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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함께 서울 올림픽공원 내 키즈카페에 놀러 간 다섯 살 아이는 엄마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새 밖으로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100명이 넘는 인력을 동원해 수색에 나섰지만 카페 근처에 폐쇄회로(CC)TV가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 아이는 다음 날 인근 호수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CCTV가 있었다면 아이의 행방을 빨리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여론이 들끓었다. 2016년 9월 벌어진 안타까운 일이다. ▷이 사건 이후 국회는 도시공원 내 범죄나 안전사고 우려가 있는 지점에 CCTV 설치를 의무화하도록 도시공원법을 개정했다. 그런데 시행령이나 규칙에 설치 간격이나 장소 등 구체적인 기준이 없고, 설치하지 않았을 때 벌칙 조항도 없다. 유명무실한 법조문이 돼 버린 것이다. 이렇다 보니 최근 여교사 폭행 살인 사건이 발생한 관악산생태공원은 축구장 10개 넓이에 CCTV가 7대뿐이고, 인근 독산자연공원에는 광화문광장 2.5배 면적에 1대만 있다. CCTV를 설치했다는 시늉만 낸 수준이다. ▷범죄는 범인의 성향, 처벌의 강도, 범행 장소의 환경 등 다양한 요소에 영향을 받는다. 이 중 환경 개선에 초점을 맞춰 범죄를 억제하는 기법을 ‘범죄예방 환경설계(CPTED)’라고 부른다. CCTV 설치는 범행 의지를 꺾는 환경을 조성한다는 점에서 CPTED의 중요한 요소다. 실제로 경찰청이 분석해보니 CCTV가 있는 곳 근처에서는 야간에 강도 절도 등 5대 범죄가 11% 정도 감소했다. 이번 사건 범인도 “CCTV가 없는 걸 알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했다. CCTV가 더 촘촘하게 설치돼 있었다면 범행을 포기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CCTV를 늘리는 것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중국 정부는 5억 대의 CCTV를 통해 주민의 목소리와 홍채 등 생체 정보까지 광범위하게 수집한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이처럼 악용된다면 시민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받는 ‘빅 브러더’ 사회가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범죄자들이 CCTV가 있는 장소를 피해 다른 곳에서 범행을 저지르는 ‘풍선효과’가 나타날 뿐 전체 범죄 감소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우려들을 감안하더라도 최소한 도시공원처럼 치안 확보가 필수적인 곳에 CCTV를 확대하는 것은 불가피해 보인다. 지난해 한국소비자원의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의 77%가 ‘도시공원에 CCTV를 추가 설치해야 한다’고 답했다. 흉악범죄가 일어난 뒤에야 늘리겠다고 부산을 떨 게 아니라 법률이나 시행령을 고쳐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일상에 지친 시민들이 안전하게 쉬어야 할 공원이 불안과 공포의 공간으로 바뀌는 일은 막아야겠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특별수사의 출발점이 뭐냐. 바로 ‘휴대전화를 찾으라’는 거다.” 2017년 3월 당시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을 수사하던 박영수 특별검사가 기자간담회에서 한 말이다. 25년간 검사로 일한 박 전 특검은 휴대전화가 ‘물증의 보고(寶庫)’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정호성 전 대통령부속비서관의 휴대전화에서 발견된 녹음파일 등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세월이 흘러 ‘50억 클럽’ 의혹 사건의 피의자로 처지가 바뀐 박 전 특검에게는 자신의 휴대전화가 큰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이제 휴대전화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존재가 됐다. 스마트폰에 내장된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은 내가 언제 어디에 있었는지를 정확하게 기록한다. 누구와 얼마나 자주 통화했는지, 문자메시지나 소셜미디어(SNS)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뭘 검색하고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도 휴대전화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렇다 보니 휴대전화 분석이 수사의 핵심 과정이 됐다. 경찰이 휴대전화를 증거 분석한 건수가 2011년 3300여 건에서 2021년에는 5만8000여 건으로 폭증했을 정도다. ▷이를 잘 알고 있는 검사 출신들이 자신이 수사 대상이 됐을 때 휴대전화를 빼앗기지 않으려 한 사례는 많다. 우병우 전 대통령민정수석은 국정농단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되기 전 휴대전화를 바꿨다. ‘라임 전주’ 김봉현 씨에게 술접대를 받은 혐의로 수사를 받던 검사와 검찰 출신 변호사도 압수수색 전 휴대전화를 교체했다. 2020년에는 당시 수사 대상에 오른 한동훈 검사장의 휴대전화를 압수하는 과정에서 수사 검사와 한 검사장 간에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검찰이 최근 대장동 업자들에게 200억 원을 약속받은 혐의 등으로 박 전 특검에 대해 구속영장을 재청구하면서 그가 올해 ‘2월 16일경’ 망치로 휴대전화를 부쉈다는 내용을 적시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당시 더불어민주당 박홍근 원내대표가 본격적으로 “50억 클럽 특검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 날이다. 강이나 바다에 던진 것도 아니고 망치로 부쉈다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망치 훼손’이 사실이라면 박 전 특검이 다급하게 움직인 걸로 볼 수도 있는 대목이다. ▷휴대전화를 압수당해 본 사람들은 ‘영혼을 털린 것’이라고 말한다. 법원은 휴대전화 압수수색영장에 검색어와 검색 대상 기간을 적도록 해 남용을 막는 방안을 추진 중이지만 검찰이 반대하고 있다. 수사 방식을 속속들이 알고 있어 검사 출신들이 휴대전화 압수에 더 민감해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증거 인멸은 공정한 수사와 재판을 방해한다. 특검을 지낸 고위직 출신 법조인까지 망치로 휴대전화를 폐기했다는 영장 내용에 황당해하는 일반인이 많을 것 같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저것은 차량인가, 자전거인가, 아니면 또 다른 존재인가.’ 깜깜한 도로에서 자전거를 끌고 길을 건너는 여성을 발견한 우버의 자율주행차 시스템은 ‘멘붕’에 빠졌다. 정체를 파악해야 어떻게 대응할지 정할 수 있는데, ‘자전거를 끌고 무단 횡단하는 사람’은 시스템의 예상 범위 내에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차량이 제때 멈추지 못해 이 여성은 차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 2018년 3월 18일 밤 미국 애리조나주 템피에서 발생한 이 사고는 자율주행차에 의한 교통사고로 보행자가 희생된 첫 사례로 기록됐다. ▷“2017년 말까지 로스앤젤레스(LA)에서 뉴욕까지 완전히 자율로 주행하는 차량을 완성할 것이다.” 2016년 10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의 호언장담처럼 자율주행차는 곧 현실로 다가올 미래로 여겨졌다. 기대가 커지면서 2010년대 들어 메르세데스벤츠, 포드, 폭스바겐, 혼다 등 내로라하는 자동차 업체는 물론이고 구글, 인텔 같은 정보기술(IT) 기업들도 자율자동차 개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한국의 현대자동차·기아도 자율자동차 개발 대열에 합류했다. ▷하지만 완전 자율주행차 시대가 오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자율주행 기술 단계는 레벨 0∼5까지 총 6단계로 나뉘는데, 위험 상황에서도 시스템 스스로 대처하는 레벨 4 수준 이상의 차량을 상용화한 업체는 없다. 비상시에만 운전자가 운전대를 잡는 레벨 3 수준에 도달한 기업도 메르세데스벤츠, 혼다, 볼보뿐이다. 예상만큼 성과가 나오지 않자 포드 등은 자율주행차에 대한 투자를 축소하면서 기대수준을 낮추는 분위기다. ▷기술적 문제도 있지만 자율주행차가 교통사고를 냈을 경우 누구에게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할지도 난제다. 미국 법원은 2018년 우버의 첫 자율주행차 사망사고와 관련해 최근 당시 시험차량 운전자에 대해 과실치사 혐의로 보호관찰 3년의 유죄를 선고했다. 비상 상황에 대처해야 할 운전자가 스마트폰으로 TV를 보느라 주의 의무를 게을리했다는 이유에서다. 미 교통당국은 시스템이 보행자를 감지하지 못하는 등 우버 측의 책임도 있다고 지적했지만 애리조나주 검찰은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다’며 우버를 기소하지는 않았다. ▷이번 판결로 자율주행차 사고에 대한 책임 논란이 일단락됐다고 보긴 힘들다. 자율주행 기술의 수준에 따라 교통사고 시 운전자나 차주, 제조사 간에 법적 윤리적 책임의 적정선을 놓고 논쟁이 이어질 공산이 크다. 다만 자율주행 기술의 완전성이 입증되기 전까진 운전자의 책임이 ‘0’이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운전대에서 완전히 손을 놓아도 되는 세상에 대한 기대는 잠시 뒤로 미루고, 어떤 차를 운전하든 최선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현명할 듯하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집회나 시위 현장에서 경찰과 지방자치단체는 ‘원팀’처럼 움직일 때가 많다. 집회 주최 측에서 허가받지 않은 시설물을 설치하려고 하면 지자체 소속 공무원들이 철거에 나서고, 경찰이 도와주는 식이다. 그 과정에서 집회 참가자와 경찰·공무원이 충돌하기도 한다. 그런데 17일 대구퀴어문화축제 현장에서는 전례 없는 광경이 펄쳐졌다. 도로 한복판에서 경찰과 지자체 공무원들 간에 집단 몸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이날 오전 7시경부터 대구 중구 반월당 네거리 대중교통전용지구에 약 500명의 시청·구청 소속 공무원들이 모여들었다. 퀴어축제 무대 설치를 막기 위해서다. 오전 9시 반경 행사 장비를 실은 트럭이 현장에 도착하자 공무원들이 가로막았다. 이에 경찰은 “밀어”라며 공무원들 해산에 나섰고, 공무원들은 “막아”라고 소리치며 버텼다. 행사 관계자들은 “경찰 파이팅”을 외쳤고, 반면 주변의 일부 상인들은 공무원을 응원했다. 40여 분간 이어진 난장판 끝에 대구시 측이 철수하면서 상황은 일단락됐다. ▷대구시와 경찰 간에 갈등이 빚어진 것은 집회 주최 측이 주변 도로까지 사용할 수 있느냐를 놓고 의견이 갈렸기 때문이다. 도로법상 도로점용 허가권은 대구시에 있고, 통행 및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도로의 적치물을 치울 수 있다는 게 대구시의 입장이다. 시민의 통행을 보장하기 위해 행사 트럭 진입을 막으려 했다는 취지다. 반면 경찰은 집회의 자유는 헌법상 권리이고, 합법적 집회에선 별도로 허가를 받지 않아도 주변 도로 이용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한 전문가는 “집회의 자유와 통행권이 부딪히는 지점인데, 법원 판례는 집회의 자유를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행사는 오래전부터 예정돼 있었고 상인 등이 낸 집회금지 가처분 신청도 법원이 15일 기각했다.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만큼 기관 간에 이견이 있다면 밤샘 토론을 해서라도 조용히 해결했어야 했다. 그런데 사전 조율을 못 한 채 시민들 앞에서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인 것이다. 충돌 이후에도 두 기관은 서로를 비난하기에 바쁘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대구경찰청장에게 책임을 묻겠다”며 목소리를 높였고, 대구경찰청 측은 “누구보다 법을 잘 아는 분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홍 시장을 비판했다. ▷시민들의 시각에선 경찰과 대구시 모두 막강한 공권력을 가진 기관들이다. 양측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공권력을 행사한다면 시민들로서는 어느 쪽을 따라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질서를 유지하고 시민을 보호해야 할 공권력이 오히려 질서를 어지럽히고 시민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서야 되겠나. 경찰과 대구시는 “어리둥절하다” “무슨 코미디냐”는 시민들의 질책을 아프게 새겨들어야 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지위가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도 법은 그 위에 있다’는 법언이 있다. 그런데 불체포특권이 있으면 ‘당신이 의원이라면 법이 건드리지 못한다’로 바뀌게 된다.” 국제적 헌법 자문기구인 베니스위원회가 2014년 채택한 보고서 내용이다. 불체포특권은 ‘법 앞의 평등’ 원칙을 훼손할 뿐 아니라 범죄를 저지른 의원에게 피신처를 제공하고, 국회와 정치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약화시키는 등 부작용이 많다고 분석했다. 한국의 현실에 꼭 들어맞는 지적이다. 의원 불체포특권을 인정하는 국가는 많지만 이를 놓고 한국처럼 논란이 거세게 벌어지는 나라는 드물다. 체포동의안이 국회에 넘어올 때마다 여야 또는 계파 사이에서 정쟁이 벌어지고, 체포를 막기 위해 ‘방탄 국회’가 열린 것도 여러 차례다. 12일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의 윤관석, 이성만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 표결을 전후해 정치권에는 또 한바탕 격랑이 일 것이다. 나라마다 불체포특권을 운용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미국은 헌법에서 ‘반역죄, 중죄, 치안위반죄’를 불체포특권의 예외로 뒀지만, 이 세 가지 혐의가 모든 범죄를 포괄한다는 대법원의 해석에 따라 불체포특권이 실질적으론 작동하지 않는다. 일본 헌법은 의원의 불체포특권을 인정하되 법률이 정하는 경우 제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뒀다. 반면 한국에서는 회기 중에 의원을 구속하려면 범죄의 종류나 경중과 관련 없이 먼저 체포동의안이 가결돼야 한다. 한국에서 체포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경우도 많지 않다. 지금까지 국회에 요청된 체포동의안은 총 68건인데 이 중 17건만 통과됐다. 체포동의안 가결률이 일본은 90%, 독일은 92%에 이르는 것과 대비된다. ‘한국 검찰이 무리하게 구속영장을 청구했기 때문 아닐까’라는 의심을 해볼 수 있다. 하지만 1989년 이후 부패 범죄로 유죄가 확정된 국회의원 25명 가운데 체포동의안이 가결된 사례는 3건에 불과했다. 나머지 22명은 범죄 혐의가 뚜렷해서 영장을 청구했는데도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는 의미다. 의원들이 법리, 증거와 무관하게 정치적·감정적으로 투표를 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1948년 제헌헌법부터 의원에게 불체포특권을 보장하고 있는 것은 정부가 국회를 탄압해 국회의 기능이 침해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민주화 이전에는 의원을 보호할 법적 장치가 필요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의 불체포특권은 본래의 취지와는 거리가 먼 방식으로 운용되고 있고, 사법 절차에 정치적 판단을 개입시키는 역효과를 낳고 있다. 그래서 불체포특권을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올해 2월 갤럽의 조사에서 불체포특권 폐지에 찬성(57%)한 응답자가 반대(27%)보다 두 배 이상 많았다. 하지만 상당수의 전문가들은 불체포특권의 폐해를 인정하면서도 폐지는 신중히 해야 한다고 말한다. 독재정권 출현 등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서라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남겨둬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불체포특권을 유지해야 한다면 정상적으로 헌법 질서가 유지되는 상황에서는 사실상 사문화되는 수준으로 사용이 제한돼야 한다. 이는 국회법 개정으로 어느 정도 가능하다. 무기명으로 이뤄지는 체포동의안 투표를 기명으로 바꿔 각 의원이 투표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도록 하고, 국회 보고 이후 일정 기간 내에 표결이 이뤄지지 않으면 가결로 간주하는 방안 등이 거론되고 있다. 법률 개정의 열쇠를 쥐고 있는 국회가 자신의 특권을 버리거나 줄일지는 의문이다. 여론이 강력하게 압박해야 국회가 움직일 것이다. 이해관계나 동료 의식을 핑계로 체포동의안에 반대표를 던지는 것을 의원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도록 정치 문화도 달라져야 한다. 유권자가 이를 감시하고 심판해야 불체포특권 남용을 근절할 수 있을 것이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200만 년 전부터 살아온 10여 종(種)의 핀치새는 종에 따라 먹이가 다르고 부리 모양도 다르다. 찰스 다윈이 이를 보면서 진화론의 영감을 얻었다고 해서 ‘다윈의 핀치’라고 불린다. 그런데 핀치들 가운데 ‘맹그로브 핀치’라는 종이 멸종 위기를 맞았다. 지구온난화로 갈라파고스가 따뜻하고 습해지면서 늘어난 흡혈 파리가 맹그로브 핀치의 새끼를 집중적으로 공격한 것이 주원인이다. ▷남미 에콰도르에서 서쪽으로 약 1000km 떨어진 갈라파고스 제도는 약 9000종의 동물이 살고 있는 생물다양성의 보고(寶庫)다. 수백만 년 동안 대륙과 단절돼 있었고 대형 육식동물이 없어 독자적으로 진화한 고유종이 많다. 하지만 갈라파고스의 상징인 자이언트거북, 바다이구아나 등의 개체 수가 근래 급감하고 있다. 바다에서도 갈라파고스 담셀이라고 불리는 작은 어류가 멸종되는 등 생태계 전체가 위기를 맞고 있다. ▷바닷물 온도가 높아지는 엘니뇨 현상이 잦아지고 있는 것이 갈라파고스의 동물들에게는 재앙이나 마찬가지다. 지구온난화로 강한 엘니뇨가 발생하면 플랑크톤이 줄면서 먹이사슬이 붕괴되기 때문이다. 1982년 발생한 갈라파고스 펭귄의 대량 폐사도 엘니뇨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인간에 의한 환경 파괴도 갈라파고스를 위협한다. 지난해에만 28만 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방문했고 3만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이들이 버린 쓰레기와 선박에서 유출되는 기름이 육지와 바다를 오염시킨다. ▷9일 크레디트스위스와 에콰도르 정부는 ‘자연보호-부채 교환(debt-for-nature swap)’ 계약을 체결했다. 16억 달러 규모의 에콰도르 국채를 6억5600만 달러 상당의 환경채권으로 바꾸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 미국국제개발금융공사(USIDFC), 미주개발은행(IDB) 등 기관들이 참여해 채권자의 부담을 분산한다. 에콰도르로서는 원금과 이자를 합쳐 약 11억 달러의 부채가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 그 대신 앞으로 18년 동안 3억2300만 달러를 갈라파고스 환경 보전에 투입해야 한다. 이로써 갈라파고스 환경 파괴를 막을 최소한의 재원은 마련됐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다양한 생물이 사는 저개발 남반구 국가들은 대부분 서방국의 식민지배를 받은 경험이 있다. 독립 이후에도 정치가 불안하고 경제는 낙후해 환경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는 만큼 선진국의 지원이 절실하다. 에콰도르의 경우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0.1%만 배출했지만 지구온난화의 피해는 고스란히 입고 있는 게 현실이다. 생태계가 무너지면 개도국뿐 아니라 연쇄적으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타격을 입는다. 개발의 혜택을 누려온 선진국들이 그에 걸맞은 책임을 져야 할 시간이 됐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검찰에서 출석요구서를 받으면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은 정치인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수사 상황과 여론을 살피기 위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시간을 끌기 일쑤다. 현역 의원의 경우 “국회 일정이 있다”는 게 불출석 사유의 단골 메뉴이고, “수술이 예정돼 있다”거나 “변호인이 다른 스케줄이 있다”며 출석을 미룬 정치인도 있었다. 반면 정치인이 자발적으로 검찰청에 출석하기도 한다. 그 속에는 검찰과의 치열한 수 싸움이 깔려 있다. ▷형사소송법에는 “수사에 필요한 때” 피의자를 불러서 조사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출석 조사 절차의 주도권은 검찰에 있다는 얘기다. 피의자가 출석을 미룰 수는 있지만 계속 피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반복적인 출석 거부는 체포의 사유가 되고, 도주 및 증거 인멸 우려를 높여 구속될 가능성도 커진다. 이런 한계 속에서 피의자들은 최선의 출석 시점을 고민한다. ▷정치인들은 정치적 손익도 계산해야 한다. 자진 출석은 ‘내 발로 떳떳하게 나갔다’고 말할 명분이 생긴다는 점에서 하나의 선택지가 된다. 2003년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차떼기 사건’과 관련해 “내가 감옥에 가겠다”며 자진 출석하고, 2019년 황교안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가 “내 목을 쳐라”라며 검찰청에 나온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검찰로서는 정치인이 스스로 찾아오는 것이 달갑지 않다. 검찰 출신 변호사는 “수사팀에서 준비가 덜 됐어도 그냥 돌려보내면 ‘조사받겠다고 온 사람을 왜 조사 안 하냐’는 말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자진 출석한 정치인들은 대부분 조사는 받았다. 2018년 ‘미투’ 의혹이 제기된 뒤 잠적했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갑자기 검찰청에 나타났을 때 수사팀에선 불만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일단 조사를 진행했다.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과 관련해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일 검찰에 자진 출석한 것도 이런 점들을 두루 고려한 전략으로 보인다. 하지만 검찰은 송 전 대표를 아예 조사하지 않고 돌려보냈다. 특별수사 경험이 많은 한 법조인은 “어지간하면 차라도 한잔 내줬을 텐데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한창 수사망을 좁혀가고 있는 검찰로서는 전 야당 대표를 문전박대했다는 비판을 들을지언정 ‘패’를 보여줄 수 없는 시점이라는 취지다. ▷유·무죄는 증거에 따라 갈리는 것이지 기습 출석을 한다고 해서 달라지지는 않는다. 안 전 지사는 유죄가 확정돼 3년 6개월간 복역한 뒤 출소했고, 황 전 대표는 재판이 진행 중이다. 송 전 대표 역시 증거에 따라 처벌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법적인 문제는 정상적인 법적 절차를 통해 대처하는 것이 최선이다. 다른 길은 없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19일 폴란드 바르샤바의 게토 영웅 기념비 앞.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이 폴란드 대통령, 이스라엘 대통령과 나란히 헌화한 뒤 머리를 숙였다. 이곳은 1943년 바르샤바의 유대인들이 나치의 강제수용소 이송에 저항하다 1만3000여 명이 사망한 것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1970년 당시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무릎을 꿇고 나치의 만행에 사죄하면서 전 세계에 신선한 충격을 준 장소이기도 하다.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연설에서 “여러분 앞에 서서 용서를 구한다”고 사과했다. 이어 “독일인의 역사적 책임에는 끝이 없다”며 과거사를 계속 반성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앞서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는 이스라엘 러시아 폴란드 등 제2차 세계대전 피해국들을 방문해 “야만적인 범죄에 깊이 부끄럽다”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수차례 사죄했다. 1985년 “과거에 대해 눈을 감은 자는 현재도 보지 못한다”고 한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전 대통령 등 독일 정부의 사과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독일 내에서도 과거사는 그만 이야기하자는 여론이 적지 않다. 2020년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53%가 ‘이제 나치 시대와 단절해야 할 때’라고 했다. 극우세력이 늘면서 신(新)나치주의를 표방하는 정당도 생겨났다. 그럼에도 독일 정치의 주류인 기민당과 사민당의 지도자들은 과거사에 대해 한결같은 태도를 보여왔고, 이는 유럽 통합의 기틀이 됐다. 이제 나치의 최대 피해국 이스라엘도 “독일은 유럽의 도덕적 나침반”이라고 평가한다. ▷일본도 과거사에 대해 여러 차례 사과를 했다고 주장한다. 일본군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을 인정하며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전한다”고 했던 1993년 고노 담화,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한다”고 밝혔던 1995년 무라야마 담화가 있다. 하지만 독일처럼 일본이 진정으로 반성했다고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과의 필수 요건인 일관성과 진정성이 없어서다. ▷2015년 위안부 합의 당시 아베 신조 총리는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언급하더니 한 달도 안 지나 “위안부를 강제연행한 증거가 없다”고 말을 바꿨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한일 정상회담에서 강제징용에 대해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을 계승한다”는 애매한 표현을 쓰더니 며칠 만에 과거사를 더 왜곡하는 초등학교 교과서를 내놨다. 메르켈 총리는 2015년 일본 방문 당시 “독일이 여러 나라와 화해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와 정면으로 마주했기 때문”이라고 일본에 일침을 놨다. 사과하는 시늉만 내면서 과거사 문제의 본질을 교묘하게 회피하는 행태는 일본의 국격만 떨어뜨릴 뿐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법을 잘 아는 변호사가 딸을 두 번 죽였습니다.” 2015년 학교폭력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한 박주원 양의 어머니 이기철 씨가 SNS에 올린 글이다. 당시 검경이 이 사건을 수사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가해자들은 기소되지 않았다. 유족에게 남은 방법은 민사소송을 통해 딸의 억울함을 알리는 것뿐이었다. 1심에서 일부 승소한 이 씨는 항소심이 가해자들의 책임을 더 엄중하게 물어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변호사가 재판에 잇따라 불출석하는 바람에 이 씨의 희망은 물거품이 됐다. ▷민사소송법에서는 재판에 2차례 불출석한 당사자가 한 달 안에 변론기일 지정을 신청하지 않거나, 기일 지정 이후 재판에 또 불출석하면 소를 취하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 씨 측 변호인 권경애 변호사는 지난해 항소심 3차례 재판에 모두 불출석했다. 그 결과 1심에서 이 씨 측이 패소했던 부분은 원심대로 확정됐고, 이 씨 측이 승소했던 1명마저 패소로 판결이 뒤바뀌었다. 이 씨는 힘겹게 8년간 이어온 재판을 허무하게 끝내야 했다. 권 변호사는 ‘조국 흑서’의 공동 저자로 대중적으로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권 변호사는 ‘날짜를 착각했다’는 취지로 변명했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법조인들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민사소송은 법원에서 변론기일 통지서를 보내고 메일이나 문자메시지로도 날짜를 알려준다”며 “여간해선 기일을 놓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재판에 가지 않은 진짜 이유가 궁금하다는 이들이 많지만 권 변호사는 ‘유족에게 9000만 원을 갚겠다’는 각서만 써놓은 채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고 있다. ▷이 사건 이전에도 변호인의 재판 ‘노쇼’로 의뢰인이 소송에서 지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2015년에 의료 소송에서 변호사가 3차례 재판에 불출석하는 바람에 원고가 패소한 사건이 있었다. 원고는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법원은 300만 원을 물어주라고 판결했다. 2012년에도 재판에 불출석해 패소한 변호사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법원이 1000만 원의 손해배상을 인정한 적이 있다. 변호사가 정해진 기간 내에 항소나 상고를 하지 않아 소송이 끝나버린 사례들도 있다. 의뢰인들은 어이없는 이유로 소중한 법적 권리를 잃은 것이다. ▷대법원 판례는 변호사에게 “전문적인 법률 지식과 경험에 기초해 성실하게 의뢰인의 권리를 옹호할 의무”를 요구한다. 대한변협은 권 변호사에 대해 징계를 추진 중이다. 법적 책임이나 징계의 관점에서만 따질 일은 아니다. 이는 법조인으로서 기본 자질의 문제다. 패소 소식을 듣고선 “가슴을 바위로 내려친 것 같았다”던 이 씨의 말을 권 변호사가 마음에 새기길 바란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중동의 이스라엘에서는 지난달 말 70만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정부여당이 사법부 권한을 약화하는 법안을 추진하는 것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중동의 스트롱맨’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도 한발 물러서 법안 처리를 미뤘을 만큼 시위의 기세는 거셌다. 그 법안의 내용 중 핵심이 대법원의 위헌법률심판권(한국에서는 헌법재판소에서 담당)을 박탈하는 것이다. 왜 이스라엘인들은 이 법안에 그토록 분노했을까. 지금은 크네셋(의회)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등 헌법에 어긋나는 법률을 만들었을 때 사법부에서 바로잡을 수 있다. 하지만 대법원이 그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면 이스라엘 국민은 다수당이 바뀌어 법률을 개정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다. 악법에 따른 피해는 국민이 고스란히 감당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제헌 헌법부터 위헌법률심판 제도가 도입되기는 했다. 하지만 권력의 눈치를 보느라 유명무실했다. 민주화 이전에는 1971년 대법원이 국가배상법 조항에 위헌 결정을 내린 것이 사실상 유일하다. 군인이 직무수행 중 다치거나 사망해도 국가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을 제한하는 내용의 조항이었다. 이에 박정희 정부는 이듬해 유신헌법에서 대법원의 위헌법률심판권을 빼앗고, 위헌 의견을 낸 대법관 9명은 재임용에서 탈락시켰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87년 개헌으로 헌재가 설립되면서 비로소 헌법재판이 제자리를 찾았다. 헌재는 헌법 해석을 둘러싼 정치·사회적 갈등의 심판 역할을 해왔고 호주제 폐지 등 국민 일상에 변화를 가져온 결정도 여럿 내렸다. 국가기관 중 헌재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가장 높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다. “민주화를 열망하던 국민에게 하늘이 준 망외(望外·기대 이상)의 선물”이라는 이강국 전 헌재 소장의 말이 자화자찬만은 아니다. 그런데 지난달 23일 이른바 ‘검수완박법’에 대한 권한쟁의심판 결정 이후 정치권에서 헌재를 비난하거나 무시하는 발언이 쏟아지고 있다. 헌재 결정의 핵심은 민주당을 탈당한 민형배 의원이 법사위 안건조정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과정에는 문제가 있지만 법률 자체는 유효하다는 것이다. 이후 국민의힘에서는 연일 헌재에 대해 “신(新)적폐 세력” “다수당의 하수인” 등 막말 수준의 발언을 내놨다. 민주당 역시 ‘위장 탈당’에 대한 헌재의 지적에 “합법적 과정”이었다고 우겼다. 불리한 대목은 무시하고 유리한 부분만 부각하는 것은 헌재 결정을 왜곡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2009년 미디어법 관련 권한쟁의심판에서 헌재가 비슷한 취지의 결정을 했을 때도 정치권은 지금과 유사한 반응을 보였다. 헌재가 성역은 아니고, 헌재의 결정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정치권의 억지 주장이 어제오늘 일이냐’고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헌법재판관을 인신공격하고 헌재 결정을 부정하는 ‘헌재 모독’ 수준까지 가서는 안 된다. 헌재는 헌법재판의 최종심이다. 그 결정이 존중돼야 갈등을 사법 시스템 안에서 풀어낸다는 법치의 근간을 지킬 수 있다. 그런데 정치권에서 헌재를 위협하는 일이 반복되면 헌재의 결정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약해지게 된다. 지금까지 헌재가 내린 결정 가운데 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한 사건은 현직 대통령들에 대한 탄핵심판이었을 것이다. 헌재는 한 건은 기각, 한 건은 인용 결정했고 더 이상의 혼란 없이 탄핵 논란은 마무리됐다. 대다수 국민이 헌재의 판단을 수용했기 때문에 헌법질서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헌재는 이제 법치의 중요한 한 축이 됐다. 정치인들이 눈앞의 득실만을 따져서 흔들어도 될 만큼 헌재의 가치가 가볍지 않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체포·구속·압수 또는 수색을 할 때에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검사의 신청에 의하여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제시하여야 한다.’ 헌법 12조 3항의 내용이다. 그런데 검사가 영장을 신청하기 위해 수사까지 할 수 있는지는 헌법에 명시돼 있지 않다. 그래서 영장청구권과 수사권이 하나로 묶여 있는 것인지, 아니면 별개인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져 왔다. 이른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법이 헌법에 어긋나는지에 대한 판단도 여기서 갈렸다. ▷헌법재판소가 23일 결정한 검수완박법 관련 권한쟁의심판 사건은 두 가지다. 먼저 국민의힘 의원들이 낸 소송에 대해선 ‘기각’ 결정을 내렸다. 민사소송에 견주면 원고 패소라는 뜻이다. 반면 법무부 장관과 검사들이 낸 심판은 ‘각하’됐다. 청구 내용을 아예 심리하지 않고 재판을 끝냈다는 의미다. ‘권한이 침해됐고 이와 관련성이 있는 기관’만 소송을 낼 수 있는데, 법무부 장관과 검사들은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자격이 없는 사람이 대입 시험에 응시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헌재가 각하를 한 이유에도 차이가 있다. 법무부 장관의 경우는 검수완박법에 따라 권한에 영향을 받지 않아 아예 ‘관련성’이 없다고 봤다. 검사들은 관련성은 있으나 권한이 침해되지 않아 소송을 낼 수 없다는 취지다. 검사가 직접 수사를 개시할 수 있는 범죄가 6개에서 2개로 줄었는데 헌재는 왜 검사의 권한이 침해되지 않았다는 것일까. 쟁점은 검사의 수사권이 법률상 권한인지, 헌법상 권한인지 여부였다. ▷검사의 수사권이 헌법상 권한이라는 주장의 핵심은 검사가 영장을 청구할지 결정하기 위해서는 수사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헌재는 인정하지 않았다. 영장을 검사가 청구하도록 한 것은 강제 수사의 남용을 막아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지, 수사권과 직접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헌법은 검사의 수사권에 대해 침묵하므로”, 즉 검사의 수사권은 헌법에 명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법률상의 권한이라는 것이 헌재의 논리다. 따라서 국회가 법률로 기관 간의 수사권 배분을 조정한 것을 검사의 권한 침해로 볼 수는 없다고 헌재는 결론 내렸다. ▷지난 정부에서부터 수사기관 간에 수사권을 어떻게 나눌지를 놓고 정치·사회적 갈등이 벌어져왔다. 수사권 조정에 찬성하는 측이나 반대하는 측 모두 ‘국민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들었다. 하지만 이제 헌재의 결정으로 일단락이 됐고, ‘누가’ 범죄를 수사하는지가 국민의 피부에 와 닿는 문제도 아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수사의 효율성을 높이고 억울한 피해자를 줄일지에 형사사법체계 개선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프랑스 서남부의 지롱드 숲은 ‘최고의 숲’이라는 애칭을 얻을 만큼 아름다운 수목이 울창했다. 하지만 작년 여름 ‘괴물 산불’로 불리는 대규모 산불이 이 숲을 덮쳐 잿더미가 된 상태다. 화마에 할퀸 면적이 파리의 2배에 이른다. 화재의 원인이 된 이상고온은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전 유럽이 40도가 넘는 무더위로 몸살을 앓았다. 대서양 건너편에 있는 미국은 한겨울 ‘폭탄 사이클론’으로 홍역을 치렀다. 아프리카 동부에서는 5년째 심각한 가뭄이 이어지고 있지만 파키스탄에서는 역대급 홍수로 국토의 3분의 1이 물에 잠겼다. 지구온난화가 불러온 기상이변이라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지구온난화는 이미 일상생활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구의 온도가 더 올라가면 해수면 상승, 전염병 확산, 농작물 재배 급감 등으로 인류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될 수 있다. 그래서 200여 개국은 파리협정을 맺고 1850∼1900년 대비 지표면 온도 상승 폭을 1.5도 이내로 줄이기로 하고 국가별로 2030년에 도달할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를 설정한 뒤 탄소 배출을 줄여왔다. ▷하지만 유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가 20일 만장일치로 승인한 제6차 종합보고서를 보면 인류의 온실가스 감축 노력은 온난화의 심각성에 비춰 볼 때 크게 미흡한 수준이다. 이번 세기 내 온도 상승 폭이 1.5도를 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세계 각국이 NDC를 높여 잡지 않으면 2100년에는 지표면 온도 상승 폭이 최고 3.4도까지 높아질 것이란 예상이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이에 대해 “인류는 살얼음판 위에 서 있고, 그 얼음판은 빨리 녹고 있다”고 절박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정부가 21일 발표한 탄소중립 로드맵에는 이 같은 위기의식이 보이지 않는다. 이전 정부가 설정한 대로 2030년까지 국내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대비 40% 줄이되 산업 부문 감축목표는 14.5%에서 11.4%로 줄여 부담을 줄여주고 나머지는 미래 기술과 국제 협력에 의존한다는 내용이다. 특히 눈길이 가는 대목은 감축 시간표다. 이번 정부 내에는 전체 목표량의 25%만 감축하고 나머지 75%는 다음 정부의 숙제로 넘겼다. ▷지난 정부가 원래 감축 목표였던 26.3%를 갑자기 40%로 끌어올린 것도 무책임하지만, 정책의 연속성을 고려하지 않고 감축 의무를 다음 정부로 떠넘긴 정부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실현 가능성을 충분히 숙고하지 않고 무리한 목표를 덜커덕 국제사회에 제시한 전 정부나, 다음 정부에 ‘폭탄’을 떠넘긴 현 정부나 온난화의 심각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1960년대 일본 문학계에서는 ‘엄청난 재능을 지닌 작가가 나타나서 작가 지망생들이 붓을 꺾었다’는 말이 돌았다. 그 주인공이 199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에 겐자부로다. 1950년대 후반 등단해 ‘만연원년(万延元年·1860년)의 풋볼’ 등 세계적 명작들을 남긴 그가 타계했다고 일본 언론이 13일 전했다. 오에를 추모하는 이들은 대문호로서의 명성 못지않게 ‘일본의 양심’으로 그를 기억한다. ▷“일왕이 사람의 목소리로 말한다는 것에 놀랐고 실망했다.” 오에는 1945년 8월 15일 라디오로 일왕의 항복 선언 연설을 들었던 순간을 이렇게 기억했다. 1935년 태어나 군국주의 교육을 받았던 그는 어릴 적 “일왕은 신비한 하얀 새와 비슷할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런데 일제의 패망과 함께 일왕 역시 사람임을 깨달은 것이다. 당시 느꼈던 충격과 미 군정 체제에서 경험한 민주주의가 오에의 세계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958년 소설 ‘사육’으로 일본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최연소 수상하며 필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63년 아들이 중증 장애를 안고 태어나면서 그의 삶은 크게 바뀐다. 낙담한 오에는 생후 한 달 된 아들을 병원에 놔둔 채 히로시마로 떠났다. 하지만 원폭 피해자들을 돌보던 의사에게서 ‘아픈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말을 듣고선 “너무나 부끄러웠다”고 미 뉴요커와의 인터뷰에서 회고했다. 도쿄로 돌아와 아들을 돌보며 쓴 소설 ‘개인적 체험’ 등은 그의 대표작이 됐다. 그는 “아들과 공동 집필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오에는 평소 조용하고 배려심이 깊은 인물이었다. 한국인들이 자택으로 찾아온다고 하면 문패 위에 한글로 이름을 써서 붙여놨을 정도였다고 윤상인 전 서울대 교수는 전했다. 하지만 폭력, 특히 국가의 폭력에는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에세이에서 “권력이 쌓아올리는 사실에 대해서는, 민주주의적으로 저항하는 목소리를 한결같이 계속 내는 길밖에 없다”고 썼다. 그리고 이를 실천으로 옮겼다. ▷오에는 “일본은 아무리 사죄해도 충분하지 않을 만큼 엄청난 범죄를 한국에 저질렀다”며 지속적으로 일본 정부에 사과를 요구했다. 그는 신사참배에 반대하고, 일왕이 주는 문화훈장을 거부했다는 이유 등으로 극우세력에게서 살해 위협을 받기도 했다. 협박 전화가 너무 많이 와서 지인들과는 전화 대신 팩스로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는 노년까지 집회에 참여해 “평화헌법을 지켜야 한다”고 호소했다. 원칙과 신념을 굽히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준 일본의 지식인이 또 한 명 귀천했다는 소식이 안타깝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법정에 걸린 초상화부터 치우세요.” 아내와 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앨릭스 머독 변호사에 대한 공판 절차가 시작되기 전 판사가 직원들에게 지시했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앨릭스의 할아버지인 랜돌프 머독 주니어였다. 100년 이상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남부 일대에서 법조계의 왕처럼 군림해온 머독 가문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한 법원의 상징적 조치였다. 치열한 법정 공방 끝에 3일 앨릭스에게 종신형이 선고됐다. ▷“이 동네에선 머독 일가가 법이었고 때로는 법 위에 있었다.” 햄프턴 카운티의 한 주민이 방송에서 증언한 내용이다. 머독 가문은 앨릭스의 증조부부터 아버지까지 3대에 걸쳐 86년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카운티 5개를 관할하는 검사장을 맡았다. 선출직인 미국의 검사장은 해당 지역 범죄의 기소 여부를 전적으로 결정하는 막강한 권한을 갖는다. 머독 가문은 오랫동안 검사장직을 세습하며 법원과 경찰까지 좌지우지했다. 미국 한복판에 ‘머독 왕국’을 건설한 셈이다. ▷대형 로펌을 운영하는 데다 가문의 후광을 등에 업은 앨릭스 역시 이 지역에서 영향력이 컸다. 2019년 아들 폴은 술을 마신 채 보트를 몰다 다리와 충돌해 동승한 여성을 숨지게 했는데도 체포되지 않았다. 폴의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앨릭스가 동승자들을 회유하고 경찰을 압박했다는 의혹이 무성했다. 2018년 앨릭스의 집에서 가정부가 갑자기 숨진 사건은 부검도 없이 단순 실족사로 마무리됐고, 유족에게 돌아가야 할 보험금까지 앨릭스가 챙겼다. 법 기술과 권력을 동원해 사법 시스템을 무력화시켰다는 비판이 들끓었지만 그의 위상은 건재했다. ▷2021년 6월 아내와 폴을 살해할 때에도 앨릭스는 법망을 피할 수 있으리라 믿었을 것이다. 법률과 수사 절차에 해박한 그는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범행에 사용된 총기 등은 발견되지 않았고, 목격자도 없었다. ‘사건 당시 치매를 앓는 어머니와 함께 있었다’는 알리바이도 제시했다. 하지만 사건이 벌어지기 직전 폴이 찍은 동영상에 앨릭스의 목소리가 담겨 있는 것이 확인됐다. 그의 거짓말이 들통나면서 유죄 판결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팩트 앞에서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던 것이다. ▷검찰은 앨릭스가 거액의 회사 자금을 횡령한 혐의로 수사선상에 오르자 여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런 끔찍한 일을 벌였다고 밝혔다. 당초 그가 회삿돈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마약성 진통제를 구입하는 데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범죄를 다른 범죄로 계속 덮을 수는 없는 일이다. 언젠가는 죗값을 치를 수밖에 없다. 철옹성 같았던 법조계 명문가의 몰락이 어느 누구도 여기에서 예외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은퇴하는 직장인에게 퇴직금은 최후의 보루이지만 그리 넉넉하지는 않다. 지난해 한국 직장인 평균 연봉인 4204만 원을 기준으로 했을 때 30년간 일한 뒤 받을 퇴직금은 1억 원 정도다. 그런데 화천대유에서 대리와 과장으로 단 6년 일한 곽상도 전 의원 아들 병채 씨는 성과급 명목으로 50억 원의 퇴직금을 챙겼다. 곽 전 의원의 뇌물 혐의에 대해선 무죄가 선고됐다. 시민들은 허탈함과 분노를 감추지 못한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납득이 안 된다”고 비판하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이른바 ‘정영학 녹취록’에는 김만배 씨가 “병채 아버지는 돈 달라 하지, 병채 통해서. 며칠 전에도 2000만 원”이라고 말했다는 대목이 있다. 곽 전 의원이 아들을 통해 돈을 요구했다는 취지의 전언(傳言)이다. 녹취록이 아니더라도 대장동 개발 민간업자들이 별 이유 없이 일개 사원에게 퇴직금 50억 원을 줬다고 여길 사람은 없다. 국회의원인 아버지를 봐서 준 돈이라는 의심이 드는 게 당연하다. ▷검찰은 화천대유가 하나은행과 컨소시엄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곽 전 의원이 힘을 써준 대가로 의심했다. 그런데 언제, 누구에게 청탁했는지를 끝내 입증하지 못해 알선수재는 성립되지 않았다. 남은 것은 뇌물 혐의였다. 곽 전 의원이 국민의힘 부동산특위 위원으로 활동했던 만큼 대장동 개발과 직무 관련성이 있다는 점은 법원도 인정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법원은 “병채 씨가 독립해 생계를 유지했다”며 곽 전 의원에 대한 뇌물은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한 법조인은 “유력 인사들에게 ‘직접 100억 원을 받을래, 아니면 자녀에게 50억 원을 줄까’라고 묻는다면 모두 후자를 택할 것”이라고 했다. 법망을 피하기 쉽고 세금 문제도 해결돼서다. 병채 씨가 받은 50억 원의 실체가 모호했다면 아버지에게 줄 돈을 아들에게 전달해 일종의 ‘우회 증여’를 한 게 아닌지 의심해보는 게 합리적이다. 그러나 검찰은 이 부분을 파고들지 않았다. 법원 역시 “성과급 50억 원은 지나치게 많다”면서도 ‘왜’라는 부분에 대해선 언급이 없었다. 세간에선 “신종 편법 증여 수단”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국민 법감정과 크게 괴리된 판결이 나왔다는 것은 어디엔가 허점이 있었다는 얘기다. 곽 전 의원은 검사 20년에 대통령민정수석까지 지낸 수사 베테랑이다. 물증을 들이대도 빠져나갈 길을 찾을 텐데 검찰이 제시한 증거는 대부분 녹취록과 진술이었다. 법원 역시 법리에만 매달리다 상식과 동떨어진 판결을 내놨다. “검사도 판사도 못 믿겠다”는 비판이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항소심에서는 검찰과 법원 모두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이른 아침 울리는 알람을 꺼주기 위해 아버지는 딸의 방에 들어갔다. 그런데 아홉 살 제시카는 방에 없었다. 잠깐 밖에 나갔으려니 생각했지만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경찰에 신고해 대대적인 수색이 진행됐다. 2005년 2월 24일 미국 플로리다주의 한적한 마을에서 벌어진 일이다. 제시카는 실종 20여 일 만에 집 근처 숲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제시카를 납치해 성폭행한 뒤 산 채로 묻은 범인은 40대 이웃 주민이었다. 그는 이전에도 미성년자 성추행으로 2차례 체포된 전력이 있었지만 당시 성범죄자 관리 시스템은 허술했다. 여론의 분노에 아동 성범죄자는 학교나 공원에서 2000피트(약 600m) 안에 살지 못하게 하는 등 내용의 ‘제시카법’이 40여 개 주에서 제정됐다. 법무부는 올해 중점 과제 중 하나로 한국판 제시카법을 추진하기로 했다. 아동 성범죄자, 상습적 성범죄자 같은 ‘괴물’들이 출소 이후 학교, 유치원, 어린이집에서 최대 500m 이내에 거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부모와 아이들의 걱정을 조금 덜어줄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 해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전자발찌를 착용한 성범죄자의 재범 장소를 보면 주거지 500m 이내가 절반 정도였고, 나머지는 더 먼 곳에서 발생했다. 미국에서는 거주 제한이 성범죄 재범 방지에 큰 효과가 없다는 연구 결과도 나온다. 보다 실효적인 수단들이 있다. 아동 성범죄자에 대한 형량을 높이는 것 외에도 출소 이후 별도의 시설에 격리해서 지내도록 하는 보호수용제를 고려할 수 있다. 대상을 엄격하게 선별하고 시설의 편의성을 향상시킨다는 점에서 2005년 폐지된 보호감호제와 차이가 있다.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에서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병적으로 아동에게 집착하는 성범죄자는 완치될 때까지 기간 제한 없이 입원시키는 방법도 있다. 한국에서도 2014년 법무부가 보호수용제 도입을 시도한 적이 있다. 하지만 헌법상 거주·이전의 자유를 침해하고 이중처벌 금지에 위배된다는 반론에 부딪혀 무산됐다. 현재 추진 중인 제시카법 제정과 치료감호제 강화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유로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는 성범죄자의 인권과 잠재적 피해자가 보호받을 권리 사이에서 충돌이 빚어질 때 어느 쪽에 무게를 둘 것인가의 문제다. 성범죄자도 헌법상 권리는 보장받아야 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헌법에는 공공복리 등을 위해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 범죄의 특수성과 피해의 정도를 감안해서 따져봐야 할 사안이다. 성폭력은 영혼을 파괴하는 범죄다. 어린 나이에 끔찍한 일을 겪으면 그 상처가 더 깊다. 피해자들은 평생 동안 고통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호소한다. 그래서 아동 성범죄를 ‘영혼 살인’이라고 부른다. 서방 국가들의 인권 의식이 낮거나 형사사법의 수준이 떨어져서 아동 성범죄자를 엄벌하고 출소 이후에도 격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이들이 성범죄로부터 안전하게 생활할 권리는 법전에 적을 필요조차 없을 만큼 당연하고 필수적인 것이다. 그만큼 국가는 강력한 의무를 지고 있다. 정부와 국회가 가장 적극적인 방식으로 추진해야 할 일이다. 기준을 엄격하게 정하고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논의는 필요하다. 하지만 한 명의 피해자라도 더 줄이기 위해서는 속도가 중요하다. 올해에만 1500명이 넘는 미성년 대상 성범죄자가 출소해 누군가의 옆집에 살게 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지난달 말 실시된 특별사면 대상자 중에는 우병우 전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이 포함됐다. 그는 국정농단을 막지 못한 것 등 다양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지만 대부분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정작 유죄가 인정된 부분은 국정원에 이석수 전 특별감찰관(특감)의 사찰을 지시한 혐의였다. 이 전 특감이 우 전 수석 아들의 병역 보직 특혜 의혹 등에 대해 감찰에 착수하자 이 전 특감 관련 정보를 모으라고 시켰다는 것이다. 2014년 특감이 신설됐을 때 ‘살아있는 권력을 상대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감찰 대상인 ‘대통령 배우자 및 4촌 이내 친족, 대통령실 수석 이상’에 맞서기에는 역부족 아니냐는 취지였다. 하지만 이 전 특감은 당시 실세였던 우 전 수석을 견제했고, 미르재단 등에 대해선 내사를 진행했다. 결과적으로 박근혜 정부 몰락의 서곡을 울린 셈이 됐다. 그런 자리가 2016년 9월 이 전 특감 사퇴 이후 8년째 공석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정치권의 속내를 짐작할 만한 단서가 몇 가지 있다. 지난해 5월 대통령실은 “민정수석실 폐지 등 이전 정권과 여건이 달라졌다”며 특감 임명에 부정적인 입장을 밝힌 적이 있다. 비판이 제기되자 대통령실은 ‘국회가 추천하면 임명하겠다’고 물러섰다. 하지만 여당은 특감과 북한인권재단 이사를 동시에 임명하자고 제안했다. 더불어민주당이 반대하는 사안과 연계시킨 것은 시간을 끌겠다는 뜻으로 비친다. 과반 의석을 가진 민주당 역시 적극적이지 않다. 지난 정권 내내 특감을 공석으로 뒀다가 이제 와서 추천을 강행한다면 계면쩍은 일일 것이다. 훗날 민주당이 집권할 때를 생각해 모호한 자세를 취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민주당의 태도를 납득하기는 어렵다. 지난해 8월 당시 우상호 비대위원장이 “특감 없이 김건희 여사가 계속 사고 치는 게 더 재미있다”고 한 것이 본심일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정치권과 법조계에선 공수처가 있는데 굳이 특감이 필요하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공수처의 수사 대상에는 특감의 감찰 대상이 모두 포함돼 있다. 그런 만큼 사정기관을 중복 운용하는 것보다 공수처를 강화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취지다. 반면 대통령 주변의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선 역할이 다소 겹치더라도 이중삼중으로 그물을 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공수처가 여전히 역량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어느 방향이든 각 정당은 명확하게 의견을 밝히고, 제대로 논의해 하루빨리 결론을 내야 한다. 현 상황은 ‘국회는 특감 후보자 3명을 추천하고, 특감 결원 시 30일 안에 후임자가 임명돼야 한다’는 특감법 위반이기 때문이다. 법을 만들고 시행하는 대통령과 국회가 위법을 방치해서야 되겠나. 더욱이 정치권이 손을 놓은 사이에 혈세가 새고 있다. 특감이 없는 특감 사무실과 직원을 유지하기 위해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95억 원가량이 쓰였고, 올해도 약 10억 원이 배정됐다. 무시해도 될 만큼 작은 액수가 아니다. 특감은 놔둘 수도 없앨 수도 없는 ‘계륵’이 아니다. 특감법이 있고 예산이 있는 한 반드시 임명해야 하고, 수명이 다했다고 여야가 판단한다면 법을 폐지해 세금 낭비를 막아야 하는 것이다. 서로 책임을 떠넘기면서 시간만 보낼 일이 아니다. 법을 지키고 세금을 귀하게 쓰는 것보다 중요한 정치권의 책무는 없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판결문은 마지막 물기 한 방울까지 짜낸 메마른 문장”이라고 판사들은 말한다. 부사나 형용사의 사용을 최대한 제한하고 주어, 목적어, 서술어 위주로 명확하게 써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기망하다(속이다)’, ‘불상(알 수 없는)’ 등 법률용어까지 곳곳에 들어간다. 그래서 잘 읽히지 않고 이해하기도 어렵다.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는 장애인들에겐 판결문의 벽이 더욱 높다. ▷보통 행정·민사재판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할 때 판사는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최근 서울행정법원 행정11부가 한 선고는 달랐다. 원고가 청각장애인인 소송에서 선고를 하면서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판결문에도 그대로 적혔다. 평상시 잘 쓰이지 않는 ‘기각’이라는 단어를 수어로 통역하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해 원고가 판결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재판부가 배려한 것이다. ▷‘쉬운 말로 요약한 판결문의 내용’이라는 제목으로 별도의 챕터가 포함된 것도 이 판결문의 특징이다. “원고와 다른 지원자들의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모두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다고 판단했습니다”라는 식으로 쉽게 존댓말로 설명했다. 이 재판의 쟁점은 원고가 취업 면접에서 수어 통역으로 의사소통을 하느라 시간에 손해를 봤는지 여부였는데, 그렇지 않다는 내용이다. 쉽게 납득할 수 있도록 삽화까지 첨부했다. 이처럼 구어체 문장과 그림 등을 이용해 장애인의 이해를 돕는 ‘Easy Read’ 방식의 판결문이 나온 것은 처음이다. ▷난해한 판결문은 장애인들에게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대법원 예규는 “판결문은 되도록 쉬운 단어를 사용하고 문장은 짧게 작성하라”고 권고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가사(가령)’, ‘불비(못 갖춤)’, ‘경료됐다(마쳤다)’ 같은 낯선 표현이 판결문에서 툭툭 튀어 나온다. A4 용지 한 장이 넘는 긴 문장이 등장하기도 해 ‘판결문 읽다 숨넘어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렇다 보니 법조인이 아닌 사람들은 판결문을 읽다가 누가 뭘 했다는 것인지, 왜 이런 결론이 나온 것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판결문에는 단 한 글자의 실수도, 오독(誤讀)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외계어 판결문’을 계속 써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판결문은 독백이 아니라 대화”(박형남 ‘법정에서 못다 한 이야기’)라고 했다. 재판의 당사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작성돼야 한다는 취지다. 엄밀하면서도 쉬운 판결문을 쓰는 것은 정성과 노력이 필요한 어려운 일이다. 그렇더라도 ‘국민에게 다가가는 사법부’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가야 할 길이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사정 컨트롤타워나 옛날 특감반 이런 거 있죠? 그런 거 안 하고. 사정은 사정기관이 알아서 하는 거고….” 5월 27일 윤석열 대통령이 출근길 문답에서 한 말이다. 특감반은 청와대에 있던 공직감찰반의 옛 이름인 특별감찰반의 줄임말이다. “대통령비서실의 사정, 정보조사 기능을 철저히 배제하겠다”며 민정수석실을 폐지하고 공직감찰반을 없앤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취임한 지 불과 7개월 만에 공직감찰반 부활 논란이 일고 있다. ▷공직감찰반은 공직자들에게 ‘저승사자’로 불렸던 곳이다. 경찰, 검찰, 국세청 등에서 파견된 멤버들이 대통령 친인척과 고위공직자의 비리 정보를 수집하고 혐의가 짙으면 수사기관으로 넘겼다. 그 뿌리는 박정희 정부에서 미국 연방수사국(FBI)을 표방하며 1972년 설치한 치안본부 특별수사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태우 정부에서는 경찰청 조사과로 소속이 바뀌었고 ‘사직동팀’으로 불렸다. 노무현 정부 들어서 2003년 청와대 내에 정식으로 특별감찰반이 설치돼 15년간 이어지다 이름이 변경됐다. ▷은밀하게 이뤄지던 감찰반의 실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은 2018년 말이었다. 당시 특감반원이었던 김태우 검찰 수사관은 ‘민영기업인 공항철도 임직원에 대한 비위 조사를 지시받았다’고 폭로했다. 민간인 사찰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그가 작성한 첩보 보고서 목록 중에는 전직 총리 아들의 사업 현황, 민간은행장 동향 등과 관련된 내용도 있었다. 또 당시 조국 민정수석이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에 대한 감찰을 무마한 혐의로 나중에 기소되는 등 감찰을 둘러싼 복마전도 벌어졌다. ▷정부는 공직감찰반의 기능을 대통령실 대신 국무총리실에 두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총리실 산하에는 공직기강을 담당하는 공직복무관리관실이 있는데, 이 조직을 보강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공직감찰반 부활은 아니다”라고 밝혔지만 두 조직은 공직자의 비리를 감찰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성격이 비슷하다. 공직복무관리관실의 전신인 공직윤리지원관실이 민간인 사찰로 물의를 빚은 전력이 있다는 점도 공직감찰반과 닮았다. 감찰은 총리실에서 하더라도 그 내용은 결국 대통령실과 공유될 수밖에 없다. ▷본래 공직자에 대한 감찰은 독립기관인 감사원이 할 일이다. 대통령 친인척 관리가 문제라면 6년 넘게 공석인 특별감찰관을 임명하면 된다. 여기에 대통령 친인척 및 고위공직자 비리 수사를 전담하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도 있다. 공직비리 척결에 반대할 사람은 없겠지만 지금 있는 기관들을 활용하는 것이 먼저다. 기껏 없앤 옥상옥(屋上屋)을 소속을 바꿔 다시 만드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최근 광화문의 한 서점에 들렀더니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한 발언을 묶은 책이 진열대의 잘 보이는 곳에 놓여 있었다. 한 장관이 했던 말을 손으로 필사해 볼 수 있도록 구성된 책도 나란히 팔리고 있다. 취임한 지 7개월 지난 현직 장관의 어록이 출판된 것은 전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한 장관의 말이 그만큼 세간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한 장관은 전 정부에서 서울중앙지검 3차장, 대검 반부패강력부장을 지내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수사 이후 한직을 전전했다. 그랬던 그가 올해 4월 일약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되자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됐다. 초기에는 윤석열 대통령과 가까운 사이라는 점에서 조명을 받았지만, 이후 한 장관이 더욱 주목받게 된 데에는 말의 힘이 컸다. 한 장관은 법적으로 복잡한 사안을 쉽고 선명하게 표현한다. 그는 취임사에서 “할 일을 제대로 하는 검찰을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범죄자뿐”이라고 말했다. ‘검수완박법’ 등을 통해 검찰의 권한이 축소되는 것에 대한 항변이다. 전 정부에서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을 없앤 것을 놓고는 “잠재적 범죄자들에게 범죄에 가담할 용기를 주는 것”이라고 했다. 배경 지식이 없는 사람의 귀에도 쏙 들어오기 때문에 호소력이 높다. 이런 언변에 공격성이 가미되면 파괴력이 배가된다. 한 장관은 상대의 발언이나 전력을 끌어와서 반격하는 화법을 종종 구사한다. 법무부 장관을 지낸 민주당 박범계 의원이 현 정부에서 검찰총장 임명 전 검찰 인사가 이뤄진 부분을 지적하자 “의원께서 장관으로 있을 때 검찰 인사를 (총장을) 완전히 패싱하시고”라고 맞받아치는 식이다. 듣는 이의 감정을 자극하는 방식이다. 본인을 대상으로 한 공격에는 대응 수위가 한층 높아진다. ‘청담동 술자리 의혹’을 제기한 김의겸 의원에 대해선 “매번 입만 열면 거짓말”이라고 했다. 한 장관이 마약 수사를 강조한 것이 결과적으로 이태원 참사의 한 원인이 됐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황운하 의원을 향해서는 “직업적인 음모론자”라고 쏘아붙였다. 두 의원을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이런 거친 표현은 정치의 영역에서는 쓰일지언정 각료의 언어로서는 부적절하다. 각료는 정부의 부처를 대표하는 자리라는 점에서 개인인 정치인과 다르다. 특히 ‘검찰 사무의 최고 감독자’인 법무부 장관의 언행은 신중을 요한다. 할 말을 하더라도 절제된 방식이어야 한다. 더욱이 한 장관은 시민들에게 현 내각의 핵심 인물로 여겨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한 장관의 말 한마디가 검찰과 법무부, 나아가 정부 전체에 대한 여론의 평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 한 장관이 최근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과 관련한 문재인 전 대통령 조사 가능성을 놓고 “헌법과 법률을 초월하는 의미의 통치 행위라는 것은 민주국가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아슬아슬하다. 원론적 표현이라고 하기에는 말 속에 뼈가 담겨 있다. 수사상 필요에 따라 검찰이 결정하면 될 일인데, 한 장관이 언급함으로써 야당에 “사실상 수사 지휘”라는 비판의 빌미를 준 결과가 됐다. 고위 검사 출신의 한 중견 법조인은 “한 장관의 발언을 들으면 시원하지만 이제 톤을 조절할 때가 된 것 같다”고 평했다. 말에는 양면성이 있다. 가시 돋친 말은 상대를 다치게 하는 것을 넘어 자신에게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기 십상이다. ‘설시참신도(舌是斬身刀)’라는 중국 중세의 지략가 풍도(馮道)의 지적은 지금도 새겨들을 만하다. 혀는 자신의 몸을 베는 칼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