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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상편()에서 이어집니다.“우리는 타인에게 받아들여지는 상황에 기쁨을 얻고, 좋은 관계를 이어 나가려 애쓴다. 좋은 일에는 더불어 기뻐하고 슬픔은 반으로 나누어 가진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증거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단요의 소설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에서)2017년 성우가 된 최하리 씨(33·본명 최정윤)는 여러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KBS 전속 때부터 라디오 드라마 출연에 프로그램 진행도 맡았고, 이후 게임 ‘마비노기 영웅전’ 애니메이션 ‘체인소 맨’ 외화 ‘알라딘’ 등 수많은 작품에서 목소리를 선보였다. 이때까지 찍은 광고는 600편이 넘는다.하리 씨의 길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건 아니다. 그에 따르면 KBS 입사 동기 10명 가운데 “문 닫고 들어온” 이가 자신이었다. 주눅들 수도 있으련만, 오히려 “들어올 땐 꼴찌였지만 나갈 땐 1등으로”란 마음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 결과 2018년 KBS라디오 연기대상 여자신인상을 받기도 했다. 이듬해 프리랜서가 된 뒤엔 지금껏 3일 이상 쉰 적이 없을 정도로 숨가쁘게 달려왔다. 스스로도 ‘악바리’라 부르는 하리 씨의 성우 생활을 상편에 이어 들어봤다.()()-성우 시험 준비는 어떻게 했습니까.“당연히 성우학원을 다녔어요. 목소리 자체가 작다 보니 처음 6개월은 호흡 발성 반에 있었어요. 저를 포함해 요즘 세대는 말을 크게 하지 않아 대부분 전달력이 떨어지는 편이라고 해요. ‘말하는 법’부터 다시 배운 셈이죠. 이후 입시 반으로 옮겨서 고시생처럼 살았어요. 회사마다 시험방식이 달라서 거기에 맞춰 준비해야 하거든요. 그간 나온 기출문제도 다 공부해야 하죠. 모든 일이 그렇지만, 그냥 뚝딱 되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기왕 도전했으니 무조건 돼야 한다는 맘으로 최선을 다했죠.”-합격했을 때 기분이 어땠나요.“솔직히 말씀드려야겠죠?”-그래주면 좋지요.“물론 기뻤지만, 내심 ‘아, 큰일 났다’ 싶었어요. 실은, KBS가 희망 회사 1순위는 아니었거든요.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을 좋아해서 애니메이션 전문 채널을 노리고 있었어요. 전 변신소녀 같은 걸 연기하고 싶은데, 왠지 KBS는 그런 분위기가 아닐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취준생이 어디 맘대로 선택할 처지인가요. 뽑아준 것만도 감사하죠. 부모님이 정말 좋아하셨어요. 아무래도 어른들은 ‘이름 있는’ 회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으니까요.”-입사하니 확실히 다르던가요.“아무래도 군기(?) 같은 게 좀 센 편이죠. 정극이나 내레이션이 많은지라 진중한 일들도 많고요. 그래서 좀 의아하기도 했어요. 제가 봐도 전 그런 스타일이 아닌데, 왜 뽑았을까. 합격자 명단 순서도 의심스러웠어요. 나이나 가나다 순서도 아닌데, 제가 제일 마지막에 있더라고요. 한 관계자께 여쭤보니 ‘그거 성적순이야’라더군요. ‘아, 망했다’ 싶었죠.”-자신감이 떨어졌겠네요.“근데 그런 거 생각할 틈도 없었어요. 당시 KBS가 파업 등으로 인력난이 심할 때라, 입사 며칠 되지도 않아서 라디오 진행을 덜컥 맡았어요. 적응 기간도 없이, 일이 쏟아져 들어오더라고요. 주말까지 일주일 내내 일한 적이 많을 정도였으니, 제 처지가 어떤지는 머리에 떠오르지도 않았어요. 그렇게 실전에 투입돼 뛰다 보니 나중엔 무슨 일을 시켜도 그리 겁이 나질 않더라고요. 돌이켜보면, KBS에 입사한 게 제겐 큰 도움이 된 거죠. 이후 성우로 자리 잡는데 큰 자산이자 밑바탕이 됐어요.”-너무 열심히 일한 거 아닌가요.“제가 입사를 꼴찌로 했잖아요. 문 닫고 들어오긴 했지만, 전속이 끝날 땐 당당하게 나가겠다고 맘먹었어요. 일이 벅찰 정도로 들어와도, 하나도 거절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다 했어요. 그 덕에 KBS 신인상도 받았죠. (꼴찌에서 1등이 된 거네요?) 1등이라기보다는 스스로 뭔가를 뛰어넘은 기분이었어요. 성우란 길을 택했지만 제가 얼마나 잘 할 수 있을지는 제 자신은 물론 누구도 모르잖아요. 힘들었지만 뭔가를 이겨낸 성취감 같은 거였죠.”-스스로 채찍질하는 게 쉬운 건 아니잖아요.“제 목표 중 하나가 ‘하나의 독립된 인간’이거든요. 경제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타인에게 기대지 않고 제대로 살아가는. 좀 추상적이지만, 어린 시절 왕따 사건 이후로 더 그런 생각을 많이 한 것 같아요. 실은 인터뷰에 응하면서도, 그때 기억이 많이 났어요. 그런 일을 겪으면서 중간에 다 포기하고 싶은 맘이 들기도 했거든요. ‘이대로 죽어버리면 날 괴롭히는 애들에게 복수할 수 있지 않을까’ 같은…. 너무 분하고 억울했거든요. 하지만 그걸 버텨낸 그때의 저에게 칭찬을 건네고 싶어요. 요즘도 그런 일을 당하는 친구들이 많을 텐데, 자신을 잃지 않는다면 이겨낼 기회가 생긴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미래는 분명 찾아오니까요.”-이젠 좀 맘이 편해졌나요.“그럼요. 누군가에겐 별것 아닐 수 있지만, 이젠 떳떳하게 제힘으로 일해서 먹고 사는 성인이 됐잖아요. 세상에서 인정을 받는다는 건 양면적인 거 같아요. 너무 그런 거에 기댈 필요도 없지만, 사회를 살아가는데 분명 필요한 부분이니까요. 어쨌든 전속이 끝난 뒤에도 성우로서 좋게 봐주시고 찾는 분들이 있다는 건 제가 이때까지 잘 못 살지 않았구나 하고 감사하게 되죠.”-전속이 끝나면 주변 환경도 많이 바뀌죠.“그럼요. 직장인에서 자영업자가 되는 거니까요. 연말정산도 그냥 회사에 맡기면 되는 거였는데,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죠. 뭣보다 홀로 경쟁해야 하고, 일에 대한 책임감도 막중하죠. 예를 들어, 어디에 소속돼 있을 땐 실수해도 혼 한 번 나고 다시 기회를 얻을 수 있지만, 프리랜서는 맘에 안 들면 다신 찾지 않으니까요. 물론 직장인이라고 왜 힘든 게 없겠어요. 장단점이 뚜렷해서 삶의 방식 자체가 전혀 다르다고 봐요.”-벌이는 확실히 나아지겠죠.“아무래도 그런 면은 있죠. 회사에서 받던 연봉보다야 더 잘 벌죠. 근데 이게 언제까지 갈지는 누구도 모르는 거잖아요. 경력이 쌓인다고 일이 수월해지는 건 아니거든요. 실력 있는 선배들은 여전히 많고, 신선한 목소리를 찾는 경우도 적지 않아 후배들과도 똑같이 경쟁해야 하고요. 특히 요즘은 ‘자연스러운 목소리’가 대세이기 때문에, 성우도 트렌드나 흐름에 민감하죠.”-자연스러운 목소리란 게 뭘까요.“음…, 설명하기 어려운데, 특히 최근 광고계는 연기하지 않는 톤을 많이 요구해요. 아무래도 전문 성우들은 발성이나 어조가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지만, 대신 다소 인위적인 느낌을 받으실 수 있어요. 그래서 요즘은 일반 직장인 같은 무경험자에게 광고 내레이션을 맡기는 경우도 꽤 있어요. 성우는 목소리로 일을 하는 사람이잖아요. 그 대가를 지불하면 거기에 맞춰드려야 하는 거죠. ‘성우처럼 말하지 않기’도 제가 해야 하는 역할인 거예요.”-역시 세상엔 쉬운 일이 없군요.“물론이죠. 게다가 이런 작업들은 여러 사람들이 참여하는 거니까 변수가 많아서 조율이 무척 중요해요. 외화 더빙을 한다고 상상해보세요. 제작자부터 감독 및 스태프 하나하나를 만족시킬 수 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하는 거죠. 현장에선 좋다고 마무리됐지만, 나중에 재녹음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요. 게다가 함께 작업한 이들은 좋아해도, 수요자들의 맘에도 들 거란 보장은 없는 거잖아요. 제 스스로 맘에 드는 연기를 했다고 다가 아닌 거예요.”-목소리 관리가 무척 중요하겠네요.“그렇죠. 제일 중요한 건 비염이나 기관지염에 걸리지 않는 거예요. 특히 작업 중에는, 목소리가 바뀌면 안 되니까요. 애니메이션 시리즈에 출연했는데, 1편과 3편의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다르면 얼마나 이상하고 어색하겠어요. 코맹맹이 소리라도 나면 정말 큰일이죠. 평소에 물을 많이 마시는 것도 중요하고요. 성우들끼리는 ‘연습은 안 하면 안 할수록 좋다’는 말도 많이 해요.”-그건 왜 그런가요.“일단 무리한 연습은 성대에 무리를 줄 수 있고요. 저희는 연습으로 정형화되는 목소리보단 현장에서 순발력 있게 ‘어울리는 목소리를 찾아내는’ 게 중요합니다. 특히 광고 같은 경우엔 현장에서 바로 대본을 주고 ‘자, 갈게요’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스무 명이 넘는 스태프들이 일하고 있는데, 시간을 끌 수가 없어요. 그래서 ‘글을 글로 보지 않는다’는 표현을 쓰는데요. 좀 어려울 수 있는데, 그냥 읽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 가장 적합한 뉘앙스와 흐름을 빨리 캐치해내야 하는 거죠.”-잘 쉬는 것도 중요하겠네요.“맞아요. 근데…, 저는 그걸 잘 못했어요. 2019년 프리랜서가 된 뒤로 이때까지 2박3일 여행 갔던 게 제일 길게 쉬어본 거예요. 빨리 자리 잡고 싶은 욕심도 컸지만, 다양한 일을 하다 보니 제 사정만 생각할 수가 없더라고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여러 사람들이 참여하는 작업인지라 그날 뭔가 진행돼야 하는 일이라면 제가 맘대로 쉬고 싶다고 할 순 없잖아요. 그러다 보니 일주일에 6일 일하는 건 그냥 일상이 돼버렸네요. 요즘 들어 일과 휴식의 균형도 잘 찾아야 오래 갈 수 있단 생각이 많이 들어요.”-본인에게 성우란 어떤 의미인가요.“고마운 직업이죠. 시작은 엉겁결에 했지만, 되돌아봤을 때 후회되지 않거든요. 처음부터 성우란 일이 적성에 잘 맞았던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저한테 ‘잘 맞는 일’로 만들려고 최선을 다했어요. 어릴 때 첼로를 오래 배우다가 부모님의 권유로 관뒀는데, 그땐 수긍이 가서 그랬던 건데 나중에 첼로한테 참 미안했어요. 진심으로 전력을 다하지 않고 그냥 어정쩡하게 떠나보낸 게 아닐까. 그래서 성우를 처음 시작했을 때 결심했어요. 이 일만큼 성공하든 실패하든 내 모든 걸 쏟아부어 보자. 결과보다는 과정에서 후회하지 말자.”-인생의 목표가 ‘독립된 인격체’와 ‘행복하기’라고 했어요. 얼마나 이뤘나요.“글쎄요, 아직 답을 내놓을 정도의 수준은 아닙니다. 그나마 경제적으로는 많이 독립을 이뤘고, 정신적으로도 이전보단 성숙했다고 보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겠죠? 그리고 두 가지 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를 수 있는 문제니까요. 다만 부모님과 주위 분들 덕에 지금껏 잘 걸어왔고, 앞으로도 주어진 일들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싶어요. 사회인으로서도 최대한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할 거고요.”-‘성우 최하리’의 꿈은 뭘까요.“아주 짧은 한순간이라도, 누군가 제 목소리를 듣고 잠시라도 기분이 나아질 수 있다면 좋겠어요. 한 팬으로부터 ‘상처를 치유 받는 느낌이 들었다’는 메시지를 받은 적이 있어요. 그것만큼 성우로서 행복한 일이 어디 있을까요. 전 제가 ‘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규정된 형태라고 정의내리기보단 어디서도 어디에도 두루두루 맞춰갈 수 있는. 그리고 하나 더, 세상 어디서나 구할 수 있지만, 목이 마른 이에게 물만큼 반갑고 필요한 건 없잖아요. 성우로서도 인간으로서도 그런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겠습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요즘 세상은 ‘보여주는 것’이 지배하는 시대다. 영화관 스크린처럼 크던, 스마트시계 액정화면만큼 작건 상관없다. 동영상이든 사진이든 혹은 그림이든. 우리의 눈은 쉴 틈 없이 무언가를 빨아들이고 있다.하지만 생각해보라. 그 보여주는 것에 ‘사운드’가 없다면 어떨까. 당장 유튜브를 틀어놓고 음 소거를 눌러보자. 자막 등을 통해 내용은 짐작할 순 있다. 허나 그 거세된 침묵은 단순히 결여 이상의 뭔가를 앗아간다. 그래서 소리는, 특히 인간의 목소리는 원초적인 아날로그이면서도 영원히 본질적인 필요조건일 수밖에 없다.성우(聲優)란 직업은 그렇기에 고전적이자 미래지향적이다. 음성으로 정보와 감정을 전달하는 일은 기나긴 역사를 지녔는데도 여전히 강력한 가치를 지녔다. 물론 인공지능의 위세가 어디까지 갈지 가늠하긴 어려우나, 인간만이 담아낼 목소리의 쓸모가 줄어드는 건 아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소통하는 한.최하리 씨(33·본명 최정윤)는 2017년 KBS 공채 입사를 시작으로 올해 8년 차가 된 전문 성우다. 이름만 대도 아는 전설적인 성우들에 비하면야 까마득하지만, 이미 SK텔레콤·카스 등 굵직한 광고 600여 편에 출연해 만만찮은 경력을 쌓았다. 젊은 세대들이 즐기는 게임과 애니메이션에도 숱하게 출연해, 막상 들어보면 “아, 이 목소리!”하며 반색할 이들이 적지 않다. 그에게 성우의 길을 걷게 된 사연과 청년 성우로서의 삶에 대해 들어봤다.))-유명한 분을 모시게 돼 영광입니다.“에구, 제가 무슨…. 그냥 직장 다니다 홀로서기 중인 자영업자인걸요. 포털사이트에 프로필 뜨는 것도 솔직히 민망해요. 어쨌든 성우로는 2017년 KBS 공채 합격해 기수로는 42기고요. 2년 전속계약 끝나고 프리랜서로 나선 지는 5년 됐습니다. 다행히 좋게 봐주신 덕에 바쁘게 살고 있어요.”-어릴 때부터 성우가 꿈이었나요.“아, 많이 받는 질문인데…. (좀 식상한가요?) 아뇨, 그게 아니라 답하기가 참 어려운 거 같아요. 10대 때부터 성우가 되고 싶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제가 가진 능력으로 잘 할 수 있는 직업을 찾은 게 성우긴 하거든요. 그래서 보통 그때그때 맞춰서 답해드리는 편이에요.”-맞춤형 답안이 있다는 게 재밌네요.“게임 업계 분들을 만나면 게임 덕후였으니 ‘덕업일치’를 이뤘다고 말씀드려요. 색다른 걸 원하시면 법대 다니며 변호사를 꿈꾸다가 언변 실력을 키우려고 성우학원에 등록한 것도 사실이니까 그렇게 얘기하죠. 사실 어떤 일의 결과는 여러 다양한 이유와 과정이 뒤섞여서 나오는 거잖아요. 뭐든 한마디로 딱 부러지게 설명하는 게…, 항상 쉽지 않네요.”-심오한데요. 원래 생각이 깊은 편인가요.“아뇨, 아뇨. 그저 남들과 엇비슷한 고민을 안고 사는 30대일 뿐이에요. 어릴 때는 천방지축이었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전학 왔는데, 그전까진 인천에서 살았어요. 학교 끝나면 가방 내팽개치고 나가서 엄마가 저녁 먹으라고 부를 때까지 뛰어노는? 애들이랑 장난도 많이 치고 싸움박질도 많이 하고요, 하하. 부모님도 좀 방목하는 스타일이었다고나 할까요. 세 살 터울 남동생한테 물려줘야 한다며 옷도 남자애들 같은 옷만 입히셨어요.”-정윤 씨 나이대면 서울은 좀 달랐을 텐데요.“그러니까요. 전학 와서 문화적 충격이 엄청났어요. 학원 다니고 공부 빡세게 하는 건 둘째 치고, 말투나 분위기 자체가 다르니까요. ‘밥 먹자’가 아니라 ‘밥 먹을래’라고 말하잖아요. 뭔가 드라마에서 봤던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 느낌? 가장 다른 건, 같은 반 친구 사이에서도 ‘서열’이 존재한다는 게 제일 쇼크였어요. 잘 살거나 공부 잘하거나 하는 애들은 끼리끼리 어울리고. 그런 게 좀 힘들었어요.”-적응이 쉽지 않았나 보네요.“다행히 크게 개의치 않는 성격이었어요. 제가 좀 자그마하긴 하지만, 운동을 엄청 좋아해요. 달리기는 초중고 내내 전교 1등을 놓쳐본 적이 없어요. 수영도 10년 이상 했고요. 인천 때도 항상 맨 앞에 앉다 보니 툭툭 건드리는 애들이 가끔 있었는데, 저희 엄마 모토가 ‘한 대 맞으면 열 대로 되갚아라’였거든요, 하하. 요즘 같으면 큰일 날 소리지만, 그땐 애들도 한번 치고받고 나면 오히려 더 친해졌고요. 그래서 서울에서도 니들이 그러든 말든 하고 제가 하고 싶은 거 했어요. 그래서인지 고깝게 보는 친구들도 있었어요.”-혹시 ‘왕따’를 당했나요.“말씀드리기 조심스럽긴 하지만…. 중학교 때 좀 심했는데, 몇몇이 주도해서 애들한테 저랑 어울리지 못하게 하더라고요.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게 이유였어요. 물리적 폭력은 안 당했지만, 반 전체가 저한테 등을 돌린 느낌 아시나요. 그때 혼자 제 방 옷장에 들어가서 참 많이 울었는데…. (부모님이 아실까 봐?) 그것도 있고, 뭔가 나만의 세상과 단절된 공간이 필요했나 봐요. 그리고 장녀다 보니 어릴 때부터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해라는 게 집안 분위기였거든요. 서울에 처음 전학 올 때 학교도 저 혼자 찾아갔어요. 그래서 어떻게든 혼자 견디고 이겨내려고 했던 거 같아요.”-문제는 잘 해결됐습니까.“좀 어이없게 끝났어요. 결국 선생님도 알게 되시고, 사안이 심각하다고 여기셨는지 양쪽 부모님들도 학교에 오셨죠. 그 이후로는 딱히 건드리진 않더라고요. 저도 저 나름대로 다른 친구들이 생겼고. 근데 그거 아세요? 전 그때 따돌림을 주동한 애들보다 못 본 척 하는 나머지 아이들이 더 무서웠어요. 제가 당함으로써 자기들은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안도하는 모습도 봤고요. 뭔가 세상의 이면을 너무 빨리 마주한 기분이었죠.”-트라우마로 남진 않았나요.“말씀드렸듯이 악바리 성격이라 씩씩하게 이겨냈죠. 왕따 사건 이후에 보란 듯이 반장선거도 나갔어요. 2표밖에 못 받았지만, 하하. 그리고 실제로 2학기엔 반장도 했고요. 하지만 지금도 생생한 걸 보면 상처는 아물었을지언정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닌가 봐요. 그래서였는지, 고교 때는 철학이나 인문학 쪽에 관심이 많았어요. 사람은 왜 사는가, 뭘 위해 사는 걸까 같은 고민이었죠. 교과서보다 그런 분야 책들을 더 많이 읽었어요. 법대에 가게 된 것도 인간사회에서 규율, 법칙이란 게 어떤 것일까를 고민하다가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아요.”-이대 법학과를 나왔더군요.“아마 아빠 엄마는 판검사 하려나 보다 싶어서 좋아하셨을 거예요. 근데 전 진짜 ‘학문’으로서 법학이 궁금했어요. 세상을 움직이는 이치 같은 것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다행히 성적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고…. 대학 가서 법학과 생활도 좋았어요. 훌륭한 교수님들이 많으셔서 헌법 형법 수업이 재밌었어요. 한번 빠지면 끝까지 파는 성격인지라. 변호사란 직업도 매력 있죠. 기왕이면 사회에 도움 되는 국선변호사나 법률구조공단 변호사가 되고 싶었어요.”-당찬 느낌이 잘 어울리네요.“웬걸요. 맘먹으면 실행해야 해서, 실제로 공단에서 인턴을 했었어요. 그때 뼈저리게 느꼈어요. 아무나 하겠다고 나설 일이 아니라는 걸. 그때 멘토 역할을 맡은 여성 변호사분이 계셨어요. 당시 만삭의 몸이셨는데 잠깐의 쉴 틈도 없이 일하시더라고요. 정말 온몸이 피곤에 짓눌렸는데도 사명감으로 그걸 버텨내시는 걸 보며, 존경스러웠지만 제 주제 파악도 됐어요. 함부로 겉멋에 취해 도전할 일이 아니었어요.”-말 그대로 ‘현타’가 왔군요.“네, 그때 좀 방황했어요. 계속 학자로서 공부하는 길도 있었겠지만, 뭔가 방향을 놓쳤다고나 할까요. 전 집에서 항상 ‘스무 살 넘으면 앞가림은 스스로 해라’는 얘기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거든요. 졸업하면 얼른 경제 독립을 이뤄야 하는데, 이렇게는 답이 안 보였어요.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아니 오히려 하고 싶은 게 많은 게 문제가 아닌지. 그때 마침 ‘롤(리그 오브 레전드)’이랑 ‘디아블로3’ 연달아 출시되는 바람에….”-잠깐만요. 갑자기 게임이요?“하하하, 당황스러우시죠? 처음에 말씀드렸잖아요. 뭐든 하나로 딱 부러지는 게 아니라고. 그리고 제가 게임 덕후란 말씀도 드렸잖아요. 부모님이 되게 엄격하시면서도 묘하게 게임엔 관대했어요. 아빠가 살짝 얼리어답터신지라. 원래 중고교 때도 게임을 좋아했는데, 대학에 가서 한번 신나게 놀아보자 하다가 엄청 빠졌어요. 게임 때문에 휴학까지 했던 건 말씀드리기 좀 민망한데…. 1년 넘게 진짜 신나게 게임만 했어요. 블리자드(미국 유명 게임 회사) 변호사가 되는 게 꿈인 적도 있었어요, 헤헤.”-뭔가 MZ세대답기도 합니다.“그런가요. 어쨌든 경제 독립과 함께 제 목표는 ‘행복하기’였거든요. 그래서 뭘 하면 좋을지 진로상담센터도 찾아가고 그랬어요. 근데 거기에서 직업 만족도 순위를 봤는데, 1위가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었어요. 그런데 두 번째가 성우인 거예요! ‘어라, 성우가 되면 내가 좋아하는 게임 캐릭터 연기도 할 수 있겠는데’ 하고 눈이 번쩍 뜨였죠. 그리고 성우가 못 되더라도 발성법 같은 걸 배워두면 법 쪽에서 일할 때 도움이 되겠단 생각도 들었고요. 그래서 당장 성우학원을 찾아갔죠.”-왜 처음 질문에 답하기 곤란했는지 이해 가네요.“삶이 원래 그렇잖아요. 무거움과 가벼움이 골고루 뒤섞여있지 않나요. 그렇다고 성우 시험 준비를 허투루 한 건 절대 아니었어요. 남들보다 1, 2시간씩 일찍 나가서 연습하고 스트레칭하고 정말 열심히 했어요. 뭐든 하기로 했으면 제가 가진 100%를 던져야 하는 거니까요. 특히 전 체구가 작아서인지 말을 크게 내뱉지를 못했거든요. 남들보다 훨씬 많이 노력해야 했어요.”-목소리가 좋은 건 장점이었겠네요.“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하지만, 실은 처음엔 절대 이런 목소리를 내지 못했어요. 다 훈련과 경험의 결과예요. 오히려 성우 하기엔 약점이 더 많았죠. 근데 그거 아세요? 목소리가 좋으면 성우가 잘 맞겠다 싶지만 꼭 그렇지도 않아요. 저도 예전엔 그런 줄 알았는데, 오히려 탁월한 음성을 가진 분들이 ‘틀’을 깨지 못하고 중도에 접는 경우가 많아요. 성우에게 주어지는 건 결코 근사한 역할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우리네 삶이 평범하면서도 다채로운 것처럼, 성우도 온갖 다양한 역할을 해야 하니까요. 작은 것에도 최선을 다하는 분들이 오래 가더라고요.”(하편에서 계속)정양환기자 ray@donga.com}
완성차 업체는 물론이고 부품사들도 급변하는 세계 자동차 시장에 대한 대응 전략이 절실한 시대다. 최근 현대모비스 등 국내 부품사들은 ‘전동화(電動化)’ 전략을 통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는 데 사활을 걸고 있다. 최근 해외에서 품질과 디자인으로 호평받고 있는 현대자동차와 기아는 올해 글로벌 판매 순위가 3위에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영업이익도 국내 1위에 올라서는 등 실적 호조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부품사들은 매출은 늘어났으나 물류비와 재료비, 인건비 부담으로 영업이익은 오히려 감소하는 실정이다. 실제로 지난해 현대차와 기아의 영업이익률은 각각 6.89%와 8.36%였지만, 대표적인 부품사들인 현대모비스 현대위아 HL만도 한온시스템 등은 3% 내외를 기록했다. 부품사들이 고전하는 이유는 간명하다. 팬데믹으로 물류·금융비용이 크게 늘어난 데다 반도체 등 원자재 수급이 불안정해졌기 때문이다.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과 생산시설 확충 비중을 늘릴 수밖에 없는 경영 환경도 한몫했다. 관련 업계에서는 “3∼5년 단위로 계약을 맺는 업계 특성상 일종의 사고성 비용은 납품 단가에 반영되지 않아 부품사가 이를 부담하는 구조 때문”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하지만 부품사라고 모두 어려운 상황에 놓인 것만은 아니다. 글로벌 톱3로 꼽히는 독일 보쉬와 콘테넨탈, 일본 덴소의 영업이익률은 5∼10%에 이른다고 한다. 특히 도요타 계열인 덴소는 지난해 현대모비스의 2배를 상회하는 4300억 엔(약 3조9166억 원)에 이르는 영업이익을 거뒀다. 국내 부품사들도 제대로 경쟁력을 키우면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요즘 가장 주목받는 ‘전동화’ 시장은 엄청난 도약의 기회가 될 수 있다. 기존 내연기관 부품사들이 진입하기에 상대적으로 장벽도 낮다. 현재 글로벌 전동화 시장은 절대 강자가 없는 실정이라 전동화 생산 경쟁력을 확보한 부품사들은 매우 유리하다. 스위스 금융기업 UBS도 “장기적으로 전기차 대응을 선제적으로 추진한 부품사들이 패권을 쥐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에 국내 부품사들도 전동화 전환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현대차와 기아의 주요 전기차 부품을 공급하는 현대모비스는 최근 인도네시아에 배터리 시스템 전용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한국과 아시아, 유럽(체코, 슬로바키아), 북미(앨라배마, 조지아)로 이어지는 ‘전동화 밸류체인(제품 생산에서 원재료와 노동력, 자본 등을 결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가가치 생태계)’도 구축했다. 현대모비스는 이미 아이오닉5에 들어가는 배터리 시스템과 모터, 인버터 등을 공급하며 세계적 수준의 경쟁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는다. 국내외 생산거점도 크게 늘리고 있으며, 전동화 핵심인 BSA(Battery System Assembly) 수주 방식도 단품에서 시스템 단위로 바꾸고 있다. 세계 전동화 시장을 선도할 ‘규모의 경제’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현대모비스 관계자는 “국내 2차 부품사는 3000여 개로, 3차 부품사까지 포함하면 모두 6000개 수준으로 추산된다”며 “현대모비스를 포함한 1차 부품사들의 전동화 대응 전략을 통해 국내 부품업계의 재도약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전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상편()에서 이어집니다.김해시청축구단 소속 골키퍼 김승건 선수(24)는 아직 젊지만 적지 않은 굴곡을 겪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줄곧 축구선수로 살아왔지만, 스무 살에 피치 못할 일들을 겪으며 축구를 접고 군대에 갔다. 2020년 전역 뒤 독립구단에서 일당 2만5000 원을 받으며 어렵사리 필드로 돌아왔지만, 한참동안 생활고에 시달리며 갖은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했다. 그런 그의 팔엔 ‘57’이란 숫자가 새겨져 있다. 2019년 훈련소 입소 때 받은 훈련병 번호다. “그때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다신 후회할 짓 하지 않으려고” 몸에 남겼다고 한다. 그 초심을 간직한 그는 현재 K3리그 강팀인 김해시청축구단에서 57번을 달고 뛰는, 주목받는 선수로 성장했다. “저보다 어려운 처지에서 운동한 이들도 많다. 무슨 대단한 걸 한 것도 아니고, 아직 갈 길도 멀다”며 쑥스러워하는 건실한 청년의 축구 인생을 상편에 이어 들어봤다. -TNT FC라는 구단은 어떤 곳인가요.“서울에 있는 독립구단인데, 프로 입단을 목표로 한 선수들이 뛰는 곳이라 보면 됩니다. 구단 내 팀이 A, B, C로 나눠져 있는데, K5리그에 뛰는 A팀은 프로에 도전하는 거예요. 저처럼 축구를 관뒀다가 돌아왔거나, 잘 풀리지 않았지만 여전히 꿈을 꾸는 이들이 모인 구단이죠. ‘재기 전문 축구단’이란 별명도 있다더군요. 전역 뒤 아무런 연고도 없던 저를 받아준 너무나 고마운 곳이에요.” -당시 받은 일당 2만5000원으로는 생활이 어렵잖아요.“그러니 뭐라도 해야했죠. 저만 힘든 건 아니고, 모두 마찬가지예요. TNT로선 구단 운영도 힘겨울 텐데, 챙겨주는 게 고마울 따름이죠. 전 처음엔 고깃집 알바를 했어요. 용산에 있는 큰 고깃집이었는데, 낮에 운동하고 저녁에 가서 일하기 딱 좋았죠. 게다가…, 솔직히 돈이 없어서 매일 라면 아니면 맨밥을 간장에 비벼 먹었거든요. 몸 만들려면 단백질이 필요한데, 고깃집에서 일하니 얼마나 좋아요. 사장님이나 이모님들도 열심히 한다고 예뻐해 주셨어요.”-20대라지만 체력적으로 괜찮았나요.“쉽진 않죠. 알바 끝나고 집에 가면 새벽 1시 전후니 지치긴 하죠. 하지만 그 정도 고생도 못 이겨내면 어떻게 프로의 꿈을 꿀 수 있겠어요. 게다가 그 고깃집에서 일한 게 저에겐 행운이었어요. 거기서 우연히 TNT FC의 김태룡 구단주님을 마주쳤거든요. ‘너 여기서 뭐해’라며 깜짝 놀라셨어요. 근데 열심히 사는 모습이 보기 좋으셨나 봐요. 그 이후로 더 많이 챙겨주셨어요.”-2021년 서울중랑축구단으로 갔더군요.“맞아요. K3리그 팀이니까 한 단계 올라선 셈이죠. 무조건 주전으로 경기 많이 뛸 팀을 선택했어요. 선수가 경기를 안 뛰면 어떻게 되는지 겪어봤으니까요. 받는 돈도 월 50만 원으로 늘었죠. 물론 생활하기엔 턱없이 부족하죠. 당시 월세방이 35만 원이라 그거 내면…. 그때는 오전 알바를 주로 했어요. 오전에 일찍 일하고 오후 운동하고 밤에는 개인훈련하거나 쉬려고요. 온라인쇼핑몰 같은 데서 택배 포장 일을 많이 했었어요.”-다시 축구하길 잘 했다 싶던가요.“중랑에서 1년쯤 뛰고 난 뒤 한번 고비가 찾아왔어요. 열심히 해서인지, 이듬해부터 월 100만 원으로 올려주셨거든요. 근데 감독님이 같은 조건으로 양주시민축구단에서 세컨드 골키퍼로 가라는 거예요. 처음엔 별로 가고 싶진 않았어요. 강팀이니 또 한 단계 올라가는 거긴 한데, 왠지 찝찝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동계훈련 때부터 실수연발에 뭔가 잘 안 풀렸어요. 뭣보다 그 즈음부터 할머니가 아프시기 시작했어요. 제가 축구하는 이유가 할머니에게 효도하려는 건데…. 자신감이 떨어지고 집중도 안 되니 성적 역시 좋을 리가 없었죠.”-힘들었을 텐데 어찌 극복했나요.“제 자신한테 화가 나더라고요. 어렵게 결심해 돌아와선, 이럴 거면 왜 다시 시작했나 싶었죠. 해결책은 뭐 딴 거 있나요. 정말 미친 듯이 운동했어요. 혼자 아침에 러닝 뛰고, 오후에 팀 훈련 하고, 밤에도 피트니스센터 가서 몇 시간씩 있었어요. 그때 실은 신종코로나바이러스에도 걸린 적도 있거든요. 근데 아플 때도 새벽에 마스크 쓰고 사람 없는 데 가서 달리기 했어요. 후회 안 하려고 축구한 건데, 후회할 짓을 하고 있으면 안 되잖아요.”-양주에서 세컨드 골키퍼였다고 했죠.“네, 그래서 처음엔 시합에 잘 못 나갔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운동하고 준비했죠. 한번만 나가면 모든 걸 쏟아 붓겠다는 심정으로요. 그러다 드디어 기회가 왔어요. 그때가 울산 원정이었는데, 주전으로 나간 거예요. 와, 진짜 완전 집중해서 뛰었어요. 선방도 꽤 나왔고, 결국 1대0으로 이겼어요. 그때부터 연속 3경기를 스타팅 멤버로 나갔는데 모두 1대0으로 이겼어요. 그러니까 감독님 포함 동료들 보는 눈도 달라지더라고요. 그때부터 주전 골키퍼로 뛸 수 있게 됐어요.”-조심스런 질문인데, 원래 주전이던 선수는….“안 그래도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원래 주전 골키퍼는 권태안 선수라고, K1 수원삼성블루윙즈에서도 뛰던 엄청 대단한 형이에요. 저랑 이름값부터 다르죠. 제가 몇 경기 잘 했다고 자리가 바뀔 레벨이 아니거든요. 근데 이 형이 그 이후로 감독님이 경기 나가라고 하면 ‘오늘 준비가 안 됐다’ 이런 식으로 말하며 제가 나가도록 밀어주는 거예요. 지금은 대학교 코치도 하시고 계신데, 아무리 한참 후배라지만 그러기 쉽지 않잖아요. 저로선 너무 감사했어요.”-올해는 김해시청축구단으로 옮겼는데.“네, 지난해 성적이 좋다보니 여러 구단에서 제의가 들어왔어요. K3, K4 리그에선 거의 1년 계약이라, 이렇게 해마다 옮기는 경우가 잦아요. 제 입장에선 상당히 좋은 조건의 연봉도 주셨고요. (얼마나 되나요?) 금액을 밝힐 순 없지만, 그래도 이젠 또래 직장인 연봉만큼 받아요. 아르바이트나 다른 거 걱정 안 하고, 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단계까지 드디어 올라온 거죠. 주위에서 많은 분들이 도와주신 덕분입니다.”-가족들이 정말 기뻐하셨겠네요.“물론이죠. 아직 시작이지만 프로로 조금은 인정받은 거잖아요. 딴 것보다 할머니 ,아버지한테 용돈 드릴 수 있는 게 제일 좋아요. 게다가 운동선수가 좋은 연봉을 받으면, 보는 눈과 대우도 달라지거든요. 받은 만큼 더 열심히 해야겠지만, 투자한 만큼 더 신경 써서 관리해주는 거니까요. 이제 잘 되고 있으니까, 할머니만 아프시지 않으면 바랄 게 없겠어요. 해드리고 싶은 게 너무 많거든요.”-다음 꿈은 뭔가요. K2, K1?“당연히 상위리그로 가고 싶죠. 하지만 전 목표를 멀리 잡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고비가 왔을 때도 아무 생각 안 하고 운동만 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지금 현재, 오늘 하루를 열심히 하자는 주의예요. 솔직히 지금 성적이 좀 나와도, 프로리그에 올라가는 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거든요. 없진 않지만 드물죠. 괜히 기대만 부풀리다가 낙담하고 싶지 않아요. 올라갈 자신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언젠간 꼭 갈 거예요. 제가 절 믿지 않는다면 누가 절 믿어주겠어요.”-이젠 축구선수로서의 삶에 확신이 섰나요.“그건 모르겠어요. 세상 일이 제 맘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요. 다만 제 자신을 더 믿을 수 있도록 계속 훈련하고 노력해야죠. 후회 없는 인생을 살자고 축구로 돌아온 거니까요. 그건 성공하든 실패하든 끝까지 가본다는 거겠죠. 가끔 저한테 골키퍼로서 가진 장점이 뭐냐고 묻는 분들이 있어요. 요즘 골키퍼는 빌드업이나 킥력 같은 다양한 능력을 중요하게 여기니까요. 근데 전 그때마다 ‘자신감’이라 말씀드려요. 언제나 난 잘 한다, 난 막을 수 있다고 스스로 세뇌를 해요. 어떤 경기도 골키퍼가 위축되면 잘 풀리지 않거든요.”-시합뿐 아니라 모든 게 그렇죠.“그렇긴 하죠. 그런데 골키퍼는 더 그래야 해요. 질문 하나 드릴게요. 평범한 걸 잘 막는 게 좋은 골키퍼일까요, 막기 어려운 슛을 잘 막는 게 좋은 골키퍼일까요?”-어렵네요. 실수 없는 게 나은 거 같긴 한데요.“맞아요. 그런데 골키퍼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건 언제인 줄 아세요. 분명히 골이 될 것 같은 슛을 선방했을 때예요. 데굴데굴 굴러오는 공을 막았다고 환호하진 않죠. 하지만 진짜 좋은 골키퍼는 기본을 잘 지키는 선수예요. 어려운 공은 못 막을 수야 있지만, 평범한 슛을 놓치면 ‘저게 골키퍼냐’ 하지 않겠어요. 눈에 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화려하지 않아도 게임을 버텨내는 존재여야 하는 거죠.”-요즘 일과는 어떻게 되나요.“운동 말고는 다른 일정은 거의 안 잡아요. 오전 운동하고, 오후에 좀 쉬고, 저녁에 다시 운동하고. 사실 제가 술 한 잔 하는 거 정말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리그 때는 웬만하면 입에 안 대요. 어쩌다 가볍게 마셔도 시합 뛰면 바로 드러나요. 없는 시간을 쪼개서 알바해가며 여기까지 왔는데, 지금부터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부상당하지 않도록 몸 관리도 잘 해야 하고요.” -김승건 선수에게 축구란 뭘까요.“제 가족이자 꿈이에요. 초등학교 때부터 제 곁을 지켜줬으니 가족이나 마찬가지고요. 가족한테 보답하고 싶어 시작한 게 축구기도 하고요. 그런데 요즘은 제 자신을 위해 하는 거란 생각도 많이 해요. 가족이 지금껏 희생한 이유도 결국 제가 좋은 인생을 살길 바라는 거였잖아요. 그러니 제가 잘 돼야 우리 가족도 행복한 거죠.”-가족에 대한 애정이 무척 깊어요.“제가 부잣집 아이들처럼 경제적으로 지원을 많이 받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가족들의 사랑과 믿음은 누구보다 컸다고 자부합니다. 게다가 저보다 더 어려운 처지로 자란 친구들도 많거든요. 제가 갖지 못한 걸로 속 끓이기보단 제가 누린 것에 감사하고 싶어요. 유럽리그 진출하는 선수들 보면서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런데 주변 탓, 환경 탓 한다고 달라지는 게 있나요. 저보다 기회를 못 얻고, 중도에 축구를 관둔 선수들이 얼마나 많은데요.”-앞으로 바라는 게 있나요.“축구는 제가 열심히 할 거니까, 어떻게든 결과가 나올 거라 생각해요. 현재로선…, 할머니가 아프시지만 않으면 좋겠어요. 해드리고 싶은 게 너무 많거든요. 물론 다시 축구선수로 기회를 잡은 걸 제일 기뻐하시는 게 할머니예요. 당신께선 지금도 너무 행복하다고 말씀하시지만, 더 호강시켜 드리고 싶어요.”-언젠가 K1리그에서 뛰는 걸 보고 싶네요.“하하, 저도요. 혼자 상상도 해보곤 하죠. 멀지 않은 미래였으면 좋겠어요. 왜 한동안 ‘중꺾마(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란 말이 유행했잖아요. 전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아요. 왜냐면 누구나 한번은, 아니 여러 번 꺾이거든요. 살면서 꺾이지 않길 바라는 건 욕심이에요. 그때마다 어떻게 하는가가 중요한 거 같아요. 거기서 멈추면 그냥 끝인 거죠. 그 다음이 보고 싶으면 뭐든 해봐야 해요. 실패를 받아들여야 또 일어날 힘도 생기지 않을까요. 중요한 건 꺾이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라고 믿습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난 지금까지 9000번 넘게 슛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또한 지금까지 300번이 넘게 경기에서 패배했다. 사람들이 날 믿어 주었을 때조차, 26번이나 결정적인 슛을 놓쳤다. 나는 계속해서 실패하고, 실패하고, 실패했다. 그것이 내가 성공한 이유다.”(마이클 조던)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있겠지만, 현재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축구’다.미국 통계사이트 월드아틀라스에 따르면 축구는 35억 명이 넘는 팬을 보유해 2위 크리켓(약 25억 명)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러니 올해 가장 돈 많이 번 스포츠 스타 순위에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리오넬 메시, 킬리안 음바페가 1~3위인 건 어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허나 알다시피, 모든 축구선수가 이런 영화를 누리는 건 아니다. 지난해 국내 프로축구리그(K1리그) 선수 평균연봉은 2억8211만 원. 상당한 액수지만, 최저연봉을 보면 8년째 2400만 원에 머물고 있다. 게다가 이마저 최고 리그인 K1일 경우다. 유튜브 등에 출연한 아마추어리그(K5, K6, K7) 선수들은 “하루 몇만 원 받는 이들이 많다. 심각하게 생계가 쪼들린다”고 털어놓기도 했다.현재 세미프로 K3리그에 있는 김해시청축구단 소속 골키퍼 김승건 선수(24)도 상황은 비슷했다. 어릴 때부터 축구를 해왔지만 사정상 관두고 군대를 다녀온 그는, 다시 시작했을 때 한 구단에서 월 50만 원 정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월세 35만 원을 내고 나면 남는 건 15만 원. 결국 고깃집이나 인터넷쇼핑에서 일하며 근근이 버텨야 했다. 다행히 실력을 인정받으며 지금은 사정이 한결 나아졌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기만 하다. 김 선수에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서 조금은 비켜나 있는 현실 속 축구선수의 삶을 들어봤다.-먼저 자기소개를 부탁드려요.“1999년생 축구선수 김승건입니다. 경남 거제에서 태어났는데, 자란 곳은 창원이에요.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하신 뒤 할머니 아버지 누나 이렇게 네 명이서 쭉 살았습니다. 이런 얘기 하면 딱하게 보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전혀 개의치 않아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고, 연락도 안 합니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정성껏 키워주셨기에 아쉬운 것도 없어요. 누구나 각자의 사정이 있는 거니까요.”-쿨해서 좋네요. 축구는 창원에서 시작했나요.“네. 창원초 3학년 때 운동장에서 공차며 노는데, 축구부 코치님이 부르시더라고요. 축구 해 볼 생각 없냐고. 뭐, 그땐 운동신경 좀 있어 보이면 그냥 권유해보는 거 같아요. 덥석 한다고 했죠. 어린 마음에 엄청 유명한 선수가 될 줄 알았죠, 하하. 아버지도 하고 싶으면 해보라고 하셨어요. 그땐 자식 하나 운동시키는데 그렇게 돈이 많이 들 줄 모르셨을 거예요.”-처음부터 골키퍼를 지원한 겁니까.“아뇨. 그런 경우는 거의 없을 걸요. 필드플레이어로 뛰다가 5학년 때쯤인가 골키퍼 맡고 있던 형이 다치는 바람에 얼떨결에 한 게임 뛰었어요. 근데 꽤 잘한 거예요. 그때부터 코치님이 전향을 권유해서 시작한 거예요. 솔직히 처음엔 반항도 하고 고민도 좀 했어요. 솔직히 골키퍼는 안 멋있다고 생각했거든요.”-안 멋있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그렇잖아요. 공격수에 비해 그다지 환호도 못 받고, 제일 뒤에 처져 있는 느낌도 들고. 어린 마음에 일단 골 넣고 싶기도 하고요. 약간 창피함 같은 것도 있었어요. 요즘은 인식이 많이 좋아졌지만, 저 때만 해도 골키퍼를 축구 잘하는 선수로 생각하질 않았거든요. 또래보다 키가 크고 팔도 긴 편이라 골키퍼에 잘 맞는 체형(현재 신장 189cm)이긴 했지만, 매력 없는 포지션이란 생각이 컸어요. 그래서 아예 축구를 관둘 생각도 몇 번 했었어요.”-근데 어떻게 계속하게 됐네요.“그게… 하다 보니 재밌더라고요, 하하. 6학년 때 시합 나가서 무실점 경기를 꽤 했어요. 칭찬을 많이 받으니 자신감도 붙었고요. ‘어, 나 좀 잘 막는데’하고 살짝 우쭐해지는 거죠. 아마 그런 게 지금까지 이어진 게 아닌가 싶어요. 뭐든 자신감이 없으면 결과도 안 좋은 법이잖아요. 제가 잘 할 수 있단 믿음이 생기면서 골키퍼란 포지션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기도 했고요.”-마산중앙중학교, 경남정보고등학교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고 들었어요.“에이, 진짜 잘했으면 지금 엄청 유명한 선수가 됐겠죠. 다만 그런대로 성적이 나쁘지 않았던 건, 중학교 때 스승님을 잘 만난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이효섭 코치님이란 분인데 골키퍼 출신이시라 기본기부터 제대로 배웠습니다. 그때는 꾸중도 많이 듣고 무서웠는데, 지금 생각하면 진심으로 애정을 갖고 가르쳐주셨어요. 뭐든 지나고 나면 다 보이는 법이잖아요. 지금도 자주 연락드리고 있어요. 고교 때는 다들 아는 축구협회 소속 청소년 국가대표는 아니지만, 축구연맹에 뽑는 청소년 대표에 뽑혀서 국제경기도 나가긴 했죠.”-그리 잘했는데 왜 관둘 생각을 여러 차례 했던 건가요.“뭐 뻔한 얘기라 말씀드리기 좀 그런데…. 일단 다른 친구들처럼 부모님들이 자주 학교에 찾아와 뒷바라지하질 못하다 보니, 별의별 소리를 다 들었거든요. 어린 마음에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또 아시겠지만, 요즘은 나아졌나 모르겠는데 옛날엔 운동부 규율이 엄격했잖아요. 선배들의 얼차려나 구타도 흔했고. 개인적으로는, 없는 살림에 제가 운동을 하니 누나가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누나가 청력이 약해 더 보살핌을 받아야 했는데, 그것도 미안했고…. 이래저래 속앓이도 많고 방황했던 시기였어요.”-그걸 버틸 수 있는 힘은 뭐였습니까.“제가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겠는데, 그런 일이 생겨도 오래 맘에 담아두지 않는 편이에요. 시간이 지나면 다 사라지겠거니 했죠. 자꾸 나쁜 쪽으로 생각하면 될 일도 안 되는 거잖아요. 그리고 전 축구 하는 이유가 확실했거든요. 축구가 좋기도 했지만, 고생하신 할머니 아버지한테 효도하고 싶었어요. 솔직히 어릴 때부터 공을 찼으니 공부 쪽으론 답이 없었죠. 축구 잘하면 돈 많이 버니 성공할 수 있겠다 싶었죠. 게다가 고등학교 때까진 제가 진짜 잘 하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 희망이 있으니까 다 잘 될 거라고 자신을 다독였어요.”-언제부터 맘대로 안 풀린다는 느낌을 받았나요.“음…, 어렵네요. 굳이 따져보면, 아까 말씀드린 축구연맹 청소년대표 이후였던 거 같아요. 거기서 국제대회 나가서 우승했고 최우수 골키퍼 상도 받았거든요. 주위에서 잘한다고 떠받들어주니까 저도 한껏 고무됐죠. 근데 당시 대표팀에 골키퍼가 4명 있었는데, 나머지 3명은 K1 프로구단에 입단하거나 명문대 축구부로 갔어요. 정말 잘 됐고 축하할 일인데, 저한테는 제대로 된 오퍼가 없는 거예요. 그때 뭔가 이상하고, 억울한 느낌도 많이 받았죠.”-학연 지연 같은 거에 밀린 건가요.“모르겠어요. 솔직히 이젠 알고 싶지도 않고요. 생각해봤자 속만 쓰리죠. 다만 그때 어린 마음엔 지방에 있다 보니 사람들 눈에 잘 들어오질 않는 건가 싶었어요. 그래서 대학도 수도권에 있는 곳으로 진학했어요. 실은 지방에 있는 다른 대학에서 더 좋은 조건을 제시받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땐 일단 서울 쪽으로 가야 한다는 조급함이 앞섰어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실력을 보여주면 기회도 다시 생기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었죠.”-대학은 1년만 다니고 파주시민축구단으로 갔더군요.“그게 좀 복잡한 사정이 있었어요. 대학 감독님이 연결해주셔서 간 건데, 실은 일본 진출을 위한 포석이었거든요. 국내에선 곧장 프로리그로 올라가기가 쉽지 않으니까, 일본에서 선수생활하면 가능성이 더 열린다고 본 거죠. 실제로 한두 팀이 관심을 보여줘서 준비도 착실히 진행했고요. 근데 중간에 뭐가 꼬이는 바람에…. 파주에 갔더니 다들 한참 나이 많은 선배들 중심인 팀이라 저한테 출장 기회가 거의 돌아오질 않았어요. 그렇게 경기를 못 뛰다 보니 일본 쪽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서질 않더라고요. 주위에서 많이 도와주셔서 계약 성사 직전까지 갔는데, 결국 무산돼 버렸어요.”-실망감이 컸겠습니다.“거대한 벽에 부딪힌 느낌이었어요. 넉넉한 집안 환경이 아닌데도 어렵사리 축구를 해왔는데, 출구를 찾으려고 몸부림쳤지만 실패한 기분이랄까. 그대로 파주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도 여전히 경기는 못 뛰고 똑같은 삶이 반복될 거 같고. 이럴 거면 다 관두자 싶었던 거죠. 그때가 딱 스무 살이었는데, 왜 그 나이에는 ‘에이, 군대나 가자’ 이런 생각 많이 하잖아요. 별생각 없이 지원했는데, 덜컥 영장이 나와 버린 거죠. 그렇게 내 축구 인생은 끝나는 거구나 싶었어요.”-군대에서 잘 준비해서 다시 할 수도 있잖아요.“그땐 그런 기대는 하질 않았어요. 갈수록 미래가 불투명하게만 느껴졌거든요. 계속 집에다 손 벌리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고. 스무 살이 넘었으면 제가 가계에 보탬이 돼야 하는데,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었죠. 군대 가서 다른 일을 찾아보자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어요. 실제로도 군대에서 재미로 하는 시합에야 몇 번 나갔지만 그게 다였죠. 운동도 아예 관둬서 축구선수로서의 몸 상태가 아니었어요.”-흔한 말로 군대에 말뚝 박으려고 했다면서요.“네, 그럴 뻔했어요. 당시 행정관님이 엄청 권유했어요. 운동부 습관이 남아서 그런지 뭐든 안 빼고 열심히 하긴 해죠. 그걸 좋게 보셨던지 자기가 도와줄 테니 하사관으로 지원하라고 하더군요. 저도 전역 뒤에 뭘 해야 할지 고민하던 차라 꽤 흔들렸어요. 한참 생각 끝에 아버지한테 전화해 상의했는데 ‘어떻게 결정하든 네 뜻대로 해라’고 하시면서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느냐’고 물으시더군요. 그 말이 그렇게 가슴을 콕콕 찔렀어요. 나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을까. 정말 이렇게 축구를 관둬도 되는 걸까.”-아버지가 멋지십니다.“네, 아버지 앞에선 이런 얘기한 적 없지만, 제 아버지라서 너무 고마운 분이에요. 간판 일 하시면서 홀로 어렵게 집안을 꾸려오셨어요. 뭣보다 항상 절 믿어주고 옆에서 담담하게 지켜주세요. 그래서 ‘나 다시 축구해도 될까’라고 했더니 바로 ‘그럼, 나라면 무조건 한다’고 하시는 거예요. 당연히 이렇게 관뒀다가 다시 하는 게 엄청 어려운 일인 줄 아시면서도, 자식이 마음에 미련이 남지 않길 바라셨나 봐요. 지금도 저한테는 제일 친한 친구가 아버지예요. 그 덕분에 다시 축구 하겠다는 결심도 설 수 있었어요.”-오래 쉬었고 소속도 없어서 쉽진 않았겠어요.“그렇죠. 그냥 전역 뒤에 무작정 서울로 갔어요. 군대에서 월급 꼬박꼬박 모아서 400만 원쯤 있었거든요. 할머니 아버지 용돈 좀 드리고 나머지 챙겨 들고 갔어요. 어쨌든 거기서 무슨 수든 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다행히 아는 분 소개로 독립구단인 서울 TNT FC에서 운동할 수 있게 됐어요. 일단 몸도 다시 만들고 경기감각도 찾아야 해서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때 받은 돈이 일당 2만5000 원이었어요. 사실 받아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죠. 그렇게 제일 밑바닥에서 다시 축구를 시작하게 됐어요.”(하편에서 계속)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만화를 통해 세상을 보려 합니다. 1965년 비틀즈 싱글 곡 ‘데이트리퍼(Day tripper)’는 “당일치기 여행자”를 일컫습니다. 만화를 본다는 건 잠깐 일상을 벗어나는 여행이니까요. 브라질 그래픽노블 ‘데이트리퍼’도 영감을 줬습니다. 이 만화엔 삶을 담는 소설가를 평생 꿈꾸지만, 실상은 죽음을 알리는 부고(訃告) 담당 기자가 나옵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우리네 인생과 무척 닮지 않았나요.배경은 알록달록 파스텔 톤의 어여쁜 색감. 등장인물은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운 곰돌이 얼굴. 오롯이 꿈과 희망과 사랑만이 ‘넘쳐나야만 하는’ 세상인데…. 어느새 스멀스멀 지린내가 피어나고, 검붉은 핏자국이 음습하게 묻어난다. 이건 천국일까 지옥일까, 아니면 지독한 현실일까.지난해 12월부터 네이버에서 연재하는 웹툰 ‘에브리띵 이즈 파인(Everything Is Fine)’은 어딘가 일그러진 프리즘 같은 만화다. 눈앞에 근사한 무지개를 환히 비춰주지만, 실상은 왜곡과 분열이 남긴 허상일 뿐. 제목과 달리, 겉은 멀쩡해 보여도 속은 뭐 하나도 괜찮지 않은 일상. ‘디스토피아 스릴러’라는 작가 마이클 베첼의 소개가 딱 맞춤한 작품이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그의 말마따나, 만화는 감시와 인질이란 쇠구슬을 주렁주렁 발목에 매단 ‘보통사람들’을 비릿하게 그려낸다. 화사한 2층집에서 도덕교과서에나 나올 말과 행동을 주고받는 그들은, 불변의 미소를 머금은 곰돌이 탈 아래 속내를 감춘 채 하루하루를 반복한다. 길목마다 빽빽이 들어선 감시카메라는 우리를 지켜주는 감사한 존재라 믿는 척하며. 그리고 그 마을엔, 어느 집에도 ‘아이들’이 없다.지난달부터 시즌2를 선보인 ‘에브리띵…’은 그간 정교하게 뿌려둔 떡밥들을 야금야금 회수할 모양새다. 이상사회의 정점으로 보였던 호수마을로 간 주인공 매기와 샘 부부는 이 거대한 연극판의 실체에 한 발짝씩 다가서고 있다. 조만간 이런 스타일의 작품들에서 빠질 수 없는 ‘독재정부와 반란군’ 얘기도 본격 등장할 터. 부부는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가 될 수 있을지. 그리 통속적인 결말을 마련하진 않았을 거란 기대를 조심스레 걸어본다.이 작품은 보면 볼수록 친숙하면서도 독특하다. 그간 미국 대중문화가 자주 꺼내먹던 ‘중산층 신화(주류 백인사회)’란 소재를 여실히 차용하면서도 꽤나 이질적인 변주로 빚어낸다. 한때 ‘워라밸’의 표상으로 여겨지던 미 중산층을 상징하는 요소는 듬뿍 가져오되, 어떤 표정도 읽을 수 없는 ‘탈’이란 장치를 심어놓아 내재된 불안과 갈등이 흐릿하게 배어나도록 만든다. 더욱이 만화의 장르적 특성인 ‘소리의 부재’는, 친절하지 않아서 창의적인 작가의 화법과도 절묘한 앙상블을 이루며 쫄깃한 질감의 긴장을 선사한다.여기서 하나 더 주목할 건, 이젠 다소 전형적인 기시감마저 주는 ‘중산층 신화 비틀기’가 최근 변모해가는 과정이다. 기존 경향이 영화 ‘아메리칸 뷰티’(2000년)나 ‘트루먼 쇼’(1998년)처럼 이상향이란 미명 아래 감쳐진 속살을 드러내는데 치중했다면, 최근엔 그런 이데올로기 자체를 무너뜨릴 대상으로 바라본다.예를 들어,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완다비전’(2021년)은 중산층 신화를 과거에 박제된 환상으로 소재 삼았다. 최근 개봉한 영화 ‘바비’는 아예 자본주의와 남성중심사회가 낳은 왜곡된 조작으로 평가 절하한다. 심지어 바비에선, 관점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를 취향이나 선택의 문제로 격하시켜 ‘주류’의 타이틀까지 반납하라 요구한다.그런 맥락에서 ‘에브리띵…’은 그만한 급진성은 부족하나,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이 신화를 파고든다. 빅 브라더가 만든 계급사회와 그에 대한 대항이란 ‘스타워즈’ 구도다. 이는 언제나 그렇듯, 피아를 명확히 구분지음으로써 ‘편들기의 당위성’을 부여해 독자에게 내적 친밀감을 안겨준다. 그 실타래를 풀어내는 과정이 얼마나 설득력 있느냐가 관건이겠지만, 기왕이면 다스베이더 같은 매력적인 적이 등장해준다면 금상첨화겠다.아쉬운 대목도 있다. 이 만화가 지닌 특유의 ‘템포’가 주는 이질감이다. 작가가 웹툰이란 형식을 잘 활용해 흐름을 조였다 풀었다 하는 속도 조절은 이채롭지만 즐겁다. 앞서 말했듯, 여느 만화들처럼 친절하지 않기에 다양한 중의적 해석을 낳는 장점도 크다. 다만 몇몇 전환 과정을 보면 뭔가 건너뛰듯 뭉개고 지나가는 경우가 없지 않다. 이는 요즘 웹툰의 스토리텔링에 길들여진 우리 탓일 수도 있으나, 가끔 쉽사리 맥이 빠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허나 그런 서운함은 빙산의 일각에 그친다. 이 외제(外製) 만화는 바다 속에 감춰진 보물덩어리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거대하고 푸짐하다. 특히 ‘웹소설 공장에서 찍어낸 회귀물 천하’가 돼버린 국내 웹툰 시장(물론 수작들도 있다)에서, 이리도 작품성과 개성이 물씬한 만화를 만나는 건 너무나 반갑다. 이미 ‘에브리띵…’ 팬들은 알겠지만, 최근 만화에서 이토록 ‘그림자’를 절묘하게 써먹는 작품은 본 적이 없다. 단지 궁금해진다. 그 그림자는 빛이 만들어낸 걸까, 아님 어둠이 존재했기에 빛도 태어난 걸까. 유토피아는 어쩌면 디스토피아의 또 다른 얼굴일지도 모른다. 영원히 웃고 있는 곰돌이처럼.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새로운 시작 전라북도 귀농·귀촌”을 슬로건으로 내건 ‘전라북도 귀농귀촌 상담홍보전’이 28일부터 사흘간 서울 서초구 aT센터 제1전시장에서 열린다. 전북도가 주최하고 전라북도농어촌종합지원센터(귀농귀촌부)가 주관하는 이 행사는 전북 13개 시·군이 참여한다. 귀농·귀촌을 희망하는 도시민과 청년은 일대일 상담을 통해 체계적 지원정책 및 길잡이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다. 신청은 홈페이지에서 가능하다. 올해는 2023년 전북 귀농귀촌 우수사례 공모전 수상자들의 정착기와 ‘생애설계란 무엇인가’ ‘소비 트렌드와 창업 아이템 찾기’ 등 전문가 강연, 귀촌 청년 토크쇼 등을 선보인다. 전북 6차 산업 인증업체가 참여한 다양한 먹거리도 만날 수 있고, 전북 특산품과 전통주를 주제로 한 페어링 쇼도 열린다. 전북 관련 퀴즈를 풀고 특산품을 상품으로 받는 퀴즈 프로그램과 행운복권 이벤트 등도 마련된다. 2026년 중장기계획 ‘대한민국 농생명산업수도, 전라북도’를 비전으로 선포한 전북도는 귀농·귀촌인의 안정적 정착을 위한 6대 전략도 내놓았다. △청년농 창업 1번지 조성 △수요 창출을 통한 농가소득 증대 △농생명 신산업 생태계 고도화 △위기대응 지속가능 농업구조 전환 △안심하고 농업하는 경영안정 강화 △누구나 살고 싶은 활력 농촌 조성 등이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KTR·KCL, 해외인증 전 주기 기술 자문 지원 윤석열 대통령이 수출플러스 달성을 위한 세일즈 외교의 일환으로 최근 폴란드를 방문해 총 33건의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 가운데 KTR이 의료기기 및 의약품 임상시험을 위해 폴란드 임상시험기관인 퓨어클리니컬과 체결한 업무협약은 의료기기 및 의약품 분야 해외 인증 획득에 어려움을 겪는 우리 기업의 돌파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기술표준원은 ‘해외 인증 종합지원 전략’을 발표하고 국내 8개 시험인증기관과 협력해 국내 기업의 해외 인증 취득을 밀착 지원하고 있다. 시험인증기관의 기업 지원 사례를 소개하는 이번 시리즈에서 기업 내 해외 인증 전문 인력의 빈자리를 맞춤형 컨설팅으로 채워주는 한국화학융합시험연구원(KTR·원장 김현철)과 한국건설생활환경시험연구원(KCL·원장 조영태)을 살펴봤다.● 중소기업의 해외 인증 전문가 KTRKTR은 7개 국내시험소와 7개 해외지사를 보유하고 있으며, 40여 개국 200여 개 기관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폭넓은 글로벌 협력 기반을 구축해 우리 기업의 수출을 돕고 있다. 특히 국내기관 중 유일하게 유럽 의료기기 인증(MDR·Medical Devices Regulation) 심사원 자격으로 의료기기 품질 심사 수행이 가능한 CE MDR 인증 대응 체계를 갖추고 있다. 또한 유럽과 중국, 일본 등 각국 화학물질 규제 극복 서비스와 유엔 지정기관으로서 탄소 중립 국내외 검증·인증 등 KTR만의 특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T사는 의료용 봉합사 제조업체로서, 수출국별로 다른 인증 및 규제에 대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왔다. 특히 브라질 수출 과정에서 브라질식의약품감시국(ANVISA)의 인증 취득을 준비하면서 현지 인증에 대한 요구 사항 및 절차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T사의 의뢰를 받은 KTR은 해외 인증 전담 부서 전문가를 통해 브라질 규제 상담부터 현지 대리인 선정, 기술문서 작성 및 심사, 인허가 승인까지 수출 전 과정에 걸친 원스톱 인증 지원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 결과로 T사는 인증을 획득하기까지 최대 6개월이 단축됐고, 2022년 10만 달러의 수출 실적을 거뒀다.● 해외 인증을 위한 세계적인 인프라 KCLKCL은 건설, 에너지, 생활안전, 물류, 이차전지 등 산업 전 분야에 걸쳐 시험·평가·인증 및 연구개발 등을 수행해 오고 있으며, 24개국 82개 기관과 해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최근 핀란드 유로핀스(Eurofins) 그룹 내 배터리 시험소를 개소해 중대형 배터리 시험평가 인프라를 구축해 국내 기업의 유럽 진출을 지원하고 있으며, 독일인증기관(DIN CERTCO)으로부터 국내 유일의 생분해성 소재 분야 시험기관으로 지정받는 등 해외 기관과의 협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식품용기, 포장재 등에 사용되는 생분해성 바이오플라스틱(PLA) 시트 생산업체인 E사는 PLA 시트의 독일 수출을 위해 산업퇴비화 관련 인증이 필요했다. 당시 국내에는 시험기관이 없어 독일 시험인증기관에 직접 시료를 보내 시험을 진행하려 했지만 현지 담당자와의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E사는 생분해 평가시설 등 관련 인프라를 갖춘 KCL을 통해 DIN CERTCO 시험을 의뢰해 인증까지 신청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E사는 하반기부터 세계 최초로 석유화학계 플라스틱 수준을 대체할 수 있는 생분해성수지제품 커피캡슐을 수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앞으로도 두 기관은 해외 네트워크와 전문성을 활용해 해외인증지원단과 함께 국내 수출기업의 해외 인증 취득 전 주기별 맞춤형 기술 자문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다. 더불어 해외인증지원단은 기업 내부 인력의 해외 인증 역량 강화를 위해 중소·영세 기업을 대상으로 전문성 향상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할 예정이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상편()에서 이어집니다.“갈수록 산티아고로 가는 방향을 알려주는 노란 화살표도 늘어났다. 카미노에선 종종 어떤 강력한 목표에 이끌리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노란 화살표 덕분에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가 명확했다. 일상에서도 그런 화살표를 가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김희경의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에서)소셜미디어 시대에 등장한 인플루언서는 독특한 위상을 지닌 존재다. 타인의 관심과 공감을 얻어 영향력을 쌓고, 다시 그 힘을 발휘해 반대급부를 얻는다. 그건 주로 자기만족이나 인기, 명예 등 무형의 것이지만, 때로는 상당한 물질적 수익으로 이어진다. 이에 최근 인플루언서는 많은 이들이 선망하고 도전하려는 직업이 됐다.그렇다면 실제 ‘직업’으로서 인플루언서는 어떻게 봐야 할까. 어떤 일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스마트폰과 모니터를 통해 ‘보여주는’ 게 일인 인플루언서의 세계는 특히나 속사정을 알기 어렵다. ‘여행킬러도로시’로 활동하는 여행 인플루언서 김슬기 씨(36) 역시 “당연히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며 “직장은 전쟁터, 바깥은 지옥(만화 ‘미생’)은 여기도 마찬가지”라 했다. 부산의 평범한 직장인에서 인스타그램 팔로워 15만 명의 인플루언서가 된 그에게 ‘인플루언서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들어봤다.-2016년 처음엔 블로거로 시작한 거죠.“맞아요. 네이버 블로그로 출발했어요. 초기엔 제 ‘일기장’이나 다름없었죠. 여행은 사비로 다니며 고군분투했죠. 블로그 방문객도 몇 명 되질 않았죠. 지금 생각하면 겁이 없었어요. 일단 좋아하니까 한번 해보자는 맘으로 했어요. 새로운 곳을 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만 해도 얻는 게 있다고 믿으며 계속 밀고 나갔던 것 같아요. 그동안 직장생활 때 모아뒀던 돈은 ‘착실하게’ 까먹으면서요, 하하.”-언제쯤부터 ‘돈벌이’가 된 거였나요.“대략…, 1년 반 정도 걸렸어요. 차츰차츰 방문객이 늘고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여행 관련 회사 등에서 메일이나 쪽지가 오더라고요. ‘이런저런 프로젝트가 있는데 같이 해보지 않겠느냐’는 식이었죠. 처음엔 스팸 메일인가 싶어 무시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접촉해보니 유명한 회사들도 적지 않았고, 상당히 좋은 제안을 해주시더라고요. 그때부터 ‘아, 이제 수익을 낼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좀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있나요.“아마 사람마다 분야마다 다르겠지만, 제 경우엔 네이버는 하루 평균 방문객이 1만 명을 넘어서던 시점으로 보면 될 거 같아요.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은 소위 ‘대박 콘텐츠’가 하나 있으면 구독자나 팔로워가 갑자기 늘기도 하지만, 블로그는 거의 그런 일이 없어요. 꾸준히 콘텐츠를 업로드하면서, 방문객도 그에 따라 조금씩 늘어나죠. 그래도 이쪽 업계에선 1년 반 만에 그렇게 성장한 거면 대단한 거라고 하시긴 했어요. 인스타그램 역시 ‘케바케(케이스 바이 케이스)’지만, 최소한 팔로워가 3만 명은 넘어야 작게라도 제안이 들어오는 거 같아요.”-그때까지 버티는 게 불안하지 않았나요.“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죠. 특히나 통장에 ‘따박따박’ 월급 들어오던 직장생활을 해봤잖아요. 계속 빠져만 나가니 걱정이 되죠. 그나마 부모님이 크게 내색을 안 하셔서 다행이었어요. 회사도 자기가 알아서 다녔는데 어떻게든 뭐라도 하겠지 싶으셨대요. 감사한 일이죠. 근데 ‘불안’은 지금이라고 없지 않아요. 저희는 결국 프리랜서잖아요. 더구나 사람들 평판이 중요하게 작용하니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특히 팬데믹을 겪으면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도 벌어진다는 걸 알게 됐죠.”-여행 쪽이라 특히 타격이 컸겠네요.“그때 힘들지 않았던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하지만 여행 쪽은 말 그대로 ‘셔터 내린’ 상황이긴 했죠. 저는 특히 해외여행 전문이어서 팬데믹 터진 뒤 1년 동안 수익이 ‘0’이었어요. 이걸 계속할 수 있을지 불확실했죠. 그동안 쌓은 게 억울해서 국내 여행을 다루거나 다른 콘텐츠를 하며 버텼어요. 3년 동안 견뎌낸 스스로를 조금은 칭찬해주고 싶네요. 그때 포기하고 떠난 분들도 적지 않거든요. 그런데 너무 이해가 되는 게…, 솔직히 생계가 막막한 상황이라면 쉽지 않았을 거 같아요.”-어려움을 이겨낸 비결이 있을까요.“에구, 거창한 게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좋아하는 일이라 그랬나 봐요. 처음 시작할 때 참 많이 헤맸거든요. 글과 사진으로 정보를 전달한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요. 특히 글쓰기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생각의 전환’을 했죠. 좋은 글, 대단한 글을 쓰려 하지 말자. 그냥 평범한 20대 여성이 여행 다녀온 뒤 친구한테 ‘여기 갔더니 이런 게 좋았어’ 알려주는 기분으로 정리해보자. 그때부터 저도 어깨에 짐을 내려놓고, 콘텐츠도 주목받기 시작했어요. 동네 친구 같은 애가 편하게 알려주는 여행정보처럼 느껴지신 게 아닐까 싶어요. 단어도 어렵거나 전문적인 걸 피하려고 했고요. 그렇게 ‘나만의 것’을 돌탑처럼 쌓아 올린 거라 더 놓고 싶지 않았어요.”-실제로 얼마나 버세요.“너무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시는 거 아니에요, 하하. 아무래도 들쭉날쭉하죠? 수익이 거의 없을 때도 있고, 일이 몰릴 땐 기대보다 훨씬 많이 벌고. 음…, 팬데믹 전에 한참 잘 될 때는 제 또래 직장인보다 훨씬 연봉이 높았죠. 그때는 건방지게 ‘앞으로 몇 년 동안 이렇게 벌면, 부산에 조그만 아파트 하나 마련할 수 있겠는데’라는 생각도 했으니까요. 가족이랑 해외여행 가면서 ‘플렉스’도 꽤 했어요. 뭘 해도 잘 될 거라는 착각에 빠진 거죠. 하지만 8년 동안 이런저런 일을 겪고 나니,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낍니다.”-나쁜 짓 한 것도 아닌데, 그럴 필요 있나요.“그래서 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는 거죠. 세상일이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요.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건 아니잖아요. 싫어도 해야 하니까 하는 경우도 많고요. 근데 전, 어쨌든 하고 싶은 일을 찾았고 벌이도 나쁘지 않은 거잖아요. 그런 행운을 제가 잘 나서 찾은 게 아니라는 걸 알아요. 특히나 인플루언서는 감사하게도 팔로워와 방문객, 구독자들 덕분에 먹고사는 거니까요. 주위 사람들, 세상 사람들 덕에 좋은 직업을 가졌으니 몸가짐도 조심해야지란 생각을 하게 돼요.”-하긴 사람은 어디서 어떻게 마주칠 줄 모르죠.“네, 저는 원래 제 신상이나 얼굴을 공개하지 않았어요. 부담스럽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했거든요. 근데 인지도가 올라가니까 그게 문제가 되더라고요. ‘여행을 직접 다녀온 거 맞느냐’는 의심을 받더라고요. 포털사이트에서 확인 들어온 적도 있어요. 그래서 결국 제 자신을 드러내게 된 거죠. 연예인이야 주목받는 게 일이지만, 저로선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주변에서 다 알게 되니까, 더 신중해야겠더라고요. 게다가 여기도 사회생활인지라 업계의 여러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에 처신이 중요합니다.”-신상 공개 뒤 불편한 점은 없었나요.“있죠. 아무래도 악플도 늘어나고요. 다행히 크게 신경 안 쓰는 편이에요. 그냥 차단해버리고 심하면 신고하면 되죠, 뭐. 처음엔 힘들었죠. 밤에 잠을 못 잤어요. 하지만 그분들은 제 얘길 듣기보단 그냥 본인 감정만 쏟아내는 거더라고요. 물론 적절한 지적이나 비판은 받아들여야죠. 그렇게 꼼꼼히 봐주시면 고맙기도 해요. 그보단 아무래도 여성이라 조심스러운 면이 있죠. 이상한 메시지야 수도 없이 오고, 여행 사진 올리면 계속 ‘나도 거긴데 만나자’는 쪽지도 보내요.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콘텐츠를 현장에서 바로 올리는 경우는 절대 없어요.”-어디나 사람 관계가 중요하군요.“그러니까요. 프리랜서에겐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어요. 직장인이야 함부로 자를 수 없지만, 저희는 맘에 안 들면 안 쓰면 그만이잖아요. 실제로 평판이 안 좋은 분들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하더라고요. 프로젝트를 제안하는 업체분들과도 잘 지내야 하지만, 인플루언서 동료들하고도 원만한 관계를 맺어야 해요. 여행 투어 같은 경우엔 여럿이서 같이 가는데, 다른 분들이 함께 가길 꺼리면 일이 들어오겠어요?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지인 거 같아요.”-나이 상관없이 인플루언서를 꿈꾸는 이들이 많아요.“그게 이 일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죠. 청년도 도전할 수 있고, 경륜 있는 어른들도 나름 무기를 지닌 거니까요. 나이대에 맞춰 콘텐츠를 바꿔나갈 수 있는 것도 장점이에요. 친한 인플루언서 언니가 있는데 20대엔 화려한 솔로 느낌으로 하더니 결혼 뒤엔 신혼부부 콘셉트, 아이 낳고는 가족 분위기로 가요. 그런 성장 일지를 좋아해 주시는 분들도 많고요. 결국 중요한 건 얼마나 이 일에 진심인가예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무래도 처음엔 외모가 뛰어나거나 원래 유명한 분들이 유리한 게 사실이에요. 근데 거기에 의존해 제대로 콘텐츠를 만들지 못하면 오래 가지 못하더라고요. 조용히 사라지는 분들도 꽤 봤어요.”-관심 있는 이들에게 조언 부탁드려요.“제가 그럴 정도의 위치는 아니지만…, 여긴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려 있잖아요. 원하면 언제든 도전할 수 있어요. 다만 취미나 부업 정도로 여기는 분들은 길게 못 버티더라고요. 적어도 1, 2년 수익이 없어도 끝까지 해보겠다는 결심이 먼저예요. 뭣보다, 편하게 돈 버는 일은 어디에도 없어요. 예를 들어, 여행이 일이 되면 사진 1장도 편하게 찍을 수가 없어요. 숙소나 비행기에서 잠 못 자고 일하는 건 일상이라 힘들다고 말할 거리도 안 돼요. 여행 장소도 자기 입맛대로 고를 수 있는 이들은 정말 극소수예요. 페이를 낮춰서라도 하겠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여기도 정글인 건 똑같아요.”-그런데도 계속하는 이유는 뭘까요.“세상에 쉽게 사는 방법이 있나요. 좋아하는 직업이라는 게 ‘좋은 일만 생긴다’는 뜻은 아니거든요. 단점도 어려움도 있지만, 그걸 감내할 메리트가 있다는 거 아닐까요. 원래 직장인은 프리랜서를 꿈꾸고, 프리랜서는 직장인을 부러워한다잖아요. 자기가 갖지 못한 건 언제나 커 보이죠. 분명한 건 여기도 열심히 하면 성과를 얻을 수 있어요. 다만 겉으로 보이는 것만 쫓으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요. 마음 단단히 먹고 뛰어들어야 해요. 저로선 좋아하는 일을 찾았는데 포기할 이유가 없죠.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죠. 그게 제 콘텐츠를 봐주시는 분들에게 보답이라고 생각합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아주 맛있는 초콜릿 크림 파이나 기대하지 않은 거액의 수표를 받는 일을 제외하고, 상쾌한 봄날 저녁 서서히 저물어가는 저녁 해의 긴 그림자를 따라 외국 도시의 낯선 거리를 한가하게 산책하는 일만큼 즐거운 일이 있을까.”(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유럽 산책’에서) 타인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사람은 누구나 서로 파장을 주고받는다. 허나 소셜미디어 시대에 ‘인플루언서(influencer)’는 이전과는 다른 관계의 지형도를 낳았다. 페이스북·유튜브 등으로 수익 창출이 가능해지며, 인플루언서는 그저 “영향력을 지닌 이”가 아니라 촉망받는 ‘직업’으로 받아들여졌다. 요즘 청소년 장래 희망 순위에서도 인플루언서는 매번 1, 2위를 다툰다. 물론 연예인 등 기존 유명인들이 여전히 가장 강력한 인플루언서다. 하지만 이젠 ‘보통 사람’도 세상을 잘 읽는 콘텐츠를 발굴하면 그들 못지않은 영향력을 지닌다. ‘여행킬러도로시’로 활동하는 김슬기 씨(36)도 그들 중 하나. 2016년 즈음 본격 전업한 그는 현재 인스타그램 팔로워 15만 명을 보유했으며, 네이버 일일 방문자 수는 평균 만 명에 이른다. 평범한 직장인이던 그는 어떻게 이런 새로운 세계에 뛰어들었을까. 온라인 네트워크 세상에서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삶’을 살고 있는 김 씨를 만나봤다.-유명 인플루언서지만 자기소개부터 부탁드려요.“아이고, 인플루언서라 불리기엔 너무 거창하고요. 포털사이트와 소셜미디어에서 여행 정보 제공하는 일을 하는 김슬기라고 합니다. 여행에 관심 있는 분들 중에 활동명 ‘도로시’로 알아보시는 경우가 아주 가끔 있긴 해요. 요즘은 자유여행 준비하실 때 인터넷을 많이 참고하시잖아요. 제가 먼저 체험해보고 교통편 예약 방법 같은 실질적인 팁을 전달하는 거죠. 처음엔 해외여행 위주로 했는데, 팬데믹을 겪으면서 국내 여행도 다루고 있습니다. 부산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쭉 살고 있는 부산 토박이기도 해요.”-어릴 때부터 여행 관련 직업을 꿈꿨나요.“전혀 아니에요. 원래는 3살 무렵부터 피아노를 쳤어요. 저도 좋아했지만 부모님도 음악을 좋아하셔서, 커서 피아니스트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그런데 중학교 2학년 때쯤 요즘 말로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온 거예요. 콩쿠르 나가도 잘해야 2, 3등 하는데 과연 내가 피아노로 성공할 수 있을까. 우리 집이 그리 부자도 아니고 부모님이 어렵게 지원해주시는데 과연 내가 나중에 보답할 수 있을까. 실은 초6 때 이미 제 한계를 좀 느끼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부모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관뒀어요.”-부모님이 아쉬워하시지 않았나요.“처음엔 장난인 줄 아셨대요. 힘드니까 잠깐 그러다 말겠지 싶으셨나 봐요. 사실 계속 피아노만 치다 보니 공부 성적이 그리 좋은 편도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크게 내색은 하지 않으셨어요. 본인이 결국 돌아가겠지 생각하셨대요. 근데 제가 다시는 피아노 얘기도 꺼내지 않으니까 많이 놀라셨다더군요. 이런 얘기도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하셨어요. 피아노 관둔 게 아깝긴 했다, 이 정도로.”-자식의 판단을 믿어주시는 성향인가 봐요.“네…, 저나 동생한텐 그러셨어요. 그게 아마 언니와의 갈등 때문이었을 거예요. 첫째 언니가 저랑 다섯 살 터울인데, 큰딸이라 기대가 크셨는지 많이 엄격하셨어요. 그 바람에 언니가 마음을 못 잡고 방황을 좀 심하게 했어요. 지금이야 결혼해서 잘 살지만, 말 그대로 당시엔 ‘질풍노도’였거든요. 부모님도 그걸 힘들게 겪으신 뒤로는 자식들 의견을 많이 들어주시려고 노력하셨어요.”-피아노 관둔 뒤 대학은 식품공학과로 진학했어요.“뭔가 동떨어진 느낌이죠? 근데 중학교 때부터 맘 잡고 공부하는데, 이상하게 수학이 재밌었어요. 고등학교 때 제가 수학 천재인 줄 알았다니까요. 미적분 들어가기 전까진, 하하. 하여튼 수학이나 과학을 잘하는 걸 보시더니, 아버지가 식품공학을 추천하셨어요. 사람은 의식주를 빼놓고는 살 수 없다면서요. 사실 고3 때 전 ‘음악치료사’라는 직업에 매료돼서 그쪽으로 전공할 방법을 찾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그때만 해도 워낙 생소한 분야인지라 그냥 식품공학과도 나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인제대 식품공학과로 가게 됐죠.”-근데 졸업 뒤 첫 취업은 건설사로 했던데요.“그러니까요.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물론 요즘 세상에 전공 살려서 취직하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어요. 특히 제가 06학번인데 취업률이 바닥을 치던 시절이라, 맘대로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거든요. 그런 와중에 대기업(롯데건설)에 사무직으로 취직했으니 뽑아주신 것만도 너무 감사한 일이죠. 부모님도 정말 좋아하셨고요. 부산에서 롯데, 아시죠? 어른들 생각이 다 비슷비슷하잖아요. 딸내미가 번듯한 회사에 들어갔다니까, 이젠 시집만 잘 가면 되겠다 싶으셨나 봐요.”-그리 오래 다니진 않았던데 이유가 있나요.“네, 1년 정도 다니다 관뒀어요. 제가 부족했던 거겠지만, 상황이 좋게 돌아가질 않았어요. 일단 당시 부산 쪽 아파트 경기가 나빠지면서 인원 감축 소문이 돌기 시작했어요. 대놓고 얘기하진 않아도 뭔가 분위기가 흉흉해졌죠. 게다가…, 직원 상사 한 분과 관계가 너무 악화됐어요. 절 가르치려고 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침에 회사 가는 게 두려울 정도로 무서웠거든요. 이름만 들어도 덜덜 떨릴 지경이어서, 결국 사표를 내게 됐어요.”-집에선 뭐라 하시지 않으셨나요.“웬걸요. 그 일로 태어나서 엄마한테 제일 크게 혼이 났어요. 부모님과 상의도 없이 그냥 퇴사한 뒤에 일방적으로 통보했거든요. 서운하기도 하셨고, 어른들 눈엔 사회생활 하며 그 정도 어려움은 다 겪는 건데 왜 못 참느냐고 생각하셨던 거 같아요. 우리 딸 대기업 다닌다고 뿌듯해했는데 갑작스레 나와버리니 당황도 하셨겠죠. 게다가 아버지 어머니 세대는 회사를 그리 쉽게 관두시질 않으니까요.”-아무래도 요즘 세대들과 다르긴 하죠.“저도 그렇지만 제 주변 친구나 비슷한 나이대 선후배를 봐도 ‘평생직장’이란 개념이 아예 없거든요. 사회생활 하며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그걸 참아가며 일하지 않죠.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고나 할까. 반면 저희가 다소 공정에 민감한 측면도 있죠. 윗세대와 달리 어릴 때부터 귀하게 예쁨 받으며 자란 세대잖아요. 그래서인지 억울한 일이 생기면 속으로 삭이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해요.”-퇴사 한 달 만에 바로 재취업했다면서요.“자꾸 운이라고 말씀드려서 죄송한데, 묘하게 잘 맞아떨어졌어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작은 식품회사가 있었는데, 전공 덕분인지 비교적 쉽게 합격했어요. 저로선 연봉도 크게 차이 나질 않는 데다 전공을 살릴 수 있으니 나쁠 게 없었죠. 하지만 그 역시 그리 오래 가진 못했으니, 직장생활이 저랑 그리 잘 맞는 건 아닌가 봐요.”-거긴 왜 관둔 건가요.“음…, 무슨 일이 벌어지는데 한두 가지 이유만 있는 건 아니죠. 일단 중소기업 다녀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작은 회사는 자기 일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인원이 많지 않다 보니 2, 3명 이상의 몫을 해주길 바라죠. 저도 1년 반 정도 다녔는데, 전산세무 2급 자격증도 취득하고 HACCP(해썹) 팀장 교육도 이수해야 했어요. 해썹은 식품을 안전하게 관리하는 위생관리 시스템 같은 거예요. 그 덕에 지금 세금 처리도 혼자 척척 할 줄 알게 됐지만, 뭔가 일에 치여서 삶의 중요한 걸 놓치는 기분이 들었어요.”-그래서 여행 블로거라는 프리랜서를 택한 겁니까.“그걸 염두에 두고 직장을 관둔 건 아니었어요. 그보다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는 게 더 맞는 말일 거예요. 사실 그때 사회생활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인간관계나 이런저런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으면서 많이 지쳐있었거든요. 뭔가 다 비워져서 더 쏟아낼 에너지가 없는 기분? 다시 그걸 채우는 게 중요할 거 같아서, 스스로를 돌보는 쉬어가는 시간을 가지기로 한 거죠. 그때 여행이 많은 위안이 됐어요. 알지 못하는 새로운 곳을 찾아가는 과정이 정말 행복하다는 걸 배웠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때까지도 이걸 ‘직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질 못했어요.”-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한 계기는 뭐였나요.“이게 좀 부끄러운 얘긴데…, 솔직하게 말씀드려야겠죠? 여행을 다니다 보면 인터넷에서 정보를 많이 찾아보게 되잖아요. 그러다 보니 온라인에 은근히 여행 관련 응모 이벤트가 많더라고요. 여행 후일담을 재밌게 올리면 숙박권이나 식당 이용권 같은 걸 주는 거죠. 와, 이런 거 받으면 가족이나 친구들하고 또 재밌게 여행 갈 수 있겠다는 단순한 호기심이 출발점이었어요. 근데 기왕 하는 김에 나도 블로그로 이런 걸 정리해서 올리면 다른 사람들한테도 도움이 되겠다 싶더라고요. 그러면서 포털사이트나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런 걸 전문적으로 하는 분들이 꽤 많고, 연예인이나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죠.”-2016년부터 활동했는데 그때도 이미 도전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나요.“맞아요. 포화상태란 말들이 나온 지 한참 된 시점이었죠. 저도 블로그 하겠다니까 주변에서 말리느라 장난 아니었어요. 전문적으로 글 쓰거나 사진 찍던 사람도 아니니 당연히 걱정하죠. 근데 아마 느끼셨겠지만, 제가 약간 그런 면이 있거든요. ‘그렇건 말건, 일단 내가 해보고 겪어봐야지’ 정신. 시도해야 뭐든 시작할 수 있고, 성공이건 실패건 결과도 있는 거잖아요.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고민만 한다고 이뤄지는 게 있나요. ‘막무가내’로 보이긴 하겠지만, 뭐든 저질러야 결과도 있는 거니까요.”(※하편에서 계속됩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정부는 최근 범정부적 역량 결집을 통한 수출플러스 달성에 기여하기 위해 수출기업의 해외인증 애로 해소를 위한 ‘해외인증 종합지원 전략’을 발표했다.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기술표준원은 국내 8개 시험 인증기관과 협력해 국내 기업의 해외인증 취득을 전방위적으로 지원해나갈 계획이다. 3회 시리즈에 걸쳐 시험인증기관의 구체적인 기업지원 사례를 알아본다. 먼저 인증 정보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기업의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하고 있는 FITI시험연구원(FITI·원장 김화영)과 KOTITI시험연구원(KOTITI·원장 이상락)을 살펴봤다.● ESG·지속가능 인증지원, FITIFITI는 KOLAS 제1호 국제공인시험기관으로 미국, 일본 등 10여 개국 40여 개 시험인증기관과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 국내 시험인증기관 최초로 중국 진출 뒤 지역을 넓혀 현재 4개국에 11개 해외 지사·사무소를 두고 현지에서 겪는 수출기업의 애로 해소를 돕고 있다. 특히 글로벌 협·단체로부터 친환경, 탄소중립 관련 섬유패션 분야 인증기관으로 지정받아 수출기업의 인증 정보 파악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섬유용 염료 제조업체 D사는 의류 생산기지인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동남아 시장 진출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해외 바이어가 ‘섬유 화학제품 유해물질 무검출 인증(ZDHC MRSL)’을 요구했으나 어떠한 방법으로 제공할지 몰라 어려움을 겪었다. FITI는 ‘유해화학물질 제로배출협회(ZDHC)’와의 파트너십으로 261가지 유해물질 정보와 시험 기준 등을 제공해 ‘ZDHC MRSL’ 인증을 원활하게 취득하도록 지원했다. 이를 통해 D사는 8개국에서 103만 달러의 수출을 달성할 수 있었다. FITI는 앞으로도 ESG·지속가능성을 입증할 수 있는 인증지원을 강화해 수출기업의 경쟁력을 높일 방침이다.● 美 CPSC 시험기관 지정, KOTITIKOTITI는 국내 최초 섬유제품 국제공인 시험·검사 연구기관으로 중국, 베트남 등 6개국 12개 지역에 법인 및 지사를 두고 있다. 현지 시험분석 및 검사 업무를 통한 업계 지원이 가능하며, 수출업계 해외인증 지원을 위한 품목별·국가별 인증 정보 제공과 상담을 실시하고 있다. 특히 미국 ‘소비자제품안전위원회(CPSC)’의 제3자 시험기관으로 지정받아 현지 진출에 관심 있는 기업에 맞춤형 인증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의류업체 B사는 미 전자상거래 플랫폼을 통해 유아복 수출을 준비하던 중 ‘어린이용 제품인증(CPC)’ 서류 제출을 요청받았다. CPC 인증을 받으려면 CPSC가 지정한 시험기관의 검사가 반드시 필요하다. 애로사항을 접수한 KOTITI는 B사에 제품 정보, 관련 법률, 시험소 정보 등 CPC 인증서 필수 항목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이후 시험검사와 인증서 발급까지 원스톱으로 지원했다. B사는 인증 취득 뒤 미국을 비롯한 일본, 멕시코, 동남아까지 수출해 2022년 기준 전체 매출 중 90%가 수출에서 발생하는 성과를 냈다.● 정부, ‘해외인증 종합지원포털’ 운영두 기관은 해외 사무소 및 해외 기관과의 파트너십을 통한 현지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해 섬유 분야 인증 취득에 필요한 맞춤형 정보를 제공하고 관련 전문 상담을 진행하여 애로 해소를 체계적으로 지원해 나갈 계획이다. 이와 더불어 정부는 해외인증 정보 습득에 애로를 겪는 수출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인증 정보를 통합 제공하는 ‘해외인증 종합지원포털’(export.k-onestop.kr)을 운영하고 있다. 이를 통해 기업은 121개국 583개 인증 정보를 한 번에 확인하고 필요시 일대일 맞춤형 상담을 받을 수 있어 정보 획득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이 단축될 것으로 기대된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만화를 통해 세상을 보려 합니다. 1965년 비틀즈 싱글 곡 ‘데이트리퍼(Day tripper)’는 “당일치기 여행자”를 일컫습니다. 만화를 본다는 건 잠깐 일상을 벗어나는 여행이니까요. 브라질 그래픽노블 ‘데이트리퍼’도 영감을 줬습니다. 이 만화엔 삶을 담는 소설가를 평생 꿈꾸지만, 실상은 죽음을 알리는 부고(訃告) 담당 기자가 나옵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우리네 인생과 무척 닮지 않았나요.※해당 칼럼은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가오갤3)’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등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아직 못 보신 분들은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번 자문해본다. ‘스타로드는 아이언맨 아머를 입게 될까.’뜬금없는 망상이란 거 안다. 두고두고 놀림감이 될지도. 원래 이런 예측, 즐기지도 않는다. 행여 ‘찍기 신공’이 맞더라도 내세울 일도 아니고. 하지만 지금의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한 번쯤 짚어볼 필요가 있다.‘가오갤3’이 다행스런 성적(국내 관객 약 420만 명)을 거뒀다고 가슴 쓸어내릴 게 아니다. 2019년 ‘어벤져스: 엔드게임’으로 마블 천하 1기를 근사하게 매조지한 뒤. 이 어정쩡함이 4년째 이어졌다. 마블과 디즈니가 얼마나 큰 포석을 펼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관객들은 하품을 참아가며 심드렁해진 지가 꽤나 오래됐다.저간의 사정은 알겠다. 1기 어벤져스 기둥뿌리들이 뭉텅이로 빠져나갔다. 웬만한 리모델링으론 어림없다. 특히 티찰라(채드윅 보스만)의 별세가 안타깝고 뼈아프다. 스파이더맨은 소니랑 엮여 맘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닥터 스트레인지와 스칼렛 위치, 로키 등이 버텨주긴 하나…. 왠지 ‘주춧돌’ 느낌은 아니다. 지반부터 다시 다져야 할 판이다.재건축은 한참 진행됐다. 캡틴 아메리카는 팔콘이 맡았다. 호크아이는 제자를 들였다. 헐크는 쉬헐크가 대체할 성싶고, 블랙 팬서는 여동생이 덤터기를 썼다. 토르도 옛 여자친구가 물망에 오르고. 올해 말 박서준이 출연하는 ‘더 마블스’가 캡틴 마블(브리 라슨)의 향방을 가늠할 시험대가 될 텐데…. 영화 안팎으로 헤쳐 나갈 난관이 만만찮아 보인다.나는 새도 떨어뜨리던 마블 대감댁에 어찌 이런 북풍 한파가 몰아친 걸까. 얽히고설켰지만, 가장 큰 이유로는 ‘리더의 부재’를 꼽고 싶다. 더 콕 짚어내자면,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없어서다. 어벤져스 시리즈의 전체 흐름을 이끌어가던 존재. 조연으로 나와도 중심을 잡아주던 무게감. 그게 사라지니 뭘 해도 어정쩡하고 헐겁다.2008년 ‘아이언맨’ 때만 해도, 이리도 영향력이 클 줄 몰랐다. 로다주의 과거 탓에 미스캐스팅이란 폄하까지 나왔다. 허나 아이언맨은 여느 초인과 다르다. 마법이나 신화, 약물 없이 오로지 테크놀로지(갈수록 마법이나 진배없지만)로 이뤄낸 슈퍼히어로다. 가장 우리와 닮은, 워너비의 표상. 물론 차려진 밥상을 맛깔나게 먹어 치운 건 로다주 능력이지만.그렇기에 지금 마블이 해야 할 시급한 일은 ‘리더 다시 세우기’다. 로다주나 보스만을 데려올 순 없고, 캡틴 마블과 아메리카에 기대기엔 위태위태하다. 게다가 2기 어벤져스 후보들이 너무 한쪽으로 기운 모양새다. 백인 남성만 판치던 시절이 옳았다는 건 아니다. 매력 있는 유색인종, 여성 캐릭터 등장은 언제나 반갑다(DC ‘플래시‘의 슈퍼걸을 보라). 허나 결국 수익을 내야 뭐든 정당해지는 영화판에서, 티켓파워 가진 캐릭터를 찾지 못한다면 모든 게 도루묵이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 디즈니고 케빈 파이기 사단일 터.그런 시점에서 ‘가오갤3’에서 스타로드 피터 퀼(크리스 프랫)이 평범한 지구인으로 돌아온 건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마블이 피해왔던 ‘닫힌 결말’이란 점도 의뭉스럽다. 굳이 가모라와 종지부 찍고 팀까지 탈퇴하다니. “스타로드는 돌아온다”는 그간 마블이 후속편 예고에 자주 써먹던 문장. 한데 이번만큼은 왠지 다르게 다가온다. 대체 어떤 신분으로 돌아올까.물론 명확한 색채를 지닌 기존 캐릭터의 융합은 위험하다. 온갖 멀티유니버스를 쏟아내는 만화에서도 스타로드가 아이언맨이 된 적은 없다. 워 머신과 이복형제 아르노 스타크, ‘빌런’ 닥터 둠이 잠시 아머를 입었을 뿐이다. 허나 MCU에선 토니가 돌아올 수 없는 마당에 안 될 게 뭐 있나. 내년 공개 예정인 드라마 ‘아이언하트’(아이언맨 여성 버전)가 변수긴 하지만, 후계자보단 조력자에 가깝다.당연히 퀼은 스타크가 될 순 없다. 배우 프랫도 로다주와 간극이 크다. 그런데도 이런 가정을 점치는 건, 스타로드가 쌓아온 ‘설화(說話)’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우주를 넘나들며 리더 경험을 제대로 쌓은 지구인의 귀환. 결은 달라도, 어떤 상황에도 농을 던질 수 있는 전형적 미국식 캐릭터. 뭣보다 스타로드가 지구를 지키는 주인공급으로 이어지려면, ‘가장 근사하나 당장은 주인 없는’ 갑옷을 입는 게 그리 개연성이 낮아 보이진 않는다.어쩌면 이미 마블은 훨씬 멀리 내다보고 있을지 모른다. 언젠간 티찰라 아들과 스타크 딸이 우뚝 서는 3기 어벤져스를 마주할지도. 하지만 코앞에 닥친 2기 어벤져스를 제대로 꾸리지 못한다면, 이 꾸물꾸물한 난항은 더 늘어질 수 있다. 그런 뜻에서 ‘스타로드 아이언맨’은 그저 잇몸 정도로 취급하기엔 여러모로 매력적인 카드다. “마블은 또 다시 돌아온다.” 허나 이젠 그들도 알아야 한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은 그냥 생겨난 말이 아니다. 그걸 뛰어넘고 싶다면, 이젠 한가한 젠가 쌓기처럼 보여선 안 된다. 거칠더라도 강렬한, 에너지를 담아낼 때다. 때론 ‘깜짝 콜라보’가 막힌 혈을 뚫어줄 수 있다.정양환기자 ray@donga.com}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디자이너 우영미 대표가 이끄는 패션브랜드 ‘우영미’와 ‘솔리드옴므’가 프랑스 파리에서 2024년 봄·여름(S/S) 컬렉션 패션쇼를 개최했다. 럭셔리 패션하우스 ‘우영미’는 24일(현지 시간) 파리를 상징하는 랜드마크인 샤요 국립극장에서 제주도와 해녀 문화에서 영감을 받은 컬렉션을 선보여 극찬을 받았다. 1980년대 여름 이미지를 빚어낸 이번 패션쇼는 보디슈트 같은 해녀 복장을 재해석해 눈길을 끌었다. 해외 패션 관계자들은 “라이트 블루와 선셋 레드 등 제주 섬 풍경의 분위기가 물씬한 색감이 인상적”이라고 반응했다. 특히 1653년 제주도 난파 기록을 담은 ‘하멜 표류기’에서 착안해 르네상스 시대 분위기를 접목한 패션 아이템들이 주요 볼거리였다. 이번 쇼에 자주 등장한 모티브 ‘해파리’는 당시 삽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우 대표는 “세계가 한국에 매료된 현재의 흐름이 영감을 줬다”며 “한국과 유럽의 역사적 결합이란 아이덴티티를 패션으로 구현하려 했다”고 말했다. 앞서 21일 파리의 팔레 드 도쿄에선 ‘솔리드 옴므’ 패션쇼가 열렸다. 2024 봄·여름 컬렉션은 현대인의 정형화된 워크웨어(직업복)를 정형화된 틀이 아닌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 올해 컬렉션은 미네랄 블루 톤을 메인 컬러로 사용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제36회 동아모닝포럼이 ‘퇴직연금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 의무화, 가입자들의 선택은’이란 주제로 27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개최됐다. 동아일보와 채널A가 주최한 이날 포럼은 다음 달 12일부터 디폴트옵션 시행이 의무화되는 것을 계기로 마련됐다. 국내외 최고 전문가들이 참석해 퇴직연금의 모델별 수익률을 비교하고, 세대별 운용 전략을 소개하는 등 가입자들의 다양한 대응 방향을 제시했다. 디폴트옵션은 확정기여형(DC)이나 개인형퇴직연금(IRP)을 든 가입자가 해당 적립금을 운용할 방법을 따로 지시하지 않으면, 사전에 정해둔 방식대로 사업자(운용사)가 대신 운용해주는 제도다. 2021년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뒤 지난해 주요 내용을 규정하는 시행령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됐으며, 1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올해 전면 시행된다. 이정식 고용부 장관은 이날 포럼에 참석해 “우리나라의 디폴트옵션 제도는 근로자가 상품을 선택하는 구조”라며 “국회에서 퇴직연금의 수익률 제고라는 당면 과제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금융소비자 보호에 취약한 우리 현실을 고려해 가입자 보호 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 요소로 함께 논의됐다”고 설명했다. 이 장관은 또 “다행히 올해 1분기 디폴트옵션 상품의 평균 수익률은 약 3.06%(연 환산할 경우 12.41%)로 준수한 성과를 달성했다”며 “디폴트옵션 상품은 장기 투자를 목적으로 설계했기 때문에 향후 공시될 장기 수익률이 디폴트옵션의 성공 여부를 판가름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포럼의 발표를 맡은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퇴직연금 디폴트옵션의 설정 및 활용 전략’을 주제로 “한국은 인구가 감소하며 연금자산 운용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연금자산 운용은 자산 가치 증식이 아닌 장기적 가치 유지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며 “디폴트옵션 전략은 위험 분산을 위해 글로벌 장기투자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 게 키워드”라고 말했다. 5월 31일 공시된 디폴트옵션 1분기(시범운용기간) 운용성과를 살펴보면 279개 적격상품 가운데 총 135개 상품이 판매돼 운용 중이다. 총가입자는 25만 명을 넘어섰으며, 적립금은 3013억 원에 이른다. 다만 전체 가입자의 88%는 원리금보장상품을 선택한 상황이다. 남 연구위원은 “국내 디폴트옵션이 사전 지정 방식으로 제도적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정부와 금융기관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디폴트옵션이 기업 또는 퇴직연금사업자 간의 경쟁 수단으로 작용하도록 시장의 경쟁 구도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진 토론에서는 전문가들이 디폴트옵션의 성공적인 정착과 가입자들의 선택 방향에 대해 집중 논의했다. 강성호 보험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투자손실 면책규정, 수탁자 책임보험 등 디폴트옵션 도입과 관련해 보완점을 검토할 시점”이라며 “선진국 수준의 투자 능력을 갖추기 위해선 한국 자본시장 구조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전망이 바탕이 돼야 할 것”이라고 짚었다. 김재현 상명대 글로벌금융경영학부 교수는 “원리금보장형 중심으로 적립금이 운용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가 관건”이라며 “퇴직연금 사업자는 디폴트옵션 제도 도입의 취지를 어떻게 살릴 수 있을지 적극 고민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손재형 고용부 퇴직연금복지과장은 “퇴직연금 사업자는 디폴트옵션 상품을 해당 금융기관의 대표 상품으로 승인받은 만큼 책임감 있게 관리해야 한다”며 “정부도 공시나 정기 평가 등 관리감독을 면밀히 수행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이기택 KB국민은행 연금사업부장은 “디폴트옵션은 수익률 관리가 가능한 자문형 펀드의 편입을 활성화하고, 수익률 개선을 위해 실적 배당 상품의 비중을 확대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며 “고령자를 위한 차별화된 디폴트옵션 상품 개발도 고민해야 할 대목”이라고 말했다. 토론회 좌장을 맡은 김원섭 한국연금학회장(고려대 교수)은 “실적배당형 상품 투자를 확대해 기대 수익률을 제고하려면 정책 당국과 사업자들이 제도적 보완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며 “시장이 디폴트옵션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 정확히 평가하고, 제도의 성공적 정착을 위해 필요한 요소가 뭔지 따져봐야 한다”고 강조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상편(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230616/119808141/1)에서 이어집니다.“즐거운 시간은 오래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게 인생의 첫걸음이지만, 괴로운 시간 역시 마찬가지라는 사실은 인생이 끝나갈 때가 다 되어서도 알기 어렵다.”(하라 료의 소설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에서)서울대 자유전공학부 2학년인 권수민 씨(20)는 자신을 “스스로 가시밭길에 걸어 들어간 사람”이라 했다. 물론 그가 어느 길로 가건 그 앞에 뭐가 기다릴지는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꿈’을 접었다면 평탄한 꽃길로 갈 기회가 적지 않았던 건 맞다. 영어와 중국어에 능통한데다, 인터내셔널 바칼로레아(IB·국제공통 대학입학 자격시험)’ 만점을 받은 흔치 않은 스펙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수민 씨가 꿈꾸는 가시밭길은 ‘배우’다. 물론 이는 적절치 않은 표현일 수 있다. 스스로 선택했으니 어떤 길보다 그에겐 가장 아름다운 길이다. 다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각오는 했지만 예상보다 더, 날카로운 가시와 냄새나는 진흙탕과 거친 돌부리가 가득했다. 그런 길 위에서 수민 씨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학교와 연기수업 병행하기가 힘들진 않나요.“확실히 체력적으로 버거울 때가 있어요. 최근에도 중간고사 기간이었는데 오디션 3개가 겹쳤거든요. 시험도 오디션도 대충 준비할 수 없잖아요. 일주일 넘게 하루 2시간 정도 잔 거 같아요. 게다가 과외도 6명을 2시간씩 주 12시간 하다보니…. 옛날엔 막연하게 학교 다니고 연기도 하면 무작정 행복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 닥치니까 정신이 멍해지는 게 이러다 과로로 쓰러질 수도 있겠구나 싶기도 해요.”-오디션도 좋은 결과만 기대할 순 없겠죠.“그럼요. 좌절이 일상이죠.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오디션을 50번 정도 봤는데, 떨어지는 건 괜찮아요. 주위에서 함께 도전하는 연기지망생 언니 오빠들도 ‘오디션은 원래 500번은 봐야 하는 거야’라고 얘기해주시더라고요. 앞으로 10년은 더 열심히 볼 자신 있어요. 힘든 건 오디션 자체가 아니라…,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인간적으로 모멸감을 느낄 때가 종종 있거든요. ‘왜 저렇게까지 말하지’ 싶은 거죠. 지적이나 비판은 당연히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인격을 모독하는 말이나 행위들은 아직도 익숙해지질 않네요.”-연예계가 워낙 거칠단 얘기가 많죠.“저도 그런 말들 워낙 많이 들어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거든요. 그런데도 언제나 그 이상이 있더라고요. 이 길을 선택했으니 감수해야 하는 거긴 한데, 기본적인 존중도 받지 못할 땐 정말 속상하죠. 여긴 약육강식의 법칙이 너무 뚜렷하게 존재하는 것 같아요. 엄마 아빠 속상하실까봐 이런 얘긴 안 하고 싶긴 한데, 집에서 혼자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그냥 다 내려놓고 펑펑 눈물 쏟고 나면 속이 좀 시원해지거든요. 그럼 다시 또 힘내서 열심히 해보자 마음먹게도 되고요.”-그런 일을 겪어도 포기하겠단 맘은 들지 않는군요.“네, 한번도요. 저도 그게 좀 신기하긴 해요. 몸도 마음도 정말 다 털려버리는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럴수록 더 하고 싶단 생각만 들어요. 더 오기가 생기고 더 각오하게 돼요. 경험 많은 어른들에겐 하찮아 보일 수도 있지만, 지금 내가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이대로 끝난다면 너무 억울한 거예요. 꼭 뭐라도 돼서 옛이야기 웃으며 할 수 있는 연기자가 돼야겠다는 마음만 가득해요.”-왜 한국에서 연기에 도전한 건가요. 영어도 잘하고 성적도 좋으니 외국 대학에 가서 했으면 어떨까요. 요즘은 해외에서 활동하는 아시아 배우도 많아졌고요.“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닌데, 제가 한국인이기 때문 아닐까요. 한국드라마를 보고 연기와 처음 사랑에 빠지기도 했고, 여기서 인정받지 못하면 어디 가도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처음 연기학원 다닐 때 ‘한국말 잘 하는 외국인이 연기하는 것 같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어요. 아무래도 외국에서 오래 살다보니 어투가 자연스럽지 못했나 봐요. 그래서 밤마다 몇 시간씩 잠 줄여가며 발음연습을 했었어요. 여기서 뭔가 이룬 뒤의 먼 미래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승부를 봐야죠.”-서울대란 간판이 활동에 도움이 되나요, 방해가 되나요.“이젠 이렇게 인터뷰했으니 소용없는 일이 됐지만, 그전까진 웬만하면 굳이 밝히지 않으려고 했어요. 연기하는데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고, 그런 걸로 평가받고 싶지도 않거든요. 지난해 말 단편영화를 찍을 때도 감독님은 물론 스태프들도 아무도 몰랐어요. 학교는 그냥 제가 학생으로 다니고 배우는 곳일 뿐이지, 연기와는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요.”-배우로서 어떤 역할을 해보고 싶은가요.“지금이야 맡겨주시면 뭐든 열심히 해야죠. 연기를 꿈꿀 때부터 여러 가지 인생을 살아볼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에, 무슨 배역이든 상관없어요. 사실 제가 외모가 ‘딱 봐도 연예인 급’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아요. 작품에 들어가도 제가 원했던 역이 아니라 다른 캐릭터를 맡는 경우도 적지 않고요. 일단은 어디서건 전력을 다할 뿐이죠. 근데 최근엔 학원이나 오디션에서 거칠고 센 역할도 잘 어울리겠단 얘길 여러 번 들어서 그런 쪽으로도 연구하고 있어요.”-그런 연구는 어떻게 하는 건가요.“관련 작품 보고 연기 연습하는 게 기본이지만, 제가 아직 경험이 많지 않잖아요. 그래서 다양한 장소에 일부러 찾아가 보기도 해요. 최근엔 밀항 브로커 연기에 관심이 생겨서 혼자 인천항에 가서 한참동안 돌아다녀봤어요. 제가 한국으로 몰래 들어온다면 어떻게 어디로 들어와야 할까 계획을 짜봤죠. 그쪽에 폐건물 같은 게 많아서 거기도 들어가서 이곳저곳 살펴봤어요. 공간이 주는 상상력의 힘이란 게 있으니까요.”-너무 위험한 곳은 혼자 가지 마세요.“하하, 네. 조심할게요. 물론 제 나이에 맞는 하이틴로맨스를 해보고 싶은 생각도 많죠. 혹시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보셨나요. 거기에 ‘나도 꽃으로 살고 있소. 다만 나는 불꽃이오’란 고애신(김태리)의 대사가 나와요. 꽃처럼 살 수 있지만 가슴 속의 열정을 이루기 위해 주변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는 마음이 느껴져서 너무 좋았어요. 영화 ‘타이타닉’의 로즈(케이트 윈슬렛)도 그렇고요. 제가 꿈꾸는 삶이나 연기도 그런 거예요. 피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한발 한발 내딛는.”-마음속의 롤 모델이 있을까요.“방금 말씀드린 배우들도 좋아하지만, 지난해 개봉한 영화 ‘불도저에 탄 소녀’에서 혜영을 연기했던 김혜윤 배우님은 정말 닮고 싶다고 느꼈던 분이에요. 뵌 적은 없지만, 제가 다니는 연기학원 선배시기도 해요! 세상의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연기에 반해서 이것저것 관련 자료를 찾아봤는데, 저희랑 비슷한 길을 걸으셨단 점도 너무 끌렸어요. 그분도 수많은 오디션을 보고 작은 단역부터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셨거든요. 게다가 그 무엇보다 연기에 대한 열정이 강하신 점이 공감도 가고 매력적이었어요.”-잔인한 질문을 드릴 텐데, 어쩌면 연기자로 자리를 못 잡을 수도 있어요.“음…, 그렇지 않길 바라지만 모든 게 제 맘대로 되는 건 아니겠죠. 하지만 앞으로 최소한 10년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드릴게요.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더라도 계속 연기를 배우고 오디션에 도전할 겁니다. 오디션 중에 가끔 제가 서울대 다니는 걸 아시고 ‘재미로 배우 해보려는 것이냐’고 물으시는 분들도 있어요. 절대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보여드리려면 중도에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겠죠.”-대학생 때 할 수 있는 게 많아요. 그런 걸 놓치는 게 아깝진 않나요.“여행이나 연애 같은 거 말씀이시죠? 주위에서 그런 말씀 많이 하시긴 해요. 근데 전 반대로 혹시 다른 일로 연기에 집중하는 시간을 뺏기지 않을까 그게 더 걱정이에요. 물론 훌륭한 배우가 되려면 연애도 해보고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게 좋겠죠. 그런 감정이나 기회를 억지로 막고 있는 건 아니지만,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게 연기니까요.”-강남 대형빌딩을 준대도 연기는 포기하지 않을 건가요.“당연하죠. 비교도 안 돼요.”-근데 기사 나간 뒤 호의적 반응만 있진 않을 겁니다. ‘네까짓 게 무슨 배우냐’ ‘세상 물정 모른다’ 악담도 나올 거예요.“무섭기는 해요. 마음에 상처가 될 수도 있겠죠. 이런 친구도 있구나 좋게 봐주시길 부탁드리지만, 그것 역시 제 맘대로 되나요. 다만 아시다시피 세상엔 정말 각양각색의 배우가 존재하잖아요. 권수민도 자기 나름의 색깔을 지닌 배우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 중 하나라고 여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직 세상 물정 다 모르는 것도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연기만큼은 제일 밑바닥에서 차근차근 배워가고 있어요. 최선을 다하면 언젠간 진심이 통하지 않을까요.”-혹시 부모님께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에구…,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어릴 때 신께선 왜 저한테 연기라는 시련을 주셔서 이렇게 힘들게 만드시나 싶은 적도 있었어요. 배우의 꿈만 아니었다면 아빠 엄마한테도 예쁨 받는 딸이었을 텐데 싶기도 했고요. 항상 마음 깊은 곳에선 죄송함이 가득해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걸 안 하면 못 살 거 같은데. 스스로 원망도 한탄도 많이 했지만, 결국 결론은 똑같았어요. 저는 이 길을 갈 겁니다.”-미래에 수민 씨는 어떤 배우가 돼 있을까요.“지금 같아선 배우라 불리기만 해도 행복하겠죠? 지난해 상업영화(주경중 감독의 ‘동대문’·미개봉작)에 처음 출연했는데, 너무 행복했지만 아직 부족한 게 많다는 것도 느꼈어요. 다만 제가 볼 때 제 장점은 ‘독기’라고 생각해요. 외모도 연기력도 아직은 어디서 내세울 정도가 아니라는 건 제가 더 잘 알아요. 하지만 고등학교 때도 그랬고, 전 뭐든 될 때까지 끝까지 하거든요.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배우가 되겠습니다. 전 연기를 너무 사랑하니까요.”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멍 때리는 댕기머리 총각 그립톡(휴대전화 손잡이), ‘육퇴(6시 퇴근)’ 하고 불콰하게 한잔하는 주모 소주잔….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의 그림을 현대적으로 유쾌하게 재해석한 ‘모두의 풍속도’ 문화상품이 최근 MZ세대에게 엄청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올봄에 열린 궁중문화축전을 맞이해 한국문화재재단(이사장 최영창)이 선보인 ‘모두의 풍속도’ 배지와 메모지, 롤스티커 등 문화상품 12종이 모두 판매율 90% 이상을 달성하며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10, 20대에게 인기 높은 그립톡은 판매 2주 만에 모두 팔렸고, 성인들이 좋아하는 소주잔 세트도 최근 완판됐다. 재단 측은 “관련 문화상품 12종 모두 추가 제작에 들어갈 만큼 인기”라며 “예상했던 것보다 더 뜨거운 반응”이라고 놀라워했다. ‘모두의 풍속도’란 2021년과 지난해 궁중문화축전 때 진행했던 온라인 이벤트를 일컫는다. 인터넷에서 궁궐을 배경으로 풍속도의 인물 캐릭터를 직접 만들어보는 프로그램인데, 30만 명이 넘게 참여해 46만여 개의 캐릭터가 만들어질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올해 선보인 문화상품은 이때 인기를 끌었던 캐릭터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전통문화상품이 젊은층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끈 이유가 뭘까. 김홍도 작품 특유의 친근한 해학을 바탕으로 요즘 트렌드인 ‘공감’을 포인트로 잘 살렸기 때문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전 김홍도 필 평안감사향연도’에서 착안해 잔치 속 놀고 즐기는 다양한 인물들을 담되 표정이나 행동은 현대인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냈다. 예를 들어, 누워서 다리 꼬고 스마트폰 보는 양반이나 걸그룹 ‘에스파’의 디귿자 춤을 추는 청년 등은 소셜미디어에서 반응이 뜨거웠다. 온라인 커뮤니티 ‘더쿠’에서는 “내 모습 같다” “너무 귀엽다”며 관련 게시물 조회수가 8만 회를 넘기기도 했다. 축전 관계자는 “지난해 오픈 하루 만에 참여자가 10만 명을 넘었고 소셜미디어 실시간 트렌드 1위에 오르기도 했다”고 전했다. 축전은 마무리됐지만 ‘모두의 풍속도’ 문화상품은 지금도 언제든 편리하게 구입할 수 있다. 서울 경복궁·창덕궁·덕수궁·국립고궁박물관의 문화상품관인 ‘사랑’이나 인천국제공항 ‘한국전통문화센터’, 한국의집 문화상품관 ‘사랑’ 등에서 판매한다. 한국문화재재단이 운영하는 온라인 쇼핑몰 KHmall(www.khmall.or.kr)에서도 살 수 있다. 한국문화재재단의 진나라 상품기획팀장은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상품이 젊은 세대의 관심을 모은다는 것 자체가 고무적”이라며 “앞으로도 전통을 소재로 참신한 디자인의 문화상품을 지속적으로 선보일 계획”이라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 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했을 때 가장 나쁜 점은 그 외의 다른 일을 하기 어렵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상상력은 늘 현실에 매여 있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일상의 구속에서 벗어나 붕 떠서 긴 세월 동안 펼쳐진 운명의 행로를 굽어볼 때가 있다.”(이디스 워튼의 소설 ‘순수의 시대’에서) 천직(天職)이란 뭘까. 하늘이 내려준 직업이란 뜻을 잠시 음미해보자. 자신의 천직을 찾는다는 건 정말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이건 선천적 재능으로 ‘잘하는 일’을 하는 걸까, 아니면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걸 일컫는 걸까. 언뜻 무슨 소린가 싶겠지만, 누군가에겐 너무나 큰 차이로 다가올 수 있다. 올해 스무 살이 된 권수민 씨가 그렇다. 그는 재능이 넘치는 청년이다. 좋은 여건에 공부 소질까지 타고나 현재 서울대 자유전공학부에 다니며 영어와 중국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한다. 흔히 국제 수능이라 부르는 ‘인터내셔널 바칼로레아(IB·국제공통 대학입학 자격시험)’는 만점을 받기도 했다. 경영학 등을 전공할 계획인 수민 씨는 말 그대로 전도유망하다. 하지만 그가 바라는 천직은 이런 길 위에 있지 않다. 수민 씨는 ‘배우’를 꿈꾼다. 단지 꿈만 꾸는 게 아니다. 숱한 큰 기회를 버리고 연기를 택했으며, 여러 현실적 어려움에도 마음을 꺾지 않고 있다. 과연 수민 씨는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걸까. 누군가에겐 치기로도 보일 그의 ‘올인’은 어디까지 이어질까. -자기소개부터 부탁드려요.“안녕하세요. 2003년생 권수민이라고 합니다. 서울대 22학번, 2학년 재학 중이고요. 자유전공학부인데 앞으로 경영학과 정보문화학을 복수전공할 생각이에요. 이건 학생 신분이고요. 연기자를 꿈꾸는 사람이란 소개가 더 정확할 거 같아요. 현재는 배우지망생과 신인배우 그 중간쯤 되는 거 같아요. 연기학원은 꾸준히 다니고 있고, 지금까지 몇몇 영화와 웹드라마 등에 출연했습니다.”-중국에서 오래 살았다고 들었어요.“네, 맞아요. 상하이에서 7년, 선전에서 7년 정도 살았어요. 아빠가 기업 해외법인에서 근무하셔서 학교를 모두 중국에서 나왔어요. 초 1~4년은 현지 중국학교를 다녔고, 이후에는 미국식 국제학교에 다녔어요. 여전히 가족은 중국에 있어서 한국으로 홀로 유학을 온 셈이 됐네요.”-한국도 국제학교에 관심 많은데, 뭐가 장점일까요.“음…, 일단 영어가 기본인 학교에 다니면 자연스레 영어를 배울 수 있죠. 저도 중국어보다 영어가 더 편해요. 뭣보다 여러 나라에서 온 친구를 사귀며, 다양한 문화와 가치관을 배울 수 있는 게 가장 매력이지 않을까요. 고교 때 제일 친했던 친구 그룹을 떠올려보면, 미국 프랑스 핀란드 말레이시아 등 국적이 천차만별이었어요. 그런데 재밌는 게, 요즘 외국 친구들은 케이팝 같은 한국문화에 워낙 관심이 많아서 오히려 제가 그들한테 배울 정도예요.”-분위기가 그리 많이 바뀌었나요.“한국인을 보는 시선 자체가 달라졌어요. 초4 때쯤 ‘강남스타일’부터인 거 같은데, 한국 노래나 드라마, 영화가 폭발적으로 인기가 높아졌어요. 한국인인 걸 부러워하는 느낌이 들 때가 많을 정도예요. 고교 때 학생들이 꾸미는 ‘탤런트 쇼’ 공연이 있었는데, 외국 애들이 먼저 트와이스 노래와 안무를 하자고 제안했어요. 한국에 대한 관심은 아시아 학생들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 출신들도 마찬가지예요.”-본인이 공부를 잘한다는 건 언제 알았나요.“에구, 갑자기 훅…. 되게 민망하네요. 사실 중학교 초반까진 잘 몰랐는데, 선전에 있는 학교로 옮긴 뒤론 성적에 따라 상을 줬어요. 그때부터 조금은 느끼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겸손하네요. 서울대를 아무나 가나요.“음…, 개인적으로 한국에 살건 해외에 살건 좋은 대학을 가려면, 보통 노력으로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 같아요. 고교 때 저희도 ‘3당4락’이란 말이 있었어요. 세 시간 자면 붙고, 네 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내신은 물론 IB도 준비하고, SAT(미국 대학입학 자격시험) HSK(중국어능력시험) 토플 등도 다 점수 따려면 정말 열심히 해야 했어요. 교내 동아리 활동도 8, 9개 정도 한 거 같아요.”-동아리라면 어떤 건가요.“가장 열심히 한 건 ‘모의UN’이었어요. 국제학교 연합에서 운영하는 해외대회도 참가했죠. 싱가포르에서 열린 대회는 200명 정도 참석했는데 연설도 하고 토론도 열정적으로 했던 기억이 나네요. 원래 약간 소심한 성격이었는데 그런 공개 석상에서 활동하며 자기 의견을 말하다보니 자신감이 생겼어요. ‘하우스 빌딩 클럽’도 좋았는데, 필리핀의 낙후 지역 같은 곳에 가서 집 지어주는 봉사활동이에요. 연극부와 배드민턴부, 방송부, 경제이슈 공부하는 이코노미스트 부 활동도 열심히 했어요.”-IB 만점자라는 타이틀도 있어요.“쑥스럽긴 한데, 저한테 도움이 많이 돼요. 그 덕에 지금 과외로 돈 벌고 있거든요. 생활비나 연기학원 수강료 등을 제 손으로 해결하고 있으니까요. 요즘은 한국에서도 IB가 꽤 알려진 거 같아요. 총 6개 카테고리가 있는데, 문학 외국어 사회과학 자연과학 수학 예술로 나뉘어요. 카테고리마다 점수를 다 따고 논문도 통과해야 점수를 받는데, 운이 좋았는지 총 45점 만점을 받았어요.”-그 점수면 미 아이비리그도 갈 수 있지 않나요.“입학심사에서 꼭 IB만 보는 건 아니지만, 굉장히 유리한 건 맞아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좋은 성적으로 왜 굳이 한국에 가냐’며 만류하는 학교 선생님도 계셨어요. 영국 명문대를 추천받기도 했고요. 하지만 대학은 무조건 한국으로 가려고 오래 전부터 맘먹고 있었던지라 전혀 망설이지 않았어요. 서울에 와야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으니까요.”-배우가 되려는 꿈 말이죠.“네, 맞아요.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제가 공부를 열심히 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어요. 빨리 한국 와서 아빠 엄마의 품에서 벗어나 배우에 도전하고 싶었어요. 제 인생 목표는 좋은 배우가 되는 거니까요. 다만 연극영화학과를 선택하지 않은 건 연영과를 가지 않더라도 연기학원 등을 다니며 준비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최근에 서울대도 영화학과가 생긴다는 얘기가 있어서 총장님한테 메일을 보내긴 했어요. 총장실에서 답을 주시긴 했는데, 아직은 좀 더 기다려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총장한테 편지 보내는 대학생은 처음 봤어요.“하하, 좀 그런가요. 외국에선 헤드마스터한테 메일로 질문하는 게 일상이라 저도 자연스럽게 그랬나 봐요. 현실적으로 배우의 길이 금방 열리는 게 아니니까, 제가 준비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뭐든 해야 한단 생각에…. 그만큼 저한텐 절실하거든요. 배우의 꿈을 두고 정말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지겨울 정도로 싸워서 여기까지 왔는데, 제가 여기에 100%를 던지지 못한다면 그건 저 자신은 물론 아빠 엄마한테도 미안한 일이잖아요.”-어릴 때부터 싸웠다면, 배우를 꿈꾼 게 오래됐군요.“2010년 방영된 드라마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를 본 뒤에 배우라는 직업에 푹 빠져버렸어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니까 부모님은 저러다 말겠지 싶었나 봐요. 하지만 연극부에도 들어가고 더 열정적으로 하니까 그때부터 만류가 거세진 거죠. 10년 넘게 정말 지겨울 정도로 싸웠어요. 다 절 생각해서 하신 말씀인 건 알지만, 그중엔 마음의 상처가 된 말도 꽤 있었어요. 이젠 너무 익숙해져서 덤덤하긴 한데, 가끔은 그냥 좀 울컥하기도 해요. 이젠 이해도 하시고 대놓고 반대하시진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적극 찬성하진 않으시죠.”-금이야 옥이야 키운 딸이 고생할까 봐 그러신 거겠죠.“제가 그걸 왜 모르겠어요. 아마 똑같은 상황에서 제 딸이 그런다면 저도 아마 말리지 않았을까 싶긴 해요. 제가 외모가 특별하게 빼어난 것도 아니고, 엄청난 연기력을 타고난 것도 아니니까요. 공부는 곧잘 하는 편이니 그걸 잘 살리면 당연히 훨씬 ‘꽃길’이 펼쳐질 가능성이 크겠죠. 하지만 가시밭길인들 어쩌겠어요. 제가 가고 싶은 길은 그쪽이 아닌데. 발을 찔리고 피눈물을 흘려도 배우의 길을 가는 게 너무 좋은걸요. 그럼 그게 저에게는 진짜 꽃길이 아닐까요.”-아직 스무 살인데 미래는 누구도 모르는 거죠.“네. 아직 어린데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지만, 결국 인생은 선택의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가끔 남들에게도 인정받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저를 상상해보기도 해요. 그럼 바로 드는 생각이, 평탄한 삶이겠지만 두고두고 연기하지 않은 걸 후회하고 있겠구나 싶어요. 평생 아쉬움을 가슴에 가득 묻어두고 사는 게 진짜로 잘 사는 걸까요. 물론 연기를 택했다고 제가 바라는 대로 장밋빛 미래가 펼쳐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요. 신기루 같은 허황된 꿈을 좇는 것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게 제 꿈이잖아요. 그럼 가봐야죠. 직접 해보고 직접 실패도 해봐야죠.”(하편에서 계속)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만화를 통해 세상을 보려 합니다. 1965년 비틀즈 싱글 곡 ‘데이트리퍼(Day tripper)’는 “당일치기 여행자”를 일컫습니다. 만화를 본다는 건 잠깐 일상을 벗어나는 여행이니까요. 브라질 그래픽노블 ‘데이트리퍼’도 영감을 줬습니다. 이 만화엔 삶을 담는 소설가를 평생 꿈꾸지만, 실상은 죽음을 알리는 부고(訃告) 담당기자가 나옵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우리네 인생과 무척 닮지 않았나요. 줄거리는 예상 가능. 설정도 마무리도 뻔뻔할 정도로 뻔하다. 근데 왜 상큼한 박하사탕마냥 입안에 착 감길까. 유니버설 픽쳐스와 닌텐도가 선보인 애니메이션 영화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가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4월 26일 국내 개봉해 누적 관객 수가 약 232만 명(2일 기준)으로 준수한 편. 해외 성적은 훨씬 흐뭇하다. 전 세계에서 지금까지 12억8800만 달러(약 1조6820억 원)를 거둬들였다. 미국 뉴욕에 사는 배관공 형제가 왕가의 공주 자매(겨울왕국 1편 12억8400만 달러)보다 돈을 더 벌다니. 역시 자본주의는 위대하다. 드디어 브루클린의 이탈리아계 이민자 가정이라는 게 확실히 밝혀진 마리오와 루이지(이전까진 이런 배경이 다소 애매하게 넘어갔다). 그간의 경력을 발판 삼아 나름 창업에 나섰지만 그다지 여건이 만만치 않은 상황. 허나 마법인지 게임인지 다른 세계로 뜬금없이 넘어가며 마리오 형제의 근사한 모험이 펼쳐진다. 기대대로 그곳엔, 피치 공주와 쿠파와 동키콩이 있다. 영화 ‘슈퍼마리오…’는 정말이지 기존 게임에서 한 치의 벗어남도 없는 작품이다. 이야기 흐름은 둘째 치고, 캐릭터들의 성격도 전혀 변주가 없다. (심지어 피치 공주는 표정도 잘 안 바뀐다.) 그나마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는 거의 유일한 인물은 쿠파뿐. 근데 그 역시 ‘괴물이니 이래도 돼’ 식으로 마구 왔다 갔다 한다. 사정이 이러니 작품은 복합적인 플롯은커녕 얄팍한 구성 장치도 변변치 않다. 그냥 일직선으로 뻥 뚫린 고속도로를 쌩하고 달려간다. 한데 이런 경주마식 전개야말로 ‘슈퍼 마리오…’가 가진 최고의 강점으로 작용한다. 생각해보면 당연하지 않나. 신장 155cm의 멜빵바지 입은 콧수염 아저씨(닌텐도는 20대 중반이라 우기지만)가 갑자기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하드보일드 탐정이 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마리오에 대한 관객의 기대는 단순하고 명쾌하다. 무지개다리 위에서 바나나 던져가며 카트 타고 신나게 달려주길 바란다. 맥락이고 뭐고 상관없이.(※마리오의 트레이드마크인 차림새는 1981년 데뷔 때 그래픽 성능의 한계 때문으로 전해진다. 입 그리기 어려워 수염을 달았고, 머리카락 표현이 힘들어 모자를 씌웠다. 빨강 파랑 상하의는 팔다리 구별이 잘 되도록. 당시엔 그의 이름이 ‘점프맨’이었다.) 유니버설과 닌텐도에겐 축제와 같은 마리오의 이번 선전에 내심 복통을 호소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픽사와 마블을 거느린 애니메이션의 절대강자 디즈니다. 몇몇 외신은 “마리오가 디즈니의 악몽(nightmare)이 됐다”고까지 설레발쳤다. 지난해 야심작 ‘버즈 라이트이어(국내 관객 34만 명)’와 ‘스트레인지 월드’(11만 명)가 줄초상을 치른 상황이니 강력한 라이벌의 등장이 편치 않을지도. 다만 닌텐도는 은근슬쩍 “이제 슈퍼마리오는 미키 마우스와 동급”(무비픽쳐스)이라 여기고 싶은 눈치이나…, 그건 좀 더 지켜봐야겠다. 일단은 그런 입방아는, 아마도 지금쯤이면 제작이 확실해졌을 마리오 시리즈의 차기작들이 제대로 불쏘시개 역할을 해줄 터. 이번 작품에 쿠키영상을 배치한 것도(딱히 신선하진 않았지만) 선전포고의 출사표인지 모른다. 하지만 과연 2편도 3편도 이런 ‘단무지(단순 무식 지X)’ 스타일이 먹힐지는 쉽사리 가늠하기 어렵다. 처음에야 ‘테이크 온 미(Take on me·1985년 아하 곡으로 이번 영화에 삽입됐다)’ 전략이 추억팔이 효과도 짭짤하게 거뒀지만, 그게 이어지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그렇다고 갑작스레 마리오의 절절한 번뇌를 보고 싶지도 않다. 뜬금없지만, 이제 마리오는 이탈리아계 미국인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고 있다. 실제로 2008년 한 조사에서 미 응답자의 93%가 “슈퍼마리오를 잘 안다”고 대답했을 정도다. 이젠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나 돈 콜레오네(영화 ‘대부’ 주인공)보다 유명세가 높다. 일본에서 창조한 브루클린 배관공이 이토록 엄청난 슈퍼스타가 될 줄이야. 영화판마저 “잇츠 미, 마리오!(It‘s a me, Mario·슈퍼마리오 최고 유행어)”로 접수해버릴 기세다. 하지만 1981년생이니 마흔 살이 넘은 마리오는 이제 지금쯤이면 모자 속 머리숱이 꽤나 빠지진 않았을까. 여전히 대가족 셋방살이 신세를 못 면한 채 쉼 없이 뛰고 달리는 걸 떠올리면, 어쩌면 그 콧수염이 가린 입가엔 삶의 고단함이 숨겨진 게 아닐지 망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미 배관공의 평균 연봉이 6만 달러쯤 된다니 그리 쪼들리는 삶은 아닐지라도, 왠지 뼈 빠지게 일하는데 남 좋은 일만 시킨 우리네 가장들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대, 나의 사랑아.”(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에서)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글로벌 의약품 위탁개발생산(CDMO) 기업인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올해 1분기(1∼3월) 역대 최고 실적을 기록하며 세계 최고 CDMO 기업으로의 도약을 눈앞에 두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연결기준 1분기 매출 7209억 원, 영업이익 1917억 원으로 역대 최고 실적을 달성했다”며 “지난해 동기 대비 매출은 41%, 영업이익은 9% 증가했다”고 30일 밝혔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지난해 국내 업계 최초로 연 매출 3조13억 원을 기록했다. 2011년 인천 송도에 1공장을 착공했던 삼성바이오로직스는 현재 건설 중인 4공장이 완공되면 세계 최고의 CDMO 기업으로 올라설 전망이다. 3개 공장을 가동하며 36만4000L의 생산능력을 가지고 있던 삼성바이오로직스는 4공장이 완공되면 60만4000L의 압도적인 생산능력을 보유하게 된다. 삼성바이오로직스 측은 “현재 4공장은 9개 고객사와 12개 제품에 대한 위탁생산 계약으로 선(先)수주를 확보한 상태”라며 “추가적으로 29개 잠재 고객사와 제품 생산을 협의하고 있다”고 전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ESG 경영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2021년 이사회 산하 ESG위원회를 설치한 뒤 관련 보고서를 발간해 왔다. 현재 영국 왕실이 주도하는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이니셔티브 SMI 내 헬스케어 시스템 태스크포스에서 유일한 CDMO 기업이다. 한국 기업 최초로 SMI가 주관하는 ‘테라 카르타 실(Terra Carta Seal)’을 획득하기도 했다. 지난해 삼성바이오로직스는 북미를 중심으로 글로벌 거점을 확대하기도 했다. 2020년 10월 미국의 대표적 바이오클러스터인 샌프란시스코에 위탁개발(CDO) 연구개발(R&D)센터를 개소했으며, 올해 3월 글로벌 네트워킹 강화를 위해 뉴저지 영업 사무소도 열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제2의 도약’을 본격화하고 올해 5공장도 착공할 예정이다. 2025년 하반기 가동을 목표로 인천 송도에 건설될 5공장은 생산능력이 18만 L로 예측된다. 회사 관계자는 “1∼4공장 운영 경험을 통해 확보한 노하우와 최신 기술이 집약될 것”이라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상편()에서 이어집니다.“한결같은 동작으로 씨앗을 뿌리고 있는 파종꾼들이 평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한쪽에는 주검이 있다면, 다른 쪽에는 씨앗이 뿌려지고 있는, 바로 그 대지 위에서 빵이 자라나고 있었다.”(에밀 졸라의 ‘대지’에서) 국가무형문화재 ‘발탈(발에 가면을 씌워 연희하는 탈놀이)’ 전수자인 차다율 씨(29)는 평소에 만난다면 국악인이란 사실을 알아보기 어렵다. 실제로 현재 문화재청 산하 한국문화재재단 한국무형문화재진흥센터 전승기획팀에서 일하고 있어, 여느 여성 직장인과 다를 바가 없다. 그가 겪어낸 20대 사회생활도 그랬다. 국악을 전공했지만 연예기획사와 크루즈여행사 등을 다니며 사회생활의 부침을 감내해야 했다. 초봉으로 월급 70만 원을 받으며 야근에 시달려야 했고, 크루즈에선 상사와의 갈등으로 많은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는 이제 다시 국악으로 돌아와 “그 모든 과정이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되기 위한 고마운 밑거름이 됐다”고 당차게 얘기한다. 다율 씨에게 국악은 어떤 의미일까.-크루즈 승무원 생활이 쉽지 않았나 보네요.“음…, 배라는 환경 자체가 주는 어려움이 있었던 거 같아요. 배 타는 동안엔 퇴근도 따로 없이 갇힌 공간에서 생활하잖아요. 그렇다 보니 그곳만의 엄격한 규칙 같은 게 있어요. 6일 근무 체제라 하루 쉬고 다시 배로 돌아가니 친구하고 약속 한번 잡기도 어려웠고요. 처음엔 배를 탄다는 게 너무 매력적이었는데, 갈수록 답답함이 커졌죠.”-1년 만에 관둔 것도 그 때문이었군요.“네, 사실 관둔 시점이 후회되긴 해요. 한두 달만 더 있으면 상여금이랑 성과급 같은 게 나올 예정이었거든요. 월급까지 합치면 1000만 원이 넘어서 제겐 엄청나게 큰돈이었는데…. 하루하루 숨쉬기도 어렵다 보니 그때까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어요. 배에 타면 매일 울고 있으니 이러다 무슨 일 생기겠다 싶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돈보다 건강이 중요하죠.“그래도 시간이 지난 뒤엔 ‘조금만 더 버틸걸’하고 후회하기도 했어요. 지금 생각하니까 더 아깝네요. 그 고생을 했는데 그걸 못 받고, 하하. 관두고 좀 쉬면서 마음도 추스르고 여행도 다니고 그랬어요. 많이 지쳤는지 꽤 오래 쉬었거든요. 대학 다닐 때도 알바를 계속해서 그렇게 쉬어본 적이 없어요. 그때가 가장 긴 방황의 시간이었어요. 2019년에 배에서 내렸는데, 2021년에 한국문화재재단에 들어왔으니까. 중간에 물류회사 같은 데도 조금씩 다녔지만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던 거죠.”-재단이 국악과 관련이 많으니 기뻤겠어요.“그럼요. 너무 좋았죠. 근데 실은…, 입사 직전에 고민이 없진 않았어요. 그때 한 무역회사도 같이 붙었거든요. 그쪽이 연봉은 800 정도 높았어요. 일은 당연히 재단이 맘에 드는데, 처음엔 계약직이기도 했고. 그래서 한 가지만 생각했어요.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뭘까. 그렇게 생각해보니, 자꾸 다른 길로 돌지 말고 기회가 닿았을 때 어떻게든 다시 국악 쪽으로 돌아와 인연을 쌓자 싶어서 마음을 굳혔죠.”-국악에 대한 애정이 크지만, 돈을 벌고 싶단 의지도 강해 보여요.“네, 말씀하셨듯이 직장인한테 연봉은 큰 문제니까요. 그리고…, 가만 생각해보니 경제적 자립에 대한 강박 비슷한 게 있긴 한가 봐요. 무슨 엄청난 부자가 되겠다는 건 아니에요. 아무래도 엄마가 고생하시면서 저랑 언니를 키우셨으니까, 의젓하게 제 몫을 하고 싶고 가사에 보탬도 되고 싶죠.”-혹시 아버님이….“네, 제가 열두 살 때 돌아가셨어요. 원래 건강이 좀 안 좋긴 하셨는데, 집에 계시다 쓰러지셔서…. 그때 가족이 다 집에 있을 때였는데, 손 쓸 틈도 없이 순식간에 떠나셨어요.”-어린 나이였는데 충격이 컸겠네요.“그땐 뭐가 뭔지 상황 파악도 잘 안됐어요. 엄마가 저희는 당장 방에 들어가 있어라 그러고, 구급차 부르고 혼자 알아서 다 대처하셨어요. 전 그냥 현실 같지가 않아서 계속 멍했던 거 같아요. 항상 그랬어요. 엄마는 언니랑 저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면서 모든 일을 해내셨어요. 아빠 돌아가시고 집안 형편도 안 좋아졌지만, 식당에서 힘들게 일하시면서도 저희를 다 건사하셨죠. 그런데도 어디 가서 기죽지 말라며 최신 스마트폰 나오면 사주려고 하시고. 솔직히 풍족하진 않았지만, 뭐가 부족하거나 아쉬운 적은 없었어요.”-그런 와중에 국악까지 지원하신 거네요.“그러니까요. 아시겠지만, 예술 분야라는 게 돈이 보통 많이 드는 게 아니잖아요. 대학을 졸업해도 금방 돈벌이가 되는 게 아니고. 그런데도 엄마는 언제나 절 응원하고 뭐라도 하나 더 도움을 주려고 애쓰셨어요. 딸이 자신과 같은 길을 걷는 게 대견하기도 하셨겠지만, 그보다 자식이 하고픈 일을 하길 바라셨던 거 같아요. 그렇지만 저도 엄마만 바라보고 있을 순 없으니까. 대학 때 열심히 아르바이트했고, 졸업하고도 열심히 벌려고 했던 거죠.”-재단에 들어온 뒤 발탈 전수자도 됐어요.“제가 그래도 인복은 있는 편인가 봐요. 재단의 김광희 문화상품실장님이 절 뽑은 면접관이신데, 국가무형문화재 발탈 전승교육사시거든요. 뽑아주신 것만도 감사한데, 제가 민요 전공이란 걸 아시고는 유심히 지켜보시더니, 어느 날 발탈 전수자 과정을 제안하셨어요. 회사에선 높은 상사이신데, 제자로 거둬주시겠다고 먼저 말씀해주시니 저로선 너무 감사할 따름이죠.”-발탈이란 게 민요하고는 좀 다르지 않나요.“그렇죠. 전 경기민요를 했던 사람인데, 발탈은 남도의 판소리가 베이스니까요. 목을 쓰는 법도 다르고,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도 다르죠. 그래서 처음엔 고민도 많았어요. 그런데 스승님(김 실장)이 ‘너무 얽매이지 말고 너만의 방식으로 표현해라’고 하셨어요. 발탈은 아시다시피 문화재청이 지정한 전승취약종목이기도 해요. 그만큼 이를 이어가고 발전, 활성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전통예술이죠. 저로서는 새롭게 배우는 재미도 있고, 이제야 제대로 길을 걸을 수 있으니 감사하고 행복하죠.”-그 와중에 대학원도 다닌다면서요.“네, 올해부터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국제문화유산협동과정에 등록했어요. 사실 이것도 스승님이 권유하신 거였어요. 사람은 계속 공부해야 한다면서. 스승님이 워낙 열정적이고 부지런하시거든요. 재단에서 일하시면서 발탈 전승교육사에 오르시고 고려대에서 박사학위까지 따시고…. 사람이 성실하게 산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몸소 보여주고 계시니, 저도 게으름 피울 수가 없죠.”-인생의 롤모델이 생긴 거네요.“하하, 맞아요. 조금은 돌아왔지만, 결국 국악은 제가 걸어야 할 길이란 믿음은 항상 간직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걸 잘 실천하고 계신 분을 만났으니, 다시 놓칠 수 없는 기회를 잡은 셈이죠. 저 역시 항상 성장하는 사람이 되는 게 인생의 목표거든요. 연예기획사 다닐 때 부사장님이 ‘성장하는 스스로를 느끼면 정말 재밌어’란 말씀을 해주셨어요. 일은 힘들었지만 그 말은 정말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어요. 아직은 미약하지만 하루하루 제가 크고 있단 생각을 하면 더 열심히 하게 되는 거죠.”-국악의 어떤 점이 다율 씨를 이렇게 이끈 걸까요.“뭐라고 해야 할까요…. 국악은 제게 어두운 밤바다에서 불빛을 비춰주는 등대 같아요. 힘들거나 헤매고 있을 때 여기에 빛이 있다며 버티고 있어 주는. 제가 대학도 가고, 좋아하는 일을 찾게 만들어줬죠. 평생 함께해야 할 소중한 존재.”-쭉 얘기를 들어보면, 그건 ‘어머니’와 동의어 같은데요.“아…. 그러네요, 그러네요. 제게 너무나 감사한…. (울먹거리더니) 아, 저 왜 이러죠. 죄송해요. (잠시 숨을 고른 뒤) 민요는 정말 엄마 같네요. 매일매일 감사하고 지금의 절 있게 만들어준. 전 제가 되게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난 잘 될 거다, 난 잘 될 거야’라고 항상 믿거든요. 그 믿음의 뿌리가 어디서 나왔나 생각해보면, 그게 다 엄마에서 온 거 같아요.”-어머니도 다율 씨가 잘 커 줘서 고마우실 거예요.“아직 멀었지만, 전 항상 절 생각할 때 ‘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선한 마음을 가지고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한 사람. 그리고 도전을 멈추지 않는 사람. 그런 게 저 혼자서 가질 수 없는 마음이고 자세였던 거 같아요. 엄마가 주신 것 중에 그게 가장 큰 게 아닐까 싶네요.”-앞으로 어떤 국악인이 되고 싶나요.“제가 돈 벌려고도 노력해봤잖아요. 물론 큰돈을 벌진 못했지만, 결국 돈보다 삶의 가치가 중요하단 걸 배운 게 제일 큰 교훈이었어요. 국악도 그런 자세로 대하고 싶어요. 한때 주위 사람들 다 가진 ‘명품백’이 왜 저만 없을까 생각했던 적도 있어요. 하지만 이제 알 거 같아요. 전 그것보다 더 큰 걸 가졌다, 명품백보다 명품 사람이 돼야겠다. 그러면 오늘 하루를 알차게 살고, 내일은 더 노력해야겠죠? 이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다율아, 넌 내일 더 나은 사람이 될 거야’라고요.”정양환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