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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필라델피아에서는 매년 500여 명이 총기 사고로 숨진다. 가해자와 피해자 중엔 10대가 많다. 1965년 9월 30일 밤에도 그랬다. 폭력 조직의 일원이었던 16세 소년 래리 밀러는 라이벌 폭력 조직이 친구를 죽이자 보복에 나섰다. 그런데 식당 근무를 끝내고 귀가하던 18세 청년에게 총을 쐈다. 이 청년은 친구의 죽음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술에 취해 엉뚱한 희생양을 찾은 것이다. 당시 피해자 청년에겐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와 두 살 된 아들, 곧 태어날 딸이 있었다. ▷살인죄로 체포된 밀러는 4년 반을 복역했다. 20대 초반에 출소했지만 총기 강도를 몇 차례 저질러 5년을 더 감옥에 있었다. 하지만 긴 수감 생활은 그에게 전화위복이 됐다. 재범예방 프로그램으로 고교 졸업 자격을 취득했고, 출소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MBA 과정을 마쳤을 때가 38세였다. 유명 회계 법인에 취직할 기회가 생겼지만 면접을 하면서 전과를 얘기해 탈락했다. ▷이때부터 그는 살인 전과를 숨겼다. 몇몇 식품회사에서 임원 경력을 쌓은 그는 1997년 나이키로 옮겼다. 전설적인 미국프로농구(NBA) 선수인 마이클 조던의 브랜드를 담당하는 ‘나이키 조던’ 회장을 현재 맡고 있다. 그는 ‘나이키 조던’을 40억 달러의 회사로 키웠다. 나이키 본사가 있는 포틀랜드 연고의 NBA 구단주도 지냈다. 흑인 기업가로 뒤늦게 성공한 것이다. ▷“나를 안에서부터 괴롭혔다.” 오랫동안 불면증에 시달리던 밀러는 지난해 10월 스포츠 전문매체와의 인터뷰에서 56년 전 살인 사건을 고백했다. 그는 ‘점프’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집필해 최근 출간했다. 하지만 인터뷰 때도, 자서전에서도 피해자를 ‘한 흑인 소년’이라고 지칭했고, 먼저 피해자 유족을 찾아가 사과하지도 않았다. 피해자 유족 중 한 명이 우연히 인터뷰 기사를 읽고, 가해자인 밀러에게 연락했지만 밀러의 답이 없었다고 한다. ▷73세의 밀러는 최근 고향을 두 차례 찾아가 피해자 유족 등을 만나 피해자의 이름으로 장학재단을 설립하는 계획을 논의했다. 유족은 “이제 밀러를 적으로도, 친구로도 생각하지 않는다.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그가 스스로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 책으로 비밀은 죽었다’고 썼다. 하지만 비밀이 사라졌다고 용서가 그 자리를 바로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 사람의 실수가 인생 최악의 실수이더라도 나머지 인생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밀러의 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교정시스템이 없었다면 그의 성공 신화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권한이 주권자인 국민께 받은 것이라면 그 권한을 받은 공수처는 당연히 이러한 사실을 항상 기억하고 되새기며 권한 행사를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권한 행사를 성찰적 권한 행사라 부르고자 합니다.” 김진욱 초대 공수처장은 올 1월 21일 취임사를 통해 ‘성찰적 권한 행사’라는 말을 세 차례 했다. ‘국민’이라는 단어도 21차례 사용했다. 그러면서 “수사와 기소라는 중요한 결정을 하기에 앞서서 이러한 결정이 주권자인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결정인지, 헌법과 법, 그리고 양심에 따른 결정인지 항상 되돌아보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신생 수사 기관인 공수처는 검찰과 경찰 등 결과만 중시하는 기존 수사 기관의 잘못된 수사 관행을 되풀이하지 않고, 국민의 신뢰를 받는 ‘인권 친화적 수사 기구’로 자리매김하겠다는 것이 김 처장의 구상이었다. 출범 1주년을 앞둔 공수처는 요즘 어떤가. 공수처가 올 5∼11월 수사 과정에서 기자 100여 명, 야당 정치인 10여 명, 시민단체 대표, 변호사 등의 휴대전화 통신자료를 광범위하게 조회한 사실이 드러났다. ‘반헌법적 사찰 논란’에 휩싸이면서 성찰적 수사 기관을 지향한 공수처가 성찰 대상이 된 것이다. “적법 절차를 지켰다”고 강조해 온 공수처는 야당 국회의원의 항의 방문 다음 날인 24일 “과거의 수사 관행을 깊은 성찰 없이 답습했다.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입장문을 냈다. 그러면서도 “수사 중인 개별 사건의 구체적 내용은 공개하기 어렵다”면서 조회 경위는 끝까지 설명하지 않았다. 고위 공직자를 수사대상으로 하는 공수처는 두 가지 사건을 수사하면서 기자와 정치인 등의 통신자료를 조회했다고 한다. 우선 공수처가 올 3월 7일 피의자 신분이던 이성윤 서울고검장을 공수처장의 관용차에 태운 뒤 집무실에서 면담한 이른바 ‘황제조사’ 사건에 대한 수사다. 이 고검장이 차량에 타는 장면이 찍힌 폐쇄회로(CC)TV 장면이 올 4월 1일 공개되자 공수처가 기자의 자료 입수 경위 등을 조사한다면서 기자와 지인의 통신자료와 통화내역까지 뒤진 것이다. 가입자의 주소와 주민번호가 적힌 통신자료는 수사 기관의 요청만으로, 통화 상대방과 통화 시간, 통화 일시 정보가 담긴 통화내역은 법원의 영장을 받아서 확인할 수 있다. 법조계에선 “수사 필요성과 상당성을 넘어선 ‘황제조사’ 보도에 대한 보복 수사로 볼 여지가 있다”고 평가한다. 두 번째는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의 고발사주 의혹에 대한 수사다. 지난해 대검찰청에서 근무할 당시 윤 후보의 참모였던 손준성 검사와 통화한 기자, 국민의힘 김웅 의원과 통화한 정치인 등에 대한 통신자료를 공수처가 확보했다. 손 검사나 김 의원과 통화한 적이 전혀 없는 기자나 지인들까지 포함됐다는 점에서 이 역시 통신자료뿐만 아니라 통화내역까지 조회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사고 있다. 수사 기관 종사자는 진실을 밝히겠다는 의지 외에 인권침해 등 수사에 따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전문성을 반드시 갖춰야 한다. 요즘 공수처는 피해를 최소화할 선의가, 능력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그런데도 김 처장은 짧은 입장문만 내놓고 경위 설명을 미루고 있다. 전체 국민들 상대로 설명이 어렵다면, 최소한 당사자에게는 어떤 경위로 수사했는지 낱낱이 밝히고, 평가를 받아야 한다. 공수처의 존폐 여부는 국민의 신뢰에 있고, 국민들이 불신하는 수사 기관은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다.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전관예우 비리의 총체 같다.” 대전과 광주에서 각각 활동하던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 2명이 지난달 23일 동시에 구속 수감된 것에 대해 한 법조계 원로는 이렇게 말했다. 사법연수원 동기인 윤모, 서모 변호사는 ‘철거왕’으로 불리던 다원그룹 이모 회장의 운전기사 출신의 재개발업자 서모 씨 관련 사건을 지난해 1월 맡았다. 약 두 달 전인 2019년 11월 구속 기소돼 1심 재판 중이던 서 씨 측으로부터 보석으로 석방돼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게 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서 씨는 광주지법에서 당시 자신의 재판을 담당한 장모 판사의 사법연수원 동기인 판사 출신 고모 변호사를 처음에 정식으로 선임했다. 하지만 고 변호사와 재판장의 친분이 두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자 새 변호인을 찾아 나섰다. 서 씨 측은 재판장과 가까운 대전의 윤 변호사를 수소문한 뒤 광주에서 활동하던 윤 변호사의 사법연수원 동기인 서 변호사를 대전까지 보내 윤 변호사에게 사건을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곧이어 윤 변호사는 재판장에게 보석 청탁 전화를 했고, 12일 뒤에 서 씨는 보석을 허가받아 석방됐다. 서 씨 측이 1억5000만 원의 성공 보수를 건네자 윤 변호사는 1억2000만 원을 받고 “대전까지 오느라 고생했다”며 서 변호사에게 소개비 명목 등으로 3000만 원을 건넸다는 것이 검찰 수사 결과다. 당사자들이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있어 재판 과정을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검찰 수사대로라면 전관 변호사의 은밀한 청탁 전화 한 통에 억대의 금품이 오간 심각한 법조 비리 사건이다. 법관 출신 변호사 3명이 재개발 비리로 구속된 건설업자의 변호인단에 이름을 올렸고, 이들의 요구가 재판 과정에서 관철된 것이어서 법원 내부의 충격도 매우 크다. 유치 수당 30%를 지급하고 법조 브로커를 통해 사건을 수임한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 2명이 2003년 창원에서 한꺼번에 구속된 적이 있는데, 법관 출신 전관 변호사 2명이 동시에 수감된 것은 18년 만에 처음 있는 사례라고 한다. 특히 검찰은 윤 변호사의 구속영장 범죄 사실에 선임계 없이 변론 활동을 한 ‘몰래 변론’ 혐의를 포함시켰다. 재판장이나 검사 등과 친분이 있는 전관 변호사가 재판 중이거나 수사 중인 사건의 처리를 부탁하고 청탁이 성사가 되면 고액의 수수료를 챙기는 몰래 변론은 전관예우의 가장 심각한 병폐 중 하나다. 당초 과태료 처분 사안에 불과했지만 2016년 검찰 고위직 출신의 몰래 변론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변호사법이 개정됐다. 그해 대한변호사협회가 전관예우 근절을 위한 변호사법 전면 개정을 국회에 제안했고, 국회가 이를 받아들여 2017년부터 몰래 변론은 ‘징역 1년 이하 또는 벌금 1000만 원 이하’로 형사처벌 대상이 됐다. 윤 변호사는 몰래 변론 구속 1호다. 법무부는 지난해 3월 몰래 변론에 대한 형사 처벌을 ‘징역 2년 이하 또는 벌금 2000만 원 이하’로 강화하는 내용의 전관예우 특혜 근절 방안을 발표했다. 윤 변호사는 법무부의 대책 마련 도중에 버젓이 몰래 변론을 함으로써 역설적으로 현행법의 실효성이 없다는 것을 입증했다. 정부가 올 6월 국회에 제출한 전관예우 처벌강화법에 대해 국회 전문위원은 ‘법 개정 취지가 타당하다’는 검토보고서를 냈지만 상정 이후 국회 논의에 진척이 없다. 20대 국회 때인 2019년 몰래 변론 재발 반복에 처벌 강화법이 발의됐지만 폐기된 적이 있다. 21대 국회도 몰래 변론의 근본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계속 방치만 할 건가.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부부장검사 1명, 수사 참여 검사 17명.’ 경기 성남시 대장동 개발 사업과 관련해 지난달 21일과 이달 1일 두 차례 기소된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사장 직무대리의 공소장에는 검사 18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대형 사건을 수사할 때 검사 2, 3명의 성명을 함께 적는 경우는 간혹 있었다. 하지만 부부장검사가 대표로 서명하고, 소속 검사뿐만 아니라 파견된 검사들까지 10명 이상의 이름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공소장은 처음이라고 해도 될 만큼 흔치 않다. 궁금해서 반부패 수사 경험이 많은 전현직 검사들에게 “이런 공소장을 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대부분 “납득이 안 된다”며 놀라워했다. 서울중앙지검 전담수사팀이 왜 공소장을 이렇게 썼다고 생각하는지 그 이유를 묻자 “책임을 18분의 1로 분할한 것”이라고 했다. 대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 등이 고발돼 수사 대상이고, 검찰의 수사 결과는 나중에 혹독한 검증을 받을 게 분명하다. 책임론이 불거질 수 있는 상황을 대비해 중요한 의사 결정을 수사 지휘부 혼자 한 게 아니라 수사팀 전체의 중지(衆志)를 모았다는 근거를 남겼다는 추론이다. 대형 사건 수사 경험이 없어 수사 초기부터 지휘 능력을 놓고 여러 차례 구설에 오른 부장검사의 이름이 공소장에서 빠진 것은 이런 의심을 확신에 가깝게 만든다. 검사 출신의 변호사는 “수사 전체 내용을 보고받고 구체적인 부분까지 제대로 알고 있는 검사는 부장검사 등 몇 명에 불과할 텐데 서울중앙지검 지휘부가 무책임해 보인다”고 비판했다. 전담수사팀은 24명 정도인데, 범죄 수익 환수를 위해 부장검사 1명이 최근 추가로 합류하기 전까지는 차장검사 1명과 부장검사 1명이 전체 수사를 지휘했다. 80명이 넘는 검사가 수사에 참여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공소장에 부장검사 1명의 이름만 기재된 것과 비교된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의 이른바 ‘고발 사주’ 의혹을 수사 중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도 검찰과 다를 게 없다. 지난해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당시 검찰총장이던 윤 후보의 핵심 참모였던 손준성 검사의 구속영장에 공수처는 ‘성명 불상’이라는 표현을 23번 사용했다. ‘손 검사가 성명 불상의 검찰 상급자, 야당 인사와 각각 공모해 성명 불상의 검찰 공무원에게 고발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도록 한 뒤 성명 불상에게 고발장을 작성하도록 했다’는 내용의 구속영장이 발부된다면 이상한 일 아니겠나. 2018년 6월 ‘댓글 여론조작’ 사건의 허익범 당시 특별검사의 수사 능력과 정치적 편향성을 의심하는 시각이 정치권에서 제기됐다. 당시 그는 “나는 검사로 재직할 때 ‘대한민국 검사’라는 명함을 갖고 다녔다. 어떤 검찰청을 대표해서 근무하는 게 아니라 국민 전체를 위해서 봉사한다는 마음가짐으로”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얘기를 듣고 저런 자세면 어떤 수사 결과를 내놓아도 국민이 신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검찰청이나 공수처 등 소속을 떠나 국민으로부터 국가 권력의 행사를 위임받은 검사의 제1 사명은 업무를 수행할 때 중립적 위치에서 일하는 것이다.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헌법 7조 1항의 명령이다. 서울중앙지검 검사와 공수처 검사가 아닌 대한민국에는 오직 대한민국 검사만 존재해야 한다.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십수 년 전의 일이다. 당시 정권 핵심 인사가 연루된 의혹 사건을 수사하던 검찰은 수사 착수 한 달 만에 그 인사의 사무실 등에 대한 압수수색에 나섰다. 이 인사가 의혹의 중심이라는 말은 진작 나왔지만 보름 전의 1차 압수수색 대상은 아니었다. 당시 검찰 관계자가 이렇게 말했다. “압수수색은 수사의 처음이 아니라 끝인데….” 증거 인멸 등의 기회를 주는 ‘시간차 압수수색’을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검찰은 정권 핵심 인사가 개입된 증거를 찾지 못했다면서 수사를 종결했고, 결국 특별검사가 다시 수사해야 했다. 요즘 경기 성남시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전담수사팀의 수사를 놓고 검찰 내부가 시끄럽다. 무엇보다 ‘시간차 늑장 압수수색’이 의심을 키웠다. 전담수사팀 구성 첫날인 지난달 29일 대장동 개발 민간사업자 화천대유자산관리(화천대유) 사무실 등을 1차 압수수색했는데, 당시 성남시청 등은 빠졌다. 전담팀 구성 16일 만에 성남시청을 압수수색했지만 그때도 시장실은 제외됐다. 성남시청 압수수색 엿새 뒤에야 시장실이 포함됐다. 시장실의 압수수색 영장이 법원에서 기각돼 늦어진 게 아니라 수사팀이 처음에 청구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봐주기 수사’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지방자치단체 관련 수사 경험이 있는 한 검사는 “성남시청을 압수수색하면서 시장실을 안 한 건 코미디”라고 말했다. 그는 “기업에 비유하자면 자치단체장은 그룹 회장이고, 지방공기업 사장은 계열사 사장과 같은 위치”라고 전했다. 지방공기업법상 지방자치단체장은 공사의 업무를 관리 감독해야 한다. 대장동 사업을 주관한 성남도시개발공사는 성남시가 100% 출자한 곳이다. 수사팀이 지자체와 공사 간 보고 과정을 수사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수사팀 입장에선 증거를 수집해서 단계적으로 접근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비판을 자초한 건 검찰이다. 대장동 의혹이 처음 불거진 게 올 8월 말이고, 9월부터는 세간의 최대 관심사가 됐다. 그런데도 검찰은 내사를 통한 기초 작업을 하지 않다가 야당의 고발장 접수 이후 전담수사팀을 구성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수사 첫날부터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사장 직무대리의 휴대전화를 확보하는 데 실패하더니, 유 전 직무대리의 구속영장에는 배임 혐의를 성급하게 넣고 20일 구속 수사 뒤 공소장에서는 빼버렸다. 증거가 있는 뇌물 사건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핵심 관련자의 대질조사를 서두른 것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십수 년 전 그 사건처럼 수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자 수사하는 것처럼 볼 수밖에 없다. 검경수사권 조정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립 등으로 수사기관을 바라보는 국민의 눈높이가 크게 높아졌다. 주요 선거를 앞두고, 정치인이 연루된 의혹 수사를 멈췄거나 봐준 것은 과거 검찰이었고, 그런 행태를 더 이상 반복하지 말자는 것이 이른바 검찰개혁의 동력 중 하나였다. 그런데 경찰은 올 4월 금융정보분석원(FIU)으로부터 화천대유의 의심 거래 내역을 통보받고, 계좌추적 영장을 6개월 동안 신청하지 않았다. 수사를 회피한 것이다. 고발 사주 의혹을 수사 중인 공수처는 국회 의원회관을 두 차례 ‘빈손’ 압수수색했다. 선거를 앞두고 주요 수사를 미적거리는 관행은 사라져야 한다. 이제는 공정하고 신속한 수사를 위한 경쟁이 필요하다. 국민적 의혹을 해소하는 수사기관은 생존하고, 그 반대의 경우 도태될 것이다.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기본적으로는 백신 접종을 완료하는 분들에게 인센티브를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전해철 행정안전부 장관(59)은 지난달 30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른바 ‘위드(with) 코로나’로 불리는 단계적 일상 회복을 위한 정부 정책의 방향에 대해 묻자 “확진자 증가에도 치명률과 위중증 환자가 감소한 것은 백신 효과”라며 이같이 말했다.정부는 이달 중 ‘일상회복 지원위원회’ 출범을 준비하고 있다. 국무총리와 민간 대표가 공동위원장을 맡고, 민간 영역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에 건의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전 장관은 “그동안 자영업자, 소상공인이 너무 힘들었다. 전문가 의견 못지않게 현장에 있는 분들 의견을 듣고 대안을 만드는 방향으로 가야 하지 않냐”고 설명했다. ―지난해 12월 24일 취임 후 10개월째인데, 성과를 말하자면…. “먼저 중대본 2차장으로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총력 대응했다. 범정부재난안전 예산을 21조4000억 원으로 확대했고, 재난안전통신망 등 재난 대응체계를 갖춰 나가고 있다. ‘자치분권 2.0’ 시대를 열고, 지역경제가 활력을 되찾도록 하는 부분에서도 많은 성과가 있었다. 4·3사건 희생자 피해 보상을 위한 예산 반영 등 과거사 문제 해결, 1300만 명 이상 가입한 ‘국민비서’ 등 정부혁신, 자치경찰제 전면 시행 등도 주요 성과다.” ―‘위드 코로나’를 이행하기 위해 정부가 생각하는 기준은 어떻게 되나. “정부 차원에서는 ‘단계적 일상 회복’이라고 얘기한다.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한 포인트는 접종률이다. 10월 말 성인의 80%, 고령층의 90% 이상이 백신을 맞으면 안정적인 단계적 일상 회복 여건이 될 것이라고 본다. 4차 대유행기인데도 접종률이 높아지면서 치명률, 위중증 환자 수 등의 지표가 안정적인 점도 백신의 효과라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다.” ―단계적 일상 회복은 어떤 방식으로 추진하나. “경제, 사회 등 다방면의 의견을 논의하는 ‘일상회복 지원위원회’를 운영한다.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고민을 전문가와 다양한 분야 이해관계자, 지방자치단체 등과 나누면서 의견을 수렴, 조정할 것이다. (식당, 카페의 영업시간이나 인원 제한 등) 거리 두기 제한 등도 당연히 논의될 것이다. 그동안은 중대본에서 전문가 의견을 듣고 결정했지만 이제는 일상회복 지원위원회에서 폭넓게 의견을 들어 보려는 것이다.” ―재택치료 사례가 늘고 있다. “백신 접종률이 높아지면서 위중증 환자 수와 치명률이 낮아졌다. 생활치료센터 대신 재택치료의 여력이 생겼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재택치료가 확대되려면 지자체의 역할도 중요하고 전문 의료 인력이 치료할 수 있는 시스템도 갖춰야 한다. 현재 재택치료를 확대하기 위한 세팅을 하고 있다.” ―국민지원금의 정책적 효과는…. “이번에도 추석 연휴까지(9월 6∼22일) 사용 내역을 보니 마트나 식료품점에 32.0%, 음식점에 24.5%, 편의점에 7.9% 등 생활밀착업종에서 많이 쓰였다. 사용처를 지역사랑상품권 가맹점으로 정하면서 어려운 자영업자나 소상공인에게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상당 부분 효과로 나타났다고 본다.” ―지난해 수도권 인구가 전체의 과반을 넘겼다. “올 6월 ‘국가균형발전특별법’ 시행령을 개정해 인구감소지역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제도적인 기반을 마련했다. 우리는 인구감소지역을 지정하기 위한 과학적이고 검증된 지표나 지수가 없었다. 다른 나라에서 쓰던 것을 가져오거나 대략적으로 나누곤 했다. 이번에 용역을 통해 인구감소지수를 만들었다. 고령화, 유소년 비율, 출생률 등을 토대로 지표별 가중치를 둬서 전국 기초지자체의 현황을 파악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아직 부처 간 협의가 필요하지만 인프라나 교육시설 확충, 세제 및 규제 특례 같은 지원을 할 때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특별지방자치단체 추진이 활발하다. “수도권에 왜 인구가 늘겠는가. 인프라 덕에 경쟁력이 있다는 거다. 지역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부울경 메가시티’나 광역권 통합 등이 추진되고 있다. 지자체 간 협력은 국가균형발전을 위해 의미가 있지만 지자체 통합은 쉽지 않다. 그래서 나온 것이 특별지방자치단체다. 기존 틀은 놔두면서 함께할 수 있는 것은 광역권이 힘을 모아 추진하는 식이다. 부울경은 메가시티 합동추진단을 구성했고 정부 차원의 지원단도 만들었다. 이달 중에는 예산지원 등을 담은 종합대책도 발표할 계획이다.” ―임기 중 꼭 완성하고 싶은 과제로 자치분권을 꼽았다. “저희가 ‘자치분권 2.0’이라고 명명을 했다. 단체장 중심이던 지방자치의 패러다임을 주민 중심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가장 큰 변화는 주민 참여 확대다. 최근 ‘주민조례발안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했다. 주민들은 단체장을 거치지 않고 지방의회에 직접 조례안을 제출할 수 있다. 주민들이 지자체 기관 구성 형태를 바꿀 수 있는 특별법안도 연내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지금처럼 투표로 단체장을 뽑을 수도 있지만 지방의회가 전문행정가를 선임하는 식도 가능해진다.” ―교통사고가 많이 감소했는데, 정부 차원의 향후 계획은…. “3년간 연평균 사망자 감소율이 9.7%로 최근 20년 동안 가장 높은 수준이다. 하지만 보행 중 사망자는 여전히 많다. 인구 10만 명당 보행 사망자 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권이다. 현재 국회에 보행자 우선도로 도입,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서 운전자 일시정지 의무 부과 등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은 반드시 관철할 것이다. 이러한 개별 법안의 통과를 넘어 더 상위개념으로 보행권을 제기하려고 한다.” ―유럽에는 교통사고 사망자를 만들지 말자는 ‘비전 제로(vision zero)’가 있다. “비전 제로에는 교통사고 책임을 운전자나 보행자에게 지우던 것에서 전반적인 교통 시스템 제공자가 공동 책임을 지는 것으로 패러다임을 바꾼다는 뜻이 담겨 있다. 우리도 희생자 몇 명 줄이는 것을 넘어 보행자를 두텁게 보호하는 방향으로 교통안전정책 패러다임을 바꿀 때가 왔다. 보행자는 안전하고 쾌적하게 걸을 수 있어야 하고 다른 교통수단과 동등한 지위를 누리고 누구나 차별 없이 양질의 보행 환경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원칙이 용역을 거쳐 거의 완성 단계에 왔다. 완성되면 관련 법안을 만들 때도 기준이 되는 상위 패러다임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장관께서는 국무위원인 동시에 3선의 중진 정치인이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경기도지사 도전 등 다양한 추측이 나온다. “지난해 12월에 행안부 장관으로 올 때는 문재인 정부의 성공적 마무리를 위해 일하겠다는 생각이 가장 컸다. 대통령께서도 ‘내각에 와서 일을 하자’ 해서 와 있기 때문에 지금은 문재인 정부의 성공적 마무리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기가 어렵다. 특별한 어떤 사정이 있지 않는 한, 그 입장이 바뀔 게 없다.” ―내년에는 대선이 있다. 앞서 대선 때마다 중요한 역할을 해왔는데…. “지금 당에서 하는 경선이나 이런 걸 생각할 겨를이 전혀 없다. 당연히 행안부 장관으로서 충분하게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선거를 공정하게 치를 수 있도록 하겠다. 주된 업무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있지만 그럼에도 현재는 제 역할이나 해야 될 일을, 그렇게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에게 어떻게 기억되기를 바라는가. “당연히 성공한 대통령으로 남아야 되는 거다. 임기 말에 국민 지지율이 40%면 굉장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역대 대통령 중에 그런 경우가 없었다.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 대통령의 사명감, 소명의식이 굉장히 강하다. 이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진정성을 많은 국민이 인정하고 계신 게 아닐까 생각한다.”전해철 행정안전부 장관△ 전남 목포 출생(59)△ 마산중앙고, 고려대 법학과 졸업△ 제29회 사법시험 합격△ 노무현 정부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 더불어민주당 경기도당 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제19, 20, 21대 국회의원(경기 안산상록갑)△ 행정안전부 장관(2020년 12월∼현재)인터뷰=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정리=박창규 기자 kyu@donga.com강승현 기자 byhuman@donga.com}
‘조선노동당 자주통일 충북지역당.’ 간첩죄로 불리는 국가보안법상 목적수행 혐의 등으로 2일 구속 수감된 ‘자주통일 충북동지회’ 고문 박모 씨(57) 등 조직원들이 북측 지령을 받은 뒤 만든 지하 전위조직의 첫 명칭이다. 2017년 7월 북한 대남공작 부서 문화교류국에 승인을 요청했는데 북측은 ‘본사(북한)와 연계 유무를 확인하지 못하도록 하고, 어떤 경우에도 조선노동당이라는 표현을 이용하여서는 안 된다’는 지침을 내렸다. 박 씨 등은 ‘충북동지회’로 바꾸고, 김정은에 대한 혈서맹세문을 써 그해 광복절 북측에 보고했다. 북한이 김일성의 항일 유적지로 선전하는 함북 온성의 산 이름을 따 2001년 3월 결성한 왕재산, 조직 총책이 1989년 김일성 시대의 북한을 방문하고 2002년 1월 만든 일심회는 이름만으로도 북한 연계 조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018년 세 차례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기 약 8개월 전 남북 화해 국면에서 만들어진 충북동지회는 명칭부터 다르다. 하지만 북한의 구체적인 지령을 받고, 간첩 임무를 수행하는 구조는 똑같다. 그런데 국가정보원과 경찰 등 공안당국이 작성한 박 씨 등의 구속영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강제 수사가 제때 시작된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2019년 11월 20일 중국 선양시의 월마트에서 마약사범이 주로 이용하는 ‘던지기 수법’으로 2만 달러의 공작금을 수령한 것이 대표적이다. 같은 해 10월 12일 북한은 ‘현재 공안당국의 내사 책동이 날로 악랄해지는 조건에서 본사(북한)에서는 무인함을 통한 자금 조달 루트를 새로 개척하려고 한다’며 박 씨 등 표출된 인물 3명을 제외시켜야 한다는 지령을 보냈다. 북한은 남측의 미행으로 인한 작전 실패를 가정해 시나리오별 지침까지 내렸다. 이뿐만 아니라 올 3월 4일 공작금 2만 달러 중 1만 달러를 조직원이 유용했다는 대북 보고가 있었고, 북한은 일주일 뒤 동기와 원인을 상세히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영장대로라면 2019년 10월 북한은 고문 박 씨 등 3명이 남측에 노출됐다는 점을, 올 3월에는 조직 내부에 심각한 균열이 발생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압수수색영장 집행은 올 5월 27일이었다. 공안당국은 충북동지회 조직원에 대한 체포영장과 주거지 압수수색영장을 동시에 두 차례 신청했는데 법원은 “대면조사 등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모두 기각했다. 그 뒤 공안당국은 5월 22일 1차 참고인 조사를 했고, 그 다음 날 조직원들은 가방 5개 분량의 짐을 트렁크에 실어 옮겼다. 결국 세 번째 영장 신청 때는 체포영장은 포기하고, 압수영장만 발부받았다. 압수수색 전날 밤 조직원들은 노트북의 중요 파일 30개를 삭제했다. 충북동지회 조직원들은 자신들이 압수수색을 받은 사실과 해외에서 자신들이 만난 북한 공작원의 이름 등을 먼저 공개했다. 공안당국은 7월 말 “신속한 수사를 통해 실체적 진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며 구속영장을 신청해 이달 2일 조직원 4명 중 3명을 구속했다. 왕재산 사건 등을 보면 국정원이 해외에서 북측 인사를 접선하는 장면을 채증한 것이 유죄 판결의 근거가 됐다. 충북동지회 사건에서도 국정원이 해외에서 확보한 증거가 영장 발부의 근거가 됐다고 한다. 2024년부터 간첩 사건 수사가 국정원에서 경찰로 완전히 이관된다. 늦어진 강제수사와 두 차례 영장 기각으로 인한 수사정보 누설 등을 보면 충북동지회 사건은 수사의 성패를 떠나, 적어도 대공 수사의 현재와 미래를 점검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가슴에 묻어두고 잊어야 할 일들이 많아서….” ‘댓글 여론조작 사건’의 허익범 전 특별검사는 지난달 30일 저녁 혼자 술을 마셨는데,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허 전 특검은 그날 오전 직원을 보내 특검팀의 수사와 재판 경과를 간략하게 정리한 3쪽 분량의 보고서를 청와대에 전달하면서 특검직에서 당연 퇴직했다. 2018년 6월부터 약 3년 2개월 동안 혼자 감내해야 했던 마음고생을 ‘혼술’로 달랜 것이다. “굉장히 힘든 여정이었다”는 허 전 특검의 소회대로 특검은 출발부터 순탄치 않았다. 무엇보다 정권 초기에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인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를 수사해야 하는 부담감이 컸다. 특검팀 구성부터 쉽지 않았다. 검사 13명의 명단을 법무부에 보냈지만 이들 중 2명만 수락했다. 일부 검사는 “못 가겠다”고 했고, 법무부가 파견을 거부하는 일도 있었다. 결국 허 전 특검은 법무부가 알아서 보내달라고 하고 검사들을 받았는데, 마지막 2명은 특검 출범 당일 오후에야 합류했다. 이런 수사팀이 ‘원팀’처럼 움직일 리가 없었다. 수사 방향을 놓고 이견이 적지 않았고, 60일 수사 뒤 검사들이 30일 특검 활동 연장에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재판 확정 때까지 특검과 함께 활동해야 하는 특검보 3명 중 2명은 김 전 지사의 1심 첫 공판을 앞두고 사퇴했다. 허 전 특검은 “내가 인복이 없는 것 같다”며 굉장히 힘들어했다. 역대 최약체 특검이라는 평가가 출범 당시에는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허 전 특검은 수사 첫날 공식 브리핑에서 “증거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수사를 진행하겠다”고 했다. 이 말대로 허 전 특검은 움직였다. 우선 ‘드루킹’ 김동원 씨와의 담판을 통해 김 씨가 지인에게 맡겨둔 휴대용저장장치(USB메모리)를 확보했다. 거기엔 김 씨가 보안성이 높은 메신저 프로그램 시그널과 텔레그램으로 김 전 지사와 대화한 내용이 있었다. 드루킹 일당은 김 전 지사가 댓글 조작 자동화 프로그램인 킹크랩 시연을 본 시점을 중구난방으로 진술했다. 특검팀은 드루킹 일당이 15인분의 식사를 결제한 날짜를 의심했다. 당일 김 전 지사 차량의 동선, 김 씨의 경기 파주시 사무실 근처 식당에서 김 전 지사의 운전사가 김 전 지사의 카드로 저녁 식사를 한 내역을 추적했다. 킹크랩 시연을 좀 더 잘 보이게 할 목적으로 다른 기종보다 가로 크기가 큰 휴대전화기가 사용됐고, 라오스에서 가입된 것처럼 조작된 아이디로 2016년 11월 9일 오후 8시 7분부터 23분까지 시연이 이뤄졌다는 것도 입증했다. 허 전 특검은 김 전 지사에 대한 대법원 유죄 판결이 확정된 직후 “내가 한 역할은 증거가 주장하는 말들을 최대한 그대로 옮겨서 재판부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전달한 것”이라고 했다. 12명을 기소해 전원 유죄를 받아 특검 역사상 전례 없는 성과를 낸 허 전 특검은 특검직을 마무리하기 전에 수사와 재판 과정을 상세히 적은 170쪽 분량의 백서를 남겼다. 이 백서는 이달 공개될 예정이다. 여론 조작의 주체는 다르지만 2012,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선 민의를 왜곡하는 일이 있었다. 정치권은 서로 비방할 게 아니라 선거에서 여론 조작이 사라지도록 재발 방지책을 마련해야 한다. 법 개정이 선거 문화를 바꾼 사례는 차고 넘친다. 허 전 특검이 특검 사무실에 적어둔 문구처럼 ‘준비에 실패하는 것은 실패를 준비하는 것(By failing to prepare, that‘s preparing to fail)’이 될 수 있다.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지난 3개월여는 기초 작업을 하는 마음이었다. 조직 개편과 추가경정예산(추경)안이 시의회를 통과한 만큼 이제 뛸 수 있는 인적 물적 준비는 마련됐다.”4·7보궐선거로 서울시청에 재입성한 오세훈 서울시장(60)은 취임 100일을 이틀 앞둔 14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2006년 7월 1일∼2011년 8월 26일 서울시장을 지낸 오 시장은 18일로 1985일째 서울시장을 맡고 있다. 전임인 박원순 전 서울시장(3179일)에 이어 역대 두 번째 최장수 시장이다. 오 시장은 박 전 시장 때 6층 집무실에 있던 수면공간을 없애고 그 자리에 작은 책상을 뒀다. 약 1시간 동안의 인터뷰 내내 오 시장은 원고 없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 방안, 부동산 대책 등 시정 현안을 막힘없이 답변했다.》 ―선거 때 ‘첫날부터 능숙하게’라고 했는데, 취임 100일을 평가해 달라. “공약을 반영해 일을 하려면 조직 개편과 추경안 통과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조직 개편은 거의 바꾸고 싶은 체제로 바꿨고, 추경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살렸다. 뛸 수 있는 기본은 시의회의 협조 끝에 마련됐다.” ―여당이 절대 다수인 시의회와의 협조가 쉽지 않았을 텐데…. “6월 한 달은 이곳에서 아침식사를 시의회 의원들과 같이했다. 상임위별로, 4선 이상, 의장단 등 거의 3, 4주 동안 식사 정치를 한 셈이다. 처음에는 굉장히 어색하고, 안 오신 분도 계셨는데 점점 분위기가 좋아졌다. 더불어민주당이 시의회 110석 중 101석 아닌가. 의회가 맘만 먹으면 식물시장을 만들 수 있다. 갈등적 요소는 줄이고 합의할 수 있는 것만 전면에 내세워서 대화하는 방식을 취했고, 어느 정도 효과를 본 것 같다.” ―최근 수도권 특별방역점검회의에서 ‘자가 치료 시스템’을 언급했다. “싱가포르는 8월 5일 전후로 2차 접종률을 67%까지 올린다고 한다. 전 국민이 한 번씩은 백신을 맞는 셈이다. 이 정도면 코로나19를 독감처럼 대하는 게 가능하다. 일상에서 걸리면 치료하고 약간 조심하며 관리하는 게 가능한 수준이 되는 것이다. 아직 우리는 2차 접종률이 10%대 초반 정도밖에 안 돼 당장 논의할 단계는 아니지만 4차 피크가 지나고 8월 말부터 백신 사정도 호전되면 그걸 전제로 우리도 그때쯤 싱가포르의 시스템 도입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생활치료센터에 격리하면 1인당 600만 원이 든다. 언제까지 격리를 시키겠나.” ―취임 초 ‘서울형 상생방역’ 제안했는데…. “서울형 상생방역은 사실 제대로 해보지도 못했다. 자영업자 영업시간에 차등을 둬 생업의 타격이 최소화될 수 있는 방안으로 방역을 최대화한다는 생각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의해 채택된 게 거의 없었다. 처음 제안했을 때 자가검사키트가 보편적으로 활용됐다면 많은 확진자가 밝혀지고 지금의 4차 대확산을 어느 정도 막았을 것이다.” ―노형욱 국토교통부 장관이 “서울시의 부동산 정책은 다른 듯하지만 같다”고 했다. “공공 재개발·재건축과 민간 재개발·재건축을 시장에서 혼용하자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두 시스템이 경쟁도 하고 협업도 하면서 빠른 주택 공급을 위해 노력하자는 데 무언의 공감대가 형성된 것 같다. 투기 방지책 마련에는 이해관계를 같이하지만 공급 측면에서는 조금 다르다. 재건축 안전진단기준 완화나 초과이익 환수 등은 정부가 양보한 게 없다. 저는 ‘주택임대차 3법’도 전면 개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부는 아직 손댈 생각이 없고 답답한 부분이 있지만 그럼에도 공급에 관해서는 함께 경쟁하면서 주민 선택에 따라 해나가자는 공감대가 있다.” ―박 전 시장 재임 때 추진한 사회주택 사업을 둘러싼 문제 제기가 적지 않다. “10년간 방향 설정을 잘못한 주거 정책 중 하나다. 사회적 협동조합 내지는 중소 건설업체가 서울시가 제공하는 땅에 주택을 지어 장기 임대사업을 하는 것인데 구조를 보면 ‘중간 마진’이 하나 더 늘어나는 셈이다. 물량도 민간 기준 4000가구 정도이고 실제 입주한 것은 1000가구 남짓이다. 사회적 기업 등이 계속할 이유가 없다. 서울주택도시공사(SH)가 관리하면 된다.” ―서울형 주민자치회와 마을공동체 사업에 대한 감사에 착수했다. “예컨대 100억 원이 투입됐는데 절반 정도가 인건비로 빠지면 예산의 효율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지금까지 파악한 것은 특정 시민단체가 거의 다 장악하다시피 했다. 중간에서 시민단체가 관여하는 것을 넘어 그 사람들이 서울시로 계약직이나 개방직 형식으로 들어온다. 그러면 직원들은 무언의 압력을 받게 된다. 이런 일들이 한두 건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전부 다 바로잡아야 한다.” ―‘서울런’ 사업을 추진하면서 계층 간 이동 사다리 복원을 강조했다. “문재인 정부가 가장 잘못한 게 부익부 빈익빈 양극화를 더 심하게 한 것이다. 자산 격차를 벌려놓은 게 부동산이고, 소득 양극화를 벌려놓은 게 역설적이게도 소득주도성장과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이었다. 제가 시장직을 수행하면서 서울시만이라도 격차 해소 방안을 모색해 보자며 내놓은 게 ‘서울런’이다. 소득, 주거, 복지, 일자리 격차 해소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교육 격차 해소가 이 모든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이다. 가난한 집안의 의지가 있는 아이들에게는 좋은 콘텐츠를 제공해 공부 잘하는 애들을 따라갈 기회를 줘야 할 것 아닌가. 그게 서울런이다.” ―안심소득 시범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설계도가 나왔다면 설명해 달라. “저와 몇 달간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격렬하게 해왔던 논쟁인데 이 지사가 대선 경선이 시작되면서 꼬리를 내린 것 같다. 기본소득은 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면 인공지능(AI)이나 빅데이터, 로봇 등의 영향으로 과도기적으로 일자리가 줄어들 수 있어 실리콘밸리 등에서 나온 논의다. 안심소득은 그 대안이다. 어려울수록, 가난할수록 지금보다 더 받는 하후상박(下厚上薄)이어야 한다. 처음에는 중위소득 100%, 정확히 중간을 자른 뒤 (저소득층에) 주는 것을 생각했는데 지금은 밑에서 25∼30% 안팎의 어디쯤을 잘라야 할지 전문가들과 토론하고 있다.” ―최근 극단적 선택을 한 강서구 일가족도 복지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다고 한다. “기초수급자 제도로 가난한 분들을 다 보호하고 있다고 알고 있지만 자산 기준 등 여러 제약 때문에 사실 절반 이상이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이분들을 안심소득으로 다 구제할 수 있다. 우선 서울시 단위에서 몇백 가구를 대상으로 실험할 것이다. 비용도 100억 원 밑으로 최소화해 미래형 복지 시스템의 방향에 관한 대안을 모색하는 실험을 해보려 한다. 이렇게 되면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에 맞는 새로운 복지 시스템이 마련되는 것이다. 정부가 방향을 잡은 전 국민 고용보험은 곧 한계에 부딪힐 것이다. 고용보험기금도 급격하게 줄고 있는 데다 자영업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건희 기증관’의 서울 건립을 둘러싸고 부산, 대구 등 지방의 반대 목소리가 크다. “2만 점이 넘는 작품을 동시에 전시할 수는 없다. 수장고에 넣어야 하는데, 그보다는 부산, 대구, 광주 등에서 순회 전시하는 시스템을 도입하면 훨씬 더 효용성을 높일 수 있다.” ―내년에 대통령 선거와 지방선거가 있다. “대선 출마는 안 한다고, 서울시장에 재도전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서울비전 2030위원회’ 사업들이 대부분 5년 계획이다.” ―30대 당 대표 선출 등 국민의힘의 변화를 어떻게 보나. “바람직한 변화의 시작이다. 우리 정치에 대한 극도의 불신과 실망, 이런 것들이 젊은 당 대표 선택으로 바뀌지 않았는가. 원내 경험이 없어 시행착오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되지만 부족한 부분은 빠른 속도로 채워 나가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젊은 사람들의 언어로 정치권의 언어가 표현되는 순간 오히려 더 피부에 와닿는 정치 언어로 진화해 가는 단계라고 평가하고 싶다.”오세훈 서울시장△ 서울 출생(60)△ 대일고, 고려대 법학과 졸업△ 제26회 사법시험 합격, 변호사△ 제16대 국회의원(2000∼2004년)△ 제33, 34대 서울시장(2006년 7월∼2011년 8월)△ 제38대 서울시장(2021년 4월∼현재)인터뷰=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정리=박창규 기자 kyu@donga.com정리=강승현 기자 byhuman@donga.com}
“요즘도 이런 검사가 있나요?” 서울경찰청이 ‘청탁금지법’ 위반 혐의의 피의자 신분인 A 검사의 서울남부지검 사무실 등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하자 검찰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경찰이 확보한 구체적 진술과 증거 등으로 압수수색영장은 반려되지 않았고, 법원에서도 그대로 발부돼 검찰 중간 간부 인사를 이틀 앞둔 지난달 23일 영장이 집행됐다. 경찰청이 1991년 옛 내무부 치안본부에서 독립한 뒤 30년 만에 경찰이 현직 검사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는 초유의 일이 발생한 것이다. ‘불명예 1호 기록’을 갖게 된 A 검사는 굳이 분류하자면 엘리트 검사에 가까웠다. 반부패 수사를 담당한 경력이 있고, 부장검사라면 누구나 선호하는 서울남부지검의 핵심 부서까지 맡았다. 인사 발표 전에는 서울중앙지검의 요직으로 이동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있었다. 예상과 달리 A 검사는 부장검사에서 지방 소재 소규모 검찰청의 부부장검사로 강등 발령이 났다. 동료 검사 몇 명이 깜짝 놀라 서울남부지검에 그 이유를 물었다고 한다. 검찰 인사를 총괄하는 박범계 법무부 장관조차 “그 검사 경력을 보면 아주 화려하다”면서 “제가 받은 충격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고 했다. 배 한 척 없던 가짜 수산업자 김모 씨(43·수감 중)의 금품 로비 의혹에 박영수 전 특별검사, 정치인 등이 연루된 과정을 보면 더 어처구니가 없다. A 검사는 국정농단 사건의 특검팀에 두 차례나 파견 근무를 했는데, 그때 인연을 맺은 박 전 특검이 ‘(A 검사가) 전보를 가는 지역의 사정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받을 인물’로 김 씨를 A 검사에게 소개했다. 박 전 특검은 2016년 국회의원 총선거 예비후보였던 B 씨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변호 활동을 했는데, B 씨와 김 씨가 수감 생활을 같이했다. 박 전 특검은 B 씨, A 검사는 박 전 특검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믿었다. 김 씨는 정치인과 검사, 경찰 등 자신이 필요로 하는 사람을 콕 집어 더 소개받으면서 인맥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지방대 법대를 중퇴한 김 씨는 30대 초반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이라고 속여 서민 36명에게 1억6000여만 원을 뜯어내던 생계형 사기꾼이었다. 그런데 2017년 특별사면으로 출소한 뒤 박 전 특검 등 ‘힘을 쓸 수 있는 배경’을 알게 되면서 ‘1000억 원대 재력가’ 행세를 했다. 돈 문제로 형사사건과 민사소송 등에 얽혀 있던 김 씨가 이들에게 고급 차량을 제공하고, 골프장과 고급 레스토랑에서 접대를 한 것을 선의로만 보기는 어렵다. 30년 동안 경찰은 검사 비위를 수사하려다 여러 번 좌절했다. 2012년 조희팔 사건 수사 때 경찰이 부장검사의 금품수수 증거를 일부 확보했는데도 검찰의 송치 명령에 수사를 접어야 했다. 김 씨가 유력 인사들에게 보낸 선물 등을 사진으로 찍어 휴대전화에 남겼다고 하지만 이번 금품 로비의혹 사건에도 장부나 명단이 있는 건 아니다. 거물급 인맥이 공개된 이후 김 씨는 “경찰이 진술을 강요하고, 휴대전화를 위법적으로 압수수색했다”며 출석 통보에도 불응하면서 구치소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경찰에서 진술하면 손해고, 검찰에서 말해야 조그만 혜택이라도 볼 수 있다는 피의자들의 오랜 통념이라고 볼 수 있다. 경찰이 피의자의 수사 비협조를 뛰어넘지 못한다면 이번 사건은 피의자의 바람대로 “게이트가 아닌 해프닝”으로 끝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부 특권층은 수사도 처벌도 받지 않는다는 신화가 앞으로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2013년 7월 다원그룹의 이모 회장(당시 43세)이 서울 동작구 상도동의 은신처 근처에서 체포됐다. 전관 변호사를 통해 검찰에 불구속 수사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4개월 넘게 잠적했고, 검찰이 잠복 끝에 이 회장을 길거리에서 붙잡았다. 당시 전국 재개발·재건축 사업의 철거 공사 90% 이상을 독점 수주해 ‘철거왕’으로 불리던 이 회장은 약 1000억 원의 회삿돈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됐다. 검찰은 정치인과 지방자치단체장 등으로 의심되는 로비 대상의 영문 이름 이니셜과 금액이 적힌 휴대용저장장치(USB메모리)를 입수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일부 지방의회 관계자 등을 제외하고는 끝까지 로비 내역을 함구했다. 쇼핑백에 현금을 담아 건네던 방식이어서 이 회장의 구체적인 진술 없이는 수사가 진척되기 어려운 구조였다고 한다. 고교 졸업 후 악명 높았던 ‘철거깡패’ 용역업체 ‘적준’ 회장의 운전기사로 출발한 이 회장은 2000년대 이후 다원그룹을 10여 개 계열사를 거느린 회사로 키웠다. 그는 평소 “한 번에 현금 수억 원 이상을 벌 수 있다”며 철거 사업의 전망을 높게 봤다고 한다. 검찰 수사 때도 “5년이고 10년이고 견디면 철거 사업을 절대로 뺏기지 않는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회장은 2015년 대법원에서 징역 5년을 확정받았지만 다원그룹은 아직 건재하다. 이 회장의 동생 2명이 이 회장과 같은 방식으로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문어발식 사업 확장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다원그룹 계열사의 임원을 맡고 있던 이 회장의 동생 A 씨는 2007년 9, 11월 광주 동구 학동 일대 재개발구역의 철거업체 선정을 부탁하면서 6억5000만 원을 전달한 사실이 2011년 수사로 밝혀졌다. 조합 측과 친분이 있던 B 씨에게 현금을 건넨 것이다. 재개발조합 정비사업 설립 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던 B 씨는 금품 수수 혐의로 2012년 징역 1년이 확정됐지만 출소 뒤 학동 재개발조합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해체계획서와는 정반대로 건물을 밑동부터 제거하는 철거로 9일 5층 건물이 도로 쪽으로 무너지면서 17명의 사상자를 낸 곳의 바로 옆 구역이다. 만연한 재개발·재건축 비리를 막기 위해 2009년 조합과 철거업체가 직접 계약을 할 수 없도록 ‘도시 및 주거환경 관리법’ 일부 조항이 개정됐다. 지금은 조합이 아닌 시공사가 철거업체와 직접 계약을 하지만 근본적으로 달라진 건 없다. 이주 대책과 석면 해체와 같은 용역들은 불법 하청, 재하청 구조로 진행되고, 여기에 다원그룹이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주 붕괴 참사를 수사 중인 경찰은 시공사와 계약한 한솔기업이 다원그룹과 한 몸처럼 움직이고, 철거 과정에 참여한 업체 최소 5곳이 다원그룹의 친인척이나 전직 직원 등이 운영하는 회사라는 점을 파악했다고 한다. 현금 로비가 통하면 철거업체는 거액의 현금을 확보할 수 있다. 여기에 최대 10분의 1 수준으로 단가를 낮춰 불법 재하청을 주면 막대한 차익을 남긴다. 결국 철거 현장에서 안전은 뒷전으로 밀리고 속도전만 우선시된다. 경찰의 수사 책임자인 남구준 국가수사본부장이 최근 광주경찰청을 방문해 다원그룹 의혹 등에 대해 “철저히 수사하라”고 지시했다. 2013년 다원그룹에 대한 검찰의 1차 수사는 미완으로 끝났다. 경찰은 후진국형 붕괴 참사 뒤에 짙게 드리운 다원그룹의 그림자를 이번에 완전히 걷어내야 한다. 그것이 철거 공사의 부조리를 뿌리 뽑을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A 씨가 여섯 살이던 1993년 아버지가 숨졌다. A 씨의 어머니는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아 아버지가 B 씨에게 갚아야 할 약속 어음 1210만 원을 자녀와 함께 자동 상속받았다. A 씨는 성인이 된 2017년 8월 B 씨가 자신의 은행 계좌 등을 압류하자 재산보다 많은 빚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게 된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A 씨는 다음 달 상속재산을 초과하는 상속채무를 부담하지 않아도 되는 ‘특별한정승인’ 신고를 하고, B 씨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1, 2심에선 A 씨가 승소했다. 2019년 5월 대법원에 접수된 A 씨 사건은 대법관들의 견해차로 소부(小部)에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지난해 1월 전원합의체에 회부됐다. 상속인이 미성년자일 경우 법정대리인과 미성년자 중 누구를 기준으로 상속채무가 상속재산을 초과하는 사실을 알게 된 때로 해석해야 하는지가 핵심 쟁점이었다. 김재형 대법관 등 다수의견은 A 씨의 법정대리인인 어머니가 민법상 한정승인 신고기한(3개월)을 놓쳤기 때문에 미성년자라고 해서 예외로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민유숙 대법관 등 반대의견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한정승인 기한을 놓친 미성년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맞섰다. 결국 지난해 11월 대법원 전합은 다수의견(9명)이 반대의견(4명)을 앞서 하급심을 뒤집었다. 대법원에선 ‘법적 안정성이 우선’이라는 사법소극주의자와 ‘적극적인 법 해석으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사법적극주의자 사이에 가장 격렬한 논쟁이 있었던 판결로 꼽힌다. 그런데 다수와 반대 의견 모두 민법 개정의 필요성엔 공감했다. 반대의견은 “청년세대가 빚의 대물림으로 출발점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시작하지 않도록 사회가 노력하여야 한다”고 했다. 다수의견도 “반대의견의 문제의식에 충분히 공감한다. 미성년자를 보호할 수 있는 특별한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입법론적으로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했다. 대법원은 46쪽 분량의 판결서 38, 39쪽에 이례적으로 한국과 가장 유사한 상속 제도를 갖고 있는 해외 입법 사례를 상세하게 적었다. 사실상 입법 모범답안을 제시한 것이다. 프랑스는 미성년자가 한정승인만 가능하고, 상속재산이 채무를 초과하는 명백한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법원의 허가를 얻어 빚을 승계하도록 하고 있다. 독일은 1998년 민법을 개정해 미성년자는 상속채무에 대한 책임을 그 미성년자가 성인이 된 시점에 가진 재산을 넘지 못하도록 했다. 앞서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자녀가 상당한 채무를 부담한 채로 성년의 삶으로 방출되는 것은 자녀의 인격권에 반하는 위헌”이라며 입법을 촉구했다. A 씨와 똑같이 1억 원 이상의 빚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김유철(가명) 군과 그의 어머니 도모 씨. 그들은 ‘빚더미 물려받은 아이들’을 취재하던 동아일보에 자신의 사연을 공개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파산했지만 같은 사례가 나오지 않도록 법을 꼭 바꾸고 싶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올 4월 해외 입법 사례를 바탕으로 미성년 상속인 보호 입법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이 보고서를 본 국회의원들이 미성년자는 상속채무가 상속재산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하는 프랑스, 독일 같은 민법 개정안을 10일 발의했다. 아이들이 재산보다 많은 빚을 물려받는데도 보호 장치가 전혀 없는 나라, 그 아이들이 청년이 되면 신용불량자로 사회생활을 하라고 강요하는 유일한 나라라는 오명에 국회가 이제 답해야 한다.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던 스물두 살의 배우 지망생 A 씨가 보이스피싱으로 200만 원가량을 잃게 됐다. 경찰에 보이스피싱 신고를 한 지 하루 만인 지난달 6일 A 씨는 숨진 채 발견됐다. 지인이 “200만 원도 안 되는 돈을 보이스피싱으로 잃고 홀로 괴로워하다 고통 없는 삶을 택했다”는 글을 올리자 “저와 비슷한 상황이라 마음이 더 아프다” 등의 추모 댓글이 달렸다. 지난해 1월 20일 스물여덟 살의 취업준비생 B 씨는 “대규모 금융사기에 연루됐고, 수사에 협조하지 않으면 처벌받게 된다”라는 ‘가짜 김민수 검사’의 말에 속아 420만 원의 피해를 입었다. B 씨는 사흘 뒤 극단적 선택을 했다. B 씨의 아버지가 ‘내 아들을 죽인 얼굴 없는 검사 김민수를 잡을 수 있을까요’라는 청와대 청원을 올렸다. “아들이 사기를 당한 420만 원에 대한 가짜 김민수 검사의 몫이 고작 50만 원이고, 그 돈 때문에 아들이 죽었다”는 아버지의 한탄에 온 국민이 분노했다. 학자금 마련을 위해 휴학하고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고 있었던 스물두 살의 대학생 C 씨. “길거리에서 현금을 받아 계좌로 입금하면 수고비를 주겠다”는 보이스피싱 조직원의 유혹에 지난해 7월 편의점 앞에서 보이스피싱 피해자가 건넨 916만7000원을 전달받았다. 수고비 56만7000원을 뺀 860만 원을 보이스피싱 조직원이 지정한 계좌에 입금했다. 위험한 아르바이트를 두 차례 더 했던 C 씨는 같은 해 10월 1심에서 사기방조죄 등으로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올 3월 항소심 재판부는 C 씨의 딱한 사정을 감안해 집행유예형을 선고했다. 대한민국에는 수많은 ‘청년 A, B, C…’가 있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보이스피싱 20대 이하 피해자는 2019년 3855명에서 지난해 5323명으로 전년 대비 38%포인트 늘어났다. 유독 20대 이하만 증가했다. 여기엔 금융당국이 계좌이체 범죄에 대한 방지책을 강화하면서 직접 만나 돈을 전달받는 이른바 ‘대면 편취형’으로 범죄가 진화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대면 편취형은 지난해 1만5111건으로 전년 대비 5배 늘었다. 취업난에 청년들이 보이스피싱 수거책 아르바이트에 뛰어들면서 청년층이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피의자가 되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나 금융당국, 국회가 그동안 노력을 전혀 안 한 건 아니다. 하지만 보이스피싱 범죄의 비극은 완전히 해결하지 않으면 하나도 해결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는 데 있다. 범죄자들은 무서운 속도로 법망의 허점을 비집고 들어와 취약계층만을 공략해왔다. 이 범죄 피해자의 약 90%는 서민층이다. 지난해 6월 관계부처 합동 종합대책엔 피해자의 중과실이나 고의가 없다면 금융기관이 원칙적으로 피해자를 구제하는 방안이 있다. 보이스피싱 피해자가 은행에 전화를 하면 “우리 책임도 있다”며 피해액의 절반을 입금해주는 영국 사례 등을 참고했다고 한다. 국회는 금융기관의 피해 배상 책임과 관리 감독 의무를 강화하는 관련법안 8건을 발의했다. 과실이 없는 기관에 책임을 지운다는 법적 논란, 악용 가능성 등에 대한 우려로 논의가 1년 가까이 답보 상태다. 보이스피싱 범죄는 2010년 5000여 건에서 지난해 3만1000여 건으로 10년 만에 6배로 늘었다. 획기적인 대책을 속도감 있게 추진하지 않으면 이 추세를 꺾을 수 없다. 지금 막지 못하면 앞으로 더 어려울 수 있고, 그 사이 수많은 취약계층, 특히 청년층이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게 될 것이다.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어쨌든 나는 검사다. 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걸 왜 하겠나.” 1일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기소된 대검찰청 과거사진상조사단 소속이었던 이규원 검사(44)는 요즘 지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공익의 대표자로 일컬어지는 검사는 피의자에게 불리한 증거만이 아니라 유리한 증거도 수집해야 하는 이른바 ‘객관의 의무’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과연 이 검사는 검사로서의 사명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을까. 올 1월부터 3개월 이상 이 검사 등을 수사해 온 수원지검 수사팀의 공소장 내용은 이 검사의 주장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 검사는 2019년 1월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성 접대 의혹을 재조사하는 과정에서 건설업자 윤중천 씨를 여러 차례 만난 뒤 면담보고서를 작성했다. 공소장에 따르면 김 전 차관에게 성 접대와 금품 등을 제공한 윤 씨가 하지도 않은 말을 면담보고서에 허위로 기재했다. 예컨대 윤 씨가 만난 적도 없는 검찰 고위 간부들이 윤 씨에게 금품 등을 제공받았다고 기록한 것이다. 같은 해 3월 23일 이 검사는 피의자 신분이 아니면 김 전 차관을 긴급 출국금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가짜 사건번호로 입건된 피의자처럼 속여 김 전 차관의 출국을 막았다. 허위 면담보고서를 기자에게 건네 문재인 대통령이 김 전 차관 의혹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강조한 당일 관련 보도가 나오게 했다. 출금 나흘 전이었다. 이 검사 측의 해명 내용을 더 살펴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 왜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이 검사는 평검사 신분 아니냐. 전직 차관을 평검사가 주도해서 출금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2007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이 검사는 중소형 로펌에서 2년 동안 변호사로 활동하다 2009년 경력 검사로 임용됐다. 지인들은 ‘어떤 일이든 의욕적으로 일하는 검사’로 이 검사를 기억하고 있다. ‘검찰 내부 인사에게 칼을 들이대는 업무는 향후 보직에도 좋지 않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그는 진상조사단 근무를 자청했다고 한다. 이 검사는 이광철 대통령민정비서관(50)의 사법연수원 동기이고, 같은 로펌에서 일했다. 이 비서관은 2019년 민정비서관실 선임행정관으로서 범정부 차원의 적폐청산 태스크포스(TF) 업무를 맡고 있었다. 검찰이 당시 통화기록 등을 추적한 결과 이 비서관은 검찰의 적폐청산을 담당하던 이 검사에게 수시로 연락했다. 이 검사는 검찰에서 “이 비서관이 ‘법무부, 대검과 조율이 됐으니 출금하라’고 연락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청와대, 법무부, 대검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이다. 과거사 진상조사 전 검찰이 김 전 차관에게 여러 차례 무혐의 처분을 한 점 등은 검찰 내부에서도 비판받고 있다. 그렇다고 김 전 차관 사건을 검찰개혁의 동력으로 삼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그 내용이 사실인 것처럼 언론에 보도되게 하고, 그 며칠 뒤 피의자 신분이 아니면 불가능한 긴급 출금을 해야 했을까. 이 검사가 객관의 의무를 위반하고 있을 당시 기획이라는 말이 군사정부 시절의 공작을 떠올리게 한다고 해서 검찰의 부서 이름에서 기획이라는 단어가 모두 사라졌다. 그런 정부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이 검사 등 관련자를 일벌백계하고, 무관용 원칙으로 ‘기획사정(企劃司正)’의 배후를 철저히 파헤치는 것 외에 더 이상의 대안은 없다.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오탈자 등 마지막으로 확인할 부분이 있어 오늘 중으로는 판결서를 등록하기 어렵다.”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등에게 직권남용 혐의로 유죄를 선고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2부(부장판사 윤종섭)는 선고 당일인 23일 이런 이유로 판결서를 공개하지 않았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재판에서 6번 연속 무죄 선고 뒤 첫 유죄가 나온 것이어서 그다음 날 법원 내부망 등록 이후 법관들이 판결서를 찾아 읽었다. 그런데 A4용지 458쪽 분량의 판결서와 154쪽 분량의 별지 등 총 612쪽으로 구성된 문서를 놓고 법원 내부가 술렁이고 있다. ‘법원행정처 등은 일선 법관에게 지적(指摘)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서 직권남용죄가 성립할 수 있다’는 생경한 논리에 동료 법관들은 가장 먼저 놀랐다. “헌법에 재판 독립이 명기되어 있는데, 위험한 판결이다” “법을 창조했다”는 불만이 나왔다. 특히 별지에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진보 성향 법관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인권법연구회) 명단이 그대로 실려 논란이 커지고 있다. 거기엔 2017년 2월 당시 인권법연구회 회원 101명의 이름과 직급, 법원 내 소속 기관, 인권법연구회 탈퇴 및 유지 여부 등이 적혀 있다. 101명 중 73명은 기존에 가입한 다른 연구회를 탈퇴하고 인권법연구회 자격을 유지했고, 28명은 인권법연구회를 탈퇴했다. 김명수 대법원장과 김기영 헌법재판관, 이동연 고양지원장, 이성복 전 전국법관대표회의 의장,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73명의 명단에 있었다. 이 전 실장에게 유죄를 선고한 윤 부장판사의 이례적인 서울중앙지법 같은 재판부 4년 유임 결정에 관여한 성지용 서울중앙지법원장도 포함됐다. 법관들은 “다른 연구회를 탈퇴하면서까지 인권법연구회에 잔류했던 진성(眞性) 회원의 명단이 처음 드러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요직에 기용된 법관들의 인사 배경이 궁금했는데, 이번에 의문이 풀렸다”고 말하는 법관들도 있다. 명단이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법관 대다수가 판결서를 구해 해당 명단을 확인했다고 한다. 퇴직한 법관들은 물론이고 국회에서도, 법원 관련 업무를 하는 로펌이나 기업도 ‘실세 법관’ 명단을 구하려는 촌극이 빚어졌다. 인권법연구회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취임하기 한 달 전인 2011년 8월 세계인권법과 북한 인권 문제 연구 등을 목적으로 설립됐다. 당시 서울고법 부장판사이던 김 대법원장이 초대 회장이었다. 양 전 대법원장이 추진하는 사법 정책에 부정적이라는 이유로 2017년 2월 인권법연구회 와해 시도가 있었고, 그 당시에는 회원들이 피해자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김 대법원장 취임을 전후해 이들이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대한 진상 조사, 검찰 수사 요구, 재판 관련 업무까지 주도하면서 피해자의 가해자에 대한 직접 반격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법관 인사와 재판의 편향성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내부 분열의 진앙으로 이 모임이 지목되고 있다. 로마법을 공부한 전직 대법관의 책에 이런 문구가 있다. ‘지금의 왕이 노예가 되고, 노예가 왕이 되어야 정의가 실현되는가. 그것은 또 다른 부정의의 세계를 창출하는 것 아닌가.’ 인권법연구회는 해체를 고민할 때다. 김 대법원장이 재임 중인 지금이 최적의 시기다.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대학의 근본적인 역할이 무엇인가 고민했다. 인터넷 강의로 지식 전달은 가능했지만 대학은 사회적인 교류도 중요하다.” 오세정 서울대 총장(68)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캠퍼스 정상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2019년 2월 총장직에 취임한 오 총장은 취임사에서 “서울대가 새롭게 도약하기 위한 초석을 놓겠다”고 했다. 18일 서울대 총장실에서 만난 그는 인터뷰 내내 ‘융합’과 ‘창의’, 그리고 ‘독창성’을 강조했다.》 ―4년 임기 중 절반이 지났다. “제가 취임하기 전에 서울대가 비정상적인 상태였다. 첫해엔 정상화를 시키는 게 가장 큰 목표였고, 정상적으로 학교가 운영돼 뭐 좀 하려고 했더니 코로나 사태로 정신없었다.” ―코로나19 신속 분자진단 검사를 시험 도입한다고 들었다. “지난해에는 워낙 갑작스러워 학내에서 감염이 발생하지 않게 관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1년이 지나고 나니 대학의 역할이 무엇인가 고민하게 됐다. 대학은 사회적인 교류도 중요하다. 학생들이 모여서 토론도 하고 동아리 활동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올해는 방역 지침을 지켜가면서 그런 기회를 마련하자는 취지에서 신속 분자진단 검사를 4월부터 도입할 예정이다.” ―검사는 어떻게 진행되나. “전문 의료진이 면봉으로 코 안 검체를 채취하는 방식은 같다. 하지만 신속 분자진단 검사 방식은 일반 검사와 달리 1, 2시간 내로 현장에서 검사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실험실을 써야 할 때 2시간 일찍 학내 임시 검사소에 와서 검사를 받고, 음성이면 시설을 이용하면 된다. 신속 진단 업체를 선정하기 위해 입찰 공고도 냈다. 관악구 보건소, 서울대병원에서 의료진을 파견 받는다. 국내 대학은 처음 시도하는 것이다.” ―검사의 정확성은 검증됐나. “질병관리청으로부터 이미 승인을 받았다. 문제는 코로 하는 기존 검사 방식은 전문 의료진이 반드시 필요해 하루에 채취할 수 있는 검체의 수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타액(침)을 통한 검사는 분석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지만 질병청은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승인을 거부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타액 검사, 셀프 검체 채취도 허용하고 있다. 서울대는 기존 검사와 함께 타액 검사를 실시해 관련 데이터를 질병청에 제출할 예정이다.” ―언제쯤 대면 강의가 가능할까. “시험 도입은 현장 실험 실습이 필수적인 자연과학계열 대학원생 및 교직원 1800여 명이 대상이다. 검사 노하우와 데이터가 쌓이면 예체능, 공과대, 15인 이하 토론 수업 등 소규모 세미나로 확대할 생각이다. 2학기에는 대면 강의가 가능하지 않을까. 검체 채취 및 검사가 얼마나 쉬워지느냐에 따라 시기가 앞당겨질 수 있다. 다른 대학, 초중등학교까지 확대되면 좋겠다.” ―서울대가 질적으로 탁월한 연구가 부족하다며 근본적이고 독창적인 연구를 강조했다. “서울대 하면 딱 기억나는 연구 분야가 없다. 그런 논문을 쓰려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남이 안 하는 분야를 해야 한다. 그래서 교수 평가에서도 논문 개수보다 질적인 면을 따진다. 최장 3년까지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특별연구년제’를 이번 달부터 시범 시행 중이다. 6년에 1년씩 주는 안식년을 발전시킨 것으로 교수들이 시간적 여유를 갖고 독창적인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한 것이다.” ―학생 교육에 있어서 융합을 강조해 왔다. “앞으로 전공 하나로 졸업해서 평생 먹고사는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직업을 서너 번은 바꿔야 살아남을 수 있다. 서울대는 학과 중심의 교육과정에서 벗어나 통합적 교육과정으로 전면 개편할 방침이다. ‘Inno-Edu 2031’ 프로젝트를 통해 매년 10% 내외 학과의 교육과정을 개편해 2031년까지 전(全) 학과 커리큘럼을 리뉴얼할 것이다. 학생들의 창의력을 키우기 위해 학생 스스로 자신의 전공을 설계하도록 지원하는 ‘학생 설계 전공’과 융합교육 활성화를 위해 복수전공, 부전공, 연합전공 선택이 자유롭도록 제도적 제한을 없애고 학생들이 원하는 강의를 언제든 수강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남은 임기 동안 집중해서 추진할 부분이다.” ―입시제도에서 정시 확대에 부정적 입장이었는데…. “지금 수능은 문제를 틀리지 않게 훈련시키는 것에 그친다. 몇 개의 ‘킬러 문제’로 변별력을 주고 있다. 정시를 아예 없앨 순 없겠지만 전체 입학 정원의 40% 정도가 최대치라고 생각한다.” ―학생부종합전형(학종)에 대한 공정성 시비 논란도 있다. “학종이 공정성에 시비 논란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학종은 학생이 관심 분야를 탐구하는 과정을 살펴본다. 반면 정시는 결과만을 반영한다. 결과만 보면 학생들이 학교 수업을 안 듣고 학원에서 공부한다. 결과적으로 교실이 망가진다. 2023년도 정시에 내신을 ‘교과평가’로 반영하는 것도 이를 막기 위해서다. 학생이 학교 수업을 등한시하지 않게 하자는 취지다.” ―올해가 법인화 10주년이다. 서울대의 장기발전 계획은…. “법인화 취지 중에는 서울대가 정부에만 의존하지 않고 재정적 자립을 하라는 것도 있다. 서울대 1년 예산이 연구비를 제외하면 약 8000억 원 수준이다. 세계적인 대학이 되려면 재정 규모가 두 배는 돼야 한다. 하지만 정부 지원금이나 등록금을 늘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래서 올해 ‘SNU홀딩스’ 지주회사를 만들었다. 지주회사를 통해 벤처기업 창업을 돕고 대가로 기업 주식을 받는다. 회사가 커서 상장하면 주식이나 로열티 등을 팔아 이익을 실현하는 구조다. 미국 스탠퍼드대의 실리콘밸리, 중국 칭화대의 베이징 중관춘(中關村)을 모델로 삼았다.” ―지역 상생모델로 ‘관악S밸리’ 사업을 추진 중인데…. “학교 인근인 대학동, 낙성대동 일대를 창업 생태계로 활성화하고 벤처 창업도시를 조성할 예정이다. 이미 대학동에 창업공간을 마련했다. 문화관을 리모델링해 서울대 구성원만 쓰는 공간이 아닌 관악구민, 나아가 서울시민들의 복합 문화공간으로 만들려고 한다.” ―어떤 총장으로 기억되고 싶나. “이번 학기부터 신임 교수 연구정착금을 실험과 실습 분야 1억 원(기존 4000만 원), 이론 분야 5000만 원(기존 3000만 원)으로 확대했다. 이전에는 막 부임한 젊은 교수들이 샘솟는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연구를 하려고 해도 실험 장비 갖추는 데만 수년을 허비했다. 노벨상이 아이디어는 20, 30대에 나와서 10년 넘게 연구를 하고, 20년 동안 다른 학자들이 검증을 해서 60대 넘어 받는 게 대부분이다. 그만큼 젊을 때의 아이디어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젊은 교수들이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총장으로 기억되고 싶다.” 오세정 서울대 총장(68)△서울대 물리학과 졸업△미국 스탠퍼드대 물리학 박사△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서울대 자연과학대학장△한국연구재단 이사장△기초과학연구원 초대 원장△제20대 국회의원(2016년 5월∼2018년 10월)△제27대 서울대 총장(2019년 2월∼)정리=이윤태 기자 oldsport@donga.com}
“역대 최장수 서울시장이 아니라 혹시 조선시대 천도 이래 최장수 아니냐.” 2018년 6월 서울시장 3선에 처음 도전한 박원순 전 서울시장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는 “맞다. 안 그래도 내가 조선시대부터 조사를 해봤다. (지금의 서울시장인) 한성 부·판윤이 그때는 당쟁의 자리였더라. 하루에 두 명이 동시에 재직한 적도 있었다”고 답했다. 서울시가 조선왕조실록 등을 근거로 집필한 ‘서울 600년사’에 따르면 1395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시대의 한성 부·판윤은 모두 1952명이었다. 당시에도 한성 부·판윤은 현재의 장관급인 6조 판서와 비슷한 대우를 받을 정도로 직책이 높았다. 하지만 약 3개월에 한 명꼴, 1년에 네 명씩 수도 서울의 책임자가 바뀌었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에는 임기가 좀 더 길어졌다. 광복 이후 76년 동안 서울시장은 38명(연임 포함)이었다. 평균 2년에 한 명꼴로 수도 서울의 책임자가 교체된 것이다. 박 전 시장이 천도 이래 2010번째 서울의 책임자였고, 다음 달 7일 보궐선거를 통해 당선되는 서울시장은 2011번째가 된다. 4년 임기의 서울시장을 시민들이 직접 뽑는 1995년 민선 서울시장 체제 이후에는 서울시장의 근무 기간이 다시 배로 늘었다. 그중에서 보궐선거 당선으로 첫 서울시장 임기를 시작한 박 전 시장은 3선에 성공했지만 성추행 의혹 등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해 8년 8개월 재직하면서 역대 최장수가 됐다. 관선과 민선을 한 차례씩 지내 약 6년 동안 재직한 고건 전 시장이 그다음이다. 다른 광역단체장만 하더라도 3선 한도를 채워 12년 근무한 전임자까지 있는데, 재선만 하더라도 가능한 8년을 근무한 서울시장은 역사상 단 1명뿐이다. 사실 수도 서울의 시정을 제대로 펼치려면 8년도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다. 백년 미래를 내다보는 장기 계획을 설계하는 것이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그동안의 서울시장은 서울시민을 위한 시장보다 ‘시장을 위한 자리’였다고도 볼 수 있다. 대통령 선거 출마 등 다음 행보를 위한 자리에 더 무게가 실렸다. 역대 최장수인 박 전 시장의 후임은 다시 보궐선거로 뽑게 됐고, 차기 서울시장은 민선 서울시장 체제 이후 최단명(最短命) 서울시장이 된다. 당선이 확정된 날부터 임기를 시작하지만 내년 6월에 지방선거가 예정돼 있어 전임자의 잔여 임기인 1년 2개월만 근무하게 된다. 차기 서울시장의 역할은 여기서 찾아야 한다. 지난해 서울시는 32년 만에 내외국인을 합쳐 1000만 명 이하로 인구가 줄어들었다. 어느 때보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미래 청사진을 마련해야 하는 시점이다.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차기 서울시장이 해결할 현안으로 부동산 안정화, 일자리 및 경제 활성화, 강남북 간 격차 해소 등이 꼽힌다. 하나같이 복합적이고 장기간 누적된 현안이어서 1년 2개월 안에 성과를 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차기 서울시장은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실험하기보다는 정책 하나하나에 대한 업무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서울과 서울시민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어야 한다. 또 글로벌 도시 서울을 한 단계 더 도약시킬 수 있는 장기 플랜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 뒤 내년 지방선거에서 재선에 도전해 재신임을 물어야 한다. ‘장수(長壽) 시장의 시대’로 패러다임을 전환해 천년 서울을 준비하는 것이 서울 시민을 위한 길이다.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나는 오직 한 가지 열정이 있다. 그것은 공정하게 재판하는 ‘좋은 법관(a good judge)’이 되는 것이다.” 지난해 숨진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전 미국 연방대법관은 1993년 7월 상원의 인사청문회에서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의견을 묻는 한 상원의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는 “법관은 공정하게 판결할 것이라고 선서한다”면서 “어떤 암시나 예측, 특정 사건에 대한 무관심을 공개해선 안 된다”고 설명했다. “그것이 (법관으로서의) 공정함과 독립성을 지키는 데 필수적이라고 믿는다”고도 했다. 긴즈버그 전 연방대법관은 나흘 동안의 청문회 일정 중 첫날 ‘암시하지 않고, 예측하지 않고, 예고하지 않는(No hint, No forecast, No preview)’ 공정한 재판의 3가지 필수 원칙을 처음 내세웠다. 그는 청문회 내내 낙태 등 민감한 이슈에 대한 질의에 60여 차례 답변을 회피했다. 이때부터 공직자 검증을 위한 청문회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법관은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질문에 노코멘트로 답변하는 것이 용인되는 전통이 생겼다. 이후 30년 가까이 수많은 연방대법관 후보자들은 청문회에서 “나는 ‘긴즈버그의 표준(The Ginsburg Standard)’을 따르겠다”는 답변을 하고 있다. 미국에서 ‘법관의 표준’으로 평가받는 긴즈버그 전 연방대법관을 떠올린 건 김명수 대법원장이 최근 단행한 법관 인사 때문이다. 2017년 9월 취임한 김 대법원장의 4번째 법관 정기 인사를 보면서 현직 법관들은 “어떤 판결을 하더라도 인사 불이익은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사라졌다”며 동요하고 있다. 한 전직 대법관은 “인사 원칙이 깨진 굉장히 이례적인 인사다. 심각해 보인다”고 했다. 무엇보다 재판 결과와 재판 진행 상황이 법관 인사에 반영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일선 판사들이 갖게 됐다는 점이 가장 심각한 문제다.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사건 재판을 1년째 공회전 중인 재판부는 인사 관례를 깨고 4년째 잔류했다. 반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부인 정경심 교수를 법정 구속한 1심 재판부의 잔류 신청은 거절당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건에서 무죄 선고 전력이 있는 재판부는 인사 원칙대로 3년 만에 해체됐고, 정반대의 재판 성향을 보였던 재판부 판사 3명은 원칙의 예외를 각각 4∼6년씩 인정받았다. 대법원은 “사건의 규모와 재판 진행 상황, 인사 희망을 고려했다”고 하는데, 이 해명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까. 김 대법원장은 취임 초부터 ‘좋은 재판’을 강조했다. 좋은 재판의 본질은 재판의 공정성에서 찾아야 한다. 어느 당사자에게도 치우치지 않고, 특히 권력의 유무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누가 재판을 하더라도 똑같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재판 불복이 줄어들고,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쌓일 수 있다. 그런데 전례 없는 법관 인사로 불행하게도 일부 사건의 재판 결과를 암시하고, 예측하고, 예고할 수 있게 됐다.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대법원이 국회에 계류 중인 이른바 ‘사법개혁입법’을 의식해서 인사를 단행한 것 아니냐는 의심마저 든다. 사법행정권 남용의 구조적 원인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법원행정처를 폐지하는 내용 등의 관련 법안은 국회 논의가 지지부진한데 김 대법원장의 임기는 2년 반밖에 남지 않았다. 국회의 과반 동의만 있다면 제도는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한다면 진정한 사법개혁은 불가능하다. 법관들과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후속 조치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몇 년 전 서울지방변호사회(서울변회)의 분쟁조정위원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의뢰인이 수임료 일부를 반환해 달라고 요구했는데, 약 50만 원의 조정안을 받아들일지를 놓고 한참 동안 망설이던 청년변호사의 표정이 아직 잊히질 않는다. 수임 기간이나 변론 내용만 보면 결코 과한 수임료라고 보긴 어려웠다. 결국 청년변호사가 조정을 거부해 소송 절차로 넘어갔다. 요즘 서초동에는 100만 원 이하 수임료 반환 소송이 종종 있다.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출신 변호사가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매년 1400∼1700명씩 쏟아져 나왔다. 1906년 변호사 제도가 도입된 이후 100년 만인 2006년 등록 변호사가 1만 명을 넘어섰고, 그 이후 8년 만인 2014년 2만 명, 다시 5년 만에 3만 명에 도달했다. 올 1월 현재 휴업 중인 변호사를 제외한 활동 중인 변호사는 2만4000여 명이다. 이 중에서 사법시험에 합격한 사법연수원 출신이 1만3500여 명, 로스쿨을 졸업한 변호사시험 출신이 1만600여 명이다. 아직 로스쿨 출신이 절반에 못 미치는데, 내년쯤에는 로스쿨 출신이 과반이 될 것이다. 변호사 업계가 적자생존의 시대로 바뀌면서 전체 변호사의 40%가량인 약 1만 명의 20, 30대 청년변호사들이 가장 큰 타격을 받고 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는 청년변호사들만의 은어(隱語)도 생겼다. 대표적인 것이 ‘막변’이다. 로스쿨을 졸업한 막내 변호사인데, 낮은 월급에 기피 사건인 ‘교폭절’(교통사고, 폭력, 절도) 사건을 주로 맡는다고 한다. ‘블랙 로펌’이라는 말도 있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는 블랙 기업처럼 청년변호사들에게 매달 100만 원의 월급으로 6개월간의 고강도 실무 수습을 요구하는 로펌이다. 필수 코스인 실무 수습을 할 곳이 마땅치 않아 어쩔 수 없이 버틴다고 한다. 로스쿨을 졸업한다고 안정된 삶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매년 1500명 안팎의 로스쿨 출신 변호사 중에서 ‘검클빅’(신임 검사, 법원의 로클러크, 대형로펌 변호사)이 될 수 있는 인원은 각 100명씩 300명 정도다. 중소 로펌의 경우 월급이 200여만 원, 1년 연봉이 3000만 원에 불과하다. 개인 변호사로 개업하면 수임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지난해 서울변회 소속 변호사는 매달 1인당 평균 1건 이하의 사건을 수임했다. 1건의 평균 수임료가 500만 원 이하였는데, 청년변호사의 수임료는 평균보다 낮다. 변호사시험 2기 출신으로 청년변호사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온 김정욱 변호사가 전국 최대 지방변호사단체인 서울변회 회장에 최근 당선됐다. 변호사 업계의 주류가 로스쿨 출신으로 세대교체가 됐다는 것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꼽힌다. 김 변호사는 당선 직후 “지금 변호사 업계는 백척간두에 서 있다”고 했다. 청년변호사 일자리 확보, 세무사와 법무사로부터 변호사 직역 수호, 변호사 업계의 ‘타다’로 불리는 법률 플랫폼과의 분쟁 등 현안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체계적이고 획일적인 교육을 받은 사법연수원생과 달리 로스쿨 출신의 개성을 살려 새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다는 기대도 있다. 반면 현안 대부분이 변호사 단체의 권한이 아닌 정부와 국회, 유사 직역 등과 머리를 맞대고 조정해야 하는 난제라는 점에서 경험 부족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공익적 이유로 설립된 변호사단체가 생존 문제에만 집중하면 자칫 국민의 신뢰를 잃게 될 수 있다. 국민의 동의 없이는 생존의 해법을 찾기 어렵다는 점을 새 집행부가 기억해야 할 것이다.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12일 밤 경찰청 교육정책담당관실은 “유출자를 색출하라”는 상부의 지시에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 전날 마감한 초대 국가수사본부장 외부 공개 채용 지원자 5명 전체의 실명이 통째로 유출됐기 때문이다. 마감 당일 경찰은 “절대 실명을 공개할 수 없다”고 했지만 하루 만에 허언이 됐다. 경찰청은 1일부터 11일 오후 6시까지 국가수사본부장을 공개 채용하기로 하고, 모집 공고를 냈다. 10년 이상 수사 업무에 종사한 총경 이상 경찰 공무원, 10년 이상 경력의 판사와 검사, 변호사 등이 지원할 수 있었다. 경찰청은 지원자가 몰릴 것에 대비해 지원자가 8명 이상이면 서류심사 단계에서 고득점순으로 7명을 추릴 계획이라고 사전에 공지했다. 하지만 지원자는 단 5명뿐이었다. 국가수사본부장은 전국 경찰 12만 명 중에서 형사와 수사, 사이버, 안보 분야의 약 3만 명을 지휘할 수 있는 요직이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직원이 3만2000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인원이다. 제복 조직인 경찰에서 국가수사본부장은 치안총감인 경찰청장 바로 아래 직급인 치안정감이다. 수사에 관한 한 같은 직급의 서울경찰청장 등 시도경찰청장에 대한 지휘권도 갖는다. 한국의 FBI 국장이라고도 불리는 자리가 왜 이렇게 인기가 없을까. 무엇보다 권한과 신분 보장이 명확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수사 경험이 있는 한 전직 경찰 간부에게 “왜 지원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실질적 권한은 없고, 책임만 지는 ‘껍데기 자리’ 아니냐”고 답했다. “오히려 경찰청장에게 ‘방패막이’가 하나 생긴 격”이라고도 했다. 국가수사본부장의 권한 등이 적힌 관련 법규를 찾아보면 이 발언이 왜 나왔는지 이해할 수 있다. 국가수사본부장은 경찰청장이 긴급하고 중요하다고 판단해 서면 지휘하는 사건 외에는 전권을 갖고 수사 지휘를 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수사 착수나 진행, 종결 사항 등은 경찰청장에게도 보고된다. 경찰청장은 수사 내용은 파악하고 있지만 수사의 총책임자가 아니어서 부실 수사에 책임질 일이 없다. 예를 들면 과거 경찰 총수가 사과하고 사퇴한 ‘오원춘 사건’에 대해 경찰청장은 “개별 사건을 구체적으로 지휘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그만이다. 신분 보장도 미흡하다. 국회의 탄핵이 없다면 임기 2년을 보장한 점은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추천과 검증의 투명성, 공정성, 중립성 확보에 대한 고민이 부족해 보인다. 외부 공모를 하고도 경찰청 심사에서 적격자가 없다고 판단하면 내부 발탁으로 전환할 수도 있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첫 공모에서 전직 경찰 간부 2명과 변호사 3명이 지원했는데, 후보자 면면이나 자격을 놓고 경찰 내부에서 벌써부터 한숨이 나온다고 한다. 이 때문에 내부 인사를 발탁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이래서야 초대 국가수사본부장을 제대로 선발했다고 할 수 있겠나. 추천과 검증 절차를 더 정교하게 보완해야 한다. 내·외부 천거와 공개 검증, 복수 추천이라는 다른 공직 후보자 등의 선발 절차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국회 인사청문회도 도입해야 한다. 경찰 수사의 외압을 막을 최종 책임자라는 점에서, 그 직책도 ‘경찰수사본부장’이 아니라 국가수사본부장이라는 점에서 인사청문 대상인 경찰청장 못지않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도 FBI 국장 후보자는 연방대법관 후보자만큼 낙마 비율이 높을 정도로 인사 검증이 철저하다. “최선을 기대하고, 최악을 대비하라”는 법언이 있는데, 국가수사본부장에 대해선 최악을 대비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국가수사본부장의 실패는 곧 경찰의 실패가 될 수 있다.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