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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월쯤 윤석열 대통령의 외부 행사 때 누군가 큰 목소리로 정치적 구호를 외친다고 가정해 보자. 최저임금 인상 요구일 수도, 강제징용 사안일 수도 있겠다. 대통령은, 현장의 경호처 요원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예상 밖 위기와 맞닥뜨리면 몸에 밴 무언가가 툭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최근 불거진 대통령 행사 강제퇴장 문제를 경호처 매뉴얼의 적절성 정도가 아니라 대통령의 정치력과 국정 스타일의 문제로 살펴야 하는 이유다. ▷2번이나 발생했다. 1월 전북 전주에서 진보당 국회의원이, 지난주엔 대전 KAIST 졸업식에서 녹색정의당 대전시당 대변인인 석사 졸업생이 소란을 일으켰다가 들려 나갔다. 둘 다 경호원 손에 입이 틀어막혔다. 평범한 시민의 목소리가 아니라 정치 구호인 것은 맞다. 의도한 소란이란 걸 감안하더라도 ‘입틀막(입 틀어막기)’이라는 신조어가 말하는 과잉 대응 논란은 피할 수 없다. 누구나 촬영하고, 실시간 공유하는 세상이다. 옛 시절에 고여 있는 경호처 때문에 대통령이 손해를 봤다. ▷영상 속 윤 대통령은 행사에 집중했다. 전주에선 국회의원을 지나쳐 갔고, 대전에선 “실패를 두려워 말라”는 연설을 이어갔다. 용산 대통령실에선 두 장면을 복기하며 점검 회의를 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결론이 궁금하다. “규정대로 했을 뿐”이라는 경호처 말에 수긍하고, 동일 상황에는 동일하게 대응하는 쪽으로 마무리했을까. 요즘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현직이던 2013년 연설 영상이 주목받고 있다. 영상 속 오바마는 불법 이민자 강제추방에 반대하는 한국계 청년의 돌발 외침을 40초 넘게 놔두고, 경호원 개입을 제지하고, 그 청년과 대화하듯 연설했다. 그는 능숙하게 경청했다. ▷경호는 순간의 과업이다. 찰나의 대응에 안위가 결정되는 만큼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할 수 없다. 그걸 인정하더라도 기계적 경호는 아쉬움을 남긴다. 국회의원을, 대학원 졸업생을 요원 4, 5명이 들어내지 않고 걸어 나가도록 안내했다면? 퇴장시키는 동안 주장을 외치도록 놓아뒀다면? 들어내기와 입 막기는 대통령 안위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정치 경호였고, 심기 경호였다. 경호처 판단에는 우리 대통령이 저 정도 주장도 불편해할 것으로 본다는 뜻인가. ▷윤 대통령이 “발언을 멈춰달라. 행사가 끝난 뒤 나랑 더 이야기하자”고 다독였다면 어땠을까 싶다. 노정객 바이든 미 대통령이 작년 9월에 했던 그대로 말이다. 오바마나 바이든이나 오랜 현장정치 경험이 있다. 윤 대통령의 대민 접촉은 사전 기획, 선발대 점검, 경호 통제 속에서 대부분 진행됐다. 그렇다고 이런 일을 2번이나 겪고도 용산 참모들이 매뉴얼도 고치지 않고, 대통령의 임기응변 시나리오를 준비하지 않는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입틀막’만큼은 경호처가 경호 규정에서 삭제해야 한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올 11월 두 번째 4년 임기에 도전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기억력 문제로 궁지에 몰렸다. 1942년생으로, 미 역사상 최고령 대통령인 그가 재선되면 86세로 퇴임한다. 말실수 잦고, 자주 넘어지더니 이번엔 지난주 특별검사가 내놓은 345쪽 수사보고서가 미 정가를 흔들고 있다. 인스턴트 음식을 즐기는 과체중 도널드 트럼프(77)가 아니라 늘 운동하고 건강 식단을 챙기는 바이든(81)에게 생긴 건강 논란이 역설적이다. ▷한국계인 로버트 허(Hur) 특검은 바이든이 부통령에서 퇴임한 뒤 이란 우크라이나 군사기밀을 자택으로 가져간 일의 불법성을 수사했다. 바이든은 “참모의 단순 실수”라고 해명했고, 1년 수사의 결론은 “중범죄 혐의 없음”이었다. 사달은 그 이유에서 시작됐다. 허 특검은 “기소하더라도 대통령 변호사들은 배심원단에게 바이든을 ‘착하지만 기억력은 나쁜 노인’으로 묘사할 것이고, 결국 유죄 평결을 받기 어렵다”고 썼다. 미 특검은 조사를 마칠 때 유죄 가능성 판단을 밝혀야 한다. ▷허 특검은 지난해 10월 8, 9일 이틀에 걸쳐 5시간 동안 바이든을 백악관에서 조사했다. 그는 보고서 곳곳에 “의사소통이 느리고… 기억력에 한계가 있다”는 표현을 남겼다. 바이든은 반박문을 통해 “조사 시점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발발(7일) 이튿날로, 내가 국제분쟁의 한복판에 서 있을 때여서 그랬다”고 해명했다. 특검은 자택에서 찾은 녹음테이프에 기밀이 담겼는지도 확인했다. 확인 결과 바이든이 책 대필작가에게 구술한 테이프였다. 특검은 “녹음 속 바이든은 때론 듣기 고통스러울 정도로 말이 느렸다(painfully slow)”거나 “수첩을 보고 말하는 것도 힘겨워했다”고 썼다. “대통령이 내부 회의 때나 외국 정상과 만날 때는 판단이 날카롭다”는 백악관 해명을 180도 뒤집은 것이다. ▷메시지를 반박 못 하면 메신저를 공격하라는 정치 공식이 워싱턴에서도 작동됐다. 민주당은 허 특검을 향해 “정치 목적으로 권한 밖의 일을 했다”는 공세를 폈다. 허 특검이 트럼프 대통령에게서 메릴랜드주 연방검사에 임명됐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공화당원이다. 하지만 그를 특검에 임명한 것은 바이든의 법무장관이었다. ▷“돈을 더 안 내면 러시아의 나토 공격을 장려하겠다”는 발언으로 평지풍파를 일으킨 트럼프 캠프는 역공 소재로 삼고 있다. 공화당은 문제의 5시간 대화록을 의회에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녹음 속 하나하나를 따지겠다는 것이다. 91개 혐의로 4개 형사재판을 받고 있는 트럼프, 말과 행동이 둔해지는 바이든. 미국인들은 11월 두 후보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투표권 없는 우리는 한반도 운명에 직결된 미국의 선택을 숨죽이며 지켜보게 됐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정치 뉴스를 읽으려면 정당명 10개쯤은 알아둬야 할 판이다. 개혁신당(이준석) 개혁미래당(이낙연) 새로운선택(금태섭) 등 제3지대 창당 붐이 일더니 비례 위성정당들도 태동을 시작했다. 국민의힘은 국민의미래 창당 발기인 대회를 준비한다고 밝혔다. 비례대표 선거 방식을 두고 오락가락하는 더불어민주당을 압박한다는 이유라지만 4월 총선 투표용지에 오를지도 모를 페이퍼 정당이다. 야권 전체가 비례 후보를 연합 공천하자는 새진보연합(용혜인)도 갓 태어났다. 익숙해지려던 새로운미래(이낙연) 미래대연합(이원욱)과 한국의희망(양향자)은 통합으로 사라졌다. ▷이러니 괄호 안에 정치인 이름을 안 넣으면 정치부 기자들도 정확히 기억 못 한다. 그럴수록 정치인들은 기억되는 이름 짓기에 골몰한다. 중앙선관위는 기존 정당과 일부 겹치거나 발음이 비슷해도 불허한다. 6년 전 국민의당(안철수)-바른정당(유승민) 합당 때 미래당으로 신청했으나 불허됐다. 우리미래라는 청년 결사체가 존재한다는 이유였다. 더불어민주당(문재인)도 2016년 현직 의원이 없던 민주당(김민석)이 명맥을 유지하는 바람에 민주당 대신 ‘더민주’라는 약칭을 썼다. ▷위성 정당들은 모태 정당이 쉽게 떠올라야 유리하다. 그러니 랩 가사처럼 운율(韻律)에도 신경 쓴다. 국민의힘의 위성정당 이름으로 국민의길과 시민의힘은 막판까지 경합했다. 4년 전에는 더불어민주당-더불어시민당, 자유한국당-미래한국당이란 쌍둥이 조합이 있었다. 첫 위성정당이라 이름이 겹쳐짐에도 당시 선관위가 평소보다 관대하게 나왔다. 현재 원내 정당들은 기억되고 싶은 가치를 담아 더불어, 민주, 국민, 힘, 정의라는 언어를 선점했으니 신생 정당들은 새 어휘를 찾아 나섰다. ▷비례정당명은 아니지만 요즘은 개혁과 미래가 인기어다. 그렇다 보니 벌써 다툼까지 생겼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파트너인 개혁미래당(이낙연)이 비슷하게 지었다고 꼬집었다. “장사 잘되는 중국집 옆에 비슷한 이름으로 또 내는 격”이라고 했다. 개혁미래당에선 “개혁이 어떻게 누군가의 전유물일 수 있느냐”라며 “한강 물에 등기했느냐”고 반문한다. 이름 다툼을 하는 것은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을 높여야 한다는 절박감 때문이다. 앞으로 있을 수 있는 양당 통합의 순간에 당직과 공천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면 지지율이 1차 변수다. ▷이렇게 지은 정당명이지만 조롱의 대상이 되곤 한다. “정의당에 정의 없고, 민주당에 민주 없고, 국민의힘에는 국민도 힘도 없다”는 말은 정치의 실패가 만든 낭패다. 총선 국면에서 잘하기 경쟁에 나서고, 유권자 마음을 사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개혁과 미래를 입증해야 할 의무가 생겼다. 그러나 벌써부터 유권자들을 힘들게 만드니 걱정이 앞선다. 속 빈 강정 같은 정당 이름을 10개 넘게 기억하도록 만들고 있지 않나.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법무장관 시절 “민주당 의원들이 국회에서는 (나에게) 반박하지 않고 라디오로 달려가 저 없을 때 뒤풀이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사사건건 충돌하던 민주당 의원들을 꼬집은 말이다. 기자는 라디오 책임자나 앵커가 무반응했던 것이 의아했다. 국가가 소수에게만 허락한 전파를 이용해 정치인들이 주장을 마음껏 펴는데, 반론성 앵커 질문이 제대로 없다는 뜻 아닌가. 언제부턴가 공영방송 라디오가 흔들리고 있다. 황당한 사례가 명예훼손 혐의로 형사 기소된 안민석 의원이다. 그는 최순실을 향해 수조 원대 재산은닉 의혹 및 사드 배치 과정에 미국 록히드마틴으로부터 막대한 커미션을 수수했단 주장을 폈다. 대부분 2016년 말 라디오에서 기정사실처럼 한 말이다. 그때 최순실은 공적(公敵) 1호였다. 그렇다고 공영방송에서 근거 제시도 없이 비판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마주 앉아 있던 라디오 앵커들이 공적 책무를 방기한 듯했다. 대학교수가 진행한 YTN, 괴담 제조기라는 유튜버가 진행한 TBS 등을 돌아다니며 안 의원은 반복해 말했다. YTN 진행자가 “최순실의 독일 재산이 어느 정도냐”고 부추겼을 때 “독일 검찰과 독일 언론이 수조 원대로 추산한다”는 답이 나왔다. 안 의원은 앵커의 맞장구에 “독일 검찰의 돈세탁 자료도 얼추 봤다”는 말까지 했다. 자사 아나운서였던 MBC 라디오의 앵커는 록히드마틴 뒷돈 주장을 또 꺼냈음에도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다”며 마무리했다. “시간 부족으로 다시 모셔 확인하겠다”는 흔한 말도 없었다. 그 시절 앵커들은 △사실 검증 △사실과 의견의 구분이라는 저널리즘의 기본기를 잊은 듯했다. 안 의원을 향해 “왜 그게 사실이라고 믿어야 하느냐”거나, “자신 있게 말하시는데, 어떻게 알게 됐느냐”고 물었어야 했다. 그럴 때라야 청취자들은 신뢰할지 말지를 판단할 것이고, 앵커와 프로그램의 신뢰도는 올라간다. 망가진 정치 담론을 위해서도 그렇다. 앵커의 반론성 질문이 살아 있을 때 정치인들은 긴장한다. 허튼소리를 했다간 공개 망신할 수 있다. 궤변 같은 주장이 어디 한 곳에서는 걸러져야 한다. 형사 기소된 수년 전 사례를 들어서 그렇지 크고 작은 일방적 주장은 요즘도 여전하다. 보수 패널이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수많은 혐의를 두고 유죄를 전제로 발언해도 듣고만 있는 것이 단적인 예다. 앵커들의 속마음이 궁금하다. 저널리즘 ABC를 몰라서는 아닐 것이다. 여야를 불러 일방적 주장을 듣기만 하고, 판단은 뉴스 소비자에게 맡기면 된다고 믿는 걸까. 한쪽에 유리한 방송을 한 라디오 앵커가 유튜브에 고정 출연해 그쪽에 치우친 발언을 내놓는 건 뭔가. 그런 앵커의 태연함에도, 그걸 두고 보는 방송사의 무신경함에도 놀랄 따름이다. MBC, KBS 등 공영방송 라디오 패널이 7 대 3 정도로 기울어진 지 오래다. 기울어진 패널에는 앵커 의견도 크게 작용한다. 불균형을 지적해도 오불관언이다. 당파성 강한 앵커가 기본 책무를 포기하다시피 해 저널리즘 품질을 떨어뜨리는 것을 지적하는 이 글은 신경이 쓰이기나 할까. 안민석 의원은 재산 은닉과 사드 뒷돈으로 최순실 가족과 민사소송도 진행 중이다. 1심에서 “1억 원 물어주라”는 판결이 났다가, 2심에선 “공익 목적이라 문제 안 된다”고 뒤집혔다. 딸 정유라가 “공익 목적이면 이래도 되냐”고 분기탱천했다. 정유라 모녀를 오래 비판해 왔지만, 이 말만큼은 동의한다. 안 의원의 근거 없는 의혹 제기는 공익에 도움이 됐던 걸까. 아니면 앵커와 합작으로 공론장 라디오의 품격을 떨어뜨린 걸까. 대법원 판단이 궁금하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영국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2.2%인 국방예산을 2.5%까지 끌어올리겠다고 선언했다. 냉전 한복판이던 1960년대(5∼7%) 수준은 아니지만 21세기 최고 수준으로 올리겠다는 의지다. 그랜트 섑스 국방장관은 어제 이런 구상을 밝히면서 “평화 배당금을 누리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평화 배당금이란 국방비를 삭감해 생긴 여유 예산을 투자 배당금을 받아 생긴 목돈처럼 보는 표현이다. 냉전 후 각국은 복지와 교육 등에 더 썼다. ▷섑스 국방장관은 현 시점을 “전후(post-war) 시기를 벗어나 (전쟁을 앞둔) 전전(戰前·pre-war) 시기에 접어드는 새 시대의 여명”이라고 진단했다.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에서 2개의 전쟁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지만 ‘진짜 전쟁’은 따로 올 듯이 말한 것이다. 그러면서 “5년 내 러시아 중국 이란 북한에서 분쟁 현장을 보게 될 것”이라며 4개국을 거론했다. 미국과 동맹이고, 북한과 대적하고, 중국과 협력해야 하는 우리로선 엄중한 상황 평가가 아닐 수 없다. ▷영국이 국방비 증액에 나선 이유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의 한 축인 서유럽이 평화 배당금에 취해 국방 태세를 놓아버렸기 때문이란 판단에서다. 나토는 국방예산의 70%를 미국에 의존하는 기형적 구조다. 독일 슈피겔지는 자국 주력 전투기인 128대 가운데 4대만이 비상시 실전 투입이 가능하다고 보도했다. 독일의 비축 탄약이 이틀 분량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영국이 보유한 장거리포는 12문에 불과하다. 우리 흑표 K-2 전차가 방산 경쟁 때 명성 높던 독일 레오파드 전차를 번번이 이긴 것도 이래서 가능했다. ▷트럼프의 미국 중심주의도 유럽을 긴장하게 한다. 그가 11월 재선될 경우 나토 탈퇴를 검토할 수 있다는 전망이 있다. “미국이나 유럽 회원국 한 곳이 공격받으면 모두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조약 5조가 나토의 핵심이다. 트럼프는 2017년 나토 정상회의 때 모든 미 대통령이 반복 다짐했던 ‘조약 5조의 중요성’을 일부러 빼고 말했다. 한국에 주한미군 주둔비용 추가 부담을 요구한 것 이상으로 유럽 부자 나라들에 방위비 증액을 압박했던 것이다. ▷탈냉전 평화를 벗어나 새로운 전쟁 시대의 전야(前夜)가 된 지금 미국과 영국이 보는 적대세력에 러시아 외에 중국 이란 북한이 추가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섑스 국방장관은 연설에서 “냉전 때는 상대가 이성적으로 보였지만 지금은 불안정하고 비합리적”이라고 말했다. 향후 30년 안보 위협의 성격을 보여주는 말이다. 미영의 전략 구상이지만, 한미동맹을 통해 연결된 우리 처지도 다를 게 없다. 1981년 GDP 대비 6.4%였던 우리 국방예산은 김영삼 정부 이후 2%대를 유지하고 있다. 2022년은 2.7%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미국 대통령이 미중 정상회담 때 빼놓지 않고 요청하는 게 미국산 콩과 옥수수 수입 확대다. 간장 두부 식용유를 만드는 데 필요해 중국은 이들 작물의 최대 수입국이다. 수출 증대를 꾀한 것이겠지만, 두 작물이 대통령 선거에 영향력이 큰 ‘정치 곡물(穀物)’인 것이 진짜 이유일 수도 있겠다. 대선에서 이기려면 아이오와주의 대표 농산물인 콩과 옥수수의 판로 확대에 기여하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중서부 대평원 지역의 아이오와 그리고 지역 농산물이 정치적으로 대접받는 이유가 있다. 4년마다 돌아오는 대선의 해 1월 가장 먼저 코커스(caucus·당원 대회)를 여는데, 그 경선 결과가 앞으로 펼쳐질 주별 경선에 심리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오와에서 우리 시간으로 오늘 오전 10시 공화당 코커스가 열리고, 오후쯤 결과가 나온다. 민주당과 공화당의 경선은 1∼6월 50개 주마다 1등 후보를 뽑는 방식으로 진행하는데, 2가지 방식이 있다. ▷우리처럼 하루 날을 잡아 방문 투표 또는 우편 사전투표를 하는 프라이머리(primary) 방식이 일반적이다. 코커스 방식은 예외적이다. 아이오와처럼 1500곳 투표소 현장을 직접 찾아 오후 7시부터 연설 듣고 토론한 뒤 투표하니 꽤 긴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그렇다 보니 투표율에도 차이가 있다. 아이오와 코커스는 투표율이 15% 선에 그치는 반면 프라이머리는 2배인 30%를 넘어선다. ▷역설적이게도 낮은 투표율이 아이오와를 주목하게 만들었다. 공화당 후보라면 이론상 등록 유권자의 7∼8%만 내 편으로 만들어 투표시키면 50% 득표율로 1위가 될 수 있다. 그렇다 보니 인구 300만 정도인 아이오와를 대선 주자들이 더 자주 찾는다. 맥줏집, 교회와 극장 앞, 학교 운동장에서 뉴스에서 보던 후보들과 선 채로 대화하는 경험이 많은 것이 아이오와 정치의 자부심이다. ▷올해 공화당 아이오와 코커스는 80년 만의 폭설과 영하 20도 맹추위로 낮은 투표율을 더 떨어뜨릴 수 있다. 오죽했으면 1위인 트럼프조차 “죽도록 아프더라도 투표하고 죽으라”고 독려할까. 후보 캠프마다 한국에선 불법인 투표장까지 교통편 제공을 위한 당번을 정해 놓았고, 2위 경쟁을 하는 후보 캠프들은 역시 한국에선 불법인 가가호호 노크 유세를 혹한에도 중단하지 않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50년 동안 4년마다 같은 날 열던 민주당의 코커스는 올해부터 3월로 미뤄졌다. 흑인 지지세가 주춤한 것을 감안해 흑인 유권자가 많은 2월 초 사우스캐롤라이나 경선을 올해의 첫 경선장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현직인 조 바이든 대통령이 있어 민주당 후보 경선은 크게 의미가 없어졌지만, 낮아진 흑인 지지율을 올리려고 머리를 짜낸 것이다. 이래저래 첫 경선장에 전략적 의미를 부여하는 건 대선 후보들에겐 인지상정이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의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는 나라들이 늘어나고 있다. 옛 유고 연방의 일부였던 동유럽 세르비아에선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1주일째 진행 중이다. 시위대 수천 명은 “대통령이 선거를 강탈했다”며 선거 무효를 주장하고 있다. 2주 전 출범한 폴란드 정부는 “공영방송이 전임 정부의 선전도구였다”며 뉴스 전문채널의 방송을 중단시켰다. 전임 정부, 새 정부 모두 비교적 자유 선거로 집권한 나라에서 했는데 벌어진 일이다. ▷선거가 언제부턴가 두려움이란 표현과 쓰이곤 한다. 일부 정치인이 민주의 외피(外皮)를 입고 전횡을 저질러 그럴 것이다. 이런 우려 속에 내년은 71개국에서 선거가 치러진다. 독일 우루과이 등 자유 선거 43개국, 베네수엘라 튀르키예 등 불완전 선거 28개국 등 모두 71개국이라고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집계했다. 71개국 인구는 42억 명으로 “역사상 가장 많은 유권자가 투표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작년과 올해 선거를 치른 나라의 인구는 모두 약 12억 명이다. 2024년 선거는 그래서 지구적 현상이다. 1월 대만, 2월 인도네시아, 3월 러시아 이란, 4월 한국 인도, 11월 미국까지…. ▷선거를 통한 대의 민주주의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란 믿음이 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젠 정보 왜곡, 부정 선거, 여론 조작 시비가 잦아졌다. 오죽하면 미국에서 트럼프의 재등장을 걱정할까. 선거 아닌 선거를 치르는 푸틴, 시진핑 등이 ‘선거란 참 좋은 발명품’으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24년 장기집권 푸틴은 5선에 도전하고, 지난해 3연임 한 시진핑 국가주석은 인민대표 2952 대 0이라는 만장일치 형식을 갖췄다. ▷1년 전 탄생한 생성형 인공지능(AI)은 가짜 공포를 더 키웠다. 메타(옛 페이스북)는 AI 정치 광고를 금지시켰다. 구글은 AI에 묻는 대선 질문을 제한한다는 원칙은 정했지만, 무엇을 막을지는 결정 못 했다. 미국도 11월 대선을 앞두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떨고 있다는 말이다. “대외 개입을 줄이겠다”는 트럼프의 당선이 유리하다고 여긴다면 여론 왜곡에 나서지 말란 법도 없다. 푸틴, 시진핑, 하마스라면 유혹이 적잖을 것이다. ▷지금의 세계는 경제 공급망과 안보 지도로 촘촘히 엮여 있다. 1월에 뽑힐 새 대만 총통이 친중이냐 반중이냐는 중국의 북태평양 군사행동에 영향을 준다. 한미일 3국에게 중요하다. 우크라이나도 젤렌스키 대통령의 5년 임기가 3월에 끝난다. 전쟁 탓에 연기됐지만 우크라이나 대선은 우리 대외정책에 영향을 미친다. 미국 외교정책과 주식시장은 말할 필요도 없다. 미국 투자액이 85조 원을 넘나드는 수백만 서학(西學) 개미에게 지구 반대편 선거가 내 앞마당 선거인 것이다. 어느 선거 하나도 우리와 무관한 것은 없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정치가 자기 일을 제때 못하고 법원에 번번이 판단을 맡기는 걸 두고 ‘정치의 사법화’라 부르곤 한다. 이런 일이 미국서도 생겼다. 콜로라도주 대법원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내년 대선에 출마할 자격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러면서 내년 1월 공화당 주(州) 경선 절차에서 그의 이름을 투표용지에서 빼도록 명령했다.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한 뒤 2021년 의사당 습격을 선동한 행위가 국가 반란에 해당한다고 봤다. 트럼프에겐 4가지 형사재판과는 다른 차원의 사법 리스크다. ▷수정헌법 14조 3항이 근거였다. 미 의회는 남북전쟁 후 헌법에 14조를 추가했다. 노예에게 시민권을 주는 조항과 함께 “공직자가 국가 반란에 가담했다면 공직을 못 맡는다”는 내용을 3항에 담았다. 노예해방에 반대한 남군 핵심의 공직을 제한하는 155년 전 조치였지만, 어느 대선 후보도 이 조항을 걱정한 적은 없다. 미국에는 유죄 판결을 받은 후보일지라도 공직선거 출마 제한법이 없다. 트럼프에게 14조 3항은 느닷없는 폭탄이 됐다. ▷후보 자격이 최종 박탈된 것은 아니다. 콜로라도주 대법원은 용지 인쇄 전인 내년 1월 4일까지 효력 발생을 늦췄고, 연방대법원에 상고할 경우도 집행을 늦추겠다고 했다. 동일한 소송이 미네소타, 뉴햄프셔주에선 기각됐으니 결과를 짐작하기 어렵다. 미시간주 법원에선 1심 판사가 “민감한 정치 사건은 연방의회가 뭔가를 하기도 전에 판사가 결정하지 않겠다”며 각하했다. 법원의 권한 행사를 절제하겠다는 판단이었다. ▷민주당은 트럼프가 1위를 달리자 역풍을 우려해 이 사안을 내세우지 않았다. 이처럼 정치권 뜻과 무관한 연방대법원의 대선 개입은 과거에도 있었다. 아들 부시와 앨 고어가 붙은 2000년 대선이 대표적이다. 펀칭 기계로 투표용지에 구멍을 뚫던 플로리다주에서 무효표가 쏟아졌다. 고령 은퇴자에게 익숙지 않은 방식이 도입되었고, 민주당 강세 지역인데도 부시가 앞섰다. 그 방식 도입 책임자가 부시의 친동생이어서 민주당은 반발했다. 재검표, 수작업 검표를 거치며 혼란이 한 달 넘게 지속되자 연방대법원이 나섰다. 검표 중단을 결정했고, 부시 승리가 확정됐다. ▷후보 자격은 연방대법원 심리 동안 뜨거운 감자가 될 것이다. 현재는 6 대 3으로 보수 대법관이 많다. 3명은 트럼프가 직접 임명했다. 자격 박탈 가능성이 낮다는 견해가 많다. 파문을 일으킨 콜로라도 대법원도 4 대 3으로 가까스로 과반(過半)이었다. 주 대법원 판사 7명 모두 민주당이 지명했는데도 그랬다. 트럼프 캠프는 “마녀사냥이다. 뭉쳐야 한다”며 지지표 결집을 시도했다. 미국 대선은 분열과 갈등이 지배할 공산이 지금보다 더 커졌다. 지지층 결집이 셀지, 중도층이나 덜 열성적인 트럼프 지지자의 이탈이 클지가 승부처가 됐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이 결단의 순간을 맞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28일 김건희 특검법안을 통과시킬 것이다. 대통령은 내년 1월 중순쯤까지 거부권 행사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총선, 민심, 책무, 가족이 뒤엉킨 사안으로 홀로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늘어날 것이다. 지금대로라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전망된다. 총선을 앞둔 민주당 노림수에 동의 못 하리라 짐작된다. 법안을 보면 수사 범위가 지나치게 넓다. 도이치모터스뿐만 아니라 김 여사 가족 전체의 모든 주식을 수사할 수 있다. 반대 논리도 만만찮다. 노란봉투법 양곡관리법 등 거부했던 법안들이 지닌 정책적 독소가 특검법에는 없다. 타이밍 맞춘 듯 공개된 손가방 수수 영상에 상처받은 민심을 헤아려야 한다. 거부권은 대통령 권한이지만 배우자 수사여서 회피(回避) 사유라는 주장도 있다. 총선 코앞 특검법은 검찰이 빌미를 줬다. 문재인 검찰이 2년간 붙들다가 넘긴 수사는 3년 반이 넘도록 결론이 없다. 한동훈 법무장관이 지난해 5월 “최종 처분만 남았다”고 한 말과 아귀가 안 맞는다. “한 톨의 증거도 없다. 문재인 (정부 시절) 검찰 상부의 지시에도 ‘증거가 안 된다’며 기소를 못 했다. …진짜 팩트”라는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의 주장은 또 어떤가. 무죄로 결론짓고 1년 넘게 끌었다는 이야기다. 총선 뒤 “혐의 없음”이라고 할 참이었던가. 한동훈이든 원희룡이든 곧 등장할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열흘 안쪽에 해법을 찾아야 하는 승부가 기다리고 있다. 경우의 수는 둘이다. 첫째, 거부권을 행사하는 대통령과 뜻을 같이하는 길이다. 총선이 영부인 이슈로 뒤덮일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 둘째, 특검법을 주도적으로 찬성하는 길이다. ‘한 톨 증거’도 없다면 피할 이유가 없다. 그동안 논란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 다만, 여야 간 절충의 묘가 더해져야 가능한 선택지다. 법안은 지금 통과시키더라도 수사는 총선 뒤로 늦출 수 있다. 또 과거 특검법이 그랬던 것처럼 수사 범위를 구체화하면서 좁히는 일이다. 둘 다 민주당으로선 양보하는 것 같지만 상식에 부합한다. 총선 영향 준다며 이재명 선고를 늦추는 마당에 영부인 특검을 시작하자는 민주당 주장에 중도층은 동의할까. 당정 일체를 강조해 온 김기현 체제에서 김건희 특검법은 금기어였다. 새 비대위원장은 두 번째 카드를 용산에 관철할 의지와 역량을 보여주기 바란다. 건의하는 형식이겠지만 대통령 가족 문제를 당이 주도하는 일이다. 수직적 관계를 벗어나자는 변화 요구를 현실로 만드는 일이다. 대통령의 최종 결심은 짐작하기 어렵다. 어느 쪽이든 관계없이 새 비대위원장은 검찰에 수사 결과를 연내에 발표하도록 촉구하기 바란다. 이제라도 내용을 봐야 특검이 필요한지 아닌지 유권자가 판단할 것 아닌가. 법무장관이 늘 말하는 “이름 가리고 해도 동일한 수사”인지는 혹독하게 검증받게 될 것이다. 대통령실은 김 여사의 대외활동에 대한 종합적인 원칙도 제시해야 한다. “조심 또 조심하겠다”던 대선 때 약속에 가까울수록 민심은 더 수긍할 것이다. 김 여사 동영상 공개 후 3주가 흘렀건만 공식 반응이 없는 건 이해할 수 없다. 7년 넘게 공석인 특별감찰관도 임명해야 한다. 일련의 노력에 여론이 공감할 때라야 새 비대위원장의 특검법 절충 요구가 힘을 받는다. 절충 제안을 수용할지는 민주당 선택이지만 이 역시 총선 국면에서 심판받을 것이다. 리더의 진면목은 일상적 결정이 아니라 큰 결단에서 드러난다. 대통령도, 새 비대위원장도, 이재명 대표도 어떤 인물인지 확인할 기회가 생겼다. 앞으로 한 달 사이에 벌어질 일이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일본인이 뽑은 올해의 한자는 ‘세(稅)’였다. 증세와 감세가 뒤섞인 정책이 일본인 마음을 흔들었다는 뜻이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방위비 증액과 저출산 대책을 위해 세금 인상을 공언해 왔다. 인기 없는 정책이었다. 그러다가 10월 들어 “더 걷은 세금을 돌려 준다”며 난데없이 감세 정책을 꺼냈다. 이게 역풍을 맞았다. 총리가 내년에 있을지 모를 총선을 앞두고 “인기에 영합한다”는 이유였다. 5월만 해도 50% 선이던 지지율은 어제 공개된 지지(時事)통신 조사에선 17.1%까지 추락했다. 이 숫자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결정타는 총리 취임 2년을 넘기며 터진 자민당 파벌 비자금 사건이었다. 아베파(派)는 후원금 모금을 위해 기업이나 단체에 파는 행사 티켓(20만 엔·180만 원)을 의원 1인당 50장씩 할당했다. 할당량보다 더 팔면 의원들이 갖도록 했는데, 이렇게 챙겨둔 돈 45억 원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게 도쿄지검 특수부가 보는 혐의다. 여론이 나빠지자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 등 장관 4명을 경질했고, 부대신 5명도 교체를 예고했다. 9명 모두 아베파 소속이다. ▷기시다 총리가 아베 파벌 색깔 지우기에 나섰지만 결국은 제 발등 찍기에 가깝다. 이들 도움 없이는 총리직 지탱이 어렵다. 당내 역학관계가 그렇다. 기시다파는 아베파(의원 99명)에 비해 한참 모자란 4번째 파벌(45명 전후)이다. ‘아베시다 정권’이란 별칭에서 보듯 총리 이름이 오히려 뒤에 붙었다. 총리가 주도자가 아니란 뜻이다. 그가 내세운 ‘한국과 중국에는 엄격히’ 구호도 강경한 아베파를 의식한 것이었다. ▷자민당은 1955년 출범한 뒤로 64년 가까이 통치했고, 4년만 야당이었다. 민주국가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다. 정권교체란 파벌끼리 권력 넘겨주기와 동의어가 됐다. 그만큼 쉽다 보니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단명(短命) 총리가 속출했다. 아베(1년), 후쿠다(11개월), 아소(1년), 하토야마(8개월), 간 나오토(15개월), 노다(16개월), 2번째 아베(7년 8개월), 스가(1년)…. 거대 계파의 확실한 리더(작고한 아베 전 총리)만 예외였다. ▷소수파 리더인 기시다 총리는 스캔들을 견뎌낼까. 당내 경쟁자는 용퇴론을 꺼내 들기 시작했다. 당 기반도 약한데, 지지율은 바닥이다. 기시다 총리가 출산율 제고, 반도체 등 첨단산업 회생, 방위력 증강처럼 장기간 뒷심이 필요한 정책을 주도해 내기란 기대 난망이다. 신냉전시대를 맞은 지금 한미일 3각 협력은 더없이 중요해졌다. 3국 지도자의 위상과 협력 고리에 관심이 클 수밖에 없다. 고령의 바이든이 치를 내년 대선도 변수고, 자민당 내 온건파인 기시다도 휘청이고 있다. 우리만 고비를 맞은 게 아니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미국 정치인의 불출마 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대선 및 상하원 의원 선거가 치러지는 내년 11월까지 1년 가까이 남았지만 벌써 38명째다. 이 중 절반은 주지사나 상원의원 등 다른 선출직에 도전하겠다지만 절반은 말 그대로 “정치를 떠난다”고 했다. 긴 연말 휴가를 마치는 1월 중에 불출마 선언이 더 나올 전망이다. 2022년과 2018년의 55명 불출마 기록이 깨질 듯하다. 상원 100명, 하원 435명 가운데 10% 정도다. ▷워싱턴에서 현역의원의 정치 포기가 주목받는 것은 손에 쥐다시피 한 재(再)당선을 포기하는 결심이어서 그렇다. 지난 20년간 90% 넘는 선거구에서 ‘재출마는 곧 당선’이었다. 미국에선 물갈이 전략공천이란 제도가 없다. 현역의원에게 별 하자가 없다면 경선에서 승리해 출마한다. 2022년 상원 선거 때 33곳에 출마한 현역의원은 전원 당선됐다. 재출마한 하원의원은 94.5%가 승리해 돌아왔다. 현역 공천 탈락이 30∼40%를 넘나드는 한국과는 비교가 안 된다. ▷현역 재당선은 TV 광고의 역할이 크다는 게 정설이다. 미국 상업 광고에선 자동차건 세탁비누건 경쟁 제품 깎아내리기가 허용된다. TV 선거광고도 마찬가지로 상대 후보 꼬집기가 넘쳐난다. 이런 TV 광고에 방송 횟수 상한선이 대체로 없다. 정치자금이 넉넉한 다선 현역의원이 TV 광고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밖에 없다. 일견 불공정한 이 제도는 미 대법원의 1976년 판례 때문에 고치기도 쉽지 않다. 대법원은 “TV 광고에 상한선을 두는 것은 ‘정치적 발언을 가로막는 것’으로, 수정헌법 1조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판시했다. ▷불출마 의원들은 막장 정치를 이유로 꼽았다. 5선 하원의원인 켄 벅(64)은 “우리는 길을 잃었다. 트럼프의 대선 패배 부정을 똑바로 다루지 못했다”고 말했다. 공화당 소속으로 초강경 노선을 걸었지만 당의 난맥에 일침을 가한 것이다. 이 밖에도 “워싱턴이 부서졌다(broken)”거나 “트럼프 계파의 혐오 정치가 문제”라는 표현이 불출마 선언문에 담겼다. 이런 자조와 무기력이 워싱턴 의사당에 퍼져 가자 공화당의 빌 하이징아 의원(54)은 “이렇게 의원 생활을 한다면 내 시간과 노력이 아깝지 않은가 묻게 된다”고 털어놓는다. ▷미 의회는 실질적 권한과 국정 참여의 명예가 존중받던 곳이다. 예산발의권도 의회에만 있고, 대통령도 의회 동의 없이는 전쟁을 치르지 못한다. 그런 미 의회가 안으로부터 흔들리고 있다. 불출마 선언을 한 하원의원은 “어린아이 칭얼거림 같아진 워싱턴 정치는 더 이상 최고의 인재를 끌어들일 만한 곳이 못 된다”고까지 평가했다. 미국 정치의 하향 평준화를 걱정하는 말인데, 우리 여의도 정치에 적용해도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는 점이 안타깝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17년 취임 1주일 만에 이란 시리아 등 7개국 국민에게 발급한 비자를 전격 무효화시켰다. 미 국무부 외교관들은 연판장을 돌려 “국익을 해친다”며 반대했다. 국무부가 외교관들에게 ‘반대 전문(電文·dissent cable)’을 쓰도록 허용하는 공식 제도(‘반대 채널’)를 통한 것이었다. 서명자가 1000명을 넘었다. 국무부 외교관이 7600명이었다는 점에서 이례적으로 큰 숫자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최근 중동 주재 외교관 몇몇을 불러모은 것은 반대 정책을 직접 듣는 자리였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대한 ‘반대 전문’을 쓰고 서명한 외교관 23명 중 일부다. 이들의 목소리는 크게 두 가지다. “이-하 전쟁에서 휴전을 독려하라. 이스라엘을 지지하더라도 민간시설을 공격할 때만큼은 비난하라.” 이스라엘에 휴전 요청도 않고, 어떤 비판도 않는 방침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요청이다. 국무장관이 면담에 나서야 할 정도로 국무부가 균열됐다는 뜻이다. ▷외교관들의 ‘반대 전문’ 제도는 베트남 전쟁이 수렁에 빠진 닉슨 행정부 때인 1971년 시작됐다. 1960년대 린든 존슨 대통령 이후 굵직한 군사작전이 비밀리에 부쳐지면서 외교관 266명이 집단 사표를 냈다. 전쟁 문건들이 언론에 유출되기 시작했다. “미 행정부가 이길 수 없는 전쟁인 걸 알면서도 확전시켰다”는 1급 기밀문서인 ‘펜타곤 페이퍼’도 그즈음 폭로됐다. 비밀주의가 가장 극심했던 닉슨 행정부 때 “반대 의견을 듣겠다”는 제도가 만들어졌다. 역설적으로 그만큼 반대 목소리에 귀를 닫았다는 뜻이겠다. ▷50년 남짓 동안 반대 전문은 연평균 4, 5건가량 작성됐다. 이라크 전쟁 반대(2003년), 보스니아 내전 개입 촉구(1993년) 등이 제안됐다. 이렇듯 직업 외교관이 실명으로 대통령과 장관에게 반대하는 제도인 만큼 용기가 필요하다. 국무부는 인사상 불이익이 없을 것을 약속했고, ‘건설적 반대상’을 만들어 독려하기까지 한다. 현실적으로 미국의 대외정책이 실무자의 반대 정책 제안으로 쉽사리 바뀌기는 어렵다. 하지만 외교관들이 집단사고에 휩쓸려 ‘윗사람이 결정한 일’이라며 반론을 삼키지 않아야 한다는 문화를 만들고 있다. ▷국무부의 독특한 제도는 최고위 당국자가 혹시 놓쳤을 반대 논리를 듣는 기회를 더 갖겠다는 뜻이다. 9·11테러 때도 테러 징후를 놓쳤다고 판단한 중앙정보국(CIA)이 레드 셀(Red Cell)을 추가로 설치했고, 미 원자력위원회는 방사능 유출 사고를 겪은 뒤 비슷한 제도를 만들었다. 단 한 차례의 오판일지라도 초래할 위험이 큰 안보와 핵과학 영역에서 먼저 시행된 것이다. 정부 기구건 기업이건 판단 실수와 그에 따른 위험 요소를 줄이고자 한다면 고려해 봄 직하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바이든-트럼프가 4년 만에 재대결할 공산이 큰 내년 미국 대선에 제3의 인물이 등장했다. 민주당원으로 출마했다가 불과 1개월 전 탈당해 무소속으로 나선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다. 변호사이자 환경운동가인 그는 퀴니피액대가 이달 초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22% 지지를 얻었다. 바이든(39%) 트럼프(36%)에는 못 미치지만 만만찮은 숫자다. 18∼34세를 떼어놓으면 38%를 얻어 바이든(32%) 트럼프(27%)를 눌렀다. 최근 3개월 여론조사 평균치가 14.5%이니, 일시적 현상은 아니다. ▷그가 이처럼 돌풍의 주인공이 된 데는 이름의 힘이 크다. 큰아버지가 43세에 대통령이 됐다가 재임 중 살해된 존 F 케네디다. 아버지는 법무장관을 지낸 뒤 ‘바비(Bobby)’란 별명을 얻으며 개혁의 아이콘이 된 로버트 케네디. 두 형제는 1960년대 변화와 희망을 앞세워 기성정치를 흔들다가 5년 간격으로 총탄에 숨졌다. 69세가 되도록 선출직 출마 경험이 없던 케네디 가문의 아들이 단숨에 3위에 오른 이유다. ▷1등에게 주별 선거인단을 몰아주는 미국의 독특한 제도 때문에 그가 당선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런 이유로 민주 공화 양당은 케네디가 누구 표를 더 잠식할지 한창 표 계산 중이다. 그의 환경 인권 불평등 개선 주장은 바이든 표를 가져갈 것을 예상하게 한다. 하지만 그는 코로나 백신의 위험성을 이유로 접종 반대에 앞장서면서 트럼프 추종자들의 표를 뺏어갈 수도 있다. 공화당 전국위원회가 그의 출마 선언 직후 “케네디를 지지하면 안 되는 23가지 이유”라는 성명을 발표한 이유이기도 하다. ▷케네디 바람의 실체는 지난주 뉴욕타임스 여론조사에서 짐작할 수 있다. 제3 후보를 찍겠느냐는 질문에 처음에는 응답자의 2%만이 그러겠다고 답했다. 그런데 케네디 이름을 제시하며 물었더니 24%가 “케네디라면 찍겠다”고 답했다(바이든 33%, 트럼프 35%). 역대 최악의 비호감 선거라는 전망 속에 마음 줄 곳 없던 표심이 케네디라는 향수 짙은 이름을 통해 불만을 표시한 것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선거에는 정책과 비전을 파는 마케팅 요소가 있으니 브랜드의 힘은 강조할 필요도 없다. 1980년 이후 미 대통령 선거에서 가족 출마가 빈번한 것도 이런 인지도가 결정적일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부시가 총 3번 당선됐다. 재선 대통령 클린턴의 지명도에 힘입어 아내 힐러리도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오바마 재임 8년 동안 대통령 부인이었던 미셸의 출마 가능성도 끊이지 않는다. 현직 대통령의 막강한 뉴스 장악력과 함께 그 이름이 소환하는 시대의 추억은 묘한 힘을 지닌다. 트럼프 후보가 며칠 전 “나는 (성공한 사업가이자 TV 스타였던) 내 브랜드로 당선됐다”고 한 게 엉뚱한 말이 아니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왜 인기가 여전할까.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향한 불출마 요구는 왜 힘을 못 받을까. 트럼프 승리를 점치는 여론조사가 미 대선을 1년 앞둔 지금도 계속되면서 나오는 질문들이다. 지난주 뉴욕타임스의 6개 핵심 경합 주(州) 조사에서 트럼프가 바이든을 오차범위 밖에서 앞섰다. 48% 대 44%. 트럼프가 조지아 등 5개 주에서 이겼고, 바이든은 위스콘신 1곳에서 체면을 차렸다. 6개 주는 3년 전 바이든이 모두 이겼던 곳이어서 민주당에 경고음이 더 커졌다. ▷트럼프는 전통적인 민주당 표밭인 흑인 히스패닉 3040 세대에서 지지를 키웠다. 흑인 유권자 22%가 그를 지지했다. 흑인 장애인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를 서슴없이 비하하던 트럼프를 떠올린다면 놀라운 수치다. 트럼프는 과거 대선 때 흑인 표를 8%(2020년), 6%(2016년) 얻는 데 그쳤다. 그런 흑인들이 마음을 바꿨다. 4%대 경제 성장의 과실이 돌아오지 않는다며, 바이든의 정책 부재를 문제 삼았다. 흑인 39%가 바이든 국정을 비판했다. 3년 전 바이든이 얻은 90% 몰표에 비춰 보면 격세지감이다. ▷트럼프는 안보를 더 잘할 것이란 이미지를 얻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 등 2곳에서 전쟁에 개입하는 현실이 유리하게 작동했다. 그가 외교적 해법을 지녔다기보다는 체면 안 차리고 발을 뺌으로써 ‘세금 낭비’를 줄여줄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바이든 백악관이 우크라이나 재건에 지원할 수십조 원 규모의 예산안을 제출하자 트럼프는 “재건할 곳은 거기가 아니라 미국”이라고 썼다. 찬성한다는 댓글이 끝도 없었다. ▷트럼프는 91개 혐의로 4차례 형사재판에 넘겨졌다. 뉴욕타임스 조사에서 응답자 54%가 “심각한 범죄”라고 답했지만 후보 지위에는 흔들림이 없다. 다른 공화당 후보들이 쓴 ‘트럼프 아류’ 전략 때문에 트럼프 유고(有故) 시 대안이란 느낌을 못 줬다. 트럼프는 바람을 피운 성인 배우에게 뒷돈을 준 혐의로 기소된 것도 “마녀사냥”이라며 이미지 세탁에 활용했다. 도덕적 비난은 가능하지만 과연 형사처벌 대상인지 미국인들이 의심하는 걸 파고들었다. ▷이쯤 되면 바이든을 향한 불출마 요구가 이어질 법도 하건만 움직임이 거의 없다. 신문에 “고령의 바이든은 한쪽 다리를 관(棺)에 걸치고 있다”는 표현까지 등장하는데도 그렇다. 오바마 백악관의 선임고문이 “바이든은 결단하라”고 썼지만 민주당 핵심부에서 반향이 없다. 오히려 공화당 쪽에서 백악관 안주인이었던 미셸 오바마(59) 구원 등판을 예상하고 있다. 변호사인 미셸은 정무직 경험이 없어 실현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게 대체적 견해다. 수수께끼 같은 트럼프의 인기와 백악관의 침묵이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커졌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를 뽑는 경선에서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이 지난 주말 중도 하차를 선언했다. 그는 사퇴 연설에서 “미국을 점잖게(with civility) 이끌 지도자를 뽑아 달라”고 호소했다. 공화당 경선 1위를 달리는 옛 상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저격한 것이자, 팬덤 정치에 일그러진 미국을 건드린 말이었다. 부통령 자격으로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에 왔고,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과 기념사진을 찍지 않기 위해 “일부러 지각했다”고 회고록에 썼던 그 펜스다. ▷점잖음, 정중함으로 번역될 수 있는 이 말(civility)은 펜스가 즐겨 쓰지만, 미국 SNS 정치에선 사어(死語)가 되다시피 한 표현이다. 펜스는 이날 “우리 본성 안의 더 좋은 천사에 호소하는 정치인, 미국의 승리만이 아니라 점잖고 정중하게 이끌 정치인에게 나라를 맡기자”고 했다. 남북전쟁 발발 직전 미국인에게 외치던 링컨 대통령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펜스의 눈에는 갈등 유발형 트럼프가 50%대 지지율로 앞서가는 현실이 남북전쟁 전야처럼 비쳤을지 모르겠다. ▷펜스의 트럼프 비판은 배신자 논란을 일으키곤 한다. 인디애나주에서 하원의원 12년, 주지사 4년을 지낸 펜스는 2016년 부통령 후보로 지명받았다. 뉴욕시 출신으로 여성 편력이 심한 부동산 재벌 트럼프 후보로선 그가 필요했다. “아내 캐런 외에는 여성과 일대일로 식사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펜스 규칙’을 지킨 그는 잘 알려진 신앙인이자 신중함으로 트럼프의 빈 곳을 채울 인물이었다. 변방의 펜스가 누구 덕분에 전국적 인물이 됐는데 나를 비판하느냐는 것이 트럼프가 심어놓은 배신자 프레임이다. ▷결정적인 것은 2020년 트럼프의 대선 패배 직후 벌어졌다. 트럼프는 “부정선거였고, 나는 패배하지 않았다”며 부통령이자 당연직 상원의장인 펜스에게 의회의 선거 결과 승인을 막으라고 요구했다. 펜스는 거절하면서 “당신이 헌법과 민주주의 위에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또 이 과정을 특별검사 앞에 진술했다. 반헌법적 요구라면 ‘정중하고도 당당하게’ 거절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겠다. 하지만 펜스는 배신자 덫에 걸려 지지율이 4% 선을 맴돌았다. ▷펜스가 점잖은 리더십을 지녔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SNS에서 소비되는 ‘재미있고 자극적인’ 짧은 동영상 정치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여기에 “바이든은 부정선거로 당선됐다”는 엉터리 주장을 믿는 공화당원이 80%대에 이른다는 몇몇 여론조사는 펜스가 설 자리를 더 좁게 만들었다. 그의 사퇴 소식에 공화당 후보들은 “원칙과 신뢰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트럼프만이 “정치인들은 매우 불충(disloyal)할 수 있다”고 깎아내렸다. 떠나고 남는 두 후보의 극명한 대비는 옳고 그름이 뒤엉킨 요즘 미국 정치를 보여주고 있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뉴스의 형식은 갖췄지만 ‘조작 정보’와 오보는 명확히 다르다. 2016년 미국 대선 때 “프란치스코 교황이 도널드 트럼프 후보를 지지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WTOE5 TV라는 매체로 미국 지방 방송사의 하나처럼 보였다. SNS상에서 급속히 퍼져 갔지만 조작된 정보였다. 이런 방송사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반면 멀쩡한 김일성이나 덩샤오핑(鄧小平)을 사망했다고 한 것은 오보로 분류된다. 정보 접근이 어려운 공산국가의 정보를 잘못 전해 들은 뒤 충분히 확인하지 못해 생긴 결과다. ▷정확한 이름, 정명(正名)을 쓰는 것은 본질 이해에 중요하다. 아서 그레그 설즈버거 뉴욕타임스 회장 겸 발행인은 정치인들이 자신에게 비판적인 보도를 가짜뉴스라고 치부해 버리는 것을 지적했다. 그는 그제 서울대 강연에서 “우리 신문은 가짜뉴스라는 말을 안 쓴다”며 “언론에 무례한 표현이고, 굉장히 음흉한(insidious) 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잘못된 정보(misinformation)로 부르자고 제안했다. 의도적 조작 정보를 가짜뉴스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 뉴스라는 외피를 입게 되면서 언론의 공신력이 훼손된다는 걸 지적한 것이다. 가짜와 뉴스는 같이 쓰는 자체가 형용 모순이란 뜻이기도 하다. ▷19세기 중반 뉴욕타임스를 인수한 옥스-설즈버거 가문의 6대손인 그는 2017년 발행인에 취임했고, 이후 가짜뉴스 논쟁을 피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6년 집권한 후 뉴욕타임스 CNN 등 주류 언론의 비판적 기사를 “가짜뉴스이니 관심 두지 말라”는 식으로 깎아내리고 있었다. 트위터(현재의 X) 횟수만 2년 동안 600번이 넘었다. 트럼프는 1930년대 독일 나치가 자신들의 선전 선동과 다른 기사를 보도하면 뤼겐프레세(Lügenpresse·거짓 언론)라고 몰아세웠던 그 방식을 가져다 썼다. ▷설즈버거 회장은 강연에서 “잘못된 정보의 시대를 맞아 저널리즘에 대한 불신이 생겼다”며 “언론에는 진실을 알릴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소셜미디어를 통해 음모론과 잘못된 정보가 확산되는 현실 속에서 사실에 기반한 뉴스를 만드는 언론사의 영향력은 더 확대될 것”이라고 했다. ▷“미래에는 온라인 콘텐츠의 90%를 인공지능(AI)이 만들게 되면 진짜와 가짜의 구분이 더 모호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았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서 보듯이 의도적으로 만든 가짜 희생자 사진이나 폭발물 영상물이 생사를 가르는 사안에서 판단을 그르치게 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한 것이다. 설즈버거 회장은 “두 번 세 번 사실관계를 크로스 체크하고, (뉴스를 가진 힘 센 사람을 향해) 어렵고 불편한 질문을 해야 한다”고 했다. 언론이 자기 자리를 지켜줄 때 오해와 혼돈을 피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인사청문회에서 퇴장해 버린 건 목요일 밤 11시였다. 제도의 안정성을 중시하는 보수 대통령이 내정한 후보자답지 못했다. 장관 자격을 못 갖췄다는 견해가 늘었다. 놀라운 건 금요일의 침묵이었다. 야당과 언론이 “드라마틱 엑시트”라고 비판하는데도 김행 본인과 국민의힘 누구도 공개 발언을 삼갔다. 대통령실에선 금요일 아침 정무수석이 ‘저강도’ 우려를 표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중도 이탈은 안 될 말이다. 청문회는 대통령실 정치력도 평가받는 자리 아니냐. 교체 건의를 미룰 일이 아니다”라는 취지의 발언은 없었다고 한다. 여의도와 국정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의 집단 침묵이었고, 투표장에 가려던 지지층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대통령에게 고언을 못 한다고 비판하기는 쉽다. 하지만 실천은 말처럼 쉽지가 않은 걸 안다. 중고교 교무실, 구청과 군청, 크고 작은 기업 등 삶의 현장에서 우리도 겪어 봤다. 미국이라고 다를 게 없다. 존 볼턴 전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3년 전 백악관의 권력투쟁, 도널드 트럼프의 일탈과 전횡, 본인의 속마음을 회고록(‘그 일이 일어난 방’)에 기록으로 남겼다. 워싱턴의 싸움닭 볼턴 자신도 트럼프 앞에서는 속마음과 달리 말했다. 트럼프의 어리석은 실수라고 책에서 묘사한 발언을 듣고도 면전에서는 제대로 말을 못 했다고 고백하듯 썼다. 대통령은 이런 불변의 속성을 뒤집어 봐야 한다. 보고와 조언이 ‘100% 진심’과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A라고 답해야 하지만 B라고 말하게 되는 순간은 언제든 오고, 대통령은 까딱하면 참모와 멘토도 동의한 ‘우리의 생각’으로 오해할 수 있다. 인내하는 열린 귀만이 이를 막을 수 있다. 대통령이 이견을 언짢아한다는 말이 돌고 있다. 문재인의 버럭, 박근혜의 레이저 등 어느 대통령인들 이런 게 없었을까마는 참모들을 체념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런 말이 더 퍼지면 대통령의 매력 자본을 갉아먹는다. 대통령이 매력적이지 않다면 내년 총선에서 “대통령의 성공을 위해 표를 달라”는 호소가 먹힐까. 윤 대통령이라면 반론을 펴고, 항명에 가까운 결기를 보이는 참모를 좋게 평가할 것이란 짐작이 있었다. 오늘의 윤 대통령을 만든 것은 국정원 댓글 사건, 조국 수사였다. 살아있는 권력이 적당히 덮어줬으면 하는 것을 거부한 사건들이었다. 검사 윤석열은 ‘고위 공직자라면 손해 보더라도 이쯤은 해줘야 한다’는 민심을 충족시켰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한마디는 그를 대통령으로 밀어 올렸다. 이런 대통령은 용기를 내는 의원과 참모에게 다른 대통령들보다는 한 번 더 생각하고 배려할 법하다. 풍문은 반대로 돌고 있다. 대통령실은 윤석열 2.0을 구상하고 있을 것이다. 도어스테핑이 끝난 뒤 1년 가까이 중단된 취재기자 질문받기를 놓고 보자. 달라지려 한다면 기자회견은 최대한 빨리 재개해야 한다. 형식은 어때야 할까. 기자들에게 불편한 질문도 받는 정식 회견과 소수의 패널을 마주하고 둥글둥글한 질문을 받는 간담회 중 어느 쪽이 논의될지는 머잖아 드러날 거다. 상상해보자. 박근혜, 문재인 대통령이 그 시절 정면승부를 선택한 검사 윤석열에게 기자회견 방식을 묻는다면 어느 쪽을 건의했을지 궁금하다. 대통령실을 향해 대통령의 대화법을 바꾸라는 주문이 많다. 대통령은 지금보다 더 귀를 열고 집권당과 참모들에게 반대를 허(許)할 수 있을까. 권력 앞에서 할 일 하고, 할 말 하던 제2, 제3의 윤석열을 발굴해 곁에 두고 또 내년 총선에 공천할 수 있을까.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주 2가지 핵 협박을 들고 나왔다. 하나는 핵순항미사일 발사 성공을 알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33년 만에 핵실험을 재개하겠다는 구상이었다. 푸틴은 “제정신이라면 러시아에 도전 못 한다”고 했다. 반(反)러시아 연대를 펴는 서방을 향한 으름장이다. 동계올림픽의 도시 소치에서 열린 행사장에서 무려 3시간 41분에 걸쳐 한 말이다. 발언 내용도 형식도 세상을 놀라게 했다. ▷푸틴이 꺼내 든 핵순항미사일(부레베스트니크·바다제비)은 미국도 중국도 보유하지 못한 기상천외한 무기다. 이 미사일은 주입한 연료를 태우며 날아가는 일반 추진체가 아니라 초소형 원자로를 품고 다닌다. 비행 사거리가 무제한에 가깝다. 오늘 발사해도 저공으로 날아다니다가 내년쯤 목표물 주변 방공망이 허술할 때 때리는 식이다. 순항미사일은 탄도미사일보다 비행 속도가 느리고 요격이 쉬워 덜 위협적인 것으로 여겼었다. 유엔이 북한의 탄도미사일만 제재한 것도 이런 이유다. 푸틴의 ‘바다제비’는 패러다임을 바꾸면서 ‘게임 체인저’로 불리게 됐다. ▷핵실험 재개 발언의 파장은 더 넓고 깊다. 러시아는 1990년에 먼저, 미국은 뒤따라 1992년에 핵실험을 중단했다. 핵실험이 더는 필요 없을 정도로 핵탄두를 쌓아놓았던 두 나라는 이때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CTBT)을 맺었다. 하지만 2000년 의회 비준까지 마친 러시아와 달리 미국은 의회가 비준을 거부했다. 푸틴은 이 점을 거론하듯 “러시아는 더 공정한 세계를 만들겠다”고 했다. 조약이 휴지조각이 되면 북한 핵실험을 규탄할 근거는 줄어들게 된다. ▷러시아의 핵확산 공갈은 처음이 아니다. 푸틴은 러시아,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댄 불량국가 벨라루스에 러시아 핵무기를 옮겨놓겠다고 선언했고, 6월 이후 실제로 옮기기 시작했다. 핵확산방지조약(NPT)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고, 냉전 종식 이후 핵무기의 제3국 이전은 전에 없던 일이다. 크렘린궁 대변인은 작년부터 “러시아가 실존적인 위협에 처한다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 ▷전문가들은 푸틴의 미치광이(Madman) 전략으로 해석하고 있다. ‘나 푸틴은 광기에 휩싸여 정상 대화가 어렵다. 내가 바라는 걸 쥐여줘야 한다’고 생각해 달라는 것이다. 50년 전 베트남전쟁을 끝내고 싶은 닉슨 미국 대통령이 썼던 방식이다. 실제로 푸틴은 광기 어린 발언과 이성적 발언을 뒤섞고 있다. 지난주에도 “핵무기란 국가 존립을 위협당할 때 방어적으로만 쓴다”는 핵 독트린을 바꿀 뜻이 없다고 했다. 핵실험금지조약 비준 파기, 핵 어뢰와 미사일 실험 지속, 시베리아 핵실험 등 러시아 전문가들이 꼽는 ‘미치광이’ 시나리오는 끝이 없다. 위험천만한 푸틴을 전 세계는 당분간 지켜보기만 할 수밖에 없게 됐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국무위원 후보자가 국회 인사청문회 도중 사라지는 전례 없는 일이 벌어졌다.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는 그제 오후 10시 50분 일시 정회가 선포된 뒤 청문회장을 떠났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권인숙 여성가족위원장은 어제 이틀째 청문회를 열었으나 여당 의원들은 “합의한 적 없다”며 불참했고, 김 후보자는 종일 연락이 닿지 않았다. 청문회 파행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의정사에 청문회 도중 ‘후보자 실종’이라는 새로운 기록을 남기게 됐다. ▷주가조작 논란이 발단이었다. 주가조작에 연루된 회사에 후보자가 한때 사외이사로 등록됐다는 점을 야당이 지적하자 후보자는 “알지 못하는 일로 범죄자 취급을 받고 있다.…차라리 고발하라”며 반박했다. 공방이 반복되자 권 위원장은 “그런 태도를 유지할 거면 본인이 사퇴를 하든가”라고 했고, 국민의힘 의원들은 “위원장은 중립을 지키라”며 퇴장했다. 고성 속에 “10분간 정회”가 선포되자 김 후보자는 자료를 챙겨 떠났다. 청문회는 다시 열렸지만 후보자 없이 오전 1시가 넘어 끝났다. ▷김 후보자가 청문회 절차를 끝까지 마무리하지 않은 것은 적절치 않다. 야당의 의혹 제기가 타당했는지와는 별개로 국회 청문회라는 제도와 절차를 존중해야 하는 것은 국무위원 후보자의 기본에 속한다. 게다가 김 후보자는 파행 이튿날인 어제 어떤 입장도 밝히지 않았다. 그는 여가부 폐지를 두고 “드라마틱하게 엑시트(극적인 부 폐지)” 하겠다고 했는데, 청문회장 이탈이야말로 드라마틱한 엑시트(전에 없던 중도 이탈)라 해도 할 말이 없는 것 아닌가. ▷“다 답변하겠다”던 10년 전 백지신탁 논란도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 소셜뉴스(위키트리 운영사) 창업자인 후보자는 박근혜 청와대 대변인에 임명됐었다. 그때 이해충돌이 큰 인터넷뉴스 주식을 정부에 백지신탁해 제3자에게 매각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공동창업자와 시누이에게 주식을 사적으로 팔았고, 7년 뒤 되샀다. 이 주식 가치가 110억 원으로 늘었다. 하지만 “법 조항은 안 어겼고, 지금 다시 생각해도 (지인에게) 매각 그 방법밖에 없었다”는 식의 답변만 되뇌었다. 그의 인터넷뉴스가 선정적이고 여성 혐오를 담은 보도로 클릭 수를 늘려 돈을 벌었다는 지적이 나오자 “나도 부끄럽지만 이게 대한민국 언론의 현실”이라는 엉뚱한 해명을 내놓기도 했다. ▷이번 청문회 파행으로 ‘청문회 무용론’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김 후보자는 자료를 충실히 내지 않았고, 의원들 질문에는 동문서답과 긴 설명으로 피해 갔다. 의원들끼리의 고성과 말싸움도 빠지지 않았다. 청문보고서 채택에 여야가 합의하지 못한 채 장관급으로 임명된 인사가 윤석열 정부 들어서만 17명이다. 그러다 여야 대치 끝에 청문회 중도 포기라는 초유의 일까지 봐야 하는 지경이 됐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상원의원 선거 7전 7승, 부통령 선거 2전 2승, 대통령 선거 1전 1승. 화려한 정치 역정을 만들어 온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80)이 궁지에 빠졌다. 고령과 건강 문제로 지지율 하락에 시달리고 악재들도 터져 나오고 있다. 지난주 1주 동안에만 불출마 압박이 2곳에서 공론화됐고, 둘째 아들이 기소됐고, 실현 가능성과 관계없이 공화당은 탄핵 절차를 시작했다. 말 그대로 사면초가다. ▷바이든의 불출마를 공개 요구한 이는 ‘40년 지기(知己)’인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다. 그는 지난주 “3년 전 도널드 트럼프(77)의 재선 저지가 바이든의 큰 업적인데, 출마했다가 지면 물거품이 된다”는 취지의 칼럼을 썼다. 사석에서 수군거릴 이야기를 워싱턴 정치에서 공론화한 순간이다. 바이든 지지를 사설로 밝혀 온 뉴욕타임스도 향후 기후변화 정책을 다루면서 “두 번째 임기가 있다면(if he gets one)”이란 표현을 큰 제목에 넣었다. 100% 출마할 것으로 본다면 쓰지 않았을 표현이다. ▷밋 롬니 상원의원(76)의 불출마 선언도 나왔다. 2012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맞붙은 공화당 대선후보였던 그는 바이든과 트럼프 후보에게 자신과 함께 정치를 떠나자며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주문했다. “(우리 같은) 80대 정치인은 인공지능 기후변화를 정확히 이해 못 한다”고 말했다. 미국은 젊은 나라다. 미국인 3억4000만 명을 한 줄로 세울 때 중간에 해당하는 나이는 39세로, 한국(43세) 일본(49세)보다 젊다. 하지만 유독 정치에는 고령자가 많아 유권자의 불만이 나오곤 한다. 미국 상원의원 평균 나이는 64세로 한국 국회의원 58세보다 높다. ▷아들 헌터 바이든이 특별검사 손에 기소된 것도 지난주다. 5년 전 마약중독 사실을 숨기고 총기를 매입한 혐의다. 총기 규제를 강화하며 트럼프를 비판해온 바이든 대통령은 정치인으로서, 아버지로서 타격을 받았다. 헌터가 사업 상대방과 식사하면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바꿔주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키운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미 하원이 대통령 탄핵조사를 시작한 것도 그가 아버지의 재임기간 동안 외국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것이 사유가 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겉으론 재선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다. 내년 대선자금 모금행사에 참석하고, 트럼프의 경제 정책을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 하지만 누가 그 속마음을 알까. ‘나는 트럼프를 이길까, 내가 불출마하면 누가 민주당 후보일까. 그는 트럼프를 꺾을까….’ 현직 대통령이 존재하는 민주당에선 대선 도전의 뜻을 밝힌 유력 정치인이 사실상 전무하다. 바이든이 불출마를 선언한다면 경선 일정을 고려할 때 연말 이전일 수밖에 없다. 미국 정치는 바이든의 결심이 최대 관심거리가 되는 길로 이미 접어들었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