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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체를 운영하는 김모 씨(53)는 최근 집에 쌓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자가검사키트 처분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던 2월 20개들이 세트를 약 16만 원에 구매했는데, 지난달 가족 4명 모두가 확진돼 남은 키트 15개가 필요하지 않게 됐기 때문. 김 씨는 “가장 비싸고 구하기 어려울 때 키트를 샀는데 지금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개당 2000원 안팎에 거래되고 있는 걸 보고 놀랐다”고 했다. 최근 코로나19 확진자가 줄고 정부의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해제되면서 사재기했던 코로나19 방역 관련 용품이 애물단지로 전락한 경우가 적지 않다. 온라인 중고거래 사이트에는 자가검사키트를 무료로 나눠주거나 헐값에 처분하겠다는 판매글이 잇달아 올라오고 있다. 15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자가검사키트를 개당 2500원에 판매한다’는 글이 올라왔다. 현재 온라인 판매 금지라는 점을 고려해 ‘교환할 물건을 제시해 달라’는 글도 게시됐다. 정부 관계자는 “원칙적으론 자가검사키트 온라인 판매가 금지돼 있지만 물물교환까지 단속하는 건 검토가 필요하다”고 했다. 2월 중순까지 개당 3만 원 넘는 가격에 거래됐던 자가검사키트는 공식 판매처인 편의점과 약국에서 최근 개당 5000원에 판매된다. 그나마 찾는 사람이 적어 일부 판매처에서는 여러 개를 사면 덤을 주기도 한다. 조만간 온라인 판매가 재개되면 가격은 더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야외 마스크 의무 착용 조치가 곧 해제될 수 있다는 정부 발표 때문에 쟁여놨던 마스크를 헐값에 처분하는 경우도 늘었다. 최근 중고거래 사이트에서는 포장을 개봉하지 않은 보건용 마스크(KF94)가 장당 100∼200원, 덴털 마스크는 장당 50원 안팎에 거래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KF94 마스크 가격은 2020년 2월 4482원까지 올라 최고치를 찍었는데 95% 이상 가격이 하락한 것이다. 박종한 웰킵스마스크 대표는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되면 수요가 감소해 저가형 마스크 생산 업체부터 생산을 중단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18일부터 마스크 착용을 제외한 사회적 거리 두기 조치를 모두 해제하면서 체온감지기와 손소독기 등 방역 설비를 중고로 파는 자영업자도 늘었다. 서울 중구에서 한식집을 운영하는 권명희 씨(50)는 “거리 두기 해제로 좌석 사이 칸막이와 QR코드 인증장치를 한쪽에 치워뒀는데 어떻게 처분할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유채연 기자 ycy@donga.com남건우 기자 woo@donga.com}
“예약 문의가 몰려 향후 2주 치 예약이 벌써 꽉 찬 상태예요. 재료 주문을 50% 늘리고, 직원 채용 공고도 올려뒀습니다.” 서울 용산구에서 테이블 18개 규모의 술집을 운영하는 김영규 씨(43)는 18일부터 다음 날 오전 2시까지 영업하기로 했다며 동아일보 기자에게 이같이 말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25개월간 이어진 사회적 거리 두기가 18일 사라진다. 김 씨를 비롯한 자영업자들은 ‘자유의 날’을 하루 앞둔 17일 늘어날 손님을 맞이할 준비에 분주한 모습을 보였다.○ 희망 품은 자영업자들…단체 활동도 기지개단체 손님 위주로 영업하던 업소들은 이어지는 예약 문의에 활기찬 모습이다. 경기 가평군에서 펜션을 운영하는 김모 씨(40)는 동아일보 기자에게 “회사 워크숍에, 대학생 엠티(MT)까지 단체 예약이 가능한지 묻는 전화를 오늘만 10통 정도 받았다. 지난 2년 동안 너무 힘들었는데 이제야 조금씩 숨통이 트일 것 같다”고 환영했다. 경북 경주시에서 유스호스텔을 운영하는 박모 씨(41)도 “그동안 정말 ‘나 죽었다’ 하고 있었다”며 “(거리 두기 해제 소식 이후) 9월에 수학여행이 가능한지 묻는 전화가 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간 심야 영업을 하지 못했던 ‘24시간 영업장’도 원상 복귀 움직임이 분주하다. 서울 송파구의 한 볼링장을 운영하는 A 씨는 “그동안 손해가 엄청났는데, 18일부터 24시간 영업을 하기로 했다”며 “야간에 일할 직원도 세 명 뽑아뒀다”고 했다. 경기 하남시에서 헬스장을 운영하는 B 씨는 “회원들로부터 24시간 영업을 언제부터 하느냐는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았다”며 “앞으로 24시간 영업을 지속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은 아이들이 고대했던 야외 단체 활동을 다시 시작할 예정이다. 광주에서 어린이집 교사로 일하는 박모 씨(48)는 “2년 만에 체험학습을 다시 하려고 전남 담양군 딸기농장을 예약해뒀다”며 “밖으로 나간다니까 아이들이 정말 좋아한다”고 했다. 다만 일각에선 ‘귀가 전쟁’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경기 수원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정모 씨(27)는 “서울에서 수원 가는 버스가 밤 12시면 끊겨 대체 교통수단이 마땅치 않다”며 “막차 시간을 1시간이라도 늘려주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서울시는 일단 지하철 막차 시간 연장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서울시 관계자는 “얼마 전 심야버스 노선을 확대한 데 이어 현재 자정인 지하철 막차 시간을 연장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했다.○ 거리 두기 해제 시점 두고 혼선도사회적 거리 두기 해제 시점을 두고 방역당국과 지방자치단체의 안내가 달라 혼선이 빚어지기도 했다. 김부겸 국무총리는 15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를 주재하면서 “현재 밤 12시까지인 다중이용시설 영업시간 제한과 10명까지 허용되던 사적모임 인원 제한을 다음 주 월요일(18일)부터 전면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지방자치단체들은 그동안의 경험에 비춰 18일 0시부터 해제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카드 뉴스 등을 제작해 홍보에 나섰다. 하지만 방역당국은 이후 기자단 질의응답 과정에서 “(식당 카페 등의) 운영시간 제한 조치는 18일 오전 5시까지 적용된다”고 밝혔다. 지자체 공지와 달라 혼선이 빚어지면서 17일 밤 영업을 준비했던 자영업자들은 불만을 쏟아냈다. 자영업자 커뮤니티에는 “17일 밤샘 영업을 하려고 했다가 김샜다” “18일 오전 5시부터면 영업시간 해제는 19일부터라고 하는 게 맞는 거 아니냐”는 등의 글이 올라왔다.최미송 기자 cms@donga.com유채연 기자 ycy@donga.com남건우 기자 woo@donga.com}
선박용 경유와 섞어 만든 저질 경유 500만 L를 제조해 판 일당 50명이 경찰에 무더기로 붙잡혔다. 이들이 2년 동안 저질 경유를 팔아 남긴 부당이득은 15억 원에 이른다. 서울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는 2020년 초부터 지난해 말까지 선박용 경유를 일반 경유와 약 1 대 2의 비율로 섞어 전국 21개 주유소에서 판매한 일당을 석유사업법 위반 혐의로 최근 검거했다고 12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전남 여수시 인근 해상에서 유황 성분이 높은 선박용 경유 약 150만 L를 L당 400원에 불법 매입한 뒤 일반 경유와 섞어 저질 경유 약 500만 L를 제조한 혐의 등을 받고 있다. 이렇게 만든 저질 경유는 경기와 대구, 충북, 충남, 경북, 전북 등지의 주유소 21곳에서 L당 약 1400원에 판매됐다. 경찰은 압수한 저질 경유 13만 L를 폐기했지만 이미 대부분이 시중에 유통돼 이를 구매한 차주 등의 피해가 예상된다. 선박용 경유에는 일반 경유(10ppm 이하)의 최대 50배(500ppm)에 달하는 황 성분이 포함돼 미세먼지를 다량 유발한다. 저질 경유를 지속적으로 사용하면 자동차 배기 밸브에 황 성분이 쌓여 출력이 저하될 수 있다.남건우 기자 woo@donga.com}
경찰이 ‘가짜 경유’를 팔아 15억 원의 부당이익을 챙긴 일당 50명을 검거했다. 12일 서울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는 2020년 초부터 지난해 말까지 2년 동안 선박용 경유를 일반 경유와 섞어 전국 21개 주유소에서 판매하는 수법으로 약 15억 원의 이익을 남긴 일당 50명을 석유사업법 위반 혐의로 검거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붙잡힌 피의자들 중에는 공급과 알선, 유통, 탈색 등을 담당한 주범들을 비롯해 가짜 경유임을 알고도 판매한 주유소 운영자들도 포함됐다. 석유사업법에 따르면 가짜 석유제품을 만들거나 유통, 판매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억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경찰에 따르면 피의자들은 2년간 전남 여수시 인근 해상에서 유황 성분이 높은 선박용 경유 약 150만L를 L당 400원에 불법 매입한 뒤 일반 경유와 1대 2 비율로 섞어 가짜 경유 약 500만L를 만들었다. 붉은 색을 띠는 선박용 경유를 섞은 사실을 감추기 위해 전남 구례군의 한 유류 저장소에서 색을 희석하는 과정도 거쳤다. 이렇게 만든 가짜 경유는 경기와 대구, 충북, 충남, 경북, 전북 등에 있는 주유소 21곳에서 L당 약 1400원에 판매됐다.피의자들은 단속에 대비해 직접 거래하는 이가 아니면 서로 신원을 공개하지 않는 등 주도면밀한 모습을 보였다. 이로 인해 공급책은 판매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또 이들은 단속을 피하기 위해 인적이 드문 새벽 시간대 가짜 경유를 유통했다. 경찰은 검거 과정에서 압수한 가짜 경유 13만L는 폐기 처분하고, 1만L는 증거로 보관 중이다. 그러나 피의자들이 제조한 500만L 상당의 가짜 경유가 상당부분 시중에 유통돼 대기오염과 이를 구매한 차주의 피해가 예상된다. 선박용 경유에는 일반 경유(10ppm 이하)의 최대 50배(500ppm)에 달하는 황 성분이 포함돼 미세먼지를 유발하고 대기 환경에 악영향을 미친다. 또 선박용 경유를 지속 사용하면 자동차 배기밸브에 황 성분이 쌓여 출력이 저하될 소지도 있다. 경찰은 한국석유관리원 등 관계기관과 협업해 가짜 석유제품 단속을 강화할 방침이다.남건우 기자 woo@donga.com}
“(축제에 오니) 이제야 대학생이 된 것 같아요.” 2020년 경희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김수현 씨(21)는 11일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 서울캠퍼스에서 동아일보 기자에게 이같이 말하며 활짝 웃었다. 김 씨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과 거의 동시에 입학한 탓에 그동안 대학 축제를 즐겨 본 적이 없었다. 이날 경희대 총학생회가 ‘본관 벚꽃 문화제’라는 명칭으로 2019년 5월 이후 3년 만에 처음 봄 축제를 개최하자 친구와 함께 캠퍼스를 찾았다. 김 씨는 “입학 뒤 거의 비대면 수업만 듣다 보니 학교에 오고 싶었다. 축제로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걸 보니 이제야 진짜 대학 캠퍼스 같다”며 발걸음을 옮겼다.○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간 듯”코로나19 사태 탓에 2019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되거나 비대면으로만 개최됐던 대학가 봄 축제가 3년 만에 돌아오고 있다. 최근 방역당국의 거리 두기 지침 완화에 따라 대학가의 ‘위드 코로나’에 차츰 시동이 걸리는 분위기다. 취재진이 11일 서울의 대학 중 12곳의 축제 개최 여부를 확인해 보니 6곳이 이미 축제를 열었거나 5월까지 봄 축제를 열 계획을 갖고 있었다. 지난달 성균관대가, 이달 경희대가 축제를 열었고 다음 달에는 서울대와 한양대, 한국외국어대, 중앙대 등이 축제를 열 예정이다. 오경현 한국외국어대 총학생회장(22)은 “2020년 이후 입학한 학생들이 대학 분위기를 제대로 느끼지 못한 것이 아쉬워 (논의 끝에) 축제를 열기로 했다”며 “학생들 역시 ‘축제를 즐기고 싶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했다. 이날 낮 12시 경희대 본관 앞에 설치된 무대에서 동아리 공연이 시작되자 학생 등 200여 명이 모여 노래를 따라 부르고 박수를 쳤다. 경희대 행정학과 1학년 공선진 씨(19)는 “처음 축제를 경험하니 ‘청춘이 이런 거구나’ 싶다”라며 “방역도 중요하지만 학생들이 대학다운 분위기를 느끼도록 축제를 개최한 건 잘한 일”이라고 했다. 봉건우 경희대 총학생회장(24)은 “캠퍼스에서 축제를 즐기는 학우들을 보니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 감개무량하다”며 “지역 주민들도 축제 현장을 많이 찾았다”고 말했다.○ “방역 지침 준수 여부 모니터”축제 주최 측은 행사가 코로나19 확산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쓰고 있다. 현행 거리 두기 지침상 대학 축제에는 299명까지 모일 수 있다. 한양대 총학생회 관계자는 “정해진 인원 이상 모이지 않도록 지도하고, 지정된 곳에서 음식을 먹도록 하는 등 방역지침 준수 여부를 잘 살필 것”이라며 “축제 규모도 코로나19 사태 이전보다 줄일 방침”이라고 했다. 고려대, 연세대, 서강대, 이화여대, 홍익대, 서울시립대 등은 향후 코로나19 확산 상황 등을 고려하며 대면 봄 축제 개최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고려대 총학생회 관계자는 “축제 준비위원회에서 대면 개최 여부를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 서울시립대 총학생회 관계자는 “지난해 코로나19 등으로 투표율이 미달돼 총학생회 구성이 무산됐다”며 “이달에야 총학생회가 정식으로 선출돼 대학본부와 축제 개최를 협의 중”이라고 했다. 홍익대 관계자 역시 “이달 말 총학생회가 구성되면 관련 논의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전혜진 기자 sunrise@donga.com남건우 기자 woo@donga.com}
청와대 고위직을 사칭하며 서울경찰청장에게 전화를 걸어 인사를 청탁한 남성이 경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 6일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경찰서장급인 직위인 총경 인사를 앞둔 지난해 12월 최관호 서울경찰청장에게 한 남성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이 남성은 자신을 “청와대 실장”이라고 소개하더니 “A 경정을 총경 승진 명단에 포함시키라”고 말했다. 전화를 수상히 여긴 최 청장은 수사를 지시했다. 서울경찰청 반부패·공공범죄수사대의 수사 결과 전화를 걸었던 사람은 50대 남성으로 청와대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인물로 드러났다. A 경정은 지난해 12월 당시 서울 소재 경찰서 형사과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승진 대상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경찰은 전화를 건 남성이 A 경정과 여러 차례 연락한 것을 파악하고 올 2월 A 경정을 다른 경찰서 비(非) 수사 부서로 인사 조치했다.남건우 기자 woo@donga.com}
“병원에서 하는 신속항원검사도 5000원인데, 자가검사키트 하나에 6000원이 말이 되나요?” 광주에 사는 대학원생 정모 씨(25)는 자가검사키트 구입에 지난달에만 8만 원을 썼다. 아직 부모님에게 용돈을 받아 쓰는 정 씨에겐 큰 부담이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신규 확진자가 매일 수십만 명씩 나오다 보니 자가검사를 자주 할 수밖에 없다. 정 씨는 “공급이 안정됐다고 하는데 언제쯤 가격이 떨어질지 모르겠다. 당분간 다른 지출을 줄여서라도 검사는 계속할 생각”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코로나19 자가검사키트 판매가격을 개당 6000원으로 지정한 조치가 5일 해제되면서 약국과 편의점에서 자율적으로 가격을 정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날 동아일보가 서울 시내 약국과 편의점 10곳을 취재한 결과 기대와 달리 판매점 모두 기존 가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약사와 편의점 직원들은 “아직 가격을 조정할 계획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가격이 안 내리는 가장 큰 이유는 납품 가격 때문이다. 약국·편의점에 들어오는 가격이 낮아져야 판매 가격도 내리는데 아직 납품 가격은 종전 수준(3000원 내외)이다. 인건비와 마진도 고려해야 하는데 “손해를 보면서 팔 수는 없지 않으냐”는 게 판매점의 하소연이다. 또 병원에서 회당 5000원을 내고 신속항원검사를 받는 사람들이 늘면서 구매 수요도 줄었다. 찾는 사람이 적으니 가격 조정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이다. 남은 재고는 정부에 반품하면 되기 때문에 크게 손해 볼 일도 없다. 서울 마포구에서 약국을 하는 정모 씨(65)는 “다른 판매처에서 얼마에 파는지 좀 더 지켜본 후 필요하면 가격을 조정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따로 시간을 내 병원을 찾기 어려운 직장인과 소득이 적은 고령층, 장애인, 학생 등은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직장인 이호진 씨(31)는 “전문가용 신속항원검사와 달리 자가검사키트는 양성이 나와도 확진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가격이 더 비싼 게 이해가 안 간다”고 지적했다. 온라인 판매 규제를 풀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정부는 올 2월 사재기를 막기 위해 온라인 판매를 제한했다. 지난달 25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공급이 안정된 만큼 온라인 판매를 허용해야 한다”는 글이 올라왔다. 식품의약품안전처 관계자는 “앞으로 자가검사키트 가격이 내릴 것으로 예상된다”며 “온라인 판매 규제 해제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전혜진 기자 sunrise@donga.com남건우 기자 woo@donga.com}
최근 2년 동안 서울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수칙 위반으로 적발돼 자영업자 등에게 부과된 과태료가 총 1만7000여 건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적발 건수는 자치구별로 최대 200배 가까이 차이가 났다. 4일 국민의힘 김소양 서울시의원이 서울시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코로나19 확산이 시작된 2020년 2월부터 올해 2월까지 25개 자치구는 방역수칙 위반 1만7076건을 적발해 37억6060만 원의 과태료를 부과했다. 자치구별로는 강남구의 적발 건수가 2년간 4737건으로 가장 많았다. 반면 금천구는 적발 건수가 25건에 불과했다. 강남구의 인구는 금천구의 2.2배, 숙박·음식업소 수는 3.2배인데 적발 건수는 189배나 되는 것이다. 이를 두고 지자체의 적발 및 과태료 부과 기준이 지나치게 자의적이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방역단속 區마다 제각각… “영업뒤 직원들과 식사에도 과태료” 서울 자치구별 코로나 과태료 조사“적극 단속” “계도 위주” 방침 달라… 강남구, 인구 대비 단속건수 최다‘업소 수 최소’ 도봉구 적발건수 2위… 자영업자 “매출 줄었는데 과태료지원금 대상서도 빠져 고통 가중”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2년 동안 서울에서 부과된 방역수칙 위반 과태료 건수가 25개 자치구별로 크게 차이 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두고 각 구청의 단속 잣대가 고무줄이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적극 단속” vs “피해 고려 계도” 지방자치단체들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관내 시설의 방역지침 이행 여부를 점검하고 위반한 업주 또는 이용자에게 과태료를 부과해 왔다. 그런데 국민의힘 김소양 서울시의원이 서울시로부터 확보한 자료를 동아일보가 분석해 보니 서울의 경우 자치구별로 단속 건수가 최대 200배 가까이 차이가 났다. 강남구의 인구는 금천구의 2.2배, 숙박·음식업소 수는 3.2배인데 적발 건수는 189배인 것. 강남구 관계자는 “구청 차원에서 방역을 중요시하며 위반을 단속하다 보니 적발 건수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구별로 업소 수와 상권 활성화 정도가 다르다는 점을 감안해도 상당한 차이다. 도봉구의 경우 2019년 기준 숙박·음식업소 수(2814개)가 25개 자치구 가운데 가장 적었지만 1000명당 적발 건수는 6.6건으로 강남구(8.8건)에 이어 2위였다. 도봉구 관계자는 “경찰서와 협력해 주기적으로 순찰하고, 신고와 민원에도 적극 대응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동대문구(3.2건), 서대문구(2.8건), 마포구(2.6건) 등이 인구 1000명당 적발 건수 상위 3∼5위를 차지했다. 금천구(0.1건)를 비롯해 동작구(0.2건), 노원구(0.3건), 관악구(0.4건), 은평구(0.4건) 등은 하위 5개구에 속했다. 금천구 관계자는 “자영업자도 코로나19로 어렵다 보니 과태료 부과 대신 계도 위주로 단속을 진행했다”고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고무줄’ 과태료 처분을 수긍할 수 없다는 자영업자들의 목소리도 나온다. 소상공인연합회 관계자는 “일부 지역에선 영업시간이 끝난 뒤 직원들과 식사를 하다 과태료를 낸 자영업자도 있다”고 하소연했다.○ 업주 과태료 평균 100만 원과태료 부과 사유별로는 ‘모임 인원 제한 초과’가 1만2210건으로 가장 많았다. 이 밖에 ‘영업시간 제한 위반’ 3374건, ‘출입자명부 작성·마스크 착용·거리 두기·환기 소독 등 의무 위반’이 1492건 순이었다. 대상별로는 각종 점포와 시설 운영자(업주)가 2064건 적발됐다. 이들에게는 평균 102만7800원의 과태료가 부과됐다. 시설 이용자(손님)는 1만5012건 적발돼 평균 10만9190원의 과태료가 부과됐다. 구청은 방역수칙을 지키지 않은 업주에게 위반 횟수에 따라 과태료 150만∼300만 원을, 손님에게는 10만 원을 부과해 왔다. 업주 대상 과태료가 과도하다는 지적이 나오자 올 2월부터는 첫 위반일 경우 업주 과태료가 50만 원으로 하향 조정됐다.○ 방역지원금도 못 받아방역수칙 위반으로 적발되면 정부의 방역지원금 대상에서도 제외된다. 서울 강남구의 주점 사장 A 씨는 “지난해 가을 영업시간이 끝났음에도 술에 취한 손님이 나가지 않겠다고 우기는 동안 구청 공무원들이 단속을 나와 과태료를 부과받았다”고 했다. 이 때문에 올 2월 자영업자들에게 지급된 2차 방역지원금 300만 원도 못 받았다. A 씨는 “코로나19로 장사도 안 되는데 과태료를 내고 지원금까지 받지 못하니 악몽 같다”고 했다. 박성민 한국자영업중기연합회장은 “방역 위반이 잘한 일은 아니지만 과태료를 납부했는데 방역지원금 대상에서까지 제외하는 건 가혹한 처사”라고 말했다.남건우 기자 woo@donga.com}
한국 첫 가톨릭 사제인 김대건 신부(1821∼1846)의 유해로 보이는 물품이 온라인 중고 거래 사이트에 올라와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사실관계 파악에 나섰다. 교황청은 유해의 판매와 거래를 금지하고 있다. 27일 동아일보 취재 결과 중고 거래 플랫폼 ‘번개장터’에는 전날 한 판매자가 김대건 신부의 척추뼈가 담긴 유해함을 1000만 원에 판매한다는 글을 올렸다. 거래 지역은 서울 동작구였다. 판매자가 올린 원형 모양의 유해함 사진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척추뼈’ 등의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현재는 게시글이 지워진 상태다. 천주교 측은 진위 파악에 나섰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관계자는 “게시글에 올라온 사진의 유해함이 천주교 유해함 형태를 갖춘 건 맞다”며 “사실관계를 파악한 뒤 대응 방침을 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교황청 훈령에 따르면 ‘성인(聖人)’의 유해는 판매와 거래가 금지된다. 1984년 로마 교황청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된 김대건 신부는 지난해 탄생 200주년을 맞았다. 김대건 신부 유해는 국내 성당과 성지 등 약 200곳에 안치돼 있다. 유해 중 일부는 개인이 소장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천주교 측이 고발하면 위법성 여부를 검토할 방침이다.남건우 기자 woo@donga.com}
울진·삼척 산불 산불은 이달 4일 시작돼 213시간 43분 동안 산림 2만여ha(헥타르)를 태우는 막대한 피해를 내고 13일 꺼졌다. 울진군청과 산림청, 경북경찰청 등이 조사를 벌이고 있지만 산불이 발생한 정확한 원인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기자는 산불 발생 다음날인 이달 5일 산불 최초 발화지인 경북 울진군 북면 두천리를 찾았다. 도로변 야산 한쪽에 출입금지 테이프가 둘러져 있었고, 빨간색과 노란색 깃발이 여러 개 꽂혀 있었다.●최초 발화지 확정까지 걸린 4일 “빨간색 깃발은 불이 앞으로, 노란색은 불이 옆으로 흘러갔다는 의미입니다.” 산림청 산하 국립산림과학원 산불·산사태연구과의 권춘근 박사가 말했다. 권 박사는 울진군청, 한국산불방지기술협회 등 5명으로 이뤄진 팀과 함께 4일부터 나흘에 걸쳐 산불 발화지를 분석했다. 7년째 국립산림과학원에서 근무 중인 권 박사는 2007년부터 산불을 연구해온 산불 전문가다. 그는 2017년 3월 강원 강릉시 옥계면에서 발생한 산불 원인 조사 당시 최초 발화지 인근에서 과자 봉지와 음료수 병 등을 발견하고, 인근 폐쇄회로(CC)TV를 통해 피의자를 특정해 범인을 찾아낸바 있다. 최초 발화지는 산불이 지나간 현장에서 불길의 방향을 추적해 찾는다. 권 박사는 울진·삼척 산불 발생 당일 오후 두천리에서 먼저 낙엽이 전부 타버린 곳부터 찾았다. 불길이 지나간 곳에는 낙엽이 남아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어 산 아래위로 나 있는 불길의 흔적 속에서 돌과 바닥에 떨어져 있는 음료수 캔, 나무 등의 그을음을 살피며 불길의 방향을 분석했다. 불에 타지 않는 돌과 음료수 캔은 그을음이 진 곳이 불길이 흘러간 방향이고, 불에 타는 나무는 그을음이 진 반대편이 불길이 흘러간 방향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권 박사는 말했다. 이렇게 불길의 방향을 역으로 추적하면 최초 발화지가 나온다. 산불은 바람에 따라 일정 방향으로 진행되지만 최초 발화지의 경우 불이 여러 방향으로 흘러간 흔적을 남긴다. 이런 특징을 통해 권 박사는 현장에서 불의 방향이 앞, 뒤, 옆으로 혼재돼있는 가로 4m 세로 1m 가량 넓이의 최초 발화지를 확인했다.●카메라에 잡힌 4대의 차량 산불 원인을 분석할 때는 가능성이 낮은 원인부터 제거해나가는 소거법이 보통 활용된다. 울진 산불은 당일 낙뢰기록이 없었고, 주변에 소각 흔적이나 등산로도 없었다. 이에 따라 번개로 인해 발화했을 가능성이나 논밭둑 소각, 등산객으로 인한 실화일 가능성은 낮다고 산림당국은 보고 있다. 이달 16일 울진군청과 산림청, 경북경찰청, 국립과학수사연구원, 한국산불방지기술협회는 최초 발화지에서 합동 감식을 벌였다. 현장에서 불에 탄 흔적이 있는 투명한 플라스틱 물통이 발견됐다. 이에 따라 햇볕이 물통을 통과하면서 응집돼 불을 냈을 가능성도 거론됐다. 그러나 산림당국 관계자는 “겨울철이라 햇빛이 약한데다 그날 바람이 강하게 불어 불이 날 정도로 열이 축적됐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했다. 남은 것은 담배꽁초다. 최병암 산림청장은 이달 6일 브리핑에서 “길가에서 발화했기 때문에 담뱃불 등 불씨로 인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최초 발화지 건너편 야산에 설치돼있던 CCTV에는 본격적으로 연기가 피어오르기 전 10분 동안 4대의 차량이 지나간 모습이 확인됐다. 울진군청 측은 경찰의 협조를 얻어 운전자의 신원을 파악한 뒤 참고인 자격으로 이들을 조사했다. 그러나 당시 운전자들은 모두 “지나가기만 했을 뿐 담배꽁초 등을 버리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차량 블랙박스 영상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차주들은 영상 기록이 지워졌거나, 메모리카드를 빼놓은 상태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산불 원인의 증거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이들은 모두 피의자가 아닌 참고인 신분이다. 조사에도 한계가 있다. 현재까지 산불 원인으로 추정되는 담배꽁초는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울진군청 관계자는 “담배꽁초라도 있어야 DNA 등을 추출할 수 있다”고 했다. 울진군청은 차량 운전자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지속할 예정이다.●빠른 조사, 현장 보존이 산불 원인 규명의 핵심 원칙적으로 산불 원인 조사는 산불 진화가 완료된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이뤄진다. 산불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진화를 최우선에 두는 까닭이다. 산불이 진화된 지 사흘이 흐른 뒤에야 최초 발화지에서 첫 현장 합동 감식이 이뤄진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소수 인원이라도 최대한 빨리 원인 조사에 투입하는 게 원인 규명에 도움이 될 거라 강조한다. 권 박사는 “진화 작업과 동시에 원인 조사를 해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최초 발화지 추정 지역에서 불을 끌 때는 최대한 현장을 보존해야 한다는 교육을 소방대원과 진화대원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산불이 처음으로 발생한 현장 주변에 방화선을 구축해 현장 훼손을 최소화하자는 것이다. 권 박사는 “아무래도 진화 작업 중에 고압 살수를 하다보니 담배꽁초 같은 것은 찾기 어려운 경우가 적지 않다”며 “쉽지는 않겠지만 최초 발화지를 보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울진=남건우 기자 woo@donga.com}
[안인득 방화살인, 그 후 1068일의 기록]동아일보 디오리지널 페이지(https://original.donga.com/2022/jinju)를 방문해 보세요. 인터랙티브 효과가 결합된 다큐멘터리 일러스트 형식으로 금세은 씨의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하루에 먹어야 하는 약이 또 늘었다. 금세은 씨(43)는 매일 10가지의 신경정신과 약 22알을 복용하고 있다. 추가된 약은 항우울제 0.5알과 불안, 경련을 완화하는 약 3알. 이제 하루에 알약 26개를 삼켜야 한다. 지난해 12월 30일 경남 진주시 경상국립대병원 신경정신과 진료실에서 세은 씨는 주치의 김봉조 교수와 마주 앉은 채 얼굴을 감싸 쥐었다. 2019년 11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와 우울증 진단을 받은 지 2년 4개월. 알약 2만 개가 그의 몸 안에 쌓였다. 아무리 약을 먹어도 ‘그날’을 생각하면 두려움이 이내 그를 덮친다. 약은 순서를 바꿔가며 찾아오는 전신 떨림, 두통, 호흡곤란, 불면증을 잠시 멎게 하는 임시방편일 뿐이다. “불면증 때문에 신경질적으로 변해서 약을 한꺼번에 다 먹었어요.”(세은 씨)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괴로우니 그렇지. 근데 약 한꺼번에 먹으면 절대 안 돼요.”(김봉조 교수) 세은 씨는 오늘도 속 시원한 해결책을 듣지 못했다. 진료실을 나온 그는 병원 1층 약국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멍한 눈으로 약사로부터 A4 용지 네 장에 달하는 복약지도서와, 약 봉투가 가득 담긴 검은색 비닐봉지를 받아 들었다.악몽 같은 3년… “안인득 방치한 국가, 왜 책임지지 않습니까” ○ 10분 만에 달라진 삶1000일 하고도 68일 전, 2019년 4월 17일 전의 세은 씨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치위생학과를 나와 스물세 살 때부터 시작한 치위생사 일이 잘 맞았다. 환자 상담까지 도맡았다. “예전엔 사람 만나는 데 대한 부끄러움이 하나도 없었는데, 지금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싫고 눈도 잘 못 마주치겠어. 예전의 내 모습이 그리워요.” 3남매를 위해 집안일만 하며 살았던 어머니가 나이 들어서는 손에 물 묻히지 않고 편히 사는 게 세은 씨 소원이었다. 어머니를 위해 마흔 살까지 한순간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아버지가 암 투병을 하며 졌던 집안 빚도 갚아가고 있었다. 매일 알약 26알로 버티는 생존자빗물만 봐도 ‘그날 핏물’ 트라우마… 20년 일했던 치위생사 결국 관둬“숨져가던 엄마 모습 아직도 생생” “가족 위해서 고생만 했던 우리 엄마 이제 친구들하고 놀러 다니고 좋은 옷 입고 편하게 살길 바랐지. ‘엄마, 이제 (통장) 플러스 된다. 쪼매만 기다려라’ 했는데….” 자칭 ‘일벌레’이자 효녀였던 세은 씨는 2019년 4월 17일, 180도 다른 사람이 됐다. 그날 오전 4시 25분, 경남 진주시 A아파트 303동. 조현병을 앓던 이 아파트 406호 주민 안인득(45)은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고 미리 준비한 흉기를 대피하는 주민들에게 휘둘렀다. 화재경보음에 잠에서 깨 비몽사몽으로 계단을 내려가던 주민들은 무방비 상태였다. 고작 10분 만에 5명이 숨지고 17명이 다쳤다. 숨진 5명 중 2명은 세은 씨의 가족이었다. 그는 불과 10분 사이 어머니 김모 씨(당시 65세)와, 딸처럼 예뻐했던 조카 금지윤(가명·당시 12세) 양을 잃었다. 세은 씨는 진주 방화·살인사건의 생존자이자 유가족이다.○ 웅덩이에 빠진 날세은 씨는 3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사건 당일을 생생히 기억한다. 어머니와 맥주 한 잔을 하고 오전 3시쯤 잠에 든 세은 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의 소란에 눈을 떴다. “살려주세요!” 올케 차모 씨(44)의 비명이 들렸다. 세은 씨 오빠 금민수(가명·47) 씨 부부와 딸 지윤 양도 같은 아파트에 살았다. 놀란 어머니가 복도로 뛰쳐나갔다. 5분 정도가 지나도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자 세은 씨도 일어나 현관으로 나갔다. 현관문을 열자 뿌연 연기가 복도에 가득했다. 복도를 지나 방화문을 열자 얼굴에서 피를 흘리는 경비원이 “수건 달라”고 외쳤다. 정신없이 집으로 돌아가 수건을 챙겨 현관문을 다시 열자 바로 앞에 올케 차 씨가 서 있었다. “지윤이랑 어머니 죽는다! 신고해야 된다!” 차 씨도 안인득에게서 딸을 보호하다 옆구리를 흉기로 찔린 상태였다. 세은 씨는 떨리는 손으로 112를 눌렀다. “지금 아파트가 피바다예요. 조카랑 엄마도 칼에 찔려서 피가 많이 나요. 빨리 와주세요!” 비상계단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주민들을 지나 1층으로 내려온 그의 눈에 어머니와 지윤이가 들어왔다. 두 사람은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눕혀져 있었다. 어머니도 손녀 지윤이를 지키려다 부상을 입었다. “엄마 지혈을 (소방대원이) 저보고 도와 달랬어요. 그래서 (엄마) 목을 받쳐갖고 지혈을 하는데 지혈이 안 돼. 다리며 이마며 피가 흥건해. 엄마 눈을 봤는데, 이미 죽은 사람이야….○ 빗물은 핏물이 됐다 세은 씨와 어머니, 그리고 오빠 민수 씨네 가족은 비 오는 날엔 늘 함께 모여 저녁을 먹었다. 하지만 사건 이후 비 오는 날은 세은 씨에게 공포가 됐다. 빗물이 고인 웅덩이만 봐도 그날이 떠오르기 때문이다.“어느 날 나가려고 현관문을 열었는데 비가 와서 문 앞에 물이 가득한 거라. 그걸 보는 순간 그날 복도에 고여 있던 피 웅덩이가 바로 떠올랐지.” 피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긴 그는 20년간 했던 치위생사 일도 그만둬야 했다. 환자들을 치료할 때 나는 피 냄새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딸을 잃은 오빠 민수 씨의 삶도 여전히 2019년 4월 17일에 멈춰 있다. 안인득은 민수 씨와 같은 통로에 살았다. 사건 당일, 문틈을 넘어오는 매캐한 연기에 잠에서 깬 민수 씨는 아내와 딸 지윤이를 깨워 먼저 내려가라고 했다. 그러곤 옆집 문을 두드려 이웃들을 깨웠다. 이웃들을 뒤따라 내려가던 그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딸과 어머니를 마주해야 했다. “같이 내려갔으면 내가 죽었어도 아(딸)는 살렸을 거 아이가. 내가 왜 연기 빼고 불났다고 문 두드리고…. 그게 제일 큰 실수라. 내가 미친놈이지.”○ 원망할 수 없는 이유민수 씨가 유독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민수 씨는 안인득의 형과 고등학교 친구였다. 민수 씨는 빵을 사다 주기도 하며 친구 동생을 챙겼다. 안인득 역시 처음에는 평범한 이웃 아저씨였다. “가(안인득)가 애들 먹으라고 과자를 보따리로 사주고 한 놈이라. 조현병인 줄도 몰랐지. 그냥 낯을 좀 많이 가리는 줄 알았어. 근데 병이 심해지니 (지윤이를) 못 알아본 기라.” 약도 먹지 않고 입원도 거부하며 안인득의 상태는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사건 수개월 전부터 주민들을 향해 폭언을 하고 오물을 던졌다. “모두가 피해자” 국가에 손배소송안인득 형, 동생 입원위해 백방노력… 檢-警-동사무소 모두 책임 떠넘겨“조현병 환자가 왜 밉노?… 방치돼 있었던기 잘못이지” 사건 약 한 달 전, 안인득은 흉기를 사용한 폭행사건을 일으켜 경찰에 입건됐다. 동생을 걱정한 안인득의 형은 경찰서에 전화를 해 “조현병 환자인 동생을 강제입원시킬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다. 경찰은 “사건을 검찰에 넘겼으니 검사에게 문의하라”고 했다. 검찰청 민원실에선 법률구조공단을 찾아가라고 권했다. 법률구조공단은 “동사무소나 시청으로 가라”고 했다. 동사무소는 “강제입원은 어렵다”는 말만 되풀이했다.조현병 환자였던 안인득, 그런 동생을 입원시키려 사방팔방으로 뛰었던 그의 형이자 자신의 친구. 민수 씨는 딸과 어머니를 잃고도 누구 하나 속 시원히 원망할 수 없었다. ○ 국가에 책임을 묻다 사건 뒤 어려워진 생계보다도 힘들었던 건 누구도 사건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경남지방경찰청 진상조사팀이 조사를 벌여 경찰 조치가 미흡했다고 인정했지만 관련 경찰 5명을 경징계하고 2명을 경고 처분하는 데 그쳤다. 갈 곳 없는 분노와 원망은 스스로를 향했다. 불면증과 불안 증세로 약을 먹어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술에 기대 하루하루를 보냈다.민수, 세은 씨 남매가 일상을 잃은 채 살아가던 2020년 봄, 전화 한 통이 왔다. 대한신경정신학회였다. 조현병 환자의 강력범죄사건이 매년 반복되면서 학회는 관련 법 개정에 나선 상태였다. 학회는 중증정신질환자는 국가가 직접 관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법 개정을 위해 국가 대상 손해배상 소송에 나서 달라고 했다. 소송을 위해 다시 사건을 떠올려야 한다고 생각하자 두려움이 앞섰다. 하지만 남매는 마음을 다잡았다. 가족의 죽음을 헛되이 하고 싶지 않았다. “조현병 환자가 왜 밉노? 그 사람들도 아픈 사람이다. 방치돼 있었던기 잘못이지. 약만 먹으면 괜찮았을 사람이 범죄자가 되고, 그 사람 가족까지 죄인이 되는 기고. 안인득도, 안인득 형도 피해자다.”(민수 씨) 세은 씨와 민수 씨 가족은 지난해 11월 8월 대한민국을 피고로 한 손해배상청구소장을 행정법원에 제출했다. “조금 괜찮아져서 소송을 하게 됐느냐”고 묻자 민수 씨가 답했다. “괜찮아져서가 아니라 괜찮아지려고 소송을 하는 기다. 이렇게라도 해야 억울함이 풀릴 것 같으니까.” ○ 눈물의 웅덩이가 마를 때까지세은 씨는 매년 추석, 설날마다 사건이 발생한 아파트를 찾는다. 어머니가 목숨을 잃은 곳이기도 하지만, 마지막으로 숨을 쉰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소장 제출 직후 아파트를 찾은 세은 씨는 아파트 정문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의 시선은 사건이 났던 303동을 향했지만 그 앞까지 가진 못했다. 검정 벙거지 모자를 푹 눌러 쓴 채 세은 씨는 한참 떨어진 309동 앞 벤치로 겨우 걸음을 옮겼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303동을 바라보던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한참 동안 사진을 쳐다봤다. “우리 엄마 예쁘죠? 이렇게나 사진이 많은데 그날 아파트 입구에 쓰러져 있던 사진은 없어. 찍어 놓을 걸…. 엄마 마지막 모습 기억하게….” 오늘도 세은 씨는 그날의 웅덩이에서 빠져나오려 애쓰고 있다. 다른 누군가는 이들이 빠졌던 웅덩이에 다시 빠지지 않도록, 1068일분의 고통을 다져 길을 고르고 있다. ‘보호자 없는 정신질환자’ 관리 사각지대… “국가책임제 필요” 입원 거부자 경찰 호송 쉽지않고, 가족없는 1인가구는 더 어려워인권단체 “제도 개선 필요성 인정… 인권 살피고 예방 치료도 힘써야” 금민수(가명), 금세은 씨 가족은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통해 경찰이 법에 명시된 정신질환자 대응 매뉴얼을 따르지 않아 범죄가 발생했고, 그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1차 공판 기일은 4월 21일로 약 한 달을 남겨두고 있다. 정신건강복지법에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해칠 위험이 큰 정신질환자를 본인 의사에 반해 입원시키는 ‘비(非)자의 입원’ 제도가 규정돼 있다. 하지만 금 씨 가족과 대한신경정신학회 등 관련 단체들은 이런 제도가 유명무실하다고 지적한다. 안인득은 △타인에게 위협을 가한 전력이 있고 △폭행, 욕설 등 공격적 성향이 지속된 경우로 비자의 입원을 충분히 검토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실제로는 입원하거나 치료받지 못했다. 비자의 입원 중 행정입원은 전문의 진단이 필수다. 하지만 정신질환자로 보이는 사람을 전문의에게 강제로 호송할 법적 근거가 없다. 응급입원은 상황이 급박해 다른 절차가 불가능할 때에만 가능하다. 경찰이 인권침해 논란을 무릅쓰고 절차를 밟기 어렵다. 이 때문에 가족에 의한 ‘보호입원’이 전체 비자의 입원 80% 이상을 차지한다. 하지만 안인득처럼 혼자 살며 직계혈족, 배우자가 없는 경우 보호입원이 불가능하다. 직계혈족, 배우자, 민법상 후견인 중 2명이 신청해야 하기 때문이다. 백종우 대한신경정신학회 법제이사는 “1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정신질환자를 보살필 가족이 없어지고 있다. 국가책임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선진국은 비자의 입원 신청 권한을 광범위하게 열어둔다. 미국 32개 주에서는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다. 일본도 ‘정신장애인 또는 그 의심이 있는 사람을 아는 사람은 누구든’ 신청 권한을 인정한다. 정신장애인 인권단체도 비자의 입원이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다만 극단적인 상황을 미리 방지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정신장애와 인권 파도손’ 박환갑 사무국장은 “상태가 악화되기 전에 미리 상담하고 외래치료를 받도록 하는 등의 환자 관리 시스템이 우선돼야 한다”며 “이송, 치료 과정에 인권침해 여지가 없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부터 지속적으로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 ‘웅덩이: 1068일의 기록’은 동아일보가 지켜온 저널리즘의 가치와, 경계를 허무는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QR코드를 스캔하면 기사를 디지털 스토리텔링으로 구현한 사이트(original.donga.com/2022/jinju)로 연결됩니다.히어로콘텐츠팀▽팀장: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기사 취재: 김재희 남건우 신희철 기자▽사진·동영상 취재: 송은석 남건우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 ▽편집: 한우신 기자▽프로젝트 기획: 위은지 기자▽사이트 개발: 고민경 임상아 뉴스룸 디벨로퍼▽동영상 편집: 김태희 인턴 김신애 CDQR코드를 스캔하면 기사를 디지털 스토리텔링으로 구현한 사이트(original.donga.com/2022/jinju)로 연결됩니다.}
[안인득 방화살인, 그 후 1068일의 기록]동아일보 디오리지널 페이지(https://original.donga.com/2022/jinju)를 방문해 보세요. 인터랙티브 효과가 결합된 다큐멘터리 일러스트 형식으로 금세은 씨의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하루에 먹어야 하는 약이 또 늘었다. 금세은 씨(43)는 매일 10가지의 신경정신과 약 22알을 복용하고 있다. 추가된 약은 항우울제 0.5알과, 불안, 긴장, 경련 증상을 완화하는 약 3알. 이제 세은 씨는 하루에 알약 26개를 삼켜야 한다. 지난해 12월 30일 경남 진주시 경상국립대학교병원 신경정신과 진료실에서 주치의 김봉조 교수와 마주 앉은 세은 씨는 약을 늘리자는 김 교수의 말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2019년 11월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와 우울증 진단을 받은 그가 하루에 먹었던 알약은 20~30개 사이. 2년 2개월 동안 알약 2만 개가 그의 몸 안에 고스란히 쌓였다.베개에 머리만 대도 목 뒤까지 저릿해지는 편두통에 급격한 시력 저하까지 겹치면서 세은 씨는 며칠 전 같은 병원에서 뇌 자기공명영상(MRI)을 찍었다. “뇌에 문제는 없다”는 의사의 말에 안도감이 든 것도 잠시. 2년 넘게 약을 먹었지만 ‘그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이내 그를 덮쳤다. 약은 순서를 바꿔가며 찾아오는 전신 떨림, 두통, 호흡곤란, 불면증을 잠시 멎게 하는 임시방편일 뿐이다. “어떻게 이렇게 하루 종일 머리가 아플 수 있어요? 이제 내 몸한테도 화가 나.” (세은 씨)“부작용 문제로 항우울제를 다 바꿨는데 2개월 넘게 기대하는 효과가 안 나와서…. 최근에 나온 약으로 바꿔 봅시다.” (김봉조 교수)“불면증 때문에 신경질적으로 변해서 약을 한꺼번에 다 먹었어요.” (세은 씨)“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괴로운 게 해결이 안 되니 짜증 안 나는 게 이상하지. 근데 앞으로 그렇게 약 한꺼번에 먹으면 절대 안 돼요.” (김봉조 교수)세은 씨는 오늘도 속 시원한 해결책을 듣지 못했다. 진료실을 나온 그는 병원 1층 약국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검정색 벙거지 모자를 푹 눌러쓴 그는 약사로부터 A4 용지 네 장에 달하는 복약지도서와, 약 봉투가 가득 담긴 검정색 비닐봉지를 받아 들었다. “엄청 심각한 병 걸린 사람 같죠? 이게 2주치야, 2주치. 2주 뒤에 와서 이만큼 또 받아야 돼.”주치의도 그런 세은 씨가 안쓰럽다. 김봉조 교수는 “시기에 따라 환자를 심하게 괴롭히는 증상이 달라질 뿐 처음 진료 때와 비교해 나아진 점은 없다”며 답답해했다. “환자가 겪은 외상이 워낙 크다보니 장기간 치료에도 반응하지 않고, 다른 PTSD 환자에 비해 증상도 다양하고 깊게 나타납니다. 예전엔 잠을 못 자는 증상이 심했고 최근에는 두통, 시야 가림 증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어요. 약을 바꾸며 다양한 시도는 하고 있지만 환자나 의사가 기대하는 효과에는 아주 못 미치는 상황입니다.”10분 만에 달라진 삶2019년 4월 17일 이전의 세은 씨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일 중독’이었다. 치위생학과를 나와 스물세 살 때부터 시작한 치위생사 일이 잘 맞았다. 환자들과 대화하는 것도 즐거웠다. 일을 시작한지 3년 만에 치과 원장은 그에게 환자 상담도 맡겼다. “사람 만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부끄러움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그게 180도 변했어. 지금은 사람을 보자마자 꺼리기부터 하니까.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싫고 눈도 잘 못 마주치겠고. 예전의 내 모습이 그리워요. 지금은 내 자신이 바보 같아.”‘엄마는 내 삶의 목표’라고 입버릇처럼 말할 정도로 끔찍한 효녀이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3남매를 위해 집안일만 하며 살았던 엄마가 나이 들어서는 손에 물 묻히지 않고 편히 사는 게 세은 씨의 소원이었다. 엄마를 위해 세은 씨는 스물세 살부터 마흔 살까지 17년을 한 순간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아버지가 암 투병을 하며 졌던 집안 빚도 다 갚아가고 있었다. “가족 위해서 고생만 했던 우리 엄마 이제 친구들하고 놀러 다니고 해외여행도 가고 좋은 옷 입고 편하게 살길 바랐지. 우리는 영세민이잖아. 빚 갚으면서, 그 와중에 되는대로 돈 모으면서 열심히 살았어. ‘엄마, 이제 (통장) 플러스 된다. 조매만 기다려라. 한두 달 안 남았다’했는데….”자칭 ‘일벌레’이자 효녀였던 세은 씨는 2019년 4월 17일, 180도 다른 사람이 됐다.그날 오전 4시 25분. 경남 진주시 A아파트. 조현병을 앓던 이 아파트 406호 주민 안인득(45)은 이날 자신의 집에 불을 질러 집 전체에 번지게 했다. 미리 준비한 흉기를 양손에 쥐고 비상계단에서 대기하다 대피하는 주민들에게 휘둘렀다. 화재경보음에 잠에서 깨 비몽사몽으로 계단을 내려가던 주민들은 무방비 상태에서 얼굴, 목, 가슴 등에 상처를 입었다. 4시 32분, “누군가 흉기로 사람을 찌른다. 사람들이 대피하고 있다”는 최초 112 신고가 접수됐다. 3분 뒤인 4시 35분 경찰 5명이 현장에 도착해 10분간 대치 끝에 안 씨를 검거했다. 5명이 숨지고 17명이 다친 뒤였다. 숨진 5명 중 2명은 세은 씨의 가족이었다. 그는 불과 10분 사이 ‘삶의 목표’였던 어머니 김모 씨(당시 65세)와, 딸처럼 예뻐했던 조카 금지윤 양(가명·당시 12세)을 잃었다. 세은 씨는 진주 방화·살인사건의 생존자이자 유가족이다.웅덩이에 빠진 날딸을 피지로 유학 보낸 세은 씨는 엄마와 함께 아파트 303동 304호에 살고 있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날이었다. 엄마와 맥주 한 잔을 하고 17일 새벽 3시쯤 잠에 든 세은 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의 소란에 눈을 떴다. 이내 “살려주세요!”라는 올케 차모 씨(44)의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세은 씨 오빠 금민수 씨(가명·47)네 부부와 딸 지윤 양도 이 아파트 403호에 살았다. 놀란 엄마는 복도로 뛰쳐나갔다. 5분이 지나도 엄마가 돌아오지 않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세은 씨는 잠옷에 슬리퍼 차림으로 현관으로 나갔다. 현관문을 열자 뿌연 연기가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도 어렴풋이 들리는 듯 했다. 복도를 지나 비상계단으로 통하는 방화문을 열자 경비원이 있었다. 그는 피가 흐르는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수건 달라”고 외쳤다. 경비원 뒤로 보이는 복도 계단이 피로 가득했다. ‘뭔가 사달이 났구나.’ 정신없이 집으로 돌아가 화장실에서 손에 집히는 대로 수건을 여러 장 챙겼다. 다시 현관문을 열자 바로 앞에 올케 차 씨가 피를 흘리며 서 있었다. 아비규환 속 차 씨의 울부짖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윤이랑 어머니 죽는다! 신고해야 된다!” 차 씨도 안인득에게서 딸을 보호하다 옆구리를 흉기로 찔린 상태였다. 세은 씨는 떨리는 손으로 112를 눌렀다.“지금 아파트가 피바다에요. 조카랑 엄마도 칼에 찔려서 피가 많이 나요. 곧 죽을 거 같아요. 빨리 와주세요!”신고를 마치고 비상계단을 정신없이 내려갔다. 3층과 2층 사이엔 507호 주민 조모 씨가 피를 흘린 채 누워있었다. 조 씨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는 3층을 지나 2층 계단으로까지 뚝뚝 떨어졌다. 그와 눈이 마주친 세은 씨는 몸에 수건을 덮어줬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몸을 전혀 움직이질 못했지. 그 상태로 나랑 눈이 마주친 거야.”1층으로 내려온 그의 눈에 엄마와 지윤이가 들어왔다. 두 사람은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눕혀져 있었다. 엄마도 손녀 지윤이를 지키려다 부상을 입었다. 2층 계단에 쓰러져 있던 두 사람을 민수 씨가 1층으로 옮긴 뒤였다. “우리 조카는 숨을 쉬고 있었어요. 근데 구조대원들이 지혈을 안 해. 지혈을 안 하니 피가 펑펑 나는 거야. 목에서도 나고 팔에도 나고. 내가 “지혈 안 하고 뭐 하냐”고 하니까 엄마 지혈을 (소방대원이) 저보고 도와 달래. 그래서 (엄마) 목을 받쳐갖고 지혈을 하는데 지혈이 안돼. 다리며 이마며 피가 흥건해. 엄마 눈을 봤는데 이미….”세은 씨는 지금도 자신의 손 안에서 온기를 잃어 가던 어머니의 피부를 생생하게 기억한다.빗물은 핏물이 됐다304호에 살았던 세은 씨와 엄마, 403호에 살았던 오빠 민수 씨네 가족은 1주일에 두 세 번은 함께 밥을 먹었다. 비 오는 날은 틀림없이 모였다. 땡초 넣은 ‘엄마표’ 된장찌개와 감자전, 삼겹살, 두루치기는 단골 메뉴였다. “비 오는 날 제가 ‘언니(올케), 비와요. 땡초전 묵으까?’라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면 얼마 안 있어 새언니한테 전화가 와요. ”땡초 사오라.“ 그럼 퇴근길에 슈퍼 들러서 밀가루랑 땡초랑 맥주 사서 가요. 비 오는 날을 참 좋아했는데…”가족들 맥주파티 하던 비 오는 날은 이제 세은 씨에게 공포가 됐다. 비 오는 날 물이 고인 웅덩이만 봐도 그날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아파트 복도에 창문이 없으니 비가 오면 다 들쳐요. 이사 오고 얼마 뒤 비가 많이 내린 날이었어요. 나가려고 문을 열었는데 문 앞에 물이 가득한 거야. 그걸 보는 순간 그날 복도에 고여 있던 피 웅덩이가 바로 떠올랐어요.”피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긴 그는 20년 간 했던 치위생사 일도 그만 둬야 했다. 환자들을 치료할 때 나는 피 냄새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피 냄새를 맡으면 우리 엄마 응급처치 하면서 피가 펑펑 나던 그 모습이 당장 내 눈 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해.” 사건 직전이었던 2019년 초 한 모임에서 세은 씨와 알게 된 동갑내기 친구 김진석 씨(가명)는 사건 직후부터 그를 곁에서 지켰다. 호흡곤란, 전신 떨림, 해리성 기억장애, 불면증, 극심한 두통을 달고 사는 세은 씨를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불치병인 것 같아요. 100미터만 걸어도 숨 차하고 작은 소리에도 소스라치듯 놀라요. 식당 갔다 공황발작이 오기도 하고…. 당당하고 밝은 사람이었는데 모든 게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진 거죠.”김 씨는 세은 씨가 순간순간 기억을 잃는 증상을 가장 걱정한다. 주치의는 PTSD로 인한 해리성 기억장애라고 진단했다. 처음은 건망증 수준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행을 갔던 것도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해졌다.지난해 8월에는 비 오는 날 한밤중에 두 시간동안 비를 맞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세은 씨는 그날을 기억하지 못 한다. 자정 무렵 오빠 네에서 밥을 먹고 대리를 불러 집에 간다던 세은 씨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세은 씨 지인에게 연락을 돌리고 아파트 주변을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녔다. 새벽 두 시가 다 된 시간에야 집 근처에서 비를 맞으며 멍한 눈으로 걷는 세은 씨를 발견했다. “세은아!”라고 불렀지만 세은 씨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날 김 씨 부축을 받아 집에 돌아온 세은 씨는 목 놓아 울었다.“증거 남기듯 사진을 찍는 게 습관이 됐어요. 어디 갔었는지도 기억 못 할 때가 있으니까 사진 보여주며 ‘우리 여기 갔었잖아’ 하려고. 둘 다 사진 찍는 것 정말 싫어하는데 계속 연습을 해요.” (김 씨)바꾼 이름, 바뀌지 않는 삶세은 씨의 오빠 민수 씨와 그의 아내, 첫째 딸은 2019년 말 이름을 바꿨다. ‘이름이 잘못 돼서 온 가족에게 이런 비극이 닥쳤나’ 하는 생각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개명을 택했다. 늘 아빠 옆에서 잠을 자던 둘째 딸 지윤이, 술 마신 다음날 해장국 끓여놨다고 전화하던 어머니가 없다는 현실을 잊기 위한 몸부림이었다.이름은 바뀌었지만 민수 씨의 삶은 여전히 4월 17일에 멈춰 있다. 안인득은 그날 자신의 집에 불을 질렀다. 같은 층에 살았던 민수 씨네 집 현관으로 이내 연기가 슬금슬금 넘어왔다. 민수 씨는 아내와 딸 지윤이를 깨워 먼저 내려가라고 했다. 수영선수인 첫째 딸은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해 집에 없었다.가족들을 내려 보낸 그는 옆집 문을 두드리며 사람들에게 대피하라고 알렸다. 다른 사람들 뒤를 따라 마지막에 내려왔다. 그리고 어머니와 딸이 피를 흘리며 2층 계단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불이 나서 가족들을 내려 보냈는데 애하고 할매(어머니)가 누워 있어. 같이 내려갔으면 내가 죽었어도 아는 살렸을 거 아이가. 내가 왜 연기 빼고 창문 열고, 불났다고 문 두드리고…. 그게 제일 큰 실수라. 내가 미친놈이지.”언니 금모 양(19)은 사건 1년이 지나고서야 가족들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차 씨가 금 양을 학교에 데려다 주려던 일요일이었다. 방에서 짐을 챙기는 금 양의 눈이 벌겠다. “울었나?” 묻는 엄마의 질문에도 아무 말이 없었다. 차 안에서도 묵묵부답이던 금 양은 기숙사 앞에서 “도대체 왜, 뭐 땜에 그카노?”라는 엄마의 질문에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동생이 너무 보고 싶다, 엄마. 운동장 뛸 때도 생각나고, 수영할 때도 생각나고, 밥 먹을 때도 생각난다. 그래서 미치겠다. 너무 힘들고 너무 보고 싶다. 미치겠다, 엄마.”원망할 수 없는 이유민수 씨는 안인득의 형과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사이였다. 진주는 동네가 좁아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알았다. 민수 씨는 빵을 사다 주기도 하며 친구 동생을 챙겼다. 안인득 역시 처음에는 평범한 이웃 아저씨였다.“가(안인득)가 애들 먹으라고 과자를 보따리로 사 주고 한 놈이라. 그냥 낯을 좀 많이 가리는 줄 알았어. 내가 ‘밥 묵었나’ 하면 ‘예’ 하며 지냈어. 근데 조현병이 심해지니 (지윤이를) 못 알아 본 기라.”동생의 상태가 심각해지자 안인득의 형은 민수 씨에게 ‘고함지르는 소리 안 들리드나?’ ‘시끄러운 일은 없었나?’라며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술자리에선 “동생이 아픈데 약을 안 먹는다”며 걱정을 털어놓은 적도 있다.사건이 발생하기 얼마 전엔 동생이 집에 있으면 연락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내가 가면 문도 안 열어준다. 집에 있는지 확인해보고, 있으면 전화 좀 주라.” 형은 걱정을 하면서도 동생이 조현병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민수 씨는 “알겠다”고 하고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약도 먹지 않고 입원도 거부하는 동생을 두고 형이 전전긍긍하는 사이 수개월 동안 주민들은 안인득의 오물투척, 폭행, 폭언 등으로 애를 먹고 있었다.안인득의 주요 타깃은 윗집인 506호 주민 최모 양(당시 19세)과 그의 숙모 강모 씨(57)였다. 안인득은 윗집에서 자신의 집에 벌레를 뿌린다는 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2018년 9월부터 사건 전까지 다섯 번에 걸쳐 506호 현관문에 계란, 간장 등 오물을 투척했다. 직접 위협도 일삼았다. 2019년 2월 28일, 안인득이 출근을 하는 강 씨에게 계란을 던지고 욕설을 했다. 강 씨는 신고했지만 경찰은 “임대아파트라 이런 신고가 많다. 화해하라”고만 한 뒤 돌아갔다. 3월 10일, 안인득은 주차 시비가 붙은 사람의 얼굴을 가격하고 망치를 휘둘러 특수폭행 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형은 경찰에 “동생이 정신병력이 있다”고 알렸지만 경찰은 별다른 조치 없이 안인득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3월 12일과 13일, 안인득은 이틀 연달아 최 양을 따라가며 욕을 했다. 집에 들어가는 최 양을 뒤따라가 초인종까지 눌렀다. 최 양은 1급 시각장애로 한쪽 눈이 거의 보이지 않았고, 뇌병변 장애로 몸의 반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고등학생이었다. 13일 강 씨가 경찰에 재차 신고해 “안인득이 더 이상 이런 짓을 못 하게 해 달라”고 호소했지만 경찰은 안인득에 구두 경고를 주는데 그쳤다. 3월 말 안인득은 진주의 한 주방용품점에서 흉기를 샀다. 사건 당일 그가 주민들에게 휘두른 것과 같은 흉기였다.형은 연락이 닿지 않는 동생이 또 무슨 일을 저지를까 걱정이 됐다. 4월 4, 5일 이틀에 걸쳐 안인득을 입건했던 경찰서에 전화를 했다. “동생을 강제입원 시킬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지만 경찰은 “사건을 검찰에 넘겼으니 검사에게 문의하라”고 답했다. 검찰청 민원실도 책임을 떠넘겼다. 직원은 “검사를 만나더라도 강제입원은 어렵다”며 법률구조공단을 찾아가라고 권했다. 법률구조공단은 “행정기관이 처리해야 한다. 동사무소나 시청으로 가라”고 했다. 동사무소에서는 “강제입원은 어렵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사건 당일인 4월 17일, 자정이 넘은 시간 안인득은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샀다. 3시간 반 뒤, 안인득은 자신의 집에 불을 질렀다. 안인득에게 집중적으로 괴롭힘을 당하던 최 양은 그날 안인득의 칼에 찔려 목숨을 잃었다. 세은 씨의 조카이자 민수 씨의 딸도, 두 사람의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가족을 잃은 대가, 5000만 원조현병 환자였던 안인득, 그런 동생을 입원시키기 위해 사방팔방 뛰었던 그의 형이자 자신의 친구. 민수 씨는 딸과 엄마를 잃고도 누구 하나 속 시원히 원망할 수 없었다. 분노와 설움은 스스로를 향했다. 하루에 소주를 6병 씩 비우는 날이 허다했다. 사건 직후 1년은 술과 정신과 약에 취해 몽롱한 상태로 매일을 보냈다.사건 후 나라가 피해자이자 유족인 세은 씨와 민수 씨에게 진 책임은 치료비 5000만 원이 전부다. 방화죄, 살인죄, 상해죄 등 강력범죄피해자는 연 1500만 원, 총 5000만 원 한도에서 치료비를 받을 수 있다. 살해된 조카를 구하려다 칼에 맞아 중상을 입은 506호 강 씨는 수술과 재활치료가 이어져 이미 5000만 원을 다 썼다. 강 씨의 딸은 때때로 전화로 안부를 묻는 세은 씨에게 늘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저희 같은 사람들은 정신과 상담하고 약 먹으면 돼요. 근데 506호 살던 숙모는 뇌수술을 또 해야 할 수도 있고, 손에 감각이 안 돌아와서 재활치료도 계속 받아야 한대요. 그런 분들은 치료비를 평생 받을 수 있어야 하잖아요. 나라에선 그 조차도 안 된다고 하대요.”부족한 치료비, 어려워진 생계보다도 힘들었던 건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왜 주민들의 신고가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는지, 왜 안인득은 제때 치료받지 못했는지, 속 시원히 답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경남지방경찰청 진상조사팀이 사건 이후 조사를 벌여 경찰 조치가 미흡했다고 인정했지만 관련 경찰 5명을 경징계하고 2명을 경고 처분 하는데 그쳤다. 잊지 않으면 고통스러웠다. 잊을 수가 없어 술에 기댔다. 세은 씨와 민수 씨가 일상을 잃고 시간의 흐름도 잊어가던 2020년 봄, 그들에게 전화 한 통이 왔다. 대한신경정신학회였다. 조현병 환자가 강력범죄를 저지르는 사건이 계속 발생하면서 학회는 관련 법 개정에 나선 상태였다. “지금 나라에서는 조현병 환자를 방치하고 있어요. 안인득처럼 치료를 거부하고, 남에게 피해를 끼칠 가능성이 큰 환자는 경찰이나 지자체가 의사 판단을 받아 잠시라도 입원을 시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해요. 이런 사건이 또 나는 걸 막아야 합니다.”학회는 이들에게 국가 대상 손해배상 소송에 나서 달라고 설득했다. 정신질환자를 국가가 책임지고 관리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두 사람은 1년을 꼬박 고민했다. 변호사에게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당시를 떠올려야 한다고 생각하자 두려움이 앞섰다. ‘돈 때문에 소송 하느냐’는 말이 나오는 것도 무서웠다.하지만 금 씨 남매는 마음을 다잡았다. 가족의 죽음을 헛되이 하고 싶지 않았다. “조현병 환자가 왜 밉노? 그 사람들, 그냥 정신이 아픈 사람이다. 그렇게 될 때까지 방치돼 있었던 게 잘못이지. 약만 먹으면 괜찮았을 사람이 범죄자가 되고, 그 사람 가족까지 죄인이 되는 거고. 그걸 왜 못 막느냐는 거지. 안인득도 피해자다. 안인득 형도 피해자고.” (민수 씨)금 씨 남매는 국가에 책임을 묻기로 했다. 이들의 소송을 대리하는 법률사무소 법과치유는 지난해 11월 8월 대한민국을 피고로 한 손해배상청구소장을 행정법원에 제출했다. 사건 발생 2년 7개월 만이다. 원고는 민수 씨 남매 세 명, 민수 씨의 아내 차 씨 등 4명이다. 소송의 요지는 경찰이 법에 명시된 매뉴얼을 따르지 않아 범죄가 발생했고, 그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조금 괜찮아져서 소송을 하게 됐느냐”는 질문에 민수 씨는 말했다. “괜찮아져서가 아니라 괜찮아지려고 소송을 하는 기다. 이렇게라도 해야 억울함이 풀릴 것 같으니까.” 매뉴얼이 작동하지 않을 때정신건강복지법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해칠 위험이 큰 정신질환자의 정신질환자를 자신의 의사에 반해 입원시키는 이른바 ‘비(非)자의 입원’을 허용하고 있다. 환자의 인권을 침해할 수 있는 조치인 만큼 엄격한 절차와 요건을 갖춰야 한다. 이중 ‘행정입원’은 경찰이 정신과 전문의나 전문요원에게 요청해 위험하다고 판단될 경우 지자체장이 절차를 거쳐 최장 2주 간 입원시키는 제도다. 긴급한 상황에는 경찰관과 의사 동의 아래 최장 3일 간 환자를 입원시킨 뒤 계속 입원이 필요한지 결정하는 ‘응급입원’ 제도도 있다. 안인득은 △타인에게 위협을 가한 전력이 있고 △폭행, 욕설 등 공격적 성향이 지속된 경우로 행정입원이나 응급입원을 충분히 검토할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안인득은 어떤 조치도 받지 않았다. 안인득 본인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행정입원과 응급입원 모두 현장에서 무용지물이 됐다.비자의 입원 중 행정입원은 유명무실하다. 행정입원에는 전문의 진단이 필요한데 정신질환자로 보이는 사람을 전문의에게 강제로 호송할 법적 근거가 없다. 응급입원은 요건이 더 까다롭다. 자·타해 위험이 크고, 상황이 급박해 다른 입원절차가 불가능할 때만 가능하다. 당장 눈앞에서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경찰이 인권침해 논란을 무릅쓰고 응급입원 절차를 밟기 어렵다.이동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가족이 입원시키도록 하는 것이 논란을 피하는 길이기 때문에 행정입원은 입원시킬 가족이 마땅치 않은 경우로 제한된다. 응급입원도 엄격한 절차를 거쳐야 해 활용이 어렵다”고 지적했다.까다로운 절차 탓에 현장에서는 대부분 ‘보호입원’이 활용된다. 가족에 의한 보호입원이 전체 비자의 입원의 80~90%를 차지한다. 보호입원은 가족 중에서도 직계혈족, 배우자, 민법상 후견인 중 2명이 신청하고 의사 진단이 있으면 가능하다. 하지만 안인득처럼 혼자 살며 직계혈족이나 배우자가 없는 경우 적용이 불가능하다. 1인 가구가 늘어나는 한국 현실에서 점점 더 실효성이 떨어지고 있는 셈이다. 백종우 대한신경정신학회 법제이사는 “노부모 중 한 명과 살거나 직계 가족이 없는 조현병 환자들이 사각지대”라며 “1인 가구가 늘며 정신질환자를 보살펴줄 가족이 없어지고 있다. 중증정신질환자에 대한 책임을 가족이 아닌 국가가 지는 ‘국가책임제’가 도입돼야 한다”고 말했다. 선진국에서는 비자의 입원을 신청할 수 있는 권한을 광범위하게 열어둔다. 미국 32개주에서는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자의 입원을 신청할 수 있다. 일본도 ‘정신장애인 또는 그 의심이 있는 사람을 아는 사람은 누구든’ 신청 권한을 인정한다. 영국은 신청권자를 정신보건전문요원 또는 환자의 가족 또는 친지로 규정하는데 직계가족이나 동거인은 물론 형제자매, 조부모, 조카 등이 포함돼 있다.일반 시민의 안전을 보장하면서도 정신질환자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사법입원제도’ 도입을 제안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법원이 입원을 결정하기 때문에 독립성이 보장되고, 환자 본인이 도움을 받아 자신의 의사를 법정에서 표현할 수 있는 절차도 포함돼 있다. 이동진 교수는 “비자의 입원은 강제조치인 만큼 국가가 책임을 지고 주도하고, 그 안에서 본인과 가족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외래치료명령제가 활성화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지자체장이 정신의료기관장의 청구를 받아 비자의 입원 환자가 퇴원하는 대신 최장 1년까지 외래치료를 의무적으로 받도록 하는 제도다. 퇴원한 환자가 아니더라도 의사 판단으로 위험한 환자는 외래치료를 의무적으로 받도록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정신장애인 인권단체도 어쩔 수 없는 경우 비자의 입원이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다만 그런 상태까지 가지 않도록 사전에 관리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정신장애와 인권 파도손’의 박환갑 사무국장은 “비자의 입원이 필요한 수준까지 상태가 악화되기 전에 미리 상담하고 외래치료를 받도록 하는 등의 관리가 필요하다”며 “상태가 악화된 환자를 입원시키는 조치는 필요하지만, 폭력적인 병원 이송 과정, 환자를 폐쇄병동에서 강제로 치료하는 방식 등 문제점이 먼저 개선돼야 한다” 지적했다.눈물의 웅덩이는 마르지 않는다물웅덩이만 봐도 그 날이 떠오르지만 세은 씨는 매년 추석, 설날마다 사건이 발생한 A아파트 3단지를 찾는다. 엄마의 숨이 멎은 곳이지만 엄마가 마지막으로 숨을 쉰 곳이기도 해서다. “추석, 설날 때마다 와요. 엄마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곳이니까…”지난해 11월 11일 아파트를 찾은 금 씨는 아파트 정문 입구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의 시선은 사건이 발생했던 303동을 향했지만 그 앞까지 가진 못했다. “저 안에까지는 못 들어가요. 나 여기선 모자도 절대 안 벗어요.”시야를 차단하는 검정색 벙거지 모자를 푹 눌러 쓰고 검정색 패딩 조끼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세은 씨는 303동과 한참 떨어진 309동 앞 벤치로 겨우 걸음을 옮겼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한동안 303동을 바라보던 그는 이내 고개를 푹 숙인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그는 한참 동안 화면을 쳐다봤다. ‘그리움’이란 제목의 사진첩 폴더에 저장된 엄마의 생전 사진이었다. “우리 엄마 예쁘죠? 이렇게나 사진이 많은데 그날 아파트 입구에 쓰러져 있던 사진은 없어. 나라도 찍어 놓을 걸… 엄마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게 사진이라도 찍을 걸…”회사로 돌아가는 차 안, 피지로 유학을 간 딸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머리 많이 길었네. 이제 진짜 숙녀 같다, 숙녀. 다 컸네.”세은 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깨를 훌쩍 넘긴 머리를 매만지는 딸의 모습이 세은 씨는 낯설면서도 대견하다. 어느덧 13살이 된 딸을 한국으로 데려오고 싶지만 현재 건강 상태로는 딸을 제대로 돌볼 수 있을지 걱정이다. 세은 씨의 소원은 소박하다. 딸과 함께 살면서 좋아했던 치위생사 일을 다시 하게 되는 것이다. “애가 성인이 될 때까지라도 몸이 버텨줬으면 좋겠어. 지금 몸 상태로는 운전도 제대로 못 하니까.” 올해 2월 설 세은 씨는 아파트를 가지 않았다. 트라우마를 남긴 장소에 가면 병세가 악화될 수도 있다는 주치의의 말 때문이었다. 대신 엄마와 조카의 유골함이 모셔져 있는 진주 응석사를 세 번이나 찾았다.1000일이 지나도록 눈물의 웅덩이는 마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세은 씨에게는 키워야 할 딸이 있고, 서로 의지하고 보듬어야 할 가족이 있다. 오늘도 세은 씨는 그날의 웅덩이에서 빠져나오려 애쓰고 있다. 다른 누군가가 이들이 빠졌던 웅덩이에 다시 빠지지 않도록, 1000일 분의 고통을 다져 길을 고르고 있다.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부터 지속적으로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 ‘웅덩이: 1068일의 기록’은 동아일보가 지켜온 저널리즘의 가치와, 경계를 허무는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QR코드를 스캔하면 기사를 디지털 스토리텔링으로 구현한 사이트(original.donga.com/2022/jinju)로 연결됩니다.히어로콘텐츠팀▽팀장: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기사 취재 : 김재희 남건우 신희철 기자▽사진·동영상 취재 : 송은석 남건우 기자▽그래픽 : 김충민 기자 ▽편집: 한우신 기자▽프로젝트 기획: 위은지 기자▽사이트 개발: 고민경 임상아 뉴스룸 디벨로퍼▽동영상 편집: 김태희 인턴 김신애 CD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남건우 기자 woo@donga.com신희철 기자 hcshin@donga.com}
상관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뒤 지난해 5월 극단적 선택을 한 공군 이모 중사의 유족이 전익수 공군본부 법무실장을 직권남용 혐의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15일 고발했다. 군인권센터는 이날 이 중사 유족과 함께 서울 마포구 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 실장과 법무실이 성추행 혐의를 받던 장모 중사의 구속을 막은 정황을 파악했다고 밝혔다. 군인권센터 측은 “사건을 맡은 20비행단 군 검사가 장 중사를 구속 수사하고자 했으나 ‘공군 법무실 등 상부 지시로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제보를 받았다”며 “이는 (센터가 앞서 공개한) 녹취록 내용과 상통한다”고 했다. 군인권센터가 지난해 11월 공개한 공군본부 군 검사들의 대화 녹취록에는 한 군 검사가 “구속시켰으면 이런 일도 없잖아”라고 하자 또 다른 검사가 “실장님이 다 생각이 있으셨겠지…직접 불구속 지휘하는데 어쩌라고”라고 답하는 대목이 있다. 센터의 주장에 관해 전 실장은 “공군본부 법무실은 군검사에게 불구속수사를 지시한 적 없다”고 부인하면서 “허위 폭로에 대해 강력한 법적 조치를 취할 예정”이라고 밝혔다.남건우 기자 woo@donga.com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경북 울진 산불로 집이 불에 타 임시 대피소에 머물던 이재민 8명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감염됐다. 이재민 대다수가 면역력이 약한 고령인데다 감염에 취약한 대피소 생활이 7일째 이어지면서 제기돼왔던 집단 감염 우려가 현실화된 것이다. 10일 경북 울진군보건소에 따르면 울진국민체육센터에 머물던 이재민 8명이 유전자증폭(PCR) 검사 결과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았다. 정부가 이곳을 임시 대피소로 지정해 지붕이 뚫린 텐트를 설치했고, 이재민 150여 명이 숙식을 해결해왔다. 이재민들을 지원하는 공무원과 자원봉사자 등도 수시로 오갔다. 현재 정부가 임시 숙소로 마련한 덕구온천호텔에서 머물고 있는 확진자 8명은 차로 5분 가량 떨어진 구수곡 자연휴양림 내 숙박시설로 이동한 뒤 이곳에서 ‘재택 치료’를 받을 예정이다. 휴양림 숙박시설은 최대 154명을 수용할 수 있다. 보건당국은 확진자들에게 필요한 의약품을 전달하고, 건강 상태를 살펴볼 방침이다. 다만 확진자 모두 현재 코로나19 관련 증세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코로나19 집단 감염을 차단하고, 이재민들의 편의를 위해 인근 덕구온천호텔을 임시 숙소로 마련했다. 이에 이재민 108명은 9일 오후 이 호텔 앞에 마련된 임시선별진료소 등지에서 PCR 검사를 받았고, 검사를 마친 이재민들은 호텔방으로 이동했다. 일부 이재민들은 호텔 이동을 원치 않아 계속 대피소에 머물고 있다. 정부는 코로나19 감염 우려가 있는 만큼 이들에게 호텔 대신 인근 원룸이나 마을회관으로 거처를 옮기도록 설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울진=남건우 기자 woo@donga.com울진=명민준 기자 mmj86@donga.com}
제20대 대통령선거 당일인 9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하루 확진자가 34만 명을 넘어 역대 최다를 기록했지만 ‘내 손으로 새 대통령을 뽑겠다’는 유권자의 열기는 뜨거웠다. 이날 오전 5시 50분 서울 동작구 노량진1동의 한 아파트단지 투표소 앞에는 50여 명이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두꺼운 패딩 점퍼까지 입고 1시간 넘게 기다린 사람도 있었다. 최모 씨(31)는 “일찍 나온다고 나왔는데 이렇게 붐빌 줄은 몰랐다”며 “사람 많은 곳이 부담스럽긴 해도 한 표를 행사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했다.○ “집 타버렸지만 그래도 한 표” 화마(火魔)에 삶의 터전을 잃은 이재민들도 투표소를 찾아 소중한 한 표를 행사했다. 오전 8시 경북 울진군 국민체육센터 임시대피소 앞에는 수십 명의 이재민이 모였다. 경북 선거관리위원회가 제공한 버스를 타고 집 근처 투표소에 가기 위해서였다. 박금자 씨(68)는 “산불로 집이 다 타버렸다. 몸도 힘들지만 투표는 해야 한다”며 신분증을 챙겼다. 남정희 씨(77)도 “좋은 사람을 뽑아야 나라가 잘되지 않겠느냐”며 버스에 올랐다. 신분증이 불에 탔거나 잃어버린 이재민들은 지문으로 신분을 증명하고 종이로 된 임시 신분증을 받았다. 전남중 씨(81)는 “급하게 몸만 피하느라 집도 신분증도 다 타버렸다”며 임시 신분증을 내보였다.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가 불편한 홍중표 씨(63)도 이웃들의 부축을 받으며 투표소를 찾았다. 홍 씨는 “대피소 생활로 몸이 많이 지쳤다. 새 대통령이 이재민을 잘 보듬어주길 바란다”고 기대했다.○ 실수로 두 표 주고, 정전되고이날 투표소와 개표장 곳곳에서 크고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서울 강동구 상일 제1동 제6투표소에서는 투표 시작 전인 오전 5시 53분부터 30분간 정전이 발생했다. 출동한 경찰이 전력시설을 정비하고 복구한 후에야 투표가 시작됐다. 경찰 관계자는 “전력 과부하로 인한 정전”이라고 밝혔다. 경기 부천시 중동의 한 투표소에서는 투표사무원이 실수로 투표용지 두 장을 건네 선거인이 두 장 모두 기표하는 사고가 났다. 선거인은 투표함에 투표지를 넣기 직전 이 사실을 현장 투표사무원에게 알렸고, 두 장 중 한 장만 유효표 처리됐다. 강원 춘천시 중앙초등학교 투표소에서는 70대 남성이 “사전투표했는데 투표용지를 또 줬다”며 소동을 벌였다. 투표사무원이 인적사항을 확인하는 사이 다른 투표사무원이 투표용지를 주자 받고 항의한 것. 춘천시선관위는 사전투표에 참여하면 투표소에 출입할 수 없는데 공직선거법을 위반한 것으로 보고 경찰에 고발했다. 경기 하남시 신장2동 투표소에서는 한 50대 여성이 “도장이 희미하게 찍혔다”며 투표지 교환을 요구했다가 거부당하자 투표지를 찢었다. 투표지는 무효 처리됐다. 경기 수원시 정자2동 투표소에서는 투표용지에 참관인 도장이 없다는 이유로, 경기 성남시 분당구에서는 선거참관인 수가 적다며 일부 선거인이 고성을 지르고 소란을 일으켜 경찰이 출동했다. 오전 6시 반경 대구 남구 대명동의 한 투표소에서는 60대 남성으로 추정되는 선거인이 기표한 투표지를 들고 달아났다. 반면 오후 6시부터 7시 반까지 진행된 확진·격리자 투표는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됐다. 일부 확진자가 증빙서류나 신분증을 지참하지 않아 다시 투표소를 찾기도 했으나 며칠 전 사전투표 때 같은 혼란은 없었다. 한편 인천 남동체육관 개표장에서는 오후 8시 50분경 국민의힘 측 참관인이 ‘투표지의 색이 다르다’고 문제를 제기해 1시간 넘게 일부 투표함의 개표가 중단됐다. 선관위가 정상적인 투표지임을 확인한 후 오후 10시경 개표가 재개됐다. 선관위는 오래된 롤지가 사전투표용지를 출력하는 프린터에 들어가 색깔에 차이가 난 것으로 보고 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울진=남건우기자 woo@donga.com수원=이경진 기자 lkj@donga.com}
제20대 대통령 선거 당일인 9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일일 확진자 수가 역대 최다인 34만 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코로나19도 새로운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선거인(유권자)들은 “코로나19로 불안해도 투표는 소중한 권리다. 꼭 투표해야 한다”며 투표소를 찾았으며, 경북 울진 지역 산불 이재민들도 지친 몸을 이끌고 투표소로 향했다. 9일 서울 동작구 노량진1동의 한 아파트단지에 마련된 투표소에는 투표가 시작되는 오전 6시가 되기 전부터 4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투표소 건물을 한 바퀴 돌 만큼 긴 줄 확인한 일부 시민은 “나중에 다시 와야겠다”며 발걸음을 돌리기도 했다. 30분을 기다린 끝에 투표를 마친 최모 씨(31)는 “코로나19로 사람이 몰리는 곳이 부담스러워도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는 게 더 중요한 권리라 차례를 기다려 투표했다”고 했다. 경기 안양시에서 집 앞 투표소를 찾은 조아현 씨(26)는 “사전투표 때 사람이 많아 오늘 다시 왔다. 개인적으로 두 번째 대선 투표인데 한 표를 꼭 행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 집 근처 투표소를 찾은 이모 씨(58)도 “누가 되든 국민이 합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투표하러 왔다”고 새 대통령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경북 울진군 산불 이재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은 힘든 상황이었지만 이른 시간부터 투표소를 찾았다. 오전 8시 울진국민체육센터 임시대피소 앞에는 20여 명의 이재민들이 선거관리위원회가 제공한 버스를 타고 투표소로 향했다. 박금자 씨(68)는 “산불로 집이 다 타버리고 몸은 힘들지만 투표는 해야지”라며 신분증을 챙겼다. 남정희 씨(77)는 “좋은 사람을 뽑아야 나라가 잘되지 않겠느냐”고 버스에 올랐다. 신분증이 불에 탔거나 대피 과정에서 미처 챙기지 못한 이재민들은 임시 신분증을 발급받았다. 전남중 씨(81)는 “갑자기 몸만 피하느라 집도 신분증도 다 타버렸다”며 종이로 된 임시 신분증을 들어보였다. 교통사고로 불편한 한쪽 다리를 이끌고 투표소를 찾은 홍중표 씨(63)는 “대피소 생활로 몸은 지쳤지만 투표는 당연히 해야 한다”고 했다. 이들은 한 목소리로 “새 대통령이 이재민을 잘 보듬어주길 바란다”고 기대했다. 전국 투표소 곳곳에서는 크고 작은 소동이 벌어져 선거인들이 항의하는 일도 잇따랐다. 서울 강동구 상일 제1동 제6 투표소에서는 투표 시작 전인 오전 5시 53분경 정전이 발생해 30여분 간 투표가 진행되지 못했다. 출동한 경찰이 전력시설을 정비해 복구했지만 선거인들이 혼란을 겪었다. 경찰 관계자는 “전력 과부화로 인한 정전이었다”고 밝혔다. 경기 부천시 중동의 한 투표소에서는 투표사무원이 실수로 투표지 두 장을 건네 선거인이 모두 기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선거인은 투표함에 투표지를 넣기 전에 다행히 이 사실을 현장에 있는 투표사무원에게 알렸고, 두 장 중 한 장만 유효 표로 처리됐다. 경기 하남시 신장2동 투표소에서는 한 50대 여성이 “도장이 옅게 찍혔다”며 투표지 교환을 요구했다 거절당하자 투표지를 찢고 현장을 떠났고 투표지는 무효 처리됐다. 대구에서도 60대로 추정되는 남성 A 씨가 기표한 투표지 교환을 요구하다 이를 거절당하자 투표지를 들고 투표소 밖으로 나갔다. 현재 경찰이 A 씨를 추적 중이다. 강원 춘천시 중앙초등학교 투표소를 찾은 70대 남성 B 씨는 “사전투표했는데 나에게 투표지를 또 줬다”고 항의하는 소동도 벌어졌다. B 씨는 선거사무원이 인적사항을 확인하는 사이 다른 선거사무원이 먼저 건넨 투표지를 받았다. 춘천시선관위는 사전투표에 참여해 투표소에 출입할 수 없는 B 씨가 공직선거법을 위반한 것으로 보고 경찰에 고발했다. 경기 남양주시 평내동의 한 투표소에서는 60대 여성 C 씨가 투표 후 투표함 특수봉인지를 훼손해 현행범으로 체포되기도 했다. C 씨는 경찰에 사전투표 당시 투표함 관리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전해졌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울진=남건우 기자 woo@donga.com}
제20대 대통령 선거 당일인 9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일일 확진자 수가 역대 최다인 34만 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시민들은 “코로나19로 불안해도 투표는 소중한 권리다. 꼭 투표해야 한다”며 투표소를 찾았다. 9일 서울 관악구 대학동주민센터에 마련된 투표소에는 투표 시작 시간인 오전 6시가 되기도 전에 이미 40명이 넘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긴 줄을 확인한 일부 시민은 “나중에 다시 와야겠다”며 발걸음을 돌렸다. 오전 8시 양천구 시립청소년센터의 투표소에도 가족 단위 시민들이 삼삼오오 몰려오면서 투표장 밖 도로까지 줄이 이어졌다. 경기 안양시에서 집 앞 투표소를 찾은 조아현 씨(26)는 “사전투표 때 줄이 길어서 오늘 다시 왔다”며 “개인적으로 두 번째 대선 투표인데 한 표를 꼭 행사하고 싶다”고 했다. 이모 씨(58·서울 강남구)도 “누가 되든 오늘 이후 국민이 합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투표하러 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국 투표소 곳곳에서 크고 작은 소동이 벌어지면서 유권자들이 항의하는 일도 잇따랐다. 서울 강동구 상일 제1동 제6 투표소에서는 투표 시작 전인 오전 5시 53분부터 6시 38분까지 정전이 발생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전기관리실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간 뒤 복구했다. 30여분 간 투표가 진행되지 못해 시민들이 혼란을 겪었다. 경찰 관계자는 “전력 과부화로 인한 정전이었다”고 밝혔다. 경기 하남시 신장2동 투표소에서는 50대 한 여성이 “도장이 옅게 찍혔다”며 투표지 교환을 요구했다가 이를 거부당하자 투표지를 찢어 버리고 현장을 떠났다. 투표지는 무효 처리 됐다. 수원 정자2동 투표소에서는 투표지에 참관인 도장이 없다는 이유로, 성남 분당구의 한 투표소에서는 선거참관인 수가 적다는 이유로 일부 유권자들이 고성을 지르고 소란을 일으켜 경찰이 출동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오전 11시 40분경 수원시 권선구 곡선중학교 제5투표소에서는 기표소 안에서 자신의 투표지를 촬영한 40대 여성이 공직선거법 위반 등의 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부산에서도 투표용지를 휴대전화로 촬영하던 50대 여성이 적발되는 일이 있었다. 오전 6시20분경 부산진구의 한 아파트에 마련된 투표소를 찾은 A 씨가 투표하기 전 자신의 휴대전화로 투표지를 촬영했다가 경찰에 고발됐다. 비슷한 시간 북구 화명1동의 한 투표소에서 60대 남성 B 씨가 “천장에 뚫린 동전 크기의 구멍이 의심스럽다. 구멍 안에 카메라가 설치된 것이 아니냐”며 현장에 있던 투표사무원에게 문제를 제기했다. 선관위가 종이와 테이프로 해당 부분을 막은 뒤 다시 투표가 진행됐다. 대구에서도 한 유권자가 기표한 투표지를 들고 투표소를 벗어나는 일이 발생했다. 오전 6시 반분경 남구 대명동의 한 투표소에서 60대 남성으로 추정되는 C 씨가 투표용지를 들고 투표소 밖으로 나갔다. C 씨는 투표용지를 받아 기표한 뒤 현장 투표사무원에게 교환을 요구했는데, 이를 거절 당하자 이같은 행동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선거가 끝날 때까지 투표소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주변 폐쇄회로(CC)TV를 통해 C 씨를 추적 중”이라고 말했다. 경북 울진 지역 산불 이재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은 힘든 상황에서도 이른 시간부터 투표를 찾았다. 오전 8시 울진국민체육센터에 마련된 임시 대피소 앞은 선관위가 마련한 버스를 타고 투표소로 향하려는 21명의 이재민들로 북적였다. 박금자 씨(68)는 “산불로 집이 다 타버리고 몸은 힘들지만 투표는 해야지”라며 신분증을 챙겼다. 아침밥을 먹던 남정희 씨(77)는 “좋은 사람을 뽑아야 나라가 잘되지 않겠느냐”고 투표소 안으로 들어갔다. 신분증이 불에 탔거나 대피 과정에서 미처 챙기지 못한 이재민들은 임시 신분증을 발급받았다. 전남중 씨(81)는 “산불이 났을 때 부랴부랴 몸만 피하느라 집도 신분증도 다 타버렸다”며 종이로 된 임시 신분증을 들어보였다. 교통사고로 불편한 한쪽 다리를 이끌고 투표소에 나선 이재민 홍중표 씨(63)는 “이웃들 도움을 받아 투표하러 왔다. 대피소 생활로 몸이 지쳤지만, 투표는 당연히 해야 한다”고 했다. 이들은 한 목소리로 “새 대통령이 이재민들을 잘 보듬어주길 바란다”고 했다. 선거 전날인 8일 ‘북한 선박 북방한계선(NLL) 침범’ 사건이 발생한 서해 최북단 섬 인천 백령도에서는 큰 동요 없이 순조롭게 투표가 진행됐다. 약 5000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백령도에는 9일 오전 6시 4개 투표소에서 일제히 투표가 시작됐다. 오전 6시 투표소를 찾은 백령도 주민 김모 씨(48)는 “다음 대통령이 후진국 수준에 머물러 있는 백령도의 의료 인프라를 개선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심효신 씨(58)는 “북한 선박이 백령도 인근 NLL을 넘어 나포되는 사건이 있었지만, 주민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이날 확진·격리자 투표는 오후 6시부터 7시 반까지 진행된다. 투표 시간을 제외한 투표 방식은 일반 유권자와 동일하며, 정식 기표소에서 투표한 뒤 직접 투표함에 기표한 투표지를 넣는다. 사전투표 당시 임시 기표소에서 기표한 투표지를 투표사무원에게 넘기도록 해 전례 없는 혼란이 발생하면서 이같이 변경됐다. 하지만 9일 코로나 확진자가 역대 최다인 34만 명에 육박하면서 혼란이 재발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울진=남건우 기자 woo@donga.com수원=이경진 기자 lkj@donga.com 부산=김화영 기자 run@donga.com대구=장영훈 기자 jang@donga.com 인천=공승배 기자 ksb@donga.com}
“여기는 난방이 안 돼서 밤에 쌀쌀해. 자고 일어났는데도 몸이 무거워.” 경북 울진 산불 발생 닷새째인 8일 오후 2시. 화재 당일부터 울진국민체육센터에 머물고 있는 김모 씨(81·여)의 울진군 북면 소곡리 자택은 화마(火魔)가 완전히 집어삼켜 흔적도 남지 않았다. 밖에서 일하던 중 황급히 대피한 김 씨가 챙긴 살림살이는 지금 입고 있는 얇은 옷이 전부. 이날부터 이재민 대피소에서 세탁 봉사가 시작됐지만 갈아입을 옷이 없으니 세탁을 맡길 수도 없었다. 김 씨는 “속옷과 양말은 2개씩 줘서 갈아입었는데, 누가 외투라도 구해주면 좋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곳에 머물고 있는 이재민은 약 160명. 고령자가 절대 다수인 이재민들의 표정에는 상실감과 피곤함이 역력했다. 대부분 지붕이 뚫린 텐트 안에 말없이 누워 있어 대피소 안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이재민들은 대피소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할지 모른단 생각에 불안해했다. 대부분 고령인 데다 대피소 생활을 하면서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다. 대피소의 한 공무원은 “아직 확진자가 나오진 않았지만, 집단감염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모두가 조심하고 있다”고 했다. 정부도 임시 대피소에 언제까지 이재민을 둘 수 없다는 판단에서 울진군 북면 덕구리의 덕구온천호텔에 임시 숙소를 마련했다. 이재민들은 이르면 9일 대선 투표를 마치고 거처를 옮길 예정이다. 다만 호텔을 에워싼 응봉산과 장재산 역시 산불 위험지역이어서 안전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코로나19 때문에 힘들던 지역 상인들은 산불까지 겹치자 망연자실한 표정이다. 울진군 1년 지역내총생산(GRDP) 중 관광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40%. 매년 약 300만 명이 울진을 찾는데 이번 산불로 관광객이 대폭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죽변항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배모 씨(61)는 “코로나19 발생 후 매출이 3분의 1로 줄었는데 산불까지 났다”며 “장사한 지 20년인데 지금까지 이런 경우는 없었다”며 울상을 지었다.울진=남건우 기자 woo@donga.com울진=명민준 기자 mmj86@donga.com}
경북 울진에서 발생한 산불이 닷새째 잡히지 않는 가운데 8일 오전 핵심 방어구역으로 꼽았던 울진군 소광리 ‘금강송 군락지’에도 화마(火魔)의 손길이 미쳤다. 산 능선의 불줄기가 군락지 경계를 넘으면서 금강송 일부가 불에 탄 것. 산림당국은 군락지 사수를 위해 총력전을 펼쳤고 다행히 군락지 핵심으로 불길이 번지기 전에 막아냈다. 산림청과 소방청은 이날도 진화에 안간힘을 쏟았지만 시시각각 방향이 바뀌는 바람과 자욱한 연기 탓에 주불 진화에 실패했다. 최병암 산림청장은 브리핑에서 “화선(불줄기)이 약 60km로 방대하고 화세도 강한 상황”이라며 “솔직히 장기전도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불길에 뚫린 금강송 군락지이날 산림당국의 목표는 200년 이상 된 금강송 8만5000여 그루가 분포한 국내 최대 금강송 군락지 사수였다. 하지만 오전 7시경 군락지로 불똥이 튀었고 이어 오전 10시경 불길 중 하나가 금강송 군락지로 번졌다. 군락지 주변은 산세가 험하고 숲이 빽빽해 진화대원의 접근이 어렵다. 특히 계곡 쪽에 있는 핵심 군락지는 산불이 옮겨붙을 경우 대처가 어려운 여건이라 당국에 비상이 걸렸다. 여기에 오후 바람이 동풍으로 바뀌면서 화선 서편에 위치한 군락지 방어가 더 어려운 상황이 전개됐다. 이에 맞서 산림당국은 일출과 동시에 헬기 82대를 투입해 군락지 방어에 나섰다. 산불 구역 10개 가운데 군락지를 둘러싼 4, 6, 7, 10구역에 헬기를 집중 투입했다. 그럼에도 불길이 번지자 물 8000L를 실을 수 있는 초대형 헬기 2대와 물 4000L를 실을 수 있는 헬기 4대 등 헬기 6대를 추가 동원해 불길 확산을 저지했다. 군락지 주변에는 소방차 37대와 고성능 화학차 5대 등을 배치해 방화선을 구축했다. 하루 종일 결사항전에 나선 끝에 군락지에 큰 피해가 미치는 것은 막아냈다. 최 청장은 오후 브리핑에서 “(군락지로 확산된 불길은) 거의 진화됐다. (군락지) 경계선상에서 잡혀 더는 확산되진 않을 것”이라며 “일부 고사목들이 좀 탄 거 같지만 큰 피해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핵심 군락지는 경계선과는 떨어져 있어 안전한 상태다.○ 산불 피해, 역대 최대 규모 육박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이날 오후 5시 기준으로 울진·삼척 산불의 피해 면적은 약 1만8421ha로 여의도 면적(290ha)의 64배에 달한다. 진화율이 전날(50%)보다 15%포인트 늘어난 65%에 불과해 피해 면적은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진화율 95%인 강릉·동해 산불을 포함한 피해 면적은 약 2만2421ha로 역대 최대 규모인 2000년 동해안 산불(2만3794ha)에 육박하고 있다. 이날 산림청은 헬기 82대와 지상진화장비 329대, 진화인력 4554명을 투입하며 총력전을 펼쳤다. 하지만 산불 범위가 워낙 넓고 불머리 진화가 여의치 않아 장기화가 불가피한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최 청장은 “9일에는 헬기를 총동원해 진화율을 상당히 높일 계획”이라며 “목표는 이번 주가 지나가기 전 정리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산불이 급격히 확산됐음을 입증하는 통계도 나왔다. 경북소방본부가 119신고 접수를 집계한 결과 4일 오전 11시 17분 최초 신고를 시작으로 7일 밤 12시까지 신고 총 2533건이 접수됐다. 소방 관계자는 “산불이 빠르게 확산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한편 문재인 대통령은 8일 대형 산불로 피해를 본 강원 강릉시와 동해시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문 대통령은 앞서 6일 경북 울진군과 강원 삼척시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한 바 있다.울진=장영훈 기자 jang@donga.com울진=명민준 기자 mmj86@donga.com울진=남건우 기자 woo@donga.com}
“여기는 난방이 안 돼서 밤에 쌀쌀해. 자고 일어났는데도 몸이 무거워.” 경북 울진 산불 발생 닷새째인 8일 오후 2시. 화재 당일부터 울진국민체육센터에 머물고 있는 김모 씨(81·여)의 울진군 북면 소곡리 자택은 화마(火魔)가 완전히 집어삼켜 흔적도 남지 않았다. 밖에서 일하던 중 황급히 대피한 김 씨가 챙긴 살림살이는 지금 입고 있는 얇은 옷이 전부. 이날부터 이재민 대피소에서 세탁 봉사가 시작됐지만 갈아입을 옷이 없으니 세탁을 맡길 수도 없었다. 김 씨는 “속옷과 양말은 2개씩 줘서 갈아입었는데, 누가 외투라도 구해주면 좋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 곳에 머물고 있는 이재민은 약 160명. 고령자가 절대 다수인 이재민들의 표정에는 상실감과 피곤함이 역력했다. 대부분 지붕이 뚫린 텐트 안에 말없이 누워 있어 대피소 안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이재민들은 대피소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할지 모른단 생각에 불안해했다. 대부분 고령인데다 대피소 생활을 하면서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여서다. 대피소의 한 공무원은 “아직 확진자가 나오진 않았지만, 집단감염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모두가 조심하고 있다”고 했다. 정부도 임시 대피소에 언제까지 이재민을 둘 수 없다는 판단에서 울진군 북면 덕구리의 덕구온천호텔에 임시 숙소를 마련했다. 이재민들은 이르면 9일 대선 투표를 마치고 거처를 옮길 예정이다. 다만 호텔을 에워싼 응봉산과 장재산 역시 산불 위험지역이어서 안전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코로나19 때문에 힘들던 지역 상인들은 산불까지 겹치자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울진군 1년 지역내총생산(GRDP) 중 관광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40%. 매년 약 300만 명이 울진을 찾는데 이번 산불로 관광객이 대폭 줄어들 전망이다. 죽변항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배모 씨(61)는 “코로나19 발생 후 매출이 3분의 1로 줄었는데 산불까지 났다”며 “장사한지 20년인데 지금까지 이런 경우는 없었다”며 울상을 지었다. 울진=남건우 기자 woo@donga.com울진=명민준 기자 mmj86@donga.com}