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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건대, 저도 왕년에 ‘이혼 가방’ 싸본 여자입니다.” 20년 차 가정법원 판사로 소위 ‘이혼 주례’를 서는 게 일인 저자는 신간에서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일을 하면서 생후 18개월의 첫째와 갓 태어난 둘째 육아를 감당해야 했던 시절, 그만 산후우울증이 와버렸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한계에 부닥친 상황에서 남편과의 사이도 멀어졌다. 그는 “나를 함부로 대하는 남편을 보면서 ‘내가 아파트에서 아기를 안고 뛰어내려 죽으면 나의 소중함을 알까?’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고 썼다. 가정의 위기는 주변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극복될 수 있었다. 다른 지방법원으로 발령이 난 직후 친정 어머니가 가사와 육아를 분담해주고, 남편 소개로 만난 여성 목사님과의 만남을 통해 정신적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었다는 것. 그는 누구라도(심지어 가정법원 판사도) 이혼의 위기에 봉착할 수 있으며, 갈등의 불씨를 식힐 수 있는 기회나 시간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 밖에 저자는 지난 20년 동안 수많은 이혼 판결을 통해 만난 다양한 부부와 자녀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혼 재판 중 자살한 남편, 첫사랑과 주고받은 휴대전화 메시지가 들통이 나 이혼당한 남편, 잠적한 베트남 아내를 찾아다니다 숨진 아들의 결혼을 무효로 만들어달라고 청원한 어머니 등. 각 사건을 맡으면서 판사이자 아내, 엄마로서 가졌던 심정을 솔직 담백하게 담았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뽀로로 캐릭터 등 국내 콘텐츠 지식재산권(IP)을 광범위하게 소개하는 ‘캐릭터 라이선싱 페어 2024’가 서울 코엑스에서 18∼21일 열린다. 올해로 23회를 맞은 이번 행사는 문화체육관광부 주최로 한국콘텐츠진흥원과 코엑스가 공동 주관한다. 캐릭터와 애니메이션, 게임 등 여러 콘텐츠의 IP를 전시하고, 새로운 사업 기회를 제공한다. 올해는 통상 70만∼200만 원이던 참가업체 부스비를 없앴고, 관람료도 받지 않는다. 행사 규모는 지난해 576개 부스에서 724개 부스로 확대한다. 주제는 ‘잇-다: 콘텐츠 IP’로, 장르와 산업을 넘나들며 확장하는 캐릭터 IP의 잠재력에 주목한다. 전시장에서는 뽀로로, 콩순이 등 애니메이션을 비롯해 K팝, 웹툰, 드라마, 게임 등 다양한 캐릭터를 선보인다. 버추얼 캐릭터, 발달장애 창작자 굿즈 등을 소개하는 특별기획관도 마련했다. 알버트 김 넷플릭스 총괄 프로듀서, 웹툰 ‘머니게임’의 배진수 작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더 에이트 쇼’의 한재림 감독 등이 참여하는 토론회도 열린다. 조현래 콘텐츠진흥원장은 “20년 넘게 국민에게 사랑받아 온 캐릭터 페어를 무료화한 만큼, 보다 많은 관람객들이 국내 콘텐츠 IP의 파워를 직접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이 국가에 기증한 청동유물이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전시된다. 대구박물관은 9일 ‘2000년 전의 대구 비산동과 1500년 전의 고령 지산동’ 전시를 개막했다. 이 선대회장의 기증품 중 대구·경북과 관련이 있는 국보 ‘대구 비산동 청동기 일괄’과 보물 ‘전(傳) 고령 일괄 유물’ 등 총 73점을 선보인다. 1956년 대구 비산동 와룡산에서 주민에 의해 발견된 창, 칼, 꺾창 등 청동기 일괄 유물은 1971년 국보로 지정됐다. 이 중 창과 꺾창은 당시 의례를 위해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꺾창은 나무 자루 끝에 창날을 가로 방향으로 결박해 찍거나 베는 용도로 쓴 청동무기다. 대가야 왕릉인 경북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됐다고 전하는 보물 ‘전 고령 일괄 유물’은 유리구슬 목걸이, 큰 칼, 말갖춤 등으로 구성돼 있다. 전시는 내년 6월 29일까지.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김칠순(62) 경희대 의류디자인학과 교수가 서양화가로 이탈리아 밀라노대에서 12~13일 개인전을 연다. 김 작가는 다양한 재료와 표현 기법의 작품으로 80회 이상 국내외 단체전에 참여했으며 개인전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유화 4점과 아크릴화 2점, 수채화 4점을 선보인다.김 작가는 미국 뉴욕 파슨즈 디자인 스쿨에서 프로덕트 디자인(텍스타일 디자인)을 공부하고 귀국한 후 1999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주로 실크, 면, 마 등의 섬유에 안료를 이용해 추상적인 형태를 그려왔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귀하는 소련이나 중국으로 탈출을 준비하는 게 좋을 것입니다.”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된 지 한 달이 채 안된 1950년 10월 13일,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보낸 편지는 북한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렸습니다. 성공적인 상륙 이후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미군에 맞서 김일성은 지원 병력을 다급히 요청했지만, 소련은 끝내 파병을 거부하죠.반면 마오쩌둥은 스탈린이 절망적인 편지를 보낸 지 엿새 만인 10월 19일 중공군의 참전을 결정합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란 말이 있듯, 이는 북한 외교의 중심 축이 소련에서 중국으로 옮겨간 결정적 계기가 됐죠.지난 달 김정은과 푸틴이 정상회담을 통해 동맹조약 부활을 선언했지만, 역사는 북한과 러시아의 관계가 늘 아름답지 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노이 노딜’로 쇼크에 빠졌던 김정은이 중국을 제끼고 일단 러시아에 풀베팅을 한 형국이지만, 그동안 북러관계는 배신과 애증의 연속에 가까웠습니다.북러 밀착 이후 한국의 자체 핵무장 주장까지 나오고 있지만, 과도한 불안을 갖기 보다 차분히 대응해야하는 이유입니다. 그럼, 현 북러 밀착을 평가하기에 앞서 시계를 다시 한국전쟁 당시로 돌려보겠습니다.‘유럽 세력확대’ 위해 한반도 이용한 스탈린“한반도 전쟁에 중국을 끌어들여 미국과 싸우게 하면 미국이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지 못하게 될 겁니다. 이는 유럽 사회주의를 강화하는 시간을 벌게 된다는 사실을 뜻합니다.”스탈린이 1950년 8월 27일 클레멘트 고트발트 체코 공산당 서기장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그해 6월 28일 유엔 안보리 회의에서 유엔군 파견을 결정할 당시 소련 측 유엔 대사가 불참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면서 중국을 전쟁에 끌어들인 이유가 미국의 발을 아시아에 묶어 유럽에서 사회주의 세력 확대를 노리기 위해서였다고 말한 겁니다.1951년 7월 시작된 정전협상이 2년이나 시간을 끈 것도 이런 스탈린의 의도가 반영됐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최대한 전쟁을 오래 지속해 미국이 유럽에 개입할 여유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는 거죠. 소련의 안보 위협에 불안을 느낀 영국이 한반도에서 미국의 확전을 경계하고, 조속한 종전을 요구한 이유입니다.냉혹한 현실주의자였던 스탈린은 손 안대고 코풀려는 격으로, 소련군의 전면적인 참전은 거부한 채(소수의 소련 공군도 중공군으로 위장해 투입) 중공군만 끌어들이는 지극히 이기적인 전략을 관철시켰습니다. 이처럼 소련의 대 한반도 전략은 철저히 유럽 중심 사고에서 한반도를 부차적인 방편으로 이용하는 행태를 보였죠.이는 탈냉전을 촉발한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정책 시기에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북한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1988년 서울올림픽 참가를 전격적으로 결정한 게 대표적입니다. 한국으로부터 경제 지원이 시급했던 소련은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과 맞물려 1990년 9월 한국과 수교를 맺습니다. 조소동맹이란 봉인이 사실상 와해된 상황에서 소련은 이듬해인 1991년 9월 18일 안보리 이사국으로서 남북한의 UN 동시 가입을 지지하죠.이렇게 남한 일변도로 편향돼 있던 러시아의 한반도 외교안보 정책은 소련 와해 후 옐친 때까지 이어지다 푸틴 집권 이후 서서히 바뀌기 시작합니다. KGB 출신으로 구소련 시절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푸틴의 야망이 한반도에서 남북한 등거리 외교를 추진하는 계기가 됐죠.1999년 12월 집권한 푸틴은 이듬해 2월 이바노프 외무장관을 평양에 보내 ‘조러 우호선린협력조약’을 체결하고, 그해 7월 평양을 방문합니다. 당시 한국을 먼저 방문하리라는 세간의 예상을 깬 것으로, 소련과 러시아 역사를 통틀어 국가원수가 최초로 방북한 사례였습니다.부활한 ‘북러 밀월’ 얼마나 갈까일각에선 김정은과 푸틴이 지난달 맺은 조약의 실효성을 의심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북한과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다는 점(러시아의 부족한 재래식 무기를 북한이 공급해주고, 대북제재로 곤란한 북한경제를 러시아가 지원)에서 종전 후 러시아가 태도를 바꿀 수 있다는 거죠.사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동맹에 시효가 있었다는 점, 특히 상대적 강대국과 약소국 간의 ‘비대칭 동맹’은 ‘방기(abandonment)와 연루(entrapment)의 딜레마’에 빠지기 쉽다는 점에서 더 그렇습니다. 동맹을 맺고도 안보위기 시 약소국이 도움을 받지 못할 수 있는 위험이 방기라면, 연루는 동맹으로 인해 강대국이 원치 않는 갈등(전쟁 등)에 휘말릴 수 있는 위험을 말합니다. 이를 북러동맹에 대입한다면 한반도에서 안보위기가 발생할 때 북한은 방기 위험에, 러시아는 연루의 위험에 빠질 수 있기에 상호 간 입장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얘깁니다.특히 위에서 살펴봤듯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거대한 영토를 갖고 있는 러시아의 경우 역사적으로 동아시아보다 유럽에 대한 정책 우선순위가 더 높기에 스탈린이 한국전쟁 참전을 외면한 것처럼 연루의 위험을 감당하지 않을 가능성이 꽤 있습니다. 즉, 현재 러시아 외교안보 정책에서 최우선 순위인 우크라이나 전쟁이 마무리 되면, 북한에 대한 지원을 줄일 수 있다는 겁니다.이와 관련해 지난 달 양국 정상의 공동 기자회견에서 김정은이 ‘동맹’이라는 표현을 세 차례 쓰면서 이를 부각한 반면, 푸틴은 이 단어를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는 점이 주목됩니다.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도 러시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군사 상호원조 조항을 설명하면서 방어적 성격만 강조했죠. 이번 조약을 둘러싼 양국 간 온도 차이가 느껴지는 대목입니다.북중러 3각 관계에 미묘한 파장이번 조약은 북중러 3국 관계에 미묘한 파장을 던져주고 있다는 점도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입니다. 역사적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가 경쟁관계에 있는데다 1950, 60년대 중소 갈등기에는 북한을 서로 끌어들이기 위해 경쟁한 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중국으로서는 북러 밀착이 달갑지 않을 수 있다는 얘깁니다. 시계를 1960년대로 돌려보죠.1969년 3월 소련-중국 국경지대인 시베리아 우수리강의 젠바오섬에서 양국 간 교전이 벌어져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1956년 스탈린 사후 마오쩌둥이 소련 공산당과 사상투쟁을 벌이며 사회주의 종주국을 둘러싼 갈등을 벌인 게 원인이었죠.1964~1969년 중소 양국이 4189회에 걸쳐 국경분쟁을 벌이는 등 갈등이 첨예해지자, 소련은 중국 핵시설에 대한 공격까지 검토합니다. 1969년 8월 아나톨리 도브리닌 주미 소련대사가 미국에 중국에 대한 공격을 암시하며 지원을 요청할 정도였죠. 이에 양국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미국이 7000km에 이르는 중소 접경지대를 정찰한 결과, 소련군 약 40개 사단이 무더기로 배치된 정황을 파악해 중국에 알려줬습니다. 한마디로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간 거였죠.중소갈등 국면에서 북한은 중국과 소련을 오가며 실리를 취합니다. 예컨대 북한은 1960년까지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무상원조의 43.17%와 30.75%를 각각 받아내죠. 또, 김일성은 1956년 8월 종파사건을 일으켜 친소파, 친중파(연안파)를 모두 제거하며 유일 지배체제의 기반을 구축합니다. 미중 데탕트 국면에선 북한이 소련으로 밀착 가능성을 암시하며 중국을 압박하기도 했죠.북중러의 이런 미묘한 3각 관계는 이번 북러 밀착 국면에서도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중국은 지난달 푸틴 방북 기간에 한중 외교 안보대화를 진행하면서 일종의 견제구를 날렸죠. 또 중국 언론사 차이신(財新)은 북러 간 군사관계가 과열되고 있다면서 유사시 자동 군사개입 조항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습니다.한국 핵무장의 기회 비용북러동맹은 한국의 자체 핵무장론을 촉발시키고 있습니다.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한미 확장억제를 지속적으로 강화하는 한편, 전술핵 재배치 및 NATO식 핵공유, 자체 핵무장 또는 잠재적 핵능력 구비 등을 포함하여 다양한 대안에 대한 정부 차원의 검토 및 전략적 공론화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적시했죠.그러나 한국의 핵무장은 많은 기회비용을 발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점을 꼭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NPT 체제에 근거해 핵확산 방지에 주력하는 미국과의 동맹이 와해될 수 있습니다. 핵보유를 포기하는 대신 한국에 핵우산을 제공한다는 것이 한미동맹의 핵심 조건이기 때문이죠. 한국의 핵심 안보자산인 한미동맹을 포기하면서까지 핵무장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봉착할 수밖에 없습니다.두번째는 국제사회로부터 전방위 제재입니다. 해외무역에 의존해 사는 한국이 미국, 유럽, 중국 등으로부터 금융, 경제제재를 받는다면 폐쇄국가인 북한 이상으로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죠. 해외 의존도가 높을수록 경제제재의 파괴력은 더욱 커지기 마련입니다.세번째는 핵 군비경쟁이라는 ‘안보 딜레마’에 빠질 우려입니다. 한국이 핵무장에 나서면 이웃국가인 일본도 동참할 가능성이 높고 그렇게 되면 동아시아 전역이 핵군비 경쟁의 악순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는 안보위협을 완화하기 위해 택한 핵개발이 도리어 위기를 확대하는 딜레마를 초래할 수 있죠.한미동맹 기반 위에 한중관계 지렛대로지금까지 다룬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① 러시아는 소련 시절부터 한국전쟁 참전을 거부하고 종전을 늦추는 등 유럽 중심 사고에서 한반도를 이용하는 행태를 보였고,② 북러 간 비대칭 동맹의 구조상 러시아가 연루 위험을 회피할 가능성이 상존하기 때문에③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후 북러 밀착이 와해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④ 여기에 1950년대 중소갈등의 역사가 보여주듯, 러시아와 중국의 미묘한 경쟁관계가 북중러 3각 구도에 균열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습니다.이런 사항들을 고려할 때 북중 밀착에 과도한 불안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겁니다. 결국 굳건한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한중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북중러 3각 구도의 불안정성을 파고들 수 있는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한미동맹에 균열을 일으키고, 동아시아에서 안보 딜레마를 초래할 수 있는 핵무장론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한 접근이 필요합니다.[참고 문헌]-국가안보전략연구원 <러북정상회담 결과 평가 및 對 한반도 파급 영향> (INSS 전략보고, 2024년 6월)-하상식 <러시아의대한반도 정책: 러시아, 북한관계를 중심으로>(국제정치논총 40집 4호, 2000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로씨야련방 사이의 포괄적인 전략적동반자관계에 관한 조약> (조선중앙통신 2024년 6월 20일)“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비좁은 지하철 운전실, 기관사의 얼굴이 갑자기 사색이 된다. 평상시 상비하고 다니는 지사제를 먹어도 소용없는 배탈이 난 것. 한번 운전대를 잡으면 2시간 30분 동안 절대 내릴 수 없다. ‘똥 대기’로 불리는 대기 기관사를 태우기 위해서는 아직도 몇 개 정거장을 더 가야 한다. 고독한 운전실에서 맞은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기관사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이 책은 부산 지하철 2호선 현직 기관사인 저자가 쓴 에세이다. 대도시에 사는 평범한 이라면 누구나 이용하는 지하철의 세계를 새로운 각도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다. 저자는 일터이자 삶의 공간인 지하철과 그 역사에서 만나는 동료와 승객들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그려낸다. 무리하게 지하철 문으로 돌진한 경험, 승객이라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그중에서도 비가 오는 날이면 출몰하는 일명 ‘쟈철 에페’가 공포의 대상이라고. 마치 펜싱의 에페 종목 선수처럼 닫히는 문을 향해 우산을 꽂아 넣는 이들을 말한다. 정시 운행을 사수해야 하는 기관사들에게는 기피 1순위다. 진상 승객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다. 지하철에서 갑자기 쓰러진 이를 돕기 위해 승객들이 나선 감동의 순간도 포착한다. 저자가 종착역에서 늘 한다는 안내 방송은 마음에 위로를 준다. “우리 열차의 마지막 역인 양산역입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모두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안 좋은 일, 슬픈 일들은 열차에 두고 내리시면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1980년 청와대 경제과학비서관에 부임한 오명은 미래 먹거리 산업을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는 한국의 기술, 경제 여건, 산업별 특성 등을 표로 빼곡히 정리한 뒤 점수를 매겨봤다. 선입견에서 벗어나 냉철하게 숫자로 파악한 결과는 ‘전자산업’이었다. 노동집약적이면서 첨단 기술을 필요로 하는 산업 특성이 한국에 적합하다는 판단이었다. 기술 개발 속도가 빠르고 기술 수명이 짧은 전자산업은 한국과 같은 후진국이 도전하기에 역부족이라는 당시 경제 관료들의 견해와 다른 접근이었다. 오명은 관련 부처와 산업계, 연구소의 인재들을 모아 전자공업 육성을 위한 팀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반도체, 컴퓨터, TDX(전화전자교환기)를 3대 전략 목표로 정하고 5년 내 전자산업 수출 규모를 2.5배 늘리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내놓았다. 지금의 1등 수출 품목인 반도체 산업의 비약적인 발전 토대가 이때 마련된 것이다. 국내 과학기술 분야 석학들의 단체인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 기획한 이 책은 오명 전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의 리더십 비결을 분석했다. 한국 정보화 사업의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받는 그는 체신부 장관 및 차관, 교통부 장관, 건설교통부 장관, 건국대 총장, 동아일보 회장 및 사장 등을 거치며 그만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1980년대 체신부 차관 시절 2000년 정보화 시대를 대비한 세미나를 열고 장기 계획을 수립하는 등 다양한 일화들도 눈길을 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사랑하는 아들 롤랑에게. 아빠는 너처럼 어린 한국의 아이들이 길에서, 흙에서, 눈 속에서 헤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곳에 왔단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프랑스의 랄프 몽클라르 장군(1892∼1964)이 1950년 12월 23일 당시 생후 11개월의 어린 아들에게 보낸 편지다. “혹독한 겨울 날씨로 손가락이 얼어붙어 총을 쏘기조차 어려웠다”던 그해 겨울 몽클라르는 중공군의 거센 공세를 버텨내고 있었다. 이윽고 이듬해 2월 그가 이끈 프랑스군과 미군 1개 연대가 경기 양평군 지평리에서 38선 아래로 밀고 내려온 중공군 3개 사단과 맞닥뜨렸다. 5 대 1의 압도적인 병력 차이 탓에 전술상 유리한 고지를 버리고 평지에 원형 진지를 구축한 결사항전이었다. 1, 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은 백전노장 몽클라르의 지휘 아래 총검을 단 백병전까지 불사한 끝에 연합군은 중공군 참전 이래 첫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6·25 전사에 전설로 남아있는 ‘지평리 전투’다. 몽클라르는 6·25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스스로 프랑스 육군 중장에서 중령으로 네 단계나 계급을 낮췄다. 대대 단위만 파병하기로 한 프랑스 정부의 방침 때문이었다. 장성에서 영관급 장교로 낮아지면서까지 전쟁에 나선 이유에 대해 그는 “곧 태어날 자식에게 내가 프랑스 최초의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최근 KT 자회사인 스토리위즈와 ㈜지평리문화콘텐츠가 지평리 전투에서 몽클라르 장군의 이야기를 웹툰과 웹소설로 제작하기로 했다. 앞서 지난해 국가보훈부는 지평리 일대의 남한강 자전거길 3421m(참전 프랑스군 3421명을 의미)를 ‘몽클라르의 길’로 조성했다. 남한강의 멋진 경치를 감상하며 라이딩을 즐기는 여행자들은 이 구간을 통과할 때마다 자유를 위해 헌신한 연합군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지방자치단체별로 지역 문화유산을 관광자원으로 개발하는 추세와 맞물려 지평리 사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길만 조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기 얽힌 사연을 웹툰 등으로 풀어내는 ‘스토리텔링’을 결합해서다. 유명 인사나 장소를 기념하는 입간판만 세우는 방식으로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데 한계가 있다. 예컨대 공주 공산성(公山城)의 경우 몇 해 전 이곳에서 옻칠갑옷이 발견된 것과 맞물려 신라군에 맞서 최후 항전을 벌인 의자왕이 비장한 의식을 치르는 장면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유구와 유물의 의미는 장소가 갖는 스토리텔링에 크게 좌우될 수 있다. 고대 로마의 휴양 도시였던 터키 히에라폴리스의 ‘고대 수영장’이 대표적이다. 이곳 온천장 바닥에 깔아놓은 2500년 전 로마시대 조각상과 기둥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관광객들은 이를 직접 밟으면서 692년의 대지진으로 무너진 고대 문명의 흔적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따지고 보면 경주가 한국을 대표하는 역사 도시가 된 것도 신라 고분 발굴의 스토리텔링 덕이 컸다.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주도로 추진된 황남대총 등 대형 적석목곽분 발굴은 신라 황금문화의 화려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1971년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을 손수 입안하며 발굴 유적을 아우른 것처럼, 문화유산에 스토리텔링을 덧입히는 정책을 진지하게 고민할 때다. 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
제2차 세계대전만큼 학계에서 깊이 있게 연구된 분야는 별로 없다. 20세기 냉전을 거쳐 21세기 미중 패권시대에 이르기까지 세계 질서를 형성한 핵심 동인이 2차대전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관련 학술서들이 나왔지만 이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서사는 ‘선한 연합국 vs 탐욕의 추축국’이란 대립 구도다. 이들 진영 간의 패권 경쟁과 이데올로기 갈등 등이 대전으로 치달았다는 것이다. 영국의 원로 현대사학자인 저자는 이 책에 전통적 견해와 결이 다른 수정주의 시각을 담았다. 2차대전을 이미 식민지를 거느린 기존 ‘영토 제국’과, 이 대열에 끼기 위해 도전한 신흥국들 사이의 ‘제국주의 전쟁’으로 규정한 것. 이 구도로 보면 식민지에서 고혈을 짜내 막대한 부를 축적한 당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도 전쟁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관점에 따라 저자는 2차대전의 시작점을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한 1939년이 아닌, 일본이 만주를 침략한 1931년으로 본다. 이후 1935년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 1937년 중일전쟁 등 식민지 침탈을 둘러싼 전 지구적 분쟁 과정이 2차대전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 것. 군인뿐 아니라 2차대전을 맞은 당시 민간인들의 경험이나 감정, 심리 등을 깊이 있게 분석한 내용도 눈길을 끈다.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민간인을 일종의 군인으로 간주하는 전쟁의 ‘민간화’가 이례적으로 벌어졌다는 것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늘 푸른 소나무 같은 평상심이야말로 지난 60년의 수도 생활이 제게 준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해인 수녀(79)는 수녀회 입회 60년을 맞아 18일 펴낸 에세이 ‘소중한 보물들’(김영사) 기자간담회에서 “중심이 잘 잡히면 바람이 불어도 안정감을 가질 수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일까. 이날 그는 16년의 고된 항암 투병 생활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간담회 내내 소녀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신간에서 자신을 ‘기쁨 발견 연구원’이라고 일컬은 이유를 알 법했다. “저도 제가 감상적인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막상 투병을 하니까 그렇게 씩씩하고 명랑할 수가 없더라고요. 이렇게 숨쉬고 있는 것 자체가 희망이구나, 신발을 신는 것 자체가 희망이구나 생각하며 삽니다.” 신간은 수녀 생활을 시작하면서 써 내려간 시, 단상 등을 모은 184권의 노트를 기반으로 쓰였다. 김수환 추기경의 편지부터 법정 스님과의 일화, 초등학생과의 사연 등 60년의 수도 생활로 얻은 ‘소중한 보물들’이 펼쳐진다. “(수도회가 있는) 부산 광안리의 산에는 솔방울이, 바다엔 조개껍데기가 있지요. 이런 사물을 아끼고 좋아합니다. 좋은 글귀나 성경 구절을 모아 조가비에 적어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 그것이 내게는 가장 소중한 보물입니다.” 수도자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는 “수녀가 되지 않았다면 방송국 PD 같은 일을 했을 것 같다”며 “만약 20대로 돌아간다면 머리에 물들이는 것도 해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제 백발을 보면서 ‘시간의 선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여생을 더 행복하고 명랑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같은 시대를 사는 이들이 소중히 여겼으면 하는 가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조금만 더 남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린 시절 겪은 6·25전쟁 당시 이야기를 꺼냈다. “부산으로 피란을 가서 조그만 셋방에 살았는데 집주인이 남이 아니라 정말 친척같이 대해주셨던 게 지금도 기억나요. 내 가족도 소중하지만 한 시대를 함께 사는 우리 모두를 서로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 그런 영성을 찾는 게 중요합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경복궁 앞 조선시대 ‘의정부(議政府) 터’가 역사유적 광장(사진)으로 조성돼 18일부터 24시간 개방된다. 서울시는 약 8년의 발굴조사 및 정비를 거쳐 의정부 터에 1만1300㎡ 규모의 역사유적 광장을 조성했다고 17일 밝혔다. 앞서 서울시는 2016∼2019년 발굴조사에서 문헌으로만 확인된 의정부 건물 터를 실제로 확인했다. 이후 유적을 보존처리 후 복토했으며, 건물터의 위치를 관람객이 알 수 있도록 주춧돌(초석)을 재현해 놓았다. 의정부는 1400∼1907년 조선시대 재상인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국왕을 보좌해 국사를 총괄한 최고 행정기구다. 의정부는 조선시대 관청이 몰려 있던 육조거리(광화문광장∼세종대로)에서도 광화문 앞 동편 첫 번째 자리(사직로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사이)에 있었다. 의정부는 임진왜란 당시 화재로 건물이 훼손됐으나 흥선대원군이 1865년 경복궁과 함께 재건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광복을 거치며 건물들이 철거됐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최근 일본 정부가 사도광산에서 조선인 강제징용 사실을 누락하기 위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신청서에서 메이지시대 유산을 삭제하는 방안을 추진한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일본이 강제징용의 역사를 감추기 위해 이런 무리수를 두는 이유는 뭘까.이번 회는 사도광산의 역사가 일본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고도 경제성장과 구조적으로 직결돼 있다는 시각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고자 합니다. 이는 오랫동안 식민지에서 자본축적으로 번영한 서구 유럽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미쓰비시 재벌화’에 기여한 사도광산문제의 사도광산은 16세기에 은을 캐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됩니다. 17세기에는 에도막부의 주요 재원으로 쓰였으며, 근대화 이후 메이지시대인 1889년에는 미쓰비시 소유가 돼 비약적인 생산 증대를 이루죠. 일본 정부가 꼼수를 부려 등재 신청서에서 삭제하려는 시기가 바로 이 메이지시대입니다.메이지유신 2년 뒤인 1870년 설립된 미쓰비시는 현재 시가총액이 약 500조 원에 이르는 일본의 대표적인 대기업 집단입니다. 자동차, 금융, 중공업, 식품 등 다양한 산업분야에 걸쳐 약 1000여 개에 이르는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죠. 2차대전 당시 일본군 주력 전투기였던 ‘제로센’을 만드는 등 군수산업을 운영하며 조선인, 중국인 강제징용의 특혜를 본 대표적인 전범기업이기도 합니다.사도광산뿐 아니라 2015년 세계유산에 등재된 군함도(하시마) 해저 탄광도 미쓰비시 소유로 조선인 강제징용이 이뤄진 현장입니다. 한마디로 식민지 시절 조선인들의 땀과 피를 쥐어짜 이를 발판으로 세계적인 재벌이 된 겁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와 마찬가지로 미쓰비시도 강제징용의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일본 정부와 미쓰비시는 중일전쟁 이후 사도광산에 군수공업 지원을 위한 동양 최대 선광장(選鑛場)을 세운 뒤 약 2000여 명의 조선인을 강제동원합니다. 사도광산뿐 아니라 이곳이 소재한 니가타현에만 패전 전후로 9763명(1945년 11월 기준)의 조선인이 집단 거주하는 등 일대 중화학 공업을 지탱한 핵심 노동력으로 쓰였습니다.일본 고도성장 이끈 전시 동원체제흔히 일본의 고도성장은 전후 복구를 거쳐 한국전쟁을 거치며 시작된 걸로 봅니다. 한국전쟁 당시 막대한 군수공업으로 재기에 성공한 미쓰비시의 사례가 보여주듯 한반도에서 뿌려진 피가 일본 경제를 일으킨 것은 팩트입니다.그런데 일제강점기 당시 식민지 경제와 조선인 강제동원이 이뤄진 전시 경제체제가 일본의 고도성장 모델과 직결돼 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고도성장기 일본 경제의 뿌리가 전시(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 총동원 시기에 형성됐다는 일본 경제사학자 오카자키 데쓰지의 ‘전시원류론(戰時原論)’이 대표적입니다. 그는 전쟁 전 일본 제국의 자본주의를 앵글로색슨형 자본주의로 보고, 전시에 구축된 국가 주도의 계획통제형 경제 시스템이 전후 고도성장의 요인이 됐다고 설명합니다.야마자키 히로아키 역시 전시 중화학 공업화 과정에서 재벌에 대한 자본 집중이나 은행 간 협조 융자 등 일본 특유의 독점적 조직화가 이뤄졌다고 봅니다. 전후 일본에 들어선 미 군정이 일본 재벌 해체에 나서지만, 마침 전개된 미소 냉전으로 일본 경제발전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이런 개혁 조치는 유야무야됩니다. 그러곤 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한국전쟁을 거치며 미쓰비시 등 일본 재벌의 부흥이 이뤄지게 되죠.일본 식민지 경제와 한반도일본은 한반도에 이어 만주를 지배하면서 본토 경제를 뒷받침하는 배후 생산기지로 식민지를 이용하는 경제구조를 만듭니다. 이른바 만선일여론(滿鮮一如論)을 내세워 조선과 만주를 통일적으로 경영하려고 하죠. 이후 중일전쟁에 이어 동남아시아 침공에 나서면서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아우르는 광역경제권을 구축하겠다며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주창하게 됩니다.이에 따라 철저히 본토 경제의 관점에서 식민지 산업을 운용하게 되는데, 이것이 해방 직후 남북한이 불균형한 산업구조로 고통을 받은 원인이 됩니다. 즉 남한을 식량 생산기지로, 북한을 중화학 공업기지로 각각 운용하며 본토 경제에 종속시키는 전략을 취한 겁니다. 이 때문에 패전으로 일본 본토 경제와 단절된 남북한 산업은 마비될 수밖에 없었고, 특히 남북 분단으로 상호 경제교류마저 막히면서 북한은 식량부족, 남한은 공업물자 품귀로 어려움을 겪게 되죠.서구 식민지 경제와도 닮은꼴15세기 대항해시대와 더불어 시작된 유럽 식민지배는 근대 자본주의 역사에서 일종의 본원적 자본축적(primitive accumulation) 역할을 했습니다. 심지어 프랑스 절대왕정에 맞서 시민의 자유를 부르짖은 대혁명기에도 마찬가지였죠. 유럽은 물론 신대륙 아메리카의 초기 경제체제가 거대한 노예제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프랑스혁명 2년 뒤인 1791년 카리브해 생도맹그(현 아이티)에서 벌어진 노예반란이 이런 유럽 식민주의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생도맹그의 흑인 반란 노예들은 프랑스 혁명 당시 국민의회에서 채택된 ‘인간 및 시민의 권리선언’의 첫 문장(‘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을 명분으로 노예주와 맞섭니다. 하지만 프랑스인 노예주들은 영국군을 끌어들이며 노예들과 싸우죠. 이들의 머릿 속에서 인간 평등의 권리선언은 노예나 여성은 제외돼 있있던 겁니다.일본, 서구 제국주의 역사 잊지 말아야하는 이유인류사에서 다른 인종, 민족에 대한 착취의 역사가 당연하지 않다고 여겨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혁명에 공감하면서도 생도맹그 반란 노예를 진압하던 프랑스인들처럼 노예제에 의존한 경제 구조는 인식의 모순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죠.이와 관련해 앞서 다룬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사도광산, 군함도 등 조선인을 강제징용한 일본의 전시 경제체제는 미쓰비시와 같은 전범기업들의 몸집을 키웠으며 전후 고도 경제성장의 뿌리가 됐습니다.-이는 대항해시대와 더불어 시작된 유럽의 식민지배가 근대 자본주의의 중요한 물질적 토대가 된 것과도 비슷합니다.-이런 맥락에서 사도광산에서 근대 이후 역사를 지우려는 일본의 꼼수는 단순히 강제동원의 역사를 감추려는 차원을 넘어 식민경제를 기반으로 고도성장을 이룬 현재 일본의 정체성을 은폐하려는 행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일본의 식민지 경제체제가 2차대전 종전 직후 남북한의 불균형 경제성장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사도광산 등 일본 근대 산업유산에 대한 올바른 역사인식은 우리와도 직결된 문제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참고 문헌〉-황선익 <일본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상 쟁점과 과제> (한일관계사연구 83집, 2024년 2월)-임채성 <동아시아 전시 전후 경제사–일본제국권 전시동원의 경험과 전후 재편> (경제사학 55호, 2013년 12월)-송병권 <1940년대 전반 일본의 동북아지역 정치경제 인식-동아광역경제론을 중심으로> (史叢 80, 2013년 9월)-마틴 푸크너 <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 (어크로스, 2023년)“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이더리움의 여정에서 가장 크게 후회되는 건 8명의 공동 창시자를 너무 성급하게 선택했고, 모두가 떠나가도록 내버려둔 일이다.” 암호화폐 이더리움의 창시자 비탈리크 부테린이 X(옛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비트코인을 대체할 수 있는 암호화폐로 꼽히는 이더리움은 2014년 부테린을 비롯한 8명이 만들었다. 이들은 누구도 절대 복제할 수 없는 전자화폐를 수수료 없이 지구상 어디에든 보낼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의기투합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내 갈등에 빠진다. 부테린을 비롯한 개발자들이 이더리움을 비영리로 운영할 것을 주장한 반면에 찰스 호스킨슨 등은 투자를 받아 영리로 운영해야 한다고 맞선 것. 이런 경영철학의 차이는 결국 부테린을 제외한 나머지 동료들의 이탈로 귀결되고 만다. 영화 ‘페이스북’에서 펼쳐진 컴퓨터 천재들의 우정과 배신의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이 책은 미국 포브스지 편집장을 지낸 언론인이 쓴 이더리움 연대기다. 이더리움 개발자 등 관계자 200여 명을 3년간 인터뷰해 암호화폐 세계의 내밀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냈다. 예컨대 이더리움 개발 초기 운영진 사이에서 직함을 놓고 벌어진 일화도 눈길을 끈다. 영리화에 관심이 많았던 이들은 최고경영자(CEO), 최고기술책임자(CTO) 등 직함에 집착했지만 기술 개발에 몰두한 엔지니어들은 이에 무관심했다는 것. 이더리움의 작동 메커니즘은 물론이고 개발자들의 철학과 탐욕, 갈등의 내밀한 드라마에 관심이 있다면 일독을 권한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군함도 때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면 안 된다. 사도광산 조선인의 노동 및 생활실태를 반드시 사실에 따라 정직한 태도로 설명해야 한다.”(마쓰우라 고이치로 전 유네스코 사무총장) “사도광산의 노동환경은 매우 열악하고 위험했으며, 가장 위험한 업무는 조선인에게 배정됐다.”(아사노 도요미 와세다대 교수) 일본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둘러싼 논란과 관련해 일본 전문가들조차 한국인 강제징용의 역사를 직시해야 한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6일 유네스코 전문가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사도광산의 등재 보류(refer)를 권고했다. 일본 정부가 조선인 강제노역 사실을 배제하기 위해 사도광산의 등재 신청 기간을 에도시대인 17∼19세기 중반으로 한정했다는 비판에 따른 것이다. 사실 일본 정부의 꼼수는 자국(自國) 전문가들뿐 아니라 공식 역사서에서도 그 한계가 드러난다. 사도광산이 소재한 니가타현의 역사를 소개한 ‘니가타현 백년(新潟県の百年)’에 따르면 1943년 3월 기준 니가타현에만 최소 4442명의 조선인 남성이 거주했으며 이들은 발전소, 철도, 공장 건설 현장 등에서 일했다. 이 중에는 조선에서 속아 연행된 이도 있었다. 역사학계는 1937년 중일전쟁 후 일본의 전시 경제체제와 강제동원이 본격화되면서 사도광산에만 약 2000명의 한국인들이 강제징용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일본 정부가 사도광산에 대한 일종의 역사왜곡을 고집하는 건 일본 사회의 극우화와 맞물려 한국과의 역사전쟁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정치적 의도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정부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황선익 국민대 교수(사학 전공)가 사도광산 현지를 답사하고 쓴 논문에 따르면 일본 정부가 에도시대로 한정한 것과는 다르게 사도광산 현지의 유구와 유물 대부분은 근대 이후에 조성된 것들이다. 폐광 후 농경이 오랫동안 진행되면서 에도시대 유적 상당수가 이미 소실됐다는 것. 이는 유네스코가 세계유산 등재의 핵심 기준으로 삼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의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 있는 대목이다. 황 교수는 “신청서에서 제시한 유산 구역은 근대 이후 시설물을 대거 포함해 공간으로 인한 논쟁을 피하기 어려울 전망”이라며 “OUV 정합성 문제는 사도광산의 등재 과정에서 주목해 지켜봐야 할 중요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국제평화와 인류 공동 번영의 달성’이라는 유네스코 창설 목표에 입각해 세계유산에 역사 갈등과 화해를 모두 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내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이와 관련해 사도 현지 종교계 인사 등이 발족한 ‘사도와 조선을 잇는 모임’이 에도시대 무숙인(無宿人·거주 대장에서 말소된 빈곤층) 노동자들과 조선인 징용자를 위한 추모행사를 매년 여는 것이 주목된다. 에도 막부가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동원한 무숙인들의 자리를 20세기 초반 조선인들이 대신한 사실은 역사 비극의 공유를 통해 화해를 모색하는 기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조선인 강제징용의 전체 규모나 신원 등이 정확히 파악되지 않은 상황에서 관련 자료를 폭넓게 수집·연구하는 정부와 학계의 노력이 시급하다. 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
“명 황제에게 죄를 짓느니 차라리 성상(광해군)께 죄를 짓겠나이다.” 1619년 광해군에게 올린 조정 신료들의 ‘협박조’ 상소는 4년 뒤 쿠데타(인조반정)를 예고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은 사대(事大)의 의리를 좇아 1만4000명의 군사를 요동에 보내 명을 도왔다. 그러나 사르후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이 후금(훗날 청나라)에 궤멸적 패배를 당한다. 이에 광해군이 명나라의 증병 요청을 외면하며 후금과 화해를 모색하자, 신료들이 집단 항명에 나선 것. 이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척화파와 주화파의 치열한 논쟁으로 이어진다. 망국 직전의 대국(명)을 위해 조선 관료들이 망국의 위기를 무릅쓴 이유는 무엇일까. 서강대 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신간에서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당시 굴욕적인 삼전도 항복이 모두 조선의 국가정체성과 직결돼 있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단순히 딸깍발이 선비들의 사대주의 집착이 낳은 비극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는 것. 조선 성리학의 정치질서에서 명과 조선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 혹은 왕-사대부-평민의 충효(忠孝) 관계와 같았다는 얘기다. 결국 명에 대한 사대 의리를 지키지 않는 건 국내 정치의 정당성을 잃을 수 있음을 뜻했다. 실제로 조선 사림의 거두 송시열은 “삼전도에서 항복을 용인하면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고, 신하가 군주에게 충성하지 않으며, 결국 노비도 주인에게 복종하지 않는 금수의 세상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국제정치 현실과 무관하게 효종대 북벌론이 추진된 배경이 됐다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문화 학습의 세례를 받기 전인 어린이들과, 인간과 진화론적으로 친연성이 높은 침팬지 및 오랑우탄의 지적 능력을 서로 비교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실제 어린이 105명과 침팬지 106마리, 오랑우탄 32마리를 대상으로 실시한 독일 진화인류학연구소 실험 결과는 다소 의외다. 실험에서 인간은 공간 지각이나 수량 파악, 인과관계 이해력 등에서 유인원들에게 열세를 보였다. 인간이 유인원들을 압도한 분야는 오직 ‘사회적 학습’ 영역뿐이었다. 사회적 학습의 다른 이름은 오랜 세월에 걸쳐 사람들 사이에서 전승되는 ‘문화’다. 미국 하버드대 인간진화생물학과 교수인 저자는 인간이 다른 종들을 꺾고 최상위 포식자가 된 것을 단순히 유전자 중심의 진화론으로만 설명할 순 없다고 말한다. 독일 진화인류학연구소의 실험이 시사하듯 사회적 학습을 거치기 전 ‘정글북’ 상태의 인간은 매우 나약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생물학적 진화 외에 인간의 문화적 진화가 생존의 원동력이 됐다고 주장한다. 문화와 유전의 공진화(共進化) 덕분에 인간이 지구의 지배종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는 것. 흥미로운 것은 문화적 진화가 인간의 뇌와 호르몬 반응, 면역체계 발달 등 신체 발달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예컨대 사회적 학습을 극대화하기 위해 유아기를 줄이고 대신 아동기를 늘리는 방식으로 몸의 성장을 늦췄다는 것. “타인에게 배운 것들이 우리의 마음과 몸을 유전적으로 모양 지었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전북 익산토성에서 백제시대 두루마리 문서 색인인 ‘봉축(棒軸)’이 발굴됐다. 일본 고대 유적에서 비슷한 게 나온 적이 있지만 국내에서 발견된 건 처음이다. 더구나 ‘정사(丁巳)년’ 연도까지 적혀 있어 무왕에 이어 의자왕 때도 익산이 복도(複都·수도에 버금가는 도성)로 기능한 흔적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는 국가사적인 익산토성 발굴 현장에서 백제시대 대형 집수시설(동서 9.5m, 남북 7.8m, 최대 깊이 4.5m)과 더불어 그 내부에서 봉축과 옻칠갑옷(가죽 조각에 옻칠을 해 이어 붙인 갑옷) 조각이 발견됐다고 30일 밝혔다. 이번에 발견된 봉축 1점은 지름 2.3cm, 길이 15cm의 긴 원통형 막대기 모양이다. 봉축은 두루마리 문서를 보관할 때 종이 끝에 풀칠을 해서 붙이는 일종의 심이다. 봉축 상단에는 문서 종류 등을 쓴 글자를 넣어 굳이 두루마리를 펴지 않고도 내용을 알 수 있도록 했다. 이번에 발견된 봉축 상단에서는 ‘丁巳 今在食’(정사년 현재 남아있는 식량)이라는 글자가 판독됐다. 주위에서 백제 토기 등이 함께 발견된 정황을 미뤄 볼 때 여기서 정사년은 597년 혹은 657년 중 하나를 의미할 것으로 추정된다. 현장을 둘러본 고고학자들은 이 중 657년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이는 백제 멸망 3년 전까지 성안에 남아있는 식량을 확인해 문서화한 사실을 보여준다. 이문형 원광대 교수(고고학)는 “익산 천도를 단행한 무왕뿐만 아니라 멸망 직전인 의자왕 대에도 익산에서 문서행정이 이뤄지는 등 복도로서의 위상이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근거”라고 설명했다. 유물이 나온 익산토성은 백제 왕궁 터가 있는 왕궁리유적에서 불과 2km 정도 떨어져 일종의 배후산성(전란 등에 대비한 피란 시설)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는 수도인 사비에도 왕궁터인 관북리 유적 북쪽에 부소산성을 쌓았다. 이번에 발견된 백제 집수시설 안에서는 고대 사치재 중 하나인 옻칠갑옷 조각도 6점이 나왔다. 공주 공산성과 부여 관북리유적에 이어 세 번째다. 이번 출토품은 공산성 갑옷과 형태나 제작 방식이 유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공산성 갑옷이 당나라 제작품이라는 일각의 지적과 달리, 백제가 자체 제작한 물품으로 볼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이병호 동국대 교수(백제사 전공)는 “이번 발굴은 일본에서 이미 확인된 봉축 목간이 한반도에도 존재했음을 확인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며 “일본 고대 목간의 원류로서 백제 문서행정 시스템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전북 익산토성에서 백제시대 두루마리 문서 색인인 ‘봉축(棒軸)’이 발굴됐다. 일본 고대 유적에서비슷한 게 나온 적이 있지만, 국내에서 발견된 건 처음이다. 더구나 ‘정사(丁巳)년’ 연도까지 적혀있어 무왕에 이어 의자왕 때도 익산이 복도(複都·수도에 버금가는 도성)로 기능한 흔적이라는 해석이 나온다.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는 국가사적인 익산토성 발굴현장에서 백제시대 대형 집수시설(동서 9.5m, 남북 7.8m, 최대 깊이 4.5m)과 더불어 그 내부에서 봉축과 옻칠갑옷(가죽 조각에 옻칠을 해 이어 붙인 갑옷) 조각이 발견됐다고 30일 밝혔다.이번에 발견된 봉축 1점은 지름 2.3cm, 길이 15cm의 긴 원통형 막대기 모양이다. 봉축은 두루마리 문서를 보관할 때, 종이 끝에 풀칠을 해서 붙이는 일종의 심이다. 봉축 상단에는 문서 종류 등을 쓴 글자를 넣어 굳이 두루마리를 펴지 않고도 내용을 알 수 있도록 했다.이번에 발견된 봉축 상단에서는 ‘丁巳 今在食(정사년 현재 남아있는 식량)’이라는 글자가 판독됐다. 주위에서 백제 토기 등이 함께 발견된 정황을 미뤄볼 때 여기서 정사년은 597년 혹은 657년 중 하나를 의미할 것으로 추정된다.현장을 둘러본 고고학자들은 이 중 657년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이는 백제 멸망 3년 전까지 성안에 남아있는 식량을 확인해 문서화한 사실을 보여준다. 이문형 원광대 교수(고고학)는 “익산 천도를 단행한 무왕뿐 아니라 멸망 직전인 의자왕대에도 익산에서 문서행정이 이뤄지는 등 복도로서의 위상이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근거”라고 설명했다.유물이 나온 익산토성은 백제 왕궁 터가 있는 왕궁리유적에서 불과 2km정도 떨어져 일종의 배후산성(전란 등에 대비한 피난 시설)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는 수도인 사비에도 왕궁터인 관북리 유적 북쪽에 부소산성을 쌓았다.이번에 발견된 백제 집수시설 안에서는 고대 사치재 중 하나인 옻칠갑옷 조각도 6점이 나왔다. 공주 공산성과 부여 관북리유적에 이어 세번째다. 이번 출토품은 공산성 갑옷과 형태나 제작 방식이 유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공산성 갑옷이 당나라 제작품이라는 일각의 지적과 달리, 백제가 자체 제작한 물품으로 볼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이병호 동국대 교수(백제사 전공)는 “이번 발굴은 일본에서 이미 확인된 봉축 목간이 한반도에도 존재했음을 확인했다는데 의의가 있다”며 “일본 고대 목간의 원류로서 백제 문서행정 시스템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최근 발간된 문재인 전 대통령의 회고록이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른 가운데 ‘전현직 영부인 게이트’로 번지는 등 파문이 일고 있습니다. 이번 회에선 2018~2019년 문재인 정부의 북한 비핵화 협상에 집중해 ‘하노이 노딜’로 귀결된 원인을 문 전 대통령 회고록과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 회고록, 관련 논문들을 통해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김정은 입에서 비핵화 진의 찾은 文 vs 히틀러 재무장 주목한 처칠북한 비핵화 협상에서 핵심은 북한의 ‘진의(眞意)’와 ‘비핵화 개념’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핵화 진의는 다른 말로 하면 북한이 정말로 핵무력화를 택하려고 했는가라는 ‘진정성’의 문제입니다. 비핵화 개념은 핵물질, 핵탄두, 미사일(발사체), 핵연구소, 개발인력 등 다양한 핵개발 요소 중 어디까지 무력화시켜야 비핵화에 해당하느냐는 문제에 해당합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한 남북미 3국의 인식 차이가 결국 하노이 노딜이라는 파국을 낳은 셈입니다.우선 비핵화 진의에 대해선 북한이 제재 완화를 통한 경제개발을 위해 비핵화 협상에 나섰다는 의견과, 부분적 비핵화로 계속 핵보유와 일부 제재완화를 노린 거라는 의견이 엇갈립니다. 전자는 김정은 위원장과 문 대통령의 견해에, 후자는 2019년 당시 트럼프 행정부의 견해에 가깝죠.이와 관련해 문 전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에 북한의 비핵화 의지가 진심이라는 내용을 수차례 강조했는데 그 중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김정은 위원장이) 자신들은 진심으로 체제 안전만 보장되면 핵을 내려놓을 것이라면서 이런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나도 딸이 있는데, 딸 세대한테까지 핵을 머리에 이고 살게 할 수는 없는 거 아니냐, 안전만 보장된다면 우리가 왜 세계로부터 제재니 뭐니 그런 어려움을 겪으면서 핵을 머리에 이고 살겠느냐, 언제든지 우리는 내려놓고 싶다, 미국이 자신들의 진정성을 믿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는 이야기도 했고요. “문 대통령께서 그런 이야기를 미국에 잘 전해달라”라고 부탁하기도 했습니다.’(116~117페이지)그런데 문제는 사람이든, 국가든 상대방의 의도를 말에 의존해 파악하는 건 위험할 수 있다는 겁니다. 왜냐면 말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기 마련이며, 특히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변함에 따라 의도 자체가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북한이 미국으로부터 안보위협 때문에 핵을 개발했더라도 완성된 핵무력을 내세워 체제를 안정시키고 있다면 국내 정치적 목적이 더 커졌다고 볼 수 있죠.이것이 헨리 키신저와 같은 현실주의자들이 상대국의 불확실한 의도보다는 힘(power)에 대한 세력균형을 추구하는 이유입니다. 윈스턴 처칠이 2차대전 발발 전부터 히틀러에 대한 유화책을 거부하고 공세적 대응에 나설 것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죠. 그는 자신의 2차대전 회고록에 이런 내용을 남겼습니다.‘독일의 상황은 문명국가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었다. 공포와 피비린내 나는 폭력을 바탕으로 한 독재체제가 세계를 상대로 마주선 것이었다. 그 증거가 너무나 명백한 “독일 재무장”의 전 과정은 나에게는 무자비하고 섬뜩하게 느껴졌다.’(82페이지)유화파였던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히틀러와 굴욕적인 ‘뮌헨 협정’을 맺어 나치의 도발을 도리어 키울 때, 처칠은 독일의 지속적인 ‘재무장’에 주목했습니다. 히틀러의 군사력 집착이 결국 전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간파한 거죠. 뮌헨 협정으로 체코를 얻은 독일은 이 나라의 35개 전투사단을 획득한 동시에 스코다(체코 자동차 생산업체) 공장을 통해 군수품 생산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습니다.결국 특정 시점에서 최고지도자의 발언에 근거해 상대국의 의도를 파악하기보다는 결과로 드러나는 힘의 추구를 주목하는 것이 중요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비핵화 협상이 진행 중일 때도 북한이 핵무력을 지속적으로 증강한 사실에 주목해야한다는 의견이 나옵니다. 예컨대 2018년 8월 국제원자력기구(IAEA)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은 미국과 비핵화 대화를 나누고 있던 2017, 2018년에도 핵개발 프로그램을 계속 진척시켰다는 겁니다.국가정보원은 2018년 11월 국회 정보위원회 간담회에서 북한이 핵개발, 핵탄두 소형화 등 핵 활동을 지속하고 있으며, 이런 동향은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에도 포착됐다고 밝혔습니다.北-美의 엇갈린 ‘영변 핵시설’ 값어치다음으로 ‘비핵화 개념’을 둘러싼 관점의 차이를 얘기해보겠습니다. 이것은 북한이 스스로 비핵화 대상으로 제시한 영변 핵시설에 대한 가격을 어떻게 매기느냐(pricing)와도 직결됩니다. 당연히 북한은 영변 핵시설이 자기네 핵능력에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면서 경제제재 해제를 요구했습니다. 문 정부도 이를 두둔하며 미국에 제재 해제를 설득했는데, 미국의 생각은 달랐죠. 문 전 대통령 회고록으로 다시 돌아가보겠습니다.‘트럼프 대통령과 내가 이른바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 원칙) 개념에 대해서 의견을 주고받은 적이 있어요. 북한의 모든 핵이 완전히 다 없어져야만 불가역적인 상태가 되는 게 아니고, 되돌릴 수 없는 단계가 되면 불가역적인 상태에 접어드는 것이어서, 20~30%가 폐기되거나 불능화되면 그때부터는 비핵화의 불가역적인 단계에 들어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의견을 모은 바 있어요.’(284페이지)여기서 ‘20~30%’라는 수치가 눈에 띕니다. 20~30% 수준의 불능화라도 비핵화로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문 전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도 이에 동의했다고 했지만,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의 행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트럼프는 하노이 회담장을 박차고 나온 당일 기자회견에서 “미국과 북한의 비핵화 개념이 다르다”며 “미국이 생각하는 비핵화 개념은 핵물질과 핵무기를 없애며, 이를 생산할 수 있는 관련 시설이나 미사일까지도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못박았습니다. 굳이 수치로 환원하면 100%에 가까운 핵무력 불능화 조치를 비핵화로 받아들이겠다는 얘깁니다.여기서 핵심은 북한이 하노이 회담에서 회심의 카드로 준비했다는 영변 핵시설의 값어치입니다. 문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영변 핵시설이 북한 핵능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어도 50%는 넘는다는 식으로 설명하는데요. 미국은 영변 이외의 비공개 핵시설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영변 핵시설의 가치를 북한 주장대로 높게 쳐줄 순 없다는 입장이었죠. 문 전 대통령은 이런 상황을 놓고 김정은이 “미국이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등에 대해 값을 눅게(싸게) 매긴다”며 불만스러워했다고 전합니다.트럼프 대통령은 회담장에서 영변 이외 농축우라늄 시설 문제를 제기했지만, 김정은 위원장은 그 존재 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채 이는 협상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미국 입장에서 북한의 비핵화 진의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었죠.북한의 비핵화 조치에 대한 값어치는 그것과 상응하는 미국 경제제재와의 등가성 문제와 직결됩니다. 모든 거래가 그렇듯 물물교환에는 양측이 내놓는 물건의 가치가 같은지 여부가 핵심이기 때문이죠.이와 관련해 북한이 미국에 해제를 요구한 2016년 이후 대북제재는 과거 제재와는 차원이 다른 고강도 조치라는 점이 주목됩니다. 핵무기 개발 물자를 차단하는 수준의 과거 제재와 달리 2016년 이후에는 광물 수출금지, 농수산물 수출금지, 섬유제품 수출금지, 해외 노동자 파견 금지, 대북 투자 금지, 원유 및 정제유 수출량 제한 등 전시 해상봉쇄에 필적하는 수준의 고강도 제재가 이어졌기 때문이죠. 미국으로선 영변 핵시설 폐기 만으로 이를 모두 풀어주는 게 맞느냐는 고민에 빠진 겁니다.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비핵화 협상에서 한국은 ‘선의의 중재자’를 자처했습니다. 이는 북한이 의도적으로 남한에 먼저 손을 내밀고, 남북 정상회담에서 비핵화를 처음 언급하는 등 북미 정상회담으로 가는 길목으로 남한을 이용한 영향이 컸죠.적대적 쌍방을 연결하는 중재자의 핵심적인 역할은 당연히 양측의 불신을 풀어주는 일일 겁니다. 그런데 문 정부는 위에서 언급한 비핵화 개념(달리 말하면 비핵화 대상의 ‘값어치’)을 둘러싼 북미의 인식 차이를 해소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회고록에 그 일단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대북 경제제재 완화의) 큰 방향에 대해서는 우리가 미국을 설득하고 중재했지만, 구체적인 상응조치, 즉 어떤 해제를 할 건가 하는 구체적인 로드맵에 대해서는 북미 간에 협상할 문제라고 생각해서 거기까지는 개입하지 않았거든요. 그 정도 했으면 북미 간에 충분히 타결을 볼 거라고 판단했던 것인데, 그게 아니었어요. 돌이켜보면 우리가 좀 더 개입해서, 북한이 하겠다는 비핵화 조치에 대한 상응조치로 어떤 제재 해제가 필요한지 북한의 요구를 듣고, 합리적이라고 판단되면 미국에 전달하는, 더 적극적인 중재를 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후회가 있어요.’(128~129페이지)비핵화 값어치에 상응하는 제재 해제의 구체적인 내용을 더 적극적으로 중재하지 못했다는 반성인데, 이는 역으로 미국 입장에선 제재 해제에 상응하는 비핵화 수준에 대해 한국 정부가 북한과 충분히 논의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런 디테일의 부족은 북한과 미국 모두로부터 신뢰를 잃는 결과를 초래하죠.예컨대 하노이 노딜 직후인 3월 15일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은 기자회견에서 “한국은 중재자가 아니라 (협상의) 플레이어”라고 말합니다. 이후 북한은 점차 한국 정부를 대놓고 무시하는 행태를 보이게 되죠.미국도 마찬가집니다. 폼페이오 등 트럼프 참모들은 문 정부가 북한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다며 한국 정부를 불신하게 됩니다. 이는 미국이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북한과의 논의 내용을 우방인 한국과 충분히 공유하지 않은 결과로 이어집니다. 문 전 대통령 회고록 곳곳에 이런 정황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지금도 우리는 하노이에서 북한이 제시한 조치는 알지만, 상응조치로 무엇을 요구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니까요.’(128페이지)‘하노이 회담 결렬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나서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 하노이 노딜 직후 번개 회담을 제안해보지 않은 것은 아쉬운 일이에요. 그러나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는 만나자는 제안을 여러 번 했지만 북한이 호응하지 않았죠. 우리가 상황파악을 제대로 못해서 실기한 건지도 모르지요.’(324~325페이지)루스벨트-스탈린 중재한 처칠의 방식2차대전 기간 처칠도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해야했습니다. 당시 미국, 소련, 영국 모두 나치 독일에 맞선 동맹이었지만 바다를 사이에 두고 유럽대륙과 분리된 미·영은 독소전쟁으로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고 있던 소련과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예컨대 1943년 11월 테헤란회담을 앞두고 미·영과 소련이 가장 극명하게 대립한 건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시기였습니다. 총력전으로 나치 공격을 막아내던 소련은 1941년부터 미·영 연합군의 신속한 상륙작전을 강하게 요구했지만, 처칠과 루스벨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충분한 숫자의 상륙함을 건조하고 병사들의 전투력을 끌어올리는데 시간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죠.이에 스탈린은 두 자본주의 국가들이 사회주의 소련이 심각한 내상을 입을 때까지 일부러 시간을 늦추는게 아닌가하는 의심까지 품게 됩니다. 이에 처칠은 워싱턴과 모스크바를 오가며 ‘대군주 작전(노르망디 상륙작전)’을 1944년까지 연기해야하는 군사·기술적 이유를 집요하게 설득하게 됩니다. 처칠은 테헤란회담을 앞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록에 썼습니다.‘정치적으로든 군사적으로든 우리와 협력하게 될 소련 대표를 부르기 전에 영미 양국 사이에 확실한 합의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 역시 그런 생각에는 호의적이었으나, 시기에 대해선 견해가 달랐다. 전쟁에서 영미의 협력관계를 다소 희생하더라도 소련의 신뢰를 얻고 싶어하는 경향이 미국 정부 내부에 있었다. 반면 나는 영미 양국이 대군주 작전의 현저한 문제점과 최고 지휘권 문제에 대한 명확하고 통일된 의견을 가진 상태에서 소련과 회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1076페이지)이에 처칠은 테헤란회담에 앞서 루스벨트와 카이로회담을 벌여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한 심층적인 논의를 거치게 됩니다. 미·영은 3군 참모총장 협의체 등을 구성해 상륙작전에 필요한 장비와 인력, 작전권 등을 구체적으로 협의합니다. 또 이를 스탈린과도 충분히 공유해 그의 오해를 풀려고 노력하죠. 이후 테헤란에서 만난 처칠과 루스벨트, 스탈린은 1944년 5월 프랑스 북부해안에서 상륙작전을 벌인다는 합의에 도달하게 됩니다.북한 비핵화 협상 당시 문재인 정부가 중재자로서 협상방식이나 내용에 디테일이 더 필요했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북미의 비핵화 개념이 무엇이고, 제재 완화 등 상응 조치의 값어치를 각각 어떻게 평가하는지 등에 대한 더 심층적이고,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했다는 얘깁니다. 이는 향후 우리 정부가 비핵화 협상에 나설 때 참고해야 할 반면교사가 아닐까요.[참고 문헌]-문재인 〈변방에서 중심으로-문재인 회고록〉 (2024년, 김영사)-윈스턴 처칠, 차병직 역 <제2차 세계대전 (상·하)> (2016년, 까치)-신범철 〈2018-2019 비핵화 프로세스를 통해 본 북한의 전략적 의도 분석〉 (2019년, 전략연구 78호)“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겸재 정선(1676∼1759)이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 수록한 ‘광진(廣津)’과 ‘송파진(松坡津)’, ‘동작진(銅雀津)’, ‘양화환도(楊花喚渡)’는 18세기 한강의 포구들을 묘사한 그림이다. 당시 한강은 조세와 물산을 실어 나르는 주요 교통로였기에 해당 포구의 경제·사회적 중요성은 매우 컸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겸재가 그린 해당 포구들에 현재 광진교, 동작대교, 양화대교 등 주요 다리들이 놓여져 서울 곳곳의 교통과 물류를 잇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한강을 중심으로 한 인문지리적 환경은 맥이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조선사 전공자로 건국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는 서울이 한 나라의 수도가 된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그 내력을 마치 자서전처럼 써 내려갔다. 사람의 탄생과 성장, 고난을 그리듯 조선 건국에 따른 한양 천도부터 일제 침탈에 이르기까지 서울 600년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엮었다. 조선의 중흥을 이끈 철인군주 정조대에 이르러서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융릉)를 참배하기 위해 한강 위에 배다리를 놓은 용산∼노량진을 다룬다. 정조는 배들을 이어 붙일 수 있는 장소로 수심과 강폭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용산∼노량진 구간을 택했는데, 1900년 최초의 근대식 철교인 ‘한강철교’가 이곳에 들어선 건 우연이 아니었다. 부제 ‘조선의 눈으로 걷다’가 시사하듯 저자는 “독자들이 책에 소개된 장소들을 직접 탐방하면서 역사의 향기를 체험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썼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