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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송평인 논설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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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3~2024-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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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3%
문학/출판3%
  • [송평인 칼럼]일상의 역사인식을 식민화하려는 사람들

    광복회장은 2011년 박유철 회장 취임 이래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맡고 있다. 독립운동가인 과거 광복회장들은 국민을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독립운동가 후손인 근래 광복회장들이 오히려 더 국민을 가르치려 한다. 박 회장 때도 조짐이 보이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김원웅 회장 때에 와서 심각해졌다. 현 이종찬 회장은 일제하에서도 나라를 잃은 적이 없다고 한다. 국민 모두가 나라 잃은 설움을 말해 왔는데 혼자 나라를 잃은 적이 없다고 한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에 따르면 근대 국가의 최소한의 요건은 군대 경찰 같은 물리력의 독점이다. 굳이 베버를 거론하지 않아도 억지만 부릴 생각이 없으면 다 아는 사실이다. 그가 억지를 부리는 것은 실은 ‘1948년 건국론’을 비판하고 싶어서다. 그러면서 뒷문으로는 ‘1919년 건국론’을 끌어들여 ‘문재인 시즌 2’를 이어가고 있다. 어느 나라가 식민지 한가운데서 있을 때 건국됐다는 주장은 액면으로도 논리모순적이어서 그 반박은 독자들의 타고난 이성에 맡기겠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대한민국 30년에 정부 수립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이 전 대통령도 처음에는 이념적이 돼서 그런 말을 했다. 그러나 점차 안 하기 시작했다. 현실과 맞지 않아서다. 억지는 한동안은 떠받치고 있을 수 있지만 계속해서 떠받치기는 어렵다. 국회는 1948년 8월 15일을 독립기념일로 정한 법을 제정했고 이승만 정부는 이듬해 제1회 독립기념일을 기념했다. 독립기념일도 어색한 말이지만 그래도 현실에 가까워졌다. 후대의 대통령들은 건국 시점을 1948년으로 봤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조차도 억지를 부리지 않을 때는 그랬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제2건국’의 과욕을 부리다가도 1998년 광복절 기념사에서 ‘건국 50년’이란 표현을 썼다. 한국 현대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로 본 노무현 전 대통령도 2003년과 2007년 광복절 기념사에서 1948년 “민주공화국을 세웠다” “이 나라를 건설했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건국이란 말의 자연스러운 의미에 따른 건국 시점은 1948년이다. 그러나 1919년에 건국됐다고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있어 시비를 건다면 굳이 싸울 필요는 없다. 맞서 싸우다 보면 건국, 즉 ‘네이션 빌딩(nation-building)’에 담긴 진짜 중요한 의미를 잃어버릴 수 있다. 건국이 언제 시작됐건 우리는 온전한 네이션 빌딩을 향해 부단히 나아가는 과정에 있다. 정부 수립도 산업화도 민주화도 네이션 빌딩의 과정이었고, 당면한 과제인 양극화 극복과 지역 분열 극복도 네이션 빌딩의 과정이고, 멀리는 통일도 네이션 빌딩의 과정이다. 이것이 과거로 먹고살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미래를 보고 나아가는 사람들의 건국관이다. 고려나 조선에는 개국 공신이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건국은 광복부터 우리 힘으로 이룬 게 아니다. 그래서 함석헌 선생은 “해방은 자기네가 투쟁한 결과로 되었다”는 자들은 “그림자도 없어져라”고 일갈했다. 해방은 선물처럼 주어졌다. 선물의 가치는 선물로 다시 얻은 나라를 얼마나 살 만하게 만들었느냐에 달렸다. 우리가 굳이 건국 공로자를 기린다면 해방이 자기네가 투쟁한 결과로 되었다는 사람이 아니라 누가 자유롭고 민주적인 질서의 토대를 놓았으며, 누가 민주주의가 가능한 경제적 기반을 닦았으며, 누가 실질적인 민주화를 이뤘으며, 앞으로 누가 양극화와 지역 분열을 극복하는 데 앞장서는지를 봐야 한다.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역사와는 다른 역사를 강요하는 일을 문재인 전 대통령이 했고 지금 이 회장이 하고 있다. 철학자 후설은 이런 현상을 ‘생활세계(Lebenswelt·everyday life)의 식민화(植民化)’라고 부르며 비판했다. 생활세계란 살면서 저절로 갖게 되는 앎의 총체다. 거기에는 역사인식도 포함된다. 우리나라에서 생활세계의 식민화가 가장 심각한 분야 중 하나가 한국 현대사다. 문 전 대통령의 ‘일제강점기 한가운데서의 건국론’이나 이 회장의 ‘일제강점기 때도 나라를 잃은 적이 없다’는 궤변은 한국 현대사 분야에서 생활세계의 식민화 시도가 얼마나 심각하게 이뤄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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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이스라엘-하마스 하이브리드 전쟁 한 달이 빚은 딜레마

    “가자지구를 바다에 잠기게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전 총리가 한 말이다.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중동 국가에도 애물이었다. 이집트는 1967년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에 가자지구와 시나이반도를 뺏겼지만 1979년 이스라엘과의 평화조약에서 시나이반도만 찾고 가자지구는 놔뒀다. 요르단도 서안을 그렇게 내다 버렸다. ▷이슬람 급진주의의 뿌리는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에 있다. 헨리 키신저는 최근 저서 ‘리더십’에서 위대한 리더십을 보인 20세기 정치인 6명을 꼽았다. 그중 한 명이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한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다. 이스라엘과의 평화의 이면(裏面)은 무슬림형제단과의 전쟁이었다. 사다트는 무슬림형제단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러나 이집트는 사다트의 뜻을 이어갔다. ▷무슬림형제단에서 비롯된 급진주의가 이슬람 신정 국가 건설에 성공한 유일한 곳이 이란이다. 이란은 레바논의 내전 상황을 틈타 헤즈볼라를,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에서는 하마스를 지원해 왔다. 이스라엘의 새로운 중동전은 하마스와 헤즈볼라를 내세운 이란과의 싸움이다. 그 대리전의 가장 잔혹한 판이 한 달 전에 벌어졌다. ▷하이브리드 전쟁이라는 말은 2006년 이스라엘-헤즈볼라 전쟁을 모델로 만들어졌다. 헤즈볼라 전투원은 게릴라이면서도 정규군이나 사용하는 첨단 무기를 사용했다. 주민들 사이에 섞여 활동하면서 주민들이 입는 피해를 이용하는 사이버 심리전을 폈다. 이번 이스라엘-하마스 전쟁도 비슷하다. 하마스는 이스라엘의 아이언돔까지 뚫은 대량의 동시다발 미사일을 쏘는 한편 병원이나 학교 지하에 기지를 건설해 자신들이 공격을 당할 때는 주민도 피해를 입게 하고 그것을 선전전에 이용했다. ▷시간은 늘 과거보다 현재의 승리다. 한 달 전 이스라엘이 입은 피해는 잊혀지고 지금 팔레스타인인이 입는 피해만 부각되고 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야 할 것 아닌가. 인심(人心)은 그렇게 흘러간다. 전 지구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실시간 연결되는 오늘날에는 힘이 있다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보복이 뜻대로 되기 어렵다. 이스라엘은 과거 중동전에서 마주하지 못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야세르 아라파트는 과거 테러 집단의 수장으로 악명 높았지만 결국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두 국가 건설에 나섰다. 아라파트가 세운 파타당의 노선만 따랐어도 가자지구 주민은 지금과 같은 곤경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파타당은 부패로 얼룩졌다고 기피되고, 가자지구 주민들이 하마스에 표를 던져 집권의 길을 열어준 결과는 가혹한 생사의 위기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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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먼저 한 도발을 바로잡는 건 도발이 아니다

    계봉우는 이동휘와 함께 볼셰비키 노선을 따르는 한인사회당을 창당하고 활동하다가 소련에 정착했다.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로 강제이주 당한 후에는 그곳에서 한국어 학자와 한국 역사가로 행세했다. 그는 1952년 펴낸 ‘조선역사’에서 6·25전쟁을 “미 제국주의가 일으킨 침략 전쟁”으로 규정하면서 “미구(美寇)가 남선(南鮮)으로 붙어 북선(北鮮)까지 강점하기 위해 고금에 유례없는 비행(非行)을 범하고 있다”고 썼다. 계봉우의 유해가 문재인 정부 때 대통령 전용기로 옮겨져 국립현충원에 묻혔다. 김영삼 정부 때 독립운동 경력이 있는 공산주의자에게 대거 건국훈장을 줄 때 그도 독립장을 받았다. 서훈은 그저 서훈으로 끝나지 않았다. 서훈이 근거가 돼 현충원 안장으로 이어졌다. 크질오르다는 홍범도도 살다 죽은 곳이다. 홍범도 집 근처에는 계봉우 최계립 이인섭 등 왕년의 빨치산이 이웃하며 살았다. 그들이 다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물론 소련에 살다 보니 6·25전쟁을 미제의 침략 전쟁이라고 여겼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변명은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에 먹고살기 위해 연해주로 건너갔다가 졸지에 공산 혁명을 당해 소련 치하에 살게 된 사람들이나 할 수 있다. 왕년의 빨치산들은 ‘적화(赤化) 없는 독립’은 가능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고 여기고 소련을 택한 사람들이다. 최소한 그들은 그런 변명을 늘어놓을 자격이 없다. 물론 홍범도는 6·25전쟁 발발 전인 1943년 죽었다. 그러나 홍범도는 1939년 소련이 독일과 싸우게 되자 자신을 전선에 보내달라며 행정기관까지 찾아가 호소한 사람이다. 그가 죽었을 때 고려인 신문 ‘레닌기치’는 부고 기사에서 그를 소련 공산당의 충직한 당원이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가 살아서 6·25를 맞았다면 어떠했을까. 그런 사람의 흉상을 육사에 설치해놓고 생도들이 경례를 하고 다닌다. 독립군은 일본군에 쫓겨 러시아령 이만으로 들어갔다가 일부는 간도로 다시 돌아가고 일부는 자유시로 향했을 때부터 민족주의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로 확연히 갈라졌다. 홍범도는 1919년부터 빨치산이 됐다고 나중에 밝혔지만 공산주의자였음이 외부로 분명히 드러난 건 1921년 자유시로 향할 때부터였다. 다만 그가 그저 한인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일부 한인 공산주의자에게만 주어진 소련 공산당원 자격을 부여받는 등의 자유시 사변 이후 행적은 소련 붕괴 후 소련 문서를 볼 수 있게 될 때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홍범도에게는 윤보선이 대통령이고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주어졌다. 자유시로 향하기 전 돌아선 이범석조차 1971년 펴낸 회고록 ‘우등불’에서 “홍범도가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원의 권유로 공산주의자가 됐지만 그 속에서 할 일도 없고 이름만 빌려준 셈이 돼 그 후 자유시 부근에서 방황하다가 병들어 불쌍하게 사망하고 말았다”고 쓸 정도로 잘못 알고 있던 시절 주어진 훈장이다. 홍범도는 자유시 사변 직후 간도 독립군을 갖다 바치는 데 앞장 선 공로로 레닌에게 포상까지 받는 등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보냈다. 왕년의 한인 빨치산 중 상당수가 스탈린 치하에서 수감생활까지 하며 치른 교화 과정도 홍범도는 치르지 않았다. 민족을 사지로 내몬 강제이주에 대해 한마디 불평의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홍범도는 ‘방황하다가 병들어 불쌍하게 사망한 것’이 아니라 소련 공산당의 충직한 당원으로서 연금과 복지 특혜에 극장 수위까지 하면서 ‘넉넉히 살다가’(반병률 한국외대 명예교수 표현) 당시로서는 장수인 75세에 사망했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육사에 홍범도 흉상을 설치하고 2021년 홍범도의 유해를 가져오면서 그의 건국훈장도 대통령장에서 대한민국장으로 올렸다. 육사에 흉상 따위를 설치하지 않고 훈장 등급을 그대로 뒀다면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주제넘게 역사의 재조산하(再造山下)를 한다며 침묵의 균형을 깨고 먼저 도발을 감행한 것은 문 대통령이다. 홍범도의 유해를 가져올 때 공군기 6대가 호위하고 대통령이 늦은 밤 공항에서 직접 맞는 장면을 보면서 참으로 괴이한 기분이 들었다. 홍범도 흉상을 설치할 당시 딸의 친구인 육사 여생도로부터 전해들은 생도들의 ‘말 못 하는 분노’를 잊을 수 없다. 먼저 한 도발을 바로잡는 건 도발이 아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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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배니티 페어’에서 길을 잃은 남현희 선수

    단테는 ‘신곡’에서 인간의 7가지 죄악을 거론하는데 그중 하나가 허영(vanity)이다.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에 천성을 향해 가는 순례자가 허영이란 도시의 휘황찬란한 시장(fair)에 들어섰다가 인간의 탐심을 자극하는 물건들의 유혹에 시달리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배니티 페어라는 말이 나왔다. 19세기 영국 작가 윌리엄 새커리의 소설 제목이 되고 20세기에는 패션과 정치 등 상류사회의 관심거리를 다룬 미국 유명 잡지의 이름이 됐다. ▷전 국가대표 펜싱 선수 남현희 씨가 재벌 3세를 사칭한 사기극에 말려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야권에서는 김건희 여사의 측근이었던 김승희 전 의전비서관 딸의 학폭 의혹을 뒤엎으려고 검찰이 유명 연예인 이선균과 지드래곤의 마약 의혹을 흘렸다고 논란을 삼고 있지만 정작 요 며칠 사이 압도적 관심을 끈 건 남 씨와 전청조 씨의 결혼 발표 인터뷰 이후 터진 두 사람의 스토리다. ▷전 씨는 남 씨와의 첫 만남에 경호원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은행 앱(아마도 가짜 앱)을 열어 공인인증까지 해가며 은행 잔액으로 0이 몇 개인지 세기도 힘든 51조 원을 보여줬다. 롯데타워의 고급 레지던스 아파트 시그니엘에도 들어와 같이 살도록 했다. 한번은 전 씨가 인터뷰를 한다고 해서 같이 갔더니 기자(실은 기자 대행 아르바이트)가 “대한민국에서 자산이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인가요”라고 물었다. 허영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도 속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남 씨는 전 씨와 만나면서 임신이 됐다. 실은 임신은 아니고 전 씨가 준 개봉된 임신 테스트기로 검사해 보니 두 줄(양성 반응)이 나왔다는 것이다. 남 씨 자신이 확인차 구입해 검사한 임신 테스트기로는 한 줄이 나왔다. 전 씨가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한 사실을 언제 알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성전환 남성이 과연 여성을 임신을 시킬 수 있는지 의심이 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결혼하기로 직진한 이유가 무엇일까 묻게 된다. ▷남 씨는 국가대표 입소훈련 때 훈련소를 빠져나와 쌍꺼풀 수술을 했다가 징계를 받았다. 아름다워지고 싶은 마음을 누가 뭐라 하겠는가. 이번 사건만 없었어도 작은 체구로도 뛰어난 펜싱 실력을 보여줬고 이혼해서도 딸을 키우며 살아가는 그에게 박수를 보냈을 텐데 ‘허영의 시장’에 들어섰다가 희대의 사기꾼을 만난 듯해 안타까울 따름이다. 전 씨가 남 씨의 이름을 이용해 이미 많은 사기성 투자를 끌어들였다고 한다. 그래도 막판에 국민들이 SNS로 이런저런 제보를 해서 더 험한 꼴을 당할 뻔한 남 씨를 구한 셈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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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초등 3학년이 2학년에게 전치 9주 상해가 사랑의 매라니

    초등학교 3학년 여아가 2학년 여아를 도대체 어떻게 때리면 전치 9주의 상해가 나올 수 있을지 폭행 상황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안와골절은 돼야 전치 9주가 나온다. 화장실에서 주먹 리코더 등으로 때려서 얼굴이 피투성이가 됐다고 한다. 초등학교에서마저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막 유치원을 나온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내는 부모의 걱정은 얼마나 클지 그것부터 걱정된다. ▷가해자 여아의 어머니는 딸의 폭행을 일종의 ‘사랑의 매’로 언급했다고 한다. 부모나 교사가 훈육 과정에서 자식이나 학생을 체벌하는 것을 과거 사랑의 매라고 부를 때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고작 초등학교 3학년이 2학년을 때리는 걸 사랑의 매라고 하는 게 제정신일까. 그 집안은 사랑의 매로 전치 9주가 되도록 때리기도 하는가. 전치 9주가 아니라 전치 0주라도 그렇게 부를 수 없다. 딸의 폭행으로 경황이 없었다는 사정만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터무니없다. ▷가해자 여아의 어머니는 딸의 학교 출석이 정지된 날 SNS 프로필 사진을 당시 대통령 의전비서관이었던 남편 김승희 씨와 윤석열 대통령이 같이 있는 사진으로 바꿨다. 김 씨는 이벤트 대행회사 대표로 재직하던 중 김건희 여사와 어느 대학원 최고위 과정을 같이한 인연으로 김 여사를 보좌하다가 의전비서관까지 됐다. 딸의 학교 출석이 정지된 날 남편의 위세를 과시할 생각이 들었을 정도라면 웬만한 상황에서는 경황이 없고 할 사람도 아닌 듯하다. ▷대전의 한 초등학교 교사가 얼마 전 학부모의 악성 민원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했다. 가해자로 지목된 학부모가 SNS로 입장문을 냈는데 “아들 손이 친구 뺨에 맞았다”며 물리적 움직임을 설명하듯 썼다가 지탄을 받고 삭제했다. 자세히 읽어 보면 ‘같은 반 친구와 놀다가 손이 친구 뺨에 맞았다’고 쓴 것이긴 하다. 의도치 않은 일이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설혹 그렇더라도 용서를 구할 쪽은 ‘친구 뺨에 가 맞은 손’을 가진 아들이라는 사실에 변함이 없는데도 아들의 반성을 요구한 교사를 끝까지 괴롭힌 모양이다. ▷세종의 한 초등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교육부 사무관이 담임교사에게 자신의 아이는 ‘왕의 DNA를 가졌다’고 언급했다가 자신이 욕먹은 건 물론이고 직장까지 욕먹였다. ‘듣기 좋게 돌려 말해도 다 알아듣는다’는 그 다음 말로 충분했을 텐데 ‘왕의 DNA’를 내세웠다. 터무니없는 표현에 담긴 사고는 서로 통해서 ‘왕의 DNA’를 가진 아이가 만약 친구를 폭행하면 ‘사랑의 매’ 그 이상의 말도 나올 듯하다. 젊은 학부모 세대의 사고가 일부이긴 하겠지만 지독할 정도로 자기중심적이 되고 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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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복원된 광화문 월대와 현판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

    광화문 월대가 복원됐다. 월대 복원 권고는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가 문화재청장이던 2006년 문화재위원회에서 처음 나왔다. 광화문의 위용을 강조하며 복원을 권고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2010년 광화문은 새로 복원되면서 충분히 위용을 갖췄다. 이번에 월대 복원으로 위용이 더해졌다고들 하지만 과도해진 느낌도 있다. 이런 느낌은 근거가 없지 않다. 조선 세종 당시 광화문 월대를 만들자는 제안이 처음 나왔을 때 그 이유는 관리들이 광화문 앞까지 말 타고 와서 내리는 모습이 무엄하고, 중국 사신을 맞이할 때 바로 문으로 들어오게 하는 게 무례하다는 것이다. 월대는 한편으로는 임금의 권위를 강화하고, 한편으로는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세종은 거부했다. 왕은 중국 사신이 오면 지금의 독립문 근처에 있던 모화루에 가서 직접 사신을 영접한 뒤 사신을 궁궐로 모셔 중국 황제의 칙서를 받았다. 입궐할 때 월대의 어도에서 사신이 앞장서고 왕이 뒤를 따른다. 세종은 ‘굳이 그렇게까지’ 생각했을지 모른다. 월대가 만들어진 건 흥선대원군 때로 조선이 망하기 고작 수십 년 전이다. 월대가 복원된 마당에 다시 어쩌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문화재청이 불러주는 걸 받아쓰는 식으로 월대를 미화하는 건 곤란하다. 광화문 월대가 임금과 백성이 소통하는 자리라는 건 근거가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월대가 없던 시절 광화문 밖에서 행사가 열렸다는 기록은 간간이 있다. 월대가 만들어지면서 오히려 행사는 사라졌다. 감히 누가 어도 위에서 연희를 벌이겠는가. 월대가 중국과 일본에는 없는 한국 궁궐의 고유 양식이라는 건 기만이다. 월대는 본래 목조 건물에는 필수 구조물이다. 목조 건물은 바닥에 돌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짓기 때문에 기단까지 올라가는 계단 같은 구조물이 필요하다. 목조 전각(殿閣)에는 다 월대가 있다. 문도 창덕궁의 돈화문과 덕수궁의 대한문은 목조 문이어서 길지는 않더라도 짧은 월대는 필요했다. 그러나 경복궁의 광화문은 문루만 목조일 뿐 문을 감싸는 아랫부분은 석조다. 이런 곳엔 월대가 필요 없다. 숭례문 등 한양 도성의 문도 같은 구조여서 월대가 없다. 중국 자금성의 천안문도 월대가 없다. 천안문은 우리로 치면 도성 문이어서 그렇다고 하자. 그러나 그 안의 궁궐 문이라고 할 수 있는 단문과 오문에도 월대가 없다. 경복궁의 근정전에 해당하는 태화전의 입구인 태화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월대가 나타난다. 광화문 월대는 자랑스러운 고유 양식이 아니라 과도한 권위주의와 사대주의가 건축에까지 영향을 미쳐 빚은 과잉이다. 일제가 없애지 않았어도 근대화 과정에 우리 스스로 없앴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문화재청이 그리 똑똑하지 않다. 광화문 현판만 봐도 알 수 있다. 6·25전쟁 때 불탔다가 1969년 콘크리트로 복원된 광화문을 제대로 다시 복원하는 과정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한글 현판도 교체한다는 결정이 2005년 유 청장 때 이뤄졌다. 문화재청은 유 청장 시절부터 박 전 대통령 글씨를 떼고 다른 글씨로 대체하는 데만 골몰해 정작 현판의 고증은 뒷전이었다. 이번에 내걸린 현판은 ‘검은 바탕에 금색 글씨’다. 박 전 대통령 때의 현판은 ‘검은 바탕에 흰색 글씨’로 큰 틀에서는 비슷했다. 2010년 광화문 복원과 함께 내걸렸다가 이번에 교체된 현판은 터무니없게도 ‘흰색 바탕에 검은 글씨’였다. 일제강점기 광화문을 그린 채색화에도 나오는 검은 바탕을 무시했다가 당한 낭패다. 문화재청은 숭례문에 주변 도로를 없애 가면서 무리하게 성벽을 단 뒤 관리 능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공원화까지 했다가 문을 태워 먹은 일도 있다. 그것도 2008년 유 청장 때 일이다. 경복궁에는 광화문 월대보다 더 시급한 복원 과제가 많은데도 월대 복원이 우선시된 것은 경복궁-광화문-광화문광장을 연결시켜 업적으로 삼으려는 시도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화문 앞 도로를 모조리 없애 전근대로 돌아가지 않는 한 광화문과 도로 사이에 월대를 끼워 넣는 건 공간적 모순만 증폭시킬 뿐이다. 월대로 차선이 휘면서 차량 정체가 심해지고 교통사고가 빈발하고 있다. 횡단보도도 시야가 제한되는 위험한 곳에 설치돼 밤에는 아찔하다. 문화재 복원도 실사구시(實事求是)해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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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대형 로펌 사건 회피로 대법원 ‘민폐’가 된 권영준 대법관

    대법관 한 명이 한 해 주심을 맡아 처리하는 사건이 지난해 평균 4038건이었다. 2000년대 후반 2000건대에 진입했고 2010년대는 대체로 3000건대였으나 지난해 4000건대로 올라섰다. 매주 77건의 사건을 처리하는 셈이다.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일해도 매일 11건씩 처리해야 할 정도로 사건이 많기 때문에 상고법원 얘기도 나오고 대법관 증원 얘기도 나온다. ▷권영준 대법관은 7월 중순 취임 후 사건 59건의 주심을 회피했다. 회피는 재판관 본인이 이해관계에 얽혀 있다고 여기는 사건의 취급을 피하는 제도다. 권 대법관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때 대형 법무법인(로펌) 7곳이 맡은 사건 38건에 대해 법률의견서를 써주고 18억 원을 받았다. 권 대법관은 이 사실이 논란이 되자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대법관이 되면 제가 관여하지 않은 사건이라고 해도 관계를 맺은 로펌의 사건은 2년간 모두 회피 신청하겠다”고 약속했다. 2년으로 한정한 것은 이해충돌방지법에서 이해당사자로 간주되는 기간이 2년이기 때문이다. ▷59건은 대법관 한 명이 두 달간 처리하는 사건의 약 10%에 해당한다. 권 대법관이 약속을 지키려면 매년 350여 건씩, 2년간 700여 건을 회피해야 한다. 물론 본인이 회피하는 사건의 수만큼 다른 사건을 넘겨받기 때문에 처리하는 사건 수는 차이가 없다. 다만 대형 로펌이 수임한 사건은 복잡할 가능성이 커 다른 대법관들이 처리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 수 있다. ▷회피는 본래 사건의 주심을 맡지 않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선고를 위한 합의에도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회피를 제대로 한다면 권 대법관은 다른 대법관이 주심을 맡은 사건이 대형 로펌과 관계돼 있을 때도 합의에 참여할 수 없다. 대법원 사건은 일단 소부(小部) 처리가 원칙이다. 소부에서 의견 일치가 이뤄지지 않거나 사회적으로 파장이 예상되는 사건만 전원합의체에 회부된다. 대법원에는 3개 소부가 있고 각 소부는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된다. 대법관 각자가 주심을 맡은 사건 중 대형 로펌 사건이 약 10%라고 한다면 권 대법관은 자신이 속한 소부의 사건 약 10%에 대해 ‘없는 재판관’이나 다름없다. ▷대법관은 자신이 주심을 맡은 사건도 산더미이기 때문에 다른 주심이 맡은 사건까지 세세하게 검토하기 쉽지 않다. 그래도 법리적으로는 엄연히 4인 합의의 형식을 취하는 것이 소부의 선고다. 권 대법관이 속한 소부는 상당수 사건을 3인 합의로 부실하게 선고하는 셈이 된다. 권 대법관도, 국회도 논란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고 과도한 약속으로 우회했다가 대법원 운영에 2년 내내 부담을 주게 됐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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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저절로 떨어지는 집값도 못 잡은 정부는 처음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집권하자마자 다주택자와 단기 주택 보유자에 대한 양도세 중과를 면제했다. 집값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굳이 매물을 유도할 필요가 없었는데도 그렇게 했다. 이어 종부세 중과까지 폐지했다. 종부세와 양도세가 다 높으면 집을 보유하기도 양도하기도 어려워 문제이지만 집값 안정이 확인되지 않았는데도 다 깎아 주는 건 뭘 하자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문재인 정부에서의 집값 상승은 정책 대응 실패에도 원인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장기간 저금리에서 비롯됐다. 금리 인하 때는 미국의 기준금리 인하를 못 쫓아갈까 봐 조바심을 내던 한국은행이 금리 인상에서는 미국과의 금리 차가 사상 최대로 벌어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은이 찔끔찔끔 올린 금리마저도 금감원이 은행 창구 금리를 통제하는 바람에 인상의 효과도 크지 않았다. ‘영끌’ 대출은 아무 젊은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부모가 돈이 있고 본인들 스스로 상당한 소득이 있을 때 가능하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20, 30대가 주택을 척척 보유했던가. 대부분의 영끌 대출은 정 안 되면 집 팔아 빚 갚고 분수에 맞게 전세 살면 해결되는 것이다. 세상에 쓸데없는 걱정이 영끌 대출 걱정인데도 윤 정부는 40, 50대 무주택 서민의 설움보다 영끌 대출에 더 부심했다. 이러니 문 정부 초에 비해 문 정부 말에 2배가 된 집값이 다시 올라가고 가계대출이 세계 최고 수준임에도 다시 느는 건 당연하다. 서울 강남 등 일부 지역에서는 문 정부 때의 최고가를 경신하는 집값이 속출하고 있다. 올라가는 집값을 못 잡은 정부는 많이 봤지만 저절로 떨어지는 집값도 못 잡은 정부는 처음 본다. 유가가 다시 올라 9월 연중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유가가 오르는 것은 인플레가 아니다. 유가는 오르락내리락한다. 계절에 따라 농산물 가격이 오르는 것도 인플레가 아니다. 계절이 바뀌면 다시 내리게 돼 있다. 그러나 유가가 내려도, 농산물 가격이 내려도 한번 오른 식당 밥값이나 서비스 요금은 다시 내리지 않는다. 이것이 인플레다. 유가나 농산물을 제외한 근원물가지수는 지난해 7월 6.3%에서 정점을 찍은 이후 하락했지만 여전히 3%대 수준을 유지하면서 올 3월 이후로는 총지수(각종 물가지수를 합한 지수)를 상회하고 있다. 현재도 미국 뉴욕보다 비싼 우유값이 이달 들어 인상되면서 유제품 가격이 일제히 오르고 수도권 지하철 요금 등 대중교통도 2차로 오른다. 4분기 전기요금 인상도 거론된다. 전년도에 있었던 높은 상승률의 기저 효과도 곧 사라진다. 근원물가지수는 다시 4%대로 오를 수 있다. 정부나 지자체가 관리하는 공공요금을 선진국처럼 제때 인상했다면 근원물가지수는 4% 이하로 떨어지지도 못했을 것이다. 한국에서 인플레는 끝물이 아니라 한창 진행 중이다. 역대 보수 정부는 현실화를 목표로 충분한 정도는 아니지만 공공요금을 계속 인상해 왔다. 이 흐름을 결정적으로 중단시킨 것은 문 정부다. 당시 한은은 정부에 의해 왜곡이 심화되는 물가를 중대 사안으로 인식해 바로잡으려 하기는커녕 왜곡된 물가지수를 토대로 저금리를 유지하면서 저금리에도 물가가 오르지 않는 뉴노멀이 왔다는 등의 헛소리나 하며 돈을 푼 탓에 자산 시장에 엄청난 거품을 쌓았다. 그러나 문 정부만 탓할 수 없다. 윤 정부 역시 공공요금을 현실화하지 못했으면서도 올 6월부터 인플레가 다 끝났다는 듯이 떠벌렸다. 윤 정부가 수십조 원씩 쌓이는 공기업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공공요금을 현실화한다면 물가가 떨어질 때마다 조금씩 요금을 올려갈 수밖에 없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꼬리가 긴 인플레다. 인플레가 장기간 누적되면 월급생활자나 연금생활자는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는다. 온갖 대출 부실이 수면 밑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다. 금리 인상이 찔끔찔끔 이뤄졌는데도 그 정도다. 부실은 어느 정도 터뜨려서 거품을 꺼줘야 새 출발이 가능하다. 그 과정에서 장기간 저금리에서나 가까스로 생존 가능한 한계 기업과 차주, 그리고 그들에게 대출해 준 금융회사가 타격을 입는 건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도 윤 정부는 틀어막고만 있다. 그러니 어느새 문 정부 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비정상적 집값으로 돌아간 데 더해 물가는 끝날 기약도 없이 오르고 그럼에도 경기 회복의 전망은 희미한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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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위헌 결정’ 대북전단금지법 만든 책임자들

    대북전단금지법은 2020년 6월 4일 북한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이 문재인 당시 대통령을 향해 “원래 못된 짓을 하는 놈보다 그걸 못 본 척하는 놈이 더 밉다”고 비난하면서 입법화되기 시작됐다. 통일부는 4시간 반 만에 예정에 없던 브리핑을 열어 “대북전단금지법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당시 통일부 장관은 김연철이다. 그런데도 그는 13일 뒤 북한이 개성 남북공동사무소를 폭파하면서 함께 자리에서 날아갔다. ▷헌법재판소는 그제 ‘대북전단금지법(개정 남북관계발전법)’을 위헌 결정했다. 의원 입법의 형식을 취했지만 사실상 정부가 주도해 만든 법률이 이렇게 빨리 그리고 쉽게 위헌 결정이 나는 걸 보지 못했다. 판사 옷을 벗은 뒤 바로 법무비서관이 된 당시 김형연 법제처장과 여성운동가 출신의 당시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은 위헌 법률이 만들어지는데도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문 정부의 청부 입법을 국회에서 주도한 것은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당시 외교통일위원장이다. 그는 대북전단금지법안의 대표 발의자로 나섰고 이 법안을 외통위에서 민주당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국민의힘은 본회의에서 필리버스터까지 하면서 저지에 나섰으나 민주당은 송 위원장이 대북전단 살포에 대한 북한의 포 사격을 정당화하는 발언을 한 뒤 필리버스터 종결 동의안을 처리하고 통과시켰다.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흔히 표현의 자유 옹호자로 거론된다. 다만 그는 ‘위해 원칙(harm principle)’을 내세워 의견조차도 그것이 표현되는 상황이 해악 행위를 적극적으로 부추긴다면 가벌성이 면제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19세기 후반 이래 헌법은 밀이 언급한 ‘위해’의 범위를 축소해 표현의 자유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앨런 더쇼위츠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가 쓴 책 ‘불이야(Shouting Fire)’를 보면 위해의 범위에 대한 연방 대법원의 입장은 올리버 홈스 대법관이 주장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에서 더 협소한 ‘즉각적인 폭력의 위험’으로 이어졌다. ▷전단 살포에 대한 북한의 포 사격으로 살포 지역 주민이 받을 위험은 ‘즉각적인 폭력의 위험’과 비슷해 보이지만 전단이 비판한 대상(김정은)이 받는 위험이 아니라 비판받는 쪽이 비판한 당사자도 아니고 제3자(주민)를 볼모로 잡고 가하는 위험이다. 게다가 김정은은 표현의 자유로 보호할 가치가 없는 독재자다. 따라서 그 위험은 표현의 자유의 오용에 따른 위험이 아니라 표현의 자유 자체를 침해하는 위험이다. 명색이 법률가인데도 두 위험의 본질적 차이를 구별 못 하고 대북전단금지법을 강행한 문 대통령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하겠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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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비례대표 초선의 구태 뺨치는 갈 之자 정치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이 정치판을 기웃거린 것은 2016년부터다. 그는 그해 총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에 인재 영입 대상으로 입당했다. 비례대표 출마를 원했으나 공천을 받지 못했다. 4년 뒤인 2020년 총선을 앞두고는 시대전환을 창당했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 취지를 무색하게 하는 위성정당이 만들어지자 이를 비판하던 그는 6일 만에 시대전환을 탈당해 민주당의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에 입당했다. 시민당에서 비례대표 6번을 공천받고 의원이 됐다. 그의 의원으로서의 첫 출발은 꼼수인 위성정당을 통해서였다. ▷조 의원은 국회 입성 후 예상대로 시대전환으로 복귀했다. 민주당은 시민당의 친(親)조국 이미지를 탈색시키기 위해 시민단체 몫이라는 구실로 시대전환의 조정훈 후보와 기본소득당의 용혜인 후보를 공천했고 두 사람 다 총선 후 민주당과 시민당의 합당에 불복한다는 이유(정확히는 구실)로 출당당해 원래 정당으로 돌아갔다. 총선 전 시대전환 탈당은 위성정당 입당과 결부된 또 다른 꼼수인 위장 탈당이었다. ▷조 의원은 이듬해인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했다. 조 의원은 “완주할 마음이 아니라면 출마하지 않았다”고 했으나 결국 민주당 박영선 후보와 단일화를 하며 후보직을 내려놓았다. 본래부터 당선 가능성이 높지 않았다. 대신 자기 이름을 알릴 기회를 얻었고 막판에 후보직을 내려놓고 의원직을 유지해 실속은 실속대로 챙겼다. ▷조 의원은 이번 국회 전반기까지만 해도 친민주당 성향을 보여 왔으나 문재인 정부 말기와 윤석열 정부 초기를 거치면서 급속히 친국민의힘 쪽으로 돌아섰다. 결국 그제 국민의힘이 내년 총선을 앞두고 그를 1호 인재로 영입한다고 밝혔다. 조 의원의 당적은 ‘더불어민주당-시대전환-더불어시민당-시대전환’으로 바뀌었고 다시 국민의힘을 더하게 됐다. ▷그는 본인 입으로 대학(연세대 경영학과)과 대학원(하버드대 케네디행정대학원 석사과정)은 재수해서 들어갔고 세계은행은 삼수해서 들어갔다고 강조한다. 목표를 세우면 달성을 위해 집요하게 추구하는 스타일인 듯하다. 내년 총선에 지역구 당선에 도전하면서는 국민의힘이라는 거대 정당의 조직력에 의탁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국민의힘은 그를 서울 마포갑 지역구에 공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서울은 민주당 강세 지역이고 특히 서울 서북권은 전통적으로 민주당 세력이 강하다. 그러나 대통령이 속한 정당에서 출마하면 떨어져도 갈 자리가 많다. 한번 거대 정당에 몸담을 기회가 있었으면 거기서 개혁을 추구해야지, 권력의 향방에 따라 거대 정당 사이를 오가는 갈지자 행보의 초선 정치인에게 어떤 개혁을 기대할 수 있을까.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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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빨치산이 가르쳐준 빨치산의 의미

    역사학회 등 51개 역사단체가 홍범도 흉상 철거에 반대하면서 “빨치산은 비정규군이란 뜻으로 일제강점기에 의병이나 독립군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됐다”고 주장했다. 빨치산은 의병이나 독립군을 지칭할 때는 대개 특정한, 다시 말해 공산주의 계열에 사용됐다. 홍범도 당시의 빨치산부터 그렇다. 역사학계가 좌파에 장악돼 전문가의 권위로 일반인을 오도하는 건 역사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일어나는 일이다. 홍범도 연구자들에게 잘 알려진 이인섭이라는 빨치산은 ‘1965년 9월 18일 김세일 동지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대강 이렇게 썼다. “의병은 갑오농민전쟁 시기 의병, 을사조약 정미7조약 군대해산 시기 의병, 경술 합병 후의 의병이 있다. 독립군은 일본의 식민지 통치 당시 중령(中領·중국 영토)과 아령(俄嶺·러시아 영토)으로 이전해 무장 투쟁한 부류다. 빨치산은 소련에서 국민전쟁(러시아 10월 혁명 후 내전) 당시 조선 민족주의 독립운동이 사회주의적으로 전환되면서 등장했다. 갑오농민전쟁으로부터 빨치산 때까지 계속 지도적 역할을 담당한 사람은 홍범도밖에 없다.” 김승빈은 신흥무관학교 교성대 출신으로 홍범도 부하가 된 빨치산이다. 그는 ‘1970년 김세일 동지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10월 혁명에 대한 보도에 접하자 원동(遠東)의 조선 사람들도 농촌에서 소비에트 기관을 선거 조직하는 사업에 나섰다. 원동에서 공민전쟁(내전)이 시작하는 때에 한인사회주의자동맹은 조선 사람들로 적위군 부대를 조직하여 전선으로 내보냈으며 연해주 수청에서는 한창걸 동무를 비롯한 25명의 니콜라엡스카야 촌(村)소비에트 위원들의 창발적 열성에 의해 빨치산 부대가 조직됐다. 이때부터 시작된 조선인 빨치산 운동은 조선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이후에 확대 강화됐다”고 썼다. 홍범도는 봉오동·청산리 전투 전인 1919년 무렵부터 빨치산이었다고 자기 이력서에 썼다. 그러나 흉상 철거 주장의 이유가 그가 단순히 빨치산이어서가 아니라 빨치산으로서 자유시에서 한 일 때문임은 역사가들이 더 잘 알 텐데도 빨치산의 뜻을 물고 늘어지며 논점을 흐렸다. 홍범도의 씻을 수 없는 과오는 간도에서 넘어온 어느 부대보다 무장해제에 앞장섰다는 사실이다. 김좌진 이범석 등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은 러시아령 입국 직전 돌아가 버렸다. 입국한 중심 인물은 봉오동 전투의 세 주역인 홍범도 최진동 안무다. 그러나 최진동과 안무의 부대만 해도 자유시 사변 당일 공격을 받고 포로가 됐다가 풀려났다. 홍범도의 부대(정확히는 신흥무관학교 교성대 출신 이청천 부대를 포함한 홍범도 부대)만 사변 전에 무장해제를 주도한 이르크추크파에 넘어가 그쪽 편에 섰다. 그의 부대가 사변 당일 토벌에 나섰다는 기록은 없지만 다음 날 전장(戰場) 소제(掃除)를 했다는 당시 부대 지휘관 김승빈의 증언이 있다. 싸움은 어느 한편에 서서 2선에서 역할을 했다고 하더라도 가담하지 않은 것으로 되지 않는다. 홍범도는 자유시 사변에 깊이 연루돼 있다. 자유시 사변의 피해 상황은 당시 참가자들에게도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공격한 측은 피해를 축소했고 공격당한 측은 과장했다. 소련 붕괴 후 밝혀진 코민테른 전권위원 오홀라의 보고에 따르면 익사자 60여 명을 포함해 전체 사망자는 120여 명이다. 포로로 된 후 탈출 강제노동 수감 등의 과정에서 또 수십 명이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심각한 사실은 연해주 기반의 사할린부대를 빼고도 1000명에 가까운 간도 독립군이 일시적 무장해제를 거쳐 결국 영구히 무장해제됐다는 것이다. 자유시 사변 후 최진동과 안무는 다시 간도로 돌아갔다. 홍범도와 함께 무장해제에 앞장선 이청천은 러시아 적군으로 편제돼 사관학교 교관으로 활동하던 중 노선 차이로 체포됐다 풀려난 후 중국으로 건너왔다. 홍범도만 레닌의 포상도 받으면서 그곳에 남았다. 홍범도가 죽었을 때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신문 ‘레닌기치’는 이런 부고 기사를 냈다. “홍범도 동무는 레닌-스탈린당의 충직한 당원으로서…당의 사명을 꾸준히 실행하기에 정력을 아끼지 않으셨다.” 이 시점에서 100년 전 빨치산이었다는 사실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빨치산으로 독립군의 전력을 파탄 내고 소련을 새 조국으로 삼은 사람이 대한민국 건국과 군과 육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묻는 것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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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홍범도가 본 홍범도

    홍범도에 대해서는 소련 붕괴 이후 공개된 자료를 보기 전까지는 알량한 지식으로 함부로 얘기해선 안 된다. 그중에서도 꼭 봐야 할 자료가 1932년 홍범도가 소련 정부로부터 연금과 특혜를 받기 위해 제출한 이력서와 소련 정부 측 질문 항목에 맞춰 응답한 앙케트 자료다. 두 자료는 홍범도가 자신의 삶을 한 번은 자유롭게, 또 한 번은 형식에 맞춰 요약한 것이다. 동아일보가 1993년 대우그룹과 공동기획해 거금을 주고 러시아에서 구입한 자료에 들어 있었다. 홍범도는 1921년 11월 레닌을 만나러 모스크바에 간 것은 그해 6월 자유시에서 한인 부대 사이에 발생한 유혈 사태를 보고하기 위함이라고 썼다. 단순히 56명의 한인 대표 중 한 명이 아니라 자유시 사변을 보고하기 위해 갔으며, 자유시 사변은 외견상 러시아 부대가 앞장섰지만 한인 부대끼리 싸운 유혈 사태임을 밝히고 있다. 홍범도는 자유시 사변 3개월 전 이미 무장해제를 주도한 칼란다리시빌리 부대의 한인 여단 제1대대장으로 임명됐음도 밝혔다. 홍범도나 그의 부대가 단순히 무장해제에 응한 것 이상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의심이 가능하다. 그래야 그가 자유시 사변 후 재판위원을 맡고 레닌에게 권총과 금화를 포상으로 받은 사실이 설명이 된다. 그가 포상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강제 무장해제된 사할린 부대원 2명에게 암살될 뻔한 사건은 그를 향한 원한이 팽배했음을 보여준다. 국내 홍범도 연구자는 한두 명에 불과하고 홍범도가 좋은 평가를 받아야 먹고산다. 그래서 근거도 불분명한 증언을 토대로 홍범도가 자유시 사변에 땅을 치며 통곡했다느니, 재판위원으로서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노력했다느니 하는 낭설을 늘어놓고 있다. 홍범도는 1919년부터 1920년까지 빨치산 부대를 거느렸다고 썼다.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는 1920년 6월과 10월의 일이다. 두 전투에 임할 때 그의 자의식은 독립군이 아니라 빨치산이었던 것이다. 그의 빨치산 증명서에는 칼란다리시빌리 부대 편입 전부터 포함해서 1919년 9월부터 1922년 11월까지 적위군(적군을 호위하는 준군사조직)에 근무한 자라고 나온다. 그는 1913년 일본의 수배를 받아 소련의 극동지역으로 건너왔다고 썼다. 그의 부대는 1919년 러시아 적군에게서 훈련을 받고 적군의 도움으로 무장을 강화했다. 산(山)포수였던 홍범도는 극동지역에서 1차 대전과 러시아 내전을 겪으면서 현대 무기의 위력을 실감하고 엽총으로는 일본군을 상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러시아 적군과 함께하기로 일찍이 마음먹은 것으로 보인다. 홍범도는 자유시 사변 이후 독립영웅으로 불리기에는 수치스럽게도 다시 총을 잡지 못했다. 무장해제된 한인 부대는 교육훈련부대로 편성됐다가 해체됐다. 무장해제의 목적이 본래 그것이었으나 홍범도도 속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가 구술한 자서전이란 게 남아 있는데 그 책에서 무장해제에 불만다운 불만을 토로한 적이 없다. 심지어 스탈린 치하의 강제 이주에 대해서도 그렇다. 오히려 2차 대전 때 독일이 소련에 개전하자 전쟁터로 보내달라고 나설 정도였다. 그의 1927년 소련 공산당 가입은 형식적인 절차였을 뿐이다. 이미 1919년 무렵부터 그의 자의식 속의 새로운 조국은 소련이었다.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부해서 공산주의자가 된 사람은 아니지만 ‘당은 개인보다 위대하며 당은 언제나 옳다’고 여긴 뼛속 깊이 공산주의자였다. 봉오동-청산리 전투는 무장투쟁의 여명으로 착각한 황혼이었다. 일본군의 반격으로 간도의 조선인들은 무고한 학살을 당하고 독립군은 땅끝까지 쫓겨갔다. 무장해제에 응한 쪽은 영원히 총을 빼앗겼고 무장해제를 거부한 뒤 만주로 돌아온 쪽은 지리멸렬했다. 독립군이 맘 놓고 숨쉴 땅 한 자락이 없었는데도 이종찬 광복회장은 나라를 잃은 적이 없고 따라서 건국이 뭔 말이냐는 헛소리를 광복절 기념사에서 늘어놓았다. 홍범도보고 지옥에나 꺼지라고 하는 건 아니다. 그는 나름 신조의 사나이였다. 다만 대한민국 현충원은 그가 있을 자리가 아니다. 국방부는 더 아니고 육사는 더욱더 아니다. 재조산하(再造山河) 운운하며 이념적 도발을 시작한 것은 문재인 전 대통령이다. 도발을 바로잡아 원상태로 되돌리는 걸 똑같이 도발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언제쯤 정신을 차릴 것인가.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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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서양인도 절레절레 고개 흔드는 ‘팁 문화’ 한국이 왜 배우나

    고급 식당이 아닌 일반 식당을 기준으로 유럽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10% 정도를 팁으로 준다. 미국에서는 이제 18%도 적다고 하고 20%가 기준이 됐다. 유럽에서는 팁을 놓고 가지 않는다고 해서 종업원이 쫓아와 왜 팁을 주지 않느냐고 따지는 일은 없지만 미국에서는 일반 식당이라도 팁을 안 주거나 적게 주고 나갔다간 큰일 난다. 팁 액수를 아예 영수증에 적어 넣어 달라는 것도 미국 식이다. ▷팁 문화는 유럽 귀족들로부터 시작됐지만 유럽을 다녀온 미국 부자들이 미국 경제가 유럽을 능가하자 팁을 더 많이 주기 시작했다. 팁의 액수가 커지다 보니 팁이 종업원에게 부수입이 아니라 주 수입의 일부가 됐다. 1960년대 들어와 미 의회는 팁이 있는 업종에서는 고용주가 종업원이 팁으로 얻을 수익까지 고려해 일반적인 최저임금보다 낮게 임금을 책정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조치가 대서양 양안의 팁 문화에 결정적 차이를 만들었다. 미국의 팁 문화는 부자연스럽고 그악스러워졌다. ▷언제 얼마의 팁을 줘야 할지는 일률적인 규칙이 없어 보이지만 실은 여러 규칙이 작용해 복잡할 뿐이다. 한번은 주로 관광객을 상대하는 프랑스 파리 식당에서 끼니를 때우고 늘 하던 대로 10% 정도의 팁을 놓고 나왔더니 프랑스 친구가 하는 말이 다시 올 식당도 아니고 서비스가 친절했던 것도 아닌데 1유로면 충분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미국에서 호텔방을 비울 때 1달러를 놓는 걸 신성한 의무처럼 여기지만 룸메이드는 웨이터와 달리 팁을 받는 직종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인 중에서는 안 주는 걸 당연히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도 팁 문화가 시도되고 있다. “서빙 직원이 친절히 응대했다면 테이블당 5000원 정도의 팁을 부탁드립니다”라는 안내문을 테이블마다 붙여놓은 식당이 있는가 하면 카운터 앞에 팁 박스라고 써붙인 유리병을 놓아두고 ‘우리 가게가 좋았다면 팁(Tips if you like)’이라는 안내문을 붙여놓은 빵집도 있다. 카카오 택시는 친절한 기사를 위한 팁 선택 제도를 시범 도입했다. 반응은 좋지 않다. 물가까지 오르는 판국에 무슨 팁 문화냐는 것이다. ▷팁이 없어 10∼20%의 돈을 더 내지 않으니 좋고 늘 팁 값을 염두에 두고 살 필요가 없으니 좋다. 서양인도 한국이나 일본 중국에 오면 팁이 없어서 좋다고 한다. 우리가 서양에서 팁 문화를 배울 게 아니라 서양이 한국 등으로부터 팁 없는 문화를 배워가야 한다. 서양인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 실패한 팁 문화보다는 팁 문화 없이도 높은 수준의 서비스업을 발전시킨 이웃 나라들로부터 배울 점을 찾아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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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김명수 대법원을 만든 건 8할이 尹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이른바 ‘사법농단’ 수사를 검찰에 의뢰했다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그의 입장은 ‘검찰이 수사한다면 협조한다’는 것이었을 뿐 수사 의뢰는 아니었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도 이유가 있었다. 사법농단 사태가 법원 자체 조사로 끝나면 그 결과를 국민이 믿어주겠느냐는 것이다. 외부, 즉 검찰의 수사를 통해 조사가 이뤄지고 법원에 회부돼 유죄가 나든 무죄가 나든 해야 사태가 종결될 수 있다는 말이다. 지금은 많은 사람이 망각하고 있지만 사법농단 수사는 당시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과 한동훈 서울중앙지검 3차장검사가 맡았다. 서울중앙지검은 특수 1∼4부를 총동원해 수사한 뒤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 전·현직 고위 법관 14명을 기소하고 66명은 비위가 있다고 대법원에 통보했다. 법원에는 동료·선후배의 평가에 의해 대법관감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대개 대법원 선임재판연구원과 수석재판연구원을 거친다. 사법연수원 17기의 한승, 18기의 홍승면, 19기의 유해용 등이 그런 사람들이다. 이런 엘리트들이 사법농단에 연루됐다고 배제되고 아무도 대법관감으로 여기지 않는 이들이 우리법연구회나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 자리에 갔다. 김 대법원장은 고등 부장판사 승진제의 폐지, 법원장 추천제의 확대, 독립된 사무분담위원회 구성 등 많은 개혁 조치를 이뤄냈다. 다만 일련의 개혁 조치가 엘리트 판사들이 적폐로 몰리는 과정에서 진행돼 법관대표회의를 주도하는 세력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결국 김 대법원장조차도 놀란, 예상을 뛰어넘는 수사 결과로 법원을 물갈이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윤석열과 한동훈 두 사람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주도한 사법농단 기소의 결과는 초라했다. 기소된 14명 중 6명이 무죄가 확정됐고 2명은 항소심까지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민걸 이규진에 대해서만 항소심까지 유죄가 선고됐다. 양 전 대법원장, 박병대 고영한 전 대법관, 임 전 차장 등 최고위급에 대해서는 1심 선고도 내려지지 않았지만 의미 있는 유죄가 예상되는 건 임 전 차장 정도다. 재판 결과로 보면 임 전 차장 등 몇 명만 기소하고 끝냈어야 할 사건을 침소봉대한 것이다. 재판에서의 무죄율을 검사 평가에 반영한다면 두 사람은 좌천감이다. 사법농단 공소장에 대해 양 전 대법원장은 ‘한 편의 소설’이라고 했다. 소설이란 말은 생짜로 거짓을 만들어냈다기보다는 억지로 엮었다는 뜻일 것이다. 가령 어느 판사가 신문에 나올 정도로 문제를 일으킨 파문을 모아 놓은 자료까지 직권을 남용한 불법 정보 수집으로 몰아갔다. 그런 과격한 기소의 결과가 법원 인사 평가와 재임용 심사의 무력화이고, 노골적인 정치적 편향 재판을 하는데도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판사들의 등장이다. 윤 대통령은 당시 사법농단 사건 수사를 시작하면서 ‘우리 법원도 선진국 법원처럼 돼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뭘 생각하며 한 말인지는 모르겠다. 김 대법원장이 취한 개혁 조치는 대체로 선진국 법원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진국 법원은 법 적용과 외교 관계가 충돌할 경우 외교 관계를 우선하는 확고한 전통을 갖고 있다. 최소한 외교 관계에 파국을 초래할 것이 분명해 판결을 연기시키려 한 대법원장을 구속하는, 그런 막 나가는 검찰은 선진국에 없다. 양 전 대법원장이 당한 수치가 엘리트 판사들의 귀족적 행태에 경종을 울린 것은 분명하다. 그는 상고법원 도입 등을 위해 스스로 뛰기보다는, 대법관이 되고 싶지만 능력이 모자라 모든 것을 맡아 해주는 것으로 대신한 ‘마타하리’ 임 전 차장에게 맡겨 놓았다가 법원 관료화를 심화시켰다. 그럼에도 그가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초래할 결과를 예상하고 뭔가 해야 한다고 여긴 점은 국가를 책임진 3부 요인다운 의식이다. 김 대법원장과 검찰에 있을 때의 윤 대통령에게는 그런 의식 자체가 없었다. 그 결과 우리가 내린 판결을 우리 스스로가 부인하는 국가적 수치를 당했다. 대법원장이나 검찰총장이라면 조직의 논리에 따라 일했으니 할 일 다했다고 손 털 게 아니라 자기 조직이 존재하는 목적인 국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 수장이 돼서야 비로소 뭣이 더 중한지 깨닫는 어리석음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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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간토대지진 100주년에도 추도문 거부한 도쿄도지사

    “1923년 9월 1일, 대지진이 일어나 도쿄에서 요코하마에 걸친 지역을 파괴했다. 혼란 중에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가 전해져 그것을 믿은 민중과 군대·경찰의 손으로 다수의 조선인이 학살됐다.” 일본 짓쿄(實敎)출판이 발행한 고교 ‘일본사B’ 교과서에 실린 간토(關東)대지진 설명이다. 각주에는 “약 6700명 정도의 조선인 외에 약 700인의 중국인도 살해됐다”고 적혀 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은 1980년대부터 시작됐지만 그럼에도 채택률이 높은 역사교과서에서 간토대지진에 대한 기술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요미우리신문은 올해 100주년을 맞는 간토대지진을 기획기사로 다루면서 13일 1면에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접하고 각지에서 자경단을 결성해 재일 조선인을 닥치는 대로 묶어서 폭행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보도했다. 일본도 관계 개선을 위해 움직이는가 관심이 가지만 반응의 정도는 실은 일본 교과서 수준이다. 일본 정부 중앙방재회의 2008년 보고서를 인용해 “사망자와 행방불명자가 약 10만 명이며 이 중 1%에서 수%가 자경단 폭행인 것으로 추계됐다”고 한 부분은 교과서 기술에도 미치지 못한다. ▷간토대지진 희생자 추도식에 역대 도쿄도 지사들은 학살된 조선인을 위한 추도문을 보냈다. 그러나 고이케 유리코 현 지사가 취임한 이듬해인 2017년부터 조선인 희생자 6000여 명이란 숫자의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추도문 발송을 거부했다. 올해도 보내지 않을 것으로 전해졌다. 10만 명의 1%인 1000명이라도 추도할 일이고 6000명 이상이라도 추도할 일인데 이 맹랑한 지사에게는 숫자에 따라 그게 되고 안 되고 하는 모양이다. ▷당시의 학살이 일본인의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하는 존 마크 램지어 같은 자가 하버드대 교수로 있다. 극우적인 후소샤(扶桑社)의 ‘새로운 역사교과서’는 “혼란 중에 조선인과 사회주의자 사이에 불온한 계획이 있다는 소문이 확산돼 주민 자경단 등이 사회주의자와 조선인·중국인을 살해했다는 사건이 일어났다”며 비비 꼬아 기술하고 있지만 아무리 정당방위로 만들어보려 해도 글 자체에서 안 되는 건 이 사건이 지닌 반(反)인륜성 때문이다. ▷당시 일본 신문들이 유언비어를 진짜처럼 보도하고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자 주민들이 불안을 느껴 조선인과 중국인을 살해하게 됐다고 하더라도 일본인의 정당방위가 되는 게 아니다. 일본인이 저지른 학살일 뿐이다. 궤변을 막는 길은 이 사건의 성격을 제노사이드(genocide·인종 학살)로 명확히 규정하는 것이다. 100주년에 우리가 할 일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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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한국의 퍼스트 보이스카우트부터 실패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새만금 잼버리 대회 개영식에 보이스카우트 복장을 입고 참석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어릴 때 보이스카우트를 했다는 대통령이니 한국의 퍼스트 보이스카우트라 할 만하다. 한국인 대부분이 가난하던 1970년대 초등학생이 보이스카우트를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없었다. 보이스카우트 복장을 갖추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야영이라도 가면 또 돈을 내야 했다. 당시 대부분의 부모들은 돈 들어가는 걸 싫어했다. 지방에서는 보이스카우트 마후라(스카프)만 하고 산으로 나물 캐러 다니고 바다로 해산물 캐러 다닌, 짝퉁 보이스카우트도 있었던 모양이다. 육성회비도 못 내 야단맞는 학생이 수두룩하던 시절이다. 그때만 해도 보이스카우트를 할 수 있는 학생과 보이스카우트를 할 수 없는 학생으로 나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가 먹고살 만해진 때에 초등학생 시절을 보낸 세대라면 몰라도 60대가 왕년에 보이스카우트를 했다는 말은 예민한 감각을 지닌 대통령이라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카우트(scout)는 정찰대라는 뜻이다. 정찰대는 본대(本隊)에 앞서 적진에 들어가 적의 동향을 탐지하고 돌아오는 임무를 띠고 있기 때문에 위험에 처하기 쉽다. 20세기 초 영국군 장성 출신이 남자아이들에게 용감한 정찰대의 꿈을 심어주기 위해 만든 것이 보이스카우트이다. 정찰대원이 되려면 침투 생존 탈출에 능해야 한다. 보이들에게는 침투와 탈출은 필요 없으니 생존 능력을 키우는 데 집중했고 그것을 위한 훈련이 야영이다. 유럽에서 벨 에포크(belle poque)라고 해서 문명의 이기가 주는 편리함에 빠져들던 시절 그에 대한 반동으로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청년들을 중심으로 일었다. 독일에서는 반더포겔(Wandervogel·철새라는 뜻)이라고 해서 알프스 등을 찾아다니며 노래하는 심신 단련 모임이 성행했다. 영국에서는 남자아이들에게 모험심을 심어주는 방식으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움직임이 일었으니 그게 보이스카우트 운동이다. 누가 가라고 하지도 않는 힘든 곳을 찾아가 역경을 극복하는 것이 보이스카우트 정신이지만 그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극복을 통해 자연과 일치되는 경험이 중요하다. 주변에 변변찮은 나무 그늘 하나 없는 새만금 인공 간척지에서는 역경은 끝까지 역경일 뿐이다. 역경을 극복함으로써 일치를 경험할 자연도 없다. 젊은이들의 모임을 새만금 선전에 이용해 먹는 걸 막아선 단 한 사람의 진정한 올드 보이스카우트가 여에도 야에도 없었던 모양이다. 자연에서 생존하려면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 그래서 보이스카우트의 모토 중 하나가 ‘Prepared. For life’다. 집 떠나 야영을 해본 사람은 철저히 준비한다는 말이 뭔지 안다. 집에서는 하찮게 여겼던 것도 밖에서는 없으면 큰 곤란을 겪기 일쑤다. 본격 등산이나 험지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는 ‘짐이 무거울수록 살아남는다’는 말이 있다. 배낭이 무거울수록 떠날 때 힘들기는 하지만 필요한 것을 빠짐없이 챙겨 가야 만일의 사태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이다. 새만금은 철저히는 고사하고 전혀 준비가 되지 않았다. 정부는 새만금의 실패를 특급 아이돌 그룹을 동원한 K팝 콘서트로 만회해 보려 한다. 정부가 각 부처를 통해 얼마나 닦달했는지 요새 블랙핑크보다 잘나간다는 뉴진스가 합류하기로 했다. 한국의 퍼스트 보이스카우트에게는 이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다. BTS를 동원하라는 특명이 내려진 듯하다. BTS 멤버 중 2명이 군 복무 중이다. 대중 가수라고 병역 면제도 안 해주더니 군 명령을 발동해서라도 군 복무 중인 BTS 멤버를 출연시킬 모양이다. 그래서 성대한 K팝 콘서트가 된들 새만금의 실패를 만회하기보다는 후유증이 더 클 것 같다. 대통령이 개영식에 갔으면 보이스카우트 복장 입고 사진만 찍고 올 게 아니라 제대로 야영장을 둘러봤어야 했다. 그래도 왕년의 보이스카우트인데 늪지 같은 야영장을 봤다면 느껴지는 게 있지 않았을까. 일선에게만 책임을 물을 게 아니라 현장까지 가서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한 자신부터 자책해야 한다. 대통령의 한계를 장관들이 공유하고, 장관들의 한계를 일선이 공유하고, 그런 중앙정부의 한계를 지방정부가 공유하고 있을 뿐이다. 전북도는 수사까지 해야 하겠지만 그 전에 감독을 제대로 못한 장관들부터 책임을 물어라.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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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불편한 대통령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시절 손바닥에 왕(王)자를 새기고 토론회에 나왔을 때만 해도 예상치 못한 이질적인 행태에 께름칙한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열심히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지나갔다. 그러나 청와대 이전에 이어 대통령 관저 선택에까지 주술이 개입한 증거가 나왔다. 조선 왕조에서도 보기 힘들었던, 주술에 사로잡힌 국가 지도자를 근대 공화국에서 보고 있다. 구한말의 민비는 국(國)무당을 세우고 내외치(內外治)의 만사를 의논한다고 해서 지탄을 받았다. 민비 이전에도 주술에 빠진 왕비와 후궁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세자 시절부터 경연 등을 통해 유교 교육을 받은 왕들은 왕비나 후궁이 무속에 빠지면 별궁에 가둬 버릇을 고치고, 심하면 폐하여 사가(私家)로 내쫓고, 더 심하면 사약을 내리기도 했다. 김건희 여사의 한 녹취록에는 스스로를 비범한 무속인으로 자처하면서 청와대는 터가 좋지 않아 들어가지 않을 거라는 취지로 단호히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윤 대통령은 당선된 뒤 대통령 집무실이 채 마련되지 않았음에도 임시로라도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았다. 터가 나쁜 곳에서는 불안해서 하루도 살 수 없는 심리가 상궤를 벗어난 고집으로 드러났다. 대통령 관저는 본래 예정된 육군참모 총장 공관에서 외교부 장관 공관으로 바뀌었다. 남산 하얏트 호텔 쪽에서 외교부 장관 공관이 들여다보여 차단 공사를 해야 함에도 그렇게 바뀌었다. 수염을 날리며 육참 총장 공관을 찾은 사람은 천공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수염을 날리며 누군가 다녀갔고 그 사람이 백재권이라는 관상·풍수가로 드러났다. 대통령의 사람들은 천공을 무속인 대신 역술인이라 부르더니 백 씨에 대해서는 관상은 빼버리고 풍수전문가라고 지칭했다. 주역에 담긴 지혜, 풍수에 담긴 지혜를 논리적 용어로 설득력 있게 풀어내는 학자들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런 학자들은 관상 따위는 보지 않고 길흉(吉凶)을 점치지도 않는다. 주술적인 역술인이나 풍수가가 관상도 보고 점도 친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면서 청와대 터는 왜 흉하고 용산은 왜 길한지 설득력 있는 설명은 없다. 풍수로 따져도 애매하다. 주술의 눈에만 길흉이 명확하다. 외교부 장관 공관이 육참 총장 공관보다 왜 적합한지도 알 수 없다. 육참 총장 공관이 낡아서라면 왜 관상쟁이 풍수가가 등장하는지 해명해야 한다. 해명할 수 없으니 숨기려 한 것이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근대(modern)를 ‘주술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근대는 공적(公的) 영역과 사적(私的) 영역의 구별 위에 서 있기도 하다. 여의도 정치인들, 정부 고위 관료들, 대기업 임원들, 전문직 종사자들이나 그 부인들이 점을 보러 다니는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적 영역에서야 뭘 하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개인이 알아서 할 일이다. 점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얻고 일을 더 잘할 수 있다는데 뭐라 하겠는가. 그러나 주술이 대통령 집무실 이전이나 대통령 관저의 선택 같은 공적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은 국민이 낸 세금이 주술적 결정을 이행하는 데 쓰이는 것으로 근대 국가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집무실과 관저를 옮기는 것은 왕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주술에 집착해 궁을 이곳저곳으로 옮기다 쫓겨난 왕이 광해군이다. 언론에 공개적으로 등장한 이름만 천공, 건진, 무정에 이어 백재권이다. 처음에는 김 여사만 주술에 진심이고 윤 대통령은 마지못해 끌려다니는 줄 알았으나 그게 아니었다. 그가 주술로부터 얻는 심리적 안정은 공사의 구분을 뛰어넘게 만드는 정도인 듯하다. 누구나 주술에 빠지면 공사의 구분을 반드시 뛰어넘게 돼 있다. 지난해 지리산 둘레길을 돌다 산속 무속기도원 앞을 지나는데 건물이 현대식으로 말끔히 지어졌음에도 기분이 으스스해져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정신분석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그런 느낌을 ‘언캐니(uncanny·독일어로는 unheimlich)’라고 불렀다. 낯익은 대상에서 이질적인 것을 접했을 때 그것이 호기심을 갖게 만드는 이질감이 아니라 기분이 으스스해져서 피하고 싶은 이질감일 때의 느낌이다. 우리 대부분은 어쩔 수 없는 근대인이라 점집 앞을 지날 때 그런 느낌을 갖는다. 대통령이 지금 그런 느낌을 주고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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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209년 ‘비동맹 중립국’ 스웨덴의 나토 가입

    유럽사는 17세기까지만 해도 북방의 강국 스웨덴을 빼고 쓸 수 없었다. 그러나 프로이센과 러시아가 부상하면서 판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프로이센은 베를린 중심의 브란덴부르크와 쾨니히스베르크 중심의 동프로이센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프리드리히 빌헬름 선제후가 1660년 동프로이센을 스웨덴과 폴란드의 지배에서 해방시키면서 왕국으로 가는 길을 닦았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스웨덴과의 대(大)북방 전쟁(1700∼1721년)에서 이겨 발트해를 차지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해 강대국화의 초석을 놓았다. ▷스웨덴은 19세기에 들어와 프랑스 나폴레옹에게 독일 쪽에 있던 스웨덴령 포메라니아(포메른)를 빼앗기고 러시아에 핀란드까지 뺏겼다. 반(反)나폴레옹 진영에 선 덕분에 1814년 빈 체제에서 덴마크를 대신해 노르웨이와 연합 왕국을 이루기 위해 군대를 움직인 이후로는 한 번도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이것이 서서히 중립화로 이어졌다. 20세기에 들어와 제1,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침공을 피하기 위해 중립 노선을 지켰고 전후까지 계속됐다. ▷스웨덴의 중립성은 우리나라와도 관련이 깊다. 6·25전쟁이 끝나면서 정전협정을 감시하기 위한 중립국 감독위원회가 구성됐다. 유엔사령부가 선임한 두 나라가 스웨덴과 스위스다. 이명박 정부에서 천안함 침몰 사건 진상을 조사하는 민관 합동위원회를 구성할 때 해외 전문가 팀에 중립국 스웨덴을 포함시켜 조사 결과에 대한 신뢰도를 높였다. ▷유럽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 진영인 서유럽과 공산 진영인 동유럽으로 나뉜다. 북유럽은 노르웨이를 빼고 중립 진영으로 남았다. 핀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의 공격을 당한 이후 독일에 협력하기도 했지만 1944년 연합국으로 전향했다가 전후 중립국을 표방했다. 다만 소련의 영향력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해서 핀란드화라는 말이 생겼다. 유럽에서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영세중립국을 제외하고 가장 중립국다운 중립국은 스웨덴이었다. ▷스웨덴과 핀란드는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고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가입을 신청했다. 나토 가입은 전 회원국이 찬성해야 가능한데 러시아와 미국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하던 튀르키예가 스웨덴의 나토 가입에 반대하다가 최근 찬성으로 돌아서면서 두 나라의 가입에 청신호가 켜졌다. 튀르키예는 찬성의 대가로 숙원이던 유럽연합(EU) 가입 약속을 받았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최대 승자는 한때 유럽의 적이었으나 비유럽 국가로서 최초의 EU국이 되는 튀르키예이고 최대 패자는 표트르 대제 이후 다시 발트해에서 길이 막힌 러시아라는 말이 나올 만하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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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삼성 16억 처벌 대가로 엘리엇에 물어주는 1400억

    윤석열 대통령, 한동훈 법무부 장관,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검사 시절 이른바 국정농단 사건을 수사할 때 미국계 사모펀드 엘리엇이 그들의 수사에 근거해 손해배상을 청구할 것을 모르지 않았다. 당시 언론들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투자자-국가 간 분쟁해결(ISDS) 조항에 따라 엘리엇이 소송을 제기할 것을 경고했다. 검찰은 엘리엇의 구미에 딱 맞게 수사했고 예상대로 엘리엇의 청구서가 날아왔다. 국정농단 사건은 최순실이 주도해 설립한 미르·K스포츠재단에 대기업들이 출연하도록 박근혜 정부가 압력을 넣었다는 혐의로부터 시작됐다. 정작 대법원에서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에 대해서는 무죄가 선고됐다. 국정농단 사건은 한마디로 하자면 출발점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표류해버린 사건이다. 다른 곳 중 하나가 삼성의 동계스포츠영재센터 후원 16억 원에 대한 제3자 뇌물죄다. 삼성이 최순실 딸 정유라에게 승마 지원을 해준 71억 원도 뇌물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승마 지원 71억 원은 그냥 뇌물죄이고, 동계스포츠영재센터 후원 16억 원은 제3자 뇌물죄다. 제3자 뇌물죄는 그냥 뇌물죄와 달리 ‘부정한 청탁’을 요건으로 한다. 법원이 승마 지원 71억 원만 뇌물죄로 인정했다면 부정한 청탁이 있었는지 따질 필요가 없었고 엘리엇에 빌미를 주지 않을 수 있었다. 동계스포츠영재센터 16억 원과 관련한 부정한 청탁은 삼성이 박 대통령 쪽에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도와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명시적 청탁이 없었다는 데에 있다. 검찰과 대법원은 명시적 청탁은 없었으나 묵시적 청탁이 있었다고 봤다. 그러나 여기서의 묵시적 청탁은 흔히 알려진 것처럼 이심전심(以心傳心)도 아니다. 그냥 기업에 현안이 있는 이상 정부 압력으로 돈을 후원하거나 출연하면 청탁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청탁에 따른 부정한 지시가 있었다는 증거도 없었다. 안종범 당시 경제수석비서관이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적은 수첩 61권은 본인도 다 없어진 줄 알았으나 검찰에 의해 극적으로 발견돼 박 대통령에게 불리한 방식으로 국정농단 수사에 큰 도움을 줬다. 그러나 안 수석 혼자 보기 위해 적은 그 많은 수첩에도 ‘삼성 합병’이란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현안 없는 대기업은 없다. 현안이 있기만 하면 묵시적 청탁으로 볼 수 있다면 미르·K스포츠재단에 출연한 대기업들은 다 제3자 뇌물죄로 처벌해야 한다. 사실 그렇게 했어야 한다. 그래야 정부가 멋대로 기업에 돈을 내게 하는 걸 근절할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기업이 이런저런 명목으로 계속 돈을 내고 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비율은 법에 따라 합병 결의 이사회 전날 시장 주가에 의해 결정됐다. 그러나 시가가 시장 참여자들의 합병 예상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는 실질적 사정을 고려해 법원은 주식매수청구가격을 재산정했다. 그 민사판결로 일성신약 등이 보상받았고 그 후 엘리엇도 같은 기준에 따라 보상받았다. 엘리엇에 새로 배상해야 할 1400억 원은 이 민사보상금을 뺀 것으로 순전히 국정농단 형사판결 유죄, 그중에서도 삼성의 동계스포츠영재센터 후원 16억 원에 부정한 청탁이 인정된 데 따른 것이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 자체에 불법이 있었는지는 재판 중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의 가치 평가 과정에서 분식회계가 있었는지가 쟁점이다. 합병 이후 삼성바이오로직스의 가치가 지속적으로 커져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지 않은 옛 삼성물산 주주들도 합병으로 손해를 보기는커녕 이득을 봤다. 국민연금이 이런 가치 상승을 예상했다면 정부 압력이 있었든 없었든 합병에 찬성할 이유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주장을 힘들게 만든 것이 바로 삼성 동계스포츠영재센터 16억 원 제3자 뇌물죄다. 삼성이 ‘승계 작업’이란 현안에 대해 잘 봐달라고 청탁하고 뇌물을 준다면 고작 16억 원을, 그것도 마지못해 줬을까라는 의문이 처음부터 제기됐다. 승마 지원 71억 원을 포함해도 마찬가지다. 엘리엇으로부터 1400억 원의 청구서를 받고 그 돈을 세금으로 낼 생각을 하니 부정한 청탁에 엮인 16억 원이 세상 끝까지 쫓아가 실현한 정의라기보다 세상 물정 모르고 입신양명하려다 우물 밖 기업사냥꾼에게 돈 뜯긴 빌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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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길 잃은 이민정책의 그늘 보여주는 프랑스 폭동

    유럽 국가 중에서는 영국이 가장 먼저 대규모 이주민 인종 폭동을 겪었다. 지금은 대(大)런던(Greater London)으로 통합된 옛 런던의 남쪽 브릭스턴과 북쪽 토트넘은 카리브해 출신 흑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었다. 1981년, 1985년, 1996년에는 브릭스턴을 시작으로, 2011년에는 토트넘을 시작으로 폭동이 발생했는데 다 범죄 혐의를 받던 흑인 청년이 경찰 총에 맞아 죽거나 다친 사건이 원인이다. ▷영국이 과거 식민지였던 카리브해 출신을 이주민으로 많이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도 과거 식민지였던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등의 북아프리카계 무슬림을 이주민으로 많이 받았다. 영국은 노팅힐 폭동 등 1950년대부터 이미 이주민 폭동을 겪었다. 프랑스는 북아프리카계 이민 수용이 좀 늦었고 1960년대 들어서는 학생혁명이 전면에 부각돼 노동자와 이주민의 불만까지 흡수하는 모양새였지만 이주민의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프랑스도 1980년대 들어 직접적인 인종 폭동의 영향권에 들었다. 잦지만 대규모에는 이르지 못하던 폭동은 2005년 북아프리카계 소년이 파리 북쪽 클리시에서 경찰 추격을 받다 감전사한 사건을 계기로 커지고 장기화하면서 큰 충격을 줬다. 2007년에도 파리 북쪽 빌리에르벨에서 오토바이를 타던 북아프리카계 소년 2명이 경찰차와 충돌해 사망한 사건으로 폭동이 일어나는 등 크고 작은 폭동이 수년마다 이어졌다. 최근에는 낭테르에서 북아프리카계 소년이 경찰 단속을 피하다 숨진 뒤 확산되는 폭동이 벌써 2005년 수준을 넘어설 정도로 커져 프랑스를 뒤흔들고 있다 ▷파리는 런던이 대(大)런던이 된 것과 달리 대(大)파리(Grand Paris)가 되지 못하고 순환도로 안쪽의 파리와 바깥쪽의 교외가 분리돼 있다. 교외에는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그중에는 이주민이 많다. 경찰과의 충돌은 가난 때문에 범죄 행각에 연루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인종 폭동은 근래로 올수록 영국은 줄어들고 프랑스는 심해지고 있다. 프랑스가 말로만 톨레랑스(관용)를 외치고 있는 사이 영국은 교외 지역까지 런던으로 포섭하면서 실질적 통합에 애쓴 결과다. ▷영국 프랑스 독일 중에서 이주민 인종 폭동을 피한 나라는 독일밖에 없다. 독일은 작은 기업이라도 전문성을 높여 그 분야에서도 자국민이 취업해서 먹고살 수 있는 임금 등의 조건을 만들면서 이민을 수용했다. 한국의 당국자들은 심화하는 출산율 저하와 노동력 부족을 극복하는 방법은 이민밖에 없다고 말하기 전에 비슷한 인구 규모를 가진 유럽 국가들이 겪었던 이민 정책의 명암(明暗)을 두루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3-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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