니 한파가 찾아오고, 날이 풀리더니 다시 영하권이다. 틀림없는 물리 법칙에 따라 전국 건설 현장 곳곳에 숨은 수분들이 팽창하며 얼고 녹기를 반복할 것이다. 어딘가에서 또 콘크리트가 얼고 있다.이은택 정책사회부 차장 nabi@donga.com}
정부가 이달 근로시간 개편안에 대한 국민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한다. 근로시간 개편은 원래 이 정부 노동개혁(근로시간과 임금체계)의 한 축이었다. 지난해 화물연대 파업 이후 ‘노조 법치’가 끼어들었지만 양대 노총의 회계공시 참여 결정을 기점으로 법치 이슈는 끝물이다. 정부는 킬러 문항보다 어려운 본래 숙제를 풀어야 한다. 이쯤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3대(교육, 연금, 노동) 개혁과제 중 하나였던 노동개혁, 특히 근로시간 개편이 상반기에 왜 좌초됐는지 복기할 필요가 있다. ①메시지=올해 3월 6일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주당 최대 69시간까지 근로를 가능하게 하는 개편안을 발표했다. 그런데 불과 9일 뒤(15일) 윤 대통령이 “60시간 이상 근로는 무리”, “상한 캡을 씌우지 않은 것은 유감”이라며 뒤집었다. 이후 20일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상한선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며 대통령 발언을 반박하는 듯한 입장을 밝혔다. 그랬더니 다음 날 윤 대통령이 “상한을 정해야 한다”고 또 뒤집었다. 장관, 대통령실 관계자, 대통령이 서로의 말을 되치기하는 과정을 보면서 도대체 뭐 하자는 건가 싶었다. 정부 안에서 메시지가 정리되지 않아 정책 실패로 이어진 대표 사례였다. ②현실성=정부는 근로시간제가 바뀌면 직장인에게 ‘몰아서 일하고, 몰아서 쉬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했다. 예금 계좌에서 내 돈 꺼내 쓰듯 근로시간을 모았다가 장기간 휴가로 쓸 수 있다는 말인데…. 현장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몰아서 일하게 될 것을 의심하는 국민은 없었고, 몰아서 쉴 수 있을 거라 믿는 국민도 없었다. 이 구상을 만든 고용부조차 공무원이 휴가를 다 못 쓴다. 중소기업 근로자의 애환을 담은 유튜브 영상은 불티났다. “여름내 몰아서 일했으니 한 달 쉬겠습니다”, “그럼 자네 업무는 누가 해?”, “정부가 그렇게 해도 된답니다”, “그건 대기업 이야기고. 우리는 중소잖나”. 현실성 없는 ‘한 달 유럽 휴가’보다는 초과근로에 상응하는 급여, 수당을 인상하고 이를 철저히 지급하도록 법제도를 정비하는 편이 현실적이다. ③의지=근로시간제를 개편하려는 이유의 본질은 기업이 원하기 때문이다. 일감, 수출 주문이 특정 시기에 폭증하는 산업은 그 타이밍에 소화 못 하면 매출에 타격을 입고 경제, 고용 타격으로 이어진다. 이 때문에 제조업, 중소기업 등을 중심으로 이런 요구가 쭉 있었다. 그런데 이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소중한 MZ세대(밀레니얼+Z세대), 돌봐야 할 어린 자녀가 있는 3040 직장인의 가치나 삶의 형태와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고심 끝에 필요한 개혁이라는 판단을 내렸다면 솔직하게 취지를 밝히고 떨어지는 지지율에도 좌고우면하지 말았어야 했다. 양쪽의 박수를 받을 순 없다. 설문 결과 발표를 앞둔 고용부는 살얼음판을 걷는 분위기다. 발표 시기를 미루고 또 미뤘다. 내년 선거를 앞두고 무산된 연금개혁처럼 눈치보기용 ‘맹탕 개편안’이 나올 우려도 제기된다. 개혁을 할지 말지, 한다면 어떤 계획을 내놓을지는 최종적으로 정부가 결정하고 책임 질 일이다. 하나는 분명하다. 이번에도 실기(失期)하면 세 번째 기회는 없다.이은택 정책사회부 차장 nabi@donga.com}
“작가의 범행으로 인해 그가 제작한 전태일동상마저도 위상이 실추됐다.” 전태일동상 존치·교체 숙의위원회가 12일 전태일 재단에 전달한 권고문에서 지금의 청계천 전태일 동상을 새로운 상징물로 교체해야 한다고 밝혔다. 임옥상 작가의 성추행 사건이 결국은 동상 교체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앞서 재단은 고문단, 운영위원회, 이사회 논의를 거쳐 노동계, 여성계, 법조계, 종교계 등 인사가 참여하는 위원회를 구성해 이 문제를 논의해왔다. 16일 동아일보가 입수한 권고문에 따르면 위원회는 재단에 “소중한 역사의 상징이었던 전태일동상은 상징성에 큰 상처를 입었다”며 “동상을 제작한 작가가 최근 성추행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 “재단의 제안을 받은 위원회는 9월 11일 첫 회의를 시작으로 다양한 의견을 놓고 토론하고 숙고하는 과정을 가졌다”고 설명했다. 위원회는 “18년 전 전태일동상의 건립 과정을 살펴봤다”며 “노동자와 시민들의 의견과 정성을 모아내고, 전태일다리에 동상을 건립하는 과정에 책임을 지셨던 분들의 ‘동상 존치 입장’도 경청했다”고 밝혔다. 또 “현재의 동상 철거를 반대하시는 시민들의 의견도 들었다”고 덧붙였다. 위원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거’를 결정했다. 이에 대해서는 “숙의위원들은 ‘성범죄를 저지른 작가가 제작한 현재의 동상만이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상징할 수 있는가? 다른 동상으로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한가?’라는 질문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작가의 성추행은 약자에 대한, 자신보다 낮은 지위에 위치한 창작 노동자에 대한 폭력이자 착취”라며 “이는 약자를 지키고자 자신의 목숨을 바친 전태일 열사의 정신에 반하는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라고 임 작가를 비판했다. 이어 “안타깝게도 이 동상을 찾는 사람들은 약자의 위치에 있던 여성 노동자에게 고통을 주었던 작가를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그러면서 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권고 사항을 재단에 밝혔다.-현재의 동상은 전태일 정신을 상징하는 새로운 상징물로 교체하기를 권고드립니다. -새로운 상징물의 건립은 전태일 열사와 이소선 어머니의 사랑과 연대의 정신을 이어가는 노동시민사회가 폭넓게 의견을 모아서 추진하기를 권고드립니다.-현 동상 또한 역사이므로 새로운 상징물이 건립될 때까지 현재의 장소에 유지하며 교체한 이후 전태일재단이 보관하기를 권고드립니다. 이에 대해 재단은 “이사회를 개최해 권고문과 관련된 후속 조치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16일 밝혔다.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출근길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차들 틈새로 버스 옆면 광고 문구가 보였다. ‘우리 아이를 위한 완벽한 식사.’ 이유식 광고일까. 차량 대열이 움직이자 가려져 있던 강아지 사진이 드러났다. 아하, ‘우리 아이’가 저 아이였구나. 걷다 보니 버스 뒤편에도 광고가 있었다. ‘잠만 자는 우리 아이를 위한 영양제.’ 이 아이도? 이내 반려견과 영양제 캡슐 사진이 나타났다. 딸 둘 아빠로서 ‘현타’가 왔다. 아이를 키우는 지금 20, 30대들은 어쩌면 ‘부모’라는 호칭이 붙는 마지막 세대일지 모른다. 한때 80만 명을 넘었던 대학수학능력시험 응시생은 올해 45만4588명이다. 출생아는 2016년 40만6000명에서 작년 24만9000명으로 줄었다. 취업은 바늘구멍이고 결혼은 맞벌이가 필수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1개 국가 중 29위인데 집값은 치솟고 있다. 자산가 집안이 아니라면 요즘 젊은이들에게 결혼, 출산, 육아는 골고다 언덕길이다. 정치권은 출산율을 높이겠다면서 ‘아이를 낳으면 100만 원 준다’ 식의 정책을 남발하지만 이를 보고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블랙 코미디다. 정부는 그저 돈을 쓸 곳이 필요한 것뿐이다. 애를 키우는 입장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돈, 시간, 아동학대 걱정 없이 마음 놓고 아이를 맡길 수 있는 곳이다. 한 달에 절반을 야근해야 할 때에도 말이다. 사설 교육, 보육 기관이 난립하지만 그래도 아직 우리 아이(강아지 말고 진짜 아이)를 가장 믿고 맡길 곳은 학교다. 거대하고 촘촘한 국가 행정 시스템, 국가고시를 통해 선발된 공무원들이 잘 돌봐주고 가르쳐줄 것이라는 신뢰가 남아있다. 이런 관점에서 초등돌봄교실을 오후 8시까지 운영하는 늘봄학교 확대를 환영한다. 하지만 교사들은 이를 반대하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지만 결국은 업무가 늘어난다는 것이 골자다. 일리도 있는 것이, 요즘 학부모와 학생들은 무척 까다롭다. 요구도 많고 안전사고, 민원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이를 막으려면 교사, 전문 인력, 예산을 늘리고 법규도 정비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교원 선발 축소는 교육부가 방향을 잘못 잡았다. 아이가 줄어도 일은 오히려 과거보다 늘어났기 때문이다. 다만 교사들도 각성이 필요하다. 학생이 요즘처럼 가파르게 줄면 장기적으로 학교와 교사도 살아남을 수 없다. 서울조차 문 닫는 학교가 속출하고 있다. 더 다양한 연령의 더 많은 아이들이 더 오랜 시간 학교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고 머물러야 학교가 산다. 교육과 보육 사이 장벽을 없애야 한다. 배움이 필요한 성인, 노인들도 누구나 집 근처 학교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사의 ‘지식 전수’ 역할 상당수는 이미 사교육, 온라인 강의, 검색 포털, 유튜브, 인공지능(AI)에 빼앗기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남은 역할은 무엇일까. 업무가 많아진다고 늘봄학교 확대를 마치 교권 침해라도 되는 양 반대할 일은 아니다. 해야 할 일이지만 지원이 필요하다고 그렇게 요구해야 한다. 그래야 교사도 학교도 산다.nabi@donga.com 이은택 정책사회부 차장 nabi@donga.com}
《#장면1. 첫인상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233일 앞둔 2021년 7월 19일. 당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는 언론 인터뷰에서 “필요한 경우 주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한 뒤 쉴 수 있는 예외조항을 둬야 한다”고 말했다. 단기간 고강도 업무가 필요한 정보기술(IT), 게임 업계의 애로사항을 들은 뒤 나온 발언이었지만 ‘120시간 노동’ 논란이 커졌다. 다음 날 윤 후보는 대구 서문시장에서 “120시간 일 시켜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월 단위나 분기, 6개월 단위로 해서 평균 주 52시간을 해도 집중적으로 일할 수 있는 것을 노사 간의 합의로 변형할 수 있게 예외를 뒀으면 좋겠다는 얘기”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노동계는 싸늘했다. 같은 달 21일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은 “게임업계 사장들의 ‘납기만 맞추면 죽도록 일하고 얼마든지 쉬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앵무새처럼 전달한 것”이라고 일갈하며 ‘친(親)기업, 반(反)노동’이라고 비판했다. 노동계가 윤 후보를 향해 낸 첫 공식 입장이었다.》 #장면2. 야속한 당신 2021년 9월 15일. 서울 영등포구 한국노총 본부에 윤 후보가 찾아왔다. 그는 “독일, 네덜란드, 덴마크의 플렉시빌리티(flexibility·노동시장의 유연성)라는 건 자유로운 해고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선 이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노동계 표심을 돌리려는 노력이었다. 이를 들은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은 “노동을 적대시하고 억눌러왔던 권력자들은 역사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고 응수했다. 말에 뼈가 있었다. 윤 후보의 노동계 달래기는 계속됐다. 같은 해 10월 23일에는 한국노총 울산본부에도 찾아갔고, 기자간담회에서는 “노동 가치를 존중하지 않으면 경제 산업 발전도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그해 12월 4일에는 비공개로 김 위원장을 만나 대선에서의 지지를 요청했다. 12월 14일에는 윤 후보는 “정치인은 노동자 편일 수밖에 없다. 솔직히 말하면 표가 그쪽에 훨씬 많다. 저는 사용자 편이 아니다”고도 했다. 구애(求愛)에도 불구하고 2022년 2월 8일 한국노총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지지를 공식 발표했다. 윤 후보 입장에서는 ‘야속한 당신’이었다.#장면3. 변함없는 친구 2022년 4월 15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한국노총 본부를 방문했다. 앞서 대선 결과가 발표되자 한국노총은 “당선을 축하한다”는 논평을 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이 “우려스럽다”고 한 것과 비교하면 화해의 제스처를 보낸 것. 윤 당선인은 “한국노총의 변함없는 친구로 남을 것”이라고 했고, 김 위원장도 “적극 대화에 임하겠다”고 화답했다. 카메라 앞에 선 두 사람의 표정은 밝았다. 고용노동부 장관에는 한국노총 ‘정책통’ 출신 이정식 전 노사발전재단 사무총장이 임명됐다. ‘정부와 노동계의 가교 역할을 기대한다’는 장밋빛 전망도 나왔다. 돌아보면 매우 짧은 허니문이었다.#장면4. 헤어질 결심 약 1년 반이 흐른 2023년 9월. 많은 일이 있었다. 그 사이 정부는 ‘노동개혁’에 착수했다. 화물연대 파업 이후에는 ‘법치(法治)’ 드라이브도 걸었다. 노조 회계의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며 노조 회계장부 공개도 추진했다. 김준영 한국노총 전국금속노동조합연맹(금속노련) 사무처장은 농성 도중 흉기를 휘두른 혐의로 구속됐다. 한국노총은 노사정 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참여 중단을 선언했다. 한국노총과 민노총은 11월 11일 ‘추투(秋鬪·가을 투쟁)’를 예고했다. 김 위원장이 9월 13일 “윤 정부는 노동을 적대시하고 노동개악을 일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비판했고, 다음 날 민노총은 임시 대의원회의에서 내년 4월 총선을 겨냥해 ‘진보 4당’(노동당 녹색당 정의당 진보당)과 공동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정했다. 민노총이 총선 대응 방침을 세운 것은 2012년 이후 10년 만이었다. 이대로라면 11월 한국노총이 민노총과 한날한시에 총궐기를 하고 총선까지 정부와 맞설 태세다. 정부와 노동계의 화해 계기는 잘 보이지 않는다. ‘변함없는 친구’가 ‘헤어질 결심’을 앞두고 있다.● 정부 “법치 지킬 때만 대화 재개”정부와 노동계가 대치를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추석 연휴 이후 전망에도 관심이 쏠린다. 산적한 현안을 풀기 위해서는 노사정 대화 복구, 정부와 노동계의 소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무 부처인 고용부의 기류는 여전히 강경하다. 복수의 고용부 관계자들에 따르면 정부의 입장은 “대화의 문은 열려 있다. 들어오고 싶으면 오라. 단, 법치를 지켰을 때 이야기”로 압축된다. 건설현장에서의 각종 돈 봉투 의혹, 노조의 위법 관행, 집회 때마다 문제가 되는 위법 사례, 그리고 정부가 요구하는 회계 장부 공개에 대해 노동계의 태도 변화가 있어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양대 노총 입장에서는 ‘백기투항’을 요구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 정부의 태도는 다소 이례적이기도 하다. 보통 앞선 정부에서는 총선을 앞두고 노동계의 표심을 잡기 위해서, 또는 산적한 법안들을 국회에서 통과시키기 위해서라도 양보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고용부 관계자는 “선거를 고려하라는 지시도, 분위기도 없다”고 단언했다. 오히려 “지금까지 해온 것에 자신감이 붙은 것 같다”고 했다. 5월 국무조정실은 ‘국정과제 30대 핵심 성과’ 자료집을 내며 현 정부 출범 이후 1년간의 근로손실일수를 ‘28만 일’로 집계했다. 근로자 1만 명이 28일간 파업한 셈이다. 국무조정실은 “역대 정부 최저치”라고 자평했다. 같은 기간을 따졌을 때 노무현 정부는 114만 일, 이명박 정부는 69만 일, 박근혜 정부는 65만 일, 문재인 정부는 106만 일이었다. 화물연대 파업을 포함시키지 않은 것을 놓고 논란이 있지만 정부는 “법치 정책이 효과를 봤다”는 생각이다. 최근 현대자동차 노조가 5년 연속 무분규 임·단협 타결을 결정한 것, 철도노조가 2차 총파업 계획을 중단한 것도 정부에 자신감을 줬다는 분석이 나온다.● 노동계 “총선까지 갈등 이어질 듯”노총은 노총대로 ‘마이웨이’ 중이다. 한 노동계 관계자는 “추투 전까지 노정 관계가 풀릴 모멘텀은 없다”며 “현재 국면이 총선까지 이어지지 않을까 한다”고 내다봤다. 그나마 역대 정부와 대화의 끈을 놓지 않았던 한국노총마저 냉랭하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지금의 정부는 마치 ‘노동계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태도”라고 비판했다. 노조 회계장부 공개, 근로시간 개편 등 주요 정책을 철회하거나 입장을 바꾸기 전까지는 노총도 타협할 수 없다는 분위기다. 섣부른 대화 제스처를 취했다가는 지도부가 내부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려 있다. 정부와 노동계가 ‘강 대 강’ 대치를 이어갈 경우 정부의 노동 정책에도 부담이 가중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당장 근로시간 개편 여론조사,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방안, 계속 고용 법제화 등 중요한 정책들이 발표, 논의를 앞두고 있다. 양대 노총을 비롯한 노동계가 반발하고, 민주당 등 야당과 연계한다면 정부 입장에서는 ‘시련의 가을’이 될 수 있다. 화해의 물꼬를 틀 수 있는 곳으로 국민의힘이 8월 23일 출범시킨 여당 산하 ‘노동위원회’가 언급되기도 한다. 변호사, 노무사, 학계 인사 등 50명으로 구성됐는데, 위원장인 김형동 의원은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부원장을 지냈고 21대 국회에 입성했다. 김 의원은 6월 한 노동전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윤 대통령이 취임 직후 한국노총에 ‘친구’라고 했던 에피소드를 언급하며 “친구는 한 번 틀어진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고 말했다. 한 정부 관계자는 “정부와 노동계 모두 강경하고 그나마 다소 조율의 여지가 있는 것은 국회”라며 위원회의 역할을 기대했다. 양대 노총에 정통한 한 인사는 “한국노총 출신 인사가 지금 고용부 장관인데 소통의 역할은 못 하고 있다”라며 “노사 관계 회복의 열쇠는 결국 윤 대통령이 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은택 정책사회부 기자 nabi@donga.com}
2024학년도 대학입시에서 전국 의대 수시모집 경쟁률이 평균 46 대 1로 나타났다. 인하대 의대 논술전형은 661 대 1을 기록했다. ‘의대 광풍’의 여파로 의대 경쟁률은 계속 오르는 추세다. 17일 종로학원, 유웨이 등에 따르면 13∼15일 마감한 원서접수에서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한양대, 중앙대, 경희대, 이화여대, 가톨릭대, 울산대 등 주요 10개 대학 의대의 평균 경쟁률은 45.59 대 1로 집계됐다. 지난해에는 44.67 대 1이었다. 서울대는 12.30 대 1로 전년도(10.49 대 1)보다 소폭 올랐다. 고려대, 성균관대, 중앙대, 가톨릭대(서울)도 경쟁률이 상승했다. 가장 높은 경쟁률을 보인 곳은 인하대 의예과 논술전형으로 8명 모집에 5286명이 몰렸다. 수험생의 절반 이상이 수도권에 몰려 있는데 인하대 의예과 등은 다른 수도권 의대에 비해 합격선이 다소 낮아 ‘인(in) 수도권 의대’의 마지노선으로 꼽혀 학생들이 몰린다. 성균관대도 논술우수자전형에서 5명 모집에 3158명(631.60 대 1)이 몰렸다. 지난해와 선발 인원은 같지만 지원자는 712명 늘었다. 반면 의대 열풍을 경계하고 미래 반도체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주요 대학에 만든 반도체학과들은 경쟁률만 놓고 보면 다소 부진한 모습이다. 주요 7개 대학(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서강대, 한양대, 이화여대)의 반도체, 첨단학과 수시 경쟁률은 평균 16.49 대 1로 집계됐다. 이는 같은 대학의 의학 계열을 제외한 나머지 이공계열 학과 평균 경쟁률(19.22 대 1)보다 낮은 수치다. 서강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가 43.30 대 1로 가장 높았고, 성균관대(반도체 및 첨단학과 4곳 평균)가 31.10 대 1이었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고3 학생 수는 줄었지만 상위권 의대 선호 현상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며 “특히 최상위권 학생들은 의대와 반도체학과 등에 동시 합격할 경우 반도체 등 첨단 학과 등록을 포기하는 현상이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수시 전체 경쟁률은 서울 지역 주요 대학이 대부분 상승했고 지방 대학들은 하락했다. 경북대, 부산대 등 주요 지역 거점 대학들도 경쟁률이 하락했다. 경쟁률이 6 대 1에 못 미친 제주대, 경상국립대, 전남대, 강원대 등은 “사실상 정원 미달”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일반대 수시는 1인당 6곳에 지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21세기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인재 선발 시험은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다. 그 역할을 600년 전 조선에서 과거(科擧) 시험이 했다. 지금 대학에 가려면 수능을 잘 봐야 하고, 조선 시대 성균관(지금의 국립대 격)에 들어가거나 관료가 되려면 과거를 통과해야 했다. 과거를 어떻게 운영할 것이냐. 당시 일종의 교육, 혹은 입시 논쟁이 있었다. 조선 초기 ‘강경(講經)과 제술(製述) 논쟁’이다. 강경은 시험관이 수험생을 한 명씩 불러 ‘압박 면접’을 통해 사서오경을 체득했는지 묻는 방식이다. 윤리성을 갖춘 인재를 선발할 수 있지만 시간, 비용이 많이 들고 인맥에 당락이 좌우될 우려가 있었다. 제술은 수험생들이 과거장에서 주어진 주제에 대한 생각을 답안지에 논술하는 방식이다. 문장력을 검증하기 좋아 공문서 작성에 능한 사람을 뽑을 수 있고 채점이 공정하다. 무엇이 좋은 인재 선발 방법이냐는 논쟁에 세종까지 참전했다. 이는 세종 중기 ‘시학(詩學)과 경학(經學)의 논쟁’으로 이어졌다. 시학은 작시(作詩·시 짓기), 즉 문예 창작이다. 경학은 유교 경전을 토대로 국가 운영에 필요한 지식을 공부하는 일이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 당시 시(詩)는 조선과 명나라의 외교전 수단 중 하나였다. 요구 사항을 시로 써서 주거니 받거니 했는데 문전(文戰·글의 전쟁)이라고도 했다. 경학은 백성의 삶을 논했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경학자가 목민심서를 쓴 정약용이다. 겉보기에는 뜬구름 잡는 이념, 당파 논쟁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조선의 고뇌가 있었다. 인재를 선발할 때 윤리성이 먼저인가 능력이 먼저인가. 약소국이 강대국을 상대로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백성의 삶을 어찌할 것인가…. 교육과 입시는 궁극적으로 국가의 존망(存亡)과 백성의 생사(生死)를 고려해야 한다는 의식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2023년 한국은 외교, 기술, 경제의 격변기에 첨단 인재가 절실하다. 기초과학을 지탱할 물리학 인재, 저출산 고령화를 해결할 인문사회 인재도 필요하다. 그런데 학생은 줄고 아이들은 의대만 바라본다. 자원도 없고 땅도 좁은 나라가 생존할 길은 인재뿐이다. 교육은 그 전략적 방향을 제시해야 하고 그게 교육 논쟁의 본질이어야 한다. 최근 벌어진 우리의 ‘킬러(초고난도) 문항 논쟁’을 돌아본다. 수능에서 킬러 문항을 빼라고 6월 15일 윤석열 대통령이 갑자기 지시했고 논란 끝에 9월 모의평가로 일단락됐다. 수험생 사이에선 ‘9모’가 아니라 ‘윤모(윤석열 모의평가)’였다는 말도 나온다. 그런데 3개월간 대통령, 교육부, 국세청이 동원되고 교육 현장이 뒤집힌 논쟁은 무엇을 남겼나. 킬러 문항이 사라진 자리는 덜 어려운 준(準)킬러 문항이 채웠고 교육은 변한 게 없다. “킬러는 없었다”는 발표에 대통령은 흡족할지 모르나, 남은 것은 이례적으로 급증한 N수생과 내심 웃는 재수학원들뿐이다. 잡겠다는 사교육비가 오히려 늘어날 판이다. 국가 존망, 국민 생사 같은 것들은 근처에도 안 갔다. 이런 무익한 논쟁에 세 달간 온 나라가 들썩이고 국력이 소모되는 사태는 모두에게 이롭지 않다. 교권 침해와 교사들의 죽음으로 무너진 학교를 추스르기도 버거운 요즘 아닌가.이은택 정책사회부 차장 nabi@donga.com}
6일 실시된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9월 모의평가에서 일본 사진이 마치 미국 사진인 것처럼 출제되는 오류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문제의 문항은 사회탐구 영역 세계지리 3번이다.이 문제는 경도와 위도, 도시 상징물의 사진, 설명이 제시된 각각 두 개의 도시를 보여주고 선택지에서 옳은 정답을 찾는 문제다.도시 (가)는 서경 73도 56분, 북위 40도 44분에 있고 여신상이 손에 횃불을 들고 있는 곳이다.도시 (나)는 동경 151도 31분, 남위 33도 52분에 있고 조개껍데기를 닮은 건축물이 바닷가에 있다.문제는 (가)에서 생겼다. 이 문제는 (가)를 미국 뉴욕, (나)를 호주 시드니로 제시하려는 의도에서 출제됐다. 제시된 위도와 경도가 각각 뉴욕과 시드니를 가리킨다.그런데 (가)에서 여신상이 횃불을 들고 있는 사진의 도시는 뉴욕이 아니라 일본 도쿄 해변도시 오다이바다. 1889년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자유의 여신상을 1998~1999년 한시적으로 오다이바에 옮겨 전시했는데, 일본과 프랑스 양국 우호 차원에서 이후 파리시의 허가를 받아 복제품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언뜻 보면 뉴욕 자유의 여신상과 헷갈릴 수 있지만 자세히 보면 뒤에 도쿄 레인보우브리지(다리)가 보이는 등 뉴욕과는 확실히 다르다. 출제 과정에서 자유의 여신상 사진을 검색하면서 일본의 것을 미국의 것인줄 알고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한 입시업체 관계자는 “오다이바 자유의 여신상이 맞다. 뉴욕이 아니다”고 말했다. 수험생들이 모이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사진을 대충 찾은 듯 하다”, “레전드 오류” 등의 반응이 이어졌다.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출제에는 교수와 교사가 출제위원으로 참여한다. 그간에는 교수 비율이 55%, 교사가 45%로 ‘교수 중심’이었다. 고교 과정을 넘어선 대학 수준의 수학 문제나 킬러(초고난도) 문항이 출제된 데에는 이런 구조도 한몫했다는 지적이 계속 있어 왔다. 교수들은 저마다 오랫동안 연구해 온 전문 분야들이 있고, 수능 출제는 오류나 논란 등을 최소화해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출제 단계에서는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분야’에서 출제할 수밖에 없었다. 교수들 입장에서는 자신의 전공 분야가 바로 출제 분야가 되는 셈이다. 이 때문에 수능 출제 시즌이 되면 유명 학원가는 출제위원 후보들로 거론될 만한 교수들의 집이나 연구실로 전화를 돌렸고 ‘출장’ ‘부재중’ 등의 답이 돌아오면 ‘출제위원으로 합숙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해당 교수의 논문 등을 연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올해 6월부터 킬러 문항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뒤 교육부는 ‘공정수능출제점검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위원회의 위원들은 전원 경력 10년 차 이상 현직 고교 교사들이다. 국어 영어 수학 각 3명, 사회탐구 8명, 과학탐구 8명 등 총 25명으로 구성된다. 이들의 역할은 출제위원이 문제를 만들면 그 문제들 중 킬러 문항이 있는지 검토하고 그 문항들을 들어내는 것이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따르면 6일 치러진 9월 모의평가도 출제 과정에서 이 위원회가 운영됐다. 평가원 관계자는 “위원인 교사들이 상당수 킬러 문항을 지적했고 모두 배제했다”고 말했다. 앞서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도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점검위원회의 지적이나 의견은 출제위원이 반드시 반영하도록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교수가 낸 문제들을 교사들이 배제할 수 있다는 것으로, 출제의 무게 중심이 교수에서 교사로 넘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9월 모의평가를 분석한 전문가들이 대체적으로 “킬러 문항이 배제됐다”는 평가를 내린 것을 감안하면 위원회는 실제로 제 기능을 했고, 이는 앞으로 수능, 모의평가에서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교육부는 “9월 모평에서 국영수 세 영역에 가동한 공정수능출제점검위원회를 수능에선 전 영역으로 확대할 방침”이라고 밝혔다.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6월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에서 시작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킬러(초고난도) 문항’ 논란 이후 석 달이 지났다. ‘수능 문제를 출제할 때 학교에서 가르치는 공교육 과정을 넘어선 문제들을 배제하라’는 윤 대통령 지시는 원론적이고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역대 어느 정부도 대통령이 이를 구체적으로 언급, 지시한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례적으로 외신도 관심을 갖고 이 문제를 보도했다. 6월 21일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한국의 대입 시험은 매우 어려운 문제들로 악명이 높고 대통령이 불만을 토로했다”며 수능 출제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 사퇴, 교육부 인재정책기획관 경질 등을 다뤘다. 열흘 뒤에는 미국 CNN이 “킬러 문항은 학생들로 하여금 두통을 유발하게 하는 고급 미적분학부터 매우 모호한 문학 지문까지 다양하다”며 “2022년 한국인들은 사교육에 총 200억 달러(약 26조2000억 원)를 지출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는 아이티(210억 달러), 아이슬란드(250억 달러) 등 작은 국가들의 국내총생산(GDP)과 맞먹는 규모라고 했다.》6일 전국에서 치러진 9월 모의평가(9모)는 앞서 전개된 사태들의 ‘분기점’이었다. 정부는 전에 없던 점검위원회, 자문위원회까지 만들어 문항을 점검했다. 9모가 끝난 뒤 입시업체들은 대체로 “대통령의 지시대로 킬러 문항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은 쉽지 않았다”는 평가를 내놨다. ● 대학 지식 묻는 문항까지… 오류 시비도 킬러 문항이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이명박 정부였던 2010년 즈음이다. 한 현직 고교 교사는 “그전에도 수능 문제가 어려울 때도, 쉬울 때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문제점이 축적되고 있었다”며 “1994학년도에 처음 시행된 수능이 15년 가까이 이어지는 동안 교육과정, 학생들이 배우는 내용은 크게 바뀌지 않았고 출제자 입장에서는 새로운 문제를 낼 수 있는 여지가 자꾸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기출 문제가 쌓이고 쌓이면서 학생들이 수능에 ‘적응’하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교육당국은 학업 부담을 줄이겠다며 고교생이 배워야 할 학습 범위를 자꾸 줄였다. 하지만 수능은 한국에서 여전히 가장 객관적인 대입 평가 수단이었다. 특히 최상위권 학생들을 ‘객관적으로’ 줄 세우는 역할을 해야만 했다. 이 때문에 출제위원들은 ‘더 어려운, 더 복잡한’ 문제를 찾았고 각종 논문, 고전 철학, 경제금융 분야 전문 지식 서적, 대학 과정의 수학 이론까지 수능에 동원했다. 그 결과로 태어난 것이 ‘킬러 문항’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킬러 문항은 주로 수능이나 모의평가 국어, 수학 영역에서 출제됐다. 2019학년도 국어에는 만유인력 지식이 있어야 풀 수 있는 문제가 나왔다. 2020학년도 국어에는 자기자본비율(BIS), 위험 가중 자산, 바젤 협약 등 전문 용어가 지문에 등장했다. 2022학년도에는 헤겔의 변증법을 묻는 문제가 나왔다. 수학은 2018학년도에 복잡한 미분 문제가 출제됐는데 정답률이 2%대였다. 문제가 어렵고 꼬인 형태로 출제되다 보니, 출제 오류 시비도 있었다. 2021년 수능 때는 생명과학 문제에 오류 시비가 일었고 당시 수험생 92명이 평가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여기에 미국 명문대 교수까지 등판했다. 소를 제기한 학생들이 미국 대학 생물학 전공 교수들에게 e메일을 보내 이 문제가 틀리게 출제됐는지 물었고 유전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조너선 프리처드 미국 스탠퍼드대 석좌교수가 트위터에 “문제에 수학적 모순이 있다”고 밝혔다. 결국 강대중 당시 평가원장은 사퇴하고 전원 정답 처리됐다. 대표적인 ‘불수능’(어려운 수능)으로 꼽혔던 2002학년도 당시에는 수능이 전년도보다 심각할 정도로 어려워져 김대중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쉽게 출제한다는 정부 약속을 믿었다가 충격을 받은 학부모와 학생들을 생각할 때 매우 유감스럽다”며 사과까지 했다.● 대통령 말에 ‘발칵’… ‘카르텔’ 조사로 이어져 이 같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6월부터 시작된 ‘킬러 문항’ 사태는 준비 없이 급박하게 벌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수능을 불과 155일을 앞둔 6월 15일 윤 대통령은 “변별력은 갖추되 학교 수업만 열심히 따라가면 문제를 풀 수 있도록 출제하고, 학교 수업에서 다루지 않은 부분을 출제에서 배제하라”고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에게 지시했다. 당일 대통령실이 “공교육 교과과정에서 다루지 않는 문제를 출제하면 사교육에 의존하라는 것 아닌가”로 발언을 수정한다고 밝혔다. ‘물수능’(너무 쉬운 수능) 우려가 일자 16일 대통령실은 “쉬운 수능, 어려운 수능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공정한 변별력은 모든 시험의 본질”이라고 대통령 발언을 수정하는 자료를 다시 냈다. 같은 날 오후에는 장상윤 교육부 차관이 “공정한 수능에 대한 지시였다”고 말했다. ‘학교 수업’에서 ‘공교육’으로, 다시 ‘공정한 변별력’으로, 또 ‘공정한 수능’으로 미묘하게 조금씩 바뀐 것이다. 사태는 인사로 번졌다. 6월 16일에는 입시를 담당하는 이윤홍 교육부 인재정책기획관이 대기발령 조치됐다. 같은 달 19일에는 이규민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이 임기 도중에 사임했다. 수능도 아니고 모의평가 때문에 교육부 국장, 평가원장이 물러난 적은 처음이었다. 다음은 학원가였다. 윤 대통령이 교육 당국과 사교육 업체를 겨냥해 “한편(카르텔)이란 말인가”라고 한 여파였다. 서울 강남구 일대 주요 학원들, 유명 ‘일타 강사’들이 세무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한 사교육 관계자는 “학원들은 거의 공안 정국 분위기다. 다들 숨죽이고 있다”며 “암암리에 수능이나 모평 관련 분석 자료를 내지 말라는 압박도 들어온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문제의 원인을 찾기 전에 범인부터 색출하고 나섰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킬러 문항이 문제라면 이런 형태의 문항이 왜 수능에 등장하게 됐는지를 먼저 고민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한 고교 교사는 “학습 범위 축소, 장기간 이어진 수능 문제 고갈, 의대 등 일부 인기 학과의 치솟는 커트라인(합격선)과 학생 쏠림 현상, 수능 외에는 다른 객관적 평가 지표가 부족한 현실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난 결과가 킬러 문항”이라며 “정부가 이런 포인트를 먼저 찬찬히 짚어봤어야 했는데 실제로는 사람부터 자르고 봤다”고 지적했다.● 韓 교육열 과열… 전설적인 ‘무즙 파동’도 한국의 과도한 교육열도 현상의 배경으로 거론된다. ‘대입 시험에 어떤 문제를 넣고 빼느냐’는 논란에 대통령이 가세하고 국세청 등이 동원되는 사태는 해외에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이 교육 문제에 극도로 민감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의 과열된 교육 현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종종 거론되는 것이 1964년(1965학년도) 경기중 입학시험 출제 오류 사태였다. 당시 경기중 입학은 경기고-서울대 진학 지름길로 꼽혔고 전국 수재들이 몰렸다. 입학시험 자연 과목 18번에 ‘엿을 만들 때 엿기름 대신 사용할 수 있는 물질’을 묻는 문제가 나왔다. 정답은 ‘디아스타아제’였으나 문제는 다른 보기에 ‘무즙’이 있었던 것. 일부 학생들은 무즙을 정답으로 선택했다가 틀렸다. 어릴 때 무즙으로 엿기름을 만들어 본 경험이 있는 학부모들은 “무즙도 정답이다”며 항의 집회를 시작했고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서울시교육감이었던 김원규 씨가 “무즙으로 엿을 만들 수 있다면 무즙을 답으로 쓴 학생들을 구제해보겠다”는 발언을 했고, 일부 학부모들이 실제로 솥에 무즙으로 엿기름을 만들어 서울시 교육위원회에 가지고 나와 시의원들에게 “엿 먹어보라”며 항의 시위를 했다. 결국 반년이 흘러 경기중은 ‘무즙’을 정답으로 선택한 학생들 중 일부의 전학을 받았다. 당시 한상봉 문화체육교육부 차관, 시교육감 등이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이는 1969년 중학교 입시 폐지의 단초가 됐다. ● 교육계 “경쟁 구조에 대한 고민 필요” 문제는 앞으로다. 킬러 문항이 배제된 9월 모의평가는 ‘변별력’ 측면에서 일부 불안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수학 과목이 ‘쉬웠다’는 평가가 나온 것. 6일 시험을 마치고 나온 고교생들 중 상위권 상당수에서는 “이럴 거면 수학을 왜 공부했는지 모르겠다”는 반응들이 나왔다. 수능이 변별력을 상실한다면 대학 입장에서 정시에 지원한 학생들을 변별, 즉 ‘줄 세우기’ 할 수 있는 다른 자료들은 뻔하다. 수학이나 특정 과목에 가중치를 높인다든지, 논술 혹은 면접에서 보다 더 어려운 문제, 어려운 질문들은 던진다든지 하는 방법뿐이다. 교육계에서는 킬러 문항 논란을 계기로,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을 해결해야 한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한 고교 교사는 “상대평가와 경쟁 체제의 현재 입시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어떤 방식으로든 킬러 문항과 유사한 논란은 벌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우리나라는 교육부가 각 대학에 일정 비율 이상의 신입생을 반드시 정시(수능 성적)로 선발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수도권 주요 대학은 약 40%를 정시로 선발한다. 수능 성적 100%로 선발하는 정시의 구조상 주요대 의대, 약대, 수의대, 한의대, 치대와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최상위권 대학들로 올라가면 한 문제 차이가 당락을 결정할 수밖에 없다. 대학들은 이런 기능을 수능이 해주길 원하고 출제위원들이 이를 위해 고안한 것이 킬러 문항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일부 대학에서는 이 같은 시스템을 바꾸기 위한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신입생을 뽑을 때 아예 과, 학부 칸막이 없이 ‘1학년’으로만 뽑는다거나 인문계 혹은 자연계로만 뽑는 식이다. 이렇게 학생을 뽑으면 굳이 1등부터 100등까지 가려낼 필요가 없다. 일단 이렇게 선발한 뒤 1학년 과정을 거치는 동안 우수한 성적을 보이는 학생들이 2학년이나 3학년 때 좋은 과로 진학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한 사립대 교수는 “그간 일명 명문대라고 하는 곳들은 학생을 잘 가르치려는 노력 없이 처음부터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는 데에만 집중해왔다. 그 결과 대학 교육의 질이 떨어진 측면도 있다”며 “잘하는 학생을 뽑는 것보다는, 일단 뽑아서 우수한 인재를 만드는 방향으로 변해야 대학도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말했다.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우리나라의 혁신성장을 이끌 ‘인문사회 융합인재양성사업’이 29일 단국대 천안캠퍼스 보건과학관에서 출범했다. 이 사업은 교육부가 디지털시대, 기후위기 등 미래 문제에 대응할 5개 분야의 인재를 육성하는 사업이다. 이 사업에는 2025년까지 분야별로 90억 원씩 총 450억 원을 지원한다. 참여 대학은 총 25곳이다. 대학들은 5곳씩 컨소시엄을 구성해 학과, 대학 간 경계를 허물고 학문 간 융합교육 시스템을 도입한다. 교육 과정, 교육 방법, 교육 인프라도 혁신하고 비전과 교육모델도 공유한다. 참여 대학의 재학생들은 정규 과목 외에 인턴십이나 현장 전문가 특강, 경진대회 등의 활동을 통해 진로를 탐색할 기회를 얻게 된다. 또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다른 대학의 강의를 들을 수 있고, 산업체 현장실습의 기회도 주어진다. 이날 행사에는 교육부 최은희 인재정책실장, 박대현 한국연구재단 학술진흥본부장, 안순철 단국대 총장 등이 참석해 토론을 진행했다. 안 총장은 “미래 산업분야의 인재 육성과 산학협력 생태계 조성에 의미 있는 진전이 있도록 대학의 기본 역량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상반기(1∼6월)에 ‘주 69시간 근무 논란’으로 숨 고르기에 들어갔던 정부의 노동개혁이 내달부터 다시 본격화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공무원 임금 체계 개편도 고용노동부가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노동개혁 과제 중 임금 체계 개편에 대해 이성희 고용부 차관(사진)은 22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6∼9급, 법관, 검사 등 공무원부터 호봉제, 즉 연공서열 임금 체계를 개편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민간 기업뿐만 아니라 공무원 임금 체계 시스템도 개편 가능성이 제기된다. ● 1948년부터 호봉제… “정부부터 바꿔야” 일반 기업은 박근혜 정부를 전후로 성과, 직무 중심의 임금 체계가 확산됐다. 그러나 공무원은 1948년 법으로 임금 체계를 정한 이후 호봉제 틀을 고수하고 있다. 5급 이상 공무원에 한해 2017년부터 연봉제가 제한적으로 도입됐지만, 6∼9급 공무원을 비롯해 검사 법관 등은 여전히 근속 연수가 길어지면 급여도 오르는 호봉제다. 인사혁신처의 올해 일반직 공무원 봉급표를 보면 6∼9급은 1호봉에서 최대 32호봉까지 나뉜다. 6급 1호봉은 218만6800원, 32호봉은 454만6300원이다. 법관의 보수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올해 일반 법관 1호봉은 334만9800원, 17호봉은 878만9800원이다. 이 차관은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에서 기자를 만나 공무원 임금에 대해 “과도한 연공성을 좀 낮출 필요가 있다”며 “공무원 임금 테이블을 보면 호봉 인상분이 너무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은 공무원들이 서로 똑같은 일을 해도 호봉이 다르면 임금 인상 폭이 다르다”고 지적하며 “(근무 연한보다는) 직무 가치가 상승하면 그에 상승해 임금이 상승하는 식으로 개편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말했다. 당장 민간 기업처럼 바꿀 수는 없지만 호봉 상승분이 차지하는 비중을 조금씩 줄이고 성과나 직무 관련 비중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역대 정부도 공무원 임금 체계를 바꾸려 했으나 공무원 노조 반발에 부딪혀 무산됐다. 이 때문에 민간에서는 “기업에는 임금 체계를 바꾸라고 하면서 정작 공무원들은 옛날 호봉제를 고집하고 있다”는 비판이 계속됐다. 공무원 임금 체계 개편은 대통령실부터 예산권을 쥔 기획재정부 등 범부처적 논의가 필요하고 국회에서의 법 개정도 동반돼야 하는 사항이기도 하다. 이 차관은 “공공부문 임금 개편은 장시간에 걸쳐 단계적으로 해야 하고 노사가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며 “개편을 한 해에 뚝딱 해치우려는 발상은 그 자체가 ‘사상누각(모래 위에 지은 누각)’”이라고 말했다. 2000년대 초반 공무원 임금 체계 개편을 추진한 일본은 검토와 논의, 노사 대화만 5년을 거쳤다. 그런 뒤 2005년 호봉금 상승 비율을 줄이고 직급 차이에 따른 상승분을 늘리는 식으로 임금 체계를 개편했다.● 근로시간 개편 여론조사 내달 발표 전망 고용부 산하 상생(相生) 임금위원회는 임금 체계를 포함한 노동시장 이중 구조 개선 방안을 논의 중이다. 10월 이후 위원회의 논의 결과가 발표될 것으로 보인다. 고용부는 근로시간제 개편안에 대한 대국민 여론조사 결과도 내달 중순경 발표할 계획이다. 노사 의견 추가 수렴 과정 등을 거쳐 새로운 근로시간 기준 등을 내놓게 된다. 앞선 3월 정부는 주 기준이었던 연장근로시간 관리 단위를 월, 분기(3개월), 반기(6개월), 연 기준으로 확대하는 개편안을 발표했다. ‘주 52시간’에 묶여 있던 근로시간을 바꾸기 위해서다. 하지만 장시간 근로 비판 여론이 커지자 수정안을 준비해 왔다. 이 차관은 ‘69시간제’ 논란에 대해 “공론화가 충분하지 못했다. 국민 의사를 더 반영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이어 “근로시간 개편이 모든 업종, 직종에 똑같이 필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며 직종별, 업종별 차등 적용 가능성도 시사했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이 6월 29일 대통령고용노동비서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등을 거친 이 차관을 비롯해 차관 12명 인사를 단행할 당시 “개혁 과제 추진이 지지부진한 분야는 대통령의 장악력을 높여 정책 추진 속도를 높일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이 차관은 “부처, 여당, 대통령실 간에 정책을 놓고 엇박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저의 과제”라며 “대통령실부터 국회, 정부가 서로 다른 해석을 하지 않도록 개편 방안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서울 중구 청계천 평화시장 앞 전태일 다리에 있는 ‘전태일 동상’의 존치 여부를 논의하기 위해 전태일재단이 긴급 이사회를 23일 소집했다. 이 동상을 만든 민중미술가 임옥상 씨(73)가 최근 성추행 혐의로 1심에서 유죄를 선고 받았기 때문이다. 재단은 “이번 사건에 충격과 실망을 느끼고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날 재단은 ‘전태일 동상에 대한 전태일 재단 입장’을 냈다. 재단은 “전태일 동상 문제의 해결을 위한 논의를 시작했다. 고문단, 운영위, 이사회 등을 긴급하게 소집했다”고 밝혔다. 이어 “노동계를 포함해서 문화, 여성, 청년 등 각계 인사가 참여하는 전태일 동상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하고 신속하게 의견을 모을 것”이라며 “그 결과를 공개 보고하겠다”고 덧붙였다.전태일 동상은 2005년 청계천 복원 당시 노동자, 시민의 모금으로 성금을 마련해 설치됐다.당시 동상 제작을 맡은 것이 임 씨였다. 임 씨는 2013년 8월 자신이 운영하는 미술연구소 직원을 추행한 혐의로 6월 기소됐고, 1심 재판부는 17일 “죄책이 가볍지 않다”며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사건 이후 재단에는 전태일 동상을 그대로 놔둘 것이냐는 문의가 이어진 것으로 알려졌다.재단은 “임 작가가 성추행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선고 받았다”며 “아동 노동이 용인되던 시대, 어린 여성 노동자의 인권을 위하여 고군분투하다 산화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뜻을 넓고 깊게 확산하려는 취지로 재단은 활동한다”고 밝혔다. 재단 관계자는 “동상의 철거 혹은 존치를 모두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지난달 13일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미국 연방 교육장관 미겔 카르도나(48)의 인터뷰를 실었다. 사법부 판결들부터 이념 갈등, 학력 저하 논란, 교사 처우 개선 요구까지. 우리와 사안은 다르지만 미국 교육도 몸살을 앓고 있었다. 카르도나 장관은 “지금은 국가가 교사들을 가장 필요로 하는 때”라고 말했다. 서울 서초구 초1 교사의 극단적인 선택으로 우리 교육 현장이 암담한 시점에서 굳이 미국 장관을 언급하는 이유는 그의 이력 때문이다. 그는 인구 6만 명 남짓한 코네티컷주(州) 메리든의 한 초등학교에서 4학년을 가르치는 평범한 교사였다. 20여 년간 학교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그는 교장, 주정부 교육위원을 거쳐 2021년 조 바이든 행정부 초대 교육장관에 임명됐다. 현장 경험을 토대로 학교와 교사들을 이끄는 카르도나 장관을 보면서 최근 들었던 하소연이 떠올랐다. 교사 사망 사건 뒤 정부가 대책을 내놓을 때마다 교사들은 기자에게 “그들은 학교 현장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했다. 사건 이후 일련의 상황을 복기해 보자. 고인이 근무했던 초교 교장은 “학교폭력 신고 사안이 없었다”며 의혹을 부인하는 입장문을 서둘러 냈다. ‘신고 사안’이 아니었을 뿐 학폭은 있었다. “돌이킬 수 없다면 일어나지 않은 일로 만들라”는 넷플릭스 드라마 ‘D.P. 2’ 속 대사가 떠오른다. 정부는 문제의 원흉을 학생인권조례로 지목했다. 한 교사는 “조례가 부담되는 것은 맞지만 교권이 무너진 원인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했다. 학교를 추스르고, 사회적 논의를 주도해야 할 국가교육위원회는 ‘애도’만 남기고 사라졌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교권 보호 대책을 발표하면서 인공지능(AI) ‘교육청 챗GPT’ 프로그램을 만들어 학부모 상담에 사용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내놨다. ‘교수 출신 관료’의 한계였다. 서울시교육청은 학교에 학부모 민원실을 만들고 소송비 지원을 늘리겠다고 한다. 한 교사는 “윗사람들은 결국 뒤로 숨고 민원실에서, 법정에서 최종 책임은 교사 혼자 지라는 뜻”이라며 냉소했다. 교육 수장이 교사 출신이었다면 조금은 다르지 않았겠냐는 토로도 나온다. 문제는 앞으로다. 아수라장이 된 학교를 목격한 20, 30대 젊은 교사들이 교직을 떠나고 있다. 20년 차 고교 교사는 “젊은 후배들이 학원, 기업, 7급 공무원 시험 준비로 옮기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했다. 교직을 준비 중인 예비 교사들도 지금의 상황을 싸늘하게 지켜보고 있다. 카르도나 장관이 타임 인터뷰 중 한 말이 있다. “요즘 교사들이 매우 지쳐 그만둘 생각도 한다는 것을 안다. 그들의 번아웃(burnout·극도로 지침)은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가 되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당신을 위해 열심히 싸우고, 당신을 지지하는 그러한 정부를, 바로 지금 당신은 갖고 있다.” 승진 기회가 남은 교감과 교장, 다음 정치적 진로를 고민 중일 교육감, 총선 출마설이 나오는 장관이 교사와 학부모들 사이에서 무엇을 고민 중일지 충분히 짐작은 간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비극의 고리를 여기서 끊으려면 교장이, 교육감이, 장관이 카르도나처럼 명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장 교사들의 리더는 바로 나라고. 내가 최종 책임자라고. 내가 지지하고 보호할 테니 나를 믿고 따라오라고 말이다.이은택 정책사회부 차장 nabi@donga.com}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올해 11월 치러지는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에서 일명 ‘준킬러’ 문항을 늘리거나 새로운 유형의 문제를 출제하는 일은 없다”고 29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밝혔다. 수능 출제 과정에서 ‘킬러 문항’(초고난도 문항) 배제 임무를 맡을 ‘수능공정출제점검위원장’에 현직 고교 교사를 임명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출제위원장을 견제할 권한을 부여하겠다고 밝혔다. 또 “내년 수능부터는 문항별 정답률과 변별도 수치를 공개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했다. 이날 이 부총리는 정부서울청사에서 본보와 만나 “기존 수능에 있던 킬러 문항을 제거하겠다는 것이지, 새로운 문제를 일으키겠다는 것이 아니다”며 최근 사교육계에 퍼진 ‘준킬러 확대’ 전망을 일축했다. 그는 “준킬러 문항이라는 용어 자체도 사교육의 불안 마케팅”이라며 학생과 학부모가 동요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이를 위해 “당장 9월 모의평가부터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나 EBS를 통해 출제 경향을 분석, 공개할 방침”이라고 했다. 올해 수능부터 신설될 ‘수능공정평가자문위’와 ‘수능공정출제점검위’ 구성에 대해 이 부총리는 “기존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인재 풀과는 겹치지 않도록 하겠다”며 “사교육 카르텔 이야기까지 나오는 상황에서는 평가원으로부터의 독립성이 보장돼야 한다”고 경계했다. 이 부총리는 “출제위원이 만든 문항을 점검위원이 ‘킬러 문항’이라고 판단할 경우에는 반드시 출제에서 배제하도록 하겠다”며 “이는 대단히 중요한 국민과의 약속”이라고 밝혔다. “9월 모평 뒤 출제경향 공개… 킬러문항 없애도 변별 문제없어” “내년 수능부터 정답률-변별도 공개출제위원-점검위원 철저히 분리‘사교육카르텔’ 실체 밝혀지면 개선수능개혁 사회적 논의 하반기 시작”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2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진행된 본보 인터뷰에서 “지금도 현장 교사들은 매번 기말고사로 학생들을 평가하고, 교육과정 내에서도 얼마든지 변별력 있는 평가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에서 ‘킬러 문항’(초고난도 문항)이 사라지면 변별력을 잃고 ‘물수능’(쉬운 수능)이 될 것이란 우려를 반박한 것. 윤석열 대통령의 15일 수능 발언 이후 교육현장은 파장이 커지고 있다. 이 부총리에게 수능, 사교육 카르텔, 입시제도 개혁에 대한 생각을 들었다. ―수능이 불과 5개월 전인데 혼란이 크다. 올해 어떻게 출제하나.“올해는 영역별로 1, 2개에 불과한 킬러 문항들만 없앤다. 그것만 하겠다는 것이다. 학부모와 학생들이 동요할 만큼 그렇게 많은 문항이 아니라는 걸 일단 강조하고 싶다. 일선 학교에서 출제되는 시험들은 이미 공교육 과정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학생을 변별해 낸다. 킬러 문항이 사라져도 변별은 이뤄질 것이다. 새로운 유형의 문제가 등장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평가의 본질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 ―수능출제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정보를 공개 안 하니까 사교육에 의존한다. “이번을 계기로 공교육에서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는 요구가 있어서 내년 수능(2025학년도)부터는 정보 공개를 검토 중이다. 수능 문항별 ‘정답률’뿐 아니라 ‘변별도’도 포함될 것이다. 변별도는 특정 문항을 잘 푸는 아이들의 전체 성적이 어떤지 그 연관성을 보여 주는 중요한 지표다. 단, 공개가 불안을 조장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어서 면밀히 지켜보는 중이다. 9월 모의평가부터는 시험이 끝난 뒤에 EBS나 평가원 등 공적 기관에서 출제 경향 등을 학부모들에게 알리는 설명회를 열려고 한다. 그래야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수능공정출제점검위원회와 수능공정평가자문위원회의 구체적인 역할은…. “자문위는 출제 이전과 이후 과정에서, 점검위는 출제 과정에서 킬러 문항을 감시하고 배제한다. 때문에 점검위원장이 출제위원장 밑에 있으면 안 된다. 그러면 형식적인 점검이 돼 버린다. 교수(출제위원)가 만든 문제라도 교사(점검위원)가 킬러라고 판단하면 반드시 배제하도록 프로세스(절차)를 마련할 것이다. 점검위원장을 현직 교사가 맡도록 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위원회 구성에 수능 출제기관인 평가원을 완전히 배제하는 건가. “수능 출제는 평가원이 한다. 긴밀히 같이 해야 하는 일이긴 하다. 그렇지만 지금 사교육 카르텔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신고 접수까지 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평가원으로부터 상당히 독립적인 기능이 갖춰져야 한다. 카르텔이라는 것이 서로 알음알음으로 하다 보니 생겨나는 것 아닌가. 평가원 출제위원과 점검위원, 자문위원을 철저히 분리하겠다.” 이 총리의 발언은 평가원에서 수능 출제를 담당했던 교수나 교사들이 사교육 업계에서 영리 행위를 하고 있는 실태를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은 ‘카르텔’이라고 표현했다. 국무총리실은 평가원에 대한 복무 감사를 진행 중이다. ―점검위원과 자문위원의 신분, 권한을 보장할 방안은…. “점검위는 수능 출제를 마치면 해산하지만, 자문위는 1년 내내 ‘스탠딩 커뮤니티’ 형식으로 존재한다. 필요할 때마다 모여서 회의를 열고 이전 수능을 리뷰하고 다음 수능 대책을 논의한다. 자문위원 임기는 1년이다. 내년부터 임기, 권한을 법적으로 보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면 국회에서 입법 추진도 검토하겠다.” ―‘스카이(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인맥이 출제위원에 너무 많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와 관련해 소위 ‘사교육 카르텔’ 신고를 받고 있다. ‘어떤 특정 그룹’이 출제에 많이 들어가서 그들의 이해가 반영됐고, 이 때문에 사교육이 성행한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들어온다. 조사를 해서 그 실체가 밝혀지면 개선해야 한다.” ―이번을 계기로 수능은 공통 과목 비중을 늘려서 절대평가로 바꾸고 장기적으로 대학이 자율적으로 학생을 선발하도록 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온다. “(웃음) 제 마음을 들여다보고 계신 것 같다. 수능을 ‘자격고사화’해야 한다는 요구도 최근에 많이 들어온다. 지금 어떻게 하겠다고 언급하면 일파만파가 되니까 말씀은 못 드리지만, 상당히 좋은 제안들이 있다. 이것이 대입제도 개편의 동력이 될 수 있다. 장관 취임했을 때 ‘수능은 미세 조정밖에 못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이제는 동력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하반기(7∼12월)부터는 수능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할 것이다.” ―교육부 대입국장 경질의 배경을 놓고 추측이 무성하다. “대통령님은 원칙을 계속 강조했는데, 사실 관행적으로 지켜지지 않았던 부분들이 있었다. 6월 모의평가에서 킬러 문항 없는 제도로 된 모의평가가 출제됐다면 사실 그게 제일 정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담당 국장을 경질하고 국민께 사과한 것이다.”이은택 기자 nabi@donga.com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재정난에 시달리는 전태일재단이 출범 42년 만에 처음으로 후원 행사를 연다. 그간 저임금 근로자와 재정이 열악한 노동조합 등을 지원해 온 재단은 “현재 방식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상황”이라고 배경을 밝혔다. 전태일재단은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한 고 전태일 열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1981년(당시 ‘전태일기념관 건립 위원회’) 구성됐다. 14일 재단은 15일 오후 6시 반부터 오후 8시까지 서울 종로구 조계사 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제1회 후원의 날 ‘태일이네 문을 열다’를 연다고 밝혔다. 그간 재단은 방송작가, 대리운전, 라이더, 제화, 아파트 경비, 청년 근로자 등을 조합원으로 둔 노조나 공제회 등을 지원하는 활동을 해왔다. 재단에 따르면 매달 재단 운영비, 사업비, 지원비 등으로 2500만 원이 나간다. 하지만 매달 들어오는 정기 후원금은 1700만 원 수준이다. 재단은 “그간 부족한 재원은 개인, 노조 등의 특별후원금으로 채워왔다”며 “하지만 이제는 감당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밝혔다. 재단은 ‘전태일 기념관’을 둘러싼 오해에 대해서도 해명했다. ‘전태일 재단’은 서울 종로구 창신동 봉제거리 안쪽에 있고, ‘전태일 기념관’은 서울 종로구 관수동 청계천 인근에 있다. 재단이 기념관을 서울시로부터 수탁받아 운영하지만, 기념관 관련 돈이나 수익은 재단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재단과 기념관이 서로 별개인 셈. 재단은 “서울시에서 수탁받아 운영하는 전태일기념관 관련 예산은 재단 운영에 한 푼도 쓰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재단을 이끄는 한석호 전태일재단 사무총장에 따르면, 재단 직원들은 재단의 어려운 사정을 감안해 본인들의 임금도 인상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사회가 직원들의 임금을 올리자고 했지만, 직원 본인들이 스스로 ‘그럴 수 없다’며 임금 인상을 거부한 것. 한 사무총장은 지난달 29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해 초 전태일재단 이사회가 열렸다. 예산안을 심의하며, 이사들이 사무국 직원 임금을 5% 인상하라고 주문했다. 그랬는데 사무국이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임금을 인상할 여력이 있으면 전태일재단 문을 두드리는 노조와 공제회 등에 더 지원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임금을 올리라는 이사들과 올릴 수 없다는 사무국 사이에 실랑이가 이어졌다. 이사들은 사무국의 뜻을 꺾지 못했다”고 밝혔다. 노동계 원로인 한 사무총장은 현재 고용노동부 산하 상생(相生)임금위원회에 노동계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원청과 하청,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 근로자의 임금 격차를 줄이고 이중구조를 해소하기 위해 위원회에 참여했지만, 이 일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으로부터 재단 사무총장직 사퇴 압박을 받기도 했다. 한 사무총장은 민노총 사회연대위원장을 지냈다. 재단은 이번 후원 행사를 통해 후원자와 재단 공동 이름으로 불안정 노동 단위에 지원할 계획이다. 비정규직 노동자, 하청노동자,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 등이 지원 대상이다. 재단은 “전태일은 돈이 많아서 배곯고 일하는 열서너 살 어린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준 것이 아니었다”며 “자신보다 더 어려운 시다와 미싱사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마음의 고향인 그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해 자신을 바치고 산화했다”고 밝혔다. 이어 “전태일재단의 운영원칙은 바로 그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처럼’이다”라고 덧붙였다.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사단법인 노동법이론실무학회는 9일 오후 2시 고려대에서 노동법이론실무학회 제59회 정기학술대회 및 정기총회를 연다. 고려대 법학연구원 노동사회보장법센터 후원하는 이번 총회에는 박지순 고려대 노동대학원장, 이욱래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등이 참석한다. 1부 기획세션에서는 ‘위법 쟁의행위와 손해배상책임’을 주제로 최우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김희성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준희 광운대 법학부 교수가 발표한다. 종합 토론에는 성대규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송강직 동아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상희 한국공학대 지식융합학부 교수가 참여한다. 2부 일반세션에서는 ‘산업안전보건법제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주제로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가 발표하고, 전형배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토론한다.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미국 남동부 노스캐롤라이나주는 1950년대만 해도 미국 전역에서 1인당 주민 소득이 가장 낮은 지역이었다. 당시 미국인 1인당 평균 연 소득이 1639달러(약 214만 원·1952년 기준)였는데 노스캐롤라이나는 1049달러(약 138만 원)에 불과했다. 지역 사람들 대부분은 소규모 농업이나 섬유공업, 산림업, 가구 제조 같은 저임금 일자리에 종사했다. 학생과 청년들은 초중고교를 졸업하면 다른 주로 떠났고,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70여 년이 지난 현재 이 지역은 미국 최고의 두뇌를 길러내는 북미 최대 첨단기술 연구단지를 품은 곳으로 완전히 바뀌어 있다. ‘리서치 트라이앵글 파크(RTP·Research Triangle Park)’로 불리는 인구 130만 명의 연구 도시가 형성된 것. 이러한 변화를 만들어낸 것은 다름 아닌 주내 채플힐의 노스캐롤라이나대, 더럼의 듀크대, 롤리의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등 세 지역 대학들이었다.● 대학-지역 혁신의 모델, 美 RTP1950년대 중반 쇠락해 가는 노스캐롤라이나를 살리기 위해 주정부와 민간, 그리고 대학은 아이디어를 모은 끝에 ‘리서치 트라이앵글 개발 위원회’를 만들었다. 지역 내 주요 3대 대학을 중심으로 삼각형 모양의 첨단 연구단지와 공동 캠퍼스를 만들고 기업, 인재를 유치해 노스캐롤라이나주를 살린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처음부터 미국 정부가 아니라 철저히 지역, 대학, 민간 주도로 진행됐다. 그 결과 1980, 90년대 지역 고용이 늘기 시작했고, 최근 40년간 매년 평균 6개의 새로운 기업, 1800명의 신규 고용이 창출됐다. 현재는 IBM, SAS인스티튜트 등 글로벌 회사와 스타트업이 입주해 대학과 유기적으로 연구를 주고받으며 140여 개 연구개발 시설이 가동되고 있다. 이는 최근 한국의 대학, 지역이 처한 위기에 시사점을 제공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저출산 고령화가 학령인구 감소, 지방대와 지방 인구 소멸로 이어지는 중이다. 본보 ‘위기의 대학 해법을 찾아서’ 시리즈 1회(22일자), 2회(23일자)를 통해 살펴본 국내 지방대와 지역의 현실은 참담했다. 문 닫은 대학 연구실에는 먼지만 쌓였고 주변 상권은 붕괴됐다. 지역의 쇠락과 인재 유출은 우리만 겪는 문제가 아니다. 이미 주요 선진국은 이를 겪었고, 그중 일부는 해결책을 찾아내 더 나은 대학과 지역을 만들어 냈다.● 말뫼-애리조나, 시장과 총장이 변화 주도스웨덴의 남서부 스코네주에 있는 도시 말뫼는 시장(市長)이 주도해 도시를 바꾸고, 그 기반에서 첨단기술 대학이 태어난 사례다. 조선업 중심 도시였던 말뫼는 1970년대부터 한국, 일본에 경쟁력이 밀리면서 쇠퇴했고, 청년 실업률이 20%에 달했다. 말뫼는 도시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지식기반, 첨단기술 도시로의 변화를 추진했고 일마르 레팔루 당시 말뫼 시장(현재 80세)이 이를 주도했다. 덴마크 코펜하겐∼말뫼 교량 설치, 주상복합빌딩 건설 등이 이뤄지는 와중에 1998년 7월 1일 조선소 부지에 ‘말뫼대’가 설립됐다. 말뫼대를 중심으로 ‘스타트업 육성’ 집중 투자가 이뤄졌고 국가, 대학, 지역이 연계된 스타트업 생태계가 구축됐다. 미국 애리조나주립대(ASU)가 있는 템피는 총장의 개혁이 도시까지 바꾼 사례로 꼽힌다. 2000년만 해도 ASU는 대학 전체 예산의 90%를 주정부에서 지원해야 할 정도로 재정난이 심각했다. 당시 재학생은 5만5000명 정도. 그 와중에 주정부는 지원금을 줄이기 시작했고 대학의 쇠락은 템피 지역의 쇠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2002년 취임한 마이클 크로 ASU 총장은 강력한 리더십으로 대학 혁신 정책을 폈다. 그는 ASU의 문을 지역에 개방하고 신입생 선발 계층을 넓혔다. 또 대학과 기업, 지역사회와 연계한 맞춤형 교육 캠페인을 벌였다. 이런 노력 덕분에 ASU는 최근 5년간 미국 US뉴스앤드월드리포트가 선정하는 ‘가장 혁신적인 대학’ 1위에 올랐다. 크로 총장은 2023년 현재도 이 대학 총장으로 재직 중이다. 애리조나 지역 언론 애리조나빅미디어는 지난해 11월 “크로 총장은 상아탑을 허물고 대학을 재설계했다”며 “그는 깨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것들을 발굴하고 가져와 부수는 일을 20년 넘게 해왔다”고 평가했다. 일본도 문부과학성 주도로 2013년부터 ‘지역 활성화를 이끌 수 있는 대학을 만든다’는 목표로 거점 정비 사업, 일명 ‘COC(Center of Community)’ 사업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일본 요코하마시는 2005년 ‘대학-도시 파트너십 협의회’를 설립했고 시(市), 요코하마 지역 대학, 지역 공동체가 삼각 협력 체계를 구축해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등의 성과를 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 남동부 코트다쥐르주 니스 근처에 있는 ‘소피아앙티폴리스’가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이 첨단 연구단지는 1970년대 지자체가 도시 건설을 주도한 뒤 국가사업으로 확대됐고 현재 IBM, 에어프랑스 등 2500곳이 넘는 기업과 파리광산대, 국립정보과학대(ESSI) 등 고등교육기관이 입주해 있다.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동아일보 4월 25일자 A8면에 실린 한석호 전태일재단 사무총장 인터뷰에서 지면사정상 미처 다 담지 못했던 내용들을 온라인에 게재합니다.“조국(전 법무부장관) 일가(一家)의 행위는 불평등이고 불공정이었어요. 상위 1%의 삶, 최상위 1% 성취 안의 삶을 자식들에게 대물림하기 위해 불공정한 행위를 한 거잖아요. 그걸 진보가 옹호하면서 조국은 무죄다, 정경심(조 전 장관의 아내)은 무죄다 이런거죠. 그때부터 격렬하게 진보가 오염됐다고 생각해요.”● 창신동 봉제거리에서 만난 한석호 20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의 일명 ‘창신동 봉제거리’. 이 곳은 영세한 소규모 봉제공장이 벌집처럼 다닥다닥 들어앉은 골목이다. 대부분 사장과 근로자를 합해도 서너 명에 그치는, 일명 ‘5인 미만 사업장’이 밀집해있다. 우리나라 근로기준법(근기법)에서 5인 미만 사업장은 그늘과 같은 곳이다. 임금, 근로시간, 휴가, 휴업수당, 해고 등과 관련된 조항들이 적용되지 않는다. 영세 사업장을 근근이 꾸려가는 사장은 근로자에게 넉넉한 임금을 지불하지 못하고, 근로자는 최저임금 혹은 그를 밑도는 시급을 모아 월 최저생계비를 확보하기 위해 ‘초장시간’ 근로를 자처하고, 법은 이런 상황을 합법으로 간주한다. 그렇게 24시간 365일 봉제거리는 합법적 묵인 하에 쉴 새 없이 작동한다. 이 거리 어느 골목 끝에 열려있는 공장 문틈으로 ‘드르륵, 드르륵’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기관총 연사음처럼 흘러나왔다. 안에서 재봉사의 작업 현장을 바라보고 있던 한석호 전태일재단 사무총장(59)이 기자에게 말했다. “주 69시간 근로시간, 최저임금 이런 것들은 이 사람들에게는 다른 세상이야기예요.” 바깥일을 보고 작업장으로 복귀하던 공장 사장이 한 사무총장과 기자를 보더니 꾸벅 인사했다. 전태일재단 근처에 있는 공장이라 두 사람은 서로 오래 지켜본 이웃이었다. 노동운동가와 봉제공장 사장은 평소처럼 안부를 나눴다. “여기서 일하는 분들은 정해진 출퇴근 시간이 없어요.” 한 사무총장이 말했다. “아침 8시나 9시에 와서 일하곤 정해진 퇴근시간도 없이 밤늦게까지 하다가는 ‘아, 오늘 이 정도 정리하고 간다’ 싶을 때 가는 거예요. 우리 사회에서 보수, 진보라고 하는 사람들이 봐야 할 곳은 이러한 밑바닥이예요.”● ‘화염병과 쇠파이프’에서 ‘연대’로 한 사무총장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민노총 산하 전국금속산업노조연맹(현 전국금속노조) 조직실장을 지냈다. 본인은 “노동운동을 한 건 35년 쯤, 학생운동까지 합치면 40년 쯤 했다”고 한다. 그는 1983년 서울시립대 도시행정학과 재학 시절 학생 운동에 뛰어들어 1987년 ‘6월 항쟁’ 때 처음으로 구속됐다. ‘조직’ 소속으로 노동운동을 한 건 민노총의 전신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시절이었다. 그는 “전노협의 선봉대, 조직쟁의 전문가, 일명 ‘화염병과 쇠파이프’”라고 본인을 소개했다. 그런 그가 지금은 민노총으로부터 ‘뭇매’를 맡고 있다. ‘운동’ 연차나 이력으로 보면 노총 위원장, 고용노동부 장관,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 혹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금배지’라도 됐어야지 싶은데 지금 그의 사무실은 창신동 골목의 아담한 사무실이다. 번잡한 대로에서 골목으로 들어가야, 그리고 그 골목에서 다시 오르막길이 시작되는 더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야 왼쪽편 구석에 그의 사무실, 전태일재단이 나온다. 한 사무총장은 요즘 자꾸 ‘임금투쟁’이 아니라 ‘연대’를 말한다. ‘우리 임금을 올리자’가 아니라 ‘너희 것을 나누자’고 한다. 그래서 민노총과 갈등 중이다. ‘나눠야 할 것’을 가진 대기업 정규직, 민노총 내 고소득이나 원청 근로자도 그를 ‘이단시’ 한다는게 본인의 말이다. 윤석열 정부에서 상생(相生)임금위원회에 참여한 뒤 한 사무총장은 “사무총장직에서 사퇴하라”는 요구를 민노총으로부터 받았다. 한 사무총장은 기자에게 “지상파 방송사 정규직 평균 임금이 1억 원 쯤 됩니다. 그런데 5년차 이하 막내뻘 비정규직 작가, 스테프들은 3000만 원이 될까말까예요”라고 했다. 고(高)임금 정규직 근로자는 위에, 저임금 비정규직 근로자는 아래에 있다. 이걸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라고 한다. 한 사무총장은 “이중구조와 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다면 내 영혼이라도 팔 것”이라고 말했다. 봉제공장과 재단에서 한 사무총장이 생각하는 양극화, 노조와 진보의 문제점, 한국의 고용 현실에 대해 들어봤다.● “불평등을 방치했고 나는 실패했다”―40년 가까이 노동운동에 투신했는데 본인을 ‘실패했다’고 스스로 규정했다.“이런거다. 노동운동을 열심히 하긴 했는데…. 상층(고임금 근로자)만 처우가 좋아지고 저 밑바닥(저임금 근로자)은 방치되도록 놔둔, 그런 노동운동이었다. 불평등은 심화됐다. 노동자들도 상위 10%와 하위 50%는 하나의 노동자 계급이라고 이야기 할 수도 없는, 분단 계급이 됐다.”―11년 전 인터뷰에서 ‘젊은 청년과 노동자에게 많이 미안하고 아프다’고 한 적이 있다. 지금은 어떤가“흐….” 그는 한숨을 쉬다 입을 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합계)출산율 0.78’ 속을 쭉 파고들면 소득 불평등이 있다고 본다. 상위 10%, 20% 일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청년들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을 수 있다. 그런데 나머지 80%, 혹은 최저임금 노동을 하는 청년들은 결혼을 할 엄두를 못 낸다. 노조가 ‘조직된 이들’의 임금과 고용조건을 지키는 데에만 집중하고 몰두해온 것이 만든 현상이다. 노조 밖의 현실을 못 보고 있었다.” 한 사무총장이 말하는 조직된 이들은 충분한 임금을 받고 노조를 결성해 사측과 동등한 입장에서 교섭을 할 수 있는 집단을 뜻한다. ‘노조 밖의 현실’은 그런 처지에 있지 못한 근로자들을 말한다.―임금 양극화가 언제부터 벌어졌다고 보는가.“1996,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전부터 그런 현상이 많이 나타난 것 같다. 경제 위기로 대량해고 사태가 벌어지자 노동운동 안에서 ‘나부터 좀 살고 보자’, ‘내 임금 좀 지키자’는 기류가 강해졌다. 이들이 총파업을 벌이자 자본과 기업 입장에서는 매우 놀랐고 이들 ‘조직된 노동자들’을 적으로 돌리지 말아야겠다는 판단이 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임금을 올려주고 처우를 개선하고, 그 임금을 마련하기 위해 하청·비정규직 인건비를 쥐어짜게 된 것이다. 그게 30년 넘게 계속됐다.”―당시 노동운동을 할 때는 그걸 몰랐나.“당시 민주금속연맹 조직부장이었다. 그때는 그 문제(양극화)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곤 전경(전투경찰)들, 그 뒤에 있는 정권, 그리고 재벌, 이런 것 만 보였다. 2001년 다시 투옥되면서 독서를 하고 생각을 할 시간이 많아졌는데 그때서야 ‘아, 뭔가 이상하다. 나의 노동운동은 실패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저임금·비정규직 근로자들은 왜 고임금·정규직 근로자들처럼 노조를 세력화 못 했나“고용노동부 통계를 보면 30인 미만 사업장의 노조 가입률은 0.2% 정도다. 그곳에 속한 노동자들이 노조를 몰라서, 아니면 노조 하면 감옥 갈까봐 무서워서 안 하는 게 아니다. 노조를 해도 임금을 못 올린다는 걸 알기 때문에 안 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 영세 사업장은 사장들이 근로자보다 더 힘들어했다. 임대료는 내야 하는데 일은 없고. 이런 처지를 피차 서로 아는 거다. 영세한 식당이나 공장, 중소공단, 시흥 반월 동두천 등 지방의 농공단지 같은 곳들은 사장들이 근로자에게 임금을 더 주고 싶어도 못 준다.”● “韓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라는데…”―양극화가 어느 정도 심각하다고 보는가.“한국이 국민 소득 3만 달러(약 4007만 원) 시대라고 한다. 환율에 따라 변하지만 대략 4000만 원이다. 이는 갓 태어난 신생아든, 팔순 어르신이든, 집에서 가사 노동하는 주부든, 초중고생이든 누구나 연 4000만 원 가량의 경제적 혜택을 입는다는 의미 아닌가. 그런데 하루에 8~10시간 씩 일주일 일하고면서도 연 3000만 원을 못 받는 사람들이 통계청 발표 기준으로 근로자의 절반 가량을 차지한다. 말이 되나.” ―그 속사정은 노조가 제일 잘 알 텐데, 왜 대책 마련에 나서지 않았나.“오래된 관성이다. 1990년대부터 노조는 임금인상 투쟁이 가장 쉬웠고, 파업하자하면 너도나도 모였다. 그렇게 이어지면서 ‘기승전 임금인상 투쟁’이 됐다. 그게 사회적 현상이 돼버렸다.”―‘고임금’, ‘파업’하며 현대차가 제일 먼저 회자되는데.“현대차는 오히려 안정되어가는 중이다. 2018년도에는 하청 임금 인상액을 더 높게 책정하는데 합의하기도 했다. 2020년도에는 기본급을 스스로 동결했다. 최근의 임금 인상 경쟁은 오히려 ‘판교 밸리’로 대변되는 정보기술(IT) 기업들과 삼성전자, SK, LG 이런 곳에서 불 붙고 있다.”―양극화 해소를 위해 정부, 기업, 노조는 무엇을 해야 할까.“노동계는 양대노총을 중심으로 ‘하후상박’을 해야 한다. 고임금 근로자는 임금을 천천히 올리고, 저임금 근로자는 두텁게 올리고. 경영계는 부유한 회사라고 해서 자꾸 임금 올리는 경쟁을 해서는 안 된다. 이제 사회를 봐야 한다. 양대 노총이 먼저 나서 저임금 근로자를 위한 기금을 만들면 재벌 총수들이 내는 것보다 더 큰 기금을 만들 수 있다. 양대 노총 조합원 250만 명이 매달 1만 원씩 기금을 모으면 단순 계산해도 연 3000억 원이다. 이건 기업 사내유보금 다 털어도 안 되고, 재벌 총수 주식 다 털어도 안 되는 문제다. 노동계가 이렇게 먼저 나서면 기업과 정부도 따라올 것으로 믿는다. 그 과정에서 노동계는 한국의 경영자와 재벌체제를 인정해주고, 기업은 노조의 자유로운 권리와 교섭권을 인정해주는 식의 타협이 필요하다.”● “양극화, 정부-경영계 책임만 물어선 안 돼”―민노총에 이러한 제안을 해본 적은 없는가.“사회연대위원장을 하면서도 주장했는데 집행부는 동의하지 않았다. 재벌이 책임져야지 정부가 책임져야지 왜 우리가 그걸 책임 지냐고 한다. 지금 이 얘기는 경영계와 정부의 책임만 물어서 해결 되는 게 아니다. 노사정을 중심으로 전 사회가 앞으로 20년 플랜, 30년 플랜을 가야지만 이룰 수 있다. 그렇게 출발해도 20년 30년, 어쩌면 50년 100년이 걸릴 수도 있다.”―양극화를 어느 수준까지 해소해야 할까.“적절한 수준의 불평등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마르크스식 소비에트식 평등주의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그걸로 노동운동 했지만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도 최소한 열심히 일했는데 연 소득 2500만 원도 안 되는 이들은 소득은 사회가 뒷받침 해 줘야 하지 않는가. 상위 10% 부자가 사회 전체 부의 30%를 점유하고, 나머지 90%가 70%를 점유하는 정도가 이상적이지 않을까 싶다. 스웨덴이 그렇다.―시간이 흐르면 양대노총도 세대교체가 이뤄질까. “당연하다. 물리적으로 지금 집행부는 정년퇴직하지 않겠나.(웃음) 다만 어떤 방향으로 바뀌느냐가 문제다. 자기 이익만 더 생각하는 ‘왜곡된 능력주의’로 간다면 한국 사회는 아수라장,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되는거다. 반면 서로 연대하는 방향, 서로 손 잡는 방향으로 가면 아주 긍정적으로 가는거다.”―최근 본인 페이스북에서 ‘진보는 오염됐다’고 썼다. 그 진보는 누군가.“우리 한국 사회에서 진보라고 하면 더불어민주당과 그 왼쪽을 말한다. 물론 노동운동 안에서는 논란이 있지만 사회적으로 보면 대체로 그렇다. 이들이 오염됐고 그 출발점은 조국 사태다. 진보는 자기 가치를 지키기 위해 냉철해야 하는데, 그들은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하면서 진보의 가치를 완전히 훼손시켜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지금까지도 여전히 옹호한다. 문제가 드러나면 잘못했다고 반성을 해야했다. 진보가 그렇게 망가지고 오염됐는데, 내가 굳이 나를 진보라고 고수할 필요가 없다.”―1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금태섭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등과 함께 ‘성찰과 모색’ 첫 토론회에 참석했다. 정치를 할 생각인가“현실 정치를 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다. 나에게 두 가지 원칙이 있다. 하나는 ‘관(官·정부)밥’ 먹지 않는다. 또 하나는 선거에 나가지 않는다. 사실 그날 좌장은 다른 분을 모시려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분이 사정이 여의치 않으셔서 무산됐다. 그래서 누구를 모실까 하다가 김종인 선생님 이야기가 나왔다. 그래서 좌장으로 모셨다. 매번 이렇게 나오시는 건 아니고.”●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한 사무총장은 인터뷰 도중 재단 벽에 걸린 전태일 열사 사진을 보며 말했다. “사실 전태일은 맨 아래 노동자가 아니라 재단사, 즉 중간 관리자였어요. 그 정도의 비상한 머리와 강력한 의지를 가졌던 사람이 ‘위’를 보면서 ‘나도 사장을 해야겠다’ 마음 먹었으면 지금쯤 못해도 대단한 의류업체 회장은 돼있었을 거예요.” 전태일은 의류업체 회장이 되는 대신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에서 자기 몸에 석유를 뿌린 뒤 분신했다. 그는 죽어갈 때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고 외쳤다. 한 사무총장은 “전태일은 위가 아니라 아래를 봤어요. 피 토하는 미싱사, 배 곯는 시다를 봤고 자기 몸을 던졌죠. 그래서 그가 아름다운 청년으로 역사에 남은거예요. 우리도 아래를 봐야해요”라고 말했다.이은택기자 nabi@donga.com}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등에서 40년 가까이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한석호 전태일재단 사무총장(사진)은 20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노동계가 30년 넘게 대기업과 중소기업, 원청과 하청,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양극화 문제를 방치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지금까지 노동계는 정부와 기업에만 그 책임을 미뤄 왔다”며 “노동계와 양대 노총이 먼저 변해야 한다”고 했다. 》“양대 노총 조합원이 약 250만 명이다. 이들이 월 1만 원씩이라도 모아서 비정규직과 저임금 노동자들을 위한 기금을 마련해야 한다.” 20일 서울 동대문구의 한 봉제공장. ‘드르륵’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리는 가운데 한석호 전태일재단 사무총장(59)은 “이곳 사람들은 아침 8시에 출근해 밤 11시, 12시에 퇴근하고도 연 수입이 3000만 원을 넘지 못한다. 주 69시간 근무, 최저임금 같은 소리는 이들에게 다른 세상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민노총은 ‘양극화를 재벌이, 정부가 책임져야지 왜 우리가 책임지느냐’고 한다”며 “아니다. 노동계가 먼저 나서야 정부도 기업도 따라온다”고 말했다. 1983년부터 노동운동에 투신해온 그는 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금속산업연맹 조직실장까지 지냈다. 현 정부에서 임금 개편을 논의하는 상생임금위원회에 참여했다가 민노총에서 사무총장 사퇴 요구 등 ‘뭇매’를 맞았다. 그는 본보 인터뷰에서 “양극화와 임금 격차 문제를 풀기 위해서라면 내 영혼이라도 팔 것”이라며 “노동계부터 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조가 고임금-정규직 대변, 양극화 심화”한 사무총장은 “나는 노동운동을 열심히 하긴 했는데 그 결과 상층 노동자만 처우가 좋아지고 밑바닥(저임금 근로자)은 방치됐다”며 “나의 운동은 실패했다”고 규정했다. 이어 “방송사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가 심하면 7, 8배 난다”며 “정규직 연봉은 1억 원이 넘는 사이 5년 차 이하 비정규직 작가들은 나이 서른이 훌쩍 넘어도 연봉 2000만∼3000만 원을 못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했다. 그는 영세 식당이나 시흥 반월 동두천 등 지방의 농공단지, 5인 미만 사업장 같은 곳들은 “제대로 월급을 줄 능력 자체가 없다”고 말했다. 사장과 근로자가 모두 최저임금 수준의 저임금에 시달리는 곳들이다. 반면 “‘판교 밸리’로 대변되는 정보기술(IT)업계와 삼성전자, LG, SK 같은 대기업에서는 최상위 고임금 근로자를 중심으로 임금 인상 경쟁이 붙고 있다”고 지적했다.지난해 세계불평등연구소가 낸 ‘세계 불평등 보고서 2022’에 따르면 한국은 상위 10%가 전체 자산의 58.5%를 차지하고 있다. 올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상위 10% 부자는 전체 자산의 43%를 보유 중이다. 한 사무총장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즈음부터 고용이 불안정해지자 대기업 노조는 ‘내 임금부터 지키자’고 나섰다”며 “기업들은 노조를 적으로 돌리지 않으려 고임금 정책을 폈고, 양측의 이해가 맞아떨어졌다”고 했다. 이어 “그 임금을 마련하기 위해 하청·비정규직 인건비를 쥐어짜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양대 노총의 ‘임금 지키기 투쟁’을 비판했다. 한 사무총장은 “노조가 너도나도 임금 인상 투쟁을 하다 보니 오랜 관성이 생겼다”며 “‘기승전 임금 극대화’가 사회적 현상이 돼버렸다”고 지적했다. ● “적당히 불평등해지자… 노동계 이제 변해야” 한 사무총장은 “나는 마르크스나 소비에트식 평등주의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적절한 수준의 불평등은 있을 수밖에 없다”며 ‘하후상박’을 언급했다. 저임금 노동자의 임금은 두텁게 올려주고 고임금은 천천히 올려 격차를 줄이자는 것이다. 고임금, 대기업, 전문가, 정규직의 반발을 살 수밖에 없는 제안이다. 이에 대해 그는 노동계가 먼저 변하면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는 “양대 노총이 먼저 나서 저임금 근로자를 위한 기금을 만들면 재벌 총수들이 내는 것보다 더 큰 기금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양대 노총 조합원 250만 명이 매달 1만 원씩 기금을 모으면 단순 계산해도 연 3000억 원이다. 4년간 기금이 쌓이면 1조2000억 원이다. 그는 “이건 기업 사내유보금 다 털어도 안 되고, 재벌 총수 주식 다 털어도 안 되는 문제”라며 노동계 참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이런 변화가 만들어지면 기업과 정부도 양극화 해소를 위해 노동계를 따라올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조성될 것이라고 했다. “그 과정에서 노동계는 한국의 경영자와 재벌 체제를 인정해주고, 기업은 노조의 자유로운 권리와 교섭권을 인정해주는 식의 타협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1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금태섭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등과 함께 ‘성찰과 모색’ 첫 토론회에 참석했다. 이들과 손잡고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것인지 묻자 “나에게 두 가지 원칙이 있다”며 “하나는 ‘관(官·정부)밥’ 먹지 않는다. 또 하나는 선거에 나가지 않는다”라고 일축했다.이은택 기자 nab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