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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가 둘 다 많이 아팠고, 서로 혼자서는 떠날 수 없었다.” 드리스 판 아흐트 전 네덜란드 총리가 세운 연구재단은 최근 판 아흐트 전 총리 부부의 부고를 이렇게 전했다. 1950년대 대학 캠퍼스 커플로 만나 70년을 해로한 두 사람은 한날한시에 안락사로 생을 마감했다. 93세 동갑내기인 부부는 마지막 순간까지 손을 맞잡고 있었다고 한다. 판 아흐트 전 총리는 2019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회복하지 못했고 부인 역시 지병 끝에 동반 안락사를 선택했다. ▷세계 최초로 안락사를 합법화한 네덜란드에서 2022년 안락사를 택한 사람은 8700여 명이다. 이 중 동반 안락사는 58명(29쌍)으로 드문 편이다. 다만 2020년 26명, 2021년 32명으로 많아지는 추세다. 우리는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소극적 안락사만 허용하지만 해외에선 의사가 약물 투여 등으로 환자를 죽게 하는 적극적 안락사, 의사 도움을 받아 환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조력자살을 허용하는 곳이 적지 않다. ▷안락사가 생명의 존엄성을 훼손하는지를 두고 찬반이 팽팽하지만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인간의 기본권으로 인정하는 나라는 꾸준히 늘고 있다. 삶은 선물이지만 버리고 싶을 때 버리지 못한다면 짐이란 인식이 커지는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2015년 안락사를 허용하며 법 이름을 ‘생명종결 선택권법(End of Life Option Act)’이라고 지었다. 엄격한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도 2021년 안락사와 조력자살을 합법화했다. 타인이 목숨을 끊도록 도우면 최대 징역 10년형에 처하도록 했던 스페인의 전향적인 변화였다. ▷하지만 안락사 허용 국가에서도 환자가 자칫 안락사로 내몰리는 등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네덜란드에서 안락사 심사위원회가 열릴 때면 완화치료 등 대안이 없는지를 두고 격론이 벌어진다고 한다. 또 악용 가능성에 대비해 안락사 허용 결정까지 3중, 4중의 안전장치를 두는 나라가 대부분이다. 환자의 고통이 심각하고, 회복할 가망이 전혀 없으며, 의료적 대안이 없어야 하는 건 기본이다. 환자가 자발적으로 한 선택인지, 복수의 의사와 여러 번 면담하면서 결심이 일관되게 유지되는지도 확인하도록 한다. ▷우리나라는 죽음을 드러내놓고 얘기하기를 꺼려 왔지만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가 진행 중인 탓인지 인식 전환도 빠르다. 2021년 서울대병원 조사에서 국민 76%가 안락사 또는 의사 조력자살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5년 전 조사 때 찬성률(41%)보다 거의 두 배로 뛴 것이다. 조력자살이 합법인 스위스 국민의 찬성률(81%)과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 2022년 국회에서 존엄조력사법이 발의된 것도 이런 변화가 반영된 것이다. 죽음의 격에 대한 논의를 더 이상 미루기 힘든 때가 오고 있는 것 같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서울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중환자실장이던 조수진 교수는 2017년 신생아 4명이 사망한 사건의 책임자로 지목돼 구속됐다. 사건 1년 전 소아과 분야 세계 3대 인명사전에 등재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의료사고로 한순간에 피고인이 됐다. 신생아들에게 오염된 영양제가 투여되는 과정에서 주의의무를 소홀히 한 혐의(업무상 과실치사)였다. 법원은 병원 측의 감염 관리 부실을 인정하면서도 의료진에게 형사책임을 묻긴 어렵다고 판결해 유족들이 크게 반발했다. 무죄로 결론 나긴 했지만 재판이 끝나기까진 5년이 걸렸다. 의료계는 이 사건으로 의대생들의 소아과 기피 현상이 더 심해졌다고 주장한다. ▷의료사고 형사책임 감경은 의사들의 숙원이다. 특히 소아과 산부인과 응급의학 등 필수 분야로 의사들이 오지 않는 건 열악한 근무 환경 외에도 소송 리스크가 주요 이유다. 정부가 최근 의료사고 시 의사에 대한 형사기소를 면제해주는 특례법을 추진하고 나선 것은 의사 증원에 따른 의료계 반발을 달래려는 목적이 있다. 이 법은 의사가 종합보험이나 공제조합에 가입해 의료사고 피해자에게 보상할 수 있다면 공소 제기를 할 수 없도록 한 게 핵심이다. ▷의료사고처리 특례법은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운전자에게 자동차보험을 의무화하되 음주운전 등 중과실 외에는 인명 피해를 내더라도 형사처벌을 줄여주는 법이다. 의료행위는 운전과 비슷하게 사고 위험이 늘 있는데 실수로 낸 사고라면 피해자 배상에 집중하고 처벌은 최소화하자는 취지다. 하지만 두 법 사이엔 중대한 차이가 있다. 교통사고 특례법은 운전자에게 잘못이 있다고 전제하고 불가피한 사고였다면 운전자가 입증하도록 한 반면, 의료사고 특례법은 환자가 의사의 과실을 입증해야 한다. ▷현재 의료소송은 심각한 정보 비대칭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의사 과실을 입증하도록 해 환자에게 크게 불리하다. 이런 상황에서 의사에게 형사 면책까지 주어지면 법의 저울은 의사 쪽으로 완전히 쏠릴 수 있다. 정부는 필수의료는 물론, 성형·미용 분야에도 특례법 적용을 논의하겠다는 입장인데 의료사고가 특히 많은 성형수술까지도 의사에게 ‘면책특권’이 주어지면 환자들은 무방비로 의사에게 생명을 맡겨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의료사고에 형사처벌이 능사는 아니다. 의사들이 사고 위험이 높은 환자들을 애초에 포기하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의사의 리스크를 줄여준다는 명목으로 환자 방어권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영미법계에 있는 ‘사과법(apology law)’을 도입해 의료분쟁 자체를 줄이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의료사고 시 의사가 환자 측에 적극적으로 상황을 설명하고 사과해도 소송에서 불리한 증거로 활용되는 걸 막아주는 법인데 이 법 도입 이후 소송으로 가는 비율이 확 줄었다고 한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금요일인 26일 저녁 서울 이태원 해밀톤호텔 옆 골목은 한산했다. “여기가 맞아?” “이렇게 좁았다고?” 골목 앞에서 두리번거리던 두 여성은 바닥에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이라고 쓰인 동판을 발견하고는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군복 차림으로 혼자 온 20대 남성은 골목 한가운데를 몇 분간 서성였다. 사건이 나던 날 입대를 며칠 앞두고 송별회를 하러 이 골목을 지나갔다고 했다.그는 골목의 경사 구간에서 한참을 맴돌았다. 성인 4명이 나란히 설 수 있을 정도인 폭 3.2m에 길이 10m 남짓한 공간(10평)이었다. 그날 밤 이 10평 안에서만 300여 명이 겹겹이 짓눌렸다. 사망자 159명 중 대부분이 거기서 숨을 거뒀다. 시신들이 수습된 뒤 골목에는 주인 잃은 휴대전화 수십 대가 밤새 울렸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 이후 1년 3개월이 흘렀다. 우리는 얼마나 더 안전해졌을까. 그 많은 죽음을 왜 막지 못했는지 이제는 답을 발견한 것일까.》●현장 달라졌지만 땜질처방 우려 주말인 28일 오후 7시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U강남도시관제센터를 찾았다. 강남역 등 관내 인파 밀집지역을 비추는 폐쇄회로(CC)TV 화면이 10여 개 띄워져 있었다. 인파가 많이 모이는 120곳의 실시간 상황을 볼 수 있고 3.3㎡(1평)당 1명 이상이 감지되면 ‘주의’ 알람이 울리도록 설정돼 있다. 행정안전부가 이달부터 일부 지자체에 도입한 인파관리 시스템이다. 서울시도 이동통신 3사로부터 기지국 접속 정보를 제공받아 휴대전화 사용자 수를 추정해 인파 밀집 정도를 파악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민상현 강남구 도시관제팀장은 “운영한 지 한 달쯤 됐는데 ‘주의’ 표시가 뜨는 상황은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고 했다. 경찰 112상황실에도 인파 밀집 신고에 적극 대응하라는 지침이 내려진 상태다. 서울경찰청 관계자는 “요즘은 사람이 몰린다는 신고가 들어오면 바로 출동해 요란할 정도로 조치한다. 적어도 이태원 같은 압사 사건이 재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사건 당시 핼러윈처럼 주최자가 없는 행사의 경우 안전관리 주체가 모호하다는 지적이 일었는데 이를 반영해 지자체장이 책임지도록 하는 재난안전관리법이 지난해 12월 8일 국회를 통과하기도 했다. 이태원 사건 이후 현장에서는 조금씩 변화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부의 이 같은 대책들이 이태원 사건의 종합적인 원인 진단을 거쳐 도출한 방안인지에 대해선 아직 의문이 많다. 사건 발생 후 국회 국정조사가 진행됐고, 경찰 특별수사본부와 검찰 수사가 완료됐지만 참사 현장에서 제기된 핵심적 질문들에 대한 답은 명쾌히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족과 생존자들이 제기하는 이 질문들은 안전관리 부실 그 자체보다 안전관리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은 원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태원에 핼러윈 인파가 심각하게 몰릴 것으로 예상돼 현장 통제가 필요하다는 사전 논의와 내부 보고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도 왜 관할 지자체와 경찰·소방은 대비하지 않았는지, 참사 시작 4시간 전부터 압사당할 것 같다는 112 신고가 11건이나 들어왔고 최고 긴급 단계인 ‘코드0’으로 분류됐음에도 왜 조치가 없었는지는 구체적인 경위가 확인되지 않았다. 용산경찰서가 서울경찰청에 했던 기동대 지원 요청이 묵살된 과정, 용산서장이 참사 시작 40분 전 상황 보고를 받고도 도보 10분 거리인 사건 현장을 앞에 두고 왜 관용차에서 50분이나 허비했는지도 정확히 드러난 게 없다.●수사 목적 실체 규명의 한계 윤석열 대통령은 30일 이태원 사건의 진상을 밝힐 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하는 내용의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검경 수사가 끝난 상황에서 추가 조사의 필요성이 없고 불필요한 정쟁을 야기할 것이란 이유에서였다. 이미 수사가 이뤄졌으니 그것으로 실체 규명이 충분히 됐다는 취지다. 하지만 대형 참사 처리에 있어 수사 중심의 접근은 한계가 뚜렷하다. 수사는 수사 대상이 될 만한 일부 개인의 행위가 형법에 위반되는지를 확인할 뿐 사건을 야기한 원천적 환경과 구조 등을 총체적으로 규명하진 않기 때문이다. 수사를 통한 사건의 재구성은 불법행위를 입증할 증거를 중심으로 관련 법리에 부합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제한적이고 파편적일 수밖에 없다. ‘재발 방지’라는 일관된 관점을 유지하면서 참사의 시작과 끝을 촘촘히 밝히려면 정부나 정치권의 입김에서 독립된 전문가 중심의 진상조사가 필요하다. 이런 절차 없이 사건 원인을 피상적으로 진단해 내놓은 대책은 땜질처방에 그치기 쉽다. 이태원 사건 관련 후속 조치에 관여한 경찰 관계자는 “이태원 관련 의사결정자들이 만약 ‘세월호 같은 여객선이 침몰할 것 같다’는 보고를 받았다면 철저히 대비하고 조치했을 것이다. 압사라는 경험해 보지 못한 위험을 상정하지 못해 일을 그르친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이어 “단순히 인파 관리를 잘하라거나 특정 기관에 ‘앞으론 너희가 책임지라’는 식의 1차원적인 대응으로는 제2, 제3의 참사를 막기 어렵다. 이태원 때와는 다른 새로운 위험을 예민하게 인지하고 막을 수 있는 포괄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참사 후 진상조사 제도화한 선진국들 이태원 참사 희생자 159명 중 외국인 희생자는 26명에 달한다. 미국 영화사 파라마운트가 최근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통해 공개한 다큐멘터리 ‘크러시(Crush)’에는 외국인 희생자 유족들의 목소리가 생생히 담겨 있다. 이들은 한국 정부의 무책임한 사후 대응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 같은 선진국에서 이런 대참사가 벌어졌는데 국가 차원의 진상조사도 이뤄지지 않고 유족들에게 정확한 사건 경위를 설명하지 않는 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이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대형 참사가 벌어지면 형사 처벌을 위한 수사와 별개로 전문가가 중심이 된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린다. 1989년 축구장에서 관람객 97명이 압사한 힐즈버러 사건을 겪은 영국은 대규모 인명사고 후에는 공적 조사위원회가 자동 구성되도록 제도화했다. 힐즈버러 사건 생존자이자 재난관리 전문가인 앤 에어 박사는 “진상조사는 공개 조사와 사인 규명, 범죄 수사 등 세 가지 축의 절차가 상호 보완하며 이뤄져야 사건 전체를 규명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호주도 대형 재난이 발생하면 진상 규명을 위한 왕립위원회가 곧바로 구성된다. 2009년 산불이 빅토리아 지역 600곳으로 번져 173명이 사망한 사건이 나자 2주 만에 조사위원회가 꾸려졌고 이후 1년 5개월에 걸쳐 조사가 이뤄졌다. 진상조사를 할지 말지를 두고 소모적 논란을 벌이기보다 지체 없이 조사에 착수해 충분한 기간 동안 다각도로 살핀다. 이태원 사건의 유사 사례로 거론되는 2001년 일본 효고현 아카시시 ‘불꽃축제’ 압사 사고 때도 관할 지자체는 위기관리, 방재, 구급의학 등 각 분야 민간 전문가로 구성된 조사위원회를 설치해 7개월간 조사를 벌였다. 조사는 사전 준비가 왜 부족했고, 위험이 예상되는데도 경찰과 지자체 간 협의가 왜 이뤄지지 않았는지 등에 집중됐다. 재발을 막을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대안은 진상조사를 통해 사건의 구조적 원인이 특정될 때 도출할 수 있다. 효고현 경찰이 만든 인파 경비 매뉴얼에는 “초등학생도 알 수 있게 쉬운 말을 쓰고, 문장을 45자 전후로 짧게 쓰며, 복문을 쓰지 말고 영어처럼 결론부터 말하라”는 등의 현장 밀착형 대응 요령이 담겼다. 일본항공(JAL) 여객기가 2일 하네다 공항 활주로에서 다른 항공기와 충돌했을 때 승무원들의 기민한 대처로 전원 생존한 것도 40년 전 대형 추락사건 이후 철저한 조사를 바탕으로 ‘피로 쓴 매뉴얼’을 만들고 훈련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긴급구조 시스템, 미국의 국가테러방지센터 등도 각각 힐즈버러 사건, 9·11테러 같은 대형 참사 후 구성된 진상조사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국가 대응 체계를 개선한 사례들이다.●사후 대응 선진 프로토콜 만들어야 이태원 참사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대형 인명사고에 공정하고 전문적으로 대처하는 선진적인 프로토콜을 만드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세월호 사건 이후 10년 가까이 이어져 온 진통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미룰 수 없는 과제다. 해외에서도 진상조사위원회 구성과 권한을 두고는 정치적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특별법이 국회로 되돌아오면 여야가 조사위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높이는 쪽으로 추가 협상을 해서라도 이태원 참사의 실체를 밝힐 기회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횡단보도 녹색불이 켜질 때 몇 초가 남았는지 알려주는 신호등은 한 ‘딸바보’ 아빠의 교통사고에서 시작됐다. 1998년의 일이다. 아버지와 여섯 살 딸이 횡단보도에서 녹색등이 깜박이는 걸 보고 함께 뛰어 건너는데 갑자기 빨간불로 바뀌었다. 그 순간 승용차가 횡단보도로 달려들어 딸을 치었다. 중상을 입은 딸에게 전자부품 회사에 다니던 아버지는 약속했다. 보행 가능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숫자로 표시해 주는 신호등을 만들겠다고. 그 후 6년 뒤 경찰청은 그가 만든 신호등을 도입했다. 그의 딸이 다니던 초등학교 앞에 맨 먼저 설치됐다. ▷올 들어 서울 도심 횡단보도에는 빨간불의 잔여 시간이 표시되는 신호등이 등장했다. 녹색불 잔여 시간 표시가 건널 사람은 서두르고 아니면 다음 신호에 건너라는 메시지를 준다면 빨간불 시간 표시는 몇 초 뒤면 건널 수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보행자들을 다독인다. 빨간 숫자로 표시되는 잔여 시간은 99초부터 시작해 6초까지 줄어든다. 마지막 5초는 표시되지 않는다. 보행자들이 1, 2초를 남겨 두고 예측 출발을 하면 미처 횡단보도를 벗어나지 못한 차량에 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가 올해 350곳에 설치 예정인 이 신호등이 전국 최초로 시행된 곳은 경기 의정부시다. 도입 6개월 만인 지난해 초 효과 조사를 해보니 보행자 교통사고가 3분의 1로 줄었다. 시민들도 10명 중 9명이 환영했다. “무단횡단을 자제하게 된다” “아이들 인내심 교육에 유용하다”는 반응이 많았다. 민간에서도 이런 시도가 일찌감치 시작됐다. 티맵이나 카카오내비 같은 자동차 내비게이션 앱은 서울 일부 지역을 지날 때 전방 300m 앞에서부터 신호등의 색상과 잔여 시간을 표시해 준다. ▷횡단보도 빨간불이 얼마나 남았는지 카운트다운 해주는 기능은 성격 급한 한국인에게 특화된 서비스 같지만 꼭 그렇진 않다. 미국 독일 일본에도 최근 도입되고 있다. 사람들에게 갈수록 시간이 귀해지는 공통적 시대상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버스정류장이나 지하철역 전광판에는 분 단위로 특정된 도착 시간이 뜨고, TV나 유튜브 영상에 광고가 나올 때도 몇 초를 더 봐야 하는지가 화면에 표시된다. 잔여 시간 알림 기능이 여러 영역으로 확산되는 건 이용자들이 몇 분, 몇 초의 시간 동안 택할 수 있는 대안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횡단보도 앞에서 20∼30초짜리 쇼츠 영상을 보는 보행자라면 적색등 잔여 시간 표시 장치가 특히 유용할 수 있다. 녹색불로 바뀔 때까지 남은 시간을 알아야 보던 영상을 잠시 멈출지, 아니면 마저 다 볼지를 판단할 수 있다. 요즘엔 횡단보도 보행자 대기선에 LED등이 켜지는 바닥신호등이 설치되고 있는데 이 역시 스마트폰 보느라 교통신호에 둔감한 ‘스몸비(스마트폰 좀비)들’이 늘어나는 세태를 보여 준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북한의 한 야외경기장 무대에 16세 청소년 2명이 나란히 섰다. 이내 이들의 양손에 수갑이 채워졌다. 12년 노동교화형이 선고된 직후였다. 한국 드라마를 본 게 죄목이었다. 무대 뒤로 교복 차림의 학생 수백 명이 도열해 이 공개재판을 지켜봤다. 영국 BBC방송이 18일 탈북자 단체로부터 제공받아 보도한 영상 속 모습이다. 북한이 이념 교육용으로 2022년 제작한 이 영상에는 ‘썩은 꼭두각시 정권의 문화가 10대들에게 퍼졌다. 고작 16살인 이들은 스스로 미래를 망쳤다’는 내레이션이 흘렀다. ▷북한은 2020년 말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이란 무시무시한 법을 공포했다. 남한 영상물을 보거나 소지한 경우 5년 형이던 처벌을 15년 형으로 강화했다. 유포한 자는 사형이다. 미성년자도 예외가 아니다. “미드 보다 걸리면 뇌물을 주고 나올 수 있지만 한국 드라마 보다 걸리면 총살”이란 말이 탈북자들 사이에서 돌았다. ▷북한은 MZ세대가 K콘텐츠에 젖어드는 현 상황을 특히 경계한다. MZ세대가 기성 질서에 도전적인 건 북한이라고 다르지 않다. 이들은 ‘당이 있어 먹고 산다’는 부채의식으로부터 자유롭다. 장기간 기근 속에 성장해 김씨 백두혈통의 은덕이랄 것을 별로 누린 적이 없다. 생활용품은 상당수가 중국 암시장에서 온 것들이다. 거기에 섞여 들어온 남한 영상물을 보고 자라 선전선동이 쉽게 먹혀들지 않는다. 이들은 연인을 부를 때 ‘동지’ 대신 ‘오빠’ ‘자기’ ‘남친’ 같은 애칭도 곧잘 쓴다. 북한이 이런 남한 말투를 ‘핀셋 단속’ 하겠다고 나선 것도 오죽 불안하면 그럴까 싶다. ▷북한이 K콘텐츠에 늘 적대적이었던 건 아니다. 2018년 남측예술단이 평양 공연을 했을 때 걸그룹 레드벨벳은 환대를 받았다. 당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내가 레드벨벳을 보러 올지 관심들이 많았는데 원래 모레 오려다가 일정을 조정해서 오늘 왔다. 평양 시민들에게 이런 선물을 해줘 고맙다”고 했다. 하지만 이듬해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의 하노이 회담이 틀어지고 경제가 악화 일로에 들어서면서 북한은 문화 장벽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한국 드라마는 어려운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약”이라고 탈북자들은 전한다. 큰 희망을 갖긴 어려워도 소소한 재미와 세상에 대한 호기심만은 포기할 수 없는 북한 젊은이들에게 K콘텐츠는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다. 이런 기본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한 처벌을 아무리 세게 해도 효과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날로 무자비해지는 북한의 내부 단속은 남한의 ‘문화 침공’이 그만큼 두렵다는 자백이나 다름없다. 미국의 한 싱크탱크는 북한이 미사일을 쏠 때마다 ‘오징어게임’이나 BTS 뮤직비디오가 담긴 USB를 평양으로 날려 보내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당장 실현 가능성은 낮지만 북의 도발에 대한 응징 효과만은 확실해 보인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러시아에서 가장 악명 높은 감옥은 북극권 시베리아에 있는 제3교도소(IK-3)다. 면회가 어려운 건 물론 편지도 주고받기 힘들 정도로 외진 곳이다. 영구 동토층에 있어 겨울이면 영하 20도 밑으로 내려간다. ‘북극의 늑대’라고 불리는 이 감옥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최대 정적인 알렉세이 나발니(47)가 지난해 말 이감됐다. 푸틴이 올 3월 대선을 앞두고 야권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나발니를 시베리아에 고립시킨 것이란 시각이 많다. ▷혹독한 옥중 투쟁 중인 나발니는 최근 제3교도소의 반인권 실태를 법원에 고발하며 한국의 컵라면 ‘도시락’을 언급했다. “판사님도 아십니까. 교도소 매점의 최고 인기 품목은 단연 도시락입니다. 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7∼10분을 기다려야 아주 맛있게 익는데 식사 시간이 제한돼 뜨거운 채로 빨리 먹느라 혀를 데었습니다. 행복해야 할 시간이 지옥으로 변했습니다.” 교도소 측이 수감자가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을 아침에 10분, 저녁에 15분으로 제한하고 있어 이를 없애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시베리아 감옥에 갇힌 야권 지도자가 ‘도시락 먹을 자유’를 호소할 정도로 러시아에서 도시락의 인기는 대단하다. 컵라면의 현지 발음은 ‘다쉬락’이다. 우리나라에서 미원이 조미료의 대명사였듯, 러시아에선 도시락이 곧 컵라면이다. 컵라면 시장에서 도시락의 점유율은 62%에 달해 10년간 1위를 지키고 있다. 몇 년 전 초코파이가 러시아의 ‘국민 간식’으로 주목받은 데 이어 도시락이 ‘국민 라면’으로 자리 잡았다. 러시아는 해외 브랜드 중 샤넬, 아디다스, 펩시 등 유명 기업 220여 곳만 저명 상표로 등록해 줄 정도로 까다로운데 도시락은 그 틈을 비집고 저명 상표로도 인정받았다. ▷국토가 광활해 기차가 주요 교통수단인 러시아에선 휴대용 사각 용기에 수프를 담아 기차에 오르는 사람이 많다. 1994년 도시락이 러시아에 수출됐을 때 현지인들은 수프통과 비슷하게 생긴 직사각형 용기에 열광했다. 둥근 사발 모양 용기에 비해 가방에 넣기 편리하고 먹을 때 흔들림도 덜했다. 현지인 입맛에 맞게 국내에 없는 8가지 다양한 맛으로 출시한 전략도 주효했다. 2년 전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후로는 전시 비축용으로 도시락을 사재기하는 러시아인도 많아졌다. ▷러시아 대법원은 식사 시간 제한을 폐지해 달라는 나발니의 청구를 결국 기각했다. 나발니가 러시아인들에게 친근한 ‘도시락’을 언급한 것을 두고 감옥에서도 국민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려 한 것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 사법부로선 푸틴의 눈엣가시인 나발니의 손을 들어주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가 입 델 걱정 없이 도시락을 즐기기 어렵게 돼 유감이지만 북극 교도소마저 녹이는 K푸드의 위력이 확인된 건 반가운 일이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요즘 출산을 앞둔 부부들 사이에선 아기 성별 공개 파티가 유행이다. 성별 관련 힌트를 풍선이나 케이크 안에 넣어두고 가족, 친구들을 불러 맞혀 보게 하는 이벤트다. 참석자들이 풍선을 터뜨려 분홍색 꽃가루가 나오면 딸, 자른 케이크의 단면이 파란색이면 아들을 뜻한다. 미국, 유럽에서 보편화된 ‘젠더 리빌 파티(Gender Reveal Party)’가 수입된 것인데 종주국의 방식은 조금 다르다. 예비 부모들이 산부인과에서 받은 성별 확인서를 열어보지 않고 있다가 친지들과 파티를 열어 깜짝 개봉한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문화가 확산되는 건 아기 한 명 한 명이 귀해져 성별에 상관없이 출산을 축하해 주는 세태가 반영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성비 불균형 국가란 오명을 벗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 여아 100명당 남아 105∼107명이 태어나는 게 생물학적 정상 범주인데 이 수치가 1985년 110, 1990년대 116까지 치솟았다. 2000년대 들어 110으로 떨어졌다가 2010년쯤 정상으로 돌아왔다. 30년간 이어진 ‘남초 출산’이 어떤 부메랑으로 돌아올지 연구한 논문이 8일 학술저널 ‘컨버세이션’에 실렸다. 저자인 미국 텍사스A&M대 더들리 포스턴 교수는 1980∼2010년 한국에서 태어난 남성 중 70만∼80만 명은 한국인 여성과 결혼하기 힘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여성 한 명이 평균 6명을 낳던 1960년대에는 남아 선호가 더 뚜렷했음에도 성비가 균형을 유지했다. 문제는 1980년대 들어 출산율이 가파르게 떨어지는데 남아 선호가 교정되는 속도는 이보다 더뎠던 데 있다. 1, 2명만 낳을 거라면 아들은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상당 기간 지속됐다. 산아 제한 정책을 폈던 중국, 인도,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들도 이런 이유로 결혼 적령기 남초 현상이 심각하다. 중국은 남성이 여성보다 3400만 명이 많고, 인도에선 3700만 명이 많다. ▷넘치는 독신남은 사회적 시한폭탄이 될 수 있다. 학계에선 치안이 불안해질 수 있다고 본다. 미국 컬럼비아대 연구 결과 중국에서 남자 성비가 1% 오르면 폭력·절도 범죄가 7%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1인 가구여도 남성은 여성에 비해 노후가 불안정한 경우가 많아 복지 부담을 가중시킬 가능성이 있다. 지방일수록 남초가 심하다 보니 남성들이 연애·결혼 기회를 찾아 수도권으로 몰리면 지방 소멸을 가속화할 수도 있다. ▷중국에선 원치 않게 독신으로 남겨진 남성들을 가리켜 ‘수동적 독신’이라고 칭한다. 이들 간에 신부 모시기 경쟁이 격해지면서 신랑이 신부에게 주는 지참금이 15년 새 100배나 뛰었다. 요즘은 3000만∼4000만 원이 예사라고 한다. 아들 쪽 부모들의 물량 공세로 ‘결혼 군비 경쟁’이란 말까지 생겼다. 저출산 늪에 빠진 우리나라에서도 2030세대의 남초는 남성들이 결혼에 기권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2009년 전남 순천의 한 시골마을에서 50, 60대 여성 2명이 새참으로 막걸리를 마시다 숨지는 사건이 있었다. 청산가리가 든 막걸리였다. 더 충격적인 건 “숨진 여성 중 1명의 남편과 딸이 공모한 살인”이란 수사 결과였다. 남편 백모 씨(당시 59세)는 무기징역, 딸(당시 26세)은 징역 20년이 확정됐다. 잊히는 듯했던 ‘독(毒) 막걸리’ 사건은 14년여 만에 원점으로 돌아왔다. 광주고법이 4일 사건을 재심하라고 결정하며 부녀를 풀어줬다. 검찰이 자백을 강요했고, 부녀에게 유리한 증거를 고의로 누락시켰다는 이유에서였다. ▷‘딸이 저(와) 함께 엄마를 죽였다고 인정했다면 저도 인정합니다.’ 백 씨는 용의자로 검찰에 체포되던 날 자술서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 한 문장을 썼다. 열흘 뒤 작성된 추가 자술서에는 상세한 범행 경위가 깔끔한 글씨체로 적혀 있다. 검찰은 아버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온 딸이 이를 눈치챈 어머니를 살해하려 아버지와 짜고 범행을 저질렀다면서 백 씨 모녀의 자백을 주요 증거로 법원에 제출했다. 1심은 자백의 신빙성을 의심해 무죄로 봤지만 2심, 3심은 “범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진술”이라며 유죄 판결했다. ▷재심은 판결 확정 뒤에 무죄 증거가 새롭게 나오거나 수사기관의 위법한 수사가 확인될 경우 가능하다. 이번 재심 결정은 후자에 해당한다. 당시 조사 녹화 영상에는 범행을 부인하는 백 씨 부녀를 상대로 유도 심문이 집요하게 반복되는 장면이 담겨 있다. 검사가 자백 진술서를 받기 위해 한글을 잘 모르는 백 씨에게 ‘당신이 불러주면 직원이 대신 쓸 것’이라고 압박하기도 했다. 초등학교도 못 나온 백 씨와 발달장애를 가진 딸은 체념한 듯 질문마다 “네”라고 짧게 답했다. ▷검찰은 증거를 취사 선택해 불리한 건 법원에 내지 않았다. “(백 씨처럼) 오이농사를 짓는 농부들은 해충을 없애려 청산가리를 사용한다”는 일부 진술만 제출하고 “그건 유황가루를 오인한 것이고, 청산가리는 절대 쓰지 않는다”는 오이농부 수십 명의 진술은 숨겼다. 또 부녀가 막걸리를 사왔다는 순천의 국밥집 인근 폐쇄회로(CC)TV를 통째로 확보해 범행 관련 행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도 법원엔 “CCTV 기록이 없다”고 했다. ▷사건을 초동 수사했던 경찰은 피의자를 특정하지 못한 채 검찰에 송치했다. 하지만 사건을 넘겨받은 광주지검 순천지청 K 검사는 꿰맞추기 수사로 백 씨 부녀를 기소하고 사형을 구형했다. 부녀가 재판에서 자백을 번복해 무죄를 호소했음에도 유죄가 확정됐을 때 K 검사는 미궁에 빠질 뻔한 사건에서 정의를 실현한 스타 검사로 불리기도 했다. 과거 화성 연쇄살인 사건 등에서도 재심을 거쳐 진범을 잡은 사례가 있지만 21세기에도 이런 억지 수사가 통한 것이다. 강압 수사를 한 검사는 물론 이를 검증하지 못한 법원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칠레 대통령인 가브리엘 보리치(37)의 부모 자택 앞에서 선물 꾸러미가 사라진 것은 성탄절을 앞둔 23일(현지 시간) 밤이었다. 칠레 남부 푼타아레나스에 사는 보리치 대통령의 부모가 이 지역 환경미화원들에게 주려고 직접 빵과 현금을 넣어 만든 꾸러미들이었다. 현지 일간지 마가야네스는 “최근 칠레에 절도 등 범죄가 증가하고 있는데 이번엔 대통령 가족의 차례가 됐다”고 24일 전했다. 칠레는 남미 첫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으로 비교적 치안이 안정됐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하지만 최근 범죄가 늘면서 대통령 부모까지 절도 피해를 입게 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22일 발표된 국민 치안 인식 조사(2022년) 결과에 따르면 ‘국내 범죄가 증가했다고 생각한다’고 답한 응답자가 90.6%에 달했다. 이는 2012년 이후 10년 사이 가장 높은 수치라고 현지 매체가 보도했다. 폭력이나 협박을 동반한 강도나 차량 절도 등 심각한 피해를 입은 적이 있다는 응답도 21.8%로 나타났다. 카롤리나 토아 칠레 내무·공공안전장관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살인 사건의 경우는 2016년 이후 증가하다 올해는 전년보다 감소했다”고 밝혔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미국 국무부 고위직을 지내며 40년간 쿠바 스파이로 활동해 온 빅터 마누엘 로차(73)는 지난해 11월 마이애미의 식당가에서 젊은 정보요원을 만났다. 로차는 접선 지점에서 수십 m 떨어진 곳에서 한참 동안 이 청년을 지켜보다 다가갔다. 청년은 유창한 스페인어로 말문을 열었다. “(쿠바 총첩보국) 마이애미 지부 미겔이라고 합니다. 아바나(쿠바의 수도)에 있는 당신의 친구들로부터 메시지가 있습니다. 제가 당신의 새로운 접촉 포인트입니다.” “미겔이라고 했나? 나는 ‘아바나’ 이런 표현 안 써. 그냥 ‘그 섬(The Island)’이라고 하지. 뭘 적지도 않아. 꼬리가 잡히니까.”(로차) 콜롬비아 출신 이민자인 로차는 미국이 주는 온갖 혜택을 누리며 엘리트로 성장한 인물이다. 뉴욕 할렘가에서 자라다 빈민 청소년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1965년 명문인 터프츠대에 입학했다. 예일대로 옮겨 우등 졸업한 뒤에는 하버드대(케네디스쿨), 조지타운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 국무부에는 1981년 입부했다. 멕시코, 쿠바,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 6개국 외교관을 지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중남미 국장을 거쳐 2000년 주볼리비아 미국대사에 올랐다. “(이 일을) 몇 년이나 하신 건가요?”(미겔) “거의 40년.”(로차) “와우… (쿠바와) 오랜 기간 우정을 지켜주셨네요.”(미겔) “쉽지 않았지. 많은 걸 희생했고…. 한순간도 긴장을 놓은 적이 없어. 나에 대한 통제력을 잃으면 안 되니까. 그래도 신념이 있으면 정신을 붙잡게 돼.”(로차) 로차가 쿠바에 포섭된 시기는 냉전이 한창이던 1973년경이다. 당시 로차는 칠레를 여행 중이었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사회주의자 대통령인 살바도르 아옌데를 축출했고, 미국이 이 군부정권을 물밑 지원하던 때였다. 쿠바 역시 피델 카스트로가 1959년 사회주의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이후 미국 재산을 국유화해 미국의 고강도 제재를 받고 있었다. 쿠바는 미국과의 대결을 ‘다윗과 골리앗 싸움’이라고 선전하며 남미 출신 미국인을 첩보원으로 끌어들였다. 아이비리그 출신으로 미 주류 사회 침투 가능성이 높은 로차는 매력적인 포섭 대상이었다. “(쿠바) 본부와 마지막으로 닿은 게 2017년쯤이었어. 보통의 삶으로 돌아가 있으라더군. 그 후로 난 우익 인사로 살았지. 그게 내 레전드(legend)야.”(로차) ‘레전드’는 비밀요원이 정체를 숨기려 만들어낸 캐릭터를 뜻하는 은어다. 로차는 2002년 주볼리비아 미국대사 퇴직 후에도 쿠바를 관할하는 미 남부사령부 고문으로 6년 넘게 활동하며 군사기밀에 접근했다. 로차는 미겔에게 “젊은 요원을 보게 돼 뿌듯하다”며 회한에 잠긴 듯 ‘나 때는’ 발언을 이어갔다. “우리가 해온 일들은 정말 대단했어. 그랜드 슬램(세계 4대 테니스 대회인 호주오픈, 프랑스오픈, 윔블던, US오픈에서 모두 우승하는 것) 이상이지. 그들(미국)은 우리를 과소평가했어.” 쿠바가 훔친 정보는 쿠바 안에 머물지 않는다. 우방인 러시아, 중국, 북한 등으로 흘러갈 수 있다. 미국의 봉쇄로 경제가 어려웠던 쿠바는 구소련에 크게 의지했다. 정보기관도 KGB로부터 훈련과 지원을 받아 운영됐다. 냉전 후에도 KGB 출신인 블라디미르 푸틴이 집권하면서 정보 공조는 지속됐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자 미 플로리다에서 불과 150km 떨어진 쿠바 해안에 정보 시설을 다시 열었다. 쿠바에 막대한 지원을 해온 ‘최대 채권국’ 중국도 미국을 겨냥한 정보 기지로 쿠바를 활용하고 있다. 신냉전의 핵심 교두보로 급부상하는 쿠바를 미국은 ‘지나간 적’으로 여기며 방심했다. 미겔은 올 6월 로차와 세 번째 접선을 했다. “본부에서 확인하려는 사항이 있습니다. 당신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길 원하는지 궁금해합니다.”(미겔) “그런 걸 물어온다니 화가 나는군. 마치 내가 남자가 맞느냐고 묻는 거니까. 바지를 내려서 성기를 보여 달라는 말이나 다름없어.”(로차) 두 사람의 대화는 미 연방검찰 공소장에 녹취록으로 첨부돼 있다. 로차는 40년간 숨겨 온 정체를 연방수사국(FBI) 위장 요원인 미겔에겐 미처 감추지 못했다. 세 번째 접선 후 체포된 로차는 미겔과의 만남 자체를 부인하다 둘이 나란히 찍힌 사진을 수사관이 들이밀자 입을 닫았다. 메릭 갈런드 법무장관은 4일(현지 시간) 로차를 간첩 혐의로 기소하면서 “외국 요원이 미국 정부의 최고위직에, 가장 오래 침투한 사건”이라고 했다. 로차는 내년 초 마이애미 법정에 선다. 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
미국 국무부 고위직을 지내며 40년간 쿠바 스파이로 활동해 온 빅터 마누엘 로차(73)는 지난해 11월 마이애미의 식당가에서 젊은 정보요원을 만났다. 로차는 접선 지점에서 수십 m 떨어진 곳에서 한참 동안 이 청년을 지켜보다 다가갔다. 청년은 유창한 스페인어로 말문을 열었다.“(쿠바 총첩보국) 마이애미 지부 미겔이라고 합니다. 아바나(쿠바의 수도)에 있는 당신의 친구들로부터 메시지가 있습니다. 제가 당신의 새로운 접촉 포인트입니다.”“미겔이라고 했나? 나는 ‘아바나’ 이런 표현 안 써. 그냥 ‘그 섬(The Island)’이라고 하지. 뭘 적지도 않아. 꼬리가 잡히니까.”(로차)콜롬비아 출신 이민자인 로차는 미국이 주는 온갖 혜택을 누리며 엘리트로 성장한 인물이다. 뉴욕 할렘가에서 자라다 빈민 청소년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1965년 명문인 터프츠대에 입학했다. 예일대로 옮겨 우등 졸업한 뒤에는 하버드대(케네디스쿨), 조지타운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 국무부에는 1981년 입부했다. 멕시코, 쿠바,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 6개국 외교관을 지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중남미 국장을 거쳐 2000년 주볼리비아 미국대사에 올랐다.“(이 일을) 몇 년이나 하신 건가요?”(미겔)“거의 40년.”(로차)“와우… (쿠바와) 오랜 기간 우정을 지켜주셨네요.”(미겔)“쉽지 않았지. 많은 걸 희생했고…. 한순간도 긴장을 놓은 적이 없어. 나에 대한 통제력을 잃으면 안 되니까. 그래도 신념이 있으면 정신을 붙잡게 돼.”(로차)로차가 쿠바에 포섭된 시기는 냉전이 한창이던 1973년경이다. 당시 로차는 칠레를 여행 중이었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사회주의자 대통령인 살바도르 아옌데를 축출했고, 미국이 이 군부정권을 물밑 지원하던 때였다. 쿠바 역시 피델 카스트로가 1959년 사회주의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이후 미국 재산을 국유화해 미국의 고강도 제재를 받고 있었다. 쿠바는 미국과의 대결을 ‘다윗과 골리앗 싸움’이라고 선전하며 남미 출신 미국인을 첩보원으로 끌어들였다. 아이비리그 출신으로 미 주류 사회 침투 가능성이 높은 로차는 매력적인 포섭 대상이었다.미 국방정보국의 쿠바 전문 정보분석관으로 활동하며 17년 간 미군 기밀정보를 빼돌리다 2001년 발각된 아나 몬테스도 비슷한 시기에 포섭된 쿠바 스파이였다.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아메리칸 드림’에 성공해 부와 명예를 보장받을 수 있었음에도 비밀공작을 멈추지 않았다.“(쿠바) 본부와 마지막으로 닿은 게 2017년쯤이었어. 보통의 삶으로 돌아가 있으라더군. 그 후로 난 우익 인사로 살았지. 그게 내 레전드(legend)야.”(로차)‘레전드’는 비밀요원이 정체를 숨기려 만들어낸 캐릭터를 뜻하는 은어다. 로차는 2002년 주볼리비아 미국대사 퇴직 후에도 쿠바를 관할하는 미 남부사령부 고문으로 6년 넘게 활동하며 군사기밀에 접근했다. 로차는 미겔에게 “젊은 요원을 보게 돼 뿌듯하다”며 회한에 잠긴 듯 ‘나 때는’ 발언을 이어갔다.“우리가 해온 일들은 정말 대단했어. 그랜드 슬램(세계 4대 테니스 대회인 호주오픈, 프랑스오픈, 윔블던, US오픈에서 모두 우승하는 것) 이상이지. 그들(미국)은 우리를 과소평가했어.”쿠바가 훔친 정보는 쿠바 안에 머물지 않는다. 우방인 러시아, 중국, 북한 등으로 흘러갈 수 있다. 미국의 봉쇄로 경제가 어려웠던 쿠바는 구소련에 크게 의지했다. 정보기관도 KGB로부터 훈련과 지원을 받아 운영됐다. 냉전 후에도 KGB 출신인 블라디미르 푸틴이 집권하면서 정보 공조는 지속됐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자 미 플로리다에서 불과 150km 떨어진 쿠바 해안에 정보 시설을 다시 열었다. 쿠바에 막대한 지원을 해온 ‘최대 채권국’ 중국도 미국을 겨냥한 정보 기지로 쿠바를 활용하고 있다. 신냉전의 핵심 교두보로 급부상하는 쿠바를 미국은 ‘지나간 적’으로 여기며 방심했다.미겔은 올 6월 로차와 세 번째 접선을 했다. “본부에서 확인하려는 사항이 있습니다. 당신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길 원하는지 궁금해합니다.”(미겔)“그런 걸 물어온다니 화가 나는군. 마치 내가 남자가 맞느냐고 묻는 거니까. 바지를 내려서 성기를 보여 달라는 말이나 다름없어.”(로차)두 사람의 대화는 미 연방검찰 공소장에 녹취록으로 첨부돼 있다. 로차는 40년간 숨겨 온 정체를 연방수사국(FBI) 위장 요원인 미겔에겐 미처 감추지 못했다. 세 번째 접선 후 체포된 로차는 미겔과의 만남 자체를 부인하다 둘이 나란히 찍힌 사진을 수사관이 들이밀자 입을 닫았다. 메릭 갈런드 법무장관은 4일(현지 시간) 로차를 간첩 혐의로 기소하면서 “외국 요원이 미국 정부의 최고위직에, 가장 오래 침투한 사건”이라고 했다. 로차는 내년 초 마이애미 법정에 선다.로차의 전직 국무부 동료들은 “감쪽같이 속았다는 생각에 치가 떨린다”는 반응을 보였다. 1990년대 중반 쿠바의 미국 대사관격인 아바나의 미 이익대표부에서 로차와 함께 근무했던 한 간부는 “당시 카스트로 정권의 독재를 같이 한탄했었고, (로차가) 아이비리그 동문들의 우파 성향 모임에도 꾸준히 참석해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미국 외교의 거목인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사진)이 29일(현지 시간) 별세했다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향년 100세. 냉전시기 ‘핑퐁 외교’의 주역이면서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주도했던 키신저 전 장관은 7월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나는 등 최근까지도 왕성한 행보를 보여왔다.키신저 전 장관만큼 미 외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정치인도 드물다. 그는 1970년대 초반 냉전 갈등이 세계를 지배했던 시절 ‘죽의 장막’을 열어젖혔다. 러시아와의 군비확대 경쟁에 브레이크를 걸기 위해 전략무기협정을 체결해 데탕트를 모색했으며 당시 미국의 최대 골칫거리였던 베트남전 휴전협정을 유도했다. 그는 세계 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3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한국과도 친했던 그는 한미 관계 발전에 기여한 인물에게 수여되는 벤플리트상을 2009년 수상했다. 90세가 넘어서도 해외 순방을 멈추지 않고 시 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정기적으로 만나는 등 말년까지 영향력을 보였다.키신저 전 장관이 존경을 받는 것은 단지 외교적 업적뿐만이 아니다. 그는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이방인으로 현대 외교사의 거인으로 우뚝 선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기도 하다.키신저 전 장관은 1923년 5월 27일 독일 북부 퍼스(Furth)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모두 유대인으로 어머니는 부유한 가정 출신이었으며 아버지는 교사였다. 어린 시절 그는 하루 2시간씩 유대교 율법집인 탈무드를 공부할 정도로 독실한 유대교 신자였다.그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학생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책에 빠져 산다”며 “좀 더 활발했으면 좋겠다”고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소수 정예 학생들이 입학하는 인문계 중고등학교 김나지움에 들어가는 꿈을 키우며 공부했다.그러나 그의 꿈은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즘이 부상하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유대인 차별정책으로 인해 김나지움 입학은 불가능해졌다. 10대 소년이었던 키신저는 유대인 박해를 견디며 살았다. 축구를 좋아했던 그는 소년 축구 클럽에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가입할 수 없었다. 유대인 금지 규정을 어기고 몰래 경기장에 들어가 경기를 관람하다가 나치 당원들로부터 몰매를 맞기도 했다. 당시의 기억은 키신저 전 장관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길거리를 지날 때마다 ‘더러운 유대인’이라는 욕을 들어야 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 화가 나고 억울했다”고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그는 미국에 건너와서도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에서 뒷걸음을 쳤다. 독일에서 나치 당원들에게 맞은 기억 때문이었다. 나치즘이 점점 기세를 올리고 유대인 박해가 심해지자 그의 부모는 1938년 미국행을 결심했다. 키신저가 15세 때였다. 그의 가족을 배를 타고 런던을 거쳐 뉴욕에 도착했다. 돈 없이 미국에 온 그의 가족은 공장에서 일을 했다. 키신저 전 장관 역시 면도용 브러시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다. 그는 미국 사회에 동화되기 위해 독일 분위기가 나는 중간 이름 ‘하인즈’를 버렸다. 그는 뉴욕의 조지워싱턴 고교에 입학해 빠르게 영어를 배웠다. 교내에서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다. 1940년 뉴욕 시립 컬리지에 입학한 뒤에는 회계사가 돼 가정을 돕겠다는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제2차 세계대전 참전은 키신저의 꿈을 바꿔 놓았다. 1943년 미국 시민이 된 그는 곧바로 전쟁에 징집됐다. 미국에 온지 5년 만에 자신의 고향 독일에 대항해 싸우게 된 것. 그는 처음에는 프랑스에 소총병으로 파견됐으나 유창한 독일어 실력 덕분에 곧바로 독일 정보수집 임무를 맡게 됐다. 키신저는 독일 하노버에 침투해 게슈타포 장교들의 전쟁 기밀을 감청하는 역할을 맡았다. 유명한 발지 전투에서 독일군 공격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자청해 전투에서 연합군이 승리하는데 큰 공적을 세웠다. 일등병으로 군에 입대했던 그는 사령관으로 초고속 승진했으며 청동 무공훈장을 받았다. 탁월한 정보 수집과 분석 능력을 인정받아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정보 교관으로 활동했다.전쟁의 최전선에서 외교의 각축 현장을 직접 목격한 키신저 전 장관은 외교 분야 학자가 되기로 마음을 바꾸고 하버드대로 편입해 1950년 최우등생으로 졸업했다. 당시 그가 대학 졸업 논문으로 ‘역사의 의미’라는 주제로 383쪽짜리 연구 논문을 쓴 것은 지금도 하버드대의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키신저 전 장관의 장대한 논문에 놀란 하버드대 당국은 이후부터 대학 졸업 논문은 100쪽 내외여야 한다는 ‘키신저 규정’을 마련할 정도였다. 비록 잘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탁월한 분석력과 직관력을 엿볼 수 있는 그의 대학 논문은 지금도 하버드대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1954년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바로 하버드대 정부학과 교수로 임용됐고 이후 5년 만에 종신 교수가 됐다. 그는 1957년 하버드대 교수로 있으면서 ‘핵무기와 외교정책’이라는 명저를 발표했다. 이 책에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존 포스터 델레스 국무장관의 소련의 공격에 대한 ‘대량 핵 보복’ 정책에 반대하며 재래식 무기와 전술적 핵무기를 사용하는 유엔 대응 전략만으로도 소련과의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하버드대 교수로 있으면서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린든 존슨 대통령의 특별고문으로 임명돼 외교정책에 영향력을 발휘했다.키신저는 1969년 하버드대를 떠나 리처드 닉슨 행정부에서 국가안보 보좌관과 국무장관으로 1975년까지 일했으며 이후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서도 1977년까지 국무장관을 맡았다. 1978년 민주당의 지미 카터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이후 컬럼비아대, 조지워싱턴대 교수를 지내면서 로널드 레이건, 조지 W H 부시 행정부의 외교정보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키신저 전 장관은 1982년 키신저 어소시에이츠라는 정치 자문 및 로비 회사를 설립했다. 그는 2002년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9·11테러를 조사하는 ‘대미 테러공격 위원회(NCTAUUS)’ 위원장으로 임명됐으나 키신저 어소시에이츠 고객과의 이해충돌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자진 사퇴했다.키신저 전 장관은 “내 인생을 돌아보면 누가 세계 최강국의 국무장관이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느냐”고 말한 적이 있다. 독일에서는 유대인 박해로 학교에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미국에 건너와서도 어린 나이에 공장에 다니며 학비를 벌어야 했던 자신이 세계사에 남을 외교인으로 우뚝 선 것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그는 생전 3권의 자서전의 썼으며 14권의 저서를 남겼다. 자서전 ‘백악관 시절’은 1980년 전미도서위원회 최고의 역사 서적으로 꼽힐 정도로 내용이 알차다.. 정책서 중 ‘미국 외교정책(1969)’ ‘외교(1994)’ ‘중국 이야기(2011)’는 키신저의 3대 명저로 꼽힌다. 가장 최근 저서로는 ‘세계 질서(2014)’가 있다.두 번 결혼했던 키신저 전 장관은 1남 1녀를 두고 있다.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 데이비드 키신저는 외교인이 아닌 방송계로 진출해 제작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장관 시절에도 고향인 독일 퍼스 축구팀의 전적을 매주 챙겼을 정도로 열렬한 축구팬이었다. 그는 2012년 고향을 방문해 퍼스팀의 경기를 직접 관람하며 감회에 젖기도 했다.키신저 전 장관은 퇴임 후 인터뷰에서 “가장 즐기는 스포츠 게임이 뭐냐”는 질문에 “외교(Diplomacy)”라고 답했다. 그는 평생 외교를 사랑한 미국인이었다.외교 업적2013년 초 뉴욕에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의 90세 생일 축하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그의 외교적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한지 보여주는 행사였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지스카르 데스텡 전 프랑스 대통령, 수전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존 매케인 상원의원,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 등 정재계 거물들이 대거 참석했다. 조지 슐츠, 제임스 베이커, 콘돌리자 라이스, 힐러리 클린턴, 존 케리 등 미국의 전현직 국무장관도 총출동했다. 매케인 의원은 “그는 미국과 세계가 가장 혼란스러웠을 때 외교의 등불을 밝혔다”며 “키신저 전 장관만큼 존경받는 인물을 본 적이 없다”는 축사를 건넸다.이에 키신저 전 장관은 “미국은 세계의 경찰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미국은 위기가 닥쳤을 때 세계가 의지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돼야 한다”며 “나는 세계 평화를 위해 미국의 외교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갔다”고 감회를 밝혔다.2016년 11월 당시 대통령 당선인 신분이던 도널드 트럼프가 선거에서 승리한 지 열흘도 되지 않아 키신저를 트럼프타워로 초청해 세계정세에 대한 견해를 구한 것도 키신저의 힘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2015년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FP)가 ‘지난 50년간 가장 효과적인 국무장관은 누구였는가’라고 묻자 미국서 활동하는 1615명의 국제정치학자 중 32.2%는 키신저를 꼽았다. 2위 ‘잘 모르겠다(18.3%)’와 3위 제임스 베이커(17.7%)를 압도했다.실제로 키신저 전 장관이 외교 사령탑으로 있던 1969~1977년은 미국 외교의 최대 전성기였다. 베트남 중국 소련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베트남 칠레 아르헨티나 아프리카 등 미국의 손길이 뻗치지 않는 나라는 거의 없었다.미국이 지지하는 자유민주주의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효과적인 외교 정책 수립을 위해선 감정이 배제된 가치중립적인 전략 이익 추구가 중요하다고 강조한 현실주의자 키신저. 그의 3대 외교 업적으로는 중국 방문, 소련과의 무기통제협정, 베트남전 휴전협정이 꼽힌다.1971년 백악관 안보보좌관이었던 키신저 전 장관은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부터 ‘관계를 재정립하라’는 밀명을 받고 중국을 방문했다. 국무부도 모르는 비밀 방문이었다. 중국은 제2차 대전 후 미국과는 별다른 접촉이 없는 베일 속에 가려진 나라였지만 미국은 소련 견제를 위해 중국과의 관계를 재설정할 필요가 있었다. 키신저 전 장관은 파키스탄 방문 중 비밀리에 중국에 가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와 마오쩌둥(毛澤東) 주석과 만나 이듬해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성사시켰다. 단 17시간의 체류는 양국 관계를 새로운 출발점이었다.키신저 전 장관은 중국 비밀방문 보고서에서 “우리는 추상적으로 공산주의 국가를 다루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데올로기와 현실정치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는 “이념을 앞세우는 냉전시대 외교과 결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키신저 전 장관은 2016년 12월에도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주석을 만나는 등 왕성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가 중국을 방문한 횟수는 40회를 넘는다. 그는 2011년 저서 ‘중국 이야기’에서 “국제무대에서 주요 2개국(G2)으로 부상한 미국과 중국은 파트너십이라기보다 함께 앞으로 나가는 공진(共進)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로 국제적 위상에 걸맞게 가능하면 협력하고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상호 관계를 조정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앞서 1969년 키신저 전 장관은 냉전시대의 라이벌인 소련과 전략무기제한협정(SALT)를 이끌어내며 데탕트의 서곡을 울렸다. 그는 SALT 협상을 통해 증가 일로를 치닫던 미국과 소련의 공격용 전략미사일 수를 동결시켰다. 당시 그는 주미 소련대사 아나톨리 도브리닌, 공산당 제1서기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와 비밀 협상을 벌여 미 국무부와 국방부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키신저 전 장관은 처음에는 베트남전 철수를 반대하며 강경노선을 유지했지만 남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하여 이를 남베트남 군대로 대치하는 ‘월남화’ 정책을 밀고 나갔다. 수개월 동안 파리에서 북베트남 정부와 비밀 협상을 벌인 끝에 1973년 미군을 철수하고 남북 베트남 사이의 평화정착의 토대를 마련하는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베트남 분쟁을 해결한 공로를 인정받아 키신저 전 장관은 북베트남 협상대표 르 둑 토(黎德壽)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토는 수상을 거절했지만 키신저 전 장관은 “겸손하게 상을 받겠다”며 수상했다. 그러나 1975년 북베트남의 공격으로 남베트남이 함락되고 공산화되면서 평화협정은 무용지물이 됐다.키신저 전 장관의 외교는 중동에서 빛을 발했다. 베트남전 평화협정을 체결하던 바로 그 해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1973년 중동전이 발생하자 키신저 전 장관은 수차례 중동 여러 국가를 방문하는 ‘’셔틀 외교‘를 펼치며 휴전을 유도했다. 키신저 전 장관이 이스라엘에게 이집트 점령지 일부를 반환할 것으로 촉구하면서 1950년대 이후 냉각됐던 미국과 이집트의 관계는 정상화됐다.외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키신저 전 장관은 평소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19세기 초 오스트리아 수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를 꼽았다. 키신저 전 장관은 메테르니히를 주제로 하버드대 박사 학위 논문도 썼다. 프랑스 나폴레옹에 대적해 주변 4국의 동맹을 주도한 메테르니히의 정치술은 키신저 전 장관의 외교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무리 불완전한 동맹이라고 해도 협력을 통해 ‘힘의 균형’을 유지하며 세계질서를 지키는 것이 혼돈과 혁명보다 낫다는 키신저의 ‘현실정치(Realpolitik)’는 메테르니히에서 출발했다.정치학자 로버트 캐플린은 키신저 전 장관을 가리켜 “미국이 펼치고 싶은 것이 아닌, 펼쳐야만 하는 외교정책을 펼친 인물”이라고 평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이상주의가 아닌 냉철한 현실 인식에 바탕으로 두고 미국의 이해관계를 넓히고 세계질서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초점을 뒀다. 뉴욕타임스는 “키신저 전 장관이 미국 외교의 지평을 넓혔고 그의 리더십 하에서 미국 외교가 황금시대를 구가했다는 것은 그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고 평했다.논란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2012년 4월 하버드대를 방문해 특별 강연을 했다. 이 방문은 키신저 전 장관에게는 43년만의 ‘귀향’이었다.키신저 전 장관은 1969년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에 임명될 때까지 15년 동안 하버드에서 교수 생활을 했다. 그러나 하버드대는 그가 1977년 장관 퇴임 후 다시 교수로 돌아오려고 했을 때 받아주지 않았다. 웬만한 유명 동문에게 주는 졸업 축사의 기회도 주지 않았다. 키신저 전 장관도 자신을 냉대하는 하버드대와 담을 쌓으며 지냈다. 이날 강연에서도 일부 청중은 “키신저는 전범이다”라고 외치며 키신저의 하버드 귀환에 반대했다.하버드대와 키신저 전 장관 간의 반세기에 가까운 냉전은 키신저의 외교 정책 때문이었다. 진보 성향의 하버드대뿐만 아니라 미국 사회 전반에서 국익에 바탕을 둔 키신저식 실리 외교는 많은 논란을 낳았다. ‘업적이 많은 만큼 과오도 많다’는 비판이었다.키신저 전 장관은 1970년 칠레에서 좌익 성향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당선되자 남미의 공산화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아옌데를 축출하기 위해 피노체트 군사 반란을 지원했다. 피노체트 독재 하에서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되면서 키신저의 피노체트 지원은 국제적으로 큰 비난을 받기도 했다.그는 베트남전 당시 캄보디아 영토를 침입해 활동하는 북베트남군을 봉쇄하기 위해 베트남전에 중립을 지키던 캄보디아에 대한 무차별 폭력을 감행해 킬링필드를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았다.이와 함께 키신저 전 장관은 1975년 동맹국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공격해 주민을 학살하는 것을 묵인했다는 논란도 있다. 미국 저널리스트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키신저 전 장관을 인류에 대한 범죄행위를 저지른 혐의로 국제사법재판소에 기소해야 한다”며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실은 전범자라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주장하기도 했다.키신저 전 장관은 하버드대 연설에서 이 같은 논란에 대해 “학자는 최상의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지만 정책 결정자는 제한된 옵션 중에서 제일 나은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고 해명했다. 전문가들은 “키신저 외교 정책의 과실에도 불구하고 그가 만들어놓은 국제질서가 지금도 상당 부분 유지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한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미국에서 공화당 대통령들은 민주당 대통령들에 비해 연방대법관 임명 기회를 더 많이 누렸다.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조 바이든이 임명한 대법관은 1, 2명에 그쳤지만 로널드 레이건은 3명, 도널드 트럼프와 리처드 닉슨은 불과 4년 임기 동안 각각 3명, 4명을 대법관에 앉혔다. 공화당 대통령들 중에서도 트럼프는 ‘타율’이 높기로 유명하다. 다른 대통령들이 보수적 가치를 실현해줄 것으로 기대하며 임명했던 대법관들은 막상 판결할 때 중도에 서거나 진보 대법관들과 의기투합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트럼프가 임명한 3인은 달랐다. 지명 당시부터 선명한 보수 성향으로 논란이 됐던 닐 고서치, 브렛 캐버노,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은 기대에 부응하며 대법관 9명으로 이뤄진 연방대법원을 확실하게 보수로 기울게 했다. ‘트럼프 대법관들’ 합류 이후 연방대법원에서 벌어진 하이라이트 사건은 지난해 6월 낙태권 폐지 판결이다. 1973년 낙태권을 최초로 보장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나왔을 때 이에 찬성한 7명 중 3명은 다름 아닌 공화당의 닉슨이 임명한 대법관들이었다. 1992년 대법원이 낙태권 존폐를 다시 다뤘을 때도 레이건이 임명한 대법관 3명 중 2명이 ‘존치’ 쪽에 서면서 낙태권은 살아남았다. 하지만 지난해 재판에서 ‘트럼프 대법관들’은 단 한 명도 이탈 없이 낙태권 폐지를 지지해 보수주의자들의 숙원을 이뤄줬다. 이 판결이 나온 날 트럼프는 “다른 대통령들이 실패했던 일을 내가 해냈다. 내가 임명한 3명의 대법관들과 함께”라며 자신의 업적을 부각했다. 이것은 근거 있는 자랑이었다. 트럼프는 2016년 대선에 나서며 “당선되면 태아의 생명을 지킬 것이다. 그런(낙태 금지) 판결을 할 2, 3명을 연방대법관에 앉히면 되는데 그러려면 나를 대통령으로 뽑아야 한다”며 보수 표심을 저격했다. 미국에서 대선 후보가 특정 이슈에 대해 특정 결론으로 판결할 대법관을 임명하겠다고 공언한 건 트럼프가 처음이었다. 사실상 ‘사법부를 정치에 이용하겠다’는 이 대국민 선언을 트럼프는 성공적으로 이행했다. 보수로 기운 연방대법원은 총기 규제, 소수 인종 우대, 학자금 채무 면제 등 바이든의 주요 정책을 번번이 무력화시켰다. 보수진영에선 “다른 건 몰라도, 우리 편 대법관 3명을 ‘알박기’ 한 게 트럼프의 최대 업적”이라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대선을 1년 앞둔 지금, 트럼프가 ‘사법적 치적’으로 홍보해온 낙태권 폐지는 그의 최대 아킬레스건이 되고 있다. 주 정부가 낙태 허용 여부를 자체 결정할 수 있게 되면서 여성 등 낙태 찬성 유권자들을 꽁꽁 결집시켰기 때문이다. 특히 민주당과 공화당이 팽팽히 맞붙는 경합주나 공화당 지지세가 강한 지역에서 여론이 출렁이고 있다. 전통적인 민주당 성향 주에서는 주 정부가 낙태권을 계속 보호할 것이기 때문에 위기감이 덜하지만 ‘공화당 주’에서는 낙태가 금지될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 최근 각 주에서 낙태 관련 법안 주민투표가 이어지는데 대표적인 경합주인 미시간은 물론이고 공화당 표밭인 오하이오, 몬태나, 캔자스, 켄터키 등에서도 낙태 허용 법안은 속속 통과되고, 낙태 제한 법안은 제동이 걸렸다. 낙태 금지를 표방하며 출마한 주지사, 주 대법관들도 줄줄이 고배를 마시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와 NBC방송의 9월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64%가 연방대법원의 낙태권 폐지 판결에 반대했다. 찬성은 30%에 그쳤다. 대법관들은 6 대 3으로 낙태권 폐지를 결정했는데 여론은 그와 정반대인 것이다. 트럼프는 대법원의 균형추를 인위적으로 옮겨 민의와 다른 판결을 이끌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대가를 내년 대선에서 치르게 됐다. 민주당은 대선 전략으로 트럼프가 ‘낙태 반대’ 대법관 3명을 임명한 주역이란 점을 집중 부각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상원 다수당을 지킬 수 있었던 최대 요인은 낙태권 폐지에 반발한 중도층 흡수였는데 내년 대선에서도 비슷한 효과가 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공개석상에서 좀처럼 트럼프 얘기를 꺼내지 않던 바이든도 14일(현지 시간) 정치자금 모금 행사에선 “미국에서 낙태가 금지된 유일한 이유는 바로 트럼프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안 된다”고 했다. 물론 트럼프가 역풍에 쉽사리 흔들릴 인물은 아니다. 그는 당내 경쟁 대선주자인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가 얼마 전 ‘임신 6주 후 낙태 금지’ 법안에 서명하자 “끔찍한 결정”이라고 비판하며 ‘낙태 금지 주역’ 꼬리표를 떼어내려 하고 있다. 낙태 표심이 곧바로 바이든에게 향할지도 지켜볼 일이다. 하지만 트럼프의 입맛에 딱 맞았던 낙태권 폐지 판결이 공화당을 늪에 빠뜨리고, 민주당엔 비벼볼 희망이 된 것은 분명하다. 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
미국에서 공화당 대통령들은 민주당 대통령들에 비해 연방대법관 임명 기회를 더 많이 누렸다.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조 바이든이 임명한 대법관은 1, 2명에 그쳤지만 로널드 레이건은 3명, 도널드 트럼프와 리처드 닉슨은 불과 4년 임기 동안 각각 3명, 4명을 대법관에 앉혔다.공화당 대통령들 중에서도 트럼프는 ‘타율’이 높기로 유명하다. 다른 대통령들이 보수적 가치를 실현해줄 것으로 기대하며 임명했던 대법관들은 막상 판결할 때 중도에 서거나 진보 대법관들과 의기투합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트럼프가 임명한 3인은 달랐다. 지명 당시부터 선명한 보수 성향으로 논란이 됐던 닐 고서치, 브렛 캐버노,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은 기대에 부응하며 대법관 9명으로 이뤄진 연방대법원을 확실하게 보수로 기울게 했다.‘트럼프 대법관들’ 합류 이후 연방대법원에서 벌어진 하이라이트 사건은 지난해 6월 낙태권 폐지 판결이다. 1973년 낙태권을 최초로 보장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나왔을 때 이에 찬성한 7명 중 3명은 다름 아닌 공화당의 닉슨이 임명한 대법관들이었다. 1992년 대법원이 낙태권 존폐를 다시 다뤘을 때도 레이건이 임명한 대법관 3명 중 2명이 ‘존치’ 쪽에 서면서 낙태권은 살아남았다. 하지만 지난해 재판에서 ‘트럼프 대법관들’은 단 한 명도 이탈 없이 낙태권 폐지를 지지해 보수주의자들의 숙원을 이뤄줬다.이 판결이 나온 날 트럼프는 “다른 대통령들이 실패했던 일을 내가 해냈다. 내가 임명한 3명의 대법관들과 함께”라며 자신의 업적을 부각했다. 이것은 근거 있는 자랑이었다. 트럼프는 2016년 대선에 나서며 “당선되면 태아의 생명을 지킬 것이다. 그런(낙태 금지) 판결을 할 2, 3명을 연방대법관에 앉히면 되는데 그러려면 나를 대통령으로 뽑아야 한다”며 보수 표심을 저격했다. 미국에서 대선 후보가 특정 이슈에 대해 특정 결론으로 판결할 대법관을 임명하겠다고 공언한 건 트럼프가 처음이었다.사실상 ‘사법부를 정치에 이용하겠다’는 이 대국민 선언을 트럼프는 성공적으로 이행했다. 보수로 기운 연방대법원은 총기 규제, 소수 인종 우대, 학자금 채무 면제 등 바이든의 주요 정책을 번번이 무력화시켰다. 보수진영에선 “다른 건 몰라도, 우리 편 대법관 3명을 ‘알박기’ 한 게 트럼프의 최대 업적”이라는 평가가 많다.하지만 대선을 1년 앞둔 지금, 트럼프가 ‘사법적 치적’으로 홍보해온 낙태권 폐지는 그의 최대 아킬레스건이 되고 있다. 주 정부가 낙태 허용 여부를 자체 결정할 수 있게 되면서 여성 등 낙태 찬성 유권자들을 꽁꽁 결집시켰기 때문이다. 특히 민주당과 공화당이 팽팽히 맞붙는 경합주나 공화당 지지세가 강한 지역에서 여론이 출렁이고 있다. 전통적인 민주당 성향 주에서는 주 정부가 낙태권을 계속 보호할 것이기 때문에 위기감이 덜하지만 ‘공화당 주’에서는 낙태가 금지될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최근 각 주에서 낙태 관련 법안 주민투표가 이어지는데 대표적인 경합주인 미시간은 물론이고 공화당 표밭인 오하이오, 몬태나, 캔자스, 켄터키 등에서도 낙태 허용 법안은 속속 통과되고, 낙태 제한 법안은 제동이 걸렸다. 낙태 금지를 표방하며 출마한 주지사, 주 대법관들도 줄줄이 고배를 마시고 있다.워싱턴포스트(WP)와 NBC방송의 9월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64%가 연방대법원의 낙태권 폐지 판결에 반대했다. 찬성은 30%에 그쳤다. 대법관들은 6 대 3으로 낙태권 폐지를 결정했는데 여론은 그와 정반대인 것이다. 트럼프는 대법원의 균형추를 인위적으로 옮겨 민의와 다른 판결을 이끌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대가를 내년 대선에서 치르게 됐다.민주당은 대선 전략으로 트럼프가 ‘낙태 반대’ 대법관 3명을 임명한 주역이란 점을 집중 부각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상원 다수당을 지킬 수 있었던 최대 요인은 낙태권 폐지에 반발한 중도층 흡수였는데 내년 대선에서도 비슷한 효과가 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공개석상에서 좀처럼 트럼프 얘기를 꺼내지 않던 바이든도 14일(현지 시간) 정치자금 모금 행사에선 “미국에서 낙태가 금지된 유일한 이유는 바로 트럼프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안 된다”고 했다.물론 트럼프가 역풍에 쉽사리 흔들릴 인물은 아니다. 그는 당내 경쟁 대선주자인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가 얼마 전 ‘임신 6주 후 낙태 금지’ 법안에 서명하자 “끔찍한 결정”이라고 비판하며 ‘낙태 금지 주역’ 꼬리표를 떼어내려 하고 있다. 낙태 표심이 곧바로 바이든에게 향할지도 지켜볼 일이다. 하지만 트럼프의 입맛에 딱 맞았던 낙태권 폐지 판결이 공화당을 늪에 빠뜨리고, 민주당엔 비벼볼 희망이 된 것은 분명하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해외 전문 투자기관이 전 세계 47개국의 연금제도를 조사한 결과 한국은 42위에 그친 것으로 평가됐다. 납입자에게 돌아가는 혜택을 뜻하는 적정성 면에선 꼴찌로 나타났다. 자산운용업체 머서와 글로벌 투자전문가협회(CFA)가 17일(현지 시간) 발표한 ‘2023 글로벌 연금지수(MCGPI)’에 따르면 한국의 연금제도는 100점 만점 중 51.2를 기록했다. 우리나라는 중국(55.3), 멕시코(55.1), 남아프리카공화국(54), 인도네시아(51.8)보다도 점수가 낮았다. 머서와 CFA는 각국의 연금 시스템을 적정성과 지속가능성, 운용관리 등 3개 분야로 나눠 평가한 뒤 가중치를 적용해 합산하는 방식으로 순위를 매겼다. 네덜란드(85.0)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고 호주(5위), 미국(22위), 일본(30위) 등이 뒤를 이었다. 우리는 납입자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제공하는지를 따지는 적정성 분야에서 39점으로 최하위였다. 지속가능성(52.7)은 27위, 운용관리 부문(68.5)은 34위를 기록했다. 보고서는 한국의 연금제도를 C등급으로 분류됐다. C등급은 ‘전반적으로 유용하지만 위험성과 약점이 존재하고, 이를 해결하지 않으면 연금제도의 실효성과 지속가능성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앞서 7월에도 글로벌 컨설팅업체인 맥킨지가 국내 공적·사적연금을 분석한 결과 우리나라의 연금 소득 대체율은 47%에 불과해 국민의 충분한 노후 대책이 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평균인 58% 대비 11%포인트 낮은 수준이다. OECD는 연금의 소득대체율을 65∼75% 정도로 권고하고 있다. 정부와 국회 역시 국민연금 기금이 2055년 모두 소진될 것이란 추계가 나왔음에도 개혁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제5차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안’의 국회 제출 시한을 10여 일 앞둔 18일까지도 보험료 인상 방안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정부 내에서는 재정 안정에 필요한 보험료율을 아예 제시하지 않고 각종 노후소득 보장 제도를 아우르는 구조 개혁 방향성만 두루뭉술하게 담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고 한다. 문재인 정부보다 후퇴한 개편안이 나올 수 있다는 뜻이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이동훈 기자 dhlee@donga.com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이스라엘은 여성이 의무 군복무를 하는 세계 유일의 나라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등 위험 지역에도 여군들이 투입된다. 이스라엘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내가 정말 미소 짓고 있었을까(To see if I am smiling)’에는 가자지구 점령군으로 복무했던 이스라엘 여군들의 목소리가 생생히 담겨 있다. 제대 후 20대 후반이 된 그들은 당시 기억을 이렇게 회상한다. “(선임이) 제게 총을 쥐여 주며 점령할 마을을 보여 주자 저는 더 강해졌다고 느꼈어요. 노인부터 아이까지 모두가 적이었고 인류애는 곧 (우리의) 죽음이었죠. 우리는 어떤 주저함도 없이 나아갔어요. 총은 장전돼 있고, 이제 갈기기만 하면 됐어요.” “제 아이가 집에서 울어댈 때면 제 기억은 (아기들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던) 그곳으로 향하게 돼요. 죄책감이 드냐고요? 그냥 제 마음속 거울을 보는 느낌이에요. 저에게 잠재된 폭력성을 비춰 주는 거울… 저는 좋은 엄마라고 생각해요. 악마 같았던 그 순간만 빼고요.” “군대 동기들에게 가끔 전화를 걸어요. 저는 말하죠. 이게 없어지질 않아. 비누로 손을 아무리 씻어도 없어지질 않아. 그럼 동기는 그게 뭐냐고 물어요. 저는 말해요. 내 손에 묻은 피…. 전투가 끝나고 몇 년이 지났지만 그때의 핏자국이 지워지질 않아요.” 이스라엘은 군사강국이다. 첨단 무기로 무장한 것은 물론이고 전쟁 때마다 30만∼40만 명의 정예 예비군이 소집된다. 2009년과 2014년 가지지구에 진입해 하마스와 지상전을 벌였을 때도 팔레스타인에 압도적인 피해를 안겼다. 2009년 전투 때 이스라엘 사망자는 13명에 불과했지만 팔레스타인에선 민간인 900여 명을 포함해 1400명이 숨졌다. 2014년에는 이스라엘(72명)의 30배에 달하는 2100여 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사망했다. 덜 죽고 많이 죽이면 그것이 이기는 것일까. 그게 승리한 전쟁이라고 해도 이스라엘은 그 승리를 통해 얻어낸 것이 거의 없다. 하마스는 이내 빈자리를 다시 채워 어김없이 이스라엘에 공격을 재개했다. 가족과 터전을 잃은 팔레스타인인들은 하마스에 의지하며 켜켜이 복수심을 쌓아왔다. ‘전쟁 영웅’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군인들 역시 손에 무고한 이들의 피를 묻혔다는 심리적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 전쟁에서 이기고 평화와는 멀어지는 오랜 악순환은 이번에도 재연될 조짐이다. 이스라엘은 곧 하마스의 본거지 가자지구에 역대 최대 규모 지상군을 투입할 예정이다. 하마스의 기습 공격으로 1500여 명이 사망하는 초유의 대참사를 당한 이스라엘로선 가혹한 대가를 안기는 것 외에 마땅한 대응책을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번에 가자자구에서 전면전이 벌어지면 이스라엘 군인들의 희생이 어느 때보다 클 수 있다. 이스라엘로선 국제사회의 압박과 이란 등으로 확전될 위험 때문에 민간인 피해를 줄여야 하는데 그러려면 한 지역을 통째로 초토화시키기보단 밀착한 거리에서 벌어지는 시가전으로 소규모 전투를 이어가야 한다. 전투원과 민간인이 구별되지 않는 가자지구에서 하마스는 수백 km에 달하는 땅굴 곳곳에 함정을 파놓고 이스라엘군을 기다릴 것이다. 가지지구 작전에 참여했던 한 이스라엘 병사는 “집 한 채 한 채 문 하나 하나를 열 때마다 두려움이 온몸을 휘감았다”고 했다. 이스라엘이 군인들과 인질들의 희생을 감수하고 하마스 세력을 일시 제압한다고 한들 가자지구 주민들의 계속될 저항은 막을 길이 없다. 중동의 해묵은 보복의 쳇바퀴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 했던 지도자들이 있었다. 1993년 팔레스타인 자치권을 인정한 오슬로 협정을 체결한 이츠하크 라빈 당시 이스라엘 총리, 1978년 중동과 이스라엘 간 최초의 평화협정을 이끈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같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둘 다 각자의 진영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혀 최후를 맞았다. 라빈 총리는 유대인 민족주의자의 손에, 사다트 대통령은 이슬람 과격단체에 의해 암살됐다. 평화보다는 전쟁, 공존보다는 배제를 추구하는 쪽이 살아남는 생태계가 유지되는 한 증오에 기생하는 세력들이 사람들의 운명을 쥐게 된다. 이런 자멸적인 게임의 룰이 지배하는 곳에선 베냐민 네타냐후 극우 정권이나 하마스 같은 극단적 무장단체들이 서로가 서로의 존재가치를 증명해주며 주인공으로 부각된다. 이스라엘에서 극우파를 솎아내고, 팔레스타인에서 하마스를 고립시키는 게 그나마의 해법일텐데 핏빛의 외신 사진들이 시시각각 쏟아지는 지금의 전시 국면에선 그런 주장들이 별로 설 자리가 없다. 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는 과정에서 자행한 민간인 살상 실태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스라엘이 하마스의 민간인 학살을 지상군 투입의 명분으로 삼으려 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11일(현지 시간) TV 연설에서 “하마스가 이스라엘 군인들을 참수하고 여성을 성폭행한 것은 물론이고 어린이들의 머리에 총을 쏘고, 사람들을 산 채로 불태웠다”며 “하마스 대원들은 이제 모두 죽은 목숨”이라고 경고했다. 이스라엘 총리 대변인도 가자지구와 이스라엘 국경에 있는 크파르아자 키부츠(집단농장)에서 참수된 영유아들의 시신이 발견됐다고 밝혔다고 미국 CNN방송은 전했다. 하마스의 민간인 학살 의혹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이날 백악관에서 유대인 지도자들과 만나 “테러리스트들이 어린이들을 참수하는 사진을 보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더욱 증폭됐다. 다만 백악관은 “네타냐후 총리 대변인의 주장과 이스라엘 언론 보도를 근거로 언급한 것일 뿐 해당 사진을 본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하마스는 성명을 통해 학살 의혹을 부인하며 “우리 저항군이 어린이 참수, 여성 성폭행에 연루됐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서방 매체들이 유포하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의 학살과 범죄를 은폐하기 위한 정보 조작”이라고 주장했다. 전쟁 6일째인 12일 기준 양측 사망자는 하마스 대원 1500명을 포함해 4100명을 넘어섰다. 이스라엘 당국은 자국 사망자가 최소 1300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했다. 팔레스타인 보건부는 주민 1354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지상군 투입이 현실화될 경우 확전에 대비해 이란을 직접 거론하며 “‘조심하라’고 분명히 전달했다”고 밝혔다.카이로=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신광영 기자 neo@donga.com}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는 과정에서 자행한 민간인 살상 실태가 드러나면서 공격의 명분을 확보하려는 양측의 여론전도 격화되고 있다.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11일(현지 시간) TV연설에서 “하마스가 이스라엘 군인들을 참수하고 여성을 강간하는 것은 물론, 어린이들의 머리에 총을 쏘고, 사람들을 산채로 불태웠다”며 “하마스 대원들은 이제 모두 죽은 목숨”이라고 경고했다. 이스라엘 총리 대변인도 가자지구와 이스라엘 국경에 있는 크라르 아자 키부츠(집단농장)에서 참수된 영유아들의 시신이 발견됐다고 밝혔다고 미국 CNN 방송은 전했다. 이곳은 아기 시신 40구가 발견됐다는 증언이 나오는 등 참혹한 피해를 입은 지역이다.하마스의 민간인 학살 의혹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이날 백악관에서 유대계 지도자들과 만나 “테러리스트들이 어린이들을 참수하는 사진을 보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더욱 증폭됐다. 다만 백악관은 “네타냐후 총리 대변인의 주장과 이스라엘 언론 보도를 근거로 언급한 것일 뿐 해당 사진을 본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하마스는 성명을 통해 학살 의혹을 부인하며 “우리 저항군이 어린이 참수, 여성 성폭행에 연루됐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서방 매체들이 유포하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의 학살과 범죄를 은폐하기 위한 정보 조작”이라고 주장했다. 전쟁 6일째인 11일 양측 사망자는 2300명을 넘어섰다. 이스라엘 당국은 사망자가 최소 1200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팔레스타인 보건부 역시 1100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바이든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지상군 투입이 현실화될 경우 확전 우려에 대비해 이란을 직접 거론하며 “조심하라고 분명히 전달했다”고 밝혔다. 또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을 이스라엘에 급파해 강력한 지원 의지와 함께 이란과 레바논 무장단체 헤즈볼라 등에 대한 억제 메시지를 전했다.카이로=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신광영 기자 neo@donga.com}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 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된 지 사흘째인 9일(현지 시간) 이스라엘은 전방위 보복을 선언하며 하마스 본거지인 가자지구에 대한 지상군 투입을 예고했다. 이에 하마스는 이스라엘이 공격해 올 때마다 납치한 인질들을 1명씩 처형하겠다며 ‘인간 방패’ 전술을 실행할 태세여서 대규모 인명 피해가 예상된다. 9일(현지 시간) AFP통신 등에 따르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TV 연설에서 “하마스의 행태는 (테러단체인) 이슬람국가(IS)와 같다. 하마스는 가혹하고 끔찍한 결과에 직면할 것”이라고 말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전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지금은 협상할 수 없다. (가자지구에) 진입해야 한다”며 지상군 투입이 불가피함을 설명했다고 미국 매체 액시오스가 전했다. 이스라엘이 하마스 지휘부에 대한 암살 작전에 곧 착수할 것이라는 보도도 이어졌다. 10일 기준 이스라엘에선 최소 900명이 사망하고 24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이스라엘 당국은 7일 기습 침투한 하마스에 납치된 인질 약 150명이 가자지구에 붙잡혀 있어 생사가 불투명하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의 집중 공습으로 가자지구에서도 770명이 숨지고 3700여 명이 부상을 당해 양측 사망자가 167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하마스는 인질 살해 협박으로 맞서고 있다. AP,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아부 우바이다 하마스 대변인은 이날 성명을 통해 “이스라엘이 사전 경고 없이 우리 민간인을 공격할 때마다 붙잡고 있는 인질 중 한 명을 처형할 것”이라고 밝혔다. 양측이 극단적인 보복전으로 치달으면서 미국 등 서방 내에서도 단일대오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빅5’ 국가 정상들은 9일 공동성명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 의지를 밝혔다. 하지만 유럽연합(EU)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가 일부 회원국이 입장 차를 드러내자 몇 시간 만에 철회하는 등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유엔은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을 규탄하면서도 “이스라엘의 가자 봉쇄도 우려된다”는 양비론 속에 안전보장이사회 성명 도출에 실패했다.하마스 “폭격에 인질 4명 사망”… 이 “하마스 지휘부 제거할것”보복전 치닫는 이-팔 전쟁하마스, 인질 ‘인간 방패’ 내세워 위협… 이 “인간 탈을 쓴 짐승과 싸우고 있어”가자지구 봉쇄… “전기-식량 없을 것”지상전 초읽기… 민간인 희생 등 부담 “하마스와의 대결은 문명과 야만의 대결이다. 문명 세계가 이슬람국가(IS)를 패배시킨 것처럼 하마스를 패배시킬 것이다.”(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이스라엘이 우리 국민을 표적으로 삼는다면 우리가 붙잡고 있는 민간인 인질을 한 명씩 처형할 것임을 선언한다.”(아부 우바이다 하마스 대변인)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기습 공격으로 최소 900명의 자국민이 숨진 이스라엘이 ‘피의 보복’에 나선 가운데 네타냐후 총리는 “힘으로 하마스를 물리칠 것이며 (이번 전쟁을 통해) 중동을 변화시키겠다”는 공격 의지를 밝혔다. 이스라엘은 전쟁 시작과 함께 예비군 30만 명을 동원한 데 이어 하마스의 근거지인 가자지구를 전방위로 포위하고 있어 지상군 투입이 임박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에 하마스는 이스라엘에서 끌고 온 민간인 인질들을 ‘인간 방패’로 삼겠다고 위협하는 등 극단적인 보복전 양상이 펼쳐지고 있다.● “하마스 지휘부 제거 작전 착수”전쟁 나흘째인 10일(현지 시간) 현재 양측의 사망자는 1700명에 육박했다. 이스라엘 현지매체 하아레츠는 이스라엘 보건당국을 인용해 이날까지 이스라엘인 약 900명이 숨지고 2400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전했다. 이스라엘방위군(IDF)은 이날 브리핑에서 “하마스가 침투한 가자지구 접경지를 장악하고 남부지역 통제권을 거의 회복했다”면서 민간인 사망자와 별도로 하마스 무장대원의 시신 1500구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보복 공습으로 팔레스타인 사상자도 크게 늘었다. 가자지구 보건부에 따르면 이날까지 770명이 숨지고 3700여 명이 다친 것으로 집계됐다. 이스라엘은 하마스 궤멸을 목표로 대대적인 설욕전을 준비하고 있어 사망자는 계속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이스라엘은 하마스 지휘부 암살 작전에도 착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영국 일간 더 타임스에 따르면 이스라엘 정부 고위 관리는 “서방이 (테러단체) IS에 했던 것처럼 하마스를 겨냥해 모든 행동에 나설 것”이라며 “이는 하마스의 지도부와 전투원을 제거하겠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하마스를 압박하기 위해 가자지구에 대한 ‘고사 작전’도 시작됐다. 요아브 갈란트 이스라엘 국방장관은 9일 “전기도 식량도 연료도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닫힐 것”이라며 “인간의 탈을 쓴 짐승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그에 맞게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의 봉쇄 정책으로 2007년부터 생필품과 의약품 반입이 제한된 가자지구에 전기, 식량, 연료 공급이 추가로 제한되면 주민 약 237만 명은 벼랑 끝으로 내몰릴 수 있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은 주민 약 12만 명이 이미 피란길에 올랐다고 집계했다.● “지상군 투입” 공언해도 걸림돌 많아 네타냐후 총리가 하마스에 대한 ‘끝장 보복’을 선언한 만큼 가자지구에 이스라엘 지상군이 투입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미 매체 액시오스에 따르면 네타냐후 총리는 8일 조 바이든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우리는 (가자지구에) 진입해야 한다”며 “이스라엘이 중동에서 나약함을 보여줘선 안 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 통화에서 네타냐후 총리의 지상 작전 계획을 만류하지 않았다고 액시오스는 전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지상군 투입을 실행하기에는 부담이 적지 않다. 우선 가자지구로 끌려간 인질 약 150명이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다. 10일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 따르면 리처드 헤흐트 이스라엘 방위군 대변인은 이날 “인질을 죽인다고 상황이 달라지진 않을 것”이라고 밝혔지만 무리한 작전으로 인질들이 연이어 살해될 경우 국내외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하마스는 이날 이스라엘의 폭격에 따라 19세 이스라엘 군인을 포함해 인질 4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하며 이스라엘의 약점을 공략하고 있다. CNN과 워싱턴포스트(WP)도 자체 영상 분석을 토대로 이스라엘인 4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도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대규모로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점도 걸리는 대목이다. 가자지구는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인 데다 하마스 대원들이 민간인 틈에 깊숙이 숨어 있어 공격 대상을 식별하기 어렵다. 이스라엘이 2014년 병력 6만 명을 가자지구에 파견해 하마스와 전쟁했을 때 팔레스타인인 2000여 명이 사망했다. 민간인 희생이 속출하면 국제 여론이 이스라엘에 불리하게 바뀔 수 있다. 지상전이 장기화될 경우 이번 전쟁에 일부 참전한 시아파 무장단체 헤즈볼라와 두 단체를 후원하는 이란으로 전선이 확대될 수 있다는 점도 변수로 꼽힌다. 하마스 고위 관계자는 이스라엘 현지 언론 ‘타임스 오브 이스라엘’에 “이란과 헤즈볼라는 이번 공격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가자지구가 위기에 처하면 전쟁에 개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카이로=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워싱턴=문병기 특파원 weappon@donga.com신광영 기자 neo@donga.com박효목 기자 tree624@donga.com}
“하마스와의 대결은 문명과 야만의 대결이다. 문명 세계가 이슬람국가(IS)를 패배시킨 것처럼 하마스를 패배시킬 것이다.”(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이스라엘이 우리 국민을 표적으로 삼는다면 우리가 붙잡고 있는 민간인 인질을 한 명씩 처형할 것임을 선언한다.”(아부 우바이다 하마스 대변인)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기습 공격으로 최소 900명의 자국민이 숨진 이스라엘이 ‘피의 보복’에 나선 가운데 네타냐후 총리는 “힘으로 하마스를 물리칠 것이며 (이번 전쟁을 통해) 중동을 변화시키겠다”는 공격 의지를 밝혔다. 이스라엘은 전쟁 시작과 함께 예비군 30만 명을 동원한데 이어 하마스의 근거지인 가자지구를 전방위로 포위하고 있어 지상군 투입이 임박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에 하마스는 이스라엘에서 끌고 온 민간인 인질들을 ‘인간 방패’로 삼겠다고 위협하는 등 극단적인 보복전 양상이 펼쳐지고 있다.● “하마스 지휘부 제거 작전 착수”전쟁 나흘째인 10일(현지 시간) 현재 양측의 사망자는 1700명에 육박했다. 이스라엘 현지매체 하레츠는 이스라엘 보건당국을 인용해 이날까지 이스라엘인 약 900명이 숨지고 2400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전했다. 이스라엘 방위군(IDF)은 이날 브리핑에서 “하마스가 침투한 가자지구 접경지를 장악하고 남부지역 통제권을 거의 회복했다”면서 민간인 사망자와 별도로 하마스 무장대원의 시신 1500구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보복 공습으로 팔레스타인 사상자도 크게 늘었다. 가자지구 보건부에 따르면 이날까지 770명이 숨지고 3700여 명이 다친 것으로 집계됐다. 이스라엘은 하마스 궤멸을 목표로 대대적인 설욕전을 준비하고 있어 사망자는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이스라엘은 하마스 지휘부 암살 작전에도 착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영국 일간 더 타임스에 따르면 이스라엘 정부 고위 관리는 “서방이 (테러단체) IS에 했던 것처럼 하마스를 겨냥해 모든 행동에 나설 것”이라며 “이는 하마스의 지도부와 전투원을 제거하겠다는 의미”라고 말했다.하마스를 압박하기 위해 가자지구에 대한 ‘고사 작전’도 시작됐다. 요아브 갈란트 이스라엘 국방장관은 9일 “전기도 식량도, 연료도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닫힐 것”이라며 “인간의 탈을 쓴 짐승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그에 맞게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의 봉쇄 정책으로 2007년부터 생필품과 의약품 반입이 제한된 가자지구에 전기, 식량, 연료 공급이 추가로 제한되면 주민 약 237만 명은 벼랑 끝으로 내몰릴 수 있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은 주민 약 12만 명이 이미 피난길에 올랐다고 집계했다.● “지상군 투입” 공언해도 걸림돌 많아 네타냐후 총리가 하마스에 대한 ‘끝장 보복’을 선언한 만큼 가자지구에 이스라엘 지상군이 투입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미 매체 악시오스에 따르면 네타냐후 총리는 8일 조 바이든 대통령과 전화 통화에서 “우리는 (가자지구에) 진입해야 한다”며 “이스라엘이 중동에서 나약함을 보여줘선 안 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 통화에서 네타냐후 총리의 지상 작전 계획을 만류하지 않았다고 악시오스는 전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지상군 투입을 실행하기에는 부담이 적지 않다. 우선 가자지구로 끌려간 인질 약 150명이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다. 10일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 따르면 리처드 헤흐트 이스라엘 방위군 대변인은 이날 “인질을 죽인다고 상황이 달라지진 않을 것”이라고 밝혔지만 무리한 작전으로 인질들이 연이어 살해될 경우 국내외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하마스는 이날 이스라엘의 폭격에 따라 19세 이스라엘 군인을 포함해 인질 4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하며 이스라엘의 약점을 공략하고 있다. CNN과 워싱턴포스트(WP)도 자체 영상 분석을 토대로 이스라엘인 4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도했다.팔레스타인 주민들이 대규모로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점도 걸리는 대목이다. 가자지구는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인 데다 하마스 대원들이 민간인 틈에 깊숙이 숨어있어 공격 대상을 식별하기 어렵다. 이스라엘이 2014년 병력 6만 명을 가자지구에 파견해 하마스와 전쟁했을 때 팔레스타인인 2000여 명이 사망했다. 민간인 희생이 속출하면 국제 여론이 이스라엘에 불리하게 바뀔 수 있다.지상전이 장기화될 경우 이번 전쟁에 일부 참전한 시아파 무장단체 헤즈볼라와 두 단체를 후원하는 이란으로 전선이 확대될 수 있다는 점도 변수로 꼽힌다. 하마스 고위 관계자는 이스라엘 현지 언론 ‘타임스 오브 이스라엘’에 “이란과 헤즈볼라는 이번 공격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가자지구가 위기에 처하면 전쟁에 개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카이로=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박효목 기자 tree624@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