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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물 국채금리 변동 상한을 최대 1%까지 용인하겠다.” 지난주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BOJ) 총재의 한마디가 세계 금융계를 놀라게 했다. 0.5%였던 상한을 두 배로 높인 이 결정이 ‘아베노믹스’ 일환으로 BOJ가 10년간 고집해온 무제한 돈 풀기의 종료 신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초기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푼 돈은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역풍을 불렀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작년 3월부터 11차례에 걸쳐 금리를 5%포인트나 올려야 했다. 한국 등 대부분의 주요국이 금리를 높였지만 반대로 움직인 나라가 둘 있다. 하나는 경기침체가 더 걱정인 중국, 다른 하나는 일본이다. ▷BOJ의 단기금리는 ―0.1%다. BOJ에 돈을 맡긴 은행들은 이자를 받는 게 아니라 원금이 깎인다. 금리가 마이너스이다 보니 경기를 띄우려고 할 때 한국처럼 금리를 낮출 수 없다. 그래서 특이한 방법을 쓰는데, 국채금리 상한을 정하고 시장금리가 그 선을 넘으면 돈을 찍어 채권을 사는 식으로 돈을 푼다. 문제는 너무 많이 사들여서 일본 정부의 국채 절반 이상을 BOJ가 보유하는 기이한 상황이 됐다는 거다. ▷부실한 일본의 재정이 국채금리를 통제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잃어버린 30년’간 일본 정부는 막대한 돈을 풀었다. 1989년 14.4%였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2021년 263%로 올랐다. 국채의 이자를 갚는 데에만 매년 예산의 4분의 1이 나간다. 국채금리가 높아지면 이자 부담이 커지면서 정부가 쓸 돈이 부족해진다. ▷이번 결정에 글로벌 금융시장이 놀란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차대전 후 첫 학자 출신 총재인 우에다는 올해 4월 취임 전 심하게 왜곡된 일본의 통화정책을 고칠 적임자로 꼽혔다. 하지만 이후 3개월간 줄곧 ‘제로 금리’ 유지에 무게를 실어오다가 이번에 방향을 확 틀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3%대로 오른 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조용하지만, 갑작스러운 우에다 총재의 변심에 일본 국채금리는 9년 만에 최고로 치솟았고, 엔화 가치는 폭등했다. ▷일본의 마이너스 금리는 그간 세계 자본시장에 호재였다. 일본에서 저금리로 돈을 빌려 다른 나라에 투자하는 ‘엔 캐리 트레이드’가 활발했다. 일본 국내 금리가 높아지면 이런 투자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싼 엔화 덕에 마음껏 일본을 찾던 한국 여행객의 부담도 커진다. 다만 엔화 약세로 강화된 일본 상품의 가격 경쟁력에 치이던 한국 수출기업에는 도움이 된다. 새로운 길로 접어든 BOJ의 작은 변화까지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 전 총리는 생전에 ‘20세기 최고 발명품이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주저 없이 “에어컨”이라고 답했다. 싱가포르의 연중 낮 평균 기온은 31도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저서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20세기 초 미국 남부의 경제활동이 활발해진 이유로 에어컨 발명을 꼽았다. 인류는 화석연료를 태워 생산한 전기와 기술 발전의 힘을 빌려 이렇게 더위를 극복했는데, 대신 지구가 열병에 걸렸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27일 “지구 온난화(global warming)의 시대는 끝났다. 지구 열대화(global boiling) 시대가 도래했다”고 선언했다. 펄펄 끓는 지구 기상이변의 위험성을 ‘온난화’같이 무난한 용어로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앞서 유엔 산하 세계기상기구(WMO)는 올해 7월 첫 3주가 1940년 관측 이래 지구 온도가 최고인 기간으로 기록됐다고 밝혔다. 이 기간 세계 평균 지표면 기온은 16.95도로, 종전 최고치인 2019년 7월의 16.63도를 웃돌았다. ▷지구 온난화란 표현은 1972년 ‘성장의 한계’라는 로마클럽 보고서에 처음 등장했다. 로마클럽은 지구의 유한성을 걱정하는 유럽의 지식인들이 1968년 만든 모임이다. 1985년에는 WMO와 유엔환경계획(UNEP)이 온난화 주범으로 이산화탄소를 공식 지목했다. 화석연료 사용으로 늘어난 이산화탄소가 태양에서 온 에너지를 지구 대기권에 온실처럼 가둬 기온을 끌어올린다는 것이다. ▷온난화에서 열대화로 51년 만에 표현 강도가 업그레이드된 배경에는 각국의 산업화 경쟁이 있다. 기후변화가 뚜렷해지자 국제사회는 2015년 파리기후협정을 통해 금세기 말 지구온도 상승 목표를 ‘1880년 대비 섭씨 1.5도’로 합의했다. 하지만 산업화 단계를 넘어선 선진국들의 탄소 감축 요구에 신흥국들은 ‘사다리 걷어차기’라며 반발한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처럼 탄소 배출과 이상기후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탄소 배출로 지구가 병들었다는 과학적 징후는 뚜렷해지고 있다. 최근 덴마크 코펜하겐대 연구팀은 극지방의 찬 바닷물이 저위도로 흐르는 ‘심층해수 순환’이 2025년 붕괴되기 시작해 2095년에 중단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영화 ‘투모로우’에 나온 지구적 기후 대재앙 시나리오가 현실화할 수 있다는 거다.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최악의 상황을 피할 여지는 남아 있다”며 각국의 즉각적 행동을 촉구했다. ‘지구의 아이들’인 우리 하나하나가 아픈 지구를 위해 뭘 할 것인지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때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국회 1, 2당이 이념 양극단을 달리는 한국에 살다 보면 미국 정치에 좌우가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게 된다. 작년 8월 조 바이든 대통령이 ‘학자금 대출 탕감’ 카드를 꺼냈을 때 “맞아, 미국에선 민주당이 좌파였지”라는 느낌이 확 와닿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올해 4월 “미국은 원금까지 탕감해준다”고 했던 그 정책이다. 작년 중간 선거를 석 달 앞두고 나온 이 정책의 별명은 ‘역사상 가장 비싼 행정명령’. 미국의 보통 중산층 대학생들은 비싼 등록금을 정부에서 대출받고 졸업 후 취직해 오래 갚는다. 바이든은 4300만 명이 진 학자금 빚 4300억 달러(약 550조 원)를 가구당 2만 달러까지 없애주는 정책을 의회 동의 없이 밀어붙였다. 국민의 빚을 정부 부채로 바꾸는 정책이다. 미국의 예산권은 의회에 있다. 대통령 멋대로 큰돈을 풀겠다는데 ‘전례 없는 포퓰리즘’ ‘명백한 매표 행위’란 비판이 나오지 않았을 리 없다. 결국 법정까지 갔다. 올해 6월 말 미 연방대법원은 ‘의회 승인 없는 추진은 잘못’이라며 정부 패소 판결을 내렸다. 내년 말 대선을 앞두고 정치적 내상을 입은 바이든은 20∼25년간 대출금을 성실히 갚고도 빚이 남은 이들의 잔액을 없애주는 낡은 조항을 찾아내 체면치레를 하려고 한다. 한국의 민주당도 올해 5월 비슷한 정책을 밀어붙였다. 국회 교육위원회에서 민주당이 단독으로 통과시킨 ‘취업 후 학자금 상환 특별법’ 개정안이다. 학자금 대출을 받은 청년이 소득이 없으면 이자를 면제해주는 법이다. 10년간 8650억 원의 예산이 든다. 문제는 월 소득 1000만 원이 넘는 고소득 가구 자녀에게까지 이자를 없애주는 경우가 생기고, 대학에 안 간 약 30% 청년은 역차별을 받는다는 점이다. 그다음 달 미 연방대법원 판결이 나오면서 “미국은 원금까지…”라며 강행 처리를 주문했던 이 대표 발언의 전제는 사실과 달라졌다. 그래도 민주당은 조만간 본회의에서 원안대로 통과시킨다는 방침에 변화가 없다. “국민이 국가 대신 빚을 지면 안 된다”는 말은 요즘 35조 원 추가경정예산 편성을 주장할 때마다 빠뜨리지 않는 이 대표의 입버릇이다. 나랏빚을 늘려 민간의 빚을 덜어주자는 거다. 2021년 7월에도 당시 경기도지사였던 이 대표는 전 국민 재난지원금을 나눠 주자고 주장하다가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반대하자 “국가가 빚지지 않으면 국민이 빚져야 한다”고 했다. 그의 발언은 현대화폐이론(MMT)을 주장하는 국내 학자의 ‘나라가 빚을 져야 국민이 산다’는 책 제목을 연상시킨다. MMT는 ‘독자 통화를 가진 나라의 정부는 무한정 돈을 찍어내도 문제가 없다’는 비주류 경제이론이다. 코로나19 전 미국 민주당 급진파가 강력히 주장했다. 하지만 팬데믹 이후 푼 막대한 재정이 인플레이션 역풍으로 돌아오자 경제 논쟁의 판에서 종적을 감췄다. 글로벌 경제 상황은 이렇게 뒤집혔는데 이 대표의 레퍼토리는 그대로다. 이 대표는 재작년 7월 문재인 정부가 법정 최고금리를 연 24%에서 20%로 인하하기 직전에 “최고금리 적정 수준은 11.3∼15% 정도”라며 더 낮추라고 압박하기도 했다. 이후 기준금리는 오르기 시작했다. 20% 금리 상한에 막힌 제도권 대부업체들은 신용 낮은 이들의 대출을 중단했다. 돈이 급해도 갈 곳 없는 서민 다수는 불법 사채업 고리 대출의 제물로 내몰리고 있다. 경제 환경이 바뀌고, 과거에 폈던 주장의 결과가 의도와 정반대로 나타나면 정책을 고치거나, 업그레이드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이 대표와 민주당의 요즘 경제정책에선 학습 능력도, 반성도 찾아보기 어렵다. 고장 난 레코드처럼 흘러간 ‘기-승-전-빚 내 돈 풀기’ 노래를 되풀이할 뿐이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2005년 “오늘날 미국인은 집을 사고팔면서 먹고산다”는 내용의 칼럼을 뉴욕타임스에 썼다. 저소득층에 빚을 내서 집을 사라고 부추겨 호황을 누리는 미국 경제를 꼬집은 것이다. 3년 뒤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졌다. 국내총생산(GDP)의 30%를 부동산 개발이 차지하는 중국 경제를 크루그먼식으로 표현하면 ‘중국인은 땅 사용권을 팔아 먹고산다’고 할 만하다. 그런 중국 부동산에 큰 탈이 났다. ▷최근 중국 부동산기업 완다그룹이 채무불이행(디폴트) 위기를 맞았다. 완다의 핵심 계열사가 이달 23일까지 4억 달러(약 5062억 원)의 달러 채권을 상환해야 하는데 갚을 능력은 절반밖에 안 된다. 완다그룹은 1988년 군인 출신의 입지전적 사업가 왕젠린 회장(69)이 세운 부동산 개발업체다. 백화점, 호텔, 테마파크, 극장체인, 엔터테인먼트로 사업을 확장해 왔다. ▷완다의 충격에다 한때 중국 2위까지 올랐던 부동산 개발업체 헝다그룹이 2021, 2022년에 120억 위안(약 142조4000억 원)의 손실을 봤다는 실적까지 공개되면서 위기감이 고조됐다. 재작년 디폴트에 빠져 ‘중국판 리먼브러더스 사태’ 우려가 제기됐던 곳이다. 헝다의 총부채는 작년 말 2조4440억 위안(약 443조 원)으로 한국 국가채무의 40%가 넘는 수준이다. ▷“집은 살기 위한 것이지 투기를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2016년 시진핑 국가주석의 발언이 부동산 시장 위축의 신호탄이었다. 이후 중국 정부가 ‘디레버리징’(부채 축소)에 나서면서 부동산 대출이 빡빡해졌고, 직격탄을 맞은 게 헝다, 완다 같은 기업들이다. 부동산 기업의 줄도산이 예고되자 중국 정부는 정책금리 인하, 대출상환 연장 등 부양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부동산은 GDP의 20%를 차지하는 수출보다 중국 경제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토지 사용권을 팔아 재정을 충당해온 지방정부들에 특히 치명타다. 땅이 국가 소유인 중국에선 지방정부가 최장 70년짜리 토지 사용권을 판다. 적자 지방정부의 빚이 급증하면서 숨겨진 것까지 모두 합할 경우 부채가 중국 GDP의 절반에 이를 것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은 추산했다. ▷지난달 중국의 주택판매량은 1년 전 같은 달보다 28% 급감했다. 집값은 2021년 여름 이후 줄곧 하락세다. 21% 실업률에 시달리는 청년은 집을 살 여력이 없고, 싱가포르 등지로 해외이민을 떠나는 자산가가 늘어나면서 주택 수요는 살아날 기미가 없다. 다음 글로벌 금융위기가 중국 부동산에서 촉발될 것이란 전망도 있다. 부동산 버블의 끝은 언제, 어디서나 극심한 경기 침체였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인류는 ‘단맛’에 끌리는 쪽으로 진화했다. 곤충부터 포유류까지 대다수 동물은 단맛을 선호한다. 열량은 높고, 위험은 적은 음식이란 교훈이 유전자에 각인된 탓이다. 단맛을 못 느끼는 고양잇과 동물 정도가 특이한 예외다. 인간이 당분 과잉 섭취를 걱정하게 된 건 100년도 안 됐다. 살찌는 건 싫고, 단맛은 즐기고 싶은 현대인을 위해 개발된 게 아스파탐(아스파르템) 같은 인공 감미료다.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가 지난주 아스파탐을 ‘발암가능물질’로 분류했다. 1965년 미국에서 개발된 아스파탐은 같은 양으로 설탕의 200배 단맛을 낸다. 그만큼 칼로리 섭취를 줄일 수 있고, 혈당도 높이지 않는다. 인공 조미료 글루탐산나트륨(MSG) 개발사 일본 ‘아지노모토’가 대량생산에 성공해 1980년대부터 무설탕 제품에 쓰이고 있다. ▷암 유발 가능성에 따라 IARC는 식품을 5개 군(群)으로 나눈다. 술, 담배, 소시지·햄이 ‘발암물질’로 1군, 거의 확실한 ‘발암추정물질’ 소고기·돼지고기 등 적색육, 튀김이 2A군이다. 아스파탐이 포함된 2B군은 ‘역학조사나 동물실험상 증거가 충분하지 않지만, 섭취 시 발암 가능성을 고려해야 하는 제품’을 뜻한다. 나트륨 함량이 높은 김치, 피클 등 절임 채소가 같은 그룹이고, 커피와 사카린은 이 그룹에 포함됐다가 빠진 적이 있다. ▷통상 IARC가 분류를 바꾸면 WHO 산하 식품첨가물전문가위원회(JECFA)는 일일 섭취 허용량을 조정한다. 하지만 이번엔 1981년 정한 ‘체중 1kg당 40mg 허용량’을 유지했다. ‘바꿀 만한 데이터가 충분치 않다’는 이유다. 체중 60kg 성인이 다이어트 콜라 55캔, 막걸리 33병을 하루에 마셔야 허용치가 넘는다. 한국인의 평균 아스파탐 섭취량은 허용량의 0.12% 수준이어서 위험이 크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데도 ‘발암 가능’이란 꼬리표가 아스파탐에 붙으면서 식품업계는 혼란에 빠졌다. 아스파탐을 소량 사용하는 막걸리 업체들은 원료 교체를 검토 중이다. 오리온과 크라운제과도 스낵류의 단맛을 낼 대체재를 찾고 있다. 반면 펩시콜라 ‘제로 슈거’ 제품에 아스파탐을 쓰는 펩시코는 ‘아스파탐은 안전하다’는 입장을 밝혀 아스파탐을 계속 사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일로 지난해 1조 원을 넘어선 국내 ‘제로 슈거’ 시장이 타격을 받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하지만 한국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승인한 인공 감미료만 22종이다. ‘단맛 본능’에 충실하면서 건강을 챙기고 싶어 하는 현대인의 ‘헬시 플레저(healthy pleasure)’ 욕망은 어떻게든 대안을 찾을 가능성이 크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대중 수출 감소로 인한 무역적자 위기감이 고조되던 4월 말.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내용의 리포트를 삼성증권이 내놨다. ‘2026년, 글로벌 1위 업계가 바뀐다’란 제목의 이 보고서는 2026년 현대자동차·기아가 920만 대의 차를 팔아 세계 완성차 업계 1위가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작년 현대차그룹 순위는 세계 3위. 1974년 독자모델 포니를 내놓은 지 49년 만에 글로벌 빅3에 진입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런데 불과 3년 뒤에는 세계 1위라니. 이유를 보면 웃음이 나지만 설득력은 충분하다. 작년 판매량 1위는 1048만 대인 일본 도요타그룹, 2위는 848만 대의 독일 폭스바겐그룹이었다. 둘은 중국 시장에서 각각 2위, 1위로 도요타는 230만 대, 폭스바겐은 330만 대를 작년에 팔았다. 그런데 중국 전기차 업체들의 약진으로 두 기업의 2026년 중국 판매량이 지금의 절반 수준으로 뚝 떨어질 거란 예측이다. 반면 현대차그룹은 2016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 이후 6년 연속 중국 판매량이 감소하면서 시장 점유율이 1%대까지 하락했다. 더 떨어질 데는 없고 반등할 일만 남았다. 미국, 인도, 유럽연합(EU)에서도 약진하고 있어 시간은 현대차 편이다. 비자발적 중국 의존도 축소가 현대차그룹에 전화위복이 되는 셈이다. 1992년 한중 수교 첫해를 빼고 30년간 흑자행진을 이어온 대중 무역수지는 한국인에게 한중 경제 관계에 대한 허상을 키웠다. 최대 수출품목인 반도체 경기가 작년부터 침체되자 양국 교역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환상이 깨졌다. 반도체를 들어내고 보니 대중 수출은 2013년부터 이미 꾸준히 줄고 있었다. 반도체를 제외한 대중 무역수지는 재작년부터 적자였다. 지난 6년여를 돌아보면 당연한 일이다. 경북 성주 사드 부지를 제공한 롯데는 온갖 훼방에 시달리다 중국 유통시장에서 철수했다. 중국을 평정했던 한국 게임업체들은 신규 판호(版號·서비스 허가)를 못 받아 멈춰 섰다.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한국 화장품은 중국 판매량 상위 리스트에서 사라졌다. 중국 정부가 인정한 적 없는 ‘유령’ 한한령(限韓令)에 우리 기업이 고전하는 사이 중국 기업의 경쟁력은 높아졌다. 궈차오(國潮·애국 소비) 열풍까지 몰아쳤다. 한층 강화된 중국의 반(反)간첩법이 이달 시행되면서 중국 리스크는 더 커지고 있다. ‘국가기밀 및 국가 안보와 이익에 대한 정탐·취득·매수·불법 제공’을 간첩 행위로 규정한 법이다. 내용이 하도 모호해서 ‘걸면 다 걸린다’는 말이 나온다. 강화되기 전 법으로도 2014년 이후 지금까지 간첩 혐의로 체포, 구금된 일본의 기업인, 학자가 17명이다. 한국인은 처벌된 적이 없지만 언제 우리 기업이나 개인이 중국에서 ‘인질’로 잡혀도 놀랍지 않은 상황이다. 이미 중국이 한국에서 사가는 제품은 중국 기업이 못 만드는 초격차 기술 제품, 고가의 프리미엄 제품으로 축소됐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첨단 메모리반도체를 중국이 수입하는 건 중국이 한국에 ‘베푸는’ 혜택이 아니다. 해외에 팔 중국 제품을 생산하는 데 없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중 무역적자 확대는 일각에서 탈중국화 추진을 시도했기 때문”이란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의 발언 역시 이런 이유에서 철저한 허구일 뿐이다. 현대차가 중국에서 겪은 고난은 결과적으로 ‘위장된 축복’이 돼가고 있다. 미국, EU의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들은 요즘 중국 고위 당국자를 찾아 달콤한 말을 늘어놓고 있다. 하지만 뒤로는 인도, 베트남, 일본, 한국으로 생산시설을 빼낸다. 한국 기업들도 ‘차이나 엑시트(Exit) 플랜’을 세워 대비해야 할 때다. 밖으로 소리 내 떠들지 않으면서 치밀하고도 빠르게.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온라인으로 게임을 하다 마찰이 생긴 게이머들이 현실에서 직접 만나 주먹다짐을 벌이는 걸 게임계 은어로 ‘현피’라고 한다. 지난주 미국에선 세계 1위 부자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52)와 9위 부자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39)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설전이 현피 직전까지 갔다. 어머니가 “말로만 싸워라. 더 웃기는 사람이 이기는 걸로…”라며 뜯어말리는데도 머스크는 “대결이 아마도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각각 전기차, SNS가 주력 사업이어서 부딪칠 일이 없을 것 같았던 둘의 다툼은 머스크가 작년 10월 트위터를 인수하면서 시작됐다. 공화당을 공개 지지하는 머스크가 인수한 트위터는 광고주가 떨어져 나가고, 주가도 급락하면서 머스크의 ‘아픈 손가락’이 됐다. 한편에선 틱톡 등에 페이스북이 밀리는 상황을 타개하려고 저커버그가 트위터와 비슷한 텍스트 중심 SNS ‘스레즈(Threads)’를 내놓기로 하면서 충돌이 예고됐다. ▷스레즈에 대해 평가해달라는 트위터 이용자에게 머스크는 “무서워 죽겠네. 전 지구가 저커버그 손가락에 지배당하겠다”고 조롱했다. “저커버그는 (브라질 무술) 주짓수를 한다”는 말에는 “철창 싸움을 할 준비가 됐다”고 응수했다. 지켜보던 저커버그가 “(싸울) 위치를 보내라”는 글을 올리자 호사가들은 열광했다. 둘과 통화한 종합격투기 단체 UFC의 회장은 “역사상 가장 큰 싸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흥행수입 10억 달러(약 1조3000억 원)짜리 빅게임이 될 거란 평가까지 나왔다. ▷미국 정보기술(IT) 업계 거물 간 말다툼의 원조는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다. 독선적 성격으로 정평이 난 잡스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를 향해 “상상력이 부족하고 발명한 게 없다”는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았다. MS 윈도에 대해선 “뻔뻔스럽게 (애플의) 아이디어를 훔쳤다”고 비판했다. 게이츠가 ‘애플이 다른 데서 훔친 걸 나도 가져다 쓴 것’이란 취지로 유머를 섞어 받아넘기지 않았으면 큰 싸움이 났을 것이다. 둘의 진정한 화해는 2011년 잡스가 타계한 뒤에야 이뤄졌다. ▷최근엔 팀 쿡 애플 CEO가 공개한 혼합현실(MR) 헤드셋 ‘비전프로’를 놓고 저커버그가 “값만 비싸고 혁신은 없다”고 비판했다. 회사 이름까지 메타로 바꾸면서 메타버스에 투자했지만 성과가 나쁜 저커버그에게 애플의 도전은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시가총액이 웬만한 나라 국내총생산(GDP)급인 미국 IT 공룡 CEO들의 입씨름은 유치해 보인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의 챔피언 트로피를 들 가능성이 높은 최강자들이 벌이는 싸움이란 점에서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모든 주식 투자자들은 자신이 산 종목이 ‘천국의 계단주(株)’가 되어주길 꿈꾼다. 우(右)상향 곡선에 올라타 멈추는 일 없이 장기간 고공 행진하는 종목을 증권가에선 이렇게 부른다. 2020년 초부터 3년 넘게 코스피 상장사인 방림·동일산업·만호제강·대한방직과 코스닥 상장사인 동일금속은 이런 주식이었다. 하지만 이번 주 수요일 정오를 전후해 이들 5개 종목은 별다른 이유 없이 동시에 하한가까지 곤두박질쳐 50일 전 소시에테제네랄(SG)증권발 주가 폭락 사태의 악몽을 되살렸다. ▷동반 폭락하기 전까지 만호제강은 2020년 초에 비해 315%, 동일산업이 285% 오르는 등 5종목 주가는 3년 반 전에 비해 평균 252% 상승했다. 회사가 보유한 자산의 규모에 비해 주가가 낮다는 점, 실적 개선 등 뚜렷한 호재가 없는데도 장기간 상승한 중소형주라는 점, 시장에서 거래되는 양이 적다는 점이 이들의 공통점이다. SG증권발 주가 폭락 사태를 주도한 라덕연 H투자자문 대표 일당이 주가 조작의 표적으로 삼았던 종목들과 여러모로 흡사하다. ▷5개 종목 중 몇몇은 온라인 주식 커뮤니티 B투자연구소가 집중 추천해온 종목이어서 이곳 운영자 강모 씨에게 의혹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과거 소액주주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던 강 씨는 해당 주식들이 저평가됐다는 글을 지속적으로 올려 왔다. 강 씨는 “나와 가족도 깡통계좌가 됐다”며 혐의를 부인했지만 검찰은 어제 그의 출국을 금지했다. 증권업계 관계자들은 이들 회사의 주가 흐름 이상을 포착한 증권사들이 신용대출 연장을 거절하자 투자자들이 투매에 나서면서 주가가 폭락한 것으로 보고 있다. ▷강 씨는 시세 조종 등의 혐의로 지난해 12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벌금 4억 원을 선고받은 전력이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21년 한 해 증시 불공정 거래 행위로 기소된 사건 중 61.5%는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재범률도 28%나 됐다. 10명 중 6명은 실형을 피하고, 3명 중 1명은 다시 주가 조작에 나선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주가 조작으로 들통난 이익의 3∼4배에 불과한 ‘솜방망이 벌금’의 영향도 있다. 당국에 걸리지 않은 이익을 생각하면 ‘한 번 감옥에 갔다 와도 남는 장사’란 말이 나온다. ▷그제 불과 28분 만에 증발한 5개 종목의 시가총액이 5066억 원이다. 이런 후진국형 사고가 반복될 때마다 외국 투자가들의 한국증시에 대한 불신은 커지고, 투자 의지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 주가 조작 범죄자를 시장에서 장기간 격리시키고, 한 번만 걸려도 패가망신하도록 이익을 환수하는 법안들이 국회에 이미 발의돼 있다. 서두르지 않으면 천국의 계단에 오르는 대신에 날개를 잃고 절망 속으로 추락하는 개미 투자자만 더 늘어나게 된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깡통전세, 역전세난, 전세사기…. 부동산 시장에서 나오는 우울한 뉴스를 접할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3년 전인 2020년 7월 30일 국회 본회의장. 야당 반대를 무릅쓰고 ‘임대차 2법’을 단독으로 통과시킨 더불어민주당 김태년 원내대표는 주먹을 불끈 쥐고 기뻐했다. 하지만 이를 지켜본 경제 전문가의 반응은 대체로 ‘저게 좋아할 일인가’ 하는 거였다. 폭격과 함께 도시를 파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경제학자들이 꼽는 게 가격통제다. 주택 공급은 부족한데 전세 갱신계약을 의무화하고, 전세금 인상 폭을 5%로 묶으면 벌어질 일은 불 보듯 훤했다. 법 시행 후 전셋값은 어김없이 폭등했다. 불과 8개월 뒤 2021년 4·7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김 원내대표는 정책 실패를 고개 숙여 사죄했다. 그래도 선거 결과는 민주당의 대패였고, 그해 말 전셋값은 정점을 찍었다. 올해 하반기부터 본격화할 역전세난은 당시 빚을 내 빌라 전세라도 얻어야 했던 세입자들의 안간힘이 만든 후폭풍이다. 지난 며칠 사이엔 민주당 전·현직 원내대표들 간의 입씨름이 벌어졌다. 렌터카 기반 차량호출 서비스 ‘타다’를 운영했던 경영진은 무죄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고, 2019년 통과시킨 ‘타다 금지법’이 혁신의 걸림돌이 됐다는 비판이 커지자 박광온 원내대표는 “타다의 승소는 국회의 패소란 지적을 아프게 받아들인다”는 반성문을 냈다. 모빌리티 혁명에 역행한다는 전문가들의 비판이 쏟아졌던 법이다. 하지만 법안을 발의했던 박홍근 전 원내대표는 “모빌리티 혁신을 위한 문재인 정부와 국회의 노력을 폄훼한 행위”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요즘 민주당의 정책 테이블엔 제2, 제3의 임대차법, 타다 금지법 후보들이 쌓이고 있다. 조만간 본회의에 올린다는 노란봉투법은 대기업들을 상대로 수백, 수천 개 하청업체들의 파업을 일상으로 만들 가능성이 높다. 여전히 살아 있는 이재명 대표의 트레이드마크, 기본소득은 유사한 정책이 이탈리아 좌파 정부에서 시행됐다가 과도한 재정 부담, 근로의욕 저하라는 예정된 부작용 탓에 정권이 교체된 후 대폭 축소됐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되긴 했지만, 민주당이 밀어붙였던 양곡법은 과거 유럽 일부 나라, 태국 등에서 실패해 폐기된 정책이다. 요즘 이 대표는 “35조 원 규모 민생회복 추경 편성”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 한국 경제의 최대 위협 요인은 수출 감소다. 선심성 돈 풀기는 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될 뿐 아니라 간신히 잡혀가는 물가를 자극할 가능성이 크고, 지난 정부에서 400조 원 넘게 늘어난 나랏빚을 더 늘려 국가신인도를 깎아먹을 것이란 경제 전문가들의 충고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민주당 정책이 이렇게 된 이유를 짐작게 하는 글을 문 전 대통령이 지난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다. 그는 “경제학을 전문가에게만 맡겨두면 우리의 운명은 신자유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에 휘둘리게 된다. (중략) 깨어있는 주권자가 되기 위해 건강한 경제학 상식이 필요한 이유”라고 했다. 그의 주장과 달리 문 정부의 정책들이 부정한 것은 우파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수요-공급 같은 경제학의 기본 원리였다. 13평 공공임대주택을 방문해 “신혼부부에 아이 1명이 표준이고, 어린아이 같은 경우에는 2명도 가능하겠다”며 흡족해한 그의 경제 감각과 상식이 현실과 거리가 있다는 걸 모르는 이는 많지 않다. 문 정부를 계승해 부작용이 불가피하거나, 다른 나라에서 폐기 처분된 정책들로 캐비닛을 채운 거대 야당은 우리 경제의 리스크 중 하나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정책들을 5년간 겪은 덕에 경제 상식이 부쩍 풍부해진 국민들을 10개월 뒤 총선에서 어떻게 설득하려는 걸까.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15년 그리스 총선에서 41세 훈남 정치인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을 이끌고 승리하자 아테네 청년들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몰려들어 환호했다. 돈 좀 빌려줬다는 이유로 그리스인에게 긴축과 개혁을 압박하는 유럽연합(EU)의 지긋지긋한 굴레를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 치프라스가 벗겨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국민이 원하는 건 뭐든지 주라”던 1980년대 파판드레우 총리에 대한 향수도 여전했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제일 존경한다는 치프라스 총리는 그리스인들을 행복했던 시절로 되돌려줄 적임자였다. 압력에 굴복하느니 유로존을 탈퇴하겠다던 치프라스 총리의 결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국가파산의 기로에서 결국 EU 채권단의 요구를 받아들여 연금을 깎고, 공무원 수와 연봉을 삭감해야 했다. 지지층은 실망했고 2019년 총선에서 정권은 우파 신민주주의당(신민당)으로 넘어갔다. 신민당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총리는 무상의료 폐기, 연금 추가 삭감 등 개혁과 친기업 정책을 밀어붙여 2021, 2022년에 8.4%, 5.9%의 고속성장을 이뤄냈다. 지난 주말 치러진 총선에서 치프라스는 최저임금 14% 인상, 주당 근로시간 35시간으로 단축 등 자극적 공약을 다시 내걸고 정권 탈환에 도전했지만 더블스코어 차이로 미초타키스에게 패배했다. #. 에게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그리스와 튀르키예는 한국과 일본만큼 뿌리 깊은 앙숙이다. 그리스 총선 1주일 전 튀르키예에선 대선이 치러졌다. 20년간 집권한 철권 통치자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1위였지만 과반이 안 돼 28일 2위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공화인민당 대표와 결선투표를 치르는데 에르도안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 작년 말만 해도 에르도안은 패색이 짙었다. 경제학적으로 근거가 없는 해괴한 통화정책이 문제였다. 전 세계가 인플레이션을 잡으려고 금리를 올릴 때 그는 “금리를 낮춰야 물가가 내린다”는 터무니없는 지론을 관철하려고 금리를 계속 낮췄고, 말 안 듣는 중앙은행 총재들을 갈아 치웠다. 결과는 작년 86%의 물가 상승률, 사상 최저 수준의 리라화 가치였다. 하지만 그에겐 히든카드가 있었다. 작년 말 에르도안은 남성 60세, 여성 58세이던 은퇴 및 연금 수급 개시 연령을 폐지해 225만 명이 곧바로 은퇴해 연금을 받을 수 있게 했다. 흑해 가스전에서 나오는 천연가스는 모든 가정에 무료로 공급하기로 했다. 선거 5일 전 공공부문 최저임금도 한꺼번에 45% 올렸다. 그의 재집권이 유력해지자 튀르키예 주가는 폭락했다. #. 한국의 역대 경제정책 가운데 에르도안의 통화정책을 떠올리게 하는 대표적 정책이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이다. 임금을 올리면 저절로 성장이 된다는 소주성을 놓고 주류 경제학자들은 ‘족보가 없는 정책’이라고 했다. ‘유럽의 병자’였던 그리스의 수출, 성장률을 되살린 원인으로 12년 전보다도 낮은 최저임금이 꼽힌다. 한국에선 2018∼2022년 5년간 최저임금이 41.6% 올랐는데 성장엔 보탬이 안 되고 일자리 질만 나빠졌다. 200%가 넘던 그리스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하락하고 있는데, 한국은 나랏빚 증가 속도가 제일 빠른 나라 중 하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정치권의 포퓰리즘 경쟁에 재갈을 물릴 재정준칙이 없는 나라는 한국과 튀르키예뿐이다. 그리스의 포퓰리즘은 실패했지만 그 덕에 나라는 살아나고 있다. 튀르키예의 포퓰리즘은 정치적으로 성공적인데 나라가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 포퓰리즘에 대처하는 국민들의 자세가 두 나라의 운명을 바꿨다. 내년 4월 총선에서 한국인은 어느 쪽을 선택할까.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영업사원에게 필요한 기술 중 하나가 물건을 팔기 전에 고객 마음부터 얻는 것이다. 지난주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은 그런 면에서 효과가 있었다. 1세대 영어강사 오성식 씨는 “미국인들이 듣기 좋은 달콤한 말들을 밑밥으로 깔고, 그러고 나서 내 얘기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라고 평가했다. “‘탑건 매버릭’과 ‘미션 임파서블’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리고 제 이름은 몰라도 BTS와 블랙핑크는 알고 계실 것”이라는 부분이 그랬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현대차 공장이 있는 텍사스, 조지아 지역구 의원들을 지목해 기립, 박수를 유도한 건 영리한 전략이었다. 한국 기업들의 막대한 대미 투자와 현지 일자리 창출과 관련해 조 바이든 대통령이 자신의 치적으로 자랑하는 모습을 늘 지켜봐야 했던 우리 국민들의 씁쓸함을 달래면서 ‘그거, 한국이 한 거 알지’ 하고 생색을 제대로 낸 느낌이다. 역대 한국 대통령 가운데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을 자임한 건 윤 대통령이 처음이다. 하지만 국가 이미지와 주력 수출품을 세일즈하는 건 모든 나라의 수장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책무다. 천연자원은 전혀 없고, 뭐라도 만들어 해외에 팔아 돈을 벌어들여야 하는 한국 같은 수출 제조업 국가라면 더욱 그렇다. 수출을 경제성장의 원동력으로 키운 ‘세일즈 대통령’의 원조는 박정희다. 다른 개발도상국들이 수입 대체산업 육성에 주력하던 1960년대에 대다수 경제학자들이 불가능하다고 뜯어말리는 수출주도형 국가를 기획하고 추진했다. 1965년부터 1979년까지 180여 차례 수출진흥회의를 직접 주재한 박 대통령은 ‘종합상사 대한민국’ 창립자로 불릴 만하다. 영업의 최고 스페셜리스트로는 이명박 대통령을 꼽을 수 있다. 현대건설 사장을 지낸 그는 특히 중동 지역 영업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 현지에 출장 가는 장관에게는 ‘국왕이 총애하는 몇 번째 부인, 그 부인의 몇 번째 아들을 위해 어떤 선물을 준비하라’는 식의 지시가 떨어졌다.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유치 등 실적도 뒤따랐다. 올해 초 윤 대통령의 중동 방문을 앞두고 이 대통령은 친분 있는 순방국에 친서를 전달하는 애프터서비스까지 했다. 영업 판로 개척이란 면에선 노태우 대통령이 발군이었다. 노 대통령은 구(舊)공산권이 붕괴하는 시기 발 빠른 ‘북방외교’로 중국·러시아와 동구권까지 해외시장의 경계를 비약적으로 넓혔다. 영업과 거리가 멀어 보였던 노무현 대통령의 실적도 만만찮다. 지지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진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빛을 발하고 있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외교력을 집중했던 문재인 대통령은 영업사원으로선 손방에 가까웠다. 안에서 탈원전을 추진하면서 해외에선 원전을 세일즈했다. 초짜 영업사원도 ‘우리 집은 위험해 안 쓰지만, 좋으니 한번 써보라’고 권하진 않는다. 박근혜 정부에서 시작된 중국 한한령(限韓令·한류 제한령)은 계속됐고, 강제징용 문제로 일본과 교역은 악화됐다. 장기 무역적자를 방치하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맞은 김영삼 대통령도 좋은 평가를 받긴 어렵다. 윤 대통령이 미국, 중동을 상대로 얻은 영업실적 대부분은 아직 계약서에 도장이 찍히지 않은 미완성이다. 게다가 지금은 미국 중심 자유진영과 중국·러시아 권위주의 블록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쪼개지는 시대다. 한쪽에서 얻은 성과가 다른 쪽의 불이익이 될 수 있다. 한 정부의 대외영업 종합 성적표는 결국 임기가 끝난 후 찬찬히 계산기를 두드려 봐야 나온다. 고객의 마음을 얻는 건 영업의 시작일 뿐이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경차 좋지요, 좋은데 데이트할 때는 좀….” “가족여행 다니려면 안전한 게 제일인데, 역시 큰 차가….” 자동차 딜러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다가 당초 예산보다 훨씬 비싸고, 옵션이 잔뜩 붙은 차를 사는 일이 적지 않다. ‘경차 사러 갔다가 벤츠 계약하고 왔다’는 농담이 나오는 이유다. 요즘은 온라인쇼핑몰,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의 마케팅 수법이 오프라인보다 더 교묘해졌다. 그중에도 소비자의 눈과 판단을 흐리는 사기적 상술을 ‘다크 패턴(dark pattern)’이라고 한다. ▷다크패턴은 쇼핑몰, 앱의 안내에 따라 클릭, 터치를 계속하다 보면 속아서 피해를 보거나, 비합리적 지출을 하게 만들어진 사용자인터페이스(UI)다. 영국의 UI 디자이너 해리 브링널이 원치 않는 행동을 하도록 소비자를 유도하는 온라인 마케팅 방식을 통칭해 2011년 다크 패턴이라고 이름 붙였다. 재작년 한국소비자원 조사에서는 국내 100개 전자상거래 모바일앱 가운데 97%에서 다크 패턴이 발견됐다. ▷원하는 상품을 다른 곳보다 훨씬 싸게 파는 온라인 쇼핑몰을 발견하면 소비자는 혹하게 마련이다. 문제는 마음을 정하고 결제 정보를 입력하는 단계가 돼서야 ‘배송료, 세금, 봉사료 별도’ ‘특정 신용카드로 결제하면 가격 할인’ 같은 중요한 정보가 나온다는 점이다. 그것도 화면 하단에 눈에 띄지 않는 작고 흐릿한 글씨로. ‘또 낚였다’는 생각이 나도 들인 손품이 아까워 그냥 결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공정거래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비슷한 경험을 한 온라인 소비자의 비율이 71.4%다. ▷‘1개월 무료 체험’ 같은 조건으로 유혹해 앱을 깔게 하고, 이 기간이 지나면 소비자에게 알리지 않고 유료로 전환해 자동 결제하게 만드는 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등 구독 서비스에 많은 수법이다. 통장 지출 내역을 꼼꼼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쓰지 않는 서비스 이용료가 매달 빠져나가는 것도 모르고 지나간다. 물건을 사거나 회원에 가입하는 절차는 간편한데, 구매를 취소하거나 탈퇴하는 방법은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미궁 같은 앱도 많다. ▷공정위는 현행법으로 제재할 수 없는 6가지 다크 패턴 유형을 규제하기 위해 전자상거래법을 고치기로 했다. 다크 패턴은 일상에 바쁜 소비자들이 온라인으로 상품, 앱을 구매할 때 세세한 데까지 신경 쓰는 걸 귀찮아하는 심리적 허점을 노린다. 속았는데 속은 줄도 모르는 ‘호갱 소비자’가 주요 타깃이다. 결제 버튼을 누르기 전에 한 번 더 따져보는 깐깐한 소비자가 많아지지 않으면 어둠 속에서 지갑을 노리는 다크 패턴을 뿌리 뽑을 수 없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도쿄 주변 삼나무 전통가옥을 2만3000달러에 사서 살고 있는데 만족스럽다.” 일본인 부인과 몇 년 전 도쿄 북동쪽 이바라키현의 단독주택으로 이주한 호주 출신 40대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사연이 최근 뉴욕타임스에 소개됐다. 집주인 사망 후 지방자치단체가 보유하던 ‘아키야(空き家)’를 경매에서 낙찰받았다고 한다. 열차로 도쿄까지 45분 거리에 건평 250㎡, 대지 330㎡짜리 집을 불과 3000만 원에 샀다니 한국인들에게도 솔깃할 일이다. ▷버블경제의 거품이 걷히고,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버려진 빈집이 아키야다. 노무라증권에 따르면 2018년 850만 채였던 아키야는 2033년에는 2000만 채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집값이 싸다 보니 일본 이주를 원하는 외국인들의 관심이 높다. 최근에는 이들을 상대로 빈집을 수리해 판매하는 업체도 여럿 생겼다. 부동산 세수가 줄어 고민하는 일본의 지자체들로서도 반길 만한 일이다. ▷고령자 비율이 높은 지역에 더 많지만 수도인 도쿄에서도 주택의 10% 정도가 빈집으로 방치돼 있다. 낡은 집을 수리하는 데 큰돈이 들고, 상속세율까지 높아 고령 거주자 사망 후 물려받으려는 자손이 많지 않다. 빈집이 늘면 도시가 슬럼화하고, 범죄 위험도 커진다. 일본의 지자체 가운데 처음으로 교토가 2026년부터 빈집, 사용하지 않는 별장 등 1만5000여 채 소유주에게 ‘빈집세(稅)’를 물리기로 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도 ‘빈집 위험국’이다. 지방 도시에서 황폐화한 폐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문제는 집계 방식마저 통일이 안 돼 있다는 점이다. 5년마다 방문조사 때 당일 비어 있는 집을 집계한 통계청 조사에서 재작년 전국의 빈집은 139만 채로 전체 주택의 7.4%였다. 전기·상수도 사용 여부를 기준으로 하는 국토교통부의 작년 통계는 10만8000채로 이보다 훨씬 적다. 정부는 지난해에야 여러 부처에 흩어져 있는 빈집 관리 업무를 통합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빈집과 달리 도쿄, 교토 도심의 새집 값은 급등세다. 버블 붕괴 후 집을 사려는 이가 줄자 새 주택을 많이 짓지 않아서다. 달러화에 비해 엔화의 가치가 크게 떨어진 ‘킹 달러’ 현상 때문에 한국의 아파트와 비슷한 맨션에 투자하는 외국인이 늘어난 영향도 크다고 한다. 작년 일본 수도권에서 팔린 신축 맨션 중 8.4%는 가격이 1억 엔(약 9억8500만 원)을 넘어서 1980년대 중후반 버블 시기의 집값을 되찾았다. 그런데도 한국인들에겐 비싸게 느껴지지 않는다. 서울의 아파트 중간가격은 올해 2월에야 겨우 10억 원 밑으로 떨어졌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처음엔 ‘재미 한번 보자’는 식으로 시작한다. 일단 발을 들이면 점점 더 깊이 빠져든다. 덜 독하고 부담이 적은 쪽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더 유해하고 파탄에 이르는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의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이들을 통해 누군가 이득을 챙기는 구조가 굳어지면 다시는 원상태로 돌아가기 어렵다. 포퓰리즘은 이렇게 마약과 비슷한 점이 많다. 그래서 정치인이 국민 세금을 멋대로 퍼주는 인기영합주의 정책을 ‘정치적 마약’이라고 한다. 10년 전만 해도 한국은 마약 청정국이었다. 지금은 생활 속 깊숙이 마약이 침투했다. 서울 강남 한복판 학원가에서 마약 탄 음료를 학생들에게 먹이는 범죄가 벌어졌다. 유명인이 마약하다 걸린 뉴스에도 “그럴 것 같았어”라는 심드렁한 반응이 나올 정도로 익숙해졌다. 10만 명당 마약사범이 20명 미만인 청정국 지위를 한국은 2016년 잃었다. 한국의 중앙 정치무대에 퍼주기 포퓰리즘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도 10년 남짓이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맞붙은 2012년 대선이 시발점이다. 모든 노인에게 기초연금 월 20만 원을 약속한 박 후보는 기초연금을 5년에 걸쳐 2배(9만→18만 원)로 올리자는 문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임기 첫해 “약속을 못 지켜 죄송한 마음”이라며 대상을 소득하위 70%로 축소했지만 정치적 이득은 톡톡히 챙겼다. 그때 일을 문재인 대통령은 단단히 기억해 뒀던 모양이다. 21대 총선을 하루 앞둔 2020년 4월 14일 그는 헌정사상 첫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을 결정했다. ‘고무신 선거’의 부활이란 비판이 나왔다. 하지만 “전 국민에게 지급하자”고 먼저 제안한 건 야당인 미래통합당 쪽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은 대승을 거뒀고, 4인 가족 기준 100만 원이 전 국민에게 지급됐다. ‘오랜만에 한우 맛을 봤다’는 반응에 문 대통령은 “가슴이 뭉클하다”고 했다. 작년 3월 대선은 한국 포퓰리즘사의 신기원이었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는 실행에 수백조 원이 드는 ‘기본 시리즈’를 앞세웠다. 이행 불가능한 공약이란 지적이 나와도 그는 “앞으로도 그냥 포퓰리즘을 하겠다”고 했다. 포퓰리스트라는 낙인이 정치인에게 불명예가 아닌 시대가 열렸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도 질세라 ‘병사 월급 200만 원’으로 응수했고, 선거 막바지엔 ‘50조 원 자영업자 손실보상’ 공약을 내놨다. 총선을 1년 앞두고 다시 포퓰리즘의 계절이 돌아왔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정부가 보증을 서서 전 국민에게 최대 1000만 원을 최장 20년간 낮은 이자로 빌려주는 ‘기본대출’ 카드를 꺼냈다. 대출 원금에만 수백조 원이 들고, 나중에 갚지 않는 돈을 얼마나 세금으로 메워 넣어야 할지 가늠하기 힘든 정책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모든 정책을 당정이 협의하라”고 내각에 지시한 후 여당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지지율을 의식한 전기·가스요금 동결이었다. 막대한 비용이 들어갈 광주 군공항 이전 특별법, 대구·경북 신공항 건설 특별법도 여야는 주고받기식으로 통과시킬 계획이다. 한국에서도 포퓰리즘에 제동을 걸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명박 정부 말기인 2012년 박재완 장관이 이끌던 기획재정부는 ‘박근혜·문재인 대선캠프 복지공약 이행에 최소 268조 원이 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여야의 반발, 선거관리위원회의 반대로 포퓰리즘의 싹을 도려내는 데 실패했다. 그 후 10여 년간 포퓰리즘은 한국 정치판에 뿌리를 내렸다. 포퓰리즘에 깊이 중독됐다가 빠져나온 나라는 세계적으로 전례를 찾기 어렵다. 한국을 ‘포퓰리즘 청정국’으로 돌이키려면 온 국민이 포퓰리즘 정치와 한판 전쟁이라도 치러야 하는 걸까.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이 ‘이권 카르텔’이란 말을 공식 석상에서 처음 쓴 건 재작년 6월 29일이다.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에서 대선 출마 기자회견을 하면서 그는 “정권과 이해관계로 얽힌 ‘소수의 이권 카르텔’은 권력을 사유화하고, 책임의식과 윤리의식이 마비된 먹이사슬을 구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후 표현 강도는 점점 세졌다. 같은 해 11월 국민의힘 대선후보 수락 연설에선 “적폐, 부패의 카르텔을 혁파하고 반드시 정권교체를 해내겠다”고 강조했다. 대통령 취임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카르텔’이란 말은 작년 12월에 다시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민노총 화물연대의 집단 운송거부 사태에 정부가 법과 원칙에 따라 강경 대응해 화물연대 측이 백기를 든 직후다. 대통령은 “일자리 세습, 기득권의 일자리 지키기를 위한 이권 카르텔”이란 말로 노동계를 비판하면서 이권 카르텔과의 전선에 복귀했다. 이후 현 정부 개혁과제 중 최우선 순위로 떠오른 노동 카르텔과의 전쟁에서 정부여당은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정부의 회계 투명성 강화 요구는 필요성이 너무 자명해서 ‘노조 탄압’이란 노동계의 반발이 국민들에게 먹혀들지 않고 있다. 경찰 수사로 드러난 건설 현장 노조의 폭력적 행태들은 기득권을 지키려는 노동계 이권 카르텔의 실체를 확인시켜 줬다. 지지율까지 끌어올린 승전고에 고무됐던 것일까. 지난달 15일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대통령은 예상치 못한 쪽으로 전선을 확대했다. 5대 은행, 3개 이동통신사였다. 정부의 인허가를 받아 과점적 지위를 누리는 이들이 고금리, 고물가로 고통받는 국민을 상대로 높은 대출금리, 비싼 통신요금을 통해 이익을 챙기는 걸 비판하면서 대통령은 ‘카르텔’을 거론했다. 역대 정부에서 비슷한 일을 경험한 은행들은 앞다퉈 대출금리를 낮췄고, 통신사들은 중간요금제 출시 계획을 내놨다. 그런데 그 정도로는 역부족이었다. 과도한 상여금 등 기업의 도덕적 해이가 경범죄라면, 카르텔은 조직범죄다. 해법의 스케일도 달라져야 했다. 금융위원회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경쟁을 촉진해 과점구조를 타파하기 위해 해당 분야에 진출할 새로운 사업자를 찾기 시작했다. 경제 검찰인 공정거래위원회도 은행, 통신사 조사에 뛰어들었다. 문제는 규제 강도가 세계 최고인 한국 은행업에 진출하려는 기업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급기야 최근엔 새로 허가할 특화은행 모델로 금융당국이 검토해온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하는 일까지 생겼다. 글로벌 금융권이 요동치는 지금은 건전성에 큰 탈이 없는 국내 은행에 당국이 오히려 고마워할 상황이다. 통신 부문도 수조 원을 투자하면서 선진국보다 크게 낮은 수익률에 만족할 제4 이동통신사업자 후보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음식점 소주, 맥주 가격이 6000원, 7000원으로 오른다는 말이 나온 뒤에는 주류업체들도 고물가를 틈타 독점적 이득을 챙기는 집단으로 지목됐다. 카르텔이라 부르지 않았을 뿐 정부가 대하는 태도는 은행, 통신사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곧바로 공장 출고가가 100원 오를 때 식당 술값이 1000원 단위로 오른다는 사실이 확인돼 정부만 머쓱해졌다. 술값을 올려 전기·가스요금 상승을 벌충하려는 식당 주인들까지 이권 카르텔로 매도할 순 없었을 것이다. 1년 8개월 전 대통령이 지목한 카르텔은 정치권력을 장악한 좌파 운동권 세력과 이들과 연계해 이권을 챙기는 집단이었다. 지금은 정부가 원하는 방향에 어긋나게 움직이는 기업, 세력에 카르텔이란 이름이 붙고 있다. 문재인 정부 때 ‘적폐’란 말이 비슷한 식으로 쓰였다. 넓어져 가는 이권 카르텔 전선에서 나오는 이상 신호에 정부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그분은 6·25에 대해 경험이 없으셔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인지 잘 모르겠다. 왜 ‘효순이 미선이 사건’을 말하면서 천안함 사건이나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은 언급하지 않는가.” ‘새로고침 노동자협의회’ 부의장인 송시영 서울교통공사 올바른노조 위원장이 민노총 위원장의 발언을 받아치면서 한 이야기가 보름이 지나도 귓가에 맴돈다. 새로고침 노협은 지난달 출범한 30대, 사무직 중심인 MZ 노조들의 협의체다. 앞서 양경수 민노총 위원장은 2002년 발생한 효순이 미선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MZ세대로 일컬어지는 분들은 이런 대중적 반미투쟁 당시 아주 어렸거나 아예 경험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노조 활동을 하다 보면 정치 문제 개입이 노동자, 서민의 삶을 바꾸는 데 중요한 의제라는 사실에 동의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MZ 노조가 반미, 반정부 정치투쟁을 지양하고 노동자 권익, 처우 개선이란 ‘노조의 본질’에 집중하겠다고 밝힌 데 대한 반응이었다. 표현이 좀 순화됐을 뿐 ‘젊고 경험 없는 세대라 뭘 몰라서…’라는 말처럼 들린다. 120만 조합원을 거느린 민노총은 정치권도 절절매는 거대 노조이자, 우리 사회를 쥐락펴락하는 기성 권력이다. 이들에게 “천안함, 서해 공무원 피격은 왜…”라고 당당히 묻는 MZ세대를 보면서 1980년대 대학가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좌경화 이념교육을 막 받기 시작한 대학 신입생 가운데 궁금증이 많은 이들은 북한 체제와 정권을 칭송하는 선배에게 “그럼 북한이 쳐들어와도 총 들고 싸우지 않을 겁니까”라고 묻곤 했다. 그럴 때 나오는 대답은 십중팔구 이랬다. “의미 없는 질문이다. 같은 민족인 우리에게 북한이 총부리를 겨누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황당한 문답이 오가던 1980년 중후반에 태어난 세대가 지금 MZ 노조의 주축이다. 북한이 차근차근 핵 개발에 성공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까지 갖춘 사실상 핵보유국이 되는 과정, 연평도 포격과 천안함 폭침(2010년)을 보면서 성장했다. 최근에는 김여정이 남쪽을 향해 핵미사일을 쏠 수 있다고 공언해도 북한에 싫은 말 한마디를 않는 기성 노조의 태도를 평소 가슴 깊이 담아 뒀을 것이다. 4050세대와 다른 시대를 살아온 MZ세대는 기업관도 완전히 달라졌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최근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MZ세대의 35.1%는 기업에 ‘호감’을 갖고 있다고 답했다. 11.3%인 ‘비호감’의 3배가 넘었다. 호감 가는 기업인 유형으로는 ‘삼성·현대차 등 거대 재벌 기업의 창업자’가 1위였다. 지난해 말 화제였던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등장인물 중에서 진양철 회장의 인기가 유독 높았던 게 우연이 아니다. 주식에 투자하는 500만 2030세대에게 대기업은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곳일 뿐 아니라 자산을 불려주는 원천이기도 하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시대에 노동운동을 시작한 60년대 출생, 80년대 학번과 그들의 이념체계를 그대로 물려받은 40대 후반이 지금 한국의 노동운동을 이끌고 있다. 젊어서 ‘대기업은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인 매판자본’이라고 배웠고, 지금도 기업을 보는 눈은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MZ 노조가 경험을 더 쌓는다고 생각이 비슷해질 리가 없다. 인간의 이념은 20대에 형성돼 평생 유지되는 경향이 있다. 30년 만에 후진국에서 선진국이 된 한국 같은 사회에선 개인과 조직의 정신적 성장이 변화를 못 따라잡는 일이 자주 생긴다. 자기가 멈춰 있는 건 잊고, 시대를 앞서가는 젊은 세대에게 자꾸 뭔가 가르치려 드는 사람을 ‘꼰대’라고 한다. 지금 민노총은 MZ 노조에 충고할 때가 아니다. 뭐라도 그들로부터 배워야 한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당신은 일하려고 살지만, 우리는 살기 위해 일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질색을 한다는 넷플릭스 드라마 ‘에밀리 파리에 가다’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미국 마케팅기업이 인수한 파리의 명품 전문 마케팅업체에 파견된 본사 직원 에밀리가 업무에 강한 의욕을 보이자, 이를 불편해하는 프랑스인 선임 직원이 해주는 충고다. 달리 말하면 “너무 무리해 주변 사람 힘들게 만들지 말고, 살살 하자”는 거다. 미국인 시각에서 프랑스인 삶의 태도를 과도하게 전형화한 것은 맞지만 어느 정도 진실도 담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이 추진하는 연금개혁의 핵심은 일하는 나이를 현재 62세에서 2030년까지 단계적으로 64세로 올리는 부분이다. 은퇴자 증가로 불어나는 재정 악화, 미래세대의 세금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다. 프랑스는 정년과 은퇴 연령을 일치시켜 놔서 일도 2년 더 해야 한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 퇴직 연령은 60.6세다. 10명 중 6명은 60세 이전 은퇴를 원한다. 실제 프랑스의 평균 은퇴 연령도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몇 년씩 빠르다. “더 오래 일하자”는 마크롱 개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이유다. 연금개혁의 큰 파도를 맞은 건 한국도 마찬가지다. 1988년 도입된 국민연금은 초기 가입의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내는 돈에 비해 너무 많은 보상을 약속했다. 소득의 9%인 현재 보험료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의 절반 수준인 데다, 고령화 속도가 빨라져 올해 33세 근로자가 연금을 받기 시작할 2055년에 기금이 완전히 고갈된다. 이걸 아는 2030청년들이 “받지도 못할 국민연금 차라리 탈퇴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한다. 하지만 한국은 프랑스와 분명히 다른 게 있다. 재작년 통계청 조사에서 한국의 55∼59세 장년층이 희망한 은퇴 연령은 70세. 프랑스인들보다 9년 이상 늦다. 다만 현실은 많이 달라서 가장 오래 일하던 일터를 떠날 때 남성 근로자의 평균 연령은 51.2세, 여성은 47.7세다. 한국의 55∼64세 장년층 고용률도 66%로 77%인 일본, 72%인 독일보다 크게 낮다. 한국의 중장년층은 기회가 없을 뿐 더 일하고, 연금을 더 오래 낼 의욕이 여전히 넘쳐난다. 이들을 더 일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60세 법정 정년과 하락하는 생산성에 맞춰 임금을 낮출 수 없게 만드는 연공서열식 호봉제다. 역대 정부와 정치권은 ‘청년 일자리를 중장년층이 뺏는다’라는 비판, 강성노조의 반발, 그로 인한 득표 손해를 의식해 문제를 방치해 왔다. 이런 생각이 그릇된 선입견일 수 있다는 증거가 요즘 속속 나오고 있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최근 2030세대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60세 정년을 연장하는 데 반대한 청년은 25%, 찬성은 그 3배인 75%였다. 찬성의 첫 번째 이유는 ‘노년 빈곤 문제 해결’(46%), 두 번째가 ‘청년층 국민연금 부담을 줄인다’(20%)였다. 부모·삼촌 세대가 더 일해 줘야 미래에 자신들이 져야 할 짐이 가벼워진다고 생각하는 청년들이 훨씬 많다는 뜻이다. 청년 알바 구하기에 지친 자영업자들도 구직 광고에 ‘중장년층 환영’이라고 써넣기 시작했다. 인구는 줄고, 더 좋은 일자리를 찾는 청년들 대신 나이 든 세대가 할 일이 생겨나고 있다. 한국 베이비부머의 대표 격인 ‘58년 개띠’들이 올해 65세다. 그 뒤 10년간 태어난 이들의 ‘더 일할 의욕’은 연금개혁 등을 둘러싼 K부머와 MZ세대의 대립적 관계를 괜찮은 궁합으로 바꿀 수 있는 한국만의 자산이다. 일반인 500명을 모아 토론하자며 개혁을 미루고, 임기 끝날 때쯤에나 개혁 완성판을 내놓겠다는 정치권과 정부가 그 가치를 제대로 모를 뿐이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많게는 100만 원 넘는 세금을 연초에 돌려줘 ‘13월의 보너스’로 불리던 연말정산. 요즘 다수의 월급쟁이들에게 연말정산이 반갑지 않은 ‘신년 세금폭탄’으로 바뀌고 있다. 2021년 근로소득에 대한 작년 초 연말정산 결과 세금을 조금도 돌려받지 못하고, 오히려 더 낸 직장인이 전체 근로소득 신고자의 19.7%인 393만4600명이었다. 1인당 평균 97만5000원, 총 3조8373억 원의 세금을 추가로 납부했다. 세금을 일부라도 돌려받은 근로자는 67.7%다. ▷연말정산 결과 내야 할 근로소득세보다 원천 징수된 세액이 적을 경우 세금을 더 내는 일이 벌어진다. 월급은 올랐는데 이전 기준으로 세금을 매긴 경우가 대부분이다. 매년 달라지는 소득공제 항목도 영향을 미친다. 코로나19 첫해인 2020년분 정산 때에는 평균임금 상승률이 1.2%로 낮고, 공제 혜택이 일시적으로 커져 세금을 돌려받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2021년분 정산에선 임금이 3.9% 오르고, 공제 혜택이 줄면서 추가로 세금 낸 사람이 전년보다 42만 명 증가했다. 다만 소득이 낮은 근로자 35.3%는 근로소득세를 전혀 내지 않았다. ▷막 시작된 2022년분 연말정산 결과도 불안하다. 작년 근로자의 임금 상승률은 3.8%로 높은 세율 구간에 새로 진입한 근로자가 적지 않다. 문제는 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공급망 갈등의 영향으로 소비자물가가 5.1%나 올라 실질소득은 오히려 감소했다는 점이다. 높은 물가 때문에 구매력이 줄었는데도, 화폐로 표시된 ‘명목소득’이 늘어 소득세를 더 내게 되는 전형적인 ‘인플레이션 세금’ 현상이다. ▷같은 직장, 비슷한 월급을 받는 동료가 세금을 돌려받았다면서 좋아하는데 자신은 세금을 더 토해내야 한다면 큰 손해를 본 것처럼 느끼게 마련이다. 2015년 초 터진 ‘연말정산 파동’이 그런 경우였다. 출산·다자녀가구, 독신가구의 공제 혜택을 줄인 소득세법 개정으로 동료 근로자보다 세금을 더 내게 된 월급쟁이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박근혜 정부가 사과하고, 연봉 5500만 원 이하 근로자 541만 명에게 8만 원씩 세금을 돌려줬지만 성난 민심을 달래기가 쉽지 않았다. ▷세금 나갈 일은 늘었지만 연말정산 자체는 쉬워졌다. 국세청은 신용·체크카드, 현금영수증 결제 내역, 기부금 액수 등 소득공제에 필요한 대부분의 자료를 간소화 서비스로 제공한다. 올해는 신용카드·대중교통 결제, 무주택 가구주가 집을 얻느라 대출한 금액 등의 공제 혜택이 늘었다. 꼼꼼히 혜택을 챙겨 한 푼의 세금도 억울하게 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한국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까지 거리는 6800∼7600km. 몇 달 새 이들 산유국과 한국의 간격이 확 좁혀진 느낌이다. 작년 11, 12월 두 달간 한국인들은 카타르에서 들려오는 월드컵 소식에 귀를 바짝 기울였다. 11월 방한한 사우디 왕세자는 ‘현대판 만리장성’으로 불리는 네옴시티 건설 등과 관련해 한국 기업과 40조 원 투자협약을 맺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방문한 UAE는 300억 달러의 한국 투자를 약속했다. 미국의 강한 견제를 받는 중국이 성장률·인구까지 정점을 찍고 하강세로 돌아서면서 새로운 돌파구 마련이 절실한 한국 경제는 ‘제2 중동 붐’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1970∼80년대 오일쇼크 때 중동 건설로 오일머니를 벌어들여 위기를 극복했던 ‘1차 중동 붐’ 재현에 대한 기대다. 산유국들이 기름값 폭등으로 번 돈을 ‘포스트 오일 시대’를 위해 쏟아붓는 이번 기회를 잘 활용하면 금세라도 꽉 막힌 국내 청년실업 문제의 숨통이 트일 것만 같다. 다만 걱정거리가 하나 있다. 우리 청년들이 기성세대처럼 중동 붐을 자신의 미래를 향해 열린 기회로 받아들일까 하는 거다. 먼저 중동 진출을 놓고 벌어졌던 8년 전 논란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2015년 4월 중동 순방을 마친 박근혜 대통령은 무역투자진흥회의를 주재하면서 “대한민국에 청년이 텅텅 빌 정도로 중동 진출을 해보라. 다 어디 갔느냐고, 다 중동 갔다고…”라고 했다. 성장 둔화, 청년실업 악화의 돌파구를 중동에서 찾자는 주문이었는데,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 때 중동 붐의 기억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청년들의 반응은 싸늘함을 넘어선 분노였다. 영화 ‘친구’ 유명 대사를 패러디한 ‘니가 가라, 중동’이란 말은 금세 유행어가 됐다. 사실 박근혜 대통령이 거론한 중동 일자리는 정보기술(IT), 의료 등으로 1970년대 할아버지 세대들이 맡았던 건설노동과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청년들 귀엔 ‘국내에 일자리가 없다고만 하지 말고 열사의 사막에 가서 땀 흘려 일하라’는 말로 들렸던 거다. 평소 국민과의 소통 부재, 특유의 썰렁한 꼰대 유머가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2차 붐을 통해 한국 기업들이 중동 진출을 꾀하는 산업은 원전, 방산, 플랜트, 바이오, 스마트팜 등 첨단 분야다. 사우디의 ‘미스터 에브리싱’ 빈 살만 왕세자는 한국의 게임, 콘텐츠 산업에 관심이 많아 국부펀드를 통해 카카오엔터테인먼트에 최근 막대한 투자를 결정했다. 사우디 미래도시에는 네이버의 로봇 기술이 채용될 가능성도 있다. 지난해 한국 게임에 1인당 가장 많은 돈을 쓴 나라 1, 2위는 카타르, 아랍에미리트였다. 이런 프로젝트들이 성공하려면 한국 청년 인재들이 해외에 나가 미래를 개척할 마음이 생겨야 한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을 거란 조짐이 적지 않다. 서울 등 수도권 일부 지역을 벗어나면 인재를 못 구해 “지방에선 벤처가 불가능하다”고들 한다. 중소기업·자영업자들은 “최저임금보다 더 준대도 청년 알바 씨가 말랐다”고 하소연이다. 양질의 일자리 부족, 청년인구 감소란 이유가 있긴 해도 작년 늘어난 일자리의 55%를 60세 이상이 채운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국이 겪는 문제들을 20년 정도 앞서 경험해온 일본에선 청년들이 자국 내의 친숙한 삶에 안주해 해외 유학, 근무를 기피한다는 한탄이 나온 지 오래다. 최근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서 판교의 IT 기업들이 재택근무를 줄이자 사무실에 자주 나가는 데 반발한 젊은 직원들의 노조 가입률이 급증했다고 한다. 해외에서 일자리를 발굴하는 것보다 지금 우리 경제의 더 급한 숙제는 청년들 가슴속에 잠자는 ‘야성’을 흔들어 깨우는 것일지 모른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노조 △△한테 얘기하면 된다더라.” “○○ 아들은 벌써 내정이 됐다던데….” 현대자동차 노조가 최근 ‘채용 관련 어떠한 불법행위도 근절한다’는 제목의 특이한 보도 자료를 냈다. 올해 700명의 생산직 근로자 채용을 앞두고 온갖 소문이 다 돌고 있기 때문이다. 노조는 “채용 과정에 청탁·압력·강요·금품·향응은 있을 수 없다. 비리 연루자는 법적 책임을 묻고 일벌백계하겠다”고 했다. ▷노조가 직원 채용과 관련해 이처럼 이례적인 입장 표명을 한 건 18년 전 현대차·기아 채용비리 사건의 트라우마가 생생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기아는 2004년 10월 광주공장 생산계약직 근로자를 뽑으면서 1079명의 채용 인원 중 30%에 대한 ‘추천권’을 노조에 준 사실이 이듬해 초 드러났다. 원래 1000명으로 예정됐던 인원이 늘어난 것도 너무 많은 청탁이 몰렸기 때문이란 말이 나왔다. 추천권을 행사하는 노조 간부에게 거액의 사례금을 건네고 입사한 근로자 중에는 나이, 학력을 속인 부적합자가 적지 않았다. ▷당시 기아 노조위원장이 “인사 청탁이 관행화되면서 광주공장 노조 간부처럼 도덕적 불감증에 빠져 입사자들로부터 금품을 수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연고 없는 응시자는 사실상 입사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로 노조 관계자들이 채용에 깊숙이 개입했다. 2005년 5월에는 현대차 쪽까지 사태가 번졌다. 노조 간부, 대의원들이 취업 청탁을 대가로 사례금을 챙겼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일부는 구속됐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같은 우려가 나오는 건 현대차·기아가 청년들이 선호하는 최고의 직장이기 때문이다. 현대차 생산직의 2021년 평균 연봉은 9600만 원으로 한국 근로자 평균 연봉(4024만 원)의 2.4배다. 60세 정년이 보장될 뿐 아니라 퇴직 후 계약직으로 1년 더 다닐 수도 있다. 재직 중에는 30%, 장기근속자는 퇴직 후에도 25%의 할인율이 현대차를 살 때 적용된다. 블루칼라 근로자들에겐 꿈의 직장인 셈이다. 게다가 현대차의 생산직 신입 채용은 2013년 4월 이후 10년 만이다. ▷최근에는 기아 단체협약의 ‘고용세습’ 조항이 문제로 떠올랐다. 노동당국은 작년 말 ‘정년퇴직자 및 장기근속자 자녀를 우선 채용한다’는 기아 단협을 고치라는 시정명령을 의결했다. 헌법상 평등권, 채용 때 차별을 금지하는 고용정책기본법 취지에 어긋난다는 이유다. 현대차 노사는 2019년 삭제한 조항이지만 기아 노조는 여전히 ‘협약 사수’를 외치고 있다. 좁은 취업문을 넘으려고 애쓰는 MZ세대 청년들의 눈에 이런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두렵지 않은가.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