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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21일부터 그끄저께까지 11차례로 나눠 진행된 27개 부처(위원회 포함) 신년 업무보고를 보면서 조금 놀랐다. KTV에 공개된 9차례 보고회 영상을 보면 윤석열 대통령은 매번 원고 없이 ‘마무리 말씀’을 했는데, 발언 분량을 합하니 222분에 달했다. 보고회마다 ‘마무리 말씀’을 평균 25분가량씩 한 것이다.우선 놀라운 것은 그 박식함이다. 한 주제가 아니라 국정의 각각 분야에 대해 원고 없이 그렇게 길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대통령이 학습능력이 워낙 뛰어나 각 부처 업무를 꿰뚫고 있다”는 대통령실 관계자의 용비어천가가 아니더라도 평범한 능력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감탄과 동시에 ‘이건 윤석열의 약속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조짐인데…’라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대선 선거전 초기의 장면이 떠오른다.“대통령이 만기친람해서 모든 걸 좌지우지하지 않고 각 분야의 뛰어난 인재들이 능력과 기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국정을 시스템적으로 운영하겠다.”2021년 10월 20일 윤석열 후보가 SNS에 올린 글이다. 그 전날 부산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군사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는 잘했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고 했다가 논란이 일자 5공 시절 김재익 경제수석이 ‘경제 대통령’ 소리를 들었던 것처럼 유능한 인재들에게 전권을 주고 맡기겠다는 취지였다고 해명하며 쓴 글이다.지난해 4월 한덕수 국무총리 후보자를 지명하면서도 ‘책임총리제’를 강조했다. 5월 1일 대통령실 인선 때도 “행정부가 창의적이고 핵심적인 정책을 수립할 수 있도록 대통령실은 조율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발표가 있었다. 하지만 정부 출범 9개월이 다 돼 가는데 책임총리 책임장관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은 필자만일까. 지난 9개월간 건교부, 법무부 등을 제외하면 장관이 현안의 중심에 서서 이슈를 주도하는 모습이 기억나는 게 없다. 난방비 문제가 터져도, 무역수지 적자가 역대 최대여도 담당 장관들은 보이지 않는다. 노동, 교육 개혁을 하겠다는데 도대체 어떤 내용의 개혁을 하겠다는 것인지 설명이 없다. 장관들이 사라진 원인은 주눅이 들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조금만 엇박자를 내도 대통령의 노기(怒氣)를 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팽배하다는 것이다.한 전직 고위공무원은 지난 수개월간 집권당 사태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윤핵관들의 여당 장악 행태와 그 과정에서 장애물들을 가혹하게 쳐내는 장면들이 공직사회에 칠링 이펙트(chilling effect·오싹해져서 움츠러드는 현상)를 줬다”는 분석이다.대통령의 메시지들이 시스템 속에서 전략적·종합적 검토를 거쳐 정제되어 나오는지도 의문이다.윤 대통령은 행정안전부 업무보고 때 “철밥통”이라는 표현을 썼다. 공직혁신 필요성이 아무리 크다 해도 표현은 신중해야 한다. 공익을 위해 평생을 헌신해온 공무원이 최소한 몇 퍼센트라도 있을 텐데 그들이 느낄 허탈감은 어떻게 할 것인가. “독립운동처럼 일하는” 공직자가 한동훈 한 사람만은 아니지 않겠는가. 최고 권력자가 쓴소리나 이견 제기에 버럭 싫은 내색을 하면 결국 아무도 말을 못 하게 되는데 지금 권력 핵심부가 그런 쪽으로 흘러가는 것은 아닌가.물론 지금의 대한민국 대통령은 문 정권이 무너뜨린 국가의 펀더멘털과 핵심 가치를 세우기 위해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좌파정권 적폐, 노조 적폐, 무너진 안보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고 강한 그립으로 공직사회를 이끌고 가야 한다.하지만 국정의 디테일에 대해선 대통령은 하고 싶은 말을 절제해야 한다. 위에서 한마디 하면 밑에선 나비효과 태풍이 분다. 쌍방향이 아닌 소통은 소통이 아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리더십을 실(絲)에 비유했다. 실은 앞에서 살짝 끌어주면 그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뒤에서 확 밀면 구부러지고 엉킬 뿐이다. 국민은 불과 1년 전 윤 후보의 약속들을 기억하고 있다. 국정 운영에 약속과 다른 대목이 있거나 성과가 느려도 지난 정부의 잘못이 너무 크고, 국회 권력의 조직적 훼방이 크다는 걸 감안해 관용하며 인내하고 있다.그러면서도 합리적 지지층이 떨치지 못하는 불안감을 윤 대통령은 알아야 한다. 총선 압승과 정권 재창출을 위한 그랜드 플랜, 즉 민생 회복과 국정 시스템 정상화, 외연 확대와 통합을 위한 전략을 세우고 실행하는 것만으로도 숨가쁠 이 귀중한 시기에 왜 대통령실은 만기친람식 행보를 하고, 왜 여당 장악이라는 곁눈질로 분란을 자초해 신뢰자산을 훼손하고 있는지 안타깝고 불안한 것이다.정권과 여당에 대한 국민의 평가에 안개처럼 드리워 있는 이재명 문재인 효과는 오래지 않아 걷힐 것이다. 이재명 문제가 정리되면 그때부터 윤 정권과 여당엔 진정한 도전이 닥친다. 안개가 걷히면 공정과 상식의 회복이라는 약속이 이행됐는지를 적나라하게 평가받게 된다. 그 시험에서 만점을 받지 못하면 정권이 유명무실해진다는 절박감을 갖고 밤잠을 못 이뤄야 정상이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집안싸움이 거의 집단 자해극 수준이다. ‘진보는 분열로 망하고,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고들 했는데, 정반대다. ‘윤석열 캠프’ 시절부터 DNA처럼 도지는 국민의힘 내분의 중심엔 공통으로 ‘장제원’이라는 인물이 있다.윤 대통령의 정치 입문 초기 달라붙지 않았더라면 중앙 일간지 칼럼에서 이름 한번 거론될 일이 없었을 그런 인물이다. 별다른 개인적 매력 자본도, 감동적 인생 스토리도, 별다른 의정활동 업적도, 대(對)문재인 정권 투쟁 공적도 없는, 보수 텃밭 금수저 의원 중 한 명에 불과했다. 다른 윤핵관들도 대동소이하다. 다들 입안의 혀처럼 처신이 빠르고, 대단한 전략가연(然)하지만 큰 그림을 보는 안목이나 직관·통찰력은 보여준 적 없다. 보수의 미래로 거론될 인물은 한명도 없다.흰 종이 상태에 가까웠을 ‘윤석열의 정치 도화지’에 이들이 끄적인 건 낡고 음습하고 저급한 정치공학이다. 그 결과물이 현재의 당 대표 경선 파동으로 이어지고 있다.이들이 시나리오를 썼을 당 장악 프로젝트는 대통령을 벼랑으로 내모는 짓이다. 내재적 관점을 취해 선의(善意)로 윤 대통령의 의도를 해석해 보자. ‘여의도 정치는 대한민국의 가장 낙후된 분야다. 정치개혁 없이는 우리 사회의 도약이 불가능하다. 대대적인 물갈이가 필요하다. 총선 공천은 그런 정치개혁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 헌신적으로 공익에 봉사할 엘리트들을 대거 진입시켜야 한다….’ ‘지금은 정말 정부와 당이 혼연일체가 돼야하는 시기다. 국민이 나를 뽑아준 이유는 비정상의 정상화다. 지난 5년간 좌파들이 뒤틀어 놓은 현실 왜곡이 워낙 심대해서 이걸 바로잡으려면 그만큼 집중적인 반대 에너지를 투입해야 한다. 당정 일사불란은 필수불가결하다. 뜻을 같이해줄 여당 지도부가 절실하다….’대략 이렇게 정리될 윤 대통령의 의중은 야당의 시각으로는 사당화(私黨化), 당 장악, 제 사람 심기 공천이나 다름없다. 어느 시각으로 볼지는 각자의 판단이지만, 설령 의도가 선하다 한들 당 장악이 과연 실현 가능하며 정권 성공에 도움이 될까. 대통령이 A라는 인물을 밀어줘 당 대표가 됐다고 한들 원하는 대로 물갈이가 가능할까. 아무리 대표가 공천심사위를 자기 사람들로 채워도 통제는 불가능하다. 대통령 인기가 하늘을 찌를 수준이 아닌 한 공천 불복 사태가 터져 나온다. 아무리 양심적인 새 얼굴들을 투입해도 검찰 시절 라인이나 김건희 여사 관련 연줄 흔적이 있는 인물들이 포함되면 쇄신 명분은 얼룩진다. 대통령이 당에 개입한다는 의구심이 퍼지면 지지도가 떨어지고, 게다가 밀어준 당 대표가 수도권이나 MZ세대에 별 어필하지 못한다면 대통령의 물갈이 파워가 더 약화되는 악순환 고리가 형성된다. 더구나 윤핵관이 공천을 좌지우지한다는 인식이 퍼지면 국민이 무슨 미래를 기대하겠는가. ‘내 뜻대로 공천’과 ‘총선 승리’는 양립이 불가능한 것이다.당장 3월 경선에서 이른바 윤심 후보가 지거나 턱걸이하는 경우도 염두에 둬야 한다. 리더십이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 물론 나경원 전 의원의 행태는 문제가 많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거리가 먼 기득권 이미지를 탈각하지 못해온 그가 총선 승리를 이끌 외연 확대력이 있을지 고개를 젓는 이들이 많다. 더구나 저출산·고령화 과제 책임자로서 경솔한 처신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당 대표 욕심이 있었다면 부위원장직을 거절했어야 마땅하다. 당장 달다고 꿀떡해버린 단견을 후회해도 늦다. 그럼에도 심판은 국민과 당원이 직접 하게 했어야 한다. 온 식구가 총출동해 몽둥이찜질하는 것 같은 장면은 집안의 수준을 드러낸다. 갈등이 불거지기 전에 대통령이 조용히 불러 설득하고,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그냥 놔두면 된다. 경선이 본격화하면 나경원의 그 가벼운 처신을 경쟁 후보들이 가만 놔뒀겠는가.지난 초가을 대통령실 쇄신으로 ‘숙청’된듯했던 장제원은 이번에 대통령이 특별히 미션을 준 것도 아닌데, 갑자기 나선 것으로 전해진다. 담임선생님의 못마땅한 심기를 읽고 나서서 급우를 혼내는 자칭 기율반장 처신이다.윤핵관들은 대통령 주변에 이런 논리를 끊임없이 주입해 왔을 것이다.“정권이 성공하려면 당에 대통령 사람이 많아야 한다. 대표가 대통령의 사람이어야 공천 때 사람을 넣을 수 있다. 대통령이 직접 배지 달아준 의원이 많아야 퇴임 후도 담보할 수 있다.”그럴듯해 보이지만 모순에 가득 찬 논리다. 누가 되든 대통령에게 전적으로 협조 안 할 여당 대표가 있을까. 그리고 아무리 줄을 세워도 당 전체를 가질 수는 없다. 당만 친윤 비윤 갈라진다. 퇴임 후 안전 보장도 친위 의원 몇 명으로 되는게 아니다. 최대의 안전 보장은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한 총선 승리와 정권 재창출이고, 당 장악 첩경은 지지도를 높이는 것이다. 인기 만점 대통령 이름을 업으면 총선에 이기는데 누가 충성하지 않겠는가.윤 대통령이 정리해줘야 한다.“자꾸들 오해하는데 윤심은 없다. 나경원 해임은 막중한 공직을 가볍게 여기는 데 대한 질책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선거에 나를 끌고 들어가지 마라. 국정만이 관심사다. 당원들이 누구를 택하든 그 선택에 흔쾌히 따를 것이다. 더 이상 윤심 윤심 하지 마라….”이 시대 대통령에겐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한 과제와 민주적 리더십이 필요한 과제가 함께 놓여 있다. 적폐청산, 민노총 대응, 간첩 적발 등등엔 강력한 리더십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울타리 외연을 확대해야하는 정치에선 달라야 한다. 정치는 검찰 조직처럼 지휘·명령 관계가 아니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휘젓고 다니는 게 불편해도 참고 귀를 열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불편하지만 결국은 지킨 사람에게 보답을 준다. 친박 친이 싸움질로 집단 자해극을 벌이다 좌파에 정권을 헌납한 당에 국민은 독립운동하는 심정으로 정권을 되찾아 맡겼다. 그저 교과서에 적힌 대로 경선 주자들은 미래를 놓고 페어플레이 하고, 대통령은 중립을 지키면 저절로 지지율이 치솟을 텐데 그 쉬운 일조차 못한다는 말인가.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윤석열 정권의 1년 차는 미완성 정권교체였다. 쓰레기와 수초가 뒤엉킨 강바닥처럼 전 정권의 잔재들이 발목을 잡았다. 가장 억센 수초인 180석 야당의 발목잡기는 내년 4월까지 어찌할 수 없는 절대조건이다. 5년 동안 단물을 빨던 거대한 이권 네트워크의 해체 위기를 맞은 좌파 그룹들은 정권을 중도에 익사시킬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이런 거대한 수초 더미의 중심에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있다. 2017년 취임사에서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를 약속했던 그는 퇴임 후에도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전직 대통령’의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정치적 적절성은 차치하고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 많다. 풍산개 논란은 백번 양보해 문 전 대통령의 논리를 다 수용해줘도 냉혹하고 협량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벗기 힘든 부정적 이슈였다. 어떤 불리한 논란을 겪고 나면 그걸 상기시킬 수 있는 비슷한 소재는 피하려는 게 사람 심리다. 그런데 문 전 대통령은 기르던 풍산개를 사실상 유기견 신세로 만든 직후 유기견 돕기 달력을 만들고, 반려견의 죽음 추모, 새해 반려견과 일출을 맞는 모습 등 개를 소재로 한 글과 사진을 SNS에 연속해서 올렸다. 그런 행동들이 자신을 얼마나 모순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으로 비치게 만들지 모르는 걸까. ‘성격과 삶’의 저자이며, 대한정신약물의학회 이사장을 역임한 김창윤 울산대 의과대학 서울아산병원 정신과 교수에게 분석을 요청했다 “문 전 대통령은 (칼 융이 분류한 8가지 심리유형 중) ‘내향적 감각형’ 인간으로 보인다. 이런 타입은 조용한 예술가 유형으로 내적 감각을 작품으로 표현하기 전에는 평소 자기 의견 표명이나 감정표현이 별로 없다. 수동적이고 온순해 보이며 먼저 얘기하기보다는 듣는 편이다. 실제로도 자기 생각이 없어 이데올로기 같은 것의 영향을 많이 받고 휘둘릴 수 있다. 겉보기에 무난한 사람처럼 보이나 사소한 일에 화를 내거나 비본질적인 것에 집착하며 엉뚱하게 고집을 부려 주위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판단은 빨라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얘기하는데 길게 보면 앞뒤가 안 맞는 경우가 많다. 논리적인 유형의 사람은 자신의 과거 언행과 비교해서 자기모순이 생기면 스스로 브레이크를 걸지만, 이런 유형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그때 그때의 상황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감각형은 돈에 인색하고 눈에 보이는 이해관계에 민감하다.” 정치전문가들의 분석도 들어봤다. 현 정권을 대놓고 비난한 신년사와 ‘민주주의 후퇴’를 비롯해 2일 이재명 더불민주당 대표 일행에게 한 발언들에 대해 “한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전례를 찾기 힘든 일”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이는 절박감의 발로라는 분석이 많았다. 현 정부 개혁이 자신이 구축한 좌파 시스템의 펀더멘털을 도려내는 쪽으로 가니까 위기감을 느꼈을 거라는 설명이다. 현 대통령을 공격함으로써, 위축된 좌파를 향해 재집결 깃발을 든 것이다. 지지층 결집을 통해 보호막을 더 단단히 하고, 한때 자신을 대체할 위치를 노렸던 ‘이재명’이라는 존재를 독수리에 쫓겨 둥지로 찾아든 작은 새처럼 품어주는 모양새를 취함으로써 범좌파진영의 정신적 추장, 영적 지도자를 자임하는 것이다. 청와대 핵심 참모를 지냈던 정치 원로는 “검찰의 칼날이 서훈, 박지원에서 멈추는 걸 보고 윤 대통령이 자신을 발탁해준 인사권자에 대한 인간적 의리, 좌파 진영의 거센 반발을 넘어설 자신감 부족 때문에 더 이상은 치고 올라오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 같다. 그런 자신감에서 본격 영향력 확대에 나선 것”이라 분석했다. 물론 그 어떤 비판도 문 전 대통령에겐 마이동풍일 것이다. 오로지 자기 지지층만 바라보고 발언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지자들에게 문 전 대통령의 뜬금없는 윤 정권 비난은 일관되고 매우 시의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하지만 수용자들의 반응이 아무리 상대적이라해도 절대적 옳고 그름 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정권을 넘겨주고 물러난 전직 국가원수가 후임 정부 공격에 직접 나서는 이런 행태는 평화적 정권교체의 취지를 깨뜨리는 것이다. 만약 YS가 DJ 정부초 이렇게 공격했다면 보수는 이래선 안된다고 비판했을 것이다. 더구나 집권 내내 국민을 갈라치기해 나라를 정신적 내전 상태로 몰아넣은 것도 모자라 퇴임 후까지 진영 편향적 발언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려 한다면 전직 국가원수로선 부끄러운 처신이다. 윤 정부의 대응 방법은 간단하다. 문 정권 청산에 속도와 강도를 내는 동시에 지지 기반의 외연을 넓히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상화는 문 정권의 비리 의혹들에 대한 명확한 진실 규명과 책임 추궁 없이는 완수되지 않는다. 민노총과 시민단체 몇 개 두들긴다 해서 완수되는 과제가 아니다. 나라의 근간을 흔들어 놓은 지도자를 심판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또 어떤 통치자가 나타나 자유민주주의 근간을 흔들어도 국민은 입을 닫고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 윤 정부가 지향하는 개혁은 그 옳은 방향성에도 불구하고 실행에 옮길 자원과 수단이 태부족한 게 현실이다. 유일한 길은 지지 세력의 외연을 넓혀 국회 권력을 포위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재명 대표 중심 현 민주당 중추 세력과의 협치는 연목구어(緣木求魚)이고, 민노층 등 강성 좌파 그룹과는 타협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들이 진보 진영의 전부가 아니다. 민주당 내에도 온건 진보가 존재하며. 진보진영 내 시민단체·학계 등에도 온건·합리적 그룹은 분명 존재한다. 진정성 있게 다가가 얘기를 듣고 합리적 대목을 적극 반영하며 공감대를 넓혀야 한다. 그러면 문재인·이재명 깃발 아래의 강성 좌파는 자연스레 고립될 것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필자는 칼럼을 준비하면서 지인들의 의견을 청해 듣곤 한다. 그중엔 우리 사회 이념 스펙트럼을 극좌1~극우10으로 놓고 펼쳐볼 때 5.1~8 사이로 분류할 만한 인사 그룹이 있다. 독립을 염원하는 식민치하 백성들처럼 정권교체를 열망했던 그들은, 윤석열 대통령의 말실수나 측근 편중 인사에 한숨을 내쉬면서도 “그래도 문재인의 캠코더보다는 낫지 않나. 이재명 정권이라면 얼마나 악몽이었겠느냐”며 스스로를 다독였고, 당 대표를 무리하게 쫓아내려는 윤핵관에 개탄하면서도 이준석의 박덕(薄德)한 인성에 혀를 찼고, 간단한 사과 한마디면 정리될 사안을 ‘새끼’ 발언마저 부인하며 질질 끌고 가는 걸 답답해하면서도 MBC의 행태에 몇 배 더 분노했다. 그런 그들이 이번 주 필자에게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다며 지적한 것은 “내 주변 보수들은 유승민류의 정치인에게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는데 왜 느닷없이 경선룰 분란을 자초하느냐”는 것이다. 필자가 “당의 대표는 당원들이 뽑는 게 맞지 않느냐”고 당원 100% 타당론을 슬쩍 제시하자 대뜸 “핵심은 그게 아니지 않으냐”는 반박이 돌아왔다. “당원 100% 방식에 찬성한다”는 분들도 “이번부터 적용은 국민을 우습게 보는 것”이라고 했다. 친윤계가 당원 100% 당위성 홍보에 아무리 열을 올려도 국민은 ‘당신들 속셈을 다 안다’며 실소하는 것이다. 친정체제 구축은 국민에겐 지긋지긋한 패거리 정치, 소인배 정치의 동의어로 들린다. 문제는 소인배 정치가 당사자들만의 자승자박에 그치는 게 아니라 나라 미래에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이다. 윤핵관의 의중대로 공천 영향력을 확대해 자기 사람들을 쉽게 심으면 총선은 해보나 마나다. 총선에서 지면 친윤-비윤이 극렬히 싸우고 나라는 다시 포퓰리스트 좌파의 수중에 넘어가게 된다. 지금은 여권이 단결해 외연을 넓혀도 총선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국제 정세는 급변하고 내년 경제 상황은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 먹고 사는 문제가 악화되면 윤 대통령의 개혁도 동력이 떨어지고 여당은 더 불리한 조건에서 총선을 치러야 한다. 백번 양보해 정치공학적으로 친정체제가 유용하다 해도 지금 룰 변경을 밀어붙이는 친윤계가 총선 승리와 정권 재창출이라는 ‘빅 픽처’에 따른 정교한 전략을 갖고 그러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그런데도 갈대처럼 한 방향으로 눕는 여당 의원들을 국민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연극 보듯 환시(環視)하고 있다. 의원들의 우선 관심사는 대통령이나 지지자들과 다르다. 그들은 설령 정권이 쇠하는 길로 갈지라도 내 공천과 배지가 안정적이 되는 게 우선이다. 이제라도 윤 대통령이 교통정리를 해줘야 한다. 당원 중심으로 가자는 의원들 총의는 존중하되 다음(차차기)부터 적용하고 이번에는 결선투표만 도입하도록 하는 것이다. ‘당원-국민 비율’ 변경은 시험 코앞에 출제범위를 완전히 바꿔버리는 것에 해당하지만, 표심 왜곡을 막기 위한 결선투표 도입은 채점 절차를 더 엄격히 하는 것이므로 불공정 시비 소지가 적다. 결선투표를 반대하는 후보라면 자신이 과반수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사람임을 알면서도 상대 표 분산이라는 요행수만 노리고 있음을 자인하는 셈이다. 보수진영 지도자에게 지지율 못잖게 중요한 건 지지층 마음 속의 신뢰와 존경이다. 좌파 진영에서는 ‘지지=신뢰=존경’의 등식이 성립한다. 권력 쟁취가 곧 실질적 자기 이익의 증대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주말 거리의 좌우 시위대를 비교해보라. 좌파 진영의 상당수는 노조, 시민단체, 온갖 조합·사회적 기업 등 우파 정권의 몰락이 자신의 이익과 직결돼 있는 사람들이다. 반면 우파 중에 정권 향배가 실제 자신의 일상 경제활동이나 이해관계에 직결돼 거리로 나온 사람은 드물다. ‘문재인의 40%’는 그 어떤 내로남불에도 “사랑해요”를 외치는 데 반해 ‘윤석열의 40%’ 중 태반은 말실수 한 번에도 우수수 떨어져 나가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런 모래성을 견고하게 만드는 방법은 존경과 신뢰다. 길은 간단하다. 당당하게 대도(大道)를 걷고, 자기편의 허물이나 실수에 엄정하고 겸허해지는 것이다. 만약 샛길, 꼼수를 택하면 존경과 신뢰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윤석열’은 정치 입문 전까지 최소한 절반이 훌쩍 넘는 국민에게 멋있는 사람이었다. 그 멋은 당당함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며 당당했던 검사, 뒷거래 꼼수는 생각하지 않는 강직한 이미지…. 그런 점에서 경선을 앞두고 룰을 바꾸는 식의 정치는 가장 비(非)윤석열적인 길이다. ‘윤석열 돌풍’은 기존과 달랐기 때문이다. 정권의 사냥개였던 옛 검찰과 달랐듯이, 계파·친정체제 욕심을 부리다 수렁에 빠졌던 과거 대통령들과 달라야 한다. 정치 신인이 뭐가 아쉬워서 야합과 술수에만 능한 정치꾼들의 때를 묻히는가. 게다가 윤 대통령이 개혁하고 싶어 한 보수정치의 가장 큰 병폐는 패거리·계파정치 아니었나. 힘들게 쌓았던 당당함의 이미지를 한줌도 안 될 현실 이익 때문에 훼손해선 안 된다. 검사 시절 정권이 아무리 난리 쳐도 국민이 지켜줬듯이, 당 대표가 누가 되든 대통령만 당당하면 국민이 최대의 버팀목이 되어줄 것임을 잊은 것인가.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은 최근 지지율 회복세의 의미를 깊게 새겨야 한다. 그동안 왜 지지율이 바닥을 헤맸는지, 남은 4년 5개월간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지의 진단과 처방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지율 회복세의 원인은 명확하다. 첫째는 국민이 윤 후보를 뽑아준 근본 이유인 법과 원칙의 회복, 좌파정권 청산 미션에 화답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둘째는 도어스테핑 중단으로 본인 리스크가 줄었고, 셋째는 여당 내분이 잠잠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너무도 당연한 방향이었다. 그 명확한 길을 외면한 채 헤매온 대통령에게 국민이 이게 당신이 갈 길이라고 정답 힌트를 준 게 최근의 지지율 변화다. 이제 관건은 모범 답안대로의 실행인데, 다시 엉뚱한 길로 이끌 유혹은 숱하게 널려 있다. 윤 대통령은 민노총 불법에 법과 원칙, 무관용 대응을 내세워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아직은 행동으로 뒷받침되는 게 약하다. 파업이 장기화될수록 적당한 타협을 요구하는 압박이 커질 것이다. 과거 정권들도 법과 원칙을 강조하다 적당히 타협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만약 이번마저 법과 원칙 다짐이 호기로운 수사(修辭)로 끝난다면 균형 잡힌 노사 관계는 물론 정권에 대한 국민 신뢰는 영영 세울 길이 없어질 것이다.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노동법상의 절차를 준수한 파업에 대해선 확실하게 권리를 보장하되, 정치 파업이나 불법 행위로 인해 야기되는 모든 피해에 대해서는 관용 없이 끝까지 민형사상 책임을 묻는 선례를 만들고 정권 내내 일관성 있게 지속해야 한다. 피해를 입은 민생과 기업들을 위한 지원 조치는 신속하고 구체적이고 방향이 선명해야한다. 민노총이 개별 기업들을 분리 공략하면 당해낼 기업은 많지 않다. 피해 기업들이 개별적으로 민노총 세력을 상대로 배상을 받아내는 건 지난(至難)한 작업이다. 행정적 제도적 지원에 나서고,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기 위한 제도 개혁에 착수해야 한다. 법과 원칙을 강조한 걸로 대통령이 할일을 다한 것은 아니다. 마거릿 대처는 2, 3년치 석탄을 비축해 놓고 파업에 맞섰다. 피해 최소화 대책을 면밀히 챙기며 국민에게 인내와 협조를 거듭거듭 당부해야 한다. 그래서 중도는 물론이고 온건 진보 내에서도 “무너진 룰을 바로 세우는 건 불가피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게 해야 한다. 일관성·지속성을 통해 불법 행위자들에게 교훈을 주고, 가치와 원칙이 끝까지 지켜진다는 점이 분명해지면 상대 진영 내에서도 동의와 존중의 폭이 자연스레 확산될 것이다. 문 정권 청산이 확실하게 이뤄질지도 아직은 변수가 많다. 문 전 대통령 관련 주요 의혹, 즉 △울산시장 선거 개입 △원전 폐쇄 △대북 의혹 △딸 부부의 태국 이주 관련 의혹 등의 진실이 규명되어야 하는데, 검찰총장으로 발탁해준 인사권자에 대한 부채감, 격렬해질 좌파진영의 반발 등을 우려해 대충 덮고 가자는 편한 길 유혹이 생길 수 있다. 성공 정권의 길로부터 벗어나게 할 또 하나의 유혹은 당 장악 욕심이다. 이를 부추기는 이들이 윤핵관이다. 매사를 계파정치·당권다툼의 낡은 관점에 찌든 눈으로 바라보는 그들은 속삭일 것이다. “당이 정권을 적극 방어해주지 않습니다, 중진들은 몸 사리기 급급합니다, 당을 장악해야 행정부가 편해집니다….” 윤 대통령은 한남동 관저 만찬정치를 시작하면서 윤핵관부터 불렀는데 이를 말리지 못한 참모들의 수준이 한심할 뿐이다. 윤 대통령은 당에 아무 연고도 없다. 그래서 자기 사람을 심어 장악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야 한다. 당에 뿌리 깊은 계파, 생사를 같이해온 가신(家臣)들이 없기 때문에 누구나 친윤이 되는 데 장벽이 없다. 과거 이명박 정권을 압박했던 친박 같은 라이벌 세력도 없다. 대통령이 오로지 국정에만 전념해 경제를 살리고 인기가 올라가면 여당은 모두가 친윤이 될 것이다. 반면 지지율이 바닥을 기면 다들 뒤에서 딴소리 하고 심지어 노무현 대통령 때처럼 탈당을 요구하는 세력도 나올 수 있다. 만에 하나 대통령이 공천에 검찰 출신 등 친분 인사들을 심으려 하면 공천 파동은 불 보듯 뻔하고 총선은 해보나 마나가 된다. 당 대표도 마찬가지다. 차기 대표는 측근이든 아니든, 대선 후보군이든 아니든 총선 승리에 대통령과 명운이 함께 걸린 공동운명체가 될 수밖에 없다. 굳이 대통령이 개입할 이유가 없다. 차기 대선주자도 대통령 지지율이 높으면 감싸고, 지지율이 바닥이면 차별화하려 들 것이다. 아무리 심복, 설령 동생이나 자식이 차기 주자가 되어도 마찬가지다. 한동훈 차출론도 마찬가지다. 설령 한동훈이 아무리 유능하게 대표직을 수행해도 대통령 지지율이 바닥이면 “검찰 출신은 역시 안 돼”라는 인식이 퍼지고 멀쩡한 한동훈까지 망가질 수 있다. 경제가 바닥이거나, 배우자 리스크가 불거지면 한동훈 할아버지를 데려와도 총선은 이길 수 없다. 결론적으로 대통령은 사람을 가려가며 택해서 당을 장악하는 게 아니라, 전체를 다 내 사람으로 만드는 큰 그림의 접근이 필요하다. 김영삼 정부 초기 주변 현인들은 YS에게 “금융실명제와 하나회 청산 두 개만 제대로 해도 청사에 남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지금 국민은 윤 대통령에게 조언해주고 있다. △민노총으로 상징되는 비대한 집단 권력에 맞서 법과 원칙·공정을 회복하고 △좌파 정권이 저지른 비리·불법을 청산하고 △신중한 언행과 엄정한 주변 관리로 사적 리스크를 차단하고 △당 장악 욕심을 버리라는 것이다. 국민이 이렇게 정답지를 보여주는데도 지난 봄여름의 자충수를 반복하면 온건 보수와 중도층이 기대를 접고 다시 돌아설 것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우리 사회가 정신적 내전 상태처럼 갈라져 있다 해도, 국민 과반수가 동의하는 상식의 추(錘)는 작동한다. 그런 상식의 추로 판단할 때 MBC의 행태는 도를 넘었다. “대통령실은 잘했느냐”는 반박으로 덮어 버리는 건 억지다. 윤석열 대통령과 대통령실 대응의 적절성은 그것대로 따져야할 문제고, 보수성향 언론들도 숱하게 비판해 왔다. MBC의 문제라 할 때 필자는 최근 대통령실과의 상호 작용 과정에서 감정적 급상승으로 빚어진 대목만을 지적하는 게 아니다. 지난 대선 과정을 포함해 최근 수년간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일부 보도들에서부터 최근의 괄호속 (미국) 자막과 PD수첩까지 이어지는 보도·시사물에 드러난 문제들은 우발적인 실수나 오류 차원이 아닌 걸로 보인다. PD수첩이 김건희 편에서 대역 고지를 안 한 것을 여당이 문제 삼는데 더 심각한 건 그게 아니다. “어렵게 만났다”는 소개와 함께 모자이크 처리되고 음성 변조된 제보자가 등장했는데 실제론 대역이었다고 한다. 모자이크와 변조를 하면 누구나 실제 인물이라 여긴다. 이를 응용한 게 모큐드라마다. 불륜 현장 급습 같은 장면 연출에 많이 사용된다. 시청자를 속일 의도가 아니라면 시사프로가 대역을 쓰면서 모자이크 처리하고, 음성 변조할 이유가 별로 없다. 제보자 목소리 녹음을 방영할 수 없는 사정이 있으면 그래픽 처리를 해서 자막으로 발언을 내보내고 진행자가 읽어주면 된다. 2008년 광우병 편 제작자들이 그랬듯이 ‘적개심이 하늘을 찌른’ 상태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결론에 닿기 위해 골몰하는 제작진의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만약 전임 정권 때 임명된 사장과 간부들이 아직 보직을 맡고 있던 문재인 정부 초기에 문 대통령이나 김정숙 여사를 다룬 방송에 이런 식의 마사지가 가해졌다면 ‘민주노총 산하 언론노조 MBC본부’(이하 노조)는 사장과 제작 간부 퇴진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섰을 것이다. MBC 전·현직 기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노조와 현 경영진에 비판적인 입장인 사람들이다. ―노영(勞營)방송이라고들 하는데, 실제로 노조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가. “노조가 곧 회사다. 단지 파워가 세다는 차원이 아니다. 워낙 공고하게 노조 중심 시스템이 갖춰져 있어 노조에 등을 지고는 버티기가 어렵다.” 전·현직 사장이 모두 노조위원장 출신이고, 보도국은 국장을 비롯한 보직간부 전원이 노조원이라고 한다. 공채로 들어온 기자들은 의무처럼 노조에 가입한다. 다른 일반 부서들도 대부분 노조원이다. “노조 주도 파업에 불참하면 정상적인 직장 생활이 어렵다. 투명인간 취급하고 심지어 들리는 소리로 욕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비노조원으로 지낸다는 건 왕따를 자처하는 중고생이나 마찬가지다.” 2017년 전임 정부 때 임명된 사장이 임기가 2년 넘게 남은 상태에서 쫓겨나고 최승호 전 노조위원장이 사장에 취임한 이튿날 MBC에서는 ‘대숙청’이 벌어졌다. “우리는 그날을 일이팔(128) 사태라 부른다. 2017년 12월 8일 오후 4시경이었다. 저녁 뉴스 준비로 정신이 없는데 노조원들이 동시에 보도국에 밀어닥치더니 다짜고짜 자리를 내달라고 했다. 인사 발령이 났다는 것이다. 데스킹 보던 기사나 저녁뉴스 아이템을 넘겨줄 수도 없었다. 분장실에 있던 메인 뉴스 앵커들도 그대로 쫓겨났다.” 파업 불참자들은 전원 비제작 부서나 단순 지원 업무로 전보됐다. 정상화위원회 타이틀 아래 한때 동료였던 기자가 동료 선후배를 앉혀 놓고 과거의 리포트, 데스킹 기록을 따지는 나날이 이어졌다. ―어떻게 이런 지경에 이르렀나. “1988년, 92년 파업 등의 영향으로 원래 노조가 강한 분위기였던 차에 언노련 결성 핵심인 최문순 전 노조위원장이 2005년 차장급에서 사장으로 발탁되면서 노조의 위세가 몇 단계 상승했다. 특히 문 정부 들어 2012년 파업 때 해직됐던 전직 노조위원장들이 연거푸 사장이 되면서 노조의 파워는 절정에 달했다.” MBC 경영진 임면권은 여야 6 대 3으로 구성된 방문진 이사회가 갖는다. 이사 임기는 3년인데 좌→우로의 정권교체인 이명박 정권 출범 때는 기존 이사들 임기를 보장해 줬다. 그러나 우→좌로 바뀐 문재인 정권 출범 때는 노조와 좌파단체들이 보수 성향 이사들의 집 학교 교회까지 쫓아다니며 압박했다. 버티다 못한 2명이 사퇴함으로써 6 대 3이 4 대 5가 되며 기존 사장을 쫓아낼 수 있었다. 자신들이 정권을 잡으면 노조가 몰려가 쫓아내고, 정권을 뺏기면 임기 존중을 외치며 버티는 편리한 방식이다. 현임 박성제 사장의 임기는 내년 2월까지지만 현 방문진 이사진은 작년 8월에 구성돼 2년 가까이 임기가 남았다. 임기 3년의 다음 사장도 민주당 성향 인물을 앉힐 수 있는 것이다. 최근 일부 시민들 사이에 MBC 광고중단 운동이 일고 있는데 정치권은 일절 개입해선 안 된다. 일부 국민의힘 의원이 광고중단을 얘기한 것은 자유시장경제의 가치 훼손뿐만 아니라 전술적으로도 하급 행태다. 물론 더 어이없는 것은 MBC와 일부 야당 의원들이 1974~75년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태를 들먹이며 동일시하려는 행태다. 동아일보 광고탄압은 모두가 권력에 굴종하고 침묵할 때 유일하게 언론의 정도(正道)를 지킨 한 신문에 대해 정권이 기업을 압박해 광고를 못 주게 한 사건이다. MBC 사태는 정반대다. 요즘 세상에 정권 비판을 못 하는 언론은 없다. MBC에 대해 광고중단 운동까지 거론되는 것은 정권을 비판해서가 아니라, 국민의 자산을 위임받아 운영하면서 언론의 가장 기본적인 윤리와 가치마저 팽개친 듯한 행태를 보이기 때문이다. 언론의 본령이 권력 비판이라고 할 때 그 권력은 정권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야당, 노동단체 등도 감시·견제되어야 할 권력이다. 언론이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할 때 어용, 나팔수라 부르듯이, 특정 이념·진영·정파의 전위대처럼 편향된 행태를 거듭하면 ‘진영의 사냥개’라 불리는 날이 올 수 있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충북 단양 해발 943m 용산봉의 중턱에 있는 피화기(避禍基)마을은 예전엔 전쟁도 비껴간 곳으로 불렸다. 워낙 산간벽지여서 이곳의 화전민은 6·25전쟁이 난 것도 몰랐다 한다. 8일 저녁 김은혜 홍보, 강승규 시민사회수석이 국감장에서 ‘웃기고 있네’ 필담을 나눴다는 뉴스를 접하고 그런 마을이 떠올랐다. 민심의 포성(砲聲)이 들리지 않는 산간벽지나 구름 위가 아니라면 어떻게 저렇게 해이할 수 있을까. 정권 교체를 이뤄낸 과반수 국민이 느끼는 절박함과 긴장감이 저들에겐 딴 세상의 일인가. 비서들뿐만이 아니다. 자신이 안전 담당 장관이라는 사실조차 망각한 듯 가벼운 입을 놀린 행안부 장관, 어색한 농담으로만 기억되는 총리…. 국제 질서의 총체적 격변과 대형 참사로 국민은 공습경보 상황처럼 긴장해 있고, 거리엔 정권증오 세력이 굶주린 승냥이처럼 발호하는 상황에서 여권 인사들은 어떻게 저토록 해이하고 경박할까. 매일 빈소를 찾으며 아픔에 공감하려 애쓰는 대통령의 노력을 측근들이 갉아먹는 형국이다. 필자는 어제 보수 성향의 원로 2명에게 “당신이 대통령이라면 어떻게 대응했겠느냐”고 물었다. 답은 거의 비슷했다. “참사 발생 직후 유족을 찾아간 대통령은 ‘모든 게 제 부덕의 소치’라며 사죄한다. 대통령의 말은 짧고 간결했지만 반나절쯤 지나 대통령이 얼마나 깊이 비통해하며, 원인 규명과 문책, 시스템 마련에 굳은 의지를 갖고 있음을 짐작케 하는 관계자 전언들이 흘러나온다. 거의 동시에 총리와 행안부 장관이 대통령에게 사표를 낸다. 대통령은 ‘지금은 일단 수습과 원인 규명이 중요하다. 여러분 거취는 급한 수습을 한 뒤 판단하겠다’며 총리와 장관을 현장으로 보낸다….” 국민이 얘기할 걸 선제적으로 하면 효과는 배가된다. 김이 빠진 야당이 “정권 책임을 인정했다”며 난리 쳐도 국민의 손가락질만 받게 된다. 윤 대통령은 7일 국가안전시스템 점검회의에서 경찰을 강하게 질책했다. 전문(全文)이 공개된 긴 발언에 담긴 대통령의 상황파악은 매우 구체적이고 정확했다. 하지만 국민이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건 그 이상이다. 다시 원로들의 “내가 대통령이었다면”이 이어진다. “대통령이 주재한 국가안전시스템 점검회의의 중심은 국내외 안전 분야 최고 전문가들이었다. 대통령은 오랜 시간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 토론한 뒤 회의에 참석한 장관과 비서관들에게 지시한다. 내일은 오늘 전문가들 말씀을 토대로 각 부처에서 어떻게 시스템을 만들 것인지 가져와서 같이 논의합시다.” 대통령은 국민보다 앞서 생각하고, 더 넓게 많이 듣고, 더 크게 생각하는 자리다. 결단의 타이밍도 중요하다. 오만한 버티기와 책임 회피가 빚는 결과는 문재인 정권이 잘 보여줬다. 조국 의혹이 터져 나온 뒤 사퇴까지 거의 두 달이 걸렸다. 숱한 사고와 정책 실패에도 아무도 정무적 책임을 지지 않았다. 강경 지지층만 보며 오기를 부린 결과는 결국 정권 교체였다. 이번 사태에서 여실히 드러난 공직 기강 해이 역시 문 정권 내내 횡행했던 편 가르기 인사와 적폐청산 광풍이 빚은 ‘복지부동이 최고의 생존’이라는 학습효과 탓이 클 것이다. 거의 사보타주 수준인 용산경찰서장 등의 행태는 문 정권을 거치면서 일부 경찰 간부 집단이 어떻게 퇴락했는지, 얼마나 정치화됐는지 짐작하게 한다. 비단 경찰뿐만 아니라 여러 권력기관에서는 전 정권에서 잘나갔던 라인의 인사들이 ‘5년간 기대할 게 없다’며 뒷짐 진 채 달력만 보고 있다는 얘기가 몇 달 전부터 들려왔다. 이를 깨려면 대통령의 리더십이 강화돼야 한다. 질책이나 버럭 호통만으로 되는 건 아니다. 언행이 품위와 품격을 갖고, 비서들이 아닌 일선 부처에 힘을 실어주며 공정한 인사와 엄격한 신상필벌을 하면 권위가 서고 신뢰가 깊어진다. 취임 전 약속대로 내각이 움직이게 하고, 대통령은 격려하며 전체를 봐야한다. 윤 대통령은 야당복은 타고난 사람이다. 여러 대형 혐의·의혹을 받고 있는 사람이 야당 대표고, 전직 대통령은 장삼이사도 상상키 어려운 행동으로 비판의 화살을 자초한다. 풍산개 논란은 전 정권 세력의 두 가지 본색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첫째는 진실 호도(糊塗) 본색이다. 법령 개정이 안 돼 풍산개 위탁 보호 자체가 불법이므로 내보냈다고 하도 주장하기에 대통령기록물법시행령을 찾아봤더니 제6조의 3항에 ‘선물이 동물 또는 식물 등이어서 다른 기관에서 더욱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것인 경우에는 다른 기관의 장에게 이관하여 관리하게 할 수 있다’는 내용이 올 3월 29일 자로 신설돼 있었다. 풍산개를 완전히 자기 소유로 할 수는 없어도 맡아서 기르는 데는 별 법적 장애가 없는데도 법령 탓을 하며 돈 때문이 아닌 듯 호도한 것이다. 둘째는 비정함이다. 기르던 개를 미련 없이 내치는 그 심성은 자신들의 이익이나 목적 달성을 위해선 무엇이든 조금도 주저하지 않을 냉혹함을 보여준다. 이런 수준의 야당과 전직 대통령이 ‘도와주는데도’ 지지율이 반등하지 못하는 것은 저들과 월등히 차별화되는 품격 공정 상식 겸허함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겸손한 자세로 민심에 귀 기울이면 권위와 품격, 신뢰가 저절로 높아진다. 그러면 야당과 좌파그룹이 아무리 정권을 흔들려 해도 자기 무덤 파기로 끝난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현 야권 인사들이 얼마나 집요하고 저열하게 공격했는지 돌아보라. 하지만 국민적 평가와 지지가 한결같이 높게 나타나니까 요즘은 섣불리 공격하면 자기 손해가 된다는 계산에서 오히려 참배 이벤트를 벌이지 않는가.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관련된 온갖 의혹들이 진실의 문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 하지만 이 대표 문제는 본질은 아니다. 혐의나 의혹이 가볍다는 뜻이 아니다. 대선에서 과반수 국민이 염원했던 진정한 의미의 적폐 청산과는 다른 차원의 일이라는 뜻이다. 거물급 정치인의 위법 여부에 대한 진실 규명 차원으로서 중대한 사안이지만, 문재인 정권 5년간의 국익 훼손 의혹들과 비교하면 잡범과 조직범죄 집단의 혐의처럼 레벨이 다르다. 이 대표 문제는 사법의 영역에 맡겨 놓으면 된다. 수사기관은 공정성과 정치적 중립을 견지하며 끝까지 진실을 파헤치고, 법원이 유무죄를 판단하면 된다. 결론이 나오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이 대표 문제를 마무리한 뒤 문 정권 청산으로 들어간다는 발상을 한다면 무책임한 업무방기다. 두 사안은 순차적으로 처리되어야 할 동종 카테고리가 아니며, 시간적으로도 많은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울산시장 선거개입, 월성원전 강제폐쇄 등 문 정권 기간에 이미 불거진 의혹들도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상태인데 정권교체 후 속속 새로운 의혹들이 추가되고 있다. 불과 5년간 이렇게 많은 해괴한 일들을 자행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수준이다. 대선 민의는 국가정상화였고, 이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 문 정권의 불의와 불법에 대한 진실 규명과 청산이다. 여기서 말하는 청산은 문 정권이 자행한 것 같은 캐비닛 털이식 형사처벌·망신주기가 아니다. 온갖 패악과 국익 훼손이 어떤 경위로 벌어졌으며, 시스템상의 어떤 결함으로 인해 제어되지 못했는지 진실을 밝히고 국가 문서에 기록해 기억하는 의미의 청산이다. 이탈된 국가궤도를 정상화시키기 위한 진실규명이 목적인 것이다. 소득주도성장, 부동산정책 같은 실정(失政)은 현실경제에 대한 무지, 이념적 경직성 때문에 빚어진 무능의 소치라 치자. 하지만 분명한 의지와 방향성을 갖고 추진했던 일들에 대해선 의도와 경위, 책임소재가 분명히 밝혀져야 한다. 예를 들어 삼불일한(三不一限)은 청와대와 외교부, 누가 어떻게 논의해서 어떻게 결정했는지, 그 과정에서 국가주권의 자진 반납성 훼손이 미칠 악영향에 대한 우려는 없었는지, 중국에 약속한 것은 무엇이고, 누가 어떤 자리에서 어떻게 약속해 준 것인지… 낱낱이 밝혀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정상적인 국회라면 이미 국정조사가 이뤄졌어야 한다. 미국 같았으면 상원에서 몇 달째 매일 청문회가 열리고 있을 것이다. 문 전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준 USB의 내용은 무엇인지, “북한의 NLL 인정” 발언의 진위는 무엇인지, 정의용 당시 국가안보실장이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강조한 근거도 다 밝혀내야 한다. 육사 교과과정 필수과목에서 6·25전쟁사가 제외된 것도 다 맥이 닿아 있다. 이처럼 정권의 두뇌에 특정한 칩이 심어지면서 나라의 모세혈관까지 변질된 사안들이 숱하다. 칩의 실체와 작동기제를 규명해야 한다. 태양광 비리, 서해 월북몰이, 원전 폐쇄, 울산시장 선거 개입처럼 사법적 판단을 물을 수밖에 없는 사안 이외의 숱한 의혹들마저 다 사정기관의 영역에 맡기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문 정권 청문회’다. 국회는 최대한의 예우를 갖추고 문 전 대통령은 국회에 나와서 설명하는 게 당당하다. 정치보복은 반복되면 안 되지만 5년 위임을 받은 정권이 나라의 정통성과 기틀을 허물고 사회 곳곳을 자기들 집단의 이권 네트워크로 변질시키려 했는데도 묵과해주는 전례도 만들면 안 된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법치와 공정이라는 나라의 기둥은 일개 정권이 마음대로 흔들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일부 보수 시민들 사이에선 윤 대통령이 자신을 검찰총장으로 발탁해준 인사권자에 대한 인간적 부채감에 영향 받을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취약한 정치적 자본 때문에 흐지부지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그러면서 경제난, 협치 등의 핑계를 대지 않겠느냐는 전망이다. 협치를 위해 문 정권 청산을 안 한다 해서 좌파진영이 호응할까? 좌파진영의 사상적 맹주로 불리는 백낙청은 11일 오마이뉴스TV 인터뷰에서 “‘우리가 뽑은 대통령이니까 일단은 성공하도록 도와줘야 된다’는 얘기는 촛불혁명 이전의 발상”이라고 했다. 상대 정권의 지지율이 낮다 해도 보수진영은 강제 퇴진 같은 발상은 하지 않는다. 좌우를 막론하고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 어디에도 한국의 좌파집단처럼 촛불만능 발상을 하는 집단은 없다. 선악 세계관이 뇌에 박힌 상태에서, 민중이 원하면 헌법이 정한 임기는 중요한 게 아니라는 편리한 논리까지 장착한 그들은 선전선동과 군중 동원의 강도를 계속 높여가며 정권을 마비시키려 할 것이다. 시대의 과제를 회피하는 정권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연금 노동 교육 공공부문 개혁과 더불어 문 정권 청산은 윤석열 정권 탄생의 근본 이유이며 소명이다. 원칙과 시대정신은 엿 바꾸듯 내줄 수 없다. 문 정권 5년간의 진실을 밝혀 책임을 묻고 공식 기록으로 남겨두지 못하면 언젠가 정권이 교체됐을 때 역사는 또다시 왜곡되고 반복될 것이며, 소득주도성장 삼불일한 대북저자세 탈원전 등등 문 정권의 온갖 ‘적폐’들이 치적으로 포장돼 부활하려 기승을 부릴 것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필자는 대선 때 ‘문재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해본 적이 없다. 이름을 변형시켜 조어(造語)하는 게 부적절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문재인 전 대통령과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보노라면 ‘문재명’보다 더 효율적인 표현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두 사람이 갈수록 닮은꼴 특질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몇 개만 나열하면 이렇다. ①내 편 결집 선동 ②시대착오적 역사관·국제관 ③어설프게 알아서 더 과격한 운동권 마인드 ④공사(公私) 구분 결핍…. 문 전 대통령은 감사원의 서면조사 요구에 “무례한 짓”이라고 격노했다. 1993년 여름 오후 필자는 이회창 당시 감사원장과 많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대쪽 대법관에서 감사원장으로 변신해 ‘성역 없는 감사’로 높은 국민적 지지를 받던 이 원장의 당시 최대 화두는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조사 문제였다. 5공 시절 평화의댐과 6공 시절 차세대전투기사업에 대한 특별감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면서, 전직 대통령까지는 건들지 말라는 청와대의 압박과 견제는 갈수록 거세졌다. 이 원장이 고심 끝에 닿은 결론은 단순 명확했다. 오로지 원칙과 법리에 따르겠다는 것. 피감 사업의 최종 결정권자를 조사하지 않고 최종 감사 결과를 내놓을 수는 없다는 결론에 닿은 것이다. 그로부터 3주 가량 후 실제로 감사원은 전, 노 조사를 공식화했다. 건국 이후 처음인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정기관의 조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감사에는 성역이 없어야 한다는 원칙 이외에 전임 정권에 대한 보복 의도나, 정치적 계산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이후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 등 여러 대통령이 조사 대상이 됐는데 문 전 대통령처럼 반응한 이는 없다. 전직 대통령이어도 사정기관의 조사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사회적 합의가 형성돼 근 30년간 이어져 왔는데 이번에 깨진 것이다. 법과 시스템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된다는 기본적 민주주의 소양만 갖추고 있어도 나올 수 없는 행동이다. 그냥 조사에 응하지 않으면 될 텐데, “무례한 짓”이라고 굳이 공표한 것은 지지자들에게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이재명 대표가 검찰 수사가 옥죄어 오는 상황에서 한미일 연합훈련을 “극단적 친일”이라고 몰아붙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일 안보협력이 김대중-오부치 선언에서 싹이 트고 노무현 박근혜, 문재인 정부 초기까지 이어져온 것임을 몰랐을 리는 없지만 그에게 중요한 건 지지자들 가슴에 불을 질러 결집시키는 것이었을 것이다. 한미일 연합훈련을 지난 7일 대뜸 “극단적 친일행위”라고 몰아붙였던 이 대표는 논리가 궁색해지자 사흘 뒤엔 “한반도가 한미일과 북중러 군사동맹체들의 전초기지가 된다”며 마치 먼 미래의 큰 그림을 보고 문제를 제기한 것처럼 포장했다. 하지만 실제 그런 취지였다면 처음부터 한미일 안보협력이 미칠 장기적 파장에 대해 논리적으로 말하면서 속도조절론, 신중론을 내놓았어야 한다. 물론 북중러 밀착 유발설 자체도 허점이 많다. 한미일 안보협력이 없다고 북중러가 밀착하지 않을까. 세계는 자유주의와 전체주의 체제가 대립하는 구도가 극대화되고 있다. 한국이 한미일 안보협력을 외면하다해서 다른 나라가 높게 평가하고 한국의 입지가 강화될 것이라고 본다면 공상이다. 한국은 군사분계선 감청·정찰과 북-중 접경지역 휴민트 등의 정보자산이 많고, 일본은 이지스함 위성 해상초계기 등을 통한 정보가 풍부하다는 점에서 두 나라의 협력은 필수적이다. 속도와 깊이에 대해서는 신중론 등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친일 반일과는 무관한 이슈다. 이 대표의 친일몰이는 국제정세와 외교안보의 기초도 모르는 무식의 산물이거나, 다 알고도 그랬다면 선동을 통한 정치적 이익을 국익과 안보보다 우선시하는 선동가적 본성의 발현, 둘 중의 하나다. 물론 국익에 대한 책임감 없이 반일 선동으로 지지자를 결집하는 원저작권은 문 정권에게 있다. 문-이 모두 한미동맹에 대해서는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이는 말장난이다. 북한의 도발과 위협에 대해 한없이 관대하면서 한미동맹을 강화한다는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이다. 사소해 보이지만 이재명식 선동 기법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가 이번에도 하나 있다. 이 대표는 그제 최고위원회의에서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큰데 자위대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되는 것 아니냐는 발언을 하는 걸 봤다. 믿기지 않는 발언”이라고 했다. 누가 섣불리 자위대 발언을 했는지 궁금해 찾아보니 동명이인인 대통령실 부대변인의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동북아에 직면한 위협이다. 그 위협을 (막기) 위해 이웃 국가와 힘을 합친다는 건 전혀 이상한 문제가 아니다”는 발언을 갖고 단어를 살짝 비틀어 자극적으로 만드는 기법을 동원한 것이었다. 공사(公私) 구분 의식의 결핍, 자기 편의 도덕적 해이에 대해선 한없이 관대하다는 점도 닮은꼴이다. 이 대표 부인의 법인카드 논란과 김정숙 여사의 타지마할 방문, 옷 논란 등은 과거 진보진영 지도자들 주변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문-이 모두 현대사와 경제체제에 대해 80년대 시각이 화석(化石)화된 채 기득권층에 대한 적대감을 끊임없이 부추긴다. 사회과학과 이념 공부를 깊이 있게 하지도 않고, 몇 권의 이념서적으로 ‘셀프 득도(得道)’를 선언한 이들이 흔히 드러내는 성향이다. 어설퍼서 더 과격한 운동권 마인드의 잔재와, 대중의 적개심을 극대화시킴으로써 지지세를 결집하는 전술 마인드가 결합한 결과 문재명식 정치는 권위주의 좌파, 좌파민족주의(social nationalism) 성향이 됐고 앞으로 더 그런 성향을 강화해갈 것이다. 남북분단 일제강점이라는 역사·지리적 조건에 따른 민족주의와 평등주의 성향을 결합해 대중을 자극하면 폭발적 에너지를 낼 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특질들은 한국 야당의 역사·전통과는 거리가 먼 변종이지만 어쨌든 우세종이 됐다. 더 고착화할지, 조영래 김근태 같은 양심과 지성이 민주당과 진보진영의 중심이 되는 시대가 다시 올지는 미지수다. 다만 작가 고 최인훈의 비유를 빌리자면 한국사회라는 공룡의 머리는 다양성 다층성 상대성 자율성의 21세기 초급변 글로벌 시대를 정신없이 헤쳐 가는데, 꼬리 쪽에선 여전히 봉건시대, 일제강점기의 뇌구조에 머문 채 “무례한 짓” “친일국방”을 외치고 있고 그런 이들이 한국 야권의 중심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내 평생 자칭 도사나 무속인의 유튜브를 보는 일이 생기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런데 지난 주말 ‘천공 스승’이라는 사람의 유튜브를 찾아봐야 했다. 거대 야당 지도부까지 나서서 “윤석열 대통령이 영국 여왕 조문을 하지 않은 것은 천공의 지침에 따른 것 아니냐”고 공개적으로 의혹을 제기하는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천공 조문’을 키워드로 치니 무수한 블로그와 동영상이 떴다. 대부분 천공의 조문 관련 발언이 요약돼 있었는데 핵심은 “불필요한 조문을 가면 악한 기운이 묻어올 수 있다”와 “장(葬)을 치르기 전에 가는 것만이 조문이 아니다. 때에 따라 시간이 지나고 갈 수도 있다”였다. 블로거들은 여왕과 일면식도 없는 대통령 부부가 나쁜 기운을 피하려고 조문을 안 했을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았고, “합리적 추론” “나라가 걱정된다”는 댓글이 줄을 이었다. 그런데 막상 천공의 동영상 원본을 찾아보니 내용이 많이 달랐다. 명분 없는 조문을 가면 나쁜 기운이 묻어올 수 있다는 내용이 있긴 했지만, 그건 알지도 못하는 사이이면서 친구 따라 가는 것 같은 경우를 지칭한 것이었다. 생전에 은혜를 베풀어준 분이나 비즈니스 조문은 꼭 해야 한다는 취지로 천공은 주장했다. ‘장(葬)이 끝나고 가도 된다’는 대목은 나쁜 기운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늦게 가라는 뜻이 아니라. 외국에 있는 등 직접 조문할 수 없을 경우엔 먼저 통신수단으로 조의를 전한 뒤 나중에 조문해도 된다는 내용이었다. 4차원, 귀신 등등 황당한 내용과 표현들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는 일반적 상식과 특별히 다른 주장은 아니었는데 좌파 진영에서는 교묘히 변질돼 퍼진 것이다. 천공의 동영상은 지난 주말 기준 조회수가 2만 건 수준인 반면 좌파인사들이 만든 관련 영상들은 수십만 건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필자는 천공 같은 부류를 두둔할 마음이 전혀 없다. 대통령 부부가 과거 한때라지만 무속인, 도사류 인사들과 알고 지냈다는 사실 자체가 어이없고, 만약 취임 후에도 어떤 끈이 이어진다면 결코 용납키 어려운 일이다. 천공이 굳이 대통령의 영국 방문 출국 사흘 전 조문 주제의 동영상을 올린 의도도 불순하다고 의심된다. 어찌 보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좌파 선동가들과 결과적 협업·공생 관계라고도 할 수 있다. 좌파 진영의 조작 선동은 인터넷 매체, 블로거 차원만이 아니다. “(비속어 영상 첫 방송 직전인) 22일 오전 MBC 뉴스룸은 신이 난 듯 떠드는 소리에 시끌벅적했다”는 MBC노조(제3노조)의 성명이 보여주듯 문재인 정권 때 벼락출세한 이른바 공영방송의 간부들, 관변 알짜 자리를 차지한 좌파 연구가들은 보수 정권의 댐을 무너뜨리기 위해 무속·처가 같은 취약한 고리를 집요하게 노린다. 그런 공세의 한켠에는 민주당이 있다. 그제 이재명 대표는 국회연설에서 윤 대통령의 순방외교를 외교참사라 규정했다. 필자는 주요국 대사를 지낸, 중도성향이며, 현 정권과는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 전직 고위 외교관 3명의 의견을 26, 27일 들어봤다. 이들의 견해는 거의 일치했다. 경솔함과 실수, 미흡한 대목들이 있었지만 국익에 해(害)가 될 일들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평가였다. 영국 여왕 조문의 경우 정교하게 계획을 못 짠 외교팀의 무능, 막힌다고 조문을 쉽게 포기한 현장 판단은 아쉽지만 그 자체로 우리가 결례를 하거나 국익이 훼손된 사안은 아니라는 평가다. 오히려 국내에서 지나치게 이 문제를 시비거는 게 호스트(영국)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결례라는 의견도 나왔다. 한일정상회담도 만난 것 자체가 잘한 일이며. 찾아가서 만났든, 일본 측이 이를 간담으로 부르든 그게 만남이 이뤄졌다는 사실 자체를 훼손시킬 만큼 의미를 둘 일은 아니라고 평가했다. 회담의 모양새가 정상적이지 않게 된 것은 정상회담을 하고는 싶지만 징용문제에 대한 패키지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식 회담은 꺼리는 일본 측의 미묘한 입장이 영향을 미쳤으며, 그런데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회담이 이뤄질 것처럼 미리 장담한 대통령실 참모의 경솔함과 경험부족은 책임을 물어 마땅하지만 그래도 만난 것은 잘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14년 1월 다보스포럼 때 아베 총리가 헬기를 타고 일찍 와 박근혜 대통령이 기조연설을 하던 홀 맨 앞자리에서 경청했지만 박 대통령은 연설 후 뒷문으로 나가버렸다. 당시 아베의 행동은 굴욕외교가 아니라 적극적 대화의지 과시로 평가받았다. 이 같은 평가가 객관적인지 아닌지 이 대표도 주변의 외교 전문가들을 비공개로 불러 의견을 들어보기 바란다. 이 대표가 순방 외교 전체를 외교참사라 규정한 것은 자신의 외교적 무지를 자인한 것이거나, 선동가적 낙인찍기 기질을 드러낸 것, 둘 중의 하나다. 본질과 해프닝을 구분하는 능력의 결핍일 수도 있다. 외교참사라는 것은 잘못된 방향설정이나 중대한 절차상의 실수로 국익에 상당한 해를 끼친 경우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2019년 3월 문재인 대통령이 말레이시아 국빈방문 때 인도네시아 말로 인사말을 한 것은 해프닝성 실수지만, 3불 합의나 중국 혼밥은 외교참사에 해당한다. 저질 좌파와의 대결은 문재인 5년 청산이라는 시대적 소명을 안고 출범한 윤 정권으로선 피할 수 없는 과제다. 그런데 정부여당의 전열(戰列)을 보라. MBC의 자막 조작 의혹, 민주당과의 유착 의혹, 풀영상 외부 유출 경위 등은 반드시 진상이 밝혀져야 한다. 현재까지 드러난 것만으로도 MBC의 행태는 사법적 차원은 몰라도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상정돼 공정한 심사를 받는다면 중징계를 면치 못할 사안이다. 그럼에도 공세에 나선 대통령실과 여당 의원들은 등에 커다란 돌덩이를 하나씩 지고 있는 모습이다. 대통령이 실언을 사과하지 않은 채 공격을 명한 것은 골목길 불량배들을 쫓아내겠다며 뛰쳐나갔는데 아랫도리를 입지 않은 상태인 것처럼 시작이 꼬인 전투다. 바지 입는 것처럼 간단한 유감 표명을 안 하니까 일선에서 돌격하는 병사들이 마치 사령관의 실수를 덮어주기 위해 싸우는 병사들처럼 어깨가 무겁고, 진격 구호에 위엄과 권위가 안 생기는 것이다. 윤 대통령은 사과를 왜 한사코 거부하는 걸까. 왜 대통령실의 첫 대응에 15시간이나 걸렸을까. 필자가 취재한 바에 따르면 이 문제를 보고받은 윤 대통령의 반응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은 바이든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며 화가 난 모습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어떤 난제가 터지면 지도자는 참모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각자 생각하는 대책을 말하도록 해야 한다. 지도자가 먼저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드러내면 참모들은 결이 다른 제안을 하기 어렵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전두환 관련 발언에 대해 사과했지만 취임 후엔 자신의 발언이나 SNS 문자가 빚은 논란들에 유감 표명을 한 적이 없다. 신이 아닌 이상 5년 동안 한 번도 실수하지 않을 수는 없는데 앞으로도 어떤 실수를 하든 버티며 매번 나라를 흔들 것인가. 대통령실 주변에서는 윤 대통령이 일부 검사들에게서 발견되는 ‘무(無)오류 신화’를 털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국민이 바라는 것은 무오류 지도자가 아니라 크든 작든 자신의 실수를 솔직히 인정하는 용기와 정직성이다. 문 정권 5년 청산은 매우 난도 높은 과제다. 최고의 리더십과 전략, 타이밍을 갖춰야 한다. 그러지 않아도 대통령실과 내각에 보신주의 관료들과 온갖 끈을 쥐고 온 눈치꾼들이 다수 등용돼 약체로 평가받는데, 그런 약체팀의 입마저 대통령의 ‘버럭’에 주눅 들어 봉쇄된다면 조작·선동 전문가들의 전쟁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마지막 길은 국가와 지도자의 품격을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다. 지도자의 권위와 신뢰, 존경이 나라의 갈등과 정쟁을 멈추게 할 만큼 소중한 국가적 자산임을 보여준다. 지난 문재인 정권 5년간 진영 수장, 부족 족장으로 스스로를 전락시킨 대통령의 행태에 진절머리 쳤던 우리 사회이기에 존경받는 리더십에 대한 갈증이 더욱 큰 것이다. 그런 갈증의 파도를 타고 정치 무경험자에서 최고 권좌로 직행한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주말로 취임 4개월이 지났다. 과거 15라운드였던 프로복싱 세계타이틀전에 비유하면 이제 1라운드 종료 공이 울린 셈이다. 첫 라운드 동안 윤 대통령은 신뢰받는 지도자의 이미지를 만들어냈을까. 보스와 지도자를 구분하는 잣대는 많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경청이다. 지도자는 경청하지만 보스는 떠벌린다. 퀴즈 하나. 다음 발언을 한 사람은 누구일까? “내가 먼저 말하면 그게 곧 결론으로 여겨지지 않겠는가. 누가 스스럼없이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겠는가.” <보기> ①삼국시대 손권 ②세종대왕 ③이병철 ④김영삼 ⑤최태원. 답은 물론 전부다. 예로 든 5명뿐 아니라 성공한 리더들의 거의 공통된 특징이 단연 경청이었다. 단순히 누군가를 불러 오래 듣는 ‘학습’ 차원의 경청이 아니라, 사람들이 찬반과 다양한 견해를 마음껏 얘기할 수 있게 해준 뒤 자기 의견을 내놓는 그런 경청이다. 특히 나이가 어리거나 경험이 일천한 상태에서 최고 책임자의 지위에 오른 리더의 공통된 성공 비법이 단연 경청이었다. 손권은 19세에 오나라의 군주가 됐고, 최태원 SK회장은 38세에 그룹 경영권을 이어 받았다. 그런 점에서 최근 대통령실 주변에 떠도는 농담은 씁쓸하다. 대통령 별명이 90프로에서 95프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의 발언 점유율이 취임 전엔 90프로였는데 취임 후엔 95프로로 높아졌다는 농담이다. 물론 뭔가 불만을 가진 직원들이 학창시절부터 다변가로 소문났던 윤 대통령의 성향을 과장해서 비꼬는 말일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우리 대통령은 정말 귀가 크고 넓다”는 말 대신 이런 말이 도는 건 우려스러운 현상이다. 더구나 긴 세월 동고동락한 동지들이 아니라 연을 맺은지 기껏해야 수개월 밖에 안된 사람들이 대다수이므로 대통령의 심기를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기가 더 꺼려질 것이다. 리더가 더더욱 각별한 의지를 갖고 경청 리더십을 펼쳐야만 하는 상황이다. 사람을 쓰는 데서도 보스와 리더는 다르다. 보스는 편한 사람, 심복만 쓰지만 리더는 인재를 널리 구한다. 보스는 패거리를 모으지만 지도자는 존경심을 모으는 것이다.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묘비엔 ‘여기, 자신보다 더 우수한 사람을 끌어모을 줄 알았던 사람이 잠들다’(Here lies a man who knew how to enlist the service of better men than himself)라고 새겨져 있다. 보스와 리더를 구분 짓는 또 하나의 중요한 기준은 자신에 대한 엄격함인데 채점은 시대적 상황과 국민 기대치에 따라 주관적이다. 새 정부의 검찰·기재부 편중 인사를 문 정권의 운동권과 좌파단체 편중에 비교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하지만 국민은 그렇게 객관적으로 비교해서 평가하지 않는다. 기대치가 다르고, 시대적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윤석열은 안 그럴 줄 알았기에, 파렴치한 좌파정권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라 기대했기에 측량해 보면 훨씬 작은 분량일지라도 더 실망하는 것이다. 겨우 1라운드가 끝났지만 상당수 국민은 벌써 나름의 채점을 했을 것이다. 윤 대통령은 가드를 내리고 어깨에 힘을 주다 몇 차례 슬립다운을 했다. 물론 4개월간 한미동맹 복구, 대(對)중국 굴종 관계 정상화, 탈원전 폐기, 공기업 개혁 등 이탈했던 국가 궤도 정상화에 시동을 걸었고, 명절연휴에 김치찌개를 만들어 무료급식 하는 등 현장을 열심히 뛰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지지율에 크게 반영되지 않는 것은 홍준표 안철수 등 다른 야당 후보가 대통령이 됐어도 당연히 했을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에게 가장 기대가 컸던 문 정권 비리·권력남용 청산은 아직 청사진이 안 나왔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외치고, 추미애의 광란의 칼질에 당당히 맞서면서 치솟은 윤석열표 공정과 상식에 대한 국민의 기대치·눈높이는 “아내 장모 모두 감옥에 가도 상관없다. 한점 의혹 남기지 말고 수사하라”고 강조하는 정도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보스는 약속을 어겨도 호위무사만 든든하면 되지만, 리더는 신뢰를 잃으면 무너진다. 자신에 대한 엄격함, 공정과 상식의 약속은 정치인 윤석열을 존재케 하는 시작이자 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지금의 한국사회는 존경과 신뢰가 유지되기 어려운 구조다. 서구 선진 사회에서 품격이 가능한 본질적 토대는 구성원 간의 보이지 않는 합의다. 아무리 경쟁하고 적대해도 공동체의 기반을 이루는 지향점과 가치 자체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무언의 약속이 지켜지는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은 이를 산산조각 냈고, 그 청와대 출신을 비롯한 강경파 인사들에겐 금도도 상식 파괴의 한계도 없다. 이런 상황을 헤쳐 나가려면 더더욱 보스가 아닌 지도자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거창한 게 아니라 망하는 리더의 조건인 ‘3만’만 피하면 된다. ‘자기 말만, 자기 사람만, 자기만 예외.’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은 하루빨리 수렁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윤핵관이 당 대표를 제거하겠다며 판 구덩이가 갈수록 깊어지고 오물로 범벅돼 수렁이 됐다. 우리 정치사에서 가장 추하고 가치 없는 내분이다. 하다못해 조선시대 당파싸움에도 세계관·학풍·노선 차이 같은 대립의 뿌리가 있었다. 국힘 사태는 공천권·당권을 쥐겠다는 탐욕이 전부다. 수렁에서 벗어나는 길은 명확하다. 윤핵관을 축출하고 과감한 인적 쇄신과 시스템 정비를 통해 국가 정상화 마스터플랜에 착수하는 것이다. 먼저 권성동 원내대표를 당장 사퇴시키고 새 원내대표를 뽑아 당내 리더십을 회복시켜야 한다. 편의적 당헌 개정 같은 꼼수는 두고두고 후과를 남길 것이다. 윤 대통령은 지금까지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외적 요인을 꼽아 보라. 단연 여당 내분과 배우자 리스크 아니겠는가. 장제원 의원이 주무른 인사가 정권의 첫 걸음을 어떻게 엉클어뜨렸는지, 지방선거 대승 직후 윤핵관이 불 지른 내분이 어떤 타격을 줬는지 돌아보라. 이준석 대표에 대한 대통령의 불쾌감·괘씸해하는 감정을 이용해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려던 검은 속을 생각해 보라. 도덕성이나 품격은 차치하고라도 이준석이 순순히 구덩이 속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판단한 그들의 전략 마인드는 역대 정권 실세 그룹 가운데 실력이나 중량으로도 최하류, 최경량급임을 보여준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으면 연말쯤 스스로의 허물로 인해 자연스럽게 정리됐을 수도 있는 이준석 리스크를 옳지 못한 방법으로 다뤄 보수진영 전체에 큰 상처를 줬다. “쫓아내고 당을 장악해야 합니다. 선거 압승한 지금이 적기입니다….” 석 달 전 그렇게 속삭였을 간신들은 지금도 속삭일 것이다. “직무대행 체제로 가면 이준석이 6개월 후 대표로 돌아옵니다….” 단견이다. 윤핵관이 사라진 상태에서 이준석이 복귀하면 의원들이 가만있을 것 같은가. 차세대 최고지도자감으로 기대받던 이준석은 스스로를 왜소화시킨 결과 윤핵관이라는 썩은 나무가 있어야만 피어나는 버섯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어찌보면 윤핵관은 운이 좋았다. 만약 부당하게 쫓겨날 위기에 처한 당 대표가 시종일관 냉정하고 절제된 언어로 대응하면서 법적 구제절차를 밟았다면, 싸움은 윤핵관의 완패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무리한 쫓아내기로 지탄을 받게 된 윤핵관을 이준석의 독설이 구해줬고, 온갖 독설로 궁지에 몰린 이준석을 ‘권성동 재신임’ 같은 민심역행 처사로 구해주는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남의 애를 혼내려면 내 애부터 혼내야 한다. 윤핵관을 확실하게 정리하면 이준석도 설자리가 좁아진다. 장제원의 “정부 임명직 공직 안맡겠다”는 선언, 그리고 권성동이 새 비대위 출범 후 물러난다 해도 국민은 윤핵관의 퇴진을 믿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올 1월초에도 백의종군을 선언했었다. 정권 초 황금기를 당권욕으로 망친 윤핵관들의 행태는 절치부심 정권교체를 이뤄준 국민에 대한 배신이다. 두 사람은 책임을 지고 의원직을 사퇴하거나 탈당하는 게 진정 윤 정권을 위하는 길이다. 그렇게 해서 정권 성공에 밀알이 된 뒤 차후에 무소속으로 생환해 복귀할 수도 있다. 대통령실 내 윤핵관 라인 정리에 대해 야당과 좌파세력은 검핵관 프레임으로 딴지를 걸고 있다. 윤핵관 라인뿐만 아니라 온갖 끈을 잡고 들어온 모든 세력에게 공평한 칼날을 들이대야 한다. 특히 만약 부속실을 제외한 대통령실의 일반 부서나 정부 기관에 김건희 여사 끈으로 들어간 이들이 남아 있다면 언제든 폭로의 소재가 될 수 있다. 김 여사는 국민들이 “나오라” “나오라” 아우성칠 때까지 고개 숙이고 있어야 한다. 좌파세력은 24시간 뿅망치를 들고 기다리고 있다. 검찰과 경찰은 도이치모터스 등 김 여사 관련 의혹 수사를 일반인들과 똑같이 엄정하고 투명하게 진행해 속히 결과를 내놓아야 한다. 대통령이 진심으로 그걸 장려해야 한다. 그게 이기는 길이다. 여당 사태는 윤 대통령에게 뼈아픈 교훈이 되어야 한다. 아무리 흉악범이어도 형사소송법을 어긴 채 처벌할 수 없듯이, 정치의 세계에서도 당내 민주주의와 절차적 정당성, 명분이 결핍된 방법으로는 그 어떤 것도 성취할 수 없는 세상이 됐다. 지지율이 바닥일 때가 씨름의 되치기처럼 반전 반등을 노릴 적기다. 바닥이라는 명분으로 과감히 인적 쇄신을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에 천착해야 한다. 유권자들이 윤석열을 선택할 때 기대했던 과제, 즉 문재인 정권 5년간 뒤틀린 나라의 정상화를 위한 마스터플랜을 제시해야 한다. 국가 정상화의 핵심 중 하나는 전임 정권 시절 저질러진 비리·불의에 대한 진실 규명과 엄중한 사법적 책임 추궁이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외교 안보 경제 사회 방송 문화 역사 등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 심각한 궤도 이탈이 있었다. 그냥 각 부처별로 알아서 그때그때 제기되는 문제를 바로잡는 식이어선 안된다. 이미 산발적으로 경찰 검찰 등에서 수사가 이뤄지지만 마스터플랜과 대통령의 분명한 의지를 모르니 일선은 제대로 뛰지 않고, 국민은 답답해한다. 종합적 리스트를 만들고 완급·우선순위를 면밀히 해야 한다. 중도와 온건진보까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우편향 칼춤, 과거로의 회귀가 되지 않도록 세밀하고 균형감있게 조율해야 한다. 임기 5년을 전반 중반 후반기로 나눠 △전반기는 국가 정상화와 4대 개혁·민간 주도 성장의 기반 조성 △총선 후가 될 중반기는 4대 개혁 완수 △후반기는 민간 주도 성장을 통한 국가 재도약기로 제시하면 국민의 답답함이 줄어들 것이다. 윤 대통령은 비호감 언행, 부인·처가 문제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국민이 자신을 밀어줬는지 잊어선 안 된다. 국가 정상화를 정파적 목적으로, 진영 결집이나 지지율 높이기 도구로 악용하지 않는다면 국정 방향 정체성을 확실하게 해줘 국정 동력을 높이는 길이 될 것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그제 오후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의원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재신임을 받았다는 뉴스를 접하는 순간, 닷새 전 수해현장 자원봉사 소동이 오버랩됐다. “솔직히 비 좀 왔으면 좋겠다” “딱 보니까, 나경원 아니면 바꿀라 그랬지”…. 수해현장에서 시시덕댄 발언의 내용 자체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본질은 상식적으로 그런 자리에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가져야 할 마음상태와 국힘 의원들의 심리상태가 너무 큰 괴리를 보인다는 점이다. 권 원내대표를 재신임한 의원들도 대다수 국민, 특히 여당 지지자들의 평균적인 마음과 현격한 괴리를 드러냈다. 민심 공감은커녕 정반대로 역행한 것이다. 비상상황을 외치며 비대위를 구성했으면 쇼 차원으로라도 환골탈태하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상식인데 오히려 정반대로 행동한다. 우리 헌정사상 이렇게 지지층을 배신하는 집권당이 또 있었을까. 여당 내분의 책임을 물었더니 윤핵관 35%, 대통령 28%, 이준석 대표 22%로 나왔다는 여론조사가 그제 발표됐다(코리아리서치). 민심은 신묘할 만큼 정확히 본질을 반영한다. 사태의 출발은 집권당을 장악하려는 윤핵관들의 욕심이었다. 성상납 의혹, 대선 기간의 무책임한 언행 등 이 대표가 휘발성 장작을 깔아줬지만 멀쩡한 집에 불을 지른 건 윤핵관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정치에 처음 입문할 당시부터 지켜봤던 인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는 제3지대론과 조기입당 사이에서 고민을 했지만, 이 대표에 대해선 특별한 반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입당 전 윤 대통령이 혐오했던 유형은 의원을 평생 직업 삼아 쇼나 일삼으며 수십 년간 호위호식해온 터줏대감 정치인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8월 말 입당 전 치맥회동 등 이 대표와의 접촉 이후 입당 날짜가 인터넷 언론에 흘러 다니고, 이 대표와 통화한 내용 일부가 녹취록 형태로 유출되면서 불신이 깊어져 패싱입당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윤핵관들은 그런 대통령의 불신을 등에 업고 이 대표 축출 공작에 돌입했다. 보선 대선 지방선거 등 3연승에 취해 기고만장해진 것이다. 정진석 의원은 국회부의장 내정자로서의 품위를 버리고 보선 사흘 뒤 갑자기 총질을 시작했다. 올 1월 6일 밤 윤 대통령이 축출 위기에 있던 이 대표를 포옹했을 당시 ‘윤핵관들은 내심 불만이지만 보선 끝날 때까지만 품고 가자며 물러섰다’는 소문이 돌았었는데, 이 소문을 입증하는 듯한 시그널이었다. 장제원 의원은 비서실과 내각 인사 실패의 책임을 통감하고 자숙하기는커녕 민들레회 등을 통해 세력화를 기도했다. 논란이 커지자 자신은 빠지고 박수영 의원 등이 앞장섰고, 민들레회는 접는 듯 하더니 최근 다시 친윤 세력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권성동 원내대표가 비대위원 선출을 위해 소집돼 62명만 참석한 의원총회에서 아무 사전예고도 없이 갑자기 자신의 재신임 여부를 판단해 달라고 요청한 것은 얄팍한 꼼수이며, 형식적인 손 씻어주기 차원의 재신임을 통해 자신의 리더십이 회복될 것이라고 믿는 안이한 판단력 수준을 보여준다. 권 대표는 동료들이 자신의 낯을 세워주기 위해 형식상 재신임에 손을 들어준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제라도 자진사퇴해야 한다. 이준석 대표도 이번 사태 과정에서 품성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줬다. 그의 언행을 보면 ‘Character Above All’이라는 책이 생각난다. 미국 대통령 10명의 평전을 쓴 작가들이 대통령의 성패를 좌우하는 자질이 뭔가를 찾아본 결과 결론은 바로 품성, 인성(character)이었다는 내용이다. ‘대통령은 영리할 필요가 없다. 영리한 사람은 구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품성은 빌려 쓸 수 없다. 용기 품위 강력한 도덕성은 빌릴 수 없다. 이런 것은 원래부터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를 정치지도자로 확장시켜도 마찬가지다. 남의 허물, 상대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내는 지적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허물, 자신의 문제를 솔직히 인정하는 용기와 정직성, 자신을 객관화시켜서 바라보고 낮출 수 있는 객관화 능력과 겸허함이다. 이 대표는 돌이키기 힘든 지경까지 내달리면서 스스로를 유시민류로 왜소화시켜버렸다. 주호영 비대위가 친윤 검찰 출신 인사 등용, 윤핵관 이철규 의원의 예결위 간사 보임 등 시작부터 논란을 자초하며 쇄신의 동력을 떨어뜨리는 것은 지금 여당 내부가 정상적인 상황판단과 의사결정을 어렵게 하는 무형의 바위에 짓눌려 있음을 보여준다. 윤 대통령은 윤핵관에게 빚진 게 없다. 그들은 윤석열의 등장 이전엔 존재감도 없던 이들이었다. 윤 대통령이 윤핵관을 멀리하고 민들레회 후속 모임을 해체시키고, 장제원이 심어놓은 사람이라 불리는 정무수석을 경질해야 국힘 의원들이 윤핵관 눈치를 보느라 민심에 역행하는 악순환이 멈출 것이다. 중도와 보수 성향 국민이 여당에 바라는 것은 더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정당, 그래서 총선과 다음 대선 승리를 기약할 수 있는 정당이 되어달라는 것 뿐이다. 윤핵관과 이준석 모두에게서 등을 돌리는 국민이 많아지는 것은 그들의 행태와 자질로 보아 누가 이전투구에서 이겨도 보수정치의 미래가 어둡다는, 자칫 좌파에 정권을 헌납하는 결과를 빚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국민 과반 “尹보다 文이 낫다”’. 그제 저녁 한 인터넷 신문의 제목이다. 여론조사업체 리서치뷰의 1000명 대상 조사(7월 30, 31일)에서 ‘윤석열 정부가 더 잘하고 있다’가 33%, ‘문재인 정부가 더 잘했다’가 57%로 나왔다는 내용이다. 전(前) 정권 비교를 방패로 내세웠던 윤 대통령으로선 지지율 추락 자체 보다 더 자존심 상할 결과다. 만약 훗날 역사의 평가에서 ‘민주화 이후 최악의 정책 실패, 최악의 이중적·위선적 행태를 보였다’는 평가를 받는 문 정권보다도 하위로 랭크된다면 이는 윤 대통령 본인의 불명예를 넘어, 대한민국의 정상화와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을 갈망하는 과반수 국민의 불행을 의미한다. 물론 이는 기우로 그칠 가능성이 크다. 지지율이 달포 만에 52%에서 30% 안팎으로 폭락했지만 원인과 해법은 다 나와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대통령이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도층과 온건 보수층의 지지철회는 이념·정책 방향이 아니라 윤 대통령 개인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반대(oppose)라기보다는 한심하다, 못마땅하다(dislike)에 가까운 것이다. 만약 문 전 대통령에게 완전한 변신을 요구하면 소주성 친중정책 대북유화책 탈원전 등을 포기하라는 것인데, 이는 이념·국정방향은 물론 핵심 지지층 포기를 의미하므로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대변신은 자신의 마음가짐과 언행만 바꾸면 되는 것이고 지지층이 박수를 칠 일이다. 변화의 핵심은 겸손하고 진지한 이미지로의 변신이다. 이는 진심으로 국민을 섬기는 마음, 국민이 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낮은 자세를 가져야 가능해진다. 소통방식도 바꿔야 한다. 도어스테핑은 대통령이 먼저 그날 자신의 어젠다를 진지하고 절실한 자세로 얘기하고 난 뒤 질문을 받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질문에 대한 답변에 급급하다 보니 야당과 언론에서 제기한 이슈들에 질질 끌려가고 대통령의 어젠다가 실종돼 왔다. 겸손하고 진지한 지도자상(像)으로의 재정립은 외형적 변화만 아니라 밑바탕에 절박함과 넓고 큰 마음이 깔려야 가능해진다. 윤 대통령이 가장 절박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국민을 바라봤을 때는 올 초였을 것이다. 1월 1일 윤 후보는 “자신을 변화시키는 인간만이 세상의 위대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저부터 바꾸겠습니다”며 갑자기 신발을 벗더니 카메라를 향해 큰절을 했다. 그날 아침 신문들은 39.9% 대 30.2%(동아일보-리서치앤리서치) 등 큰 차이로 윤 후보가 뒤지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들을 전했다. 후보 교체론이 불거지던 시점이었다. 윤 후보는 닷새 뒤에는 국민의힘 의총장으로 달려가 이준석 대표를 뜨겁게 포옹했다. 그 며칠 전인 12월 26일 김건희 씨는 “제가 없어져 남편이 남편답게 평가받을 수 있다면 차라리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고 울먹이며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고 약속했다. 부부 모두 대선에서 이길 수만 있다면 정말 다른 모든 걸 포기할 수 있다는 절박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언제 그랬냐는 듯 김 여사 관련 논란이 하나 둘 불거지더니 이젠 비등점을 넘어서고 있다. 이번 코바나컨텐츠 전시회 후원 업체의 대통령관저 공사 수주 논란은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사건이다. 대통령실 관련 공사는 공식 발주처는 행정안전부지만 경호실이 통제한다. 현 경호실장은 윤 대통령의 고교 1년 선배다. 만약 김 여사가 경호실에 업체를 소개했다면 이는 그 어떤 논리로도 용인 받을 수 없는, 상식적 수준의 공사(公私) 구분 관념조차 망각한 행동이다. 김 여사가 전혀 무관한 일이라 해도 여사 관련성이 있는 업체가 수주할 경우 문제가 될 것임을 대통령실이 몰랐다면 무능·무책임의 극치다. 좌파 이권 네트워크의 영속성을 위협받는 수많은 좌파세력이 둑을 무너뜨릴 작은 개미구멍이라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현실을 망각한 해이한 행태인 것이다. 물론 우리 사회의 김 여사에 대한 태도에는 반이성적이고 감정적이고 성차별적이고 마녀사냥적인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심각성이 바뀌는 건 아니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좌파진영이 온갖 악소문을 퍼뜨리며 극렬한 공세를 퍼부었지만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국민들은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다. “아내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는 약속, 자신 주변에 대해서도 엄정한 공정의 잣대를 들이대겠다는 후보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실망을 시켜도 이렇게까지…”라며 허탈해하는 것이다. 이제 관저에 입주하면 좌파진영은 호화 인테리어 운운하며 악소문을 퍼뜨리고 자극적인 소재들을 찾아내려 혈안이 될 것이다. 지금처럼 대통령실의 예방적 선제 대응능력이 최저 수준이고 뭐에 짓눌린 듯 배우자 문제를 컨트롤하지 못하는 상태에선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다. 인사권자가 듣기 싫은 소리에 화를 내거나, 총애하는 사람의 문제를 자꾸 내재적 관점으로 이해해주려는 태도를 보이면 내부 견제 시스템은 짓눌리고 곪는다. 최고 권력자는 쓴 소리에 귀를 열고, 내부 이견에 대해선 달갑지 않은 구석이 있어도 장점을 보며 끌어안는 큰 그릇인 동시에 공동체의 가치와 원칙을 위협하는 세력, 외부의 적에게는 한없이 강하고 단호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최근 불법파업·점거 사태와 내부총질 문자 사태 등을 지켜본 지지자들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7개월 전 윤 후보의 진심은 국민에게 전달됐다. 지지율은 곧 반등해 한 달도 안 돼 역전했다.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른 건 인간의 속성이다. 하지만 성공한 대통령이 되려면 그런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앞으로 4년 9개월간 2022년 1월의 절박하고 겸손했던 마음을 잃지 않는 게 윤 정권 성패의 관건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요즘 야당의 행태는 ‘침소봉대’의 극한을 보여준다. 사실관계를 따져보면 “부적절하다” “국민 눈높이에 못 미친다” 정도의 비판이면 타당할 대통령실 직원 채용 논란을 국정농단, 국기문란으로 규정하고 탄핵 운운한다. 객관적 사실관계에는 눈을 감은 채 조직적으로 의혹을 확대 재생산하는 반지성적인 선전선동 행태다. 그런데 국민을 더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그런 질 낮은 선전선동에 빌미를 제공하는 대통령실과 여당, 그리고 기름까지 부어주는 권성동 원내대표 같은 경박한 행태다. 흔히들 대통령 지지율 하락의 주된 요인으로 인사 문제를 꼽는데 보다 정교하게 볼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장관 후보자들이 발표된 4, 5월 윤 대통령 지지율은 정호영 논란 등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조금씩 상승세를 보였다. 그러다 한국갤럽 기준으로 6월 7~9일 조사 때 53%로 고점을 찍은 뒤 14~16일 조사에서 49%로 하강세에 들어섰다. 당시 어떤 일이 있었을까. 금감원장에 부장검사 출신을 임명했고(6월7일), “민변 도배” 발언이 있었고(8일), 국민의힘 정진석 의원이 갑자기 이준석 대표를 공격하고 나섰다(6일). 이후 지지율은 매주 2~6%씩 계속 떨어졌다. 사실 후보자 낙마 및 부실검증 논란은 전임 정부들에서 훨씬 심했고, 국민은 어떤 정권이든 인사 때마다 지도층의 한심한 실체에 한숨을 내쉬어 왔지만 그 자체로 지지를 철회하는 건 아니다. 결국은 인사권자가 국민의 실망 찻잔에 물이 넘치게 더 붓느냐, 국민 눈높이를 존중하느냐가 관건이었던 것이다. 윤 대통령은 검찰 출신이 너무 많이 기용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수 주째 이어졌는데도 총리비서실장 국정원기조실장에 이어 금감원장까지 검찰 출신을 임명해버리는 화룡점정을 찍었고, 국민은 이를 오만으로 느낀 것이다. 이와 더불어 △비선 동반 논란 등이 빚은 주변 관리 부실과 공정 이미지의 훼손 △국민의힘 내분이 환기시킨 구태 정당 이미지 △위기 상황에 절박감이 안 느껴지는 정부 이미지가 지지율 하락 요인이다. 이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을 뽑는다면 장제원 권성동 의원과 김대기 비서실장, 한덕수 총리다. 당선인 비서실장으로 대통령실과 내각의 인선을 총괄한 장 의원, 그리고 4월 13일 일찌감치 임명됐는데도 온갖 논란거리들을 예방·통제하지 못한 김 실장은 무거운 책임을 느껴야 한다. 인사 논란보다 더 고약한 건 윤핵관들의 당권 빼앗기 시도다. 이준석 대표는 성상납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면 정계에서 사라지는 게 마땅하다.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그릇에 못 미치는 성정을 드러낸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는 국민과 당원이 뽑은 대표로 임기가 1년 남아 있다. 이걸 당장 빼앗아 당권→총선 공천권→차기 대선 영향력을 쥐려는 윤핵관들과 중진들의 탐욕이 사태의 본질이다. 대선, 보선 승리로 기고만장해져 당권까지 마음대로 하려는 욕심을 낸 것이다. 그런데 막상 권성동과 장제원의 이해득실이 엇갈렸다. 윤핵관들은 당장 이준석을 내치고 장제원을 중심으로 같은 부산 출신인 안철수 또는 자신들이 컨트롤할 수 있는 기존 중진을 대표로 밀어 맹주 역할을 하는 그림을 꿈꿨을 것이다. 친윤 그룹의 맏형 격인 정진석이 보선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이준석 공격에 나선 것도 그런 맥락이었을 것이다. 반면 권성동은 이준석의 임기를 보장해서 원내대표로서 세력을 확장하고 내년에 당권을 노려볼 심산이었을 것이다. 이준석이 아무리 큰 의혹에 휘말려 있고 설령 자질이 부족하다해도 경찰수사가 이뤄진 다음에 결정하는 게 정도고 상식이다. 당 지도부 정상화가 정 시급하면 수사를 신속히 하도록 촉구했어야 했다. 권 원내대표는 경박한 언행으로 정권에 큰 피해를 줬다. 게다가 지역구에서는 옛 구태 정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의혹들이 제기되고 있다. 사실 장 의원과 권 대표는 ‘후보 윤석열’과의 인연이 아니라면 지도자급으로 인정받을 별다른 스토리가 없던 의원들이었다. 과거 YS, DJ 등의 최측근들이 야인시절 ‘주군’을 위해 숱한 옥고를 치르고 평생을 바쳤던 것에 비해 이들은 남들보다 조금 먼저 윤 후보에게 다가와서 1년 남짓 바짝 뛴 게 개국공신 공적의 전부다. 한덕수 총리는 책임총리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지금까지 소신 있게 한 게 뭐가 있는지 찾기 어려울 정도다. 한 달 넘게 이어져온 대우조선 사태 같은 난제에 대통령이 나서기 훨씬 이전에 틀어쥐고 욕을 먹을 각오로 대책을 주도했어야 마땅했다. 김 실장과 한 총리의 현재는 나서지 않고 책임질 도전을 하지 않으려 하는 관료주의와 보신주의 처신 그 자체를 보여준다. 최근 윤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은 국가 방향성이나 정책 실패 같은 구조적 요인에 의한 게 아니다. 구체적인 국정 목표와 로드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지만 아직 부처 업무보고도 끝나지 않은 상태니 판단은 이르다. 윤 대통령은 침소봉대 공격에 발목이 잡히면서도 외교·안보와 노동·연금개혁 등에서 진로를 정상화시키려 시도하고 있다. 공영방송을 비롯해 사회 기간 부문을 정상화시키고 좌파 기득권 카르텔을 해체하는 작업도 늦출 수 없다. 윤핵관을 손절하고 내각에 도전정신을 불어넣고, 주변 관리를 엄격히 하면서 대선 때 지지자들이 위임한 개혁과제의 실천에 나서면 의외로 빠른 시간에 지지율 회복이 가능할 것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윤석열 정권에 대한 좌파진영의 적개심은 극에 달한 수준이다. 반대, 비판의 수준을 넘는다. 하나에서 열까지 다 물고 늘어지며 극한의 혐오와 증오를 퍼붓는다. 아직은 언어적 차원이지만 머잖아 조직력이 총동원돼 정권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물리적 공세에 나설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통합과 협치가 가능할까? 성인 유권자의 20~40%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윤석열 혐오층은 새 정권이 그 어떤 통합 노력을 해도 호응하거나 협조할 생각이 없을 것이다.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도 그랬는데 더 심해진 것이다. 총칼만 들지 않았을 뿐 거의 내전 수준의 이념적·정치적 적개심이다. 이런 상황에서 출범한 윤 정권은 역대 어느 정부보다도 높은 난도의 소명을 어깨에 이고 있다. 경제회복, 안보강화 같은 일반적 목표만 잘하면 됐던 다른 보수 정권과는 다르다. 그 소명은 대한민국의 정상화, 즉 문재인 정권 5년의 비리·부정·왜곡을 바로잡아 정의를 회복하고, 문 정권이 방기해 악화시킨 노동 연금 교육 개혁을 이뤄내는 일이다. 한결같이 좌파 진영이 극렬 저항할 사안들이다. 윤 정권이 이 소임을 이뤄내기 위한 유일한 동력은 국민 과반수의 지지뿐이다. 레닌·스탈린이 휘둘렀던 공포정치·숙청 같은 물리력도, 문재인의 180석 같은 다수의석도 없는 윤 대통령에게 국민 지지는 소임을 이뤄낼 유일한 수단이다. 국민의 지지는 대통령에 대한 신뢰와 존경에서 나온다. 신뢰와 존경은 진중한 언행과 엄격한 자기 및 주변 관리, 겸손한 태도에서 싹튼다. 아무리 옳은 일이어도 말이 가볍고 남 탓을 하면 존경과 신뢰를 받기 어렵다. 사실 지난 두 달간 시빗거리가 된 윤 대통령의 언행 가운데는 타깃이 윤석열이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시비를 삼을 사안이 아니었던 게 상당수였다. 공약대로 대통령의 특권·기득권을 없애는 차원에서 기존의 기구·제도를 폐지하는 바람에 과도기적 공백 상태가 빚어져 시행착오, 서투른 대응들이 발생했는데 이를 마치 본질적·심각한 병폐인 것처럼 물고 늘어진 경우가 많았다. 한 예로 “대통령 처음 해봐서…” 발언은 제2부속실을 없애고 새로운 보좌시스템을 모색하는 공백상태에서 어떤 게 모범답안인지 잘 모르겠다는 심정을 담은 서투른 유머로 간주해도 될 텐데, 이를 무책임의 극치로 몰아붙이는 게 우리 정치·언론환경이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결코 간과하거나 너그럽게 넘겨서는 안 되는 문제는 윤 대통령이 그동안 쏟아낸 말들 일부에서 묻어나는 오만함의 징후다. 지도자가 정말 국민을 섬겨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어려워한다면 많은 노력을 기울여 답변을 준비할 것이다. 마음에 없는 입에 발린 말을 연습하라는 게 아니다. 조금이라도 더 국민 공감대를 넓히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같은 콘텐츠라도 보다 더 겸허하고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표현을 찾으려 노력할 것이다. “전 정권 장관 중 훌륭한 사람 봤느냐”고 하는 대신 “능력 우선으로 찾았는데 우리 사회 사람 찾기 어렵더라. 어느 부분에 더 가치를 두고 보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는데 많이 부족할 수 있다. 국민들이 한번 기회를 주시면 자기 부족한 점을 의식해서라도 더 열심히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면 반응이 지금 같았을까. “지지율에 신경 안 쓴다”는 발언도 당장은 욕을 먹어도 나라에 꼭 필요한 개혁을 할 때 고뇌와 충심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해야 하는 발언인데, 엉뚱한 데서 해버리니 ‘이제 당분간 선거도 없으니 누가 뭐라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오만함으로 비친다. 말의 내용 자체가 아니라 그 바탕에 깔린 오만한 마음이 국민을 실망시키는 것이다. 지난 두 달간 윤 정부는 옳은 방향으로 나라의 궤도를 틀어 왔다. 한미 동맹·원전 복구, 규제 완화, 공기업 개혁…. 그런데도 국정의 본질이나 방향과는 무관한 몇 마디 말과 주변인들의 처신 때문에 많은 지지층을 잃었다. 문재인 정권은 국민 다수의 상식과 여론을 무시하고도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보수 정권은 다르다. 문재인 정권이 아무리 국정을 망가뜨려도 변함없이 뭉쳐 있던 좌파 지지층 40%와 달리 보수 지지율은 금방 녹아 사라진다. 진보 중도 보수를 40 대 20 대 40으로 가정할 때, 왼쪽 40%는 콘크리트인 반면 오른쪽 40% 중 절반가량은 아이스크림처럼 사라질 수 있다. 대다수 보수는 조직도, 맹목적 지지도 없기 때문이다. 어제 한 독자가 좌파 진영에 공격 빌미를 계속 제공하는 윤 대통령과 주변인들이 너무 답답하고 불안하다며 필자에게 보내온 문구를 소개한다. “우리가 타인을 평가하는 수단은 그 사람의 언어와 행동이다.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판단도 마찬가지다. 지도자가 국민 앞에서 진심으로 겸손하면 언행에 그게 묻어난다. 국민은 그 향기에 감동하고 모여들고 존경을 보내게 마련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월북이냐 아니냐가 뭐가 중요하냐”고 열변을 토하는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비상대책위원장의 모습은 정치가 사람을 얼마나 바꿔놓는지를 절감케 한다. 요즘의 우상호에게서 1987년 6월 항쟁 직후 이한열 열사 영결식에서 오열하던 청년을 연상하는 건 쉽지 않다. 사실 그의 변모를 더 적나라하게 드러낸 장면은 대선 직전인 2월 20일이었다. 선대위 총괄본부장 우상호는 기자회견을 열어 “윤석열 후보가 대장동 비리의 뒷배를 봐준 흑기사라고 볼 수 밖에 없다”며 대장동 녹취록을 공개했다. △(김만배) “윤석열 영장 들어오면 윤석열은 죽어.” △(정영학) “죽죠. 원래 죄가 많은 사람이긴 해. 윤석열은…” △(김만배) “되게 좋으신 분이야. 나한테도 꼭 잡으면서 ‘내가 우리 김 부장 잘 아는데, 위험하지 않게 해’”. 그런데 곧 녹취록의 실체가 드러났다. 편집돼 잘린 앞뒤 문맥을 복원하니 ‘윤 후보가 사법농단 수사로 미운털이 박혔기 때문에 뭐라도 걸리면 판사들에 의해 죽는다’는 취지였고, ‘좋으신 분’ ‘우리 김 부장’ 대목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한 것으로 봐야 마땅한 내용이었다. 당시 필자는 우상호가 녹취록 ‘편집’ 사실을 몰랐을 것이라 믿고 싶었다. 1986년 ‘송충이’라는 시로 대학 학보사 문학상을 받았던 문학청년이 조작된 내용을 뻔뻔하게 발표할 수 있을 만큼 변질될 수 있다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우상호는 “내가 국문과 출신”이라며 “뭐가 조작이냐”고 강변했다. 그런 모습은 이젠 정말 586들이 진보정치의 앞날을 위해 사라져 줘야 함을 웅변해 준다. 586에 대해 흔히들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이 어떻게 저렇게 뻔뻔하고 내로남불일 수 있나”라고 비판한다. 그런데 이런 비판엔 오류가 있다. 586을 민주화 주도세력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정확치 않기 때문이다. 전두환 군부독재 치하이던 1980년대 중반 당시 주요 대학 운동권의 핵심 지도부는 지하에서 익명으로 활동했다. 북한의 대남방송을 단파라디오로 들으며 ‘강철서신’을 작성해 운동권에 회람시켰던 구국학생연맹 의장 서울대 김영환 씨 등이 대표적이다. 김 씨는 1991년 김일성이 보낸 잠수정을 타고 평양에 가 김일성을 만난 뒤 주체사상과 북한의 실체에 대한 환각에서 깨어나면서 전향해 북한인권 운동가로 전향했다. 물론 진정한 학생운동의 주역은 대다수 무명의 학생들이었다. 직격탄의 위험을 무릅쓰고 시위의 선두에 섰다. 강제연행 고문 구타 등으로 평생 병마에 시달리거나 이름 없이 죽어간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상당수는 기득권을 버리고 노동현장 등 민중 속으로 갔다. 현재 586 정치인들 가운데 그런 길을 걸은 이는 많지 않다. 대부분 학생회 등 공개조직 장(長) 출신들로 옥고를 치른 뒤 현역 정치 거물들에 스카우트되거나 의원 보좌관 비서 등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어느 공동체든 앞에 나서 사람을 모으고 연설하고 이끌고 가는 걸 좋아하는 정치지향적인 인물들이 있는데, 그런 성향과 독재에 대한 항거 의지가 결합된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렇게 386 중 극소수가 정치에 뛰어들었고, 수십 년간 진화론의 적자생존과 도태 과정처럼 변신과 현실적응력이 뛰어난 이들이 살아남아 다선 의원이 된 것이다. 즉, 586은 민주화운동 세력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386이라는 뿌리에서 출발해 현실정치판에서 생존한 소수의 변종그룹이라 할 수 있다. 문재인 정권의 내로남불 뻔뻔함도 386세대 자체가 뻔뻔한 특성을 가져서가 아니라, 그런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 권력층에 집결한 결과물이다. 엄혹한 독재폭력에 맞선 상황에서는 많은 학생들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논리를 내면화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게 상식이나 도덕에 지나치게 배치되면 주저하게 마련인데, 그런 거리낌을 상대적으로 덜 느끼는 강한 멘털의 소유자들이 문재인 정권에 포진했다. 그 결과 그들은 최고 권력자가 방향을 설정하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로매진했다. 피살된 국민을 단호하게 월북자로 낙인찍을 수 있었던 것도 ‘남북관계 치적’이라는 대통령의 목표가 혁명군에 하달된 테제처럼 전체를 압도해 국가권력이 한 방향으로 달려간 결과물일 것이다. 이 사건 외에도 목적 달성을 위해 팩트를 마사지하고 절차를 어긴 행각들은 앞으로도 숱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제는 절차와 수단, 상식을 무시하고라도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586식의 정치에는 더 이상 미래가 없다. 당장은 손해여도 가치 원칙을 택하는 쪽이 승자가 되는 세상이다. 586들이 냉전시대 흡입했던 좌파 세계관은 시장 자유 미국 경쟁 등 해방 후 우리 사회가 몰입해 온 주류 가치들의 극단적 쏠림을 막아주는 보완재로서는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주변부 세계관을 중심적 세계관으로 내면화한 사람들이 주도권을 잡는 한 진보세력은 미래가 없다. 민주당이 미래를 위해 586의 굴레를 벗고 새로운 진보로 재탄생해야 한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길이다. 그런데도 강경파들이 다시 목소리를 높인다. 대선 막판 586 퇴진 약속이 무색하게 우상호를 비대위원장으로 앉힌 것은 당장 살기 위한 선택일 것이다. 진보의 미래보다는 자기들 방어를 목표로 뭉친 것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지만, 발을 딛고 있는 곳이 얼음장이면 정반대가 된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오늘로 취임 한 달. 윤석열 대통령은 대통령실 이전, 한미 정상회담, 지방선거 승리 등등 쾌속질주를 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위험한 조짐들도 엿보인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일방적 리더십의 징후다. 그제 윤 대통령의 “민변 도배” 발언은 독립운동하는 심정으로 정권교체를 이뤄낸 뒤 초보 정치인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아슬아슬한 심정으로 응원하던 국민들로 하여금 “어이구” 소리가 절로 나오게 하는 실언이었다. 지방선거 직전에 이런 발언이 나왔다면 접전지의 승패가 상당수 뒤집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강경지지층은 사이다라고 시원해할지 모르지만 새 정권의 소명을 망각한 발언이다. 문재인 정권은 반면교사이지 비교 대상이 아니다. 국민은 문 정권 내내 점철된 내로남불, 몰상식을 떨쳐 없애고 상식을 회복하라고 정권을 바꾼 것이다. 상대적으로 덜 비상식적이고 덜 내로남불이면 되는 게 아니다. 물론 좌파 시민단체와 운동권 출신 왕국으로 정권을 변질시킨 문 정권의 인사와 새 정부의 검찰·기재부 중용은 의도와 퀄리티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문 정권은 평생 제대로 된 경제활동에 참여해본 경험 조차 없이 낡은 좌파 이념 활동만 해온 이들의 밥그릇을 챙겨주며 이념 실험 멍석을 깔아줘 나라의 기둥을 갉아먹었다. 이에 비해 새 정부가 검찰과 기재부 출신을 대거 기용한 것은 전방위적 위기관리를 제1미션으로 삼아야 하는 첫 내각이 처한 대내외적 상황과 좌파 정권 5년 적폐의 청산, 새로운 부패방지 시스템 구축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실 총무·인사 등에 검찰 식구들을 앉힌 것을 놓고도 비판이 많지만, 윤 대통령 입장에선 나름의 논리가 있을 것이다. 최고 권력자 지근거리의 ‘집사’ 역할은 문고리 권력으로 변질·부패하기 쉬운데,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추천한다 해도 겉 다르고 속 다른 인간의 다층적 면목을 다 알 수 없는 한계가 있으므로 오랜 기간 직접 겪어본 것만큼 확실한 검증은 없다는 논리일 것이다. 검사 출신 금감원장도 서민을 울리는 금융기관의 횡포를 방지할 시스템을 구축해 보겠다는 의도라면 효율적 인선일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국정원 기조실장, 법제처장 등등 검사가 아니어도 될 자리에 검찰 출신을 너무 많이 등용한 원죄에 있다. 특히 사적 인연이 있다면 일부러라도 배제했어야 했다. 기본적으로 자신이 검찰총장 출신이면 “너무 역차별한다”는 소리가 나올 만큼 검찰 출신을 덜 쓰는 게 상식이고 국민에 대한 예의였다. 그런 절제를 소홀히 한 결과 이제는 필요한 자리에 인선하려 해도 엄청난 역풍을 자초하게 된 것이다. 인사권자가 어떤 인사 철학을 갖든 그건 자유다. 다만 그 철학은 상식, 전통, 사회적 기대치의 테두리 내에서 자율권을 갖는 것이다. 설령 인선된 인사들이 일을 잘해 결과적으로 성과를 낸다 해도 국민은 대통령이 인재를 찾고 선택하는 과정 전체를 보며 리더십에 대한 신뢰-불신을 결정하므로 인선 기준과 과정 자체에 대한 공감대와 지지를 더 폭넓게 확보했어야 한다. 국민이 특정 집단 편중 인사를 비판하는 것은 기득권 엘리트 집단에 대한 적대감의 차원이 아니다. 사람은 수십 년 해온 직업에서 굳어진 특질을 벗기 어렵다. 윤 대통령은 규제개혁·민간주도 성장을 신앙처럼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동시에 모피아 왕국을 만들어 놓았다. 비서실장 경제수석 국무총리 부총리 금융위원장 국무조정실장 관세청장 통계청장 조달청장 복지부 차관 문체부 차관…. 관료는 규제를 만들어 내는 장본인 집단이다. 개인적 유능·도덕성을 떠나 관료 생태계 구축과 유지를 위해 팔이 굽는 DNA를 어쩔 수 없다. 규제개혁, 민간주도 성장을 이끌 책임자들을 관료들로 도배해 버린 건 왼쪽 깜빡이를 켜고 오른쪽으로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전문경영인, 벤처기업인 등 규모도 방대하고 수준도 초일류급인 우리 사회의 민간인 고급 인력풀을 도외시한 인선은 인선에 관여한 대통령 측근들이 게으르고 무능력했거나, 등잔불 아래서 자기 식구들끼리 요직을 차지하려는 욕심으로 ‘장난질’을 친 결과물일 것이다. 인수위 시절부터 검찰·기재부 편중 인사 조짐에 대한 우려가 제기돼 왔지만 윤 대통령은 귀 기울이지 않았다. “민변 도배” 발언도 진의와 무관하게 ‘이제 선거도 끝났으니 내 뜻대로 간다’는 포고문처럼 들릴 수 있다. 보스는 소신과 용기, 의리만 있으면 되지만, 정치지도자는 민심의 바다에서 노를 저어야 한다. 아무리 유능한 노꾼을 구해도 파도가 거세지면 헤쳐가기 어려워진다. 귀에 말뚝을 박은 것처럼 남의 말에 꿈쩍도 하지 않는 사람을 ‘말뚝귀’라고 한다. 최악의 리더는 세뇌되듯 어떤 결론이 머리에 주입돼 말뚝귀가 돼버린 상태에서 즉흥적 일방적 결정을 하고 집착하는 지도자다. ‘전환시대의논리 리영희’ 유의 낡은 이념적 사고의 틀 안에 웅크린 상태에서 영화 보고 탈원전을 결정하고 끝까지 집착한 문 전 대통령이 바로 그런 사례였다. 윤 정부는 그런 문 정권의 정반대가 되어야 한다. 닮거나 덜 하는 것만으로는 국민에 대한 배신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윤석열-조 바이든 정상회담 결과 한미동맹이 복원됐다는 평가가 잇따르자 더불어민주당은 한미동맹은 이미 문재인 정권에서 강화됐다고 반박했다. 윤호중 비대위원장은 “지난해 문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은 한미동맹을 정치·군사를 넘어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격상시켰다”고 주장했다. 고용진 수석대변인은 “윤 대통령이 문 정부가 확장시킨 한미동맹을 계승·발전하고자 한 것으로 보여 다행”이라고 했다. 지난해 5월 21일 백악관 정상회담에서 나온 5·21 공동성명을 근거로 한 주장들이다. 얼핏 보면 맞는 말이다. 당시 공동성명은 안미경중(安美經中)의 차원을 넘어선 대중 굴종외교, 한미동맹의 대북억지력 축소 일변도를 걸었던 문 정권의 대전환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후다. 문 정권은 슬금슬금 제자리로 돌아갔다. 미중 갈등, 한미 연합훈련 문제 등에 열의를 보이지 않고 기존 스탠스를 유지했다. 문 정부 임기 말 전직 고위외교관이 바이든 행정부 최고위급 관계자에게 “5·21 공동성명이 잘 이행되고 있느냐”고 묻자 그는 피식 웃으며 “알면서 왜 물어보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당시 문 대통령은 판문점선언, 싱가포르선언 등 자신의 어젠다를 새로 출범한 바이든 정부에서도 반영하는 데 골몰했다. 이를 위해 ‘대만해협의 평화 안정’등 미국이 원한 민감한 문구를 받아준 것이다. 필자가 5·21 공동성명 직후 쓴 칼럼의 제목은 ‘등떠밀려 진입한 옳은 길, 실천이 관건’이었다. 우려대로 문재인 정권은 북한과의 대화 재개 문제 이외에는 큰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애당초 그럴 의지가 없었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물론 문재인 정부 5년을 포함해 지난 수십년간 한미동맹이 외형상 무너진 적은 없다. 그러나 유사시 남의 전쟁터에 자국 젊은이를 보내야 하는 안보동맹은 협정의 존재만으로 지속가능성을 갖는 게 아니다. 정상회담에서 미사여구가 난무해도 행정부와 의회를 비롯한 조야에서 불신이 깊어지면 동맹은 위기로 치닫는다.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는 “만약 지난 몇 년 식으로 몇 년 더 갔으면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졌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사실 문재인 정부가 대미외교에 돈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주미 대사관엔 공공외교 공사라는 고위직이 신설됐다. 그런데 ‘외국 국민들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통해 우리나라의 역사 문화 등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시켜 국가이미지와 브랜드를 높이는 외교활동’(외교부 홈페이지)이어야 할 공공외교가 종전선언 등 정권 어젠다의 지지를 확보하는 작업으로 변질됐다. 대통령 자문기구인 민주평통 미주부의장에 문 대통령 대학 후배가 임명된 것을 비롯해 주요 도시 간부직이 친민주당 인사들로 채워졌고, 종전선언 지지 강연회, 모임 등이 잇따랐다. 미 의회가 종전선언 지지 결의안을 통과시키게 만들자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는 미국이 2016년 러시아 스캔들 이후 대폭 강화한 일명 FARA법, 즉 외국대리인등록법(Foreign Agents Registration Act)에 저촉될 소지가 있는 위험한 접근이다. 교민들이 미 의원 등을 상대로 유권자 운동을 펼치는 것은 좋지만, 이는 교민 위상강화나 보편적 인권문제 등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출신국 정부의 어젠다를 위한 활동에 그 정부의 돈이 들어가면 스파이 행위로 간주돼 엄중 처벌받을 수 있다. 종전선언 등을 위해 동원된 문 정권의 대미 민간외교는 뉴욕뉴저지한인유권자센터 등이 주도한 유권자 운동의 결과 2007년 미 의회가 일본군 위안부 사과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성과를 내는 등 미국 내에서 한발 한발 성장해온 풀뿌리 운동에 찬물을 끼얹었다. 다행히 이제 동맹 관리는 본궤도로 복원됐다. 이번 윤-바이든 공동성명은 5·21의 업그레이드판 수준이지만 실제 효과는 본질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우선 미국의 기대가 다르다. 문 정부에 대해선 임기 말이니까 대충 넘어갔지만 이젠 정말 한국이 열의를 갖고 임해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5·21 때는 겉으론 신경질을 내면서도 내심으론 한국이 안 변할 것이라고 예상하며 넘어갔지만 이번엔 매우 심각하게 볼 것이다. 이 점에서 윤 정부가 경계해야 할 대목들이 있다. 방향은 맞는데 속도와 강도에 대한 전략적 마인드도 충분히 갖춘 것인지 확실치 않다. 동맹 복원이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는 수준이 돼선 안 된다. 정반합(正反合)으로 진전해야 한다. 너무 고무되거나 균형을 잃어선 안 된다. 사소한 사례지만 19일 밤 그랜드하얏트호텔 앞 폭행사건을 일으킨 미 경호원을 20일 오후 4시 출국시킨 것은 정상적인 업무 처리와는 다르다. 이 경호원은 SOFA 대상도 아니고 외교관도 아니다. 경찰은 본보 질의에 조사가 끝나 송치할 계획이며 폭행의 정도로 보아 약식 기소 후 벌금형이 나오면 해외납부가 가능하다고 답했다. 물론 경미한 폭행에 대해 신병을 장기간 확보할 수는 없으며 출국 자체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지만 폭행 만 하루도 안돼 출국시킨 결정에는 다른 요인이 고려됐을 가능성이 의심된다. 중국에 대해서도 확실한 원칙을 가져야 한다. 중국이 약하게 반응한다 해서 쉽게 말하고, 세게 나온다 해서 움츠리는, 그때그때 대응은 안 된다. 5년간 익숙할 만큼 경험한 문 정권과 민주당의 속성은 아쉬운 게 있을 때는 약속·공약을 서슴없이 하지만 그 필요성이 사라지면 헌신짝같이 뒤집거나 무시해 버린다는 점이다. 내정뿐만 아니라 외교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윤 정부는 올바른 방향으로 대선회했다. 하지만 향후 어떤 도전이 닥칠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예컨대 만약 북한 급변사태 발생 시 중국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최고조의 위기 상황이 닥칠 수도 있다. 냉정하고 치밀한 전략을 바탕으로 동맹 강화의 길을 정교하게 걸어야 한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퇴임 시점 지지율이 40%를 웃돌자 문재인 전 대통령 측은 국민이 성공한 정권으로 인정해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갤럽 조사에서 문 전 대통령의 직무 수행 지지도는 임기 5년차 1분기 35%, 2분기 39%, 3분기 37%, 4분기 42%를 기록했다. 부정평가는 56%→53%→56%→51%였다. 대통령 지지율을 묻는 한국갤럽 조사의 질문은 “대통령이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잘못 수행하고 있다고 보십니까”이다. 그런데 만약 ‘잘못 수행하고 있다’고 답한 사람들한테 “얼마나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냐”고 추가로 물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예를 들어 ①기대에 못 미친다 ②실망스럽다 ③아주 잘못하고 있다 ④역대 최악 ⑤증오할 정도 등으로 강도를 묻는다고 가정해보자. 문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단순히 ‘실망스럽다’ 수준이 아니라 증오, 역대 최악 등 강도 높게 부정적 평가를 하는 이들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매우 높을 것이다. 반면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 퇴임 시점 지지율이 각각 24%, 27%에 불과했지만 부정적 평가라고 해도 ‘실망스럽다’ ‘성과가 나쁘다’ 정도의 수준이 많았을 것이다. 문 전 대통령의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율은 강도 높은 혐오도와 동전의 양면이다. 지지자는 ‘사랑해요’ ‘최고 성군(聖君)’ 수준으로 떠받들고, 부정적 평가자는 ‘실망스럽다’ 정도가 아니라 혐오, 증오, ‘역대 최악’ 수준으로 싫어한다. 지지율이 높지만 부정평가의 강도와 질(質) 역시 높은 것이다. 지도자라면 40% 지지율에 도취될 게 아니라 국민을 이렇게 양극단으로 갈라놓은 것을 부끄러워하고 후회해야 한다. 철저한 진영정치, 편 가르기 통치는 그에 상응해 증오도를 상승시켰고, 그 증오는 50% 후반대의 압도적 정권교체 여론이 확고하게 유지된 핵심 에너지가 됐다. 진보 장기집권 호기를 문 전 대통령 스스로 망쳐버린 것이다. 이런 참담한 실패에서도 배운 게 없는 듯 더불어민주당은 지지층만을 겨냥한 독주에 오히려 가속페달을 밟고 있다. 입법폭주로 인해 법치주의는 이미 의미를 상실했다. 자기 필요에 따라 법을 뚝딱 만들어 버리니 법은 그저 ‘내 마음대로’를 실현할 도구 신세가 됐다. 이젠 법제사법위원장을 임기 후반기엔 야당 몫으로 하겠다는 약속마저 깨겠다고 한다. 아예 약속이 무의미한 사회로 몰고 가는 것이다. 신뢰와 약속은 인간관계 성립의 기초를 이룬다. 정치 외교 등 공적인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는 법적 구속력보다 도덕적·정치적 구속력을 더 중요하고 강한 것으로 여긴다. 그럼에도 전혀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을 안 느끼고, 그 행위가 사회에 미칠 영향도 개의치 않는다. 그런 척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당당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인사청문회장에서 “내가 무슨 위장 탈당을 했냐”고 버럭 화를 내는 민형배 의원의 행태가 한 사례다. 민주당이 죄책감과 수오지심을 느끼는 세포를 잃어버린 것은 강경 지지자들의 환호와 응원만을 듣고, 그 속에서 자기만족을 느끼는 ‘선택적 청취’가 5년간 반복되면서 DNA처럼 체질화된 결과다. 강경 지지층에게만 귀를 기울이면 결국은 정권에 대한 증오를 양산해 정권의 기반이 무너지게 됨을 보여준 문 정권의 실패기는 윤석열 정권에는 생생한 학습 자료다. 새 정부 인선 논란도 강경 지지층이 아닌 중도와 온건 보수층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 좌파진영의 새 정부 흔들기용 발목 잡기와 보수정부의 앞날을 걱정하는 쓴소리가 구분될 것이다. 인선은 인사권자의 원칙과 소신에 따라 하되, 인선 공개 후 미처 몰랐던 문제가 드러나면 주저 말고 반영하면 된다. 인선 변경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철저히 사전 검증을 한다 해도 모든 흠결을 다 걸러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를 내정할 때 두 자녀의 의대 편입 관련 내용을 파악하지 못했다 해서, 종교다문화비서관을 고를 때 그가 위안부 문제를 ‘밀린 화대’로 표현한 사실까지 파악하지 못했다 해서 그 자체가 인사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사에 실패한 정권과 성공한 정권의 차이는 문제가 드러난 후의 대응에서 갈린다. 관건은 인사권자가 자기가 고른 사람들에게도 엄정한 저울을 잃지 않는 것이다. “상관없어” “괜찮아”라고 속삭이는 강경 지지자들, 간신들의 목소리를 떨쳐야 한다. 강경 지지층에게만 귀를 연 결과 팬덤에 취해 마지막까지도 자화자찬과 새 정부 트집 잡기에 연연했던 문 전 대통령의 옹색한 뒷모습을 보라. 세상에 이렇게 선명한 반면교사가 또 있겠는가.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